옛 중국인의 생활과 한자의 관계
한자의 부수(部首)가 그 한자의 뜻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한자를 배우다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생긴다.
예를 들어 땅 지(地)자에는 흙 토(土)자가 들어가고, 바다 해(海)자에는 물 수(水)자가 들어가고 고목나무 고(枯)자에는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다.
돌(石)로 만드는 성(城)은 왜 흙 토(土)자가 들어가며, 쇠(金)로 만드는 기계(機械)는 왜 나무 목(木)자가 들어갈까? 또 나무로 만드는 종이 지(紙)자에는 왜 실 사(糸)자가 들어 갈까? 편지 간(簡)자는 왜 대나무 죽(竹)자가 들어갈까? 세금을 의미하는 조세(租稅)에는 왜 벼 화(禾)자가 들어갈까? 집을 빌린다는 의미의 임대(賃貸)에는 왜 조개 패(貝)자가 나란히 들어갈까? 여자들이 하는 화장(化粧)에는 왜 쌀 미(米)자가 들어갈까?
이런 끊임없는 물음에 대한 답을 하려면 먼저 옛 중국인들의 생활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서는 한자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앞서, 한자가 고대 중국인들의 생활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개략적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아래의 글은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는 동시에, 한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BC2000년 전부터 상(商)나라 - 은(殷)나라 - 주(周)나라 -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 진(秦)나라를 거쳐 한자가 정착되기 시작한 BC1세기 한(漢)나라까지의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고 중국인들의 생활을 서술해보았다. 물론 뒤에 나오는 "부수 글자 135자"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더욱 상세하게 할 예정이다. 따라서 이 글은 본 영화 전에 보는 예고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장 곳곳에는 관련된 한자를 넣어 두었는데, 지금은 이 글자가 무슨 자인지는 알 필요가 없다. 뒤에 나오는 "부수 글자 135자"에서 각 글자가 만들어진 경위나 배경을 상세히 이야기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각 단락마다 공통으로 나오는 부수(部首)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또 중국인의 생활과 한자가 어떻게 관련되어 만들어졌는지만 이해하면 된다. 따라서 이 글의 중간에 나오는 한자에 유의하면서 읽어보기 바란다.
우(雨) 여름 하늘에 구름(雲)이 모이면 비(雨)가 내리고 천둥(雷)과 벼락(電)이 친다. 그친 비 사이로 무지개(霓)가 뜨고, 노을(霞)이 졌다. 새벽에는 안개(雰)가 자욱하고, 긴 장마(霖)철에는 가끔 우박(雹)도 왔다. 가을에는 풀잎에 이슬(露)이 맺히고, 늦가을에는 서리(霜)가 내리고, 겨울에는 눈(雪)도 내렸다.
혈(穴) 고대 중국 문명이 시작된 황하강 중류에는 거대한 황토고원이 있는데, 고대인들은 비와 눈을 피하기 위해 황토 언덕에 굴(窟)을 뚫어(穿) 집을 만들었다. 굴 내부는 비어(空) 있고 한쪽은 막혀(窒)있다. 입구는 가급적 좁게(窄) 만드는 것이 난방을 위해 좋았고, 통풍이나 채광을 위해 조그만한 구멍(穴)을 낸 것이 창(窓)이었다.
면(宀) 황하강 하류의 화북평야에 사는 사람들은 움집(宇)을 지어, 날씨나 맹수들로 부터 자신을 지킬(守) 수 있었다. 이렇게 집(宙)에 정(定)착하면서 돼지(豕)와 같은 가(家)축도 길렀다. 또한 집에 있으면 편안히(寧) 쉴 수 있었다. 밤에는 잠을 자고(宿), 아침이면 깨어났다(寤). 장가(嫁)를 가서 여자(女)와 함께 살면 더 편안(安)하였다.
목(木) 고대 중국인들은 나무(木)로 집을 짓기 위해 목재(木材)를 만들고, 이 목재로 기둥(柱)과 대들보(梁)를 세우고, 집안에는 판자(板)를 잘라 침대(床)와 의자(椅)를 만들었다. 침대에는 목침(枕)이 있었고, 벽에는 시렁(架)을, 책상에는 책시렁(格)를 만들었다. 또한 베틀(機)이나 사다리(梯), 바둑판(棋), 관(棺)도 만들고, 노인을 위해 지팡이(杖)도 만들었다. 나무로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자 누각(樓)이나 다리(橋)도 만들었다. 오래된 나무(枯)는 도끼로 쪼개어(析) 묶어두었다가(束), 장작 불(焚)을 피웠다
문(門) 나무로 만든 건축 기술이 발달하자, 성문(門) 위에 누각(閣)도 만들었고,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검열(閱)하기도 하였다. 보통 문(闔)에는 빗장(關)을 채워 닫거나(閉), 빗장을 벗겨 문을 열었다(開). 집 안에는 안방(閨)을 만들어 문을 달았고, 문지방(閑)도 만들어 방을 구분하였다. 하지만 문이 좀 엉성해서 문(門) 틈 사이(間)로 햇볕(日)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죽(竹) 많은 나무들 중에서도 대나무(竹)는 가장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낚시대(竿), 화살(箭), 화살통(筒), 피리(笛), 붓(筆), 대나무 관(管), 키(箕), 젓가락(箸), 대그릇(籠), 대광주리(簞), 상자(箱), 바구니(籃) 등을 모두 대나무로 만들었다. 서기 105년 한나라 채륜이 종이를 만들기 전까지 대나무는 종이 대신 사용되었다. 책(篇)이나 장부(簿)는 물론, 편지(簡)나 답장(答)도 대나무에 썼다.
사(糸) 지금은 나무를 이용해 종이(紙)를 만들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실(絲)로 짠 비단(絹)을 사용하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누에에서 가는(細) 실을 뽑아(紡) 길쌈(績)을 했다. 실로는 비단(緋緞)을 짜고(組), 그물(網)도 짰다(織). 비단과 그물은 날 줄(經)과 씨 줄(緯)을 교차시켜 짰고, 실이 끊어지면(絶) 실을 묶어서(結) 이었다(維). 이러한 비단은 실크로드(Silk road)를 통해 서양으로 수출 되었다. 누에보다 키우기 쉬운 솜(綿)은 11세기까지 중국인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모시(紵)는 비단 보다 먼저 만들기 시작했으나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건(巾) 실로 짠 베(布)로 모자(帽)와 띠(帶)를 만들었으며, 돛(帆), 휘장(帳), 장막(幕)을 만들었고, 시장(市)에는 깃발(幢)을 달아 장이 열린다는 표시를 하였다. 또 비단(幣帛)은 책 표제(帖)에도 사용되었다.
의(衣/衤) 또한 베는 재단(裁)을 해서 옷(衣)을 만들어 입었다. 도포(袍)도 만들고, 치마(裳)도 만들었으며, 적삼(衫)도 만들어 입었다. 겉옷(表) 뿐만 아니라 속옷(裏)도 만들었다. 찢어진(裂) 남루(襤褸)한 옷은 기워서(補) 입었다. 또 부자들은 장식(裝)을 하여 입었다. 옷감으로 이불(衾)도 만들었고 부대(袋)도 만들었다.
화(禾) 전설에 의하면 신농씨가 농사를 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한다, 볍씨(種)를 모판에 심으면 싹이 나고, 어느 정도 자라면 모판에서 논으로 모를 옮겨(移) 심었다. 가을(秋)이 되면 벼(稻)를 수확(穫)하여 쌓아(積) 놓는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벼로 조세(租稅)를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정확한 징수를 위해, 저울(稱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는 벼(禾)를 많이 길렀다.
식(食) 고대 중국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밥(飯)을 해서, 반찬(饌)과 함께 배불리(飽) 먹었다(餐). 하지만 농사가 안되면 기근(飢饉)으로 굶어(餓) 죽기도 하였다. 남는(餘) 밥은 가축의 사료(飼)로 사용하였다.
미(米) 식량(糧)으로 사용한 쌀(米)로 죽(糊)도 만들고, 가루(粉)를 만들어 엿(糖)도 만들고, 화장(粧)하는 데도 사용하였다. 밥을 먹고 나서 똥(糞)도 샀다.
유(酉) 쌀을 발효(醱酵)시켜 술(酒)을 빗기도(釀) 하였는데, 술을 따라(酌) 마셔 취하면(酩) 자고, 일어나면 술이 깨었다(醒). 익은(酋) 술이 너무 오래되어 시어지면(酸) 식초(醋)로 사용하였다.
수(水/氵) 농사를 짓기 위해 고대 중국인들은 황하강(黃河江) 중류에 모여들었다. 바다(海洋)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기는 하나 큰 강과 작은 시냇물(溪)이 흘렀다. 주변에는 황하강이 범람(濫)해서 호수(湖)나 못(澤), 늪(沼)도 발달하였다. 황하강은 황토로 인해 항상 흐려(濁) 물이 맑은(淸) 때가 없었다. 물은 강을 따라 흐르면서(流) 때로는 소용돌이(渦)치기도 하고 때로는 격렬(激)하게 흘러 파도(波)가 쳐 물방울(沫)이 튀고, 거품(泡)이 생기기도 하였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강에서 물을 대어(灌) 땅을 비옥(沃)하게 만들었다. 물가(浦)에서는 고기를 잡다가(漁) 물에 빠져(沈) 익사(溺)하는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는 수영(泳)을 하거나 잠수(潛)를 하기도하고 배를 띄워(浮) 타는 사람도 생겼다. 옷이 더러워지면 빨레(洗)를 하고, 여름에 땀(汗)이 나면 강이나 호수에서 목욕(沐浴)을 하였다. 사람들은 물가에 모여들고 동네(洞)를 이루어 살았다.
토(土) 황하강이 범람하면 강 주변에는 황하강에서 나온 토사가 땅(地)에 쌓였다. 이렇게 쌓인 황토(土) 흙은 고대 중국인에게 매우 유용하였다. 적을 막기(塞) 위해 흙으로 성(城)을 쌓았고, 강가에는 흙으로 제방(堤)을 만들었다. 홍수가 오면 제방이 붕괴(壞)되기도 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적당한 터(垈)에 구덩이(坑)를 파고, 시신을 묻어(埋) 분묘(墳墓)를 만들었고, 흙으로 벽돌(塼)을 만들어 담(墻)도 쌓고 탑(塔)이나 만리장성(城)도 만들었다. 부드러운 흙(壤)이나 진흙(塗)으로 그릇을 만들었다.
명(皿) 중국을 뜻하는 영어 차이나(China)는 진나라의 이름에서 유래하였고, 영어로 도자기를 차이나(China)라 부르는 것을 볼 때, 중국의 도자기 문화가 얼마나 발달하였는지 알 수 있다. 밥 그릇(盂) 뿐만 이니라 술잔(盃), 화분(盆), 화로(盧), 찬합(盒) 등도 만들었다. 그릇(皿)에는 뚜껑(盖)도 만들어 덮었다(蓋).
화(火/灬) 불(火)을 때어(炊) 나는 열(熱)을 이용해 도자기를 굽고(焦), 음식을 삶아(烹) 익히고(熟), 물을 달였다(煎). 뿐만 아니라 밤에는 등불(燈)로 불빛(熙)을 비추어(煇) 어둠을 밝히고(照), 추우면 화로(爐)에 불을 담아 난방(煖)에 이용하였다.
견(犬/犭) 고대 중국에서는 농사뿐만 아니라 수렵(狩獵)도 하였다. 사납고(猛) 미쳐(狂) 날뛰는 이리(狼)를 잡아서(獲) 개(狗)로 길들여 집에서 길렀다. 무리를 이루어 사는 이리와는 달리 개는 혼자(獨)살게 되었다. 고양이(猫)이도 집에서 길렀으나, 여우(狐)는 교활(狡猾)하여 가축이 되지 못했다. 원숭이(猿)도 마찬가지다.
우(牛) 고대 중국에서의 소(牛)는 매우 요긴한 가축이었다. 은나라 때 이미 우리(牢)에서 소를 길렀고(牧) 밭을 갈거나 수레를 끄는데(牽) 소를 이용했다. 당시까지 제물(物)로 바치던 사람을 소가 대신 하였다. 즉 소가 사람 대신에 희생(犧牲)되었다. 희생되는 소는 숫소(特)로서 송아지(犢) 때부터 특별한(特) 대우를 받았다. 소를 제단에 바친 후에는 조상신에게 이런 사실을 고(告)했다.
착(辵/辶) 당시 사람들은 가까운(近) 곳이든 먼(遠) 곳이든 걸어 다녔다. 길(道)이 생기면서 방해물이 없이 빠른(迅) 속도(速)로 나아갈(進) 수 있었다. 길에서 도둑을 만나면, 먼 길로 우회(迂廻)하여 달아나(逃) 돌아오기도(還) 하였다. 길은 마을을 연결(連)하였으며, 마을을 통과(通過)하여 지나(過) 갔다. 길(途)에서는 멀리(遼) 사람을 보내거나(送), 돌아오는(返) 사람을 맞이하기도(迎)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逢) 하였다.
마(馬) BC1500년 경인 상나라 때에 북방 민족에 의해 중국으로 말(馬)이 수입되었다. 말은, 올라타서(騰) 원하는 데로 몰고(驅) 갈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었다. 말은 종종 놀라(驚)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마리가 동시에 놀라면 소동(騷)이 벌어지곤 하였다. 말을 몰고 멀리 갈 때에는 역(驛)에서 말을 쉬게하고 먹이도 줄 수 있었다.
차(車) BC 1300년 경인 은(殷)나라 때에 군(軍)사적인 목적으로 말이 끄는 수레(車)가 사용되었다. 수레는 바퀴(輪)가 달려 굴러(轉) 가도록 만들었다. 군사들이 사용하는 무기나 식량을 실어(載) 빨리(輕) 수송(輸)할 수 있었는데, 삐걱거리는(軋轢) 수레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로 여러 대가 함께 지나가면 굉(轟)음이 울렸다. 전쟁터에서는 수레를 배치하여 진(陣)을 쳤고, 공격(擊)을 할 때에도 마차가 사용되었다.
복(攴/攵) 전쟁은 고대국가에서 일상 생활이었다. 전쟁을 하려면 먼저 군사를 징집(徵)하고 세금을 거두었다(收). 전쟁이 시작되면 공격(攻)을 하고, 적(敵)들이 패(敗)해서 흩어지면(散), 포로로 잡았다. 포로는 매로 때려(攴/攵) 공손(敬)하게 만든 후 사면(赦)하여 놓아(放)주었다.
신(辛) 하지만 대부분 경우 포로를 그냥 놓아 주지 않고, 얼굴에 침(辛)으로 문신을 새겨 노예로 삼았다. 여자는 얼굴에 문신(章)을 새겨 첩(妾)으로 삼고, 아이(童)들은 침(辛)으로 한쪽 눈의 눈동자를 찔러 거리감을 상실하게 만들어 노예로 삼았다.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을 묵형이라고 하는데, 백성을 다스리는 재상(宰)이 이런 형벌도 관장하였다.
궁(弓) 고대 중국의 국가들은 활(弓)을 어깨에 매고 말을 타고 다니는 오랑캐(夷)들과 전쟁을 많이 치렀다. 오랑캐가 사용하는 활의 호(弧)는 반달 모양이 아닌 낙타등처럼 이중으로 되어 탄력(彈)이 매우 컸다. 활줄(弦)을 당기면(引) 큰 힘으로 발사(發)되었다. 이러한 활은 활줄이 느슨해지면(弛) 다시 줄을 팽팽하게 당겨(張)놓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 이후에는 쇠뇌(弩)가 전쟁에 사용되면서 이런 활은 쇠퇴해 갔다.
패(貝) BC1600년 경 탄생한 상(商)나라에서는 농사일 뿐만 아니라 장사를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래서 상나라 사람이란 의미의 상인(商人)은 물건을 파는 사람이란 의미도 생겨났다. 상인(商人)들은 조개(貝)를 돈(貨)으로 사용하였다. 물건을 사고(買) 팔아(賣) 재산(財)을 모으고, 돈을 저축(貯)하기도 하였다. 물건을 판매했을(販) 뿐만 아니라 임대(賃貸)도 하여 세(貰)도 받았다. 사회가 혼란해지자 부자든 가난한(貧) 사람이든 남의 재물을 탐(貪)내게 되었고, 도적질(賊)도 하게 되었다.
도(刀/刂) BC1300년 경 은나라의 탄생과 함께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며서 조개 대신 칼(刀) 모양으로 화패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칼은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물건을 둘로 나누거나(別), 과일을 깍거나(削), 짐승의 배를 가르거나(剖), 가죽을 벗기거나(剝), 나무를 쪼개는데(判)사용되었다. 또한 칼(劍)로 사람을 찔러(刺) 죽이거나(刑) 목을 베는데(刎)도 사용하였다.
금(金) 청동기는 구리(銅)와 주석(錫) 등 땅속의 광물(鑛)을 제련(鍊)하여 만들었다. 이러한 청동으로 거울(鏡), 바늘(針), 침(鍼), 낚시바늘(釣), 송곳(錐), 돈(錢), 비녀(鈐) 등을 만들었다. BC 3세기 한(漢)나라로 가면서 철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런 것들은 모두 쇠(鐵鋼)로 만들게 되었다.
기(示) 고대 중국인들은 인간에게 닥치는 재앙(禍)이나 복(福)이 모두 이 조상신(祖上神)과 관련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종묘(宗)나 사당(祠)에서 돌아가신 조상에게 제사(祭祀)를 지내거나, 복(福)을 축원(祝)하는 기도(祈禱)를 하였다.
녀(女) 조상신을 모시는 이러한 관습에서 동양 사상의 근본이 되는 유교가 탄생되게 되었다. 제사는 남자가 모셔야한다는 것 때문에 여자의 지위는 내려갔다. 급기야 여자(女) 셋이 모이면 접시를 깨는 대신 간사하고(姦), 간교하며(奸), 시기하고(嫉), 질투하며(妬), 요망하고(妖), 방자하며(放), 거짓(妄)을 일삼는 존재로 몰아부쳤다. 하지만 고대중국인에게 여자들은 예쁘고(娟), 고우며(姸), 아리땁고(娥), 맵시(姿)가 아리따운(嬌) 미녀(媛)로 보였다.
옥(玉/王) 남자들은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들은 더 예쁘지려고 귀걸이(珥)도하고 반지(環)도 끼었다. 공(球)처럼 둥근 구슬(珠)로 목걸이도 만들었다. 푸른 옥돌(碧)을 다듬어서(琢) 이런 것들을 만들었다. 옥돌(玉)을 잘 다루지(理) 않으면 흠집(瑕)이 생겼다. 하지만 옥돌과 같은 보석(寶)뿐만 아니라 호박(琥珀)이나 산호(珊瑚)와 같이 진기한(珍) 것으로도 만들었다.
녁(疒) 고대 중국인들도 아프거나(痛), 각종 질병(疾)에 시달렸다. 병(病)의 증상(症)으로는 몸이 피곤(疲)해지거나 수척(瘦瘠)해지거나, 경련(痙)으로 몸이 마비(痲)되는 경우도 있다. 천연두(痘)와 같은 전염병(疫)도 있었고 낫지 않는 고질병(痼)도 있었다. 종기(疽)를 치료(療)하면 딱지(痕)가 남았다. 늙으면 치매(痴)에 걸리기도 하였다.
알(歺/歹) 당시 사람들도 늙고 병들면 필연적으로 죽었다(死). 하지만 위험(殆)한 전쟁이나, 홍수와 같은 재앙(殃)으로 죽는(殊) 수도 많았다. 높은 사람이 죽으면(殞), 수의를 입히는 염(殮)을 하고 빈소(殯)를 차린 후, 장사(葬)를 지냈다. 또한 살아있는 노예나 궁녀들이 함께 묻어버리는(殉) 잔인한(殘) 악습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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