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篇---綜合文學

이지李贄-분서焚書 다시 등석양에게復鄧石陽

一字師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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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李贄-분서焚書 다시 등석양에게復鄧石陽

 
 

다시 등석양에게復鄧石陽

지난번 편지를 통해 가르침을 받고 감사의 답장을 했었지만, 아직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어, 삼가 다시 적어 올립니다.

그대는 오로지 근기가 상(上) 중의 상(上)인 사람[上上人]을 대상으로 말을 하면서, 그들이 지나치게 높은 것을 추구하다 혹시 가족을 버리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저는 정말이지 근기가 하(下) 중의 하(下)인 사람[下下人]을 대상으로 말을 하는 것으로, 그들이 속세에 깊이 가라앉아 빠져나오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이니, 오늘날 이른바 출가(出家)하는 아이들은 그저 바리때를 가지고 다니며 입에 풀칠하는 것밖에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오히려 근기가 하 중의 하인 사람이 가장 많아서, 이른바 천하에 도도하게 넘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근기가 상 중의 상인 사람 같은 경우는 온 세상에 극히 적습니다. 아니 적을 뿐 아니라 아마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같은 사람은 도도하게 넘쳐나는 그런 사람 중 하나일 뿐이지요. 절대 없는 것은 온 세상에 이미 없다는 것이니, 또한 무슨 말을 할 필요 있겠습니까?

이 몇 년 사이에 해가 바뀔 때마다 매번 깊이 개탄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흘러가 버리고, 30여 년 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털끝 만큼이나마 나라를 위해 힘을 쏟은 것은 없고, 그저 봉록을 훔쳐서 저 자신만 윤택하게 했을 뿐입니다. 이제 양친께서 흙으로 돌아가시고, 아우․누이 7명의 혼사가 각각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모두 입을 것과 먹을 것도 부족하지 않고, 각각 자식 손주도 낳았습니다. 유독 저만 4남 3녀를 연달아 낳았지만 다 죽고 겨우 딸 하나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나이는 이순(耳順, 60세)에 가까워지고 몸도 원래 허약하여, 나는 아들이 없더라도 동생들이 낳은 조카들이 벌써 눈에 가득한 것으로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결국 이로써 스스로 위안을 삼아 왔습니다. 이런 것은 이른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요, 할 수 있는데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인생이라는 이 큰 문제[此一件人生大事]1를 아직 분명히 깨닫지 못해, 마음 한구석에 항상 번민과 우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관직을 버리고 초(楚)에 들어가 선지식(善知識)을 모시고 조금이나마 도를 깨닫고 싶었습니다. 이 모두는 오랫동안 미망에 빠져 있던 사람이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것으로, 결코 스스로를 인륜의 밖으로 버린 적은 없습니다.2

사방에 흩어져 있는 평생 동안 알게 된 스승과 친구가 수백 명에 이르는데, 모두 벼슬길에 오른 충렬(忠烈)스런 대장부들로서, 바로 형(兄)과 같은 사람들이지요. 이 아우는 처음부터 감히 그들이 속세에 휩쓸려서 산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들 역시 내가 세상과 관계를 끊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각각 자기 길에 힘쓰면서 스스로 만족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만날 기약이 희미해지자 오가는 자취도 어느덧 없어지게 되었지요.

성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성인을 스승으로 삼고, 부처가 되고 싶은 사람은 부처를 조종(祖宗)으로 삼습니다. 재가(在家) 수행하느냐 출가(出家) 수행하느냐, 또는 남들이 알아주느냐 등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주어진 품성을 따라 하나같이 도를 향해 나아가니, 그러므로 서로 함께 학문을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하니 그3의 경우, 어찌 꼭 그가 인륜을 버린 것만 보려고 합니까? 그가 도에 뜻을 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보내신 편지에 실린 내용을 요약해보면, 대략 “그 사람이 굳세고 강하여 교화시키기 이처럼 어렵다. 처음에는 머리 숙이려고 하지 않더니, 끝내 경복(敬服)하여 스승으로 섬겼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가 교화되기 어려운 까닭에 그가 반드시 득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또한 그가 득도한 것을 보고 다시 그가 처음의 굳세고 강했던 뜻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굳세고 강하면서도 득도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만약 득도하지 못한다면 비록 굳세고 강하다 한들, 비록 출가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비록 팔을 자르고 몸을 태우는 지경에 이른들, 역시 그저 몸을 상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이 될 뿐이니, 결국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도에 뜻이 있다면 재가(在家)해도 가능합니다. 공자․맹자도 재가(在家)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출가해도 가능합니다. 석가도 출가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부처를 배우는 사람들은 그가 정반왕(淨飯王)의 자리를 물려받지 않고 설산(雪山)에서 고행한 것을 배우지는 않고 그저 부처가 될 수 있는 방법만을 배우려고 할 뿐입니다. 오늘날 공자를 배우는 사람들은 그가 재가(在家)할 수 있었던 것을 배우지는 않고 그저 공자가 될 수 있는 방법만을 배우려고 할 뿐입니다.

만약 재가(在家)하는 것만 옳다고 한다면, 오늘날 재가(在家)해서 성인을 배우는 사람이 많은데, 성인이 된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또한 만약 출가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승려가 아닌 사람 또한 적지 않은데, 끝내 감히 그들이 부처가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므로 부처를 배우는 것의 요체는 성불하는 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그는 이미 부처를 배웠으니, 또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준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조(趙) 어른4께서 호씨5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등할거)의 잘못을 극도로 비난하여 “바가지 매달고 삿갓 쓰고 떠도는 행각승 노릇 하며, 남의 제사에 기웃거리며 구걸하여 먹고 돌아와서 처와 첩에게는 부귀한 사람들 모임에 가서 배불리 먹고 왔다면서 거들먹거렸다는 제(齊)나라 사람6이나 언덕에 올라 이리저리 시장의 형세를 관망하며 이익을 구하는 작자7와 같은 작태를 보인다”라고 했다고 하셨습니다. 편지를 읽다가 이 내용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 말의 해독이 실로 내 마음을 찌릅니다. 저와 그가 완전히 그런 지경에 떨어지고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호씨는 필시 벼슬을 그만두는 것이 높은 품격이라 여기고 공명(功名)과 부귀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학문을 잘 하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른이 그(등할거)의 잘못을 통렬히 꾸짖어 호씨를 깨닫게 하려고 한 것이니, 이른바 “노해서 말하지 않으면 듣는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부귀와 영달을 추구하면 부귀와 영달을 구걸하는 꼴이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바가지 매달고 삿갓 쓰고 떠도는 행각승 무리가 모두 구걸하는 무리라는 것을 누가 안단 말입니까! 만약 호씨가 이 점을 생각을 해본다면, 이 도는 커서 오로지 공명과 부귀를 가볍게 여기는 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조 어른이 부귀와 공명에 빠진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면 또한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른바 병에 따라 약을 짓고 때에 따라 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으로, 일률적으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가 위대한 이유입니다. 저는 조 어른은 진정 성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땅히 종신토록 귀의하여 의지해야 하거늘, 어찌 갑자기 버리고 멀리 가버렸단 말입니까! 그러나 요컨대 각각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요, 그도 반드시 나의 뜻과 같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도를 구걸한다는 치욕을 생각하면 실로 수치스러운데,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마도 빌어 듣고 본 것을 가지고 총명하다고 여기고, 눈과 귀를 자기 마음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혹은 책에 의지하여 단안을 내리거나, 혹은 공자․부처에 의지하여 태산이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중의 한 가지라도 있다면 저도 제(齊)나라 사람과 같은 꼴이니, 또한 어찌 그를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 아우가 아프고 괴롭게 여기는 바입니다. 형께서는 무엇으로 가르치려 하십니까?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 이 아우가 그 글8을 비판해 주기를 원하는 듯한데, 이는 사실 안될 것도 없으나, 다만 꼭 그럴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사람은 각각 자기 마음이 있는데, 모두 맞아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저절로 좋아하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은 보고, 비판하고 싶은 것은 비판하여, 각자 서로의 길을 가로막지 않는 것, 이것에 바로 학문의 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이 옳다고 여겨서, 남들도 반드시 형과 함께 좋아하게 하려고 한다면, 또한 형이 비판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 거듭 이 아우가 비판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면, 이는 각기 자기가 옳게 여기는 것만 보고, 각기 자기의 학문에 사사로이 빠져, 학문이 이에 편협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 말이 조 어르신께 누가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조 어르신이 어떤 사람입니까? 우뚝 솟은 태산같은 사람이요, 학문은 천고를 꿰뚫고 있으니, 만약 한낱 일개 화상(和尙)이 누를 끼칠 수 있다면, 또한 조 어르신이 그만큼 귀할 것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진상이 스승 진량을 등진 이후 진량의 학문이 비로소 드러났고,9 서하10의 사람들이 자하를 보고 공자를 의심하여, 공자의 도가 이에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러하니 조 어르신은 진실로 사람들이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그를 위해서, 그가 스승을 등졌기 때문에 갑자기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여 애석해 한다고 해도, 당사자인 그는 이미 속세의 인연을 끊고 버려, 유학(儒學)을 달아나 불학(佛學)으로 귀의하였으니, 크나큰 형벌에 처해진다 해도 스스로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애석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그의 학문이 만약 정말 잘못 되었다면, 마땅히 천하 후세에 그 악함을 드러내서 천하 후세가 함께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요, 만약 과연 옳다면, 마땅히 천하 후세에 그 가르침을 드러내서 천하 후세가 함께 추구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仁)을 추구하는 군자의 마음 씀씀이요, 대동(大同)을 이루는 길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을 보건대, 명리(名利)를 피하지 않은 다음에야 어느 누가 이단의 책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저 기세등등한 하늘같은 조정에서 사서(四書)․오경(五經)을 온 천하에 반포하여, 어려서 배우고 자라서 행하게 하여, 그대로 따르는 사람에게는 높은 작위와 많은 봉록을 내려줌으로써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랑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쫓아내고 벌을 주는 것이 이토록 분명합니다. 이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꽁꽁 묶어두고 못 읽게 하는 책이 있는데 하물며 부처의 가르침이 담긴 책은 어떻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못 읽게 할 것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이 담긴 책 또한 그러한데, 하물며 등화상(鄧和尙)의 말은 어떻겠습니까? 또한 하물며 저같은 거사(居士)의 몇 구절 문장은 어떻겠습니까? 저는 비록 두 손 모아 바치고 싶지만, 저들이 방치하고 버릴 것이 염려될 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가 그들(세상사람)을 대신하여 그(등할거)를 비난하고 버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아우는 형(兄)이 성인의 자질을 갖추었고 또한 성인의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아우가 이단의 부류라는 것은 본래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朱)선생11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노장(老莊)과 불학(佛學)을 이단으로 지목하여 공격하고 배척해온 것이 몇백 년이나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 아우가 이를 모르지 않는데 감히 줄곧 사람들의 노여움을 산 것은 늙으면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나라는 육경(六經)으로 인재를 선발하지만 삼장12 등의 불전(佛典)을 소장하고 있고, 육예(六藝)13로 사람을 가르치지만 불교의 교단을 설치해 놓았고, 또한 일찍이 출가를 금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같은 사람은 나라에서도 버리지 않는데, 형이 버리려는 것입니까?

누차 간절하게 이끌어주고 깨우쳐 주셨으니, 정말로 목석(木石)이 아닐진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듯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아우가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공명(功名)과 처자식을 버리고 나서야 학문에 종사하게 하려 한다고 하시니, 정말 그렇다면 이는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것이 되는데, 이 아우는 그럴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형의 이 말씀은, 제 생각으로는, 역시 너무 일찍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아직 알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닭이 울어 밤낮을 알려주길 요구하는 것14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내강(內江)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지금 내강 사람들을 볼 때, 단 하나라도 그의 행실을 본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의 생각에는, 설령 조정에서 명을 내려 앞에는 펄펄 끓는 솥을 갖다 놓고 뒤에는 시퍼런 칼을 세워 놓고 몰아치며 출가하라고 해도, 그들은 차라리 처자식을 지키다 죽을지언정 필시 출가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개 등화상(鄧和尙)이 천하의 사람들을 변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도 중요할 것이 없는 일개 거사(居士)가 몇 마디 한가한 말로 천하의 사람들이 처자식과 공명을 버리고 불학(佛學)에 종사하게 할 수 있습니까? 이는 천고에 결코 없었던 일입니다. 절대 번거롭게 그런 기우(杞憂)를 가지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나는 진정 조 어른의 맥을 이을 사람은 혹시 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참된 동문(同門)이 있어서, 함께 조 어른을 추존하여, 옛날 공자 문하의 안회․민자건15처럼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이단의 무리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도 여유가 없는데, 어찌 함께 앞을 다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비루한 말16은 비난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또한 일찍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젊었을 때 출가한 사람이요, 노자는 주(周)나라의 도가 쇠미해진 것에 염증을 느껴 결국 서쪽으로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늙어서 출가한 사람이요, 오직 공자만이 노년에 집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종신토록 천하를 돌아다녀, 앉은 자리를 따뜻하게 덥힐 여유도 없었으니, 집에 있었던 기간 또한 얼마 되지 않습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났고 아들 하나만 있었는데도, 다시 어떤 여인에게 장가들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뿐더러, 또한 공자가 첩들을 몇 명 거느렸다는 말은 더더욱 듣지 못했습니다. 집안에 대한 관심은 공자 역시 극히 미미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모든 나라의 군주는 모두 공자를 예우할 줄 알았지만, 공자는 벼슬하지 않았고, 관직에 가장 오래 있었던 기간이 석달 뿐입니다. ‘씻은 쌀을 끓여 밥을 해 먹을 여유도 없이 떠났다’17거나 또는 ‘다음날 떠나버렸다’18고 했으니, 공명에 대한 생각 역시 너무 가벼웠습니다.

평생 부친 숙량흘(叔梁紇)을 장사지낸 곳을 몰라, 모친을 오보(五父)의 거리에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방산(防山)에 합장하게 되었다고 하니, 성묘의 예(禮)에 대해서도 역시 너무 소홀했습니다. 따지고 보자면 이 세 성인이 공명과 처자식을 단지 가볍게 여겼을 뿐이겠습니까? 아마 그 이상으로 보아야 하니, 처자식을 버린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상인(上人)의 죄 또한 서둘러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판단하기에, 그 상인의 죄는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에 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너무 가볍게 출가한 것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구요? 일단 출가하여 부모를 버리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늙어서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저절로 많은 병이 생깁니다. 그런데 자식이 있으면, 노년이 왔을 때 힘을 얻고, 병 들어 힘들 때 힘을 얻고, 자리에 누워서 움직이기 어려울 때 힘을 얻고, 곁에서 모시며 탕약을 내올 때 힘을 얻고,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그 고통을 참기 어려울 때 힘을 얻고, 임종이 가까워 숨을 헐떡거리며 마지막 유언을 하고 작별을 고하면서 소리와 숨이 점차 끊어져갈 때 힘을 얻습니다. 그럴 때에 힘을 얻지 못하면 자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상을 당했을 때 예법을 지키게 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훌륭하게 하려는 것에 있겠습니까?

왕왕 오늘날 세상의 도를 배웠다는 성인이나 선각자라는 사대부들을 보면, 부모가 80여 세인데, 조정에 배알하라는 전갈을 들으면 서둘러 달려가, 부모의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질 때가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공명을 급하게 여겨 그 부모를 잊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꾸짖지 않고 도리어 출가한 자들을 꾸짖으니, 이것이 바로 크나큰 미혹이요, 앞뒤가 전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아! 만나면 무릎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며 20여 년 동안 사귄 벗인 우리가 이제 머리가 허옇게 센 60․70세의 노인이 되어, 만리 타향에서 상봉하여 머리를 맞대고 정말 마음속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푸른 하늘 흰 태양이 내 마음을 비춰보고 있으니, 만약 털끝 하나 만큼이라도 나의 진정한 마음을 보여주지 않고 꾸미거나 거짓으로 한 말이 있다면, 마땅히 영겁의 무간지옥에 떨어져, 만겁의 세월 동안 노새가 되어 형을 태우고 다닐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이 오늘 백천(百泉)의 지기(知己)19에게 답하는 진정한 내 마음입니다. 설령 형은 나의 말에 유감이 있다 해도, 나는 끝까지 감히 원망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권1)

李贽故居, 출처 海丝商报

1 ‘인생이라는 큰 문제’[此一件人生大事]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중요한 큰 일, 즉 ‘도를 깨닫는 것’[悟道]을 가리키는 선가(禪家)의 상투적 용어이다. 개사(箇事)․차일대사(此一大事)․차일대사인연(此一大事因緣)․피사(彼事) 등과 같이, 문맥상 특별히 지칭하는 것이 없는 독립적 용어로 사용된 예가 많다.

2 이 내용으로 보아, 등석양은 이지가 식솔을 귀향시키고 삭발한 것을 대단히 염려했던 듯하다.

3 본문에는 거(渠)라고 되어 있는데, 거(渠)는 원래 3인칭 대명사이다. 그런데 일본(日本)의 미조구치 유우조우(溝口雄三)는 앞뒤의 문맥을 통해 볼 때 등활거(鄧豁渠)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근세수필집》(近世隨筆集) ― 中國古典文學大系55, 東京, 平凡社, 1994년, 초판 11쇄, 301쪽, 주25 참조) 등활거는 당시 유학을 배우던 도중, 스승을 등지고 가족 곁을 떠나 불도의 수행에 전념했다. 그런데 가족을 돌보지 않는 등 그의 기행이 워낙 심했고, 특히 그가 쓴 《남순록》(南詢錄)이란 글로 인하여 유자(儒者)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 답장의 내용으로 보아, 등석양은 이지에게 등활거의 《남순록》을 비난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4 조대주(趙大洲)이다. 이름은 정길(貞吉)이며 자는 맹정(孟靜)이고 대주는 호이다. <황안의 두 스님을 위해 쓴 글 세 편>[爲黃安二上人三首]에 조대주와 등활거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처음에는 등활거의 유학(儒學) 스승이었으나, 나중에 등활거는 그의 곁을 떠나서 불도의 수양에 전념했다.

5 호씨(胡氏)는 호직(胡直, 1517~1585)으로 자는 정보(正甫)이고, 호는 여산(廬山)이다. 강서(江西) 태화(泰和) 사람이다. 황종희(黃宗羲)는 추수익과 같이 그를 강우왕학(江右王學)으로 분류하였다.

6 《맹자》 <이루하>(離婁下) 참조.

7 《맹자》 <공손추하>(公孫丑下) 참조.

8 등활거의 《남순록》을 말하는 듯하다.

9 진상(陳相)과 진량(陳良)은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진량은 “주공과 공자의 학문을 좋아하여 북에서 중국으로 와서 배운” 유학자였다. 그의 제자 진상이 진량 밑에서 공부하다가 그를 떠나 신농(神農)의 말에 능통한 농가(農家)인 허행(許行)의 학문을 공부한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 《맹자》 <등문공상>(滕文公上)에 나온다.

10 서하(西河)는 하남(河南)에 있는 지명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공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자하(子夏)가 서하에 살면서 학문을 가르쳤는데 위(魏)나라의 문후(文侯)의 스승이 되었다. 그런데 아들이 죽자 그가 곡을 하다가 실명하였다”고 하였다. 바로 이 기상에 근거해서 발언한 것이다.

11 원문의 호칭은 주부자(朱夫子)이다.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를 말하는데, 흔히 존칭을 붙여서 주자(朱子)라고 한다. 부자(夫子)는 극존칭이다. 공자(孔子)를 공부자(孔夫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이지가 주희를 주부자라고 극존칭으로 일컬은 것에는 지나치게 주희를 추종하는 경향에 대한 풍자적․반어적 의미가 담겨 있다.

12 삼장(三藏)은 경(經)․율(律)․론(論)의 세 가지 불전이다. 다시 말해 불교의 경전을 총칭하는 말이다.

13 옛날 사대부의 기초 소양 교육으로 행해졌던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14 《장자》 <제물론>(齊物論) 참조.

15 안회(顔回)와 민자건(閔子騫)은 공자의 제자 중에서 덕행이 가장 뛰어났던 두 제자이다. 흔히 이들은 훌륭한 제자의 대명사로 쓰인다.

16 등활거의 《남순록》을 말하는 듯하다.

17 《맹자》 <만장하>(萬章下) 참조.

18 《논어》 <위령공>(衛靈公) 참조.

19 백천(百泉)이란 하남성 휘현이다. 이지가 젊은 시절 휘현교유(輝縣敎諭)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그 곳에 남아 있던 가족들이 등석양(鄧石陽)의 도움으로 생활을 꾸렸다는 이야기가 <탁오논략>(卓吾論略)에 나온다. 여기서 ‘백천의 지기’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卷一 書答 複鄧石陽

昨承教言,對使裁謝,尚有未盡,謹複錄而上之。蓋老丈專為上上人說,恐其過高,或有遺棄之病;弟則真為了下人說,恐其沉溺而不能出,如今之所謂出家兒者、祗知有持缽糊口事耳。然世間惟下下人最多,所謂滔滔者天下皆是也。若夫上上人,則舉世絕少,非直少也,蓋絕無之矣。如弟者,滔滔皆是人也。此其絕無者,舉世既無之矣,又何說焉。

年來每深歎憾,光陰去矣,而一官三十余年,未嘗分毫為國出力,徒竊俸余以自潤。既幸雙親歸土,弟妹七人婚嫁各畢。各幸而不缺衣食,各生兒孫。獨余連生四男三女,惟留一女在耳。而年逼耳順,體素贏弱,以為弟侄已滿目,可以無歉矣,遂自安慰焉。蓋所謂欲之而不能,非能之而自不欲也,惟此一件人生大事未能明了,心下時時煩懣;故遂棄官入楚,事善知識,以求少得。蓋皆陷溺之久,老而始覺,絕未曾自棄于人倫之外者。

平生師友散在四方,不下十百,盡是仕宦忠烈丈夫,如兄輩等耳。弟初不敢以彼等為徇人,彼等亦不以我為絕世,各務以自得而已矣。故相期甚遠,而形假遺。願作聖者師聖,願為佛者宗佛。不同在家出家,人知與否,隨其資性,一任進道,故得相與共為學耳。然則所取于渠者,豈取其棄人倫哉,取其志道也。中間大略不過曰:“其為人倔強難化如此。始焉不肯低頭,而終也遂爾稟服師事。”因其難化,故料其必能得道,又因其得道,而複喜其不負倔強初志。如此而已。然天下之倔強而不得道者多矣。若其不得道,則雖倔強何益,雖出家何用。雖至于斷臂燃身,亦祗為喪身失命之夫耳,竟何補也!故苟有志于道,則在家可也,孔、孟不在家乎?出家可也,釋迦佛不出家乎?今之學佛者,非學其棄淨飯主之位而苦行于雪山之中也,學其能成佛之道而已。今之學孔子者,非學其能在家也,學其能成孔子之道而已。若以在家者為是,則今之在家學聖者多矣,而成聖者其誰耶?若以出家為非,則今之非釋氏者亦不少矣,而終不敢謂其非佛,又何也?然則學佛者,要于成佛爾矣。渠既學佛矣,又何說乎?

承示云,趙老與胡氏書,極詆渠之非,曰:“云水瓢笠之中,作此乞墦登垅之態。”覽教至此,不覺泫然!斯言毒害,實刺我心。我與彼得無盡墮其中而不自知者乎?當時胡氏必以致仕分高品,輕功名富貴為善學者,故此老痛責渠之非以曉之,所謂言不怒,則聽者不入是也。今夫人人盡知求富貴利達者之為乞墦矣,而孰知云水瓢笠之眾,皆乞墦耶!使胡氏思之,得無知斯道之大,而不專在于輕功名富貴之間乎?然使趙老而別與溺于富貴功名之人言之,則又不如此矣。所謂因病發藥,因時治病,不得一概,此道之所以為大也。吾謂趙老真聖人也。渠當終身依歸,而奈何其遽舍之而遠去耶!然要之各從所好,不可以我之意而必渠之同此意也。獨念乞墦之辱,心實恥之,而卒不得免者何居?意者或借聞見以為聰明,或藉耳目以為心腹歟!或憑冊籍以為斷案,或依孔、佛以為泰山歟!有一于此,我乃齊人,又安能笑彼渠也。此弟之所痛而苦也。兄其何以教之?

承諭欲弟便毀此文,此實無不可,但不必耳。何也?人各有心,不能皆合。喜者自喜,不喜者自然不喜;欲覽者覽,欲毀者毀,各不相礙,此學之所以為妙也。若以喜者為是,而必欲兄丈之同喜;又以毀者為是,而複責弟之不毀。則是各見其是,各私其學,學斯僻矣。

抑豈以此言為有累于趙老乎?夫趙老何人也,巍巍泰山,學貫千古,乃一和尚能累之,則亦無貴于趙老矣。夫惟陳相倍師,而後陳良之學始顯,惟西河之人疑子夏于夫子,而後夫子之遭益尊。然則趙老固非人之所能累也。若曰吾謂渠,惜其以倍師之故,頓為後世咦耳,則渠已絕棄人世,逃儒歸佛,陷于大戮而不自愛惜矣,吾又何愛惜之有焉?吾以為渠之學若果非,則當以此暴其惡于天下後世,而與天下後世共改之;若果是,則當以此顯其教于天下後世,而與天下後世共為之。此仁人君子之用心,所以為大同也。且觀世之人,孰能不避名色而讀異端之書者乎?堂堂天朝,行頒《四書》、《五經》于天下,欲其幼而學、,壯而行,以博高爵重祿,顯榮家世,不然者,有黜有罰如此其詳明也,然猶有束書面不肯讀者,況佛教乎?

佛然且然,況鄧和尚之語乎?況居上數句文字乎?吾恐雖欲拱手以奉之,彼即置而棄之矣,而何必代之毀與棄也。弟謂兄聖人之資也,且又聖人之徒也。弟異端者流也,本無足道者也。

自朱夫子以至今日,以老、佛為異端,相襲而排擯之者,不知其幾百年矣。弟非不知,而敢以直犯眾怒者,不得已也,老而怕死也。且國家以六經取士,而有《三藏》之收;六藝教人,而又有戒壇之設:則亦未嘗以出家為禁矣。則如渠者,固國家之所不棄,而兄乃以為棄耶?

屢承接引之勤,苟非木石,能不動念。然謂弟欲使天下之人皆棄功名妻子而後從事于學,果若是,是為大蠹,弟不如是之愚也。然斯言也,吾謂兄亦太早計矣,非但未卵而求時夜者也。夫渠生長于內江矣,今觀內江之人,更有一人效渠之為者乎?吾謂即使朝廷出令,前鼎鑊而後白刃,驅而之出家,彼甯有守其妻孥以死者耳,必不願也。而謂一鄧和尚能變易天下之人乎?一無緊要居士,能以幾句閑言語,能使天下人盡棄妻子功名,以從事于佛學乎?蓋千古絕無之事,千萬勿煩杞慮也。吾謂真正能接趙老之脈者,意者或有待于兄耳。異日者,必有端的同門,能共推尊老丈,以為師門顏、閔。區區異端之徒,自救不暇,安能並驅爭先也?則此鄙陋之語,勿毀之亦可。

然我又嘗推念之矣。夫黃面老瞿曇,少而出家者也,李耳厭薄衰周,亦遂西游不返;老而後出家者也,獨孔子老在家耳。然終身周流,不暇暖席,則在家時亦無幾矣,妻既卒矣,獨一子耳,更不聞其娶誰女也,更不聞其複有幾房妾媵也,則于室家之情,亦太微矣”時列國之主,盡知禮遇夫子,然而夫子不仕也,最久者三月而已,不曰“接浙而行”,則自‘明日遂行”,則于功名之念,亦太輕矣。居郴知叔梁紇葬處,乃葬其母于五父之衡,然後得合葬于防焉,則字掃墓之禮,亦太簡矣。豈三聖人于此,顧為輕于功名妻子哉?恐亦未免遺棄之病哉!然則渠上人之罪過,亦未能遽定也。

然以余斷之,上人之罪不在于後日之不歸家,而在于其初之輕于出家也。何也?一出家即棄父母矣。所貴于有子者,謂其臨老得力耳;蓋人既老,便自有許多疾病。苟有子,則老來得力,病困時得力,臥床難移動時得力;奉侍瘍藥時得力、五內分割;痛苦難忍時得力,臨終嗚咽、分付決別七聲氣垂絕對得力。若此時不得力,則與寵子等矣,文何在于奔喪守劄,以為他人之觀乎?往往見今世學道壘人,先覺士大夫,或父母八千有余,猶聞拜疾趨,全不念風中之燭,滅在俄頃。無他,急功名而忘其親也。此之不責,而反責彼出家兒,是為大惑,足稱顛倒見矣。

籲籲!二十余年傾蓋之友,六七十歲皓皤之夫,萬里相逢,聚首他縣,誓吐肝膽,盡脫皮膚。苟一蔓衷赤不盡,尚有纖芥為名作誑之語,青霄白日,照耀我心,便當永墮無間,萬劫力驢,與兄騎乘。此今日所以報答百泉上知己之感也。縱兄有憾,我終不敢有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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