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篇---綜合文學

이지李贄-분서焚書 황안의 두 스님을 위해 쓴 글 세 편爲黃安二上人三首

一字師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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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李贄-분서焚書 황안의 두 스님을 위해 쓴 글 세 편爲黃安二上人三首

 
 

황안의 두 스님을 위해 쓴 글 세 편1)爲黃安二上人三首

1. 큰 효[大孝]

황안의 스님은 모친께서 과부로 외롭게 집에서 여생을 보내시는 것을 보고, 어떻게 모친께 보답할 길이 없을까 생각했다. 마침내 살을 베어 피를 내서, 혈서로 발원의 글을 써서, 부처께 다음과 같이 맹세하고자 했다.

 

“이 생애에 도를 완성함으로써 어머니께 보답하고자 한다. 곁에서 때에 맞추어 따뜻하고 서늘하게 해드리는 것2)이 비록 효도라고 한다지만, 결국 조그만 효[小孝]에 불과할 뿐, 우리 어머니께 보답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설령 부지런히 공부해서 공명을 이루어 만인의 찬양과 추앙을 받으시게 한다 해도, 역시 타인의 이목만 휘황찬란하게 해주는 것일 뿐, 우리 어머니를 고해(苦海)에서 건져드릴 수는 없다. 오직 부지런히 정진하여 불도를 이루면, 이로써 조금이나마 보답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 공자께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신 것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비록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이 선인의 업적을 계승한 큰 효[大孝]라고 할지라도, 보잘것없이 작은 것이 된다. 지금 보면, 공자의 부모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찬란히 빛나니, 정말이지 사소한 공명으로는 어머니께 보답하는 과업을 이루지 못한다.”

 

스님이 피를 내어 발원의 글을 쓰려는데, 그 뜻이 대략 이상과 같았지만 감히 글로 써내려가지 못하니, 그 뜻이 또한 매우 슬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대신 그 뜻을 써, 여러 동반에게 알리는 것이다.

 

내가 처음 스님을 만났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과거 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또한 삭발하고 출가하겠다는 뜻을 처음 내게 말했을 때, 나는 그러지 말라고 완강하게 말렸다. 올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머리를 훤히 깎은 승려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모친 곁을 떠나 출가할 뜻이 그에게 정말로 있었음을 알수 있었다. 이로부터 감히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때때로 말하는 사이에 출가하지 말라는 나의 은근한 뜻을 보였는데, 스님의 마음이 독실하고 의지가 굳건하여, 결국 이런저런 말로 말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 또한 이와 같이 혈서로 발원의 글을 쓰니, 진짜 출가한 사람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에 비교될 수 있겠는가! 도를 배우는 것은 오로지 영령(英靈)한 사나이가 되려는 것이라고 옛 사람이 말한 것에 감탄했었는데, 스님같은 사람이면 진정 영령한 사나이가 아닌가!

 

양명(陽明)선생의 제자가 천하에 두루 퍼졌을 당시, 유독 심재(心齋) 왕간(王艮)이 가장 영령했다. 심재는 본래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로, 목불식정(目不識丁)의 무식꾼이었는데, 책 읽는 소리를 듣고 문득 스스로 깨우친 바가 있어, 강서(江西) 지방으로 가서 왕도당3)을 만나, 그와의 토론을 통해 자기가 깨우친 것의 실체를 알아보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친구의 입장으로 찾아간 것이었는데, 후에 자기가 그만 못함을 알고, 이에 그를 따라 학업을 끝냈다. 그러므로 심재 역시 성인의 도를 들을 수 있었으니, 기골이 대단한 사람이 아닌가!

 

심재의 후예가 서파석4)이요, 안산농5)이다. 산농은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학문을 강론하며 일세를 내려다 보았는데 무고를 당했고, 파석은 포정사(布政使)로 군사를 청하여 싸움을 독려하다 광남(廣南)에서 죽었다. 구름은 용을 부르고 바람은 범을 부르듯[雲龍風虎] 만물은 각각 그 무리를 따른다는데, 정말로 그렇다. 심재는 진정한 영웅이요, 따라서 그의 무리 역시 진정한 영웅이다. 파석의 후예가 조대주(趙大洲)요, 대주의 후예가 등활거(鄧豁渠)이다. 산농의 후예가 나근계(羅近谿)6)요, 하심은(何心隱)이며, 심은의 후예가 전회소7)와 정후대8)로, 대(代)를 이어 그 높은 경지를 닮았다. 이른바 大海不宿死屍요 龍門不點破額이라는 것을 어찌 믿지 않으리오? 심은은 포의의 신분으로 앞장서서 도를 제창하다 횡사를 당했고, 근계는 비록 요행으로 화를 면하기는 했지만, 끝내 일개 관직에 있다가 장태악(張太岳)에게 미움을 샀다. 대개 영웅의 인물은 세상에서 화를 면할 수는 없어도 도를 이루는 것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지금 스님이 이로써 도를 이루는 것으로 나아가면, 또한 누가 이보다 앞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큰 효[大孝]라고 한다.

 

2. 참된 스승[眞師]

황안의 두 스님이 이곳에 와서, 때때로 스승과 친구의 중요함을 언급했다. 회림(懷林)9)이 “스님께서 평소 스승과 친구를 말씀하시는 것에 따르면, 둘은 마찬가지라고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스승과 친구는 원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둘이 다르단 말인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친구가 곧 스승임을 모르고, 사배(四拜)를 올리고 학업을 전수받은 사람만이 스승이라고 여긴다. 또한 스승이 곧 친구임을 모르고, 그저 함께 사귀어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만이 친구라고 여긴다.

 

만약 친구라서 사배를 올리고 학업을 전수받을 수 없다면, 필시 그와 함께 친구가 될 수 없다. 스승이라서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못한다면, 또한 그를 스승으로 섬길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은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으니, 그러므로 ‘우(友)’ 앞에 ‘사(師)’를 붙여서, 사귀는 친구를 스승으로 모시지 못할 것도 없으며 만약 스승으로 모실 수 없다면 친구도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대체로 말해서, 사우(師友)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결국 그 의미는 ‘우(友)’라는 한 글자 뿐이다. 그러므로 친구라고 하면 스승의 의미가 그 안에 있다.

 

이 두 스님같은 경우는 서로 친구이면서 스승으로 삼았다.

사제(師弟)가 정에 구애되어 속세를 벗어나지 못함을 사형(師兄)이 항상 염려하여, 그의 손을 잡고 멀리 가서 그 도심(道心)을 굳건히 다지게 했다. 사제 역시 사형이 정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결국 함께 멀리 가서 부처에게 그 큰 염원을 발했다. 이는 사형을 친구로 삼았으면서 또한 사형을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니 친구이면서 스승인 경우가 아닌가?

 

사제는 사형이 다만 서방 정토에 귀의하는 것만 알 뿐 서방 정토는 스스로의 성[自性]에 있음을 모를까봐 염려한 나머지, 그의 스승10)이 등활거의 자증자오(自證自悟)를 칭찬하시던 말을 사형 앞에서 항상 했다. 사형 역시 사제의 완곡한 기탁의 뜻을 알고, 염불과 더불어 참선을 해야 하며 오직 염불만 능사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을 믿었다. 이는 사제를 친구로 삼았으면서 또한 사제를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니 이 또한 친구이면서 스승인 경우가 아닌가?

 

그러므로 나는 이 두 스님이야말로 진정한 사우(師友)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세상 사람들처럼 친구라느니 스승이라느니 하면서 우르르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사우(師友)의 소중함을 어떻게 알겠는가?

 

나도 이로 인해 항상 등활거를 언급했고, 또한 등활거의 사우(師友)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사귀었는가에 대해 미루어 말해주었다. 그러자 두 스님은 매우 기뻐하며 “제가 비록 등활거의 후손이라지만, 줄곧 등활거 사상의 유래를 몰랐었는데, 지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실로 등활거 사조(師祖)의 바로 곁에 있는 듯 합니다. 또한 이로 인해 양명․심재선생이 전수하고 전수받은 것을 듣게 되니, 얼마나 끝없이 기쁘고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다만 선생님의 사우 관계가 어떤지 모를 뿐입니다”라고 했다.

 

배움에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자가 누구에겐들 배우지 않았으리오!’[夫子焉不學]11)라는 말이 오늘날 비록 상투적인 말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사실 맞는 말이다. 내가 비록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사배(四拜)하고 학업을 전수받으며 그를 스승으로 모신 적이 없고, 또한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사배를 받고 학업을 전수해주며 그를 벗으로 삼은 적도 없지만, 세상 사람들이 시시때때로 툭하면 남에게 사배한다거나 시시때때로 툭하면 남에게 사배를 받는 것에 비교하더라도 나의 사우는 너무 많아서, 정말 같은 차원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의 사배를 받는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당신은 남의 사배를 받고 스승이 되었느냐고 내가 그 연유를 물으면, 남의 사배를 받은 그 사람은 귀머거리인지 아니면 벙어리인지, 내게 그 연유를 말해주는 법이 없다. 또한 남에게 사배하여 제자가 된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당신은 그에게 사배하고 제자가 되었느냐고 내가 두루 그 연유를 물으면, 남에게 사배한 그 사람도 또한 귀머거리인지 아니면 벙어리인지, 내게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 사배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때때로 사배하고 백배(百拜)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그 많은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사계(沙界)의 수12)로도 그 많음을 비유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가 알리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두 스님에게 나의 사우(師友)를 말해줄 수 있겠는가!

 

3. 실언(失言)

내가 처음 두 스님을 만났을 때, 염불에 부지런히 정성을 들이는 것을 보고, 내가 평생 좋아했던 고결(高潔)함에 대한 글13)을 써서 주었다. 이제 함께 생활한 지 오래 되고 보니, 두 스님의 고결함은 나보다 백배 천배 더한지라, 내가 말한 고결함에 대한 이야기가 두 스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말한 고결함에 대한 이야기는 이 세상의 보잘것없고 혼탁함에 대해서 치료약이 될 수 있다. 내가 보아하니, 세상 사람들은 항상 참된 뜻이 없어, 보잘것없고 혼탁한 지경에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입으로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맑다지만 행실은 혼탁하여, 그들이 정말로 고결함을 좋아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이 거꾸로 고결함이 나의 병통이라고 말들을 하니, 이 때문에 나는 매우 마음 아파하고 깊이 고민하는 것이다.

 

두 스님 같은 경우에는 어찌 고결함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필요 있겠는가? 고결한 사람에게 고결함을 말하는 것이 이미 불에 기름을 쏟아 붓는 격인데,14) 하물며 열 배나 더 고결한 사람들에게야 말할 나위도 없다. 내가 어리석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라고 공자가 분명히 말했다. 보잘것없고 혼탁하면서 정진하지 않는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이요, 끊임없이 고결함을 좋아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으로, 모두 도에 맞지 않다.

 

두 스님은 그저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적합할 뿐이다. 이와 같이 염불하고, 이와 같이 수행하고, 이와 같이 계율을 지키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오래 갈 수 있고, 이와 같이 하면 크게 될 수 있고, 이와 같이 하면 자연히 연대(蓮臺)에 올라 진승(眞乘)을 체험할 것이요, 불과(佛果)를 성취할 것이니, 더 이상 다른 많은 것을 할 필요가 없다. 염불할 때에는 오직 염불만 할 것이요, 모친을 보고 싶을 때에는 모친을 보러 갈 것이요, 감정을 포장할 필요가 없고, 본성을 거스를 필요가 없고, 마음을 감출 필요가 없고, 뜻을 억누를 필요가 없어, 마음에 따라서 움직이면 진정한 부처가 된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것도 괜찮지만 너무 고결하지 않는 것도 좋다. (권2)

 
왕양명王陽明

1) 세 편 중 세 번째 <실언>(失言)은 <고결설>[高潔說]과 직접 관련되는 글이므로 두 가지를 참조해야 한다.
2)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린다는 것으로, 신체적인 봉양을 의미한다. 《예기》 <곡례>(曲禮) 참조.
3) 왕도당(王都堂)은 왕양명을 가리킨다. 도당(都堂)은 도어사(都御史)․부어사(副御史)․첨도어사(僉都御史)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양명은 당시에 도찰원좌첨도어사(都察院左僉都御史)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4) 서파석(徐波石)은 서월(徐樾)로 자는 자직(子直)이고, 파석은 호이다. 강서 귀계 사람이다. 《명유학안》(明儒學案) 권32 <태주학안서록>(泰州學案序錄)에 보인다.
5) 안산농(顔山農)은 안조(顔釣)로 자가 산농이다. 강서 길안 사람이다. 서파석과 함께 《명유학안》에 보인다.
6) 근계(近谿)는 나여방(羅汝芳)의 호이다. 그는 강서(江西) 남성(南城) 사람으로, 자는 유덕(維德)이다.
7) 회소(懷蘇)는 전동문(錢同文)의 자로, 그는 복건성(福建省) 흥화(興化) 사람이다.
8) 전회소(錢懷蘇)는 전동문(錢同文)이며 회소는 자이고 복건 흥화 사람이다. 정후대(程後臺)는 정학안(程學顔)으로 자는 이포(二蒲)이고 후대는 호이다. 호북 효감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명유학안》에 보인다.
9) <예약>(豫約) 소인(小引) 참조.
10) 이수암(李壽庵)을 일컫는다. <고결설>[高潔說] 참조.
11) 《논어》 <자장>(子張) 참조.
12). 문은 사수(沙數)로, 인도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숫자가 많음을 비유하는 불교의 상투어이다.
13) 본 역서에 수록되어 있는 <고결설>(高潔說)을 일컫는다.
14) 원문은 ‘지비익신’(止沸益薪)으로, ‘그만 끓게 한다면서 땔감을 더 넣다’라는 뜻의 속담이다.

卷二 書答 為黃安二上人三首

大孝一首

黃安上人,為有慈母照居在堂,念無以報母,乃割肉出血,書寫願文,對佛自誓,欲以此生成道,報答母慈。以為溫清雖孝,終是小孝,未足以報答吾母也。即使勉強勤學,成就功名以致褒崇,亦是榮耀他人耳目,未可以拔吾慈母于苦海也。唯有勤精進,成佛道,庶可藉此以報答耳。若以吾家孔夫子報父報母之事觀之,則雖武周繼述之大孝,不覺眇乎小矣。

今觀吾夫子之父母,至于今有耿光,則些小功名,真不足以成吾報母之業也。上人刺血書願,其志蓋如此而不敢筆之于文,則其志亦可悲矣!故余代書其意,以告諸同事云。

余初見上人時,上人尚攻舉子業,初亦曾以落發出家事告余,余甚不然之。今年過此,乃禿然一無發之僧,余一見之,不免驚訝,然亦知其有真志矣。是以不敢顯言,但時時略示微意于語言之間,而上人心實志堅,終不可以說辭諍也。今複如此,則真出家兒矣,他人可得比耶!因歎古人稱學道全要英靈漢子,如上人非真英靈漢子乎?當時陽明先生門徒遍天下,獨有心齋為最英靈。心齋本一灶丁也,目不識丁,聞人讀書,便自悟性,徑往江西見王都堂,欲與之辯質所悟。此尚以朋友往也。後自知其不如,乃從而卒業焉。故心齋亦得聞聖人之道,此其氣骨為何如者!心齋之後為徐波石,為顏山農。山農以布衣講學,雄視一世而遭誣陷;波石以布政使清兵督戰而死廣南。云龍風虎,各從其類,然哉!蓋心齋真英雄,故其徒亦英雄也;波石之後為趙大洲,大洲之後為鄧豁渠;山農之後為羅近溪,為何心隱,心隱之後為錢懷蘇,為程後台:一代高似一代。所謂大海不宿死尸,龍門不點破額,豈不信乎!心隱以布衣出頭倡道而遭橫死,近溪雖得免于難,然亦幸耳,卒以一官不見容于張太岳。蓋英雄之士,不可免于世而可以進于道。今上人以此進道,又誰能先之乎?故稱之曰大孝。

真師二首

黃安二上人到此,時時言及師友之重。懷林曰:“據和尚平日所言師友,覺又是一樣者。”

余謂師友原是一樣,有兩樣耶?但世人不知友之即師,乃以四拜受業者謂之師;又不知師之即友,徒以結交親密者謂之友。夫使友而不可以四拜受業也,則必不可以與之友矣。師而不可以心腹告語也,則亦不可以事之為師矣。古人知朋友所系之重,故特加師字于友之上,以見所友無不可師者,若不可師,即不可友。大概言之,總不過友之一字而已,故言友則師在其中矣。若此二上人,是友而即師者也。其師兄常恐師弟之牽于情而不能擺脫也,則攜之遠出以堅固其道心;其師弟亦知師兄之真愛己也,遂同之遠出而對佛以發其弘願。此以師兄為友,亦以師兄為師者也,非友而師者乎?其師弟恐師兄徒知皈依西方而不知自性西方也,故常述其師稱贊鄧豁渠之語于師兄之前,其師兄亦知師弟之托意婉也,亦信念佛即參禪而不可以徒為念佛之計。此以師弟為友,亦以師弟為師者也,又非友而師者乎?故吾謂二上人方可稱真師友矣。若泛泛然群聚,何益耶,甯知師友之為重耶!

故吾因此時時論及鄧豁渠,又推豁渠師友之所自,二上人喜甚,以謂我雖忝為豁渠之孫,而竟不知豁渠之所自,今得先生開示,宛然如在豁渠師祖之旁,又因以得聞陽明、心齋先生之所以授受,其快活無量何如也!今但不聞先生師友所在耳。余謂學無常師,“夫子焉不學”,雖在今日不免套語,其實亦是實語。吾雖不曾四拜受業一個人以為師,亦不曾以四拜傳受一個人以為友,然比世人之時時四拜人,與時時受人四拜者,真不可同日而語也。我問此受四拜人,此受四拜人非聾即啞,莫我告也。我又遍問此四拜于人者,此四拜于人者亦非聾即啞,不知所以我告也。然則師之下在四拜明矣。然孰知吾心中時時四拜百拜屈指不能舉其多,沙數不能喻其眾乎?吾河以言吾師友于二上人之前哉!

失言三首

余初會二上人時,見其念佛精勤,遂敘吾生平好高好潔之說以請教之。今相處日久,二上人之高潔比余當十百千倍,則高潔之說為不當矣。蓋高潔之說,以對世之委靡渾濁者則為應病之藥。余觀世人恒無真志,要不過落在委靡渾濁之中,是故口是心非,言清行濁,了不見有好高好潔之實,而又反以高潔為余病,是以痛切而深念之。若二上人者,豈宜以高潔之說進乎?對高潔人談高潔,已為止沸益薪,況高潔十倍哉!是余蠢也。“過猶不及”,孔夫于言之詳矣。委靡渾濁而不進者,不及者也;好為高潔而不止者,大過者也:皆道之所不載也。二上人只宜如是而已矣。如是念佛,如是修行,如是持戒。如是可久,如是可大,如是自然登蓮台而證真乘,成佛果,不可再多事也。念佛時但去念佛,欲見慈母時但去見慈母,不必矯情,不必逆性,不必昧心,不必抑志,直心而動,是為真佛。故念佛亦可,莫太高潔可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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