工夫房---漢字六書

김 씨(金氏) 성(姓) 많은 이유(理由)

一字師 2024.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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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金氏) 성(姓) 많은 이유(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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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풀이: 성 김(金) 뿌리 씨(氏) 성 성(姓) 다스릴 리(理) 말미암을 유(由). ◑뜻풀이: 우리나라 성(姓)의 하나. 본관(本貫)은 김해(金海), 경주(慶州), 광산(光山), 금령(金寧), 안동(安東), 의성(義城), 강릉(江陵), 청풍(淸風) 등 280여 본이 현존한다. ◑출처: 네이버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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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金)은 주물(鑄物)을 할 때 쓰이던 거푸집(亼)과 녹인 쇳덩이(土와 두 개의 점(點)를 상형(象形)하였다. 본래는 주물(鑄物)하기 쉬운 청동(靑銅)을 의미(意味)하였지만 때에 따라 ‘황금(黃金’을 뜻한다. 금(金)에 대해 "설문(說文)"에서는 “'금(金)'은 다섯 가지 색(色)의 쇠(鐵)를 뜻한다. 그 가운데서도 황금(黃金)을 으뜸으로 여긴다. 금(金)은 땅속에 오래 묻어두어도 녹(綠)이 생기지 않고, 백 번을 제련(製鍊)해도 감소(減少)하지 않으며 모양(模樣)을 바꾸어도 안 변(變)한다. 서쪽을 나타내는 오행(五行)이다. 흙(土)에서 생(生)겨나므로 토(土)로 구성(構成)되었으며 거푸집의 좌우(左右)에서 붓을 때 쇠(鐵)가 흙속에 있는 모양(模樣)을 본떴다. 금(今)은 소리요소가 된다.”고 하였다. 금(金)은 갑골문(甲骨文)에는 보이지 않고 금문(金文)에 보이는데, 잘 살펴보면 주물(鑄物)을 할 때 쓰이던 거푸집(亼)과 녹인 쇳덩이(土와 두 개의 점(點)를 상형(象形)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大部分) 소리요소(聲要素)인 금(今)의 생략형(省略形)에다 흙(土)에 덮여 있는 두 덩어리(두 점)의 금(金)을 나타낸 형성글자(形成字)로 보는 경향(傾向)이 많은데 금문(金文)을 고려(考慮)하지 않은 탓이다. 금(金)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진 시기(時期)는 상(商)나라이후 선진시대(先秦時代)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가 활발(活潑)하게 꽃피던 때로 ‘황금(黃金)’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청동(靑銅)’을 뜻했는데, 후대로 오면서 모든 쇠(鐵)를 아우른 금속(金屬)의 대표명사(代表名詞)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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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씨(氏)자는 나무의 뿌리를 본떠 만든 글자다. 뿌리는 나무의 맨 아래에 있기 때문에 아래나 밑이라는 의미(意味)로 쓰인다. 뿌리 씨(氏)자가 날 일(日)자와 만나면 날 저물 혼(昏)자가 되는데, 해(日)가 나무뿌리(氏)처럼 땅 속으로 들어갔다는 데에서 날이 저문다는 뜻이 나왔다. 그래서 해가 저물 무렵의 땅거미를 황혼(黃昏)이라고 부른다. 또 날 저물 혼(昏)자에 여자 녀(女)자가 만나면 혼인할 혼(婚)자가 되는데, 옛날 중국(中國)에서는 날이 저문 뒤에 혼인(婚姻)을 했기 때문이다. 뿌리 씨(氏)자 아래에 선(一)을 하나 그으면, 밑이라는 뜻의 밑 저(氐)자가 된다. 밑 저(氐)자도 뿌리 씨(氏)자와 마찬가지로 아래나 밑이라는 의미(意味)의 글자에 들어간다. 예를 들어 낮을 저(低)자나 바닥 저(底)자가 그러하다. 뿌리 씨(氏)자는 성 씨(氏)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자신의 뿌리와 같고, 같은 성(姓)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의 성(姓)을 부를 때 김씨(金氏), 이씨(李氏)처럼 씨(氏)를 붙이는데, 성(姓=女+生)은 원래 모계(母系) 사회(社會)에서 어머니의 성(姓)을 일컫는 글자이고, 씨(氏)는 부계(父系) 사회(社會)로 오면서 아버지 성(姓)을 일컫는 글자다. 지금은 둘을 합(合)쳐서 성씨(姓氏)라고도 한다. 성 씨, 뿌리 씨는 나무의 뿌리를 본떠 만든 글자다. 씨족(氏族)은 같은 조상(祖上)을 가진 겨레붙이의 집단(集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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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성(姓)의 구성(構成)은 여자 여(女)와 날 생(生)으로 짜였다. 여(女)는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모아 신(神)에게 기도(祈禱)하는 사람을 그려낸 상형글자(象形字)다. 모계사회(母系社會) 때 만들어진 글자로 당시(當時)에는 남자(男子)보다는 여자(女子)가 중심(中心)이 되어 제사(祭祀)를 주도(主導)하게 되었는데, 이후 부계사회(父系社會)로 넘어오면서 여자(女子)를 지칭(指稱)하는 대명사(代名詞)로 남게 된다. 생(生)은 만물(萬物)을 잉태(孕胎)한 땅(土)이 초목(屮)을 낳는 모양(模樣)을 그려낸다. 따라서 성(姓)의 전체적(全體的)인 의미(意味)는 어머니(女)의 혈통(血統)을 받아 태어난(生) 계통(系統)을 말한다. 따라서 성 성(姓)은 의미(意味) 요소(要素)인 여(女)와 소리(音聲) 요소(要素)인 생(生)의 결합(結合)으로 보기도 하고, "어머니(母)로부터 태어났다"는 회의자(會意字)로 보기도 하는데 어떻게 해석(解釋)하든 모두 원시(原始) 모계사회(母系社會)의 흔적(痕跡)이 느껴진다. 불분명(不分明)한 아버지(父)보다 난 것이 확실(確實)한 어머니(母)를 중심(中心)으로 씨족사회(氏族社會)가 형성(形成)된 것은 어쩜 당연(當然)한 귀결(歸結)로 보인다. 원시(原始) 모계사회(母系社會)에서 성(姓)은 오직 여성(女性)의 권리(權利)에 귀속(歸屬)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중국(中國)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姓氏)에는 모두 '여(女)'가 들어 있다. 신농(神農)의 어머니(母)는 강수(姜水)에, 황제(黄帝)의 어머니(母)는 희수(姬水)에, 순(舜)임금의 어머니(母)는 요허(姚虛)에 살아서 강(姜), 희(姬), 요(姚)씨 성(姓)이 생(牲)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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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릴 이(理)자는 구슬 옥(玊(玉)과 마을 리(里)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을 다스리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옥구슬이 연상(聯想)된다. 리(里)는 밭 전(田)과 흙 토(土)가 합(合)쳐져서 ‘마을’을 나타낸다고 한다. 리(里)의 금문(金文)은 선풍기 모양(模樣)과 비슷하다. 리(里)는 마을, 고향, 이웃, 인근, 리(里; 행정구역 단위), 리(里; 거리 단위), 이미, 벌써, 헤아리다, 안쪽, 내면 등의 뜻이 있다. 한자로는 묻을 매(埋), 들 야(野), 아이 동(童), 속 리(裡), 속 리(裏), 삵 리(狸), 속될 리(俚), 다스릴 리, 가게 전(厘) 등이 있다. 리(理)는 다스리다, 사리(事理), 이치(理致), 도리(道理), 매개(每個), 나뭇결, 학문(學問), 깨닫다, 깁다, 수선(修繕)하다, 의뢰(依賴)하다 등의 의미(意味)가 있다. 이치(理致), 이론(理論), 사리(事理), 생성지리(生生之理)이다. 이(理)자는 '옥(玉)을 다듬다'는 뜻을 위해 고안(考案)된 글자이니 '구슬 옥'(玉→王)이 의미요소(意味要素)로 쓰였고, 마을 리(里)는 발음요소(發音要素)이기에 뜻과는 무관(無關)하다. '다스리다(理)', '이치'(理), '방법'(理) 등으로 확대(擴大) 사용(使用)됐다. 윤리(倫理)는 '인간의 도리[倫]와 그 원리(原理)'가 속뜻이다. 도리와 실익(實益)이 합치되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옛말에 이르길, '군자(君子)는 도리(道理)에 맞아도 나라에 실익(實益)이 없는 일은 말하지 않으며, 할 수는 있어도 실익이 없는 일은 아예 하지 않는다'(有理而無益於治者, 君子弗言; 有能而無益於事者, 君子不爲 - '尹文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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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암을 유(由)자는 투구(頭盔)의 모습(模襲)을 본떠 만든 글자다. 나중에 가차(假借)되어 '말미암을'이란 뜻을 가지면서, 원래(原來)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게 모(冃)자를 추가(追加)하여 투구(頭盔) 자가 되었다. 이유(理由)는 '말미암은(由) 이치(理)'이다. 모양(模樣)이 비슷한 글자로 갑옷 갑(甲)자가 있다. 갑옷 갑(甲)자는 거북 껍질의 모습(模襲)을 본떠 만든 글자로서, 거북 껍질(龜甲)로 만든 갑옷(甲)을 의미(意味)한다. 말미암을 유(由)는 간단(簡單)한 자형(字形)임에도 그 유래(由來)가 분분(紛紛)하다. 머리에 쓰는 투구 冑(주)의 약자(略字)로 보는 설(說)과 나무에 열린 열매가 꼭지로 ‘말미암아’ 매달려 있는 모양(模樣)이라는 설(說), 그리고 열매의 씨앗(田)에서 싹(丨)이 돋아나는 모양(模樣)에서 ‘움’을 뜻하게 되었다는 설(說) 등이다. 기름 유(油)를 고려(考慮) 할 때 꼭지로 ‘말미암아’ 열매(實)가 매달린 모양(模樣)이라는 설(說)이 설득력(說得力)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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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서울남대문시장(首尔南大門市場)에서 ‘김사장(金社長)’라고 부르면 10명 중 다섯 명이 머리를 돌린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돌을 던지면 맞는 사람이 김 씨다.‘ ’김 씨가 너무 흔해 빠져서 머저리 김 씨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얘기들은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행어(流行語)다.

실제로 한국정부(韓國政府)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278가지 성이 있는데, 그중 김, 이, 최, 박 씨 성이 대략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김 씨가 전체 인구의 21.9%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과 해외동포사회(海外同胞社會)도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럼 우리 민족(民族)은 왜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엄청 많을까? 그 이유(理由)를 아래와 같은 역사유래(歷史由來)에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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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우리 민족의 김 씨 조상은 김알지(金閼智)인데, 그는 신라 제4대 석탈해(昔脫解) 왕대에 금궤에서 탄생하였던 고로 성을 김이라 하였으며 그의 7손인 미추(味鄒)가 제13대왕으로 등극하여 제52대 효공왕(孝恭王; 제53,54,55대왕은 박씨이고 제56대 왕은 김씨)에 이르기까지 줄곧 김 씨가 신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는 신라(新羅)가 모두 56대왕에 이르는 역사에서 무려 41대를 김 씨가 통치하였으므로 김 씨 가문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그 후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들어 왕 씨가 통치(統治)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신라문화(新羅文化)가 주축(主軸)이였다. 그 당시 조정(朝廷)과 재야(在野)에 유명인물중 김 씨가 많았다. 예하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金富軾),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 김일연(金一然) 등 경주 김 씨들이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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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 이 씨가 500여년을 통치하였으나 조정을 비롯해 안동 김씨(安東金氏), 경주 김 씨(慶州金氏), 선산 김 씨(善山金氏) 등 김 씨네 일가가 정치적으로 세도를 부렸고 양반신분(兩班身分)을 가진 분들도 굉장히 많았다. 그리하여 조선후기(16~17세기)에 들어 족보바람이 일자 돈 많은 가문에서 김 씨 가문의 양반족보(兩班族譜)를 사서 허위로 족보를 만들었다. 더욱이 본래 성(姓)이 없었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백성들이 조선시대 말기에 성을 갖는 바람이 불었는데, 그때 김 씨 성을 갖기를 원하는 자가 굉장히 많았다. 그 일례로서 김좌진 장군(金佐鎭將軍) 댁의 100여 명이나 되는 노비들이 전부 안동 김 씨 성을 가짐으로 하여 양반가문(兩班家門)으로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본래 조선시대에 양반이 10%로밖에 안 되였었는데 일제시대와 광복 후 양반가문출신(兩班家門出身)이라고 자처하는 수자가 90%를 넘었다. 물론 그 중에는 김 씨가 차지하는 비례가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성이 있고 또 본(本籍)이라는 것이 있는데, 본이란 조상이 태어난 구체적인 곳의 이름을 뜻한다. 예를 들어 ‘밀양 박 씨(密陽朴氏)’ ‘경주 최 씨(慶州崔氏)’라고 할 때 ‘밀양(密陽)’과 ‘경주(慶州)’는 그 가문의 조상이 태어난 곳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본을 살펴보면 그 절대다수가 남한이다. 이것은 통일신라문화(統一新羅文化)의 영향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통일신라(統一新羅)의 영토는 대동강(大同江) 이남(以南)이었고 고려와 조선시대는 역시 통일신라문화(統一新羅文化)가 주축(主軸)이였고, 물론 성 씨 문화도 신라의 영향(影響)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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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이리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 말기에 90%나 되는 백성들이 갑자기 성을 갖게 되자 기존에 있었던 양반(경상도가 위주이고 전라도 경기도 강원도 등지가 본적이였음)가문의 성과 본적을 따르게 되어 우리 민족의 대다수의 본적이 남한(南韓)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김 씨 성 중에 ‘김해(金海)’ ‘경주(慶州)’ ‘전주(全州)’ ‘안동(安東)’ ‘선산(善山)’을 비롯한 본적(本籍)이 거의 다 남한이며 그 가운데서도 경상도(慶尙道)가 차지하는 비례(比例)가 가장 많다. 제공: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 씨(金氏) 성(姓) 많은 이유(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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