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허’와 ‘실’에 대하여虛實說>
<‘허’와 ‘실’에 대하여虛實說>
도(道)를 배우려는 것은 허(虛)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도를 얻었다고 자임하는 것은 실(實)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허’하면 선(善)을 받아들이고, ‘실’하면 자신의 원칙이나 견해를 굳게 견지한다. ‘허’하지 않으면 선택하는 것이 정밀하지 않고, ‘실’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관을 유지하는 것이 견고하지 않다. ‘허’하면서 ‘실’하고 ‘실’하면서 ‘허’하며, 참된 ‘허’는 참된 ‘실’이요 참된 ‘실’은 참된 ‘허’이니, 이는 오직 참된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으며, 참된 사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다.
참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물론 ‘허’와 ‘실’은 있지만, 참된 사람의 ‘허’․‘실’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허’한 듯 하면서 그 속은 진정 ‘허’하지 않은 경우가 있고, ‘허’하지 않은 듯 하면서 그 속은 사실 매우 ‘허’한 경우가 있다. ‘허’로 시작해서 ‘실’로 끝나는 경우가 있고, ‘실’로 시작해서 ‘허’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사람들이 모두 지극히 ‘허’하다고 믿는데, 군자라는 사람이 홀로 ‘허’하다고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 사람이 ‘허’를 겁내는 병통에 빠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모두 ‘실’하다고 믿는데, 군자라는 사람이 홀로 ‘실’하다고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 사람이 굳이 실체를 손에 넣어야 믿는 증세에 빠진 것이다. 참과 거짓이 다르고 ‘허’와 ‘실’의 쓰임이 다르니, 허실(虛實)의 단서를 이루 다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 본다.
‘허’로 시작해서 ‘실’로 끝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는 마치 다음의 예와 같은 경우이다. 사람이 큰 바다 속에 빠져 있어, 그가 바라는 것이라고는 오직 구원 한 가지일 뿐이다. 사공이 그를 가련히 여겨 지혜의 눈과 막힘없는 재주로 단번에 구원해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 사람의 경사와 다행이 비록 깊다 해도 혼백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끝내 감히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날이 쌓이고 달이 지나도 배 위에서는 오직 사공의 말만 듣는다. 이 어찌 ‘허’하지 않은가!
해안에 도착하고 나서 옷을 여며 입고 먼저 올라서서 발로 실제 땅을 디디면 절대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는, 설령 사공이 그를 속여서 “여기로 가면 또 큰 바다가 있으니 다시 배로 올라와야 하오. 당신은 나와 함께 다른 해안으로 가야 계속 길을 갈 수 있소”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머리를 흔들고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곧장 앞으로 가서 더 이상 사공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 어찌 ‘실’하지 않은가! ‘허’로 시작해서 ‘실’로 끝난다는 것은 위와 같은 경우이다. 아! 천고(千古)의 현인․성인, 참된 부처․신선 등은 대개 이랬었다.
‘실’로 시작해서 ‘허’로 끝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장횡거(張橫渠)는 일찍이 관중(關中)의 위대한 스승이 되었으니, ‘실’로 선각자의 막중한 임무를 떠맡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이정(二程)선생이 《역경》을 논한 것을 듣자, 고비[1]를 영원히 철거하고 끝내 더 이상 앉지 않았다.[2] 그리고 협산화상(夾山和尙)은 일찍이 단(壇)에 올라 설법을 했으니, ‘실’로 법사(法師)의 임무를 떠맡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도오(道吾)가 박장대소하는 것을 보자, 결국 대중을 흩어 보내고 와서 따로 선자(船子)의 설법을 찾았다. 이상 두 사람의 경우에는 비록 처음에 ‘실’한 잘못을 면할 수는 없었지만 ‘허’로 끝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니, 아마도 역사상 보기 드문 크나큰 역량을 지닌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이 도를 터득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나는 믿지 못하겠다.
사람들이 모두 ‘실’(實)이라고 여기는데 군자라는 사람이 홀로 ‘실’(實)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자기 자신으로서는 사실 아직 감히 스스로의 견해를 믿지 못하는데, 다만 남의 견해를 믿는 것에 기반하여 자기의 생각을 믿을 뿐인 것을 말한다. 공자가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學而時習] 매우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자기는 사실 아직 배우고 때때로 익혀서 기쁜 적이 없었는데, 다만 기뻐하는 것이 쉽다는 이유로, 자기는 그렇게 기뻐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무턱대고 인정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은 사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는 것을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논어》에서 ‘어느 지역에서 그 사람이 덕망이 있다는 말이 들려오면, 그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머물러 있게 한다’[在邦必聞, 則居之不疑]라고 했다. 여기서 의심하지 않는 것은 그의 명성이 그 지역에서 들려오기 때문이다. 만약 명성이 들려오지 않는다면,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렇다면 그 사람이 어찌 ‘실’을 얻은 사람이겠는가? 이는 우스운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지극히 ‘허’(虛)하다고 여기는데 군자라는 사람이 홀로 ‘허’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일찍이 하루라도 남과 선(善)을 행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그가 순(舜)임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과연 정말로 순임금처럼 자기의 아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를 수 있을지는 모르는 것이다. 우(禹)임금이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을 한 것처럼 일찍이 하루라도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가 우임금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과연 정말로 우임금처럼 천하를 위하여 일하면서 돌아다니던 중에 자기 집 앞을 지나가게 되어도 문앞을 지나치고 들어가지 않으면서 자식 걱정을 뒤로 미룰 수 있을지는 모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허’(虛)로 미덕을 받아들여서 실행함으로써 결국 습관이 되고 버릇이 되어 ‘깊은 연못 앞에 선 듯, 살얼음을 밟고 가듯, 전전긍긍 근신하며 실천하는 중이라고[3] 무모하게 인정하는 것에 불과할 뿐, 그는 사실 겁이 많고 나약하여 스스로를 챙기지도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리오!
그러므로 ‘허’가 무엇이고 ‘실’이 무엇인지 그 단서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 ‘허’와 ‘실’을 단언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참된 ‘허’와 참된 ‘실’을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人]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4]고 말한 것이다. 이 말에서 ‘인’(人)은 ‘중인’(衆人) 즉 ‘사람들’이다. ‘중인’(衆人)이 알아주지 않으므로 군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중인’(衆人)이 알아준다면 나 역시 ‘중인’(衆人)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군자가 될 수 있겠는가?
‘중인’(衆人)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며 화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군자가 알아주지 않는다면 어찌 화를 내지 않겠는가? 군자가 알아주지 않는 것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 있을까? 세상에 군자는 적고 ‘중인’(衆人)은 많으며, 따라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은 많다.
온 세상에 이 도리를 알았던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오직 안회 한 사람만이 그것을 알았다. 그 말 중에서 ‘세상을 피하여 살아서 남에게 알려지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5]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을 피하여 살아서 남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비록 ‘허’와 ‘실’의 설이 있다 한들, 누가 듣겠는가!(권3)
[1] 고비(皐比)는 고명한 학자나 용맹한 장군이 앉았던 호피를 깐 자리이다.
[2] 당시 장횡거는 역경에 대한 강의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이정(二程)의 주역 강의를 듣고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 가서 그를 스승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자신의 강의를 중단했다고 한다. 《송원학안》(宋元學案) <횡거학안>(橫渠學案) 참조.
[3] 《시경》 <소아․소민>(小雅․小旻),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冰” 참조.
[4] 《논어》 <학이>(學而),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참조.
[5] 《중용》 11장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能之.” 참조.
卷三 雜述 虛實說
學道貴虛,任道貴實。虛以受善,實焉固執。不虛則所擇不精,不實則所執不固。虛而實,實而虛,真虛真實,真實真虛。此唯真人能有之,非真人則不能有也。蓋真人亦自有虛實,但不可以語於真人之虛實矣。故有似虛而其中真不虛者,有似不虛而其中乃至虛者。有始虛而終實,始實而終虛者。又有眾人皆信以為至虛,而君子獨不謂之虛,此其人犯虛怯之病。有眾人皆信以為實,而君子獨不謂之實,此其人犯色取之癥。真偽不同,虛實異用,虛實之端,可勝言哉!且試言之。
何謂始虛而終實?此加人沒在大海之中,所望一救援耳。舵師憐之,以智慧眼,用無礙才,一舉而援之,可謂幸矣。然其人慶幸雖深,魂魄尚未完也。閉目噤口,終不敢出一語,經月累日,唯舵師是聽,抑何虛也!及到彼岸,攝衣先登,腳履實地,方無一死矣。縱舵師復詒之曰:「此去尚有大海,須還上船,與爾俱載別岸,乃可行也。」吾知其人,搖頭擺手,徑往直前,終不復舵師之是聽矣,抑又何實乎!所謂始虛而終實行者如此。籲!千古賢聖,真佛真仙,大抵若此矣。
何謂始實而終虛?如張橫渠已為關中夫子矣,非不實任先覺之重也,然一聞二程論《易》,而臯比永撤,遂不復坐。夾山和尚已登壇說法矣,非不實受法師之任也,然一見道吾拍手大笑,遂散眾而來,別求船子說法。此二等者,雖不免始實之差,而能獲終虛之益,蓋千古大有力量人,若不得道,吾不信也。
何謂眾人皆以為實,而君子獨不謂之實?彼其於己,實未敢自信也,特因信人而後信己耳。此其於學,實未嘗時習之而說也,特以易說之故,遂冒認以為能說茲心耳。是故人皆悅之,則自以為是。是其自是也,是於人之皆說也。在邦必聞,則居之不疑,是其不疑也,以其聞之於邦家也。設使不聞,則雖欲不疑,不可得矣。此其人寧有實得者耶?是可笑也。
何謂眾人皆以為至虛,而君子獨不謂之虛?彼其未嘗一日不與人為善也,是以人皆謂之舜也,然不知其能舍己從人否也。未嘗一日不拜昌言也,是以人皆謂之禹也,然不知其能過門不入,呱呱弗子否也。蓋其始也,不過以虛受為美德而為之,其終也,習慣成僻,亦冒認以為戰戰兢兢,臨深履薄,而安知其為怯弱而不能自起者哉!
然則虛實之端,未易言也。蓋虛實之難言也,以真虛真實之難知也。故曰:「人不知而不溫。」夫人,眾人也。眾人不知,故可謂之君子。若眾人而知,則吾亦眾人而已,何足以為君子。眾人不知,故可直任之而不慍。若君子而不知之,則又如之何而不慍也?是則大可懼也,雖欲勿慍,得乎?世間君子少而眾人多,則知我者少,不知我者多√有舉世而無一知者,而唯顏子一人獨知之,所謂「遁世不見知而不梅」是也。夫唯遁世而不見知也,則雖有虛實之說,其誰聽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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