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수호지와 관련서적 수호지 이야기 관련작품 수호후전水滸後傳

一字師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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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와 관련서적 수호지 이야기 관련작품 수호후전水滸後傳

 

 

관련작품 수호후전水滸後傳

중국의 구어체로 쓴 장회소설(章回小說). 840. 명말청초때 사람 진침(陳沈)의 작품.

 

[수호전水滸傳]에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혼강룡(混江龍) 이준(李俊)의 후일담으로 이준등이 조정의 부패에 통탄하고, 해외로 나가, (현제의 태국)국의 왕이 되어 선정을 배푼다는 이야기이다.

 

작자 진침은 시인으로서도 이름을 떨쳤는데, 고염무(顧炎武)와 함께 시인의 모임을 만들었으며 청조를 섬기지 않고 명나라의 유신으로 끝을 맺었다고 한다. 이책도 정성공(鄭成公)이 대만을 근거지로 하여 청조에 저항했던 사건을 반영하여 한()족 압박에 대한 반발을 담고 있다. 작자는 고송유민(古宋遺民)이라는 이름으로 본명을 숨기고 있었으나, 청나라 말의 학자인 유월(兪越)에 의해 진침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결수호전結水滸傳

협의 소설이 대량으로 생산된 청대에는 수호전과 견줄 수 있는 탕구지도 출현했다. 이 책은 결수호전이라고도 부른다.

 

내용은 무예가 고강한 진희진 부녀가 양산박 108명의 호한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말끔하게 소탕해 버린다는 것이다.

작자 유만춘은 통치자를 수호한다는 입장에 서서 송강 등의 인물을 불풍불의한 도적으로 묘사하여, 그의 농민봉기에 대한 노골적이고도 극단적인 적대감을 표출했다.

 

그러나 양산박 영웅들의 이야기는 이미 대중들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터라 이 책을 통해 수호전이 대중에 미친 영향을 없애 버리고자 한 그의 시도는 시종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취옹담록

남송의 나화가 쓴 취옹담록醉翁談錄에는 송나라의 박도, 간봉 만담책의 상연목록으로서 <청면수>,<화화상>,<무행자>,<이종길李從吉>,<서가낙초徐家落草>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을 씨줄로, 선화유사에 나오는 조개·송강 설화를 날줄로 하여, 여기에 그 때의 원곡으로 공연한 수호극도 도입, '관핍민반'의 대의명분을 임충에게 체현시켜 초기 <수호전>이 성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실린 수호 이야기의 대부분은 비록 설화 예술인의 테제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 수호전의 원시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수호이야기에 대한 가장 빠른 화본이다.

 

송강36인찬

송대 말엽과 원대 초엽의 화가 공개가 쓴 송대36인찬宋江三十六人贊에 처음으로 그 36명의 성명과 별명이 기록되었다. 공개는 수호의 인물을 모조리 부랑배나 도적으로 그려놓았는데 그것은 봉건 지배 계급의 견해이지 민간에서 송강봉기군을 보는 견해는 아니었다.

 

공개의 송강36인찬 서문에서 송강의 이야기가 이미 민간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과 봉건 사대부도 수호 이야기의 창작에 끼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화유사

정식으로는 대송(大宋) 선화유사라 하며, 송말원초(宋末元初)의 작품이다. 원형이정(元亨利貞)4부로 나누어져 있다. 내용은 역대 제왕의 황음(荒淫)을 지탄하고, 송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이민족의 포로가 된 것을 통탄하며, 반항영웅(反抗英雄)을 동정한 민족주의적인 사실주의 작품이다.

 

뒷부분에 송강(宋江) 및 양산박(梁山泊)의 도적단 등, 수호지(水滸誌)의 원형(原型)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작자가 그 원본을 초록(抄錄)하여 삽입했거나 문장을 손질하여 삽입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체는 강사(講史)에 속하므로 순수한 백화(白話:口語文)가 아니다. 신편오대사평화(新編五代史平話)와 함께 송대문학사상 강사로서 귀중한 문헌이다

 

후수호전

낙선재 필사본. 12. 1819세기.

 

원전은 後水滸傳으로 수호전 속서의 하나로 명말 청초 靑蓮室主人이 지은 영웅소설이다.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후수호전은 다른 수호전 속서에 비해 작품성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중국에서조차 거의 잊혀졌고 원본도 전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이는 중국에서조차 보기 힘든 [후수호전]의 완역본이다. 여러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다른낙선재본 번역소설과 함께 낙선재 문고에 남아있는 번역소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원전 자체가 중국에서도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는 점과 영조 38(1762)에 이루어진 완산이씨 [중국소설회모본]에 그 소설명이 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원전은 현재 大連圖書館에 유일하게 한 부 소장되어 있다

 

북송연의北宋演義

55. 낙선재 필사본.

1819세기. 嘉靖 연간에 熊大木이 지은 北宋志傳의 번역본. 송 태조 976(開寶 8)에서 시작하여 송 1022(진종 원년)까지의 역사 고사를 기술하고 있다.

 

소설의 전반 10회는 주로 호연찬의 복수와 녹림의 의적들이 서로 싸우는 이야기이고, 40회는 양가장 영웅들의 충군애국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수호지의 실제기록 수호지 이야기

 

실제기록

수호지는 완전한 허구가 아닌 선화유사(1119-1125)의 송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사서에는 송사宋史. 삼조북맹휘편三朝北盟彙編. 심조강요. 동도사략 등에 간단한 기록이 남아있다.

 

송사宋史에는, 송나라 휘종의 선화연간에, 송강 등 36명의 적도賊徒가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한때 큰 혼란을 빚었으나, 나중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선화 32, 회남淮南의 적도 송강 등이 화양군을 범하다. 토장討將을 보내 토벌케 하다. 또 경동京東 강북江北을 범하고 초해楚海의 주계州界로 침범한 것을 지주 知州 장숙야張叔夜에게 명하여 투항시키다. (徽宗本記)

 

- 송강, 경동을 침범하다. 이 천자께 상서하여 가로되, "송강 등 36인이 제위齊魏에 횡행하여, 관군 수만이 이를 감히 당하지 못하니 그 재능이 반드시 뛰어난 바 있다고 하겠나이다. 지금 다시 청계靑溪에 도적이 일어나니, 송강에게 허락하여 방랍을 치게 함으로써 스스로 속죄케 함이 좋을 듯 아뢰나이다" 하였다. 천자 가로되, "몽이 밖에 있어도 나를 잊지 않았으니 과연 충신이로군"했따. 곧 명하여 동평부東平府의 지사가 되게 했으나 취임하기 전에 죽다. (侯蒙列專)

 

- 송강, 하삭河朔에서 일어나 계속 열 고을十郡을 침략하다. 관군 감히 도둑의 예봉銳鋒을 막지 못하다. 이 때 숙야 첩자를 보내어 도둑들의 방향을 탐지케 하니, 도둑들은 곧 해변으로 나가 선박 10여척을 뺏아 노획물을 싣고 달아나려 하다. 여기서 결사대 천명을 모아 이를 공략케 하여 부장副將을 사로잡으매 송강이 투항하다.

 

원나라 초기의 주밀周密이란 사람이 편찬한 [계신잡지癸辛雜識]에 송나라 유민遺民 공성여가 기록한 [송강삼십육인찬(宋江三十六人贊)]이 실려 있는데 이를 좇아 보면 남송 때에 이미 송강의 이야기는 민중사이에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張叔夜列專)

 

송강들의 이 반란은 우리나라의 동학란 비슷한 농민본기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이야기 자체는 오락적인 야담 비슷하다. 그러나 송강들의 반란사건이 있자 이내 이것이 영웅설화로 발전햐여 민중들에게 파고들어가 공감을 일으켰는데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패한 권력, 관료정치에 대한 민중들의 증오와 원한이 송강을 일종의 민중영웅으로 만들어 갔다고 보겠다.

 

방랍의 난

방랍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배경을 대충 살펴보면, 왕안석의 신법이 실패로 돌아가고 송나라의 사회·경제적 위기가 심화되어 가고 있을 때 제 8대 휘종(徽宗이 즉위하게 되었다. 휘종은 서화에는 뛰어난 천재적 소질을 보였으나 정치에는 열등생이었다.

 

휘종 [徽宗, 1082~1135]

노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서화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그의 작품은 중학교 미술책에도 나오더라)

 

정치에는 젬병이였으며 그 밑의 간신들과 탐관오리의 폭정으로 나라는 개판이 되었고, 수호지를 통해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휘종의 총신인 채경(蔡京)이과 환관의 우두머리 동관(童貫)은 다 함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더욱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갖가지 수석(壽石)과 기석(奇石)에 열을 올려 멀리 강남 지방까지 관리를 파견하여 기화 요초와 괴석들을 수집하고 궁전이나 화원을 장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많은 관리들은 눈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궁중 어용품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누런 빛깔의 종이를 붙여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다.관리들은 기석을 운반할 때 담장이 방해가 되면 집까지 허물어 버리는 등 그들의 약탈과 횡포는 극에 달했다.

 

목주 청계현 일대에도 기석의 수집 등으로 관리들의 약탈이 극심했던 지방이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농가의 머슴 출신인 방랍이라는 인물을 수령으로 추대하여 반란의 깃발을 들었다. 그들은 112010월의 어느날 밤 칠원(漆園)에 집결하여 반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방랍은 백성들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우리들 백성들은 1년 내내 피땀을 흘려 겨우 약간의 곡식과 피륙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뿐인데 황제의 관리들은 그것을 제멋대로 빼앗아 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있으면 우리들에게 까닭없이 매질을 하고 백성 죽이기를 밥먹듯이 하면서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는 형편이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방랍의 이같은 호소에 백성들이 환호하자 방랍은 말을 이었다.

그뿐 아니라 또 있소이다. 놈들은 제 벳대지를 채울 뿐 아니라 그 나머지는 우리들의 적인 요나라와 서하에 세공으로 바치고 있소.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적을 기르고 있는 것이오. 그리하여 그 적이 공격해 오면 우리들을 방패막이로 써먹고 있소. 그러다가 싸움에 패하면 우리들에게 책임을 돌려 우리들을 꾸짖고 있소. 이런 일은 용서할 수 있단 말씀이오!

흥분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방랍은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우리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무기를 가지고 일어나면 10일이 안되어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들 것이오. 모두가 힘을 합쳐 강남의 각 군을 공략함락 시킵시다. 10년만 고생하면 분명 천하는 우리들의 수중으로 들어올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놈들에게 죽음을 당할 뿐이오. 어떻소 잘 들 생각해 보시오

 

방랍의 이야기가 끝나자 청중들 가운데서 일제히 환호와 절규가 일어났다.

옳소! 자아 무엇이든 명령만 내려주시오!

방랍이 반란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일어나자 과연 10일이 채 못되어 10여만 명의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반란의 무리들은 대오를 정비한 후 북쪽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들은 동남지방의 요충지 항주를 공략·함락시켰다. 이러한 사태에 전후하여 절강·안휘·강서 등의 여러 주현에서도 방랍에 호응하여 반란에 가담함으로써 그들의 병력은 1백만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되자 방랍은 자신의 정권을 수립하고 스스로 성공(聖公)이라 일컫고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정하였다.

 

방랍의 반란 보고에 접한 송나라 조정에서는 즉시 요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편성한 동관 휘하의 15만 대군을 출동시켜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악명 높은 기석의 수집을 중지시키는 등 백성들의 회유책을 강구하였다. 반란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전투경험이 없을 뿐아니라 조직력도 없었기 때문에 패전을 거듭한 끝에 다음해 4월에는 반란군의 수령 방랍이 체포되어 8월에는 개봉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방랍 반란군의 공격 목표는 주로 부호나 악덕 관리에게 집중되어 한때 현재의 절강성 대부분 지역에 미치는 652현을 공략·함락 시킴으로써 중국 동남지방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동관 등은 방납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무려 3백만명에 달하는 반란군의 백성들을 살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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