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 수호전의 여자들 그리고 독부 반금련 재평가
고대 문인들은 유가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여자들에 대하여는 일관되게 경시, 천시 내지는 적대시하였다. 공자님의 말씀중에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 힘들다"는 말의 영향은 천년이래로 문인들이 여인을 보는 관점이 되었다. 시내암은 비록 봉건사회에서는 비교적 깨었던 문인이었지만, 그도 당시의 "정주이학"의 정통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고, 봉건예교가 최고도로 발전했던 시대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당시의 문인들은 어려서부터 봉건전통교육을 방아서, 여인들에 대하여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가 <<수호전>>에 쓴 여인들은 많지도 않았다. 이름이 나오는 사람은 십여명에 불과했다. 이 십여명중에서 개별적인 예외를 빼고는 거의 전부 "비참하게 죽었다" 이로써 볼 때도 당시 사람들의 여자에 대하여 경시, 천시, 내지 적대시한 정도를 알 수 있다.
유일하게 '비참하게 죽지 않은' 예외는 이사사(李師師)이다. 이사사는 비록 팔자는 거세어 기녀로 살았지만, 송나라의 유명한 예술황제 송휘종의 어용기녀였으므로, 아마도 황제에 대한 존중에서인지, 이사사의 일생에 대하여는 비참하게 그리지 않았다. 그녀는 또한 양산박의 송강등을 회유할 때도 큰 힘을 보탠다. 송강이 죽은 후에도 이사사가 말을 잘 해주어서 송강등이 죽은 후에 영예를 받게 된다.
다른 이름있는 여자들은 고대수(顧大嫂)가 칼에 맞아죽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 칼아래 죽임을 당한다. 그것도 여러가지 형태로 비참하게 죽는다.
양산박에 투신하여 108장수에 들어간 사람중에 3명의 여자가 있다. 모대충(母大蟲) 고대수(顧大嫂), 일장청(一丈靑) 호삼랑(扈三娘), 모야차(母夜叉) 손이랑(孫二娘). 하나는 호랑이, 하나는 독사, 하나는 야차이다. 이 세 사람의 별호에서도 사람들이 싫어하게 만들었다. 세 여자는 모두 사람을 죽이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자들이다. 그 중에 특히 손이랑이 그렇다. 흑점을 열어서 산 사람의 껍질을 벗긴다. 도살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나중에 모두 전장터에서 비참하게 죽고, 시체도 완전하게 남기지 못한다.
무대랑의 처인 반금련(潘金蓮)은 하늘의 선녀에 비길만큼 아름답지만, 마음은 사갈과 같고, 서문경과 놀아난 후에 남편을 죽인다. 나중에 무송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송강의 소첩인 염파석(閻婆惜)은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다. 바깥에 정부를 둘 뿐아니라, 송강을 고소하겠다고 위협까지 한다. 경국 송강이 부득이 그녀를 죽여버린다.
양웅의 처인 반교운(潘巧雲)은 먼저 양웅의 결의형제인 석수를 꼬드기려고 하나 잘 되지 않자, 다시 석수를 무고하여 형제간에 반목이 일어나게 하고, 나중에 중과 간통하다가 붙잡혀서 양웅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반금련의 이웃인 왕파(王婆)는 전형적인 못된 여인이다. 재물을 탐하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문경과 반금련을 이어준다. 나중에 들통이 나서 '기목로'에 의하여 능지처참의 형을 당한다.
청풍채의 지채인 유고의 마누라는 연순등 녹림일당에 붙잡힌 후에 송강은 그녀가 유고의 처인 것을 알고 연순에게 권해서 풀어주게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은혜를 원수로 갚아 송강등을 산적으로 보고하게 된다. 나중에 연순에 의하여 허리를 잘려 죽게 된다. 백수영은 현령의 첩이었는데, 현의 대소관리들을 눈에 두지 않을 정도로 방약무인했다. 현령을 핍박하여 현부의 고위관리인 뇌횡을 감옥에 가두게 하고, 뇌횡의 모친을 때리고 욕한다. 뇌횡이 분노하여 그녀의 머리를 때려 바로 비명에 숨지게 한다.
여자들은 전부 시내암의 소설에서는 죽을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하면, 이것은 작자의 기본적인 사상과 연관이 되는 것 같다. 수호전에서 그러기 때문에 여자들은 하나같이 죽을 죄를 지은 것으로만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요즘 수호전 이야기만 계속 늘어놓는 것 같은데, 생각났을 때 왕창 써 버리고 치우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지난번에는 수호전 중에서도 반금련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여섯 편인가 일곱 편인가 쓴 적이 있으니까.
『수호전』에서 양산박이 처음 언급되는 것은 표자두 임충이 창주에서 옥사장과 육겸, 부안을 죽인 후 시진의 집에 숨어 살고 있을 때로, 새 은신처를 찾는 임충에게 시진이 양산박을 소개한다. 자기가 그간 물질적으로 뒷배를 여러 차례 보아 준 사람들이 그곳에 터잡고 있다면서 소개장까지 써 준다. 다시 말해 수호전의 108성 중, 시작을 양산박에서 했던 한지홀률 주귀를 제외하면 최초로 양산박에 가담한 별이 임충이다.
그 당시 양산박의 두목은 왕륜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양산박을 차지하고 앉았지만 원래 선비 출신이라서 자리 뺏길 걱정이 컸다. 그래서 누군가 완력이 절인(絶人)한 호걸이나 머리 회전이 아주 비상한 책사가 양산박에 들어오려 하면 이런저런 핑계나 조건을 붙여서 돌려보내곤 했다. 그러던 중 임충이 찾아오고, 시진의 소개장이라는 막강한 빽을 두르고 들어온 임충에게는 차마 돌아가라 소리를 할 수 없었으며 주위 측근들도 어지간하면 받아들이자는 눈치를 보였다. 이에 왕륜이 내놓은 대책은 정말이지 왕륜다워서, <양산박에 투신한다는 증거(투명장)로 사흘 안에 사람의 목을 가져오라>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 이때 등장하여 임충의 투명장이 될 뻔하지는 않았던 사람이 청면수 양지이다.
어쨌든 임충은 이리하여 양산박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왕륜의 사람됨이 결코 두목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 동계촌의 탁탑대왕 조개와 그 일당들이 양중서로부터 채경에게 가는 진상을 털어먹었다가 ― 위에서 나왔던 양지가 이 일로 인해 완전히 나락의 바닥에 떨어질 지경으로 피해를 본다 ― 들통이 나는 바람에, 출동한 관병들을 죄다 물귀신으로 만들고는 ― 고우영에 의하면 물이 3 물고기가 7 수준의 굉장한 낚시 포인트인데, 그 옛날에 몰살당한 병사들의 갑옷이 아직도 바닥에 그대로 가라앉아 있어 걸핏하면 바늘이 걸려 줄을 끊어먹는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 추격을 피해 양산박으로 몰려오는 사건이 일어난다. 왕륜은 이번에도 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커다란 쟁반에다 금은보화를 가득 담아 내놓고는 "산채가 좁고 물자가 적으니 호걸께서는 이 성의를 받으시고 새로운 곳에 터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운운한다. 말하자면 <이거나 먹고 딴 데 가서 놀아라>이다. 이때 임충이 달려들어 왕륜을 죽이는 단독 쿠데타가 일어나고, 주귀를 포함한 기존의 양산박 멤버들은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여기며 조개 일당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조개를 두목으로 세우기까지 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양산박의 역사가 시작된다.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쫓아낸다>가 모토였던 왕륜 시절과는 정반대로. 조개 이후 양산박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아온다>를 모토로 하여 호걸 영입에 열을 올린다. 좀 쓸만한 인재가 어쩌다가 양산박과 인연을 맺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 앉히고,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도 그 재간이 양산박에서 쓰일 만하다 싶으면 또한 온갖 수단을 써서 양산박으로 데려온다. 당사자가 아무리 싫다고 자기 의사를 밝히는 정도가 아니라 뻗대고 앉아 울고불고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으니, 그 당사자가 양산박으로 도망쳐 오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엄청난 사건을 터트려 버리기 때문이다.
지다성 오용이 줄기차게 사용하는 이 수법에 걸려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에 몇몇 편에서 소개했는데, 사건의 끔찍함과 그로 인해 걸려든 사람들이 처한 상황의 암담함과는 대조적으로, 일단 사건이 저질러진 후에는 오용과 몇몇 실행범들이 나타나 그 앞에 꿇어 엎드려서 <너무나도 형장을 모시고 싶어 저지른 일입니다> 어쩌고저쩌고 한두 마디 아첨하며 빌면 그들은 분노를 싹 거두고 흔쾌히 양산박으로 들어가곤 한다.
이 불가사의한 설득력에 대해 연변판 수호전에서는 <별들이 만나는 것은 처음부터 하늘에서 정한 인연이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독자에게 설득력 없는 설득으로나마 이해를 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고우영 수호전에서도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이때 송나라에서는 허무주의 비슷한 것이 도처에서 판을 치고 있었던지라> 등으로, 정황상 설득이 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원전대로 설득을 시켜 끌고 나가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이 수법에 걸렸으되 그나마 즉석에서 화를 풀지 않고, <실행범을 죽여 원수를 갚아 달라>고 요구하는 등으로 뒤끝을 남긴 사건은, 미염공 주동이 돌보던 창주지부의 외아들을 이규가 살해함으로써 주동을 양산박으로 영입한 사건이 『수호전』 전체에서 유일하다. 하기야 호걸의 비위에 뭔가 틀리는 일이 일어나면 여자들도 반금련이나 염파석이 그랬던 것처럼 파리 목숨으로 죽어나가는 것이 『수호전』의 세계관이지만, 그래도 그 여자들은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뭔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다.
반금련은 간통에 더하여 무대 독살의 실행범이고, 염파석은 송강에게 개겼다. 그외 죽임을 당하는 이런저런 여자들도, 간통이라든가 남편을 능가하는 토색질과 치맛바람이라든가 노인을 그 아들의 눈앞에서 폭행하는 등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최소한의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주동에게 일어난 사건에서 그 네 살 먹은 아이는 정말로 아무 죄도 짓지 않았으니, 확실히 실행범이 흑선풍 이규쯤 되었으니까 그런 어린것을 무참하게 죽일 수 있었지 다른 호걸(?)이 갔더라면 차마 저지르지 못했을 일이다.
중국문학사에서『삼국연의』『서유기』『수호전』『홍루몽』을 4대 고전명작으로 꼽는다. 그 중『수호전』은 기타 작품보다 인물묘사가 가장 뛰어나다. 108명의 영웅호걸들의 인물묘사도 가관이지만 여자들의 인물묘사는 가히 세계문학사에서 꼽힐 만큼 훌륭하다.
그런데『수호전』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대개 남자를 망치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손이낭(孫二娘)처럼 인육을 만두속에 넣어 파는 ‘살인마’의 모습이다.
반금련은 제 손으로 무대랑을 독살하였고, 반교운은 애매하게 석수를 모함하였다. 염파석은 송강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안달하였고, 백수영은 뇌형을 희롱하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그의 어머니까지 구타하였다. 가씨는 관청에 출두하여 남편 노준의를 무고하고 증인으로 나서 자칫하면 노준의는 죽을 뻔 했다.
반금련, 반교운, 염파석, 백수영, 가씨 등의 공통점은 미녀들이라는 것이다. 이녀들을 통해 한 가지 결론이 나온다. 미녀는 독부라는 것. 또 하나 더 매도한다면 미녀는 음란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반금련의 자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른 봄 버들잎 같은 눈썹에는 언제나 운우의 정을 그리워하는 듯 한과 시름을 품고 있고, 춘삼월 복사꽃 같은 얼굴에는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었다. 가는 허리는 걸을 때마다 하늘거렸고, 도톰한 입은 향기를 뿜어 벌과 나비가 미친 듯이 날아든다.”
아마『수호전』을 읽어본 독자라면 전부 반금련이란 인물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나쁜 년이라고 속으로 돌을 던졌을 것이다. 『수호전』에 등장한 반금련이 얼마나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던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반금련과 서문경을 두 주인공으로 한 소설『금병매』가 시중에 나왔다.
『금병매』에 등장한 반금련은 음탕하기로 천하의 가장 나쁜 년으로 묘사되었고 서문경은 방탕하기로 천하의 가장 나쁜 사내로 그려졌다. 그런데 1961년 모택동 주석은 부성급 이상 간부들에게 반드시『금병매』를 읽어보라고 하명했다고 한다. 반금련의 사내를 홀리는 재주와 서문경의 여자를 잘 다루는 재주 및 문란한 ‘연애스토리’가 재미있어 그런 명을 내렸을까? 아니다.『금병매』는 송나라 정치, 경제, 문화를 잘 반영했는데, 송나라는 중국역사에서 자본주의맹아가 싹틀 만큼 호황이었으며 그때 이미 지폐가 등장할 만큼 세계적으로 앞자리를 달리고 있었다.
유감스런 것은 한국에서 출간된『금병매』버전들은 전부 아주 저급적인 삼류소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국문학사는『금병매』를 명나라 4대 명작 중 하나로 꼽는다. 그만큼 가치가 풍부하다는 얘기다. 그건 그렇고『수호전』과『금병매』가 묘사한 반금련은 과연 역사상 가장 음란한 ‘화냥년’이고 남편을 독살할 정도로 독부였을까?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반금련,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여 년 동안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반금련의 모습은 진짜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반금련의 화냥년, 독부의 모습은 황당한 가짜뉴스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이다. 반금련은 청하현에서 매우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재산이 많을 뿐만 아니라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재산이 많은 가문은 하인을 고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요즘도 괜찮게 사는 집들이 가정부를 두는 것과 같다. 재산의 다소에 따라 하인을 많이 고용하나, 적게 고용하나는 문제일 뿐이다.
반금련 집안에 고용된 하인 중에 무대랑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청년이 된 무대랑은 신장이 7척(180센티)이 되는 멋진 사내였다. 머리도 좋았다. 반금련의 아버지 눈에 비친 무대랑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하여 반금련의 부친은 싹수가 보이는 무대랑한테 투자해 공부를 시켰고 무예도 가리켰다. 무대랑은 과연 주인의 은혜를 잊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문무를 결합한 훌륭한 사내로 거듭났다.
당시 출세의 길은 진사(進士)에 합격하는 것이다. 무대랑은 진사에 합격하여 양곡현의 현령으로 부임했다. 1만호 이상 현의 장을 현령이라 부르고 1만 호 이하의 장을 현장이라 불렀으니 무대랑은 꽤나 큰 현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무대랑은 맡은 바 사업도 잘했을 뿐만 아니라 남을 잘 배려하기로 유명했으며 아내 반금련을 몹시 사랑하는 애처가였다. 엄부(嚴父)의 슬하에서 자란 반금련도 남편 못지않게 여자로서 갖출 소양을 무람없이 갖췄고 남편의 내조를 잘하는 훌륭한 여인이었다. 무대랑과 반금련의 부부는 청하현과 양곡현에서 모두 부러워하는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하현에서 어릴 적 친했던 짜개바지 친구 황당(黃塘)이란 자가 무대랑을 찾아왔다. 황씨는 집에 불이나 다 타 버려 무대랑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대랑은 별 말 없이 황씨를 잘 접대했다. 그런데 타버린 집에 대해선 가타부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황씨가 무대랑을 찾아온 목적은 한 끼의 산해진미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버린 집의 복구였다. 속이 재가 되도록 까맣게 타 버린 황씨는 무대랑의 침묵에 화가 치밀었다. 돌아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무대랑이 어떻게 나쁘다는 둥 그 마누라는 음란하기로 시동생인 무송과 여차여차하게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둥, 반금련이 무대랑을 잡아먹을 상이라는 둥 등등의 가짜소문을 지어내어 나발을 불었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해서 청하현에서 양곡현까지 왕복하려면 달포가 족히 걸렸다. 그 사이 도중에 숱한 사람을 만나 가짜뉴스를 터뜨렸다.
황당이 황당한 가짜뉴스를 퍼뜨린 것이다.
황씨는 제딴에는 분풀이를 실컷 했다고 생각하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게 웬 일인가? 잿더미로 타버린 집터에 멀쩡한 새집이 들어선 것 아닌가! 이때서야 황씨는 아차 싶었다. 무대랑에 대한 악담을 퍼부을 대로 퍼부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쏟은 물은 주워 담지 못하는 법이다. 황당이 황당하게 퍼부은 가짜 악담은 달포 사이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듯 청하현과 양곡현을 뒤덮었다. 얼마 후 무대랑은 죽었다. 억울한 누명을 벗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명나라 초기 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세상에 등장했다.『삼국지』를 지은 나관중,『서유기』의 저자인 오승은,『수호전』을 펴낸 시내암은 소설 스토리를 일부는 사서에 의존하고 일부는 장터에서 이야기로 밥벌이 하는 이야기꾼들의 민간전설로 내려온 것을 각색하여 소설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소설 반 이상의 스토리는 실제 역사사실이 아닌 문학적인 허구일 수밖에 없다. 시내암은 황씨가 퍼뜨렸던 가짜뉴스가 수백 년 동안 전해오면서 가미된 것을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수호전』을 짓다보니 반금련을 완전히 화냥년에다 천하의 독부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중탠 교수는『삼국지를 말하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역사인물은 역사 이미지, 문학 이미지, 민간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삼국연의』를 예로 든다면 조조는 역사 이미지에 가깝고, 제갈량은 완전히 문학 이미지이고, 관우는 민간 이미지다. 반금련은 어떤 이미지에 속할까? 한심한 문학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문학 이미지는 재미를 추구하다 보니 소설가는 멀쩡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 수 있고 병신을 영웅으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역사적인 무대랑은 아주 훌륭한 사나이였는데 시내암의 붓 끝에 묘사된 무대랑은 난장이, 시장터에서 호떡이나 팔아 생계를 겨우 이어가는 무능한 사나이, 무능하다 못해 아내 하나 건사 못하는 병신으로 둔갑되었던 것이다.
반금련의 말이 나온 김에 서문경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과거 알았던 서문경은 한심한 건달, 카사노바를 뺨 칠 바람둥이, 눈에 거슬리는 자를 무차별 폭행하고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악마 등등의 모습인데 역사적인 서문경은 그런 또라이가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잘 나가는 사나이였다. 그는 청하현 도읍에서 가장 큰 약국을 운영하여 아주 부유하게 살아가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0대 초반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서문경은 20대 초반에 가업을 이어받았는데 수완이 뛰어나 가업을 나날이 번창시켰다. 당시 부자는 모두 삼처사첩(三妻四妾)을 거느리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기방출입을 밥 먹듯 하는 세상이었다. 돈 많은 서문경도 예외일 수 없었다. 처첩을 두고도 처첩의 시중을 드는 하녀를 건드리고 기방출입도 하루건너였다. 어디에 예쁜 여자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그녀가 처녀이든 타인의 아내이든 관계치 않고 집적거렸다.
요즘 같으면 서문경과 같은 이런 사내가 크게 문제가 되지만 그 시대에 있어서 별로 시빗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서문경은 가게 운영 노하우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도 매우 훌륭했다. 그의 주변에는 건달 양아치부터 관료에 이르기까지 사회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늘 붙어 있었다. 정치수완도 뛰어나 청하현 副獄長 자리까지 올랐다. 당시 옥장은 서문경의 세력에 밀려 명의만 있었을 뿐 실권은 서문경이 갖고 있었다. 그 때는 사법체계가 완비되어 있지 않아 그때 서문경의 권력은 오늘의 법원, 검찰, 경찰이 갖고 있는 권한을 전부 한 손에 움켜쥐고 있으면서 청하현의 천하는 서문경의 손바닥에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잘 나가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서문경은 흑도(黑道), 백도(白道)에 모두 바싹한 사내였다.
필자는 진보당의 여러 거물들의 성 사건이 터지자 30~40년 전에 읽었던『금병매』라는 책을 다시 들었다. 수십 년 전 그때는 몰랐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 있다. 서문경은 헤아릴 수 없이 그 수많은 여자를 건드리면서 빠뜨림 없이 전부 금전적으로 보상해주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두 번째 부인 이병아가 도망가자 그녀의 하녀 수춘이를 잡아다 이병아의 행방을 추구하던 중 성욕이 발작하여 미성년 수춘이를 건드린다. 그러고 나서 서문경은 은전을 두둑이 수춘이 손에 쥐어준다. 이것으로 먹고 살라고. 본래 서문경의 권세를 말하자면 수춘에게 보상해주지 않아도 별 시빗거리가 아니고 수춘이도 풀려나오기만 하면 ‘만세’일 뿐 돈은 전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서문경은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남녀 간의 그 일을 가벼이 넘기지 않고 모든 여자에게 철저하게 보상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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