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무협소설 천룡팔부1 김용

一字師 2023.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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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천룡팔부1 김용

 

                                                                 图片来源 | 天龙八部中的段誉,历史上真的存在吗?

1. 웃음이 불러 들인 재앙

검광을 시퍼렇게 번뜩이고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쟁쟁 하다. 허공을 가르는 칼날은 먹장구름을 꿰뚫는 한 줄기 번갯불인가 아니면 밤하늘을 찬란히 물들이는 유성인가.

두 자루의 청강검은 어지럽게 춤추며 뱀의 혀처럼 날렵하게 상대방을 노린다. 검을 내뻗던 소년은 중도에서 검의 방향을 홱 틀더니 중년 무사의 목젖을 향해 벼락같이 찔러 넣는다. 중년 무사가 재빨리 검을 세워 막자 '쨍!'하는 소리가 일며 불똥이 튄다. 두 자루의 검이 부르르 진동하는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은 다시 일곱번을 서로 공격하고 막는다.

두 사람의 동작은 신출귀몰했고, 칼빛은 자디잘게 부서지는 물결처럼 현란했다.

연무청(鍊武廳) 안에는 수십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중앙의 비무대에서 검을 겨루는 두 사람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무대의 동편에는 사순가량의 긴 수염을 기른 도사(道士)와 서른 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여도사(女道士)가 의자에 앉아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도사가 얼굴 가득히 초조한 빛을 담고 있는 반면, 긴 수염의 도사는 수염을 한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며 자못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그들 뒤에는 각기 이십여 명의 청춘 남녀들이 도포(道袍)를 걸치고 검을 찬 채 줄을 지어 서있었다. 아마도 두 남녀 도사의 제자들인 모양이었다.

연무청 서쪽으로는 십여 개의 좌석이 놓여 있는데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앉아 비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중앙의 비무대에서 검을 겨루는 두 무사의 솜씨는 갈수록 매서워지나 쉽게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 순식간에 칠십여초를 다시 교환했다.갑자기 중년 무사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검을 휘두르며 소년을 향해 내찔렀다. 그러나 너무 무리한 힘을 주었음인지 발을 헛디디고 쓰러질 듯 기우뚱 거렸다.

[하 하 하!]

관전하던 손님들 중에서 푸른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중년 무사의 기우뚱하는 자태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자신이 실례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손을 들어 입을 막는다. 소년 무사는 상대방이 비틀거리는 빈틈을 놓칠세라 커다란 기합소리와 함께 검을 들어 중년 무사의 오른쪽 허리를 찔러 갔다.

이때다. 돌연 중년 무사의 몸이 왼발을 축으로 하여 핑그르 한 바퀴 회전하는가 했는데 어느샌가 소년의 오른편으로 바짝 접근해 있지 않은가.

[받아랏!]

중년 무사는 힘차게 외치며 수중의 장검으로 소년무사의 검을 든 오른쪽 팔을 내리 쳤다.

[아악!]

비명이 터졌다. 동시에 소년의 오른팔이 싹둑 잘라지며 땅 위에 떨어지고 만다. 소년은 왼손으로 잘라진 오른편 어깨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붉은 피가 하염없이 쏟아져 온 몸을 물들였다.

여도사의 뒤에 서있던 몇 명의 여제자가 우르르 달려나가 소년의 어깨에 가루약을 뿌리고 헝겊으로 싸매는 등 응급처치를 했다.

중년 무사는 승리하자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사방을 한차례 휘둘러 보고는 긴 수염 도사의 뒤에 가서 섰다.

긴수염 도사는 만면에 기쁜 빛을 띠고 옆의 여도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제자들이 세 판을 모두 이겼으니 내가 제자를 이끌고 검호궁(劍湖宮)에 머물러야겠구려.]

여도사는 사랑하는 제자의 팔이 잘려서 가슴이 쓰라리던 차에 그 말을 듣자 더욱 화가 나서 차갑게 이죽거렸다.

[사형은 그동안 제자들을 무섭게 키우셨군요. 이번 판에는 점잖게 이길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기어코 내 제자를 팔 병신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어요.]

수염을 기른 도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정색을 한다.

[나의 견해는 다르오. 내 제자는 조금전 당신 제자의 목을 날릴 수도 있었지만 자비스런 마음에 팔 하나만 잘랐던 거요.]

여도사는 그 말을 듣자 크게 분한듯 숨을 쌔근거리고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며 어쩔 줄 모른다. 이 여도사는 누군가? 쌍청(雙淸)이라는 도호를 가지고 있는 무량검파(無量劍派)의 서종장문인(西宗掌門人)이다.긴수염의 도사 역시 무량검파의 인물로 동종장문인(東宗掌門人)이었다.무량검파는 당(唐)나라 시대의 무량산에서 창건한 문파였는데 송(宋)나라 인종(仁宗)무렵 동서로 나뉘어졌다. 그 후 두 파는 오 년마다 한 번씩 검을 겨루어 이기는 편이 무량산에 자리잡고 있는 검호궁에 거주하기로 한 것이었다. 서쪽의 관람석에 있는 십여 명의 인물들은 시합의 공증인으로 초대된 사람들이고 운남지방에 사는 유명인사들이었다. 다만 한 사람 푸른옷을 입은 청년만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청년의 용모는 눈에 띌 정도로 준수했다. 조금 전 중년 무사가 일부러 비틀거려 상대를 유인할때 웃음을 터뜨린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 청년은 전남(전南)지방에서 찻잎을 거래하는 늙은무사 마오덕(馬五德)을 따라 왔었다.마오덕은 상당한 부자로 손님접대하기를 즐겼다. 맹상군(孟嘗君)을 숭배하는 마오덕은 낙방한 선비와 떠도는 한량들과 잘 어울렸으며 그의 집에는 언제나 수십명의 식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이때 긴 수염을 기른 동종장문인 좌자목(左子穆)은 푸른 옷을 입은 청년에게로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마오덕은 그 청년을 소개할 때 성(姓)이 단(段)씨라고만 했을 뿐이다.단씨 성은 운남대리국(雲南大理國)에서는 가장 흔해 빠졌기때문에 좌자목은 소개받을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마오덕의 무예가 지극히 평범했으므로 마오덕의 제자쯤으로 생각되는 그청년이 무슨 뾰족한 무예를 지녔으랴 싶었기에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하는 흔한 인사말도 하지 안고 다만 고개만 끄덕였던 터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좌자목의 제자가 일부러 헛점을 보여 소년을 유인할 때 비웃음에 찬 실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좌자목 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불쾌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청년에게 다가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보게, 단가 성을 가진 젊은이, 자네는 조금 전 나의 제자가 질박보(跌撲步)를 써서 유인할 때 비웃음을 터뜨렸지? 아마도 자네는 몹시 고명한 검법을 지닌 모양이군 그래. 예로부터 강한 장수 밑에 약한 병졸 없다고 했는데 마오덕 같이 훌륭한 무사의 제자이니만큼 분명 놀라운 무예를 지니고 있으리라 생가되네. 내 제자와 한번 겨루어 보게.]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 마오덕은 얼굴을 붉혔다.

[이 젊은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오. 나의 보잘것없는 재간으로 어찌 남의 스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청년은 다만 나의 식객일 뿐이며, 내가 무량산에 온다는 말을 듣고 경치를 구경하겠다고 따라왔을 뿐있니다.]

좌자목은 차갑게 말했다.

[마형의 제자가 아니라면 더욱 잘 된 일이오, 그에게 어떻게 대하건 마형에게 실례를 저지르는 일은 아닐테니 말이오. 감히 이 곳 검호궁에 와서 무량검파를 비웃었으니 단단히 혼을 내주어야 하겠소이다.]

이어 단씨 성을 가진 청년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물었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이며, 누구의 제자인가?]

청년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나의 이름은 외자로 예(譽)이며 지금껏 무예를 익힌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사부님도 없지요.]

좌자목은 청년의 말투가 건방지기 짝이 없고 무량검파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언성을 높여 물었다.

[자네는 왜 웃었지? 분명 무량검파를 비웃는 것이겠지?]

청년 단예(段譽)는 여전히 부채를 흔들며 시큰둥하니 말했다.

[좀 전에 사람이 쓰러지려고 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웃었을 뿐이지 비웃은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다 큰 어른이 침대가 아닌 맨땅에 누우려고 하는데 우습지 않단 말인갸요?]

좌자목은 크게 화가 났다. 생각 같아서는 청년의 따귀라도 후려치고 싶었지만 여러사람이 지켜보는 앞이라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광걸(廣傑), 조금 전 이 자가 너를 비웃었으니 한번 겨루어 보거라. 얼마나 뛰어난 무예를 지녔기에 저처럼 건방진지 구경이나 하자꾸나.]

중년 무사 광걸은 예 하는 대답 소리와 함께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이어 검을 챙! 하고 뽑으며 단예에게 말했다.

[친구, 한수 가르쳐 주게.]

단예는 싱긋 웃기만 할 뿐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칼춤을 추고 싶은가보군요. 그렇다면 혼자서 추시지요. 저는 앉아서 구경이나 하겠습니다.]

광걸은 그 말에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저 사람은 당신의 사부이지 내 사부가 아니요. 나는 겨루기도 싫고 상처를 입기도 싫으며 피를 흘리고 싶지도 않을 뿐 아니라 죽기는 더욱 싫소.]

광걸은 훌쩍 몸을 날려 단예의 앞으로 다가갔다. 검 끝으로 단예의 가슴팍을 겨누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감히 무량검파를 업신여기는 거냐?]

단예는 칼날이 옷깃에 닿아 조금만 내밀면 심장을 꿰뚫을 것 같은데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귀파는 무량검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무량(無量)의 뜻이나 알고 있나요? 불경에 보면 무량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 네가지라고 합니다.사무량(四無量)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지요.즐거움을 같이 누리는 것을 자라고 하며,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을 비라고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도록 하는 것을 희, 그리하여 모든 중생이 은혜나 원수라는 인연을 벗어버리고 평등하게 사귀는 것을 사라고 합니다.무량수불(無量壽佛)은 곧 아미타불(阿彌陀佛)이지요. 아미타불...아미타불....]

단예가 불교에 교리를 설명하고 아미타불을 외자 광걸은 크게 분노했다. 급히 장검을 거두면서 왼손바닥으로 단예의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 소리가 나며 단예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단예의 뺨에 붉은 손자국이 나타났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단예가 광걸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무슨 고강한 무예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다. 그는 정말로 무예를 모르면서 그토록 대담하게 지껄여댄 것이었다. 광걸 역시 단예가 자신의 따귀에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 얻어맞자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이제 보니 무공의 무자도 모르면서 까불었구나!]

하는 말과 함께 단예의 멱살을 잡아 멀리 집어던졌다. 단예는 멀리 날아가더니 쿵! 소리와 함께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마오덕이 금히 달려가 일으키는데 단예의 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 나온다.

[이제 보니 자네는 무공을 전혀 모르고 있군 그래.그러면서 이곳엔 무엇 하러 왔는가?]

마오덕의 말에 단예는 엉거주춤 일어서며 대답했다.

[저는 무량산의 풍경이 멋있다는 말을 익히 들어 왔던 터라 구경을 하러 왔어요. 저 사람들의 검술을 구경하러 온 게 아니예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칼싸움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요. 칼싸움을 구경할 바에야 차라리 원숭이들이 싸우는 것을 보는 편이 훨씬 재미 있지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단예는 마오덕을 뿌리치고 연무청 밖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 때 광걸이 달려나와 단예의 앞을 가로막고 소리를 질렀다.

[검술 시합이 원숭이 싸움질 보다 못하다고? 이 곳에서 나가고 싶다면 사부님께 여덟번 절하고 꿇어앉아서 지금 까지 네가 내뱉은 말이 모두 방귀뀌는 소리였다고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흥...흥...]

단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광걸에게 물었다.

[방귀를 뀐다고? 당신 입은 밥도 먹고 방귀도 뀌나요?]

그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킥킥 웃는 소리가 났다. 광걸은 수치감에 얼굴이 시뻘개지며 칼을 힘차게 뽑았다.

[죽고 싶다면 시원하게 죽여 주마.]

서슬이 시퍼런 장검이 번쩍 하더니 단예의 목덜미를 향하여 강하게 내리쳤다.

[악!]

단예의 비명이 터지고 붉은 피가 허공에 확 튀었다. 마오덕은 끔직한 광경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은 마오덕의 얼굴에 뜨끈뜨끈하고 비릿한 액체가 뿌려졌다.

마오덕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내가 공연히 앞길이 창창한 젊은 이를 데려와서 죽게 만들었구나!)

짧은 순간 마오덕의 뇌리에 단예의 준수하고 영기 발랄하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그의 죽음을 저지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자책감이 일었다. 이 때 마오덕의 귓가에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흥! 이제 보니 무량파는 사람의 목슴을 가볍게 여기는 강도들의 집단이었구나!]

마오덕은 의아하여 눈을 번쩍 뜨고 살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죽은 줄만 알았던 단예는 우뚝 선 채 광걸에게 부채로 삿대질을 하며 힐책하는데,그의 가슴엔 붉은 핏방울이 어지럽게 묻어 있었지만 목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그리고 한 마리의 거대한 구렁이가 목이잘린채 단예의 발앞에 떨어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구렁이가 때마침 날아와 당신의 칼을 막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나의 목이 떨어질 뻔했지 않소?]

단예는 크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광걸은 뜻 밖에도 어디선가 구렁이가 날아와 자기의 칼을 받자 어리둥절하여 사방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구렁이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수가 없었다.

[어디 얼마나 많은 구렁이가 네생명을 지켜 주는지 두고보자!]

광걸은 단예의 앞으로 달려 들며 검을 힘주어 잡았다. 바로 그때다. 광걸은 목덜미에 차갑고 미끈미끈한 감촉을 느꼈다. 멈칫하는 사이에 목덜미에서 무언가 스르르 움직이더니 팔을 타고 미끄러지며 검을 잡은 손 위로 올라갔다. 눈길이 그 물체에 닿는 순간 광걸은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뱀, 뱀이다!]

그의 손등에 손가락 굵기의 붉은 적련사(赤練蛇)가 스르륵 기어가고 있었다. 그가 질겁을 하여 손을 뿌리치자 뱀과 장검이 동시에 땅으로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뱀은 다음 순간 또아리를 틀더니 몸을 쭉 펴며 위로 솟구쳐올라 쉭소리와 함께 광걸의 소매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광걸은 비명을 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팔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호 호 호....춤 잘 춘다.]

갑자기 대들보 위에서 간드러진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모두 놀라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니 푸른옷을 입은 소녀가 대들보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열 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그 얼굴이 몹시 고왔다. 그녀의 두 손에는 십여 마리의 독사가 들려진 채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갖가지 색깔의 독사가 몸을 꿈틀거리자 그 모습은 흡사 그녀가 살아 있는 꽃을 들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언제 대들보 위로 올라갔는지 본 사람은 없었다.

소녀는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두 다리를 내려뜨리고 흔들어댔다.

이 때 광걸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연무청에 메아리쳤다. 모두 바라보니 그는 옷을 마구 찟어대며 연신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광걸의 상의가 찢어지고 구리빛 몸체가 드러났다. 적련사는 광걸의 등판에 찰싹 달라붙어 혀를 날름거리며 금새라도 물어뜯을 기세였다. 광걸은 등 뒤로 손을 뻗어 뱀을 떨구려고 했으나 허탕만 친다.

[광걸, 꼼짝 말고 있어라!]

좌자목이 외치며 번쩍 몸을 날린다. 칼빛이 번뜩이고 사라진 순간 뱀은 두 토막이 나서 땅 위로 떨어졌다. 똑똑히 볼 사이도 없는 빠른 수법이다. 뱀을 동강냈지만 검은 광걸의 등에 티끌만한 상처도 내지 않았다.

[절묘한 검법이다!]

여기 저기서 갈채가 터져나왔다. 대들보에 걸터앉은 소녀가 부르짖었다.

[이봐요, 수염 긴 늙은이! 왜 내 뱀을 죽여요! 가만 두지 않을 테예요!]

좌자목은 검을 든 채 대들보 위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뉘 집 딸이기에 여기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냐?]

말을 하며 속으로 생각을 굴린다.

(이 계집애가 대들보 위에 올라가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 계집의 무공은 상당하겠구나. 도대채 누구의 제자일까?)

이때 소녀는 꽃신을 신은 두 다리를 더욱 빠르게 흔들며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우리 아빠는 말씀하셨어요. 아무에게도 그분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요. 이름을 듣는 사람이 놀라서 까무러치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고 하셨거든요. 그러니 저는 뉘 집딸인지 말을 할 수 없네요.]

좌자목은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빨리 내려오너라. 너 앉으라고 만든 대들보가 아니야.]

이때 단예가 대들보 앞으로 밑으로 달려가며 손을 내저었다.

[안돼요. 떨어지면 다쳐요. 그러니 사닥다리를 갖다 놓고 내려오라고 해요!]

이 말이 떨어지자 몇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는 단예를 내려다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무척 잘생겼군요. 그런데 어쩌면 그리도 멍청하지요? 사닥다리 없이 올라온 사람은 내려갈 때도 사닥다리가 필요 없어요.]

쌍청의 여제자들은 단예를 바라보니 보기 힘들게 잘 생셔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절로 가슴이 울렁거려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소녀가 좌자목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어서 내 뱀을 살려내요.]

[어서 내려오너라.]

좌자목이 동문서답하자 소녀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아무래도 혼이 덜 난 모양이군!]

그리고는 왼쪽 허리에 차고 있던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광걸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러면서 냅다 외쳤다.

[꽉꽉 물어라.]

광걸은 주먹한한 잿빛 물체가 덮쳐들자 급히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헌데 물체는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더니 쉭! 하는 소리를 내면서 광걸에게 날아들었다. 그제서야 모두들 그것이 조그만 담비[貂]라는 것을 알았다. 담비는 광걸의 등에 올라앉더니 얼굴이며 가슴, 허벅지 등으로 분주히 오락가락했다. 광걸은 두 손을 휘둘러 담비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담비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광걸은 허탕만 쳤고 시간이 흐를수록 두 팔을 미친듯 휘두르며 꽥꽥 비명을 질렀다. 단예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하 하, 정말 재미있구나! 무량산 구경보다 낫구나!]

담비의 크기는 주먹만 했지만 두 발톱은 몹시 날카로왔다. 순식간에 광걸의 온몸은 담비가 할퀸 자국으로 붉으죽죽하게 되었다. 좌자목이 달려나가 장검을 휘둘러 담비를 죽이려고 했다. 장검이 번뜩였으나 담비의 동작은 더욱 빠르다. 좌자목은 광걸의 몸을 돌면서 신속하게 검을 놀렸고,담비는 광걸의 등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등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검을 피하는데, 어떤 때는 얼굴이며 발등에까지 옮겨다니며 상처자국을 남겼다. 좌자목은 더욱 빨리 검을 놀려 베고 찌르고 거두곤했다.광걸의 몸이 칼빛에 가려 흐릿하게 보일 정도가 됐지만,여전히 담비를 어쩌지는 못했다. 광걸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꼼짝달싹을 못한다. 한번 잘못 움직였다가 칼에 맞으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검은 사종 광걸의 몸에서 머리칼 한 올의 차이를 두고 미끄러질듯 스쳐간다. 좌자목의 신묘한 기술에 모든 사람은 넋을 잃었다. 소녀가 차갑게 코웃음쳤다.

[늙은이, 당신 솜씨가 제법이군요. 그렇다면 나에게도 좋은 방법이 있어요.]

그녀는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담비가 광걸의 다리를 타고 주르르 미끄러지더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좌자목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담비의 행방을 찾았다. 갑자기 광걸이 두손으로 허벅지를 마구 더듬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담비는 그의 바짓가랑이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단예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하 하 하.... 이렇게 재미있는 광경은 평생 동안 다시 구경하기 힘들겠구나!]

광걸은 황망이 바지를 벗어 던졌다. 털이 숭숭한 두 다리가 나타났다. 소녀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호 호 호, 남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 어디 홀딱 벗고 창피한 맛을 보세요.]

이어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담비는 정말 신통할 정도로 말을 잘 들었다. 소녀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사타구니를 가린 속옷으로 파고들었다. 두손으로 국부를 감싸쥐고 껑충껑충 뛰어 연무청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막 문을 나서려는데 밖에서 뛰어들어오는 사람이 있어서 정면으로 부딫히고 말았다. 광걸은 잠시 비틀거렸고 상대방은 뒤로 벌렁 쓰러졌다.

[앗! 용(容) 사숙님!]

광걸이 쓰러진 상대방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쓰러진 그 사람이 꼼짝도 않고있는지라 광걸은 급히 쓰러진 도사를 부축해세웠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담비가 그의 국부를 날카롭게 할퀴고 말았다.

[아악!]

광걸은 크게 비명을 내지르며 두 손으로 국부를 움켜쥐고 쭈그려 앉았다.그 서슬에 부축해 일으켰던 도사는 다시 쿵 소리를 내며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대들보의 소녀는 깔깔 웃었다.

[호 호 호, 이만하면 톡톡히 버릇을 고쳐주었으렷다?]

휘파람을 한번 불자 담비는 광걸의 속옷에서 빠져나와 벽을 타고 소녀에게로 가서 안긴다.

[착한 담비야, 좋은 일을 했으니 먹이를 주마.]

소녀는 담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른쪽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 속에서 살아있는 독사을 몇 마리 꺼내 담비에게 내밀었다.

담비는 앞발로 뱀을 잡더니 산 채로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원래 소녀가 가지고 다니던 뱀들은 담비의 먹이였던 모양이었다. 담비는 몇 마리의 뱀들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고는 소녀의 왼쪽 허리에 있는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얼굴을 내밀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린다. 붉은 눈알을 굴리며 사방을 살펴보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단예는 대들보 위를 바라보며 흥미있어 했다. 소녀는 단예를 내려다보며 말을 건넸다.

[이봐요, 당신은 왜 바보처럼 두들겨 맞기만 하죠?]

단예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무공을 쓸 줄 몰라요.]

소녀는 품 속에서 씨앗을 꺼내 까먹으며 다리를 흔들거렸다.

그녀는 갑자기 씨앗 하나를 단예의 이마 위로던졌다.

[이봐요, 이리 올라와요. 내가 맛있는 걸 줄께요.]

단예는 고개를 저었다.

[사닥 다리가 없는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소?]

소녀는 허리에서 비취색 띠를 풀어서 단예 앞으로 늘어 뜨렸다.

[띠를 잡아요. 내가 끌어올려줄께.]

단예는 웃었다.

[내 몸은 무거운데 어떻게 당신 힘으로 끌어올린단 말이오?]

[어디 시험해 봐요. 떨어져 죽지는 않을 거예요.]

단예는 눈 앞에서 흔들거리는 띠를 잡았다. 소녀는 말했다.

[꼭 잡아요.]

그리고 가볍게 들어올리자 단예의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소녀는 두 손을 번갈아 움직여 순식간에 단예를 대들보 위까지 끌어올렸다. 단예는 올라앉자마자 담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의 담비는 정말 영리 하더군요.어쩌면 그렇게 말을 잘 듣지요?]

소녀는 얼른 담비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다. 단예는 윤기가 도는 털과 빨간 눈동자를 보자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다듬어 주어도 괜찮을까요?]

[어루만져 보세요.]

소녀가 허락하자 단예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담비의 등을 쓰다듬었다. 촉감은 따스하고 보드러왔다. 갑자기 담비는 '찍!' 소리를 지르더니 소녀의 허리에 달린 주머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단예는 깜짝 놀라 얼른 손을 움추렸다. 그러자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소녀는 얼른 그의 허리를 받쳐 제자리로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당신은 정말 무공을 모르는군요. 그런데 여긴 뭐하러 왔죠?]

단예는 입을 열어 온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이때 광걸의 부르짖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앗! 용 사숙께서 돌아가셨다!]

단예는 급히 고개를 돌려 광걸을 내려다보았다. 이때 광걸은 쓰러진 도사를 붙잡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품안에 쓰러진 사람은 나이 사십 가량에 염소수염을 코 밑에 기르고 있는 도사였는데 두 눈을 부릅뜨고 얼굴 가득 경악과 분노의 빛을 담은 채 죽어 있었다. 좌자목은 크게 소리쳤다.

[이상하구나! 사제는 무공이 나와 비슷한데 어째서 한 번 부딪히고 죽었을까? 필시 중상을 입고 이곳으로 달려오다가 충돌하는 바람에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좌자목은 시체를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상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좌자목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아무런 상처도 없이 죽을 까닭이 없다.옷을 벗기고 살펴 보아야겠다.)

생각과 함께 시신을 땅 위에 반듯하게 눕히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시체의 웃옷이 벗겨지자 모두 놀라 아 ! 하고 소리쳤다. 그의 가슴에는 시커멓게 글씨가 씌어져 있는게 아닌가!

(신농방(神農幇)은 무량파를 몰살시키고 말겠다.)

이 문구는 살갗에 깊이 새겨져 있었는데 먹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지독한 독물로 그의 가슴에 글씨를 써 놓은 것이 부식되어 살갗 속으로 파고든 것이었다. 좌자목은 장검을 크게 휘두르며 미친 듯 부르짖었다.

[신농방이 무량파를 죽이는지 무량파가 신농방을 죽이는지 어디 두고 보자! 이 원한을 갚지 않고 어찌 사람 구실을 하랴!]

이어 그는 냅다 소리쳤다.

[광걸과 우광호,너희들은 밖에나가 형세를 살펴보도록 해라!]

광걸과 우광호는 급히 연무청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연무청 안은 대뜸 소란스러워졌다. 여러 사람들은 단예와 소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죽은 시체의 주위에 모여서 웅성거렸다. 마오덕은 좌자목에게 물었다.

[신농방은 갈수록 악랄해지는군요. 그런데 무량파는 어쩌다가 신농방과 원한을 맺게 되었습니까?]

좌자목은 이를 부드득 갈며 대답했다.

[작년 가을 신농방의 방주 사공현(史空玄)이 검호궁 뒷산에 약초를 캐러 들어왔습니다. 원래 신농방은 독사와 약초를 채취하여 살아가는 무리들이지요....검호궁 뒷산에는 외부인들은 들어갈 수 없다는 본파의 규칙이 있어서 그들을 막았습니다.그때 싸움이 일어나 양편의 사람이 몇 명 죽었는데 그때부터 신농방과 무량검은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오덕은 급히 물었다.

[검호궁 뒷산에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좌자목은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뒷산에는....본파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더 이상은 묻지 마십시오.]

이 때 밖에 나갔던 광걸과 우광호가 말했다.

[신농방의 무리들은 맞은편 산 위에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몇명은 산 길을 지키고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좌자목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몇 놈이나 되더냐?]

[신농방의 무리들이 모두 동원된 것이 합치면 백여 명은 되는 듯했습니다.]

우관호가 대답하며 손에는 한 통의 서찰을 내밀었다.

[놈들이 사부님께 전하라고 준 편지입니다.]

좌자목이 편지를 바라보니 겉봉에 '좌자목에게 고하노라.'하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는 편지를 받지 않고 말했다.

[광걸, 네가 뜯어 보아라.]

[예.]

광걸은 대답하고 편지를 건네 받아서는 읽기 시작했다.

[무량검장문인 좌자목은 듣거라. 우리신농방은 영취궁(靈鷲宮)의 명을받들어 네놈들을 주멸하고, 뒷산의 무량옥벽(無量玉擘)의 비밀을 조사하려고 한다. 너희들이 죽음을 면하고 싶으면 한 시간 안으로 모두 오른팔을 자르고 나와서 항복해라. 만약 그렇지 않을 때에는 너희들 한 사람도 남김없이 독살(毒殺)될 것이다. 신농방주 사공현이 거룩하신 영취궁의 명을 받들어 이글을 쓴다.]

광걸은 읽기를 마쳤다. 좌자목은 화가 나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때 쌍청 여도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신농방은 이제 보니 무량옥벽의 비밀을 밝히려고 욕심을 내고 있었구나. 그런데 영취궁은 어떤 문파이길레 신농방을 휘하에 두고 있는 것이지?]

이 때 마오덕이 입을 열었다.

[아! 나는 몇년 전 영취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거처는 표묘봉(표묘峯)에 있다고하며 독수리를 문파에 상징으로 삼고있다고 하더군요.영취궁의궁주는 천산동모(天山童모)라고 하는데 신비에 가려진 인물이어서 직접 본 사람이 없다고 했소이다. 또한 표묘봉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도 천하에 없답니다.]

이 때였다. 갑자기 쿵! 하며 광걸이 뒤로 벌렁 쓰러졌다. 우광호는 광걸이 느닷없이 자빠지자 급히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의 몸에 손을 대지 마라. 그는 중독되어 죽었다!]

좌자목이 급히 외쳤다. 우광호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이 때 광걸의 손은 새까맣게 변색되었고 전신이 푸르뎅뎅하게 변해 있었다. 편지에 독이 묻어 있는 것응 만지자 시간이 흘러 죽음에 이른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토록 지독한 독이 있을까 생각하자 몸에 소름이 끼쳤다.이때 단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혼자 중얼 거렸다.

[세상엔 별 일이 다 있구나! 손으로 독을 만졌을 뿐인데 죽는 일이 벌어지다니.......]

소녀는 팔을 뻗쳐 단예의 겨드랑이를 잡고 말했다.

[우리 이곳을 빨리 떠나요. 여기 있다가는 신농방 사람들에게 독살당하게 되요.]

그리고는 대들보에서 아래로 뛰오내렸다. 단예가 놀라 부르짖었을 때 몸은 이미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소녀는 그를 잡고 땅위에 사뿐이 내려섰다.

[우리 밖으로 나가요. 그리고 신농방이 어떻게 무량파를 몰살시키는지 구경해요.]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좌자목이 검을 휘두르며 앞을 막아섰다.

[잠깐! 너희들은 혹시 신농방의 첩자가 아니냐? 누리 무량파에는 들어오기 쉬어도 나가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소녀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쏘아붙였다.

[나는 아니에요!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믿는단 말이냐?]

소녀는 억울하여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예요.당신은 왜 억지를 쓰는 거예요?]

좌자목은 음흉하게 웃었다.

[너희들이 신농방의 첩자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생사를 같이 해야 한다.]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우리가 만약 이곳을 나가려고 한다면 당신은 우리를 죽일 생각 인가요?]

좌자목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구나.]

말과 함께 장검을 몇 번 휘둘러 휙휙 소리를 냈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단예를 바라보고 말했다.

[저 긴수염 늙은이가 우리를 죽이겠대요. 당신은 어쩔 생각이예요?]

단예는 손에 들고 있던 쥘부채를 흔들며 대답했다.

[소저가 하자는 대로 하겠소이다.]

소녀가 방긋 웃고 다시 물었다.

[저 늙은이가 검으로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당신은 무섭지 않나요?]

[우리는 씨앗을 함께 먹은 사이니까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고 화가 닥치면 함께 맞읍시다. 그러니 함께 죽읍시다.]

소녀는 깔깔 웃었다.

[당신은 정말 의리 있는 분이군요. 좋아요. 함께 나가요.]

소녀는 단예의 팔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좌자목은 다시 검을 휘둘러 그녀의 얼굴 앞에서 몇 번 흔들었다.

[걸음을 멈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소녀는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두드리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별안간 잿빛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담비가 좌자목의 오른손위에 올라탔다. 좌자목이 기겁하여 손을 흔들었다. 담비는 찍! 하며 다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쨍그랑!

갑자기 좌자목의 손에있던 장검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오른팔을 축 늘어뜨리고 부르짖었다.

[독이다! 담비의 이빨에 독이 있었구나!]

그는 오른팔을 왼손으로 바짝 움켜잡으며 독기가 퍼지지 못하게 했다. 이미 그의 오른팔은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다. 무량파의 제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몇명은 좌자목을 부축했고 나머지는 모두 검을 뽑아들고 두 사람을 에워쌌다. 쌍청이 앙칼지게 말했다.

[빨리 해독약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난도질을 해서 죽여버리겠다.]

소녀는 겁도 없이 웃었다.

[나에게는 해약이 없어요. 무량산에 많이 나는 통천초(痛天草)를 달여 먹이면 해독이 될 거예요. 하지만 세 시간이 흐르면 이미 늦어서 생명을 구할 수가 없어요. 당신들이 정녕 우리를 막는다면 나는 담비와 서른 마리의 독사를 풀어 놓겠어요. 우리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당신네들도 최소한 절반 이상은 중독되어 죽고 말 거예요. 길을 비켜줄 거예요, 목슴을 걸고 싸울 테에요?]

그러면서 담비를 꺼내들고 쌍청에게 던지려 했다. 쌍청은 싸워봐야 손해라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검을 거두고 길을 터주었다.

소녀는 단예의 팔을 이끌고 당당하게 연무청을 벗어났다.

단예와 소녀는 연무청을 나서서 어느 산비탈에 올랐다. 둘은 잠시 나란히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소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의 담비는 섬전초(閃電貂)라고 하죠. 번개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여 주었죠.]

단예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소녀는 자랑스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섬전초는 독사만 먹어요. 그래서 이빨에 독이 있는데 그 독은 너무도 지독해서 한번 물리면 살아날 수 없어요. 물론 해독약도 없구요. 그 긴 수염 늙은이가 담비에게 한번 물린 순간 즉시 오른팔을 잘라 버렸으면 살았을 텐데....호 호 호....]

단예는 깜짝 놀랐다.

[당신은 통천초를 달여 먹으면 살아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소녀는 웃었다.

[그들을 속인 거예요. 그렇지 않았으면 그들이 우리를 놓아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단예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는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요. 내가 얼른 가서 좌자목에게 알려주고 오겠소.]

소녀는 급히 그의 옷자락을 부여 잡았다.

[바보 같은 양반, 그 말을 하면 우리 두 사람은 살아남지 못해요.]

단예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어떡하지?]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당신은 밸도 없나요. 그렇게 따귀를 얻어맞고 패대기질까지 당했는데도 여전히 그들에게 인정을 베풀려고 하는군요. 내가 없었으면 당신은 이미 광걸인가 뭔가 하는 작자에게 죽었을 거라구요.]

단예는 어색한 표정을지으며 뺨을 한번 어루만지고 말했다.

[그에게 맞은 뺨은 지금은 아프지 않은데 기억해서 무엇 하겠소. 애석하게도 그는 이미 죽고 말았군요. 자께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仁)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고, 부처님께서도 한 사람의 목슴을구하면 칠층의 불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고 했소.]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밝은 달이 동쪽 하늘에 떠 있었다. 달빛을 받은 소녀의 얼굴은 더 아름다와 보였다. 단예는 소녀 옆에 다시 앉으며 물었다.

[그대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소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나의 성은 종(鍾)이도 이름은 외자로 영(靈)이에요.]

[종영....종영이라. 참 좋은 이름이군요.]

단예가 이렇게 말하자 종영은 빙그레 웃었다.

[그까짓 이름이 뭐 좋을 게 있나요? 그런데 당신은 무엇하러 무량산에 와서 두들겨 맞았지요?]

단예는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집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다가 전남 지방에 왔을 때 돈이 떨어지고 말았어요. 듣자 하니 마오덕 나리는 손님에게 매우 잘 대해 준다기에 밥이나 얻어먹을까 하고 그집으로 갔었지요. 그런데 마침 그가 무량산으로 온다고 하기에 산수를 구경할 생각으로 따라왔어요. 그런데 주착없이 웃는 바람에 그같은 봉변을 당했죠.]

[호호, 당신은 정말이지 너무 덜렁거려요.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다가는 오래 못 살아요. 헌데 어째서 집을 뛰쳐나온 거죠?]

단예는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아버님께서 자꾸만 무공을익히라고 다그치시기에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거라오.]

종영은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단예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녀는 매우 호기심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어째서 무학을 배우지 않으려고 했어요? 고생스러워서요?]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생스러운 것쯤이야 겁나지 않소. 다만 아버님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았기에 배우고 싶지 않았지요. 그래서 아버님께서 화를 내시게 되었고, 아버님과 어머님이 다투시게 되었지요.]

종영은 미소했다.

[그대의 어머님은 언제나 당신 편을 들어서 아버님과 싸우시나요?]

단예는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그렇소.]

종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의 어머님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먼 서쪽 하늘로 시선을 던지고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불쑥 물었다.

[당신 아버님의 말씀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했는데 그건 무슨 뜻이죠?]

단예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님께서 초청해 오신 몇 분의 사부님들께 글을 배웠어요. 사서삼경과 시사가부(詩詞歌賦)를 배웠고, 또 한분의 고승으로부터는 불경을 가르침받았어요. 십여 년이나 배운것은 유교의 인의도덕과 불교의 자비였지요. 그런데 갑자기 아버님께서 나보고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무공을 배우라고 하셨단 말이오. 그러니 앞뒤가 안 맞는게 아니고 뭐겠어요. 아버님과 나는 사흘동안 논쟁을 벌였고 결국 아버님께서는 크게 화를 내셨던 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버님은 당신을 때렸겠죠?]

단예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은 날 때리지 않으셨소. 다만 한 손가락을 뻗어 나의 몸을 찔렀지요. 그 순간 나는 온 몸이 뻣뻣해지고 수천 마리의 개미들에게 물어뜯기는 듯한 고통을 받았어요. 그때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참 이상해요. 이때 어머님께서 아버님과 다투셨고 아버님께서는 나의 혈도를 풀어 주셨지요. 그 이튿날 나는 그만 집에서 뛰쳐나오고 말았지요.]

종영은 그의 말을 듣고 뭔가 생각하더니 갑자기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 이제 보니 당신의 아버님께서는 일양지(一陽指)를 익힌 무림의 고수시군요?]

[일양지요? 나를 찌른 수법의 이름이 일양지인가요?]

종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는 언젠가 아버님께 들은 기억이 있어요. 천하엔 신기한 무공도 많지만 손가락을 쓰는 무공에 있어서는 소림사(少林寺)의 금강지(金剛指)와 단씨(段氏)의 일양지가 가장 오묘하다고 하셨어요. 그 두가지 무공에 능통하게 되면 백 보밖에 있는 사람을 기척도 없이 죽일수 있으며 한 치나 되는 두꺼운 철판을 마치 종잇장처럼 뻥뻥 뚫어버린대요. 정말 아깝네요. 당신이 그 무공을 배웠어야 하는 건데....]

 

2. 손오공과 천도복숭아

종영은 일양지라는 무공이 몹시 탐나는 모양이었다. 풀잎을 뜯어 토막토막 자르다가 다시 불쑥 입을 열었다.

[일양지의 무공을 배우기 싫어하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네요. 당신 혹시 나를 속이는거 아녜요?]

단예는 웃었다.

[그대는 일양지를 무서운 무공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당신의 섬전초가 훨씬 무서운 것 같소. 한번만 깨물면 무엇이건 살아남지 못하니.....하지만 사람을 물어 죽이는 건 너무 한 것 같더군요.]

종영은 힝 하고 코웃음을 날렸다.

[섬전초가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걸 뭐하러 갖고 다녀요, 귀찮게시리.]

단예는 언성을 높여 꾸짖었다.

[그대는 나이도 어린데 벌써부터 사람 죽이는데 재미를 붙였으니 큰일이오.]

종영은 냉랭히 말했다.

[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요. 험난한 강호를 다니다 보면 흉악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냥 앉아서 죽여주십시오 하고 목을 길게 늘어뜨려야 할까요?]

그녀는 하늘을 힐끗 쳐다보고 말을 계속했다.

[잠시 기다렸다가 저 검은 구름이 달빛을 가리면 살그머니 여길 빠져나가요. 그러면 신농방 사람들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거예요.]

단예는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말했다.

[아니오. 나는 그들의 방주를 만나 무량검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충고를 해야 되겠소.]

종영은 측은한 눈길로 단예를 잠시 바라보다가 타이르듯 말했다.

[당시은 순진해도 정말 도가 지나치군요. 공연히 화를 자초할 생각 하지 말고 우리 그냥 빠져나가요.]

[안되오. 이 일만은 내가 반드시 나서야겠소. 무서우면 이곳에서 기다려요. 내가 빨리 가서 타이르고 올 테니.]

[이런 바보!]

종영은 화를 버럭 냈다. 단예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종영은 원망스런 눈길로 그의 뒷 모습을 쏘아보다가 할 수 없이 뒤따랐다.

[좋아요. 그대는 말했죠, 복이 오면 함께 누리고 화가 닥치면 함께 맞겠다고요. 당신과 함께 가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너무 고집 세고 제멋대로이며 겁이 없어요.]

두 사람이 산비탈을 꺾어 들자 몸에 누런 옷을 걸친 노인이 재빨리 앞을 막아섰다.

[너희들은 누구냐? 달밤에 팔짱을 끼고 어슬렁거리다니.]

단예는 그 사람이 약초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손에는 한자루의 넓은 청룡도(靑龍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단예라는 사람이요. 귀방의 사공현 방주를 만나러 왔소이다.]

누런 옷의 노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감히 방주님을 찾는 게냐?]

종영이 대답했다.

[우리는 막 무량파에서 도망쳐 나오는 길이에요.방주님께 긴히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그러니 어서 만나게 해주세요.]

노인은 두사람을 몇번이나 훑어보더니 결심한듯 몸을 돌렸다.

[나를 따라오너라.]

세 사람은 순식간에 산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들쑥날쑥 바위가 난립한 곳이 나타났다. 사십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중앙에는 비쩍 마르고 왜소한 늙은이가 높은 바위위에 앉아 있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그 노인은 염소 수염을 여덟 팔(八)자로 길렀고 눈빛이 살모사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단예는 그가 신농방주라고 짐작하고는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맞잡고 절을 했다.

[사공방주님이시지요? 단예가 인사를 드립니다.]

사공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너희들은 왠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단예는 천천히 부채를 부치며 입을 열었다.

[말을 들으니 귀방은 무량파와 원한을 맺고 있다고 하더군요. 옛말에도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어요. 나는 두 방파가 싸우지 말고 화해를 하도록 권하러 왔습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은 국법에도 어긋나며 관부에서 알게 되면 크게 불편한 것 아닙니까? 모쪼록 방주님께서는 무량파와의 원한을 풀도록 하십

시오.]

사공현은 묵묵히 단예의 말을듣는 한편 살기 어린 눈초리로 단예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 하 하, 네 녀석은 누군데 나를 희롱하려 드는 거냐? 누가 너를 보냈지?]

단예는 고개를 저었다.

[내 스스로 찾아왔을 뿐이오.]

사공현은 코웃음을 쳤다.

[신농방은 남이 간섭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아성, 저 녀석을 사로잡아라.]

예 하는 대답 소리와 함께 한 명의 덩치 큰 사내가 걸어나왔다. 그는 순식간에 손을 뻗어 단예의 두 팔을 움켜쥐었다.

종영이 다급해서 부르짖었다.

[사공방주,단 오라버니는 좋은 말로 권했는데, 듣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잡고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사공현은 차갑게 코웃음쳤다.

[아성, 저 계집애도 잡아라.]

[예.]

아성은 단예를 놓고 종영을 향해 달려 들었다. 종영은 살짝 걸음을 옮겨 피하고는 말했다.

[사공방주,나는 당신이 두렵지 않아요. 다만 저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밖에서 사건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좋은 말로 하는 거예요. 자꾸 귀찮게 굴면 좋지 않을걸요.]

[조그만 계집애가 주둥이만 살았구나! 아성,어서 잡지 않고 무얼 하느냐?]

[예.]

아성은 손을 뻗쳐 종영의 어깨를 움켜쥐려고 했다.그러나 종영은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오른손을 칼날처럼 세워 아성의목을 후려쳤다. 아성은 급히 고개를 숙여 피하려 했다. '흥!' 하고 종영은 냉소를 날리며 오른발을 번개처럼 뻗었다.

퍽!

둔탁한 음향이 일었다.아성은 그녀의 발이 호되게 자신의 아래턱을 가격하자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사지를 버둥거리더니 급기야 까무러치고 만다. 사공현은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저 계집애는 한 수 하는 구나!하지만 신농방에서 난동을 부리기엔 아직 어려.]

그는 한손을 쳐들에 신호했다. 사공현의 옆에 있던 키가 큰 늙은이가 휘청거리며 종영에게 걸어갔다. 노인의 키는 유별날 정도로 커서 종영은 그의 가슴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노인이 불쑥 두 손을 내밀어 종영을 낚아채려 했다.열 손가락이 마치 까마귀 발톱같이 길고 검었다.종영은 그 기세가 흉악한 것을 보고 속으로 겁이 더럭 나 부르짖었다.

[사공방주, 빨리 멈추라고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빠에게 일러바칠 거예요!]

사공현은 들은 채도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종영을 노려보기만 했다.

키가 큰 노인은 왼손을 비스듬히 치켜들고 둥글게 원을 그리더니 갑자기 오른손을 불쑥 내밀어 종영의 어깻죽지를 움켜쥐려고 했다. 그 형상은 마치 어린아이가 잠자리를 잡을 때 한손으로는 잠자리 앞에서 원을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슬그머니 잠자리의 꼬리를 잡는 방법과 같아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도저히 피할 수 없게 했다.

[아!]

종영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양팔은 이미 노인에게 꽉 움켜쥐어진 채였다. 종영은 마치 쇠고랑에 채인 듯 잡힌 팔이 아파서 하마터면 눈물까지 흘릴뻔 했다. 갑자기 그녀는 입으로 휘파람을 몇 번 불었다. 별안간 잿빛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키가 큰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종영을 놓았다. 노인은 무릎을 꺽으며 땅 위에 엎어졌다. 그의 오른 손등엔 섬전초에게 물린 자국이 깊게 나 있고 선혈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사공현의 옆에 있던 두 사내는 급히 쓰러진 노인을 부축했다. 키가 큰 노인은 이미 피부색이 검푸르게 변한채 사지를 푸들푸들 쉬지 않고 경련하고 있었다.

사공현은 담비가 한번 깨물자 신농방에서 이름 있는 노인이 중독되어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신농방은 직업이 뱀을 잡고 약초를 캐는 일이었다. 따라서 독사에게 물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채질이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섬전초에게 한번 물리자 맥없이 축 늘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빨리 저 계집을 사로잡아라!]

몇 명의 사내가 종영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종영은 잇달아 휫파람을 불었다. 섬전초는 바쁘게 이리저리 뛰고 날며서 삽시간에 다섯명을 깨물어 쓰러지게 했다. 사공현은 그 광경을 보자 품속에서 한 병의 물약을 꺼내 손바닥에 발랐다.이어 앉아 있던 바위를 박차며 허공으로 붕 떠올라다. 다음 순간 그는 종영의 머리위로 떨어져내렸다. 종영은 기척도 없이 신농방주가 덮쳐오자 혼비백산하여 땅위를 몇 바퀴 굴러 겨우 사공현의 손길을 피했다. 이때 섬전초가 사공현을 향해 날아들었다.사공현은 발로 땅을 디디고 우뚝서서 두팔을 팔랑개비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 유황 냄새가 풍겼다. 담비는그 냄새를 맡는 순간 찍! 하며 도망쳤다.

[하 하 하!]

사공현은 득의양양했다.낭랑히 웃으며 종영을 향해 휙! 일장을 날린다.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장풍이 쇄도해들었다. 종영이 옆으로 비스듬히 날아서 피하는데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종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단예가 벌렁 쓰러지고 있었다. 단예는 종영이 피하는 바람에 사공현의 장풍에 명중되고 만것이었다. 단예는 갑자기 드러누운 채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했다.

[앗! 오라버니!]

종영이 대경실색하여 단예를 향해 달려들었다.사공현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종영의 뒷등을 향해 장풍을 격중시켰다.

펑!

[아악!]

종영은 등에 장풍을 맞자 앞으로 주르르 미끄러져 나가다가 급기야 허리를 뒤로 꺾으며 천천히 땅 위로 쓰러졌다.

[하 하 하, 여기가 너희들 놀이터인 둘 알았느냐?]

사공현은 득의양양하여 크게 지껄여대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극렬한 고통이 뒷덜이에서 느껴진 것이다. 깜짝 놀라 무의식중에 손을 뒤로 돌려 뒷덜미를 감쌌다.

별안간 손등이 아팠다. 섬전초는 사공현의 손바닥에서 기이한 약초 냄새가 나서 감히 덤비지 못하고 있다가 사공현이 한 눈을 파는 틈을 타서 기습한 것이었다.

사공현은 재빨리 뱀의 독을 치료하는 약을 꺼내 상처에 바르고 일부는 먹었다.또 옆에 있던 한 사람은 산삼을 꺼내 먹이기도 했다. 사공현은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다가 갑자기 왼손으로 검을 뽑아서 자기의 오른팔을 잘라버렸다. 이것은 독사에게 물린 사지를 잘라 독기가 퍼지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목 뒤에도 한 방 물렸으므로 전신이 욱신거리고 근육이란 근육이 모두 뒤틀리며 경련을 일으켰다.여러 사람이 달려와 잘린 오른팔을 헝겊으로 묶자 선혈은 더 이상 흐르지 않게 되었다.

[저 연놈들을 끌어오너라.]

사공현은 이빨을 갈며 명령했다.

단예와 종영은 정신을 잃고 있었고 둘 다 입가에서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사공현은 증오에 찬 눈길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연놈들을 오랏줄로 묶은 후 정신을 차리도록 만들어라.]

신농방의 수하들이 단예와 종영을 밧줄로 묶은 다음 노란 가루약을 콧구멍에 뿌렸다. 신기하게도 단예와 정영은 재채기를 하며 정신을 차렸다. 종영은 눈을 뜨자 팔 하나를 잘라버린 신농방주가 살기를 담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몸을 움직이려고 했다.하지만 팔다리가 묶여진것을 깨닫고 체념해버렸다

사공현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그 망할 놈의 담비에게 물리면 며칠이나 살 수 있느냐?]

종영은 겁이 덜컥 났다.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대답한다.

[저의 아버님께서는 이레를 산다고 했어요. 하지만 사공방주님은 체력이 뛰어나시고 무예가 출중하시니..열흘은 사실거예요.]

[계집애야, 너는 죽고 싶으냐 살고 싶으냐?]

종영은 사공현이 그토록 비열한 질문을 하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살려달라고 구걸한다는 것은 그녀의 성깔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차갑게 대답했다.

[내가 죽게 되면 당신도 살아남지 못할거예요.]

사공현은 나이 어린 소녀가 도도하게 나오자 콧방귀를 날렸다.

[좋다.너희들을 살려줄테니 어서 담비의 해독약을 내놓아라.]

사공현은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해약을 받는 순간 단예와 종영을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종영은 총명한 아가씨다.

사공현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다.

[해약이 있긴 해요.그러나 현재의 내 몸에는 없고 아버님께 있어요.]

사공현은 움찔하며 급히 물었다.

[네 아버지 이름은 무엇이냐?]

종영은 재빨리 쏘아붙였다.

[당신은 나이가 적지 않은데 어찌하여 사리분별을 못해요? 아버지의 이름을 딸이 어떻게 입에 올려요?]

사공현은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단예를 가리키며 입을 연다.

[이 계집애가 아직도 혼이 덜 난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본보기로 네가 보는 앞에서 저 녀석을 죽여야 겠다.]

종영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봐요,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 그는 아무 죄도 없어요.그를 해치지 마세요.]

단예는 속으로 더럭 겁이났으나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종 소저, 대장부는 죽음에 임하여 비굴해져서는 안 된다고 했소. 이런 쓰레기같은 인간들 앞에서 비굴함을 보이면 안됩니다.]

종영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쏘아붙였다.

[나는 대장부가 아니라고요!]

이때 사공현이 무거운 음성으로 명령했다.

[저 녀석에게 단장산(斷腸酸)을 먹여라. 칠 일 후에 죽도록 적당한 분량을 먹여라.]

[예.]

한 명의 제자가 약병을 꺼내 반 병 분량의 붉은 가루약을 단예의 입에 억지로 벌리고 쏟아부었다. 종영은 미친 듯 부르짖었다.

[안돼요! 그 독약을 먹지 마세요!]

단예는 강제로 단장산을 복용하게 되었다. 그는 약을 삼키고는 입맛을 다시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맛이 달콤하구만!사공방주 당신도 남은 반병을 잡수시지요.]

[내가 미쳤는 줄 아니?]

사공방주가 코웃음쳤다. 종영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는 킥! 하고 웃었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공현이 말했다.

[이 녀석아,네가 먹은 단장산은 일주일 후에 발작을 일으킨다.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서 죽고 싶지 않으면 일주일 안으로 해약을 가지고 돌아오너라.]

종영은 울음을 그치고 말했다.

[약만 가져와서는 소용이 없어요.우리 아버님의 내공력으로 섬전초의 독을 몰아내야만 해독이 돼요.]

사공현은 단예에게 말했다.

[들었느냐? 약과 함께 저 계집애의 아버지도 데리고 오너라.]

종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비아냥거렸다.

[칫 ! 우리 아버지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사람인 줄 아시나봐? 그분은 골짜기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아요.]

단예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모두 함께 종소저의 댁으로가서 치료를 받도록 합시다.]

[아돼요. 누구든 그 골짜기에 한 걸음만 들어서면 아버님께 죽임을 당하고 말아요.]

사공현은 무겁게 말했다.

[무량파와의 원한을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농방 사람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네 녀석이 갔다오거라.]

종영은 사공현에게 눈을 흘겼다.

[단 오라버니를 보내 죽게 만들 생각인가요? 나는 그렇게는 못해요.]

[흫!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죽어햐지.]

사공현은 냉랭히 말하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단예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갔다와야겠군요.]

잠시 시간이 흘렀다. 종영은 갑자기 기쁜 표정을 짓고 소리를 질렀다.

[아,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요. 우리 아버지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그러면 당신을 죽이면 내 위치를 모르게 되니까 당신은 안전할 거예요. 당신은 아버님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후 즉시 도망을 치세요.]

[좋은 방법이오.]

단예가 좋아했다. 종영은 사공현에게 말했다.

[사공 방주, 단 오라버니가 이곳에 온 즉시 도망을 쳐야 하는데 그렇게되면 단장산의 해약을 받을 시간이 없어요.어떡하죠?]

사공현은 멀리 서북쪽의 커다란 바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저쪽으로 사람을 보내 기다리도록 하지. 저 녀석이 그리로 도망치면 해약을 얻을 수 있을 게야.]

종영은 말했다.

[어서 그분의 몸에 묶은 밧줄을 풀어주세요.]

사공현이 눈짓을 하자 몇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단예의 결박을 푼다. 종영은 단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단 오라버니, 나의 신발을 벗겨서 가져가요. 저의 부모님께서 이것을 보시면 나를 구해주실 거예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수그려 그녀의 신발을 벗겼다. 그녀의 발목을 잡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져 가슴이 뛰었다.종영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신발을 벗기자 종영은 골짜기로 가는 길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본래 종영이 살고있는 곳은 난찬강(瀾滄江) 서쪽의 어느 산골짜기였다.계곡의 입구엔 여러가지 비밀장치를 해놓아 외부 사람은 결코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설명을 마치자 종영은 한 가지 당부를 했다.

[계곡에 가면 먼저 제 어머님을 찾아요. 그리고 절대로 그대의 성이 단씨라는 것을 밝히면 안돼요. 우리 아버지는 단씨를 증오하거든요.]

단예는 그녀와 작별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떠나갔다. 달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그는 곧장 서쪽으로 걸어갔다. 십 리 정도 걸었을까? 어느덧 무량산 주봉(主峰)의 뒷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려왔다. 앞쪽의 달빛을 받은 맑은 계류가 반짝이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는 목이 말랐던 참이라 개울가로 달려가 엎드린 채 몇 모금의 물을 들이켰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라 그런지 뼈가시릴 정도로 차가왔다.그는 정신이 번쩍 나는 걸 느꼈다.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두런두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어 발자국 소리가 자박자박 귓전을 파고든다.단예는 황망히 개울가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울물이 있군. 물 좀 마시고 갑시다.]

그 음성이 매우 귀에 익었다. 단예는 그가 좌자목의 제자 우광호임을 알아챘다.

잠시 후 두 사람이 개울 상류에 이르러 물을 떠먹는 소리가 들렸다. 우광호의 음성이 들렸다.

[갈(葛)사매, 우리는 이미 위험한 지역은 벗어났소. 걷느라고 피곤할 테니 잠시 쉬었다가 길을 재촉하도록 합시다.]

[으응. 그렇게 해요.]

간드러진 여인의 음성이 대답했다.

개울가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모양이다.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신농방 사람들이 이곳을 지키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죠?]

음성이 약간 떨리는 것으로 보아 무척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우광호는 말했다.

[안심해요. 이 산길은 은밀하기 짝이 없으니까.우리 무량파 동종에서도 나만이 알고 있는 길이오.그러니 신농방에서 어떻게 알겠소.]

[이 소룻길은 언제 발견하셨어요?]

[사부님은 닷새에 한 번씩 제자들을 이끌고 이 부근으로 와요. 무량옥벽의 비밀을 밝히려는 것이지요. 다른 녀석들은 뭐가 있을까 하고 멍하니 무량옥벽만 쳐다봤지만 아무 뾰족한 비밀도 알아내지 못했다구요.나는 쳐다보는데 지쳐서 가끔 대변을 보는 척하고 다른 형제들로부터 떨어져나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이 소룻길을 발견하게 된 것이오.]

여자는 나직히 소리내어 웃었다.

[알고보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게으름을 피웠군요? 당신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의지력이 약한가봐요.]

단예는 거기까지 듣고는 생각했다.

(알고 보니 저 여자는 무량검 서종 문파의 제자구나.)

이 때 우광호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나는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속으로 맹세를 했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당신을 내 아내로 삼겠다고 말이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오늘에야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가 온 것이오.신농방이 갑자기 공격해오는 바람에 궁이 발칵 뒤집히게 되어서 우리가 탈출할 기회가 생긴 것이오.]

여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사문을 배반하고 도망치게 되었으니 무림인들에게 발각되면 수치스러움 뿐이에요.그러니 될수록 멀리 가서 은밀한 곳에 숨어 살아요.동문 사형제에게 발각되면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요.]

우광호가 대답했다.

[그 점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신농방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쳐들어 온 이상 무량파 사람들은 우리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 떼 죽음을 당할 것이오.]

[아뭏든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여인이 대답했다. 단예는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화가 났다.

(저런 악독한 것들! 부부가 되려고 사문의 위험을 못 본체하고 도망친 곳도 나쁜 일인데.....더 나아가 사부와 동문 사형제들이 모두 죽기를 바라다니! 짐승만도 못하구나!)

단예는 더욱 꼼짝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에게 발각된다면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그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다.

[우 사형, 도대체 무량옥벽에는 무슨 비밀이 있길래 신농방에서 무량파를 죽이려고 하는 거지요?]

우광호는 낮게 잔 기침을 하고 말했다.

[내 사부의 사부께서 오십여 년 전 어느 달 밝은 밤 우연히 무량옥벽을 바라보고 있다가 옥벽 속에 검을 휘두르는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하오. 때로는 남자였고 때로는 여자이기도 했는데 가끔 남녀가 서로 검을 겨루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오. 옥벽 위에 비치는 검술의 정묘함은 사조께서도 평생 처음보는 것이었다오. 정말 신선의 술법이었다는 거요. 그리하여 사조님은 몇 초의 검법이라도 배우려고 했지만 비치는 검의 그림자가 너무도 빠르고 오묘할 뿐 아니라 희미해서 똑똑히 바라볼 수가 없어 결국 단 한 초식도 배우지 못했답니다. 옥벽의 신선은 불규칙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사조께서는 옥벽 앞에 지키고 앉아 몇십 년을 지켜보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소. 그분이 돌아가실 즈음 옥벽에는 여인 혼자서만 검을 휘두르는 그림자가 비쳤고 결국은 여인의 모습조차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소. 사조께서는 숨을 거둘 때도 여전히 두 눈을 멍하니 뜨고 옥벽 위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 후 좌자목 장문인께서 석벽을 바라보았군요.]

[닷새에 한 번씩 옥벽 앞에 가서 지켜보았지만 신선의 그림자는 한 번도 나타난 일이 없었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득 여인이 코먹은 목소리를 냈다.

[으응, 이러지 마세요. 간지러워요.]

우광호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 사매의 젖가슴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군! 달빛을 받으니 마치 수밀도 두 쪽을 엎어놓은 듯하군.]

여인은 흥분했는지 더욱 코먹은 소리로 말했다.

[아이, 당신은 틈만 있으면 이래.]

[흐흐....수밀도를 어디 한번 먹어볼까?]

여인의 아 아 하는 교성이 들려왔다. 문득 여인이 간드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수밀도가 뭐예요? 분위기 없게시리. 천도복숭아라고 해요.]

우광호가 음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이놈의 천도복숭아 먹음직스럽게도 생겼구나. 이 제천대성 손오공 나리가 훔쳐 먹어야겠다. 나중에 태상노군에게 다리뼈가 부질러져도 좋다구.]

[손오공님, 아니 원숭이 아저씨, 당신은....당신은 아아....원숭이 당신.....]

단예는 두 사람이 유방을 가리켜 천도복숭아라고 하고 우광호를 원숭이라고 부르자 그만 너무 우스워서 자기도 모르게 '킥!'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순간 그는 속으로 아차 하고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 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우광호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서라!]

이어 뒤쫓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급박하게 들렸다. 단예는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렸다. 그리고 속으로 염불을 외웠다.

(관세음보살님, 제발 저를 구해주십시오. 이 불쌍한 단예가 액난을 벗어나게 도와주옵소서.)

우광호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며 장검을 뽑아들었다.

[서라! 서지 않으면 너를 죽일 테다.]

단예는 기겁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발을 옮겼다. 그러면서 자신을 꾸짖었다.

(단예야, 어쩌다가 웃어서 화를 불러들였느냐? 그들이 원숭이건 천도복숭아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웃었느냐? 너 한 목숨은 물론이고 종 소저도 죽게 되었단 말이다!)

눈 앞을 수목이 울창한 숲이 가로막았다. 그는 냅다 뛰어들어 두 팔로 나뭇가지를 헤치며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갑자기 눈 앞이 탁 트이며 우르릉 하고 물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아! 은하(銀河)가 거꾸로 걸려 있는 양 거대한 폭포가 높은 벼랑 위에서 곧장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등 뒤에서 우광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은 무량파의 비밀장소다. 외인이 함부로 접근하면 안 된다. 거기에 접근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단예가 힐끗 고개를 돌려 보니 우광호가 막 서슬이 시퍼런 칼을 높이 치켜들고 자신을 향해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앗!]

비명을 내지르며 단예는 폭포 쪽으로 내달았다.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졌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천야만야의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아이쿠! 이제 정말 죽었구나!]

그는 재차 비명을 토했다. 그는 허공에서 팔다리를 마구 허우적거려 무엇이건 붙잡으려고 했다. 다시 한참 동안 떨어져 내렸다.

그러다 별안간 엉덩이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몸이 위로 튕겨져 올랐다. 알고 보니 벼랑가에 뻗어나온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딪힌 것이었다. 우지직 소리와 함께 커다란 소나무 가지가 대뜸 부러져나갔다. 단예가 팔을 뻗어 소나무의 기둥을 움켜잡았을 때 그의 몸은 허공에서 흔들흔들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안개와 구름이 자욱해서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소나무 위에 올라앉아 천천히 벼랑 쪽으로 미끄러져갔다. 일단 위기를 모면한 그는 소나무에게 말했다.

[소나무님, 당신 덕분에 단예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과거 소나무님의 선조는 진시황을 가려주어 비에 맞지 않도록 해서 진시황은 그 소나무를 오대부(五大夫)에 봉했는데, 사람의 목슴을 구한 것과 비를 막아준 것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소. 나는 그대를 육대부, 아니 칠대부,팔대부에 봉해드리겠소.]

소나무 뿌리 부근에 커다란 틈새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틈새는 아래로 비스듬히 나 있어서 그는 천천히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틈새가 끝나고 비스듬히 뻗은 벼랑이 나타났다. 그리고 폭포가 굉장하게 떨어지는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물방울이 소낙비처럼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아!]

그는 탄성을 내지르며 얼마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왼쪽 산벼랑에 거대한 폭포가 걸려 있는데 정말 허공에 걸려 있는 듯했다. 거대한 물줄기가 아래로 곤두박질쳐서는 맑은 호수 위에 허연 포말을 만드는 모습은 실로 일대의 장관이었다.

하늘에는 둥근 달이 고즈너기 걸려 있었다. 호수가로는 삥 둘러 무성한 다화(茶花) 숲이었다. 바람이 불자 다화가 파도치듯 일렁거려 눈을 어지럽게 했다. 운남(雲南)의 다화는 천화일품이다.

[정말 경치 한번 좋구나! 내가 마오덕 나리를 따라 무량산에 오길 잘했나보다!]

그는 걸음을 옮겨 호숫가로 다가갔다.

이 호수는 타원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태반은 꽃나무 숲속에 가려져 있었다. 호숫가의 물은 명성지수처럼 고요해서 둥근 달이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골짜기의 사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가끔 이름 모를 새소리만이 귓전을 간지럽힐 뿐이다.

단예는 호숫가에 앉아 번뇌에 잠겼다. 사방의 경치는 좋았지만 빠져나갈 길이 막연하여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만약에 내가 한 마리의 고기가 되어 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절벽 위로 오를 수 있을텐데....]

그는 폭포의 아래쪽에서부터 위쪽으로 눈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갑자기 그는 눈을 크게 뜨고 폭포의 오른편 바위 벼랑을 바라보았다. 그 벼랑은 매끄럽고 광채가나는 것이 마치 거울같이 편편했다.

(아마 천년 전에 폭포는 오늘보다도 더 기세 좋게 흘러내렸을거야.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폭포수가 바위를 깎아 매끄럽게 만들었을 게고. 그러다가 폭포의 물줄기가 줄어들게 되자 매끄러운 석벽이 드러나게 된 것일 게다.)

섬광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 그는 크게 부르짖었다.

[그렇다! 저것이 바로 무량옥벽이구나!]

이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는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절벽 밑의 등나무 줄기에 이름 모를 푸른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는 하나를 따서 입으로 깨물어 보았다. 맛은 새콤하고 달았다. 그는 순식간에 백여 알을 따먹었다.

그러자 온 몸이 노곤해져서 그는 풀밭 위에 팔배개를 하고 누워 잠이 들고 말았다.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해는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울고 머리 위엔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호수의 물안개가 햇빛을 받아 그처럼 아름다운 무지개를 드리운 것이었다. 한 잠을 잔 후라 온 몸에 활력이 넘쳤다.

그는 무료하고 따분해서 절벽가의 이름 모를 열매를 따려고 등나무 줄기를 밑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등나무 줄기가 후드득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뽑히고 말았다. 이어 등나무 줄기에 가려졌던 매끄러운 석벽이 드러났다. 표면은 거울처럼 평평했다.

[여기에도 작은 옥벽이 있구나!]

그는 석벽에 돋아 있는 이끼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벽은 옥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하늘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단예는 피곤해져서 몇 개의 열매를 따먹고 다시 잠을 잤다. 꿈에 그는 한 쌍의 꽃신이 허공을 나는 것을 보았다. 단예는 그 꽃신이 종영의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헌데 꽃신은 높이 날아오르더니 멀리 사라지는 게 아닌가?

단예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신발아, 날아가지 말아라!]

그 소리에 스스로 잠이 깨었다. 그는 급히 품 속을 더듬어보았다. 꽃신이 만져지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둥근 달이 떠 있는 모습이 마치 쟁반을 박아놓은 듯했다. 교교한 달빛을 받아 호수는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

갑자기 그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폭포 왼쪽의 무량옥벽에 놀랍게도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 있지 않은가? 그는 크게 놀라는 한편 크게 기뻤다. 냅다 소리를 질렀다.

[신선 할아버지! 나를 구해주세요!]

무량옥벽 위의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단예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

[나를 구해주세요!]

옥벽에 비친 그림자가 몇 번 흔들렸다. 단예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사람의 그림자 역시 꼽짝하지 않았다. 단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 자신의 그림자였던가? 나의 그림자가 어떻게 저렇게 높은 곳에 비칠 수 있을까?]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자 석벽의 그림자 역시 왼쪽으로 흔들했다. 오른팔을 옆으로 내밀어 보았다. 석벽의 그림자 역시 오른팔을 내밀었다. 단예는 자리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달이 석벽의 뒤에 있는데 어떻게 나의 그림자를 석벽에 비추는 걸까?)

그는 뒤로 돌았다. 그러자 등나무를 벚기고 이끼를 떼어낸 절벽 밑의 석벽에 자기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비추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황연히 깨달았다.

(알고 보니 달이 먼저 나의 그림자를 아래쪽 석벽에 비쳤는데 절벽 위의 무량옥벽이 다시 아래의 석벽을 되비친 것이구나. 그러니까 나는 두 개의 거울 가이에 서 있는 셈이고 위의 거울에 밑의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구나!)

그는 무량파에서 무량옥벽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고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에 확실히 이곳에서 검을 사용한 사람이 있었구나. 그 사람의 그림자가 무량옥벽에 비친 것일 게다. 본래는 일남일녀였는데 그 후 남자는 죽고 여자 혼자 남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알게 되자 조금 전 미칠 듯 신선 할아버지를 찾았던 기쁨은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무료해진 나머지 손과 발을 흔들어댔다. 그러자 무량옥벽 위의 그림자도 손과 발을 움직였다

[좌자목과 쌍청이 벼랑 위에서 무량옥벽을 바라보고 있다면 좋겠다. 그들은 나의 그림자를 보고 신선이 무예를 연마하는 줄 알고 그걸 배우려고 얼이 빠지겠지? 하 하 하.]

생각할수록 재미가 있었다. 그는 팔로 삿대질도 하고 팔뚝질까지 했다.

별안간 그는 웃음을 뚝 그쳤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 두 분 선배께서 이 골짜기에 살아 계셨다면 어딘가에 여기를 빠져나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는 호숫가에 앉아 월색을 감상했다. 고적하기만 했다. 그는 나직이 뇌까렸다.

[내일 날이 밝은 후 출구를 찾아 보아야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는 항상 나에게 치아(치兒)라고 했고, 내가 무엇에 몰두하면 다른 일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성미라고 하셨지. 나는 일곱 살 때 바둑을 배웠는데 그때도 낮이면 낮마다 밤이면 밤마다 바둑판만 생각했었지.]

그는 어느덧 지나간 과거를 희상하고 있었다.

(이반에 아버님께서 무공을 연마하라고 하셨을 때도 나는 마침 주역(周易)을 연구하는 데 정신을 빠뜨리고 있었지. 나는 주역에 몰두해서 밥 먹을 때도 젓가락이 주역에서 어떤 방위일까를 생각하지 않았는가? 내가 무예를 배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정말 무공이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당시 내가 연구하던 주역을 그만두기 싫어서였을까? 어머니께서는 나의 성질을 잘 아시고 내가 어느 날엔가 무공을 좋아하게 된다면 거기에 미친 듯 빠져들게 될 거라고 하셨어. 아아....그렇지만 나는 무공을 배우기가 싫구나. 어느 날이건 무공을 좋아할 날이 왔으면 좋겠건만. 그러면 부모님과 큰아버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렇지만 무공을 연마한다 해도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지는 않겠다. 무공을 연마한다고 해서 모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큰아버님은 무공이 그토록 고강하시지만 언제 누구를 때리신 적이 있었나?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오랫동안 상상의 나래를 펴던 그는 갑자기 배가 고픈 것을 느꼈다. 끌어내린 등나무 덩굴로 다가가 이름 모를 열매를 따려고 하던 단예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끼를 벗겨냈던 편편한 바위벽에 은연중 영롱한 빛이 일렁이는 모습이 비친 것이다. 자세히 바라보니 한 자루의 장검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검의 그림자는 아주 선명해서 자루와 칼날 어느곳 할 것 없이 뚜렸했다. 검의 끝은 비스듬히 아래로 향하고 있었으나 칼날 중앙에 무지개와 같은 빛무리가 흐르듯 맴돌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그림자에 빛깔이 맴도는 걸까?)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이미 서녘으로 완전히 기울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둥근 달이 넘어간 절벽에는 조그만 구멍이 있어 달빛이 그 구멍을 통해 이쪽을 비춰주고 있었다. 구멍에서 무지개빛 광채가 유동하고 있었다. 단예는 속으로 짚히는 바가 있었다.

(원래 구멍 속에는 한 자루의 검이 걸려 맀구나. 검날에는 여어가지 보석이 박혀 있어 달칯을 받자 이 벼랑위에 영롱하게 비쳐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하게 보이는 거야.)

단예는 흥미있는 감흥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칼날에 구멍을 내고 보석을 박아넣지 않았다면 달빛이 보석을 통해 아름다운 광채를 흘리지는 못했을 거야. 저와 같은 검을 만들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절벽의 구멍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어서 올라가 자세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색영롱한 빛무리는 혼을 빼앗을 정도로 아름다왔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흐르자 달빛이 사라지면서 보석의 그림자는 점점 엷어졌고 엷어졌다가는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단예는 생각했다.

(저 보검은 아마도 두 분 신선께서 사용하시던 것일 게다. 하지만 보검을 얻는다고 해서 크게 좋을 것도 없지 않을까? 그런데 절벽 속에 보검을 걸어놓은 건 혹시 어떤 생각이 있어서 그런것이 아닐까? 구멍 속에는 무예를 익히는 비결이 감추어져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무예에는 관심이 없으니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골짜기로 떨어진 지 어느덧 사흘이 흘러갔다. 다시 나흘이 지난다면 뱃속의 단장산이 발작을 일으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될 것이다. 그날 밤도 절벽 위에는 아름다운 보검의 광채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석벽 위의 그림자는 비스듬히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고 검의 끝은 하나의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단예는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혹시 저 바위에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그는 곧장 바위 아래로 다가가 손으로 만져보았다. 이끼가 잔뜩 덮여 있어서 미끌미끌했다. 그런데 암석은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미미하게 흔들거리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두손으로 힘껏 밀었다. 그러자 바위는 점점 더 크게 흔들렸다.

(이상하구나. 이토록 커다란 바위가 조금 힘을 주었다고 해서흔들리다니.)

그는 두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냅다 밀었다. 놀랍게도 바위는 천천히 기울어지는 게 아닌가! 바위가 있던 곳에 석 자 높이의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단예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허리를 구부린 채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 속은 어두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손으로 더듬어야 했다. 밑바닥은 사람이 다듬어 놓은 듯 반반하여 그는 기쁜 마음이 더욱 치밀어 올랐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 계곡에서 빠져나갈 길이 나올는지도 모른다.)

길은 비스듬히 아래로 향해 있었다. 문득 그의 손에 차갑고 둥근 물체가 잡혔다. 손에 부딪치는 순간 그 물체는 땡 하는 소리를 발했다. 그 소리는 무척이나 맑고 깨끗했다. 손으로 자세히 더듬어보니 문고리가 아닌가? 문고리가 있으니 대문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손을 앞으로 뻗어 보았다. 즉시 그는 커다란 문에 치는 빗장을 더듬을 수 있었다. 놀람과 기쁨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 문을 만들다니 이 속에 사람이 살고 있단 말인가?)

그는 문고리를 밀어 문을 두드렸다. 당당당 하는 소리가 동굴 속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어 다시 세번을 두드렸다. 여전히 문을 열고 나오는 기척은 없었다. 그리하여 손을 뻗어 문을 힘껏 밀었다. 문은 몹시 무겁고 육중했으나 안쪽으로 빗장을 지르지 않아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희미한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단예는 낭랑히 외쳤다.

[불초 단예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왔습니다. 주인께서는 용서하여 주십시오.]

 

3. 동굴 속의 절세미녀

잠시 여유를 두고 기다렸으나 문 안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그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둥근 석실이었다. 우유빛 광선이 왼쪽에서 비쳐와 석실 안은 몽롱하기만 했다. 빛은 창문을 통해서 새어들고 있었다. 그는 눈을 창에 대고 바깥을 살펴보았다. 갑자기 커다란 새우가 창 밖에서 유유히 헤엄을 쳐 지나가더니 뒤를 이어 얼룩무늬의 잉어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스쳐갔다. 파란 물이 끊임없이 일렁였고 물고기들이 왔다갔다 헤엄치고 있었다. 단예는 깨달았다.

(이제 보니 이 석실은 호수 밑에 있는 것이구나. 누가 설계했는지 모르지만 정말 운치가 있다. 하지만 골짜기를 올라가야 하는데 오히려 땅밑으로 들어왔으니 큰일이다.)

그는 몸을 돌려 석실을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한쪽 구석에 돌로 깎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엔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과 여인의 귀걸이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한 자나 되는 먼지가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거처하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단예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래 전에 한 여인이 이곳에서 살았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여인은 어째서 인간 세상을 등지고 이런 곳에 머물러야 했을까? 어쩌면 그 여인은 혹시 무량옥벽에 나타났던 장본인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사방의 벽에는 다섯 개의 구리거울이 걸려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미녀였을 거야. 사랑하는 임을 잃고 상심해서 거울만 바라보며 눈물지었겠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문득 왼쪽 석벽에 월동문(月洞門) 하나가 희미하게 보였다. 먼지가 끼어 있어 그가 쉽게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힘주어 문을 밀었다. 갑자기 눈 앞이 밝아져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잠시 후에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 '앗!'하고 비명을 질렀다. 눈 앞에는 한 명의 궁정복 차림의 미녀가 손에 장검을 들고 서 있는데 장검의 끝은 바로 단예의 가슴을 찌를 듯 닿아 있지 않은가! 만약 그가 한 걸음만 더 내딛었다면 틀림없이 장검은 그의 가슴을 꿰뚫고 말았을 것이다. 단예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자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여인은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단예는 속으로 크게 의아해져서 미녀의 얼굴이며 몸매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인의 자태는 진정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고 옥(玉)을 깍아 만든 인형이었다. 이 옥미인상(玉美人像)의 크기는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고 몸에 노란색의 비단 장삼(長衫)을 두르고 있었다. 장삼은 바람도 없는데 미미하게 떨리고, 한 쌍의 눈에는 영롱한 광채가 서려 있는 모습이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아름다왔다. 그녀의 갸름한 얼굴과 오똑한 코는 인간 세상의 어떤 미인보다도 아름다와 보고 있노라니 혼백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망연히 미녀상을 바라보던 그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평소 여자 보기를 돌 같이 했던 내가 오늘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그는 미녀상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눈을 똑바로 뜨고 아가씨를 쳐다본 것은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눈길은 홀린듯 미녀상의 얼굴에 박힌 채 떨어질 줄 몰랐다. 그토록 옥미인상은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잃고 바라본 지 한참 후에야 그는 비로소 옥미인상의 눈동자가 흑보석(黑寶石)을 박아넣은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흑보석의 검고 영롱한 광채 때문에 그 옥미인상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이 있어 용을 그리고 눈알까지 그리자 그 용이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지 않던가? 정말 이 한 쌍의 흑보석은 미녀상으로 하여금 마치 살아 움직이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구나!]

단예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옥상의 얼굴은 백옥 바탕에 은은한 분홍빛이 감돌고 있어 그 또한 살아 있는 사람의 살결과 다름이 없었다. 단예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자 미녀상의 눈동자 역시 따라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어 그는 깜짝 놀랐다. 다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옥상의 눈동자가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그가 어디에서건 옥상의 눈초리는 시종 그를 향하고 있었고 눈동자의 영롱한 빛은 더욱더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예는 물끄러미 옥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두 손을 맞잡고 절을 했다.

[신선누님, 소생은 누님의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대하게 되었으니 죽어도 미련이 없읍니다. 그런데 누님께서는 이런 곳에서 세상과 외떨어져 사시니 외롭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누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이와 같이 말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엔가 누님의 이름을 적어 놓았을지도 모르지.)

그는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이때 그는 미녀상의 구름처럼 틀어올린 머리칼이 진짜 사람의 머리칼인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귓불에는 옥으로 만든 귀걸이를 달았고 거기서는 찬연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사방을 살펴보다가 동쪽 석벽에 빽빽히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 모두 장자(莊子)에 있는 구절들이었다.

대부분이 소요유(逍遙遊), 양생주(養生主),추수(秋水),지락(至樂) 등의 몇 편에서 인용한 글귀로 필법이 표일하고 매끈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리고 글 끝에는 한 줄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소요자(逍遙子)가 추수매(秋水妹)를 위하여 글을 씀. 동굴 안에는 비록 해와 달은 없으나, 그대 있으매 인간세상의 지극한 즐거움을 누렸노라.)

단예는 몇 번이고 그 글을 읽어본 후 중얼거렸다.

[소요자와 추수매는 아마도 수십 년 전 골짜기 아래에서 검을 휘두르던 두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옥미녀상은 분명 추수매라는 여인을 본뜬 것이고 소요자가 만든 것일 게다. 아! 이와 같은 미인과 골짜기 안에서 꿀보다도 달콤한 사랑을 속삭였으니 진정 인간세상에 그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 내가 소요자라는 분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눈길을 돌려 다른 쪽 석벽에 새겨진 글들을 읽어보았다.

(??姑射之山, 有神人居焉, 肌膚若氷雪, 綽約若處子, 不食五穀, 吸風飮露.)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자의 이 몇 마디 말은 정말 이 신선 누님의 용모를 형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절 같구나. 정말 적절한 표현이다!]

그는 다시 옥미녀상 앞에 다가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눈과 같은 흰 살결을 보고 있노라니 만져보고 싶은 생각 들어 몇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러자 콧속으로 은은한 사향 냄새 같은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그는 더욱 흥분하여 여인을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그 순간 얼음같이 차가운 감촉에 그는 번쩍 정신을 차리게 되어 그녀에게서 다시 한번 입맞춤을 하고는 떨어져 나왔다.

[신선 누님, 만약 당신이 살아나서 나와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나는 천번 죽어도 좋을 것 같소.]

그는 끓어오르는 정을 가누지 못하고 미녀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자 옥상 앞에 두개의 방석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무릎을 꿇게 되자 하나의 방석 위에 앉은 형상이 되었고, 앞에 있는 조그만 방석은 아마도 절을 할때 이마가 땅에 닿지 않도록 안배해 놓은 모양이었다.

이때 그는 옥미녀상의 오른쪽 신발에 깨알 같은 글씨가 수놓아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글자는 신발의 색깔과 같아서 바닥에 꿇어앉지 않고는 결코 발견할 수 없을 듯했다. 단예는 찬찬히 살펴보았다.

(절을 일천 번 해라. 그리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 누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즉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오륙백 번의 절을 하게 되었을 때 허리가 시큰거렸고 무릎이 아파왔지만 그는 꾹 참고 일천 번의 절을 마쳤다. 그러자 머리에 부딪힌 방석의 실밥이 튿어지면서 그 안에 든 물건이 드러나게 되었다. 단예는 힘이 들어 방석에 머리를 베고 벌렁 드러누워 한참동안 휴식을 취했다. 신선 누님의 명령대로 절을 하고 나니 몸은 피곤했지만 한없이 흐뭇했다. 그는 누운 채 머리에 베고 있던 방석의 튿어진 틈새로 손을 밀어 넣었다. 무언가 매끄러운 헝겊 같은 것이 만져졌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아 그것을 꺼내어 살펴보았다. 하나의 작은 비단 보자기였다. 그 위에는 글씨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대가 일천 번의 절을 하지 않았다면 이 물건은 그대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보자기 속에는 우리 소요파(逍遙派)의 무공을 익히는 비결이 들어 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세번에 걸쳐 이 무공을 힘써 연마한다면 천하무적의 무예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약 게을러 이 귀중한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낭환복지(郎環福地)에 들어가라. 거기 쌓여 있는 책들은 모두 천하의 각종 무술을 익히는 비결을 적은 것이다. 무공을 익혀 이곳을 나가게 되거든 나의원수인 소요파 제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주살해라. 만약 이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서도 원귀(怨鬼)가 되어 너를 괴롭힐 것이다.)

단예는 읽기를 마치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신선 누님의 마지막 당부가 몹시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큰일이구나.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신선 누님의 분부를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님께 이미 천 번의 절을 했으니 그것은 바로 누님의 당부대로 하겠다는 약속이 아닌가. 그녀는 어째서 나로 하여금 소요파의 무공을 배우게 만들고 그것으로 소요파의 인물들을 죽이려고 했을까. 아마도 소요파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박해를 당한 모양이다. 그렇다. 그들이 누님께 억울하게 대했다면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단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친이 무공을 익히라고 했을 때 유교와 불교의 도덕을 내세워 무공을 배우지 않겠다고 했고 그 때문에 부친과 다투고 집에서 뛰쳐 나오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옥미녀상에게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그녀의 말이 옳게만 생각되는 것이었다.

(신선 누님께서는 수십 년 전에 돌아가셨다. 옛날에 누님을 괴롭히던 소요파의 악인들도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니 죽은 사람을 또 다시 죽일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악인은 지옥에 간다고 했으니 그들은 이미 지옥에서 죄의 업보를 받고 있을 거야. 그러니 소요파의 후계자들을 죽일 필요는 없을 것이고 누님도 탓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풀어져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신선 누님, 누님께서 분부하신 일은 불초 단예가 반드시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쪼록 소요파가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기를 바랄 뿐입니다.]

눈을 뜬 그는 천천히 비단보를 펼쳤다.

(누님께서는 이것이 천하무적의 무예라고 하셨는데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그토록 오만한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하구나.)

비단보를 펼치자 양피(羊皮)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 만든 그림과 글씨가 박혀 있는 수십 개의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첫번째 두루마리를 펼쳐보니 표일한 필체로 '북명신공'(北冥神功)이라고 쓴 아래에 다음의 구절이 적혀 있었다. 글씨의 크기는 깨알만했다.

(장자는 소요유 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북극에 큰 바다(冥)가 있으니 그 이름은 천지(天池)라고 한다. 거기에 큰 물고기가 사는데 그 길이는 천리(千里)에 이르고 수명은 길어 헤아릴 길이 없다. 이 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라고 하는데 어느날엔가 큰 새로 변하니 그 새를 붕(鵬)이라 한다. 붕새가 나래를 펴면 그 길이가 구만리(九萬里)에 이른다. 붕새는 드넓은 창공을 날아서 남쪽으로 간다. '무릇 물이 모여 깊게 되면 큰 배를 띄울 수 있나니 큰 바다도 결국은 한 잔의 물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소요파의 무공은 장자에서 나오는 비유와 같이 진기(眞氣)를 체내에 축적하여, 바닷물이 큰 배를 띄우듯 축적된 진기로 큰 힘을 발휘하는 데에 첫번째 묘용이 있다. 진기가 쌓여 내력이 웅후하게 되면 천하의 무공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응용할 수 있으니 이는 북명(北冥)과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배를 모두 띄우고 곤과 같이 큰 물고기도 포용할 수 있는 이치다. 따라서 진기를 기반으로 하고 치고받는 동작은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 아래의 그림을 보고 진기를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여라.)

단예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아, 신선 누님의 북명신공은 오묘불가사의한 뜻을 담고 있구나.)

이어 다음 번의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순간 그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두루마리엔 놀랍게도 벌거벗은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가? 여인의 얼굴은 옥미녀상의 얼굴과 똑같았다. 그림 속의 여인은 전신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온 몸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 왔다. 단예는 눈을 떼고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신선 누님께서 이 그림을 자세히 보고 연마하라고 하셨으니 알몸을 본다고 화를 내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어 다른 두루마리를 펼쳤다. 알몸의 여인이 똑바로 서 있는 그림이 나왔다. 여인은 배시시 웃고 있었다. 눈썹이나 눈매 그리고 입과 뺨은 정말 요염하기만 했다. 옥상과 같은 모습이지만 표정은 완연히 달랐다. 단예는 이때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벌거벗은 여자의 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가닥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녹색의 선이 왼쪽 어깨에서 비스듬히 내려가 배꼽에 이르렀다가 다시 비스듬히 올라가 오른쪽 젖꼭지에 닿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인의 유방은 수밀도를 엎어놓은 듯 봉긋 솟아 있었다. 크게 마음이 흔들렸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여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또 하나의 가느다란 녹색 선이 오른쪽 엄지 손가락에서 시작되어 팔을 지나 겨드랑이로 뻗어 있었다. 연뿌리처럼 하얀 팔과 파뿌리처럼 길쭉길쭉한 고운 손가락, 그리고 쥐면 한 줌밖에 되지 않을 듯 가느다란 허리의 곡선이 다시금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런데 또 다른 파란 선이 그녀의 가늘고 긴 목덜미에서 시작하여 옴폭 파인 젖무덤 사이를 지나고 배꼽을 지나 여인의 가장 은밀한 부분에 이르고 있었다. 적당히 살이 오른 둔부와 잉어처럼 싱싱한 두 허벅지가 눈에 들어오자 단예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눈길을 얼른 돌려 손가락에 나 있는 녹색의 선을 향했다. 그리고 보니 그 선 옆에 가는 글씨로 해석이 적혀 있었다.

(북명신공의 오묘한 점은 타인의 진기를 끌어들여 자신의 것으로 함에 있다. 북명(北冥)은 수백 수천만 줄기의 강물이 흘러들어 이루어진 것이다. 북명신공도 이와 같이 남의 내력을 흡취하여야 빨리 큰 내력을 저장할 수 있다. 이 가는 선은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으로 북명신공을 익히는 제 일 단계다.)

이어 그 밑으로는 수태음폐경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내력을 빼앗는 방법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대체로 무공을 연마할 때 모두 옥문(玉門)에서 소상혈(少商穴)로 내공을 운행하지만 우리 소요파에서는 그 반대로 행한다. 즉 엄지손가락에 있는 소상혈에서부터 내공을 운행하는 것이다. 이 방법만 터득한다면 엄지손가락으로 상대방의 손을 잡는 순간 상대방의 내력은 즉시 엄지손가락을 통하여 나에게로 흘러들어오게 되고 나의 체내에 축적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적의 내공이 나보다 강하다면 바다가 거꾸로 흘러 강물로 가듯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극히 주의해야 한다. 소요파 외의 여러 문파들은 이런 오묘한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오직 무식한 방법으로 치고 받을 뿐으로 내력을 양성하기는 커녕 싸우면 싸울수록 힘만 소비할 뿐이다. 그야말로 귀중한 내력을 피차간에 소비해버리니 어찌 아깝다고 하지 않으랴! )

단예는 글을 읽는 동안 흥분이 많이 가라앉았다. 그는 기지개를 켜고 나서 중얼거렸다.

[신선 누님의 이와 같은 비유는 무척 훌륭하구나. 여러 줄기의 냇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는 것이지 결코 바다가 강제 냇물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이 공들여 쌓은 내공을 강제로 뺏는다면 그건 미안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나쁜 사람들이 신선누님을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누님께서는 그들의 내력을 빼앗았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미친 놈의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같으니 신선 누님이 뻔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다음 번의 두루마리를 펼쳤다.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에는 모두 벌거벗은 미녀가 그려져 있었고 각각 무공을 익히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엎드린 모습도 있었고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그림도 있었으며 두 다리를 활짝 벌려 은밀한 부분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그림도 있었다. 표정 역시 각기 달랐다. 어떤 그림은 기뻐하는 표정인가 하면, 어떤 것은 근심하는 빛이었으며, 정을 가득 담고 있는 눈동자를 하고 있거나 가볍게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도 있었다. 모두 서른 여섯 폭의 그림인데 폭마다 녹색의 선이 다르게 표시되어 있었고 무공을 익히는 방법도 달랐다. 맨 마지막의 그림은 뜻밖에도 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능파미보(凌波微步)'라는 네 글자 밑으로 무수한 발자국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각각의 발자국에는 역경(易經) 속에 나오는 방위(方位)를 가리키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었다. 부매(婦妹), 무망(無妄) 같은 주역 속의 용어가 보이자 단예는 크게 기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주역에 몰두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석실 속에서 그런 글들을 보니 옛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발자국은 수천개나 되었는데 빽빽하여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하나의 발자국에서 다른 발자국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 것이 복잡한 가운데 질서와 법칙이 있었다. 그 옆으로 주석이 씌어져 있었다.

(갑자기 강적을 만났을 때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데 능파미보는 지극히 효율적이다. 상대의 공격을 피할 뿐만 아니라 적이 예측할 수 없는 방위로 번개처럼 이동하여 적을 죽일 수 있다.)

단예는 기뻤다.

(강적을 만나 위험을 면할 수 있다면 그처럼 좋을 일도 없을 것이다. 신선 누님은 참으로 좋은 것을 나에게 주셨다. 하지만 몸을 피하면 그만이지 구태여 상대방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단예는 두루마리를 둘둘 말아 품 안에 갈무리하고 옥미녀상을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 다짐하듯 말했다.

[신선 누님, 저는 누님의 분부대로 하루 세 번씩 이 무공을 연마하여 천하무적의 고수(高手)가 되겠습니다. 천하 제일의 무예를 익힐지라도 거만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더욱 겸손하게 대할 것이며 남이 나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나 역시 남의 내력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특히 누님께서 남기신 능파미보는 완전히 익혀서 상대방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상대방이 극악한 인물이 아닌 이상 그의 내력을 빼앗지도 않겠으며 죽이는 것은 더욱 삼가하겠습니다. 모쪼록 내가 평생 한 사람의 생명도 해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는 소요파 제자를 죽이라는 문제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 덮어 두기로 했다.

그는 왼편에 나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지나자 또 한 칸의 석실이 나왔다. 하나의 돌침대가 있었고 나무로 만든 조그만 요람이 있었다. 그는 요람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설마 신선 누님께서 아이를 낳으신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신선 누님이 아이를 낳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그만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심지어 사지에 힘이 쑥 빠져 달아나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즉시 고개를 흔들어 부인했다.

(아아, 그렇다. 이제 보니 이 요람은 신선 누님께서 어릴 때 자랐던 요람이었구나. 그러니까 소요자와 추수매는 그녀의 부모님일거야 그렇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자신의 추측에 빈틈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는 싱글싱글 웃었다. 그는 아주 유쾌해져서 여기저기 둘러 보았다. 한쪽 벽에 칠현금 하나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현은 웬일인지 모조리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석실의 중앙엔 돌로 된 바둑판 하나가 놓여있었다. 바둑판 위에는 두다가 만 듯 이백여 개나 되는 바둑알들이 놓아져 있는데 검은 돌과 흰 돌이 서로 나란히 대치하고있는 국면이었다. 칠현금이 있고 바둑판이 끝나지않았건만 가인은 이미 떠나고 쓸쓸한 여운만이 감돈다. 단예는 갑자기 서글픔이 밀려와 두 줄기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그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중얼거렸다.

[아이쿠, 바둑판이 이렇게 놓여 있는 것을 보니 반드시 두 사람이 이 방 안에서 바둑을 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신선 누님은 바로 추수매일 것이다. 그녀는 남편 소요자와 함께 이곳에서 바둑을 두며 소일했을 거야. 아! 그렇다면....이건....이건....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신선 누님 혼자서 심심하니까 바둑을 두셨을 것이다. 신선 누님, 그때 얼마나 심심하셨으면 바둑을 두셨읍니까? 왜 그때 소리 높여 나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이 단예가 당신의 아리따운 음성을 들었더라면 즉시 이 깊은 골짜기로 뛰어내려와 바둑의 상대가 되어주었을 텐데.]

그는 애석하다는 듯이 말하고 바둑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바둑판은 보면 볼수록 오묘했다. 변화가 무궁무진할 뿐 아니라 바둑인들이 말하는 소위 진농(珍농)처럼 위기와 반전이 얽혀 있고 함께 사는 수도 있고 둘 다 죽는 수도 있었다. 단예는 바둑을 수년간 연구하여 왔다. 그가 바둑에 미치게 되었을 때 그는 온종일 회계를 보는 곽선생(藿先生)과 바둑을 두었었다. 단예는 뛰어나게 총명하여 무엇이건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고 하여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소리를 들어온 터였다. 그에게 바둑을 가르쳐준 곽선생은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국수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었지만 단예는 배운지 일년이 지난 후에는 실력이 비등비등해졌고 다시 일년이 흐르자 곽선생에게 세 점을 양보해주고도 지지 않았다. 그런 단예의 바둑실력으로도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바둑의 형세는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오랫동안 내려다보았으나 볼수록 애매모호한 것이 명확한 결과를 판단할 수 없었다. 길고 긴 시간이 흘렀고 그는 결국 눈 앞이 어지럽고 가슴 속에서 구역질이 나려고 해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바둑판에서 눈을 뗄 수가 있었다.

(아....내 생전 이토록 어렵고 오묘한 바둑을 보기는 처음이다.내가 열흘 동안 바라본다고 해도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설사 풀 수 있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나는 단장산의 독에 못이겨 죽고 말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죽으면 종소저 역시 죽게 된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는 다시 바둑판을 바라보다가는 언제 눈을 돌릴지 자신이 서지 않아 애써 눈길을 피했다.

그의 시선 속으로 석벽에 나 있는 또 하나의 문이 보였다. 문위에는 '낭환복지'(낭環福地)라는 네 글자가 씌어 있었다. 두루마리 속의 내용이 생각났다.

(신선 누님께서는 낭환복지에 들어가 천하 각 문파의 무공비급을모두 익히라고 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여기구나. 나는 무공을 익히고 싶지도 않고 익힐 겨를도 없다. 하지만 신선 누님의 분부시니 한번 구경이라도 하도록 하자.)

그는 낭환복지라고 씌어진 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낭환복지는 커다란 석동(石洞)이었다. 실내에는 책꽂이가 쭉 진열되어 있건만 책은 단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서가(書架)에는 목록표가 각각 붙어있었다. 소림파(少林派)니 사천청성파(四川靑城派)니 산동봉래파(山東蓬萊派)니 곤륜파(崑崙派) 등등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아마도 각 문파에 따라 무공비급을 꽂아두었던 모양이었다. 단예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거기엔 놀랍게도 대리국(大理國) 단씨(段氏)라고 씌인 쪽지에 '일양지(一陽指)와 육맥신검(六脈神劍)은 수집하지 못했음.'이라는 각주가 적혀 있었다. 여기저기 살펴보니 소림파의 역근경(易筋經)과 금강지(金剛指)의 수법과 개방파(개幇派)의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이 빠져 있었다. 분명 책꽂이에는 각 문파의 무공비법을 가득 꽂아놓았을 터이나 지금은 모두 어디로 옮겨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단예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공비급이 보이지 않으니 무공을 배우지 않는다고 해도 신선누님의 말을 거역한 것은 아니겠지.)

낭환복지엔 다른 출구가 없었으므로 그는 다시 옥미녀상이 있는 석실로 돌아왔다. 옥미녀상과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어 그는 몇번이나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절을 하며 말했다.

[신선 누님, 오늘 저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습니다. 종소저를 구한 후 다시 이곳에 와서 누님을 모시고 함께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옥미녀상에게 마지막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는 성큼성큼 석실을 나섰다. 나가는 출구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석실을 나서자 하나의 돌계단이 비스듬히 위로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들어오게 되었을 때는 옥미녀상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그 계단에는 주의가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돌계단을 오르며 제발 밖으로 나가는 출구였으면 하고 바랐다. 계단은 끝이 없는 듯 길었다. 단예는 몇 걸음 옮길 때마다 다시 내려가 옥미녀상을 보고 싶은 생각이 났지만 이를 악물고 계속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약 일천 계단을 올라가고 세 번이나 모퉁이를 돌게 되었을 때 우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올라가자 우렁찬 물소리가 고막을 때릴 듯 크게 들려왔다. 그는 걸음을 빨리하여 돌계단의 끝에 이르게 되었다. 앞에 사람이 간신히 빠져나갈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는지라 급히 고개를 내밀고 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깥은 탁 트인 하늘이고 밑으로는 거센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물살은 몹시 빨라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거대한 강 언덕에는 바위들이 들쑥날쑥 솟아 있었다. 단예는 그 강이 난창강임을 알고 놀람과 기쁨을 느끼며 천천히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강물보다 십여 장 정도 높은 위치였지만 강언덕을 오르자면 몹시 가파라 까딱하면 그대로 난창강 물결 속으로 굴러 떨어질 형세였다. 그는 기다시피 강언덕을 오르며 중얼거렸다.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꼭 이곳에 들러 신선 누님과 며칠 놀아야겠다. 누님은 외딴 곳에 있으니 몹시 쓸쓸할 거야.]

강언덕을 오르니 무성한 복숭아 밭이 나왔다. 주렁주렁한 복숭아는 마침 익을 대로 익어 있었으므로 그는 배고픈 김에 열 다섯 개나 먹어치웠다. 복숭아를 실컷 먹고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십여리를 걸어가자 조그만 소롯길이 나왔다. 소롯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땅거미가 사방을 덮어오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바위 벼랑에 걸쳐진 쇠사슬로 만든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 옆 바위에는 선인도(善人渡)라는 글자가 패여 있는지라 단예는 뛸 듯이 기뻤다.

[여기가 바로 종영의 아버님이 거처하시는 만겁곡의 입구로구나!]

그는 쇠줄을 붙잡고 조심조심 쇠사슬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이 다리는 네 가닥의 쇠사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두 개는 위에 있고 두 개는 밑에 있는데 밑의 두 사슬 사이에 나무판을 가로대어 건너도록 한 것이었다. 다리 위로 오르자 줄다리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앙에 이르자 그것은 높다랗게 아래위로 출렁거려 십분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센 강물이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도도하게 흘러가는 것이 그야말로 천리준마가 재빨리 달려가는 것 같았다. 그는 더욱 무서워져 눈을 질끈 감고 연신 아미타불을 외며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다 건너고 잠시 휴식을 취한 그는 종영이 알려준 대로 빨리 걸어갔다. 약 반시간 정도 가자 앞에 시커먼 숲이 웅크리고 있었다. 단예는 그 속으로 들어가 유난히 커다란 느릅나무를 찾았다. 나무에는 큰 구멍이 나 있어 그 굴 안으로 들어갔다.

(만겁곡은 정말 은밀하구나. 종소저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떻게 만겁곡의 입구가 느릅나무에 있는 구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구멍 속은 돌계단이었다. 돌계단은 오 리 정도 가자 위로 비스듬히 경사져 있었다. 이윽고 계단이 끝나는 곳에 이르니 철판이 머리 위를 막았다. 단예는 그것을 밀쳤다. 그러자 휘황한 달빛이 그의 온 몸에 쏟아져 내렸다. 계단을 올라서서 살펴보니 드넓은 풀밭이었고 가을 벌레들이 쓰르륵 쓰르륵 울고 있었다. 풀밭을 한참 가로지르자 어두컴컴한 계곡의 입구가 들어났다. 계곡은 보름달 밝은 빛 아래에서도 무성한 숲 때문에 유령이 나올 듯 음산하기만 했다.

박달나무를 깎아 세운 푯말이 계곡 입구에 외롭게 서 있었다. 단예는 다가가 살펴보았다. 거기엔 여섯 자가 씌어져 있었다.

'段氏入遲卽死'

단씨 성을 가진 자는 들어오는 즉시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다섯 자는 검은 색인데 유독 사(死) 자만은 핏물로 찍힌듯 선홍색이어서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필이면 단씨만이 죽는다는 걸까? 종영의 아버지는 성질도 괴퍅스럽구나. 천하에 널려 있는 게 단씨인데 그들을 모두 저주하다니....)

이어 종영의 말을 생각해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종소저는 나에게 단씨라는 것을 숨기라고 했고 여섯 글자 가운데 첫째번 것을 두드리라고 했지. 즉 단(段)을 두드리라고 하지 못한 것은 내가 불쾌해할까봐 그런 것이었구나. 그녀는 나의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이 글자를 세 번 두드리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렵겠는가.)

그는 푯대의 옆에 매달린 쇠망치를 들고 단이라는 글자를 세번 두드렸다.

땅! 땅! 땅!

커다란 금속성이 울려퍼졌다. 단예는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나 소리가 크자 깜짝 놀랐다. 이때 앳된 소녀의 음성이 계곡 속에서 들려왔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그 음성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예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종소저의 부탁을 받고 곡주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계곡 안에서 어 하고 놀란 음성이 들리더니 예의 소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외부 사람이군요. 저희 소저는....]

[종소저가 지금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기에 알리러 왔소이다.]

소녀는 놀라 물었다.

[위험이라니요?]

[종소저는 사로잡혀 있소. 아주 악랄한 사람들에게 잡혀 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와요.]

소녀는 무척 놀란 듯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부인께 알려드리겠어요.]

[그러지요.]

단예는 대답하며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종소저는 나보고 자기 어머니를 먼저 만나보라고 했지. 참 잘됐는 걸.)

잠시 후 계곡 안에서 조금 전 소녀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부인께서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이어 모습을 드러내는데 십 육 세 가량의 나이에 노란색 하녀복장을 했으며 얼굴이 예쁜 편이었다. 소녀는 단예를 보더니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를 띄우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공자께서는 저를 따라 오십시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그를 이끌고 계곡 안으로 들어서서 무성한 숲을 이리저리 돌며 나아갔다. 이윽고 그들은 한채의 기와집에 당도하게 되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단예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안은 아담한 객청이었고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탁자 위에 하나의 커다란 촛대가 있고 황촛불이 사방을 은은히 밝혀주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소녀는 차를 내왔다.

[차 드세요. 부인께서는 곧 나오실 거예요.]

단예는 차를 마시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쪽 벽에는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를 그린 네폭의 그림이 늘어져 있는데 차례가 바뀌어 있었다. 난초가 맨 앞이고 다음이 대나무와 국화이고 맨 나중이 매화였다. 서쪽 벽에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의 글자가 씌어진 액자가 걸려 있는데 그 또한 동하춘추(冬夏春秋)의 순서였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종소저의 부모님은 무공을 익히느라 서화(書畵)에 대해선 잘 모르나 보다. 탓할 일이 못되지.)

이때 패옥 부딪치는 맑은 음향이 쨍그랑 쨍그랑 들려 오는 가운데 한 부인이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몸에 짙은 녹색의 장삼을 걸친 매우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단예는 대뜸 그녀가 종영과 닮았다고 느끼고 몸을 일으켜 공손히 절을 했다.

[후배 단예가 아주머니께 인사드립니다.]

말을 마친 그는 속으로 아차하고 부르짖으며 얼굴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는 종영과 부인의 모습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느라고 그만 가짜 이름을 대는 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종 부인은 흠칫하더니 곧 물었다.

[공자의 성이 단씨 인가요?]

묻는 그녀의 표정은 몹시 착잡해 보였다. 놀란 것도 같고 설레는 것도 같으며 수심에 잠긴 표정이기도 했다. 단예는 어쩔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의 성은 단씨입니다.]

종 부인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공자의 고향은 어디시며 영존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단예는 속으로 이것만은 말할 수 없다고 느껴 얼른 대답했다.

[이 후배는 강남(江南) 임안부(臨安府) 사람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외자로 용(龍)을 쓰십니다.]

종 부인은 말없이 단예를 요모저모 뜯어보았다. 단예는 종 부인이 자꾸 자신을 주시하자 몹시 부자연스러워져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배는 오는 길에 위험한 일을 당해서 그만 옷이 해어지게 되었지만 종소저가 위험에 빠졌기에 옷을 갈아 입지도 못하고 달려왔읍니다. 불결하다고 너무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 부인은 홀린 듯 단예를 바라보고 있다가 종영이 위험하다는 말을 듣자 꿈 속에서 깨어난 듯 놀라 물었다.

[우리 그애가 어떻게 되었다고요?]

단예는 품속에서 종영의 꽃신을 꺼내 들고 그간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종 부인의 얼굴엔 금새 수심이 가득 어렸다. 단예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애는 나가기만 하면 말썽을 부려서 큰일이애요.]

단예는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녀를 탓할 수는 없읍니다. 이 일은 제가 신농방의 일에 끼여들어서 생긴 일입니다.]

종 부인은 단예를 바라보더니 얼굴에 홍조를 띠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군. 탓할 수가 없지. 과거의 나도 그랬으니....]

단예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종 부인은 흠칫하더니 더욱 얼굴을 붉혔다.

[아니에요. 나는 젊었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단예는 종 부인이 왜 부끄러운 태도를 취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문 밖에서 굵직한 중년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왜 멀쩡하던 진희아(眞喜兒)가 죽었단 말이냐?]

종 부인은 그 음성을 듣자 소스라쳐 놀라며 말했다.

[큰일났어요. 바깥 양반이 왔어요. 그이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니 공자께서는 잠시 숨어 있으세요.]

단예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숨다니요? 종소저의 아버님께 마땅히 인사를 드려야 되지 않겠읍....]

종 부인은 재빨리 손을 뻗어 단예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그를 번쩍 들어 옆의 객실에 내려놓았다.

[이곳에 숨어 있어요. 절대 소리를 내면 안되요. 우리 그이는 성질이 불같아서 그대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안다면 살려두지 않을 거예요.]

종 부인의 갸냘픈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단예는 엉겁결에 객실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먼 길을 달려와 전갈을 한 사람이 아닌가? 손님대접은 고사하고 이렇게 숨어 있으라고 하다니 나를 좀도둑 취급하는 것이 아닐까? )

종 부인은 그의 표정이 잔뜩 불만에 차 있는 걸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미안해요.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객실의 문을 닫았다.

곧이어 대청에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부인.]

걸직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단예는 종영의 아버지가 어떻게 생긴 인물인지 궁금해서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한 명의 남자 하인이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고,그 옆으로 키가 매우 크고 수수깡처럼 비쩍 마른 한 중년 사내가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서 있었다. 따라서 얼굴 모습은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옆으로 한 쌍의 커다란 손을 내려뜨리고 있는데 털이 숭숭 나 있어 징그러웠다.

(히야! 정말 솥뚜껑 같은 손이구나! )

단예는 사람의 손이 그토록 클 줄은 몰랐다. 속으로 탄성을 내지르며 계속해서 밖을 내다보았다.

종 부인이 물었다.

[진희아가 죽다니 무슨 말이죠?]

하인이 얼른 대답했다.

[곡주님께서는 진희아와 소인더러 북쪽 장원으로 가서 네 분의 손님을 맞아들이라고 하셨읍니다. 그런데 오늘 정오에 한 분이 오셨읍니다. 그분은 자신의 성이 악(岳)이라고 했읍니다. 곡주님께서는 저희들을 보낼 때 악씨 성을 가진 손님께 세째 나으리라고 부르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진희아는 마중을 나가 공손하게 절을 하며 '세째 나으리,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했읍니다.

그러자 악씨 성의 손님은 크게 화를 내면서 '내가 왜 세째냐? 나는 둘째란 말이다.'라고 소리치며 진희아의 얼굴을 때렸고 진희아는 코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지고 말았읍니다.]

종 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 그토록 무지막지한 사람이 있다니! 악 세째가 언제 둘째가 되었지?]

종영의 부친이 말했다.

[악노삼(岳老三)은 원래 성질이 급하고 포악스러우며 약간 모자란 구석이 있지 않소?]

그러면서 그는 종 부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예는 순간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그만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종곡주의 얼굴은 두뼘은 될 듯 길어서 몹시 기괴했으며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눈은 이마 위에 붙어 있고 들창코는 입과 함께 턱 바로 위에 붙어 있었다. 그리하여 코와 입 사이엔 드넓은 평야처럼 밋밋한 살로 채워져 있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해괴하고 우스운 몰골이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야말로 말상이군! 저처럼 생긴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을거야. 종영이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도 닮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다.)

그는 종영이 어머니만을 닮은 사실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종곡주는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종 부인을 대하자 금방 부드럽게 얼굴이 변했다. 부드럽다고는 하나 볼상 사납기는 매일반이었다. 그는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보(寶寶), 악노삼은 원래 거칠어요. 나는 그가 당신을 놀라게 할까봐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라오. 이런 하찮은 일엔 당신은 신경쓰지 말아요.]

 

4. 사랑은 죽음을 넘어

단예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제보니 저 사람은 부인에게는 무척 친절해서 간이라도 빼줄 것 같구나. 그런데 종 부인은 어째서 남편이 오자 놀라 어쩔 줄 몰랐을까? )

종 부인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게 어째서 하찮은 일이죠? 진희아는 오랫동안 충실하게 우리를 보살펴 왔어요. 그런데 당신의 친구에게 죽고 말다니, 나의 마음은 여간 괴롭지 않아요.]

종곡주는 웃음을 지으며 얼른 종 부인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건 당신 말이 맞아요. 당신 말은 언제나 옳아요. 당신은 언제나 하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여간 잘 대해주지 않았지.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여자가 있지만 당신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없어요. 암! 한 명도 없지! 당신은 참 좋은 여자요.]

종 부인은 픽 하고 웃고는 하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인은 금새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예. 진희아가 얼굴을 맞고 쓰러졌을 때만 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요. 저는 급히 술상을 차려 악 나으리에게 접대했지요. 이때 진희아가 일어나 코피를 닦고 있었어요. 악 나으리는 진희아에게 물었읍니다. '조금 전 내가 너를 때렸으니 너는 속으로 나를 욕하고 있겠지. 그렇지? ' 그러자 진희아는 급히 말했지요.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둘째 어르신네께 화를 내겠읍니까? 절대 그런 일은 없읍니다.' 악 나으리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물었읍니다. '너는 마음속으로 나를 악인(惡人)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무나 악독해서 더 이상 악할래야 악할 수 없는 대 악인이라고 말이다. 하 하 하!' 그래서 진희아는 재빨리 부인했어요. '아닙니다. 둘째 나으리는 정말 좋은 분입니다. 조금도 악하지 않습니다.'하고요. 그러자 악 나으리는 화가 나서 호통을 쳤어요. '너는 내가 조금도 악하지 않다고 했느냐? ' 그러자 진희아는 크게 겁을 먹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어요. '둘째 나으리, 둘째 나으리는 조금도 악 하지 않습니다. 악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읍니다.' 그 말을 듣자 악 나으리는 벌떡 일어났어요. 진희아의 목을 움켜쥐더니 닭 모가지 비틀듯 진희아의 목을 몇바퀴 비틀자 진희아는 목뼈가 부러져 처참하게 죽고 말았읍니다.]

하인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종 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손짓을 했다.

[너는 정말 놀라서 가슴이 조마조마 했겠구나. 나가서 좀 쉬도록 해라.]

[예.]

하인은 절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종 부인은 고개를 흔들며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나는 마음이 몹시 아파요. 좀 쉬어야겠어요.]

종곡주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구려. 나는 즉시 악노삼에게 가보아야겠소. 또 다른 사고가 생기지 않게 말이요.]

[당신도 조심하세요. 악노삼이라고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악노이(岳老二)라고 불러야 해요.]

종곡주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보는 거요? 내가 그를 두려워 하는 줄 아오? 나는 다만 그가 나를 도우러 불원천리 찾아왔기 때문에 손님 대우를 해줄 뿐이오. 악노삼을 어찌 악노이로 부를 수 있겠소? 그리고 그는 손님이니만큼 나는 진희아를 죽인 일은 거론하지 않을 생각이오.]

종 부인은 가볍게 탄식했다.

[아! 우리 두 내외는 평안히 이곳에서 살아왔어요. 십 년 동안 나는 골짜기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당신은 이제와서 사대악인(四大惡人)을 초청해 와서 그분을 해치려는 거예요? 당신은 평소에 나에게 잘 대해주지만 마음속으로는 미워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종곡주는 급히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아니오.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내가 사대악인을 청해 온 것

도 당신을 끔찍이 사랑하기 때문이오.]

종 부인은 코웃음을 쳤다.

[나를 위해서라고요? 그거 고맙군요. 하지만 정말 나를 아낀다면 지난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마세요. 빨리 사대악인을 돌려 보내세요.]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악노삼이라는 사람은 사대악인 가운데 세째인 모양이구나. 그런데 사람을 그토록 함부로 죽이다니 정말 악인 중의 악인이구나. 사대악인은 모두 그렇게 악랄한 사람들일까? )

이때 종곡주는 대청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거친 숨을 식식 내쉬었다. 그 모습은 한 마리 숫말이 크게 발광을 하기 직전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가 성을 가진 녀석을 당신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군! 그래서 사대악인이 그 놈을 해칠까 두려워하는 것이지? 흥! 이 원한을 갚지 않고 나 종만구(鍾萬구)가 어찌 사내 구실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단예는 종만구란 이름을 듣자 생각했다.

(무슨 이름이 그렇게 해괴할까? 만구라니....일만 명의 원수를 가졌다는 뜻이 아닌가? 예로부터 원한은 맺기는 쉽지만 풀기는 어렵다고 했다. 한 가지 원한만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닌데 만 가지의 원한이라니! 그러니까 얼굴이 그렇게 말상이지. 그 얼굴을 보건대 종 부인과 같이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한 것은 그야말로 큰 복덩어리가 굴러 들어온 셈이야. 그런 의미에서 볼때 당신의 이름은 종만구가 아니라 종만복(鍾萬福)이어야 할 거요.)

종 부인은 쌀쌀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를 미워한다면 어째서 스스로 찾아가서 정정당당히 싸우지못하죠? 설사 사대악인의 힘을 빌어 이긴다고 해도 그건 대장부답지 못한 일이에요.]

종만구의 목에 퍼런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는 크게 부르짖었다.

[나 혼자 그를 찾아가 싸우라고? 당신은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군. 생각해 보오. 그는 일만명이 넘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고 수하에는 무예의 달인(達人)이 구름떼처럼 많소. 하지만... 나는 역시 직접 그를 찾아가고 싶소. 다만 내가 그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그가 눈치챌 것이 두렵기 때문이오.]

종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밑의 마루 바닥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어깨를 들먹이며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종만구는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자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즉시 그녀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랜다.

[보보...화내지 말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종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더욱 눈물만 흘릴 뿐이다. 종만구는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보보, 화를 풀어요. 당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녀석이 미웠던 거요. 사랑이 크면 미움도 깊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자나깨나 그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 하다오. 미안하오, 미안해, 나를 용서해주구료.]

종 부인은 흐느끼며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그 일만 생각하고 있군요. 나 역시 괴롭기 짝이 없으니 차라리 일 장을 쳐서 나를 죽여버리세요. 그러면 당신 마음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풀어질 거고 그때 가서 다시 아름다운 여인을 맞아들이도록 하세요.]

종만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쩔쩔 매다가 갑자기 자신의 뺨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내가 죽을 죄를 졌소! 내가 죽을 죄를 지었어! 나는 죽어 마땅해!]

철썩철썩 소리가 연이어 들려 졌으며 종만구의 고개는 따귀를 때릴 때마다 반대쪽으로 홱 돌아갔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가곤 했다. 얼굴은 시뻘겋게 되었으며 그의 길다란 뺨엔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단예는 말상의 길쭉한 얼굴이 솥뚜껑 같은 손에 맞아 이리저리 돌아가는 것을 보자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 하는 웃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순간 종만구는 손을 멈추고 단예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누구냐?]

곧이어 문이 탕 하고 열렸다. 종만구는 솥뚜껑 같이 큰 손으로 단예의 멱살을 잡아 공중으로 높이 들어 올렸다가 마루바닥으로 힘껏 팽개쳤다.

단예는 눈 앞이 캄캄해 졌으며 전신의 뼈마디가 모두 분해되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아구구!' 신음을 내질렀다.

종만구는 왼손으로 재차 그의 뒷덜미를 잡아 번쩍 들어올리고 노호를 터뜨렸다.

[너는 웬 놈이냐? 나의 아내 방에 숨어 있다니, 아주 수상한 새낀데?]

종만구는 단예의 준수한 얼굴을 보자 갑자기 눈에서 질투의 불길이 솟아 올랐다. 부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당신은....또....]

종 부인은 발끈해서 앙칼지게 소리쳤다.

[또는 뭐가 또예요! 의심 많은 양반 같으니! 그는 우리에게 전갈을 하러 온 사람이니 어서 내려 놓으세요.]

종만구는 물었다.

[무슨 전갈을 하러 왔소? 나는 믿을 수 없어!]

종만구는 단예를 더욱 높이 쳐들고는 호통을 쳤다.

[이 더러운 자식! 생긴 것이 반반한 것을 보니 끼가 있는 놈이 분명하다! 어찌하여 내 마누라 방에 몰래 들어와 숨어 있었는지 솔직히 말해라. 빨리 말해!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즉시 골통을 부숴버리겠다!]

말을 하면서 한손으로 옆의 탁자를 내리치자 '와지끈' 뚝하며 나무로 만든 탁자의 한 쪽이 대뜸 부서져 나갔다.

단예는 조금 전 내팽개쳐져 온 몸이 극렬하게 아팠다. 하지만 종만구가 이상한 의심을 하자 크게 반감이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

[나는 단씨 성을 가진 사람이오! 죽일 테면 어서 죽이시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 치우고!]

종만구의 얼굴이 참흑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네 놈의 성이 단가라고? 또....또....단가 잡종이란 말이지? 으 으 으!]

그는 그렬한 분노에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그는 점점 슬픈 기색을 띠더니 둥그런 눈동자에선 왈칵 눈물마저 솟아나지 않는가! 단예는 연민의 정을 느꼈다. 아마도 종만구는 자신의 용모가 부인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걸핏하면 부인을 의심하고 질투를 일으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단예는 갑자기 가련한 생각이 들어 부드럽게 말했다.

[곡주님, 저는 오늘 처음 부인을 뵙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처구니 없는 의심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종만구의 얼굴에 기쁜 빛이 어렸다.

[정....정말이냐? 오늘 처음 보보를 만났단 말이지?]

단예는 얼른 대답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았습니다.]

종만구의 길다란 얼굴에 헤벌쭉 웃음이 담겼다.

[하하...맞다. 네 말이 맞다. 보보는 십 년 동안 이 골짜기 밖으로 나간 일이 없어. 십 년 전에 너는 고작해야 팔 구세의 어린애였을 테니 보보와 눈이 맞을 수가 없었겠지. 아!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군.]

종 부인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외쳤다.

[빨리 단 공자를 내려놓아요!]

종만구는 슬그머니 단예를 내려놓았다. 이어 얼굴 가득 의심스런 기색을 띠고 다그쳐 물었다.

[단 공자라... 너의 아버지도 단씨겠구나?]

단예는 그만 우스워졌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종만구는 급히 물었다.

[네 아버지의 이름은 어떻게 되느냐?]

단예는 종만구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는 아주머니께 거짓말을 했습니다만 이제 숨길 것이 없으니 털어놓겠습니다. 아버님의 성함은 단정순(段正淳)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종 부인은 '아!'하며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단정순! 단정순이라고? 우 우 우...!]

종만구는 미친 듯 울부짖었다. 얼굴은 푸르르 경련했으며 두 주먹은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단예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단정순이란 석 자가 그들 부부에게 이토록 커다란 충격을 주리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종만구는 와락 단예의 어깨를 움켜쥐며 거칠게 흔들어댔다.

[네...네가 바로 그 단정순 그 잡종의 아들이란 말이지?]

단예는 종만구가 부친을 잡종이라고 욕하자 크게 분노했다.

[당신이 감히 우리 아버님을 욕하겠다는 거요!]

종만구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내가 감히 못할것이 뭐냐? 네 애비는 가장 치사한 도둑놈이고 후레자식이며 개쌍놈이다. 언젠가 반드시 그놈을 내 손으로 죽여 산 채로 씹어 먹고 말 테다!]

단예는 크게 화가 난 가운데서도 황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단씨 성을 가진 사람이 골짜기 안에 들어오면 죽인다는 글은 바로 그의 아버지를 지극히 증오하여 단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조리 죽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고 늠름하게 입을 열었다.

[종곡주, 당신이 우리 아버님과 원한이 있다면 정정당당히 매듭을 지으십시오. 당신이 진정한 용기를 가졌다면 저의 아버지를 찾아가 욕하십시오. 등 뒤에서 사람을 욕하는 것은 사내 대장부가 할 것이 못 됩니다. 저의 아버지는 대리성(大理城)에 계십니다. 당신이 아버님을 찾으려 한다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골짜기에 단씨 성을 가진 자가 들어오면 죽인다고 써붙이는 등 쓸데 없는 일을 하십니까?]

종만구의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 몇 번이나 변했다. 단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가슴에 쑤셔박히는 듯한 충격을 주는 듯했다. 한참 동안 망연히 서 있던 종만구는 갑자기 맹수처럼 부르짖으며 손과 발을 미친 듯 휘둘러 실내의 기물을 부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의자가 박살났고 사방 벽에는 움푹 움푹 구멍이 파였다. 그는 쿵쾅거리며 부수고 날뛰며 부르짖었다.

[나는 단정순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다만 그놈이 보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알까봐 찾아가지 못할 뿐이다!]

그의 음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흐느끼는 목소리로 변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르짖었다.

[나는 간이 작은 사람이야....용기가....용기가 없는 겁장이야....]

그리고는 밖으로 냅다 달려 나갔다. 이어 쿵쾅 와르르 뚝딱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 왔다. 눈에 띄는 것은 모조리 때려 부수는 모양이었다. 화분이고 걸상이고 문짝이고 닥치는 대로 요절을 내는 게 분명했다.

단예는 어안이 벙벙해서 나직히 중얼거렸다.

[우리 아버님께서 종 부인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아신다면 무슨 큰일이 난다는 것일까? 달려와서 그녀를 죽이기라도 하신다는 말인가? 우리 아버님은 자비로운 분이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

종 부인은 물끄러미 단예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두 눈 가득 눈물을 담고 있었다. 단예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비 맞은 배꽃처럼 애처롭다고 느꼈다.

종 부인은 격동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단 공자, 영존께서는 편안하신가요?]

단예는 몸을 똑바로 하고 정중히 대답했다.

[엄친께서는 건강하시며 하시는 일이 순조롭습니다.]

종 부인은 망연한 눈빛이 되어 중얼거린다.

[그럼 잘 되었군. 하지만 나는....나는.....]

그녀의 긴 속눈썹에 눈물 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눈물 방울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주르르 흘러내렸다. 단예는 너무나 가련한 느낌이 들어 얼른 위로의 말을 던졌다.

[아주머니, 곡주님의 성질이 급하기는 하지만 아주머님께 대한 사랑은 지극한 것 같았습니다. 두 분의 인연은 정말 아름다운 것으로 조그만 일로 다투었다고 해서 그토록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종 부인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고 나서 처연히 웃었다.

[그대같이 어린 나이에 운명이 아름다운지 어떤지 어떻게 알겠어요.]

단예는 종 부인의 웃는 모습을 보자 문득 종영이 생각 났다.

(종소저는 지금 위기에 처하여 나의 도움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

생각을 마치자 즉시 입을 열었다.

[후배는 조금 전 너무 지나친 말을 했던 모양입니다. 곡주님께 사과의 말씀을 드려주십시오. 그리고 곡주님께서 즉시 출발하여 종소저를 구출하도록 말씀드려 주십시오.]

종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 양반은 멀리서 온 사람을 접대하러 갔으니 이 골짜기를 떠날수가 없어요. 공자께서도 조금 전 하인의 말을 들어 짐작하겠지만 손님들의 성격은 괴퍅하기 이를 데 없어요.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며 스스로 악인을 자처하는만큼 대접을 소홀히 했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공자를 따라가죠.]

단예는 크게 기뻐했다.

[아주머니께서 친히 가신다면 더 좋은 일이지요.]

그러다가 종영의 말이 생각나 말했다.

[아주머니께서도 섬전초의 독을 해독하실 수 있으십니까?]

종 부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해독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큰일이군요.]

종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섬전초의 독을 해독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바깥 양반이 가도 마찬가지예요. 혹시 천산동모(天山童모)라면 모를까.]

[천산동모가 누굽니까?]

단예가 다급히 물었다. 종 부인은 물었다.

[독(毒)에 대해서는 천하제일인자고 무예의 고강함으로 말하면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지요. 그녀는 생사부(生死府)라는 독을 쓰는데 한번에 수천 명을 중독시켜 죽일 수 있다고 하지요. 표모궁에 있는 영취궁(靈鷲宮)의 궁주가 바로 그지만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또 표모궁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어요.]

단예는 영취궁이라는 말을 듣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신농방을 사주하여 무량파를 주멸하도록 시킨 신비의 방파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모든 사건은 영취궁이 무량옥벽의 비밀을 파헤치려고 해서 발생한 일이었다.

종 부인이 말했다.

[내가 가는 이유는 섬전초의 독을 몰아내려는 게 아니에요. 다만 딸 아이를 구하려는 거죠.]

[아! 그렇군요.]

종 부인은 총총히 행장을 수습하고 종이에 몇 글자를 적어 객실에 놓아 종만구가 보도록 했다.

[공자, 우리 떠나지요.]

단예는 꽃신을 품 안에 넣고 그녀의 뒤를 따라 나섰다. 종 부인의 걸음은 몹시 빨랐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 듯했으나 한번의 걸음은 몇 길이나 되어 마치 허공을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단예는 거의 뛰다시피 해야 겨우 그녀를 뒤따를 수 있었다. 달빛은 여전히 교교했고 사방은 죽은 듯 고요했다. 단예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불쑥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섬전초의 독을 치료할 수 없다면 신농방에서 종소저를 순순히 내줄까요?]

종 부인은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은 나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어요. 감히 내 딸을 데리고 엉뚱한 수작을 부린다면 모조리 죽여버릴 거예요.]

단예는 그만 소름이 끼쳤다. 부드러운 종부인의 음성속에는 살인을 예사로 생각하는 듯한 섬뜩한 기운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 부인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영존께서는 처첩을 몇 분이나 거느리고 계신가요?]

단예는 얼른 대답했다.

[없습니다. 하나도 없어요.]

종부인의 표정에 기쁨과 의혹의 빛이 엇갈렸다.

[그분은 그토록 높은 지위에 계시면서....그리고 그토록 준수하신데 처첩을 거느리지 않다니....설마....설마.....]

그녀의 얼굴이 도화꽃처럼 붉어졌다. 단예는 얼른 말했다.

[곡주께서 아주머니를 사랑하시듯 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을 지극히 아껴주십니다. 그래서 다른 여인은 거들떠 보지 않아요.]

종 부인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사실 그대의 아버님이 인중룡(人中龍)이라면 그대의 어머님은 이 시대의 양귀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거예요. 그러니 비익조(飛翼鳥)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을 거예요.]

[아주머님은 저의 어머님을 알고 계십니까?]

단예는 놀라서 물었다. 종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단예는 의문이 구름처럼 피어올랐으나 꾹 참고 그녀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들은 몇 개의 산등성이를 넘었다. 문득 종 부인이 물었다.

[영존께서는 요즘도 무공을 연마하시는가요?]

단예는 얼른 대답했다.

[그분은 하루도 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는 저 역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저는 무공에는 흥미가 없거든요.]

종 부인은 단예를 뒤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영존께서는 천하 십대고수(十大高手) 중의 한 분이신데 공자에게 무공을 전수하시지 않던가요?]

[아닙니다. 제가 배우고 싶지 않아 배우지 않았을 뿐입니다.]

종 부인은 단예의 얼굴을 뜯어 보며 말했다.

[안타깝군요. 공자께서는 양친의 장점만을 취한 듯 준수하고 착하고 총명한데....무공을 모르니 옥에 티라고 할 수 있겠어요.]

단예는 급히 말했다.

[공자님은 무(武)는 감정 말단에서 생긴 것으로 자신의 몸 하나만 지킬 뿐 백성에게는 아무런 유익함도 주지 못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것이 뭐가 그리 좋은 일입니까?]

종 부인이 급히 반박했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예요. 자신의 몸 하나 보살피지 못하고 어찌 천하 백성을 위할 수 있겠어요? 공자님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도 하셨어요. 좀더 생각을 넓게 가지세요. 그래야 영존의 뒤를 이어....]

이때 뒤에서 날카롭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보보! 보보! 당신 어디로 가는 거요!]

종만구가 허공을 훌쩍 훌쩍 뛰며 따라오고 있었다.

[빨리 가야겠어요.]

종 부인은 단예를 옆구리에 끼더니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귓가로 바람이 쉭쉭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큰 산둥성이를 순식간에 몇개나 넘었다. 단예는 종 부인의 무예가 이토록 높음을 알고는 마음속으로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종만구는 더욱 빨라, 거리는 갈수록 단축되고 있었다. 종만구의 숨쉬는 소리가 바로 뒤쪽에서 들려왔다. 별안간 '찍!' 하며 단예의 상의가 찢어지고 서늘한 기운이 등에 느껴졌다. 종만구가 그의 옷를 붙잡자 그만 찢어져 나간 것이다.

[서라!]

종만구는 노기등등해서 소리쳤다.

종부인은 단예를 앞으로 던졌다.

[어서 도망쳐요! 바깥 양반은 당신을 살려두지 않으려 해요!]

이내 그녀는 장검을 뽑더니 몸을 뒤로 선회하며 종만구를 향해 찔러갔다. 종만구의 무공은 그녀보다 훨씬 높아 어렵지 않게 그의 가슴을 향해 내찔렀다. 이때 종만구는 웬일인지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예상치 못했던 바라 급히 장검을 거두려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푹!

날카로운 칼날은 종만구의 가슴을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 종 부인은 깜짝 놀라 급히 검을 뽑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종만구는 가슴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하여 금새라도 떨어질 것 같았고 얼굴엔 한없이 서글픈 감정이 어려 있었다. 종 부인은 가슴이 뭉클하며 뜨거운 것이 목구멍 위로 울컥 치미는 것을 느끼고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남편에게 달려가 가슴의 상처를 손으로 막아 더 이상 피가 나오지 못하게 했다. '쨍그렁!' 하며 그녀의 장검은 땅 위에 굴렀다.

[여보! 당신은 왜....피하지 않으셨어요!]

종만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울먹이는 음성으로 나직히 말했다.

[보보, 내 곁을 떠나지 말아요.]

종 부인의 칼은 종만구의 가슴을 깊숙이 찌른 후였다. 생사를 예측할 수 없었다. 피는 종 부인의 손을 붉게 적시며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가 왜 당신 곁을 떠나요?]

종 부인이 울먹이며 말했다.

종만구는 처량하게 웃었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이 쓸쓸한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없소. 당신은 모를 거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당신을....]

종만구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고통스런 얼굴을 했다. 종 부인은 와락 눈물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누가 당신을 떠난대요! 나는 딸 아이를 구하러 가는 것뿐 이었어요! 편지를 남기고 왔는데 나를 이렇게도 믿지 못하다니요!]

종곡주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나는 편지 같은 건 보지 못했소.]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고 자세히 말씀드릴께요.]

종 부인은 자신의 상의를 찢어 재빨리 종만구의 상처를 싸매 더이상 피가 흐르지 못하게 하고 그를 땅 위에 눕혔다. 종만구는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얼빠진 듯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종부인은 종영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말해주고 남편의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단예는 종만구 곁에 다가가 정중히 말했다.

[어르신네, 죄송합니다. 이 모든 일이 저의 불찰 때문입니다.]

종만구는 다리를 번쩍 들어 단예의 앞가슴을 걷어찼다.

[이 후레자식! 꺼져라! 보기도 싫다!]

단예는 뒤로 벌렁 쓰러졌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꼼짝도 못하고 아픔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종 부인은 단예가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으나 남편이 화를 낼까 두려워 조용히 말했다.

[여보, 흥분하시면 상처가 도져요.]

종만구는 부인을 쳐다보며 탄식했다.

[나를 위하는 척 할 필요 없소.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그렇게도 그 사람이 그리우면 가시오. 아! 십여 년간 그대와 영(靈)에게 정성을 다했었는데.....]

종만구는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주르르 흘러 양쪽 관자놀이로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안았다. 그러자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흘러내왔다. 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단예를 향해 소리쳤다.

[못된 자식! 내 아내를 뺏으려고 내 딸을 이용했지! 어디 덤벼봐! 내가 비록 상처를 입긴 했지만 네 집안의 일양지 수법을 두려워 하지는 않는단 말이다. 어서 일양지를 써서 나를 죽이고 내 마누라를 데려가란 말이야!]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종 부인은 급히 그를 다시 눕히고 조용히 말했다.

[여보, 저는 가지 않겠어요. 그러니 의심을 풀고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세요.]

이때 단예가 일어섰다. 그는 꿋꿋하게 말했다.

[어르신네, 나는 어르신네와 아무런 원한도 없소이다. 그리고 나는 일양지를 배우지 않았고, 설사 배웠다 해도 손을 쓰지는 않겠습니다.]

종만구는 다시 기침을 하더니 살기 띤 눈으로 단예를 노려보았다.

[후레자식, 시치미를 뗄 거냐? 너는....너는 가서 네 애비를 데려오너라.]

단예는 그가 격렬한 기침을 하며 가슴에서 선혈을 울컥울컥 쏟아내자 그만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부인을 향한 그의 헌신적인 사랑에 뜨거운 감동을 받았다.

[어르신네께서 나를 믿지 못하신다면 나는 차라리 어르신께서 보는 앞에서 칼을 물고 죽겠소!]

그는 종 부인이 버린 장검을 들어 입에 물고는 앞으로 엎어졌다. 칼날이 그의 입을 관통하려는 찰나 종만구가 발길질을 했다. 단예의 몸은 허공에서 빙글 한 바퀴 돌고는 땅에 떨어졌고 입에 물었던 검은 옆으로 뒹굴고 말았다. 단예의 입술이 칼날에 스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종만구는 갑자기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으며 부인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보보, 내가 당신을 의심했구료.]

종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떨굴 뿐이다. 그녀의 눈물이 종만구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여보, 내가 잘못했소.]

종만구가 팔을 위로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자 종 부인은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종만구는 그녀를 힘껏 부둥켜안았다. 단예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종 부인은 울음을 그치고 단예에게 말을 던졌다.

[단 공자, 나는 그애를 구하러 가지 못하겠군요. 그대는 사공현에게 가서 말해요. 내 남편은 바로 지난날 강호를 주름잡던 마왕신(魔王神) 종만구이며 나는 소야차(小夜차) 감보보(甘寶寶)라고요. 그 말을 들으면 사공현은 즉시 그녀를 놓아줄 거예요.]

종만구는 가슴 속의 응어리가 풀어진 듯 급히 맞장구를 쳤다.

[맞아, 당신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소. 마왕신과 소야차의 이름은 천하를 떨게 하고도 남음이 있지.]

단예는 그 두가지 이름이 사공현을 겁주게 하여 종영이 풀려나고 단장산의 해독약을 얻을지 의문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절을 했다.

[두 분께 많은 염려를 끼쳤습니다. 그럼 불초는 이만 떠날까 합니다.]

그가 몸을 돌려 몇 발자국 갔을 때 종부인이 다급히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요.]

단예는 우뚝 걸음을 멈추어 몸을 돌렸다. 감보보는 남편을 땅에 뉘고 단예에게 다가왔다.

[공자에게 전할 말이 있어요.]

그녀는 품 속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내 단예에게 건네줬다.

[이 물건을 영존께 드리고 우리딸을 구해달라고 하세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께서 나서신다면 물론 종소저를 구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아버님이 계신 곳은 너무나 멀어서 갔다올 시간이 없습니다.]

[내가 천리마 한 필을 빌려드리지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있어요. 내가 하인을 보내겠어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 부인은 남편을 품에 안고 다시 만겁곡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모습은 산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단예는 손을 펴고 종 부인이 건네준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한 장의 종잇조각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색이 바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 된 듯했다. 종이 위에는 몇방울의 핏자국이 나 있었고 경신년(庚申年), 이월 오일 축시(二月五日丑時)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대체 누구의 사주단자일까? 혹시 종소저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종 부인은 이것을 어째서 아버님께 전해주라고 하셨을까? 설마하니 나와 종소저를 결혼시킬 생각은 아닐테고....알 수 없는 일이다. 이왕이면 사주가 좋은지 나쁜지 한번 풀이해보자.)

그는 생년월일대로 손가락을 짚으며 헤아려 나갔다.

(경신년이고 신천고(申天孤)이니 크게 외롭겠고, 이월이면 유(酉)에 해당한다. 유천인(酉天刃)이니 칼에 맞을 운수이고, 초닷새이면 축이니 축천액(丑天厄)이다. 무슨 사주가 이리도 나쁘담! 축시이면 인에 해당한다. 인천권(寅天權)이니 권세가 있을 상이나 여인에게 있으면 팔자가 드셀 뿐이다. 정말 하나 같이 않 좋구나. 다행이 묘(卯)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결코 순탄한 삶을 살기는 힘들겠는걸.....)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종영을 생각했다. 둥근 달 속에 그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종 소저, 조금만 더 참도록 하시오. 내가 아버님을 모시고 가서 그대를 구하도록 하리라.)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 공자님!]

단예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하인 차림의 남자가 날듯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상당히 빨라 순식간에 단예 앞에 이르렀다.

[소인 내복아(來福兒)가 인사드립니다.]

그 하인은 절을 했다. 단예는 내복아라는 하인이 바로 객실에서 진희아의 죽음을 설명하던 사람임을 알아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알고 보니 당신 이름이 내복아였군요.]

[소인은 공자님께 말을 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고 좀 해주십시오.]

내복아는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커다란 나무 숲을 가로 질러 북쪽으로 돌아 조그만 소롯길을 따라 십여 리쯤나아가자 산비탈에 서 있는 웅장한 저택에 당도할 수 있었다.

내복아는 대문을 몇 번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빠꼼히 열리고 내복아가 무어라고 몇마디 했다. 잠시 후 저택 안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예는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기뻐 외쳤다.

[아! 정말 천리마구나!]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한 소녀가 한 필의 검은 말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말은 날씬했고 발굽이 작았으며 다리가 길었다. 말을 끌고 나온 소녀는 십 육 세 정도 보였다. 내복아가 말했다.

[단 공자님, 부인께서 이 집의 소저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서 이 흑매괴를 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 집의 소저와 종소저는 친구라서 말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고맙군요.]

단예는 말고삐를 받아 들였다. 소녀는 가볍게 말 갈기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흑매괴야, 공자님 말씀 잘 듣고 말썽 피우지 말아라. 그리고 빨리 갔다가 돌아오너라.]

흑매괴는 그녀의 손등에 머리를 부비며 친밀하게 굴었다. 소녀는 다시 단예에게 말했다.

[이 말은 채찍으로 때리면 안 돼요. 잘 대해줄수록 빨리 달리고 말을 잘 들어요.]

[알았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해본다.

(말 이름이 흑매괴인 것을 보니 아마도 암놈인가 보다.)

그는 흑매괴에게 절을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흑매괴 소저, 잘 친해봅시다.]

소녀는 킥 하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재미있는 분이네요. 말이 너무 빠르니 뒤로 자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단예는 말 위에 껑충 올라탄 후 소녀에게 말했다.

[말의 주인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시오.]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저한테는 고맙다는 인사 안 하세요?]

단예는 이 명랑한 소녀를 향해 두 손을 맞잡고 절을 했다.

[소저, 고맙소, 돌아올 때 선물을 갖다 드리겠소이다.]

소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선물은요. 말만 다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선물이지요.]

내복아가 말했다.

[여기서 줄곧 북쪽으로 달리면 대리성으로 가는 큰 길이 나옵니다. 공자님은 몸 조심하십시오.]

[고맙소.]

단예는 손을 들어 답례했다. 흑매괴는 천천히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더니 속도를 가하여 순식간에 십여리를 나아갔다. 단예는 길가의 나무들이 뒤로 흐릿하도록 빠르게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빨랐건만 말 잔등이 거의 흔들리지 않아 마치 가마를 탄 기분이었다.

(정말 기막힌 말이구나! 이런 말은 아버님이나 큰아버님도 타보신 적이 없을 것이다. 내일 오후면 충분히 대리성에 도착할 것 같구나.)

신선한 밤공기가 스쳐가자 정신이 무척 상쾌했다.

(이렇게 천리마를 타고 달리는 것도 인생의 진미 중 하나라고 할만하구나!)

별안간 왼쪽 길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계집애야! 멈춰라!]

어둠을 가르며 한 줄기 칼날이 단예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말의 속도가 워낙 빠른지라 칼이 떨어졌을 때 단예의 몸은 이미 멀리 나아간 후였다. 단예가 홀낏 돌아보니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칼을 들고 그를 추격하고 있었다.

[서라! 나쁜 계집애 같으니! 남자로 꾸몄다고 해서 누가 속을 줄 아느냐? 흑매괴를 탄걸 보면 다 안단 말야!]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까마득히 뒤떨어지고 말았다. 잠시 후엔 고함을 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들은 나에게 왜 계집애라고 했을까? 아! 그들은 흑매괴의 주인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자들이구나! 하지만 잘못 보았어. 나는 정말 남자란 말이다.)

그는 웃었다. 일마장 쯤 갔을때 단예는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나직이 부르짖었다.

[아차! 큰일났구나. 저들은 흑매괴의 주인을 죽이려고 왔구나. 그렇다면 저들이 들어닥치기 전에 그녀에게 알려주어 도망치도록 해야 한다.]

그는 즉시 말머리를 돌리고 더욱 빠르게 달렸다. 말의 속도는 질풍과 같아 반 시간도 안 되어 큰 저택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갑자기 금속성이 철그렁하고 일면서 무언가가 말의 다리를 노리고 짓쳐들었다. 흑매괴는 껑충 뛰어넘으며 뒷발질을 했다.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장창(長槍)을 들었던 무사 하나가 가슴이 으깨진 채 뒤로 쓰러졌다.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흑매괴가 대문안으로 들어서는 찰나 누군가 흑매괴의 고삐를 잽싸게 나꿔챘고 단예 역시 땅 위로 나뒹굴고 말았다. 누군가 소리쳤다.

[웬 놈이 뛰어든 거냐?]

이어 사방에서 무기를 든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큰일이구나! 이미 집이 완전히 포위된 모양이다!)

단예는 몸을 일으키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갑자기 오른팔이 흡사 쇠고랑에 끼인 듯 조여들며 아파왔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사순의 우람한 사내가 그의 팔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단예는 호통을 쳤다.

[나는 이 집의 주인을 만나러 왔소! 당신은 어째서 함부로 붙잡는 거요?]

그때 집안에서 노파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여보내라. 녀석이 흑매괴를 타고 온 것으로 보아 계집애와 각별한 사이인 모양이다.]

단예의 팔을 잡았던 사내는 손을 놓고 단예의 등을 떠밀었다.

[들어가!]

[그러지 않아도 들어갈 참인데 왜 밀고 난리요!]

단예는 퉁명스레 내뱉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을 지나자 그윽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돌로 포장한 길이 나타났다. 길 양쪽에는 매괴화가 만발하여 밤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돌길이 끝나자 하나의 월동문이 나타났다. 월동문이 있는 담장 주변에도 수없이 많은 사내들이 무기를 번뜩이며 매복해 있었다. 단예는 겁이 났으나 침착하게 월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하나의 대청이 보였다. 대청 옆에 방문에서는 불빛이 환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단예는 큰 소리로 외쳤다.

[단예가 흑매괴의 주인을 뵙고자 찾아왔소이다!]

[웬 놈인지 우선 들어와서 애기해라.]

목쉰 노파의 음성이 문 안에서 들려왔다.

 

5. 미녀를 말에 태우고

단예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급히 마당을 가로지르며 방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대청에는 십여 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무기를 꼬나쥐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단예는 개의치 않았다. 문을 열자 드넓은 방안이었다. 그 안에도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기를 빼들고 있었다.

중앙에 포위된 여인은 흑의를 입고 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등을 문 쪽으로 돌려서 얼굴은 알아볼 숫가 없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무척 날씬했고 구름 같은 머리채는 허리에 이르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쪽에는 두 노파가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사방을 에워싼 채 서 있었다.

방바닥 중앙에는 한 사람이 목이 반쯤 잘려 선혈을 흥건히 쏟은 채 죽어 있었다. 내복아였다.

(저 사람은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기 때문에 죽고 말았구나! 정말 내 탓이다!)

백발이 성성하고 체구가 왜소한 노파가 목쉰 음성으로 물었다.

[이 녀석아, 너는 누구냐?]

단예는 내복아의 참흑한 죽음을 목격하고 죄책감과 분노를 함께 느끼고 있던 차에 그 말을 듣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할멈, 당신이 나이가 몇 살 많으면 많았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함부로 욕을 할 수 있소?]

노파는 일순 어이가 없는 듯 단예를 아래 위로 흝어보았다. 옆에 있던 뚱뚱한 노파가 호통쳤다.

[젊은 녀석이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떠드는구나! 서파파(西婆婆)가 친히 네 녀석에게 말을 건넨 것은 그래도 너를 존중해 준건데 그것도 모르고 지랄발광을 하다니!]

이 노파의 배는 남산만 했고 머리카락은 반백으로 희끗희끗했다. 또한 얼굴에 살이 디룩디룩해서 말을 하자 얼굴 근육이 마치 춤을 추듯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에 피묻은 단도가 들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내복아는 그녀가 죽인 모양이었다. 단예는 뚱뚱한 노파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서파파가 무슨 황후라도 된단 말이냐? 고작해야 늙어 비틀어진 할망구에 불과하지!]

단예는 내복아의 죽음을 보고 화가 난데다 어차피 살아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되는 대로 욕을 해댔다. 뚱뚱한 노파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피묻은 단도를 번뜩이며 차갑게 말했다.

[나의 이 단검은 오늘까지 모두 일천 사십 칠 명 의 목슴을 빼앗았다. 아마도 네가 일천 사십 팔 번째의 재물이 되어야 할까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도가 어지러이 번뜩이며 단예의 목을 향해 뻗어왔다.그때 갑자기 꽝!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며 단검이 튕겨졌다. 바짝 마르고 왜소한 노파가 지팡이를 뻗어 제지한 것이다.

[평파파(平婆婆), 잠깐만! 우선 자초지종을 물어 본 후에 손을 써도 늦지는 않아요.]

이어 지팡이를 거두며 단예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단예는 가슴을 쑥 내밀고 대답했다.

[나는 단예라는 사람이다. 저 뚱뚱보 할망구의 말대로 나는 살고 죽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평파파가 얼굴을 실룩거리며 노성을 질렀다.

[이놈아! 평파파라고 부르면 그만이지 뚱뚱보라니!]

단예는 일부러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하! 스스로 뱃가죽을 만져보시구료! 옛날 동탁이 죽은 후 배꼽에 심지를 박고 불을 당겼더니 삼 일 동안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고 했지만, 당신의 배를 보니 불꽃이 열흘은 갈 것 같소이다!]

평파파는 평소 자기에게 뚱뚱하다고 하는 사람을 제일 미워했다. 더구나 배꼽에 심지를 박는다는 지독한 욕설을 듣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단검을 휘두르며 악을 썼다.

[맹세코 이 밤이 가기 전에 너를 죽이고 말테다! 그리고 나의 칼날이 무디어질 때까지 네놈의 살과 뼈를 난도질하겠다!]

단예는 그만 등골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 노파의 말은 실로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서파파가 급히 평파파를 가로막고 나서 단예에게 말한다.

[네 녀석은 참으로 잘 생겼구나. 이 계집은 네 애인이냐?]

그러면서 흑의여인의 뒷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저 소저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소. 당신은 계속해서 욕을 함부로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입만 벙긋하면 욕이 나오는지요? 저 소저가 마음이 너그러우니 다행이지만.... 어쨌든 입이 더러우면 그 사람의 인품도 따라서 더러워진다는 진리를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서파파는 바닥에 탁! 가래침을 뱉으며 빈정거렸다.

[쳇! 아주 훌륭하신 말씀만 골라서 하는군! 미친 녀석아, 저 계집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면서 여기는 뭣하러 왔느냐? 젊은 나이에 벌써 삶에 염증을 느꼈느냐?]

[나는 저 소저에게 한 가지 전갈할 것이 있어서 왔소.]

[전갈? 무슨 전갈이냐?]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늦고 말았소. 전갈을 하나마나지.]

서파파는 궁금한 듯 급히 재촉했다.

[무슨 전갈인지 빨리 말을 하란 말이다.]

단예는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저 소저를 만나게 되면 자연히 말할 터인데 당신이 왜 명령이오?]

서파파는 싸늘히 코웃음쳤다.

[직접 말하고 싶으면 어서 해라. 나 역시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테니.]

단예는 흑의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소저, 당신이 흑매괴의 주인이십니까?]

흑의여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여전히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돌아왔죠?]

단예는 엄숙히 말했다.

[흑매괴를 타고 가는데 도중에서 나를 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를 소저로 오인하고 불손한 언사를 쓰더군요. 그래서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당신께 전갈을 하러 왔던것이오.]

흑의여인이 물었다.

[어떤 전갈을 한다는 건가요?]

그녀의 음성은 맑고 고왔다. 그러나 얼음처럼 냉랭했고 털끝만큼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빨리 달려와 소저에게 한시 바삐 도망치라는 전갈을 하려고 왔소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으니 유감천만이오.]

흑의여인이 물었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흑의여인은 싸늘히 냉소하며 말했다.

[나는 내복아에게서 당신이 무공을 전혀 모른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도 이곳에 와서 시비를 걸다니 정말 간 큰 사람이로군요.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지요?]

단예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그건 나의 일이니 상관하지 마시오. 난 전갈을 했으니 소저에게 할 도리는 다 한 것이오.]

흑의여인은 싸늘히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 와서 목슴을 잃으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겠지요? 후회스럽지 않나요?]

단예는 그녀의 말속에 은근히 비웃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고 분연히 말했다.

[대장부는 일을 행함에 있어 옳고 그름을 따질 뿐이며 켤코 후회를 하지는 않소이다!]

[호 호 호, 닭 잡을 힘도 없는 사람도 대장부가 될 수 있을까요?]

단예는 급히 말했다.

[대장부가 되고 못 되는 것을 어찌 한낱 손 놀리는 재주로 판단할 수 있겠소? 무예가 비록 천하제일이라 해도 일을 처리하는 것이 치사하고 비열하다면 대장부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흑의여인은 싸늘히 웃었다.

[호 호 호, 당신이 나에게 전갈을 하려고 한 것은 이제 보니 대장부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군요. 잠시 후 저 사람들이 당신을 수백 토막 낼 텐데 그렇게 되면 수백명의 대장부가 탄생하게 되겠군요.]

평파파가 싸늘하게 소리쳤다.

[이 망할 년아, 무슨 잡소리가 그리 많으냐? 시간 그만 끌고 어서 손을 써라.]

말을 하면서 두 자루 단검을 서로 부딪치자 쨍쨍 하는 쇳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흑의여인은 싸늘히 내뱉았다.

[당신은 그 나이가 되도록 살았으니 당장 죽어도 무어 아까울 건 없겠지. 그런데 당신 주인인 왕(王)인가 뭔가 하는 계집은 어째서 친히 와서 손을 쓰지 않고 너희 종년놈들을 보내 나를 번거롭게 만드는 거냐?]

서파파가 싸늘히 대꾸했다.

[개소리 작작해라. 우리 부인께서 얼마나 존귀하신 분인데 너같이 천한 년을 상대하신단 말이냐? 너 같은 년은 우리 주인 마님을 번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 해도 크나 큰 영광이란 말이다. 그런데 네 사부는 어디로 도망쳤느냐?]

흑의여인은 날카롭게 말했다.

[사부님은 지금 너의 뒤에 계시지.]

서파파와 평파파는 깜짝 놀라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예는 그들이 모두 당황해서 속아 넘어가는 것을 보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평파파는 화를 버럭 냈다.

[곧 죽을 자식이 뭐가 좋아서 히히덕거리느냐?]

[하 하, 우스워서 웃는다.]

[우습긴 뭐가 우스워 이 미친 자식아!]

단예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하 하 하, 웃긴다. 정말 웃기는구나!]

[저런 미친 놈!]

평파파가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부었다. 서파파가 말했다.

[평파파, 그 미친 녀석을 상대해 뭘 하오? 잠시 후면 시체가 될 놈인데.]

서파파는 이어 흑의 여인에게 매섭게 쏘아붙였다.

[이년아, 너는 그 동안 강남에서 이곳까지 잘도 도망질을 쳤다만, 오늘은 우리가 다 죽는 한이 있어도 네년을 요절내고 말테다. 어서 손을 써라!]

단예는 서파파의 말투에서 그녀가 흑의여인을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방안에 있는 십여 명은 모두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감히먼저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평파파는 손에 쌍검을 들고 흑의여인의 뒤로 몇 번이나 접근했다가는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물러나곤 했다.

흑의여인은 불쑥 물었다.

[이봐요, 전갈하러 오신 양반, 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데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나요?]

단예는 잠시 생각한 후대답했다.

[흑매괴가 밖에 있으니 포위망을 뚫고 나가 말을 타고 도망치도록 하시오. 말이 화살처럼 빠르니 아무도 당신을 따라가지 못할거요.]

[그럼 당신은요?]

단예는 담담하게 말했다.

[운이 좋으면 혹시 살아날지도 모르지요.]

[호 호 호, 그들은 반드시 당신을 처참한 방법으로 죽일 거예요. 마지막 남길 유언은 없나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 주겠어요.]

단예는 조용히 말했다.

[종소저가 신농방에 사로잡혀 있소. 그녀의 어머님께서 나에게 이 상자를 주면서 나의 아버님께 전해 주고 아버님께 종 소저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드리라고 하셨소. 소저께서 나를 대신해 이 물건을 우리 아버님께 전해 주면 고맙겠소.]

그는 금상자를 꺼내들고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두 자 거리에 이르자 난초 냄새 같기도 하고 사향 냄새 같기도 한 그윽한 향기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걸 느끼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흑의여인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종영은 무척 예쁜 아이지요. 당신 혹시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닌가요?]

단예는 무겁게 대답했다.

[아니오. 나는 그저 누이동생같이 생각할 뿐이오. 그녀에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고 있소이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 동굴 속의 옥미녀상이 떠올랐다. 문득 흑의여인은 뒤로 왼팔을 뻗어 금상자를 받앗다. 단예는 그녀가 손에 명주실로 짠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서 살결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저의 아버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바로.....]

[천천히 말씀하세요.]

흑의여인은 불쑥 말하며 금상자를 천천히 품안에 넣었다. 단예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흑의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축(丑)노인,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겠어요. 이곳을 떠나세요.]

한 옆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장검을 들고 서 있었다.

[금방 무어라고 했소?]

노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두려워서 그러는 것인지 분노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흑의여인은 나직하고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왕가 계집의 부하가 아니잖아요? 저 두 노파에게 끌려서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것뿐이죠.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은 내게 퍽 잘 해 주엇어요. 저 못된 것들이 복면을 벗기고 내 얼굴을 보려고 했을 때 당신은 계속해서 말렸어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 어서 꺼져요.]

노인은 파랗게 질렸다. 손에 쳐들었던 장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단예는 점잖게 충고했다.

[소저, 노인에게 나가시라고 해야지 꺼지라니요?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오.]

축씨라는 노인은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잠시 망설이더니 쨍그랑! 하고 장검을 바닥에 떨구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몸이 막 문지방을 넘으려는 순간 평파파의 손이 흔들렸다. 그녀의 수중에 있던 단도가 유성처럼 날아가 노인의 등에 퍽! 꽂혔다.

[흐윽!]

노인은 허파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더니 몸이 뻣뻣이 굳은 채 나무토막처럼 땅 위로 나뒹굴었다. 즉사였다. 단예는 크게 분노해서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야! 이 미친 뚱뚱보 할망구야! 너는 정말 악독하구나!]

평파파는 허리춤에서 또 하나의 단도를 꺼내 두 손에 나누어 잡고 흑의 여인을 주시할 뿐 단예가 하는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들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흑의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의 명령만 떨어지면 십여 명의 무기가 일제히 흑의여인의 몸 위에 떨어질 판이다. 단예가 버럭 소리쳤다.

[비겁하구나! 여러 명이 맨손의 여인을 공격하려고 하다니!]

그는 흑의여인에게 바싹 다가가 그녀의 등에 자기의 등을 맞대고 외쳤다.

[감히 어느 누가 손을 쓰겠느냐?]

그는 무공은 몰랐지만 정기가 늠름하고 기상이 씩씩하여 저절로 위엄이 우러나오고 있었다. 서파파는 단예가 무공이 상당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와 같은 짓을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일에 꼭 끼여들 생각인가?]

단예는 서파파의 어조가 약간 겸손해진 것을 알았으나 여전히 강경하게 맞섰다.

[물론이오. 나는 숫자의 우세를 이용하여 약한 자를 핍박하는 걸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할 수는 없소.]

서파파는 냉랭하게 물었다.

[너는 저 여자와 매우 깊은 사이인가 보지?]

[천만에!]

단예는 말을 자르고 흑의여인에게 말했다.

[소저는 빨리 도망치시오. 내가 이들을 막아보겠소.]

흑의여인이 나직히 물었다.

[당신은 나를 위해 목슴을 잃어도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단예가 말했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소.]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흑의여인의 물음에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죽음은 두렵소. 하지만....하지만.....]

흑의여인이 갑자기 높은 음성으로 날카롭게 외쳤다.

[당신은 무공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영웅호걸인 체하는 거에요?]

그리고 오른손을 홱 뒤로 뻗치자 두 가닥의 가죽 채찍이 날아와 단예의 두 손과 두 다리에 감겼다. 서파파는 그녀가 단예를 공격하자 그만 어리둥절했다. 순간 흑의여인은 다시 왼손을 번뜩였다. 단예는 좌우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어 무기가 어지럽게 번뜩였다. 별안간 방안을 밝히던 촛불이 일제히 꺼졌고 눈 앞이 캄캄해졌으며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떠오르는 것을 느겼다. 이 갑작스런 변화는 너무나 빠른 순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사방에서 호통소리가 다투어 일어났다.

[그 계집이 도망친다. 잡아라!]

[그년의 독화살을 조심해라!]

[비조를 날려라! 어서 빨리!]

이어 쨍그랑! 창! 창! 하는 금속성이 밤하늘에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다음 순간 촉급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제서야 단예는 자신이 흑매괴의 등 위에 타고 있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손과 발이 묶여 있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귓가로 시원한 바람이 소리를 내어 지나가고 고함소리는 점점 멀어져 마침내 들리지 않았다. 단예의 코로 은은한 난초 향기가 스며들었다. 흑의여인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였다. 흑의여인은 그를 앞에 앉히고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말이 달리자 등 뒤로 여인의 봉긋하고 부드러운 젖가슴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단예는 가볍고 평온한 말 등에서 여인의 체향을 맡으며 등을 기대고 있으려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단예는 입을 열었다.

[소저, 당신은 정말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군요. 이제 나를 내려주시오.]

그의 팔과 다리는 여전히 가죽 채찍에 의해 꽁꽁 묶여 있어 은근히 아팠다.

[소저, 나를 풀어주시오.]

갑자기 단예의 왼쪽 뺨에 철썩! 하는 소리가 나며 눈 앞에 별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흑의여인이 호되게 그의 따귀를 갈긴 것이었다. 흑의여인의 얼음같이 차디찬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묻지 않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단예는 영문도 모르고 따귀를 얻어맞자 크게 화가 났다.

[왜 때리는 거요?]

철썩! 철썩!

단예의 고개가 다시 좌우로 한 번씩 왔다갔다 했다. 이번의 따귀는 너무나 호되게 후려친 것이었기 따문에 뺨이 얼얼하고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흑의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만 두 개의 눈만 내놓고 있었다. 눈동자는 흑진주처럼 검고 그윽하고 맑아 무척 아름다왔다. 하지만 인간의 오욕칠정을 배제한 듯 조용하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섬뜩할 정도로 고요하고 차가운 눈길에 단예는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말았다. 갑자기 흑의여인은 단예를 품에서 확 밀어내더니 말 잔등에 다리를 위로 하고 머리를 땅으로 한 채 매달리게 했다. 말이 달리자 단예는 흑의여인이 그토록 괴팍하고 냉정할 줄은 몰랐으므로 크게 당황했고 또한 화가 났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파파가 당신을 가리켜 천하다고 하더니 정말 못됐구나!]

흑의여인은 단예를 끌어올려 다시 대여섯 번 따귀를 후려쳤다. 단예는 머리가 띵하게 울려왔고 입에서는 실날 같은 피를 흘렸다. 몽롱한 의식 속으로 흑의여인의 차가운 일갈이 들려왔다.

[남자란 더러운 동물이다. 꺼져 버려!]

단예의 몸을 묶었던 가죽채찍이 풀려나갔다. 이어서 흑의여인은 단예를 번쩍 들어 홱 집어던지고는 유유히 말을 달려 사라졌다. 단예는 땅에 맥없이 나뒹굴었다. 온 몸뚱이가 토막토막 끊어지듯 아파와 그는 땅 위를 뒹굴며 신음을 질렀다. 한참이 지남 후에야 그는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땅위에 뒹구는 바람에 무릅과 팔꿈치의 옷이 찢겨지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단예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구나! 흑의여인의 성질이 그토록 괴퍅하고 야만적일 줄이야!)

그는 쭈그리고 앉아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아버님을 만날 시간은 없었다. 단장산의 독이 이틀 후면 발작을 하여 죽게 될 것이다. 그는 처연히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죽을 목슴이니 종 소저와 같이 죽도록 하자.]

그는 다리를 쩔뚝거리며 신농방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난창강 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수십 리를 걷자 머동이 훤히 터오기 시작했다. 그는 고단한 나머지 커다란 피자나무 맡에 벌렁드러누워 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튿날 오후, 그는 어느 조그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조그만 주막집에 들어갔다.

걸상에 앉자 뚫어진 바지 틈새로 두 무릎이 드러났다. 그리고 엉덩이에도 구멍이 뚫려 있어 걸상에 앉자 서늘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릎과 등을 보이는 건 그래도 괜찮지만 엉덩이를 드러낸다는건 실로 꼴불견이다. 방법을 강구해야겠구나.)

식당 주인이 밥과 찬을 가져왔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터라 그는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세 번째 밥그릇을 막 비웠을 때 문 밖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저기 음식점이 있군. 사매, 배고픈데 요기를 하고 갑시다.]

그러자 여인의 교태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자나깨나 밥과 여자뿐이군요.]

단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무량파에서 도망쳐 나온 우광호와 갈사매였던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저들이 나를 보면 죽이려 할테지.)

단예는 등을 문 쪽으로 돌리고 그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게했다. 우광호의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하 하 하, 틀렸어. 나는 오직 당신을 많이 먹기 위해서 밥을 먹을 뿐이지, 밥과 여자를 동등하게 보지는 않아.]

[이 양반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무슨 음식인 줄 알아요, 먹게?]

[흐흐,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천하제일의 음식이지.]

우광호는 음탕한 말을 지껄이며 단예의 바로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주인장, 술과 밥을 좀 주시오. 그리고 소고기도 좀 주시고요. 요즘은 체력의 소모가 많아서.....]

[아이, 당신은 다른 손님이 있는 데서 그렇게 적나라한 말을 하고 그래요?]

여인이 응석부리듯 말하자 우광호는 크게 말했다.

[하하, 이 집엔 다 떨어진 옷을 걸친 거지밖에 없는데 뭘 그래? 엇! 어디서 본 듯한 뒷모습인데?]

단예는 우광호가 자기를 발견한 것을 알고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갑자기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턱 잡더니 우왁스럽게 뒤로 돌렸다. 이렇게 되자 단예와 우광호는 정면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단예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군요. 축하합니다.]

우광호는 소리내어 웃더니 갈사매를 쳐다보았다. 단예가 그의 시선을 따라 여인을 바라보니 갈사매라는 여인은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에 왼쪽 뺨에 몇 개의 얽은 자국이 있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갈사매의 얼굴엔 싸늘한 살기가 덮여 있었다. 그녀는 차분차분 입을 열었다.

[똑똑히 말해! 너는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아났지? 그리고 이 부근에서 무량파 사람들을 보진 못했느냐?]

단예는 이 위험을 어떻게 넘겨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음, 이 여자의 말을 들어보니 무량파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구나. 그렇다면 겁을 주어 빨리 달아나도록 만들어야지.)

단예는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금 무량파의 네 제자가 손에 장검을 들고 음식점 문 앞을 총총히 지나서 동쪽으로 가는 걸 보았소. 아마 누군가를 쫓아가는 듯하더군요.]

우광호는 얼굴색이 파랗게 질리며 벌떡 일어났다.

[갈사매, 빨리 떠납시다!]

갈사매는 눈짓으로 단예를 가리키더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것은 단예를 죽여 없애라는 신호였다. 우광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리의 장검을 창! 하고 뽑았다. 뽑았다고 보인 순간 장검은 어느새 단예의 목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단예는 이제는 정말 죽었구나 하고 놀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쨍!

별안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일며 우광호의 장검은 멀리 튕겨지고 말았다. 이어 칙! 하는 소리와 함께 우광호의 몸이 대뜸 경직되며 뒤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단예가 놀라 눈을 떴을 때 다시 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갈사매가 앞가슴을 움켜쥐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어 눈을 허옇게 뒤집으며 그대로 죽어 자빠지는 게 아닌가! 단예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니 우광호의 뒤통수에는 검고 작은 화살이 깊숙이 박혀 있었고 갈사매의 가슴 한복판에도 같은 모양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단예는 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히히힝! 하는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예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흑매괴!]

문 밖에는 흑의여인이 흑매괴를 타고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단예는 버럭 소리쳤다.

[소저, 나를 구해 주어 고맙소!]

그는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흑의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말을 달려 갔다. 단예는 다시 소리쳤다.

[소저께서 두 대의 화살을 쏘지 않았더라면 나는 죽고 말았을 것이오.]

흑의여인은 그의 외침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조용히 말 위에 앉아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이때 식당 주인이 달려 나오며 단예를 불렀다.

[상공, 상공, 큰일났어요!]

다예는 그제서야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주인에게 말했다.

[하마터면 밥값을 주지 않을 뻔했군요.]

그는 품속에서 돈을 꺼내려고 하는데 흑의여인은 저만치 가고 있지 않은가! 단예는 흑매괴를 향해 뛰어가며 식당 주인에게 소리쳤다.

[밥값은 시체의 호주머니를 뒤져 보면 있을 겁니다. 나는 바빠서 줄 시간이 없어요!]

단예는 헐레벌떡 뛰어 흑매괴에게 다가갔다. 뛰어가면서 그는 두 손을 모아 절을 하고 말했다.

[소저,이왕 좋은 일 하는 거 끝까지 돌보아 주시오. 내친김에 종소저를 구해주면 고맙겠소.]

흑의여인은 냉랭하게 말했다.

[종영은 내 친구예요. 그러지 않아도 구하려던 참이니 상관 말아요. 나는 남이 부탁하는 걸 제일 싫어해요. 당신이 한 번만 더 구해달라고 하면 나는 그녀를 구하지 않을 거예요.]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좋소. 난 부탁하지 않겠소.]

[그러나 이미 부탁을 한걸요.]

여인의 말에 단예는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말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것은 없었던 일로 합시다.]

여인은 냉랭히 말했다.

[흫! 당신은 사내 대장부가 아닌가요?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있어요?]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대장부라는 말을 한 것을 꼬투리잡으려 하는구나. 종소저를 구하기 위해서는 대장부 노릇을 그만둘 수밖에 없어.)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나는 대장부가 아니오. 소저 덕분에 목슴을 건진 가엾은 벌레에 불과하지요.]

여인은 킥 하고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얼음처럼 차가운 눈길로 단예를 한 차례 훑어보고 말했다.

[종영이 그렇게도 좋으세요? 어젯밤엔 죽는 한이 있어도 대장부 노릇을 하려고 하더니 이번에는 가엾은 벌레가 되어가면서까지 그녀를 구하려 하는 군요. 흥! 나는 그녀를 구하지 않을래요.]

단예는 다급해졌다.

[그런 법이 어디 있소?]

흑의여인은 비웃듯 말했다.

[나의 사부님은 이 세상 남자들은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남자의 말은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급히 말했다.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소. 예를 들면....소저의 아버님은 매우 좋은 사람이 아닙니까?]

흑의여인은 내쏘듯 말했다.

[사부님은 나의 아버님이야말로 나쁜 남자라고 햐셨어요.]

갑자기 길 옆의 숲 속에서 네 사람이 튀어나와 흑매괴의 앞을 가로막았다. 흑매괴는 돌연한 변화에 크게 부르짖으며 뒤로 몇 걸을 물러났다.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여인들이었다. 하나같이 녹색의 바람막이를 걸쳤고 손에는 허옇게 날이 선 갈코리를 들고 있었다.

[너희들은 바로 무량파에서 도망친 우광호와 갈사매렷다?]

가운데 여인이 뾰족한 음성으로 물었다. 단예는 급히 대답했다.

[아니오. 우광호와 갈사매는 이미 그렇고 그렇게 되었소.]

여인은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게 되다니 무슨 소리냐? 너희들은 일남일녀이니 우광호와 갈사매가 틀림없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무얼 모르는군. 갈사매는 살짝 곰보인데 이 소저는 곰보가 아니란 말이오.]

여인은 말 위에 탄 흑의여인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복면을 벗어라!]

흑의여인의 손이 위로 쳐들리는 순간 그녀의 팔소매에서 네 대의 화살이 쏘아졌다. 칙칙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여인이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고 나머지 두 여인은 갈코리로 화살을 막아냈다. 흑의여인의 화살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허를 노린 기습이어서 피하거나 막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두 여인은 갈코리를 휘둘러 화살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흑의여인은 말 위에서 훌쩍 날아오르며 두 여인에게로 덮쳐갔다. 서슬 퍼런 한 자루 장검이 흑의여인의 손에서 번쩍번쩍움직였다.

[어림없다!]

두 여인은 갈코리를 휘두르며 흑의여인과 불붙듯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일 대 이의 싸움은 날카롭고도 치열했다. 병기는 연신 부딪히며 고막을 찢는 금속성을 냈고 그때마다 불똥이 어지럽게 튀었다. 갑자기 한 여인이 몸을 홱 돌리며 단예를 향해 공격해왔다. 단예는 질겁하여 흑매괴의 배 밑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허리를 숙여 말의 배 밑으로 고개를 들이밀고는 갈코리를 내찔렀다. 단예는 뒤로 벌렁 드러누웠고 갈코리는 그의 머리 위를 쌩! 하고 스쳐갔다.

[으악!]

갑자기 그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말의 배 밑에 엎어져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경련이 멎으며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뒤통수엔 흑의여인이 쏜 화살이 깊숙히 박혀 있었다.

흑의여인이 화살을 쏘느라고 한눈을 파는 찰나 남은 한 여인이 무서운 속도로 갈코리를 휘둘렀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흑의 여인의 왼팔 소맷자락이 그대로 찢겨 나가고 연뿌리 같은 흰 팔이 드러나게 되었다. 갈코리는 그녀의 팔을 깊숙히 헤치고 나갔고 금세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적시고 말았다. 흑의여인은 화가 나 앙칼지게 외치며 검을 매섭게 휘두르며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갈코리를 쓰는 여인의 무예는 절묘하기 이를 데 없어 순식간에 흑의여인의 공격을 해소시켜 버리고 오히려 반격에 나섰다. 흑의여인의 왼쪽 허벅지가 다시 갈코리에 뜯겨 나가 선혈이 땅바닥을 질펀하게 만들었다. 흑의여인이 연속으로 세 대의 화살을 쏘았으나 갈코리를 쓰는 여인은 여유 있게 막아냈다. 갑자기 그 여인이 부르짖었다.

[너는 갈사매가 아니구나! 너의 검법은 결코 무량검법이 아니다!]

흑의여인은 아무 대답도 않고 장검을 번뜩이며 공격할 뿐이었다. 돌연 흑의여인은 아!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장검이 그 여인의 두 갈코리 사이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만 것이었다. 여인이 갈코리를 잡아당기자 흑의여인은 그만 장검을 놓치고 말았다. 갈코리를 쓰는 여인은 차갑게 웃으며 흑의여인을 향해 살기 어린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흑의여인은 이리저리 피할 뿐 반격할 겨를이 없다. 단예는 흑의여인이 위태롭게 되자 몹시 다급해졌다. 급한 김에 시체의 다리를 잡고 빙글 돌려 갈코리든 여인을 향해 집어던졌다.

여인은 깜짝 놀랐다. 자기에게 덮쳐드는 것은 바로 자기 언니의 얼굴이 아닌가? 껑충 뛰어 피하는 순간 푹! 하며 화살 한 대가 아랫배에 꽂히고 말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추렸고 갈코리는 땅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칙! 하며 다시 두 대의 화살이 날아와 여인의 목젖과 미간에 꽂혔다.

[끄으윽!]

여인은 단말마의 신음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때 흑의여인도 왼쪽 무릅을 땅에 꿇으며 신음소리를 냈다. 단예는 급히쓰러진 시체의 옷을 찢어 흑의여인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흑의여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 계집애들은 어디서 왔길래 이토록 무공이 뛰어날까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요.]

단예라고 알 리 없다.

[나도 모르겠소.]

흑의여인은 단예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자 그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부드럽게 말했다.

[이봐요, 시체를 숲에 버리고 와요.]

단예는 시체를 모두 숲 속에 끌어다 쌓아 놓고 중얼거렸다.

[당신들을 묻어 주어야 예의겠지만 이곳에는 삽이 없군요. 어쨋든 내세에서는 사람을 잘못 보아 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기를 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한 후에 흑의여인에게로 돌아왔다.

단예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왔다. 그는 세개의 바람막이를 벗겨 가지고 온 것이었다.

흑의여인이 물었다.

[그건 뭐하러 벗겨 오는 거죠?]

단예는 얼굴을 붉혔다.

[사실 내 옷이 다 해져서 엉덩이가 나오기에....좀 가려야 할것 같아서요.]

단예는 바람막이를 걸쳤다. 흑의여인이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렸다.

[꼭 여자같이 곱상하네요. 나머지 바람막이 하나를 머리에 뒤집어 써 봐요. 그러면 누가 봐도 여자인 줄 알거고 우리를 일남일녀라고 보고 시비를 걸지도 않을거예요.]

[그러지요.]

단예가 또 하나의 바람막이를 머리에 뒤집어쓰자 흑의여인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여인의 음성과 행동을 보면 나이 어린 소녀인 게 분명한데 어째서 마음씨는 그토록 악랄할까?)

흑의여인은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추고 바람막이 하나를 걸쳤다. 바람막이는 가슴 부위에 한 마리의 검은 독수리가 수놓아져 있는데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하고 흉맹했다. 단예는 나직히 말했다.

[아가씨들이 옷에다가 꽃이나 나비를 수놓을 일이지 이렇게 흉맹스런 독수리를 수놓고 다닐게 뭐람! 그러니까 그토록 싸우기를 좋아하지.]

흑의여인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당신 지금 나를 빗대어 말하는 거 아녜요?]

단예는 금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가 어찌 소저를 비웃겠소.]

여인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도대체 안 하는 거예요? 아니면 감히 못하는 거예요?]

[감히 비웃지 못하는 것이지요.]

흑의여인은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단예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상처는 아프지 않으시오?]

[아프지 않은 상처도 있나요? 내가 당신 몸에 두어 번 칼질을 해볼까요? 아픈가 안 아픈가 보게.]

[아....아니 그럴 필요는 없소이다.]

흑의여인은 잠시 동안 단예를 빤히 바라보다가 나직히 물었다.

[당신은 정말 내 상처에 관심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종영을 구해달라고 아부를 하고 있는 건가요?]

단예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흑매괴의 등 위에 올라탔다.

[이봐요, 어서 말에 오르지 않고 뭘 멍하니 서 있는 거예요? 종영을 구하기 싫은가요?]

단예는 급히 그녀의 뒤에 올라앉았다. 흑매괴는 질풍처럼 내닫기 시작했다. 흑의여인은 단예의 가슴에 은근히 기대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금상자 속의 사주단자는 누구 것이죠?]

아마도 열어 본 모양이었다. 단예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오.]

흑의여인은 더욱더 몸을 기대며 물었다.

[혹시 종영의 것이 아닌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흑의여인은 고개를 돌려 단예를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와 여인의 체취가 콧속으로 파고 들었다. 단예는 갑자기 심장의 박동이 빠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흑의여인의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나를 속이려 하지 말아요. 종부인은 종영과 그대를 짝지워 주려고 그걸 당신 아버님께 보내는 게 틀림없어요.]

[아마도 그럴 리 없을 겁니다.]

단예는 부인했다. 흑의여인은 계속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여 말했다.

[당신의 이름이 단예라고 했지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여인은 다시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나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죠?]

단예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빙그레 웃고 물었다.

[소저의 아리따운 이름은 어떻게 되십니까? 몹시 궁금하군요.]

흑의여인이 킥 하고 웃었다.

[말하지 않을래요. 종영을 구해 주면 그 계집애는 틀리없이 당신에게 내 이름을 말해 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때 귀를 막고 듣지 말아야 해요.알겠어요?]

단예는 쓴웃음 지었다.

[알았소.]

[어디 두고 봐야지. 내 말을 잘 듣는지.]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마치 보석을 뿌려놓은 듯 제각기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산굽이를 돌자 멀리 웅장한 건물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단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은 무량파의 본거지 검호궁이오. 신농방은 반대편으로 조금만 가면 있지요. 우리 살며시 들어가서 종소저를 납치해 도망칩시다.]

[흥!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보채지 말아요. 말끝마다 종소저 종소저 하는 꼴이라니!]

단예는 얼굴을 붉혔다. 신농방 있는 부근에서 모닥불을 피워져 있고 이십여 명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흑매괴가가까이 다가가자 모두 일어서서 무기를 뽑아들었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멈춰라! 너희들은 누구냐?]

흑의여인은 모닥불로 더욱 가까이 말을 몰면서 싸늘히 말했다.

[너희 방주 사공현은 어디 있느냐? 내가 보겠다고 전해라.]

모닥불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흑의여인과 단예의 모습을 비추었다. 녹색의 바람막이가 불빛을 받아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갑자기 질문을 던졌던 자가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렸다.

[신농방의 졸개 윤후덕(尹後德)이 삼가 영취궁의 거룩하신 사자(使者)님을 영접하옵니다.]

그러자 털썩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신농방의 무사들이 땅에 이마를 찧으며 엎드렸다. 단예는 그제서야 그들이 걸친 바람막이가 영취궁 사람들이 입는 옷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엎드리는 것을 보자 우습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일이 묘하게 꼬이는구나!)

 

6. 하늘에는 달, 땅에는 피

흑의여인은 그런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다.

[당신들은 지금 뭐하는 거예요? 나보고 영취.....]

단예가 손을 뻗어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했다.

[빨리 사공현 방주를 데려오시오.]

[예, 사자님!]

한 사람이 일어서서 몇 걸음 뒷걸음질치더니 그제서야 몸을 돌려서는 산골짜기 안으로 뛰어갔다. 단예는 흑의여인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

[신농방은 영취궁 밑에 속해 있는 방파입니다. 신농방에서는 우리를 영취궁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이들을 속여서 종소저를 구출합시다.]

흑의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사공현이 멀리서 뛰어오며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속하 사공현, 삼가 거룩하신 사자님을 영접하는 바입니다.]

사공현은 가까이 다가온 단예와 흑의여인을 향해 꿇어 앉아 큰절을 하고 입을 열었다.

[신농방의 사공현이 삼가 영취궁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오며,아울러 천산동모 궁주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단예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천산동모가 무슨 황제라도 되는 줄 아는가 보지? 만수무강이다 무슨 개소리람. 꼴 사납게시리!)

그러나 그는 여자 음성으로 말했다.

[일어나시오.]

사공현은 공손히 대답하고는 이어 두 번 큰 절을 올리고 난 후 일어섰다.

이때 그의 뒤에는 신농방의 무사들이 꿇어앉아 있었다. 단예는 말했다.

[종영을 이리 데려오시오, 빨리.]

두 명의 신농방 제자가 방주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나는 듯 골짜기로 달려가더니 잠시 후 종영을 데리고 왔다.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묶은 밧줄을 풀어요.]

[예.]

사공현은 공손히 대답하고 칼을 빼어 종영의 손과 발을 묶었던 밧줄을 잘랐다. 종영은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단예는 다시 가느다란 음성으로 말했다.

[종영, 이리 와요.]

종영은 제 자리에 선 채 단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군데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거죠?]

단예는 바람막이로 얼굴을 가리고 누만 빼꼼히 내놓고 있었다. 그러니 종영이 알 수가 있었겠는가?

사공현이 엄숙하게 말했다.

[종영, 네가 감히 거룩하신 사자님께 반항하느냐?]

종영은 속으로 생각해 본다.

(사자님이건 나발이건 어쨌든 나를 풀어 주었으니 당신의 말을 듣기로 하지.)

종영은 묵묵히 단예에게 다가왔다. 단예는 종영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사공현에게 말했다.

[단장산의 해약을 가져오시오.]

사공현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물었다.

[천산동모님께서 그까짓 약은 왜 찾으시지요?]

단예는 화가 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내말을 거역하는 거요?]

[아....아닙니다. 속하가 어찌 감히....나의 약상자를 가져오너라. 빨리 빨리.]

신농방의 제자가 또다시 골짜기까지 뛰어가 약상자를 가져왔다. 사공현은 상자 속에서 한 개의 약병을 꺼내어 단예에게 공손히 바쳤다.

[거룩하신 사자님, 이해약을 삼 일 동안 아침마다 복용하면 되옵니다.]

단예는 크게 기뻐 내심 쾌재를 부르며 약병을 받아들었다. 종영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봐요, 사공방주, 해약을 모두 주어 버리면 나중에 단예 오라버니는 어떡해요?]

단예는 종영을 끌어당겨 귓엣말로 속삭였다.

[이 멍청한 아가씨야, 내가 누군지 모르나?]

종영은 깜짝 놀라 단예를 올려다보고는 기뻐서 앗! 하는 비명을 질렀다.

이때 사공현이 꿇어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거룩하신 사자님께 말씀올립니다. 속하는 섬전초에 물려 죽게 되었사오니 은덕을 베푸시어 천산동모님의 해독약을 조금만 내려주소서.]

단예는 만약 그에게 해독약을 주지 않았다가는 목슴을 걸고 덤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흑의여인에게 말했다.

[언니, 궁주님의 해약이 있으면 좀 나누어 주새요.]

흑의여인은 시치미를 떼고 품속에서 자기로 된 약병 하나를 꺼냈다.

[손을 벌리시오.]

[예, 예.]

사공현은 굽신거리며 두 손바닥을 펴서 머리 위로 올렸다. 흑의여인은 손바닥 위에 녹색 가루약을 약간 부어 주며 말했다.

[약간만 복용하면 즉시 해독이 될거요.]

사공현은 가루약에서 짙은 향기가 풍기자 크게 기뻐 연신 고맙다고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단예가 말했다.

[언니, 이제 그만 가요.]

[응.]

흑매괴가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사공현은 떠나가는 세 사람을 보고는 땅에 꿇어 엎드렸다.

[신농방은 삼가 두 분 거룩하신 사자님을 전송하오며 아울러 궁주님의 만수무강을 비옵나이다.]

단예와 흑의여인 그리고 종영 세 사람은 수십 장을 나아갔다. 이제 신농방의 기척은 들을 수가 없었다. 종영은 섬전초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섬전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종영이 흑의여인을 보고 말했다.

[목(木)언니, 저를 구해줘서 고마와요.]

[그까짓 것을 가지고 무얼.]

흑의 여인은 차갑게 말했다. 종영은 갑자기 단예에게 뛰어들며 그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고 부르짖었다.

[단 공자님, 정말 저를 잊지 않고 구해주셨군요!]

흑의여인은 재빨리 종영을 떠밀며 말했다.

[이러지 마!]

종영은 깜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흑의여인이 불쑥 말했다.

[이봐요, 단예, 나의 이름은 종영의 입을 빌어 밝힐 것 없이 내 스스로 알려주겠어요. 나는 목완청(木婉淸)이라고 해요.]

단예는 급히 말했다.

[정말 좋은이름이군요!]

종영은 새침해져서 더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목완청은 곁눈질로 종영을 흘겨보더니 차갑게 물었다.

[종영, 너는 이월 초닷새가 생일이지?]

종영은 휘파람을 그치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별걸 다 알고 있네요?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아냈죠?]

목완청은 갑자기 단예를 노려보며 부르짖었다.

[단예, 그러고도 그 사주단자가 종영의 것이 아니라고 할테냐?]

이어 말고삐를 돌려서 단예를 깔아뭉개려고 했다. 이때였다. 갑자기 서북쪽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동쪽에서도 손뼉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완청은 질주하던 말의 기세를 우뚝 멈추게 하고는 싸늘히 냉소했다.

[귀신 같은 것들이 또 찾아왔군!]

문득 한 인영이 맞은편에서 날아왔다. 그는 목쉰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 계집년, 네까짓 게 도망쳐 봤자 부처님 손바닥의 원숭이지.]

바로 서파파였다. 그녀는 어느새 목완청 앞에 표표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뒤에서도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예가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평파파가 아닌가! 그녀는 두 손에 각기 한자루씩의 시퍼렇게 날이 선 단도를 움켜쥐고 있었다. 곧이어 좌우에서 두 사람이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왼편은 흰 수염의 노인으로 손에는 한 자루의 철산(鐵산)을 빗겨 들고 있었고 오른쪽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 사내였는데 손에 장검을 들고 있었다. 단예는 어렴풋이 그들 두 사람이 목완청을 포위 공격할 때 참여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목완청이 냉소를 날렸다.

[당신들은 정말 집념이 강하군. 그리고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재간이 제법인걸?]

평파파가 말을 받았다.

[네 년이 설사 하늘 끝까지 도망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너를 추격할 수 있어!]

목완청은 찍! 하고 한 대의 화살을 쏘았다. 검을 들고 있던 사내는 재빨리 이를 발견하고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서 떨어뜨렸다. 이때 목완청은 말 안장에서 몸을 붕 날려 노인에게 덮쳐들었다.

노인은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모습이 나이가 적지 않은 듯했으나 몸동작은 무척 빨랐다. 오른손을 흔들며 쇠도리깨로 목완청을 후려치려고 한다.

목완청은 몸이 땅에 닿기 전에 왼쪽 발로 쇠도리깨의 자루를 딛는 동시에 곧장 검을 뻗쳐서는 평파파를 찔러갔다. 평파파는 칼을 들어 이를 막았다. 챙! 하는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며 평파파의 단도가 두 동강 나고 말았다. 그런데 목완청의 검날은 서릿발처럼 서늘한 광채를 내뿜으며 곧장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서파파가 재빨리 철괴를 휘둘러 목완청의 등을 후려쳤다. 목완청은 홀연히 몸을 날려 한편으로 피해 버렸다. 급히 서파파의 지팡이를 피하지 않았다라면 목완청의 장검은 곧장 떨어지게 되었을 것이고 평파파는 두 쪽이 나고 말았으리라. 이 몇 번의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난 것으로 쾌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평파파는 그야말로 흉맹하기 그지 없었다. 방금 죽을 목숨을 건지고서도 전혀 두려움을 나타내지 않고 재차 목완청에게 '휙휙휙!'하니 세번이나 칼을 휘둘렀다. 목완청은 급히 피했다. 바로 이때 서파파와 두 남자가 동시에 공격을 해왔다. 목완청은 검광을 휙 뿌리치며 네 사람의 포위공격 에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맞서 싸웠다.

이때 종영은 싸움권 밖에서 단예에게 손짓을 하며 불렀다.

[단 오라버니, 빨리 와요.]

단예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왜 그러오.]

종영은 말했다.

[우리 빨리 떠나요.]

단예는 고개를 저었다.

[목소저가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어떻게 떠날 수 있소?]

종영이 말했다.

[목언니의 재간은 엄청나게 탁월하니까 자연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

단예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그대를 구하러 왔어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녀를 버리고 간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소?]

종영은 발을 굴렀다.

[이 책벌레, 그대가 이곳에 있는다고 해서 목언니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아아! 나의 섬전초가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애석하군!]

이때 서파파 등 네 사람은 목완청과 한참 싸움을 벌리고 있었다. 서파파의 철괴와 노인의 철산은 모두 무거운 무기여서 휘두를 때마다 휙휙 하는 바람소리를 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목완청은 귀를 곤두세우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러니까 단예와 종영이 주고받는 말을 모조리 들은 것이다. 이때 단예가 다시 말했다.

[종소저 먼저 가시오. 내가 만약 목소저를 저버린다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오. 만약 그녀가 적을 당해내지 못할 때 내가 옆에서 좋은 말로 권하게 된다면 대세를 만회할 수도 있을 것이오.]

종영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단 오라버니 한 목숨만 바치게 될 뿐이예요. 빨리 가요. 목언니는 결코 단 오라버니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만약 목소저가 나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오. 한나절 늦게 죽는 것도 결코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오.]

종영은 다급히 말했다.

[이 책벌레, 그대와 따져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지.]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다짜고짜 그의 팔을 잡고는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나는 가지 않겠어요! 나는 가지 않아요!]

그러나 그는 종영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질질 몇 걸음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목완청이 날카롭게 외쳤다.

[종영, 너 혼자 꺼져! 그를 데려가지 마!]

종영은 더욱 더 단예를 빨리 끌어당겼다. 별안간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종영의 머리가 흔들렸다. 한 대의 화살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꽂힌 것이다. 목완청은 호통을 내질렀다.

[다시 그 분에게 손을 댄다면 이번에는 너의 눈에 화살을 꽂겠다.]

종영은 목완청이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하는 성질인 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자기의 눈을 정말 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종영은 얼른 단예의 팔을 놓았다.

목완청은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종영, 빨리 너의 아버지와 어머님에게로 돌아가! 빨리 빨리 가란 말이야! 만약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나는 세 대의 화살로 너를 죽이겠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려 잇따라 자기의 몸 위에 떨어지는 무기들을 막았다.

종영은 감히 그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단예에게 말했다.

[단 오라버니 그럼 조심해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질풍과 같이 몸을 날려서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목완청은 종영을 쫓아 보낸 후 네 사람 사이를 이리저리 춤추듯 돌아 다녔다. 그러니 자연 갈코리에 입은 다리의 상처가 점점 아파왔다. 검초를 갑자기 변화시켜 여러 줄기 검광을 유성처럼 뿜어내었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검초였다. 갑자기 그 노인은 크게 비명을 질렀다. 옆구리에 일검을 맞은 것이다. 목완청은 '휙휙휙!' 검을 휘둘러 서파파와 검을 쓰는 사내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대뜸 검날을 휙 돌려서는 평파파를 검광 속에 가두었다. 삽시간에 평파파는 몸에 세군데의 검상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추호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호랑이처럼 목완청에게 달려들었다. 나머지 세 사람도 다시 몸을 돌려서는 공격을 해왔다. 평파파는 몸을 뒹굴어 목완청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른손 단도로 그녀의 다리를 쑤셔들었다. 목완청이 발을 들어 걷어차자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곤두박질쳤다. 바로 이때 서파파 의 철괴가 바싹 그녀의 미간을 찍어 들어갔다. 목완청은 신속하게 장검을 회전시키면서 철괴를 밀어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서파파의 가슴팍을 노리고 찔러갔다. 서파파는 비스듬히 몸을 날려 피하더니 지팡이를 비껴들고 목완청의 장검을 막아냈다. 목완청이 짧게 기합을 지르면서 몇 초식을 변화시키려 할 때였다. 별안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에 급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본래 그 노인은 상처를 입은 후 철산을 휘두를 수 없게 되자 강추(剛錐)를 뽑아들고는 재차 달려 들어서는 빈틈을 타 그녀의 어깨를 찔렀던 것이다. 그순간 목완청은 홱 몸을 돌리면서 손을 칼날처럼 세워 그 노인의 안면을 내리찍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문드러져서는 벌렁 죽어 자빠졌다. 이때 서파파가 다시 달려들어 공격을 가해왔다. 그리고 평파파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계집년은 상처를 입었다. 사로잡을 생각은 아예 말고 죽여 버리자!]

단예는 목완청이 상처를 입게 되자 속으로 크게 초조해졌다. 그는 지난번처럼 달려가 한구의 시체를 안아 들었다. 그러나 네 사람이 서로 돌아가면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다급한 김에 그는 자기가 걸치고있던 두루마기를 벗어 들고는 평파파에게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면서 그 바람막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 바람막이로 평파파의 얼굴을 덮어 씌우듯 던졌다. 평파파는 갑자기 눈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깜짝 놀라서 급히 손을 뻗어 그 바람막이를 잡아당기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손에 아직도 단도가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푹!'하며 자기의 얼굴을 찔렀고 돼지멱따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게 되었다.

목완청은 왼쪽에 박혀 있는 강추를 미처 뽑을 겨를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서파파에게 급히 두 검을 내찔렀다. 그리고는 검을 쓰는 사내에게 일검을 찔렀다. 이 장검의 기세는 오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파파의 오른쪽 뺨은 칼날이 깊숙히 긋고 지나가자 주르륵 하고 선혈이 어졌고, 검을 쓰는 사내의 가슴팍은 대각선으로 검날에 스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입은 상처가 가볍기는 했으나 검에 찔린 부위는 급소였다. 깜짝 놀란 나머지 옆으로 몸을 날려서는 손을 뻗어 상처를 감쌌다. 목완청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두 사람을 죽이지 못해 애석하구나!)

그리고 숨을 들이킨 다음 드높이 휘파람을 불었다.

흑매괴가 달려들었다. 목완청은 훌쩍 몸을 날려 흑매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단예의 뒷덜미를 붙잡고는 말등으로 끌어올렸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은 질풍같이 내달았다. 십여장을 달려갔을 때다. 서쪽 숲 속에서 일제히 고함소리가 들리면서 십여 명이 달려나와 길을 막는 것이 아닌가? 중앙에 있던 체구 우람한 노인이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내지른다.

[이 계집년! 노부가 이곳에서 너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즉시 손을 뻗쳐 흑매괴의 고삐를 잡으려고 했다. 목완청은 오른손을 살짝 쳐들었다. 찍찍! 하는 소리가 년달아 이는 가운데 세 개의 화살이 격출되었다. 세 사람이 화살에 맞고 즉시 쓰러졌다. 노인은 어리둥절해졌다. 이 틈에 목완청이 고삐를 뿌리치자 흑매괴는 별안간 허공으로 높이 떠오르더니 사람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그녀의 화살이 두려워 들고 있는 무기로 자기 자신을 지킬 뿐 제대로 쫓아 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말을 탄 사람과는 차츰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다투어 욕지거리를 했다.

[이 돼지같은 계집년, 또 뺑소니를 쳤구나!]

[하늘 끝까지 도망친다 하더라도 너를 잡아 살을 발라 놓겠다!]

[모두들 뒤쫓아 가자꾸나!]

목완청은 흑매괴가 산 속에서 마구 달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느덧 그들은 산등성이 위에 오르게 되었다. 앞쪽은 깊은 골짜기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부득이 말을 몰아 그 산을 내려왔으며 달리 출구를 찾으려고 애썼다. 이 무량산은 산길이 이리저리 얽히고 섥혀 있었다. 동쪽으로 돌다보면 서쪽으로 가게 되는 등 방향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별안간 앞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 말이 달려오고 있다!]

[이쪽으로 쫓아라! 계집년이 또 돌아왔다!]

목완청은 중상을 입은 뒤라 남과 다시 싸울 힘이 없었다. 그는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하여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달려나갔다. 당황하여 길을 찾고 어쩔 여유가 없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은 이미 길이 아니었다. 다행이 흑매괴는 준마였다. 바위들이 어지럽게 서있는 산비탈 길에서도 여전히 나는 듯 달려갔다. 다시 한참동안 달리게 되자 흑매괴는 갑자기 앞발을 구부렸다. 오른쪽 무릎을 바위에 부딪힌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흑매괴가 달리는 속도는 그만 늦추어지게 되었고 다리를 절룩이는 바람에 말을 타고 있던 두 사람도 덩달아 흔들리게 되었다. 단예는 속으로 초조해졌다.

[목소저 나를 말에서 내려 주시오. 혼자서는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오. 그들은 나와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으니 나를 잡는다 하더라도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목완청은 코웃음쳤다.

[그대가 뭘 알아요. 그대는 대리국 사람이예요. 만약 그들에게 잡히게 된다면 한 칼에 목을 베이게 될 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대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모조리 죽일수 있을 것 같소? 소저는 역시 먼저 가는 것이 좋겠소.]

목완청은 왼쪽 어깨가 자꾸만 아파왔다. 단예가 잔소리를 늘어놓게 되자 그만 화가 나 소리쳤다.

[그만 닥쳐요! 더 말하지 말아요!]

단예는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나를 뒤에다 태워 주시오.]

목완청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것은 또 왜요?]

단예는 말했다.

[나는 바람막이를 그 뚱보할머니 머리 위에 씌워 주었소.]

목완청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내 바지에 크게 구멍이 나 있어서 소저의 앞에서 볼기짝을.... 소저에게 보인다는 것은....허 허 허, 너무나 실례될 것 같소.]

목완청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아파왔다. 그리하여 단예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다가 자기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단예의 경골이 우두둑 소리가 났다. 목완청은 큰 소리로 외쳤다.

[닥치세요!]

단예는 경골이 으스러지는듯 아프자 재빨리 말했다.

[좋소, 좋아. 내 입을 열지 않으리다.]

수 마장을 달려가자 흑매괴는 어떤 높은 봉우리 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산봉우리는 매우 험난해서 흑매괴의 걸음은 더욱 더 느려졌다. 그런데 등 뒤에서는 고함소리가 여전히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부르짖었다.

[흑매괴야! 오늘 어찌 되었든지 수고를 좀 해라. 수고롭겠지만 좀더 빨리 달리자꾸나!]

그리하여 다시 한 마장쯤 더 나아갔다. 뒤를 돌아보니 달빛에 칼날이 번뜩이는 모습으로 보아 쫓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더 가까와지는 것 같았다. 목완청은 끊임없이 재촉했다.

[빨리! 빨리!]

흑매괴는 애써 발걸음을 빨리 했다. 별안간 그들 앞에 하나의 깊은 골짜기가 나타났다. 그 폭이 수 장이나 되었고 골짜기 아래쪽은 너무 깊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흑매괴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별안간 앞발굽을 모으더니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목완청은 앞으로 나갈 길이 없고 뒤에 추척하는 사람들이 달려오자 단예에게 물었다.

[나는 말을 뛰쳐 이 계곡을 뛰어 넘을까 해요. 그대는 날 따라 모험을 하겠어요, 않겠어요?]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말등에 탄 사람이 적을수록 흑매괴는 더욱 더 쉽게 뛰어 넘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소저가 먼저 넘어가시오. 그 다음에 띠를 던져 나를 끌어 가도록 하구려.]

목완청은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았다. 그들을 쫓아온 사람이 불과 수십 자 되는 곳에 이르러 있지 않은가!

[이제 늦었어요.]

그리고 말을 수 장 정도 뒤로 물러서게 하더니 소리쳤다.

[얏! 뛰어넘어!]

그리고 손을 뻗쳐 말고리를 가볍게 두 번 쳤다.

흑매괴는 네 발굽을 놀리며 급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벼랑가에 이르게 되었을 때 힘주어 곧장 계곡을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그 순간 마치 구름을 타듯 자기의 몸이 뛰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심장이 그의 목구멍 아래서 바로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흑매괴는 주인의 재촉을 받고 전심전력을 다해서 계곡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런데 두 앞발은 간신히 맞은편 언덕에 닿았으나 계곡의 폭이 너무나 길어서, 뒷발굽은 언덕에 내려 설 수가 없었다. 따라서 흑매괴의 몸둥아리는 어쩔 수 없이 깊은 골짜기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목완청은 임기응변이 빨랐다. 말 등에서 몸을 솟구치는 동시에 단예를 잡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단예가 먼저 땅에 떨어지게 되었고 목완청도 곧이어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마침 단예의 품속에 떨어지게 되었다. 단예는 그녀가 상처를 입을까봐 두 손으로 꼭 껴안았다. 이때 흑매괴의 길게 울부짖는 소리가 이미 만 장이나 되어 보이는 깊은 골짜기 아래서 들려왔다.

목완청은 마음이 여간 괴롭지 않았다. 재빨리 단예가 껴안은 것을 뿌리치고는 벼랑가로 단려갔다. 그러나 희뿌연 안개가 골짜기를 뒤덮고 있어서 이미 흑매괴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하늘이 돌고 땅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다리에 맥이 빠져 그만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단예는 깜짝 놀랐다. 행여 그녀가 골짜기 안으로 뛰어들까봐 급히 달려나가 붙잡았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두눈을 감고 이미 기절한 후가 아닌가!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맞은편 벼랑에서 누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활을 쏴라, 활을 쏴서 저 년놈은 죽여라.]

단예는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맞은편 벼랑 위에는 이미 칠팔 명이 서 있었다. 그는 재빨리 목완청을 안아들고는 몸을 돌려 급히 달렸다. 별안간에 휙휙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대의 우전(羽箭)이 귓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는 휘청거리며 앞으로 몇 걸음 달려나가다가 목을 웅크렸다. 그리고 목완청을 안고서는 앞으로 나아갔다. 휙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대의 화살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 '쉭쉭쉭!'하는 화살 날으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린다. 단예는 즉시 옆의 커다란 바위 뒤로 피했다.

팍!

파파팍! 팍!

우박처럼 쏟아지던 화살이 바위에 맞아 불똥이 어지럽게 된다.

단예는 간이 콩알만해졌다. 만약 그의 행동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두 사람의 몸은 고슴도치처럼 화살에 꽂혀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돌연'휙!' 하며 주먹 크기의 차돌맹이가 날아왔다. 그돌은 바위를 넘어 단예의 머리를 스치고 땅에 떨어졌다. 돌을 던진 사람은 굉장한 팔힘을 지닌 듯 그의 옆까지 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정확성을 기하기가 힘들었다. 단예는 속으로 이곳 역시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할 장소라고 생각했다. 즉시 목완청은 앉고는 단숨에 앞으로 달려나갔다. 십여 장 달려나가 적의 화살이나 암기가 도달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하고 걸음은 멈추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목완청을 풀밭 위에 눕혔다. 그리고 바위 뒤에 숨어서는 앞쪽을살폈다. 맞은 편 벼랑 위에는 까맣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알 수 없는 손짓을 해가며 의논을 하고 있었다. 간혹 산바람에 실려 몇마디 말이 들려오기도 했으나, 하나같이 욕을 하는 소리였다. 보아하니 한동안은 그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할 것 같았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그들이 산길을 돌아서 저쪽으로 기어올라 온다면 우리 두사람은 여전히 독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더럭 겁이 치밀어 산벼랑 저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정말 깜짝놀라 다리에 맥이 빠져 서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벼랑아래 수백 장 되는 곳에서 파도가 거세게 넘실거리고 있지를 않은가! 파아란 물결의 큰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난창강이었다. 강물이 너무나 세차 이쪽으로는 어떻게 하더라도 사람들이 올라올 수 없었다. 그러나 적이 만약 골짜기를 가로질러 이쪽 벼랑으로 기어 올라온다면 끝내는 자기와 목완청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속으로 잠시동안이나마 위험에서 벗어난 것도 다행이며 이후야 어떻게 되든 그때가서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시 조금전에 한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반 나절 더 사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는 목완청 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살펴 보니 그녀의 등 뒤와 왼쪽 어깨에는 놀랍게도 하나의 강추가 꽂혀 있지 않은가! 그리고 피는 이밈 상반신을 시뻘겋게 물들여 놓고 있었다. 단예는 깜짝 놀랐다. 말등 위에 타고 있을 때는 바로 그녀 앞에 앉아있었고 황급히 도망치느라고 그녀가 이같이 중상을 입은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혹시 그녀가 죽지 않았나 하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복면을 들치고 손가락을 그녀의 코끝에 가져갔다. 다행히 미미하나마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다.

(강추를 뽑고 피를 멈추게 해야 한다.)

그는 즉시 강추의 자루를 잡고 입술을 깨물며 힘주어 뽑았다. 그러자 강추는 뽑혔다. 그런데 한줄기 선혈이 확 뿜어지는 바람에 그는 얼굴 가득히 핏물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목완청은 크게 한소리 부르짖더니 눈을 번쩍 떴으나 곧이어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단예는 선혈이 흘러 나오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으나 핏물은 샘 솟듯 흘러나와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별도리 없이 땅 바닥에서 푸른 풀을 뜯어서는 입에 넣고 씹은 후 그녀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 그러나 선혈은 계속 흘러 나왔다. 입으로 으깨 넣은 풀입들을 씻어내는 게 아닌가! 단예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먼저본 갈코리에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그녀는 품 속에서 약을 꺼내 바르더라. 그러니까 피가 멎지 않았던가?)

그는 가볍게 그녀의 품속을 더듬었다. 손에 닿는 대로 모든 물건을 하나하나 꺼냈다. 누런 양옥으로 된 빛과 조그만 구리거울이 있었으며 분홍색 손수건도 둘이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세 개의 조그마한 나무상자와 자기로 된 병도 있었다. 처녀들이 쓰는 이 물건들을 보자 그는 그만 어리둥절했다. 그제서야 그는 눈앞에 정신을 잃고 있는 사람이 아가씨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손을 그녀의 주머니 속으로 디밀어 마구 뒤진다는 것은 너무 무례한 행위라고 여겼다. 또 한편으로는 빛과 거울 그리고 손수건 등의 물건은 사람을 죽여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그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문득 목완청이 자기병에서 녹색분말을 쏟아 사공현에게 주며 동모의 영약이라고 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녹색가루약이 피를 멈추게 할런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조그만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대뜸 그윽한 향기가 코에 스며들었다. 나무상자 안에 담겨져 있던 것은 연지였다. 두번째 나무상자 안에 있는 것은 반 상자 정도의 하얀 가루약이었고 세번째 상자 안에는 황색의 분말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코끝에 대고 하나하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백색의 가루는 아무런 냄새도 없었고 황색의 가루는 지독히 매운 냄새를 풍겨 코로 숨을 들이쉬자 대뜸 재채기가 났다.

(어떤 것이 금창약이고 어떤 것이 살인을 하는 독약인지 알 수가 없구나. 만약에 잘못 사용하게 되면 큰일인데.)

그는 손가락을 뻗쳐 목완청의 인중을 힘주어 눌렀다. 잠시 후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단예가 크게 기뻐서 재빨리 물었다.

[목소저, 어느 상자의 약이 피를 멎게 하고 상처를 치료할 수 있소?]

목완청이 대답했다.

[빨간 약이예요.]

한마디를 하고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단예는 재차 물었다.

[붉은 가루약이라고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예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황색의 상자 안에 든 것은 분명히 연지인데 어떻게 해서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까?)

의심이 구름처럼 일었으나 시험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처부근의 옷자락을 약간 찢었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에다 연지 같은 가루를 묻혀 가볍게 상처에 발랐다. 손가락이 그녀의 상처에 닿게 되었을 때 목완청은 정신을 잃은 가운데서도 심한 고통을 느끼는지 몸을 움직였다. 단예는 위로의 말을 던졌다.

[두려워 마오. 피를 멈추게 한 후 다시 봅시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 연지는 놀랍게도 탁월한 효과가 있어, 상처에 바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새 피가 멎는게 아닌가! 잠시 후 상처에서는 엷은 황색의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단예는 중얼거렸다.

[금창약마저 연지처럼 만들어 놓다니 여자들의 마음이란 참 재미있구나.]

그제서야 어느 정도 심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때 맞은편 벼랑 위에서 떠드는 소리는 이미 멎어 들리지 않았다.

[정말 골짜기로 해서 이 벼랑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닐까?]

그는 몸을 웅크리고 살그머니 벼랑가로 다가갔다. 갑자기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 벼랑 위에 있던 십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천천히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산골짜기가 깊었지만 언젠가는 밑바닥에 닿게 될 것이고 또 그 사람들이 골자기 바닥에 닿게 된다면 다시 이쪽으로 기어 오를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이삼 시간안에 적이 이곳을 공격해 오게 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이긴 했으나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다. 사방의 지형을 살피니 단예가 있는 곳은 우뚝 높이 솟아 있는 벼랑 위였다. 한쪽으로 강을 끼고 있었고 삼면은 깊은 골짜기였다. 도망칠래야 길이 없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목완청을 튀어나온 암석밑에 눕혀 산바람을 피하도록 했다. 그리고 몸을 웅크린 채 돌들을 날라다 벼랑가 움푹 꺼진 곳에 모아 두었다. 다행히 벼랑 위에는 곳곳에 바위나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서 얼마 되지 않아 오륙 백 개나 모을 수 있었다. 준비가 끝나자 그는 목완청 곁에 앉아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주저앉아 있으니 엉덩이가 바닥의 모래와 돌들 때문에 따끔따끔했다. 그는 주역의 점괘를 짚어 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이 모습은 결괘(결卦)로서 '구사(九四)에 전무부(전無膚) 기행차차(其行且且) 견양회망(牽羊恢亡) 문언불신(聞言不信)'이다. 차차(且且)는 막힘이다. 즉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 점괘야말로 정확하기 이를데 없다. 나의 이 전무부(전無膚)의 부자는 빠질 고(고)로 바꾸어 쓰면 더욱더 묘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남자를 속이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문언불신이다. 그러나 그녀가 견양회망하고 있으니 나는 바로 한 마리의 양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러나 그녀가 후회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구나.)

그는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해 실로 피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몇 마디 주역에 있는 말을 생각한 후에 자려고 했으나 적이 언제쯤 도달할 지 알 수가 없어 감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때 목완청의 몸에서는 은근하고도 그윽한 향기가 풍겨왔다. 조금전 그녀의 콧김을 알아 보려고 코 아래 부분의 복면을 들추었었다. 물론 그녀의 생사가 염려되어 그녀의 입과 코가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보지를 못했던 터엿다. 그러나 지금은 자꾸만 그녀의 복면을 들추고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아마도 그녀의 얼굴 살결은 매우 희고 부드러우리라 상상되었다. 최소한 못생기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목완청은 여전히 혼미상태에 바져 있었다. 만약에 살그머니 그녀의 복면을 벚기고 본다면 결코 그녀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보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기가 나지 않아 한참이나 망설였다.

(내 짐작으로는 그녀와 함께 이곳에서 죽게 될 것 같다. 만약에 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녀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 한다면 그야말로 억울한 죽음이 아닐까?)

이와 같은 생각과 더불어 그는 한편으로 그녀가 지극히 추악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만약에 그녀가 추악하지 않다면 어찌 해서 복면을 하고 있으며 참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을까? 이 소저의 행동은 매우 흉악하다. 짐작하건데 청초하고 아름답다는 말과는 인연이 없을런지 모르니 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너무도 궁금하여 보고 싶기는 하나 감히 그럴 염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점을 쳐서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점점 피곤해져 급기야 몽롱하니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별안간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쳐 벌떡 일어나 급히 벼랑가로 달려가 보았다. 오륙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기척도 없이 이쪽 산벼랑을 기어오르고 있지 않은가? 다만 산 벼랑이 너무 가파라서 올라오기가 극히 힘드는 듯했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거 위험하구나!)

그리고는 돌을 집어들자 벼랑 아래쪽으로 던지며 부르짖었다.

[올라오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사정두지 않겠다!]

높은데서 아래로 던지는 돌은 지극히 맹렬했다. 위로 올라오던 사내들은 수십 장의 간격을 두고 있어서 암기를 쏴도 도달하지 못할 거리였다. 그가 돌을 던지며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 되자 모두들 크게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바위 뒤로 몸을 숨기면서 슬금슬금 계속해서 기어올랐다. 단예는 대여섯 개나 되는 돌을 마구 집어 던졌다. 그러자 아악! 하는 두마디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두 명의 사내가 돌에 맞아 깊은 계곡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마도 온 몸이 박살나 죽었을 것 같았다. 나머지 사내들은 상황이 불리한 것을 보고는 다투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급히 달아나다가 잘못 실족하는 바람에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단예는 어릴 적부터 고승에게 불경을 배운 몸이었으며 무예라고는 전혀 배우려고 하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 평생 처음으로 살인을 하게 되자 그만 크게 놀라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원래 돌을 던져 올라오던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돌아가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뜻밖에도 잇따라 두 사람을 죽이고 또 한 사람이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되자 마음이 지극히 괴로왔던 것이다.

그는 잠시동안 멍하니 있다가 목완청 곁으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이때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등을 바위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단예는 놀람과 기쁨에 소리쳤다.

[목소저 이제....다 나았소?]

목완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면 위로 난 두 구멍으로 그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 보기만 했다. 엄하고 흉악한 눈빛이었다. 단예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좀 더 누워서 쉬도록 하구료. 내가 물을 길러다 드릴께.]

목완청은 물었다.

[누가 절벽 위로 올라오려고 했던 모양이죠?]

단예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소메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실수해서 두 사람을 때려죽였소. 또 한 사람을 놀라게 해서 실족사하게 만들었소.]

목완청은 그가 우는 모습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그게 어쨌다는 거죠?]

단예는 흐느끼며 말했다.

[하늘에는 호생지덕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아! 나는 무단히 사람을 죽였으니 그 죄 적지 않을 거예요.]

그는 발을 구르며 다시 말했다.

[그 세 사람 가운데는 부모나 처자가 있을 것이 아니오? 그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들 가족들은 얼마나 슬퍼하겠소. 내....내 어찌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느냐 말이오?]

목완청은 냉소를 흘린다.

[그대 혹시 부모와 처가 있는 게 아녜요?]

단예는 말했다.

[나에게 부모는 있지만 처는 아직 없소.]

목완청은 갑자기 눈에 기이한 빛을 반짝였다. 그러나 그 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으며, 곧 평소의 예리하고 차가운 눈길로 되돌아갔다.

[그들이 산 위로 올라오게 된다면 그들이 그대를 죽이지 않겠어요? 그리고 나를 죽이지 않겠어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응당 우리를 죽일 것이요.]

목완청은 차갑게 콧웃음쳤다.

[흥! 그대는 차라리 남에게 죽임을 당했으면 당했지 사람을 죽이지는 못한다는 것인가요?]

단예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 내 자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결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소. 하지만....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대를 해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소.]

목완청은 급히 물었다.

[그건 또 무엇 때문이죠?]

단예는 말했다.

[그대는 나를 구한 적이 있소. 따라서 나도 자연히 그대를 구해야 될 것이 아니겠소.]

목완청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한마디 묻겠는데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나의 소매자락에 숨은 화살로 즉시 당신의 목슴을 배앗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오른팔을 살짝 쳐들어 단예를 겨누었다. 단예는 신기하다는 듯 소리쳤다.

[사람을 죽이는 화살이 알고 보니 바로 소매자락 안 족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군요!]

목완청은 냉랭히 물었다.

[바보 같은 양반! 그대는 내가 두렵지 않나요?]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가 나를 죽이지도 않는데 내가 왜 두려워하겠소?]

목완청은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그대가 만약 나를 화나게 한다면 그대를 죽일거예요! 나의 얼굴을 봤어요 안 봤어요?]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지 않았소.]

목완청은 다그쳤다.

[정말인가요?]

그녀의 음성은 갈수록 낮아졌다. 이마 위의 복면수건은 흠뻑 젖어 있었다. 아마도 매우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식은 땀이 끊임없이 흘러 나오는 것 같았으나 말소리만은 여전히 매우 준엄했다. 단예는 말했다.

[내가 어찌 그대를 속이겠소.]

목완청은 말했다.

[내가 기절을 하게 되었을 때 어찌하여 복면을 벗겨 보지 않았죠?]

단예는 고개를 자로저었다.

[나는 그대의 어깨쭉지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기에 바빠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소.]

목완청은 화난 음성으로 앙칼지게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내 뒷등의 살결을 보았지요. 그대의 손으로 내 뒷등에다 약을 발랐지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대의 연지는 정말 영험하더군요. 나는 그와 같은 치료약이 있으리라고는 정말로 생각하지 못했소.]

목완청은 갑자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리 다가와서 나를 부축해줘요.]

단예는 말했다.

[원래 그토록 많은 말을 하지 말고 좀더 누워있다가 달아날 방법이나 강구하는 것이 옳았소.]

그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미처 그녀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녀의 팔이 매섭게 그의 오른족 뺨을 후려쳤다. 느닷없이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것이다. 그녀는 중상을 입은 몸이었지만 손 씀씀이는 여전히 매서웠다.

그야말로 두 눈에서 불이 번쩍날 정도로 호되고 몸마저 빙글 한 바퀴를 돌았다. 그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화가 나 소리쳤다.

[그대는 어째서 나를 때리는 것이요?]

목완청은 차갑게 말했다.

[그대는....감히 내 살결에 손을 대고 또 감히....나의 뒷등을 보았어요.]

매우 다급하고 또 격노한 나머지 말을 마치자 대뜸 기절하여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깜짝 놀랐다. 얼른 달려들어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등 뒷쪽에서는 다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전 따귀를 때리느라고 너무 힘을 쓰자 아물어 들던 상처가 다시 덧나게 된 셈이었다.

단예는 어리둥절해졌다.

[목소저는 그녀의 살결에 내가 손을 대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구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기실 피를 많이 흘리고 죽었을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어찌할 수 없다. 기껏해야 한두대의 따귀를 더 맞게 될 뿐이겠지.]

그는 옷자락을 찢어서 상처 주위의 핏자국을 닦아 내었다. 그녀의 살결은 정말 옥과 같이 희었고 눈처럼 고와 보였다. 거기다가 은은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단예는 감히 더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황급히 연지를 찍어서 상처에 발라 주었다.

목완청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는 매섭게 단예를 노려보았다. 단예는 그녀가 다시 때릴까봐 벌찌감치 비켜섰다. 목완청은 입을 열었다.

[그대는....또.....]

그녀는 등 뒷쪽 상처가 시원한것을 느끼고 단예가 다시 약을 발라 준 사실을 알았다. 단예는 목완청의 말을 받았다.

[난, 나로서는....죽는 것을 보고 구하지 않을 수 없었소.]

목완청은 숨을 헐떡거릴 뿐 더 말할 기운이 안나는 듯 잠자코 있었다.

단예는 멀리 졸졸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맑고 고운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씻고는 상반신을 숙이고 몇 모금의 물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두 손에다 물을 떠서는 목완청 곁으로 다가갔다.

[입을 벌려요. 입을 벌리고 물을 마셔요.]

목완청은 잠시주저했다. 그러나 많은 피를 흘린 후라 갈증이 심하게 왔다. 그녀는 복면의 아래쪽을 살짝 들추고 입을 드러내었다.

이때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온 누리를 밝게 비추는 햇빛이 그녀의 반쪽 얼굴을 비췄다. 단예는 그녀의 아래턱이 갸름하고 희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그녀의 뒷등의 살결처럼 곱고 윤기가 나는 살결이었으며 얽은 자국이라고는 한군데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앵두같이 조그만 입술은 여간 예쁘지 않았고 엷은 입술에 가지런한 치아도 옥처럼 고와 보여 그만 마음이 흔들렸다.

(실로 절세의 미녀로구나!)

그가 넋을 잃고 있는 사이에 손 안의 물이 모두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목완청의 반쪽 얼굴은 모두 물로 젖게 되었다. 목덜미에 구르는 물방울이 아침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꽃잎이 이슬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지라 단예는 멍한 표정이 되어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목완청은 거의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빨리 물을 길러와요! 멍청하기는.....]

단예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황급히 개울로 달려갔다. 잇따라 세 번이나 물을 떠다 먹이고서야 그녀는 갈증을 풀수가 있었다.

단예는 이쪽 벼랑가로 다시 나아가 살펴 보았다. 맞은편 벼랑 위에는 여전히 칠팔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각기 손에 활을 쥐고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었다. 다시 산골짜기 아래를 바라보니 올라오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적이 결코 그대로 단념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 공격해 올 것 같았다.

그는 다시 개울가로 걸어가 엎드려 물을 마셨다. 그리고 얼굴을 씻고 머리에 묻은 목완청의 핏자욱마저 말끔히 씻겨내었다.

(단장산의 해약을 먹으나 마나 쓸데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먹어 두는 것이 낫겠지.)

품속에서 자기온병을 꺼내서 약간의 해약을 입에 털어넣고 개울물과 함께 마셨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해독약은 매우 쓰군. 단장산만큼 달콤하지도 않고 먹기 좋지도 않구나. 그런데 목소저는 어쩌면 그렇게도 에쁠까!)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이 벼랑 위에는 물이 있으나 먹을 것이 없다. 적은 산을 공격하지 않아도 수일 후에 우리 두 사람은 저절로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생각에 맥이 빠져서는 목완청의 곁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애석하게도 이 산 위에는 열매가 없군요. 그렇지 않으면 몇 개 따서 그대에게 주어 배고픔을 면하게 할텐데.]

목완청은 말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녀는 날카로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어떻게 종영이란 계집애를 알게 됐죠?]

단예는 검호궁에서 어떻게 종영을 알게 되었으며 자기가 어떻게 그녀의 구원을 받게 되었던가를 일일이 설명했다. 목완청은 이야기가 끝나자 냉소했다.

[무공도 모르면서 강호의 쓸데 없는 일에 나서다니....정말 살기 싫으세요?]

단예는 계면쩍어 말했다.

[내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니 더 할 말이 없소. 다만 소저에게 누를 끼쳐 여간 미안하지 않소.]

목완청은 말했다.

[그대가 나에게 누를 끼친 게 뭐예요?저 사람들과의 원한은 이미 맺었던 거예요. 세상에 당신이란 사람이 없더라도 나는 아무 걱정 없이 한바탕 신바람나게 그들을 죽이고 나또한 그들에게 난도질 당해 죽는다면 차라리 이 황산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녀는 걱정없이란 말을 하게 되었을 때 잠시 여유를 두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를 걱정한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되어 불현듯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복면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어서 단예는 그와 같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음성이 약간 변했는데도 단예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만 그녀가 상처를 입은 후 몸이 약해진 탓으로 여겨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소저 며칠 더 휴식을 하도록 하시오. 상처가 나은 후에 달려나가 공격한다면 그들은 그대를 막지 못할 것이오.]

목완청은 냉소했다.

[정말 수월하게 말씀을 하시는군요.이 상처가 며칠 안으로 아물 것 같아요? 그리고 상대방에는 고수들이 적지 않아요....]

별안간 맞은편 벼랑 위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온 산이 찌르르 울렸다. 목완청은 그만 전신을 흠칫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 사람은....누구인데 내공이 저토록 뛰어나지?]

그녀는 손을 뻗쳐 단예의 팔을 잡았다.이때 휘파람 소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고 온 천지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뭇 산봉우리들이 이 메아리에 흔들리는 듯했고 무수한 귀신들이 밤중에 울부짖으며 달려나와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처럼 사람을 전율케 했다. 밝은 대낮이었으나 단예는 이 순간만큼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야 휘파람 소리가 점점 멎었다.

목완청은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의 무공은 굉장하네요. 아무래도 나는 목숨을 잃게 되겠어요. 그대는....방법을 강구해서 도망쳐요. 이제부터는 날 상관하지 말아요.]

단예는 미소했다.

[소저,그대는 이 단예를 너무나 과소평가하는군요. 이 단예가 비록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영웅은 아니지만 결코 그와 같이 의리 없는 사람은 아니외다.]

목완청은 아름다운 눈동자를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 눈길에는 처량한 빛이 가득 서려 있었다. 한참이 지났을때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와 함께 죽으려고만 하나요? 그것은....도대체 무엇 때문이죠? 그대가 도망쳐서 살 수만 있다면 때때로 나를 생각해 주기만 해도 되는 거예요.]

단예는 그녀가 그와 같이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 이후 그녀는 갑자기 사람이 변한 듯했다.그러나 그녀는 평소 매섭고 차갑게 말을 해온 것이 버릇이 되어 그와 같이 부드러운 말을하니 약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단예는 미소를 지었다.

[목 소저,그대의 그와 같은 부드러운 말투가 듣기 좋군요.이제야 얌전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보이는군요.]

목완청은 갑자기 코웃음치더니 돌연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대는 어떻게 내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죠?내 얼굴을 보았지요, 그렇죠?]

그러더니 손에 힘을 주어 쇠갈고리처럼 단예의 팔을 움켜 잡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물을 떠다 먹일 때 그대의 반쪽 얼굴을 보지 않았소? 단지 반쪽에 지나지 않지만 정말 세상에 보기 드문 미녀입니다.]

목완청은 흉악했지만 역시 소녀였다. 단예같이 준수한 남자가 아름답다고 하니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언제나 복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칭찬은 들었어도 용모가 아름답다는 칭찬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만 단예를 잡았던 손을 놓아주고 말았다.

[빨리 동굴이라도 찾아서 눕도록 해요.무엇을 보든지간에 나서지 말아요. 그 사람이 곧 이곳으로 올라올 거예요.]

단예는 깜짝놀라 말했다.

[그를 올라오게 하면 안 되지.]

그는 벌떡 일어나 벼랑가로 달려갔다.별안간 눈앞에 무언가 번뜩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황색 옷을 걸친 한 중년인이 신속무비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산비탈은 지극히 험하고 가파랐으나 그 사람은 마치 평지를 걷듯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정말 민첩하기 이를데 없었다. 단예는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다시 더 올라오면 나는 당신에게 돌을 던지겠소.]

그 사람은 소리내어 껄껄 웃더니 더 빨리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그가 웃는 순간에 다시 일장이나 더 올라오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든 그가 위로 오르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다시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재빨리 돌 하나를 들어서는 그 사람의 옆으로 던졌다.그 돌은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니 휙휙,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고 기세는 퍽이나 놀라워 보였다.동시에 단예는 부르짖었다.

[이봐요.보았지요? 만약 그 돌을 당신의 몸에 던졌다면 당신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죽기 싫으면 빨리 물러가시오!]

그 사람은 냉랭히 웃었다.

[이 못난 녀석!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감히 나에게 그토록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단예는 그 순간 그가 다시 수 장이나 더 올라오는 것을 보고 실로 정세가 위급해졌다고 생각했다.그리하여 즉시 돌을 여러 개 들어 그의 머리 위로 던졌다.그리고는 눈을 꾹 감아버렸다. 감히 그가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는 참담한 광경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그런데 그 사람은 다시 큰소리로 웃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속으로 의아하여 눈을 떴다.그 황색 인영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몇 개의 돌들은 바로 깊은 골짜기를 향해 떨어져 가고 있었고 그 사람은 아무 이상도 없었다.

단예는 이렇게 되자 다급해졌다.재빨리 돌을 잇따라 그에게 던졌다. 그런데 돌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질 양이면 그 사람은 손으로 밀어내곤 했다. 그러면 돌은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옆으로 비껴서 날아가는 것이었다. 때로는 가볍게 돌을 던졌지만 그가 올라오는 기세를 약간 늦추게 했을 뿐 그의 머리카락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었다.단예는 그가 점점 더 가깝게 올라오자 이제는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이때 흉악하기 이를데 없는 그의 모습이 어렴풋 드러났다. 단예는 그만 목완청 옆으로 달려가서 놀라 부르짖었다.

[목..목 소저..그 사람은 정말 무섭게 생겼소.우리 빨리 달아납시다.]

목완청은 조용히 말했다.

[이미 늦었어요.]

단예가 다시 뭐라고 말할려고 할 때 갑자기 등뒤로 한가닥 커다란 힘이 밀어 닥쳤다. 순간 그의 몸은 허공으로 붕 하니 떠올랐다가 수풀 속으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그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충격을 받았다.다행히 그가 떨어진 곳에는 고목나무들이 있어서 얼굴을 할퀴게 되었을 뿐 상처는 입지 않았다. 그는 바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눈을 부비고 바라다 보니 그 사람은 어느덧 목완청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나와 목완청 앞을 가로막고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귀하는 누구시오! 어찌해서 사람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시오?]

목완청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대는.... 빨리 도망쳐요.이곳에 있지 말고!]

그 사람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하! 도망칠 수는 없다. 노부로 말하면 남해악신(嵐瀣愕紳)으로 무공이 천하에서....후 후 후, 두 애송이 녀석은 내 이름을 들어 보았겠지?]

단예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억지로 침착한 태도를 짓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첫눈에도 그의 머리통이 유난히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메기같이 넓다란 입술 사이로 허옇고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그 반면에 한 쌍의 눈동자는 조그맣고 둥그래서 마치 두 알의 완두 콩을 연상시켰다.그러나 그 조그만 눈동자에서는 무시무시한 안광이 줄기줄기 뻗쳐나왔다. 그는 눈을 껌벅거리며 단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단예는 그만 섬짓해져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보통의 키에 몸이 옆으로 매우 넓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하반신은 수척한 편이었고 턱 아래 위로는 강철로 만든 솔처럼 날카로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수염 하나하나가 바늘처럼 뻣뻣해 보였다. 그의 나이는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옷감은 고급의 비단이었고 심히 화사한데 반해 아래쪽에 입고 있는 바지는 무명 바지인데다했다.

[원래 귀하의 별호는 남해악신이구려. 무공은 천하에서 제일....그건 그렇고 대명은 익히 들었사옵나이다.불초가 이 며칠동안 적지 않은 영웅호걸들을 만나 보았지만 그중에서 귀하의 무공이 가장 무서운 것 같습니다. 내가 수십 개의 돌을 귀하에게 던졌지만 하나도 맞히지를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소이다. 귀하의 무공이 고강한 점에는 정말 감탄하는 바이올시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마구 찬사를 늘어 놓는 것은 아첨이지만 기실 이 사람의 무공이 확실히 고강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니 이 아첨은 아첨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해악신은 단예가 칭찬하는 말을 듣자 기분이 몹시 좋아져서 입을 벙긋거렸다.

[네 녀석의 재간은 보잘것없는데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괜찮구나.옆으로 비켜서라.노부는 너를 살려 주겠다.]

단예는 너무 기뻤다.

[그러면 어르신네, 목 소저도 용서해 주십시오.]

남해악신은 동그란 두 눈을 부릅뜨더니 손으로 단예를 밀어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온다면 노부는 너마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단예는 비틀거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강호의 인물들은 한번 한다고 하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들이니 나는 가만히 있는 게 좋겠다.)

남해악신은 목완청의 아래위를 동그란 눈으로 훑어보며 물었다.

[소살신(소살신) 손삼패는 네가 죽였지,그렇지?]

[그래요.]

목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제자다. 너는 알고 있었느냐?]

단예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큰일이다. 목 소저가 그의 사랑하는 제자를 죽였으니 좋게 끝나기는 힘들겠구나. 내가 아무리 그를 추켜세운다 해도 별 소용이 없겠구나.)

목완청은 또렷하게 대꾸했다.

[죽일 땐 몰랐어요. 죽인 후 며칠이 지나고서야 알았어요.]

남해악신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너는 내가 두렵지 않느냐?]

[저는 두렵지 않아요.]

목완청의 대답에 남해악신이 버럭 노호를 터뜨렸다. 산골짜기가 쩌렁쩌렁할 정도로 우렁찬 부르짖음이었다.

[네가 감히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단 말이지? 너....정말 담이 크구나! 누구를 믿고 그러는 것이지?]

목완청은 비웃듯 냉랭하게 대답했다.

[나는 바로 귀하를 믿고 그러는 것입니다.]

남해악신은 잠깐 동안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귀하는 사대악신(四大惡人)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가요? 그토록 높은 지위에 있고 그토록 혁혁한 위명을 떨치고 계신데 설마하니 몸에 중상을 입은 나약한 여인을 해칠 리가 있을라구요?]

이 몇 마디 말은 상대방을 추켜세우면서 상대방이 손을 쓰지 못하도록 만드는지라 남해악신은 입맛을 다셨다.

[으음! 네 말에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단예는 사대 악인이라는 말을 듣자 종만구가 초청했다는 그사람이 바로 이 남해악신임을 깨달았다.종만구와의 관계를 잘 이용하면 위기에서 벗어날 묘책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급히 말했다.

[강호에서는 당신을 가리켜 아주 훌륭한 영웅호걸이라고 하더군요. 상처입은 여인을 괴롭히기는커녕 상처입은 남자도 때리지 않는다고 하더군요.모두들 당신은 일대 일의 싸움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상대가 많아야 싸움을 한다 하는데,그 이유는 그래야만 어르신의 무공이 하늘보다 높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남해악신은 실눈을 하고는 단예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음, 네 녀석 말이 맞아. 너는 누구한테서 그런 말을 들었느냐?]

단예는 얼른 대답했다.

[무량검 동종 장문인 좌자목과 서종 장문인 신쌍청,신농방주 사공현,만겁곡주 마왕신 종만구,그의 부인 소야차 감보보,강남에서온 서파파와 동파파등....하 하 하,너무 많아서 이루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남해악신은 싱글벙글하며 좋아했다.

[네 녀석은 정말 재미있구나.다음부터는 노부를 영웅호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람의 성명을 기억해 두도록 해라.]

이어 남해악신은 목완청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듣자니 네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던데,누구에게 상처를 입었지?]

[네 사람이 나 하나를 동시에 공격했어요. 물론 남해악신 같은 분이라면 상대방이 많을수록 좋겠지만 저야 어디 그런가요 ?]

[음,일리가 있는 말이야.네 사람이 한 여자를 공격하다니 정말 염치가 없는 것들이군.]

단예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래요.그들은 영웅호걸이 못 돼요.애석하게도 어르신께서 놈들이 노는 꼴을 보지 못하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르신께서는 놈들을 한 손에 하나씩 잡아서 대뜸 그들의 힘줄을 뽑아버렸을 거예요.]

남해악신은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아냐 그렇지 않아.]

그가 큰 머리통을 흔들며 그렇지 않다고 하자,단예는 흠칫했다.

[나는 상대방의 근육을 뽑지는 않아.다만 이렇게 후레자식들의 목뼈를 비틀어 버리지. 힘줄을 뽑는다고 해서 반드시 죽지는 않거든.목을 몇 바퀴 비틀어 목뼈를 분질러 버리면 어떤 후레자식도 살아날 수 없지. 자네가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자네의 목뼈를 비틀어 볼까 ?]

단예는 다급히 말했다.

[믿지요.믿구 말고요! 그건 시험해 볼 필요조차 없어요!]

단예는 종만구의 하인 진희아가 사대 악인 중 하나인 악노삼(악노삼)을 접대 하다가 '세째 나으리'라고 잘못 불렀고,'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남해악신이 분명 악노삼이라고 생각되자 황급히 말했다.

[사실 당신은 더 이상 악할래야 악할 수 없는 악인이지요.어떤 사람은 귀하를 악노이라고 하지만,내 생각에는 악노대(惡老大)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악노대께서 사람의 목을 닭모가지 비틀 듯 하는데 누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남해악신은 크게 기쁜 모양이었다. 단예의 두 손을 붙잡고 연신 흔들며 껄껄 웃었다.

[맞아,맞아.네 녀석은 정말 총명해.내가 바로 악할래야 더 악할 수 없는 대악인임을 알고 있구나.하지만 악노대는 아냐.악노이 둘째가 맞다.]

단예는 붙잡힌 팔목이 시큰거리고 아파,뼈가 저릴 정도 였으나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당신은 마땅히 첫째 나으리라고 불러야 해요.]

말하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단예야,단예야.정말 별놈의 아부를 다 하는구나.너는 정말 줏대 없는 녀석이구나.옛 성현의 책을 많이 읽었지만 그게 다 허사가 되고 말았구나.)

이어 생각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마음에 없는 아부를 결코 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한대서야 어찌 사내 대중부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목 소저를 위해서는 억울해도 참을 수밖에 없다.주역에 보면 유순이정(柚馴吏鄭) 군자유행(窘字有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바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도리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약간 풀어졌다.

이때 남해악신은 단예의 팔을 놓고 목완청에게 다가섰다.

[악노이는 상처입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악노이는 영웅호걸이니까.]

(저 자는 시종 첫째 나으리를 자처하지 않는군. 대체 사대 악인의 첫째는 어떤 사람일까?)

단예가 이런 생각하고 있는데 남해악신은 계속하여 말했다.

[다음에 너의 상처가 낫고 실력이 나아졌을 때,너를 죽이도록 하고 오늘은 너를 살려주마.그런데 너는 항상 복면을 하고 다니며,만약 누가 얼굴을 보게 된다면 그를 죽이던지 그에게 시집을 가던지 둘 중 한가지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하던데,사실이냐?]

목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어째서 그토록 해괴한 규칙을 정했지?]

남해악신이 묻자,목완청은 나직이 대답했다.

[그 맹세를 하지 않으면 사부님께서 저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시지 않았을 터이기에 그랬어요.]

[네 사부는 누구냐? 어째서 그토록 괴상한 맹세를 하도록 했지? 정말 개방귀 같군! 꼭 개방귀 같애!]

목완청은 싸늘히 말했다.

[나는 귀하에게 깍듯이 선배 대우를 해주었어요.그런데 저의 사부님을 개방귀라고 욕할 수 있나요?]

남해악신은 목완청이 따지고 들자 버럭 화를 내며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꽝,소리와 함께 바위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으며 파편이 단예의 얼굴을 아프게 때리기까지 했다.

(이 사람의 무공은 정말 엄청나구나.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을 저렇게 후려친다면 아마 뼈도 못 추릴 것이다.)

단예가 속으로 겁을 먹고 있는데 남해악신은 다시 말했다.

[계집애야,네 사부는 누구냐? 만약 빨리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 바위처럼 후려갈겨 단번에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저의 사부님은 유곡객(유곡객) 이라는 분이세요.]

남해악신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곡객? 들어본 적이 없는데....]

목완청이 재빨리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은거한 이후에 유곡객이라고 자처하셨어요.그러니 어르신네처럼 명성이 자자한 영웅호걸께서 어떻게 들어보셨겠어요?]

남해악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 아하, 그러고 보니 나의 제자 손삼패는 너의 얼굴을 보려고 하다가 너에게 죽었을 것이다.그렇지?]

목완청은 냉랭히 대답했다.

[그래요. 그 자식은 정말 못 됐어요. 어르신의 그 훌륭한 무공은 익힐 생각을 안 하고 음란한 짓만 일삼았어요. 그 놈이 어르신의 무공을 십분의 일만 터득했어도 저는 그를 이길 수 없었을 거예요.]

[음, 네 말이 맞다.]

남해악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표정이 무섭게 변하기 시작했다.원래 남해악신의 문파에서는 한 명의 제자만을 두어야 했다.남해악신은 제자 손삼패에게 십년 동안 힘들여 무공을 전수했는데 그만 목완청의 손에 죽고 만 것이다.그야말로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된 셈이었다.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남해악신은 속으론 부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밀어 올랐다.

[제미랄!]

목완청과 단예는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눈에서 흉악한 광채가 흘러나오자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나는 내 제자의 원수를 갚을테다!]

남해악신은 살기 어린 음성으로 소리쳤다.단예는 다급하여 말했다.

[둘째 나리,방금 그녀의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어르신의 제자는 어르신의 무공을 십분지 일도 배우지 못했으니 그런 녀석은 빨리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아요. 살아 있어 봤자 어르신의 체면만 깎았을 거예요.]

[음. 그 말도 일리가 없지는 않군.이 악노이가 체면이 손상될 수는 없지.]

남해악신은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목완청을 보고 묻는다.

[내 제자는 너의 얼굴을 보았느냐?]

목완청은 고개를 흔든다.

[좋다.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하지만 내 제자 녀석이 죽어서라도 눈을 감을수 있도록 내가 그를 대신해서 너의 얼굴을 보아야겠다.도대체 네가 못난이인지 선녀같이 아름다운지 어디보자.]

목완청은 깜짝 놀랐다.남해악신이 그녀의 복면을 벗긴다면 그를 죽이든지 아니면 그에게 시집을 가든지 해야 하는데,시집을 가기는 싫고 죽일 능력도 없었다.그녀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르신네는 무림에서 혁혁한 위명을 떨치는 영웅이십니다. 어찌 그처

럼 비열한 행동을 하려고 하시나요?]

남해악신은 냉소를 보냈다.

[노부는 악할래야 더 악할 수 없는 대악인이다.따라서 하는 짓이 악할수록 좋다.노부는 한평생 한 가지 규칙만을 지킬 뿐이다. 그것은 무력하여 반격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떤 나쁜 짓이라도 다 한다.네 스스로 복면을 벗도록 해라.나를 번거롭게 하지 말고.]

[정말 꼭 보셔야 하나요?]

[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너의 복면을 벗길 뿐만 아니라 너의 옷을 모두 벗겨 버릴테다.얼굴만 보여주겠느냐, 아니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보여 줄테냐?]

목완청은 비장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결하는 도리밖에는 없구나!)

이때 남해악신의 수염이 밤송이처럼 빳빳하게 곤두섰다.이어 갈고리 같은 손가락을 불쑥 내밀어 그녀의 복면을 향해 낚아채 갔다.목완청의 옷소매가 가볍게 흔들렸다.

팍! 팍! 팍!

세개의 독전이 그녀의 소매에서 쏟아져 나와 남해악신의 가슴팍에 격중되었다.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세 개의 독화살은 남해악신의 옷에 맞고는 도로 퉁겨져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옷 속에 철갑(鐵胛) 이라도 두른 모양이었다.목완청은 재차 세 개의 독전을 날렸다. 이번에는 남해악신의 두 눈과 목젖을 행해 섬전처럼 폭사되었다.

[흥!]

남해악신은 코웃음을 치더니 양손의 가운데 손가락으로 두 눈에 박히려는 독전을 퉁겨버리고,이빨로 또 하나의 독전을 물었다.남해악신은 입에 물었던 독전을 퉤,뱉어내고는 싸늘히 웃었다.

[흐 흐 흐....나의 규칙은 반격할 힘이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여섯 개의 화살을 쏘았다.이것은 네가 먼저 손을 쓴 것이니 네가 반격할 힘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나는 먼져 너의 복면을 벗기고 그 다음 너의 옷을 모조리 벗긴 다음 마지막으로 목뼈를 비틀어 죽이겠다.]

이때 단예가 불쑥 말했다.

[틀렸습니다.]

[틀리다니?]

남해악신이 단예를 바라본다.

[어르신꼐서는 영웅호걸로써 중상을 입은 여인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그녀가 나에게 잇달아 여섯 대의 독화살을 쏘았다.너도 보았지? 중상을 입은 여인이 영웅호걸을 먼저 괴롭힌 것이지, 결코 영웅께서 가련한 여인을 괴롭힌 게 아니다.]

단예는 당당히 나서며 또렷하게 말한다.

[그래도 틀렸습니다.]

[어째서 틀렸다는 거냐? 개방귀 같은 소리를 하면 네놈의 팔다리를 분질러 버릴테다.팔다리를 분지르는 것은 내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남해악신이 노한 표정을 지으며 단예를 노려본다.

[어르신의 규칙은 반격할 수 없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

단예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 규칙은 어길 수 없겠지요?]

[물론이다.]

단예는 다짐받듯 물었다.

[한 자도 고칠 수 없겠지요?]

[반 자도 고칠 수 없다.]

남해악신은 당당히 대답했다.

[만약 고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후레자식이다!]

[좋아요.매우 좋습니다. 목 소저가 먼저 어르신을 공격했습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하지만 이것은 결코 반격이 아닙니다.다만 선공(先攻)일 뿐이지요. 만약에 어르신께서 그녀를 먼저 공격하신다면 그녀는 결코 반격하거나 막아낼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따라서 그녀는 기습을 가할 힘은 있으나 반격할 힘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르신계서 그녀를 죽인다면 바로 어르신의 규칙을 어긴것이 됩니다. 규칙을 어긴다면 후레자식이 되고 말지요.]

단예의 말은 조리정연하여 남해악신은 어리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예는 어렸을 때부터 유교와 불교의 경전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낱말 하나 하나의 사소한 차이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못하는 것 또는 안 하는 것,혹은 백마는 말이 아니고[白馬非馬] 견고한 돌은 돌이 아니라는 [堅石非石] 말들을 연구한 바 있어서 이 위급한 순간에 남해악신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고 반박한 것이었다.

남해악신은 미친듯 소리지르며 단예의 어깨를 움켜잡고 흔들었다.

[네가 감히 나보고 후레자식이라고 욕을 해?]

이어 단예의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어 비틀려고 했다.단예는 급히 말했다.

[제가 언제 후레자식이라고 했습니까? 어르신께서 규칙을 어긴다면 후레자식이 되지만 규칙을 지키신다면 그때는 후레자식이 아니지요.어르신께서 후레자식이 되고 안 되고는 규칙을 준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렸다고요.]

목완청은 단예가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계속하여 후레자식 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자 남해악신이 화가 나서 틀림없이 그의 목을 비틀어 죽이리라 생각했다.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얼른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뜻밖에도 남해악신은 후레자식이 되고 싶지 않아서인지 단예를 놓아주었다.

[노부는 바보가 아니야.너희들을 죽여 후레자식이 되지는 않겠다.]

남해악신은 흉칙하게 웃으며 목완청에게 다가갔다.

[네가 복면을 벗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옷을 찢어 버리겠다.]

목완청은 무슨 좋은 수가 생각이 났던지 단예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요.]

단예가 가까이 가자,목완청은 등을 남해악신에게 돌리며 단예의 귀에

입을 대고 나직히 말했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맨 처음 나의 얼굴을 보는 남자예요.]

말을 마치고는 천천히 복면을 벗는다.

단예는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초생달이 맑게 빛나는 듯, 꽃잎 위에 아침 이슬이 맺힌 듯,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눈이 내린듯이 희고 고운 얼굴 피부는 성스럽게 보일 지경이었다.호수같이 그윽한 한 쌍의 눈은 혼백을 빨아당기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꽃잎을 문 듯한 붉고 조그만 입술은 꽉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정말 선녀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단예의 눈앞에 있었다. 그 누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살인마인 줄 알겠는가?

목완청은 복면을 다시 쓰고 남해악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네가 나의 모습을 보려면 먼저 내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남해악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이미 시집을 갔느냐? 네 남편은 누구지?]

목완청은 단예를 가리켰다.

[이 분이에요.이 분은 맨 처음으로 나의 얼굴을 본 남성이에요.그런데 나는 이 분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 이 분께 시집을 가야 해요.]

단예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낭자....그건....]

이때 남해악신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해악신은 눈에 짙은 호기심을 담고 단예의 몸을 구석구석 세밀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별안간 남해악신이 크게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하 하.정말 묘하군 그래! 이녀석아,빨리 몸을 돌려 보아라.]

단예는 간이 콩알만 해졌으나 감히 거역할 수가 없어 몸을 돌렸다.남해악신은 다시 소리쳤다.

[정말 절묘하다.나를 닮은 녀석이 세상에 있었다니!정말 나를 꼭 닮았어.]

단예와 목완청은 어리둥절 해졌다.

(나의 어디가 저 사람을 닮았다는 걸까? 내가 보기엔 닮은 곳은 단 한군데도 없는 것 같은데.)

남해악신이 훌쩍 몸을 날려 단예에게 다가오더니 단예의 뒤통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단예는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가 힘을 주면 그의 머리통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숴질 것이다. 남해악신은 손을 내려 단예의 팔과 다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이었다.

(이 악노이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럴까?)

남해악신은 단예의 몸에서 손을 ㄸ고 헤벌쭉이 웃었다.

[하 하.꼭 닮았구나.너는 나를 따라가자.]

단예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물었다.

[어디로 가자는 건가요?]

[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빨리 절을 해라.너를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절을 한다면 나는 즉시 허락하마.]

[그건....그건....]

단예가 더듬거렸다.남해악신은 신이 난듯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말했다.

[너는 손 발이 길어 무공을 연마하면 대성할 놈이다.그리고 뒷골이 불룩하며 허리가 가늘고 유연하다.어디 그뿐이냐? 총명하기 그지 없으며 나이 도한 적당하니 정말 너 같은 제자는 천하를 이 잡듯 뒤져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보아라.나의 뒷골이 너처럼 불룩하지 않느냐?]

남해악신은 춤을 그치고 단예에게 뒤통수를 내밀었다. 단예가 만져보니 남해악신의 뒤통수는 유난히 불룩했다. 손을 떼고 자신의 뒤통수를 만져보니 정말 비슷한 것 같았다.

(뒷골이 닮긴 닮았군!)

남해악신은 애써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남해파는 한 명의 제자밖에는 거둘 수 없다.나의 옛제자 손삼패의 자질은 너의 백분지 일도 못 미쳤다. 그가 죽기를 정말 잘했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번거롭게도 내가 그 녀석을 죽이고 너를 제자로 맞아야할 뻔했어.]

단예는 그 말을 듣자 소름이 끼쳤다.

(이 자가 이처럼 잔인하다니....나보다 자질이 좋은 사람을 보면 나를 죽이고 그를 제자로 삼을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었다.

[난 무공을 배우고 싶지도 않고 당신을 사부로 모시고 싶지도 않아요]

남해악신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건 왜지? 세상의 젊은이들이 모두 나의 기막힌 무공을 배우고 싶어 잠을 못 이루고 있거늘 너는 어째서 싫다고 하는 거냐?]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맞으시면 되지요. 만약에 당신 제자가 되었다가 나보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를 죽이고 그를 제자로 삼을것이 아닙니까? 난 공연히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해악신은 그 말을 다 듣고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핫 핫 핫! 너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있구나!천하가 아무리 넓다고는 하지만 너보다 자질이 뛰어난 인물은 없을 것이다. 단언하건데 너는 백년에 하나 날까말까한 인재다! 어찌 다른 사람을 너에게 비교할 수 있단 말이냐?]

(저 사람의 말이 사실일까?)

단예가 반신반의할 때였다.갑자기 남해악신이 호통을 내질렀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썩 기어 나오너라!]

그러자 옆의 숲속에서 십여 명이 모습을 나타냈다.서파파와 평파파, 그리고 검을 쓰는 사내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그들은 숲속에 숨어 있었지만 남해악신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그들은 큰일났다고 속으로 생각했다.남해악신의 악명은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으며 남해악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해악신은 단예와 같은 인재를 제자로 삼게 된다는 생각에 한없이 기뻤으므로 서파파 등을 보고는 안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너희들 마침 잘 왔다.내가 세 제자를 거둬들였는데 축하를 해주러 온 모양이구나.]

서파파는 목완청을 가리키며 공손히 말했다.

[우리는 저 계집애를 잡아 동료의 복수를 하러 왔습니다.]

남해악신은 벌컥 노성을 질렀다.

[저 소저는 내 사랑하는 제자의 마누라다! 감히 누가 잡아가겠다는 거냐? 못된 것들 같으니 당장 꺼져 버려!]

서파파 등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단예가 불쑥 입을 연다.

[나는 어르신네의 제자가 되지 않을 겁니다.나는 이미 사부님이 계십니다.]

남해악신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내질렀다.

[네 사부는 누구냐?그가 나보다 고강하단 말이냐?]

[제 사부님의 재주는 아마도 어르신께서 조금도 모르실 겁니다.그 분은 주역 속의 괘상(卦象),계사(繫辭),명이(明夷),미제(未濟) 등에 능통하십니다.]

남해악신은 무예만을 익혔지 사서삼경을 공부한 적이 없었다.더구나 주역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는 단예가 주워섬기는 괘상이니 계사니하는 것들이 무슨 신기한 무공의 명칭인 줄 알고는 난처해졌다.

[어르신께서는 그와 같은 고심한 공부를 모르시는 것 같군요.어르신의 호의는 제 마음에 새겨두겠습니다.다음에 제 사부님께 청을 드려 어르신과 한 번 시합을 하도록 주선해 보겠습니다.그때 어르신께서 제 사부를 이기신다면 어르신을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사부는 대체 누구냐?내가 그를 무서워 할 줄 알고? 빨리 겨루어 보아야겠다.]

이때였다. 멀리서 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는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 이곳까지 들려오고 있었다.피리 부는 사람의 내공(內功)은 무궁무진한 듯 피리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피리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들자 바늘로 찔린 듯한 고통을 느끼고 얼굴을 찡그렸다.

[큰 형님께서 나를 부르는군! 너희들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네 사부와 나는 언제 어디서 무슬 시합을 가져야 할까? 빨리 말해라,빨리!]

[그건....제가 사부님께 물어 보아야 합니다.그런데 어르신께서 가시고 나면 이 사람들이 우리를 죽여 버리고 말텐데 어떻게 약속을 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예는 서파파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해악신은 번개처럼 몸을 날려 검을 쥔 사내의 멱살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오르손으로 사내의 머리통을 잡았다. 왼손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오른손을 왼쪽으로 돌리는순간 사내의 머리통이 몸통과 반대로 비틀어지며 우두둑,소리가 났다. 사내의 목뼈가 부러진 채 혀를 쑥 내밀고 절명하고 말았다.죽은 사내의 얼굴은 자신의 등뒤로 넘어가고 말았다.참혹한 죽음이었다.

이 사내는 목완청과 겨룰때 매우 날렵했는데 남해악신에게 잡히자 비명조차 못 지르고 황천으로 간 것이다.

남해악신이 손을 놓자 사내의 시신은 짚단처럼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세 남자가 검을 뽑아들고 일제히 남해악신에게 달려들었다. 남해악신은 피식 웃으며 두 발을 번개처럼 놀렸다.

퍽, 퍽,하는 음향과 함께 세 명은 높이 날아오르더니 모조리 계곡 아래로 떨어진다.처절한 비명소리가 계속 아래서 들려왔다.

남해악신은 웃으며 서파파 등을 바라보았다.

[난 모가지를 비틀 때 생기는 우두둑 소리가 제일 듣기 좋거든! 어디 한 놈더 비틀어 볼까?어느 놈이라도 가장 늦게 도망치는 놈의 목을 비틀어야지.]

그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파파등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헤헤....요 녀석아,네 사부에게도 이와 같은 재주가 있느냐? 나를 사부로 모신다면 나는 즉각 너에게 이 재간을 가르쳐 줄 것이다.네 마누라의 무공이 제법인데,만약 그녀가 네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이렇게 우두둑 그녀의 목을 비틀면 된다.]

홀연 피리 소리가 다급하게 변하는 것이어서 오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간다! 가! 더럽게 재촉하네.]

남해악신은 말을 마치자 번쩍하더니 벼랑 아래로 뛰어내린다.단예는 그가 떨어져 죽지 않나 보려고 벼랑가에 이르렀다.남해악신은 허공에서 몸을 몇 번 뒤집더니 까막득한 계곡 아래로 사뿐히 떨어져 내린다.

[정말 신선 같은 솜씨구나!저런 재주를 살인하는 데 쓰다니 정말 아깝구나.아까워!]

그는 목완청에게 다가갔다.

[다행히도 낭자가 지혜를 짜냈기에 저 악인을 속일 수가 있었군요.]

목완청이 단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묻는다.

[속이다니,뭐를요?]

[소저의 얼굴을 맨 처음 본 남자가 바로....그대의....]

목완청은 날카롭게 말했다.

[그건 속이려고 꾸민 말이 아니에요. 사실이라구요. 이제부터 당신은 저의 남편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대가 저 악인을 사부로 삼는 것은 반대해요.나의 목을 비틀면 곤란하거든요.]

[어,그렇다면 진실이었나요?]

단예는 대단히 놀랐다.목완청은 몸을 바르르 떨더니 앙칼지게 말했다.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요? 나를 받아들이기가 싫은가요?]

단예는 화를 내는 그녀를 재빨리 부축하며 급히 말했다.

[소저, 몸 생각을 하시오. 화를 내면 건강에 해로워요.]

갑자기 목완청의 오른손이 번뜩이자 단예의 빰에서 찰싹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따귀를 때리자 힘이 부치는지 단예의 품안으로 쓰러진다. 그는 재빨리 그녀를 껴안았다. 목완청은 자기의 몸을 안고 있는 남자가 자기의 남편이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마구 뛰고 호흡이 가빠왔다.단예는 부드럽고 연약한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있으려니 뺨을 맞은 불쾌감이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갑자기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놓으세요.]

단예는 조심스레 그녀를 바위에 기대어 앉도록 했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긴다.

(지금 그녀는 중상을 입어서 신경이 무척 날카로운가 보다.그러니 나를 때려도 가만 내버려 두자.)

그는 손가락을 구부리며 자기가 알고 있는 점을 쳐 보았다.그는 주역에 통달하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쳐보곤 했었다.

(곤(困)의 괘가 나왔구나.곤이란 유언불신(有言不信)이 아닌가.곤란한 처지를 당하여 남의 말을 믿기 힘들다는 뜻이다. 내가 대악인의 제자가되고 이 악랄한 여인의 남편이 된다면 그건 난처한 일이다.)

단예가 씁쓸하게 웃고 있는데 목완청은 그의 옆모습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눈을 뗄 줄 모른다.단예는 쑥스러워서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복면을 벗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낭군님의 말씀이니 따르도록 하지요.]

목완청은 순순히 복면을 벗는다.수려한 얼굴이 나타나자 단예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복면하라는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아랫배에 극렬한 통증이 엄습했다.마치 칼로 난자하는 듯 형언할 수 없이 아파왔고 창자가 수백 토막으로 잘라지는 것 같았다.

[아이쿠!]

단예가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쭈그려 앉았다.

목완청은 깜짝 놀랐다.

[이봐요,왜 그래요?]

[그....단장산이....]

[어머나! 아직까지도 해약을 드시지 않았나 보군요?]

[머....먹었소. 아마도 분량이 적은 모양이오.]

품속에서 자기병을 꺼내 모조리 입 속에 털어넣는다.그러나 배는 점점 더 아파오기 시작해서 급기야 그는 땅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신음을 내질렀다.

[아이고....해약이 가짜인 모양이오!]

목완청은 어찌할 줄 모르며 그의 배를 쓰다듬었다.갑자기 그녀는 표독한 어조로 뇌까렸다.

[만약 해약이 가짜라면 나는 신농방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어요.]

단예는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사공현에게 준 것도 가짜가 아니오? 피차 마찬가지인데 그들을 죽일 필요는 없어요.아이고!]

[말도 안 돼요.그들의 목숨과 당신의 목숨이 같을 수는 없어요.]

그녀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단예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훔쳐 주었다.

[당신은....당신은 죽어서는 안 돼요.]

갑자기 목완청은 구슬 같은 눈물을 떨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단예의 뺨에 부비며 울먹였다.

[낭군....낭군,죽지 말아요.]

단예는 그녀의 상체가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뺨과 뺨이 닿자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여인과 몸을 접촉해 보기는 처음이었다.부드러운 피부의 촉감과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낭군이라는 음성,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난초 향기에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이상하게도 이때 복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원래 단장산은 해독이 될 때 한 번 아픈 법인데, 사공현은 영취궁의 사자가 두려워 미처 그 사실을 알려 주지 못했던것이다.

목완청은 갑자기 그가 신음소리를 내지 않자 고개를 조금 쳐들고 물었다.

[이젠 아프지 않나요?]

[좀 나았어요,하지만....하지만....]

[하지만 뭐예요?]

단예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그대가 내 곁을 떠난다면 다시 아플 것 같군요.]

[응큼해요.]

목완청은 얼굴이 빨개져서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어 입을 삐죽이며 내쏘았다.

[알고 보니 꾀병이었군요?]

단예가 막 대답을 하려는데 다시 배가 뒤틀리며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땅 위를 뒹굴었다.

[낭군,많이 아픈가요?]

목완청이 놀라 물었다.

목완청의 눈앞에 지니간 날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부모 없는 고아가 되어 엄격한 사부 밑에서 쓸쓸히 살아왔던 날들이었다.그녀의 친구는 다만 심산유곡에 퍼져 있는 돌과 나무 그리고 파아란 하늘이었을 뿐,그 누구도 그녀와 놀아 주지 않았다.고아이기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외로움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길고도 길었던 외로움 속에서 벗어나 이제는 밝고 행복하게 살아가나했더니 그녀의 모든 희망인 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그녀는 흐느꼈다.

[낭군 그대가 죽으면 나 역시 살아갈 수 없어요!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저승에 가서 다시 부부가 되어요.거기서 아무 걱정없이 행복하게....]

단예는 그녀가 자기를 따라 죽는다고 하자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당신은 죽어서는 안 돼요.당신마저 죽는다면 그누가 나의 성묘를 해 준단 말이오. 나는 그냥은 죽을 수 없어요. 그대가 삼십년 이상 내 성묘를 해 줘야 죽어도 눈을 감을 거요.]

목완청은 물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이상하군요.죽으면 아무 것도 모른다고요.내가 성묘를 한다고 해서 그대에게 무슨 덕이 되나요?]

단예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나와 함께 죽는다고 해서 더 좋을 것도 없지 않소. 자,내 그대에게 말해 두지만 당신과 같이 어여쁜 사람이 매번 내 무덤앞으로 와 성묘를 해 준다면 나는 지하에서라도 알게 될 것이고 또 그대를 만나보게 되니까 기쁠 것이 아니겠소? 그러나 만약 그대가 나와 함께 죽게 된다면 둘 다 해골 바가지가 되고 말테니 얼마나 보기 사납겠소?]

목완청은 그가 자기를 예쁘다고 하자 속으로 무척 기뻤다. 그러나 오늘 막 결혼을 하자마자 그가 목숨을 잃게된다고 생각하니 그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말았다.

단예는 손을 뻗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껴안았다. 따뜻한 촉감이 느껴진다.마치 뼈가 없는 듯 부드럽다. 다시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고 그녀의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그난 난생 처음으로 여자와 입맞춤을 했다. 감히 오랫동안 입맞춤을 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즉시 입술을 떼고는 멍하니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목숨이 길지 않으니 애석하군요. 이와 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이제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목완청은 그가 입맞춤을 하는 순간 머리 속이 텅빈 듯하고 가슴이 무섭게 두근거렸다.그녀의 두 뺨은 빨갛게 물들었다.그녀는 부끄러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본래 옥처럼 희고 곱던 얼굴이 빨개지자 더욱 요염해 보였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의 얼굴을 본 남자예요. 그대가 죽는다면 저의 얼굴을 짖이겨 버리겠어요. 그리하여 다시는 두 번째 남자가 있어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할 것이에요.]

단예는 본래 그런 짓을 못하게 말리려고 했다.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갑자기 마음 속에서 질투심이 끓어올랐다.다른 남자가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를 보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말리려고 하던 말을 그만 다시 집어삼키고는 화제를 돌렸다.

[과거 어째서 그와 같이 악독한 맹세를 했소?그 맹세는 이상하지만 무척이나....잘 되었다고 생각되는군요.]

목완청은 말했다.

[그대는 나의 낭군이니 그대에게 들려줘도 무방해요.저는 부모도 없는 사람이에요.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산에 버려졌어요. 다행이 저의 사부님께서 저를 구해 주었죠. 그녀는 고생하며 저를 키웠고 무공도 가르쳐 주었어요.저의 사부님은 천하의 남자들은 모두 다 여자를 헌신짝 버리듯 한댔어요.그리고 만약에 나의 용모를 본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나를 유혹할 것이라고 했어요. 그리하여 저는 열네 살 때에 사부님의 명령에 의해서 복면을 하여 얼굴을 가리게 되었죠. 그리고 여지껏 십팔 년이란 세월을 살았지만 줄곧 사부님과 함께 깊은 산속에서만 살았어요.그런데....]

단예가 불쑥 그 말에 뛰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열 여덟 살이구만! 나보다 한 살이 적소.]

목완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금년 봄에 우리 산속으로 사람이 한 사람 찾아왔어요.그 사람은 사부님의 사매인 소야차 감보보의 편지를 가지고 왔죠.]

단예는 불쑥 입을 열었다.

[소야차 감보보라니,그것은 종영의 어머님이 아니오?]

목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그녀는 저의 사숙이에요.]

갑자기 그녀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그대가 종영이란 계집애를 자꾸 생각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겠어요.그대는 나의 남편이에요.오직 나 하나만을 생각해야 해요.]

단예는 혀를 내밀며 놀랍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목완청은 화가 났다.

[듣지 않겠어요? 나는 그대의 부인이에요. 나도 그대만을 생각할 것이고 다른 남자는 돼지나 개 기타 등등의 짐승들로 여길 거예요.]

단예는 짐짓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소.]

목완청은 손을 뻗어 그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건 왜죠?]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어머니와 그대의 사부님도 모두 여자들이 아니오? 내가 어찌 그녀들을 짐승과 같이 여길 수 있겠소.]

목완청은 킥,하고 웃었다.

[어쨌든 그대는 종영이란 계집애를 자꾸만 생각하지 말아요.]

단예는 말했다.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그대가 종 부인을 들먹이기에 종영이 생각난 것이오.그런데 그대 사부님에게 보낸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있었지요?]

목완청은 말했다.

[나는 편지 내용을 몰라요.사부님은 그 편지를 보더니 크게 화를 내시며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것이었어요.그리고 편지를 가져온 사람에게 말했어요. `알았으니 너는 돌아 가도록 해라'.그리고는 그 사람이 간 다음 사부님은 며칠간 울었어요.밥도 먹지 않았어요.저는 사부님에게 너무 슬퍼 말라고 권했으나 사부님은 아랑곳 하지 않았으며 또 그원인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요.다만 두 여자가 자기에게 죄를 지었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저는 말했어요.`사부님 화를 내지 마세요. 그 두 나쁜 여자가 사부님을 이토록 괴롭혔다면 우리 두 사람은 산을 내려와서 두 나쁜 여자를 죽여 버려요.' 그러자 사부님은 말했어요.`옳아.'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산을 내려와서 두 나쁜 여자를 죽이려고 했어요.사부님은 이 몇 년 동안 주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알고 보니 그 두 나쁜 여자가 그토록 사부님을 상심시킨 일을 저질렀던 것이죠.다행히 감보보가 기별을 해서 두 여자의 짓거리와 살고 있는 장소를 알게 되었죠.]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종 부인은 보기에 천진난만하고 매우 수줍음을 타는 것 같았는데 원래 꾀를 잘 짜내는구나.이것이야 말로 차도살인(借刀殺人)이 아닌가 ? 그녀 자신도 그 두 여자를 미워하면서 목완청의 사부로 하여금 그녀들을 죽이게 한 것이로구나.)

목완청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산을 내려오게 되었을 때 사부님은 나에게 맹세를 하도록 했어요. 그리하여 만약 누가 나의 얼굴을 보았는데도 내가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시집을 가야 한다고 했어요.그러나 그 사람이 만약 나를 처로 삼지 않거나 처를 삼은 후에 나를 버린다면 나는 반드시 친히 그박정한 사람을 죽이라는 것이었어요.만약 내가 이와 같은 맹세를 저버리고 지키지 않는다면 사부님이 아시게 되었을때 사부님께서는 자결을 하겠다고 했어요.저의 사부님은 한 말은 반드시 지킬 줄 아는 분이지 결코 아무렇게나 겁주려고 말씀을 하시지 않아요.]

단예는 속으로 놀라 생각했다.

(천하에 아무리 무서운 맹세라 할지라도,만약 어떻게 하지 않는다면 그 자신이 어떠한 보답을 받게 된다는 맹세를 하지만 그녀의 사부처럼 스스로 자결을 하겠다고 위협하여 남으로 하여금 맹세하도록 만드는 일은 보기 어려울 것이고 또 이와 같은 맹세는 정말 거역하기 힘들 것이다.)

목완청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저의 사부님은 바로 저의 부모와 같아요. 그야말로 제가 입은 은혜는 태산처럼 높은데 내 어찌 그 분의 분부를 듣지 않을 수 있겠어요? 더군다나 그와 같은 당부는 모두 저를 위한 것이었어요. 당시 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땅에 꿇어앉아 맹세를 했죠. 그리하여 사부님과 제가 산에서 내려오자 마자 언저 소주(蘇洲)로 가서 성이 왕(王)씨인 나쁜 여자를 죽이려고 했어요.그러나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매우 괴상했어요. 수로(水路)로 가야 했는데 갈래길이 하도 많아 어디가 어딘지를 분간할 수 없었고, 저와 사부님은 왕씨의 많은 수하들을 죽였으나 시종 그녀는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후 저의 사부님은 우리 두 사람이 헤어져서 찾자고 하셨죠. 그리하여 일개월 후에도 찾지 못하게 된다면 각기 대리로 돌아오자는 약속을 했어요. 왜냐하면 또 다른 나쁜 여인이 대리에 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왕씨 여인의 수하에는 무공이 대단한 남녀 노예들이 적지 않게 있었어요. 서파파와 평파파라는 늙은이는 바로 그 한 떼의 노예들의 우두머리 였지요.나는 여러 사람을 당해낼 수가 없어서 싸우는 한편 대리로 도망쳐 와 감 사숙을 찾았던 것이에요. 감 사숙은 나에게 만겁곡 밖의 장원에서 살도록 하면서 사부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라고 했어요.사부님을 기다렸다가 다시 되돌아가서 그 나쁜 여인을 죽이라는 것이에요.그런데 사부님이 오기도 전에 서파파 등 한떼의 무리들이 먼저 도달한 것이에요. 그 이후의 일은 그대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에요.]

그녀는 말하기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처음 그대가 사부님이 말하신 것처럼 천하의 모든남자와 똑같이 의리도 없고 정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어요.그런데 나의 흑매괴를 빌려간 후에 놀랍게도 되돌아와 전갈을 해 주려고 했으니 정말 쉬운 노릇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그 한 떼의 노예같은 자들이 나를 포위 공격했을 때 그대는 무공도 모르면서 나를 지켜주려고 했어요. 나는.... 역시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구나....마음속으론 매우 고맙게 생각했죠.]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걸핏하면 따귀까지 때리곤 했는데 원래 마음속으론 고맙게 생각해서 그랬군. 맞았어,만약에 마음속으로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벌서 독화살로 나를 쏴 죽였을 것이다.)

목완청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다시 상처를 치료하느라고 나의 뒷등을 보게 되었으며 나는 또 그대의 엉덩이를 보게 되었어요. 그때 저는 이미 그대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그후 남해악신이 하도 다그치길래 그대로 하여금 나의 용모를 보게 했던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단예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부드러운 정이 담뿍 어려 있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하니 그녀가 정말 나에게 정을 준 것일까?)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말했다.

[그대가 나의 엉덩이를 본 것은 마음에 둘 것 없소. 조금 전에는 하도 사태가 급박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짓인 것을 알고 있으니 그 맹세를 지킬 필요는 없는 것이오.]

목완청은 눈시울을 붉히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맹세를 했는데 어찌 그 맹세를 고칠 수 있겠어요. 그대의 엉덩이가 뭐 보기 좋은 줄 아세요?꼴불견이었어요.그대가 만약 나를 취하기 싫으시면 일찌감치 말을 해요.그러면 나는 단 한 대의 화살로 그대를 쏴죽여 내가 맹세를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어요.]

단예는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급격한 고통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그는 두 손으로 배를 누르고 큰소리로 신음 소리를 뱉아냈다.

목완청은 재빨리 말했다.

[빨리 말해요.나를 아내로 맞아들이겠어요,그러지 않겠어요?]

단예는 말했다.

[나는....배가....몹시 아프오....]

목완청은 다그치듯 물었다.

[도대체 저의 남편이 되고 싶어요,되기 싫어요?]

단예는 어쨌든 이토록 아픈 것을 보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죽기 전에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고 또 그녀가 한평생 한을 품도록 만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꺼이 그대를 아내로 맞아들이겠소.]

목완청의 손가락은 본래 소매자락에 있는 독화살을 쏘는장치에 갖다 대놓고 있었다. 그의 이 말에 그녀는 무한히 기뻐했으며 아리따운 얼굴은 마치 복숭아꽃이 활짝 핀 듯했다. 그녀는 화살의 장치에서 손을 떼고 배시시 웃으며 단예를 안았다.

[정말 좋은 낭군이셔.내가 배를 어루만져 드릴게요.]

단예는 말했다.

[아니오.우리 두 사람은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았소.남녀....유별한데....이래서야 쓰겠소.]

목완청은 말했다.

[쳇! 그러면 조금 전에는 왜 입맞춤을 했어요?]

단예는 말했다.

[그대가 너무나 예뻐서 참을 수 없었소.미안하오.]

목완청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다고 할 건 없어요. 그대가 입맞춤을 하니까 나도 기분이 무척 좋았으니까요.]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소녀는 정말 천진난만하구나.그러나 종 부인의 천진난만한 듯한 태도는 가짜다.종영은 나이가 어리니 역시 진짜로 천진난만한 것이다.)

목완청은 말했다.

[그렇군요.뱃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한 번 아프기 시작하니까 더욱 심하게 아픈 거예요.내가 가서 저 녀석들의 살을 좀 뜯어다가 그대에게 먹여 주겠어요.]

그녀는 석벽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정말 남해악신이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놓은 사내의 살을 뜯으러 가는 것 같았다.

단예는 깜짝 놀라 복통마저 잊고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 고기는 먹을 수 없는 것이오! 나는 죽어도 먹지 않겠소.]

목완청은 의아한 듯 물었다.

[어째서 먹지 않겠다는 거예요? 저와 사부님은 산속에 있을 때 호랑이 고기도 먹었고,표범 고기도 먹어 봤어요. 그대의 말대로 한다면 모두 못먹을 것이 아니겠어요?]

단예는 말했다.

[호랑이와 표범의 고기는 물론 먹을 수 있지만 사람 고기는 먹을 수 없소.]

목완청은 고개를 갸웃뚱했다.

[사람 고기에는 독이 있나요?그건 몰랐는데요.]

단예는 말했다.

[독이 있는 것이 아니오. 그대는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오. 저 사내도 사람이오. 사람의 고기는 먹을 수가 없는 것이오.]

목완청은 말했다.

[그것은 어째서 인가요? 나는 이리나 늑대들이 배가 고프게 되면 다른 이리나 늑대들을 잡아 먹는 것을 보았어요.]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그러나 만약에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면 그 사람은 늑대나 이리와 다름이 없지 않겠소.]

목완청은 어릴 때부터 사부님과 함께 있으면서 한 번도 제 삼자와는 함께 생활을 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사부는 성격이 괴팍해서 그녀에게 세상 일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 세상의 도덕이나 규칙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단예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단예는 설명했다.

[그대가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도 잘못된 것이오.공자께서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고 했소.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되고 싶지 않다면 역시 사람을 죽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하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위험과 고통이 있을 때 손을 써서 도와 주어야 사람 도리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오.]

목완청이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위험과 고통 속에 빠졌을 때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줄까요? 내가 만난 사람들은 사부님과 그대 외에는 모두 다 나를 해치려고 하고,죽이려고 하고,또 괴롭히려 할 뿐 한 번도 좋게 대해주지를 않았죠. 호랑이나 표범은 나를 물려고 했고 나를 잡아 먹을려고 해서 나는 그것들을 죽였어요. 마찬가지로 나를 해치려 하고 죽이려 하면 자연히 그 사람을 죽일 수밖에 더 있겠어요.그것과 이것이 뭐가 달라요?]

이 몇 마디 말에 단예는 그만 대답할 말이 없어져서 변명하듯 말했다.

[당신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하지만....]

목완청은 코웃음 쳤다.

[흥! 뭐가 일리가 있다는 거죠?그대는 벌서 남해악신 사부님의 말투를 배웠군요.]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남해악신은 그래도 사리를 분간할 줄 알았소. 따라서 그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소.]

갑자기 목완청이 놀람에 찬 외침을 내뱉으며 단예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그가 왔어요....]

단예는 고개를 돌렸다. 별안간 노란 그림자가 번쩍 하더니 남해악신이 어느덧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단예를 바라보더니 헤벌죽이 웃었다.

[네가 아직도 사부님으로 모시겠다는 절을 하지 않아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혹시나 염치없는 녀석이 선수를 써서 너를 거두어가 제자로 삼는다면 어쩌나 겁이 났지.노대(老大)는 말하기를 선수를 쓰는 자가 장땡이고,뒤에 손을 쓰는 자는 손해를 입는다고 했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손에 쥐어야 내 것이 되는 것이고, 남에게 빼앗기게 된 후에 다시 빼앗아 오려면 쉽지 않다고 했지,노대의 말은 언제나 옳아.더우기 그를 이길 수 없으니 그의 말을 들어야지.이봐 네 녀석은 빨리 절을 해라.]

단예는 생각했다.

(승부욕이 강하고 추켜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노대에게 진사실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는 솔직성도 있구나!)

그러고 보니 남해악신의 왼쪽 눈이 시커멓게 부어 올라 있었고, 입가도 크게 터져 있었다.틀림없이 노대에게 얻어 맞은 것이었다.세상에 남해악신보다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니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를 사부로 맞아들일 수는 없었다.그리하여 단예는 쓸데없이 시간만 질질 끄는 말을 했다.

[조금 전 노대가 피리를 불어서 어르신을 부른것은 싸우자는 것이었나요?]

남해악신은 말했다.

[그렇지.]

단예는 말했다.

[어르신네가 이기셨겠네요.노대는 어르신에게 얻어맞고 도망쳤겠지요?]

남해악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그의 무공은 나보다도 고강해.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이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와 일이백 합은 싸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주먹 세 대와 두 번 발길질에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했어. 그는 역시 사대 악인의 첫째다워. 나는 둘째가 되어야겠어. 하지만 나도 허벅지를 강하게 한 번 걷어 찰 수 있었지. 그는 `악노삼 무공이 많이 증진되었네'하고 말하더군. 노대가 나의 무공이 증진되었다고 칭찬하는 것을 보면 역시 노대의 말은 언제나 옳아.]

단예는 다시 그 말을 받았다.

[어르신은 악노이지 악노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해악신은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띄었다.

[몇 년간 보지 못한 사이에 노대가 아무렇게나 부른 것이겠지 뭐.아마 깜빡 잊었을 거야.]

단예는 말했다.

[노대의 말은 언제나 옳은 것인데, 설마하니 차례나 순서를 잘못 불렀을까요?]

핟데 뜻밖에도 그 말은 남해악신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남해악신은 크게 부르짖었다.

[나는 악노이지 악노삼이 아니야! 너는 빨리 땅바닥에 엎드려 너를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빌어라. 내가 싫은 체하면 너는 두 번 세 번 부탁을 하고 큰절을 하면 나는 못 이기는 척 응낙할 것이지만 기실 내 마음속으로는 너를 제자로 삼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란다. 이것은 우리 남해파의 규칙이다.이후 네가 제자를 거둘 때도 이렇게 해야 된다.잊지 말아라.]

단예는 물었다.

[만약 그 규칙을 고치게 된다면 어르신은 또 다시 후레자식이 되는 것입니까?]

남해악신은 말했다.

[바로 그렇다.]

단예는 말했다.

[고치기만 하면 후레자식이 되는 거죠?]

남해악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자,이제 빨리 큰절을 해라.]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땅에 엎드려서 큰 절도 하지 않을 것이며 애써 제자로 거둬달라고 어르신에게 애원하지도 않겠어요.]

남해악신은 극도로 노해서 얼굴이 누렇게 변했다.메가 같은 입을 쫙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마치 달려들어 금새라도 사람을 물 듯한 기세였다.

[나에게 큰 절을 하며 부탁을 하지 않겠다고?]

단예는 말했다.

[큰절도 올리지 않겠으며 부탁도 하지 않겠습니다.]

남해악신은 한 걸음 내딛으며 호통을 내질렀다.

[나는 너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테다.]

단예는 말했다.

[비틀려면 비틀어 버리세요.나는 반격할 힘이 없습니다.]

남해악신은 왼손을 뻗쳐내서는 그의 가슴팍을 움켜잡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목뒤를 잡았다.

단예는 말했다.

[나는 반격할 힘이 없는데 어르신이 날 죽인다면 어르신은 뭐가 되는것

이죠?]

남해악신은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바로 후레자식이 되는 것이지.]

단예는 말했다.

[맞아요.]

남해악신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죽일 수도 없고 나에게 애원도 하지 않겠다니.이거 난처하게 됐군.)

그러다가 흘깃 보니 목완청이 가득 관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벼락같이 몸을 날려 목완청의 뒷덜미를 잡아서 들어올렸다.그리고 몸을 돌려서 벼랑가에 이르렀다.왼발을 쳐들고 오른손으로 금계독립(金谿獨立)의 자세를 취했다.그리고 그는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던질듯 흔들어댔다. 마치 목완청을 금방이라도 떨구려는 듯한 자세였다. 단예는 혹시나 목완청이 생명을 잃게 될까봐 놀라 부르짖었다.

[조심하세요.빨리 이쪽으로 오세요.어르신....어르신....]

남해악신은 흉칙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나를 무척이나 닮았기 때문에 반드시 너를 제자로 삼아야 돼.나는 저쪽 산머리에 가서 몇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

그는 멀리 있는 한 산봉우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와 할일 없이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네가 칠일 이내에 내가 있는 곳에 찾아와 제자로 거두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면 너의 아내 목숨은 살려 주겠다.그렇지 않을 때는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리고 말테다.]

그는 두 손으로 목완청의 목을 비트는 시늉을 하더니 갑자기 몸을 날려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오른손을 산벽에 갔다 대고는 목완청을 안고서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봐요. 조심하세요.]

그는 벼랑가로 달려갔다.그런데 악노삼은 이미 목완청을 든 채 십여 장 아래로 내려가고 잇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그만 맥이 빠져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목완청은 남해악신에게 뒷덜미를 잡혀 벼랑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의 오른손이 절벽에 갖다대자 아래로 미끄러지는 기세가 약간 누그러졌다.이때 목완청은 반항은커녕 허공에 떠 있는 몸이라 발버둥조차 칠 수 없었다.나중에는 아예 눈마저 감아 버리고 말았다.한참 후에 그녀는 자기의 몸이 위로 튕겨지는 듯하면서 땅바닥에 내려서는 것을 느꼈다.그런데 남해악신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땅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다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남해악신은 그녀를 번쩍 치켜드는데 마치 갓난아이를 드는 듯이 조금도 힘드는 기색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난석더미 사이와 물보라가 일고 있는 골짜기 바닥에서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삽시간에 그는 계곡을 가로질러 계곡 저쪽에 도달했다.그는 목완청을 향해 말했다.

[너는 내 제자의 아내이니 잠시 동안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그 녀석이 만약 나를 찾아와 사부로 모시지 않는다면,흐흐흐.... 그때는 나의 제자가 아니고 너 역시 내 제자의 아내가 아니다. 남해악신은 아름다운 계집애를 보게 되면 먼저 강간을 한 후 죽여 버리지.]

목완청은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끼쳐 말했다.

[저의 남편은 무공을 몰라요.저 벼랑 위에서 어떻게 내려올 수 있겠어요.그는 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목숨을 걸고 어르신을 찾아와 사부님으로 모시려고 하겠지요. 그러다가 실족하여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게 된다면 그때 어르신에게는 제자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에요.그렇게 된다면 어르신은 요모조모로 뛰어난 인재를 한평생 다시 찾지는 못하게 될 거예요.]

남해악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나는 그 녀석이 산을 내려오지 못하리라는 점을 미처 생각치 못했구나.]

그는 갑자기 길게 휘바람을 내불었다.

얼마 후 산비탈 저쪽에서 두 명의 황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그들은 이마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남해악신에게 인사했다.

남해악신은 큰 소리로 말했다.

[저쪽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서 그 녀석을 찾아 보아라.그가 나를 사부로 모시겠다고 한다면 즉시 나에게 엎고 오도록 해라. 만약 나를 사부로 모시지 않겠다면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며 그를 보호해라.노부가 선택한 제자가 결코 다른 사람을 사부로 삼게 놔 두지는 않겠다.]

두 명의 사내는 공손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남해악신은 분부가 끝나자 다시 목완청을 붙들고는 걸음을 옮겨놓았다. 목완청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단예가 오기 전까지 자기는 위험이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단예가 너무나 고집이 세기 때문에 남해악신과 같이 흉폭한 사람을 사부로 모시지 않을 것이 틀림없어, 그녀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는 나에게 퍽이나 많은 정을 느끼는 것 같았으나 부부의 정은 없는 것 같았다.나를 위해서 이 악인의 제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아! 아무쪼록 그가 평온무사하고 벼랑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빌 뿐이다.그런데 그의 복통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그녀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해악신은 이미 그녀를 든 채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남해악신의 내공은 정말 무궁무진했다.산을 오른 후에도 잠시도 쉬지 않고 다시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다.그리하여 잇따라 네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서야 사방이 뭇 봉우리들에게 둘러싸인 한복판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목완청을 내려놓더니 바지를 벗고서는 한 그루 나무를 향해 오줌을 갈기기 시작했다.목완청은 이 사람이 거칠고 무례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수건을 꺼내서 다시 얼굴에 썼다. 자기의 얼굴이 반반하게 생겼으니 만약 몇 번 더 쳐다보게 된다면 짐승같은 욕정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염려가 생겼다.그녀는 커다란 바위 앞에 앉아서 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남해악신은 오줌을 누고 난 후 바지를 추켜올렸다. 그리고는 그녀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복면을 하는 것이 오히려 좋구나.그렇지 않고 내가 몇 번 더 보게 되었다면 아마도 좋지 못한 일이 생길 뻔했어.]

목완청은 속으로 생각한다.

(자기를 잘 알고 있기는 하군.)

남해악신은 말했다.

[어째 말을 하지 않느냐.눈을 감고 자는 척한다는 것은 남해악신을 업수이 여기는 것이겠지.]

목완청은 고개를 흔들며 눈을 떴다.

[선배님! 선배님의 이름은 어떻게 되십니까? 이후 저의 남편이 선배님의 제자가 된다면 나는 반드시 선배님의 이름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남해악신은 말했다.

[나는 악....악.... 제기랄 나의 이름은 나의 아버지가 지어준 것인데 듣기가 좋지 않아.우리 아버지는 한 번도 좋은 일을 한 적이 없어. 그야말로 후레자식이지.]

목완청은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웃을 뻔했다.

(당신 아버지가 후레자식이라면 자신은 뭐가 되지? 자기 아버지마저 욕을 하다니 정말 사람 축에도 못 드는 작자군!)

그녀는 자기 역시 부친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점을 떠올렸다. 사부는 다만 여인을 저버린 박정한 사내라고만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남해악신보다 더 나을것도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그만 침울해지고 말았다.

이때 남해악신은 동쪽으로 몇 걸음 옮기더니 다시 서쪽으로 몇 걸음 서성거렸다.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미 같았다.목완청은 그가 서성거리는 것을 보자 마음이 심란해져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그래서 목완청은 슬쩍 말을 건넸다.

[조금 전 산 위로 오르고 내리고 했는데 피곤도 하지 않은가 봐요. 어째서 좀 앉아서 쉬지 않으세요.]

남해악신은 호통을 내질렀다.

[쓸데없는 일에 상관하지 마.노부는 앉아 있는 걸 제일 싫어한다.]

목완청은 상대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다만 단예만을 생각했다.그러자 마음이 기쁘기도 하고,한편 쓸쓸하기도 하였다.

별안간 허공에서 실날같이 가느다란 울음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매우 처량했다.여자가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남해악신은 퇘,하고 침을 땅바닥에 내뱉으며 말했다.

[초상을 치루는 사람이 왔군!]

그는 언성을 높여 부르짖었다.

[무슨 초상을 치루는게야! 노부는 이곳에서 기다린 지 오래되었다.]

그러자 그 소리는 여전히 들릴듯 말듯 부르짖는 것이 아닌가?

[내 아들아,이 에미는 너를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목완청은 의아하여 물었다.

[선배님의 어머니가 오신 거예요?]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무엇이 우리 어머니야! 터무니없는 소리 마.저 계집은 무악부작(無惡不作) 섭이랑(葉二랑)으로 사대 악인 가운데 하나야! 그녀의 서열은 두번째지.언젠가는 그녀와 서열을 맞바꾸고 말테야!]

목완청은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녀는 급히 물었다.

[그럼 첫째 악인의 별호는 어떻게 되며 넷째 악인의 별호는 어떻게 되죠?]

남해악신은 거칠게 대답했다.

[좀 작작 물어보는 것이 너의 신상에 좋을걸! 노부는 너와 이야기하기 싫단 말이다!]

갑자기 뒤에서 여인이 한숨짓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노대는 악관만영(惡貫滿盈),넷째는 궁흉극악(窮兇極惡)이라고 한단다.]

목완청은 섭이랑이 기척도 없이 가까이 다가왔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재빨리 머리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보았다.몸에 청색의 장삼을 걸친 한 여인이 나무에 비스듬히 기댄 채 목완청을 응시하고 있었다.머리카락은 길게 늘어뜨려 몇 가닥을 입가에 물고 있었는데 나이는 약 사십 세쯤 되어 보였다.모습은 퍽이나 수려한 편이었다.그러나 양쪽 뺨에는 각기 세 가닥의 시뻘건 상처자국이 있었다. 그 상처자국은 눈 밑에서 곧장 아랫턱까지 그어져 있었다. 마치 그 어떤 사람이 손가락 끝에 할퀴어져 얼굴이 찢어 진 것 같았다. 그녀의 손에는 두세 살 먹은 남자 아이가 안겨져 있었다. 통통한것이 몹시 귀여운 아기였다.

목완청은 본래 무악부작 섭이랑이 흉신악살 남해악신보다 서열이 높은 만큼 반드시 극악무도하게 생겼으리라 추측했었다.그런데 퍽이나 연약하고 고운지라 자기도 모르게 두 번 쳐다보았다. 섭이랑은 이때 그녀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목완청은 전신을 흠칫했다.그 웃음 가운데 은연 중 깊은 슬픔과 괴로움이 숨겨져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차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마력이 스며 있었다.그리하여 목완청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이때 남해악신이 물었다.

[세째 누이,노대와 네째는 어찌해서 아직 안 오지?]

섭이랑은 한숨 쉬듯 나직이 말했다.

[눈가가 시퍼렇게 멍들고 입가가 터진 모양을 보니 벌써 노대에게 단단히 맞은 모양이군. 그런데도 웅큼하게시리 모른 척 노대가 왜 안 오느냐고 물어? 더군다나 당신은 셋째야.언제나 내 위로 기어올라 가려고 하지만 잘 안 될걸. 또 다시 나를 세째 누이라고 부른다면 이 누님이 가만두지 않겠어.]

남해악신은 버럭 소리쳤다.

[가만두지 않을테면 안 두면 될 것 아냐! 어디 한바탕 싸워볼까?]

섭이랑은 담담하게 웃었다.

[싸우고 싶다면 언제라도 상대를 해 드리지.]

이때 그녀가 안고 있는 어린애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엄마! 나는 엄마한테 갈래요!]

섭이랑은 아기를 두드리며 달랬다.

[착한 내 아기....내가 바로 너의 엄마란다.]

그 어린애는 울부짖었다.

[엄마한테 갈래요! 우리 엄마한테 갈래요! 당신은 우리 엄마가 아니에요!]

섭이랑은 가볍게 아기의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흔들 흔들 흔들면서 외할머니 집으로 간다면.... 외할머니는 기뻐서 착한 아기 젖 주지....]

그래도 어린애는 여전히 울부짖었다.남해악신은 아기의 울음 소리에 마음이 번거로운지 호통을 내질렀다.

[달래기는 뭘 달래! 죽이려면 일찌감치 죽여 버릴 일이지!]

섭이랑은 실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녀는 다시금 나지막히 노래를 불렀다.

[....사탕 한 봉지.... 과자 한 봉지....한 봉지는 먹고 한 봉지는 남겨야지....]

목완청은 그들이 하는 수작을 듣고 모골이 송연해졌다.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겁이 났다.남해악신의 말을 듣건대 섭이랑은 어린애를 죽이기 전에

가지고 노는 모양이었다.불현듯 화가 났고 두렵기도 했다.

섭이랑은 계속하여 아기를 달랜다.

[우리 아기,착한 아기....엄마가 토닥거려 줄테니,쌔근쌔근 잘 자거라.우리 아기 착한 아기....우리 새끼 착한 새끼....]

그녀의 음성은 몹시 부드럽고 다정했다.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 진득하게 배여 있는 목완청은 부모 없는 자신의 처지가 생각나 눈물이 왈칵 고였다.

남해악신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매일같이 어린애를 죽이면서 그따위 낯 간지러운 수작을 부리다니.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구나!]

섭이랑은 둘때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급히 갔다대며 나직이 말했다.

[쉿! 우리 아기 놀래요.그렇게 큰소리 치지 마.]

남해악신은 벼락같이 손을 뻗어 어린애를 잡으려 했다. 아이 우는 소리에 신경이 쓰였으므로 아이를 빼앗아 땅바닥에 팽개쳐 죽이려는 것이었다.그의 손 씀씀이도 빨랐으나 섭이랑은 그보다 더욱 빨랐다. 유령처럼 몸을 빙글 돌리자 남해악신의 손은 그만 허공을 움켜쥐게 되었다.섭이랑은 천천히 말했다.

[세째,왜 어여쁜 우리 아기를 못 살게 굴지?]

남해악신은 호통을 내질렀다.

[나는 그 애새끼를 팽개쳐서 죽여야겠다!]

섭이랑은 부드러운 어조로 어린애를 달랬다.

[우리 착한 아기....보배 같은 아기.... 엄마가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한다고....저 못난 세째 아저씨를 무서워 말아라.그는 귀여운 아기를 죽일 수 없단다. 토실토실 귀여운 내 새끼.... 엄마는 너를 밤까지 데리고 놀다가 죽일거야.아직은 아까워서 못 죽여.]

목완청은 그녀의 말을 듣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섭이랑은 서열에 있어서 남해악신보다 앞선 것은 당연하다. 악노삼은 평생을 노력해도 악랄함에 있어서는 절대 그녀를 뛰어 넘지 못할 것이다)

남해악신은 아기를 잡을 수 없게 되자 더 손을 써 보아야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듯 오락가락하며 서성거렸다.그리고는 중얼중얼 욕을 해댔다.그러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호통을 내 질렀다.

[이리 기어 나와! 그 녀석을 어째서 데려오지 않았지?]

두 명의 황의 사내는 바위 뒷쪽에서 겁에 질린 얼굴로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며 걸어나갔다.그리고는 멀찌감치 섰다. 바로 남해악신이 단예를 데리고 오라고 시켰던 두 사내였다. 한 사람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소인....소인이 그 벼랑 위로 갔을 때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없었습니다.]

목완청은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벼랑에서 떨어져 죽지는 않았겠지?)

이때 남해악신은 호통을 내질렀다.

[혹시 너희들이 너무 늦게 가서 그 녀석이 그만 계곡 아래에 떨어져 죽은 것이 아니야?]

두 사람은 감히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인들은 계곡 아래도 자세히 살펴 보았으나 그의 시체를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남해악신은 노호를 터뜨렸다.

[그렇다면 그가 하늘로 올라갔단 말이냐? 이 바보같은 녀석들!감히 나를 속이려 들다니!]

두 사람은 즉시 꿇어 엎드리고는 쿵쿵,소리가 나도록 이마로 땅을 찍으며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그런데 퍽,퍽,하는 소리가 울렸다. 남해악신이 두 개의 커다란 바위를 던져 그들 두 사람의 머리통을 박살내 죽이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단예를 찾지 못 한데 대하여 목완청은 이미 그들이 일을 그르쳤다고 여기고 매우 미워했다.그런데 남해악신이 그들을 돌로 때려 죽이자 그녀는 섬칫함을 느꼈다.다음 순간 단예가 걱정되었다.

(그가 벼랑 위에 있지 않고 산골짜기에도 없다면 어디로 갔을까? 필시 인적이 드문 곳에 떨어졌을 것이다.그래서 그 두 사람이 찾지 못한 것일게다. 혹시 두 사람이 시체를 보고서도 똑바로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녀는 이미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고 있었다.단예가 만약 죽는다면 그녀는 혼자서 살 생각이 없었다.더군다나 남해악신의 손에 떨어져 있는이때 만약 죽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단예의 시체를 보기 전까지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이때 남해악신은 씩씩 거친 숨을 내쉬며 욕지거리를 했다.

[첫째와 넷째 후레자식은 왜 이때까지 오지 않는거야? 나는 이제 기다리다 지쳤는데.]

섭이랑은 말했다.

[네가 감히 첫째를 기다리지 않을 참이냐?]

남해악신은 말했다.

[노대는 나에게 말했어. 우리는 이 산봉우리 위에서 그를 기다리되 꼬박 이레를 기다려야 한다고.이레를 기다렸다가 그가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겁곡의 종만구 집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했지.만날 때까지 흩어지지 말라고 했어.]

섭이랑은 담담히 말했다.

[거봐,네가 벌서 첫째에게 매섭게 얻어 맞았다고 했잖아.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고 못하겠지.]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누가 아니라고 했어? 나는 노대를 이길 수가 없어.그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그에게 맞은 것도 사실이지만 아프게 맞은 것은 아니야.]

섭이랑은 말했다.

[알고 보니 아프게 얻어맞은 것은 아니었군....착한 아기 울지 마라.. 이 어미가 얼마나 너를 귀여워 한다고....가볍게 얻어맞았군....우리 귀여운 아기....]

남해악신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

[가볍게 얻어맞은 것도 아니야. 당신도 조심해야 될 걸.노대가 때리려고 한다면 당신도 도망치지는 못해.]

섭이랑은 말했다.

[내가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닌데,첫째가 왜 나를 괴롭히겠어?우리 아기 착한 아기지....]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착한 아기라는 소리는 그만하면 안 돼?]

섭이랑은 웃으며 말했다.

[셋째,성질을 부리지 말아.사실은 넷째가 어제밤 적수를 만나 크게 당했어.]

남해악신은 신기하다는듯 말했다.

[뭐라고? 넷째가 적수를 만났어? 누군데?]

섭이랑은 말했다.

[저 계집애의 모습이 아무래도 맘에 들지 않는 걸.그녀는 속으로 내가 매일 같이 어린애를 죽인다고 욕을 하고 있는 것 같아.먼저 저 계집애를 죽여.그러면 내 그 이야기를 들려줄께.]

남해악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내 제자의 아내야.내가 만약 그녀를 죽인다면 우리 제자가 나를 사부로 모시지 않아.]

섭이랑은 의아한 듯 말했다.

[셋째의 제자는 산골짜기에 떨어져 죽지 않았어 ?]

남해악신은 금새라도 울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만약 떨어져 죽었다면 시체는 있을 것이 아닌가. 아마도 숨었을 거야.잠시 후에는 이리 달려와서 제자로 맞아 달라고 큰 절을 하며 빌걸.]

섭이랑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손을 쓰지. 나중에 섯째의 제자가 오거든 나에게 따지라고 해. 그녀의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러움을 느끼게 하는걸.나도 저와 같은 한쌍의 눈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는 그녀의 눈동자부터 뽑아내야겠어.]

목완청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남해악신은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내가 그녀의 혼수혈을 집어,한 이틀 잠을 자도록 해야 하겠군.]

그는 섭이랑의 말도 듣지 않고 손가락을 뻗쳐 목완청의 허리 근처와 옆구리 밑을 두 번 찔렀다.목완청은 그만 머리가 빙그르 돌면서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목완청이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껄껄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그 웃음 소리는 웃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들으면 우는 것도 같았다.또한 그 소리는 갑자기 날카로와졌다가 갑자기 끊어지곤 해서 매우 듣기 거북했다. 목완청은 자기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상대방에게 즉시 발각되리라고 생각했다. 발각된다면 어떤 포악한 수단으로 자기를 대할지 몰라 마디마디가 저려왔지만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때 남해악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넷째,큰 소리 치지 말아.셋째 누이는 네가 크게 당했다고 했다. 그런데 너는 딱 잡아떼기냐? 도대체 몇 사람의 적이 너를 포위 공격했지?]

그러자 갑자기 날카로와졌다가 굵어졌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일곱 명이 나 한 사람을 공격했지만 하나같이 일류의 고수였소.내 재간이 몹시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 칠대 고수들을 다 한 번에 죽일 수야 없지 않겠소.]

목완청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보내 궁흉극악이 도달했군.)

그녀는 궁흉극악이 어떤 인물인지 보고 싶었으나 감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때 섭이랑이 입을 열었다.

[넷째는 그저 큰 소리 치는 것만 좋아하는군.상대방은 분명히 두 사람뿐이었는데 어디서 또 다섯 사람의 고수가 나왔다는 거지. 천하의 일류고수들이 그토록 많을까?]

넷째가 부르짖었다.

[당신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 마치 친히 목격한 것처럼 떠드네.]

섭이랑은 나직이 소리내어 웃었다.

[호 호 호! 내가 치히 보지 않았더라면 물론 알 턱이 없지.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한 자루의 낚시대를 썼고 다른 한 사람은 한 쌍의 단부(短斧)를 사용했지.그렇지 않아? 히 히 히! 네가 날조한 다른 다섯 명은 또 무슨 무기를 썼지?]

넷째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당시 옆에 있으면서도 어째서 날 도우지 않았소.둘째 누님은 내가 상대방의 손에 죽어야 기쁘겠군! 그렇소?]

섭이랑은 웃으며 말했다.

[궁흉극악 운중학(雲中鶴)의 경신법이 뛰어나다는 것을 그 누가 몰라? 상대방을 이길 수 없을 때는 도망칠 수 있지 않겠어?]

목완청은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보니 그래서 넷째는 운중학이란 이름을 가졌구나.)

운중학은 더욱 분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 넷째가 그들에게 진다고 해서 당신에게 무슨 영광이 돌아간단 말이오? 우리의 사대 악인들이 이번에 모인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아시오? 설마하니 종만구와 같은 멍청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알고 있지는 않겠지.그가 자기 마누라 맛을 나에게 보여 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어림도 없지. 노대는 대리의 황궁과 깊은 원한이 있어서 우리들을 부른 것이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대리의 황궁을 쳐부수려는 것인데 내가 싸움에 지는 것을 보고 당신은 그래, 구경만 하고 속으로 좋아했단 말이지 ? 어디 내가 노대에게 이야기 할테니 두고 봅시다.]

섭이랑은 살랑살랑 웃었다.

[호 호 호, 넷째 나는 한평생 그대처럼 뛰어난 경신법을 지닌 사람을 보지 못했어.그대의 운중일학(雲中一鶴)이란 이름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지. 가벼운 연기처럼 혹은 기러기 털처럼 날아서 사라져 버리거든. 그 두 녀석이 뒤쫓을래야 쫓을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누나되는 사람도 뒤쫓아 잡을 수 없지.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구경만 하고 있었겠어?]

그녀는 운중학이 첫째에게 고할까봐 재빨리 비위를 맞추는 말을 했다. 운중학은 흥,코웃음을쳤다.

이때 남해악신은 다시 물었다.

[넷째,도대체 그대를 괴롭힌 녀석들은 누구지? 황궁의 앞잡이들이었나?]

운중학은 노해 부르짖었다.

[십중팔구는 황궁의 사람이지.나는 대리국 내에 황궁 사람들을 빼고는 다른 어떤 대단한 고수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소.]

섭이랑은 말했다.

[그대들 두 사람은 황궁을 한 번 뒤집어 놓기에는 전혀 힘이 들지 않는 일이라고 큰 소리를 쳤지.그리고 뭐,대리 황제의 머리를 주머니 안의 물건을 꺼내듯 쉽게 베어버릴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언제나 일을 너무 쉽게 보지 말라고 했었잖아. 이제야 내 말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알았겠지?]

운중학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째서 첫째는 지금까지 오지 않소? 이미 약속한 날짜는 사흘이 지났는데.그는 한 번도 이같이 날짜를 어긴 적이 없는데 혹시....혹시....]

운중학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닐까?]

남해악신은 콧방귀를 날렸다.

[쳇! 노대는 여기서 칠일을 기다리라고 했어.이제 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뭐가 그리 급해서 야단이야.노대가 어떠한 인물인데 상대방을 이기지 못해 너같이 도망칠까봐!]

섭이랑은 말했다.

[이기지 못할 때 도망치는 사람은 그야말로 때를 아는 영웅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운중학은 영웅이라고 불러도 괜찮은 인물이지.]

남해악신은 잇따라 침을 뱉았다.

[퇘 퇘 퇘! 노대가 천하를 횡행한 이후 그 누구를 두려워해서 도망친 적이 있었어? 이 조그만 대리국에서 어찌 도망을 친단 말이야.제미랄..]

그는 땅바닥에 있는 쇠고기를 들어 옆에 피워 놓은 모닥불에 굽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목완청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주고받는 말을 들으니 내가 벌써 이 산봉우리에서 이미 죽은 척 잠들게 된 지도 사흘이 되었구나. 그런데 어째서 나의 낭군은 소식이 없을까?)

그녀는 이미 나흘간 음식을 먹지 않아 몹시 배가 고팠다.더군다나 쇠고기를 굽는 냄새를 맡게 되자 뱃속에서 연신 꾸룩꾸룩 하는 소리가 났다.

이때 섭이랑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아가씨가 배가 고픈 모양이지? 벌써 깨어났는데 왜 깨어나지 않은 척 누워 있지? 우리 궁흉극악 넷째를 보고 싶지 않아서인가?]

남해악신은 운중학이 여자를 목숨처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목완청의 자색을 보게 된다면 목숨을 버릴지라도 달려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처럼 흥분되었을 때만 강간을 하고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그는 반쯤 구워진 큰 조각의 소다리를 찢어서는 목완청의 앞에 던지며 호통을 쳤다.

[너는 저쪽으로 가서 먹어. 멀찌감치 서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지 말아라.]

목완청은 일부러 음성을 거칠게 하느라고 목에 힘을 주며 물었다.

[저의 남편이 왔던가요?]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제미랄,나는 저쪽 산벼랑과 산골짜기에 가서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도 그녀석의 종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 그 녀석은 반드시 죽지 않고 그 누구에게 구원을 받았나 봐.내가 여기서 사흘을 기다렸는데 다시 나흘을 기다리기로 하지. 그래서 이레가 되어도 그 녀석이 오지 않을 땐,흥 흥.... 너를 구워서 먹겠다.]

목완청은 단예가 죽지 않았다는 말에 약간 안심이 되었다.

(남해악신이 죽지 않았다고 단정한다면 그럴 것이다.아,그가 과연 나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 나를 구하기 위해서 이곳에 올지 모르겠구나.)

그녀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쇠고기를 들고 천천히 바위 뒷쪽으로 돌아갔다.오랫동안 굶주렸던 판이라 더욱 더 피로했다.그런데 사흘간 잠들었던 사이에 등 뒷쪽의 상처는 아물어져 있었다.

이때 섭이랑이 물었다.

[도대체 그 녀석이 어떤 점이 좋길래 그토록 아끼지?]

남해악신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 녀석은 정말 나를 닮았어. 우리 남해일파의 무공을 배우게 된다면 아마도 청출어람(靑出於藍)할 거야.헤 헤 헤.... 천하 사대 악인 가운데 이 악노이가 두 번째로 손꼽히지만,제자에 있어서는 나의 제자가 서열에 있어서 일위가 될걸.아무도 비교할 수가 없어.]

목완청은 점차 멀리 그들과 떨어져 갔다. 그런데 남해악신이 단예의 자질이 매우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좋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속으론 또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나의 낭군님은 책벌레와 같아서 아무 무공도 못하지.다만 담이 큰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어.만약에 남해악신이 그와 같은 제자를 거두어들이게 된다면 남해파로는 패망의 지름길이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커다란 바위 아래에 조용히 앉아 고기를 한점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배가 무척 고팠지만 서너 근이나 되는 쇠고기를 겨우 반 근 정도만 먹었는데도 배가 불러왔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레날까지 단예가 정말 박정하게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방법을 강구해서 도망을 쳐야지.)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만 마음이 쓰라렸다.

(내가 설사 도망쳐서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이후의 나날을 어떻게 보내야지?)

이와 같은 고심이 교차하는 가운데 또 며칠이 지나갔다. 그야말로 하루가 일년과 같은 느낌이었다.이 며칠 동안 그녀는 정말로 지루함을 잔뜩 맛봐야 했다. 낮이나 밤이나 산봉우리 아래에서 조그만 기척만 들려와도 혹시나 단예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귀를 기울였다. 아니 너무나 지루하고 답답해서 다른일이라도 벌어졌으면 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래야만 지루하고 긴 밤을 조금이라도 덜 적적하게 보낼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나갈수록 그녀의 마음은 처량함과 슬픔이 한층 더해갔다.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단예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그이가 정말 나를 찾아올 마음이 있다면 산을 넘고 고개를 넘는 것이 어렵다하더라도 이틀낟이나 사흘날 쯤에는 반드시 찾아왔을 것이다.그러면 오늘까지 찾아 오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남해악신을 사부로 모시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 나에게 추호의 감정이나 의리를 느끼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는 나를 껴안고 입맞춤을 했으며 또 나를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응낙을 했지?)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고달프기 이를데 없었다.그녀의 사부가 말했듯이 천하의 남자는 모두 박정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 자꾸만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자기는 단예가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다만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며칠간 남해악신과 섭이랑 그리고 운중학은 그녀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들 세 사람은 악관만영이라는 천하제일 악인이 도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정의 초조함은 목완청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세 명의 악인 역시 뜨거운 부뚜막 위의 개미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목완청은 그들 세 사람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세 사람이 크게 다투는 소리가 때때로 들렸다.

이튿날 저녁이 되자 목완청은 속으로 생각한다.

(내일은 최후의 하루다.박정한 그 사람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오늘 밤 야음을 틈타 살그머니 도망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일 날이 밝게 된다면 빠져나가기 힘들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그리고는 살그머니 한 번 움직엿다.엿새 밤을 두고 충분히 쉰 덕분에 정신적으로는 상당히 위축되어 있지만 상처는 좋은 금창약을 발랐기에 거의 다 나아 있었다.그녀는 생각했다.

(가장 좋기는 그들 세 사람이 언쟁을 한참 벌이게 되었을 때 몰래 수십장 밖으로 도망가는 것이다. 동굴 같은 곳에 숨어 버리면 그들은 틀림없이 멀리까지 가서 나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어쩌면 수십 리 밖으로 가서 찾을지도 모른다.세 사람이 멀리 가게 되었을 때 몰래 도망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든다.

(아.... 그들과 내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왜 나를 뒤쫓겠는가? 내가 도망치든 도망치지 않든간에 그들이 어찌 마음에 두겠는가?)

또 한편 자꾸만 단예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했는데 내가 떠나 버린다면 내가 그를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자 그야말로 애간장이 탔다.그녀는 동녘 하늘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7. 능파미보를 펼쳐 생명을 건지다.

날이 밝았다.이제 그녀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 셈이다.어쨌든 도망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박정한 사람이 오든 오지 않든 나는 이곳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기다려야겠다.]

이와 같이 작정하니 쓸쓸하고 슬픈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그런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장 밖에서 무언가 떨어지더니 풀더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목완청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게 뭐지?)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풀더미 쪽으로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그리하여 그녀는 살그머니 풀더미 곁으로 기어 가서 길게 자란 풀숲을 헤치고 자세히 살펴 보는 순간 그만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풀더미 속에는 여섯 명의 갓난아이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며칠 전 섭이랑의 손에 들렸던 토실토실한 그 남자 아이도 그 안에 있었다.마음 속에 놀람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야말로 악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섭이랑은 정말 이와 같은 어린애를 죽이는구나.무엇 때문에 그러지? 그녀가 봉우리 위에 엿새 동안 있었으니까 여섯 아기를 죽였군.)

여섯 명의 죽은 아기들 몸에는 아무런 상처 자국도 보이지 않았다.그 섭이랑이 어떤 수법을 써서 죽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 가운데 한 어린아이는 옷 입은 것이 상당히 화려했다.나머지 다섯 명은 모두 시골 농사꾼의 아이들인 듯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아마도 무량산 산골짜기의 농가에서 훔쳐온 모양이었다.

목완청은 사부를 따라 산을 내려오면서 적지 않은 사람을 죽였지만 결코 그와 같이 어린 아이를 살해한 적은 없었다. 직접 이와 같은 광경을 보자 전신이 부르르 떨려왔다.

갑자기 흐릿한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한 사람의 모습이 비조처럼 산으로 달려가는 것이 눈에 비쳤다.한 번 몸을 날렸다가 아래로 뛰어가는 그 모습은 마치 유령과 같았다.바로 무악부작 섭이랑이었다.

목완청은 신속하게 달려가는 경신법을 보고 아무도 당해내지 못할 경신법이라고 여겼다.삽시간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고 수없이 많은 근심이 피어올라 그만 맥없이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렇게 정신을 빠뜨리고 있다가 여섯 구의 갓난아이 시체를 나란히 놓고 그 위에 흙과 돌을 덮어 주었다.별안간 등뒤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그녀는 왼발로 급히 땅을 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갑자기 날카로와 졌다가 굵어지는 웃음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오더니 곧이어 한 사람의 말 소리가 들려왔다.

[소저,그대의 시아버지가 그대를 버려두고 상관하지 않는군,차라리 나를 따르는 게 어때?]

바로 궁흉극악 운중학이었다. 그 소리와 함께 운중학은 다가와 손을 뻗쳐 목완청의 어깨죽지를 잡으려고 했다.그런데 옆에서 다른 하나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그 손을 밀어내는 것이 아닌가? 남해악신이었다. 그는 노해 부르짖었다.

[넷째,우리 남해파의 제자를 네가 못살게 굴다니!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

운중학은 몇 번 몸을 날리더니 이미 십여 장 밖으로 몸을 피하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제자를 거두어 들이지 못한다면 이 소저는 남해파의 문파가아니지.]

목완청은 그 사람의 키가 훌쩍 크고 비쩍 마른 것이 대나무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얼굴 역시 놀라울 정도로 깡말라 있었다.

남해악신은 호통을 내질렀다.

[어째서 내 제자가 오지 않는다고 하느냐? 혹시 네가 그를 해친 것 아니냐? 맞아! 아마 그럴 게다.틀림없이 네가 내 제자의 자질이 뛰어난 것을 보고 잡아 갔을 거야.그리고 제자로 거두어 들이려고 했겠지.네가 나의 큰일을 그르쳤으니 내가 너를 죽인 후에 따지겠다.]

정말 남해악신은 고집스럽고 억척스러운 데가 있었다.그는 운중학이 진짜 그 같은 짓을 했는지는 불문에 부치고 운중학에게 덮쳐들었다.운중학은 부르짖었다.

[당신은 제자가 둥근지,네모났는지,뾰족한지 아니면 납작한지,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째서 내가 그를 죽였다고 하오?]

[바싹 마른 것아! 누가 너의 말을 믿겠느냐? 너는 싸움에 졌으니까 아마 그 화풀이를 나의 제자에게 했을 것이다.]

운중학은 말했다.

[셋째의 제자가 남자요,여자요?]

남해악신은 말했다.

[그야 물론 남자지.내가 왜 여자를 거둬들이겠나?]

[이 운중학은 여자만 빼앗지 남자는 한 번도 빼앗은 적이 없어.설마하니 그 사실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남해악신은 그에게 덮쳐들려고 이미 허공에 몸을 띄운 중이었다.그러나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천근추의 수법을 써서는 땅위로 내려왔다.그는 오른쪽 발로 바위를 딛고서 호통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나의 제자가 어디로 도망갔지?어찌하여 아직까지 나를 사부로 모시겠다고 찾아오지 않느냐 말이야?]

운중학은 웃으며 말했다.

[헤 헤.당신네들 남해파의 일을 내가 할일이 없어 상관을 하겠소?]

남해악신은 단예를 학수고대 하던 중이었다.이미 초조할 대로 초조해졌고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노화를 누를 길 없어 호통을 내질렀다.

[네가 감히 나를 비웃어?]

목완청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이 두 사람을 이간질시켜 싸우게 하여 쌍방이 다 상처를 입게 된다면 실로 나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맞아요,선생님의 제자는 반드시 운중학에게 해를 입었을 거예요.그렇지 않으면 그는 벼랑 위에 있었을 거예요.그 혼자서 어떻게 벼랑 위에서 내려 오겠어요?이 운중학은 경신법이 뛰어나니 반드시 벼랑 위에 올라가서 선배님의 제자를 데리고 으슥한 곳에 가서 죽인 것이 틀림없어요. 그래야만 남해파에게 걸출한 인물이 나오지 못할 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째서 그의 시체를 찾아볼 수 없겠어요?]

남해악신은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탁치며 운중학에게 말했다.

[그것 봐라.내 제자의 아내될 사람마저 이같이 이야기하는데, 내가 너를 억울하게 비난했다는 것이냐?]

목완청은 말했다.

[저의 남편은 선배님과 같이 뛰어난 사부를 맞아들이는 것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반드시 열심히 무공을 익혀 남해파를 빛내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남해악신의 명성을 천하에 더욱 떨치도록 하겠다고 말했으며 악관만영인가 무악부작인가 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게끔 만들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운중학이 독심을 품고 선배님의 훌륭한 제자를 죽인 것이에요. 이후 선배님을 그토록 꼭 닮은 사람을 찾아내 제자로 삼지는 못할 거예요.]

그녀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남해악신은 자기 머리를 탁탁 쳤다.목완청은 다시말했다.

[내 남편의 뒷골은 선배님과 똑 같아요. 그리고 천부적인 자질도 또한 선배님과 똑같으며 총명함도 마찬가지예요. 그토록 뛰어난 제자를 다시 얻기 어려울 거예요.그런데 이쪽 운중학이 선배님을 곤경에 빠뜨린 거예요.빨리 제자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 무엇 해요?]

거기까지 듣자 남해악신의 눈에서 흉악한 안광이 폭사되었다.휙하니 몸을 날려 운중학에게 덮쳐갔다. 운중학은 자기의 무공이 남해악신에 비해서는 한 수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다.남해악신이 달려들자 급히 몸을 날려 도망을 쳤다.남해악신은 두 발로 땅을 박차며 다시 덮쳐갔다.

목완청은 부르짖었다.

[그가 도망가는 것은 바로 마음에 찔리는 데가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그가 선배님의 제자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어째서 여기서 도망치겠어요?]

남해악신은 호통을 내질렀다.

[맞아,맞아.그 말이 맞다.내 제자의 목숨을 변상해라!]

두 사람은 서로 쫓고 쫓기기 시작했다.순식간에 산 뒤로 돌아갔다. 목완청은 속으로 기뻐했다.삽시간에 남해악신의 호통치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점차 가까워지더니 두 사람이 산 뒤에서 쫓거니 쫓기거니 하면서 나타났다.

운중학의 경신법은 확실히 남해악신보다 고명했다.대나무쪽 같은 긴 몸을 흔들거리며 걸음을 옮겨놓는데 남해악신은 계속해서 간격의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막 목완청의 눈앞을 지나가자 삽시간에 다시 산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다.그리고 두 번째 다시 다가왔을 때 운중학은 와락 몸을 날려 목완청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손을 뻗쳐 그녀의 어깨죽지를 잡으려고 했다.목완청은 깜짝 놀라 오른손을 급히 휘둘러 한 대의 독화살을 쏘았다. 운중학은 왼쪽으로 반 자쯤 몸을 움직여 독화살을 피하더니 어떻게 몸을 움직였는지 기다란 팔로 갑자기 목완청의 안면을 잡으려고 했다. 목완청은 급히 피했으나 끝내 한 걸음 늦어 얼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복면이 그의 손에 벗겨지고 만 것이다. 운중학은 그녀의 고운 모습을 보자 그만 어리둥절 해졌고 곧이어 음탕한 웃음을 흘렸다.

[이거 묘하군! 이 계집애는 정말 예쁜데? 다만 음탕한 기운이 없으니 아직까지 숫처녀로구나!]

그러는 사이 남해악신이 뒤쫓아와 휙하니 그의 뒷등을 노리고 일 장을 후려쳤다.운중학은 오른손을 쳐들고 운기하여 반격했다. 펑,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면서 두 가닥 장풍이 서로 격돌했다. 목완청은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일 장 둘레 이내에는 흙먼지가 휘날렸다. 운중학은 남해악신이 후려친 일 장의 힘을 빌어 다시 앞으로 이 장이나 붕하니 몸을 날렸다.남해악신은 호통을 내질렀다.

[다시 나의 삼 장을 받아라 !]

운중학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뒤따라 잡지 못하고 나 역시 당신을 이길 수 없소. 다시 하루 밤 하루 낮을 두고 싸운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요!]

이어 두 사람은 서로 쫓고 쫓기면서 멀리 사라졌다.멀리 사라질 때까지 사방의 흙먼지는 가라 앉지 않았다.목완청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법을 강구해서 운중학을 가로막아야 한다.]

두 사람이 세번 째 산봉우리를 돌아 이쪽으로 달려오게 되었을 때 목완청은 앞으로 달려나가며 칙,칙,칙, 하는 소리와 함께 일곱 대의 독화살을 운중학에게 쏴 붙였다.그리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내 남편의 목숨을 살려내라!]

운중학은 독화살이 허공을 나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뒤로 몸을 솟구쳤다.그순간 잇따라 일곱 개나 되는 독화살을 피해 버렸다. 그러자 목완청은 장검을 뽑아들고 휙,휙, 두 검을 그에게 찔러갔다. 운중학은 그녀의뜻을 잘 알고 있는지라 대항해 싸우지 않고 표연히 몸을 날려 피할 뿐이다.그러나 그와 같이 지체하다 보니 남해악신의 삼 장이 그의 좌우 양쪽에서 밀어닥치는 것이 아닌가? 장풍은 그의 전신을 완전히 에워싸고 말았다.

운중학은 흉측한 웃음을 흘렸다.

[셋째, 내 몇 번 양보한 것은 우리 사대 악인의 우애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오.내가 정말 당신을 두려워하는 줄 아시오?]

그는 두 손을 허리께로 가져가더니 두 손에 각기 한 자루씩의 강조(鋼爪)를 뽑아들었다.이 한 쌍의 강조는 자루가 석 자였고,강조의 머리에는 사람의 손 모양을 한 물건이 달려 있었다. 손가락을 약간 벌리고 있었는데 손가락 끝에서는 파란 빛이 번득거리고 있었다. 그는 강조를 들고 왼손의 강조를 오른쪽으로 오른손의 강조를 왼쪽으로 향하게 하고서는 열십 자로 교차하여 자기의 몸을 막았다.자기 자신을 지킬 뿐 공격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남해악신은 기뻐했다.

[정말 묘하다! 몇 년 동안 보지 않은 사이 네가 한 가지 괴상한 무기를 만들었구나! 이 노부의 것을 봐라!]

그는 등뒤의 봇짐에서 두 가지의 무기를 꺼냈다.

목완청은 자기가 싸움에 가담하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알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때 남해악신은 오른쪽에 한 자루의 자루가 짧고 주둥이가 긴 괴상하게 생긴 가위를 들고 있었다.가위의 날은 톱니처럼 되어 있었다.마치 한마리 악어 주둥이 같았다.왼손에는 거치연편(鋸齒軟鞭)을 들고 있었는데 역시 악어의 꼬리 모양이었다.

운중학은 곁눈질로 그 두가지 무기를 보더니 오른손의 강조를 뻗쳐 벼락같이 남해악신의 안면을 할퀴려 들었다.남해악신은 왼손의 악미편(鰐尾鞭)을 불쑥 쳐들어 딱, 하면서 강조를 밀어냈다.운중학의 손 씀씀이는 지극히 빨랐다.오른손의 강조를 미처 움직이기 전에 왼손의 강조를 내밀고 있었다.이때 철컥,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악어 주둥이 같은 가위가 강조를 꽉 깨물었다. 남해악신은 가위를 힘껏 비틀었다. 강조는 순 강철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악어 가위의 주둥이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놀랍게도 강조의 다섯 손가락 중에서 두 개를 잘라버리지 않는가? 운중학이 손을 빨리 움츠렸기에 그나마 강조에 붙어 있는 나머지 세 손가락을 보존할 수가 있었다.

강조의 열 손가락마다 하나같이 어떤 묘용이 있었는데 두 손가락이 모자라게 되자 위력이 현저하게 약하되고 말았다. 운중학은 마음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남해악신은 광소를 터뜨리는 가운데 악미편을 질풍같이 휘둘러 운중학을 휘감으려 했다.

별안간 푸른 그림자가 두 사람 사이로 날렵하게 뛰어 들었다.바로 섭이랑이었다.그녀는 왼손을 옆으로 뻗어 악미편에 갖다 붙이고 비스듬히 바깥쪽으로 밀었다. 그 바람에 운중학은 한 옆으로 안전하게 물러설 수 있었다.섭이랑은 입을 열었다.

[셋째와 넷째.어찌해서 무기를 들고 싸우게 되었지?]

그녀는 목완청의 용모를 바라보고 금새 안색이 변했다.목완청은 그녀의 손에서 또 한 명의 남자 아이가 들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약 서너 살 정도의 나이에 비단 옷과 비단 모자를 쓰고 있었고 빨간 입술에 얼굴이 통통한것이 무척귀여웠다. 그제서야 그녀는 섭이랑이 조금 전에 어린애를 구하러 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목완청은 그녀의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이 번득이는 것을 보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이때 갓난아이가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아버지! 아버지! 산산은 아버지가 좋아요!]

섭이랑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산산,너는 정말 착하지? 잠시 후에 아빠가 올 것이다.]

목완청은 풀더미 속에 뒹굴던 어린애들 시체의 모습을 떠올렸다.그녀가 그처럼 자상한 어조로 어린애를 달래는 음성을 듣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운중학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둘째 누나, 셋째가 새롭게 연성한 악어 가위와 악어 꼬리는 대단하다오.조금전 나는 그와 연습삼아 몇 수 나누어 보았는데 정말 감당하기 힘들더군. 칠년 동안 누나는 무슨 재간을 익혔소? 누나도 셋째의 두 가지 무서운 무기를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소.]

운중학은 섭이랑을 충동질하여 남해악신과 싸우게 만들 속셈이었다. 하지만 섭이랑이 그 속셈을 모를 리 없다. 그녀는 두 사람의 생사를 건 격투를 보았는지라 운중학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섭이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칠 년 동안 나는 부지런히 내공만 익혔을 뿐이지,무기와 권각법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네.아마도 셋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야.]

이때 갑자기 산허리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왜 우리 아들을 빼앗아 갔소? 빨리 내 아들을 돌려 주시오!]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한 사람이 봉우리 위로 뛰어 올라왔다.그 신법은 매우 표연했다. 그 사람은 사십 세쯤 되었으며 몸에 고동색 비단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그리고 손에는 장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남해악신은 호통을 질렀다.

[네 녀석은 누군데 이곳에 와서 큰 소리로 떠드는거냐?나의 제자는 네가 훔쳐간 것이 아니냐?]

섭이랑은 웃으며 말했다.

[이분은 무량검 동종 장문인 좌자목 선생이지. 무예 솜씨는 그저 그렇지만 아들은 이렇게 통통하니 잘 생겼거든.]

목완청은 즉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알고 보니 섭이랑은 무량산에서 다른 아이를 찾지 못하니까 무량검 장문인의 아들을 잡아왔구나.)

섭이랑이 말했다.

[좌 선생,댁의 아드님은 정말 귀엽군. 내가 잠시 안고 놀다가 내일 돌려줄테니 서둘지 말아요.]

그녀는 산산의 뺨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가볍게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마치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태도였다.좌산산은 부친을 보자 큰 소리로 불렀다.

[아빠! 아빠!]

좌자목은 왼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제 자식놈은....우둔하고 못나서 데리고 놀 만한 재미가 없을 것이니 지금 돌려 주시오.]

그는 아들을 대하자 대뜸 말하는 게 겸손해졌다.그는 그녀가 손에 힘을 써서 대번에 아들을 눌러 죽일까 겁이 났던 것이다.

남해악신은 웃으며 말했다.

[이분은 무악부작 섭삼랑이오.설사 황태자나 공주라도 그녀의 손에 일단 들어오면 결코 돌려주는 법이 없지.]

좌자목은 흠칠했다.

[그대가....섭삼랑이라구요? 그렇다면 섭이랑.... 섭이랑은 귀하와 어떤 사이죠?]

그는 사대 악인 가운데 섭이랑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또 그 여인이 매일 아침 갓난아이를 데리고 놀다가 저녁 무렵이면 죽여 없앤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그는 섭삼랑이 혹시 섭이랑과 자매가 아닌가 생각하고 다급히 물은 것이다.

[호호....터무니 없는 소리를 믿지 말아요.내가 바로 섭이랑이에요. 이 세상에 섭삼랑이 어디 있어요?]

좌자목의 얼굴은 삽시간에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는 자기의 어린 아들이 사로잡혔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여 쫓아온 터였고 도중에 그녀의 무공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런데 이제 보니 무악부작 섭이랑이라고 하지 않는가? 욕지거리를 하거나 부탁하는 말을 하려고 해도 너무 긴장되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섭이랑은 다시 말했다.

[이 아기의 살결이 매끄러운 것을 봐요.얼마나 건장하게 생겼는가? 피부빛도 불그스레하고 살결도 투명하리 만큼 곱군.정말 무학 명가의 자제다와! 여느 농가의 아들과는 크게 다르군.]

그러면서 어린애를 쳐들고 햇빛을 빌어 그의 혈색을 살펴보았다.그녀는 혀를 차며 칭찬해 마지 않았다. 마치 보통 사람들이 시장에서 닭이나 오리 혹은 물고기나 염소를 살 때 통통하게 살이 쪘나를 감별하는 듯했다. 좌자목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침을 삼키는 그녀를 보고 놀람과 분노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홍관일(百虹貫日)이란 초식으로 그녀의 목을 질러갔다.

섭이랑은 가볍게 웃으면서 산산의 몸을 내밀었다.좌자목의 이 일검이 계속해서 질러간다면 먼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찔러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그의 검술은 뛰어난 편이었다.찔러가던 검을 재빨리 거둬들였다. 이어 초식을 바꾸어 비스듬이 섭이랑의 오른쪽 어깨를 찔러갔다. 섭이랑은 여전히 피하지 않고 산산의 몸을 움직여 자기의 오른쪽 어깨를 막았다.삽시간에 좌자목은 상하좌우를 따라 네 검을 찔렀다.그러나 섭이랑은 기다렸다는 듯이 산산의 몸을 조금씩 움직여 그 날카롭고 매서운 검초를 반 초 정도 썼을 때 멈추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이렇게 되자 산산은 놀라,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

운중학은 남해악신에게쫓겨 산을 세 바퀴나 돌아야 했고 강조의 두 손가락이 잘려지자 그야말로 화가 잔뜻 나 있었다.갑자기 몸을 날려 한 손의 강조로 좌자목의 머리를 낚아채려 하였다.좌자목은 검을 위로 쳐들었다.검광이 어지럽게 번득이는 가운데 위쪽을 완전히 봉쇄했다.땅,하는 음향과 함께 두 무기의 목을 찔러갔다.별안간 강조의 손가락이 합쳐지면서 검날을 움켜 쥐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좌자목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정도로 검을 놓칠 수는 없었다. 급히 운기하여서는 빼앗으려고 들었다. 퍽,하는 소리가 나면서 운중학의 오른손 강조가 그의 어깻쭉지에 깊숙이 박혔다. 선혈이 마구 흘러내렸고 세가닥 강철로 만들어진 손가락은 그의 경골을 꽉 움켜지고 놓아주지 않았다.운중학이 앞으로 달려나오며 발길질을 했다.좌자목은 신음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와 같은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서 명문대파의 장문인 좌자목조차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이 당하고 말았다.

남해악신은 칭찬했다.

[넷째,그와 같은 수법은 나쁘지 않군.그렇게 체면이 깎이는 일은 아니야.]

섭이랑은 물었다.

[좌 장문,당신은 우리 노대를 보았소?]

좌자목은 오른쪽 어깨 경골이 여전히 강조에 잡혀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억지로 고통을 참고 말했다.

[당신들의 노대는 누구요? 나는 보지 못했소.]

남해악신은 급히 물었다.

[당신은 나의 제자를 보았는가?]

좌자목은 다시 말했다.

[당신의 제자는 누구요? 나는 보지 못했소.]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너는 내 제자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면서 어째서 못 봤다고 하느냐? 정말 개방귀 같은 소리다.셋째 누이,빨리 그 아이를 잡아먹어!]

섭이랑은 말했다.

[그대의 둘째 누나는 어린애를 먹지 않아.좌 장문,그대는 돌아가요.우리는 그대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겠어.]

좌자목은 말했다.

[그렇다면 나의 아이를 되돌려 주시오. 나는 즉시 서너 명의 아이들을 찾아서 바치겠소. 그렇게 해주신다면 이 좌 아무개는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소.]

섭이랑은 실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것도 좋지.그렇다면 가서 여덟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요. 그러면 나는 여드레는 쉴 수가 있어.넷째,그를 놔줘.]

운중학은 빙그레 웃으면서 강조의 장치를 풀렀다.그러자 강철 손가락이 벌어졌다.그는 섭이랑에게 절을 하는 척하면서 손을 뻗어 아이를 나꿔채려 했다.

섭이랑은 웃으며 말한다.

[그대 역시 강호의 인물이거늘 어찌 규칙을 몰라요? 여덟명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 바꿔가지 전에 내가 어찌 이 아이를 되돌려 준단 말이예요?]

좌자목은 아들이 그녀의 품속에 안겨 있자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가서 여덟 명의 토실토실한 아이들을 찾아 드리리다. 나의 아들을 잘 대해 주시오.]

섭이랑은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나직이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착한 아기....너의 할머니가 너를 귀여워 해주마.]

좌자목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내 새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좌자목은 그와 같은 칭호를 듣게 되자 그녀가 바로 자기의 어미 노릇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산산아,착하지.이 애비가 곧 되돌아와 너를 안고 가마.]

산산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그리고 발버둥치면서 그의 품으로 달려가려고했다.좌자목은 미련이 남는 듯 아들을 몇 번이나 돌아봤다. 그의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의 상처를 누르고는 고개를 돌리더니 천천히 벼랑 아래로 내려갔다.

별안간 산봉우리 서쪽에서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남해악신과 운중학은 동시에 기뻐서 외쳤다.

[노대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몸을 날렸다. 한 가닥 연기처럼 피리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그들은 삽시간에 커다란 바위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섭이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어린애를 갖고 놀았다. 그녀는 목완청의 곁에 다가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목 소저,그대의 눈동자가 매우 아름답군. 그와 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그와 같은 눈동자가 있으니 더욱 더 예쁜걸! 좌 장문,나에게 협조해요. 와서 이 소저의 눈알을 파내요.]

좌자목은 산봉우리를 내려 가려다가 흠칫 발걸음을 멈추었다.아들이 상대방의 손에 들려 있으니 그의 분부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 소저,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그러면서 좌자목은 검을 뻗쳐 목완청을 찌르려 들었다.목완청은 호통쳐 꾸짖었다.

[이 몰염치한 졸장부 같으니!]

그녀는 장검을 들어 반격했다. 검의 끝은 곧장 좌자목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삼 초를 겨누게 되었을 때 몸을 빙글 돌리며 별안간 한 손을 살짝 쳐들었다.칙칙칙,세 대의 독화살이 섭이랑에게 소아졌다.그녀의 의표를 찌르고 공격을 한 것이다.좌자목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나의 아들을 해치지 마시오.]

화살이 빠르긴 했어도 섭이랑이 한 손의 소매를 떨치는 순간 세 대의 화살은 섭이랑의 소매끝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떨치자 세 대의 화살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섭이랑은 산산의 오른쪽 발에 신겨져 있는 조그만 신을 벗기더니 목완청의 뒷등을 향해 던졌다.목완청은 바람소리를 듣고 검을 돌려 막았다. 신발은 검날을 따라 미끄러지듯 달려들더니 팍,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오른쪽 허리를 때렸다.섭이랑은 그 신발에 음경(陰勁)이라는 음유한 기운을 쏟아 넣었기 때문에 목완청이 급히 운기행공하여 대항했지만 일시 숨을 들이마실 수도 없을 정도로 온몸이 저리고 마비되었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쨍그랑 하면서 장검을 놓치고 말았다. 바로 이때 산산의 두번째 신발이 다시 던져졌다.이번에는 정확하게 목완청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목완청은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고 더 견딜 수 없이 털석 주저앉았다. 좌자목은 검의 끝을 비스듬히 내리 숙여 그녀의 가슴팍을 겨누었다.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오른쪽 눈을 파내려고 했다.

목완청은 나직이 부르짖었다.

[나쁜 새끼!]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차라리 검 아래 죽는 것이 눈알을 뽑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좌자목은 이에 검을 뒤로 움츠렸다. 별안간 손목이 바짝조여 들었고 장검을 그대로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장검이 위로 날아올랐다.그 바람에 그는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다.세 사람은 동시에 놀라 약속이나 한 듯 장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칼날은 기다란 밧줄에 감겨 있었고 그 연한 밧줄 끝은 한자루의 쇠막대기에 붙어 있었다. 쇠로 된 막대기를 든 사람은 몸에 황의를 걸친 포졸 차림의 사내였다.이 사람의 나이는 약 삼십여 세쯤 되었다. 얼굴은 영기발랄했다.

섭이랑은 그가 바로 칠일 전 운중학과 싸우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며 무공이 상당히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자기보다는 한수 아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동료가 함께 왔는지 곁눈질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한 명의 황의 포졸이 한쪽에 서 있었는데 그의 허리에는 한쌍의 도끼가 꽂혀 있었다.

섭이랑이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등뒤에서 미미한 기척이 들렸다.그녀는 즉시 몸을 돌렸다.동남쪽과 서남쪽에 각기 한 사람씩 서 있었다.그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먼저번의 두 사람과 같이 황의에 포졸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동남방에 있는 사람은 손에 한 쌍의 판관필을 들고 있었고, 서남쪽에 서 있는 사람은 손에 숙동제미곤(熟銅齊眉棍)을 들고 있었다.네 사람은 사방에 서서 은연중 포위한 형세를 취하고 있었다. 좌자목은 낭랑하게 외쳤다.

[알고 보니 대리국 황궁의 저(著),고(古),부(傅),주(朱), 사대 호위들께서 일제히 도달하셨구려.불초 무량검 좌자목 인사 올립니다.]

그는 네 사람에게 절을 해 보였다.판관필을 든 호위 주단신(朱丹臣)은 답례를 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좌자목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가장 먼저 도착한 호위 저만리(著萬里)는 무쇠로 만들어진 쇠막대기를 흔들었다.그 바람에 가죽끈에 말려 있던 장검이 허공에서 계속 흔들 거리며 햇살 아래 번쩍번쩍 빛을 내기도 했다.저만리는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무량검으로 말하면 대리에서는 그래도 명문대파에 속하는데 장문인이 이토록 비열한 자일 줄은 정말 뜻밖이군.단 공자,그는 어디에 있소?]

목완청은 본래 이미 죽은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원자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그녀는 여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가 단공자에 대해서 묻자 더욱 관심이 쏠렸다.

좌자목은 말했다.

[단....단 공자? 그렇구려.며칠 전 단 공자를 본 적이 있소이다. 하지만 지금은....지금은....어디로 갔는지 모르오.]

목완청은 부르짖었다.

[단 공자는 이미 저 여자의 일당에게 해침을 당해 죽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섭이랑을 가리켰다.

[궁흉극악 운중학이라 하던가요? 키가 크고 비쩍 마른 것이 대나무쪽 같았어요.]

저만리는 깜짝 놀라 부르짖는다.

[그게 사실이오? 바로 그 사람이었소?]

손에 숙동제미곤을 들고 있던 호위 부사귀(傅思歸)가 슬픔과 분노에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단 공자,내가 원수를 갚아 드리리다.]

그는 숙동제미곤을 휘둘러 섭이랑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섭이랑은 재빨리 몸을 날리며 부르짖었다.

[어마! 대리국의 저고부주 사대 호위,너희들이 명이 짧아 일찍 죽으니 이 어미는 정말 슬퍼서 어쩔 줄을 모르겠구나.귀여운 내 자식들아! 저승길에서 너희들의 어미인 섭이랑은 기다려 다오!]

저고부주 네 사람은 나이가 적지 않은 편이었다. 그녀는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데 어머니라 자칭하고 내 아들이니 귀여운 자식이니 하는 것이었다.

부사귀는 대노했다.한 자루의 숙동제미곤을 휙,소리가 나도록 흔들었다. 삽시간에 뿌연 흙먼지를 말아 올리며 그녀를 안에 잡아 가두었다.섭이랑은 두 손으로 좌자목의 어린 아들을 안고서 숙동제미곤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피했다. 숙동제미곤은 시종 그녀를 때리지 못했다.산산은 큰소리로 울부짖었다.좌자목은 다급해서 부르짖었다.

[두 분은 손을 멈추시오! 손을 멈추시오!]

그러자 다른 호위가 허리에서 도끼를 뽑아들고 호통을 내질렀다.

[무악부작 섭이랑은 정말 명불허전이로군.이 고득성(古得性)이 고상한 초식을 가르침 받아야겠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땅에서 구르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대뜸 반곤착절십팔부(盤棍錯節十八斧)라는 절초를 펼쳐내었다. 양 손에 각기 한 자루의 도끼를 들고 휙휙 휘두르며 그녀의 하반신을 공격했다.섭이랑은 웃으며 말했다.

[이 애가 방해가 되는군! 먼저 이 아이를 도끼로 찍어 죽여라.]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아기를 아래로 내밀어 도끼를 맞으려고 했다.고득성은 깜짝 놀라 급히 도끼를 거둬들였다.그런데 뜻밖에도 섭이랑은 그순간 치마아래의 다리를 뻗쳐 내는 것이 아닌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고득성의 어깻죽지를 걷어찼다.

다행히 그는 체구가 땅딸하고 건장해서 그 발길질에 휘청 했을 뿐 상처는 입지 않았다.그는 즉시 다시 달려들었다.섭이랑은 어린애를 호신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고득성과 부사귀의 무기는 많은 방해를 받아야 했다. 이와 같은 광경에 좌자목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애를 조심하시오.그것은 나의 아들이오.제발 조심하시오.부형,그 한대는 너무나 높이 쳤소.고형,그대의 도끼날을 내 아들의 몸 가까이 들이대지 마시오.]

이와 같은 혼란이 벌어지고 있을 때 산등성이 뒷쪽에서 갑자기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그 피리 소리는 맑고 우렁찼다.곧 높다란 장포에 커다란 소맷자락을한 중년의 남자가 걸어나왔다.세 가닥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매우 고아해 보였다.두 손으로 한 대의 철 피리를 들어 입가에 대고 피리를 불고 있었다.

주단신(朱丹臣)은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가 나직이 뭐라고 몇 마디를 했다.그 사람은 여전히 피리 불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곡조는 유려한 편이었다. 그는 천천히 한참 싸우고 있는 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별안간 피리 소리가 급격하게 울려퍼졌다. 그 바람에 싸우던 세 사람은 고막이 터질듯이 아팠다.

바로 이때 그 중년의 사내는 열 손가락으로 일제히 피리 구멍을 막고 한껏 힘을 주어 피리를 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철 피리의 끝쪽에서 한 줄기 세찬 바람이 뻗쳐나와 섭이랑의 얼굴로 덮쳐갔다.섭이랑은 깜짝 놀라 얼굴을 돌려 피했다. 그 순간 철 피리의 끝이 어느덧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 두 번의 변화는 정말 너무나 빨라서 사람들은 아,하고 놀라 부르짖었다.

섭이랑의 대응이 신속했지만 그만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촉망중에 허리를 살짝 비틀며 상반신을 뒤로 한 자 정도 젖혔다.그리고는 좌산산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손을 뻗쳐 철 피리를 잡으려고 했다.장삼객(長衫客)은 어린애가 떨어지기 전에 커다란 소매자락을 뻗쳐내서 어린애를 두루말았다.그 순간 섭이랑의 손이 철 피리를 움켜 잡았다.그런데 철 피리는 불덩이처럼 뜨겁지 않은가? 깜짝 놀란 그녀는 급히 피리를 놓았다.

그녀는 몇 걸음 물러섰다. 장삼객은 커다란 소매 자락을 휘둘러 산산을 부드럽게 좌자목에게로 던졌다.섭이랑은 이때 장삼객의 오른쪽 손바닥이 피빛처럼 붉은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원래 피리에 상승의 내공력을 주입하자 쇠 피리가 불에 달군 것처럼 뜨겁게 되었구나! )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웃었다.

[귀하의 무공이 대단하군요.이 조그만 대리국에 이와 같은 고인이 계시다니 뜻밖이에요.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장삼객은 빙그레 웃었다.

[섭이랑이 우리 대리국 경내에 들어오시다니 정말 영광이외다. 대리국에서는 응당 주인의 도리를 다해야겠죠.]

좌자목은 아들을 안고 있었다.놀람과 기쁨에 불쑥 외쳤다.

[귀하는 고....고군후(高君候)가 아니시오?]

장삼객은 미소할 뿐 대답하지 않고 섭이랑에게 물었다.

[단 공자는 어디에 있소?]

섭이랑은 냉소했다.

[나는 몰라요.설사 안다고 해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별안간 그녀는 몸을 날리더니 산봉우리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장삼객은 부르짖었다.

[잠깐!]

그는 곧 뒤쫓아 갔다. 별안간 눈앞에 빛이 번득이는 가운데 칠팔 개의 암기가 잇따라 쏟아져 왔다. 암기들은 그의 머리와 얼굴 그리고 몇 곳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장삼객은 철적(鐵笛:철 피리)을 휘둘러 일일이 쳐서 떨어뜨렸다.이때 그녀는 다시 한 번 둥실 몸을 날리더니 흔들하는 순간 어느덧 멀어져 다시 추격할 수가 없게 되었다.장삼객은 땅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떨어진 암기를 바라보니 그 암기들이 바로 어린애 몸에 달려 있던 금붙이니 은붙이니 하는 것들이었다.명이 길라고 달아주는 장명패도 있었고 열쇠 조각도 있었다.갑자기 그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에게 죽은 어린애들의 물건이구나! 그녀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대리국의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르겠다!]

이때 저만리가 쇠낚시대를 휘둘렀다.가죽끈에 들려 있던 장검이 휙,하니 날아 검자루를 바로 하고 좌자목에게 날아갔다. 좌자목은 손을 뻗쳐 장검을 받았다. 얼굴 가득히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띠우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저만리는 목완청에게 물었다.

[도대체 단 공자가 어떻게 되었소? 정말 운중학에게 해침을 당했소?]

목완청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낭군님의 친구들인 것 같구나.아! 나는 역시 그들에게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 좋겠다.)

그녀는 입을 열려고 했다. 바로 그때 산골짜기 아래에서 다급히 부르짖

는 소리가 들렸다.

[목 소저,목 소저....아직도 거기에 있소? 남해악신! 내가 왔소.절대 소저를 해치지 마시오. 사부로 모시고 안모시고는 우리 천천히 상의하기로 합시다.목 소저 목소저....무사하시오?]

장삼객 등이 일제히 환호했다.

[왕자님이시다!]

목완청은 이레 낮 이레 밤을 두고 그를 기다리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이때 그의 음성을 듣게 되자 기쁨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혼미스런 의식 속에서 나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 소저,목 소저,빨리 정신 차리시오.]

그녀는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한 사람의 품에 누워 있었다. 그 사람은 자기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낭군님....!]

속으로 달콤하기도 하고 또한 서글프기도 했다.조용히 눈을 떴다. 눈앞에 한 쌍의 맑고 고운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바로 단예였다.단예는 기뻐서 말했다.

[깨어났군!]

목완청은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갑자기 단예의 따귀를 후려쳤다.

단예는 자기의 뺨을 어루만지며 있었다.

[걸핏하면 사람을 때리니 정말 야만스럽군.]

그는 즉시 물었다.

[남해악신은 어디 있소? 그는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오?]

목완청은 말했다.

[그 사람은 이미 그대를 칠 일 동안 기다렸어요.그래도 부족한가요?이제 그는 갔어요.]

단예는 크게 기뻐했다.

[잘 됐군.정말 잘 됐어! 그렇지 않아도 나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목완청은 말했다.

[그의 제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여기는 무엇하러 왔어요?]

단예는 대답했다.

[그대가 잡혀 있는데 내가 오지 않는다면 그가 그대를 괴롭힐 것이 아니오? 그래서 왔지요.]

목완청은 여간 흐뭇하지 않았다.

[그대는 양심도 없는 사람이에요. 나는 단 일검에 그대를 죽이고 싶어요.그가 떠나고 나서야 겨우 나타나 좋은 사람인 척 행세를 하다니!어째서 이레동안 찾아 오지 않았죠?]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여지껏 남에게 사로잡혀서 꼼짝 못했소. 간신히 탈출하자 즉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오.]

 

그 날 남해악신이 목완청을 잡아가고 난 후에 단예는 혼자 벼랑 위에 있었다.

(내가 만약 달려가서 그 악인에게 제자를 삼아달라고 하지 않는다면 소저의 생명을 보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악인을 사부로 모시고 우지끈 뚝,목을 비트는 재간을 배우고 싶지는 않구나.)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벼랑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그러다가 뱃속이 약간 은근히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 얼른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왜 이리 멍청할까? 나는 동굴에서 이미 신선 누님을 사부님으로 모시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소요파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소요파의 제자가 어찌 남해악신의 부하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맞다. 나는 바로 그 악인에게 당당하게 말해서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말하도록 만들어야겠다.)

그는 다시 생각을 했다.

(그 악인은 반드시 몇 수 소요파의 무공을 보여 달라고 할 것이다.그런데 나는 전혀 모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는 내가 소요파의 제자라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신선 누님은 매일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 때 세 번 씩, 두루마리의 신공을 연마하라고 분부했다.이 며칠간 정신이 나갈 정도로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연마를 못 했으니 정말 죽을 죄를 졌구나.)

마음속으로 미안하기도 해서 그는 손을 뻗쳐서 품속에서 그 두루마리를 꺼내려고 했다.그때 등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몸을 돌리자 크게 놀랐다.벼랑 위로 잇따라 수십 명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앞장을 선 사람은 바로 신농방의 방주 사공현이었다. 그리고 무량검의 동종 장문인 좌자목과 서종 장문인 신쌍청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 외에 신농방의 무리와 무량검 동서종의 제자들 수십 인이 서로 섞여 있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싸움을 하지 않고 적에서 친구로 변했지? 그야말로 잘 되었구나.)

이때 수십 명은 나무의 양쪽으로 늘어섰다. 그리고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마치 어떤 커다란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파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벼랑 위로 여덟 명의 여자가 떠올라왔다. 하나같이 짙은 녹색의 바람막이를 걸치고 있었고 그 바람막이 위에는 독수리가 수놓아져 있었다.단예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죽었구나 !)

여덟 여자들은 한편으로 네 명씩 물러섰다. 그러니까 여덟 명이 양쪽에 늘어선 것이었다.곧이어 녹색의 바람막이를 걸친 여인이 벼랑 위로 올라왔다.이 여자는 이십 세 정도 되어 보였다.용모가 아름답고 미간에 은연 중 살기가 감돌았다.그녀는 단예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죠?]

단예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녀는 나와 목 소저가 그녀의 네 자매를 죽인 사실을 모르고 있구나! 그러면서도 무슨 영취궁의 사자라고 뽐내고 있나? 다행히 나는 바람막이를 그 뚱보 할머니인 평파파에게 씌워 주었지. 그러니 모른다고 잡아 떼어야지.)

생각을 마친 단예는 입을 열었다.

[불초는 단예라고 하오. 친구를 따라 좌 선생의 검호궁에 가서 무량파의 손님이 된 적도 있소이다.]

좌자목은 불쑥 입을 열었다.

[단씨 친구.무량검은 이제 거룩하신 영취궁의 휘하로 투신하게 되었소.무량파는 이제 무량동(無量洞)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소.무량파 석 자는 이후 불리지 않게 될 것이오.]

단예는 생각했다.

(알고 보니 당신은 상대방에게 이기지 못할 것 같자 투항을 한 것이로군.꽤 고명한 생각이신데.)

단예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축하하오! 축하합니다! 좌 선생이 어둠을 버리고 광명을 찾다니 정말 훌륭하신 일이오!]

좌자목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언제 어두운 곳에 있었나? 그리고 지금 무엇이 밝아졌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와 같은 말을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오로지 쓴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단예는 계속해서 말했다.

[불초는 사공 방주와 좌 선생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알고 호의로 두분을 화해시키려고 했소.그런데 뜻밖에도 남해악신 악노삼이라는 자를 만나게 되었소. 그런데 그는 나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하면서 나를 제자로 거둬들이겠다는 것이었소. 나는 무공을 배우지 않겠노라고 했지만 남해악신은 도리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소.나를 여기다 잡아 놓고서는 반드시 그를 사부로 모셔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었소. 저는 본래 닭 잡을 힘조차 없는 몸이 아니오.]

그는 두 손을 벌려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와 같이 높은 봉우리에 놓여 있으니 어떤 방법을 써도 내려갈 방법이 없더군요.]

그의 말은 정말 틀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 여인은 단예의 말을 듣자 말했다.

[사대 악인이 정말 대리에 나타났군. 악노삼이 그대를 제자로 거두어 들이겠다니 그대의 무엇이 좋다는 거지?]

그녀는 단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공현과 좌자목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나요?]

좌자목은 대답했다.

[예.]

사공현도 말했다.

[예. 거룩하신 사자님께 알립니다. 이 녀석은 조금도 무공을 모르지만 언제나 일을 망치게 만들죠.]

그 여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나의 자매로 가장한 두 계집이 이 산봉우리로 도망쳐 왔다고 했는데 지금 어디에 있죠? 단 상공은 혹시 파란 바람막이를 걸친 나 같은 차림을 한 여자들을 보았나요?]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지 않았소.당신과 같은 옷차림을 한 여자는 보지 못했소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녹색 바람막이를 걸치고 당신들을 사칭한 사람은 한 남자와 한 여자였지.나는 거울이 없어서 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수 없었지만 목소저는 분명 한 여자였지 두 여자는 아니었다 이 말씀이야. 그러니 나는 거짓말을 한게 아니다.)

이때 그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공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대는 영취궁으로 들어온 지 상당히 오래됐죠?]

사공현은 전전긍긍하며 말했다.

[어느덧....팔 년이란 세월이 흘렀소이다.]

그 여자는 말했다.

[그대는 우리 자매마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니 그러고도 천산동모 어르신을 위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생사부(生死符)의 해약을 주지 않겠어요.]

사공현은 그만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땅에 꿇어 앉아 연신 절을 하며 빌었다.

[성사(聖使)께서 온정을 베푸시옵소서.]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은 아직까지 죽지 않았구나.그렇다면 목 소저가 그에게 준 가짜 해약이 쓸모가 있었나? 아니면 영취궁에서 그에게 영약을 주었나?생사부의 해약은 또 무엇일까?)

이때 그 여인은 사공현을 아랑곳 하지 않고 신쌍청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그대는 단 상공을 데리고 내려가요. 사대 악인이 와서 잔소리를 한다면 그들에게 표묘봉 영취궁으로 나를 찾아 오라고 해요. 그리고 우리를 사칭한 두 가짜 계집년을 잡는 일은 당신들 무량동의 머리 위에 떨어졌으니 알아서 해요.대담하게 시리 감히 우리를 사칭하다니.그리고 우광호와 갈 사매 두 반역도를 반드시 잡아들여 죽여야 해요 .그리고 나의 네분 자매를 만나거든 그들에게 곧장 영취궁으로 돌아오란다고 전해요. 나는 먼저 돌아가야 해요.]

그녀가 한 마디 할 때마다 신쌍청은 허리를 굽신거렸다.그 여인은 말이 끝나자마자 곧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부하인 여덟 명의 여자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공현은 줄곧 땅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그런데 아홉 여인이 봉우리를 내려가자 재빨리 벼랑가로 달려가 부르짖었다.

[부(符)성사, 아무쪼록 동모 어르신에게 이 사공현이 잘못했다는 말씀을 전해 주시오.]

그리고 높은 벼랑의 다른 한쪽으로 달려가더니 몸을 난창강으로 던지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신농방의 제자들은 다투어 벼랑가로 달려갔다.그러나 탁한 물결이 거세게 흘러가고 있을 뿐 방주는 보이지 않는다.어떤 제자들은 그만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다.

무량검의 사람들은 사공현이 그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공 방주의 죽음은 정말 나에게 책임이 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무척 미안한 감을 느꼈다.신쌍청은 무량검 동종의 남자 제자에게 말했다.

[너희들 두 사람이 단 상공을 모시고 내려가도록 해라.]

두 사람은 욱광표(郁光標) 그리고 오광승(吳光勝)이라는 두 젊은 제자였는데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을 했다.

단예는 두 사람이 부축하고 이끄는 가운데 고생고생해서 산밑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그는 좌자목과 신쌍청을 향해서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산 아래까지 내려오도록 도와주셔서 고맙소이다.그럼 이만 작별하겠소이다.]

그는 남해악신이 얼마 전에 가르쳐 주던 그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저 산봉우리를 올라가자면 봉우리 아래로 내려올 때보다 몇 배나 힘들겠다.그러나 무량검의 사람들이 저 위에까지는 나를 끌어올려 주지는 않겠지.목소저를 위해서는 목숨을 거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런데 뜻밖에도 신쌍청은 말했다.

[상공은 우리와 함께 무량궁으로 가야 해요.]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오.아니오.불초는 급히 볼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해야겠소.용서하시오.]

신쌍청은 코웃음치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욱광표와 오광승 두 대한은 양쪽에서 각기 팔을 뻗쳐 단예의 두 팔을 잡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단예는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신 장문,그리고 좌 장문,이 단예는 당신들에게 죄를 짓지 않았소! 방금 그 분 성사는 당신들 보고 나를 산 아래까지 데리고 내려가라고 했을 뿐이오.이제 산에서 내려왔고 이미 당신들에게 사례를 표했으면 됐지 또 어쩌자는 것이오.]

신쌍청과 좌자목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예는 욱광표와 오광승이 좌우에서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그는 결국 검호궁까지 따라가게 되었다.

욱광표와 오광승 두 사람은 단예를 데리고 검호궁으로 들어갔다.커다란 화원을 지나 세 칸의 조그만 집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오광승은 방문을 열었고 욱광표는 단예의 등을 냅다 떠밀어 문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나무문을 닫았다.다음 순간 철컥,소리가 났다.아마도 바깥 쪽에서 자물쇠를 채우는 것 같았다.

단예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당신들 무량동은 사리도 따질 줄 모르나요? 이것은 나를 범인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오?무량동은 관부도 아닌데 어찌하여 함부로 사람을 잡아 가두는 것이오?]

그러나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아무리 큰소리로 떠들어 보았자 아랑곳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에 왔으니 마음을 편안히 가져야지.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는 봉우리에서 내려올 때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래서 방엔에 침대와 탁자가 있는 것을 보자 침대 위에 벌렁 누워 잠을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밥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다. 반찬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단예는 밥을 가져온 하인에게 말했다.

이때 욱광표가 문밖에서 거칠게 호통을 내질렀다.

[이 단가야,좀 조용히 해라.다시 한 번만 떠들면 그냥 두지 않을테다. 네가 한 마디 말을 한다면 나는 너의 따귀를 한 대 갈길 것이고 두 마디 말을 하면 두 대의 따귀를,세 마디 말을 하면 세 대의 따귀를 갈길 것이다.알겠지?]

단예는 즉시 입을 다물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와 같이 거친 사람들은 말대로 할 것이 틀림없다. 목 소저에게 따귀를 얻어 맞는 것은 뺨은 아파도 마음은 흐뭇했다. 하지만 저런 자식들에게 따귀를 맞으면 그 맛이 전혀 다를걸! )

그는 밥을 먹은 후에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목 소저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녀가 독화살로 남해악신을 쏴 죽이고 빠져 나와 나를 구해 준다면 가장 좋겠는데.하지만 내가 어찌 그녀가 사람 죽이는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방안에는 집기가 별로 없었다.창문엔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아무래도 무량파에서 사람을 가두는 곳 같았다. 그러나 방이 매우 넓어서 속박을 받는 느낌은 없었다.그는 제일 먼저 할일은 신선 누님의 당부대로 북명신공을 연마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림 속의 그녀를 보는 즉시 가슴이 두근거려졌고 얼굴이 빨개졌다.그는 단정히 앉아서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신선 누님,나는 그대의 분부를 받들어 신공을 연마할까 합니다. 결코, 신선 누님의 몸을 훔쳐보자는 것이 아니니 외람됨을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그는 천천히 두루마리를 펼쳤다. 첫번째 그림 뒤의 작은 글자를 몇 번 읽었다. 문자를 해독하는 것은 그야말로 밥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한 번을 보면 즉시 알아차렸고 두 번을 보면 기억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보게 되면 마음속으로 터득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감히 그림 속의 여인상을 많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만 그림 위에 있는 경맥과 혈도 부위를 기억했다. 그리고는 두루마기에 적혀 있는 요령대로 연마하기 시작했다.

(본문의 내공은 각 문파의 내공과 그 이치가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이 내공을 배우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전에 배운 것을 깡그리 잊어 버리고 오로지 한 마음으로 새로운 내공을 연마해야 할 것이다.만약 조금이라도 이전에 익힌 내공과 뒤섞이게 된다면 두 가지 내용이 서로 충돌하게 되고 그 즉시 미치거나 피를 토하게 될 뿐만 아니라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단예는 한 번도 내공을 연마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가장 어려운 이 고비를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넘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반 시간 가량 그림의 지시에 따라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의 경락과 혈도를 차질없이 모조리 기억할 수 있었다. 다만 그는 내공을 익히지 않아 내공이 전혀 없는 터라 운기행공하여 내공이 경맥을 흐르도록 할수 없었다. 곧이어 그는 임맥(任脈)을 연마했다.임맥은 항문과 음부 사이의 회음혈(會陰穴)에서 시작하여 곡골(曲骨),중극(中極),관원(關元),석문(石門)혈도를 지나 배와 가슴 목을 경과한 후에 이빨 사이의 단기혈(斷基穴)에 이르는 것이었다.이 임맥의 혈도는 너무나 많았다.그러나 손을 뻗쳐 자기의 몸에 있는 혈도의 위치와 명칭을 모조리 기억할 수 있었다.그는 손을 뻗쳐 자기의 몸에 있는 혈도 하나하나를 짚어보았다. 임맥 또한 거꾸로 연마하는 것이었다.단기혈로부터 승장(承漿),염천(廉泉),천돌(天突) 등을 통해서 아래의 회음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수태음폐경은 바로 임맥이다. 이는 북명신공의 기틀이라 할 수 있는데 그중 엄지손가락의 소상혈과 두 젖가슴 사이의 전중혈이 더욱 중요한 곳이다.전자는 상대의 내공을 섭취하고,후자는 그 내공을 저장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사해(四海)가 있는데 위(胃)는 물과 음식이 저장되는 바다이고,충맥(衝脈)은 십이경(十二經)의 바다이며,단중혈(丹中穴)은 기(氣)의 바다이며, 뇌는 곧 골수의 바다이다. 물과 낟알을 위장에 저장하는 일은 갓난아이가 태어난 때부터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며 연마할 필요조차 없다.그러나 소상혈에서 다른 사람의 내력을 취해 자신의 전중혈에 저장하는 것은 오로지 소요파의 북명신공만이 능히 할 수 있다.사람은 물과 낟알을 먹지만 불과 하루만에 모조리 밖으로 배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내력을 취하게 되면 취한만큼 저장하게 되고 조금도 배설하는 바가 없어서 저축할수록 심후해지는 것이다.이는 바로 북명(北冥)이라는 커다란 바다가 천리나 되는 큰 물고기를 저장할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단예는 두루마리를 덮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수법은 자기는 이득을 보지만 남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 고생 고생해서 연성한 내력을 빼앗아 몸안에 저축을 하는것이니 이는 사람의 피와 살을 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긁어 모아서는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미 신선 누님에게 응락을 했으니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지만 나는 한평생 결코 남의 내력을 섭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생각했다.

(백부님께서는 사람이 살아 생전에 입지 않고 먹지 않는다면 살아갈 도리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밥 한 끼나 죽 한 그릇도 모두 남에게서 취하는 바라고 하지 않는가? 남에게 물건을 취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문제는 어떻게 보답하느냐에 있다.취하는 것은 적고 보답하는 것을 많이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인정 없는 자들의 것을 취해서 가난하고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베푼다면 양심에 어긋나지 않고 자비를 베푸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유가와 불가에서 말하는 도리도 그와 같다고 했다.따라서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일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쓴다면 이것은 백성을 박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뭇 사람들에게 베풀게 된다면 만가생불(萬家生佛)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취하고 안 취하는 문제가 아니라 착하게 사용하느냐 악하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자 이 내공을 연마하는 것이 잘못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마음이 편안해 진 그는 다시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한평생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 커다란 코끼리는 천 근이나 되는 짐을 질 수 있고 조그만 개미는 겨우 겨자 한 알 정도를 끌고 다닐 수 있을 뿐이다.힘이 크면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고 나쁜 일을 하게 되면 더욱 무섭게 나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남해악신의 재간으로 만약 좋은 일만 한다면 그야말로 백성들의 복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설사 남해악신을 사부로 모신다 하더라도 다만 나쁜 사람의 목만 비틀면 된다고 생각했다.

두루마리에는 이 외에도 여러 경맥을 연마하는 방법이 무척 많이 실려 있었다.하나같이 남의 내력을 취하는 요령이었다. 단예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요령을 배운다는 것은 아무래도 양심에 찔렸다.

그는 두루마리 끝에 적힌 능파미보라는 네 글자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대뜸 낙신부(洛神賦)의 구절들이 생각났다.

(능파미보(凌波微步) 나말생진(羅襪生塵).... 전반유정(轉盼流精) 광윤옥안(光潤玉顔) 함사미토(含辭未吐) 기약유란(氣若幽蘭) 화용아나(華容아娜) 영아망찬(令我忘餐) )

조자건(曹子建)이 지은 이 싯구의 뒷부분이 천천히 뇌리에 떠올랐다.

(농직득충(농織得衷) 수단합도(修短合度) 견약삭성(肩若削成) 요여약소(腰如若素) 연경수항(延경秀項) 호질정로(晧질呈로) 방택무가(芳澤無加) 연화불어(鉛華弗御) 운계아아(雲계峨峨) 수미연연(修眉連娟) 단순외랑(丹순外郞) 호치내선(晧齒內鮮) 명반선래(明반善래) 보엽승권(輔엽承權) 괴자염일(괴姿艶逸) 의정체한(儀靜體閒) 유정작태(柔情綽態) 미어어언(眉於語言)....)

신선 누님의 화용월태를 생각하니 그야말로 해가 떠오르는 아침처럼 교교하고 부용꽃이 파란 줄기 사이로 솟아오른 것보다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녀의 분부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실로 인생의 가장 즐거운 일로 여겨졌으며,그 일을 받들어행하다가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사양하고 싶지 않았고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후회할 것 같지 않았다.

(우선 먼저 이 능파미보를 연마해야겠다. 이것은 목숨을 구하는 수법일뿐 사람을 해치는 재간이 아니다. 따라서 연마하면 백 가지 이로운 일은있어도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

두루마리에는 발걸음을 옮기는 방법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주역의 육십사괘 방위를 자세히 설명한 후 주를 달아 놓고 있었다. 그는 역경을 습득한지라 배우기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두루마리의 보법은 매우 이상했다. 한 걸음 나오게 된 이후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려면 반드시 허공에서 몸을 돌려야 했다. 앞으로 뛰어 나가려면 뒤로 몸을 날려야 했고 왼쪽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번개같이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학에도 알고 보니 이와 같이 무궁무진한 재미가 있구나!실로 독서를 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구나!)

보법을 익히면서 그는 하루를 보냈다. 두루마리의 무공은 어느 정도 숙달되었다. 저녁밥을 먹은 이후 다시 십여 걸음을 배우고 침대 위에 올랐다. 그는 소상,전중,관원,중극 등 혈도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그리고 동인(同人) 대유(大有) 귀매(歸妹) 미제(未濟)등 주역에 나온 방위도 생각했다.

이때였다. 갑자기 과앙,하며 커다랗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그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얼마 후에 다시 과앙,하는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소가 우는 것 같기도 했으며 또한 몹시 처절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단예로서는 어떤 맹수의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잠시후 울부짖는 소리가 멎자 그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옆방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망고주합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는데 오늘 밤 갑자기 울부짖는 것을 보니 길한 일인지 아니면 흉한 일인지 잘 모르겠군.]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그 말을 받았다.

[우리 무량파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길할래야 길할 리가 없지. 어쨌든 흉하더라도 너무 흉하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단예는 말을 주고받는 두 명이 욱광표와 오광승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그들은 옆방에 자면서 단예를 감시하는 모양이었다.

이때 오광승이 입을 열었다.

[우리 무량동이 영취궁에게 소속되었으니 차후부터 그들에게 제압을 당하고 자유롭지 못하겠죠. 하지만 큰 배후 세력을 두게 되었으니 좋고 나쁨은 각기 반반이라 할 수 있소. 그러나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서종이 분명히 우리 동종보다 못한데,부 사자는 신 사숙을 무량파의 우두머리로 삼고 좌자목 사부님으로 하여금 그녀의 명령을 듣게 했다는 점이오.]

욱광표는 그 말을 받았다.

[영취궁은 천산동모를 비롯해서 모두 여인들이 아닌가. 그녀들은 천하의 남자들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던가. 더군다나 그 부 사자가 신 사숙으로 하여금 우두머리가 되게 한 것은 영취궁에서 무량동을 달리보도록 하려는 호의에서 그런 조치를 한 것이야 자네도 보다시피 부 사자는 신농방의 사공현에게 얼마나 매섭던가? 하지만 신사숙을 대하는 태도는 훨씬 부드러웠거든.]

오광승은 물었다.

[욱 사형,그런데 또 한 가지 모를 일이 있소. 부사자는 어찌하여 옆방의 그녀석에게 그토록 겸손할까요? 단 상공,단 상공 하면서 매우 다정히 부릅디다.]

단예는 그들이 자기에 관해 말하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욱광표는 오광승에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들끼리 여기서 슬그머니 하는 수밖에 없지. 젊은 소저가 잘 생긴 녀석에게 겸손하게 대하며 `단 상공,단 상공' 하고 부르는 것은....]

그는 단 상공이란 석자를 내뱉게 되었을 때 목청을 낮추었다.그리고 영취궁 그 부씨 성을 가진 사자의 음성을 흉내내어 약간 코가 막힌 소리를 냈다.

[자네가 왜 그러는지 한 번 알아 맞춰 보게나.]

오광승은 말했다.

[나도 모르오.사형이 말해 주시오.]

[나야 뭐 부 사자 뱃속의 벌레가 아니니 그 어르신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하지만 신 사숙 역시 그녀의 마음을 미리 내다보고 우리를 보고 잘 지켜보라고 한 것 같네.]

오광승은 물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가두어 둘 참이오?]

욱광표는 말했다.

[부 사자가 산봉우리에서 '신쌍청은 단 상공을 데리고 내려 가시오.사대 악인이 만약 와서 잔소리를 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표묘봉 영취궁에 와서 나를 찾으라고 하시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 몇 마디 말을 할 때는 또 녹의 여인의 음성을 흉내내었다.

[....그러나 단 상공을 데리고 산을 내려와서 어떻게 하라는 건지, 그 어르신께서 말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도 감히 묻지를 못했지. 만약 부사자가 어느날 갑자기 사람을 보내 이런 말을 전한다고 치세. `신쌍청,단상공을 영취궁으로 보내시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이미 단가 녀석을 죽였거나 놓아 보냈다면 큰 일이 아닌가?]

오광승은 말했다.

[만약에 부 사자가 들먹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저 녀석을 이곳에다 한평생 가두어 둔 채 언제라도 부 사자님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오?]

욱광표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단예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거 고달프게 됐구나! 고달프게 되었어.)

그는 다시금 곰곰히 생각했다.

(그 부가란 사자가 나에게 한 마디 단 상공하고 불러준 것은 내가 공부를 한 사람이고 또 어느 정도 겸손하니까 그런 것인데 너희들은 어처구니 없는 쪽으로 생각을 돌리는구나. 나를 수염이 허옇게 될 때까지 가둬둔다고 해도 그 부사자는 결코 나를 데리러 오지는 않을걸.)

오광승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두 사람도 역시....]

그런데 갑자기 과앙,하는 울부짖음이 세 번 울려 퍼졌다.바로 망고주합이 울부짖는 소리였다.오광승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한참 기다려도 망고주합이 다시 울부짖지 않자 그는 재차 입을 열었다.

[망고주합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니 자꾸만 간이 서늘해 지는군.병을 부르는 온신이 이번에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을 거두어 갈지 모르겠군.]

욱광표는 말했다.

[모두들 망고주합을 온신이 타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게 말할 뿐이야.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보현보살이 백상을 타고,태상노군이 청우를 탄다는 설과 마찬가지지.이 망고주합은 만독의 왕으로서 그는 온보살이 타는 동물이라고 하는데 진짜 그럴 것 같지는 않네.]

오광승은 말했다.

[욱 사형,그럼 망고주합은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오?]

욱광표는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한 번 보고 싶지 않은가?]

오광승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욱 사형이 보고난 후에 나에게 이야기만 해 주시구려.]

[내가 만약 망고주합을 보게 된다면 그 독기에 즉시 두 눈이 멀게 되고 곧이어 그 독기가 온몸으로 파고 들어가서 자네에게 만독지왕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말할 여유도 없이 죽게 될걸세.그러니 역시 우리 사형제 두 사람이 나가서 한 번 구경하도록 하세.]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빗장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오광승은 재빨리 말했다.

[노....농담 마시오.]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달려가서 도로 빗장을 거는 모양이었다.

욱광표는 웃으며 말했다.

[하 하 하! 나는 너에게 나가볼 용기가 있는 줄 알았다.그런데 이토록 놀라다니 원....]

오광승은 말했다.

[그와 같은 농담은 역시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정말 무슨 사고라도 일으키게 된다면 야단이 아니겠소.역시 그냥 잠이나 잡시다.]

욱광표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우광호와 갈 사매,이 한 쌍의 개같은 남녀들은 정말 도망쳤을까? 자네가 한 번 알아 맞춰 보게나.]

오광승은 말했다.

[이토록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정말 도망친 모양입니다.]

욱광표는 말했다.

[우광호는 여자 후리는 재간이 보통이 넘지.그는 몹시 색을 밝히지. 그리고 검술 연마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달콤한 말로 여인들을 속이는 데 많은 연구를 기울였지. 영취궁의 사자까지도 친히 나서서 찾아보았지만 여전히 그들이 도망을 쳤으니,나로서는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

오광승은 말했다.

[믿을 수 없어도 믿어야 하지 않겠어요?]

욱광표는 말했다.

[내 생각에는 그들 두 남녀는 아무래도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가 망고주합에게 죽은 것 같군!]

오광승은 아,하고 외치며 크게 놀랐다는 뜻을 비쳤다.욱광표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반드시 황량한 곳만 찾아서 도망가다가 망고주합을 보게 되었고 그 독기를 들이마시게 되자 그만 전신이 한 무더기의 핏물로 변해서 전혀 종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해.]

오광승은 말했다.

[사형의 짐작이 그럴싸 하군요.]

욱광표는 말했다.

[뭐가 그럴싸 하다는 건가? 만약에 망고주합을 만니지 않았다면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오광승은 말했다.

[어쩌면 두 사람은 견딜 수 없어 깊은 산속에서 그 짓을 하다가 정신이 아득해지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이어번신이라는 한 수를 쓰면서 몸을 뒤채다가 그만 만 장이나 되는 깊은 산골짜기로 떨어져서 죽었을지도 모르지요.]

두 사람은 킥킥,음탕한 웃음을 흘렸다.

단예는 생각했다.

(목 소저가 그 반점에서 우광호와 갈 사매 두 사람을 쏴 죽였는데 무량동의 사람들이 아직 알아내지 못했구나. 아마도 그 반점의 주인이 화를 불러들이게 될까봐 재빨리 두 구의 시체를 매장해 버렸나 보다.)

이때 오광승이 말했다.

[무량동의 두 제자가 도망친 것은 큰일이라고 할 수 없어요.그러나 황제는 급하지 않은데 태감이 급하게 되었다고,영취궁의 사자는 어째서 그토록 긴장되어 반드시 두 사람을 잡아들이려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욱광표는 말했다.

[자네가 머리를 써서 생각해 보게나.]

오광승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

[사형도 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알고 있지 않소? 아무리 머리를 써봤자 무슨 수를 발견할 수 없군요.]

[내가 자네에게 먼저 묻겠는데 영취궁에서 우리 무량파를 점거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오광승은 대꾸했다.

[무량옥벽 대문이라고 하더군요. 부 사자는 도착하자마자 무량옥벽의 선영이나 검법에 대해서만 질문을 했다는군요.우리도 모두 부 사자의 분부를 받들어 맹세를 하지 않았습니까?무량옥벽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겠다고요.]

[그러나 우광호와 갈 사매는 그와 같은 맹세를 하지 않고 본파를 배반하여 이탈하였으니 그들이 비밀을 발설하지 않으리라고 볼 수 없지 않은가?]

오광승은 크게 무릎을 쳤다.

[맞아요! 영취궁은 그들 두 사람을 죽여 입을 봉하려는 것이군요.]

욱광표는 나직이 소리쳤다.

[떠들지 말게.옆방에 사람이 있어,잊었는가?]

오광승은 재빨리 말했다.

[네,알겠어요.]

잠시 후 그는 다시 말했다.

[우광호 그 녀석은 정말 여복이 적지 않군. 갈 사매 같은 야들야들한 미녀를 품속에 안게 되었으니. 제기랄! 설사 한 무더기의 핏물로 변한다 하더라도 그녀와 한 번만 인연을 맺게 된다면....]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들은 모두 다 속되고 음탕한 말들이었다. 단예는 다시 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옆방에서 들려오는 음탕한 웃음소리가 끊어지지 않아,듣지 않을래야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묵묵히 북명신공의 혈도에 생각을 쏟았다. 잠시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어 옆방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한 마디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다시 능파미보를 연마했다. 두루마리에 그려져 있는 순서대로 한 걸음,두 걸음 연습해 본 것이다. 이 보법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면서 한 걸음도 곧장 나아가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방안의 탁자와 의자를 치우니까 보법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십여 걸음을 배우게 되었을 때 벼락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중에 밥을 가져오는 사람이 들어올 때 나는 이렇게 비틀거리며 그들 피해 서 문밖으로 나간다면 나를 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즉시 도망칠 수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이 방안에서 늙을 때까지 갇혀 있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여간 기쁘지 않았다.

(나는 이 보법이 익숙해지도록 연마를 해야겠다.반 걸음이라도 잘못 디디게 된다면 그에게 잡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 발에 쇠고랑을 채우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렇게 되면 능파미보가 아무리 오묘하다고 하더라도 쇠사슬에 묶여 있으니 늙어 죽을 때까지 갇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정성을 기울여 보법을 익혔다.

이미 배운 일백여 보를 앞에서부터 끝까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어야 된다.)

생각을 마치자 왼발을 내딛었다.곧장 중부를 딛고서는 기제로 옮겨갔다. 그런데 막 태방위에 이르러 몸을 돌리게 되었을 때는 오른발이 고방위를 디뎌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단전에서 한 가닥 열기가 위로 치미는 것이 아닌가? 전신이 마비되어 오면서 대뜸 앞으로 몸이 쏠리게 되었고 앞에 있는 탁자 위에 엎어진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깜짝 놀라서는 손을 뻗쳐 탁자를 딛고 몸을 일으켜려고 했다.그러나 사지백해가 말을 듣지 않았다.손가락 하나 움직힐 수 없었다.마치 잠을 자다가 악몽을 꾸는 듯 초조하게 생각하면 할 수록 반 푼 어치의 기운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이 능파미보가 고도로 심오한 상승의 무공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다라서 무루마기의 끝에 있는 능파미보가 원래 북명신공을 연마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내력을 끌어들여서 내력이 퍽이나 심후해지게 되었을 때 연마하도록 한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능파미보란 내딛는 매걸음마다 내공의 기운과 서로 일치되어야 하며 결코 걸음만 내딛어서는 안 되는 수법이었다.

단예는 내공의 기초가 전혀 없었다. 지금까지는 한 걸음 내딛고 생각하고 한 걸음 물러서고는 다시 멈추어서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숨돌릴 여유를 가지고 있어서 장애가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나 보법에 익숙해진 후 단숨에 몇 걸음을 내딛으려고 하니까 몸안의 혈도에 착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대뜸 마비되고만 것이었다.하마터면 주화입마될 뻔한 것을 간신히 면한 것이다.

그는 놀라고 당황하여 계속 버둥거렸지만 힘을 쓸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왔고 구토증이 일어났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그냥 엎드려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그냥 내버려 두자 오히려 답답하던 감이 차츰 누그러졌다. 꼼짝 않고 탁자 위에 엎드려 있는데 마침 두루마리가 자기 면전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두루마리에 실려 있는 아직 배우지 않은 보법을 읽어 보았다. 마음속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이렇게 생각해 가면서 기억해갔다.그렇게 반 시간이 지나게 되자 그는 이십여 보를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가슴팍이 답답하던 증세가 크게 누그러졌다.

정오가 되지 않아 그는 모든 보법을 모조리 기억하게 되었다.그는 마음속으로 두루마리에 그려져 있는 육십사괘의 보법을 따라 명이로부터 시작하여 비,기제,가인을 지나 모두 육십사괘를 디딘 것이다. 마침내는 크게 원을 한 번 그리고 기망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모든 보법을 완전히 암기했다는 것을 알았다.크게 기쁜 나머지 그는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며 부르짖었다.

[정말 묘하다! 정말 묘해!]

그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그는 자기 자신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그의 내력은 부지불식간에 그의 생각을 따라 움직이게 되었고 역시 크게 한 바퀴를 돈 후 교차되었던 경맥이 뚫리게 된 것이었다.

그는 놀람과 기쁨에 섞이어 육십사괘의 보법을 되풀이해 기억했다.그리고는 지극히 완만한 동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보았다. 그는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숨을 쉬었다.그리하여 육십사괘를 모조리 딛게 되고 발걸음이 큰원을 그리게 되었을 때 정신이 상쾌해졌을 뿐만 아니라 온몸에 기운이 가득차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기뻐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정말 묘하다! 정말 묘하구나!]

이때 욱광표가 문밖에서 거친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웬 소린이야? 나는 한 번 한다고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 한 마디 하면 한대의 따귀를 때린다고 했지?]

욱광표는 자물통을 열고 문안으로 들어섰다.

[너는 잇따라 세 번 부르짖었으니 세 번 따귀를 맞아야 한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점을 참작해서 세 대를 한 대로 에누리 해 주지. 한 대의 따귀 맛이 어떤가 보아라.]

그는 두 걸음을 내딛으며 왼손으로 단예의 얼굴을 때리려고 했다.이 일장은 무척 매서웠다. 단예는 급한 김에 머리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고 정위치에서 비스듬히 송의 위치로 내딛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욱광표의 일 장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욱광표는 대노해서 왼주먹을 재빨리 뻗어냈다.단예는 보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피하려고 했으나 펑,소리와 함께 가슴팍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공교롭게도 지금 맞은 곳은 바로 전중혈이었다.전중혈은 조금만 세게 맞으면 즉시 생명이 위태로운 급소였으므로 욱광표는 자기가 힘껏 내지른 주먹이 전중혈에 적중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혹시나 단예가 죽는 게 아닌가 여겼던 것이다.그런데 상대방을 때린 순간 때린 팔이 시큰해지면서 온몸의 맥이 풀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일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욱광표는 잠시 동안 어리둥절했으나 단예가 무사한 것을 보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 대의 따귀를 때리지 못한 대신에 가슴팍을 한대 후려쳤으니 됐다.]

욱광표는 문을 나서서 자물쇠를 채웠다.

단예는 주먹을 호되게 맞았는데도 맞는 순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으므로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사실 욱광표의 한 주먹에 실린 내력은 모조리 전중혈을 통하여 그의 체내에 축적되었던 것이다. 단예는 그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만약 욱광표가 단예의 다른 부위를 때렸다면 단예는 크게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중혈은 상대방의 내력을 받아들이는 곳이었다.단예는 앉아서 득을 본 셈이었지만 이 공교롭기 그지없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욱광표를 원망할 뿐이었다.

(이 사람은 매우 거칠구나.내가 몇 마디 절묘하다고 했을 뿐인데 자기에게 무슨 피해를 끼치기나 한 것처럼 나를 때린단 말인가?)

그는 전중혈에 뿌듯한 팽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임백과 수태음폐경의 두 혈도를 따라 내력을 운행시켰다. 그러자 한 가닥 따스한 기운이 두 줄기의 경맥을 통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이어 그 기운은 기해혈에 르렀고 뿌듯하던 기분도 없어지고 말았다.단예는 물론 이 한번의 소주천이라는 내력 운행으로 말미암아 욱광표가 전해준 내력이 영원히 그의 체내에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단예는 전혀 내력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서 약간이나마 내력을 지닌 상태로 변한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그는 다시 능파미보를 익히기 시작했다.

한 걸음 옮기고 숨을 들이쉬고 두 번째 걸음을 옮길때 숨을 내쉬었다. 그리하여 육심사괘를 모조리 밟았을 때는 사지에 힘이 넘치고 날아갈 것 같았다.그는 호흡을 잘 조절하였기에 그런 상태에 도달했다는 점을 깨닫고 재차 능파미보를 연습하기 시작했다.이번에는 두 걸음을 옮긴 다음에 숨을 들이쉬고 두 걸음 을 내딛은 후 숨을 내쉬었다. 능파미보는 움직이면서 내공 연마를 하게 되어 있어 육십사괘를 한 번 밟게 되자 이것이 곧 한 번 진기를 운행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그는 능파미보를 연습할수록 온몸에 힘이 넘치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자 쉬지 않고 연마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전 욱씨가 내 얼굴을 때리려 했을 때 나는 정의 위치에서 송의 위치로 발길을 내딛었다.이 한 걸음을 잘 딛었기 때문에 따귀를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곧이어 비스듬히 고의 방위로 옮겨갔더라면 가슴이 주먹에 맞는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나는 생각만 했을 뿐 동작이 따라 주지를 않았었다. 그러니까 생각해서 움직이는 경지를 넘어서서 무의식중에 능파미보를 전개할 수 있는 경지까지 연마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능파미보로 이곳을 빠져나가기 힘들 것이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모든 시간을 빼고는 모든 시간을 능파미보를 연습하는 데 쏟았다. 사흘이 흘렀을 때 능파미보는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서 한 번 호흡하는 동안 육십사괘를 밟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나아가 능파미보와 낙신부속의 귀절을 연결시킬 수 있었다.

(뜬 구름이 달을 가리듯 바람이 눈송이를 날리듯 표홀하고,홀연 나타나 홀연 사라짐이 연기처럼 신비롭다.몸이 한 번 움직이매 학처럼 날렵하고 한 번의 발걸음에 몸이 귀신처럼 사라진다.허허실실 움직이니 방향을 종잡을 수 없고 나아가고 물러섬은 귀신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낙신부에서 말하는 신출귀몰의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도 요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적이 손을 뻗쳐 잡으려고 할 때 피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을뿐 귀신의 경지에 도달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능파미보를 완전히 익히려면 일 년 이상은 연습을 해야 한다. 하지만 목완청과 헤어진 지 벌써 이레가 되었다.빨리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남해악신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기필코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단예는 밥을 가져오는 기회를 이용해 도망치기로 결심을 했다.

 

이윽고 하인이 자물쇠를 열고 밥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단예는 천천히 다가가서 갑자기 쟁반을 뒤집어 엎었다.와장창,소리와 함께 밥과 반찬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하인은 크게 놀라 소리쳤다.

[아이쿠!]

단예는 재빨리 두세 걸음을 옮겨 딛어 문밖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이때 문을 지키던 욱광표가 하인의 비명 소리에 놀라 급히 문안으로 뛰어들었다.단예와 욱광표는 문턱에서 그만 가슴끼리 부딪히고 말았다.단예는 급히 예의 방위에서 관의 방위로 걸음을 옮겨 욱광표의 곁을 스쳐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왼발이 문지방에 턱 걸리게 되어 단예의 몸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했다. 욱광표는 재빨리 손을 뻗어 단예의 왼팔을 꽉 움켜쥐었다. 단예는 문지방이라는 복병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관계로 그만 다시 사로잡히고 만 셈이었다.그는 깜짝 놀라며 오른손을 내밀어 욱광표의 손을 떼내려고 했다.별안간 욱광표는 엇,하고 놀라 부르짖었다. 단예의 오른손이 자신의 손에 닿는 순간 전기에 감염된 듯 팔이 찌르르 하면서 온몸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그는 더욱 힘을 주어 단예의 팔을 잡았다. 이때 욱광표의 엄지손가락과 단예의 엄지손가락이 맞닿아 있는 상태였다.욱광표는 힘을 쓰는 족족 엄지손가락을 통해 자신의 내력이 빨려나가는 것을 느끼고 급히 손을 떼려고 했다.한데 이게 웬일인가? 두 사람의 엄지손가락은 마치 철사줄로 묶은 듯 아무리 뗄레야 뗄수가 없지 않은가? 욱광표가 돋운 힘은 단예의 손가락을 통해 기해혈에 저장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야말로 북명신공의 오묘한 작용이었고 수많은 냇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이치였다.

 

욱광표는 죽을 힘을 다하여 단예를 와락 떠밀었다.단예는 뒤로 벌렁 쓰러졌다.그러나 두 손가락은 여전히 꼭 달라붙어 있었으므로 욱광표는 덩달아 단예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욱광표의 내력은 이미 절반 이상이나 단예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 간 이후였다.욱광표의 내력이 단예보다 열세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둑 터진 봇물처럼 욱광표의 내력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나가 단예의 몸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해서 도저히 항거할 수 없게 되었다.

욱광표는 이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 크게 부르짖었다.

[오광승! 빨리 와! 빨리 와서 나를 구해 줘!]

오광승은 이때 변소에 있다가 욱광표의 다급한 비명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욱광표는 단예의 몸 위로 엎드린 채 고개를 돌려 오광승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 녀석이 도망치려고 한다! 내 힘으로는 막지 못하겠어!]

오광승은 급히 바지를 추스려 올리고 달려들어 단예를 잡으려 했다. 욱광표는 다급히 외쳤다.

[먼저 나를 떼내 주게!]

[예!]

오광승은 대답하고 욱광표의 두 어깨를 팔로 잡아당겼다. 순간 그의 두 팔이 시큰하면서 온몸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는 재빨리 온몸에 힘을 주었다.이때는 이미 단예가 욱광표의 내력을 모조리 흡수한 이후였고 오광승의 내력도 고스란히 욱광표의 몸을 통해 단예의 손가락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오광승이 힘을 쓰면 쓸수록 온몸이 나른해지는 걸 느끼고 부르짖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이때 밥을 가져온 하인은 단예가 도망을 치려고 하고,욱광표와 오광승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것을 보자 급히 밖으로 뛰쳐 나가면서 소리질렀다.

[빨리 와요! 단가 녀석이 도망치려고 해요!]

그 외침을 듣고 즉시 두 명의 무량파 제자가 달려왔다. 뒤이어 다시 세명의 제자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어떻게 됐다고? 그 녀석은 어디 있지?]

단예의 몸 위에 욱광표와 오광승이 덮쳐 누르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오광승이 이때 내력을 대부분 단예에게 빼앗긴 이후라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밑에 그 녀석이 깔려 있다! 빨리 우리를 일으켜 세워!]

오광승이 소리치자 두 명의 제자가 달려들어 각각 오광승의 한쪽 팔을 잡고 위로 잡아당겼다. 그 순간 팔이 시큰하면서 내력이 오광승의 팔을 통해 바져나갔으며 욱광표를 통해 단예에게 흘러들게 되었다. 단예는 기해혈이 터질듯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새로 온 두 제자의 내력이 그의 몸안에 모조리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나머지 세 제자는 옆에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말타기 놀이를 하나? 왜들 엎드려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할까?]

이어 세 사람은 엎어진 사람의 어깨를 잡고 위로 당겼다. 예외 없이 시큰한 감각이 전해오며 세 제자는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그들의 몸속에 있던 내력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말았다.

[아앗! 이상하다!]

일곱 명의 무량동 제자는 단예의 몸을 덮친 상태에서 팔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부르짖었다. 단예는 일곱 명이 배 위에 올라타자 숨이 막혀 소리쳤다.

[나를 놓아줘! 도망치지 않을 게!]

그러나 일곱 명의 제자는 안색이 창백해 졌고 온몸에 힘이 빠져 단예의 몸 위에 축 늘어진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특히 욱광표와 오광승은 탈진하여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기절한 상태였다.

이때 갑자기 좌자목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인이 나의 아들을 훔쳐갔다! 모두들 흩어져 그녀를 사로잡아라!]

그 음성은 당황함과 놀람으로 가득차 있었다.단예는 좌자목의 음성을 듣고 생각했다.

(어느 여인이 그녀의 아이를 훔쳐갔다니....아! 이제보니 목 소저가 나를 구하러 온 모양이구나! 그녀는 좌자목의 아들을 납치하여 나와 교환하려고 하나보다! 정말 그녀는 총명하구나!)

단예가 팔을 힘껏 내밀자 알 수 없는 괴력이 용솟음쳐 그를 덮치고 있던 일곱명의 몸이 공중으로 높이 튀어올라 저만큼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단예는 일곱명의 힘이 자기의 몸속에 고스란히 저장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 갑자기 내 힘이 세지다니 이상한데....저 사람들은 왜 맥을 놓고 축 늘어져 있는 걸까?]

단예는 의아했으나 더 생각할 여유가 없어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사방을 살펴보니 무량검의 제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이리 뛰고 저리뛰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장문인의 아들이 납치되었다.]

[어서 빨리 그 계집을 추격해라!]

[넌 그쪽으로 가라! 난 이쪽으로 찾아보겠다!]

단예는 그물에서 빠져나온 물고기처럼 빠른 속도로 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목 소저의 이와 같은 계획은 정말 묘하구나! 그 덕분에 나는 도망치기가 쉬워졌다.)

그는 눈앞의 무성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한참을 달렸지만 조금도 피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갈수록 힘이 솟고 속도가 빨라졌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 기이한 일들만 연속해서 일어나는구나!)

십여 리를 달려 어느 음침한 숲속에 들자 그는 잠시 큰 나무 아래서 앉아 휴식을 취했다.기해혈,즉 단중혈은 여전히 뿌듯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진기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일곱 제자의 내력을 합친 힘은 굉장했다. 그가 진기를 몇 번이나 운행했으나 기해혈의 뿌듯한 감각은 좀체로 사라지지 않았다.그는 한참 후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생각에 잠겼다.

(목 소저는 나를 찾고 있을텐데 어떻게 그녀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릴 수가 있을까?이제 좌자목의 아들은 돌려 줘도 될텐데....)

이때였다. 찍,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잿빛 그림자가 스쳐갔다. 단예는 깜짝 놀랐다.

[섬전초다! 종 소저의 섬전초다!]

단예는 종영이 섬전초를 찾고 있던 모습이 생각났다. 섬전초를 잡아다 갖다주면 그녀가 무척 기뻐할 것 같았다. 그는 즉시 종영의 흉내를 내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휙,하는 휘파람 소리가 울려퍼지자 잿빛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리더니 섬전초가 나타났다.섬전초는 그의 발 앞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붉은 눈동자를 디룩디룩 굴리며 단예를 올려다 보았다.단예는 섬전초를 보고 웃으며 다가갔다.

[예쁜 우리 담비야! 내가 너를 종 소저에게 데려다 주마.]

그는 섬전초에게 바짝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움켜 쥐려고 했다.순간 찍,하며 섬전초가 번개처럼 튕겨올라 단예의 오른쪽 허벅지를 깨물고 도망쳤다.섬전초는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단예를 쏘아보고 있었다. 단예의 허벅지는 금새 퉁퉁 부어 올랐으며 온몸이 마비되어 왔다.단예는 정신이 어찔어찔하여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곧이어 손과 발이 마비되어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너무 경솔했다. 섬전초에 물리면 살아남지 못한다는데 함부로 만지려 했으니....)

섬전초에 물리면 즉시 물린 팔다리를 잘라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단예는 칼을 가지고 있지 않아 다리를 잘라낼 수도 없어서 고스란히 죽음을 당해야 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단예의 온몸은 금세 뻣뻣하게 굳어져갔다.그는 옆으로 쓰러진 채 눈을 멀거니 뜨고 입을 쩍 벌렸으며 혀를 길게 내밀었다.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죽다니 실로 꼴불견이 되겠구나!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고 엉덩이를 들어낸 채 죽은 모습은 실로 가관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때 가까운 곳에서 과앙,과앙 하는 음향이 들렸다.단예는 그 음향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저 소리는 만독의 제왕이라는 망고주합의 울음 소리가 아닌가?그걸 본 사람은 그 즉시 온몸이 핏물로 녹아버린다고 하던데 큰일이구나!)

퍽퍽,하고 땅을 파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단예 앞의 풀더미 속에서 한 마리의 동물이 껑충 뛰어 나왔다. 그 동물은 주먹 크기였는데 모양은 두꺼비 같기도 하고 맹꽁이 같기도 했다. 온몸은 핏물에서 방금 기어나온 듯 새빨갰다. 눈동자는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어 몹시 징그럽고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망고주합이 입을 쩍 벌리자 목구멍에 있는 엷은 막이 진동하며 과앙,과앙,하는 암소 울음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주먹만한 몸뚱이에서 어떻게 그토록 우렁찬 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단예는 생각했다.

(망고주합이라는 이름이 제격이구나! 울음 소리는 소가 우는 소리고,온몸이 새빨가니 말이다! 그런데 한 번 보기만 하면 핏물로 녹는다는 말은거짓이었구나! 사실 망고주합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저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어서 붙인 이름일 것이다.저 동물을 본 사람이 모두 핏물로 변했다면 어떻게 이름을 붙일수가 있었겠는가?)

이때 섬전초는 망고주합이 나타나자 꼬리를 말며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 태도를 취했다.그 모습은 마치 고양이를 본 쥐가 감히 도망을 치지도 못하고 비실대는 것과 흡사했다.망고주합은 섬전초를 보더니 입을 쩍 벌리고 과앙,소리를 냈다. 그러자 망고주합의 목궁멍에서 불그스레한 안개가 뿜어져 섬전초를 향해 쏘아져 갔다.섬전초는 껑충 뛰어올라 망고주합이 쏘아낸 독기를 피하고 오히려 망고주합에게 덮쳐들며 망고주합의 등을 물어뜯었다.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섬전초는 독종이구나! 망고주합을 공격하다니....)

그런데 막 그가 이런 생각을 할 때 섬전초가 돌연 땅 바닥에 벌렁 쓰러지더니 다리를 바들바들 경련하며 즉시 죽어 버리지 않는가? 단예는 속으로 크게 놀라고 말았다.

(섬전초가 망고주합을 깨물었는데 오히려 망고주합의 몸에 있는 독에 중독되어 죽고 마는구나! 정말 망고주합이 만독의 제왕이라는 말이 실감나는군!)

이때 망고주합은 껑충 뛰더니 섬전초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섬전초의 양쪽 뺨을 핥았다.순간 섬전초의 양쪽 뺨의 털과 살이 주르르 녹아버리고 뼈만 앙상하게 남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황연히 깨달았다.

(섬전초가 독사를 먹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망고주합도 독이 있는 동물을 먹고 사는구나! 섬전초의 양쪽 뺨에 있는 독 주머니를 망고주합이 빨아먹은 것이구나!)

망고주합은 섬전초의 독 주머니를 핥아먹은 후 허공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더니 과앙,하고 울었다.그러자 풀더미 속에서 싸그락 소리가 들리더니 한 마리 얼룩무늬의 지네가 기어나왔다. 지네의 길이는 두 뼘 정도였다. 망고주합은 껑충 뛰어 지네를 향해 다가갔다.지네는 급히 도망쳤고. 망고주합은 그 뒤를 쫓았다.갑자기 과앙,소리가 나며 망고주합의 입에서 붉은 색 독 안개가 쏘아져 나가 지네를 향해 뻗어나갔다.지네는 크게 놀라며 급히 도망친다는 것이 그만 단예의 쩍 벌어진 입 속으로 들어오는게 아닌가? 단예는 기겁했으나 섬전초의 독에 마비된 터라 입을 다물 수도 없었다.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지네야,거기는 내 입이란 말이다! 빨리 나가! 내 목구멍이 네가 숨는 구멍인 줄 아니?)

싸그락 소리가 입 안에서 들리며 단예는 목구멍이 근질근질하고 까칠까칠한 감각을 느꼈다.지네는 점차로 그의 뱃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단예는 그만 크게 놀라 정신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망고주합이 지네의 뒤를 따라 단예의 입 속으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미끌미끌하고 느물느물한 감각이 목구멍과 식도에서 느껴졌다. 이윽고 망고주합과 지네가 그의 뱃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단예는 자기의 뱃속에서 과앙,과앙,하는 음향이 계속 들려오는 것을 느끼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또한 가장 우스꽝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대성통곡을 하고 싶기도 했고 미친듯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온몸이 뻣뻣하여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다만 두 줄기 눈물이 땅 위로 흘러내릴 뿐이었다. 뱃속이 요란스럽게 꿈틀거리며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단예는 속으로 외쳤다.

(망고주합아! 망고주합아! 빨리 지네를 잡아먹고 밖으로 나오너라! 내 뱃속은 결코 네가 뛰어노는 놀이터가 아니다!)

뱃속의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그러나 꿈틀거리는 기운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단예는 손가락을 목구멍 속에 넣어 토하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크게 외쳤다.

[망고주합아! 빨리 나오너라!]

갑자기 단예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중얼거렸다.

[어? 내 몸이 움직이잖아?]

뻣뻣하던 몸은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구나! 내가 갑자기 해독되다니 정말 믿을 수 없구나! 혹시 망고주합이 내뱃속에서 살기로 작정하고 섬전초의 독을 해소시켜 준 것이 아닐까? 아....그러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땅에 물구나무를 서서 입을 크게 벌리고 몸을 아래 위로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망고주합을 목구멍 밖으로 토해내려는 것이었다.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망고주합은 나오지 않았다.단예는 일어나 앉아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망고주합과 지네는 내 뱃속에 들어가서 소화가 된모양이구나! 그렇게 되자 그 독이 섬전초의 독을 중화시켜버린 모양이다!]

갑자기 뱃속에서 숯불같이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라 그는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뜨거운 기운은 이리저리 요동치기 시작했다.입을 벌리고 토하려 했으나 그것조차 되지 않았다.그는 비명을 지르며 땅 위를 뒹굴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마에 땀방울마저 송글송글 맺혔고 온몸의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서히 고통이 멎었다. 이때 단예는 온몸이 날아갈듯 가볍고 상쾌한 것을 느끼고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사실 망고주합은 단예의 위에서 소화되었고 그 독기가 오히려 약효를 나타내어 섬전초의 독을 해소시켰을 분 아니라 그의 내력도 증진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단예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예는 몸에 불편함이 없어지자 급히 숲속에서 나왔다. 이때 그는 좌자목이 장검을 빼들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마도 좌자목은 목 소저를 뒤쫓는 모양이구나! 어서 따라가서 목 소저를 만나야겠다!)

그는 급히 좌자목을 미행했다. 좌자목은 아들의 생명이 걱정되어 뒤에 단예가 따라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단예는 좌자목에게 들킬까봐 조심조심 뒤따랐지만 산허리에 이르자 남해악신이 목완청에게 손을 쓸 것이 걱정되어 큰소리로 목완청을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8.누구의 자제이며 누구의 집인가?

단예는 목완청을 힘주어 끌어안았다.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목 소저,상처는 다 나았소? 그 악인이 그대를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소?]

목완청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볼멘 어조로 쏘아부쳤다.

[아직도 나보고 목 소저라고 부를 거예요?]

단예는 그녀의 어리광부리는 모습에 더욱 사랑스런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완 누이,이렇게 부르면 되겠어?]

단예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작고 예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목완청의 온몸이 움찔 경련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려 입술을 떼며 말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래요?]

[걱정 말아요.이곳에는 나와 당신뿐이니.]

단예는 다정하게 말하며 그녀의 부드럽고 연약한 상체를 껴안았다.목완청이 사방을 살펴보니 정말 아무도 없는지라 그가 하는 대로 그냥 몸을 맡기고 만다.

[낭군은 언제 왔죠?]

단예는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방금 전에 왔어. 내가 여기에 왔을 때는 그대 혼자 땅에 쓰러져 있더군.]

[정말 이상하네요.모두들 어디로 갔을까요?]

그녀는 단예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나직이 말했다.홀연 멀지 않은 바위 뒤에서 낭랑히 시를 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자루 검을 들고 천리를 가네.소인이 감히 한 말씀 올릴까 합니다.]

말이 긑나자 한 사람이 바위 뒤에서 걸어나왔다.바로 사대 호위중의 하나인 주단신이었다.단예는 기뻐 소리쳤다.

[주형!]

주단신은 허리를 굽혔다.

[왕자님,무사하시니 천만다행입니다.]

단예는 두 손을 모아 답례하며 물었다.

[주형은 어떻게 여기에 왔습니까? 정말 공교롭군요.]

주단신은 미소지었다.

[우리 네 호위는 왕자님을 모셔 오라는 명을 받고 나서게 된 것입니다. 결코 우연히 이곳에 온 것은 아닙니다. 왕자님은 정말 겁도 없으십니다. 홀몸으로 강호에 뛰어들다니요.우리는 마오덕의 집에까지 찾아갔다가 다시 무량산으로 달려갔었지요. 이 며칠 동안 우리들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단예는 웃었다.

[나는 정말 쓴 맛을 단단히 보았습니다.한데 아버님과 큰아버님께서는 크게 화가 나셨겠군요?]

[물론 좋아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떠날 즈음 두 분께서는 화가 많이 풀어진 뒤였습니다.그 뒤 선천후께서 사대 악인이 모여 대리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공자께서 그들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친히 달려오셨습니다.]

단예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고 숙부님도 나를 찾아나섰다고요? 그렇다면 너무 미안한걸. 그 분은 지금 어디에 있소?]

주단신은 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두 이곳에 있었습니다. 고 나으리께서는 한 명의 악한 여인을 뒤쫓아갔으며 나 혼자 왕자님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왕자님,이제 우리는 부(府)로 돌아가십시다. 두 분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습니까?]

단예는 얼굴이 붉어졌다.

[알고 보니....그대는 줄곧 이곳에.... 있었군요?]

그는 자기와 목완청의 다정한 언동을 주단신이 모두 보았다는 것을 알자 그만 부끄러웠던 것이다.주단신은 말했다.

[저는 조금 전 바위 뒤에 앉아서 왕창령의 시집을 읽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한 수의 오언절구였지요. 그 시는 비록 간단하지만,활달하고 호탕한 기개는 사람의 가슴을 확 트이게 하지 않습니까?]

말을 하고 나서 주단신은 품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바로 왕창령집이었다.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창령은 칠언칠구로 이름을 날렸으며 오언절구는 별로 읊지 않았지요.그러나 이 한 수만은 정말 좋은 시지요.또한 다른 한 수 송곽사창 역시 운치있는 작품이지요.]

이어 단예는 한 수의 시를 낭랑히 읊기 시작했다.

[회수의 파란물 문앞에 보이고,말은 주인이 타기를 기다리네. 명월은 좋은 인연을 맺어주는데,봄밤의 물결소리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시를 읊기를 기다려 주단신은 읍을 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조금 전 단예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자 주단신은 왕창령의 오언절구를 가지고 슬쩍 화제를 돌렸던 것이다. 그 시는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흔히 사용되는 시였으므로 단예는 이에 다른 시로 응답한 것이다. 단예가 인용한 시는 주인의 신하의 충성에 감사히 여기며 친구로 대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그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고맙다고 하면서 웃었던 것이다.

목완청은 학문을 거의 배우지 못해서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책벌레가 지금이 어떤 처지인지도 모르고 좋아서 시를 읊는구나.그런데 저 사람 역시 낭군님 못지 않게 시를 좋아하는 모양이다.품안에 책까지 갖고 다니는걸 보면.)

그녀는 주단신이 문무를 겸비한 호인이며 평소 시서를 탐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이때 단예가 목완청을 향해 말했다.

[목....목 소저,이 분은 주단신이라고 하며 나의 친구요.]

주단신은 목완청에게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주단신이 삼가 소저를 뵈옵니다.]

목완청은 그가 자기에게 공손히 대하자 기분이 몹시 좋았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주단신에게 맞절을 했다.

주단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소저는 용모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무척 활달하구나.왕자님이 집을 나간 이유가 바로 이 아가씨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입을 열었다.

[왕자님,이제 그만 궁으로 돌아가십시다.목 소저께서도 함께 가시죠.]

그는 단예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까봐 목완청도 함께 가자고 한 것이다.

단예가 망설이는데 목완청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죠 뭐.]

주단신은 얼른 덧붙였다.

[사대 악인의 무예는 고강하기 짝이 없습니다.고 나으리께서 섭이랑을 쫓아 보내기는 했지만,그것은 섭이랑이 무방비한 틈을 탔기에 이긴 것입니다.왕자님은 옥체를 보중하셔야 하니 어서 들어갑시다.]

단예는 남해악신의 흉악한 모습이 떠올라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가도록 하겠소.주 형께서는 고 숙부를 도와 사대 악인을 쫓으십시오.나는 목 소저와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주단신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렵게 왕자님을 찾았는데 집까지 호위를 해드려야지요.목 소저의 무공도 상당하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도중에 강적이라도 만나면 큰일이니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단예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나 주단신이 권하는 이상 돌아가는 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도중에 기회를 보아 도망치기로 작정하고 주단신을 따라 봉우리를 내려왔다.

(아버님과 백부님을 무슨 얼굴로 뵌담! 주형이 한눈을 팔 때 몰래 빠져나가야 겠구나.)

목완청은 단예에게 칠 일 동안 무얼 했는지 묻고 싶었으나,옆에 주단신이 있어 말을 걸지는 못하고 자꾸만 단예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주단신은 건량을 꺼내 두 사람이 먹도록 했다.

봉우리 아래에 이르니 큰 나무 아래 다섯 필의 말이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할수 있었다.그 말들은 주단신 등이 타고 온 준마였다.주단신은 세 필의 고삐를 풀어 타도록 한 후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세 사람은 객점에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주단신은 단예를 목욕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밤이 깊었다.목완청은 자신의 방에 앉은 채 촛불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낭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찾아왔으니까 분명 나를 깊이 사랑하는가 보다. 주단신이 그를 보고 왕자님이라고 불렀으니만큼 그의 아버지는 왕인가 보다. 낭군은 아버님을 무척 무서워하던데 그 분이 만약 나를 깔보거나 낭군과 결혼시키려 들지 않으면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흥!생각할 필요도 없어.독화살로 쏘아 죽이고 낭군과 함께 도망치는 거지 뭐.)

이런 흉칙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목완청은 눈을 들어 창문을 바라 보았다. 창 밖에서 단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야.]

목완청은 야심한 밤중에 그녀의 방으로 단예가 방문하자 가슴이 마구뛰고 마음이 야릇하게 흔들리는걸 느꼈다.그녀는 두 뺨을 빨갛게 물들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웬일이죠?]

단예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창문을 열어요.그대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목완청의 얼굴은 더욱 새빨개졌다.

[난.... 열지 않겠어요.]

그녀는 문득 단예가 무섭게 느껴졌다. 무공이 강한 그녀가 무공을 모르는 단예를 두려워하는 것은 왜일까? 목완청 역시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막연히 두렵고 가슴이 설레일 뿐이었다.

단예가 말했다.

[문을 열기 싫다면 내가 열고 들어가지.]

드르륵 문이 열리고 단예가 훌쩍 창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촛불이 크게 일렁거렸다.목완청도 촛불처럼 마음이 크게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이건 해야겠는데 입술이 얼어붙어 말도 못하고 겁먹은 눈빛으로 단예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불빛 아래 얼굴을 붉힌 채 몸을 움츠린 그녀의 자태는 가련하기도 하고 요염하기도 했다. 단예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 보고는 빙긋 웃었다.

[아름답군.]

목완청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단예가 팔을 뻗어 그녀의 둥그스름한 어깨를 만졌다.그녀는 온몸이 짜릿해짐을 느꼈다.단예는 얼굴을 가까이 밀착시켜 갔다. 목완청의 두 눈을 살며시 감기고 단예의 두툼한 입술이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을 지긋이 눌러왔다.

[음!]

목완청은 신음하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단예가 급히 그녀의 두뺨을 손으로 잡았으므로 그녀는 고스란히 입술을 빼앗기고 말았다.몇 번째의 입맞춤이었으니 이번의 입맞춤은 유난히 흥분되었고 길었으며 깊숙했다.그녀는 자신의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른다고 느꼈다.어느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 단예를 떠밀었다.단예의 손이 그녀의 봉긋한 젖가슴을 만졌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단예는 와락 몇 걸음 밀려간 후 얼굴을 붉혔다.공연히 쑥스러웠던 것이다.목완청은 아무 말도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예가 미안하고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자 가볍게 웃었다.

[미안해요.떠밀어서....나도 모르게 그랬으니 너무 탓하지 말아요.]

단예는 그녀가 부드럽게 나오자 그제서야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 갑시다.]

목완청은 어리둥절해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단예는 말했다.

[지금 주 형이 곤하게 잠들었소. 이 틈에 우리는 함께 도망쳐야 해요. 난 궁으로 돌아가기 싫거든.]

(낭군의 부친을 만나는 것은 나 역시 부담스럽다.낭군과 혼인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생각을 마치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좋아요.]

두 사람은 훌쩍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단예가 말했다.

[내가 말을 끌고 올게.]

목완청은 고개를 저으며 단예를 꼭 끌어안았다.

[어?]

단예가 놀랄 때 그녀가 발을 한 번 구르자 두 사람의 몸은 붕 떠올라 담장을 넘었다.목완청은 단예의 귀에 입을 대고 나직이 소곤거렸다.

[말발굽 소리가 나면 주 형이 깨어날 거예요.]

단예는 나직이 웃었다.

[역시 당신은 총명해.]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동쪽으로 달렸다.

목완청은 기쁜 듯 재잘거리며 달렸다.

[낭군과 내가 함께 강호를 주유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어울리는 한쌍이라고 누구나 부러워할 거예요.그런데 어디로 가죠?]

단예는 말했다.

[주 형이나 남해악신이 모르는 곳!]

목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우리는 서쪽으로 가기로 해요. 그리고 조용한 곳을 찾아 당분간 숨어 있다가,내 상처가 나은 후 명승고적을 유람하도록 해요.]

그들은 날이 밝을 무렵까지 달렸다.

목완청이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낮에 길을 가면 발각되기 십상이에요. 우리 쉴 곳을 찾아 밥을 먹고 저녁에 길을 가도록 해요.]

[그럽시다.]

목완청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밥을 먹고 나면 나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어야 해요.만약 거짓말을 하면 당신을 그냥 내버려두지는.....어?]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앞의 버드나무 휘어진 사이로 보이는 풀밭에서 세 필의 말이 풀을 뜯고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이 풀밭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바로 주단신이었다.

단예 역시 깜짝 놀라 목완청을 돌아보며 말했다.

[바보 같은 양반! 도망쳐도 소용없어요.]

목완청은 주단신을 바라보며 냉랭히 쏘아부쳤다.

[흥! 새벽부터 책을 읽는 꼴이라니! 뭐 장원 급제라도 할 셈인가 보죠?]

주단신은 부시시 몸을 일으키고 빙긋 웃었다.

[왕자님,제가 시를 한 수 읊을 테니 알아맞춰 보십시오!]

주단신은 소리 높여 낭랑히 시를 읊기 시작했다.

[고목명한조,

공산제야원,

환경구절혼,

기불탄간험,

심회국사은,

계포무이낙,

후영중일약,

인생감위기,

공명수복론.]

단예는 대답했다.

[그것은 위징의 `술회(述懷)'가 아니오?]

[왕자님은 정말 책을 많이 읽으셨군요.저는 그만 탄복했습니다.]

단예는 그 시를 인용한 이유가,야밤에 뒤따라 온 이유는 백부님과 부친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 감히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임을 시로써 전달하려는 데 있음을 알았다.그리고 아랫 구절은 이미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했으니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비유였다.

목완청이 말고삐를 풀었다.

[우리는 대리성으로 가던 길인데 길을 잘 찾아들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능청을 떨었다.

주단신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모로 가도 대리로만 가면 되지요.]

단예는 말 위에 올라 동쪽으로 나아갔다.주단신은 행여 단예가 화를 낼까 두려워 시사가부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만약 주단신이 주역을 알았더라면 더욱 단예를 즐겁게 했을 것이다. 단예는 흥이 나서 담화를 나누고 토론까지 하는데 목완청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큰 길이 나타났다.

정오가 되었을 때,세 사람은 길가의 주막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갑자기 사람 그림자가 번득이더니 키가 크고 대나무쪽처럼 빼빼마른 사람이 주막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쾅,하고 탁자를 치며 음식을 주문했다.

[두 근의 술과 쇠고기를 가져오너라! 어서 빨리 !]

그 음성은 뾰족하다가 급격히 굵어지곤 해서 몹시 듣기가 역겨웠다.목완청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즉시 국수 그릇에 손가락을 담그었다가 탁자 위에 물로 글을 썼다.

(사대 악인의 막내 운중학이 왔어요.)

주단신도 급히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

(뒷문으로 빠져나가십시오.제가 막아 보지요.)

목완청은 단예의 소매를 잡아 일으키고는 뒷문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운중학은 줄곧 큰 길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등뒤에서 인기척이 나자 고개를 돌렸다.그는 대뜸 목완청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

[거기 서라!]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목완청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주단신은 돌연 국수 그릇을 운중학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퍽!

운중학의 얼굴은 국수로 뒤범벅이 되었다. 운중학은 일순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국수 그릇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덮쳐갔다.

[웬 놈이냐?]

주단신은 재빨리 앞의 탁상을 일으켜 세웠다.

쾅!

운중학의 두 손은 탁자 깊숙이 박혔고, 얼굴은 탁자에 세차게 부딪치고 말았다.주단신은 번개처럼 몸을 날려 운중학의 옆구리를 발길로 찼다. 퍽 하며 발길에 채이자 운중학의 몸이 옆으로 활처럼 휘어졌다.운중학은 고개를 흔들어 얼굴에 붙은 국수를 털어내고는 우악,하고 기합을 내지르며 두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콰지직!

박달나무로 만든 탁자가 대뜸 열십자로 쪼개져 나갔다. 운중학은 몸을 홱 틀어 주단신을 향해 자세를 가다듬었다. 주단신은 운중학이 맨손으로 견고한 탁자를 흡사 두부모처럼 부셔버리는 것을 보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주단신은 크게 부르짖었다.

[저만리! 고득성! 어서 운중학을 포위하여 사로잡아라!]

운중학은 크게 놀랐다.

(야단났다! 알고 보니 사대 호위가 매복하고 있었구나! 나 혼자서는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겠다!)

생각을 마치자 일학충천이라는 신법을 써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우지끈, 소리와 함께 천정이 부서지면서 그는 몸으로 천정을 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주단신은 크게 외쳤다.

[앗! 저 놈이 도망친다! 빨리 추격하라! 이번에는 기필코 사로잡아야한다.]

주단신은 급히 문밖으로 나가 단예의 뒤를 쫓아갔다.

주단신은 십여 장을 달려서야 단예와 목완청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때 목완청은 주단신을 보고 사연을 물으려고 하다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그가 와요!]

아닌게 아니라 주단신의 뒤로 운중학이 허공을 표홀히 날아 쫓아오는 것이었다.주단신은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의 경신술은 정말 무섭구나!]

세 사람은 말을 채찍질 해 질풍같이 달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운중학은 뒤쳐져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세 사람의 말이 입에 거품을 내며 속도가 둔해지기 시작했다.운중학은 다시 가깝게 다가왔다. 거리는 점차 가까워졌다.단예가 탄 말이 갑자기 앞발을 꿇으며 쓰러졌다.목완청은 급히 단예를 안고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주단신은 길에서 내려 운중학을 기다리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려 했다. 운중학이 손처럼 생긴 강조를 뽑아들고 주단신에게 덮쳐왔다. 주단신은 두 손에 팔관필을 뽑아들고 대항했다.병기가 거세게 부닥뜨리자 쨍,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똥이 번쩍였다. 주단신은 자신이 타고 온 말 엉덩이를 팔관필로 찔렀다.말은 크게 부르짖으며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왕자님 그 말을 타고 도망치십시오!]

주단신은 크게 소리치며 다시 운중학과 어울려 불꽃튀는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단예는 주단신의 말에 올라 있는 힘을 다해 말을 채찍질했다. 단예는 놀라 중얼거렸다.

[주 형이 못 당하는 걸 보니.운중학은 몹시 무공이 높구나!]

목완청이 냉소했다.

[흥! 내가 부상당하지 않았다면 주단신과 힘을 합쳐 충분히 물리쳤을거예요.]

[음,그건 당신 말이 옳아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단신은 날아오는 운중학을 향해 신속히 팔관필을 내리찍었다. 그러나 운중학은 비스듬히 주단신을 피하며 빙글 돌아 곧장 단예와 목완청 두사람을 뒤쫓아가는 것이 아닌가? 목완청은 연신 채찍질을 했다. 말은 흰 거품을 토해내고 있었다.단예는 말했다.

[만약 우리들이 탄 말이 당신의 흑매괴였다면 운중학이 뒤쫓아 오지 못 할 텐데......]

목완청은 말했다.

[그거야 말할 나위가 있나요?]

말이 막 한 언덕을 돌아서자 앞은 쭉 뻗어 있는 큰 길이었다. 피할래야 피할데가 없었다. 그런데 서쪽 파란 버드나무 숲 가운데 조그만 호수가 있고 호수곁에 노란 담장이 보였다.단예는 이를 발견하고 좋아했다.

[우리 저쪽으로 갑시다.]

목완청이 말했다.

[안돼요.그곳은 사지예요.빠져나갈 길이 없는걸요.]

단예는 말했다.

[그대는 내 말만 따르면 돼요.]

그는 말고삐를 잡고 파아란 숲이 있는 쪽으로 말을 달렸다.가까이 다가가자 목완청은 누런 담장이 원래는 한 채의 도관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그현관에는 옥허관이라는 석 자가 쓰여 있었다.그녀는 생각했다.

(이 책벌레가 도망칠 길이 없는 이곳으로 들이닥치다니 어처구니 없구나. 내가 으슥한 곳에 숨어 있다가 그 대나무쪽 같은 사내에게 한 대의 화살을 쏘아야겠다.)

순식간에 그들이 탄 말은 옥허관 앞에 이르게 되었다. 갑자기 등뒤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바로 운중학의 음성이었다.그들과 운중학의 간격은 불과 수장이었다.

이때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머니,어머니,빨리 나와 보세요, 어머니!]

목완청은 화가 나서 호통을 내질렀다.

[책벌레 같으니라구!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해요!]

운중학은 웃으며 말했다.

[이미 늦었다.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부른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는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목완청은 왼손으로 단예의 뒷등을 와락 밀어 제치며 소리쳤다.

[옥허관 안으로 도망쳐요!]

그와 동시에 목완청은 오른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한 대의 화살을 뒤로 쏜 것이다.운중학은 머리를 움츠리며 피했다.그 순간 목완청이 말안장에

서 몸을 날리는 것을 보고 왼쪽의 강조를 벼락 같이 디밀어 그녀의 어깻죽지를 잡으려고 했다.목완청은 급히 몸을 움츠리며 말 아래로 기어들어갔다.곧이어 석 대의 화살을 더 쏘았다.운중학은 동쪽으로 피하고, 서쪽으로 몸을 흔들거려 피하는가 하면,뒤로 몸을 날려 피하기도 했다.

바로 그때 도관 안에서 한 사람의 여도사가 나왔다. 이때 단예는 막 땅에 엎어지며 어이쿠, 하는 신음을 내었다. 여도사는 재빨리 팔을 내밀어 단예를 부축하고 웃으며 말했다.

[또 무슨 망나니 짓을 하느냐? 크게 소리를 치다니!]

목완청이 보니 그 여도사는 나이가 단예보다 약간 많아 보였지만 용모가 빼어날 뿐 아니라 단예에 대하여 그토록 다정하게 대하고, 단예 또한 오른팔을 뻗어 여도사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에 기쁜 빛을 띠우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울컥 질투심이 끓어올라 강적이 뒤에 있는 것도 잊어 버리고 몸을 날려 달려갔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 여도사의 안면을 후려치며 호통을 쳤다.

[왜 껴안는 거예요! 빨리 손을 놔요!]

단예는 급히 말했다.

[완 누이,무례하게 굴면 못 써요.]

목완청은 단예가 여도사를 변호하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손에서 삼푼 쯤 내공을 쏟아내었다. 그러자 여도사는 급히 손에 든 불진을 휘둘렀다.불진의 끝이 허공에서 작은 원을 그렸다.그 순간 목완청의 팔목을 휘감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목완청은 불진에 끌려서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 달려가서야 겨우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다급하고 화가 난 그녀는 욕을 했다.

[당신은 출가인인데도 추한 꼴을 보이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요?]

운중학은 처음 여도사가 뛰어나왔을 때 자색이 뛰어난 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다.

[오늘 그야말로 운수대통이로 구나. 한 대의 화살로 두마리 기러기를 쏘아 잡는 격이군! 두 여자를 모두 사로잡아 가야지.]

그런데 여도사의 불진이 대뜸 목완청의 날카로운 일장을 가볍게 해소시키는 것을 보고 여도사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았다.운중학은 말안장 위에 올라타서 조용히 사태를 관망했다.

[두 여자가 다 아름다우니 아무거나 손에 넣으면 된다.]

이때 여도사가 노해 소리쳤다.

[이봐 아가씨,무슨 터무니 없는 소릴 지껄여.그대는.....그대는 이 단예와 어떻게 되는 사이야?]

목완청이 말했다.

[나는 이 분의 아내예요.빨리 놔 주세요.]

그 여도사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갑자기 단예의 귀를 잡아 당기며 웃었다.

[그게 정말이냐?]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라고 할 수도 있고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여도사는 그의 뺨에 힘주어 한 번 꼬집고 웃었다.

[너는 아버지의 무공은 반푼도 못 배우지 못하면서 하는 짓은 꼭 빼닮았구나. 네 다리를 분질러 놓지 않는지 두고보려므나.]

그녀는 목완청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음.이 소저가 아름답긴 정말 아름답군.그러나 너무 거칠어서 잘 가르쳐야 하겠다.]

목완청은 노해 부르짖었다.

[내가 거칠든 거칠지 않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에요.빨리 그를 놓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꼐 활을 쏘겠어요.]

그 여도사는 웃으며 말했다.

[어디 쏴 보시지.]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완 누이, 안 돼요. 이 분이 누구인지 아시오?]

그러면서 그는 그녀의 목을 껴안았다.목완청은 미치도록 화가 났다. 손을 쳐들자마자 휙휙,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화살을 여도사에세 쐈다. 여도사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조그만 화살을 보자 안색이 크게 변했다. 불진을 휘둘러 두 대의 화살을 막아 버리고는 날카롭게 외쳤다.

[수라도 진홍면은 너와 어떻게 되는 사이냐?]

목완청은 말했다.

[수라도 진홍면이 누구에요? 나는 들어본 적도 없으니 남편을 놔 주세요.]

그녀는 이때 단예가 여도사를 안고 있는 것을 본 터였다.

단예는 여도사가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로 화가 난 것을 보자 여도사를 달랬다.

[어머니,화를 내지 마세요.]

목완청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녀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소리쳤다.

[뭐라고요! 그녀가......그녀가 당신의 어머니라구요?]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나는 어머니라고 소리치지 않았소,그 소리를 못 들었소?]

그리고 여도사에게 말했다.

[어머니,이 소저는 목완청이라고 해요. 제가 며칠간 위험한 일에 처하여 악인들의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을 때 다행히 목 소저가 이 아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어요.]

바로 이때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옥허산인,조심하십시오.그 자는 사대악인 중의 하나입니다.]

곧이어 한 사람이 나는 듯 달려왔다.바로 주단신이었다. 그는 여도사의 안색이 기이한 것을 보고 운중학에게 어떤 피해를 당한줄 알고 두려운 음성으로 말했다.

[혹시......혹시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운중학은 낭랑히 웃으며 말했다.

[지금 손을 써도 늦지는 않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말안장에서 몸을 일으켰다.마치 말등에 한 자루의 깃대를 꽂아 놓은 것 같았다.갑자기 그는 앞으로 두 손을 휘둘렀다. 오른발을 말안장에 건 채 두 자루의 강조를 여도사를 향해 후려치자 여도사는 비스듬히 말 왼편으로 다가들면서 불진으로 휘감았던 두 대의 작은 화살을 쏘았다.운중학은 재빨리 이를 피했다. 여도사는 앞으로 달려나오면서 불진을 휘둘러 그의 왼쪽 다리를 후려치려고 했다.운중학은 이를 피하지 않고 왼손의 강조로 그녀의 등을 나꿔채려고 했다. 여도사는 몸을 돌려 피하고 불진을 들어 반격을 했다.운중학은 한 걸음 나서며 왼발로 말 머리를 딛고 섰다. 높은 곳에 서서 아래에 있는 여도사를 향해 강조를 들어 옆으로 후려쳤다.

주단신은 호통을 쳤다.

[내려와!]

그는 몸을 날려 말 엉덩이 쪽으로 올라가며 왼쪽의 팔관필로 운중학의 왼쪽 허리를 찔렀다.운중학은 왼손의 강조로 이를 막았다. 긴 것으로 짧은 것을 공격한 것이었다.옥허산인은 불진을 다시 휘둘러 그의 아래쪽을 후려쳤다.운중학은 두 손의 강조를 마구 휘둘렀다. 일 대 이의 싸움이었지만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목완청은 그가 말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가슴팍과 배를 보호할 필요가 없어 이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휙하니 한 대의 화살로 말이 왼쪽 눈을 쐈다.그러자 말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옥허산인은 불진을 휘둘러 운중학의 오른손 강조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주단신은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어 잇따라 삼 초를 공격했다.옥허산인과 운중학은 동시에 힘을 주어서 자기의 무기를 잡아당겼다.운중학의 내력이 강한편이었지만, 힘의 반을 나누어서 주단신의 판관필을 막아야 했고 또한 목완청의 독전이 날아드는 것을 방비해야 했다. 갑자기 불진과 강조가 동시에 그의 손에서 날아올랐다. 그는 오늘 자기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욕을 했다.

[대리국의 녀석들! 항상 인원수에 의지해서 이기는구나!]

그는 두 발로 말안장을 찼다.몸이 화살처럼 튕겨 나갔다.왼손의 강조를 한 그루 커다란 버드나무 가지에 걸고 몸을 훌쩍 뒤집으며 재차 용을 쓰자 그의 몸은 이미 수 장 밖에 가 있었다.목완청이 한 대의 화살을 쐈으나 탁,하는 소리와 함께 버드나무 가지에 가서 맞았다. 운중학은 어느덧 자취를 감춘 이후였다.이때서야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불진과 강조가 동시에 땅바닥에 떨어졌다. 주단신은 허리를 굽혀 옥허산인에게 공손히 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주단신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옥허산인은 빙그레 웃었다.

[십여 년간 무기를 쓰지 않고 무공을 연마하지 않았더니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군요.주 형제,그 사람은 대체 누구요?]

주단신은 말했다.

[소문을 듣건대 사대 악인이 모두 다 대리로 왔답니다.그 사람은 바로 사대 악인중 막내입니다.그런데도 무공이 이토록 놀라우니 나머지 세 사람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아무쪼록.....아무쪼록 왕궁으로 돌아가시어 잠시 피하셨다가 사대 악인의 일을 처리한 후에 다시 거처를 정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옥허산인은 안색이 약간 변하며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또다시 왕궁으로 돌아가서 뭘 해요. 사대 악인이 일제히 달려들게 되었을 때 내가 그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죽으면 그뿐이지 뭐.]

주단신은 감히 더 할말을 못하고 단예에게 연신 눈짓을 했다.그에게 말을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단예는 불진을 집어 어머니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운중학의 강조는 조그만 연못에 집어던져 버리고 말했다.

[어머니,그 네 사람의 악인들은 정말 흉악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면 제가 어머님을 모시고 백부가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옥허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단예는 말했다.

[좋아요. 어머님이 가시지 않는다면 저도 이곳에서 어머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는 주단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 형,수고스럽겠지만 백부님,아버님에게 전갈을 전해 주시오. 우리 모자 두 사람이 이곳에서 힘을 합쳐 사대 악인에 대항하겠다고요.]

옥허산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정말 창피한 줄 모르는구나.너에게 무슨 재간이 있다고 나와 협력하여 사대 악인을 막는다는 것이냐?]

그녀는 아들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조금 전 눈물이 글썽하던 때와는 판이한 얼굴 이었다.그러나 조금 전 눈가에 머물렀던 눈물이 끝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몸을 돌리고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았다.목완청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햇다.

(낭군의 모친이 어찌해서 출가인이 되었을까?운중학이 지금은 떠나갔지만 반드시 나머지 세 악인과 손을 합쳐 다시 공격해올 것이다.그러니 그의 어머니가 어찌 혼자서 당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도 그녀는 어찌해서 집으로 돌아가려하지 않고 고집을 세우고 있는 겄일까? 아, 그렇다.남자들은 박정하다고 하지 않던가.낭군의 부친에게 아마도 총애하는 첩이 있는 모양이다.그래서 그의 어머님이 화가 나서 출가하신 게로구나.)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크게 일어나 입을 열었다.

[옥허산인,저도 함께 적을 막지요.]

옥허산인은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너는 바른 대로 말해라.도대체 수라도 진홍면과 어떤 사이냐?]

목완청 또한 화가 났다.

[이미 말씀 드렸지 않았요? 저는 한 번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진홍면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짐승인지 저는 전혀 모른다고요.]

옥허산인은 그녀가 짐승인지도 모른다는 말에 그만 마음이 놓이는 듯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만약 수라도의 후예나 친인이라면 결코 짐승이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안색이 훨씬 누그러졌다.

[소저,너무 탁하지 마시오. 나는 조금 전 그대가 화살을 쏘는 수법이 내가 알고 있던 한 여자와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소.왜 그런지 그대의 용모도 그녀와 너무 닮아서 의심이 일어났던게요.목 소저, 영존과 자당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아마도 무공이 훌륭한 것을 보면 명문가의 따님이 틀림없는 것 같군요.]

목완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어머님이 없었고 사부님이 저를 키워 주셨어요.그리고 아버님과 어머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옥허산인은 말했다.

[그렇다면 사부님은 뉘신지?]

목완청은 말했다.

[저의 사부님은 유곡객이라 합니다.]

[유곡객,유곡객.]

그녀는 주단신에게 시선을 던졌다.주단신의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주단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주단신 역시 남쪽 땅에만 처박혀 살았기 때문에 견문이 넓지 못합니다.무림의 선배님이나 영웅호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유곡객 선배님이라면 아마도 조용히 산천에 몸을 숨기고 사는 고아한 양반인거 같습니다.]

이 말은 자기가 한 번도 유곡객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었다.

갑자기 버드나무 숲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오며 멀리서 누군가 소리쳤다.

[네째,왕자님은 무사하신가?]

주단신이 외쳤다.

[왕자님은 이곳에 편안히 계십니다.]

삽시간에 세 필의 말이 옥허관 앞으로 와 멈추었다.저만리,고득성,부사귀 세 사람이었다.그들은 말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오더니 땅바닥에 엎드려서 옥허산인에게 절을 했다.

목완청은 어릴 적부터 산속에서 자라난 몸이라 인사하는 것이 너무 번거롭다 생각했었고 혐오감마저 느꼈다.

(이 사람들은 무공이 그토록 고강하면서 어찌해서 사람만 보면 큰절을 하지?)

옥허산인은 세 사람의 행색이 낭패한 것을 알아보았다.부사귀의 얼굴에는 무기에 상처를 입었는지 얼굴 반쪽을 붕대로 감고 있었다. 고득성의 몸은 피로 얼룩져 있었꼬,저만리의 기다란 쇠낚시대는 반쪽밖에 있지 않았다.그녀는 재빨리 물었다.

[아니,적이 매우 강한가 보죠? 사귀의 상처는 어때요?]

부사귀는 그녀가 질문을 던져오자 북받치는 화를 누를 수 없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이 사귀가 무예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정말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왕비님께 근심까지 끼쳐드리니 죄송할 뿐입니다.]

옥허상인은 나직이 말했다.

[아직도 나를 왕비라고 부르다니요? 좀 기억력이 좋았으면 좋겠네요.]

부사귀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네.왕비께서 용서하십시오.]

그는 여전히 왕비라고 불렀다.습관이 되어 좀처럼 고칠 수가 없었떤 것이다.

주단신이 입을 열었다.

[고 나으리는 어떻게 되었소?]

저만리는 말했다.

[고 나으리께서도 내상을 약간 입으셔서 천천히 말을 몰고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일세.]

옥허산인은 나직이 아,하더니 입을 열었다.

[고 나으리도 상처를 입었소? 크게 다치지는 않았나요?]

저만리는 대답했다.

[고 나으리와 남해악신이 장법으로 마주 싸우고 있을 때였소.한참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데 섭이랑이 돌연 뒤에서 암습을 가했습니다.고 나으리는 미처 방비를 하지 못해 등줄기를 한대 얻어맞고 말았죠.]

옥허산인은 단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고 숙부님을 보러 가자.]

모자 두 사람은 함께 버드나무 숲을 걸어 나갔다.저만리도 말을 버드나무 가지에 매어 두고는 그 뒤를 따랐다.

멀리 한 필의 말이 천천히 다가왔다. 말 등에는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옥허산인 일행은 재빨리 다가서며 물었다.

[고 숙부님,괜찮으십니까?]

고승태는 말했다.

[괜찮다.]

그는 고개를 쳐들어 옥허산인을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려고 했다.옥허산인은 재빨리 말했다.

[고 나으리,몸에 상처도 있고 하니 절을 할 건 없어요.]

그러나 고승태는 이미 말에서 내려 허리를 굽혔다.

[고승태가 왕비에게 삼가 안녕하신가를 묻사옵니다.]

옥허산인은 만류하며 말했다.

[예야,빨리 고 숙부님을 부축해 드려라.]

목완청은 가슴 가득히 의문을 느꼈다.

(저 고 씨의 무공은 확실히 뛰어났었다. 한 자루의 철적으로 수 초만에 섭이랑을 놀라 물러서게 만들지 않았던가?그런데 어찌 하여 낭군의 어머니에 대해 저토록 공손할까? 또한 왕비라고 부르다니......낭군은 정말로 왕자인가? 저 책벌레는 행동거지가 아리송할 뿐이지 어디 왕자 같은데가 있었나? )

옥허산인은 말했다.

[고 나으리는 빨리 대리로 돌아가서 조섭을 하도록 하십시오.]

고승태는 말했다.

[네. 그런데 사대 악인이 함께 대리에 나타나서 정세가 지극히 위험합니다.왕비께서도 잠시 왕궁으로 돌아가십시다.]

옥허산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한평생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오.]

고승태는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옥허관 밖에서 지키도록 하지요.]

그는 부사귀에게 말했다.

[사귀,자네는 속히 돌아가 전갈을 해주게.]

부사귀는 대답했다.

[네.]

그는 재빨리 말이 매여 있는 옥허관 바깥 쪽으로 달려갔다.

옥허산인은 불렀다.

[잠깐!]

옥허산인은 고개를 숙인 채 깊이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부사귀는 걸음을 멈추었다.

목완청은 옥허산인의 안색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에 많은 의문과 어려움이 있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운햇살이 그녀 뺨 위에 떨어지고 있었는데 옥허산인의 두 뺨은 그야말로 옥처럼 화사했다. 이미 중년이었지만 자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낭군의 어머니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구나. 저 모양은 그림속의 관음보살과 같다.)

잠시 후 옥허산인은 고개를 쳐들었다.

[좋아요.우리 함께 대리로 돌아가죠.나 한 사람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게 할 수는 없어요.]

단예는 매우 기뻐 펄쩍펄쩍 뛰며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소리쳤다.

[그래야 저의 훌륭한 어머님이죠!]

부사귀가 말했다.

[속하는 먼저 가서 전갈을 하겠습니다.]

그는 말고삐를 풀고 말 위에 올라타자마자 북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저만리는 말을 끌고 와 옥허산인,단예,목완청 세 사람이 앉도록 했다.

일행은 대리성을 향해 떠났다. 옥허산인,목완청,단예,고승태 네 사람은 말을 탔고 저만리,고득성,주단신 등은 걸어서 뒤를 따랐다.수 마장을 나가자 맞은편에서 한 소대의 기마병이 달려왔다. 저만리는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기마대의 대장에게 무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대장은 한 소리 호령을 내렸고,뭇 기마병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렸다.단예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너무 예를 차릴 것 없소.]

그 대장은 다시 명령을 내려 세 필의 말을 끌어내도록 했다. 그 세필의 말에 저만리 등이 타도록 했다.부사귀는 기마병을 데리고 앞장을 섰다. 말발굽도 요란하게 그들은 큰길을 따라 달려왔다.

목완청은 이와 같은 기세를 보고 단예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그러자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가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서생으로 알았다.그래서 시집가겠다고 했지.그런데 저 기세를 보니 아무래도 황친이나 조정의 대관인 것 같다. 그러므로 산속에서 자란 나를 우습게 여길지도 모른다.사부님도 남자는 부귀를 누릴수록 양심이 없다고 했으며,처를 맞을 때도 문무를 따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나를 맞아들이면 모르되 만약 약속을 저버리고 핑계를 대면서 결혼을 피한다면 검으로 찔러 죽여야지. 나는 그가 얼마나 큰 내력을 가졌는지 상관하지 않겠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녀는 마음속으로 꽁하니 접어둘 수가 없었다. 말을 달려 단예 곁으로 가서 물었다.

[이봐요.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된 사람이죠? 우리가 산봉우리 위에서 한 말은 아직도 효력이 있나요 없나요?]

단예는 앞뒤에 사람들이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혼인대사에 대하여 묻자 그만 겸연쩍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리성 안으로 들어간 후 우리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목완청은 말했다.

[만약 그대가 나를......저버린다면......나는......나는......]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단예는 그녀가 눈에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 더욱 예뻐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욱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일어나서 말했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오? 안심하시오. 우리 어머니도 그대를 매우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

목완청은 울던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대의 어머니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내가 상관 할 것 같아요?]

그 말은 단예가 그녀를 좋아하면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단예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신시쯤 되었을 때 그들은 아직도 대리성까지 이삼십 리 길을 남겨 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쪽에서 크게 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수천을 헤어리는 기마병들이 대오를 지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두 폭의 누런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한쪽의 깃발에는 진남이라는 붉은 글자가 쓰여 있고,다른 한 깃발에는 보국이라는 검을 글자가 쓰여 있었다.단예는 소리쳤다.

[어머니, 아버지가 친히 마중을 나오셨어요.]

옥허산인은 코웃음치며 말을 멈추어 세웠다.고승태 등도 일제히 말에서 내려 길 옆으로 물러섰다.단예는 말을 제쳐 앞으로 나갔다. 목완청은 잠시 주저하다가 역시 말을 몰아 뒤를 따랐다. 삽시간에 쌍방은 가까워졌다. 단예는 큰소리로 외쳤다.

[아버님, 어머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두 명의 기사가 옆으로 비켜섰다.그러자 자포에 높은 백마를 탄 사람이 말을 마주 몰아나오며 부르짖었다.

[예야, 너 정말 망나니 짓이 심하구나. 너 때문에 고 숙부께서 중상을 입지 않았느냐. 너 이 녀석, 다리를 분질러 놓지 않는지 어디 두고보자.]

목완청은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흥,낭군의 두 다리를 분질러 놓기만 해봐라.설사 당신이 그의 아버지라도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자포를 입은 사람은 네모난 얼굴에 위맹스럽게 생긴 중년인이었다.짙은 눈썹에 서글서글한 눈망울이 위엄이 있어 보였으며,왕의 기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반은 노기를 띠었고,반은 기뻐하는 표정이었다.목완청은 그와 같은 눈치를 채고 속으로 생각했다.

(낭군의 부모는 모두 잘 생겼구나! 그러니 낭군이 저처럼 멋지지 않을 수 있겠어?)

단예는 말을 몰라 앞으로 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그 동안 안녕하셨씁니까.]

자포인은 짐짓 노한 척 말했다.

[안녕하기는 뭐가 안녕해.하마터면 너 때문에 화가 나서 죽을 뻔했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제자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머님을 모시고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그야말로 저는 큰 공로를 세운 셈이죠.아버님은 공을 세운 점을 참작하셔서 제 죄를 용서하시고 화를 내지 마십시오.]

자포인은 코웃음을 쳤다.

[설사 내가 너를 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의 백부님께서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백마를 몰아 나는 듯 옥허산인 쪽으로 달려갔다.

기마병들은 몸에 갑주를 걸치고 있었고 무기는 번쩍번쩍 빛이 나도록 잘 닦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앞쪽 스무 명은 양쪽 손에 패를 들고 있었다.한 쪽의 붉은 칠을 한 패에는 대리진남왕단이라는 여섯 자를 써 놓았고, 다른 한 쪽의 호랑이 머리를 한 패 위에는 보국대장군단이라는 여섯 자가 쓰여 있었다.목완청은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이 깊은 줄 모르는 성격이었으나 이와 같은 위세에 그만 숙연해졌다.그녀는 살짝 단예에게 물어보았다.

[이봐요.진남왕 보국대장군은 바로 그대의 아버님인가요?]

단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대의 시아버님이오.]

목완청은 그만 멍해졌다.마음속으로 달콤하기도 하고 새콤하기도 하며, 은근히 두렵기도 했다.

이때 진남왕은 옥허산인 앞에서 말을 세웠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단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버님께서 친히 마중을 나오셨어요.]

옥허산인은 말했다.

[너는 가서 백부님께 여쭈어라.내가 백모님 곁에서 며칠 머물겟다고. 그리고 적을 물리친 후에 나는 다시 옥허관으로 돌아가겠다.]

진남왕은 웃으며 말했다.

[부인......아직도 화가 가라안지 않았소? 우리 집으로 돌아간 후 내 천천히 설명을 드리리다.]

옥허산인은 무거운 얼굴을 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아요.나는 황궁으로 돌아가겠어요.]

단예는 말했다.

[그거 잘 되었습니다.우리는 먼저 황궁으로 들어가 백부님과 백모님에게 인사를 한 후 다시 만나기로 하죠. 어머니, 이번에 이 아들이 바깥 세상으로 놀러 나간 것을 아시고 백부님께서는 반드시 화를 내고 계실 거예요.그리고 아버님은 분명 저를 위해 조언을 해주지 않을 것이니 제 생각에는 어머님께서 이 아들을 도와 몇 마디 좋은 말씀을 해주세요.]

옥허산인은 말했다.

[너는 크면 클수록 버릇없이 굴기 때문에 백부님에게 한 차례 실컷 맞아야 돼.]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맞는 것은 저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머님일 거예요.그러니 저를 때리지 말라고 권하시는 게 좋을걸요.]

옥허산인은 그 말에 흥,하고 웃었다.

[심하게 때릴수록 나는 더 기뻐할지언정 너를 불쌍히 여기지는 않겠다.]

진남왕과 옥허산인의 관계는 심히 어색한 상태였다.그런데 단예가 나서자 옥허산인은 활짝 웃게 되었고 서먹서먹하던 분위기가 가셔지게 되었다. 단예는 말했다.

[아버님, 아버님 타신 말이 훌륭한데 어째서 어머님께서 타도록 양보해 주시지 않으세요?]

옥허산인은 말했다.

[난 타지 않겠다.]

그녀는 앞으로 말을 몰았다. 단예는 말을 몰아 뒤를 따라가 모친이 탄 말의 고삐를 붙잡았다.진남왕은 이미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갔다. 단예는 어머님을 안아 부친이 타고 있던 백마 위에다 태우고 웃었다.

[어머니, 경국지색의 미인이신 어머니가 이 백마를 타니까 더욱 예뻐 보이는군요.그야말로 관음보살이 하강하신 것 같아요.]

옥허산인은 웃으며 말했다.

[너의 그 목 소저야말로 미녀던데 뭘.너는 이 어머니를 비웃는 거냐?]

진남왕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목완청을 바라보았다.단예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설명을 했다.

[그녀는......그녀는 목 소저입니다.이 아들이 최근 사귄.....사귄 친구랍니다.]

진남왕은 아들의 안색을 보고 이미 그 뜻을 알았다.그는 목완청의 뛰어난 용모를 보고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상당히 예쁜걸.)

이때 그는 목완청이 다가와 인사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보니 예를 모르는 시골처녀인 것 같구나.)

그러나 그는 고승태의 상처가 염려되어 재빨리 걸음으로 고승태의 곁으로 다가갔다.

[태 아우,상처는 좀 어떤가?]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자 고승태는 대답했다.

[독맥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습니다만 대단치 않습니다.아니,나 때문에 공력을 소모할 것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남왕은 오른손 식지로 가볍게 고승태의 뒷덜미를 세번 찔렀다.그리고는 오른손을 그의 허리께로 가져갔다.곧이어 진남왕의 머리 위에서 허연 김이 솟아올랐다.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흘러서야 진남왕은 오른손을 떼어냈다. 고승태는 감격에 겨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전하,대적을 앞에 둔 이 마당에 어이하여 저를 위해 내력을 소모하십니까?]

진남왕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내상이 가볍지 않으니 한시 바삐 치료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일세.나중에 형님을 만나게 된다면 형님은 내가 손을 쓸 기회도 없이 그 자신이 손을 쓸 것이네.]

목완청은 고승태의 안색이 무섭도록 창백했으나 금방 두 뺨이 붉어진 것을 보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낭군의 아버님 내공은 심오하기 이를 데 없군.그런데 낭군은 어째서 무공을 모르는 것일까?)

이때 저만리는 한 필의 말을 끌고 와서 진남왕에게 드렸다.진남왕은 그 말등에 올라탔다. 그는 고승태와 나란히 말을 몰았다.그는 나직이 적의 형세를 물었다.단예는 어머님과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앞서 가고 있었다. 이들 모두 철갑기사들의 엄호를 받고 대리성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되자 쓸쓸해진 것은 목완청 한 사람뿐이었다.

 

황혼 무렵,일행은 대리성 남문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진남보국이란 두 깃발이 있는 곳에서 백성들은 크세 환호성을 질렀다.

[진남왕 천세! 대장군 천세!]

하고 외쳤으며 진남왕은 이에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목완청은 대리성 안에 사람이 꽤 많이 살고 있고,거리에는 청석을 깔아 놓았으며,시장이 매우 번화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 거리를 지나자 눈앞에 탁 트인 길이 나타났다.큰 길에서 노란 기와를 한 궁궐이 서 있었다.석양빛을 받은 유리는 금빛 찬란해서 보는 사람의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일행은 하나의 거대한 궁전 앞에 이르러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목완청은 그 궁전의 기둥에 네 개의 커다란 글자가 쓰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도광자(聖道廣慈)]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곳의 대리국의 황궁이로구나.낭군의 백부님이 바로 황궁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고관인 것이 분명하다.아마도 무슨 왕 전하나 대장군쯤 되겠지.어쩌면 황제일지도 몰라.)

일행은 걸어서 그곳을 지났다.목완청은 북문의 편액에 [성자궁]이라는 금빛 글자가 씌여 있는 건물을 볼 수 있었다.이때 태감이 재빠른 걸음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전하께 아룁니다. 황상께서는 황후마마와 함께 왕궁으로 가셔서 기다리겠다고 하십니다.전하와 왕비께서는 진남왕궁으로 가시는 것이 타당한가 하옵니다.]

진남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묘하게 되었는데요.]

옥허산인은 그를 흘겨보며 뾰롱통하니 말했다.

[묘하긴 뭐가 묘해.나는 황궁에서 마마를 기다리겠다.]

태감은 말했다.

[마마께서는 분부하셨습니다.왕비께서는 즉시 가셔서 마마를 뵈옵시라는 분부이십니다. 마마께서는 요긴한 일로 왕비님과 상담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옥허산인이 나직이 말했다.

[요긴한 일은 무슨 요긴한 일이야.다 계책이지.]

단예는 태감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어머님이 진남왕부로 가시지 않을 것을 내다보시고,먼저 진남왕부로 가셔서 어머님이 그리로 가시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셨구나.부모님을 화해시키려고 계책을 내셨으니 정말 고마우신 일이다.)

일행은 다시 말 위에 올라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약 이 마장쯤 가자 한 채의 커다란 저택 앞에 이르렀다. 저택의 문앞에는 한폭의 커다란 깃발이 세워져 있었는데, 깃발에는 진남과 보국이라는 두 글자가 각기 수놓아져 있었다.문의 편액에는 진남왕궁이라는 네 글자가 씌여 있었고,문앞에는 친위병들이 줄지어 서 있다가 허리를 굽혀 왕과 왕비를 맞아들였다.

진남왕은 진남왕부의 대문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옥허산인은 첫번째 돌계단을 딛고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흘렸다.

단예는 억지로 밀다시피 해서 어머니를 대문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그는 부친에게 말했다.

[아버님, 이번에 이 아들이 어머님을 모시고 돌아왔으니 큰 공을 세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아버님께서는 어떤 상을 내리실 작정이신가요?]

진남왕은 속으로 기뻐했다.

[너희 어머님에게 상을 달라고 해라. 너의 어머님이 무슨 상이건 말만 하면 내가 그대로 상을 내리마.]

옥허산인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상은커녕 곤장을 맞아야 한다.]

단예는 무섭다는 듯 혀를 쏙 내밀었다.

고승태 등은 대청에 이르러 양편으로 나누어 늘어섰다.진남왕은 말했다.

[고 아우,자네는 몸에 상처가 있으니 빨리 앉게.]

단예는 목완청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요.내 가서 황상 폐하와 황후마마를 뵙고 다시 돌아오겠소.]

목완청은 그가 자기 곁을 떠나는 것이 싫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못마땅한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곧장 제일 윗자리 의자에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줄을 서 있었다.그러다가 진남왕 부부와 단예가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고승태가 의자에 앉았다.그러나 저만리와 고득성,주단신 등은 여전히 손을 늘어뜨리고 공손히 서 있었다.

목완청은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눈을 돌려 대청 안을 살펴 보았다. 중앙의 편액에는 방국주석(邦國株石)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쓰여 있었고, 아래에는 정묘어필(丁卯御筆)이라는 네 개의 작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그리고 기둥에는 서화를 가득 매달아 놓아 일시에 일일이 다 볼 수 없을 정도였다.더군다나 그녀는 대부분의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때 하녀들이 차를 올렸다.그들은 차를 내밀 때에는 공손히 찻잔을 머리위까지 받들어 올렸다가 탁자 위에 놓는 것이었다.목완청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상하군.정말 이상하다.)

그런데 그녀 자신과 고승태 두 사람에게만 차를 올리고,주단신등에게는 차를 올리지 않는 것이었다.주단신 등은 적을 맞아 싸웠을 때 위풍이 늠름하더니 진남왕부에 들어와서는 공손하기 이를데 없이 시립하고 서 있었으며 크게 숨도 못 쉬는 것이 아닌가? 목완청은 그야말로 그들의 모습이 상승무공을 지닌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반 시진이 지났다.목완청은 기다리기가 귀찮은 듯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낭군! 왜 아직도 나오지 않으세요?]

대청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으나 모두 숨을 죽이고 찍 소리 한 번 못했다.그런데 목완청이 소리내어 부르짖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고승태는 미소지었다.

[소저,너무 서두르지 마시오.왕자님은 곧 나오실 것이오.]

목완청은 중얼거렸다.

[그 책벌레는 왕자같지 않은데요?]

이때 안쪽에서 한 명의 태감이 나타났다.

[선전후와 목완청은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황상의 명이십니다.]

고승태는 태감이 나오자 이미 공산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목완청은 여전히 건방지게 앉아 있었다.그녀는 태감이 곧장 자기 이름을 부르자 속으로 불쾌하다는듯 나직이 말했다.

[소저라는 호칭도 한 마디 안 붙이고 내 이름을 당신이 함부로 불러?]

고승태는 말했다.

[목 소저,우리 들어가서 황상을 배알합시다.]

목완청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는 말괄량이였다.그러나 황상이 보자고 하자 마음 속으로 약간의 두려움이 치솟았다. 그녀는 고승태의 뒤를 따라 기다란 낭하를 지나고 정원을 가로질러갔다. 그런 후 끝없이 이어져 있는 집을 지나서는 마침내 한 채의 화청 앞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그 태감은 알렸다.

[선전후와 목완청이 황상과 마마를 배알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휘장을 들쳤다. 고승태는 목완청에게 눈짓을 하고 대청 안으로 들어가 한복판에 앉아 있는 일남일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목완청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 사람은 기다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황포를 걸쳤는데 모습이 상당히 청수하였다.목완청은 물었다.

[당신이 바로 황제이신가요?]

중간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바로 대리국의 당금 황제인 단정명이었다. 제호는 보정제라고 했다.대리국은 오대 진나라 천복 2년에 세워졌으며, 송나라의 조광윤이 진교에서 정변을 일으켜 황포를 몸에 걸친 것보다 23년이나 빨랐다.대리 단씨의 선조는 본래 무위군사람이었다.시조는 단검위라는 사람으로서 본래는 남소대몽국의 몽씨를 보좌하는 청평관이었다.그런데 육 대째의 단사평에 이르러 벼슬이 통해절도사로 되었고,정유년에 나라를 하사받아 태조를 신성문무제라고 칭하게 되었다.그리하여 십사대째에 이르러 단정명이 즉위했는데 이미 나라가 선지 일백 오십여년 이란 세월이 흐른 후였다.

이때는 북송에서 철종이 천자로서 재위하고 있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다.그리하여 태황 태후 고씨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다. 이 태황 태후는 이름있는 신하를 등용하여 모든 학정을 없앴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편안한 삶을 즐기게 되었고 중원 천하는 그야말로 조용했다.대리국은 남쪽땅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역대에 걸친 황제들이 불교를 숭상하고 있었다.따라서 비록 황제의 호를 사용했으나 송나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양보하고 공손하게 대했으며 한 번도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보정제는 재위 십일 년동안에 연호를 세 번이나 바꾸었는데,바로 보정,건안,천우였다. 이 시기는 바로 천우라는 연호가 쓰이는 시기였고 사방 변경 지대가 조용하고 국태민안한 시기라 할 수 있었다.보정제는 목완청이 자기를 향해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 입을 벌리자마자 자기가 황제냐고 묻는 것을 보고 그만 실소를 했다.

[내가 바로 황제다.너는 대리성이 좋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목완청은 말했다.

[나는 성으로 들어오자마자 이리 오느라고 아직 구경을 못했어요.]

보정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일 예로 하여금 너를 데리고 곳곳을 구경시켜 주도록 해야겠구나.우리 대리의 풍경을 잘 구경하도록 해라.]

목완청은 말했다.

[좋아요.그런데 당신도 저희들과 함께 가시겠어요?]

그 말이 떨어지자 모든 사람들은 참을 수 없어 미소를 지었다.

보정제는 옆에 있는 황후를 바라보고 웃으며 물었다.

[황후.저 애는 우리보고 함께 가자는 뜻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되겠소?]

황후는 미소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완청은 그녀를 몇 번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당신은 황후마마이신가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보정제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예야.목 소저는 천진난만하고 소박하구나.정말 재미있다.]

목완청은 물었다.

[어찌해서 그를 예야라고 부르지요?그가 항상 말씀하시던 백부님이 바로 당신이군요.그렇지요? 그가 이번에 밖으로 도망친 것에 대해서 그는 당신께 매우 미안해하고 있어요.그러니 그를 때리지 마세요,예?]

보정제는 미소했다.

[나는 본래 그에게 곤장 오십 대를 안길려고 했다.그러나 소저가 그와 같이 사정을 하니 용서해 주지,예야,빨리 목 소저에게 고맙다고 해라.]

단예는 목완청이 황상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무척 흐뭇했다. 백부님의 성격이 소탈하다는 것을 알고 그는 곧 목완청에게 말했다.

[목 소저,고맙소.]

목완청은 나직이 말했다.

[당신의 백부님께서 당신을 때리지 않는다고 했어요.이제 나는 안심했어요.고마와할 건 없어요.]

그녀는 다시 보정제를 향해 말했다.

[저는 황제가 매우 흉악하고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당신은...... 참 좋으신 분이군요.]

보정제는 어릴 적에 부황과 모후에게서 그와 같은 칭찬을 받아온 이래 십여년 동안 대하는 사람들마다 공경하고 두려워했을 뿐이지 한 번도 좋으신 분이라고 칭찬한 말을 들어보지 못한 터였다.따라서 그는 목완청이 귀여운 마음이 들어 황후에게 말했다.

[저 애에게 뭐 상을 내릴 만한 것이 없겠소?]

황후는 왼쪽 팔목에서 옥팔찌 하나를 벗겨 내밀었다.

[너에게 상으로 주마.]

목완청은 앞으로 나아가 그 옥팔찌를 받아 팔목에 채우더니 방긋 웃었다.

[정말 고마워요.다음에 저도 좋고 예쁜 물건이 있으면 선물을 할게요.]

황후는 빙그레 웃었다.

이때 갑자기 서쪽 수칸이나 되는 집 밖의 지붕에서 바삭 하는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옆의 지붕 위에서도 바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완청은 깜짝 놀랐다.즉시 적이 내습한 것을 깨달았다.그러나 그 사람이 너무나 재빠른 데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데 휙휙 하는 소리가 나며 곧이어 몇 사람이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저만리의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귀하가 이 깊은 밤에 왕궁으로 들오온 것은 무엇 때문이오?]

그러자 목이 쉰 듯한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내 제자를 찾아왔다. 빨리 내 착한 제자를 내보내 나를 뵙게하라.]

바로 남해악신이 아닌가? 목완청은 더욱 놀랐다. 왕궁에는 경비가 삼엄했다. 그리고 위사들이 구름처럼 지키고 있었다.거기다가 진남왕,고승태, 옥허산인, 사대 호위 등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공이 고강했다.그러나 남해악신이 섭이랑과 운중학,그리고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 천하 제일의 악인의 도움을 받아 네 악인이 연합해 와서 단예를 강제로 잡아가려고 한다면 좀처럼 막기가 힘들 것 같았다.이때 저만리가 호통을 쳤다.

[귀하의 제자는 누구요? 진남왕궁에 어찌 귀하의 제자가 있겠소? 빨리 물러가시오!]

별안간 쫙, 하는 소리가 났다. 허공에서 불쑥 디밀어진 한 커다란 손이 대청문에 걸려 있던 휘장을 두 쪽으로 찢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 뒤에서 인영이 흔들 하더니 남해악신이 어느덧 대청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콩알 같은 눈을 빙글 돌리더니 단예를 발견하고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하 하 하.네쩨의 말이 맞구나! 정말 나의 착한 제자가 여기 있었군. 빨리 나에게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빌어라.그리고 나를 따라 무공을 익히러 가자.]

그는 닭발 같은 손을 뻗쳐서 단예의 어깻죽지를 잡으려고 했다.

진남왕은 그 잡는 기세가 매우 세차고 무서운 것을 보자 아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까 걱정스러워 즉각 일 장을 들어 후려쳤다.두 사람의 손이 펑,하는 소리와 더불어 부딪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내력에 충격을 받았다.남해악신은 속으로 놀라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내가 내 제자를 데리러 왔는데,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지?]

진남왕은 빙그레 웃었다.

[불초는 단정순이라 하오.이 애는 내 아들인데 언제 당신을 사부로 모셨소?]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억지로 저를 제자로 삼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사부님을 모시고 있다고 했는데 그는 믿지를 않아요.]

남해악신은 단예를 한 번 쳐다보고, 진남왕 단정순을 다시 쳐다 보더니 말했다.

[늙은 것의 무공은 꽤 강하다만 어린 것을 전혀 무공을 모르니 너희들이 부자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구나.단정순, 그렇다고 치자, 설사 그가 너의 아들이라고 해도 좋다.그러나 당신이 가르친 무공은 엉터리야.네 아들은 허수아비야.정말 애석해.애헉하다고! 허 허 허!]

단정순은 말했다.

[뭐가 애석하오?]

남해악신은 말했다.

[당신의 아들은 나를 닮았단 말이오.지극히 보기 어려운 인재란 말씀이야. 나에게 십 년만 배운다면 나는 그를 천하에 제일가는 고수로 만들어 주겠어 !]

단정순은 우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 전 그와 일 장을 교환한 후에 상대방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단예가 서둘러 말했다.

[악노삼,당신의 무공으로는 안 되오.내 사부될 자격이 없소.당신은 역시 남해로 가서 다시 십 년을 더 연마한 후 다른 사람과 무학을 논하도록 하시오.]

남해악신은 대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아니 네까짓 녀석이 나의 무공을 헐뜯을 자격이 있느냐?]

단예는 말했다.

[내 묻겠소.풍뢰 익 군자이견선칙선 유과칙개가 무슨 뜻인지 아시오?]

남해악신은 노성을 질렀다.

[무슨 소리긴! 터무니없는 소리지!]

단예는 말했다.

[당신은 그 몇 마디의 가장 쉬운 말도 모르면서 무슨 무공을 가르치겠다는것이오? 다시 묻겠소. 손상익하 민설무강 자상하하 기도대광은 무슨 뜻이오?]

보정제와 진남왕 고승태 등은 그가 역경 가운데의 말을 인용하여 그 사람을 희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모두 우스꽝스럽게 생각했다. 목완청은 잘 모르지만 이 선비가 문장을 논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남해악신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웃음을 띄고 있는 것을 보고 단예의 말이 태반 좋지 않은 말임을 짐작했다.그는 일성대갈하며 손을 써서 후려치려고 했다.단정순은 반 걸음 앞으로 내딛어 그와 아들 사이를 막아섰다.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한 것은 모두 무공의 귀결이오. 그 가운데는 오묘무궁한 이치가 담겨져 있으니 당신이 모르는 것은 당연하지요. 우물 안의 개구리가 감히 나의 사부가 되려 하다니! 그야말로 천하사람들이 웃다가 입이 비뚤어지고 말 일이 아니겠소? 하 하 하! 내가 모신 사부는 옥동신선이오. 그리고 학문에 밝은 선비도 많고 덕 높은 고승도 많이 있소.그러니 당신은 다시 십 년을 노력한다 하더라도 나의 사부로 모실 자격이 없을 것이오.]

남해악신은 대답했다.

[네가 사부로 모신 사람이 누구냐? 어디 몇 수 구경 좀 하게 나오라고 해라!]

단정순은 남해악신의 무공이 제법이긴 하나 자기에 비하면 훨씬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좀 모자라는 듯한 사람을 희롱하여 황상과 황후마마,그리고 자기 부인을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에서 아들이 멋대로 씨부렁거리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단예는 백부가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있는 것을 보고,또 부친이 용납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더욱 의기양양해서 남해악신에게 말했다.

[좋소.당신에게 그만한 용기가 있으면 여기 계시오.내가 가서 우리 사부를 모셔 오리라.놀라서 도망가지 마시오.]

남해악신은 노해 소리쳤다.

[이 악노이는 한평생 강호를 종횡했다마는 두려워 도망친 적은 없었다. 빨리 갔다 오너라.]

단예는 몸을 돌리더니 화청에서 나갔다.남해악신은 여러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모두들 하나같이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지 않은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자의 무공이 그토록 보잘것없는데 그의 사부가 무슨 재간이 있다는게야? 노부는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아!)

이때 신발 끄는 소리가 달달 들리면서 두 사람이 다가왔다.단예는 문밖에서 말했다.

[악노삼이라는 녀석이 도망쳤습니까? 아버님,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사부님이 오셨습니다.]

남해악신은 호통을 내질렀다.

[내가 왜 도망을 쳐? 제기랄! 빨리 너의 사부보고 들어오라고 해! 네가 나같이 뛰어난 사부를 모시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너의 멍청한 사부가 응낙을 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내가 먼저 너의 개방귀 같은 사부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린다면 너는 사부가 없어질 것이고,그렇게 된다면 반드시 나를 사부로 모시게 될 것이 아니냐? 하 하 하! 이 계책이야말로 훌륭하기 그지 없구나!]

그가 좋아하는 가운데 단예가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뭇 사람들은 그를 보자 껄껄 웃고 말았다.이 사람은 조그만 모자에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두 가닥 누런 쥐새끼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붉은 실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목을 움추리고 어깨를 추켜올린 상태였다. 정말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옥허산인 등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바로 이 왕궁의 곽 선생으로,회계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온종일 취해 있는 듯 하였으며 왕궁의 하인들과 도박하기를 즐겼다. 이때 그는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고 가슴팍엔 기름때가 끼어 있었다. 그는 단예에게 팔을 잡혀 겁을 집어먹고 끌려 들어오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그러나 화청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정제와 황후에게 큰절을 했다.

단예는 곽 선생의 팔을 잡고 남해악신에게 말했다.

[악노삼. 내 사부들 가운데 이 분 사부의 무공이 가장 얕으오. 당신이 반드시 이 분을 이겨야 다른 사부와 무공을 겨룰 수 있소.]

남해악신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삼 초 안으로 이 악노이가 그를 묵사발로 만들어 놓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사부로 모시겠다.]

단예는 눈빛을 반짝 하고 빛냈다.

[그게 사실이오? 사내 대장부는 한 번 말했으면 지켜야지,그렇지 않으면 바로 후레자식이 되는 것이오!]

남해악신은 부르짖었다.

[오너라. 와! 덤벼라!]

단예는 말했다.

[만약 삼 초만 겨루겠다면 우리 사부가 손을 쓸 필요도 없소. 내가 당신의 삼초를 받아 보겠소.]

남해악신은 오로지 단예를 잡아가서 남해일파의 제자로 만들 생각밖에 없었다.그러다가 단정순과 일장을 겨루게 되자 비로소 약간 겁을 집어먹게 되었다. 이 많은 고수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단예를 잡아 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단예의 부친만 하더라도 아무래도 자기가 이길 것 같지 않았다.그러던 중에 단예가 자기와 손을 쓰겠다고 나서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단숨에 그를 사로잡아 인질로 한다면 단정순 등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고 하더라도 꼼짝 못할 것이고 눈을 멀거니 뜬 채 자기가 제자를 데려가도록 내버려둘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외쳤다.

[좋다. 네가 나서서 나의 삼 초를 받아라. 나는 내력을 쏟아내지 않을 터이고 결코 너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단예는 말했다.

[그럼 우리 먼저 약속했소. 삼 초 안으로 당신이 나를 이기지 못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남해악신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그는 단예가 닭 잡을 힘조차 없는 서생임을 잘 알고 있었다.삼 초는 커녕 반 초도 받아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입을 열었다.

[삼 초 안으로 너를 때려 눕히지 못한다면 네가 말한 것처럼 내가 너를 사부로 모시겠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었으니 나중에 가서 잡아떼지는 않겠지?]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이 악노이는 한 번 말을 꺼냈다 하면 실천하는 성미다.하나라면 하나고,둘이라면 둘이야.]

단예는 말했다.

[악노삼.]

남해악신은 그 말에 반박했다.

[악노이라고 불러.]

단예는 말했다.

[악노삼.]

남해악신은 말했다.

[빨리 손을 쓰지 않고 웬 잔소리가 그리도 많으냐?]

단예는 두 걸음 나아가 그와 마주섰다.

대청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보정제와 황후마마를 위시해서,목완청 외에는 모두 단예가 커 온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었다.하나같이 단예가 글 공부를 좋아했지 무공을 싫어하는 성미를 가진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무공을 배우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보정제와 단정순이 그에게 무공을 연마하라고 다그치자 그는 집을 나갔던 것이다.그러니 이런 고수와 싸우기는커녕 일반 병사도 제대로 상대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옥허산인이 말했다.

[예야, 쓸데없는 장난치지 말아라.그와 같은 필부는 더 이상 아랑곳할 가치도 없다.]

황후 역시 말했다.

[선전후,명을 내려서 저 건방진 작자를 사로잡도록 하시오.]

선전후 고승태는 허리를 숙였다.

[신 고승태가 성지를 받사옵니다.]

그는 호통을 내질렀다.

[저만리,고득성,부사귀,주단신,네 호위는 명을 들어라, 마마께서 침범한 자를 잡으라고 하신다.]

저만리 등 네 사람은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신이 삼가 성지를 받드옵니다.]

남해악신은 뭇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공격하려고 하자 호통을 쳤다.

[너희들 모두 덤빈다 하더라도 노부는 두렵지 않다. 너희들 두 사람은 황제와 황후겠지.너희 두사람도 같이 덤벼라.]

단예는 두 손을 들어 급히 흔들었다.

[잠깐,잠깐.내가 그와 삼 초를 겨룬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보정제는 평소 조카가 종종 사람의 의표를 찌르는 짓을 잘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어쩌면 몰래 다른 계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남해악신이 그의 생명을 해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자기의 동생인 단정순과 선전후 등이 옆에서 보살피고 있으니 큰 위험은 없으리라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여러 사람들은 잠깐만 기다리도록 하라. 저 건방진 자로 하여금 대리국 소왕자로부터 절도를 가르침 받게 하는 것도 괜찮다.]

저만리 등 네 사람은 본래 한꺼번에 달려들려고 했으나 황상의 뜻을 받들어 즉시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단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노삼,우리 먼저 미리 말해두기로 합시다.만약 당신이 삼 초에 나를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나를 사부로 삼아야 하오.그리고 내가 비록 당신의 사부가 된다 하더라도 당신의 자질이 너무나 우둔하여 당신에게 무공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누가 너보고 무공을 전수해 달랬냐? 너에게 무슨 개방귀 같은 무공이 있다고 그러냐?]

[좋소.그럼 응낙한 걸로 알겠소.사부로 모신 이후 사부의 명령을 어기면 아니 되오.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시키면 당신은 반드시 그 명을 받들어 행해야 하오.그렇지 않을 때는 그야말로 사문을 업수이 여긴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무림 규칙에 위배되는 것이오.응낙하겠소?]

남해악신은 성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네가 나를 사부로 모시게 된다 해도 마찬가지야.]

단예는 자기가 배운 능파미보를 십여 걸음 외워 보았다. 그의 삼 초를 피하는 것은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그러나 어느 정도 퇴로를 남겨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재차 입을 열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이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반드시 나의 사부님을 일일이 패배시켜야 하고,그리하여 당신의 무공이 확실히 나의 여러 사부님들 보다 고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나는 당신을 사부로 맞아들일 수 있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에 삼 초 안으로 그에게 잡히게 된다면 이곳에 무공이 고강한 사람들이 나의 사부라고 말해 주어 그로 하여금 혼자서 싸우게 만들어야지.)

이때 남해악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좋아.그런데 네가 말만 한다는 것은 너답지 않구나.우리 남해파의 사람들은 싸운다면 싸우는 것이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단예는 그의 등뒤를 가리키며 미소했다.

[나의 사부님은 이미 당신의 등뒤에 서 있소.]

남해악신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이때 단예가 별안간 비스듭히 한 걸음 내딛으며 접근하면서 질풍과 같이 그의 가슴팍에 있는 전중혈을 움켜잡았다.그리곤 엄지 손가락을 상대방의 혈도 한복판에 갖다 대었다. 이 수법은 그야말로 놀랍기 그지 없었다. 단예의 몸에는 무량검 칠 명 제자의 내력이 축적되어 있었다.운용할 줄 몰랐지만 그 힘은 대단했다. 남해 악신은 그만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런데 단예의 왼손이 다시 그의 배꼽 위에 있는 신궐혈을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북명신공의 두루마리에는 많은 경맥과 혈도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단예는 다만 수태음폐경과 임맥의 그림만 연마했을 뿐이었다.이 전중,신귈 두 혈도로 말하면 임맥의 이대 요혈이라서 움켜잡게 된 것이었다.

남해악신은 깜짝 놀라 급히 내력을 돋우어서는 바둥거렸다.갑자기 그는 내력이 전중혈에서 급히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아 더욱 그를 당황케 했다.단예는 어느덧 그의 몸을 거꾸로 쳐들었다. 머리를 아래로 발을 위로 한 채 꼬나박았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남해악신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혔다.격노한 남해악신은 리어타정이라는 수법으로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왼손을 뻗쳐 단예를 움켜 잡으려 했다.

대청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와 같은 변고를 보고 모두들 놀람과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단정순은 남해악신의 손 씀씀이가 날카로운 것을 보고 손을 써서 막으려고 했다.그런데 단예는 왼쪽으로 비스듬히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보법이 기이하기 이를데 없어 단숨에 상대방의 번개 같은 손을 피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단정순은 갈채를 보냈다.

[정말 묘하다!]

남해악신은 잇따라 두 번째 장을 후려쳤다.단예는 반격하지 않고 다시 비스듬히 두 걸음을 옮겨 피해 버렸다.남해악신은 이 초를 펼쳤으나 적중되지 않자 놀람과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다. 단예가 바로 자기 눈앞의 석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별안간 그는 미친듯이 호통을 내지르며 두 손을 뻗쳤다.그리고는 단예의 가슴팍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동시에 그는 팔과 손가락에 전력을 기울였다.단정순,옥허산인,그리고 고승태 등 네 사람은 일제히 호통을 내질렀다.

[조심해라!]

단예는 왼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그리고 오른쪽으로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그 순간 두둥실 하더니 날렵하게 남해악신의 등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그는 손을 뻗쳐 대머리인 남해악신의 정수리를 매섭게 후려쳤다.그러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단예의 손은 다섯 개의 상처자국을 남해악신의 대머리에 내고 말았다.단예는 급히 몸을 뒤로 빼고 단정순의 뒤로 돌아가 숨었다.

옥허산인은 아들을 흘겼다.

[잘 한다! 백부와 아버지에게 그와 같은 재간을 배우고도 무공을 안배운 체 하며 나를 속였어!]

목완청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악노삼, 삼 초로 그를 쓰러뜨리지 못했어요. 오히려 당신이 그에게 한번 곤두박히고 머리에 흔적이 나도록 맞았으니 빨리 절을 해서 사부로 모셔요.]

남해악신은 뒷덜미를 긁적긁적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는 나와 진짜로 손을 쓴 것도 아니니 이것은 안 되는 것으로 해야돼.]

목완청은 손가락을 뻗쳐 자기의 얼굴을 가리켰다.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당신이 사부로 모시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후레자식이에요.당신은 그를 사부님으로 모시겠어요,아니면 후레자식이 되겠어요?]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나는 양쪽 다 싫다.나는 그와 싸워봐야 한다.]

단정순은 아들의 보법이 교모하기 이를데 없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그 가운데 오묘한 이치를 알아낼 수 없어 나직이 단예의 입가에 속삭였다.

[너는 손을 뻗쳐 그를 때릴 생각을 하지 말고, 때를 틈타 그의 혈도를 움켜잡도록 해라.]

단예는 나직이 말했다.

[이제 저는 겁이 났어요.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두려워할 것 없다.내가 옆에서 돌봐주마.]

단예는 아버지가 돌봐준다는 말에 용기가 났다.그리하여 단정순의 등뒤에서 걸어나왔다.

[삼 초로 당신은 나를 쓰러뜨리지 못했으니 응당 나를 사부님으로 모셔야 하오.]

남해악신은 호통 소리를 내지르며 일 장을 쳐들고 그를 후려쳤다.

단예는 동북쪽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가볍게 그 일장을 피해버렸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남해악신의 그 일장은 탁자 하나를 박살내고 말았다.

단예는 정신을 가다듬고 속으로 역경의 육십사괘 방위를 읊었다.

[관아생,진퇴,간기배.]

그는 왼쪽으로 나갔다간 오른쪽으로 물러서곤 했다.그리고 비스듭히 나갔다가 곧장 물러서곤 했다. 남해악신은 두 손을 더욱 빨리 휘둘러 대었다.그 세찬힘은 점점 강해져 갔다. 의자,탁자, 주전자 등이 그의 장력에 맞아 깨어져 나갔다.그러나 그는 시종 단예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아니 후려쳐서 적중시킬 수도 없었다.순식간에 삼십여 초가 지나가게 되었다.보정제와 진남왕은 이미 단예의 발걸음에 기운이 없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반푼어치의 무공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그런데 어떻게 고인의 전수를 받아 신묘하기 이를데 없는 보법을 배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보법은 육십사괘의 방위를 따라움직이는데,매걸음이 불가사의할 정도였다.그가 만약에 정말 남해악신과 대적해서 싸우게 된다면 단 일 초에 적의 일 장 아래 목숨을 잃고 말 것이지만, 그가 자기 멋대로 걸음을 옮겨놓고 있기 때문에 남해악신의 장력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시종 그를 때릴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더 바라본 이후 두 형제는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얼굴에 똑같은 한 가닥 우려의 빛을 띄우고 생각했다.

(남해악신이 만약에 눈을 감고 단예가 어디로 가는 지를 보지 않고 손을 쓴다면 수 초 안에 단예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남해악신은 화가 나기도 하고 망신스럽기도 하여 얼굴이 붉어져갔고 눈은 흉악한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그는 필사적으로 두 팔을 후려쳤으나 시종 단예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하지만 단예 역시 지쳐 있어 갈수록 발걸음이 불안해졌다.

보정제는 소리쳤다.

[예야,피하지만 말고 교묘하게 파고들어 상대의 혈도를 움켜 쥐거라!]

단예는 대답하고는 갑자기 보법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단정순은 신바람이 났다.

[너는 내 아들이다! 단씨의 자손은 싸움에 임하여 오로지 공격할 뿐, 피하는 법이 없다.공격! 공격해라!]

옥허산인은 냉랭히 단정순에게 쏘아부쳤다.

[내 아들은 이미 저 악마와 육심여 초 동안이나 싸웠어요.그만하면 됐지,왜 자꾸 공격하라고 그러는 거죠? 만약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당신과 사생결단을 내겠어요.]

단정순은 말했다.

[걱정마시오.예아는 결코 다치지 않아요.]

옥허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금세라도 주르륵 흘러 내릴 것만 같았다.

이때 단예의 호통소리가 장내를 쩌러렁 울렸다.

[자! 받아랏!]

그의 몸이 신출귀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남해악신의 가슴팍을 다부지게 움켜쥐지 않는가? 남해악신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팔을 뻗어 단예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단예의 몸이 흔들 하는 순간 남해악신의 공격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단예의 오른손은 남해악신의 전중혈을 바짝 틀어쥐었고 왼손은 신관혈을 거머잡았다.사실 단예는 진기 내력을 사용할 줄 몰랐다.만약 이때 남해악신이 진기를 돋우지 않고 팔 힘만으로 단예를 밀었다면 단예의 손을 떨쳐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해악신은 혈도를 잡히자 기절할 듯 놀라 급히 진기를 잔뜩 일으켜 단예의 얼굴을 세게 후려쳐 나갔다.공격으로 수비를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는 단예의 두 눈을 흉험한 기세로 찔러갔으며 이는 무예를 하는 요결 중의 하나인 상대방이 방어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을 공격한다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단예는 피할 겨를이 없어 여지없이 두 눈을 찔리게 되었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남해악신은 손가락이 바로 눈앞에 이르렀을 때,가슴이 콱 저려오며 더 이상 팔을 뻗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느꼈다.가슴이 구역질이 날 듯 울렁거리며 몸안의 진기가 전중혈을 통해 물밀듯이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남해악신은 재차 온몸의 진기를 일으켰다.단예는 남해악신의 전중혈에 닿은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소상혈로 화끈한 기운이 흘러드는 것을 느꼈다. 남해악신의 내력을 어찌 무량검 칠 명의 제자에 비하랴? 단예의 몸이 폭풍을 만난 갈대처럼 크게 뒤로 제켜졌다. 단예는 손을 놓는 순간이면 상대방의 진기에 맞아 몸이 으스러져 즉사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진기가 흘러들어 팔이 끊어질 듯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 왔지만 억지로 버티었다.

단정순은 아들이 시뻘건 얼굴을 하고 힘들어 하자 달려들어 오른손 둘째 손가락을 단예의 허리에 있는 명문혈에 갖다대고 진기를 주입시켰다. 천하제일 지공 일양지가 펼쳐지는 순간 단정순의 내력은 단예의 몸속에 있던 내력을 일시에 격발시키게 되었다.

순간 남해악신은 벼락을 맞은 듯 크게 소스라치며 눈을 까뒤집더니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단정순은 일양지로 아들을 도와 남해악신을 간단히 제압하고 아들을 부축했다.

남해악신은 역시 강호를 주름잡는 대마두로 손색이 없었다.땅에 눕는가 했더니 금새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그는 단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의혹과 경악과 비애가 어우러진 표정이었다.

목완청이 급히 말했다.

[악노이,당신은 그래도 내 낭군을 사부로 모시지 않을 테에요? 그렇다면 당신은 후레자식이라고요!]

남해악신은 미친 듯 괴성을 질렀다.

[에이! 빌어먹을!]

남해악신은 갑자기 단예 앞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여덟 번이나 쿵쿵 박으려 소리쳤다.

[사부님! 제자 악노이가 인사 올립니다!]

단예가 어리둥절해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남해악신은 퉁기듯 몸을 솟구쳐 밖으로 달려나갔다.곧이어 지붕 위에서 으아악,하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바로 왕궁의 호위 무사였다.그의 가슴에선 분수처럼 싱싱한 피가 뻗어나왔으며 남해악신에게 심장을 뽑힌 듯 왼쪽 가슴은 크게 파헤쳐져 있었다.위사는 사지를 크게 바둥거리더니 이윽고 잠잠해졌다.

목완청은 노해 부르짖었다.

[낭군,당신의 제자는 너무 악독하군요!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혼을 내주세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나면 제자의 목뼈를 분질러 버리겠소.]

보정제는 위사의 시체를 치우게 한 후,단예에게 물었다.

[예야,너의 그 보법은 정말 고명하더구나.누가 가르쳐 주었지?]

단예는 공손히 말했다.

[저는 어느 동굴 속에서 우연히 익혔을 뿐입니다.]

단예는 그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나 옥미녀상에 대해서는 웬지 말하고 싶지 않아 숨겨 두었다. 그리고 보법이 그려진 두루마리도 보여주지 않았다.거룩한 신선 누님의 알몸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정제는 단예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이 육십사괘의 보법에는 분명히 상승의 내공심법이 곁들여져 있을 것이다.너는 한 번 보법을 펼쳐 보아라.]

[예.]

단예는 천천히 보법을 전개해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오묘함을 알아내지 못했다.보정제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담고 기뻐했다.

[정말 천하무쌍의 보법이로다! 너는 정말 큰 복을 얻었구나! 어머님도 마침 돌아오셨으니 너는 어머님을 모시고 잔치를 열도록 하려므나.]

보정제는 황후를 보며 말했다.

[중전,우리는 돌아갑시다.]

[예.]

황후는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모두 진남왕부 밖에까지 나가 황제를 전송한 후에 단정순은 내당에 연회석을 마련케 했다. 단정순 부부와 단예,그리고 목완청 네 사람은 연회석에 자리잡고 그 주변에 십여 명의 미녀들이 둘러섰다.

목완청은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한 좌석에 앉자 기쁘기 그지 없었다. 마치 그녀를 며느리처럼 대했기 때문이었다.

단예는 모친이 여전히 부친에게 냉랭히 대하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다만 소채만을 먹는 것을 보자, 한 잔의 술을 따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아들의 술잔을 받으십시오.어머님과 아버님이 자리를 함께 하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옥허산인은 잘라 말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단예는 목완청에게 말했다.흉내내어 입을 열었다.

[어머니,술 한 잔 받으십시오.]

옥허산인은 목완청의 잔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소저,우리 아들을 잘 보살펴 줘요. 워낙 귀엽게만 자라서 말을 잘 안 들으니까 그대가 잘 다스려 주어야 해요.]

목완청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따귀를 때려 줄 테니까요.]

옥허산인과 단정순은 미소지었다.단정순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참 좋은 방법이군.저 녀석은 맞아도 싸지.]

이때 옥허산인은 한 손을 내밀어 목완청이 내미는 술잔을 받고 있었다. 촛불 아래 그녀의 섬섬옥수가 드러났는데 팔목에 핏빛의 점이 품(品)자형으로 찍혀 있는게 아닌가? 그것을 목격한 목완청은 몸을 움찔했다.

[어머니의 이름은......혹시 도백봉이 아니세요?]

옥허산인은 잔잔히 웃었다.

[나의 성명을 그대가 어떻게 알지?]

목완청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파이 출신으로 연한 채찍을 무기로 쓰는 것이 맞나요?]

옥허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은 정말 그대를 좋아하는 모양이군.별 걸 다 말해 주었어.]

목완청은 얼굴이 창백하게 말했다.

[도백봉이 틀림없군요.]

[목 소저는 어찌해서 자꾸 내 이름을 묻지?]

목완청은 부르짖었다.

[스승의 은혜가 깊으니 내 어찌 사부님의 명령을 거역하랴!]

그녀의 오른팔이 번쩍 들리며 두 대의 독화살이 도백봉의 가슴을 향해 격사되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돌연한 사태라 도백봉은 피할 겨를이 없었다.

두 대의 화살이 옥허산인의 가슴팍에 깊숙이 꽃히려는 찰나, 인영이 어른거리더니 팍, 팍, 소리가 났다.단예가 능파미보를 써서 도백봉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두 대의 독화살은 단예의 가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단예가 풀썩 무너질 때 단정순은 놀라서 부르짖었고 목완청은 혈도를 찔린 채 탁자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단정순은 목완청의 혈도를 짚은 후 재차 그녀의 팔목 관절을 우드득, 하니 비틀어 손을 못 쓰게 만들고 급히 단예를 일으켰다. 그는 단예의 가슴에 있는 여덟개의 혈도를 찔러 독이 퍼지지 않게 했다.도백봉은 하얗게 질린 채 부르짖었다.

[해약을 내놔라!]

목완청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부르짖었다.

[낭군,당신을 쏘려던 게 아니었어요.미안해요.해약은 품속에 있어요.]

도백봉은 그녀가 단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자 노기가 약간 누그러졌다. 즉시 그녀의 품속을 뒤져 해약을 꺼내 단예에게 먹였다. 이어 독화살을 뽑아내고 가루약을 발랐다.

목완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제 됐어요. 죽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평생 무공을 익힐 수 없게 되고 말았어요.아.....이를 어쩌나?]

그녀와 단정순 내외는 아직 단예가 망고주합을 복용한 이후 어떠한 독에도 중독되지 않는 몸으로 변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설사 목완청의 해약을 먹지 않았다 해도 단예는 중독되지 않았을 것이다.

단예는 화살이 박히자 따끔한 통증을 느끼면서 이젠 죽었구나하는 절망감에 땅으로 쓰러졌던 것인데 화살을 뽑고 나자 가슴이 시원해지는걸 느꼈다.

도백봉은 단예를 안아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그리고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의 맥박은 고르고 힘찬 것이 완전히 정상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의아함을 금치 못하며 다시 목완청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대는 가서 수라도 진홍면에게 전해라.]

단정순의 얼굴색이 확 번했다.

[수라도......진홍면!]

도백봉은 단정순에게 싸늘히 눈을 흘기고 재차 목완청에게 말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면 공명정대하게 뺏으라고 전해라. 비겁한 짓을 하면 못써.]

목완청이 급히 말을 받았다.

[나는 수라도 진홍면이 누군지 몰라요.]

도백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누가 너더라 나를 죽이라고 시켰느냐?]

[저의 사부님이에요.사부님은 저보고 두 여인을 죽이라고 했어요.하나는 바로 당신이고,또 한 사람은 소주의 왕부인이었어요.]

도백봉은 단정순을 싸늘히 노려보았다.

[이 일은 지난날 당신이 저지른 것이에요.당신이 이 계집을 알아서 하세요.난 나가겠어요.]

단정순은 순간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건 이미......지나간 일이 아니오? 마음에 두지 마시오.]

도백봉은 코웃음을 쳤다.

[흥! 당신에게야 아무일도 아니겠죠.하지만 나에겐 그토록 큰 일이 없었어요!]

갑자기 몸을 훌쩍 날려 그녀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어 몇 번 발을 구르는가 했더니 까맣게 멀어지고 말았다.

단정순은 그녀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한참 후에야 단정순은 몸을 돌려 목완청에게 다가갔다.그는 그녀의 혈도를 풀고 팔을 잡아 빠진 두 팔의 관절을 다시 맞춰 주었다.

목완청은 생각했다.

(내가 그의 부인을 죽이려 했으니 나를 실컷 두들겨 패서 병신을 만들겠지.)

단정순은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주저앉더니 술을 한 잔 따라 마시고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이와 같이 열 여섯 잔을 따라 마시자 주전자가 비고 말았다.그러자 단정순은 다른 주전자에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목완청은 그때까지 단정순만 바라보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에게 가할 아주 잔인한 형벌을 생각하고 있죠?]

단정순은 눈길을 돌려 목완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얼마 후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닮았구나! 아아....내가 이미 알아 보았어야 했는데, 그 모습에 그 성깔....]

목완청이 쏘아부쳤다.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거예요?]

단정순은 대답하지 않고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갑자기 왼손을 들어 등뒤를 향해 후려쳤다. 휙,하니 바람이 일며 등 뒤에 있던 한 자루의 촛불이 꺼졌다. 곧이어 그는 오른손을 뒤로 돌리며 비스듬히 후려쳐 한 개의 촛불을 꺼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시종 앞을 향한 채였고,손의 씀씀이는 행운유수처럼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며 날렵했다.

목완청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것은....오라경연장(五羅輕烟掌)!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단정순이 쓴 웃음을 지었다.

[너의 사부가 너에게 가르쳐 주었느냐?]

목완청은 고개를 저었다.

[저의 사부님은 그 장법만은 결코 전수해 주시지 않고 죽을 때도 그것만은 저승으로 가져가겠다고 하셨어요.]

단정순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으음! 남에게 가르치지 않고 관 속으로 가져 가겠다고 했단 말이지?]

목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하지만 사부님 혼자서 몰래 그 장법을 연마하시는 걸 제가 몇번 훔쳐 보았죠.]

단정순은 물었다.

[그녀 혼자 종종 이 장법을 펼쳤다고?]

[그래요. 사부님은 그 장법을 연마할 때마다 저에게 신경질을 부리며 욕을 하셨어요.그런데 당신은 그 오라경연장을 어떻게 알죠?당신의 솜씨는 저의 사부님보다도 훨씬 능숙하시네요.]

단정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장법은 내가 너의 사부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목완청은 깜짝 놀랐다.하지만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저의 사부님의 사부님, 다시 말해서 저의 사조가 되시는 군요?]

단정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다.]

단정순은 머리를 숙이며 혼자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이 장법을 연마할 때마다 성질을 부리고.... 장법을 저승에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니....]

목완청은 의혹이 구름처럼 치밀었으나 단정순의 얼굴이 너무 침통해서 감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한참이 지나자 단정순은 입을 열었다.

[너는 올해 열 여덟이고,생일은 구월이지?]

목완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생일을 당신이 어떻게 알죠?]

단정순은 회한이 서린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나는....너의 사부에게 큰 죄를 졌다.완아....너는....]

[죄를 짓다니요? 제가 보기에는 당신은 퍽 인자하시고 좋으신 분 같아요.]

단정순은 씁쓸하게 웃었다.

[너의 사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았느냐?]

목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은 스스로 유곡객이라고 하셨어요.저는 성도 이름도 몰라요.]

단정순은 나직이 되뇌었다.

[유곡객....유곡객....]

단정순은 갑자기 낮고 처량한 어조로 한 수의 시를 읊기 시작했다.바로 두보의 가인이라는 시였다.그 싯구의 하나하나가 칼날이 되어 그의 가슴을 아프게 도려내는듯 그의 표정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절대유가인,

유거재공곡,

자운양가자,

영락의초목,

부서경박아,

신인미여옥,

단견신인소,

나문구인곡,....]

싯구를 읊은 후,단정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몇 년간 너희는 어디서 어떻게 지냈느냐?]

목완청은 나직이 말했다.

[저와 사부님은 깊은 산골짜기에서 살았어요.사부님은 그 계곡을 유곡이라고 부르셨죠. 이번에 사부님의 일생을 망친 두 여인을 죽이러 함께 나왔죠.]

단정순은 다그치듯 물었다.

[너의 부모는 누구지? 너의 사부는 얘기해 주더냐?]

목완청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사부님은 제가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라고 하셨어요.저의 사부님은 저를 주워서 길렀대요.]

단정순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부모를 미워하겠구나?]

목완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땅만 내려다 보았다.

단정순은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그 모습이 너무도 쓸쓸하고 고독해 보이자 다시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단정순의 두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목완청은 한참 후 눈물을 닦고 단정순을 바라보다가 그가 우는 것을 보자 의아해서 물었다.

[왜 울죠?]

단정순은 등을 돌려 소매로 눈물을 찍어낸 후 억지로 웃어 보였다.

[운 게 아니라,술 기운이 올라오면 언제나 눈물이 나오는걸.]

[거짓말이에요.당신은 분명히 울었다고요.여인이야 울지만 남자도 울수 있나요? 나는 남자가 우는 걸 처음 봐요.어린애를 빼고는요.]

단정순은 조용히 말했다.

[완아,이후에 너에게 잘 대해주마.그래야 나의 과실을 보상할 수 있어. 너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지 나에게 들려주렴.내 힘이 닿는 한 들어주마.]

목완청은 그 말을 듣자 한편 의아하고 한편으론 기뻐서 얼른 물었다.

[제가 독화살을 쏘아 당신의 부인을 죽이려고 했는데 제가 밉지 않나요?]

단정순은 부드럽게 말했다.

[너야 무슨 죄가 있겠느냐?사부님의 은혜가 깊으니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그런 것인데.....나는 너를 탓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는 나의 아내에게 무례하게 굴면 못 쓴다.]

목완청의 얼굴 가득히 수심이 어렸다.

[저의 사부님께서 화를 내시면 어떡하죠?]

[내가 친히 그녀에게 말하면 그녀도 네가 도백봉을 죽이지 않았다고 탓하지 않을 것이다.]

목완청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좋아요! 좋아요!]

기뻐하던 목완청은 갑자기 무엇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좋지 않아요.저의 사부님은 세상 남자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고 하셨어요. 당신 역시 남자니까 믿기 힘들어요.그러니까 사부님은 한 번도 남자를 상대한 일이 없지요.]

단정순은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사부가 한 번도 남자를 상대한 적이 없다고?]

목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믄요.사부님은 쌀과 소금을 사는 일에도 양 아줌마를 시켜요. 언젠가 양 아줌마가 병이 났을 때 그의 아들이 대신 소금을 사왔어요.사부님은 크게 노하셔서 그 아들에게 멀리 문밖에 소금을 놔두고 가라고 하시면서 대문 안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셨어요.]

단정순은 비통하기 이를데 없는 표정이 되어 나직이 부르짖었다.

[홍면....그렇게 자신을 학대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오!]

목완청은 불쑥 물었다.

[당신은 또 홍면이라고 부르는군요.도대체 홍면이 누구죠?]

단정순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래....이 일을 너에게 언제까지 속일 수야 없겠지. 너의 사부의 이름이 바로 진홍면이다.그녀의 별호는 수라도란다.]

목완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래서 부인께서 제가 독화살을 쏘는 걸 보고 진홍면과 저와의 관계를 물었던 거군요? 진홍면이라....이름이 퍽 예쁘네요?사부님은 왜 그토록 예쁜 이름을 저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요?]

단정순은 빙그레 웃으며 자상하게 물었다.

[조금 전 내가 너의 팔을 비틀었는데 지금도 아프냐?]

목완청은 그의 얼굴에 온화하고 자애로운 정이 가득한 것을 보자 미소지었다.

[한결 나아졌어요.이제 우리는 당신 아들을 보러 가요.저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어요.]

단정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보러 가자꾸나!]

단정순은 몸을 일으키며 자상하게 웃었다.

[완아,소원이 있으면 말을 해라.빨리 듣고 싶구나.]

목완청의 얼굴이 갑자기 진달래꽃처럼 붉어졌다.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려 뜨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본래 남에게 부탁을 하지 않는 성미예요.하지만....말하겠어요. 제 소원을 말한다면 당신은 정말....들어주시는 거죠?]

그녀는 살짝 머리를 들어 단정순을 훔쳐보고 급히 고개를 숙인다.

단정순은 부드럽게 말했다.

[내 힘이 닿는 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목완청은 다짐하듯 물었다.

[정말 들어주시는 거죠?]

단정순은 웃으며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들어주고말고.]

목완청은 기어들어가는 어조로 말했다.

[저와 단예를 결혼시켜 주세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얼굴을 들었다. 얼굴은 더욱 붉어졌으나 눈빛은 기쁨과 기대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단정순은 몸을 부르르 떨며 안색이 홱 변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그는 침울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목완청은 금방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시군요.그렇죠?]

단정순은 눈에서 신광을 폭사하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

그의 어조는 칼로 자르는 듯 단호했다. 목완청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그녀는 애통해서 부르짖었다.

[왜....무엇 때문에 안 된다는 거죠?]

단정순은 그녀의 말에 대답을 않고 침통하게 뇌까렸다.

[업보로다! 업보야!]

목완청은 주르륵 눈물을 쏟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신이 미워요! 당신을 저주해요! 난 자결하고 말겠어요!그리고 귀신이 되어서도 당신을 괴롭힐 거예요!]

그녀는 품속에서 은장도를 뽑았다.촛불에 반사되어 칼날은 서릿발처럼 뽀얗게 보였고, 언뜻언뜻 푸르스름한 빛이 어른거렸다. 보기에도 싸늘한 칼날은 그녀의 한스런 과거처럼 섬뜩한 감을 뿌려주고 있었다.

목완청은 칼날을 되돌려 자신의 목을 향해 사정 없이 찔렀다. 일순 단정순의 몸이 섬전같이 움직이자 어느새 은장도는 단정순의 손에 들려 있었다.목완청은 표범처럼 독기 품은 눈으로 단정순을 노려보았다.그녀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왜 막아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행복해요.당신은 끝까지 나의 행복을 짓밟는군요! 당신은....잔인해요! 짐승보다도 더 잔인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단정순도 몹시 비통한 표정으로 발악하듯 외쳤다.

[나를 미워해도 좋다! 하지만 더 이상 천륜을 어기는 짓을 저지를 수는 없다!]

목완청은 단정순의 처절한 모습을 보자 멈칫했다.단정순은 목완청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단예는 너의 친오빠다.그래도 시집을 가겠다는 것이냐?]

목완청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낭군이 나의 오빠라고요?]

단정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했다.

[완아,너의 사부는 바로 너의 친엄마다.그리고 나는....친애비다.]

목완청의 얼굴이 핼쓱하게 변했다.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발을 구르며 절규했다.

[난 믿지 않겠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이때 별안간 창밖에서 나직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이어 서글프기 짝이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완아.우리 유곡으로 돌아가자.]

목완청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사부님!]

창밖에는 한 중년 여인이 밝은 달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서 있었다. 갸름한 얼굴의 몹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흰 옷자락이 바람을 맞아 펄럭이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보였다.

[홍면....홍면....그대가 왔구료!]

 

[ 1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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