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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남쪽땅 구십여 리 폭원에 대정이 서쪽에 있고 정의가 동쪽에 있으니
정의읍에서 보면 국내에 이름높은 한라산이 서로 이십 리요, 신선의 놀이터라는
영주산이 북으로 사 마장이녀 동으로는 성산포가 이십오리인데 해수 많이 모이
는 우도가 가까이 있고 남으로는 바다가 칠 마장인데 호호망망한 남해가 가이없
다. 산에서는 희귀한 약재가 나고 바다에서는 풍부한 해물이 나건마는 백성은
살기가 간구하였다. 토지가 대개 돌서덜밭인데 농구가 변변치 못하여 밭벼, 서속
같은 곡식이 소출이 적고 잠수질로 해의, 전복 등속을 따고 낚시질로 은구어, 옥
두어등속을 잡으나, 그물 같은 좋은 어구를 쓸줄 모르고 사내가 적고 계집이 많
은 곳이라 사내는 놀리고 계집이 일하는 것이 풍속인 까닭에 여름살이도 주장
계집의 일이요, 고기잡이도 역시 계집의 일이오, 잠수지릉ㄴ 특별히 계집의 장기
로 쳐서 바닷속에 깊이 들어가는 딸이라야 여의기가 손쉬웠다. 계집의 덕으로
먹고 사는 백성들이 다른 침해만 아니 당하여도 오히려 잘 살 수가 있지만, 관
장도 침해하고 관속도 침해하고 더욱이 도지관벼슬을 세습하는 고씨, 문씨의 붙
이들의 침해가 자심하여 밭 뺏고 세간 뺏는 건 고사하고 사람을 잡아다가 사내
종, 계집종 같이 부리되 인록이라고 자기네 받을 녹과 같이 여기었다. 고된 신역
으로 겨우 식구 입에 풀칠을 하는 신세니 물건 지고 다니는 계집의 노래가 자연
구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물건을 머리에 이지 않고 곡식을 방아로 찧지 않는
것이 역시 이곳의 풍속이었다. 백성들이 간구하니 읍 모양도 보잘것 없었다.사가
에 와가 없는 것은 말할 것 없고 관가까지 초가라 정의현감의 동헌은 전주부내
잘 사는 집의 안마루 폭도 못 되었다. 동헌은 오히려도 번듯하지만 내아는 더구
나 말 못 되어서 내아라고 부르는 것이 외람스럽게 들릴 만하였다. 봉학이는 정
의현감 도임하기 전에 골 이야기를 많이 들어둔 까닭에 다소 눈에 설 뿐이지 마
음에 놀랄 것까지는 없었지만 전주부중에서 나서 전라감영에서 기생 노릇하던
계향이는 참말 놀라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아가 누추한 것은 마음에
시쁠 뿐이지만 뱀이 유난히 많아서 돌담 위로 날마다 기어다니는 것도 뱀이요,
마루 앞처마에서 이따금 떨어지는 것도 뱀이라 끔찍스럽기 짝이 업슨데 본토 사
람들은 뱀을 영물로 위하여서 죽이지 못하고 모기가 입을 봉한다는 처서 지난
지가 벌써 오래건만, 이곳은 아직도 해만 설핏하면 처마 앞에 모기진이 새까맣
고 또 거짓말 좀 보태면 지네가 자가 넘고 거미가 손바닥만하여 무섭고 징그러
워서 몸에 소름까지 끼칠 때가 많았다. 어느 날 밤에 지네 한 마리가 방안에 들
어와서 계향이는 관비들을 데리고 지네를 잡느라고 북새를 떠는 중에 봉학이가
내아에 들어왔다. 관비들이 지네를 잡고 물러간 뒤에 계향이가 봉학이 옆으로
다가앉으며 “여기 어디 오래 있겠세요?” 하고 새심스럽게 몸서리를 치니 봉학
이가 “지네 무서워 못 있겠단 말인가.” 하고 웃었다. 봉학이가 정의에 도임한
후로 계향이를 대접하여 전과 같이 해라를 아니하였었다. “지네뿐인가요?” “
그럼 또 무어?” “뱀은 무섭지 않은가요.” “오래 못 있겠단 말이 참말인가?
” “나으리는 오래 기시고 싶소.” “내말은 할 것 없구 진정으루 여기 있기
어렵다면 전주루 도루 보내주지.” “나으리는 여기 기시고?” “내야 벼슬 갈
리기 전 여기 있어야지.” “빈말씀이라도 그런 말씀을 어떻게 하시오.” “왜
못할 말인가?” “어딜 가든지 둘이 떨어지지 말자던 말씀은 벌써 잊으셨소?”
“나두 할 말 있어. 나를 따라가면 칼산지옥이라두 무섭지 않다구 말한 사람은
누구든가.” “내가 오래 못 있겠단 말은 잘못한 말이니 용서하세요.”계향이가
싹싹하게 사과하니 봉학이는 웃으면서 “이 다음에 다시 그런 말 하지 말게.”
하고 일렀다. 봉학이도 속으로는 계향이와 같이 정의에 오래 있고 싶지 않지마
는 벼슬이 옮기거나 떨어지기까지 있고 싶지 않아도 있어야 함처지라, 계향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막는 것이 곧 자기 속에 움직이는 맘을 누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봉학이는 이감사의 부탁대로 선치수령이 되려고 뼈물었다. 봉학이는 무
변이라 먼저 무비에 힘을 썼다. 읍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수선하고 대수산, 오소
포, 서귀포의 방호소와 수전소를 가끔 나가 순시하고 현내에 있는 열군데 봉화
대에 각각 다섯 패로 번을 서는 봉군들을 각별히 신칙하고, 사흘에 한번 좌우
병방 이하 장교들을 모아서 활을 쏘이되 한 달에 한 번씩은 다른 관속과 읍촌
인민의 활 쏠 줄 아는 자까지 다 불러서 편사를 쏘이었다. 편사 쏘는 날은 구경
오는 남녀가 수가 없었는데 그중에는 제주나 대정땅에서 밥 싸가지고 오는 구경
꾼도 적지 않았다. 정의원님의 활재주가 귀신 같다고 소문이 한 입 두 입 건너
널리 퍼진 까닭에 편사보다 정의원님 활재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무비가 대강 정돈되며부터 봉학이는 치민에 성심을 다하였다. 뇌물이 관문에 들
어오지 못하게 하고 아전이 민간에 작폐하지 못하게 하고 또 토호가 발호하지
못하게 하니 살판 만난 백성들은 곧 원님을 신명같이 여기게 되었다. 우매한
백성들이 원님에게 한껏 정성을 피우느라고 각처 본향당에서 우리 안전 수명 장
수하라고 또는 우리 안전 오래 갈리지 말라고 치성드리는 남녀가 많았다. 그 해
겨울 전라도 각골 수령 포폄에 정의현감은 “삼월지치가 일도지송이라.”고 상
등이 되었다. 석 달 동안 다스린 정사가 온 섬에서 다 기리는 바라고 책방이 포
폄 뜻을 새겨서 들려줄 때 봉학이는 선치수령 노릇하기가 어려울 것 없다고 생
각하였다. 이듬해 봄에 대정현감이 상제 되어 가고 대가 나기 전에 공관이 되어
서 봉학이가 제주목사의 명으로 겸관을 보게 되었는데, 정의서 여러 달 두고 하
던 정사를 대정서는 일시에 시행하였으나 백성은 따르고 관속과 토호는 거스르
지 못하였다. 두어 달 동안 봉학이가 정의서 대정을 왕래하며 겸관을 보는 중에
농시백성을 인록 잡지 못하도록 엄령을 내리었었는데, 정의 와서 있는 사이에
대정성내에 사는 고부윤의 현손 되는 고씨의 집에서 인록을 잡아간 일이 있어서
봉학이가 뒤에 알고 고씨 대신으로 고씨의 집 하인을 잡아다가 징치하였더니 고
씨의 떨거지는 고사하고 고씨네와 한동가리지는 양씨,부씨, 문씨네까지 속으로
좋아 아니하였다. 인록을 엄금한 탓으로 봉학이가 이해 여름포폄에는 중을 맞았
다. “소민수개회혜나 거실간혹유언이라.” 고 큰성바지의 뒷말 있단 것이 포폄
에 폄이 되어서 상이 되지 못한 것이었다. 봉학이가 제주 갔을때 인록을 금할
것인가 아닌가 목사에게 품하여 본즉 “금하긴 금하더라도 보아가며 금하오.”
목사의 대답이 분명치 못하였다. “보아가며 금하라시니 무엇을 보란 말씀입니
까?” “오래된 관습이니 차차로 금하도록 하란 말이오.” “오래된 관습인 까
닭에 더욱이 일시에 엄금해야 할 것이 아니오니까.” “예전에 성주니 왕자니
하고 제주 주인 노릇하던 버릇이 뿌리가 깊어서 그렇게 쉽사리 금해지지 않소.
” “하관에게 죄책을 더하지 않으시면 그런 관습은 근절이 되도록 금해 보겠습
니다.” “근절 안될 걸 근절시키려다가는 말썽만 자주 날 게니 알아 하오.” 목
사가 굳세게 거들어 주지 않는 것을 보고 봉학이는 토호를 어루만져서 무사히
지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 뒤로는 봉학이가 고씨,문씨의 붙이들을 가끔 존문하
고 토호질을 말도록 사의로 말하여 인록 같은 못된 관습이 전같이 심하지 않았
다. 당하수령은 육 년 만에 갈리는 것이 법이나 윤원형이 권세를 잡은 뒤로 법
이 해이하여져서 여간 무세한 수령이 아니면 좋지 못한 골에서 육 년을 채우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봉학이가 정의에 육 년토록 있고 싶지 않아서 이감
사께 상서할 때 매양 이 뜻을 비치었다. 그 동안 인편에 상서한 것도 여러 순이
지만 골 하인을 보낸 것이 세 번인데 나중 하인 한번은 이감사가 경기감사로 일
년 과만을 채우고 한성부우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 벼슬이 옮은 뒤라 봉학
이도 내직으로 올라가서 전과 같이 뫼시고 지내기를 청하였더니 그 하인 회편에
차차 주선하여 보자는 반허락 회답이 있었다. 봉학이가 골 하인을 보낼 때마다
교하 외숙에게와 양주 꺽정이에게도 약간 토산을 부치는데 외숙에게는 외조모
제사에 쓸 제수를 미리 닦아 부치고 꺽정이에게는 칠장사 선생에게 보낼 물종을
같이 봉해 부치었었다. 봉학이는 꺽정이의 연신으로 팔십여 세 노인 대사가 아
직 강녕한 것도 알았거니와 유복이가 평안도서 와서 부모의 원수 갚고 송도땅에
서 사는 것도 알았고, 천왕동이가 황해도에 가서 장가 들고 처가살이하는 것도
알았다. 천왕동이는 꺽정이의 처남으로 알 뿐이라 보고 싶은 생각까지 날 것은
없지마는, 유복이는 아이 적에 형이니 아우니 하던 동무라 이따금 보고 싶은 마
음이 간절할 때도 있었다. 지난번 꺽정이에게 편지할 때 한번 유복이를 데리고
와서 몇 달 놀다 가라고 말하였더니 꺽정이에게서 육로 천 리, 수로 천 리에 놀
러가기가 쉽지도 않거니와 자기나 유복이나 원님의 손님 노룻할 주제가 못 된다
고 거절하는 회답이 왔었다. 봉학이가 한번 서울을 올라갔다 오려고 생각하고
먼저 계향이에게 의논하니 계향이는 “수이 내적으로 옮기실 테라면 먼 길에 왔
다갔다 하실 것 무어있소.” 하고 그만두면 좋을 뜻을 말하였다. “그렇게 쉽게
내직으루 옮기게 될지 누가 아나.” “지난번 구사또 서간에 그런 말씀이 기셨
다고 하셨지요.” “차차 주선해 보자는 허락은 기셨지만 그것두 한번 가서 보
입구 말씀으루 품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 “상서로 사뢰어도 구사또께서 어
련히 나으리 일을 생각해 주시리까.” “여러 가지 볼일이 있으니까 겸두겸두
가볼까 하는 말이야. 부모 산소에 소분두 한번 해야지 남의 자식된 보람이 있지.
” “외조모님은 산소에 소분해 달라고 유언까지 하셨다지요?” “외할머니 덕
으루 잔뼈가 굵어진 사람이 그만 유언을 이때까지 한번 시행 못한 것두 도리에
틀리는 일이지.”“전주서부터 별러 오시는 일이니 조금 더 미루어 두시구려.”
“꼭 수이 서울루 가게 된다면 모르지만 여기서 육 년 과만을 채우게 될지 누가
아나.”“올안에 내직으로 승탁되실 테니 염려 마시고 기다리세요.”“염려 말구
기다리란 품이 바루 승탁을 시켜줄 사람의 말 같네그려.”“내 말이 맞을 테니
두고 보셔요.”“만나보구 싶은 사람두 있구 아무래두 맘 내키는 김에 한번 가
야겠어.”“만나보구 싶으신 사람은 누군가요?”“내직으루 승탁될 것을 미리
아는 사람이 그건 어째 모르나?”“알아내라시면 알아내지요. 교하 기신 마나님.
”“잘 알았네.”“양주 사는 장사는 어떱니까?”“그래두 다는 못 알았어.”“
그외에 또 누가 보고 싶으시까. 옳지, 알았어요. 양주 장사더러 다리고 오라셨단
사람이지요. 그렇지요?”“그렇게 자꾸 주어대서 알라면이야 누가 모르까.”“그
래 정말 가신다면 나는 어떻게 하실 테요?”“여기 있지 어떻게 해?”“나는 싫
어요. 나으리하고 같이 갈 테요.”“같이 가면 둘이 다 비편할 테니 쓸데없는 소
리 말게.”하고 봉학이는 계향이의 같이 가겠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봉학이
는 혼자 계향이를 달래고 계향이는 혼자 떨어지지 않으려고 봉학이를 조르던 끝
에 봉학이가 서울을 갔다 오는 동안 계향이는 전주 가서 있기로 의논이 작정되
었다. 봉학이가 목사에게 수유를 받으러 제주에 올라갔을 때 마침 대정현감에게
서 목사에게 급한 보장이 올라왔는데 보장 사연은 대정 서편에 있는 죽도에 왜
적선 삼사 척이 와서 닿았다는 것이었다. 죽도서 북으로 돌면 제주요, 남으로 돌
면 정의라 대정은 말할 것 없고 제주와 정의도 미리 방비를 아니할 수 없어서
봉학이는 수유도 얻지 못하고 급히 환관하였다. 죽도에 닿았던 적선이 대정 본
토도 침노하지 않고 어디로 가버리어서 십여 일 후에 적선 소동이 가라앉았다.
봉학이가 제주를 다시 가기가 번폐스러워서 목사에게 서간으로 수유를 청하였다
가 적선 출몰하는 즈음에 공관이 부질없으니 아직 중지하란 목사의 회답을 받았
다. 봉학이는 여러 가지로 서울을 가려고 벼르다가 못 가게 되어서 괴탄하였으
나, 계향이는 늙은이와 계집아이에게 맡겨둔 전주집을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마는 단 한 달 동안이라도 봉학이와 떨어지기가 싫은 까닭에 되레 해
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달포뒤에 서울 인편이 있어서 봉학이가 이우윤께 상서하
는데 올에는 꼭 한번 가서 뵈오려고 하다가 적선 소동에 수유를 못 얻고 말았다
고 말씀하였더니, 그 다음 이우윤의 답장에 조금 더 참으면 자연 서울 와서 보
게 될는지 모르니 구태여 수유 얻어가지고 오지 말란 뜻의 사연이 있어서 봉학
이는 서울 갈 생각을 접어놓고 내직으로 옮길 날을 기다리고 지내었다. 이우윤
의 주선으로 봉학이의 벼슬이 오위부장으로 옮아서 이봉학이가 정의서 떠날 준
비를 차릴 때 정의 백성들이 관가에 원류 들어오는 것은 고사하고 제주목사에게
등장들까지 올라갔다. 봉학이가 계향이를 데리고 제주로 떠나는 날 읍촌 백성
남녀노소 천여 명이 말머리에 결진하고 길을 터주지 아니하여 봉학이는 할 일
없이 관가로 다시 들어와서 서간으로 목사께 행지를 취품하였더니 목사가 새 현
감 내려오기까지 있으라고 회답하여 봉학이는 구관으로 골 일을 보고 있게 되었
다. 봉학이가 모든 일을 전과 같이 보되 오직 전에 없이 계향이를 데리고 각처
로 구경을 많이 나다녔다. 어느 날 조연에 나가서 게를 잡고 놀다가 그날 묵고
이튿날 읍으로 들어오는데 마중나온 사령이 서울서 하인이 왔다고 말하여 어디
서 하인이 왔을까 의심하며 관가로 들어왔다. “그 하인이 어디 있느냐? 불러들
여라.”하고 사령에게 분부하였더니 얼마 만에 사령만 들어와서 “그 하인이 객
사 앞 술집에 가서 술을 먹구 있습니다.”하고 아뢰었다. “술을 먹는다구 부르
지 않았단 말이냐?”“안전께ㅂ서 부릅신다구 말씀을 했솝드니 술을 좀더 먹구
들어온다구 일어나지 않습디다.”“변변치 않은 놈두 다 많다. 내가 기다리구 있
다구 얼른 들어가잔 말을 못했단 말이냐!” 봉학이가 그 하인을 곧 불러오라고
다른 사령들을 다시 내보냈다. 한동안 뒤에 몸을 가누지 못하도록 술이 취한 사
람을 사령들이 좌우 부축하고 들어오는데 봉학이가 ‘대체 어디서 온 완만한 하
인인가.’하고 생각하며 들어오는 하인을 내다보다가 별안간 “아, 이게 누구요?
”하고 소리치며 곧 뜰 아래로 쫓아내려갔다.
제주목사나 점마별성이 노문 놓고 행차할 때 원님이 나가서 지경에 등대하거
나 중간에 마중하는 일은 있지마는 예사 손님이 관가에 들어올 때 원님이 방에
서 대청으로 나오는 일도 별로 없는데 손님도 아니고 하인이요, 하인도 하인 나
름이지 갓도 못 쓰고 패랭이 쓴 하인을 원님이 뜰 아래까지 쫓아내려와서 맞아
올리니 좌우에 있는 관속들이 모두 놀라서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관속들이 어이
없이 보고 있는 중에 봉학이가 패랭이 쓴 사람을 붙들고 동헌방으로 들어와서
좌정한 뒤에 “형님, 어째 소문두 없이 오셨소?”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내가
노문 놓구 다닐 주제가 되나.”하고 껄껄 웃었다. “유복이하구 같이 오셨소?”
“아니.” “그럼 혼자 오셨소?” “천왕동이하구 같이 왔네.” “천왕동이는 어
디 있소?” “제주 있네.” “같이 오시지 않구 왜 제주다 두구 오셨소?” “천
왕동이가 제주루 귀양을 오는데 내가 따라왔네.” “무슨 일루 귀양을 왔단 말
이오?” “차차 이야기함세.” “오실 때 유복이를 보구 오셨소?” “보구말구.
같이 오구 싶은데 못 와서 말을 조만히 하데.” “무슨 못 올 일이 있던가요?”
“좀 그런 일이 있어.” “유복이가 지내기는 과히 어렵지 않습디까?” “잘 지
내지.” “농사하나요?” “아니.” “장사하나요?” “아니.” “농사두 안 하
구 장사두 안 하구 어떻게 잘 지낸단 말이오?” “농사하구 장사해서 잘 지낸
수 있나.” “그럼 생화가 무어란 말이오?” “놀구 먹는다네.” “무슨 수가 생
겨서 놀구 먹을까.”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듣게.” “사람은 아직 적같이 진
실하지요?” “그럼 진실하구말구.” “장가는 잘 들었소?” “잘 들었지.” “
유복이 안해를 보셨겠지.” “보다뿐인가. 친수숙같이 지내네.” “자녀간 무얼
낳소?” “혼인한 지는 벌써 삼 년인데 아직 생산은 못했어.” “참말 친환은
좀 나으시우?” “나실 리가 있나. 점점 더하시지. 올 여름에는 꼭 일을 당하는
줄 알았더니 생량한 뒤부터 다시 좀 그만하셔서 내가 떠나왔네.” “누님 아주
머니 다 무고하구 백손이 잘 있소?” “아직 별고들 없네.” “칠장사 선생님
문안 자주 들으셨소?” “올 봄에 내가 잠깐 가서 보입구 왔네.” “근력이 전
과 같으십디까?” “근력 좋으신 품은 아직두 몇십 년 더 사실 것 같데.” “올
에 여든 몇이시던가?” “여든넷이시지.” “나두 이번에 서울 올라갈 때 선생
님을 보입구 가려구 생각하우.” “참말 내직으루 올라가게 되었다지. 나는 제주
와서 들었네.” “내가 요전 떠나려구 작정한 때 떠났더면 이렇게 못 만나구 길
에서 교위될 뻔했소.” “제주서두 들었지만 아까 술집에서 여러 사람의 말을
들어 보니 전에 없는 명관이라구들 하데. 나두 듣기 좋데.” “백성이 아직 우매
하니까 원노릇하기가 과히 힘들지 않습디다. 그렇지만 명관 값에야 갈 수 있소.
단지 내 전에 여러 등내 명관이 없었던갑디다.”
봉학이가 그제야 뜰 위 뜰 아래에 우뚝우뚝 섰는 관속들을 내다보고 다 물려
내보낸 뒤에 “곤하시거든 좀 누우시려우?”하고 꺽정이더러 물었다. “곤하긴
무어 곤하겠나?” “아까 보니 술이 꽤 취하신 것 같습디다.” “임꺽정이가 사
십 평생에 처음 원님 기신 동헌에 들어오느라고 좀 취한 체했네.” “그럼, 우리
내아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다가 저녁을 먹읍시다.” “아무리나 하세.” 봉학이
가 꺽정이를 데리고 내아로 들어왔다.
계향이가 봉학이의 큰기침 소리를 듣고 방에서 마루로 쫓아나오다가 패랭이
쓴 사람과 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해괴하게 생각하면서 마루 한구석에
비켜섰다. 봉학이가 꺽정이를 방으로 인도하고 계향이를 돌아보며 “양주 장사
가 오셨으니 들어와 보입게.”하고 말하였다. 양주 장사 임꺽정이가 백정의 자식
인 줄은 계향이가 전에 들어 알건마는, 패랭이 쓴 것을 눈으로 볼 때 장사는 놀
라웁지 않고 백정은 창피하여 마루에서 한동안 주저주저하고 있다가 “얼른 들
어오게.” 봉학이의 재촉을 받고 방에 들어와서 “어서 보입게.” 또다시 봉학이
의 재촉을 받고 절 한번 하였다. 계향이는 꺽정이에게 인사를 마치고 곧 도로
마루로 나가고 봉학이는 꺽정이에게 유복이의 이야기를 다시 묻기 시작하였다.
“유복이가 장가를 숫색시에게 들었소?” “남의 마누라를 첫날밤에 가로채었
다네.” “남의 기집을 가로채구 무사했소?” “마누라 뺏긴 자가 귀신이여.”
“귀신이라니? 기집 뺏긴 사내를 죽였단 말이요?” “참말 귀신이여.” “참말
귀신이라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 “유복이가 장가를 희한하게 들었네. 내
이야기하께 들어보게.”
꺽정이가 유복이의 장가든 것을 이야기하느라고 유복이의 소경력을 거의 다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강령 가서 부모의 원수를 갚은 것을 이야기한 다음에 맹산
가서 앉은뱅이 병을 앓는 동안 표창질 익힌 것을 이야기하고, 또 덕물산 장군당
새마누라 가로챈 것을 이야기하다가 최영 장군의 귀신이 영검해서 산 사람 마누
라 얻는 것을 이야기하여 이야기가 올라가고 내려가고 또 가로새어 가리산 지리
산이 될 때가 많았으나 봉학이는 갈피를 찾아 물어가며 재미나게 들었다. 그 동
안에 날이 벌써 어두워서 관비 하나가 방에 들어와서 촛불을 켜놓고 “저녁 진
지를 어떻게 하라십니까?”하고 물으니 봉학이는 상을 곧 들이라고 분부하였다.
봉학이가 꺽정이와 같이 저녁을 먹어가며 유복이가 장군당 마누라를 빼가지고
맹산으로 도망하는 길에 청석골 도적 오가의 집에 가서 같이 사는 이야기를 마
저 들었다.
“유복이가 지금 도적질을 하는구려.” “도적두 이만저만한 도적이 아니라
댓가지 도적이라구 유명짜한 도적이라네.” “댓가지 도적이란 건 무슨 별명이
오?” “인명을 상하지 않으려구 댓가지루 만든 표창을 쓰는 까닭에 생긴 별명
이여.” “형님에 가까이 있으면서 유복이를 도적놈 노릇하게 내버려 둔단 말이
오.” “내버려 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가 무어요? 그 자식
을 붙들어다가 농사를 시키든지 장사를 시키든지 하지 못한단 말이오.” “농사
나 장사 시키려구 적굴에서 데려 내왔다가 포교 손에 잡혀 보내면 도적질두 못
해먹구 죽지 않나.” “내가 서울 가선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바루잡아 주어
야겠소.”
꺽정이는 대답이 없었다.
저녁상을 물린 뒤에 봉학이가 꺽정이를 데리고 다시 동헌으로 나왔다. 봉학이
가 천왕동이의 귀양 온 곡절을 물어서 꺽정이가 배돌석이의 살인한 이야기를 시
작할 때 통인 하나가 방에 들어와서 “내아에서 듭시라구 여쭙니다.”하고 아뢰
니 봉학이가 “왜?”하고 통인을 바라보았다. “안으서님께서 잠깐 뵈입겠다구
하신답니다.” “글쎄, 무슨 일이 있다느냐?” “그건 알지 못하옵니다.” “다
시 가 일아보아라.” 통인이 염석문 밖에서 관비를 불러서 물어보고 다시 나와
서 “안으서님께서 무슨 일은 말씀 안 합시구 잠깐 내아에 듭시라구만 여쭈라십
니다.”하고 아뢰었다.
봉학이가 속으로 밤참할 것을 의논하려고 부르나 생각하며 꺽정이를 보고 “
잠깐 들어가 보구 나오리다.”하고 곧 일어서 내아로 들어왔다.
봉학이가 내아 층계 위에 올라설 때 계향이가 마루 끝에 나와서 맞았다. “왜
부른 거야?” “잠깐 방으로 들어가세요.” “할 말이 있거든 여기서 하게.” “
조용히 할 말씀이 있세요.” “조용히 할 말이 무어야?”하고 봉학이가 마루로
올라왔다. 봉학이와 계향이가 방에 들어와서 단둘이 마주 앉은 뒤 봉학이가 다
시 “조용히 할 말이 무어야?”하고 물으니 계향이는 “무에 그렇게 급하세요.
”하고 상글상글 웃었다. “재미나는 이야기를 듣다 말구 들어왔어.” “무슨 이
야기가 그렇게 재미나셔요.” “이야기를 같이 듣구 싶은가?” “아니오. 그런데
오늘 밤에 동헌에서 손님하고 같이 주무실랍니까?” “그래. 그건 왜 묻나?”하
고 봉학이가 물끄러미 계향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계향이의 손을 잡아당기며
귓속말로 “손님만 동헌에서 재우구 나는 들어와 자까?”하고 웃었다. “점잖지
않게.”하고 계향이가 얼른 손을 빼어 가지고 따로 앉아서 “정한 사처 하나를
치우고 손님을 나가 주무시게 하면 어떠까요?”하고 물으니 봉학이는 “왜 그
래?”하고 괴상히 여기는 기색을 보이었다. “글쎄 말이에요.” “글쎄 말이라
니, 그렇게 해야 좋을 일이 있나?” “내 소견엔 그렇게 했으면 좋을 것 갔애요.
” “어째서?” “패랭이 쓴 손님을 동헌에서 재우면 뒤에 말썽이 없을까요?”
“말썽이 무슨 말썽이야.” “관가 동헌은 사사집과 달라서 지금 오신 손님 같
은 이를 재울데가 못 되지 않아요.” “별 우순 소리를 다하네.” “목사가 알면
탈이 있을까 보아 걱정이에요.” “목사가 지금 나하구 무슨 상관이 있어서 걱
정인가.”“관속이나 백성들의 입도 무섭지요.” “아따, 쓸데없는 걱정 되우 하
네.”하고 봉학이가 증을 내니 “소견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면 고만이지 화까
지 내실 거 무어 있세요?”하고 계향이도 새촘하였다. 봉학이가 잠깐 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내가 백정의 아들을 보구 형님 형님 하는 것이 맘에 창피한가?
”하고 계향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 뒤를 이어서 “사람이 그래선 못 쓰
네.”하고 타이르듯 말하였다.
“내야 창피할 것이 무에요.” “자네가 아이 적부터 언니 동생하구 지내던
동무가 있다구 하세. 그 동무가 시집을 잘 가서 숙부인이나 정부인을 바친 뒤에
자네가 찾아갔는데 자네를 기생이라구 소대하면 자네 맘이 어떻겠나. 괘씸할 테
지. 아무리 염량을 보는 세상이라두 사람이 그 동무 같아서야 쓰겠나. 더구나 사
내 대장부가.” “네, 잘 알았세요.” “잘 알았거든 밤참으로 술상이나 잘 차려
내보내게.”하고 봉학이는 일어섰다.
봉학이가 동헌에 나온 뒤에 중간 그친 꺽정이의 이야기를 다시 듣기 시작하였
다. 돌석이가 양반의 집 비부 노릇하다가 양반의 행랑 출입하는 버릇을 가르치
려고 양반 이마와 계집 눈자위에 자자해준 이야기를 듣고 봉학이는 한동안 허리
를 잡고 웃고 나서 “돌석이가 황주서 살인한 이야기나 마저 들읍시다.”하고
꺽정이의 이야기를 재촉하였다. 호랑이 잡고 경천역말서 역졸 노릇하고 계집 사
단으로 살인하고 봉산 와서 잡혀 갇힌 돌석이 이야기와, 사위 취재 보이고 득배
잘하고 장교 다니고, 유복이와 돌석이를 빼어놓고 그 언걸로 귀양 온 천왕동이
이야기가 뒤범벅이 되어서 이야기를 잘 알아듣는 봉학이로도 연해 재차 묻지 않
으면 돌석이 이야긴지 천왕동이 이야긴지를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밤이 든
뒤에 진 안주 마른 안주가 늘어놓인 술상이 밤참으로 나와서 봉학이는 꺽정이와
같이 술을 먹기 시작하였다.
“내가 형님과 술을 같이 먹는 것이 삼 년 만이구려.” “삼 년 동안이 맘에
는 삼십 년이나 될 것 같애.” “내가 서울 가면 자연 형님을 만날 테지만 여기
서 미리 만나기는 참말 뜻밖이요.” “내가 집에서 떠나기 전에 자네 벼슬이 갈
릴 줄을 알았더면 여기를 안 왔을는지 모를 걸세.” “모르구 오기를 잘했소. 제
주 세 골루 다니며 구경이나 하구 나갈 때 같이 갑시다.” “그건 봐가며 작정
하세.” “한라산은 한번 올라가 봐야지요.” “한라산은 전에 선생님 뫼시구 왔
을 때 올라가 보았네.” “참말 제주가 이번이 초행이 아니구려.” “자네가 여
기서 떠나기 전에 천왕동이의 귀양이나 풀리게 주선해주게.” “여기서는 도리
가 없으니까 서울 가서나 주선해 봅시다.” “제주목사에게 청해서 될 수 없나?
” “내가 한번 제주 가서 목사께 청하구 판관에게 부탁하면 귀양살이는 좀 편
하게 살 수 있을 게요.” “천왕동이는 자네가 힘쓰면 풀리게 될 줄 알구 나하
구 같이 오는 것을 퍽 좋아했는데 그거 안됐네.” “죄명이 중하지 않으니까 내
가 서울 가서 주선하면 곧 풀리게 할 도리가 있을 듯하우.” “자네두 알다시피
천왕동이가 성미는 바상바상한 위인이 갓 정든 안해를 떨어져서 지금 하루를 일
년같이 보내네.”“내가 수이 한번 제주를 가서 천왕동이를 보구 말두 일르구
또 천왕동이 일을 부탁두 하리다.” “ 수이라구 할 거 없이 내일 가세.” “내
일은 좀 어렵구 모레쯤 가지요.” “자네 힘으루 곧 풀어주지 못할 줄은 짐작
못한 건 아니지만 혹시를 바랐더니 틀렸네그려.” “술잔 식소. 어서 술이나 잡
수시우.” “천왕동이만 떼놓구 갈 일을 생각하니까 술맛이 다 없어지네.” “형
님이 꽤 심약해졌소그려.” “속을 썩히며 한세상을 약약하게 지내려니까 맘이
한편으룬 약해지구 한편으룬 독해지데.” “약해지면 약해지구 독해지면 독해지
지 어떻게 한꺼번에 약해지구 독해지구 한단 말이요.” “글쎄, 내 맘이라두 나
는 모르겠네.” “자, 술 잡수시우. 나두 오늘 밤엔 오래간만에 한번 취투룩 먹
어 보겠소.” “그 동안엔 원님 노릇 하느라구 술을 조심했나?” “조심은 둘째
치구 대관절 대작할 사람이 없으니까 취투룩 먹어지지 않습디다.” “그럼, 자
먹세.”
둘이 권커니잣커니 먹느라고 술을 네 번이나 더 내왔다. 술기운이 팔구 분 오
른 뒤에 꺽정이가 봉학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자네는 대체 이 세상이 어떻
다구 생각하나?”하고 물었다. “어떻다니 무슨 말이오?” “좋은 세상이냐 망
한 세상이냐 묻는 말이야.” “글쎄 좋은 세상이라군 할 수 없겠지.” “내가 다
른 건 모르네만 이 세상이 망한 세상인 것은 남버덤 잘 아네. 여보게 내 말 듣
게. 임금이 영의정감으루까지 치든 우리 선생님이 중놈 노릇을 하구 진실하기가
짝이 없는 우리 유복이가 도둑눔 노릇을 하는 것이 모두 다 세상을 못 만난 탓
이지 무엇인가. 자네는 그렇게 생각 않나?”하고 꺽정이가 흰자 많은 눈으로 봉
학이를 바라보았다.
꺽정이의 입에서 말이 부프게 나올 때 눈동자 위로 흰자가 많이 나오는 것은
아이 적부터 있던 버릇이라 봉학이가 꺽정이를 보고 웃으면서 “형님 눈 괴상하
게 뜨는 버릇이 그저 남았구려. 동소문 안에서 같이 지낼 때 내가 곧잘 형님 눈
을 흉내내었더니 형님이 나를 가르쳤다구 우리 외할머니가 형님을 야단친 일까
지 있지 않소. 형님, 생각나우?”하고 이야기를 달리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꺽정이는 가볍게 “그랬던가” 한마디로 봉학이 말을 막고 자기의 하고 싶은 말
을 계속하였다.
“자네는 나더러 유복이를 도둑눔 노릇하게 내버려 두었다구 책망하지만 양반
의 세상에서 성명 없는 상놈들이 기 좀 펴구 살아보려면 도둑눔 노릇밖에 할 게
무엇 있나. 그 전에 심좌랑이 우리보구 반석평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했었
지. 남의 집 종의 자식으로 재상까지 되었을 젠 여간 좋은 운수를 타구난 사람
이 아닐 겔세. 예전부터 오늘날까지 수없는 종의 자식에 잘난 사람이야 반석평
이 하나뿐이겠나. 우선 우리 알기에두 홍주 서기 같은 사람은 효행 있구 행검
있구 글두 잘한다네. 그 사람이 나이 우리버덤 두어 살 아래니까 앞으루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제나 내나 그대루 썩었지 별조 있겠나. 그 사람이 양반의 집
종의 자식이 아니구 양반의 자식이었으면 벌써 대사성이니 부제학이니 들날렸을
것일세. 내 생각을 똑바루 말하면 유복이 같은 도둑눔은 도둑눔이 아니구 양반
들이 정작 도둑눔인 줄 아네. 나라의 벼슬두 도둑질하구 백성의 재물두 도둑질
하구 그것이 정작 도둑눔이지 무엇인가.”
꺽정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봉학이는 꺽정이의 말이 끝난 뒤에 긴 한숨
을 한번 내쉬고 “형님, 그런 속상하는 이야기는 고만두구 다른 이야기나 합시
다.”하고 말하였다. “무슨 이야기가 있어야지. 청석골 도둑눔들 이야기나 해
들려줄까?” “유복이와 돌석이 외 졸개들 이야기요?” “유복이와 돌석이 외에
괴수가 둘이나 더 있다네.” “아주 대적패요그려. 그 괴수들도 다 비범한 인물
이오?” “하나는 성명이 곽오주구 하나는 성명이 길막봉인데 둘 다 힘꼴들 쓰
는 사람이야.” “그자들은 청석골 붙백이 도둑놈들이오?” “아니 유복이버덤
뒤에 도둑눔 된 사람일세.” “그자들의 도둑놈 된 내력두 들을 만한 게구려.”
“길막봉이가 남의 집 처녀를 훔친 것두 이야깃거리가 되지만 곽오주가 제 자식
을 죽인 것은 희한한 이야깃거린 줄 아네.” “제 자식을 죽이다니, 천하에 흉악
한 놈이구려.” “흉악한 놈인가 불쌍한 놈인가 내 이야기를 듣구 말하게.”하고
꺽정이가 이야기를 시작하여 먼저 곽오주의 일을 되숭대숭 다 이야기하고 다음
에 길막봉이 일까지 대충대충 이야기하였다. 그 동안에 밤이 이미 깊어서 “미
진한 이야기는 두었다 하구 고만 잡시다.”하고 봉학이가 통인을 불러서 술상을
치우고 자리를 펴게 하였다.
자리에 누운 뒤에 꺽정이가 “가리포 싸움 이야기나 좀 듣세.”하고 말하니
봉학이가 “형님 곤하지 않소?”하고 묻고 그 다음에 한동안 자기의 지난 일을
대강 이야기하였다.
꺽정이가 봉학이를 찾아오던 날부터 며칠 동안 정의읍내에서는 원님 찾아온
손님 이야기가 자자하였다. “원님 찾아온 손님이 상놈이랍디다.” “상놈이 다
무어요? 백정놈인갑디다.” “우리 안전하구 척분으루 형님 아우 한다니까 백정
놈은 아니겠지.” “그 손님이 힘이 천하 장사라우.” “우리 안전께서 영암 전
장에서 손님이 힘을 보신 일이 있답디다.” “남방어사가 영암 북문 밖 싸움에
죽게 된 것을 그 손님이 살려냈는데 무슨 군령을 어기었다구 남방어사가 인정없
이 효수시키려구 하는 것을 우리 안전께서 빼놔 주셨다우.”
정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꺽정이의 일을 말들 하였는데 말근본은 대개 나 내
아 관비의 입에서 나왔었다.
봉학이는 꺽정이를 관가에서 묵히고 싶었으나 꺽정이와 자기가 모두 비편하여
관가 근처에 정한 사처를 정하여 나가서 묵게 하고, 또 천왕동이 일을 전위하여
제주에 올라가서 초하루 보름 점고날 외에는 마음대로 쏘다녀도 좋도록 부탁하
여 천왕동이도 정의 와서 꺽정이 사처에서 같이 묵게 하였다. 봉학이가 꺽정이
와 천왕동이를 데리고 각처로 구경도 돌아다니고 사슴 사냥질도 나다니어서 한
반 달 심심치 않게 보내었다. 이 동안에 새 현감이 제주 내려왔단 기별이 와서
봉학이가 정의를 떠나는데 꺽정이는 천왕동이를 데리고 먼저 제주로 간 까닭에
봉학이의 일행은 계향이와 책방뿐이라, 인마 통히 합하여 열이 넘지 못하나 정
의 관속 백성 천여 명이 제주까지 쫓아왔었다. 봉학이가 제주서 떠날 때 정의
사람들은 뱃머리에 와서 하직하여 눈물을 뿌리고 천왕동이는 언덕 위에 주저앉
아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정의 사람의 하직을 받느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몽
학이와, 천왕동이더러 들어가라고 손짓하는 꺽정이가 둘이 다 눈에 눈물이 괴었
었다.
봉학이가 전주 와서 책방을 작별하여 보내고 계향이는 서울 전접하는 동안 있
으라고 떼어놓고 꺽정이와 같이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길을 돌아 죽산 칠장사에
들어가서 팔십 노인 선생을 뫼시고 수일 지내고 다시 꺽정이와 같이 떠나서 서
울로 올라왔다. 꺽정이가 양주집으로 내려간 것은 말할 것 없고 봉학이는 서울
입성하여 곧 이윤우댁을 찾아가서 문안하고 다음날 비로소 궐하에 숙배하고 또
그 다음날부터 의흥중위인 외소에 출사하였다.
전란이 없는 평시에는 오위 각소가 다 일없는 마을들이라 봉학이가 마을일을
알게 되자마자, 곧 자기 벼슬이 재미가 없어서 이우윤께 이 뜻을 말씀하였다가
벼슬이란 재미를 취해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꾸중을 듣고 다시 두말 못하였
다. 봉학이는 벼슬이 한가한 덕에 말미 얻기가 쉬워서 서울 문밖에 있는 부모
산소와 교하에 있는 외조모 산소에 소분할 뿐 아니라 교하 외숙에게와 양주 꺽
정이에게로 돌아다니며 여러 날을 묵었다. 유복이는 꺽정이 집으로 불러다가 처
음 만날 때 봉학이는 “유복아!”하고 부르고 유복이는 “봉학 언니.”하고 부르
고서 한동안 둘이 다 뒷말을 잇지 못하여 갑자기들 벙어리가 되었느냐고 애기
어머니에게 조소까지 받았었다. 청석골 가서 유복이를 불러온 사람은 꺽정이의
집에서 일해주는 새원 사람 신불출인데, 봉학이가 나중에 신불출이의 내력을 들
으니 다르내재에서 도적놈 노릇하던 중에 유복이 손에 혼이 나고 그 길로 훌륭
한 농군이 되어서 늙은 어미와 어린 자식을 기르다가 어미도 죽고 자식도 죽은
뒤에 평일 우러러보는 꺽정이에게로 와서 새경도 안 받고 일하는 사람이었다.
봉학이가 유복이를 보고 “신불출이 보기가 부끄럽지 않은가.”하고 말하니 유
복이가 머리를 숙이고 한숨만 쉬었었다.
봉학이가 양주서 올라온 뒤에야 비로소 이우윤댁 근처에 작은 초가집을 장만
하고 계향이를 데려다가 같이 살림을 하게 되었는데, 교하 안해가 외숙과 같이
올라온 것을 봉학이가 인정없이 도로 쫓아 내려보냈더니 불과 며칠 뒤에 안해가
죽었다는 기별이 와서 봉학이는 다시 교하 내려가서 죽은 안해를 감장하였다.
수문장이 따로 없고 사품 이상 무변들이 번차례를 돌려가며 궐문과 성문을 수
직하던 때나 사품 이상 무변들이 흔히 자기 마을의 아래 동관들을 대신 시키는
까닭에 이봉학이도 위장들을 대신으로 여러 차례 창덕궁, 경복궁 두 대궐문을
수직하였다. 왕대비전하 왕전하가 다 창덕궁에 와서 계신 중에 어느 날 봉학이
가 금호문을 수직하게 되었는데, 이날 다 저녁때 기생같이 치장을 차린 하님 하
나가 보자로 싼 목판을 머리에 이고 문앞에 와서 “영부사댁이오.” 말 한마디
하고 바로 궐내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군사가 막지 아니하여 봉학이가 앞으로
나서서 “내 말두 들어보지 않구 어디를 들어가!”하고 가로막았다. “영부사댁
에서 왔단 말 듣지 못했소?” “영부사댁에서 왔더래두 수직하는 관원의 허락을
받구 들어가야지.” “그래 나를 못 들어가게 하겠단 말이오?” “영부사댁 하
님이면 권문 출입하는 법을 잘 알겠네그려.” “누가 모른답니까?” “알거든
어서 선인문으로 가게.” “왜 선인문으로 가라오?” “아는 건 무얼 알았나. 이
금호문은 조신이 드나드는 문이구 돈화문은 대간이 드나드는 문이구 자네 따위
드나드는 문은 선인문이야. 어서 그리 가게.” “별소리 다 듣겠소. 우리는 이때
까지 이 문으로 드나들었소.” “거짓말 아닌가?” “누가 당신하고 말하잡디까.
”하고 하님이 눈을 똑바로 뜨고 얼굴을 치어다보니 봉학이가 괘씸한 생각이 왈
칵 나서 “맨망스러운 년이구나.”하고 꾸짖었다. “누구더러 년이래?” “네년
더러 년이라구 못한단 말이냐!” “사람이 살려니까 별꼴을 다 보겠네.”하고 하
님이 혼잣말하는 것을 봉학이가 “무엇이 어째! 이년, 다시 한번 말해 봐라!”하
고 호령할 때 마친 궐내에서 재상 하나가 퇴궐하여 나오니 봉학이와 하님이 다
같이 한옆으로 비켜서서 재상의 나오는 길을 틔워 놓았다. 재상이 문밖에 나오
자 비켜섰던 하님이 앞으로 쫓아나오며 “아이구 미동 대감마님, 쇤네 좀 보십
시오.”하고 소리를 질러서 그 재상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네가 영부사댁 정
경부인 시녀 아니냐?”하고 하님을 알아보았다. “대비마마 저녁 수라에 드릴
찬을 가지고 왔는데.” 하님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재상이 “수라간 찬보다
좋은 찬이 무엇이니?”하고 물었다. “찬은 좋지 않아도 정경부인 마님이 정성
으로 바치시는 겝니다.” “얼른 들어가 바치고 가지 왜 여기 섰느냐?” “문지
기 양반이 못 들어가게 한답니다.”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럴 리가 무에요?
선인문으로 가라고 못 들어가게 해요.” 재상이 하님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
면서 봉학이를 손짓하여 부르니 봉학이가 가까이 나가서 허리를 굽히었다. “자
네 벼슬이 무엇인가?” “외소부장 이봉학이올시다.” “외소부장이야? 전에는.
” “정의현감으루 있었습니다.” “그래 서울 온 지 얼마나 되었나?” “인제
두어 달 되었습니다.” “이 금호문은 조신들이 드나드는 문이지만 저 기집하인
은 그대로 들여보내게.” 재상이 잡이를 불러 타고 간 뒤에 봉학이가 하님을 보
고 “들어가게.”하고 말하니 하님이 입속말로 알아듣지 못하게 종알종알하며
들어 갔다. 한번 들어간 하님이 다시 나오기 전에 다른 사람이 봉학이 대신 문
을 수직하러 오며 곧 뒤미처 금부 나장이가 나졸을 데리고 봉학이를 잡으러 왔
다. 그 하님이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의 신임하는 시녀 옥섬인 것과 그 재상이
윤원형의 족질 윤춘년인 것은 봉학이가 금부에 잡혀온 뒤에 비로소 알았다.
봉학이가 수문하는 관원으로 궐문 밖에서 대신댁 계집하인을 붙들고 희롱하였
다고 신문을 받았다. 봉학이가 계집을 희롱한 것이 아니라고 극구 변명하였으나
뒤에 왕대비전 분부가 있는 일이라 금부 당상들이 변명을 잘 들어주지 아니하고
주장질까지 시키었다. 형문 한두 차례 톡톡이 맞은 뒤에 봉학이가 금부에서 놓
여났으나 벼슬은 떨어지고 말았다. 벼슬 떨어진 것보다도 허물 뒤집어쓴 것이
억울하여서 봉학이는 이우윤께 하소연하려고 매일 이우윤댁에 가서 살다시피 하
거만, 이우윤이 사진하거나 출입하지 않으면 손을 보거나 안에 들어가고 봉학이
에게 하소연할 틈을 주지 아니하였다. 이우윤이 미타히 여기는 줄을 짐작한 뒤
로 봉학이는 억울한 중에 일층 더 억울하여 얼굴에 풀기까지 없어졌다. 하루 지
나고 이틀 지나고 사흘 나흘이 지난 뒤 봉학이가 이우윤댁에 가서 있다가 점심
먹으러 왔을 때, 계향이가 봉학이의 풀기 없는 얼굴을 보고 “오늘 아침에도 구
사또를 못 뵈셨구려.”하고 말하니 봉학이는 대답 없이 입맛만 다시었다. “댁에
안 기십디까?” “댁에 기시면 손님이 오셨습디까?” “손님이 안 왔으면 아낙
에 들어가 기십디까?” 계향이가 세 번 묻는 말에 봉학이는 번번이 고개만 가로
흔들었다. “그럼 왜 말씀을 못하셨소?” “책 보시어.” “책 보신다고 말씀 못
하면 어느 때 말씀하시겠소.” “나를 지금 미타히 생각하시는데 불쑥 들어가서
말씀을 여쭐 수 있나. 불러 물으실 때만 기다리지.” “공연히 비슥거리면 참말
허물이나 있는 줄로 아시지 않겠소. 이 다음엔 불러 물으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들어가서 전후사 이만저만 하다고 말씀을 여쭈시오.” “글쎄.” 봉학이가 점심
한두 술 떠먹은 뒤에 다시 이우윤댁에 와서 보니 대배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한
이우윤의 계씨 이정승이 와서 형제 같이 담화하는 중이었다. 봉학이가 바로 수
청방으로 들어와서 이정승께 문안이나 할까 생각하고 있는 중에 큰사랑에서 “
이리 오너라!” 소리가 나서 젊은 청지기가 “녜.” 대답하고 가더니 얼마 안 있
다 도로 와서 “이정의 나리, 영감께서 오라시오.”하고 말하여 봉학이는 “날
오라시어?”하고 벌떡 일어섰다. “영감께서 지금 수청방에 온 사람이 누구냐
물으시기에 나리라구 말씀을 여쭈었지요.” 청지기의 공치사같이 하는 말을 봉
학이는 듣는지 만지 하고 큰사랑에 와서 이정승께 문안한 뒤 두 손길을 맞잡고
섰다. “벼슬 떨어지고 무슨 맛에 서울 있느냐? 시굴 가서 농사나 짓지.” 이유
윤의 역증난 말을 듣고 봉학이가 허리를 굽신하며 “황송하오이다.”하고 잠깐
우물우물하다가 “소인이 벼슬은 떨어졌사오나 실상 허물은 없소이다. 이것만은
통촉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말하니 “수문하는 관원으로 궐문 앞에서
대신댁 기집하인을 희롱한 것이 허물이 아니면 무엇이 허물일까!” 이유윤의 꾸
중이 내리었다. “기집하인을 희롱한 것이 아니올시다.” “어디 네 발명 좀 들
어보자.”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려고 벼르고 벼른 봉학이가 그날 일을 자초지
정 이야기하여 발명하였다. “대신댁 기집하인이 궐내에 바치는 찬품을 가지고
왔는데 어째 얼른 안 들였느냐. 그것은 허물이 아닌 줄 아느냐?” “금호문은
조신만 드나드는 문이라구 듣자온 까닭에 얼른 들이지 않았습니다.” “조신이
못 드나드는 내전에까지 들어가는 기집하인이 금호문을 드나들지 못할 것이냐.
그만 요량도 없는 사람이 벼슬을 다니겠느냐. 벼슬 떨어진 것이 잘된 일이다. 시
굴 가서 땅이나 파먹구 살라.” 대답도 못하고 섰는 봉학이를 이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더니 슬며시 손을 들어서 나가라고 손짓하여 봉학이는 수청방으로
물러나왔다.
“벼슬 떨어지구 무슨 맛에 서울 있느냐. 시굴 가서 농사나 짓지.” “벼슬 떨
어진 것이 잘된 일이다. 시굴 가서 땅이나 파먹구 살아라.” 먼저 말씀은 허물이
있는 줄로 알고 한 말씀이고 뒤의 말씀은 사정을 다 듣고 한 말씀인데 어찌하여
뒤의 말씀이 먼저 말씀보다 더 심하실까. 이유윤의 처음 말과 나중 말을 봉학이
는 속으로 비교하고 일시 역증이 아니거니 생각하였다.
‘전 같으면 내가 그런 말을 하더라도 그만 일에 제 손으로 전정을 막아버린
단 말이냐. 지각없는 소리 말고 가만 있거라 꾸중을 하시고 뒤로 복직을 주선해
주실 듯한데 벼슬 떨어진 것이 나를 괘씸히 보신 일이 있나. 그럴 일도 없고 혹
시 당신이 환로에 싫증이 나셔서 내게까지 그렇게 말씀하셨나. 그런 눈치도 없
고 전에 없이 심한 말씀을 하실 까닭이 무엇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렇던
지 일시 역증풀이는 아니신 모양이니 인제 나는 끈 떨어진 두룽박이다. 서울 있
어 소용 없으면 말씀대로 시골로나 가보겠다. 시골로 간다면 교하밖에 갈 데가
없는데 교하는 재미 적고 전주 가서 살아볼까. 이럴 줄 알았더면 계향이 집이나
팔지 말랄 걸 공연히 자발적게 팔아 없앴지. 어느 시골이 좋을까. 산수 좋은 곳
에 초가삼간 지어놓고 전후좌우에 갖은 화초 심어놓고 꽃향내가 사철 그치지 않
는 속에 계향이의 가야금이나 듣고 누웠으면 대장부 살림살이 그만해도 족하려
니. 군총에 뽑혀서 전라도 내려가던 때를 생각하면 이정의니 이부장이니 택호를
얻은 것도 의외의 공명이다. 막이 십 년 이십 년 벼슬을 다닌댔자 나 같은 미천
한 놈에게 병수사도 차례에 안 올 것이니까 진작 벼슬을 하직하는 것도 역시 좋
다. 그러나 오뉴월 화롯불도 쪼이다 물러나면 섭섭하다지.’ 봉학이는 마음이 번
조하여져서 앉았다 섰다 하다가 나중에 ‘집에 가서 술이나 먹어볼까.’ 생각하
고 집으로 돌아오니 계향이가 기색을 살피면서 “말씀을 또 여쭙지 못하셨소?”
하고 물었다. “여쭐 말씀 다 여쭈었네.” “그럼 무슨 딴 걱정이 생겼소?” “
일껀 말씀을 여쭈었더니 벼슬 떨어진 것이 잘된 일이라구 나더러 시굴 가서 땅
이나 파먹구 살라시데.”하고 봉학이가 이우윤 형제 앞에서 말한 것을 이야기하
고 이유윤의 처음 말, 나중 말을 그대로 옮겨 들리니 계향이는 “어째 말씀이
그러실까?”하고 눈을 깜짝깜짝하다가 “옳지 알겠소. 그 말씀이 역중에서 나온
말씀이오.”하고 말하였다. “내가 잘못이 없는 줄 아시구 하시는 말씀이 더 심
하신 걸 보면 내게 따루 역증나신 일이 있는지두 모르겠네.”
“나리께 역증나신 것이 아니고 작은댁 대감께 역증이 나신 게요.” “우애가
유명하신 형제분 사이에 무슨 일에 역증을 내시겠나.” “내 생각엔 작은댁 대
감께 나리를 복직시켜 주라고 청하시다가 작은댁 대감이 잘 듣지 않으시니까 역
증이 나신 것 같소.” “내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아시기두 전에 복직을 청해
주실 리가 있나.” “설사 나리 잘못으로 낙사가 되었더라도 복직을 청해 주시
겠지요.” “내 잘못으루 낙사되었으면 복직을 청해 주실른지 모르겠네.” “아
무래도 내 생각엔 나리 복직 청하시다 틀린 것 같소.” “재미없는 벼슬 복직된
대두 맘에 좋을 거 없네. 영감 말씀대루 시굴루나 가보세.” “시굴도 좋지요.”
“이 집을 팔아가지구 시굴 가면 밭날가리쯤 집에 껴서 살 수 있으렷다.” “전
주집 판 것도 있으니까 조그마치 전장도 장만할 수 있겠지요.” “내가 술이 먹
구 싶으니 있거든 가져오구 없거든 받아오라게.” 얼마 동안 뒤에 봉학이는 술
상을 앞에 놓고 계향이의 쳐주는 잔을 한잔 두잔 거듭하면서 시골 갈 일을 다시
공론하였다.
이유윤은 봉학이 입에서 발명하는 말을 듣기 전에 봉학이가 억울하게 벼슬 떨
어진 것을 밝히 아는 까닭에 곧 보직시켜 주라고 계씨에게 청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계씨나 봉학이에게 속생각은 말하지 않고 계씨 면전에서 봉학이를 불러
다가 발명시키고 계씨의 귀를 울리도록 봉학이에게 심한 말을 하였었다. 그 계
씨가 봉학이와 같이 이유윤의 농락 속에 들어서 봉학이가 낙향할 준비를 차리는
중에 봉학이를 군기시 직장으로 복직시켜 주었다. 봉학이가 복직된 뒤 비로소
이유윤의 속생각을 깨닫고 계향이와 같이 감지덕지 말한 뒤에 낙향은 곧 파의하
고 군기시에 출사하였다. 군기시 관원은 도제조, 제조, 정, 부정, 첨정, 판관, 주부
가 직장 위에 있고, 봉사, 부봉사, 참봉이 직장 아래에 있어서 직장은 승상접하
의 성가신 일이 많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다는 속담과 같이 옥섬이의
외숙 되는 사람이 군기시 부정으로 있어서 생질녀의 금호문 사단으로 봉학이의
이름을 들어아는 까닭에 처음에 벌써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고 한 열흘 지난 뒤
로는 봉학이의 하는 일이 탈 잡을 만하면 한번 눈 덮어두는 법이 없었다. 환로
는 염량 빠른 곳이라 부정이 새 직장 미워하는 것을 알며부터 첨정, 판관, 주부
들까지 봉학이를 정답게 대하지 아니하였다. 같은 직장 한 사람이 사람이 좋아
서 봉학이의 뒤를 많이 싸주는 까닭에 봉학이가 한번 술대접을 하려고 어느 날
마을에서 나오는 길에 집으로 끌고 왔었다. 봉학이가 동관과 같이 술을 먹어가
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금호문 사단을 이야기 하였더니 동관 직장
이 “영부사댁 시녀를 금호문에 들어가게 한 것이 동관의 일인 줄을 몰랐소.”
하고 말한 다음에 “그때 시녀의 이름이 무엇이랍디까?”하고 물었다. “금부에
서 나쟁이에게 이야기를 들으니까 시녀의 이름이 옥섬인데 영부사댁 정경부인께
신임을 받을 뿐 아니라 왕대비 전하께까지 총애를 받는답디다.” “옳지, 알겠
소. 동관이 부정에게 미움받는 까닭이 있소그려.” “무슨 까닭이오?” “부정이
옥섬이의 외숙이오. 이 말이 부정의 귀에 들어가면 큰 일이니까 마을에 가선 입
밖에 내지 마우.” “인제 아니까 금호문 동티가 군기시까지 쫓아왔구려.”하고
봉학이는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봉학이가 마을에서 설움을 촉촉히 받는 중에 이우윤이 함경감사로 나가게 되
어서 봉학이는 더욱이 의지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이감사가 함경도로 떠나기
전에 봉학이가 한번 조용한 틈을 타서 마을에서 설움받는 사정을 대강 이야기하
고 다시 비장으로 따라가기를 청하니 이감사가 “지각없는 소리 마라. 지금 세
상에 벼슬을 다니자면 비위가 좋아야 하니 비위를 참고 지내 보아라.”하고 봉
학이의 청을 들어 주지 아니하였다. 이감사가 떠난 뒤에 불과 한 달이 못 지나
서 봉학이가 한번 마을에서 부정에게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분난 김에 “시녀
생질녀를 두신 양반 장하시우.”하고 들이대어서 부정이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
리기까지 하였다. 봉학이가 직장을 즉시 내버리고 싶었으나 이감사께 상서할 동
안 참으려고 마음을 먹고 함흥까지 전인을 사서 상서하였더니 전인 회편에 봉학
이에게 오는 답장은 없고 계씨 대감께 갖다 드리라는 서간이 있었다. 봉학이가
그 서간을 갖다 드린 지 이삼 일 후에 봉학이의 벼슬이 갑자기 임진별장으로 옮
기었다. 군기시 직장이 임진별장으로 나가는 것은 심한 좌천이건만 봉학이도 도
리어 다행이 여겨서 불불이 서울 살림을 거두어 가지고 임진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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