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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임꺽정이는 아비 병이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서 겨우내 집을 떠나
지 못하였다. 사람의 목숨이 모질어서 숨만 붙은 병인이 죽을 듯 죽지 않고 하
루하루 넘기어서 온겨울을 다 지냈다. 미음을 떠넣어도 맛 모르고 삼키던 병인
이 개춘이 되며부터 조금 조금 나아서 중동밥까지 달게 먹게 되었다. 아비 병이
그만한 뒤에 꺽정이는 칠장사 선생을 보러 가려고 하는데 애기 어머니가 노인
시아버지에게 옷 한 벌을 지어 보내겠다고 말하여 꺽정이가 옷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임진별장 이봉학이게서 전인으로 편지가 왔는데, 언문이나 똑똑히 볼
사람이 없어서 애기 어머니가 이웃집 최서방에게 가서 술 한 사발 사주고 편지
를 보아왔다. 그 편지에 안부의 사연은 기쁜 소식을 들려줄 것이 있으니 놀기
겸하여 나오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꺽정이가 애기 어머니의 옮기는 말을 듣고나
서 “기쁜 소식은 무슨 소식이랍디까?”하고 물으니 “편지에 기쁜 소식이라고
만 했지 기쁜 소식이 무슨 소식이란 말은 없대. 이별장이 재미있는 사람이니까
꼭 오라고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하고 애기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봉학이
가 내겐 실없은 말을 할 리가 없는데.”“글쎄 참말 무슨 기쁜 일이 있을까?”
“내게 무슨 기쁜 일이 있겠소.”“혹시 있을는지 누가 아나.”“사람이 혹시루
속아 산다지만 우리는 혹시두 바랄 게 없으니까 속구 말구 할 거 있소.” 남매
간 수작하는 말을 꺽정이 안해 백손 어머니가 옆에서 듣다가 “우리 동생이나
놓여오면 기쁠까.”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개도가 되는 것처럼 “옳다, 천왕동이
소식인가 부다.”하고 안해를 돌아보았다. “이별장한테 나하구 같이 갑시다.”
“또 주착없는 소리 한다.”“동생 소식을 들으러 간다는 게 주착없는 소리란
말이오?”“말대답이 일쑤로군.”“임자는 누님 동생이 다 한집에 있지만 나는
둘도 없는 동생이 하늘 끝에 귀양가 있소. 인정이 있거든 남의 생각도 좀 해보
시오.”“수다 떨지 말구 가만히 있어.”꺽정이는 안해를 윽박질렀다.
이튿날 꺽정이가 전인 온 사람과 같이 떠나서 임진을 나왔다. 봉학이의 기쁜
소식이란 것은 다른 소식이 아니요, 곧 천왕동이의 귀양이 풀린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제주목사께 상서할 때마다 천왕동이 말을 비쳤었소. 작년 세밑에 상서한
답장이 일전에 왔는데 그 답장에 황천왕동이는 곧 귀양이 풀릴 듯하다구 했습디
다.”봉학이의 말끌에 꺽정이는 “그거 참말 기븐 소식일세.”하고 좋아서 입을
벌리고 웃었다. “우리가 제주서 떠날 때 천왕동이가 언덕 위에 주저앉아서 울
던 것이 지금까지두 눈에 선하우.”“그애가 수이 풀려오지 않으면 나는 한번
다시 제주를 가보려구까지 생각했네.”“천왕동이가 수이 풀리게 된 것은 목사
의 힘뿐이 아니구 이정승대감의 힘두 있을 것이오.”“이정승에게두 말은 했었
나?”“세전에 문후하러 갔을 때 마침 조용한 틈이 있어서 천왕동이 죄가 애매
한 것을 조만히 말씀하구 귀양이 풀리두룩 주선해 줍시사구 청까지 했었소.”“
뉘 힘 뉘 힘 할게 있나, 자네 힘이지. 그런데 나는 내일 곧 도루 집으로 가겠네.
”“무엇이 그렇게 급하시오. 뱃놀이나 하구 메칠 놀다 가시우.”“우리 집사람
은 지금 동생의 일이 궁금해서 곧 죽으려구 하네. 이번에 기쁜 소식이 있단 말
을 듣구 동생이 놓였는가 보다구 하구 여기를 같이 오겠다구까지 하는 걸 윽박
질러서 주저앉혔네.”“왜 윽박질렀소? 갈이 오시지. 그래 가실 테면 수이 한번
다시 오시려우?”“내가 칠장사 가서 선생님을 뵈입고 온 뒤에 한번 다시 옴세.
” 꺽정이는 임진서 하룻밤을 지내고 곧 양주 집으로 돌아왔다. 천왕동이의 귀
양 풀린단 소식을 듣고 꺽정이 집 식구들이 다 좋아하는 중에 백손 어머니는 좋
아서 저녁밥도 먹지 아니하였다. 애기 어머니가 동생의 댁을 보고 웃으면서 “
여보게, 귀양 풀린단 소식을 듣고 밥을 못 먹으면 풀려와서 서로 만나는 날은
굶어죽으려나.”하고 말하여 백손 어머니가 “동생을 만나보면 굶어죽어도 좋아
요.”하고 말대답하는데 백손이가 옆에서 불쑥 “외삼촌 아저씨 귀양이 풀리지
말아야겠소.”하고 열퉁적게 말참례하였다. “무엇이야? 이 자식아, 네가 어미
비위를 긁는 게냐!”“어머니가 굶어죽으면 탈이거든.”“하면 다하는 것만 여겨
서 너까지 어미를 놀리느냐.”“누가 어머니더러 유난을 부리랍디까.”“너두 지
각 좀 나.”“내가 아무리 안 났기루 설마하니 어머니 지각만 못하리까.”“잘한
다 잘해. 저 자식이 사람인가.” 백손이 모자간에 오락가락하는 말을 꺽정이가
듣다가 “어미 자식이 똑같다.”하고 웃으니 백손이가 저의 어머니더러 “어머
니 고만둡시다. 아버지 웃는 것이 아니꼽소.”말하고 아비의 얼굴을 흘끗 돌아보
았다. 꺽정이는 잠가코 있는데 애기 어머니가 눈을 흘기면서 “저 자식의 아가
리는 마구 난 창구녕이야.”하고 말하니 백손이는 아랫입술을 길게 빼물었다. “
이애 내 말 좀 들어라. 대가리 커단 자식이 어머니더러 지각 없다는 건 무엇이
고 아버지더러 아니꼽다는 건 무엇이냐. 그런 버릇 어디서 배웠니?”“아주머니
잔소리엔 사람이 머리가 빠지겠소.”“너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하는 걸 좀 보
구 배우지 못하느냐?”“아버지가 할아버지 같은 반신불수 병신이면 내가 아버
지버덤 더 잘할는지 누가 아우.”꺽정이가 별안간 “이 자식이 되지 못한 소리
지껄이지 마라. 듣기 싫다.”하고 소리를 질러서 백손이와 애기 어머니는 다같이
말을 그치었다. 백손이와 팔삭동이 숙질을 뜰아랫방으로 내려가고 꺽정이와 애
기 어머니 남매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또 애기와 백손 어머니 숙질은 저녁 먹은
그릇을 설거지할 때 삽작께서 “누님!”하구 부르는 소리가 나며 뒤미처 마루
앞에 있던 애기가 “아이구 아주머니, 백손 오빠, 외삼촌 아저씨.”하고 소리쳤
다. 부엌에서 솥을 부시던 백손 어머니가 “무엇?”하고 한걸음에 뛰어나와서
들어오는 천왕동이에게로 쫓아나가며 “아이구 이게 누구야? 아이구 이게 웬일
이야!”하고 울음 반 지껄였다. 안방에서 꺽정이 남매가 쫓아나오고 뜰아랫방에
서 백손이 숙질이 뛰어나왔다. 천왕동이와 백손 어머니가 남매 서로 끌어안고
우는 것을 꺽정이는 한동안 물끄러미 보고 섰다가 나중에 끌어안은 남매를 떼어
놓으며 “인제 고만 방으로 들어가자.”하고 천왕동이의 손목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뒤따라 들어와서 각기 인사들을 마친 뒤에 꺽정이가 천
왕동이를 돌아보며 “귀양이 수이 풀린단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속히 올 줄은
생각 못했다. 대체 어느 날 귀양이 풀리구 어느 날 제주서 떠났느냐?”하고 물
으니 천왕동이는 “모두가 꿈속 같소.”하고 백손 어머니로부터 여러 사람들을
한번 다시 돌아보고 나서 “보름 점고를 맞으러 들어가니까 목사가 따루 불러서
귀양이 풀렸으니 내일이라두 고향으루 가라구 분부합디다. 열이렛날 떠나
나오는 배편이 있어서 제주서 불불이 떠나는데 형님하구 이정의하구 떠날 때 주
구 간 상목으루 그 동안 객비 쓰구 남저지가 선가가 겨우 됩디다. 그래서 뭍에
내린 뒤는 과객질루 얻어먹구 왔소. 그끄저께 뭍에 내렸는데 온사흘 동안 풍랑
에 부대낀 까닭으루 첫날은 다리가 허전해서 구십 리밖에 못 걷구 그저께 어저
께 양이틀은 하루 이백육십 리씩 걷구 오늘은 한 삼백 리 넘어 걸었소.”하고
꺽정이 말을 대답하였다. 천왕동이가 저녁을 안 먹어서 밥을 새로 짓게 되었는
데 백손 어머니는 동생 옆을 잠시도 떠나려고 아니하여 애기 어머니가 애기를
데리고 나가 밥을 지어서 저녁 굶은 백손 어머니와 남매 겸상하여 먹게 하였다.
밥 먹기 전과 밥 먹은 후는 고사하고 밥 먹는 중에도 천왕동이는 귀양살이하던
이야기를 하느라고 숟갈질이 동안 뜰 때가 많았다. 천왕동이의 이야기가 대충
끝이 났을 때 꺽정이가 천왕동이더러 “이번 귀양 풀리는 데 이별장이 매우 힘
들 쓴 모양이다.”하고 말하니 천왕동이는 이별장이 이봉학인 줄 몰라서 “이별
장이란 사람이 누구요?”하고 물었다. “이봉학이가 지금 임진별장이다. 네 귀양
이 수이 풀린단 소식두 내가 임진 가서 듣구 왔다.”“언제 가서 듣구 왔소?”
“가기는 어제 가구 오기는 오늘 왔다. 이별장이 놀다가 가라구 붙드는데 네 소
식 들은 것을 빨리 집에 와서 알려려구 불불이 되짚어 왔다.”“내일 다시 나하
구 같이 갑시다. 내가 가는 길에 잠깐 이별장을 찾아보구 가겠소.”천왕동이 말
끝에 백손 어머니는 “저 주제를 해가지고 염체 별장 나리를 찾아갈 작정이오?
”하고 물었다. 천왕동이는 주제가 사나운 품이 헐벗지 않은 거지로 보기 좋을
만하였다. 꺽정이가 애기 어머니와 백손 어머니를 돌아보며 “참말 주제가 말
아니군. 아무것으루나 옷 한벌 해 입히지.”하고 말하는데 천왕동이가 “언제 옷
을 해입구 있겠소. 내일 봉산 가서 갈아 입지.”하고 말하니 백손 어머니는 “주
제가 이런 걸 내가 그대로 보내면 나는 이 다음 동생의 댁 볼낯이 없어. 그러고
하루도 묵지 않고 간단 말이 될 말이야? 너는 간대도 나는 못 보내겠다. 수일
묵어서 옷 한벌 해입고 가거라.”성을내서 사설하고 애기 어머니는 “백이방댁
아가씨를 보이러 가기가 급하겠지만 하루 이틀 못 참겠소. 참기 좀 어렵더라도
주리 참듯 참아보구려.”조롱하고 깔깔거리었다. 천왕동이는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꺽정이를 보고 “나 갈 때 형님 임진까지 같이 갈라우?”하고 다시 물으
니 꺽정이가 “네가 같이 가자면 임진은 고만두구 봉산까지라두 같이 가지.”하
고 대답하였다. “이왕 늦을 바엔 청석골두 거쳐갈 테니 형님 꼭 나하구 동행합
시다.”“청석골이 요새는 전과 달라서 놀러가기두 재미적지만 네가 간다면 동
행하지.”꺽정이가 천왕동이하고 동행한단 말에 애기 어머니는 “그럼 죽산은
언제 갈라고?”하고 꺽정이더러 말하니 그 말 속에는 청석골 가는 것이 부질없
단 뜻이 숨겨 있고 백손 어머니는 “갔다 와선 가지 못해요.”하고 꺽정이 대신
말하는데 그 말 속에는 동생을 봉산까지 데려다 주었으면 좋겠단 뜻이 들어 있
었다.
“날이 차차 더워 가면 옷 해놓은 건 어떻게 하나.”“옷 보내기가 급하면 신
서방더러 먼저 갖다 두고 오라지요.”“그렇지만 이왕 가려는 길을 자꾸 늦춰서
쓰겠나.”백손 어머니가 말대답하기 전에 천왕동이가 먼저 “내 길은 늦추라구
형님 길을 늦추지 말라우. 애기 어머니 차치구 포치구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내가 내일 갈까 보우.”하고 웃으니 애기 어머니도 웃으면서 “귀양살이까지 하
구 지각 좀 났을 줄 알았더니 전이나 마찬가지로군.”하고 대꾸하였다. 이내 정
당한 말은 그치고 실없은 말이 나서 한동안 여럿이 함께 웃고 떠들다가 정밤중
에 돋는 달이 높이 올라온 뒤 비로소 잘 자리들을 보게 되었다.
이튿날 식전에 애기 어머니가 백손 어머니를 데리고 천왕동이의 옷 지을 것을
의논하였다. “바지 저고리 두루매기를 다 무명으로 지을까?”“내가 무얼 알아
요? 형님 생각대로 해주시지.”“애기 할아버지 바지짓고 남은 명주가 저구리
한 감 넉넉할 테니 저구리는 명주로 짓세.”“명주 저구리 좋지요.”“요전에 마
전한 무명이 여남은 자 남지 않았나.”“한 반 필 남았을 게요.”“그럼 두루매
기 한 감만 새로 마전하면 되겠네.”“안집들은 어떻게 하오?”“흔것으로 넣지.
”“애기 할아버지 두루매기도 안집이 만만치 않아서 애쓰시고 그러시오.”“팔
십 노인이니까 아직 홑두루매기가 이를 것 같아서 겹으로 지었지 젊은이들이야
누가 지금 겹두루매기를 입나.”“그러면 무명을 한 필만 마전하지요.”“두루매
기 한 거죽이니까 한 필 탐이나 들 것도 아니지만 이왕이면 필로 마전하세.”“
행전도 있고 버선도 있어야지요. 한필이 얼마나 남겠소.?”“아따 쓰는 대로 남
는 대로 남겨두세그려.”“그럼 다락에서 한 필을 끄내주시오.”“가만히 있게.
이따 아침 지난 뒤에 내가 골라서 끄내줌세.”
아침밥이 끝난 뒤에 애기 어머니가 다락에 들어가서 세목 한 필을 골라가지고
나와서 “여기 무명 내왔으니 어서 갖다 삶게.”하고 밖에 있는 백손 어머니더
러 말하는 것을 천왕동이가 듣고 “그게 내 옷 해줄 게요?”하고 물으니 애기
어머니는 “옷감이 맘에 드나 좀 보오.”하고 무명을 천왕동이 앞에 내밀었다.
“삶기는 왜 삶소?”“마전을 해야 옷을 짓지.”“그대루는 옷을 짓지 못하우?
”“상제 아닌 사람이 누가 깃것을 입어.”“지금 마전해서 오늘 해전에 옷을
짓게 될 수 있소?”“급하기라니 우물에 가서 숙랭을 찾겠네. 오늘은 삶아서 헹
구어서 말리고 내일은 다듬고 모레나 옷을 짓게 될까 아직 멀었으니 청처짐하게
잡고 깁시오.”“아이구, 그러면 나는 옷 못 입구 가겠소. 늦어두 내일 모레 안
으루는 떠나야겠으니 알아 해주시우.” “안될 걸 억지로 어떻게 하오?” “
깃것두 좋으니 마전 말구 그대루 해주시오.”
천왕동이가 나중에 애걸하다시피 청하여 애기 어머니는 아무쪼록 옷을 빨리
입게 하여 주마고 허락하고 백손 어머니더러 무명을 옳게 마전하지 말고 깃만
빼라고 말하였다. 백손 어머니가 두루마깃감을 깃을빼는동안에 애기 어머니는
전에 마전한 무명으로 바지를 지었다. 이날 저녁때, 바지 하나밖에 된 것 없는
것을 천왕둥이가 보고 밤에 일을 하여 내일 식전 입게 하여 달라고 부득부득 떼
를 써서 할길없이 명주 저고리는 이웃집 최서방 여편네의 손을 빌고, 두루마기
와 행전과 버선은 시누이 올케 어울려 짓고 허리띠와 대님은 애기가 접었다. 그
이튿날 늦은 아침때 옷 한 벌이 갖추 다되어서 천왕동이가 새옷을 갈아입은 뒤
에 임진 가서 잘 작정하고 떠나자고 꺽정이를 졸랐다. 꺽정이가 병든 아비를 들
어가 보고 천왕둥이를 봉산 처가에 데려다 주고 온다고 말하니 병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속희 다녀오라는 뜻으로 속히 속히 하고 두어 마디 얼버무려 말하였
다. 꺽정이가 네네 대답하고 나와서 애기 어머니더러 “ 내가 불과 열흘 안에
와서 죽산을 갈 테지만 선생님 옷은 먼저 불출이 시켜 보내두 좋소.” 말하고
바깥방에 있는 신불출이를 불러서 “칠장사에 옷 가져갈 것이 있으니 자네 좀
갖다 두구 오게.” 하고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날 점심 두에 꺽정이는 천왕동이
를 데리고 떠나갔다.
꺽정이의 이웃집 최서방은 희만이서 잘살다가 패가하고 읍으로 들어온 사람인
데 위인이 난봉이요, 또 게으름뱅이라 늙어 꼬부라진 어미와 올망졸망한 자식
삼남매를 굶겨죽이지 않는 것이 전수히 그 안해의 힘이었다. 그 안해는 사람이
번잡스러운 것이 병통이나 붙임성이 좋고 일이 시원칠칠하여 이 집 저 집에 일
을 해주고 음식도 얻어오고 곡식도 얻어와서 여섯 식구가 구차히나마 연명하고
지내는 처지이었다. 최서방 집에서 꺽정이 집 이웃간이라도 통 내왕이 없었으나,
꺽정이의 집 살림이 구차치 않은 것을 짐작한 뒤 최서방의 안해가 먼저 찾아와
서 애기 어머니와 백손 어머니를 보고 “이웃간에 왕래가 없어 쓰겠소. 이웃사
촌이라니 사촌처럼 정답게 지냅시다.” 하고 말을 붙이었었다. 다른 양민들은 백
정의 집이라고 돌리는데 최서방의 안해가 말만이라도 간격을 두지 않는 것이 여
편네들 마음에 대단 고마워서 쉽게 서로 친하였다. 해포 이웃하여 지내는 동안
에 꺽정이와 최서방만 사이가 서로 벋버듬하여 친하지 못할 뿐이고, 그 나머지
두 집 식구는 다들 친할 만큼 친하여서 최서방의 아들딸이 꺽정이의 집 조석 때
오면 애기가 불러서 대궁밥도 거두어 먹이고 꺽정이 동생 팔삭동이가 최서방의
집 어질더분한 때 가면 최서방의 안해가 구슬려서 비질도 시킬 만큼 무간하게
지내었다.
꺽정이가 천왕동이와 같이 떠나던 날 팔삭동이는 전에 없어 저도 형과 같이
훨훨 다니고 싶은 마음이 나서 다른 식구들이 다 집안으로 들어간 뒤까지 삽작
귀틀에 등을 기대고 멀거니 섰다가 나중에 최서방 집 삽작께 와서 기웃이 들여
다보았다. 최서방은 봉당에 자리쪽 깔고 번듯이 드러누웠고 최서방의 안해는 남
편 발치에 앉아서 어린 아들 머리의 이를 잡아주다가 팔삭동이를 바라보며 “왜
거기 섰나. 들어오게.” 하고 불러들었다. 팔상동이가 들어와서 봉당 끝에 걸터
앉은 뒤 최서방의 안해가 “손님이 떠났지?” 하고 물으니 팔삭동이는 고개를
끄덕하였다. “손님이 새옷 입은 뒤에 보니까 외모가 깍은 서방님이데.” “외모
가 무어요?” “새옷 입었다구 얼굴이 달라지우?” “사람은 입성이 날개라네.
입성을 잘 입으면 얼굴이 돋보이다뿐인가.” “나두 날마다 새옷이나 달래 입을
까 보다.” “자네 옷이 얼마나 많기에 날마다 새옷을 입는다나.” “옷이 없으
면 새루 해달라지.” “자네 집에 피륙도 많은가베.” “피륙이 퍽 많소. 다락에
두 있구 광 속에두 있고.” “명주도 많은가?” “명주가 다무어요, 대국 비단두
있소.” “자네 집엔 별게 다 있네그려. 대국 비단은 어디서 생겼나?” “어디서
생긴 건 나두 모르우. 그런데 우리 집에 오서 내가 대국비단 말했다구 말 마우.
우리 누님이 남더러 말 말라구 합디다.”
이때 최서방의 큰아들 여덟 살 먹은 아이가 훌쩍훌쩍 울면서 밖에서 들어왔
다. “너 왜 우니? 어떤 놈하구 싸웠느냐?” 하고 그 어미가 물으니 “백손 어
머니가 머리를 이렇게 쥐어박았다우.” 하고 그 아이논 주어박던 시늉을 내었다.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쥐어박힐라구.” “콩볶음이 조금 집어먹었더니 나더리
거지새끼라구 하구 막 쥐어박겠지.” 최서방이 벌떡 일어 앉으며 “어떤 년이
너더리 거지새끼라구 그래!” 하구 소리를 질러서 그 안해는 얼른 “백손 어머
니가 귀여해서 좀 쥐어박은 걸 이 못생긴 게 울고 온게지.” 하고 남편에게 눈
짓하였다. “창피한 것들하구 이웃해 살라니까 별꼴을 다 보겠네.” “이웃집선
잘사는데 우리 집에선 하두 못사니까 창피도 해요, 아니게아니라.” “농사두 않
구 장사두 않구 소두 안 잡구 잘살면 남에게 의심이나 사지.” “의심을 살때
사더라도 우리도 남같이 잘 살아봤으면 좋겠소.” 최서방은 팔삭동이의 이야기
를 돌쳐 생각하고 “백정의 집에 대국 비단 있는 것두 좋을 거 없어.” 하고 속
으로 슬그머니 모함잡을 마음을 먹었다.
이날 다 저녁때 양주 장교와 사령들이 꺽정이 집에 쏟아져나와서 집안 식구들
을 한옆에 몰아놓고 집뒤짐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꺽정이의 이웃집 최가가 양
주 관가에 들어가서 백정의 자식 꺽정이 집에 평양 진상 봉물이 있다고 밀고한
까닭이었다.
외방에서 진상이나 선사하는 물건이 다락에서 많이 나왔다. 주단이 여러 필이
요 피물이 여러 장이요, 초가 몇 궤요, 면주.반주주속과 세목.상목 목속은 다락뿐
이 아니라 광에서도 나왔고 공단수의, 북포 수의 수의두 벌은 병인의 방에서 나
왔다. 장교들이 집안 세간을 샅샅이 다 뒤진 뒤에 사령들이 집안 식구들을 따로
따로 묶어 내세우는데 다 죽어가는 병인 까지 끌어내니 애기 어머니가 보다 못
하여 담을 크게 먹고 “소인네 아비는 반신불수 병신으로 누워서 꼼짝을 못한
지가 여러 해올시다.저기 저 기집아이년하고, 집에 남겨두시고 소인네들만 잡아
가십시오.” 하고 서정을 하였더니 옆에 가까이 섰던 장교 하나가 대들어서 보
기 좋게 뺨을 한번 붙이며 “이년아, 무슨 잔말이냐!” 하고 윽박질렀다. 애기는
말할 것도 없고 병인의 입에서 아이구 아이구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을 무지스
러운 사령들은 엄살이라고 야단을 치면서 개새끼처럼 끌고 갔다. 양주군수(이때
는 목사가 아니다)가 임꺽정의 집에서 나온 물건들을 동헌 대처으로 올리라고
하여 낱낱이 친히 살펴보니 촛궤에 스인 택호는 모두 깎고 긁어버렸는데 그중에
영부사 택호는 흔적이 남아 있어서 아는 사람이 짐작으로 불 수 있었다. 군수가
곧 꺽정의 집 식구들을 차례로 잡아들여서 물건의 소종래와 꺽정이의 거처를 문
초 받는데 꺽정이의 아비는 형틀에 올려매기전에 다 죽은 송장이라 매를 몇 개
치지 않고 끌어내치고 꺽정의 아들은 매를 치기전에 물어도 “모릅니다.” 해믈
치면서 물어도 “모릅니다.” 모릅니다 한마디 외에 다른 말이 없으므로 매를
한 차례 쳐서 끌어내치고 꺽정의 계집은 물볼기를 치려고 사령들이 옷을 벗길
때 “이놈들아, 여편네 찬 걸레를 핥아먹으라는냐, 왜 옷을 벗기느냐!” 하고 사
령들을 욕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군수까지 치어다보며 이놈 저놈 하여 군수
가 화가 나서 말도 묻지 않고 물볼기만 되우쳐서 끌어내치고 그 다음에 꺽정이
누이를 잡아들여서 엎어놓고 군사가 “이년, 너는 아는 대로 아뢸 테냐?” 하고
호령하여 관속들이 호령을 받아내리고 “소인네 아는 것이야 존전에 어찌 기망
하올 길이 있소리까.” 하고 대답하여 관속들이 다시 대답을 받아올렸다. “저
물건들이 어디서 난 것들이냐?” “소인네 동생과 상종하는 양반님네들이 보내
신 것이올시다.” “소인네가 천한 백정이오나 소인네 아비는 이찬성 부인과 내
외종 남매간이옵고 소인네 시아비는 서울 재상님네와 친분이 있었삽고 소인네
동생도 여러 양반님네와 상종이 있솝는데 소인네는 다압지 못하오나 지금 함경
감사께도 친쫍게 다닌다고 하옵디다.” “함경감사가 누가란 말이냐?” “전라
감사와 경기감사를 지냅시고 함경감사로 나갑신 양반 말씀이올시다.” “백정의
자식으론 발이 대단 너르구나.” 하고 군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네 동생
은 어디를 갔느냐?” 하고 말을 고쳐 물었다. “임진별장 이봉학이란 자가 놀러
오라고 해서 가옵는 길에 황해도 봉산 사는 처남을 다리고 가온 까닭에 봉산까
지 갔다 올 듯하외다.” “언제쯤 온다고 하고 갔느냐?” “과즉 한 열흘 된다
고 하고 갔소이다.”“네 동생이 운달산이나 청석골 화적들하고 상종하는 것을
보았느냐?” “소인네 동생이 온 뒤에 물어봅시면 알으실 테지만 소인네는 본일
이 없소이다.”
꺽정의 누이가 대답이 능란하여 대답을 듣는 군수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답을
받아올리는 관속들도 다 속으로 놀래었다. 군수는 꺽정이 계집에게 봉욕하고
꼭뒤까지 났던 화가 꺽정의 누이을 문초받는 중에 많이 풀리었으나 아직도 화가
좀 남아서 “이 다음에 네 동생의 말이 네 말고 다르면 너는 장하에 죽을 줄 알
아라.” 하고 추상같이 호령한 뒤에 꺽정의 누이를 끌어내치고 꺽정의 동생을
잡아들였다. 절뚝발이 병신일망정 키는 엄부렁하게 큰 것이 어린아이같이 엉엉
울며 끌려들어왔다. 사령들이 쥐어지르니 고함치며 더 울고 군수가 호령하닌 느
껴 가며 더 울어서 형틀에 올려 매놓기만 하고 문초를 받지 못하는 중에 울음을
잠깐 그치며 고개를 치어들고 “형님 나 죽소, 형님 살려 주우.” 하고 고개를
끄떡끄떡하였다. 팔삭동이는 공중대고 형에게 하는 말을 집장사령부터 동헌을
보고 원님에게 하는 말로 짐작하고 “이놈아, 무슨 소리냐?” 군수가 채쳐서 관
속들이 말을 받아올리니 군수는 형님이란 말을 이놈 저놈 소리보다도 더 봉욕으
로 생각하여 “그놈이 실성한 놈이다. 실성한 놈에게 말 물을 것 없다. 매를 쳐
라!”하고 호령을 내리었다. 얼뜬 위인이매 네댓 개에 까물쳐서 고개가 축 늘어
지니 군수가 이것을 보고 “그놈이 흉물을 쓴다. 더 쳐라.” 하고 호령하여 매
열 개를 채운 뒤에 끌어내치었는데, 까물친 것이 깨어나지 못하여 다 죽은 송장
과 같아서 사령들이 들어냈다. “이제 또 어떤 것이 남았느냐?” 하고 군수가
꺽정이 식구의 남은 사람을 물어서 “여남은 살 먹은 기집아이년이 하나 남았소
이다. 그것이 대답똑똑히 하던 기집의 딸이랍네다.” 하고 형리가 애기 남아 았
는 것을 아뢰니 군수는 곧 “그 기집아이년을 마저 잡아들여라.” 하고 분부하
였다가 “그년 모녀를 함께 잡아들여라.” 하고 고쳐 분부하였다. 어미는 한옆에
앉히고 딸만 앞으로 내세우게 한 뒤에 군수가 내려다보며 “꺽정이가 네게 무었
이 되느냐?” 하고 물으니 애기는 발발 떨며 대답을 못하였다. “네 외삼촌이
냐?” “네.” “네 외삼촌의 집에 저기 놓이 물건이 어느 때 생겼느냐?” “빨
리 아뢰라.” 긴 대답소리에 나오던 말도 도로 들어가서 애기는 입만 옴질거리
었다. “고년도 맞아야겠다. 고년을 걷어 세우고 종아리를 쳐라.” 딸이 종아리
를 맞는 동안 어미는 머리를 땅에 부딪쳤다. 종아리에서 피가 난 뒤 군수가 매
를 그치게 하고 어미를 앞으로 잡아내서 꿇려놓고 “네 딸년을 네 눈앞에서 쳐
죽이기 전에 네년이 아는 대로 다 바로 아뢸테냐?” 하고 호령하니 “무엇이든
지 물읍시면 소인네 아는 대로 다 아뢰겠소이다.” 하고 꺽정의 누이가 대답하
였다. “저 물건들이언제 생긴 것이냐?” “적년 설에 생긴 것도 있솝고 올 설
에 생긴 것도 있소이다.” “촛궤들은 언제 생긴 것이냐?” “그것도 작년 설과
올 설에 생긴 것이 올시다.” “그것이 함경감영에서 온 것이냐?” “어디서 온
것은 모르오나 서울서 왔다고 하옵디다.” “네 동생이 영부사댁에도 다닌다더
냐?” “그건 소인네가 압지 못합네다.” “네 동생이 화적질 다니는 것을 이웃
에서까지 다 아는데 네가 모른단 말이 될 말이냐!” “하늘이 내려다봅시지소인
네 동생은 화적질 다닐 리가 만무하외다.” “네 집에 자주드나드는 사람은 누
구누구냐?” “소인네 집에는 혹간 오시는 손님 외에 일꾼 하나밖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소이다.” “그 일꾼은 어디 있느냐?” “오늘 식전에 죽산 칠장사에
옷 가지고 갔소이다.” “뉘 옷을 가지고 갔단 말이냐?” “소인네 시아비 옷이
올시다. 소인네 시아비가 칠장사에 중노릇을 하옵는데 죽산 근방에서 생불스님
이라고 한답네다.”
군수는 꺽정의 누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몇번 끄덕끄덕하였따. 이때 양주군수
는 죽산 안진사와 같이 칠장사에 놀러갔던 이참봉의 백씨라 칠장사 노장중이 경
력이 많고 도덕이 높은 것을 그 계씨에게 들어서 아는 터이었다. “너의 시아버
지가 나이 올에 얼마냐?” “여든다섯 살이옵니다.” “근력이 아직도 좋다느
냐?” “아직 큰병은 없는 줄로 아옵네다.” “네가 언제 보러 갔더냐?” “소
인네 모녀는 오지 말라고 해서 가지 못하옵고 소인네 동생이 자주 다니옵네다.
” “네 동생이 언베 갔다 왔느냐?” “작년 겨울에 갔다 오고 그 뒤엔 아비 병
까닭에 하루도 집을 떠나지 못했소이다.” “네 아비 병이 지금은 나온 모양이
냐?” “봄을 잡아들며 조금씩 나아서 지금은 세전에 대면 아주 다 나은 셈이외
다.” “작년 섣달에는 네 동생이 어디 나간 일이 없느냐?” “어디를 나갈 수
있었으면 선생을 안 보러 갔겠삽네까.” “선생이 누구냐?” “소인네 시아비가
소인네 동생의 선생이올시다.” “네 동생이 글자 하느냐?” “글은 못하옵네다.
” “좋은 선생에게 배웠다며 글을 못한단 말이냐?” “임진별장 이봉학이란 이
도 소인네 동생의 동접이온데 역시 글을 잘 못한다 하옵디다.” “네 동생이 너
의 시아버지 같은 도덕 있는 중의 제자라고 하면 불법한 짓은 안할 듯하나 저
물건들의 소종래가 종시 수상하고 또 촛궤에 쓰인 택호를 긁어버린 것이 적은
일일망정 대단 수상하니 네 동생이 와서 수상한 것을 명백히 하기까지 너희들은
다 같이 갇혀 있을 줄 알아라.” “소인네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한마디 사뢸
말씀이 있소이다.” “무슨 말이냐?” “소인네 아비는 옥에 갇히는 날 옥에서
죽지 살지 못할 것이오니 놓아줍시고 저 기집아이년 하나만 같이 놓아줍셔서 미
음이라도 끓여먹이게 해주시면 소인네 남매가 죽은 뒤 풀을 맺어서라도 은혜를
갚사오리다.”
꺽정의 누이가 눈물 섞어 사정하니 군수는 별로 주저하지도 않고 “그건 그래
라.”하고 허락하였다. 애기 어머니 시누이 올케와 팔삭동이 숙질은 옥에 갇히게
되고 애기 조손만 집으로 놓여나왔는데 집이라고 난리쳐 간 뒤 같았다. 관속들
이 빈집을 그대로 두고 갔는지 양민들이 세간을 뿔뿔이 들어갔는지 눈 뜨이는
세간이 많이 없어졌었다. 병인이 매맞고 나온 뒤 이틀 동안 미음 한 모금 먹지
않고 앓는데 애기가 미음 그릇을 들고 지성스럽게 권하여도 눈도 떠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눈감고 누운 병인은 목에서 나는 가르랑 소리가 죽지 않은 표이었
는데, 사흘 되는 날 아침에 애기가 병인의 방에 들어와 본즉 그 가르랑 소리가
없어져서 마음이 섬뜩한 것을 간신히 참고 병인 옆에 가까이 와서 “할아버지!
”하고 큰소리로 부르며 얼굴에 손을 대어 보니 차기가 곧 얼음 같았다.
“아이구머니!”하고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애기가 혼자 울고불고
하다가 최서방 내외를 가서 보고 “할아버지가 죽었는지 모르겠으니 좀 와서 보
아주세요.”하고 사정하였더니 최서방은 “내 집에 왜 왔느냐! 가거라!”하고 소
리지르고 최서방의 안해는 “우리가 백정의 송장을 만질 사람이냐?”하고 소리
를 질러서 애기는 두말 못하고 울며 돌아섰다. 이튿날 낮에 죽산 갔던 신불출이
가 돌아와서 죽은 사람의 뻣뻣한 수족을 억지로 거두고 홑이불 폭으로 덮어놓은
뒤에 애기를 보고 “옥에 가서 말했느냐?”하고 물으니 애기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까지 죽으라구 가서 말해요.”하고 대답하였다. “이웃집 최가 내외가
와 보더냐?” 애기가 고개를 흔들며 최서방 내외가 알던 정, 보던 정 없이 소리
질러 쫓은 이야기하니 “내가 지금 장터에서 이야기를 듣고 왔다. 이웃집 최가
가 밀고해서 이번 일이 났다더라. 내가 오늘 곧 떠나서 너의 아저씨를 찾아 뫼
시구 올 테니 그 동안 참구 지내라.”하고 애기에게 말을 이르고 신불출이는 곧
봉산으로 떠나갔다.
꺽정이가 황천왕동이와 같이 양주 집에서 떠난 뒤 첫날은 임진 이봉학이게 와
서 자고 다음날은 청석골 산속에 와서 잤다. 청석골 두령들이 황천왕동이를 위
하여 밤잔치를 차리어서 술들은 먹는 중에 박유복이의 안해가 저녁 먹은 것이
관격이 되어서 유복이는 말할 것 없고 오가까지 안에를 자주 드나들게 된 까닭
에 다른 두령이 있지만 재미가 없어서 꺽정이가 술을 많이 먹지 않고 상을 치우
게 하고 진상 봉물 뺏어온 이야기도 대강 듣고 말았다. 청석골서 떠나서 이틀에
봉산을 가고 봉산서 천왕동이 장인에게 붙들려서 가던 날까지 사흘 묵고 회정하
게 되었는데, 회로에는 청석골을 알과할 작정하고 오다가 공교히 탑고개에서 곽
오주를 만났다.
“유복이네 아주머니 일어났나?” “일어났소. 한두 군데 돌아보러 나왔더니
고만두구 형님하구 같이 들어가야겠소.” “자네는 자네 볼일 돌아보러 가게. 나
는 나대루 가겠네.” “큰 볼일 없소. 같이 들어갑시다.” “내가 이번은 그대루
지나가겠으니 여러 사람에게 가서 말이나 하게.” “나는 그런 말 하기 싫소. 형
님이 가서 말하구 가우.” “말하기 싫거든 고만두게.” “형님 그대루 가서 되
우? 여러 사람은 고만두구 내가 우선 섭섭하우. 이번에 들어가서 술이나 실컨
먹읍시다.” “내가 집에 가서 죽산길을 떠날 테니까 바루 가야겠네. 술은 이 다
음에 먹세.” “형님을 만났다가 그대루 놔보내구 들어가면 나는 여러 사람에게
지청구 받소. 잠깐이라두 들어갔다 가우.” 오주가 붙들고 놓지 않아서 꺽정이는
마지못하여 다시 청석골 산속에를 들어오게 되었다.
이날 밤에 여러 두령과 서림이가 오가의 집 사랑에 모여서 꺽정이를 술대접하
였는데 술 사이에 운달산 박연중이 소굴 빼앗긴 이야기가 나서 꺽정이가 듣고
옆에 앉은 오가를 돌아보며 “연중이가 잡히지나 않았답디까?”하고 물으니 오
가는 “박연중이가 왜 시라소니요, 잡히게.”하고 대답하였다. 서림이가 오가의
대답을 받아서 “박연중이가 시라소니는 아니라두 두꺼비는 틀림없지요.”하고
웃고 여러 사람이 두꺼비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서림이가 다시 “
두꺼비라 돌에 치었지요.”하고 웃어서 여러 사람이 다같이 웃었다. “여기는 정
작 아무 뒤탈이 없었지?”하고 꺽정이가 물으니 “곱게 먹구 새겼지. 탈이 무슨
탈이오. 금교역말 술집 주인이 매맞은 것이나 탈이라구 할까.”하고 오가가 꺽정
이의 말을 대답한 뒤 곧 이어서 “속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술집 주인이 무슨
나타난 죄야 있소. 강음읍에 잡혀가 갇힌 것을 우리가 친분 있는 강음 이방에게
한두번 부탁했더니 십여 일 만에 우물쭈물해서 내보냅디다. 어물전 젊은 주인이
우리 심부름한 것은 그 아비두 까맣게 모른다우. 대체 다른 사람의 꾀는 구석이
비는 데가 많지만 서장사의 꾀는 물 부어 샐 틈이 없습디다. 서장사는 지금 우
리 보배요.”하고 늘어놓는데 서림이의 칭찬을 곽오주가 못마땅하게 여겨서 “
어서 술들이나 먹읍시다.”하고 술그릇을 부리나케 들었다.
밤이 늦도록 술을 먹고 이튿날 식전 해정한 뒤에 꺽정이가 떠나려고 하는 것
을 여러 사람이 하루만 더 묵어가라고 굳이 붙들어서 마침내 떠나지 못하고 낮
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도회청 마루에서 술을 먹는 중에 작은 두목 하나가 들어
와서 “일전에 왔다 가신 손님이 또 오셨습니다.”하고 고하며 뒤미처 곧 천왕
동이가 바쁜 걸음으로 들어왔다. 천왕동이는 여러 사람이 맞아올릴 사이도 없이
대청 위로 올라오고 꺽정이가 말을 물을 사이도 없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형
님 큰일났소. 형님 이웃의 최가란 놈이 형님 집에 평양 진상 봉물이 있다구 양
주 관가에 고발해서 관속들이 나와서 집뒤짐을 해가구 집안 식구를 깡그리 잡아
갔다우. 지금 우리 누님, 애기 어머니, 백손이, 팔삭동이 넷은 옥에 갇혀 있구 백
손이 할아버지, 애기 둘만 놓여나와 집에 있는데 백손이 할아버지가......”하고
천왕동이가 잠깐 우물거리니 꺽정이가 “무어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병이
더쳐서 다 돌아가게 되었다우.” 꺽정이가 곧 좌중을 향하여 “나는 가우.”하고
일어서니 여러 두령은 어안이 벙벙하여 말들을 못하는데 서림이가 꺽정이를 보
고 “잠깐만 기다리시우.”말하고 곧 천왕동이를 보고 “대체 양주 소식을 봉산
서 어떻게 들으셨소?”하고 물었다. “형님 집에 있는 사람이 형님을 찾아서 내
게를 왔습디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소?” “어제 밤중은 해서 내게 와
서 오늘 새벽에 같이 떠났는데 내가 먼저 왔소.” 서림이가 다시 꺽정이를 보고
“아무리 급하시더라두 그 사람이 오거든 자세한 이야기나 듣구서 떠나시는 것
이 좋겠소.”하고 말하니 꺽정이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천왕동이가 “나는 허허
실수루 여기를 들렀지만 그 사람이야 이리 들어올 리 있소.”하고 말하였다. “
오는 길목에 사람만 내보내 두면 될 테니까 그것은 어려울 것 없지요.” “그
사람이 오면 무슨 별소리 있을 줄 아우?” “별소리야 없겠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오면 좀 자세한 이야기두 들을 수 있구 또 그 동안 사람을 양주 보내서
관가 동정을 탐지한 뒤에 이것저것 다 생각해 보구 가야지 낭패가 없지. 지금
그대루 더뻑 가는 것은 섶 지구 불에 뛰어드는 셈이오. 잘못하면 양주 가지두
못하구 포교나 장교 손에 잡힐는지 누가 아우.”
서림이의 말이 근리하여 천왕동이가 꺽정이를 돌아보며 “형님, 그렇게 하는
게 좋을까 보우.”말하고 곧 여러 두령들이 우 하고 나서서 서림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니 꺽정이는 고개를 외치며 “안 되어. 안 되어.”하고 부적부
적 밖으로 나갔다. 여러 사람들이 다 꺽정이의 뒤를 따라나오는 중에 박유복이
가 천왕동이더러 “자네 양주까지 갈 텐가?”하고 물으니 천왕동이는 “그럼,
가구말구.”하고 대답하였다. “나두 같이 가겠네.” “같이 가는 데 부질없소.
고만두우.” “형님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데 내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나.
” 꺽정이가 뒤를 돌아보며 “유복이가 나하구 같이 가겠단 말이냐? 당치 않은
소리 하지 마라. 천왕동이두 여기서 도루 봉산으루 가거라.”하고 말하니 천왕동
이가 성을 빨끈 내며 “우리 누님이 옥에 갇혀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데 날더러
봉산으루 도루 가란 말이오? 새벽에 떠날 때 장인 장모 모두 대들어서 가지 말
라구 붙들기에 대판 쌈질을 하구 봉산은 아주 하직한다구까지 하구 왔소. 형님
이 나하구 같이 안 간다면 나 혼자 먼저 가겠소.”하고 휘적휘적 앞으로 나갔다.
“이애 가만 있거라. 같이 가자.” 꺽정이가 천왕동이를 혼자 가지 못하게 붙든
뒤에 박유복이를 보고 “너만은 고만둬라.”하고 이르니 유복이는 고개를 숙이
고 대답이 없었다. 서림이가 앞으로 나와서 먼저 박유복이를 보고 “양주를 가
시더래두 좀 봐가며 가시우.”말하고 그 다음에 꺽정이를 보고 “물건 출처를
대게 될 경우에는 평양서 내가 보냈다구 하시오. 그러면 얼마 동안 날짜를 끌
수 있을 게요.”하고 말한즉 꺽정이는 그저 들을 만할 뿐이었다. 서림이의 말이
끝난 뒤에 꺽정이가 여러 사람의 인사도 변변히 받지 않고 총총히 떠나갔다.
3
꺽정이가 천왕동이를 데리고 청석골을 떠나서 일력을 다하여 임진까지 왔으나
나루를 건널 수가 없어서 나룻가에 하룻밤을 드새고 이튿날 식전 첫배를 타고
건너온 뒤 줄달음을 치다시피하여 점심 나절도 채 되기 전에 양주 집에를 들어
왔다. 반겨 내닫는 애기를 보고 꺽정이는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바로 아비 방
에 와서 방문을 열었다. 눈이 뜨이는 것은 얼굴 덮은 홑이불폭이요, 코를 찌르는
것은 살 썩는 시취라 꺽정이는 정신이 아뜩하며 눈앞이 캄캄하여 털썩 주저앉았
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나 왔소.
꺽정이 왔소.”하고 홑이불폭을 걷어치니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 아비의 얼굴이
아니다. 꺼진 눈자위, 악물린 이빨, 어디가 조금이나 보던 얼굴 같을까. 꺽정이가
다시 넋 잃은 사람같이 앉았는 것을 천왕동이가 와서 붙들어 일으켜서 안방으로
건너왔다. 꺽정이가 안방에 와서 앉으며 비로소 아이구 소리 한 마디를 지르고
네 이웃에 다 들릴만큼 큰 울음소리를 내놓았다. 천왕동이는 꺽정이의 울음을
진정시키려다 못하고 나중에 애기에게 옥에 갔다 온다고 말하고 나갔다.
천왕동이가 나간 뒤에도 한동안 착실히 지나서 꺽정이는 울음을 겨우 그치고
자기 손으로 머리를 푸는데 밖에서 여러 신발 소리가 나서 애기가 얼른 내다보
니 꾸역꾸역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장교와 사령들이었다. “아이구, 아저씨 잡으
러들 왔소.” 애기의 말을 듣고 꺽정이가 곧 머리를 거듬거듬하여 수건으로 눌
러 동이며 마루로 나왔다. 앞장선 두 장교가 마루 앞으로 가까이 오며 하나가
먼저 “꺽정이 관가에 잡혔다.”하고 말을 붙이고 또 하나가 뒤를 이어 “곱게
잡혀가자.”하고 말을 일렀다. 꺽정이가 힘이 장사인 줄 아는 까닭에 꺽정이 하
나를 잡아가려고 장교와 사령이 십여 명 몰려나왔지만 그래도 염려스러워서 마
구 욱대기지 못한 것이었다. 꺽정이가 한동안 눈만 부릅뜨고 말이 없이 섰다가
나중에 “내가 지금은 못 잡혀가겠소. 죽은 아버지를 아무렇게라두 땅에 끌어
묻구야 잡혀갈 테니 오늘은 그대루들 가구 내일 모레쯤 다시 나오.” 무거운 말
소리로 띄엄띄엄 말하였다. “관가 일을 네 맘대루 지휘하느냐?” “그런 어쭙
지 않은 소리 말구 얼른 나서라.” “내가 잡혀가구 싶지 않은 걸 잡아갈 사람
이 누구요? 십여 명은 고만두구 백여 명이라두 내 몸에 손끝 하나 못댈 테니 알
아 하우.”
꺽정이 눈에 불이 철철 흘렀다. 장교와 사령들이 꺽정이의 기안에 눌려서 말
한마디 못하고 서로 돌아보기들만 하는 중에 나이 먹은 장교 하나가 앞으로 나
서서 “여보게, 꺽정이. 내 말 듣게. 자네를 우리 자의로 잡으러 온 것 같으면
내일 모레는 고사하구 열흘 보름이라두 관한을 해주겠네. 그렇지만 우리 자의가
아니구 안전 분부니 자네가 관가에 들어가서 안전께 사정을 말씀하게.” 말씨
곱게 말하니 꺽정이가 수건을 벗고 풀어진 머리를 내보이며 “지금 막 머리를
푸는 중이오. 들어가서 안전께 이런 사정을 여쭈어 주시우. 내가 한번 잡혀간다
구 말한 바에 도망할 리두 없구 또 식구들이 모두 옥에 갇혀 있는데 나 혼자 도
망한들 무어하겠소.”하고 순순히 대답하였다. 그 장교가 다른 장교 사령들과 쑥
덕쑥덕 말하고 나서 다시 꺽정이를 보고 “자네 사정이 하두 딱하니 우리가 들
어가서 안전께 말씀을 어쭈어 봄세. 그렇지만 또 나오게 될는지 모르겠네. 자네
두 좀더 생각해 보게.”하고 먼저 돌아서 나가니 다른 장교들도 다 그 뒤를 따
라나갔다.
장교와 사령이 십여 명이나 함께 몰려나왔다가 뒤통수들을 치고 들어가니 그
중에는 남보기 창피하다고 두덜거리는 사람도 없지 않고 또 원님께 죄책을 당하
겠다고 귀성거리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대로 들어가자고 발론하던 나이 먹은
장교가 두덜거리는 사람들 보고는 “큰 창피를 안 당하려면 작은 창피는 참아야
하네. 꺽정이가 어떤 장산지 자네들 잘 아는가. 스무 살 안짝에 벌써 기둥을 쳐
들구 물건을 끼었다 뺐다 한 장살세. 내가 아까 말하지 않던가. 꺽정이 잡으려
오는 데는 한둘이나 십여 명이나 마찬가지라구. 십여 명쯤으루 건드리지 못할
걸 아니까 그렇게 말한 겔세. 꺽정이를 섣불리 건드리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인
줄만 알게.”하고 중언부언 타이르고 또 귀성거리는 사람들보고는 “안전께 말
씀만 잘 여쭈면 꾸중 한마디 안 들을 테니 염려들 말게. 말씀 여쭐 것은 내 맡
음세.”하고 한말로 담당하였다. 장교와 사령들이 관가에 들어왔을 때 그 나이
먹은 장교가 군수 앞에 나와서 “꺽정이를 잡으러 가보온즉 머리를 풀구 죽은
아비 옆에 엎드려 통곡하는 중이옵디다. 아무 천인이라두 아비 임종두 못한 놈
이 막 와서 발상하는 것을 잡아내기 어렵사와 말미를 주구 왔소이다.”하고 아
뢰니 군수는 듣고 다른 말이 없이 다만 “도타할 염려가 없겠느냐?”하고 물었
다. “처자식이 갇혀 있사온 까닭에 도타할 염려는 없사오나 튼튼할 성으루 소
인들이 꺽정이 집을 지키겠소이다.” “그럼 내일 식전 조사 뒤에 잡아 대령하
도록 해라.” “네, 그리 하오리다.” 그 장교가 삼문 밖에 물러나와서 동무 장
교와 사령들을 보고 “내 말이 어떤가. 영낙재없지.”하고 말이 맞은 것을 자랑
하였다. “그러나 밤에 누가 나가 지킬 테요?” “낮에 십여 명이 나가 못 잡은
놈을 한둘이 지켜 무어하우?” “내일 식전에는 무슨 용뺄 수 있소. 어떻게 잡
아올 테요?” “또 무슨 거짓말을 꾸며댈라우.” 여러 사람이 중구난방으로 지
껄이고 나서는 것을 그 장교가 손을 내저으며 “가만히들 좀 있게.”하고 누르
고 나서 “우리가 나가서 지키지 않드래두 꺽정이는 도망 못할 게니 염려말게.
집에 뻗쳐놓은 아비 송장이 있지 옥에 갇힌 식구가 있지 어딜 도망하겠나. 그러
구 내일 식전에는 여럿이 나갈 것 없네. 누구든지 하나만 나하구 같이 나가서
꺽정이를 잡아오세. 오늘 맘을 눅여준 까닭에 제 입으루 말한 모레 안에 잡아올
수 있을 테니 내일 두구 보게.”하고 말하니 다른 장교와 사령들은 다행히 여겨
서 “그러면 작히 좋겠소.” “우리는 모르니 잘 해보우.” 이와 같은 말을 지껄
이고 다 각기 집으로 흩어져 갔다.
황천왕동이가 옥에서 돌아왔을 때 꺽정이는 멍하니 안방에 앉아 있었다. “형
님을 잡으러 한떼가 나왔다더니 안 왔습디까?” “지금 막들 왔다갔다.” “형
님을 가만두구 갔으니 웬일이오?” “초상 상제라구 인정 쓰구 간 모양이다.”
“나는 옥에 가서 보구 왔소.” “병들이나 없다더냐?” “누님이 장독이 나서
말 아니구 팔삭동이가 다 죽어갑디다.” “옥사쟁이가 말썽부리지 않더냐?” “
그까지 자식이 말썽부리면 소용 있소. 한옆으루 떠다밀구서 애기 어머니하구 이
야기했소.” “우리 누님은 장독이 안 났다더냐?” “애기 어머니는 괜찮은갑디
다. 형님더러 관가에 들어가기 전에 한번 오라구 말하랍디다.” “지금 좀 가보
구 올까.” “나하구 같이 갑시다. 내가 가서 옥사쟁이를 붙들구 실랑이할께 그
틈에 형님 애기 어머니하구 이야기하우.” “그럼 같이 가자.” 꺽정이는 천왕동
이를 데리고 옥에 있는 식구들을 보러 왔다.
옥이라고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옥문에 열고 안에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앞
에 있는 창살 틈으로 갇힌 사람을 들여다보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옥쇄
장이란 것이 열의 아홉은 심청이 고약하여 옥 앞에 사람이 얼씬을 못하게 쫓는
까닭에 옥에 갇힌 사람을 보러 오자면 옥쇄장이의 인정을 사려고 코아래 진상을
갖다 드리는 것이 의전례 있는 일이었다. 꺽정이가 천왕동이를 앞세우고 옥 앞
으로 들어올 때 옥쇄장이가 보고 마주나오며 “네가 아까 나를 떠다박질르던 놈
아니냐!”하고 천왕동이를 노려보았다. “여보게, 자네에게 사과하려 왔네.” “
뉘게다가 하게를 던지느냐, 이놈아. 내가 언제 네놈더러 사과하러 오라더냐.”
“내가 아까 잘못했네. 용서하게.” “네가 아까 와서 행패한 것이 벌써 관가에
입문됐다. 경칠 테니 두구 봐라.” “나중 경칠 것은 어쨌든지 지금 잠깐 나 좀
보게” “누가 네놈을 보구 싶다느냐.” “그러지 말구 조용히 좀 보세그려.”
“날 왜 보자느냐?” “볼일이 있으니까 보자지.” “볼일이 무어냐?” “잠깐
만 저 뒤루 들어가세.” 천왕동이가 옥쇄장이의 손을 끄니 “뒤에 들어가서 볼
일이 무어냐?” 옥쇄장이는 황천왕동이의 품이 불룩한 것을 유심히 보면서 못이
기는 체하고 끌려갔다.
꺽정이가 옥 앞에 와서 창살을 붙들고 어둔 속을 들여다보며 “누님 어디 있
소?”하고 물으니 안에서 “아이구 형님.”하고 팔삭동이가 소리를 질렀다. “
오, 너냐?” 꺽정이는 동생을 살펴보는데 “아버지 나두 여기 있소.” 백손이가
아비를 알은체하였다. “오, 백손이냐?” 꺽정이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백손이와
팔삭동이가 둘이 다 머리에 칼을 쓰고 발에 착고를 차고 앉아 있었다. “아주머
니하구 너의 어머니는 어디들 있느냐?” “다음 칸에들 있소.” 꺽정이가 다음
칸 앞에 와서 서니 “동생 왔나?”하는 것은 애기 어머니의 목소리요 “인제 왔
소?”하는 것은 백손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꺽정이가 안침을 들여다보며 “큰
병들이나 없소?”하고 물으니 애기 어머니가 “나는 매를 안 맞아서 괜찮지만
백손 어머니는 장독이 났어.”하고 대답하였다. “어떻게든지 할 테니 염려들 마
우.” “그런데 아버지가 대단하시다지?” “아버지 돌아가셨소.” 애기 어머니
가 아이구 하고 울음을 내놓으니 백손 어머니도 따라서 아이구 소리를 내었다.
“누님 고만 그치시구 나보구 할 말이 있거든 말이나 얼른 하시우.” “물건 출
처하구 촛궤의 글씨 긁은 것만 잘 발명하면 무사할 것 같애. 나는 작년 올 설에
서울서 왔다구 대답했으니 외착나지 않게 말하게. 애기년이 내가 대답하는 걸
다 들었는데 말하든가?” “아직 못 들었소.” “그렇지, 그 년이 정신이 없었을
거야.” 백손이가 큰소리로 “아재 아재.”하고 팔삭동이를 부르는 소리가 나더
니 나중에 “아버지, 아재가 죽었소.”하고 소리를 질러서 꺽정이가 다시 팔삭동
이 숙질 있는 데로 왔다. “죽다가 숨이 막혔느냐?” “아까 아버지 보구 소리
한번 지르더니 고만 정신을 못 차리구 고꾸라졌소.” “숨은 있니?” “숨이 있
는지 없는지 모르겠소.” “큰일났구나. 물을 좀 먹여봐라.” “물이 여기 어디
있소?” “가만 있거라.” 꺽정이가 옥쇄장이를 보려고 옥 뒤에 돌아와서 보니
황천왕동이가 옥쇄장이를 붙들고 서로 이놈저놈 욕질하고 있었다.
옥쇄장이가 처음에 황천왕동이게 끌려갈 때는 속으로 은근히 무엇을 줄까 하
고 바랐는데 급기 옥 뒤에 들어가서는 한껏 하는 말이 “오늘 밤에 틈이 있거든
나하구 같이 술 먹으러 가세.”하는 시쁘장스러운 소리라 옥쇄장이가 사람이 부
처님의 중간토막이라도 골이 안 날 수 없었다. “이놈아, 누가 너더러 술 달라더
냐?” “이놈 저놈 한 하구는 말 못하나.” “백정놈더러 놈이라구 못하면 누구
더러 놈이라구 하랴.” “나는 백정두 아닐세. 황해도 봉산서 군관 다니시든 어
른이야.” “백정놈의 붙이루 의관하구 다니며 거짓말하구 그것만두 귀양갈 죄
다.” 황천왕동이가 불룩한 품에서 뚤뚤 뭉친 때 묻은 수건을 꺼내더니 ‘너 줄
물건 아니니 봐라.’ 하듯이 옥쇄장이 눈앞에 훌훌 털어서 얼굴을 씻고 다시 뚤
뚤 뭉쳐 품에 집어넣었다. “한 놈은 날 붙잡구 실랑이하구 한 놈은 갇힌 연놈
들하구 짬짬이하구 너의 놈 꾀 다 알았다.”하고 옥쇄장이가 급히 돌쳐서 나가
려는 것을 황천왕동이가 쫓아와서 “내 말 좀 듣구 가게.”하고 손을 꽉 잡았다.
“손 놔라, 못 놓겠느냐?” “글쎄 잠깐 내 말 좀 듣게.” “이놈아, 말이 무슨
말이냐?” “관가에 들어간 물건이 있지, 그 물건을 찾아 내오거든 자네를 좀
노놔주두룩 내가 말함세.” “이놈이 누구를 놀리나.” “놀리는 게 무언가. 참
말일세. 만일 그 물건을 못 찾아내게 된다면 내가 소매동냥을 해서라두 자네의
수구를 갚을 테니 갇힌 사람들을 좀 잘 봐주게.” “무엇이 어째! 갇힌 연놈을
잘 봐달라구? 오냐, 잘 봐주마. 저승 가는데 활개들을 치구 가두룩 잘 봐주마.”
“지금 한 말 한번 다시 해봐라. 네놈이 만일 갇힌 사람 몸에 털끝만치라두 손
을 대면 네놈의 배때기에 칼이 들어갈 테니 그리 알아라.” “이놈이 누굴 얼르
나. 경칠 놈 같으니.” “이놈아, 누가 경을 치나 두구 보려느냐.”
옥쇄장이와 황천왕동이가 서로 욕질들 하는 중에 꺽정이가 들어와서 옥쇄장이
를 보고 “갇힌 아이 하나가 방금 죽어가니 물 한 모금만 갖다 먹여주우.”하고
청하였다. “내가 너희들의 심부름꾼인 줄 아느냐?” “심부름꾼 아니면 사람
죽는 걸 가만두구 볼 테요.” “제 명 짤러서 뒤어지는 걸 내가 알 배 있느냐.”
“이놈 심보 좋다. 어디 보자.” 꺽정이가 옥쇄장이를 떠밀어 자빠지자, 바로 다
리를 잡아 꺼꾸로 치켜들었다. “물을 갖다 먹일 테냐 어쩔 테냐! 말해라.” 옥
쇄장이의 고개가 끄덕끄덕하는 것을 꺽정이가 내려다보고 “내 동생이 죽기 전
에 네가 죽지 않을라거든 물을 갖다 먹여라.”하고 다리를 내려놓았다. 꺽정이와
천왕동이는 옥쇄장이를 끌고 옥 앞으로 나와서 곧 물을 가지러 보낸 뒤에 꺽정
이가 창살 앞에 와 서서 백손이더러 말을 물었다. “좀 피어났느냐?” “아무리
보아두 아주 죽은 것 같소.” “손발이 어떠냐?” “발은 만져보지 못해서 모르
지만 손은 얼음장 같소.” “코밑에 손을 대어보았느냐.” “더운 김은 없어지고
찬 김이 나우.” “젖가슴은 뛰느냐?” “가만 있소. 만져봅시다. 제미 칼에 걸
려서 맘대루 만져볼 수두 없네. 아이구 살이 차디차우. 조금두 뛰지 않소.” “
아이구 그러면 아주 죽었구나. 여보 누님, 팔삭동이가 죽었다우.” 꺽정이는 옥
앞에 주저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애기 어머니는 옥 안에서 “아이구 불쌍해라.
얼뜬 위인이 죽음까지 얼뜨게 했네. 아이구 불쌍해라.” 넋두리하면서 울었다.
옥쇄장이가 저의 집에를 몇 고팽이 왔다갔다 할 동안이 지나도 오지 아니하여
황천왕동이가 괴이쩍게 생각하며 “형님, 고만 집으루 갑시다.”하고 꺽정이를
붙들어 일으킬 때 홀저에 아우성 소리가 들리며 창칼 가진 관속 한 패가 옥 앞
으로 쫓아들어왔다. 천왕동이가 꺽정이의 옷을 잡아당기며 “형님, 얼른 피합시
다.”하고 말하니 꺽정이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럼 어떻게 할 테요?” “
잡혀가지.” “형님이 잡혀가면 뒷일은 어떻게 하우?” “원님보구 사정해서 내
가 나오게 되면 좋구 만일 나오지 못하구 갇히거든 네가 이별장에게 가서 말하
구 벳자를 얻어다가 아버지를 묶어놓구 팔삭동이두 찾아내다가 묶어놔라.” “
형님이 마저 잡혀가게 된다면 나는 청석골패를 끌구 와서 파옥하겠소.” “장사
지낸 뒤에는 나 혼자서라두 어떻게 할 테니 내 말대루만 속해 해다우.” 꺽정이
와 천왕동이가 몇 마디 수작하는 중에 수교가 장교 사령 이십여 명을 영솔하고
가까이 들어왔다. 꺽정이가 몇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잠깐 거기들 서서 내 말
좀 들으우.”하고 큰소리를 지르니 칼 들고 앞장선 수교부터 발을 멈추며 “네
가 파옥하러 왔다지?”하고 호령하였다. “파옥이라니 파옥하러 왔다면 옥문을
가만두었겠소? 옥문 좀 보구 말하우.” “옥사쟁이는 어째서 때려눕혔느냐?”
“옥사쟁이를 누가 때렸단 말이오. 우리는 때린 일 없소.” “때린 일 없는 것은
관가에 들어가서 발명하구 줄을 곱게 받아라.” “어차피 원님께 들어가서 사정
할 말씀이 있으니까 내가 갈텐데 여기 섰는 처남은 저의 누이를 잠깐 보러 온
사람이니 잡지 말구 보내우.” “안 된다.” “안 되어? 그러면 내가 먼저 처남
을 보내구 나중 다시 이야기 하겠소.” “이놈아, 힘꼴 쓴다구 흰소리 마라.”
“꺽정이 여기 섰으니 칼루 칠 사람이 있거든 쳐보구 창으루 찌를 사람이 있거
든 찔러 보우.” 수교가 뒤를 볼아보며 눈짓하더니 장교와 사령들이 일시에 좌
우로 갈라서서 꺽정이와 천왕동이의 앞을 막고 들어오며 아우성을 쳤다. 꺽정이
가 수교를 노리며 쫓아나가다가 한번 뛰어 수교 뒤로 넘어가서 바른팔을 잡아젖
히고 칼을 뺏었다. 장교와 사령들이 이것을 보고 쫓아올 때 꺽정이는 벌써 칼을
쥐고 이리 닫고 저리 닫고 하였다. 꺽정이가 삽시간에 장교 사령 이십여 명을
치는데, 치는 것은 칼등이라 사람은 하나도 상치 아니하였으나 치는 곳은 바른
팔이라 병장기를 모두 떨어뜨리어서 옥문에 기대서서 구경하던 황천왕동이가 땅
에 떨어진 칼과 창을 집어다가 한옆에 모아놓았다. 장교와 사령들이 슬금슬금
뒤를 빼려고 드는 것을 꺽정이가 보고 소리를 질러서 도망질들을 치지 못하게
한 뒤에 “인제 꺽정이를 함부루 건드리지 못할 건 알았소?”하고 수교를 바라
보니 수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저기 또 한 패가 오는구려.” 황
천왕동이가 소리쳐서 꺽정이가 앞을 바라보고 섰는 중에 새로 장교 사령 팔구
명이 쫓아들어오며 그중에서 꺽정이에게 인정 쓰던 나이 먹은 장교가 앞으로 나
섰다. “꺽정이 자네두 관령 거역하는 것이 큰 죈 줄 알겠지. 그만 것은 잘 알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인가. 아까 머리 풀구 앉았을 때는 차마 가자구 우기지 못
했지만 지금 여기까지 나온 바엔 거역 말구 곱게 가세.” “나 하나만 잡
아간다면 긴 말 아니하겠소. 그렇지만 일에 상관없는 내 처남까지 잡아간다니
사람이 비윗장이 갈라지지 않소.” “자네 처남은 잡아갈 것 없지. 가만 있게.”
하고 나이 먹은 장교가 수교에게 귓속말하고 와서 “자, 자네만 가세. 그대루 가
두 좋지만 관령이 그렇지 못하니 줄을 지구 가세.”하고 붉은 줄을 내밀었다. 꺽
정이가 옥 앞에서 잡혀서 관가에 들어갔을 때 날이 이미 어두웠었다. 군수가 저
녁 먹기가 늦은 까닭에 꺽정이를 잡아들여서 옥쇄장이에게 행패한 것만 대강 사
실하고 곧 장방에 내려 가두게 하였다.
이튿날 조사 끝에 비로소 장물에 대한 꺽정이의 초사를 받게 되었는데 군수는
꺽정이의 인물이 사내답게 생긴 것을 보고 백정의 자식으로 난 것을 아깝게 여
기는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네가 본래 양주 사람이냐?” “녜, 양주서 났소
이다.” “나이 올에 몇 살이냐?” “서른여덟 살이올시다.” “네가 백정의 자
식으로 푸주도 안하고 다솔 식구에 어떻게 사느냐?”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그럭저럭이라니 모호한 말이다. 분명히 말할 수 없느냐?” “남의 도움이 많
소이다.” “네 집에서 나온 주단 포목 등속은 어디서 생긴 것이냐?” “평양서
온 것이올시다.” “평양서 보냈어? 평양서 누가 보냈느냐” “수지국장사 서림
이란 사람이 보낸 것이올시다.” “서림이가 어디 사람이냐?” “광주 아전으루
경기감영 영리를 다니던 사람이올시다.” “경기감영 영리가 어떻게 평양 가서
토관을 다니느냐?” “평안감사께 신임을 받았답니다.” “서림이가 너하고 대
단 친하냐?” “녜, 친합니다.” “네 누이의 말은 물건들은 서울 양반의 댁에서
보냈다니 그건 거짓말이냐?” “물건이 올 때 서울편으루 온 까닭에 서울서 보
낸 줄루 잘못 안 모양이올시다.” “물건이 오긴 언제 왔느냐?” “재작년 섣달
과 작년 섣달에 세찬으루 왔소이다.” “촛궤두 평양서 온 것이냐?” “녜, 그렇
소이다.” “촛궤에 영부사댁 택호 쓰였든 것이 분명한데 네게 보낸 것이면 그
런 택호가 쓰였을 리 있느냐?” “택호 쓰인 것은 못 보았습니다. 글씨를 썼다
가 긁어버린 자국만 있습디다.” “네가 긁어버리기 않았느냐?” “보낸 사람이
그런 것을 보냈습디다.” 군수가 별로 까다롭게 묻지 않고 묻는 것을 그친 뒤에
“네 집 물건의 소종래가 네 말과 같은지 평양으로 알아보기까지 너는 갇히어
있어야 할 테니 그리 알아라.”하고 말을 이르니 꺽정이는 죽은 아비와 동생을
감장하도록 이삼일 말미를 달라구 사정하였다. 군수 생각에 꺽정이의 죄 있고
없는 건 나중 밝히면 드러나려니와 죄가 있다고 치더라도 상제 되기 전에 범한
죄가 상제 된 뒤에 발각될 때는 십악대죄 이외에는 다 속을 받고 내놓고 만일
속을 못 바치거나 안 바치려고 하면 백일거상시킨 뒤에 비로소 결벌하는 것이
국법이라, 꺽정이를 내놓아 죽은 아비를 감장하게 하는 것이 국법에 비추어서
합당할 듯하여 꺽정이에게 “네 정경이 가긍해서 특별히 사흘 말미를 줄 것이매
그 안에 감장하구 다시 들어와서 갇히게 해라.”하고 처분을 내리었다.
꺽정이가 집에 나와 보니 천왕동이는 임진을 나가고 죽을 꼴이 된 애기 혼자
집에 있었다. “오늘 아침에 옥에 갔다 왔느냐?” “어제 저녁에 밥을 가지고
갔다가 밥도 못 드리고 매만 맞았어요.” “옥사쟁이에게 맞았느냐?” “녜, 다
시 오면 다리를 분질러놓는다구 해요.” “밥 가지구 나하구 같이 가자.” 꺽정
이가 애기를 데리고 옥에 가려고 집에서 나설 때 사령 하나가 쫓아오며 “꺽정
이.”하고 불렀다. “무슨 일이 있소?” “어디를 가나?” “옥에 밥 들이러 가
우.” “그럼 마침 잘됐네. 지금 형방이 옥에 나오셔서 동생 송장을 받아가라구
부르시네.” 꺽정이와 애기가 사령 뒤를 따라 옥에 와서 꺽정이는 팔삭동이의
송장을 찾아내고 애기는 옥에 남은 세 식구에게 밥을 들이는데, 옥쇄장이가 형
방에게도 눌리려니와 꺽정이를 기탄하여 기광을 부리지 못하였다.
이날 점심때 천왕동이가 돌아오고 저녁때 이봉학이가 하인 하나 안 데리고 혼
자 오고 이튿날 낮에 신불출이가 돌아오고 밤에 박유복이가 서림이와 작반하여
같이 왔다. 유복이가 올 때 다른 두령들이 다같이 오려고 하고 더욱이 곽오주가
몸달게 오려고 하는 것을 일체로 못 오게 하고 급할 때 지혜를 빌려고 오직 서
림이와 같이 온 것이었다. 서림이의 온 것을 꺽정이는 의외로 생각하여 서림이
를 보고 의외라고 말하니 서림이가 웃으면서 “이번 액회 당하신 것을 귀기본하
여 말하자면 내 탓이라구 할 수 있는데 내가 안 와볼 길이 있습니까.”하고 대
답하였다. 실상 서림이가 유복이를 따라온 것은 유복이의 비위도 맞추고 꺽정이
의 환심도 사고 또 같지않은 의기도 보이려는 것이었다. 범절 없는 초종이나마
서림이 온 뒤에 비로소 두서를 차려서 상포로 수의 명색들도 만들고 상제의 상
옷도 지었다. 이튿날 점심때가 지난 뒤에 북망산 한모퉁이에 장사를 지내게 되
었는데 서림이는 먼저 가서 산지를 잡고 박유복이와 황천왕동이는 서림이를 따
라가서 산역들 하고 꺽정이는 아비의 관을 옆에 끼고 가고 신불출이는 팔삭동이
의 관을 지게에 지고 가고 이봉학이는 애기의 손을 잡고 관 뒤에 따라갔다. 평
토된 것을 보고 이봉학이는 산에서 바로 가는데, 갈 때 꺽정이에게 무슨 귓속말
을 하였다.
장사를 다 지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꺽정이가 새삼스럽게 통곡함을 마지 아니
하여 박유복이가 “형님 그만 우시우.” 황천왕동이가 “운다구 죽은 사람이 살
아오겠소. 고만 울구 갇힌 사람들 빼내 올 도리나 생각합시다.” 서림이가 “지
금 우시구만 기실 때가 아닙니다.” 또 신불출이가 “고만 진정하십시오.”하고
여럿이 말로 말리는 외에 애기까지 “아저씨 고만 그치세요.”하고 팔목을 잡고
흔들며 말리었다. 꺽정이가 곡을 그친 뒤에 서림이가 먼저 꺽정이더러 “앞으루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하고 물으니 꺽정이가 한참 만에 “아직 질정한 생각
이 없소.”하고 대답하였다. “아까 이별장이 갈때 무슨 말씀 합디까?” “나만
피하구 없으면 내 식구쯤은 자기 힘으루 주선해서 빼놀 수 있다구 나더러 피하
랍디다.” 꺽정이 말끝에 박유복이는 “그러면 됐소. 형님, 우리에게루 갑시다.
숨어 있기는 우리게가 좋지 않소.”하고 권하는데 황천왕동이는 “아니 그게 될
말이오? 옥에 남은 식구들이 모두 팔삭동이처럼 죽어나오게 되란 말이지. 말이
되우?”하고 타박하였다. 박유복이가 서림이를 돌아보며 “이별장 말이 유리하
지 않소. 서장사 생각엔 어떻소?”하고 의견을 물어서 서림이가 나직나직한 말
소리로 “황서방의 염려가 좀 과하긴 하나 그런 염려가 바이 없진 않소. 이별장
의 주선이 어련할 것 아니로되 그 주선이 도는 동안에 옥에 갇힌 사람이 몇 번
살는지 누가 아우? 사람의 목숨이 워낙 초로 같다지만 옥에 갇힌 사람의 목숨이
야말루 참말 초로 같소. 내 생각 같아서는 옥에 갇힌 사람들까지 아주 빼가지구
우리게루 가시는 게 제일 상책일 듯하우.”하고 대답하는 것을 꺽정이는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더 좋겠소.” 박유복이가 말하고 “지금 그렇
게라두 했지 별수 있소.” 황천왕동이가 말하는데 꺽정이는 여전히 눈을 딱 감
고 있어서 천황동이가 속으로 조바심이 났다. “형님, 어떻게든지 좌단해 말하
우.” 꺽정이가 천황동이의 말을 듣고 비로소 눈을 뜨고 애기를 보며 “저녁밥
곧 지어라.”하고 이르고 다른 말이 없었다.
꺽정이 앞에 세갈랫길이 놓여 있었다. 한 갈래는 식구들이 갇혀 있는 옥으로
들어가는 길이니 이 길로 가면 적어도 극변이나 원악도를 안 가지 못할 것 같
고, 또 한 갈래는 식구들을 버리고 정처없이 떠나는 길이니, 이 길로 가면 나중
돌아올 기약이 망연할 뿐 아니라 돌아오게 되더라도 식구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고, 마지막 한 갈래는 식구들을 옥에서 빼내가지고 청석골로 달아나는 길
이니, 서림이가 가르치고 유복이가 끌고 또 천왕동이가 권하나 이 길로 가면 막
이 적굴에 빠져서 도적놈으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라, 세갈랫길이 다같이 꺽
정이 마음에는 좋지 않았다. 도적놈의 힘으로 악착한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만
있다면 꺽정이는 벌써 도적놈이 되었을 사람이다. 도적놈을 그르게 알거나 미워
하거나 하지는 아니하되 자기가 늦깎이로 도적놈 되는 것도 마음에 신신치 않거
니와 외아들 백손이를 도적놈 만드는 것이 더욱 마음에 싫었다. 서림이가 중언
부언 이해를 말하고 천왕동이가 조급하게 결정을 재촉하여도 꺽정이는 이렇다
저렇다 대답 한마디가 없어서 사람이 좀 늘쩡한 유복이까지 답답하게 생각하여
“당초에 말이 없으니 사람이 답답하지 않소. 대체 형님같이 과단성 많은 이가
오늘은 웬일이오?”하고 말하였다. 얼마 뒤에 꺽정이가 꿈꾸다가 깬 때와 같은
태도로 “서장사 말대루 할 테니 식구 빼내올 계책을 서장사가 담당하우.”하고
말하여 서림이는 선뜻 “그건 염려 맙시오.”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따루 할
일이 있소.” “무슨 일인가요?” “이웃집에 버릇 좀 가르칠 것들이 있소.” “
녜, 고발한 놈 말씀이지요.” 꺽정이가 한번 고개를 끄덕하였다. “내가 알아서
사람을 분배하오리다. 그런데 이 집은 어떻게 하실 텐가요?” “내던지구 가지
별수 있소.” “아주 불질러 버리구 가면 어떻겠습니까?” “좋소.” “그러면
사람 분배를 이렇게 합시다. 박두령하구 황서방은 옥에 갇힌 사람을 끄내오시구
주인은 이웃집에 가서 할 일 하시구 나는 이 집에서 불을 놓구 신서방은 기집애
데리구 앞길에 가서 기다리구 있게 합시다.” 서림이가 꺽정이보고 말한 뒤에
유복이와 천왕동이를 돌아보며 “두 분 하실 일이 제일 중요한데 두 분으루 어
려우실 것 같으면 신서방까지 마저 가게 하겠으니 어떠합니까?”하고 물으니 “
그럴 것 없소. 옥문이라구 한번 발길루 내지르면 부서질 놈의 옥문이니까 파옥
하는 데는 나 혼자만 가두 넉넉하우.” 황천왕동이가 먼저 장담하고 “옥은 아
무리 허술하더래두 옥사쟁이 쫓아올 것과 다른 관속들이 쏟아져나올 것을 생각
해야 하지 않소.”하고 서림이가 말하니 “우리가 오래 지체되면 다른 관속들까
지 쏟아져나오게 될 테지만 옥이 허술하면 그렇게 오래 지체될 것두 없구 설혹
몇십 명 쏟아져나온다손 잡드래두 우리 둘이 처치할 수 있을 게요.”박유복이마
저 장담하였다. 대체 의논이 끝난 뒤에 여럿이 둘러 앉아서 저녁밥들을 먹는데
꺽정이도 여러 날 만에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저녁상을 일변 치우며 곧 집안
세간을 뒤져서 가져갈 만한 물건을 짐을 만들었는데, 예전에 검술 선생이 준 장
광도는 다행히 집뒤짐에 들쳐나지 않고 벽장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꺽정이가 몸
에 지니려고 내놓았다. 땅거미 지나서 밖이 캄캄할 때 신불출이는 짐을 지워서
애기와 같이 먼저 떠나보내고 네 사람은 짚신 감발들까지 단단히 하고 일 시작
할 시각으로 작정한 정밤중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짐승까지 잠이 드는 정밤중이라 사방이 괴괴하였다. 때 되기를 기다리느라
고 애삭이던 황천왕동이가 “한밤중이 지났나 보우. 인제 고만들 일어납시다.”
하고 재촉하여 다들 같이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먼저 황천왕동이와 박유복이가
옥으로 가는데 옥을 깨칠 제구로는 천왕동이가 도끼 한 자루를 몸에 지닐 뿐이
고 관속을 대적할 무기로는 유복이가 댓가지 표창을 한 줌 가득 쥐었을 뿐이었
다. 옥으로 가는 패가 나간 뒤에 꺽정이는 한 손에 장광도를 빼어들고 최가의
집 사이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갔다. 최가의 집은 아래윗간 방이 둘인데 최가
의 어미는 손자 형제를 데리고 아랫간에서 자고 최가 내외는 젖먹이 딸을 데리
고 윗간에서 자는 것을 꺽정이가 잘 아는 까닭에 대번 윗간에 와서 방문을 열어
젖혔다. “이게 누구야?” 새된 계집의 소리가 난 다음에 “엉, 웬일이여.” 얼
뜬 사내 소리가 나고 계집사내가 다 벌떡 일어 앉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었다.
꺽정이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어둔 방안을 들여다보며 “너의 연놈이
우리와 무슨 원수가 있어서 우리를 고발했느냐!”라고 불호령하는 중에 최가가
도망하려고 살며시 아랫간 사잇문을 열었다. “이눔, 어디를 도망할 테냐!” 꺽
정이가 방안으로 쫓아들어가니 최가가 아랫간으로 뛰어들어가서 앞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꺽정이가 최가의 뒤를 쫓아나와서 삽작 안에서 칼을 쳤다.
아랫도리 발가벗은 최가가 삽작 앞에 쓰러질 때 최가의 계집은 속곳바람으로 봉
당에 나와서 고함을 치고 최가의 어미는 방문 밖에 머리만 내밀고 악을 쓰고,
또 최가의 자식들은 방안에서 소리내어 울었다. 꺽정이가 봉당 앞에 와서 “모
든 조화가 네년에게서 났을 테지. 네년두 죽어라.”하고 최가의 계집도 칼을 쳤
다. 꺽정이가 최가 내외를 죽인 뒤 피묻은 칼을 들고 밖으로 나올 때 서림이는
벌써 꺽정의 집 전후 좌우에 불을 질러놓고 최가의 집으로 달아왔다. “죽이셨
소? 죽이셨거든 아주 화장까지 지내줍시다.” 서림이의 말을 듣고 꺽정이가 삽
작께 있는 사내의 송장과 봉당에 있는 계집의 송장을 방에 집어넣는 동안에 서
림이는 앞뒤로 돌아다니며 집에 불을 질렀다. 최가의 어미와 자식들은 집 앞뒤
에 불이 돌 때까지 뛰어나오지 못하였으니 필경 불 속에서 타 죽었을 것이다.
꺽정이와 서림이가 일을 마치고 옥에 간 패와 만날 약속한 자리에 먼저 와서 한
동안 기다리어도 오지를 아니하여 꺽정이가 갑갑증이 나서 서림이를 보고 “내
가 얼른 옥에까지 가보구 올 테니 그 동안 여기 혼자 기시우.” 말하고 그 자리
에서 나서서 옥으로 오는데 옥에 다 나오기 전에 풍편에 아우성 소리가 들리어
서 ‘이거 무슨 일 난 게다.’ 꺽정이는 생각하고 곧 달음질을 놓아 쫓아왔다.
황천왕동이와 박유복이가 아무 거침없이 옥에까지 와서 갇힌 사람들에게 온
뜻을 알린 뒤에 곧 옥문을 깨치는데 발길 한번에 부서질 것 같은 문짝이 그렇게
쉽게 부서지지 아니하여 마침내 도끼로 깨치게 되었다. 고요한 밤중에 도끼 소
리가 굉장히 울려서 도끼질을 연거푸 하지 못하고 한번 하고 한참씩 쉬었다. 옥
쇄장이 집에서 옥문 깨치는 도끼 소리를 듣고 놀라서 온 집안 식구가 다 일어났
으나, 파옥하는 사람이 무서운 꺽정인 줄 짐작하고 옥쇄장이부터 옥에는 가볼
생의를 못하였다. 옥쇄장이 집 식구 어른 아이가 각각 이방 이하 관속들의 집으
로 쫓아다니며 잠들을 깨워서 관속들이 바쁜 걸음으로 왔다갔다 하던 끝에 닫히
었던 관가 삼문의 옆문 하나가 다시 열리었다. 군수가 꺽정이 파옥한단 급보를
듣고 일변 급한 대로 장교 사령 십여 명을 먼저 쫓아 내보내고 일변 부랴부랴
수교 이하 장교들과 기타 관속을 불러들여서 일제히 병기를 나눠주며 꺽정이와
그 가속을 살려 잡기 어렵거든 죽여도 좋다고 분부하여 내보내고 그 다음에는
읍내 각동 동소임과 양민의 장정들을 불러내서 각처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황
천왕동이와 박유복이가 옥문을 부수고 칼과 착고를 벗기고 갇힌 사람들을 옥 밖
으로 데려내온 뒤에 백손이는 혼자 걸리고 백손 어머니는 황천왕동이가 부축하
고 애기 어머니는 박유복이가 손을 잡고 나오는데, 옥에서 몇 간쯤 나왔을 때
관속 십여 명이 앞길을 막고 고함들을 질렀다. 박유복이가 황천왕동이를 보고
“저것들은 내가 처치할 테니 세 사람은 자네가 보호하게.”하고 말하여 황천왕
동이는 세 사람을 데리고 뒤로 물러나고 박유복이는 댓가지 표장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네놈들이 우리를 가지 못하게 막을 테냐! 죽어두 원망 안할라거든 막
아봐라!” 박유복이의 재주를 모르는 관속들이 꺽정이 아니라고 넘보고서 몽치
들을 휘두르며 앞으로 내닫다가 댓가지 표창이 면상에 들어가 박히는 바람에 두
서너 사람이 땅에 엎드러지자,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슬금슬금 도망하였다. 박
유복이와 황천왕동이가 다시 한데 모여서 세 사람을 데리고 나오는 중에 백손
어머니가 갈증이 나서 못 견디겠다고 하여 옥쇄장이 집 앞에 와서 황천왕동이가
집안 동정을 살피고 물을 뜨러 들어갔다가 집안이 하도 괴괴하여 방안을 들여다
보니 사람의 새끼 하나 없는 빈집이라 여러 사람을 불러들여서 백손 어머니 외
의 다른 목마른 사람도 물들을 같이 먹었다. 옥쇄장이 집에서 나왔을 때 앞을
바라보니 관속 여러 십 명이 풍우같이 몰려오는데 병기들이 달빛에 번쩍번쩍하
였다. “이번은 사람 수두 많거니와 모두 병장기를 가진 모양일세.” “셋은 옥
사쟁이 집에 들여앉히구 우리 둘이 막아내 봅시다.” 박유복이와 황천왕동이의
수작하는 말을 애기 어머니가 듣고 “그럴 것 없이 우리 다섯이 다 집에 들어가
서 숨어 있다가 옥에들 가서 찾는 틈에 도망해 보지.” 하고 말하여 박유복이와
황천왕동이가 다 애기 어머니의 말을 좇아 옥쇄장이 집으로 도로 들어와서 어둠
침침한 봉당 구석과 부엌 구석에 숨어 앉아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장교가 옥쇄
장이 집 앞을 지나서 옥으로 쫓아갈 때 뒤에 따라오던 옥쇄장이가 꽁무니를 뺄
생각이 났던지 저의 집으로 들어오다가 봉당 구석에 숨어 있던 박유복이에게 댓
가지 표창 한 개를 맞고 땅에 쓰러졌다가 곧 밖으로 기어나가며 “도둑놈들 여
기 있소!”하고 소리를 쳐서 숨어 있는 사람들이 도망하여 나가기 전에 장교패
가 몰려와서 짐을 에워싸고 아우성들을 질렀다. 박유복이와 황천왕동이 단둘만
같으면 한편을 뚫고 도망도 하겠지만 백손이도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장달음질을
지기 어렵거니와 백손 어머니 시누이 올케가 당초에 달음질칠 가망이 없어서 도
망할 생의를 못하였다. “이거 큰일났소. 어떻게 하면 좋소.” 천왕동이가 몸을
달리기 시작하니 “지금 내 손에 댓가지두 여남은 개 남아 있구 또 따루 쇠가
한벌 있으니까 아직은 염려없네.” 유복이는 위로하듯 말하였다. “이놈들이 밖
에서 아우성만 치구 들어오지를 않으니 우리가 쫓아나가 볼라우?” “무슨 꾀들
을 쓰는지 모르니 가만히 좀 있어 보세.” “얼른 여기를 벗어져 나가야 하지
않소.” “설마 어떻게든지 벗어져 나가게 되겠지.” 박유복이와 황천왕동이가
봉당 구석에서 수작하고 섰을 때 앞뒤 울타리가 일시에 부서지며 관속들이 사방
으로 뛰어들어왔다. 유복이는 표창을 내치고 천왕동이는 표창 맞은 장교에게서
창 한 자루를 뺏어들고 내둘렀다. 유복이의 표창이 쇠밖에 안 남았을 때 홀저에
밖에서 “꺽정이 여기 왔다!” 벽력 같은 소리가 나고 삽작께를 막고 섰는 장교
들이 엎드려지며 고꾸라지고 꺽정이가 칼을 춤추며 들어왔다. 천왕동이가 얼른
내달으며 “형님, 우리들 다 여기 있소.”하고 소리치니 꺽정이는 “오냐.” 한
마디 대답하고 곧 천왕동이를 등지고 돌아서서 칼을 머리 위에 비껴 들고 좌우
를 돌아보며 “죽구 싶은 놈은 내 칼을 받아라.!”하고 호통을 질렀다. 꺽정이의
호통 한번에 죽은 장교와 중상당한 관속들만 뒤에 남고 성한 관속들은 다 도망
하였다.
꺽정이는 칼을 들고 앞에 서서 황천왕동이는 창을 메고 꺽정이의 식구와 같이
중간에 서고 박유복이는 쇠표창 대여섯 개를 손에 쥐고 뒤에 서서 술렁거리는
양주읍내를 무인지경같이 지나나오는 중에 꺽정이의 발길이 자기 집 있는 곳으
로 향하였다. 꺽정이의 집과 최가의 집은 다 타서 주저앉고 최가의 집 이웃집까
지 타서 겨우 뼈대만 남았는데 불 잡던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서 웅긋쭝긋 서
있다가 꺽정이의 일행이 오는 것을 보고 와 하고 흩어졌다. 꺽정이가 불탄 집
앞에 와서 발을 멈추자, 애기 어머니가 꺽정이 옆으로 쫓아나오며 “여기가 우
리 집 아니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백손 어머니가 마저 시누이 옆으로 나서려
고 할 때 꺽정이는 벌써 앞서 걸어나갔다. 길목 지키는 사람들이 먼빛 보고 도
망들 하여 꺽정이의 일행은 아무 거침 없이 약속한 자리에 나와서 서림이를 만
나고 또다시 얼마 동안 더 나와서 애기와 신불출이를 만났다. 꺽정이는 칼을 집
에 꽂아 허리춤에 지르고 황천왕동이는 창을 풀섶에 내던지고 박유복이는 쇠표
창을 주머니에 넣은 뒤에, 애기는 꺽정이가 업고 애기 어머니는 유복이가 부축
하고 백손 어머니는 천왕동이와 백손이가 양옆에서 부축하고 길을 걸었다. 이십
리 남짓하게 와서 날이 밝으니 서림이가 꺽정이를 보고 “낮에 파주, 장단을 지
나가기 위험하니 산속 으슥한 곳에 숨어있다가 밤길을 걸읍시다.”하고 말하였
다. 황천왕동이가 옆에서 “밤에 가서 임진을 어떻게 건너겠소.”하고 타박하니
서림이가 황천왕동이를 돌아보며 “이별장의 힘을 빌면 오밤중이라두 건널 수
있을 게요.”하고 대답하였다. 서림의 말을 박유복이가 옳다고 할 뿐 아니라 발
이 아픈 애기 어머니까지도 좋다고 하여 꺽정이가 마침내 서림이의 말을 좇아서
낮에는 종일 산속에 숨어 있다가 어두침침한 때 길을 나서서 임진나루를 나왔는
데, 꺽정이가 이봉학이를 들어가 보니 봉학이는 양주 소식을 낮에 듣고 근심하
고 있던 차이라 긴말 않고 배 한 척을 내주었다. 꺽정이의 일행은 밤중에 임진
나루를 건너고 이튿날 또다시 밤길을 걸어서 밤중에 청석골을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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