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추리소설 제3의 정사 김성종
책이름 : 제3의 정사 지은이 : 김성종
----- 차 례 -----
⊙ 작가소개
1. 임 신
2. 불 안
3. 증 오
4. 개새끼
5. 사팔뜨기
6. 협 상
7. 위자료
8. 정 체
9. 각 서
10. 뉴 스
11. 용의자
12. 형 사
13. 신 문
14. 과 거
15. 추 적
16. 관 계
17. 미 행
18. 사파이어
19. 살 인
20. 비 밀
21. 제3의 정사
⊙ 작가소개
1941년 전남 구례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1971년 현대문학 시 소설 추천 완료
1974년 한국일보 최후의 증인으로 장편소설 당선
작품으로 <최후의 증인>, <여명의 눈동자>, <Z의 비밀>, <안개
속으로 지다>, <제5열>, <국제열차살인사건> 등 다수
1. 임 신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언제 보아도 조그맣고 아담한
모습이다. 보기는 저래도 벗겨 놓으면 풍만하다. 입술의 모습이
야무져 보인다. 화가 난 투로 재빨리 다가오고 있다.
청바지에 흰 장미꽃이 그려진 빨간 T셔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간편한 차림이다. 가슴에 책 몇 권을 끌어안고 있다.
대학생임을 나타내는 배지가 유난히 돋보인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느긋한 기분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저녁을 먹고 나서 술을 한잔 걸친 다음 호텔에
들어간다.> 이것은 우리의 공식화된 스케줄이었다. 일을 치르고
나면 열 시쯤 되겠지.
집에 도착하면 열한 시. 아내는 좋지 않은 얼굴로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물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적당히 둘러붙인다. 아,
돌 잔치가 있어서 거기 들렀다 오느라고 늦었어. 저녁은 먹었어.
풍성한 검은 머리채에 감싸인 조그맣고 갸름한 얼굴이
다가왔다. 얼굴빛이 창백하다. 그녀는 고개를 까닥한 다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표정이 전 같지 않게 딱딱하다. 언제나
미소를 띠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일 주일 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웃는 듯하다가 도로
굳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짓느라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웨이터가 다가왔다.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이는
메뉴판을 한쪽으로 치웠다. 내가 식사를 시키려고 하자 그녀는
머리를 저으며 싫다고 했다.
"전 괜찮으니까 혼자 드세요."
남자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가냘픈 목소리.
"왜 그래?"
"먹고 싶지 않아요."
"식사를 거르면 되나. 그러지 말고 함께 들어."
"제 걱정 말고 드세요."
"무슨 재미로 혼자 먹어. 그럼 술이나 마실까?"
나는 맥주 두 병과 안주로 미트볼을 시켰다. 왠지 그녀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S호텔 25층에 앉아 있다. 스카이 라운지였는데
분위기가 고급스럽고 조용해서 좋았다. 그 곳을 우리가 즐겨
찾는 이유는 분위기 탓도 있지만 호텔방에 들어가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들고 여자와 함께 호텔 방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래도 남의 이목도 있고 해서 여간 뒤가 켕기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방에 쉽게 들어가기 위해 스카이 라운지를 즐겨
이용한다. 방을 미리 얻어놓은 다음 스카이 라운지에서 여자를
만나 호실을 귀띔해 준다.
그리고 먼저 일어나 셈을 치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도중에 슬쩍 내려 방에 들어가 기다린다. 오 분 후에
노크 소리가 들린다.
내가 잔에 술을 따라 주자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는 미소를 거두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아아뇨."
그녀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
"한 잔 더 주세요."
그녀가 빈 잔을 불쑥 내밀었다. 나는 잠자코 술을 따라
주었다.
그녀는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안주도 먹지 않고 빈 잔을
만지작거린다.
"말해 봐. 무슨 일이야?"
나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이쪽을 뚫어지게 쏘아본다.
"저......임신했어요."
쿵!
가슴을 해머로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그녀의
눈을 응시하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잔을
집어들고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침착해지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초조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정말이야?"
나는 침착을 가장하면서 겨우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나를
쏘아보는 그녀의 눈에 금방 눈물이 가득 괴었다. 그녀는 원망
어린 눈으로 나를 쏘아보다가 고개를 숙였는데, 그때 눈물이 몇
방울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사람들이 볼까 봐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우리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고개를
내밀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런 데서 울면 어떡해! 울지 말고 말해 봐. 정말이야?"
그녀는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제가 거짓말하는 줄 알아요!"
내 손에서 담배가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구두
끝으로 꽉 눌렀다.
"병원에 가봤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개월이래?"
"삼 개월이래요."
나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눈초리가 갑자기 싫어졌다. 그녀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악산에서 한 게 문제작을 만들었군."
나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녀가 물었다.
"네?"
지난 여름 우리는 강릉 경포대에서 처음 만나 둘이서 설악산에
갔었다. 우리는 그 곳 호텔에서 이틀을 함께 지냈는데, 그것이
문제의 씨를 만든 것 같았다. 제기랄! 조심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게 안 나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어요."
"일찍 알기 다행이군."
그녀의 이름은 조해주--S여대 무용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스물 한살의 그녀를 마흔 살의 나는 아무 죄의식 같은 것도
느끼지 않고 범했다. 나는 여간해서 죄의식 따위를 느끼지
않는다. 특히 여자 관계에 있어서.
"어떡하죠?"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맴돌고 있던 말이 굴러나왔다.
'어떡하죠?'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결혼하기 전 별로 마음에 없던 여자를 임신시킨 적이 있었다.
그녀도 나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리면서 '어떡하죠?' 하고
물었다. 내가 병원에 가서 지우라고 하자 그녀는 울며불며
매달렸다. 나와 결혼하겠다는 거였다.
내가 면박을 주고 결혼은 절대 못 하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그녀를 굴복시켜 물러서게 하기는 했지만,
그때 어떻게나 혼이 났던지 다시는 여자를 임신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다.
그런데 또 스물한 살짜리 여대생으로부터 '어떡하죠?' 하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어떡하죠?'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세련된 아가씨라면 이 따위 질문으로 상대방 남자를 주눅들게
만들지 않는다. 그런 아가씨는 남자에게 부담을 줄까 봐 혼자
몰래 병원에 가서 처리해 버린다.
남자는 좀 미안한 마음으로 수술비를 내놓으면 된다. 그런
후에는 헤어지거나 새로운 마음으로 애정을 되살리거나 둘 중의
하나다.
"어떡하죠?"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그녀가 다시 물어 왔다. 아까보다는
좀더 강한 어조였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이 사십에 처자가 있는
몸인데, 아기를 낳겠다고 앙탈하지는 않겠지. 자기 앞길을
생각해서 지우겠지. 멍청한 계집애는 아니니까.
그녀는 고분고분하고 청순했다. 마치 내 손끝에서 노는 인형
같았다. 지금까지 반대 의견을 꺼낸다거나 내 뜻을 거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인형처럼, 혹은 식물 인간처럼 내가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 말에 따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떡하긴......병원에 가야지."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섬광
같은 것이 지나갔다. 그녀는 백을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책을
집어들더니
"싫어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사람들이 그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 방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단호하고
명쾌한 한 마디인가! 그녀에게도 저런 데가 있었던가.
나는 어리벙벙해 있다가 급히 일어나 셈을 치르고 그녀를
쫓아나갔다. 그녀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막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잠깐 기다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기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나는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고
엘리베이 터는 하강하기 시작했다.
한참 기다리자 다른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나는 로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커피숍에도 없었다.
급히 밖으로 나가 보았다. 그녀가 갔음직한 방향으로 허둥지둥
가보았다. 그러나 어느새 새버렸는지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기집애 같으니!"
나는 욕지거리를 하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얻어놓은 호텔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애꿎은 담배만 피워 대면서 한숨 짓다가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렸다. 어쩐지 예감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골치 아프게 됐는데......"
나는 거울 속의 사내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중키에
허여멀건 얼굴이 땀을 흘리고 있다. 중년의 살이 올라 중후하고
귀골스럽게 생겨먹었다. 쌍꺼풀진 눈이 노리끼하고 피로에 젖어
있다. 짙은 눈썹, 즉물적인 인상을 풍기는 주먹코, 두툼한 입술.
목이 바트고 어깨가 두꺼비처럼 딱 벌어져 있다.
넥타이를 풀어헤친다. 오늘은 좀 색다르게 즐기려고 했었는데
틀려 버렸다. 괜히 호텔비 몇만 원만 날렸다. 특급 호텔이라
하루 숙박비가 오만 원 가까이 된다. 낮에 시간제로 빌리면 반액
정도 이지만 오후 여섯 시 이후에 투숙하면 하루 치를 물어야
한다.
갑자기 아랫부분이 나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일어서기
시작한다. 여자도 없는데 이러면 정말 곤란하다. 허리띠를 풀고
바지와 함께 팬티를 끌어내린다.
그것이 높이 일어서 있다. 놈이 갑자기 고독해 보인다. 버섯
모양의 머리 부분이 탐스럽게 부풀어 있다. 사람들은 여자의
구석구석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면서도 남자의 성기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려고 든다. 흉물스럽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의 신체 중에 이놈처럼
근사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손으로 놈을 꽉
쥐면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것을 사랑했는가!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이 여기에
키스해 주었는가!
나의 아내는 자기가 이것을 독차지한 줄 알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아내가 알면 기절 초풍하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이놈은 아내 한 사람에게 절대 만족하지 못한다. 부부
사이란 것이 도덕적인 신뢰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놈이 한 여자에 만족하지 못하니 어쩌랴!
이놈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제멋대로 놀아난다. 그럴
때는 별개의 개체로 느껴진다. 지칠 줄 모르는 묘한 놈이다.
나는 가정에 아주 충실한 가장이다. 결혼한 지는 올해로 십오
년째 된다. 슬하에 딸 둘,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그 동안 말썽
한번 부리지 않고 오로지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봉사해 왔다.
내면으로야 어떻든 겉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가장으로 군림해
왔다. 내가 워낙 착실하게 굴었기 때문에 아내는 나를 한 번도
의심해 보거나 한 적이 없다. 아내에게 있어서 나는 거의 완전
무결한 남편이자 남성인 셈이다.
남근이 최대로 팽창했다. 나는 그것을 쥐고 흔들면서 한숨을
내쉰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해주를 안고 싶은 충동이
강렬했었다.
조해주--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지난 7월 하순경이었다.
그때 나는 세미나 관계 때문에 2박 3일 예정으로 강릉
경포대에 갔었다. 그것은 생명 공학에 관한 세미나였는데 말이
세미나지 사실은 먹고 노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바캉스철에 피서지에서 할 수 있는 것으로 먹고 마시고 노는
것 외에 또 뭐가 있겠는가. 피서지에서 열리는 무슨 회의다
세미나다 하는 것이 모두 그렇고 그런 것처럼 그때 그
생명공학에 관한 세미나도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나는 주최측의 한 사람이었다. 주최측은 내가 몸담고 있는
대아그룹을 포함해 세 개 재벌 그룹이었다. 대재벌 그룹들이
공동 으로 생명 공학을 연구하자는 취지에서 공동 주최로
세미나를 연 것인데, 각자가 벌써부터 꿍꿍이속을 차리고 있었기
때문에 세미나란 것은 처음부터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모두가
얼른 일을 끝내고 바다에 뛰어들어 놀자는 속셈만 차리고
있었다.
나는 대아의 기획 파트를 맡고 있는 이사였다.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군에서 이년 동안 ROTC
장교로 복무한 다음 곧장 대아에 들어왔으니까 금년으로 입사
십오 년이 되는 셈이다.
이사가 된 것은 서른여덟 살 때인 재작년 일이다. 입사 십삼
년 만에 대재벌 그룹의 이사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승진이었다. 동료들의 질시와 부러움을 동시에 받으며
우쭐거리다 보니 어느새 이년이 지났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쭐거릴 것도 못 된다. 나의 실력이라는
것은 영어에 좀 뛰어나다는 것뿐 남보다 특출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사가 된 것이 마치 실력 때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남들은 모르고 있지만 사실 나는 회장의 조카사위다. 나의
장인이 회장의 아우니까 꽤 가까운 셈이다. 이 관계를 숨기려고
나는 무진 애를 썼다. 남들에게 알려져 손가락질받는 것이
질색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 이 관계를 아무도 모르고 있다.
꽤 신중하게 비밀을 지켜 온 셈이다.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흘렀다.
7월 하순에 있었던 세미나가 대충 끝나자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는데, 나는 어쩌다 외톨이가 되었다. 세미나가 끝나는
대로 가족들과 합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기를 막내가 아파서 못 가겠다는 거였다.
아들 하나 있는 것이 몸이 약해 사흘거리로 아프다는 바람에
나는 어지간히 면역이 되어 있었다. 으레 또 그러려니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려고는 하지 않고 부지런히 딴 궁리만 했다.
아내에게는 시골집에 들렀다 이틀 후에 가겠다고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다. 아내의 시가, 그러니까 나의 부모님 댁은 치악산
가까운 시골에 있었다. 형님 내외가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효성이 지극한 것이 대학 교육까지 받은 나와는 딴판이었다.
아내에게는 시골집에 들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경포대 해변을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혼자서 호텔 안에 있는 나이트 클럽에 갔다.
클럽 안은 초만원이었고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얌전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웨이터가 다가와 속삭였다.
서울서 온 예쁜 여대생들이 여비가 떨어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한번 만나 보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여대생이라는 말에 나는 귀가 솔깃했다. 정말 여대생이냐,
예쁘냐 하고 나는 물었다. 웨이 터는 자기를 믿어 달라고 했다.
여비가 떨어지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나는 하나 불러
달라고 했다.
조금 있자 귀엽고 청순하게 생긴 아가씨가 다가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행동거지가 어설퍼 보이고 수줍어하는 것이
클럽에서 굴러먹은 아가씨와는 딴판이었다. 진짜 여대생이다
싶어 바싹 호기심이 당겼다. 대학생이냐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바로 조해주였다.
나는 그 날 밤 거나하게 취했다. 취해서 그녀에게 이런 말도
했다. 학생이 아무리 아르바이트라고 하지만 이런 데 나오면
되겠느냐고. 거기에 대해 그녀는 단 며칠만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팁을 후하게 주었다. 그녀가 나를 방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그녀는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음 날 아침 그녀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팁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일부를 돌려주고 싶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사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사뭇 감동해서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돈 봉투를 내밀며 이렇게 많이 받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하도 기특해서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것을 되돌려 주었다. 우리는 전복죽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실 때 나는 넌지시 함께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함께 가주면
아르바이트로 버는 것 이상으로 보수를 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함께 온 친구들 때문에 곤란하다고 말했다. 내가
실망하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친구들을 만나 보고 오겠다 며
나갔다.
한참 후 돌아온 그녀는 친구들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하면서 함께 가는 것은 좋되 한 가지만은 꼭 약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묻자 자기를 범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였다. 나는 물론 좋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되어 나는 그녀를 데리고 설악산으로 갔던 것이다.
일단 호텔 방에 들어가니 약속이고 뭐고 없었다. 방 안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녀는 반항했지만 필사적인 것은 아니어서 마침내
나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다.
첫 번째 일을 치르고 났을 때 그녀는 몹시도 서럽게 울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울지 않았다. 우리는 거기서 이틀 동안
지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우리들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나는 처음
약속대로 그녀에게 등록금에 해당하는 돈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애정 관계는 돈을 주고받는 것일 수가 없었다. 그런
관계였다면 서울에 와서까지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좋아했던 것이다. 아니, 사랑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느끼지 못한 것을 그녀에게서 찾고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신선하고 탄력이 있었다. 그리고 한없이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으면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만큼 그녀가 좋았다.
그런데 우리의 관계를 뒤흔드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녀가
임신한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사고였다. 바라지 않은 것이
생겨났기 때문에 사고였다.
거기에 대비하지 않은 나의 어리석음을 나는 탓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싫어요! 그녀의 외침이 아직도 귀에 쟁쟁히
남아 있었다.
나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남근이 어느새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2. 불 안
"기분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내가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수저를 놓는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여자의 직감력은 놀랍다.
"아아니......"
나는 아내를 쳐다보며 웃었다. 꽤 못생긴 얼굴이다. 이마는
좁고 광대뼈는 튀어나오고 눈이 점을 찍어 놓은 듯 조그맣다.
코까지 들창이다. 거기다가 살이 몹시 쪄서 드럼통 같다. 어쩌다
내가 이런 여자와 결혼을 했지.
"왜 그렇게 식사를 못하세요? 안색도 안 좋고......"
"글쎄......식욕이 좀 떨어지는데......"
나는 잠옷 사이로 드러난 아내의 젖가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자연 해주의 그것과 비교가 된다. 해주의 가슴은 탐스러우면서
탄력이 있어 팽팽하다. 아내의 가슴은 크기는 하지만 볼품없이
축 늘어져 있다. 그래도 아내는 그것을 내 앞에 노출시키기를
좋아한다.
"요새 너무해요."
아내가 갑자기 눈을 흘긴다. 원망스럽다는 투다. 나는 웃기만
한다.
"벌써 일 주일이 넘었어요."
"보채긴......"
나는 한마디 한다.
"보채는 게 아니에요. 일 주일이나 가만 내버려두는 법이 어딨
어요? 정말 요새 형편없어요. 그러기예요?"
아내의 눈빛이 이글거린다. 간단히 말해 지난 며칠 동안
잠자리에서 자기를 안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아내와 성관계를 갖는 것이 괴롭다.
"정말 그러기예요?"
아내가 식탁을 돌아 내 뒤로 다가왔다. 내 목을 끌어안고
가슴을 비벼 댄다. 아, 덥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뿌리치지
못한다.
"어젯밤에는 얼마나 내가 기다렸는데......"
"난 이젠 늙었어."
나는 힘없이 중얼거린다.
"웃기지 말아요. 나이 사십에 뭐가 늙었다고 그러세요?"
그녀의 손이 파자마를 헤치고 사타구니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나는 얼굴을 찌푸린다. 아내는 아주 노골적이다.
"이러지 마."
"싫어, 하고 싶어."
"회사 갈 시간이야."
"좀 늦으면 어때요."
이제 숫제 앙탈이다. 출근을 앞둔 남편을 붙들고 아침 정사를
갖자는 거다. 맙소사!
"저녁에 해줄게."
"싫어, 싫어!"
나는 하는 수 없이 아내에게 이끌려 침실로 들어간다.
도망치고 싶다. 아내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
아내는 재빨리 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눕는다. 나는
사육된 수퇘지처럼 옷을 벗고 슬슬 침대 위로 올라간다.
나는 아내를 안는다. 끈끈한 느낌이다. 아내는 눈을 스르르
감는다. 쌍꺼풀 수술한 자리가 보기 흉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다.
그녀가 입술을 내민다. 나는 키스를 피해 얼굴을 돌린다.
그녀는 억지로 내 목을 끌어안고 키스한다. 나는 아내와
키스하는 게 싫다. 아내의 입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난다.
아내가 두 다리를 넓게 벌리며 들어올린다. 그리고
'빨리......' 하고 말한다. 그러나 내 몸은 차갑기만 하다.
그놈은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왜 이래요?"
아내가 마침내 신경질을 부린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안 되는 걸 어떡해?"
아내가 일어나 앉는다. 나도 상체를 일으킨다. 우리는
마주보고 앉았다. 그녀가 내 것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만져도 그놈은 요지부동이다. 아내는 나를 흘긴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꽉 움켜쥔다.
"아야!"
나는 화가 나서 그녀를 밀어 버린다. 아내는 뒤로 벌렁
나자빠진다.
"이게 장난감인 줄 알아?"
아내의 표정이 굳어진다. 나를 노려보다가 발딱 일어나 홱
나가 버린다.
우울한 아침이다. 기분 나쁜 아침이다.
아파트를 나와 차에 시동을 걸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내가
부엌 창문을 통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왜 오명희와 결혼했을까. 이 자식,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빨간 불.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너라는 놈은 현실
감각에 뛰어난 놈 아니냐. 이상보다도 현실에 더 충실한 놈
아니냐.
그녀와의 결혼은 세속과의 타협이자 결탁이었다. 빨리
출세해서 편하게 살아 보고 싶은 천박한 욕구. 너라는 놈은
그러한 욕구를 안고 일관되게 살아온 게 아니냐. 파란 불.
액셀러레이터를 살며시 밟으며 클러치를 떼어 준다. 차가 앞으로
나간다.
그녀는 같은 대학의 클래스메이트였다. 영문학과에는 여학생이
모두 열다섯 명 있었는데, 오명희는 그 중 생김새에 있어서나
실력면에서 제일 처지는 여학생이었다. 남학생들은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언제 보아도
외톨이였다.
나는 다분히 심심풀이하는 기분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녀는 예상대로 쉽게 응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와의
결혼 같은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아무리 내가 저렇게
못생긴 여자하고 결혼할까. 내 딴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녀의 집에 초대받아 갔다. 집에 가서야
그녀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그 집의 으리으리함을 보고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단번에 굉장한 부자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가 대아 그룹 회장의 조카따님임을 알고는 두 번째
놀랐다. 그녀는 나를 자기 부모님과 오빠들에게 소개시켰는데,
어떻게 말을 해두었는지 그들은 마치 나를 명희와 장래를 약속한
듬직한 애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가난한 공무원의 아들로 자라난 나에게는 부자라는 것이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다. 바로 그 부자의 대열에 어쩌면 나도
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계산이 어느 새 나를 비굴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날 이후 오명희에 대한 나의 태도는 겸손하고 적극적인
것으로 변했다. 실력 따위야 무슨 상관이냐. 인물이 밥 먹여
주는가. 저렇게 생겼어도 저 아가씨는 복덩이임에 틀림없다. 저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면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올 것이다.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그녀와 결혼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여러가지 이익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넌지시 그녀로 하여금 그것들을 이야기 하도록 유도해
보았다. 이익은 대단히 많았다. 노력에 비해--사실 노력이랄
것도 없지만--많은 보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세밀하게 작전을 짰다. 그 작전에 따라 그녀의 육체를
정복했다. 일단 내 것으로 만들자. 그녀는 내 손끝에서 노는
인형 같았다. 그녀는 나를 절대적이고 유일한 남성으로 믿어
주었다.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군에 입대했다. 우리는
사흘거리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형식적으로 열성을 보인
것이지만 그녀는 진정으로 애정 어린 편지를 보내 주곤 했다.
이 년 후 나는 군에서 제대했고, 그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대아에 입사했다. 계획했던 대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아 빌딩은 세종로 네거리에 25층의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전면에 백색 대리석이 입혀져 있어 어디서 보아도 산뜻해
보인다.
나는 주차장에 차를 집어넣고 정문으로 들어섰다. 나보다
나이가 휠씬 많은 수위가 나를 향해 거수 경례를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급히 걸어간다.
결혼한 지 이제 십오 년. 나는 이제야 오명희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모든 것이 만족한 상태에 이르니까 결혼을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간사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아내와 이혼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혼은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다. 아내와의 이혼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이혼과 동시에 나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빌빌거릴 것이다.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 불쌍해진다.
나는 20층에서 내린다. 20층에 내 사무실이 있다. 이사이기
때문에 독방을 사용하고 있다.
아침나절은 분주하게 지나간다. 간부 회의에 참석하고 나면
아홉 시 삼십 분. 이어서 기획 파트의 회의에 들어간다. 그것은
한 시간 동안 계속된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조간 신문을
펴든다. 십 분 내지 이십 분 사이에 신문을 대충 훑어보고 나서
업무를 시작한다.
정오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밝은 목소리다.
"식사하셨어요?"
"아니, 아직......"
"그럼 잘됐어요. 함께 해요."
"나오려구?"
"벌써 나왔어요. 가까운 데 있어요. 거기 지하 다방으로
갈게요. 십 분 후에 만나요."
나는 얼굴을 찌푸린다. 뭣 하러 나왔을까.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나 않고.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내가 묻는다.
"싫으면 관두고요. 싫으세요?"
"아니......"
"아직 화가 안 풀렸어요?"
"언제 내가 화냈나."
대아 빌딩 지하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별의별 것들이 다 들어서
있다. 십 분 후 나는 지하 다방으로 들어서다 말고 멈칫했다.
조해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뒤 이어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꽤 당황했다. 그렇다고 거기서 머뭇거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어느 여자한테 먼저 가느냐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나는 아내 쪽으로 다가갔다.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
아내가 똑바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야 아는 사람 천지지."
"그런데 왜 그렇게 당황하세요?"
"내가? 아니, 그러지 않았는데......"
나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아내는 최고로 치장을 하고 나왔다. 목걸이, 귀고리, 팔찌,
반지 등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하고 나왔다. 머리는
젊은애들처럼 달달 볶았다. 거기다 빨간 투피스라니. 나는 내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꼭 돼지가 치장하고 나온 것 같다.
어쩌면 이 여자는 이리도 미적 감각이 둔할까. 아무 장식도
하지 않고 싸구려 T셔츠만 하나 척 걸쳐도 얼마든지 멋져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하긴 사람 나름이지만.
마누라는 무엇을 입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저런 몸에는
값 비싼 것으로 치장하기보다는 수수하게 차리는 게 낫다.
"나가지."
나는 서둘러 일어섰다.
"차도 안 마시고요? 차 시켰는데......"
나는 도로 자리에 앉는다. 해주가 앉아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본다. 해주가 오도카니 앉아서 이쪽을 쏘아보고 있다. 나는
얼른 시선을 피한다. 아내가 뭐라고 말한다.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그녀를 쳐다 본다.
"뭐라고?"
"보약 지으러 나왔다구요."
"거기다가 보약까지 먹으려고?"
"당신 주려구요."
"나 말이야? 난 필요 없어. 너무 건강해서 탈인데 보약은 무슨
보약...... 그것도 믿을 만한 데서 사야지 그렇지 않으면 속아
산다구."
"잘 아는 데가 있어요. 친구 삼촌이 하는 덴데 유명한
사람들은 다 거기 와서 지어 간대요."
"필요 없어."
"그러지 말고 제 말 들으세요. 겉보기 보다는 많이
약해지셨어요."
"정력이 많이 감퇴됐다 이 말인가?"
"아침에 얼마나 실망했다구요."
"그래서 보약을 먹으라는 건가?"
"그대로 방치하면 임포가 된대요."
"임포라니?"
"아이, 그것도 모르세요? 발기 불능 말이에요."
"보약을 먹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것이 일어서나?"
"아이, 목소리 낮춰요. 남들이 들어요."
아내는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나는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항상 그게 일어서 있어도 문제 아닌가. 아무 여자한테나
달려들 테니 말이야."
아내는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내 무릎을 꼬집었다.
"자, 나가지."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다방을 나오면서 얼른
돌아보니 해주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본 것은 닷새 만이었다. 나에게 폭탄 선언을 하고
도망간 후 소식이 없었는데 이렇게 다방에서 마주친 것이다.
아마 나를 만나러 온 것 같았다.
지난 닷새 동안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는지 모른다. 해주의
집 주소도 전화 번호도 모르니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낫살이나 먹은 놈이 학교로 그녀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육체뿐이었다. 그녀가 뱃속에 든 아기를 없애지 않는 한 나의
불안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녀는 또
보약 이야기를 꺼냈다.
"한약보다는 뱀탕이 좋대요. 혜숙이 그 애가 그러는데 자기
남편한테 그것을 몇 번 먹였더니 밤마다 못살게 군대요."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아내는 나를
사육해서 잡아먹을 생각인 것 같았다.
"뱀탕? 싫어! 그런 건 정말 싫어!"
나는 넌더리를 치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당신은 보신탕도 못 먹는데 그런 걸
먹겠어요? 그러니까 보약을 지어 드릴 테니까 잡수세요."
"싫어."
"당신 아뭇소리 말고 드세요. 당신한테 해되게 하지는
않으니까요. 남들은 없어서 못 먹는데 왜 그러세요?"
아내는 힐난조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가져온 음식에
젓가락을 가져 갔다.
"너무 짜게 들지 마세요. 암에 걸려요. 당신은 항상 짜게
들어요."
"......"
"커피도 많이 들지 마세요. 하루에 딱 한 잔만 드세요."
"......"
"담배는 요새 얼마나 피우세요?"
"......"
나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누르며 먹는 데 열중했다.
"담배가 제일 해롭대요. 담배가 정력 감퇴의 원인이라는
결과가 나왔어요. 오늘 아침 신문에 났는데 하버드
대학의......"
"그만, 그만!"
나는 고개를 쳐들고 아내를 바라보았는데 내 표정이
험악했는지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부터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내는 침묵을 지켜 주었다.
아내와 헤어져 다방으로 들어가니 해주는 그때까지 그 자리에
그린 듯이 앉아 있었다. 나는 갑자기 그녀가 두려워졌다. 다방
안에 는 회사 직원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을
의식해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래 기다렸지?"
"......"
까만 두 눈이 나를 말없이 쏘아본다.
"나가, 점심 사줄게."
"안 먹어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초조해진다.
"하여간 나가. 여긴 회사 사람들이 많아."
나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아담한
경양식집으로 갔다. 룸이 있어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았다. 그녀에게 햄버그 스테이크를 시켜 주었지만 그녀는 손도
대지 않았다.
"어떻게 그 다방에는 왔지? 누구 만날 사람 있었나?"
그녀는 원망 어린 눈으로 눈길을 나에게 던졌다.
"선생님한테 전화 걸려던 참이었어요. 아까 그 여자는
누구예요?"
"집사람이야."
"난 술집 여잔 줄 알았어요."
나는 모욕은 느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왜 왔어요?"
"그건 알 필요 없어."
"매우 다정하던데요?"
어린것이 빈정거린다. 코발트색 블라우스가 한결 미모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감상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다.
그녀가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골칫덩어리, 그리고 무서운
존재로 느껴질 뿐이다. 이미 그녀에 대한 애정은 식은 것 같다.
말썽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만나고 있을 뿐이다.
"왜 연락이 없었지?"
"......"
그녀가 입술을 오므린다. 차돌같이 단단해 보인다. 그전에는
이렇지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야지."
"기다렸어요?"
그녀가 눈을 치떴다.
"그래, 기다리다 지쳤어."
"저도 보고 싶었어요."
갑자기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금방 눈물을 글썽인다. 나는 그녀
옆으로 옮겨 앉아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몸을 몹시
떨며 울었다. 나는 가엾은 생각에 그녀를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 날......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나는 그녀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다 말했다.
"선생님, 미워요! 미워요!"
그녀는 내 가슴을 꽝꽝 때렸다.
"어떻게 병원에 가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어요?"
"미안해."
"전 그 날 집에 가서 밤새 울었어요."
"정말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아."
"어쩔 수 없기는 뭐가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싫어졌죠?"
얼굴이 온통 눈물이다.
"싫어지긴......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야."
"전 어떡해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 해주가 잘 알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몰라요, 몰라요! 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해. 감상은 금물이야. 감상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야."
"전 선생님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누가 헤어진다고 했어?"
"전 선생님 아기를 낳고 싶어요. 선생님 아기를 낳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어딨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기를 낳는 게
죄인가요?"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 선생님의 아기를 낳을 거예요! 낳아서 혼자 살면서 기를
거예요! 선생님만 생각하면서......"
그녀의 말은 충격이었다. 너무 충격적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한테 부담 드리지는 않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사납게 쳐다보았다.
"바보 같은 것! 지금 제정신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게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걸 몰라?"
나는 그녀를 잡아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요, 전 바보예요! 바보니까 선생님한테 모든 걸
바쳤지요! 저는 계속 바보 짓을 할 거예요!"
3. 증 오
그 날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조해주를 때려 주었다.
그녀의 어리석음과 고집스러움에 더 참을 수 없어 손찌검을 한
것이다. 손찌검이라야 따귀를 한 대 갈긴 것이었는데 아무튼
그녀에게는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따귀를 맞는 순간 내 품으로 쓰러져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있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총알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남의 눈도 있고 해서 따라가지 않고 내버려두었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 날 밤 정확히 자정이 되었을 때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막 잠이 들려던 나는 불길한 예감에 얼른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밤늦게 누가 전화질이지......"
아내가 돌아누우며 중얼거렸다.
"여보세요."
아무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졸리운 음성으로 상대방을
불렀다. 그러자,
"저......해주예요."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나에게는 마치 폭탄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아, 난 또 누구라고. 웬일이야?"
아내를 의식한 나는 당황한 나머지 능청을 떨었다. 해주는
얼른 말하지 않고 흐느끼기만 했다. 마치 전류에 감전된
느낌이었다.
"많이 취했나 본데 웬일이야? 일찍 집에 들어가지 그래."
"저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
나는 마른 기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강가에 와 있어요. 공중 전화로 거는 거예요. 조금만
걸어가면 강이에요. 저......죽을 거예요. 저
죽으면......선생님은......시원하시겠지요. 이제 선생님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게요. 선생님...... 사랑했어요.
안녕히......안녕히......계......세......요......"
"이봐! 이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아내가 놀라서 일어나 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여자 목소리가 나던데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나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거짓말을 꾸며 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에게 등을 돌리고 돌아누웠다. 일 분
이내에 생각해 내야 한다. 아내가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얼버무리지 말고 말해 봐요. 뭐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발 좀 내버려둬."
나는 신경질을 부렸다.
"어머, 이이 좀 봐! 신경질을 부리네. 돌아눕지 말고 나 좀
봐요."
그녀는 우악스럽게 나를 그녀 쪽으로 돌려 눕혔다. 그녀는
여자치고는 아주 힘이 센 편이었다.
"이 밤중에 어떤 년이 전화 걸었어요? 누구예요?"
"에이, 이러지 말라니까. 이거 놓고 이야기해."
나는 화를 벌컥 내면서 아내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억세게 나를 잡아끌었다.
"어머, 이젠 화까지 내시네. 기가 막혀서...... 도대체 그년
누구예요? 누구냔 말이에요? 말 못 하겠어요?"
"알 필요 없어."
"뭐라구요? 왜 알 필요가 없어요? 왜 알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발딱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나를 쿡쿡 쥐어박았다.
우리는 한밤중에 자다 일어나 아이들처럼 철딱서니없이 싸우는
꼴이 되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곤혹스러웠다. 궁지에 몰리자
의외로 오기가 발동했다.
"말하지 않겠어."
"왜 말하지 않아요? 나는 들어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게
아내의 권리란 걸 모르세요?"
잠옷 사이로 그녀의 허연 젖가슴이 드러나 덜렁거리고 있었다.
"권리 좋아하네! 나한테도 침묵을 지킬 권리가 있어. 모든 걸
아내한테 이야기해 줄 의무는 없어!"
"정말 이러기예요? 도대체 왜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솔직히 말한다면 싫어서 그래. 이야기하기가 싫어. 강요된
대답은 싫어."
나는 교묘하게 빠져 나가고 있었다.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나를 꼬집기 시작했다.
"그게 어째서 강요예요? 오밤중에 여자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물어 보지 않는 여자가 어딨어요? 뭐, 강요된 대답은
싫다구요? 난 강요해야겠어요. 빨리 대답해요, 대답하라구요!
대답하지 않으면 잠 못 잘 줄 알아요!"
나는 어깨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내가
날카로운 손톱 끝으로 내 어깨를 할퀸 것이다. 불을 켜고 거울에
비춰 보니 두 줄로 길게 피가 맺혀 있었다.
"이 여편네가 사람을 뭘로 알고!"
나는 사정없이 그녀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반격이었다.
일찍이 아내에게 손찌검 한 번 한 적 없는 나였다. 아내와의
싸움은 언제나 말다툼 정도로 끝나곤 했는데, 그럴 때도 항상
내가 져주곤 했다. 아내에게 있어서 나는 줏대도 없고 화낼 줄도
모르는 위인이었다.
그런 내가 그녀의 따귀를 갈겼으니 그녀가 기절할 정도로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내가 이렇게 나에게 함부로
구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내 책임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버릇을 잡아 주지 않고 죽어지냈으니 아내란 것이
기어오를 수밖에.
아내는 얻어맞은 쪽 뺨을 감싸쥔 채 잠시 얼빠진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풀썩 엎어졌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아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차마 또 손찌검 할
수가 없어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엄포만은 잊지 않았다.
"남편한테 그러는 년이 어딨어? 지금까지는 내가 참아 왔지만
앞으로는 어림없는 줄 알아! 건방진 년 같으니...... 가만 두고
보니까 함부로 기어오르고 있어. 뭐가 서러워서 처우는 거야?
더러 워서 정말......"
아내는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성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다가
베개를 집어들고 휭하니 밖으로 나갔다. 문이 부서져라 하고 쾅
닫는 바람에 나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저게!"
나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부르쥐었다가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산다는 것이 갑자기 고역으로 느껴졌다. 언제까지 저
상판때기를 대하고 살아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니 모골이 다
송연해졌다.
아내는 그렇다 치고 조해주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개미에게 X를 물린다더니 정말 조그만 조개에게 물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단단히 혼쭐이 나고 있다.
망할 년 같으니! 한밤중에 집으로 전화를 걸게 뭐람. 집 전화
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에게 집 전화 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없다. 하긴 전화 번호부에도 나와 있고 회사에 문의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드러누웠다가 도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비로소 해주의
전화 내용이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가슴에 와닿는 것이다.
강물에 빠져 죽은 해주의 팅팅 불은 시체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이어서 그녀의 가족들이 아우성치며 나에게 달려드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씨근덕거리며 런닝 셔츠를 벗어부쳤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나는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그녀가 죽으면 나도 죽는 것이다. 생매장되는 거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아침에 아내는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물론 아침 식사도
없었다. 식욕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집을 나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샜는데도 졸리지가 않았다.
오늘중으로 사건이 터질 것만 같아 회사에 나가는 것이
불안했다. 해주의 시체를 떠메고 가족들이 회사로 몰려올 것만
같았다.
아침나절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나는 너무 불안했기
때문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보는 사람마다 나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왔다.
"속이 좀 좋지 않아서요."
나는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열두 시에 나를 찾는 전화가 있었다. 교환 전화를 통해 온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저예요."
나는 그만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우선 살아 있는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죽지 못하고 다시 전화 건 거예요."
"죽는다고 했으면 죽을 것이지 왜 살아 왔어?"
"정말 제가 죽기를 원하세요?"
"이런 바보 같은 것!"
그녀를 만나러 가면서 나는 그녀를 살살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는 만큼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저러나 낫살이나 처먹은 놈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경양식집 룸에서 그녀를 만나자 그녀를 따뜻이 안아 주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걱정이 돼서 한숨도 잠을 못 잤어. 그런 생각하면
못써. 네가 죽어야 할 이유가 어딨니?"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소리를 죽여 흐느꼈다.
"나야 어떻게 돼도 상관 없지만 넌 앞길이 구만리 같은데
죽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것도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겠다니 그런 어리석은 짓이 어딨어."
"죄송해요. 걱정을 끼쳐 드려서......"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정말로 뉘우치는 것 같았다.
"인생은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짓이야. 지나고 보면 다
부질없는 거야."
나는 제법 초월한 듯 말했다.
"사람은 자살하지 않아도 어차피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야.
그러니까 죽음을 서두를 필요는 없는 거야. 자살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야."
"죄송해요......"
나는 뉘우치는 그녀가 대견스러웠다. 이제야 제정신이 드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그녀는 크게 끄덕였다. 비로소 내 말이 먹혀 들어가는가
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기를 떼라는 것도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넌 앞으로
훌륭한 남편 만나 얼마든지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어. 임신 한
번 했다고 해서 거기에다 인생을 모두 걸면 안 돼. 요새 세상에
처녀가 어딨니? 모두 몇 번씩 경험하고 나서 결혼은 딴 남자와
하는 거 아니야.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면 결국 자기
손해야. 사생아를 낳으면 넌 평생 고민거리를 안게 되는 거야."
나는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10만원이 든 봉투였다.
"아무 소리 말고 이거 가지고 병원에 가도록 해. 내 말이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우선 이거
받아 둬. 다음에 또 줄게."
그녀는 봉투를 집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손에 쥐어 주자
그제서야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병원에 가겠다는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다.
"병원에 같이 가고 싶지만 남들 눈도 있고 해서 그러니까 혼자
가도록 해."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부근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일을 끝내면
그리로 와. 지금 병원에 가도록 해."
나는 내친 김에 빨리 결말을 보고 싶었다.
"저 혼자 가도 돼요. 이따가 혼자 가겠어요."
"다방에서 기다려 줄게."
"싫어요."
그녀가 싫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 싶어 나는 그녀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고 그녀의 용단에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꼭 가야 해."
나는 그녀에게 몇 번이나 다짐한 후 그녀와 헤어졌다.
오후에는 내내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까지 절로 나올 정도였다.
퇴근 후 맥주까지 한잔 걸치고 제과점에 들러 케익을 한 상자
샀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는 그때까지 뾰로통해 있었다. 나는
그녀 앞에 케익을 내려놓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우리 마누라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나?"
"몰라요!"
그녀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내질렀다. 굉장한 충격에 나는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어머, 미안해요."
아내는 심했다 싶었는지 내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이렇게 해서 우리는 화해했다. 부부 싸움의 결말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따귀를 갈기는 법이 어딨어요?"
그녀는 눈을 흘기면서 나의 하복부를 어루만졌다.
"미안해. 하지만 당신도 너무했어."
어깨의 할퀸 상처를 보여 주자 그녀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뻘건 머큐로크롬을 발라 놓았기 때문에 상처는 더욱 커보였다.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 날 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내와 정사를 가졌다. 다행히
그것이 일어서 주었기 때문에 아내를 만족시켜 줄 수가 있었다.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난 후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아내가 냉큼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찰칵 하고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끊었어요."
아내는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가 받자 또 끊어졌다.
"누가 장난을 치나 봐."
아내는 화를 냈다. 세 번째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아내를
제지하고 대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예요."
해주였다.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밤늦게 전화해서 죄송해요. 아까 전화 받은 분이
사모님이시죠?"
"......"
나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해주는 당돌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궁금하실 것 같아서 전화 드렸어요. 아무래도 수술은 못
하겠어요. 병원에까지 들어갔다가 도로 나왔어요. 정말
죄송해요."
나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그 말을 하려고 이
밤중에 집으로 전화를 했단 말인가.
"죽으면 죽었지 수술은 못 하겠어요. 죄송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여자한테 온 전화지요?"
아내가 눈을 치뜨고 물었다.
"음......"
나는 신음처럼 말했다.
"누구예요?"
"몰라."
"모르다니요?"
"잠이 오지 않는대. 남자가 그립다는 거야."
"아니, 어떤 년이 그래요?"
"모르겠어. 아무데나 전화를 걸어 본 거래. 당신이 받으니까
끊었다가 내가 받으니까 수작을 거는군."
"거짓말 말아요!"
아내가 소리쳤다. 나는 굽히지 않고 거짓말을 계속했다.
"거짓말 아니야. 남자에게 안기고 싶어 죽겠다는 거야. 자긴
삼십 대 과분데, 남자 없이는 못 산대. 지금 발가벗고 있으니까
자기한테 와달라는 거야."
"거짓말 말아요! 어제 그 여자죠?"
"아니야!"
"그럼 어제 그 여자는 누구예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에라 모르겠다.
"술집 여자야."
"뭐라구요?"
"술집 여자라니까!"
"술집 여자가 왜 한밤중에 전화를 걸었어요?"
"좀 친절하게 해줬더니 그런가 봐. 다음에 만나서 혼내
줘야겠어."
"웃기지 말아요.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아. 당신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구요."
"난 전에나 지금이나 똑같아."
"전에는 여자한테서 전화 걸려 온 적이 없었다구요."
"하여간 나는 변하지 않았어."
"어떤 년이 오밤중에 전화를 걸어 모르는 남자한테 수작을
붙인담. 개 같은 년!"
아내는 화가 나서 혼자 씩씩거렸다.
나는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내일은 기어코 해주를
끌고 병원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해주는 정확하게 정오에 회사로 또 전화를 걸어 왔다.
같은 장소에서 우리는 만났다.
나는 만나자마자 그녀를 심하게 꾸짖었다.
"밤중에 집으로 자꾸만 전화를 걸면 어떡해? 누구 망하는 꼴
정말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마누라한테 내가 얼마나 시달린
줄 알아?"
"죄송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죄송해하는 빛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왜 병원에 가지 않았어?"
"가긴 갔는데 그건 못 하겠어요."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이렇게 사람 피를 바짝바짝 말릴
셈이야?"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 따위 말 이젠 듣기 싫어!"
그녀는 수술하지 않았으면서 내가 준 십만 원은 내놓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어쩔 셈이냐고 다그치자 또,
"죽고 싶어요."
하고 말했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주먹으로 탁자를 후려쳤다.
"죽고 싶은 건 나야!"
그녀는 찔끔해서 가만 있었다.
"잔말 말고 오늘은 나하고 함께 병원에 가! 아무래도 같이
가야겠어."
"아빠가 좀 보재요."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심하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제 드디어
터지고 말았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4. 개새끼
충격을 가라앉히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나에게는 그런
충격을 받아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연달아 먹여대는
충격에 나는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지? 다시 한 번 말해 봐."
나는 감정을 억누른 채 가까스로 물었다. 그녀는 눈을 밑으로
내리깐 채 말했다.
"아빠가 선생님 좀 만나재요."
"왜?"
나는 금방이라도 그녀를 때릴 듯이 노려보면서 물었다.
그녀는 조그맣게 위축이 된 채, 그러나 또렷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임신한 거......아빠가 아셨어요."
"그래서?"
"아빠가 하도 캐물어서 할 수 없이 선생님에 대해 말씀
드렸어요. 아빠는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엄마가 말리지
않았으면 전 죽었을 거예요."
"바보 멍텅구리 같은 년!"
기가 막히고 화가 난 나머지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죄송해요......"
"이 바보야, 그걸 부모한테 이야기하면 어떻게 돼?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아무려면 부모가 널 죽이기야
하겠어?"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넌 날 골탕먹이려고 작정을 했어."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큰일났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망연하기만 했다.
"나를 만나서 어쩌겠다는 거야?"
쓸데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 나는 물었다.
"모르겠어요. 만나시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우리 관계를 이야기해 놓고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니, 지금 날 놀리는 거야?"
"놀리는 게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이야기는 했지만 만나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빠는 화내면 무서워요. 선생님을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아빠는 선생님을......"
말끝을 얼버무리는 것이 더욱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숨김없이 이야기해 봐. 아빠가 뭐라고 했어?"
그녀는 두려운 눈길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만나면......죽이겠다고 했어요."
"......"
나는 바보처럼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계속했다.
"우리 아빠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에요. 아빠가
무서워요. 만나지 마세요. 만나면 정말 큰일나요."
나는 앉아 있기가 너무 괴로왔다. 그래서 화장실로 갔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겁에 질려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번져 있었다.
가슴에 손을 대보니 해머에 두들겨맞는 듯 쿵쿵 울리고
있었다. 큰일이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 나는 어느새 내 자신이
쫓기고 있는 범인이 된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창피해서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나 혼자서 당해야 되고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숨을 들이쉰 다음
화장실을 나왔다. 남자답게 배짱을 두둑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계속 식은땀이 흘렀다.
"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아빠는 더구나 만나고 싶지
않아. 이런 문제로 어떻게 네 아빠를 만나겠어. 하지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아. 내가 안 만나겠다고 해서 네
아빠가 가만 있겠어?"
"......"
"내 이름을 알려 줬나?"
"네......"
"회사 이름은?"
"말했어요."
"전화 번호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 전화 번호는?"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에끼, 오라질 년!"
상대가 닭이라면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고 싶었다.
나는 먼길을 달려온 마라토너처럼 헐떡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차갑게 웅크리고 있는 그녀가 더할 수 없이
비정하게 보였다. 아니 피가 통하지 않는 돌멩이 같았다.
"그렇게 가르쳐 줄 것 다 가르쳐 주고 만나지 말라고?
아버지가 회사로 찾아오면 난 어떡하지? 집으로 전화를 걸면 난
뭐라고 하지?"
"어디로 피하시면 될 거 아니에요?"
"어디로 피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어디로 피한단 말이야?
회사는 어떻게 하고?"
그녀도 거기에는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네가 임신한 걸 어떻게 알았지?"
"엄마가 제 일기장을 훔쳐봤어요. 그리고 아빠한테 일러바친
거예요."
내 입은 얼어붙어 버렸다. 나는 한참 동안 침묵에 빠져
있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예쁘고 청순하던
인상이 지금은 조금도 없었다. 그것은 불행으로 몰아넣기 위해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얼굴이었다. 결국 나는 장님이었다. 저
얼굴을 예쁘고 청순하다고 보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만 나무랄 게 못 된다. 근본적인 잘못은 나에게
있다. 낫살이나 처먹은 놈이 저 같은 애를 건드린 게
잘못이었다. 정말 벌을 받아 싸다. 죽일 놈! 나는 내 몸을
물어뜯고 싶었다.
"어떡하지?"
나는 한참 만에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듯 입을 열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
그녀는 말이 없다. 필요할 때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아빠는 몇 살이지?"
"마흔다섯 살이에요."
"무슨 일을 하고 계시지?"
언젠가 한번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막연히 사업을 한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사업을 하고 계셔요."
그전과 같은 대답이었다.
"무슨 사업?"
"자세히는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무슨 사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단 말이야?"
"전 그런 데는 관심이 없어요. 아실 필요 없지 않아요."
그렇지가 않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대책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하긴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수도 없지만.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무서웠다. 만나기도 전에 그는 두려운
존재로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험상궂은
인상일까. 키는 클까 작을까. 그는 정말 나를 죽이려 들까? 자기
딸을 농락했으니, 그리고 임신까지 시켰으니 죽이고 싶겠지.
세상의 어느 아버지치고 자기 딸을 농락한 유부남을
가만두겠는가. 아, 어쩌다가 나는 이렇게 됐지.
"아빠는 키가 크나?"
나는 점점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두려운 상대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것이었다.
"보통이에요."
"나를 만나서 어쩌겠다는 거야? 도로 주워담을 수는 없는 거
아니야? 그런 문제를 놓고 네 아버지를 만난다는 건 정말
어색해. 가능하면 아버지의 개입 없이 우리끼리 해결하는 게 백
번 나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버지가 나를 찾아오지 말게 할 수 없을까? 찾아오면 정말
야단이야. 네가 중간에서 어떻게 좀 해봐."
"아빠는 저를 상대도 하지 않아요. 너무 무서워서 말도 못
걸어요."
"하지만 아빠가 아니니? 아빤데 무슨 말을 못 하겠니? 제발
나를 만나려는 것만은 말려 줘. 부탁한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애걸했다.
해주는 새끼손가락 끝을 자근자근 깨물다가 못 이기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무 저한테 기대를 걸지 마세요. 저도 자신은
없어요."
"난 너를 믿겠어."
낙태 수술은 두번째 문제가 되었다. 우선 그녀의 아버지를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너 아기는 어떻게 할래?"
"......"
"병원에까지 정말 가긴 갔었니?"
"네, 갔었어요."
"헌데 왜 그냥 왔어?"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용기가 없어서 그런 거야. 나하고 함께 가면 괜찮을 거야."
그녀는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요! 병원에는 안 갈 거예요!"
"그럼 어쩌겠다는 거야?"
"제가 싫어서 그러신 거죠?"
나는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이런 바보 같은 것! 너 같은 바보 천치는 이 세상에 없을
거다!"
"바보라도 좋아요. 전 선생님만 사랑하면 돼요."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녀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천치 같았다. 천치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 해도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구!"
"알고 있어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게 아니에요. 선생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선생님을 죽을 때까지 사랑할 거예요. 선생님 닮은 아기를
낳아서 죽을 때까지 선생님 생각하면서 살아갈 거예요."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떠한 설명, 어떠한 논리도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단단히 물렸다. 정말 단단히 물렸다!'
나는 그만 웃음이 나왔다. 나도 알 수 없는 웃음이 나왔다.
내가 소리 없이 미소를 짓자 그녀가 의아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왜 웃으세요?"
"그냥 웃는 거다."
"저를 비웃는 거죠?"
"아니. 비웃는다면 내 자신을 비웃어야겠지."
나는 마침내 신음 소리 같은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내 애기를 낳으려면 차라리 쌍둥이를 낳아라. 알았지?
쌍둥이를 낳으란 말이다."
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면서 한참 동안 정신없이 웃어
댔다.
해주와 헤어져 회사로 돌아온 나는 그때부터 노이로제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누가 찾아왔다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화벨이 울리기만 하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저녁에 이마를 만져 보니 열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갈비찜을 만들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비스가 좋은 걸 보니 밤에 또 한바탕 치르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수저에 손도 대지 않고 일찍 자리에 누웠다.
"아니, 왜 그러세요?"
아내가 놀라서 물었다. 얼굴에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이만저만 실망하는 빛이 아니었다.
"머리가 좀 아파."
"감기 걸리신 거 아니에요?"
그녀는 내 이마를 짚어 보더니,
"어머나, 열이 있어요!"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굳이 약을 사오겠다는 걸 나는 말렸다.
저녁을 굶었는데도 배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식은땀이
자꾸만 흘렀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무거운 중압감을 안겨 준다면
머지않아 미칠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주의 배는 불러 갈 것이다. 장구통 같은
배를 내 앞에 들이대며 '여보, 이거 봐요. 아기가 뱃속에서
발길질을 해요.' 하고 나올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만 현기증에 눈을 감고 만다. 생선같이 팔딱거리는
그녀를 품에 안고 희롱했을 때는 정말 좋았었다. 그 대가가 이런
것이라면 두 번 다시 여자를 안고 싶지 않다.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자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에 언제나 문제의
전화가 걸려 왔으니까 오늘 밤에도 그럴 것만 같았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거실에 있는 벽시계가 열두 점을 치고 나서 조금 있자 아니나
다를까 때르릉 하고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런데 아내의 행동이 나보다
빨랐다.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년이 또!"
하고 외치면서 냉큼 일어나더니 전화통을 덮쳤다.
"누구세요?"
아내의 앙칼진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뭐라구요?"
"......"
나에게는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거기 어디신가요?"
앙칼진 아내의 목소리가 다소 수그러지고 있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아내는 송화구를 막고 나를 쳐다보았다.
"남자예요."
나는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뛰고 있었다.
"누구야?"
나는 두려운 빛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물었다.
"그냥 바꿔 달래요. 잔뜩 술 취한 목소리예요. 아주
건방져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할까요? 끊을까요?"
아내가 나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어두운 방 안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내는 나의 공포 어린 표정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이리 줘."
나는 아내로부터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제법 근엄한
목소리로 상대를 불렀다.
"여보세요."
그러자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상대는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나는 조금 큰 소리로 불렀다.
"음......홍학수 씨요?"
"네, 그렇습니다만......누구신지?"
"내가 누구냐고? 내가 누군지 알고 싶나?"
완전히 반말이었다. 거칠고 무례하고 가래가 끓는 쉬어빠진
목소리에 나는 벌써부터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눅이 들어
가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누구요? 누군데 이 밤중에......"
"야, 임마!"
호통 소리에 나는 멈칫했다.
"야, 이 개새끼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나 해주 애비다, 해주
애비야! 알겠어? 해주 애비란 말이다!"
마치 성난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 같았다. 아찔한 현기증에
나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야, 이 개만도 못한 놈아! 네가 개지
사람이 야? 너 전화 끊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지금 네놈 집에
쳐들어 갈려다가 이렇게 전화 거는 거야. 집에 쳐들어가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 임마! 개새끼...... 처자식까지 있고
대회사 간부라는 새끼가 딸 같은 애를 건드려 임신을 시켜?
쓰레기 같은 놈! 너 같은 놈은 작살을 내야 해! 이 사회에서
아예 없애 버려야 해! 너 딸이 몇 살이지? 네놈이 내 딸을
건드렸으니까 이젠 내가 네놈 딸을 건드려야겠다. 그럼
피장파장이야. 네 딸이 몇 살이지? 열둘? 열셋? 열세 살이면
데리고 놀기 조오치."
나는 수화기를 탁 내려놓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아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니, 왜 그러세요! 무슨 전화예요?"
아내가 놀라서 물었다. 나는 발작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은 몰라도 돼!"
나는 벌렁 드러누워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왜 그러세요? 무슨 전화예요?"
그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내가
전화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받지 마!"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워낙 큰소리를 쳤기 때문에
그녀는 주춤했다.
"왜 받지 말아요?"
"받지 말라면 받지 마!"
그녀는 전화를 받는 대신 불을 켰다. 전화는 몸부림치며 울어
댔다. 갑자기 그 작자가 집으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겁이 더럭 났다. 전화를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아내가 내 팔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도대체 왜 그러세요?"
"이거 놔."
"당신 얼굴 왜 그래요? 꼭 정신 나간 사람 같아요. 어머, 저
땀 좀 봐."
그녀가 수건에 물을 적셔 가지고 올 때까지도 전화벨은 울어
대고 있었다. 아내가 땀을 닦아 주는 것까지도 나는 싫었다.
전화벨은 내 귀를 후비고 들어와 머리 속을 휘저었다. 내 머리는
부서져 가루가 되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이 개새끼야, 전화를 끊어? 내 말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망할 자식 같으니! 지금 거기로 갈까?"
"할말 있으면 내일 회사로 전화해!"
나는 반격했다. 그야말로 힘없는 반격이었다.
"개새끼, 어디다 반말이야? 뒈지고 싶어? 나 지금 사시미 칼
품고 있어. 네놈 죽이려고 사시미 칼 가지고 있단 말이야!
알았어?"
상대는 말끝마다 나를 개새끼라고 불렀다. 내가 그런 욕을
먹어 보기는 어른이 돼서 처음이었다.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까 이만 해둔다. 내일 열두 시에 회사로
전화할 테니까 피하지 말고 받아. 알았어?"
"알았소......"
이렇게도 사람이 무서울 수 있을까.
5. 사팔뜨기
사람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그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낮에는 해주에게 시달리고, 밤에는 그녀의 애비란 자에게
협박을 당하고, 그러고 나자 이번에는 아내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쯤 모를 리 없었다. 아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밤새도록 나를 들볶아 댄다. 자기가 알아서 안
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데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지칠대로 지친 나는 홧김에 말해 버릴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으로 스쳐간 생각에 불과했을 뿐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것은 인내심의 싸움이었다. 누가 오래 버티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나는 싸움 같았다. 그 싸움에서 결국 아내가 물러서고
말았다. 물러섰다기 보다는 더 짙은 의혹을 안은 채 싸움을
연기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나는 거의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일 수가 있었는데 그나마
악몽의 연속으로, 눈을 뜨자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어떡
한다? 오늘 회사에 출근할까 말까? 나는 그것부터 생각했다.
아내는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상종도 하기 싫다는 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체하고 있었다.
중년의 가정부가 와서 아이들 식사를 차려 주었다. 그녀는
새벽같이 우리 집에 와서 저녁 여섯 시까지 일을 해주고 간다.
그 대가로 그녀는 한 달에 십만 원의 보수를 받고 있었다.
언제나 안색이 창백하고 얼굴이 부은 듯 부석부석하다. 말없이
그림자처럼 움직인다.
나는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집을 나섰다. 베이지색 피아트를
몰고 회사 쪽으로 갔다. 반 시간쯤 지나 회사 빌딩이 멀리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방향을 바꾸어 강변 쪽으로 달려갔다.
강변 가까운 어느 삼류 호텔 앞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안으로
들어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일이 있어서 오후에나
출근하겠다고 이르고 전화를 끊었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한 잔 시켰다. 회사에 출근하지도 않은 채
낯선 곳에 멍청히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더없이 한심스러워
보였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것인가. 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일단 깨지더라도
상대방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해결책이 나올 수가 있다.
피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물러날 리는 없다.
어젯밤 전화를 걸어 온 매너로 보건대 상대는 여간 악질이
아닌 것 같다. 해주 같은 처녀한테 그런 아버지가 있었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땀을 닦고 한숨을 내쉰다. 자꾸만 한숨을 내쉰다. 도저히
그 자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를 죽이려고 칼을 품고
다닌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도 생선회용 칼을 말이다.
그 자가 분을 이기지 못해 다짜고짜 칼로 나를 난도질하면
어쩌란 말인가! 나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으로 옮겨지겠지. 신문에 대서 특필된 기사를 보고 사람들은
아마 이러겠지.
"이런 놈은 칼 맞아 싸! 개새끼!"
커피숍에는 나말고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두 명은 젊은
남녀들이었다. 얼른 보기에도 그들은 간밤에 아마 호텔에서 자고
나온 듯했다. 처녀는 순결을 잃었는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고, 남자는 그런 그녀를 달래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결혼하면 될 거 아니야?"
"누가 결혼한다고 그랬어요."
처녀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그들은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말소리가 고스란히 들려 오고 있었다.
"오나가나 저게 문제라니까."
나는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들어왔다. 왼쪽
가슴에 근무 회사 마크가 새겨진 감색 점퍼를 입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아마 커피를 마시러 온 것
같았다. 안경을 낀 중키의 젊은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당황했다.
"아니, 이사님이 웬일이십니까?"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상대방의 손을 잡았다.
"부근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차 한 잔 마시고 가려고
들렀지."
나는 영 어색하게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차 드셨습니까?"
"음, 차 한 잔 들지."
상대는 일행에서 떨어져나와 나와 마주하고 앉았다. 그대로 갈
것이지 앉기는.
나는 그를 위해 커피를 시켰다. 그는 얼마 전에 나와 함께
기획 파트에서 일하다가 그만둔 꽤 똑똑한 젊은이었다. 너무
충돌이 잦았고, 그래서 매우 불쾌한 기분으로 사표를 내던지고
떠났던 것이다. 그런만큼 그와의 갑작스런 만남은, 더구나 그런
장소에서의 해후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과거의 감정은 묻어 둔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나는
거기에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바쁜 듯이
일어섰다.
"자, 다음에......"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비웃는 듯이 미소를 띠며 손이
으스러지게 쥐었다가 놓았다.
차를 돌려 큰길로 나온 나는 시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커브를 돌려 2단 기어를 넣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순간
쓰레기를 만재한 시커먼 트럭이 오른쪽 앞부분을 치면서
달려갔다.
쿵 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차를 세웠다. 뒤에서 오던 차들이
무자비하게 클랙슨을 울려댔다.
쓰레기차는 그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귀찮은 생각이 들어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길 한 쪽에 차를 세웠다. 내려서 보니
오른쪽 앞부분이 보기 흉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참담한 기분에
나는 한동안 멀거니 서 있었다.
지나가던 경찰 패트롤 카가 다가와 섰다. 순경 한 명이 차에서
내려 나에게 걸어왔다. 그는 면허증 제시를 요구했다. 나는
면허증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순경이 면허증을 돌려주면서 물었다.
"트럭에 받혔어요."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트럭은 어디 있나요?"
"도망쳤어요."
"번호를 알고 계시죠?"
"모릅니다. 보지를 못했어요."
나는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순경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이러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따라가서 변상하도록 해야지."
"멀리 도망쳐 버렸는데요 뭐."
"무슨 차였습니까?"
"쓰레기차였어요."
"저쪽에다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십시오."
그는 골목을 가리킨 다음 패트롤 카로 돌아갔다.
패트롤 카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자 나는 천천히 그곳을
떠났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져 왔다. 절망적인 기분이 몰고 온
기분 나쁜 평온함 같은 것이었다. 한 시간 후 나는 차를 서비스
센터에 몰아넣었다.
"이걸 아예 떼어내고 새 것으로 달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칠도 새로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걸리죠."
기름때가 시커멓게 묻은 작업복을 입은 사내가 말했다. 내가
멍청히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계속했다.
"우그러진 것을 펴는 데는 시간이 얼마 안 걸립니다. 흉터가
남지만 그런대로 몰고 다닐 만할 겁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나는 두 시간 후에 오기로 하고 그곳을 나왔다.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목욕을 하는 게
시간 보내는 데 제일 좋을 것 같아 목욕탕과 여관을 겸하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욕실이 달린 방 하나를 얻었다. 밖에서 보기보다 방 안은
지저분했다. 침대 시트도 더러웠고 벽은 곰팡이가 슬어
얼룩덜룩했다.
목욕할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에 침대 위에 걸터앉아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다. 그런 가운데서도 슬그머니 욕정이 솟아올랐다.
이것이 인간의 원죄라는 것인가. 왜 신은 인간에게 성욕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을까.
나는 종업원을 불렀다. 젊은 여자 종업원이 들어왔다.
"아가씨 하나 불러 줘. 참한 애로......"
"이만 원이에요."
그녀는 껌을 짝짝 씹으며 아래위로 나를 살폈다. 나는 이만 천
원을 주었다. 천 원은 팁이었다.
"기다리세요."
"참한 애 아니면 돌려보낼 거야."
나는 그녀의 뒤에다 대고 말했다.
문득 아이들 생각이 났다. 아이들은 언제 보아도 귀엽다. 내
목숨 보다 귀중한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의 아비인 내가 이런
짓을 해서 될까.
그러면서 나는 어느새 옷을 벗고 있었다. 내 의지에 의해서 내
손은 옷을 벗기고 있었다. 옷을 다 벗고 거울 앞에 섰다. 칠이
벗겨진 낡은 거울이었다.
성기는 오그라져 있었다. 나는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얼룩이 진 천장을 바라보며 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나이 - 이런 자를 뭐라고 하면
좋을까.
빌어먹을, 될대로 돼라. 나는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힘껏
뿜어 올렸다. 노크소리가 났다. 나는 문 쪽을 주시했다.
짙게 화장한 여인의 얼굴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너무 화장을
짙게 해서 마치 탈을 쓴 것 같았다.
"들어와요."
나는 성기를 어루만졌다. 그것은 더욱 오그라들고 있었다.
마치 번데기처럼.
"안녕하세요."
여자가 억양 없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참하기는커녕 늙은
여자였다. 볼이 패이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잡힌, 머리칼마저
거의 빠진 여자였다. 눈병까지 났는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그녀가 옷벗는 것을 구경했다.
"목욕하셨어요?"
그녀가 발가벗은 몸을 일으키면서 물었다.
"했어요."
"왜 혼자 하셨어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백치
같은 웃음이었다. 한마디로 말라 비틀어진 몸이었다.
젖가슴이라고는 건포도같이 시커먼 젖꼭지가 달랑 붙어 있는
것이 전부였고 팔다리는 살이 없어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다. 어디를 씻는지 물소리가
요란스럽더니 한참 후에 또 입을 헤 벌리면서 나왔다. 그 부분에
털이 유난히 많은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바보같이 웃으면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오려고 하는 바람에
나는 기겁했다.
"들어오지 않아도 돼."
나는 일어나 앉았다.
"왜요?"
여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대로 옷을 입어요."
"왜요?"
나는 재빨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아니, 왜 그러세요?"
"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
"그럼 왜 불렀어요?"
"......"
나는 말문이 막혀 우물쭈물했다.
"제가 싫으세요?"
여자의 얼굴에 표독스런 기운이 나타났다.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상대방의 자존심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왜 그러세요?"
"그냥 하고 싶지 않다니까."
"그러지 말고 해요. 잘해 드릴게요. 젊은 애들보다는 훨씬
재미가 좋을 거예요. 벗으세요."
그녀는 내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이러지 마!"
나는 엄하게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돈은 줬으니까 그대로 가요."
"시시하게 구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그녀는 거칠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눈을 부라렸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시시하다 그랬다, 왜?"
그녀는 턱을 앞으로 쑥 내밀고 말했다.
"말 조심해. 어디다 대고 그 따위 말버릇이야?"
"아이구, 꼴값하네. 이런 데 오는 주제에 그래도 남자라고
꼴값을 하려고 드네. 기가 막혀서......"
혀를 끌끌 차는 것을 보고 참다못해 나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뭐가 어째?"
나는 그녀를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망할 년 같으니라구! 죽여 버릴까부다."
나는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다음에 일어난 사태는 나를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그녀가 갑자기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새끼야, 죽여라 죽여! 죽이라구! 죽이란 말이야!"
그녀는 챙피함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는 여자였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그녀가 노린 것도 바로 그런 약점 때문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방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내가 아무 소리도 못 하자 더욱
기운이 나서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그리고 온갖 욕설을
쏟아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어마어마하고 무지무지한 욕설을
얻어먹기는 처음이었다. 상대할 수도 없는 처지라 고스란히 욕을
얻어먹으면서 종업원이 말리는 사이 방에서 빠져 나왔다. 방문
앞에 몰려 서 있던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쫓기듯이 여관을 나왔다. 내 자신이
비참하고 한심스러웠다. 다시는 저런 데 가지 말자. 오늘은 왜
이렇 게 재수가 없을까. 모든 게 해주 탓이다. 고 쥐새끼 같은
년 때문에 내가 이렇게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서비스 센터에 들러 경비를 지불하고 차를 끌어냈다.
우그러진 것이 펴져 있었지만 눈에 띄게 흉터는 남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회사 쪽으로 차를 몰고 갔다.
할 수 없지 않은가. 더 이상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회사에
닿았을 때 두 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2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 내 방으로 가려고 하자 복도
입구에 앉아 있는 여비서가 불렀다.
"홍 이사님, 아까부터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그녀는 눈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벽 쪽으로 긴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몇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용무가 있는 방문객들을 위해 놓여진
소파였다.
"누가 찾아왔어?"
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파에서 한 사내가 일어섰다.
중키에 비쩍 마른 사내였다. 움푹 들어간 눈이 나를 보는 순간
칼날처럼 번득였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나는 바짝 긴장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지에 두 손을 찌른 채 걸어왔다. 그리고 내 앞에 우뚝
서더니 물었다.
"홍학수 씨죠?"
가래가 끓는 듯한 쉬어빠진 목소리였다.
"네, 그렇습니다만......"
여비서가 보는 앞에서 주눅이 들 수도 없어 나는 제법
의젓하게 대답했다.
사내의 두 눈동자가 서로 엇갈리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상대가 사팔뜨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눈이었다.
"해주 알죠? 그 문제로 왔어요."
뭐라고 표현하면 옳을까. 강파르게 마른 그 얼굴은 황량한
벌판을 생각케 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나는 떨리기 시작한 가슴을 진정하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해주 애비요. 어젯밤 전화 건......"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회사로 이렇게 들이닥치면
어떡하란 말인가! 여기서 이 자가 나에게 행패라도 부리는
날에는 무슨 창피란 말인가! 그러면 나는 끝장이다.
"이야기 좀 합시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재촉했다.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리 오시죠."
그를 내 방으로 안내했다. 그는 내 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태도만은 당당했다.
나는 예의라는 것을 그에게 주지시킬 요량으로 아주 점잖게
대했다.
"앉으시죠."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자기 집 소파에 앉는
것처럼. 그러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살얼음을 딛는
기분이었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필요 없어!"
그 한마디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맞은 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뭐라고 말씀하셔도 할 말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죄인처럼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용서를 빌었다. 만일
아내나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이 이 꼴을 본다면 어떨까.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 실수였습니다."
나는 누가 들을까 봐 목소리까지 낮추어 절박한 심정으로
애원했다.
"개새끼......"
마침내 그가 길고 느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애원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두 눈이 허공에 떠 있었다.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몸 전체에 살기 같은 것이 번져 있었다. 강파르게 마른
얼굴은 흡사 석상 같았다.
이런 자에게서 어떻게 해주 같은 딸이 나왔을까. 해주의
청순한 인상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얼굴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어느 한 구석이라도 해주와 닮은 데가 있을 것만
같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구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낡은 베이지색 점퍼 속에서 칼이
나왔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무슨 짓이오!"
"잔말 말고 앉아, 이 새끼야!"
그는 날이 시퍼런 생선회 칼로 탁자를 찔렀다. 그가 손을 놓자
칼은 탁자에 꽂힌 채 바르르 떨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앉으라니까!"
그가 명령했다. 방 주인이 뒤바뀐 셈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에 다시 앉았다.
"열두 시에 내가 전화 건다고 했는데 왜 피했어? 피하면 너만
손해야. 얼마든지 피해 보라구, 지구 끝까지 따라갈 테니까."
내가 상상하기에는 해주의 아버지는 레슬러처럼 우람하게
생겼으려니 했었다. 그런데 이건 영 딴판이었다.
그러나 막상 만나 보니 내가 상상하던 인물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무서운 것 같았다. 강파르게 마른 얼굴에서 번뜩이는
사팔눈은 전류처럼 내 피를 말리고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개새끼, 처자식까지 있는 놈이 어린 처녀를 건드려? 너 같은
놈은 매장시켜야 해. 회장실에 쳐들어갈까 하다가 우선 너를
만나 보고 나서 가려고 기다린 거야!"
용서를 비는 것 외에는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그가
갑자기 내 따귀를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나는 뺨을 싸쥐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담배를 꼬나문 채 나를 노려보았다.
"왜? 기분 나빠?"
"아, 아닙니다."
"이 새끼야, 애를 배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야!"
"지, 지겠습니다."
"어떻게 책임지겠어?"
6. 협 상
나는 내가 병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런 경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란 말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아무도 선뜻 대답할 수
없으리라.
나는 회사 사람이 알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해주의 아버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와 내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안에는
우리 둘만 있었다. 그가 내 앞에 뒤를 보이며 버티고 섰고 나는
그 뒤에 섰다.
자연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나보다 작고 어깨도
가냘퍼 보였다. 나는 갑자기 상대의 납작한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전율했다.
그것은 죽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었다. 가냘픈 목을
휘어감아 비틀어 버릴까. 그 다음에는? 나는 머리를 저었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벽을 바라보았다. 내 자신이 이렇게 무력감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그를 데리고 조용한 일식집으로 갔다. 술과 함께 몇 가지
음식을 시켰다. 조금이라도 그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나는
최대한 융숭하게 접대하려고 애를 썼다. 그럴수록 그는 얼굴을
험하게 일그러뜨리면서 나를 죄어 왔다.
"그 애가 어떻게 큰 앤데 손을 대? 내 하나밖에 없는 딸이야.
난 가난하게 살지만 그 애만은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구. 그런데
이 새끼야, 그런 애에게 손을 대? 개새끼!"
그는 내 얼굴에다 마시던 술을 뿌렸다. 나는 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술은 내 얼굴을 적시고 밑으로 흘러내렸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올랐다. 그것을
다져 누르면서 나는 분노에 떨리는 손으로 수건을 집어 얼굴을
닦았다.
"말로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꼭 이래야만 되겠습니까?"
얼굴을 닦고 나서 나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눈을 부릅뜨고 내 따귀를 후려갈겼다.
"뭐가 어째, 이 새꺄? 너 같은 놈은 백 번 맞아도 싸!
개새끼!"
그는 다시 나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내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그는 칼을 뽑아들고 나를
찌르려고 했다. 나는 기겁을 하고 그의 손을 놓았다.
그는 사정없이 주먹으로 내 얼굴을 때렸다. 생각보다는 대단히
억센 주먹이었다. 몇 차례 얻어맞고 나자 얼굴이 얼얼했다. 코
밑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고 손등으로 코를 문지르자 피가
묻어나왔다.
"나 태권도 4단이야. 해보겠어?"
그는 주먹을 내 눈앞에 들이댔다. 주먹에 울퉁불퉁 못이 박힌
것이 정말로 태권도 4단인 것 같았다.
"너 같은 새끼는 한 주먹에 날려 버릴 수 있어." -끝
[출처] 김성종 - 제3의 정사 - 모이자 커뮤니티
'千里眼---名作評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길산 제1부 - 황석영 지음(파일로보기) (1) | 2024.05.30 |
---|---|
봉신연의(封神演義) (7) | 2024.03.08 |
조자룡(趙子龍)에 대한 역사적 진실(眞實) (2) | 2024.02.26 |
김성종 추리소설 비련의 화인(파일로 읽기) (0) | 2024.02.25 |
김성종 추리소설 불타는 여인(파일로읽기) (0) | 2024.02.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