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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룡(趙子龍)에 대한 역사적 진실(眞實)

一字師 2024.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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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룡(趙子龍)에 대한 역사적 진실(眞實)

사진출처 : 위키백과

 

《삼국연의(三國演義)》의 내용에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있다. 만일 허구(虛構)를 벗겨 내버린다면 가장 먼저 신화에서 끌어내려질 사람은 아마도 제갈량(諸葛亮)일 것이다. 그러나《삼국연의》에서 신격화된 사람은 제갈량뿐이 아니다.

 

두 번째로 허구가 많이 포함된 사람은 아마도 관운장 즉 관우(關羽)일 것이다. “술이 아직 따뜻할 때 화웅(華雄)을 베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또 관운장은 안량(顔良)을 죽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문추(文醜)는 죽이지 못했고 “다섯 관문을 넘으면서 여섯 장수를 베였다”는것도 허구였다. 그리고 “화용도(華容道)에서 조조(曹操)를 붙잡았다가 풀어준 사실”도 없었다.

 

제갈량과 관운장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삼국연의》에서 신격화(神格化)되였으나 진면모에 대하여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조자룡(趙子龍) 즉 조운이다.

 

조운은 원래 공손찬(公孫瓚)의 부하였는데 공손찬이 유비(劉備)에게 보내어 전해와 함께 원소와 싸우게 하였다. 조운은 유비에게 의탁한 이후로 천하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장군으로 되여 여러가지 활약을 하였다. 정사에 나오는 그의 활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이다.

 

첫째, 장판교에서의 활약이다.

장판교에서 있은 일에 관하여 여러 사적에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조운전》: 선주(유비)는 조공(조조)에게 쫓겨서 당양의 장판에 이르러 처자를 버리고 남으로 도망쳤다. 조운이 유비의 어린 아들을 안았는데 바로 후주(유선)이다. 그리고 감부인을 보호하였는데 바로 후주의 모친이다. 조운의 보호로 모두 란을 벗어날수 있었다. 조운은 아문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운별전》: 운별전에 이르기를 선주가 패하자 어떤 사람이 조운은 이미 북으로 갔다고 말했다. 선주는 손으로 극을 잡고 긁으면서 “자룡은 절대 나를 버리고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조운이 도착하여 류비를 구했다.

 

《삼국지. 장비전》: 유표가 죽었다. 조조가 형주로 들어왔고 유비는 강남으로 도망쳤다. 조조가 추격했다. 유비는 쫓겨서 당양의 장판에 이르렀다. 유비는 조조의 병사가 다가왔다는 말을 듣고 처자를 버리고 도망쳤다. 조운이 유비의 아들과 부인을 보호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삼국연의》에 묘사된 것처럼 조운은 아두(유선)를 안고 수십만 조조의 군중에서 일곱번 들어갔다 일곱 번 나오면서 50여명을 베였다는 소설내용은 많이 과장되고 윤색된 것임을 알수 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실제의 상황은 조조의 군대가 몰려오자 류비는 처자식은 돌보지 못하고 주변에 있던 부하장수 수십 명과 함께 먼저 도망치고 류비의 처자식을 돌보던 조운은 유선을 안고 감부인을 태워서 바로 뒤쫓아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운별전에서 “조운도 곧 도착했다”는 문구가 이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조조의 군대도 수십만 대군이 아니라 하루만에 300여리를 추격해 피로해진 기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의 기록에 의하면 조운이 적의 목을 베였다든지 하는 점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조운이 유선을 안고 감부인을 태운 채 계속 도망을 친 것이지 적군의 목을 벤 전공을 세운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손부인이 유선을 오나라로 데려가려는 것을 막았다

손권은 유비가 서쪽으로 익주에 들어가려 한다는 것을 알고 선박을 보내어 여동생(손부인)을 맞이하려고 하였다. 손부인은 유비의 아들인 유선을 데리고 오나라의 친정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장비, 조운이 부대를 이끌고 장강에서 손부인의 배를 막았다. 그리하여 유선을 데리고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셋째, 익주를 취할 때 조운이 두 성을 취했다

제갈량이 장비, 조운 등 장병을 이끌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백제, 강주, 강양을 평정했다. 제갈량은 관우만 남겨서 형주를 지키게 했다. 조운은 외수에서 강양, 건위를 평정했고, 장비는 파서, 덕양을 평정했다.

 

넷째, 공영계(空营计)이다.

조조는 쌀을 북산의 아래로 옮겼다. 황충이 병사를 이끌고 나가서 쌀을 빼앗으려고 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운이 수십기를 이끌고 군영을 나가 살펴보았다. 마침 조조가 병사를 대거 이끌고 나와서 조운은 황급히 그들과 맞부딛쳤다. 조운은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퇴각했다. 위나라병사들은 흩어졌다 다시 모이면서 군영아래로 몰려왔다. 조운은 군영에 들어간후 대문을 크게 열고 기발을 흔들고 북을 쳤다. 위나라병사들은 조운이 매복을 두었다고 의심했다. 조운은 북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강한 활로 위나라병사들을 쏘았다. 위나라병사들은 깜짝 놀라서 서로 짓밟았고 한수에 떨어져 죽는 자가 많았다. 유비가 다음날 아침에 조운의 군영으로 와서 전날에 전투했던 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자룡은 온 몸에 담력을 지닌 장수이다”라고 칭찬했다.

 

다섯째, 기곡(箕谷)이다.

제갈량이 병사를 일으켰을 때 겉으로 사곡도를 통하여 공격한다고 말하고는 조운, 등지를 의군(疑军)으로 보내여 기곡을 지키게 하였다.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무리를 이끌고 이들을 상대했다. 조운, 등지는 약한 병사로 강한 적에 대응하다보니 기곡을 잃었다. 그래도 무리를 모아서 잘 지키는 바람에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일로 조운은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였다.

 

조운이 활약한 정사상의 이 다섯 번의 전투를 보면 성을 공격하여 취한 것은 단 한번이다. 그것도 이미 피폐해진 익주의 두 군현이다. 이때 유비는 이미 면죽을 격파했고 장비는 또 다른 노선을 따라 공격하고 있어서 성 두개는 거의 그저 주운 것이었다. 나머지 네 번은 그저 패전하였거나 패전 중에 어찌어찌하여 겨우겨우 대패를 면하게 되는 경우에 기여하거나 주요인물을 구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정도이다. 기록상 조운은 적군의 유명한 장수를 죽인 적도 없었고 군사상 요새를 공격하여 격파한 사례도 없었으며 대형전투를 승리로 이끈 적도 없었다.

 

조운이 비록 무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정치적인 안목은 아주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유비가 사천(익주)을 얻은 후에 성도의 전답을 여러 장수에게 분배하려고 하였다.

이때 조운은 “곽거병은 흉노를 아직 소멸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집안을 위하여 쓸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우리의 적은 흉노뿐이 아닌데 어찌 편안함을 구하겠습니까. 천하를 평정한 후에나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익주인민은 오래 동안의 전란으로 고통을 겪어왔으니 전답을 그들에게 돌려주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나중에 다시 징용하여야 그들의 환심을 살 것입니다. 그들이 아끼는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유비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둘째, 유비가 관우가 죽은 후에 손권을 치려고 하자 익군 장군이었던 조운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만일 위나라를 먼저 멸한다면 손권은 알아서 항복할 것입니다. 이제 조조는 비록 죽었지만 그 아들인 조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민심을 따라 하루빨리 관중을 취하고 황하와 위하의 상류를 차지하여 역적을 토벌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관동의 사람들도 왕의 군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위나라를 놔두고 오나라와 먼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셋째, 조운의 군사물자에 여유분이 있었다. 제갈량은 장사들에게 나눠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운은 “군사적으로 실적이 없는데 어찌 하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물건을 창고에 모두 넣어두었다가 10월이 된 후 겨울에 하사품으로 내려야 합니다”고 말했다. 제갈량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기재를 보면 조운은 대국관과 정치적 판단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바로 전후좌우 4대장군(관우, 장비, 마초, 황충)에게 결핍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는 비록 군사적으로 큰 업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큰 잘못이나 참패도 없었던 것이다.

 

유비가 그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신변에 둔것은 그의 이런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대국관과 장기적인 정치적 안목이 있어 곁에 두고 의견을 듣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성도의 무후사(武侯祠)에 가보면 순평후(顺平侯) 조운이 무관자리가 아니라, 문관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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