逸話傳---人物傳記

[비하인드 스토리] 포증 편: 제3회 강직한 성품의 대신

一字師 202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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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스토리] 포증 편: 제3회 강직한 성품의 대신

(사진설명: 연극화 된 포증의 이미지)

제3회 강직한 성품의 대신

문단의 거두 구양수(歐陽脩)는 기분이 언짢았다. <신당서(新唐書)>도 아직 다 쓰지 못했는데 절친 두 명이 연이어 면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구양수는 서재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포증이라는 놈이 정말 안하무인이야. 지가 무슨 위징(魏征)이라도 된 듯 언감생심 위징의 상소문 3편을 올려 그것을 좌우명과 역사적 교훈으로 삼으라고 폐하께 요구하니 말이야. 또 조정의 7가지 폐단을 열거하면서 형전(刑典)을 올바르게 하라고 진언했어! 폐하께서는 그의 간언을 받아 들였지 뭐야. 물론 이 일은 좋은 일이고 나도 찬성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했어. 조정의 중신(重臣)들을 여러 명 제거하니 너무 지나치다는 말이지. 삼사사(三司使) 장방평(張方平)도 그 때문에 물러나고 장방평의 뒤를 이은 송기(宋祁)도 자리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 자신은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도 하고 삼사사도 겸한다. 그는 벼슬을 하려고 안달인가? 추밀직학사로 부족하다는 말인가? 내일 조회에 나가서 그를 고발해야겠어!”

이튿날 조회에서 구양수는 황제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추밀직학사 포증은 장요좌(張尧佐)와 장방평, 송기 이 세 사람을 삼사사의 자리에서 내쫓고 자신이 이 중요한 관직을 겸하며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좌전(左傳)>에 나오는‘자기 집 밭의 곡식을 밟은 다른 집 소를 억지로 빼앗은 밭주인’과 같지 않습니까? 연속 세 명의 삼사사를 모두 파면시키고 자신은 그 자리에 연연하니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문단의 거두가 자신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것을 본 포증은 확실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정말 자신을 오해할 것 같아서 당당하고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장요좌는 외척으로 아무런 재능도 없으면서 파벌관계로 관운(官運)이 형통(亨通)한 사람입니다. 그는 심지어 작은 벼슬을 할 능력조차 없는데 어찌 삼사사라는 중요한 관직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소신이 탄핵소를 올려 폐하께서 그를 절도사(節度使)로 봉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소신은 재차 소를 올렸고 폐하께서는 그를 또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로 봉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소신은 세 번째로 그를 탄핵해 폐하와 변론을 벌였고 그래서야 폐하께서는 장요좌의 관직을 삭탈했습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국구(國舅)를 탄핵해 조정의 풍기를 바르게 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만 등용하지 말도록 폐하께 소를 올린 것이 잘못됐습니까?”

“이 일은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구양수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포증이 말을 이었다.

“장방평은 삼사사의 직권을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챙겼습니다. 유보형(劉保衡)이라는 한 상인이 양조장을 세웠는데 경영이 잘 되지 않아 관가에 백만 관(貫)이 넘는 빚을 졌습니다. 장방평은 가산을 팔아서 빚을 상환하라고 명령한 동시에 이 기회를 타서 저가로 유씨의 가산을 구입해 크게 횡재했습니다. 소신은 장방평이 조정의 관리라는 편리를 이용해 교묘하게 재물을 모음으로써 관가의 명성에 해를 끼쳤고 이는 또 모양만 바꿨지 사실상 횡령과 다름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폐하께 소를 올려 그의 면직을 요구했는데, 관가의 형상을 지키기 위한 이 일에 잘못이 있습니까?”

<당사(唐史)> 편찬에 참가한 장방평이 역사를 거울로 삼지 않고 이렇게 탐욕적일 줄을 몰랐던 구양수는 깜짝 놀라며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이런 행위는 확실히 관리의 덕행에 해를 끼쳤습니다.”

“송기는 ‘살구나무 가지에 봄기운이 아우성치니(紅杏枝頭春意闹)’라는 시구로 문단을 뒤흔든 문인이지만 그의 생활은 극히 사치스러워 끼니마다 36가지 요리를 먹어야 하고 또 23명의 시녀가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그는 또 호색한이여서 한 여자가 마음에 들면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그 여자를 손에 넣고야 직성이 풀립니다. 송기처럼 이렇게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이 어떻게 삼사사와 같은 관직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구양수는 이번에는 부끄러웠다. 송기는 문단에서 구양수의 선배이다. 그리하여 조정이 송기가 편찬한 <당서(唐書)>의 전(傳) 부분이 기(紀)와 지(志), 표(表)와 상이하다고 사서의 일치함을 위해 전을 삭제할 것을 구양수에게 요구했으나 구양수는 송기를 존중해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니 어떻게 일치할 수 있겠는가’하는 이유로 송기가 편찬한 부분을 수정하지도 삭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송기의 생활이 이토록 사치스럽고 도덕성을 잃은 사실 앞에서 구양수는 포증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구양수의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어린 것을 본 포증이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소신을 신뢰하시어 삼사사를 겸하게 하신 것이지 소신이 수입이 좋은 관직을 탐내서가 아닙니다. 제가 삼사사를 맡은 기간 부당한 이익을 챙겼는지 조사해보십시오. 저는 부당한 이익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백성들을 헤아려 너그러운 마음으로 공무에 임했습니다. 삼사(三司) 여러 창고의 공물은 원래 지방에 분담시켜 백성들의 부담이 아주 컸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문 변경무역과 공정거래를 담당하는 각장(榷場)을 두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부당한 이익을 챙긴 것입니까? 또 전에 관리들이 관가의 빚을 지면 그 관리는 하옥시키는데 만약 잡힌 관리가 도주하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대신 잡아 넣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죄가 그의 가족에까지 미치고 죄인의 구족을 연좌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고하게 잡혀온 이런 가족들을 전부 풀어주었습니다. 이것도 부당한 이익을 챙긴 것입니까? 삼사사가 소신에게 수입이 좋은 관직이라 할 수 있습니까?”

구양수는 할 말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증은 부하를 남용해 소금을 사사로이 판매한 회남전운사(淮南轉運使) 장가(張可)와 공권력을 사적인 일에 사용한 분주지부(汾州知府) 임변(任弁), 불법을 저지르고 과세를 늘린 호남로전운사(湖南路轉運使) 왕규(王逵) 등을 적발했다. 비리를 저지른 많은 관리들이 포증의 적발로 응징을 받았다.

강직하고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백성을 위해 일하는 포증은 조정을 놀라게 했으며 그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전해졌다. 포증은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임명되었으며 또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승진됐으나 끝까지 이런 벼슬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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