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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명인 비하인드 스토리] 동호 편-제4회: 양심사관과 어진 재상

一字師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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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명인 비하인드 스토리] 동호 편-제4회: 양심사관과 어진 재상

 

제4회 양심 사관과 어진 재상

공자(孔子)는 동호를 양심의 사학자라고 평가하고 조순은 현명한 대부라고 인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순이 당시 사관의 목숨 하나쯤은 식은 죽 먹기로 거둘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군주 시해의 악명에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동호가 쓴 역사를 그대로 두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형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동기만 있고 행동하지 않으면 범죄가 구성되지 않는다. 조순은 군주를 시해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또 조순에게 군주 시해의 동기가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동호가 조순에게 군주 시해의 죄명을 씌운 것은 조순의 동기보다 그 책임을 물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순은 상국(相國)이라 불린, 대신들 중 최고의 직위인 재상이었다. 따라서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면 모든 책임은 상국에게 있었고 그러기 때문에 동호는 “외국으로 도주하지도 않고 상국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공자가 “조순이 외국으로 도주했더라면 더는 진 나라의 상국이 아니기 때문에 군주 시해의 죄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동호가 조순이 군주를 시해했다고 판단한 데는 또 이런 증거가 있다. 즉 군주를 시해한 조천을 체포하지 않고 조천의 죄를 묻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조순이 군주를 시해할 생각이 없고 조천과 공모하지 않았다면 살인자를 이렇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조순은 상국이니 그가 주모자라고 동호는 결론을 낸 것이다.

옛 사람들은 “용사기사(庸史紀事), 양사주의(良史誅意)”, 즉 보통 사관은 사실을 기록하고 양심 사관은 부정함을 말한다고 한다. 2천여 년 전의 옛 사람들은 증거보다 진실을 더 중요시해 양심과 식견으로 사건의 진실을 밝힐 것을 사관들에게 요구했다. 따라서 사관에 대한 요구는 자신의 견식으로 사건의 참 모습을 보아내며 사건의 진실을 기록하는 담략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동호가 운이 좋아서 조순과 같은 현명한 대부를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말도 일리가 있다. 동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후 제(齊) 나라의 사관인 태사(太史) 형제는 동호처럼 운이 좋지 않았다.

제 나라의 대부 최무(崔柕)에게 당강(棠姜)이라는 아름다운 외모의 아내가 있었는데 호색한인 장공(庄公)의 눈에 들었다. 장공은 한 나라 군주의 신분과 존엄도 버리고 늘 몰래 최모네 집을 찾아 당강과 밀회를 즐겼다. 화가 난 최무는 상국의 아내에 눈독을 들인 후안무치의 군주를 증오해서 죽이기로 마음 먹었다.

최무는 병을 핑계로 장공을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밤이 되어 최무가 사랑채에서 잠을 자는 것을 본 장공은 몰래 안채로 들어가서 당강과 밀회를 즐기려 했다. 이 때 최무는 간통하는 음란한 남녀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측근들을 시켜 장공을 죽이게 했다.

군주를 시해한 후 최무는 사관인 태사 백(伯)을 찾아갔다.

“장공이 학질로 죽었다고 기록하라.”

태사 백은 머리를 들어 최무를 보더니 이렇게 썼다.

“을해년 여름 5월, 최무가 자신의 군주를 시해했다.”

화가 난 최무는 검을 휘둘러 태사 백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태사 백의 둘째 동생을 불러 명령했다.

“내가 말하는 대로 기록하거라. 아니면 너도 너의 형처럼 될 것이다.”

태사 백의 동생인 태사 중(仲)은 태연자약하게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썼다.

“을해년 여름 5월, 최무가 자신의 군주를 시해했다.”

대로한 최무는 당장에서 태사 중의 목숨도 빼앗았다. 그리고 백과 중의 동생인 태사 숙(叔)도 진실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목숨을 잃었다. 3명의 태사를 죽인 최무는 그들의 동생인 태사 계(季)를 불러 말했다.

“너의 세 형이 모두 죽었는데 너는 두렵지 아니하느냐?”

“사건에 근거해 진실되게 기록하는 것이 바로 사관의 직책입니다. 살기 위해 직책을 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기보다 못합니다! 과거에 조천이 군주를 시해했을 때 태사 동호가 상국인 조순이 살인범을 징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순이 군주를 시해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조순이 태사를 나무라지 않은 것은 사관의 직위는 폐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당신이 군주를 시해한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의 추악함을 덮어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직책을 다 하지 못했다고 나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태사 계의 말에 3명의 사관을 죽인 최무는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죽간을 던지며 탄식했다.

“나는 사직을 위해서 군주를 시해했다. 네가 사실을 기록한다 해도 후세 사람들은 나를 용서할 것이다.”

최무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관인 남사(南史)씨가 죽간을 들고 달려왔다. 남사씨는 태사 계를 보자 말했다.

“당신들 형제가 모두 살해되었다고 들어서 최무가 군주를 시해한 일이 기록되지 못할까 걱정되어 내가 대신 기록하려고 달려왔습니다.”

동호의 직필은 후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후에 정직한 사관들은 진리를 고집하고 직필의 직업도덕을 지키면서 제 나라의 태사 4형제처럼 정의롭고 두려움이 없이 목숨으로 역사학자의 풍채를 그렸다. 오늘의 주인공, 실록역사의 개척자 동호가 바로 그런 역사학자의 본보기였던 것이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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