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과 도사가 "영기가 통한 돌"과 이야기를 나누다 | 홍학연구 제2교시
[본문] ...하루는 공공도인(空空道人)이 훌륭한 도사를 찾으려고 각지를 돌아다니던 끝에 우연히 대황산(大荒山) 무계애(無稽崖) 청경봉(靑埂峰)을 지나다가 언뜻 절벽 같은 큰 바위에 선명한 글자들이 씌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처음부터 읽어 보니 태고적에 하늘을 떠받칠 자격이 없었던 이 바위가 옥으로 변하여 세상에 태어났는데 망망대사(茫茫大士)와 묘묘진인(渺渺眞人)의 인도로 속세에 내려가 인간 세상의 이별의 슬픔과 상봉의 기쁨, 온갖 세태와 인정의 쓰고 단 맛을 죄다 맛보았다는 이야기였다.(제1회)
[해석] : 통행본 홍루몽의 첫부분은 이미 세상에 오래동안 존재해온 "요석(要石, 중요한 돌맹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홍루몽의 그 '요석'은 이미 대황산(大荒山) 무계애(無稽崖) 청경봉(靑埂峰)에서 "몇 세(世) 몇 겁(劫)"을 존재했다. 제1회 "진사은은 꿈길에서 기이한 옥을 알아보고 가우촌은 속세에서 꽃다운 여인을 그리다"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다시 몇 세 몇 겁을 지났는지 모르는데, 공동도인이라는 사람이 도를 닦아 신선이 되고자 하여 대황산 무계애 천경봉아래를 지나다가 돌연 큰 돌 하나늘 보게 된다...위에는 내려온 마을, 태아로 들어간 곳, 그리고 가정의 자질구레한 일, 규각한정(閨閣閑情), 시사미어(詩詞迷語)가 모조리 들어 있었다."
여기서 '공공'이란 '空'에 대한 이치(우주만상의 실체도 필경은 텅 비어 있다'는 불교의 이치)에 따라 공(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에게 주는 칭호이며, 또한 머리가 텅 비어 아무 생각도 없다는 뜻도 된다. '도인(道人)'이란 보통 도학자들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머릿속이 텅텅 빈 도학자란 뜻이다.
또한 대사(大士)와 진인(眞人)은 불교와 도교의 이치를 깨친 사람데 대한 존칭으로 쓰이는데, 여기세 묘망(애매하고 막연하다는 뜻)의 '渺'자와 '茫'자를 각각 두 개씩 붙여 불교도와 도학자들을 비웃는 말로 썼다.
[본문] : 그 뒤에는 또 다음과 같은 시가 한 수 새겨져 있었다.
无材可去补苍天,枉入红尘若许年。
此系身前身后事,倩谁记去作奇传?
이 몸이 하늘을 받칠 재주가 없어
속세에서 해매기를 몇몇해이던고
전생 후생의 기구한 이 운명을
누구의 손을 빌어 세상에 전하리요?
이 시의 다음에는 또 이 돌이 속세에 내려갔던 곳이며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시초로부터 그가 겪어온 경험담이 자세하게 씌어 있는데, 그 가운데는 가정사에서부터 규방 속의 아녀자들의 한가한 글놀음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적혀 있었다. 울적한 심사를 풀며 심심풀이로 한 번 읽어 볼 만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이야기가 생긴 왕조와 연대, 나라와 지역은 밝혀져 있지 않아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공공도인은 바위를 향해 물었다.
"여보시오. 돌 양반! 당신은 자신의 경험담이 흥미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여기에 적어 놓았을 것이고, 또 그 뜻인즉 아무의 손을 빌어서라도 세상에 널리 전하려는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첫째로 어느 때 있었던 일인지 그 왕조와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고, 둘째로 이야기 가운데 어진 재상이나 충신이 나타나 나라를 잘 다스렸다든가 풍속을 바로잡았다는 따위의 이를테면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구려. 기껏 한다는 소리가 몇몇 색다른 아녀자들이 어리석은 사랑 때문에 한 사나이에게만 순정을 바쳤다든가, 고작해야 그들이 눈치가 좀 빠르고 마음씩 착했다는 정도의 이야기뿐을 같은 여자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반고((班姑)나 채녀(蔡女)처럼 재질과 덕행을 겸한 훌륭한 여자는 전혀 볼 수 없으니 내가 설사 이대로 베껴 간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즐겨 읽지를 않을까보오."
중의 말을 들은 바위는 웃으며 대답했다.
"스님께서 어찌 그처럼 어리석은 말씀을 하시나요? 왕조나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다면 스님께서 이제라도 한나라나 당나라의 연대를 빌려다 좋을 대로 붙여놓으면 돌 것인데 어려울 게 있습니까?
다만 제가 보기에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책들은 전부 판에 박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그런 케케묵은 냄새는 피우지 않는 것이 도리어 새맛이 나지 않을까요? 그저 내용이 진실하고 사리에 맞으면 그만이니 왕조나 연대에 구애될 필요야 없겠지요. 게다가 도회지의 속된 사람들 가운데는 정치에 관한 딱딱한 책을 즐기는 이보다 인정에 맞고 생활에 가까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거든요. 지금까지의 역사소설을 보면 그 태반이 임금과 재상을 비방하거나 남의집 아녀자의 행실을 힐난하는 것이 아니면 남녀간의 치정관계를 취급한 음탕한 이야기들뿐이거든요. 그리고 연애소설이라는 것은 색정적인 저속한 필치로 더럽고 부정한 것들을 글에 담아서는 젊은 남녀들을 그르치고 있는데, 그 예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지요. 선비나 미인들에 대한 소설 또한 천 편이면 천 편이 다 똑같은 형식이며, 이먀기마다 번안(潘安)이 아니면 자건(子建)이요, 서자(西子)가 아니면 문군(文君)이라 어느 것이나 잡스러운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그런 건 다 작자가 시시한 자작 연애시 두세 수를 책 속에 끼워 넣기 위해 억지로 남녀 두 사람의 이름을 붙여 놓고 거기에다 연극에 나오는 꼭두각시 같은 인물을 하나 등장시켜 그들 사이를 이간시킨는 거지요. 그리고 이야기에 나오는 몸종이나 시녀들까지도 말끝마다 '지(之), 호(乎), 자(者), 야(也)' 따위의 낡은 투를 내뱉는 데는 정말 비위가 거슬립니다. 그나마 그런대로 얼마간 읽어 보면 모두 앞뒤가 모순되고 사리에 어긋나는 이야기뿐이지요.
거기에 비한다면 오히려 내가 반새을 두고 직접 보고 들은 이 몇몇 아녀자들이 비록 그전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보다 반드시 낫다고는 하기 어렵더라도 그 행장의 자초지종은 심심풀이로 한번 읽어 불 만은 할 것이고, 또 몇수의 졸렬한 시 같은 것들도 밥상머리의 웃음을 자아내거나 술상의 흥을돋구는 데는 더러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작중 인물들의 이별과 상봉, 슬픔과 기쁨, 흥성과 쇠망, 경로와 봉변에 대해서는 그 자취를 밟아 실제로 있던 그대로 그렸을 뿐 조금도 허투루 고치지 않았지요. 부질없이 사람들의 이목만 끌려다가 도리어 실감을 잃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기조차 쉽지 않은 편이고 탐욕스런 부자들은 간혹 한가한 때라도 있게 되면 주색잡기에 정신이 팔리고 물요과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판이라 어느 여가에 골머리 아픈 정치에 관한 책을 읽고 있겠어요?
그러므로 저는 이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묘할진저!' 하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거나 책장 속에 고이 간직해 두고 애독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그들이 술과 계집에 싫증이 났을 때나 세상을 등지고 모든 시름을 잊고자 할 때에라도 이 책을 손에 들어 준다면 만족할 뿐이에요. 그런다먼 하잘것없는 일에 매달려 쓸데없이 속을 썩이기보다는 세속의 같잖은 시비 때문에 입씨름을 하거나, 생기는 것도 없이 공연히 발꿈치가 닳도록 쏘다니는 것보다는 건강에도 해롭지 않고 수명도 줄어들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 남녀간의 추잡한 관계나 종작없는 이별이요, 상봉 따위의 이야기라든가, 한 장 건너 나온다는 것이 자건과 문군이 아니면 홍랑과 소옥과 같은 선비와 숙녀들로서 누구나 다 아는 판에 박은 투의 케케묵은 책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니 사람들의 견해를 새롭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하올진대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바위의 장황한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공공도인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 "석두기"를 다시 한번 쭉 읽어 보았다. 글 속에 간사한 떨거지들을 책망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규탄하는 말들이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시국을 개탄하며 욕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무릇 임금의 성덕과 신하의 충성, 아버지의 자애와 자식의 효성을 취급한 이른바 윤리도덕에 관해서는 모두 그 공덕을 수없이 칭송하였으모로 과연 다른 책들은 이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야기의 내용이 주로 남녀간의 사랑을 서술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사실 그대로 그린 것이고 거짓으로 꾸몄거나 멋대로 맞추어 넣은 것이 아닌지라 남녀간의 유혹이나 사통을 그린 그런 방탕한 것들과는 비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시국에는 조금도 연루될 것이 없겠다고 여긴 공공도인은 마침내 그 기록을 모조리 베껴서 세상에 널리 전하기로 했다.(제1회)
[해설] : 여기서 보다시피 분명 조설근은 '홍루몽'의 작가이다. 또한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쑥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홍루몽'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다만 책읽기를 좋아할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 '홍루몽'이란 제목을 보고 왠지 음탕한 내용을 담은 것 같아 다소 기분이 언짢았다. 이제 보니 완전한 착각이다. 하긴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앞으로 미리 짧은 소견으로 추측하여 황송한 오해를 사는 일이 없도록 근신해야겠다.
조설근은 제1회에 내용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정치를 다룬 것도 이니고 남녀간의 어지러운 사랑을 묘사한 것도 아니다. 있는 사실 그대로 엮어낸 것이다.
돌의 입을 빌어 자신이 앞으로 엮어나갈 홍루몽에 대한 이야기를 재치있게 표현한 조설근이 몹시 존경스럽다. 아직 조설근의 소설을 접해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들을 그의 문학세계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것이 내가 세운 목표이다. 그렇다면 조설근의 소설은 단순히 일반 소설이 아닌 세계적 명작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자 내가 이 블로그를 새로 만든 동기이기도 하다. "홍루몽"의 애독자라면 나와 함께 이 블로그를 잘 꾸려나가기를 약속 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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