逸話傳---人物傳記

[비하인드 스토리] 서광계 편: 제1회 낙방, 그리고 세계지도

一字師 2024.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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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스토리] 서광계 편: 제1회 낙방, 그리고 세계지도

(사진설명: 서광계의 석상)

중외문명교류의 선구자 서광계

그는 4백년 전에 기하(幾何)와 평행선(平行線), 예각(銳角), 둔각(鈍角), 삼각형(三角形)을 비롯해 오늘날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수학 명사를 만들어냈다.

그가 도입∙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은 중국문명사상 최초의 서구 자연과학 번역서이고 그가 편찬한 <농정전서(農政全書)>는 중국의 고대 농업 과학기술을 집대성한, 중국의 눈부신 농학 유산으로 많은 이재민들을 도와 흉년을 넘게 했다.

그가 바로 명(明) 나라 후반의 수학자이자 농학자이며 정치가이자 군사가인 서광계(徐光啓)이다. 그는 또 대포를 도입해 최초로 전쟁에서 화기(火器)의 응용이론을 천명하기도 했으며 그가 도입한 고구마는 중요한 구황작물이 되어 수많은 백성을 살렸다.

중외문명교류의 선구자 서광계(徐光啓)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낙방, 그리고 세계지도

‘야밤삼경부터 새벽 닭이 울 때까지는(三更燈火五更鷄) 젊은이들이 공부하기 가장 좋은 때이다(正是男兒讀書時)’. 서광계는 야밤에 복음서를 읽는데 습관되었다. 오늘 놀라운 소식을 들은 그는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대서양국(大西洋國)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남경(南京)에서 선교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 속에 지난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만력(萬曆) 9년(1581년)에 나는 수재(秀才)에 급제했지만 만력 21년(1593년)까지는 그 뒤의 과거시험에서 계속 낙방만 했다. 세월도 좋지 않아서 가뭄이 들지 않으면 큰물이 져서 백성들은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생활은 계속 해야 하고 밥은 먹고 살아야 공부를 하고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고향에서 몇 년간 사숙을 차리다가 만력 21년(1593년)에 살길을 찾아 고향 송강부(松江府)를 떠나 광주부(廣州府) 소주(韶州)로 갔다. 물론 거기서도 글을 가르쳤는데 선교사 라차로 카타네오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성경>과 가톨릭교를 알리는 책자 몇 권을 선물했다. 그는 나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그래야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권고했다. 당시 나는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未知生)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焉知死)’라고 한 지성선사(至聖先師)의 말씀을 잊지 않아 사후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오로지 진사(進士) 급제로 벼슬길에 올라 가문을 빛낼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럼에도 카타네오는 내가 책을 많이 읽고 새로운 사상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늘 나를 찾아와 책도 선물하고 선교도 했다.

어느 날, 나는 카타네오의 거처에 책을 돌려주러 갔다가 벽에 많은 나라 명칭이 적힌 지도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동했다.

“중국 외에도 세계에 정말로 이렇게 많은 나라가 있습니까?”

나의 질문에 카타네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닙니다. 보세요. 중국이 여기 있습니다. 이 지역이 중국이지요. 지구는 둥글고 아주 큽니다.”

나는 지도를 보며 놀라서 외쳤다.

“뭐라구요? 지구가 둥글다구요?”

“마젤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배를 타고 계속 동쪽을 향해서만 항행했는데 결국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제일 처음에 출발했던 그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는 중국인들이 보도 듣지도 못한 많은 새로운 지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로부터 카타네오가 말하던 과학지식에 매료되어 늘 그를 찾아가 이것 저것 물으며 시야를 넓혔다.

만력 25년(1597년), 나는 광주를 떠나 북경(北京)에 와서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또 낙방했다. 당시 나는 정말로 모든 의욕을 다 잃은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과거시험에 급제하지 못하면 벼슬을 할 수 없고, 벼슬을 하지 못하면 무슨 이상이든지 모두 헛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오래도록 고민했다. 주로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했다. 설마 또 집에 돌아가 귀밑머리 하얗게 될 때까지, 두 다리를 뻗고 죽을 때까지 제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말인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내 평생의 원대한 이상과 나라와 백성을 위하고자 하는 내 평생의 포부는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날이 밝아 책을 정리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밖에서 낭보를 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 나리께 감축 드립니다! 향시에 장원(壯元) 급제하셨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낭보를 전하러 온 벼슬아치가 연속 나를 ‘해원공(解員公)’이라 부르며 촌지를 달라고 하는 바람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심사관 초횡(焦㢬) 나리가 낙방한 시험지들 중에서 나의 시험지를 보았다. 그는 경세치용에 대한 나의 견해와 학문을 배움에 있어서 ‘덕에 유익하고(益於德), 행동에 이로우며(利於行), 일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濟於事)’는 나의 견해가 그의 주장과 약속이나 한 듯 일치한 것을 보고 내 문장을 향시 1등으로 놓은 것이었다.

이 일은 나에게 아주 고무적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성(京城)에 남아 공부를 했다. 나는 향시 장원급제에 이어 회시(會試)와 전시(殿試)에서도 연속 장원으로 급제할 꿈을 꾸면서 이듬해 회시를 볼 준비를 했다. 아아, 과거시험에는 참으로 운이 따른다. 향시와 회시, 전시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는 사람이 몇 백 년 동안 몇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하는데 어찌 내가 그런 행운을 가질 수 있겠는가? 후에 나는 회시에서 낙방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여전히 학문을 가르쳤다…

여기까지 생각한 서광계는 이마를 찌푸리고 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내일 남경에 가서 마테오 리치 선교사를 찾아가 서방의 여러 가지 지식을 배워야겠다. 그런 지식은 참 재미가 있어. 나는 이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는데 싫증이 나고 팔고문(八股文)을 쓰는데도 지쳤다.”

이 때 닭이 꼬끼오~하고 홰를 쳤다.

[비하인드 스토리] 서광계 편: 제1회 낙방, 그리고 세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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