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임측서의 동상)
제3회 燒煙이 아닌 銷煙인 이유
진짜로 태양이 서쪽에서 떴다! 도광(道光) 18년(1838년), 도광제는 민주주의 정신을 발양해 조정에서 공개 토론을 진행했다. 황제가 먼저 서두를 뗐다.
“경들 모두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각자 견해를 제출하시오. 이는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생계가 걸린 문제이니 예사롭게 생각하지 마시오.”
홍로사경(鸿臚寺庚) 황작자(黃爵滋)가 올린 소가 이 토론을 이끌어냈다. 그래서 황작자가 첫 사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아편이 나라를 크게 해치고 있습니다. 외국의 상인들에게서 아편을 구매하는데 나라의 백은(白銀)을 대량으로 쓰고 있습니다. 아편 장사가 이렇게 잘 되는 것은 아편쟁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편을 금지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체질이 약해지고 국고가 거덜 나 나라 꼴이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무릇 아편을 피우는 자는 관리든 백성이든 1년 시간을 주어 아편을 끊게 하고 1년 후에도 아편을 계속 피우는 자는 일률도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죽을 죄로 정해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그래야 아편의 유행을 막을 수 있습니다. 아편을 끊지 않는 관리는 더 엄하게 그 죄를 물어야 합니다.”
청(淸) 왕조에서 외교를 담당하는 예의관(禮儀官) 홍려사경은 오늘날의 외교관 격이었다. 시인이기도 한 황작자는 도광 3년(1823년)에 과거시험에 급제한 진사(進士)로 임측서(林則徐)와는 늘 시를 주고받는 벗이었다. 마약의 유행을 금지하는 데서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고 뜻이 같았다.
황작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임측서가 나섰다.
“소신은 황 대인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소신은 호광총독(湖廣總督) 부임기간 아편 금지를 위한 여섯 가지 대책을 제정∙시행해서 좋은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는 아편을 금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편쟁이들을 엄격하게 제재해야 한다는 황 대인의 의견은 전적으로 정확합니다. 아편을 피우는 것을 못 본체하고 아편거래를 엄금하지 않으면 수십 년 후 이 나라에 적군에 맞설 병사가 더는 없을 것이며 군량을 마련할 돈도 없을 것입니다.”
도광제는 임측서의 의견을 아주 중요시해 여덟 번이나 그를 불러 아편금지 문제를 논의했다. 도광제도 아편의 위해가 아주 커서 금지하지 않으면 확실히 나라가 망할 것임을 느꼈다.
도광 18년(1838년) 11월, 도광제는 임측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했고 임측서는 즉시 광주(廣州)로 출발했다.
“흠차대신이 아편 금지차 광주로 옵니다! 흠차대신 임 대인은 고집이 센 해서(海瑞)이고 인정사정 보지 않는 포공(包公)입니다! 모두들 각자 머리를 조심하세요.”
임측서는 도광 19년(1839년) 정월에야 광주에 도착했지만 아편금지의 소식은 벌써 광주의 관아와 상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광주에 도착하기 전에 임측서는 벌써 몰래 사람을 파견해 광주의 아편거래 상황을 조사해 아편을 거래하는 외국인 상인과 중국인 상인의 명단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광주에 도착하자 임측서는 양광총독(兩廣總督) 등정정(鄧廷禎)과 논의를 거쳐 바로 두 개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하나는 흠차대신이 광주에 온 것은 해구(海口) 사건 수사, 즉 아편 금지를 위한 것임을 밝히는 <수정시고(收呈示稿)>이고 두 번째는 광주의 관리와 백성, 외국인 상인들에게 고하는 <관방시고(關防示稿)>였다. 이 고시문에서 임측서는 이번에 흠차대신은 공무를 보려 왔기에 절대로 사적인 왕래를 하지 않는다고, 공무가 있는 자는 흠차관아로 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임측서와 등정정은 광주 십삼행(十三行)의 외국인 상인을 불러 만나 규정된 시일 안에 모든 아편을 내놓을 것을 명령했다. 그는 또 아편판매상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편을 깡그리 금하기 전에 본 대인은 경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아편과 끝까지 싸울 것이며 절대로 중도에 그만 두지 않을 것이다!”
주중 영국 상무 감독 찰스 엘리엣은 중국의 관리가 중국에 와서 장사하는 외국인 상인을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인정했다. 아편 상인들이 찰스 엘리엣을 믿고 아편을 내놓지 않는 것을 본 임측서는 그들이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갑작스레 매판(買辦) 중국인을 철수하고 상업건물을 봉쇄했으며 영국인 상선의 아편을 전부 몰수했다. 그리고 아편판매상들이 이제부터 중국에 장사하러 올 때 절대 아편을 가지고 오지 않겠다는 담보서를 쓰게 했다.
그날 저녁 임측서는 아편금지를 지지하는 동료 및 백성들에 의지해 절대 사악함과 타협하지 않고 절대 재물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아편을 끝까지 금지하려는 자신의 큰 뜻을 밝히는 시를 지었다.
바다가 온갖 시내를 받아들이는 것은(海納百川)
너그러움과 포용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고(有容乃大)
산봉우리가 천 길 높이 서 있는 것은(壁立千仞)
욕심이 없어 굳건하기 때문이라(無慾則剛)
영국인 상인들이 끝내 모든 아편을 내놓았다. 산 같이 쌓여 있는 아편을 보며 임측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편은 깨끗하게 태우기 쉽지 않다고 들었다. 아편을 불에 태울 때 그 진액이 땅에 스며들면 그 흙을 가지고 다시 아편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안 돼. 그렇게 태울 수는 없지. 이번에 어떻게 하든 2만여 상자의 아편을 깡그리 폐기해서 아편금지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1백만 킬로그램의 아편 처분이 쉽지만은 않았다.
도광 19년(1839년) 6월 3일, 이 날은 위대한 날이고 영원히 기억에 새겨 둘 날이다. 이 날 임측서는 일찍부터 호문(虎門) 모래사장에 큰 웅덩이 두 개를 파고 간수를 부었다. 그리고 몸소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그 과정을 감독했다. 그는 2백여만근의 아편을 웅덩이에 넣어 반 나절 간수에 잠기게 한 다음 생석회를 그 위에 넣었다. 물을 만난 생석회는 뿌지직뿌지직 소리를 내며 끓었고 펄펄 끊는 석회수의 화학작용으로 검은 아편은 점점 부식∙용해되기 시작했다.
23일의 소각을 통해 2백여만근의 아편은 깡그리 폐기되고 그 폐기물은 드넓은 태평양으로 흘러갔다. 내외를 놀라게 한 임측서의 이 쾌거, 즉 인류 역사상 최초로 되는 대 규모 마약금지행동은 아편을 불에 태웠다는 의미의 호문소연(虎門燒煙)이 아니라 아편을 폐기했다는 의미의 호문소연(虎門銷煙)이라 불리며 임측서 아편금지의 키워드로 지금까지 전해진다.
아편금지를 지지하는 미국인 상인 C.W 킹과 선교사 브릿지맨, 상선 선장 벤슨 등도 몸소 아편 소각현장에 와서 끓어 번지는 석회수 속에서 아편이 점점 부식하는 것을 보고 임측서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경의를 표시했다.
[비하인드 스토리] 임측서 편: 제3회 燒煙이 아닌 銷煙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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