逸話傳---人物傳記

[비하인드 스토리] 임측서 편: 제4회 유배범의 복직 경위

一字師 2024.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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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임측서)

제4회 유배범의 복직 경위

임측서(林則徐)는 <사주지(四洲志)>를 읽고 있었다. 자신이 사람들을 시켜 외국어 자료를 번역해서 만든 그 책을 읽은 임측서는 마음이 무거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호문에서 아편을 폐기한 후 그는 포대(炮臺)를 쌓고 백성과 군사를 훈련시켜 영국인들의 무력침공을 막아 7전7승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영국인들이 군함에서 발사한 포탄은 포대에 떨어지지만 포대에서 쏜 포탄은 군함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청(淸)의 군사력은 영국의 군사력과 비교도 안 된 것이었다.

광주에 상륙하지 못한 영국인들은 더는 임측서가 지키는 광주(廣州)를 피해서 해안선을 따라 북상했다.

임측서는 밤도와 황제에게 올리는 소를 썼다. 그는 소에서 ‘포를 제조함에 예리함을 취하고 배를 제조함에 단단함을 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당시 임측서는 세상을 보는 눈은 있었으나 청 왕조의 정치제도가 서구와 아주 다르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청의 무기가 많이 뒤떨어졌다는 것만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중국의 근대사에서 현대 국방산업의 흥기로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항해야 한다고 제출한 첫 사람이다.

임측서는 자신의 소를 경성으로 보낸 동시에 광동(廣東)에서 수집하고 연구한 대포제작기술과 8가지 군함의 도면도 화포제조 전문가 공진린(龔振麟)에게 보냈다. 하지만 임측서는 ‘면직하고 신강(新疆) 이리(伊犁)에 가서 속죄하라’는 내용의 도광제 어지를 받았다. 영국의 군함과 화포에 놀란 황제가 열강들에게 머리를 숙인 것이었다.

임측서가 면직당하고 이리로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하늘이 폭우를 내려 하남(河南) 개봉(開封)의 황하(黃河) 강둑이 붕괴되었다. 이에 조정은 먼저 개봉에 가서 수해를 막으라고 임측서에게 명령했다. 밤낮으로 현장에서 언제 공사를 감독하던 임측서는 과로로 비설(脾泄) 질환에 걸렸다. 범람하던 황하가 다시 제 곬으로 돌아가자 임측서와 함께 수해를 다스린 군기대신(軍機大臣) 왕정(王鼎)은 황제에게 소를 올려 나라의 기둥인 임측서를 다시 임용할 것을 제언했다. 하지만 도광제는 여전히 빨리 이리로 가라는 어명을 임측서에게 내렸다. 화가 난 왕정은 집에 돌아가자 목을 매서 죽음으로 황제에게 간언했다. 왕정이 자신을 위해 사간(死諫)한 것을 안 임측서는 비통을 참을 길이 없어 <재상 고 왕문락공을 울며(哭故相王文恪公)>라는 시 2수를 썼다. 시에서 ‘지기 위해 슬픈 눈물 뿌리며(傷心知己千行淚) 모래바람 부는 먼 곳으로 떠나네(洒向平沙大幕風)’라고 왕정을 평가한 임측서는 서안(西安)에 이른 후 중병에 걸려 하마터면 왕정의 뒤를 따라갈 뻔했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생사도 걸텐데(苟利國家生死以)

어찌 화와 복을 피해 다니겠는가(岂因禍福避趨之)

임측서는 평생 서로 사랑하며 의지한 아내에게는 이런 시구를 남겼다. 조정은 무슨 원인인지 임측서가 유배를 갈 때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임측서는 다른 가족은 두고 두 아들만 데리고 머나먼 유배길에 올랐다.

도광제는 영국인들의 압박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기선(琦善)과 같은 간신들의 선동에 넘어가서인지 반백이 넘고 과로로 질환에 걸린, 나라와 백성에 큰 공을 세운 대신 임측서에게 이런 비인도주의 벌을 내렸다. 하지만 좋은 명성을 가진 임측서는 유배길에 큰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르는 곳마다 그를 죄를 지은 대신으로 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이 모두 여전히 그를 나라의 공신으로 대접하고 호송했기 때문이었다. 도광제도 마음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임측서가 이리 혜원성(惠遠城)에 도착하자 봉지(封地)를 내려 그의 생계를 해결해주었다.

어쩌면 임측서는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이리에 이른 그는 여전히 아픈 몸을 끌고 3만 리(里, 1리=0.5km)를 걸어 8개 성(城)을 돌아보았다. 청 왕조 서북쪽의 변방 상황을 파악한 임측서는 ‘영국에 대항하고 제정 러시아에 대비하는’ 국방사상을 제출해 근대 ‘방새론(防塞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이리를 통상구로 개방할 것을 조정에 요구했다. 서북지역의 지리적 여건과 인문상황을 알아본 임측서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는 제정 러시아를 중국의 바로 곁에 있는 굶은 호랑이 같은 존재로, 중국 최대의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리에 주둔한 포언태(布彦泰)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둔전(屯田)과 경전(耕戰) 제도를 시행해 우환을 사전에 방비해야 합니다. 우리 국력이 쇠락하면 제정 러시아가 마수를 뻗칠 것입니다. 아아, 이제 늙어서 더는 나라를 위해 일 할 수 없는 이 몸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임측서는 변방의 안전에 주의하라고 후세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러시아국 기요(紀要)>를 쓰기도 했다. 그로부터 백 년 후 제정 러시아는 과연 150만 ㎢에 달하는 중국의 영토를 집어삼켰다. 임측서는 저 세상에서 가슴을 치며 통탄할 것이다!

신강의 상황을 손금 보듯 한 임측서는 물만 있으면 천 리에 달하는 황막한 벌판이 오아시스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당시 포언태는 조정의 명령으로 땅을 개간하며 변방을 지키고 있었다. 임측서는 현지의 백성들을 동원해 길이 6리(里, 1리=0.5km), 너비 3자에 달하는 물길을 파고 강물을 끌어 들여 혜원성 밖의 황막한 땅을 곡창으로 만들었다. 후에 인민거(人民渠)라 불린 이 인공 물길은 120 여년 동안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제공하고 1967년에 새 물길에게 급수 기능을 넘겨준 후에야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왔다.

조정은 또 임측서에게 신강 남부의 황지를 개간하라고 명령했다. 임측서는 투루판(吐魯番)에서 현지의 수리시설인 잡정(卡井)의 원리를 자세하게 연구하고 개조해 감정(坎井)이라고 명명했으며 그 후 지세 여건만 갖추어지면 감정을 팠다. 곳곳에 산재한 이런 수리시설들로 인해 신강 남부의 천 리 황지가 살찐 땅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또 광동(廣東)과 복건(福建)에서 용수(榕樹)와 버드나무 묘목을 가져다 사막을 오아시스로 만들었다.

현지에서 목화가 나는 것을 본 임측서는 현지의 백성들에게 방직기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실을 뽑고 천을 짜게 했다. 신강인들을 오늘날도 감정을 임공정(林公井)이라 부르고 물길은 임공거(林公渠), 방직기는 임공차(林公車), 버드나무 숲은 임공림(林公林)이라고 부른다. 임측서는 신강에서 도합 69만무(畝), 약 4만 6천 헥타르에 달하는 황무지를 개간했다. 참으로 대단한 공덕을 쌓은 것이다. 노년에, 그것도 아픈 몸을 끌고 머나먼 변방으로 유배 온 임측서는 유배지에서도 눈부신 생명의 빛을 발산해 자자손손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조정은 임측서가 유배지에서 또 새로운 공을 세운 것을 보고 4품 경당후보(京堂候補)로 임명했다. 임측서는 5년의 유배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후 임측서는 선후로 섬감총독(陝甘總督)과 섬서순무(陝西巡撫), 운귀총독(雲貴總督)을 맡아 강철의 수단으로 역모를 일으킨 장인(藏人)의 무리를 평정하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화적 떼를 소탕했으며 운귀의 한인(漢人)과 회인(回人)간 갈등을 해소했다. 하지만 임측서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었고 거기다 아내까지 곤명(昆明)에서 병사했다. 임측서는 관직을 사퇴하고 아내의 영구와 함께 고향인 복주(福州)로 돌아갔다.

남자, 그것도 벼슬길에 올라 관리가 되면 통상 정실과 어려 명의 첩실을 두는 봉건사회에서 임측서는 아내와 둘만이 평생을 함께 하며 아내 생전에 첩을 들이지 않았다. 그는 또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줄 때 한 명당 6천 개의 동전만 주었으며 자손들에게 지금도 사람들을 경책하는 명언을 남겼다.

만약 자손이 나를 닮았다면(子孫若如我)

돈을 남겨 무엇 하리(留錢做什么),

현명한데 재물이 많으면(賢而多財)

그들의 뜻을 갉아먹을 것인데(則損其志).

만약 자손이 나를 닮지 않았어도(子孫不如我)

돈을 남겨 무엇 하리(留錢做什么),

어리석은데 재물이 많으면(愚而多財)

그들의 허물만 많아질 것인데(則增其過).

임측서의 고상한 품행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도광 30년(1850년), 홍수전(洪秀全)이 광서(廣西)에서 거사를 준비했다. 도광제는 중병을 앓는 임측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해 광서로 보냈다.

특제한 가마에 누워 광서로 가던 임측서는 광동(廣東) 조주(潮州)에 이르자 갑자기 멎지 않는 설사로 보녕(普寧) 행궁(行宮)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해 그의 나이 66살이었다. 임종을 앞두고 임측서는 하늘을 가리키며 ‘성투남(星鬪南)! 성투남(星鬪南)! 성투남(星鬪南)!’하고 외쳤다. 지금까지도 임측서의 그 유언은 풀지 못하는 천고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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