逸話傳---人物傳記

[비하인드 스토리] 담사동 편: 제2회 변법을 추진하고 아내와 이별하다

一字師 202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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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시국도)

제2회 변법을 추진하고 아내와 이별하다

이 세상에 떠나가는 봄날 슬퍼하지 않는 이 없어(世間無物抵春愁)

푸른 하늘 우러러 한바탕 소리쳐 울고야 말리(合向蒼冥一哭休)

사만만의 사람들 한꺼번에 눈물 흘리니(四萬萬人齊下淚)

이 넓은 세상에서 우리 땅은 어디더냐(天涯何處是神州)

호남(湖南) 유양성(瀏陽城)의 담(譚)씨 대 저택 정원의 오동나무에 핀 하얀 꽃이 미풍에 한들거리며 지기 시작했다. 최신 <시무보(時務報)> 신문을 본 담사동(譚嗣同)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언젠가 지었던 <유감(有感)>을 읊조렸다.

갑오해전(甲午海戰)에서 참패한 청나라는 일본과 나라의 주권을 상실한 치욕스러운 <마관조약(馬關條約)>을 체결하고 배상금을 지불한 외에 대만(臺灣)과 주변의 섬들까지 일본에 할양했다. 이 놀라운 소식을 들은 담사동은 조국의 침몰을 비탄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이 시를 썼다. 이제 중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분노와 슬픔에 찬 과거와 망연자실해 그 과거를 생각하는 담사동의 눈앞으로 지난 일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강유위(康有爲) 선생이 회시(會試)에 참가하러 상경(上京)하는 거자(擧子) 1천여명을 통솔해 강화조약을 거부하고 천도와 변법을 요구하는 글을 조정에 올렸다는 소식은 나에게 어두운 밤에 나타난 한 줄기의 빛이었다. 나는 망망한 황야에서 구국(救國)의 길을 찾은 듯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흥분을 느껴 즉시 강유위 선생을 찾아 경성(京城)으로 가서 변법(變法) 운동에 동참하려 했다. 그런데 강유위선생이 남방으로 가는 바람에 나는 그의 문하생인 양탁여(梁卓如)만 만날 수 있었다. 탁여는 나보다 7,8살이나 어렸지만 의기투합한 우리는 금방 절친이 되었다. 당시 나는 스스로를 강유위 선생의 사숙(私淑) 제자라고 여겼다.

북경(北京)의 유양회관(瀏陽會館)에서 나는 양탁여와 구국구민(救國救民)의 진리를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12살 때 사부로 모시고 무예를 배운 경성의 제일 협객 대도왕오(大刀王五)와도 재회했다. 우리는 매일 회관에서 새벽부터 검술을 연마했다. 나는 몸에 지녔던 ‘봉구(鳳矩)’검을 끌러서 사부님께 보여드렸다. 사부님께서는 그 검이 선현 문천상(文天祥) 선생의 검이라는 것을 아시고 나서 경건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현의 검을 몸에 지녔으니 너는 이 희세의 보물에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문산 선생은 ‘인생에 자고로 어느 누가 죽지 않으리(人生自古誰無死) 충심을 남겨 붉은 마음으로 역사를 빛내리(留取丹心照汗靑)’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를 서약으로 삼아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이 내 머리를 벤다 해도 이 검에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는 머리를 끄덕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필요하면 알려주거라. 나도 내 이 머리를 내놓을 테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부친의 명에 따라 남경(南京)으로 가서 강소(江蘇) 후보지부(候補知府)로 있었다. 나는 남경에서 거사(居士) 양문회(楊文會)를 알게 되어 그의 영향으로 적지 않은 불교서적들을 읽었고 불교의 대자비(大慈悲)를 느꼈다. 그렇다. 내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갈 것인가? 나는 나의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다. 남경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책을 읽으며 나는 약 5만자에 달하는 저서 <인학(仁學)> 2권을 썼다.

<인학>에서 나는 세상의 실체는 ‘인(仁)’이고 이 ‘인’은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인(仁)-통(通)-평등(平等)’은 막을 수 없는 만물의 발전 법칙이라고 인정했다. 나는 동방 전제주의(專制主義)에 예봉을 돌려 군주(君主), 윤상(倫常), 이익과 관록, 속학(俗學), 천명(天命)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나는 또 2천년 동안의 정권은 모두 진정(秦政)이고 제왕은 모두 대도(大盜)이며, 2천년 동안의 학술은 모두 순학(荀學)이고 학자들은 모두 향원(鄕愿)이라는 중국 역사의 놀라운 비밀을 폭로했다! 중국 역사는 대도가 향원을 이용하고 향원이 대도에게 아첨하는 과정이었다고 말이다. <인학>을 본 동지들은 내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대역무도한 말을 했다고 말했다. 또 <인학>이 프랑스의 <인권선언>에 비견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인학>을 썼기에 나는 남경에서 보낸 1년간 허송세월하지 않고 수확이 풍성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또 남경에서 보낸 1년을 기념하기 위해 속에 검정색의 무사 복을 입고 겉에 하얀 두루마기를 걸치고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지금 이 사진을 봐도 왼 손으로 허리를 짚고 오른 손에는 검을 잡은 나는 짙은 눈썹에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 나와 마치 우뚝 솟은 큰 산을 방불케 한다. 이 사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다. 32살의 나에게 남긴 청춘의 기념이니깐…

담사동은 서랍에서 남경에서 찍은 그 사진을 꺼내 감상했다. 사진을 보면 볼수록 자신이 웅장한 기개를 지닌 대장부 같아서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는데 아내 이윤(李閏)이 들어왔다.

“여보, 어지가 내렸어요. 얼른 나가서 어지를 받아요.”

아내의 말에 담사동은 깜짝 놀랐다.

지난해 담사동은 호남순무(湖南巡撫) 진보잠(陳寶箴)의 초청으로 남경으로부터 장사(長沙)에 가서 당재상(唐才常), 황준헌(黃遵憲)과 함께 유신변법을 찬성하는 진 순무의 신정(新政) 추진을 협조했다. 그들은 시무학당(時務學堂)과 무비학당(武備學堂) 등을 설립하고 해운(海運)과 광산 개발, 철도 건설 등 실용적인 일도 했으며 <호학신보(湖學新報)>와 <상보(湘報)> 등 신문도 꾸렸다. 담사동은 시무학당의 총교습(總敎習)을 담당한 동시에 <상보>의 주필도 겸했으며 호남의 유신의사기구인 남학회(南學會)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가 유신변법을 위세 드높게 홍보하고 여론을 조성하면서 호남은 전 중국의 풍기를 이끌며 명성을 떨쳤다.

광서제(光緖帝)는 담사동에게 상경(上京)해서 국사에 참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뜻밖의 기쁨에 담사동은 희열이 넘쳤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 점잖게 사자를 배웅하고 나서야 아내를 포옹하며 말했다.

“여보, 너무 잘 됐소! 이 나라에 희망이 있소!”

그 날 저녁 아내가 담사동의 짐을 준비하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금 유신을 반대하는 왕족과 대신들이 많잖아요. 호광총독(湖廣總督)만 봐도 당신들과 맞서잖아요. 태후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당신 지나치게 낙관하는 거 아니에요? 저는 좀 걱정되네요.”

“걱정하지 마오. 폐하의 지지가 있으면 유신은 성공할 가망이 크오. 제정 러시아의 변혁을 보오, 표트르 대제의 지지로 성공하지 않았소. 또 일본의 유신도 메이지 천황의 지지로 성공했소. 지금 늙어서 죽을 날이 가까운 자희(慈禧) 태후가 세찬 세계의 흐름을 막을 수 있겠소?”

이렇게 말하면서 담사동은 국화석(菊花石)으로 만든 벼루를 손에 올려 놓았다. 그는 ‘추영연(秋影硯)’이라는 이름을 달아주고 애지중지하는 벼루를 응시하다가 자신이 지은 연명(硯銘)을 읊었다.

내가 그리는 고국에(我思故園) 서풍이 세차게 불어와(西風振壑) 꽃 기운이 은은히 날리고(花氣微醒) 우수가 분분히 시드네(秋心零落). 스르륵 스르륵(郭索郭索) 먹 가는 소리 여전하네(墨聲如昨).

담사동은 벼루에서 눈길을 떼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이 벼루는 내가 아끼는 보물이오. 내가 떠난 뒤에 당신이 매일 이 벼루에 먹을 갈아 글을 쓰오. 그러면 나를 보는 듯 할거요.”

아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담사동은 몸소 그 벼루에 먹을 갈아 <무술년 북상하며 아내에게 남기다(戊戌北上留別內子)>를 썼다.

서방의 극락세계에서는(西方極樂世界) 살아도 죽어도(生生世世) 연꽃 속에 함께 하고(同住蓮花) 가릉빈가 원앙새는(如比迦陵毗迦同命鳥) 서로 의지하누나(可以互賀矣). 더 열심히 정진해서(但愿更求精進) 자신도 타인도 해탈하고(自度度人) 복덕과 지혜 구하리(雙修福慧). 시에 이르기를(詩雲) 사바세계 보현겁(娑婆世界普賢劫) 정토에서는 인연 맺어 산다네(淨土生生此締緣). 십오 년 동문의 길(十五年同學道) 가족의 부양 현숙한 그대에 의지하노라(養親撫侄賴君賢).

가릉빈가는 불교 전설 속의 원앙새를 말하며 두 수의 시를 합치면 사실 사랑새를 말한다. 담사동은 자신과 아내를 원앙새로 본 것이다. 강직하면서도 다정한 그는 사랑하는 아내에 깊은 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라와 백성을 선택하고 그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다.

담사동은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그의 둘째 형님이 조카를 남기고 금방 병사했다. 그리고 그는 결혼 15년차이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모를 공양하고 조카를 부양하는 책임을 모두 사랑하는 아내에게 맡긴 것이다.

아내 이윤은 남편 담사동이 쓴 글을 보고 나서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집 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거문고 하나를 나에게 남겨주세요! 그 거문고 소리에 그리움을 실어 당신에게 보낼 수 있게요.”

“칠성검(七星劍)과 초우금(蕉雨琴)을 당신에게 남겨두고 봉구검(鳳矩劍)과 잔뢰금(殘雷琴), 붕정금(崩霆琴) 두 거문고를 내가 가지고 가려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담사동의 말에 이윤이 눈물을 머금고 머리를 끄덕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어둠 속에서는 흐느끼는 듯한 거문고 소리와 담사동이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정담이 메아리 쳤다.

“여보. 부디 몸 조심하시오. 부귀와 영화를 꿈처럼 보고 생사와 영욕을 범상사로 대하시오. 너무 낙관하지도 말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만사 자연의 섭리를 따르시오.”

유신을 위해 몸을 바칠 각오를 한 담사동은 아마 이 때 벌써 불길한 예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별을 앞두고 아내에게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영원한 이별의 말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니 남편의 말을 들으며 거문고를 타던 이윤이 눈물을 펑펑 쏟은 것도 이상할 것 없었다.

[비하인드 스토리] 담사동 편: 제2회 변법을 추진하고 아내와 이별하다

 

[비하인드 스토리] 담사동 편: 제2회 변법을 추진하고 아내와 이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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