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삼국연의 인물들의 실제 나이와 정사 삼국지 위서

一字師 2023. 5. 14.
반응형

삼국연의 인물들의 실제 나이와 정사 삼국지 위서

 

 

: 희랄인(嘻辣人)

필자의 삼국인물에 대한 인상은 모두 영화와 드라마에서 왔다. 그런데, 사료와 대조해보니, 실제와는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 도원결의

<삼국연의>는 도원결의로 시작한다. 사서에는 이를 기록하지 않았고, 그저 "세 사람이 형제같이 정이 두터웠다"고만 적고 있다. 184, 유비는 고향에서 의군을 모아 황건적에 항거하려는데, 관우와 장비가 가담하여 유비와 알게 된다. 도원결의의 드라마에서의 모습은 모두 중년인인데, 실제로 184년 유비는 23, 관우는 24, 장비는 17세이다.

 

2. 삼고초려

영화드라마에서는 통상 도원결의후 곧 삼고초려로 넘어간다. 마치 둘 사이에 그다지 시간이 떨어져있지 않은 것처럼... 사실상 두 건은 23년의 시간차이가 있다. 그리고, 영화드라마를 본 일반사람들은 유비와 제갈량의 나이가 비슷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삼고초려(207), 유비는 46살이고, 제갈량은 26살이다.

 

3. 제갈량의 직업

필자는 지금까지 제갈량은 융중(지금의 호북성 양양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일을 할 필요가 없던 은사라고 여겼다. 사실상, 제갈량은 산동 기남현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군승(현재의 부현장)을 지냈다. 그가 2살때 모친을 잃고, 7살때 부친이 돌아가신다. 일가는 숙부인 제갈현이 보살핀다. 제갈현은 형주목 유표와 친구였고, 형주는 전란이 없어서, 그는 일가족을 이끌고 형주로 와서 거주한다. 제갈현이 죽은 후, 제갈량은 농사를 지었다. 제갈량은 제주가 뛰어나 스스로를 관중, 낙의에 비유했고, 최주평, 서서와 친하게 지낸다. 유비가 만일 융중부근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았거나, 서서가 유비에게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제갈량은 평생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4. 주유와 손권

영화드라마나 온라인게임에서 주유는 항상 젊은 미남으로 나오고, 손권은 수염을 기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손권이 주유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적벽지전 때 주유는 33, 제갈량은 27, 손권은 26살이었다.

 

5. 유선의 재위기간

'도와줘도 안되는' 아두(阿斗)라는 말은 이미 일상적으로 쓰이는 조롱하는 말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선이 황제로 있던 기간이 길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사실상, 유비는 황제를 칭한지 2년 만에 죽었고, 유선은 16살에 황제에 올라 40년간 황제로 있었다. 이는 중국역사상 보기 드물게 장기간 재위한 기록이다. 그리고 촉의 적수인 위는 3대의 황제를 지나 비로소 유선을 멸망시킨다. 진실한 유선은 어느 정도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드라마에서는 그를 뚱뚱하고 멍청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정사 삼국지 위서

 

나는 중고교 시절 소설 삼국지三國志를 읽으면서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이 역사 속 실존 인물의 모습과 같으리라는 착각을 하곤 했다.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실감이 났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소설 삼국지를 읽자니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왜 전쟁만 일어났다 하면 1백만 대군이고 죽은 자는 왜 그렇게 많은지, 왜 조조는 극악무도한 파렴치범으로 묘사되는데 유비는 성인군자로 추앙을 받는지, 제갈량은 동남풍을 불러오는 신통력을 지니고 싸움에서 패한 적이 없다면서 왜 삼국 통일은 이루지 못했는지, 관우가 바둑을 두면서 태연히 수술을 받은 것이 사실인지 등등 끝도 모를 궁금증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던 차에 이문열 선생의 소설 삼국지를 읽다가 서문에서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었다. “변형과 재구성은 철저하게 정사(正史,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를 지칭한다)에 의지한 것이라 한낱 말재주로 독자들을 현혹시켜 역사를 그릇 알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는다.” 이 말에 나는 정사 삼국지가 어떤 내용인지 꽤 궁금해졌다. 또한 내 전공 영역이 위진남북조 시대이기에 자연스럽게 당시의 시대 상황에 관심이 갔던 것도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 가운데 하나이다.

 

나관중羅貫中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모본이 진수陳壽가 지은 정사 삼국지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관중 자신도 삼국지연의의 앞머리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남긴 역사 기록을 후학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했다(晉平陽侯陳壽史傳, 後學羅貫中編次).”라고 분명하게 밝혔으니 말이다. 청나라 중기의 역사가 장학성章學成칠실삼허(七實三虛, 열 가운데 일곱은 사실이고 셋은 허구이다).”라고 했듯이 정사 삼국지가 없었다면 삼국지연의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을 정사 삼국지와 비교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1980년대 중반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사 삼국지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만 떼어내 번역한 것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나라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반드시 필요한 기본 자료이자 소설 삼국지의 독자들에게 참고 자료로 유용할 정사 삼국지가 단 한 번도 번역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 24가운데 다른 정사도 완역된 것이 없었다.

 

이런 호기심과 문제의식 때문에 대학원 박사 과정 중 4년여의 작업 끝에 1994정사 삼국지의 초역본을 출간했다. 그러나 출간 일정을 맞추려 서둔 탓에 적지 않은 오탈자가 있었고, 거슬리는 표현이나 심지어 잘못된 번역도 있는 듯해서 계약 기간이 끝나자 책을 절판시켜버렸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책을 다시 출간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틈나는 대로 개역 작업에 매달렸다.

 

실로 10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초역본을 밑그림으로 삼으면서 그간의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수용하여 개고 작업을 했다. 특히 조서詔書와 상소문上疏文, 서간문書簡文 등 탄탄한 논조와 함축성 때문에 초역 당시 애로가 많았던 부분들을 대폭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사기열전, 사기본기, 한비자, 정관정요등 역사 관련 중국 고전들을 번역·출간하면서 역사에 관한 안목을 키워나갔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또 다른 동기도 작용했다. 방대한 연구 인력을 자랑하는 중국이 역사 재평가 작업에 힘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서 학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하나 들면, 그들은 정사正史 전체를 국가의 출판 기획 중점 도서로 지정하여 전국의 권위 있는 학자 2백여 명을 참여시켜 이십사사전역二十四史全譯이라는 이름으로 88권을 출간했다. 이는 중국 역사를 현재 중국의 관점에서 새로이 해석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또한 중국이 1980년대 이후 중국 영토 내의 역사는 모두 자국의 역사라는 소위 신중화주의新中華主義에 입각하여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정해놓고, 중국 국무원 산하 기관인 사회과학원의 주도 아래 고조선과 발해, 고구려를 자신들의 고대 국가라고 선전하는가 하면, 급조된 연구 성과물을 출간하면서 심지어 한강 이남의 백제사까지도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시도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우리 역사와 긴밀하게 발전해온 중국의 역사, 그 가운데서도 고대사의 원전은 우리의 과거 문화유산을 다루기 위한 기본 자료로서 제대로 번역하여 학문 연구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이번에 휴머니스트에서 재출간하는 정사 삼국지전면 개정판은 이전에 민음사에서 출간한 개정판을 다시 수정하여 내는 것이다. 이 개정판도 이전의 몇몇 오류를 바로잡았으며 각주도 더욱 풍부하게 덧붙였다.

 

한 가지 밝혀둘 점은 이번에도 정사 삼국지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는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을 모두 살려 번역하지 못하고 제한적인 범위에서 번역했다는 것이다. 이는 배송지의 주석이 매우 방대하다는 점이 일차적인 원인이지만, 내 게으름이 더 큰 원인이라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논어의 경우에도 주희의 논어집주를 주석의 정본으로 평가하지만 국내의 수많은 논어번역본에서 이미 역자의 판단과 주관에 따라 선별하여 참조하고 있으니, 배송지의 주석 역시 취사선택의 차원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배송지의 주석과 나의 주석을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독자에게 좀 더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구분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내가 덧붙인 각주는 관직의 이름이나 개념어 등이며, 인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나 관련된 이야기 등은 거의 다 배송지의 주석에 따른 것이므로 독자들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 과정에서 고전을 눈으로 읽어가며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별개의 작업임을 뼈저리게 느꼈으니, 여전히 인명·지명·관직명과 상소문·조서 등 적지 않은 난제들을 떠안고 번역에 임했다는 점을 다시 밝힌다. 적지 않은 소설 삼국지마니아가 있는데, 이 책과 비교해서 읽어본다면 인물들의 진면목과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막상 개정판 출간을 앞둔 지금에 와서는 괜한 욕심을 부려 대작을 훼손한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뿐이다. 내 무딘 붓에 훼손되었을 원전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모쪼록 많은 분의 지도 편달을 바란다.

 

번역은 지루하고도 힘겨운 작업이다.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고전 번역 작업을 해오면서 오늘도 나의 작업을 성원해주는 고전 애독자들에게 마음속 깊은 감사를 전한다. 특히 이번 작업을 포함하여 나의 고전 시리즈의 편집과 교정 과정에서 온 힘을 기울여준 휴머니스트 편집진의 수고로움이 없었다면 이 작업은 힘들었을 것이다.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1.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를 둘러싼 문제들

우리가 흔히 삼국지三國志라고 부르는 것은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다. 원래 삼국지는 진수陳壽가 편찬한 것으로, 중국의 위··오 삼국의 정사正史이다(중국에서는 시대별로 대표적인 역사서들을 모아 24사로 부르는데, 삼국지도 그 가운데 하나이기에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로 통칭한다). 삼국지연의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한 소설일 뿐이므로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사 삼국지는 단순한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난세亂世라고 불린 후한後漢 말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시작으로 삼국정립, 후한에서 위로의 정권 이양, 의 멸망, 에서 진으로의 정권 이양, 의 멸망까지를 아우르는 한 시대의 총화總和이며, 그런 까닭에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나 반고班固한서漢書와 함께 중국 고대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역사서로 꼽히고 있다.

 

정사 삼국지280년에 편찬되었고, 뒤이어 나온 후한서後漢書와는 100여 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모두 65권으로 구성되었으니,1) 위서魏書30, 촉서蜀書15, 오서吳書20권으로, 권수에서 벌써 위나라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후한 말기는 중앙 정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호족이 비대해져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백성이 도탄에 빠진 시대였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백성을 구원해줄 난세의 영웅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일어선 수많은 영웅의 전기가 정사 삼국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식견 있는 독자들마저도 삼국지연의를 정사로 오인할 만큼 정사 삼국지삼국지연의의 그늘에 가려 있다. 사실상 삼국지연의2)에는 허구와 과장으로 얼룩진 부분이 많은데도 말이다.3) 그렇다면 위를 한의 정통 계승자로 기술한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어떤 책일까?

 

2. 진수의 생애와 정사 삼국지편찬 작업

진서晉書》 〈진수전陳壽傳에 의하면, 진수는 자가 승조承祚이고, 파서군 안한현을 본적으로 하여, ··오 삼국이 팽팽히 대치하던 시기인 233(촉한蜀漢 후주後主 유선劉禪이 다스리던 건흥 11)에 촉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원강 7(297)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진수의 부친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촉나라 마속馬謖의 참군을 지내다가 마속이 참수를 당하자 제갈량諸葛亮에게 머리를 깎이는 곤형髡刑을 받았다는 불명예스러운 사적만 진서에 전할 뿐이다.

 

진수가 31세 때 촉나라는 위나라에 정복되었고, 몇 년 후에는 위나라도 진나라에 병탄되어 진수는 망국의 백성이 되었다.

 

진수는 일찍이 성도成都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초주譙周에게 태학에서 학문을 익혀 상서尙書·춘추春秋·사기·한서등을 읽었고, 글재주가 있었다. 초주는 촉의 전통문화를 계승한 대표적인 역사학자였고, 자신의 죽음을 예언할 정도로 참위설讖緯說에도 정통했다. 진수는 정사 삼국지》 〈촉서12초주전譙周傳을 두어, 초주가 문장 해석에 정통한 선비로서 동중서董仲舒나 양웅揚雄의 규범이 있었다고 호평했다. 당시 태학은 한 경제漢景帝 때 촉군 태수 문옹文翁이 성도에 세운 학당이었는데, 초주가 익주권학종사가 되었고, 또 전학종사가 되어 주관했다. 그러나 초주에 대한 후세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위나라 경원 4(263), 등애鄧艾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가 국경을 뚫고 들어와 촉나라를 공격했을 때, 초주가 유선에게 항복을 권유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진수는 촉나라에서 관각령사를 지냈는데, 환관들이 전횡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아부하는 것을 보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몸이 아파 시비에게 환약을 만들어오도록 했는데, 이는 당시의 예교 규범에 따르면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이 일로 향당鄕黨의 폄하를 받았고, 촉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여러 해 동안 배척을 받아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진나라 무제武帝 태강 원년(280)에 오나라가 멸망하는데, 이때 진수는 48세의 나이에 정사 삼국지를 완성했다. 진수가 정사 삼국지의 편찬 작업을 완성하자, 서진西晉의 장화張華는 그의 학식과 사학에 대한 조예에 감동한 나머지 중서랑으로 추천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평소에 장화를 미워하고 시기한 중서감 순욱荀彧이 장화의 극진한 총애를 받는 진수에게도 사적인 감정을 가졌다. 게다가 위서부분이 순욱의 견해와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욱은 진수를 적극적으로 배척해 중서랑이 아닌 장광 태수가 되도록 했다.

 

장광군은 수도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진수는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관직을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진남대장군 두예杜預가 수도를 떠나 부임할 때 진수의 지식이 깊고 넓음을 알고는 표를 올려 산기시랑으로 추천했다. 진수가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감당했으므로 황제는 그를 다시 치서어사로 임명하여 곁에 두었다. 이는 진수가 일생 중에서 가장 높이 오른 것이다.

 

후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진수는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의 모친은 임종하면서 수도 낙양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진수는 유언에 따라 처리하여 세인의 비난을 받았는데, 모친을 고향인 촉 땅에 안장하지 않은 것이 예교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몇 년 후, 태자중서자로 기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병사했다.

 

진수가 지은 저작으로는 정사 삼국지외에도 고국지古國志50, 석휘釋諱, 광국론廣國論, 진박사晉駁事4, 진탄사晉彈事9, 익부시구전益部蓍舊傳10, 익부시구전잡기益部蓍舊傳雜記2, 관사론官司論7, 제갈씨집諸葛氏集24, 한명신주사漢名臣奏事30, 위명신주사魏名臣奏事40권 등이 있다. 이상 12종의 저술은 모두 250여 권()에 달하지만 그중에서 정사 삼국지가 가장 높이 평가받는다.

 

3. 정사 삼국지의 시대적 상황과 서술의 정통성 문제

후한은 외척과 환관, 청류淸流라는 삼대 세력이 힘을 겨루는 정쟁의 연속이었다.4) 정치는 부패하고 군벌은 혼전을 거듭했으며 왕의 외척들이 일어나고 환관 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조정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러자 백성의 마음이 떠나고 지식인들의 암중모색이 거듭되는 가운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본래 장각張角은 화북성 거록 사람으로 태평도太平道를 믿었다.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고 하면서 주술로 병을 치료하고 죄지은 민중을 참회시켜 구제한다며 교세를 넓혔다. 그는 당시에 빈곤과 질병으로 신음하던 민중에게 강한 영향을 끼쳐 170년부터 180년에 이르는 10여 년 동안 장강과 화북 동부 지역에 수십만 명의 신도를 만들었다.

 

이들을 토벌하겠다고 모인 영웅 중에는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동탁董卓과 북방의 거대 세력 원소袁紹, 난세의 영웅 조조曹操, 유랑하면서 서쪽 변방을 노리는 유비劉備 등이 있었다. 10여 년 뒤에 남방의 젊은 영웅 손권孫權이 합세한다. 후한 말 군웅들은 저마다 패권을 잡으려 갖은 노력을 다하니, 동탁은 천자를 끼고서 제후를 호령하려는 야심을 품고, 조조와 원술袁術은 관도에서 천하를 놓고 다투며, 손책孫策과 손권은 강남 평정이라는 의지를 불태우고, 형주에 있던 유비는 제갈량을 끌어들이고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천하삼분天下三分의 계책을 낸다.

 

군웅할거의 시대를 거쳐 위··오 삼국이 정립된 후 세월이 지나자 저마다 각기 제를 칭하기 시작한다. 먼저 220년 위나라 조비曹丕가 한 헌제漢獻帝에게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오른다. 이듬해에 유비 역시 소열제라고 칭하며 제위에 올라, 그가 내세운 한 왕조 부흥이라는 명목이 결코 순수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손권은 위나라와는 별도로 황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제국을 구축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진수는 기전체 형식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서술하려 했으나 사마천과 반고가 다룬 한또는 그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 ··오 삼국의 군주가 저마다 황제라 일컬은 것이다. 진수는 세 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에 정통성을 부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는다. 그 까닭은 이러했다. 정권 계승 관계에서 볼 때, 위 명제魏明帝가 죽고 나서 당시 여덟 살인 양자 조방曹芳이 제위를 계승했는데, 249년 사마의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 조방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사마의가 죽자 251년 아들 사마사司馬師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사마사가 죽자 사마소司馬昭가 권력을 계승했고, 몇 년에 걸쳐 격렬한 권력투쟁을 펼쳐 친위親魏 세력을 무너뜨렸다(255). 사마소가 죽자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이어서 승상 겸 진왕晉王이 되어 상도향공 조환曹奐을 폐위하고 스스로 제라 하며 진조晉朝를 세운 것이다(265).

 

진수는 진나라가 세워지고 나서 다시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책이 바로 정사 삼국지이다. 따라서 진수는 진나라의 전신인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몇 가지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첫째, 위서(30)촉서(15)오서(20)보다 앞에 놓았으며, 분량 면에서도 거의 절반을 할애했다. 둘째, 기전체의 통례에 따르면, ··오 삼국의 군주는 모두 제기帝紀를 두어야 하지만, 진수는 위 황제에 관한 사적은 기(, 본기)라 하고, 촉과 오의 군주에 대한 기록은 전(, 열전)이라 하여 촉과 오의 제의 위상을 일반 왕후王侯와 같이 낮추어버렸다.

 

셋째, 삼국 황제에 대한 표현 방식에 차이를 두었다. 위나라의 황제는 제라 했지만, 촉나라의 황제는 선주先主·후주後主 등 주라고 칭했으며, 오나라의 황제 역시 주라고 하고, 심지어는 그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삼국 황제의 죽음을 서술할 때도 상당히 구분했으니, 위나라 황제의 경우 모두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반면, 촉나라의 경우 를 사용하고, 오나라의 경우 을 썼다.

 

4. 정사 삼국지의 또 다른 매력, 배송지의 삼국지주

정사 삼국지의 사료적 가치를 따져보기 위해 우리가 우선 주목할 사항은 정사 삼국지원전 못지않게 유명한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이다.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문제文帝정사 삼국지가 너무 간략한 것이 안타까워 중서시랑 배송지에게 명하여 주석을 달게 했다.

 

배송지는 자가 세기世期이고, 하동군 문희현 사람이다. 동진東晉에서 벼슬했고 송의 태조인 유유劉裕에게 인정받았다. 동진과 송의 왕조 교체기인 420년에 49세였고, 송나라에 들어와서도 고위직을 지냈다.

 

정사 삼국지주석서의 완성은 429년 배송지의 나이 58세 때 이루어졌다. 이 주석서는 당시의 야사野史와 정사를 총망라하여 집필되었는데, 양적으로 정사 삼국지와 비슷할 정도이다. 이 주석은 방대한 자료 조사와 인용 예문의 정확성과 풍부함, 문맥에 따른 시의적절한 단평短評으로 유명하다.5) 배송지는 정사에서 빠진 내용이나 부족한 부분을 골라 당시 사료를 충분히 활용하여 재치 있게 재구성함으로써 정사에 흥미를 더해주었다. 오늘날까지도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國志注정사 삼국지의 최고 주석본이자 독서 촉매제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5. 정사 삼국지의 몇 가지 한계

위진남북조의 저명한 문학 이론가 유협劉勰오직 진수의 삼국지만 실질과 수사가 융합을 이루어 정돈과 분석이 잘되었으므로 문과 질이 제대로 합치되었다. 순욱과 장화는 진수를 사마천과 반고에 비견했는데, 이것은 안일한 칭찬이 아니다.”6)라고 호평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는 구성에서 보통 기전체 사서와 크게 다른 결함이 있다.

 

첫째, 황제를 다룬 기와 인물들의 전기인 전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래는 사이에 제후나 왕을 다룬 세가世家가 있어야 한다.

둘째, 주제나 내용을 내세운 전이 없다는 점이다. 사기유림열전儒林列傳이나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보듯 주제를 표제로 한 전은 그 자체로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정사 삼국지후비전이나 비빈전처럼 몇몇 사람의 전을 합친 경우는 있으나 이 또한 전의 범위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공통점을 가진 인물들을 같은 전에 넣고 있으므로 표제를 세우는 일이 가능한데도 화타 등의 전이 방기전方技傳에 있는 것 외에는 주제로 편명을 삼은 것이 없다. 이것도 본문에서는 방기전이라고 했지만, 송간본宋刊本 등의 목록에서는 전에 실린 다섯 명의 이름을 적고 있다. 이 점은 정사 삼국지에 수록된 인물이 정치가나 관료에 국한된 탓이 아닌가 한다.

셋째, 또는 서가 없다. 기전체는 비록 기와 전이 주체이지만, 지 역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제, 화폐, 지리, 천문과 율력, 예악, 형법 등과 같은 전제典制는 모두 지에 기술되며, 이것은 한 시대의 사회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후대인들의 역사 연구에 기초 자료가 된다. 기전체 사서의 창시자인 사마천이 사기에 팔서八書를 두고, 반고가 한서에 십지十志를 둔 것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넷째, 서술하는 방식이나 내용이 소략하다. 진수가 역사를 정리하면서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곤혹스러웠음을 짐작할 수 있기는 하지만, 건안문단建安文壇의 중요한 인물인 서간徐干, 진림陳琳, 응창應瑒조차도 별도의 전이 없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위서촉서, 오서를 비교해볼 때, 특히 사관이 없던 촉나라 역사를 다룬 촉서의 내용은 더욱 소략하다.

다섯째, 문장이 간결하고 투박하다. 이 점은 사기와 비교해볼 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는 개인의 의견과 감정을 억제하고 최대한 사실事實을 적확하게 기술하려는 진수의 의도 때문인 듯한데, 이 역시 촉서의 경우에 두드러진다. 이를테면 유비가 당양의 장판에서 조조의 군대에 무너져 처자를 버리고 도주할 때, 맹장 조운趙雲이 유비의 아내 감 부인과 아들 유선을 구한 일이 삼국지연의에는 1백만 대군을 뚫고 구해냈다며 과장되어 있는 데 비해, 정사 삼국지에는 겨우 42자 정도로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사마염이 정권을 빼앗는 과정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적지 않은 역사 왜곡을 하여 역사가의 기본적 자질인 직서直書가 결여되었다. 이것은 진수가 사마염이 건국한 진나라의 신하라는 점이 일차적인 원인이겠지만, 역사가로서 엄정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에서 비켜갈 수는 없다.

 

6. 정사 삼국지의 의의

몇 가지 한계가 있기는 해도 오늘날 우리가 정사 삼국지를 읽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정사 삼국지삼국지연의와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한 정사正史임을 알아야 한다. 중국인의 뿌리 깊은 화이관華夷觀도 따지고 보면 이민족으로 대변되는 사이四夷의 침략으로 실추된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제시한 것이니, 흥성의 시대인 한나라 시절에도 흉노와 형제지국을 맺었고, 위진남북조 시절에는 글자 그대로 오호五胡에 의해 16국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수나라는 두 차례 고구려高句麗 원정을 나섰다가 결국 패망에 이르렀고, 나라도 서쪽의 티베트에 시달렸으니 그들의 의식 속에는 이민족에 대한 피해 의식이 상존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남송南宋 주희朱熹의 역사 철학의 입장에서 출발한 촉한 정통론이 원나라 때는 수면 아래로 잠겨 있다가 중화사상의 자존심을 회복한 명나라로 계승되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집필 관점으로 이어지면서 정사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방향, 즉 존유반조尊劉反曹의 기치를 내걸며 인물 묘사 자체를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연의칠실삼허七實三虛.”라는 후광을 두르고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민족에 의해 실추된 중국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의도적으로 쓴 흔적이 역력하다. 삼국지연의의 역사 왜곡은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부정하고 동아시아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그 기본적인 맥락은 크게 차이가 없다. 특히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사 정책으로 천하의 기반을 다진 조조를 그저 난세의 간웅 정도로 알고, 배은망덕한 유비를 덕망을 갖춘 제왕으로 그릇 알며, 인사 정책의 최대 실패자인 제갈량을 신출귀몰한 전략가로 잘못 아는 것7)은 이제 바로잡아야 한다.

 

아울러 정사가 갖고 있는 시대사적 의의, 우리나라 상고사와의 긴밀한 관련은 차치하고서라도 위··오 삼국으로 나뉘면서 패권을 차지하고자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를 던지는 책략가들의 두뇌 싸움과 권력을 좇아 이합집산을 하는 인간들의 추한 모습이라든가, 제위를 둘러싸고 형제간에 전개되는 정권 쟁탈전의 양상 등은 오늘날 정치의 권력 지형과도 관련지어 분석해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런 면에서 정사 삼국지는 단순한 중국의 역사서가 결코 아니며, 인간의 흥망사가 살아 숨 쉬는 삶의 지침서로서 그 가치를 획득하고 있고, 사기한서같은 역사서들과 함께 그 중요성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책임에 틀림없다. 특히 독자들은 인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정사 삼국지의 가치에 주목하며 소설 삼국지에서 그려내는 인물상과 비교해보면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의 차이를 염두에 둔다면 더욱 즐거운 독서법이 될 것이다.

 

:

1) 본래 이 책의 서문 격인 서록敍錄한 권이 더 있어 진수의 생애와 저작 취지 등을 알 수 있을 법한데, 일찍이 유실되어 동진東晉화양국지華陽國志진수전陳壽傳진서晉書본전本傳에 의거해서 그의 생애를 알 수밖에 없다.

2) 삼국지연의의 형성 과정은 이러하다. 진나라 때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썼고, 남북조시대에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에 대한 주석을 내어 당나라와 송나라의 민간을 중심으로 구전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집약해 원나라 지치至治 연간에는 전상 삼국지 평화全相三國志平話세 권으로 출간되었다. 이것이 다시 원나라 때 희곡 및 잡극으로 공연되면서 대중화되었고, 원말 명초에 나관중이 고문과 백화를 혼용하여 삼국지연의를 지었는데, 명나라 홍치弘治 연간인 갑인년(1494)에 간행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대표적 판본이다. 명나라 때는 20종 이상의 판본이 있었으며, 그중 청나라 때의 모종강본毛宗崗本이 가장 널리 읽혔다.

3) 수판칭許盤淸과 저우원예周文業삼국연의와 삼국지의 비교三國演義三國志對照本에 의하면 삼국지연의에 허구적으로 묘사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명장면들이다. 1. 유비와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하는 장면(1). 2.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는 장면(5). 3. 왕윤이 초선을 이용하는 연환계(8~9). 4. 조조가 술을 마시며 유비와 함께 영웅을 논하는 장면과 망매지갈 이야기(21). 5. 관우가 1천 리를 단기로 달리며 다섯 관문의 다섯 장군을 베는 장면(27). 6. 유비가 삼고초려하여 제갈량을 영입하는 과정(37). 7.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유선을 구하는 장면(41) 8. 제갈량이 여러 유학자와 설전하는 장면. 9. 적벽대전에서 화살을 빌려오는 장면과 황계의 고육책(46). 10. 제갈량이 동풍을 불러들이는 장면(49). 11. 화용도에서 조조를 살려주는 장면(50). 12. 제갈량과 주유의 기 싸움 장면(88~90). 13. 남만 정벌에서 맹획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살려주는 장면(88~90). 14. 읍참마속의 장면(95).

4) 통일과 분열, 문화의 동질성과 이질성의 극단적 표출로 인해 유가가 몰락하고 경전을 재해석하는 풍토가 이루어졌으며, 불교가 성행하고 도가적 학풍이 대세를 이루면서 이른바 현학玄學이 시대적 조류로 등장하며 황건적이 전국을 강타했다. 불교의 유입은 중국이 외국과의 교섭을 바라는 국제 교류 관계의 서막을 알리는 징표이기도 했다.

5) 그의 아들 배인裴駰 역시 사기의 주석본인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니 2대에 걸쳐 역사서를 주해한 것이다. 홍윤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및 배송지(裴松之) ()에 대한 주석과 번역 1, 중국어문논총49, 2011, pp. 375~402.

 

6) “唯陳壽三國志, 文質辨合洽, 荀張比之於遷固, 非安譽也.” 문심조룡文心雕龍》 〈사전史傳.

7) 충신의 사표로 추앙되는 제갈량은 칠종칠금七縱七擒이란 말도 있듯이 대단한 전략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홍윤기는 흥미로운 논문에서 제갈량이 독재정치를 했다는 점을 그의 명문장 출사표出師表를 연구하여 고찰하고 있다. 홍윤기, 〈〈출사표(出師表)에 나타나는 제갈량(諸葛亮)의 독재정치, 중국어문논총84, 2017, pp. 183~208.

 

위서해제

1. 진수가 정사 삼국지위서를 편찬하기 전에도 위나라 자체적으로 역사서를 편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위나라 문제文帝와 명제明帝가 위기衛覬와 무습繆襲에게 기전체로 위사魏史를 편찬하도록 명을 내렸는데, 당시 몇 해에 걸쳐 작업했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위탄韋誕과 왕침王沈, 완적阮籍, 부현傅玄 등에게 다시 작업하도록 명했다. 후에 왕침이 편찬 사업을 완성하여 위서魏書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위나라 최초의 전사專史이다.1) 이 책은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집필할 때 적지 않게 참조한 책이다.

 

1) 위서사통史通》 〈고금정사古今正史구당서舊唐書》 〈경적지經籍志에는 44,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48,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는 47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경조 사람 어권魚眷이 개인 신분으로 위략魏略을 완성하여 위나라 명제의 일까지를 기록했는데, 왕침의 위서와 마찬가지로 기전체로 이루어졌다. 위략원위략原魏略에 근거했다고 하며 전략典略과 마찬가지로 소실되었으나, 그 일부 문장은 배송지의 주석에 재현되었다. 다만 전략정사 삼국지위서를 비롯하여 촉서오서에서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위략은 위나라의 건국 이전에 대한 기록이 절반을 차지한다.

 

정사 삼국지》 〈위서의 구성을 살펴보면, 와 전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기는 무제기武帝紀문제기文帝紀명제기明帝紀삼소제기三少帝紀네 편이 있으며, 전은 후비전后妃傳에서 시작하여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이민족에 관한 기록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으로 끝난다. 전은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각각 독립된 기전체를 이루고 있다.

 

2. 우리는 흔히 정사 삼국지의 핵심 인물인 조조와 유비, 손권, 제갈량이 비슷한 나이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아마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영향 때문인 듯한데, 주요 인물들의 실제 나이를 따져보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에 조조와 손견孫堅30세였고, 유비가 24세였다. 그렇다면 삼국지연의에서 주역으로 등장하는 제갈량은 몇 세일까? 그는 181년에 태어났으니 이때 겨우 4세이고, 손견의 장남 손책은 10세이며, 차남 손권은 겨우 3세였으니, 조조의 입장에서는 손권과 마치 동시대인처럼 거론되는 것이 황당한 노릇이리라.

 

조조는 어떤 인물인가? 삼국지》 〈위서무제기에 의하면 조조는 전한前漢 때 상국을 지낸 조참曹參의 후예이다. 조부 조등曹騰은 중상시와 대장추를 지냈으며 비정후에 봉해졌다고 한다. 양자養子 조숭曹嵩이 작위를 이어받아 태위의 관직까지 이르렀지만,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는 상세히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조조는 조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0세에 효렴으로 추천되어 수도 낙양의 북부위에 임명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정사 삼국지65권 중에서 거의 절반인 30권의 방대한 분량이 바로 위서이고, 위서의 주인공은 조조이다. 환관의 자손으로 비주류의 설움을 딛고 일어선 영웅이었지만, 유비와 달리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한 조조는 한실 부흥이라는 명제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참혹한 후한의 상황을 목격하고 천하의 백성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으며, 스스로 제위에 오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가 아들인 조비가 위나라를 창업하게 할 정도로 절제력도 갖고 있었다. 당시 14개 주에서 10개 주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오나라가 3개 주, 촉나라가 1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당시의 위세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조조가 성공한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조조의 인재 등용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조조는 인물을 등용할 때 재능 있는 자만 추천된다(唯才是擧).’는 논리를 내세워 덕망보다는 능력 위주로 발탁하여 헛된 이름을 배제했다. 조조의 논지는 천하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청렴함을 잣대로 해서도 안 되고 고상함을 기준으로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형수와 사통했다는 말이 도는 부도덕한 자이거나 뇌물을 받은 파렴치한 자라도 재능이 있으면 기용했다. 이러한 용인술은 천하 경영을 위한 기반 구축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또한 지지 기반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황건적의 난 때 조조는 영천의 도적을 토벌했는데, 영천군 동쪽 지역에 조씨 가문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초현이 있어서 조조가 황건적의 잔당을 수하의 세력으로 편입시킬 때도 그 지역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한 헌제를 영천군의 중심지인 허창에 맞이하여 실권을 장악한 것도 그의 지역 기반에 근거를 둔 전략 덕분에 가능했다.

 

후한 말에 군웅이 많이 일어난 원인은 지방의 장관 격인 자사들이 자기 소유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가 한나라 왕실을 보필하겠다면서 촉한을 세운 것도 따지고 보면 개인의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말년에 딸을 헌제의 황후로 삼아 한나라의 외척이 되었으니, 후한의 3대 세력인 환관과 외척, 호족豪族 지식인 계층을 모두 수중에 넣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3. 물론 조조의 기반 정립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원소와 맞붙은 관도 전투이다. 당시 조조는 여러 영웅 중에서 유리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의 지배지는 군웅할거의 중심부였고,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특히 원소는 하북 일대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어서 조조로서는 부담이 되는 강적이었다. 그러나 원소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자식들 간에 불화가 싹튼 것이다.

 

원소에게는 원담袁譚, 원희袁熙, 원상袁尙 세 아들이 있었다. 조조가 그랬던 것처럼, 원소도 맏아들인 원담보다는 막내아들인 원상을 사랑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장남인 원담에게는 동쪽에 있는 청주를 주고, 차남인 원희에게는 북방에 있는 유주를 다스리게 하며, 조카인 고간高幹에게는 서쪽의 병주를 다스리게 하고, 막내인 원상에게는 자신이 있는 기주에 머무르게 했다.

 

이런 조치가 형제간의 불화를 일으켰는데, 특히 원담과 원상의 대립이 심각하여 부하들끼리도 반목할 정도였다. 당시 원소와 동맹 관계에 있던 형주의 유표劉表가 장남 유기劉琦를 제치고 차남 유종劉琮에게 승계하려다가 멸망을 자초한 것을 보고서도 원소는 그처럼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것이다.

 

관도 전투가 있고 난 이듬해 원소가 실의에 빠져 죽자, 원담과 원상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서 원담이 아버지의 숙적인 조조에게 구원을 청하는 해괴한 상황이 일어난다. 이때 조조는 남방의 형주를 토벌해야 할지, 원씨의 내분을 틈타 북방에 있는 병력을 끌어들여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참모 대부분은 형주를 토벌하라고 주장했지만 조조는 후자를 주장하는 순유荀攸의 의견을 따랐고, 결국 원담에게 구원병을 보냈다. 이때 조조는 아들 조정曹整을 원담의 딸과 정략결혼을 시킨다.

 

그 후 조조는 하북으로 군대를 출동시켜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원씨의 근거지인 업도를 함락했다. 이때 원담이 조조를 배신하자 조조는 원담의 딸을 돌려보내고는 원담을 공격하여 결국 패사시킨다. 조조는 관도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뒤처리도 잘했다. 자신을 험담하거나 배반한 자들이 원소의 진영에 보낸 편지 등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허물을 용서하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당대의 문장가 진림은 원소의 참모였는데 조조를 비난하는 격문을 썼으나 조조는 과감히 진림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관도 전투를 통해 조조는 기존의 장안과 낙양, 연주 등의 지역에 더하여 유주, 병주, 청주, 기주를 차지하면서 중원을 장악한다. 이들 지역은 하··주를 거쳐 춘추오패春秋五覇와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뿌리내린 곳과 그다지 어긋나지 않는다. , ··오 삼국 중에서 실질적 거대 세력이 성립된 것이다. 위나라는 그 면적이 거의 오와 촉을 합친 정도였고, 당시 인구나 호수戶數는 위나라가 66만 호(인구 440만 명)로서 52만 호(인구 230만 명)인 오나라나 28만 호(인구 94만 명)에 불과한 촉나라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이러한 하북 평정의 전략은 삼국지연의에서도 3회에 걸쳐 서술하고 있는데, 그 주요 초점은 관도 전투에 맞추어져 있다. 실제 조조는 하북 평정에 7년을 소모했으니 그의 삶에서 상당 부분을 할애한 셈이다.

 

조조는 둔전제屯田制를 널리 시행하여 전란으로 파괴된 농업을 회복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또한 밖으로는 요동을 정벌하여 요동의 주권자인 공손연公孫淵을 멸하고, 고구려를 정벌하여 그 수도인 집안을 함락하고, 멀리 만주의 읍루와 부여를 정복했다.

 

220년 조조가 낙양에서 붕어하니, 나이는 66세였다. 임종할 때 그는 천하가 평정되지 않았는데 고대의 규정에 따라 장례를 치를 수는 없다.”라면서 장례가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고 직무에 충실하도록 하고 자신의 무덤에도 금··보물 따위를 넣지 말라고 당부했다.

 

4. 그 후에 큰아들 조비가 헌제에게 제위를 이어받아 위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위나라도 제2대 명제 이후에 국력이 신장되지 못하고 권신 사마의라는 인물의 허허실실 전략에 휘말리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김문경金文京 교수에 의하면 249년 사마의가 실권을 장악할 때 상황은 이러하다. 2년 앞선 2474월에 본처 장춘화張春華59세로 사망하자 사마의는 5월부터는 병이 있다며 정치에 나서지 않았다. 조상曹爽의 사람인 이승李勝이 형주의 장관에 임명되는 걸 보면서도 사마의는 죽을 먹으면서 철저히 병자로 위장했다. 그러다 249년 정월 6일에 제왕 조방이 명제의 능에 갈 때 조상 일파가 수행하는 것을 틈타 사마의는 조상과 그의 족속을 저잣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하고 위나라의 실권을 잡는다. 사마의가 71세 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518월에 사마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다.

 

사마의에게는 자식이 아홉 있었지만 그는 후계자로 장춘화의 소생인 사마사와 사마소 형제를 지목한다. 2542월에 재상 이풍李豊이 사마사에게 모반을 하려다 발각되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 당시 황제인 조방이 관여되었다고 하여 사마사는 황제를 쫓아낸다. 그리고 문제의 손자요 명제의 동생인 고귀향공高貴鄕公 조모曹髦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운다. 고귀향공은 즉위한 이래 5년간 사마씨에게서 정권을 되찾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실패하고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결국 위나라는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의 손에 넘어갔고, 조조가 위왕이 되고 조비가 황제라 칭한 220년부터 265년에 이르는 46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다.

 

 

위나라 가계도

조참曹參 조등曹騰 조숭曹嵩 조조曹操 조비曹丕 조예曹叡 조방曹芳 조모曹髦 조환曹奐

 

위나라(220~265) : 조조 사후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세움. 46년 후 사마염에 의해 멸망.

조비(187~226 / 재위 220~226) : 조조의 장남.

조예(204~239 / 재위 226~239) : 조비의 장남.

조방(231~274 / 재위 239~254) : 조예의 양아들. 9세에 즉위. 곽 태후가 수렴청정. 정권을 장악한 사마씨에게 맞서다가 폐위됨.

조모(241~260 / 재위 254~260) : 조비의 손자. 조예의 이복동생인 조림曹霖의 아들. 조방이 폐위된 후 즉위. 사마씨에 맞서다가 시해됨.

조환(246~302 / 재위 260~265) : 조조의 손자. 본명은 조황. 조모가 시해된 뒤 즉위. 사마염에게 선양하며 위나라 마지막 황제가 됨.

 

일러두기

1) 이 책은 195912,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간행된 표점본 정사 삼국지(전체 5)에 의거하여 번역한 것으로, 별도의 교감校勘 작업은 하지 않았다.

2) 이 책의 단락 구분은 표점본에 따르지 않고 연대순에 따라 역자가 재구분한 것이다.

3) 이 책의 주석은 대부분 배송지裵松之가 덧붙인 주석에 의거한 것이지만, 역자가 번역본을 참조하여 덧붙인 것도 적지 않은데, 두 가지 주석을 구분하지 않고 일괄로 처리했다.

4) 역주의 원칙은 인명人名·관명官名·유문遺文·일사逸事 등을 비롯하여 문맥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덧붙이려 노력했다.

5) 역문에서 원문을 보충한 곳이 더러 있는데, 그럴 경우 소괄호를 이용해 원문과 구분했다.

6) 원전의 간지干支를 현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연월일年月日로 바꾸어 번역했다.

7) 원문에 충실한 직역을 원칙으로 했으나, 의미가 불충분한 부분은 의역도 배제하지 않았다. 번역 어투는 가능한 한 현대적 의미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8) 정사 삼국지의 세 부분은 일반적으로 위지魏志·촉지蜀志·오지吳志라고 하지만, 대 이래 대다수의 목록이나 표제標題에는 위서魏書·촉서蜀書·오서吳書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 체재를 따른다.

 

위나라를 창업한 난세의 영웅 조조

 

무제기武帝紀

태조太祖 무황제武皇帝1)는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은 조이고 휘2)는 조이며 자는 맹덕孟德이다. 나라 때 상국相國3)을 지낸 조참曹參의 후예이다.

 

조등曹騰은 한나라 환제桓帝 때 환관으로 중상시中常侍4)와 대장추大長秋5)를 지냈으며 비정후費亭侯까지 봉해졌다. 양자 조숭曹嵩이 그 작위를 이어받아 태위太尉6)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조숭이 본래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는 그 본말을 상세히 알 수 없다.7)

 

조숭이 조조曹操8)를 낳았다.

 

조조는 어려서부터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으며 권모술수가 있었으나, 사내다움을 뽐내며 멋대로 놀기를 좋아해 덕행과 학업을 닦는 일을 등한히 했으므로9) 세상 사람들은 그를 기이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양나라 교현橋玄과 남양南陽의 하옹何顒10)만이 그를 남다른 인물로 알아주었다. 교현이 조조에게 말했다.

 

천하는 장차 혼란에 빠질 것인데, 세상을 구할 만한 재목이 아니면 이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 있을 것인저!”11)

 

나이 스물에 효렴孝廉12)으로 천거되어 낭이 되었고, 동한東漢의 수도 낙양洛陽 북부 지역의 위에 임명되었다가, 돈구현頓丘縣의 영13)으로 승진했으며, 조정으로 불려가 의랑議郞14)으로 임명되었다.

 

| 광화光和 말년(184) | 황건적黃巾賊15)이 난을 일으키자 조조는 기도위騎都尉16)에 임명되어 영천穎川의 황건적을 토벌했고, 이 일로 승진하여 제남국濟南國의 상이 되었다. 제남국에는 10여 개의 현이 있었는데, 장리長吏17)들 가운데 대부분이 귀족과 친척에게 영합하고 뇌물을 받고 직책을 파는 일이 횡행했으므로 조조가 상주하여 그중 여덟 명을 파직하고 음사(淫祠, 관청의 비준을 받지 않는 제사)를 엄금하니, 간사하고 사악한 자들이 달아나 자취를 감추어 제남국의 질서가 바로 안정되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동군 태수東郡太守18)로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기주 자사冀州刺史 왕분王芬, 남양 사람 허유許攸,19) 패국 사람 주정周旌 등이 호걸 등과 연합해 영제靈帝20)를 폐위하고 합비후合肥侯21)를 옹립할 계획을 세우고 조조에게 알렸지만, 조조는 그 제의를 거절했다.22) 왕분 등의 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금성金城 사람 변장邊章과 한수韓遂가 자사刺史23)와 군수郡守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무리가 10수만 명이나 되어 천하가 어지럽고 불안했다. 조정에서는 조조를 불러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삼았다. 때마침 영제가 죽고 태자 유변劉辯이 즉위하여 소제少帝가 되었으며 태후가 조정을 장악했다. 대장군大將軍24) 하진何進25)은 원소袁紹와 더불어 환관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지만 태후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진은 곧 동탁董卓을 불러들여 태후를 협박하려 했는데,26) 동탁이 낙양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환관들에게 살해되었다.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여 황제를 폐위해 홍농왕弘農王으로 삼고, 진류왕陳留王 유협劉協을 옹립하여 헌제獻帝로 삼으니, 수도는 크게 혼란스러웠다.

 

동탁은 표를 올려 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27)로 삼고 그와 함께 조정의 일들을 의논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조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샛길을 따라 동쪽의 고향 초현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관소關所, 즉 호뢰관虎牢關을 빠져나와 중모현中牟縣을 지나갈 때, 정장亭長의 의심을 받아 현성縣城까지 압송되었지만, 마을 사람 중에 어떤 이가 남몰래 조조임을 알아보아 그에게 부탁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때마침 동탁이 태후와 홍농왕을 살해했다. 조조는 진류에 도착하여 가산을 처분하고 의로운 군대를 소집하여 동탁을 토벌할 준비를 했다.

 

| 중평中平 6(189) 겨울 12| 기오己吾에서 비로소 군대를 일으키니 그때가 한 영제 중평 6년이다.

 

| 초평初平 원년(190) 봄 정월 | 후장군後將軍28) 원술袁術, 기주목冀州牧29) 한복韓馥, 예주 자사豫州刺史 공주孔伷, 연주 자사兗州刺史 유대劉岱, 하내 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 발해 태수勃海太守 원소, 진류 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 동군 태수 교모橋瑁, 산양 태수山陽太守 원유袁遺, 제북濟北의 상30) 포신鮑信이 동시에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 숫자는 각기 수만이나 되었으며 원소를 맹주로 추대했다. 조조는 분무장군奮武將軍의 직무를 대행했다.

 

| 2| 동탁은 군대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곧 천자를 협박해 도읍을 장안長安으로 옮겼다. 동탁은 낙양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마침내 한나라 궁실을 불태워버렸다. 이때 원소는 하내河內에 주둔했고, 장막유대교모원유는 산조酸棗에 주둔했으며, 원술은 남양에, 공주는 영천에, 한복은 업에 주둔했다.31)

 

동탁의 군대가 강했으므로 원소 등은 감히 먼저 진군하려 하지 않았는데, 조조가 말했다.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폭력으로 혼란스럽게 한 자를 죽이고자 이미 대군大軍이 모였는데, 여러분은 또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만일 앞서 동탁이 산동山東에서 군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조정의 권위에 의지하고 이주二周32)의 요충지를 근거로 하여 동쪽으로 병사를 출정시켜 천하를 지배하려 한다면, 그는 설사 도의에 어긋난다 해도 이 일을 할 것이므로 나라의 큰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그는 궁실을 불태우고 황제를 위협하여 수도를 옮겼으며, 천하가 동요되어 백성은 어느 곳에 의지해 돌아가야 할지를 모르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그를 멸망시키려는 때입니다. 한 번의 싸움으로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는데,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까?”

 

그러고 나서 조조는 곧 혼자서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성고成皐를 점령하려고 했다. 장막만이 장군 위자衛玆에게 병사를 나누어주어 조조를 따라가도록 했다. 이들은 형양滎陽의 변수汴水에 이르러 동탁의 장군 서영徐榮과 교전했으나 패하여 병사들 가운데 대다수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조조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으며, 타던 말도 부상을 입었다. 사촌 동생 조홍曹洪이 자기 말을 조조에게 주었으므로 밤에 몰래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서영은 조조가 이끄는 병사가 많지 않은데도 온종일 전력투구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 산조를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역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조조가 산조로 돌아왔을 때 여러 군영의 의로운 군대 10여만 명은 매일 주연만 성대하게 베풀 뿐 나아가 적극적으로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조는 그들을 꾸짖고는 책략을 내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제 계획을 들어보십시오. 발해 태수 원소는 하내의 군대를 이끌고 먼저 맹진孟津으로 가고, 산조의 여러 장수는 성고를 지키면서 오창敖倉을 점거하고 환원環轅과 태곡太谷의 두 길을 봉쇄하여 요충지를 전부 제압합니다. 원술 장군은 남양의 군대를 이끌고 단현丹縣과 석현析縣으로 진군하다가 무관武關으로 쳐들어가 삼보三輔33)를 위협합니다. 각 대군이 모두 성벽을 높고 깊게 쌓되 적군과 싸우지는 말고 의병疑兵의 숫자를 늘려 각지에서 일어나는 천하의 형세를 보여주고 정의로써 역적을 토벌한다면, 천하는 아주 빠르게 평정될 것입니다. 지금 군대가 정의의 이름으로 일어났으면서도 의심하며 진군하지 않는다면 천하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되니, 나는 속으로 여러분을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장막 등은 조조의 책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조는 병력이 적었으므로 하후돈夏侯惇 등과 양주揚州까지 가서 병사를 모집했는데, 양주 자사 진온陳溫, 단양 태수丹陽太守 주흔周昕이 그에게 4천여 명을 주었다. 돌아오던 중 용항현龍亢縣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 가운데 대다수가 반란을 일으켰다. 과 건평建平에 도달하여 다시 1천여 명의 병사를 소집하고 하내에서 주둔했다.

 

유대와 교모는 서로 싫어하여, 유대가 교모를 죽이고 왕굉王肱에게 동군 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원소와 한복은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황제로 옹립할 계획이었는데, 조조가 거절했다. 원소는 또 일찍이 옥새를 얻은 적이 있는데, 조조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그의 팔꿈치를 향해 그 옥새를 들었다. 조조는 이 일로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원소를 증오하게 되었다.

 

| 초평 2(191) | 원소와 한복이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지만, 유우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 여름 4| 동탁이 장안으로 돌아왔다.

| 가을 7| 원소가 한복을 위협해 기주를 빼앗았다.

 

흑산黑山의 산적 우독于毒백요白繞수고眭固34) 10여만 명이 위군魏郡과 동군東郡을 공략했다. 동군 태수 왕굉은 이를 막지 못했다. 조조가 병사를 이끌고 동군으로 들어가 복양濮陽에서 백요를 공격하여 무찔렀다. 그래서 원소가 상소해 조조를 동군 태수로 임명하여 동무양東武陽을 다스리도록 했다.

 

| 초평 3(192) | 조조가 돈구頓丘에 주둔하고 있는데, 우독 등이 동무양을 공격했다. 조조가 곧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흑산에 들어가 우독 등의 본거지를 공격하려 하니,35) 우독이 그 소식을 듣고 무양을 버리고 돌아갔다. 조조는 수고를 기다렸다가 공격하고, 또 흉노 어부라於夫羅36)를 내황內黃에서 공격하여 모두 크게 무찔렀다.

| 여름 4| 사도司徒37) 왕윤王允이 여포呂布와 공모하여 동탁을 살해했다. 동탁의 장군 이각李傕과 곽사郭汜 등이 왕윤을 죽이고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는 패배하여 동쪽으로 향해 무관을 도망쳐 나왔다. 이각 등은 조정을 제멋대로 했다.

 

청주靑州의 황건적 1백만 명이 연주로 침입하여 임성국任城國의 재상宰相38) 정수鄭遂를 죽이고 방향을 바꾸어 동평東平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유대가 그들을 공격하려 하자, 포신이 간언했다.

 

지금 적의 군사는 1백만이고, 백성은 두려워 벌벌 떨고 있으며, 병사들은 싸우려는 의욕이 없으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 적의 군사력을 관찰하면 늙은이와 젊은이가 뒤섞여 있고, 무기와 식량 등이 구비되지 않아 완전히 약탈에만 의지하여 조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군사의 힘을 축적하여 지키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그들은 싸워도 이길 수 없고 공격 또한 하지 못할 것이니, 형세는 반드시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정예 군사를 뽑아 요충지를 점거하면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유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황건적과 싸우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 포신이 주리州吏 만잠萬潛 등과 동군으로 가서 조조를 영접하고 연주목兗州牧을 맡기를 청했다. 조조가 수장壽張 동쪽으로 가서 황건적을 공격했다. 포신은 온 힘을 다해 싸워 목숨을 잃고서야 가까스로 황건적을 무찌를 수 있었다. 포신의 시신에 상금을 내걸고 찾으려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사람들은 포신의 모습과 비슷하게 나무를 깎아서 만들어놓고, 그것에 제사 지내고 곡을 했다. 황건적을 추격하여 제북까지 쫓아가니 황건적은 항복을 요청했다.

 

| 겨울 | 조조가 항복한 30여만 명과 남녀 1백여만 명을 받아들였으며, 그중에서 정예들만 거두어 청주병靑州兵이라 불렀다.

 

원술과 원소 사이에 불화가 생겨, 원술이 공손찬公孫瓚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공손찬은 유비劉備를 고당高唐, 단경單經을 평원平原, 도겸陶謙을 발간發干에 주둔시켜 원소를 압박했다. 조조는 원소와 힘을 합쳐 그들을 모두 쳐부수었다.

 

| 초평 4(193) | 조조는 견성鄄城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가 원술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원술은 군사를 이끌고 진류로 들어가 봉구封丘에 주둔했는데, 흑산에 남은 적들과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은 장군 유상劉詳을 광정匡亭에 주둔시켰다. 조조가 유상을 공격하자 원술이 유상을 구원하려 했으므로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조조가 원술을 크게 쳐부수었다. 원술은 퇴각하여 봉구를 지켰으나 조조가 원술을 포위했다. 원술은 포위망이 채 다 이루어지지 않은 틈을 타 양읍襄邑으로 도망갔다. [조조의] 군대는 태수太壽까지 추격해갔고, 강둑을 무너뜨려 성안으로 물이 들어가게 했다. 원술은 영릉寧陵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계속 추격하자 원술은 또다시 구강九江으로 도망쳤다.

| 여름 | 조조는 군사를 돌려 정도定陶에 진을 쳤다.

 

하비下邳 사람 궐선闕宣이 수천의 군사를 모아놓고 스스로 천자라고 일컬었다. 서주목徐州牧 도겸은 그와 손을 잡고 함께 군대를 일으켜 태산군泰山郡의 화현華縣과 비현費縣을 빼앗고 임성任城을 공략했다.

| 가을 | 조조는 도겸을 정벌하고 10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도겸은 성을 굳게 지킬 뿐 감히 싸우러 나오지 못했다.

 

그해 손책孫策은 원술의 지시를 받아 장강長江을 건넜으며, 몇 년 안에 드디어 강동江東을 소유하게 되었다.

 

| 흥평興平 원년(194) | 조조는 서주에서 돌아왔다. 이전에 조조의 부친 조숭이 관직을 버리고 초현으로 돌아왔는데, 동탁의 난이 일어나자 낭야瑯邪로 피난을 갔다가 도겸에게 살해당했다.39) 그 때문에 조조는 동쪽을 정벌함으로써 복수하려고 마음먹었다.

| 여름 | 조조는 순욱荀彧과 정욱程昱에게 견성을 지키도록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러 가서 다섯 성을 함락하고, 그 땅을 공략하여 동해군東海郡까지 갔다. 돌아오는 도중에 담현郯縣을 지나는데, 도겸의 부장 조표曹豹가 유비와 함께 담현의 동쪽에 주둔하여 조조를 맞아 공격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들을 쳐부수고, 이어 양분현襄賁縣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그가 지나간 곳은 파괴되고 많은 사람이 학살되었다.

 

때마침 장막이 진궁陳宮과 반역을 도모하여 여포를 맞이하자, 군과 현이 모두 호응했다. 순욱과 정욱은 견성을 보위하고, 과 동아東阿 두 현을 굳게 지키는데,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여포가 도착하여 견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해 서쪽의 복양에 주둔했다. 조조가 말했다.

 

여포는 하루아침에 한 주를 얻었다. 그러나 동평을 근거로 하여 항부亢父와 태산의 길을 끊고, 요충지를 이용하여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양에 주둔하고 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겠다.”

 

이렇게 말하고는 곧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공격했다. 여포는 군대를 내보내 싸우게 했는데, 먼저 기병들로 하여금 청주병을 공격하게 했다. 청주병이 달아나자 조조의 진세는 혼란스러워졌다. 조조는 급히 말을 달려 불길을 빠져나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40) 사마司馬41) 누이樓異가 조조를 부축하여 말에 오르게 한 다음 데리고 빠져나왔다. 군영에 돌아오기 전에 여러 장수는 조조가 보이지 않자 모두 두려워했다. 조조는 군영에 도착하여 애써 자기 몸을 지탱하며 장수들을 위로하고,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성을 공격할 무기를 속히 만들도록 한 다음, 다시 군대를 이끌고 여포를 공격하여 1백여 일 동안 대치했다. 이때 명충(螟蟲, 메뚜기의 일종)이 기습해 백성은 굶주림에 허덕였으며, 여포도 군량미가 모두 떨어져 각자 군사를 퇴각시켰다.

 

| 가을 9| 조조가 견성으로 돌아왔다. 여포는 승지현乘氏縣에 도착했으나, 그곳 사람 이진李進에게 공격을 받아 패하여 동쪽으로 가서 산양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원소는 사람을 파견하여 조조에게 연합하자고 설득했다. 조조는 막 연주를 잃어버리고 군대의 양식도 모두 떨어져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으나, 정욱이 조조에게 거절할 것을 권했다. 조조는 그 의견을 따랐다.

| 겨울 10| 조조가 동아현東阿縣으로 돌아왔다.

그해에 곡식 한 섬이 50여만 전에 달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리(軍吏, 군대의 관원과 참모 들을 합쳐 부르는 말)와 병사 들 중 새로 소집한 자들을 해산했다. 도겸이 죽고 유비가 그를 계승했다.

| 흥평 2(195) | 조조는 정도定陶를 습격했으나 제음 태수濟陰太守 오자吳資가 정도의 남쪽 성에서 지켰으므로 함락하지 못했다. 마침 여포가 도착했으므로 조조는 또다시 그를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 여름 | 여포의 부장 설란薛蘭과 이봉李封이 거야鉅野에 군대를 주둔하자 조조가 그들을 공격했다. 여포는 설란을 구하려다가 설란이 패배하자 달아났다. 마침내 설란 등의 목을 베었다. 여포가 다시 진궁이 인솔한 1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동민東緡에서 싸우러 왔다. 당시 조조의 군대는 수가 적었으므로 매복했다가 기습병을 출동시켜 크게 쳐부수었다. 여포가 밤에 달아나자 조조가 다시 공격하여 정도를 점령하고 군대를 나누어 여러 현을 평정했다. 여포는 동쪽으로 유비에게 달아났고, 장막은 여포를 따르면서 동생 장초張超에게 가족을 데리고 옹구雍丘를 지키도록 했다.

| 가을 8| 조조는 옹구를 포위했다.

| 겨울 10| 천자(헌제)는 조조를 연주목에 임명했다.

| 12| 옹구가 무너지자 장초는 자살했고, 조조는 장초의 삼족三族을 멸했다. 장막은 원술이 있는 곳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려 했으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연평이 평정된 후에 조조는 동쪽으로 가서 진국陳國의 땅을 빼앗았다.

 

그해 장안에서 동란이 발생해 천자는 동쪽(낙양)으로 도읍을 옮기려 했으나, 황제를 호송하던 부대가 이각과 곽사의 군사에게 조양曹陽에서 패하는 바람에 급히 황하를 건너 안읍현安邑縣에 도착했다.

 

| 건안建安 원년(196) 봄 정월 | 조조의 군대가 무평현武平縣에 도착하자 원술이 임명한 진국의 재상 원사袁嗣가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가 천자를 영접하려고 하자 장군들은 의혹을 품었다. 그러나 순욱과 정욱이 조조에게 권했으므로, 곧 조홍에게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영접하도록 했다. 그러나 위장군衛將軍42) 동승董承과 원술의 장수 장노萇奴가 요충지를 막고 있었으므로 조홍은 나아갈 수가 없었다.

 

여남汝南과 영천의 황건하의何儀유벽劉辟황소黃邵하만何曼 등은 각각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원술을 따랐지만 또다시 손견孫堅을 가까이했다.

 

| 2| 조조가 군사를 보내 그들을 정벌하고 유벽과 황소 등을 참수하니, 하의와 그의 부하들은 모두 항복했다. 천자는 조조를 건덕장군建德將軍43)으로 제수했다.

| 여름 6| 조조는 진동장군鎭東將軍44)으로 승진하고 비정후에 봉해졌다.

| 가을 7| 양봉楊奉과 한섬韓暹은 천자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양봉은 따로 군대를 이끌고 양현梁縣에 주둔했다. 마침내 조조가 낙양으로 돌아와 수도를 호위하니, 한섬은 슬그머니 도망가버렸다. 천자는 조조에게 부절符節45)과 황월(黃鉞, 황금 도끼)을 주고, 녹상서사錄尙書事46)로 삼았다. 낙양이 산산이 파괴되었으므로 동소董昭 등은 조조에게 허현許縣으로 천도할 것을 권했다.

| 9| 천자는 환원轘轅을 나와 동쪽을 향해 허현으로 왔으며, 조조를 대장군으로 삼고 무평후武平侯에 봉했다. 천자가 동탁의 핍박으로 서쪽(장안)으로 천도한 후로 조정은 나날이 혼란스러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종묘47)와 사직 제도가 확립되었다.

 

천자가 동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 양봉이 양현에서 출병하여 천자를 막으려 했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 겨울 10| 조조는 양봉을 정벌하러 나섰다. 양봉은 남쪽의 원술에게 도망쳤지만, 조조는 그가 주둔했던 양현을 공격하여 함락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원소를 태위로 임명했지만, 원소는 조조의 아래에 놓이는 것48)을 치욕스럽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조조는 한사코 사양하여 대장군 자리를 원소에게 양보했다. 천자는 조조를 사공司空49)으로 임명하고 거기장군車騎將軍을 대행하게 했다.50)

 

조지棗祗와 한호韓浩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여포가 유비를 습격해 하비성을 빼앗자 유비는 조조에게 도망쳐왔다. 정욱이 조조에게 진언했다.

 

제가 보기에 유비는 영웅의 재질을 두루 가졌고 인심을 많이 얻었으니, 끝까지 다른 사람 밑에 있을 인물이 아닙니다. 일찍 그를 제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조는 대답했다.

 

지금은 영웅을 끌어모을 시기이다. 이럴 때 한 사람을 죽여 천하 사람들의 인심을 잃는 일은 옳지 않다.”

 

장제張濟는 관중(關中, 함곡관函谷關 서쪽 지역)에서 남양으로 도망갔다. 장제가 죽자 조카 장수張繡가 그의 군대를 이끌었다.

 

| 건안 2(197) 봄 정월 | 조조는 완성宛城으로 갔다. 장수는 항복했지만 오래지 않아 후회하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그와 전투를 벌이다가 패하여 어지럽게 퍼붓는 화살에 맞았고, 장남 조앙曹昻과 조카 조안민曹安民을 잃었다. 그래서 조조는 병사들을 무음舞陰으로 퇴각시켰는데, 장수가 기병들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그들을 물리쳤다. 장수는 양현穰縣으로 달아나 유표와 연합했다. 조조는 여러 장군에게 말했다.

 

우리는 장수 등을 항복시켰지만, 인질을 잡아두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이오. 나는 패배한 원인을 분명히 알고 있소. 여러분도 이것을 알았으니, 지금부터 다시는 패배하지 않을 것이오.”

 

조조는 마침내 허도許都로 돌아왔다.

 

원술은 회남淮南에서 황제로 불리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 여포에게 알렸다. 여포는 그 사신을 붙잡아놓고 [원술이 보낸] 서신을 조정에 보고했다. 원술이 크게 화가 나서 여포를 공격했지만, 여포에게 패했다.

 

| 가을 9| 원술이 진국을 침략했으므로 조조는 그를 정벌하러 동쪽으로 갔다. 원술은 조조가 직접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버려두고 달아나면서 장수 교유橋蕤이풍李豊양강梁綱낙취樂就를 남겨 지키도록 했다. 조조가 도착하여 교유 등을 쳐부수고 모두 목을 베었다. 원술은 회수淮水를 건너 도망쳤고 조조는 허도로 돌아왔다.

 

조조가 무음舞陰에서 돌아왔을 때 남양과 장릉章陵 등 여러 현의 백성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장수에게 붙었다. 조조는 조홍을 파견해 그들을 공격했지만 전세가 불리했다. 조홍이 병사를 물리고 섭현涉縣에 주둔했는데, 장수와 유표에게 몇 차례 공격을 당했다.

 

| 겨울 11| 조조는 직접 남쪽에서부터 정벌하여 완성까지 갔다. 유표의 부장 등제鄧濟는 호양현을 근거지로 했다. 조조가 등제를 공격해 함락하고 그를 생포하자 호양현湖陽縣은 투항했다. 또 무음을 공격해 함락했다.

| 건안 3(198) 봄 정월 | 조조는 허도로 돌아와 처음으로 군사좨주軍師祭酒51)를 설치했다.

| 3| 조조가 장수를 양현에서 포위했다.52)

| 여름 5| 유표가 병사를 파견하여 장수를 구원하고 조조 군대의 퇴로를 막았다. 조조는 후퇴하려 했지만 장수의 군대가 뒤에서 추격해 들어왔고, 조조의 군대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워 진영을 연결하여 조금씩 나아갔다. 조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적이 우리를 추격하고 있다. 하루에 몇 리밖에 행군할 수 없지만, 예상해보건대 안중현安衆縣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를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안중현에 도착하니 장수가 유표의 병사와 합류하여 요충지를 지키고 있어 조조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조는 한밤중에 요충지에 굴을 파서 지하도를 만들고 치중(輜重, 군수물자)을 전부 운반한 다음, 기습할 군사를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적은 조조가 이미 도망갔다고 생각하고는 군사를 모두 풀어 추격했다. 조조가 매복해두었던 기습병과 보병, 기병을 풀어서 협공하니 장수를 크게 이겼다.

 

| 가을 7| 조조가 허도로 돌아왔다. 순욱이 조조에게 물었다.

 

이전에 적군이 반드시 패배할 것을 미리 헤아린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조조가 대답했다.

 

적이 우리 군대가 돌아가는 길을 막아 사지死地에 몰아넣고 싸웠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할 줄 알았던 것이오.”

 

여포는 다시 원술을 도와 고순高順에게 명하여 유비를 공격하도록 했다. 조조는 하후돈을 파견하여 유비를 구원하려 했지만, 형세가 불리했으므로 유비는 고순에게 패했다.

 

| 9| 조조는 여포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갔다.

| 겨울 10| 팽성彭城의 군사와 백성을 죽이고, 재상 후해侯諧를 사로잡았다. 조조가 하비성까지 진군하자 여포는 직접 기병을 이끌고 나와 역습했다. 조조는 여포를 크게 무찌르고, 용장 성렴成廉을 사로잡았다. 하비성 아래까지 추격하자 여포는 두려워 항복하려 했으나, 진궁 등이 여포의 생각을 막고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성에서 나가 싸우도록 권했다. 싸움에서 다시금 패한 여포가 성안으로 돌아가 굳게 지켰으므로, 조조가 성을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했다. 그때 계속된 싸움으로 조조의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돌아가려 했지만, 순유荀攸와 곽가郭嘉의 계책을 받아들여 사수泗水와 기수沂水의 둑을 무너뜨려 물이 성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한 달 남짓 후 여포의 부장 송헌宋憲과 위속魏續 등이 진궁을 사로잡고 성을 바치며 투항하자, 조조는 여포와 진궁을 생포해 모두 죽였다.

 

태산군의 장패臧覇손관孫觀오돈吳敦윤례尹禮창희昌豨는 각각 도당을 모았다. 여포가 유비를 공격했을 때 장패 등은 전부 여포에게 귀속되었다. 여포가 싸움에서 패하자 조조는 장패 등을 포로로 잡았지만, 관대하게 대해 청주와 서주의 해안 지대를 나누어 맡겼으며, 낭야동해東海북해北海의 일부를 떼어서 성양군城陽郡이성군利城郡창려군昌慮郡을 만들었다.

 

예전에 조조가 연주 자사로 있을 때 동평 사람 필심畢諶을 별가別駕53)로 임명한 적이 있다. 장막이 모반을 일으키고 필심의 어머니와 동생, 아내를 위협했다.

 

조조는 그를 떠나보내면서 말했다.

 

그대의 늙은 어머니가 저쪽에 있으니 가도 좋소.”

 

필심이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다른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자, 조조는 그를 칭찬하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필심은 자리에서 물러나온 후 곧장 장막에게 도망쳤다. 여포가 패했을 때 필심도 생포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필심을 걱정했지만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어찌 자기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겠는가? 그는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고는 곧 필심을 노국 재상으로 임명했다.

 

| 건안 4(199) 2| 조조는 창읍昌邑에 이르렀다. 장양張楊54)의 부장 양추楊醜가 장양을 죽이고, 수고는 또 양추를 죽여 그 부대를 이끌고 원소 밑에 들어가 사견射犬에 주둔했다.

| 여름 4| 조조는 황하까지 진군했으며, 사환史渙과 조인曹仁에게 황하를 건너 수고를 공격하도록 했다. 수고는 장양의 옛 장사長史55)였던 설홍薛洪과 하내 태수 무상繆尙으로 하여금 남아 지키도록 하고, 자기는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원소를 접대하며 구원을 요청했지만, 사환조인과 견성에서 부딪쳤다. 서로 싸워 사환과 조인은 수고를 크게 무찌르고 목을 베었다. 조조는 황하를 건너 사견을 포위했다. 설홍과 무상이 군대를 이끌고 투항했으므로 조조는 그들을 열후列侯56)에 봉하고 군사를 돌려 오창으로 돌아왔다. 위종魏鍾을 하내 태수로 임명하여 황하 이북의 일을 맡겼다.

 

예전에 조조는 위종을 효렴으로 천거했다.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조조는 말했다.

 

위종만은 나를 모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종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조는 노여워하며 말했다.

 

위종! 남쪽의 월로 달아나거나 북쪽의 호로 달아나지 않는 한, 나는 결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즉시 사견을 공격해 함락한 후 위종을 사로잡은 조조가 말했다.

 

오직 그의 재주를 살 뿐이다.”

 

그러고는 포박을 풀어주고 기용했다.

 

이때 원소는 벌써 공손찬과 군사를 합쳐 사주(四州, 황하 이북의 청주·기주·유주·병주)의 땅을 갖고 10수만 명의 군사도 거느리고서 허도를 공격하려 했다. 여러 장수가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자 조조가 말했다.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뜻은 크지만 지혜가 부족하오. 겉은 엄하지만 속은 겁이 많소. 시기하고 인정이 없으며 위엄이 적소. 병사가 비록 많다고는 하지만 적절히 지휘하지 못하고, 장수들은 교만하며 명령을 내릴 때도 일관성이 없소. 비록 토지가 넓고 양식이 풍부하다고 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때마침 우리에게 바쳐진 제물로 여겨지오.”

 

| 가을 8| 조조는 여양黎陽으로 하여금 군대를 나아가게 하고, 장패 등에게 청주로 들어가 제북해北海동안東安을 공격하게 했으며, 우금于禁을 황하변에 주둔시켰다.

| 9| 조조는 허도로 돌아오면서 군대를 분산하여 관도官渡를 지키도록 했다.

| 겨울 11|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항복하자 그를 열후에 봉했다.

| 12| 조조는 관도에 진을 쳤다.

 

원술은 진에서 패한 후로 그 세력이 점차 약해졌다. 원소의 아들 원담袁譚은 청주에서 사람을 보내어 원술을 영접하게 했다. 원술은 하비에서 북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조조가 유비와 주령朱靈을 보내 그를 잡아오게 했다. 때마침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정욱과 곽가는 조조가 유비를 출전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조조는 후회하고 유비를 추적하도록 했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유비가 동쪽으로 떠나기 전에 동승董承 등과 은밀히 모반을 도모했다. 하비에 이르러 서주 자사 차주車胄를 살해하고 병사를 일으켜 패 땅에 진을 쳤다. 조조는 유대와 왕충王忠을 파견하여 유비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여강 태수廬江太守 유훈劉勳57)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자 조조는 그를 열후에 봉했다.

 

| 건안 5(200) 봄 정월 | 동승 등의 음모가 누설되어 모두 사형되었다. 조조는 친히 동쪽으로 가서 유비를 정벌하려 했으나, 여러 장수가 모두 이렇게 말했다.

 

명공明公58)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쳐들어오려 하는데, 명공이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향하셨다가 만일 원소가 뒤에서 우리의 퇴로를 끊어버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조가 말했다.

 

유비는 사람됨이 호걸이오. 지금 공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훗날 근심이 될 것이오. 원소는 큰 뜻이 있지만 형세 판단이 느리므로 틀림없이 출동시키지 않을 것이오.”59)

 

곽가도 조조의 생각을 지지했다. 그래서 조조는 동쪽으로 가서 유비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부장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유비는 원소에게 도망쳤고, 조조는 그의 처자를 포로로 잡았다. 유비의 부장 관우關羽가 하비에 주둔해 있었는데, 조조가 다시 진군하여 공격하니 관우는 투항했다. 창희昌豨가 일찍이 반란을 일으키고 유비를 도운 적이 있으므로 조조는 또 창희도 공격하여 무찔렀다. 조조가 관도로 돌아올 때까지 원소는 끝내 군대를 일으키지 않았다.

 

| 2| 원소는 곽도郭圖순우경淳于瓊안량顔良을 파견해 백마白馬에 있는 동군 태수 유연劉延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병사를 이끌고 여양으로 가서 황하를 건너려고 했다.

| 여름 4| 조조는 북쪽으로 가서 유연을 구원했다. 순유가 조조에게 진언했다.

 

지금은 우리 병사의 수가 적어 원소를 대적할 수 없지만,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면 승산이 있습니다. 공이 연진延津에 도착한 후 병사들이 물을 건너 그 뒤를 공격할 것처럼 하면, 원소는 틀림없이 [병사들을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응전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보내 불시에 백마로 쳐들어가 적이 준비하지 않은 틈을 노리면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원소는 [조조의] 병사가 물을 건너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병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응전 태세를 갖추었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쉬지 않고 백마로 달려갔다. [백마로부터] 10여 리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안량은 크게 놀라 급히 맞서 싸웠다. 조조는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원소의 군대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의 포위망이 풀리자 수많은 백성이 황하 서쪽으로 옮겼다. 이때 원소는 황하를 건너 조조의 군사를 뒤쫓아 연진 남쪽까지 왔다. 조조는 병사를 거두어 남반南阪 아래에 진을 치고 성벽 위로 올라가 원소의 군사를 지켜보게 했다. 망을 보던 병사가 말했다.

 

대략 5~6백 명의 기병이 있습니다.”

 

잠시 후 또 보고했다.

 

기병의 수가 점점 늘고 있고 보병의 수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다시 보고할 필요 없다.”

 

그러고 나서 기병에게 말안장을 풀어 말을 놓아주라고 명령했다. 이때 백마에서 육로를 통해 치중이 운반되고 있었다. 장수들은 적의 기병이 많으므로 돌아가 진영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순유가 말했다.

 

이것은 적을 유인하는 것인데 어찌 철수한단 말인가!”

 

원소의 기병 부장 문추文醜와 유비가 5~6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뒤로 추격해왔다.

 

조조의 여러 장수가 또 말했다.

 

말을 타면 됩니다.”

 

조조가 말했다.

 

아직 때가 아니오.”

 

잠시 후, 추격해오는 기병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그중 어떤 자들은 치중을 차지하려고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조조가 말했다.

 

되었다.”

 

모두 말에 올랐다. 그때 기병의 수는 6백 명이 못 되었는데 공격하여 원소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문추를 베었다. 원소의 맹장인 안량과 문추가 두 번의 싸움으로 모두 사로잡히자 원소의 군대는 크게 동요했다. 조조는 군대를 관도로 돌려보냈다. 원소는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켰다. 관우는 이 틈을 타서 유비에게 도망쳤다.

 

| 8| 원소가 진영을 연결해 조금씩 전진하며 모래 언덕에 의지해 진을 치니 동서로 수십 리가 되었다. 조조 또한 진영을 나누어 대치했지만 불리한 싸움이었다.60)

 

당시 조조의 병사는 1만 명이 채 못 되었는데, 부상을 입은 자가 10분의 2 내지 3이나 되었다. 원소의 군대는 또다시 관도까지 진군하여 흙산과 지하도를 구축했다. 조조도 진영 안에서 똑같은 것을 만들어 대응했다. 원소가 조조의 진영 안으로 화살을 쏘았는데 마치 비가 내리는 듯해 진영 안에서 걸을 때도 방패로 몸을 가려야 했으므로 병사들 모두 매우 두려워했다. 그때 조조의 군량미가 적었으므로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허도로 돌아갈 방법을 상의했다. 순욱의 답장은 이러했다.

 

원소는 모든 병력을 관도에 집결하여 공과 승패를 겨루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공은 매우 약한 병력으로 지극히 강한 적군을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반드시 짓밟히게 되니, 지금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입니다. 더구나 원소는 평범한 일개 우두머리에 불과하므로 인재를 모아도 쓸 줄은 모릅니다. 공의 뛰어난 무용武勇과 밝은 지혜에 의지하고 천자의 이름을 받들어 원소를 토벌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조조는 순욱의 의견을 따랐다.

 

손책은 조조가 원소와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허도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출발하기도 전에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여남에서 항복한 적장 유벽 등은 반역하고 원소에게 호응하여 허도 근처를 공략했다. 원소는 유비에게 유벽을 돕게 했지만, 조조가 조인을 보내 유비를 무찔렀다. 유비가 달아나자 조조는 유벽의 진영을 쳐부수었다.

 

원소의 운곡거(運穀車, 곡물 운송 수레) 수천 대가 도착하니, 조조는 순유의 계책을 이용해 서황徐晃과 사환을 보내 길에서 공격하여 원소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그 수레를 모두 불살랐다. 조조는 원소와 몇 달 동안 대치하면서 여러 차례 싸움에서 적의 장수를 베었지만, 군사는 적고 양식은 다 떨어져갔으며 병사들은 피로에 지쳤다.

 

조조는 식량을 운반하는 병사에게 말했다

 

보름만 지나면 원소를 쳐부술 것이니, 다시는 그대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겠다.”

 

| 겨울 10| 원소는 또 치중을 내어 곡물을 운반하고 순우경 등 다섯 사람에게 1만여 명의 병사를 주어 호송하게 했다. 밤이 되자 그들은 원소 진영에서 북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에 묵었다. 원소의 신하 중에 재물을 탐하는 모사 허유가 있었는데, 원소가 그의 욕심을 채워주지 않았으므로 도망쳐 조조에게 투항하여 순우경 등을 공격하라고 권유했다. 조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의심했지만, 순유와 가후賈詡만은 조조에게 그 의견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조조는 조홍에게 남아 지키게 하고, 직접 5천 명의 보병과 기병을 지휘하여 한밤중에 출발해 날이 샐 무렵 도착했다. 순우경 등은 조조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진영 밖으로 나왔다. 조조가 순식간에 나아가 맹렬히 쳐들어가자 순우경은 후퇴하여 진영을 지켰으므로, 조조는 그들의 군영을 공격했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순우경을 구원하도록 했다. 조조의 좌우에서 이렇게 진언하는 자가 있었다.

 

적의 기병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병사를 분산시켜 적을 막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노하여 말했다.

 

적이 배후에 다다르면 다시 보고하라!”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워 순우경 등을 크게 무찌르고,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원소는 조조가 순우경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큰아들 원담에게 말했다.

 

그가 순우경 등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내가 그의 진영을 공격해 점거하면, 그는 정말로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원소는 장합張郃과 고람高覽을 보내 조홍을 공격했다. 장합 등은 순우경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조조에게 투항했다. 군세가 크게 약해졌으므로 원소와 원담은 군대를 버리고 도망쳐 황하를 건넜다. 조조는 그들을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했고, 그의 군수물자와 도서, 진귀한 보물 등을 전부 몰수하고 부하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가 몰수한 원소의 편지 가운데는 허도의 관원과 자신의 군대에 속한 인물이 원소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으나, 조조는 그것들을 전부 태워버렸다.61) 기주의 여러 군에서 성읍을 바치고 투항해오는 자가 매우 많았다.

 

예전에 한나라 환제 때에 황성黃星이 초나라와 송나라의 하늘 경계선에 나타났다. 요동군遼東郡 사람 은규殷馗는 천문에 밝아, 50년 후에 진인(眞人, 천자가 될 인물)이 양과 패사이의 지역에 출현하며 그 누구도 그 예봉에 대적할 수 없으리라고 예언했다. 이때가 그로부터 50년이 되는 해로서 조조가 원소를 무찔렀으니, 하늘 아래 조조에게 대적할 자가 없었다.

 

| 건안 6(201) 여름 4| 황하 강가에 병력을 보내 창정倉亭에 주둔한 원소의 군대를 공격했다. 원소는 기주로 돌아가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모으고 자기에게 반기를 들었던 여러 군현郡縣을 평정했다.

| 9| 조조는 허도로 돌아갔다. 조조에게 패하기 전 원소가 유비를 보내 여남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여남의 산적 공도共都 등은 유비에게 호응했다. 조조는 채양蔡揚을 파견하여 공도를 공격했지만 전세가 불리하여 패했다. 조조는 또 유비를 정벌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유비는 조조가 직접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쳐서 유표에게 투항했으며 공도 등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 건안 7(202) 봄 정월 | 조조는 초현에 군대를 주둔하고 영을 내렸다.

내가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천하의 폭력과 혼란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옛 땅(조조의 고향 초현)의 백성은 대부분 죽었고, 나라 안에서 온종일 걸어 다녀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비통하고 상심해 있다.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이래로, 죽어 후사가 없는 병사를 위해서는 그 친척을 찾아내어 뒤를 잇게 하고, 땅을 나누어주고, 관가에서는 농사짓는 소를 지급해주며, 학교를 세우고 교사를 두어 그 자식을 교육하도록 하라. 살아남은 병사를 위해서는 종묘를 세워 조상에게 제사 지내게 하라. 만일 죽은 자에게 영혼이 있어 이 일을 안다면 내가 죽은 후에라도 더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이어서 조조는 준의현浚儀縣으로 가서 수양거睢陽渠를 수리하고, 사자를 보내 태뢰太牢의 희생으로 교현에게 제사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관도로 진군했다.

 

| 여름 5| 원소는 싸움에서 진 후로 병이 나서 피를 토하다가 죽었다. 작은아들 원상(袁尙, 원소의 삼남)이 직위를 이었고 원담은 스스로 거기장군이라 부르며 여양에 주둔했다.

| 가을 9| 조조는 원담과 원상을 정벌하려고 여러 차례 싸웠다. 그들은 싸움에서 패하자 병사를 물리고 여양을 지키는 데만 전념했다.

| 건안 8(203) 3| 여양의 외성外城을 공격하자 원담과 원상은 성 밖으로 나와 싸웠다. 조조가 크게 무찌르자, 그들은 밤을 틈타 달아났다.

| 여름 4| 업성鄴城으로 진군했다.

| 5| 허도로 돌아왔지만, 가신賈信을 여양에 남겨 군대를 주둔시켰다.

| 25| 영을 내렸다.

 

사마법司馬法62)장군은 패하여 퇴각한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그래서 조괄趙括63)의 어머니는 조괄이 싸움에 패한 것 때문에 자신까지 벌하진 말라고 빌었던 것이다. 이것은 옛 장군들은 밖에서 싸움에 지면 안으로 집안 식구 모두가 벌을 받았다는 뜻이다. 내가 장수를 파견하여 출정시킨 이래 공로만 포상하고 죄를 처벌하지 않은 것은 국법에 들어맞지 않는다. 지금 여러 장수에게 출정을 명하니, 싸움에 패한 자는 벌을 받고 나라에 손실을 가져오는 자는 관직과 작위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 가을 7| 영을 내렸다.

전란 이래 벌써 15년이 지났는데 젊은이들이 인의예양仁義禮讓의 기풍을 접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매우 슬프게 생각해왔다. 지금 각 군과 국에 명하노니 문학文學을 가르치고, 5백 호 이상의 현에는 교관校官을 설치하고, (, 현 아래 행정단위)의 우수한 인재를 뽑아 가르치도록 하라. 이리 하면 아마도 선왕의 도가 없어지는 일은 없을 터이니 천하에 이익이 될 것이다.

| 8| 조조는 유표를 정벌하고 서평西平에 주둔했다. 조조가 업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올 때, 원담과 원상은 기주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벌였다. 원상에게 패한 원담은 도망쳐서 평원현平原縣에서 방어했다. 원상이 재빨리 공격해오자 원담은 조조에게 신비辛毗를 파견하여 항복하겠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장수들은 모두 의심했지만 순유는 조조에게 그 청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64) 조조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 겨울 10| 여양에 도착했다. 아들 조정曹整을 원담의 딸과 결혼시켰다.65) 원상은 조조가 북쪽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평원현平原縣의 포위를 풀고 업성으로 돌아갔다. 동평 사람 여광呂曠과 여상呂翔이 원상에 반기를 들고 양평陽平에 주둔하다가 병사들을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해왔으므로 그들을 열후로 봉했다.66)

| 건안 9(204) 봄 정월 | 황하를 건너 기수(淇水, 황하 북쪽의 지류)의 물을 막아 백구(白溝, 운하 이름)로 흘러 들어가게 하여 양도(糧道, 식량 수송로)를 만들었다.

| 2| 원상이 또 원담을 공격하니, 소유蘇由와 심배審配를 남겨 업성을 지키게 했다. 조조가 원수洹水까지 진군하니 소유는 항복했다. 업성에 도착한 조조의 군사는 업성을 공격하면서 흙산을 쌓고 지하도를 팠다. 무안현武安縣의 장윤해尹楷가 모성毛城에 진을 치고 업성에서 상당上黨으로 통하는 양도를 지켰다.

| 여름 4| 조홍을 남겨 업성을 공격하게 하고, 조조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윤해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돌아왔다. 원상의 부장 저곡沮鵠이 한단邯鄲을 지켰지만 또다시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역양현易陽縣의 영한범韓範과 섭현의 장양지梁岐가 현을 바치고 투항해왔으므로 관내후關內侯67)의 작위를 내렸다.

| 5| 흙산과 지하도를 무너뜨리고 성 주위에 참호를 파고, 장수漳水를 터 성안으로 물이 들어가게 하니 성안에서 굶어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 가을 7| 원상이 업성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오자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주장했다.

 

저들은 본거지로 돌아가는 군사이므로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자발적으로 싸울 것이니 정면 대결을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원상이 큰길로부터 온다면 마땅히 피해야겠지만 서산西山을 따라 온다면 그들은 나에게 포로로 붙잡힐 것이다.”

 

원상은 과연 서산을 따라 왔으며 부수滏水 가까이 진을 쳤다. 원상은 한밤중에 병사를 보내 조조의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조조는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하여 원상의 군사를 무찔렀으며, 또 여세를 몰아 원상의 진영을 포위했다.

 

포위하기도 전에 원상은 겁을 먹고 예전 예주 자사 음기陰夔와 진림陳琳을 보내 항복했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포위망을 더욱 죄어가며 공격했다. 원상은 밤을 틈타 달아나 기산祁山을 굳게 지켰지만 조조 군의 추격을 당했다. 원상의 부장 마연馬延과 장의張顗 등이 전투를 하기도 전에 항복했으므로 그의 군대는 붕괴되었고 원상은 중산中山으로 달아났다. 조조 군은 원상의 치중을 전부 사로잡았다. 원상의 인수印綬와 절월節鉞을 손에 넣어 항복한 원상의 장수들을 시켜 가족들에게 보여주자, 성안의 사기는 완전히 무너지고 좌절되었다.

 

| 8| 심배의 조카 심영審榮이 한밤중에 자신이 지키던 성의 동쪽 문을 열어 조조의 병사들을 안으로 들였다. 심배는 조조의 군사를 맞아 싸웠지만 패했다. 조조가 심배를 생포하여 참수하자 업성은 평정되었다. 조조는 친히 원소의 묘에 가서 제사 지내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곡을 했다. 또 원소의 부인을 위로하고 그 집에 심부름꾼들과 보물을 돌려주고 각종 비단과 솜을 내렸으며 관에서 양식을 제공해주었다.

 

처음에 원소가 조조와 함께 병사를 일으켰을 때, 원소는 조조에게 물었다. “만일 이 일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어느 곳을 근거지로 삼을 수 있겠소?”

 

조조가 말했다.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원소가 대답했다. “남쪽으로는 황하에 의지하고 북쪽으로는 연과 대를 의지하여 융적戎狄과 세력을 합치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천하의 패권을 다투면 아마도 성공하지 않겠소?”

 

조조가 말했다. “천하에서 지혜롭고 용감한 인재들을 임용한 후 왕도로써 그들을 다스리면 반드시 가능할 것입니다.”

 

| 9| 영을 내렸다.

황하 이북은 원씨 가족이 일으킨 난리로 피해를 입었으므로 올해는 세금을 내지 않도록 한다. 그가 또 권세 있는 자들이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다스리는 법령을 무겁게 하자 백성이 기뻐했다.68)

 

천자가 조조에게 기주목을 겸하도록 하자 조조는 연주목의 자리를 사양하고 반납했다. 조조가 업성을 포위할 때 원담은 감릉현甘陵縣안평현安平縣발해국勃海國하간국河間國을 공략해 빼앗았다. 원상은 싸움에서 패하여 중산국中山國으로 돌아갔다. 원담이 또 원상을 공격하자 원상은 고안현故安縣으로 달아났다. 그리하여 원담은 원상의 군대를 병합했다.

 

조조는 원담에게 편지를 보내 약속을 어긴 것을 질책하고는 그와 사돈 관계를 끊어 원담의 딸을 돌려보낸 후에 진군했다. 원담은 두려워하며 평원현에서 물러나 남피현南皮縣을 지켰다.

 

| 12| 조조는 평원현으로 들어갔다. 부근의 여러 현을 되찾아 평정했다.

| 건안 10(205) 봄 정월 | 조조가 원담을 공격하여 그 군대를 격파하고69) 원담을 참수하며 그 처자식을 주살하자 기주는 평정되었다. 영을 내렸다.

 

원씨와 함께 나쁜 일을 한 자일지라도 [스스로 잘못을 고치고 새로] 시작할 것을 허락한다. 또 백성에게 명하여 사사로운 복수와 사치스러운 장례를 금했으며, 이를 어기는 자는 모두 법령에 따라 처리했다.

 

이달에 원희(袁熙, 원소의 차남)의 대장 초촉焦觸과 장남張南 등이 반란을 일으켜 원희와 원상을 공격하자, 원희와 원상은 삼군三郡의 오환족烏丸族에게 달아났다. 초촉 등이 현을 바치고 투항했으므로 조조는 이들을 열후로 봉했다. 이전에 원담을 토벌할 때 백성 중에서 얼음을 깨어 배가 지나가도록 하는 일을 하지 않고 도망간 자가 있었다. 이에 조조는 도망간 백성이 자수해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오래지 않아 도망간 백성 중에 군문으로 와 자수한 이가 있었는데, 조조가 그에게 말했다.

 

만약 너를 받아들이면 법을 어기는 셈이 되고, 만일 너를 죽이면 자수하여 죄를 시인한 사람을 죽이는 셈이 되니, 돌아가 깊숙한 곳에 몸을 숨겨 관리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하라.” 이 백성은 눈물을 흘리며 떠났지만 후에 결국 체포되었다.

 

| 여름 4| 흑산의 산적 장연張燕10만이 넘는 부하를 이끌고 투항했으므로 열후로 봉했다. 고안현 사람 조독趙犢과 곽노霍奴 등이 유주 자사幽州刺史와 탁군 태수涿郡太守를 죽였다. 삼군의 오환족이 광평현獷平縣에 있는 선우보鮮于輔를 공격했다.

| 가을 8| 조조가 이들을 정벌하여 조독 등을 베고 곧이어 노하潞河를 건너가 광평현을 구원하자 오환족은 재빨리 변경으로 달아났다.

| 9| 조조는 영을 내렸다.

 

사사로이 당파를 이루어 서로 결탁하는 것은 고대의 성인(공자)이 몹시 싫어했던 일이다. 듣자니 기주의 풍속은 아버지와 아들도 당파를 달리하여 서로 명예를 훼손하며 비방한다고 한다. 옛날에 직불의直不疑는 형이 없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가 형수와 사통한다고 말했고, 제오백어第五伯魚가 세 번 모두 고아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가 장인을 구타한다고 말했으며, 왕봉王鳳이 권력을 휘둘렀는데도 곡영谷永은 그가 주나라 신백申伯보다 충성스럽다고 말했고, 왕상王商이 충성스러운 의론을 폈는데도 장광張匡은 그를 정도正道를 왜곡시키는 사람이라 했다. 이것은 모두 흰 것을 검다고 하고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기만하는 것이다. 나는 사회의 풍속을 가지런히 정돈하려고 하는데, 위의 네 가지 폐단이 없어지지 않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한다.

 

| 겨울 10| 조조가 업성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원소는 외조카 고간高幹을 보내 병주목幷州牧을 겸임하게 했다. 조조가 업성을 함락시킬 때 고간은 투항하여 곧 병주 자사에 임명되었다. 고간은 조조가 오환족을 토벌한다는 것을 듣고 병주를 들어 반란을 일으키고, 상당 태수를 위협해 병사를 풀어 호관구壺關口를 지키게 했다. 조조가 낙진樂進과 이전李典을 보내 그를 공격하자, 고간은 돌아와 호관성을 지켰다.

 

| 건안 11(206) 봄 정월 | 조조가 고간을 정벌하러 갔다. 고간은 이 소식을 듣고 별장別將을 남겨 성을 수비하도록 하고, 흉노족... “미리 읽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