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리더 전형인가? 도둑떼 두목인가? 송강 최측근 심복은 누구인가?

一字師 202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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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전형인가? 도둑떼 두목인가? 송강 최측근 심복은 누구인가?

 

 

: 노검리(盧劍利)

표자두 임충(林沖, 천웅성, 6)이 백의수사 왕륜(王倫, 양산의 제1대 천왕)과 싸운 이후, 탁탑천왕 조개(晁蓋)는 임충, 지다성 오용(吳用, 천기성, 3)등의 지지하에, 양산박의 제2대 천왕이 된다. 그러나, 조개가 사문공의 독화살에 목숨을 잃은 후에, 양산의 두목은 산동의 급시우 송강(宋江, 천괴성, 1)이 된다.

 

심복은 중국의 여하한 조직에서도 존재하는 인맥현상이다. 그리고 특수환경하에서 특수문제를 해결하는 채널의 하나이다. 하나의 울타리에는 세 개의 말뚝, 사나이 한 명에는 도와주는 사람이 3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두목은 두목대로 어려운 점이 있고, 일부 특수한 일은 심복들이 처리해주어야 한다. 고대에는 모사(謀士), 사야(師爺)가 있었고, 현대에는 비서, 판공실주임, 연락원등등이 있다.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고나 할까.

 

송강이 양산박의 두목으로 있을 때 심복이 없을 수 없다. 그런하면, 송강을 제외한 107명의 양산박영웅들 중에서, 송강의 심복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누가 있을가?

 

당연히 양산의 여러 영웅들 중에서, 대부분은 송강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고, 대부분이 송강과 교분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심복은 좁은 범위여야 하고, 너무 많은 사람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골라내야 한다.

 

만일 전략을 짜고, 인재를 망라하며, 거시적인 측면에서 기획하고 조정하는 능력으로 따진다면, 양산에서 지다성 오용에 비견할 자가 없다. 입운룡 공손승(公孫勝, 천한성, 4)과 신기군사 주무(朱武, 지괴성 제37)는 비록 능력이 있지만, 송강을 대신하여 넓은 범위내에서 근심거리를 나누어 담당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모두 송강의 각종 일들을 직간접으로 기획하였으니, 송강의 심복으로 이들을 꼽지 않을 수는 없다. 위치나 역할이 특수하므로 이들은 제1그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전투를 하고 싸우는 것으로 강호에 이름을 날린 사람을 들자면, 대장중에서는 행자 무송(武松, 천상성 제14)이 책에서 정식으로 송강과 결의형제를 맺은 형제이다. 벽력화 진명(秦明, 천맹성 제7)은 송강이 거둔 첫번째 장수이다. 흑선풍 이규(천살성, 22)는 송강이 도산화해(刀山火海)로 들어가더라도 함께할 맹장이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송강의 심복이라 할 수 있으니, 2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정보를 전달하고, 곁에서 머무르는 사람을 든다면, 신행태보 대종(戴宗, 천속성, 20)이 양산의 총책임자이다. 소후 여방(呂方, 지좌성 제54), 새인귀 곽성(郭盛, 지우성 제55)은 송강의 곁을 따르고 있으니 빼서는 안된 인물들이다. 당연히 송강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제3그룹이다.

 

만일 친하기로 따진다면 철선자 송청(宋淸, 지준성 제76)이 송강의 친형제이다. 모두성 공명(孔明, 지창성, 62)과 모화성 공량(孔亮, 지광성, 63)은 송강의 제자이다. 이들 세 사람은 당연히 송강의 심복이다. 4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비록 이 4개 그룹에 속하지 않지만, 송강에 대한 영향력이 이들 4그룹이상인 경우가 있다. 심지어 송강의 제일심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소이광(小李廣) 화영(花榮, 천영성, 9)이다.

 

어찌하여 송강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4개그룹에서 이름을 찾을 수도 없는 화영이 송강의 제일심복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말하자면 아주 간단하다. 송강이 살인후에 갈 곳이 없던 송강을 집안으로 받아들여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화영이다(또 다른 한 사람은 소선풍 시진이다); 송강으로 하여금 도적이 되도록 권유하고 끝까지 그를 따른 사람도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화영이다; 송강에 최초의 무장세력을 준 사람도 화영이다; 송강이 자리에 없을 때 무리를 이끌고 양산으로 오른 사람도 역시 화영이다.

 

, 송강이 양산박의 두목자리에 오르는데는 화영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송강이 반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에 있어서는 화영이 핵심적인 추진자일 뿐아니라, 유일한 협조자이다. 오용, 공손승, 주무등의 역할은 송강이 양산에 가입한 이후의 일이다. 화영은 송강과 연원이 가장 깊은 인물이다. 이 점에서 다른 수호전의 영웅들은 비길 수가 없다.

 

여하한 조직도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흑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송강은 비록 강호에서 광범위하게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강호에서 행세하는데 송강에게는 두 가지 약점도 분명히 있었다: 하나는 은량(銀兩) 즉 돈이고 하나는 대오(隊伍), 즉 따르는 무리였다. 그에게는 집안재력이라는 것이 없었다. , 진정으로 반란을 일으키려면, 송강은 가장 기본적인 돈과 사람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것은 맨손으로 집안을 일으킨 사람들이 공동으로 부닥치는 문제이기는 하다.

 

먼저 자금을 얘기해보자. 비교하자면 송강의 부친은 지주계급이다. 좋은 밭도 있었고, 일꾼도 있었다. 작은 부자라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송강의 부친은 편안히 생활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반란을 일으키려면 턱도 없었다. 그래서 송강이 강호에서 처음으로 찾아들어간 곳이 바로 소선풍 시진(柴進, 천귀성, 10)의 집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조달이었다. 시진의 집에서 송강은 반년을 머문다. 시진과 계속 얘기를 나누다가 두 사람이 컨센서스를 달성하는데, 여기에는 시진의 자금제공약속이 포함된다. 그리고 나서야 송강이 비로소 청풍채로 화영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시 사람을 얘기해보자. 송강이 화영을 찾은 것은 한편으로는 확실히 화영이 여러번 서신을 보내어 송강에게 피난할 것을 권유한 것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송강도 확실히 화영의 힘을 빌어 최초의 무장세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필경, 화영은 청풍채의 부채주이고, 수중에 약간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발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송강의 이 노선은 아주 정확했다.

 

시진과 마찬가지로, 화영도 송강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특히 청풍채의 채주인 유고(劉高)가 송강을 체포하자, 화영은 앞뒤를 생각지 않고 송강을 구해주고, 자기의 병사를 이끌고 자기의 상사와 칼을 맞댄다. 직위를 잃는 것도 전혀 아쉬워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간뇌도지(肝腦塗地)라는 말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수호전의 영웅의 랭킹을 매길 때 화영이 제9위에 오른데 의문을 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송강과 화영의 관계내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전력을 다해서 송강을 쫓아온 것을 제외하고도 화영은 적극적으로 송강을 위하여 여러가지 일을 한다. 예를 들면, 진명에게 항복을 받아 수하로 끌어들여, 송강이 무장세력을 건립하는데 대한 믿음을 강화시킨다. 진명을 받아들인 후, 진명의 제자인 삼산 황신(지살성, 38)도 곧장 가담한다. 송강의 대오는 금방 화영 1명에서 3명의 대장(화영, 진명, 황신)3명의 보조장수(청풍산의 세 대왕 금모연 연순, 왜각호 왕호, 백면랑군 정천수)가 공동으로 지지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이 소규모의 대오는 심지어 도화산(타호장 이충, 소패왕 주통이 이끔)과 같은 산채에 도전할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송강은 어떻게 진명의 항복을 받아냈는가? 책에는 상세히 적어놓았다. 송강과 화영이 계책을 내서, 청풍산의 병력을 빌고, 화영의 궁술에 의지해서, 성동격서의 방법으로 진명의 부대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함정을 이용하여 진명을 생포한다. 그리고 진명이 청주에 가서 도살한 것처럼 꾸며서, 진명의 퇴로를 철저히 차단한다. 그리고나서 송강은 진명의 복속을 받아낸다. 중간에는 피비린내나는 도살도 있고, 암산도 있다. 송강이 나중에 영웅들을 끌어들이는 수법은 먼저 진명을 다루면서 성숙된 것이다. 그 안의 기본적인 틀에는 화영의 피와 땀이 섞여 있다.

 

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명이 무고한 백성을 살해한 것으로 위장하였으므로, 청주지부 모용복이 급한 나머지 진명의 일가를 살해한다. 심지어 진명의 처의 머리를 성벽에 걸어놓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진명은 처를 잃은 고통을 안고 송강의 부대에 들어온다. 그리하여, 송강, 화영이 중매를 서서, 화영은 친여동생을 진명과 연결시켜준다. 화영의 용모를 기준으로 추리해보면, 화영의 여동생도 분명히 미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철저히 진명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진명은 송강을 위하여 영웅스럽게 싸우는데, 누가 화영의 용심양고(用心良苦)를 이해할 것인가?

 

여기서 끝나지도 않는다. 나중에 공로에 따라 랭킹을 정할 때 화영은 제9위에 오른다. 매부인 진명은 제7위에 오른다. 이에 대하여 화영은 그저 웃어넘기고 만다. 송강에게 서열을 매기는데 있어서 고민하지 않도록 해준다.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경지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 하나의 일이 있다. 그런데, 이는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도대체 누가 조개를 살해하였는지에 대하여 필자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책에서는 증두시의 교사인 사문공이 쏜 화살에 조개가 맞아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사문공은 강호의 유명인물인데, 암전(暗箭, 몰래 쏘는 화살)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렇게 화살로 암살하는 것은 강호에서 멸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소문나면 강호에서 발붙이기 힘들다. 둘째, 조개를 맞춘 화살은 사문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이 곳에 은 삼백냥이 묻혀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문공이 그렇게 할 리가 없다. 만일 사문공이 몰래 조개를 기습하려 했다면,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셋째, 암전에 이름을 새겨두고, 게다가 독화살이라는 것은 너무나 상식에 어긋난다. 논리적으로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 넷째, 조개가 죽기 전에 송강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중에 누구든지 사문공을 붙잡으면 그를 천왕으로 삼으라고. 이전에 여러번 송강에게 천왕의 지위를 양보하려했던 상황에 비추어보면, 조개가 송강을 아주 신임해서 언제든지 천왕의 지위를 넘겨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죽기 전에 이렇게 이상한 유언을 남긴 것일까? 조개가 혼미한 상태에서 한 말이기 때문일까? 다섯째, 노준의가 나중에 사문공을 잡은 후에도 독화살에 관하여 심문을 하지 않고, 급히 그를 죽여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뒤로 어떻게 된 일인지 언급이 없다. 이치대로라면, 양산의 노영웅들 특히 임충같은 사람들은 독화살에 관하여 관심이 많았다. 임충은 아예 독화살을 조개의 신위 앞에 놓아두고, 나중에 조사할 때 증거로 삼겠다고까지 하였다. 아쉽게도 사문공을 붙잡은 것은 임충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 일을 이렇게 끝이 난다. 사실 임충이 사문공을 붙잡았다고 하더라도(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임충의 무공은 사문공보다 약간 약했다), 아마 이 일을 추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시간이 흘렀고, 이 일은 이미 더 이상 주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조사한다면 골치거리만 증가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상황하에서 누가 조개를 죽이고자 했을까? 첫째는 작자인 시내암일 것이다. 축가장을 세번 치고, 삼산이 다 모였는데, 책을 쓰는 입장에서 당연히 송강을 제 자리에 갖다 놓아야 했고, 노천왕을 물러나게 해야 했다. 둘째는 화영이다. 송강의 비서실장으로써, 화영은 고심을 해서 송강을 양산박의 두목으로 만들어야 했다. 목적을 위하여 그는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었다.

 

당연히 이 일은 화영이 양산박의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가능성이 컸다. 그는 백발백중의 궁술을 지니고 있고, 그 당시에 화살은 가장 유용한 공격수단이었다. 양산박에서 노()를 잘 쏘는 낭자 연청(천교성, 36)와 돌맹이 던지는데 대단한 물우전 장청(張淸, 16)은 아직 양산에 오지 않은 때였다.

 

당연히, 화영이 이 일을 하고자 하더라도 난점은 있다. 화영이 어디서 사문공의 화살을 구했을까? 시천이 훔쳤을까? 김대성과 소양이 공동으로 해냈을까? 더 이상은 얘기하지 않겠다. 어쨌든 음모였다.

 

중국 역사서인 <송사(宋史)>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회남 도적 송강(宋江)이 수도인 경사(京師) 동쪽 여러 고을을 약탈하자 해주 지주(知州) 장숙야(張叔夜)가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송나라 수도 개봉 동쪽에서 날뛰던 도적 송강을 해주 장관인 장숙야가 토벌했다는 짧은 문장이다.

 

하지만 여기서 파생된 민간 전승담(傳承談)은 해를 거듭하며 켜켜이 쌓여 마침내 <수호전(水滸傳)>이란 찬란한 금자탑을 이룬다. '수호(水滸)'란 물 가장자리, 즉 변두리를 말하는데 탄압받고 버림받은 인생들이 모여든 곳이란 뜻이다.

 

쌍도끼를 휘두르며 불문곡직하고 상대 머리통을 날리는 흑선풍(黑旋風). 불한당인 그에게 자초지종이나 논리 따윈 없다. 십자파 주막에서 행인들을 도살해 만두에 넣어 파는 채원자(菜園子)와 모야차(母夜叉). 이 부부는 스스로를 협객으로 자처한다. 임충(林沖)이나 양지(楊志)처럼 말단 무관출신들도 있으나 <수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처럼 대부분 무뢰배나 도박꾼, 조폭 아니면 보따리 장사치다.

 

<수호전>은 시내암(施耐庵)이 저자로 돼 있으나, 시장통에서 구연(口演)되던 민중설화를 정리한 민중문학이다. 폭압적인 전제정치 하에서 숨도 못 쉬던 백성들에게 하류인생들이 벌이는 복수 드라마만큼 강렬한 대리만족이 또 있었을까?

 

<수호전>은 장회(章回) 소설이다. 하나하나 스토리가 완결되면서, 말미에 "궁금하면 다음 편을 보시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송강은 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주인공 중 하나다. <송사>에 따르면 그는 실존인물이다. 그러나 <수호전>에 등장하는 송강은 이름만 빌렸을 뿐 사실상 창조된 캐릭터다. 70회 본()으로 이뤄진 '김성탄 수호전'에서 17회에 등장하는 그는 이야기를 연결하는 매개역할을 하면서 그 자신도 왕왕 핍박받는 당사자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108두령을 이끄는 대두목인 그가 시골 아전 출신이라는 점이다. <수호전>을 한국 영화로 만든다면 송강은 '이방(吏房)' 정도가 될 듯싶다. 창봉(槍棒)을 제법 다루기는 하나, 출신에서 드러나듯 완력은 별로다. 그렇다고 용모나 자태가 뛰어난 것도 아니다. 흑삼랑(黑三郞)으로 불릴 만큼 키가 작고 얼굴이 검다.

 

송강은 이른바 중국 민중들이 그들의 욕망을 투사해 창조한 전형(典型)이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를 중시한다.' 이 구절은 등장할 때부터 소설이 끝날 때까지 송강을 설명할 때면 반드시 붙는 말이다. 폭압에 시달리던 하층민들은 '신실한' 의를 구현하는 대장을 원한 것이다.

 

송강은 리더쉽에 대한 갈망도 캐릭터에 수용하고 있다. 유교문화권에서 리더란 개인적인 영웅성이나 독단성 대신 조화를 추구하며 부하들로부터 충성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역사적으론 삼국시대 유비나, 송나라 창업주인 조광윤이 그러하다. 송강은 개인적인 실력은 없지만, 동료와 부하를 항상 아끼는 이로 그려진다. 그래서 살성(殺星)으로 불리는 흑선풍도 송강에게는 고분고분하다.

 

후대에 충의(忠義)라는 말이 붙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수호전>은 도둑떼 이야기다. 온갖 부랑자들을 이끄는 두목이란 이가 마냥 의리만 따지며 인자할 순 없다. 풀어준 은혜를 배반한 유고 마누라나 자신을 모함한 황문병을 처치할 때 송강은 극도로 잔인해진다. "이 분을 풀지 않고 어찌 세상을 살리오"라며 부하들을 시켜 그들을 칼로 짓이긴다.

 

이 이중성은 <수호전>이 뼈대를 갖췄을 때부터 줄곧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수호전>이 지닌 문학성을 찬미하며 70회본을 널리 퍼뜨린 김성탄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다. "<수호전>의 내용은 대체로 무난하나, 송강을 극도로 미워하고 증오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개돼지도 송강의 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한을 품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작자의 이런 의도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송강이 지닌 다중적 캐릭터를 잘 이해하는 이들도 이 말엔 쉬이 공감하기 어려울 성 싶다. 김성탄은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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