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 두 얼굴 가진 모르핀 : 삼국연의는 아편인가 담배인가
글: 이중천(易中天)
삼국연의 드라마가 다시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 이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중국인들은 왜 삼국연의를 좋아할까? 어떤 사람은 권력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나관중의 <<삼국연의>>가 '정치계몽서'이다. 왜냐하면 그 책은 '유사이래 중국의 정치투쟁과 권력운용'에 대하여 '가장 상세하고 생동감있는 해석'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평가들을 만일 원저에서 슬쩍 덮어 감추려고 했지만, 독자들이 즐겁게 찾아내는 것들을 신판 티비드라마 <<삼국>>에서 확대재생산하여 중국인들을 다시 자극하고 있어, 우려할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확실히 중국인은 권력을 좋아하고, 권모술수를 좋아한다. 권력과 권모술수를 좋아하는 것은 난세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노우선생이 말한 것처럼, 난세가 되어야, 문명과 제도가 붕괴되어야, 권력은 정치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때만이, 권력투쟁은 첨예하고 복잡하여, 끝간데까지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삼국은 바로 이런 시대이다. 기껏해봐야 100년을 넘지않는 역사의 에피소드이지만, 문학예술작품에서 계속하여 등장하여, 찻집 술집에서 오랫동안 얘기되는 꺼리가 되었고, 식후에 차를 마시면서 얘기하면 피곤한 줄 모르는 화제가 되었다. 그 근본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우리가 '아편쟁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알아야 할 것은 권모와 술수는 근본이 마약이라는 것이다. 일단 권력이라는 이 아편대에 집게 되면 갈수록 중독이 되고만다. 결국은 사람이 귀신으로 바뀐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 귀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조조, 유비, 손권이 모두 그러하다. 그저 제갈량만이 달랐다. 그러나, 정파인 제갈량도 <<삼국연의>>에서는 '권모술수'를 쓰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금낭묘계'니 '삼기주유'니 마치 무슨 마약밀매업자같이 그려졌다. 단지 도덕적인 경향의 이유로 이런 권모술수가 '지혜'로 묘사되었고, 정정당당하게 숭상을 받았을 뿐이다. 이것은 드라마 <<잠복>>과 비슷하다. 비록 주제가는 '진정한 사랑은 영원하다' '진정한 충성은 영원하다'이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직장요령'을 얻고, '사무실정치'를 알고, 여칙성(잠복의 주인공)의 전술을 활용하게 된다. 중국인은 재주가 있는 것같다. 항상 권모와 지혜간에 서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마약의 독성이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는 이를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방법이 없다. 중국인들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건 처치곤란이다. 먼저, 권모술수라는 것은 문예작품에서 쓰지 않으려면 실제생활에서 없어야 한다. 문학예술은 실제생활을 반영한다. 못본척 하는 것은 거짓이다. 하물며, 생활의 곳곳에 이런 것이 있는데, 문학예술만 깨끗할 수 있겠는가? 그게 가능하겠는가? 가능하지 않을 뿐아니라, 성실하고 천진난만한 사람을 망치는 것이다. 그들의 면역능력과 방어기교를 익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일부러 나쁜 짓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삼국연의나 잠복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생활중에서 충분히 학습할 수 있다. 조금 듣기 싫은 말로 하자면, 생활이 진정한 살아있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대강당이다. 생활을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금지하지 못하고, 금지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권모술수를 쓰는 사람은 가지각색이기 때문이다. 그 수완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그 수완을 구경하려는 사람도 있다. 세계에 그렇게 많은 경찰드라마가 있지만, 보려는 사람은 수두룩하다. 그들이 모두 도적이 되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삼국연의나 삼국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모두 아편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물며, 우리에게 그런 도적이 될 마음이 없다고 해서, 그런 도적의 마음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도적이 되기는 어렵다. 권세가 없는 사람은 권모술수를 부릴 수도 없다.
당연히, 당신이 이런 극을 보기를 즐긴다면,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격조가 높지 못하다고 할 수는 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중국인의 국민성때문이다. 그 말에는 동의한다. 단지 일깨워주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 궁중정변과 다툼을 그린 극을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중국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당신은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보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어쨌든 권모술수극을 본다고 하여 위법한 것은 아니다. 권모술수극을 만드는 것은 언론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좀 더 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국민의 권리이다. 역사에 대한 액세스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상, 권모술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권력이 제한받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조, 유비, 손권의 문제점이다. 특히 그들의 만년의 문제점이다. 비교하여 말하자면, 그들의 권모와 술수는 오히려 '소아과'적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방어해야 하는 것은 먼저 권력의 남용이다. 다음으로 권모술수의 악용이다. 그 다음이 바로 일반 백성이 권모술수를 즐기는 것이다. 하물며 중국역사만 얘기하면, 특히 중국정치사의 경우에는 이것이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이다. 무대와 은막을 권모술수로 가득차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깨끗하게 하고 권모술수가 전혀 없게 할 필요는 없다.
결국, 권모와 술수와 권력투쟁은 은막으로 옮겨올 수 있다. 무대로 옮겨올 수 있다. 단지 조심하면 된다. 먼저 편극도 좋고, 감독도 좋다. 모두 '단정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어떻게 해야 '단정'한가.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제한받지 않는 권력'이 사람을 해치고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권모와 술수가 왜 나쁜지,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여기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상승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즐길 수도 감상할 수도 없다. 이것이 최저선이다. 최저선을 무너뜨리면,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독자와 관중에 대하여는 심리조정을 권하고 싶다. 무엇이 조정인가? 위는 '비판에 참가'하는 것이고, 아래는 '교재로 삼지않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가장 바람직한 것은 권모술수를 지능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극을 보는 것을 교과서를 보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진짜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극은 극이다. 재미는 있다. 주의할 것은 이것은 그냥 구경거리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편은 담배가 된다. 담배도 문제는 있다. 그러나 금연은 공공장소나 미성년자에게만 가능하다. 왜 그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체에 있어서, 왕왕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천사와 악마 두 얼굴 가진 모르핀
아편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역사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 사건은 중국에서 일어났다.
아편을 사용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명의 화타 이야기로 볼 수 있는데, 화타는 '마비산'이라는 마취약을 사용해 수없이 개복수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마비산'의 주요성분이 아편인지 다른 식물인지 정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서양에서는 먼 옛날부터 널리 이용된 아편이 중국에서는 꽤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은 것은 미스터리 하지만, 더 나아가 아편의 끔찍한 해악과 독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영국에 처음 차가 도입된 것은 17세기 초반의 일이다. 동양에서 들어온 이 진귀한 음료는 엄청난 열풍을 일으켰지만, 아열대에서 생산되는 차가 한랭한 유럽 기후에서는 잘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차는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의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영국은 천문학적 액수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방법을 마련해야 했는데, 당시 중국의 청 왕조는 식량·음료·의복·공예품 등 모든 면에서 전혀 부족한 것이 없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인도 벵갈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대량 생산해 수출하기로 결심한다. 담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아편에 불을 붙여 연기를 들이마시는 중국 맞춤 신상품을 개발했다. 하지만 다시 영국으로 유입되는 것은 엄격히 규제하는 등 그 수법은 기발하고 악랄하기 그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는 정부 고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아편의 포로가 됐다. 그로 인한 부작용과 해악이 극심해져 몇 번이나 강력한 대책을 새웠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편에 한번 맛을 들인 사람은 그 중독성에 열이면 열 충성스러운 단골이 됐다.
아편 무역 덕분에 영국이 전적으로 손해를 보던 무역수지의 판세도 완전히 뒤집혔다. 청왕조의 은이 끝없이 국외로 유출되며 급기야 국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그 상황에서 청의 관료였던 임칙서가 떨쳐 일어나 마약을 규제하는 강력한 정책을 시행한다. 밀수 단속 업무를 하며 영국 상인이 보유하고 있는 1400톤 이상의 아편을 모두 압수, 석탄과 소금물로 분해 처분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은 강경책으로 전환해 '아편전쟁(1839~1842년)'이 발발한다.
영국에게는 전혀 대의명분 없는 전쟁이었지만, 청의 입장에서는 명분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전력의 차이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근대 병기를 갖춘 영국군의 엄청난 기세에 눌려 청군은 전쟁 초반부터 바람 앞의 검불처럼 스러져갔다.
결국 청은 완패했고, 홍콩을 할양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각서에 울며 겨자 먹기로 서명해야 했다. 이어진 1856년 제2차 아편전쟁 등을 거쳐 청은 서구 열강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으로 전락해갔다.
세계 최강으로 여겨지던 청이 서구 열강에 완전히 항복한 사건은 아시아 전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만약 모르핀이 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아니 원자 하나만이라도 구조가 달랐다면 아시아의 역사는,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사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인가?”
식민지시기 한국인의 중국인식을 설명하는 데 최근 가장 빈번하게 활용되어 온 거점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와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였다. 경성제국대학 지나어학지나문학 강좌 교수였던 가라시마 다케시는 그가 보여준 중국현대문학에 대한 관심보다는 ‘악역’으로서의 성격이 부각되어 온 측면이 강하다.2 중국의 현실, 그리고 중국 현대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국을 철저한 타자로 사유함에 따라 보다 심화된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그것은 ‘태도로서의 문학’을 추구한 다케우치와의 극명한 대비로 제시된다. 가라시마, 그리고 제국대학의 중국인식이 경성제국대학 지나문학과라는 장치를 거쳐 조선인 내부에서 동요하고 균열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천진의 연구이며, 재조일본인이라는 삶의 조건에서 가라시마가 겪은 조선과 자신의 좌표 재설정을 다룬 것이 윤대석의 연구였다.3
그렇지만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하기 위하여 다케우치와 가라시마는 참조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시각일 수는 있어도, 본격적인 출발지점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판단이다. 첫째로, 식민지시기 한국인의 중국인식을 논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이 생산한 중국에 대한 수많은 언설들에 대한 수집·정리와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라시마 다케시가 경성제대의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할 수도있고, 다케우치가 보여준 치열한 자기반성과 아시아, 중국, 일본에 대한사유는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것으로 한국인의 중국인식과는 제한적인 연계성으로 존재한다. 둘째, 중국 고전문학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수행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케우치와 가라시마 공히 동시대 중국현대문학을 중시하였기에 중국고전문학은 그것에 대비되는 대상이자 국외자로 처리되어 잊혀지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양자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지적되는 ‘근대의 특권화’ 혹은 근대문학과 고전문학간의 격절 등의 문제에 닿아 있는 것이다. 근대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 동아시아 삼국을 관통하는 고전문학의 전통과 그것이 구성한 세계에 대한 탐구는 아직까지도 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는 영역이다.4
1세대 한국 중국문학연구자 정래동은 일찍이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나문학은 과거에 우리에게 외국문학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5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이는 한문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왔던 한국문학의 주류적인 경향을 말하는 것이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문학’이라고 한다면 곧 한문학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천태산인 김태준, 식민지시기에도 오히려 한문학의 재흥을 기대했던 무정 정만조 등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표기체계에 기반한 문학의 국적 문제가 불거지기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한문학은 칼로 베어내듯 명쾌하게 잘라낼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수천년 동안 한국문학의 재생산 구조에 깊이 유착되어 있었기에,6 이미 한국인의 언어와 사유의 많은 부분을 구성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주목되는 것이 한국인의 독자적 역사경험에 기반한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다. 민두기는 『시간과의 경쟁』(연세대 출판부, 2001), 『신언준 현대 중국 관계 논설선』(문학과지성사, 2000) 등을 발간하여 한국인의 중국인식 연구의 선편을 잡았다. 동아일보 특파원 신언준에 관심을 기울인 연구는 이후 가라시마 다케시를 개입시켜 한중관계가 보다 복잡한 한·중·일의 역학 속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홍석표의 연구로 계승되었다.7 개벽사 북경 특파원 이동곡의 중국론에 관심을 기울인 한기형의 연구도 특기할만 하다. 한기형은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동아시아 연대론’과 그 근거로서 동아시아의 ‘전통론’의 유교문명 전유시도와 실각 등을 살핀다. 그에 따르면 일본지식인이 내세운 유교문명의 동질성이 침략주의를 위한 수사법이었음이 탄로난 이후 한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사유는 보다 현실문제에 집중하는 형태로 바뀐다. 개벽사 특파원 이동곡은 북경에 거주하며 현실중국의 변화를 면밀하게 살피는 가운데, ‘지나’와 ‘동양’의 함정을 피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세계의 미래를 진지하게 성찰했다.8
또 다른 계열로 경성제국대학 지나문학과 출신 조선인들의 중국경험에 주목한 천진의 연구가 있다. 신언준, 이동곡이 저널리즘 차원으로 분류될 수 있다면, 경성제대 지나문학과의 중국경험은 제국 아카데미즘과의 관계 속에서, 곧 때로는 ‘제국 학지의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경성제대 지나문학과 강사 가라시마 다케시와 다케우치 요시미의 중국학, 곧 제국 일본의 중국학의 내부적 차이가 ‘지나인’에 대한 인식으로 드러나는 가운데 제3의, 조선인들의 분열적 경험들이 함께 배치된다.9 최근의 연구로, 이용범의 「김태준의 사상자원과 학술실천」의 3장은 경성제국대학 지나문학과 출신 김태준의 중국인식의 여러 층위를 제시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그에 따르면 김태준의 중국인식은 ① 전통 한문학, ② 경성제국대학의 ‘지나문학’, ③ 문학혁명과 중국 신문학에 근거한 미래에 대한 기대, ④ ‘혁명이 성공하지 못한(革命未成功)’ 암흑면과 하층민의 생활, ⑤ 문화유산 속 한국과 분리되지 않는 중국 등의 다층성을 지니고 있었다.10 이상과 같은 연구성과들은 이제 초기단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자료에 기반한 연구의 풍부한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다.11
연구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기 한국인의 중국인식과 관련된 자료는 아직 충분히 수습되지 못한 상황이다. 현 상황에서 연구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예시하기 위해 고심 끝에 선택된 자료가 경성제국대학 1회 졸업생 최창규가 『동아일보』에 1931년 8월 23일부터 10월 20일간 연재한 「장강만리」(총34회)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1920∼1930년대 일본에서는 다수의 중국기행문이 간행되었다.12 이러한 ‘기행문학’들은 다케우치 요시미가 “중국에 가기 전에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중국에 갔다 와서 써버린다(write)”고 비판했듯이, ‘여행 안내서’에 기반한 천편일률적인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다수의 유사한 형태의 기행문들, 곧 인지하고 있던 스트레오타입을 현지경험 이후에 문자화하는 방식이 유행하던 시점에 발간된 「장강만리」는 몇 가지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중국 여행기가 상류계층 여행자로서의 경험13 혹은 중국어를 하지 못해 방 안에서 나가지 못했다는 회고14 등 중국에 갔으되 중국인과는 제한적 교류를 행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반해 최창규는 중국인들 속에 섞여 생활하며 일정정도 이상의 중국어 회화와 필담을 통해 보다 심화된 소통을 수행한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중국 고전문학이 현상(現像)하는 방식이다. 영어권 화자의 경우 중국 고전문학에 대한 소양이 충분하지 못하기에 좀처럼 전면화되지 못하고,15 일본의 여행기라 할지라도 대개는 ‘여행 안내서’에 제시된 내용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최창규의 글에서 소환되는 중국 고전문학은 화석화된 고전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동시대 중국의 현실을 드러내거나 한국의 고전문학 전통으로 자꾸만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논문의 3장에서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그 외에도 김태준이 “黃海를 건너 저의들의 부르지즘을 들으라!”16는 선언과 함께 보여주었던 혁명에 추동되고 혁명을 이끌고자 하는 중국 인민들의 모습, 혁명에의 기대 등이 노출되고 있어 흥미롭다.
최창규의 텍스트는 연구사의 맥락에서 저널리즘의 한 계열과 아카데미즘의 한 계열이 중첩된 공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 논문의 시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중국 고전문학의 소양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장강만리」를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의 독자적인 역사경험에 기반한 중국, 중국과 긴밀하게 연결된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 범주에 대한 진지한 재인식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역내의 비대칭성에 주목하여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시공간” 속에서 다시 ‘동아시아의 근대’를 탐색하고자 하는 움직임 등과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하다.17
논문의 각 장 ‘아편과 민중’, ‘미끄러지는 고전문학들’, ‘영속혁명에의 기대’ 등은 연구사의 축적이 극히 미미한 가운데, 텍스트의 반복적인 독해를 통해 어렴풋하게 잡히는 실마리를 통해 계열화 시켜본 것으로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다. 2장에서는 민중 속에 깊게 자리잡은 아편이라는 소재를 통해 중국사회의 난맥상과, 동시에 최창규가 찾아낸 혁명에의 암시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3장은 고전문학작품의 탄생장소를 찾아간 그가 작품 속 ‘이상’과 현실중국의 낙차를 발견하며, 또 자꾸만 한국 고전문학 작품으로 ‘미끄러지게’ 되는 모습들을 관찰한다. 4장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을 말하기 위한 서술전략 속에서 역설적으로 관찰되는 그의 혁명에 대한 기대를 살핀다.
2. 아편과 민중
경성제국대학 지나문학과 1회 졸업생인 최창규에 대한 연구사적 조명은 많지 않다. 경성제국대학의 경제연구회에 참여하였다는 것,18 해방 후 서울대학교 중문과에 출강을 하거나,19 교육계에서 종사했던 것이 알려져 있다.20 그 외에 비교적 최근의 연구성과로, 지나문학과 3회인 김태준과 중국 궈모뤄[郭沫若]의 마르크스주의 역사서 『중국고대사회연구』를 함께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한 것들이 밝혀져 있다.21
경성제대 1회생의 졸업일자는 1929년 3월이다. 졸업이후의 행적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장강만리」에 기록된 상하이의 출발일자가 1930년 3월 20일, 그리고 그 전부터 중국에 건너와 “수삭(數朔)동안을 어물어물” 했다는 언급에 따르자면 최창규는 1930년 말∼1931년 초에 이르는 시기부터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글에서는 좀처럼 상하이 거주의 경험을 살펴보기 어려우나, 이 시기 상하이 경험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국제도시로서 자본주의의 또 다른 절정을 체현하는 가운데, 조계지 내부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계 각지의 사상가·활동가들이 모여드는 공간이자, 동아시아 지식인의 허브로 기능하기도 했던 우치야마 서점[內山書店] 등등. 그러한 ‘말해지지 않은’ 경험들이 그의 70여 일(3월 20일∼5월 29일)에 걸친 상하이로부터 쓰촨[四川]까지 대장정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최창규에 의하면 동기는 보다 명확하게 “일개 조선청년으로서 중국 오억 대중의 움직임을 실제로 한번 보자는”22 포부로 설명된다. 물론, 이 글의 초점은 민중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로 나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중국이라는 용어가 지칭할 수 있는 대상이 매우 넓은 범주로 산포되어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장강만리」에서 다루어진 다양하고 광범위한 대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주화해본 결과 도출된 것이 ‘아편과 민중’, ‘미끄러지는 고전문학들’, 그리고 ‘영속혁명에의 기대’라는 범박한 계열들이다. 각 계열들은 서로 깔끔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는 가운데 다른 대상의 전제, 혹은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영속혁명에의 기대’는 내외의 압박을 받는 민중들의 떨쳐 일어남을 기대하고 있으며, ‘미끄러지는 고전문학들’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익숙한 고전의 인문지리를 민중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와 접속시키며 민중의 삶, 혁명의 기대라는 양방향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다.
3월 21일 새벽 출항을 위해 전날 밤 미리 영국선적의 원저우[溫州]호에 오른 그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장면은 식염 밀수출 장면이었다. 이러한 글의 구성은 그의 여행기가 동시대 조선의 신문지면을 반분이상 차지하던 중국에 대한 정치사적 전변의 기사들,23 그리고 여전히 반복되던 사서삼경,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고전중국의 이미지들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별건곤』 등에 실렸던 흥미위주의 기사들에 가까운 소재이되, 직접 경험이라는 핍진성과 그것이 흥미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에 대한 관심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아편은 중국의 민중,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층민들의 삶 속에 매우 깊이 침투해있던 상황이었다. 첫 번째 아편전쟁으로부터 기산하면 거의 9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1931년에도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아편이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었다.
“나도 사람이닛가 이것 파라서 阿片도 먹어야 하고 담배도 먹어야 하고-”다시 한 배에 탄 自己 안해를 가릇치며
“-저것들도 밥을 먹어야 하지안소. 이것이 오늘 하로 終日 잡은것인데 그러케 밧고야 어듸 셈이되오”
한다. 江上에서 구물질로 歲月을 보내는 이 漁夫도 日常에 가장 必要한 것이 第一로 “阿片”이다. “일하는 者에게 阿片을 주라!” 이러한 “스로간”이 잇슬수 잇는지는 모르되 世上에는 이러한 “스로간”을 내세울수도 잇는 곳이 잇다고도 할 수 잇다고 하면 筆者를 責하실분이 게실가. 흰옷 닙은 勞動者와 農夫가 “일하는 者에게 막걸리를 주라!”고 부르짓는다하면 責하실 분이 몃분이나 게십닛가. 中國勞動者는 적어도 이 地方의 우리가 “막걸리”를 願하는 것보다도 阿片을 그 몃倍나 要求한다.24
심심하야 上陸하얏다 도라오는 길에 나루뱃사공이 “阿片먹으러 갓다오십닛가”한다. 우리나라 가트면 “藥酒 한잔 하시고 오십닛가”하는 셈이다.25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중국의 하층민, 그리고 한국의 하층민들이 겹쳐지는 가운데 중국의 노동자들은 밥보다도 아편을 앞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의 하층계급에게 음주가 있다면 중국에서는 아편이 그것으로 대체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 폐해는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조선과 중국을 겹쳐보는 그의 시선은 한중관계의 독특성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기역사적인 맥락에서 생성되어 온 문화적 공통성 이외에도,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중국의 정치사적 전변이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식민지로 신음하고 있는 동안 반(半) 식민지를 겪은 중국은 약소민족으로서 자신을 재발견했고, 그것은 조선과 중국이 겪고 있는 제국주의의 침탈을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지반이었다. 최창규는 「장강만리」 서술의 중간중간에 모호하게 계급적 측면으로 발전시킬 여지를 암시하며 틈이 날 때마다 은은히 환기시킨다.
嗜好品으로는 첫재로 阿片을 칠 수 밧게 업다. 하로에 銅錢 몃푼버리밧게 못하는 轎夫라도 이것 몃대 빨지 안코는 못겐띈다. 그 苦役을 하는 그들의 눈瞳子는 그들의 얼골빗은 地獄求景이나가면 어더볼 것을 예서보는가보다 하게 생각된다. (…중략…) 料理店엘가도 依例히 上座는 阿片 먹는 座席이다. 阿片에도 亦是 品質의 高下가 만허 이곳서는 雲南産인 南土(點土)가 第一 나흔便이오 다음이 西土인 陜西인바 川土인 四川産이 第一下品으로 돌니운다 한다. 阿片自體도 自體려니와 吸煙室에도 階級이 잇서 吸煙者의 階級을 딸하 層이만타.26
“지옥구경이나 가면” 볼 수 있을 것 같은 고역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눈동자는 아편으로 잠시나마 진정되나, 그것은 뒷부분의 계급묘사와 함께 결부되어 아편의 생산과 유통을 용인하는 사회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아편은 개인의 신체를 파괴하는 것, 곧 경제활동인구를 ‘소모’시킨다. 합법화된 판매를 통한 세수(稅收)의 확보, 다르게 말하면 국민의 건강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재정적 이익을 위해 그것을 방기하고 있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본주의적 계급갈등 심화의 여지를 해소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편의 유통을 통해 적발되는 중화민국 국가시스템의 문란은, 공산당의 영향력 확대를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장강을 거슬러 올라 쓰촨성 만현에27 도착한 배에 세관(海關)이 올라와 승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특정 품목에 대해서 과세(課稅)를 실시한다. 각 성(省)별로 독자적인 재정을 운영하고 있던 당시, 전국적인 과세행정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성들은 자신의 관할지역에 들어온 모든 이에게 세금을 징수했다. 상하이에서 출발한 배가 쓰촨성에 도달하기까지 통과 하게 되는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장시[江西],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각 성의 오중과세, 심지어 배가 머무르는 모든 장소에서 징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酷稅는 四川以外에 四十餘種의 稅金을 賦課하는 곳이잇고 또 十餘年後의 稅金을 豫賦하는 곳도 잇스며 게다 都大體 一國 안에서 가는 곳마다 稅金이니 關稅라는 것이 存在한 以上 그리 酷稅될 것도 업고 怪異할 것도 업다. 各省의 財政이 獨立하야 거의 一國家와 가튼 以上 何如튼 빠라먹을수가 업서서못하지, 아모럿케라도 주어부처노코 갈거먹을수가 잇는 限에는 徵收하는 것이다.28
자신이 사는 지역에 전기시설이 불완전하여 상하이에서 자가용 발전기 기계시설을 사서 돌아오던 허씨[何氏]는 관세에 더해 벌금까지 물게 되었다. “이러닛가 共産黨이 대고 생기지 안흘수가 잇나 도적놈들 가느티 罰金-”이라는 발언을 배치한 전략은 장면을 적절하게 마무리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준다. 최창규의 이러한 관찰은, 실제로 4절에서 다룰 ‘영속혁명에의 기대’로 보다 구체화되어가게 된다.
아편을 통해 본 중국의 민중, 그리고 중국 사회 시스템에 대한 관찰은 여행자로서의 관찰뿐만 아니라 중국인들과 같이 생활하며 대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져 간 것이었다. 선박 내 선실은 다인실이었고 최창규는 중국인들과 함께 먹고, 자고, 대화하며 그들에 대한 인식을 넓혀갔다. “萬縣서 釀酒業을 한다는 나히 三十二十歲 되어보이는 친구”의 자기자랑의 장광설을 들으며 짐 속의 고기 통조림 자랑만 하지 말고 좀 꺼내보지라고 생각하는 장면29 등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살아있는 현대 중국인을 그려주고 있으며, 여행기의 리얼리티를 극대화 하고 있다. 여산(廬山) 서현사(棲賢寺)에서 만난 한 스님과의 술자리 또한, 기존의 중국 여행기에서는 볼 수 없는 경험담이었다.
한盞술이 두盞술이 되고 한斤 사온 甁 저윽히 들기에 가벼워젓슬 때에는 多少內心之事가 醉中에 나오는 格으로 不滿이 나온다. 曰 和尙이라고 獨身生活할 必要가 어듸잇는냐 曰 술잔이나 할줄아는 사람이면 좀하기로서 어떠며 曰 이절에서 年收로 三百石을 하는데 바다가고 빼서가고 무러주고하면 百石도 채 못남는다 等等 그래도 百石이라도 남는 것은 아직 이 附近에는 水利組合이 안생기인 關係일것이며 帶妻하고 십흔 生覺이 좀잇는 것은 아직도 俗塵의 자릿자릿한맛을 잇지 못한 돌중인 所以인가.30
젊은 스님이 가진 육체적 욕망과 더불어, 절이라는 종교시설이 실상은 지주로서 지역사회와 경제적으로 관계맺고 있는 양상이 노출된다. 최창규는 또 다른 여행기인 「남중국탐기여행(南中國耽奇旅行)」(『동광』 30, 1932.1) 저장성[浙江省] 푸퉈산[普陀山]일대의 관음신앙에 기반한 이백여 대소 사찰을 방문하고 있다. 기복신앙으로서 대중으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모습들이 비판적으로 그려지는 가운데, “中國으로 하여금 오직 無益有害한 存在이다. 中國革命이 完成統一되는 날이면 普陀山의 存在는 抹消될 것이다”31며 중국의 미래를 위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통종교의 세속화를 바라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에 의해 종교의 지배권력에 부역해 온 과거는 엄혹하게 비판받았고, 또 사회의 현상유지에 이바지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다. 최창규는 그것을 ‘미신의 아편’으로 비유한다.
迷信의 “阿片”은 “업는 大衆”뿐만아니라 잇는 一群에게 더욱 甚하다. 올나오면 본 寺刹 廟宇가 거의 軍營이나 警察官廳으로 實用化되엇슴에 反하야 예서는 새로히 大刹이 新築되며 古佛이 燦爛한 金衣를 다시닙으며 數十萬金의 舍利塔이 建設된다.32
아편은 중국사회를 중층적으로, 또 입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삼민주의를 내세운 국민당 정부는 민권, 민주, 민생에 있어 혁명적인 변화를 제시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청에서 중화민국으로 넘어가면서 지방분권적인 수탈은 더 악화되었다. 다수의 하층민들에게 제국주의의 침탈은 서양제국주의자의 얼굴이 아니라, 아편의 유통이 유지되는 것처럼 구사회의 지속이라는 형태로 간접적으로 다가왔다. 여행자이면서도 중국인과 함께 생활하고, 또 대화를 통한 소통을 통해, 최창규는 ‘지나’가 아닌 ‘중국’의 모습을 관찰해내고 있었다.
3. 미끄러지는 고전문학들
최창규는 「장강만리」의 서두에서 오억 중국 대중의 움직임을 직접 보고 싶다는 것과 동시에, “一個中國文學徒인 나로서 古代中國文學的 遺跡에 눈에 띄우는대로 興味的一瞥을 던지자는 것”을 또 하나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중국 고전문학기행이라고 할 만한 여행의 또 다른 성격은, 동아일보라는 저널리즘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흥미가 돋는 지점이었음이 분명하다. ‘조선적인 것’이라는 테마가 높은 상품성과 동시에 위험성을 지녔다면, 중국의 고전문학은 상품성은 약간 떨어지더라도 위험성 자체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장강의 여로는 고전과 현실이 중첩된 공간으로 다시 현상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여행기’나 ‘안내서’에 의존한 여타의 여행기33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중국인식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그는 역사적 장소에 도달하여 전고(典故)를 소환하면서도, 결코 순수한 전고만이 아닌 현실 중국과 결부된, 혹은 한국의 문학전통과의 결합, 그리고 혁명에의 암시를 함께 배치하고 있다.
황학루와 악양루에 대한 서술이 대표적이다.
漢陽을 바래다보는 景致가 더욱조타. 이 景致만은 黃鶴一去不復返이라도 古今이 不變할 것이다. 樓臺는 이미 祝融의 禍를 當한지 오래엿스며 그 자리에 只今은 煉瓦製에 時計까지부튼 洋風樓臺로 變하얏는데 樓臺內部는 全部飮食店 寫眞館 觀相匠이로 차고마럿다. 아모리 景致는 조치만은 이꼴을 보고야 登仙한 費文禪가 다시야 黃鶴을 타고와서 놀고갈理가 萬無하다. 그러나 이것도 現代中國의 한가지 “프로필”이라할수잇다. 寫眞館에서 요전타기 前의 黃鶴樓寫眞을 사서듸러다보니 人世의 變遷의 넘어도 甚한 恨을 禁치 못하겟다.37
별다른 설명없이 배치되는 당시(唐詩)는, 그것이 당대(當代)까지도 설명없이 배치되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두 수의 한시와 그것이 노래한 황학루의 경치를 직접 목도하는 것은 일반적인 역사문화 기행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창규는 고전문학과 풍경의 세계에서 내러티브를 완결시키지 않는다. 불타버린 누대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서양풍의 건물에 ‘틈입한’ 음식점, 사진관, 관상쟁이로 인해 고전문학의 고아한 풍광은 순식간에 어그러진다. 그가 “현대 중국의 ‘프로필’”이라고 명명한 이 장면은 어쩌면 위대한 과거 문명의 빛을 잃고 몰락해버린 현재의 ‘지나’를 현시하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 ‘지나’라는 용어가 설득력을 지니고 광범위하게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상당한 수준의 현실근거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데에 있었다. 그것은 다카하시 도오루의 『조선인』 등에 쓰인 ‘민족성’론과 유사하게 일부를 곧바로 전체로 치환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2절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장면은 중층적이고 입체적인 여러 가지 중국 이미지 중의 하나인 것으로, 여행기 전반에 놓인 다른 장면들과 함께 더 큰 총체를 구성한다.
고전문학 세계와 현대중국의 낙차는, 악양루에서도 발견된다.
여페는 左右로 寫眞館이 버틔여잇고 二層樓에는 老子님을 모시어서 岳陽樓가 老關廟가 되어잇스며 얼크러진 기와장 터진바람벽 문어진담 於是乎重修期成會가 成立될 理由가 넘고넘는다. 그러나 會牌만히 어지간이 꺼매진품을 보니 엇재 얼는 重修工事가 着手될 것 갓지도 아니하다.
“昔聞洞庭湖”한 筆者가 “今上岳陽樓하니” 果然 “吳楚東南圻”38 이다.39
관광지인 두 누대 이외에도 중국의 도처는 민국혁명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증국번(曾國藩)의 사당은 공안국(公安局)이 되어 있었고, 가의(賈誼)의 고택은 파출소가 되어 있었다.40 소동파(蘇東坡)의 비파정(琵琶亭)은 정거장 창고로, 백거이(白居易)의 『비파행(琵琶行)』의 무대가 되었던 강가는 일청기선회사(日淸汽船會社)의 부두가 되어있었다.41 고전문학의 세계를 재확인하려는 시선은, 오히려 현대중국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중국을 묘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른 한편, 고전문학을 찾으려던 시선은 무의식중에 중국이 아닌 조선으로 향한다. 그것은 중국고전문학과 한국고전문학의 이제는 서로 뒤엉켜 잘 분리되지 않는 뿌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항우가 최후를 맞이한 오강(烏江)에 이르러 최창규는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를 인용한다.
“史記에 눈이젓고 楚漢歌에 귀가저즌 우리”의 시조는, 한문학 소양이 작품의 구성에 있어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적벽을 지나며 『삼국지연의』와 『적벽부』를 자연스레 연상하고, “赤壁을그저가랴 蘇東坡노든 風月 依舊하야잇다만은 曹孟德一世之雄 于今에 安在哉오”43 같은 시조를 떠올리는 장면이야말로, (중국)고전문학이 한국문학에 있어서 차지하고 있는 지분, 아니 그 불가분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시조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에 새롭게 발흥하게 된 판소리와 한글소설에서도 그러한 관계는 여지없이 확인된다. 쓰촨성 윈양현[雲陽縣]을 지나며 최창규는 『삼국지연의』의 장비를 떠올린다.44
적벽부“對岸山中服에는 “義釋嚴顔”하며 “御使丈母月梅의 응덩이에 닷칠 念慮가 잇섯든만큼 배는 크되” “性은 急하야 門박게서 칼뽑아들고 草廬로 뛰여들어갈 번땍한” 翼德張飛를 모신 桓侯廟가 잇다.45
능수능란한 명창의 사설, 혹은 소설가의 손 아래에서 유비의 입촉(入蜀)과 「춘향전」의 월매, 그리고 삼고초려의 화소가 현란하게 갈마들며, 이 모든 이야기를 아는 사람에게 지적 즐거움을 제공한다. 「심청전」도 또 하나의 좋은 사례였다.
반듯이 눈을 뜨고 지나처야겟다고 생각한 汨羅水는 午前 다섯 時 아직 咫尺이 희미한 黎明裡에 지나친다. 인당수로가는 沈淸이는 “汨羅水를 바라보니 屈三閭 魚腹忠魂 無量도하도든가”하고 불넛거니와 조금만 江이 더욱 어두운 中에 보이는만큼 저윽히, 쓸쓸하여 보인다.46
중국 고전문학의 발상지에서 자신의 고전문학 소양을 되새기는 가운데, 한문학이 국적을 심문받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중국 고전문학과 한국문학의 긴밀한 관계가 반복적으로 노출된다. 역사적 현장에서 고전문학을 다시 떠올리는 작업이 자꾸만 현실중국, 또 한국의 문학전통을 소환하는 가운데, 최창규의 시각은 점차 계급주의적 해석의 방향으로 인도된다.
이라고 한만큼 蜀道의 險難은 想像을 끗는바가 잇다. 짐을 지고 가다가는 수이고 가다가는 주저안는 步行客들의 辛苦는 말할 餘地가 업다. “難於上靑天” 이라는 形容은 飛行機가 이 峻嶺斷崖를 數百尺眼下로 내려구버보며 지나치는 今日에도 妥當하며 汽船은커녕 木船도 못타고 步行하는 大衆에게는 飛行機航路가 된 蜀道 亦是 “難於上靑天”일 것이다. 勿論 太白 先生이 얼근하여 한 首를 플때에 一千二百餘年後의 今日之盛業이며 快事인 同時에 大慘劇인 이 現象까지 미루어 生覺하지는 못하얏겟지만 이것이 두가지 意味에서 今日까지 妥當을 갓게 되는 것이 妙하다면 妙하고 奇하다면 奇하다.48
쓰촨성의 초입인 구당협(瞿唐峽)을 지나며 그는 이백의 「촉도난(蜀道難)」을 떠올린다. 촉으로 들어가는 길의 험난함이, 오늘날에는 계급적 분화로 인해 비행기나 기선을 타고 쉽게 지나가는 부류와,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하층계급으로 서로 다르게 적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서술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은 심화의 시작지점을 찾았지만 보다 더 구체화되지는 않는다. 중국사회에서는 아직 아편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고전문학에서 출발한 사유가 그 곳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른 중간단계들이 더 배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도처에서 어떠한 ‘가능성’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배 위에서 굴원의 고향인 귀주현(歸州縣, 오늘날의 秭归县)을 바라보면서 그는 굴원과 왕소군을 떠올리지만 정작 눈으로 보이는 것은 성벽에 쓰인 “打倒帝國主義”의 표어였다.49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은 양쯔강 일대에빼곡이 들어찬 열강들의 조계지와 매판자본, 군벌의 전횡으로 혼란한 중국의 가야 할 길이기도 했다. 백아절현의 고사가 전하는 백아대(伯牙臺)를 보고 내려오는 도중, 그는 민국혁명의 의총(義塚)들을 발견한다.
山南面은 全部古塚이다. 그 中에 “民國二年□月鄂軍義塚 黎元洪書”라는 墓碑를 세운 矩形의 荒塚이 여긔저긔 보인다. 革命에 피부린 義塚을 모다가 똑가티된 그 義塚을 一一히 듸러다보앗다 塚을 덥흔 靑草가 너머도 성긴 것은 무친勇士의 뜨거운 氣運으로 因하야 말나버린 所以는 안일터이지-? (…중략…) 길가마다 軍人과 警官이 들석들석한다. 戰爭이 始作되거나 또는 엊그제 戰爭을 격고난듯하다 戰爭에 시달니고 軍人에게 복다기고 남음이업는 市民은 長江의 물흐르듯이 悠悠하다. (…중략…) 모든 것이 破壞後 建設에 이르기까지의 半路程인 “락”時代中에 잇다.50
또 다시 군벌들 간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그는 보다 본질적인 변혁을 희구했고, 실제로 청조의 몰락을 이끌어 낸 민국혁명을 회상한다. 혁명을 위해 피뿌린 의총들을 하나하나씩 들여다보는 행위는 그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경의(敬意)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민국혁명의 의사들을 지금 소환하는 것은, 현실중국의 대변혁을 다시 한번 꿈꾸는 일이었다. “世界의 一切를 破壞하고, 世界의 一切를 建設한다”는 목소리가 막바지에 겹쳐지는 가운데, 그의 언설은 혁명에 대한 기대로 이행한다.
4. 영속혁명에의 기대51
식민지시기 조선 내부 지성사의 계보에서 보자면 최창규의 중국인식은 이동곡, 신언준 등으로 대표되는 중국 현지경험 저널리즘의 한 계열과, 경성제국대학 지나문학과로 요약되는 아카데미즘의 계열, 그리고 전통 한문학이 강한 중력을 발휘하는 복합공간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중 「장강만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첫 번째와 세 번째로, 제국대학 학지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것은 경성제국대학 지나문학과 커리큘럼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최창규가 재학중일 당시의 수업내용은 주로 강사 가라시마 다케시의 스승 시오노야 온[鹽谷溫]의 전문분야인 원곡(元曲)과 명대 소설 등의 속문학이었다.52 원·명(元明) 속문학에 대한 관심에는 애초에 현실중국은 극히 축소되어 있었고, 또 전통적인 문학범주인 시문(詩文)과도 거리가 있었기에 그것이 「장강만리」에 전면화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제국대학 아카데미즘의 ‘지배하는지(知)’이자 제국주의 학문으로서의 성격은 은연중 작동하고 있었으나, 최창규의 글 속에서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시 중국 인식의 계보로 넘어가보면, 최창규의 인식론적 기반이 한문학과 현실중국이었던 점은 1920년대 개벽사 특파원 이동곡을 떠올리게하는 한편, 차이점이 명확한 지점이 있다. 한문학에 대한 태도가 그것이다. 1920년대 개벽사는 전통의 재해석보다는 현실문제에 더욱 집중했는데,53 그것은 중국에 대한 시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한국이 공유하고 있는 한문학이라는 대상이 과거에 속한 것으로, ‘현실’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놓이게 됨에 따라 중국과 한국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사유하는데 있어서 과거의 문화유산은 고민의 범주에서 제외되고 말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문학을 치지도외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논의에 활용하는 것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양자의 중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시각은 혁명이라는 지점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1920년대 개벽사 특파원 이동곡은 중국의 당대사를 ‘만성적 혁명’의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것은 ‘지속되는 혁명’, 혹은 ‘완결되지 않는 혁명’을 의미했다. 그는 신해혁명, 신문화운동(5·4운동), 민중운동, 사회주의 혁명의 연쇄적인 경로를 예언했으며, 1930년대 현재 그것은 일정부분 실현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은 ‘만성적 혁명’의 도정에서 ‘5·4운동의 원만한 승리’와 ‘일층 더 나아가 최후의 해결’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자 계기로 제시되었다.54 최창규가 이동곡의 논리를 인지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민중의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고전문학의 아취(雅趣)를 해체시켜 나가며 그가 도달해 나간 지점에는 현실개벽을 위한 혁명에의 기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行政과 金融이 絶對 軍閥의 勢力下에 잇다. 敎育行政에 이르기까지 大劇場大料理店에 이르기까지 勢力과 金力이 모다 軍閥의 手中에서 弄絡되고 잇다. 主權의 軍閥의 掌握中에 잇는 重慶市의 文化施設은 資本主義 黎明期에 處하는 어수룩하기 짝이업는 現狀이다. 적어도 封建主義末路다. 資本主義黎明期에 介在한 重慶은 다른 모든 現代資本主義都市와 가튼 經路을 발버 發展될것이냐. 이것은 筆者는 否定한다.
激流가치미는 思潮의 大勢는 이 重慶市로 하야금 急轉直下의 形勢로 飛躍을 거듭하야 發展하는 中에 只今 바야흐로 숨싹을보인 大衆의 勢力은 이와 아울러 아니 이보다도 一層急한 速度로 膨脹하야 가장 單期間內에 다른 모든 都市와 竝行될것이라고 밋는다. 또 이에 밋치는 동안의 모든 事態의 勃發과 아울러 이러나는 軋轢과 鬪爭은 적지 아니한 敎訓을 우리에게 주는바가 잇슬 것을 斷定한다.55
최창규는 중국 자본주의를 “그 흔한 제3기는커녕 제1기를 겨우 들어슨 듯한”56 단계로 파악한다. 군벌이 전횡을 일삼는 가운데 그는 ‘격류가 치미는 사조의 대세’가 바야흐로 “숨싹을 보인 대중의 세력”을 각성시켜 그들이 주도하는 변화과정, 곧 알력과 투쟁을 거쳐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로 비약할 것을 기대한다. 표면적으로는 다른 도시와의 병행을 내세워 마치 경제발전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술전략의 이면에는 ‘사조’라는 용어선택과 더불어 ‘급전직하’, ‘비약’ 등을 통해 민중에 의한 혁명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다만 四川民衆이 어느때까지 이들 軍閥미테서 그 搾取와 劫奪을 甘受할는지 이것은 큰 疑問이다. (…중략…) 그러면 오직 軍閥을 업샐수잇는 者 오직 民衆이 잇슬뿐일가. 何如間 어느 때까지 이 軍閥이라는 것이 그대로 잇슬수가 업는것만이 事實이면 四川軍閥의 末路는 가장 興味잇는 事實일것이며 이消滅에 이르기까지의 民衆의 實踐 過程은 적지아니한 敎訓이 될 것이다. 또오직 우리에게 直接關係가업는 中國奧地에 蟄居하는 一群의 軍閥의 興亡이라하야 우리는 오직 興味眼으로만 對岸火視함에 끗칠것일가. 勿論 軍閥興亡 其自體는 우리에게 아모 關係가 업다. 그러나 四川五十萬民衆이 밟는바 實踐過程만은 우리의 一大關心事이라고 筆者는 밋는바이다.57
“군벌을 없앨 수 있는자 오직 민중만이 있을 뿐인가”라는 서술은 “세계대세의 필연적 결과인 민중의 급속적 각성”과 결부되며, 나아가 민중의 군벌을 없애 나가는 ‘실천과정’ 곧, 에둘러 말한 ‘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 이 표현은 조선의 민중에게도 “적지 아니한 교훈”이 될 수 있다. 검열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우리에게 아무 관계가 없다는 식의 선을 긋는 서술전략은 지속적으로 그 행간의 함의를 문면과는 배치되는 방향으로 강조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여기서 그가 말하는 민중의 각성은 비교적 모호한 방향성으로 독해될 수 있다. 그것은 현 민중의 상황과 목표로 하는 미래 간의 너무도 큰 간극 때문이다. 아편에 중독된 민중의 상황은 90년전과 큰 차이가 없는 가운데, 자본주의 발전단계의 초기단계에 이제야 진입하기 시작했다는 판단은 사회주의 혁명까지 너무도 많은 단계를 남겨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방향성은 여전히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의 수행주체로서 공산당을 가리키고 있었다.
공산당은 여로의 중간중간에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강안에 늘어선 “沒落帝國主義-云云의 長文으로부터 曰 擴大紅軍 打倒三民主義 等短句等等”58의 공산당의 표어들로부터 시작하여, 배의 항행을 저애(沮礙) 하거나 야간항행을 단념하게 하는 교전들,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군대의 선박 습격, 공산당원 200명이 잠입하였다는 풍설과 함께 내려진 계엄령, 후난[湖南]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언급 등은 보이지 않는 공산당을 서술 가능성의 한계 속에서 최대한 구체화하고 있었다. ‘볼 수 없는’ 혹은 ‘서술될 수 없는’ 공산당, 어쩌면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글의 저자는 다양한 간접적 서술방식을 취한다. 상하이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장시성[江西省]을 지나치며 그는 ‘공산군의 천하’ ‘毛澤東의 贛省’을 다룬다. 가치판단과 호의들을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그는 객관적 사실의 나열처럼 보이지만 공산당 정보의 점유율을 높이는 전략을 취한다.
全省이 赤化된지라 이 地域內의 누구 하나가 黨員이 아니며 軍人의 一分子가 아니리오만은 그 中 큼직큼직한 軍隊는 다음과 갓다.
질서정연한 군대의 대오가 구체적인 실감을 주는 숫자와 함께 결합하여 제시되고, 중국 공산당군은 그 존재감을 조선인들에게 과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것은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그대로 말할 수 없는 제약 속에서 구성된 최대치의 것으로, 혁명의 방향을 지시하되 혁명의 방향으로 이끄는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제약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은, 고 전문학과 유머러스한 서술과 더불어 「장강만리」 전체를 일관하고 있었다. 충칭의 한 고아원에서 그는 숨겨져 있던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只今은 單純한 意味에서 求하기 어려운 ‘新靑年’雜誌가 初號부터 가지런이 雜誌閱覽室 한복판에 꼬치어잇는 것을 본 나는 흘너나오는 微笑를 禁치 못하엿다.60
‘단순한 의미에서’ 구하기 어렵다는 말은 시일이 지나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지만, ‘단순한 의미’라는 말을 삽입하여 역으로 강조한 것은 『신청년』이 부르짖은 ‘신사조’와 사회변혁, 그리고 깊게 관여한 “중국의 ‘레닌’ 陳獨秀”61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 미래를 열어나갈 어린이들의 공간에 신문화운동을 주도한 『신청년』및 중국 공산당의 영수가 자리잡고 있기에 그는 ‘미소를 금치’ 못한다. “아이들을 구하라(救救孩子)”는 『광인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서술은 결국 오고 말 ‘그 날’, 혁명이라 해야 할지 해방이라 해야 할지 모를 그 언젠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강만리」는 장강을 중국의 정신적 중추신경이자, 물질적 화수분으로 정의하며 그 미래를 점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中樞神經으로서는 痲痹된 神經이며 ‘화수분’으로서는 저윽히 ‘客코’가 들엇”지만 ‘장강이 눈뜨는 날’, ‘장강이 짓는(起-인용자) 날’에는 중국을 분할하고 있는 “軍閥, 貪官汚吏의 酷歛, 奸商輩”, 조계지를 설치하고 중국을 수탈하는 서구 열강 등을 일소하고 “오직 물만히 흘으게 될 것”을 예언한다. 장강을 중국, 그리고 중국민중에 비유하고 있다. ‘그 날’이 오기까지는 “아직도 얼마 동안은 大小修羅場을 몃번 거듭나야만할 必然的 形勢”에 처해 있지만, “돗는 싹은 반드시 욱어지고야만다”62며 영속혁명의 끝에 오고야 말 희망적 미래를 예언한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중국을 사랑할 수 없는, 자신과 타자의 좁혀질수 없는 거리를 인정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나와 같이 슬픔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지나인’이라는 표현으로 보편적 인류애의 차원에서 타자성을 끌어안는 방식으로 보다 한 걸음 중국에 다가갔다.
한국인은, 식민지시기 조선인은, 아니 최창규는 어떠했는가? 한중관계는 일중관계와는 또 다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손쉽게 중국의 영향력으로만 해석되어 온 매우 높은 수준의 상동성(相同性) 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유지할 수 있었던 중국과의 거리는 중국에 대한 상대화를 비교적 용이하게 만들었다.64 반면, 한국의 경우 중국과의 분리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다. 청(淸)에 대한 거리두기는 황명(皇明)이라는 대립항과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식민지 시기의 분리는 기본적으로 외부의 물리적 강제에 의한 것으로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사유는 충분히 전개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지나’와 ‘동양’, 그리고 중국이라는 범주는 충분히 깊게 고민되지 못했다. ‘서구’라는 대타자의 시선을 내재화한 재귀적 오리엔탈리즘(Reflexive Orientalism)의 재생산,65 그리고 동아시아 담론의 유행기에도 민족주의가 사유의 기반이 되어 일본과 중국이라는 ‘제국 그 사이의 한국’을 동아시아에서 대면시키지 않고, 동아시아론을 지렛대로 세계를 논하고자 했던 상황66 등은 분명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안타까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로 식민지시기와 냉전이라는 단절의 기간을 공백으로 둔 채, 고전문학에 대한 지식과 한중수교 이후 정치·경제적 존재가 접합된 기묘한 중국의 이미지는 우리의 앞에 거대한 연구과제가 남겨져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장강만리」에 대한 분석은 그러한 과제를 풀어나가는 한 가지 방식을 제안하는 작업이었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민중의 모습과, 고전문학에 기반하여 생산된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현실중국, 한국의 문학전통과 분리되기 어려운 지점들, 마지막으로 식민지 민중들에게도 절실했을 혁명에의 기대 등이 텍스트 분석을 통해 확인되었다. 「장강만리」는 아직도 확인되지 못한 수많은 관련 텍스트 중의 일부이다. 이 논문을 통해서 실시된 초보적인 분석들은 추후 더 많은 텍스트의 집중적인 수집·정리, 독서와 연구 등을 통해 보다 정교화되고 발전되며, 종내에는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작업은 자료의 축적과 정리, 그리고 과감한 질문을 상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중국은 동아시아에 포함될 수 있는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동아시아 범주가 역내 ‘동등한’ 국민국가들의 산술적 결합인 것처럼 논의되는 가운데 은폐되는 비대칭성, 혹은 불균등성을 문제 삼는 것이다. 주체 간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동등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동등성으로 인한 사유의 제약이 역사문화적 영향력의 비대칭성을 ‘지우는’ 형태로 나아가서는 곤란하다는 판단이다. 동아시아 범주에 대한 사유의 다음 단계는 그 역사문화적 영향력의 비대칭 성과 원칙적 동등성을 함께 고려하는 가운데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쩌면 동아시아 범주를 초과하는 중국이라는 대상에 대한 재인식까지 나아가는 가운데 다시 한국의 위치와 존재를 다시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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