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篇---綜合文學

중국인의 기원은 어디이며 중국인 인종(人種)은 무엇인가?

一字師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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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기원은 어디이며 중국인 인종(人種)은 무엇인가?

 

 

: 이권홍

여와(여왜女媧)는 중국 고대신화 속 인류의 시조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오빠인 복희(伏羲)와 부부가 되어 자손을 번식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인류는 여와가 황토를 빚어 만들었으며 오색 돌로 하늘을 메웠고 큰 거북이의 다리로 사방을 지탱하게 하였고 홍수를 다스리고 맹수를 없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인류의 기원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가장 흥미 있는 문제 중 하나다. 세계 여러 민족은 각기 아름다운 신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흙으로 자신과 같은 형상을 빚어 인류의 시조인 아담을 창조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담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갈비뼈로 배우자인 이브를 만들었고,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류가 번성했다고 한다.

 

호피(Hopi)인디언들은 최초 인류는 동일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하루는 신이 지구로 내려와 인류에게 동서남북으로 보낼 것이며 피부가 네 가지로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방의 홍색인종은 인디언으로 흙의 수호자가 되었고, 남방은 황색인종이 되었는데 바람의 수호자이며, 서방은 흑색 인종이 되어 물의 수호자로, 북방은 백색인종으로 불의 수호자가 되었다고 한다.

 

인류 기원의 문제는 세계 각 민족이 제각각이라 논쟁이 끊이지 않다가 19세기에 다윈의 진화론이 출현함으로써 인류 기원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다윈은 원인(猿人)에서 진화했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자연계의 발전을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끊임없이 진화하다가 결국 식물, 동물, 그리고 인류가 출현했다고 하였다. 1856년 독일 네안데르탈에서 10만 년 전 인류의 뼈 화석이 발굴되었고 연이어 아프리카에서 더 오래된 유인원의 뼈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고인류학자들은 인류기원의 진화 표를 만들었다.

 

인류의 기원은 4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1단계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단계로 지금으로부터 300~400만 년 전이고, 2단계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단계로 160~250만 년 전이며, 3단계는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시기로 160만년에서 180만년부터 20만 년 전까지 단계이고, 4단계는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시기로 만기 호모사피엔스는 현대인 수준에 도달했다고 보고 있다. 1, 2 단계의 유인화석은 아프리카대륙에서만 발견되고 기타 대륙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어 과학자들은 아프리카가 인류의 공동 발원지라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인은 어디서 기원한 것인가?

중국 신화에는 반고(盤古)가 천지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인인 반고는 커다란 도끼를 가지고 혼돈을 갈라 하늘과 땅으로 나눴다고 한다. 죽은 후 그의 호흡은 바람과 구름이 되었고 목소리는 천둥소리가 됐으며, 왼쪽 눈은 태양, 오른쪽 눈은 달, 손발과 사지는 대지의 사극과 오방의 산이 되었고 혈액은 강과 하천, 혈관은 도로, 근육은 경작지, 수염과 머리카락은 별이 되었고, 치아와 골격은 금속, 진주, 옥으로 변했고 땀은 만물이 윤택하게 생장하도록 단비와 우로가 됐다고 한다.

 

반고 후에 여와(여왜女媧)가 출현했다. 자신의 형상을 본떠 황토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루는 여와가 맑은 연못가에 이르러 물가에 웅크리고 앉아 진흙으로 자신의 모양을 본떠서 흙 인형을 만들었다. 그녀가 흙 인형을 땅에 내려놓자 놀랍게도 살아 움직였다. 여와는 피곤함도 잊고 계속해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냈다. 벌거벗은 사람들은 여와를 에워싸고 환호하며 뛰어다니면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감사를 올린 후 각지로 흩어졌다. 그런데 사람은 결국 명을 다하는 것. 여와는 인류가 절멸하지 않도록 인간들에게 혼인을 맺도록 했고 남녀가 서로 짝을 찾아 자녀를 낳도록 하여 대대손손 번영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전설이 있지만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윈의 영향을 받아 인류는 원인으로부터 진화했다고 믿는다. 중국인들의 기원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북경원인설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이브설이다.

 

북경원인은 북경인이라 간단하게 부르기도 하는데 1920년 베이징 서남쪽 주구점(周口店) 용골산(龍骨山)의 동굴에서 화석이 나왔다. 두개골 6, 안면골 6, 하악골 15, 치아 157, 두골 조각 12, 상박골 3토막, 팔다리뼈 7토막, 정강이뼈 1토막, 쇄골 1점이 발굴되었다. 고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각각 40개체나 되었다. 주구점유적 지층을 연구한 결과 북경원인은 지금으로부터 70만 년 전에서 23만 년 전까지 생활했음이 밝혀졌다. 중국에서 발견된 각 시기의 인류화석, 운남(雲南) 원모(元謀)원인과 산시(陝西) 남전(藍田)원인 화석과 북경원인 화석은 서로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안면부가 비교적 편평하고 콧마루가 높지 않으며 눈언저리는 장방형이고 삽모양앞니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중국 국경 내 동일 인종에서 중국인이 기원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고 북경원인으로 부른다.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유전학자인 레베카 칸(Rebecca Cann) 등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파푸아 뉴기니 등지의 148명의 여인에게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연구한 결과 각 대륙의 인종 중에서 아프리카인의 변이가 가장 많음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아프리카인이 역사가 다른 대륙과 비교하여 가장 길었고 현대 아프리카인의 역사가 20만년이나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반면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현대인은 13만년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생인류는 아프리카의 동일 조상에서 기원하였다고 단정하고 그들을 아프리카 이브(African Eve)’라 한다.

 

199920여 명의 중국 유전학자들은 중국의 28명에게서 인류 군체 DNAY염색체의 유전표지를 연구하였는데 중국인들의 기원이 아프리카라는 결과를 얻었다. 대략 6만 년 전 일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이 아시아 동남부를 경유 북쪽으로 이동하여 중국에 도착하였고 이들이 중국인들의 선조가 됐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고고학 발견은 우리를 아리송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중국 운남 부원(富源)현 트라이아스기 암석 위에 4명의 사람발자국이 발견되었다. 고증한 결과에 따르면 그 암석은 2.23억 년의 역사를 지녔다고 한다. ‘아프리카 이브설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중국으로 이동한 것은 13만 년 전밖에 되지 않는데 어떻게 2.23억 년 전에 사람발자국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북경원인설에 따르면 인류의 탄생은 70만 년에 불과하고 운남 원모와 섬서 남전에서 발굴된 원인화석도 200만 년을 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세계 각지에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발굴들이 한 둘이 아니다. 현재 대담한 학자들은 사전(史前)문명과 사전문화의 개념을 제시하기도 한다. 지금 인류문명 이전에 지구상에 다른 인류문명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들리기는 하지만 인류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고고학 연구와 발굴이 성과에 따라, 언젠가는 우리 인류 자신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인종(人種)은 종족(種族)이라 하기도 한다. 체질 형태 상 공동유전의 특징(예를 들어 피부색, 털색, 눈 색, 혈액형 등)을 갖춘 무리를 말한다. 이런 특징에 근거하여 세계인류를 크게 황인(몽골 Mongoloids), 흑인(니그로 Negro), 백인(유로파 Europa)종으로 나눈다.

 

중국인은 몽골인종에 속한다. 각 인종 사이에는 구별이 되기는 하지만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한 인종에서 점점 다음 인종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 현상이 있다. 이는 인류의 각 인종 사이에 공통의 조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으로 인류를 세 인종으로 나누는데 중국인은 어디에 속할까? 인류학자들이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의 인종은 모두 기원이 같은 동일종이라 한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5만 년 전 인류의 체질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단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세 인종이 기본적으로 형성됐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현재 중국인은 몽골인종의 동아시아 유형과 남아시아 유형에 속한다. 몽골인종의 주요 특징은 체형과 피부색이 중간 정도이고 두발은 곧고 굳으며 체모와 머리카락은 비교적 적고, 얼굴은 편평하며 코 너비는 중간 정도이고 콧마루가 낮으며 입술 두께는 중간 정도이고 눈꺼풀은 거의 다 몽고주름(내안각췌피內眼角贅皮)을 가지고 있고 윗눈꺼풀에 지방질이 많아 두툼하며 가늘고 길게 째진 모양의 황인종 특유의 몽고안(蒙古眼)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높은 눈언저리, 삽모양 앞니, 툭 불거진 광대뼈, 편평한 안면골을 가진다는 특징이 있다.

 

중국 문명은 구석기 말기와 신석기 시대에 출현하였다. 중국 내에서 발견된 인골화석은 모두 원시 몽골인종에 속하고 호모 사피엔스이니, 중국의 호모 사피엔스가 중국인의 직계 조상이라 할 것이다.

 

베이징 서남쪽 주구점(周口店) 용골(龍骨)산 정상에 북경 직립인이 발견된 제1지점 바로 옆에서 산정동인(山頂洞人)화석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두개골 3점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류학자인 바이덴라이히(Weidenreich)가 측량을 해보니 남성 두개골은 유럽 인종의 화석과 닮았으면서 외형은 오히려 원시 몽골인종을 닮았고; 한 여성 두개골은 멜라네시아 유형을 닮았으며; 또 다른 여성 두개골은 에스키모인과 닮았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희한한 추측을 내놓았다. 산정동인은 외지에서 이동해온 주민으로 원래 현지에 거주하던 몽골인종의 공격을 받아 멸종한 것으로 현재 중국인의 체질 특징과 그들하고는 직접적인 승계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학자들이 다시 산정동인의 두개골을 연구한 결과 바이덴라이히는 너무 차이만을 강조했을 뿐 공통성을 헤아리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실제 3점의 두개골은 원시 몽골인종을 대표하는 것으로 중국인, 에스키모인, 미주 인디언과 특별히 닮았으며 상술한 인종의 공통 조상이었음을 밝혀냈다. 산정동인은 중국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속하며 그들의 뇌 용량은 1300-1500밀리리터로 현대인 뇌 용량의 변이 범위내로 발달정도가 현대인과 근접했음을 할 수 있다.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신석기 중기에 중국의 북방에는 앙소(仰韶)문화가 출현하였다. 주로 섬서(陝西) 관중, 하남(河南)의 대부분, 산서(山西) 남부, 하북(河北) 북부와 감숙(甘肅), 청해(靑海) 오르도스(Ordos)지역에 분포해있다. 현재까지 1천여가 넘는 유적지가 발견됐는데 중국 문명의 초기 핵심 지역을 덮고 있어 중원 대부분의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문명의 근간으로 보고 있다. 앙소문화의 주민은 몽골인종의 동아시아 유형이 주체이고 중아시아, 남아시아 요소도 포함하고 있는 동아시아 몽골인종의 주요 유적이다. 이 시기의 고대인은 이미 대규모의 촌락을 이뤄 정착생활을 하였다.

 

앙소문화의 각 유적 중 강채(姜寨) 촌락 유적이 가장 온전하게 발굴되었다. 강채유적은 기원전 4600년에서 기원전 3690년에 건립됐는데 섬서성 임동(臨潼)현 성북에 있다. 면적은 5500평방미터이고 원형으로 폭과 깊이가 모두 2미터가 넘는 해자가 촌 주위를 에워싸고 있으며 촌 중앙에는 광장이 있었다. 촌락은 씨족을 중심으로 조직돼 있고 5개의 집합체에 100여 채의 가옥으로 구성돼 있었다. 씨족마다 커다란 공공주택을 두고 이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가옥들이 둘러싸 있었다. 가옥은 지혈(地穴), 반지혈(半地穴), 평지에 움집을 짓는 3가지 종류가 있었으며 여러 개의 방이 있는 가옥도 유행했다. 한 가족은 노모가 중심이었고 가족은 중방에서 거주를 했으며, 가임연력의 여성은 작은 방에서 남자를 맞았고 성년 남자는 평상시 공공주택에 거주하는 전형적인 모계 씨족사회였다.

 

이 시기 농업은 고도로 발달돼 있었다. 앙소문화는 주로 황하 유역에 분포하였는데 기후가 건조하고 강수량이 비교적 적었으나 비가 여름에 집중돼 내건성 작물이 생장하기에 유리하였다. 더욱이 황토는 바람에 날려 와 쌓인 것으로 토양의 조직이 균일하고 성기어 좋은 보수, 급수 성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천연의 비옥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은 곡물 수확을 높여줬다. 원시농업의 출현은 인류가 자연을 개조하여 얻은 결과였다. 문명의 탄생은 농업의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앙소문화는 중국문명의 기초를 세웠다고 할 것이다. 앙소문화 시기에 생활했던 고대인들은 중국인들의 선조임이 틀림없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은 중국인의 인종 특징이 동아시아 중위도의 지리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중간 정도의 체격을 가졌고 중간 피부색은 중위도의 일조와 온도에 어울리며 몽고안과 높지 않은 코는 어쩌면 중아시아 한랭하면서 풍사가 많은 기후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중국인의 인종 구성은 단순하지 않다. 단일민족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황하 하류의 대문구(大汶口)문화 거주민들은 폴리네시아의 요소가 있고, 하모도(河姆渡)문화와 광동(廣東)에서 발견된 인골화석들은 분명하게 오스트레일리아 흑색인종의 성분을 갖고 있다. ()대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두골은 여러 다른 종족들이 포함돼있다. 따라서 석기시대 이전에 인류는 장기적이면서 대규모로 이동을 하였고 유사(有史)시대에서야 지역성을 띤 민족이 형성되면서 인류의 생활이 비로소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고 할 것이다.

 

결국 중국 민족이 독립적으로 일체를 이루게 된 것은 중국 문명의 형성 과정 중에서 여러 요소가 융합되면서 가능했다. 중국 민족이 형성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성분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몽매와 야만의 산물, 식인(食人) 풍습

10만 년에서 20만 년 전 베이징 주구점(周口店) 유적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화석 중 두골 화석이 사지 혹은 몸통 뼈화석보다 많았다. 이에 근거하여 학자들은 원고시대에 사람들에게 식인(食人)풍속이 실재했었다고 추정하였다. 수서隋書유구전流求傳남쪽 나라의 풍속은 다소 다른데 사람이 죽으면 마을에서 함께 먹는다.(南境風俗稍異,人有死者,邑里共食之.)”라는 기록이 있다. 식인 풍속은 음식물 결핍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파푸아 뉴기니(Papua New Guinea) 원시부락에서 이른바 구루병(kuru disease)’ 이라는 괴병에 걸린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은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이 괴병에 걸리는 원인은 무엇일까? 장기간 사람들은 원인을 찾지 못하다가 몇 십 년 전 병리학자인 대니얼 가이듀섹(Daniel Gajdusek)에 의해 원시부락의 종족인 포어족은 가족이나 친척이 죽으면 장례의 일환으로 시체를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특히 뇌를 먹는 사람에게 주로 발병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가이듀섹은 구루병이 슬로(slow) 바이러스 감염증임을 밝혀 낸 업적으로 1976B. 블럼버그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인류의 몽매, 야만의 시대에 식인의 풍속이 실재하였을까? 사람들은 또 어떻게 죽은 자를 처리했을까?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상고시대 생산력의 극단적인 저하로 인해 생활 물자가 극도로 결핍되고 인류의 생존에 시시각각 위험이 닥쳐왔다. 노동 능력을 상실한 노인들이 사회에 더 할 수 없는 부담이 되었을 때 노인과 청장년 중에 누가 생존해 나가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할 시기가 오자 씨족 전체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청장년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노인을 죽이고 배고픔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죽은 시체를 나누어 배고픔을 해결했다. 인류의 식인 풍습은 이러한 상황에서 생긴 것이라 추측한다.

 

중국의 역사서에 식인관련 기록이 보인다. 묵자墨子초나라 남쪽에 사람을 먹는 나라가 있다.” 수서隋書유구전流求傳남쪽 나라의 풍속이 다소 다르다. 죽은 사람이 생기면 마을에서 함께 먹는다.” 만진(萬震)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에서는 오호(烏滸)’라는 나라는 사람을 먹을 뿐만 아니라 술안주로 삼는다는 기록이 나오고, ‘요인(僚人)’은 식인을 즐기고 심지어 진미로 여긴다고 까지 한 기록들이 보인다.

 

지질학자 바이덴라이히(Weidenreich)1939년에서 1940년 사이에 발표한 중국 원인(猿人)의 동종 잔식(殘食) 여부에서 그가 최초로 베이징 주구점 북경원인 발굴에 참여하였을 때 북경원인 화석 산지에 두개골이 몸체와 사지보다 더 많았던 상황에 미뤄 북경원인도 당시에 식인 풍습이 존재했었다고 추측하였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도 아직까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그들의 조상은 상고시대에 가옥을 지을 때는 부친을 나누어 먹고 곡식 창고를 지을 때는 모친을 나누어 먹으며 사람이 죽은 후 시체는 반드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고.

 

중국 고대의 원시씨족 중에 식인 풍속이 존재했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기타 민족 중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다윈은비글(Begle)호 항해기에서 남미 화산섬의 식인 풍속을 겨울이었다. 화산섬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이자 자신의 늙은 부녀를 죽이고는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자연에서의 인간의 위치에서 16세기 아프리카의 식인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 기자인 존 건서(John Gunther)아프리카의 내막에서 아프리카인이 인육을 먹는 습관을 기록하면서 잠비아(Zambia)의 일부 부족은 최근까지 시체를 먹는 상황은 보편적으로 행해졌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엥겔스는 베를린에 살고 있던 조상들도 16세기에 그들의 부모를 먹는 풍속이 있었다고 했다.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식인과 관련된 자료들이 너무 많다. 이러한 자료들로부터 상고시대 인류사회에는 분명 식인 풍속이 존재했었음을 쉬이 추론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야만적이고 수치스런 행위였음은 자명하지만 몽매한 시기 원시사회에서 그들이 보기에 이치에 맞는 것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부락의 생존을 위해 약자나 죽은 자의 육체를 먹었다는 것에 대해 일말의 외경을 가져봄직도 하다.

 

맹목적인 숭배 토템 ... 중국의 ()’

기원전 6000년에서 4000, 원시인들은 부락을 이루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토템과 점복(占卜)활동이 이루어졌다. 대략 기원전 4000년 앙소문화 유적에서는 조개를 이용해 만든 용호(龍虎)의 문양이 출토되었다. 이는 중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용의 형상이다.

 

()은 중국 고대 전설 속에 있는 비늘이 있고 수염이 있으며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리는 신기한 동물이다. 이는 상고시대 사람들의 지극히 존중했던 토템이다. 몇 천 년 동안 용의 위엄, 정의, 용감하고 꿋꿋한 형상은 중국 민족의 마음 속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중국 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이 신기한 동물 형상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대손손 중국 민족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렸다.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고 못할 것이 없는 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문화를 용의 문화라고 하고, 중국은 자신을 가리켜 용의 후손이라고 한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 곳곳에서 용을 숭배했었다. 용을 가지고 이름을 붙이 산천, 촌락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용강, 용성, 용천용의 이름을 붙인 중국식 건축물 또한 부지기수다. 용문, 용벽, 용정용의 이름을 가진 민속도 한 둘이 아니다. 용주, 용등, 용적용의 이름을 붙인 상가, 용으로 이름을 붙인 개인도 수를 셀 수 없이 많다.

 

고대 황제들은 스스로 진룡천자(眞龍天子)’라 불렀다. 금빛 찬란한 궁전에도 용을 그려 넣었고 용을 조각했으니 그야말로 용의 세계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 중에도 용을 가지고 도안을 한 복식, 기물, 완구 등도 수없이 많다. 심지어 언어생활 속에도 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용봉정상(龍鳳呈祥)’, ‘용마정신(龍馬情神)’, ‘와호장룡(卧虎藏龍)’……신화 중의 용은 더 변화무쌍하다.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지기도 하며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며 하늘에도 오르고 바다에도 들어간다. 사람들은 용을 좋아하고 찬송하며 숭배한다. 용은 길상의 상징이 됐다. 중국민족의 권위와 신령을 상징하는 것이 됐다.

 

용은 어떤 모양인가? 살아있거나 진짜 용을 본 사람이 어디 있으랴.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9종의 동물의 특징을 한 몸에 갖고 있다고 한다. 머리는 낙타를, 뿔은 사슴을, 눈은 토끼를, 귀는 소를, 목은 뱀을, 배는 대합을, 비늘은 잉어를, 손톱은 독수리를, 손발바닥은 호랑이 닮았다고 한다. 중국 약학서 본초강목에서 묘사한 용의 모습은, 입가에는 수염이 났고, 턱 밑에는 구슬(여의주), 낙타머리, 사슴뿔, 도깨비눈, 소귀, 독수리발톱, 등에는 81(9×9=81)의 비늘이 달렸다. 이런 조합이 용에 대한 신비한 색채를 더해 준다. 여러 동물의 특성을 합한 형체로 신묘하고 물, 바다의 신으로 여긴다.

 

설문해자용은 비늘 달린 동물 중 우두머리다. 숨을 수도 있고 나타날 수도 있고 아주 커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발톱은 5개고,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는 등 조화 무쌍한 영물로서 춘분(春分) 때는 하늘로 오르고, 추분(秋分)에는 깊은 못 속에 잠겨 지낸다고 했다.

 

전문가와 학자들은 다년간의 연구와 고증을 거쳐 중국민족이 용에 대한 숭배의 수수께끼를 초보적이나마 벗겨 냈다. 바로 용은 중국 하화(夏華), 염황(炎黃)자손의 토템이라는 것이다.

 

토템은 인디안 말 totem의 음역이다. ‘그들의 친족이라는 뜻이다. 원시인들이 보기에 각 씨족은 모두 어떤 동물이나 식물과 친족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동물이나 식물은 씨족들에 의해 상징이나 보호자로 생각하게 됐는데 이것이 토템이다. 독수리 같은 몸에 비둘기 머리를 가진 짐바브웨 새가 바로 아프리카 국가 짐바브웨의 토템인 셈이다.

 

고고학자들은 출토된 문물 속에서 용이 중국 고대인들의 토템이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서안 반파 앙소문화 유적 중에 항아리 용문이 있고, 강소 오현 양저문화에서 출토된 기물에는 뱀 문양과 같으면서도 뱀이라고 볼 수 없는 화문이 있으며 내몽고 홍산문화 유적 중에는 검푸른 빛깔의 옥룡 공예품이 출토되었다.

 

이런 대량의 유물은 용의 숭배가 중국에서는 적어도 5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렇다면 용은 진실로 존재했었는가 아니면 공허한 신령인가? 또 어떤 동물을 근거로 상상해 만든 것인가?

 

어떤 학자들은 용이 물고기나 뱀에서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가장 원시적인 용의 형상은 서안 반포 앙소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항아리 용문이다. 그것의 형상과 후세의 용의 모형은 비슷한데 바로 뱀의 몸에 물고기 형태로 앙소문화 부락민의 토템 형상이라는 것이다. 산서 양분(襄汾) 하허(夏墟)유적에서도 반포와 비슷한 용문이 발견되었다.

 

반포에서 하허의 원시 용문을 보면 최소의 용은 물에서 살았던 일종의 뱀의 형상을 가진 큰 물고기였다고 추론된다. 하나라 사람과 앙소문화 원주민들은 왜 그것을 토템으로 하여 종족 표지로 삼았을까? 어쩌면 그들은 홍수라는 재해에 직면할 때마다 인류도 용의 형상을 가진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생활하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런 까닭에 용의 형상의 물고기를 민족의 수호신으로 삼아 숭배했다고 본다.

 

최근에 또 다른 학자는 이 고대에 확실히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단지 그것을 용이라 부르지도 않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렇게 신비스런 존재가 아니라 바로 거대한 악어라는 것이다. 악어를 보면 머리, , , , 비늘, 손발, 손발바닥이 모두 용과 비슷하다 본다. 어떤 악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연의 기압의 변화에 민감하여 맑고 흐림을 예감한다고 한다. 비가 내릴 때에는 목청을 돋워 울부짖는다고 한다. 그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기도 했을 것이고. 고대 선민들은 그러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비한 동물로 받아들여 천둥의 신, 비의 신 혹은 북의 신으로 숭배했다고 본다.

 

어쩌면 원시 인류가 수렵과 유목 생활을 하면서 여러 종류의 야수들과 부딪쳤는데 거대한 악어처럼 가장 신비스럽고 위협적인 동물을 만나지 못해 그것을 두려워하고 숭배했으며 점차 땅의 신, 물의 신, 혹은 전쟁의 신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닌가 추론하기도 한다. 이런 이해가 차츰 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더더욱 신비하고 신기한 대상으로 삼고 괴이함이 신령스러움으로 바뀐 것이라 보는 것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거대한 악어를 토템으로 삼은 민족은 고대 바빌론, 인도, 마야에도 있었다고 한다.

 

중국이 봉건사회에 진입하면서 중국의 용의 형상은 천태만상으로 변했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비희(贔屭). 다른 이름은 구부(龜趺)라고 한다. 모양이 거북과 비슷한데 이빨이 있다. 힘이 세고 무거운 것을 짊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문자를 좋아하고 이름 날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석비를 지고 있다.

둘째 이문(螭吻)이다. 치미(鴟尾), 치문(鴟吻)이라고 부른다.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목구멍이 젖어있고 비를 내리게 한다. 용마루에 올려놓으면 화재를 진압한다고 한다.

셋째는 포뢰(蒲牢). 울부짖기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기에 종두에 만들어 놓는다. 종소리가 더 멀리 전해지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넷째는 폐안(狴犴)이다. 호랑이를 닮았으며 위력이 있다. 감옥 문이나 관아 정당의 양측 면에 그 형상이 있는데 위력으로 죄인을 다스린다고 본다.

다섯째는 도철(饕餮)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해 솥뚜껑이나 제기에 그려 놓는다.

여섯째는 공복(蚣蝮)이다. 평시에 가장 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리에 새겨 놓는다.

일곱째는 애자(睚眦). 용의 머리에 승냥이 머리를 가지고 있다. 성격이 강폭 하여 죽이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도검이나 검병에 새긴다.

여덟째는 금예(金猊). 산예(狻猊)라 하기도 한다. 사자를 닮았다. 연기를 좋아하고 후광이 밝아 향로 위에 조각한다.

아홉째는 초도(椒圖). 조개처럼 생기고 폐쇄를 좋아해 문짝에 그려 붙인다. 입을 닫아 있는 것을 좋아하며 남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문을 지키는 신수로 사용된다.

이것을 용의 아홉 아들 즉 구룡자(九龍子)’라고 한다.

 

중국에 용생구자(龍生九子)’라는 말이 있다. “용 한 마리가 새끼 아홉 마리를 낳았는데 모습과 성격이 모두 다르다는 말인데, 한 부모 밑에 태어난 자식이라도 성격이 각양각색이라는 뜻이다. 형제가 다르듯 성격과 좋아하는 것이 다른 용들은 각종 형태로 고대 풍격이 건축과 기물에 표현된 것이다.

 

용은 그야말로 중국문화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출처] 제이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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