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속의 근친상간 고대인들의 오누이 통혼 토템과 아름다움의 추구 문신의 수수께끼
글 : 이권홍
복희(伏羲)는 희황(犧皇), 복희(伏戱)라 부르기도 하는 중국 신화 속의 인류의 시조(始祖)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와 여와(女媧)가 결혼하여 인류가 탄생했다고 한다. 전설 속의 복희는 그물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고 어렵과 목축에 종사했으며 팔괘(八卦)이론을 창제했다고 한다.
중국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전설이 있다. 복희와 여와는 ‘삼황’의 하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복희는 팔괘를 그렸는데 각각의 부호는 天(천), 地(지), 水(수), 火(화), 山(산), 雷(뇌), 風(풍), 澤(택)을 대표한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부호들을 가지고 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했다고 한다. 불을 사용하고 그물을 만들어 어렵을 하게 된 것도 복희가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 고대 전설 중에 여와도 인류의 시조다. 그리고 복희의 여동생이다. 원고시대(遠古時代) 하늘의 떠받치고 있던 4개의 기둥이 갑자기 꺾어졌다. 하늘의 한 부분이 무너져 내려 파란 하늘에 거대한 검은 동굴이 생겼다. 대지도 갑자기 벌어지고 산산조각이 났다. 하늘은 대지를 완전히 덮을 수 없었고 땅도 만물을 다 감당할 수 없었다. 강물이 도처에서 범람(氾濫)하여 홍수가 났고 곳곳에 큰 불이 나 화재에 휩싸였다.
여와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재난에 빠진 것을 보고 염려하다가 무너져 내린 반쪽 하늘을 보수하여 천하의 자녀들을 극심한 고통에서 구해 내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곤륜산에 올라 직접 오색의 돌을 정련하고 하늘을 보수하였다. 하늘은 이전처럼 아름답게 되었다. 또 커다란 거북이의 다리를 잘라 하늘의 기둥을 대체하고 대지의 사방을 세워 하늘을 지탱하게 하였다. 그리고 풍파를 일으키는 흑룡(黑龍)을 죽이고 중원의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했다. 그런 후 갈대를 태워 잿더미를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올려 사나운 홍수를 막았다.
여와의 이러한 노력으로 파괴된 하늘은 마침내 다 보수(補修)되었고 사방이 단단하게 되었으며 홍수 또한 물러났고 사나운 짐승들도 죽임으로써 중원 일대의 재난은 다 가라 앉았다. 선량한 백성들은 비로소 구원을 받아 근심걱정 없는 삶을 영위(營爲)하게 되었다. 이것이 중국의 ‘여와보천’ 신화다.
중국 전설 중 복희 여와 오누이의 통혼(通婚) 이야기가 전해온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와 여와는 오누이였다. 천지가 홍수에 휩싸였을 때 오누이는 커다란 조롱박에 올라 재난을 피했는데 이후 오빠와 누이가 결혼을 하여 인류가 널리 퍼지게 됐다는 것이다. 당대 이원(李元)의 『독이지獨異志』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 옛날 우주가 처음 열릴 때 여와 오누이만 있었다. 곤륜산에서 “하늘이시여. 만약 우리 오누이를 부부가 되는 것을 허락(許諾)하시거들랑 연기를 모두 모아 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흩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하자 연기가 모였다. 그래서 누이동생은 오빠를 남편으로 삼았다.
하남(河南) 당하(唐河)에서 출토된 활석에 복희와 여와 그림이 있는데 그 앞에 모두 연기가 그려져 있다. 이는 부부가 되어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한(漢)대의 복희․여와 그림은 꼬리가 교차된 형상을 하고 있다. 복희는 비늘을 가진 몸의 형태이고 여와는 뱀 모양이다. 이는 인격화된 뱀 신과 여신을 비유한다.
어떤 한대의 활석의 그림에는 복희와 여와가 각각 태양과 달을 받들고 있다. 복희는 태양신으로 양을 대표하고 여와는 달의 신으로 음을 대표한다. 햇빛과 비이슬로 만물을 기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섬서(陝西)성 임동(臨潼) 여산(驪山)의 한 조묘에는 여와를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3일과 음력 6월 15일, 두 차례 제사를 지낸다. 현지 사람들은 두 제사를 ‘이불 제사’라 한다. 그때마다 제사에 참여하는 소녀들은 시트를 들고 가슴에는 헝겊인형을 품고 여산의 조묘에 가서 여와에서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빈 후 밤중에 몰래 근처에 있는 숲으로 간다. 부근 여러 마을의 청장년 남자들이 저녁을 먹고 난 후 산에 오르고 이미 숲속에 있던 여자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동침한다. 다음날 새벽 여자들이 마을로 돌아올 때에는 고개를 숙이고 뒤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액막이’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이한 ‘야합’의 풍속은 어쩌면 먼 옛날 복희와 여와 오누이의 통혼 전설(通婚傳說)이 전해 내려온 것일 수도 있다.
어떻게 상고시대에 중국에는 오누이가 통혼할 수 있었을까? 인류의 가장 오래된 원시 혼인 상태에 있었다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인류는 최초에 혼인과 가정 관념(家庭觀念)이 없었다. 최초 인류의 남녀 성적 관계는 뒤죽박죽이었다. 고대인들은 채집과 수렵이 발전함에 따라 노동에 있어 남녀, 연령에 따라 분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사유도 진보하게 되었다. 부모도 자신의 자녀들과 양성 관계를 원치 않게 되어 마침내 인류는 난잡한 남녀의 성 관계를 배척(排斥)하고 비교적 고정적인 혈연 집단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를 현연가정 혹은 혈연사회라 한다. 이는 생산 단위이기도 하면서 내부 통혼의 집단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 내부에서는 할아버지뻘과 손자뻘, 부모와 자녀지간의 성적 관계를 허락하지 않기 시작했지만 형제자매 사이에는 통혼이 허락되었다. 이런 혈연(血緣) 집단혼은 인류 발전사상 백만 년이 넘는 길고 긴 세월동안 이루어졌다. 인류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중국에서 발견된 운남(雲南) 원모(元謨)인, 섬서 남전(藍田)인 모두 분류학상 직립인 단계였고 대체적으로 혈연사회 시기였다고 한다.
중국의 소수민족, 예를 들어 나시(納西)족, 다이(傣)족, 먀오(苗)족, 동(侗)족, 좡(壯)족, 리(黎)족, 고산(高山)족 등은 지금도 오누이 통혼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이외에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지금도 많든 적든 혈족결혼이 잔존한다.
복희와 여와의 연대가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먼 옛날이야기인지를 현대 역사학자들은 아직까지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원시사회의 현연사회 시기에 생활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고 그 시기의 시간은 백만 년 이상이었다. 원시시대에 자매가 한 남편의 아내가 됐던 경우도 있다. 이는 인류의 발전 과정 상 하나의 단계이며 어쩌면 혈연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을 지던 습속의 하나일 따름이라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복희와 여와 오누이가 통혼한 것 또한 그리 기이한 것만은 아닐 터이다.
토템과 아름다움의 추구 문신의 수수께끼
기원전 3500년경에 시작된 용봉(龍鳳)문화는 중국문화 중 오래되고 특이한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제가(齊家)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항아리 도기에 용의 형상이 조각돼 있었다. 어느 시기부터 용과 봉황의 토템을 숭배(崇拜)하기 시작했고 원시인들이 자신의 몸에 용봉을 그려 넣었는가가 관심사가 되었다.
문신(文身)은 인체에 예리한 도구로 도안의 윤곽을 만들고 안료를 뿌려 색소를 피부 내에 스며들게 하여 오래도록 무늬를 남기는 것이다. 문신에 사용된 안료는 흑색이 위주였다. 입묵하기 때문에 문신이라는 말 이외에 먹물뜨기하다 뜻을 가진 ‘자청(刺靑)’이라 하기도 한다.
고대인들은 왜 몸에 도안을 새겼을까? 도대체 오래된 이런 습속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돼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각양각색(各樣各色)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문신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현대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문신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문신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화적 습속 중의 하나다. 중국에는 문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춘추시대에 쓰인 『예기禮記』에 보인다. 당시 중국 동부의 오랑캐인 이(夷), 남쪽의 오랑캐인 만(蠻) 등의 민족은 생식하고 머리를 풀어 헤치며 몸에는 문신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로써 서주시기부터 중국의 동이나 남만 등 고대 민족들은 문신 습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서기전 12세기경 주공단(周公旦)의 두 아들이 형만(荊蠻)의 풍속을 따라 머리를 깎고 전신에 회색 칠을 하는 문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민족, 모든 지역의 문신이 똑 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 민족마다 문신의 도안이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용과 뱀’, ‘조익’, ‘수목’, ‘화초’ 등 도안이 주를 이루었다. 문신하는 부위도 달랐다. 얼굴, 가슴, 등, 다리, 배 등 신체 모든 부위에 문신을 했다.
문신의 기원에 대해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토템 숭배에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고대인들은 자기의 씨족이 어떤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무생물과 친족 관계에 있거나 다른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선조나 수호신(守護神)으로 여겼다. 이런 자기 씨족의 대표물의 도안이 씨족이 숭배하는 토템으로 변한 것이다. 고대인들은 토템을 몸에 새기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면서 신령의 보호를 구하였다. 이것이 원시 종교의식(宗敎儀式)이었다.
이런 토템 숭배설을 뒷받침하는 좋은 예가 대만 소수민족의 문신습속과 그 기원에 대한 신화 전설이다. 파이완(Paiwan)족의 어떤 촌락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 씨족의 선조는 뱀이 낳았다거나 태양의 알에서 부화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뱀과 태양을 그들 씨족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고 자연계의 뱀과 태양도 그들의 토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문신을 할 때도 대부분 뱀 문양이나 태양 문양을 한다. 그러한 목적은 그들이 숭배하는 토템의 영혼이 자신의 몸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들어온 숭배의 토템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믿는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면서 파이완족이 문신을 할 때에는 또 성대한 의식을 치른다.
또 다른 설은 문신을 자신의 신체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생겨났다고 것이다. 한 일본 학자는 대만의 소수민족들이 자신의 몸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문신을 한다는 실례를 들고 있다. 아타얄(Atayal)족의 문신의 기원에 대한 신화전설 중에 아름다움을 위해 문신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오래 전에 한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당신의 용모는 추하다. 만약 얼굴에 꽃무늬를 새기면 분명 예쁠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얼굴에 꽃무늬를 새기겠다고 동의를 하자, 남자는 검은 연기로 여자의 옷 위에 꽃무늬를 그려주고 그녀에게 문신하는 방법을 알려 줬다. 이렇게 문신이 아름답다는 관념이 아타얄족 사람들에게 생겨났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옛날 두 명의 남자가 자신들이 잘라온 적의 머리에 문신이 있었는데 오래되도록 퇴색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보기가 좋았다. 이에 그들은 그 모양을 본떠 자신들의 얼굴에 꽃무늬를 새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남자들이 꽃무늬를 새기는 습속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아타얄족은 털을 뽑는 습속이 있었다.
문신을 한 몸에는 털이 자라지 않고 주름도 생기지 않아 청춘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그들의 습속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에 아타얄족은 얼굴에 문신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게 되었고 문신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하는 풍속이 후대에 와서 아름다움의 장식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의 기록에 보면 당(唐)대에 문신이 무척 성행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전문적인 직업이 등장했고 시장에는 문신 전문 도구를 팔기도 했다. 심지어 문신 도장도 있었는데 그 형태(形態)가 가지각색이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대 이후에도 꾸준히 성행했는데 문신은 중국 고대의 문화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탕현조(湯顯祖)는 『여녀가黎女歌』라는 시에서 원대 해남도의 여(리:黎)족 부녀자들 사이에 성행했던 문신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중 여족 부녀자들의 얼굴에 문신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 시에 따르면 부유한 여족(黎族) 여인이 열세네 살이 되면 계례(笄禮:여자의 성년식)를 치르는데 집안에서 주석을 차리고 친족들을 초청하여 성대하게 거행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얼굴에 문신을 하는 것으로 모든 의식이 복잡하고 융성(隆盛)하게 진행됐다고 한다.
대만 고산족(高山族)에서 얼굴 문식에 대한 전설을 보면 문신이 혼인을 위한 의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옛날 커다란 바위가 오누이로 변했다고 한다. 오누이라서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속여 오누이가 결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얼굴에 문신을 하게 됐다고 한다. 해남도(海南島)의 여족에게도 비슷한 전설이 남아있다. 이렇게 보면 문신 풍속의 기원은 혼인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여족에게 있어 문신은 성인 의식의 중요한 일부였음도 알 수 있다. 문신을 함으로써 청소년에서 성년이 되는 것이고 문신이야 말로 성인의 표식(表式)이며 그때서야 비로소 혼인 상대를 찾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신의 규칙은 여러 방면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리우한(劉咸)교수가 50년대 이전에 해남도에서 조사를 하였는데 여족 부녀자들은 혼인 형태에 따라 문신을 하는 신체부위가 달랐고 문신의 연령이나 도안도 시기에 맞는 규칙(規則)이 있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다고 한다.
또 다른 관점은 문신이 일종의 상징이며 기념이었다는 것이다. 공로가 있는 사람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바로 공헌의 기록설이다. 대만 소수민족의 문신 풍속 중에서 일반적인 규칙에 의하면 문신은 자격이 있어야 한다. 성년 의식(成年儀式)을 통과한 사람 중 그 씨족에 공헌을 한 남녀에게 문신을 새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헌이 많고 적음에 따라 문신하는 부위와 도안(圖案)이 달랐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문신은 공을 기록하기 위한 것으로 현재의 훈장(訓長)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다. 아타얄족이나 다른 민족의 남자들에게 있어 문신의 자격(資格)이나 문신하는 특수 부위와 문양은 모두 사냥, 적의 머릿수 혹은 사냥한 물품과 관련이 있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듯 문신이 어디에서 기원(起源)했냐는 문제에 대해 전문가 마다 다르고 나름대로 설득력(說得力)을 갖고 있다. 역사적 자료에도 각각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문신의 기원은 무엇일까 하는 수수께끼는 여전히 연구하고 해답을 구해야 하는 대상으로 남아있다. [출처] 제이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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