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篇---綜合文學

성과 사랑의 융합 애정의 수수께끼와 신에 대한 경외 자해自害의 수수께끼

一字師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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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사랑의 융합 애정의 수수께끼와 신에 대한 경외 자해自害의 수수께끼

 

 

: 이권홍

상아(嫦娥)가 달로 달아난 전설은 대략 기원전 2500년 전에 생겼다고 본다. 이 속에는 상아와 예(羿)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학자들은 애정이란 일부일처제 아래에서 생겨난 것으로 문명사회에서나 있는 감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원시인류에게는 애정이 없었다는 말인가?

 

세상에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기에 사람에게 생사를 같이 하게 하는가(問世間情爲何物,直敎人生死相許)”라는 시구처럼 애정이 가지고 있는 마력은 사람들을 경탄하게 한다. 사람들은 애정을 갈망하고 사랑을 찬미하면서 견딜 수 없어 목숨까지 버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사랑, 곧 애정이란 언제부터 인류에게 있었던 것인가?

 

인류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대답을 내놨다. 모건(Thomas Hunt Morgan)고대사회에서 애정의 유래에 대해 탐구 했다. 그는 인류사회가 야만(野蠻), 몽매(蒙昧), 그리고 문명(文明)3단계가 있다고 보고 애정은 문명사회에서야 비로소 생긴 감정이라고 했다. 문명시대 이전에는 인류는 아직 애정이란 무엇인지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인류는 동물과 같이 편리나 필요에 의해 짝을 찾는다. 생물학자들은 동물도 감정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모건은 야만인은 애정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야만인은 감정을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건의 결론은 고전적이고 영향력이 가장 큰 해석이 되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그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나 엥겔스도 원시사회에는 애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엥겔스는 대략 유럽의 중세기가 돼서야 애정이라는 게 생겼다고 본다. 중세기 이전에는 개인의 애욕을 얘기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중세의 기사 및 낭만적 사조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남녀의 결혼이 부모에 의해 결정되었고 근본적으로 연애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세에 기사들이 출현한 이후 기사들이 귀족의 젊은 여자들을 거리낌 없이 추구하게 됨으로써 애정에 매혹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것이 애정의 유래에 대한 유일한 해석인가?

모건의 결론은 미주 인디언의 원시부족에 대한 조사에서 얻은 것이다. 진실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지구의 한 모퉁이를 대표하는 것일 뿐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와 다른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일까?

 

학자들은 중국에 현존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소수민족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다가 모건과는 다른 결론을 도출해 냈다. 예를 들어 두위팅(杜玉亭)의 연구가 그것이다. 윈난(雲南)의 지눠(基諾), 나시(納西), 쓰촨의 이(), 그리고 하니(哈尼), 다이()족과 같은 오래된 민족의 혼인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이런 민족의 발전 정도를 보면 모건이 얘기한 문명시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들의 애정은 이미 문명인이 상상하기 힘든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예로부터 윈난 시솽반나(西雙版納) 징홍(景洪)현 산악지구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지눠족의 경우를 보자. 그들의 인구는 약 12,000명이다. 두위팅의 연구에 따르면 지눠족의 애정 과정은 3단계로 나뉜다고 한다.

 

바퍄오(巴漂)’, ‘바바오(巴寶)’, ‘바러(巴勒)’가 그것이다. 애정의 초기, 바퍄오단계는 여성이 비교적 주동적이다. 여성들은 자신이 마음에 둔 남자에게 몰래 선물을 주며 추파를 던지면서 용감하게 상대를 탐색한다. 일반적으로 서로 정을 느끼면 애정은 비밀스런 모색에서 공개적인 행동으로 옮기는데 이 단계가 바바오이다. ‘바퍄오시기보다는 남성이 더 주동적이 되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성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며 검증을 하면서 적극적인 추구자가 된다.

 

이 시기에 검증을 견뎌내지 못하거나 마음이 변하면 애정은 바람처럼 사라진다. 서로 헤어진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바바오단계를 지나면 사랑하는 연인은 바러’(혹은 바리(巴里)’) 단계로 접어든다. 그들은 거침없이 동거하고 일반 가정과 같은 생활을 꾸려 나가면서 쌍방이 서로 사랑하는 성애의 쾌락을 향유한다. 쌍방의 부모는 이런 연애 과정에 있는 자식들을 간섭할 수 없다. 더욱이 자식들에게 스스로 애인을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사랑의 쓴 맛과 단 맛을 체험하게 한다. 연애 중 최종적인 결합은 편리함과 필요에 기초를 두지 않고 자유스러우며 솔직한 것이 중세 기사들이 슬며시 하는 애정보다도 숭고하고 완벽했을 것이다.

 

이 지눠족의 예는 대표적이라 하겠다. 이들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이런 예스러운 풍속은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돼 왔다. 지눠족의 결혼풍속의 연구를 통해 선사시대 인류의 혼인관계를 추측하고 근원을 캐는 방법은 모건의 방법과 같다. 학술계가 인정하는 연구 방법이다. 두위팅은 지눠족의 애정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모건 등이 원시사회에는 애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렇다면 애정은 원시사회 어느 시기부터 발생하였을까?

두위팅은 모건이 제시한 명사인 푸날루아(punalua)가정 시대를 채용하였다. 모건은 이 용어로 원시사회시기 씨족 내부 혈연관계를 피하지 않고 통혼하는 가정 형태를 형용하였다. 하와이 토착민들은 외부에 알려지기 이전에 실제적으로 혈연을 따지지 않고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가 결혼할 수 있는 푸날루아가정 식의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두위팅은 지눠족의 연가인 바스(巴什)를 주목하였다. ‘바스의 노래가사는 사람들이 고대 씨족 내부의 혈족통혼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지눠족 사람들이 직접 푸날루아 식의 혈족혼을 적지 않게 경험을 했었다는 것에도 주목하였다. 이런 혼인들도 3단계를 거치고 똑 같이 자유스럽고 솔직하게 진행됨으로써 애정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을 근거로 두위팅은 푸날루아가정 시기에 애정이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두위팅은 또 다른 예로 파두어자이(巴朵寨)를 들었다. 지난 세기 50년대에 이 씨족은 마을은 족내혼이 성행했고 지눠족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애정의 3단계를 갖췄다고 한다. 이것도 푸날루아가정 시대의 애정이 있었음을 실증한다고 했다.

 

지눠족의 연구는 학자들이 인류 애정 기원에 대해 새로운 토론을 야기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아직도 원시사회시기에 애정이 존재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리샤오동(李小東)은 애정이 결코 인류가 생기면서 있었다고 보지 않는다. 애정은 인류가 일정한 단계까지 발전하고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은 어린시기에 성애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만 이것이 인류가 원시시대에 애정이 생겼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리샤오동는 애정이란 바로 일부일처제라는 사회가 전제돼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일부일처 이전에 인류는 군혼(群婚), 대우혼(對偶婚)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때는 남녀지간의 결합은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광범위하게 행해졌다고 본다. 즉 애정의 배타적인 본질과 도무지 맞지 않는 것으로 애정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일처제는 언제 생겨난 것일까?

농경지의 완전한 사유화와 동시에 진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는 또 사회계급, 특히 노예계급의 발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원시사회에는 애정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샤오동의 표준에서 본다면 엥겔스가 말한 중세 기사의 사랑도 어쩌면 애정이라고 할 수 없다. 기사들과 토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행한 애정행각도 다른 사람의 가정을 해체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애정이 원시사회에서 기원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다르다. 단지 민족학자들의 구체적인 실증이 있었고 고전학자들이 이론으로 탐구했다는 것은 그 배후에 우리 인류가 애정에 대한 갈망과 아름다운 상상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신에 대한 경외 자해(自害)의 수수께끼

중국 원시사회의 씨족 묘지의 발굴 중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없는 뼈대가 자주 발견되었다. 어떤 손가락과 발가락은 묘에 함께 묻은 도기에 놓아 둔 것이 발굴되기도 했다. 연구를 통해 이런 특이한 현상은 시체 매장 후 동물에 의해 훼손되었거나 발굴할 때 고고학자들의 조심스럽지 못한 것 때문에 파손된 것이 아니었다. 바로 5000년 전 일찍이 유행했던 매장 풍속이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할체장(割體葬)’라고 부른다.

 

무슨 이유로 할체장이라는 장의풍속이 생겨났을까?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50년대 고고학자들이 섬서성 서안 반포유적을 발굴 할 때 유적의 묘지에서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없는 뼈대가 발굴되었다. 시체와 함께 묻은 도기사발이나 메운 흙에서 뼈대에서 떨어져나간 손가락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중국 신석기시대의 할체장의 무덤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현상을 중시했다. 계속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면서 동일한 원시사회 유적이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고 대부분 유적에서 이런 현상의 고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임동(臨潼) 강채(姜寨), 감숙(甘肅) 영창(永昌) 원앙지(鴛鴦池), 청해(靑海) 낙도(樂都) 류만(柳灣), 하남(河南) 낙양(洛陽) 좌리(矬李), 흑룡강 밀산(密山) 신개류(新開流), 복건(福建) 민후현(閩侯顯) 석산(石山) 등 유적에서도 확실한 할체장현상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이런 매장 풍속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매장 풍속이 공간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적인 거리도 길다. 지금까지 이런 특이한 매장 풍속을 가진 신석기시대 유적이 지속된 시간을 보면 적어도 2천년은 된다.

 

사실 이런 특이한 매장 풍속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학 조사 자료에 따르면 세계 모든 곳에서 이런 매장 풍속의 유풍이 발견된다. 사료에 따르면 오세아니아 태즈메이니아(Tasmania)사람들은 시신을 매장할 때 부락의 과부들은 머리에 회반죽을 바르고 얼굴에는 유지와 분탄을 바른 후 장례에서 조개껍데기로 자신의 신체를 베고 자신의 다리에 화상을 입히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무덤에 던지면서 죽은 자에 대한 깊은 애도를 표시한다.

 

장례에 있어 죽은 자의 자녀들은 자신의 이마를 베기도 한다. 만약 과부와 홀아비가 있으면 예리한 조개껍데기로 머리를 자른다. 이것은 일본 북부에 있는 아이누들이 하는 풍속이다. 미국 서부 초원의 크로족(Crows)은 장례에 참석한 같은 씨족의 성원들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다리를 베고, 팔목을 찢고 두피를 찌르면서 모든 사람이 온몸을 피로 적신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한둘이 아니다. 단지 이런 현상은 분명 죽은 자의 친족이 자신의 신체를 훼손시키면서 애도를 표시하는 것일 뿐 사자의 시체를 자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할체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신석기시대 묘에서 발견된 할체장의 손가락이나 발가락, 심지어 다리뼈가 꼭 죽은 자 본인의 뼈대에서 잃어버린 부분이라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단지 죽은 자의 씨족 구성원 및 친족들이 시체의 손가락이나 발가락, 혹은 손발을 잘라 죽은 자의 영혼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민속학자들이 조사한 자료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100년 동안 원시사회의 이런 장례 중 시체에 흠집을 내는 풍속은 줄곧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및 민속학자들이 연구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학자들 간에 관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으로 찬성하고 있는 것이 있다. 원시씨족사회의 사람들은 초자연적 힘을 믿었다는 것이다. ‘애니미즘이나 영혼불멸의 관념이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설령 형식이 다를지라도 제사를 지내면서 사람과 귀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작용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죽은 자의 시신을 자르는 것이나 죽은 자의 친족들이 자신에게 흠집을 내는 할체장모두 에 대한 경외로 말미암은 의식인 것이다.

 

현재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원시사회의 할체장에 대해 3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할체장의 목적이 영혼흉악한 귀신이 되돌아와 친족을 위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죽은 자의 시신을 훼손한다고 보는 것이다. 죽은 씨족 구성원이나 친족을 매장할 때 계획적으로 시체의 일정한 부분을 분리하여 나누어 매장하거나 보존했다고 본다. 그러나 생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신체가 훼손되어 매장한 것까지 일률적으로 할체장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른 하나는 위 관점하고는 완전히 상반된다. ‘할체장은 살아있는 자가 자신의 신체를 훼손시키면서 죽은 자를 제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제사를 지내면서 진정으로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으로 죽은 자로 하여금 살아있는 자들의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시하는 동시에 죽은 자와 산 자가 본질적으로 혈육 관계를 맺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 본다. 또 하나는 그들도 역시 죽은 자의 영혼이 되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식을 통해 불결한 것을 없애고 영혼이 애통하고 노여워하는 것을 완화시킴으로써 공포심을 없애는 것이라 본다. 그리고 죽은 자에게 산 자의 피를 나누어줌으로써 다른 세상으로 갈 때 힘과 지혜를 나누워 준다고 믿어서 행한 것이라 본다.

 

세 번째는 앞에서 얘기한 두 가지 방법을 종합한 관점이다. 수천 년 동안 유행한 할체(割體)’는 시체를 훼손시키면서 사악함을 피하고 자신을 흠집 내면서 제물로 바친다고 보는 통합적 관점이다. 그들의 이런 관점은 지금까지 각지에서 발굴된 대부분의 자료로 보충된다. 이미 발굴된 유적 중 할체장은 시체를 분리하는 것과 산 자가 자신을 훼손시킨 두 가지 형태가 다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전 두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도 이 특이한 매장풍속에 대해 일치된 관점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어쩌면 고고학 발굴이 더 진행되면서 새로운 증거가 나와야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제이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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