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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遊記서유기 속 唐僧당승

一字師 202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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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遊記서유기 속 唐僧당승

 

图片来源 三藏法师是什么意思_什么人能称为三藏法师? - 华人佛教网

 

질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당승의 공통점은?

: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이다. 여기서는 간단히 당승이라 부르자.

 

중국(中國) ()나라 때의 승려(僧侶). 법상종(法相宗), 구사종(俱舍宗)의 개조(開祖). 하남(河南) 진류(陳留) 사람. 629년 장안을 출발(出發), 천산 남로를 거쳐 인도(印度)로 들어가, 나란타사(那爛陀事)의 계현(戒賢)에 사사(師事). 645년 경전(經典) 657 부를 가지고 귀국(歸國), 대반야경(大般若經), 구사론(俱舍論), 성유식론(成唯識論)() 많은 불전(佛典)을 번역(飜譯)했음. 그 번역(飜譯)을 신역(新譯)이라고 하고 그 이전(以前) 것을 구역(區域)이라고 함. 그의 여행기(旅行記)대당 서역기(大唐西域記)12권을 써서 태종(太宗)에게 바침. 소설(小說) 서유기는 이 여행(旅行)에서 취재(取材)한 것임. 현장삼장(玄奘三藏). 삼장(三藏) 법사(法師).

 

당대는 경제적 풍요, 군사적 승리 , 종교적 다원주의, 그리고 예술과 과학의 번성함을 누리던 시대였다. 이 때문에 중국의 문화적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불경을 찾아 서역으로 가는 여정을 담은 서유기는 1,300년 전 시작된다. 바로 당대의 수도, ‘영원한 평화를 뜻하는 장안에서 말이다.

 

당시 당 태종은 젊은 승려에게 어려운 임무를 맡긴다. 서쪽 험준한 산맥을 넘어 오늘날 인도로 알려진 땅으로 가서 불경을 수집하고 중국으로 이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당승은 기꺼이 황제의 명을 받든다.

 

서유기는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역사적인 여정은 17년에 걸쳐 완성된다. 당승은 산스크리트로 쓰여진 불교 경전 657권을 중국으로 가져왔고, 그리고 여생을 경전을 번역하는데 바쳤다.

 

역사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승은 경건한 불심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인도로 가는 길에 당승은 81가지 난관을 만나는데, 바로 수행의 길에서 인간이 만나게 되는 고험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한번은 당승이 아름다운여왕으로부터 청혼을 받는다. 청혼을 받아들이면 여성들만 사는 땅을 다스리며 남은 생에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하지만 당승은 이를 거절하고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이런 식의 고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온갖 괴물과 요괴가 끊임없이 당승을 탐한다. 그의 살점을 한 번 베어 먹기만 해도 영생을 얻는다는 소문 때문이다.

 

현장(玄奘, 60246~ 66437)은 당나라 초기 고승이자 번역가이며, 흔히 현장삼장(玄奘三藏)으로 불린다. 10세 때 형을 따라 낙양의 정토사에서 불경을 공부했고, 13세 때 승적에 이름을 올려[1] 현장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를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은 삼장법사인데, 삼장(三藏)이란 명칭은 경장(經藏) · 율장(律藏) · 논장(論藏)에 능해서 생긴 별칭이다.

 

현장은 당시의 한문 불교 경전의 내용과 계율에 대한 의문점을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의거하여 연구하려고 627년 또는 629년에 인도의 푸슈야브후티로 떠났으며 645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후 사망할 때까지 만 19년에 걸쳐 자신이 가지고 돌아온 불교 경전의 한문 번역에 종사하였다. 그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며 당시 번역법이나 번역어에 커다란 개혁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종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부르고, 현장 이후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현장은 중국 불교의 법상종 · 구사종(俱舍宗)의 개조이다.

 

또 그는 자신의 인도 여행의 견문기를 대당서역기에 통합 정리하여 태종에게 진상하였다. 이 책은 당시 인도나 중앙아시아(서역)를 알기 위한 제1급의 사료다. 또한 문학적으로는 현장의 천축 여행을 모티브로 하여 명나라 시대에 서유기라는 소설이 생겼다.

 

행적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에 의하면 현장 승려는 모험심이 강한 승려였다고 전해진다. 본래 중국의 승려들은 법에 의해 모여 살아야 했는데, 현장 승려는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에 이르는 현장 승려의 행로는 그의 여행기 대당서역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만화 십팔사략에 의하면 불교를 믿는 관리들이 통행증을 내주고 위험한 길을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627(일설에는 629) 인도로 출발하여, 쿠차와 투르판 등의 서역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의 행로를 거쳐 천축의 날란다 사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저서는 명나라 때 오승은(吳承恩)에 의해 서유기라는 소설로도 각색되었는데, 그의 흔적인 쿠차와 투르판 등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현장법사가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국문태의 초대를 받아 6302월경에 도착하여 1개월간 카라호자에 들러 이 곳에서 법회를 열어 한 달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했는데, 그때 법회를 열었던 건물은 복원이 되어 있다. 카라호자의 왕 국문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노잣돈으로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그 후 10여 년 유학을 끝내고 불경을 가지고 다시 카라호자에 들러 당나라로 귀환을 하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현장법사의 모국인 당나라에 멸망한 뒤였고 사람들도 다 떠난 뒤였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현장은 카라호자에 들러지 않고 바로 당나라로 귀환하게 된다.

 

저서

대당서역기: 21권이며, 그의 17년간(629-645)의 구법 행적을 정리한 것으로 그가 정리하여 그의 사후 646년에 완성되었다. 대당서역기는 현장이 직간접 경험 한 138개국 풍토와 전설, 관습 등 정리한 방대한 서적이다. 이것은 고대 및 중세 초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역사나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문헌기록이 미흡한 인도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일차 사료로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현장은 5천축 80개국 중 75개국이나 역방하면서 사실적인 기록을 남겨놓음으로써 할거로 점철된 인도역사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데 더 없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10

 

서유기에서 묘사된 현장

서역으로 불경을 가지러 떠나는 삼장법사 일행(서유기)

서유기에서 현장은 삼장법사로 묘사한다. 불경 구하러 천축으로 가던 도중 옥황상제에게 싸움을 건 죄로 산 밑에 500년째 깔려있던 손오공의 형벌을 면제해주고 손오공을 통제하기 위해 손오공에게 금고아를 머리에 씌운다. 그 이후 손오공을 데리고 다니면서 천축으로 향하던 도중 저팔계와 사오정을 만나 일행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삼장,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불경을 구하러 천축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여행 도중 여러 요괴를 만나지만 손오공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런데 일방적인 것은 거의 전부의 요괴는 모두 손오공이 무찌른다는 것이다.

 

관련 사적

구당서191, 열전141, 현장

송고승전24, 당 현주 백마사 현장전.

 

당의 승려. 생몰년은 602? ~ 664. 속명은 진위(陳褘). 하남성 낙양 동쪽에 있는 구씨현(緱氏縣거우스현) 출생. 고전소설 서유기'삼장법사'의 모티브가 된 인물. 삼장법사(三藏法師)라는 명칭은 당 태종이 내린 것이다. 삼장(三藏)이란 명칭은 경장(經藏) · 율장(律藏) · 논장(論藏)에 능했기 때문이다. 법상종(法相宗) · 구사종(俱舍宗)의 개조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명승 원측의 스승이기도 하다. 산스크리트식 법명은 목샤데바(Mokshadeva).

 

60년의 생애를 대략 나누면 유년기를 빼고 처음 15년은 수도, 중간 19년은 인도행과 귀국, 마지막 19년은 경전 한역으로 나누어진다.

 

10세에 낙양의 정토사(淨土寺)에 들어갔으며, 13세에 승적에 올랐다. 장안(長安), 성도(成都=청두)와 그 밖의 중국 중북부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불교 연구에 진력한 뒤, 많은 의문을 풀기 위하여, 또한 불교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627(일설에는 629) 국외여행을 금한 나라의 법을 어기고 몰래 인도로 떠났다. 중국을 나설 때 위기가 여러 번 왔지만 그때마다 불교를 믿는 관리들이 눈감아주거나 도움을 줘서 통과했다.

 

여행 도중 고창국(高昌國) 왕 국문태(麴文泰)의 대접(630)을 받았다. 인도의 바르다나 왕국에 도착한 후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 계현(戒賢:시라바드라) 밑에서 불교 연구에 힘썼다. 거의 인도 전역을 돌며 수학했고 당시 카나우지에 도읍하고 있던 바르다나 왕조의 수장 하르샤 대왕 등의 우대를 받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때 가지고 온 경전이 일부 오는 도중 잃어버려 재수집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국문태에게 받은 극진한 대접에 귀로에서도 들르려고 했으나 이미 당나라에게 멸망해 뿔뿔히 흩어진 상황이었다고 한다.

 

641년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의 두 험로를 넘어 호탄을 거쳐서 645년 정월에 조정과 민간 모두의 대환영을 받으며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그의 생애와 서역에 대한 중국인들의 상상력, 편견 등을 덧붙여 서유기가 나왔다. 당 태종은 공로를 치하하고, 현장에게 환속하여 조정에서 중신으로 활동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현장은 이를 사양하고 단순히 승려로서 살아가기를 원해서 당태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당태종(太宗)의 후원을 받아 경전 741,335권을 한문으로 옮겼다. (전진 때의 구마라습과 함께 양대 한역자로 손꼽혀 구마라습의 한역경을 '구역경', 현장의 한역경을 '신역경'으로 분류한다.) 또한 번역과정에서 이전에 사용되던 용어와는 다른 용어를 채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범어 sattva의 구역인 '중생' 대신에 '유정'이라고 번역하거나 승려를 뜻하는 범어 bhikṣu'비구' 대신 '필추'라고 번역한 것이다. 기존에 번역에서 충분하게 그 의미를 반영하지 못하거나 올바른 음사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이처럼 독자적으로 용어를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12)를 저술하였다.

 

신라의 승려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원측(圓測)이 현장의 제자이다. 원측은 현장법사와 한 살 차이로 당나라에서 활동하면서 현장이 쓴 한문번역 경전을 검수하고, 주석을 달았으며 현장의 유식학을 전수받아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대표저작 <해심밀경소>는 현장이 한문으로 번역한 '해심밀경'에 대해 원측이 주석을 단 책으로 티벳대장경에 티베트어로 수록되어있다.

 

서유기의 영향도 있고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서브컬쳐에서 불교와 관련된 소재가 있을 경우 어떻게든 연관을 지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근데 이 사람의 실제 인생을 보면 웬만한 창작물보다 훨씬 파란만장하다.

 

그가 저술한 대당서역기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백인에 대해서는 얼굴이 보기 흉하게 뒤틀려 있다고 하고 어느어느 지역 주민들이 성품이 문란하고 어디는 무식하며 어떤 사람들은 생긴 모습부터 비열하고 어디는 무척 키도 작고 겁이 많으면서 뒷담화만 좋아하고, 어디는 또 얍삽하다 등등 다니는 곳 사람들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부정적 서술이 계속 끝도 없이 나온다. 대당서역기보다 훨씬 덜하지만, 이로부터 100년쯤 뒤에 쓰여진, 신라 승려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을 봐도 밥을 손으로 먹는 것을 어이없어 하고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의 근친혼을 대놓고 고약한 관습이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오천축국전이나 대당서역기, 이븐바투타 책이 불쏘시개로 취급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해당 견문록들은 신변잡기나 종교 설화 관련 이야기 외에도 당대 현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몇 안 되는 귀중한 1차 사료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비행기나 열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호텔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여행하는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해외여행하고 이들이 즐겼던 여행은 차원이 달랐다. 현장법사의 경우 명목상으로는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간 것이지만 실상은 당나라에 필요한 여러 지리 정보를 얻기 위해서 여행한 사람이고, 이 와중에 길거리에서 탁발을 하면서 먹고 자고 도적들을 피해 며칠씩 산을 타고 넘어가던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여행간 지역 현지인들이 예쁘게 보였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었다. 이븐바투타와 비교해보자면 법학 지식이 풍부했던 이븐바투타는 여행간 지역에서도 법관으로 일하면서 풍족하게 먹고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연유로 자신에게 풍족하게 잘 해주었던 지역 관련해서는 술탄이 영웅호걸이다 지역 주민들이 신앙심이 깊다 정직하다 등등의 갖가지 칭찬을 써놓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그 역시 현지 주민들에 대해 부정적인 기록을 남겼던 바 있다.

 

현장

[1] 河南省. 현재의 허난 성

[2] 洛陽. 현재의 뤄양.

[3] 굉장히 영광스러운 칭호으로, 이 칭호를 받은 승려는 불교가 국교인 동남아시아에서는 대단한 석학으로 존중받는다.

[4] 당나라가 외국인의 입국이 비교적 자유로워 국제적인 분위기였던 것이지, 자국민의 해외여행은 탄압했다.

[5]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되기 이전까지 인도 최대의 교육기관이자 불교 대학이었다.

 

[6] 대중적으로는 현장이 카나우지까지만 방문했다가 즉각 다시 귀국길에 오른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현지 불교를 수학하기 위해 인도 전역을 유랑했다. 당시에는 인도가 지금처럼 어느 정도 통일된 시기도 아니었고, 현대의 힌디어 같은 공용어가 쓰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물론 승려들끼리는 산스크리트어가 통했겠지만) 이것만으로 이미 엄청난 용기와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영어 실력만 믿고 도전했다가는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것이 바로 인도 여행이다.

 

[7] 서유기에도 이 부분을 암시한 에피소드가 있다. 천축 갈 때 '통천하'라는 강을 그곳의 거북이 신이 건너게 해 줬는데, '부처님을 만나 제 업이 언제 끝날지 물어봐주십쇼'라고 부탁해서 현장 일행이 알았구마 하면서 갔는데 이 부탁을 까먹었다. 불경을 갖고 돌아오던 중 다시 그 강을 건널 때 또 통천하의 신의 도움을 받았는데, 강 중간에 와서 이 신이 '부처님께 물어보셨나요?'라고 하니 다들 묵묵부답. 열받은 거북신이 제 몸을 뒤집으며 난동을 부린 덕분에 불경의 일부가 강물에 떠내려가고, 또 일부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강가에 말렸다가 당나라로 들고 왔다고 한다. 이 당시 경전들 중 일부가 손실되는 일만 없었어도 한자문화권에서의 불교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아쉬움을 표하는 학자들이 많다.

 

[8] 여담이지만 그해 여름에 당태종은 고구려를 정벌하여 안시성 전투가 벌어진다. 당태종은 그해 2월에 낙양을 출발했다고 했으니, 현장이 장안에 돌아온 시점이 당태종이 그곳을 떠나던 시기와 거의 일치했을 것이다. 또한 그 해에 일본에서는 일본의 불교 수용에 큰 영향력을 끼쳤고 백제와의 깊은 연관성이 있는 소가씨 정권이 을사의 변으로 끝나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후지와라 가문의 시대를 열게 된다.

 

[9] 이는 태종의 정치적인 의도가 반영된 제안이었다. 당시 당태종은 위왕 이태와 진왕 이치간의 갈등으로 인한 후계자 문제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좁아져 장손무기등의 외척들이 득세하자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네임드인 현장을 자신의 정치적 측근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10] 필추를 당대 발음으로 읽으면 '빅슈'에 가까운 발음이 되니, 비구보다 원음에 가깝게 음역하였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어 발음상 편하지 않아 비구에 밀려 버렸다. 구마라집의 음역과 현장의 음역을 비교하면 구마라집의 음역이 훨씬 발음하기 편하다.

 

[11] 물탄 여행 중에는 지역 관리들이 자신의 일행에게 요리사 20명을 붙여주었는데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물탄의 관리들은 유능하고 신앙심 깊은 청백리라는 서술을 남겼으며, 몰디브에서는 여러 애인을 두었는데 이 때문인지 몰디브 사람들이 매우 정직하고 신앙심이 깊다는 서술을 남겼다.

 

三藏法师是什么意思?什么人能称为三藏法师?

作者:圣严法师

我们常常看到在很多佛经的封面上,写着某某三藏法师译,最常见的当然是hi玄奘三藏跟鸠摩罗什三藏,但是一般人并不了解三藏法师是什么意思?还有现在的出家人为什么不叫三藏法师呢?希望师傅开示。

三藏法师的三藏,就是佛教的经、律、论三类的书籍、文物、圣典。这三藏,经是佛所说的经;论是菩萨们对于佛所说的经,以及佛制的律加以解释、组织、说明,而把它成为一个有系统的书,这叫做论;律就是佛对于出家的僧团,生活的规律做的一些规定。研究经、律、论三藏的人,精通经、律、论三藏,而且要通达他的梵文原典的人,叫做三藏法师

 

在我们中国来讲的话,能够通达原典的,所谓原典是梵文的原典,一定是到印度去取经的人,或者是从印度到中国来传佛法、翻译圣典的人,他们才是真正的通达经、律、论三藏。如果仅仅是懂汉文,不能够成为三藏法师,因为原典不清楚,只有通达原文的人,他们成为三藏,原因是什么呢?因为汉文并没有全部把梵文的东西全部译过来,所以是看到汉文,并不是等于看到所有的佛教圣典的全部,因此,不能够叫做三藏法师。

 

在我们中国另外还有一个原因,凡是主持译经道场,主持译经法会,主持翻译经典的事业的那位主持人,这叫做三藏法师;如果不是主持的,虽然你也懂得梵文,不一定能够成为三藏法师。三藏法师多半是由于朝廷皇帝给他认可的,给他授命的,而成为一个做译经的,这就是译经主、译主、译经的主持人,像这样子的人,在中国是不多的。我们在历史上看到的,多半是从印度来的,成为三藏法师,而中国的出家人之中,很少成为三藏法师的;从印度来的,比如说仅仅是翻译了一部小的经典、小的论典、小的律典,也不能成为三藏法师,这个是小规模的,个别的行动,这是叫做某某高僧,这某某高僧翻译,并没有说某某三藏法师。能够成为三藏法师,一定是大规模的翻译佛经的一个组织体的主持人,这叫做三藏法师。

 

在我们中国佛教的历史上,我们看到最伟大的西方来的,就是有鸠摩罗什三藏、实叉难陀三藏,义净三藏是中国人,玄奘三藏是中国人,真谛也叫三藏,真谛论师也叫三藏,多半是印度人。到了中国以后,如果是印度人到中国,仅仅是翻译小经典,一部经典两部经典不算,而是翻译大批的经典的人才算;中国人如果参与翻译经典的道场,不能够算是三藏,一定是主持道场的人才是三藏。另外,如果说是中国人也只能够翻译一部、两部小经典,不算三藏,一定是大批的经典、论典翻译出来的人,那叫做三藏。

 

所以三藏法师,在中国来讲,可以说既是表明他对佛法认识的深度广度,他是个全才,同时也表示着他是一个非常尊贵的宗教的一项职务、一个名称、一个职称。就是现在有一些人,他们已经对佛教的经、律、论是个大通家,三藏教典非常的熟悉,还是只能称为法师,不能够称为三藏法师,因为他没有主持翻译。所以三藏法师的重要性,在于他的身份,以及他的工作上的一种性质,以及他跟中文、梵文两种之中,主要的是对梵文很熟悉

  阿弥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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