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수호지의 내용 중 정사에 실린 기록들 수호지 이야기

一字師 2023. 6. 1.
반응형

수호지의 내용 중 정사에 실린 기록들 수호지 이야기

 

图片来源 《水浒传》鲜为知的真相

 

『수호전(水滸傳)』은 북송(北宋) 연간에 실재했던 송강(宋江)을 비롯한 도적들의 이야기이다. 정사(正史)인 『송사(宋史)』에도 기재된 ‘송강의 이야기’는 북송 말부터 평민은 물론 사대부 사이에도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여, 남송(南宋)과 원대(元代)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화본(話本), 잡극(雜劇), 잡희(雜戱)가 생겨났다. 그러다가 원말명초(元末明初) 무렵에 소설(小說)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배계층에서는 이 책을 ‘회도(誨盜)’나 ‘범상작란(犯上作亂)’을 유도하는 위험한 책으로 인식하여 수차례 금서(禁書)로 지정하였다. 금서로 지정된 이후에는 역설적이게도 이 책의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특히 이 소설의 내용을 주목한 이탁오(李卓吾), 종백경(鐘伯敬), 김성탄(金聖嘆), 왕망여(王望如) 등은 이 책을 바탕으로 평점본(評點本)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고안해 내었고, 진침(陳枕) 등은 이 소설 결말에 불만을 품고 이후의 내용을 개작(改作)하여 『후수호전(後水滸傳)』과 같은 속서(續書)를 만들기도 했다. 중국소설사에서, 소설 하나를 놓고 중앙정부에서 여러 차례 금서로 지정한 것이나 현존하는 판본이 다기(多岐)하여 판본의 계통을 설명할 수 없는 문제작이 바로 『수호전』이다. -본문 중에서-

 

[ 水滸傳 ]

* 宋江의 난 ; 명청 시대 이를 소재로 {水滸傳} 구성

- 史書의 기록 '宋江 36인이 하북·경기 일대에 횡행, 관군 수만인도 진압 불가능. 최후에는 해주에서 관군에게 투항' '그 재능이 過人하여 罪過하고 招降시켜 方臘의 난을 평정하도록 했다.'

 

* 그런데 송강이 항복한 것은 방납토벌 이후, 그는 방납정벌에 출정하지 않았음

- 방납 토벌에 참여한 童貫의 부하에 宋江이라는 자가 있었지만 양산박의 송강과는 전혀 다른 사람

 

1) 출토된 신자료 (북송말 范圭가 찬한 '宋故武功大夫河東第二將折公墓誌名')

a. 북송말 折可求가 일족을 대표하여 金軍의 침입을 막다가 투항하게 됨, 묘비의 주인공인 折可存은 이 折可求의 동생

b. 그런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 적혀져 있음, 折可存이 방랍의 난을 토벌하여 공을 세움, 방납이 패전하여 포로가 된 것이 宣和3(1121) 426, 이에 折可存都下로 개선, 도중에 草寇 宋江追捕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

c. 이에 대한 牟潤孫의 해석 '송왕조는 유능한 장군이라도 권력을 주지 않고 모반 등의 혐의를 받는 것이 상례, 송강도 마찬가지일 것, 마지막에 죽을 때를 느낀 송강이 반란을 일으킬 것 같은 李逵를 불러 함께 자결하는 것과 유사'

d. 그런데 너무 빠르지 않는가?

e. 남송의  {東都史略}에 의하면 송강이 방납의 난을 토벌하는 기록이 2번 기록, 한번은 4, 또한번은 6, 그렇다면 2인일 수 밖에 없음, 송강이라는 이름은 지극히 평범

 

2) 1인으로 된 원인

a. 송강이라는 이름이 사서에 나타난 것이 선화1년에서 선화3년까지 단 3년에 불과, 그래서 한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

b. {宋史}에서 송강이 宣和32淮陽軍 지방에 나타났다고 기록한 뒤 바로 이어서 조정이 張叔夜에 명하여 송강을 招降시켰다고 기록, 따라서 함께 읽으면 招降한 것이 바로 2월 이후라고 생각되는 것

c. {宣和遺事}라는 책을 지나치게 신봉한 결과, 이 책은 역사소설, 이 중에 송강등 36인의 이름을 들고 이들이 일단을 결성하였던 경로를 기록하고 최후에 송강이 방랍토벌군에 참여한 공이 있다고 결론을 냄, 원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 물론 수호지보다는 빨리 만들어짐

d. {송사} 등에 조정이 송강을 초항시켰다든가 송강이 출항하였다든가 하는 표현이 많음, 그런데 이들 표현은 마치 송강이 선택의 여유가 있었던 뉘앙스를 줌, 그러나 송강의 출항 상황은 {송사} 張叔夜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 즉 장숙야가 결사대 1000여명을 해주에 복병시켜두고 경장부대로 하여금 싸우게 한 뒤 거짓 패주, 복병들이 송강의 배를 불태워 대패, 부두목이 생포되자 송강도 항복, 즉 한 지방장관인 知州의 꾀에 의해 대패를 받았던 정도의 실력에 불과함, 방랍에 비하면 형편없는 실력

 

<양산박의 핵심 브레인-지다성 오용>

* 중국 민중의 {수호전} 애호와 1970년대 중국의 {수호전} 비판

 

- 중국 문화 이해에 있어 {수호전}의 가치

; 중국 민중의 생활 모습·전통 시대의 시대 상황 묘사, 더우기 중국사의 농민 반란 전통을 생생하게 전해줌(官逼民反. 逼上梁山)

 

- {수호전}의 작자 : 諸說이 분분하나 108인 호걸이 양산박에 모여들기까지의 줄거리는 施耐菴이 정리, 이후는 羅貫中의 작품, 단 시내암이라는자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도 적지 않을 뿐 아니라 나관중도 그 사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음

 

- 수호전의 유행

장편소설이지만 108명의 주인공 상호간에는 양산박에 들어온 순서만이 있을 뿐 상호간의 인과관계가 없가 없어 실질적으로는 단편소설을 묶어놓은 듯함

그 각각의 단편소설의 구성과 묘사가 뛰어나 각각 戱曲 혹은 만담 등으로 실연되면서 오랜동안 민중과 함께 성장

사실 청대에 들어오면 {수호전}은 금서에 속함 (청조는 사상통제에 매우 날카로운 반응, {수호전}이 모반을 장려한다는 것이 금지 이유)

그러나 집마다 四書五經과 함께 읽혀진 책

 

- 다양한 판본의 流傳 : 70회본, 100회본, 120회본 등

a) 가장 이른 원본은 100회본이었던 것 같음

그 내용은 宣和遺事와 거의 일치, 즉 북송말년 송강을 수령으로 하는 도적의 일단이 산동성내 梁山泊이라는 호수가운데의 요새를 세울 때까지의 경과, 그리고 후에 조정에 귀순하여 浙江에서 일어난 方臘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끝남

그런데 {수호전}은 여기에 더하여 方臘 정벌 이전에 大遼國을 공격하여 이를 굴복시켰다는 매우 비역사적인 부분이 첨가되어 있음

明末에 성립되었을 것 (嘉靖년간에 성립, 그 뒤 萬曆년간 지금의 모습으로 출현

b) 120회본

遼國 공격과 方臘 정벌 사이에 田虎王慶의 반란 평정 이야기를 삽입하여 20회분을 첨가

100회본보다 뒤인 明末 天啓·崇禎년간

c) 그 밖에 110회본, 115회본 (120회본을 간략히 한 것)

124회본 (水滸後傳을 첨가한 것)

d) 70회본의 유행

108인 호걸이 梁山泊에 집결하여 서열에 따라 각기 부서를 정해 임무를 맡기까지의 내용

따라서 송강집단은 반정부태도를 계속 유지하게 됨, 여기에 소위 {續水滸傳}이 송강집단을 토벌한다는 내용의 소설이 생기게 됨

; 17세기 초 70회본이 정리 간행된 후 여타 판본을 압도, 다른 종류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릴 정도

 

- 70년대 중반 4인방 주도의 {수호전} 비판

; 주로 70회 이후의 일, 즉 송강이 귀순한 후 방납의 난 토벌에 종사한 것을 문제로 삼음. 기타 조정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요소(官員 대신 시행, 忠義 강조 등)

특히 송강의 난 보다 더욱 소위 '계급의식'에 투철했던 방납기의 정벌 종사가 비판 ; 체제 옹호적·投降主義的이라 지적

그러나 이 비판은 다분히 정치적 지향·의도를 지녔던 것 ; 당시 등소평 등 개혁파의 등장을 견제하기 위한 시도

- {수호전}의 체제 옹호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

; {수호전} 자체의 전승, 활자화를 위한 안전판과 같은 요소였을 것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70회본이 압도적 인기를 누리고 宋江 투항 이후의 내용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던 사실도 이와 관련될 것

 

* 徽宗李師師

- 수호전에도 휘종이 등장, 81회에 '燕靑이 한밤중에 道君을 만나다'라 되어 있음, 즉 송강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미청년 燕靑(온몸에 파란색으로 문신, 피리를불고 노래를 부르는 반면 무예에도 뛰어남)이 돈많은 상인행세하면서 李師師에 접근, 李師師의 소개로 道君皇帝와 회견하여 宋江등의 본심은 조정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귀순하여 황제에 충성을 다하고 싶다는 고충을 전함, 결국 휘종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내용

 

- 70회본이라면 별다른 사족이 필요없었겠지만, 100회본이라면 과거 반정부행동으로부터 일전하여 정부군에 편입되는 전환점으로서 그들의 귀순을 묘사설명하는 부분이 반드시 필요, 사실 남송이 되면 반란군의 귀순은 다반사, 그러나 수호전은 처음부터 대의명분을 내걸고 시작, 즉 폭군과 탐관오리를 공격한다는 것이었으므로 간단히 귀순하였다고 처리할 수는 없음 결국 李師師라는 여인을 빌어 梁山泊의 대표와 道君皇帝사이에 직접 거래를 추진, 최고 우두머리간의 담판

 

<수호지 꽃미남 낭자연청>

- 그런데 이는 완전한 상상의 산물은 아님,

휘종의 개봉의 靑樓(妓女거리) 잠행 습관, 절색인 李師師라는 미녀와의 만남이라는 사실 ; 당시 개봉의 경기가 매우 좋아 인심이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

여기에 더해서 남송 張端義[貴耳集]이라는 수필속에 보면, 하급관리인 周邦彦李師師의 집에 있을 때 휘종이 들어옴, 그래서 침대밑에서 李師師와 휘종간의 대화를 듣고 이를 글로 남김, 나중에 李師師가 이를 노래로 부르자 크게 화가나서 잡아들이라고 명했으나 李師師가 슬퍼하지 용서하였다는 기록

 

* 方臘과의 문제

- 遼國과의 전쟁

공식적으로 서로 大宋, 大遼라고 불리우는 상황, 이러한 요국을 宋江이 다른 정부군의 도움 없이 굴복시켰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온 송강은 정9품관 즉 육군준위라는 낮은 계급에 봉해짐, 명대의 상황을 반영하면서도 픽션의 요소도 느끼게 함

公孫勝이라는 인물이 이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 마법을 사용하여 검은 부름을 일으키고 뇌우를 오게 하기도 하며 적이 마법을 사용하면 이를 없애는 역할도 담당

그런데 公孫勝은 이 이후 은둔생활, 여기에 수호전 작자의 고뇌가 담겨 있음, 즉 다음 조정으로부터 명을 받은 방납토벌에서 수많은 전사자를 내면서 이야기를 마감하기 위해 그 이전에 송강의 업적, 그리고 1사람도 전사자가 나지 않는 상황을 마련, 이를 위해 公孫勝이 필요, 반대로 方臘 토벌때에는 이러한 자가 있으면 안됨, 즉 명예로운 퇴진을 위해 중요한 전쟁이 필요한 것이며 이것이 對遼 전쟁임

 

[ 方臘의 난 ]

- 宣和 2(1120) 兩浙路에서 기병, 연호를 세우고 관직을 개설

- 방납은 원래 '喫菜事魔'란 교단(摩尼敎의 일종)首領

; 채식, 酒肉不食, 교단내 평등 추구, 인생은 고된 것이므로 살인은 그 고통을 덜어주는 것, 따라서 살인이 많으면 成佛한다고 여김

- 반란 발생과 더불어 세력 급격히 확대

- 당시 송은 금과 연합, 를 공격하는 도중이었으나 방납의 난으로 차질

정예 금군을 반란 진압에 돌림

- 결국 반란은 반년만에 평정

 

수호지 영웅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

 

: 문재봉(文裁縫)

중국의 4대명저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은 송휘종(宋徽宗) 통치시기의 기세가 대단했던 양산박 농민의거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상 진실한 송강(宋江)과 양산박의거는 소설책에 나오는 것과 같았을까?

 

실제, 역사자료를 뒤져보면, 송나라의 300여년간, 크고 작은 농민반란은 수백번있었다. 이는 모든 역대왕조가 모두 그러했다. 다만, 송나라의 농민의거는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하지는 못했고, 그저 일개 지방에 그쳤고, 참여한 인원수도 한계가 있었으며, 지속된 기간도 짧은 편이었다. 송나라에서 일어난 수백번의 농민반란중에서 송강이 이끄는 양산박농민의거는 규모로 보거나 영향력으로 보거나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작은 반란이 이처럼 유명하게 되었는데, 첫째는 남송때 편찬한 <<선화유사(宣和遺事)>>에서 이 농민의거를 소설화하고 이야기로 만들었으며, 둘째는 명나라때 시내암이 <<수호전>>을 썼으며 이때 양산박 영웅호한을 주제로 하게 됨에 따라, 양산박과 송강의 이야기가 민간에 퍼지게 되었고,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게 되었으며,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소설은 비록 역사와 약간의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송강의거는 북송말기인 선화연간에 일어났고, 농민반란을 촉발시킨 도화선은 북송이 설치한 "서성괄전소(西城括田所)"였다. 송휘종은 재정곤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화원년(1111)에 이 기구를 설치하였는데,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긁어모으는데 전념하는 기구였다. 반란은 양산박을 근거지로 하게 된다. 양산박은 황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송강등은 하북극도(河北劇盜)라고 불리웠다. 양산박은 운주(鄆州, 지금의 산동성 동평) 서남쪽에 양산(지금의 양산현 남쪽)을 둘러싼 주위의 큰 호수였다. 이 큰 호수는 북송때 황하가 두번이나 둑이 무너지면서 형성되었다. 그때 황하의 둑이 무너지면, 강물이 범람하여 원래 얕은 땅에 물이 들어왔고, 양산주위에 방원 800리의 큰 호수가 형성된 것이다. 그때, 양산주위의 생활은 모두 물고기를 잡고, 연밥을 따며, 부들을 거둬서 먹고 사는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그들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그런데, 양산과 같은 이런 생활조건하에서도 북송정부는 방대한 군사적 지출을 감당하고, 요나라와 금나라에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곳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원래 지급할 세금부역외에 한꺼번에 10만여관을 증가시킨다. 사람들은 조정에 세금은 납부한 후에, 생활조차 연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방정부는 세수증가를 위하여, 양산박의 주위에 관문을 설치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양산의 백성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연받을 따는데도 인두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누락된 세금에 따라 바로 형벌을 가했다. 게다가 가뭄이나 홍수등 재해를 입어서 백성들이 수확을 하지 못해도, 세금은 감면되지 않았다. 양산부근의 농민들은 더이상 관청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양산박을 기지로 반항하게 된 것이다.

 

반란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역사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송사. 후몽전>> <<선화유사>>등인데, 겨우 36명의 이름이 전해진다. 36명은 송강, 조개, 오용, 노준의, 관승, 사진, 시진, 완소이, 완소오, 완소칠, 유당, 장청, 연청, 손립, 장순, 장횡, 호연탁, 이준, 화영, 진명, 이규, 뇌횡, 대종, 색초, 양지, 양웅, 동평, 해진, 해보, 주공, 목횡, 석수, 서녕, 이영, 화화상, 무송이다. 당연히, 36명만으로는 농민반란을 일으켜, "제와 위 지방을 횡행"할 수 없었을 것이고, 송나라관병 수만명에게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36명은 반란군의 크고작은 장군들로 본다. , 송강과 함께 의거에 참여한 사람은 아마도 36명일텐데, 나중에 이 36명은 각각 부대를 하나씩 통솔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가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송강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에는 도대체 몇명이나 있었을까? 사서에 정확한 기록은 없어, 통계낼 수는 없지만, 개략 계산해보면 수천명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서에 기재된 송강의거에 참여한 사람은 36인인데, 나중에 <<수호전>>에서 108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낭영은 <<칠수류고>>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나관중이 책으로 만들고자 하면서, 36명을 천강으로 하고, 여기에 72명의 지살을 추가했다" 그래서 양산박 백팔호한의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송강반란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수호전>>에 따르면, 양산박의 영웅들이 모인자리에서 송강은 앞날을 생각해여 조정의 초안(招安)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조정에 귀순한다. 송강은 장군이 되어 방랍의 반란을 평정한다. 그러나 송휘종은 송강을 죽여버리고, 나머지 양산박의 호한들도 죽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여 몇명 남지 않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양산박의 호한들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정부에 귀순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송말원초에 만들어진 <<선화유사>>에는 양산호한들이 정부에 귀순한 후 모두 작위를 받았다고 기록하여, 수호전의 내용과 일치한다. 북숭말기에 이약수가 쓴 <<포도우성>>에도 송강등 36인이 함께 작위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약수가 살았던 시기는 북송말년이어서 양산호한들이 활동한 시기와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그가 비록 직접 양산박 호한들이 귀순하는 장면을 보지는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기록이 그다지 사실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정사의 기록을 보면, 양산호한들은 정부에 귀순하지 않았고, 해주지주(海州知州)인 장숙야(張叔夜)가 이끄는 군에 포로로 잡혔다고 되어 있다. 선화33, 송강은 부대를 이끌고 물길을 따라 남으로 확장하였으며, 부근에 있는 연해의 관리들이 당황하게 된다. 해주지주인 장숙야는 나이가 많은 관리였는데, 신속히 몇 개 현의 무장역량을 끌어모아, 천여명의 결사대를 조직한다 그리고는 매복을 하여 양산호한을 전부 붙잡고자 한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송강일행은 함정에 빠졌고, 그들은 황급히 육지로 올라와 관군과 싸우고자 했다. 그리고 아주 적은 인원만을 배에 남겨두었다. 장숙야는 사람을 시켜 배를 불태우게 한다. 송강은 무기와 물자를 싣고 있던 배를 불태운 것이다. 송강일행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되고, 투지도 약해졌다. 그러다 결국 장숙야에게 패하여 포로가 된다. 정사를 보면, 양산호한은 초안을 받아 귀순한 것이 아니고, '36인이 동시에 작위를 받은 것'도 아니다. 송강등을 격파한 후, 장숙야와 두 명의 관리는 함께 송휘종의 상을 받고, 장숙야는 이후 관직이 계속 올라가서, 조정의 중신이 된다. 그의 관직이 높아진 것은 송강등을 붙잡은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사의 이런 기록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먼저, 송강등 영웅호한들은 유동성이 커서, 행군이 아주 빨랐다는 석이다. 그리고 이미 백전노장들이고, 지모가 뛰어난 오용등이 있어, 행군노정은 면밀히 계산했을 것이므로, 장숙야가 끌어모은 1000여명의 장사 정도는 송강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송강일행의 전선이 불에 타더라도, 양산호한의 일관된 방식은 배수진을 치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인데, 어찌 모두 투지를 잃고 생포된단 말인가. 그리고 하룻밤만에 송강등 36인을 모두 체포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장숙야도 역전노장이고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두 명의 경험이 풍부한 관리가 도와주었다. 그러므로, 몇 개 현의 무장역량을 끌어모았고, 장숙야 자신의 부대만으로도 송강을 무찌를 능력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송강등이 생포된 것도 역사적 사실일 수 있을 것같다.

 

이상의 주장 이외에, 양산호한의 결말에 대하여는 다른 몇가지 더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중 하나는 왕등(王登) 부자가 송강등 양산호한을 패배시키고,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북송말년의 사인(詞人) 갈승중이 <<승의랑왕공묘지명>>에서 기록하고 있다. , 왕등의 묘지명에 따르면, 왕등이 용감하게 잘 싸운 것을 칭송하고 있다. 웃기는 일은 갈승중이 이 묘지명을 쓴 후 얼마되지 않아, 한 글장이는 왕등의 아들인 왕사심을 위하여 묘지명을 썼는데, 거기에 쓴 내용은 왕사심이 송강등을 격파했다는 내용이다. 이 두 편의 묘지명을 잘 대조해보면 몇 가지 헛점이 드러난다. 왕등(부친)의 묘지명에는 왕등이 스스로 부대를 조직하여 송강의 수천명형제를 섬멸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아들의 묘지명을 보면 아들이 송강을 격파했는데, 송강등은 도망쳤다고 되어 있다. 더욱 웃기는 일은 왕씨부자 2명의 관직은 목양현위에 불과했고, 수하는 기껏해야 80명인데, 어찌 송강의 수천무리를 격파할 수 있었겠는가? 송강등이 1개현위의 부대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설은 성립되기 힘들다고 본다.

 

또 다른 견해는 양산박의 호한들이 대부분 채거후(蔡居厚)에 의하여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채거후는 북송 내주교수(지금의 산동 평도시) 사람이다. 일설에는 항주사람이라고도 한다. 채거후는 진사급제하고 창주, 응천부, 진주등의 지방을 다스렸었다. 일찌기 기거랑, 우간의대부, 호부시랑등의 직위에까지 승진한다. 나중에 사고로 파직당한다. 채거후는 얼마되지 않아 병으로 죽는데, 친척인 왕생도 급사한다 그런데, 3일후 왕생이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사람들에게 아주 신비롭게 알려준다. 자신이 죽은 후에 음조지부(陰曹地府)에 갔는데, 아주 무서웠다고 한다. 거기서 걷고 걷다가 채거후를 만났는데, 그는 죄수의 모양을 하고, 두명의 귀신이 그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흘렀고 채거후는 고통을 못참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왕생이 다가가서 채거후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채거후는 운주에서 양산호한 500인을 죽였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채거후의 처는 이를 듣고 도사를 청하여 죽은 남편의 망령을 위한 제를 지내주고, 죽은 양산호한의 망령에 사죄하였다. 그러나, 채거후가 농민반란을 진압하는데 가담했다고 하더라도, 운주는 아니었다. 채거후의 경력과도 맞지 않을뿐아니라, 송강등의 사적과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믿기 어렵다.

 

水浒传鲜为知的真相

水浒传是一部深受人们喜爱的古代经典名著随着新版电视剧的热播梁山好汉的形象又一次鲜活地走进了人们的视野作为文学作品,《水浒传中的大部分人物和故事情节都是虚构的但也有一些人和事在历史上确有原型

 

水浒传作为四大名著中最早的白话小说在民间其影响是很大的封建朝廷屡次将其列为禁书草根们却一直争相传诵文人们评价奇高明末清初的金圣叹把水浒传离骚》、《史记等并列谓之六才子书

 

水浒传为施耐庵所著一是见于明人笔记中胡应麟少室山房笔记等书均有记载二见于水浒传雄飞馆刊本贯华堂刊本的题号尤其是贯华堂本该版本是金圣叹腰斩百回本只保留前七十一回认为前七十一回是施耐庵所著后为罗贯中所续并自己伪造了序言此版本一出传播十分广泛施耐庵写水浒传就成为很多人的看法

 

新中国成立后人民文学出版社整理出版的水浒传成为流传最广的版本其明确题为施耐庵著这也成为今天最通行的看法然而施耐庵究竟何许人也施耐庵名子安号耐庵元至顺二年1331进士曾在钱塘做过小官后退出官场潜心著书立说

 

作为中国第一部歌颂农民起义的长篇章回体小说,《水浒传描写了北宋徽宗时以宋江为首的108名好汉在梁山聚义杀富济贫的故事很多人不知的是作者施耐庵其实并不是本名据说施耐庵在创作江湖豪侠传石秀智杀裴如海一章时感到思路枯竭笔不流畅就不愿再写下去友人得知此事给他讲了一个和尚潜心念经端坐庵内30居然把木鱼敲了个洞的故事他颇受启迪便写了耐庵两字贴在书房作为座右铭告诫自己潜心创作后来干脆更名为耐庵

 

历史上确有宋江其人也有宋江起义据说宋江起义军中共有36员主要头领,《水浒传所描写的梁山108将是小说家的虚构作者欲成其书以三十六为天罡添地煞七十二人之名目的是使小说更添传奇色彩以迎合百姓口味便于流传但小说毕竟是文学作品读者切不可将其当做信史来看

 

宋江起义后正如小说中所言占据了梁山泊但很快就离开了此地转战于今山东青州济南一带攻城略地杀富济贫声势日隆引起了朝廷的注意这时担任亳州知州的侯蒙提了一个赦过招降的建议宋徽宗于是便派侯蒙前往招安结果侯蒙途中病亡此事也就不了了之

 

后来朝廷又派人马征讨宋江率众南下沂州与官军周旋11212攻取淮阳军继由沭阳乘船进抵海州被知州张叔夜设计包围宋江被俘投降起义遂被镇压这段史实在宋史?张叔夜传中被描绘得活龙活现宋江起河朔转略十郡官军莫敢婴其锋声言将至叔夜使间者觇所向贼径趋海濒劫钜舟十余载卤获于是募死士得千人设伏近城而出轻兵距海诱之战先匿壮卒海旁伺兵合举火焚其舟贼闻之皆无斗志伏兵乘之擒其副贼江乃降

 

历代史籍特别是正史中对宋江的记载极为稀少其生卒年月籍贯投降后的结局等皆不可知总的说来宋江起义在当时的规模和影响都不是很大但因南宋时编印出版了一部宣和遗事》,把宋江起义史事演义化故事化兼之明初的长篇话本水浒传又将梁山故事描述得更加生动鲜活因此宋江起义在民间产生了极为广泛的影响家喻户晓妇孺皆知

 

水浒传鲜为知的真相 - 天空之城 - 天空之城

历史上确有武松其人

 

据史书记载武松原是浪迹江湖的卖艺人貌奇伟尝使技于涌金门外非盗也杭州知府高权见武松武艺高强人才出众遂邀请入府让他充当都头不久因功被提升为提辖成为知府高权的心腹后来高权因得罪权贵被奸人诬陷而罢官武松也因此受到牵连被赶出衙门

 

继任的新知府虐政殃民百姓怨声载道人称蔡虎武松对这个奸臣恨之入骨决心拼上性命也要为民除害一日武松身藏利刃隐匿在蔡府前候蔡虎前呼后拥而来之际冲上前向他猛刺数刀结果了他的性命官兵蜂拥前来围攻武松武松终因寡不敌众被官兵当场捕获后惨遭重刑死于狱中百姓深感其德葬于杭州西泠桥畔后人立碑题曰宋义士武松之墓

 

高俅是水浒传中的第一奸臣他溜须拍马不学无术无恶不作陷害忠良东京八十万禁军教头林冲就是被他害得家破人亡历史上的高俅果真如此吗我们翻开宋史》,发现了一个令人疑惑之处:《宋史中竟然没有高俅的传记不论是正面人物还是佞幸奸臣的传中都没有他只是在其他人的传中偶尔提到他的名字由此我们可以得出这样一个信息高俅可能并非像小说中描绘的那样卑鄙地位也没有那么显赫

 

真实的高俅究竟如何呢据南宋王明清的挥麈录中记载高俅者本东坡先生小史草札颇工东坡自翰苑出帅中山留以予曾文肃文肃以史令已多辞之东坡以属王晋卿挥麈录是南宋中期的一部史料笔记全书主要记载了南北宋之交朝野各方面的情况内容涉及当时的政治军事文化社会等其资料来源大多得自当时的文献以及撰者亲友的口述问世之初就得到了一些学者的称道被官私史书屡加征引是宋代史料笔记中的上乘之作

 

王明清对高俅早年身世的描述与水浒传中相差无几,《水浒传中说他吹弹歌舞刺枪使棒相扑玩耍颇能诗书词赋,《挥麈录中说其草札颇工意思是文字功底很好所以做了东坡先生的小史后来苏轼因外放任职将高俅推荐给了驸马都尉王晋卿这与小说中的描写也是大同小异

 

历史上真实的高俅其实是个颇念旧情的人据说他发迹后对老主人苏轼一家照顾颇周,《挥麈录中是这样说的然不忘苏氏每其子弟入都则给养恤甚勤靖康初年金人入侵中原高俅随驾至临淮后以疾辞归京师宋史?钦宗本纪记载元年五月己卯开府仪同三司高俅卒高俅最后死于家中也算善终纵观高俅一生以幸臣而列显位虽不似蔡京童贯等人那样罪恶累累但也的确无政绩可陈这大概就是宋史不为其立传其他史籍对其记述也都寥寥无几的主要原因

 

水浒传金瓶梅中都出现过西门庆是否是同一个人呢

 

历史上确实有一个西门庆但和水浒传中的西门庆却是南辕北辙明朝初年阳谷县有一暴虐的知县姓武武知县有一妻一妾潘氏和金氏其为人极其阴险黎民百姓深受其害县城西门的一个名叫的大户受害最深百姓对武知县敢怒不敢言偷偷为他取了一个武皮匠的绰号言其心毒手狠精于盘剥又叫他卖饼大郎言其好从穷苦百姓嘴边牟利施耐庵在写水浒传以一些社会上的人物和流传故事为原型因此在小说中就出现了一个西门庆

 

金瓶梅中所描绘的西门庆乃是明朝嘉靖年间一个攀附权臣蔡京门下的横行乡里的官商泼皮已不是水浒传中的西门庆了。《金瓶梅作者对当时奸党贪赃枉法地痞流氓为非作歹深恶痛绝特意利用水浒传借题发挥抨击时弊

 

水浒传的作者把流传于民间参差不齐水平各异的各种传说和作品进行整理加工编撰创作最终使其成为一部伟大的文学名著。《水浒传其实是历经许多作者才趋于完善的它凝聚了许多作者集体智慧的结晶!《水浒传之所以成为名著关键是其白话小说的写作手法具有鲜明的时代特色草根们阅读通俗易懂传播起来朗朗上口具有振奋人心的效果文人们把其小说作为学习借鉴的范本具有提升之功效政治家怎么看我就不管他了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