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실존 양산박 36인

一字師 2023. 6. 2.
반응형

실존 양산박 36

图片来源 水浒传另一个蓝本宋江三十六人赞

청면수 양지

이진의 ( 李進義 = 옥기린 노준의 )

표자두 임충

왕웅 ( 王雄 = 병관삭 양웅 )

소이광 화영

소선풍 시진

몰우전 장청 ( 張靑 = 張淸 )

금창수 서령

박천조 이응

목횡 ( 穆橫 = 몰차란 목홍 )

대도 관승

병울지 손립

 

( 화석강 운반 역사 12= 송강빼고 계산 )

 

조천왕 조개 ( = 사망 )

오가량 ( 지다성 오용 )

벽력화 진명

적발귀 유당

완진 ( 院進 = 院小二 )

완통( 院通 = 阮小五 )

완소칠

연청

 

( 채태사 생진강 탈취 사건 8-1=7= 송강빼고 계산 )

 

모착천 두천 ( 杜千 = 杜遷 )

장령 ( 張橫 )

급선봉 삭초

쌍창장 동평

 

( 송강 부친 병구환 위해 환향시 술집에서 만난 3+ 양산박을 동경하던 포리 1= 송강빼고 계산 )

 

미염공 주동

삽시호 뇌횡

흑선풍 이규

신행태보 대중

이해 ( 李海 = 혼강룡 이준 )

구문룡 사진

입운룡 공손승

낭리백조 장순

행자 무송

반명삼랑 석수

 

( 포청으로 돌아가다 염파석 살해 후 관의 추적시 만난 10= 송강빼고 계산 )

 

송강이 이상 10인과 양산박에 입산해 구천현녀묘에서 얻은 기록을 말하니

그들은 곧 송강을 수령으로 추대

 

( 이 때 이미 조개가 죽고 없었으므로 양산박의 적도는 송강 이외 33)

 

조정에서는 쌍편 호연작을 대장으로 삼아 송강 등을 잡게 하였으나

번번이 싸워서 패하고 양산박에 가담 ( 1)

 

이 무렵 불승 화화상 노지심 합류

( 1인 이상 송강 외에 36)

 

중국의 시천 사상

고상조 시천은 재주가 뛰어난 도둑이었던만큼, 절강성의 성도인 항주에는 시천의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없어졌지만 그는 지금도 좀도둑과 빈집털이들의 수호신으로 신앙되고 있다고 한다.

 

청나라 말기까지 존재했던 그의 사당에는 도둑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참배했는데, 이는 도둑의 신이 곧 재물의 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시천이나 제천대성 손오공처럼 중국의 도교는 문학속의 일면으로도 신으로 추앙받을수 있었다.그러나 시천은 그리 잘 알려진 신은 아니다.

 

채경에 관련된 고사 :

홍매의 [이견지夷堅志]에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 있다.

 

선화 7년에 시랑 채거후가 등의 악성 종기로 세상을 떴다. 죽어서 지옥에 간 채거후가 형벌을 받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자기 처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말을 전하도록 했는데, 그 내용은 자신이 벌을 받는 것은 운주의 일 때문이니 빨리 공덕을 쌓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채거후의 아내가 통곡을 하며 말했다.

 

"시랑이 양산박의 6백명이 투항했을 때 내가 여러번 만류해도 듣지 않고 그들을 주살하더니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이 고사가 황당무계한 것이기는 하나, 송강과 그의 일당이 투항하였지만 주살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시랑 채거후가 양산박의 호한들을 죽인 것으로 지옥에서 극심한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당시 송나라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반감과, 양산박 호걸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수호지의 실제인물 수호지 이야기

실제 선화유사에 나오는 36명에 대한 소개와, 정보를 알고 싶으시면 수호지 코너의 선화유사로 가시면 자세히 아실 수 있습니다.

 

아랫 글들은 김한성님의 무사열전의 글을 옮겨 본 것입니다..

 

적발귀 유당 赤髮鬼 劉唐

-북송말기 흠종조인물 (생몰미상) 산동성 기주현 출생

 

양산박 입성이후의 일은 주로 관군과의 대치나 전쟁관련의 일로 대부분 밝혀져있는 내용이고 그는 요군과의 대치상황에서 동관산하의 척살대를 이끄는 암살집단의 수장으로서 수십명의 요인을 암살하고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양산박에 입성하기 이전엔 살가라는 살수집단의 단주로써 주로 암살전문의 살수로서 활약한다. 검의 명문인 청성파의 전통검법을 익혔으며 궁중의 무사집단인 동창에서 약6년의 시간을 보내게된다. 일반적인 궁중무사인 호위사들과는 다르게 동창의 무예는 실전위주의 살인무술이다. 청성파의 고유검술과 동창의 실전무술을 겸비하게 된 유당은 동창의 관직을 뿌리치고 강호로 뛰어들게 된다.

 

[무예사 유당편] 에보면 '무예의 현란함은 없으나 실전,암살무예로서 11 대결에선 누구도 유당위에 설수없다' 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현장에서 그는 어느누구도 접하지 못했던 11명과 부딪혀 1000명째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무예의 깊이를 창조하는 1000명 대련이라는 업적을 이룬다. 삼류무사에서 각문파의 고수들, 낭인, 살수, 무뢰한, 관군의 장수, 비장 등 그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대련을 통해 자기자신만의 검법세계를 창조하게 되며 "살가" , 살수가문이라는살수집단의 우두머리로 세상에 다시금 나타난다.

 

그는 삼류무사와 창기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였다. 현존하는 검법중에 가장 실전적이며 강인한 "살가검법"의 창시자인 유당은 그의 사후 살수와 암살자들의 원조로 받들어진다. 죽기직전까지 그가 죽인인물의 숫자는 총2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그중 일반인은 단1명도 없고 주로 고수,장수,상대요인 위주의 순으로 분류된다. 그의 아호인 적발귀의 의미는 그의 빨간 머릿결을 의미한다. 항설에는 숱한사람의 피가 어리어 변한색이라 하며 그의 살수로서의 의미를 보다극명하게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수있다. 지금도 중국 마피아인 삼합회에서는 중간보스이상의 간부들은 살가검법을 무조건 연마하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청면수양지 靑面獸 楊志

-(생몰년 미상) 산동성 운보현 출생

 

양지는 명문인 산동양가장의 적자로 태어난다. 그러나 그의나이15세 경에 화재와 전란으로 가문이 몰락하고 양자와 그의 사촌일부만이 살아남아 그의 평생의 목표는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일을 최우선시 하게되며 30여명에 달하는 그의 친족들은 그의 오로지 양지를 지주로 생계조차 이어나가기 힘든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나이 15세에 모든것을 잃어버린 양지는 당시 강호의 고수인 화산파의 운남자를 만나면서 새로운 목표를 찾게된다. 무과에 급제하고 뚜렷한 무예실력을 쌓음으로서 지나간 세월에 대한 보상을 받기로 결정하게 된다. 화산파내에서 그는 차기 장문인을 보장받을 정도의 상당한 실력을 쌓게되며 당시는 검문으로서는 화산파의 검도가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양지는 또한 강호의 명검객들과 의교류와 숱한 은자나 고수들과의 대련을 통해 나름의 검학을 찾아가게된다.

 

그러나 당시 양지는 운남성 유주부의 제사 (지금의 지방경찰서의 부서장)자리로 이동하게 되면서 그의 터전인 산동성과 화산문하를 떠나게 된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생계를 위해 가문을 위해 자리를 옮기게 된 양지의 형편은 그리 순탄치만은 못했고, 또한 새로운 무대이기도 햇다 주변지역인 절강성,호남성,섬서성등의 파견근무가 잦아지면서 양지는 각지방의 검보를 수집하게 되고 숱한 문파 즉, 악가검가, 진씨도가, 사천검문등 당시의 검문들과 막역한 교류를 이루게되며 그의 끊임없는 탐구열과 수련의 욕구는 양지 특유의 검법인 양가검법을 창안해내게 된다. 양가검법은 생존을 위한 가문부흥의 욕구와 스스로의 담금질에서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검학으로 당시 그의 사문이었던 화산파와 어깨를 나란히하게 된다. 지금도 양가장인 그의 생가 운보현을 찾게되면 양가장의 서각에 그가 수집한 검보 200여점과 당시 그와 교류하던 무예가들의 친필 교류첩들이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양지가 창조한 양가검법의 검보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 양가검법은 화산파의 필수과목으로 속가장문인 청수자(파란모습의 짐승같은 선인) 양지라는 편액과 함께 화산파와 양가장의 두 세력을 이어주는 끈으로 나타난다. 양가검법은 소박한 품세에 장중하고 위력있는 검법으로 무술의 일절로 나타나고 있으며, 양지의 검에 대한 애착은 위기의식을 항상 소유하기위해 항상 반자정도의 나무판에서 모로 잠들어 얼굴 한 면이 퍼렇게 죽어 청면수라는 별호를 갖게된 점에서도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그는 정통검가의 시조로써 현존 무예계에서 검가의 일절로 지금까지 인정받고 있다.

 

그가 주로 사용한 검은 묵향검으로써 열십자 형태의 기본 초식부터 면면하고 위력있게 선초식, 후초식, 미초, 완초로 물흐르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중한 위력은 양가검법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평생 수천번의 대련중에 양가검법을 완성한 이후, 단 한번도 패하지않은 그의 불패신화는 지금도 면면히 전해져온다. 그는 그의 나이 약45세에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적의 장수와 부장 포함 20인을 자기의 마지막 제물로 삼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신산자 장경 神算子 蔣敬

-북송 흠종조인물(1088-??) 섬서성 서안출생

 

장경은 몰락한 서안 장가장의 후예로 무인의 후예이나 가전무예는 이미 흔적조차 사라진 속에 잡과를 통해 섬서성 서안현의 하급관리로 주로 현의 경리를 담당하는 보잘것 없는 지방향리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간다. 몰락한 장가장의 일맥을 다시금 세상의 중심으로 끌어 올리는데 평생을 바친 그의 노력은 가히 피눈물나는 노력이 뒷받침된다. 19세에 잡다한 가전무술을 익힌 그의 무예솜씨는 실로 보잘것 없었다. 서안현의 지방관료로서는 출세나 위치상승은 꿈도 꿀수 없는 상황이었고 오로지 하나의 방법은 각 성(사천성,섬서성등 우리의 도와비슷함)에서 주최하는 무술대회에서 입상하여 중앙 무술대회로 진출하는일이었다. 지방관리인 그가 할수 있는 일은 무슨 수를 쓰던 틈틈이 무술을 연마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나 근무여건상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성실함을 높이산 현령은 당시의 고수인 진주 언가장의 가주에게 장경을 소개하여 무예를 정식으로 배울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진주언가는 권법과 도법, 창법의 삼절로 유명한 가문으로 그 중에서도 언가권은 지금도 중국무술의 백미로 남아있다. 그 중 장경의 관심을 끌게된 부문은 도법이었다. 진주언가에서 도법을연수한 장경은 어딘가 모르게 미진하다는 느낌을 갖고 악비의 종가인 악가장의 도법을 연수하고 낙양화가장 사천당문 등 무예의 명문을 찾아 숱한 요청과 부탁 끝에 도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의 생업인 산술과 관련하여 주판을 사용한 새로운 신산판법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주판무예를 만들어내게 된다.

 

신산자라는 별호는 그의 주판무예와 산술에 능한 그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장경의 무예이다. 또한 그는 약15,6년의 무예탐구끝에 장가쌍도법을 완성하며 당대무예의 일절로 장경만의 독특한 도법인 장가도법을 완성해내며 지금도 섬서성 서안현으로 들어가면 "섬서서안 무예일절 장경쌍도 신산판법'이라는 편액이 장가장에 전해진다. 그의 무예는 당대의 초고수인 80만 금군교두인 임충과 동수를 이루고 그 깊이는 명문무예가들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그는 나이40에 섬서성 보병 도독으로 제수되는 일대 쾌거를 이룬다. 일개 하급지방관리가 무신서열 30위 안에 들어가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정책과 당시의 탐관오리에 반발한 장경은 등비,마린등과 의적을 결성, 활동하다 자진해산하고 악비산하 부장으로 금과의 전투에 참가 사천지방의 전선에서 적의 장수와 함께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수호지와 관련하여서는 임충 ,양지등과의 교류는 있었지만 송강 등 양산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로 나타난다. 장가장은 지금 폐쇄되고 그의 사적은 섬서성 서안의 지방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주판은 사라졌지만 그의 쌍도는 지금도 섬서일절로 섬서성 지방문화재로 남아있다.

 

이런 내용을 볼때 천강 지살의108영웅중 36인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주로 개개의 영웅호걸의 사적이나 야담을 근거로 조합시킨 내용이 드러난다. 대표적인예가 장경, 마린, 이준, 장청 등 에서 나타난다.

 

타호장 이충 打虎將 李忠

-(1084-??) 하남성 옥루현출생

 

이충은 무예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창봉의 대가이다. 수호지에서의 역할이나 위치는 미미하나 실제 그의 행적은 소설 속의 편협한 행태와는 전혀 다른 전형적인 무인의 명예와 의인의 표상으로 보아도 하등 무리가 없는 인물이다.

 

수호지의 인물 중에서 독특하게 관직과는 전혀 인연이 없던 인물 타호장 이충, 그는 평범한 지방무가에서 자라난 지방토호의 자손이다. 어려서부터 하남성의 관리인 집안의 세력의 혜택으로 무예18반 등 여러가지 무예를 접하고 성장해왔다. 허나 그의 나이 17세에 떠돌이 무사와의 대련에서 철저하게 패배한 이충은 짓이겨진 자존심과 스스로의 온실속의 생활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가출하여 평생을 풍찬노숙하는 야인의 생활을 시작한다 . 가문을 부흥하고자 하지도 않았고, 관직에 나가 일신영달을 꾀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예의 깊이를 깨닫고 수련하여 무도의 극에 도달하고자 하는 진정한 무인의 자세를 익힐 따름이었다. 우선 그는 당대의 명문 무예문파인 화산,점창,청성,아미,진주언가,사천당가,청성 등을 순례하면서 무예 중에서 창봉에 관한 자료와 자기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는 평생을 건 수련과 대련의 세월을 보내게된다.

 

그러던 중 어린 아이들이 매화꽃이 떨어질때 나무막대기로 찌르고 휘젓는 모습을 보고 점창파의 독문절기이자 이충의 독보적인 창법인 이화창법(또는 매화창법)을 창조해낸다. 그것이 최초의 이충이 만든 무예의 시초가 된다. 나아가 떨어지는 꽃잎의 모습을 연구하여 이화창법과는 또다른 낙화창법, 해가 지는 모습속에 자연과 하나되는 낙일창법 등을 부단히 창조하고 후일 낙일창법은 후인들에의해 낙일검법으로 변형된 모습을 나타낸다. 그의 무예 순례여행 중 그는 하남성 보타산에서 대호를 만나 때려죽임으로 인해 타호장이라고 일컫게 된다. (호랑이었는지 표범이었는지 또는 진짜 잡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무예순례가 점차 길어지고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에게 대련을 요구하거나 시기하는 무리들이 많아져서 수호지에서도 언급되는 구문룡 사진이나 소패왕 주통 같은 이들과의 대련후에 사제로서 의형제로서의 인연을 맺으며, 수련과 나아감이 목적이지 사람을 해함이 목적이 아닌 무예본연의 자세를 지키는 참무인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정갈하고 항상 중도를 지키는 진정한 무예수련가로 항상 자기를 담금질해 나갔으며 그와 화화상 노지심과의 일촉즉발의 대회전은 지금도 하남성에서는 경극으로 공연될 정도로 당대 초고수들의 대결이요 무인간의 자존심을건 한판대결이었다. 창봉의 극을 향하는 무인 이충과 곤과 장의 극을 탐구하는 무예승 노지심의 대결은 산천초목을 떨게하는 대단한 구경거리요 자존심의 치열한격돌이였다. 그의 나이 어느덧 30대중반의 시절이었다.

 

그는 다른 이처럼 관직에 나가지도 않았고 재물을 탐하지도 않았고 순수한 무인으로서 평생을 보내다 소리없이 저물어간다. 그의 사적은 하남성에 사료가 약간 남아있으며 명문인 점창파의 장서각에 그의 무예지침서가 남아있다.

 

水浒传另一个蓝本——《宋江三十六人赞》 

《宋江三十六人赞》是龚开所作,为宋末元初词人周密的史料笔记《癸辛杂识》所收录。

龚开是宋末元初画家,字圣予(一作圣与),号翠岩,淮阴(今江苏省淮阴县)人。景定年间曾任两淮制置司监当官。他是一位诗文书画都擅长的文人画家。

龚开对中国绘画史、文学史有开创性的贡献。他在宋亡后隐居,限制了他的影响范围,直至近代美术评论家还认为他仅仅是一个善画马的画家。

龚开是最早记录水浒三十六人姓名和绰号的艺术家。他为水浒英雄写像早在《水浒传》成书之前,所作《宋江三十六人赞并序》。其中赞扬宋江“识性超卓,有过人者”,“为盗贼之圣”。

三十六人中除宋江外,还有后来《水浒传》中的主要人物吴学究(吴用)、卢俊义、鲁智深、武松、李逵,以及阮小七、刘唐、阮小二、戴宗、阮小五等,为《水浒传》的研究提供了极有价值的资料。

在水浒的早期资料里,《宋江三十六人赞》是极珍贵而又极难解的一种。因年代久远,不同版本之间均有文字出入。

龚开在《赞·序》中,说出了他之所以题赞的目的,就是想以此唤起百姓的民族意识和抗元斗志。他感叹道:“与其逢圣公之徒,孰若拓与江也!”。

而且这三十六人中有晁盖,无林冲和公孙胜。

呼保义宋江:不称假王,而呼保义。岂若狂卓,专犯忌讳?

智多星吴学究:古人用智,乂国安民,惜哉所为,酒色粗人!

玉麒麟卢俊义:白玉麒麟,见之可爱。风尘太行,皮毛终坏。

大刀关胜:大刀关胜,岂云长孙?云长义勇,乃其后昆。

活阎罗阮小七:地下阎罗,追魂摄魄。今其活矣,名喝大伯。

尺八腿刘唐:将军下短,贵称侯王。汝岂非夫?腿尺八长。

没羽箭张清:箭以羽行,破敌无颇。七札难穿,如游斜何!

浪子燕青:平康巷陌,岂知汝名?太行春色,有一丈青。

病尉迟孙立:尉迟壮士,以病自名,端能去病,国功可成。

浪里白跳张顺:雪浪如山,汝能白跳。愿随忠魂,来驾怒潮。

船火儿张横:太行好汉,三十有六,无此火儿,其数不足。

短命二郎阮小二:灌口少年,短命何益!易不监之,清源庙食。

花和尚鲁智深:有飞飞儿,出家尤好。与尔同袍,佛也被恼。

行者武松:汝优婆塞,五戒在身。酒色财气,更要杀人。

铁鞭呼延绰:尉迟彦章,去来一身。长鞭铁铸,汝岂其人?

混江龙李俊:乖龙混江,射之即济。武皇雄尊,自惜神臂。

九文龙史进:龙数肖九,汝有九文。盗从东皇,驾五色云生。

小李广花荣:中心慕汉,夺马而归。汝能慕广,何优数奇?

霹雳火秦明:霹雳有火,摧山破岳。天心无妄,汝孽自作。

黑旋风李逵:旋风黑恶,不辨雌雄。山谷之中,遇尔亦凶。

小旋风柴进:风存大小,黑恶则惧。一嗯之微,香满太虚。

插翅黑虎雷横:飞而肉食,存此雄奇。生入玉关,当伤今姿。

神行太保戴宗:不疾而速,故神无方。汝行何之?敢离太行。

先锋索超:行军出师,其锋必先。汝勿锐进,天兵在前。

立地太岁阮小五:东家之西,即西家东。汝虽特立,何有吾宫?

青面兽杨志:圣人治世,四灵在郊。汝兽何名?走圹劳劳。

赛关索杨雄:关氏之雄,超之亦贤。能持义勇,自命可全。

一直撞董平:昔樊将军,鸿门直撞。斗酒肩,其言甚壮。

两头蛇解珍:左齿右噬,其毒可畏。逢阴德人,杖之亦毙。

美髯公朱仝:长髯郁然,美哉丰姿。忍使尺宅,而见赤眉。

没遮拦穆横:山没太行,茫无畔岸。虽没遮拦,难离火伴。

拼命三郎石秀:石秀拼命,志在金宝。大似河鮓,腹果一饱。

双尾蝎解宝:医师用蝎,其体实全。反其常性,雷公汝嫌。

铁天王晁盖:毗沙天人,澄紫金躯。顽铁铸汝,亦出洪炉。

金枪班徐宁:金不可辱,亦忌在秽。盍铸长殳,羽林是卫。

扑天雕李应:挚禽雄长,唯雕最狡。毋扑天飞,封狐在草。

水浒传另一个蓝本——《宋江三十六人赞》

龚开对很多梁山好汉持一种欣赏和惋惜的态度,比如吴用、卢俊义的赞词,意思就很明显。另外比如刘唐和孙立。

【尺八腿刘唐】将军下短,贵称侯王。汝岂非夫?腿尺八长。

意思是:过去人们认为上身长下身短是富贵之相——比如双手过膝,据说刘备就是。刘唐绰号尺八腿,也就说刘唐是个腿短的矮子。身长腿短是王侯之相,然而此人空有相而无运,“汝岂非夫”等于说刘唐看着不像“夫”,但毕竟还是“夫”。

需要注意这里刘唐绰号是“尺八腿”,而不是“赤发鬼”。另外很多好汉外号也与《水浒传》中不同。

【病尉迟孙立】尉迟壮士,以病自名,端能去病,国功可成。

端:果然。在这里是表假设语气:假如真的能改掉“病”的话,就可以为国立功了。言下之意,孙立是“国功未成”的。

其他如杨雄、花荣、张顺、雷横的赞词,都含有这种惋惜的情绪。

但也有很多好汉的赞词类似贬词。

比如杨志和秦明:

【青面兽杨志】圣人治世,四灵在郊。汝兽何名?走圹劳劳。

意思是:圣人在世的时候,天下的兽都是吉祥的神兽。而现在没有圣人,以至于奇怪的青面兽之类的都出来满地跑了。

【霹雳火秦明】霹雳有火,摧山破岳。天心无妄,汝孽自作。

这个“汝”指什么呢?也许指的是“摧山破岳”的山和岳。这样的话大约可以解释为:这样乱世的山河,活该天打五雷轰。不过还是觉得这种解释有点牵强。纵观几十篇《赞》,凡提到“汝”的,绝大多数都指的是被赞的人。

《赞》里还有家国之思比如说他们:

【小李广花荣】中心慕汉,夺马而归。汝能慕广,何忧数奇?(用李广之典)

【插翅黑虎雷横】飞而肉食,存此雄奇。生入玉关,当伤今姿。(用班超之典)

李广和班超的典故的共同点是“流落异国,心念故乡”。翻译到南宋遗民的语言里,岂不就是“遗民泪尽胡尘里,北望王师又一年”?

水浒传另一个蓝本——《宋江三十六人赞》

梁山三十六人在正史里有过记载。

根据《宋史》有关宋江的记载有三条,其中一条就明确说了他们这个团伙的合伙人是三十六人:

其一是《徽宗本纪》记:“宣和三年(1121)二月……方腊陷处州,淮南盗宋江等犯淮阳军,遣将讨捕;又犯京东、江北,入楚、海州界,命知州张叔夜招讨之。”

其二是《侯蒙传》记:“宋江寇京东,蒙上书言:‘江以三十六人横行齐魏,官军数万无敢抗者,其才必过人。今青溪盗起,不若赦江,使讨方腊以自赎。’帝曰:‘蒙居外不忘君,忠臣也。’命知东平府,未赴而卒。”

其三是《张叔夜传》记:“宋江起河朔,转略十郡,官军莫敢撄其锋。声言将至,叔夜使间者觇所向。贼径趋海濒,劫巨舟十余,载卤获。于是募死士,得千人,设伏近城,而出轻兵踞海诱之战。先匿壮卒海旁,伺兵合,举火焚其舟。贼闻之,皆无斗志。伏兵乘之,禽其副贼,江乃降。”

这三条提供的信息大致是:

其一,宋江确有其人,也确在山东等地起事。

其二,宋江确有过人之处,以致“官军数万无敢抗者”。

其三,宋江仅是流寇而已,“转略十郡”,曾转战各地。有关他在梁山泊“落草生根”的事,史书似乎也根本没有提到过。

其四,宋江起事的规模有限,手下之众谈不上浩浩荡荡,估计也就是几百到上千人的规模,亲信头领或者是合伙人仅有三十六人,而不是水浒传中所写的一百单八将。而且宋江后来是战败而降,也不是主动受招安。

所谓《水浒传》中的108将则是后来施耐庵再创作加工出来的。

《大宋宣和遗事》也对宋江的结局有交代,说宋江等三十六人归顺后又去征方腊,而且宋江因功而被封为节度使。这基本是演绎。

宋江后果如何,正史并没记载,至于说他征方腊根据出土的北宋名将折可存墓志铭可考证出宋廷平方腊是在平宋江之前,所以他不可能去为宋廷征方腊。

반응형

댓글

💲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