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세력인 양산집단이 북송사대적구北宋四大賊寇에 들어간 이유는?
글: 삼갑제사(三甲第四)
<수호전>에서 하북전호(河北田虎), 회서왕경(淮西王慶), 강남방랍(江南方臘), 산동송강(山東宋江)은 북송말기의 '사대적구'라고 불린다. 전호, 왕경, 방랍의 세명 대왕은 모두 영역이 양산보다 컸다. 인력, 재력, 물력, 영향력으로 볼 때, 양산은 이들에 한참 못미친다. 송강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이들 삼대 대왕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을까?
"사대적구"를 쓰는 순서에 대하여도 이런 견해가 있다. 송강이 그중 가장 강했기때문에 첫머리에 이름이 놓인 것이라고. 그리고 송강은 초안후에 조정을 위하여 나머지 세 적구를 소탕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실력이 가장 강하다는 것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기실 '산동송강'은 '사대적구'중 실력이 가장 약했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송강의 지반(地盤)이 좁았다. 겨우 양산수박(梁山水泊)을 점거했을 뿐이고, 인마는 겨우 몇만이었다.
양산수박은 방원팔백리에 이른다. 물산이 풍부하고, 지세가 험준하다. 왕륜(王倫)시대부터 송강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반을 확장한 적이 없다. 항상 양산수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비록 송강도 다른 성을 공격한 적이 있지만, 모두 공격만 했을 뿐 점령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동평부, 동창부에 대하여 양식을 구하는 행동을 진행했지만, 기실 그것은 약탈이었고, 약탈을 끝낸 후에는 퇴각했다. 그곳을 점령하고 권력을 교체하고 관직을 임명하지는 않았다.
나머지 세 적구는 달랐다. 전호는 5주56현을 점거했고, 방랍은8주25현을 점거했으며, 왕경은 지반이 더욱 넓었다. 8주86현을 점거했다. 이들과 비교하면, 양산수박은 그저 공원수준에 불과했다.
삼구의 인마수량도 송강보다 훨씬 많았다. 방랍의 병력은 삼십만에 달했고, 이것은 송강이 비교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둘째, 양산은 정권을 건립하지 못했다. 호한들은 서열이 있지만, 관직을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나머지 삼구는 조정의 정권제도를 적용하여, 스스로 왕에 봉하고, 관직을 두고, 궁전을 건축하고, 후궁까지 두었다.
송강은 양산을 오랫동안 경영하면서도 '산적'수준에 머물렀다. 기껏해야 몇개의 집을 만들어서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는 수준이었다. 자신은 마누라조차도 없었다. 그러니 후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삼구들처럼 야심만만하게 난을 일으켜 황제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아예 송나라황제를 끌어내릴 생각이 없었다. 뼛속부터 '충군'사싱에 물들어 있었다. 당연히 그는 스스로 그런 실력이 안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평가했다. 이규가 '큰형님이 대송황제가 될 수 있다"고 소리친다고 하여 그 말에 현혹되어 넘어가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실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송강은 양산을 위하여 초안의 길을 설계한 것이다. 삼구처럼 조정과 끝까지 싸우지 않았던 것이다.
초안후, 송강과 그의 형제들은 쉬지않고 조정을 위하여 사방으로 정벌을 다니며, 공로를 세운다. 요나라를 치고, 전호를 멸하고, 왕경을 소탕하며, 방랍을 제거했다. 송강과 그의 형제들은 천신만고끝에 최종승리를 거둔다. 역사적 사실은 놔두고서라도, <수호전>소설의 글만 볼 때, 왜 사대적구중 실력이 가장 약한 송강이 오히려 최종슨리자가 된 것일까? 원인은 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초안후의 송강 인마는 조정에 의해 재편된다. 중대한 군사행동에서 조정군대의 지원을 받는다. 그리하여 인력, 물력이 크게 증가한다.
양산의 기껏 몇만명의 인마로 그렇게 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초안후의 송강과 양산두목들이 이끄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수하들이었던 소수의 무리들이 아니었다. 조정이라는 큰 나무를 업고, 인력, 물자공급에서 나머지 삼구를 훨씬 넘어서게 된다.
둘째, 송강의 대오는 인심을 얻었다. 송강이 어디를 가든지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군중들로부터 실 하나 바늘 하나 가져가지 않은 것은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이는 초안전의 송강의 스타일과 천양지차가 있다. 초안전에, 송강은 백성을 괴롭히는 유적집단이었다. 대명부등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관병과 백성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대명부전투에서 5천여 빈민들이 죽임을 당한다.
초안후의 송강은 유구의 스타일을 바꾼다. 어디를 가든지 백성들에게 안심하라는 고시를 붙이고 최대한 백성들의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시켜주도록 애쓴다. 관건은 그가 이를 최대한 해냈다는 것이다. 태원성을 수공으로 파괴시키는 악독한 이준의 계모로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은 것을 제외하면, 다른 때는 용병때 최대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노력했다.
삼구의 점령구내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은 그러나 도탄에 빠져 있었다. 고통이 엄청나게 심했다. 그들은 백성을 그저 착취대상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방랍이 10일내에 수만의 인원을 모을 수 있었더 ㄴ것은, 바로 양민을 유인하고 핍박하여 의거에 가담하게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본심은 '모두 송나라의 양민이므로, 분명히 도적을 기꺼이 돕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양, 김대견, 배선등이 왕경의 부하에게 붙잡힌 후, 성을 함락시켜 사람을 구해야할 긴급한 상황에서,
성안의 백성들은 의사(義士) 소가수가 소집하자 순식간에 5,6천명이 모인다. 백성들은 자신이 평소에 일하는데 쓰는 무기를 들고 나와 유수 양영(梁永)을 죽인다. 양영은 포학하여 평상시에 백성과 군인들을 학대하고 군인들을 매질했다. 그래서 모두 원한이 뼛속까지 깊어서 한 사람이 일어서자 모두 호응하여 가담한다." 수가수가 이끄는 군민이 성문을 나설 때는 이미 2만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렇게 안팎에서 호응하니 송강부대는 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삼구는 부패타락이 심해서 송강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나머지 삼구 중에서, 방랍이 화석강의 화를 참지 못하고 강남에서 빈곤한 자들을 끌어모아 의거를 일으킨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2명은 악당출신이다. 도적에서 반동정권을 건립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이다. 백성들에게 계속 해만 끼쳤다. 전호는 사냥꾼 출신으로, 지방의 악인들과 결탁하여 하북을 점거하여 정권을 건립한다. 왕경은 동경의 깡패이고, 사건을 저질러 도적이 된다. 도적이 된 후에 병력을 이끌어 반란을 일으킨다. 이 두 사람은 불충, 불의, 불효한 인물들이다. "효의흑삼랑(孝義黑三郞)" 송강과 비교하면 고하가 분명하다.
다만, 이들 지방흑세력이 발전하여 이루어진 반동정권에 대하여 조정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수호전>에는 그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단지 '문관은 돈을 좋아하고, 무관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군기가 세워지지 않고, 군수물자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는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송강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기풍이 우량했다. 전투에서 이기겠다는 충의의 사나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송강을 선봉장으로 내보낸 것은 적재적소에 사람을 쓴 셈이다.
삼구는 지방정권을 건립한 후, 자신감이 팽창했다. 그러다보니 생활은 점점 부패하고, 진취심은 점점 상실한다. 향락만 즐기게 되고, 민생을 개선하는 것은 아예 생각지 못한다. 전호는 범미인을 총애하고, 왕경은 여러 곳에 행궁별원을 짓는다. 그들의 대오에 강한 장수들이 있었지만, 뿌리부터 부패되는 것이 점점 확대된다. 그래서 송강부대는 전호, 왕경을 토벌할 때 우무머리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방랍을 공격할 때는 달랐다. 방랍은 앞의 두 적구와는 달랐다. 그의 수하에는 정예병사들과 좋은 장수들이 있었다. 그리고 군기가 엄명해서 전투력이 강했다. 양산호한을 거의 절반이나 잃으면서 결국 시진의 잠복으로 보루이 내부에서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다.
방랍을 진압한 후, 양산호한은 더 이상 남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중에서는 갑옷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거나, 세상의 허무함을 깨닫고 하나하나 송강을 떠난다. 송강의 세력은 이렇게 하여 크게 약화된다. 조정의 간신은 그에 대해 더 이상 거리낌이 없었다. 송강은 결국 '토사구팽'의 비극을 벗어나지 못했다.
北宋六贼
“北宋六贼”凭什么能获得重用,六人的结局又是如何?
北宋六贼,导致王朝覆灭的罪魁祸首
北宋六贼,北宋年间六个奸臣的统称,这六个人分别是蔡京、童贯、王黼、梁师成、朱勔、李彦,基本都是宋徽宗时期重要的大臣,这六人朝庙之上结党营私、贪赃枉法、荒淫无度、排除异己,私下滥使职权以鱼肉百姓为乐,将民间弄得乌烟瘴气,满目涂炭,是导致当时江南方腊起义和金国入侵中原的罪魁祸首。
中文名北宋六贼别 名六贼国 籍宋朝民 族汉族释 义民间对宋徽宗年间六个奸臣的合称代表人物蔡京、童贯、王黼、梁师成、朱勔、李彦所属时期宋徽宗时期特 征贪赃枉法、横行霸道危 害民不聊生身 份宋徽宗时期大臣
历史背景编辑 播报
“六贼”之名最早出于太学生陈东在宣和七年(1125年)的上书,陈东说:“今 日之事,蔡京坏乱于前,梁师成阴谋于后,李彦结怨于西北,朱勔结怨于东南,王黼、童贯又结怨于辽、金,创开边衅。宜诛六贼,传首四方,以谢天下。”
北宋末年的“六贼”。蔡京、王黼、童贯、梁师成、朱勔、李彦,都是宋徽宗的朋友。
蔡京与童贯是北宋末年响当当的“六贼”领头人物,腐败得一塌糊涂,搜刮来的银子拿部分 办办公开赛供皇族高官“花差花差”根本无所谓。六人互相勾结,排斥异己,民间称“三千索,直秘阁;五百贯,擢通判”。
“六贼”把国家搞得乌烟瘴气。他派朱勔在江南一带搜刮珍奇异宝、名花古木,朱勔及其爪牙们仗着皇帝的势力在江南横行霸道,他们拆墙破屋、敲诈勒索,弄得民不聊生。歙州、睦州一带山清水秀、物产丰富,也成了朱勔等人骚扰、搜刮的主要地区。歙州、睦州人民痛恨官府,在穷苦农民方腊的领导下举行起义。
宋徽宗宣和七年(1125年),李彦遭赐死。宋钦宗靖康元年(1126年),其馀五人先後伏诛:王黼安置永州(今湖南零陵),途中秘密处死;蔡京贬于儋州(今海南儋县),途中病死;梁师成贬为彰化军节度副使,途中赐死;童贯贬于吉阳军(今海南崖县),途中赐死;朱勔贬于循州(今广东龙川),不久斩首处死。
六贼令北宋渐渐没落,不久即发生靖康之变。
蔡京
蔡京(1047~1126),北宋奸臣。字元长。兴化仙游(今属福建)人。与北宋书法家蔡襄是同乡。熙宁二年(1069年),在满朝保守派大臣的反对中,王安石被宋神宗任命为宰相,实行变法;次年,兴化军仙游县蔡京进京应试,得中进士,开始步入仕途。后据明代弘治年间编写的《重刊兴化府志·蔡京传》记载,蔡京登第后,“调钱塘尉,舒州推官,累迁起居郎。使辽还,拜中书舍人。时弟卞已为舍人,故事入官以先后为序,卞乞斑京下,兄弟同掌书命,朝廷荣之”。短短数年,蔡京由地方政府官员变成朝中大臣,受到宋神宗,宋徽宗和王安石的重用。
在宋神宗的支持下,王安石变法顺利推行,青苗法、募役法、方田均税法、农田水利法、保甲法等一一面世,解决了北宋面临的种种危机。新法推行后,社会矛盾得到缓和,政府收入有所增加;促进农业生产,全国各地兴修水利工程一万多处。在莆田,就有侯官(今闽侯),“长者”李宏应诏,携带巨额家资来莆田建造木兰陂,此陂于宋熙宁八年(1075)动工,历经八年完工。
但此时朝中反对变法者众多,甚至连太皇太后和皇太后也出面,带头反对。她俩视新法为洪水猛兽,把王安石说成是乱臣贼子。她俩哭着向神宗诉说:“王安石是要用新法把天下搞得大乱!”神宗动摇,罢了王安石的官。后来后悔了,又请王安石出来重新当政。
宋神宗死后,子哲宗立,高太后临朝听政,1086年,司马光出任宰相,尽复旧人旧法,对新人新法一概排除,蔡京这个王安石变法的得力干将,成了被打击的主要对象。《重刊兴化府志》说,司马光秉政,复差役法,为期五日,迫蔡京等完成。“京独如约,悉改畿县差役,无一违者。诣政事堂,白光,光喜曰:‘使人人奉法如君,何不可行之有?’已而,台谏言京挟邪坏法,出知成德军……”蔡京办事雷厉风行,连保守派首领司马光也不得不折服,当面称赞,但在反对派面前,这个兴化之子却无立锥之地,终被逐出京城,日子一天不如一天。
由于高太后临朝听政,对变法者大打出手,使北宋政权又陷入了严重的政治危机。元祐八年(1093年),哲宗亲政,重新使用变法者,任命章惇为相。不久,蔡京回都城,任户部尚书。《重刊兴化府志》说:“章淳复变役法,置司讲议,久不决”。蔡京见状,主动上前积极配合,帮章解决问题。“京谓惇曰:‘取熙宁成法施行之,尔何以讲为?然之,雇役遂定。差雇两法。十年间,京再莅其事,成于反掌,两人相依以济”。这一记载说明,蔡京对王安石十分敬仰,对他的新法很有研究。元祐元年(1086),王安石在江宁(今江苏南京)去世,八年后,蔡京还继续宣传和介绍王安石新法,使王安石的遗志有人继承。
但哲宗时的这次变法因新旧党争反复不已,难于取得明显成效。宋徽宗即位后,有意修熙丰政事,又起用蔡京,任命他为宰相,继续推行新法。靖康元年(1126),宋钦宗即位后,蔡京被贬岭南,途中死于潭州(今湖南长沙)。
蔡京的艺术天赋极高,素有才子之称,在书法、诗词、散文等各个艺术领域均有辉煌表现。当时的人们谈到他的书法时,使用的词汇经常是“冠绝一时”、“无人出其右者”,就连狂傲的米芾都曾经表示,自己的书法不如蔡京。据说,有一次蔡京与米芾聊天,蔡京问米芾:“当今书法什么人最好?”米芾回答说:“从唐朝晚期的柳公权之后,就得算你和你的弟弟蔡卞了。”蔡京问:“其次呢?”米芾说:“当然是我。”
存世书迹有《草堂诗题记》、《节夫帖》、《宫使帖》。
王黼
王黼(1079—1126),汴京(今河南开封)人,字将明,原名甫,赐改为黼。为人多智善佞,寡学术。崇宁进士。初因何执中推荐而任校书郎,迁左司谏。因助蔡京复相,骤升至御史中丞。历翰林学士、承旨。勾结宦官梁师成,以父事之。宣和元年(1119),拜特进、少宰,权倾一时。后代蔡京执政,伪顺民心,悉反蔡京所为,以沽名钓誉。利用权势广求子女玉帛,生活糜烂奢华。请置应泰局,苛取四方水陆珍异之物,据为己有。时朝廷欲联金攻辽,王黼竭力怂恿,不遗余力,且大肆搜括,计口出钱,得钱六千余万缗,买五、六座空城伪称胜利,进封太傅、楚国公。钦宗即位,抄没其家,贬为崇信军节度副使,被开封尹聂山派人诛杀。为“六贼”之一。
童贯
童贯(1054-1126) 北宋宦官,“六贼”之一。字道夫(一作道辅),汴京(今河南开封)人。性巧媚。初任供奉官,在杭州为徽宗搜括书画奇巧。助蔡京为相。京荐其为西北监军,领枢密院事,掌兵权二十年,权倾内外。时称蔡京为“公相”,称他为“媪相”。宣和四年.攻辽失败,乞金兵代取燕京,以百万贯赎燕京等空城而回,侈言恢复之功。七年,金兵南下,他由太原逃至开封。随徽宗南逃。钦宗即位,被处死。《宋史》列为“奸臣”。
梁师成
梁师成(?-1126) 北宋末宦官,籍贯不详。为“六贼”之一,字守道。政和间为徽宗(赵佶)所宠信,官至检校太殿。凡御书号令皆出其手,并找人仿照帝字笔迹伪造圣旨,因之权势日盛,贪污受贿,卖官鬻职等无恶不作,甚至连蔡京父子也谄附,故时人称之为“隐相”。钦宗(赵桓)即位后贬为彰化军节度副使,在行至途中时被缢杀。
梁师成外表愚讷谦卑,看上去老实厚道,不象是能说会道的人,实际上却内藏奸诈,善察言观色,处事老道,深得徽宗的宠信。
梁师成原本在贾祥的书艺局当役,因为本性慧黠,加之在书艺局耳濡目染,也略习文法、诗书。贾祥死后,他便领睿思殿文字外库,主管出外传导御旨。这可是个肥缺,所有御书号令都经他手传出来,颁命天下。天长日久,他也看出些门道,找来几个擅长书法的小吏模仿宋徽宗的笔迹按照他自己的意愿拟圣旨下传,外廷人不知底细,也不辨真伪。
梁师成虽多少懂些诗书,但根本谈不上是什么大手笔,他却喜欢附庸风雅,自我标榜吹嘘,说自己出自于苏轼之门,还四处宣称以翰墨为己任,常常对门下的四方俊秀名士指点批评。他还在府宅的外舍放置各种字画、卷轴,邀请宾客观赏、评论,题识。如果题识令他满意的他便加以荐引。所以朝廷的大臣谁也不敢低估他背地里都称他为“隐相”。
当时被称为“六贼”之一的王黼,对梁师成更是如子敬父,称之为“恩府先生”。两人府第仅一墙之隔,又在墙上设一小门。日夜往来交通。王黼仗着有梁师成撑腰,强占左邻门下侍郎许将的房宅,光天化日之下,将许将一家从内眷到仆隶一起扫地出门,路人见状无不愤惋叹惜但却无可奈何。
大太监李彦,在宣和三年(公元1121年),继杨戬提举西城所,置局汝州,搜刮民田为公田。焚民故券,使输田租,凡有投诉上报的人,一旦被他知道,使严加拷打,一时死者千万。他还征发财物要求供奉,酷胜朱励,廉费巨万,劳民妨农。他对各地地方官也极不尊重,所到之处,便倨坐在大堂上,监司、都守都不敢与之抗礼,一时结怨于西北。有人告到徽宗面前,徽宗尚未发言,一旁的梁师成却恐有伤同类,厉声说:“皇上身边的人官职虽微,也列诸侯之上,李彦那样做,怎么算是过分呢?”言者惧怕梁师成专权狠毒,当即不敢发怨辞。就连气焰熏天的蔡京父子也丝毫不敢怠慢梁师成。
梁师成利用徽宗的宠幸,将自己名字窜入进士籍中。这样一个太监出身的家伙摇身变成了进士出身,于是迁升为晋州观察使、兴德军留后。后来都监建明堂,明堂建成后,又拜节度使,加中太一官,神宵官宫使,历护国、镇东、河杀三节度使,至校检太傅,再拜太尉,开封府仪同三司,换节淮南。
宣和年间,赵良嗣献计联金攻辽,朝臣多不同意。唯童贯、王黼等人意愿坚决。最初梁师成也不同意此计,后经王黼的游说,他才赞同并推荐谭棋作宣抚使。后来王黼等人大肆搜刮,计口出钱,得钱六千余万缗,买空城五六座、假称大捷。梁师成也因“献策”之功晋升为少保。
梁师成不仅独断专行,侍权弄柄,还通纳贿赂。有个人向他贿赂了数百万钱,他便以此人献颂扬皇上之书有功为名,令其参加廷试。唱第之日,他侍从于帝前,盛气凌人。
徽宗宣和末年,郓王赵楷恃宠企图动摇东宫太子赵恒之位,梁师成竭立保护。后来,赵恒即位(即来钦宗)因念旧“恩”,让徽宗的宠宦都从徽宗东卞,独留梁师成在身边。
但是,梁师成的奸佞却引起朝臣和百姓的强烈反感,太学陈东和布衣张炳上疏力诋其罪。说梁师成情定策有功,身怀异志,表里相应,变恐不测,应正之典型,以谢天下。钦宗虽迫于公议,但还不想下手。梁师成生怕离了钦宗会被人处置,所以寝食都不离钦宗一步。就连钦宗皇帝上厕所,他都恭侍厕外,以防不测。他提心吊胆地过了一段日子,见没有什么动静,心下稍安。
就在这时,郑望之出使重营回来。钦宗命梁师成与郑望之持宣和殿珠玉器玩再次前往,并让郑望之先行一步到中书晓谕宰相,如果梁师成去,就扣押定罪。梁师成不知原因,以为警报早除,威风如旧地来到中书,结果被早已守候的兵将擒住,钦宗下诏将其贬为彰化军节度副使,由开封府支“保护”到任所,行次到八角镇时,府吏缢杀了梁师成,上表说其“暴死”。
朱勔
朱勔(1075—1126),苏州(今江苏苏州)人。因父亲朱冲谄事蔡京、童贯,父子均得官。当时宋徽宗垂意于奇花异石,朱勔奉迎上意,搜求浙中珍奇花石进献,并逐年增加。政和年间,在苏州设置应奉局,摩费官钱,百计求索,勒取花石,用船从淮河、汴河运入京城,号称“花石纲”。
此役连年不绝,百姓备遭困扰涂炭,中产之家全都破产,甚至卖子鬻女以供索取。方腊起义时,即以诛杀朱勔为号召。朱勔在竭力奉迎皇帝的同时,又千方百计,巧取豪夺,广蓄私产,生活糜烂。他权势煊赫,谄事之人立即得官,不附己者统统罢去,州郡官吏奔走听命,奴事朱勔,当时号称“东南小朝廷”。钦宗即位,将他削官放归田里,以后又流放到循州(今广东龙川)关押,复造使将他斩首处死。为“六贼”之一。
李彦
李彦(?-1126 年),北宋宦官,名列六贼。
给事掖庭出身,后掌管后苑,宣和三年(1121年) 杨戬死,李继为大内总管,将杨之前收括的田地并入西城所,共得田三万四千三百余顷。“由是破产者比屋,有朝为豪姓而暮乞丐于市者”,先后杖死良民千余人,京东、河北人民群起反抗。太学生陈东说:“今 日之事,蔡京坏乱于前,梁师成阴谋于后,李彦结怨于西北,朱勔结怨于东南,王黼、童贯又结怨于辽、金,创开边衅。宜诛六贼,传首四方,以谢天下”。
宣和七年(1125年)十二月,诏罢西城所,将土地还予农家。次年,钦宗赐死李彦。
事见于《宋史·宦者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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