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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세력인 양산집단이 북송사대적구北宋四大賊寇에 들어간 이유는?

一字師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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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세력인 양산집단이 북송사대적구北宋四大賊寇에 들어간 이유는?

 

图片来源 北宋时期的四大寇都有谁?你知道他们谁最强吗?

 

: 삼갑제사(三甲第四)

<수호전>에서 하북전호(河北田虎), 회서왕경(淮西王慶), 강남방랍(江南方臘), 산동송강(山東宋江)은 북송말기의 '사대적구'라고 불린다. 전호, 왕경, 방랍의 세명 대왕은 모두 영역이 양산보다 컸다. 인력, 재력, 물력, 영향력으로 볼 때, 양산은 이들에 한참 못미친다. 송강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이들 삼대 대왕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을까?

 

"사대적구"를 쓰는 순서에 대하여도 이런 견해가 있다. 송강이 그중 가장 강했기때문에 첫머리에 이름이 놓인 것이라고. 그리고 송강은 초안후에 조정을 위하여 나머지 세 적구를 소탕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실력이 가장 강하다는 것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기실 '산동송강''사대적구'중 실력이 가장 약했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송강의 지반(地盤)이 좁았다. 겨우 양산수박(梁山水泊)을 점거했을 뿐이고, 인마는 겨우 몇만이었다.

 

양산수박은 방원팔백리에 이른다. 물산이 풍부하고, 지세가 험준하다. 왕륜(王倫)시대부터 송강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반을 확장한 적이 없다. 항상 양산수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비록 송강도 다른 성을 공격한 적이 있지만, 모두 공격만 했을 뿐 점령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동평부, 동창부에 대하여 양식을 구하는 행동을 진행했지만, 기실 그것은 약탈이었고, 약탈을 끝낸 후에는 퇴각했다. 그곳을 점령하고 권력을 교체하고 관직을 임명하지는 않았다.

 

나머지 세 적구는 달랐다. 전호는 556현을 점거했고, 방랍은825현을 점거했으며, 왕경은 지반이 더욱 넓었다. 886현을 점거했다. 이들과 비교하면, 양산수박은 그저 공원수준에 불과했다.

 

삼구의 인마수량도 송강보다 훨씬 많았다. 방랍의 병력은 삼십만에 달했고, 이것은 송강이 비교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둘째, 양산은 정권을 건립하지 못했다. 호한들은 서열이 있지만, 관직을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나머지 삼구는 조정의 정권제도를 적용하여, 스스로 왕에 봉하고, 관직을 두고, 궁전을 건축하고, 후궁까지 두었다.

 

송강은 양산을 오랫동안 경영하면서도 '산적'수준에 머물렀다. 기껏해야 몇개의 집을 만들어서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는 수준이었다. 자신은 마누라조차도 없었다. 그러니 후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삼구들처럼 야심만만하게 난을 일으켜 황제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아예 송나라황제를 끌어내릴 생각이 없었다. 뼛속부터 '충군'사싱에 물들어 있었다. 당연히 그는 스스로 그런 실력이 안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평가했다. 이규가 '큰형님이 대송황제가 될 수 있다"고 소리친다고 하여 그 말에 현혹되어 넘어가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실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송강은 양산을 위하여 초안의 길을 설계한 것이다. 삼구처럼 조정과 끝까지 싸우지 않았던 것이다.

 

초안후, 송강과 그의 형제들은 쉬지않고 조정을 위하여 사방으로 정벌을 다니며, 공로를 세운다. 요나라를 치고, 전호를 멸하고, 왕경을 소탕하며, 방랍을 제거했다. 송강과 그의 형제들은 천신만고끝에 최종승리를 거둔다. 역사적 사실은 놔두고서라도, <수호전>소설의 글만 볼 때, 왜 사대적구중 실력이 가장 약한 송강이 오히려 최종슨리자가 된 것일까? 원인은 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초안후의 송강 인마는 조정에 의해 재편된다. 중대한 군사행동에서 조정군대의 지원을 받는다. 그리하여 인력, 물력이 크게 증가한다.

 

양산의 기껏 몇만명의 인마로 그렇게 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초안후의 송강과 양산두목들이 이끄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수하들이었던 소수의 무리들이 아니었다. 조정이라는 큰 나무를 업고, 인력, 물자공급에서 나머지 삼구를 훨씬 넘어서게 된다.

 

둘째, 송강의 대오는 인심을 얻었다. 송강이 어디를 가든지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군중들로부터 실 하나 바늘 하나 가져가지 않은 것은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이는 초안전의 송강의 스타일과 천양지차가 있다. 초안전에, 송강은 백성을 괴롭히는 유적집단이었다. 대명부등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관병과 백성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대명부전투에서 5천여 빈민들이 죽임을 당한다.

 

초안후의 송강은 유구의 스타일을 바꾼다. 어디를 가든지 백성들에게 안심하라는 고시를 붙이고 최대한 백성들의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시켜주도록 애쓴다. 관건은 그가 이를 최대한 해냈다는 것이다. 태원성을 수공으로 파괴시키는 악독한 이준의 계모로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은 것을 제외하면, 다른 때는 용병때 최대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노력했다.

 

삼구의 점령구내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은 그러나 도탄에 빠져 있었다. 고통이 엄청나게 심했다. 그들은 백성을 그저 착취대상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방랍이 10일내에 수만의 인원을 모을 수 있었더 것은, 바로 양민을 유인하고 핍박하여 의거에 가담하게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본심은 '모두 송나라의 양민이므로, 분명히 도적을 기꺼이 돕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양, 김대견, 배선등이 왕경의 부하에게 붙잡힌 후, 성을 함락시켜 사람을 구해야할 긴급한 상황에서,

 

성안의 백성들은 의사(義士) 소가수가 소집하자 순식간에 5,6천명이 모인다. 백성들은 자신이 평소에 일하는데 쓰는 무기를 들고 나와 유수 양영(梁永)을 죽인다. 양영은 포학하여 평상시에 백성과 군인들을 학대하고 군인들을 매질했다. 그래서 모두 원한이 뼛속까지 깊어서 한 사람이 일어서자 모두 호응하여 가담한다." 수가수가 이끄는 군민이 성문을 나설 때는 이미 2만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렇게 안팎에서 호응하니 송강부대는 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삼구는 부패타락이 심해서 송강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나머지 삼구 중에서, 방랍이 화석강의 화를 참지 못하고 강남에서 빈곤한 자들을 끌어모아 의거를 일으킨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2명은 악당출신이다. 도적에서 반동정권을 건립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이다. 백성들에게 계속 해만 끼쳤다. 전호는 사냥꾼 출신으로, 지방의 악인들과 결탁하여 하북을 점거하여 정권을 건립한다. 왕경은 동경의 깡패이고, 사건을 저질러 도적이 된다. 도적이 된 후에 병력을 이끌어 반란을 일으킨다. 이 두 사람은 불충, 불의, 불효한 인물들이다. "효의흑삼랑(孝義黑三郞)" 송강과 비교하면 고하가 분명하다.

 

다만, 이들 지방흑세력이 발전하여 이루어진 반동정권에 대하여 조정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수호전>에는 그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단지 '문관은 돈을 좋아하고, 무관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군기가 세워지지 않고, 군수물자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는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송강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기풍이 우량했다. 전투에서 이기겠다는 충의의 사나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송강을 선봉장으로 내보낸 것은 적재적소에 사람을 쓴 셈이다.

 

삼구는 지방정권을 건립한 후, 자신감이 팽창했다. 그러다보니 생활은 점점 부패하고, 진취심은 점점 상실한다. 향락만 즐기게 되고, 민생을 개선하는 것은 아예 생각지 못한다. 전호는 범미인을 총애하고, 왕경은 여러 곳에 행궁별원을 짓는다. 그들의 대오에 강한 장수들이 있었지만, 뿌리부터 부패되는 것이 점점 확대된다. 그래서 송강부대는 전호, 왕경을 토벌할 때 우무머리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방랍을 공격할 때는 달랐다. 방랍은 앞의 두 적구와는 달랐다. 그의 수하에는 정예병사들과 좋은 장수들이 있었다. 그리고 군기가 엄명해서 전투력이 강했다. 양산호한을 거의 절반이나 잃으면서 결국 시진의 잠복으로 보루이 내부에서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다.

 

방랍을 진압한 후, 양산호한은 더 이상 남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중에서는 갑옷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거나, 세상의 허무함을 깨닫고 하나하나 송강을 떠난다. 송강의 세력은 이렇게 하여 크게 약화된다. 조정의 간신은 그에 대해 더 이상 거리낌이 없었다. 송강은 결국 '토사구팽'의 비극을 벗어나지 못했다.

 

北宋六贼

 

北宋六贼凭什么能获得重用六人的结局又是如何

 

北宋六贼导致王朝覆灭的罪魁祸首

北宋六贼北宋年间六个奸臣的统称这六个人分别是蔡京童贯王黼梁师成朱勔李彦基本都是宋徽宗时期重要的大臣这六人朝庙之上结党营私贪赃枉法荒淫无度排除异己私下滥使职权以鱼肉百姓为乐将民间弄得乌烟瘴气满目涂炭是导致当时江南方腊起义和金国入侵中原的罪魁祸首

 

中文名北宋六贼别 名六贼国 籍宋朝民 族汉族释 义民间对宋徽宗年间六个奸臣的合称代表人物蔡京童贯王黼梁师成朱勔李彦所属时期宋徽宗时期特 征贪赃枉法横行霸道危 害民不聊生身 份宋徽宗时期大臣

 

历史背景编辑 播报

六贼之名最早出于太学生陈东在宣和七年1125的上书陈东说今 日之事蔡京坏乱于前梁师成阴谋于后李彦结怨于西北朱勔结怨于东南王黼童贯又结怨于辽创开边衅宜诛六贼传首四方以谢天下

 

北宋末年的六贼蔡京王黼童贯梁师成朱勔李彦都是宋徽宗的朋友

蔡京与童贯是北宋末年响当当的六贼领头人物腐败得一塌糊涂搜刮来的银子拿部分 办办公开赛供皇族高官花差花差根本无所谓六人互相勾结排斥异己民间称三千索直秘阁五百贯擢通判

 

六贼把国家搞得乌烟瘴气他派朱勔在江南一带搜刮珍奇异宝名花古木,朱勔及其爪牙们仗着皇帝的势力在江南横行霸道,他们拆墙破屋敲诈勒索,弄得民不聊生歙州睦州一带山清水秀物产丰富,也成了朱勔等人骚扰搜刮的主要地区歙州睦州人民痛恨官府,在穷苦农民方腊的领导下举行起义

 

宋徽宗宣和七年1125),李彦遭赐死宋钦宗靖康元年1126),其馀五人先後伏诛王黼安置永州今湖南零陵),途中秘密处死蔡京贬于儋州今海南儋县),途中病死梁师成贬为彰化军节度副使途中赐死童贯贬于吉阳军今海南崖县),途中赐死朱勔贬于循州今广东龙川),不久斩首处死

六贼令北宋渐渐没落不久即发生靖康之变

 

蔡京

蔡京(10471126)北宋奸臣字元长兴化仙游今属福建与北宋书法家蔡襄是同乡熙宁二年1069),在满朝保守派大臣的反对中王安石被宋神宗任命为宰相实行变法次年兴化军仙游县蔡京进京应试得中进士开始步入仕途后据明代弘治年间编写的重刊兴化府志·蔡京传记载蔡京登第后调钱塘尉舒州推官累迁起居郎使辽还拜中书舍人时弟卞已为舍人故事入官以先后为序卞乞斑京下兄弟同掌书命朝廷荣之短短数年蔡京由地方政府官员变成朝中大臣受到宋神宗,宋徽宗和王安石的重用

 

在宋神宗的支持下王安石变法顺利推行青苗法募役法方田均税法农田水利法保甲法等一一面世解决了北宋面临的种种危机新法推行后社会矛盾得到缓和政府收入有所增加促进农业生产全国各地兴修水利工程一万多处在莆田就有侯官今闽侯),长者李宏应诏携带巨额家资来莆田建造木兰陂此陂于宋熙宁八年1075动工历经八年完工

 

但此时朝中反对变法者众多甚至连太皇太后和皇太后也出面带头反对她俩视新法为洪水猛兽把王安石说成是乱臣贼子她俩哭着向神宗诉说王安石是要用新法把天下搞得大乱!”神宗动摇罢了王安石的官后来后悔了又请王安石出来重新当政

 

宋神宗死后子哲宗立高太后临朝听政1086司马光出任宰相尽复旧人旧法对新人新法一概排除蔡京这个王安石变法的得力干将成了被打击的主要对象。《重刊兴化府志司马光秉政复差役法为期五日迫蔡京等完成京独如约悉改畿县差役无一违者诣政事堂白光光喜曰使人人奉法如君何不可行之有?’已而台谏言京挟邪坏法出知成德军……蔡京办事雷厉风行连保守派首领司马光也不得不折服当面称赞但在反对派面前这个兴化之子却无立锥之地终被逐出京城日子一天不如一天

 

由于高太后临朝听政对变法者大打出手使北宋政权又陷入了严重的政治危机元祐八年1093),哲宗亲政重新使用变法者任命章惇为相不久蔡京回都城任户部尚书。《重刊兴化府志章淳复变役法置司讲议久不决蔡京见状主动上前积极配合帮章解决问题京谓惇曰取熙宁成法施行之尔何以讲为?然之雇役遂定差雇两法十年间京再莅其事成于反掌两人相依以济这一记载说明蔡京对王安石十分敬仰对他的新法很有研究元祐元年1086),王安石在江宁今江苏南京去世八年后蔡京还继续宣传和介绍王安石新法使王安石的遗志有人继承

 

但哲宗时的这次变法因新旧党争反复不已难于取得明显成效宋徽宗即位后有意修熙丰政事又起用蔡京任命他为宰相继续推行新法靖康元年(1126),宋钦宗即位后蔡京被贬岭南途中死于潭州今湖南长沙)。

 

蔡京的艺术天赋极高素有才子之称在书法诗词散文等各个艺术领域均有辉煌表现当时的人们谈到他的书法时使用的词汇经常是冠绝一时无人出其右者就连狂傲的米芾都曾经表示自己的书法不如蔡京据说有一次蔡京与米芾聊天蔡京问米芾当今书法什么人最好?”米芾回答说从唐朝晚期的柳公权之后就得算你和你的弟弟蔡卞了蔡京问其次呢?”米芾说当然是我

存世书迹有草堂诗题记》、《节夫帖》、《宫使帖》。

 

王黼

王黼10791126),汴京今河南开封字将明原名甫赐改为黼为人多智善佞寡学术崇宁进士初因何执中推荐而任校书郎迁左司谏因助蔡京复相骤升至御史中丞历翰林学士承旨勾结宦官梁师成以父事之宣和元年1119),拜特进少宰权倾一时后代蔡京执政伪顺民心悉反蔡京所为以沽名钓誉利用权势广求子女玉帛生活糜烂奢华请置应泰局苛取四方水陆珍异之物据为己有时朝廷欲联金攻辽王黼竭力怂恿不遗余力且大肆搜括计口出钱得钱六千余万缗买五六座空城伪称胜利进封太傅楚国公钦宗即位抄没其家贬为崇信军节度副使被开封尹聂山派人诛杀六贼之一

 

童贯

童贯(1054-1126) 北宋宦官六贼之一字道夫一作道辅),汴京今河南开封性巧媚初任供奉官在杭州为徽宗搜括书画奇巧助蔡京为相京荐其为西北监军领枢密院事掌兵权二十年权倾内外时称蔡京为公相称他为媪相宣和四年攻辽失败乞金兵代取燕京以百万贯赎燕京等空城而回侈言恢复之功七年金兵南下他由太原逃至开封随徽宗南逃钦宗即位被处死。《宋史列为奸臣

 

梁师成

梁师成(?-1126) 北宋末宦官籍贯不详六贼之一字守道政和间为徽宗(赵佶)所宠信官至检校太殿凡御书号令皆出其手并找人仿照帝字笔迹伪造圣旨因之权势日盛贪污受贿卖官鬻职等无恶不作甚至连蔡京父子也谄附故时人称之为隐相钦宗(赵桓)即位后贬为彰化军节度副使在行至途中时被缢杀

 

梁师成外表愚讷谦卑看上去老实厚道不象是能说会道的人实际上却内藏奸诈善察言观色处事老道深得徽宗的宠信

 

梁师成原本在贾祥的书艺局当役因为本性慧黠加之在书艺局耳濡目染也略习文法诗书贾祥死后他便领睿思殿文字外库主管出外传导御旨这可是个肥缺所有御书号令都经他手传出来颁命天下天长日久他也看出些门道找来几个擅长书法的小吏模仿宋徽宗的笔迹按照他自己的意愿拟圣旨下传外廷人不知底细也不辨真伪

 

梁师成虽多少懂些诗书但根本谈不上是什么大手笔他却喜欢附庸风雅自我标榜吹嘘说自己出自于苏轼之门还四处宣称以翰墨为己任常常对门下的四方俊秀名士指点批评他还在府宅的外舍放置各种字画卷轴邀请宾客观赏评论题识如果题识令他满意的他便加以荐引所以朝廷的大臣谁也不敢低估他背地里都称他为隐相

 

当时被称为六贼之一的王黼对梁师成更是如子敬父称之为恩府先生两人府第仅一墙之隔又在墙上设一小门日夜往来交通王黼仗着有梁师成撑腰强占左邻门下侍郎许将的房宅光天化日之下将许将一家从内眷到仆隶一起扫地出门路人见状无不愤惋叹惜但却无可奈何

 

大太监李彦在宣和三年公元1121),继杨戬提举西城所置局汝州搜刮民田为公田焚民故券使输田租凡有投诉上报的人一旦被他知道使严加拷打一时死者千万他还征发财物要求供奉酷胜朱励廉费巨万劳民妨农他对各地地方官也极不尊重所到之处便倨坐在大堂上监司都守都不敢与之抗礼一时结怨于西北有人告到徽宗面前徽宗尚未发言一旁的梁师成却恐有伤同类厉声说皇上身边的人官职虽微也列诸侯之上李彦那样做怎么算是过分呢?”言者惧怕梁师成专权狠毒当即不敢发怨辞就连气焰熏天的蔡京父子也丝毫不敢怠慢梁师成

 

梁师成利用徽宗的宠幸将自己名字窜入进士籍中这样一个太监出身的家伙摇身变成了进士出身于是迁升为晋州观察使兴德军留后后来都监建明堂明堂建成后又拜节度使加中太一官神宵官宫使历护国镇东河杀三节度使至校检太傅再拜太尉开封府仪同三司换节淮南

 

宣和年间赵良嗣献计联金攻辽朝臣多不同意唯童贯王黼等人意愿坚决最初梁师成也不同意此计后经王黼的游说他才赞同并推荐谭棋作宣抚使后来王黼等人大肆搜刮计口出钱得钱六千余万缗买空城五六座假称大捷梁师成也因献策之功晋升为少保

 

梁师成不仅独断专行侍权弄柄还通纳贿赂有个人向他贿赂了数百万钱他便以此人献颂扬皇上之书有功为名令其参加廷试唱第之日他侍从于帝前盛气凌人

 

徽宗宣和末年郓王赵楷恃宠企图动摇东宫太子赵恒之位梁师成竭立保护后来赵恒即位即来钦宗因念旧让徽宗的宠宦都从徽宗东卞独留梁师成在身边

 

但是梁师成的奸佞却引起朝臣和百姓的强烈反感太学陈东和布衣张炳上疏力诋其罪说梁师成情定策有功身怀异志表里相应变恐不测应正之典型以谢天下钦宗虽迫于公议但还不想下手梁师成生怕离了钦宗会被人处置所以寝食都不离钦宗一步就连钦宗皇帝上厕所他都恭侍厕外以防不测他提心吊胆地过了一段日子见没有什么动静心下稍安

 

就在这时郑望之出使重营回来钦宗命梁师成与郑望之持宣和殿珠玉器玩再次前往并让郑望之先行一步到中书晓谕宰相如果梁师成去就扣押定罪梁师成不知原因以为警报早除威风如旧地来到中书结果被早已守候的兵将擒住钦宗下诏将其贬为彰化军节度副使由开封府支保护到任所行次到八角镇时府吏缢杀了梁师成上表说其暴死

 

朱勔

朱勔10751126),苏州今江苏苏州因父亲朱冲谄事蔡京童贯父子均得官当时宋徽宗垂意于奇花异石朱勔奉迎上意搜求浙中珍奇花石进献并逐年增加政和年间在苏州设置应奉局摩费官钱百计求索勒取花石用船从淮河汴河运入京城号称花石纲

 

此役连年不绝百姓备遭困扰涂炭中产之家全都破产甚至卖子鬻女以供索取方腊起义时即以诛杀朱勔为号召朱勔在竭力奉迎皇帝的同时又千方百计巧取豪夺广蓄私产生活糜烂他权势煊赫谄事之人立即得官不附己者统统罢去州郡官吏奔走听命奴事朱勔当时号称东南小朝廷钦宗即位将他削官放归田里以后又流放到循州今广东龙川关押复造使将他斩首处死六贼之一

 

李彦

李彦?1126 ),北宋宦官名列六贼

给事掖庭出身后掌管后苑宣和三年1121杨戬死李继为大内总管将杨之前收括的田地并入西城所共得田三万四千三百余顷由是破产者比屋有朝为豪姓而暮乞丐于市者先后杖死良民千余人京东河北人民群起反抗太学生陈东说今 日之事蔡京坏乱于前梁师成阴谋于后李彦结怨于西北朱勔结怨于东南王黼童贯又结怨于辽创开边衅宜诛六贼传首四方以谢天下

 

宣和七年1125十二月诏罢西城所将土地还予农家次年钦宗赐死李彦

事见于宋史·宦者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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