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홍루몽에 나오는 철리종교哲理宗敎와 문사인물文史人物

一字師 2023.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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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에 나오는 철리종교哲理宗敎와 문사인물文史人物

 

 

인상여藺相如

전국시기戰國時期에 조趙나라의 상경上卿이다. 조혜문왕趙惠文王 때, 진秦나라가 조나라에게 “화씨벽和氏璧”을 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명을 받들어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로 들어가, 조정에서 격렬하게 논쟁하여 화씨벽을 원래대로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조혜문왕 20년(BC 279년)에 조왕을 수행하여 민지澠池(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 속함)에 가서 진왕秦王과 서로 만났을 때, 조왕이 굴욕을 당하지 않게 보좌했다.

 

그 당시의 조정대신 염파廉頗에게 양보하고 참아서 염파로 하여금 깨닫게 만들어 지기가 되었다. 경극京劇 『장상화將相和』는 이 고사를 공연한 것이다.

 

사마상여司馬相如

사마상여(BC 179년-BC 117년)는 자가 장경長卿, 아명은 견자犬子로 인상여의 사람됨을 경모하여 이름을 상여相如라고 지었다,

 

촉군蜀郡의 성도成都(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사람이다. 서한西漢의 유명한 사부가辭賦家로 경제景帝 때에 처음 무기상시武騎常侍에 임명되었으나 칭병하며 사직하고 촉군으로 갔는데, 우연히 임공臨邛에서 탁문군卓文君을 만나 서로 사랑하여 성도로 도망쳤다가, 또 함께 임공으로 돌아롸 술을 판 일은 미담으로 전해내려 온다.

 

卓文君最扎心的一首诗,全诗无一情字,却句句痛彻心扉

 
卓文君是汉代有名的才女,出生在一个巨富之家,汉代文景之治时,卓家的冶铁生意传到了卓文君父亲卓王孙这一代,由于社会安定,又经营得当,很快得到了发展,家产颇丰,不过卓文君并非因卓家而出名,恰恰相反,卓家因她才被世人关注。


卓文君从小姿色娇美,又富有才情,琴棋书画样样精通,特别招人喜欢,而她后来跟司马相如的爱情故事,更是被后世传为佳话。
正所谓每个成功男人的背后都有一个伟大的女人,而卓文君就是那个伟大的女人!司马相如在自己穷困潦倒的时候,遇到了卓文君,从此改变了他的人生。weide1946


虽然他们两人最终白头到老了,但期间也发生了很多情感上的纠葛,司马相如发迹后,开始移情别恋,想要娶小妾,羞愤的卓文君得知以后写了一首诗给他,来表达自己的哀怨之情,没想到却成了千古佳作,这首诗应该是卓文君最扎心的一首诗,全诗并无一个情字,却字字痛彻心扉。


这首诗很多人都读过叫《白头吟》:
皑如山上雪,皎若云间月。
闻君有两意,故来相决绝。
今日斗酒会,明旦沟水头。
躞蹀御沟上,沟水东西流。
凄凄复凄凄,嫁娶不须啼。
愿得一心人,白头不相离。
竹竿何袅袅,鱼尾何簁簁!
男儿重意气,何用钱刀为!


诗的开篇两句“皑如山上雪,皎若云间月”,卓文君写得非常唯美。说爱情本来就应该像山上的雪一般纯洁,像云中的月亮一样皎洁,而紧接着写到“闻君有两意,故来相决绝,今日斗酒会,明旦沟水头……”
意思说,现在你有二心,给我们的爱情掺杂了东西,我要跟你分手,今天是咱们最后一次聚餐,宴席过后咱们各自分手,就像江水东西永不汇合。看似决绝的态度,背后却暗藏了一个女人的苦楚和无助。


凄凄复凄凄,嫁娶不须啼。
愿得一心人,白头不相离。
这两句跟上面几句形成了强烈的呼应,意思是说,一般女子出嫁总是悲伤啼哭,其实大可不必,只要嫁给一个专心的如意郎君,白头偕老,永不分离,就很幸福!言外之意就是说,今天我遭到了你的抛弃,这是出嫁女子根本无法体会的感受。
作者用委婉的方式,表达了自己,并不想就此离去希望男方可以回心转意。说明卓文君对司马相如还是有很深的感情在的,而最后4句的思想境界放到今天都适用。
她用香饵引诱鱼上钩,来比喻靠金钱来引诱爱情,意思是说,爱情应该以相互意气相投作为基础,而不是依靠金钱关系来维持。也点破了司马相如,娶小妾是因为金钱的原因,而并非是相互意气相投,这种爱情是不靠谱的。


这首诗塑造了一个个性相当鲜明的弃妇形象,表达了一个失去爱情的妻子,心中对丈夫的哀怨和悲愤,以及对一份真挚纯真爱情的渴望,并表达了自己对爱情的态度。
最后司马相如看了这首诗后,决定浪子回头,打消了娶小妾的念头,在古代女子的地位相当卑微,像司马相如,如此尊重他夫人的很少见。

 

무제武帝 때, 랑郞으로 부름을 받고 서남西南 지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소수민족과의 관계를 소통시켰고, 만년에 관직을 면하고 한가하게 생활하며 지냈다.

 

홍루몽에 나오는 철리종교哲理宗敎와 문사인물文史人物 (9)

 

맹광孟光

맹광은 자가 덕요德曜이고, 부풍扶風 평릉平陵(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함양시咸陽市) 사람으로, 그 아내는 양홍梁鴻이다.

 

제 92 회에서 보옥寶玉이 교저巧姐에게 『열녀전烈女傳』에 대하여 설명해 줄 때, “싫어하지 않는” 인물에 속한 사람이다.

 

양홍梁鴻

자는 백란伯鸞이고 부풍 평릉 사람으로 동한東漢 때에 살았던 인물이다.

 

집이 가난하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임원林苑에서 돼지를 길렀는데, 나중에 아내 맹광과 패릉산覇陵山에서 은거하며 길쌈과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나중에 오吳(지금의 소주蘇州) 지역에서 거하다가, 고백통臯伯通에게 의탁하여 낭하廊下에서 살았는데, 농사꾼으로 고용살이를 했다.

 

“매번 돌아오면, 아내는 밥을 지어서 남편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거안제미擧案齊眉’(남편에게 밥상을 올릴 때, 밥상을 눈썹까지 들어 올리다)했는데, 후세에 ‘거안제미’는 아내가 남편을 경애敬愛하는 것을 비유하는 부덕의 본보기가 되었다.

 

“맹광이 양홍의 밥상을 받아들다”라는 말은, 왕실보王實甫의 『서상기西廂記』 제 3 본本 2 절折에 나오는데, 최앵앵崔鶯鶯이 장군서張君瑞의 애정을 받아들일 것을 비유한 것으로, 홍루몽 소설에서 대옥黛玉이 보옥寶玉의 우정을 받아들인 것을 암시한다.

 

홍루몽에 나오는 철리종교哲理宗敎와 문사인물文史人物 (8)

 

육방옹陸放翁

즉 육유陸游(1125년-1210년)는 자가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이고, 산음山陰(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사람으로, 남송의 대시인이다.

 

진강鎭江, 융흥隆興과 기주夔州의 통판通判과 보장각대제寶章閣待制 등의 관직을 담당했다. 송 왕조가 남쪽으로 건너가게 되었을 때, 애국사상에 넘쳐 항전하기를 주장했다.

 

만년에 고향으로 퇴거하여 중원 회복을 갈구했다. 시풍은 웅장하고 힘차고 호방한 시풍을 가졌는데, ⌜시아示兒⌟ 등의 명편名篇이 있다.

 

또 사詞에도 능하여 미려하고 힘차며 탄식을 구비했는데, ⌜차두봉𨥁頭鳳⌟ 등은 사람에게 참된 감동을 주며 널리 칭송을 받았다.

 

홍루몽 중에 향릉香菱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바로 육유의 시의 다음의 한 구절이다:

 

重帘不卷留香久(주렴을 드리우고 걷지 않아서 향기가 오래 머물고)

古硯微凹聚墨多(오래된 벼루의 우묵한 곳에 먹물이 가득하구나)

 

왕마힐王摩詰

즉 왕유王維(701년-761년)인데, 자는 마힐摩詰, 원래의 호적은 기祁 지방이나, 부친을 따라 포주蒲州로 옮겨 하동河東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당나라 때의 시인이자 화가이기도 한데, 급사중給事中과 태자중윤太子中允을 담당했다가, 나중에 상서우승尙書右丞을 지내서, 사람들에게 왕우승王右丞으로 불렸다.

 

만년에 남전藍田의 망천輞川에 거주하며 관직에 나가기도 하고 은거하기도 했다.

 

그는 시를 정교하게 내용을 묘사하고, 그림의 형상은 생동적으로 그렸는데, 북송의 소식蘇軾은 그의 그림에 대해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는 시가 들어있다”라고 평했는데, 『망천도輞川圖』와 『왕우승집王右丞集』이 있다.

 

홍루몽에 나오는 철리종교哲理宗敎와 문사인물文史人物 (7)

 

여동빈呂洞賓

이름은 이름이 암嵒, 또는 암岩, 호는 순양자純陽子이고, 당나라의 경조京兆 사람인데, 일설에는 하중부河中府(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영제현永濟縣) 사람이라고도 한다.

 

진사進士 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지자, 강호江湖를 유람하다가 종리권鍾離權을 알게 되어 종남산終南山에서 도道를 배우며 은거했는데, 나중에 각지를 다니면서 도인을 자처했다.

 

북송 때부터 전해지는 고사로는, 교룡蛟龍을 죽이고, 학鶴을 다루고, 술에 취해서 지냈는데, “팔선八仙”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홍루몽 소설 중에서는 채하彩霞가 ‘강아지가 여동빈을 깨문 것은 --- 호인好人의 마음을 알지 못해 그런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구절은 나중에 가환賈環이 그녀의 착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질책한 말이다.

 

이의산李義山

이의산(약 813년-약 858년)은 이름은 상은商隱은 자가 의산義山, 호는 옥계생玉溪生이고, 회주懷州 하내河內(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심양沁陽) 사람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현위縣尉, 비서랑秘書郞과 동천절도사판관東川節度使判官 등의 관직을 지냈는데, 우승유牛僧儒와 이덕유李德裕의 당쟁의 영향을 받아, 할거하는 번진藩鎭과 전권을 휘두르는 관료에 대한 불만과 사람들로부터 배제되자 의기소침해 하며 생을 마쳤다.

 

율절律絶에 뛰어나고 풍부한 문채文采를 가져 독특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영사咏史⌟, ⌜무제無題⌟는 모두 옛것에 의거하여 풍자로 심정을 기탁한 것이나, 전고를 너무 많이 인용하여 중심사상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결점이 있다.

 

그래서 임대옥林黛玉은 “이의선의 시를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오직 ‘留得殘荷聽雨聲’(남아 있는 연꽃잎에 비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라는 구절은 좋아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 구절은⌜숙락씨정기회최옹최연宿駱氏亭寄懷崔雍崔兗⌟이라는 시에서 나온 것인데, 시가 단조롭다는 결함이 있다.

 

제 49 회에서 보차寶𨥁가 사상운史湘雲과 향릉香菱에게 당나라 시인의 풍격에 대해 말할 때, ‘이의선의 시는 문구가 생소하고 괴벽하다’라고 말한 것이 있다.

 

조자앙趙子昻

즉 조맹부조趙孟頫(1254년-1322년)인데, 자는 자앙子昻이고, 원元나라의 서화가이다. 중년에는 호를 맹부孟俯, 송설도인松雪道人, 수정궁도인水精宮道人이라 했다.

 

본래 송의 종실이나, 원나라에 들어가 형부주사刑部主事,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지내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서법書法과 회화繪畫에 뛰어나서, 그 행해行楷(행서와 해서의 중간서체이며, ‘행초行草’와 구별됨)는 힘 있게 둥글게 돌리는 서체가 매우 멋있는데, 사람들은 “조체趙體”라고 불렀다.

 

그림의 유파는 고풍스러워 일대一代의 화풍을 창립하고, 전각篆刻에도 뛰어나 “원주문圓珠文”으로 유명했다. 전해 내려온 서화 작품이 아주 많은데, 친필 『사체천자문四體千字文』과 『추교음마도秋郊飮馬圖』 등이 있다.

 

홍루몽에 나오는 철리종교哲理宗敎와 문사인물文史人物 (6)

 

온비경溫飛卿

즉 온정균溫庭筠(약 812년-866년)인데, 원래 이름은 기岐, 자는 비경飛卿으로 태원太原 사람이고, 당나라의 시인이자 사인詞人이다. 민첩하게 글을 구상하고 음률이 정교하다.​​

 

매번 시문의 압운押韻을 할 때면, 팔차수八叉手(시를 짓는데 재빠름을 이르는 말)하게 팔운八韻을 다 했기 때문에 당시에 “온팔차溫八叉”라고 호號를 붙였다.

 

벼슬길이 뜻대로 되지 않아, 관직은 국자조교國子助敎에 그쳤다. 그의 시사詩詞는 규방의 정취가 많고, 몇몇은 시정時政을 반영한 것도 있다.

 

현존하는 사詞 60여 수는 대다수가 『화간집花間集』애 수록되어 있다.

 

제 75 회에서 보차寶𨥁가 사상운史湘雲과 향릉香菱에게 시를 말할 때 당대唐代 시인의 풍격을 제기하면서 온비경의 시는 사조辭藻(시문의 문채나 말의 수식)가 화려하고, 그 사詞의 풍격은 농염하여 “온비경지기미溫飛卿之綺靡”(온비경의 아름다움)라고 칭했다.

 

진소유秦小游

즉 진관秦觀(1049년-1100년)인데, 자는 소유少游, 태허太虛, 호는 회해거사淮海居士이고, 고우高郵 사람으로,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를 맡고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겸했다.

 

북송의 저명한 사인詞人이며 구당舊黨의 경향이 있는 진소유는 당원으로 만들려는 원우元에게 여러 번 좌천을 당했다.

 

그의 문사文辭는 소식蘇軾에게 인정을 받아서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사詞는 완약파婉約派에 속하는데, 남녀의 사랑에 관한 작품이 많고, 신세의 감상感傷을 묘사한 작품도 꽤 있다. 또 시에도 능해서 『회해집淮海集』이 전해지고 있다.

 

제 5 회에는 진가경秦可卿의 방 안에 송학사宋學士 진태허秦太虛의 “눈한쇄몽인춘랭嫩寒鎖夢因春冷”(싸늘한 봄날 때문에 단꿈을 못이루다)이라고 쓴 대련對聯있는데, 이 대련은 『회해집』에는 없는 것이다.

 

혜능惠能

혜능(638년-713년)은 당나라 때의 고승으로, 중국불교 선종禪宗의 실제적인 창립자로 남종육조南宗六祖로 숭상하고 있다.

 

나중에 중국불교사의 선종과 사상사에서의 선학禪學은 일반적으로 남종南宗과 혜능선학惠能禪學을 가리킨다.

 

선종 정파正派가 되기 위해서, 그 제자가 그 언론言論을 『육조단경六祖壇經』으로 편집하여 대대로 전했다.

 

가보옥賈寶玉, 임대옥林黛玉, 설보차薛寶𨥁가 參禪과 오선기悟禪機 등등이 바로 선학을 말한 것이다.

 

홍인弘忍

홍인(602년-675년)은 당나라 때의 고승으로 선종을 학습하여 선종의 제오조第五祖라 불렸는데, 그 문하에 신수神秀와 혜능惠能이 있다.

 

신수神秀

신수(606년-706년)은 당나라의 고승으로 선종북파禪宗北派의 창시자이고, 칭호는 북종北宗의 제육조第六祖이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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