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천룡팔부2 김용
1. 다정도 병인가
여인은 조용히 말했다.
[완아 빨리 나오너라.이 몹쓸 집은 잠시라도 머물만한 곳이 못 된다.]
목완청은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도리질하며 부르짖었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에요! 사부님.그는 나를 속이는 것이죠? 그렇죠? 그는 말했어요.사부님이 제 엄마이고 그가 아빠라고요.]
진홍면은 싸늘히 입을 열었다.
[바보같은 계집애! 내가 이미 누누이 말했지 않느냐? 세상 남자들은 모두 거짓말장이라고....너의 부모는 이미 죽었다.]
당정순은 창문께로 다가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홍면....들어와요.어디 얼굴 좀 봅시다. 이제부터는 헤어지지말고 우리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 살도록 합시다.]
진홍면은 움찔 몸을 떨었다.그러나 곧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또 다시 저를 농락하려고 하는군요. 그런 사탕발림에 차갑게 얼어붙은 내 마음이 풀어질 줄 알았어요?]
단정순은 진정으로 말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오.하지만 나는 하루도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진홍면은 단정순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많이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백봉을 버릴 수 있으세요?]
단정순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대답을 못하자 진홍면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진정 나와 가련한 우리의 딸을 사랑한다면 나를 따라오세요. 그리고 영원히 도백봉을 생각하지 말아야 해요.]
목완청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아득한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눈앞의 두 사람이 그녀의 부모이고 이 며칠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하던 단예가 배 다른 오라버니라는 사실에 그녀는 절망하고 말았다. 원앙이니 비익조니 하는 낱말들은 그녀로부터 떨어져 나가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단정순은 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진남왕부의 주인이오.내가 어떻게 이곳을 버릴 수가 있겠소?]
진홍면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십팔 년 전에도 당신은 그렇게 말했어요.그리고 십팔 년 후인 오늘에도 당신은 여전히 그렇게 말하는군요.단정순....이 박정한 사내....나는....당신이 정말 미워요....]
그때 별안간 동쪽 지붕 위에서 철썩 철썩 철썩, 하니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리고 서쪽 지붕 위에서도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고승태와 저만리가 동시에 부르짖는 음성이 들여왔다.
[자객이다! 여러 형제들은 원 위치를 지키고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진홍면은 말했다.
[완아,너 정말 못 나오겠느냐?]
목완청은 대답했다.
[네.나가요.]
그녀는 몸을 날려 창밖으로 나와서는 이제는 어머님이며 은사이기도 한 진홍면의 품속에 몸을 던졌다.
단정순은 말했다.
[홍면,정말 이대로 나를 두고 떠날 작정이오?]
그 음성은 매우 처량했다.진홍면은 갑자기 부드러운 이조로 말했다.
[순 오라버니,당신은 수십 년간 왕 노릇을 했으니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나를 따라가요.이후부터 저는 당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듣겠으며 다시는 한 마디의 욕도 하지 않겠어요. 또한 절대로 당신을 때리지 않겠어요.귀여운 딸이 측은하지도 않으세요?]
단정순은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하여 불쑥 입을 열었다.
[좋소.그대를 따라가지.]
진홍면은 크게 기뻐 오른손을 내밀었다.단정순이 손으로 잡아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때 별안간 등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린다.
[사저,또....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는군요. 그는 며칠간 사저를 달래려고 하겠지만 또다시 돌아와 왕 노릇을 하게 될 거예요.]
단정순은 흠칫해서 부르짖었다.
[보보,그대였구려! 그대 역시 왔구려!]
목완청이 고개를 돌렸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녹색의 비단장삼을 걸치고서 있었다. 바로 만겁곡의 종 부인 소야차 감보보였다. 그녀의 등뒤에는 네 사람이 서 있었다.한 사람은 섭이랑이고 또 한 사람은 운중학,그리고 세 번째의 사람은 방금 떠나갔던 남해악신이 아닌가? 그녀로 하여금 더욱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네 번째 사람이 바로 단예라는 사실이었다.남해악신은 커다란 손으로 단예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언제라도 우지끈 뚝하고 그의 목을 비틀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목완청은 부르짖었다.
[낭군님,어떻게 된 일이에요?]
단예는 침대 위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몽롱한 의식 속에 남해악신이 뛰어들어 자기를 안고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본래 그는 독에 중독되지 않았었다.목완청의 독화살도 그를 중독시킬 수는 없었다. 다만 화살에 의해 상처가 났을 뿐인데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지라 그는 남해악신에게 잡히는 순간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창밖에서 부친과 목완청,그리고 진홍면 세 세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그는 목완청이 자기를 낭군이라고 부르자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누이,우리는 남매요,앞으로 서로 위해 주고 아껴 준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목완청은 크게 부르짖었다.
[아니에요! 좋지 않아요! 당신은 처음으로 나의 얼굴을 본 남자에요.]
그러나 그녀는 자기와 그가 모두 단정순의 소생이고 남매라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다.혼례를 올릴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어떤 사람이 그들의 혼사를 막는다면 그녀는 화살로 쏘아 죽일 수도 있었으리라.그러나 지금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고 권세가 높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왁,하는 울음 소리와 함께 바깥쪽으로 질풍과 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진홍면은 급히 부르짖었다.
[완아,어디로 가느냐?]
목완청은 사부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나를 해쳤어요.나는 당신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갔다.
한 명의 위사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호통쳤다.
[멈추시오!]
목완청은 독화살을 쏘았다.그 독화살은 즉시 그 위사의 목을 꿰뚫었다. 그녀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단정순은 아들이 남해악신에 잡혀 있자 딸이 어디로 가는지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즉시 한 손가락을 송곳처럼 뻗쳐 남해악신을 향해 찔러갔다.섭이랑이 손을 칼같이 펼쳐서는 위로 쳐올려 그의 손목을 자르려고 했다. 단정순은 손을 홱 뒤집으며 손을 낚아채려고 했다.삽시간에 두 사람은 삼 초를 교환했다.단정순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이 이토록 무공이 뛰어나다니....]
이때 진홍면은 단예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부르짖었다.
[당신 아들을 죽일 셈인가요?]
단정순은 깜짝 놀라 손을 멈추었다. 그는 진홍면의 성격이 열화와 같이 급하고 거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단정순의 부인인 도백봉에 대해서는 뼈에 사무치는 증오심을 품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장력을 내쏟아 단예의 목숨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말했다.
[홍면, 내 아들은 그대의 딸이 쏜 독전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었소!]
진홍면은 말했다.
[그는 이미 해약을 먹었으니 죽지는 않을 거예요. 내가 잠시 데려가겠어요. 당신은 계속 왕 노릇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들을 살리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될 거예요.]
갑자기 남해악신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 하 하.네 녀석은 끝내 나를 사부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될껄?]
단정순은 말했다.
[홍면,모든 것을 응낙하겠소.그러니....내 아들을 놓아주시오.]
진홍면이 단정순에게 품고 있는 애정은 십팔 년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엷어진 것이 아니었다.단정순이 그렇게 다급히 부르짖자 대뜸 마음이 누그러졌다.
[정말....정말 모든 것을 응낙하시는 거죠?]
단정순은 말했다.
[그렇고 말고.]
종 부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사저,박정한 사내의 말을 어떻게 믿는다고 그러세요? 악노이 선생, 우리 가요.]
남해악신은 몸을 날렸다. 단예를 안고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는가 했더니 어느새 맞은 편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때 펑,소리와 함께 섭이랑과 운중학이 각기 두 명의 왕궁 위사를 후려쳐서 땅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종 부인은 부르짖었다.
[단정순,오늘밤 우리 한바탕 싸워 봅시다!]
단정순은 왕궁의 사람들을 모두 모은다면 그들을 처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들이 상대방의 수중에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쥐를 잡자고 독을 깰 수 없다는 속담처럼 무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더군다나 눈앞에 잇는 한 쌍의 사자매들은 자기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수 없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보보,그대 역시....역시 나를 괴롭히러 온 것이오?]
종 부인은 말했다.
[나는 종만구의 처예요.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로 나를 유혹하는 거예요?]
단정순은 말했다.
[보보,이 몇 년 동안 난 하루도 그대를 잊은 적이 없었다오.]
종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단 공자가 당신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저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요....]
그녀의 음성은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진홍면이 급히 끼어들었다.
[사매! 사매 역시 속아 넘어가려고 그러나?]
종 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진홍면의 팔을 잡았다.
[좋아요.우리 그만 가요.]
그리고 단정순에게 고개를 돌리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도백봉 그 계집의 수급을 들고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절을 하며 만겁곡으로 오세요....혹시 우리가 당신의 아들을 돌려 줄지도 모르니까요.]
단정순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만겁곡....만겁곡....]
이때 남해악신은 단예를 안고 이미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고승태와 저만리등은 그를 포위하려고 했다.단정순은 한숨을 내쉬고 크게 소리쳤다.
[고 아우님! 그들을 놓아 주시오.]
고승태는 부르짖었다.
[소왕자가 잡혀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단정순은 침통하게 말했다.
[천천히 방법을 강구합시다.]
고승태 등은 거역하지 못하고 길을 터주었다.
단정순은 몸을 한 번 흔들하여 종 부인 옆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보보,이 몇 년 동안 잘 있었소?]
종 부인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말했다.
[물론 잘 있었어요.]
단정순은 그녀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일지를 내뻗어 기척도 없이 그녀의 허리께에 있는 장문혈을 찔러 버렸다. 종 부인은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혈도를 찔리게 되자 힘없이 쓰러지려고 했다. 단정순은 즉시 왼손을 뻗쳐 그녀를 안으며 짐짓 깜짝 놀랐다는 듯 부르짖었다.
[아아! 보보,왜 그러오?]
진홍면은 사정을 모르고 앞으로 달려오며 물었다.
[사매,무슨 일이야?]
단정순은 다시 일양지를 찍어냈다.역시 진홍면의 허리께에 있는 장문혈을 찔러 버린 것이다. 진홍면과 종 부인은 요혈을 찔리고 단정순의 품속에 안기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두 사람은 단정순을 매섭게 노려 보았으며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속았구나! 내가 어째서 이토록 멍청하지? 한평생 그에게 속아 왔는데도 오늘 이 마당에 이르러 여전히 경계할 줄을 모르다니....!)
단정순은 말했다.
[고 아우, 내상이 치유되지 않았으니 빨리 방으로 들어가서 쉬도록 하시오.저만리,그대는 사람들을 이끌고 사방을 지키도록 하게.]
고승태와 저만리는 허리를 굽히고 대답했다.
[예.]
단정순은 두 여인을 끼고 내당에 들어왔다. 뭇 사람들이 물러가자, 단정순은 두 여인의 다리에 있는 환도와 곡천 두 혈도를 짚어서 그녀들이 걸음을 옮길수 없도록 했다. 그런 다음 싱글거리며 두 여인의 장문혈을 풀어주었다.진홍면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단정순,당신은....그래도 계속하여 사람을 괴롭히는군요!]
단정순은 몸을 돌리더니 두 여인에게 읍을 했다.
[누가 사과를 하라 그랬어요? 빨리 우리들을 놓아 줘요!]
단정순은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은 십여년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소. 오늘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할말이 수두룩하지 않겠소? 홍면, 당신은 여전히 성질이 급하구려. 보보, 당신은 더욱더 아름다워졌구려. 옛날 우리가 함께 있을 때보다 더 젊어진 것 같소.]
종 부인이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진홍면이 노해 부르짖었다.
[빨리 나를 놔줘요! 나의 사매는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지만 나는 갈수록 미워져요.이 할망구를 붙잡아 놓아서 뭐가 좋을 게 있어요?]
단정순은 한숨을 내쉬었다.
[홍면,거울에 스스로의 얼굴을 비추어 보구려. 만약 당신이 못난 할망구라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절세미인을 형용할 때 사용하는 침어낙안(沈魚落雁)이라는 용어가 추한 할망구의 모습을 묘사하는 용어가 되고 말게요.]
진홍면은 단정순이 말을 돌려 자신을 아름답다고 추켜세우자 쳇, 하고 웃으며 발을 구르려고 했다. 그러나 발은 이미 마비되어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그리하여 그녀는 뾰루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누가 당신과 농담을 하자고 했어요? 헤벌쭉 웃은 그 표정이 밉살스럽기만 해요!]
촛불 아래에서 그녀가 가볍게 안면을 찌푸리고 화를 내는 모습을 단정순은 넋이 빠진 듯 내려다 보았다. 그는 옛날 정을 나누던 밤이 불현듯 떠올라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그는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볼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진홍면은 상반신을 움직일 수 있었다. 왼손을 들어 맑고 고운 소리가 나도록 단정순의 따귀를 한 대 갈겼다.단정순은 피할 수 있었으나 일부러 그녀에게 따귀를 얻어맞았다.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말했다.
[수라도 아래에서 죽는다면 죽어서도 풍류 귀신이 될 것이오.]
진홍면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뺨을 타고 두 줄기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그녀는 갑자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당신은.... 당신은 또 그 말을 하는군요.나는 당신이....너무나도 미워요!]
과거 진홍면이 한 쌍의 수라도로 강호를 휩쓸 무렵 그녀의 별호가 수라도였다.언제였던가? 단정순에게 몸을 빼앗기던 그날 밤에도 그녀는 그에게 입맞춤을 당하고 한 대의 따귀를 때린 적이 있었다.그때 단정순은 방금 한 그 한마디를 했던 것이다. 십팔 년 동안 (수라도 아래에서 죽는다면 죽어서도 풍류 귀신이 되리라)는 그 한 마디는 그녀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귓가에 언제나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가 다시 그말을 하게 된 것이다. 기쁘기도 했거니와 지나간 나날들이 생각나 한없이 서글퍼지기도 했다.
종 부인은 화가 나서 말했다.
[사저,이 사람은 그저 달콤한 말만 할 줄 알며 남의 환심을 잘 사요. 다시는 그의 말을 믿지 않도록 하세요.]
진홍면은 눈물을 훔치며 애써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맞다.나는 다시는 그의 거짓말에 속지 않을 거야.]
단정순은 종 부인 곁으로 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보보,이번에는 그대의 얼굴에다 입맞춤을 하고 싶구려. 괜찮겠소?]
종 부인은 흠칫하더니 냅다 고개를 도리질했다.
[나는 유부녀예요.결코 우리 남편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어요. 당신이 만약 나에게 입맞춤을 한다면 나는 즉시 혀를 깨물고 당신 앞에서 죽어버릴 테예요!]
단정순은 그녀의 결연한 표정과 단호한 어조를 대하자 함부로 다루지 못하고 물었다.
[보보,어떤 남편을 맞아들이게 되었소?]
종 부인은 말했다.
[내 남편의 생긴 모양은 추악해요.그리고 성질도 괴팍하며 무공도 또한 당신을 따를 수 없어요.더군다나 당신처럼 부귀영화를 누릴 만큼 좋은 지위에 있지도 못해요. 하지만 그는 한마음 한뜻으로 나를 받들어요.그리고 나 역시 한 뜻으로 그를 대해요.만약 내가 추호라도 그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면 이 감보보는 천벌을 받게 될 것이며 만겁의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을 거예요. 내가 이미 당신에게 말한 바 있지만 나와 그는 만겁곡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어요. 그 이름도 바로 그와 같은 맹세에서 나온 것이에요.]
단정순은 자기도 모르게 엄숙해졌다. 감히 옛날의 정을 들먹일 수 없었다. 입으로 들먹이지는 못했지만 감보보의 고운 얼굴이 전과 다름없음을 볼 수 있었다.더군다나 지금은 화를 내고 있어 약간 치켜올린 입술이 앵두같이 붉고 도톰하고 요염해서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남편을 위하는 말을 하자,마음이 쓰라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보보,나는 복을 타고나지 못했나 보오.당신으로 하여금 나와 함께 살도록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오.본래....본래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을 알았는데.... 아....! 모든 게 내 잘못인 것 같소.]
종 부인은 그의 어조가 처량하고 깊은 정이 담겨 있는 것을 느꼈다. 자기를 속이려고 거짓으로 꾸며낸 말이 아닌 것을 느끼게 되자 그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려 했다.
세 사람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옛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얼굴에는 때로는 기쁜 빛이 떠올랐고 때로는 서글픈 빛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참 후에 단정순은 나직이 말했다.
[당신들이 나의 아들을 붙잡아 간 것은 무엇 때문이오? 보보, 그 만겁곡은 어디에 있소?]
갑자기 창밖에서 목이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에게 말하지 마시오.]
단정순은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바깥에는 저만리 등 몇 사람이 지키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 사람은 기척도 없이 다가올 수 있었을까? )
이때 종 부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부르짖었다.
[당신은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 뭣하러 여기 왔어요!]
곧이어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종 선생,안으로 드시죠.]
단정순은 더욱 놀랐으며,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내당의 휘장이 들어올려지면서 도백봉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독기가 가득했다.그녀의 뒤로는 용모가 추악한 말상의 사내가 뒤따르고 있었다.
원래 진홍면은 소주에 있는 왕씨의 여인을 죽이러 갔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랑하는 딸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속대로 남쪽으로 대리에 이르러 사매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소주의 왕씨 집안에서 파견한 서파파와 평파파 등은 전력으로 목완청을 쫓고 있었다.진홍면은 그 덕택에 오히려 평안 무사하게 대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그녀는 만겁곡에 이르러 사정을 알게 되고 즉시 종 부인과 함께 목완청을 찾으려고 나섰다. 오는 도중 섭이랑과 남해악신 그리고 운중학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세 악인은 종만구가 단정순을 괴롭히기 위해 초청한 사람들이었다.그들은 즉시 종 부인에게 그 동안의 경과를 이야기 했다. 물론 남해악신이 단예를 사부로 모시게 되었다는 추악한 일은 슬쩍 감추고 말하지 않았다. 진홍면은 목완청이 대리성 진남 왕궁에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왕궁으로 달려 온 것이었다.
종만구는 처에 대한 사랑이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했다. 거기다가 질투가 심한 편이었다. 그야말로 그녀가 떠난 이후 초조와 불안에 휩싸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야밤에 뒤쫓아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진남 왕궁 밖에서 마침 분연히 밖으로 달려나오는 도백봉과 마주치게 되었다. 서로 가슴에 울분을 가득쌓고 있던 두 사람은 그만 주고 받는 말이 곱지 못하게 되고 손을 쓰게 되었다.한창 싸우자 도백봉은 점차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돌연 한 흑의 여인이 그녀 옆을 스칠듯 지나가는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울고 있지 않은가? 바로 목완청이었다.종만구는 왕궁에 가 있는 자신의 처가 생각났다.
[나는 내 아내를 찾는 것이 더 급하오.당신과 싸울 여가가 없소.]
도백봉은 말했다.
[당신은 어디로 가서 아내를 찾는다는 것이죠?]
종만구는 말했다.
[바로 단정순이라는 그 놈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이오. 내 아내가 단정순을 만나게 된다면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틀림없소.]
도백봉은 물었다.
[좋지 못한 일이란게 대체 뭐죠?]
종만구는 말했다.
[단정순은 달콤한 말을 잘 하는 자로서 여자를 유혹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지닌 놈이오.나는 반드시 그 자를 죽여야 하겠소.]
도백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단정순은 사십여 세로 수염마저 길게 자랐는데 젊었을 때의 준수한 얼굴과 같을라구? 그러나 그의 바람기는 이미 습성이 되어 있어 이 사내의 말대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녀는 종만구 부부의 성명과 내력을 물었다.알고 보니 그의 부인은 바로 감보보가 아닌가? 그녀는 이미 소야차 감보보가 자기 남편의 옛날 애인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크게 질투심이 북받쳐 올라 즉시 종만구를 데리고 왕궁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진남 왕궁의 사방에는 지키는 사람들이 삼엄했으나 뭇 위사들은 왕비가 들어오는지라 감히 저지하지 못했다.그리하여 두 사람은 내당에 이르게 되었는데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단정순은 이때 진홍면과 감보보 두 여인에게 짓궂은 말들을 하여 옛일을 회상하고 있는 터였는데 창밖의 두 사람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일일이 다 듣게 되었던것이다. 화가 난 도백봉은 그야말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종만구는 처가 도리를 내세워 그녀 자신을 지킨 데 대해서 크게 기뻤다. 종만구는 대뜸 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끊임없이 그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기쁜 음성으로 말했다.
[보보,정말 고맙소.그대는 정말 나에게 잘 대해 주었소. 만약 그가 당신을 괴롭혔다면 난 죽기를 각오하고 그에게 덤벼들었을 것이오.]
한참 말을 하다가 처의 혈도가 짚혀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고개를 돌려 단정순에게 말했다.
[빨리 내 아내의 혈도를 풀어 주시오.]
단정순은 말했다.
[내 아들이 당신들에게 사로잡혀 갔소. 당신이 돌아가 내 아들을 놓아준다면 나는 부인을 풀어 드리리라.]
종만구는 손을 뻗쳐 처의 허리께와 옆구리를 이리저리 만지고 때려보았다. 그의 내력은 무척 고강했으나 단씨 집안의 일양지 수법은 천하에서 독특하기로 이름난 지법으로서 다른 사람은 함부로 풀 수가 없었다. 종부인은 그가 문지르고 때리고 하는 바람에 아프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했다.그런데도 다리의 혈도는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종 부인은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바보,못난 짓은 그만해요!]
종만구는 겸연쩍어져서 손을 멈추었다.그렇게 되자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단정순! 빌어먹을 놈아! 삼백 초만 겨루어 보자!]
그러면서 두 손을 비벼대면서 금방 달려들려고 했다.
종 부인은 냉냉히 말했다.
[단왕 전하,공자가 남해악신에게 사로잡혀 갔지만 저희 남편이 그들에게 사람을 놓아 달라고 한다면 그 몇 사람의 악인들은 거절을 하지 않을거예요. 또한 나와 사저가 돌아가 기회를 보아 풀어 준다면 혹시 풀려날 지도 몰라요. 적어도 그들로 하여금 공자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수는 있는 거예요.]
단정순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믿을 수 없소.종 선생, 당신은 돌아가시오.내 아들을 데리고 와서 부인을 모셔가도록 하시오.]
종만구는 대노해서 날카롭게 외쳤다.
[이 진남왕궁은 음란하고도 몰염치한 곳이어서 우리 안사람을 여기다 남겨 둔다면 크게 위험하단 말야!]
단정순은 얼굴을 붉히며 호통을 내질렀다.
[다시 더 무례한 말을 한다면 이 단가는 가만 있지 않겠소!]
도백봉은 집안으로 들어선 후에 줄곧 아무말도 하지않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 두 여자를 붙잡아 두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예요? 예아를 위한 것이에요,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에요?]
단정순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마저도 나를 믿지 못한단 말이오?]
말을 마치자 손을 들어 진홍면의 허리께를 짚어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더 다가서서는 손가락으로 종 부인의 허리를 만지려고 했다.
종만구는 몸을 날려 처의 앞을 막아서면서 두 손을 급히 흔들며 소리쳤다.
[당신은 음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군!내 안사람의 몸을 내 앞에서 만지려 하다니!]
단정순은 씁쓸히 웃었다.
[불초의 이 점혈 공부는 대단치 않지만 다른 사람이 풀 수 없는 것이오. 시간이 길어지면 종 부인의 다리는 쓰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오.]
종만구는 노해 부르짖었다.
[꽃과 같이 아름다운 안사람을 절름발이로 만든다면 난 너의 아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단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종 부인의 혈도를 풀어 달라고 하면서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요?]
종만구는 대답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종만구는 갑자기 호통을 내질렀다.
[누가 당신보고 그녀의 혈도를 짚으라고 했소? 아이쿠! 야단났네! 내 아내의 혈도를 당신이 짚을 때 이미 몸을 만졌을 테지! 나 역시 당신 아내의 몸에 손가락을 한 번 대어야겠다.]
종 부인은 그를 흘겨보며 뾰로통해져서 소리쳤다.
[또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군요. 남들이 웃을까봐 두렵지도 않으세요?]
종만구는 말했다.
[웃고 싶으면 웃으라지! 나는 그런 손해를 볼 수는 없어!]
이와 같이 소란스러워졌을 때 문의 휘장이 들쳐지면서 한사람이 천천히 걸어들어왔다.노란 비단 장포에 세 가닥 수염을 기른 청수한 사람이었다. 바로 대리국의 황제인 단정명이 아닌가?
단정순은 부르짖었다.
[형님!]
보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몸을 약간 구부려서 허공을 격하고 손가락을 내밀어 종 부인의 가슴팍에 일지를 가했다. 그 순간 단전이 약간 화끈하면서 두 줄기의 따뜻한 기운이 다리 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낄수 있었고 곧이어 피가 잘 통하게 되면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종만구는 허공을 격하여 혈도를 풀어 주는 신기를 목격하게 되자 얼굴 가득 놀랍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그는 입을 딱 벌린 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실로 그로서는 이 세상에 그토록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단정순은 말했다.
[형님,예아가 그들에게 사로잡혀 갔습니다.]
보정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전후가 이미 나에게 이야기를 했네.순 아우,우리 단씨 자손이 남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자연 그의 부모와 백부가 달려가서 구하면 그만이야.구태여 여인들을 인질로 사로잡을 필요는 없네.]
단정순은 얼굴을 붉히며대답햇다.
[네,형님.]
보정제의 이 한마디 말은 매우 공명정대했다.
단정명이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종만구에게 말했다.
[세 분은 돌아가도록 하시오. 삼일 안으로 우리는 만겁곡으로 가서 사람을 구출할 것이오.]
종만구는 말했다.
[우리 만겁곡은 매우 은밀한 곳에 있어서 당신이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을 것이오.내가 당신에게 길을 설명해 드리리까 ?]
그는 보정제가 자기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일부러 대답을 회피하여 그에게 망신을 줄 속셈으로 이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런데 보정제는 소매 자락을 휘두르며 나가라는 시늉을 하지 않는가?
[안녕히 가시오.]
종만구는 성질이 거친 사내였다. 그러나 절로 위엄이 솟아나는 보정제 앞에서는 성질을 부리지 못했다.
[좋소.가겠소.노부가 한평생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단씨 성을 가진 사람이오.단씨 가운데 한 사람도 좋은 사람이 없소.]
그는 처의 팔을 잡고는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종 부인은 진홍면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언니,우리 가요.]
진홍면은 단정순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마음 속으로 쓰라림을 느끼고 매섭게 도백봉을 한 번 흘겨준 다음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섰다.세 사람은 방을 나서자마자 즉시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고승태는 처마 끝에 서 있다가 살짝 허리를 굽혀 보였다.
[안녕히 가시오.]
종만구는 지붕 위에서 침을 탁 뱉으며 분명히 말했다.
[흥! 위선자들 같으니라구!]
그는 진기를 돋우고는 몸을 날려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훌쩍훌쩍 뛰어갔다.그가 막 담장에 이르러 진기를 돋우고 몸을 날린 후 왼발로 담장 위를 딛으려고 하는 곳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기다란 장포를 걸치고 `안녕히 가십시오' 하던 고승태였다. 고승태는 본래 종만구의 등뒤에 없었는데 어느결에 귀신도 모르게 그를 앞지르게 되었고 그가 발디딜 곳을 먼저 차지한 것이다. 종만구는 몸이 허공에 떠있는 상태였다.뒤로 물러가는 것은 고사하고 방향을 틀기도 힘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호통을 내질렀다.
[비켜라!]
그는 두 손을 함께 내어 고승태를 후려쳤다. 이 쌍장의 힘은 족히 비석을 깨뜨릴 수 있으니만큼 상대방이 만약 맞받았다가는 반드시 충격을 받고 담정 저쪽으로 떨어지리라 생각했다.설사 상대방이 자기와 공력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종만구는 상대방에서 후려치는 일 장의 힘을 빌어 담장 위에 내려설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손이 바로 상대방의 가슴팍에 닿으려는 순간 고승태가 갑자기 허리를 다리와 직각이 되게 뒤로 꺾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허공에서 철판교(鐵板橋)의 재간을 펼친 것이다. 두 발을 못박은 듯 담장 위에 대고서 상대방의 쌍장의 공격을 피해 버린 것이었다.
종만구는 일격이 적중되지 않자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앗!]
그의 몸은 이미 고승태의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몸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는 가슴팍과 아랫배및 하반신을 모조리 상대방에게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 적이 멋대로 손을 써 와도 어찌할 수 없이 당하고 말 형편이었다.다행히도 고승태는 그 기회를 틈타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종만구는 땅 위로 내려서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런대로 창피는 면했군!)
그는 종부인과 진홍면 두 여인과 더불어 쌍쌍이 담장을 넘어 나갔다.
고승태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돌리더니 읍을 했다.
[멀리 나가지 않소이다.]
종만구는 흥,하고 코웃음쳤다. 그 순간 바지가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급히 손을 뻗쳐 붙잡아 간신히 추한 꼴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살펴보니 허리띠가 끊어져 있었다.그제서야 그는 고승태의 몸 위를 가로지르게 되었을 때 상대방이 슬쩍 손가락을 써서 자기의 바지 허리띠를 잘라 버렸음을 깨달았다. 만약에 상대방이 손에 사정을 두지 않고 내력을 돋우어 단전 요혈이라도 찔렀다면 그는 지금쯤 이미 시체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여간 놀랍지 않았고 또한 화도 났다.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 후 고개를 돌리고 담장 쪽을 향해 가래침을 내뱉았다.그 가래는 세차게 담장에 날아가서 철썩 달라붙었다.
목완청은 정신없이 진남 왕궁에서 달려나왔다.단예의 모친 도백봉과 종만구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으나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곧장 얼굴을 가린 채 달렸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 자기 몸 하나 둘 곳 없는 듯 허전하기만 했다. 그녀는 황량한 산과 들판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마구 달려갔다.초저녁이 되어 두 다리가 피곤해졌을 무렵에야 겨우 걸음을 멈추고 한 그루 거대한 느릅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녀는 발을 구르며 부르짖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더 이상 살아서 무얼 하나?]
가슴 가득 울분과 분노가 치밀었으나 누구에게 화풀이를 해야될 지 알 수가 없었다.
(단예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다만 운명의 장난으로 나의 오라버니가 되었을 뿐이다.사부님은 원래 나의 친어머니였다. 십팔 년 동안이나 어머님은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 나를 키워 주셨다. 그야말로 태산과 같은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어머니를 원망할 수 있으랴...
진남왕은 나의 아버님이 틀림없다. 물론 그분이 어머니에게 잘못했을지 모르지만 거기엔 부득이한 고충이 있었겠지. 그분은 나에게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인자한 눈길을 던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나에게 무슨 소원이 있으면 털어 놓으라고 했으며 반드시 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소원에 대해서 전혀 도와줄 능력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님과 부부가 되지 못한 이유는 필시 도백봉이 가운데서 훼방을 놓았기 때문일거야.그렇기 때문에 어머님은 나에게 그녀를 죽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백봉을 탓할 수는 없어.내가 만약 낭군에게 시집을 갔더라도 결코 첩을 두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도백봉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었지 않은가?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아버님은 역시 그녀에게도 슬픔을 주었을 거야. 나는 옥허관 밖에서 그녀에게 두 대의 화살을 쐈으나 그녀는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왕궁에서 다시 그녀에게 두 대의 화살을 쏴서 그녀의 외동아들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아무래도.... 아무래도 그녀 역시 흉악하고 악독한 여자는 아닌 것 같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자 그저 슬프기만 했다.
(이제부터 단예를 잊기로 하자.그리고 다시 그를 생각하지 말자.)
입으로 말하기는 쉬워도 잠시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단예의 준수한 얼굴과 헌칠한 자태가 뇌리에 떠올를 때마다 가슴은 마치 거대한 망치에 두들겨 맞는 듯 고통스러웠다. 잠시 후에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이후에 그를 오빠처럼 여기면 되지 않겠는가? 나는 부모가 없는 고아였다. 이제는 아버님도 생기게 되었고 어머님도 계시게 되었으며 또한 한 사람의 훌륭한 오빠마저 생겼으니 응당 기뻐해야 된다.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왜 슬퍼하느냐? )
그러나 정의 그물에 한 번 휘감기게 되면 그 부드러운 실은 벗어날 수 없도록 사람을 얽매는 법이다. 그녀는 무량산 봉우리에서 칠 일 밤낮 동안 눈이 빠져라 하고 단예를 기다릴 때 이미 깊은 정을 느끼게 되었고 이제는 지워버리려고 해도 지워지지가 않았다.
이때 우르릉 우르릉 하는 폭포물 떨어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목완청은 그만 자포자기에 빠져 갑자기 죽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는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갔다.한 개의 산등성이를 넘자 난창강물이 거세게 산밑을 돌면서 흘러가고 있었다.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생각했다.
(내가 용기를 내어 훌쩍 뛰어들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그녀는 산기슭에서 강변으로 나아갔다.마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파란 강물은 마치 무수한 황금조각을 뿌려놓은 듯 눈부시게 빛났다.만약 뛰어내린다면 이와 같이 장려하기 이를데 없는 경치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 아닌가?
그녀는 말없이 강변에 서서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문득 눈길이 닿은 곳에 한 사람이 돌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수십 장 밖의 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그 사람은 시종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에 청포를 걸치고 푸른 이끼가 낀 바위 사이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강변에 그토록 오래 서 있었지만 쉽게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목완청은 그를 몇 번 쳐다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십중팔구 죽은 시체인 것 같다.)
그녀는 손을 써서 사람을 많이 죽여 보았기 때문에 시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그러나 호기심이 일어나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그 청포객은 노인이었는데 기다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쌍의 커다란 눈동자는 곧바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한번도 깜박이지 않았다.
목완청은 말했다.
[알고 보니 죽은 사람이 아니었군.]
그러나 노인은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 한 번 구르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살아 있는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 말했다.
[알고 보니 죽은 시체였군.]
그러나 그 죽은 시체의 두 눈에는 신광이 서려 있었다.얼굴에는 혈색이 감돌았다. 목완청은 손을 뻗쳐 그의 코밑에 갖다 대었다. 미미한 입김이 손끝에 닿았다. 다시 그의 뺨을 만저 보았다.얼음처럼 싸늘했다. 가슴을 만지자 미약한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그녀는 크게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정말 이상하다. 죽은 사람이라고 하자니 마치 살아 있는 사람같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자니 꼭 죽은 사람 같구나! )
그러자 갑자기 누군가의 음성이 들여왔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목완청은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펴 보았으나 등뒤에는 아무도 없었다.강변에는 거위알 크기의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줄곧 그 괴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을 때 그가 입술을 움직이는 것도 볼 수 없었다.그리하여 그녀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누가 이 소저를 회롱하는 거예요! 살기가 싫어졌는가요 ?]
그리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강을 등지고 눈으로 삼면을 주시했다.
이때 그 음성이 확실히 들려왔다.
[난 확실히 살기가 귀찮아졌다.]
목완청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는 그 괴인밖에 없었다.그런데 그 입술이 꼭 다물어져 있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결코 그가 말한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다시 큰소리로 호통쳐 물었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야! 썩 나오란 말야!]
그러자 그 음성이 말했다.
[네 스스로 말하고 있잖아!]
나에게 말을 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그 소리는 대답했다.
[너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없다.]
목완청은 급히 몸을 세 번이나 돌렸다.자기 그림자밖에는 아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때 그녀는 청포객이 말소리를 낸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다가가서는 용기를 내어서 그의 입에다 손을 갖다대 보았다.
[당신이 나에게 말한 것인가요?]
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니다.]
목완청은 청포객의 입술이 조금도 떨리지 않는걸 알고 크게 소리쳤다.
[분명히 나에게 말한 사람이 있는데 어찌하여서 없다는 거야?]
그 음성이 대답했다.
[나 역시 내가 아니니 이 세상에는 내가 없다.]
목완청은 갑자기 몰골이 송연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하니 진짜로 귀신이 있는 것일까 ?)
그래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귀신인가요?]
그 소리는 대답했다.
[그대 자신이 살고 싶지 않다고 했으며 귀신이 되고자 했는데 왜 귀신을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
목완청은 악을 쓰듯 부르짖었다.
[내가 언제 귀신이 두렵다고 말했어요? 나는 하늘도 무서운 줄 모르고 땅도 두려운 줄 몰라요.]
그 소리는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두려워한걸.]
목완청은 코웃음쳤다.
그 소리는 대답했다.
[그대는 훌륭한 남편이 갑자기 친 오라버니로 변한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이 말을 듣자 그녀의 머리통은 갑자기 띵,하고 울렸다. 목완청은 두 다리에 맥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은 도깨비군요. 당신은 귀신이 틀림없어요.]
그 음성이 말했다.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단예로 하여금 남편이 될 수 있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단 말이다.]
목완청은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날 속이는 거죠? 이는 하늘이 정한 일이라서 변경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자 그 음성은 대답했다.
[그 하늘은 죽어 마땅한 후레자식이야! 우리는 그를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너의 오라버니가 너의 남편으로 변하게 할 방법이 있다. 너는 그것을 원하느냐?]
목완청은 이미 죄책감에 빠져 있었고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와 같은 말은 하늘에서 내린 선음(仙音)과 같았다. 반신반의했으나 급히 소리쳐 대답했다.
[원해요! 바라고 있어요!]
그 음성은 다시는 울려퍼지지 않았다.
잠시 후 목완청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면 안 되나요?]
그러자 그 음성이 대답했다.
[그대는 이미 나를 본 지 오래인데 아직도 본 것이 부족한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음성은 단조로왔으며 기복이 없었다.목완청은 청포객의 코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물었다.
[당신은....당신은 바로.... 이 당신인가요?]
그 소리는 대답했다.
[나 역시 내가 나인지 모르고 있다.아.... !]
끝에 가서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가슴속에 우울함이 가득찬 탄식이었다. 이제 목완청은 더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 목소리는 바로 눈앞의 청포 노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입술도 벙긋하지 않는데 어떻게 해서 말을 할 수가 있죠?]
그 소리는 대답했다.
[나는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입술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 소리는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란다.]
목완청은 나이가 어린 편이었고 동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애수에 가득 잠겨 있었다. 그런데 이때 그 청포 노인이 입술을 놀리지 않고 말을 한다고 하자 불현듯 흥미를 느끼고 말았다.
[뱃속에서 말이 나오다니....그거 참 희한한 일이군요!]
청포객은 말했다.
[그대가 손을 뻗쳐 내 뱃가죽을 만져 보면 곧 알게 될 것이다.]
목완청은 손을 뻗쳐 그의 배에 갖다댔다.그러자 청포객은 말했다.
[내 배가 진동하고 있지? 느낄 수 있느냐 ?]
목완청은 손바닥에서 그의 배가 소리에 따라 파동을 일으키면서 기복을 이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웃으며 말했다.
[호 호 호,정말 이상하네요!]
그녀는 청포객이 연마한 것이 일종의 복화술(腹話術)이란 것을 모르고 있었다.무공이 높은 사람은 배로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포객같이 똑똑히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희귀했다.깊은 내공이 없이는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목완청은 청포객의 주의를 몇 바퀴 돌며 자세히 살피다가 물었다.
[육신을 움직일 수 없다면 밥은 어떻게 먹죠?]
청포객은 두 손을 내밀어 한 손으로 위쪽의 입술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아래쪽의 입술을 잡고서는 입을 벌렸다.그리고는 왼손의 두 손가락으로 두 입술을 벌려 놓게 한 후 오른손으로 물건을 집어넣는 시늉을 하고 삼키는 시늉을 했다.
[바로 이렇게 한다.]
목완청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엾어라! 그렇다면 아무 맛도 모르시겠네요?]
이때 그녀는 그의 얼굴 근육이 모조리 뻣뻣하게 굳어져서 눈도 제대로 감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얼굴은 희노애락의 표정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 죽은 시체라고 여겼떤 것은 바로 거기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그러지고 궁금증이 풀리자 청포객의 곁을 떠나려 했다.
[단예를 그대의 남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내 곁에서 떠나지 마라.]
목완청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당신과 나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어찌하여 나를 도우려고 하죠? 당신은 .... 당신은 그분을 알고 있나요?]
청포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매자락 속에서 두 손으로 각기 한 자루 가늘고 긴 철장(鐵杖)을 꺼내 들면서 말했다.
[가자.]
그는 왼손의 철장을 들어 암석을 한 번 찍었다. 그러자 몸이 훌쩍 뛰어오르더니 날렵하게 일 장 밖에 내려서는 것이었다. 목완청은 그의 두발이 가부좌를 튼 모습 그대로이고 다만 한 자루의 철장으로 땅을 짚고 움직이는 걸 보자 이상해서 물었다.
[그대의 두 발은....]
[나의 두 발은 이미 병신이 된 지 오래다. 이제부터 나의 일에 대해서 더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내가 다시 묻는다면요?]
그 말이 막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두 발에서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꼈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원래 청포객은 질풍과 같이 다가들어 오른손의 철장으로 그녀의 무릎에 있는 혈도를 두 번 찔렀던 것이다.그녀의 두다리가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런데 청포객은 다시 철장을 내밀어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었다.그 수법의 씀씀이는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 목완청은 벌떡 일어나서는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은 어찌 그토록 무례한가요?]
그녀는 소맷자락 속에 숨긴 화살을 쏘려고 했다.
이때 청포객은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한 대의 화살을 쏜다면 나는 너의 볼기짝을 한 대 때려주겠고 네가 나에게 열 대의 화살을 쏜다면 열 대를 때려 줄 것이다. 믿을 수 없다면 어디 시험해 보아라.]
목완청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만약 한 대의 화살을 적중시킬 수 있다면 당장에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데 그가 어떻게 나를 때릴 수 있는 것인가. 그런데 이 사람의 신통력은 너무나 크다.무공 또한 남해악신보다 높은 것 같다. 그러니 십중팔구 그를 쏘아 맞히지는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한 말을 실천할 것 같다.정말로 나의 볼기짝을 때린다면 그야말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때 청포객은 말했다.
[네가 나에게 감히 화살을 쏠 수 없다면 나의 명령을 듣도록 해.]
[내가 순순히 당신의 분부를 들을 것 같아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화살을 쏘는 장치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청포객은 두 자루 가느다란 철장으로 두 발을 대신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목완청은 그의 뒤를 따랐다.그의 철장은 길이가 칠 팔 자나 되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걸음걸이보다 몇 배나 빨랐다.목완청은 진기를 돋우고 있는 힘껏 쫓아가야만 겨우 따라붙을 수 있엇다. 청포객은 산을 넘고 고개를 건너는데 마치 평지를 걷듯 했다.그는 산간의 이미 나 있는 길로 가지 않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바위들과 가시밭을 가로질렀다.
몇 개의 산봉우리를 지나게 되자 멀리 시커먼 숲이 보였다. 목완청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겁곡에 이르렀구나! )
그녀는 물었다.
[우리가 만겁곡으로 가서는 무엇을 하죠?]
청포객은 몸을 돌렸다.별안간 철장이 나는 듯 휙하니 그녀의 오른쪽 다리를 한 대 때렸다.그리고 그는 말했다.
[너 잔소리를 하겠어,안 하겠어?]
목완청의 예전 성미대로였다면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알고서도 결코 이와같은 괴롭힘을 당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자기를 도와 자기의 소원을 성취시켜 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꾹 참았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소저는 결코 당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잠시 동안 당신에게 양보할 뿐이다.)
청포객은 다시 말했다.
[가자.]
산골짜기를 돌아 비스듬히 올라가서는 골짜기 뒷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골짜기의 사정을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청포객은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아 점점 더 골짜기 뒷쪽으로 들어갔다.
수 마장을 나아가자 어느 커다란 숲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곳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고목들이 서 있었다. 이 날 햇살이 찬연한데도 숲속은 어두침침하여 황혼녘을 맞이한 것 같았다.들어갈수록 숲은 더욱 울창해졌다.
그와 같이 수십장을 나아가자 앞쪽에 한 그루 나무들리 서로 빽빽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나무로 만들어진 담장과 같았다.청포객은 철장을 뻗쳐내더니 그녀의 등뒤에 갖다대고 힘을 썼다.그러자 목완청의 몸은 자기도 모르게 솟구쳐 올라 한 그루의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올라서게 되었다.이때 청포객은 날렵하게 허공으로 몸을 뛰우고 있었다.철장을 한 그루의 나무에 푹 꽂더니 재차 몸을 날려서는 나무로 만들어진 담장을 넘는 것이 아닌가. 목완청은 그와 같은 재능이 없는지라 커다란 나뭇가지와 잎들을 헤치고 기어 나갔다.그리고는 나무 담장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어버렸다.
그곳은 넓다란 빈터였다. 그런데 중간에 외따로 한 칸의 석옥(石屋)이 세워져 있었다.석옥의 모양은 심히 기괴했다.한 조각 한 조각을 수천 근이나 나가는 커다란 바위를 쪼개어 만들었으며 울퉁불퉁한 것이 마치 하나의 조그만 산이 서 있는 것 같았다.동굴처럼 입구가 한 곳 있었다. 청포객은 호통을 내질렀다.
[들어가!]
목완청은 석옥 안을 바라보았다. 어두침침한 것이 안에 어떤 괴물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의 손바닥이 그녀의 등뒤에 철썩, 하며 붙었다. 급히 피하려고 했으나 청포객은 이미 손바닥에서 공력을 내쏟아 그녀를 안으로 밀어넣은 후였다.
그녀는 왼손으로 자기 자신을 지키며 회풍분류(廻風分柳)라는 일초의 자세를 취해서는 가슴을 보호했다. 어둠속에서 어떤 괴물이 달려들까봐 방비를 한 것이었다.이때 우르릉 쾅,하는 소리가 나면서 석옥의 문이 닫혔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문쪽으로 달려가 손을 뻗쳐 밀어 보았으나 손이 닿은 곳은 거칠기 이를데 없었다.알고 보니 화강석으로 된 커다란 바위가 아닌가.
그녀는 두 팔에 힘을 모으고 힘껏 밀어붙였으나 그 커다란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는 다급해지 나머지 크게 부르짖었다.
[이봐요! 나를 왜 여기다 가두는 거죠!]
그러자 청포객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부탁한 일을 네 자신이 잊었더냐?]
목완청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날 놔줘요! 날 놔줘요!]
그러나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눈을 문틈에 갖다대고 밖을 바라보니 멀리 청포객이 고공을 가로질러 한 마리의 커다란 청색의 새처럼 나무로 만들어진 담장을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뒤로 돌아서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석옥의 한 모퉁이에는 탁자와 침대가 있었고 침대 위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라 부르짖었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죠?]
그 사람은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두어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완 누이,그대도 왔구려.]
놀람과 기쁨이 가득차 있는 음성,바로 단예의 목소리였다.
목완청은 석옥 속에서 갑자기 정인을 만나게 되자 너무 기뻐서 심장이 멎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와락 달려가 단예의 품속에 자신을 던졌다.석옥 안에는 빛이 희미했으나 단예는 어렴풋이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고 두 줄기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마음속으로 안 되었다고 생각이 들어 그녀는 꼭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약간 떨리고 있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입맞춤을 했다. 두 사람은 입술이 맞닿는 순간 그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우리들은 남매이다.결코 이래서는 안 된다! )
그들은 즉시 상대방을 안고 있던 두 팔을 풀었다. 그리고는 각자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은 각기 석옥의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갑자기 목완청은 왁,하니 울음을 터뜨렸다.
단예는 부드럽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완 누이, 이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니 괴로워할 것 없어. 나는 그대 같은 누이가 생겨서 무척 기뻐.]
목완청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괴로워요.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아요.그대가 마음속으로 기쁘다면 그거야말로 양심이 없다는 증거예요.]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지 않아. 애당초 내가 누이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을뻔 했어.]
목완청은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내가 보고자 한 것도 아닌데 왜 먼저 나를 찾아왔죠? 내가 그대에게 전갈을 해달라고 하지는 않았어요.그리고 전갈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바로 상대방의 손에 죽는다고도 할 수 없었어요. 그대는 나의 흑매괴를 죽게 만들었고 나를 슬프게 만들었어요. 그대 때문에 나의 사부는 어머니가 되었고 당신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었어요.더욱 가슴 아픈 일은 그대 자신이 나의 오라버니가 되었다는 거예요. 나는 모든 것이 싫어요.나는 모든 사람이 미워요.그리고 그대 때문에 나는 이곳에 갇힌 거예요.나는 나가고 싶어요.나가고 싶단 말예요!]
단예는 말했다.
[완 누이,모든 것이 내 불찰이오. 화내지 마시오. 우린 천천히 방법을 강구해서 도망을 치도록 합시다.]
목완청은 말했다.
[나는 도망가지 않을 래요. 나는 이곳에서 죽는 편이 나아요. 바깥에서 죽어도 죽기는 매일반이에요.난 나가지 않을래요. 나가지 않을래요.]
그녀는 조금전만 하더라도 `나는 나갈래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지금은 `나가지 않겠다'고 부르짖는 것이 아닌가.
한참 동안 목완청은 성질을 부리더니 단예가 아랑곳하지 않자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말하지 않나요?]
단예가 말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라는 거지?]
목완청은 말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셨죠?]
단예는 말했다.
[내 제자가 나를 사로잡아 왔어.]
목완청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대의 제자라니?]
그녀는 곧 눈물진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말했다.
[남해악신이 그대를 잡아 와서는 이곳에 가두었군요?]
단예는 말했다.
[맞아!]
[그대는 응당 사부님답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그에게 놓아달라고 명령했어야 옳았어요.]
단예는 말했다.
[내가 어찌 한두 번 말했겠어요? 사실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그를 사부로 맞아들여야만 나를 놓아 주겠다고 하더군.]
목완청은 말했다.
[흥! 십중팔구 제대로 거드름을 피우지도 못했을 거예요!]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그런데 완 누이는 누구에게 잡혀왔지?]
목완청은 청포객을 만났던 사실을 간단히 설명했다.그러나 그녀는 오라버니를 남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그 한 토막의 이야기만은 들먹이지 않았다. 단예는 청포객이 입술을 놀리지 않고 뱃속으로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두 발이 병신인데도 나는 듯 달려간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흥미를 느끼고 다그치듯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이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석옥 밖에서 딸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구멍으로 하나의 그릇이 들어왔다. 누군가 밖에서 말했다.
[식사를 하시오.]
단예는 손을 뻗쳐 받았다.그릇 속에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홍소육(紅燒肉)이 들어 있었다.곧이어 열 개의 빵이 디밀어졌다.단예는 반찬과 만두를 탁자 위에 놓고 목완청을 향해 물었다.
[이 음식에는 독이 없을까 ?]
목완청은 말했다.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면 쉬운 일이니 독을 쓰지는 않았을 거예요.]
단예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아도 배가 상당히 고픈 참이었다.
[먹읍시다.]
그는 홍소육을 빵에 끼워서 먼저 목완청에게 주고 자기도 먹기 시작했다.이때 밖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 먹은 후 그릇을 내 주면 가져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나서 석옥 문앞을 떠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두 사람은 홍소육을 끼운 빵을 먹기 시작했다.
단예는 먹으면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아.백부님과 아버님이 반드시 우리를 구하러 올 거야. 남해악신과 섭이랑 등의 무공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우리 아버지의 적수는 되지 못해 우리 백부님이 만약 친히 나서게 된다면 그야말로 추풍낙엽의 형세가 되고 말거야.사대 악인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게 될걸.]
목완청은 말했다.
[그는 기껏해야 대륙의 황제일 뿐이지 무공이 뭐가 대단하다는 거예요. 나는 그가 청포 괴인과 맞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분명히 수천이나 되는 철갑기병을 거느리고서 공격해올 거예요.]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그렇지 않아.우리 단씨의 선조는 원래 중원 무림의 고수였소. 비록 대리국에서 황제 노릇을 하고 있지만 결코 강호 무림의 규칙을 잊은 적이 없다구.만약에 그 권세를 믿고 사람을 괴롭히든지 많은 수의 사람으로 이긴다면 대리 단씨는 천하영웅들의 웃음 거리가 되지 않겠어?]
목완청은 말했다.
[알고보니 당신네 집안의 사람들은 황제나 왕이 되었다 하더라도 강호협사의 신분을 잊어 버리려고 하지 않는군요.]
단예는 말했다.
[우리 백부님과 아버님은 종종 사람이 근본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했소.]
목완청은 코웃음을 쳤다.
[쳇,입으로는 인의도덕을 말하지만 행동하는 것은 비열하기 그지 없던데요 뭘. 당신 아버지는 당신 어머니가 있는데 어찌해서 또....우리 사부님에게 못된 짓을 했죠?]
단예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대가 어찌 우리 아버지를 욕하지? 나의 아버지가 곧 그대의 아버지가 아냐? 더군다나 천하의 왕궁 귀족들 가운데 어느 누가 몇 분의 부인을 거느리지 않은 사람이 있나? 열 명의 부인을 거느린다고 하더라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어.]
이때는 북송 시대였다. 북으로는 거란,서북쪽으로는 서하,서남쪽으로는 토번, 그리고 남으로는 대리국이 있었다. 이 다섯 나라의 왕이나 공작은 본처 외에 널리 시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많으면 수십 명이나 되었고 적어도 삼사 명은 거느리고 있었다.그리고 왕보다 한 수 아래인 후작이나 백작이라는 높은 벼슬아치들도 반드시 시첩을 거느리고 있었다.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목완청은 단예의 말을 듣자 그만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그리하여 단예의 오른쪽 뺨을 후려쳤다.갑자기 한 대의 뺨을 맞은 단예는 그만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딱 벌리게 되었다.그 바람에 입에 반쯤 씹던 빵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대는....그대는....]
목완청이 노해 부르짖었다.
[나는 그를 아버지라도 부르지 않겠어요!남자가 첩을 많이 거느린다는 것은 양심이 없는 것이에요. 한 사람이 두 가지 세 가지의 마음과 뜻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무정하고 의리가 없다는 증거예요.]
단예는 부풀어 오르는 뺨을 어루만지면서 씁쓸히 웃었다.
[나는 그대의 오래비야. 누이 동생인 그대는 나에게 이토록 무례한 행동을 하면 못 써요.]
목완청은 가슴속의 울분을 풀 길이 없어 다시 손을 쳐들어 단예를 때리려고 했다.
이번에는 단예가 방비를 하고 있었다.발걸음을 교차하며 능파미보를 펼쳐 어느덧 그녀의 등뒤로 돌아갔다.목완청은 뒤로 손을 돌려 일 장을 후려치려고 했다.단예가 다시 피하고 말았다. 석실은 일 장의 둘레밖에 되지 않았지만 능파미보는 확실히 신묘하기 이를데 없었다. 목완청은 아무리 빠르게 손짓을 해도 단예를 때릴 수가 없었다. 목완청은 갑자기 어이쿠,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어찌된 일이오?]
그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쳐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 목완청은 얌전하게 그에게 안겼다.그리고 왼팔로 그의 목을 끌어당기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도망칠 수 있어요?]
그녀는 오른손으로 철썩,하니 그의 왼쪽 뺨을 후려쳤다. 단예는 아픔을 느끼고 아,하고 부르짖었다. 별안간 그는 단전에서 한 가닥 뜨거운 열기가 급히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삽시간에 혈맥이 부풀어 오르는 듯 했고 정욕이 조수처럼 용솟음쳤다.억제할 수 없는 기세였다.그는 품속에 안고 있는 소저가 갑자기 숨을 쌕쌕거리고 그윽한 향기를 낸다고 느끼자 그만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서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입맞춤을 당한 목완청은 온몸에 기운이 쭉 빠졌다. 단예는 그녀의 몸을 안고서는 침대 위에 눕혔다.그리고는 손을 뻗쳐 그녀의 단추를 몇 개 끌렀다.봉긋 솟아오른 젖무덤이 탐스러운 자태를 드러냈다. 목완청은 단예의 손을 밀치며 소리쳤다.
[그대는.... 나의 친 오라버니예요!]
단예는 얼이 빠진 상태였으나 그 한 마디 말은 청청벽력과 같은 충격을 주었다.급히 그녀를 놓고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그리고는 두 손으로 잇따라 자기의 뺨을 후려 갈기기 시작했다.
[죽을 죄를 지었다! 죽을 죄를 지었어!]
목완청은 단예의 두 눈이 충혈되어 있고 기이한 광채를 내뿜을 뿐 아니라 그의 근육이 부르르 떨리고 콧구멍이 연신 벌렁거리는것을 보자 놀라 소리쳤다.
[낭군,음식에 독이 있었어요! 우리 두 사람이 당한 거예요!]
이때 단예의 온몸은 숯불처럼 뜨거워졌다. 마치 빵을 찌는 가마솥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그러다가 목완청이 음식에 독이 있다고 하자 마음이 놓였다.
(알고 보니 독약이 나의 본성을 흐리게 했기 때문에 완 누이에게 윤리에 어긋난 짓을 하려고 했구나.내 책임이 아니지!)
그러나 그의 몸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끈거렸다. 그리하여 그는 옷을 하나 둘 씩 벗기 시작했다. 다만 살에 붙어 있는 내의와 속바지만은 더 벗을 수 없었다.그리고 그는 단정히 앉아서는 눈으로 코를 보고 코로 마음을 향하도록 하게 만들고 흔들리는 마음을 억제하려고 했다.그는 망고주합을 먹었기 때문에 본래는 만독이 불침하는 몸이었으나, 홍소육에 섞인 것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독약이 아니고 정욕을 유발시키는 춘약이 었다.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라고 했듯이 이 춘약은 사람들에게 모두 갖추어져 있는 정욕을 일으키게 만들어서 자제할 수 없도록 했다. 망고주합은 만독을 제거할 수 있으나 이 춘약은 결코 독이 아니기 때문에 망고주합을 복용한 단예에게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었다.
목완청 역시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불처럼 달아 오르고 있었다.참을 수 없게 된 그녀는 젖가리개와 국부를 가린 조그만 고의만 남기고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더운 입김을 쌕쌕 내뱉고 있었다. 학처럼 길고 유려한 목덜미,둥그스름한 어깨와 연뿌리같이 내려뜨린 두 팔,풍만한 젖무덤과 쥐면 한 줌밖에 안 될 듯 잘록한 허리, 알맞게 살이 오른 둔부와 쭉 빠진 다리가 어둠속에서 황홀하게 빛났다.그녀는 젖가리개마저 벗어 버리려고 했다.
단예는 그녀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몸매를 홀린 듯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며 악을 쓰듯 외쳤다.
[더 벗지 마! 등을 석벽에 기대고 몸을 차갑게 해!]
두 사람은 석벽에 등을 기대었다. 등이 서늘하긴 했으나 나머지 부분은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단예는 두 뺨이 능금처럼 붉게 달아오른 모습과 한 쌍의 열롱하고 물기 어린 눈동자를 보자 다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이제 약 기운과 대항할 결심을 해야 한다.만일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진정 단씨 집안의 체면을 손상시키게 되어 백 번 죽어도 그죄를 용서받지 못한다.]
그는 목완청에게 말했다.
[나에게 한 개의 독화살을 주시오.]
목완청은 물었다.
[무엇하게요?]
단예는 말했다.
[나는....나는 만약 약 기운에 저항하지 못하게 될 때 화살로 나 자신을 찔러서 죽겠소.그대에게 해를 입히지 않게 말이오.]
목완청은 말했다.
[나는 주지 않겠어요.]
두 사람은 화살촉에 묻어 있는 독기운이 단예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단예는 말했다.
[그럼 한 가지 일을 응낙해 주시오.]
목완청은 말했다.
[뭐예요?]
단예는 말했다.
[내가 손을 뻗쳐 당신의 몸을 만진다면 화살로 나를 쏴 죽이도록 하시오.]
[나는 응낙할 수 없어요.]
단예는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 응낙해 주시오.우리 두 사람은 대리 단씨가 오랜 기간 지켜온 명예를 더럽힐 수 없소.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어 저승에 갔을 때 무슨 낯으로 선조들을 뵈올 수 있겠소?]
이때였다.
갑자기 석실 밖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대리 단씨는 본래 훌륭했다. 그러나 단정명의 대에 이르러 입으로는 인의도덕을 부르짖으면서도 마음 씀씀이는 짐승만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대대로 명예를 지켰다고는 할 수 없다.]
단예는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은 누구인데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시오?]
목완청은 급히 말했다.
[그는 바로 청포객이에요.]
그 청포객의 음성이 들려왔다.
[목 소저, 내가 그대의 오라버니를 그대의 남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 그 일은 나에게 맡기면 된다.내가 반드시 해낼테니!]
목완청은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이 이와 같은 독을 써서 사람을 해치는 것과 내가 부탁한 일이 무슨 상관이 있어요?]
청포객은 말했다.
[그 한 대접의 홍소육 가운데 나는 다량의 음양화합산(陰陽和合散)을 뿌렸지. 먹은 후에 음양을 조화시켜 남녀가 살을 섞지 않는다면 살갗이 터지고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게 돼. 이 화합산의 약효는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무서워지며 여드레가 되는 날에는 설사 신선이라 하더라도 참을 수가 없게 되지.]
단예는 노해 부르짖었다.
[나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째서 그와 같은 독을 써서 나를 해치려고 하시오? 당신은 나로 하여금 이후에 사람을 대할 면목도 없도록 만들고 나의 백부님과 부모님들로 하여금 한평생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들 작정이 아니오? 나는....백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그와 같이 몰염치한 일을 저지를 수는 없소.]
그 청포객은 말했다.
[나는 너와 아무런 원한이 없지만 너의 백부는 나와 바다보다 깊은 원한이 있다. 단정명과 단정순 이 두 녀석으로 하여금 한평생 수치를 느끼고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도록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정말 묘하군 묘해! 허허허허!]
단예는 다시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힐끗 바라보니 목완청의 해당화같이 고운 얼굴과 부용이 막 피어날 때처럼 어여뿐 몸매가 눈에 뜨이지 않는가? 그는 그만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그는 자기의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완 누이와 나는 본래 혼인을 약속했다.만약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대리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 누가 있어 나와 그녀가 같은 남매라는 것을 알아냈겠는가? 이것은 윗대에서 잘못하여 저지른 업보이니 두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몸을 휘청거리면서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목완청 역시 손으로 벽을 잡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돌연 단예는 마음 속에서 전광석화같이 일어나는 생각이 있었다.
(안 된다.안 돼! 단예야.단예야!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무엇이냐? 네가 오늘 실수하여 그녀를 범하게 된다면 비단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게 될뿐아니라 백부와 부친마저도 함정에 빠뜨리는 결과가 된다.)
그는 즉시 호통을 내질렀다.
[완 누이,나는 그대의 친오라버니이고 그대는 나의 친누이야! 알겠어? 누이는 주역을 아는가?]
목완청은 희미한 의식속에서 갑작스런 질문을 당하자 물었다.
[주역이라니? 난 몰라요.]
단예는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 주지.주역이란 학문은 매우 어려우니 잘 들어 두시오.]
목완청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나는 그것을 배우고 싶지 않아요.]
단예는 말했다.
[그대가 배우고 난 후에는 크게 쓸모가 있을 것이오.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은 이로 인해서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오.]
그는 그 자신의 욕념이 미칠 듯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이 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놓여 있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목완청이 달려들어 조금이라도 유혹을 한다면 둑이 무너진듯 그는 그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그리하여 그는 그녀에게 주역을 가르치려고 생각한 것이다. 한 사람이 가르치려 하고 한 사람이 배우려고 한다면 두 사람은 그 주역을 배우고 가르치는 데 골몰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남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주역의 기본이라 함은 태극(太極)에 있소. 태극에서 양의(兩儀)가 생기고 양의에서 사상(四象)이 생기고 사상에서 팔괘(八卦)가 생기는 것이오.그대는 팔괘의 도형을 아시오?]
목완청은 말했다.
[몰라요.제가 이상해져요.낭군! 이리로 오세요.내가 그대에게 할 말이 있어요.]
단예는 말했다.
[나는 그대의 오라비이니 낭군이라 부르지 마오.나를 오라버니라고 불러야 하오.내가 팔괘도형의 요결을 그대에게 들려줄 터이니 잘 기억하도록 하시오. 건삼련(乾三連) 진앙우(震仰盂) 양복완(良覆碗) 이중허(離中虛) 감중만(坎中滿) 태상결(兌上缺) 손하단(巽下斷).]
목완청은 그 소리를 따라 한 번 외워 보더니 물었다.
[수우반완(水盂飯碗)이라는 것은 뭣하는거죠?]
단예는 말했다.
[그것은 팔괘의 형상을 설명하는 것이오. 무릇 팔괘에 포함된 뜻에는 천지만물 가운데 무엇 하나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오. 한 집안의 사람들을 두고 이야기를 합시다.건 은 부친이고 곤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오. 진은 장자가 되고 손은 장녀가 되는 것이오....우리는 남매이니 나는 진괘이고 그대는 손괘가 되는 것이오.]
목완청은 귀찮다는 듯 말 ㎎다.
[아니에요.그대가 건괘이고 나는 곤괘예요. 우리 두 사람이 부부로 맺어지게 되어 아들을 낳고 딸을 키우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괘와 손괘를 낳아 기르게 되는 것이죠....]
단예는 그녀의 어조가 간드러진 것을 듣고는 더욱더 가슴이 설레였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진정하고 말했다.
[그대는 쓸데없는 생각을 말고 다시 내 말을 듣도록 하시오.]
목완청은 그를 손짓해 불렀다.
[그대는.... 내 곁으로 와서 앉아요.그러면 그대의 말을 듣겠어요.]
이때 청포객이 석옥 밖에서 말했다.
[좋아 좋아. 너희들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아들 딸을 낳는다면 나는 너희들을 놓아 주겠다.너희들을 죽이지 않을 뿐 아니라 너희 두 사람에게 나의 무공을 전수하여 너희 부부가 천하를 주름잡도록 해주마.]
단예는 노해부르짖었다.
[최후의 고비에 이르면 나는 스스로 석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겠소. 우리 대리 단씨의 자손은 죽더라도 욕을 당하지는 않소! 당신이 나의 몸을 이용해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시도는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오.]
청포객은 말했다.
[네가 죽는 것도 좋고 살아 있는 것도 좋다.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만약 스스로 자결은 한다면 나는 너희 두 사람의 시체를 발가벗겨 대리 단정명의 조카와 질녀라는 글을 써 붙이고 단정순의 아들 딸이라는 사실도 밝힐 뿐만 아니라 사사로이 간통을 하다가 남에게 발견당한 끝에 수치심을 못 이기고 자살했다고 써 놓겠다. 그리고 너희들 두 사람의 시체를 소금으로 절여서는 먼저 대리성 내에 사흘간 걸어두겠다. 그후에 다시 밀양, 낙양, 임안, 항주 등지에서 뭇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키겠다.]
단예는 극도의 분노에 차서 호통을 내질렀다.
[우리 단씨 집안이 도대체 당신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은 그토록 악독한 보복을 하려는 것이오?]
[내 자신의 일을 네 녀석에게 들려 줄 필요는 없다.]
그 한 마디가 끝나고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단예는 목완청과 한 마디 말을 하면 그만큼 위험이 뒤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그리하여 그는 벽쪽을 향해 앉아서는 능파미보 가운데 있는 복잡한 발걸음을 골똘히 생각했다. 그런 상태에서 한참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 때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 석동 속의 신선 누님은 완 누이보다 열 배나 더 아름답다. 내가 만약 처를 맞아들인다면 신선 누님과 같이 아름다운 여인을 맞이하겠다.)
생각을 하던 그는 목완청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목완청의 모습이 갑자기 석동 속에 있던 옥미인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크게 부르짖었다.
[신선 누님! 저는 정말 괴롭습니다.날 좀 구해 주세요.]
그는 달려가 허겁지겁 목완청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바로 이때 바깥에서 누가 말했다.
[저녁밥을 먹으시오.]
그러면서 한 대의 불을 밝힌 붉은 초를 디밀었다.
[빨리 받으시오.신혼 초야에 화촉을 밝힐 촛불이오.]
단예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촛불 아래 목완청의 두 눈이 요염하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단예는 단숨에 촛불을 집어던지고 호통을 쳤다.
[음식에는 독이 있으니 가져 가시오.우리는 먹지 않겠소.]
[당신은 이미 중독이 되었고 또 분량이 충분하므로 더 독을 쓸 필요는 없소.]
그러면서 그는 찬과 밥을 디밀었다.
단예는 멍하니 그것을 받아서는 탁자 위에 놓고 생각했다.
(사람이 죽은 후엔 모든 것이 끝난다.죽은 후의 모든 시비를 누가 관계할 수 있을까 보냐? )
그러나 그는 다시 생각을 돌렸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백부님이 나를 얼마나 귀여워했는가. 내 어찌 단씨 집안이 천하의 웃음 거리가 되도록 할 수 있겠는가?)
이때 목완청이 입을 열었다.
[낭군님,더 이상 참지 못하겠어요! 그대가 자살하는 걸 나는 볼 수 없어요.내 자신이 독화살로 자결을 할래요.]
단예는 부르짖었다.
[잠깐!우리 남매가 죽는다 하더라도 저 악독하기 이를데 없는 자는 우리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오.이 자는 음흉하고 악랄해서 어린 아기를 죽이는 섭이랑이나 사람의 심장을 꺼내는 남해악신보다 더욱 악독하오. 도대체 그는 누구인지 모르겠구료.]
그러자 밖에서 청포객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녀석은 정말 어느 정도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그렇다.악인 중의 악인이며 사대 악인의 우두머리인 악관만영(惡貫滿盈)이 바로 나다!]
3. 왕자를 구출하라
대리국은 중원의 남방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였고 여러 민족이 모여 살고있었다. 진남왕비 도백봉은 태이사람이었다. 대리국 사람들은 중원 문화의영향을 별로 받지 않아 황실의 예법은 송나라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특히 보정제는 인자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면 속된 예의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단정순 부부와 고승태 등 세 사람은 아랫자리에 앉아 보정제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과 음식을 드는 사이에 보정제는 조금 전 단예가 납치된 사건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백봉과 단정순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으며 상 위에 차려진 산해진미의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날이 밝을 무렵이 되어서야 문 밖의 시위가 말했다.
[파사공께서 황상을 배알코저 합니다.]
단정명은 말했다.
[들라 이르라.]
그러자 휘장이 걷혀지면서 비쩍마르고 키가 작은 사내가 들어와 허리를 굽혀 예를 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만겁곡은 선인도를 지난후 철교를 건너게 되면 도달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한 그루 커다란 나무에 있는 구멍을 통해 골짜기로 들어가야 합니다."
도백봉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진작 사공께서 나서신 것을 알았더라면 적의 소굴을 찾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며 반 나절 동안 근심걱정하지 않았을거에요.]
그 흑의 사내는 약간 허리를 굽혔다.
"왕비께선 과찬이십니다."
이 파천석은 모습은 비록 보잘것 없었지만 매우 똑똑하고 부지런한 인물이 었다. 한때는 보정제를 위해 적지 않은 공로를 세우기도했다. 지금은 대리국의 사공이라는 벼슬에 있었다. 사도, 사마, 사공, 이 삼공의 벼슬은 조정에서 지극히 존귀한 자리였다. 파천석의 무공은 탁월했으며 특히 경신법에 뛰어난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이번에 보정제의 명령을 받고 적들이 머물고 있는것을 탐사하기 위해 몰래 종만구 일행을 미행했고 만겁곡의 소재지를 알아냈던 것이다.
보정제는 미소했다.
"파사공, 앉아서 배불리 자시도록 하게. 우리는 곧 출발해야겠네."
파천석은 황제가 다른 신하들이 무릎을 꿇고 큰절하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제는 신하들을 형제처럼 또는 친구처럼 호칭하고 사랑했다.만약에 신하가 지나치게 공손하게 나오면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이 바로 보정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즉시 승낙을 하고 밥그릇을 들고 사양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그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나 밥먹는 양은 놀랍도록 커서 삽시간에 여덟 그릇을 먹어치웠다. 파천석은 다 먹고 나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소맷자락으로 입가에 묻은 기름 찌꺼기들을 닦아내고 말했다.
"신 파천석이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장서서 나갔다. 보정제와 단정순 부부 그리고 고승태는 그뒤를 이어 차례로 걸어나갔다.
진남 왕궁을 나가자 저고부주 사대호위가 이미 마필을 준비한 채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 명의 종복들이 보정제 등의 무기를 들고 사대호위 뒤에 서있었다. 단씨는 중원무림의 무학명가였는데 대리에 나라를 세운후 육주년을 이어내려 오는 동안 조상의 유품을 지켜왔다. 단정명과 단정순 형제들은 부귀영화가 극에 달했으나 여전히 검소하게 생활했다. 그리고 무림의 고수들이 방문을 하러 오거나 원한이 있어 찾아오게 되었을 때 언제나 무림규칙에 의해서 그들을 상대하곤 했으며 한번도 황실의 위세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 날 보정제가 친히 나서게 되었으나 종복들은 흔히 보아온 일이라조금도 놀라워하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보정제 이하 모든 사람들은 다같이 평상복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눈에는 대가집의 주인이 종복들을 데리고 놀러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도백봉은 파천석이 거느리고 있는 종복들 가운데 십여 명이 커다란 도끼와 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파사공, 우리는 만겁곡에 가서 집을 짓게되나요?"
파천석은 대답했다.
"아닙니다. 집을 헐게 될 것입니다."
일행이 탄말은 모두 준마였다. 질풍같이 달렸기 때문에 정오가 되기도 전에 그들은 만겁곡 앞의 숲에 당도할 수 있었다. 파천석은 종복들을 지휘해서 길을 막는 나무들을 일일이 쓰러뜨리거나 톱으로 잘라 넘겼다. 그리고 골짜기 입구에 이르게 되었을때 보정제는 '단씨성을 가진 사람으로 이 골짜기에 들어오는 자는 죽여 용서치 않으리라'고 쓰여진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면서 웃었다.
"만겁곡의 주인은 우리와 매우 깊은 원한이 있는 모양이군."
단정순은 혹시나 자기가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 감보보를 찾게 될까봐 종만구가 이와 같은 글을 써놓았다는 사실을 짐작할수 있었다. 그는 슬쩍 부인의 눈치를 봤다. 도백봉은 싸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명의 사내들이 커다란 도끼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삽시간에 그 아름드리의 커다란 나무를 찍어 쓰러뜨렸다. 저고부주 사대호위가 앞장을 서서 나아가고 그 뒤는 파천석과 고승태가 따랐다. 그 뒤를 진남왕 부부가 따르고 보정제는 마지막으로 걸어갔다.
만겁곡에 들어가니 사방은 조용하고 마중을 나온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파천석은 강호규칙에 따라 손에 단정명과 단정순 두 형제의 명첩을 들고 성큼성큼 본채가 있는곳으로 다가가서는 낭랑히 외쳤다.
"대리의 단씨 형제가 삼가 종곡주를 만나러 왔소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왼쪽에 있는 수풀더미 속에서 한 비쩍마른 인영이 번개처럼 달려들더니 손을 뻗쳐 파천석의 손에 들린 명첩을 낚아채려 했다. 파천석은 오른쪽으로 세 걸음 비스듬히 걸음을 옮겨 피하며 물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그 사람은 바로 궁흉극악 운중학이었다. 그는 낚아챌 수 없게 되자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재차 파천석에게 달려들었다. 파천석은 그의 경신법이 기이하도록 뛰어난 것을 보고 그와 겨루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다시 옆으로 세 걸음을 내딛었다. 운중학도 곧 세 걸음을 다가왔다. 파천석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달렸다. 그러자 운중학은 곧 그 뒤를 쫓았다. 한 사람은 키가 작고 한사람은 키가 큰 그들은 삽시간에 집 밖에서 세 바퀴를 돌았다. 운중학의 걸음폭은 기이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파천석은 훌쩍훌쩍 뛰는 듯 움직였다. 파천석의 걸음걸이는 운중학보다 빨랐다. 그리하여 두사람의 간격은 시종 일 장 정도 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운중학이 파천석을 뒤쫓아 잡을 수는 없었지만 파천석 역시 그를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 두사람은 항상 자신의 경신법이 천하무적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강적을 만나게 되자 두 사람은 똑같이 마음속으로 놀랐다. 두 사람은 더욱 빨리 돌았다. 옷자락에서 펄럭이는 바람소리가 있었다.
다만 두사람이 쫓고 쫓길뿐이었건만 옆에서 볼 때는 마치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두 사람의 거리는 점차 넓어지게 되었고 집을 가운데 두고 맴돌며 달리는 꼴이 되었는데, 이때에는 운중학이 파천석을 쫓고있는 것인지 파천석이 운중학을 쫓고 있는것인지 알아차릴수가 없었다. 만야에 파천석이 운중학의 등뒤로 쫓아갈 수만 있다면 이 경신법의 시합은 자연히 파천석이 이기게 되는 것이었다. 이때 쿵하는 소리와 함게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종만구가 걸어나왔다. 파천석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암암리에 내공을 돋우고 왼손을 떨쳐냈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렸던 명첩이 수평으로 종만구에게 날아갔다. 종만구는 손으로 받아들고 노해 부르짓었다.
"단가야! 강호규칙으로 방문을 왔면서 왜 우리 골짜기의 문을 망가뜨렸느냐!"
저만리는 호통을 내질렀다.
"황상지존께서 어찌 너희 그 나무구멍에 난 지하도로 들어갈 수있단 말이냐?"
도백봉은 줄곧 아들을 염려하고 있던 터이라 참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내 아들은 어떻게 되었죠? 당신들은 그를 어디에다 숨겨놨나요?"
그러자 집안에서 다시 한여인이 달려나와 만족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한걸음 늦게 왔다. 단가라는 꼬마녀석은 우리가 이미 그의 가슴팍을 찢고 창자를 긁어내어서는 개의 먹이로 주었다."
그렇게말하는 여인의 두 손은 각기 한자루의 칼을 들고 있었다. 검신은 버드나무 잎처럼 가늘었으며 파란 광채가 어른 거리고있었다. 바로 피를 보면 즉사하고 만다는 수라도였다. 도백봉과 진홍면은 이십년전부터 서로 질투를 하고있었다. 따라서 지극히 깊은 원한을 맺게 되었다. 도백봉은 진홍면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그녀가 자기의 외동아들에 대해 그토록 악담을 하자 옛날의 증오와 새로이 싹튼 분노가 얽혀 한꺼번에 터져 나오게 되었다.
"나는 종곡주에게 물었을 뿐이다. 너같이 비천한 게집애는 내 앞에서 말을 할 자격도 없다."
별안간 창창하는 음향이 들렸다. 진홍면이 쌍도를 세차게 부딪힌 것이다. 그리고 질풍같이 도백봉 앞으로 달려들며 두 자루의 칼을 신랄하게 휘둘렀다. 십자단이라는 수법으로서 그녀가 명성을 떨치던 절기였다. 얼마나 많은 강호의 호걸들이 그녀의 수라쌍도가 펼치는 이 독랄한 초식 아래 열십자로 쪼개져 죽었는지 몰랐다. 도백봉은 즉시 불진을 뽑아들고는 힘차게 수라쌍도를 밀어냈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리며 불진의 끝으로 그녀의 등심을 짚어갔다. 단정순은 정말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한 사람은 지금의 처이고 한사람은 옛날의 정인이 아닌가.
그는 도백봉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느끼고있었다. 그러나 진홍면에 대해서도 역시 옛날의 온정을 잊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두 여인은 손을 쓰자마자 너죽고 나죽자는 생사를 돌보지 않는 싸움을 벌이지 않는가? 어느 쪽에서 상처를 입든 단정순으로서는 평생의 한이 될 터이었다. 그는 호통을 내질렀다.
"손을 멈추시오!"
그리고는 비스듬히 몸을 날려 다가서며 장검을 뽑아들고 두 사람의 무기를 밀쳐 내려고 했다. 종만구는 단정순을 보자 그만 말할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다. 쨍 하니 대감도를 뽑아들고 단정순의 머리를 내려쳤다. 저만리는 급히 말했다.
"왕전하께서 손수 손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소인이 그를 처치하지요."
그는 쇠낚시대를 휘둘러 종만구의 목을 찔러갔다.
"나는 단가가 다만 많은 사람의 수로 이기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종만구가 욕을 했다. 단정순은 말했다.
"만리, 물러나게! 내가 종곡주의 무공을 좀 알아 봐야겠네."
그리고 장검을 뻗쳐 저만리의 쇠낚시대를 퉁겨냈다. 이어 대환도를 잡고 있는 종만구의 손가락을 자르려고 했다.
"이 단가 녀석의 검법은 매우 무섭군!"
그는 끌어오르는 노기를 억누르며 칼을 비스듬히 휘둘러 자기의 앞을 지켰다. 강적을 맞이한 그로서는 조금도 경솔하게 움직일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정순은 검을 뻗쳐 찔러냈다. 종만구는 그 기세가 너무도 강하여 막아낼 수 없음을 알고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그 순간 단정순은 번쩍 몸을 날려 도백봉과 진홍면의 곁으로 날아갔다. 이때 진홍면의 도법은 이미 약간 허트러지고 있었고 도백봉은 한 걸음 두 걸음 그녀를 핍박하고 있었다. 별안간 칙칙칙! 하는 소리가 잇따라 울려 퍼지면서 진홍면은 잇따라 세 대의 독화살을 쐈다. 이 짧은 화살의 형상은 목완청이 쏘던 그 화살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 수법은 훨씬 고명한 편이었다. 세개의 화살은 좌우와 중간 세 방위로 날아들고 있었으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피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때 도백봉은 훌쩍 몸을 솟구쳤다. 그 순간 석 대의 화살은 그녀의 아랫배를 겨냥한 것이었고 두번재의 화살은 그녀의 두발 사이를 노린 것이었으며 세번째의 화살은 바로 그녀의 발밑을 노리는것이었다. 이때 도백봉은 실로 몸을 재차 솟구칠 수는 없었고 아래로 떨어지는 판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대의 화살은 정확하게 그녀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배를 겨냥한 꼴이 되어실로 정대절명의 위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도백봉은 속으로 놀람과 당황함을 금할수 없었다. 불진을 급히 휘둘러서는 첫번째 독화살을 휘감아 버렸다. 그러나 몸은 급속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곧 두번째의 화살과 세번째의 화살이 자기의 가슴팍과 아랫배에 꽂히려는 찰나! 별안간 눈앞에 하얀 광채가 번쩍 빛났다. 한 자루의 장검이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면서 그녀의 눈 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 순간 그 장검은 두개의 화살을 네 토막을 내게 되었다. 동시에 누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바로 단정순이 달려와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만약 그의 검이조금이라도 정확하지 못해서 짧은 화살을 두 토막으로 내지 못했다면 그 두대의 화살은 영낙없이 그녀의 몸에 박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도백봉과 진홍면은 똑같이 놀라 안색이 창백하게 되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었다. 도백봉은 부르짖었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반갑지 않아요!"
그녀는 몸을 돌려 남편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불진을 휘둘러 진홍면을 후려쳤다. 그녀는 진홍면이 음흉하고 악랄한 수법을 쓰자 여간 가증스럽지 않았으므로 불진을 휘두르는 초식은 살기를 담고 있었다. 비스듬히 쓸어치고 곧장 밀어치는 듯 상대방으로 하여금 손을 써서 독전을 내 쏘게 할 여유를 전혀 주지 않았다. 진홍면은 조금전 두 대의 화살이 하마터면 단정순에게 가 꽂히려고 할 때 단정순이 스스로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처를 구하는것을 보자 화가 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마음이 산란하게 되자 불진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밀리게 되었다. 도백봉은 불진을 들어 오악압정의 초식을 펼쳐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진홍면은 급히 오른손으로 피했다. 도백봉은 왼손을 때맞추어 격출했다. 진홍면의 가슴팍이 정확히 격타당하여 피를 토하게 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이 그녀의 가슴팍과 아직도 반 자 정도 남아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남자의 손이 뻗쳐와 그녀의 손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단정순이 손을 써서 진홍면을 구한 것이다.
"봉황아, 그렇게 악랄하게 손을 쓸 것은 없소."
진홍면은 어리둥절하였으나 곧 노해 부르짖었다.
"내 앞에서 봉황이니 공작이니 그토록 다정스럽게 부를 수 있나요?"
왼손에 들고 있던 칼로 단정순의 어깨죽지를 향해 내리쳤다. 도백봉 역시 자기가 진홍면을 죽일 수 있었는데 단정순에 의해 저지당하게 되자 남편이 미웠다. 그리하여 불진을 휘둘러 단정순의 얼굴을 후려쳐 갔다. 두 여인은 동시에 손을 썼으나 상대방이 단정순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일제히 부르짖었다.
"어머나!"
동시에 그녀들은 단정순을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도백봉의 불진은 방향을 틀어 수라도를 막게 되었고 진홍면은 나는 듯 다리를 들어 도백봉을 걷어차서 그녀로 하여금 불진을 거두어 들이도록 하려 했다.
이때 단정순은 비스듬히 몸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진홍면의 발길질은 세차게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게 되었다. 도백봉은 노해 부르짖었다.
"네가 감히 우리 남편을 차?"
진홍면은 부르짖었다.
"낭군님. 난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예요. 매우...... 매우 아프세요?"
단정순은 일부러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이구! 아이구! 발길질에 채여 이제 죽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몸을 웅크렸다.
종만구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듯 칼을 높이 쳐들고는 단정순을 향해 내리쳤다. 도백봉은 부르짖었다.
"손을 멈추어라!"
진홍면은 부르짖었다.
"그러지 마!"
불진과 수라도가 동시에 일제히 종만구에게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종만구는 부득이 칼을 돌려서는 맞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울화가 치미는 듯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단가라는 도적아, 여인에게 의지해서 목숨을 구하다니! 그래도 영웅호걸이냐?"
단정순은 껄걸 웃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휙 휙 휙하며 삼검을 찔러냈다. 이와 같은 공격에 종만구는 휘청 뒤로 물러섰다. 진홍면은 어리둥절했다가 곧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은 상처를 입은 척 가장했군요!"
도백봉은 웃으며 말했다.
"이 분은 원래 사람을 잘 속이는데 당신이 어떻게 그를 믿었지?"
진홍면은 단정순을 향해 공격해갔다.
"칼을 받아요!"
도백봉 역시 부르짖었다.
"그를 때려줘요!"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두 여인은 손을 함께 써서는 단정순을 공격했다. 보정제는 아우가 두 여인과 얽혀서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저만리를 향해 말했다.
"자네들이 들어가서 단예를 찾아 보게."
저만리는 대답했다.
"네."
저고부주 네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고득성이 왼발로 막 문지방을 넘게 되었을 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차가운 바람이 휙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오른발로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지그히 날이 엷으면서도 넓적한 칼이 그의 눈앞으로 곧장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간격은 불과 수치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요행히 머리통이 두 쪽으로 갈라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코가 날아가고 말았을 형편이었다. 고득성은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똑똑히 보니 자기에게 암습을 가한 사람은 얼굴이 예쁘장한 중년여인이었다. 바로 무악부작 섭이랑이 아닌가? 그녀의 날이 얇은 칼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넓으면서도 엷고 사면에 예리한 날이 서있었다. 그녀는 짧은 칼자루를 쥐고 있었는데 조금 휘두르자 대번에 한 무리의 둥근 광채로 화하는 것이었다.
고득성은 처음에는 놀라마지 않았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일성을 대갈하며 도끼를 휘둘러서는 그녀의 엷은 칼을 내려찍으려 했다. 섭이랑의 엷은 칼은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았다.그녀는 감히 날이 엷은 칼과 도끼와 같이 무거운 무기를 맞부딪힐 수가 없었다. 고득성은 칠십이로 난파풍부법을 펼쳐 두 개의 도끼를 곧장 찍어내리는 수법으로 휘둘러댔다. 주단신은 그녀가 여유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도법 또한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지라 시간이 길어졌다가는 고득성이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즉시 판관필을 휘두르며 고득성과 더불어 섭이랑을 협공했다.
이때 파천석과 운중학 두 사람은 여전히 큰 원을 그리며 쫓고 쫓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경신법이 비슷해서 쌍방은 승부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들이 겨루는 것은 내력의 고하가 되고 말았다. 파천석은 백여 번이나 원을 그리게 되었을 때 이미 운중학의 하반신 재간이 여간 표일하지 않으나 지구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한 사람이 거친 음성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떠드는 소리에 노부가 잠을 잘 수가 있나? 어디서 기어온 자식들이야!]
그러면서 남해악신이 악어 모양의 가위를 들고 훌쩍훌쩍 뛰며 다가들었다.
부사귀는 호통을 쳤다.
[네 사부의 아버님께서 오셨다!]
남해악신은 호통을 내질렀다.
[누가 내 사부의 아버님이야?]
부사귀는 단정순을 가리켰다.
[진남왕은 단공자의 아버지이고 단공자는 너의 사부가 아니냐? 이제와서 잡아떼자는 것이냐?]
남해악신은 그 말을 듣자 울화가 치미는 듯 얼굴이 샛노래졌다.
[나는 내 사부를 모셨을 뿐인데 너와 같은 후레자식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서는거야?]
부사귀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의 아들이 아닌데 왜 나를 후레자식이라고 부르지?]
남해악신은 어리둥절해졌다. 한참 생각끝에 가서야 부사귀가 말을 빙글 돌려서 자기를 후레자식의 애비는 역시 후레자식이라고 욕을 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악취전을 철컥철컥 휘두르는 동시에 달려들었다. 남해악신은 두뇌가 좀 모자라는 편이었으나 무공은 확실히 뛰어난 데가 있었다. 악취전의 날에 돋아난 하얀 이빨은 날카로운 가시와 비슷했다. 부사귀는 한 자루의 제미숙동곤으로 삼 초를 받았으나 두 팔이 시큰거려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저만리가 기다란 낚시대를 쳐들고 낚시대에 매어 있는 강철 철사를 길게 뻗쳐냈다. 그는 강철 철사로 남해악신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했다. 남해악신은 그의 악미편을 꺼내 이를 밀어냈다.
보정제는 고승태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곳을 지키고 있게.]
고승태는 대답했다.
[예.]
보정제는 집안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예아, 너는 어디에 있는냐?]
그러나 대답하는 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그는 왼쪽의 대청문을 열고 다시 불렀다.
[예아! 예아!]
그러자 십 오륙 세 정도의 소녀가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얼굴에 당황과 놀라운 빛을 띠고 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신가요?]
보정제는 말했다.
[단공자는 어디 있느냐?]
소녀는 말했다.
[단공자는 왜 찾으시나요?]
보정제는 말했다.
[내가 구해가려고 그런다.]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상공을 구하지 못할거예요. 그는 커다란 바위로 막혀 있는 석옥에 갇혀 있어요. 그리고 문 앞에는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요.]
보정제는 말했다.
[네가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 다오., 내가 그 지키는 사람을 때려 눕히고 바위를 밀어내면 그를 구출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요. 내가 안내를 했다간 저의 아버님이 저를 죽일거예요.]
보정제는 물었다.
[너의 아버지는 누구냐.]
[저의 성은 종씨예요. 저의 아버지는 바로 이 곳의 곡주예요.]
소녀는 바로 무량산에서 도망쳐온 종영이었다.
보정제는 즉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달리 길을 안내할 사람을 찾으려 했다.
단예와 목완청은 석옥 안에서 문 밖의 청포객이 천하제일의 악인인 악관만영이라는 사실을 알아듣게 되자 깜짝놀란 나머지 달려들어 서로 얼싸안게 되었다. 단예는 나직이 말했다.
[알고 보니 우리는 천하제일의 악인의 손에 떨어졌군. 정말 야단났는걸.]
목완청은 머리를 그의 품속에 쳐박았다. 단예는 가볍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오.]
두 사람이 입고 있는 내의는 모두 땀에 젖어 있었다. 그야말로 물속에서 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전신은 뜨거운 열기로 화끈거렸고 체온이 상대방의 코에 스미게 되자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꼈다. 한 사람은 혈기 방장한 젊은이였고 한 사람은 첫 정을 알게 된 소녀였다. 설사 춘약에 격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참을수 없는 나이였다. 음양화합산의 약효는 지독해서 그 옛날 여자를 모르던 왕사성이란 군자를 음탕한 자로 만들었고 정숙한 여인을 탕녀로 만들수 있었다. 그것은 심신이 흐트러지게 만들어 한 마리의 금수로 변하게 하는 효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청포객은 득의에 찬 괴성을 터뜨리며 웃었다.
[하하하! 너희 남매 두 사람은 빨리 몸을 섞어라. 그리고 하루라도 일찍 자식을 낳게 된다면 하루 빨리 그곳에서 빠져 나갈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간다.]
그는 나무로 된 담장을 뛰어넘어 사라져 갔다.
단예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악노삼, 악노이! 사부에게 어려움이 있으니 빨리 와서 구해다오!]
몇 번을 부르짖었으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위급할 경우에는 그를 사부로 모신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악인을 사부로 잘못 사귄다는 것은 나 한 사람의 일에 불과할 뿐이니까. 결코 백부님과 아버님에게 누를 끼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다시 소리내어 외쳤다.
[남해악신 내 기꺼이 당신을 사부로 모시겠소! 기꺼이 남해악신의 제자가 되겠단 말이오! 빨리 당신의 제자를 구해 주시오. 내가 죽게 된다면 당신에게는 제자가 없게 되오!]
그가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짖었으나 시종 남해악신의 기척은 들을수 없었다. 갑자기 그는 생각했다.
[잘못됐구나! 남해악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노대 악관만영이 아닌가. 설사 내가 부르는 소리를듣는다 하더라도 감히 와서 구하려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때 목완청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낭군, 그대와 혼례를 이룬 다음 우리 첫번째 아이는 남자였으면 해요. 여자가 태어나도 상관은 없지만요.]
단예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남자아이가 됐으면 좋겠소.]
갑자기 석옥 밖에서 한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단공자, 그대는 목언니의 오라버니예요. 결코 그녀와 결혼할 수 없어요.]
단예는 어리둥절해졌다가 물었다.
[그대는..... 그대는 종소저이오?]
그 소녀는 바로 종영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나에요. 나는 청포객의 말을 훔쳐 들었어요.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그대와 목언니를 구하도록 하겠어요.]
단예는 크게 기뻤다.
[그거 참 잘 되었구려. 그대는 빨리 가서 해독약을 훔쳐 보시오!]
목완청은 노해 부르짖었다.
[종영! 이 몹쓸 계집애! 빨리 물러서라! 누가 너보고 구해 달라고 했니?]
종영은 말했다.
[나는 역시 방법을 강구해서 이 바위를 밀어낸 후에 단공자를 구해 내는 것이 좋겠어요.]
단예는 그 말을 부인햇다.
[아니 아니야. 가서 해약을 훔쳐와요. 나는.....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요. 빨리.....다 죽게 되었어요!]
종영은 놀라 물었다.
[뭐가 견딜수 없다는 거에요. 배가 아프신가요?]
단예는 말했다.
[배가 아픈 것이 아니오.]
[그러면 머리가 아픈가요?]
[머리가 아픈 것도 아니오.]
[그렇다면 어느 곳이 불편한가요?]
단예는 정욕을 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온몸이 개운하지못하오. 방법을 강구해서 해약을 훔쳐오도록 하시오.]
종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병의 상태를 말하지 않으면 나는어떤 해약을 찾게 될런지 모르게 되어요. 우리 아버지의 해약은 많아요 그러므로 먼저 배가 아픈지 머리가 아픈지 아니면 마음이 아픈지를 알아야 해요.]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픈 데는 없소. 다만..... 일종의 음양화합산이라는 독약을 복용했을 뿐이오.]
종영은 손뼉을 쳤다.
[독약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일은 한결 쉬워져요. 단 오라버니, 내가 아버지에게 가서 해약을 얻어 오겠어요.]
그는 총총히 나무담장을 넘어갔다. 그녀는 가서 자기 아버지에게 음양화합산의 해약을 달라고 조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음양화합산은 청포객의 약이었다. 종만구는 그이름을 듣자 말처럼 길쭉한 얼굴을 지푸리며 꾸짖었다.
[조그만 계집애가 그와 같은 물건을 왜 찾느냐? 한번만 더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너의 따귀를 갈겨줄테다.]
종영은 급히 말했다.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인 것이 아니예요!]
이때 보정제 등 여러명이 만겁곡으로 쳐들어 오게 된 것이었다. 종만구는 황망히 나아가 대적하느라고 그만 종영 한 사람을 방안에 남겨 두게 되었다. 종영은 밖에서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심하게 싸우는소리를 들었지만 상관하지않았다. 그녀는 부친이 약을 숨겨둔 곳을 이리 뒤지고 저리 뒤지며 해약을 찾았다. 종만구에게는 수백 병이나 되는 약병들이 있었고 또 약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음양화합산의 해약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될지를 모를때 누가 들어오는 기척을 듣고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보정제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보정제는 안내할 사람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종영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즉시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종영은 다가오더니 말했다.
[해약을 찾을수 없네요. 역시 당신을 안내해야 겠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 커다란 바위를 밀어낼 수 있을런지 모르겠어요.]
보정제는 아리송하기만 해서 물었다.
[무슨 해약이지? 큰 바위라는 것은 뭐지?]
종영은 말했다.
[날 따라오세요. 보면 즉시 알 수 있어요.]
만겁곡의 길은 이리 구불 저리 구불했다. 그러나 종영이 안내를 하자 삽시간에 도달할수 있었다. 보정제는 종영을 받쳐들고 몸을 훌쩍 날려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평온하게 나무 담장을 넘어서게 되었다. 종영은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
[정말 묘하네요. 묘해요! 마치 새가 나는것 같아요. 어머나 야단났어요! 야단났어요!]
그러고 보니 석옥 앞에는 한 사람이 단정히 앉아있지 않는가?
바로 청포객이었다.
종영은 반 쯤 죽어 있고 반쯤 살아있는 이 사람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빨리 가요. 저 사람이 떠난 후에 다시 오도록 해요.]
보정제는 청포객을 발견하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녀를 위로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상 두려워할 것은 없다. 단예는 바로 저 석옥 안에 있는것이지?]
종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로 몸을 감추었다.
보정제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귀하께서는 한 걸음만 비켜 주시오.]
청포객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꼼짝하지 않았다. 보정제는 다시 말했다.
[귀하가 만약 길을 비켜 주지 않는다면 불초는 실례를 무릅써야겠소.]
그리고는 몸을 옆으로 해서 청포객의 뒤쪽으로 후딱 지나쳐갔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비스듬히 쳐들고 커다란 바위를 밀어내려고 했다. 이때 청포객은 겨드랑이 아래서 한 자루 가느다란 철장을 뻗쳐내더니 보정제의 견정혈을 찌르려 들지 않는가? 철장은 그의 몸 한 자 쯤 되는 곳에 와서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보정제가 바위를 밀어내려고 기운을 내쏟기만 한다면 철장은 곧장 찌러오게 될것이고 그렇데 된다면 중상을 입게 될 처지였다. 보정제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 사람의 점혈 재간은 고명하기 이를 데 없다. 대체 누구일까?]
그는 오른손을 바짝 쳐들고 철장을 밀어냈다. 그리고 왼손을 오른손 아래로 뻗쳐 내서는 다시 바위에 갖다대었다. 청포객은 철장을 변화시키더니 이번에는 그의 장문혈을 겨누었다. 보정제는 질풍과 같이 손을 놀려서는 잇따라 일곱번이나 방위를 바꾸었으나 청포객의 철장은 그럴 때마다 허공을 격하고서 그의 요혈을 겨누어 그를 제지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잇따라 초식을 변화시켰다. 청포객은 언제나 보정제로 하여금 운기 행공해서 바위를 밀어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는데 그가 혈도를 겨냥하는 수법은 정확하고 신속했다. 이때 보정제는 왼손을 비스듬히 내려치는 척하다가 갑자기 장법을 지법으로 바꾸었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양지력을 내쏟아 철장을 찔러갔다.
이 일지가 만약 정확하게 철장을 찍게 된다면 철장은 구부러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 철장 역시 찍 하는 소리와 더불어 기운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두 가닥 기운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보정제는 한 걸음 물러서게 되고 청포객은 역시 몸을 흔들했다. 보정제의 얼굴에는 붉은 빛이 뻔쩍 나타났다 사라졌고 청포객의 얼굴에도 은연중 한겹의 붉은 기운이 감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정제는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자의 무공은 기이할 뿐 아니라 나의 무공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철장 끝에서 분명히 일양지력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는가?)
그는 두손을 맞잡고 물었다.
[선배의 존명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 가르쳐 줄수 없소이까?]
그러자 기복 없는 음성이 울려퍼졌다.
[그대는 단정명이오, 아니면 단정순이오?]
보정제는 그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은체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더욱더 기이하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불초는 단정명이라 하오.]
청포객은 말했다.
[그대가 바로 대리국의 당금 황제인 보정제란 말이오?]
보정제는 대답했다.
[바로 그렇소.]
청포객은 말했다.
[그대의 무공을 나와 비교해서 누가 강하고 누가 못한 것 같소?]
보정제는 잠시 생각해 보고 말했다.
[무공은 그대가 반 수 위나 정말 손을 쓰게 된다면 내가 당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이오.]
청포객은 말했다.
[맞소. 나는 역시 불구라는 불리한 점에서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오. 아아! 뜻밖에도 그대는 제위에 오르고서도 무공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군!]
그의 뱃속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는 기이했으며 허전함과 절망이 가득 서려 있었다.
보정제는 그의 내력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때 갑자기 석옥에서는 한소리 다급해져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단예의 음성이었다. 보정제는 부르짖었다.
[예아, 어떻게 되었니? 놀라거나 당황하지 마라. 내 곧 너를 구해내마.]
종영은 놀라 부르짖었다.
[단공자! 단공자!]
원래 단예와 목완청은 맹렬한 춘약의 약효에 더 이상 욕정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나중에 목완청은 정신마저 흐려져서 단예가 친 오라비라는 사실을 깡그리 잊어 버린 채 부르짖었다.
[낭군, 나를 안아요! 나를 안아 줘요!]
그녀는 처녀의 몸이었다. 남녀의 일에 대해서 잘은 모르고 있었으나 온몸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단예가 자기를 안고 있을 때는 약간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기에 단예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안돼!]
그는 몸을 뺐다. 발로 자연스럽게 능파미보를 펼쳐내었다. 목완청은 달려들었으나 단예가 피하는 바람에 그만 비스듬히 침대 위로 쓰러지게 되었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단예는 잇따라 몇 걸음을 옮겼다. 내공의 진기가 자연스럽게 경맥을 따라 운행되었다. 그러자 점점 더 빨리 움직이게 되었고 가슴팍에 답답한 기운이 더욱더 심해져서는 숨도 제대로 쉴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참을 수 없어서 크게 한소리를 부르짖었다. 그와 같이 크게 한소리를 부르짖자 답답한 기운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몇 걸음을 옮긴 이후 다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렇게 되자 솟구치던 정욕이 약간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이때 청포객은 말했다.
[저 녀석의 참을성이 대단하군! 나의 음양화합산을 먹고서도 여태껏 버티어 내다니 정말 놀랍다!]
보정제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것은 무슨 독약이오?]
청포객은 말했다.
[독약이 아니오. 다만 일종의 맹렬한 춘약이오.]
보정제는 말했다.
[당신이 그에게 그와 같은 약물을 먹인 의도가 무엇이오?]
청포객은 말했다.
[저 석옥 가운데는 또다른 한 여인이 있지. 바로 그의 친 누이동생 목완청이지.]
보정제는 그말을 듣자 즉시 이자의 음모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양이 깊은 그라고 하지만 발끈 대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손을 휘두르는 가운데 찍 하니 일양지를 찍어냈다. 청포객은 철장을 치켜 들고 그 일지를 막아내었다. 보정제는 다시 제 2지를 찍어냈다. 이 일지는 곧장 그의 목에 있는 천돌혈을 노렸다. 천돌혈은 바로 치명적인 사혈이라 반드시 청포객이 반격해 오리라고 여겼다.
헌데 청포객은 허허 냉소를 흘릴 뿐 피하지도 않고 반격하지도 않아 크게 의심이 일어 즉시 손가락을 거두고 물었다.
[어째서 죽으려 하시오?]
청포객은 말했다.
[내가 그대의 손 아래 죽는다면 그처럼 좋은일이 없지. 그대의 죄가 한층 깊어질 테니까 말이오.]
보정제는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청포객은 나직히 한마디 했다.
보정제는 그말을 듣자 그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나는 믿을 수 없소!]
청포객은 오른손의 철장을 왼손으로 옮기더니 오른손 식지로 찍하니 보정제를 찔러왔다. 보정제는 몸을 비스듬히 하면서는 번개같이 피하면서 일지를 반격했다. 청포객은 중지로서 곧장 찔러왔다. 보정제는 안색이 무거워져서는 역시 중지로 반격했다. 청포객은 3초에는 무명지로 쓰러지듯 찔러왔고 제 4초에는 새끼 손가락으로 가볍게 퉁겨내듯 찔러댔다. 보정제는 일일이 똑같은 무명지와 새끼손가락을 써서 반격을 했다. 그런데 제 5초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 총포객은 엄지로 누르듯이 찔러왔다. 다섯 손가락 가운데 엄지 손가락이 가장 짧은 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둔했다. 하지만 엄지 손가락의 힘은 가장 강한 것이다. 보정제는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어 역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는 누르듯 찍어갔다.
종영은 옆에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청포객에 대한 두려움마저 잃어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 두 사람은 가위 바위 보를 하는거예요? 한사람이 손가락을 뻗치면 다른 한 사람도 역시 손가락을 뻗치니 도대체 누가 이긴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다가들었다. 별안간 한줄기 세찬 바람이 기척도 없이 들이닥쳤다. 종영이 어리둥절해할 때 왼쪽 어깨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보정제는 손등으로 일 장을 휘둘러 그녀의 몸을 평온하게 밀어 내었다. 그리고는 즉시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움직이지 말아라.]
종영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그가....... 나를 죽이려해요.]
보정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우리가 무공을 겨루고 있을 때는 옆으로 다른 사람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단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등을 만져 주었다.
청포객은 말했다.
[이제 믿겠는가?]
보정제는 몇 걸음 다가가서는 허리를 굽혔다.
[정명이 선배님에게 인사 드립니다.]
청포객은 말했다.
[나를 선배라고만 부르는 것은 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보정제는 말했다.
[정명은 일국의 주인으로서 자연 의례를 지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정명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이 단예는 종묘사직을 이을 후손이니 선배께서는 석방하여 주십시오.]
청포객은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대리 단씨가 윤리에 어긋나고 도덕을 저버리는 짓을 하여서는 자손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기다려 왔는데 그토록 가볍게 놓아줄 것 같은가?]
보정제는 날카롭게 말했다.
[이 단정명으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소!]
청포객은 냉소를 흘렸다.
[흐흐흐! 너는 스스로 대리국의 황제라 일컫고 있지만 나는 그대를 제위를 찬탈한 역적으로 보고 있네.자네에게 그만한 용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서 병마를 이끌고 나를 죽이러 오게. 하지만 미리 말해두겠는데 내 세력이 그대만 못한건 사실이지만 단예를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노릇일세. 지금 자네가 나에게 손을 써 수백 초만에 나를 이길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지. 내가 죽지 않는 한 그대의 단예는 목숨을 구할수 없을거네.]
보정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보정제에게 어떤 협조자가 생긴다 하더라도 청포객은 죽일 수가 없을 것이지만 청포객은 언제라도 단예를 해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의 신분을 두고 볼때 보정제가 함부로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놓아 주시겠습니까?]
청포객은 말했다.
[어렵지 않지. 어렵지 않아. 그대가 천룡사에 출가하여 중이 되고 황위를 나에게 양보하기만 한다면 나는 단예의 몸안에 스며든 약성을 풀어 주고 인내심이 많은 조카를 되돌려 주도록 하겠네.]
보정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의 위업을 함부로 남에게 바칠 수는 없습니다.]
청포객은 말했다.
[흐흐흐! 그것이 그대의 위엄인가 아니면 나의 위엄인가? 물건을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어째서 남에게 갖다 바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자네에게 황위를 찬탈한 대죄를 따지지 않는 것만도 크게 너그럽게 대해준 것일세. 그런데도 그대가 고집을 부리고 듣지 않는다면 단예와 그 친 누이가 남자나 여자아이를 낳을 때까지 참을성있게 가디리도록 하게. 그러면 그때 내가 그들을 놓아주겟네.]
보정제는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그들을 죽이도록 하십시오.]
청포객은 다시 말했다.
[그 외 두가지 길이 있네.]
보정제는 물었다.
[어떤 것입니까?]
[첫째 그대가 별안간 암습을 가해 미처 방비한 틈이 없는 나를 죽이는 것일세. 그렇게 된다면 그대가 자연히 그들을 구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보정제는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암살할 수 없습니다.]
청포객은 말했다.
[설사 암살을 하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을껄? 그리고 두번째 일은 단예가 자기의 일양지 재간으로 나와 직접 겨루도록 하는 것일세. 그리하여 나를 이기기만 한다면 그 스스로 걸어나갈수 있지 않겠는가? 흐흐흐!]
보정제는 그야말로 노기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 없을 정도였으나 간신히 화를 억제하고 말했다.
[단예는 전혀 무공을 모르며 일양지를 배운 적도 없소이다.]
청포객은 말했다.
[대리 단정명의 조카가 일양지를 모르다니 그 누가 믿겠는가?]
보정제는 말했다.
[단예는 어릴 적부터 사서와 불경을 읽었으며 심기가 자비로와 결코 무공을 배우려 들지 않았소이다.]
청포객은 말했다.
[또 한명의 인의도덕을 부르짖는 위선에 찬 군자가 생겼군. 그와 같은 사람이 대리국의 군주가 된다는 것은 결코 억조창생의 복이 아니니 지금이 죽여 버리는 것이 차라리 낫겠군!]
보정제는 말카롭게 말했다.
[선배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청포객이 말했다.
[과거 나에게 다른 길이 주어졌다면 오늘 이와 같이 죽은 삶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삶도 아닌 비참한 지경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나아갈 길을 주지 않았는데 내가 어째서 그대에게 나아갈 길을 주겠는가?]
보정제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엄숙히 말했다.
[예아, 내가 방법을 강구해서 너를 구할테니 너는 단가의 자손임을 잊지 말아라.]
이때 석옥 안의 단예가 부르짖었다.
[백부님. 이리로 들어오셔서 단 일지로..... 일지로 저를 죽여주십시요!]
이때 단예는 문을 막아놓고 있는 바위의 틈바구니 앞에 서있었다. 그리하여 이의 보정제와 청포객이 주고받는 말을 듣게 된 것이었다. 보정제는 날카롭게 외쳤다.
[뭐라고? 너는 우리 단씨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을 저질렀느냐?]
단예는 급히 부인햇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조카는..... 몸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보정제는 말했다.
[생사는 천명이니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종영의 팔을 잡고 빈터를 가로질러 나무담장을 넘었다. 그리고는 종영에게 말했다.
[소저, 길을 안내해 주어서 고마웠소. 이후 보답을 하리다.]
그리고는 원래의 길을 따라 안채로 나아갔다.
이때 저만리와 부사귀 두 사람은 남해악신과 싸우고 있었는데 승패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주단신과 고득성은 섭이랑에게 차츰차츰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운중학은 발걸음을 조금도 늦추지는 않았으나 크게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것이 지친 모습이었고 파천석은 훌쩍훌쩍 뛰는 것이 가볍게 보였다. 고승태는 한편에 서서 뒷짐을 진 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마치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에는 관계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눈으로 싸움을 관찰하고 있었고 귀로는 팔방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자기편의 사람이 그 누구라도 위험을 당하게 된다면 손을 써서 구할 판이었으나 아직 그런 상태에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단정순 부부와 진홍면 그리고 종만구등 네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보정제는 물었다.
[순아우는?]
고승태는 말했다.
[진남왕은 종곡주를 쫓아 보내고 왕비와 함께 단공자를 구하러 갔습니다.]
보정제는 소리 높여 외쳤다.
[이곳의 일은 달리 생각한 바가 있으니 뭇 사람들은 물러서도록 하게.]
별안간 파천석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때 운중학이 곧장 달려왔다. 파천석은 휙하니 일장을 격출했다. 운중학은 두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그 순간 가슴팍의 기혈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하마터면 피를 토할뻔했다. 대뜸 눈앞이 흐릿해져서 상대방의 주먹이나 팔이 어디로 들어오는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파천석은 그 기회를 틈타 공격하지 않고 냉소를 흘렸다.
[허허허, 가르침을 잘 받았소.]
이때 왼쪽 나무 덤불 뒤에서 단정순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에도 없군. 우리 다시 뒤로 가서 찾아보도록 합시다.]
도백봉은 말했다.
[한 사람을 찾아내서 물어 보도록 해요. 어째서 한 사람도 볼 수 없죠?]
진홍면은 말했다.
[나의 사매가 그들에게 모두 숨어 있으라고 했으니까요.]
보정제와 고승태 그리고 파천석 세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진남왕의 신통력이 대단하다고 여겼다. 도대체 무슨 교묘한 방법을 썼길래 조금전만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싸우던 두 여자가 손을 합쳐서는 단예를 찾고 있는 것인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단정순이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대의 사매에게 물어보도록 합시다. 그녀는 반드시 단예를 가두고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것이오.]
도백봉은 노해 말했다.
[감보보를 만나러 가는 것은 반갑지 않아요. 결코 좋은 뜻을 품지 않았을테니까.]
진홍면은 말했다.
[사매는 말했어요. 이후부터는 영원히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겠대요.]
세 사람은 그러면서 그 숲속에서 걸어 나왔다. 단정순은 형을 보자 물었다.
[예아를 구출...... 찾아냈습니까?]
그는 본래 구출해냈느냐고 물으려고 하다가 아들이 옆에 없는 것을 보고는 즉시 찾았느냐는 말로 대신했던 것이다. 보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긴 찾았네. 우리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하세.]
저만리와 주단신 등은 황상의 싸움을 멈추라는 명령을 듣고 손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섭이랑과 남해악신은 한참 신이나서 싸우고 있는 판이라 좀처럼 그들을 놓아 주려고 하지 않고 연신 공격을 해 대었다. 보정제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싸움을 멈추도록 하게.]
고승태는 대답했다.
[예.]
그리고 품속에서 철책을 꺼내더니 철책을 뻗쳐서 남해악신의 목을 겨누었다. 곧이어 팔을 쳐든채 손을 후딱 돌리더니 철책을 옆으로 비스듬히 쓸어서는 섭이랑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이 두번의 초식은 모두 빈틈을 공격한 것이었다. 남해악신은 고개를 숙여 이를 피했고 탁하는 소리와 함께 철책은 섭이랑의 오른팔을 때리게 되었다. 섭이랑은 비명을 내지르며 급히 비켜섰다.
고승태의 무공은 기실 두 사람보다 조금밖에 강하지 않았다. 다만 옆에서 오랫동안 구경을 하고 잇었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이미 두 사람을 상대할 초식을 미리 생각해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일초는 마치 남해악신을 상대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고 섭이랑의 의표를 찔러 매섭게 일격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전날 그녀에게 일장을 맞은 빛을 갚은 셈이 되었다. 보기에는 수월한 것 같고 아무렇게나 휘두르는것 같았으나 실로 이 일초는 고승태가 젖먹던 힘을 다해 후려친 것이었다.
[제기랄.... 대단한 솜씨군!]
남해악신이 콩알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렸다. 남해악신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다시 말했다.
[놀랍고 무서운 솜씨야! 아마도 노부 역시 네 녀석의 적수가 못 될 것 같군!]
도배봉은 보정제에게 물었다.
[황상, 예아가 어떻게 됐죠?]
보정제는 마음속으로 심히 걱정되었으나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별일 없소. 지금이야말로 그를 단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요. 며칠 지나게 된다면 자연 나오게 될 것이오. 모든것은 궁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합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놓았다.
파천석은 앞장을 섰다. 단정순 부부는 그의 뒤를 따랐다. 저고부주 사대호위와 고승태가 그뒤를 따랐다. 그는 조금전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일초로 적을 압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해악신 같이 흉악한 사람도 감히 앞으로 나서서 도전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단정순은 십여 장 쯤 걸어 나간 이후 고개를 돌려 진홍면을 바라보았다. 진홍면 역시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눈길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불꽃이 일어나듯 눈이 반짝였다. 이때 종만구가 손에 대환도를 들고 다급하게 뒷쪽에서 달려오며 부르짖었다.
[단정순, 네가 나의 부인을 만나지 못한 것은 너의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 나의 부인은 이미 맹세를 했다. 이후엔 결코 너를 보지 않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믿을 수 없어. 그녀가 네 녀석을 또 만나게 된다면 어쩌면 제기랄.... 또 다시... 어찌되었든 간에 너는 다시 오지 말아라!]
그는 단정순과 싸우다가 몇 초 안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돌아가서 부인을 지키게 되었다. 단정순이 달려와 유혹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인으로부터 다시는 단정순을 만나보지 않겠다는 맹세의 말을 듣고는 크게 흐뭇해져서 재빨리 달려나와 그 요긴하기 이를데 없는 한마디 단정순에게 들려 준 것이었다.
단정순은 속으로 침울해져서는 생각했다.
(어째서 다시 나의 얼굴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대는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인데 내 어찌 너의 정절을 더럽히는 일을 하겠는가? 이 대리의 단정순이 비록 풍류남아로서 여색을 즐기지만 결코 비겁하고 몰염치한 사내는 아니다. 내가 다시 그대를 만날수만 있다면 아아.... 설사 우리 두사람이 멀리 떨어져서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는다 하더라도 좋으련만......!)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처가 차디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는 속으로 흠칫해서는 발걸음을 빨리 해서 골짜기를 벗어났다.
4. 목숨을 건 바둑
일행은 대리로 돌아왔다. 보정제는 말했다.
[모두들 궁중에 가서 상의를 하세.]
그리하여 그들은 황궁 안에 있는 서재로 가게 되었다. 보정제는 표범의 가죽을 덮어씌운 커다란 의자 위에 앉고 단정순 부부가 아랫쪽에 앉았다. 그리고 고승태 등 몇 명의 사람들은 모두 공손히 서있었다. 보정제는 내시들을 물리치고는 단예가 적에게 잡혀있는 상황을 설명했다. 모든 사람들은 관건이 바로 그 청포객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정제로부터 그 사람이 일양지를 쓸 줄 알 뿐만 아니라 공력이 보정제보다 높다는 말을 듣고 모두 놀라마지 않았다.
일양지의 재간은 단씨 잡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고 아들에게만 전했지 딸에게는 전하지 않는 무공이었다. 또한 부인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청포객이 그와 같은 재간을 알고 있다면 과연 직계자손이 틀림없었다.
보정제는 단정순에게 물었다.
[순 아우 자네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는가.]
단정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니 천룡사의 인물 가운데 누군가 환속한 것이 아닐까요?]
보정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그는 연경태자일세.]
그 말이 떨어지자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연경태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청포객은 아마도 사칭하고 있을 것입니다.]
보정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을 함부로 사칭할 수 있지만 일양지의 재간만은 모방할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의 무학을 훔쳐 배우는 것은 흔히있는 일이지만 일양지의 비결은 입으로 전하는 것인데 어떻게 훔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자는 연경태자임이 틀림없네.]
단정순은 다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 단씨 집안에서도 쟁쟁한 인물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이해 우리집안의 명예를 손상시키려 하는 것일까요?]
보정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은 불구자가 되자 성격이 크게 달라진 모양이네. 더군다나 대리국의 황제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있으니 그는 자연 마음 속에 울분과 분노를 갖게 되었을 것이고, 우리 형제가 망하는 꼴을 보아야 속이 시원할게 아니겠는가?]
단정순은 말했다.
[형님이 제위에 오른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모두 따르고 나라가 태평성세를 이루고 있는 이때 연경태자가 다시 세상에 나왔기로.... 아니 설사 상덕제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형님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승태는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진남왕의 말씀이 옳습니다. 연경태자가 순순히 단공자를 내놓으면 모르되 그렇지 않을 때 우리들은 그를 태자라고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천하 사대악인의 우두머리이며 모든 사람들은 그를 죽여 마땅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악인에게 어찌 제위를 물려줄 수 있단 말씀입니까?]
원래 십여 년 전 상덕오년 상덕제 단염의가 대리국의 황제로 있을 때 조정에는 큰 변고가 생기게 되었다. 상덕제는 간신 양의정에게 시해되고 말았다. 그후 상덕제의 조카인 단수위가 천룡사의 뭇 고승과 충신 고지승의 도움으로 양의정을 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단씨가 제위를 잇게 되어 상명제라 이르게 되었다. 상명제는 황제 되기를 싫어했다. 제위에 있은지 일년만에 천룡사로 출가하여 중이 되고 말았으며 제위를 사촌동생인 단정명에게 전해 주게 되었는데, 이 단정명이 바로 보정제였다. 상덕제에게느 본래 친아들이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를 연경태자라고 물렀다. 그러나 간신 양의정이 제위를 찬탈하게 되었을 대 전국이 크게 어지러웠고 연경태자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양의정에게 죽임을 당했으리라고 추측했었는데 뜻밖에도 십여 년이 지난 오늘 갑자기 그가 나타난 것이다.
보정제는 고승태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위는 본래 연경태자의 것이며 그때 당시 그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상명제가 제위를 이어받게 된것이고 나중에 다시 나에게 전해준 것일세. 연경태자가 다시 세상에 나온 이상 나는 이 왕위를 응당 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리고는 고승태를 향해 말했다.
[연경태자가 살아 계신다면 누구도 나의 말을 틀렸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네.]
고승태는 바로 충신 고지승의 아들이었다 과거 간신역적을 물리치게 된 것은 완전히 고지승의 덕택이었다.
고승태는 한 걸음 나아가 땅에 엎드리며 말했다.
[선친께서는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청포객은 악인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던 자가 아닙니까? 만약에 대리국의 군주로서 만민을 다스리게 된다면 뭇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어야 할지 모릅니다. 황상께서 제위를 물려 주시겠다는 뜻을 신 고승태는 만번 죽어도 받을 수 없습니다.]
파천석 역시 땅에 엎드려서 말했다.
[조금전 저는 남해악신이 괴이한 음성으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사대악인의 우두머리를 악관만영이라도 불렀습니다. 이 악인이 만약 연경태자라면 감히 황제의 자리를 엿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그가 연경태자라 하더라도 그토록 흉악하고 음흉한 자에게 어찌 대리 백성을 다스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반드시 나라는기울어지고 종묘사직은 단절되고 말것입니다.]
보정제는 손을 내저었다.
[두 분은 일어나시오. 당신들이 말한 것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예아가 그의 수중에 잡혀 있으니 내가 황위를 그에게 양보하는 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어 예아를 되돌려 받을 수 있겠소?]
단정순은 말했다.
[형님, 자고로 군주나 부친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신하나 자식된 사람은 마땅히 자기의 몸을 던져 그 어려움을 이기고 군주나 부친을 구해내야 한다고 했사옵니다. 예아는 형님에게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만 그를 위해 황위를 내던질 수는 없사옵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아가 위험에서 벗어나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대리국의 죄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보정제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왼손으로 턱 아래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오른손 두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볍게 쳤다. 그러면서 천천히 서성거렸다. 뭇 사람들은 그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면 이와 같이 깊은 생각에 잠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대문에 그 누구도 소리를 내어서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보정제는 한참동안 서성거리더니 말했다.
[그 연경태자의 수단은 너무도 악랄하군! 예아가 먹은 음양화합산의 약기운은 실로 무서운 것이네, 보통 사람으로서는 당해내기 어려워.... 지금쯤은..... 아무래도 약기운에 제정신을 잃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야. 아... 다른 사람이 강제로 그와 같은 함정을 만든 것이니 결코 예아를 탓할 수 없는 일이네.]
단정순은 고개를 숙였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볼 때 그가 여색을 자나치게 탐했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자초하게 된 것이었다.
보정제는 자리로 되돌아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파사공, 한림원에 알려서 나의 아우인 정순을 황태제로 삼는다는 명령을 전하도록 하게.]
단정순은 깜짝 놀라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형님은 지금 한창 나이시고 백성을 위해 무한한 공덕을 쌓았으니 하늘은 형님을 보살펴 주실 것이며 후세 자손에게도 그 은덕은 고루 미치게 될것입니다. 그러니 이 황태제의 일은 늦추심이 옳은 줄로 아뢰오.]
보정제는 손을 뻗쳐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나나 자네는 형제가 아닌가. 더군다나 나에게는 자손이 없네. 설사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다 하더라도 자네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네. 순 아우, 내가 자네를 다음의 계승자로 삼으려는 것도 이미 결심한지 오래 되었으며 온나라 백성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야. 오늘 이와 같은 명분을 정하게 된다면 연경태자도 그와 같은 생각을 단념하게 될 것일세.]
단정순은 수차 사양을 했으나 보정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득이 단정순은 머리를 조아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고승태 등은 앞으로 나아가 축하를 했다. 보정제에게는 자식이 없어 황위가 단정순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그들도 이미 짐작했던 일이라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정제는 말했다.
[모두 가서 쉬도록 하시오. 연경태자의 일은 다만 화사도와 범사마 두 사람에게만 이야기 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겐 알리지 마시오.]
뭇 사람들은 일제히 응낙하고 허리를 굽혀 작별을 고했다. 파천석은 즉시 한림원에로 가 황제의 조칙을 선포했다.
보정제는 수라상을 물리고는 잠을 청하였다. 잠을 깨게 되었을 때는 성밖에서 북소리와 주악소리가 높다랗게 울려퍼지고 있었고 폭죽소리도 연신 터지고 있었다. 내시가 들어와 그의 옷을 갈아 입히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진남왕을 황태제로 삼으신 것을 뭇 백성들이 환호하며 경축하고 있습니다. 전국이 떠들썩합니다.]
[나의 뜻을 전하도록 하게. 내일은 크게 화등놀이를 하게 대리성 전역을 개방하도록 하고 삼군에게 상을 내리며 술과 고기를 노인들과 고아들에게 내려 주도록 하게.]
그 황제의 뜻은 곧 전달되었고 대리성의 모든 백성들은 더욱 즐거워했다.
저녁이 되었을 때 보정제는 의복을 갈아입고 혼자 궁을 나섰다. 그는 파란 모자를 깊이 내려쓰고 얼굴을 가렸다. 다니면서 그는 뭇 백성들이 손뼉을 치고 노래를 하며, 젊은 남녀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중원인들은 대리국을 오랑캐의 땅이라고 여길 만큼 예의가 중원땅과 크게 달랐다.
큰거리에서 젊은 남녀가 손을 맞잡고 희롱하는 것을 예사로 여겼으며 다른 사람들도 이를 탓하지 않았다. 보정제는 속으로 기도했다.
[아무쪼록 우리 대리의 모든 백성들은 대대손손 이와 같이 즐거워하기를.....]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약 이십리를 간후 산위에 올랐다. 오를수록 산세는 험해졌다. 네 곳의 산비탈을 돌아 어느 조그맣고 오래된 절간 앞에이르게 되었다. 절문 위에는 점화사라는 석자가 씌여 있었다. 불교는 대리국의 국교였다. 대리성 안팎으로 크고 작은 절들이 백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 점화사는 외진 곳에 있어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대리성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점화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보정제는 절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앞으로 나아가절문을 세번 두드렸다. 잠시후 절문이 열려지면서 소사미가 한 명 걸어나와서는 합장을 하고 물었다.
[손님께서 어인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보정제는 말했다.
[수고스럽지만 황미대사에게 옛 친구 단정명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구려.]
소사미는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소사미는 몸을 돌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보정제는 몇 걸음 따라 들어갔다. 이때 탁탁 하는 맑은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탁소리는 후원에서 유유히 들려오고 있었다. 삽시간에 그는 온몸이 쾌적해지면서 전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후원으로 들어갔다. 소사미는 말했다.
[손님께서는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사부님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보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그리고 뒷짐을 진 채 정원에 서있었다. 정원에 있는 한 그루의 공손수나무에서 한 잎의 누런 낙엽이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한평생 이와 같이 문밖에 서서 다른 사람을 기다려 본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점화사에 이르게 되자 속된 생각은 깡그리 사라지고 그야말로 자기가 대리국의 황제라는 사실조차 깡그리 잊을 정도였다.
갑자기 자비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단 아우님, 마음 속에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보정제는 고개를 돌렸다. 온 얼굴이 주름투성이이고 체구가 우람한 노승이 후원의 정사에서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이 노승의 두 눈썹은 신비롭게도 노란색이었으며 끝이 아래로 길게 처져 있었다. 바로 황미대사였다.
보정제는 두 손을 맞잡고 정중히 말했다.
[대사의 수양을 방해한것 같군요.]
황미대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안으로 드십시오.]
보정제는 성큼 정사 안으로 들어섰다. 한명의 중년 화상이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다. 보정제는 황미노승의 제자인 것을 알아보고 즉시 손을 들어 답례했다. 그리고 서쪽에있는 방석 위에 단정히 앉았다. 황미노승이 동쪽에 있는 방석 위에 앉기를 기다려 보정제는 입을 열었다.
[나에게 단예라는 조카가 있는데 일곱살 때 내가 안고서 이곳으로 와 불법을 강론하는 것을 들려 준 적이 있었습니다.]
황미승은 미소지었다.
[그 아이는 총명하여 금새 진리를 터득했었지요. 매우 훌륭한 아이였지요.]
보정제는 말했다.
[그는 불법에 감화되어 어릴 적부터 자비심을 품게 되었고 무공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살생을 피하자는 거지요.]
황미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모른다고 해도 사람을 죽일 수가 있고 무공을 안다 해도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
보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정제는 단예가 무공을 배우지 않으려고 혼자서 집을 나갔던 사연과 그리하여 어떻게 목완청을 알게 되었고 또 어떻게 하다가 천하제일악인으로 일컬어지는 연경태자에게 인질이 되어 석실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했다. 황미승은 미소지으며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을 뿐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명의 제자는 그의 등 뒤에서 공손히 서있을 뿐 눈 한번 깜짝이지 않았다.
보정제의 이야기가 끝나자 황미승은 천천히 말했다.
[그 연경태자는 바로 아우님의 사촌형이 되지 않습니까? 아우님이 도와서 손 쓰는 것이 불편할진대 부하들을 보내어 억지로 사람을 구하는 것도 적절하지 못한 일인 것 같습니다.]
보정제는 말했다.
[형님께서 잘 보셨습니다.]
황미승은 말했다.
[천룡사에는 덕 높은 고승들이 있을 것이며 무공에 있어서도 아우님보다 고강한 분이 계실 것이오. 하지만 그들 역시 단씨 집안의 사람이라 집안 싸움에 끼어들어 아우님을 편들거나 하지는 않을것입니다. 그러니까 천룡사에게 도움을 청할수도 없는 노릇이구려.]
보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황미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지를 내밀더니 보정제의 가슴팍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보정제는 빙그레 웃고서 식지를 뻗쳐 상대방의 중지를 찔렀다. 두 사람은 모두 몸을 흔들 했다. 그순간 그들은 손가락을 거두었다. 황미승은 말했다.
[단 아우님, 나의 일양지력은 아우님의 일양지를 이길수가 없구려.]
보정제는 말했다.
[사형은 지혜가 뛰어나신 분이니 지력으로 이기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황미승은 고개를 숙이고 말하지 않았다. 보정제는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오년 전 사형은 나에게 대리백성에게 물도록 하던 소금의 세금을 면하도록 간청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나라에서 세금을 받지 않으면 국고가 부족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했고 나의 아우인 정순이 황제의 지위를 이어받게 되었을 때 그와 같은 조처를 취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정순 아우님의 덕을 칭송토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 일찌기 소제는 소금의 세금을 면제하겠다는 조칙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황미승은 몸을 일으키더니 공손히 말했다.
[아우님은 정말 만민을 위해 고통을 무릅쓰고 법을 만드는구려. 노승은 그 은덕에 깊이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보정제는 궁으로 돌아오자 즉시 내시를 불러 파사공으로 들어오도록 일렀다. 그리고는 파사공이 들어오자 소금에 물리던 세금을 폐지한다고 포고를 하도록 했다. 파천석은 허리를 굽히고 그 은덕에 사의를 표한 후 말했다.
[황상폐하의 크고 너그러움은 실로 만백성의 복이라 하겠습니다.]
보정제는 당부했다.
[궁중에서 사용하는 모든 비용은 될 수 있는대로 절약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대는 가서 화사도와 범사마 두 사람과 상의해서는 어떤 점에서 절약할 수 있을지 연구해 보도록 하시구려.]
파천석은 인사후 궁에서 물러나갔다.
파천석은 즉시 사도 화혁량을 불러 내어 함께 사마 범화의 집으로 가서는 소금에 관한 세금을 폐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야기를 듣고 난 화혁량과 범화 두 사람은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진남왕세자가 간악한 자의 수중에 떨어져 있는 이때 황상께서 성지를 내려 소금에 관한 세금을 폐지하려고 하는 것은 하늘로 하여금 불쌍히 여기도록 하여 진남왕세자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는 뜻일게요. 따라서 우리는 황상의 근심을 같이 나누어야 할것이외다.]
파천석은 말했다.
[바로 그렇소. 둘째형에게 왕세자를 구할 어떤 묘안이 있습니까?]
범화는 말했다.
[상대방이 바로 연경태자라면 황상께서 결코 그와정면으로 맞서려 하지 않을 것이오. 다만 나에게 한가지 대책이 있기는 한데 이것은 큰형님에게 수고를 끼치는 결과가 될 것이오.]
화사도가 재빨리 말했다.
[무슨 수고라고 할 게 있는가? 둘째 아우님은 어서 그 대책이나 말해 보게.]
범화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연경태자의 무공이 황상보다 반 수 위라고 했소. 그러니 우리의 실력으로는 왕자님을 구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큰 형님이 이 십년 전에 하던 짓을 재차 한번 더 해보는 것입니다.]
화사도의 검은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둘째 아우님도.... 나를 놀리시는군!]
이 화사도 혁량은 본명이 아근이었다. 본래 가난한 집 출신이었는데 지금은 대리국의 삼공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출세를 하기전에 해온 짓은 바로 무덤을 파내는 일이었다. 그가 가장 장기로 내세우는 재간은 왕이나 부자들의 무덤을 터는 것이었다. 부귀영화를 누리던 인물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진귀한 보물을 합장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사도는 본시부터 땅굴을 파서 무덤 안으로 통하게 만들고는 그 보물을 훔쳐내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드는 노력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번도 남에게 발각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가 무덤을 파고 들어가게 되었을때 그 관 안에서 한권의 무공비결을 얻게 되었다. 그 무공비결에 따라 무공을 익히게 되고 일신에 탁월한 외문무공을 연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구차한 생활방식을 버리고 보정제를 보좌하여 수차 귀한 공을 세운 까닭에 끝내는 사도의 직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벼슬길에 오른 이후에는 옛시절의 이름이 너무나 속되다 해서 이름을 혁량이라 고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범화와 파천석 같은 생사를 같이 하는 두 친구만 알뿐이지 다른사람은 그의 출신을 모르고 있었다.
범화는 말했다.
[소제가 어찌 큰형님을 놀리겠소이까. 우리가 만겁곡 안으로 들어간 후에는 지하통로를 파서 진남왕세자가 있는 석실로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귀신도 모르게 왕세자를 구출해 올 수 있을 것이오.]
화혁량은 무릎을 치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정말 묘하군! 정말 묘해!]
사실 그는 땅파기를 천성적으로 좋아했다. 이십 년 간 그 같은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간혹 생각날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손이 근질근질 했었다. 다만 부귀가 극에 도달한 이때에 다시 도벌을 한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아왔던 터였다. 지금 범화가 부추기는 말을 듣자 기쁘기 짝이 없었다. 범화는 웃으며 말했다.
[큰형님은 일찍부터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요. 이 중간에는 정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사대악인이모두 만겁곡에 있고 종만구 부부와 수라도 진홍면 역시 지극히 무서운 인물입니다. 거기다가 연경태자가 석옥 앞에서 지키고 있으니 만약에 땅굴이 조금만 빗나가도, 즉시 발각될 것입니다.]
화혁량은 말했다.
[지하땅굴을 석옥의 뒤로 파게 한다면 연경태자가 있는 곳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천석은 말했다.
[진남왕세자에게는 시시각각 위험이 닥치고 있으니 큰일이오. 우리가 지하땅굴을 파는 데는 아무래도 시일이 많이 걸릴텐데 늦지 않겠소?]
화혁량은 말했다.
[우리 형제 세 사람이 한다면 늦지 않을 것이요. 두 분은 억울하겠지만 나를 따라 무덤을 파는 좀도적 노릇을 좀 배우도록 하시구려, 허허허.]
파천석은 웃으며 말햇다.
[다같이 대리국 삼공의 위치에 있는 몸이니 무덤을 파기 위해 땅굴을 파는 노릇을 의리상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세 사람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웃었다.
화혁량은 말했다.
[소뿔은 당긴 김에 빼랬다고 말이 나온 김에 시작을 하도록 합시다.]
그는 즉시 파천석에게 만겁곡의 형세를 설명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그리고 화혁량은 지하땅굴을 어디서 입구를 잡고 어디로 파고 들어갈 것인지를 초안을 잡았다. 그리고 사람의 이목을 어떻게 피하고 지하땅굴을 판 후 흙을 옮기는 일 등에 관해서는 원래 그의 천하 제일가는 절기였으므로 그가 알아서 하기로 했다.
단예는 매번 몸이 후끈 달아올를 적마다 능파미보의 신법을 펼쳐서는 석실 안에서 재빨리 걸음을 옮겨놓곤 했다. 그리하여 한 두 바퀴 돌게 되면 가슴이 시원해졌다. 목완청은 몸에서 솟구치는 열기로 정신마저 희미해졌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혼수상태에 빠진 채 보냈다. 이튿날 오시 무렵 단예는 다시 석실 안에서 재빨리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석실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종과 횡으로 난 열 아홉 줄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는지 모르오. 시주께서 흥미가 있다면 이 노승과 한번 두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단예는 속으로 이상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밥을 들이미는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얼굴이 온통 주름투성이이고 눈썹이 노란 노승이 왼손에 밥그릇 크기 만한 쇠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황미승은 오른손에는 한 자루 시커먼 방망이를 들고 쇠목탁을 창창 소리가 나도록 몇 번 두드렸다. 그 소리로 미루어 그 목탁방망이 역시 강철로 만든 모양이었다. 황미승은 낭랑히 불호를 외우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리고 몸을 구부리더니 목탁의 방망이로 석옥 앞의 커다란 청석에 줄을 긋기 시작햇다. 찍찍 하는 소리가 나면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대뜸 한가닥 선이 그어졌다. 단예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노승은 어디서 본 듯하다. 그런데 그의 손 힘은 굉장하구나! 아무렇게나 긋는데도 견고한 바위에 깊은 자국이 패이다니 마치 무쇠로 만든 꿀을 망치로 힘껏 쳐서 만들어낸 듯하구나! 더군다나 그 선은 먹줄을 치고 파낸 듯 일직선이 아닌가? 정말 대단하다!)
그러자 석옥 앞에서 청포객의 음성이 들려왔다.
[금강지력이군! 훌륭한 재간이오!]
청포객은 오른손의 철장을 뻗쳐내더니 청석위에 하나의 가로로 된 선을 그었다. 그러니까 황미승이 새긴 직선과 직각으로 교차되는 선이기도 했다. 그 선 역시 바위에 깊이 파여졌으며 조금도 비뚤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황미승은 웃으며 말했다.
[시주에게 가르침을 베푸시다니 정말 잘 됐소이다. 정말 잘 됐소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청석에다가 한 줄의 직선을 그었다. 청포객도 한줄의 횡선을 그었다. 이와 같이 네가 한 줄을 그으면 내가 한줄 긋는 식으로 두 사람은 총력을 기울여 줄을 긋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선을 긋는것이 느려졌다. 그들은 자기가 그은 선의 깊이가 똑같기를 바라고 있었고 또한 비뚤어지지 않도록 했는데 만약 비뚤어지거나 깊이가 다르다면 바로 상대방에게 졌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흐르자 종횡으로 각기 열 아홉 줄의 바둑판이 정교하게 새겨지게 되었다. 황미승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명 아우님의 말이 맞다. 이 연경태자의 내공은 정말 뛰어나구나!)
연경태자는 더욱더 놀라워 하였다.
(어디서 이같이 무서운 무공을 지닌 노승이 나왔지? 틀림없이 단정명이 초청해 온 불제자로구나. 이 화상이 나를 붙잡아 두고 단정명이 그 기회를 틈타 단예를 구한다면 나는 몸을 나눌 수 없으니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황미승은 말했다.
[당신은 공력이 고명하구려. 탄복했소이다. 웬만한 고수들보다 십 배 이상 강하리라고 생각되오. 따라서 노승은 스스로 넉점을 깔고 두어야 상대가 될 것 같습니다.]
청포객은 어리둥절해졌다.
(실력이 그토록 뛰어난 것을 보면 크게 신분이 있는 고승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와 도전을 하면서 어찌 처음부터 나에게 양보해 달라는 것일까?)
생각을 마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사께서는 너무 겸손하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승패를 결하자면 당연히 맞두어야 하겠지요.]
황미승은 말했다.
[네 알은 반드시 접어 주어야 합니다.]
청포객은 담담히 말했다.
[대사께서 스스로 바둑 실력이 나만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바둑은 겨룰 필요도 없습니다.]
황미승은 말했다.
[그렇다면 세 알만 접어두고 두시구려.]
청포객은 말했다.
[선수를 양보하는 것도 양보하는 것입니다.]
황미승은 껄껄 웃었다.
[알고 보니 시주의 바둑실력에도 무척 한도가 있는것 같구려. 그렇다면 내가 세 알을 접어 드리리다.]
청포객은 말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두 사람중 먼저 누가 둘 것인가를 정한 이후 바둑을 두면 되겠습니다.]
황미승은 속으로 더욱더 조심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 자는 교만하지도 않고 초조해 하지도 않는것이 매우 침착하구나. 실로 강적이다. 내가 어떠한 방법을 써서 충동질을 한다해도 시종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겠구나.)
황미승은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이 없었다. 평소에 바둑을 즐겨두는 사람들은 호승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대뜸 상대방에게 세 알이나 네 알을 접어 달라면 상대방은 종종 응낙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출가한 사람이라 그와 같은 허명을 극히 담담하게 보아왔다. 그래서 만약 연경태자가 자기의 재능을 믿고 세 알이나 네 알을 접어 주게 된다면 자기가 큰 이득을 보는 셈이 되고 이번 시합에서 자연히 이길 승산이 많아진다고 예상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연경태자는 남에게 양보하지도 않고 또한 양보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추호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황미승은 말했다.
[좋소. 시주가 주인이고 나는 손님이니 내가 먼저 두겠소.]
청포객은 말했다.
[아니오. 아무리 강한 용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조상인 뱀을 억누르지 않는 법이라오. 내가 먼저 두겠소.]
황미승은 말했다.
[그렇다면 몇 살인지를 알아 맞추어 선후를 정하도록 합시다. 그럼 먼저 시주가 금년 노승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짝수냐 홀수냐 하는것을 알아 맞추게 된다면 시주가 먼저 두게 되고 잘못 알아 맞추게 된다면 노승이 먼저 두겠소.]
청포객은 말했다.
[내가 알아 맞춘다 하더라도 잡아뗄 것이 아니겠소.]
황미승은 말했다.
[좋소. 그럼 내가 잡아뗄수 없는 한가지를 들테니 알아 맞추어 보시오. 시주는 노승이 칠십 세가 된 이후 두 발의 발가락이 짝수라고 생각하시오 아니면 홀수라고 생각하시오.]
이 수수께끼는 정말 이상한 문제라로 할 수 있었다. 청포객은 코웃음 쳤다.
(보통 사람들 발가락은 모두 열개니 당연히 짝수이다. 그는 칠십세가 된 이후의 숫자를 말하라고 했으니 그는 자연히 나로 하여금 칠십세 되는 해에 발가락 하나가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유도한 것이 아니겠는가. 병법에서 실 한것은 허하고 허한것은 실하다 했다. 이 화상은 바로 열 개의 발가락을 가지면서도 일부러 그러한 수작을 부리고있는데 내 어찌 그꾀에 순순히 넘어가리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짝수요!]
황미승은 말했다.
[틀렸소. 홀수이외다.]
청포객은 말했다.
[신발을 벗어 증명을 해 보이시오.]
황미승은 왼발의 신발과 버선을 벗었다. 다섯개의 발가락이 완전무결했다. 청포객은 상대방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자 황미승은 약간 얼굴에 웃는 빛을 띠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표정도 순박했다. 이를 본 청포객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그의 오른발은 정말 네 개의 발가락밖에 없는 모양이구나.)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황미승은 천천히 오른쪽 발의 신발과 버선을 벗었다. 그리하여 청포객은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알아볼 것도 없소이다. 노화상이 먼저 두도록 하시오.]
그러나 또한 마음이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때 황미승이 오른쪽 발의 버선을 벗었는데 오른쪽 발도 놀랍게도 다섯 발가락이 그대로 있지 않은가? 하나도 모자란 것이 없었다.
청포객은 삽시간에 무수한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도대체 상대방이 어째서 그와 같은 수수께끼를 문제로 삼았는가 하고 더듬어 보았다. 이때 황미승은 목탁을 들어 아래로 내리쳤다. '우두득'하는 음향이 일어나면서 자기의 오른쪽 발의 새끼발가락을 잘라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의 등뒤에 서있던 두 명의 제자는 갑자기 사부가 자기의 발가락을 잘라낸 데 이어 피가 흐르는 것을 보자 참지 못하고서 '어'하는 소리를 냈다. 대제자인 파의는 품속에서 금창약을 꺼내 사부에게 발라 주었다. 그리고는 옷자락을 찢어서는 상처를 싸맸다.
황미승은 웃으며 말했다.
[노승은......금년 육십 구 세이오. 칠십세가 되엇을 때 나의 발가락은 홀수가 될것이오.]
청포객은 말했다.
[좋소, 대사께서 먼저 두시오.]
그는 천하 제일악인이라고 일컫는 만큼 흉폭하고 악랄한 일들을 저지르기도 했고 많이 목격하기도 했다. 따라서 새끼 발가락을 잘라낸 일을 어찌 마음에 두겠는가. 그러나 노화상이 선수가 되기 위해서 그와같이 새끼 발가락을 잘라내는 단호한 조치를 취한것을 보고 그가 이 바둑판에서 반드시 이기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자기가 만약 지게 된다면 황미승이 제의한 조건이 반드시 가혹하기 이를데 없으리라고 짐작하였다.
황미승은 말했다.
[양보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그리고 그는 목탁치는 방망이를 들어서는 양 대각의 사사로(四四路)에다 하나의 조그만 원을 그렸다. 이로써 흰돌을 대신하게 되었다. 청포객은 철장을 뻗쳐내어 다른 곳의 사사로에다가 한번 눌렀다. 그러자 그 바위 위에는 두곳의 움푹꺼진 곳이 드러났다. 이곳이 바로 검은 바둑돌이 되는 것이었다. 모퉁이의 사사점에는 흑백이 각기 한 알씩 놓여지게 된것이다. 이를 가리켜 세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옛날 중국 바둑의 기초이기도 했다.
곧이어 황미승은 평위인 육삼로에 돌을 놨다. 청포객은 구삼로에다가 돌을 놓아 이에 응했다. 처음 두 사람은 매우 빠르게 바둑을 두었다. 황미승은 조금도 소홀히 생각하지 않았다. 한 개의 새끼발가락으로 바꾸어 온 선수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열 칠 팔 개의 알을 둔 뒤에는 매수마다 날카롭게 맞서게 되었다. 심한 충돌이 일어난 것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손가락에서 내뿜어지는 기운은 더욱더 많이 소모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깊이 생각하여 이기려 하였고 한편으로는 운기행공하여 힘을 돋우려고 했다. 그러자니 자연 바둑은 점점 늦어지게 되었다. 황미승의 수제자인 파의 역시 바둑의 고수였다. 사부와 청포객이 접전을 벌이고 잇따라 몇수가 펼쳐지자 속으로 놀라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제 이십 사 수에 이르게 되엇을 때 청포객이 기이한 수를 쓰자 금새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황미승이 만약에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우하귀에 은연중 지극히 큰 위험이 도사리게 되는것이고 만약에 그 돌을 받아 응수한다면 지키기는 지키지만은 선기를 상실하게 되는것이다.
황미승은 한참 동안 생각했으나 일시에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석옥에서 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위로 반격하면 승기를 잃지 않습니다.]
원래 단예는 어릴 적부터 바둑을 좋아했다. 이때 두 사람이 바둑판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불쑥 끼어들게 된 것이다.
속담에 구경하는 사람이 똑똑히 보고 당사자는 잘 모르는 수가 있다는 말이 있다. 단예의 바둑 실력은 본래 황미승보다 높았다. 거기다가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어 더욱 쉽게 요점이 되는 곳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황미승은 말했다.
[노승은 본래 그런 뜻이 있었으나 다만 일시 취사선택을 할 수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시주의 그와 같은 말에 노승은 마음 속의 근심을 덜게 되었소이다.]
그리고 그는 거위의 칠삼로에 목탁추로 원을 그렸다. 중국의 옛 바둑에 의하면 바둑판은 평상거입의 사격으로 나뉜다. 거위는 바로 우상귀였다.
청포객은 담담히 말했다.
[옆에서 구경을 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참된 군자이고 스스로 주장할 줄 아는 사람만이 대장부이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당신이 나를 이곳에 가두어 두었소. 갇힌자가 어떻게 군자가 될 수 있겠소?]
황미승은 웃으며 응수했다.
[나 역시 화상일 뿐 대장부는 아니오.]
청포객은 말했다.
[뻔뻔스럽군! 뻔뻔스러워!]
잠시 생각해 보더니 그는 거위에 다시 움푹 구멍을 팠다.
몇 수가 지나고 난 이후 황미승은 다시 위험을 맞게 되었다. 파의 화상은 초조해졌으나 단예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초조해진 파의 화상은 단예의 앞으로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단공자, 저 한수는 어떻게 받아야 하겠소?]
단예는 말했다.
[난 이미 그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소. 다만 저 바둑의 수에는 선후 모두 일곱 수가 있는데 만약 말을 하게 된다면 상대방도 듣게 되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오. 그래서 주저하며 말하지 않았던 것이오.]
파의는 오른손을 내밀어 왼손의 식지로 손바닥에다 '써주십시요'하고 글씨를 썼다. 그리고는 그 손바닥을 그 구멍 안으로 디밀면서 입으로는 시치미를 떼었다.
[그렇다면 별 도리가 없는 것이군요.]
단예는 손바닥에 쓰는 방법이 정말 묘하다고 생각하고 즉시 그 손바닥에다가 일곱 수를 썼다. 그리고는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존사의 바둑 실력이 고명하니 반드시 묘수가 있을 겁니다. 결코 불초가 옆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파의 화상은 생각해 보고 나서 그 다음 일곱수가 확실히 심히 묘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사부의 등 뒤로 돌아와서는 손가락을 뻗쳐서 사부의 등 뒤에다 다음에 둘 일곱 곳을 써서 알렸다. 커다란 승포자락이 그의 손을 덮고 있어서 청포객은 그가무슨 수작을 부리고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미승은 잠시 생각한 이후에 그 말을 따라 바둑을 두기시작했다.
청포객은 코 웃음쳤다.
[흥, 그것은 단가 녀석이 가르친 것이 아니오? 대사의 바둑실력은 아직 그와 같은 경지에는 도달한 것 같지 않은데요?]
황미승은 웃으며 말했다.
[바둑이라는 것은 본래 지혜를 다루는 놀이가 아니겠소? 가장 좋은 것은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며 능한 자는 상대방에게 자기의 실력을 감추는 것이라오. 노승의 바둑실력이 시주에 의해서 빤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라면 바둑을 두자고 찾아오지도 않을게요.]
청포객은 말했다.
[교활한 돌중이군! 소맷자락 안에서 치는 장난이 아니겠오?]
그는 파의 화상이 왔다 갔다 하면서 소맷자락을 뒤덮고 있는 상태에서 황미승의 등에다가 무슨 수작을 부렸으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바둑판의 변화에만 온정신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확신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황미승은 단예가 가르쳐 준대로 차례로 여섯 수를 두었다. 이 여섯 수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만 전심전력을 다해서 운기행공을 하고 목탁추로써 청석에다가 여섯 개의 조그만 구멍이 둥글고 깊게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직도 내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던 것이다. 청포객은 그 여섯 알의 바둑이 점차 더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고 상대방이 한 수를 둘때마다 깊이 생각하고 응수를 했다. 그러나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철장으로 둥근 원을 파는 것도 약간 깊이가 얕은 것이 있게 되었다. 황미승이 여섯번째의 돌을 두게 되었을 때 청포객은 한참동안 넋을 빠뜨리고 바라보더니 갑자기 입위에 한알을 두었다.
이 돌 하나는 정말 묘수였다. 단예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황미승은 어리둥절해져서는 생각했다.
(단공자가 가르쳐준 일곱 알의 돌은 정말 묘수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된다면 일곱번 째의 알을 둘수 없게 되는 것인즉 여지껏 쌓은 공이 헛될 것이 아닌가?)
원래 청포객은 훈수가 불리해지자 어떤 수로 응수한다 하더라도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완전히 이를 무시하고는 상대방의 다른 한쪽을 공격한 것이다. 이것은 응하지 않으면서 응하는 수법이기도 했으며 사실 우습기 짝이 없는 속임수이기도 했다. 황미승은 눈살을 찌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파의는 바둑판에 또다시 커다란 변화가 일게 되고 사부가 제대로 두지를 못하자 즉시 석옥 옆으로 다가갔다. 단예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바 여 섯 수를 그의 손바닥에 일일이 써주었다. 파의는 사부의 등뒤로 가서 역시 손가락을 내밀어 황미승의 등 뒤에다가 글을 썼다.
청포객은 천하제일악인이라고 일컫는 만큼 그와 같은 수작을 부리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왼손의 철장을 뻗쳐내어 파의의 어개쭉지를 향해 '휙'하고 찌르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자네는 좀 뒤로 물러서 있게!]
그가 그와 같이 찍자 '찍찍'하는 소리가 일었다.
황미승은 제자가 감당할 수 없게 되고 중상을 입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고는 왼손을 뻗쳐 철장의 끝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청포객은 철장의 끝을 흔들하며 파의의 왼쪽 젖꼭지 아래에 있는 혈도를 노렸다. 황미승은 대뜸 손바닥으로 붙잡는 초식에서 내미는 초식으로 바꾸면서 철장을 내리쳤다. 그런데 그 철장은 또 다시 변화를 일으켰다. 삽시간에 두 사람은 여덟 수를 교환하게 되었다.
황미승은 속으로 자기의 팔이 짧고 상대방의 지팡이는 길어 이와 같이 싸우다가는 자기가 열세에 처하게 되고 공격은 고사고 수비만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졌으면 졌지 이길 가망은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리하여 그는 철장이 찔러오는 것을 보자 벼락같이 일지를 찔러내어 지팡이의 머리쪽을 찍어갔다. 청포객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철장의 머리와 황미승의 손가락 끝이 맞부딪히도록 했다. 두사람은 각기 내력을 돋우었다. 이렇게 되자 철장과 손가락은 대뜸 교착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청포객은 말했다.
[대사는 왜 다음의 한 수를 두시지 않으시오. 이제 졌음을 시인하는 것이오?]
황미승은 껄껄 웃었다.
[귀하는 선배의 고인인데 어찌하여 손을 써서 나의 제자에게 암습을 가하시고 신분에 어긋나는 짓이 아니겠소?]
그리고 오른손의 목탁치는 쇠방망이로 청석에다가 조그만 원을 그렸다. 청포객은 별로 생각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또 한 수를 두었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왼손으로 내력을 겨루게 된 셈이었다. 이건 조금도 정신을 팔 수 없는 형편인데 바둑판 역시 긴장된 형세로서 곳곳에서 접전을 벌리고 있었다.
황미승은 오년 전 대리국의 온 백성들을 위해서 청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보정제에게 소금에 대한 세금을 페지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정제는 이제서야 그것을 응낙한 것이다. 이로써 두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도 서로의 뜻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보정제를 대신하여 단예를 구출해 달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황미승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관계없다만 만약 단예를 구출하지 못한다면 내 어찌 정명 아우님을 대할 수 있겠는가.)
무학을 연마하는 사람은 내공을 단련함에 있어서 잡념을 품어서는 안 되었다.
소위 '반조공명'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사물과 그 자신마저 잊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둑은 삼백 육십일로 나누어져 있는데 매 길목마다 한결같이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머리를 짜내듯 해야 하며 반드시 정확한 계산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이 무학과 바둑은 서로 모순되는 점이 있었고 서로 상치된다고 할 수 있었다. 황미승은 참선으로 깊은 수양을 쌓았지만 바둑실력은 상대방만 못했다. 그리하여 암암리에 내력을 돋우어 항거하게됨에 따라서 바둑판의 형세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고 바둑판을 생각하게 된다면 내력을 겨룸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형세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 그리하여 황미승은 즉시 죽음으로써 친구에게 보답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이제 자기의 앞일을 염두에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 속담에 '물러설 수 없는 군사들이 반드시 이긴다'는 말이 있다. 현재 황미승은 이때 정말 물러설수 없게 된 형편이었지만 반드시 이긴다고는 볼수가 없었다.
5. 풍운의 만겁곡
대리국의 삼공인 화혁량과 범화 그리고 파천석은 무공을 지닌 삼십여 명의 부하들에게 목재 철사 공명 등 물건들을 들게한 후 만겁곡의 뒤에 있는 숲속으로 들어섰다. 지형을 살피고 장소를 정한 후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사십 삼 명이 하루밤을 파게되자 쉽사리 수십 장이나 되는 지하땅굴을 팔 수 있었다. 이튿날 다시 반나절을 팠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석옥과 가깝게 파들어갈 수 있었다. 화혁량은 부하들에게 뒤로 물러서서 흙을 밟도록 하고 세 사람은 계속 파나가게 했다. 세 사람은 연경태자의 무공이 뛰어난 만큼 땅을 팔 때 삽질을 조심스럽게 했으며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속도가 많이 느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연경태자가 이때 온갖 정성을 다해 황미승과 바둑실력을 겨루고 있어서 땅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얼마 후 그들은 단예가 잡혀 있는 석실 아래에 이르렀으리라고 계산했다. 화혁량은 삽을 버리고 열 손가락으로 흙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연마한 무공 가운데 호조공을 펼친 것이었다. 열손가락은 마치 두 자루의 무쇠로 만든 갈코리와 같이 커다란 흙덩이를 연신 파들어내는 것이었다. 범화와 파천석은 그 뒤에서 화혁량이 파낸 흙을 날랐다. 이때 화혁량은 이미 앞으로 땅굴을 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파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공사가 끝날 때가 온 것이다.
그는 잠시 흙을 파던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머리 위에 어떤 기척이 있는지 주의깊게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약 두 대의 향을 피울 시간을 두고 팠다. 아마도 지면과는 불과 한 자 정도밖에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화혁량은 손놀림이 느려지게 되었고 가볍게 흙을 훑어냈다. 손가락이 한조각 단단한 나무판대기에 닿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 기이해했다.
(석옥 바닥에 나무판대기를 깔아 놓았다면 일하기가 더욱 쉽지.)
힘을 손가락에 모으고 천천히 판대기 아래에다가 대고 둥근 원을 그렸다. 그리고 나무판대기를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려뜨리자 둥글게 잘라진 그 나무판대기가 아래로 툭 떨어지면서 한 사람이 출입할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드러나게 되었다. 화혁량은 삽을 그 구멍밖으로 내밀고 한 바퀴 휘둘렀다. 혹시 다른 사람이 암습을 가해올까 봐 손을 써본 것이었다. 갑자기 아 하는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저, 떠들지 마시오. 우리는 친구요. 그대들을 구하러 왔소.]
그는 몸을 날려 구멍 밖으로 나갔다. 사방을 둘러 보았을때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곳이 어디 사람을 가두는 석옥인가?
햇살이 들어올 수 있도록 깨끗하게 닦아넣은 창문과 깨끗한 탁자, 시렁 위에는 옹기 그릇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소녀가 온 얼굴에 놀람과 당황의 빛을 띠운 채 한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지 않은가? 화혁량은 즉시 자기의 계산에 착오가 났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잘 못알고 들어온 곳이다.
화혁량이 다다른 곳은 종만구의 거실이었으며, 그 소녀는 종영이었다. 그는 부친의 방에서 이리 뒤적이고 저리 뒤적이면서 해약을 찾아 단예에게 갖다 주려고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땅밑에서 한 사내가 불쑥 솟아 올라나오자 그녀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혁량은 속으로 생각했다.
(장소를 잘못알고 팠으면 다시 파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정체가 이 소녀에게 발각되었는데 만약 죽여 입을 봉하게 된다면 만겁곡에서는 그녀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고 즉시 수색에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석옥까지 파들어가기도 전에 이곳이 그들에게 발견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선 그녀를 지하도로 데리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누가 그녀를 찾을 때 골짜기 밖으로 나가 찾게 될 것이다.)
바로 이때 갑자기 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화혁량은 재빨리 종영에게 손을 흔들며 소리내지 말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는 몸을 날렸다. 그리고 왼손으로 종영의 입을 막고 오른손으로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땅굴 입구로 데리고 가 밑으로 내려보냈다. 범화가 이를 받아서는 한 뭉치의 진흙을 종영의 입에다 넣어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화혁량은 지하도에 뛰어내린 이후 잘라낸 정방형의 나무판대기를 다시 원위치로 갖다 놓고는 판자대기 틈바구니 사이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이때 사람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그리고 곧이어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구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단씨 집안의 명성을 더럽히는데 어찌하여 당신이 자꾸만 막는단 말이오?]
여인의 뾰로통한 음성이 들렸다.
[미련이라는게 뭐예요? 나는 한번도 그에게 정을 느껴 본 적이 없어요.]
남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일이오! 정말 좋은 일이야!]
그 어조는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자는 말했다.
[하지만 목소저는 나의 사저의 딸이예요. 어쨌든 우리 편 사람이예요. 그런데 당신이 그토록 그녀를 괴롭힐 수 있어요?]
화혁량은 여기까지 듣고 이미 두사람이 종만구 부부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이 상의 하는 일이 단예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퍼뜩 깨닫고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종만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사저는 원래 단예를 놓아 보내려고 했소. 다행히 섭이랑에게 발각되었지. 그러니까 당신의 사저는 우리와는 적이 되는것이오. 당신이 그녀의 딸을 상관할 것이 무엇 있단 말이오? 부인, 대청에 온 손님들은 모두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들이오.]
종부인은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녀석들을 다 불러왔지요? 저 사람들과 우리는 아무런 교분이 없어요. 그들이 감히 대리국의 황제에게 죄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종만구는 말했다.
[나는 그들을 청해와서 싸움을 도와 달라든가 또 단정명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오. 마침 그들이 모두 대리성 안에 있기에 나는 그들을 초청해서 술을 마시면서 단정순의 친아들과 친 딸이 한 석실에서 음란한 행위를 저질러 윤리에 벗어난 일을 한다는 것을 증언하도록 할 생각이오. 그리고 오늘 청해온 손님들 가운데 몇 사람은 북쪽에서 온 호걸들이오. 내일 일찌기 우리는 석옥의 문을 열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켜 줍시다. 그리하여 단씨 집안의 후손들의 덕성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그거야말로 재미있는 일이 아니겠소? 이야말로 강호에 명성을 떨치는 일이기도 하지!]
그리고는 소리내어 껄껄 웃는데 매우 득의에 찬 웃음소리였다.
종부인은 콧움음쳤다.
[흥! 비열하다 비열해! 그리고 뻔뻔스럽군!]
종만구는 물었다.
[당신은 누구보고 비열하며 뻔뻔하다는거요?]
종부인은 말했다.
[그 누구든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은 바로 비열하고 뻔뻔스러운자예요!]
종만구는 말했다.
[그렇소. 단정순은 그 악당은 스스로 잘난 척하면서 많은 죄를 지었소. 그 죄의 값을 받아 자기의 아들 딸들이 간음을 하게 되었으니 진정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일이 아니겠소?]
종부인은 냉소를 흘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종만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서 냉소를 하오? 비열하고 뻔뻔스럽다는 욕은 단정순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소?]
종부인은 냉소했다.
[자기가 단씨 집안의 사람을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한평생 골짜기에서 나서지 못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그래도 소위 치욕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고 했듯이 그런 대로 사람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와 같은 수단으로 그의 아들 딸을 처리한다면 천하 영웅들이 비웃게 될 사람은 결코 그가 아니라 바로 당신 종만구가 될거예요.]
정만구는 펄쩍 뛸듯이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은.... 당신은 나를 비열하고 뻔뻔스럽다는 것이오?]
종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목멘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맞아들인 남편이 종신을 위탁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끝내는..... 끝내는 그와 같은 인물이었으니...아이고! 내 팔자야!]
종만구는 처가 눈물을 흘리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좋소 좋아! 나를 욕한 걸로 해 둡시다. 그리고 실컷 욕하도록 하시오!]
그는 실내에서 서성거리며 몇 마디 처에게 위로하는 말을 하고자 했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오. 단예는 남해악신이 잡아온 것이고 목완청은 악관만영이 사로잡은 것이오. 그리고 음양화합산만 하더라도 그의 것이오. 내 어찌 그와 같이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춘약을 지니고 있겠소?]
그는 이때 변명만 하려고 애를 썼다. 종부인은 냉소했다.
[당신이 비열하고 뻔뻔스러움을 안다면 고마운 일이예요. 그리고 만약 그와같은 계획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목소저를 석방시켜야 할거예요.]
종만구는 말했다.
[그건 그럴 수 없소! 그건 그럴 수 없어! 목완청을 내놓게 된다면 단예라는 녀석 혼자서 무슨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할 수 있겠소?]
종부인은 말했다.
[좋아요. 당신은 비열하고 뻔뻔해요. 나 역시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일을 해 보이겠어요.]
종만구는 깜짝 놀라 황망히 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무엇을 할 작정이오?]
종부인은 코웃음을 쳤다.
[당신 스스로 생각해 봐요.]
종만구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또 단정순과 .... 단정순이라는 악당과 사통을 하겠다는 말이오?]
종부인은 말했다.
[또는 무슨 또예요?]
종만구는 황망히 웃음을 지었다.
[부인 화내지 마시오. 내가 말을 잘못했소. 그대는 한번도 그와....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었지. 당신이 나에게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일을 해 보인다는 것은 농담이시겠지?]
종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종만구는 속으로 놀란 나머지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그는 방에 숨겨진 병이나 옹기그릇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흥, 영아 이 계집애가 또 쓸데 없는 짓을 했군! 어린 나이에 감히 나에게 음양화합산이 어쩌고 저쩌고 묻다니!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또 여기와서 함부로 뒤적였구나!]
그는 약시렁 쪽으로 가서는 약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바로 잘라낸 둥근 판대기를 밟게 되었다. 화혁량은 이때 재빨리 힘을 주어 그가 알아차리지 않도록 나무판대기를 받쳐야 했다.
종부인은 말했다.
[영아는 어디로 갔지요? 조금전 그녀를 데리고 대청으로 가서 손님들에게 인사를 시켰나요?]
종만구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와 나 사이에 그토록 아름다운 딸을 두게 되었는데 어찌 친구들에게 자랑을 아니할 수 있겠소?]
종부인은 말했다.
[자랑은 무슨 자랑이예요! 운중학이라는 그 도적의 눈동자가 시종 영아에게만 흐르고 있었어요. 당신 조심하는 게 좋아요.]
종만구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 한 사람만 조심할 뿐이오. 꽃과 같이 어여쁜 미인을 그 누가 한번 건드려 보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겠소?]
종부인은 쳇 하고 침을 뱉으며 큰소리로 불렀다.
[영아! 영아!]
그러자 한 명의 하녀가 다가와서는 말했다.
[아가씨는 조금 전에 이리로 온 것 같은데요?]
종부인은 화를 냈다.
[어서 가서 아가씨를 모셔 오너라! 내가 할 말이 있다.]
종영은 지하땅굴에서 부모들이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리를 내지를 수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급한데 입 안에는 흙이 가득 들어 있어서 괴롭기만 했다.
종만구는 말했다.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하시오. 나는 손님들을 상대해야겠소.]
종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역시 당신은 가서 좀 쉬도록 해요. 내가 가서 손님들을 상대하죠.]
종만구는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갑시다.]
종부인은 말했다.
[손님들은 나의 꽃과 같은 모습을 보고 싶어 할 것 아니예요? 하지만 당신의 그와 같은 말상을 누가 보고 싶어하겠어요? 어느날 나마저도 보기 역겹게 된다면 당신은 못생긴 사람을 보아야 하는 맛이 어떤가를 알게 될거예요.]
이 며칠간 종만구는 걸핏하면 종부인으로 부터 질책을 받곤 했다. 무슨 말을 하든간에 종부인은 느닷없이 그를 비웃곤 했다. 물론 그는 자기의 부인이 단정순과 오랜만에 만난 이후 옛정을 돌이켜 볼 때 심신이 불안해져서 그런 것임을 알고있었다. 속으로는 화도 났지만 감히 맞서서 욕질은 할 수 없어 언제나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때도 그는 역시 웃으면서 대청 쪽으로 가며 생각을 했다.
(그대가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일을 저질러 나에게 보여 준다고 했지? 그리고 그녀는 어느 날엔가 내가 역겨워지면 뭐라고 했던가? 어쨌든 아직까지는 나를 보기 역겹지 않다는 것이니 아직은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단정순이라는 도적 녀석 때문에....)
보정제가 성지를 내려 소금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게 되자 대리국의 백성들은 모두 그 은덕을 고맙게 생각했다. 운남은 본래 소금이 부족했다. 나라를 통틀어 보아도 백정, 흑정, 운룡등 아홉 지역에서 소금이 날 뿐이었다. 따라서 매년 그들은 촉 땅에서 나는 소금을 사들여야 했으며 그 소금에 대한 세금이 매우 무거웠다. 그리하여 연경이나 대리성에서 멀리 떨어진 가난한 사람들은 일년 중 종종 몇 개월은 소금 없이 음식을 먹어야 했다. 보정제는 소금세를 면하게 된다면 황미승이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단예를 구출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소 황미승의 기지와 무공에 탄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미승의 두 명의 제자역시 무공이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세 사람이 일제히 나서게 된다면 꼭 성공하리라 믿었다.
헌데 하루밤 하루낮을 기다려도 전혀 소식이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는 파천석에게 동정을 살펴 보도록 당부하려고 파천석을 찾으니 파천석 역시 화사도와 범사마 세 사람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황태자인 단정순과 선천후 고승태 그리고 저만리 등 사대호위를 불렀다. 그리고는 진남왕비 도백봉마저 데리고 제차 만겁곡으로갔다. 도백봉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보정제에게 어림군을 끌고 가서 아예 만겁곡을 소탕해 버리자고 했다. 보정제는 말했다.
[최후의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우리들은 언제나 강호규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오. 수백년 내려온 조상의 가르침을 우리가 어겨서는 안 될 것이오.]
그리하여 일행은 만겁곡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자 운중학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마주 나오더니 깊이 읍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천하 사악과 종곡주는 오늘 반드시 재차 이곳으로 와 주리라고 믿고 있었으며 불초는 이미 이 곳에서 기다린 지 오래 됐습니다. 만약 귀하가 철갑군을 데리고 왔더라면 우리들은 벌써 도망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물론 진남왕의 공자와 딸마저도 데리고 갔겠지요. 그러나 강호 규칙에 따라 무림인의 신분으로서 친구를 만나겠다고 하니 아무쪼록 대청으로 들어가 차를 드시도록 하십시오.]
보정제는 상대방이 매우 침착하고 또 무엇을 믿고 있는 듯한 모양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즉 전날처럼 마주치는 순간 그냥 싸움을 걸어와 크게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예의를 다해 나오는 데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읍을 하여 답례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매우 좋소.]
그리하여 운중학이 앞장을 서게 되고 일행은 대청에 도달하게 되었다.
보정제는 대청문 앞으로 들어서는 순간 대청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는 강호희 호걸들이 잔뜩 앉아있었고 섭이랑과 남해악신도 그 안에 있었다. 그러나 연경태자만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운중학은 큰소리로 말했다.
[천남의 단가 장문인 단노사께서 도착하셨소이다!]
그는 대리국 황제폐하라고 칭하지 않고 무림에서 쓰는 칭호를 불렀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는 바로 모든 일에 강호규칙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을 밝힌 셈이기도 했다.
단정명은 일국의 지존인 점은 말할 것도 없고 무림 중에서의 명성과 지위만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종사였다. 따라서 군웅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 몸을 일으켰다. 다만 남해악신은 오만한 자세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누군가 했더니 알고 보니 황제 늙은이셨군. 그 동안 안녕하셨소?]
종만구는 몇 걸음 달려나오며 입을 열었다.
[이 종만구가 나가 영접하지 못한 점 양해하십시오.]
보정제는 말했다.
[원 천만의 말씀을!]
대청에는 손님과 주인으로 나누어져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강호의 규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이상 단정순 부부와 고승태도 황궁의 예를 지키지 않고 보정제의 아래쪽에 앉았다. 저만리 등 네 사람은 보정제의 등 뒤에 가 섰다. 골짜기의 하녀들이 차를 올렸다. 보정제는 황미승 사도와 파천석 등이 대청에 없는 것을 보고 속으로 어떻게 말문을 꺼내 물어볼까 하고 생각했다. 이때 종만구가 입을 열었다.
[단장문께서 재차 왕림하시니 불초로서는 커다란 영광입니다. 많은 친구들이 자리를 같이 했으니 제가 단장문님께 소개를 해드리지요]
이윽고 그는 대청의 영웅들의 이름을 알려 주면서 소개를 했다. 몇 사람은 북쪽에서 온 중원의 호걸들이었다. 그 나머지의 사람들은 대리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호걸들로 신쌍청, 좌자목, 마오덕 등도 그 안에 있었다. 보정제는 대개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나 이름만은 듣고 있었다. 그 강호 호걸들도 보정제와일일이 인사를 했다. 어떤 사람들은 더욱더 공손하게 나왔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오만을 떨기도 했다.
종만구는 말했다.
[단노사께서 좀처럼 오시기 어려운 이곳에 이르렀으니 며칠 묵다가 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뭇 형제들도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겁니다.]
보정제는 말했다.
[나의 조카 단예가 종곡주에게 잘못을 저질러 이곳에 잡혀 있소. 따라서 불초는 청을 드리는 한편 사죄를 할까 하오. 종곡주께서는 불초의 못난 얼굴을 보시고 조카의 무지함을 용서한다면 불초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자 탄복해 마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대리의 단형제는 무림규칙에 의해서 동료를 접대한다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이 곳은 바로 대리국에서 다스리는 땅이 아닌가. 그가 수백 명의 병마를 파견하기만 한다면 즉시 잡을 사람들은 잡아들이고 구할 사람은 구할 수 있을 것인데도 친히 나서서 좋은 말로 부탁을 하다니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종만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마오덕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단공자께서 종곡주에게 잘못을 저질렀군요. 단공자는 지난번에 진남땅에 있는 저의 집으로 찾아 왔었습니다. 그래서 이 형제와 함께 무량산 구경을 가기도 했는데 불초가 제대로 살피지를 못해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불초 역시 종곡주께서 단공자를 석방하도록 청해 드리는 바입니다.]
이때 남해악신이 갑자기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내 제자 일에 대해서 네가 왜 나서서 잔말을 하느냐?]
고승태는 냉랭히 말했다.
[단공자는 당신의 사부가 아니오. 당신은 그에게 절을 한 적이 있고 또 사부로 모신다고 인사마저 했는데 이제와서 잡아뗄 생각이오?]
남해악신은 온 얼굴이 붉어져서는 욕을 했다.
[제기랄! 노부는 잡아떼지는 않는다. 오늘 노부는 유명무실한 사부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 노부가 조심을 하지 않았다가 그 녀석을 사부로 모시게 되었으니 정말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이다.]
뭇 사람들은 사정을 모르는지라 의아하게 생각했다.
도백봉은 말했다.
[종곡주, 석방할 것인지 석방 안 할 것인지 귀하가 한마디 하세요.]
종만구는 웃으며 말했다.
[석방하죠. 석방해요. 물론 석방합니다. 댁의 아드님을 잡아다가 무엇을 하겠소?]
운중학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단공자는 풍류남아이고 또 준수하게 생겼죠. 거기다가 종부인 소야차는 또한 미녀이니 단공자를 골짜기에 잡아 둔다는 것은 그야말로 늑대를 끌어들이는 꼴이고 호랑이를 키우는 후환을 낳지 않겠습니까? 종곡주는 물론 석방하겠죠. 석방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극악무도한 운중학의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종만구가 크게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운형, 이번 일이 끝난 이후에 불초는 귀하와 사생결단을 내겠소!]
운중학은 말했다.
[정말 잘됐군! 나는 이미 그 남편을 죽이고 그 처를 차지하고 싶었으며 재산마저 약탈하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군웅들은 모두 그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무량파의 장문인 신쌍청이 말했다.
[강호의 영웅호걸들이 다 죽지는 않았소. 당신들 사대악인의 솜씨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감히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소.]
섭이랑은 간드러진 목소리롤 입을 열었다.
[신도우, 이 섭이랑은 그대의 위엄을 거스르지 안았는데 어찌하여 나까지도 끌어들이는 것인가요?]
좌자목은 그녀가 자기의 어린 아들을 유괴했던 사실을 상기하고 아직도 두려움이 앞서서 처음부터 그녀를 무서워했다. 이때 섭이랑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좌선생, 당신의 아드님은 더욱 토실토실 해졌겠지요?]
좌자목은 감히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번 찬바람을 쏘여 아직도 병중에 있으며 낫지 않았습니다.]
섭이랑은 웃으며 말했다.
[아, 이것은 모두 나의 불찰이예요. 나중에 여가가 있으면 실산이란 귀여운 애를 내가 보러 가죠.]
좌자목은 깜짝 놀라서 재빨리 말했다.
[감히 수고를 끼칠 수가 있겠습니까.]
보정제는 생각했다.
(사대악인은 나쁜 짓만 일삼아서 원한을 맺은 바가 크다. 이 강호 호걸들은 결코 그들의 협조자가 아니니 일은 좀더 처리하기가 쉬울 것이다. 나중에 예아를 구한 이후 기회를 봐서 강호의 해를 제거해야겠다.)
도백봉은 이때 뭇 사람들이 어지럽게 중구난방으로 떠들기 때문에 화제가 빗나간 것을 보고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종곡주, 저의 아들을 돌려 주겠다고 응낙했으니 아들을 불러와서 우리 모자가 상봉하도록 해 주시오.]
종만구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죠.]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매섭게 단정순을 한번 노려보고 말했다.
[단정순, 당신은 이와 같이 예쁜 아내와 좋은 아들이 있는데 어찌해서 욕심이 그리 많으시오? 오늘날 명성이 땅에 떨어지고 체면이 깍이게 된 것은 당신이 자초한 바이니 이 종만구를 탓하지는 마시오.]
단정순은 종만구가 아들을 되돌려 주겠다고 응낙한 것을 보고 반드시 상대방에게 어떤 음모가 준비되어 있다고 여겼다.
[종곡주, 당신이 만약 사람을 해칠 뜻을 갖고 있다면 단정순은 당신으로 하여금 한평생 후회하도록 할 방법이 있소.]
종만구는 그의 모습이 당당하고 위풍이 늠름할 뿐 아니라 풍도가 고귀함을 엿볼 수 있었다. 실로 자기로서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열등감이 생기게 되었고 대뜸 질투의 불길이 치솟아 큰 소리로 말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종만구의 집안이 망하고 전신이 수 만 가닥으로 토막난다 하더라도 끝까지 해 보겠소. 아들을 원한다면 나를 따라 오시오.]
일행은 종만구를 따라 나무담장 앞에 이르게 되었다. 운중학은 자기 경신법을 자랑하느라 제일 먼저 뛰어 넘었다. 단정순은 사태가 좋게 해결날리 없으니 차라리 먼저 위엄을 보여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알고 물러서도록 하자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입을 열었다.
[고득성, 몇 그루의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게! 모든 사람들이 다 지나갈 수 있도록.]
고득성은 대답했다.
[예.]
그는 강철 도끼를 들고 싹 싹 싹, 몇 번 휘두르자, 커다란 나무 하나를 쓰러뜨렸다. 부사귀 역시 두 손을 밀어냈다. 대뜸 우직근 뚝 하는 소리와 함게 그 잘라진 나무가 한 옆으로 젖혀졌다. 강철 도끼가 잇따라 하얀 섬광을 번뜩이며 허공을 가로지를 때마다 커다란 나무들이 잇따라 쓰러졌다. 종만구는 이 나무담장을 만들기에 사실 몇 년간 많은 심혈을 기울인 바가 있었다. 그런데 고득성이 잇따라 몇 그루의 나무를 쓰러뜨리자 발끈해졌다.
(오늘 대리 단씨는 크게 추한 꼴을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까짓 조그만 일은 참도록 하자.)
나무 담장 뒤쪽에는 황미승과 청포객이 왼손으로 똑같이 한 자루의 철장을 붙잡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허연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고 있었다. 바로 내력을 겨루고 있는 중이었다.
황미승은 갑자기 오른손을 내밀어 목탁추로 자기 앞의 청석 위에다 하나의 원을 그렸다. 청포객은 잠시 생각하더니 오른손의 철장으로 청석 위에다 얕고 조그만 구멍을 냈다. 보정제는 시선을 가다듬고 바라보고는 사태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알고 보니 황미 사형은 연경태자와 바둑을 두면서 내력을 겨루고 있구나. 지혜와 힘을 겨루고 있으니 이와 같이 독특한 겨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 회신을 보내 주지 않나 했더니 이미 하루낮 하루밤을 겨루었는데도 승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구나.)
그리고 그는 흘깃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한 곳의 생사검을 공략하고 있었다. 승부의 수는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미승은 이미 두어 수 뒤져 있었다. 한 쪽의 대마를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었다. 황미승의 두 명의 제자는 이미 땅바닥에 쓰러져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원래 두 승려는 사부가 위태로와 진것을 보고 손을 써서청포객을 협공했다가 오히려 그의 철장에 혈도를 집혀 쓰러지게 된 것이었다.
단정순은 앞으로 나아가 그들 두 사람의 혈도를 풀고 호통을 내질렀다.
[빨리 저리로 가서 큰 바위를 밀어내고 예아를 석방하도록 하게]
저만리 등 네 사람은 일제히 어깨를 나란히 한 후 앞으로 나아갔다.
종만구는 호통을 내질렀다.
[잠깐, 당신들은 이 석옥 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아시오.]
단정순은 노해 부르짖었다.
[종곡주, 당신이 만약 악랄한 수단으로 나의 아들을 해친다면 그대 자신에게도 처와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오!]
종만구는 냉소했다.
[흐흐흐, 맞았소. 이 종만구에게도 처가 있고 딸이 있소. 그러나 다행히도 나에게는 아들이 없소. 내 아들은 나의 친딸과 윤리를 더럽히는 금수만도 못한 짓을 자행하지는 않을 것이오.]
단정순의 안색이 새빨개지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오?]
종만구는 말했다.
[목완청은 당신의 사생아가 아니오?]
당정순은 노해 부르짖었다.
[목소저의 신분에 대해서 당신이 쓸데없이 관여할 게 뭐요?]
종만구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자는 것이 아니지. 대리 단씨는 남쪽에서 황제로 군림하고있으며 한 지방을 주름잡고 있다 하겠소. 그리고 무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소. 여러 영웅호걸들! 모두들 눈을 크게 뜨고 똑똑히 보시오. 단정순의 친 아들과 친 딸이 이곳에서 윤리에 어긋나는 금수만도 못한 지랄을 하여 부부가 되었다오.]
그리고 그는 남해악신에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뻗쳐 석옥의 문을 막고 있는 굴 바위를 밀어냈다.
단정순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싶어서 손을 써서 저지하지는 않았다. 큰 바위가 굴러가고 문이 드러나게 되었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보니 어두침침한 것이 석옥 안의 정경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이때 종만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남자와 여자가 어두침침한 석옥 속에 몸을 숨기고 있으니 무슨 좋은 지랄을 할런지 뻔하지! 하 하 하!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종만구의 커다란웃음소리가 날 때 한 젊은 남자가 얼굴을 붉힌 채 벌거숭이몸으로 걸어 나왔다. 하반신은 그저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역시 몸에는 내의만을 걸치고 있을 뿐 손 팔 그리고 허벅지 그런가 하면 등 뒤의 하얀 살결을 드러내 놓은 상태였다. 보정제는 온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을 띠었다. 단정순은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쳐들지를 못했다. 도백봉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울었다.
[업보로다! 업보야!]
고승태는 장포를 벗어서는 단예의 몸에 걸쳐 주었다. 마오덕은 단씨 형제들에게 잘 보이려고 재빨리 몸을 날려서는 단예의 앞을 가로막았다. 남해악신은 부르짖었다.
[이 후레자식아! 비켜라.]
종만구는 소리내어 웃었다. 득의에 찬 웃음 소리였다. 그러나 잠시 웃음을 멈추더니 별안간 참담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영아! 네가...]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단정순은 흠칫했다. 종만구는 단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단예가 안고있는 여자를 빼앗아 들었다. 그제서야 뭇 사람들은 그 여자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목완청보다 어려 보였다. 그리고 몸매도 섬세했다. 얼굴은 아직도 소녀의 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바로 목완청이 아니라 종만구의 딸인 종영이 아닌가? 애당초 그네들이 처음 만겁곡에 오게 되었을 때 종만구는 그녀를 데리고 대청으로 데려가 여러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도록 했었다. 그는 이와 같이 예쁜 딸이 있다는 것을 자랑한 셈이었다. 단예는 희미한 정신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주위에 둘러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백부와 부모님마저도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재빨리 종영을 종만구가 받아가도록 내버려 두고는 부르짖었다.
[어머님! 백부님! 아버님!]
도백봉은 황망히 앞으로 달려나가 그를 품 안에 껴안고 울었다.
[예아, 예아, 너... 어떻게 됐니?]
단예가 어쩔줄을 모르며 말했다.
[나는...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종만구는 남을 해치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해침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단예가 석옥에서 안고나온 사람이 바로 자기의 딸이라는 것을 어찌 그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는 멍해져서는 딸을 내려 놓았다. 종영은 내의만을 입고 있는 몸으로 갑자기 많은 사람을 대하게 되자 그만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졌다. 종만구는 몸에 걸치고 있던 장포를 벗어 종영에게 걸쳐주고는 곧이어 철썩하니 그녀의 왼쪽 뺨을 후려쳤다. 그녀의 왼쪽 뺨은 대뜸 시뻘개졌다.
종만구는 욕을 했다.
[이 못된 것아! 누가 너 보고 저 녀석과 함게 있으라고했니?]
종영은 그야말로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일시에 변명을 할래야 변명을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만구는 생각했다.
(목완청은 분명히 석옥안에 갇혀있었는데 그녀가 저 큰 바위를 밀어낼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안에 있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불러내어 그녀로 하여금 영아의 치욕을 나누어 가지도록 해야지)
그리하여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목소저 빨리 나오시오!]
그는 잇따라 세 번을 불렀으나 석옥 안에서는 전혀 기척이 없었다. 종만구는 안으로 달려갔다. 석옥 안은 일 장 둘레에 불과했다.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수 없지 않은가? 종만구는 그야말로 울화가 터져 가슴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달려나오는 즉시 다시 손을 들어서는 딸을 후려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너 이 계집애! 죽여 버리고 말겠다.]
별안간 옆에서 하나의 손이 뻗쳐 나와 무명지와 새끼 손가락으로 그의 손목을 슬쩍 쳤다. 종만구는 급히 손을 움츠려 피했다.
손을 써서 막는 사람은 바로 단정순이었다. 종만구는 노해 부르짖었다.
[내 딸을 내가 가르치는데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소?]
단정순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종만구, 당신은 정말 나의 아들을 우대해 주었구려? 그가 혼자 석옥에 갇혀 있다면 적적하겠기에 영애로 하여금 같이 지내도록 했으니 불초는 실로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외다. 또 이렇게 된 이상 영애는 이미 우리 단씨 집안의 사람이지 않겠소? 불초가 어떻게 상관하지 않을 수 있겠소?]
종만구는 노해 부르짖었다.
[어찌해서 당신 단씨네 집안 사람이란 말이오?]
단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영애가 저 석옥에서 나의 아들인 단예를 시중들지 않았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옷을 벗고 컴컴한 석옥 안에 숨어 있었으니 무슨 좋은 일을 했겠소? 내 아들은 진남왕세자요. 아직 영애를 세자비로 맞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삼첩사첩을 둔다고 해서 안 될 것이 뭐 있겠소? 그러니 당신과 나는 사돈이 된 것이 아니겠소? 하 하 하!]
종만구는 그야말로 미친 듯 노해서 스스로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단정순에게 달려 들어 휙휙하니 삼장을 후려쳤다. 단정순은 일일이 그 공격을 해소 시켰다.
군웅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단정순! 정말 놀랍다. 어떤 방법을 썼길래 종곡주의 딸과 바꿔치기하여서는 석실에다 감춰 두었을까? 종만구는 대리땅에 살면서 부단히 단씨 집안과 맞서다니 그야말로 고통을 자초하는 셈이 아니겠는가?)
본래 이 일은 화혁량 등 세 사람이 한 것이었다. 화혁량은 종영을 지하도로 잡아 들였다. 본래의 의도는 그녀로 하여금 지하도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종만구 부부가 나누는 말을 듣고 종만구와 연경태자가 어떤 계책을 꾸미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지하도에서 상의를 하게 되었다. 그런 후 서둘러 땅을팠다. 다시 하룻밤을 꼬박 세우고 이튿날 새벽녘에야 석옥 아래에까지 파고들어 갈 수가 있었다. 화혁량이 석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단예는 그 조그만 석옥 안에서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손을 뻗쳐서는 단예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단예의 신법은 신속하고 기이하기 이를데 없어서 시종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파천석과 범화가 일제히 그를 에워싼 채 중앙으로 밀어 붙였다. 석실이 너무 좁아 단예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화혁량에게 대뜸 손목을 잡히게 되었다. 그 순간 화혁량은 전신이 흠칫해졌다. 마치 한 조각 뜨거운 쇳덩이를 붙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힘써 그를 끌어서는 지하도로 넣으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신속하게 도망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힘을 주자마자 전신의 진기가 바깥쪽으로 급히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참을 수 없이 어이쿠! 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파천석과 범화가 재빨리 화혁량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야 북명신공의 흡인력에 진기가 빠져들어 가는 액운을 면할 수 있었다. 파천석의 진력은 무량검의 제자들보다 실로 고명한 터였고 또한 눈치가 빨라 임기응변의 조처가 신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 사람은 모두 하나같이 깜작 놀라서는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연경태자의 이 요상한 수가 정말 무섭구나.)
그리고는 다시 단예의 몸을 만지지 못했다.
정히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석옥 밖에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보정제 진남왕까지 모두 도착한 것을 알았다. 그런가 하면 종만구는 큰 소리로 비양거리지 않는가? 이때 번화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종만구는 매우 고약하니 우리가 그에게 매우 고약한 장난을 쳐보는 것이 좋겠군]
그리하여 그는 즉시 종영의 겉옷을 벗기고 목완청에게 입혀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종영을 안아서는 다시 단예에게 내밀었다. 단예는 흐릿한 정신에서 종영을 받아 안았다. 화혁량 등 세 사람은 목완청을 지하도로 끌고 가서는 먼저번처럼 문을 닫아 버렸다.
그렇게 되자 조금도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보정제는 사태가 그와 같이 변하게 되자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기도했다. 그러나 황미승이 연경태자와 내력을 겨루다가 조금이라도 소홀히 했다간 즉시 목숨을 잃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즉시 몸을 돌려서는 두 사람이 겨루는 것을 지켜 보았다. 이때 황미승의 이마에서는 콩알 같은땀방울이 맺혀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연경태자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이미 승부는 판가름 난 것 같았다. 단예는 정신이 맑아지자 역시 바둑판의 승패에 관심이 갔다. 그리하여 그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 바둑판 형세를 내려 보았다. 그런데 황미승은 이미 생사집을 다 써버리고 없었다. 연경태자가 다시 생사집에 돌 하나만 놓게 된다면 황미승은 바둑을 놓을 자리가 없게 되고 반드시 패배할 판국이었다. 이때 연경태자가 처랑을 뻗쳐 바둑판의 한 점을 찍으려고 했다. 단예는 크게 초조한 나머지 속으로 생각했다.
(억지를 한번 써봐야겠다.)
그는 손을 뻗쳐 철장을 잡았다. 연경태자는 철장으로 막 상위의 삼칠로에 바둑알을 놓으려고 했다. 즉 둥근 원을 그려서는 파도록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손바닥이 흠칫했다.
오른팔에 정히 활을 잡아당기듯 힘을 돋우고 있었는데 그 진력이 쏜살같이 쏟아져 나가는 것이아닌가? 깜짝 놀란 그가 곁눈질을 해보니 단예가 엄지와 식지로 철장의 끝을 잡고 있지 않는가? 단예는 다만 철장을 옆으로 붙이려고만 생각했다. 즉 청포객으로 하여금 바둑판의 관건이 되는 곳에 바둑돌을 놓지 못하게 하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철장은 마치 허공에다가 만들어 놓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는 힘주어 옆으로 밀었다. 이렇게 되자 연경태자의 내력이 그만 그의 소상혈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 연경태자는 속으로 깜짝 놀라 생각했다.
(성숙해 정노괴의 화공대법이다!)
그는 즉시 단전의 진기를 돋우고 손과 팔에 힘을 주었다. 철장에서 대뜸 한 줄기 강맹하기 이를데 없는 큰 힘이 쏟아져 나가 단예의 손가락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단예는 그 순간 반신이 시큰거리고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어지러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따라서 몸을 몇 번 휘청거리다가 손으로 청석을 짚은 끝에야 겨우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연경태자가 쏟아낸 웅후한 내력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연경태자는 속으로 경악해 마지 않았다. 그야말로 깜짝 놀라게 되었고 그 바람에 철장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마침 상위의 칠팔로를 두드리게 되었다. 다만 단예가 그와 같이 저지를 하는 바람에 그는 내력도 자유자재로 거두어 들이고 뻗쳐낼 수 없어 철장을 내려뜨리게 된 것이었는데, 그 떨어지는 철장에는 남은 힘이 실려 있어 자연히 무겁게 청석 위를 후려치게 되었던 것이다. 연경태자는 급히 철장을 들이올렸으나 칠팔로의 교차점에는 이미 움푹 패인 구멍이 나있지 않은가?
고수들은 바둑을 둠에 있어서 한번 둔 돌은 물리는 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바위를 바둑판으로 삼고 그 바위를 움푹 파이게 만듦으로써 돌을 두게 되는 이 시합에 있어서랴? 그리하여 내력이 이르는 곳에 돌은 깨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안 두었다고 잡아뗄 수가있겠는가? 그런데 이 상위의 칠팔로는 바로 자기의 대마를 죽여 버리는 셈이 되었다. 바둑의 이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두 집이 나야 살아 있는 것이고 한 집이면 죽게 되는것을 알고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연경태자의 대마는 이미 두 집을 만들어 놓고서 이를 기점으로 삼아 황미승의 대마를 공격하고 있는 셈이었으니 결코 자기 스스로 두 집 가운데 한 집을 막을 이치가 없었다. 그러나 돌을 놓은 이상에는 그것이 바둑의 도리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취소할 수 있겠는가?
연경태자는 탄식했다.
[한 수를 잘못 두게 된다면 만방으로 진다고 하더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인가?]
그는 본래 신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결코 이것 때문에 황미승과 다시 다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청석바위를 밀어낸 채 한참 동안 바둑판의 형세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보고 있더니 별안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지팡이로 땅바닥을 꽉 잡더니 허공을 밟듯 크게 발자국을 떼어 놓으면서 멀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별안간 우두두둑! 하느 소리가 나면서 청석바위가 흔들거리더니 예닐곱 조각으로 흩어졌다. 산사태가 나서 산이 무너지는 꼴이라고 할가? 그 바위들이 그만 땅바닥에 흩어지게 되었다. 보정제와 황미승 그리고 삼대악인들 외에는 하나같이 생각했다.
(저 사람같기도 하고 사람같지 않기도 하고 도깨비 같기도 하고 도깨비 같지 않기도 한 강시같은 청포객의 무공이 저토록 놀랍다니!)
황미승은 요행히 이 바둑에서 이기게 되었다. 두 손으로 무릎을 잡고 멍하니 넋을 빠뜨리고 보고 있었다. 단정순은 종만구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종곡주, 영애가 내 아들의 시첩이 되었으니 수일 내로 사람을 보내어 모셔 가도록 하겠소이다. 우리 부부는 응당 영애를 잘 대접할 것이며 그야말로 친딸과 같이 대할 것이오. 당신은 아무쪼록 안심하시구려.]
종만구는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날 대로 나있었다. 단정순이 그와 같은 비웃음의 말을 던지자 휙하니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종영의 머리 위를 향해 내려치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내 이 계집애부터 죽이고 이야기하겠다!]
별안간 한 기다란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 신속무비하게 종영을 안더니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이 다닌가? 그는 어느덧 수 장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게 종만구의 한 칼은 땅바닥을 내려치게 되었다. 그리고 종영을 안은 사람을 바로보게 되었다. 극악무도한 운중학이 아닌가? 종만구는 노갈을 터뜨렸다.
[당신 뭣하는 것이지?]
운중학은 웃으며 말했다.
[딸이 싫다면, 이미 쳐죽인 걸로 하고 나에게 주도록 하시오]
그리고는 표연히 수 장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보정제와 황미승의 무공이 자기보다 뛰어날 뿐 아니라 단정순과 고승태만 하더라도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던 터라 종영을 안고 달아날 작정을 아까부터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파천석도 그곳에 없고 해서 자기가 경신법만 펼치게 된다면 그들 사람들 중에 자기를 쫓아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종만구는 욕지거리를 해대었다. 보정제는 일전에 운중학과 파천석이 원을 그리며 쫓고 쫓기던 솜씨를 보았던 터였다. 이때 그가 종영을 안고 흔들흔들하면서 가벼운 깃털처럼 달려가는 것을 보고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예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부르짖었다.
[악노삼! 사부의 명령이오. 빨리 저 소저를 빼앗도록 하시오!]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제기랄! 뭐라고 떠드는게야?]
단예는 말했다.
[당신이 나를 사부로 삼지 않았소? 그리고 절도 했는데 이제와서 잡아뗄 생각이오? 당신이 한 말은 만고에 변하지 않는단 말이오. 아마도 후레자식이 된 모양이지?]
남해악신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내질렀다.
[내가 한 말이면 물론 지키고 말고. 하지만 네 녀석이 내 사부라는 것이 어떻게 됐다는거야? 노부가 화가 나면 사부마저도 단 한칼에 쳐죽이고 말것이다!]
단예는 말했다.
[인정한다면 됐소. 저 종가 소저는 내 처이니 바로 당신의 사모님이오. 빨리 빼앗아 오시오. 운중학이 그녀를 욕보인다면 바로 당신의 체면도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며 영웅호걸에 뽑히지 못하게 될것이오.]
남해악신은 어리둥절해졌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는 목완청이 단예의 처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종가의 소저도 단예의 처가 된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는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나에게는 몇 사람의 사모님이 있지?]
단예는 말했다.
[그것은 묻지 마세요. 어찌 되었든 만약 당신이 당신 사모님을 빼앗아 오지 못한다면 당신에게는 창피스러운 일이 될것이오! 이곳에 있는 많은 영웅호걸들이 친히 본것처럼 당신은 제사악인인 운중학도 이기지 못하는걸로 소문이 나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제 오악인 아니 제육악인으로떨어지게 될 것이오!]
남해악신은 자신이 운중학 밑에 든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한소리 미친 듯 소리를 내지르더니 달음질쳐 운중학의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다.
[빨리 내 사모님을 내놓아라.]
운중학은 몸을 앞으로 표현히 날리면서 부르짖었다.
[악노삼은 정말 바보로군! 당신은 지금 속고 있소!]
남해악신은 자기를 대단히 잘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운중학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남에게 속고 있다는 말을 하자 더욱더 노기충천해져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악노이가 어째서 남에게 속고 있다는 것이냐?]
그러면서 진기를 돋우고 급히 쫓아갔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삽시간에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종만구는 크게 화가 난 나머지 딸을 쳐죽일려고 했으나 이때 딸이 운중학이란 악당에게 잡혀가는 것을 보자 처가 묻게 되었을 때 변명할 수 없는지라 다급한 김에 역시 칼을 들고는 뒤쫓아 갔다.
6.너의 수법으로 너를 치리라.
보정제는 군웅들과 작별한 후 일행을 데리고 만겁곡을 떠났다.
그들은 대리성에 들어서자 먼저 진남왕부로 갔다. 화혁량과 범화, 그리고 파천석 세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그 옆에는 옷차림이 화려한 소녀가 서있었다. 바로 목완청이었다.
범화는 보정제에게 화혁량이 땅굴을 파서 종영을 석옥 안으로 밀어 놓고 목완청을 구해낸 일을 설명했다. 그 음양화합산의 약기운은 강했으나 그것은 독약은 아니었다. 단예와 목완청은 해약을 먹고 냉수를 한 사발 들이키게 되자 즉시 괜찮아졌다.
왕궁에서는 즉시 잔치가 벌어졌다. 모든 사람들은 그 연회석상에서 기분이 좋아서 만겁곡에서의 일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모두들 황미승과 화혁량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말했다. 만약 황미승이 바둑을 두지 않았더리면 땅굴을 파는 일은 연경태자에게 반드시 발각되었으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도백봉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화사마, 한 가지 청이 있는데 수고좀 해 주시겠습니까?]
화혁량은 말했다.
[왕비께서 분부만 내리십시오. 마땅히 명을 받들겠습니다.]
도백봉은 말했다.
[사람들을 보내 그 땅굴을 막아 버리도록 하십시오.]
화혁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백봉은 단정순을 흘겨 보며 말했다.
[그 지하통로는 종부인의 거실로 통하게 되어있어요. 만약 그 통로를 막아 버리지 않는다면 이곳에게 계신 한 분께서 아마도 매일 밤 그 지하도로 드나들게 될 것이예요.]
뭇 사람들은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목완청은 단예를 몰래 훔쳐 보았다. 매번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두 사람은 즉시 고개를 돌려 외면하곤 했다. 그녀는 한평생 그와 부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두 사람이 석옥에서 함께 지내던 광경을 상기하고는 더욱더 침울해졌다.
그녀는 뭇 사람들이 종영이 단예의 시첩이 되리라는 것 그리고 종영이 운중학에게 잡혀가기는 했지만 남해악신과 종만구가 힘을 합치게 된다면 반드시 그녀를 구해올 수 있을 것이라고 떠드는 말을 듣고 있다가, 보정제가 저고부주 네 사람에게 식사가 끝난 후 종영의 소식을 알아 보고 방법을 강구해서 그녀를 보호하라고 명하는말을 듣게 되자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품속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종부인이 단예에게 종영을 구해 달라고 할 때 내주었던 신표였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단정순에게 내밀었다.
[감보보가 드리는 거예요.]
단정순은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뭐냐?]
목완청은 노해 말했다.
[종영 계집애의 사주단자예요!]
그리고 상자를 손에 든 채 단예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감보보가 그에게 주면서 갔다 드리라고 했던 거예요.]
단정순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물건은 과거 자기와 감보보가 정을 나누던 날 밤 그가 그녀에게 준 것이기도 했다. 그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조그만 종이쪽지가 들어 있었다. 붉은 종이였다.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이 써있었다.
[을미년 십 이월 초 닷새 축시]
조그만 글씨였고 글시가 비뚤비뚤한 것이 바로 감보보의 친필이었다.
도백봉은 냉랭히 말했다.
[상대방이 사주 단자까지 보냈으니 참 잘 되었군.]
단정순은 붉은 종이를 뒤집었다. 그 뒤에는 몇 줄의 가느다란 글자로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슬픈 마음으로 고대 했으나 이제 실망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애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십 육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그대가 오시기만을 기다렸지요. 부득이 을미년 오월 종씨에게로 시집가게 되었습니다.>
글자체는 매우 섬세했다. 만약 자세히 시력을 가다듬고 바라보지 않는다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단정순은 감보보를 저버린 데 대해서 매우 가슴이 아팠다. 따라서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별안간 그는 그 몇 줄의 글이 지닌 뜻을 알게 되었다.
(보보는 을미년 오월에 시집을 갔다. 종영은 바로 그 해 십 이월 초닷새에 낳았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종만구의 딸이 아닐 것이다. 보보는 날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니까 아이에게는 애비가 없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일게다. 그리고 부득히 시집을 간것도 바로 몸에 태기가 있기 때문에 시집을 가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종영이라는 이 애는 바로 나의 딸이다. 그때 십 육년 전의 봄이었다. 그녀와 즐긴 지 한 달도 못 되어서 이 종영을 임신하게 되었구나!)
이와 같읕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 큰일이다!]
도백봉은 물었다.
[뭐가 큰일이예요?]
단정순은 고개를 흔들면서 응수했다.
[종만구라는 이 녀석은 심술이 나빠 그와 같은 독계를 안배하여 우리의 단씨 집안을 함정에 빠뜨릴려고 했소. 우리로서는 결코 그와 사돈지간이 될 수는 없지. 이 일은 어찌됐건 성사시킬 수가 없다오.]
도백봉은 그가 말을 더듬거리는 것을 보고 더럭 의심이 일어났다. 재빨리 붉은 종이를 받아 읽어 보았다. 잠시 생각해 본 후 대뜸 그 도리를 깨닫고는 그만 소리내어 웃었다.
[알고보니... 알고보니, 호호호! 종영이란 계집애도 역시 당신의 사생아였군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기가 극에 달한 그녀는 일 장을 들어 단정순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러나 단정순은 고개를 틀어 피해 버렸다. 대청에 있던 뭇 사람들은 그만 매우 어색해지고 말았다.
보정제는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혼인에 관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 두세.]
이때 왕궁의 한 무관이 대청 입구에 몸을 드러냈다. 그는 두 손으로 한 장의 명첩을 받쳐들고 허리를 굽히더니 말했다.
[호뇌관의 과언지대협께서 전하를 뵙겠답니다.]
단정순은 과언지가 복우파장문인 가백세의 대제자로서 별호는 추혼편이며 무공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러나 단씨와는 평소 왕래가 없던 터인데 어째서 이 먼길을 달려 왔는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는 즉시 몸을 일으키고 보정제에게 말했다.
[이 사람이 어찌 해서 찾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보정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추혼편이 도움을 주었군! 이 기회를 빌어 빠져나가는 것이 당연하겠지.]
단정순은 화청에서 걸어 나왔다. 저고부주 사대시위가 그의 뒤를 따랐다. 대청으로 들어서자 체구가 우람한 두 명의 사내가 서쪽 끝머리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상복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삼베로 만든 관을 쓰고 있었다. 온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으며 두 눈은 붉게 부어 올라 있었다.
아마도 집안에 초상이 났거나 가까운 사람이 죽은 모양이었다.
그는 단정순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자 즉시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하남성의 과언지가 전하에게 인사드립니다.]
단정순은 답례했다.
[과노사가 대리까지 왕림하시다니.... 서제 단정순이 미처 마중나가지 못했던 점을 용서해 주시구려.]
과언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평소 대리 단씨 형제는 부귀가 극도로 달하고 있으나 교만하지 않다 하더니 정말 명불허전이로구나.)
그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는 말했다.
[과언지는 초야에 묻힌 필부에 불과합니다. 전하를 뵈옵자는 것도 실로 당돌하기 이를데 없는 노릇이지요.]
단정순은 말했다.
[전하니 뭐니 하는 벼슬은 속인들을 위해 만든 것이오. 관노사의 명성은 불초가 평소 흠모하던 참이오. 우리 형제로 칭호합시다. 속된 예절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승태를 소개한 후 세 사람이 주인과 손님으로 나누어 앉게 되었다.
과언지는 말했다.
[전하, 저의 사숙께서는 왕궁에서 오랫동안 기거해 왔으니 아무쪼록 그에게도 알려 만나게 해줬으면 고맙겠습니다.]
단정순은 의아하여 물었다.
[과형의 사숙이라니요?]
그리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궁에 복우파의 사람이 었었던가?)
과언지는 말했다.
[저의 사숙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귀 왕궁에 피신을 하고 있던 터라 감히 전하에게 사정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이 무례한 일을 저질렀으나 전하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탓하지 않으신다면 불초로서는 그보다 고마울 데가 없겠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읍을 했다. 단정순은 한편으로 답레하면서 한편으로 생각해 보았지만 그의 사숙이 누구인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고승태 역시 생각에 잠겼다.
(누구일까? 그게 누구일까?)
별안간 그는 한 사람의 별호와 성시가 머리에 떠올라 속으로 생각했다.
(틀림없을거다.)
그리하여 그는 옆에 있는 무관에게 말했다.
[회계실에 가서 곽선생에게 하남 추혼편 과언지 협사께서 도달했다고 전하게. 요긴한 일로 금산반 최노선배님에게 알릴 말씀이 있으니 아무쪼록 대청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하게.]
그 무관은 대답을 하고 나갔다. 얼마 후에 달달 신발끄는 소리와 더불어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이제 나는 밥을 얻어먹지 못하지 않느냐?]
단정순은 금산반 최노선배란 말을 듣고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금산반 최백천이 놀랍게도 이곳에 숨어 있었나? 내가 어찌 몰랐을까? 그런데 고 아우님은 어째서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때 초라하게 생긴 늙은이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걸어 나왔다. 바로 계산대에서 일을 보고 있는 곽선생이 아닌가? 이 사람은 매일같이 술에 취해 있거나 하인들과 도박을 했다. 가장 게으르고 재미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계산은 분명히 했고 돈 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단정순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곽선생이 정말 최백천이란 말인가? 내가 눈이 있어도 사람을 알아 보지 못했으니 얼굴을 어떻게 든담! 다행히 고승태가 단숨에 그 이름을 불렀기에 과언지는 진남 왕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줄 알겠지.)
곽선생은 본래 반은 술에 취했고 반은 깨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흐리멍텅산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과언지가 상복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놀라 물었다.
[너는.....어떻게.....]
과언지는 앞으로 달려나가 땅바닥에 엎드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최사숙, 저의 사부님게서 남의 해침을 당하시어 돌아 가셨습니다.]
곽선생이 아닌 최백천은 그만 안색이 확 변했다. 누렇고 비쩍마른 얼굴은 삽시간에 음침하고도 경계하는 빛을 띠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수는 누구지?]
과언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사질이 무능하여 원수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짐작컨대 고소의 모용씨 집안 사람인 것 같습니다.]
최백천의 얼굴에 갑자기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표정은 삽시간에 사라졌으며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이 일은 반드시 오랜 시일을 두고 준비한 일일게다.]
단정순과 고승태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북교봉 남모용이라고 하는데 복우파에서 고소의 모용씨와 원한을 맺게 되었다면 이 원한은 갚기가 힘들게 되었군.)
최백천은 안색이 침울해저더니 과언지에게 말했다.
[과현질, 나의 사형께서 어떻게 하시다가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그 경과를 상세히 이야기해 보게.]
과언지는 말했다.
[사부의 원한은 부친의 원한과 같습니다. 소질은 정말 자는 것도 먹는 것도 편치 않을 정도입니다. 사숙게서는 즉시 길을 떠나시지요. 소질이 길을 가면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시각을 지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백천은 과언지가 대청에 너무나 많은 이목이 있어서 말하기 거북해 한다는사실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각에 이야기를 듣겠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진남 왕궁에서 몇 년을 살아 왔지만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나리께서 나의 행적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구나. 내가 만약 전하에게 사과의 말씀을 올리지 않는다면 단씨 집안에 대해서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고소 모용씨를 찾아 사형의 원한을 갚자면 결코 내 한몸의 힘으로써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에 단씨 집안에서 그 누구라도 보내어 도와 준다면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 그렇데 된다면한 사람의 적과 한 사람의 친구 사이에서 활동하는 내용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는 갑자기 단정순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연신 큰 절을 올렸다.
이렇게 되자 뭇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으며 단정순은 재빨리 손을 뻗쳐 그를 부축했다. 그런데 부축하게 되었을 때 최백천의 몸뚱아리는 땅바닥에 못박힌 듯 꼼짝하지 않았다. 단정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술망나니가 알고보니 무공이 이토록 훌륭하군! 그 동안 줄곧 나를 속여 왔겠다?)
그는 두 팔에 힘을 주고 위로 들어올렸다. 이때 마침 최백천은 운기행공하여 항거 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막 몸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에 온몸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최백천은 체내의 진기가 흔들거리자 즉각 뒤로 벌렁 쓰러졌다.
[어이쿠!]
단정순은 빙그레 웃고 손을 뻗쳐 그를 잡아다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어루만져 그 체내의 괴로운 기운을 해소시켜 주었다.
최백천은 말했다.
[전하, 최백천이 원수에게 핍박을 당한 나머지 갈데가 없어서 몰염치하게도 왕궁에 뛰어들어 의지하게 되었으며 전하의 위명 아래 몸을 보호코자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오늘날까지 살아오게 되었으며 그 동안 이 최백천이 전하에게 진상을 토로하지 않았으니 실로 죽을 죄를 졌습니다.]
고승태는 그 말을 받았다.
[최형은 너무 겸손해 할 것 없소. 전하께서는 이미 당신의 내력을 알고 있었소. 최형께서 그야말로 자기의 내력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전하께서도 모른척 덮어두신 것이라오. 전하께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다오. 전번날 세자께서 남해악신을 상대할 때 최형을 데리고 와 세자의 사부라고 말하지 않았었소? 세자께서도 왕궁에서 최형만이 그 악씨성을 가진 악인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단예가 최백천을 데리고 와 자기 사부라고 속인 것은 우연의 일치에 불과했다. 다만 왕궁의 사람들은 최백천의 모습이 정말 볼품이 없고 가장 초라했기 때문에 단예가 그를 끌로 와 남해악신을 놀려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백천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의심치 않았으며 속으로 부끄럽게 여겼다.
고승태는 다시 말했다.
[전하께서는 평소부터 손님들을 좋아하는 편이오. 그리고 최형은 우리 대리국에 대해 악의나 음모를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사 불리한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전하께서는 넓으신 아량으로 너그럽게 받아 들여 성의껏 대했을 것이오. 그러니 최형께서는 너무 예의를 차릴 것 없소이다.]
이 말의 뜻 은 평소 나쁜 일이나 악행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까지 용납한 것이며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너를 처치했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최백천은 말했다.
[고나리께서도 잘 알다시피, 말이야 그렇지만 이 최가가 어찌하여 왕궁에 의지하게 되었는지 작별을 고하기 전에 밝혀야 겠습니다. 다만 이 일은 다른 사람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이 최백천으로서는 당돌하게나마 자리를 빌렸으면 합니다.]
단정순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과언지에게 말했다.
[화형, 사문의 깊은 원한은 중대한 일이니 만큼 지금 급히 서두를 것은 없소. 그러니 우리 천천히 상의해도 늦지 않을것이오.]
과언지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최백천이 서둘러 대답했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 때 한 명의 무관이 대청 입구에 이르러 허리를 굽혔다.
[전하에게 알립니다. 소림사 방장께서 두분의 고승을 보내 서찰을 전해 왔습니다.]
소림사는 당나라 이래 무림의 태산북두와 같은 존재였다.
단정순은 그 말을 듣자 즉시 몸을 일으켜 섬돌까지 마중을 나가 그들을 맞았다. 두 명의 중년 승려는 무관의 인도하에 뜨락을 가로질러 왔다. 한명의 비쩍 마른 승려가 허리를 굽혀 합장하더니 말했다.
[소림사의 소승 혜진과 혜관이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단정순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두분께서는 멀리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소이다. 대청으로 드시어 차를 드십시오.]
대청에 이르렀으나 두 승려는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혜진은 말했다.
[전하, 소승은 폐사 방장의 명을 받고 편지를 전해 드리려 왔습니다. 편지는 보정황제와 진남왕 전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품 속에서 기름종이로 싼 보따리를 꺼내더니 한 껍질씩 벗겨 냈다. 그리고 한 통의 누런 서찰을 꺼내 두손으로 단정순에게 내밀었다. 단정순은 그것을 받아들고 말했다.
[폐하께서도 바로 이곳에 계시니 두 분께서는 만나 뵙는게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최백천과 과언지에게 말했다.
[두 분은 차를 들면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를 합시다.]
그는 헤진과 혜관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보정제는 이미 난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바로 황미승과 차를 나누면서 이야기를하고 있는 중이었다. 단예는 옆에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혜진과 혜관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모두 몸을 일으켰다. 단정순은 서찰을 보정제에게 바쳤다. 보정제는 편지를 뜯어 보았다. 그 편지는 그들 형제 두 사람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앞 구절은 오래 전부터 영명을 흠모하였으나 서로 사귈 기회가 없었다는 것, 남쪽 땅에서 위세를 떨치고있으나 은덕이 널리 퍼졌으며 만민이 우러러보고 있다는 것, 호걸들의 마음이 한결 같이 그들을 따르고 불도를 보호하고 지키니 그야말로 거룩한 도를 크게 떨친다는 등의 인사말이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사연이 적힌 글귀였다.
<사제 현비선사는 네명의 제자를 이끌고 귀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부처님을 모시는 몸이고 무림동도의 정의를 생각해서 삼가 돌봐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아래에 <소림사성사 석자, 현자 합장배례.>라는 서명이 적혀 있었다.
보정제는 선 채로 편지를 읽었다. 그 뜻은 소림사를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혜진과 혜관 역시 공손하게 앞에서 두 손을 늘여뜨린 채 시립해 있었다. 보정제는 말했다.
[두 분께서는 앉으시오. 소림방장께서 이와 같이 법유를 내리셨군요. 모두 불문의 제자이고 무림의 동도이니 힘이 미치는 한 명을 받들어야죠. 현비대사께서는 불도에 밝으실 뿐 아니라 무공에도 심오한 조예를 쌓으셔서 불초 형제들은 평소 흠모하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태사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불초 형제들은 삼가 모실 곳을 청소하고 기다리겠습니다.]
헤진과 혜관은 갑자기 두 무릎을 끓고 땅바닥에 꿇아 앉더니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소리내어 통곡하기 시작했다.
보정제와 단정순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혹시 현비대사가 죽은 것이 아닐까?)
보정제는 그들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모두 무림의 동도이니 이와 같은 큰절을 해서는 못쓰오.]
혜진은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원적하셨습니다.]
보정제는 생각했다.
(이 한통의 편지는 본래 현비대사에게 보내어 현비대사가 친히 우리에게 주기로 한 것인데 혹시 그는 이 대리국에서 죽은 것이 아닐까.)
혜진은 대답했다.
[방장사백께서는 달포 전에 천하의 사대악인이 대리에 와서 폐하와 진남왕 전하를 괴롭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대리 단씨로 말하면 남족 땅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만틈 물론 그까짓 사대악인을 두려워할 바 아니겠으나 혹시 두분이 불리하게 될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사부로 하여금 네 명의 제자를 이끌고 대리로 데려와 귀하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귀하의 분부를 받들도록 했던 것입니다.]
보정제는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보정제는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소림사에서 수백년간 뭇 영웅호걸들의 존경을 받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로구나! 현자방장(方丈)은 천하무림의 안위를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비록 남쪽 구석 땅에 위치 하고 있으나 그는 놀랍게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는 편지에는 우리들에게 현비대사 사도들을 보살펴 달라고 했으나 기실은 사람을 보내 우리에게 전갈을 하고 우리를 도우려 했던 것이로구나.)
그리하여 즉시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했다.
[방장대사의 그 두터운 정에 우리들은 어떻게 보답해야 될지 모르겠구려.]
혜진은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너무나 겸손하십니다. 저희 사도는 길을 재촉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지난달 스무 여드렛 날 대리 육양주 신계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무 아흐렛 날 새벽 우리 사형제 네 사람이 일어나 보니 그만 사부님이....저의 사부님게 암산을 받으시고 신계사의 대전에서 원적하셨더군요.]
거기까지 말하고는 목이 매어 말을 잇지 못하였다.
보정제는 길게 탄식하며 물었다.
[현비대사는 혹시 악랄한 암기에 적중되었나요?]
혜진은 말했다.
[아닙니다.]
보정제와 황미승, 단정순, 고승태 등 몇 사람은 하나같이 의아한 빛을 띠우고 생각했다.
(현비대사의 높은 무공을 보건데 피를 본 즉시 목숨을 빼앗는 악독한 암기가 아니라면 설사 배후에서 돌연 암습을 가했다 치더라도 결코 죽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대리국에 또 어느 사파의 고수가 있어 그토록 독수를 쓸 수 있을 만큼 재간이 뛰아나단 말인가?)
단정순은 말했다.
[오늘은 초사흘이니 지난 달 스무 여드레 밤이라면 나흘 전이구려. 바로 예아가 만겁곡에 잡혀간 것이 스무 이레 날 저녁이었습니다.]
보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사대악인의 짓이 아니지.]
이 며칠 동안 단연경은 줄곧 만겁곡에 있었다. 그러니까 천리 밖에 있는 육양주로 들어가 사람을 죽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단연경이라면 그렇게 기척도 없이 단번에 현비대사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혜진은 말했다.
[우리가 사부님을 부축해 일으켰을때 그 어른께서는 벌써 몸이 차겁게 변해 있었으며 원적한지 오래되었었습니다. 대전에서는 싸운 흔적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대전 밖으로 쫓아나왔으며 신계사의 승려들도 우리를 도와 찾았습니다만 수십 리 안에는 흉수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보정제는 침울히 말했다.
[현비대사께서 우리 단씨집안을 위해 돌아가셨고 또한 대리국경내에서 난을 당하셨으니 우리 형제들은 이 일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혜진과 혜관 두 승려는 동시에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혜진은 말했다.
[저희 사형제 네 사람과 신계사의 방장 오엽대사는 상의한 끝에 사부의 유체를 잠시 신계사에 모시기로 하고 화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장문 사백께서 검시하도록 한 것이지요. 그리고 저희 두 사형은 소림사로 달려가 장문사백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고 소승과 혜관 사제는 대리로 달려와 폐하와 진남왕 전하에게 알린 것입니다.]
보정제는 말했다.
[오엽방장께서는 연세도 많으실 뿐더러 덕망이 높으신 분이고 견식이 넓습니다. 무림의 일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많은데 그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던가요?]
혜진은 말했다.
[오엽방장께서는 십중팔구 흉수는 고소 모용씨 집안의 인물이라 고 했습니다.]
단정순과 고승태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또 고소의 모용이란 말인가?)
황미승은 그동안 줄곧 듣고 있었는데 불쑥 입을 열고 물었다.
[현비대사는 혹시 가슴팍에 적의 대위타저라는 수법을 맞으시고 원적하신 것이 아니오?]
혜진은 깜짝 놀라 말했다.
[대사의 짐작이 맞습니다. 어떻게....]
황미승은 말했다.
[오래 전부터 소림의 현비대사는 말씀하시기를 대위타저 재간이 무림의 일절이며 그 대위타저에맞게 된다면 상대방의 늑골이 모조리 부러져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무공으로 말하면 무섭기는 무서우나 너무나 패도적이어서 결코 우리 불문제자가 배울 무공이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요.]
단예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와 같은 재간은 너무나 악랄합니다.]
혜진과 혜관은 황미승이 자기의 사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소리를 듣자 속으로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미승이 선배 고승이기 때문에 감히 반박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단예가 옆에서 한마디 뛰어들자 그만 노기 띤 눈초리로 노려 보았다. 단예는 그들의 눈초리를 못 본 체했다.
[사형은 어떻게 현비대사께서 대위타저에 돌아가신 것을 아셨소이까?]
황미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계사 방장 오엽대사께서 흉수가 고소 모용씨라고 단정을 했다면 자연 억측은 아닐 것이오. 단 아우, 고소의 모용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한마디가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의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보복한다.' 이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단정순은 생각해 보았다.
[그 말을 들어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포함된 뜻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황미승은 줄얼거리듯 말했다.
[상대방의 방법을 상대방에게 펼친다는 것은....]
중얼거리던 황미승의 얼굴에 갑자기 한 가닥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보정제와 단정순은 그와 안지 수십년이 되었으나 일찌기 한번도 그와 같이 두려운 빛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날 황미승은 연경태자와 생사의 도박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진 상태였고 낭패한 꼴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그와 같이 두려운 빛을 드러낸 것을 보건대 상대방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위는 일시 조용하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황미승은 조용히 말했다.
[노승은 확실히 세상에 모용박이란 인물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박인것을 보면 무공이 해박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무림의 어느 문파의 어느 집안의 절기이든 모조리 정통하고 있고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이 된다오. 더욱 의아한 것은 그가 사람을 죽일 때 반드시 그 사람이 명성을 떨치는 절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죠.]
단예가 말했다.
[그건 정말 불가사의 합니다. 천하에는 그토록 많은 무공이 있는데 그가 어떻게 모조리 다 배우죠?]
황미승은 말했다.
[현질의 그와 같은 말도 옳아. 학문은 그야말로 바다처럼 넓은 것인데 한 사람이 어떻게 모조리 다 배울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용박의 원수는 원래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네. 말을 듣자니까 그는 원수의 절초를 사용하여 원수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할 바에는 아예 손을 쓰지 않는다고 하더군.]
보정제는 말했다.
[나도 중원에 그와 같은 한분의 기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이다. 하북 낙씨 삼웅은 비추를 잘 쓰는데 그 후 세사람은 몸에 비추를 맞고 목숨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산동의 장허도인은 사람을 죽일 때 반드시 적의 사지를 짤라내어 적으로 하여금 반 나절 동안 애절히 부르짖다가 죽도록 만들었다고 하오. 그런데 장허도인 자신도 그와 같이 참담한 보답을 받았다오. 따라서 모용박이 상대방의 방법으로 상대방에게 도로 펼친다는 소문이 장허도인의 입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들었소.]
그리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 당시 제남번화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장허도인이 땅바닥을 뒹굴며 애절히 부르짖던 것을 모여서서 구경했다고 합디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그는 장허도인이 죽을 때의 참상을 본 듯 안됐다는 표정을 짓고 또한 불안의 빛을 띠었다. 단정순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과언지의 사부인 가백세께서도 연편을 잘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연편에 실린 공력은 몹시 강맹하여 적을 죽일 때 종종 채찍으로 상대방의 두개골을 부숴 버린다고 했습니다.]
단정순은 손뼉을 세 번 쳐서 한 명의 하인을 불렀다.
[내가 상의할 일이 있으니 최선생과 과대협을 이곳으로 모셔라.]
그 하인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그러나 그는 최선생이 누구인지 몰랐으므로 머뭇거리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최선생은 바로 계산을 맡고 있는 곽선생이라오.]
그제서야 그 하인은 큰소리로 또 다시 '예' 하는 소리를 내고는 달려갔다. 얼마 후 최백천과 과언지가 난각에 이르게 되었다.
단정순은 말했다.
[과형에게 불초가 한가지 여쭈어 볼 일이 있으니....양해하시구려.]
과언지는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단정순은 말했다.
[영사인 가선배께서는 어떻게 하시다가 암살을 당하셨소? 권각에 의해서요 아니면 무기에 의해서 치명상을 입은 것이오?]
과언지 갑자기 얼굴이 씨뻘겋게 변하면서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는 한참 더듬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가사께서는 연편으로 펼치는 천령천열이란 일 초 아래 치명상을 입으셨습니다. 흉수의 공격은 강력하기 이를데 없으며 설사 가사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와 같이는.... 그와 같이는 펼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정제와 단정순, 황미승 등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섬칫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혜진은 최백천과 과언지 앞으로 다가가 합장을 하고 예를 했다.
[소승 사형제는 두 분과 똑같은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고소 모용을 멸하지 않는다면....]
거기가지 말하다가 속으로 고소 모용씨를 멸할 자신이 없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빈승은 이 목숨을 바쳐 사부님의 원한을 갚겠소.]
과언지는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소림사와 고소 모용씨 사이에도 원한이 있습니까?]
혜진은 즉시 사부인 현비대사가 어떻게 모용씨의 손 아래 죽게 되었는지 간단히 이야기 했다.
과언지의 안색은 비분에 차있었고 이빨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그러나 최백천은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관화상은 불쑥 말했다.
[최선생, 최선생은 고소 모용씨를 두려워하나요?]
혜진은 재빨리 호통을 내질렀다.
[사제 무례하면 못쓰네,]
최백천은 동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옆방에 누가 있어 엿듣게 될까봐 염려하는 듯했으며 또는 지극히 무서운 적이 암습을 가해오기라도 하는 듯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야말로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아닌가? 혜관은 흥 하니 코웃음 치며 소리를 내질렀다.
[사내 대장부가 죽으면 그만이지 뭐가 그렇게 두렵단 말인가?]
혜진 역시 최백천이 두려워하는 꼴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사제가 그와 같은 무례한 말을 했으나 제지하지 않았다.
황미승은 나직이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최백천은 갑자기 전신을 흠칫했다. 그 바람에 탁자 위에 놓인 하나의 찻잔이 떼구르 굴러서는 쨍그랑 하며 땅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그는 정신은 가다듬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자기에게 집중된 것을 보자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미안하외다. 미안하외다.]
과언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깨어진 찻잔의 조각들을 주워 담았다.
단정순은 생각했다.
(최백천은 허수아비로구나!)
황미승은 한 모금의 차를 마시며 천천히 말했다.
[최시주는 아마도 모용박을 만나 본 것 같구려.]
최백천은 모용박이라는 말을 듣고는 '아'하고 놀람에 찬 소리를 내지르며 두 손을 의자에 갖다 대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만나 본 적이 있지요. 아니 만난 적이 없습니다.]
혜관 화상은 큰 소리로 소리쳐 물었다.
[최선생은 도대체 모용박을 만나 본 적이 있나요 없나요.]
최백천은 두 눈을 뜨고 허공을 노려 보았다. 혼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단정순 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언지는 사숙이 이토록 사람들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이자 더욱더 수치스러웠다. 한참 후에야 최백천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옳습니다.......아마도.....아마 만나 본 적이 없는 것..]
황미승은 말했다.
[내가 모용박을 친히 본 일이 있는데 이야기를 해 드릴까 합니다. 그 말을 하자면, 사십 삼 년 전의 일이죠. 그때 이 늙은이는 젊고 힘이 좋을 때였으며, 강호에 나선 지도 얼마 되지 않아 강호에서도 약간의 명성을 날렸지요.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었으며 천하가 아무리 크다 한들 사부 외에는 그 누구도 나의 무공만큼 고강하지 못하리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 나는 한 분의 늙은 관리와 그의 가족들을 호송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청표강 부근의 산골짜기에서 네 명의 도적들을 만났습니다. 네 명의 도적들은 다려들자마자 재물을 노리는 것이 아니고 벼슬아치의 아가씨를 잡아가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 늙은이는 나이가 젊은데다가 혈기가 왕성해서 대뜸 악랄한 초식인 금강지를 펼쳐냈습니다. 하나같이 일 지로 상대방의 심장을 찌른 것이었지요. 네 명의 비적들은 비명도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모두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기고만장했지요. 그리하여 입에 침을 튀기면서 그 벼슬아치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여덟 명이나 열 명의 도적이 온다 하더라도 똑같이 금강지로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소이다'라고. 바로 그 때 말발굽 소리가 들렸지요. 두 사람이 노새를 타고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노새 위에 탄 한 사람이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의 음성이었으나 그 코웃음에는 경멸의 뜻이 가득차 있었지요. 나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소이다. 그런데 한 필의 노새위에 앉아있는 사람은 삼십 육칠세 정도 되어 보이는 부인이었고 다른 한필의 노새위에는 이제 십 오세 된 소년이 타고 있었는데 소년은 정말 준수하기 이를데 없었소이다. 그때 두 사람 다 온몸에 상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을 당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 금강지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곳에서 큰 소리를 치고 있죠?' 당시 나는 그 말을 듣고 매우 성이 났지만 젖비린내나는 녀석이 함부로 지껄이는 말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따라서 나는 그를 한번 노려보고 아랑곳하지 않았소이다. 그런데 그 부인은 소년을 꾸짖었소이다.
'저 사람의 금강지는 복건성 포전에 있는 달마하원의 정통수법으로 이미 삼 성의 공력을 쌓았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네가 지법을 펼친다 하더라도 저 사람처럼 정확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놀람과 분노를 함께 느꼈소. 우리 사문의 내력을 강호상에서 아는 사람이 극히 적었는데 그 젊은 부인은 단숨에 간파하기에 놀랐고 또 나의 금강지력이 삼성의 공력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에 크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아....그때 나는 정말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몰랐소이다. 그 당시 공력으로 논할 때 내게 삼 성의 공력을 쌓았다는 것도 높이 말한 것이죠. 기껏해야 이 성하고도 육칠 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오. 나는 큰소리로 외쳐 물었소. '부인의 존성은 어떻게 되오. 불초의 금강지력을 얕보는 모양인데 가르침을 베풀 뜻이 있나요?' 이때 그 소년은 노새를 멈추고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부인은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소. '너희 아버님이 임종 때 무슨말씀을 하셨느냐? 너는 금방 잊어 먹었느냐.' 그러자 그 소년은 말했지요. '예,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채찍질을 하며 앞으로 달려갔죠.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승복할 수 없어서 달려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불렀지요.
'이봐요. 터무니 없는 소리로 남의 무공을 흉보고 그냥 갈 작정이오?'
내가 탄 말은 발걸음이 재빠른 준마였어요. 말하는 사이 두 필의 노새를 가로질러서는 두 사람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지요. 그 부인은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그것 봐라. 네가 함부로 말하는 바람에 상대방에게 화를 내며 싸우려고 하지 않느냐?'
그 소년은 모친에게 효성이 지극한 모양이었고 그래서 다시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는 것이었소. 나는 그들이 나를 두려워하는 눈치를 보고 과부를 상대로 이겨도 명에로울 것은 없으니 그들과 따져서 무엇하랴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부인의 어조로 미루어 소년 역시 금강지력을 알고 있는 것 같았소이다. 나는 그 재간에만 족히 십 오년 이라는 세월을 두고 고된 연마를 해서 겨우 연성할수 있었는데 그 나이 어린 소년이 어떻게 금강지력을 알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따라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오늘은 당신네들을 놓아 보내겠지만 이후 말을 조심하구려.' 그 부인은 나를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그 소년을 향해 말했죠. '이 분 아저씨의 말씀이 옳다. 이후 너는 말을 조심해라.' 그런데 그 정도로 끝냈으면 얼마나 좋았겠소. 하지만 그때 나는 젊고 혈기 방장하여 길가에 말을 멈추어 세웠죠. 그리하여 그 부인이 먼저 노새를 재촉하여 지나가고 소년이 탄 노새가 발을 옮겨 놓기 시작할 때 나는 말채찍을 들어 그 노새의 엉덩이를 후려치려고 하면서 소리내어 웃었소이다. '빨리 가 버려!' 그런데 그 말채찍이 노새의 엉덩이를 막 후려치려는 찰나 '찍'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이 몸을 뒤로 돌리며 일지를 날렸소이다. 지풍은 허공을 격하고 날아들어 나의 채찍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겠소? 이렇게 되자 나는 깜짝놀라고 말았지요. 그 일지의 지력은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것이 나보다 훨씬 강했었소. 이때 그 부인은 말했소. '이왕 손을 썼으면 끝장을 보아야 한다.' 소년은 대답한 후에 노새의 고삐를 돌려 나에게 달려들었소. 나는 왼손을 뻗쳐 난운수 일초로 그를 공격했는데 돌연 '찍'하는 소리와 함께 그 역시 일 지를 찔러내는 것이었소.
그 순간 나는 왼쪽 가슴팍에 격렬한 고통을 느끼고 전신의 공력을 상실하고 말았소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황미승은 천천히 승포를 열어 젖혔다. 비쩍 마르고 앙상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그의 왼쪽 가슴팍의 심장부위에는 한 치정도 깊이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상처 자국은 이미 아물었으나 옛날 상처를 입었을 때 얼마나 심했던가를 능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상처는 분명히 심장까지 파고든 듯한데도 놀랍게도 그가 죽지 않고 아직가지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아연해지고 말았다. 황미승은 자기의 오른쪽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를 보시오!]
그러고 보니 그의 오른쪽 가슴의 살갗이 끊임없이 기복을 이루면서 움직이지 않는가. 사람들은 그제서야 깨달은 바가 있었다.
원래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과 다른 점이 있었다. 즉 심장이 오른쪽에 붙어 있었고 왼쪽에 붙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죽었어야 할 목숨을 건진 것도 바로 심장이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미승은 승포자락의 저고리 고름을 매고는 다시 말했다.
7. 공포의 모용세가
[이와 같이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극히 희귀하지요. 실로 만 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요. 그때 소년은 내가 심장을 찔리고도 즉시 죽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소. 나는 그때 내 자신의 가슴에서 선혈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목숨을 건질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소. 그리하여 조금도 거리낌 없이 큰소리로 욕을 했죠. '이 조그만 도적아! 네가 금강지를 펼칠 줄 안다고? 흥! 달마하원의 금강지는 살인은 할지언정 부상을 입히지는 않는다. 너의 수법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결코 금강지의 수법이 아니다.' 그 소년은 몸을 날려 앞으로 다가들면서 다시 손가락으로 찌르려고 했소이다. 그때 나는 전혀 항거할 능력이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당하는 수 밖에 없었소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부인은 들고 있던 채찍으로 소년의 팔을 휘감았소이다. 나는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그녀가 꾸짖는 소리를 들었소이다.
'고소 모용씨 집안에 어찌 너와 같이 못난 자식이 생겼단 말이냐? 네가 금강지를 익숙하게 연마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한번에 죽이지 못한 것이 아니냐? 네게 벌을 내리겠는데 칠 일 안으로....' 도대체 칠 일 안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나는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들을 수가 없었소이다.]
최백천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대사, 그 후 다시 그들을 만난 적이 있나요?]
황미승은 말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와 같은 일을당한 이후 이 늙은이는 좌절감에 빠지고 말았지요. 상대방은 나이 어린 소년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와 같은 조예를 쌓고 있었고, 내가 다시 한평생을 다해 무공을 연마한다 하더라고 그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소. 그리하여 가슴팍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게 되었을 때 나는 송나라 국경을 넘어 멀리 대리에 오게 되었으며 보정제 치하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고, 몇년이 지난 후 다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던 것이오. 노승은 이미 몇 년간 생사를 깊이 깨닫게 되고 다시는 과거의 능욕을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으나 그 일을 되돌이켜 볼 때마다 여전히 두려움을 금할 수 없소이다. 그야말로 화살에 놀란 새라고 할까요?]
단예는 물었다.
[대사, 그 소년이 오늘까지 살아있다면 약 육십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바로 모용박입니까?]
황미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이 늙은이는 모르고 있네. 그 소년이 당시 펼친 수법이 진짜 금강지였는지 나 역시 똑똑히 보지 못했다네.
다만 손 씀씀이가 완전히 같지는 않은 것 같더군. 하지만 금강지든 아니든 무서운 것은 사실이야.]
사람들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최백천을 못나게 보던 생각들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황미승이 그와 같은 높은 무공을 가지고도 여전히 고소 모용씨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을 볼 때 최백천이 혼이 나갈 정도로 놀라는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백천은 말했다.
[황미대사 같으신 고승께서 과거의 일을 조금도 숨기지 않으니 이 최가가 못난 꼴을 보이는 것이 무엇이 두렵겠소? 불초는 진남왕궁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를 폐하와 전하에게 말씀드리려고 했소이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모두 남들이 아니니 불초가 이야기를 해드려 여러분에게 참고가 되도록 하겠소이다.]
이 몇 마디 말을 하면서 그는 크게 격동하는 듯했다. 그는 목이 마르는 것을 느끼고자기 앞에 놓인 찻잔의 물을 모두 들이켰다. 그리고 과언지 앞에 놓인 찻물까지 마시고는 말을 계속했다.
[지금으로부터 바로.......십 팔 년 전의 일이오.]
그렇게 말한 그는 불현듯 창밖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더니 다시 말했다.
[남양성안에 채씨 성을 가진 토호가 있었는데 부유했지만 인정이 메마른 자였소. 그는 양민을 괴롭혔지요. 그런데 나의 가사형에게 한 분의 친구가 있었는데 전 가족이 모두 그의 손에 죽었답니다.]
과언지는 말했다.
[사숙께서는 채경도라는 도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최백천을 말했다.
[맞아 너의 사부는 채경도의 이름만 들먹여도 이를 가고 통탄히 여겼다. 그리고 너의 사부는 관가에 몇 번이나 고발을 했지만 채경도가 손을써서 그 송사를 눌러 버리곤 했지. 너의 사부가 원래 연편을 들어 그 채경도를 죽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국법을 어기는 일을 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나 최백천은 달랐지요. 나는 채경도의 집안으로 들어가 그의 가족 삼십여명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았소이다. 나는 앞에서부터 죽이기 시작해서 후원이 있는 곳까지 사람을 죽이며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원예사나 시녀들도 한 사람 남겨두지 않았지요. 그런데 뒤에 있는 화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화원에는 한 채의 조그만 누각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누각의 창문으로 등불이 새어나오고 있었소이다. 그래서 나는 그 누각 위로 뛰어올라가 방문을 걷어차 열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하나의 서재였어요. 사면의 시렁 위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고 한 쌍의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소이다. 그 남자는 약 사십 세쯤 되어 보였으며 모습이 상당히 준수했는데 서생차림을 하고 있었소이다. 그 여자의 나이는 비교적 젊었으나 나를 등지고 앉아 있어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소이다. 그녀는 녹색의 엷은 장삼을 입고 있었지요. 촛불 아래 볼 때 퍽이나 날씬했지요. 빌어먹을...]
본래 그는 매우 점잖은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이는 평소의 행동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마디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최백천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단숨에 삼십여 명을 죽인 만큼 대단히 흥분되어 있었소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한 쌍의 남녀를 만나게 되자 빌어먹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소이다. 채경도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흉폭하게 생겼는데 어찌해서 이와 같이 청수한 남녀가 있는지 궁금했죠. 그녀야말로 전설같이 내려오는 양귀비를 닮았더군요.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손을 써서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잊어버렸어요. 이때 그 남자는 말했습니다. '낭자 귀매에서 무왕까지 어떻게 배열해야 할지를 모르 겠구려']
단예는 귀매에서 무왕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을 듣고 생각했다.
(귀매와 무왕이 무엇이지.)
그러나 순식간에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혹시 귀매에서 무왕이라는 말을 잘못들은 게 아닐까? 이 귀절은 바로 주역에 나오는 귀절이 아닌가?)
그러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때 최백천은 다시 말했다.
[그러자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지요. 만약에 동북쪽에서 비스듬히 대가쪽으로 나갔다가 재차 자자쪽으로 돈다면 통할 수 있지 않겠어요?]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가와 자자? 아, 그것은 대과와 즉제로군!]
그는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그 여자가 말하는 것은 분명히 능파미보의 구결이 아닌가? 다만 위치가 약간 기울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여자와 동굴 속의 신선누나와는 어던 관련이 있지 않을까?)
최백천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그들 부부가 한참 동안 의논을 하는 것을 들었지요. 그들은 계속해서 오귀매자니 대부자, 또는 소자자 어쩌구 저쩌구 떠들어댔지요. 듣고 있던 나는 귀찮아졌죠. 그래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개같은 남녀야!빌어먹을! 빨리 이리 썩 나오지 못해!' 그런데 두 사람은 마치 귀머거리인 듯 전혀 내 말을 못 들은 척했으며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그 책을 들여다 보고 있었소이다. 이때 그 여자가 간드러진 어조로 말했죠. '이곳에서 자자가에 이르기까지는 전부 아홉 걸음인데 이렇게 해서는 통하지 않겠군.' 이 말을 들은 나는 다시 호통을 쳤지요.
'빨리 가거라!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란 말이다! 그리하여 너희 십팔 대 조상이나 만나 보도록 하라구!' 그리고 그들을 저승으로 보내려고 했죠. 그때 남자가 갑자기 두 손을 들어 손뼉을 치더니 소리내어 웃었소이다. '하 하 하. 정말 묘하군. 묘묘는 곤이고 이구 십팔이니 마땅히 곤위로 돌아야겠군. 이 한걸음에 들어있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소.' 그러면서 그는 탁자위의 주판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어떻게 된일인지 세 알의 주판알이 돌연 나에게로 날아왔고 나는 가슴팍에 극렬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소. 어느덧 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가 없었소이다.
그들 두 사람은 나에 대해서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소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이야기에 빠져서는 소가가니 소축생이니 하며 떠드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참말로 두렵기 이를데 없었소이다. 나의 별명은 원래 금산반으로서 언제나 몸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주판을 지니고 다녔죠. 그 가운데 장치가 있어서 일흔 일곱알의 주판알을 언제라도 용수철로써 튕겨낼 수 있었지요. 그런데 보아하니 그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주판은 홍목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평범한 것으로서 기이한 곳이라고는 전혀 없었소. 다만 중간의 살 하나가 몇 토막으로 분질러져 있었소이다. 아마도 틀림없이 그가 내력으로 충격을 주어 살을 분지른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이후에 내력으로 충격을 주어 주판알을 쏘아낸 거지요. 이 재간이야말로 빌어먹을! 정말 훌륭했소이다.
그 일남일녀는 이야기를 할수록 기쁜 듯했으며 나는 점점 두려움에 떨게 되었지요. 나는 집안에 이미 삼십여명을 죽여 놓았는데 하필이면 그곳에서 온 몸이 굳어져서는 꼼짝 못하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으니 내 한 목숨 바치면 그만이겠지만 그렇데 된다면 반드시 가사형에게 누를 끼칠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두 시진이 흘렀소. 밖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 그 남자는 그제서야 웃으며 말을 했죠. '낭자, 아래의 이 몇 걸음은 오늘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이제 우리갑시다.' 그러자 그 여자는 말했지요. '저 금산반 최노사께서는 당신이 한가지의 보법을 생각해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니 응당 그에게 고맙다는 보답을 해야 옳을 거예요.' 나는 다시 한번 놀랐지요. 처음부터 그들은 벌써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소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말했지요.
'그렇다면 몇 년 더 살도록 해주지. 다음에 만나게 되었을때 그의 목숨을 빼앗도록 합시다. 그는 감히 그대와 나를 욕했으니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리고 다시 책을 거두고는 곧이어 왼손을 들어 나의 등을 가볍게 한번 쳤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혈도를 풀어 주었소. 그리고 한 쌍의 남녀는 창문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니 가슴팍 옷자락에 세 개의 구멍이 나 있었고 세 알의 주판알은 나의 가슴팍에 꽃혀 있었습니다. 아마 자를 가지고 잰다 하더라도 그처럼 정확하게 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아! 여러분, 나의 이 몰골좀 보십시오.]
그러면서 그는 옷을 벗었다.
사람들은 그의 가슴팍을 들여다 보는 순간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두 알의 주판알은 바로 그의 두 젖꼭지 위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두 젖꼭지 사이에 또하나의 주판알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몇 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는 그것을 파내지 않고 그대로 두고있었다.
최백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장삼에 붙은 단추를 끼웠다.
[이 세 알의 주판알은 내 몸에 붙어서는 정말 나를 이만저만 고생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본래 작은 칼을 이용해서 이 주판알을 파내려고 했지만 조금만 힘을 주게 되면 혈도를 건드리게 되어 즉시 기절을 하고 말았지요. 그리고는 두 시진이 지나야만 깨어나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천천히 칼이나 모래종이로 닦아서 문질러 없애려고 했었죠. 하지만 역시 아프기 짝이 없었지요. 이 업보는 그야말로 정말 끈질긴 데가 있어 나를 한시도 놓아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궂어서 비가 오게 되면 이 세 곳은 빌어먹을 견딜수 없으리만큼 아프답니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라면서도 우스꽝스럽게 여겼다. 최백천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사람은 다음에 만나게 되면 나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했소. 이 목숨을 그가 가져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그러나 그를 만나게 된다면 못 가져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유일한 방법은 그와 만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멀리 도망가기에 이르렀죠. 그리하여 진남왕 전하의 궁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내가 그와 같이 생각한 것은 대리국이 남쪽에 위치해 있고 중원무림 인사들이 여간해서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정말 그 후레자식이 이곳까지 찾아온다면 왕전하와 고나리 저씨 친구 등 많은 고수들이 있으니 눈뜨고 내가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보지는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죠. 이 세 알의 주판알은 내 가슴팍에 꼭 붙어서는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죽어라 하고 술을 마셔야 조금 고통이 사그러지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똑같이 생각했다.
(이 사람의 경우는 황미승과 기실 대동소이하다. 다만 한 사람은 출가하여 중이 되고 한 사람은 성명을 바꾸고 은둔했을 뿐이다.)
단예는 물었다.
[곽선생, 그들 부부가 고소 모용씨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나요?]
그는 곽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일시 그 이름을 고치지 못했다. 최백천은 뒤통수를 긁적긁적했다.
[그것은 나의 사형이 짐작한 것이지. 나는 세 알의 주판알을 맞은 후 사형에게 찾아가 상의를 했는데 사형은 무림에서 고소 모용씨만이 그 사람의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보복을 한다고 하셨지. 내가 평소 주판알로 사람들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는 주판알로 나를 때린 것이지. 고소 모용씨 집안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니 정말 다행이야. 만약에 수십 명의 아들에 수백 명이나 되는 손자들을 낳게 된다면 강호에 어떤 사람이 살아 남을 수 있겠나? 오직 모용씨 집안 한 집안 사람만이 남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말은 대리 단씨에 대해서는 실로 불경스러운 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다행히 모용씨 집안에서 유명한 사람이라고는 모용박 밖에는 없어요. 사십 삼년 전 금강지력으로 이 분 대사님을 해친 것은 십 오륙 세 되는 소년이었고 십 팔 년전 나의 가슴팍에 주판알을 달아준 녀석은 약 사십세였으니까 아무래도 바로 모용박인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의 사형마저 그의 손 아래 죽었다니 천만 뜻밖이외다. 언지, 너의 사부님은 어떻게 하다가 그에게 죄를 짓게 되었지?]
과언지는 말했다.
[사부님은 이 몇 년 동안 장사에 전념했습니다. 항상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라고 하면서 사람에게 성을 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고소 모용씨의 집안 사람들에게 죄를 지을 겨를이 없었지요. 우리는 남양에 있었고 그들은 소주에 있었으니 그야말로 십만 팔천리나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백천은 말했다.
[십중팔구 모용박은 이 못난 사람을 찾지 못하게 되니까 자네의 사부님에게 따진 것이 분명해. 너의 사부님은 의리가 있으니 죽어도 내가 대리에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겠지. 그래서 독수를 입은 것이야. 가사형, 내가 가사형을 해쳤구려.]
그리고 그는 눈물 콧물을 마구 흘리며 울음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모용박, 내가 너의 가죽을 벗겨 놓고 말테다!]
그리고는 단정순을 바라보았다.
[단왕 전하, 이제 충분히 설명드렸습니다. 이 몇 년 동안 돌보아 주시고 또 내력을 폭로하지 않은 점을 최가는 정말 고맙게 여깁니다. 무엇으로 보답할지 모르겠군요. 이제 저는 고소 땅으로 가봐야 겠습니다.]
단정순은 의아하여 물었다.
[아니 고소로 가겠다고요?]
최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저의 사형으로 말하면 저에게는 친 형과 다름이 없습니다. 사형의 원한을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언지야, 우리는 고소로 떠나자.]
그러면서 그는 몇 사람들에게 읍을 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과언지 역시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더니 나가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그와 같은 행동을 뜻밖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소 모용박을 그토록 무서워하던 사람이 사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가기만 하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여러 사람들은 속으로 그를 우러러보는 마음이 일었다. 이때 단정순이 만류했다.
[두 분은 서두르지 마시오. 과형이 먼 길을 오셨으니 오늘밤은 여기서 하룻밤 더 묵고 내일 아침 일찌기 출발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둘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전하의 분부라면 다시 하루밤 폐를 끼치겠습니다. 언지, 우리 술이나 마시러 가자.]
그리고 그는 과언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보정제는 단정순에게 말했다.
[순아우, 내일 자네는 화사도와 범사마, 파사용을 데리고 육양주의 신계사로 가서 나를 대신하여 현비대사의 영전에 절을 올리도록 하게.]
단정순은 '예'하고 대답했다.
혜진과 혜관은 절을 하며 고마워했다. 보정제는 다시 단정순에게 말했다.
[오엽방장을 만나 뵈온 후 신계사에서 소림사의 대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게. 그리고 그들이 오거든 내가 현자대사에게 드리는 편지를 주도록 하게.]
그리고 그는 파천석에게 말했다.
[두 통의 서찰을 쓰도록 하게. 하나는 소림 방장에게 드리는 것이고 하나는 신계사 방장에게 드리는 것일세. 그리고 두 묶음의 예물을 준비하도록 하게나.]
파천석은 허리를 굽히며 그의 명을 받들겠다고 했다. 보정제는 말했다.
[그리고 소림사의 두 분 대사를 데려가 쉬게 해드리게.]
파천석이 혜진과 혜관 두 승려를 데리고 나가자 보정제는 말했다.
[우리 단씨 집안은 원래 중원무림에서 나왔으며 수백 년 동안 근본을 잊어 버린적이 없었다. 우리는 선조들의 유훈을 따라 무림의 사사로운 원한에 끼어들면 안되네. 현비대사의 죽음을 방관할 수는 없지만 원한을 갚는 일은 마땅히 소림파에 일임해야 하네.]
단정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미승은 말했다.
[정말 어려운 일이군요. 우리는 소림사를 도와 주어야 되지만 사사로운 원한에 개입해서는 안되오. 모용씨의 집안은 숫자는 많지 않지만 무림에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을 게외다. 소림파와 모용세가가 싸우게 된다면 무림은 피바다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대리국의 백성들이 죽게 될런지 모릅니다.]
보정제는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료. 순아우, 자네는 반드시 정의를 지키되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게나.]
황미승은 말했다.
[저는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이다. 저는 만겁곡에 한번 갔다와야겠습니다.]
보정제는 말했다.
[사형은 만겁곡에 무엇하러 가시려 합니까?]
[나는 바둑판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은 승부에 관게없이 두었던 바둑을 되새기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어디에서 실수를 했으며 어느 곳에서 승기를 잡았는지 자세히 알아야 만족하기 마련이었다.
황미승은 혼자 만겁곡을 향해 떠났다.
도백봉은 남편이 또 다른 사생아 종영을 낳은 것을 알고 화가 나서 단정순이 왔으나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단정순은 할 수 없이 서재로 가서 감보보가 건제준 종영의 사주단자를 바라보며 옛날 그녀와 즐겁게 지내던 날들을 회상했다.
(당시 그녀는 십 칠 세의 소녀에 불과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지하도가 감보보의 침실로 통한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단정순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문밖을 나섰다.
단예는 서재에서 목완청과 종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모용박 부부가 능파미보를 연마했다는 최백천의 이야기를 상기하자 모용박과 신선누님이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모용박은 혹시 소요파의 제자가 아닐까? 신선누님은 나에게 소요파의 제자를 모두 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모용박 부부의 무공이 몹시 고강하다던데 내가 그를 죽일 수 있을까?)
그는 품 속에 넣어 둔 신선누님이 남긴 능파미보의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는 이미 조각이 나있어서 걸레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아앗! 큰일났다! 청포객에 의해 독약을 먹었을 때 몸이 답답하여 옷을 찢어내지 않았던가? 그 바람에 옷과 같이 찢어진 것이구나!]
날은 이미 저물었다.
단예는 화원으로 걸어 들어가 호숫가에 서서 월색을 감상했다. 호수 위에도 둥근 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무량옥벽에 있던 오색영롱한 칼빛을 회상하게 되었다.
갑자기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별안간 한 그림자가 화원을 스쳐 담장 위로 솟구쳤다. 단예는 놀라 부르짖었다.
[완누이!]
그림자는 담장 저쪽으로 뛰어내렸다. 단예는 높은 담장을 뛰어넘을 수 없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완누이, 가지 말아요!]
밖에서 목완청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사부님께로 갈래요!]
이때 중년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완아, 우리는 유곡으로 돌아가자.]
단예는 그 여인이 진홍면이라는 거을 알고 외쳤다.
[작은 어머니! 이리 오세요.]
[들어가면 뭘 하겠느냐?]
단예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완누이, 가지 마오! 우리 방법을 강구합시다!]
[무슨 방법이 있나요? 이건 운명이란 말이예요!.....아....!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단예는 기뻐서 얼른 부르짖었다.
[어떤 방법이오?]
순간 '쾅'하며 담장의 가운데가 뻥 뚫어지며 그 사이로 파란 빛이 번쩍였다. 목완청이 수라도를 잡고 뚫린 구멍을 통해 단예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을 이리 들이밀어오. 단칼에 잘라 버린 후 나도 자살하고 말겠어요.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다시 아기로 환생토록 해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단예가 놀라 부르짖자 목완청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내가 하겠다는데 당신은 왜 안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를 죽이고 자결토록 하세요!]
목완청은 단예에게 수라도를 내밀었다.
[안 되오!]
단예는 손을 내흔들며 말했다.
목완청은 진홍면의 팔을 잡고 말했다.
[사부님, 우리 가요.]
단예는 멍하니 두 사람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 보았다.
별안간 누군가 그의 뒷덜미를 나꿔채려 했다. 이어 나직한 음성이 들여왔다.
[너는 나의 제자가 되어 살겠느냐 아니면 나의 사부가 되어 죽고 말겠느냐?]
바로 남해악신의 음성이었다.
단정순은 두 명의 무사를 데리고 만겁곡으로 갔다. 지하도의 입구를 막아 놓았던 돌을 치우고 나자 단정순은 말했다.
[너희는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도록 해라.]
단정순은 땅굴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그림자가 번뜩이더니 최백천이 나타났다.
[최형은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셨소?]
[소인은 전하의 따님이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 찾으러 왔습니다]
단정순은 생각했다.
(최백천은 은혜와 원수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몇 년 숨겨두자 그는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구나.)
8. 내 사랑 보보
단정순은 최백천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최백천이 고소의 모용박을 찾아가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행위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죽기 전에 십 년 자기를 보호해 준 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영아를 찾아 주려 한 것이다.)
단정순은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읍을 하며 입을 열었다.
[최형의 높으신 의리에 불초는 깊이 감복하는 바입니다.]
최백천은 말했다.
[소인은 저쪽으로 가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최백천은 몸을 흔들더니 서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의 경신법은 번개처럼 빨랐다.
단정순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
[최형의 무공은 사대호위의 아래가 아니다.]
단정순은 즉시 지하도 입구쪽으로 되돌아와서는 땅굴로 들어섰다.
한참동안 기어나가자 지하도에 갈래길이 나왔다. 그는 이미 화사도의 두 무관에게 지하도의 구조를 물어본 바가 있었다. 동북쪽으로 향한 통로는 먼저 번에 단예를 감금하였던 석옥으로 통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석옥쪽으로 기어나갔다. 끝까지 오게 되자 머리 위에 있는 나무 판대기를 받쳐들었다. 곧 빛이 흘러들어왔다. 그는 빈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한 쌍의 엷은 자색빛 꽃을 수놓은 신발을 볼 수 있었다. 단정순은 크게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느끼고 나무 판대기를 다시 두 치 정도 들어 올렸다. 이때 감보보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유원에 찬 어조로 중얼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만약 당신이 왕전하가 아니고 밭을 갈거나 사냥을 하는 사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개나 닭을 훔치는 좀도둑이었어도 좋았을 거에요. 아니예요, 남의 집을 터는 강도라고 해도 좋아요. 그렇게 된다면 나는 당신을 따라갔을 거예요.... 나는 한평생 그대를 섬겼을 거예요.....]
눈물 방울이 꽃신 앞의 바닥에 떨어졌다. 단정순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왕노릇을 하지 않겠다. 나는 좀도적이 되거나 강도가 되겠다. 그리하여 그대로 하여금 나를 한 평생 따르도록 하겠다. 왕노릇을 하여 무엇 하랴?)
이때 감보보는 다시 말했다.
[설마....설마하니 내가 이제부터 영원히 당신의 얼굴을 한 번도 볼 수 없는 건가요? 한번도 보아서는 안 된단 말인가요? 나는....나는 죽는 편이 낫겠어요.. 순 오라버니... 순 오라버니... 그대는 나를 생각하나요?]
몇 마디의 말을 마치고 그녀는 나직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단정순은 참을 수 없어 나직이 말했다.
[보보, 나의 사랑하는 보보.]
감보보는 깜짝놀라 몸을 똑바로 세우더니 큰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내가 또 꿈을 꾼 모양이지. 꿈속에서 당신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구려.]
단정순은 나직이 말했다.
[다정한 보보. 내가 그대를 부르고 있는 것이오. 나는 언제나 그대를 생각하고 있었소. 그리워하고 있었소.]
감보보는 놀라 부르짖었다.
[순 오라버니! 정말 당신이예요?]
단정순은 나무 판대기를 들치고 기어 나갔다. 그리고는 나직이 말했다.
[내 사랑 보보, 나요.]
감보보는 갑자기 단정순을 대하게 되자 대뜸 얼굴의 핏기가 가셔지고 말았다. 몇 걸음 다가오더니 몸을 비틀거렸다. 단정순은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얼싸 안았다. 감보보는 온몸을 흠칫하더니 그만 정신을 잃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단정순은 재빨리 그녀의 인중혈을 쓰다듬어 주었다. 감보보는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자기의 몸이 아직도 단정순의 품에 안겨있고 단정순이 바로 자기의 얼굴에 입맞춤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기뻐서 온몸이 터져 버리는 듯했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순 오라버니, 순오라버니! 저는....저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죠?]
단정순은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을 꼭 껴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다정히 말했다.
[다정한 감보보, 이것은 꿈이 아니오.]
돌연 문 밖에서 남자의 호통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냐? 누가 그 방안에 있느냐? 나는 남자의 음성을 들었다!]
바로 종만구의 음성이었다.
단정순과 감보보는 모두 깔짝 놀라고 말았다. 감보보는 큰소리로 말했다.
[나예요. 무슨 남자가 있다고 그래요. 당신은 또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고 있군요.]
단정순은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그대는 나를 따라 도망칩시다. 나는 좀도적이나 강도가 될지언정 이제부터 왕노릇을 하지 않겠소.]
감보보는 크게 기뻐하며 나직이 말했다.
[나는 그대를 따라가서 좀도적이나 강도의 아내가 되겠어요. 하루라도 되어 봤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소원이예요]
종만구는 처의 허가를 받지 않는 한 함부로 처의 방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창밖에 비친 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당신의 방에 남자가 있군! 나는 보았소.....]
그리고 처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펑'하니 발길로 방문을 차서 열었다.
단예는 남해악신에게 뒷덜미를 잡히어서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몸을 꼼짝할 수 없었다. 그는 북명신공을 수태음폐경밖에는 연마하지 않은 터였다. 그러므로 엄지손가락의 소상혈이 상대방과 접촉되고 또 상대방이 운기행공을 할 때만 상대방의 내력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다른 혈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가 막 입을 벌리고 부르짖을려고 했을 때 남해악신은 왼손을 뻗쳐 그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리고 단예를 품에 안고 나는 듯 달려가지 않는가. 진남왕부와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곳에 이르러서야 남해악신은 단예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한손으로는 여전히 그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예의 괴상한 보법을 펼쳐 달아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당신은 뜻을 바꾸어 나의 제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군. 그렇다면 후레자식이지.]
남해악신은 말했다.
[누가 그렇게 말하던? 네가 먼저 나에게 여덟 번의 큰 절을 올리고 나를 문중에서 축출하도록 해라. 그리고 나를 제자로 삼지 않겠다고 말하란 말이야. 그런 이후에 다시 나에게 여덟번의 큰 절을 하고 나를 사부로 모셔.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되고 나도 또한 후레자식이 될 필요가 없게 되지.]
단예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싫소. 나는 지금 당신에게 잡혀 있어서 전혀 반격할 힘도 없으니 당신이 나를 죽이도록 하시오.]
남해악신은 말했다.
[칫! 나는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노부는 결코 남에게 속아서 후레자식이 될 수는 없단 말이야. 너는 내가 바보인줄 알고 있구나.]
단예는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총명하군! 매우 총명한 사람이야!]
남해악신은 제 나름대로 며칠간 머리를 싸매고 단예를 제자로 만드는 방법을 궁리한 바가 있었다. 단예가 여덟 번씩 두 번에 걸쳐 큰 절을 하게 되면 모든 절차가 끝나게 되고 그때부터 남해악신 자신은 제자에서 사부로 변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데 상대방은 죽더라도 열 여섯 번의 큰절을 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는가. 며칠 밤낮을 두고 짜낸 절차가 아무 쓸모 없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되자 그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단예는 말했다.
[남해파의 규칙에는 제자가 사부를 죽일 수 있소?]
남해악신은 말했다.
[물론 안 되지. 사부만이 제자를 죽일 수 있고 제자가 사부를 죽이는 일은 결코 없지.]
단예는 말했다.
[그렇다면 제자가 사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오. 아니면 사부가 제자의 분부를 쫓게 되는 것이오?]
남해악신은 말했다.
[그야 물론 제자가 사부의 분부를 받들어야지. 자네가 나를 사부로 모시게 된다면 모든 일은 나의 분부를 따라야 돼.]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직 나의 제자예요. 내가 당신보고 사모님을 빼앗아 오라고 했는데 그 일은 다 처리했소?]
남해악신은 말했다.
[나와 운중학이 싸우고 있는데 사모님의 애비가 달려오지 않겠어. 그리하여 우리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는 사모님을 빼앗아갔단 말야!]
단예는 종영이 운중학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남해악신은 다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사모님의 애비와 싸워 사모님을 빼앗으려 했지. 그와 나는 잠깐 동안 싸우게 되었는데 그 틈에 사모님이 도망을 쳤지. 운중학은 나에게 만겁곡으로 함께 가서 종만구를 죽이자고 하더군. 나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운중학의 말을 듣고 허락하게 되었어.]
단예는 물었다.
[운중학은 무슨 소리를 지껄여대며 내 제자를 꼬드겼지?]
남해악신은 말했다.
[이 일은 말하지 않겠다. 누가 그 말을 듣게 된다면 악노이는 강호상에서 한평생 고개를 쳐들지 못하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업수이 여길거야.]
단예는 의아하여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운중학 네째는 사람을 속이는 재간이 놀라우니 당신은 그의 말을 믿을 필요가 없소.]
남해악신은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네째는 나를 위해 그런 것이야. 자네는 그 가운데의 도리를 잘 몰라. 생각해 봐. 그 소녀로 말하면 나의 사모님이니까 나보다 한 항렬이 높게 돼.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애비는 나보다 두 항렬이나 높게 되지. 제기랄! 종만구가 무엇이기에 나보다 두 항렬이나 높아야 되느냐 말이야! 그러니까 반드시 그를 죽여야 돼. 운 네째는 말했어. 종만구의 아내를 잡아가서 자기의 마누라로 삼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가 종만구를 죽이려는 이유는 사대악인의 의리를 위해, 완전히 나를 생각해서 힘을 쓰겠다는 것이었어. 그는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를 위해 그 일을 해내겟다는 것이었어. 운중학이 감보보와 결혼하면 나에게도 이득이 많아.]
단예는 의아해서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남해악신을 말했다.
[종만구의 아내는 내 사모님의 어머니가 아닌가. 그러니까 나보다 두 항렬이 높은거지. 만약 운 네째가 그녀를 잡아와서 마누라로 삼는다면 그녀는 이 악노이의 동생의 아내가 되며 나의 제수가 되는 셈이 아니겠나?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딸은 나보다 한 항렬이 낮게 되고 나의 질녀가 되겠지. 자네는 나의 질녀의 남편이니 나의 조카사위가 되는 셈이 되고 나보다 또한 한 항렬이 낮아지게 되지. 나는 자네를 사부라 부르게 되고 자네는 나를 백부님으로 받들어모시게 된다면 우리 두 사람은 다같이 어른 행세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일세. 하 하 하! 이 방법은 정말 묘하지?]
단예는 소리내어 웃었다. 남해악신은 말했다.
[빨리 가자, 빨리 가! 빨리 가서 그 일을 처리해야 되네. 이 세상에 악노이보다 두 항렬이나 높은 사람이 있을 수 없단 말야!]
악노이는 급히 단예의 팔을 잡고는 나는 듯 만겁곡 쪽으로 달려갔다.
단정순은 종만구가 방문을 차는 소리를 듣고 급히 머리를 굴렸다.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그는 재빨리 감보보의 품에서 빠져나와 지하 땅굴로 들어가 그 구멍을 다시 나무 판대기로 막았다.
종만구는 손에 큰 칼을 들고 방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러나 방 안에는 감보보 혼자밖에 없지 않은가? 그는 옷장과 침대 및 문 뒤쪽을 수색했으나 남자는 커녕 빈대 한 마리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감보보는 노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당신은 또 나를 못살게 구는군요! 빨리 한 칼에 나를 깨끗이 죽여 버려요.]
종만구는 남자를 찾지 못하게 되자 기쁨에 넘쳐 있었다. 그는 급히 칼을 던져 버리고는 헤벌쭉 웃었다.
[부인, 아마도 내가 헛것을 본 것 같소. 조금 전에 술을 많이 마신 탓이야.]
돌연 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종영이 큰소리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어머니!]
그리고 그녀는 나는 듯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곧이어 운중학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하늘 끝까지 도망친다 하더라도 너를 잡고야 말 것이다!]
운중학은 나는 듯 달려왔다.
종영은 부르짖었다.
[이 악당이 또 나를 잡아가려고 해요!]
그녀는 운중학에게 쫓기느라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운중학은 종만구 부부가 방 안에 있자 크게 기뻐했다. 그는 속으로 이 차레에 종만구를 죽이고 종부인과 종영 두 사람을 함께 사로잡아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종만구는 잇따라 삼 장을 펼쳐냈다. 그러나 운중학은 몸을 날려 쉽게 피해 버리고 말았다. 운중학은 탁자 곁을 돌아서는 종영을 잡으려고 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먼저 저 계집애의 혈도를 짚어 쓰러뜨린 후 종만구를 죽이고 감보보를 빼앗아야지!)
이때 종영은 부르짖었다.
[대나무쪽! 다시 나를 쫓아온다면 겨드랑이를 간지럽혀 줄거야!]
운중학은 어리둥절했다가 크게 부르짖었다.
[겨드랑이를 간지럽힐 수가 있을까? 다시 한번 해보시지.]
그러면서 몸을 날려 종영에게 덮쳐갔다.
그 날 종영은 운중학에게 안겨가게 되었을때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으나 운중학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더럭 겁이 났다. 이때 남해악신이 멀리서 뒤쫓아 오면서 부르짖었다.
[사모님, 사모님! 손을 뻗쳐 그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시오. 그 비쩍 마른 대나무쪽은 간지럼을 잘 탄다오.]
종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겨드랑이를 간지럽혀 주라고? 그것이야 내가 잘하는 것이지.]
그는 손을 뻗쳐 운중학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혀 주려고 했다. 그런데 운중학은 먼저 남해악신이 하는 말을 듣고 종영의 손이 이르기도 전에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같이 웃게되자 그만 걸음을 빨리 할 수 없게 되고 남해악신은 바짝 뒤쫓아오게 된 것이었다.
이때 운중학은 말했다.
[악노삼, 당신은 또 상대방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야.]
남해악신은 말했다.
[무슨 속임수라는 것이야. 빨리 우리 사모님을 내려 놓기나 해.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나의 악취전의 맛을 보여 줄테다.]
운중학은 어찌할 수 없어서 종영을 내려 놓았다. 종영은 운중학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손을 뻗쳐서는 그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운중학은 허리를 구부리며 웃느라고 숨도 제대로 쉬지못했다. 그가 웃으면 웃을수록 종영은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 간지럽혔다.
남해악신은 말했다.
[사모님, 이제는 그만 하고 용서해요. 다시 그를 간지럽히다가는 숨이 막혀 죽게 될 것이오.]
종영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운중학은 무공이 매우 고강한데 어찌하여 간지럼을 타서 죽는다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한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말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는데요. 정말 간지럽혀서 죽일 수가 있는지 시험해 봐야겠어요.]
남해악신을 말했다.
[안돼. 그것을 시험하면 못써. 정말 죽게 된다면 살아날 길이 없잖아? 운중학의 치명적인 급소인 탁문은 바로 겨드랑이 아래의 천천혈에 있어서 그곳을 건드렸다가는 큰일나게 돼!]
종영은 남해악신이 그와 같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는 손을 들어 더 이상 간지럽히지 않았다. 운중학은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더니 갑자기 남해악신에게 침을 뱉으며 말을 했다.
[이 죽일 놈의 악어 냄새나는 악어. 내 탁문의 소재를 어째서 알켜 주지?]
종영은 말했다.
[잘 한다. 또 욕을 하는군!]
종영은 손을 뻗쳐 운중학의 겨드랑이를 다시 간지럽혀 주려고 했다. 운중학은 나는 듯 발길질을 하였고 그녀는 그만 곤두박질쳐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 순간 운중학은 저만큼 떨어져서 있었다.
남해악신이 종영을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다.
[사모님. 어디 다친 데는 없소?]
종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때 종만구가 칼을 들고 쫓아 오면서 부르짖었다.
[이 못난 계집애. 왜 멍청하게 서 있는거지?]
남해악신은 고개를 돌리고 호통을 쳤다.
[제기랄, 나의 사모님께 상소리를 하기야!]
종만구는 노해 부르짖었다.
[내가 내 딸을 욕하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남해악신은 크게 성질을 내서는 종만구를 손가락질하며 부르짖었다.
[너 이 놈! 득을 보려고 하다니! 이.... 악노이가 너와 사생결단을 내아겠다.]
종만구는 물었다.
[내가 무슨 덕을 본다는거야.]
남해악신은 말했다.
[그녀는 나의 사모님이야. 나보다 한 항렬 높은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너까지 그녀의 애비로 자칭하고 나선다면 이건...이건...네가....나보다 두 항렬이나 높게 되지 않아. 이 악노이는 남해에서 제일가는 사람이야. 사람들은 모두 나를 할아버지 대하듯 하고 있는데 중원땅에 들어와서는 남보다 몇 항렬씩 낮아져야 하다니 말이 돼? 노부는 싫단 말이야!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종만구는 말했다.
[싫으면 그만 두면 되잖아? 종영은 나의 친딸이야. 나는 자연히 그의 애비가 되는 것인데 자칭이라고 할 것이 어디 있어?]
남해악신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종영과 종만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말했다.
[자네는 자칭하고 있음이 틀림없어. 나의 사모님은 저토록 예쁜데 말처럼 생긴 자네가 어찌해서 그녀의 애비가 된다는거야? 나의 사모님은 다른 사람이 낳은 것이지 자네가 낳은 것이 아니야! 너는 가짜 애비야! 진짜 애비가 아니라구!]
종만구는 그 말을 듣자 울화가 치솟아 얼굴마저 새빨게 졌다.
팔을 들고는 남해악신을 향해 후려쳤다.
종영은 재빨리 말했다.
[아버님, 이 사람은 나를 악인의 손에서 구했어요. 그를 죽이지 마세요.]
종만구는 노기충천해서 부르짖었다.
[이 계집애야. 나는 벌써 내가 나의 딸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멍청이까지 이와 같이 말하는데 어찌 거짓일리가 있겠느냐? 내가 그를 먼저 죽이고 다시 너를 죽이겠다.! 그런후 다시 너의 어머니를 죽이겠다!]
종영은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일시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봐요, 악노삼, 저의 아버님을 해지지 말아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부르짖었다.
[아버님, 악노삼을 해쳐서는 안 돼요!]
그리고는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때 종영은 운중학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으나 가까이 갈수가 없었다. 흘깃 지하동굴로 통하는 나무판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때 화혁량에게 잡혀서 지하도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즉시 달려가 나무 판대기를 들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운중학과 종만구는 지하땅굴이 드러나자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운중학은 재빨리 달려와 종영의 발을 잡았다. 종만구는 손을 휘둘러 그의 등을 후려쳤다. 운중학은 왼손을 뒤로 돌려 그 일 장을 막아냈다. 그러다가 종영과 같이 어여쁜 계집애가 지하도로 들어간 이후 잡지 못하게 될까봐 운중학 역시 땅굴 안으로 기어들어가게 되었다. 일장쯤 나가 어둠속에서 두 손을 들어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부드러운 발목이 잡혔다. 이때 종영이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운중학은 크게 기뻤다. 그녀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팔에 힘을 주어 끌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잡아 당기는 순간 종영은 다시 큰소리르 부르짖었다.
[아이쿠!]
그런데 그녀는 꼼짝하지 않았다. 앞쪽에 누가 있어 그녀를 잡아 당기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운중학의 발목을 바짝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자기의 발목을 꼭 쥐고는 바깥으로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종만구가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와! 빨리 나와!]
종만구는 운중학이 자기의 딸을 해칠까봐 지하 땅굴까지 들어와 그를 끌어 내려는 것이었다. 종만구는 두 번 잡아 당겼으나 꼼짝하지 않자 운기행공을 하고는 힘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의 발목을 또 다른 사람이 붙잡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 가닥 세찬 힘이 그를 바깥으로 끌어당겼다. 남해악신의 목이 쉰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말상의 못난 친구야. 너는 자칭 내 사모님의 애비이고 이 악노이보다 두 항렬이나 높지 않느냐? 그러니 나는 기필코 너를 죽이고 말겠다.]
원래 남해악신은 단예를 데리고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가장 급한 것은 자기보다 두 항렬이나 높다는 녀석을 죽이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지하도로 달려들어가 종만구의 두 발을 잡게 된 것이었다. 단예는 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종부인에게 말했다.
[종장모님, 종영 누이를 구하는 것이 급합니다!]
그리고는 지하땅굴로 들어가려고 했다. 갑자기 누군가 그의 몸을 와락 밀치는 바람에 단예는 쓰러지고 말았다.
곧이어 한 여인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악 둘째, 운 네째, 당신들 빨리 빨리 나와요. 노대가 분부했어요. 당신네 두 사람은 서로 싸워서는 안 된다고!]
바로 무악부작 섭이랑이었다. 그녀는 단연경의 명을 받고 남해악신과 운중학을 데리러 온 것이다. 몇 번 불러도 남해악신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즉시 지하땅굴로 기어들어가 남해악신의 두 발을 잡고 힘주어 끌어 내려고 했다.
이때 단예는 부르짖었다.
[이봐요! 이것봐요! 당신네들은 나의 종영을 해쳐서는 안 돼요. 그녀는 본래 나와 한때는 정혼까지 했고 이제는 나의 누이가 된 사람이예요!]
그런데 지하에서 호통치는 소리, 부르는 소리가 마구 들려왔다. 누가 누구를 부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예는 삼대악인이 지하땅굴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종영이 크게 위험다하고 생각했다. 단예는 자기가 비록 무공을 모르지만 목숨을 걸고라도 그녀를 구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지하동굴로 들어가 섭이랑의 두 발목을 잡고는 힘주어 끌어당겼다. 그가 두 손으로 꼭 쥔 곳은 섭이랑의 발목의 움푹 꺼져서 잡기 쉬운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속칭 수일속이기도 했다. 마침 손에 잡힌 이곳은 족태비음경가운데 삼음교라는 대 혈로서 바로 족소음신경,족태음비경,족궐음심포경, 삼음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했다. 단예의 엄지손가락에 있는 소상혈이 섭이랑의 발목에 있는 삼음교요혈과 맞닿게 되고 쌍방이 동시에 힘을 쓰게 되자 섭이랑의 내력은 거꾸로 쏟아져 나와 단예의 몸안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지하도 내에서는 몸을 틀기도 수월하지 않았다. 운중학은 종영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종만구는 운중학의 발목을 잡고 있었으며 남해악신은 또한 종만구의 발목을 잡았는가 하면 섭이랑은 남해악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으며 최후로 단예가 섭이랑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종영외의 다섯 사람은 모두 죽어라 하고 앞의 사람을 땅굴에서 끌어내려고 힘을 쓰고 있었다. 종영은 별로 기운이 없기 때문에 운중학이 쉽게 그녀를 끌어낼 수 있었으나 누군가가 종영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끌어당겨지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모두 엄지의 소상혈과 앞쪽 사람의 발목에 있는 삼음교와 연결된 채 이어져 있었다. 섭이랑의 내력이 단예에게로 쏟아져 들어가게 되자 남해악신, 종만구, 운중학, 종영, 네 사람의 내력이 모두 거꾸로 쏟아져 나가는 것이었다. 종영은 본래 내력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으니까 망정이었지만 나머지 네 사람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죽어라 하고 발을 버둥거리며 뒤에 있는 사람의 손에서 자기의 발목을 뽑아 내려고 했다. 그러나 꼭 잡혀 있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뽑아 낼 수가 없었고 기운을 쓰면 쓸수록 내력은 둑터진 봇물처럼 빠져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운중학은 자기의 발에서 내력이 쏟아져 나가는것을 느낄수 있었고 쏟아져 나간만큼 손에서 보충되는걸 느꼈다.
따라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아이에게 어찌하여 이토록 심오한 내력이 있을가? 정말 이상하다. 다행히 나의 발목에서 쏟아지는 내력은 손으로 보충이 되니까 천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어떻게 하든 종영의 발목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만약 발목을 놓았다가 내력이 달아나기만 하고 보충이 되지 않는다면 큰일이 나게 된다. 종만구도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속으로 겁을 집어 먹고서 두 손으로 앞쪽 사람의 발목을 쥐고 놓지 않았다.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들이 죽어라 하고 어떤 물체를 잡아서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들은 지하도에서 그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놀라 부르짖었다.
[노대가 당신들을 오라고 했소.]
[빨리 나의 발을 놓아라!]
[노부가 너를 죽이고 말겠다.]
[나를 왜 붙잡고 있어. 재빨리 손을 떼.]
[엄마! 아버지!]
시간이 흐를수록 손에 흘러들던 내력이 점차 약해지는데 발목에서 사라지는 내력은 조금도 그 기세가 늦추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모두 경악해마지 않았다. 단예는 한참 동안 잡아 당기고 있자 내력이 점점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는 무량산에서 그와같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때는 자연적으로 곧 대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매번 가슴이 답답해지게 될 때는 쏟아져 들어온 내력을 기해혈에 저장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르게 되자. 기해혈이 마치 금방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점점 겁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종영이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생각하고는 어떻게 하든 손을 놓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를 악물며 전중혈이 딱딱해지는 것을 참았다.
감보보는 이상한 사태가 잇따라 벌어지게 되자 그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조금 전 단정순이 그녀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굴던 광경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나직이 부르짖었다.
[순 오라버니! 순 오라버니! 그대는 나를 다정한 보보라 불렀죠? 그리고 나를 안고 뺨에다가 입맞춤을 했죠. 이번에는 꿈이 아니라고 하시며...]
단예의 가슴팍은 점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달아 올랐다. 손으로 뻗쳐오는 힘은 더욱 거세어 갔다. 이때 지하도에 있던 사람들의 내력은 거의 반쯤 단예의 몸안으로 스며든 이후였다. 끝내 단예는 섭이랑을 천천히 지하동굴 밖으로 끌어낼수 있었다. 곧이어 남해악신, 종만구, 운중학, 종영이 잇따라 끌려나오게 되었다.단예는 종영을 발견하게 되자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즉시 섭이랑의 발목을 놓고 앞으로 달려가 종영을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
[누이, 누이, 상처는 입지 않았소?]
섭이랑 등 네사람은 내력을 거의 반이나 소모했다. 하나같이 손을 놓고는 바닥에 주저않아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종만구는 갑자기 부르짖었다.
[남자가 있었어! 남자가 있었다고! 단정순이야! 단정순!]
그는 갑자기 깨닫는 바가 있었다.
(부인의 방 안에는 이와 같은 지하도가 있었다. 따라서 이 지하도를 낸 것은 단정순의 짓이 틀림이 없다. 조금 전에 방 밖에서 들은 남자의 소리와 내가 본 남자의 그림자는 반드시 단정순일 것이다.)
이와 같은 질투심이 복받쳐 오르자 그는 대뜸 달려가 단숨에 단예를 밀어붙이고 종영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는 한편으로 던져 버리고 지하도로 들어가 단정순을 잡아내어 오려고 했다.
이때 감보보는 그가 '단정순'하고 크게 부르짖는 소리에 대뜸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큰일 났다고 생각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종만구는 내력이 크게 소모된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종영의 뒷덜미를 잡긴 잡았으나 던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두 발이 시큰해지면서 털썩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못하고 종영을 지하땅굴에서 저만치 밀어붙였다. 어떻게 하더라도 단정순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몇 번 잡아 끌다 보니까 지하땅굴속에서 두 손이 뻗어나왔다. 그 두 손은 종영의 양쪽 손목을 잡고 있었다. 종만구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단정순! 올라오너라! 올라와서 나와 사생결단을 내자!]
그리고 나서 힘주어 종영을 뒤로 끌어당겼다. 지하 땅굴 속에 있던 사람도 천천히 끌려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한명의 남자가 기어 나왔다. 종만구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종영을 내려놓고 달려들어가 그의 가슴팍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비쩍 마른 얼굴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얼굴을 잔뜩 지푸리고 있었고 어깨를 들어올린 상태에 있었다. 단정순과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이었다.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곽선생, 어떻게 하여 이곳에 와 계시게 되었어요?]
원래 그사람은 금산반 최백천이었다.
종만구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단정순이 아니로군!]
그리고는 뒤로 벌렁 쓰러졌다. 그래도 그는 최백천을 움켜잡은 다섯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그때 돌연 지하땅굴에서 두 개의 손이 뻗어 나왔다. 두손은 최백천의 두 발목을 잡고 있었다. 종만구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단정순!]
그리고는 힘주어 잡아당기자 다시 한 사람이 끌려나왔다.
이번 사람은 머리에 머리카락이 없었고 계를 받은 흔적이 있었다. 바로 화상이었다. 그런데 얼굴 가득 주름살이 잡혀 있었고 두 눈썹은 싯누랬다. 늙은 화상이었다.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황미대사님! 어떻게 이곳에 와 계십니까?]
원래 그 노승은 바로 황미대사였다.
종만구는 있는 힘을 다해서 황미승을 지하땅굴에서 끌어내왔다. 황미노승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종만구는 지하도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야 씩씩거리며 뛰어 나오더니 부르짖었다.
[사람이 없어, 지하도에는 사람이 없어!]
그리고는 최백천을 바라보다가 황미승을 바라보곤 했다. 아무리 보아도 두 사람은 정부가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크게 마음이 놓였다.
[부인, 미안하오. 내가... 내가 또 그대를 잘못 원망했구려!]
이때 그는 정력이 고갈될 대로 고갈되어서는 지하땅굴 입구에 반쯤 기어나온 채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황미승과 최백천, 섭이랑, 남해악신, 운중학, 다섯 사람은 모두 땅바닥에 앉아서는 운기행공을 했다. 다섯 사람 가운데 황미승의 공력이 가장 깊은 듯, 얼마 후 몸을 일으키더니 호통을 쳤다.
[세 악인, 오늘 너희들 목숨을 용서해 주겠다. 금후에 다시 대리로 와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이 노승을 무정하다고 탓하지 말아라.]
세 악인은 내력이 고갈된 처지라서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소리도 못했다. 세 악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황미승에게 약간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이때 삼대악인은 전혀 악인다운 데가 없었다.
황미승과 최백천, 단예, 세 사람은 종만구 가족과 작별을 한 후 골짜기를 나섰다. 골짜기 입구에 이르자 단정순이 두 명의 무관을 데리고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단정순과 단예 부자는 서로 만나게 되자 서로가 의아한 감을 느꼈다.
원래 단정순은 종만구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자 양심에 가책을 받고 지하도로 급히 도망치고 말았다. 그가 지하도를 나오게 되었을 때 최백천이 옆에 서있었다. 최백천은 평소 단정순의 풍류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진하여 지하땅굴로 들어가 살폈다. 혹시나 종부인이 남편의 독수에 해를 입지 않는가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종영이 운중학에게 발목을 잡힌 광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최백천은 즉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도와주었다. 견딜 수 없게 되었을때 갑자기 그 누가 자기 발목을 잡아당겼다. 바로 황미승이었다. 황미승은 바둑판을 새로 짜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지하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석옥에서 지하도로 들어오게 되었고 소리나는 곳을 찾게 되었는데 그는 즉시 최백천의 말하는 소리를 듣고는 손을 써서 도와 준 것이었다. 그러던 중 이와 같은 사건에 휘말리게 돼서 황미승과 최백천의 내력이 반쯤은 단예의 체내로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단정순은 처와 아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단예에게는 목완청이 어제밤 그의 어머니 진홍면을 따라 갔다는 말을 듣고 단정순은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최백천과 과언지 두 사람에 관해서 물었다. 최백천과 과언지가 이미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는 말을 들은 그는 곧 삼공과 사호위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가 보정제에게 작별을 했다. 그리고는 혜인, 혜관 두 승려와 함께 육양주 쪽으로 떠나갔다.
9. 천룡사
단예는 십 리 밖까지 전송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날 오후의 일이었다.
보정제는 황궁의 선방에서 불경을 암송하고 있다가 태감의 전갈을 받게 되었다.
[황태제전하께서 사람을 보내 알려 왔습니다. 황태자의 세자가 갑자기 병이 났
으니 태의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보정제는 그렇지 않아도 근심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단예가 연경태자의 독을 먹었으니 그 여독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정제는 즉시 두 명의 태감을 보내 살펴보도록 했다. 반 시진 후에 두 명의 태감이 돌아와 보고했다.
[황태제 세자의 병세가 가볍지 않습니다. 약간의 정신착란 증세까지 겹친 것 같았습니다.]
보정제는 크게 놀라 즉시 궁을 나서서 진남왕궁으로 행차했다. 막 단예의 거실 밖에 이르게 되었을 때 '와지끈 뚝 와르르! 쨍그랑!'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물건이 깨어지는 소리였다. 문 밖에는 시녀들과 하인들이 꿇어 엎드려 황제를 맞았는데 그들의 표정은 놀람과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보정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단예는 춤을 추듯 손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탁자건 의자건 가리지 않고 잡히는 대로 들어서 한쪽에 내동댕이치곤 했다. 두 명의 태의는 동쪽으로 피하고 서쪽으로 피하는 등 낭패한 모습이었다. 보정제는 말했다.
[예아. 네가 어떻게 된 것이냐?]
단예의 정신은 여전히 맑은 편이었다. 다만 체내의 내력이 너무나 극성을 부리고 마치 가슴팍을 뚫고서 나올 것처럼 요동을 치고 있어 손과 발을 함께 움직여 물건을 내던져야만 약간 개운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는 보정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백부님. 저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두 손을 허공에서 마구 휘둘러댔다.
도백봉은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눈물만 흘리며 말했다.
[폐하, 예아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그의 아버지가 성을 나서는 것을 전송까지 해 주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미치기 시작한 거예요.]
보정제는 그녀를 위로했다.
[제수씨, 너무 당황해 할 것 없소. 아마도 만겁곡에서 중독된 독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오. 그의 치료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예에게 말했다.
[지금은 좀 어떠냐?]
단예는 끊임없이 발을 구르며 부르짖었다.
[이 조카의 온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아요! 괴롭기 그지 없습니다.]
보정제는 그의 얼굴과 손의 피부를 바라보았다. 아무 이상이 없었으며 조금도 부어오르지 않았다. 보정제는 단예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생각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래 단예는 어제밤 만겁곡에서 다섯 고수의 내력을 반 이상이나 흡수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으며 아침에는 부친을 전송까지 했던 것이다. 그 후 그가 한잠 자고 일어났을 때 갑자기 체내의 진기가 제대로 이끌어지지 않고 함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몸을 일으켜 능파미보를 펼쳤다. 가면 갈수록 빨리걸음을 옮겼다. 그런데도 진기가 제멋대로 요동치고 가슴이 답답해 오자 견딜 수 없어서 큰 소리로 부르짖게 되었고 다른 사람까지 놀라게 만든 것이었다.
이때 한 명의 태의가 알렸다.
[폐하께 말씀드립니다. 세자의 맥박도 왕성하기 그지없습니다. 혈기가 너무 지나쳐서 병이난 것 같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세자의 몸에서 피를 좀 뽑으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보정제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좋다. 피를 좀 빼내도록 해라.]
그 태감은 대답했다.
[예.]
그리고 그가 약상자를 열고 자기로 된 병 속에서 커다랗고 통통한 거머리를 꺼냈다. 거머리는 피를 잘 빨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병자의 몸에 응어리진 피를 빠는 데 사용하곤 했다. 거머리를 사용하게 되면 해가 없고 환자가 전혀 아픈 줄을 몰랐다. 그 태의는 단예의 팔을 잡고 그 거머리를 단예의 혈관에 갖다 놓았다. 그런데 거머리는 단예의 팔에 닿게 되자 심하게 꿈틀거리며 단예의 팔을 물어 뜯으려고 하지 않았다. 태의는 크게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잠시 후 그 거머리는 축 늘어지며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태의는 그야말로 못난 꼴을 보인 셈이었다. 태의는 재빨리 두번째의 거머리를 꺼냈으나 그 거머리 역시 잠시 지나자 죽어 버리는 게 아닌가?
다른 한 명의 태의는 염려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 알립니다. 세자의 몸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머리는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는 단예가 만독지왕인 망고주합은 먹은 이후 어떠한 벌레나 뱀이라도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면 멀리 피해 버린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단예의 몸에서 나는 냄새만 맡고도 가장 무서운 독사마저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게 되는데 이 조그만 거머리가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보정제는 속으로 초조해서 물었다.
[그가 무슨 독을 먹었기에 이토록 무섭지?]
한 명의 태의가 말했다.
[신의 우견으로는 세자의 맥이 매우 빠르고 왕성한 것을 보면 일종의 보기드문 열독에 중독된 것 같습니다. 이 열독의 이름은.....에....그건....소신이 우둔하여...]
다른 한 명의 태의는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자의 맥상은 음하고 허합니다. 복용하신 독이 차갑기 때문이죠. 그러니 열로 중화시켜야 합니다.]
단예의 체내에는 황미승, 남해악신, 종만구의 양강한 내력은 물론 섭이랑, 운중학의 음유한 내력마저 맴돌고 있었다. 그러니 두 명의 태의의 의견이 갈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참된 병인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었다.
보정제는 그들이 논쟁하는 것을 보고 대리국에서 의술이 가장 뛰어나다는 명의들도 보는 바가 그토록 다르니 이로 미루어 볼때 단예의 몸 속에 침투한 독은 몹시 기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보정제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식지와 중지 그리고 무명지 세 손가락으로 가볍게 손목에 있는 열결혈을 만져 보았다. 단씨 집안 자손들의 맥박은 종종 촌구로 통하지 않고 열결혈로 통했다. 의학에서 반관맥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두 명의 태의는 황상이 대뜸 손을 쓰는 것을 보자 보정제가 의술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탄복하는 눈치였다. 한 사람이 말했다.
[의서에서는 반관맥이 왼손에 있는 사람은 귀하게 되고 오른손에 있으면 부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손이 모두 반관맥이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고 하더군요. 폐하와 전하, 세자 세분은 모두 반관맥이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말했다.
[세 분은 지극한 부귀를 누리고 있으나 그것이 곧 반관맥 때문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소. 세자의 맥상은 크게 부귀할 상을 보이고 있는 만큼 이 병으로 인해 큰 장애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외다.]
다른 한 명의 태의는 그렇지 않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크게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사람 가운데 요절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그러나 그와 같은 말을 입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보정제는 조카의 맥박이 매우 힘차고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와 같이 뛰다가는 심장이 견디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에다 힘을 주어 보았다. 그의 경락에서 어떤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별안간 그 자신의 내력이 급히 쏟아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보정제는 깜짝 놀라 급히 손을 떼어내었다. 그는 단예가 이미 북명신공 가운데 수태음폐경을 통해 타인의 내력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열결혈은 바로 수태음폐경 가운데 있는 혈도였다. 그리하여 보정제가 운기하게 되자 내력이 단예의 몸 안에 흘러들게 된 것이었다.
단예는 갑자기 부르짖었다.
[어이쿠!]
그는 더욱 세차게 온 몸을 떨며 힘들어 했다.
보정제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
[예아, 너는 성숙해의 정춘추를 만난 적이 있느냐?]
단예는 말했다.
[정...정..정춘추라고요? 조카는 그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보정제는 말했다.
[그 분은 선풍도골의 풍채를 지니고 있는 신선 같은
노인이라 하더구나.]
단예는 말했다.
[조카는 한번도 그런 노인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보정제는 말했다.
[그 사람의 몸에는 요사한 재간이 있다. 전문적으로 남의 내력을 소모시키는 것인데 화공대법이라고 한단다. 따라서 남이 한평생을 갈고 닦은 내공을 일조일석에 없애 버린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협사들 가운데 그를 저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네가 그를 만나지 않았따면 어찌 하여.. 어찌하여 그와 같은 요사한 재간을 알고 있지?]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이 조카는 배운적이 없습니다.. 정춘추라든가 화공대법 같은 말은 조카가 처음으로 백부님에게 듣는 이야기입니다.]
보정제는 단예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기의 내력을 해소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판단하게 되었다.
(그렇다. 반드시 연경태자가 그와 같은 요사한 무공을 배우고 기괴한 방법을 써서는 요사한 내공을 예아의 체내에 주입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단예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 나와 순아우를 해치도록 만들었다. 하 하 하. 그 사람이 천하제일 악인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정말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구나!)
이때 단예는 두 손으로 스스로의 신체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옷을 아주 갈기 갈기 찢었으며 살결에도 많은 핏자국을 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야 겨우 터져나오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도백봉은 괴로워하는 단예를 위로했다.
[예아, 좀 참아라. 조금 있으면 낫을 것이다.]
보정제는 생각했다.
(이와 같이 어려운 문제는 천룡사로 가서 가르침을 구하는 수 밖에 없다.)
보정제는 말했다.
[예아, 내가 너를 데리고 몇 분 어른을 만나 보도록 하겠다. 아마 그분들에게는 너의 그 사악한 독을 치료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단예는 대답했다.
[예.]
도백봉은 재빨리 다른 옷을 가져다가 아들에게 갈아입도록 했다. 보정제는 그를 데리고 왕궁을 나섰다. 그들은 말을 타고 점창산으로 달려갔다.
천룡사는 대리성 밖에 있는 점창산 중악봉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의 이름은 숭성사였다. 그러나 대리의 백성들은 천룡사라고 부르는데 습관이 되어 있었다.
천룡사는 녹음이 우거진 산을 드잊고 앞으로 위수를 끼고 있어 풍광이 수려했다. 절에는 탑이 세워져 있었다. 세 개의 탑은 당나라 초기에 세워진 것이었다. 탑은 높이가 이백여 자나 되고 십육 층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탑 위에는 철을 주조한 다음과 같은 문구를 걸어놓고 있었다.
<대당정관위지경덕조>
전하여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천룡사에는 다섯 가지 보물이 있다고 했다. 세 개의 탑은 다섯가지 보물 가운데 으뜸이었다. 단씨 역대 조상들 가운데는 황제의 제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사람이 많았다. 출가한 황제들은 모두 천룡사에 출가했다. 그래서 천룡사는 대리 황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천룡사는 대리국의 많은 사찰 가운데 가장 유명했다. 황제가 출가한 이후 그의 자손들이 그의 생일이 되면 반드시 천룡사에 가서 예배를 올렸다.
그리고 예배를 올리 때마다 많은 보물을 바치기도 하고 천룡사를 보수하기도 했다. 천룡사에는 삼각, 칠루, 구전백하등의 건물이 있어 규모가 웅장하기 그지 없었고 하나같이 화려했다. 중원에 있는 오대, 보타, 구화, 아미와 같은 불교의 성지에 있는 명산대찰이라고 해도 천룡사에는 미치기 힘들 정도였다. 다만 천룡사가 너무 남쪽땅에 위치해 있어서 명성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단예는 말을 타고 가면서 보정제의 말에 따라 체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는 진기를 억눌렀다. 그렇게 하자 답답한 기운이 약간 누그러지게 되었다. 이윽고 그들은 천룡사 앞에 이르게 되었다.
이 천룡사는 보정제가 종종 찾아오는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천룡사의 방장으로 있는 본인대사를 만났다. 본인대사는 바로 보정제의 숙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출가인은 언제나 군신의 예의에 구애를 받지 않았고 가족적인 항렬도 따지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평등한 신분으로 만나게 되었다. 보정제는 단예가 어떻게 연경태자에게 잡혀가게 되었으며 어떻게 중독이 되었고 또 다른 사람의 내력을 받아들이는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 일일이 설명했다.
본인방장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나를 따라 모니당으로 가서 세 분 사형제를 만나 보도록 합시다.]
보정제는 말했다.
[여러 대사님들의 청수를 방해하는 것 같아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본인방장은 말했다.
[진남 세자로 말하면 앞로 우리나라의 황제가 되실 몸이 아니오. 그에게 만백성의 화복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내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니 세 분 사형제와 함께 상의하겠습니다.]
곧이어 두 명의 소사미가 나와서 길을 인도했다. 그 뒤로는 본인방장이 따르고 그 본인방장의 뒤로는 보정제 숙실이 따랐다.
왼쪽에 있는 학문으로 들어가 황천문, 청도요대, 긱기경, 두모궁, 삼원궁 ,도솔 대사원, 우화원, 반야대를 지나 기다란 낭하에 이르게 되었다. 두 명의 소사미는 허리를 굽히고 즉시 양편으로 갈라선 채 다시는 그들을 따라 오지 않았다. 세 사람은 앞에 이르렀다. 단예는 천룡사에 몇 번 와 보았으나 이곳만은 처음이었다. 그 몇 채의 집은 모두 소나무를 깎아 만든 집이었다. 문과 나무기둥 등은 하나같이 껍질을 벗기지 않은 자연 그대로 였다. 천룡사의 다른 금빛이 찬란한 대전이나 법당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본인방장은 합장하고 말했다.
[아미타불...본인에게 한 가지 해결할 수 없는 의문점이 있어서 세 분 사형제의 수련을 방해하게 되었소이다.]
그러자 집 안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방장께서는 들어오시오.]
본인은 손을 뻗쳐 천천히 문을 밀었다. 판대기문은 '끼익'소리를 냈다. 평소에 드나드는 사람이 적었던 모양이었다. 단예는 방장과 백부님을 따라 문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방장에게서 세 분의 사형제라고 들었는데 그 실내에는 네 명의 화상이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세 승려는 바깥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 중 두승려는 비쩍 마른 데 비해 다른 한 명은 체구가 장대하고 우람했다. 그리고 동쪽의 한 화상은 얼굴을 안쪽으로 돌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정제는 그 비쩍 마른 승려의 본명이 본관과 본상으로서 모두 본인방장의 사형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우람한 체구의 승려는 본참으로서 본인방장의 사제였다. 그는 천룡사의 모니당에 세 분의 고승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뿐, 또 달리 한 명의 승려가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즉시 허리를 굽혀 예를 했다. 본관 등 세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답례를 했다. 그런데 면벽하고 있던 승려는 입정을 하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한참 공부가 요긴한 고비에 이르러서 정신을 분산할 수 없는 지 시종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정제는 이 '모니'라는 글자가 바로 조용함과 침묵의 뜻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곳이 모니당인 만큼 될 수 있으면 말을 적게 할수록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간단하게 단예가 어떻게 되어 사악한 독에 중독되었는가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쪼록 세 분께서 큰 덕을 베푸시어 밝은 길을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관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단예를 또 한 차례 보고 나서 불었다.
[두 분 사제의 뜻은 어떠하오?]
본참은 말했다.
[설사 조금 내력을 소모하는 일이 있더라도 육맥신검을 연성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이다.]
보정제는 육맥신검이라는 네 글자를 듣자 깜짝 놀랐다.
(어릴 때 아버님으로부터 우리 단씨 조상에게 육맥신검 이라는 무공이 있어 위력이 무궁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전해지는 말일 뿐이며 어느 조상도 그 재간을 익혔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본참대사가 그와 같이 말한 것을 보면 확실히 육맥신검이라는 기이한 무공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본참대사의 그 말뜻은 내력으로 예아를 위해 해독을 시켜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필연코 그들이 수련하고 있는 육맥신검의 수련에 방해를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아가 중독된 사악한 독기와 사악한 무공은 괴상하기 짝이 없다. 만약 우리 다섯 사람이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 속으로 미안한 감을 느꼈으나 끝내 그는 한 마디의 사양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본상화상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동북쪽의 위치를 비스듬히 차지했다. 본관과 본참 역시 두곳의 방위에 나누어 섰다. 본인 방장은 말했다.
[선재로다!]
그는 서남쪽에서 약간 기운 위치를 차지했다. 보정제는 말했다.
[예아, 네 분의 장로께서는 공력이 소모되는 것을 무릅쓰고 너를 위해 사악한 독기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 빨리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라.]
단예는 백부의 표정과 네 승려의 행동을 보고 이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네 승려에게 일일이 큰 절을 올렸다. 네 승려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보정제는 말했다.
[예아, 너도 단정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라. 그리고 마음 속에서 모든 생각을 지워 버려라. 그리고 온몸의 힘을 빼라. 심한 아픔이나 근질거리는 것은 당연히 나타나는 증상이니 놀라거나 두려워 하지 말아라.]
단예는 대답을 하고 그 말에 따라 좌정했다. 본관화상은 오른쪽 엄지를 세우더니 약간 기를 돋우어 단예 뒤통수에 있는 풍부혈을 짚었다. 그리고 일양지력을 천천히 주입했다. 이 풍부혈은 목과 머리 사이에 위치했으며 독맥에속했다. 곧이어 본상화상이 그의 임맥자궁혈을 짚었다. 본참화상은 그의 음유맥, 대횡혈을 짚었다. 그리고 본인방장은 그의 충맥, 유문혈과 대맥의 장문혈을 짚었다. 보정제는 그의 음교맥, 청명혈을 짚었다. 기경팔맥에는 모두 여덟개의 경맥이 있었다. 다섯 사람은 양유, 양교 두 맥만으 짚지 않았다. 다섯 사람이 사용한 것은 모두 일양지였다. 양강한 힘으로 그의 몸에 들어 있는 사악한 독기와 사악한 내공을 양유와 양교 두 혈도를 통해 밖으로 몰아 내려는 것이었다. 이 오대고수가 일양지를 쌓은 조예는 거의 백중지간이라 할 수 있었다. 찍찍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다섯 줄기의 양강한 내력이 동시에 단예의 몸 안으로 주입되었다. 단예는 전신을 흠칫했다. 대뜸 몸이 나른한 것이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해졌다. 마치 겨울철 햇살이 몸에 쏟아지는 듯했다. 다섯 사람은 손가락을 연신 움직였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의 내력이 단예의 체내에 들어간 후 점차 융화되어 다시 거두어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예는 기경팔맥의 북명신공을 연마하지는 않았으나 다섯 명이 일양지를 강제로 주입하자 단예의 생각과 관계없이 주입된 내력은 그의 전중혈로 들어가 저축되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승려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놀람과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별안간 '우왁'하는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그소리를 듣는 순간 단예는 귀가 멍멍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보정제는 이것이 바로 불문의 극히 높은 무공인 사자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때 면벽을 하고 있던 승려가 입을 열었다.
[강적이 곧 들이닥치게 된다. 천룡사의 백년 위명이 그야말로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 이때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가 중독이 되었든 더위를 마셨든 그를 위해 공력을 소모할 수는 없소.]
이 몇 마디 말은 위엄으로 가득차 있었다. 본인방장은 말했다.
[사숙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리고 왼손을 휘둘었다. 다섯 사람은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보정제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고영장로께서 여기 계신 줄 모르고 이 후배가 예의를 차리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고영장로는 천룡사에서 배분이 가장 높은 분이었다. 면벽을 한 지 수십년이나 되었고 천룡사의 뭇 승려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의 참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보정제 역시 그 이름만 들었지 한번도 인사를 드린 적이 없었다. 줄곧 그는 쌍수원에서 홀로 수련에 정진한다고 들었을 뿐, 십여 년 간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이미 원적한 줄 알고 있었다.
고영장로는 말했다.
[일에는 가볍고 무거우며 느리고 급한 분별이 있다. 대설산의 대륜명왕과 약속된 시일은 금방 닥치게 된다. 정명, 너도 함께 육맥신검을 연구하도록 해라.]
보정제는 대답했다.
[예.]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대설산 대륜명왕은 불법에 깊이 통달한 자인데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실까?)
이때 본인방장이 품 속에서 한층 금빛이 찬란한 편지를 꺼내 보정제에게 내밀었다. 보정제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묵직했다. 신기하게도 그 편지는 황금을 엷게 펴서 만든 것이었다. 위에는 백금으로 문자를 상감해 놓고 있었는데 바로 범문이었다.
보정제는 그 글씨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는 금으로 만들어진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역시 한 장의 금으로 만들어진 편지였다. 거기에는 역시 범문으로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이 있었다.
<과거 고소 모용박 선생과 만나게 되어 친분을 맺게 되고 무공을 담론하게 되었소이다. 모용 선생은 그때 귀사의 육맥신검을 극구 칭찬했으나 육맥신검과 겨루어 보지 못해 유감으로 생각했었소이다. 그 분 모용 선생이 서거하셨다니 애통해 마지 않는 바이며 그 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귀사에 있는 육맥신검의 비검을 가져가 모용 선생의 묘 앞에서 태워 드릴까 합니다. 비급을 가지러 갈테니 거절하지 말았으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빈승 역시 귀중한 예물로 보답을 드리겠으며 결코 맨손으로 가져가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편지 끝에는 다음과 같은 서명이 적혀 있었다.
<대설산 대륜사 석자 구마지 합십백배>
편지에 나열된 범문 역시 백금으로 상감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야말로 정묘한 세공이었다. 틀림없이 고수가 되는 장인이 무수한 심혈을 기울어서 만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대륜명왕의 사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가히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보정제는 평소 대륜명왕 구마지가 토번국호국법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정제는 그가 높은 지혜를 갖추고 불법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매 오년마다 많은 승려들에게 불경을 설명한다고 들었으며 그 강연이 행해질 때마다 서역의 각 국의 고승과 덕 있는 자들이 대설산 대륜사에 모여 불경을 손에 들고 어려운 점을 물으며 연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법회가 끝나게 되면 모두들 기뻐하면서 찬탄을 금치 못한다고 하였다. 보정제 역시 한때는 그 법회에 참가할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편지에 고소 모용박과 무공을 논하다가 친구가 되었다고 쓴 것으로 볼 때 대륜명왕 구마지 역시 한 분의 무예 고수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그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무공을 배웠다 하면 반드시 초절한 무공을 지니게 될 것이었다.
그때 본인방장이 입을 열었다.
[육맥신검은 본사의 진사지보이며 대리 단씨 무학의 지고한 요결이외다. 정명, 우리 단씨 가문에서 최고로 심오한 무학이 천룡사에 있소이다. 그러나 그대는 속세의 사람이기 때문에 대리 단씨의 자손이지만 많은 무학의 비밀을 그대에게는 누설할 수 없소이다.]
보정제는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본관대사는 말했다.
[본사에 비장되어 육맥신검경은 정명, 정순도 모르는데 어떻게 고소 모용씨가 알게 되었을까요?]
단예는 거기까지 들었을 때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무량산의 동굴 안에 있는 낭환복지의 빈 서가에 붙어있던 쪽지가 생각난 것이었다. 그 쪽지에는 대리단씨라고 적혀져 있는 곳에 '일양지와 육맥신검은 수집하지 못했음'이라는 글자가 있지 않던가? 따라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신선누나는 천하 각 문파의 무학비급을 망라했으나 우리 집안의 일양지와 육맥신검경만은 손에 넣지 못한 모양이다.)
따라서 그는 속으로 의기양양해졌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서운한 감이 없지 않았다. 신선누나가 일양지와 육맥신검을 모으지 못해 심히 안타까워 했으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본참대사는 분연히 말했다.
[대륜명왕으로 말하면 역시 이 세상에서 이름난 고승이 아니오? 그런데 어째서 그토록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감히 육맥신검경을 강제로 달라고 한단 말이오? '좋은 자는 오지 않고 온 자는 좋지 않다'는 말이 있듯이 이 일은 정말 큰 문제이오. 그래서나 스스로 결정을 할 수가 없어 고영사숙께서 친히 나서서 이 일을 해결토록 했던 것이외다.]
본인방장은 말했다.
[본사에 육맥신검경이 있지만 부끄럽게도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그 경에 실린 무예를 연성하지 못했다오. 거기다가 고영사숙이 연구하신 무예는 또다른 신공인데 며칠 시일이 더 걸려야 대성할 수가 있소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공을 연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외부 사람들은 자연 모를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도 대륜명왕이 두려움없이 나서는 것을 보면 육맥신검의 위력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소?
고영은 냉랭히 말했다.
[그가 육맥신검을 감히 경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모용 선생을 존경하고 있다. 모용 선생 역시 육맥신검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륜명왕도 그와 같은 경을 가지고 있지만 연성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게다.]
보정제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가 그만큼 육맥신검을 우러러본다면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그가 육맥신검을 죽은 사람을 위해 불사르겠다고 하는 점이오. 이것이야말로 우리 천룡사를 너무 얕보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10. 육맥신검(六脈神劍)
본상대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제는 그런 일로 화를 내지 말게. 내가 보기에 대륜명왕은 결코 경망스런 자는 아니네. 옛날 오계찰(吳季札)의 무덤 앞에 검을 걸어놓은 일을 본받아 모용박을 기리려는 것같아. 그는 모용선생을 너무나 우러러 보는 것 같군. 아... 훌륭한 친구 모용박이 이미 세상을 떠나 다시 만나볼 수 없게 되다니...]
보정제는 말했다.
[본상대사는 모용 선생의 위인됨을 아십니까?]
본상대사는 말했다.
[난 모르오. 그러나 대륜명왕이 어떤 사람이오? 대륜명왕이 그토록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모용 선생은 정말 비상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그렇게 말하는 본상대사 역시 모용 선생을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본인방장은 말했다.
[사숙께서 적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우리들이 빨리 육맥신검을 연성하지 않는다면 육맥신검을 남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고 천룡사는 일패해서 위명이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오. 이 신검의 재간은 내력을 위주로 하는 만큼 짧은 시일에 대뜸 연성할 수는 없는 일이외다. 정명, 우리가 결코 예아의 문제에 대해서 구경하자는 것이 아니고 모두 내력을 크게 소모한 끝에 강적이 들이닥치게 될까봐 염려하는 것이외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좀처럼 감당하기 어렵소. 예아는 며칠 동안은 생명에 지장이 없을 터이니 큰 적을 물리치고 난 이후 우리들이 전력으로 그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이 어떻겠소?]
보정제는 단예의 병세를 지극히 염려하긴 했으나 대국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천룡사가 대리 단씨의 근원임을 알고 있었다. 황실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천룡사에서는 온 힘을 기울여 도와 주었고 언제나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과거 역적 양어정이 상덕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게 되었을 때 천룡사와 충신 고지승의 덕택으로 난을 평정했던 적이 있었다. 대리국은 건국한지 백 오십 팔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 동안 무수한 전란을 겪기도 했으나 위태로울 때마다 천룡사가 도와 주어 사직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천룡사가 위험을 당하는 것은 사직이 위기를 맞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보정제는 말했다.
[그런데 대륜명왕을 상대하는 일에 이 정명이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본인방장은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대는 우리 단씨의 일류 가는 고수이오. 만약 함께 손을 써서 강적을 막는다면 위세를 크게 증가 시킬 것이 틀림없소. 그러나 그대는 속세의 사람으로서 불문제자의 다툼에 뛰어들게 된다면 대륜명왕은 우리 천룡사가 사람이 없다고 비웃지 않을까 두렵구려.]
고영대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만약 각자 육맥신검을 연마하게 된다면 모두들 내력이 부족하니까 연마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 뻔하네. 따라서 나 역시 교묘한 방법을 생각했네. 각자 일맥(一脈)씩을 연마한 후 여섯 사람이 일제히 손을 쓰는 것이라네. 물론 여섯 사람이 한 사람의 적을 맞아 싸운다는 것은 영광스럽지 못한 것이지만 우리의 임무는 그와 무공시합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육맥신검경을 보존하고 절을 지키는 데 있으니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네. 그런데 정명이 힘을 합한다니 그처럼 좋은 일이 없네. 그렇지만 그가 육맥신검을 익혀 대륜명왕을 대적하려면 먼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야 하네.]
보정제는 말했다.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은 바로 제가 평소 바라던 바입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저의 능력으로 육맥신검을 연마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본참대사는 말했다.
[이 검법의 기본이 되는 재간은 그대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오. 오직 한동작의 검법만 기억하면 되는 것이오.]
보정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방장께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오.]
본인방장은 말했다.
[그럼 우선 앉으시오.]
보정제는 방석 위에 단정히 앉았다. 본인대사는 말했다.
[이 육맥신검은 쇠로 만든 검이 아니고 일양지의 지력을 검기(劍氣)처럼 날카롭게 변화시킨 것으로, 실체는 있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가히 무형기검(無形氣劍)이라고 할 수 있소. 육맥이라는 것은 손에 있는 여섯가지의 맥으로서 태음폐경(太陰肺經), 궐음심포경(厥陰心包經), 소음심경(少陰心經), 태양소장경(太陽小腸經), 양명위경(陽明胃經), 소양삼초경(少陽三焦經)이외다.]
그리고 본관대사의 방석 밑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내놓았다. 본참 대사는 이것을 받아 벽에 걸었다. 두루마리가 서서히 펼쳐졌다. 비단으로 만든 그것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인지 싯누런 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비단 위에는 나체 남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몸 위에 혈도의 부위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붉은 선과 검은 선으로 육맥이 운행하게 되는 경로를 표시해 놓고 있었다. 보정제는 일양지의 대가이니만큼 육맥신검이 일양지의 지력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단예는 이때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두루마리와 나체 남자의 도형을 보게 되자 신선누님의 그림이 그려진 북명신공을 익히는 비결이 수록된 두루마리가 생각났다.
(몸에 있는 혈도와 경맥은 남녀가 모두 똑같다. 그런데 신선누님은 참 이상하지? 어찌하여 벌거벗은 여인의 모습을 그렸으며 또 그 여인의 얼굴을 자기의 모습과 똑같이 그려 놓았을까?)
그는 신선누나가 일부러 색(色)으로 사람을 유혹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부득불 그림에 그려져 있는 신공을 연마하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생각한다는 것은 신선누나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다시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인대사는 보정제를 향해 말했다.
[이 육맥신검은 속가 제자에게는 전수하지 않는 바이니 그대가 머리를 깎아야 전수해 줄 수가 있소. 그리고 강적을 물리친 이후에 다시 환속하도록 하오.]
보정제는 몸을 돌려 일으켜서는 두 무릎을 꿇었다.
[대사께서 자비를 베푸소서.]
고영대사는 말했다.
[이리 다가오오. 이제 내가 머리를 깎아 주겠소.]
보정제는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단예는 백부가 삭발하여 중이 되려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영 대사는 오른손을 내밀고 보정제의 머리를 감싸쥐었다 손바닥에는 한 점의 살도 붙어 있지 않는 것 같았으며 살가죽이 뼈를 감싸고 있는 듯 앙상한 손이었다. 고영대사는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일미진중입삼매(一微塵中入三昧), 성취일정미진정(成就一切微塵定), 이피미진역불증(而彼微塵亦不增), 어일보현난사찰(於一普現難思刹).]
이때 보정제의 머리를 덮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들이 모조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머리에는 한 가닥의 머리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제도로 싹미는 것보다 깨끗했다. 이때 고영대사는 입을 열었다.
[불문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법명을 본진(本塵)으로 하라.]
보정제는 합장을 했다.
[사부께서 명을 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불문에서는 세속의 배분을 따지지 않았다. 본인방장은 보정제의 숙부가 되지만 보정제가 고영대사에게 삭박을 당함으로써 그만 본인대사의 사제가 된 셈이었다. 그 즉시 보정제는 승려 복장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나니 마치 득도한 고승 같았다. 고영대사는 입을 열었다.
[그 대륜명왕은 어쩌면 오늘밤 도달할지도 모른다. 본인, 육맥 신검의 오묘한 점을 본진에게 전하도록 하라.]
본인대사는 대답했다.
[예.]
그리고 그는 벽 위에 걸린 경맥도를 가리켰다.
[본진사제, 이 육맥 가운데 전문적으로 수소양삼초경맥(手少陽三焦經脈)을 연마하도록 하시오. 진기를 단전에서부터 어깨와 팔에 있는 혈도로 끌어올렸다가 청냉연(淸冷淵)에서 천정(天井)으로 내려와서는 아래의 사독(四瀆), 삼양락(三陽絡), 회종(會宗), 외관(外觀), 양지(陽池), 중저(中渚), 앵문(앵門)으로 내려보내 진기를 모았다가, 무명지의 관충혈로 쏘아내는 것이오.]
보정제는 그 말을 따라 운기행공하여 진기를 끌어올려서는 두 명지를 한번 질러냈다. 그러자 '찍찍'하는 소리가 나면서 진기는 광충혈에서 칼날같이 쏘아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고영대사는 기뻐서 말했다.
[그대의 내력 조예가 비범하군. 이 검법은 변화무쌍하고 복잡하지만 검기가 이미 형체를 이루게 되었으니 저절로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연마하게.]
본인대사는 말했다.
[육맥신검은 본래 한 사람이 동시에 육맥검기를 펼쳐내는 것이요. 하지만 그토록 강맹하고 웅후한 내력을 연마하여 모을 수 있는 사람은 찾기 어렵소. 따라서 우리는 부득이 여섯 사람이 나누어 육맥검기를 펼쳐야 하는 것이외다. 사숙께서는 엄지손가락으로 펼치는 소상검을 연마하시고 빈승은 전문적으로 식지의 상양검을 연마하며, 본관형은 중지의 증충검을 연마하시고 본진사제는 무명지의 관충검을 연마하며, 본상사형은 새끼손가락의 소충검을 연마하시고 본참사제는 왼손의 새끼손가락의 소택검(少澤劍)을 연마하도록 합시다. 자, 이제 늦지 않게 우리들은 곧 연마에 들어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는 여섯 폭의 도형을 꺼내 사면의 벽에 걸었다. 소상검의 도형은 고영대사의 앞에 걸었다. 그 한 폭의 그림 위에는 종횡으로 나누어지고 교차되는 직선과 원 그리고 곡선 등이 그려져 있었다. 여섯 사람은 전문적으로 자기가 연마하게 된 일검의 검기만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단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체내의 진기가 요동치는 바람에 조금 전보다 더욱더 참기가 어려웠다. 원래 보정제 본인 등 다섯 사람은 조금 전에 적지 않는 내력을 그의 몸안으로 주입시켜 주었던 것이다. 단예는 백부와 방장 등이 형색을 가다듬고 공부하고 있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자니 매우 무료했다. 그는 고영대사의 앞에 걸려 있는 경맥 혈도가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순간 그는 자기의 오른팔이 끊임없이 흔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어떤 물건이 살갗을 뚫고 쏟아 나오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물건이 뒤쳐 나오려고 하는 것은 바로 혈도의 그림에 표시된 공취혈(孔吹穴)이었다. 이 일련의 수태음폐경은 그가 연마한 바가 있었다. 벽에 걸린 도형 속의 혈도는 북명신공을 설명한 그림의 혈도와 같았다. 다만 노선이 전혀 달랐을 뿐이었다. 경맥도의 붉은 선을 다라 바라보니 공취혈에서 대연(大淵)에 이르게 되고 다시 건너뛰어 척택(尺澤)으로 되돌아 왔다가 재차 아래로 내려가 어제(御提)에 도달했다. 비록 맴돌고 왔다갔다 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체내의 한 줄기 좌충우돌하는 진기는 놀랍게도 그의 마음의 뜻을 따라 팔을 따라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팔꿈치에 이르렀다가는 다시 어깨로 올라갔다. 진기는 경맥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되자 전신의 답답한 느낌이 즉시 감소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전심전력으로 그 진기를 전중혈로 몰아 넣었다. 그런데 경맥의 운행이 빠르니만큼 그 한 가닥의 진기는 나녀가 그려진 두루마리에 그려진 진기의 운행방법처럼 순조럽게 진중혈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얼마 후 그는 다시 '어이쿠'하는 소리를 내지르게 되었다. 보정제는 그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좀, 어떠냐?]
단예는 말했다.
[제 몸에는 무수한 진기가 마구 날뛰고 있는 것 같아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마음 속으로 서백조 앞에 있는 그림 위의 빨간선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 진기는 그만 전중혈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이쿠! 그런데 전중혈이 자꾸만 진기로 가득 차게 되어서 이제는 더 몰아 넣을 수가 없습니다...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보정제는 내공을 연마하는 사람이 당하는 현상을 잘 알고 있었다. 본래 전중혈이 팽창되어서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되는 현상은 적어도 내공을 연마한 지 이십년 후에 나타난다. 이때 쯤이면 내력이 웅후하게 되어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예는 한번도 내공을 익힌 바가 없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현상은 체내의 사악한 독기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정제는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만약 그가 진기를 이끌어 순조롭게 길들이지 않는다면 전신이 곧 마비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그 사악한 독기는 사람의 내장에 깊이 파로들게 될 것이고 이후 다시 몰아내려 하더라도 여간 어렵지 않게 되었다. 보정제는 평소 어떤 의문나는 일이나 어려운 큰 일을 과단성있게 처리해 왔다. 그러나 지금 눈 앞의 일은 단예의 생사회복과 관계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목숨을 잃을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예의 눈빛을 보니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지 않은가? 그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곧 결단을 내렸다.
[지금 이때로서는 독약을 먹여 갈증을 푸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예아, 내가 너에게 도기귀허(導氣歸虛)의 요결을 알려 주마.]
보정제는 즉시 설명을 해가면서 요결을 단예에게 전수했다. 단예는 다 듣기도 전에 실행에 옮겼다. 대리 단씨의 내공 요결은 정말 정묘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가 따라서 행하게 되자 사방으로 뛰듯이 날뛰던 진기는 하나로 모여들어서는 오장육부에 스며들었다. 중국에서는 인체의 내부기관을 오장육부라 한다. 오장의 장은 바로 감춘다는 뜻도 되고 육부의 부는 원래 축적한다는 뜻이 있었다. 단예는 이미 무량검파의 일곱 제자의 내력을 흡취하게 되었고 그 후 다시 단연경, 황미승, 섭이랑, 남해악신, 운중학, 종만구, 최백천 등 고수의 일부 내력을 흡수한 데다가 이 날에는 재차 보정제, 본관,본상, 본인, 본참 등 오대고수의 일부분의 내력을 흡취하게 되었다. 따라서 몸 속에 축적된 진기의 웅후함과 내력의 고강함은 그야말로 천고에 드물 정도였고 세상을 통털어서도 그를 따를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때 백부의 가르침을 받게 되자, 단예는 그와 같은 진기의 내력을 점차 오장육부로 갈무리하게 되어 전신은 차츰차츰 쾌적해졌다. 그리고 두둥실하니 몸이 금방 허공에 떠오를 것처럼 가벼워졌다. 보정제는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단예가 아직도 사악한 독기가 이후부터는 한평생 그를 붙잡고 늘어지게 될 것이며 다시는 깡그리 없앨래야 없앨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된다면 단예는 한평생 짐을 지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불현듯 나직한 탄식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영대사는 보정제가 단예에게 가르쳐 주기를 마치자 입을 열었다.
[본진, 모든 것은 자기의 하기에 달렸다. 그리고 옳고 그릇된 일과 화복은 마음에서 생긴다네. 너무 다른 사람을 염려하지 말고 빨리 소양검이나 익히도록 하게.]
보정제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예.]
그는 심신을 가다듬고는 다시 소양검법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단예는 체내에 진기가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일시에 모조리 다스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요결은 행하면 행할수록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갈수록 빨리 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모니당의 일곱 사람은 각자가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덧 동녘 하늘이 훤히 밝아왔다. 이때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단예는 사지백헤에 멋대로 뛰노는 진기가 모두 사라졌음을 느끼고 몸을 일으켜서 사지를 움직여 보았다. 백주와 다섯 분의 고승들이 여전히 검법연마에 전념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감히 문을 열고 나서서 산책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여섯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봐 더욱더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무 할일도 없자 그는 백부가 연구하는 경맥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소양검의 검법도해를 주시했다. 육맥신검을 속가 제자에게 전수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와 같은 고심한 무공을 자기가 금방 어떻게 배울 수 없을테니 잠시 구경하는 것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심신을 가다듬고 한참 바라보게 되자 갑자기 한 가닥 진기가 저절로 단전에서 우러나와 어깨쭉지와 팔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붉은 선들을 따라 곧장 무명지의 관충혈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는 운기행공해서 진기를 내쏟을 줄 몰랐으나 그 순간 무명지의 끝쪽이 팽창되는 듯한 괴로운 감을 느끼고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 진기가 되돌아 가도록 하는 게 낫겠다.)
이와 같이 생각하자 그 한 가닥 진기는 정말 그의 뜻을 따라 경맥을 거쳐서는 단전으로 되돌아 갔다. 단예는 부지불식간에 상승내공의 요결을 엿보게 된 셈이었다. 그는 한가닥 진기가 손과 발에서 오락가락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모니당의 세 승려 가운데 그는 본상대사가 가장 온화하고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 의 수소음심경맥도를 바라보았다. 이 경맥은 겨드랑이 아래에 있는 극천혈(極天穴)에서 시작되어 팔꿈치 위쪽의 삼촌(三寸)에서 청명혈(淸冥穴)에 이르렀다가 다시 팔굽이 움푹 꺼진 곳에 있는 소해혈로 왔다가 염도, 통리, 심문, 소부 같은 혈도를 거쳐 새끼손가락이 있는 소충혈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단예가 그와 같은 순서를 밟아 천천히 생각을 떠올리자 한 가닥 진기는 아니나 다를까 그 경맥 노선을 따라 움직였다. 따라서 늦었다가 빠르다가 하는 것은 마음데로 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무척 잘 되기도 했고 때로는 잘 되지 않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그와 같은 현상을 공력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반 나절 동안 단예는 이내 여섯 장의 도형 위에 그려진 각각의 육맥신검을 모조리 연마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자 전신이 상쾌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사미가 어찌해서 먹을 것을 갖다 주지 않지? 살그머니 나가서 먹을 것을 찾아 먹을까 보다.)
바로 이때, 바깥에서 갑자기 부드러운 단향냄새가 풍겼다. 곧이어 맑고 높은 범창소리가멀리서 들려왔다.
고영 대사는 말했다.
[대륜명왕이 도달했군! 자네들은 어느 정도까지 연마하였는가?]
본참은 대답했다.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으나 충분히 적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영은 말했다.
[그렇다. 본인, 나는 걸음을 걷기가 싫으니 명왕으로 하여금 이 모니당으로 들어와서 만나자고 하게나.]
본인방장은 대답했다.
[예.]
본관대사는 다섯 개의 방석을 한 줄로 동쪽에 나란히 놓았다. 그리고 서쪽에도 하나의 방석을 놓았다. 그리고 그 자신은 동쪽 첫번재 방석 위에 앉았다. 본상은 두번 째 방석 위에 앉았고 본참은 네 번재 방석 위에 앉았다. 세번째 방석은 본인방장을 위해 남겨둔 것이었다. 그리고 보정제는 다섯번째의 방석에 앉았다. 단예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보정제의 등 뒤에 서게 되었다. 고영대사와 본관 등은 취후로 한번 더 검법도해를 바라본후 두루마리의 그림을 말아서 갈무리한 후 고영 대사의 앞에 갖다 놓았다. 보정제는 단예에게 당부했다.
[예아, 싸우게 된다면 이 방안에 검기가 충전하게 될 것이니 크게 위험할지도 모른다.이 백부는 마음을 나누어서 너를 보호할 수가 없구나, 너는 밖으로 밖으로 나가 있도록 해라.]
단예는 속으로 괴로웠다.
(여러 사람의 말투로 보아, 대륜명왕의 무공이 아주 무서운 것 같구나. 백부님의 관충검법은 새로이 연마한 것인데 상대방을 맞아 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백부님, 저는... 백부님의 곁에 있겠습니다. 저는 백부님이 상대방과 검기로 싸우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뒤의 몇 마디를 하게 될 때는 목이 메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보정제는 마음이 움직였다.
(이 애는 자비심이 퍽이나 깊구나!)
이때 고영대사가 입을 열었다.
[예아, 너는 내 앞에 앉거라. 대륜명왕이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너의 털끝 하나 해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음성은 전과 같이 차가왔으나 그 어조에는 오만한 기색이 감추어져 있었다. 단예는 대답했다.
[예.]
그리고 허리를 구부리고 고영대사 앞으로 다가갔다. 감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역시 가부좌를 튼 채 벽을 향해 앉았다. 보정제는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삽시간에 모니당은 조용해졌다. 본인방장이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왕께서는 이쪽 모니당으로 가시지요.]
그러자 다른 한 소리가 대답했다.
[수고스럽겠지만 방장께서 앞장을 서 주시오.]
단예는 그 소리가 매우 친절하고 온화하여 결코 흉폭한 사람같지 않다고 느꼈다. 곧이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본인은 판자문을 열고 말했다.
[명왕, 안으로 들어 가시지요.]
대륜명왕은 말했다.
[실례하오.]
그리고 그는 실내로 들어와 고영대사에사 합장을 했다.
[토번국의 후배인 구마지가 선배대사에게 인사드립니다. 유상(有相)이 무상(無相)이며 쌍수(雙樹)는 고영(枯榮)으로 나누어지니 동서남북(東西南北)에 비가비공(非假非空)이외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몇 마디의 말은 무슨 뜻일까?)
고영대사는 속으로 퍽이나 놀라워했다.
(대륜명왕은 정말 박학하고 무공이 심오하구나. 정말 명불허전이다. 나를 보자마자 내가 연구하고 있는 고선(枯禪)의 내력을 간파하는구나!)
세존인 석가모니는 사라쌍수(沙羅雙樹) 사이에서 입적을 했다. 이때 동서남북으로 각기 사라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는데 나무 가운데 어떤 것은 울창하고 어떤 것은 시들했다. 그리하여 이를 가리켜 사고사영(四枯四榮)이라고 했으며, 불경에서 풀이하는 데 따르면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즉 동쪽의 쌍수는 상(常)과 무상(無常)을 의미하고 남쪽의 쌍수는 낙(樂) 무락(無樂)을 의미하며, 서쪽의 쌍수는 아(我)와 무아(無我)를 의미하며, 북방의 쌍수는 정(淨)과 무정(無淨)을 의미한다고 했다. 무성한 나무는 곧 열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고, 앙상하게 비틀어진 나무는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는바 무상(無常), 무락(無樂), 무아(無我), 무정(無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석가여래는 바로 이와 같은 여덟 경계의 사이에서 입적을 한 것이니 그 뜻은 곧 앙상하게 마른 것도 아니요 무성한 것도 아니며 공허한 것도 아니고 뚜렷한 모습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고영대사는 수 십 년간 고(枯)를 참선하였지만은 아직까지도 반고반영(半枯半榮)의 경지에 도달했을 뿐이었고 더욱더 높은 비고비영(非枯非榮), 역고역영(亦枯亦榮)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따라서 대륜명왕의 말을 듣자 그만 섬칫해져서는 말했다.
[명왕께서 멀리서 오시는 데 이 늙은이가 멀리 나가서 영접하지 못함을 자비롭게 생각해 주시오.]
대륜명왕 구마지는 말했다.
[천룡(天龍)의 위명을 소승이 평소 크게 흠모하던 참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장엄한 모습을 대하게 되니 정말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본인방장은 말했다.
[명왕께서는 앉으시지요.]
구마지는 곧장 말을 하고 앉았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대륜명왕은 어떻게 생긴 모습일까?)
그리하여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고영대사의 옆으로 그는 대륜명왕을 살펴본 것이다. 그런데 서쪽의 방석 위에는 한 사람의 승려가 앉아 있었다. 몸에는 황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오십도 되어 보이지 않는 나이에 포의(布衣)에 망혜(芒鞋)를 신었는데 얼굴은 훤했고 은연중 보광(寶光)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하나의 명주구슬처럼 저절로 빛나는 듯했다. 단예는 그를 한 번 쳐다본 순간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러보는 마음이 생기고 다정한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그는 판자문 밖을 살폈다. 문 밖에는 팔구 명이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얼굴 모습은 대체로 흉칙한 편이었다. 중원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아마 대륜명왕이 데리고 온 시종들인 모양이었다. 이때 구마지는 두 손으로 합장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부처님께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했습니다. 소승은 본래 그릇이 우둔하여 사랑과 미움, 죽음과 삶의 이치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소승에게는 한 평생 한 사람의 친구를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그 사람은 대송(大宋)나라의 고소지방 사람으로서 성은 모용이고 이름은 박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소승과 그가 우연히 상봉하게 되고 우열을 논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모용 선생은 천하의 무학을 모조리 다 알고 있었으며 하나같이 정통하고 있었습니다. 소승은 그로부터 며칠간 가르침을 받게 되고 한평생 가지고 있떤 의문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터득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모용 선생으로부터 상승무학의 비급을 선물 받아 깊은 은덕을 느끼게 되었고 그 일은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영웅을 하늘이 시기한 듯 좀더 오래도록 살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모용 선생은 극락왕생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소승에게는 부득이한 청이 있는바 뭇 장로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본인방장은 말했다.
[명왕과 모용 선생이 사귀게 된 것은 인연이 아닙니까. 인연이 다한 것을 억지로 요구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용 선생이 왕생극락하여 연꽃이 떠 있는 연못가의 부처님이 되셨으니 인간의 무학에 어찌 다시 뜻을 두겠습니까. 명왕의 이와 같은 행동은 부질없는 노릇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구마지는 말했다.
[방장의 말씀에도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승은 성격이 고집스러워서 사십여 일간 폐관을 했는데도 시종 친구의 정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모용 선생은 과거 천하의 무예를 논하면서 대리 천룡사의 육맥신검을 천하의 검법 가운데 제일 간다고 했으나 한번 볼 수 없어서 한스럽게 여기며 한평생 최대의 유감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본인 방장은 말했다.
[폐사는 이 남쪽땅에 위치한 보잘것없는 곳인데도 모용 선생이 그토록 사랑해 주셨다니 실로 영광스럽기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서 과거 모용 선생은 친히 육맥신검경을 보자고 말씀을 하지 않았을까요.]
구마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서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모용 선생은 그 비급이 귀사의 진사지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보자고만 한다면 반드시 응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죠. 그는 대리 단씨는 제왕의 자리에 올라 부귀를 누리고 있으나 강호의 의리를 잊지 않고 인의로써 백성을 사랑하시니 모든 창생이 그덕을 입고 있어서 그로서는 감히 도적질을 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본인방장은 사의를 표했다.
[모용 선생이 그토록 칭찬을 해주시니 고맙소이다. 모용 선생은 우리 대리 단씨를 대단히 높게 보신 모양인데 명왕께서는 그의 훌륭한 친구이시니까 응당 모용 선생의 뜻을 받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마지는 말했다.
[그런데 그 날 소승은 크게 생색을 내었습니다. 소승은 토번국의 국사(國師)이니 대리 단씨와는 아무런 연고관계가 없다. 그리고 토번과 대리 양국은 어떤 관계도 수립되어 있지 않다. 모용 선생이 취하기에 불편하다면 소승이 대신 수고를 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대장부가 한 마디를 뱉은 이상 생사를 불구하고 후회없이 그 말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소승은 모용 선생에게 그와 같은 약속을 했으므로 결코 실언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어 가볍게 세 번 손뼉을 쳤다. 그러자 문밖에 있던 두 명의 사내가 하나의 나무상자를 들고와서는 바닥 위에 놨다. 구마지는 소매자락을 한번 펼쳤다. 그러자 그 상자의 뚜껑이 바람도 일지 않는데도 저절로 열렸다. 그 안에는 찬연한 빛이 도는 하나의 황금으로 된 조그만 상자가 놓여 있었다. 구마지는 다시 몸을 구부리고 그 금으로 만들어진 상자를 꺼내서는 손 안에 받쳐들었다. 본인방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들은 출가인인데 이런 진가진보를 좋아하는 줄 아는가 보군. 더군다나 단씨는 대리 일국의 군주이며 백 오십여 년간의 공양을 받아온 바 금은 그릇이 없을까봐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일까.)
이때 구마지는 끌러놓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꺼내는 것은 세 권의 낡은 책이었다. 그는 헌책을 뒤적거렸다. 본인 등은 급히 바라보았다. 그 책 안에는 그림도 있고 글자도 있었다. 그것은 모두 주사나 먹으로 쓴 것이었다. 구마지는 그 세 권의 책을 한참 들여다 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뚝뚝 흐르는 눈물은 앞섶자락을 적셨는데 그 표정은 매우 애절해 보였고 슬픔을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본인 등은 하나같이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고영대사가 입을 열었다.
[명왕은 옛친구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곧 속세의 인연을 깨끗이 떨쳐 버리지 못한게 아니겠소. 따라서 고승이란 두 글자가 부끄럽지 않으시오?]
대륜명왕은 고개를 숙였다.
[대사께서는 대지혜와 신통력을 갖추신 분으로서 결코 소승이 따를 바가 아닙니다. 이 세 권의 무공비급은 모용 선생이 지은 것으로서 소림사 칠십 이 종 절기의 요결과 연마하는 법을 서술하고 또한 깨뜨리는 방법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게 되었다.
(소림사의 칠십 이종 절기는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다. 듣자니까 소림은 문파를 창립한 이래 송나라 초 한 분의 고승이 스물 네 가지의 절기를 연마하는 데 성공했을 뿐 그 후에는 이십 가지 이상의 절예를 연마한 승려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모용 선생이 소림 칠십 이 종의 절기의 요결을 다 알고 있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 절기를 깨뜨리는 방법까지도 모조리 알고 있다니 그거야말로 믿어지지 않는 노릇이구나!)
구마지는 계속해서 말했다.
[모용 선생은 이 세 권의 기서를 저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제 이 세 권의 기서를 귀사의 육맥신검보경과 교환하고자 합니다. 응낙하시어 소승으로 하여금 옛날의 야속을 지키게 해 준다면 여간 고마울 데가 없겠습니다.]
본인방장은 아무 말 않고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저 세 권에 실려진 것이 정말 소림사 칠십 이 가지의 절기라고 한다면, 본사에서 그 책을 얻은 후 무학에 있어서는 비단 소림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뿐 아니라 소림사보다도 더욱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룡사에서는 소림절기를 다 알고 있는 반면에 본사의 절기를 소림사에서는 모조리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구마지는 다시 말했다.
[귀사께서 보경을 내려주실 때 사본을 남겨 두셔도 좋습니다. 뭇대사들께서 이 소승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것은 백골이 된 모용선생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승이 보경을 받는 즉시 봉해서 결코 사사로이 엿보지 않고 친히 모용 선생의 무덤 앞으로 가져가 태우겠습니다. 따라서 귀사의 절기는 결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귀사의 뭇 대사들은 무학이 깊으니 본래 남의 것을 빌려볼 필요는 없겠으나 타산지석으로 옥을 다담을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소림사의 칠십 이 가지 절기는 확실히 독특한 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점화지, 다라엽지, 무상겁지 세가지의 손가락을 쓰는 무예는 귀사 일양지와 상호 대조할 수 있는 무공이란 사실입니다.]
이제 그가 천천히 설명하는 말을 듣자니 퍽 일리 있는 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행동은 천룡사에도 이익이 클뿐 아니라 결코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본상대사는 상대방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허락할 뜻이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위치로 따져 방장이 천룡사에서는 제일로 이지만 신분에 있어서 가장 존귀한 사숙이 옆에 있지 않은가? 그런 그는 뭐라고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구마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소승은 나이도 적고 견식이 적어서 뭇 대사님의 신임을 얻기에 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니 소림 칠십 이 절기 가운데 세 가지의 기법을 먼저 여러분 앞에 꼴 사나우나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몸을 일으키고서는 말했다.
[소승은 과거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연마한 것이라서 매우 조야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게서 지도를 해주십시오. 이 지법은 점화지라고 합니다.]
그는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과 식지를 가볍게 모았다. 마치 한 송이의 꽃처럼 둥글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는 왼손 다섯 손가락을 오른쪽을 향해 가볍게 내밀었다. 모니당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단예외에는 하나같이 한평생 지법을 연구해온 대가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륜명왕의 손가락이 부드럽기 이를데 없고 또 왼손에서 매번 퉁길 때마다 마치 오른쪽 손에 들고 있는 꽃에 맺혀 있는 이슬을 털기라도 하는 듯하고 또한 혹시나 꽃잎을 상하지 않게 하느라고 조심한 듯할 뿐 아니라 얼굴에는 시종 인자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 것이 퍽이나 깊 터득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불교계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영산에서 설법을 하실 때 금빛의 바라화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고한다. 그런데 뭇 사람들은 그 뜻을 모르고 잠자코 있었는데 다만 가섭만이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가섭만이 자기의 설법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고는 입을 열었다.
[나에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법이 있는데 바로 열반의 법문으로서, 실상은 무상으로서 미묘하기 끝이 없는 법문이다 문자로 화하게 하여 남에게 알려줄 수 없다. 그러니 네가 가섭에게 알아보도록 하라.]
불교의 선종에서는 마음으로 터득한 것을 제일로 높이 여겼다. 소림사는 바로 선종에 속했다. 따라서 이 점화지에는 물론 달리 정묘한 연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졌다.
그런데 구마지가 손가락으로 튕기는 동안 점화지가 어떤 신통력을 가졌는 지를 곧 알아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는 잇따라 수십번을 튕기더니 오른손의 소맷자락을 쳐들고는 입김을 훅 하니 옷자락에다가 불었다. 그러자 삽시간에 그 소맷자락에서는 바둑 알만한 둥근 베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옷자락에는 수십개의 구멍이 뻥 뚤려 있었다. 원래 그는 수십번 점화지를 펼쳐서는 허공을 격하고 자기의 옷자락을 찔렀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힘으로 옷자락에 손상을 입혔기 때문에 처음 볼때에는 아무흔적도 나지 않았으나 한번 입김으로 불자 점화지의 위력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 것이다. 본인과 본관, 본상, 본참, 보정제등은 서로 쳐다보았으며 하나같이 속으로 경탄해마지 않았다.
(우리의 공력으로 일양지의 수법을 써서 허공을 격하고 짚는다면 옷에다 구멍을 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손가락을 그토록 부드럽게 쓰고 온화한 얼굴에 미소마저 띠우는 사이 신공을 편다는 것은 결코 우리로서 할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점화지는 일양지와 전혀 달라 그 오묘한 내력은 우리가 충분히 본받을 만한 데가 있구나.)
구마지는 미소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소승의 점화지 지력은 소림사의 현도 대사에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라엽지는 점화지보다 더욱 오묘하답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서는 바닥 위에 놓은 나무상자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재빠른 걸음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열 손가락을 신통무비하게 잇따라 찔러내었다. 그러자 나무상자 위에 나무톱밥과 같은 나무조각들이 다투어 일었다. 삽시간에 하나의 나무상자는 가루처럼 부숴져 없어지고 말았다. 보정제는 그가 나무상자를 손가락으로 부수는데 대해서는 별로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상자에 붙어 있는 청첩, 구리조각, 무쇠로 만든 고리 열쇠 등 쇠붙이 부속품도 그의 지력 아래에 다투어 쪼개져 나가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래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구마지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승은 다라엽지를 펼쳤습니다만은, 패도한 지법으로서 무상겁지는 완전히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두 손을 옷자락 속에 집어넣었다. 별안간 한 무더기의 나뭇조각들이 툭툭 뛰듯이 날아올랐다가 떨어지곤 했다. 그런데 구마지를 바라보니 그는 시종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우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승포의 소매자락이 한번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원래 그는 지력을 소매자락 속에서 암암리에 쏟아낸 것인데 전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본상대사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칭찬의 말을 던졌다.
[무상겁지! 정말 명불허전이오! 탄복했소이다!]
구마지는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대사께서는 과찬이십니다. 나무조각들이 튕기는 것은 바로 유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높은 경지까지 연마하려면 무형무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한평생의 공을 들인다 하더라도 쉽게 연성할 수는 없습니다.]
본상대사는 물었다.
[모용 선생이 남긴 기술 가운데 무상겁지를 깨뜨리는 요결이 있습니까.]
구마지는 말했다.
[있습니다. 그 깨뜨리는 방법은 바로 대사의 법명에서 착상할 수 있습니다.]
본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본상으로서 무상을 깨뜨린다 이 말씀이죠? 정말 고명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본인, 본관, 본상, 본참, 네 승려는 구마지가 세 가지 지력을 연마해 보이는 것을 보고 크게 마음이 움직였다. 따라서 그들은 세권의 기서에 실린 내용이 천하에 이름높은 소림의 칠십 두가지 절기라는 것을 확신했다. 따라서 그들은 육맥신검의 도보를 따로 복사해서는 교환하면 어떨까 하고 크게 망설였다. 이에 본인대사가 말을 열었다.
[사숙, 명왕께서는 멀리 오셨으며 또 그 뜻이 매우 성의에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응당 어떻게 대접해야 될 것인지 사숙께서는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고영대사는 말했다.
[본인, 우리가 무공을 연마하고 예를 익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지.]
본인방장은 사숙이 그와 같은 질문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그거야 법과 나라를 지키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영대사는 말했다.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게 되었을 때 우리들이 닦은 도가 얕아 불법으로써 상대방을 교화시킬 수 없을 때는 반드시 손을 써서 항복을 받아야 하는데, 그때 어떤 재간을 펼쳐야 하지?]
본인대사는 대답했다.
[만약 부득이하여 손을 쓰게 된다면 응당 일양지를 펼쳐야 하겠지요.]
고영대사는 물었다.
[그대가 일양지를 연마한 경지는 어느 정도인가?]
본인은 이마에서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제자 우둔하고 또 열심히 배우지 못해 지금까지 겨우 제 사품까지 연마하는데 그쳤습니다.]
고영대사는 다시 물었다.
[그대의 견해로 대리 단씨의 일양지와 소림의 점화지, 다라엽지, 무상겁지, 세 가지의 지법과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본인은 말했다.
[지법에 있어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듭니다. 공력의 고가에 따라 다르겠지요.]
고영대사는 말했다.
[맞았다. 우리의 일양지를 만약 제 이품까지 연마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지?]
본인대사는 말했다.
[그 깊이는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제자로서는 함부로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고영대사는 말했다.
[만약 그대가 다시 백 년을 더 살게 된다면 몇 품까지 연마할 수 있겠는가?]
본인대사는 이마에서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
[제자로서는 모르겠습니다.]
고영대사는 물었다.
[제 이 품까지 연성할 수 있겠는가?]
본인대사는 말했다.
[결코 불가능합니다.]
고영대사는 이에 이르러 더 말하지 않았다. 본인대사는 말했다.
[사숙의 가르침이 무척 옳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일양지조차 완전하게 연성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무학기경을 얻어 무엇에 쓰겠습니까? 명왕께서는 멀리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으니 폐사에서는 제밥으로써 대접할까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륜명왕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구마지는 길게 탄식했다.
[모두 소승이 옛날 쓸데 없는 한마디를 한 것이 잘못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모용 선생께서 이미 돌아가신 이때 육맥신검경을 손에 넣는 것과 안 넣는 것이 무슨 중요함이 있겠습니까. 소승은 오늘 건방지게도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도 넓은지 모르는 말을 하겠습니다. 이 육맥신검의 검법이 정말 모용선생이 말한 것처럼 그토록 절묘하다면 아마도 귀사에서는 그 도보를 가지고 있지만 연성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누가 있어 연성할 수 있다면 이 검법은 모용 선생이 칭찬한것처럼 그토록 심오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고영대사는 말했다.
[이 늙은이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소. 명왕에게 가르침을 받을까 하오.]
구마지는 말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고영대사는 말했다.
[폐사에 육맥신검경이 있다는 일은 우리 단씨의 속가제자라 하더라도 모르고 있는 일인데 모용 선생은 어디서 그와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합디까?]
구마지는 말했다.
[모용 선생은 천하무학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매우 넓었습니다. 각 문 각 파의 비기무공에 대해서 종종 그 파의 장문인까지도 모르는 것을 모용 선생은 손바닥 들여다 보듯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소 모용의 '그 방법으로 그 사람에 펼친다'는 말은 바로 이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죠. 그러나 모용 선생은 대리 단씨의 일양지와 육맥신검의 오묘한 점에 대해서는 시종 그 요결을 엿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 평생 유감스럽게 생각하다가 한을 품은채 이 세상을 등지게 된 것이지요.]
고영대사는 더 말하지 않았다. 보정제 등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만약에 그가 일양지와 육맥신검의 오묘한 점을 터득했다면 바로 그와같은 수법으로써 우리 단씨의 몸에 펼쳤을 것이 아닌가?)
본인방장은 말했다.
[저의 사숙께선 십여 년간 외부에서 온 손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명왕께서는 당금 세상의 고승이시라 저의 사숙께서 파격적으로 만나드린것 입니다. 자 이제 명왕께서는 나가 보실까요.]
그러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것은 손님을 전송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구마지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귀사에서는 어째서 그토록 중시하십니까. 그리하여 만약 천룡사와 대륜사의 화기애애한 관계를 해치게 되고 대리국과 토번국의 외교관계를 해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본인대사의 안색이 약간 변하면서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명왕의 말씀은 천룡사가 만약 검경을 내놓지 않는다면 대리와 토번 양국은 전쟁을 일으킨다는 뜻입니까.]
보정제는 언제나 많은 병사를 서북쪽 변경지대에 머물게 하고 있었다. 즉 토번국의 침입을 막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마지의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자연 신경을 기울여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구마지는 말했다.
[우리 토번국의 군주께서는 오래 전부터 대리국의 풍토와 인정을 흠모해 왔습니다. 그리고 일찌기 귀국의 군주와 대리에서 싸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소승이 그과 같은 행위는 많은 인명을 살생하게 되고 우리 부처님의 자비의 본 뜻을 크게 져 버린다고 하여서 수년간 애써 말려왔습니다.]
본인등은 그의 말 중에 포함된 위협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토번의 국사이니 토번국은 군주를 위시해서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는바, 이는 대리국과 다름이 없었다. 다라서 구마지는 언제나 국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평을 하느냐 전쟁을 하느냐는 십중팔구 그의 한마디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만약 일부의 경서를 위해서 양국의 생명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면 그야말로 크게 보람없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토번국은 강하고 대리국은 약한 편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대국적인 면에서 크게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이 위협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천룡사에세 진사지보를 두 손으로 바친다면 그 무슨 체통이 서겠는가. 고영대사는 말했다.
[명왕께서 꼭 검경을 손에 넣어야 하겠다면 이 늙은이 등이 또 어찌 감히 인색할 수 있겠소. 명왕의 소림사 칠십 이 절기로 교환하겠다는 말씀은 대사로서는 감히 받들 수 없소이다. 명왕이 기왕 소림 칠십이절기에 정통하고 또한 대설산 대륜사의 무공에 정통하시니 아마도 당금 세상에서는 적수가 없으리라고 보여집니다.]
구마지는 두 손으로 합장을 했다.
[대사의 뜻은 소승으로 하여금 손을 쓰는 꼴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고영대사는 말했다.
[명왕께서는 폐사의 육맥신검경은 흠만 지니고 있을 뿐 실용적이 못 된다고 하지 안았소. 따라서 우리는 육맥신검으로 명왕의 몇수 고초를 가르침 받을까 하오. 만약에 명왕이 말씀하신대로 이 검법이 실용적이 못 된다면 우리로서는 또 그렇게 진기하게 여길 필요가 없지 않소. 명왕께서는 검경을 가져가독록 하시구료.]
구마지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과거 모용박과 육맥신검을 논하게 되었을 때 각 검법의 뜻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 검법은 순전히 내력으로서 무형검기를 펼치는 것이었다. 검법이 얼마만큼 신기하고 고명하다 하더라도 단 한 사람의 내력으로써 동시에 육맥검기를 펼친다는 것은 결코 사람의 힘으로서는 행할 수 없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영대사의 말투를 들으니 비단 고영대사가 그 육맥신검을 펼칠 줄 알 뿐아니라 나머지의 뭇 승려들도 그 검법을 알고 있는 듯하지 않는가. 따라서 구마지는 천룡사가 백여 년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만큼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의 태도는 아주 공손했는데 이때는 더욱 더 허리마저 약간 구부리며 말했다.
[여러 고승게서 신검의 절예를 보여 주어 소승으로 하여금 크게 안식을 넓혀 주겠다면 그야 말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본인방장은 말했다.
[명왕게서는 어떤 무기를 쓰시는지 꺼내도록 하십시오.]
구마지는 두 손으로 손뼉을 한번 쳤다. 그러자 문밖에서 한 명의 거대한 사내가 들어왔다. 구마지는 그에게 뭐라고 몇 마디 토번국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그리고 문 밖의 상자에서 한 묶음의 향을 꺼내더니 구마지에게 건네 주고는 뒷걸음질쳐서 문을 나섰다. 뭇 사람들은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한 묶음의 향이라 하는 것은 어떤 사물과 부딪히게 되면 곧 뿌러지기 마련인데 이 향으로써 어떻게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대륜명왕은 왼손으로 한대의 향을 들더니 오른손으로 소복하게 쌓여 있는 나무 부스러기들을 가볍게 모았다. 그리곤 그 향을 나무조각들 가운데에 꽂았다. 잇따라 그는 여섯대의 향을 그렇게 한 줄로 늘어서도록 했으며 향과 향 사이의 간격이 각기 한자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구마지 자신은 단정히 향 뒤에 앉았다. 갑자기 그는 두손을 비비더니 가볍게 바깥쪽으로 뿌리쳤다. 그러자 여섯대의 향에 반짝하며 불이 당겨졌다. 향에서 파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11. 괴승 대륜명왕
구마지는 두 손으로 둥근 공을 안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 내력을 쏟아냈다. 그러자 여섯 줄기의 파란 연기는 천천히 바깥쪽으로 구부러졌으며 각기 고영, 본관, 본상, 본인, 본참, 보정제 등을 향해 곧바로 쏘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 손으로 나타낸 장력은 화염도라 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표묘하며 헤아릴 수조차 없지만 무형 중에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실로 무서운 무공이었다. 그는 보경을 가지고 가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사람을 해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섯 대의 향에다 불을 핀 후 장력의 방향을 나타내도록 한 것이다. 이러면 자기가 두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다만 무학의 수위를 겨루는 것이지 인명을 살생코자 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힌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섯 줄기의 파란 연기는 본인 등의 석 자 되는 앞에 이르러 멈추었다. 본인 등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력으로 파란 연기를 밀어 보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흔들거리는 연기를 허공에다 응결시키기란 그야말로십 배나 더 어려운 노릇이었다.
본참은 왼손 새끼손가락을 죽뻗었다. 그러자 한줄기의 진기가 소충혈에서 직사되어 나와서는 몸앞의 파란 연기쪽 으로 날았다. 그러자 그 연기는 그와 같은 내력의 핍박에 신속무비하게 구마지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구마지의 몸 앞 두자쯤 되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구마지는 화염도의 힘을 더욱더 증가시켰다. 이렇게 되자 그 파란 연기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때 구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불허전이로군! 육맥신검 중에 소택검이란 검법이 있었군!]
두 사람의 내력이 서로 소용돌이치면서 부딪혔다. 본참 대사는 자기가 앉아서 움직이지 않은 채 소택검을 펼친다면 검법중의 위력을 나타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세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왼손 새끼손가락의 내력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도록 하여서는 비스듬히 공격해 봤다. 구마지는 왼손을 뿌리치며 살짝 흔들어 대뜸 그것을 막았다.
본관은 중지를 세우더니 증충검으로 앞을 향해 찔러내었다. 구마지는 호통을 내질렀다.
[좋아! 증충검법이로군!]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 막았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상대하는데도 조금도 두려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단예는 고영대사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돌리고는 천재일우의 검술싸움을 정신을 가다듬고 구경하게 되었다. 그는 무공을 모르나 이 몇 분 고승들이 내력으로 검술지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험과 무서운 정도가 진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보다 더하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예는 십수초를 본 이후 마음이 움직였다.
(아! 그렇구나! 본관대사의 증충검법은 그림에 그려놓았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는 가볍게 증충검법의 도보를 펼쳤다. 파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운데 도보에 있는 검초와 비교해 보자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고 조금도 여러운 점이 없었다. 그리하여 단예는 본참의 소택검법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다. 다만 증충검은 크게 치고 베는 것으로서 기세가 웅후한데 소택검법은 표홀한 것이 변화가 정묘했다.
본인방장은 사형과 사제가 힘을 합해도 조금도 유리한 싸움을 이끌지 못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들이 이 검법을 연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미숙하다. 따라서 검초를 쉽게 다 써버릴 수 있다. 그러니 여섯 사람이 일찍 손을 쓴수록 더욱 좋을 것이다. 이 대륜명왕은 총명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니 지금은 본관과 본참 두 사람의 검법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그가 육맥신검의 운용법을 파악하기 전에 손을 쓰는 것이 낫겠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입을 열었다.
[보상, 본진, 두 분 사제, 우리 모두 손을 씁시다.]
그리고 그는 식지를 뻗치는 가운데 상량검법을 전개했다. 곧이어 본상의 소충검 그리고 보정제의 관충검 삼로의 검기가 일제히 세 가닥의 파란 연기를 공격해갔다. 단예는 소충검을 바라보았다가 동으로 일 초를 보고 서로 일초를 보는 등 하면서 도보의 그림과도 대조를 했다. 그렇게 되자 알기는 알수 있었으나 끝내 잡다하여 혼란되는 상태를 빚었다. 이에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소충검의 도보를 바라보게 되었다. 홀연히 비쩍 마른 손가락이 그의 도보 쪽으로 뻗쳐 오더니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썼다.
<한가지 도보를 다 익힌 이후 다시 다른 도보로 바꾸도록 하라.>
이는 고영대사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고영대사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맙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영의 모습을 본 그의 얼굴은 대번에 얼어붙고 말았다. 처음으로 눈앞에 나타난 그 얼굴은 매우 특이했다. 왼쪽의 얼굴 반은 불그레하고 윤기가 감돌았으며 살결이 매끄럽고 광채가 나는 것이 꼭 어린애의 얼굴 같았다. 그런데 오른쪽의 얼굴반은 앙상한 뼈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싯누런 살갗위에는 근육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 것이 반쪽의 해골 바가지를 연상시켰다. 그는 깜짝 놀란 나머지 즉시 고개를 돌렸으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그는 그것이 고영대사가 연마하고 있는 고영신공이며 그래서 그렇게 된 것임을 알았다. 반은 앙상하게 마르고 반은 윤기가 나는 얼굴은 너무나 끔찍해서 단예는 일시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을 안정시킬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영대사의 식지가 다시 그 두루마리 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좋은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해라. 정신을 가다듬고 검을 바라보아라. 스스로 관찰해서 배우는 것은 조상의 가르침을 저버리는것이 아니다.>
단예는 속으로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고영태사백께서는 백부님에게 말씀하기를 육맥신검은 단씨의 속가제자에게 전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부님은 삭발을 해서야만이 전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방금 사백조께서 쓴 것처럼 스스로 연마하여 배우는 것은 조상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면 조상의 가르침 중에 단씨 속가의 제자가 사부의 지도 없이 스스로 배우는 것은 금지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백조께서 좋은 기회를 잃지 말고 정신을 가다듬고서 검을 관찰하라 한 것을 보면 내 스스로 관찰하여 배우도록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백부의 관충검법을 관찰했다. 어느 정도 알아차리게 된 후 차례로 다시 소충검법을 관찰했다. 무릇 사람들의 다섯 손가락 가운데 무명지가 가장 둔한편이고 식지는 가장 영활했다. 따라서 관충검은 무겁고 소박함을 위주로 했고 상량검은 교묘하고 활발하여 포착하기가 어려웠다. 소충겁법과 소택검법은 똑같이 새끼손가락을 운용하여 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이고 다른 하나는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펼치기 때문에 검법에 있어서도 공을 드린 점, 졸렬한 점, 민첩한 점, 느린 점들의 분별이 있었다. 그러나 졸렬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나쁘지 않았고 느리다 하더라도 그 위력이 감소되지 않았다. 단지 기이하고 정정당당하다는 느낌에 있어서 다를 뿐이었다. 단예는 본래 호기심에 파란연기가 오락가락하는 것을 도보에 그어진 선과 대조해 보려고 했던것인데 고영대사의 지시와 당부를 얻게 되자 그제서야 전심전력으로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가 삼도의 검법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본참과 본관은 검법은 이미 두번째로 펼쳐지고 있었다. 단예는 이제 도보를 참고할 필요가 없었다. 눈으로 받아넘기고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마음 속에 기억한 검법을 일일이 대조해 보았다.
다시 잠시 동안 보고 있자 본인, 본상, 그리고 보정제 세 사람의 검법도 이미 끝나게 되었다. 이때 본상은 새끼 손가락을 퉁겨 일초의 분화불류라는 검식을 펼쳐내었다. 이는 그 검초가 두번째로 펼쳐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구마지는 약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곧이어 본인과 보정제의 검초 역시 이미 펼쳤던 초식 중에서 더욱더 변화를 구하게 되었다. 별안간 구마지의 앞에서 찍찍하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화염도의 위세가 크게 일더니 다섯 사람의 검초의 위력을 모조리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가?
원래 구마지는 수세만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육맥신검의 초식을 모조리 다 보고 나자 반격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수비에서 공세로 나오게 되자 다섯 가닥의 파란 연기는 선회하며 춤추듯 너울거렸고 그 움직임은 영민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런데 여섯번째의 파란 연기는 여전히 고영대사의 등 뒤 석자 되는 곳에 정체해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영대사는 일부러 그의 실력을 알아보려고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즉 구마지가 다섯사람의 공격이 일단 멈추게 되었을때 얼마나 더 견디어 내는가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종 손을 써서 공격을 하지 않았다. 과연 구마지는 여섯번째의 파란 연기를 오랫동안 그대로 두자니 내력의 소모가 큰 듯했다. 끝내 그 파란 연기는 한치 고영대사의 뒤통수 쪽으로 접근해왔다. 단예는 놀라 말했다.
[사백조, 파란 연기가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고영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소상검의 도보를 단예앞에다 놓았다. 단예는 그 소상검의 도보를 보자 마치 한폭의 먹을 부려 그린 산수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이 종횡으로 그려져 있고 그리고 몇 획 되지 않는 것인데도 웅후하면서도 기운차서 돌을 가르고 하늘을 놀라게 하며 풍우가 금방이라도 몰아칠 것 같은 기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단예는 검보에서 눈을 떼고 고영대사의 뒤통수로 옮겨오던 그 파란 연기가 근심되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파란 연기는 고영대사의 뒤통수와는 겨우 서너치 정도의 간격밖에 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놀라 부르짖었다.
[조심하십시오!]
고영대사는 손을 뒤로 돌렸다. 두 손의 엄지 손가락을 동시에 누르는 듯 펼쳐냈다. 찍찍 하는 두 마디의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누어 구마지의 오른쪽 가슴과 왼쪽 어깨를 공격했다. 그는 적의 침공을 막지 않고 도리어 기운을 내보내 상대방을 급습한 꼴이 되었다. 그는 구마지의 화염도가 내력이 축적되어서는 천천히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따라서 정말 자기를 해치게 되려면 아직도 잠시 동안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만약 뒤에 손을 써서 먼저 닿게 한다면 그가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당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구마지는 매우 치밀했다. 그는 이미 한가닥 장력을 가슴 앞에 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내다본 것은 다만 한 수의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소상검의 봉쇄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영대사는 쌍검을 일제히 뻗쳐내 두 곳을 나누어 습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구마지는 손을 번쩍 쳐드는 가운데 오른쪽 가슴팍으로 날아드는 일검을 막을 수 있었다. 곧이어 그는 오른발로 땅을 박차며 뒤로 급히 쏘아 나갔다. 그러나 그가 재빠르게 물러섰으나 검기보다 빠르게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한가닥 가벼운 음향이 일어나는가운데 어깨죽지의 승포자락이 터지면서 선혈이 튀었다. 고영대사는 양쪽의 엄지손가락을 벌려서는 검기를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여섯대의 향이 일제히 허리 부근에서 절단되는 것이 아닌가? 본인 보정제 등 역시 손가락을 거두고 검세를 멈추었다. 그들 다섯 사람들은 오랫동안 싸워도 승리를 얻게 되지 못하자 암암리에 근심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안심을 하고 있었다.
구마지는 성큼성큼 다시 모니당 안으로 들어오더니 미소를 지었다.
[고영대사의 선공은 정말 얕볼 수가 없군요. 소승은 실로 탄복했소이다. 그 육맥신검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헛되이 명성을 떨치고 있는게 아니군요!]
본인 방장은 말했다.
[언제 허명만을 날리고 있었던가?]
구마지는 말했다.
[과거 모용 선생이 우러러본 것은 육맥신검의 검법이지 결코 육맥신검의 검진이 아니었소. 천룡사의 이 검진은 물론 위력이 심히 크다 하겠으나 기껏해야 소림사의 나한검진이나 곤륜파의 혼돈검진과 백중할 뿐이지 천하무쌍의 검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소.]
그가 검법이 아니며 검진이라고 말한 것은 여섯 사람이 함께 공격한 것을 지적한 것이엇다. 따라서 진법을 펼친 것은 한 사람이 육맥신검을 펼친 것이 아니었고 자기처럼 화염도를 혼자서 펼쳐낸 것과 다르다는 뜻이기도 했다.
본인방장은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반박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본참대사는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검법이든 검진이든 조금전 검과 칼이 겨룬 결과 명왕이 이긴것이오 아니면 우리 천룡사가 이긴 것이오?]
구마지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더니 잠시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눈을 뜨고 말했다.
[제 일전에서는 귀사에서 약간 우세했지만 제 이전에서는 소승이 아마도 승산을 이미 쥐고 있는 듯 하외다.]
본인대사는 놀라 물었다.
[명왕은 다시 겨루자는 것이오?]
구마지는 말했다.
[사내 대장부는 자기가 한 말을 신의로써 지켜야 할 것이 아니겠소? 소승이 이미 모용 선생에게 응낙한 이상 어찌 어려움을 두려워하여 물러선단 말이오?]
본인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명왕께서 어떻게 이미 승산을 쥐고 있다는 것이오.]
구마지는 빙그레 웃었다.
[여러분들은 수학에 조예가 깊은데 짐작할 수 없다는 말이오. 자 일초를 받아보시오.]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고영과 본인 그리고 보정제 등 여섯 사람은 동시에 각기 두 가닥의 내공에 의한 힘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습격해 오는 것을 느꼈다.본인 등은 받아칠 그 기세는 육맥신검의 검법으로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모두들 쌍장을 일제히 밀어내서는 그 두 줄기의 장력을 막아내려 했다. 다만 고영대사만이 여전히 쌍수의 엄지 손가락을 누르듯 하면서 적이 내공으로 실어보낸 기운을 막아냈다. 구마지는 그와 같은 장력을 펼쳐낸 이후 즉시 초식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실례했소.]
본인과 본관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똑같이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의 일장에서는 동시에 수가닥의 힘을 뽑아낼 수 있다. 고영사숙의 소상 쌈검이 만약게 재차 나누어서 습격을 가한다 하더라도 그는 역시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다. 그러니 마치 육맥신검은 그의 화염도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때였다. 고영대사의 앞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 올랐다. 그리고 한 줄기의 분명한 검은 연기는 네 가닥으로 나누어져서는 구마지에게 공격해 갔다. 구마지는 벽을 향한 채 앉아서 시종 고개 한번 돌리지 않는 노좌상에 대해서 속으로 여간 꺼리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돌연 검은 연기가 역습해오자 일시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여전히 화염도를 펼쳐 넷으로 나누어져 들어오는 공력을 막아내었다. 그리고는 반격을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본인 등이 떼를 지어 공격을 할까봐 방비를 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조용히 변화를 관찰하여 고영대사가 또 어떤 무서운 기술을 감추고 있는지 알아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검은 연기는 갈수록 짙어져 갔다. 그리고 그 공세는 지극히 강맹했다. 구마지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토록 전력을 다해서 공격해 온다는 것은 일시 부는 바람이 아침까지 가지 않고 폭풍우가 저녁까지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오랫동안 견뎌낼 수가 없을 것이다. 고영대사는 당금 세상의 고승인데 어찌하여서 이토록 초조하고 강력하기 이를데 없는 수단으로 적을 대적하려고 하는것일까.)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네 가닥 검은 연기는 갑작기 한 가닥이 두가 닥으로 나누어지고 두 가닥이 네 가닥으로 나누어졌다. 네 가닥의 연기가 열 여섯 가닥으로 나누어져서는 사면팔방에서 구마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구마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대가 힘을 다 쓴 끝인데 두려울 게 무엇인가?)
그리하여 화염도법을 전개하여 일일이 봉쇄를했다. 그런데 쌍방의 힘이 부딪히는 순간 열 여섯 가닥의 검은 연기는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모니당 안은 삽시간에 연기로 자욱해지게되었다. 구마지는 조금도 두려움을 나타내지 않고 전력을 돋우어서는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점차 연기가 엷어졌다. 몽롱한 연기 속에서 본인 등 다섯 승려가 땅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 표정이 장엄했다. 본관과 본참의 안색은 더욱더 비통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구마지는 어리둥절했으나 곧 깨달은 바가 있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당했다. 고영 노화상이 당할 수 없을 듯하니까 육맥신검의 도보를 모조리 태워 버렸구나.)
그의 짐작이 맞았다. 고영대사는 일양지의 내력으로 여섯 장의 도보를 불태운 것이다. 그런데 구마지가 이를 알고 저지하면서 빼앗으려 들까봐 연기를 밀어붙여 그에게 공격을 한 것이었다. 즉 그로 하여금 애써 방어케 하였고 연기가 모조리 흩어졌을 때 도보는 이미 깨끗이 태워진 후였던 것이다. 본인 등은 하나같이 일양지를 연마한 고승이었다. 그는 연기를 보자 그 까닭을 금방 알수 있었다. 그러니까 진사지보를 불태워서는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꿋꿋한 행동이었다. 여섯 사람들은 각자 하나씩의 검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강적이 물러간 이후에 다시 기록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조상 대대로 전해져오던 도보는 이에 이르러 끝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천룡사와 대륜명왕 간에는 이미 깊은 원한을 맺게 되고 좀처럼 좋게 끝날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구마지는 놀람과 분노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는 평소 자기의 지략이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잇따라 두번이나 고영대사의 손 아래 패하게 되고 육맥신검경도 이미 불타 없어지고 말았으니 아무런 수확이 없는 셈이었다. 이윽고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합장하고 말했다.
[고영대사께서는 어찌 그토록 완고한 성질을 부렸습니까. 차라리 부러질언정 구부러지지 않으려는 점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대사의 보경이 소승으로 인해서 불타 버렸으니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행히 이 검경은 한 사람의 힘으로 연마할 수 없는 것이니 없애고 아니 없애고 간에 별다른 차이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그리고 그는 약간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영대사와 본인방장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별안간 손을 뻗쳐 보정제의 오른쪽 완맥을 움켜잡고 말했다.
[저의 군주께서는 보정제의 풍모를 오래 전부터 흠모하여 뵙고자 하던 참입니다. 대사께서는 귀찮으시겠지만 한번 토번국으로 가서 우리 군주를 만나보아야겠습니다.]
이는 정말 느닷없이 가해진 일격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토번국의 승려가 갑자기 암습을 가해오는데도 보정제와 같은 무공을 지닌 고수가 그대로 잡힌 것을 보면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보정제는 구마지에게 손목에 있는 열결과 편력의 두 혈도를 움켜잡힌 것이었다. 보정제는 급히 내력을 움직여서 혈도를 풀어보려 했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잇따라 일곱 차례나 시도해 보았으나 시종 상대방의 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본인 등은 구마지의 이와 같은 행동이 지극히 비열하다고 생각했다.
고영대사는 크게 웃었다.
[하 하 하! 그는 예전엔 보정제였고 지금은 자리에서 물러난 승려로서 법명은 본진이라 하오. 본진 토번국의 군주가 자네를 만나겠다고 하니 자네는 가보는 것이 좋겠네.]
보정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게 합시다.]
그는 고영대사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구마지는 자기를 일국의 군주로 알고 자기를 인질로 삼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황제에서 물러나 승려가 된 몸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면 그야말로 천룡사의 한 화상을 잡은 꼴이 되는 것으로서 대국에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손을 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마지가 문 안으로 들어오게 된 이후 보정제는 시종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육맥신검을 펼치려면 역시 제일류의 고수라야 가능했고 그 내력의 수위 또한 매우 심후한 사람이어야 했다. 따라서 무림에서 몇몇이나 되는 일류고수가 있는 지는 서로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구마지가 대리국에 올 때는 미리 대리 단씨와 천룡사를 합쳐 승인이든 속인이든 뛰어난 고수의 모습이나 나이를 모조리 알아보았던 것이고 각자의 습성이나 버릇 그리고 무공조예도 십중팔구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는 천룡사에 고영대사와 네 분의 고수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 사람의 본진이라는 화상이 더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진이란 이름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 내력의 고강함은 조금도 다른 본자항렬의 네 승려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거기다가 본진 대사의 의젓한 용모와 위엄있는 태도 그리고 신색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만이 지닌 기상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는 바로 본진이 보정제라고 짐작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고영대사가 이미 황제에서 물러나 승려가 되었다는 말을 하자 구마지는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오래 전부터 대리 단씨의 역대 조상들 가운데 종종 황제자리에서 물러나 승려가 된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니 보정제가 천룡사에서 출가를 한다는 것은 별로 기이할 것도 없다. 하지만 황제가 자리에서 물러나 승려가 될 때에는 전국적으로 반드시 성대한 의식이 있으며 모든 승려들이 예불을 올리고 탑을 건축하거나 절을 세우느라고 대리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것이며 결코 이와 같이 소문도 없이 자리에서 물러나 승려가 되지는 않앗을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사실이 있었다면 우리 토번국에서도 소식을 알 게 된 이후 사자를 보내 대리의 새로운 군주가 즉위하는 것을 축하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말에는 무언가 속임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보정제가 출가해도 좋고 출가하지 않아도 좋소이다. 아뭏든 토번국으로 가시어 우리의 군주를 만나뵈어야 하겠소이다.]
그리고 그는 보정제를 끌고 문을 나서려고 했다.
본인방장은 호통을 내질렀다.
[잠깐!]
몸을 흔들 하는 순간 본관대사가 문 앞을 막아섰다. 구마지는 입을 열었다.
[소승은 결코 보정제를 해칠 뜻은 없소. 그러나 여러분들이 핍박한다면 이것저것 돌볼 겨를이 없소이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보정제의 등에 갖다 대었다. 그의 화염도의 장력은 그야말로 무엇이든지 부러뜨릴 수 있는 위력이 있었다. 보정제가 완맥을 움켜잡힌 것은 이미 도마 위의 고기처럼 항거할 기운이 없는 상태를 뜻했다. 만약 천룡사의 뭇 승려들이 힘을 합해서 공격을 하게 된다면, 보정제의 생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한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본인 등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정제는 대리국의 군주인데 어떻게 적이 인질로 사로잡아 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이때 구마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천룡사의 뭇 고승들의 대명을 평소 들어와 우러러보던 참인데 이까짓 조그마한 일로 우물쭈물하다니 퍽 실망했소. 어서 길을 비키도록 하시오!]
단예는 백부가 인질로 사로잡히게 되자 마음이 매우 초조해졌다. 처음에는 백부의 무공이 고강하니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잠시 참앗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 보정제가 구마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구마지의 어조와 안색이 크게 오만한 빛을 띠우기 시작했으며 본인대사와 본관대사등의 안색은 하나같이 초조와 분노의 빛을 띠우고 있으면서도 어쩌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때 구마지는 보정제의 손목을 잡은 채 한 걸음 두 걸음 문쪽으로 다가갔다. 단예는 황급한 가운데 미처 생각할 여유도 없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우리 백부님의 손을 놓으시오!]
그리고 그는 고영대사의 앞에서 걸어나갔다.
구마지는 고영대사의 앞에 한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보았으나 어떠한 사람인지 미처 헤아릴수 없었다. 그리고 또 무엇때문에 고영대사의 앞에 앉아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 그가 나서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서는 물었다.
[시주는 누구시오?]
단예는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묻지 마시오. 먼저 우리 백부님을 풀어놓고 말합시다.]
그리고 그는 오른손을 뻗어 보정제의 왼손을 잡았다. 보정제는 말했다.
[예아, 너는 나를 아는 척하지 말고 급히 너의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등극하도록 하라. 나는 떠돌아 다니는 한 노승이 되었으니 대수로운 일이 있겠느냐?]
단예는 힘을 주어 보정제의 손목을 끌어당기면서 부르짖었다.
[빨리 나의 백부님을 놓으시오!]
그의 엄지손가락에 있는 소상혈과 보정제의 손목에 있는 혈도가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힘을 주게 되자 보정제의 전신이 흠칫했다. 대뜸 그는 내력이 바깥쪽으로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와 동시에 구마지 역시 자기의 진력이 급히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끼고 곧 안색이 크게 변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대리 단씨 중에 어찌 화공대법을 아는 자가 있지?)
그는 즉시 운기행공해서 그 음독한 사공에 대항하려고 했다. 보정제는 별안간 두 손에 각기 한 가닥 맹렬한 힘이 있어 바깥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고 즉시 차력타력이라는 심법을 펼쳐냈다. 그리하여 두 가닥 들어오오는 기운의 기세의 방향이 한데 어울어지도록 했다. 그리하여 쌍방의 힘이 서로 다투게 되었을때 그 중간에 끼인 그는 두 손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즉시 손을 펼쳐 구마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며 단예의 뒤로 표연히 물러서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 오늘 예아의 구원을 받아서 천만다행이다!)
구마지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리국에 이와 같은 고수가 또 한 명 나타났다니.... 내가 어찌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이 사람의 나이는 젊다 기껏해야 이십 세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토록 깊은 조예를 쌓았을까? 이 사람이 보정제를 보고 백부라 하는 것을 보면 대리단씨 가운데 아랫 사람 중의 인물임에 틀림이 없겠구나.)
그리하여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입을 열었다.
[소승은 결코 대리 단씨가 조상의 무학만을 연구하며 다른 것은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후배들 가운데 인재가 있어 성숙노인과 사귀게 되고 또한 화공대법이라는 기문무학을 연마했군. 정말 이상하다 이상해!]
그는 정말 박식했고 또한 지혜도 많았다. 하지마 단예의 북명신공을 화공대법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는 자기의 신분이 높은만큼 함부로 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성숙노괴를 노인이라 칭하게 되고 무림인들이 화공대법을 요사한 무공이라고 하는 데 대하여 그는 기문 무학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방금 한번 다툼으로써 그는 단예의 내력 수위가 결코 성숙노괴 정춘추에 못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노괴의 제자나 전인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해서는 사귄다는 두 글자로 두 사람의 관계를 묘사한 것이었다.
보정제는 냉소했다.
[오래 전부터 대륜명왕의 기지가 뛰어나고 식견이 비범하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는데 그와 같이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이다니 천만 뜻밖이군! 성숙노괴는 암산이나 암습에 능한 자로서 비열하기 이를데 없거늘 우리 단씨의 자제가 어찌 그와 같은 사람과 관계있다는 것이오?]
구마지는 어리둥절해졌으며 곧 얼굴을 붉혔다. 보정제의 말 속의 암산이나 암습, 그리고 비열하다는 말은 바로 조금전 그가 취한 행동을 지적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예가 입을 열었다.
[대륜명왕은 멀리서 온 손님으로서 천룡사에서는 예의로 접대를 한 것인데 당신이 감히 우리 백부님을 범하다니!]
사람들은 단예가 대의를 들어 구마지를 꾸짖자 하나같이 속으로 통쾌하게 생각했다. 동시에 엄히 경계했다. 혹시나 구마지가 분노가 끓어올라 갑자기 공격을 가해 단예를 해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구마지의 안색은 태연자약했다.
[오늘 이와 같이 뛰어난 분을 만나게 되니 정말 영광이오. 아무쪼록 인색하게 굴지 말고 몇 수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으면 소승에게는 더없는 은덕이 되겠소이다.]
단예는 말했다.
[나는 무공을 모르오. 한번도 배워 본 적이 없소.]
구마지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명하오. 그럼 소승은 이만 물러 가겠소.]
몸을 약간 옆으로 기울이는 가운데 그는 소매자락을 휘둘렀다. 소매자락 안으로부터 손을 뻗쳐내 사 초의 화염도 초식을 동시에 전개하여 단예를 공격했다. 적의 가장 무서운 초식이 느닷없이 공격해 들어오는데도 단예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보정제와 본상이 쌍쌍이 손가락을 뻗쳐내어 그 사 초의 화염도를 막았다. 본상은 내공이 충돌하는 순간 우엑! 하며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내야 했다.
단예는 본상이 피마저 토하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조금전 구마지가 암습을 가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속으로 크게 노해 구마지의 코끝을 가리키며 욕을 했다.
[당신은 정말 도리를 따지지 않는 오랑캐 중이군!]
그가 오른쪽 식지에다가 그토록 힘을 써서 가리케게 되자 마음과 기가 통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일 초 상양검의 검법을 펼쳐내게 되었다. 그 내력의 고강함은 당금지상에서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조금 전에 고영대사 몸 앞에서 그는 육맥신검의 표본을 보고 또 일곱 승려가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 식지를 뻗쳐내자나자 자기도 모르게 검보에 그려져 있는 것과 마음이 합해지게 되었다. 그 순간 '찍!'하는 음향이 울려퍼지면서 한 가닥 웅후하기 이를데 없는 진기가 곧장 구마지를 찔러갔다.
구마지는 깜짝놀라 재빨리 손을 들어 화염도를 전개해 막았다. 단예가 이와같이 손을 쓰게 되자 비단 구마지만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본인대사 등도 눈이 휘둥그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기이하게 여긴 것은 보정제와 단예 자신이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거 정말 이상하군! 내가 아무렇게나 가리키는데 저 화상은 어째서 저토록 정신을 가다듬고 막는 시늉을 하지? 그렇지, 그렇군! 내가 손을 쓰는 자세가 맞기 때문에 저 화상은 내가 육맥신검을 펼치는 줄로 알고 있다. 하하! 그렇다면 내가 그를 놀래 주어야지.)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상양검법이 뭐가 대단하오. 나는 다시 몇 초의 증충검의 검법을 당신에게 보여 주리라!]
그는 중지를 찔러냈다. 이번에 그의 수법은 맞았지만은 내경이 실리지 않았다. 다만 허공을 격하고 찔러낸 허초에 아무런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구마지는 그가 중지를 찔러내자 즉시 자세를 가다듬고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방의 일지에는 전혀 힘도 실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상대방이 허실로 나오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니까 그 뒤에 무서운 수가 따르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다시 일지를 찔러내는데 여전히 맹탕이 아닌가? 구마지는 속으로 기뻐했다.
(그렇지. 이 세상에는 상양검을 펼칠줄 알면서 또한 증충검을 펼칠줄 아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지.)
그는 이번에 천룡사에세 잇따라 몇 번 곤두박질을 친 셈이 되었다. 그래서 무서운 맛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대륜명왕의 위명이 크게 손상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왼손을 들어 좌우 양쪽을 향해 잇따라 후려쳤다. 즉 내공에 실린 기운으로 보정제 등이 도와 주는 기회를 봉쇄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오른손을 칼날처럼 휘어서는 곧장 단예의 오른쪽 어깨를 공격하려 했다. 이 일초는 백홍관일로서 화염도 가운데 정묘한 일 초였다. 한칼에 단예의 오른쪽 어깨를 베어낼 수 있었다. 이를 본 보정제와 본인 본참 등 대사는 일제히 부르짖었다.
[조심해라!]
그리고 각기 손가락을 펼쳐서는 구마지를 찔러갔다. 그런데 구마지는 먼저 내공이 실린 힘으로 온 전신의 혈도를 봉쇄해 버린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그 화염도의 일초를 곧장 펼쳐낼 수 있었다. 단예는 보정제등이 놀라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아차!" 했다. 그리하여 그는 두 손을 동시에 쳐들며 힘써 부딪쳤다. 그는 속으로 당황해한 나머지 진기가 자연적으로 쏟아지게 되었다. 오른손으로는 소충검을 왼손으로는 소택검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 쌍검이 동시에 화염도의 일초를 밀어붙여 버렸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찍찍 하는 소리와 함께 오히려 구마지에게 반격해 갔다. 구마지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왼손을 펼쳐서는 그 공격을 막았다. 단예는 이와 같이 몇 점을 휘두르게 된 이후 마음속으로 은연중 생각을 먼저 정한다음 힘을 써서 손가락을 펼쳐내야 내공진기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이때 그는 다시 중지로 가볍게 퉁겨 증충검을 다시 펼쳐내게 되었다. 삽시간에 조금전 도보에서 본 육로의 검법이 일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하여 열 손가락을 나누어 퉁기며 잇따라 공격을 펼쳐 내었다. 구마지는 깜짝놀라 힘을 돋우어서는 진기를 움직여 대항했다. 이렇게 되자 얼마 되지 않는 방안에 검기가 종횡으로 난무했고 화염도에서 펼쳐나는 기운이 날뛰게 되었다. 마치 무수한 번개와 질풍이 서로 부딪치고 요동치는 것 같았다. 잠시나마 싸우는 동안 구마지는 상대방의 진기가 점차 갈수록 강해지는 것을 느꼈고 검법 역시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수시로 새로운 초식을 창안해서 펼쳐내는 것이 조금전 본인 본상 등의 일정한 검초와는 크게 달라서 실로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물론 단예가 육로의 검법중 그 많은 복잡한 초식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마구 손가락을 펼쳐서 찔러내는 것이었지 어떤 새로운 초식을 창안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구마지는 속으로 놀라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천룡사에 이와 같은 청년고수가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오늘 그야말로 욕을 자초하는 꼴이 되었군!)
그는 칙! 칙! 하니 잇따라 화염도를 세번이나 휘두르며 부르짖었다.
[잠깐!]
단예의 진기는 아직 마음대로 쏟아냈다가 거두어들이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잠깐만 하고 부르짖자 어떻게 진기를 거두어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리하여 손가락을 쳐들어 천정을 가리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기운을 내쏟으면 안 되겠지. 그의 말을 듣고 난 이후에 다시 말하기로 하자.)
구마지는 단예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거기다가 진기를 거두어들일때 손발이 어지럽고 어찌할 바 모르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다. 약간 마음이 움직이게 된 그는 즉시 몸을 날려서 달려들며 주먹을 쥐고 그의 얼굴을 쳐갔다.
단예는 권각법과 무기로 싸우는 무공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구마지의 이 일권에는 칠팔초의 후수가 도사리고 있었으며 또한 지극히 고명한 권술이기도 했다. 그러나 화염도가 진기로써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에 비하면 그 차이는 천차만차라고 할 수 있었다. 본래 세상에는 어떠한 기예나 학문이라 하더라도 기초를 닥지 않고는 깊이 들어갈 수가 없으며 어려운 것은 알고 쉬운 것은 모른다는 도리는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예의 무공은 예외였다. 그는 구마지가 주먹을 휘둘러 때리려고 하자 그저 손을 들고는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구마지는 그 순간 오른손을 홱 뒤집어서는 그의 가슴팍에 있는 신봉혈을 움켜 잡앗다. 이렇게 되자 단예는 즉시 온몸이 시큰해지면서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신봉혈은 족소음신경에 속하는 혈도로서 단예가 연마한 적이 없었던 혈도였다. 구마지는 단예의 무학 가운데 은연중 커다란 허점이 잇는 것을 알아냈지만 일시 그의 육맥신검을 당해낼 수가 없어서 다른 고심한 무공으로 그를 이겨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토록 수월하게 단예를 잡아 버리게 되었는지라 그로서도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단예가 일부러 시치미를 떼는지 모르며 어떤 간계가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의 신봉혈을 잡는 즉시 손가락을 뻗쳐 단예의 극천, 대주, 경문등 몇 곳의 요혈을 짚어 버렸다. 공교롭게도 이와 같은 혈도와 경맥들은 단예가 일찌기 연마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곧이어 구마지는 세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이 소시주는 마음 속으로 육맥신검의 도보를 기억하고 있구려. 원래의 도보가 이미 고영대사에 의해서 태워졌으니 소시주는 바로 살아 있는 도보라고 할 수 있겠소. 따라서 모용 선생의 무덤 앞에서 이 소시주를 산 채로 불태우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그리고 왼손을 쳐들고는 급히 화염도 다섯 초를 펼쳐내었다. 동시에 그는 단예를 붙잡고는 모니당 문 밖으로 나갔다. 보정제와 본인 그리고 본관등이 앞으로 달려나가 사람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하나같이 그의 화염도에 봉쇄당하고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구마지는 그 순간 단예를 던져 문밖에서 지키고 있던 사내에게 내어 주면서 호통을 쳤다.
[빨리 가거라!]
두 명의 사내가 동시에 손을 뻗쳐여서는 단예를 잡았다. 그리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지 않고 곧장 모니당 밖의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구마지는 화염도를 펼쳐서는 한칸 한칸의 모니당 문앞쪽을 향해 베어갔다. 보정제 등은 일양지의 지풍을 바깥쪽으로 급히 내 쐈으나 일시에 구마지의 무형의 칼로 이루어진 그물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구마지는 말 발굽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듣고는 부하가 이미 단예를 사로잡아 북쪽으로 달려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하! 죽어 있는 도보를 잃었지만은 오히려 살아 있는 도보를 얻게 되었군! 모용 선생이 지하에서라도 짝이 생기게 되어 적막함을 면하게 되었소이다.]
그리고 오른손을 쳐들고는 비스듬히 내려쳤다. '우직끈!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모니당의 기둥이 쓰러졌다. 그 순간 그는 몸을 흔들하더니 한 가닥 가벼운 연기처럼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삽시간에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보정제와 본참은 같이 달려 나갔다. 그러나 이미 구마지는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보정제는 말했다.
[빨리 쫓읍시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단번에 오 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본상대사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단예는 구마지에게 혈도를 짚혀서 전신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 명의대한들에 의해서 한 필의 말안장 위에 걸쳐지게 되었다. 그런데 얼굴을 아래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땅바닥이 끊임없이 뒤로 밀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말발굽이 어지럽게 땅을 밟는 가운데 흑먼지가 일어 그 흑먼지가 코와 입 속으로 마구 들어왔다. 거기다가 귀로는 뭇 사내들이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모두가 토번국의 말이라 하나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도 그가 말다리를 살펴보니 모두가 열 필이나 되었다. 십여리를 달려가게 되었을 때 어느 갈림길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구마지는 무어라고 몇마디 말을 했다. 그러더니 다섯 필의 말은 왼쪽 갈림길로 나아가게 되고 구마지는 나머지의 사람들과 단예를 데리고 오른쪽으로 나아갔다. 다시 수 마장을 나가게 되자 두번째 갈래길에 이르게 되었다
12. 중원으로
단예는 구마지가 추격하는 사람들을 따돌리려는 것임을 알았다.
잠시 후 구마지는 잠깐 말을 멈추고 가죽띠를 들어 단예의 손발을 묶고 왼쪽 겨드랑이에 끼었다. 그리고는 계곡 안으로 들어 갔다. 다른 부하들은 여전히 말을 달려 서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단예는 속으로 야단 났다고 생각했다.
(백부가 철갑기병을 내 보낸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이 오랑캐 중이 데리고 있는 아홉 명의 시종을 모조리 잡아갈수 있을 뿐 나를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마지는 손에 한 사람을 들고 있었으나 발걸음은 여전히 가벼웠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때 구마지는 그의 몸을 한 그루 커다란 나무의 가지위에 내려놓고 가죽띠로 나무가지에 묶어 놓았다. 그리고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몇 조각의 떡을 단예에게 주고 그의 왼손과 팔의 혈도를 풀어 음식을 먹도록 해주었다. 며칠 동안 구마지는 그를 들고서 끊임없이 북쪽으로 나아갔다. 단예는 몇번이나 그에게 말을 붙이려고 했다. 왜 자기를 붙잡았으며 북쪽으로 뭣하러 데리고 가는지 물어 보기도 했으나 구마지는 시종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예는 그야말로 가슴 가득히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리고 속으로 지난 번 누이 목완청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는 쓴맛을 단단히 보았지만 결코 이와 같이 답답하고 무료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소저에게 붙잡힌 상태라 코끝에는 향기마저 감돌지 않았던가? 십여 일을 가게 되었다. 아마도 대리국에서 벗어난 듯했다. 단예는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동북쪽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구마지는 여전히 큰 길을 피해서 황량한 산길이나 들판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지세는 갈수록 평탄해졌고 산도 점차 적어지는 가운데 냇물이 많아졌다.
이 날 밤 두 사람은 어느 조그만 성의 한 객점에서 쉬게 되었다. 구마지는 사환에게 문방사보를 가져다 달래서는 탁자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심지를 돋구더니 말했다.
[단공자, 소승이 시주를 북쪽으로 잡아온 데 대해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단예는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마시오.]
구마지는 말했다.
[그런데 공자는 소승이 왜 이와 같은 일을 하는지 아시오?]
단예는 길을 오면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거기다가 탁자 위에 지필묵과 벼루가 놓여진 것을 보고 십중팔구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구마지는 물었다.
[무슨 일인데 안 된다는 것이오?]
단예는 말했다.
[당신은 우리 단씨 집안의 육맥신검경을 부러워한 나머지 나에게 육맥신검의 요결을 써 달라는 것이 아니겠소. 이 일은 절대 행할 수 없다는 것이오.]
구마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단공자는 나의 뜻을 잘못 알고 있군. 소승은 과거 모용 선생과 약속을 했소. 육맥신검경을 빌려서 그에게 보여 주겠다는 약속이었소. 따라서 그 약속을 실천하기 전에는 줄곧 마음에 걸려서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소이다. 다행히 단공자는 마음 속에 그 검경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대를 모용 선생의 무덤 앞으로 데려다가 태울 작정이오. 그렇게 함으로써 소승은 고인에게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오.
그러나 공자는 사람들 가운데 용봉이라고 할 수 있소. 소승이 그대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찌 공자를 해칠수 있겠느냐 말이오. 따라서 이 가운데에는 서로 끊을 방법이 한 가지 있는데, 공자가 경문과 도보를 빠짐없이 써 놓는다면 소승은 결코 한번도 보지 않고 즉시 봉해서 그 경문과 도보를 모용 선생의 무덤 앞에서 불태워 여지껏 품고 있던 숙원을 풀자는 것이고, 즉시 공자를 대리로 돌아가도록 조처를 해 주겠소.]
이와 같은 말은 구마지가 천룡사에 들어설 때부터 한 바가 있었다. 당시 본인 등은 허락할 뜻이 있었고 단예 역시 그 방법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먼저 보정제에게 암습을 가했고 자신을 다시 사로잡는 등 태도가 정당하지 못했다. 그리고 추격을 벗어나기 위해서 온갖 간계를 다 썼으며 아홉 명의 부하들이 죽고사는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음흉하고 흉악한 성격을 여지없이 드러낸 터라 단예로서는 이제 그 말을 믿을래야 믿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미 속으로 남해악신 등 사대악인은 자기네들이 악인이라는 것을 버젓이 드러내 놓고 행세하기 때문에 이 위선에 가득찬 승려가 사대악인보다 오히려 품격이 낮다고 생각한 터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구마지 대사, 그와 같은 말로 나를 속일 수는 없을 것이오.]
구마지는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소승이 모용 선생에게 과거의 약속을 이토록 지키려 하는데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약속을 저버리겠소?]
단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은 과거 모용 선생에게 그와 같은 약속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오. 그리고 당신이 육맥신검의 검보를 얻게 된다면 한번도 읽어 보지 않고 모용 선생의 무덤 앞에 가서 태운다는 보장이 어디 있소? 설사 정말 태운다 하더라도 대사의 총명함과 재치로서는 몇 번 읽은 이후에 모조리 기억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어쩌면 잘못 기억하게 될까봐 복사를 한 이후 다시 태울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소?]
구마지는 안광을 빛내며 무섭게 단예를 노려 보았다. 그러나 부드러운 안색으로 고치며 입을 열었다.
[그대와 나는 하나같이 불문의 제자인데 어찌 그와 같이 망령된 말을 하는 것이오? 소승은 부득이 핍박을 하지 않을 수 없구려. 이것도 단공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너무 탓하지 마오.]
그리고 그는 왼손을 뻗쳐내 단예의 가슴팍에 대고 말했다.
[공자가 견딜 수 없게 되고 기꺼이 복사를 하겠다면 고개를 끄덕이시오. 그러면 즉시 손을 떼겠소이다.]
단예는 웃었다.
[내가 이 격문을 쓰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오. 그너나 만약 내가 쓴다면 당신이 어찌 나의 목숨을 살려주겠소? 내가 격문을 쓴다는 것은 바로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소. 구마지 대사,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열 살이 되기 전에 깨달은 바가 있었소이다.]
구마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손바닥에 힘을 돋우었다. 그는 이 한 가닥 기운이 단예의 전중대혈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의 온몸은 마치 수많은 개미가 물어뜯는 것과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런 고생 없이 자란 단예가 입으로는 큰 소리를 치지만, 정말 금방 숨이 넘어 갈 것 같은 혹형을 당하게 될때는 반드시 굴복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내공을 내쏟자 마자 즉시 한가닥 내력은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구마지는 깜짝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내공을 돋우었다. 이번에는 내력이 더욱더 빨리 사라져 갔다. 곧이어 그의 체내의 내력이 거세게 쏟아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구마지는 그만 대경실잭하고 말았다. 오른손을 급히 떼는 동시에 단예의 어깨죽지를 힘주어 밀쳐 버렸다. 단예는 침대 위에 벌렁 쓰러졌으며 뒤통수를 꽝 하고 부딪히게 되었다. 구마지는 단예가 성숙노괴의 화공대법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혈이 봉쇄되었는지라 그 무공은 자연적으로 펼칠 수 없으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가 내공력을 돋우자마자 자신의 내력을 억지로 상대방의 전중혈로 밀어넣는 꼴이 되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이때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득도한 고승이라고 자처하면서 이럴 수 있소? 고승이 이렇게 손을 써서 사람을 때리는 법이 있느냐 말이오.]
구마지는 날카롭게 외쳤다.
[너의 화공대법은 도대체 누가 가르쳐 준 것이지?]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화공대법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물건을 낭비하는 것과 다름이 없소. 그야말로 하루에 천금을 땅바닥에 뿌리면서 어디에 쓸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란 말이오. 따라서 그와 같은 방문좌도의 무공을 왈가왈부하다니 정말 가소롭소 가소로와!]
이 몇마디 말은 사실 그가 옥동의 두루마리에 씌어있던 말들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구마지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만큼 다시 그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구마지는 단예의 무공이 괴이하고 실로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 재간은 반드시 일양지와 육맥신검에서 변화한 것이지만 단예가 갓 배운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사용할 줄을 모르는가 보다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구마지는 대리 단씨의 무학에 대해서 더욱더 마음이 기울어졌다. 돌연 그는 손을 쳐들고 허공을 격하고서 단예의 머리의 서생건을 잘라내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정말 쓰지 못하겠는가. 이 한 칼이 반 자 정도만 낮게 휘둘러 진다면 너의 머리통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단예는 정말 겁이 났다. 구마지가 정말 화가 나서 나의 눈을 찌르거나 나의 한 팔을 자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길에서 되풀이 생각했던 몇 마디 말이 즉시 머리에 떠올라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핍박을 받아 견뎌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저 아무렇게나 격문을 쓸지도 모를 일이오. 그리고 당신이 만약 나의 팔다리를 자르거나 해치게 된다면 나는 더 당신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한 나머지 쓰게 되는 검보는 더욱더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될 것이오.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 어쨌든 나는 검보를 쓸테니까 그 쓴것을 당신이 가져다 모용 선생의 무덤 앞에서 태우도록 하시오. 당신은 즉시 봉한다고 했으며 결코 한번도 보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 검보가 맞든 틀리든 당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내가 아무렇게나 써놓는다는 것은 내가 모용 선생의 영혼을 속이는 것밖에 되지 않소. 따라서 그는 저승에서 무공을 잘못 연마하여 주화입마 되거나 어떤 맥을 단절 시키게 된다하더라도 당신을 탓하지 않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는 탁자 곁으로 가서는 붓을 들고 종이를 펼친 후 쓸 자세를 취했다. 구마지는 극도의 분노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단예의 지금과 같은 몇 마디는 자기가 육맥신검검보를 사취할 의도를 모조리 간파한 셈이 아닌가. 동시에 명백하게 구마지가 강제적인 수단을 써서 핍박을 한다면 단예 자신은 엉터리 검보를 써놓겠다고 밝히지 않는가. 그렇게 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실 구마지는 천룡사에서 두번이나 육맥신검의 검법의 진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검법의 요결은 순전히 내공력을 돋우어 펼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떻게 하더라도 분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구마지는 수치가 분노로 변하게 되었다. 정말 미칠 것처럼 화가 나서 단숨에 일초의 화염도를 펼쳐냈다. 찍! 하는 음향과 함게 단예의 손에 들린 붓이 그만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단예가 큰 소리로 웃고 있는 가운데 구마지는 호통을 내질렀다.
[이 부처님께서 호의로 너의 목숨을 살려 주려고 하는데 네가 고집을 피우고 깨닫지를 못하다니 그렇다면 너를 모용 선생 무덤 앞에서 태울 수밖에 없다. 너의 마음 속에서 기억하고 있는 검보는 결코 가짜일리 없겠지.]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죽을 일시에 그 검법을 몇 수 잘못 기억하도록 하겠소. 맞아 이 방법이 옳지. 지금부터 나는 죽어라 하고 잘못 기억하겠소. 그리고 자꾸만 틀리게 기억하겠소. 그렇게 된다면 내 자신도 뭐가 뭔지 멍청하게 될 것이 아니겠소.]
구마지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 보았다. 그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화염도가 뻗쳐 나올 것 같았다. 그야말로 당장에 손을 휘둘러 화염도의 무형기공으로 단예의 머리통을 쪼개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들은 곧 동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십여일을 가게 되었다.
그들은 소주성 밖에 이르게 되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모용박의무덤으로 가겠구나. 오랑캐 중이 검보를 손에 넣지 못하자 당장 나를 정말로 죽이지는 않더라도 모용박의 무덤앞에서 불을 놓아 나를 태우거나 구워서 반쯤 죽여 놓는다면 큰일이군)
그러나 그는 모질게 마음을 가다듬고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눈길을 돌려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때는 3월이었다. 살구꽃이 길 좌우 양쪽에 피어 있었고 파란 버드나무 가지들이 호숫가에 드리워져 있었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졸음이 오게 하는 봄바람이 살갗을 스치는 계절이었다. 단예는 그만 마음속으로 매우 상쾌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불쑥 시를 읊었다.
[파묘묘 유의의, 고촌방초원, 사일행화비.]
구마지는 냉소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도도한 기분은 살아서 여전히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는군!]
단예는 미소를지었다.
[부처님이 가로되 색신이 무상이요, 무상이 곧 고달픔이라 했소. 이 천하에서 죽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당신이 몇 년 더 산다고 해서 기뻐할 것이 무엇이겠소?]
구마지는 그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삼합장이 어디 있는가 물었다. 그러나 잇따라 칠팔 명의 사람에게 물어 보았으나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더욱더 종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최후로 만난 한 노인은 말했다.
[소주성 안쪽으로는 삼합장이라 부르는 장원은 없소이다. 화상께서는 아마도 잘못 들은 모양이오.]
구마지는 말했다.
[그렇다면 모용이라는 성을 가진 대장주는 어디 살고 있나요?]
노인은 말했다.
[소주성 안에 사는 고씨 육씨 심씨 장씨 주씨 문씨 등이 모두 대장주이지만 모용 성을 가진 장주는 없어요. 들어 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구마지가 어떻게 할지 몰라 하고있을 때 갑자기 서쪽으로 난 길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모용씨는 바로 서쪽으로 삼십리 떨어진 연자오에 있답니다.]
옆의 한 사람이 말했다.
[이제 목적지에 다 왔으니 조심해야겠다.]
그들의 말씨는 하남성 중주의 말씨였다. 두 사람이 말하는 소리는 매우 나직했으나 구마지는 내공수위가 뛰어났기 때문에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저 두사람은 일부러 나에게 들려 주려 한 것이 아닐까. 어떻게 그토록 공교로울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기우가 헌앙하고 상복을 입고 있었고 한 사람은 왜소하고 비쩍 마른 것이 마치 폐병장이와 같았다. 구마지는 첫눈에 그들 두 사람이 무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그들을 어떻게 알아 볼까 하는 생각중에 단예가 먼저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곽선생, 곽선생, 곽선생도 오셨소?]
원래 보잘것 없이 생긴 사람은 금산반 최백천이었고 또 한 사람은 바로 그의 사질인 추혼편 과언지였다. 그 두 사람은 대리를 떠난 이후 줄곧 가백세를 위해 원수를 갚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물론 모용씨가 무공이 지극히 높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이 원수를 갚는 것이 십중 팔구는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용기 백배해서 소주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모용씨가 연자오에 살고 있었고 모용박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그래서 가백세를 살해 한 사람은 다른 모용씨 집안의 한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 두 사람은 복수를 할 기회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호수가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구마지와 단예를 만나게 된 것이다. 최백천은 갑자기 단예가 부르는 소리에 어리둥절하더니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 화상이 마루에 앉아있고 손으로 단예가 앉아 있는 말의 고삐를 붙들고 있으며 단예의 양손이 한 쪽으로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단예가 혈도를 짚힌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물었다.
[소왕자, 그대였구료. 이것 봐요 대화상, 그대는 어찌하여 이공자를 괴롭히는 것이오. 그대는 이 공자가 누구인지 아시오?]
구마지는 이들 두 사람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중원 땅에 한번도 와본 적도 없고 더군다나 모용 선생의 집도 알지 못하는 터라 이들 두 사람을 안내장이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용씨의 저택으로 가고 있는 중이오. 수고스럽겠지만 나를 거기까지 안내해 주면 고맙겠소.]
최백천은 물었다.
[실례이지만 대사의 직무는 어떻게 되오. 어떻게 감히 단씨의 소왕자를 괴롭힌단 말이오. 그리고 모용씨의 저택으로는 무슨 볼 일로 간다는 말이오?]
구마지는 간단히 대답했다.
[도착해 보면 알게 될 것이오.]
최백천은 다시 물었다.
[대사는 모용씨 집안과 친구가 되시오?]
구마지가 말했다.
[그렇소. 모용 선생이 거처하는 삼합장이 어디 있는지를 안다면 역시 곽선생이 안내를 해주시구료.]
구마지는 단예가 그를 곽선생이라 불렀기 때문에 진짜 그것이 그의 성인 줄 알았다. 최백천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더니 단예에게 말했다.
[소왕자, 내가 먼저 그대 팔의 혈도를 풀고 난 후 다시 이야기 합시다.]
그는 단예에게 다가와 그의 팔의 혈도를 풀어 주려고 했다.
단예는 구마지의 무공이 기이하도록 고강하여 세상에서는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될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최백천과 과언지는 절대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만약에 그를 구하려고 한다면 괜히 억울하게 두 사람의 목숨만 잃을 뿐이므로 빨리 그들 두 사람을 도망가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잠깐, 이 대사님은 혼자서 우리 백부님과 대리의 고수 다섯 분을 대패시키고 나를 사로잡아 온 것이외다. 그는 모용 선생의 지기로 나를 모용 선생의 무덤 앞에서 태워 재를 올리겠다는 것이오. 그러니 두 분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니 이대로 그냥 떠나시오.]
최백천과 과언지는 이 화상이 보정제등 고수를 대패시켰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모용씨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욱더 경악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최백천은 자기가 진남왕궁에서 십여 년간 숨어 살아왔는데 소왕자가 이런 일을 당한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반 어찌 됐든 이 소주땅까지 오게 된 것은 목숨을 걸어 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가 모용씨 집안 사람의 주판알에 죽거나 다른 사람의 손에 죽거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즉시 그는 한쪽으로 손을 집어 넣고는 주판을 높이 쳐들고 흔덜었다. '쨍그랑' 소리가 울렸다.
[대화상, 모용 선생이 당신의 친구라면 소왕자는 나의 절친한 친구요. 권고하건대 그를 풀어 주시오.]
과언지 역시 한손으로 어느새 그의 허리에 차고 있던 연편을 풀어 들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구마지 앞으로 다가갔다. 단예는 큰소리로 외쳤다.
[두 분은 어서 가시오. 당신들은 이 사람을 이길 수 없어요.]
구마지는 담담하게 웃었다.
[정말로 손을 쓸 참이오?]
최백천은 말했다.
[이 싸움은 그야말로 호랑이 머리 위에 있는 파리를 잡는 격으로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시험을 해보지 않을 수 없소, 생사는.........아이쿠!]
생사는 무엇이라고 미처 말하기도 전에 구마지는 손을 뻗쳐 과언지의 연편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팍'하는 소리와 함께 연편이 뒤집히더니 최백천 손에 들려 있는 금주판을 휘말아 버리는게 아닌가? 곧이어 채찍을 한번 휘두르자 두가지 무기는 동시에 그의 손에서 떠나 오른쪽의 호수로 떨어지려 했다. 그야말로 두가지 무기가 호수 밑으로 막 가라앉으려 했다. 그런데 구마지의 손으로 쓴 공력은 매우 합당한 데가 있었다. 그는 왼편의 채찍끝이 뒤집어지면서 공교롭게도 한줄기의 가지를 수면으로 드리우고 있는 버들가지에 걸리게 했다. 그러자 버들가지는 부드러우므로 흔들흔들 하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갔다 끊임없이 요동을 했다. 이렇게 되자 채찍 끝에 매달려 있던 금주판은 물 위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면서 수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때 구마지는 두 손을 합장하더니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수고스럽지만은 길을 안내해 주시오.]
최백천과 과언지 두 사람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구마지는 말했다.
[두 사람이 만약 길을 안내하기 싫다면 연자오의 삼합장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오. 소생이 길을 찾아 가는 것도 무방하오.]
바로 이때 노젓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저쪽으로부터 일엽편주가 두둥실 떠왔다. 녹삼을 걸친 한 소녀가 손에 노를 붙잡고 천천히 물을 헤치고 이쪽으로 오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함담향연십경파, 소고탐회채연지, 만래농수선두탄, 소탈홍군과압아.]
노래소리는 교태롭고 천진난만했으며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었다. 단예는 대리에 있을때 때때로 옛사람들의 시와 문장을 읽었다. 그러므로 강남의 풍물에 대해서는 깊이 혹해 있었는데 이때 노래 소리를 듣고는 그만 그 소리에 취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소녀의 한쌍의 섬세한 손은 살결이 옥과 같이 희었다. 파란 물과 대조를 이루어 유리처럼 투명해 보였다. 최백천과 과언지도 대적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몇번씩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구마지는 상대방이 자기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 줄 알고 다시 말했다.
[두 분이 삼합장의 소재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소생은 이만 작별을 하겠소.]
이때 소녀가 젓던 배는 이미 뭍에 닿아 있었다. 구마지가 하는 말을 듣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삼합장에 무슨 볼 일로 가시나요?]
그 음성은 매우 달콤하고 청아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뭐라 말할 수 없는 쾌적감을 느끼게 했다. 이 소녀는 나이가 십 육세 정도 되어 보였으며 얼굴은 청수하면서도 온순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강남의 여자들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정말 뜻밖이다.)
기실 이 소녀는 그다지 아름다운 편이 되지 못했다. 목완청에게 비한다면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미모에다 온순함을 보탠다면 그야말로 십분 뛰어난 미녀에 조금도 손색이 없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구마지는 그와 같은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
[소승은 삼합장으로 가는 길인데 소낭자는 길을 가르쳐 주겠소?]
소녀는 말했다.
[참으로 공교롭군요. 모용 공자께서는 외출했어요. 대사께서 삼일만 일찍오셨다면 만날 수 있었을텐데요.]
구마지는 말했다.
[공자를 만날 수 없다니 정말 소승의 마음을 허전하게 하는구료. 그러나 소승은 토번국에서 만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이 중원땅까지 온 사람이오. 그러니 모용 선생의 무덤 앞에서 재를 올린 후 과거의 심원을 풀고자 하오.]
그 소녀는 말했다.
[대사께서 모용 선생의 절친한 친구라면 먼저 가서 한 잔의 차를 마신 후 제가 다시 전갈을 드리지요. 어떠세요?]
구마지는 말했다.
[소낭자는 공자 댁의 어떠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오? 또한 어떻게 불러야 되겠소?]
소녀는 말했다.
[저는 공자의 시중을 들고 있으며 문금을 타고 퉁소를 부는 시녀입니다. 아벽이라고 해요. 대낭자니 소낭자니 하여 겸손해 하실 것 없이 저를 그냥 아벽이라 불러 주세요.]
그는 대뜸 소주의 토박이 말을 했다. 단예 등은 간신히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이때 구마지는 공손하게 응수했다.
[원, 별 말씀을 다하시는군요.]
아벽은 다시 말했다.
[이곳에서 연자오 금운소축으로 가는 길은 모두 수로에요. 여기 계신 분이 모두 가셔야 한다면 제가 모셔다 드리는게 어떻겠어요?]
그녀는 한 마디 할때마다 '좋겠어요'라고 부드럽게 물으며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구마지는 말했다.
[그렇다면 부탁드리오]
그리고 단예의 손을 잡고 가볍게 몸을 날려서 조그만 배 위로 올라갔다. 그 배는 아래로 약간 들어갔으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벽은 구마지와 단예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마치 훌륭한 재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과언지는 나직이 말했다.
[사숙,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그 두 사람은 모용씨 집안 사람을 찾아 원수를 갚으러 온 터이지만 워낙 낭패한 꼴을 당한 후라 여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벽은 미소했다.
[두 나리께서도 소주에 오셨으니 달리 요긴한 일이 없으시면 제가 있는곳으로 가서 차나 한잔 마시며 음식을 조금씩 들도록 하셔요. 이 배는 비록 작지만 몇 사람 더 타도 끄덕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배를 저어 버드나무가지 바로 아래에다 바짝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섬섬옥수를 뻗어서는 주판과 연편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주워든 즉시 주판을 흔들어 보았다. 금주판에서는 '쨍그렁'하는 소리가 났다. 단예는 그 소리만 들어도 기뻐서 말했다.
[소저가 탄주하는 것은 채상자가 아니오?]
원래 그녀는 주판알을 굴린 것이 아니라 가볍고 무거운 반면 빠를 때도 있고 느릴 때도 있는 운율을 내고 있었다. 그 운율은 청아하기 이를데 없는 채상자라는 노래가락이었던 것이다.
아벽은 방긋 웃었다.
[공자, 공자는 음율에 대해 매우 잘 아시는군요. 한 곡 퉁겨 보시겠어요?]
그녀의 말이 매우 청아하고 부드러운 것을 보고 단예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나는 주판알을 퉁길 줄 모른다오.]
단예는 최백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곽선생, 저 소저는 곽선생의 주판알을 가지고 저토록 아름답게 퉁기는구료.]
최백천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소. 소저는 정말 운치가 있는 사람이구료. 우리의 가장 속된 물건이 소저의 손에 들어가니까 그만 한가지의 악기로 변하는 군요.]
아벽은 말했다.
[어마, 미안해요. 이것은 곽나리의 것인가요. 이 주판알은 굉장히 잘 만들었네요. 댁에는 굉장히 돈이 많으신가봐요. 주판알을 다 황금으로 만들었네요. 자 곽나리 이것을 돌려드리죠.]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들고 팔을 뻗쳤다. 최백천은 뭍 위에 있어서 그것을 받을 수가 없었다. 최백천으로서는 정말 잠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주판이라서 잃어 버리기는 정말 아까왔다. 그래서 가볍게 몸을 날려 뱃머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서 주판알을 받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구마지를 한번 노려보았다. 구마지는 시종 얼굴에 인자한 웃음을 띠우고 전혀 노해하는 빛이 없었다. 아벽은 왼손으로 연편의 끝을 약간 높이 올렸다. 그리고 오른손의 다섯손가락으로 채찍을 쓰다듬으며 내려왔다.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은 연편에서 불거져 나온 가시 같은 곳을 가볍게 퉁겼다. 그라자 "띵땡똥"하는 맑은 소리가 났다. 그녀의 다섯 손가락은 마치 쇠로 된 비파를 시험해보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중원의 남북을 주름잡던 하나의 무기가 그녀의 부드럽고 깨끗한 손길에 닿자 그만 모두 악기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아벽은 과언지에게 말했다.
[이 연편은 나으리 것이가요? 제가 아무렇게나 가지고 놀아서 실례했어요. 나으리도 이 배위로 올라오셔요. 잠시 후 모두에게 신선한 붉은 홍능을 대접해 드릴께요.]
과언지는사부님의 원한을 갚고 싶은 마음에 고소 모용씨의 집안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증오심에 복바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 소저의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여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차마 그녀에게는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장원으로 안내한다면 그것 마침 잘된 일이다. 먼저 몇 사람을 먼저 죽인 후 사부님의 원수를 갚아야지.)
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 배 위로 올라갔다.
아벽은 연편을 곱게 말아서 과언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노를 저어 배를 서쪽으로 몰았다. 최백천과 과언지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둘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은 호랑이굴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우리의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모용씨의 집안 사람들은 손 씀씀이가 악랄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이 소저는 매우 부드럽고 온순해 보이는데 계책일 수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가 경계하는 마음을 풀도록 유도했다가 그런 즉시 모용씨 집안에서 손을 써올지도 모른다.)
배는 호수 위로 거칠 것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수로를 따라 몇번 모퉁이를 돌더니 다른 커다란 호수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야말로 푸른 물결만이 감돌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먼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지 않은가? 과언지는 더욱더 놀랐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커다란 호수가 바로 태호인 모양이다. 나와 사숙은 자맥질을 할 줄 모른다. 만약 저 계집이 배를 뒤집어 놓기만 한다면 우리둘은 호수에 빠져 고기밥이 될 터이니 어찌 사부의 원한을 갚게 되겠는가.)
최백천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만약에 노를 자기가 잡고 있기만 하다면 소저가 배를 뒤집으려 해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백천은 말했다.
[소저 노는 내가 잡도록 하지. 그대는 방향을 가리키기만 하면 되오.]
아벽은 웃으며 말했다.
[어마, 그것은 감당할 수 없네요. 만약 그 일을 우리집 공자께서 안다면 손님에게 태만하게 대했다고 저를 꾸짖으실거에요.]
그녀가 노를 놓지 않으려 하자 더욱 의심이 솟았다.
[사실, 우리는 소저가 연편을 퉁기던 절기를 들어보려는 것이오. 우리는 조야한 사람이지만 저기 있는 저 단공자는 금기서화에 능통하지요.]
아벽은 단예를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제가 퉁긴 것은 아무것도 아닌데 어떻게 절기라고 하셔요? 단공자께서는 정말 고아한 분이시니 제가 하는 양을 보고 매우 웃었을거예요. 저는 싫어요.]
최백천은 가운데에서 왼편의 손으로 연편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퉁겨 보시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녀에게서 노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좋아요. 그러면 나리의 주판도 주셔요.]
최백천은 속으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우리의 두 가지 무기를 모두 거두어가는 것이 혹시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최백천은 금으로 만든 주판을 그녀에게 주었다. 아벽은 주판을 갑판 위에다 놓았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연편의 자루를 쥐었다. 왼발로는 가볍게 연편의 끝을 밟아 연편이 쭉 뻗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오른손 다섯 손가락으로 한번 나는 듯 연편을 퉁기자 '딩댕동' 소리가 났다. 비파처럼 복잡하고 맑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시원하고 맑은 소리였다.
아벽은 다섯 손가락으로 연편을 퉁기면서 여유가 있을 때는 또 손가락을 뻗쳐서 주판을 튕기기도 했다. 그렇게 되자 주판의 쨍쨍거리는 소리가 연편의 딩댕동거리는 소리에 섞여 들어와 더욱 운치를 더했다. 바로 이때 두 마리의 제비가 뱃머리에 앉았다가 서쪽으로 질풍과 같이 날아갔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모용씨가 거처하는 곳이 연자오라 했으니 아마도 제비가 많을 것이다.)
아벽은 나직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사양지 천가정원 편편우도쌍비연 봉황소은허위린 소상연명래하만 난입흥루, 저비녹안, 화량경불가진전, 위수귀거위수래? 주인은 중주겸권.]
단예는 그녀의 노래 소리가 부드럽게 흐르자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만약 한평생 남쪽 땅에서만 살았다면 어찌 이런 신선과 같은 가락을 들을수 있었겠는가? 위수귀거위수래, 주인은 중주겸권이라, 모용 공자를 받드는 시녀가 이런 노래를 읊는 것으로 보아 모용공자는 그야말로 범상한 인물이 아니구나.)
아벽은 한 곡이 끝나자 연편과 주판을 과언지와 최백천에게 돌려 주며 말했다.
[노래 소리가 시원치 않으니 손님들께서는 웃지나 마셔요. 곽나리, 배를 바로 왼쪽 조그만 수로길로 접어 들게 하셔요.]
최백천은 무기를 되돌려 주자 즉시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아벽이 이야기한 대로 조그마한 배를 갈대가 우거진 곳으로 저었다. 그곳에는 수면으로 갈대가 잔뜩 자라나 있어서 만약 그녀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갈대 사이로 수로가 나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지경이었다.
최백천은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아벽은 다시 수로를 가리켰다.
그쪽 수로에는 붉은 능들이 잔뜩 자라 있었다. 푸른 물결 가운데 붉은 능각과 파란잎이 자라나 있어 더욱 신선한 감을 주었다. 아벽은 배가 옆에 지나갈 때 손을 뻗쳐서는 붉은 능각을 따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단예는 손을 움직일 수는 있었으나 혈도를 짚힌 후 전혀 기운을 쓸 수가 없었다. 따라서 붉은 능각의 껍질을 하나도 벗길 수가 없었다. 아벽은 웃으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강남인이 아니어서 능각의 껍질을 벗길 줄 모르는군요. 제가 벗겨 드리지요.]
그리고 그녀는 잇따라 몇 개를 벗겨서는 그의 손에 놓아주었다. 단예는 그 능각의 속살이 곱고 부드러운 것을 보자 입안으로 넣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것이 여간 맛이 좋지 않아 웃으며 말했다.
[이 능각의 맛이 맑으면서 느끼하지 않은 것이 바로 소저의 노래소리 같구료.]
아벽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웃었다.
[저의 노래를 이 능각에 비교하는 말씀은 오늘 처음 듣네요. 공자 고마워요.]
능각의 풀잎들이 나있는 수로를 미처 다 지나기 전에 아벽은 다시 갈대와 수초가 우거져 있는 길로 갈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되자 구마지마저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몰래 배가 온 길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돌아갈 때 길을 잃지 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호수위에는 아무리 봐도 연잎과 능각잎 그리고 갈대와 잡초들만이 자라있고 그 모양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거기다가 연뿌리 능각의 잎은 수면에 떠있다가 바람만 불어도 삽시간에 그모양이 변해 버리므로 아무리 길을 머리 속에 외워 놓아도 아무소용이 없을거 같았다. 그래도 구마지와 최백천, 과언지 세사람은 끊임없이 그녀의 두 눈꼬리를 살폈다. 그녀의 눈초리에서 그녀가 길을 찾아내는 방법과 흔적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능각을 따며 무심히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말할 뿐이었다. 이와 같이 구불구불하게 두 시진쯤 배를 저어갔다. 이렇게 미시때쯤 되었을때 멀리 푸른 버드나무가지 사이로 처마가 비죽 나와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아벽이 말했다.
[다 왔어요 곽나리. 정말 반 나절이나 저를 도와 배를 저어 주셨군요.]
최백천은 쓰디쓰게 웃었다.
[붉은 능각을 얻어먹고 소저의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나를 열 시진이고 여덟 시진이고 배를 저을 수 있소.]
아벽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애기를 들으니 능각을 먹고 싶다고요? 그건 간단해요. 그것은 이 소주성에 살면서 한평생을 나가지 않으면 돼요.]
최백천은 그녀의 소주성에서 한평생 나가지 않으면 된다는 말을 듣고 곁눈질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전혀 어떤 의미를 갖고 이야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최백천은 마음이 놓이지않았다.
아벽은 노를 받아들더니 배를 곧장 버드나무 가지쪽으로 저어갔다. 거기에는 소나무가지를 엮어 만든 사다리가 물 위로 놓여 있었다. 아벽은 배를 나뭇가지에 묶었다. 그러자 갑자기 버드나무위에서 한마리의 조그마한 새가 재잘재잘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소리가 매우 맑았다. 아벽은 그 소리를 몇 번 흉내내어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자, 뭍으로 오르시지요.]
그들은 한명씩 뭍으로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드문 드문 몇 채의 집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집들이 지어져 있는 곳은 섬인지 아니면 반도인지 도무지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집들은 아담했고 퍽이나 운치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맨앞에 있는 조그만 정사의 편액 위에는 '금운'이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필체는 꽤나 매끄러워보였다.
구마지는 말했다.
[이곳이 바로 연자오 삼합장이오?]
아벽은 대답했다.
[아니요, 이곳은 공자께서 제게 지어준 집이예요. 조그마한 곳에 지나지 않아서 실제로는 귀빈을 접대할 수 없답니다. 그리고 대사님께서는 모용 큰나리의 무덤에 재를 올리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저는 제 마음대로 그곳으로 안내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면 제가 아주 언니에게 물어 볼 작정이예요.]
13. 모용세가의 시녀들
구마지는 아벽의 말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토번국의 국사가 아닌가? 어찌 일개 시녀의 집에 머물 수가 있으랴?)
그는 화가 났지만 생글생글 웃는 아벽을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계집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모르는 아이를 상대해서 따진들 무엇하랴.)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최백천은 물었다.
[대체 아주 언니는 누구세요?]
아벽은 웃으며 말했다.
[아주는 아주지요. 그녀는 나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났는데 그래서 걸핏하면 언니라고 거드름을 피우죠. 저는 할 수 없이 언니라고 불러요. 제가 한 달 늦게 태어난 것이 죄죠. 최나리께서도 아주라고 부르시면 될거에요.]
그녀는 거침없이 종알거렸다. 그 음성이 맑고 고와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네 사람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객청에 이르게 되자 아벽은 네 사람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자 남자하인이 나서서 차를 올리고 떡을 내놓았다. 단예는 찻잔을 들어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향긋한 냄새가 코에 스몄다. 엷은 녹색의 찻물에는 짙은 파랑 빛의 찻잎이 둥둥 떠있었다. 그것은 구슬같이 생겼는데 한알한알에 융털같은 것이 소담스럽게 자라 있었다. 단예는 이와 같은 차를 마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입에 한 모금 머금고 맛을 보았다. 입안에 향기가 그득해지면서 절로 침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구마지와 최백천 그리고 과언지 세 사람은 찻잎이 이상하게 생긴 것을 보고 마시려 하지 않았다.
이 구슬처럼 생긴 찻잎은 태호 부근의 산봉우리에서 나는 특산으로 후세 사람들은 벽나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북송시대만 해도 이처럼 운치 있는 것도 없었다. 본 고장 사람들은 이를 혁살인향이라고 일컬었는데 그 향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마지는 서역과 토번 산지에서 기거해 왔기 때문에 씁쓰레한 흑색의 찻잎을 마셔왔다. 따라서 이처럼 파랗고 융털이 보송보송한 것을 보자 혹시 독이 있지나 않은가 의심하게 되었다.
간식용의 떡은 네 가지였다.
송자당, 복영연고, 위축첨병, 우분화퇴교였는데 그 모양이 매우 예뻐서 먹기보다는 가지고 놀기 위해서 만든 것 같았다.
단예는 칭찬했다.
[이 떡들이 이와 같이 모양이 예쁘니 맛 또한 절묘할 것 같군. 그러나 아까와서 어떻게 먹지?]
아벽이 미소했다.
[공자께선 드시기나 하세요. 우리 집에는 만들어 놓은 것이 많이 있어요.]
단예는 한가지씩 먹어 보고 한마디씩의 칭찬을 던지곤 했다. 매우 즐거운 듯했으며 한평생 처음 먹어 보는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구마지와 최백천 그리고 과언지 세 사람은 역시 먹으려 하지 않았다.
단예는 속으로 의심을 했다.
(구마지는 자칭 모용박의 절친한 친구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경계심을 잔뜩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모용장에서 그를 대접하는 태도가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은데........)
구마지는 정말 참을성이 대단했다.
단예가 네 가지의 떡과 찻물을 모두 먹고 마시고 잔뜩 칭찬을 늘어 놓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소저가 가서 아주 언니에게 통지하시구려.]
아벽은 말했다.
[아주 언니가 살고 있는 곳은 수로로 사구예요. 오늘은 갈 여가가 없어요. 오늘은 네 분이 여기서 쉬시지요. 저는 내일 아침 일찌기 네 분을 청향수사로 보내 드리지요.]
최백천은물었다.
[사구 수로라는 것은 무엇이오.]
아벽은 말했다.
[일구는 아홉 마장, 이구는 십 팔 마장, 사구는 삼십 육 마장이 되는 거에요. 주판알로 튕겨 보시면 아실거예요.]
언제나 강남에서는 노정의 거리를 측정할 때 일구는 몇 마장, 몇 마장은 몇 리 하는 식으로 계산했다. 구마지는 말했다.
[진작 그런 줄 알았으면 우리를 곧장 청향수사로 보냈으면 일이 좀더 쉬워질 걸 그랬소.]
아벽은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는 저를 상대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어야죠.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에요.그러던 차에 손님 몇 분이 오셨는데 제가 그냥 놓칠 수가 있겠어요? 어찌 되었든 간에 오늘 밤에는 여기서 묵고 가셔야 해요.]
과언지는 여태까지는 성질을 누르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자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모용씨 집안 사람들은 어디서 사는거요? 과언지가 이곳 삼합장에 온 것은 당신과 차나 마시고 당신의 말 상대를 하러 온 것이 아니오. 사람을 죽이고 원한을 갚는 등 피를 뿌리러 온 것이오. 그리고 이 과가가 이곳에 온 이상 살아갈 생각은 없소. 그대는 가서 복우파 가백세의 제자인 내가 사부님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고 전하시오.]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연편을 흔들었다. 그러자 '우지끈, 뚝'하는 소리와 함께 자단목으로 만든 탁자와 장상죽으로 만든 의자가 박살이 났다.
아벽은 그래도 화를 내거나 당황해하지 않았다.
[강호에서 공자님을 만나려는 영웅호걸들이 매 달 몇 번씩은 오시죠. 그리고 과나리처럼 무섭게 기세등등하신 분도 계시지요. 그래서 저와 같은 시녀들도 별로 놀라지 않는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머리카락과 수염이 허옇게 쇤 노인이 지팡이를 들고서 어적어적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누군데 여기서 큰 소리를 치고 야단이냐!]
말씨는 표준 말이었고 억양 또한 매우 올바랐다.
최백천은 의자에서 일어나 과언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호통을 쳤다.
[나의 사형은 도대체 누구의 손에 돌아가셨지?]
단예는 노인을 살폈다.
노인의 허리는 구부정했고 온 얼굴에는 주름이 덮혀 있었다. 그 노인은 아흔은 되지 않았어도 팔십 몇 세는 되어 보였다.
이때 노인은 목이 쉰 음성으로 고함을 지르듯 말했다.
[가백세, 가백세, 나이를 백 살이나 먹었는데 죽어도 싸지.]
과언지는 소주땅에 이르자 마자 즉시 모용씨의 집으로 달려가 한바탕 소동을 부려 사부의 원한을 갚으려 했었다. 그런데 과언지는 무기를 빼앗기면서 그 의지가 꺽여 버리고 말았다. 거기다가 재차 아벽과 같이 천진난만한 소저를 만나 가슴 그득히 끓어 오르는 원한을 쏟아낼 수가 없었다. 이때 노인의 무레한 말을 듣고 연편을 꺼내 휘둘렀다. 채찍 끝은 곧장 노인의 등으로 날아갔다. 그는 구마지가 왼쪽에 있기 때문에 그가 중간에 방해를 할까봐 채찍 끝을 동편을 향해 휘둘러 갔다. 구마지는 팔을 쭉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 마치 자석 같은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멀이 떨어져 있는 연편을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말했다.
[과대인, 우리는 멀리서 온 손님이오.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해야지 무력을 써서야 되겠소?]
구마지는 그 채찍을 말아서는 과언지에게 되돌려 주었다.
과언지는 얼굴이 시뻘개졌다.
받자니 그렇고 안 받자니 그렇다. 그러나 과언지는 생각을 달리했다.
(원수를 갚자면 무기는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손을 뻗어 무기를 받아 쥐었다.
구마지는 노인에게 입을 열었다.
[시주께서는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모용 선생의 친척이 되시나요, 아니면 친구가 되시는가요.]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는 공자 나리의 종이오. 존성대명이라니 가당치 않소. 그런데 대인은 우리 돌아가신 모용 나리의 절친한 친구라고 하던데 무슨 볼 일이 있어 여기까지 오셨나요?]
구마지는 말했다.
[나의 일은 공자를 뵙고 직접 말을 하겠소.]
노인은 말했다.
[그것 참 안 됐군요. 공자 나리는 바로 그저께 외출을 하셨답니다.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지요.]
구마지는 말했다.
[공자는 어디로 가셨소?]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기의 이마를 '탁탁'치며 말했다.
[이거, 늙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군. 서하국이라고 하던가? 요나라라고 하던가? 어쩌면 토번국이나 아니면 대리로 갔을지도 모르죠.]
구마지는 코웃음을 쳤다.
당시 천하는 다섯 나라가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은 이곳을 가리키는 송나라만 제외하고는 네 나라를 모두 말하는 것이었다.
구마지는 노인이 일부러 멍청한 척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말햇다.
[그렇다면 나는 공자가 돌아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겠소. 시주는 나를 모용선생의 묘앞으로 안내하시오. 고인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떠나가겠소.]
노인은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것은 내가 책임질 수 없소.]
구마지는 말했다.
[그렇다면 귀댁의 묘지기는 누구요. 이리 나오라고 하시오.]
노인은 말했다.
[좋소, 좋소. 그렇다면 내가 가서 묘지기를 나오라고 하지요.]
그러더니 몸을 돌려 휘청거리며 나갔다.
그리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요즘 세상은 별 나쁜 사람들이 다 있거든. 화상이나 도사를 가장하고 아무 집이나 찾아 들어서 시주를 바란다는 둥 속이면서 별짓을 다 벌이는 세상이야! 이 늙은이가 견문은 없지만 그런 수에 속아 넘어가지는 않지.]
단예는 소리내어 웃었다.
아벽은 황급히 변명을 했다.
[대사님, 화를 내지 마셔요, 저 황노인은 늙어서 망령이 났어요. 그는 항상 자신이 가장 현명한 것처럼 말을 하면서 남의 비위를 거슬린답니다.]
최백천은 과언지의 옷자락을 당기며 한쪽으로 갔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저 화상은 자칭 모용씨 집안 사람과 친구가 된다고 했는데 이 집안에서는 분명히 저 사람을 귀빈으로 대접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좀더 두고 본 후에 이야기 하기로 하자.]
과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로 하죠.]
두 사람은 다시 제자리로 가서 앉았다. 과언지는 원래 자기가 앉았던 의자를 쳐서 부숴 버렸기 때문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아벽은 자기의 의자를 내어 주며 웃었다.
[과나리, 여기 앉으시죠.]
과언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모용씨 집안 일가족을 모조리 죽여 없앤다 하더라도 이 계집애 만큼은 살려 주어야겠다.)
단예는 그 늙은이가 들어올 때 뭔가 마음에 걸리면서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무언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 조그만 객청에 진열되어 있는 가구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원의 꽃나무들과 벽에 걸려 있는 서화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벽과 과언지, 최백천과 구마지 네 사람을 차레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 속으로 더욱더 거북스럽게 느꼈다.
잠시후 발자국 소리가 울리더니 쉰 댓 살 되어 보이는 비쩍 마른 남자가 들어왔다. 얼굴색은 싯누럴 뿐 아니라 아래 턱에는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부진 모습을 엿보이게 하는 데가 있었고 옷차림도 꽤 깨끗했다. 왼손가락에는 한옥반지를 끼고 있었다. 아마도 모용씨 집안의 묘지기인 모양이었다.
이 비쩍 마른 사람은 구마지 등에게 예를 했다.
[손삼이 여러분에게 인사드립니다. 대사께서는 우리 나리의 무덤 앞에 가서 제를 지내시겠다구요. 우리는 실로 고맙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자님께서 외출을 하시어 예를 다 갖추지 못하는 것을 실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공자께서 돌아오시면 반드시 대사님의 그런 뜻을 전해 올리지요.]
그 자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단예는 갑자기 담담한 향기를 맡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그러고 보니 조금전 노인이 객청에 들어섰을 때 은근한 향내가 났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것은 목완청의 몸에서 나는 몸냄새와 비슷했다.
물론 서로 다른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여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임에는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노인이 대청에서 나가자마자 그 향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손삼이라는 묘지기가 대청으로 들어 오는 순간 그 냄새가 다시 나는 것이었다. 단예는 그제서야 자신의 마음 속에 느껴지던 의문이 바로 구십 세의 노인의 몸에서 나는 향이 십 칠팔 세의 소녀의 몸에서나 맡을 수 있는 향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뒤에 어디다 기화이초를 심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저 뒤에서 나오는 사람의 몸에 그 냄새가 밴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 구십 노인과 저 비쩍 마른 사내는 모두 여자가 분장을 한 것일게다.)
이 향기는 단예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했지만 그 향기는 지극히 엷었다.
구마지 등 나머지 세 사람은 전혀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단예만이 이러한 눈치를 채게 된 것은 그가 목완청과 석실에서 기이한 경험을 했던 때문이었다.
이 담담한 처녀의 유향은 다른 사람은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단예에게는 그야말로 뼈에 사무치도록 맡고 또 맡았던 냄새였다. 사향이니, 단향이니 꽃향기보다도 더욱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구마지의 내력이 심오하다고 하나 한평생 계율을 지켜 왔으므로 어여쁜 미녀라 하더라도 그의 눈에는 백골로 보였고 분과 연지에서 나는 향기라도 그의 코 끝에 풍기는 것은 피비린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자와 여자에게서 나는 체취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였다. 단예는 손삼이 여자가 분장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이리 저리 뜯어 보았으나 어떠한 흔적도 찾아 볼수가 없었다. 이 손삼이란자는 비단 표정이나 행동에 있어서도 모두 남자다울 뿐만 아니라 얼굴이나 소리에 있어서도 전혀 여자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남자로 가장하려 해도 목에 있는 복숭아 뼈는 가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단예가 손삼의 목뼈를 들여다 보려 했으나 염소 수염이 길게 늘어져 복숭아 뼈가 있는 곳을 가리고 있지 않은가. 단예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부러 벽에 걸려 있는 소화폭을 감상하는 척하면서 손삼의 옆으로 가서 곁눈질로 훔쳐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목에는 전혀 복숭아 뼈가 튀어 나온 흔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이 꽤 불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토록 비쩍 마른 사내의 가슴이 그 부분만 살이 쪄서 풍성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예는 그와 같은 비밀을 발견하게 되자 매우 흥미있게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구경거리가 많이 생기게 되었군. 어떻게 될른지 두고 봐야겠다.)
이때 구마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승과 그대의 나리는 과거 사천성 변경에서 서로 알게 되었고. 무공을 논하다가 피차 서로 탄복한 나머지 좋은 친구가 된 것이오. 그런데 뜻밖에도 하늘이 귀재를 시기해서인지 나와 같이 범용한 자들은 아직도 세상에 살고 있는데 그대의 나리는 서방의 극락세계로 떠났구료. 내가 토번국에서 중원까지 온 것은 다만 옛친구와의 정을 중시해서 그의 무덤앞으로 나아가 제를 올리고 절을 하려는 것뿐이오. 따라서 그 누가 있어서 제대로 대접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는 일이오. 그러니 수고스럽지마는 묘지기께서 나를 안내해 주시오.]
손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매우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건......]
구마지는 말했다.
[그런데 이 중간에 어떤 어려운 점이 있다면 가르쳐 주시오.]
손삼은 말했다.
[대사께서 생전에 우리 나리와 절친한 사이이셨다면 우리 나리의 성질을 아실 것입니다. 저희 나리는 그 누가 찾아오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나리께서는 우리집으로 찾아 오는 사람들은 원한을 갚거나 시비를 일으키러 오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무공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죠. 그리고 더욱더 나쁜 것은 여비나 풍성히 뜯어 가려고 찾아오려고 하거나 집어갈 것이 없는가 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죠. 따라서 나리께서는 화상이나 여승은 더욱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한 말 중에 몇 마디가 구마지에게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손을 들어 재빨리 입을 틀어 막았다.
이와 같은 태도는 바로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동그랗게 뜨고 있는 눈의 까만 눈동자를 또르르 한 곳으로 굴렸다.
그는 이를 보고 속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손삼이라는자는 여자일 뿐 아니라 나이 어린 소저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곁눈질로 아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한 가닥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자신의 의심이 들어 맞았다고 생각했다.
(이 손삼은 바로 그 노복인 황노인과 동일 인물이다. 어쩌면 바로 그 아주언니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때 구마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상에 음흉한 자가 많고 성실한 사람이 적은 것은 사실이오. 그리고 모용 선생이 속인들과 사귀기 싫어한 것도 당연한 일이외다.]
손삼이 말했다.
[그렇지요. 저희 나리께서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저희에게 말하기를 성묘를 한다거나 무덤 앞에서 절을 한다는 것을 일절 사절하라고 했습니다. 나리께서는 '그 중놈들은 호의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필시 나의 무덤이나 파헤칠려고 찾아오는 것일게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어이쿠! 대사 오해는 하지 마십시요. 저희 나리께서 욕한 '중놈'은 십중팔구 대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단예는 속으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화상을 눈앞에 두고 중놈을 욕한다더니 그 말이 틀림이 없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래도 저 화상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구나. 간악한 사람일수록 참을성이 많다고 하더니 저 화상은 정말 얕보아서는 안되겠다.)
구마지는 입을 열었다.
[그대 나리의 몇 마디 유언은 일리가 있는 말씀이외다. 그는 생전에 천하에 위엄을 떨쳤고 그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외다. 그러니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어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있던 자들도 그가 죽은 후에 원한을 갚고자 시체라도 어떻게 하려고 할터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외다.]
손삼은 말했다.
[저희 나리의 유체를 건드리다니 하 하 하...... 늙은 고양이가 절인 고기 냄새를 맡는 격이죠.]
구마지는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늙은 고양이가 절인 고기냄새를 맡는다니 무슨 뜻이오?]
손삼은 말했다.
[그것은 바로 생각지도 말라는 얘기지요.]
구마지는 말했다.
[알고 보니 그렇군. 나는 모용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으니 무덤앞에서 단시 고인에게 절을 한 번 하고 싶었던 것뿐이오. 묘지기는 너무 의심을 하지 마시오.]
손삼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소인이 어떻게 하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모용 나리의 엄명을 어기게 된다면 공자께서 돌아온 다음에 그 사실을 아시게 될 것이고 그리고 난 후엔 제 다리가 분질러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요. 제가 가서 노마님을 모셔 나와 다시 대답을 들어 보는 것이 어떠할런지요?]
구마지는 물었다.
[노마님이라니, 어떤 분의 노마님을 말하는 것이오?]
손삼은 말했다.
[바로 모용 노마님이지요. 우리 나리의 숙모님이 되십니다. 매번 나리의 친구들이 저희 집을 찾아오게 될 때마다 그녀에게 인사를 드리지요. 그리고 나리가 집에 안 계실 때는 무슨 일이든지 노마님에게 상의를 드리지요.]
구마지는 말했다.
[그것 참 잘됐군. 그럼 그대가 노마나님에게 전해 주시오. 토번국의 구마지가 노마님께 안부를 여쭙는다고 전해 주시오.]
손삼은 말했다.
[대사께서 너무 겸손하십니다. 저희로서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일이지요.]
그런 후 그는 내당으로 들어갔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소저는 정말 영악하기 이를데 없다. 그런데 저 구마지라는 화상을 희롱하는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잠시 후 장식용 귀걸이 같은 것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한 노부인이 내당으로 부터 들어왔다.
그런데 그 노부인이 객청으로 들어서자 그 담담한 향내가 코끝으로 스며들지 않는가? 단예는 미소를 하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노부인으로 분장했구나.)
그 노부인은 고동색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팔목에는 옥으로 만든 팔찌를 끼고 있었으며 머리칼에는 구슬이며 취등으로 잔뜩 장식을 해 놓고 있었다. 옷차림은 그야말로 매우 의젓하고 고귀해 보였다. 그러나 얼굴에는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고 눈도 흐릿해서 앞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았다.
단예는 암암리에 갈채를 보냈다.
(계집애가 대단하군. 무엇을 가장하던지 간에 근사하게 닮았어. 더욱 대단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이렇게 완전하게 변장을 한다는 사실이야. 정말 사람을 탄복하게 하는구나.)
노부인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몸을 떨면서 대청으로 들어서더니 입을 열었다.
[아벽, 너의 나리의 친구가 왔느냐? 어째서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노부인은 말하면서도 고개를 동쪽으로 돌렸다가 서쪽으로 돌렸다가 하였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누가 누군지 구별을 하지 못하는 상싶었다.
아벽은 연신 손짓을 하며 구마지에게 나직히 말했다.
[빨리 절을 하세요. 절을 하게 된다면 노마님께서 기쁘셔서 어떤 일이라도 허락하실거예요.]
노부인은 몸을 기웃하면서 손을 뻗어 귀 뒤에다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좀더 잘 들으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이 계집애가 뭐라고 말하는 게야? 상대방에서는 절을 하였느냐?]
구마지는 말했다.
[노마님 안녕하셨습니까. 소생이 어르신네께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는 길게 읍을 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진기를 내쏟아 객청바닥의 댓돌들이 통통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그것은 마치 큰 절을 올리는 것 같았다.
이때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좋아. 요즈음 간사한 무리가 성실한 사람보다 많아서 절을 한번 하래도 엉뚱한 짓을 한단 말이야. 절도 하지 않으면서 절을 하는 것처럼 땅바닥에다 동동동 소리만 내거든! 이야말로 내가 앞을 못 본다고 업신여기는거지. 네 녀석은 정말 훌륭해. 착하단 말이야. 절을 해도 동동동 소리를 내면서 하니 말이야.]
단예는 그만 참을 수가 없어 커다란 웃음소리를 내었다.
노부인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벽, 그 누가 방귀라도 뀌었느냐?]
하면서 그녀는 손을 뻗어 코끝을 만졌다.
아벽은 웃음을 참고 말했다.
[노마나님 아니에요. 저 단공자께서 한번 웃음소리를 낸 것이예요.]
노부인은 말했다.
[단 무엇이라고, 무엇을 달라는 게냐?]
아벽은 말했다.
[달라는 것이 아니고 성이 단씨 그러니까 단씨 집안의 공자란 말이예요.]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또 공자 타령이구나. 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나 너희 공자만을 생각하더라.]
아벽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노부인께서는 귀가 멀어서 자꾸 엉뚱한 말씀만 하시네요.]
그러자 노부인은 단예 쪽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이 할머니를 보고도 왜 절을 하지 않는거냐?]
단예는 말했다.
[노마나님, 제가 한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노부인은 말했다.
[무슨 말이냐?]
단예는 말했다.
[제게 한 조카가 있습니다. 정말 총명하기 이를데 가 없죠. 그런데 곧잘 말광량이 짓을 한답니다. 그 애는 원숭이로 변장해서 노는 것을 좋아했죠. 오늘은 수컷으로 가장해서 노는가 하면 내일은 암컷으로 분장을 해서 놀곤 하죠. 노마나님께선 틀림없이 좋아하실겁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번에 데리고 오지 못하여 노마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였군요.]
이 노마님은 바로 모용 씨 집안의 또 다른 하녀인 아주가 변장을 한 것이었다. 그녀의 분장술은 그야말로 신기할 정도였다. 모습을 내어 닮은 것뿐 아니라 행동거지도 완벽하게 연기를 해내어, 구마지같이 총명하기 그지없는 사람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최백천과 같이 강호에 노련한 인물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단예는 단지 그녀의 몸에서 나는 담담한 유향의 냄새로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아내었던 것이다.
아주는 단예의 이와같은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여전히 늙은이 역을 해내었다. 귀가 멀고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척을 하며 말했다.
[착한 애구나 착한 애야. 나는 한번도 자네처럼 그토록 똑똑하고 착한 애를 본 적이 없어. 착한 아이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러면 반드시 이 할멈이 네게 득이 되게 해 주겠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뜻은 나에게 그녀의 정체를 폭로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녀는 구마지라는 중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내 친구이지 적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생각에 그는 대답했다.
[마나님은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불초가 귀댁에 머무는 이상 마나님의 분부를 받들고 따를 것입니다.]
아주는 말했다.
[네가 내 말을 따른다면 그건 착한 일이지. 좋아, 먼저 이 할멈에게 큰 절을 세 번 해라. 결코 너를 손해보지 않게 해주겠다.]
단예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내심 생각했다.
(나는 당당한 대리국의 황실의 왕세자이다. 어떻게 왕세자인 내가 너와 같은 시녀에게 절을 한단 말인가?)
아주는 그의 안색이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보고 냉소했다.
[헤헤헤, 예쁜 애야.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인데 역시 이 할멈에게 큰 절을 몇 번 해야 네가 덕을 볼 수 있을게다.]
단예는 고개를 들자 아벽을 바라 보았다. 아벽은 입술을 살짝 깨어 물며 웃고 있었다. 아니, 웃으면서 단예는 곁눈질하고 있지 않는가.
하얀 살결은 막 껍질을 벗겨 놓은 능각처럼 싱싱해 보였고 입가에 조그마한 검은 점이 있어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단예는 마음 속으로 흔들리는 바가 있어서 물었다.
[아벽누나. 이 댁에 아주 누나가 있다고 했는데 그녀도 그대처럼 아름답나요?]
아벽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머나! 저 같은 못난이가 어떻게 아주 언니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아주 언니는 그야말로 나보다 열 배는 더 에쁠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그게 정말이예요?]
아벽은 말했다.
[내가 왜 속이겠어요.]
단예는 말했다.
[그대보다 열 배나 아름다운 여자는 이 세상에 없을거요......그 옥동의 신선누님만을 제외하고 말이오. 그대와 비슷하기만 하더라도 정말 미인일 것이오.]
아벽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노마님께서 큰 절을 하라고 하시는데 왜 자꾸 저를 칭찬하시는 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노부인은 본래 틀림없이 나라를 기울일 수 있을 정도로 미인이었을 것이오. 그러나 단예는 결코 마음에 두지 않소. 미인에게 몇 번 절을 하라면 그것은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생각했다.
(절을 하려면 아예 소리가 나게 해야지. 나는 이미 동굴 안의 옥미인상을 향해 천 번이나 절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미인에게 세 번 절을 한다고 어떠랴?)
그리고는 '동동동' 소리가 나게 세 번 절을 했다.
아주는 아주 기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공자는 내가 시녀인 줄을 알면서도 내게 절을 하는구나. 그야말로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착한 애구나 좋아 좋아. 그러나 처음 인사를 받았는데 선물을 줄 것이 없군.]
아벽은 서둘러 말했다.
[노마님께서는 잊으시면 안돼요. 나중에 주셔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아주는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리고는 최백천과 과언지를 향해 말했다.
14. 만다라 산장
[왜 이 두 사람은 이 할멈에게 큰 절을 올리지 않지?]
과언지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거칠게 말했다.
[나는 너희 집안을 멸망시키려고 왔는데 어떻게 너에게 절을 한단 말이냐?]
[글쎄...그럴 능력이 있을까?]
노마님으로 변장한 소녀는 냉랭한 비웃음을 던졌다.
이때 구마지가 입을 열었다.
[소승은 모용박 선생과 절친한 친구였소이다. 소승은 모용 선생과 한 가지 약속을 한 바 있습니다. 대리국 단씨의 육맥신검경을 얻어서 모용 선생님께 보여 드리기로 했죠. 그 분께서 작고하셨으니 육맥신검경을 그 분의 묘 앞에서 불살라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아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육맥신검경을 손에 넣었소?]
구마지는 대답했다.
[그 분은 약속하셨소. 소승이 육맥신검경을 보여 드리면 선생께서는 이 댁에 있는 환시수각에 소장되어 있는 일천 권의 무공비급을 보여 주겠다고 하셨던 거라오.]
아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화상이 어떻게 환시수각의 이름을 알고 있지?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르겠군.)
구마지는 아주가 대답하지 않자 마음이 다급해져서 말했다.
[육맥신검의 검보는 소승이 가져왔소이다. 그러니 소승을 환시수각으로 안내하여 그 곳의 책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아주는 말했다.
[어떤 검경이죠? 우선 이 노마님이 보아야겠어요.]
구마지는 단예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 사람이오. 이 공자의 마음 속에는 검경이 들어 있으니 소승은 단공자를 모용 선생의 무덤 앞에서 불태울 작정이오.]
그 말이 떨어지자 모든 사람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벽은 말했다.
[대사께서는 농담 좀 그만 하세요.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을 대사의 마음대로 태울 수가 있어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는데 무엇인들 가리겠소이까?]
아주는 단예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대사, 단공자가 정말 육맥신검을 암기하고 있는지 나는 말만 듣고는 믿을 수가 없소. 그의 혈도를 풀고 한번 전개해 보도록 하시오.]
구마지는 순순히 응했다. 단예에게 다가가 손을 뻗쳐 혈도를 풀어 주었다. 단예가 운기행공을 해보니 진기가 거침없이 돌지 않는가? 육맥신검경의 요결에 따라 내력을 운행하자 손가락에 전신의 내력이 일시에 집중되어 금시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아주가 말했다.
[꼬마 녀석아, 육맥신검을 펼쳐 저 화상과 싸워 보아라!]
[그러죠.]
단예가 대륜명왕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송곳처럼 꼿꼿이 편채 질러갔다. 바로 증충검이 전개된 것이다. 구마지는 방심하지 않고 급히 화염도를 펼쳤다.
츄--- 뻑!!
달군 쇠를 물 속에 담글 때 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단예는 많은 고수들의 내력을 흡수하고 있었으며 이때 그의 내력은 이미 구마지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창문과 벽이 크게흔들렸고 구멍이 뻥뻥 뚫리기 시작했다. 구마지는 손을 연신 휘두르며 말했다.
[육맥신검은 과연 무섭구나! 과거 모용 선생이 그토록 칭찬한 것도 무리는 아니야!]
구마지와 단예는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구마지는 처음에는 단예를 쉽게 죽일 수 있었으나 데리고 놀 속셈으로 가볍게 상대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단예는 육맥신검의 오묘한 원리를 점차 깨닫고 있었다. 구마지는 생각했다.
(이 녀석이 싸우면 싸울수록 정묘해지는구나! 앞으로 몇 년이 지나게 된다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게 분명하다. 오늘 아예 죽여버려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단예는 구마지의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리는 것을 깨닫고 크게 소리쳤다.
[아주, 아벽, 두 분 누님은 빨리 도망을 치세요! 이 중이 살심을 품었다고요!]
아주는 말했다.
[기어코 나의 정체를 밝히는군요! 단공자, 당신은 어째서 우리를 구하려고 하는 거죠?]
[나는 이 중녀석이 하는 일은 모두 가로막을거요!]
구마지는 음흉하게 웃었다.
[이미 때는 늦었다.]
구마지는 한 걸음 내딛더니 왼손의 손가락을 뻗쳐 단예의 혈도를 짚었다. 단예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이쿠!]
그는 피하려 했으나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리가 시큰거려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부르짖었다.
[아주, 아벽 빨리 빨리 떠나시오.]
구마지는 코웃음을 쳤다.
[당장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둔 녀석이 그래도 여자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여전하군!]
그러면서 몸을 돌려 아주에게 말했다.
[소저도 이제는 그 도깨비 장난 같은 짓은 그만 두시오. 도대체 댁의 일은 누가 책임질 수 있소. 단공자는 육맥신검의 검보를 모조리 외우고 있소. 다만 그는 무공을 몰라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뿐이오. 내일 내가 그를 모용 선생의 무덤 앞에서 태운다면 지하에서나마 선생은 옛 친구가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기뻐할 것이오.]
아주는 금운소축에 있는 사람중에 이 화상을 이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얼굴을 펴고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기로 하죠. 그런데 나리의 무덤은 이곳에서 물길로 하루 걸려요. 그러니 오늘밤은 이곳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 일찍 저희 자매가 대사님과 단공자를 나리의 무덤까지 직접 안내해 드리겠어요. 그러면 잠시 쉬시고 난 후에 저녁밥을 드세요.]
그리고 그녀는 아벽의 팔장을 끼고는 내당으로 물러났다.
약 반 시진이 흘렀을까. 한 남자 하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아벽 소저는 네 분께서 청우거에 나와서 식사하시라고 전하라 하십니다.]
구마지는 말했다.
[고맙소.]
구마지는 손을 뻗어 단예의 팔을 붙들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꾸불꾸불한 길을 수십 장 나아갔다. 길은 모두 알만한 돌들로 다듬어 깔아 놓은 소로 길이었다. 몇 곳의 바위와 옻나무들이 서있는 곳을 지나 물가로 나왔다. 나와 보니 버드나무 가지에 한 척의 작은 배가 매어져 있었다.
그 남자 하인은 연못 중앙의 삼면이 전부 창문으로 만들어진 나무집을 가리켰다.
[바로 저깁니다.]
구마지와 단예, 최백천, 과언지는 작은 배 위로 올라갔다. 남자 하인은 삽시간에 배를 저어 청우거에 다다랐다.
단예는 소나무로 만든 계단을 타고 청우거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문 앞에는 아벽이 서서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그녀는 몸에 엷은 녹색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엷은 분홍색의 의상을 입은 한 여인이 서있었는데 그녀 역시 십 육칠 세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단예를 보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첫 눈에 영악하기 이를데 없는 여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아벽은 얼굴이 갸름하면서도 청순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녀는 계란형의 얼굴이었고 눈동자가 매우 반짝거리는 것이 또 다른 느낌의 사람을 움직이는 멋이 있었다.
단예는 가까이 가자 그녀의 몸에서 나는 담담한 유향의 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주 누나. 당신과 같은 미녀가 구십 세 할머니로 분장했는데도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더군요.]
그 소녀는 바로 아주 였다. 그를 곁눈질을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세 번 큰절을 했기 때문에 속으로 기분이 나빴다 이건가요?]
단예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 번 절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겠소. 그런데 나의 짐작과 많이 다르구료.]
아주는 말했다.
[무슨 일이 짐작이 틀렸다고 그러나요?]
[나는 누나가 역시 아벽 누나처럼 천하에 보기드문 미인일거라고 생각을 했소. 그러나 내 마음 속으로 아주 누나가 아벽 누나와 거의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거요. 그런데 한번 보니 이건....이건..]
아주는 서둘러 말했다.
[원래 아벽보다 훨씬 못하다는말이지요?]
아벽은 동시에 말했다.
[그대는 이 언니가 나보다 십 배나 더 나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겠죠?]
단예는 고개를 저었다.
[다 그렇지 않소. 나는 하느님의 재간이 정말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케 한다는 것을 느꼈소. 그가 심혈을 기울여 아벽과 같은 미인을 만들면서 이 강남 땅의 영묘하고도 수려한 기운을 다 써버리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또다시 아주 누나와 같은 분을 만들어 냈단 말이오. 두 분의 모습은 서로 전혀 다르면서 또한 각자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소. 내가 몇 마디의 칭찬의 말을 해주고 싶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 나와 주지를 않는구료.]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체, 그 입심 좋게 여지껏 칭찬의 말을 늘어 놓고서 한 마디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니 말이 되나요?]
아벽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구마지 등에게 말했다.
[네 분이 이렇게 우리 집에 오셨는데 특별히 좋은 것을 대접해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그러나 여러분은 술과 강남땅 본고장에서 나는 신선한 음식을 좀 드시도록 하셔요.]
그녀는 네 사람을 각기 자리에 안내했다. 그리고 자신과 아주는 상 아랫쪽에 앉았다.
단예는 청우거라는 집이 사면으로 물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내다보니 호수 위에 일렁이는 파란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돌려 탁자 위를 보니 술잔이나 접시들이 모두 정교하게 만들어진 자기였다. 그는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잠시후 남자 하인이 소채로 만든 음식을 내놓았다. 네 접시의 소채는 구마지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이었다.
곧이어 김이 무럭무럭나는 음식들이 날라졌다.
능백가인, 하엽동순탕, 앵도화퇴, 용정다엽게정 등등이었다.
잔마다 매우 독특했다. 고기나 새우 그리고 육류에다 꽃잎이나 과일 등을 섞어서 모양만 예쁠 뿐 아니라 독특한 향을 내고 있었다. 단예는 반찬마다 몇 젓가락씩 덜어 맛을 보고 모두 입에 맞고 하나같이 신선하여 칭찬해마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산천에 이와 같은 인물이 있게 마련이고 이와 같은 인물이 있기에 이와 같은 총명과 재치가 있어서 이와 같이 청아한 음식을 만들어 내는가 보군요.]
아주는 말했다.
[내가 만든 것인지 아벽이 만든 것인지 한번 알아 맞춰 보세요.]
단예는 말했다.
[이 앵도화퇴, 매화조압등, 부드럽고 빨간 기운이 있으면서 향기가 감도는 것은 아마도 아주 누나가 만든 것 같고, 이 하엽동순탕과 비취어원은 파랗고 청신한 것이 아마도 아벽누나가 만든 것 같군요.]
아주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대는 알아 맞추는 재간이 퍽 뛰어나군요. 아벽, 그에게 무슨 상을 주었으면 좋겠나?]
아벽은 미소했다.
[단공자께서 무슨 분부를 내리신다면 우린 마땅히 전력을 다해서 해드려야지요. 상은 무슨 상이에요. 우리 시녀들이 상을 내릴 자격이 있나요?]
아주는 말했다.
[아이구, 네 그 입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는 재주가 제일이구나. 그러니 모든 사람이 너를 좋다고 하고 나를 나쁘다고 하지.]
단예는 말했다.
[온순하고 얌전한 것과 활발하고 영리한 것은 두 가지 다 좋습니다. 아벽 누나, 조금전 연편을 가지고 퉁긴 곡은 실로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더군요. 진짜 악기를 가지고 그 곡을 한번 퉁겨 보십시오. 그러면 내일 이 대화상에 의해 불에 타 재가 된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왔다간 보람이 있겠습니다.]
아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공자가 듣기 싫지만 않으시다면 한 곡 퉁겨 드리지요. 손님을 즐겁게 해드린다면 저도 기쁘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병풍 뒤로 가더니 하나의 요금을 꺼내와서는 비단으로 만든 의자 앞에 단정히 앉았다. 그리고 아벽은 자기 앞의 탁자에 요금을 내려 놓고는 단예를 쳐다 보고 손짓하며 웃었다.
[단공자 이리 와 보셔요. 이 금이 어떤 금인지 아시겠어요?]
단예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 요금은 보통 칠현금보다 한자 정도 짧았다. 그리고 현이 아홉이었으며 현마다 색깔이 모두 달랐다.
그는 생각해 보고 말했다.
[이 구현금은 내가 생전 처음 보는 것이구료.]
아주는 다가와 한 손가락을 뻗더니 현 하나를 슬쩍 퉁겼다. '땅'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매우 우렁찼다.
알고 보니 이 요금의 현은 금속으로 만든 것이었다. 단예는 말했다.
[누나의 이 금은.....]
막 그 한 마디를 말하게 되었을 때 발 아래가 허전하더니 자신이 곧장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어이쿠' 하고 엉겁결에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으나 곧이어 자신이 푹신푹신한 곳에 떨어져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그때 뒤에 끊임없이 '아이구, 큰일났네'하는 소리와 함께 텀벙텀벙 물소리가 났다. 그리고 곧이어 자기의 몸이 흔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에 의하여 자신이 옮겨지는 것 같았다.
이 돌연한 변고는 괴이하기 그지 없었고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일어나려고 몸을 버둥거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미 조그마한 배를 타고 있었고 아주와 아벽이 배의 선두와 선미에 앉아서 급하게 노를 젓고 있었다. 놀라 일어나 앉아서 배 밖을 바라보니 물 속에서 구마지와 최백천 그리고 과언지가 막 고개를 물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아주와 아벽 두 소녀가 노를 몇 번 젓지 않아 배는 이미 청우거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별안간 호수 속에서 물에 흠뻑 젖은 몸이 위로 뛰어 올랐다. 바로 구마지였다. 그는 청우거로 뛰어올라서는 나무를 하나 분질러 선미에 타고 있는 아벽을 향해 재빨리 집어 던졌다. '휙휙'하는 소리와 더불어 그 기세가 아주 맹렬했다.
아벽은 급히 소리를 질렀다.
[단공자, 어서 고개를 숙이셔요.]
단예와 두 소녀가 동시에 몸을 납작하게 엎드리자 반 토막의 나무기둥은 그들의 머리를 급히 스치며 지나갔다. 그것이 매섭게 일으키는 바람에 단예는 목이 따끔할 정도였다.
아벽은 몸을 구부린 채 노를 저어 일 마장쯤을 더 앞으로 나아갔다.
배는 '텀벙텀벙' 소리를 내며 수면 위에서 던져지듯 솟구쳤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호수물이 배 안으로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세 사람은 순식간에 호수 물에 온몸을 적시게 되었다.
단예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구마지가 이미 청우거의 판자대기와 집안의 도구, 향로 등 무게가 있는 물건들을 이쪽으로 던지고 있었다.
아벽은 물건이 날아오는 기세를 보고는 배를 저어서 피했다. 그런가 하면 아주는 죽어라 하고 앞쪽으로만 배를 저었다. 한번 노를 저을 때마다 청우거와 몇 자씩 떨어지게 되었다.
구마지는 여전히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물건이 떨어지는 곳은 점차 배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제 그의 기운이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더는 던질 수가 없는 곳까지 배는 가고 말았다.
아벽과 아주는 여전히 노를 저어 배를 달렸다. 단예는 고개를 돌려 멀리 바라보았다. 최백천과 과언지가 청우거의 계단 위를 오르고 있었다. 속으로 그는 기뻐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에이쿠'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끈질긴 구마지가 어디서 구했는지 어느 새 조그만 배로 올라 타고 쫓아오는 게 아닌가.
아주는 부르짖었다.
[저 못된 화상이 쫓아온다!]
그리고 그녀는 힘주어 몇 번 노를 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그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단예도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가 탄 배가 수면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는 원래 무공은 고강했지만 노젓는 방법은 익히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세 사람은 대뜸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얼마 후 뒤를 돌아 보니 구마지는 이미 배를 바로 하여 급히 노를 저으며 쫓아 오고 있지 않은가.
아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대사는 확실히 총명해요. 무슨 일이든지 해내고야 마는군요.]
아주는 말했다.
[우리 그와 숨바꼭질을 하자구요.]
그리고 그녀는 노를 왼쪽에다 대고 몇 번 움직였다. 그러자 그배는 능각잎이 우거진 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수로가 수없이 많이 나있었다. 그리고 몇 번 방향을 틀자 조그만 배는 좁은 갯고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구마지가 더 이상은 추적을 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단예는 말했다.
[이 상황에서도 내 몸에 짚힌 혈도가 풀어지지 않아 두 누님을 도와드릴 수가 없군요.]
아벽은 단예를 위로했다.
[단공자 근심하지 마셔요. 대화상은 더이상 쫓아오지 못할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청우거에 장치한 기관이 퍽이나 재미있군요. 이 조그만 배는 바로 누나가 금을 퉁기려던 그 상 아래에 매어 있었던 것이죠?]
아벽은 미소했다.
[그래요. 그래서 공자에게 다가와 구현금을 보라고 한거예요. 아주 언니가 그 현을 한 번 퉁긴 것은 신호였어요. 그 소리를 듣고 남자 하인이 마루를 뒤집어 엎게 된 것이고 모두들 텀벙 텀벙하게 된거예요.]
그리고 세 사람은 유쾌하게 웃었다.
아벽은 급히 입을 막으면서 웃었다.
[참 그 화상이 들으면 안 돼요.]
그때 갑자기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아주 소저, 아벽 소저, 빨리 배를 저어 돌아오도록 하시오. 빨리 돌아오시오. 이 화상은 바로 그대들 공자의 친구이니 결코 그대들을 괴롭히지는 않겠소.]
그 몇 마디의 말은 매우 부드러웠고 친근감이 있었다. 그 말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대로 따르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아주는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대화상이 우리보고 돌아오라고 하는군. 결코 우리를 해치지 않겠대.]
퍽이나 마음이 동하는 듯했다.
아벽이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돌아가기로 해요.]
그러나 단예는 내력이 매우 고강했으므로 그 목소리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말했다.
[그 말은 우리를 속이려는 수작이오.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가 있겠소?]
이때 구마지의 부드러운 음성이 천천히 다시 들려왔다.
[두 분 소저, 그대들의 공자가 돌아왔소. 그대들을 보고 싶다고 하니 빨리 배를 저어 돌아오도록 하시오.]
아주는 말했다.
[네.]
그리고는 노를 저어 뱃머리를 돌렸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모용 공자가 정말로 돌아왔다면 그가 직접 소리를 쳐서 이들을 부를 것이다. 어째서 그에게 대신 부르게 하겠는가. 아마도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게 하는 사술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손을 뻗쳐 수면 위에 있는 능각의 잎을 따서 손으로 비벼 아벽의 귀를 틀어 막았다.
그리고는 다시 아주의 귀를 마저 틀어 막았다.
아주는 정신을 가다듬자 소리내어 말했다.
[아이구, 위험했었다.]
아벽 역시 놀라 말했다.
[그 화상은 정말 남의 혼백을 끌어 당기는 놀라운 재주가 있나봐요. 우린 하마터면 그의 수작에 걸려들 뻔했어요.]
아주는 뱃머리를 돌리더니 힘주어 끌어 당기며 부르짖었다.
[아벽 빨리 빨리 저어, 빨리.]
두 사람은 힘껏 배를 저어서 곧장 능각이 우거져 있는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한참 후 구마지가 부르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소리가 엷어져 끝내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단예는 손짓을 하여 두 사람을 부르더니 귀에 막은 능각의 잎파리를 배도록 했다. 아벽이 가슴을 톡톡 치며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정말 놀라서 까무라칠 뻔했네, 아주 언니 이제는 어떻게 하지요?]
[우리는 바로 이 호수속에서 그 화상과 숨박꼭질을 하며 지내는 것이지. 뭐, 배가 고파지면 여기서 능각이나 연뿌리를 따먹자고, 그렇게 되면 열흘이고 보름이고 상관 없어.]
아벽은 빙그레 웃었다.
[그 방법이 재미 있겠군요. 그런데 단공자께서 답답하지 않을까요.]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호수의 풍경은 아무리 봐도 부족할 정도요. 거기다 두 분을 짝으로 삼고 있으니 열흘 동안을 이렇게 다녀도 그야말로 신선도 이보다는 즐겁지 못할 것 같구료.]
아벽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가면 조그만 냇물의 갈래가 가장 많아요. 본고장에서 고기를 잡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길을 아는 사람은 거의없어요. 우리가 일단 백곡호로 들어가게 된다면 저 화상은 결코 우리를 뒤쫓아 오지 못할거예요.]
두 소녀는 노를 들고 천천히 배를 저어 나아갔다. 단예는 배 밑 바닥에 병을 깔고 누워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노 젓는 소리와 능각이 뱃전을 스치는 '삭, 삭'소리를 빼고는 사방은 매우 조용했다. 그리고 호수 위로 청풍의 담담한 꽃향기가 실려왔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평생 이렇게 세월을 보낸다고 해도 좋을 것 같군.)
그리고 그는 또 다시 생각했다.
(아주와 아벽 누나가 이렇게 사람이 좋은 것을 보면 모용 공자역시 극악무도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소림사의 현비대사와 곽선생의 사형을 정말 그가 죽인 것일까. 우리집에서 나를 시중드는 시녀가 많기는 하지만 아벽과 아주 누나에 미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단예가 막 잠이 들까 말까 하는데 갑자기 아벽이 나직이 소리내어 말했다.
[아주 언니 이리 좀 와봐요.]
아주 역시 나직이 말했다.
[무슨 일이야?]
[이리좀 와요. 내가 할 얘기가 있어요.]
아주는 노를 내려놓고 선미 쪽으로 가서 앉았다. 아벽은 아주의 어깨를 감싸 듯해서는 귀에 가까이 대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저를 위해 방법을 내어 주세요. 아주 남부끄러운 일이예요.]
아주는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아벽은 말했다.
[나직이 말해요. 단공자는 잠들었겠죠?]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누가 알겠어? 미심쩍으면 그에게 물어 보지 그래?]
아벽이 말했다.
[웃지 말아요. 아주 언니. 나는..... 나는... 소변이 마려워요.]
그녀 두 사람은 그야말로 모기 소리와 같이 작은 소리로 말하였지만 단예는 내력이 고강했으므로 아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의 그러한 말을 듣자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일부러 코고는 소리까지 슬쩍 내어서는 아벽이 곤란해 하지 않게 했다. 이때 아주는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단공자가 잠이 들었으니 소변을 보려므나.]
그래도 아벽은 부끄러운 듯 몸을 비틀며 말했다.
[그러지 말아요. 만약에 소변을 반쯤 보는데 단공자가 깨어서 일어난다면 그건 어떻게 해요.]
아주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깔깔 웃더니 재빨리 자기 입을 틀어 막으며 나직이 말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사람은 누구나 소변을 보고 살아야지. 그게 뭐 신기한 일이라고 그래.]
아벽은 그녀의 몸을 잡아 흔들며 부탁을 했다.
[아주 언니, 날 위해 뭔가 방법을 한번 생각해 봐요.]
아주가 말했다.
[내가 가리고 있을께 소변을 보려무나. 그러면 설사 단공자가 깨어나더라도 보지 못할 것 아니냐.]
아벽은 말했다.
[그래도 소리가 있어서 들릴 것 아녜요. 나는.....나는....]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지 뭐. 그냥 옷에다 싸렴. 그러면 단공자가 소리를 못 들을 것 아니니?]
[그럴수도 없어요. 나도 사람인 이상 그렇게 소변을 볼 수는 없어요.]
아주는 말했다.
[소변이 나오지 않는다면 마침 잘 되었네.]
아벽은 다급해진 나머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놀리지 말아요. 놀리지 말아요.]
아주는 갑자기 다시 깔깔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모두 네 탓이야. 나는 깜박 잊고 있었는데 네가 그런 얘기를 하는 바람에 나마저도 오줌이 마려워졌어. 이 곳에서 왕씨 숙모님 댁까지는 한 오리밖에 되지 않으니 우리 그 쪽으로 배를 저어 가서 소변을 보자꾸나.]
아벽은 말했다.
[왕씨 숙모님은 우리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해요. 그리고 굉장히 무서워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면 따귀를 때릴 거예요.]
아주는 말했다.
[상관없어. 왕씨 숙모님과 노마나님 간에 서로 언쟁을 했었지만 노마나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지 않았니? 그리고 너와 나는 그저 시녀에 불과한데 왜 우리의 따귀를 때리겠니? 우리가 살그머니 뭍으로 올라갔다가 얼른 소변을 보고 내려온다면 그 숙모님이 어떻게 아시겠어?]
아벽은 말했다.
[하긴 그래요.]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나중에 뭍으로 올라가서 단공자에게도 소변을 보라고 하죠. 그렇지 않으면 그가 다급해져서 퍽이나 어색해 할거예요.]
아주는 나직이 웃었다.
[너는 정말 남의 사정도 잘 헤아려 주는구나. 나중에 공자께서 알면 질투를 일으킬라.]
아벽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런 조그만 일 가지고는 공자는 마음에도 두지 않을거예요. 우리 두 시녀에 대해 공자께서 언제 마음에나 두셨던가요?]
아주는 말했다.
[나는 우리 두 시녀에 대해 공자가 마음을 두지 않기를 바란다. 아벽 누이, 너도 매일 밤낮으로 공자에 대해 염려할 필요 없어.]
아벽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는 소변을 보고 싶어 하기고 하고 공자를 생각하기도 하다니, 이 두 가지를 함께 놓고 생각하니 정말 우스꽝스럽구나.]
아벽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언니, 쓸데없는 농담은 그만 두어요. 난 머리가 아플 지경이예요.]
아주는 다시 뱃머리로 돌아가 노를 젓기 시작했다. 두 여인이 한참 노를 젓자 날이 점점 밝아왔다.
단예는 내력이 웅후해서 혈도를 짚힌 곳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구마지는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짚어야 했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게 되자 단예는 진기가 점차 유통되어서 몇 군데 막혔던 혈도가 천천히 풀어지는것을 느꼈다.
그는 기지개를 펴며 앉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한숨 푹 자는 동안 두 분 누나는 정말 수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거북한 점을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나는......저.....소변을 보고 싶습니다.]
그는 그 소저가 난처해 하지 않도록 자신이 그 말을 끄집어 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주와 아벽은 그 소리를 듣자 동시에 '체'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얼마 가지 않으면 친척이 되는 왕씨네 집으로 갈 수 있어요. 그때 공자는 뭍으로 올라가 소변을 보도록 하세요.]
단예가 말했다.
[그렇다면 잘 되었군요.]
아주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왕씨네 마나님은 성질이 괴팍해서 낯선 남자가 찾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공자께서는 뭍으로 올라갔다가 즉시 이 배로 돌아와야 해요. 우리가 이 배에서 시비를 일으킬 수는 없잖아요.]
단예는 말했다.
[잘 알겠소.]
조그만 배는 한 줄의 수양버들이 서 있는 곳을 돌았다. 그러자 멀리 물가에 꽃나무들이 물에 비쳐서 빨갛게 물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노을이 물든 것 같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단예는 아! 하고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아주는 물었다.
[왜 그러죠?]
단예는 그 꽃나무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것들은 우리 대리국에 많은 산다화요. 그런데 어떻게 태호에서도 이와 같은 운남차를 심었을까?]
산다화는 운남성에서 나는 것이 가장 유명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이를 운남차라고도 했다.
[그런가요? 이 장원은 만다산장이라고 해요. 산다화를 잔뜩 심어 놓았죠.]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산다화는 또한 옥명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름은 만다라화라고 하지 않는가? 이 장원이 만다라화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하니 어디 어떤 유명한 품종들을 심어 놓았는지 한번 두고 보아야겠다.)
아주는 노를 저어 배를 곧장 산다화가 많이 피어 있는 곳으로 나아가게했다. 물가에 다다라 바라보니 모두가 붉고 하얀 산다화만 피어 있을 뿐 집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단예는 대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다화는 많이 보고 살아서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은 산다화가 많기는 하지만 품종은 진정 훌륭한 품종은 보이질 않는구나. 그렇다면 정말 훌륭한 품종은 반드시 장원 안에 심어 놓았을 것이다.)
아주는 배를 기슭에다 대어 놓고는 단예에게 미소하며 말했다.
[단공자, 우리는 안으로 들어 갔다 금방 나오겠어요.]
그리고는 아벽의 손을 잡고 뭍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꽃밭 속에서 가느다란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서 한 청의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그 소녀는 손에 한 묶음의 꽃을 들고 있었는데 아벽과 아주를 보자 종종 걸음으로 그녀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주, 아벽, 너희들 참 당돌하구나. 또 몰래 여기까지 왔군. 부인께서는 두 계집의 얼굴에 칼로 십자 모양의 상처를 내어 너희들의 꽃과 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짓이겨 놓아야겠다고 말씀하셨단다.]
아주는 웃었다.
[위초언니, 숙모님은 집에 계신가요?]
그 소녀 위초는 단예를 한두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아주와 아벽에게 돌리고 말했다.
[부인께서는 또 두 말괄량이 계집애가 낯선 남자를 만다라산장으로 데리고 왔으니 빨리 그 남자의 두 다리를 잘라 놓으라고 하셨어.]
그러나 그녀는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기의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벽은 자기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위초 언니,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아요. 정말이에요, 가짜예요?]
아주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벽 그런 말에 놀랄 것 없다. 숙모님이 계시다면 감히 이 계집애가 이렇게 히히덕거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숙모님은 어디로 가셨지?]
위초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이가 몇이지? 나에게 반말을 하게? 놀랍게도 요 영악한 것이 숙모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군.]
그리고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아벽, 두 분 누이 정말 오랫만에 이곳에 왔는데, 내 마음 같으면 한 이틀 이곳에 묵어가게 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는 말했다.
[나 역시 언니와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요. 위초언니, 언제 한번 우리 장원으로 놀러 오세요. 오시기만 한다면 사흘 밤 사흘 낮을 자지 않고 우리가 짝이 되어 드리겠어요. 좋아요?]
그러면서 아주와 아벽은 뭍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벽은 위초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나직이 속삭였다. 위초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쳇'하고 웃으면서 단예 쪽을 한번 힐끔 쳐다 보았다. 아벽은 그만 얼굴이 새빨개졌다.
위초는 한 손으로 아벽을 잡고 한 손으로는 아주의 팔을 잡고 말했다.
[자, 집안으로 들어가자.]
아벽은 고개를 돌렸다.
[단공자,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단예는 말했다.
[좋소.]
단예는 세 소녀가 다정히 손을잡고 꽃밭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뭍으로 올라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 나무 뒤로 가서 소변을 보았다.
그리고 조그만 배 앞에 한참 앉아 있으려니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이곳에 만다화의 어떤 기이한 품종이 있는지 구경이나 가볼까?)
그리고 그는 내키는 대로 걸음을 옮기면서 구경을 했다.
그런데 그 꽃밭 속에는 만다화 이외에는 다른 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긴요화, 월월홍, 장미 같은 것도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심어져 있는 만다화도 모두 평범한 것들이었다. 다만 좋은 점이 있다면 그와 같은 산다화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익 장을 나아가게 되자 산다화의 품종이 점점 많아 졌다. 간혹 가다가 두어 송이 그럴싸한 것이 있었으나 심는 방법이 틀려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장원이 이름을 만다라고 취한 것도 헛된 것이로군. 좋은 품종의 산다화를 엉망으로 만들다니!)
그리고 그는 다시 생각했다.
(어서 돌아가야지. 아주와 아벽이 돌아와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초조하게 생각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몸을 돌려 그는 몇 걸음 가지 않아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군!]
그는 꽃밭 속에서 내키는 대로 걸음을 옮기면서 걸었고 산다화에 정신이 팔려 그만 되돌아가는 길을 잃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소로길은 동으로도 서쪽으로도 나있지 않는가?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고 아무래도 작은 배가 매어져 있는 곳까지 가려면 어려울 것 같아 속으로 생각했다.
(먼저 물가로 나아가 보도록 하자.)
그런데 그는 가면 갈수록 길을 잘못 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갈수록 산다화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왼쪽 편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아주의 목소리 였다.
단예는 크게 기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우선 여기에서 그녀들을 기다리다가 그녀의 말이 끝나면 함께 돌아가면 되겠지.)
이때 아주가 말했다.
[공자께서는 몸이 좋아요. 식사량도 괜찮구요. 요즈음은 개방의 타구봉법을 연마하고 있어요. 아마도 개방의 누군가와 겨룰 모양이예요.
단예는 생각했다.
(아주는 모용 공자의 일을 얘기하고 있구나. 이런 일을 엿듣는 것은 옳지 못하니 일찌감치 멀리 떨어져 있어야겠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는 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그녀들의 이야기가 언제 끝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바로 이때 한 여인의 나직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단예는 몸을 흠칫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생각했다.
(탄식소리가 이처럼 아름답게 들리다니 세상에 이와 같이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을 수 있을까?)
그때 그 음성은 나직이 물었다.
[이번에 그는 어디로 외출을 갔지?]
단예는 여인의 한숨소리만 듣고도 신심이 진동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두 마디를 더 듣게 되자 마치 전신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고 마음은 쓰리고 아팠으며 뭐라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적개심을 느꼈다.
(그녀가 묻는 것은 분명히 모용 공자의 일일 것이다. 모용 공자에 대해 그녀가 이토록 관심이 있다니 모용 공자는 어떻게 하여 이런 복을 타고난 것일까?)
이때 아주가 말했다.
[모용 공자는 먼저번 나가실 때 낙양으로 가서 개방중의 고수를 만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등 오라버니가 공자를 따라 갔으니 소저는 안심하셔요.]
그 여인은 나직이 말했다.
[개방의 <타구봉법>과 <항룡십팔장>이라는 이대 신기는 개방의 부전지비학이다. 너희 집 <환시수각>과 우리집의 <낭환옥동>에 숨겨진 비법들을 모두 모은다 해도 약간의 완전하지 못한 봉법과 장법밖에는 되지 않는다. 거기다 운기 행공의 신법은 전혀 없다. 너희 공자께서 어떻게 그러한 이대 신공을 연마할 수 있겠니?]
아주는 말했다.
[<타구봉법>의 신법이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어찌 공자께서도 생각해낼 수 없겠어요? 봉법만 있다면 자기가 생각해서 신법을 만들어 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했어요.]
단예는 생각했다.
(모용 공자의 그 말에는 일리가 있구나. 아마도 그는 총명하고 의지가 굳은 사람인가 보다.)
그 여인은 또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설사 창안을 한다 해도 팔 년에서 십 년은 걸리는 것인데 조석지간에 어떻게 만들어 낸다는 것이냐? 공자가 봉법을 익히는 것을 보았느냐?]
아주는 말했다.
[공자는 봉법을 매우 빨리 펼쳐내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행운유수와 같이...]
그 여자는 '아!'하고 부르짖었다.
[그는....., 그는...... 그처럼 빨리 펼쳐 보이든?]
아주는 말했다.
[그래요. 뭐가 잘못 되었나요?]
[물론 잘못되었지. 타구봉법의 신법은 잘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봉법에서 볼 때 어떤 것은 느릴수록 좋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 어떤 수법은 갑자기 빨랐다가 갑자기 느려져야 하고 또 빠르다가 느려지기도 하고 빠른 중에 느림이 있고 느림 중에 빠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는 빨리 펼치기만 한다니 개방중의 고수와 손을 쓰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그는... 아무래도 그는... 너희들은 공자에게 전갈을 보낼 방법이 있겠니?]
아주는 '음'하며 말했다.
[저희는 공자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리고 지금쯤 개방의 장로들과 만났는지도 모르고요. 공자가 떠날 때 한 애기로는 공자께서 개방의 마 부방주를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낙양으로 가서 그 일을 따지겠다는 것이지 결코 손을 쓰겠다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렇지 않다면 그와 등 오라버니 두분이 결국 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많은 적들 한테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말로 따지다가 잘못되어 언쟁을 하게 되고.......]
아벽은 물었다.
[소저, 타구봉법을 빨리 펼친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일까요?]
그 여자는 말했다.
[물론 당연히 안 되지. 그건 말할 필요도 없어. 그는 떠날 때 어째서 나를 만나지 않았지?]
그리고 그녀는 가볍게 발을 굴렸다.
초조하고도 걱정스러운 듯했는데 그 목소리는 여전히 간드러져 여간 듣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단예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는 대리국에서 고소 모용이라는 사람이 매우 존경받고 있으며 두려운 존재로 듣고 있었다. 그런데 들은 대로라면 그 모용 공자의 무예가 이 여인에게 지도를 받아야 할 정도가 아닌가? 설마하니 이와 같이 젊은 여자가 그토록 빼어난 재간이 있을까?)
일시 넋을 빠뜨리고 있던 터에 갑자기 그의 머리가 향나무 가지에 부딪히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급히 입을 틀어 막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여인은 물었다.
[거기 누구예요?]
그는 이미 몸을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하자 기침을 한 후 나무덤불 뒤에서 말했다.
[불초는 단예라고 합니다. 귀장의 옥명꽃을 구경하다 그만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그녀는 말했다.
[아주, 너희와 같이 온 그 공자냐?]
아주는 대답했다.
[네, 그래요. 소저는 아는 척하지 마셔요. 우리가 곧 데리고 돌아가겠어요.]
그녀는 말했다.
[잠깐, 내가 한 통의 편지를 쓰겠다. 그리고 그에게 분명히 말해 주겠다. 개방 사람과 손을 쓸 일이 있다면 타구봉법은 결코 쓰지 말고, 원래의 권법만을 쓰라고 말이다. 설령 <그 자의 방법으로 그자에게 펼친다>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해도....., 너희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이 편지를 그에게 전하도록 해라.]
아주는 망설였다.
[그건.... 그건.... 숙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녀는 말했다.
[아니, 너희들은 부인의 말만 듣고 내 말은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 목소리에는 제법 노기마저 띠고 있었다.
아주는 재빨리 말했다.
[소저께서 숙모님께 알리지만 않는다면 저희는 물론 명을 받들겠어요. 더우기 공자께 이득이 되는 일 아니겠어요?]
소저는 말했다.
[너희들은 내 서재로 와서 편지를 가져가도록 해라.]
아주는 여전히 망설이더니 억지로 대답했다.
[네.]
단예는 그 여자의 한숨소리를 들은 이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그녀에게 폭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을 느끼자 한번 떠나게 되면 그 이후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한편생 한이 될것 같아 그녀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얼굴 모습을 한번 보아야겠기에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아벽 누나, 그대는 나와 함께 여기 있으면 안 돼요?]
하면서 그는 꽃나무 숲 속에서 걸어나왔다.
그 여자는 그가 나오는 소리를 듣자 '어?' 하면서 등을 돌렸다.
단예는 그 숲을 빠져 나오는 순간 연뿌리색 장삼을 걸치고 있는 소녀가 꽃나무쪽을 향해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은 매우 아름다왔다. 길다란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 은색 명주띠로 묶어져 있었다. 단예는 그녀의 뒷 모습을 보고 그녀의 주위에 노을빛과 같은 것이 연기처럼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속세인 같지는 않았다. 따라서 마음속 깊이 억울해 하며 입을 열었다.
[불초 단예는 소저에게 인사 드립니다.]
그러자 그녀는 왼발로 땅바닥을 한번 구르더니 곧 뾰로통해져서 말했다.
[아주, 아벽, 다 너희들 때문이야! 나는 외간 남자를 쓸데없이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몇 번 모퉁이를 돌더니 산다화의 숲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벽은 빙그레 웃고 단예에게 말했다.
[단공자, 저 소저의 성질은 대단해요. 우리 빨리 떠나도록 해요.]
아주 역시 웃으며 말했다.
[단공자가 마침 와 주어서 우리를 난처한 입장에서 구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왕소저는 반드시 우리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주었을거예요. 이 두 목숨은 그렇게 된다면 위험해지죠.]
단예는 걷잡을 수 없이 뛰어 나오기는 했지만 그녀에게서 몇 마디 말을 듣자 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와 아벽도 반드시 원망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히려 고마워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그야말로 그로서는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고 마음 속은 허전했다. 그래서 단예는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꽃나무 덤불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벽이 가볍게 그의 소매자락을 잡아당겼는데도 단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벽은 웃으며 말했다.
[단공자, 우리 이제 가요.]
단예는 흠칫해서는 입을 열었다.
[좋소, 우리는 가야되겠지?]
그리고는 아주와 아벽이 앞장서 걸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으나 한 걸음 가서 뒤를 돌아보고 또 한 걸음 내딛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세 사람은 조그만 배로 돌아왔다. 아주와 아벽이 노를 들고 저어 나갔다. 단예는 멍하니 언덕 위의 산다화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에게 그만한 복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그녀의 몇번 내뱉는 탄식소리를 듣게 하였고 그 몇 마디의 말을 듣게 하였으며 또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게 하였을까? 하지만 만약 내가 그만한 복이 있다면 왜 그녀의 얼굴 한번 볼 수 없었을까?)
그는 산다화의 덤불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침울해졌다.
별안간 아주는 '아'하고 놀람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아! 숙모님.... 이 돌아오셨다.]
단예는 고개를 돌렸다. 호수 위로 한 척의 쾌선이 나는 듯이 달려왔다. 그 쾌선의 선두에는 오색영롱한 꽃송이들로 가득차 있었다. 더욱 배가 가까워졌을 때 보니 모두 다 산다화였다. 아주와 아벽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들은 몹시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아벽은 단예에게 눈짓을 했다. 그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단예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주인이 선실에서 나와 이야기를 할 때면 일어날 것이오. 사내 대장부가 너무 겸손해도 비열한 것이라오.]
이때 안에서 한 여인의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어떤 남자인데 감히 만다산장에 뛰어 들었느냐? 어떠한 남자라도 청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오면 두 다리를 잘라 놓는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 소리는 지극히 위엄에 차 있었으나 퍽 맑고 고운 소리였다.
단예는 낭랑히 말했다.
[불초는 단예라고 합니다. 어쩌다가 그냥 귀장을 경과하게 된 것이며 결코 일부러 뛰어들어 간 것은 아닙니다. 삼가 사과드립니다.]
그 여자는 물었다.
[네 성이 단씨이냐?]
그 음성에는 약간 의아한 빛이 들어 있었다.
단예는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흠, 아주, 아벽, 또 너희 두 계집애들의 짓이로구나! 모용복이란 그자는 잘 배우지는 않고 항상 살금살금 남의 눈치나 살피면서 나쁜 짓만 한단 말이야.]
아주는 말했다.
[마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죠. 사실 저희들은 적의 쫓김을 받아 만다산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저희 공자께서는 외출하셨사와요. 그러니 이 일과 저희 공자께서는 아무 연관도 없사옵니다.]
여자는 말했다.
[교묘한 변명을 늘어놓는구나. 빨리 떠날 생각일랑 하지 말고 날 따라 오너라.]
아주와 아벽은 풀이 죽어 대답했다.
[녜.]
그리고는 작은 배를 저어 쾌선의 뒤를 따라갔다. 만다산장과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으므로 배는 순식간에 뭍에 닿게 되었다. 그러자 장식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쾌선에서는 한 떼의 많은 수의 여인들이 걸어나왔다. 모두 시녀 차림이었고 손에는 각기 장검들을 들고 있었다.
삽시간에 서릿발 같은 검광이 번쩍번쩍 꽃나무 숲에 비춰졌다. 그런 모습의 여인들이 모두 아홉 쌍이었다. 십 팔 명의 여인들은 두 줄로 늘어섰다.
그녀들은 모두 허리께에서부터 비스듬히 위로 겨냥하는 듯이 일제히 검을 들고 서있었다. 그러자 선실에서 한 여인이 걸어나왔다.
단예는 그 여인의 모습을 보자 참을 수 없이 '아'하는 탄성과 함게 입을 딱 벌렸다. 혹시나 꿈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 여자는 아황색 비단 적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의복이나 장식이 무량산의 옥녀상과 매우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중년의 아름다운 부인으로 사십 세 남짓이었으나 동굴의 옥녀상은 십 팔구 세 정도의 나이였다.
단예는 놀란 끝에 다시 그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동굴의 옥녀상에 비해 눈썹이나 눈동자, 그리고 코, 입이 그다지 아름답지는 못한 편이었다. 그리고 중년 부인의 얼굴에는 세월의 시달림을 받은 흔적이 있었고 나이도 달랐지만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닮은 데가 있었다.
아주와 아벽은 단예가 왕부인을 눈 한번 돌리지 않고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어 보여서 마음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연신 손짓을 하며 보지 말라고 신호를 하였으나 단예의 눈동자는 왕부인에게 못박힌 듯 옆으로 한번도 돌리지 않았다.
그 여인은 단예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냉랭하게 말하였다.
[이 사람이 이토록 무례하구나. 나중에 제일 먼저 두 다리를 자르고 두 눈알을 뽑아라. 그리고는 혓바닥을 짤라 버려라.]
그러자 한 시녀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녜.]
그 순간 단예는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 나를 죽여 버린다면 모르되 두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거기다 혓바닥까지 잘라 진정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그렇게 되자 그는 진정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고개를 돌리고 아주와 아벽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들은 얼굴색이 창백해져서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왕부인이 언덕으로 오른 후 선실에서 두 쌍의 시녀가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들이 손에는 각기 쇠사슬이 들려져 있었으며 선실에서는 두 명의 남자가 쇠사슬에 묶인 채끌려 나오고 있었다.
그 남자들은 쌍수가 뒤로 묶여 있었으며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얼굴이 수려한 것이 아마도 부유한 집안의 자제인 것 같았고 또 한사람은 단예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바로 무량검파중의 한 제자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당광웅이라는 것도 기억해 냈다. 단예는 매우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저 사람은 원래 대리에 있었잖는가? 어찌하여 왕부인에게 잡혀 강남으로 오게 되었을까?)
이때 왕부인은 당광웅에게 말했다.
[너는 분명히 대리국 사람인데 어찌하여 그 사실을 부인하려 드느냐?]
당광웅은 말했다.
[나는 운남사람이지만 제 고향은 대송나라의 영내에 있으며 결코 대리국에 속하지는 않는 바입니다.]
왕부인은 말했다.
[너의 고향은 대리에서 얼마나 멀다는거냐?]
당광웅은 말했다.
[사백 여리나 됩니다.]
왕부인은 소리쳤다.
[오백리가 못 된다면 대리국의 사람으로 치는 것이 마땅하다. 데려가서 만다라화 아래에 산 채로 묻어 비료로 하라.]
당광웅은 부르짖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까. 분명히 말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왕부인은 냉소했다.
[대리국의 사람이거나 단씨성의 사람이 내 손에 잡히게 되면 무조건 산 채로 매장을 당한다. 도대체 너는 소주에는 무슨 일로 왔지? 이곳 소주로 온 이상 어째서 대리의 말투를 그대로 쓰고 있었으며 또 어째서 주루에서 큰 소리를 치고 있었느냐? 너는 대리국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대리국과는 이웃이니 대리국 사람과 똑같이 처리하겠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하, 저 부인은 나에게 보라고 하는 짓이구나. 물어 볼 것도 없이 내가 솔직하게 인정을 하지.)
그리고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바로 대리국 사람이고 또한 성이 단씨이니 산 채로 묻을양이면 일찌감치 손을 쓰도록 하시오!]
왕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너는 벌써 이름을 말했지 않느냐. 자칭 단예라고 했지? 흥, 대리 단씨 지방의 사람이라면 그토록 쉽게 죽이지는 않겠다.]
그녀가 한번 소리를 지르자 한 시녀가 와서 당광웅을 끌고 갔다.
그는 혈도를 짚혔는지 아니면 큰 부상을 당했는지 전혀 반항을 하지 못한 채 큰 소리로 부르짖기만 했다.
[천하에 이와 같은 법은 없습니다. 대리국의 수많은 사람을 당신이 다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는 곧 꽃나무 숲솔으로 끌려가서는 점차 멀어졌으며 외치는 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왕부인은 약간 고개를 돌리더니 얼굴이 청수한 남자에게 말했다.
[너는 무어라고 말할테냐?]
그 남자는 갑자기 두 무릎을 꿇고는 애걸하기 시작했다.
[저의 가친은 경중에서 벼슬을 하고 있으며 슬하에는 외동 아들로 저 밖에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부인께서 어떤 분부를 내린다 하여도 가친께서는 반드시 응할 것입니다.]
왕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너희 부친이 조정의 대관인 것을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너를 살려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너는 돌아가는 즉시 지방의 조강지처를 죽이고 어제 네가 밖에서 몰래 사귄 묘소저를 맞아들이되 삼서육례를 모조리 갖추어야 한다.]
그 공자는 말했다.
[그건...... 저의 처를 죽인다는 것은 실로...... 불초로서는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묘소저를 맞아들인다는 것은 저희 부모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왕부인은 그 말을 가로챘다.
[그를 데려가 산 채로 매장하라.]
그를 잡고 있던 시녀가 대답했다.
[녜.]
그리고는 쇠사슬에 묶인 그를 끌고서 들어갔다. 그 공자는 놀라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부르짖었다.
[제가 응낙을 하겠습니다.]
왕부인은 말했다.
[소취, 네가 그를 직접 압송하여 소주성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친히 그가 자기의 처를 죽이고 묘소저와 혼례를 올리는지를 지켜보아 확인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일이 끝난 후에야 돌아오도록 하라.]
소취는 대답했다.
[녜.]
그리고 그는 그 공자를 끌고 언덕 아래 매어 있는 조그만 배로 올라갔다.
공자는 애걸했다.
[부인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부인과 저의 처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묘소저도 부인과 무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그토록 묘소저를 두둔하고 저의 처를 죽이고 달리 처를 맞으라 하십니까. 저는 평소 한번도 부인을 뵈온 적이 없고 또한 죄를 지은 적도 없습니다.]
왕부인은 말했다.
[네게 이미 처자가 있으면 남의 처녀를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감언이설로 상대를 속였다면 그 대가로 반드시 그녀를 처로 맞아 들여야 한다. 듣지 못했다면 모르되 그런 사실을 내가 알게 된 이상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무엇을 그리 새삼스러워 하느냐? 소취야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어라.]
소취는 대답했다.
[녜, 상숙, 단양 무석, 가흥 등 모두 일곱번을 처리하였습니다. 또한 소란, 소시, 그녀들도 이러한 일을 몇 번 처리한 적이 있죠.]
공자는 관례가 그러하다는 말을 듣고 그저 울부짖는 소리만 했다.
소취는 곧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배를 몰고 소주성쪽으로 사라져갔다.
단예는 왕부인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리에 맞지 않는 것을 보고 그만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멍청해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 것은 '이런 법이 있을가?'하는 의혹이었다. 따라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을 지껄이게 되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왕부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천하에 이럴 수가 있는 일은 많고 많다.]
단예는 다시 한번 실망과 쓰라림을 느꼈다.
(그날 무량산 석봉에서 본 옥녀상 신선 누님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많은 감동으로 그녀를 우러러보았던가.)
그런데 지금 왕부인의 모습은 옥녀상과 매우 닮았으나 행동거지는 마귀와 같았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그때 왕부인의 시녀들이 선실로 들어가더니 네 개의 화분을 들고 나왔다. 그것을 본 단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개의 화분에 심어져 있는 것은 모두 산다화였다. 더구나 퍽이나 얻기 어려운 희귀한 품정이었다.
천하에서 산다화는 대리의 것을 얻음으로서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진남왕궁은 유명한 품종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또 대리에서는 산다화를 얻을 수 있었다.
단예는 어릴 적부터 산다화를 수없이 보아 왔으며 그리고 여가가 있을 때는 십여 명이 넘는 원예사들이 이야기 하고 논평하는 것을 듣곤 하였다. 그리하여 산다화의 우열, 습성 같은 것들을 배우지 않고도 익힐 수 있었다. 이는 마치 농가의 자제가 숙맥을 배우지 않고도 분간할 줄 아는 것과 그리고 어부의 자제들이 물고기와 새우를 분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는 만다산장에서 장원을 슬쩍 돌아보았었지만 정말로 뛰어난 품종은 발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만다산장>이라는 네 글자가 명실상부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막 본 네 개의 화분에 심어진 산다화를 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제서야 좀 말이 되는군.)
그때 왕부인이 입을 열었다.
[소차, 이 네 개의 화분의 만월산다화는 어럽게 구해온 것이니 잘 보살피도록 하라.]
소차라 불리워지는 소녀는 대답했다.
[녜!]
단예는 왕부인의 몇 마디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진정으로 산다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냉소했다.
그런데 왕부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호수의 바람이 세차 화분들을 선실에다 두었었다. 햇살을 보지 못했으니 빨리 햇볕을 쪼이게 하고 비료를 많이 주도록 하라.]
소차는 소리내어 대답했다.
[예.]
단예는 여기에 이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만 소리내어 웃고 말았
다.
왕부인은 그의 웃음 소리가 이상한 것을 보고는 물었다.
[왜 웃지?]
단예는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산다화를 모르면서 산다화를 잔뜩 심어 놓은 것을 웃는 것이오. 이처럼 훌륭한 품종이 당신의 손에 들어가다니 마치 칠현금을 쪼개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 살풍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 애석하군 애석해! 정말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아프게 하는군.]
왕부인은 노해서 말했다.
[나는 산다화를 모른다 하자. 그럼 너는 아느냐?]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움직였다.
(잠깐, 그는 정말 대리 사람이라고 했고 성이 단씨라 했다. 어쩌면 그는 진정으로 산다화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입으로는 좀처럼 지려 하지 않았다.
[본장의 이름은 <만다산장>이다. 장원 안팎으로 모두 만다라꽃을 심어 놓았다. 자, 보아라. 얼마나 무성하고 찬란하냐. 그런데도 내가 만다라 꽃을 모른다고 하겠느냐?]
단예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용지속분은 자연적으로 그르치게 성장하게 마련이죠. 그러나 네 개의 화분에 심어져 있는 백다화는 그야말로 경국지색으로서 당신과 같은 문외한이 이를 제대로 심을 수 있다면 나는 단씨 성을 갈아도 좋소이다.]
왕부인은 지극히 산다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도처에서 많은 돈을 주고 좋은 산다화를 구해서는 산장에다 심었다.
그런데 한 포기의 진귀한 산다화도 제대로 자라는 것이 없었다. 거의 일 년 반만에 그대로 시들어 죽거나 아예 처음부터 시들어 죽게 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그는 종종 이 때문에 짜증을 부리곤 했는데 오히려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녀는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질문을 던졌다.
[저 네 개의 화분에 심어져 있는 백다화는 무엇이 다르지? 어떻게 해야만이 제대로 심을 수 있느냐?]
단예는 말했다.
[당신이 만약에 나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관심을 갖는다는 예의를 반드시 차려야 할 것이외다.]
왕부인은 노하여 말했다.
[너의 두 발을 자른다면 무엇이 이로우냐? 소시, 먼저 그의 왼발을 잘라내도록 하여라.]
그러자 소시라고 불리는 시녀가 명을 받들고는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다급해진 아벽이 말렸다.
[마님, 그러지 마십시오. 만약 그를 해치게 된다면 고집이 센 그는 죽어도 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왕부인은 볼래 단예를 놀라게 하여 주려던 것이었지 단예의 발을 정말로 잘라 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왼손을 치켜들었다.
소시라는 시녀는 즉시 검을 거두었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 수하가 내 두 발을 잘라 저 네 뿌리의 다화 옆에다 묻는다면 정말 좋은 비료가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저 백다화가 매우 크게 잘 자라 꽃이 마치 대접만하게 피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하하하! 정말 묘하군 묘해!]
왕부인은 원래가 그런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말하는 투로 보아 완전히 거꾸로 얘기하는 듯하지 않은가! 왕부인은 잠시 어리둥절하여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2권 끝 ]
'千里眼---名作評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루몽 제3회에서는 왜 눈을 사용하여 본다라고 하였을까? (0) | 2023.07.15 |
---|---|
공손승수호지 (0) | 2023.07.15 |
소설 『홍루몽』에 나오는 가賈·사史·왕王·설薛 네 가문은 무슨 관계인가? (2) | 2023.07.14 |
오용(수호지) (0) | 2023.07.14 |
노준의수호지 (0) | 2023.07.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