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6 김용(金庸)
小說 英雄門 第 1 部 蒙古의 별 第 六 卷
저자 : 김 용
역자 : 김일강
발행 : (주)고려원
1993년 11월 20일 2판 1쇄 발행본
타자,편집 : Zazeung
第 六 卷. 第 一 章.(通卷 章). 오해로 맞선 싸움
곽정은 여섯 사부들이 예전에 구처기와 우위를 겨루었던 일을 어려서부터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사부님들이 그 까닭을 설명해 준 적은 없었지만 취선루에서 구리 항아리에 술을 담아 주량을 겨룬 호쾌한 일들을 주총과 한보구, 한소영 등이 즐겨 얘기하곤 했었다. 그는 남쪽으로 온 뒤에 자기의 신세를 듣고부터 그 술집과 자기 일생이 큰 인연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성안에 들어오자마자 취선루의 위치를 물어 찾아 나섰다.
그 술집은 남호(南湖)가에 있었다. 곽정이 그 앞에 이르러 둘러보니 한소영이 말해 주던 모습과 비슷했다. 이 술집은 곽정의 뇌리에 십여 년 전부터 박혀 있었는데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날아갈 듯한 처마며 화려한 용마루가 과연 훌륭했다. 태백유풍(太白遺風)이란 네 글자의 입간판이 서 있고 소동파가 쓴 취선루(醉仙樓)란 금빛 글자가 빛을 발했다. 곽정은 내심 흥분이 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계단을 올라서자어느새 주인이 반기며 나섰다.
[손님, 아래층으로 가시지요. 오늘 이층은 어느 분이 세를 내셨답니다.]
곽정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정이냐? 네가 왔구나!]
소리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도사 한 분이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데 바로 장춘자 구처기였다.
곽정은 그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구도장님!]
그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구처기가 손을 뻗어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그래 네 여섯 사부님께서도 도착하셨느냐? 내 벌써 술좌석을 마련해 놓았느니라.]
구처기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식탁 아흡 개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구처기가 앉아 있는 탁자에는 잔이며 그릇이 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나머지 여덟 개에는 젓가락 하나와 빈 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십팔 년 전 여기서 처음으로 네 사부님 일곱 분을 모두 뵙게 되었느니라. 그분들의 식탁을 이렇게 차려 놓았다. 이 식탁은 초목대사의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그 노인은 오늘 우리와 함께 술을 드실 수가 없구나.]
구처기는 몹시 섭섭한 모양이었다. 곽정은 감히 그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안 나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구처기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일 우리가 술 내기를 하던 구리 항아리도 절에서 빌려다 놓았느니라. 잠시 후 네 사부님들이 오시면 한바탕 통쾌하게 마시자꾸나.]
곽정이 주위를 살펴보니 과연 병풍 옆에 커다란 구리 항아리가 보였다. 항아리를 바라다보는 곽정의 눈에 어느덧 눈물이 왈칵 괴었다.
[강남 칠괴는 과연 훌륭한 인물들이다. 당시 내가 한 몇 마디 말 때문에 그 험한 수만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사막으로 가 십여 년 이상 고생하며 너를 이만큼 키워 주었으니 말이다.]
구처기는 감회에 젖어 혼자말하듯 중얼거렸다.
구리 항아리는 워낙 오래 된 것이라 겉에 파란 동록이 슬었지만 안을 말끔히 씻고 명주(銘酒)를 가득 채워 술 향기가 물씬물씬 풍겼다. 곽정은 한참 동안 항아리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다시 빈 식탁으로 옮겼다. 대사부님 외에는 아무도 오실 수 없게 돼버린 것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일곱 사부님께서 함께 모여 술을 드시며 담소를 나누는 광경을 볼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을 텐데.)
[당초 금년 삼월 스무나흗날 너와 양강이 여기서 무예를 겨루기로 약조를 했었느니라. 나는 네 일곱 사부님의 히늘같이 높은 뜻을 공경하여 처음부터 네가 이기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강남 칠괴의 명성이 천하에 떨칠 게 아니겠느냐? 게다가 나는 동분서주하며 간악한 무리들을 제거하는 데 바빠, 양강에게 심혈을 기울일 여가가 없었다. 그래서 무공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느니라.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제대로 된 떳떳한 사람을 만들어 놓았어야 했는데 여의치 못했으니 실로 네 양철심 양숙부님께 부끄럽게 되었다. 이제 생각해 보아도 후회막급이로구나.]
곽정은 양강의 행동거지가 바르지 못해 상서(湘西)에서 이미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얘기를 꺼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문재(文才)나 무공(武功)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충(忠)과 의(義)라는 두 글자지. 양강의 무예가 너보다 백배 훌륭하다 하더라도 인품으로 따진다면 이 취선루의 대결은 네 사부님들이 이기신 것이나 다름없다. 이 구처기는 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흐뭇하구나.]
구처기는 이렇게 말하며 껄껄 웃다가 그제야 울고 있는 곽정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니 왜 그러느냐? 뭐 상심되는 일이라도 있느냐?]
곽정은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서며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제...., 제...., 제 다섯 사부님은 벌써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뭐라구?]
구처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사부님만 계시고 나머지 다섯 분은 모두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구처기는 놀라 입을 벌린 채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이제라도 금방 옛 친구를 만나게 되리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상에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또 있으랴! 구처기는 워낙 정이 많은 사람이다. 강남 칠괴와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18년 동안 그래도 생사를 나눌 만큼 훌륭한 친구들이라 여겨는데 뜻밖에도 부고를 받고보니 비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휘청휘청 난간 옆으로 걸어각 망망한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칠괴의 모습이 하나하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느닷없이 구리 항아리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 들었다.
[옛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난 마당에 이까짓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그가 두 손을 번쩍 들어 멀리 집어 던지자 구리 항아리는 빙긍빙글 돌아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가 호수 속에 풍덩 가라앉았다. 구처기는 구리 항아리를 던지기가 바쁘게 다시 고개를 돌려 곽정의 팔목을 꽉 움켜잡으며 다그쳤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빨리 말을 해라!]
곽정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눈앞에 언뜻 소리도 없이 이층으로 올라오는 사람이 하나 보였다. 파란 옷에 풍채도 깨끗하고 늠름한게 도화도주 황약사였다. 곽정은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눈을 의심하며 다시 살펴보았지만 그는 틀림없는 황약사였다. 황약사도 그가 여기에 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파본 부분임====그가 미처 곽정 등을 보고 아는 체를 하기도 전에 곽정이 느닷없이 손을 쓰는데 여간 강한 게 아니었다.
====================황약사는 몸을 살짝 비키며 왼손으로 맞받아 쳤다. 그러자 곽정은 미처 힘을 거두지 못하고 와당탕 소리를 내며 벽을 뚫고 아래층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취선루가 재난을 당할 때가 되었는지 공교롭게도 찬장 위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릇이며 접시, 술잔 들이 쨍그랑 쨍그랑 소리를 내며 수백 개도 더 깨져 부서졌다.
취선루의 늙은 주인은 구처기가 이렇게 저렇게 식탁을 배열하라고 당부하고 또 큰 구리 항아리를 옮겨 오는 것을 보고 l8년 전 일이 생각났다. 그래 벌써부터 가슴이 조마조마해 견딜 수가 없었는데 이제 사기 그릇이 모두 깨지는 소리를 듣자 자기도 모르게 어이쿠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는 당장 그 자리에 엎드려 두 손을 싹싹 비볐다.
[관세음보살, 옥황상제, 제발 이 재난을 막아 주소서.]
곽정은 흑시 깨진 그릇에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손을 짚지 못하고 허리에 힘을 주면서 벌떡 일어나 다시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번쩍이자 뒤따라 파란빛이 반짝하더니 구처기와 황약사가 앞뒤로 창을 넘어 아래층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저 늙은이의 무공이 나보다 월등하니 맨손으로는 어려울 거야.)
곽정은 이런 생각으로 구처기가 준 단검을 뽑아 입에 물고, 오른손에는 칭기즈 칸이 하사한 금도를, 왼손에는 아버지가 남긴 짧은 삼지창을 틀어 잡았다.
(저 늙은이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그의 몸에 구멍 두 개는 뚫어 놓아야겠다.)
곽정은 결심을 굳히고 창 쪽으로 달려가 다시 아래층으로 뛰어내렸다.
취선루 앞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주루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구경거리가 생겼구나 싶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데 공중에서 뛰어내리는 또 한 사람의 손에 든 병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자 놀라 피하려고 우왕좌왕 서로 밀치는 바람에 벌써 몇 사람은 땅바닥에 넘어지기까지 했다. 곽정은 사람들 틈에 구처기와 황약사가 보이지 않자 입에 물었던 단검을 빼고 옆에 있는 노인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이층에서 뛰어내린 두 사람이 어느쪽으로 가던가요?]
노인은 깜짝 놀라 벌벌 떨기만 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줍쇼.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곽정이 몇 번이나 다그쳐 물었지만 노인온 계속 살려 달라는 소리만 질렀다. 마음이 다급해진 곽정이 저도 모르게 몽고에서 살았던 버릇이 튀어나와 몽고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노인이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곽정은 노인을 살짝 밀치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찾아보았지만 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곽정은 다시 주점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호수 한가운데에 뜬 일엽편주에 두 사람이 타고 호수 한켠에 있는 섬을 향해 노를 저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황약사는 선창에 앉았고, 구처기가 고물에 앉아 노를 젓고 있었다. 곽정은 이 광경을 보고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 사람이 연우루에 가서 사생결단을 벌이겠구나. 구도장의 무공이 제아무리 신출귀몰하다 하더라도 저 늙은이를 혼자 당해 낼 수 없을 텐데.)
곽정은 즉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닥치는 대로 배 한 척을 빼앗아 타고 그 뒤를 쫓았다. 원수를 눈앞에 두자 도저히 태연자약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급한 마음에 힘껏 노를 젓는 바람에 그만 딱 하고 노가 부러졌다.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판자를 주워 들고 저어 보았지만 두 사람이 탄 배는 점점 더 멀어져 가까스로 배를 언덕에 댔을 때는 두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숨을 가라앉혀야 한다. 원수를 갚기도 전에 잘못하다간 내가 먼저 죽는다.)
곽정은 혼자 중얼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나서 귀를 기울이니 과연 연우루 뒤에서 병기 부닥치는 소리와 함께 장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 한데 구처기와 황약사 두 사람 만의 소리가 아닌 듯했다. 곽정은 주위의 정황을 한번 살핀 뒤에 연우루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연우루에 닿은 그는 아래층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실내를 한번 휘둘러보니 누군가가 난간에 기대어 선 채 무얼 씹어 먹고 있었다. 바로 홍칠공이었다.
[사부님!]
홍칠공은 정중한 표정으로 창 밖을 손짓해 보이고는 다시 손에 든 양고기를 뜯었다. 곽정이 재빨리 창 앞으로 달려가 살펴보니 연우루 뒤 빈터에 검광이 번쩍이며 일고여덟 명쯤 되는 사람들이 황약사를 둘러싸고 공격하고 있었다. 곽정은 우선 이쪽 편 사람이 많은 것을 보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접전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깜짝 놀랐다. 대사부 가진악이 쇠지팡이를 휘두르며 젊은 도사 한 명과 등을 마주 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대사부님께서 어떻게 여기 와 계실까?)
곽정이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니 그 젊은 도사는 구처기의 제자인 윤지평이었다. 그는 손에 장검을 든 채 가진악의 등뒤를 호위할 뿐 황약사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 밖에 도인 여섯 사람이 싸우고 있는데 그들은 바로 마옥, 구처기 등 전진 육자였다.
곽정은 전진파가 천강북두진으로 맞서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장진자 담처단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천선(天璇)의 위치를 가진악이 맡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진악의 무공이 비교적 처지는 편이라 윤지평이 등뒤를 보호하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전진 육자는 각기 장검을 휘둘러 공격과 방어를 하면서 황약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날 우가촌에서 악전고투를 할 때 전진 칠자는 맨 손이었기 때문에 전세가 상당히 불리했었다. 그러나 이제 일곱 자루의 장검에 쇠지팡이까지 합세하고 보니 그 위세가 강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처럼 여전히 아무 병기도 들지 않은 황약사는 검광의 틈을 이리저리 피하며 방어에만 급급할 뿐 반격할 힘을 잃은 것 같았다. 수십 초를 대결하면서도 검봉만 피할 뿐 단 한 번의 반격도 없었다. 곽정은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제아무리 뛰고 난다 하더라도 몰리는 날이 있구나.)
이때 황약사가 왼발로 땅을 밟고 버틴 채 오른발을 들어 세 바퀴 돌리자 갑자기 여덟 사람이 뒤로 세 발짝씩 물러섰다.
(과연 훌륭한 소엽퇴법(掃葉腿法)이로구나!)
곽정이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내는데 황약사가 고개를 들어 이층에 있는 홍방주와 곽정을 보고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곽정은 그의 태연자약한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공격에 몰려 반격도 못하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함정이 있는 것이다. 그 순간 황약사는 쌍장을 날려 장생자 유처현의 머리를 맹격했다. 드디어 방어에서 공격으로 바꾼 것이다.
이 쌍장의 맹격은 유처현이 막을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구처기와 가진악이 측면 공격으로 막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가진악은 눈이 멀어 앞을 못 본다. 그의 공력으로 보통 사람과의 대결이라면 귀로 눈을 대신할 수도 있지만 황약사같이 그림자도 소리도 없는 장법을 쓰는 사람을 막아내면서 기선을 장악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구처기가 재빨리 검광을 번득이며 황약사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노렸지만, 가진악의 쇠지팡이는 한 발 늦었다.
유처현은 바람소리를 듣고 적의 수장이 자기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알아채고 깜짝 놀라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피했다. 마옥과 왕처일이 이 위급한 정황을 보고 장검을 들어 막았다. 유처현이 위급한 고비를 피하기는 했지만 천강북두의 진세는 흩어질 대로 흩어졌다. 황약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불이를 공격하는 체하다가 후퇴를 하면서 광녕자 학대통을 쳤다. 학대통이 이 괴상한 공격에 놀라 멈칫거리다 칼을 들어 그의 등을 치려고 했지만 황약사는 벌써 진 밖으로 물러나 두어 장 밖에 나가 있었다. 이를 본 홍칠공이 찬사를 보냈다.
[황노사의 수완이 정말 근사하오.]
[제가 나가 대결하겠습니다.]
곽정이 이렇게 말하며 서둘러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려 하자 홍칠공이 말렸다.
[서둘 것 없다. 황약사가 처음에 반격을 하지 않아 네 대사부가 걱정되었는데 이제 보니 사람을 해칠 의사가 없었던 게야.]
곽정이 다시 창 앞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니다. 그가 만약 상대방의 목숨을 노렸다면 방금 그 원숭이 같은 도사의 목숨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느냐? 도사들은 황노사의 적수가 아니니라.]
홍칠공은 부지런히 양고기를 씹어대며 말을 이었다.
[네 장인과 구처기가 나타나기 전에 저 도사들과 네 대사부는 진을 치면서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영 나타나지 않고 이제 두 사람밖에 없는데 그래 네 장인의 살수를 당해 낼 수 있겠느냐?]
[그 사람은 제 장인이 아니에요.]
곽정이 원한을 품은 어조로 차갑게 내뱉었다.
[아니, 장인이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곽정은 이를 뿌드득 갈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람...., 그 사람...., 흥!]
[용아는 어디 있느냐? 둘이 또 다툰 모양이로구나.]
[용아 일을 제가 알 게 뭐예요. 저 늙은 도둑이 제 다섯 사부님을 살해했으니 제가 원수를 갚지 않으면 누가 갚겠어요?]
이 말에 홍칠공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그게 정말이냐?]
곽정은 대결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이 말을 듣지 못했다. 이때 정세는 변해 황약사는 벽공장법을 쓰고 있었다. 바람소리가 휙획 공기를 가르고 있을 뿐 상대편 여덟 사람은 접근조차 못하고 있었다. 마옥이나 구처기, 왕처일 등의 공력으로 말한다면 황약사도 한 손만 가지고 그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처지였지만 천강북두진은 일제히 공격하거나 일제히 후퇴를 해야 하는 것이다. 손불이와 가진악, 윤지평 세 사람의 무공이 약하다 보니 그중 한 사람만 공격에 몰려도 그들 모두가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발짝 앞으로 나서면 세 발짝 밀리고 세 발짝 앞으로 나가면 네 발짝을 밀리니 점점 그 거리는 벌어지고 말았다. 다만 북두의 진세만은 여전히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전진파의 긴 칼이 황약사의 몸을 찌르기에는 그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황약사만이 간간이 그 틈을 비집고 공격을 하고 있었다. 다시 몇 초의 대결을 하고 있는데 홍칠공이 무언가 알아차린 듯 입을 열었다.
[아,그렇구나.]
[뭡니까?]
[황노사가 고의로 시간을 끌고 있는 게야. 천강북두진법을 완전히 파악해 보려고 살수를 쓰지 않는군 그래. 십 초 이내에 포위망을 축소시킬 것이니 두고 보려무나.]
홍칠공이 비록 무공을 상실했다고는 하지만 견해만은 정확했다. 과연 황약사가 뻗치고 있는 장력은 가면 갈수록 약화되는 듯싶었다. 전진 제자는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혀 거의 한덩어리가 되다시피 했다. 유처현과 구처기, 왕처일과 학대통 네 사람이 뻗는 칼끝이 황약사의 몸을 에워싸며 찌르는 듯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황약사의 몸이 살짝 쏠리며 칼의 그물을 스르르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만약 네 사람의 변초가 신속하지 않았더라면 서로의 칼끝이 맞은편에 있는 동료를 찌르고 말았을 것이다. 이 작은 테두리 안의 대결에서는 추호의 착오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들의 대결을 바라보는 곽정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황약사가 일단 이 진법을 파악하기만 하면 그는 지체 없이 진을 깨고 그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사부와 윤지평을 맨 먼저 공격할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워낙 멀리 떨어진 장소라 위급한 사태에 이르러도 미처 손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사부님, 제자가 내려가 보아야겠습니다.]
곽정은 홍칠공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가 가까이 접근했을 때는 황약사가 계속해서 마옥의 왼쪽으로 다가들며 슬금슬금 진 밖으로 빠져 나오고 있었다. 곽정은 손에 단검을 움켜쥐고 그가 몸을 돌려 세우기만 하면 맹격을 가할 태세를 취했다.
이때 왕처일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그와 학대통, 손불이 세 사람이 맡고 있던 북두칠성의 자루 쪽이 왼쪽으로 돌면서 황약사를 가운데로 다시 몰았다. 황약사도 세 차례나 위치를 옮겼지만 왕처일이 움직이지 않으면 구처기가 움직여 황약사가 마옥의 왼쪽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네 번씩이나 이렇게 공방전을 펼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곽정은 그 까닭을 알았다.
[옳지, 북극성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그러는구나.]
만약 천문을 조금이라도 볼 줄 안다면 북두성좌 가운데 천추(天樞)와 천선(天璇) 두 별이 일직선으로 북쪽을 향해 뻗어 있으며, 거기 있는 별이 바로 북극성임을 알 것이다. 이 별은 영원히 정북에 위치하고 있고 북두칠성은 밤마다 이 별을 끼고 도는 것이다.
이때 황약사는 벌써 천강북두진의 심오한 이치를 터득했던 것이다. 북극성의 위치만 확보하고 있으면 북두진이 깨져도 그만이요, 깨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전진 제자들도 황약사가 이미 진법을 파악한 것을 눈치채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담처단만 무사했어도 칠자가 혼연일체가 되어 그냥 버틸 수 있겠지만 지금 천선의 위치는 가진악과 윤지평 두 사람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우선 무공이 약한데다가 진법에도 어두웠다. 결국 천강북두의 위력이 상당히 약화되고 말았다. 마옥 동은 오래 버티고 있어 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게다가 곽정까지 옆에서 지키고 있으니 황약사가 위급하기만 하면 사위될 입장에서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숙과 동문을 피살한 원수를 갚지 않을 수도 없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만 와준다면 천선의 위치는 강화될 것이요, 진법의 취약점도 충분히 보완할 수 있을 텐데 그가 나타나지 않으니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중양 문하의 제자들이 이토록 철이 없는 줄은 몰랐구나.]
황약사가 이렇게 한번 빈정거린 뒤에 손불이의 면상을 향해 획획휙 삼 장을 날렸다. 마옥과 학대통이 칼을 들어 막아 주었지만 황약사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그들의 검봉을 피하고 다시 손불이를 향해 삼장을 날렸다. 도화도주의 장법이니 그 오묘함을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이렇게 계속해서 여섯 장을 날렸으니 왕중양이 부활하고 홍칠공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예봉을 피하기 어려울 텐데 청정산인 손불이가 어떻게 혼자 당해 낸단 말인가! 손불이는 마옥과 학대통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얼굴만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황약사는 갑자기 두 다리를 빙빙 돌리며 그를 향해 여섯 차례나 발길질을 했다. 이 낙영장과 소엽퇴를 동시에 쓰는 묘술은 바로 도화도의 광풍절기(狂風絶技)였다. 6초 이내에 적을 물리치지 못하면 초술은 점점 더 빨라져 36초 이내면 제아무리 날쌘 영웅 호한이라 하더라도 주먹이나 장풍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발길질에는 얻어맞게 되어 있었다.
마옥 등은 그가 전적으로 손불이 하나만을 상대로 맹공을 펼치자 철통같은 포위망을 좁히며 그를 방어해 주기에 바빴다. 상황이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니 가진악은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사람이라 전진 제자들이 원하는 대로 기민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새 황약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등뒤에 가 있었다. 순간 사부님 하는 소리와 함께 윤지평이 연우루 지붕을 향해 날아갔다. 황약사가 진법을 깨뜨리기 위해 그의 덜미를 잡고 집어 던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진법은 엉망으로 홑어져 버렸다. 황약사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즉시 고개를 숙인 채 마옥을 향해 질풍처럼 돌격해 들어갔다. 반드시 피할 것이란 자신을 가지고 대든 것이었다. 그런데 마옥은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칼을 뻗어 황약사를 무섭게 반격하는 것이 아닌가! 황약사가 몸을 옆으로 피하며 찬사를 보냈다.
[훌륭하오. 전진파 수제자로서 손색이 없는 솜씨요.]
황약사는 이런 말을 하면서 몸을 돌려 학대통을 걷어차 그를 벌렁 넘어뜨리고는 성큼 다가가 칼을 뺏아 들고 그의 가슴을 찌르려 했다. 유처현이 옆에 있다가 깜짝 놀라 칼을 막았다. 그러나 황약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흔들자 어떻게 된 일인지 퍽 소리가 나며 유처현이 들고 있던 쌍검이 부러져 나갔다.
황약사는 이 틈을 이용해 파란 옷자락을 휘날리며 북극성의 위치를 차지해 버렸다. 이때 진법은 흩어질 대로 흩어져 황약사의 이런 행동을 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진 제자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어이쿠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제 전진파는 끝장날 것이 틀림없었다.
마옥은 한숨을 내쉬며 칼을 버리고 패배를 인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적의 위치에서 파란 옷자락이 번쩍 스치며 원위치로 주춤 물러서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북극성의 위치에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곽정이었다. 전진 제자 가운데 오직 구처기 한 사람만이 반가운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취선루에서 곽정과 황약사의 결사적인 대결을 그만은 보았던 것이다. 마옥과 왕처일도 곽정이 어질고 착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비록 자기 장인을 도우려고 나서기는 했어도 사부인 가진악이 있는 이쪽을 살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놀라 쩔쩔매고 있었다. 곽정까지 북극성의 위치를 차지했으니 만약 사위와 장인이 손을 잡고 나선다면 전진파는 끝장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데 곽정은 양손에 칼을 들고 황약사에게 달려들었다.
이때 황약사는 전진파의 천강북두진을 마음껏 교란시키고 득의만면해 있었다. 이제 전진파가 무릎을 끓고 패배를 자인함은 물론 목숨을 구해 달라고 애걸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북극성의 위치에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온 신경을 전진 제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다. 다만 뒤로 손을 돌려 벽공장의 재주로 나타난 사람의 가슴을 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왼손을 뻗어 물리치고도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세상에 혼자 힘으로 내 일 장을 막아낼 수 있다니, 도대체 어떤 인물이지?)
황약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곽정이었다. 이제 황약사는 앞뒤로 적을 만나게 된 셈이다. 만약 곽정을 물리치지 못하면 천강북두진이 다시 자기를 포위할 게 틀림없었고 그렇게 되면 실로 위험천만이라 싶었다. 그는 곽정을 향해 계속해서 삼 장을 공격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곽정이 당황해하는 기색도 없이 쉽게 물리치자 이번에는 허초로 사 장을 날려 보았다. 그러면 곽정이 반격을 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곽정은 방어만 할 뿐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단검을 세워 가슴을 가린 채 왼손만을 쓸 뿐이었다.
(이상하구나. 저놈이 진법의 오묘함을 파악했기에 북극성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텐데, 어째서 꼼짝하지 않을까? 옳지, 전진 제자의 부탁을 받고 나를 상대하기로 미리 약속을 한 모양이로구나.)
그러나 그의 추측은 반만 맞았다. 곽정은 확실히 천강북두진법의 요체를 터득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구음진경》에서 배운 것이지 전진 제자에게 익힌 것은 아니었다. 곽정은 사부를 죽인 원수를 대하고도 침착하게 방위를 고수하며 두 발을 땅에 못박은 듯 버티고 있을 뿐 황약사가 고의로 허점을 드러내고 유인하려 해도 못 본 체했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황약사 쪽이었다.
(아니, 이 바보 같은 녀석이 진법을 모르나! 흥, 내 용아에게 원망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본때를 보여야지 그냥 물러설 수는 없겠구나.)
황약사는 왼손으로 원을 그리다가 오른손을 들어 왼손에 걸치며 곽정의 면상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러다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이 계속 저렇게 멍청하게 서 있다가 맞으면 중상을 입을 텐데, 그러다 정말 잘못이라도 저지르게 되면 용아가 평생 제 아비를 원수로 대하는 게 아닐까?)
곽정은 황약사가 내뻗는 힘이 너무나 강한 것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고 견룡재전의 재주를 부렸다. 항룡십팔장의 묘기로 맞서 보려 했던 것이다. 곽정은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주먹에 땀이 흥건히 고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황약사는 힘을 뻗다가 다시 거두어 들였다.
[야, 이 녀석아, 빨리 비켜나지 못할까? 네가 무엇 때문에 나서서 성가시게 구는 게냐?]
곽정은 꼿꼿이 선 채 바라보기만 할 뿐 혹시 무슨 흉계에 말려드는 게 아닌가 싶어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이때 전진 제자는 벌써 진세를 가다듬고 멀찍이 떨어져 황약사를 포위한 뒤 기회를 보아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용아는 지금 어디 있느냐?]
황약사가 재차 물었지만 곽정은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곽정의 두 눈에서는 증오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황약사는 그의 표정을 보자 혹시 자기 딸을 어떻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네놈이 용아를 어떻게 한 것이 아니냐? 빨리 말을 해라!]
곽정은 입을 더욱 굳게 다물고 칼을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황약사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움직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 보았다. 그의 신색이 평소와는 다른 것을 보자 불안한 마음에 다시 한 번 다그쳐 물었다.
[무엇 때문에 손만 바들바들 떨 뿐 말을 하지 않는 게냐?]
곽정은 도화도에서 참혹하게 죽어 간 사부들의 모습이 생각나 비분강개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또 한 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황약사는 그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래도 자기 딸이 화쟁 공주 일로 곽정과 다투다 살해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두 발로 땅을 찍으며 온몸으로 곽정을 향해 덮쳐 들었다. 그가 이렇게 허공에 몸을 날리자 구도장이 장검을 휘두르고 천강북두진이 동시에 돌격을 하면서 왕처일, 학대통 두 사람이 각기 칼과 수장으로 좌우에서 공격을 했다. 곽정도 단검을 들어 반격을 했다. 황약사는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손을 뒤집어 곽정의 팔목을 잡고 단검을 뺏으려고 했다. 그러나 왕처일의 장검이 벌써 그의 등뒤에 이르러 황약사로서도 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바람에 잡았던 팔목을 놓치자 곽정은 곽정대로 또 한 번 반격을 하면서 그를 찌르려고 했다.
이 악전고투는 방금 치렀던 것보다 몇 배나 더 치열했다. 전진 제자들은 이번 기회에 황약사를 처치하여 주백통과 담처단의 복수를 하려고 했지만 황약사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오해로 빚어진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본시 성격이 오만한데다가 또 선배의 입장이라 말로 해명할 것이 아니라 우선 싸워 이기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 패배를 자인하게 될 것이고 그때 가서 진상을 밝힌 뒤에 단단히 설교를 할 셈이었다. 그래서 싸울 때도 사정을 보아주며 살수를 쓰지 않은 컷이다. 그렇지 않다면 마옥이나 구처기는 당장 이길 수 없다 하더라도 손불이나 윤지평쯤은 벌써 목숨을 빼앗았을 것이다. 그런데 곽정이 느닷없이 나타나 그들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걸사적으로 달려드니 황약사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만약 곽정이 황용을 살해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기를 쓰고 대들 이유가 없다고 확신했다.
이제 황약사로서도 사정을 보아줄 계제가 아니었다. 우선 저놈의 곽정을 잡아 하나하나 추궁해 봐야 하는 것이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곽정이 북극성의 위치를 차지하는 바람에 윤지평이 아직 연우루 지붕 위에서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쌍방의 우열은 양상을 달리하고 있었다. 천강북두진법은 물이 세차게 흐르듯 이동하면서 황약사를 위협했다. 황약사가 몇 차례나 공격해 보았지만 시종일관 곽정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황약사가 맹격을 가하면 전진 제자가 나서서 방해를 했고 몸을 돌이켜 진세를 어지럽힐라치면 또 곽정이 나서서 훼방을 놓았다. 4,50초를 대결하는 동안 황약사는 점점 더 몰려 도저히 자기 재주를 부릴 수가 없었다.
북두진은 갈수록 좁혀져 도화도주가 제아무리 통천철지(通天徹地) 신출귀몰하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액운을 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황약사가 궁지에 몰리자 마옥이 장검을 들고 외쳤다.
[모두들 손을 멈추시오.]
전진 제자들은 일제히 손을 거두고 자기들의 위치만을 지키고 서 있었다. 마옥이 말문을 열었다.
[황도주님, 당신은 당대 무학의 종주이신데 우리 후학들이 감히 득죄를 하려고 나설 리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숫자가 많아 유리한 형세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 우리의 주사숙과 담사제의 핏값을 어떻게 치르려는지 어디 한번 말씀이나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황약사가 냉소를 날렸다.
[말은 무슨 말이오? 통쾌하게 황노사를 죽여 전진파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 좋은 일 아니겠소? 이거나 받으시오.]
그가 몸도 움직이지 않고 어깨도 들먹이지 않았는데 벌써 오른손이 마옥의 면상을 향해 쪼개졌다. 황약사의 이 일 장은 전연 예비 동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단 공격을 한 뒤에도 그 다음을 알 수 없는 허허실실의 묘기였다. 십여 년 동안 혼자 수련을 거듭해 터득한 낙영장법 가운데 구양절초(救命絶招)였다. 2차 화산논검을 염두에 두고 천하 무공 제일의 영예를 차지하려고 준비한 것으로 많은 사람과 대결할 때는 소용없지만 l대 1 대결에서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단양자의 공력이 제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견딜 수 없었다. 마옥으로서는 차라리 피하지 않는 편이 좋았겠지만 오른쪽으로 피하는 바람에 적의 수장이 벌써 가슴에 와 있었다.
이제 황약사가 힘만 쓰면 가슴이 터지는 것이다. 전진 제자가 대경실색하여 검과 수장으로 대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마옥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황약사가 껄껄 웃으며 손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아닌가! 진땀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내 북두진법을 깬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패배를 자인하고 나설 것 같지가 않소. 나 황노사, 죽으면 죽었지 천하 영웅들의 웃음거리야 될 수 있겠소? 자 훌륭한 도사님들, 어디 한번 한꺼번에 공격해 보시구려.]
유처현이 코방귀를 뀌고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뒤이어 왕처일의 장검이 나가고 천강북두진이 또다시 발동했다. 그러나 왕처일이 질풍같이 칼을 쓰며 나서는데도 마옥은 공격은커녕 오히려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이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동작을 멈췄다.
[황도주님, 그래도 사정을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오.]
[사실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선사께서 물려주신 이 진법은 황도주님에 의해 깨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뭘 안다면 패배를 자인하고 조처를 기다려야 되겠지만 워낙 사문의 원한이 깊어 갚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이 끝난 후 이 후배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도주님께 사의를 표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황약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말이 많아야 소용없는 것이오. 어서 덤벼들기나 하시오. 세상의 은혜와 원한이란 가리기 어려운 것이라오.]
곽정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도장 등이 황노사와 싸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숙과 사제의 원수를 갚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주대형은 얌전하게 살아 있는 형편이요, 담도장의 죽음은 또 황도주와는 무관한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이 사실을 말해 오해가 풀린다면 전진 제자가 물러날 테니 대사부님과 나 두 사람이 어떻게 황약사를 당해 낸단 말이냐? 사부님들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우리라.)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 일을 뻔히 알면서도 속인다면 나만 비루한 소인이 되는 것이 아니냐? 머리가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의만은 잃지 말라고 평소 사부님들이 내게 가르쳐 주셨는데....)
[마도장님, 도장님들의 주사숙은 돌아가시지 않았고, 담도장님은 구양봉이 살해한 것입니다.]
곽정은 결국 큰소리로 실토하고 말았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느냐?]
구처기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곽정은 그날 자기가 밀실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구천리가 사실을 날조하고 구양봉이 음모를 꾸미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말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전진 제자들은 곽정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했다.
[네 말이 사실이냐?]
구처기가 무섭게 따지고 들자 곽정은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황약사를 쏘아보았다.
[제자 저 늙은 도둑외 고기를 생으로 뜯어먹어도 속이 풀리지 않을 텐데, 무엇 때문에 저자를 도우려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사실이 그렇기에 말씀드릴 뿐입니다.]
황약사는 곽정이 나서서 자기 변명을 해주는 것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넌 무엇 때문에 나를 그토록 증오하며, 용아는 도대체 어떻게 했느냐?]
[당신 스스로 한 일을 그래 자기가 모른단 말이오? 곽정아, 우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늙은이와 사생결단을 내리고 말자꾸나.]
곽정은 가진악의 입에서 이미 자기를 용서한 듯한 말이 나오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대사부님! 이사부님 등은 너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셨어요.]
곽정이 흐느껴 울며 가진악에게 하는 말을 듣고 황약사는 손을 뻗어 가진악의 쇠지팡이 끝을 움켜잡으며 곽정을 향해 물었다.
[뭐라구? 주총, 한보구 등이 도화도의 손님으로 편안하게 계신데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가진악이 있는 힘을 다하여 지팡이를 낚아채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네놈이 어른도 몰라보고 지껄이며 내게 대든 것이 모두 주총 등의 일 때문에 그랬느냐?]
곽정의 눈은 피라도 쏟을 것처럼 험악했다.
[당신 손으로 내 다섯 사부님을 살해해 놓고도 모른체하실 참이오?]
곽정은 단검을 비껴 들고 황약사의 가슴을 노렸다. 황약사가 가진악의 쇠지팡이를 들어 막는 순간 쨍그랑 소리와 함께 단검과 지팡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워낙 예리한 단검이라 쇠지팡이에 깊은 흠이 파였다.
[그래 그걸 누가 보았다더냐?]
[다섯 사부님을 내 이 손으로 직접 안장하고 왔는데 그래도 내가 당신을 증오해선 안 된단 말이오?]
황약사는 코방귀를 뀌며 차갑게 대꾸했다.
[흥, 그래 증오하면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황약사 일평생 오해만 받고 살란 팔자인가 보구나. 그래 기왕에 이렇게 된 것 몇 사람 더 죽인다 해서 별탈이야 있겠느냐. 그렇다, 네놈의 사부는 모두 내가 죽였느니라.]
[아녜요, 아버지. 아버지가 죽인 게 아녜요. 절대로 뒤집어 쓰시면 안 돼요.]
갑자기 들려 온 여자 목소리에 모두들 고개를 돌리니 황용이 서 있었다. 싸움에 정신이 팔려 그들은 그녀가 언제 나타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곽정은 졸지에 나타난 황용을 보고 어안이벙벙했다. 황약사도 무사한 딸을 보자 너무나 반가웠다. 순식간에 곽정을 미워하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져 껄껄 웃음까지 터져 나왔다.
[오, 예쁜 내 딸이 왔구나. 이리 오렴. 어디 한번 안아 보자.]
요 며칠 동안 황용은 너무나 쓰리고 아픈 꼴을 많이 당했던 터라 아버지의 부드러운 말을 듣자 설움이 왈칵 밀려와 나는 듯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전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몰라요. 정말 괴로워 죽고 싶었어요. 곽정 오빠가 오해를 해 더 힘들었어요.]
황약사는 딸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웃었다.
[황노사는 언제나 혼자 아니겠느냐? 수십 년 전부터 세상의 죄란 죄는 모두 네 아비 혼자 덮어쓰고 살았으니 다시 또 뒤집어쓴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강남 오괴는 네 사제인 매초풍의 원수였다. 그래서 내 직접 그들을 죽였느니라.]
[아녜요, 아버지. 절대로 아버지가 아녜요. 저는 그걸 알고 있어요.]
황약사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넌 참으로 대담하구나. 내 귀여운 딸을 괴롭히는 자 내 어찌 그냥 놔두겠느냐.]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돌연 손을 번개처럼 뻗었다. 흔적도, 그림자도 없는 묘기다. 때마침 곽정은 그들 부녀의 대화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가 졸지에 따귀를 얻어맞고 말았다. 딱 소리와 함께 왼쪽 볼이 얼얼하게 아파 왔다. 손을 뻗어 막으려 했을 때는 황약사의 손이 벌써 황용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나 따귀를 때리는 소리는 크게 울렸지만 힘은 이상할 정도로 약했다. 곽정은 맞은 볼을 어루만지며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가진악은 곽정이 맞는 소리를 듣고 황약사가 벌써 독수를 썼나 걱정이 되었다.
[곽정아, 어디 다친 데 없느냐?]
[괜찮습니다.]
[요괴 같은 부녀가 주고받는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내 비록 눈이 멀어 앞은 보지 못하나 네 넷째 사부가 직접 저 늙은 도둑이 이사부와 칠사부를 살해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
가진악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곽정은 쌍장을 교차시켜 황약사를 향해 덤벼들었다. 가진악도 쇠지팡이를 휘두르며 나섰다. 황약사는 딸을 옆으로 비켜 세우고 곽정의 수장을 피한 뒤에 가진악의 쇠지팡이를 빼앗으려 했다. 이번에는 가진악도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빼앗기지는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곽정과 가진악이 한덩어리가 되어 황약사를 상대로 하는 혈투가 벌어졌다. 곽정이 비록 여러 차례 기인(奇人)을 만나 신묘한 무공을 많이 배웠다고는 하지만 무학의 대종사인 도화도주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가진악의 도움이 있다고는 하지만 별도움이 되지 못했다. 겨우 30초를 겨루었는데도 수세에 몰려 자기 재주를 발휘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바라보고만 있던 구처기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전진파가 위급할 때 저들이 우리를 도와주었는데 이제 이 마당에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사숙님의 생사가 어떻든 우선 황노사를 꺾어 놓고 따질 일이다.)
그는 일단 마음을 먹자 장검을 번쩍 치켜 들고 소리쳤다.
[가영웅님, 원진으로 물러서시오.]
이때 윤지평도 연우루 지붕에서 내려와 있었다.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이 파랗게 멍들고 귀뼈가 부러져 부어 오르기는 했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그도 역시 가진악의 뒤로 달려가 그를 호위했다. 천강북두진이 다시 위세를 떨치자 황약사 부녀가 중앙으로 몰렸다. 황약사도 이제는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것들이 정말 얼마나 나를 나쁜 사람으로 알기에 이럴까?)
그는 몸을 번쩍 솟구치며 가진악의 왼쪽을 향해 덮쳐 들었다. 황용은 아버지의 얼굴에 살기가 등등한 것을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런데 왕처일과 마옥이 아버지의 수장을 막아내자 가진악의 지팡이가 무서운 기세로 자기 어깨를 향해 내려왔다.
[이 요괴 같은 계집애를 먼저 처치해야 해.]
가진악의 입에서 나오는 욕지거리였다. 황용은 여태까지 욕을 먹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강남 육괴만 만나면 갖은 욕을 다 들었다. 황용도 결국 불끈 하고 화가 치솟았다.
[아니 이놈의 늙은이, 죽고 싶거든 어디 또 한번 욕을 해보구려.]
강남 칠괴는 원래 장터에서 백정 노릇을 하던 호걸들이라 욕지거리를 하라면 빠질 리가 없었다. 특히나 가진악은 황약사 부녀를 골수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던 터라 못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판국에 욕을 해보라니 별의별 악독한 욕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황용은 어려서부터 혼자 지내 왔기 때문에 이렇게 거칠고 더러운 욕을 생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하여 가진악의 입에서 욕이 나올 때마다 기가 콱콱 막혔다.
[아니 저꼴에 그래도 다른 사람의 사부 행세를 하다니 정말 한심하군요.]
[그래 이 나으리는 깨끗한 사람을 만나면 깨끗한 말을 하고 더러운 사람을 만나면 더러운 말을 한다. 그래 어쩔 데냐?]
황용은 화가 치밀어 죽장을 들어 그의 얼굴을 찔렀다. 가진악도 반격을 하려 했지만 우선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타구봉법이 너무나 오묘해 수초를 겨루는 동안 가진악의 지팡이는 황용의 타구봉에 말려 음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가진악은 북두진 가운데 천선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만약 그가 몰리면 진법이 풀리지 못하리라고 판단한 구처기가 검광을 번쩍이며 황용의 등뒤를 찔렀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진악을 위기에서 구해 주려 했던 것이다. 황용은 연위갑을 입어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구처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봉법을 바꾸어 가진악을 향해 삼 초의 반격을 가했다. 구처기의 칼끝이 그녀의 등에 닿았지만 그는 차마 찌르지는 못했다.
(이 구모가 어떤 사람인데 이 어린 소녀를 다치게 하겠는가?)
이렇게 구처기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황용은 벌써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죽장을 잡은 손을 안으로 잡아 뺐다. 이것은 복마장법(伏魔杖法)
의 외력(外力)으로서 가진악이 쓰는 힘까지도 역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쇠지팡이가 스르르 미끄러져 빠지면서 허공에 떴다가 남호의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왕처일은 황용이 이 틈을 노려 가진악을 공격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그 앞을 막아 섰다. 그는 비록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태까지 이 타구봉법은 본 일이 없었다. 곽정도 사부가 낭패하는 꼴을 보고 나섰다.
[대사부님, 좀 쉬도록 하세요. 제가 대신 싸우겠습니다.]
곽정은 몸을 날려 북두성의 위치에서 천선 쪽으로 달렸다. 이때 그의 무공은 이미 전진 제자를 능가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진법의 오묘함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세의 위력은 삽시간에 막강해졌다.
북두진은 본래 천권(天權)이 위주다. 그런데 그가 들어서자 천선이 막강해져 진법이 즉시 바뀌었다. 이렇게 되자 황약사는 당황했다. 비록 딸이 옆에서 도와주기는 하지만 견디기 힘들었다. 다행히도 전진제자가 걸사적으로 덤비지는 않아 겨우 팽팽한 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곽정은 갈수록 더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게다가 전진 제자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황약사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연속적으로 절초(絶招)를 써서 겨우 급공을 막아낼 뿐이었다. 황용은 평소 온화하던 곽정의 표정이 살기충천해 있는 걸 보자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황용은 아버지 앞을 막아 서며 곽정에게 외쳤다.
[우선 저를 먼저 죽이세요!]
[비켜!]
곽정이 눈알을 부라린 채 소리를 꽥 지르며 어깨로 황용을 밀치고 황약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황용은 너무나 기가 막혔다.
(아니 나한테까지 이렇게 험악하게 나올 수 있을까?)
이때 등뒤에서 누군가가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약형, 걱정할 것 없소. 내가 당신을 도우러 왔소.]
카랑카랑한 금속성 말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찢었다. 뭇사람들은 진법을 유지하느라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북두진이 황약사의 뒤로 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바라보았다. 호숫가에 서 있는 대여섯 명 중 앞장선 사람은 바로 서독 구양봉이었다. 전진 제자가 일제히 휘파람을 불었다.
[곽정, 우리 서독부터 처치하고 보자.]
구처기가 이렇게 말을 하며 장검을 휘둘렀다. 전진 육자도 일제히 진을 풀고 구양봉을 에워쌌다. 곽정은 온 신경을 황약사에게 쏟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구처기의 말을 듣지 못했다. 갑작스레 전진 육자가 몸을 빼는 바람에 곽정의 몸이 황약사 쪽으로 몰렸다. 양쪽이 모두 조급한 마음에 빨리 승부를 내고 싶어 눈 깜짝할 사이에 5,6초를 대결했다. 그래도 쌍방은 상대를 적중시키지 못하자 서로 떨어져 다시 기회를 엿보며 노려보았다. 그러다 곽정이 대갈일성 재차 공격을 감행했지만 결과는 또 마찬가지였다. 가진악은 적수공권으로 황약사의 등뒤에 서 있다가 느닷없이 두 손을 벌린 채 달려들어 그를 꽉 껴안았다.
이 틈에 곽정이 그의 급소를 치기 바랐던 것이다.
이때 전진 육자는 벌써 진세를 가다듬은 후였다. 구처기는 윤지평을 향해 천선 자리를 확보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우리 이번에는 담사제의 원수를 갚아야 하네.]
마옥의 말에 전진 제자들은 적개심이 불타 올라 검광을 번쩍이며 구양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종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공격을 당하자 사장을 휘둘러 전진파 일곱 사람을 멀리 쫓아 버렸다. 그는 무공도 출중하지만 신중한 사람이라 승산이 없을 때는 결코 쉽게 손을 쓰지 않는다. 이미 우가촌에서 전진파 천강북두진의 위력을 충분히 본 일이 있기에 되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우선 자기 방어를 철저히 해놓고 상대의 허점이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천강북두의 진세가 다시 한 번 구양봉을 위협하며 달려들었다. 눈치빠른 그가 벌써 윤지평의 천선에 취약점이 있는 걸 알아챘다. 그렇다면 크게 겁낼 일도 아니란 자신이 생겼다. 그러자 사장을 휘둘러 급소를 방어하면서 사방의 정세를 살피는 여유까지 보였다.
곽정과 황약사 사이에는 계속 육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용은 죽장으로 가진악의 접근을 막으며 애걸했다.
[잠깐만, 제가 하는 얘기를 들어 주세요.]
몇 번이나 소리를 쳤지만 곽정은 들리지 않는지 계속 수장을 날렸다. 황용은 아버지의 표정에서 그래도 살수는 쓰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워낙 곽정이 죽자 하고 대드니 그의 얼굴에도 차츰 노색이 감돌면서 손이 매서워졌다. 저쪽의 구양봉도 전진파 일곱 사람의 포위망이 점점 좁아지자 꽥꽥 괴성을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필경 살상이 생길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였다. 황용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올려다보니 홍칠공이 연우루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사부님 사부님, 내려와 말씀 좀 해주세요.]
다급한 황용이 홍칠공을 재촉했다. 홍칠공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지만 자신의 무공이 소멸된 마당에 나서 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고민하고 있던 참에 황용이 재촉하는 말을 듣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황약사가 다소나마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어쩌면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홍칠공은 두 손으로 난간을 누르며 반공에서 사뿐히 뛰어내렸다.
[자, 모두들 손을 거두시오. 제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구지신개의 명성이 워낙 뜨르르 하던 터라 모두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싸움을 멈추었다. 구양봉 하나만이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어 초조해졌다.
(아니, 저 늙은 거지의 무공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닐까?)
홍칠공은 곽정이 들려준 《구음진경》 가운데 범어로 된 부분을 들은 후 며칠 동안 그대로 수련한 결과 기경팔맥을 뚫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구양봉이 알 리 없었다. 홍칠공은 무공이 워낙 상승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구음진경》의 효험을 빨리 볼 수 있었다. 그 덕택에 경신의 무공은 어느 정도 회복된 셈이지만 만약 주먹을 휘두르거나 장력으로 대결하라면 무공을 모르는 장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경신술만은 어느 정도 다른 사람의 눈을 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구양봉의 날카로운 시선도 이 허점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第 六 卷. 第 二 章.(通卷 章). 안개 속의 혼전
홍칠공은 다른 사람들이 전과 다름없이 자기를 삼가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늙은 거지가 한바탕 연극을 꾸미지 않고는 오늘의 위기를 풀 수가 없겠지.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전진 제자가 고개를 숙여 듣게 될 것이며 노독물은 노독물대로 일이 어려운 줄 알고 물러서게 될까?)
그러나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그렇게 좋은 계교가 금방 떠오를리 만무했다. 우선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바탕 너털웃음이나 터뜨리고 다시 생각해 볼 일이라며 고개를 드는데 이제 막 밝은 달이 쟁반처럼 둥글게 물 위로 솟아올랐다. 이를 보자 문득 묘안이 떠올랐다.
[모두들 쟁쟁한 무림 고수들인데 뜻밖에도 하는 짓이 엉뚱하고 도리에 어긋나니 참으로 창피하오.]
뭇사람들은 홍칠공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홍칠공이란 위인이 평소에도 말을 마구 하는 편이라 별로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나무라는 것은 분명 까닭이 있으리라 싶었다. 마옥이 먼저 공손하게 나섰다.
[선배님,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홍칠공은 벌컥 화를 냈다.
[내 오래 전부터 금년 팔월 중추절에 누군가가 연우루에서 싸우기로 했단 말을 듣고 있었소. 그러나 이 늙은 거지는 시끄러운 것이 제일 질색이오. 그래 아직 시간도 이르고 하여 여기서 편안하게 잠이나 자며 쉬려고 했는데 새벽부터 와당탕 하며 개 죽는 소리가 들리니 이거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무슨 돼먹지 않은 북두진세에다가 또 사내가 계집을 치지 않나, 사위가 장인을 때리지 않나, 이게 말이 되오. 원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모두들 고개를 들어 저 달이나 바라보구려. 그래 오늘이 도대체 며칠이오?]
다른 사람들은 홍칠공의 말을 듣고 나서야 오늘이 팔월 열나흘이란 생각을 했다. 무예를 겨루기로 한 날은 분명 내일이고, 팽련호나 사통천 등 주인공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싸움을 벌였으니 겸연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선배님 말씀이 백번 지당합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서 싸울 수는 없는 일이지요.]
구처기가 이렇게 공손히 말을 한 뒤에 다시 시선을 구양봉에게 돌렸다.
[이 구양가야. 우리 장소를 바꾸어 사생결단을 벌이기로 하자.]
[그것 참 좋은 생각이로군. 그럼 그렇게 합시다.]
구양봉이 웃으며 하는 말에 홍칠공이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왕중양이 귀천하자마자 전진교의 철없는 것들이 이렇게 소란을 부리고 다니니 한심하구나. 그러나 내 바른말은 해줘야지. 남자 도사 여섯에다 여자 도사 한 명이 아무리 설쳐 봐야 노독물의 상대는 될 수 없어. 왕중양이 내게 뭐 좋은 걸 물려준 바도 아니니 전진교의 철없는 것들이 몰살을 당한대도 내 알 바는 아니지. 그러나 어디 한 가지 물어 봐야겠는데, 이미 무예를 겨루기로 한 약속은 누가 지키지? 죽은 일곱 도사가 나서서 싸우나?]
홍칠공의 말은 분명 전진 제자를 우롱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라도 해서 슬그머니 암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과 대결을 한다면 아무래도 십중팔구 죽을 것이 불을 보듯 명확했다. 전진육자들도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라 홍칠공이 이런 말을 꺼낸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물러설 수 있단 말인가? 홍칠공이 곁눈으로 보니 곽정은 황약사를 노려보고 있었고, 황용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주르륵 흘릴 듯싶었다. 아무래도 얽히고설킨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노완동이 오면 그의 무공에 의지하여 수습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때 가면 나도 할말이 많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일부러 다시 한 번 벌컥 소리를 질렀다.
[이 늙은 거지 잠 좀 자겠소. 누구든지 다시 싸우려고 덤비는 사람이 있으면 그땐 내가 가만 놔두지 않겠소. 내일 저녁에 가서 어디 한번 실컷 싸워들 보구려. 그땐 나도 나서지 않을 테니까. 마옥, 자넨 저 철없는 것들을 데리고 누각으로 올라가 좀 조용히 해주게나. 그리고 곽정과 용아는 나를 따라와 내 다리나 주무르도록 해라.]
구양봉은 은근히 홍칠공을 두려워하는 처지였다. 그가 만약 전진 제자와 손을 잡는다면 자기로서도 상대하기 어렵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자 다시 한 빈 못박아 말했다.
[홍칠공, 내 오늘 그래도 당신의 체면을 보아 참기는 하겠지만 내일은 정말 어느 편도 도와서는 안 되오.]
홍칠공은 지금 그가 손가락만 뻗어도 자기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이 늙은 거지 평생 거짓말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지 않소? 돕지 않겠다면 돕지 않는 것이오. 그러나저러나 이길 승산은 있소?]
이렇게 정색을 하고 큰소리를 치면서 표주박을 베개 삼아 벌렁 그 자리에 누웠다.
[아니, 얘들은 뭘 하느냐? 빨리 와서 다리 주무를 생각은 않고.]
이때 그가 아까부터 뜯어먹던 양 다리에 고기라고는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소중하게 핥고 또 핥았다. 마치 무궁무진한 맛이 계속 나오는 성싶었다. 홍칠공은 한참 동안이나 이렇게 핥다가 그걸 다시 품속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먼 하늘의 흰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시선을 황약사에게 돌렸다.
[약형, 따님에게 내 다리를 주무르게 하면 아니 되겠소?]
황약사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황용은 홍칠공 곁으로 다가가 그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응, 이 늙은이 뼈다귀가 언제 이런 복을 타고났나?]
홍칠공은 기분이 좋아진 듯 흥홍거리며 다시 곽정을 쳐다보았다.
[야, 이 녀석아. 네 팔이 황약사 때문에 부러졌기라도 했단 말이냐? 가만있지 말고 너도 와서 주물러!]
곽정도 스승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다른 한쪽 다리를 주물렀다. 가진악은 물가의 버드나무에 기댄 채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호반을 거니는 황약사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는 귀로 눈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황약사가 동쪽으로 가면 가진악의 시선도 동쪽으로 옮겨 가고, 다시 서쪽으로 가면 그의 시선도 서쪽으로 함께 옮겨 갔다. 그러나 황약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채 여유만만했다. 전진육자와 윤지평은 각기 책상다리를 하고 조용히 앉아 여전히 천강북두진세를 지키고 있었다. 구양봉 수하의 사노(蛇奴)들은 배에서 식탁과 의자를 연우루 아래에 옮겨다 놓고 그 위에 안주와 술을 차렸다. 구양봉만이 뭇사람들에게 등을 돌린 채 술을 마시며 호수의 물결이 출렁이는 것을 감상하고 있었다.
홍칠공은 곁눈으로 곽정과 황용 두 사람을 계속 살펴보았지만 서로 눈길을 피한 채 한 시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워낙 거침없는 사람이라 이런 거북한 장면을 그냥 묵과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 몇 차례나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둘다 어물어물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홍칠공은 할 수 없이 큰소리로 황약사를 불렀다.
[약형, 이 남호의 또 다른 이름이 뭐요?]
[아, 원앙호(鴦鴦湖)라고도 부르지 않습니까!]
[이걸 좀 보시구려, 이 원앙호에서 약형 따님과 사위가 서먹서먹하게 있는데 장인이 어찌 한마디 말씀이 없으시오?]
그러자 곽정이 벌떡 일어서며 황약사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저...., 저자가...., 제 다섯 사부님을 살해했는데 제가 어떻게 저자를 장인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황약사가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
[강남 칠괴가 다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소경 한 놈이 남았는데 내일 안으로 그가까지 죽여야 속이 시원해질 모양이로구나.]
이 말을 들은 가진악은 분기탱천하여 황약사를 향해 무작정 덮쳐들었다. 그에 앞서 곽정이 달려들며 장풍을 날렸다. 그러나 황약사가 반격을 하는 바람에 쌍장이 부딪쳐 곽정이 한 발짝 뒤로 밀렸다.
[아니, 내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이 늙은 거지의 말이 그래게 방귀만도 못하단 말이냐?]
홍칠공이 따끔하게 꾸짖자 팍정은 주춤한 채 더 대들지는 못하고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여보 황노사, 강남 육괴로 말할 것 같으면 영웅 호한인데 그래 당신이 무엇 때문에 무고한 그들을 해쳤단 말이오? 이 늙은 거지는 당신의 그런 행동거지가 제일 눈에 거슬린단 말이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내 마음대로 죽이는 것이지, 당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오.]
[아버지, 곽정 오빠의 다섯 사부님은 아버지가 살해한 것이 아녜요.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아버지.]
황용이 다급하게 끼여들며 말하자 황약사는 딸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딸의 모습이 너무나 가련해 보였다. 순간 왈칵 불쌍한 생각이 들었지만 눈을 흘기고 있는 곽정을 보자 다시 마음이 싸늘해졌다.
[내가 죽였단다.]
[아녜요 아버지. 아버지가 죽일 이유가 없지 않아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우는 딸의 모습을 보자 황약사는 또 한 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세상 사람이 모두 나를 악독한 사람이라 하는데 넌들 그걸 모르겠느냐? 악한 사람이 그래 착한 일을 할 수 있느냐 말이다. 천하의 못된 일이란 일은 모두 네 아비가 한 거다. 강남 육괴가 스스로 어질고 착한 체하는데 나는 그따위 영웅 호한만 보면 화가 나서 그냥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구양봉은 등을 돌린 채 술을 마시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호쾌하게 웃었다.
[약형, 그 말 한번 시원하게 잘하셨소. 아주 근사하오.]
그는 술잔을 높이 들어 쭉 들이마신 후 왼손을 번쩍 들어 보자기 하나를 황약사 쪽으로 던졌다. 그와 황약사의 거리는 20여 장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보자기는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확실히 그 완력이 놀랄 만했다. 황약사가 받아 들고 보니 촉감이 아무래도 사람 머리 같았다. 보자기를 펼치니 과연 방금 자른 사람의 머리였다. 건을 쓰고아래턱에 수염이 달렀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내 오늘 아침에 한 서원(書院)에서 쉬고 있는데 이 썩어 빠진 유생이 서생들에게 강학(講學)을 하면서 뭐 충신 효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기에 듣다못해 죽여 버렸소. 당신은 동사요, 나는 서독인데 까짓것 뭐 눈이나 깜짝 하겠소.]
구양봉이 껄껄 웃으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이 말을 들은 황약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내 평생 충신과 효자를 늘 존경하고 지냈소.]
그는 몸을 숙이고 땅을 판 뒤에 잘린 머리를 묻고 세 번 절하고 물러섰다. 옆에서 지켜 보던 구양봉이 재미없다는 듯 싱겁게 웃었다.
[황노사도 허명뿐이구려. 예법에 구애받는 인물인 줄은 미처 몰랐소.]
그러나 황약사는 여전히 위엄 있게 말을 받았다.
[충효란, 대의(大義)를 위해 죽음으로 지키는 절개(節槪)라 예법과는 다른 것이오!]
이 말이 막 끝나자마자 반공에서 돌연 벼락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늘을 쳐다보니 검은 먹구름이 가득한 게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기세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풍악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배 7,8척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배에 홍등을 매단 것이 벼슬아치의 행차가 틀림없었다.
배가 언덕에 닿자마자 수십 명의 사람이 떼지어 올라왔다. 팽련호와 사통천 등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올라오는 사람 중 키가 큰 사람은 대금국 조왕인 완안열이요, 작은 사람은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었다. 완안열은 구양봉과 구천인 두 사람을 믿고 따라 나선 모양이었다. 이번 대결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필승을 거두겠다는 신념으로 재차 남하해 강남에 온 것이다. 황용은 그들 중에서 구천인을 알아보고 손가락질을 했다.
[아버지, 제가 저 영감에게 맞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황약사는 일찍이 귀운장에서 구천인의 추태를 구경한 일이 있었다. 당시 구천리가 구천인 행세를 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는 그는 구천인이 그만한 재주로 어떻게 자기 딸을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때렸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때 구양봉은 벌써 완안열 등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부지런히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구양봉이 홍칠공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칠형, 잠시 후 무예를 겨룰 때 칠형은 어느쪽에도 가담해서는 아니되오. 직접 하신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내가 돕고 싶어도 도울 힘이나 있나?)
[잠시 전이고 잠시 후가 있겠소. 나는 팔월 보름에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뿐이니까.]
[바로 그 말씀이오. 여보 약형, 전진 문인과 강남 칠괴가 당신을 찾아 분풀이를 하려고 하는데 약형은 일대의 종주로서 어찌 그들과 대결해 체면을 손상하겠소. 내가 대신 쫓아 버릴 데니 형은 수수방관 구경이나 하시구려.]
황약사는 쌍방의 진세를 살피며 갖은 생각을 다 해보았다. 만약 홍칠공이 나서지 않는다면 전진 제자는 구양봉의 살수에 남아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당년 왕중양이 창립한 전진파는 이제 여기서 그 끝을 보고 말 것이다. 그러나 곽정이 돕고 나서서 천선의 위치를 지켜 준다면 구양봉도 북두진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곽정이 계속해서 자기를 귀찮게 굴면 형세는 또 달라지는 것이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이 저 녀석 생각 여하에 달려 있구나.)
구양봉은 황약사의 표정을 보고 별 관심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시간을 지체한다면 또 기회를 놓칠지 몰랐다. 이러다 만약 노완동 주백통이라도 나타난다면 일은 더욱 묘해지는 것이다.
[자, 다들 시작합시다. 또 기다리고 있을 게 뭐요, 시작합시다.]
구양봉이 이렇게 큰소리로 떠들자 홍칠공이 버럭 화를 냈다.
[지금 한 말은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요, 아니면 개 방귀요?]
구양봉은 하늘을 가리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시(子時)가 벌써 지났으니 지금은 팔월 보름날 새벽이 아니오?]
홍칠공이 고개를 들고 보니 달은 벌써 서편으로 살짝 기울었다. 한쪽이 검은 구름에 가려 있기는 했지만 시각은 벌써 자말축초(子末丑初)가 확실했다.
구양봉이 사장을 찍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구처기의 앞가슴을 공격했다. 전진 육자가 대적을 앞에 두고 있는데 팽련호 등은 또 옆에서 호시탐탐 달려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구처기 등은 오늘 자칫 잘못하다가는 여지없이 패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을 알았다.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전력을 다해 구양봉을 상대해 접전을 하는 동안에도 내심 초조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이때 구양봉은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실력을 과시하려고 살수를 쓰며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사장 위의 독사 두 마리가 들락날락 혀를 날름거리며 그들을 위협했다. 구처기, 왕처일 등이 몇 차례나 장검으로 찌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황용은 곽정이 계속 자기 아버지를 노려보면서도 홍칠공 때문에 차마 달려들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온종일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큰소리치더니 아버지롤 죽인 원수가 나타났는데도 겁만 먹고 계시군요.]
곽정은 황용이 깨우쳐 주는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다.
(먼저 아버지의 원수를 처치하고 난 후에 황약사에게 대들어도 무방하겠지.)
그는 아버지가 남긴 짧은 삼지창을 찾아 들고 완안열에게 달려들었다. 이를 본 팽련호와 사통천이 완안열 앞을 가로막았다. 곽정이 삼지창을 비껴 들고 완안열을 찌르려 하자 팽련호가 판관쌍필(判官雙筆)을 들어 막았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곽정은 이미 두 사람을 제치고 들어갔다. 사통천 역시 이형환위(移形換位)를 부리고도 그를 막지 못하자 놀라기도 했지만 화가 치밀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곽정에게 밀리는 것을 본 영지상인과 양자옹도 각기 병기를 들고 앞을 막았다. 곽정은 양자옹이 발사한 투골정을 피한 뒤에 왼손으로 운룡삼현(雲龍三現)의 재주를 부렸다. 이 묘기 속에는 연환삼장(連環三掌)이 숨겨져 있었다. 그가 내지르는 수장의 위력이 가히 사람을 놀라게 할 만했다. 양자옹은 장풍이 세차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마자 데굴데굴 굴러 피했다. 그러나 영지상인은 몸이 비대하여 행동이 불편한데다가 만약 자기까지 피한다면 곽정이 조왕의 면전에 육박할 것을 알고 급한 대로 쌍발(雙鋏)을 들어 억지로 막았다. 그 순간 쨍그랑 쨍그랑 소리가 크게 울리며 그의 쌍발은 장력에 흔들려 반공으로 날아오르고 곽정의 삼 장이 자기 얼굴을 때리는 것이 아닌가!
영지상인은 자기의 장법이 독창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늘 믿고 있었다. 적이 제아무리 날카로운 공격을 해와도 손만 번쩍 들면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곽정의 항룡십팔장은 천하 제일의 무공이다. 어찌 영지상인의 재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순간적으로 팔이 뻣뻣해지면서 맥없이 축 늘어졌다. 팔의 관절이 빠져 버린 것이다.
완안열은 이 젊은 청년이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고수들을 삽시간에 해치우고 자기 앞으로 육박해 들어오자 혼비백산 줄행랑을 놓았다. 이를 본 곽정이 삼지창을 흔들며 그 뒤를 쫓았다. 정신없이 완안열을 뒤쫓아가는데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옆에서 쌍장이 날아왔다. 엉겁결에 몸을 옆으로 살짝 비키며 보니 적은 다른 사람이 아닌 철장방 방주인 구천인이었다. 곽정은 그의 무공이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자세를 가다듬고 즉시 삼지창을 휘두르며 왼손을 뻗어 달려들었다. 구천인이라면 소홀히 맞설 상대가 아니었던것이다.
팽련호는 곽정이 구천인과 어울려 싸우는 것을 보고 양자옹, 사통친과 더불어 완안열을 에워쌌다. 이제 위험한 고비는 그런대로 넘긴듯싶자 즉시 판관쌍필을 들고 가진악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영웅, 강남 칠괴 가운데 어째서 한 분만 오셨소?]
가진악의 쇠지팡이는 황용이 휘두른 죽장에 의해 남호에 빠진 지 오래였다. 맨손으로 엉거추춤 서 있던 가진악은 적이 자기를 놀리는 말을 하자 분기탱천하여 독릉을 날리며 뒤로 삼 보 피했다. 어둠 속에서 독릉이 바람을 찢으며 무섭게 날았다. 팽련호는 그대로 막았다가는 부상을 입을까 걱정이 되어 급히 쌍필을 들어 땅바닥을 찍으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쉭! 독릉이 아슬아슬하게 발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이 독릉의 맛을 단단히 본 일이 있었다. 비록 해독약을 입수하긴 했지만 여러 달 동안이나 죽을 고생을 했던 터라 그 원수를 대하니 복수심이 불타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의 손에는 병기도 보이지 않았다. 팽련호는 분기탱천하여 이를 부드득 갈며 판관쌍필을 들고 가진악을 덮쳤다.
가진악은 평소 걸어 다닐 때도 쇠지팡이에 의지해야 될 정도로 심한 절름발이였다. 적이 바람처럼 대드는 소리를 듣고 간신히 두 발자국 옆으로 피하기는 했지만 한 발이 뒤뚱거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이를 본 팽련호는 희희낙락하며 왼쪽에 든 판관필로 자기 몸을 호위하면서 오른손의 판관필로는 가진악의 등을 맹격했다. 가진악은 비록 소경이기는 하지만 바람소리만으로도 뭐든지 식별해 내 추호의 착오가 없었다. 그는 암기가 날아오는 것을 느끼자 재빨리 땅바닥을 굴러 위험을 모면했다. 팽련호의 판관필이 땅바닥에 솟은 돌에 맞아 불꽃이 튀었다.
[빌어먹을 놈의 소경이 어찌 그리 날쌔냐!]
팽련호는 욕을 퍼부으며 왼손의 판관필로 또 한 번 찍었다. 가진악이 이번에는 땅바닥을 굴러 피하며 독릉을 날려 반격했다. 그런데 영지상인이 한옆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다가 가진악이 자기 옆으로 굴러 오자 슬그머니 발을 들어 밟았다. 깜짝 놀란 가진악이 어찌어찌 영지상인의 발길을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팽련호의 쌍필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등이 뜨끔해지는 걸 느끼면서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황용의 말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타구봉법을 써서 판관필의 공격을 막아 물리치고 또 팽련호를 넘어뜨린 것이다. 이 봉법은 조금 전 가진악의 쇠지팡이를 빼앗을 때와 같은 수법이었다. 팽련호는 판관필을 꽉 잡은 채 빼지도 박지도 못하고 있다가 그만 멀찍이 나가떨어져 버렸다. 팽련호는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기어 일어나니 황용이 죽장을 휘두르며 가진악을 호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도 가진악은 계속해서 황용에게 주절주절 욕을 퍼부었다.
[이 요녀야, 누가 너를 보고 구해 달라더냐?]
[아버지, 아버지는 이 소경 좀 보살펴 주세요. 다치지 않도록 말예요.]
황용은 가진악의 말에는 대꾸할 생각도 않고 자기 아버지에게 그를 부탁한 뒤에 곽정 쪽으로 달려가 구천인을 상대하는 걸 도왔다. 가진악은 영문을 몰라 그 자리에 멍청히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팽련호는 황약사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기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었기 때문에 황용의 얘기는 듣지도 못한 줄 알았다. 그래 슬그머니 가진악의 등뒤로 돌아가 판관필을 들어 번개처럼 내리쳤다. 정말 전광석화 같은 날렵한 솜씨에다 힘까지 강해 가진악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하더라도 막지 못했을 강공이었다. 팽련호는 이번에야말로 상대방을 제대로 맞혀 누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착각이 채 깨지기도 전에 쉭 소리와 함께 아주 작은 물건 하나가 공기를 찢고 날아와 자신의 판관필을 때렸다. 팽련호는 어찌나 아프던지 기절초풍하도록 놀라며 그만 손에 쥐고 있던 판관필을 놓치고 말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물건이 도대체 어디서 날아왔으며, 어찌 그리 힘이 강한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황약사는 여전히 두 손을 마주잡고 등을 돌린 채 하늘의 먹구름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진악은 귀운장에서 이 탄지(彈指)의 신통한 무공을 본 일이 있었기에 황약사가 자기를 위해 손을 쓴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생각해 볼수록 괘씸한 마음이 들어 무작정 그의 등을 향해 덮쳐 들었다.
[칠형제가 다 죽고 나 하나만 남았는데 나 혼자 산들 무슨 의미가 있나?]
황약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서 있다가 그가 가까이 접근하자 왼손을 뻗어 밀었다. 이렇게 미는 솜씨는 가볍고 평범해 대수로울 것이 없어 보였지만 이것은 도화도에서 가장 위력이 있다는 벽공장이었다. 당해 낼 리 없는 가진악은 비틀비틀하다가 풀썩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 곽정은 황용의 도움을 받고 구천인과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의 전진파는 이상하게 몰리고 있었다. 학대통은 다리를 사장에 한 번 되게 엊어맞았고 손불이의 옷자락도 반이상 찢어져 나갔다. 왕처일은 이렇게 계속 싸우다가는 30합 이내에 누가 죽거나 중상을 입을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나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왕처일은 마옥과 유처현이 공격하는 틈을 이용해 품에서 유성(流星)을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쉭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빛이 창공을 날았다.
이때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지며 호수에서는 짙은 안개가 무럭무럭 피어 올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들이 아랑곳없이 싸우는 동안에도 안개는 더욱 짙어고 습기 머금은 공기는 사람을 질식시킬 것처럼 답답해져 갔다. 하늘 위의 먹구름도 점점 두터워지고 구름을 뚫고 비치던 달빛도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이제는 모두 불안한 마음으로 떨었다.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상대방과의 간격이 자꾸만 벌어졌다.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곽정과 황용이 구천인을 향해 쌍격을 가하는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들어 세 사람을 가렸다. 곽정은 구천인과 황용의 몸이 보이지 않자 바로 이때다 싶어 완안열을 찾아 나섰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완안열의 머리 위에서 번쩍거릴 금관을 찾았다. 그러나 워낙 짙은 안개 속이라 석 자 밖은 보이지도 않았다. 동으로 번쩍 서로 번쩍 찾아 다니는데 갑자기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백통이다. 누가 나를 보고 싸우자고 하느냐?]
곽정은 너무나 반가웠다. 막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구처기가 외치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주사숙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바로 이때 검은 구름이 살짝 걷히자 모두들 지척에 적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주백통은 시시덕거리며 가운데로 나서서 그들을 둘러보았다.
[정말 재미있군그래.]
그는 오른손으로 왼쪽 겨드랑이를 문질러 때를 한줌 움켜쥐더니 옆에 있던 사통천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내 네놈에게 독약을 주마.]
사통천은 급히 피하려 했지만 이형환위의 기막힌 재주로도 달아날 수가 없었다. 주백롱은 사통천의 뒷덜미를 단단히 낚아채고 억지로 먹였다. 사통천은 예전에 노완동에게 단단히 골탕먹은 일이 있었다. 섣불리 뱉어 내기라도 하다가는 실컷 두드려 맞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알기 때문에 그냥 입에 문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왕처일은 유성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불러오지는 않았지만 뜻밖에도 주백통을 청해 왔으니 반갑지 않을 리 없었다.
[사숙님, 원래 황약사에게 살해되신 것이 아니었군요.]
[아니 어느 놈이 내가 죽었단 말을 하던가? 황노사가 계속 나를 죽이려고 십여 년을 빌렀지만 소용이 없었는걸. 여보 황노사, 이것 좀 맛보구려.]
이렇게 말을 하면서 주먹으로 황약사의 어깨를 내리쳤다. 이것은 그가 도화도에 있을 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연구해 낸 칠십이로의 공명권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유순하나 실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었다. 황약사도 소흘히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즉각 낙영장으로 반격을 했다.
[전진교 철부지 도사들이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구려.]
[아니, 당신이 감히 나를 죽여? 어림없는 소리 작작 하오.]
주백통은 안하무인으로 욕을 퍼부으며 맹렬하게 대들었다. 황약사도 그에게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는 걸 알고 전력을 다해 접전했다. 전진 제자들은 사숙이 도착했으니 이제 그가 황약사와 함께 구양봉을 상대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사숙은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고 무턱대고 황약사와 붙어 싸우니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사숙님, 황약사와 다투지 마세요.]
마옥이 간절하게 외치자 구양봉이 이때를 놓칠세라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그래 옳은 말이오. 당신은 절대로 약형의 적수가 아니오. 달아나 목숨을 부지하는 게 상책이오.]
주백통은 구양봉이 잔꾀를 쓰는 줄도 모르고 더욱 약이 올라 악착같이 대들었다.
[주대형이 구음진경의 무공을 가지고 우리 아버지와 대결하고 있는 걸 아시면 왕진인이 구천에서 뭐라고 말씀하실까?]
보다 못한 황용이 한마디했지만 주백통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진경의 무공으로 대들고 있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경문 내용을 잊어버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배우기야 쉬운 일이지만 아는 걸 잊는다는 게 징글맞게 어렵더군.]
황약사는 도화도에서 주백통과 싸울 때 그의 주먹이며 발의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권빕이야 오묘했지만 근력이 전만 못해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희한하고 묘한 방법으로 가지고 있던 상승의 무공을 없애 버렸다는 것일까?
구양봉은 희미한 안개 속에서 주백통이 황약사와 격투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보자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가 황약사를 물리친 후 전진 제자와 함께 자신에게 달려들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북두진을 깰 좋은 기회라 판단하고 사장을 휘두르며 진격을 시작했다. 북두진은 순식간에 위험에 처했다.
[주사숙님, 우선 구양봉부터 제거하세요.]
왕처일과 유처현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주백통은 사질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자 양손을 번갈아 휘둘러 황약사의 얼굴을 치려다가 느닷없이 오른손을 내지르며 껄껄 웃었다. 황약사가 이 괴상한 공격에 당황하여 팔을 뻗어 막으려고 했을 땐 미간이 벌써 그의 오른손 끝에 맞은 뒤였다. 부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화끈화끈한 통증이 밀려왔다. 주백통은 일 장이 상대방의 미간을 스치고 지나자 깜짝 놀라 왼손으로 자기 오른팔을 때렸다.
[빌어먹을 놈의 손, 이건 구음진경의 무공이란 말야.]
황약사도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수장을 뻗었다. 이 일 초는 재빠를 뿐더러 소리도 느낌도 없이 주백통의 어깨를 탁 때렸다. 주백통이 어깨와 허리를 숙여 피하며 중얼거렸다.
[어이쿠, 보복이 꽤 빨리도 오누나.]
짙은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갈수록 상대방을 식별하기 어려웠다. 곽정은 두 사부가 행여 적의 독계에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손을 뻗어 가진악을 부축해 홍칠공 옆으로 걸어갔다.
[사부님들께서는 잠시 연우루에 올라가 쉬도록 하세요. 우선 안개나 걷혀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때 황용은 계속해서 주백통을 달래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노완동, 도대체 내 말을 들을 거예요, 안 들을 거예요?]
[내가 용아 아버지를 이기지 못할 테니까 안심하라구]
[우선 노독물부터 상대하라니까 왜 말을 듣지 않아요. 하지만 죽여서는 안 돼요.]
[그건 또 왜?]
그녀는 계속 말하면서도 손발을 늦추지 않았다.
[계속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주대형의 냄새나는 과거를 모두 말할 거예요.]
[무슨 과거사를 들춘다는 게야. 쓸데없는 수작은 집어치우라구.]
[그래요? 그럼 영고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려줄까요?]
이 말에 주백통은 혼비백산했다.
[그래그래.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그 얘기는 제발 아무에게도 하지말아 줘. 노독물, 자네 어디 있나?]
주백통이 혜메고 있는 사이에 어디선가 마옥의 말소리가 짙은 안개를 뚫고 들려 왔다.
[주사숙님, 북극성의 위치를 일단 차지하고 보세요.]
[아버지, 이 구천인은 오랑캐와 야합한 간악한 역적이에요. 빨리 아버지가 처치해 버리세요.]
황용은 주백통을 떼어놓자 이번에는 황약사에게 이런 간청을 했다. 그러나 짙은 안개에 가려 구천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백통의 너털웃음이 안개 속에서 흔들렸다.
[노독물, 빨리 이 할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절을 해야만 살려 주겠다.]
어느덧 전진파는 다시 유리한 상황에 놓인 것 같았다.
곽정은 흥칠공과 가진악 두 사부를 연우루 근처까지 모셔다 놓고 다시 완안열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 다녀도 완안열은커녕 사통천, 구천인 등까지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주백통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노독물 어디로 달아났지?]
안개가 여전히 너무나 짙게 깔려 있어 옆에 있는 사람조차 알아볼 수 없을 뿐더러 목소리까지 이상하게 웅얼거려 잘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수없이 많은 적을 상대해 싸워 본 사람들인데도 안개 때문에 소경이나 다름없게 되자 두려움에 떨었다. 황용은 아버지에게 기댄 채 가만히 있었고 마옥은 낮은 소리로 포위망을 좁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움직임을 멈춘 채 적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사방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한참 뒤에 구처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이상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 오고 있었다. 황용은 그 소리의 정체를 깨닫자 큰소리로 외쳤다.
[노독물이 뱀을 풀었어요. 겅말 파렴치한 사람이군요.]
황약사는 누구보다도 먼저 뱀 소리를 들었다. 그에게는 뱀을 쫓을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옥통소만 있으면 뱀 무리를 미쳐 날뛰게 만들어 맥을 잃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딸이 익사했다는 거짓 소문을 듣고 비통한 나머지 그 퉁소를 부러뜨린 지 이미 오래였다. 하여 뱀이 몰려오는데도 속수무책이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칠공도 연우루에서 뱀이 몰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노독물이 뱀을 풀어 우릴 포위했으니 모두들 누상으로 오르시오.]
주백통의 무공이 그중 제일 출중했건만 그는 뱀이라면 질색이었다. 세상에 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지라 황용과 홍칠공이 뱀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제일 먼저 연우루로 달려든 사람도 바로 그였다. 뱀이 꼭 자기 발꿈치를 무는 것 같은 착각에 계단도 밟지 못하고 경공의 재주로 뛰어 올라가 제일 높은 기둥에 올라앉았는데도 가슴은 두근두근 뛰기만 했다. 뱀이 몰려오는 소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더욱 가깝게 들려 왔다.
[내 혈조도 여기 없으니 어떻게 한담.]
황용도 발을 동동 구르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연우루로 뛰어올랐다. 전진 제자들도 손에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더듬어 올라왔다. 윤지평은 허공을 밟고 넘어지는 바람에 이마에 커다란 혹이 생겼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기어 겨우 올라왔다. 황용은 곽정이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었다.
[곽정 오빠, 어디 계셔요?]
두리번거리며 몇 번 불러 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황용은 내심 조바심이 일었다.
[아빠, 아무래도 곽정 오빠를 찾아봐야겠어요.]
[날 무엇 때문에 찾지? 앞으로는 부를 필요도 없거니와 불러도 대답을 안 할 거야.]
곽정의 차디찬 목소리가 바로 황용 곁에서 들렸다. 이 꼴을 본 황약사는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이 녀석이 너무 건방지구나.]
황약사가 팔을 휘둘러 때리자 곽정은 머리를 숙여 피한 뒤에 반격을 하려고 하는데 머리 위로 화살이 쉭쉭 날아오더니 창틀에 꽂혔다.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는 순간 가까운 곳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화살이 비 오듯 날아왔다. 칠흑 같은 안개 속에서 상대의 인마가 얼마나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떠드는 소리가 다시 크게 들렸다.
[반적들을 놓치지 마라!]
구처기는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부들부들 떨었다.
[금나라 오랑캐가 가흥의 탐관오리와 결탁하여 군마를 이끌고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 틀림없구나.]
[내려가서 저놈들을 몰살합시다.]
왕처일의 말에 학대통이 저지하고 나섰다.
[안 돼요, 뱀 떼가 있어서.]
사람들은 비 오듯 날아오는 화살 떨어지는 소리와 뱀 떼 소리를 들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오늘의 대결을 안 완안열과 구양봉이 미리 쳐둔 덫에 걸린 것이다. 그런데 이 밤의 안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화인지 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화살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뱀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며 뱀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화살은 피하기 어려울 테니, 우리 모두 달아납시다.]
홍칠공이 달아나자고 서두르는 동안에도 주백통은 기둥에 걸터앉아 욕을 퍼부으며 날아오는 화살을 물리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연우루의 삼면은 물이다. 어느 틈에 관군이 작은 배를 타고 소리 없이 다가와 연우루를 둘러싼 뒤 활을 쏘아대는 모양인데 안개가 너무 짙어 더 이상 다가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서쪽 육로로 달아납시다.]
홍칠공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졸지에 우두머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좇아 아래층으로 내려와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을 뜨고도 반 자 앞을 내다볼 수가 없으니 동서남북이 어딘지 분간할 리가 만무했다. 다만 화살이 비교적 적게 날아오는 곳을 찻아 서로 놓칠세라 손에 손을 잡고 더듬어 나갈 뿐이었다.
구처기와 왕처일이 손에 장검을 든 채 앞장서 헤쳐 나가며 쌍검을 휘둘러 뱀도 쫓고 화살도 막았다. 곽정은 오른손으로 홍칠공의 손을 잡고, 왼손을 뻗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보니 따뜻하고 보드라운 것이 황용의 손이었다.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뿌리치니 황용이 차디차게 쏘아붙였다.
[누가 내 손을 잡으랬나요!]
이때 구처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앞에 뱀이 깔려 있어 나갈 수가 없으니 다시 물러서시오!]
홍칠공과 황약사는 후미에서 추적하는 관병들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구처기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방향을 바꿨다. 황약사는 대나무 가지 두 개를 꺾어 들고 휘둘렀다. 안개 속에서 뱀이 지르는 괴상한 비명 소리가 들리고 고약한 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황용이 결국참지 못하고 웩 구토를 했다.
[사방에 길이 막혔으니 갈 데가 없구나. 이게 다 팔자 소관이로구나.]
황약사가 체념하듯 중얼거리더니 대나무 가지를 집어 던지고 딸을 번쩍 들어 안았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무공이 워낙 비범해 관병의 화살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지만 서독이 풀어놓은 뱀 떼만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누구든지 독사에 물리기만 하면 목숨을 잃을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모두들 뱀의 괴상한 비명과 비린내에 모골이 송연해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게다가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으니 혹시 앞에 길이 있다 하더라도 도저히 찾아 나갈 수 없는 절박한 처지였다.
이렇게 위급한 순간에 한 사람이 차디찬 어조로 말했다.
[이 어린 요녀야. 차라리 죽장을 이 소경에게나 주어라.]
사람들은 이 목소리가 가진악의 것임을 알았다. 황약사와 황용이 <소경>이란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반가워했다. 황용이 재빨리 가진악에게 죽장을 넘겨주자 그가 서두르며 앞장섰다.
[모두들 이 소경의 뒤를 따라 도망갑시다.]
가진악은 가흥 본토박이라 연우루 근처의 큰길, 작은 길 할 것 없이 익숙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두 눈이 먼 소경이라 안개가 자욱하고 검은 구름이 꽉 끼어 있는 것이 아무 장애도 아닌데다가 다른 사람에 비해 예민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뱀 떼와 화살 날아가는 소리를 들으니 서쪽으로 난 지름길에만 적이 없는 듯했다. 이 지름길은 예전에는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었지만 요 몇 년 사이 여기저기 대나무를 심어 길이 없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가진악은 어렸을 때 이 길을 수도 없이 지나 다닌 기억뿐,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와본 일이 없어 이렇게 대나무가 자라 있을 줄은 까맣게 몰랐다. 그는 기우뚱기우뚱하며 앞장서 7,8보 건다가 그만 대나무에 가로막혀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르던 구처기와 왕처일이 쌍검을 휘두르자 대나무가 우수수 쓰러지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주사숙님, 빨리 오세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마옥이 그제야 주백통을 생각해 내곤 두리번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까지도 주백통은 천장 위 기둥에 올라가 있었으나 뱀 떼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아 차마 대답할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십여 장을 뚫고 나가니 대나무밭이 끝나고 앞에 작은 길이 나타났다. 오합지졸인 관병이 그들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학사제, 자네와 내가 앞으로 달려가 관병 몇 놈을 해치워야 분이 풀릴 것 같네.]
유처현의 말에 학대통이 대답을 하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둘이 칼을 들고 막 달려들려고 하는데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둘은 칼을 휘둘러 정신없이 화살을 막았다.
한참 동안 다시 걸어 나가자 큰길이 나왔다. 때마침 천지를 진동하듯 벼락이 치며 소나기가 한바탕 퍼븟자 눈 깜짝할 사이에 안개가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칠흑처럼 어두워 모든 게 어슴푸레하게 보일 뿐이었다.
[자,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모두들 자기 편한 곳으로 가시오.]
가진악은 이렇게 말하며 죽장을 황용에게 되돌려준 뒤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동쪽을 향해 떠나 버렸다.
[사부님!]
곽정이 가진악을 안타깝게 불렀다.
[너는 홍칠공을 모시고 조용한 곳으로 가 치료를 받도록 하고 뒤에가가촌(柯家村)으로 와서 나를 찾으려무나.]
곽정은 그러마고 대답을 했다. 황약사는 어디선가 또 날아온 화살을 들고 가진악 면전에 다가섰다.
[만약 오늘 내 생명을 구해 주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말을 당신에게 하지는 않을 거요.]
가진악은 황약사가 말을 채 끝맺지도 않았는데 끈적한 가래침을 그의 얼굴에다 뱉었다.
[오늘 일, 내 죽어서도 여섯 형제의 얼굴을 대하기 부끄러운 짓이었소.]
황약사는 화가 나서 손을 높이 들었다. 내리치기만 하면 가진악은 죽은 목숨이었다. 이를 본 곽정이 나는 듯 달려들었다. 곽정과 두 사람 사이는 십여 보 이상 떨어져 있었다. 미처 그들 중간에 끼여들지도 못했는데 높이 치켜 들었던 황약사 손이 서서히 내려졌다.
[이 황약사 어떤 사람인데 보통 사람과 다투겠느냐?]
그는 손을 털고 껄껄 웃으면서 황용에게 시선을 옮겼다.
[용아, 우리 가자꾸나1]
홍칠공에게 목례를 한 듯싶은데 이미 수장 밖에 서 있었다. 곽정은 황약사가 하는 말을 듣자 뭔지 모를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잠시 후 그들 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관병이 벌떼처럼 몰려왔다. 전진 육자가 장검을 휘둘러 막는 와중에도 황약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몸을 되돌려 세우고 홍칠공의 팔을 잡았다.
[칠형, 우리 둘이 저 앞으로 가 술이나 들며 얘기를 나눕시다.]
홍칠공은 흐뭇해서 웃었다.
[그것 참 좋겠군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곽정은 대사부 가진악을 쫓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관병이 떼를 지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다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깨와 팔로 관병을 밀어붙이고 있는데 얽히고설킨 혼전 속에서 구처기 등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은 사부가 난군 가운데 섞여 다칠까 봐 걱정이되어 조바심을 쳤지만 관병 가운데 완안열이 데리고 온 친위대와 구천인 수하 철장 방중이 섞여 있어 쉽게 물리칠 수가 없었다.
[대사부님, 대사부님! 어디 계십니까?]
그러나 곽정이 외치는 소리는 병기와 함성 소리에 눌려 거의 들리지 않았다.
황용은 가진악의 손에서 죽장을 받아 들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아버지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을 본 순간 자기의 아름다운 꿈이 산산이 깨지는 듯하여 망연자실 넋을 잃고 만 것이다. 황용은 계속해서 관군의 군마가 밀려오자 나무 뒤에 서서 하릴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무수한 군마가 자기 옆을 스쳐 가건만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처럼 넋을 잃고 서 있기만 했다. 그런데 어이쿠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리니 가진악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황용이 소리난 쪽을 살펴보니 가진악은 이미 땅에 쓰러져 있고 군관 한 명이 긴 칼을 들고 그의 등을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가진악이 떼구루루 굴러 칼을 피하며 주먹으로 군관을 때려눕혔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서려고 했으나 부상을 입었는지 몸을 채 펴지도 못하고 도로 넘어졌다. 이를 본 황용이 달려가 살펴보니 다리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지만 가진악은 황용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는 비틀거렸다.
[고집을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황용이 쏘아붙이며 왼손을 휘둘러 난화불혈수의 재주로 그의 오른쪽 어깨 위에 있는 견정혈을 눌렀다. 가진악은 그녀의 손을 떨치려고 몸부림쳤지만 이미 반신이 마비되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몸은 맡겼지만 입으로는 계속 욕을 퍼부었다.
황용은 그를 부축해서 십여 보쯤 떨어진 큰 나무 뒤로 숨었다. 막 숨을 가라앉히려고 하는데 관병이 그들을 발견하고 활을 쏘았다. 황용은 가진악의 앞을 막아서며 죽장을 휘둘러 얼굴을 가렸다. 날아오던 화살이 모두 그녀가 입고 있는 연위갑에 맞아 떨어졌다. 가진악은 화살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녀가 자기의 생명을 내놓고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내버려두고 달아나도록 하시오.]
가진악이 낮은 소리로 힘없이 말하자 황용이 코방귀를 뀌었다.
[흥, 세상 없어도 구해 드려야겠어요. 그래야 제 정성을 아실 것 아녜요? 그래 이런 판국에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둘은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혼란 속을 헤쳐 나갔다. 낮은 담장이 있는 곳으로 피신을 하자 화살은 더 날아오지 않았지만 가진악이 워낙 무거워 황용은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담장에 기댄 채 잠시 숨을 돌렸다. 가진악은 자신의 신세가 한심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소. 아가씨와 나 사이의 은혜니 원망이니 이제 그만 따지기로 합시다. 앞으로는 이 가소경이 죽은 셈 칩시다.]
[아니 멀썽하게 살아 계신데 어찌 죽은 셈 치라는 말씀이세요. 저를 찾아 복수를 하려고 한다 해도 저는 끝까지 도와드리겠어요.]
황용은 이런 말을 하면서 떠나가려는 가진악을 향해 죽장을 뻗었다가 거둬 들였다. 그때는 벌써 그의 두 다리에 있는 위중혈(委中穴)을 누른 뒤였다. 가진악은 아무 방비도 않고 있다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미련한 자기를 또 한 번 원망했다. 그녀가 어떤 악독한 방법으로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발자취도 가볍게 담장을 돌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第 六 卷. 第 三 章.(通卷 章). 십(十)자의 비밀
어느덧 서로 얽혀 싸우던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아마 전진 제자가 관병들을 거의 살해하거나 쫓아 버린 모양이었다. 멀어져 가는 사람들 말소리 속에 대사부를 부르는 곽정의 애절한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필시 방향을 잘못 잡아 혜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또 시간이 흐르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먼 곳에서 수탉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진악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건 내가 마지막으로 듣는 수탉 울음이겠지. 내일도 가홍부의 이곳저곳에서 수탉은 여전히 울겠지만 나 가진악은 들을 수 없겠구나.)
마냥 처량한 상념에 잠겨 있는데 사람들 발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자기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벼운 걸음은 분명 황용일 것이요, 다른 두 사람 소리는 누군지 모르지만 거칠게 들렸다.
[바로 이 나으리니 빨리 부축해 모시도록 해.]
황용은 함께 온 두 사람을 향해 이런 말을 하면서 가진악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가진악은 두 남자가 자신을 대나무로 만든 들것에 싣고 어디론가 데려가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연유를 몰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휙 소리와 함께 앞에 가던 사람입에서 어이쿠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황용이 죽장으로 후려갈긴게 틀림없으리라.
[빨리 걷지 못하고 왜 이리 꾸물거려? 관군이라 하는 것들이 백성이나 업신여길 줄 알지 쓸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
이어서 또 한 번 쉭 소리가 들렸다. 뒤에 선 작자도 한 대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프다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아! 황용이 관군 둘을 잡아다 나를 둘러메게 했구나. 그녀다운 깜찍한 생각이야.)
가진악은 화살에 맞은 다리의 통증이 여간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끙끙거리다가는 황용이 또 뭐라고 조롱할 것만 같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얼마쯤 가니 몸이 들썩들썩하는 것이 험한 소로에 접어든 듯했다. 잠시 후 숲 속을 가로지르는지 나믓가지며 이파리가 얼굴을 마구 스쳤다. 관군들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기진맥진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비틀거릴 때마다 황용이 죽장으로 치는 바람에 죽을 힘을 다해 버티는 듯했다.
30여 리쯤 왔을까? 가진악이 계산해 봐도 진말오초(辰末午初)는 되었을 성싶었다. 이미 비는 멎은 지 오래요, 젖었던 옷도 햇볕에 반 이상이나 말랐다.
매미 소리와 개 짖는 소리 속에 농부들이 홍얼거리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섞여 들렸다. 아늑하고 태평한 분위기가 방금 벌어졌던 남호의 악전고투와는 완연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분위기였다.
황용이 가까운 농가에서 호박과 쌀을 얻어 죽을 끓인 후 한 그릇은 자신이 먹고 한 그릇은 가진악 면전에 가져다 놓았다.
[난 배고프지 않소.]
[다리가 아프실 텐데, 제가 모를 줄 아세요? 배가 고프든 말든 한참 진통을 겪어야 치료해 드릴 거예요.]
가진악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 뜨끈뜨끈한 호박죽 그릇을 내동댕이 쳐 버렸다. 순간 관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황용이 날쌔게 피하는 바람에 죽그릇이 관병에게 쏟아진 것이다.
[왜 떠들고 야단이야? 가 나으리께서 호박죽을 내리셨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빨리 깨끗이 먹어 치우지 못할까!]
황용의 야단에 관병은 또 맞을까 전전긍긍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호박을 한점 한점 주워 먹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가진악으로서는 화를 낼 수도 웃을 수도 없어 의자에 엉거주춤 앉은 채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뻗어 다리에 박힌 화살을 뽑자니 선혈이 쏟아질 것이 뻔한데 만약 황용이 그냥 보고만 있는다면 이 또한 난처한 일이었다. 혼자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는데 황용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가서 깨끗한 냉수를 떠와. 빨리빨리!]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관병의 따귀를 시원하게 올려 붙였다.
(요놈의 계집애는 말로도 충분할 텐데, 그저 입만 벌렸다 하면 다른 사람을 골탕먹이는구나,)
가진악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칼을 가지고 가 나으리 상처 부근의 옷깃을 찢어 놔.]
관병 하나가 황용이 시키는 대로 그의 옷을 찢었다.
[아프다고 엄살 떨지 마세요. 계속 엄살을 부리면 나도 손을 떼고 모르는 체할 테니까.]
[누가 아는 체하래. 멀리 꺼져 없어지라구]
가진악은 가까스로 대꾸하기는 했지만 상처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황용이 화살대를 잡았다. 한데 빼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으로 밀어 쑤시는 것만 같았다. 가진악은 정말 화가 나서 주먹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상처가 뜨금 아픈가 싶더니 손에 긴 화살이 쥐여졌다. 황용이 화살을 뽑아 가진악에게 건네 준 것이었다.
[움직이기만 하면 따귀를 때릴 거예요.]
가진악은 그녀가 말을 하면 꼭 실천하고야 마는 성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상대할 수 없으니 그저 꾹 참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요녀에게 따귀라도 맞는다면 평생의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입을 다문 채 꼼짝하지 않았다.
황용이 천을 찢어 상처 부근을 묶어 지혈을 시켜 주었다. 게다가 맑고 시원한 물로 깨끗이 씻어 주니 아픔이 훨씬 가시는 듯했다. 가진악은 정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여자가 만약 악의를 품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나를 구해 주려고 할까? 만약 악의가 아니라면...., 흥! 어림없는 얘기야. 도화도의 요괴 부녀에게 착한 마음을 기대할 수 있을까? 틀림없이 다른 흉계가 있어서 이럴 거야.)
가진악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황용은 상처에 금창약(金創藥)을 바르고 잘 싸매 주었다. 상처가 시원해지며 통증이 반 이상 감소됐다. 이 약은 황용이 도화도에서 직접 가져 온 것으로 외상을 치료하는 천하 제일의 영약이었다.
가진악은 상처의 통중이 가시자 이제는 허기 때문에 뱃속이 꾸르륵 요동을 쳤다.
[원래 거짓으로 배고픈 체하나 했더니 정말 대단히 배가 고프신 모양이로군요. 그럼 빨리 갑시다.]
그녀는 관군들을 닦달해 들것을 메게 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3,4리를 갔을까? 해가 지는지 까마귀 우는 소리가 깍깍 들렸다. 수천 수만 마리 까마귀가 공중을 날며 깍깍거렸다. 가홍 이곳저곳 다녀 보지 않은 곳이 없는 가진악은 까마귀 우는 소리만으로도 그들이 철창묘(鐵槍廟) 부근에 당도했음을 알았다.
이 철창묘에 모신 신주는 오대(五代) 때 명장인 철창 왕언장(王彦章)이다. 묘 옆에 높은 탑이 있고, 탑 위에 까마귀가 깃들이는 보금자리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까마귀를 신병신장(神兵神將)이라 믿고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난 것이다.
[날이 저물었는데 어느 곳에 드나?]
황용이 혼자 가만히 중얼거렸다.
(만약 근처 인가에 들었다가 소식이 알려지면 공연히 관병이 와서 귀찮게 굴 텐데.)
[좀 가면 오래 된 사당이 있는데.....]
가진악이 황용에게 말했다.
[아니, 까마귀가 뭐가 보기 좋아서 이럴까? 그래 까마귀도 본 일이 없나? 빨리 가자구.]
황용은 가진악의 말을 들었는지 관병들을 향해 욕을 퍼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에는 죽장 흔드는 소리가 없었는데 관병이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보아 손으로 꼬집었거나 발길로 걷어찬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철창묘에 당도했다. 가진악은 사랑방 문을 미는 소리를 들었다. 까마귀 똥으로 범벅이 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당은 오랫동안 비워 놓은 채 아무도 살지 않은 것 같았다. 황용이 혹시 더럽다고 다른 곳에 가자고 하지나 않을까 했는데 아무 말이 없었다.
황용은 관군들을 시켜 하나는 청소를 하고 하나는 아궁이에 불을 피워 물을 데우도록 했다. 그리고 가진악의 상처에 금창악을 다시 발라 주고 나서 세수하고 발을 씻었다. 한결 편안해진 가진악은 부들풀 방석을 베개 삼아 제상 위에 누웠다.
[아니 내 발을 왜 구경하지? 감히 내 발을 구경할 수 있다고 생각해? 발 처음 봐? 눈깔을 빼버릴까 보다.]
황용의 호통에 관군은 혼비백산하여 수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 뭣 때문에 눈깔을 멀뚱멀뚱하게 뜨고 내 발을 보고 있었는지 빨리 말을 해봐.]
관군은 차마 거짓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가 죽을 때라 모르고 그랬습니다. 아가씨 발이 너무 예쁘게 생겨서 그만.....]
가진악은 깜짝 놀랐다.
(아니 저 빌어먹을 놈이 이제 죽을 마당에도 색정이 동했나 보구나. 이 요녀가 저놈을 그냥 놔두지는 않을 텐데. 아마 가죽이라도 벗기고 말겠지!)
그런데 의외로 황용이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네까짓 주제에 그래도 예쁜 것과 미운 것이 보이는 모양이지.]
황용은 죽장을 들어 한 번 퍽 후려치고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관군들은 후원에 몸을 숨기고 다시는 나타나지 못했다. 가진악은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고 황용만이 대전 안을 왔다갔다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왕철창이 당세에 위명을 떨치기는 했지만 뒤에 가서 머리와 몸이 따로 묻혔으니 무슨 놈의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무슨 놈의 호한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철창이 정말 쇠를 부어 만든 것인지 모르지.]
가진악은 어렸을 때부터 한보구, 남희인 등과 이 사당에 와서 놀았었다. 당시에는 어린아이들이었지만 모두들 이상할 정도로 힘이 세서 그 철창을 가지고 논 적도 있었다. 가진악은 황용의 말을 듣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쇠를 두드려 만들었지, 아무렴 가짜일 리가 있겠나?]
황용이 그러냐고 대답하고 철창을 들어 어림짐작을 했다.
[한 삼십 근은 되겠군요. 아참, 제가 가선생님 쇠지팡이를 버려 버렸는데 금방 보상할 방법은 없고 어떻게 할까요? 내일 우리가 혜어지면 각자 자기 길을 가야 할 텐데, 병기가 없으니 이걸 지팡이로 삼으면 어떨까요?]
그녀는 가진악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마당으로 내려가 큰 돌을 주워 들고 철창 끄트머리를 땅땅 두드려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가진악은 외로운 신세로서 친척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 황용과 겨우 하루를 함께 지냈지만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내일 우리가 헤어지면 각자 자기 길을 가야 한다>는 말을 하자 망연자실 어쩔 줄 몰랐다. 무엇에 홀린 듯 넋을 잃고 철창을 받아 들었다. 자기가 평소 쓰던 쇠지팡이보다는 무거웠지만 그래도 쓸 만했다.
(그녀가 병기까지 내게 주는 걸 보면 악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단 말야.)
[이건 우리 아버지께서 배합해 만든 환단(還丹)인데 상처에 이보다 좋은 약은 없을 거예요. 워낙 우리 부녀를 증오하고 계시니 쓰고 안쓰고는 마음대로 하세요.]
이런 말을 하면서 황용이 약 한 봉지를 건네 주었다. 가진악은 약을 받아 품속에 챙겨 넣으며 뭐라고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가질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황용이 또 무슨 말을 하나 망연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럼 우리 잠이나 자요.]
가진악은 황용이 더 이상 말을 않자 억지로 눕기는 했지만 이 생각 저 생각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탑 위 까마귀들도 수선을 떨다가 어느덧 조용해졌다. 그런데 황용은 끝내 자리에 눕지 않고 여전히 부들풀 방석에 앉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황용이 뭔가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글 모르는 가진악으로서는 그녀가 무슨 시를 읊는지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시 읊는 소리가 처량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이윽고 황용이 방석을 서너 개 가져다 가지런히 놓고 눕는 기척이 들렸다. 비스듬히 누워 호흡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잠이 든 듯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가진악은 누운 채 황용이 준 철창을 어루만져 보았다. 어렸을 때 추억이 선명하게 떠올라 눈앞에 어른거렸다. 주총이 낡은 책 한 권을 들고 머리를 끄덕거리며 읽는 광경이었다. 한보구와 전금발이 신상(神像)의 어깨에 걸터앉아 수염을 어루만진다. 남희인은 자기와 함께 철창 한쪽을 잡고 있었고 장아생이 다른 한쪽을 잡은 채 힘을 겨루고 있다. 한소영은 그때 겨우 네댓 살 먹은 어린아이로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린 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때 그녀의 땋아 내린 머리에는 빨간 댕기가 나풀거렸었다.
가진악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 같은 암흑이 덮쳐 왔다. 가슴속 복수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철창을 꽉 틀어 잡은 채 슬그머니 황용 곁으로 다가섰다. 황용의 숨소리가 쌔근쌔근 들렸다.
(내가 이 철창을 내리치기만 하면 황용은 꼼짝없이 죽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황노사의 무공을 당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살아 생전 언제 복수를 한단 말이냐? 그의 딸이 여기 이렇게 잠들어 있다. 이는 하늘이 내게 내리신 좋은 기회다. 그에게도 딸을 잃은 슬픔을 맛보게 해야 한다.)
그러나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여자가 내 목숨을 구해 주지 않았더냐? 은혜를 원수로 갚는 법은 없다. 음, 그럼 먼저 그녀를 죽인 후에 나도 여기서 죽어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가진악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을 굳혔다.
(나 가진악은 일생을 정직하게 살아왔다. 수십 년 동안 어느 한 가지 천지에 부끄러운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고향에 돌아와 죽는 마당에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
철창을 높이 치켜 들고 두 손에 힘을 주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먼 곳에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렀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날카롭게 울려 퍼져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황용이 이 웃음 소리에 벌떡 일어나 보니 가진악이 철창을 높이 든 채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구양봉이 나타나다니!]
황용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가진악은 그녀가 외치는 소리를 듣자 철창을 내리칠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워낙 거리가 멀어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3,40명은 족히 될 듯한 발소리까지 들렸다. 가진악은 이 사당의 전전(前殿)이고 후원이고 가릴 것 없이 모르는 장소가 없었다.
[저들이 탑을 발견하고 이리 오고 있으니 우리 잠깐 숨도록 하지]
가진악이 조용히 속삭이자 황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즉시 깔고 자던 방석을 발로 차 한쪽에 밀어붙였다. 가진악이 황용의 손을 잡고 후원으로 와 문을 밀었다. 그런데 문이 단단히 잠겨 있어 꿈쩍도 안 했다.
[빌어먹을 관군 놈들이 잠갔군.]
가진악이 막 욕을 퍼붓는데 누군가가 대문을 미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대전 안에는 숨을 만한 장소가 없었다.
[신상 뒤로 몸을 숨겨요.]
두 사람이 막 신상 뒤에 숨어 좌정을 하는데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누군가가 부싯돌을 켠 것이다.
그들이 수군거리는 와중에 맨 먼저 구양봉의 말소리가 들렸다.
[조왕야님, 오늘 연우루에서의 싸움에서 큰 공은 없었지만 적의 예기(銳氣)만은 충분히 꺾어 놓은 셈입니다.]
[모두 선생님이 주장해 주신 덕분이지요. 다음에 철장봉에 가서 책을 내올 때에도 힘을 써주셔야 하겠습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만약 어린 왕야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오시지 않았더라면 무목유서가 철장봉 안에 있는지 누가 알기나 했겠습니까?]
[선생님 수하의 사노들이 제 아이 목숨을 구해 주셔서 여간 고맙지 않습니다, 제 아이가 사람을 시켜 그분들을 경도(京都)로 모셔 일평생 편안히 모시도록 다 주선을 해놓았습니다.]
[그 모두 조왕야의 은덕이시지요.]
[구방주가 화가 나서 철장봉으로 돌아갔으니 방비가 여간 철저하지 않을 겝니다. 책을 입수하는 데 구양선생께서는 무슨 묘책이라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군요.]
[조왕의 면전에 고수가 이렇게나 많은데 까짓 철장방이 두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구천인의 무예가 높다고는 하지만 웬만하면 이 구양봉이 이길 수 있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하며 구양봉이 헛기침을 했다. 양자옹, 팽련호 등도 앞을 다투어 구양봉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들이 이렇게 자기들 멋대로 구천인을 깔고 뭉개며 보잘것없는 인물로 만들자 젊은 목소리 하나가 나섰다.
[여러분 말씀은 어딘가 틀렸습니다. 구방주의 무공이 여간 탁월한게 아닙니다. 제가 직접 본 일이 있는걸요. 당세에 구양선생말고 그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몇 명에 불과합니다.]
가진악은 이 젊은이가 양강인 걸 알 수 있었다. 진노의 불길이 또 한 번 마음속에서 이글거렸다.
양강의 말은 양자옹 등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구천인을 헐뜯던 그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구천인 그 영감, 곽정 하나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재주가 별것 아니에요.]
영지상인이 빈정거리자 구양봉이 냉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영지상인은 곽정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사람들은 대내의 취한당 앞에서 곽정이 영지상인을 폭포 밖으로 내동댕이쳤던 일을 떠올리면서 고소해했다.
[제가 영지상인을 깔보는 것은 아닙니다. 영지상인의 무공이 지금보다 십 배 강하다 해도 구방주의 상대가 되기는 어려울걸요. 철장수상표가 양호(兩湖)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저로서도 그를 경시하지 못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구양봉이 그를 실컷 비웃어 주고 헛기침을 했다. 영지상인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음속으로는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처지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가진악은 많은 고수들이 모인 자리라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방금 황용을 때려 죽이고 자기도 함께 죽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니 식은땀이 흘렀다. 더구나 이제 적에게 발각되면 황용과 자기 목숨은 끝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완안열의 수종들이 잠자리를 마련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완안열, 구양봉, 양강 등 셋이 나란히 누웠다. 이윽고 양강이 구양봉에게 말을 걸었다.
[구양선생님, 이 후배는 상관검남의 유서 가운데서 철장법을 깨는 방법이 씌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양봉은 귀가 번쩍 트여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제가 어찌 감히 구양선생님을 속이겠습니까? 그 철장법을 깨는 방법이 책의 마지막 장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몹쓸 계집년이 찢어 버렸습니다.]
구양봉은 구천인에 비해 무공이 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철장법에 대해서는 은근히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철장법을 깰 수 있다는 말을 듣자 귀가 솔깃했는데 그 귀중한 책을 무공도 모르는 소녀가 찢어 버렸다니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후배가 그래도 몇 번 읽었기 때문에 회미하게나마 그 대강을 기억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제 무학이 얕은 탓에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선배님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가르쳐 드리고말고요.]
구양봉은 희색이 만면하여 기뻐하다가 갑자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조카가 황약사와 전진 제자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어 백타산은 이제 그 대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내가 제자로 거두면 어떨까요?]
양강은 오래 전부터 갈망해 오던 일이라 기쁜 마음에 벌떡 일어나 구양봉을 향해 이마를 조아리며 스승으로 모시는 절을 했다. 가진악은 양강이 의로운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원수를 아비로 삼더니 그것도 부족해 다시 천하의 악한을 사부로 모시겠다고 발광하는 꼴을 보자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객지에서 스승을 모시는데 적당한 예물이 없으니 다음날 후히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완안열의 정중한 인사에 구양봉이 웃으며 받았다.
[진주며 보옥 같은 것은 백타산에도 많이 있습니다. 나 구양봉은 소왕야의 총명함을 높이 사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지니고 있는 무공을 전수해 줄 사람이 생긴 것만으로도 흐뭇합니다.]
[제 실언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완안열의 정중한 사과에 이어 양자옹 등이 분분히 일어나 축하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느라 수선스러운데 누군가가 일어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배고파 죽겠는데 왜 먹을 것을 주지 않나요?]
가진악은 바보 소녀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어째서 이 여자가 완안열, 구양봉 등과 함께 어울렸을까? 이때 양강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참 그렇군. 빨리 먹을 것을 찾아다 저 아가씨에게 드리도록 해.]
잠시 후 바보 소녀는 가져 온 음식을 우물우물 먹어 치운 후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를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그동안 말을 잘 들었는데, 아직도 우리 집이 멀었나요?]
[내일이면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잔뜩 먹고 잠이나 푹 자라구.]
바보 소녀는 얌전히 있는가 싶더니 또 이런 말을 꺼냈다.
[저 탑 위에서 바스락바스락하는데 무슨 소리예요?]
[새 아니면 쥐겠지, 귀신일 수도 있고....]
양강이 대꾸했다.
[무서워요.]
[바보같이, 무섭긴 뭐가 무섭다고 야단이야]
[저는 귀신이 제일 무서운걸요.]
[아니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귀신이 감히 어떻게 나타나나?]
가진악은 양강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듣고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그 땅딸보 귀신이에요.]
[거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라고. 무슨 놈의 땅딸보가 이러니저러니야단일까?]
[흥, 그럼 내가 모를 줄 알고. 땅딸보가 할머니 묘지 안에서 죽었는데 그 할머니 귀신이 그냥 놔두겠어요? 내쫓겠죠. 그럼 그가 누굴 찾아오겠나 생각해 보라구요. 양강 오빠를 찾아오겠지요.]
[다시 또 주책을 부리면 할아버지를 오시게 해서 다시 도화도로 데리고 가라고 할 테야.]
바보 소녀는 이 말에 기가 질렸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 갑자기 사통천이 의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왜 남의 발을 밟고 야단이야!]
바보 소녀가 귀신이 무섭다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가진악은 방금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부쩍 의심이 일었다. 바보 소녀가 말한 땅딸보는 셋깨 아우 한보구가 틀림없었다. 그가 도화도에서 죽었으니 이건 분명 황약사에게 살해된 것인데 그의 혼백이 무엇 때문에 양강을 찾을까? 바보 소녀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하더라도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수들이 떼지어 눈앞에 있으니 감히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라 안타깝기만 했다.
(황약사가 연우루에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 황약사 어떤 사람인데 보통 사람과 다투겠느냐?> 그는 나를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내 오형제는 죽였을까? 만약 황약사가 한 일이 아니라면 왜 넷째 아우는 그가 둘째와 일곱째를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말했을까?)
가진악이 혼자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느닷없이 황용이 그의 손바닥에 글씨를 한자 한자 쓰기 시작했다.
<한 가지 일을 부탁드려요.>
<무슨 일을?>
<나를 누가 죽였다고 우리 아버지께 말씀해 주세요.>
가진악이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해 있는 사이에 황용은 벌써 밖으로 뛰쳐나갔다.
[구양아저씨 안녕하세요?]
사람들은 신상 뒤에 누군가가 숨어 자기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수선을 피웠다. 여기저기에서 병기를 꺼내는 철커덕 철커덕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이어 황용은 포위되었다.
[누구냐?]
[자객이 있다.]
[어떤 사람이냐?]
그들은 분분히 떠들어대며 다가들었다.
[제 아버지께서 저를 보고 구양 아저씨가 여기로 오실 테니 기다리다가 맞으라고 하셨는데 왜들 이렇게 놀라시죠?]
황용이 아무 거리낌 없이 웃으며 말하자 구양봉은 어이가 없었다.
[아가씨 아버지가 내가 여기 올 줄 어떻게 아셨지?]
[우리 아버지는 이술이며 점술, 모르는 것이 없으시잖아요. 뭐든지 다 알고 계시답니다.]
구양봉은 반신반의했지만 더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사통천 등이 밖으로 나가 한바퀴 살펴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멋쩍게 다시 돌아와 병기를 든 채 완안열을 호위했다.
황용이 부들풀 방석 위에 태연자약하게 앉아 구양봉에게 말을 걸었다.
[구양아저씨, 왜 그리 우리 아버지를 괴롭게 만드셨어요?]
구양봉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황용이 나이는 어리지만 여간 영악한 소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공연히 한 마디라도 실언을 했다가는 꼬투리를 잡혀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할 게 뻔하니 실컷 지껄이게 놔두는 것이 상책이다 싶었다.
[구양아저씨, 지금 우리 아버지가 신승진(新勝鎭) 소봉래(小蓬萊)에서 전진교 도사들에게 포위돼 있는데 만약 아저씨가 도와주시지 않으면 몸을 빼기 어려울 것 같아요.]
[원 그럴 리가 있나?]
구양봉이 웃으며 가볍게 받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군요. 대장부가 일을 저질렀으면 자신이 그것을 감당해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분명 아저씨께서 전진교의 담처단을 살해했는데도 웬일인지 그 못된 도사들이 시종일관 아버지를 귀찮게 하고 있군요. 게다가 노완동 주백통까지 소란을 부리고 있어 시비를 가릴 수도 없으니 우리 아버지 입장이 얼마나 곤란하시겠어요.]
구양봉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롤 지었다.
[아가씨 아버지의 무공이 그토록 훌륭한데 그래 전진교의 보잘것없는 도사들이 이겨내겠나?]
[아버지의 말씀도 꼭 와서 도와주십사고 하는 것은 아녜요. 다만 칠일 낮 칠일 밤을 생각해 보신 결과 일단의 문장 뜻을 터득하셨다는 얘기나 전하라고 하신 것뿐이에요.]
[무슨 문장인데?]
[사지성(斯地星) 앙의납득(昻依納得) 사열확허(斯熱確虛) 합호문영(哈虎文英)이에요.]
이 괴상한 말을 가진악과 완안열 등 다른 사람들은 전연 알아듣지 못했다. 구양봉만은 이 말이 《구음진경》의 마지막 일 편의 내용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황약사가 그 내용을 터득해 알고 있다니 가슴이 뜨끔하지 않을 리 없었건만 그래도 그는 전연 놀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린 소녀가 워낙 사람을 잘 속이니 못 믿겠는걸. 그따위 괴상한 글을 알 사람이 누가 있냔 말이야.]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만두세요. 아버지께서 이 말을 해석해 놓으신 걸 제 이 눈으로 직접 본걸요.]
구양봉은 평소 황약사의 재능에 탄복하고 있었다. 이 괴상한 문장을 끝까지 아무도 모르고 그냥 넘어간다면 그뿐이겠지만 누구 한 사람이라도 알 수 있다면 그건 황약사지 다른 사람일 리는 없었다.
[그럼 아버님께 축하 인사를 드려야겠군그래.]
황용은 그의 말투에서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는 걸 느꼈다.
[제가 보고 나서 아직도 몇 마디는 기억하고 있는데, 무방하시다면 여기서 읽어 드릴 수도 있어요. 자, 들어 보시겠어요? 몸이 가렵거나 혹은 뭣에 눌린 것처럼 무겁다거나, 또는 가벼이 날고 싶거나 아니면 몸이 묶인 것 같은 느낌이 들거나, 더웠다 추웠다 하거나, 너무나 기뻐 뛰고 싶거나, 혹은 몸의 털이 놀라 뻣뻣하게 서거나, 너무 기쁨에 취해 있을 때, 이러한 여러 가지 현상이 있을 때 아래 방법을 쓰면 신통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몇 마디 말이 드디어 구양봉을 간질간질하게 만들고 말았다. 사실 황용이 왼 것은 일등대사가 번역했던 구음신공편(九陰神功篇)에 있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증상은 원래 상승의 내공을 익힌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증상이다. 무예를 익히는 사람이 이런 경우를 당하면 대개 전전긍긍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흩어지지 않게 하느라 무진 애를 먹는다. 그런데 묘법으로써 이를 신통한 경지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는 황용이 왼 것이 《진경》의 경문이지 결코 마음대로 지껄인 것이 아니라는 걸 즉시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그래 그 다음은 뭐라고 했는가?]
구양봉이 자기도 모르게 다그쳐 물었다.
[글쎄요. 다음 내용은 잊어버렸군요. 다만 전신의 모공(毛孔)을 모두 통하게 하면 심안(心眼)으로 몸에 있는 서른여섯 가지 물체를 보게 된대요. 그렇게 되면 마음이 즐겁고 조용해진다더군요.]
구양봉은 잠자코 마음속으로 저렇게 똑똑한 것이 잊을 리는 없을게고 고의로 저러는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구양아저씨가 오천 자를 필요로 하는지 여쭈어 보라고 하셨어요.]
[무슨 말인지 좀 자세히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만약 아저씨께서 우리 아버지를 도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전진교를 섬멸할 것 같으면 구음진경의 경문 오천 자를 전부 알려 드리는 거지요.]
[내가 가지 않겠다면 어떻게 할 텐가?]
[아버지를 도와 주백통과 전진 육자를 다 죽이고 나면 제가 삼천자를 알려 드릴게요.]
[아가씨 아버지와 내 교분이 그리 두텁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이 노독물을 그토록 생각해 주지?]
구양봉이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첫째, 아저씨 조카를 살해한 사람이 전진교 문인이니 원수를 갚으려고 할 거라구요.....]
양강은 이 말을 듣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때마침 그의 옆에 있던 바보 소녀가 눈치 없이 물었다.
[왜? 추우세요?]
양강은 어물어물 얼버무리며 외면했다.
[둘째, 아버지께서 경문을 번역하신 후 곧바로 전진 도사들과 싸움을 하는 바람에 제게 자세한 말씀을 하실 겨를이 없었어요. 구음진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의 보물이나 다름없는데 그걸 그냥 사장시킬 수는 없잖아요. 지금 세상에 아저씨와 아버지 두 사람만이 그래도 의기투합한 편이니 아저씨가 먼저 배우신 다음 제게 알려 주시면 좋지 않겠어요?]
구양봉은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말이야 믿을 수 있겠지. 고수의 지도가 없다면 이 계집애가 제아무리 경문을 술술 읠 수 있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겠지.)
[그러나 아가씨가 외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
[곽정 그 녀석이 벌써 경문을 아저씨에게 베껴 드리지 않았어요? 제가 범어로 된 부분만 읽어 드릴 테니 대조해 보시면 금방 진짠지 가짠지 알 수 있을 텐데요.]
[그럴듯한 말이군. 내 오늘은 좀 쉬고 내일 아버지를 도우러 가지.]
[일이 급한데 어떻게 내일까지 기다려요?]
[그럼 뒤에 내가 아버지 대신 원수를 갚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는 벌써 따로 속셈이 있었다. 경문이야 이미 자기 손에 있는 것이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황용 하나쯤 입을 열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때 가서 경문의 내용을 터득하면 되는 것이니 지금 황약사가 전진교와 싸우다 양쪽이 다 죽어 버린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가진악은 신상 뒤에 숨은 채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오가는 얘기는 모두 구음진경에 대한 것뿐이었다. 방금 황용이 자기 손바닥에 <나를 누가 죽였다고 우리 아버지께 말씀해 주세요>라고 쓴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황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해요.]
[그야 물론이지. 아가씨도 좀 쉬도록 하라구.]
이렇게 말하며 구양봉이 웃었다.
황용은 방석을 챙겨 들고 바보 소녀 옆으로 다가앉았다.
[우리 아버지가 도화도로 데리고 갔을 텐데 어떻게 여기 와 있지요?]
[섬에 사는 게 재미없어 집으로 돌아가려구요.]
[이 양씨 성을 가진 분이 섬에서 데리고 나왔지요? 그렇지요?]
[그래요. 정말 좋은 분이에요.]
가진악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자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양강이 언제 도화도에 갔을까?)
황용은 연이어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 아버지는 어디로 갔어요?]
[내가 달아났다고 말하면 안 돼요. 할아버지가 나를 때릴 테니까요.]
[절대로 말 안 할게요. 그러니 묻는 말에 대답을 잘해야 해요.]
[할아버지께 고자질하면 절대로 안 돼요. 나를 잡아가지고 가서 또 글을 배우라고 하실 테니까요.]
[말 안 할 테니 그 점은 안심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글을 배우라고 했다구요?]
[그래요. 그날도 할아버지가 서재에서 내게 글을 배우라고 했어요. 뭐 우리 아버지 성이 곡(曲)씨니까 내 성도 곡이라며 곡(曲)자를 써보라구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 이름이 무슨 풍(風)이라고 하던데, 내가 잘 모르니까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나더러 바보라고 야단을 치시는 거예요. 내 원래부터 바보인 줄 모르시나 봐요.]
[바보니까 바보라고 하신 모양이지만 할아버지가 욕을 하시다니 그 할아버지 나쁜 사람이네요.]
바보 소녀는 황용이 웃으며 황약사를 욕하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 뒤에 어떻게 됐어요?]
[내가 집에 가겠다고 하니까 더욱 성을 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벙어리 하인 하나가 들어와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뭐라고 말을 하더군요. <나 손님 만나지 않을 테니 그냥 돌아가시라고 해>라고 할아버지가 대답하자 잠시 후에 그 벙어리가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다시 들어왔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나와 벙어리를 보고 손님 접대를 하라시더군요. 흐호. 그 땅딸보 어찌나 보기 싫게 생겼던지 내가 그를 보고 눈을 흘기니까 그도 나를 향해 눈을 흘기더군요.]
가진악은 당일 도화도에 당도해 도주를 만나자고 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자 곧 셋째 아우인 한보구가 세상을 떠난 일이 생각나 그만 콧등이 시큰해졌다. 순간 황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래 할아버지가 그들을 만났나요?]
[할아버지는 나더러 그들을 접대하라고 하시곤 그냥 어디로 가버리셨어요. 나도 땅딸보가 보기 싫어 슬그머니 빠져 나왔더니 할아버지가 혼자 돌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그래 나도 뭔가 하고 쳐다보았지요. 그런데 그때 멀리서 배 한 척이 오고 있었는데 그 배 위에는 도사들이 앉아 있었어요.]
가진악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전진파가 도화도로 복수를 하러 대거 몰려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 황약사에게 미리 알려 잠시 피하게 하고는 뒤에 전진파에게 본말을 설명해 주려고 했었지. 그러나 섬에서 끝내 전진 제자들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째서 이 바보는 도사들이 배를 타고 왔다고 말할까?)
황용이 계속해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어떻게 했어요?]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오라는 손짓을 했어요. 깜짝 놀랐지요. 내가 슬그머니 빠져 나온 것을 모르고 계신 줄 알았는데 벌써부터 알고 계셨던 모양이지요. 맞을까 봐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때리지 않을 테니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가까이 갔죠. 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낚시질하러 갈 테니 도사들이 도착하거든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게 하라시더군요. 그래서 나도 낚시질 가겠다고 때를 썼더니 할아버지 표정이 단박에 험악해지더군요. 너무 무서워 아무 말 못했어요.]
[그래서요?]
[뒤에 할아버지는 섬 뒤로 돌아가 배를 타고 떠나 버렸어요. 워낙 도사들이 못생겨서 할아버지가 만나기 싫었나 봐요.]
[정말 그랬을 거예요. 아주 잘 아시네. 그래 할아버지는 언제 다시 돌아오셨나요?]
[돌아오다니요? 돌아온 일 없는데.]
가진악은 너무나 놀라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그랬나요? 그럼 그 뒤에는요?]
묻고 있는 황용의 말소리도 가볍게 떨렸다.
[할아버지가 막 배를 출발시키려고 하는데 갑자기 수리 한 쌍이 날아왔어요. 왜 그전에도 본 일이 있는 수리 말예요. 할아버지가 수리를 향해 손을 혼들며 휘파람을 부니까 수리가 내려오는데 발에 뭔가가 묶여 있었어요. 정말 재미있더군요.<할아버지, 그거 내게 주세요> 하며 마구 소리를 질렀지요.]
바보 소녀는 말을 하다가 그때 광경이 떠올랐는지 정말 소리를 크게 질렀다.
[떠들지 말라구. 다들 잠을 자는데 왜 이리 떠들고 야단일까?]
양강이 듣다못해 벌킥 화를 냈다.
[거들떠볼 것 없이 말이나 계속해요.]
[그럼 내 조용조용히 말할게요.]
바보 소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날 거들떠보지도 않기에 나는 할아버지 웃옷 자락을 찢어 수리 다리에 붙들어매고 다시 날려보냈지요.]
이 말을 듣자 황용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가 전진 제자를 피하기에 바빠 미처 금와와를 챙겨 주실 여유가 없었구나. 그렇지만 암놈 다리에 꽂힌 짧은 화살은 도대체 누가 쏜 것일까?)
[그런데 누가 수리에게 화살을 쏘았지요?]
[화살을 쏘았다뇨?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바보 소녀는 이렇게 말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니 말을 계속해 봐요.]
[할아버지는 옷자락이 찢어진 것을 보자 벗어 버리고는 나보고 옷을 한 벌 다시 가져 오라고 했어요. 내가 옷을 가지고 와보니 이미 계시지 않더군요. 그리고 도사들이 타고 온 배도 보이지 않았어요. 다만 찢어져 벗어 놓은 옷만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에요.]
황용은 여기까지 듣고는 다시 묻지 않았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이윽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럼 그들이 어디로 갔을까?]
[그래 큰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지 않겠어요? 큰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보니 할아버지가 탄 작은 배가 앞서고 도사들이 탄 큰 배가 뒤쫓아가다가 가물가물 보이지 않더군요. 난 그 땅딸보가 보기 싫어 그냥 모래톱에서 장난을 하다가 날이 저물어 이 할아버지와 양강, 그리고 나머지 사람과 함께 돌아왔어요.]
[아니 이 할아버지라니? 글 배우라고 하시던 할아버지가 아니고?]
황용이 다급히 묻자 바보 소녀는 히히덕거리며 대답했다.
[이 할아버지가 더 좋아요. 공부하라는 소리도 안 하고 떡까지 주신걸요. 할아버지, 떡 또 있어요?]
구양봉이 너털웃음을 더뜨렸다.
[있고말고, 내 또 주지.]
가진악은 여기까지 얘기를 듣자 가슴이 팔딱팔딱 뛰었다.
(그날 구양봉도 도화도에 있었구나.)
그런데 바보 소녀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어 퍽퍽 치는 소리까지 들렸다. 여기저기 쿵쾅거리며 뛰어다니는 것이 싸움이라도 벌어진 모양이었다.
[그녀를 죽여 입을 봉해 버리려구요? 어림없는 소리, 차라리 나를 먼저 죽이시지요.]
황용이 발끈해서 덤벼들자 구양봉이 껄껄 웃으머 말했다.
[다른 사람이야 속여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아가씨 아버지는 속이지 못할 텐데, 내 무엇 때문에 아가씨를 죽이려고 하겠는가? 묻고 싶거든 시원하게 물어 보라구]
바보 소녀의 신음 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것으로 보아 구양봉에게 어디를 되게 얻어맞은 게 틀림없었다.
[물어 볼 것도 없어요. 내 벌써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그냥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워낙 똑똑한 아가씨라 속이지 못할 줄 알았다니까. 그러나 어째서 그렇게 짐작하게 되었는지 얘기나 듣고 싶은걸.]
[제가 처음 섬의 상황을 보았을 땐 아버지가 강남 육괴를 살해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뒤에 한 가지 일을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더군요. 어디 한번 아저씨도 생각해 보세요. 우리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다른 남자 시체를 어머니 곁에 그냥 놔두겠어요? 그리고 또 묘지에서 나온 후에 문을 안 닫을 리 있겠어요?]
구양봉이 자기 넓적다리를 퍽 치며 감탄했다.
[어이쿠, 그건 정말 우리가 소홀했구나. 강아 그렇지 않느냐?]
가진악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팠다. 황용은 진작에 강남 육괴를 살해한 사람이 구양봉과 양강 두 사람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녀가 갑자기 뛰쳐나간 것도 자기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누명만은 벗겨야겠다는 효심 때문이었으리라. 그녀는 일단 자기가 뛰쳐나가면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많을 것을 예측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를 죽인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자기 아버지에게 알려 달라고 가진악에게 부탁한 것이다. 가진악은 너무나 괴로워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가씨, 아가씨! 진작 누구라고 내게 말만 해주었으면 그만일 텐데 무엇 때문에 생명을 버리는 모험까지 할 필요가 있단 말이오? 나 비천편복, 성질이 너무나 거칠고 눈이 멀어 물건도 못 보는 주제에 모든 죄를 그들 부녀에게 뒤집어 씌웠구나. 그녀가 비록 사실을 털어 놓았다 하더라도 믿기나 했을라구? 가진악아, 가진악아, 백번 천번 죽는다 한들 이 죄를 어찌하려느냐? 이 착한 아가씨를 헛되이 죽게 만들었구나.)
스스로가 너무나 원망스러워 자기 따귀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그런데 구양봉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런데 어찌해서 그게 내 소행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나?]
[그야 아주 당연한 일이지요. 수장으로 홍마를 때려 죽인 일이라든가 손으로 저울대를 부러뜨린 일 등, 세상에 그런 공력을 지닌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나 저도 처음엔 다른 사람이 아닌가 의심했어요. 남희인이 죽을 때 땅에 이런 글씨를 쓰다 말았어요.<나를 살해한 자는 바로 십(十)이다.....> 십자를 쓰다가 그만 숨을 거둔 거예요. 그러니 아저씨의 이름과 열십자는 관계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혹시 구천인의 구( )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구양봉이 이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그자의 인내심이 대단하군그래. 죽지 않고 버티다가 아가씨를 만났다니.]
[저는 그의 임종 무렵 상황을 보고 무언가에 중독된 줄 알았어요. 철장방에서는 여러 가지 두꺼비, 청개구리, 독사를 기르니까 구철장의 짓이라 생각했던 거지요.]
구양봉이 흥 코방귀를 뀌었다.
[철장방에 독물이 많다고는 하지만 별로 대수로울 것은 없어. 그 남희인인가 하는 사람이 입으로는 뭐라고 하면서도 말을 못하고 얼굴에는 웃는 표정을 하고 있지 않던가?]
[그랬어요. 그럼 그게 무슨 독이지요?]
구양봉은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묻기만 했다.
[그가 몸을 비튼 채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지? 힘이 이상할 정도로 셌을 텐데, 안 그렇던가?]
[그랬어요. 그렇게 지독한 극약이라면 천하의 철장방밖에는 없을 거예요.]
황용은 어디까지나 구양봉을 자극하려는 뜻에서 던진 말이었다. 과연 예기했던 대로 구양봉이 발끈 화를 냈다.
[남들이 나를 보고 모두들 노독물이라고 하는데 그래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 알겠나?]
그는 이렇게 말하며 사장을 들어 바닥을 쿡쿡 찔렀다.
[바로 이 지팡이의 뱀이 그를 물었는데 공교롭게도 혀가 물렸단 말야. 그래 상처도 없이 말만 못했을 뿐이야]
황용은 신상 뒤에 있는 가진악의 이상한 동정을 눈치채고 기침을 하며 신상을 가렸다. 가진악은 너무나 화가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
[그때 강남 오괴가 모두 아저씨에게 살해되었는데 달아나 살아 남은 가진악은 소경이라 도대체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단 말이에요.]
가진악은 이 말을 듣자 마음에 짚이는 게 있었다.
(나를 깨우치려고 하는 말이로구나. 경거망동하다가는 둘 다 귀신도 모르게 죽어 없어진다는 뜻이겠지.)
[소경이 감히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겠나? 고의로 그를 살려 보낸 거야.]
[아, 그랬군요. 아저씨가 다섯 사람을 죽이고는 우리 아버지가 한 것처럼 믿도록 말이에요. 그가 나가서 떠들고 다녀야 천하 영웅들이 힘을 합쳐 우리 아버지를 공격할 것 아니겠어요?]
[사실 그건 내 생각은 아니었고 강의 꾀였지. 그렇지 않은가?]
양강은 어물어물하다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정말 그건 귀신도 당해 내지 못할 꾀였군요.]
[그건 그렇다 치고 뒤에 어째서 내 소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나?]
[구천인하고는 양호의 남로(南路)에서 대결한 일이 있는데 물론 그가 먼저 도화도에 도착할 수도 있긴 하지만 홍마보다도 빨리 간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또 주총이 쓴 편지의 마지막 말을 생각해 본 거예요. 모두들 방비를 하라는 글의 마지막 글자를 세획만 쓰다 말았는데 동(東)자도 될 수 있지만 서(西)자를 쓰려고 했다가 그만두었다고 해도 무방할 거예요. 그렇다면 동사 아니면 서독이 분명하겠지요. 이 점은 제가 도화도에서 벌써 짐작한 일이지만 나머지 다른 자질구레한 일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난 또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허점을 많이 남겼군그래. 그 거지 같은 서생이 어느 틈에 그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분 별명이 묘수서생이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들키지 않았을 거예요. 전 또 남희인이 쓴 열십(十)자를 가지고 왜 그걸 썼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저는 양강이 세상을 떠났단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전연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요.]
[내가 왜 세상을 떠난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런 얘기를 누구에게서 들었어요?]
양강이 떨리는 목소리로 황용에게 물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굉장히 많지요. 그날 저는 어지러운 심사에 자다 깨다 하느라 몽롱한 상태였어요. 간신히 잠든 꿈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뒤에는 목염자 언니도 만났지요. 꿈속에 북경에서 있었던 비무초친(比武招親) 광경이 떠오르는 순간 벌떡 깨어나며 범인이 누구라는 확신을 내린 거예요.]
그녀의 말이 어찌나 차고 날카로웠던지 양강은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목염자가 꿈속에서 가르쳐 주었단 말인가요?]
양강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그래요. 그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리고 그 비취로 만든 작은 신발은 어떻게 된 거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것도 목염자가 꿈속에서 말해 주던가요?]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주총을 먼저 때려 죽인 뒤에 우리 어머니 묘지 속에서 보물을 꺼내 그의 품속에 집어 넣었지요? 다른 사람들이 그가 보물을 훔치다가 우리 아버지에게 들켜 맞아 죽은 줄 알게 하려구요. 그 계략이 근사했지만 한 가지 허점이 있었답니다. 주총의 별명이 묘수서생이란 걸 깜박 잊으셨더군요.]
구양봉은 호기심이 부쩍 일어 재촉하듯 물었다.
[묘수서생이니 어쨌단 말이지?]
[홍, 그의 몸에 보물을 넣어 둘 줄만 알았지 그가 훔친 보물을 빼앗을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구양봉은 황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물을 뺏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주총의 무공이 양강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임종할 무렵에 묘수의 재주를 부려 이 소왕야의 몸에서 물건을 훔쳐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구요. 만약 그 물건이 아니었더라면 소왕야가 되살아나 도화도에 나타난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것 참 재미있구나. 그 묘수서생이란 사람 지독한 데가 있는데.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그렇게 흔적을 남겨 놓고 가다니. 그럼 그 물건이 바로 비취로 만든 작은 신발이었나?]
[물론이죠. 어머니 묘지에 있는 보물이라면 어려서부터 보아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비취 신발은 본 일이 없었어요. 주총이 꼭 쥐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 곡절이 숨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죠. 그 신발의 정면에는 비(比)자, 뒤에는 초(招)자가 있었어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는데 그날 꿈속에서 목언니가 북경 거리에서 <비무초친>이란 깃발을 걸어 놓는 광경을 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환하게 알게 되었지요.]
[그 신발에 씌어 있는 두 글가에 그런 사연이 숨어 있었군그래. 하하하.....]
구양봉이 그저 재미있다고 껄껄거리는데 가진악은 들을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황용이 어떻게 그리 용의주도하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황용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사실 가진악더러 들으라는 것이었다.
[그날 목언니가 비무초친을 할 때 소왕야는 마음껏 실력을 발휘했지요. 그건 나도 옆에서 직접 본 사실이니까요. 뒤에 소왕야는 목언니가 신고 있던 비단 신발을 벗겨 승리를 거두었지요. 그러나 초친만은 사연이 너무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답니다.]
바로 그날의 <비무초친> 때문에 그후 많은 사건이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당시 양자옹이나 사통천 등도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뒤 완안열이 상처를 하고 양강이 친아버지를 만난 일 등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뭇사람들은 여기까지 듣자 제각기 감개무량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일단 이 일에 생각이 미치자 그 다음은 더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어요. 소왕야가 그 뒤 목염자와 혼인하기로 약조하고 그 선물로 비취로 만든 신발을 주었지요. 각자 하나씩 나누어 가졌을 거예요. 소왕야, 어때요? 제 추측이 틀림없지요?]
양강은 할말이 없었다. 황용은 양강이 대답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의심할 필요조차 없어졌어요. 한보구가 구음백골조에 맞아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에 이 무공을 익힌 사람은 오직 흑풍쌍쇄뿐이죠.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벌써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는걸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야 흑풍쌍쇄의 사부가 이 구음백골조에 정통할 것으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동시(銅屍)인 매초풍이 생전에 훌륭한 제자를 거두었음을 알아야 해요. 남희인이 쓰다 만 열십자는 당연히 양(楊)자를 쓰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보 같은 곽정은 그걸 황(黃)자로 오해했던 거예요.]
여기까지 말하던 황용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第 六 卷. 第 四 章.(通卷 章). 다시 몽고로
구양봉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끼여들었다.
[어쩐지 곽정 그 녀석이 연우루 앞에서 결자적으로 황약사에게 대들더라니.]
황용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계책이 묘하기는 했어요. 곽정 오빠는 비통과 분노에 빠져 시비를 가릴 겨를이 없었거든요. 전 처음엔 아저씨가 섬에 있는 벙어리 하인을 잡아 길 안내를 시켰는가 했더니 오늘에서야 바보 소녀를 윽박질러 앞장세운 줄 알겠군요. 바보 소녀는 틀림없이 우가촌으로 데려다 준다는 양강의 말에 솔깃해서 시키는 대로 했을 거예요. 게다가 두 분이 먼저 우리 어머니 묘지 속에 들어가 있다가 아버지 분부라며 바보 소녀를 이용해 강남 육괴를 안으로 유인해 들였겠지요. 구양봉 아저씨가 묘문을 지키고 있는데 육괴가 어떻게 그 독수에서 빠져 나가겠어요. 독 안에 든 쥐 잡기죠.]
가진악은 황용이 직접 보기나 한 것처럼 술술 얘기를 해나가는 데에 감탄했다. 그때 묘실에서 느닷없이 강적을 만났던 정경이 머리에 떠올랐다.
[구양아저씨는 해변에서 우리 아버지의 두루마기와 가면을 주워 걸쳤지요. 묘실이 어두컴컴한데다 싸움이 벌어지자마자 육괴 중에서 몇 사람이 다쳤을 테니, 적이 누군지 알아볼 겨를이나 있었겠어요. 그러니까 남희인이 가진악보고 우리 아버지가 살해한 것이라고 말했겠지요. 주총과 전금발은 구양아저씨가 살해했고, 한보구는 양강이 죽였어요. 한소영은 스스로 자결했고, 가진악, 남희인이 가까스로 묘실을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정사(精含)에서 또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어요. 가진악은 일부러 달아나게 해놓았고 남희인이 양강을 알아보았을 땐 이미 중독이 되어 있었을 테고요.]
[정말 놀랄 만한 추리로군. 아마 육괴의 팔자 소관이었겠지. 나나 양강이 도화도에 갔을 땐 육괴가 섬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거든.]
[그래요. 강남 육괴의 명성이 강호에는 그런대로 알려진 편이지만 그분들은 협의(俠義) 두 글자만 믿었지 무공이야 어디 구양아저씨 발끝에나 미치겠어요. 그러나 두 분이 그토록 수고를 하셨다면 분명 다른 의도가 있었을 거예요.]
[아가씨가 이토록 총명하고 영리하니 아무래도 속일 수가 없겠군.]
[어디 한번 제가 맞혀 볼 테니 틀리더라도 너무 나무라지 마셔요. 제가 생각하기에 아저씨가 도화도에 오셨을 때 본래는 전진 제자와 우리 아버지가 싸우다 양쪽이 다 패하기를 바랐을 거예요. 그런데 그만 한 발 늦어 우리 아버지와 전진교 도사들이 모두 섬을 떠난 뒤였어요. 그때 양강이 바보 소녀에게 물어 육괴가 섬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음, 그래서 두 분이 오괴를 살해한 거예요. 그럼 세상 사람들은 모두 우리 아버지가 죽인 것으로 생각할 것 아니겠어요. 그 다음에는 섬에 있는 벙어리 하인들을 있는 대로 다 죽여 증거를 없애 버린 거죠. 그때 가서는 다들 죽은 뒤니까,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홍칠공이나 단황야 등이 우리 아버지를 그냥 놔둘 리가 있나요? 그리고 양강은 혹시 우리 아버지가 먼저 섬으로 돌아와 두 분이 남겨 놓은 흔적을 없애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고의로 가진악이 도망가도록 내버려둔 거예요. 그가 눈은 멀었지만 입만은 멀쩡했거든요. 진상이야 볼 수 없지만 말이야 못하겠어요?]
가진악은 황용의 말을 들으면서 분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반면에 구양봉은 한숨 섞인 탄식이 절로 나왔다.
[황약사가 부럽구나! 이렇게 훌륭한 딸을 두다니.]
[이제 곽정 오빠는 아저씨 계략에 말려 우리 아버지와 사생결단을 벌이겠다고 야단인데, 내일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를 구해 주시고, 그 조카 되시는 분만 살아 있다면...., 예전에 있었던 혼담을 다시 거론할 수도 있었을 텐데.......]
황용이 잦아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구양봉은 마음이 뜨끔했다.
(무슨 의도로 이런 얘기를 갑자기 꺼낼까?)
황용은 다시 고개를 바보 소녀에게 돌리며 뜬금 없이 물었다.
[이 양가 성을 가진 오라버니 아주 좋은 사람이지요?]
[그래요. 나를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어요. 난 그 섬은 질색이거든요.]
[이 오라버니가 아가씨 집에서 사람을 하나 죽였는데 그때 보았던가요?]
바보 소녀는 손뼉을 치며 나섰다.
[그래요, 정말 훌륭한 재주였어요. 그가...., 어이쿠.......]
갑작스런 소녀의 비명과 함께 뗑그렁 소리가 나며 암기 두 개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말을 하게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왜 암기로 그녀를 해치려고 하지요?]
황용이 따져 묻는 말에는 아랑곳없이 양강이 발끈 화를 냈다.
[아니 이 계집애가 횡설수설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아가씨, 말을 해도 괜잖아요. 이 할아버지께서 듣고 싶어하시거든요.]
[말 안 할래요. 이분이 말하지 말라고 하니 그만두겠어요.]
[그래야 착하지, 빨리 누워 잠이나 자라구. 다시 입을 벌리기만 하면 내일 섬으로 돌려보낼 테니까.]
양강이 차가운 목소리로 위협하자 소녀는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래요, 그래. 말 안 할게요.]
소녀는 사각사각 옷깃 스치는 소리를 내며 곧 자리에 누워 버렸다.
[아가씨, 얘기하지 않으면 할아버지를 불러 다시 섬으로 데려가라고 하겠어요.]
[나 안 갈래요!]
[그럼 말을 해요. 이 오라버니가 아가씨 집에서 사람을 죽였는데 그때 누굴 죽였지요?]
사람들은 황용이 갑자기 사람 죽인 일을 들추어내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다만 양강만이 식은땀을 흘리며 오른손에 힘을 모았다. 바보 소녀가 정말 우가촌에서 있었던 일을 꺼낼 듯싶으면 구양봉의 의심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당장 요절낼 참이었다.
(내가 구양공자를 살해할 때 목염자, 정요가, 육관영 이 세 사람만 보았을 뿐인데 벌써 소문이 흘러 나갔단 말인가?)
모두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바보 소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이 가진악은 숨도 크게 쉴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바보 소녀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코고는 소리만 낮게 들릴 뿐 바보 소녀는 어느 틈에 잠이 든 듯했다. 양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남몰래 내쉬었다. 그러나 손에는 이미 식은땀이 흥건히 고였다.
(이 계집애가 화근이로구나.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없애 버려야겠어.)
양강은 곁눈질로 구양봉을 살폈다.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을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담담한 표정이, 방금 주고받은 대화를 전부 잊은 듯 싶었다. 사람들은 바보 소녀가 그냥 잠이 들어 일이 이제 끝난 줄 알았다. 그래서 눕거나 벽에 몸을 기댄 채 잠을 청했다. 모두들 몽롱한 잠속으로 빠져 드는 순간 갑자기 바보 소녀가 벌컥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꼬집지 말아요. 아파 죽겠어요.]
[귀신, 귀신이다. 다리 부러진 귀신이다. 바보 아가씨가 죽인 다리 부러진 그 귀신이 아가씨를 찾아왔어.]
황용의 날카로운 소리가 밤의 적막을 찢었다.
[아녜요. 내가 죽인 게 아니라 바로 이 오라버니가 죽인....]
바보 소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쉭 하며 수장 날아오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한데 얽혔다. 사태가 시급함을 느낀 양강이 바보 소녀의 천령개(天靈蓋)를 찍으려다가 황용이 타구봉법으로 막는 바람에 벌렁 나가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소란을 피웠고 사통천 등은 즉시 황용을 둘러쌌다. 그러나 황용은 거들떠볼 생각도 않고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다리 부러진 도련님. 어서 들어오세요. 바보 소녀가 여기 있어요.]
바보 소녀는 문 앞을 두리번거렸지만 캄캄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귀신이라면 워낙 무서워 벌벌 떨었던 그녀라 황용의 옷소매를 붙든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없다고 해주세요. 저 양강 오라버니가 철창으로 죽인 것이지 제가 한 게 아니에요. 난 그때 부엌 문틈으로 구경만 했어요.]
구양봉은 뜻밖의 말에 너무나 놀랐다. 비록 사생아였지만 자기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자식을 양강이 죽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거짓일지 몰라도 바보 소녀의 말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 끝까지 치솟는 분노가 오히려 웃음으로 터져 나왔다. 구양봉은 불을 뿜는 눈초리로 양강을 노려보았다.
[소왕야, 내 조카 놈은 죽어 마땅한 녀석이었습니다. 잘 죽이셨어요. 정말 잘 죽이셨어요!]
구양봉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나 처절했던지 듣는 사람의 귀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울리고 아팠다. 그의 말이 막 끝나자마자 까마귀 떼들이 놀라 깍깍거리며 날개를 퍼득여 밤 하늘로 날아올랐다.
양강은 이제 죽었구나 싶어 눈을 감고 달아날 궁리를 했다. 완안열도 당황해 어쩔 줄 몰랐지만 도무지 수습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까마귀 소동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를 기다려 무거운 입을 열었다.
[실성한 사람의 말을 어찌 다 믿겠습니까? 구양공자로 말할 것 같으면 저희 부자가 모셔 온 분인데 까닭 없이 그를 해칠 리 있겠습니까? 공연한 소리니 개의치 마십시오.]
구양봉은 발끝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바보 소녀 옆으로 날아가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
[그가 어째서 내 조카를 죽였는지 빨리 말을 해라!]
바보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가 죽인 게 아녜요. 이 손을 놓으세요.]
바보 소녀는 있는 힘을 다해 구양봉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놀랍고 무서운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야!]
구양봉이 몇 번이나 다그쳐 물어도 바보 소녀는 겁먹은 눈초리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황용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이 할아버지가 또 떡을 주실 텐데 뭘 그래요?]
이 모양을 본 구양봉은 무섭게 닦달해서는 그녀의 입을 열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비상 식량으로 준비했던 말린 만두를 품속에서 꺼내 건네 주면서 바보 소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자, 이거나 먹으며 천천히 말해 보라구]
바보 소녀는 만두를 받자 비로소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날 다리 부러진 도련님이 안고 있던 아가씨가 아주 예쁘던가요?]
황용이 물었다.
[아주 예쁘던데 그 아가씨 지금 어디에 가 있지요, 그녀가 누군지알겠어요?]
[알고말고요. 양강 오라버니 아내 될 분 아녜요?]
바보 소녀는 득의만면하여 손뼉을 치면서 아는 체했다. 이 말을 듣자 구양봉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여색을 지나치게 밝히던 조카가 목염자를 회롱하다가 벌어진 일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구양공자의 무공은 보통이 넘는다. 비록 두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양강의 적수는 아니었다. 도대체 그가 어떻게 죽였단 말인가? 구양봉은 양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소왕야의 아내 될 사람을 희롱했다면 그야 만반 죽어 마땅한 일이지요.]
[아닙니다. 아녜요. 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구양봉의 눈이 무섭게 반짝였다. 양강은 겁에 질려 손발의 맥이 탁 풀렸다. 평소의 총기나 임기응변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구양아저씨, 소왕야의 마음이 악독하다거나 구양공자가 너무 여색을 좋아한다고 나무랄 일도 아녜요. 다만 아저씨 무공이 지나치게 출중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지?]
[저도 왜 그런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군요. 다만 제가 우가촌에 있을 때 어떤 남자와 여자가 옆방에서 주고받는 말을 들었는데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에요.]
구양봉은 오리무중을 걷는 것 같아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슨 말을 했는데?]
[제가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는 일 없이 말씀드릴 테니 들어 보시겠어요? 저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남자나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그 남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내 구양공자를 죽인 일이 소문난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오.> <대장부가 뭘 그래요. 그렇게 무섭거든 어제 구양공자를 죽이지 마실 걸 그랬네요. 그의 숙부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우리 멀리 달아나 숨어 살아요. 그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숨은 곳이야 찾아내지 못할 것 아니겠어요?>]
황용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 여자, 말을 아주 잘했군그래. 그래 그 남자가 뭐라고 하던가?]
양강은 황용과 구양봉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경악과 분노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이때 은은한 달빛이 신상 앞을 조용히 밝히고 있었다. 양강이 달빛을 피해 슬그머니 황용 뒤로 돌아갔다. 황용은 잠시 숨을 들이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남자의 말을 듣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저씨의 무공이 지나치게 높아 조카님이 죽게 됐다구요. 그 남자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누이, 나는 다른 계획이 있어서 그랬다오. 그의 숙부의 무공이 천하 제일인데 나는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단 말이오. 내 진작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문중 규율은 대대로 한 사람에게만 무공을 전수하게 되어 있단 말이오. 그가 죽어야만 내가 제자가 될 수 있거든!>]
황용은 아직 그 남자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양강의 말투를 그럴싸하게 흉내내고 있었다. 양강은 어렸을 때 중도에서 살았고 그의 어머니 포석약은 임안부 사람이었다. 게다가 왕궁에는 금나라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말투에는 남북쪽의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황용이 이런 말투를 흉내내자 듣는 사람들은 그 남자가 양강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양봉이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양강을 찾았지만 어느 틈에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어이쿠 하는 비명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모두들 깜짝 놀라 일제히 시선을 돌리니 양강이 오른손에 선혈이 낭자한 채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는 황용이 자기 비밀을 폭로하자 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후려치려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황용이 머리를 살짝 돌리는 바람에 손이 빗나가 그만 어깨를 때린 것이다. 어찌나 힘을 주어 때렸는지 다섯 손가락 모두 연위갑 가시에 찔리고 말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어찌나 아픈지 기절할 것만 같았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찌 된 상황인지 똑똑히 보지도 못했다. 다만 양강이 독수에 걸린 것 같은데 황용이 그랬는지 구양봉이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워낙 구양봉을 무서워하던 터라 수수방관하고 잠자코 있었다. 완안열만이 화들짝 놀라며 양강 앞으로 달려나갔다.
[강아, 왜 그러느냐? 도대체 어딜 다쳤느냐?]
완안열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양강의 손에 쥐여 주었다. 혹시 구양봉이 조카의 원수를 갚겠다고 달려들까 겁을 먹은 것이다.
[괜찮아요.]
양강은 통중을 참으면서 칼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마비되어 그만 스르르 놓치고 말았다. 허리를 숙여 주우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어깨가 말을 듣지 않았다. 왼손을 들어 오른손을 꼬집어 보았지만 감각이 없었다.
[독! 독! 독침으로 나를 죽이는구나.]
그는 황용을 향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팽련호 등은 구양봉이 두렵기도 했지만 어쨌든 완안열은 금나라 왕이니 구양공자의 문제야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이 되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공포에 떠는 양강의 표정을 보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양강에게 달려가 위로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황용에게 달려왔다.
[해약을 써서 소왕야를 구해 주시오!]
그러나 황용은 담담했다.
[제가 입고 있는 연위갑에는 독이 없어요. 너무 당황하지 말아요. 그를 죽일 사람이 여기 따로 있는데 제가 무엇 때문에 해치려 하겠어요?]
양강은 계속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난...., 난...., 움직일 수가 없군요.]
그는 결국 맥이 빠져 두 무릎을 꿇고 자지러졌다. 짐승 같은 신음소리는 잦아들 줄 몰랐다. 황용은 이상해서 구양봉에게 시선을 돌렸다. 구양봉의 표정도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다시 양강을 쳐다보니 입을 헤벌린 채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얀 달빛이 얼굴에 비쳐 더욱 괴이하게 보였다.
[구양아저씨의 독수가 분명하니 나를 보고 뭐라 하면 안 돼요.]
황용은 짐작되는 바 있어 이런 말을 했다.
[모양으로 봐서는 확실히 내가 가진 괴사(怪蛇)에 물린 것 같은데, 나도 원래 그럴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가씨가 내 대신 수고를 했으니 정말 묘하군. 그런데 이 괴사는 세상에 나밖에 가진 사람이 없는데 아가씨는 도대체 어디서 구했지?]
[아니 제가 무슨 괴사를 가지고 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이건 원래 아저씨 솜씨인데 본인이 모르시거나 아니면 아직 깨닫지 못하고 계신 것뿐이겠지요?]
[그것 참 이상한 일인데.]
[구양아저씨, 저는 아저씨가 노완동과 내기를 걸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어요. 괴사의 독약을 상어에게 먹인 일이 있지요? 그 상어가 중독이 되어 죽자 다른 상어가 그 고기를 먹고 또 죽었지요. 이렇게 그 독은 한없이 번져 나가지 않았어요?]
[내 독물이 그런 특징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서독이란 별명은 헛것이 아니겠나?]
[그래요. 남희인이 바로 그 첫번쩨 상어였던 셈이에요.]
양강은 미친 듯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양자옹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구양봉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어 다시 황용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단 말이지?]
[음, 그 괴사로 하여금 남희인을 물게 했지요? 그날 저는 도화도에 있다가 그에게 한 번 얻어맞았어요. 바로 제 왼쪽 어깨를 맞은 거죠. 그 때문에 연위갑 가시에 그 독이 남아 있었던 거예요. 방금 소왕야가 저를 때렸는데 공교롭게도 지난번 맞은 부위를 때리는 통에 연위갑 가시에 남아 있던 독이 퍼진 거예요. 결국 그는 세 번째 상어가 돼버렸군요.]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구양봉의 괴사가 너무나 무섭다는 사실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양강은 황용을 해치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기가 당한 셈이다. 완안열이 구양봉 앞으로 다가가 갑자기 두 무릎을 꿇었다.
[구양선생, 저 어린것의 생명을 구해 주시면 그 은혜 반드시 결초보은하겠습니다.]
구양봉이 껄껄 웃으며 빈정거렸다.
[당신 아들 생명은 귀하고 제 조카 생명은 귀하지 않다던가요?]
그리고 나서 팽련호 등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어느 영웅이고 불복하고 싶거든 말을 해보시오.]
사람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설 뿐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양강이 벌떡 일어서며 느닷없이 양자옹을 때려눕혔다. 이를 본 완안열도 일어났다.
[소왕야를 부축해 임안으로 갑시다. 거기 가서 명의를 청해 치료하도록 하겠소.]
[노독물의 독물을 천하의 어느 명의가 치료할 수 있겠소. 또 어느 명의가 감히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 일에 훼방을 놓는단 말이오!]
구양봉의 빈정거리는 말도 완안열은 못 들은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빨리 소왕야를 부축하지 않고 왜들 꾸물거리는 게냐?]
그는 애매한 수하 무장들에게 벌컥 화를 냈다. 양강의 몸은 다시 한번 천장을 향해 뛰어올라 하마터면 대들보를 받을 뻔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오. 우리 어머니를 해치고 이번에는 또 나를 해칠 생각입니까?]
양강이 제정신을 잃고 완안열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자 사통천이 나섰다.
[소왕야님,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사통천은 앞으로 나서며 그의 두 어깨를 잡았다. 순간 양강은 몸부림을 치며 그의 팔목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꽉 물었다. 사통천은 너무 아파 뿌리쳐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물린 손가락이 쓰리고 아렸다.
[네 번째 상어로구나!]
황용이 나직한 목소리로 외쳤다.
평소 사통천과 제일 친하게 지내는 천수인도 팽련호는 독물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통천이 중독된 것을 알자 급한 김에 허리춤에 찬 요도를 뽑아 그의 팔을 잘라 버렸다. 후통해는 팽련호의 의도도 모르고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들었다.
[팽련호, 어찌하여 내 사형을 해치려고 하는가?]
[이 바보야, 팽대형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게야.]
사통천이 진통을 참으면서 해명해 주었다.
이때 양강은 닥치는 대로 치고 받고 차는 등 미쳐 날뛰는 것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방금 사통천이 당한 꼴을 보았기 때문에 혹시라도 양강이 달려들까 봐 우르르 절 밖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소란이 빌어지는 바람에 탑 위에 있던 까마귀 떼들이 또 한 번 깍깍거리며 어지럽게 날았다. 달빛이 서린 절 마당 위에 먹구름이 드리운 듯 까마귀 떼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완안열은 문지방 밖에 한 발을 내디딘 채 고개를 돌려 양강을 바라보았다.
[강아, 강아!]
양강의 두 눈에 눈물이 괴었다.
[부왕, 부왕!]
양강이 달려오자 완안열은 반가워하며 두 팔을 벌려 그를 얼싸안았다.
[얘야, 이제 좀 괜찮으냐?]
달빛 아래 양강의 표정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지 이를 악문 채 왼손을 번쩍 들어 완안열의 머리를 내질렀다. 완안열은 소스라치게 놀라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었다. 그러자 양강은 맥없이 뒤로 넘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완안열은 더 이상 뒤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절문을 빠져 나와 말 위에 올랐다. 수하의 무장들이 앞뒤로 그를 호위하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구양봉과 황용은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양강을 쳐다보며 각기 다른 생각에 잠겨 한동안 말을 잊었다. 이때 절 지붕의 기와가 들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뭘 숨어 듣느냐? 빨리 내려오지 못할까?]
구양봉이 외치는 바람에 황용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진악이 슬그머니 기어 올라가다가 들킨 줄만 안 것이다. 그런데 문에 검은 그림자가 스치며 누군가가 지붕에서 내려와 들어섰다.
[목언니, 언니도 오셨군요.]
황용이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목염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양강을 끌어안았다.
[저를 알아 보시겠어요?]
목염자가 부드럽게 말을 걸었지만 양강은 끙끙 신음 소리만 낼 뿐 대답이 없었다.
[아, 제가 보이지 않나 보군요.]
그녀는 달빛을 향해 얼굴을 내밀고 다시 물었다.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양강은 멀뚱멀뚱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염자는 그 와중에도 기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 고생이 많으셨어요. 저도 고생 많이 했구요. 우리 함께 저 세상에 가서 잘살도록 해요.]
양강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목염자가 그를 끌어당겨 꽉 껴안은 것이다.
황용은 이 광경을 바라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목염자의 머리가 점점 숙여지더니 양강의 어깨에 걸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목언니, 목언니!]
황용이 깜짝 놀라 거듭 불러 보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녀를 일으키려고 어깨를 잡았더니 그만 뒤로 벌렁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황용은 또 한 번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목염자는 가슴에 철창 반 토막이 꽂힌 채 쓰러져 있었다. 양강의 가슴에도 구멍이 뚫려 선혈이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다. 둘 다 숨을 거둔 것이다.
원래 목염자는 양강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양철심이 남긴 철창 반 토막을 가슴에 대고 그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 창끝을 자기 쪽으로 돌려 다시 한 번 양강을 힘껏 껴안음으로써 함께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황용은 그녀의 시체에 엎드려 통곡하다가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고 더욱 애통하게 울었다.
[다 잘 죽었는데 울긴 왜 울어? 밤새 소란을 부리는 바람에 날이 새는 것도 몰랐군. 자, 아가씨 아버지나 만나러 가자구.]
구양봉의 말에 황용은 그제야 눈물을 거두었다.
[지금쯤 아버지는 도화도에 계실 텐데 가보면 뭘 해요?]
[아니 그럼 아가씨가 말한 것이 모두 거짓이었군그래.]
[처음에 한 말은 거짓이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데 전진교의 어리숙한 도사들에게 당하겠어요. 그리고 제가 만약 구음진경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아저씨가 바보 소녀에게 그렇게 자세히 물어나 보셨겠어요?]
신상 뒤에 숨어 있던 가진악은 황용에 대해 탄복을 금치 못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가 구양봉의 독수에서 빠져 나갈 수 있기만을 바랐다.
[아가씨, 거짓말 가운데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담이 있었기에 이 노독물이 말려들지 않았을까? 그러니 어디 한번 아버지께서 번역했다는 경문 내용을 들려주지. 한 자도 빠트리지 말고!]
[만약 제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야 다 기억해 내야지. 아가씨처럼 예쁜 소녀가 내 괴사에게 물린다면 곤란한 일이 아니겠나?]
황용은 신상 뒤에서 뛰쳐나올 때 벌써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강이 죽는 참상을 목격한 뒤인지라 가슴이 부들부들 떨렸다.
(설사 일등대사가 알려 준 경문을 전부 외어 바친다 해도 나를 놓아주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빠져 나간담?)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 보기로 하자.
[제가 그 범문의 경문을 들으면 혹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아저씨께서 한마디 들려주세요.]
[그 괴상한 말들을 어떻게 왼단 말야. 공연히 쓸데없는 수작은 그만 두라구]
황용은 그가 욀 수 없다는 말을 하자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
(이자가 욀 수 없다면 당연히 경문을 목숨처럼 소중히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럼 꺼내 들고 읽으시지요.]
구양봉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내용을 터득하고 싶은 일념에 품속에서 기름종이로 싼 종이 뭉치를 꺼냈다. 세 겹으로 단단히 싼 종이를 풀자 곽정이 써주었던 경문이 나왔다. 황용은 속으로 코방귀를 뀌었다.
(곽정 오빠가 엉터리로 써준 것인데 노독물은 아예 보물 취급을 하고 있었구나.)
구양봉은 부싯돌을 켜들고 신상 앞에서 쓰단 만 반 토막 초를 찾아내 불을 붙여 놓고 경문을 읽기 시작했다.
[흘부이(忽不爾) 긍성다득(肯星多得).]
[관상(觀相)을 적절하게 잘 이용해 쓰면 열두 가지 호흡법을 운용할 수 있다.]
구양봉은 크게 기뻐하며 계속해서 읽었다.
[길이문화사(吉爾文花思) 합호(哈虎).]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할 수 있으면 점점 신통(神通)의 경지에 들어선다.]
[취달별사토(取達別,思吐) 은니구(恩尼區).]
황용은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이윽고 머리를 흔들었다.
[뭔가 빠뜨렸어요. 잘못 읽으셨어요.]
구양봉이 다시 한 번 읽었는데도 황용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빠뜨리지 않았는데, 확실히 이렇게 씌어 있단 말이야.]
[그럼 이상한데요. 전연 내용이 맞지 않아요]
황용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는 체했다. 구양봉도 답답한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빨리 생각이 뚫리기만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황용이 입을 열었다.
[아 그랬군요. 곽정 그 녀석이 틀림없이 잘못 썼을 거예요. 어디 한 번 보여 주세요.]
구양봉은 아무 생각 없이 경문을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황용은 오른손으로 경문을 받아 들고 왼손으로 촛대를 들어 자세히 들여다보는 체하다가 순식간에 두 발을 모으고 뒤로 펄쩍 뛰어 피했다. 손에 든 종이 쪽과 촛대의 거리가 반 자도 되지 않았다.
[구양아저씨, 이 경문은 가짜예요. 제가 태워 버릴게요.]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쩌려고 그러는 게야? 빨리 이리 내놔!]
[경문을 가지시겠어요, 아니면 제 목숨을 가지시겠어요?]
황용이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생명을 빼앗아 뭘 하게? 빨리 경문이나 되돌려 달라구.]
구양봉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금세라도 대들 태세를 취했다. 이를 본 황용이 경문을 더욱 촛불 가까이 댔다.
[움직이기만 하면 이걸 태워 버리겠어요. 한 자라도 타면 평생 후회하실 텐데요.]
[난, 난 아가씨를 당해 낼 재간이 없단 말일세. 경문이나 내놓고 갈데로 가보라구.]
[당대의 종사께서 식언을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빨리 경문이나 놓고 갈 데로 가라고 하지 않았나?]
황용은 그의 말을 믿었다. 비록 그의 성격이 극악무도하다고는 해도 당대 종사의 장담이 아닌가. 그녀는 즉시 경문과 촛대를 바닥에 내려놓고 생긋 웃었다.
[구양아저씨, 정말 미안해요.]
황용은 슬그머니 타구봉온 주워 들고 밖으로 나왔다. 구양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다가 손을 뒤로 돌리면서 일 장을 날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철창 왕언장의 신상이 반 이상 부러졌다.
[가진악 이놈,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구양봉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황용이 고개를 돌리니 가진악이 신상 뒤에 숨어 있다가 뛰어내리면서 철창을 흔들어 방어하는 것이 보였다.
(노독물의 재주로 가진악이 숨어 있는 것쯤 모를 리 있었겠나. 숨쉬는 소리만 듣고도 벌써 알았겠지. 다만 가진악쯤은 안중에도 없어 그냥 놔뒀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황용은 다시 돌아와 죽장을 휘두르며 가진악과 나란히 구양봉에 맞섰다.
[구양아저씨, 제가 가지 않을 테니 그를 놔주세요.]
[아니오. 용아 아가씨나 가보구려. 그리고 나중에 곽정을 만나거든 우리 육형제의 원수나 갚아 달라고 해주시오.]
가진악의 말이었다.
[곽정 오빠가 만약 제 말을 듣는 사람이라면 벌써 믿었을 거예요. 가영웅님께서 가시지 않으면 저와 제 아버님의 누명은 벗을 수가 없어요. 곽정 오빠에게 대사부의 오해가 전부 풀렸으니 괴로워하지 말라고 하세요.]
가진악을 설득하는 황용의 목소리가 슬픔으로 떨렸다. 그러나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가진악이 자기 대신 황용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이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둘이 서로 가라고 고집을 부리자 구양봉이 벌컥 화를 내며 소릴 질렀다.
[아니 이놈의 계집애, 가라고 했는데 가지도 않고 왜 야단을 부리나?]
[전 이제 가고 싶지 않은걸요. 구양아저씨, 이 귀찮은 소경을 쫓아 보내세요. 그러면 모든 얘기를 다 할게요. 정말 그를 다치게 하지 마세요.]
구양봉은 황용만 가지 않는다면 까짓 소경 하나쯤 죽이고 살리는 것이야 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큰 걸음으로 다가가 가진악의 멱살을 잡았다. 가진악은 철창으로 앞가슴을 가리고 있다가 적의 손등과 마주치는 순간 그만 철창을 놓치고 말았다. 어찌 된 일인지 손이 말을 듣지 않고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철창은 쩔그렁 소리와 함께 지붕을 뚫고 하늘 높이 날아갔다.
가진악은 급히 뒤로 물러나며 피하려 했지만 허공에 뜬 몸이 미처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목이 조이면서 구양봉의 손에 다시 잡혔다. 그러나 그는 대적과 접전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 이러한 경우에도 정신만은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
가진악은 가까스로 독롱 두 개를 구양봉의 면상을 향해 날렸다. 구양봉은 그가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반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뜻밖의 공격을 당하자 크게 당황했다. 거리도 가깝거니와 그 무서운 형세로 보아 아무래도 피할 겨를이 없을 것 같았다.
구양봉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진악을 집어 던지자 그의 몸이 황용의 머리 위를 날았다.
신상 뒤에서 뛰어내릴 때 문 쪽을 향해 있던 가진악은 구양봉이 집어 던지는 바람에 공교롭게도 문을 지나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어찌나 힘차게 집어 던졌는지 독릉보다 빨랐다. 이제는 독릉이 구양봉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 가진악 쪽으로 날아가는 꼴이 되었다.
[어이쿠!]
황용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데 가진악이 몸을 공중에서 꺾으면서 오른손을 뻗어 날아오는 독릉을 가볍게 받아 냈다. 바람소리를 듣고 위치를 확인하는 그의 재주는 이미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눈뜬 사람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었다.
구양봉이 오히려 탄성을 지르며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재주로구나. 가소경, 용서해 줄 데니 가보라구]
가진악은 땅바닥에 내려서서도 머뭇거리며 차마 발을 떼지 못했다.
[가영웅님, 구양아저씨가 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구음진경을 배우려고 하는데 왜 안 가고 계셔요. 함께 배우고 싶어 그러시나요?]
황용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진악은 황용의 말을 듣고는 사태가 긴박하다는 것을 알고 문 앞에 선 채 계속 버티고 있었다.
[날이 활짝 밝았으니 우리 가자구.]
구양봉은 하늘을 보며 이렇게 말한 뒤 다짜고짜 황용의 손을 잡고 문밖을 나섰다.
[가영웅님, 제가 손바닥에 써드린 말 잊지 마세요.]
이 말을 하는 사이에도 둘은 벌써 십여 장 밖에 나가 있었다. 가진악은 불안한 마음으로 두 사람 발걸음 소리가 멀리 사라져 가는 것을 듣고 있었다. 까마귀 떼는 하늘을 날며 계속 울부짖었다.
가진악은 반시간 이상을 그냥 거기에 서 있었다. 까마귀 떼들이 이젠 절 안으로 들어와 시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목염자가 비록 양강같은 못된 놈을 사랑하다가 죽기는 했지만 본인이야 무슨 죄가 있으랴! 가진악은 그녀의 시체를 까마귀들이 그냥 뜯어먹게 놔둘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까마귀 떼를 쫓은 뒤에 목염자의 시체를 안고 나와 절 뒤 빈터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지붕으로 뛰어올라가 철창을 찾았다. 그는 그 철창을 짚고 지붕 위에 하염없이 서 있었다. 천지가 망망한데 이 소경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얼마 후 까마귀 떼가 비명을 지르며 반공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양강의 시체를 뜯어먹고 중독이 되어 죽어 가는 깃이었다. 가진악은 길게 탄식하며 다시 내려와 철창으로 땅을 더듬어 북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사흘째 되던 날 갑자기 공중에서 수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수리들이 여기 있다면 곽정도 근처 어딘가에 있으리라.
[곽정아! 곽정아!]
그는 광야에 선 채 무작정 제자의 이름을 불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과연 말발굽 소리가 나며 곽정이 홍마를 타고 달려왔다. 그와 가진악은 연우루에서 혼전이 벌어질 때 서로 헤어졌다가 이제야 만난 것이다. 곽정은 그렇게 걱정했던 사부가 무사한 것을 보자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허겁지겁 말에서 뛰어내리며 달려들어 얼싸안았다.
[사부님!]
가진악은 양팔을 벌리고 그의 따귀를 때렸다. 놀란 곽정이 안았던 손을 푸는 동안에도 가진악은 계속해서 왼손으로는 곽정을 때리며 오른손으로는 자기의 따귀를 때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곽정은 어안이 벙벙했다.
[사부님, 왜 이러십니까?]
[네놈도 바보요. 나도 바보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이렇게 때리다 비로소 손을 멈추었다. 두 사람의 볼이 빨갛게 부어 올랐다. 가진악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곽정과 자기를 향해 한바탕 욕을 퍼부은 다음 왕언장의 사당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곽정은 놀랍고 부끄러웠지만 그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진상이 그랬는데 공연히 황용만 원망하고 있었군요.]
[그래 우리가 죽어야 옳은지 살아야 옳은지 어디 한번 말이나 해보거라.]
[사부님, 우선 빨리 용아를 구해야겠어요.]
[황용의 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
[황도주는 홍칠공을 모시고 도화도로 치료를 하러 가셨어요. 구양봉이 용아를 데리고 어디로 갔을 것 같습니까?]
가진악은 묵묵히 있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용아가 만약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죽었거나 아니면 크나큰 시달림을 받고 있을 거다. 곽정아, 너나 그녀를 구하러 가렴. 나는 자진이라도 해야 그녀의 고마움에 보답하는 뜻이 될 것 같다.]
[사부님, 그런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셔요.]
그는 평소 대사부의 성격이 지나치게 강직하여 다른 사람 말에는 쉽게 혼들리지 않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죽는다면 죽는 것이지 다른 것을 돌볼 위인이 아니었다.
[사부님은 도화도에 가셔서 이 소식을 알려 주세요. 그래야만 황도주가 급히 황용을 구하러 오지 않겠습니까. 제자는 정말 구양봉의 적수가 아닙니다.]
가진악이 들어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철창을 짚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그러나 곽정은 자꾸 사부가 걱정이 되어 슬금슬금 그 뒤를 따랐다. 이를 느낀 가진악이 철창을 들어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래도 빨리 갈 생각 않고 뭘 하느냐? 네 만약 귀여운 용아를 구해 내지 못하면 내가 너롤 죽여 없애겠다.]
곽정은 꼼짝못하고 발길을 멈추었다. 동쪽 뽕나무숲 속으로 멀어져 가는 사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어디로 가야 황용을 만날 수 있을지 막연하기만 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생각해 보다가 홍마를 재촉해 수리와 함께 철창묘로 갔다.
사당 앞뒤에 까마귀 시체가 어지럽게 널리고 양강의 백골이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곽정은 양강이 자기 사부를 살해한 사실이 몹시 밉기는 했지만 이미 죽고 없으니 원망해 보아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자기와 결의 형제를 맺은 과거를 생각하면서 주섬주섬 뼈를 챙겨 절 뒤 목염자 옆에 나란히 묻고는 절을 했다.
[양강 아우, 오늘 내 아우를 묻어 준 일이 고맙거든 나로 하여금 황용을 찾도록 도와주시게. 그래야만 생전의 허물을 다소라도 벗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마음속으로 당부를 끝낸 뒤에 다시 양강과 목염자의 분묘를 향해 네 번 절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곽정이 황용의 종적을 찾아 나선 지 벌써 반년, 가을이 가고 또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돌아왔다. 홍마를 타고 개방과 전진교 및 산지사방의 무림 동료를 찾아다녀 보았지만 황용의 소식은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곽정은 워낙 굳세고 단단한 성품이라 어떤 어려움에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과 땅 끝을 전부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황용만은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이 반년 동안 연경과 변량까지도 다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황용은커녕 완안열의 종적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날은 산동성 경내에 당도해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길가에 늘어선 열 집 가운데 아흡 집은 텅텅 비었고 노상의 행인들도 분분히 피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몽고와 금나라가 연일 접전을 하고 있는데 금나라가 연패를 당해 피해 다니면서도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노략질이 극심하다는 것이었다.
곽정은 사흘을 내리 걸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백성들의 고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윽고 어느 산골 마을에 당도한 곽정은 적당한 인가를 물색해 말도 쉬게 하고 밥도 지어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쪽이 떠들썩하더니 금나라 군사 수백 명이 말을 타고 마을로 달려왔다. 앞장을 선 군관 하나가 창 끝에 어린아이 시체를 꽂은 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병사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백성을 몰아냈다. 젊은 여자를 보면 결박을 지웠고 늙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살륙을 했다.
보다못해 곽정이 말을 달려 군관의 손에서 창을 빼앗고 왼손으로 그의 태양혈을 후려쳤다. 이 반년 동안 연공을 계속할 시간은 없었지만 내력은 크게 진보되어 있었다. 이 일 장을 하찮은 군관이 당해 낼 리 없었다. 그는 두 눈이 튀어나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를 본 금나라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칼과 창을 들고 달려들었다. 홍마는 접전이 벌어지자 신들린 듯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휘젓고 달렸다. 곽정도 왼손으로 칼 한 자루를 빼앗아 든 채 양팔을 움직이는 좌우호박 재주로 그들과 뒤섞여 신나게 싸웠다.
금나라 병사들은 그의 위세에 눌려 투지를 잃고 우르르 마을 밖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큰 기를 나부끼며 몽고 기병 백여 명이 이리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금나라 병사들은 앞에 몽고병이 나타나자 사람이 많은 것만 믿고 다시 곽정을 향해 달려들었다.
곽정은 금나라 병사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골수에 사무치게 증오하던 차라 자기가 먼저 마을 어귀로 달려가 위풍당당하게 혼자 몸으로 맞섰다.
함부로 덤벼든 금군 십여 명은 어이없게 죽어 넘어졌다. 나머지 금군들은 전진할 수도 후틔할 수도 없는 곤경에 빠졌다.
몽고병은 앞에 누군가가 나타나 자기들을 도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가 앞뒤 협공으로 순식간에 기백 명의 금나라 병사들을 섬멸했다. 기병을 인솔한 백부장(百夫長)이 곽정의 내력을 물으려고 하는데 일행 중 십장(什長) 하나가 곽정을 알아보고 달려와 땅바닥에 엎드려절을 했다.
[금도부마(金刀駙馬)!]
백부장은 대칸(大汗)의 부마란 말을 듣자 허겁지겁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빠른 말 한 필을 보내 본진에 알리도록 했다. 곽정은 몽고 병사들을 향해 마을의 불길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백성들이 몰려와 그에게 사의를 표하며 기뻐했다.
이렇게 부산스러운 가운데 마을 밖에서 자욱한 먼지와 함께 무수한 군마가 다시 몰려들었다. 백성들이 깜짝 놀라 서로들 바라다보는데 황마 한 필이 먼저 마을로 달려 들어오고 그 위에 탄 젊은 장군이 소리를 질렀다.
[곽정 형제는 어디에 있는가?]
곽정은 툴루이를 알아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갔다.
[툴루이형!]
둘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수리도 툴루이를 알아보았는지 푸드득푸드득 날며 반기는 모습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툴루이는 천부장 한 명을 시켜 병사들을 이끌고 금나라 병사들을 추적하게 하는 한편 산기슭에 파오를 치게 하고 곽정과 함께 그들이 혜어진 뒤의얘기를 꺼냈다. 툴루이는 양강의 거짓말을 듣고 죽은 줄로 믿었던 곽정을 살아서 만나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곽정은 툴루이의 북국 군무에 대한 말을 듣고 비로소 이 일년 동안 칭기즈 칸이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무수한 영토를 확보한 것을 알았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 네 왕자와 무칼리, 보구르치, 보르쿠, 칠룬 등 네 명의 개국 공신은 각기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 지금 툴루이와 무칼리는 군대를 이끌고 산동 가지에서 여러 차례 금나라 군대를 일패도지시키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금나라 정병은 동관(潼關)에 집결하여 성문을 굳게 닫은 채 나와 싸울 생각을 안 했다.
곽정이 툴루이의 군중에서 며칠 묵는 동안 갑자기 칭기즈 칸이 제왕과 중장을 소집해 몽고로 돌아간다는 급한 전갈이 왔다. 툴루이와 무칼리는 즉시 영기(令旗)를 부장(副將)에게 맡기고 북상했다. 곽정도 어머니가 그리워 그들과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이들의 무리는 어느덧 알리부(斡難) 강가에 이르렀다. 멀리 바라다보니 끝간데없는 대초원에 즐비한 파오와 수천 수만의 전마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수천 수만의 창 끝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 천만도 넘는 회색빛 파오 가운데 노란 비단으로 우뚝 선 파오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파오의 지붕을 황금으로 부어 만들었고 그 앞에는 높다랗게 쇠꼬리로 장식한 큰 기가 세워져 있었다.
이 금빛 파오 안에 칭기즈 칸이 자리를 잡고 앉아 명령을 하면 쾌마들이 한필 한필 만 리 밖에 있는 왕자와 대장들에게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각이 한 번 울리면 초원에는 봉화가 하늘을 가리고,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날며, 검광이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곽정은 말을 달려 언덕 위로 올라가 이 장관을 내려다보았다. 한 무리의 기병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 그들을 영접했다. 툴루이, 무칼리, 곽정 세 사람은 금빛 파오 안으로 들어가 대간을 알현하게 되었다. 곽정은 파오 안으로 들어서다가 가볍게 놀랐다. 대칸 수하에 있는 모든 제왕과 제장이 거의 다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칭기즈 칸은 그들 세 사람을 보고 몹시 반가워했다. 툴루이와 무칼리가 군정을 보고하고 곽정은 꿇어 엎드려 얘기했다.
[대칸께서는 저를 보고 금나라 완안열의 목을 베어 오라고 하셨는데 몇 차례 만나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달아나는 바람에 성사치 못했습니다. 부디 중벌을 내려 치죄하소서.]
[어린 매가 자라면 언제고 여우는 잡게 마련인데 내 어찌 중벌을 내리겠느냐.]
칭기즈 칸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하고는 즉시 제장들과 함께 금국 토벌에 대한 의논을 시작했다. 회중의 제장들은 금나라 군사들이 동관을 사수하는 바람에 공격이 어려우니 차라리 송나라와 연합전선을 펴 공략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칭기즈 칸은 즉시 서신을 쓰게 한 뒤에 남하할 사람을 파견하고 논의를 끝마쳤다.
곽정도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어둠 속을 더듬어 어머니의 파오를 찾아가는데 부드러운 손이 등뒤에서 자기의 눈을 가렸다. 동시에 향긋한 향기가 코로 스며 들어왔다.
[화쟁 누이!]
몸을 돌리니 화쟁 공주가 흰옷을 입고 거기에 서 있었다. 둘이 헤어진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런데 이제 다시 만나니 전보다 훨씬 키도 크고 더 아름다워 보였다.
[누이, 왜 소복을 입었지?]
화쟁 공주는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빠가 죽었다고 해서.....]
(그녀와 나는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날 남편으로 섬기고 있었구나.)
곽정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할말을 잊고 말았다. 둘은 저녁 바람을 맞으면서 넋을 잃고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못박은 듯 서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화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머님을 뵈러 가요. 이렇게 살아 돌아오셨는데 어머니와 나, 누가 더 기뻐하겠어요?]
[어머니가 더 반가워하시겠지.]
곽정의 멋없는 대답에 화쟁이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
[그럼 저는 반갑지 않겠네요? 그날 오빠가 세상을 떠나셨단 말을 듣고 날마다 밤마다 울며 산 저는요?]
몽고 사람들은 솔직한 성품이라 마음이 내키면 무슨 말이든지 털어놔야 속이 풀렸다. 곽정은 오랫동안 남쪽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이제 옛날 정든 고장으로 돌아와 화쟁 공주의 이런 얘기를 듣고 보니 미안한 생각이 솟구쳤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 옛날보다는 많이 수척한 모습이었다. 둘은 손에 손을 잡고 곽정의 어머니인 이평의 파오를 찾았다. 모자 상봉에는 눈물과 웃음이 한바탕 엇갈렸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칭기즈 칸이 불렀다.
[그 동안 네가 한 일은 툴루이에게 들어 알고 있다. 네가 신용을 지키고 의를 중시했으니 내 여간 기쁘지 않구나. 날을 가려 화쟁과의 혼사를 맺도록 하자꾸나.]
곽정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용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찌 그녀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한단 말이냐?)
그러나 칭기즈 칸의 위엄에 눌려 감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칭기즈 칸은 평소부터 곽정이 소박하고 과묵한 인물이라 좋아도 좋다는 표시를 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는 즉시 황금 1백 근과 소 5백 마리, 양 2천 마리를 주며 혼사 준비를 서두르도록 명했다.
화쟁은 칭기즈 칸의 외동딸이라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때 몽고의 국세는 날로 융성했고 칭기즈 칸의 신출귀몰한 용병으로 싸움이 있을 때마다 대승을 거두었다. 각 부족의 칸들은 대칸의 딸이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분히 달려와 예물을 바치고 축하를 했다. 진귀한 보물이 파오 l0개에 쌓이고도 남았다. 화쟁 공주는 희색이 만면했지만 곽정은 오히려 수심이 가득했다.
혼례식을 올리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곽정의 괴로움은 커갔다. 이평은 아들의 신색이 어두운 것을 눈치채고 어느 날 밤 자세히 물었다. 곽정은 황용과 있었던 모든 일들을 어머니께 낱낱이 이야기해 주었다. 이평은 아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어머니, 아들의 고민이 이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대칸의 은혜가 태산 같은데 어떻게 그분의 뜻을 어긴단 말이냐? 그러나 그 용아, 용아를 내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귀엽고 불쌍한 그녀를 어떻게 한단 말이냐?]
第 六 卷. 第 五 章.(通卷 章). 칭기즈 칸과 함께
[어머니,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셨을까요?]
뜻밖의 질문에 어머니 이평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남편의 성격을 생각해 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고통을 당할망정 절대로 그 짐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 지게 하지는 않으셨단다.]
곽정은 벌떡 일어서며 늠름하게 말했다.
[제가 아버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아버님의 훌륭한 뜻은 따라야겠지요. 만약 용아가 편안히만 있다면 전 옛날 약속한 그대로 화쟁 공주를 아내로 맞겠어요. 그러나 용아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평생 장가들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곽씨의 종사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애 성격이 워낙 제 아버지를 닮아 고집을 부리면 할 수 없는지라 더 얘기해 봐야 소용이 없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이평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 말을 대칸에게 말씀드리겠느냐?]
[어쨌든 대칸께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지요.]
이평은 어디까지나 어진 어머니였다. 아들이 올곧은 사내답기를 바랄 뿐 사사로운 욕심은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여기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겠지. 대칸께 사과를 드리고 너와 나는 오늘로 남행을 하자. 알겠느냐?]
곽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짐을 챙졌다. 몸에 걸친 옷과 당장 필요한 노자만 챙겨 떠나기로 하고 대칸이 하사한 나머지 물건은 그냥 파오 안에 두고 가기로 했다.
[어머니, 저는 공주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오겠어요.]
이평은 곽정을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어떻게 그 말을 하지? 네가 슬그머니 떠나 버리면 오히려 상심이 덜 될 텐데.]
[아닙니다 어머니, 제가 직접 말을 해야 합니다.]
곽정은 서둘러 파오를 나가 화쟁의 처소로 갔다.
화쟁 공주는 어머니와 함께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요 며칠 동안 표정이 밝고 환했다. 때마침 혼사 준비를 하고 있다가 곽정이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를 졸랐다.
[엄마!]
[며칠 있으면 혼인을 할 텐데. 하루라도 못 보면 큰일이라도 난다더냐? 그래 만나고 오렴.]
그녀의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허락했다. 화쟁이 미소를 머금고 밖으로 나와 조용히 불렀다.
[곽정 오빠.]
[누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곽정은 그녀와 함께 한참 동안이나 걷다가 풀밭에 나란히 앉았다.
화쟁이 곽정에게 살며시 몸을 기대어 왔다.
[곽정 오빠, 저도 오빠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뭐, 그럼 사실을 다 알고 있었나?]
화쟁이 그나마 그 일들을 알고 있다면 더욱 다행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입을 열까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알긴 뭘 안다고 그러세요? 제가 이제는 대칸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뿐인데요.]
[뭐라고?]
곽정은 그녀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되물었다.
화쟁은 고개를 들어 초생달을 바라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오빠와 결혼을 하면 전 제 자신이 칭기즈 칸의 딸이라는 사실을 잊겠단 말이에요. 다만 곽정의 아내일 뿐이에요. 오빠가 저를 욕하고 싶으면 욕하고 때리고 싶으면 얼마든지 때리세요. 제 아버지가 대칸이라고 해서 오빠가 어려워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곽정은 콧날이 시큰하고 뜨거운 피가 가슴에 꽉차는 것 같았다.
[누이, 누이는 내게 이토록 잘해 주는데 난 정말 자격이 없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오빤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분이세요. 우리 아버지말고는 그 누구도 오빠를 따를 수 없어요. 친오빠가 넷이나 있지만 곽정 오빠에 비하면 어림없어요.]
곽정은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내일 아침이면 몽고를 떠나 남행을 해야 할 텐데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요 며칠 저는 어찌나 기쁜지 몰라요. 오빠가 죽었단 말을 듣고 저도 따라 죽으려고 했어요. 그때 툴루이 오빠가 제 손에서 칼을 빼앗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었겠어요. 곽정 오빠, 제가 만약 오빠의 아내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나아요]
(용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이들 둘은 정말 내게 너무 극진하구나.)
곽정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니 오빠, 왜 한숨을 쉬셔요?]
화쟁이 의아해하며 물었지만 곽정은 딴전을 피웠다.
[아무것도 아니야]
[음, 큰오빠와 둘째오빠가 곽정 오빠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시는 거지요? 그러나 셋째와 넷째 오빠는 오빠를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큰오빠, 둘째오빠는 나쁘지만 셋째, 넷째 오빠는 좋은 사람들이라구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건 무슨 말이야?]
[제가 어머니께 말씀을 들었는데요. 아버지가 연세가 많아 태자를 책봉한다는데 그게 누군지 아시겠어요?]
[그야 물론 큰형님인 주치(朮赤)이겠지. 나이도 위고 공로도 제일 많으니까.]
화쟁은 고개롤 가로 저으며 웃었다.
[틀렸어요. 셋째오빠일 거예요, 아니면 넷째 오빠구요.]
칭기즈 칸의 장남인 주치는 똑똑하고 수완이 좋았고 둘째 차가타이는 용감하고 싸움을 잘했다. 그러나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아 늘 다투었다. 반면에 셋째인 오고타이는 술을 잘 마시고 사냥을 좋아하는데다가 도량이 대단히 넓었다. 장래 부왕이 세상을 떠나면 대칸 자리는 큰형님이나 둘째형님이 계승할 것이지 자기 몫이 아니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일도 없거니와 형제 자매들에게도 제일 다정하게 대했다. 그래서 화쟁의 말이 믿기 어려운 것이다.
[아니, 누이의 몇 마디 말 때문에 대칸께서 태자를 바꾸어 세우신단 말인가?]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추측해 본 것뿐이에요. 그러나 장래 큰오빠나 둘째오빠가 대칸이 된다 하더라도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그들이 만약 오빠를 괴롭힌다면 제가 사생결단을 내겠어요.]
화쟁 공주는 어려서부터 칭기즈 칸의 총애를 독차지했기 때문에 오빠들은 모두 그녀에게만은 무조건 양보했다. 곽정은 그녀가 한다고 하면 하는 성질인 줄 알고 빙그레 웃었다.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그건 그래요. 오빠들이 함부로 대하면 우린 함께 남쪽으로 가버리는 거예요.]
[나 남쪽으로 가고 싶단 말을 하기 위해 찾아온 거야.]
곽정은 드디어 어렵사리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아버지나 엄마가 섭섭해서 나를 보내지 않을까 걱정이 되세요?]
[아니 나 혼자 말야....]
[전 영원히 오빠 말만 듣겠어요. 오빠가 남쪽으로 가신다면 저도 따라 나서지요. 아빠나 엄마가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몰래 달아나요.]
곽정은 더 참고 들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났다.
[나와 어머니 두 사람만 남쪽으로 가겠단 말이라니까!]
곽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는 선 채, 다른 하나는 앉은 채로 눈과 눈이 부딪쳐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들은 갑자기 나무나 흙으로 만든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화쟁은 아무리 애써도 곽정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누이, 정말 미안해. 난 누이와 혼인할 수 없는 입장이야.]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오빠를 위해 자진하지 않았다고 나무라시는 건가요?]
[아냐 아냐. 누이가 잘못했다는 뜻이 아냐. 누가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내 잘못이었나 봐.]
곽정은 참담한 어조로 황용과 자기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다 털어놓았다. 황용이 구양봉에게 잡혀 가고 자기가 반년을 헤매며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화쟁의 눈에서도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누이 나를 잊어 줘! 난 아무래도 그녀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 돼.]
[그녀를 찾으면 저를 보러 오실 건가요?]
[그녀가 만약 아무 일 없이 편안하다면 내 다시 북으로 돌아올게. 그때도 누이가 나를 마다하지 않으면 난 누이와 혼인할 거야. 결코 후회하지 않겠어.]
[그런 말씀은 하실 필요도 없어요. 오빠는 제가 오빠에게 시집가기를 영원히 원하고 있다는 걸 아시잖아요. 오빤 그녀를 찾아가도록 하세요. 십 년 이십 년도 괜찮아요. 제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언제까지나 이 초원에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곽정도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조용히 다짐했다.
[그래, 누이 말이 맞아. 십 년 이십 년 나는 기필코 그녀를 찾아야 해. 그리고 십 년 이십 년이 흘러도 나는 언제나 누이가 이 초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을 거야.]
화쟁은 그의 품속으로 달려들며 통곡을 했다. 그녀를 안은 곽정의 손에는 힘이 더해지고 어느덧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로 이때 말 네 필이 서쪽으로부터 달려와 그들 옆을 스쳐 칭기즈 칸의 파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중 한 필은 파오에서 십여 장 떨어진 장소에 풀썩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워낙 먼 길을 달려 탈진해 죽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에 탔던 사람은 벌떡 일어나 그냥 파오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 파오 안에서 나팔수 십여 명이 나와 사방을 향해 나팔을 불었다.
이 나팔 소리는 칭기즈 칸이 긴급할 때 제장을 소집하는 신호였다. 왕자는 물론 제아무리 사랑받는 장수라 하더라도 대칸이 손가락 열 개를 구부리기 전에 달려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참수의 벌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대칸이 제장을 소집하는군.]
곽정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화쟁 공주를 놔둔 채 경공의 제종술로 바람처럼 달려갔다. 사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곽정이 파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칭기즈 칸은 막 다섯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여덟 번째 구부러졌을 때 왕자와 장군들도 다 모였다. 칭기즈 칸은 소리 높여 외쳤다.
[그 개놈의 왕(狗王)에게 이토록 민첩한 왕자가 있느냐? 이렇게 용감한 장군이 있느냐?]
[없습니다.]
모여 선 제왕 중장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칭기즈 칸이 가슴을 두드리며 화를 냈다.
[이걸 보아라. 이는 내가 호라즘(花刺子模)에 파견했던 사신이다. 그 개놈의 왕 무하마드(魔訶末)가 내 충성스런 신하를 어떻게 했는지 보아라.]
제장들은 대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 사신들의 얼굴은 무언가에 맞은 듯 퉁통 부어 올랐고 수염은 불에 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수염은 몽고 무사들의 존엄의 상징이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큰 모욕인데 이를 다 태워 비리다니! 이를 본 제장들은 한결같이 화를 냈다.
[호라즘은 몽고 서쪽에 있는 대국이지만 우리가 금나라 주구를 공격하느라 늘 양보를 해왔다. 그런데 주치야, 개놈의 무하마드 왕이 우리를 어떻게 대했는지 말을 해라.]
칭기즈 칸의 노기 찬 말에 따라 주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해 부왕께서 저를 보고 메르키드(蔑兒乞人)를 토벌하라는 분부를 내리셔서 득승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을 때 무하마드 왕도 대군을 이끌고 메르키드를 치러 왔었습니다. 양군이 만나게 되자 저는 사자를 파견해 부왕께서 호라즘과 친구로 지내자는 분부가 있었다는 전갈을 했습니다. 그때 그 붉은 수염의 개왕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칭기즈 칸이 너희에게 나를 치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다지만 하늘은 오히려 나를 보고 너희를 치라 했다.> 그래 한바탕 악전고투가 벌어졌습니다. 우리측이 이기기는 했지만 적의 숫자가 우리의 십 배가 넘어 밤에 슬그머니 퇴각을 했습니다.]
곧 이어 개국 공신 네 명 가운데 보르쿠가 나섰다.
[비록 그런 일이 있었지만 대칸께서는 그래도 그 개왕에게 예의를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장사꾼을 파견했지만 공물은 모두 개왕이 빼앗았고 목숨은 목숨대로 잃었습니다. 이번에도 수교를 맺자는 사자를 파견했는데 그 개왕이 금나라 완안열의 사주를 받고 대칸의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자를 살해하고 사신의 위병 반을 죽였으며 나머지 반은 수염을 태운 뒤에 축출했습니다.]
곽정은 완안열의 이름을 듣는 순간 몸을 부르르 멀었다.
[완안열이 호라즘에 있었습니까?]
수염이 탄 사자의 호위가 대답을 했다.
[제가 그를 아는데 그는 개왕 곁에 앉아 계속 뭐라고 귀엣말을 하더군요.]
[금나라가 호라줌과 야합하고 양짜가에서 우릴 협공할 모양인데 그럼 우린 무섭다고 벌벌 떨고 있어야 하나?]
칭기즈 칸이 제왕 중장을 둘러보며 호령하듯 외쳤다.
[우리들의 대칸은 천하무적이십니다. 대칸께서 우리를 이끌고 호라즘을 치러 가야 합니다. 가서 그들의 성을 때려부수고 그들의 집을 태워 버리고 그들 모두를 몰살시키고 그들의 가축을 차지해야 합니다.]
제왕 중장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자, 다들 무하마드와 완안열을 치러 가자!]
칭기즈 칸의 선창에 중장들도 제창을 했다. 파오 안의 촛불이 함성에 흔들거렸다.
칭기즈 칸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아 허공을 치며 파오 밖으로 뛰어가 말에 올랐다. 제장들도 벌떼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칭기즈 칸이 얼마를 달리다 산언덕으로 올라섰다. 제장들은 그가 혼자 생각을 하기 위해 그러는 줄 알기 때문에 모두들 산 아래를 빙 둘러쌌다. 칭기즈 칸은 곽정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불렀다.
[곽정아, 이리 오렴.]
곽정이 고삐를 당기자 홍마가 나는 듯이 산 위로 뛰어올랐다. 칭기즈 칸은 초원에 별빛처럼 빛나는 파오의 횃불을 바라보다가 채찍을 들었다.
[얘야, 그날 우리가 상쿤(桑昆)과 자무카(札木合)에게 포위당했을 때 내가 한 말이 있는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느냐?]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몽고 사람 가운데 이렇게 많은 호한이 있으니 서로 다투지 않고 단걸만 한다면 우린 전세계를 몽고의 목장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칭기즈 칸은 허공을 향해 채찍질을 했다.
[그렇다! 이제 우리 몽고 사람이 대동단결했으니 완안열을 잡으러 가자!]
곽정은 내일 남쪽으로 갈 결심을 하고 있었으나 일이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완안열을 잡고 말겠습니다.]
[그 호라즘은 정병 백만이 있다고 큰소리를 치는데 내 보기에 육칠십만은 족히 될 것 같다. 그런데 우라는 겨우 이십만 명, 또 금나라와의 싸움 때문에 몇 만 명을 남긴다면 십오만 명이 있을 뿐이다. 십오만 명을 가지고 칠십만 명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곽정은 싸움에 있어서 용병이니 전술이니 하는 것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젊은 혈기요, 난관이 있다고 괴한 적이 없는 그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다. 그날 내 너를 친자식처럼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때 내가 한 말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너는 날 따라 서정(西征)을 떠나자, 가서 무하마드와 완안열을 잡은 뒤에 돌아와서 내 딸과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자.]
칭기즈 칸의 말은 곽정의 마음에도 들었다. 곽정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칭기즈 칸이 말을 달려 산에서 내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을 집결시켜라!]
친병들이 호각을 불었다. 연도에 사람 그림자가 흔들거리고 전마가 번개처럼 달리는데도 정작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칭기즈 칸이 급히 말을 몰아 금빛 파오 앞에 이르자 어느새 만인대 삼 대가 정연하게 대오를 갖추고 초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열을 선 긴 칼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칭기즈 칸은 금빛 파오 안에 들어서자마자 서기를 불러 전서(戰書)를 쓰도록 했다. 서기는 큰 양피 한 장에 긴 편지를 쓴 뒤에 무릎을 꿇고 대칸을 향해 읽었다.
하늘이 짐으로 하여금 각족의 대칸이 되게 함은 칠 년 동안 짐이 이룩한 공적의 비상함이 자고로 덕업을 이룬 자 가운데 짐만한 자 없음이로다. 짐의 천둥 같은 일격을 그대 어찌 당해 내겠는가? 그대 국운의 존망이 오늘에 달렸도다. 세 번 생각하고 만약 진심으로 귀순하여 성의껏 섬기지 않으면.....
칭기즈 칸은 들을수록 화가 치밀어 횐 수염의 서기가 나동그라지도록 걷어차고 말았다.
[아니 누구에게 편지를 쓰는 줄 아느냐? 이 칭기즈 칸이 그따위 개왕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을 필요가 있다는 게야?]
그는 분기탱천하여 말채찍을 들어 닥치는 대로 서기를 후려갈겼다.
[내가 부르는 대로 그냥 받아쓰란 말이다.]
서기는 전전긍긍하며 간신히 기어 일어나 다시 양피 한 장을 바닥에 깔아 놓고 엎드려 대칸의 입만 쳐다보았다. 칭기즈 칸은 벌어진 장막 틈으로 밖에 있는 삼만 정병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쓰거라. 아주 간단하다.]
그는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싸울 테면 싸우자!]
서기는 깜짝 놀랐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이 일곱 자를 양피 위에 크게 썼다.
[거기에 금인을 찍어 속히 발송하라.]
칭기즈 칸의 명령에 따라 무칼리가 금인을 찍고 천부장에게 군사 몇 명을 이끌고 가 전달하도록 했다. 제장들은 사신의 말발굽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가자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싸울 테면 싸우자!]
파오 밖에 도열해 선 삼만 병사도 함께 외쳤다.
[하호, 하호, 하호!]
이는 몽고 기병들이 적진을 향하여 돌진할 때 늘 외치는 고함소리였다. 전마도 주인의 함성을 듣자 힘차게 투레질을 했다. 삽시간에 초원은 하늘을 진동시키고 땅을 놀라게 할 함성으로 가득 찼다. 칭기즈 칸은 즉시 제장과 사병들을 물러가게 한 뒤 홀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침묵에 잠겼다. 이 의자는 금나라를 공략해서 빼앗은 것으로 황제가 앉던 보좌였다. 의자 등에는 몸을 서린 용 한 마리가 구슬을 삼키는 그림이 있었고 양편 손을 올려 놓은 곳에는 각기 호랑이가 한 마리씩 새겨져 있었다. 칭기즈 칸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청년 시절을 회상했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네 아들과 외동딸, 백전백승의 군대, 끝없이 넓은 제국(帝國)과 장차 맞이할 강적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의 회상을 뚫고 먼 곳에서 한 전마의 비명 소리가 들리다 끊겼다. 그는 비록 늙었다고는 해도 아직 귀만은 밝았다. 이것은 늙은 말이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주인이 그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한칼로 죽이는 소리였다. 칭기즈 칸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늙을 대로 늙은 몸이다. 이번 출정에서 능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내 만약 갑자기 전쟁터에서 죽는다면 네 명의 아들은 서로 대칸이 되겠다고 다투겠지? 나라고 해서 죽지 말란 법은 없을 텐데.....)
제아무리 전무불승(戰無不勝)의 대영웅이라 하더라도 정력이 쇠잔해 지면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누가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겠는가!
(남쪽에는 도사(道士)가 있어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한다는데 도대체 그게 정말일까?)
칭기즈 칸은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손뼉을 쳐 위병을 불러 곽정을 들게 했다. 잠시 후 곽정이 들어서자 칭기즈 칸은 그 일을 자세히 물었다.
[장생불사가 정말인지 거짓인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호흡법을 익혀 연년 익수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곽정의 말을 듣고 칭기즈 칸은 크게 기뻐했다.
[너는 그런 사람을 아느냐? 빨리 한 사람을 불러 나를 좀 만나게 해다오.]
[그런 도사는 아무렇게나 부르면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네 말이 옳다. 내 높은 관리를 보내 예의로 모셔 오면 되겠구나. 그런데 누굴 청하면 좋겠느냐?]
(천하의 현문 내공의 정종은 그래도 전진파다. 전진 육자 가운데 구도장의 무공이 가장 높고 일하는 것도 좋아하니 혹시 그분이라면 올지도 모른다.)
곽정은 곰곰이 생각해 본 후 장춘자 구처기의 이름을 댔다.
칭기즈 칸은 크게 기뻐하며 서기를 불러 조서(詔書)를 작성하게 했다. 서기는 방금 한바탕 얻어맞은 뒤라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이렇게 썼다.
짐에게 일이 있으니 급히 오라.
대칸의 체제를 본받아 그대로 썼으니 이번에는 칭찬을 받겠거니 했다. 그런데 칭기즈 칸은 내용을 듣자마자 노발대발하며 소리를 질렀다.
[내 개놈의 왕에게는 그렇게 쓰라고 했다만 어찌 도사께 이렇게 쓸 수 있느냐? 길게 써야 한다. 예의바르고 겸손하게 말이다.]
서기는 바닥에 꿇어 엎드려 초안을 다시 작성했다.
하늘이 중원에 복을 내려 짐 같은 사람이 북야(北野)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나 봅니다. 순박함을 사랑하며 사치를 멀리하고 지냅니다. 밥 한끼, 옷 한 벌도 마소를 먹이는 목동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백성을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사랑하고 선비를 형제처럼 대하며, 일을 할 때는 화평을 위주로 삼고 은혜와 덕을 쌓아 가고 있습니다.
만군을 훈련할 때는 늘 솔선수범하고 전투에 임해 제 자신을 돌본 일은 전연 없습니다. 7년 동안 대업을 이룩하고 사해를 통일한 일도 짐에게 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워낙 금나라가 악정을 펴기 때문에 하늘이 도와 지존의 자리를 승계하고 있는 줄 압니다. 남으로 송나라, 북으로 위구르(回紇, 지금의 외몽고), 동하(東夏), 서이(西夷)가 모두 짐에게 조공을 바치는 형편입니다. 짐의 선우국(禪于國)은 수천 수백 년 이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워낙 중차대한 임무라 천하를 다스림에 소흘함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를 합니다.
더구나 배와 노를 마련하여 강남을 도탄에서 구하려고 하는 차제입니다. 이제 짐은 어진 사람의 도움을 받아 천하를 태평케 하고 싶습니다. 짐이 대업을 맡은 이래 서정에만 전념하느라 미처 찾아뵈올 기회가 없었지만 전부터 구선생님의 존함을 흠모해 왔습니다. 진실을 아시고 예의바르시며 천하의 도에 통달하시지 않음이 없고 덕 또한 충만하셔서 군자의 도를 다하시면서도 산중에 은거하고 계심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천하에 도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을 좇는 수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전쟁이 발발한 후 선생께서 아직도 산동 옛집에 계신 줄 알고 짐은 심히 우러러 흠모하고 있습니다.
서기는 여기까지 쓰고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
칭기즈 칸은 빙그레 웃었다.
[그 정도면 되겠지. 내 다시 한인(漢人) 출신의 대관 유중록(劉仲祿)을 파견하여 모시게 할 테니 꼭 오십사는 말을 쓰도록 하게.]
서기는 계속해서 써내려 갔다.
제 어찌 유비가 제갈량을 모시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갔던 일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다만 산천이 너무 멀어 실례를 범할 뿐입니다. 그러나 짐은 잠시 의자에서 물러나 목욕 재계하고 측근에 있는 유중록을 파견, 불원천리 선생님을 모시고자 하오니 잠시 이 사막을 멀다 마시고 백성을 위해서나 혹은 짐의 보신(保身)을 위하여 왕림해 주시면 그 은혜 백골난망이겠습니다. 선생님의 여가를 이용해 다만 한마디 가르침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짐의 정성을 표하기 위해 이렇게 서찰을 올리나이다. 착한 일을 하겠다는 뜻 거절하실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어찌 중생의 뜻을 저버리시겠습니까? 부디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겠나이다.
[좋아, 그만하면 훌륭하게 썼네.]
칭기즈 칸은 다시 곽정에게 편지 한 통을 별도로 쓰도록 한 뒤에 그날로 유중록을 파견하여 남행케 했다.
다음날 칭기즈 칸은 제장을 소집하여 전투 계획을 짰다. 그리고 회의중에 곽정을 나안(那顔)으로 추대, 만인을 통솔하라고 했다. 나안은 몽고 최고의 관직으로서 총애를 받는 대장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곽정은 무공이 크게 진보해 있다고는 해도 행군이나 전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제베, 수보타이 등에게 밤새도록 지도를 받기는 했지만 워낙 자질이 우둔한데다가 전술이란 것이 천변만화하는 것이라 쉽게 배워질 리 없었다. 그는 며칠 고민했다. 출정하여 명령을 잘못 내리기만 하면 적에게 섬멸당하는 것은 물론 잘못하다가는 칭기즈 칸의 명성을 손상시키고 만인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대칸에게 관직을 사앙하고 졸병의 신분으로 참전케 해달라고 간청하려는데 친병이 들어와 밖에 한인 천여 명이 몰려와 만나자고 한다는 전갈을 했다.
곽정은 회색이 만면했다.
(구도장께서 빨리도 오셨구나.)
파오 밖으로 달려 나오니 초원 위에 거지 차림의 사람 천여 명이 서 있었다. 그중 세 사람이 앞으로 달려와 인사를 했다. 그들은 바로 개방의 노유각과 간장로, 양장로였다.
[황소저의 소식을 알고 계십니까?]
[소인 등이 도처로 찾아다녀 보았지만 방주님 소식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번 곽선생께서 군대를 이끌고 서정에 나선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노유각의 말을 듣고 곽정은 의아하게 여겼다.
[대칸께서 구도장을 모셔 오기 위해 사람을 파견했단 사실을 전진교로부터 들었습니다.]
곽정은 남쪽 하늘에 유유히 흐르는 흰구름을 바라보았다.
(개방 방중이 온 천하에 널려 있는데도 황용의 소식을 모른다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구나.)
곽정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친명을 시켜 방중을 보살피게 하고는 대칸께 달려가 이 일을 보고했다.
[잘됐군 그래. 모두 자네 휘하에 거두어 들이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곽정이 관직을 사양한다는 말을 꺼내자 칭기즈 칸은 화를 버럭 냈다.
[누가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을 안다던가? 몇 번 해보면 자연히 알게 되네.]
곽정은 더 할말이 없었다. 자기 파오로 돌아와서도 계속 고민에 빠져 있자 노유각이 이를 알아보고 몇 마디 위로를 했다.
저녁나절 노유각은 다시 곽정의 파오로 들어섰다.
[진작 그런 줄 알았더라면 소인이 남쪽에서 손자병법이나 육도삼략을 가지고 올 걸 그랬지요. 그럼 일이 아주 쉽게 해결될 텐데요.]
이 말을 들은 곽정은 그제야 자기가 무목의 유서를 지니고 있다는 걸 상기했다. 이는 군진의 요걸인데 내 어찌 잊고 있었단 말인가! 즉시 옷보따리에서 유서를 꺼내 등잔불 심지를 돋우어 놓고 읽었다. 책읽기에 골몰하다 보니 잠자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까맣게 잊었다. 그는 다음날 점심때가 되어 비로소 가벼운 피곤을 느꼈다.
이 책에는 정모(定謀), 심사(審事), 공벌(功伐), 수어(守禦), 연졸(練卒), 사장(使將) 및 동정(動靜)과 안위지세(安危之勢), 용정출기지도(用正出奇之道) 등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당일 곽정이 원강(沅江)의 배 위에서 한 번 읽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기에 아무 의미도 없는 글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한마디 한마디가 지당한 도리요, 명언 아닌 것이 없었다. 그는 읽다가 잘 이해가 안 되는 곳은 노유각을 청해 물어 보았다.
[소인도 잘 모르겠군요. 생각해 보고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노유각이 잠시 파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것이었다. 곽정은 기뻐서 계속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노유각은 이상스럽게도 즉시 대답을 못하다가도 잠시 밖에 나갔다 오면 금방 대답을 해주었다. 곽정은 처음에는 전연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계속 그런 행동을 반복하자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날 저녁에 일부러 또 책에 있는 글자 하나를 물었다. 노유각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밖에 나가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다.
(책에 있는 의문은 천천히 생각해 보면 풀리는 것이 아닌가? 글자 하나를 모르는데 그걸 생각해 보면 된다니 알 수 없구나.)
그는 신분이 대장이라고는 하지만 나이가 어린데다 호기심까지 많았다. 노유각이 나가자 뒷문으로 빠져 나와 긴 풀밭에 엎드렸다. 도대체 노유각이 무슨 마술을 부리나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유각은 총총히 작은 파오로 들어가더니 금방 되돌아 나왔다. 곽정이 먼저 제자리로 돌아와 기다리니 노유각이 들어왔다.
[이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몰랐던 그 글자의 뜻을 설명해 주었다.
[노장로님, 다른 스승이 있는 모양인데 왜 제게 소개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곽정이 웃으며 묻는 말에 노유각은 순간 당황했다.
[없는데요.]
[그러면 우리 함께 가봅시다.]
곽정은 그의 팔을 잡고 방금 노유각이 들어갔다 나온 그 파오를 찾았다. 파오 밖에는 개방 방중 두 명이 지키고 있다가 곽정이 오는 것을 보고 헛기침을 했다. 곽정은 기침 소리를 듣는 순간 노유각을 뿌리치고 달려가 보았다. 파오를 들치고 안을 들여다보니 뒤편 파오 자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방금 그리로 빠져 나간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곽정이 달려들어 흔들리는 파오를 들쳤을 때는 긴 풀만 보일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곽정이 노유각에게 연유를 물으니 이 파오는 원래 자기가 거처하는 곳으로 다른 사람은 없다고 우길 뿐이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다시 무목유서에 있는 의문을 제기하니 노유각은 다음날에나 가서야 답변을 했다. 곽정은 그 파오에 있던 사람이 결코 자기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만나는 깃을 꺼려 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래 더 이상 노유각을 추궁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곽정은 저녁에는 병서를 읽고 낮에는 그대로 병사를 조련했다. 몽고 기병은 야전에 능숙했지만 이와 같은 진법에는 서툴렀다. 그러나 주수(主帥)의 명령이 있으니 어길 수도 없어 시키는 대로 그냥 조련을 했다. 한 달쯤 지나는 동안 칭기즈 칸은 군량을 준비했고, 곽정이 소속된 만인대는 벌써 천복(天覆), 지재(地載), 풍양(風揚), 운수(雪垂), 용비(龍飛), 호익(虎翼), 조상(,島翔), 사반(蛇蟠) 등 여덟 가지 진세에 통달하게 되었다. 이 8가지 진법은 제갈량이 처음 만든 이후로 악비에 이르러 더욱 발전한 것이다.
이날따라 하늘은 티없이 맑고 푸르렀다. 몽고의 15개 만인대가 일렬로 넓은 초원 위에 정렬했다. 칭기즈 칸은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출정을 서둘렀다. 그는 제장을 소집하고 이런 말을 했다.
[돌은 껍질이 없고, 사람의 목숨은 끝이 있다. 내 머리도 이제 백발이 성성한데 이번 출정에서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내 오늘 아들 하나를 뽑아 내 지위를 승계코자 하노라.]
개국의 제장들은 칭기즈 칸을 따라 동정서토(東征西討) 백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머리도 칭기즈 칸과 마찬가지로 백발이 성성했다. 이제 대칸이 후계자를 뽑는단 말을 듣자 크게 놀라면서도 기대가 가득한 눈초리로 누구를 지명할까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주치, 너는 내 장남이다. 누굴 후계자로 지명했으면 좋을지 의견을 말해 보아라.]
주치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는 똑똑하고 수완이 좋았다. 공도 제일 많이 세운데다가 또 장남이다. 부왕 사후에는 자연히 자기가 승계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대칸이 이렇게 묻고 나오니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은 차가타이다. 성격이 불 같고 형과는 늘 앙숙이었다. 부왕이 형을 향해 묻자 자기가 나섰다.
[아니 주치에게 그런 말을 물어 무엇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메르키드 부족의 잡종한테 통제를 받을 이유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과거 칭기즈 칸의 병력이 미약할 때 그의 아내는 적인 메르키드족에게 잡혀 가 애를 밴 후 돌아와 주치를 낳았던 것이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이 일에 개의치 않고 그냥 자기 자식처럼 길러 왔다.
주치는 자기 아우가 이렇게 욕을 하고 나오자 그냥 참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앞으로 대들며 차가타이의 멱살을 잡았다.
[부왕께서 날 외인 취급하신 일이 없는데 네놈이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모욕한단 말이냐? 네놈 재주가 그래 나보다 나은 게 뭐 있느냐? 거칠고 오만한 것밖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이냐? 네놈과 내가 어디 한 번 겨루어 보자. 내 만약 활을 쏘아 네놈에게 진다면 이 엄지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 무예를 겨루어 내가 진다면 네놈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히 일어나지 않겠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칭기즈 간을 바라보았다.
[부왕, 허락을 내려 주옵소서.]
두 형제는 중장이 분분히 달려와 말리는데도 서로 멱살을 잡은 채 한사코 놓지 않았다.
보구르치는 주치를 잡고 무칼리는 차가타이를 부둥켜 안았다. 칭기즈 칸은 청년 시절을 잠시 회상했다. 자기 아내조차 지키지 못해 오늘에 이르러 이런 일이 야기된 것을 생각하자 입맛이 썼다. 중장은 차가타이에게 옛일을 들춰 부모를 상심시켜서는 안 된다고 달랬다.
[둘 다 손을 놓아라. 주치는 내 장남이요, 사랑하는 아들이다. 다시 그런 말을 꺼내면 누구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칭기즈 칸의 엄명에 차가타이는 그제야 주치의 멱살을 놓았다.
[주치의 재주가 비상함은 모두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셋째아우인 오고타이의 인자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저는 오고타이를 추천합니다.]
[주치, 어디 네 의견이 어떤지 말해 보아라.]
칭기즈 칸이 다시 한 번 장남을 향해 물었다. 주치는 이미 자신이 가망 없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셋째와는 평소에도 잘 지냈거니와 그 성품이 인자하고 어질어 장래 자기를 해칠 것 같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저도 오고타이를 추천합니다.]
넷째인 툴루이도 다른 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이날 칭기즈 칸은 제장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새 태자 책봉을 축하했다.
군사들은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셨다. 곽정 역시 자기 파오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 정도 취해 있었다. 막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친병 하나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부마님! 큰일났습니다. 큰 왕자와 둘째 왕자가 술에 취해 각기 군사를 이끌고 나와 싸우려고 합니다.]
곽정은 깜짝 놀랐다.
[빨리 가서 대칸께 알려라.]
[대칸도 취하셔서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십니다.]
곽정은 주치와 차가타이의 군사들이 모두 정병이요, 맹장들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피차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몽고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낮에도 두 사람은 대칸의 면전에서 다투었는데 이제 술까지 취했으니 자기가 나서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곽정은 파오 안을 오락가락하며 해결할 묘안을 찾는 데 골몰했다.
[만약 용아만 여기 있다면 묘안이 있을 텐데.]
곽정은 혼자 중얼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였다. 그런데 이때 먼 곳에서 함성이 터졌다. 양쪽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곽정이 안절부절못하는데 노유각이 들어서며 종이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사반진(蛇蟠陣)으로 양군을 격리하고 불복하는 쪽은 호익진(虎翼陣)으로 사로잡으시오.
이 며칠 동안에 곽정은 무목유서에 통달해 있었다. 갑자기 이 두 줄의 글을 보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내 왜 이리도 미련할까? 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병서를 읽어야 소용없는 일 아닌가?]
그는 즉시 자기 예하 군대에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지만 군령의 지엄함을 알기에 나안의 호령이 떨어지자마자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순식간에 정연한 대오를 갖추고 기다렸다.
곽정은 북을 세 번 치게 했다.
북소리가 울리자 선발대가 함성을 지르며 동북쪽을 향해 돌격했다. 몇 리를 달리자 척후병이 상황 보고를 했다. 큰 왕자와 둘째 왕자의 양군이 대치한 채 이미 육박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호야 호야 하는 함성이 사방에서 들려 왔다. 곽정은 초조했다.
(내 한 발만 늦었어도 수습하지 못할 뻔했구나.)
곽정이 손을 흔들자 만인대 좌측 후미 지축(地軸) 3대가 앞으로 달려나가고 우측 후미 지축 3대는 후미가 되어 우후천형(右後天衡) 우지후충(右地後衝) 우천후충(右天後衝) 서북풍(西北風) 동북풍(東北風) 각 대열이 우측에, 좌군(左軍)의 각 대열이 좌측에 선 채 중군(中軍)을 따라 사반진을 펴고 급히 전진했다. 주치와 차가타이 예하의 이만여 병사가 때마침 칼을 휘두르며 접전을 하고 있었다.
곽정의 사반진이 돌연 이 양군의 중간을 신속하게 가르며 들어갔는데 그 군세가 질서정연하고 위풍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양군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차가타이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도대체 누가 나타났느냐? 나를 도우려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주치를 도우러 나타난 잡종이냐?]
곽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기를 흔들었다. 각대가 빙빙 돌다가 사반진이 호익진으로 바뀌고 진 좌쪽으로 우전천형(右前天衡) 4대가 선두를 서고 그의 각대는 차가타이군을 양쪽에서 둘러쌌다. 다만 좌천전충(左天前衝)의 2대만이 주치군의 진로를 차단했다. 차가타이는 이때 자기들 사이에 끼여든 것이 곽정의 영기임을 확인하고 있었다.
[내 벌써부터 남쪽 오랑캐가 틀려 먹은 줄 알고 있었다.]
차가타이는 이렇게 욕을 하며 군사들에게 곽정군을 쳐부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호익진의 변화가 정밀했고 양익의 위력이 워낙 강했다. 당년 한신(韓信)이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섬멸할 때도 바로 이 전법을 활용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십즉위지(十則圍之)라 했다. 열 배의 병력을 가져야만 능히 적을 포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진세의 변화에 따라 적은 수로도 많은 수를 포위하는 예외도있다.
차가타이의 군사들은 곽정의 소대들이 종횡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고도 도대체 몇 명인지 알 수가 없어 은근히 겁을 먹고 있던 차에 순식간에 이만여 군사가 이리저리 잘려 격리되는 바람에 서로 호응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주치의 군대와 접전할 때도 투지가 왕성하지 못했다. 모두 같은 종족인데다 대칸의 책벌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곽정군까지 돌진해 들어오니 완전히 전의를 잃고 말았다. 그 와중에 곽정이 소리 높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모두가 몽고의 형제니 골육상쟁을 삼갑시다. 빨리 칼과 활을 거두시오. 대칸이 아시면 모두 참수를 당할 것이오.]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분분히 말에서 내리며 무기를 버렸다.
차가타이가 일천여 휘하 군사를 이끌고 곽정의 중군을 항하여 돌격을 감행했다. 그때 징소리가 세 번 울리며 팔대의 병사들이 팔방에서그들을 포위했다.
삽시간에 땅에 반마삭(絆馬索)이 깔리고 일천여 명이 하나씩 말에서 떨어졌다. 팔대의 병사들은 네댓 명이 한 조가 되어 그들을 결박했다. 주치는 곽정의 군사가 차가타이의 부하를 걸박하자 크게 기뻐하며 달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호각 소리가 나더니 곽정의 전대(前隊)는 후대(後隊)로 후대는 전대로 변해 사방에서 자기 군사를 포위하고 좁혀 오는 것이 아닌가.
주치는 비록 전투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긴 하지만 이런 진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대항하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곽정의 만인대가 12개 소대로 변해 전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각하는 것이었다.
주치는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12개 소대는 자측인묘진사오(子丑剌口辰巳午) 등 12간지를 따라 기습과 정면 공격을 구사하며 갑자기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여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12개 소대는 약간 후퇴를 하면서 진법이 도치되어 우군이 좌충하거나 좌군이 우격을 하는 것이 전연 상례에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격에 주치군은 즉시 흩어져 어지럽게 되었다. 잠시 후 한 시간이 못 되어 주치군도 모두 사로잡혔다.
그는 곽정을 처음 만났을 때 채찍으로 죽도록 때린 일이 있고 차가타이는 맹견을 시켜 물게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 이 기회에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겁을 먹었다. 취한 술도 말끔히 깨어 제정신이 돌아오니 부왕의 책망이 두려워져 후회막급이었다.
곽정은 두 사람을 잡아 놓고도 자기는 어디까지나 제삼자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큰일을 저질렀으니 화가 될지 아니면 복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오고타이와 툴루이를 찾아가 상의하고 싶었다.
바로 이때 호각 소리가 크게 울리며 칭기즈 칸이 달려왔다. 그는 술이 깬 뒤에 두 아들이 싸운다는 말을 듣고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산발을 하고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양군의 장사들이 모두 열을 지은 채 땅에 앉아 있고 곽정의 기병이 옆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아들도 무사 여덟이 칼을 든 채 포위하고 있어 이상하게 여겼다.
곽정은 앞으로 나가 꿇어 엎드려 그 까닭을 낱낱이 아뢰었다. 칭기즈 칸은 하마터면 일어날 뻔했던 재앙이 곽정에 의해 미연에 방지된 사실을 알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제장을 소집한 후에 주치와 차가타이를 책망하고 곽정과 그 수하 장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곽정이 상으로 받은 금은과 가축을 병사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자 온 군대 안에 기쁨의 환성이 일제히 터졌다.
제장들은 곽정의 파오를 찾아와 큰 공을 세운 데 대한 축하 인사를 했다. 곽정은 손님을 보낸 뒤에 노유각이 가져 온 종이를 다시 한 번 살펴보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반 호익 양진에 대해 그에게 말한 적이 없는데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가 내 병서를 몰래 훔쳐보았단 말인가? 그러나 이 병서는 늘 몸에 지니고 다녔기 때문에 훔쳐볼 기회가 없었을 텐데.)
곽정은 즉시 노유각을 불렀다.
[노장로님, 이 병서를 보고 싶다면 제가 빌려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거지가 장군이 될 리도 없는데 병서는 보아 뭘 하겠습니까.]
노유각이 웃으며 거절하자 곽정은 그가 가져 온 종이를 내밀었다.
[그럼 어떻게 사반 호익진을 아셨지요?]
[제게 말씀을 해주시고도 잊으셨군요.]
곽정은 그가 거짓말을 하자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을 속이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 칭기즈 칸은 출정을 서둘렀다. 제1군 선봉은 차가타이와 오고타이가 통솔하고, 제 2군인 우군은 주치가, 제 3군인 좌군은 곽정이 통솔했다. 칭기즈 칸과 툴루이는 중군과 함께 뒤를 따라오며 지원하기로 했다. 호각 소리가 울리자 십여만 몽고 정병이 군량과 마초 등 군수품을 싣고 흐호탕탕 서쪽을 향해 출발했다.
대군은 어느덧 호라즘의 국경에 이르렀다. 무하마드의 병력이 많기는 했지만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몽고군의 적수는 아니었다.
이날 곽정의 부대는 나밀하반(那密河畔)에 주둔했다. 저녁때 파오 안에서 병서를 읽고 있던 곽정은 문이 살짝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서는 것을 느꼈다. 파오 앞에 있던 호위병이 말리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그자가 손을 가볍게 놀렸을 뿐인데도 호위병이 모두 땅에 쓰러졌다. 곽정은 급히 병서를 품속에 넣고 일어섰다. 그자가 고개를 들고 웃는데 촛불에 비치는 얼굴이 서독 구양봉이 틀림없었다. 곽정은 중원에서 수만 리 떨어진 이역 땅에서 그를 만나자 놀랍기도 하거니와 반갑기도 했다.
[황소저는 어디 있습니까?]
곽정이 다짜고짜 묻자 구양봉이 우습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 계집애는 어디 있는가? 빨리 내놓아라.]
곽정은 이 말을 듣자 우선 반가웠다.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용아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저자의 마수에서 빠져 달아난 것이 틀림없고.)
그는 순박한 사람이라 표정을 감출 줄 몰랐다.
[그 계집애는 어디 있느냐?]
구양봉이 날카롭게 다그쳐 물었다.
[그녀가 강남에서 구양선생을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뒤에 어떻게 됐나요?]
구양봉은 곽정이 거짓말을 못하는 성품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황용은 틀림없이 곽정의 파오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아직 모르고 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구양봉은 바닥에 깔린 방석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곽정이 호위병의 눌린 혈도를 풀어 주고 술을 내오게 했다. 구양봉은 술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자네에게 말을 해도 상관없겠지. 그 계집애를 가흥부 철창묘에서 내가 잡아 놓았는데 그날 밤 달아나 버리고 말았네.]
곽정은 몹시 기뻐하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워낙 영리해서 달아나고 싶으면 얼마든지 달아날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달아났습니까?]
[태호 옆에 있는 귀운장에서...., 홍, 말을 해야 무슨 소용이 있나. 이미 달아나 버린걸.]
곽정은 구양봉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자기 실수를 자기 입으로 말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더 이상 물어야 소용없었다.
[그 계집애가 달아난 후 난 계속해서 쫓아다녔지. 몇 번 잡을 뻔했지만 어찌나 잽싼지 용케 괴하더군. 그러나 내가 워낙 바짝 쫓아다니는 바람에 도화도에 갈 기회가 없었네. 우린 쫓고 쫓기며 몽고까지 왔는데 그녀가 그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네. 아무래도 그녀가 자네 군중에 있는 것 같으니 여길 지키고 있는 게 상책이란 말일세.]
곽정은 황용이 몽고에 왔다는 말을 듣자 뛸 듯이 기뻤다.
[그래 만나 본 일이 있나요?]
[만났으면 벌써 잡았게. 내 밤낮으로 군중을 엿보고 있었는데 틀림없이 여기 있어.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야. 그런데 도대체 자넨 무슨 놀음을 하고 있는가?]
[아니, 밤낮 여기를 엿보고 계셨다구요? 그럼 왜 저는 그걸 전연 몰랐을까요?]
[나는 자네 천전충대(天前衝隊)에 속해 있는 서역의 소졸일세. 그러니 날 알아볼 수 있었겠나?]
원래 몽고군 가운데는 적의 포로가 많았다. 구양봉은 서역 사람이니 그들 속에 섞여 있었다면 쉽게 발각될 리 없었다.
第 六 卷. 第 六 章.(通卷 章). 숨바꼭질
곽정은 구양봉의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저자가 만약 나를 해치려 했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겠구나.)
[그런데 어째서 용아가 제 군중에 있다는 말씀을 하시지요?]
[자네가 대칸의 두 아들을 잡았고 또 성을 함락하여 적까지 섬멸했는데 만약 그 계집애 도음이 아니었으면 자네 재주로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런데도 그 계집애가 시종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단 말일세. 이제 다른 방법이 없으니 자네가 그 계집애를 내놓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별수 있겠나?]
[만약 용아가 나타난다면 그보다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녀가 나타났다고 제가 구양선생께 내놓을 것 같습니까?]
[내놓지 않는다면 내게도 방빕이 있지. 자네가 비록 많은 병사를 호령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흥, 어림없는 수작이지. 내겐 무인지경이나 다름이 없어.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게지. 누가 감히 날 막는단 말인가?]
그의 호언장담은 말뿐이 아닌 엄연한 사실이라 곽정으로서도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여보게, 우리 이렇게 약속하면 어떨까?]
[무슨 약속을요?]
[자네가 만약 그녀가 숨은 곳을 알려 준다면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기로 하겠네. 그러나 알려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언제까지나 찾지 못하란 법은 없을 테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 가서는 흥, 별로 좋은 일은 없을 거야.]
곽정은 그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만한 힘이 무궁무진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말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을 했다. 황용이 이 세상에 살아 있고 또 도화도로 들어가 숨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구양봉에게 잡히고 말 것이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구양선생이 말씀하신 그대로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구양선생, 지금 구양선생의 무공은 저보다 월등합니다. 그러나 저는 나이가 어립니다. 언젠가 구양선생이 늙고 기운이 다할 경우에는 저를 이기지 못하실 겁니다.]
구양봉은 아직까지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보 같은 녀석이 꽤 그럴듯한 말을 다 할 줄 아는군.)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저와 구양선생은 철천지원수가 아닙니까? 제 사부님을 살해한 원수는 언제고 갚고야 말겠습니다. 구양선생이 어디로 달아나든 저는 기필코 찾아가 복수를 하겠습니다.]
[그럼 내 늙어 기운이 없어지기 전에 자네를 죽여 없애면 될 게 아닌가?]
구양봉은 껄껄 웃으며 말을 마치자마자 두 다리를 벌리고 엉거주춤 일어나 산과 바다를 밀듯 쌍장을 내밀었다.
이때 곽정은 역근단골편을 수련한 뒤라 무공이 크게 상승되어 있었다. 구양봉의 장력이 엄습하자 곧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장세를 피하고 견룡재전의 솜씨로 반격을 했다. 이는 홍칠공에게 배운 재주로 장력이 극히 강했다. 구양봉도 즉각 손을 뻗어 막았다. 이 항룡십팔장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았다. 그러니 이쯤은 막을 자신이 있다고 믿으며 덤비는 순간 그만 몸이 흔들릴 뻔했다. 고수들이 대결할 때 잠시라도 기세가 빠지면 즉시 중상을 입는다. 구양봉은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는 생각을 했다.
(내 늙기도 전에 이 녀석이 나를 능가하겠구나.)
구양봉이 왼손을 뻗어 공격했다. 곽정이 또 몸을 옆으로 피하며 반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양봉도 그냥 막는 것이 아니라 팔을 구부려 그의 장력을 풀어 버렸다. 곽정은 장력을 운용하는 비결을 몰랐다. 그냥 자기의 공력을 사라지게 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구양봉이 팔을 구부리자 어마어마한 반격의 힘이 쏟아져 왔다. 곽정은 한 줄기 강한 힘이 자기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직감하면서 피할 겨를이 없자 오른손을 뻗어 막았다.
두 사람의 공력을 보면 곽정은 아직도 그에 비해 처지는 데가 많았다. 이때의 형세는 예전에 황궁의 수렴 동굴에서 대결할 때와 비슷했다. 시간이 길어지면 곽정은 또 죽거나 부상을 당할 판이었다. 구양봉은 예측한 대로 곽정이 자기 속임수에 걸려들자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 그는 곽정의 오른손이 약간 수그러지는 듯하자 또 한 번 힘을 주었다, 그런데 오른손이 그냥 미끄러지며 피해 버렸다. 구양봉이 다시 기합 소리와 함께 장력을 질풍처럼 날렸다.
(오늘이 바로 네놈 제삿날이다.)
구양봉의 손끝이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곽정은 좌장을 옆으로 뻗어 막으며 오른손 식지를 뻗어 그의 태양혈을 찍으려고 했다. 이는 일등에게서 배운 일양지의 공력으로 오랫동안 연습은 했지만 써본 일은 없었다. 일양지는 바로 합마공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재주였다. 이를 본 구양봉이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잽싸게 두 발을 모아 뒤로 뛰어 피했다.
[단지흥 그놈의 영감까지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을 했구나.]
사실 곽정이 배운 일양지는 아직 합마공을 깰 만한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구양봉이 너무나 놀라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피했을 따름이었다. 일양지의 재주는 그 후속 동작이 무궁무진한데도 곽정은 한 번만 찌르고 손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아직 완전히 배우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구양봉은 이를 눈치채고 쌍장을 아래위로 교차시키면서 맹격을 퍼부었다. 어찌나 재빠른 솜씨인지 곽정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몸을 날려 간신히 피했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파오 안에 있던 탁자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구양봉은 곽정을 수세에 몰아넣고 계속적인 공격을 폈다. 그런데 갑자기 등뒤에서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구양봉은 누군가가 배후에서 기습을 하는 걸 느끼고 재빨리 뒷발질을 했다. 배후의 그 사람도 발길질을 했다. 두 사람의 발과 발이 부딪치는 순간 그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구양봉으로서는 그 사람의 다리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구양봉이 고개를 돌리니 파오 문 어귀에 늙은 거지 세 명이 보였다. 바로 개방의 노, 간, 양 세 장로였다.
노유각이 몸을 날려 두 팔로 간, 양 두 장로의 팔을 한쪽씩 잡았다. 이는 개방 방중이 소수와 대결할 때 쓰는 방법으로 약세로 강한 적을 막는 기술이었다. 당일 군산에서 방주를 옹립할 때 개방은 이를 이용해 사람 울타리를 만들어 곽정과 황용을 속수무책의 곤경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이 거지들 모두가 고수임을 알고 있었다. 자기와 곽정이 1대 l로 대결하는 것이라면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이 거지 떼마저 합세를 하면 불리해질 게 뻔했다. 구양봉은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상책이다 싶자 금세 안색을 바꾸며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보게, 자네 공력이 크게 발전했군 그래. 무슨 약속을 어떻게 하려는지 들어나 보자구.]
구양봉은 두 다리를 구부려 담요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 노유각 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황소저에게 구음진경을 해석해 달라고 그러시는 모양인데 해석을 하든 말든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마음에 달린 것이니 절대로 그녀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가 말만 한다면 나도 해치고 싶은 마음은 추흐도 없네. 그래 황노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그러나 그녀가 말을 않는다 해도 그냥 멀거니 있으란 말인가?]
[그냥 계셔야 합니다.]
[그럼 내가 그리 한다면 자넨 내게 무엇을 주겠나?]
[오늘부터 구양선생이 내 수중에 걸려도 세 번까지는 목숨을 살려 드리기로 하지요.]
구양봉은 이 말을 듣고 일어서며 껄껄 웃었다. 그의 웃음 소리는 어찌나 날카로운지 멀리까지 퍼져 초원 위에 있던 말들이 놀라 한참 동안이나 울었다. 곽정은 꼼짝도 하지 않고 다만 두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뭐 별로 웃을 일도 아닙니다. 언제고 제 손에 걸릴 날이 있을 테니까요.]
구양봉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무언지 모를 두려음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계속 웃으면서도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 구양봉이 자네 같은 어린애에게 용서를 받는다, 그 말인가? 그럼 어디 두고 보세.]
곽정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장부의 일언은.]
[중천금일세.]
구양봉이 웃으며 받아넘기고 손을 내밀어 곽정의 손바닥을 세 번 쳤다. 이렇게 세 번 치는 것은 송나라 사람들이 맹세할 때 하는 의식이었다. 만약 한쪽이 그 약속을 어기면 평생의 수치로 남아 세상 사람의 비웃음을 사는 것이다.
구양봉은 곽정과 맹세의 의식을 치른 후 다시 황용의 종적을 물으려고 하다가 갈라진 파오 틈 사이로 누군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어찌나 몸놀림이 재빠른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열흘 안에 다시 한 번 찾아오겠네. 자네가 나를 용서하게 될지 아니면 내가 자네를 용서하게 될지 그때 가서 보자구.]
구양봉은 말을 마치고 껄껄 웃으며 나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수장 밖에 가 있었다. 노,간,양 세 장로는 어리둥절해하며 멀뚱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저 사람의 무공은 정말 뛰어나구나. 그러기에 능히 홍방주님과 비슷한 명성을 누리고 있겠지.)
곽정은 구양봉이 찾아온 까닭을 세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황방주님이 우리 군중에 계시다구요? 어림없는 얘기예요. 만약 정말 계시다면 우리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노유각이 이러니저러니 말을 하려는데 곽정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오히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황소저가 내곁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의문이나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묘안을 제시해 주거든요. 제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애를 태우는데도 만나 볼 수 없을 뿐이지요.]
여기까지 말하다 곽정은 그만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너무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별은 잠깐이요, 앞으로 꼭 만나시게 될 겁니다.]
노유각이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제가 황소저에게 득죄를 해서 다시는 저를 만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만 속죄가 될지 알 수 없군요.]
노, 간, 양 세 장로는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나와 말은 안 해도 좋으니 그저 한번 만나만 봐도 이토록 괴롭지는 않을 것 같군요.]
[곽선생, 피곤하신 모양이니 일찌감치 쉬도록 하세요. 내일 저희가 구양봉을 막을 묘책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간장로가 하는 말이었다.
이튿날도 몽고의 대군은 계속 서행을 했다.
해가 저물어 주둔한 곽정의 파오에 노유각이 들어섰다.
[소인이 연전 강남에서 그림 한 폭을 입수한 일이 있는데 저 같은 필부가 어찌 그 내용을 알겠습니까? 곽선생께서 심심하실 것 같아 감상하시라고 여기 가져 왔습니다.]
곽정은 노유각이 펼쳐 놓은 두루마리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머리에 꽃을 꽂은 소녀 하나가 베틀에 앉아 명주를 짜고 있는 그림인데 그 얼굴 생김새가 어쩌면 그렇게도 황용을 닮았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다른 게 있다면 얼굴이 약간 여위고 수심에 잠긴 듯 초췌해 보이는 것뿐이었다.
곽정은 그리움이 샘물처럼 솟는 것을 느끼며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용아의 솜씨가 틀림없다. 그런데 노장로가 이걸 어디서 구했을까?)
곽정이 고개를 들어 물어 보려고 했지만 노유각은 언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친병을 시켜 노유각을 찾아오게 했다. 그런데 노유각은 강남의 책방에서 산 것이라고 우겼다. 제아무리 미련한 곽정이었지만 노유각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그가 끝끝내 버티니 시원한 대답을 들어 볼 도리가 없어 안타깝기만 했다. 이때 간장로가 들어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소인이 방금 동북방에 사람 그림자가 스치는 것을 보았는데 금방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습니다. 혹시 오늘 밤 구양봉이 또 습격해 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럼 우리 네 사람이 여기 있다가 함께 사로잡아 버립시다.]
[소인에게 꾀가 하나 있는데 적당할지 모르겠군요.]
[어디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이 계책은 사실 아주 평범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깊은 구덩이를 파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졸 이십여 명에게 모래 부대(袋)를 가지고 파오를 지키게 합니다. 그자가 오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다시 나타나 곽선생을 귀찮게 한다면 다시는 못 빠져 나가게 만드는 것이지요.]
곽겅은 이 계책을 듣자 옳다꾸나 싶어 매우 기뻤다. 구양봉은 자만심이 대단한 사람이라 언제나 다른 사람을 깔보았다. 평범한 방법이었지만 그를 골탕먹이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세 장로는 즉시 부하들을 시켜 이십여 장이나 되는 깊은 구덩이를 파게 했다. 그리고 그 구덩이 위에 담요를 깔고 담요 위에 다시 가벼운 나무 의자 세 개를 올려 놓았다. 또 건장한 부하 이십여 명이 모래부대를 가지고 숨어 지키기로 했다. 이들은 사막을 행군할 때 늘 구덩이를 파 물을 구하기 때문에 별로 다른 사람 눈에 띄지도 않았다.
일이 다 끝나자 곽정은 촛불을 밝히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밤 구양봉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행군 후에도 세 장로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지만 끝내 다른 동정이 없었다. 나흘째 되던 날 밤 곽정은 군중에서 순라군들이 구리로 만든 솥을 두드려 경계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때 드디어 파오 밖에 낙엽이 떨어지듯 구양봉이 나타났다.
구양봉은 와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에 앉은 채 깊은 구덩이 속에 빠졌다. 구양봉이 제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이십여 장이 넘는 구덩이 속을 그리 쉽게 올라올 수는 없으리라.
이어서 노유각이 오른손을 흔들자 친병 이십여 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사십여 개의 모래 부대를 일제히 구덩이 속으로 던졌다. 구양봉은 결국 모래 부대 밑에 깔리고 말았다. 이를 본 노유각이 유쾌하게 웃었다.
[황방주님의 계책은 역시 용의주도하단 말이야.]
간장로가 눈을 흘기자 노유각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황방주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곽정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묻자 노유각은 또 딴전을 부렸다.
[소인의 말이 헛 나왔군요. 저는 홍방주님을 말한 것인데요. 만약 홍방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시면 꽤나 좋아하셨을 텐데요.]
곽정이 다시 한 번 캐물으려고 하는데 돌연 친병들이 왁자지껄하게 소란을 떨었다.
곽정과 세 장로는 급히 달려가 친병들이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았다. 구덩이 속의 모래 부대가 점점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무슨 물건이 그 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것 같았다.
(구양봉의 무공이 정말 대단하구나. 그 깊은 곳에서 모래 부대를 뚫고 올라오다니.)
곽정이 즉각 호령을 내리자 십여 명의 기병이 말에 올라 그 구덩이 위를 밟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사람과 모래의 무게만 해도 상당한데 게다가 그 위로 말이 달리고 있으니 천하의 구양봉도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다. 기병들은 모래 부대가 꿈틀거리는 듯하면 그곳을 집증적으로 밟았다. 이렇게 한참 동안 밟고 다니자 모래 부대가 다시는 꿈틀거리지 않았다. 구양봉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은 모양이었다.
곽정은 기병들을 시켜 시체를 끄집어 올리게 했다. 벌써 자시(子時)가 넘은 때라 어둠 속에서 친병들이 촛불을 들고 명사들 십여 명이 모래를 파올렸다. 십여 장 깊이까지 파들어 가자 구양봉이 뻣뻣하게 굳어 모래 속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은 파오 안 구덩이에서 이십여 장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모래가 흙보다 단단하지는 않다지만 맨 손으로 숨을 죽인 채 이렇게 땅을 파고 자리를 옮겼다면 두더지나 다름없는 기막힌 내공이었다. 병사들은 한결같이 놀라면서 그를 꺼내 바닥에 비스듬히 눕혔다.
노유각이 누워 있는 그의 가슴을 만져 보니 아직도 따뜻했다. 노유각은 병사들에게 구양봉을 묶을 쇠사슬을 가져 오라고 했다. 그런데 구양봉은 숨을 죽인 채 죽은 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래 속을 뚫고 올라오려고 했지만 말발굽에 눌려 올라올 수 없게 되자 잠시 가사 상태로 들어간 것뿐이었다. 그는 이제 귀신도 모르게 가볍게 숨을 몰아 쉬며 기회를 보아 달아나려고 했다. 그때 노유각이 쇠사슬을 가져 오라고 시키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구양봉은 순간 벌떡 일어나며 대갈일성하며 그의 오른손 맥문을 움켜잡았다. 어찌나 창졸간에 일어난 일인지 모두들 죽었던 사람이 부활하는 줄만 알고 화들짝 놀랐다.
이를 본 곽정이 달려들어 왼손으로 그의 거골혈(巨骨穴)을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봉안혈(鳳眼穴)을 눌렀다. 이 두 혈도는 모두 사람 등뒤에 있는 대혈이다. 구양봉이 어떤 사람인데 이런 대혈을 눌리겠는가? 만약 모래 밑에 깔려 축으려다가 살아나지 않았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구양봉은 깜짝 놀라 반격을 하려고 했지만 혈도가 벌써 마비되고 있는 걸 느꼈다. 그래도 곽정이 꽉 누르지 않고 있기에 망정이지 만약 장력에 힘만 준다면 자기의 오장육부는 금방 터지고 말 것이다. 구양봉은 어쩔 수 없이 노유각의 팔을 놓았다.
[구양선생, 한말씀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래 황소저를 만나 보셨습니까?]
[내 그녀의 옆모습을 보고 여기로 찾아은 것이오.]
[정말 똑똑히 보시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만약 그 계집애가 여기 없다면 어떻게 자네가 구덩이를 팔 생각을 했겠나?]
곽정은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자, 가보시지요. 약속대로 이번엔 용서해 드리지요.]
곽정은 오른손을 가볍게 뻗어 그를 멀찍이 밀어 버렸다. 구양봉을 그냥 놔주었다가는 반격이나 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구양봉은 고개를 돌려 곽정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 어린 후배들과 싸울 때 병기를 써본 일이 없었네. 그러나 자네 곁에서 그 계집이 도와줄 때는 예외일 수밖에 없지. 십 일 이내에 사장을 들고 다시 찾아오지. 사장의 독은 자네도 직접 본 바 있으니 조심하게나.]
곽정은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표연히 사라져 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바탕 북풍이 불자 으스스 추운 한기가 뼈 속까지 느껴졌다. 곽정은 그의 사장의 독을 생각하니 은근히 겁이 났다. 강남 육괴에게 여러 가지 병기 사용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모두 상승의 무공은 아니었다. 적수공권으로 사장과 대결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병기를 사용하고자 해도 딱히 쓸 만한 것도 없는 형편이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문득 올려다본 밤 하늘엔 어두운 구름만 흘러가고 있었다.
곽정이 파오로 돌아왔을 때 날은 더욱 차가워졌다. 병사들이 숯불을 피우고 말들을 춥지 않은 천막 안으로 몰아넣었다. 개방 사람들은 가죽옷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자 당황했다. 곽정은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양을 잡아 가죽을 벗기게 했다. 그러나 미처 바느질을 할 겨를이 없어 그냥 몸에 걸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은 더욱 추워 눈조차 꽁꽁 얼어붙었다. 호라즘의 군대는 추위를 틈타 공격을 해왔다. 그러나 곽정은 미리 준비를 하고 있다가 용비진(龍飛陣)으로 크게 이기고 계속 북상하며 그들을 추격했다.
곽정은 오랫동안 북쪽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정도 추위쯤은 능히 견딜 수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만약 황용이 군중에 숨어 있다면 강남에서 살던 그녀가 이 추위를 어떻게 견딜까 걱정이 되었다.
다음날 숙영을 할 때 그는 슬그머니 군중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녔다. 그러나 어디를 가보아도 황용의 그림자는 없었다. 자기의 파오로 돌아오니 노유각이 사병들을 시켜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구양봉이 얼마나 교활한 사람인데요. 한번 골탕을 먹었으면 그만이지 두 번씩 걸려들 리 있겠어요?]
[그야 물론 저희가 다른 계책을 쓸 것으로 알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또 걸려들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바로 허허실실이라는 것입니다.]
곽정은 노유각을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병서에 있는 말들인데 또 어디서 알았을까.)
[그러나 모래 부대로 누른다면 소용이 없겠지요. 어떻게 해서든 빠져 나올 테니까요. 그러니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써봐야겠습니다. 모래 부대를 쓰는 것이 아니라 끓는 물을 붓는 것입니다.]
곽정은 수십 명의 병사들이 장막 밖에 가마솥을 걸어 놓고 얼어붙은 눈을 도끼로 찍어 솥 안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럼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것이 아니오?]
[곽선생께서 그를 세 번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만약 이번에 끓는 물에 데어 죽는다면 그게 뭐 선생님의 손에 걸린 것도 아니요, 용서하려야 용서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 약속을 어겼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요.]
시간이 지나자 깊은 구덩이가 파졌다. 병사들은 노유각의 지휘에 따라 구덩이 위를 원상으로 회복하고 담요를 깐 뒤에 나무 의자를 옮겨 놓았다. 파오 밖의 군인들이 솥 밑에 불을 피우자 얼음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날씨가 추운데다가 솥 몇 개는 땔감을 늦게 가져다 놓는 바람에 일단 녹았던 물도 다시 얼어붙었다.
[빨리 불을 지펴라!]
노유각이 재촉을 하는데 홑날리기 시작한 눈발 사이로 사람 그림자 하나가 번쩍했다. 어느 틈에 나타난 구양봉이 사장 끝으로 파오의 문짝을 걷어 올렸다.
[이 바보야. 다시 구덩이를 파놓았다 하더라도 이 나으리, 눈 하나 깜박이지 않겠다.]
구양봉은 쏜살같이 들어와 나무 의자에 앉았다.
노, 간, 양 세 장로는 구양봉이 이렇게까지 빨리 나타날 줄은 몰랐다. 이때 솥 안의 얼음은 겨우 녹기 시작하여 차디찬 물만 가득 고여 있을 뿐이었다. 삶아 죽이기는 고사하고 목욕을 하라고 해도 차다고 할 판이었다. 세 장로는 구양봉이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도 마음속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어쨌든 구양봉은 와당탕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함정 속에 빠졌다. 세 장로는 함정에 걸려든 구양봉을 보고도 속수 무책으로 곽정이 다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빨리 밖으로 피신하십시오.]
그런데 등뒤에서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빨리 물을 부어요.]
노유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친병들은 솥째 들어다 구덩이 안으로 물을 쏟아 부었다. 구양봉은 솟아오르려고 기합을 넣다가 머리 위로 물이 쏟아지자 깜짝 놀라 다시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사장을 바닥에 버린 채 다시 한 번 기합을 넣고 뛰어오르려고 했다. 계속해서 물이 쏟아지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러나 워낙 날씨가 추웠다. 솥에서 쏟아져 내린 찬물은 구양봉의 머리에 닿는 순간 얼음덩이로 변해 버렸다.
그래서 구양봉은 뛰어오르다 그만 얼음덩이를 받아 버렸다. 어찌나 세게 받았는지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팠다. 다시 내려가 기운을 모아 뛰어오르려고 하는데 두 발이 얼어붙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가 놀라 소리를 지르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니 두 발은 겨우 빠졌지만 이젠 하체가 얼어붙었다. 친병들이 구덩이에 물을 쏟아 붓는 것은 사전에 충분히 연습이 되어 있었다.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우선 물을 쏟고 한쪽으로 물러나면 다른 네 사람이 즉시 앞으로 나서서물을 쏟음으로써 마치 물방아처럼 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끓는 물을 스다간 델까 봐 사전에 손과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 하나 냉수로도 도적을 이렇게 쉽게 잡으리라고는 예기치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개의 가마솥 물을 모두 구덩이에 쏟았다. 이렇게 되자 십여 장 높이 얼음 기둥에 구양봉이 갇힌 걸과가 되었다.
다른 방법이 없어 그냥 해본 일이 일거에 성공을 거두자 모두들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세 장로는 병사들을 통솔하여 얼음 기둥 주위의 모래를 제거하고는 단단한 밧줄을 내려 얼음 기둥을 묶어 맨 후에 말 20여 필을 동원하여 밧졸을 당기게 했다. 얼음 기둥이 지상으로 올라오자 몽고 병사들은 사방에서 몰려와 구경을 했다. 병사들은 달려들어 이 희한한 얼음 기둥을 에워싸고 만세를 불렀다. 횃불이 비치는 가운데 구양봉이 이를 악문 채 얼음 기둥에 갇혀 꼼짝못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유각은 구양봉의 내공이 워낙 대단해 흑시라도 내럭으로 얼음을 녹이고 뛰쳐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더 많은 물을 얼음 기둥에 붓게 했다. 그러자 그 기둥은 자꾸만 굵어졌다.
[내 그에게 세 번 용서하고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얼음을 깨고 놓아주도록 하시오.]
곽정의 말에 세 장로는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호걸은 신의를 지킬 줄 알아야 하기에 그들로서도 할말이 없었다. 노유각이 쇠망치를 들어 얼음 기둥을 두드리는 것을 보고 간장로가 나섰다.
[곽선생님, 구양봉의 공력으로 이 얼음 기둥 속에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요?]
[한 삼 일쯤은 버틸 수 있겠지만 삼 일이 지나면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걸요.]
[그럼 우리 사흘 뒤에 구해 주지요.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고생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곽정도 사부님을 살해한 원수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소문이 퍼지자 다른 만인대의 병사들까지 구경을 하러 몰려왔다. 그 모습을 본 곽정이 노유각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자고로 선비는 죽일 수는 있지만 모욕은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자가 간사하고 잔인무도하지만 그래도 무학의 종사인데 다른 사람의 놀림감이 되게 버려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즉시 사병에게 명하여 천을 구해다가 얼음 기둥을 가리게 하고는 군사를 파견해 지키게 해놓고 함부로 구경을 시키지 않았다.
삼 일째 저녁이 되자 세 장로는 얼음을 깨고 구양봉을 꺼냈다. 구양봉은 반시간 이상 묵묵히 앉아 정신을 가다듬다가 검은 피를 세 번 토하고 이를 갈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곽정과 세 장로는 그가 사흘 동안이나 얼음 속에 갇혀 있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나자 탄복해 마지 않았다.
곽정은 이 사흘 동안 공연히 마음이 산란했다. 처음에는 구양봉이 옆에 있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으나 구양봉이 이미 떠났는데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곽정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왜 그랬던가 원인이 생각났다.
구양봉을 사로잡던 날 노유각에게 속삭였던 낮은 목소리가 기억이 난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어쩌면 황용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구양봉이 함정에 빠지는 바람에 급하고 당황해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들려 온 목소리.... 이 사흘 내내 물을 부으라고 하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았었다. 곽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용아는 이 군중에 있다. 모든 장수들을 소집해 조사한다면 설마 못 찾을까?]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나를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데 내가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곽정은 노유각이 준 그림을 펼치고 그림 속 소녀를 언제까지나 바라보았다.
조용한 밤이다. 먼 곳에서 쾌마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위병이 외치는 소리와 함께 칭기즈 칸의 군령을 전달하는 사자가 들어왔다. 각기 나뉘어 진군을 하고 있던 몽고군은 곳곳에서 승승장구, 이제 다시 서쪽으로 수백 리만 가면 호라즘의 사마르칸트(撒魔爾罕)란 성에 도착할 것이다. 칭기즈 칸은 척후병으로부터 이 성이 호라즘의 새로운 도읍지라는 말을 들었다. 정병 십여만이 지키고 있는 무기와 군량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는 난공불락의 성으로서, 사방으로 홑어진 군마를 집결, 일시에 공략을 하자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곽정은 부대를 인솔, 나밀하반을 끼고 남쪽에 있는 사마르칸트 성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행군 십여 일 만에 사마르칸트 성 아래에 도착했다. 성안에서는 곽정의 군대가 적은 것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달려 나와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곽정은 풍양(風揚)과 운수(雲垂) 두 가지 진법을 이용해 반나절 동안에 적군 5천여 명을 살상했다. 호라즘군은 크게 패해 성안으로 퇴각했다.
사흘이 지나자 칭기즈 칸의 대군과 주치, 오고타이의 양군이 속속 도착해 몽고군 십여만 명이 사방에서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어찌나 철통같이 방어를 하는지 몽고군은 수일 동안 공격을 했어도 적지 않은 인명 피해만 냈을 뿐 끝내 공략에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또 하루가 지났다. 그 사이 차가타이의 아들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공을 세우겠다고 덤비다가 그만 머리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평소 이 손자를 몹시 귀여워하던 칭기즈 칸의 슬픔은 누구보다도 컸다. 친병이 왕손의 시체를 가져다 그의 앞에 놓았다. 이를 바라보는 칭기즈 칸의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그는 손자를 품에 안고 머리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화살에 대금조왕(大金趙王)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완안열 그놈이구나!]
칭기즈 칸은 이를 부드득 갈며 말에 올라 호령을 했다.
[대소 장수들은 듣거라. 누구든지 용감하게 나서서 이 성을 깨고 완안열을 잡아 왕손을 위해 복수를 해주는 자에게 이 성에 있는 여자와 보물과 비단을 있는 대로 다 상으로 주리라.]
칭기즈 칸의 뒤에 서 있던 일백어 친병들이 대칸의 명령을 큰소리로 복창했다. 삼군은 이 말에 용기백배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순식간에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날며 사방은 살기충천해졌다. 흙을 쌓아 올리는 사람, 사다리를 마련해 기어오르는 사람, 거목을 구해다 성곽을 치는 사람, 형형색색이었다. 그러나 성안의 방어도 결사적이었다. 저녁나절이 되자 몽고군만 4천여 명이 살상당했을 뿐 사마르칸트 성은 전연 손상을 입지 않았다. 칭기즈 칸이 군대를 이끌고 호라즘에 들어 온 이후 처음 당하는 참패였다. 그날 밤 그는 파오 안에서 손자를 잃은 비통에 벼락같은 화만 내고 있었다.
곽정은 처소로 돌아와 무목유서를 들쳤다. 성곽을 깰 방법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르칸트 성의 성벽과 방어는 중국의 어느 성과도 크게 달랐다. 제아무리 대단한 무목유서라 해도 이럴 땐 소용이 없었다. 곽정은 노유각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노유각은 틀림없이 황용에게 방법을 물어 볼 것이다. 곽정은 그가 나간 뒤에 슬그머니 뒤를 밟았다. 그런데 노유각의 앞뒤에는 개방 방중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곽정을 보자 우렁찬 군호로 인사를 했다.
(이거야 물론 황용이 시킨 것이겠지. 그녀가 나를 이렇게 피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그녀를 만난단 말인가? 내 일거일동을 모두 다 알고 있겠구나.)
한 시간쯤 지나자 노유각이 다시 나타났다.
[이 큰 성을 급히 공격한다 해서 함락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며칠 지켜 봐야겠습니다. 적군의 허점이 발견되면 다시 계책을 짜보지요.]
곽정은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 몽고를 떠나 남행을 할 때 철부지 소년에 불과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러나 일년 동안 수많은 우환과 난관을 겪으며 견식도 꽤 많이 넓혔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날 밤 그는 노유각이 준 그림의 소녀를 바라보며 마냥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운 정이 사무쳐 안절부절못했다.
(용아가 결코 무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죄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워낙 우둔해서 어떻게 해야만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곽정은 이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도 엎치락뒤치락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삼경이 지나서야 겨우 몽롱하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 황용이 나타났다. 그는 재빨리 황용의 손을 부여잡고 어떻게 해야 사죄가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황용이 귀엣말로 몇 마디 소곤거렸다. 꿈속에서도 반가워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깨어나 생각해 보니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곽정은 너무나 답답해 자기 머리를 마구 쥐어박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빨리 노장로를 모시고 오게]
노유각은 무슨 급한 군무가 있는 줄 알고 양피를 둘러쓴 채 맨발로 달려왔다.
[노장로님, 내일 저녁 세상 없는 일이 있어도 황소저를 한번 만나봐야 하겠습니다. 노장로님 혼자 생각해 보시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상의하든지 내일 오시까지는 묘책을 강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유각은 깜짝 놀랐다.
[황방주께서 여기 계시지 않은데 어떻게 만나려고 하십니까?]
[아니 노장로님은 꾀가 그렇게 많으시면서 이것 하나 해결하지 못한단 말씀입니까? 내일 오시까지 묘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군법으로 다스리겠소!]
노유각이 뭐라고 항변을 하려는데 곽정이 친병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내일 오시에 백 명의 도부수(刀斧手)를 대기시켜라.]
친병이 큰소리로 대답을 하는 걸 보며 노유각은 근심스런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큰눈이 내려 성곽이 꽁꽁 얼어붙었다. 마치 기름을 바른 듯 미끄러워 도저히 기어오를 재간이 없었다. 칭기즈 칸은 어쩔 수 없이 군사를 거두어 들이고 공격을 중지시켰다. 아직 봄이 오려면 몇 달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이 성을 포기할 수도 없거니와 그냥 주둔해 있을 처지도 아니었다. 포기하고 뒤돌아 서면 분명 역습을 당할 것이요, 주둔해 있는다면 계속 지원군이 운집하여 아군은 중과부적으로 궤멸당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방안을 오락가락하며 성곽 옆에 우뚝 선 설봉(雪峯)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 설봉은 생김새부터가 이상야릇했다. 평지에서 죽순처럼 솟아나 초원 위에 외롭게 서 있는 것이 마치 가지도 잎새도 없는 큰 나무 같았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설봉을 독목봉(禿木峯)이라고 불렀다.
사마르칸트 성은 산봉우리에 의지해 쌓은 성으로 서쪽 성벽이 바로 산봉우리인 셈이었다. 이렇게 하면 성을 쌓거나 토목 공사를 할 때 경비가 절감될 뿐만 아니라 견고하다. 당시 성을 쌓을 때 공정을 책임진 사람의 재주를 능히 알 수 있었다. 산봉우리 경사가 깎아지른 듯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단단한 돌이라 초목도 자라지 못했다. 원숭이 재주를 가지고도 오를 수 없는 산이었다. 그래서 사마르칸트 성은 난공불락의 천연의 요새가 된 것이다.
칭기즈 칸은 수심에 잠긴 채 반나절을 보냈다.
(내 크고 작은 수백 번의 전쟁을 치렀지만 오늘처럼 곤경에 빠진 일은 없었다. 혹시 하늘이 내 앞날을 막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큰눈이 어지럽게 내려 어느덧 낙타, 말, 파오 할 것 없이 모두 흰색으로 변했다. 성안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 올라 사람의 마음을 더한층 근심으로 몰아넣었다.
곽정은 또 다른 수심에 잠겨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모처럼 부린 만용을 황용이 식은죽 먹듯 묵살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또한 노유각이 정말 말을 안 한다 해서 그의 목을 자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정오가 되자 양옆으로 도부수들이 큰 칼을 들고 늘어섰다. 군중의 호각 소리로 보아 벌써 오시가 된 모양이었다. 그때 노유각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소인이 계책은 강구했지만 곽선생께서 그대로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빨리 말씀을 해보시지요. 제 목숨을 내놓으라 해도 내놓을 처지인데 뭐가 어렵겠습니까?]
노유각이 독목봉 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황방주께서는 오늘 밤 자시 정각에 저 봉우리 위에서 기다리시겠답니다.]
곽정은 기가 막혀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저 산봉우리에 올라간단 말이오. 흑시 나를 속이려고 하는 것 아니오?]
[그래서 제가 그대로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묘책을 강구해 드려도 소용이 없군요.]
노유각은 이 말을 끝내자마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에 휑하니 나가 버렸다.
(예기했던 그대로 황용의 말 한마디에 그만 속수무책이 되는구나. 독목봉은 철장산 중지봉보다 몇 배나 높고 몽고의 절벽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수리가 있다 하더라도 타고 올라갈 수 없지 않은가? 봉우리 위에 신선이 있어 사다리를 내려 줄 리도 없으니 야단났구나.)
곽정은 답답한 마음으로 도부수를 돌려보내고 즉시 독목봉 주변을 살펴보았다. 독목봉은 봉우리나 아래나 굵기나 같았고 주위에 두꺼운 얼음이 얼어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며칠 전에 구양봉이 갇혔던 얼음 기둥과 똑같았다. 봉우리가 생긴 이래 나는 새 외에는 사람이나 짐승이 그 위에 올라간 적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곽정이 고개를 젖히고 위를 올려다보는데 모자가 벗겨져 얼음 위로 떨어져 뒹굴었다.
[그렇겠지. 용아도 정말 내가 올라가려니 하는 생각은 아니었을 거야. 다만 내 성의가 어떤지 시험해 보고 싶었을 거야. 내 죽자 하고 올라가다가 실족을 해 떨어져 죽는다면 그것도 용아에 대한 사죄가 되겠지.]
곽정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답답하던 마음이 어느 정도 후련해졌다. 이날 밤 그는 저녁밥을 든든히 먹고 허리춤에 비수를 꽂은 채 밧줄을 짊어지고 나섰다.
그러자 노, 간, 양 세 장로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따라 나서며 말했다.
[저희들이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
곽정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나와 함께 오르겠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곽선생께서 황방주님과 만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용아가 나를 속이려고 공연히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는 기쁜 마음으로 세 장로와 함께 독목봉 아래로 갔다. 그곳에는 친병 십여 명이 수십 마리 양을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자, 잡으라구]
노유각의 말에 따라 친병 하나가 날카로운 칼로 양의 뒷다리를 자르더니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양 다리를 그대로 봉우리에 갖다 댔다. 삽시간에 양 다리가 쇠못을 박은 것보다 튼튼하게 얼어붙었다. 곽정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 사이에 다른 친병이 또 양 다리를 잘라 얼어붙은 양 다리 위쪽에 댔다. 두 다리 사이가 넉 자 정도 떨어졌다. 곽정은 이때야 비로소 세 장로가 양의 다리를 이용해 사다리를 놓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혹한의 날씨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노유각이 펄쩍 뛰어 두 번째로 얼어붙은 양 다리를 타고 올라섰다. 간장로가 또 양 다리를 잘라위로 던지니 노유각이 받아 다시 붙였다.
잠시 후에 이 양 다리로 만든 사다리는 십여 장 높이로 올라갔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지자 아래서 던진 다리가 미처 그 자리로 올라가기도 전에 얼어붙어 떨어졌다. 곽정과 세 장로는 이제 양을 산 채로 밧줄에 묶어 끌어올리게 했다. 그 자리에서 잡아 그냥 붙이는 것이다. 사다리가 산중턱까지 올라가자 바람이 지상보다 더 세게 불었다. 다행히 네 사람의 무공이 다른 사람에 비해 출중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두 다리로 간신히 버티어 이 작업을 계속했다. 드디어 밤이 깊어서야 겨우 양 다리로 만든 사다리가 정상에 닿았다. 세 장로도 지쳤지만 곽정도 땀에 흠뻑 절어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노유각이 가쁜 숨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곽정은 고마운 마음에 몸둘 바를 몰랐다.
[정말 어떻게 세 분께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거야 방주님의 분부시니 이보다 어려운 일이라도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참 이상한 성격을 가진 방주님도 다 모셔 봅니다.]
세 사람은 임무를 완수하자 흘가분한 마음으로 봉우리를 내려갔다. 그들은 미끄러워 실족하지 않도록 각기 밧줄로 허리를 묶은 채 서로 도와 가며 내려갔다.
곽정은 그들이 안전하게 중턱까지 내려가는 것을 보고서야 몸을 돌렸다. 산봉우리의 경치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만년설이 유리 세계를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고목이나 꽃 같은 얼음이 있는가 하면 괴상한 짐승 모양을 한 것도 있고 또 바위같이 생긴 것도 있어 볼수록 기기묘묘했다. 곽정이 탄성을 지르며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등뒤에서 깔깔대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웃음 소리를 들은 곽정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이 굳었다. 달빛 아래 흰옷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몽매에도 잊지 못해 그리던 황용이었다.
곽정은 용아를 봉우리 위에서 만날 줄은 알았지만 정작 눈앞에 두니 꿈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둘은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하고 바라보다가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이 앞서 미처 조심할 겨를도 없이 달려가다가 그만 동시에 미끄러졌다. 곽정은 황용이 혹시 다치지 않을까 염려되어 재빨리 달려가 부둥켜안았다. 그토록 보고 싶어했으면서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들이라 껴안은 채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꿈결 같은 시간이 흐른 뒤 황용은 곽정의 품을 벗어나 돌의자처럼 우뚝 솟은 얼음 위에 앉았다.
[그토록 저를 만나고 싶다고 야단을 부리지 않았다면 저는 오지 않았을 거예요.]
곽정은 넋을 잃은 듯 쳐다보기만 할 뿐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용아!>라는 한마디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곽정은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황용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황용이 <네> 하고 대답하자 곽정은 미칠 듯 기뻐 자꾸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용아!]
[그렇게 제 이름을 불렀는데도 아직 부족하신가요? 비록 오빠 곁에는 없었지만 전 하루에도 수십 번 부르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들었지?]
[오빠는 저를 보시지 못했지만 전 늘 오빠를 보고 있었는걸요.]
[아니 계속 내 군중에 있었다면 왜 보질 못했을까?]
[아니 무슨 염치로 그런 말씀을 다 하시지요? 내가 안전한 걸 알면 금방 화쟁 공주와 결혼할 텐데요. 차라리 제 무사함을 안 알리는 것이 마음이 편했어요. 제가 그토록 바보인 줄 아셨나요?]
황용이 화가 나서 쏘아붙이자 곽정은 할말이 없었다. 어느덧 반갑고 즐겁던 마음이 점차 식고 새로운 슬픔이 밀려들었다. 황용은 그런 곽정에겐 아랑곳하지 않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저 수정궁 얼마나 예뻐요. 우리 저 안에 들어가 얘기해요. 네!]
곽정이 황용의 눈길을 따라가 보니 커다란 얼음 덩어리 가운데에 굴이 하나 보였다. 달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것이 정말 수정을 깎아 만든 궁전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들어가 나란히 앉았다.
[또 도화도에서 제게 어떻게 대했나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도 제가 오빠를 용서해 드려야 하나요?]
곽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황용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용아, 내가 사과의 절부더 할게.]
[그만두세요. 제가 만약 오빠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노유각의 머리 백 개를 벤대도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을 거예요.]
[용아, 용아는 정말 훌륭해.]
[뭐 훌륭하고 말고가 있겠어요? 그냥 사부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에 저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으니 자연 화가 날 수밖에요. 뒤에 나 때문에 구양봉을 세 번이나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말을 듣고야 그래도 날 꽤 생각해 주시는구나 했어요.]
[어이구,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았다니 그래도 고맙군그래.]
황용이 살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무엇을 입었는지 한번 보세요.]
곽정은 계속 그녀의 얼굴만 보고 있다가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야 시선을 옷에 보냈다, 하얀 담비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바로 두 사람이 장자구에서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자기가 준 그 옷이었다. 곽정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두 사람은 꼭 부둥켜안고 달빛을 바라보았다.
[용아, 용아가 철창묘에서 구양봉에게 잡혀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다는 말을 사부님께 들어 알고 있었는데 뒤에 어떻게 그의 마수에서 빠져 나왔지?]
[아까운 건 육사형의 귀운장이에요. 노독물이 그날 내게 구음진경의 내용을 설명하라고 계속 윽박지르는 거예요. 저는 설명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조용하고 깨끗한 처소가 있어야겠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노독물이 그럼 조용한 절로 가자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제가 중이 싫고 또 절의 음식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노독물이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고 화를 내더군요. 그래 태호 옆에 귀운장이 있는데 경치도 아름답거니와 음식도 깔끔하다고 했어요. 노독물도 그럼 거기로 가자고 제 의견에 쫓아 나서더군요.]
[어째서 노독물이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을까?]
[그는 제가 귀운장 장주와 아는 사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워낙 자만심이 많은 사람이라 다른 사람은 안중에나 있었겠어요. 제아무리 제 동조자가 많아도 문제없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더군요. 저와 그 사람이 귀운장에 도착했을 때 육사형 부자는 공교롭게도 외출하고 집에 없었어요. 원래 강북의 보응(寶應)에 있는 정소저 친정에 나들이를 갔대요. 그런데 오빠도 알다시피 귀운장은 우리 아버지의 오행팔괘술에 따라 지은 집이잖아요. 노독물은 귀운장에 들어서자 당황하는 눈치다군요. 그래서 저는 동서로 유인을 하다가 재빨리 달아나 버리고 말았지요. 노독물은 화가 나서 그만 귀운장에 불을 질렀답니다.]
곽정은 무릎을 탁 치며 어이쿠 소리를 질렀다.
[저도 그가 혹시 귀운장에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모두들 달아나라고 했어요. 노독물은 정말 악랄한 데가 있어요. 나를 놓치자 도화도와 비슷한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바람에 하마터면 잡힐 뻔했어요. 그렇게 그는 몽고로 오는데도 계속 쫓아왔어요. 그래도 오빠가 어리숙하기에 망정이지 노독물처럼 약아빠져 두 사람이 앞뒤로 찾아 나섰더라면 전 정말 숨을 만한 곳이 없었을 거예요.]
곽정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렇지만 결국 오빠가 똑똑했어요. 노유각을 다 위협할 줄 알았으니까요.]
[그건 용아가 내게 가르쳐 준 방법이야.]
[제가 가르쳐 드렸다니요?]
[꿈속에서 내게 가르쳐 줬지.]
곽정은 즉시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황용은 깊이 감동한 나머지 웃지도 못했다.
[옛사람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았어요? 오빠가 그토록 날 생각해 주시는 줄 알았더라면 벌써 만났을 걸 그랬군요.]
[용아, 이젠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마, 옹?]
황용은 산봉우리를 둘러싼 운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나 추워요.]
곽정은 황급히 자기 옷을 벗어 그녀의 몸에 걸쳐 주었다.
[그럼 우리 내려가지.]
[그래요, 내일 저녁에 다시 이리로 오세요. 제가 구음진경의 내용을 오빠에게 상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뭐라구?]
황용은 오른손으로 곽정의 왼손을 잡고 있다가 갑자기 힘을 주었다.
[우리 아버지가 진경 마지막 편에 있는 괴상한 말을 번역했는데 내일 밤 제가 말씀드릴게요.]
곽정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 범문은 분명 일등대사가 번역했는데 어째서 자기 아버지가 했다고 그러나?)
곽정이 부쩍 의심이 일어 다시 물으려고 하는데 황용이 그의 손등을 꼬집으며 눈짓을 보냈다. 그는 황용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무언가 곡절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 이상 따져 묻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그냥 봉우리를 내려왔다. 황용은 파오로 돌아온 후 곽정의 귀에 입을 대고 이렇게 소곤거렸다.
[구양봉도 정상에 올라와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을 엿듣고 있었어요.]
곽정은 깜짝 놀랐다.
[아, 그랬나? 왜 난 전연 몰랐을까?]
[그는 얼음 바위 뒤에 숨어 있었어요. 노독물이 교활한 사람이지만 얼음이 투명하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거예요. 저도 달빛이 비스듬히 비칠 때에야 비로소 희미하게 사람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까 구음진경이 이러쿵저러쿵 한 것은 구양봉 들으라는 얘기였군그래.]
[내일 밤 그를 정상으로 유인한 뒤 내려올 때 우리가 사다리를 없애 버리면 그는 영원히 얼음 귀신이 될 거예요.]
곽정도 맞장구를 치면서 좋아했다.
第 六 卷. 第 七 章.(通卷 章). 구처기를 맞다
다음날 칭기즈 칸은 성을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1천여 명의 정병을 잃었을 뿐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날 밤 곽정과 황용 두 사람과 개방의 세 장로는 구양봉이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아래서 사다리를 없애 버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그러나 교활한 구양봉은 이 계략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는 먼곳에 숨은 채 곽정과 황용이 올라가지 않으면 자기도 올라가지 않으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자 황용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또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병사들에게 밧줄 몇 개를 마련하여 거기에 석유를 흠뻑 묻혀 놓으라고 했다.
호라즘은 지금의 중앙아시아 일대에 속하는 곳으로 여기저기에서 석유가 펑펑 솟아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 주민들은 1천여 년 전부터 석유를 사용해 밥을 지어 먹을 정도였다. 원사(元史)의 기록을 보면 칭기즈 칸이 호라좀의 구도(舊都)인 오타르치(王龍傑赤)를 칠 때 대량의 석유를 이용해 성을 무너뜨린 일이 있다고 했다.
곽정과 황용은 밧줄을 등에 지고 정상으로 올라 수정궁 안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구양봉의 그림자가 빙벽 뒤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그의 경공은 이미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상봉의 얼음을 밟는데도 전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곽정과 황용의 재주로도 간신히 알아낼 수 있는 상승의 경지였다. 황용은 경문 몇 구절을 곽정에게 들려주면서 서로 토론하는 체했다. 비록 거짓으로 하는 이야기였지만 경문의 구절구절은 진짜였다. 구양봉이 귀기울여 들어 보니 구구절절이 의미심장한 얘기라 여태껏 꼬였던 심사가 은근히 풀리기 시작했다. 만약 자기가 황용을 윽박질렀더라면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말을 했다 하더라도 저토록 자상하게 들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양봉은 쾌재를 부르며 싱글벙글 좋아 어쩔 줄 몰랐다.
황용은 곽정에게 천천히 해석해 주었다. 그녀가 막 세 마디째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봉우리 아래서 호각 소리가 뚜뚜 급하게 울렸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곽정이 벌떡 일어섰다.
[대칸이 부르시니 내려가 봐야겠는데.]
[그럼 우리 내일 다시 와서 얘기해요.]
[오르고 내리는 데 힘이 드니 내 파오 안에서 만나면 어떨까?]
[안 돼요. 그 교활한 구양봉 영감이 도처에서 나를 찾고 있어 숨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요. 그가 제아무리 교활하고 똑똑하다 해도 우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거예요.]
구양봉은 득의만면하여 속으로 코방귀를 뀌었다.
(이까짓 봉우리는 고사하고 하늘 위에 가 있다 해도 쫓아가겠다.)
[그럼 용아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 반시간 이내에 꼭 돌아올테니까.]
황용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곽정은 봉우리를 내려왔다. 그러나 황용만을 봉우리에 두고 가기가 꺼림칙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구양봉이 진경의 내용을 몰래 들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녀를 해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홀렀다. 황용은 곽정이 지금쯤은 벌써 봉우리를 다 내려갔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 봉우리에 혹시 귀신이 있을지도 몰라? 양강이나 목염자 언니를 생각하면 정말 무섭단 말야. 나도 잠시 내려갔다가 곽정 오빠가 올라올 때 와야지.]
구양봉은 혹시 발각이나 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해 몸을 웅크린 채 머리도 내밀지 못했다. 황용이 거의 다 내려오자 곽정과 세 장로는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밧줄에 불을 당겼다. 먼저 곽정이 내려올 때 석유 묻은 밧줄을 얼어붙은 양 다리에 감으면서 내려온 것이다. 밧줄이 위로 타올라 가면서 얼어붙은 양 다리의 계단이 하나하나 떨어져 내렸다. 캄캄한 밤에 뱀의 혀 같은 불길이 꿈틀거리며 얼음을 타고 올라가는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황용은 손뼉을 치며 좋아 어쩔 줄 몰랐다.
[곽정 오빠, 이번에도 그 영감을 용서할 생각이세요?]
[이번이 세 번째야, 약속을 어길 수는 없지 않을까?]
[제게 방법이 있어요. 약속도 지키고 또 오빠의 사부를 살해한 원수도 갚구요.]
[용아는 정말 꾀 덩어리인가 봐. 그래 무슨 방법인데? 말을 해보라구.]
[아주 쉬운 방법이에요. 우리가 열흘만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서북풍이나 마시고 있으면 춥고 배고파 기진맥진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나서 양 다리로 사다리를 만들어 구하는 거예요. 그럼 세 번째 용서를 해주는 결과가 되지요.]
[그건 그래.]
[세 번씩이나 용서해 주었으면 그만 아녜요. 그가 땅에 내려서는 즉시 싸움을 벌이자구요. 우리 둘에 세 장로가 돕는데 그래 다섯 사람이 다 죽어 가는 사람 하나 처치 못하겠어요?]
그러나 곽정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반대했다.
[그야 물론 가능하겠지. 그러나 그렇게 죽이면 떳떳하지 못하단 말이야]
[그런 악독한 사람에게 떳떳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그래, 그가 오빠의 이사부님과 사사부님을 살해할 때에도 사정을 보아 가며 살해한 줄 아시나요? 흥!]
곽정은 황용이 빈정거리며 내뱉는 말을 듣고 또 살해된 은사님들의 참상을 생각해 보니 정말 눈에서 불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구양봉의 무예를 자기로서도 당할 재주는 없으니 만약 이번에 그를 살려보내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곽정은 드디어 이를 부드득 갈며 결심했다.
[그래, 그럼 용아 말대로 하지.]
두 사람은 파오 안으로 돌아와 진지하게 《구음진경》의 무공을 토론했다. 그들은 1년 동안 상대의 무공이 크게 진보한 것을 발견하고 흐뭇해했다.
[용아, 완안열이 저 성내에 있는데 눈만 멀뚱밀뚱 뜬 채 그냥 쳐다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한번 묘책을 궁리해 봐.]
[글쎄 저도 이 며칠 동안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십여 가지 생각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하나도 신통한 게 없군요.]
[개방 형제들 가운데 경신술이 뛰어난 사람이 십여 명 있으니 나와 용아가 합세해서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떨까?]
황용이 머리를 흔들며 하나하나 따져 보았다.
[성벽에는 십여 장 거리마다 강궁(强弓)을 가진 사람이 지키고 있으니 쉽게 올라갈 수도 없거니와 십여 명이 뛰어들어간다 하더라도 수많은 군사가 가로막을 테니, 어떻게 성문을 깬단 말예요?]
둘은 밤새 이 문제에 골몰하여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다음날 아침 칭기즈 칸은 또 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몽고 병사 l만여 명이 투석기(投石機)를 가지고 성내로 돌을 빗발치듯 퍼부었지만 어찌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별 소용이 없었다. 몽고군은 사흘 동안 천방백계 애만 썼지 아무 효과도 볼 수 없었다.
4일째 되는 날 하놀에서는 또 큰눈이 내렸다. 곽정은 산봉우리롤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열흘이 되기도 전에 구양봉은 얼어 죽겠구나.]
[워낙 내공이 대단한 사람이라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서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던 두 사람은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봉우리 위에서 뭔가가 훨훨 날아 떨어지는데 그게 바로 구양봉이었다.
[노독물이 열흘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자살을 하려고 그러는군요.]
황용은 희회낙락하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런데 그는 똑바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날리는 연처럼 흔들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천야만야한 높은 봉우리에서 떨어진다면 가루가 될 수밖에 없는데 어찌해서 저렇게 천천히 떨어져 내려올까? 노독물이 혹시 무슨 요술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순식간에 구양봉은 상당한 거리까지 떨어져 내려와 이제는 사람들 눈에 확연히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구양봉은 옷을 벗온 채 머리 위에 공 같은 물체를 달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황용은 벌써 그까닭을 알고 발을 동동 굴렀다.
사실 구양봉은 며칠 동안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결국 이 기묘한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그는 일단 바지를 벗어 양쪽 가랑이를 묶었다. 그러고도 혹시 튼튼하지 못할까 봐 웃옷까지 벗어 거기에 붙들어맨 뒤에 두 손으로 바지 허리를 잡은 채 이를 악물고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다. 대단한 모험이기는 했지만 살길은 이것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바지 속에 가득 들어간 공기가 하강 속도를 그만큼 늦추어 주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옷을 벗었기 때문에 추워 죽을 지경이었다. 일신의 초인적인 내공으로 전신에 운기를 해 겨우 한기와 싸우고 있었다. 황용은 기가 막히고 우습기도 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성 안팎에 있는 군사들도 이 희한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만 명이 일제히 고개를 젖히고 공증을 나는 사람을 넋을 잃고 구경했다. 개중에는 신선이 하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군졸들도 있었다.
곽정은 구양봉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보아 성안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는 옆에 있는 친병에게 철태궁(鐵胎弓)을 가져 오게 해서 구양봉의 바지를 겨누고 화살을 날렸다.
만약 그의 바지를 터뜨릴 수 있다면 그는 수십 장 높이에서 그냥 떨어질 것이요, 그렇게만 된다면 무공이 제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중상을 입을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반공에 떠있는 몸이라 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곽정의 모습을 본 그는 허리를 숙이고 두 발을 허우적거리며 화살을 모두 차버렸다. 그러자 이를 지켜 보던 칭기즈 칸이 여기저기 구경하고 서 있던 병사들에게 일제히 화살을 쏘도록 했다.
수천 수만의 화살이 메뚜기 떼처럼 구양봉을 향해 날았다. 손발이 몇 천 개가 있다 해도 막을 도리가 없을 텐데 온몸을 발가벗은 처지에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이제 구양봉의 몸에 고슴도치 가시처럼 화살이 박힐 참이었다. 그는 일이 급해지자 쥐고 있던 바지를 놓은 채 거꾸로 떨어져 내려왔다.
수십만 명의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런데 구양봉이 반공에서 허리를 꺾으며 성 위에 꽂힌 큰 기(旗)를 향해 떨어졌다. 때마침 서북풍이 매섭게 불고 있어 기는 동쪽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구양봉이 왼손을 뻗어 기폭을 움켜쥐자 기는 북 하고 찢어졌다. 그는 어느 틈에 원숭이처럼 깃대를 타고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성 뒤로 사라졌다.
양측 군대는 이 희한한 구경을 하느라 서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까지 까맣게 잊었다.
(아니 이번엔 용서를 해준 게 아니니 다음에 또 한 번 용서를 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용아가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겠지?)
곽정이 이런 염려를 하며 쳐다보니 뜻밖에도 황용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용아, 뭐가 그리 기쁘다고 웃는 거야?]
황용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듯 대뜸 말했다.
[오빠, 제가 큰 선물 하나 드릴까요?]
[무슨 선물을?]
[사마르칸트 성요.]
곽정은 어리벙벙했다.
[노독물이 성을 깨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오늘 맘에 공격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예요.]
황용이 속삭이는 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난 곽정도 회색이 만면해졌다.
곽정은 영내에 밀령을 내려 부하들에게 파오를 찢어 우산을 만들도록 했다. 한 시간 반 만에 1만 개가 만들어졌다. 병사들은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북풍 설한에 파오를 찢어 우산을 만들었으니 도대체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그러나 원수(元帥)의 엄명을 어길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또 곽정은 부대 내에 있는 소와 양을 끌고 설봉(雪峰) 밑에1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른 만인대에게는 북문 밖 30리에 나가 천복(天覆), 지재(地載), 풍양(風揚), 운수(雪垂)의 4진을 치고 대기하다가 적군을 보는 대로 잡게 했다. 또 다른 만인대는 북문의 양측에서 용비(龍飛), 호익(虎翼), 조상(,島翔), 사반(蛇蟠) 4진을 치고 기다리다가 적군이 나타나면 모두 천지풍운(天地風雲) 4진으로 몰아넣으라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만인대에게는 간편한 차림사로 대기하도록 했다.
곽정은 그날 저녁 모두에게 밥을 배불리 먹게 한 뒤에 우선 만인대 2대를 북으로 출발시켰다. 이윽고 술말해초(戌末亥初)가 되자 친병을 대칸께 보내 작전을 보고했다. 적성(敵城)을 파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모든 병사를 동원, 성을 포위해 달라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이 보고를 듣고 반신반의하면서 직접 곽정을 만나 상세히 듣고자 했다.
[금도부마께서는 벌써 병사를 인솔하고 공격에 나섰으니 대칸께서는 그냥 포위만 해주시면 됩니다.]
곽정의 친병이 하는 말이었다.
곽정의 진중에서는 호각 소리와 함께 군사 l천여 명이 일제히 소와 양을 잡기 시작했다. 개방 고수들이 오가며 눈 깜짝할 사이에 1백여 마리 소와 양 다리로 만든 사다리를 설봉에 마련해 놓았다. 곽정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앞장서서 제일 먼저 올라갔다. 1만여 장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엄한 군령에 따라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캄캄한 밤에 사다리를 오르는 곽정과 군사들은 마치 1백여 마리 용이 꿈틀꿈틀 올라가는 듯 장관을 이루었다.
설봉의 정상은 좁은데다가 수많은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뒤에 올라온 사람들은 거의 발붙일 장소도 없었다, 곽정은 각자 허리에 우산을 붙들어맨 채 병기를 가지고 성안으로 뛰어내려 남문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손뻑을 쳐 신호를 한 뒤에 맨 먼저 뛰어내렸다. 군사들이 준비한 우산은 구양봉의 바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군사들은 모두 낮에 구양봉이 떨어지는 광경을 처음부터 똑똑히 본데다 곽정이 먼저 뛰어내리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용감하게 그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공중에는 백화가 만발한 듯 우산을 든 병사들이 안전하게 하강을 하고 있었다.
황용은 정상의 얼음 위에 앉아 이 광경을 모두 지켜 보았다. 이제이 작전은 성공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칭기즈 칸이 성을 파하고 못하고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만 곽정 오빠가 내 말을 들어주어 정말 기쁘구나.)
곽정은 거의 지상에 내려설 무렵에야 우산을 폈다. 그리고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큰 칼을 휘두르며 적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성안에 있던 군사들은 놀라 우왕좌왕할 뿐 수천 수만의 적군이 공중에서 내려오고 있으니 어떻게 대항해 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맨 처음으로 땅에 내려선 사람들은 모두 개방 고수들이어서 별 저항 없이 득달같이 성문에 이르렀다. 몽고군은 계속 낙하했다. 개중 수백 명의 군사가 부상하거나 죽기도 했지만 십중팔구는 무사히 안착했다. 1천여 명이 바람에 날려 성의 이곳 저곳에 떨어져 호라즘군에 포위되어 살해되기도 했지만 그외의 장수들은 거의 성문 좌우로 떨어져 내려왔다. 곽정의 군사 가운데 반은 기어이 적과 접전을 하고 반은 성문을 부수고 문을 열었다.
칭기즈 칸은 성안에서 울리는 함성을 듣고 모든 것이 곽정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3군을 독려하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남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수백 명의 몽고 군사가 창을 들고 성문을 지켰다. 즉시 수천 명이 안으로 안으로 벌떼처럼 몰려들어갔다.
10여만 호라즘 군대는 대경실색하여 도대체 적군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방향도 잡지 못했다. 날이 미처 밝기도 전에 호라즘의 군대는 대패했다. 국왕은 북문에만 적군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 문을 열고 그쪽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곽정의 만인대가 벌써부터 매복하고 있다가 그들이 나타나자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호라즘 국왕은 완전히 전의를 잃고 완안열에게 뒤를 부탁한 뒤 자신은 친병의 철통 같은 호위를 받으며 달아나고 말았다.
곽정은 완안열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난군 가운데 그의 번쩍이는 금투구를 발견하고 급히 추격했다. 호라즘 군대가 패했다고는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은데다가 이판사판이므로 적을 향해 결사적으로 항거해 왔다. 곽정의 군대가 아무리 용맹하다고는 해도 워낙 소수라 힘에 부쳤다. 잠시 후 앞으로 달려나갔던 쾌마가 돌아와 적이 아군을 포위할 기세라 보고했다.
곽정은 즉시 진세를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기(令旗)가 펄럭이자 천지풍운 4진이 벌여지며 길이 생기고 호라즘군 수만 명이 질풍처럼 지나갔다. 다시 영기가 들리고 포성이 일어나며 4진이 또 합쳤다. 이때 적군은 후미에 수천 명만이 남아 있었다. 모두가 날랜 군사들이라지만 역시 패잔병이라 투지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은 변변히 싸움 한 번 못해 보고 곽정의 군사에게 모두 포로가 되었다. 곽정은 잡혀 온 포로를 일일이 확인했지만 완안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힘겹게 거둔 승리였지만 별로 흡족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까지 성안의 패잔병은 모조리 숙청되었다. 칭기즈 칸은 왕궁으로 제장을 소집해 들였다. 때마침 곽정은 부상당한 부하들을 위문하고 있다가 칭기즈 칸의 소집 나팔 소리를 듣고 달려갔다. 왕궁 앞에 이르자 궁문 옆에 군사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황용과 노유각 등 세 장로도 거기 섞여 있었다. 황용이 손뼉을 치자 군사 둘이 자루를 짊어지고 나왔다.
[이 자루 안에 뭐가 있는지 한번 맞혀 보세요.]
황용이 장난끼 섞인 어조로 말했다.
[성안에는 온갖 물건이 다 있을 텐데 그걸 어떻게 알아맞힌담.]
[제가 오빠에게 드리는 선물이에요. 보시면 굉장히 좋아하실 텐데.]
곽정은 구천인이 철장봉에서 남금을 대바구니에 넣어 양강에게 예물로 준 일을 생각했다. 황용이 성안에서 미모의 여자를 찾아내 자기에게 장난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워낙 장난을 좋아하는 황용이고 보면 충분히 그런 짓도 할 수 있으리라. 곽겅은 난처해지기 전에 거절하는 것이 상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필요 없어.]
[정말이세요? 보고 나서 다른 말 하시면 안 돼요.]
황용이 자루를 열자 그 안에서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산발한 머리에 얼굴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차림새는 호라즘 군대의 졸병이었지만 얼굴은 틀림없는 대금국 조왕 완안열이었다. 곽정은 놀랍고도 기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용아, 어디서 잡았지?]
[패잔병이 북문으로 달아날 때 보니까 조왕 기호를 들고 달아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금투구에 갑옷을 입은 장군이 인솔하고 있었어요. 이 완안열이 얼마나 교활한데, 그래 패잔병을 거느리고 조왕 기호를 들고 달아나겠어요? 그래서 흉계가 있는 줄 알았지요. 깃발이 동쪽을 향해 달아나기에 노장로 등과 함께 서쪽으로 가 매복하고 있다가 잡았어요.]
곽정은 황용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용아, 돌아가신 아버님의 원수를 내 대신 갚아 주었으니 뭐라고 고마운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황용이 입에 손을 대고 웃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이런 공을 세웠으니 대칸이 큰 상을 내릴 것 아니겠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난 상 같은 건 바라지 않아.]
그러자 황용이 옆으로 비켜서며 낮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오빠, 이쪽으로 오세요.]
곽정은 그녀가 부르는 대로 쫓아갔다.
[그래 정말 바라는 게 없단 말씀이신가요?]
곽정은 황용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다만 한 가지가 있을 뿐이야. 영원히 황용과 떨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것, 그것뿐이야.]
[오늘 이런 큰 공을 세웠으니 대칸이 오빠께 화야 내지 않을 것 아니겠어요?]
곽정은 그렇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여전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몰랐다.
[오늘 만약 무슨 관작을 달라고 하면 반드시 주시겠지요? 그러나 아무 관작도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고 해도 거절 못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이쪽에서 무슨 요구를 하든지 다 들어주겠다는 그의 약속을 받아 내는 거예요.]
[그야 할 수 있지!]
황용은 곽정이 선선히 대답하자 더 말하지 않고 새초롬히 눈꼬리를 올렸다.
[오빠, 금도부마 아주 근사하다고 생각하시지요? 안 그래요?]
곽정은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황용의 마음을 환히 깨달았다.
[용아, 이제 모든 것을 알겠어. 금도부마를 물려 주십사, 이거지? 그 말을 하기 전에 우선 무슨 요구를 하든지 다 둘어주겠다는 선약을 단단히 받아 놓고 말야.]
[그거야 오빠 마음에 달렸지요. 오빠가 금도부마가 되고 싶으면 그만두시는 거구요.]
[용아, 화쟁 공주가 정말 진심으로 대해 준 것만은 사실이야.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그녀를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을 뿐야. 다만 혼약의 신의를 어긴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야. 그런데 만약 대칸이 허락만 해주신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
황용은 기쁨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곽정이 다시 무슨 말을 막 꺼내려고 하는데 궁중에서 두 번째 재촉하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는 황용의 손을 잡고 쓰다듬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용아, 반가운 소식이나 기다리고 있어.]
곽정은 서둘러 완안열을 압송하여 궁중으로 들어가 대칸을 만났다. 칭기즈 칸은 곽정이 들어서자 직접 보좌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고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좌우에 명해 비단으로 만든 의자를 가져 오게 한 다음 곽정을 자기 옆에 앉혔다. 칭기즈 칸은 곽정이 완안열을 잡아 왔다는 보고를 듣고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잡혀 온 완안열을 꿇어 엎드리게 한 후 오른발을 들어 그의 머리를 밟고 웃었다.
[당시 네가 몽고로 와 위엄을 떨칠 때 내게도 오늘과 같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바 있느냐!]
완안열은 다만 죽음이 있을 뿐임을 알기에 이를 악물었다.
[당시 우리 금나라 군대가 강성할 때 몽고를 섬멸해 없앴더라면 오늘 같은 후환은 없었을 텐데. 그것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칭기즈 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완안열을 내다가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곽정은 드디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되자 온갖 감회가 밀려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왔다.
[내 일찍이 성을 파하고 완안열을 잡는 가에게 이 성의 여자와 모든 보물을 주겠다고 악속한 바 있으니 네 마음대로 가져 가도록 하라.]
그러나 곽정은 머리를 흔들었다.
[저희 모자 대칸의 은총을 받아, 입고 먹음에 부족함이 없었는데 노복이나 보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좋다. 그것이 바로 영웅호걸의 진면목이니라. 그러면 너는 무엇이 필요하냐? 무엇이든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겠노라.]
곽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칸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대칸께 드릴 말씀이 있사오니 허물치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리 있겠느냐?]
곽정이 막 화쟁 공주와의 혼사를 물려 달라는 말을 꺼내려고 하는 데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듯 들렸다. 깜짝 놀란 제장들이 칼을 뽑아 들고 우르르 달려나갔다. 사마르칸트 성 주민이 돌연 반발하고 일어난 것으로 알고 진압하기 위해 달려나간 것이다. 칭기즈 칸은 태연자약하게 웃었다.
[아무 일도 아니니라. 그 더러운 성,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바람에 많은 장수와 병사를 잃었고 또 내 사랑하는 손자까지 죽었노라. 크게 한번 분풀이를 해야만 속이 풀리지 않겠느냐? 어디 나가 구경이나 하도록 하자.]
이렇게 말한 후 그도 보좌를 떠나 방금 달려나간 제장들의 뒤를 쫓았다.
사람들은 궁에서 나와 일제히 말에 올라 서쪽 성으로 달렸다.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더욱 처절하게 들렸다. 성문을 벗어나니 수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노인과 아이들을 부축한 채 성밖 빈터에 줄지어 서 있었다.
몽고 병사들은 성안 주민들에게 한 명도 남지 말고 모두 성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처음에 주민들은 호구 조사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몽고 병사들은 주민들이 가진 병기를 몰수한 뒤에 재주 있는 장인들을 한쪽으로 세워 두고 사람들 틈에서 미모를 갖춘 젊은 부인과 처녀들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제야 사마르칸트 성 주민들은 큰 재앙이 닥쳐온 것을 직감했다. 그중에 일부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대항하려다가 오히려 몽고군의 칼과 창에 찔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몽고 병사들은 미모의 부녀자를 모두 끌어내 그들을 오랏줄로 묶었다. 그 뒤 천인대 10여 대가 함성을 지르며 백성을 향해 돌진하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하기 시작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 품에 안긴 젖먹이 어린애까지 모두 죽였다.
칭기즈 칸이 제장을 인솔하고 구경을 갔을 때는 벌써 10여만 명이 죽어 있었다. 사방에 피가 개울처럼 흐르고 몽고군의 말이 그 시체를 밟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칭기즈 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하게 잘들 죽이는구나. 이제는 우리 대몽고 군대가 무서운 걸 알겠지.]
그러나 곽정은 차마 눈뜨고 바라다볼 수 없었다. 그는 즉각 대칸에게 다가가 애원했다.
[대칸,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안 돼 ! 모두 다 죽여 없애야 한다.]
칭기즈 칸이 손을 내흔들자 곽정으로서도 더 할말이 없었다. 이때 7,8세쯤 된 어린애 하나가 군중 틈에서 빠져 나오며 말발굽에 깔린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엄마!]
이를 본 몽고 병사가 단숨에 달려들더니 그들을 한칼에 요절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아이가 어머니를 끌어안고 몸부림을 쳤다. 곽정은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는 걸 느끼며 칭기즈 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칸, 대칸께서는 이 성안에 있는 여자와 보물, 비단이 모두 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아니 네가 마다하지 않았더냐?]
칭기즈 칸이 웃으며 반문했다.
[제가 무슨 요구를 하든지 다 들어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칭기즈 칸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머리를 끄덕였다.
[대칸의 말씀은 산과 같이 무겁습니다. 저는 수십만 명이 넘는 백성의 생명을 용서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너무나 엉뚱한 요구였다. 칭기즈 칸은 곽정이 이런 요구를 하리라고는 전연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칭기즈 칸은 화가 치밀어 올라 불을 뿜을 듯 곽정을 노려보면서 벌컥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 진심으로 그런 요구를 하는 게냐?]
제장과 중장들은 대칸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드문 일이라 모두들 부들부들 떨었다. 백전을 경험하여 죽음쯤은 초개같이 아는 용감하기 짝이 없는 용장들이었지만 대칸의 화난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곽정도 여태까지 이렇게 무섭게 화를 내는 칭기즈 칸을 본 일이 없었다. 잡아먹기라도 할 듯 노려보는 눈이 너무나 무서웠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끝까지 애원했다.
[간곡히 청하오니 이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후회하지 않겠느냐?]
한결 낮아진 칭기즈 칸의 목소리였다. 곽정은 황용과의 약가을 생각했다.
지금은 화쟁 공주와의 파혼을 요구해야 할 때였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영영 칭기즈 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함은 물론 자기와 황용 사이의 인연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수십만이 넘는 백성의 처절한 비명과 참상을 어찌 그냥 보아 넘긴단 말인가? 그는 결국 나 하나만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칭기즈 칸은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마음 속으로는 두려워하면서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그가 한편으로는 미더웠다. 칭기즈 칸은 긴 칼을 뽑아 들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군사들을 거두어 들이라.]
이어서 친병들의 호각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몽고 병사 수만 명이 온몸에 선혈을 묻힌 채 사람들을 헤집고 나와 대열을 갖추었다.
칭기즈 칸은 대칸이 된 이래 어느 한 사람 감히 자기의 명령을 거두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곽정에 의해 성내의 백성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거두어 들이게 된 것이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긴 칼을 땅에 던진 채 말을 달려 자리를 떠났다.
남아 있던 제장들이 모두 곽정을 노려보았다. 대칸이 저토록 화가 났으니 누가 골탕을 먹을지 알기나 하느냐는 눈초리들이다. 사마르칸트 성을 함락시켰으니 이제 며칠 동안 실컷 분풀이를 할 것이련만 곽정의 엉뚱한 제의가 성을 함락한 즐거움에 그만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곽정은 불만에 가득 찬 제장들의 표정을 보고도 모르는 체했다. 그는 허전한 가슴을 끌어안고 홍마를 탄 채 천천히 조용한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양쪽 다 엄청난 희생이 따른 큰 싸움이었다. 싸움이 끝난 전쟁터는 그것을 말없이 보여 주듯 성 안밖의 집은 모조리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고 여기저기 시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전쟁은 너무나 비참하구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군대를 끌고 와 이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었구나. 대칸은 천하를 정복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람을 죽였겠지? 그러나 여기 누워 있는 군사나 백성들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곽정은 생각할수록 서글퍼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여서 아버지의 윈수를 갚는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는 혼자 말을 타고 황폐한 들을 돌아다니며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성안의 숙영지로 돌아왔다. 영문으로 들어서자 대칸의 친병 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칸께서 부마를 부르십니다. 소인들 여기서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함께 속히 가시지요.]
(낮에 대칸의 분부를 어겼다고 혹시 나를 참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곽정은 자기의 친병 하나를 손짓으로 불러 귀엣말로 노유각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당부한 뒤에 혼자 입궁했다. 두렵고 불안했지만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대칸이 진노하여 위협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이 성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 달라는 요구는 철회할 수 없다. 그도 대칸이니 식언은 하지않겠지.)
그는 칭기즈 칸이 크게 화를 내고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대칸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곽정은 걸음을 빨리하여 대전으로 들어섰다. 칭기즈 칸 옆에 누군가가 앉아 있고 그의 발 밑에 소녀 하나가 보였다. 옆에 앉은 사람은 동안에 백발인 장춘자 구처기요, 발 밑에 있는 사람은 화쟁 공주였다.
곽정은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 인사를 했다. 칭기즈 칸은 시종의 손에서 끝이 좌우로 갈라진 창을 빼앗아 거꾸로 둘고는 난데없이 곽정의 머리를 찔렀다. 곽정이 깜짝 놀라 피하는 바람에 창이 왼쪽 어깨에 맞고 두 토막으로 부러지자 칭기즈 칸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놈아. 이것으로 그냥 끝을 내고 말자. 구도장님과 딸의 체면만 아니라면 내 오늘 네놈을 요절냈을 것이다.]
화쟁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만약 제가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곽정 오빠를 죽이실 뻔했군요.]
[누구한데 무슨 말을 들었더냐?]
[아뇨. 제가 직접 보니 그런걸요.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되어 구도장님을 모시고 직접 뵈려고 왔어요.]
칭기즈 칸은 한 손에 딸을, 또 한 손에 곽정을 잡고 흔들며 웃었다.
[이제 그만해 두고 구도장님의 말씀이나 듣기로 하자.]
구처기는 연우루의 대결에서 주백통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담처단을 살해한 진범이 구양봉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자 즉각 마옥 등과 더불어 황약사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사실 전진 육자가 연우루에서 포진할 때 기다렸던 사람은 바로 양강이었다. 그러나 구처기는 뒤에 가진악을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탄식을 하며 제자를 거둘 때 경솔했음을 크게 후회했다. 무공만 전수해 주고 그를 왕궁에서 끌어내지 않고 있다가 결국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얼마 후 구처기는 칭기즈 칸과 곽정의 편지를 받고 그렇지 않아도 곽정이 염려되던 차라 제자 십여 명을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원사(元史)의 기록에 보면 구처기와 칭기즈 칸은 세 차례 서신 왕래가 있었고 곤륜(崑崙)을 거쳐 설산(雪山)에서 만날 때까지 4년의 세월이 걸렸고 제자 18명을 동반했다고 한다. 제자 가운데 이지상(李志常)이란 사람은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라는 책을 저술하여 도중에 겪은 얘기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은 현존하고 있다.
구처기는 곽정이 세상의 경험을 많이 쌓은 것 같고 또 몸도 전에 비하여 건장해진 것을 보고 여간 반갑지 않았다. 그는 곽정이 도착하기 전에 칭기즈 칸과 더불어 오는 도중에 겪은 일이며 풍물, 회한한 관습 등에 대한 얘기를 재미있게 나누고 있었다.
[도사님께서 오시는 도중에 우리 대몽고군의 위력이 어떤가 이제 충분히 이해하셨을 줄로 믿습니다.]
[대칸의 정벌이 대단했음을 알겠더군요. 그러나 무고한 백성이 너무나 처참하게 많이 죽은 것을 보면 이러한 참혹한 전쟁이 더 계속되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중간에 앉아 통역을 하던 사람은 입장이 난처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대로 통역을 해주자니 칭기즈 칸이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어물어물 다른 말로 넘어가자니 그것도 곤란했다. 곽정이 모두 알아들을 텐데 대칸을 속였다는 죄가 탄로나면 자기는 목숨을 잃을 게 뻔했다. 그래서 그는 어물어물하면서도 사실대로 통역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칭기즈 칸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중화(中華)에는 불로장생하는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세간에는 불로장생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가의 연기(練氣)는 병을 쫓고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지요.]
[그렇다면 연기를 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하늘은 누구든지 선행(善行)을 하는 사람에게만 자비심을 베푸는 법입니다.]
[선행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성인(聖人)은 고정된 마음을 갖지 않고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습니다.]
칭기즈 칸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중화에 성서(聖書)가 한 권 있는데 도덕경(道德經)이라 합니다. 우리 도가에서는 이를 보물처럼 받들고 있지요. 방금 드린 말씀이 모두 그 안에 있는 말입니다. 도덕경에는 또 이런 말도 있지요. <무력은 상서(祥瑞)롭지 못한 것, 군사가 쓸 것이 못 된다. 부득이 무력을 쓸 경우에도 담담한 심정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전승(戰勝)을 자랑하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자라 하겠다. 대저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 뜻을 펼 수 없다.>]
구처기는 서쪽으로 오면서 전화의 참상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안 그래도 측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칭기즈 칸이 그에게 불로장생의 방법을 묻자 그 기회를 이용해 은근히 백성을 위해 모든 일을 하라는 충고를 한 것이다. 구처기 말은 용병을 삼가고 사람을 덜 죽이라는 것이다. 칭기즈 칸은 기분이 언짢았다.
[도사님을 모시고 내려가 쉬도록 해라.]
곽정은 구도장을 모시고 궁을 나왔다. 황용이 노유각 등 1천여 명 개방 방중과 함께 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곽정이 나오는 것을 발견한 황용이 말을 타고 달려나와 웃음으로 맞았다.
[별일 없었군요.]
[정말 재수가 좋았어. 공교롭게도 구도장님이 도착하셨거든.]
황용은 구처기에게 인사를 한 뒤에 다시 말을 꺼냈다.
[저는 대칸이 화가 나서 흑시 오빠를 죽이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여기에서 기다리다가 다급해지면 구하려고 했어요. 그래 대칸이 뭐라고 했어요? 파혼을 허락했나요?]
곽정은 한참 동안이나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파혼 얘긴 꺼내지도 못했는걸.]
[뭐라구요?]
[용아, 화내지 마, 저어.....]
곽정이 막 말을 꺼내려는데 화쟁이 궁문에서 쪼르르 달려나오며 곽정을 불렀다.
[곽정 오빠!]
황용은 표정이 확 달라지며 즉시 말에서 내려 한쪽으로 물러섰다. 곽정이 황용에게 뭐라 해명을 하려는데 화쟁은 벌써 곽정의 손을 부여잡았다.
[제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셨을 거예요. 제가 와서 반갑지요?]
곽정이 우선 고개를 끄덕이고 황용 쪽을 보니 어느새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화쟁은 곽정에게만 마음이 쏠려 미처 황용을 보지 못했다. 그저 곽정의 손을 잡은 채, 헤어져 있는 동안 쌓인 그리움을 한몫에 다 풀겠다는 듯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어이쿠 야단났구나. 용아는 내가 화쟁을 만나서 파혼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으로 믿겠지.)
곽정은 화쟁이 조잘거리는 말이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화쟁은 혼자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뒤늦게야 곽정의 멍한 표정을 발견했다.
[아니 웬일이세요? 제가 그 먼데서 오빠를 보려고 달려왔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는군요?]
화쟁은 표정이 싸늘해지며 사믓 화를 냈다.
[누이, 내 중요한 일 한 가지를 생각하느라 그랬어. 잠깐 갔다 와서 누이와 얘기를 할게.]
곽정은 친병에게 구처기를 잘 대접하라는 명을 내리고 서둘러 처소로 돌아왔다. 황용을 모시던 친병 하나가 이렇게 보고했다.
[황소저께서 돌아와 그림 하나를 가지고 동문 쪽으로 나가셨습니다.]
곽정은 깜짝 놀랐다.
[무슨 그림을?]
[부마께서 늘 보시던 그 그림입니다.]
곽정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그림을 가지고 갔다면 이건 분명 나와 헤어지자는 것이다. 내 지금 이것저것 생각할 계제가 아니다. 그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
곽정은 총총히 편지 한 통을 구처기에게 남기고 홍마를 몰아 성밖으로 나갔다. 곽정은 행여나 황용을 놓칠까 봐 말을 몹시 재촉했다. 워낙 다른 말보다 월등히 빠른 홍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리를 달렸다. 성밖은 인마가 붐비고 시체가 어지러이 홑어져 있었다.
수십 리 밖으로 나오자 망망한 벌판에 하얀 눈 사이로 난 말발굽 자국이 동쪽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다.
곽정은 말발굽 자국을 보자 황용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조금만 더 가면 용아를 만날 수 있겠지. 그녀와 함께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자! 화쟁 누이가 섭섭해하겠지만 내 지금 그런 걸 생각할 입장이 아니다.)
곽정이 그 말발굽 자국을 따라 10여 리를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말발굽 자국이 북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게다가 그 옆에는 한 사람이 쫓아간 흔적이 똑똑히 보였다.
왼발과 오른발 사이의 넓이가 다섯 자가 넘어 보이는 아주 독특한 발자국이었다.
그 발자국은 그렇게 사이가 먼데도 깊이는 너무나 얕았다. 전연 바닥에 힘을 주지 않은 자국이었다. 곽정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의 경신 무공이 여간 대단하지 않구나. 구양봉 이외에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가 없구나. 그렇다면 구양봉이 황용의 뒤를 쫓아갔단 말인가?)
곽정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살을 에는 추운 겨울 날씨인데도 식은땀이 홀렀다. 홍마는 워낙 영특해서 주인의 지시가 없는데도 계속 발자취를 찾아 달려갔다. 말발굽을 쫓아 계속 몇 리를 더 가니 발자국이 이번에는 서쪽으로 꺾였다, 남쪽으로 꺾였다, 맴만 돌 뿐 앞으로 직진한 흔적이 없었다.
(용아는 구양봉이 뒤를 밟는 것을 발견하고 일부러 맴을 돈 모양이로구나. 그러나 눈이 쌓여 자취가 확연한데 돌아 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 아닌가?)
다시 또 10여 리를 달리다 보니 말발굽과 사람 발자국이 갑자기 또 다른 말발굽과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곽정은 말에서 내려 자세히 살펴보았다.
(용아가 무목의 유서에 적힌 대로 행동함으로써 구양봉의 주의를 교란시키며 맴돌다 빠져 나간 흔적이 틀림없다.)
第 六 卷. 第 八 章.(通卷 章). 비단 주머니 세 개
곽정은 반갑기도 했지만 적이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말에 올랐다. 구양봉이 다시는 그녀를 쫓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면 반가웠지만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혹시 자기도 황용을 놓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온갖 주의를 기울여 방향을 일단 확인한 뒤에 흩어진 발자국을 따라 맴을 돌지 않고 포진의 이치를 따라 우선 동남쪽으로 달리다 다시 동쪽으로 꺾었다. 그렇게 한참 달리니 예상했던 대로 다시 발자국이 또 나타났다. 파란 하늘과 눈 덮인 벌판이 교차하는 지평선에 가물가물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곽정은 힘껏 말을 몰아 그쪽으로 다가갔다. 구양봉이었다. 구양봉도 다가오는 사람이 곽정인 것을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빨리 오게. 황소저가 진흙 속에 빠졌네.]
곽정은 깜짝 놀라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홍마는 질풍처럼 앞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구양봉과의 거리가 10여 장 정도 남았는데 이상하게도 말발굽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이 덮여 몰랐지, 그 부근은 단단한 땅이 아니라 진흙 늪이었던 것이다. 홍마도 이상했던지 급히 발을 뽑았다. 곽정이 눈여겨 살펴보니 구양봉은 작은 나무를 끼고 맴을 돌고 있었다.
(아니 저자가 왜 저러고 있을까?)
곽정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삐를 잡은 채 말을 멈추고 물으려는데 홍마는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달려나갔다가 되돌아왔다.
(옳지, 바닥이 진흙 늪이라 일단 멈추기만 하면 그냥 빠져 들어가는 곳이구나.)
그러다가 곽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용아도 여기에 빠져 들어간 게 아닐까?)
곽정은 말등에 탄 채 구양봉을 향해 큰소리로 물었다.
[황소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구양봉은 여전히 발길을 멈추지 않은 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내 그녀의 말발굽 자국을 따라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종적이 묘연하네. 여길 보라구]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나무 위를 가리켰다. 곽정은 그가 가리키는 나뭇가지에 손을 뻗어 그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물건을 집었다. 황용이 머리에 꽂고 다니던 금환이었다.
곽정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동쪽으로 l0여 리를 달렸다. 눈 속에서 뭔가 번쩍이는 물체가 보였다. 그는 말등에서 허리를 숙이고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황용이 옷자락에 늘 꽂고 다니던 꽃송이였다. 이제는 불안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용아, 용아, 지금 어디에 있어!]
큰소리로 부르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일망무제의 흰 눈만 있을 뿐 움직이는 물체는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또 몇 리를 달려가자 이번에는 눈 위에 담비 가죽으로 만든 옷이 보였다. 장자구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황용에게 주었던 옷이다. 황용은 이 담비 가죽옷을 보물처럼 소중히 여겨 단 한 번도 어디에 함부로 둔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이 여기에 이렇게 버려져 있으니 일이 생겨도 보통 큰일이 생긴 게 아니었다. 그는 잔뜩 불길한 예감으로 담비 가죽옷이 버려진 주위를 급히 맴돌면서 큰소리로 불렀다.
[용아! 용아!]
곽정이 애처롭게 부르는 소리만 멀리 멀리 울려 퍼질 뿐 산도 없는 벌판이라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불안을 가누지 못하여 조급하게 외쳐대는 곽정의 소리는 차라리 울음이 되어 땅을 혼들었다. 잠시 후 구양봉이 달려와 그에게 애걸했다.
[나를 좀 태워 주게. 그리고 함께 황소저를 찾아보세.]
[만약 당신이 그녀 뒤를 쫓지 않았다면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 진흙 늪 속으로 빠져 들었겠어요!]
화가 난 곽정은 매정하게 쏘아붙이고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홍마는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구양봉은 다급한 김에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말 뒤로 뛰어올라 꼬리를 잡으려고 했다. 곽정은 그가 이토록 민첩하게 달려들 줄은 미처 몰랐다. 그는 재빨리 신룡파미의 재주로 오른손을 뒤로 뻗어 밀었다. 이 일 장이 구양봉의 수장과 마주쳤다. 두 사람 다 필사적으로 버텼다. 어느덧 곽정의 몸이 구양봉의 장력에 밀려 말안장에서 흘러내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홍마가 앞을 향해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왼손을 뻗어 말궁둥이를 잡고는 이 힘을 이용해 다시 말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이번에는 구양봉이 곽정의 장럭에 뒤로 두 발짝 밀렸다. 구양봉온 곽정이 미는 바람에 발을 무겁게 디딨던지 왼발이 진흙 속에 푹 빠지면서 진흙이 금방 무릎까지 차올라 오는 걸 느꼈다. 구양봉은 몹시 당황했다. 이런 진흙 늪에 한 발이 빠졌을 때 힘을 다해 빠진 발을 빼내려 하다가는 오히려 다른 발이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법이다. 이렇게 두 발을 계속 놀리다 보면 어느새 온몸이 빠져 들어가게 마련이다.
어쩌면 황용도 이렇게 몸부림치다가 죽어간 게 아닐까? 다급해진 구양봉은 아주 바닥에 누운 채 데굴데굴 구르다가 오른발로 힘껏 공중을 걷어찼다. 연환원앙퇴(連環鴛鴦腿)의 묘기였다. 이렇게 오른발로 허공을 차니까 빠졌던 왼발이 진흙을 튀며 불쑥 뽑혔다. 그 순간 그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섰다.
곽정은 황용을 부르며 계속 말을 달리고 있었다. 홍마의 달리는 모습이 편안한 것으로 보아 진흙 늪을 벗어난 모양이었다. 구양봉도 즉시 말발굽을 밟아 가며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달릴수록 바닥이 말랑말랑한 것이 참으로 느낌이 묘했다.
사실 구양봉은 처음에는 늪 가장자리에 있다가 한가운데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곽정에게 세 번이나 골탕을 먹었다. 마지막 한 번은 수십만 명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고 있었으니 이만저만한 창피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무예가 출중함에 탄복하지만 자신으로서는 평생 처음 당하는 수치였다. 이제 곽정과 단둘이 만났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일념뿐 위험이고 모험이고를 돌볼 계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조급한 생각으로 경공의 재주를 부려 결사적인 추적을 했다.
그는 이런 경공을 펴기만 하면 곽정이 탄 홍마를 따라잡을 자신이 있었다. 곽정은 등뒤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나 고개를 돌려 보니 구양봉이 수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있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홍마를 더욱 세게 몰았다.
이렇게 한 사람은 말에 타고 또 한 사람은 그 뒤를 쫓아 10여 리를 달렸다. 곽정은 계속 황용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녀가 나타날 가망은 더욱 아득하기만 했다. 그는 자꾸만 암담해지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홍마도 눈 위를 밟으면서 발굽 밑이 말랑거리자 위험한 줄을 알았다. 마치 허공을 나는 듯 계속해서 땅을 딛지 않고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혈(汗血)의 보마는 과연 여느 평범한 말과 달랐다. 이렇게 전광석화처럼 달리니 제아무리 경공이 뛰어난 구양봉이라 하더라도 도저히 그 뒤를 따를 수 없었다. 구양봉은 땀을 뻘뻘 흘리며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홍마도 전신에 땀이 흥건했다.
이제 날이 저물어 사방은 캄캄해졌다. 홍마는 간신히 진흙 늪을 벗어났지만 구양봉은 어디서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곽정은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용아가 탄 말이 시원치 않았는데 도중에 지쳐 기진맥진했을 거야. 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구하지 않으면 안 돼.)
사실 황용은 이때 사라진 지 이미 오래라 만약 진흙 늪에 빠졌다면 그녀를 구한다 하더라도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를 찾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홍마를 쉬게 하느라 잠시 말에서 내려 말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홍마야, 홍마야. 몹시 피곤할 테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가 보자꾸나.]
그는 다시 말 위에 올라 고삐를 돌렸다. 홍마는 다시 진흙 속에 뛰어드는 게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곽정이 몇 차례 다그치자 길게 한 번 투레질을 하고는 화닥닥 네 발을 모으더니 다시 한 번 진흙 속으로 뛰어들었다. 홍마도 워낙 앞길이 먼 줄을 아는지라 아까보다 더 빨리 달렸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
곽정은 한참을 달리다 어둠 속에서 구양봉의 비명을 듣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희미한 눈빛 사이로 그는 반신이 진흙 속에 빠진 채 두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진흙이 점점 더 위로 올라오며 가슴까지 묻혔다. 조만간 진흙이 코까지 차오르기만 하면 그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곽정은 비참한 그의 모양을 보며 황용을 생각했다. 황용도 저렇게 죽었겠구나 생각하니 뜨거운 피가 왈칵 솟구쳤다. 자신도 말에서 뛰어 내려 저렇게 죽고만 싶었다.
[빨리 사람 좀 살려 주오!]
구양봉의 외침에 곽정은 이를 뿌드득 갈며 쏘아붙였다.
[내 은사님을 살해하고 또 황소저를 살해한 주제에 나를 보고 살려달라니 어림없는 수작이오.]
[아니 우리가 손바닥을 쳐 약속하기를 세 번 용서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빈이 세 번짼데 그래 신의를 지키지 않겠단 말이오?]
[황소저가 세상을 떠난 이 마당에 그까짓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곽정은 분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
구양봉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갖은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곽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곽정은 뒤도 안 돌아보고 수장을 달렸다. 그래도 그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그는 차마 구양봉을 내버려두고 갈 수가 없어 탄식을 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이미 진흙은 구양봉의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내가 구해는 주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 말을 탈 수는 없소. 그랬다가는 두 사람 다 빠질 테니까요]
[끈으로 나를 끌어 주면 되오.]
곽정은 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웃옷을 벗어 한쪽을 잡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구양봉이 다른 한쪽을 움켜잡았다. 곽정이 두 발을 모으고 대갈일성하자 홍마가 앞으로 내달렸다. 이어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구양봉이 진흙 속에서 쑥 뽑혀 나오자 곽정은 눈 위로 그를 끌고 달렸다.
이대로 만약 동쪽으로 간다면 금방 늪을 벗어날 수도 있을 테지만 곽정은 황용의 안위를 몹시 걱정하고 있던 터라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말을 서쪽으로 몰았다.
구양봉은 눈 위에 벌렁 누운 채 미끄러지면서도 호흡을 가다듬었다. 홍마는 질풍처럼 달려 날이 미처 새기도 전에 진흙 늪을 벗어났다.
그런데 눈 위에는 황용이 걸어간 혼적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점점이 박혀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발자국만 남고 사람은 간데없으니 그 혼백이 어디를 헤매고 있단 말인가?
곽정은 말에서 뛰어내려 넋을 잃고 황용의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 침통한 나머지 그만 등뒤에 대적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눈 위에 우두커니 서서 왼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 황용이 입었던 담비 가죽옷을 하염없이 어루만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등뒤가 이상함을 느끼며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그때는 이미 구양봉의 수장이 자기 등뒤의 영태혈(靈台穴)을 누른 뒤였다. 그날 구양봉이 모래 구덩이 속에서 빠져 나왔을 때 곽정에 의해 영태혈을 눌려 꼼짝없이 당했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구양봉은 너무나 통쾌해 절로 웃음이 껄껄 터져 나왔다. 그러나 곽정은 애통한 심정이 차고 넘쳐 자기 목숨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죽이고 싶거든 죽이시구려. 나를 용서해 줘야 한다고 약속한 일도 없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곽정이 의외로 담담하게 나오자 놀란 사람은 오히려 구양봉이었다. 그는 본래 곽정을 괴롭힐 때까지 괴롭히다가 결국 죽여 버릴 셈이었다. 그런데 그가 삶을 포기하며 체념하는 자세를 보이니 바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녀석과 그 계집애의 정이 이토록 두터운 줄은 몰랐다. 내 만약 이 녀석을 죽여 없앤다면 순사(殉死)하겠다는 소망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생각을 다시 바꿨다.
(그 계집애는 이미 늪에 빠져 죽었으니 이놈의 힘에 의지해서 경문 내용을 터득할 수밖에 없지.)
구양봉은 일단 이렇게 걸정하고 즉시 곽정의 팔을 잡아 끌고 말등에 올라타 남쪽에 보이는 작은 마을을 향해 달렸다.
사시(巳時)쯤 지나자 길 옆에 촌락이 나타났다. 말머리를 돌려 촌락어귀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마을에 온통 시체만 즐비했다. 워낙 날씨가 추워 시체들은 죽을 때 참상 그대로 하고 있었다. 몽고 대군이 휩쓸고 지나갈 때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구양봉이 목청을 높여 사람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고 다만 수십 마리의 소와 양만이 인기척을 듣고 울부짖었다. 구양봉은 내심 은근히 기뻐하며 곽정을 잡아끌고 으슥한 석실(石室)을 찾아 들어가며 말했다.
[자네가 내 손에 잡혔지만 죽일 생각은 없네. 나와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마음대로 나가도 돼.]
그는 유유자적 지껄이면서 양 한 마리를 끌어다 잡아먹었다. 곽정은 구양봉의 느긋한 표정을 쳐다볼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씩씩거리며 울분을 참지 못하는 곽정에게 구양봉은 구운 양 다리 하나를 던져 주며 이죽거렸다.
[자네가 배불리 먹고 난 후 한바탕 싸워 보도록 하지.]
[치겠으면 그냥 칠 일이지 내가 배부르고 말고 상관할 게 뭐 있어요?]
곽정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홱 날리며 그의 면상을 향해 일 장을 뻗었다. 구양봉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꽥꽥 두 마디를 외치다 주먹으로 반격했다. 둘이 싸우는 바람에 탁자며 의자가 엎어지고 넘어지는 등 석실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렇게 l백여 초를 겨루고 나니 아무래도 곽정의 공력이 미치지 못하고 밀렸다. 순간 구양봉의 수장이 곽정의 겨드랑이 밑을 무섭게 스쳤다. 곽정은 깜짝 놀라면서도 그냥 죽을 각오를 했다. 그런데 구양봉은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씩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고 내일 진경에 씌어 있는 무공이나 익힌 뒤에 다시 대결하자구]
곽정은 코방귀를 뀌면서 의자에 앉아 양 다리를 뜯어먹으며 궁리했다.
(흥, 진경 안의 비결을 배우고 싶어 안달이로군. 내가 수련하는 모양을 보고 옆에서 그냥 공짜로 배워 보려고 하겠지만 어디 그따위 속임수에 걸려들 줄 아나? 홍, 어림없는 수작이지. 그러나 방금 내 겨드랑이를 노렸던 그런 공세는 무슨 방법으로 깰 수 있을까?)
곽정은 잠시 그 동안 배운 권법이나 장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별로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진경에 나오는 한 가지 공력을 열심히 익히면 겨드랑이 밑에 있는 근육을 이용해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이번 공격을 헛수고로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 혼자 연공을 하더라도 저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해.)
곽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양 다리 하나를 깨끗이 먹어 치운 후에 바닥에 앉아 진경에 적힌 비결에 따라 연습을 해봤다. 그는 역근단골편을 익힌 뒤로 기초가 확고해진데다 일등대사에게 전수받은 진경의 요지를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던 터라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비서경(飛絮勁)의 마지막 부분에 숙달할 수 있었다.
수련을 마친 후 곁눈으로 구양봉을 살펴보니 때마침 그도 앉아서 뭔가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
[자 받으시오!]
곽정은 몸도 일으켜 세우지 않고 일 장을 쪼갰다. 그러자 구양봉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수장을 들어 반격을 했다. 한참 동안 이렇게 싸우다가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곽정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꽂았다. 그런데 수장이 이상스럽게도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어느 틈에 곽정의 왼손 끝이 그의 목을 치려고 내려와 있었다. 구양봉은 놀랍고도 반가웠다. 내친김에 앞으로 내달려 곽정의 공세를 피하고 다시 돌아섰다.
[정말 훌륭한 재주로군. 진경에 있는 것인가? 이름이 뭐야?]
[사찰이추(沙蔡以推), 애말금아(愛末琴兒)요.]
구양봉은 이것이 범어의 명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바보 녀석의 소 같은 힘은 꾀로 당해 내야지, 힘으로 맞서 봐야 소용이 없단 말야.)
구양봉과 곽정은 장세를 달리하여 또 한바탕 어울려 싸웠다.
구양봉은 어떻게 해서든지 진경의 무공을 배우고야 말겠다는 일념 뿐이요, 곽정은 그를 죽여 복수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결사적으로 덤볐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석실에 묵으면서 달포 이상을 싸우는 동안 마을에 있는 소와 양을 반 이상이나 잡아먹었다. 그러나 꾀 많은 사람의 속셈이라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요, 우둔한 사람의 행동이라 해서 늘 손해만 입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한 달이 넘도록 싸우는 동안 구양봉은 어떻게 해서든지 곽정이 연공을 하도록 유도했다. 구양봉은 무공이 워낙 오묘해서 곽정이 연공을 하면 그 앞뒤의 차이를 세심히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동안 적지 않게 진경의 요지를 터득했지만 전에 곽정이 배 위에서 자기에게 써준 내용과는 부합되지 않는 것이 많음을 발견했다. 그는 진경의 요지를 이해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만큼 더 곽정을 괴롭혔다. 이렇게 되자 곽정의 무공도 이 한 달 동안에 급격한 발전을 거듭했다. 한편 이를 눈치챈 구양봉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해 나가다가는 진경의 요지를 미처 터득하기도 전에 녀석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닐까.)
이 며칠 동안 곽정은 병기를 쓰는 데 골몰해 있었다. 비수로 나무를 깎아 칼을 만들어 구양봉의 사장과 맞섰다. 구양봉은 예전에 홍칠공과 싸울 때 사장을 바닷속에 빠뜨려 잃어버린 뒤로 다시 쇠지팡이를 주조하고 괴사(怪蛇)를 길렀지만 이번에는 또 얼음 기둥에 갇히는 바람에 노유각이 거두어 부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은 평범한 몽둥이에 불과한데다 괴사가 없어 위력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다만 휘두르는 초술이 오묘하고 변화가 무꿍할 뿐이었다. 그 사이 몇 차례나 곽정의 목검에 맞아 부러질 뻔하기는 했으나 만약 그 지팡이에 뱀이 있었다면 곽정으로서는 더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석실 밖에서는 칭기즈 칸의 대군이 동쪽으로 돌아가는 인마의 소리가 며칠 동안이나 계속해서 들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격투에 여념이 없어 거들떠보지도 못했다. 이날 밤 대군이 다 지나간 뒤인지 사방이 조용해졌다. 곽정은 칼을 들고 곰곰이 생각했다.
(오늘 밤에도 이기지 못할 테지만 저 나무 지팡이가 내 칼을 부러뜨리지도 못하겠지.)
그는 이제 막 배운 초술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은 욕망에 적이 선제 공격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요, 간사한 것이 어디로 달아나려고 그러느냐?]
분명 노완동 주백통의 목소리였다. 구양봉과 곽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면서 한결같이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서 그가 만리 타향 이 서역에 왔을까?)
두 사람이 막 말을 꺼내려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석실 부근으로 달려오는 사람 발소리가 들렸다. 비록 마을에 집이 여러 채 있기는 했지만 이 석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구양봉이 혹 등불을 끄는 순간 문이 삐걱 열리며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의 걸음걸이가 이상할 정도로 날렵한 것으로 보아 그의 무공이 결코 주백통에 비해 손색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구양봉도 크게 놀랐다.
(이 사람이 수만 리나 달아나면서도 노완동에게 잡히지 않았다면 그의 무공도 알아 줄 만하다. 세상에 이 정도 무공을 지닌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만약 황약사나 홍칠공이라면 노독물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
앞서 들어온 사람이 몸을 솟구쳐 대들보 위에 올라가 앉자 주백통이 빙긋거리며 소리쳤다.
[나와 술래잡기를 하려는 모양인데 이 노완동이 제일 좋아하는 장난이지. 그러나 오늘만은 달아나지 못하게 해야지.]
주백통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대문을 닫아걸고 옆에 있는 큰 돌을 들어다 거기에 기대 놓았다.
[여보 지금 어디 숨었소?]
그러면서 주백통은 사방을 더듬었다. 곽정이 막 대들보 위에 그 사람이 있다고 말하려는데 주백통이 대들보 위의 그자를 겨냥하고 펄쩍 뛰어올랐다. 사실 그는 대들보 위에 적이 숨은 줄 뻔히 알면서도 고의로 사방을 더듬는 체했다. 그러다 적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노려 갑자기 습격을 한 것이다.
그러나 대들보 위에 있던 사람도 보통 수완이 아니었다. 노완동의 손이 자기를 덮치려고 하자 기둥을 타고 주르르 내려와 남쪽 모통이에 몸을 숨겼다. 주백통도 입으로는 연신 허풍을 떨었지만 내심 상대를 꽤나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조용히 숨죽이고 앉아 그가 숨은 장소가 어딘가 주의를 기울일 뿐 함부로 대들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방은 다시 정적에 묻혔다. 이제는 주백통도 세 사람의 숨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등불이 갑자기 꺼졌으니 원래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주백통은 다만 그 사람이 무서움에 벌벌 떠느라 조용히 있는 줄 알았다.
[여보 주인장, 안심하시오. 내 좀도둑 하나를 잡으려고 하는데 잡기만 하면 금방 나가리다.]
대개 보통 사람의 숨소리는 대단히 거칠다. 그러나 내공이 깊은 사람들의 호흡은 느리고 길고 또 가벼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무거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금방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주백통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니 동, 서, 북 삼면에 있는 사람들 숨소리가 한결같이 낮고도 느렸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니, 요 간사한 도둑놈이 여기에 도와줄 사람을 숨기고 있었군 그래.]
곽정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꿀꺽 참았다.
(구양봉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다 주대형이 쫓고 있는 사람 또한 강적이니 가만히 있다가 기회를 보아 돕는 게 낫겠다.)
주백통은 한발 한발 문전으로 접근하면서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노완동이 사람을 잡으려다 잡지 못하고 오히려 잡히게 되었구나.]
그리고는 사정이 묘해지면 달아날 결심을 했다. 바로 이때 문밖 먼 곳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났다.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며 가을 밤의 조수가 밀려오듯 했다.
[도와줄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밀려오니 이 노완동 그만 실례를 해야겠군.]
그러고는 주백통은 문 뒤에 버텨 놓았던 돌을 들어올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주백통이 문을 열고 도망치는 줄 알았다. 그는 1백 근이 넘는 큰 돌을 번쩍 치켜 들고 쫓던 사람이 숨어 있는 쪽으로 힘껏 던졌다. 문은 남쪽을 향해 열 수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사람은 북쪽에 서있었다. 구양봉은 맹렬한 바람소리를 듣고 노완동이 돌을 던질 때 그의 오른쪽에 반드시 허점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다. 차제에 그를 죽여 없앤다면 우선 눈앞의 화근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앞으로 화산에서 2차 논검이 있을 시에 강적 하나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그는 이렇게 마음먹자마자 꿇어앉아 합마공의 재주를 부려 두 손을 앞으로 밀었다. 그가 서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미는 힘은 자연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었다. 어찌나 그 힘이 강했던지 무시무시한 바람소리가 스쳤다.
곽정은 그와 수십 일 동안이나 연이어 싸웠기 때문에 이제 그의 일거일동을 거의 짐작할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수장이 뻗는 것을 보고 벌써 주백통을 습격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잽싸게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항룡유회의 재주로 맞섰다.
이때 북쪽에 서 있던 사람도 자기를 향해 돌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두 발을 벌리고 서서 쌍장을 뻗어 주백통에게 도로 밀어붙일 태세를 취했다. 네 사람은 동서남북 사방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뻗는 힘의 선후는 달랐지만 강세는 엇비슷했다. 큰 돌이 네 줄기 강한 힘에 의해 석실 중앙에 꽝 하고 떨어져 내리는 바람에 탁자 하나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귀가 다 먹먹할 정도였다. 이를 본 주백통은 뭐가 그리 재미나는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웃음 소리는 인마 소리에 파묻혔다.
어느 틈에 마을에는 수천 수만의 군마가 벌써 들어와 법석대고 있었다. 전마의 투래질 소리와 병기 부딪치는 소리, 군관의 호령과 사병들의 함성이 뒤섞여 왁자지껄했다. 곽정은 군사들이 주고받는 말소리를 듣고 그들은 호라즘 군대로 마을로 피해 들어와 결사적인 항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호라즘 군대가 미처 포진도 하기 전에 몽고군이 추격을 해온 것이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큰 기를 흔드는 바람소리, 함성 소리, 화살이 공중을 가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 왔다. 이어서 육박전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사방의 어수선한 소리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어우러져 싸우는지 일수도 없게 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주백통이 그를 낚아채 밖으로 집어 던지고 큰 돌을 들어 다시 문을 막았다. 구양봉은 일격이 실패하자 자기의 존재가 탄로난 줄 알았다.
[여보 노완동, 내가 누군지 알겠소?]
주백통은 사람의 소리는 들었지만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몰랐다. 그래서 한 손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다른 손으로 그를 잡으려고 했다. 구양봉이 오른손을 구부려 그의 팔을 잡고 왼손으로 후려치자 주백통이 막으며 놀라 외쳤다.
[노독물,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었소?]
주백통은 날렵하게 왼쪽으로 비켜서면서 몸을 돌렸다. 바로 이 틈을 노리고 북쪽에 서 있던 사람이 일 장으로 주백통의 배후를 맹격했다. 주백통은 오른손으로 구양봉을 공격하면서 순식간에 왼쪽 주먹을 뒤로 돌려 반격했다. 그는 도화도에서 혼자 좌우호박술을 익힌 뒤 아직까지 고수를 만나 대결해 볼 기회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자 그 기술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 그의 왼쪽 주먹이 상대편에 가 맞으려는 찰나 곽정이 동쪽에서 홀쩍 나타나 오른손으로 주백통의 주먹을 밀치며 왼손으로 그자를 상대했다.
순간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주백통은 곽정을 보고 놀라 외쳤고 곽정은 구천인임을 확인하고 놀랐다.
연우루의 대결이 있던 그날 주백통은 독사가 무서워 지붕 위에 몸을 숨겼으나 빠져 나갈 길이 막히자 지붕 위의 기왓장을 한장 한장 벗겨 몸을 가렸다. 그러자 비 오듯 퍼부어대는 관병의 화살도 막을 수 있었고 구양봉의 독사도 감히 대들지 못했다. 다음날 해가 솟고 안개가 홑어지자 뱀 떼도 물러갔고 사람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백통은 할 일이 없어지자 사방으로 구경을 다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때 개방 제자 하나가 그에게 황용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자기의 요구는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신용을 지켜야 하는데 철장방 방주인 구천인을 제거하는 데 성공만 하면 단황야의 유귀비로 하여금 다시는 주백통을 찾지 못하게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주백통이 생각해 봐도 황용은 확실히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구천인 그놈은 금나라와 야합했으니 결코 호인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또 유귀비와의 일을 생각하면 언제나 꺼림칙했다. 구천인과 무슨 감정이 있건 없건 간에 유귀비가 자기를 찾지만 않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렇게 마음먹고 그는 단신으로 철장방을 찾아갔다.
처음에 구천인과 상대할 때는 피차의 공력이 엇비슷했다. 그런데 주백통이 좌우호박술을 쓰기 시작하자 수세에 몰린 구천인이 도망을 친 것이다. 고수의 대결에서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면 승부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도리였다. 그런데도 주백통은 계속 그를 추적했다. 구천인이 몇 번이나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주백통은 눈만 찢어지게 흘길뿐 그 까닭을 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쫓고 쫓기며 싸우다 점점 더 멀리까지 가게 되었다. 주백통의 무공이 구천인에 비해 어느 정도 우월하기는 했지만 그의 생명을 해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천인은 이런 생각까지 했다.
(서역의 아주 추운 곳으로 달아나도 쫓아오나 어디 좀 보자.)
그러나 주백통의 생각은 전혀 반대였다.
(네가 어디까지 달아나다 돌아서나 어디 좀 보자.)
결국 이렇게 계속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석실에까지 뛰어들게 된 것이다.
주백통과 곽정은 그들 이외의 두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지만 구양봉과 구천인은 상대방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두 사람의 호흡 소리가 문밖에서 나는 소란 때문에 전연 들리지 않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구양봉은 이 사람이 주백통의 상대인 줄 알았고 구천인은 구천인 대로 상대방이 같은 패거리로 곽정의 친구려니 여겼다. 네 사람은 빙빙 돌아가며 대결하다가 갑자기 떨어지곤 했다. 석실 안은 불빛 하나 없는데다가 문밖은 더욱 소란스러워져 말소리가 전연 들리지 않았다. 주백통, 구천인, 구양봉 세 사람의 무공은 워낙 출중한데다가 곽정도 구양봉과 수십 일 동안 싸우는 동안 상당히 수준이 높아져 있었다. 이른바 4명의 고수는 밀폐된 방안에 갇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했다. 네 사람모두 갑자기 벙어리와 귀머거리, 장님이 되어 답답한 대치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곽정은 궁리 끝에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구양봉을 막고 주대형으로 하여금 먼저 구천인을 처치하도록 해야겠다. 그때 가서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구양봉쯤이야 어렵지 않겠지.)
곽정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쌍장을 뻗어 오른손은 허공을 치고, 왼손은 다른 한 사람의 수장과 마주 댔다. 곽정은 도화도의 굴속에서 주백통과 워낙 가까이 지내며 수련을 했기 때문에 두 손이 닿는 순간 그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즉시 앞으로 뛰어가 그의 팔을 잡고 신호를 보내려 했다. 그런데 그때 주백통은 장난기가 불끈 일어나 왼쪽 팔을 움츠리고 오른쪽 손을 주먹으로 바꾸며 퍽 하고 곽정의 어깨를 때렸다. 그가 주먹에 힘을 준 것은 아니지만 곽정은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맞았기 때문에 상당히 아팠다.
[착한 아우, 이 형님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랬지? 조심하게.]
그러면서 주백통은 다시 한 번 왼손을 날렸다. 곽정도 비록 그의 말뜻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빈에는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구양봉과 구천인도 10여 초를 대결하는 사이에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화산에서 논검이 있을 때는 결국 사력을 다해 싸워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 이렇게 만났으니 차제에 상대방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연속적으로 살수를 쓰며 공격을 했다. 잠시 이렇게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데 얼굴이며 등뒤로 질풍이 오락가락했다. 순간적으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곧 주백통과 곽정이 대결하고 있는 걸 알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주백통이란 사람은 워낙 괴팍한 위인이라 예측하기 어려웠다. 다만 이런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들은 피차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시에 주백통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백통은 곽정과 l0여 초를 겨루는 사이 그의 무공이 전과는 크게 다른 것을 발견하고는 몹시 기뻐하며 물었다.
[아우, 어디서 이런 무공을 배웠지?]
그러나 곽정은 밖의 소란 때문에 아무 소리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싸움에만 몰두하는데 강한 바람이 자기의 얼굴을 향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구양봉과 구천인 두 사람이 한꺼번에 공격한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비겁한 짓들이람. 아우, 아우 혼자 어디 한번 이자들에게 맛 좀 보여 주게나.]
주백통은 이렇게 말하면서 대들보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갔다.
구양봉과 구천인은 주백통이 대들보 위로 뛰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눈엣가시 같은 녀석을 해치울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즉시 한 사람은 왼쪽에서, 또 한 사람은 오른쪽에서 양면 공격을 감행했다.
곽정은 방금까지 주백통에게 걸려 괴로움을 당했다. 그런데 이제 주백통이 물러가나 싶었더니 다시 강적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게 된 것이다. 7,8종의 권법을 계속 바꿔 가며 써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정말로 큰일났다는 위기 의식을 느끼며 정신을 가다듬고 이번에는 좌우호박술로 맞섰다.
이렇게 싸우는 동안 구양봉과 구천인은 내심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곽정의 공력으로 따진다면 구양봉이나 구천인 가운데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이겨낼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합세를 했는데도 그가 좌장으로는 구양봉올, 우권으로는 구천인을 견제하면서 버티는 바람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주백통은 대들보 위에 앉아 쉬다가 자기가 내려가지 않으면 혹시 곽정이 다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벽을 타고 내려와 두 눈을 감은 채 아무나 잡으려고 손을 휘저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의 손은 구양봉의 덜미를 잡았다.
그때 구양봉은 땅에 쭈그려 앉아 합마공으로 곽정을 향해 맹공을 퍼부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등뒤에 주백통의 손이 와닿는것을 느끼는 순간 몸을 홱 돌려 세웠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곽정은 구천인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는 방 모통이로 뛰어가 숨을 헐떡거렸다. 만약 주백통이 한 발만 늦었더라면 구양봉의 맹격을 당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네 사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난전을 벌였다. 주백통과 구천인이 붙었다 싶으면 어느새 또 곽정과 구천인이 맞서 있는 식으로 네 사람은 피아를 구별하지 못하고 마구 엉겨붙어 싸웠다. 네 사람이 이렇게 혼전을 벌이는데도 주백통만은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생 별별 대결을 수없이 겪어 보았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대전은 처음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이번에는 더 재미있는 생각을 해낸 듯 곽정을 붙들고 늘어졌다.
[구천인, 구양봉 두 적이 있고 또 내 두 손을 각기 놀리면 네 명의 적이 되는 셈이 아닌가? 이제 1대 4로 한번 대결해 보면 근사할 것 같으니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구.]
곽정은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세 사람이 동시에 자기를 향해 공격하자 결사적으로 막고 피했다. 주백통은 계속 그를 격려했다.
[무서워할 것 없어. 위험할 때는 내가 도울 데니까.]
그러나 이런 어둠 속에서 어느 누구의 주먹이나 발길에 한번 걸리기만 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없으리라. 비록 주백통이 돕겠다고는 하지만 그때 가서는 소용이 없을 터였다. 다시 수십 초를 겨루는 동안 곽정은 기진맥진해져 잠시라도 대들보로 올라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구양봉과 구천인 두 사람의 주먹과 수장은 갈수록 무서워졌다. 한쪽으로 막아 가면서 뒤로 물러섰지만 끝내 주백통의 장력에 밀려 몸을 뺄 재주가 없었다. 곽정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더 견딜 수가 없어 절로 욕이 나왔다.
[이 바보 같은 주대형, 그래 어쩌자고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거요?]
그러나 석실 밖의 소란 때문에 말을 하고 있는 자기 귀에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곽정은 다시 또 뒤로 몇 발짝 피하다가 바닥에 놓인 큰 돌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가 미처 허리를 펴기도 전에 구천인의 철장이 무섭게 날아왔다. 곽정은 그 와중에도 돌을 번쩍 들어 가슴을 가렸다. 구천인의 일 장이 돌에 와 맞자 곽정은 두 팔에 힘을 주며 돌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집어 던졌다. 이때 왼쪽으로 바람이 세게 일며 구양봉의 장력이 또 자기를 향해 엄습하자 그는 살짝 몸을 숙여 피했다.
곽정이 집어 던진 돌은 지붕을 뚫고 허공으로 획 날아갔다. 지붕 위의 커다랗게 뚫린 구멍을 통해 별빛이 비쳐 들어오자 주백통이 벌컥 화를 냈다.
[다 보이면 무슨 재미가 있나?]
곽정은 너무나 피곤해 두 발로 땅을 찍으며 뚫린 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왔다. 구양봉이 그 뒤를 따르려고 몸을 날리는데 주백통이 팔을 쭉 뻗어 구양봉의 왼발을 붙잡으며 외쳤다.
[어디 가면 안 돼. 가지 말고 나하고 놀자구.]
구양봉이 기겁을 하며 오른발로 그의 발을 차버리기는 했지만 공중에 떴던 몸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구천인이 떨어져 내려오는 그의 가슴을 걷어차기라도 할 듯이 달려들었다. 구양봉은 재빨리 가슴을 움츠리며 손가락을 펴 그의 복사뼈를 눌렀다. 그 바람에 세 사람은 다시 육박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는 상대방의 동작을 어느 정도 식별할 수 있었고 소란스럽던 밖의 동정도 뜸해져 조금 전과 같은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분이 상한 주백통은 두 사람을 향해 화풀이를 하면서 권법을 바꿔 계속 살수를 쓰기 시작했다.
곽정은 석실에서 완전히 빠져 나왔다. 오가는 인마가 수시로 들어오고 병기와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 속에 칼과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그는 병사들 사이를 뚫고 마을 밖으로 달려 나와 나무 아래 누워 휴식을 취했다. 밤새 악전고투를 한 뒤라 심신의 맥이 한꺼번에 풀렸다. 석실에서의 싸움으로 몹시 고단했던지 그는 눕자마자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곽정은 얼굴에 뭔가 기어가는 것을 느끼며 미처 눈도 뜨기 전에 벌떡 일어났다. 홍마가 반갑다고 자기 얼굴을 핥고 있었던 것이다. 곽정도 홍마를 어루만지며 반가워했다.
홍마는 그가 구양봉에 의해 석실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혼자 먹이를 찾아 헤맨데다가 어젯밤의 격전 가운데서도 용케 살아나 주인을 만났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곽정은 말을 끌고 다시 마을로 들어왔다. 부러진 활과 화살, 인마의 시체가 즐비한 가운데 목숨만 간신히 건진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가 처절했다. 곽정은 전쟁의 경험이 풍부하여 죽은 시체도 예사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신세를 생각해 보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곽정은 홍마를 이끌고 슬그머니 석실로 돌아와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안에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문을 밀고 안을 들여다보아도 쥐죽은듯 정적만 흐를 뿐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주백통, 구양봉, 구천인 모두 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니면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곽정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말을 타고 동쪽으로 떠났다. 홍마가 워낙 빨리 달리는 바람에 얼마 가지 않아 칭기즈 칸의 대군을 쫓을 수 있었다. 이때 호라즘의 여러 성은 혹은 투항하고 혹은 섬멸을 당해 수십만 군대가 모두 일패도지되었다.
오만하고 포악한 호라즘의 왕 무하마드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 수도 없었다. 칭기즈 칸은 대장 수보타이와 제베로 하여금 만인대 2대를 통솔하여 서쪽의 잔병을 추적케 한 뒤 자기는 대군을 인솔하고 개선했다. 수보타이와 제베는 지금의 모스크바 서쪽에 있는 제궁백(第弓伯) 강변에 있는 키예프(基輔城) 부근까지 추적하여 러시아(俄羅斯)와 킵차크 연합군 수십만을 대파하고 투항한 키예프천공(基輔天公) 및 11명의 러시아 왕공(王公)을 모두 처형했다. 이 전사(戰史)를 카르카하지역(迦勒迦河之役)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러시아의 대평원은 오랫동안 몽고군의 말발굽 밑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당시의 전황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소련사가들이 상세하게 기술해 놓았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더 길게 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칭기즈 칸은 사마르칸트 성에서 곽정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어 크게 걱정을 하고 있던 차인데 이렇게 돌아오자 여간 반기지 않았다. 화쟁 공주의 기쁨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구처기는 계속 대군을 쫓아 동쪽으로 오면서도 대칸에게 끊임없이 백성을 사랑하고 살생을 삼가라는 충고를 했다. 칭기즈 칸은 비록 그와 의견은 달리하고 있었지만 도를 닦는 사람의 말이려니 하고 별로 나무라지 않았다. 그래도 그 전란 속에서 구처기의 말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사람의 숫자만도 부지기수였다. 원사(元史) 구처기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태조(즉, 칭기즈 칸) 때 서방 공벌을 하는데 날마다 싸움이 있었다. 구처기는 천하를 통일하려면 살인을 능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고, 장생의 비결을 물으면 깨끗한 마음으로 욕심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태조는 그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하늘이 신선을 보내 내 뜻을 깨우치게 했다면서 좌우에 명하여 이를 글로 써서 후세 자손들을 훈계하는 데 쓰라고 했다. 뒤에 몽고군이 금나라를 칠 때도 구처기는 전력을 다하여 백성을 하나라도 구하려고 애썼다. 원사(元史)에도 <이로 말미암아 노예로 삼았던 사람을 양민으로 만들고, 죽음에 임박한 사람 가운데 다시 살아난 자 무려 2,3만 명에 달해 사람들이 모두 이를 크게 칭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라즘과 몽고 본토 사이는 수만 리나 떨어져 있어서 칭기즈 칸이 동쪽으로 귀환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칭기즈 칸은 귀국한 즉시 대첩을 경축하고 명사들로 하여금 휴양을 취하도록 했다.
다시 또 수개월이 흘러 가을 바람이 쌀쌀하게 불자 사병들은 원기를 되찾았고 말은 살이 올랐다. 칭기즈 칸은 또 남정(南征)을 계획했다. 하루는 수하 장수들을 소집해 놓고 금나라를 토벌할 의논을 했다.
곽정은 황용이 세상을 떠난 뒤로 실의에 빠져 늘 혼자 홍마를 탄 채 수리를 데리고 몽고의 초원을 저녁 늦도록 혜매고 다녔다. 그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마냥 며칠씩 말 한마디 꺼내는 법이 없었다. 보다 못한 화쟁 공주가 부드러운 말로 달래 보지만 곽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도 그가 워낙 괴로워하는 줄 알기 때문에 혼사를 거론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날도 대칸의 장막 안에서 장수들이 각기 책략을 내놓았지만 곽정은 시종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칭기즈 칸은 장수들을 되돌려보내고 혼자 산 위로 올라가 반나절이나 심사숙고하며 고민을 했다. 다음날 그는 병사들에게 세 길로 나누어 쳐들어가 금나라를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장남 주치와 차남 차가타이는 모두 서방에서 새로 정복한 여러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금나라를 토벌하는 제1군은 3남인 오고타이가 인솔하고 제2군은 4남인 툴루이가, 제3군은 곽정이 통솔했다. 칭기즈 칸은 3군 통솔자를 장막 안으로 불러들이고 잠시 친병을 물리친 뒤에 오고타이, 툴루이, 곽정 세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금나라의 정병이 동관에 있는데 남은 험한 산으로 둘러 있고 북에는 대하가 흐르고 있어 공략이 대단히 어렵다. 여러 장수들이 내놓은 책략도 각기 일리는 있다만 만약 정면으로 공격을 한다면 시일이 매우 오래 걸릴 것이야. 이제 우리 몽고와 송나라가 결맹을 하고 있으니 차라리 송나라의 길을 빌려 당주(唐州), 등주(鄧州)로 진격을 해 직접 금나라 도성인 대량(大梁, 지금의 하남성 개봉)을 치는 것이 묘책이 아닐까?]
오고타이, 툴루이, 곽정 세 사람은 여기까지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로 얼싸안았다.
[정말 대단한 묘책입니다.]
칭기즈 칸이 곽정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너는 용병에 능하니 내 마음을 충분히 알겠지. 내 한 가지 묻겠는데 대량을 공격한 후에는 어떻게 하지?]
[대량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곽정이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오고타이와 툴루이는 방금 부왕이 직접 대량을 치겠다고 한 말을 분명 들었는데 이제 곽정이 치지 않는다고 말하자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요, 않는 것도 아니며 공격을 안 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곽정의 말에 오고타이와 툴루이는 영문을 몰라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칭기즈 칸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요, 않는 것도 아니란 말의 뜻을 두 형에게 설명해 주거라.]
[제가 대칸의 용병책을 추측하건대 금나라 도성을 치는 척하면서 성밖에서 섬멸해 버리자는 것 같습니다. 대량은 금나라 황제가 있는 곳이지만 주둔하고 있는 병사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우리 군대가 접근하는 것을 보면 금나라에서는 즉시 동관에 있는 정병을 불러들일 것입니다. 중화의 병법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갑옷을 챙겨 후퇴할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 속도는 평소의 배가 된다. 백 리를 계속 달리게 되면 기운 센 사람은 앞에 서고 힘없는 사람은 뒤에 처지게 마련이다. 열 명 가운데 겨우 한 명이 도착할 수 있을 뿐이다.> 백 리를 달리면 병사들 열 명 가운데 겨우 한 명이나 쫓아올까말까 한데 동관에서부터 대량까지 천 리가 넘는데 아무리 정병이라 하더라도 십중팔구 도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인마는 지칠 대로 지쳐 있어 도착했다 하더라도 싸움을 할 수는 없을 테니 아군이 이 기회를 이용한다면 틀림없이 이기고도 남을 것입니다. 금나라의 정예 부대가 괴멸되면 대량은 공략할 필요도 없게 되지요. 만약 무리를 해서 대량을 공격한다면 쉽게 함락할 수도 없으려니와 오히려 앞뒤로 적을 맞게 되는 셈입니다.]
칭기즈 칸은 손뻑을 치면서 희희낙락했다.
[맞는 말이야!]
그리고는 그림 한 폭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세 사람은 이를 본 순간 깜짝 놀랐다. 다름아니라 그 그림은 대량 부근의 지도였다. 지도 위에는 피아 양군의 행군 노선이 그려져 있고 어떻게 적의 배후를 칠 것이며, 또 어떻게 전면의 적을 섬멸하며, 어떻게 적을 유인해 지치게 만들어 대승을 거둘 것인가 하는 등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방금 곽정이 한 말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고타이와 툴루이는 부왕과 곽정을 번갈아 바라보머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번에 남정을 하면 금나라는 반드시 패망할 것이다. 여기 세 개의 비단 주머니가 있다. 각기 하나씩 간수하도록 하거라. 대량이 함락되거든 너희 세 사람은 대금황제의 금란전(金鎣殿)에 모여 함께 열어 본 뒤에 주머니 안에 적힌 그대로 행동하기 바란다.]
그 말을 하며 칭기즈 칸은 품에서 주머니 세 개를 꺼내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모두들 받아 보니 주머니 입구를 불로 지져 밀봉해 놓은 데다가 대칸의 금인을 찍어 놓았다.
[대량에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풀어 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주머니를 열기 전에 너희 세 사람은 각기 주머니를 풀어 본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 서로 확인해 보는 것도 잊지 말도록 하라.]
[대칸의 명령을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세 사람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칭기즈 칸은 곽정을 다정한 눈길로 쳐다보며 신통하다는 듯 물었다.
[너는 평소에는 상당히 우둔해 보이는데 용병술에는 어찌 그리 신출귀몰하냐?]
곽정은 무목유서를 열심히 읽은 결과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그러자 칭기즈 칸은 악비에 관한 얘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곽정은 악비가 어떻게 주선진(朱仙鎭)에서 금나라 병사를 대파했고 또 왜 금나라 사람들이 그를 악야야(岳爺爺)라 부르게 되었으며 <산은 흔들기 쉽지만 악비의 군대는 흔들기 어렵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이 모두를 듣고 난 칭기즈 칸은 아무 말 없이 뒷짐을 진 채 왔다갔다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백 년만 일찍 태어나 그런 영웅과 손을 잡았더라면 이 세상에 그 누가 나와 대적하겠다고 나서겠느냐?]
그러면서 그는 꽤나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곽정은 그의 장막에서 물러 나왔다. 그 동안 연일 군무에 바빠 오랫동안 어머니를 찾아뵐 기회가 없었던데다 내일 남정에 나서면 또 언제 돌아와 어머니를 뵙게 될지 몰랐다. 그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어머니를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어머니의 처소를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물건이란 물건은 다 어디로 옮겨 가고 늙은 병사 하나만이 장막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빙사 말로는 그의 어머니 이씨는 대칸의 명을 받고 다른 장막으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곽정은 다시 상세히 물어 어머니의 거처를 찾아갔다. 어머니의 새 장막은 평소 살던 것보다 몇 배나 더 컸다. 장막 안의 집기나 장식이 휘황찬란한 것이 너무나 호화스러웠다. 도처에 몽고군이 여기저기서 약탈해 온 진귀한 보물이 가득했다. 때마침 화쟁 공주가 이평을 모시고 곽정의 어렸을 때 얘기를 듣다가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미소로 반겼다.
[어머니, 이 많은 물건을 어디서 가져 오셨어요?]
[대칸께서 네가 이번 서정에서 큰 공로를 세웠다시면서 하사하신 거란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가난하게 살아온 우리에게 이런 물건이 무슨 소용 있느냐?]
정은 고개만 끄덕였다. 장막 안에는 어머니를 모시는 하녀가 8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몽고군이 사로잡아 온 포로들로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모두 왕손이나 귀족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세 사람은 같이 한담을 주고받다가 화쟁 공주가 먼저 물러났다. 그녀는 곽정이 내일 떠나기 때문에 자기에게 할말이 많으리라 짐작하고 밖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곽정은 나오지 않았다.
[곽정아, 공주는 아마 밖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게야. 나가서 서로 얘기나 나누렴.]
곽정은 건성으로 대답만 할 뿐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우리가 이 북국에서 산 지도 어언 이십 년이 되었구나. 대칸의 보살핌이 대단하지만 고향 생각이 자꾸만 간절해지는구나. 내 소원은 이번에 네가 나가 금나라를 섬멸하거든 일찌감치 고향으로 돌아가 너의 아버지가 살던 우가촌 그 집에서 살았으면 싶다. 너도 부귀영화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시 북으로 올 생각은 말거라. 걱정스러운 것은 공주를 어떻게 하느냐이다. 어려움이 많을 텐데....]
[제가 벌써 공주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용아가 세상을 떠났으니 저는 평생 결혼하지 않으렵니다.]
이평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는 혹 양해할지 모르겠다만 대칸이 나를 대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걱정이 되는구나.]
[대칸께서 무슨 말이라도 하셨나요?]
[글쎄 말이다. 요 며칠 대칸이 갑자기 나를 우대해 주시는 것 같구나. 금은보화를 헤아릴 수도 없이 보내 주시는구나. 말은 네 서정의 공로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 이십 년을 여기 살다 보니 대칸의 성품을 어느 정도 아는 셈인데 아무래도 다른 곡절이 있는 것 같지 뭐냐.]
[어머니 생각에는 그래 왜 그러시는 것 같아요?]
[내 일개 아녀자 몸으로 무얼 알겠느냐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칸이 뭔가 우리에게 시킬 일이 있으신 것 같구나.]
[음, 그야 물론 성혼을 시키시려는 거겠지요?]
[성혼이라면 좋은 일이 아니냐? 대칸은 네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지 않느냐. 그보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이번 대군을 거느리고 남정에 나섰다가 혹시 마음이 번해 모반을 할까 봐 걱정하시는 게 아닌가 싶더구나.]
[제가 부귀영화에 뜻이 없는 건 대칸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 제가 무엇 때문에 모반을 하겠습니까?]
곽정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되물었다.
[내 한 가지 묘안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대칸의 의도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고향을 그리워해서 이번에 너와 함께 남쪽으로 가려고 한다고 대칸께 말씀을 드려 보아라. 무슨 말이 나오나 어디 한 번 보자꾸나.]
第 六 卷. 第 九 章.(通卷 章). 진정 지켜야 할 것
곽정은 반가웠다.
[어머니 왜 좀더 일찍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 어머니와 제가 함께 고향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 대칸도 쾌히 승낙하실 거예요.]
그는 문을 열어제치고 밖으로 나왔다. 화쟁은 기다리다 지쳐 화가 나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곽정은 나간 지 한참 만에 풀이 죽어 돌아왔다.
[대칸께서 허락을 하시지 않더냐?]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로군요. 대칸께서 어머니를 여기 머무르시게 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는지 모르겠군요.]
이평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대칸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금나라를 대파하고 돌아와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귀향한다면 금의환향이니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겠느냐고요. 그래서 전 어머니가 고향을 너무 그리워하셔서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을 뿐이라고 했더니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만 도리질할 뿐 허락을 내리시지 않는군요.]
[그래 오늘 대칸께서 네게 다른 말을 하지는 않더냐?]
그래서 곽정은 대칸의 장막에서 금나라를 치는 데 대한 책략을 의논한 일과 비단 주머니 받은 일을 조목조목 말했다.
[만약 네 이사부와 황용이 살아 있다면 모든 일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왠지 불안한 마음만 들 뿐 그 까닭을 모르겠구나.]
곽정은 비단 주머니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대칸께서 이 주머니를 제게 주실 때 그 표정이 아주 이상했어요. 이걸 준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평은 비단 주머니를 받아 자세히 살펴보더니 하녀를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어디 한번 뜯어 보자.]
[안 됩니다. 금인을 뜯으면 그건 죽을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곽정이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임안부의 주머니 만드는 솜씨는 천하에 유명하다. 네 어미가 임안 사람 아니냐? 어려서부터 이 기술을 익혔으니 감쪽같이 뜯어보고 다시 꿰매 놓으면 귀신도 모른단다.]
이평은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가는 바늘을 찾아 실밥을 뜯었다. 잠시 후 살짝 뜯어진 주머니 틈으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이를 읽어 본 곽정 모자는 서로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을 잊었다.
그 종이에는 칭기즈 칸의 밀령이 씌어 있었다. 오고타이, 툴루이, 곽정 세 사람이 3군을 이끌고 금나라를 격파한 후 즉시 그 여세를 몰고 남하하여 임안을 공략 송나라를 멸망시키면 몽고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이런 말도 있었다. 곽정이 이번에 큰 공을 세우면 반드시 영토를 분할해 주고 왕으로 책봉함은 물론 큰 상을 내리려니와, 그러나 추호라도 다른 마음을 품거든 오고타이와 툴루이가 즉시 참수를 할 것이요, 그 어머니도 능지처참의 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곽정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만약 주머니를 뜯어 보자고 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자는 생명조차 지키지 못할 뻔했군요. 제가 송나라 사람으로서 어찌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사겠습니까?]
[그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어머니가 고생 좀 하시지요. 저와 함께 밤새 달아나 남행을 하십시다.]
[오냐, 그게 좋겠구나. 빨리 가서 짐을 챙기도록 해라. 발각되면 큰일이니 조심해라.]
곽정은 소리 죽여 대답하고는 자기 처소로 돌아와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단 필요한 옷가지를 챙기고 홍마 이외에 준마 세 필을 골랐다. 대칸이 그에게 하사한 금은보화는 하나도 가져 가지 않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마치 고향처럼 자라 온 이 몽고의 초원을 이제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몽고의 군령은 엄했다. 그러나 통군(統軍)의 원수(元帥)인 그를 감히 막을 자는 없으리라. 이때는 노유각 등 개방 방중도 모두 남으로 돌아간 뒤라 거칠 것이 없었다. 원수의 복장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다시 어머니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는 문을 젖히고 들어서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닥에 보따리 두 개만이 달랑 보일 뿐 어머니가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두어 번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자 일이 잘못되었나 싶어 막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불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어지러웠다. 대장 칠룬이 1천 정병을 이끌고 철통같이 포위를 하고 있었다.
[대칸께서 부르십니다.]
곽정은 이런 상황을 보자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곽정은 자신이 무공을 믿고 뚫고 나간다면 칠룬으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벌써 사로잡히신 모양인데 나 혼자 살겠다고 달아날 수는 없지.)
결국 곽정은 순순히 결박을 당했다. 칠룬이 그를 대칸의 금빛 찬란한 장막으로 압송했다. 대칸의 장막 양 옆으로는 2천 명이나 되는 호위병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이들 호위병은 모두가 몽고 사람으로 l천 명 가운데 하나씩 뽑은 날렵한 장사들이었다. 긴 창을 비껴 들고 앞뒤에서 철통같이 대칸을 호위했다. 곽정이 안으로 들어서자 칭기즈 칸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맞으면서 탁자를 꽝 때렸다.
[내 네놈을 박대함이 없이 어려서부터 키웠고 또 내 외동딸을 네게 주기로 허락했거늘 어찌 감히 나를 거역하고 모반을 한단 말이냐?]
곽정은 뜯어진 비단 주머니가 대칸의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걸 본 순간 이제 끝장이란 생각을 했다. 오로지 죽음이 있을 뿐 살 가망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저는 대송의 신민입니다. 어찌 대칸의 명령이라고 제 나라를 제 손으로 치겠습니까?]
곽정의 당돌한 대답이 칭기즈 칸을 더욱 화나게 했다.
[냉큼 끌어내 목을 치도록 하라.]
곽정의 두 손은 이미 오랏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8명의 도부수가 옆을 지키고 있으니 반항하려야 반항할 도리가 없었다.
[대칸이 송나라와 결맹을 맺어 금나라를 치기로 해놓고는 이제 도중에 맹약을 버리니 무슨 영웅이 그 모양입니까?]
이 말에 더욱 진노한 칭기즈 칸이 앞에 놓인 탁자를 힘껏 걷어찼다.
[내가 금나라를 무찌른 후면 송나라와의 맹약도 끝나는 것이 아니냐? 그때 다시 남하해 송나라를 치겠다는데 그게 무슨 맹약을 버리는 것이란 말이냐? 냉큼 끌어내다가 참수를 하고 즉시 보고토록 하라.]
여러 장수들은 평소 곽정과의 교분이 두터웠지만 성난 호랑이 같은 대칸의 면전이라 감히 용서하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곽정도 더 말해 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고 제 발로 물러 나왔다.
툴루이가 말을 타고 황급히 달려오며 외쳤다.
[잠깐만!]
툴루이는 웃통을 벗은 채 바지도 한쪽 가랑이만 끼고 있는 걸로 미루어 자다가 뛰쳐나왔음이 분명했다. 그는 곧장 부왕의 처소로 돌진해 들어갔다.
[부왕! 곽정 안다는 공도 많이 세웠거니와 아버지와 제 목숨도 건져 준 일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의 목을 벨 수는 없습니다.]
그제야 칭기즈 칸도 과거 곽정의 공로를 생각하고 다시 명을 내렸다.
[데려오도록 해라.]
도부수가 곽정을 끌고 돌아왔다.
칭기즈 칸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겁게 입을 맸다.
[네가 송나라를 생각해 무슨 좋은 수가 있단 말이냐? 네 그전에 내게 악비에 대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더냐? 그래 그분이 그토록 나라를 위해 충성을 했지만 뒤에 어떻게 됐느냐? 처형당하고 말지 않았느냐? 네가 나를 도와 송나라를 평정하면 내 너를 송나라 왕으로 책봉하겠다.]
[저는 대칸께 거역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나라를 팔아 영화를 구한다면 천번 만번 죽는다 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곽정의 어머니를 데려오너라.]
칭기즈 칸의 명이 떨어지자 곧 친병이 뒤쪽에서 이평을 데리고 나왔다. 곽정은 어머니를 보자 벌떡 일어나 달려가려고 했지만 도부수가 칼을 들어 가로막았다. 곽정은 생각했다.
(이 일은 우리 모자만 알고 있는데 어떻게 새어 나갔을까?)
[만약 내 말을 들으면 네 모자는 부귀영화를 누리겠거니와 거역한다면 네 모친을 일도양단을 내고 말리라. 이는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네가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 그렇게만 되면 너는 불효 막급한 사람이 되느니라.]
곽정은 칭기즈 칸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도려내는 듯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맸다.
툴루이도 옆에서 곽정을 달래듯 만류했다.
[곽정 안다, 안다는 어려서부터 몽고에서 자라 몽고 사람이나 똑같지 않습니까? 송나라 탐관오리들이 금나라 사람과 야합하여 안다의 부친을 살해했고, 또 모친은 고향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만약 부왕이 안다를 거두어 주시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우리 둘의 우정 또한 깊은 처지에 어찌 제가 형을 불효 막급한 사람이 되도록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제발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곽정은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무슨 말이든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평소 어머니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거나 서역이나 다른 여러 나라가 몽고에 정복당한 뒤에 겪는 참상을 생각해 보면 정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칭기즈 칸은 호랑이 같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곽정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금빛 찬란한 장막 안은 침묵에 잠겨 수백 명의 눈초리가 곽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는.....]
곽정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간신히 서두를 꺼내고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대칸, 이 아이가 당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니 제가 좀 권유하면 어떨까요?]
갑자기 이평이 나서자 칭기즈 칸이 반가워하며 재촉했다.
[좋은 생각이오. 어디 한번 권해 보구려.]
이평은 곽정의 팔을 잡고 모퉁이에 놓인 의자에 함께 걸터앉았다. 이제는 도부수들도 대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진 것을 보고는 말리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이평은 아들을 품속에 끌어안고 조용히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십 년 전 내가 임안부 우가촌에서 너를 잉태하고 있었을 때다. 큰눈이 내리던 어느 날 구처기 구도장과 네 아버지는 처음 만나게 되었단다. 그날 구도장님은 비수를 두 자루 꺼내 하나는 네 아버님께 드리고 또 한 자루는 양(梁)숙부님께 드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곽정의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들고 거기에 새겨진 <곽정>이란 두 글자를 가리켰다.
[구도장께서는 네 이름을 곽정이라 지어 주셨고 양숙부의 아기 이름은 양강이라고 지어 주셨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구도장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정강의 치욕(靖康之恥)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렇다. 양강이야 원수를 아비로 삼고 있다가 패가망신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다만 양숙부님께 누를 끼친 것만 애석할 뿐이구나. 후손이 오히려 그의 훌륭한 이름을 더럽히고 말았으니.....]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당시 차마 말할 수 없는 욕과 수치를 참으면서도 이 북국에서 천신만고 너를 키운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겠느냐? 매국노를 길러 구천에 있는 네 아비님이 통탄하시기를 바라서 그랬겠느냐?]
[어머니!]
곽정은 두 눈에서 눈물을 비 오듯 홀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평이 하는 말은 한어(漢語)였기에 칭기즈 칸과 수하 장수들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곽정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모두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해서 그러는 줄 알고 은근히 기뻐하고 있었다. 이평은 일개 중년의 연약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대칸의 금빛 찬란한 장막 안에서 칼과 도끼가 사방에 번쩍이고 있는데 담담하게 대의가 무엇인지 아들에게 들려주고 있으니 여걸 중의 여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인생이라 해야 고작 육칠십 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살고 죽는다는 사실이 뭐 대단할 게 있겠느냐? 다만 일생 동안의 행위가 양심에 부끄럽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설사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저버렸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의 허물을 지나치게 탓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라. 내 말뜻을 잊지 않도록 해라.]
말을 마친 이평은 그대로 오랫동안 곽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얘야, 너는 네 자신을 잘 보살피도록 해라.]
이런 말과 함께 비수를 들어 곽정의 손을 묶은 오랏졸을 자르고 느닷없이 자신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곽정은 두 손이 풀리자 급히 어머니의 손에 든 비수를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워낙 예리한 칼이라 벌써 자루까지 깊숙이 어머니 가슴에 박힌 뒤였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던 칭기즈 칸은 깜짝 놀라 소리 높여 외쳤다.
[빨리 잡아라!]
8명의 도부수들은 부마를 다치게 할 수는 없었던지 수중의 병기를 내동댕이치고 덮쳐 들었다.
곽정은 슬픔이 극에 달해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부여안고 발을 들어 옆차기로 휘둘렀다. 도부수 둘이 다리뼈가 부러져 넘어졌다. 그가 다시 왼쪽 팔꿈치로 뒤를 치자 또 다른 도부수 한 명이 가슴을 맞고 늑골이 부러졌다. 대칸 휘하 장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순간 곽정이 급히 장막의 뒤쪽 자락을 잡고 힘껏 당기자 장막 반쪽이 무너지면서 장수들 머리 위를 덮쳤다. 이 혼란을 틈타 곽정은 어머니의 시신을 안고 밖으로 내달렸다.
호각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고 병사들이 분분히 말에 올라 그 뒤를 추적했다. 곽정은 울먹이며 몇 번이나 어머니를 불렀지만 대답이 있을리 없었다. 이평은 숨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어머니를 안은 채 어둠을 뚫고 앞을 향해 달렸다. 사방에서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천지사방 분간을 못하고 한참 달리다 보니 동서남북 모두가 몽고 병사뿐이었다. 제아무리 신출귀몰한 곽정이라 하지만 혼자 어떻게 l0여만 명이 넘는 몽고의 정병을 상대한단 말인가?
만약 홍마만 타고 있다 해도 탈출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어머니의 시체를 안은 채 단신인 처지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별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절벽 아래에 당도할 수 있다면 경공의 재주로 올라갈 수도 있으리라. 몽고 병사들이 많기는 하지만 거기까지 쫓아서 기어 올라올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잠시 위기를 피한 뒤에 빠져 나갈 궁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곽정이 이렇게 생각하며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데 앞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들었다. 불빛 가운데 앞장선 대장은 붉은 얼굴에 구레나릇이 허연 몽고 개국 4걸 가운데 한 사람인 칠룬이었다. 곽정은 몸을 옆으로 돌려 칠룬의 칼을 피한 뒤에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적진을 향해 곧장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왼손을 뻗어 한 십장의 오른쪽 다리를 낚아채며 오른발로는 땅을 찍어 몸을 날렸다. 곽정은 말등에 오르자마자 어머니를 내려놓으며 그 십장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그의 손에 들린 장창을 빼앗았다. 이렇듯 말에 오르고 어머니를 내려놓고 또 적을 집어 던지고 창을 빼앗는 네 가지 동작을 일시에 해버린 것이다. 이제는 호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곽정은 두 발을 모으고 장창을 휘두르며 쏜살같이 적진을 빠져 나갔다. 칠룬이 호령을 지르며 군사들을 이끌고 그 뒤를 쫓았다. 적진을 뚫고 나은 곽정은 이대로 말을 달려 남하할 것인지 아니면 우선 절벽을 향해 올라갈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미처 결심을 하기도 전에 대장 보르쿠가 또 군사를 이끌고 쫓아왔다.
이때 칭기즈 칸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발을 구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곽정을 잡아야지 놓치면 안 된다고 전군에 호령을 내렸다. 사영(四營)의 군마가 몇 겹으로 포위한 것은 물론 수천 군마가 남쪽으로 달려가 곽정의 도주로를 차단했다.
곽정은 보르쿠가 이끄는 천인대를 뚫고 나갔다. 어느덧 옷이며 말 잔등이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만져 보니 벌써 차디차게 굳었다. 그는 터지려는 울음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계속해서 말을 남쪽으로 몰았다. 뒤를 쫓던 추격병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갔지만 어느덧 날이 부옇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이곳은 몽고 북부로서 중토(中土)와는 l0만 리나 떨어진 곳이다.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어떻게 이 겹겹이 에워싼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고향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곽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전진을 하고 있는데 앞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들었다. 곽정은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려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탄 말은 밤새 적진을 뚫고 나오느라 지칠 대로 지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앞발을 꿇은 채 좀처럼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는 어머니의 시신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왼손으로 어머니를 안은 채 오른손에 창을 비껴 들고 몸을 돌려 세웠다. 이제 정면으로 적과 대결할 비장한 결심을 한 것이다.
아침 안개 사이로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곽정이 들고 있는 창을 정통으로 명중시켰다. 화살의 힘이 어찌나 셌던지 곽정의 손이 흔들리면서 창 끝이 부러져 나갔다. 이어서 또 화살 하나가 곽정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곽정은 급히 창을 버리고 날아오는 화살을 그냥 손으로 받았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화살촉이 부러져 있었다. 곽정이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장군 하나가 부하들을 멈추게 하고는 단신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렸을 적 그에게 활쏘는 것을 가르쳐 준 신전(神箭) 장군 제베였다.
[사부님 저를 잡아가려고 오셨습니까?]
[그렇다.]
(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잡히느니보다는 차라리 이 공로를 사부님께 돌리도록 하자.)
곽정은 이런 생각으로 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좋습니다. 우선 어머니나 안장토록 해주십시오.]
사방을 휘둘러보니 왼쪽에 나지막한 언덕이 보였다. 곽정은 어머니를 안고 그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는 부러진 창으로 구덩이를 판 후 그곳에 어머니의 시체를 뉘었다. 비수는 아직도 어머니 가슴 깊이 박혀 있었지만 차마 뽑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꿇어 엎드려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린 뒤에 흙을 덮기 시작했다. 일평생 자식을 기르느라 고생만 하다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묻는 슬픔이 오죽하랴만 곽정은 너무나 슬퍼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를 바라보던 제베도 말에서 내려 이평의 분묘 앞에 엎드려 네 번 절을 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화살통과 철궁, 장창을 있는대로 모두 곽정에게 넘겨주었다. 심지어는 자기가 타고 온 말까지 끌고 와 고삐를 곽정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가보도록 해라. 우린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곽정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님!]
[예전에 너는 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구해 주지 않았느냐? 그래 나라고 남아 대장부가 되지 말란 법은 없겠지. 나도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구해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사부님, 대칸의 군령을 어기면 그 화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동정서토하면서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으니 그 점을 생각한다면 대칸께서도 곤장은 치시겠지만 설마 한들 목이야 자르시겠느냐? 너나 속히 떠나도록 해라.]
곽정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부하들이 혹시 내 명령을 듣지 않을까 해서 네가 서정할 때 데리고 갔던 옛 부하들만 여기 함께 왔다. 그들에게 직접 물어 보거라. 부귀영화를 탐내 너를 잡아가려는지 안 잡아가려는지?]
곽정은 말을 끌고 부하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부복했다.
[장군이 남쪽으로 가실 수 있도록 저희가 호송하겠습니다.]
곽정이 둘러보니 과연 자기와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장사들이라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나는 대칸께 득죄를 해 중형을 받아야 할 사람이오. 여러분이 나를 놓아 보낸 걸 대칸께서 아신다면 엄한 벌을 내리실 것이오.]
[장군의 은혜가 태산 같은데 저희가 어찌 감히 배은망덕할 수 있겠습니까?]
곽정은 한숨을 내쉬고 중군을 향해 읍을 한 뒤에 창을 들고 말에 올랐다. 막 말을 달리려고 하는데 전면에 먼지가 뽀얗게 일며 또 다른 군마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제베와 곽정, 모든 장사들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내 중책을 짊어진 신분으로 사사로이 곽정을 놓아 보내는 더에 이제 다시 본군과 싸움을 벌인다면 이는 공공연한 모반이 아닌가?)
제베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곽정을 재촉했다.
[곽정, 빨리 달아나게.]
그런데 달려오는 군마 사이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부마를 다치게 하지 마라!]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들을 살펴보았다. 달려오는 병사들은 사왕자(四王子)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드디어 안개를 헤치고 툴루이가 곽정의 홍마를 타고 나타났다. 그는 곽정을 보자 말에서 뛰어내리며 걱정부터 했다.
[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소?]
[괜찮아요. 제베 사부님이 나를 잡아가지고 대칸께 가려던 참이오.]
그는 제베를 감싸 주기 위해 어물쩍 말을 둘러대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툴루이가 제베에게 눈알을 부라렸다.
[안다, 이 홍마를 타고 빨리 떠나시오.]
그리고는 보따리 하나를 말안장에 올려 주었다.
[여기 황금 천 냥이 들어 있어요. 우리 형제 또 만날 날이 있겠지요.]
이들은 많은 말을 나눌 필요가 없는 호걸들이었다. 곽정은 즉시 홍마에 올랐다.
[화쟁 누이에게 건강을 빈다는 인사말을 전해 주구려. 그리고 내 생각 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라는 부탁도 아울러 전해주오.]
툴루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화쟁 누이는 영원히 결혼하지 않을 게요.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남쪽으로 형을 찾아 나설 것이오. 그때는 내가 사람을 시켜 호송해 주리다.]
[아니오. 나를 찾을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또 천하가 이렇게 넓은데 날 찾기도 어려울 것이오. 설사 만날 수 있다 하더라도 피차 괴롭기만 할 뿐이오.]
[자, 떠납시다. 내 얼마 동안 배웅해 드릴 테니.]
둘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남쪽으로 30여 리를 달렸다.
[안다, 언제고 헤어질 처지인데 이제 그만 돌아가구려.]
[한 십 리만 더 전송을 하겠소.]
둘은 또 안타까운 마음으로 차마 헤어지지 못하다가 마침내 툴루이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눈물로 작별을 고했다. 그는 곽정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울적한 심사로 뒤돌아섰다.
곽정은 며칠 동안 말을 달렸다. 이제 위험한 곳은 거의 지나친 것 같았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날씨는 따뜻해졌다. 푸른 풀은 자랐지만 연도의 풍경은 병란으로 말미암아 피폐할 대로 피폐했다. 무너진 성터며 허물어진 집, 어지럽게 흩어진 시체며 백골 들이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을 이루고 있었다.
곽정은 중원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하릴없이 떠돌 뿐 도대체 어디로 가야 좋을지 막연했다. 1년 동안에 어머니와 황용, 은사님 등 자신이 사랑하는 이는 거의 죽었으니 이제 이 세상에 친한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구양봉이 은사님과 황용을 살해했으니 마땅히 그를 찾아 복수를 해야 했다. 그러나 곽정은 이 복수라는 말에 생각이 미치자 호라즘의 참상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는 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무고한 백성을 허다히 죽였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복수라는 이 일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그는 원래가 여리고 착한 품성을 가진데다가 짧은 기간에 온갖 일을 겪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분분히 머리에 떠올랐다.
(내 평생 무예를 익히기에 고심을 했지만 이제 와서 그것이 어떻단 말이냐? 어머니도, 사랑하는 사람도 지키지 못했으니 그래 무예를 익힌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무진 애를 쓰기는 했지만 도대체 누가 그걸 좋아한단 말이냐? 어머니와 용아는 나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났고 화쟁 누이도 나 때문에 평생을 그늘에서 살게 되지 않았느냐. 나로 인하여 해를 입은 사람이 너무나 많구나. 완안열, 무하마드 같은 사람들은 물론 나쁘다. 그럼 칭기즈 칸은 어떤 사람인가? 그가 완안열을 죽였으니 마땅히 좋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송나라를 치라고 명령했다. 나와 어머니를 이십 년 동안 보살펴 주었지만 뒤에 와서는 우리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 나와 양강은 결의 형제다. 그러나 끝내 두 사람의 마음은 달랐다. 목염자 누이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뭘 보고 양강을 그토록 죽자고 사랑했을까? 툴루이 안다와 나는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병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공격해 온다면 나는 전쟁터에서 그와 사생결단을 벌일 수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사람마다 모두 어머니가 있다. 열 달 동안 어머니의 뱃속에 있다가 낳아서도 천신만고 키워 놓았는데 내 어찌 다른 사람의 아들을 죽여 그의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한단 말이냐? 무예를 배우는 것은 사람을 때리고 죽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내 이십 년 동안의 생활은 모조리 잘못된 것이 아니냐? 고생고생 하면서 부지런히 배운 결과가 결국 다른 사람을 해치자는 것이 아닌가? 진작 이런 걸 알았다면 무예를 배우지 않았을 것이니 그 얼마나 좋았을까? 만약 무예를 익히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내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살고 있는가? 앞으로 수십 년을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대로 살아야 할까? 아니면 일찌감치 죽어 버려야 할까? 만약 산다면 과거의 그 많은 번뇌는 앞으로도 있을 것이 아닌가? 만약 죽는다면 당초에 우리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날 낳으셨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갖은 고생을 다하시면서 날 이만큼 기르셨을까?)
아무리 곰곰이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결론을 낼 수 없었다.
곽정은 며칠을 계속해서 밥도 못 먹고 잠도 이루지 못했다. 공연히 이리저리 헤매며 골똘히 이 생각만 했다.
(어머니와 여러 사부님들이 어렸을 때부터 의를 중히 여기고 신용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내 마음속으로는 용아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대칸의 혼약을 거역치 못하고 있다가 결과적으로 어머니와 용아만 헛되이 죽게 만들고 말지 않았는가. 대칸이나 툴루이, 화쟁 누이도 즐거울 수만은 없겠지. 강남의 일곱 사부님이나 홍칠공은 모두가 의로운 사람들이었지만 한 분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구양봉이나 구천인은 의롭지 못한데도 유유자적하고 있으니 세상에 도대체 천리(天理)나 천도(天道)가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느님이 정말 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날 곽정은 산동성 제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그는 주점에 들어가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제 막 석 잔을 비웠는데 갑자기 사내 하나가 들어와 곽정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다.
[야, 이 오랑캐야. 우리 집을 망하게 했으니 너 죽고 나 죽자.]
그 사내는 마구 주먹질을 하면서 곽정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곽정이 왼손을 뻗어 그의 팔을 슬며시 낚아챘더니 그 사람은 그만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사내는 무공이라고는 전연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곽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넘어뜨려 다치게 한 셈이었다. 그 사람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자 미안한 생각에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노형,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은 엉엉 울면서도 계속해서 <오랑캐>라고 욕만 퍼부었다. 문밖에서 10여 명의 장정이 주점으로 들어서며 일제히 곽정을 향해 주먹질, 발길질을 하며 덤벼들었다.
곽정은 이 며칠 동안 무공이 오히려 화가 된다는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그래 다시는 사람과 싸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바 있었다. 게다가 평소에 아는 처지도 아니요, 또 무예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섣불리 어쩌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개 패듯 달려들었다. 곽정은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반격을 하지 않았는데도 문밖의 사람 숫자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는 까닭도 모르고 여러 사람의 주먹과 발길에 맞고 걷어차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막 사람들을 밀치고 밖으로 나갈까 하는데 문밖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아, 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곽정이 간신히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도포를 입은 장춘자 구처기였다.
[구도장님, 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저를 때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처기가 두 팔로 사람들을 혜집고 곽정을 끌어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여전히 그 뒤를 쫓으며 소리를 지르고 마구 때렸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이 어디 보통 사람인가. 그들은 입으로 휘파람을 불어 홍마를 찾아 올라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들판으로 달아났다. 뒤를 쫓던 사람들은 그들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곽정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구처기가 껄껄 웃으며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네가 몽고옷을 입고 있어서 그랬던 거야.]
원래 몽고병이 금나라 병사들과 산동 일대에서 접전을 할 때 당시 백성들은 오랫동안 금나라의 압박을 받고 있던 터라 처음에는 몽고 편을 들어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몽고 병사들도 금나라 병사와 마찬가지로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저래 백성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몽고군의 대군이 지날 때는 꼼짝못하고 있다가도 혼자 떨어져 가는 몽고인만 보면 당장에 때려 죽일 듯이 덤벼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냥 맞고만 있었지? 온몸에 멍이 들었구나.]
곽정은 한숨을 내쉬며 대칸이 자기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경위와 이 며칠 동안에 있었던 마음속의 고뇌를 낱낱이 말했다.
[아니, 칭기즈 칸이 송나라를 침략할 계획이 있다면 우리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 조정에 알려 방비를 해야겠구나.]
[그래 봐야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결과는 쌍방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시체만 태산처럼 쌓일 것이요, 백성은 백성대로 고생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송나라가 몽고에 의해 멸망한다면 백성의 고통은 끝이 없지 않겠느냐.]
[구도장님, 제게 여러 가지 의문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길이 없군요. 부디 구도장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구처기는 그를 이끌고 한적한 대추나무 밑에 앉았다.
[어디 말을 해보거라.]
곽정은 그 동안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여러 가지 의문을 구처기에게 들려주었다.
[제자는 평생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동안 배운 무학을 당장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방금도 조심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만 사람을 넘어뜨려 머리가 깨지게 만들었습니다.]
구처기는 곽정의 말을 듣고 머리를 흔들었다.
[곽정아!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수십 년 전 무림의 보물인 구음진경이 세상에 나타나자 얼마나 많은 강호의 호걸들이 이것 때문에 죽어 갔는지 모른다. 뒤에 화산논검에서 내 은사이신 중양진인이 군웅을 물리치고 진경을 차지하게 되셨다. 그분은 원래 이 진경을 없애 버리려고 하셨지. 그러나 뒤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그 배를 엎을 수도 있다. 복이니 화니 하는 것은 모두 사람이 하기에 달렸느니라.> 그래서 드디어 이 경서를 보존하시기로 결정을 내리셨단다. 천하의 문재나 무예, 또 단단한 병기나 기계가 모두 사람을 이롭게 하는 반면 해롭게 할 수도 있느니라. 네가 마음만 착하게 먹는다면 무공이 강할수록 좋은 법, 무엇 때문에 배운 것을 잊지 못해 고민할 필요가 있겠느냐?]
곽정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도장님의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강호의 호한들은 동사, 서독, 남제, 북개 네 분 무공이 가장 강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이 네 분 선배님 수준에 도달하려면 그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 수준에 도달했다 해서 그것이 저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구처기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황약사는 괴팍한 사람으로서 세상을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있지만 그라고 해서 마음속 깊이 서린 고통이 없겠느냐?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하는 위인이지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도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구양봉은 워낙 못된 인간이라 구태여 입에 올릴 필요도 없을 게다. 단황야는 인자하고 도량이 넓으신 분이라 나라를 다스릴 때도 백성들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셨지.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조그만 은혜와 원한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고 계시니 대인대용(大人大勇)한 분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한 분, 홍칠공 홍방주님만 협기가 있고 의리를 지키면서 다른 사람의 위험을 막아 주고 어려움을 도와주고 계시지 않느냐? 그래서 나는 그분을 가장 존경한다. 화산의 이차 논검이 곧 눈앞에 닥친다. 비록 다른 사람이 무공으로 이긴다 하더라도 천하의 호걸들은 홍방주님을 무림 제일인자로 모실 것이다.]
곽정은 <화산논검>이란 말을 듣자 마음이 섬뜩했다.
[제 은사님의 부상이 완전히 치유됐나요? 그래 그분이 화산논검에 참가하시겠다고 했나요?]
[내 서역에서 돌아온 뒤 아직 홍방주님을 뵙지는 못했다. 그분이 대결에 나서실지 어쩔지는 몰라도 분명 화산에는 가실 것이다. 나도 이 일 때문에 가는 길이니 너도 함께 가서 구경이나 하자꾸나.]
그러나 곽정은 이제 그러한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왠지 귀찮기만 해 머리를 흔들었다.
[제자는 가지 않으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럼 넌 어디로 가겠느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가볼까 합니다.]
구처기는 풀이 죽고 몰골이 초췌한 곽정을 보자 행여 큰 병이라도 앓는 게 아닐까 싶어 심히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달래고 권해 보아도 그는 여전히 머리를 가로 저을 뿐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곽정은 평소 홍방주님의 말만은 잘 들었다. 화산에 데리고 가서 사제가 서로 만나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어떻게 해서 데리고 가지?)
구처기는 갑자기 한 가지 묘안이 생각났다.
[곽정아, 네가 그 동안 배운 무공을 잊고 싶어한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곽정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귀를 기울였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무의식중에 구음진경에 있는 상승의 무공을 익혔느니라. 그런데 뒤에 생각해 보니 이 일이 약속을 어긴 것이었단 말이다. 그래서 마침내 배운 무공을 잊게 되었지. 네 만약 그분을 본받고 싶거든 그분께 가르침을 받도록 하려무나.]
이 말을 들은 곽정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군요. 주백통 주대형이 계시군요.]
순간 곽정은 주백통이 구처기의 사숙이 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무의식중에 그를 형이라 부른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구처기는 미소를 머금고 용서했다.
[괜찮다. 주사숙은 평소 항렬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따진 일이 없으시다. 그냥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무방하다.]
[그래 그분은 어디 계신가요?]
[화산에 틀림없이 오실 것이다.]
[그럼 제가 구도장님을 모시고 화산으로 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장터로 나왔다. 곽정은 툴루이가 마련해 주었던 금으로 구처기의 말을 샀다. 둘은 말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서쪽으로 달려 어느덧 화산에 이르렀다.
화산은 오악(五嶽) 가운데 서악(西嶽)이라고 불렸다. 옛사람들은 오악을 오경(五經)에 비유하여 화산을 춘추(春秋)라 했다. 천하 명산 가운데 제일 험한 곳이 이 화산이다. 이날 두 사람은 화산 남쪽에 있는 산손정(山蓀亭)에 도착했다. 정자 옆에 자라고 있는 둥나무 l2그루의 가지가 하늘을 가려 그 모습이 비룡(飛龍)과 흡사했다.
[화산은 우리 도가의 영지(靈地)야. 이 열두 그루 등나무는 희이(希夷) 선생이신 진박노조(陳搏老祖)께서 심으셨다고 전해 내려오지.]
[진박노조요? 한번 잠들면 반년 동안 깨지 않으신다는 그 신선 말씀인가요?]
[진박노조께서는 당나라 말엽에 태어나셔서 양당진한주(梁唐晋漢周) 오대를 겪으셨지. 조정이 바뀌고 성이 달라졌다는 말씀을 들으시면 불쾌하다고 문을 닫아걸고 잠만 주무셨단다. 세상에서는 그분이 몇 년씩 주무셨다고 하지만 천하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없다며 두문불출하셨던 거야. 송태조가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야 웃으면서 이제야 천하가 태평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더군.]
[진박노조가 지금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역시 잠만 주무시고 계시겠군요.]
구처기도 한숨을 내쉬며 나라일을 걱정했다.
[몽고가 벌떼처럼 북쪽에서 일어나 남침할 야욕을 품고 있는데도 송나라 군신은 자기들끼리 재물만 다투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했다. 도림평(桃林坪)과 희이갑(希夷匣)을 지나 사몽평(莎夢萍)에 오르니 길은 더욱 험난해졌다. 서현문(西玄門)에 오를 때는 쇠사슬을 잡고야 겨우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상승의 경공을 지니고 있었기에 쉽게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몇 마장쯤 가니 이번에는 푸른 잔디밭이 나오고 이 잔디밭이 끝나는 지점에는 날카로운 북벽 밑에 돌 하나가 길을 막고 있었다.
[이 돌을 회심석(回心石)이라 부르는데 유객들은 여기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네.]
다시 천척협(天尺峽)과 백척협(百尺峽)을 지나자 산길의 너비가 반 자도 안 되게 좁아졌다. 지나는 사람이 몸을 옆으로 돌리기 전에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는 너비였다.
(만약 적이 이런 곳에 숨어 있다가 습격을 해오면 제아무리 강한 고수라 하더라도 당해 내기 어렵겠구나.)
곽정이 이런 생각을 하며 막 주위를 살피는데 앞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구처기! 연우루 앞에서 살려 주었으면 됐지 무엇 때문에 이 화산까지 올라오는가?]
구처기는 앞을 향해 달려나가 봉우리 옆, 움푹 파인 곳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사통천, 팽련호, 영지상인, 양자옹, 후통해 다섯 사람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구처기도 산에 오를 때 구양봉이나 구천인 등 대적을 만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백통, 홍칠공, 곽정과 함께 온다면 큰 탈은 없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사통천 등이 나타나 길을 막고 있을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바였다. 그가 발을 디딘 장소가 다소 넓기는 했지만 어차피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 누가 몰래 달려들기라도 한다면 천야만야한 절벽 밑으로 떨어질 것은 정한 이치였다.
구처기는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자 장검을 빼들고 백홍경천(白虹經天)의 재주로 후통해를 먼저 찔렀다. 눈앞의 5명 가운데 후통해가 제일 약했다. 그는 구처기가 장검을 가지고 대들자 몸을 옆으로 살짝 피하며 삼지창을 들어 막았다. 이어서 팽련호의 판관필과 영지상인의 동발(銅鉞)이 좌우 양측에서 공격을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처기를 절벽 아래로 몰아 떨어뜨리겠다는 듯 마구 달려드는 것이었다.
구처기의 장검과 후통해의 삼지창이 붙는 순간 구처기는 칼끝의 힘에 의지해 몸을 공중으로 솟구쳐 이미 후통해 머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표적을 잃은 팽련호와 영지상인의 병기가 돌에 맞아 불꽃을 튀며 떨어졌다. 비록 철창묘에서 한 팔을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공이 가장 나은 사통천이 사제의 일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형환위의 기술로 구처기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쏜살같은 장춘자의 검광이 번쩍이며 위협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사통천과 팽련호가 고함을 지르며 그 뒤를 잇자 구처기도 몸을 돌려 세우고 맞섰다. 게다가 이제는 영지상인까지 동발을 날리며 합세를 했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세 가지 병기를 가지고 구처기 한 사람과 접전하는 형세였다. 곽정은 자신이 보기에도 구처기의 처지가 워낙 위급한 듯싶자 도와야 될지 말아야 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다른 사람과 무예로 다툰다는 것이 옳은일 같지가 않았다. 그는 쌍방의 대결이 치열해질수록 고뇌만 더 커지자 차라리 고개를 돌린 채 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슬며시 싸움을 외면하고 등나무 줄기와 칡넝클을 잡고 다른 길로 해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발길을 내디디면서도 어지러운 심사를 감출 길이 없었다.
(구도장을 도와드려야 하나, 아니면 영원히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아야 하나?)
곽정은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도무지 그 해답을 알 수가 없었다.
(구도장님이 만약 팽련호 등에게 살해된다면 내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나서서 돕다가 팽련호 등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면 그것 또한 옳은일이라 할 수 있을까?)
곽정은 이런 생각에 젖어 걸어가노라니 어느덧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혼자 바위에 기대 앉아 넋을 잃고 먼 하늘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 곽정은 갑자기 뒤에 있는 소나무 사이로 인기척을 느꼈다. 곽정이 고개를 돌려 보니 홍안에 백발인 삼선노괴 양자옹이었다. 그는 곽정에게 골탕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곽정의 무공이 대단해 자기의 적수가 아님을 알고 즉시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곽정은 더 거들떠보지 않고 자기 생각에만 골똘했다.
양자옹은 곽정이 자기를 보지 못해 저러는가 싶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참으로 회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저 녀석이 어째서 저렇게 되었을까? 참 이상도 하구나. 어디 한번 시험이나 해볼까?)
그는 감히 다가갈 생각은 못하고 돌을 하나 주워 들어 곽정의 등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곽정은 바람소리를 듣자 슬쩍 몸만 피할 뿐 뒤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모양을 본 양자옹은 한결 대담해져서 슬슬 몇 발짝 다가서며 그를 불렀다.
[곽정, 여기서 뭘 하고 있나?]
[내 다른 생각을 좀 하고 있는 중이에요. 무공으로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군요.]
양자옹은 어리둥절했지만 금세 곽정의 상태를 눈치챘다.
(이 녀석이 정말 보통 바보가 아니로구나.)
그래서 이번엔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을 때리는 것은 나쁜 일이니 그야 물론 타당하지 못하지.]
[양선생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정말 그 동안 배운 무공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양자옹은 그가 넋을 잃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훔쳐보다가 불현듯 예전에 복사의 보혈을 빼앗긴 원한이 생각났다. 그러자 앙심이 솟구쳐 갑자기 두 눈을 빛내며 그의 등뒤로 걸어가 자못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도 지금 어떻게 하면 내가 배운 무공을 잊을 수 있을까 노력하고 있는 중일세. 내 자넬 좀 도와주면 어떨까?]
곽정은 워낙 충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라 상대방의 저의나 음모를 따질 줄 모르는 위인이었다.
[좋습니다. 도와주세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요?]
[음, 내게 묘법이 있지.]
그는 순식간에 두 손을 내밀며 금나수법으로 곽정의 목에 있는 천주(天柱)와 등에 있는 신당(神堂) 두 혈을 꽉 찔렀다. 곽정은 놀랄 사이도 없이 어느새 전신이 뻣뻣하게 마비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양가옹은 온 힘을 손에 모으고 입을 딱 벌린 채 곽정의 목을 물고 피를 빨아먹으려고 덤볐다. 자기가 천신만고 키워 놓은 복사의 보혈을 곽정이 먹어 치운 셈이니 이제 그의 전신에 있는 피를 다 빨아 먹어도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곽정은 목이 아파 견딜 수 없게 되자 자꾸만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양대 요혈을 적이 누르고 있으니 눈앞에 별만 오락가락할 뿐 전연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양자옹은 핏발이 선 눈에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고 자기 목을 더욱 힘껏 깨물고 있었다. 조만간 혈관만 터지면 죽은 목숨이었다. 이제는 무공으로 사람을 치는 것이 옳고 그름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는 즉시 역근단골편 가운데 있는 무공을 이용해 한줄기 강한 힘을 단전(丹田)에서 천주, 신당 두 혈을 향해 뿜었다.
두 손으로 그의 혈도를 누르고 있던 양가옹은 호구가 찢어질 듯 아파 오는 걸 느꼈다. 순간 상대방의 혈도 가운데서 한 줄기 강한 힘이 안에서 밖으로 뻗어 나온 것이다. 곽정은 고개를 숙인 채 등을 올리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양자옹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곽정의 등을 타고 미끄러졌다. 처참한 비명 소리와 함께 깊고 깊은 절벽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비명 소리가 산을 울려 메아리가 되어 사방으로 어지럽게 퍼져 나갔다. 듣는 이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괴한 메아리였다.
곽정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목의 상처를 어루만지다 생각하니 무의식중에 또 한 번 사람을 죽였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내 만약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죽였을 것이다. 내 그를 죽인 것이 옳지 못하다면 그가 나를 죽이려 한 것도 옳지 못하다.)
그는 고개를 길게 빼고 절벽 밑을 내려다보았다. 어찌나 깊은 낭떠러지인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삼선노괴의 시체도 어디에 떨어져 가루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곽정은 돌 위에 앉아 옷깃을 찢어 목의 상처를 감쌌다. 바로 그때 탁탁탁, 이상한 소리를 내며 괴물 하나가 산 뒤에서 돌아 나왔다. 깜짝 놀라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보니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다만 머리를 아래로 발을 위로 하고 물구나무를 선 채 가고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손으로 발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두 팔을 몸 양쪽에 찰싹 붙인 채 머리를 발로 삼아 한 번씩 뛰어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탁, 탁 하는 소리는 그의 머리가 땅바닥에 부딪힐 때 나는 소리였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가 하는 궁금함에 허리를 숙이고 쳐다보다가 곽정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희한한 자세의 인물은 다른 사람이 아닌 서독 구양봉이었다.
곽정은 방금 습격을 받은데다가 또 구양봉이 이런 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여기에는 분명 무슨 흉계나 함정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뒤로 두 발짝 물러서며 방비 태세를 취했다. 구양봉은 머리로 뛰어 바위 위에 오르더니 자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똑바른 자세로 굳은 듯 가만히 있었다. 곽정은 더 이상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말을 걸고야 말았다.
[구양선생, 뭘 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구양봉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마치 자기가 묻는 말도 못들은 듯했다.
곽정은 다시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좌장으로 자기 몸을 가렸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괴상한 돌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건만 구양봉은 전연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곽정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얼굴을 거꾸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표정을 살필 수가 없다. 곽정은 두 발을 벌린 채 머리를 가랑이 밑으로 내밀고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 보았다. 구양봉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아나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게 바로 어떤 괴상한 내공이라도 익히는 중인가 싶었다. 갑자기 구양봉은 두 팔을 벌려 밖으로 뻗고 빙빙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매 끝에서 바람소리가 휙휙 일었다.
곽정은 이제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승의 내공을 익힐 때는 밖에서 오는 타격에 약한 법이었다. 수련을 할 때는 정력이 안으로 모여 외부 충격에 대한 저항력을 전연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무공이 강한 동료가 엎에서 돌봐 주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일을 지금 구양봉은 혼자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를 막아 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이러한 상황이 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곧 화산에서 제2차 논검이 있을 터라 고수들이 속속 운집할 것이다. 사람마다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방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가도 다른 사람의 습격을 받으면 난처한 법인데, 이렇게 대담하게 혼자 뭔가 연공을 하고 있다니 놀랍기만 했다. 이러한 경우에는 고수가 아닌 보통 장정이 주먹으로 치거나 발길질을 해도 중상을 입게 마련이었다. 곽정이 이러한 기회에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느 시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죽여 달라고 스스로 찾아온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곽정은 방금 양자옹을 죽여 미처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구양봉이 도마 위에 오른 생선이나 똑같은데도 손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자기의 연공에 열중하느라 곽정을 보지도 못했다. 그는 밥 한끼쯤 먹을 시간이 지나자 뻗었던 두 팔을 오므리고 가만히 있다가 다시 탁탁탁 머리로 땅을 받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곽정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었다. 도대체 거꾸로 서서 가고 빙빙 돌던 재주는 무슨 무공이란 말인가? 솟구치는 호기심으로 슬그머니 그 뒤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은 머리로 가는데도 두 발로 걷는 것이나 그 속도가 별로 차이가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더 높이 뛰는 것이었다. 곽정은 계속 그의 뒤를 쫓아 산 위로 올라갔다. 봉우리에 나무가 무성한 굴 앞에 이르러 그가 멈추었다. 곽정은 큰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이어서 구양봉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합호문발영(哈虎文鉢英), 성이길근(星爾吉近) 사고이(斯古耳), 해석이 틀렸어. 아무리 수련을 해도 결과가 없지 않은가?]
그가 한 이 세 마디는 분명 《구음진경》의 신공편(神功篇)에 나오는 범어다. 그러나 경문에 적힌 것과는 사뭇 달랐다. 자기가 그날 배 위에서 구양봉의 강박을 받고 홍칠공이 가르쳐 준 대로 엉터리로 써준 것이었다. 그야 그렇다 치고 지금 그는 누구를 향해 말을 한 것일까?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굴속에서 들려 왔다.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까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언제 해석을 잘못했나요?]
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곽정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애타게 그리워하던, 죽은 줄만 알았던 황용 바로 그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냐? 그녀는 분명 몽고의 눈 덮인 평원에서 죽지 않았는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정신을 잃고 미쳐 버린 것은 아닌가? 곽정은 머리가 혼란스러워 미처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데 또 구양봉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가씨가 하라는 대로 틀림없이 했단 말야. 그런데 어째서 임맥(任脈)과 양유맥(陽維脈)이 바뀌지 않지?]
[천기가 오지 않았는데 억지로 한다고 그게 그리 쉽게 되나요.]
아무리 귀를 의심해 보아도 틀림없는 황용의 목소리였다. 곽정은 기쁨을 주체 못해 비틀비틀 쓰러질 것만 같았다. 너무나 격동한 나머지 목의 상처가 터지고 말았다. 그러나 선혈이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전연 의식하지 못했다.
구양봉은 화가 스민 목소리로 계속 황용을 닦달했다.
[내일 정오에 바로 논검이 있는데 내 무슨 시간이 있어 천천히 수련을 한단 말이냐? 빨리 경문 내용을 전부 해석해 보라구. 공연히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미루지 말고 말야.]
곽정은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연공에 여념이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황용은 깔깔 웃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곽정 오빠가 약속하기를 세 번 살려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너무 날 윽박지르지 마세요. 마음이 내켜야만 가르쳐 주겠어요.]
곽정은 그녀의 입에서 <곽정 오빠>란 말이 나오자 흐뭇해 견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녀를 와락 껴안고 싶었다.
구양봉도 이제는 참을 수 없는지 차갑게 내뱉었다.
[일이 급한데 그따위 약속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담. 오늘은 억지로라도 내 마음대로 해야지.]
그리고 나서 물구나무 자세를 풀고 굴속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뻔뻔스럽군요. 죽어도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
구양봉의 괴상한 웃음 소리가 낮게 들렸다.
[어디 한번 가르쳐 주지 않고 배길 수 있나 구경 좀 하자.]
第 六 卷. 第 十 章.(通卷 章). 무공 천하 제일
황용의 외마디 비명에 이어 옷 찢어지는 소리가 부지직 들렸다. 이러한 마당에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옳고 그르냐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용아! 내가 도와줄게.]
좌장으로 몸을 막으며 굴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무렵 구양봉이 왼손으로 황용의 죽장을 잡고 오른손을 뻗어 막 그녀의 왼팔을 잡으려고 하자, 황용이 봉도라견(棒途癩犬)의 재주로 찌르며 오른팔을 뻗어 그의 손에 있는 죽장을 뺏었다. 구양봉이 속으로 감탄하며 다시 뺏으려는데 굴 밖에서 곽정의 소리가 들렸다.
무학의 명가답게 그는 평소에 신용 지키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던터라, 부득이 황용을 윽박지르긴 했지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마치 그 소리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힐책하는 소리 같았다. 구양봉은 부리나케 얼굴을 소매에 묻고 데굴데굴 굴러 곽정 옆을 스치는 듯하더니 어느새 흔적도 없이 멀리 사라졌다.
곽정은 달려가 황용의 두 손을 마주잡았다.
[용아,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는 격정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황용은 그의 손을 홱 뿌리치며 차디차게 쏘아붙였다.
[댁은 누구시죠? 무엇 때문에 남의 손을 잡고 이 야단이세요?]
[나 곽정이야, 그 동안 잘 지냈어?]
[누군지 모르겠는데요.]
그리고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굴 밖으로 빠져 나갔다. 당황한 곽정이 연신 몸을 굽실거리며 그 뒤를 쫓아갔다.
[용아, 용아, 내 말 좀 들어 봐.]
황용이 코방귀를 뀌며 톡 쏘았다.
[용아라는 이름 그렇게 함부로 부르지 마세요! 댁이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
그 말에 곽정은 입을 딱 벌리고 뭐라 대꾸할 생각을 못했다. 황용은 비쩍 말라 초췌해진 그의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자기를 버린 일을 떠올리고는 그 생각을 마음에서 지워 버렸다. 그녀는 돌아서서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다급해진 곽정이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내 말 한마디만 들어 봐.]
[말해 봐요.]
[난 진흙의 늪 속에서 용아의 금가락지와 담비 가죽옷을 보고는 그만......]
[한마디만 들어 보라고 했잖아요 이제 됐어요.]
황용은 잡힌 소매를 뿌리치고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곽정은 괴롭고도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이토록 단호한 태도로 보아 황용은 영원히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만 같았다. 워낙 말주변이 없는 그인지라 무슨 말을 해야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옷소매를 나풀거리며 내달리는 그녀를 뒤쫓아갔다.
황용도 혼자 걸으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다. 그 머나먼 서역에서부터 혼자 온 일이며, 중원에 돌아와 고생하던 일, 급기야 아버지를 만나서 도화도로 돌아가려다가 그만 산동에서 큰 병을 앓고 겨우 몸을 추스른 일 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심한 병을 앓을 때도 옆에는 보살펴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몸져누워 있을 때 곽정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도 더할 수 없이 원망스러웠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들 이런 몸 고생, 마음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몇 번이고 곱씹었다. 병이 완쾌되었을 무렵 노남(魯南)에서 다시 구양봉을 만나 어쩔 수 없이 화산까지 끌려 오는 신세가 되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 모두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곽정은 여전히 황용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그녀가 빨리 가면 곽정도 빨리 쫓아오고 그녀가 걸음을 늦추면 그도 걸음을 늦추었다. 그렇게 한참을 견다가 황용이 별안간 몸을 돌려 세웠다.
[아니 무엇 때문에 날 쫓아오는 거예요?]
[영원히 용아의 뒤만 따라다니겠어, 평생 용아 곁을 떠나지 않을 테야!]
황용의 얼굴에 냉소가 스쳤다.
[대칸의 부마가 무엇이 아쉬워 이 가난한 계집애를 쫓아다니려고 하실까?]
[대칸이 우리 어머니를 죽였는데 내가 어떻게 그의 부마가 될 수 있겠어?]
그 말에 황용은 얼굴까지 시뻘게지며 씨근덕거렸다.
[난 또, 그래도 날 생각해서 그러나 했군요. 대칸에게 내쫓겨 부마가 될 수 없으니까 그제야 나를 찾아왔군요? 흥! 나 같은 천한 계집애는 마음먹은 대로 해도 되는 줄 아시나 보군요?....]
황용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그만 목이 메어 울음을 터뜨렸다. 황용이 울자 곽정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속마음을 속시원하게 털어놓으면 후련하련만 웬일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우물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용아, 나 용아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 용아가 죽이고 싶거든 죽이고 용아 마음대로 해.]
[내 무엇 때문에 죽이고 살리고 하겠어요? 서로 모르던 사이라고 체념해 버리면 그만인데요. 그러니 제발 저를 따라다니지 마세요.]
황용의 완강한 태도로 보아 도저히 자기를 용서할 것 같지 않았다. 곽정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알아주지, 응? 말을 좀 해봐.]
[오늘은 나를 좋아하는 척하다가 내일은 화쟁 공주인가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또 나를 버릴 테니, 차라리 내 눈앞에서 죽기나 한다면 믿을까 이젠 정말 못 믿겠어요.]
곽정은 마치 뜨거운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니 바위 옆으로 걸어갔다. 사신암(捨身岩)이라 불리는이곳은 화산에서도 험하기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누구든 여기서 뛰어내리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린다고 했다. 황용은 그의 성격이 고지식해서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하고야 마는 성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대들 듯이 그의 덜미를 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곽정의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 절벽 앞에 가로막고 섰다.
[정말 답답하군요. 다른 사람 생각 같은 건 안중에도 없군요. 화가 나서 그냥 한마디 내뱉은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할 게 뭐예요. 내 속 썩이지 말고 차라리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주세요.]
황용은 울부짖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은 마치 깎아지른 절벽 위에 한 송이 백다화(白茶花)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듯했다. 곽정은 자칫 그녀가 실족이라도 해 떨어지지 않을까 조바심이 일었다.
[얼른 앞으로 다가서.]
황용은 자기를 걱정하는 그의 말을 듣고 코끝이 또 한 번 시큰해졌다.
[마음에도 없는 그런 말 누가 하라고 했어요? 산동에서 병이 나 아무도 보살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끙끙 앓고 있는데도 찾아 주지 않았어요. 그뿐인가요? 구양봉에게 걸려 꼼짝못하고 있을 때도 구해주기는커녕 얼씬도 안 했죠. 하긴 어머니까지도 내가 필요 없다고 저 세상으로 가버리셨고 아버지 역시 날 찾으실 생각을 안 하시죠. 내 신세가 이 꼴이에요.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 세상 아무데도 없어요. 이 세상에서 날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구요.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단 말이에요.]
황용은 발을 동동 구르며 목놓아 울었다. 그 동안 쌓인 외로움과 원망이 곽정을 보자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곽정은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다. 황용의 말이 구구절절이 옳기에 들을수록 괴롭기만 했다. 바람이 휘몰아치며 황용의 울음 소리를 멀리 멀리 실어 갔다. 황용은 오한이 드는지 몸을 흠칫 떨며 움츠렸다. 곽정이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려는데, 바위 옆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니, 감히 어느 놈이 무례하게도 우리 황소저를 괴롭히느냐?]
백발의 노완동 주백통이었다.
[주대형!]
곽정이 반가운 나머지 목청 높여 그를 불렀다. 황용으로서는 때마침 화풀이할 곳이 생긴 셈이었다.
[노완동, 내가 구천인을 죽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 머리는 어디 있어요?]
주백통은 할말이 없으니까 그냥 입을 벌리고 혜헤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럴 때는 갖은 방법을 다 써서 그녀의 환심을 사야 했다.
[황소저, 누가 황소저를 화나게 했는지 말해요. 내 대신 분풀이 해줄 테니까.]
황용이 곽정을 가리켰다.
[저 사람 아니면 누구겠어요?]
주백통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매사에 경솔한 축에 들었다. 일의 순서와 경중을 가려서 처리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황용의 환심만 사면 그뿐이므로 냅다 곽정에게 달려들어 철썩철썩 보기 좋게 따귀를 연거푸 올려 쳤다. 곽정은 무방비 상태였으며, 노완동은 힘을 다해 때렸다. 일순 곽정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금방 양 볼이 빨갛게 부어 올랐다.
[황소저,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부족하다면 더 때려 줄게.]
황용은 곽정의 두 볼에 선명하게 찍힌 손가락 자국을 보자 그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어느새 연민이 되어 그 연민의 정이 다시금 주백통에 대한 분노로 번했다.
[아니 내가 저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노완동이 끼여들어 야단이에요, 야단이? 누가 때려 달라고 부탁했나요? 구천인을 죽이라고 시켰더니 그건 어떻게 된 거예요?]
주백통은 혀를 쑥 빼물고 낭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보비위나 하려고 했더니 또 잘못됐나?)
이때 갑자기 바위 뒤에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연이어 사람들이 다투는 왁자한 소리가 들려 왔다. 주백통은 이때다 싶어 냉큼 한마디하고는 연기처럼 그쪽으로 사라졌다.
[혹시 구천인 그놈이 나다난 게 아닐까? 어디 한번 가봐야지.]
만약 구천인이 나타났으면 주백통으로서는 달아나기에도 급급한 터에 감히 그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사실 그날 그는 구천인, 구양봉, 곽정 세 사람과 함께 서역의 석실에서 장님이나 된 것처럼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곽정과 구양봉이 먼저 어디로 없어지고 뒤를 이어 구천인도 도망을 쳐버렸다. 주백통은 계속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얼마를 그렇게 쫓고 쫓기기를 했는지 구천인은 지친 나머지 그만 원한이 앞서기까지 했다. 명색이 무림 대방의 방주인데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할 수만 있다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연히 우물쭈물하다가 주백통의 손에 잡히기라도 하면 망신만 당할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있는 무덤에서 독사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이런 독사가 내뿜는 독은 무척 지독해서 한번 물리면 전신이 마비되면서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구천인은 손을 뻗어 독사의 머리를 잡으며 소리쳤다.
[그래 주백통, 너 혼자 잘살아라.]
그러면서 뱀의 아가리를 자기 팔에 갖다 대는데 주백통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치는 게 아닌가. 주백통이 세상에서 뱀을 제일 무서워 한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구천인으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야 이런 눈치를 챈 구천인은 왼손으로 뱀을 거머쥐고 소리소리 지르며 그 뒤를 쫓았다. 이렇게 되자 쌍방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주백통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구천인 별명은 철장수상표. 그래도 경신의 무공은 주백통보다 한 수 위였다. 뒤를 쫓기로 작정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주백통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내심 주백통을 두려워하고 있던 터라 결사적으로 뒤쫓지는 않았다. 이렇듯 쫓고 쫓기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주백통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구천인도 쫓아가는 체하면서도 기실 자기 쪽에서 달아날 궁리를 했다. 그가 동쪽으로 달아난 줄 뻔히 알면서도 속으로 웃으며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황용은 주백통이 사라지자 곽정을 흘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용아!]
[네]
곽정의 부름에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황용이 대답했다. 곽정은 뭐라고 사과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워낙 말주변이 없는데다 행여 말을 잘못했다가 오히려 그녀의 화를 돋우지나 않을까 해서 잠자코 있었다.
두 사람은 바람을 맞으며 그대로 서 있었다. 갑자기 황용이 재채기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옷을 벗어 주려던 참이어서 곽정이 자기 옷을 벗어 걸쳐 주자 황용은 가만히 있었다.
근처에서 주백통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묘하구나 묘해. 정말 묘하구나.]
황용이 손을 뻗어 곽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곽정 오빠, 우리 가서 구경해요.]
곽정은 너무나 기뻐 눈물이 왈칵 나왔다. 황용이 소맷부리로 곽정의 눈을 훔쳐 주며 웃었다.
[얼굴이 이게 뭐예요. 눈물 자국에 손가락 자국까지 있으니, 누가 보면 내가 오빠를 울린 줄 알겠네요.]
이렇게 활짝 웃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게 엉겨 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 둘 사이의 정은 한층 더 두터워진 듯 싶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바위 뒤를 돌았다.
주백통이 배를 움켜잡은 채 허리를 비비꼬고 있었다. 구처기는 칼을 짚고 서 있었고 사통천, 팽련호, 영지상인, 후통해 네 사람은 어떤 사람은 병기를 치켜 들고 마치 돌격이라도 할 태세였고 또 어떤 사람은 몸을 웅크리거나 달아나는 자세를 취한 채 흙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사람처럼 꼼짝 않고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주백통이 이들의 혈도를 눌러 움직일 수 없게 해놓았던 것이다.
[그때 내가 때를 벗겨 환약을 만들어 네놈들에게 먹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약아빠진 네놈들이 독이 없는 줄 알고 이 나으리의 말을 듣지 않았지? 흥, 그래 오늘 맛을 보니 어떠냐!]
그는 이 네 사람을 꼼짝못하게 만들어 놓고 약을 올리면서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던 중 곽정과 황용을 발견하고 기뻐서 물었다.
[황소저, 이 네 놈을 아가씨께 드릴까?]
[제가 받아 무슨 소용이 있나요? 흥, 죽이지도 못하고 놓아주지도 못해 쩔쩔매시는군. 나보고 누나라고 세 번만 부르면 좋은 방법을 알려 드리죠.]
주백통은 좋아라고 <누나>를 연거푸 세 번이나 부르며 고개 숙여 절까지 했다. 황용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팽련호를 가리켰다.
[저자외 몸을 한번 뒤져 봐요.]
주백통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팽련호의 몸을 뒤졌다. 주머니 속에서 독침이 달린 반지와 해약(解藥) 두 병이 나왔다.
[저자가 그 반지로 사질인 마옥을 찌른 일이 있으니 그의 몸을 몇 번 찔러요.]
팽련호 등은 황용의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그뿐, 그들은 혈도를 눌려 있었으므로 꼼짝없이 독침 달린 반지에 몇 번씩 찔리고 말았다. 온몸이 벌집 쑤셔 놓은 듯 욱신거렸다.
[해약이 수중에 있으니 이제 뭐든지 시키면 그대로 할 거예요.]
주백통이 입을 헤벌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 뭔가를 생각하더니 몸을 쓱쓱 문질러 때를 벗겨 내가지고 해약과 섞어 환약 하나를 만들어 구처기에게 넘겨 주었다.
[자네가 이놈들 넷을 청허관(淸虛觀)으로 데리고 가서 십 년만 감금해 놓게. 길을 가다 말을 잘 듣거든 이 환약을 먹이고 그렇지 않으면 독이 퍼지게 그냥 내버려두게나. 이런 걸 보고 자승자박이라고 하는 것이니 동정할 필요도 없네.]
구처기가 허리를 굽히고 그러겠노라고 했다.
[노완동, 지금 한 말 아주 그럴듯한데 누구에게 배웠어요? 일년 동안 많이 발전했군요.]
황용의 놀리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주백통은 득의만면해 가지고 네 사람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네놈들은 내 청허관에 가서 얌전하게 십 년만 살도록 해라. 만약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일후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돼먹지 않게 굴다가는.... 흥.... 우리 전진교의 도사 도고(道姑)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각별히 조심하렷다!]
팽련호 등은 감히 그의 말을 어길 수가 없어 그저 허리만 굽실거렸다. 구처기는 간신히 웃음을 참고 주백통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그들을 데리고 하산했다.
[노완동, 언제 사람에게 훈계하는 것까지 배우셨나요? 그러나 처음 몇 마디는 근사했는데 뒤에 가서는 역시 엉망이더군요.]
황용의 놀림에 역시 주백통은 앙천대소하는데 왼쪽 높은 봉우리 위에서 뭔가가 번쩍 빛났다.
[아니 저게 뭐지?]
곽,황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섬광이 보이지 않았다. 주백통은 황용이 다시 구천인 얘기를 꺼낼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내가 좀 가봐야겠군.]
그리고는 나는 듯 봉우리를 향해 치달았다. 곽정과 황용은 서로 할말이 많았다. 그래서 굴 하나를 찾아 들어가 헤어진 뒤의 일을 서로 들려주었다. 해가 서산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곽정은 비상 식랑을 꺼내 황용에게 주었다. 황용은 한편 먹으면서 한편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그러면서도 마냥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구양봉 그놈의 영감이 구음진경을 가르쳐 달라고 계속 나를 못살게 구는 거예요. 오빠가 엉터리로 적어 준 경문을 나도 멋대로 해석해 주었는데 그걸 진짜로 알고 몇 달 동안이고 죽도록 헛고생만 했어요. 상승의 무공은 거꾸로 수련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정말 머리를 땅에 대고 연공을 하더군요. 그자의 재주가 정말 보통이 아녜요. 이미 음유(陰維), 양유(陽維), 음교(陰轎), 양교(陽嶠) 사맥을 자유자재로 역류시킬 수 있게 됐으니까요. 만약 그가 전신의 경맥을 모두 역류할 수 있게 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해요.]
황용이 킥킥거리며 이렇게 말하자 곽정도 따라 웃었다.
[어쩐지 그가 거꾸로 다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역시 그랬구먼. 그러나 그렇게 하기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
[오빠는 무공 천하 제일의 명성을 차지하기 위해서 화산에 온 건가요?]
[용아까지 나를 놀리는군. 그 동안 배운 무공을 어떻게 하면 전부 잊을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주대형에게 배우고 싶어서 온 거야.]
그러면서 곽정은 그 동안 고민해 온 문제를 황용에게 털어놓았다. 황용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한참 생각했다.
[잊어버리는 것도 괜찮겠군요. 무공이 강해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불안하기만 한 게 사실이거든요. 어렸을 때 같지가 않아요. 그땐 무슨 걱정 근심이 있기나 했나요.]
나이가 많아질수록 번뇌와 근심만 늘 뿐, 행복한 삶은 무공의 고하(高下)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구양봉의 말에 따르면 내일이 바로 화산에서 논검을 하는 날이래요. 우리 아버지도 오실 텐데 오빠가 첫째를 다툴 의사가 없다면 우리 아버지를 도와드릴 궁리나 해요. 다른 사람이 그 명성을 차지하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용아, 내 용아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것은 아냐. 그러나 홍은사님이 용아 아버님보다는 훌륭하신 것 같아.]
그때까지 몸을 곽정에게 기대고 있던 황용은 곽정이 자기 아버지를 낮게 평하자 화가 나 곽정을 확 밀어 버렸다. 그러나 어리둥절해하는 곽정의 얼굴을 보고는 이내 웃는 얼굴로 되돌아왔다.
[홍은사님은 정말 우리에게 잘해 주셨어요. 그럼 이렇게 해요. 우리 아무도 도와주지 않기로 말예요.]
[아버님이나 홍은사님 모두 당당한 군자이신데 만약 우리가 옆에서 돕는다는 것을 아시면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좋아요. 내가 오빠 몰래 수작을 부리거든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욕해 주세요.]
황용은 이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꼿꼿이 들었다.
[이것 또 큰일났군. 말을 잘못해 용아를 화나게 만들었으니 이를 어쩐다.]
황용이 킥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내가 화를 더 많이 내게 될 텐데요.]
곽정은 그 말뜻을 몰라 머리만 긁적거리며 황용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만약 오빠가 날 버리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함께 있을 날이 많아지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거짓말하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될지도 모르구요.]
곽정은 그 말이 너무 반가워 그녀의 두 손을 꽉 잡았다.
[그럴 리가 있나?]
[공주가 싫다고 했으니 이제 저 같은 천한 계집애를 좋아하실 수 밖에 없구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의 죽음이 머리를 스쳤다. 곽정은 처연한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하늘엔 초생달이 떠올라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마치 물결을 이루듯 두 사람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황용은 그의 표정이 이상해진 것을 눈치채고 아마 자기가 말을 잘못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곽정 오빠, 이제 지나간 일은 우리 서로 꺼내지 않기로 해요. 난 오빠하고만 있으면 마음이 즐거워요. 제 볼에 뽀뽀해 주시지 않겠어요?]
곽정은 얼굴만 붉힐 뿐 감히 입맞출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쪽 볼을 쑥 내밀고 있다가 민망해진 황용이 말머리를 돌렸다.
[오빠 생각에는 내일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누구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일등대사가 오실지도 모르고.]
[그분은 출가해 수도하고 계시니까 절대 오시지 않을 텐데요.]
곽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용아 아버님, 홍은사, 주대형, 구천인, 구양봉 다섯 사람인데 각기 나름대로 특징을 가지고 있지. 그러나 홍은사님이 건강을 회복하시고 무공을 되찾으셨는지 모르겠단 말야.]
곽정은 말꼬리를 흐리며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치로 따지자면 노완동의 무공이 제일 강할 거예요. 그러나 그가 구음진경의 무공을 쓰지 않는다면 다른 네 사람에 비해 다소 손색이 있겠지요.]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황용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연신 비비다가 어느새 곽정에게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곽정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잠이 들락말락하는데 무슨 소리가 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검은 그림자 두 개가 앞서거니뒤서거니 달리고 있었다.
옷깃에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두 사람의 빠르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몸놀림으로 보아 앞선 사람은 노완동 주백통이요, 뒤에 선 사람은 구천인이 틀림없었다. 곽정은 구천인이 독사를 가지고 주백통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서역에서는 구천인이 계속 몰려 도망다니기 바빴는데 지금은 어쩌다가 상황이 바뀌었는지 이상했다. 곽정은 황용을 가볍게 혼들어 깨웠다.
[저걸 좀 봐.]
황용이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서 주백통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야, 이 구가야, 여기 뱀 잡을 줄 아는 사람이 날 도우려고 와 있는데도 달아날 생각을 안 하고 있느냐?]
[아니 누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로 아나?]
[곽정, 황소저, 나 좀 도와주오!]
주백통이 큰소리로 외쳤다. 곽정이 막 뛰쳐나가려는데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황용이 말렸다.
[가만히 계셔요.]
주백통이 몇 바퀴 맴을 돌며 아무리 기다려도 곽정이나 황용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이놈이 그 계집애하고 어디 숨었기에 나타나지 않을까. 썩 나오지 않으면 내 연놈의 십팔대 조상까지 욕할 테다.]
[우리는 나가지 않을 테니 욕하고 싶으면 실컷 하세요.]
그러면서 황용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주백통은 구천인의 손에 있는 뱀이 머리를 반짝 쳐들며 혀를 날름거리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오금까지 저릴 지경이었다.
[황소저, 제발 빨리 좀 나와요. 우리 주씨 집 십팔대 조상까지 욕을 할 테니 제발 좀 나와서 도와주구려.]
구천인은 곽정과 황용이 근처에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일찌감치 달아나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했다. 세 사람이 자기에게 달려든다면 그야말로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내일 정오만 되어도 1대 l로 대결하는 것이니 별로 무서울 게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두 발로 땅을 찍으며 홱 몸을 날려 달아나다가 독사를 번쩍 들어 주백통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주백통이 얼떨결에 팔을 휘둘러 막으며 옆으로 피하는데 목에 차디찬 물건이 와닿으며 목을 타고 등으로 내려가면서 옷 속에서 팔딱팔딱 뛰는 게 아닌가.
주백통은 혼비백산하여 비명만 질러댔다.
[아이고 이젠 죽었구나 죽었어!]
손을 넣어 독사를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미친 듯 날뛰기만 하는데 당장이라도 뱀이 등을 물 것만 같았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니 그만 두 다리에 맥이 풀려 주백통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곽겅과 황용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구천인은 난데없는 낭패를 보자 당황해서 허둥지둥 길을 찾아 하산하려는데 숲 속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오늘만은 달아나지 못할걸.]
그 사람은 달빛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구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신은 누구요?]
주백통은 가물가물하며 의식이 몽롱해지는 가운데 자기가 지옥으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자기를 일으켜 세웠다.
[주영감님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그건 뱀이 아니오.]
주백통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벌떡 일어서려고 하는데 등뒤의 그 차디찬 물건이 또 한 번 요동을 부렸다.
[어이쿠! 뱀이 또 나를 무는구나.]
[그건 비단잉어지 뱀이 아닙니다.]
곽정과 황용은 벌써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일등대사를 모시고 있는 어초경독 네 제자 가운데 하나인 어부였다. 그는 주백통의 등에 손을 넣어 비단잉어를 끄집어냈다. 일전에 그는 화산에 있는 비단잉어 한 쌍을 보고 잡아서 품속에 넣고 다녔는데 잠깐 실수로 그만 놓쳐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놈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가 공교롭게도 주백통의 목덜미 속을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원래 비단잉어는 사람을 물지 않지만 주백통이 독사에 놀라 정신이 나가 있던 터라 차고 미끄러운 물건이 등 속에 들어와 꿈틀거리니 독사가 꼭 자기 등을 무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어부가 한 발만 늦게 왔더라도 아마 주백통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것이다.
주백통은 눈을 멀거니 뜨고 그 어부를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아직 제정신을 찾지 못해 눈앞의 사람을 어디선가 본 일이 있다는 기억만 어렴풋이 날 뿐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구천인은 계속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주백통이 눈여겨보다가 그만 또 한 번 혼비백산했다. 구천인을 향해 접근하고 있는 그림자는 바로 당년 대리국 황궁에 있던 유귀비 영고였기 때문이다.
구천인은 지금 세상에서 자기 무공을 능가하는 사람은 주백통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독사로 그를 놀라게 해 달아나게만 하면 내일 있을 대결에서 단연 1등을 차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이날 저녁에 영고가 나타난 것이다. 일전에 청룡탄에서 구천인은 미쳐 날뛰는 그녀 때문에 크게 골탕을 먹은 일이 있었던 터라, 지금 이 시간에 다시 이 미친 여자에게 잡히면, 더구나 주위에 강적도 있으니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내 아들 목숨을 되돌려 내라.]
영고가 목쉰 소리로 구천인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구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년 자기가 가장을 하고 밤에 황궁에 들어가 그녀의 아들을 해친 것은 단황야의 공력을 소모시키기 위해서였는데 그날 단황야는 그 아이를 구츨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가 어떻게 그 진상을 알았을까? 구천인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아니 왜 나를 귀찮게 하는 거요?]
[내 아들 목숨을 되돌려 내라니까.]
[당신 아들이 뭐 어쨌다고 이 야단이오? 당신 아들이 죽은 것이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그날, 그날 밤 네 얼굴을 똑똑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 웃음 소리만은 분명 기억하고 있다. 어디 다시 한 번 웃어 봐라. 웃어 봐!]
그녀는 금방이라도 대들 듯이 두 손을 쫙 펼쳤다. 구천인은 다시 두 발짝 뒤로 피하면서 갑자기 몸을 옆으로 기울여 좌장으로 우장을 치며 우장을 비스듬히 날려 그대로 영고의 배를 찼다. 이는 철장공 가운데 십삼절초의 하나로, 음양귀일(陰陽歸一)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양장의 힘이 일 장에 모여 그 위력이 대단했다. 영고도 그 위럭을 알고 니추공(泥湫功)으로 막으려 했지만 적의 공격이 어찌나 괴상한지 미처 발길을 옮기기도 전에 그의 수장이 자기 몸의 반 자 정도 거리에까지 접근했다.
영고는 앞이 캄캄했다. 원수를 갚기는 고사하고 구천인의 일 장에 오히려 자기가 죽을 판이었다. 차라리 그를 껴안고 함께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을 각오를 하고 달려드는데 난데없이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빈쩍이더니 한 줄기 권풍이 귀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구천인이 영고를 향해 뻗었던 팔을 급히 거두어 습격해 오는 권풍부터 막으며 벌컥 화를 냈다.
[노완동이 또 나타났군.]
주백통이 영고의 위급함을 보고는 옛정을 생각해서 구음진경 가운데 상승의 무공으로 멀리서 그의 철장절초를 물리친 것이었다.
그러나 주백통은 영고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영고, 당신은 그의 적수가 아니니 빨리 가도록 하오. 나도 떠나겠소.]
그러고는 몸을 홱 돌려 산 밑으로 뛰어 내려가는데 영고의 한마디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당신은 당신 아들의 원수를 갚을 생각도 안 하나요?]
[내 아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래요. 당신 아들을 죽인 사람이 바로 이 구천인이에요.]
주백통은 자기와 영고 사이에 아들이 태어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구천인에게 죽음을 당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영고 옆에 몇 사람이 서 있었다. 곽정, 황용말고도 일등대사와 네 제자가 자기 등뒤에 있었다.
이때 구천인은 절벽에서 석 자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다.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적이었다. 이런 위험한 지경에 빠지기는 평생 처음이었으나 그래도 구천인은 쌍장을 치며 큰소리를 질렀다.
[나는 지금 화산에 오르는 중이오. 무공 천하 제일의 명성을 차지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흥, 비겁하게도 여러 사람이 합세를 해 나 하나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다니 이런 비열한 행동이 어디 있소?]
주백통이 들어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럼 내일 대결이 끝난 뒤에 네놈의 개 같은 목숨을 뺏겠다.]
[어이구, 이 원통한 마음을 어찌 내일까지 기다려 풀란 말입니까?]
영고의 외침은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이때 황용이 나서며 말했다.
[노완동, 신의를 아는 사람 앞에서는 신의를 따지고, 간사한 사람 앞에서는 간사한 방법으로 대해야 해요. 우릴 보고 여러 사람이 합세해 대든다고 하니 어디 한번 두들겨 패요. 어떻게 나오나 구경 좀 하게요.]
이제 끝장이다 싶은지, 구천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날 죽이려는 거요?]
[당신은 너무나 악한 일만 저질렀소.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다 당신을 죽이려 하오.]
서생의 말에 구천인은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소리쳤다.
[만약 무공으로 대결한다면 여러분은 많고 나는 혼자니 상대가 되지 않겠지요. 그러나 선악과 시비를 가지고 따진다면 피차 마찬가지요. 여기 있는 사람 가운데 누구든지 살인해 본 일도 없고, 죄를 지은 일도 없는 사람이 있어 나를 죽인다면 내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곱게 죽겠소. 만약 내가 얼굴을 찡그리고 죽는다면 난 남아 대장부가 아니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인간이 최후의 발악으로 생각해 낸 꾀였지만 그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인지라, 일순 사람들은 그 말에 눌려 버렸다. 일등대사는 장탄식을 하며 한쪽으로 물러나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어초경독 네 사람도 대리국 대신으로 있을 때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다. 물론 공적인 일로 그랬다고는 하지만 전혀 착오가 없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주백통과 영고는 서로 바라다보면서 평생 동안의 원한을 생각했다. 곽정도 서정(西征)에 나섰을 때 진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을 죽인 일로 말미암아 그 동안 고민하고 있던 차였으며 황용 또한 비록 나이는 어리다지만 이 몇 년 동안 아버님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으니 그 역시 큰 불효려니와 다른 사람을 골탕먹이고 속인 일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구천인은 자기 말 한마디에 모두들 유구무언이라는 표정을 보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곽정이 있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곽정이 물러서며 길을 비켜 주었다. 걸음을 더욱 재촉하는데 돌연 바위 뒤에서 죽장이 얼굴을 후려칠 듯이 날아들었다.
구천인은 좌장을 들어 그 죽장을 잡으려 했으나 어찌나 번개같은지 눈 깜짝할 사이에 가슴에 있는 혈도 세 곳을 세 번이나 찔러 위협하는 게 아닌가? 구천인은 깜짝 놀라 주춤주춤 뒷걸음질쳤지만 죽장의 공격이 바람과 같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어 결국 절벽 옆의 제자리로 몰렸다. 그때 불쑥 바위 뒤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죽장의 끝을 쫓아 나타났다. 곽정과 황용이 반가운 비명을 질렀다.
[사부님!]
구지신개 홍칠공이 나타난 것이다.
[더러운 거지까지 나타나 귀찮게 구는군. 논검 날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오.]
[누가 논검을 하겠다고 온 줄 아나? 네놈을 죽여 없애려고 왔다.]
[결국 당신은 대영웅, 대협사고 나는 악당이란 말이지. 당신은 여태까지 나쁜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훌륭한 사람이란 말이렷다.]
[그렇다! 이 늙은 거지 한평생 죽인 사람이 오백서른한 명이다. 그런데 그 오백서른한 명은 모두가 악당이었다. 탐관오리 아니면 토호, 그도 아니면 잔학무도한 무리거나 배은망덕한 무뢰배였다. 이 늙은 거지, 비록 음식은 탐했지만 여태까지 선량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죽인 일이 없다. 구천인 이제 네놈 차례다. 네놈이 바로 오백서른두 번째로 내 손에 죽는 놈이 될 터이다.]
흠잡을 데 하나 없이 당당한 홍칠공의 말에 구천인은 기가 죽었다.
[구천인, 네놈의 철장방 옛 방주인 상관검남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네놈도 잘 알 것이다. 그분은 일생 동안 진충보국, 오직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돌아가셨다. 네놈도 그분과 마찬가지로 방주의 신분이 아니더냐? 그런데도 금나라와 야합해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해? 네 이놈, 죽어 무슨 낯짝으로 상관 방주님을 뵈올 테냐? 네놈이 아마 무공 천하 제일의 명성을 차지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오늘 화산에 나타난 모양인데 네놈의 무공이 그토록 출중하지도 못하려니와 설혹 당세의 무적이라 하더라도 천하의 영웅들이 너 같은 매국노에게 굴복할 줄 아느냐? 어림도 없는 수작이다.]
홍칠공의 입에서 서릿발 같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구천인의 머리는 점점 꺾어졌다.
구천인은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기가 처음 철장방의 방주가 되었을 때 병상에 누워 있던 전임 방주로부터 방규와 유훈을 듣고 또 애국과 애민을 어떻게 하라는 간곡한 교훈도 들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고 무공 또한 강해질수록 자신은 본방의 충의보국하던 전롱을 점점 무시하고 탈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방중의 품위는 날로 떨어지고 충의지배는 철장방을 떠나고 간악한 무리들만 모여 급기야 명예롭던 철장방은 더러운 도둑소굴로 변해 갖은 못된 짓만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구천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공에 걸린 명월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홍칠공의 두 눈동자는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갖추고 자기를 쏘아보고 있었다. 갑자기 천생의 양심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일생 동안 한 일을 생각하니 어느 것 하나 천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전신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홍방주님의 책망을 들어 마땅합니다.]
그리고는 구천인은 몸을 홱 돌려 절벽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홍칠공은 행여 그가 부끄러운 나머지 갑자기 대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죽장을 쥐고 방비하고 있었다. 이자의 무공이 워낙 대단하다 보니 습격을 받으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자살을 하려고 뛰어내린 것이다. 미처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데 그림자 하나가 번쩍하더니 어느 틈에 일등대사가 절벽 앞에 와 있었다. 아까부터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일등대사는 여전히 그 자세로 왼팔을 길게 뻗어 구천인의 두 다리를 잡고 끌어올렸다.
[고해가 끝이 없다지만 머리를 돌리면 극락이라오. 이미 과거의 죄를 뉘우쳤으니 새사람이 되기에도 늦지는 않았소. 이제 그냥 가보도록 하오.]
구천인은 방성대곡을 하며 일등대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음속에는 천마디 만마디 서리서리 맺혀 있지만 단 한마디도 말로 되어 나오질 않았다. 영고는 그가 자기 쪽에 등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자 복수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품속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내 그의 등을 향해 찌르려고 했다.
[잠깐만!]
주백통이 영고의 팔을 잡았다.
[왜 이래요?]
영고가 벌컥 화를 냈다. 주백통은 그녀가 나타나면서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했다. 그런데 이제 화까지 내며 힐책하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냅다 산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아니 어딜 가려고 그래요?]
영고는 벌떡 일어나 주백통의 뒤를 쫓았다.
[배가 아파 대변 좀 보려 해요.]
순간 영고는 어리둥절했지만 계속해서 그를 쫓아갔다.
[어이구 야단났구나. 바지가 온통 똥투성이다. 아이구 쿠려 죽겠네. 오지 말아요]
20년 동안이나 주백통을 찾아 혜매던 영고였다. 이번에 놓치면 또 언제 만날지 기약이 없다. 똥을 쌌건 말건 개의치 않고 그냥 쫓아갔다. 주백통은 그녀의 발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했다. 바지가 똥투성이라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영고를 쫓고 그 틈에 도망치려고 지어낸 거짓말이었는데 그렇게 외치다가 바지에 정말 똥오줌을 싸고 말았다.
곽정과 황용은 그들 둘이 쫓고 쫓기며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일등대사는 구천인의 귀에 뭐라고 소곤거리고, 구천인은 계속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 이제 그만 갑시다!]
곽정과 황용이 인사를 하고 어초경독 네 사람을 향해서도 알은 체를 했다. 일등대사는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홍칠공을 향해 입을 여는데 그 표정이 자애롭기 그지없었다.
[칠형,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이렇게 어진 두 제자를 두셨으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황야께서도 안녕히 지내셨습니까?]
서로 건네는 인사가 무척 정중했다.
[저는 이제 황제의 신분이 아닙니다. 칠형, 산고수장하니 기회 있으면 다음에 또 만나 뵙게 되겠지요.]
일등대사는 합장을 하며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떠나려 했다.
[아니 내일 논검이 있는데 왜 그냥 가시려고 합니까?]
당황해 묻는 홍칠공을 향해 일등이 고개를 돌렸다.
[저야 벌써 세상을 등지고 출가한 사람인데 어찌 천하의 영웅과 앞뒤를 다툴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번에 온 것은 어디까지나 이십 년이나 묵은 원한을 씻어 공덕을 쌓기 위해서지요. 칠형, 지금 세상의 호걸이라면 칠형 외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겸양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을 마친 뒤에 다시 합장을 하고는 구천인의 손을 잡고 산아래로 내려갔다. 사대 제자가 일제히 홍칠공을 향해 절을 한 뒤 사부의 뒤를 쫓아갔다. 서생은 황용의 발그스름한 두 볼을 보고 한마디 던졌다.
[진벌에 있는 장초(莫楚) 나무 앳된 가지가 곱기도 해라.]
황용은 서생이 자기를 놀리자 이렇게 대꾸했다.
[닭은 벌써 홰에 오르고 날은 이미 저물었네.]
그 응수에 서생은 껄껄 웃으며 읍을 하고 떠났다.
곽정은 그들이 무슨 수수께끼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용아, 그건 또 무슨 범어지?]
[범어가 아니라 시경(詩經)에 있는 말을 주고받았어요.]
곽정은 《시경》에 있는 말이라고 하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원래 서생이 한 두 마디의 아랫줄은 이렇다.
<무지한 네가 부럽구나. 집 없는 네가 부럽구나. 식구 없는 네가 부럽구나.>
이 세 마디는 원래 한 소녀가 미혼의 남자를 그리워하는 연가(戀歌)로서 뜻은 이렇다.
<네 성질이 덜렁덜렁하여 아직도 결혼을 못했으니 내 마음은 오히려 기쁘기만 하구나.>
서생의 이 말은 사실 황용의 고민을 정통으로 찌른 말이었다. 황용이 인용한 두 글귀의 아래는 또 이렇다.
<양과 소도 제 집 찾아오는데, 양과 소도 제 집 찾아 드는데.>
뜻은, 시간이 이르지 않아 양과 소가 언덕을 내려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니, 서생을 보고 가축이라고 한 것이다.
그 서생은 장원급제한 사람이라 경서에 통달해 있었다. 황용의 말뜻을 모를 리 없었다.
곽정은 방금 홍칠공이 구친인을 야단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은 바 있었다. 그 동안 고민하고 있던 의문이 순식간에 풀렸던 것이다.
(사부님은 일생 동안 오백서른한 명을 죽였다고 하셨다. 이 오백서른한 명은 모두가 악당이라고 했다. 단 한 명도 착한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니, 과연 양심에 물어도 부끄러울 바 없지 않은가. 구천인을 책망하실 때의 사부님은 얼마나 늠름하셨던가? 구천인의 무공이 결코 사부님에 비해 손색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이 비뚤어졌기 때문에 기세가 꺾인 것이다. 내 배운 무공을 착한 데 쓰면 그뿐이지, 무엇 때문에 잊으려 고생하겠는가?)
참으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치였지만, 칭기즈 칸을 따라 서정에 나섰다가 너무나 비참한 것들을 많이 보아 무력과 무공에 대해 혐오를 느끼기까지 한 곽정으로서는 자신의 고민을 풀어 주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게끔 해주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한 말이었다.
곽,황 두 사람은 홍칠공을 향해 절을 하고, 서로 헤어져 있던 동안의 얘기를 주고받았다. 원래 홍칠공은 황약사를 따라 도화도에 가서치료를 했다. 《구음진경》에 기록된 상승의 내공으로 자신의 경맥을 스스로 뚫을 수 있어서 반년 만에 무공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황약사는 딸이 걱정되어 홍칠공의 부상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딸을 찾아 먼저 북쪽으로 떠났고, 홍칠공은 뒤늦게 도화도를 떠났는데 일전 노유각 등을 만나 곽,황 두 사람의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사부님, 우선 좀 쉬도록 하세요. 날이 곧 새겠습니다. 아무래도 논검에서는 근력을 많이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곽정의 말에 홍칠공이 웃었다.
[나이가 이렇게 많은데도 지고 싶은 생각이 전연 없구나. 동사, 서독과 대결할 생각을 하면 은근히 불안해지니 내가 생각해 봐도 우습다. 용아, 네 아버지의 무공이 근래 크게 진보했는데 어디 한번 맞혀보렴. 논검을 하게 되면 네 아버지나 나 둘 중 대체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할 듯싶으냐?]
[사부님과 저의 아버지의 실력은 막상막하예요. 그러나 사부님은 일등대사의 일양지를 배우셨고 또 구음진공도 아시니 우리 아버지가 어찌 상대할 수 있겠어요? 조금 후에 아버지가 오시면 포기하시라고 말씀드려야겠어요. 일찌감치 도화도로 돌아가시는 것이 상책이라구요.]
홍칠공은 그녀의 말이 어딘가 좀 이상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껄껄 웃었다.
[뭐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할 게 있느냐? 일양지는 단황야의 것이요, 구음진공은 너희 두 사람의 것이 아니냐? 네 말이 없어도 이 늙은 거지 뻔뻔스럽게 그런 것을 쓸 생각은 없었느니라. 조금 후에 황노사와 대결하게 되면 내 원래 가지고 있던 실력만 쓸 테니 염려 마라.]
황용은 홍칠공의 말을 듣고 웃었다.
[사부님, 사부님이 아버지에게 지시면 제가 요리를 백 가지 만들어 대접할게요.]
홍칠공은 쩝쩝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네가 아주 아버지 생각만 하는구나. 은근히 나를 찌르고는 이제 또 뇌물을 쓰려고까지 하니 꼭 아버지가 이겨야겠단 말이지?]
황용이 웃으며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홍칠공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독물, 일찌감치 도착했구려.]
곽정과 황용도 벌떡 뛰어 일어나 홍칠공 옆으로 가 고개를 돌렸다. 키가 훌쩍 큰 구양봉이 어느새 자기들이 앉아 있던 자리 바로 뒤에 와 있었다. 언제 그가 나타났는지 전연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 오면 일찍 대결하는 것이요, 늦게 오면 늦게 대결하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 늙은 거지, 오늘 무공으로 결판을 낼 거요, 아니면 사생결단을 내시겠소?]
[승부도 가리고 사생결단도 냅시다.]
[그것 좋군요.]
그는 등뒤에 감추고 있던 왼손을 쑥 내밀었다. 원래 그는 손바닥에 사장을 들고 있었는데 그 사장으로 바위를 툭툭 건드렸다.
[여기서 대결할까요, 아니면 넓은 장소로 옮기겠소?]
홍칠공이 대답하기 전에 황용이 나섰다.
[화산보다는 차라리 배 위로 옮기는 것이 좋겠어요.]
[뭐라구?]
홍칠공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
[구양선생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배은망덕할 기회를 주게요. 그래야만 뒤에서 습격할 거 아니겠어요?]
홍칠공이 이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한 번 속지 두 번씩이나 속겠는가? 이 늙은 거지가 또 한 번 용서할 것이란 기대는 아예 갖지도 마오.]
구양봉은 황용이 자기를 비웃는데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두 다리를 구부리고 사장을 오른손에 옮겨 쥐어 좌장을 움직여 합마공을 쓸 태세를 취했다. 그때 황용이 타구봉을 홍칠공에게 넘겨주었다.
[사부님, 타구봉법과 일양지로 상대하세요. 저런 비열한 인간하고는 인의니 도덕이니 따질 필요가 없어요.]
(내 원래의 무공만 가지고 싸운다 하더라도 지지는 않겠지. 그러나 노독물과 싸우다 지치면 황노사와 대결할 때 쓸 힘이 없지 않을까.)
홍칠공은 타구봉을 받아 쥐면서 생각 끝에 타초경사(打草驚蛇)와 발초심사(撥草尋蛇)의 재주를 좌우로 부리며 공격에 나섰다.
구양봉은 홍칠공과 여러 차례 대결을 해봤지만 타구봉법을 쓰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황용이 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은 하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홍칠공이 이 타구봉법을 쓰고 나오는데 거기서 나오는 바람의 위력이 여간 무섭지 않았다. 사장을 흔들어 왼쪽을 막고 오른쪽으로 피하면서 적의 중궁(中宮)을 직격했다. 일찍이 홍칠공은 구양봉의 일 장을 등에 맞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후 거의 2년 동안이나 치료받고 겨우 회복이 되었다. 그의 일생 동안 전무후무한 대패였던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이 일전은 일생의 영욕과 성패를 좌우할 뿐만 아니라 생사존망이 달린 결전이나 다름없었다. 죽장이 바람을 일으키며 착실히 선제 공격을 펴나갔다.
구양봉은 키가 커 두 다리를 구부리고 합마공을 쓰고 있는데도 홍칠공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는 사장을 두 번이나 잃고 지금은 세 번째 새로 만든 것을 쥐고 있었다. 사장 위에 새긴 사람의 머리 모양이 더욱 험상궂게 생겨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두 마리의 뱀이 품은 독은 옛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훈련이 부족했다. 적과 싸울 때, 그 옛날의 뱀과 달리 이번 뱀들은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1차 화산논검에서는 명예와 구음진경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였다. 두 번째는 도화도에서 곽정과 구양공자의 혼담 때문에 싸웠고 세 번째 바다 위에서는 홍칠공이 그래도 사정을 보아주며 다퉜다. 이제 네 번째로 대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전력을 기울였다. 둘 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무공도 전에 비할 바 없이 날카로워 졌다. 조금이라도 소흘하여 상대방의 일격에 걸리는 날에는 그 당장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을 피차간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1백여 초를 싸웠다. 갑자기 달이 구름에 가려 사방이 어두워졌다. 어느덧 새벽이 되었던 것이다. 여명 전의 짙은 어둠, 이 순간만 지나면 날이 샌다. 두 사람 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상대의 독수에 걸릴까 두려워 방어만 할 뿐 감히 공격을 펴지 못했다. 곽정과 황용은 마음을 졸이며 지켜 보면서 홍칠공에게 허점이 보였다 하면 즉시 대들어 도울 만반의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곽정은 두 사람의 악전고투를 지켜 보노라니 갖가지 상념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두 사람 모두 당대 으뜸가는 고수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의를 위해 살고 다른 하나는 악행만 일삼고 있다. 무공 자체에 결코 선악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이 그 무공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린 것이다. 의를 위해 살 수만 있다면 무공이 강할수록 좋겠지만 악행만 일삼는다면 무공이 강하면 강한 만큼 더 악하고 횡포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때 사방이 캄캄해지더니 북개, 서독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 들릴 뿐 잘 보이지도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이 년 동안 부상을 치료하시기에 바빠 수련할 기회가 없었다. 고수의 무공에는 추호의 착오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하시다가 혹시 구양봉의 손에 패하시지 않을까? 이럴줄 알았으면 내 세 번씩이나 구양봉을 용서해 주지 말았어야 옳았다.)
그는 또 구처기가 말한 신의(信義)란 두 글자를 생각했다. 신의는 크게 대신 대의와 소신 소의로 나눌 수 있는데 만약 자신이 소신 소의를 위해 대신 대의를 그르쳤다면 그것은 신의라 할 수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사부님께서는 그와 1대 1로 대결하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저자가 만약 사부님을 살해하고 천하를 종횡무진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호인이 또 저자의 손에 죽을지 모른다. 그래, 내 전에는 신의라는 두 글자의 진의를 잘못 알아 어리석은 짓을 많이 했지만.)
마침내 곽정은 걸심을 하고 쌍장을 교차시킨 뒤에 홍칠공을 도우러 나섰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황용의 말소리가 들렸다.
[구양봉, 곽정 오빠와 서로 손을 마주쳐 악속하기를 세 번 죽을 고비에서 용서해 주기로 했는데 당신은 여전히 힘을 믿고 날 억압했어요. 당신은 무림 가운데 무명의 소졸만도 못한 인간예요. 그런데도 무공 천하 제일의 명성을 가지고 다투려 하다니 정말 뻔뻔스럽군요.]
구양봉은 일생 동안 많은 악행을 자행했지만, 말만은 하나라면 하나요, 둘이라면 둘이었다. 그리고도 후회 한 번 한 일이 없어 이를 자랑으로 여겨 오던 터였다.
그때는 일이 급박해서 어쩔 수 없이 황용을 윽박질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긴장할 대로 긴장해서 홍칠공과 싸우고 있는 판인데 황용이 이 얘기를 불쑥 꺼내니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홍칠공의 죽장에 찔릴 뻔했다.
[별명이 서독인지라 악행을 저지르고 다닌 것은 말하지 말기로 합시다. 그러나 어린 후배가 세 번 죽을 고비에서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체면이 말이 아닐 뿐더러 강호의 호한들이 이를 알면 웃다가 배꼽이 빠질 일이오. 구양봉, 천하의 그 누구도 당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다름아니라 그 뻔뻔스러움이오. 결국 당신은 뻔뻔하기가 천하 제일이라는 것뿐 아니겠소.]
구양봉은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지만 황용이 자기 정신을 어지럽히려는 수작인 줄 아는 터라 못 들은 척했다. 내력이 흩어지기만 하면 금방 홍칠공에게 패할 것이었다. 그런데 황용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욕이 갈수록 가관이었다. 심지어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일까지도 들먹이면서 자기 이름을 욕되게 했다. 황용이 혼자 지지고 볶는 바람에 천하에 못된 사람은 오직 구양봉 혼자요, 못된 일이란 못된 일은 모두 자기가 한 꼴이 되었다.
워낙 교활한데다 황용이 계책을 부리는 것을 뻔히 알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구양봉도 참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황용이 엉뚱한 일을 들먹이며 자기 욕을 하고 나서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한두 마디 말 대답을 한 것이 오히려 황용의 신명을 더 돋우는 격이 되었다. 어느덧 구양봉은 주먹과 발길질과 병기로는 홍칠공과 대결하고, 입으로는 황용과 맞서 싸우는 결과가 되었다. 신경이 쓰이고 힘이 드는 것으로 따진다면 황용과의 입씨름이 홍칠공과 대결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힘이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양봉의 심사는 더욱 흐트러져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늙은 거지는 구음진경의 무공을 모르고 있으니 지금 내가 그것을 쓰면 이길 수도 있겠지.)
그가 비록 황용이 시키는 대로 전신의 경맥을 역전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반년 동안 수련을 쌓은데다가 워낙 기초가 있는 사람이라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갑자기 구양봉은 사장을 휘두르며 이상한 초술을 쓰기 시작했다.
홍칠공이 놀라 정신을 가다듬고 접전을 했다.
[원사영아(源,思英兒)바바서락진(巴巴西落晋)설육문병(雪陸文兵).]
황용이 외치는 소리에 구양봉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아니 그 범어는 무슨 뜻인가?]
황용이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구양봉이었다. 황용은 혀를 말아 올린 채 아무 뜻도 없는 말을 그냥 주워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욕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엄하게 훈계를 하는 듯 하는가 하면 황급히 질문을 던지는 것 같기도 했다. 구양봉은 못 들은 체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뭐라고 하는 게야?]
황용은 다시 가짜 범문으로 대답을 했다. 구양봉은 알아들을 수 없어 더욱 답답했다. 곽정이 적어 주었던 경문의 내용 가운데 그런 것이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삽시간에 구양봉의 뇌리에는 이상야릇한 소리와 형상, 무공, 비결 등이 어지럽게 뒤엉켜 떠올랐다. 갑자기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다. 홍칠공은 그가 갑자기 허점을 보이자 기합과 함께 죽장으로 그의 천령개(天靈蓋)를 후려쳤다.
죽봉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늘이 빙글빙글 돌며 어지러워 어쩔 줄 모르던 구양봉은 그 일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구양봉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사장을 질질 끌고 달아났다.
[어디로 달아나려구?]
곽정이 외치머 그 뒤를 쫓아갔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반공에 몸을 붕 띄워 두 번 펄쩍펄쩍 뛰다가 곤두박질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엎어지고 자빠지며 낭떠러지 뒤로 사라지더니 영영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홍칠공, 곽정, 황용 세 사람은 영문을 몰라 서로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홍칠공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용아, 오늘 노독물을 물리친 것은 모두 네 공로다.]
[사부님, 이 무공은 사부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지요?]
[그야 물론이지. 네 아버지처럼 똑똑하고 괴팍한 사람이나 너같이 꾀 많은 딸이 있지 않겠니?]
이때 산 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쿠렁쿠렁 들려 왔다.
[사람이 없는 데서 이러쿵저러쿵 말씀을 하시다니 늙은 거지, 부끄럽지도 않으시오?]
[아버지!]
황용이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뛰어갔다. 어느덧 동녘 하늘이 불그레 물들며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햇살을 뒤로 하고 도화도주 동사 황약사가 청포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황용이 달려들자 부녀가 얼싸안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황약사는 이제 앳된 표정은 간곳없고 어여쁜 처녀로 성숙한 딸의 얼굴을 보자, 마치 세상을 떠난 아내를 대하는 듯했다. 반갑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찌르르 퍼지는 아픔 또한 숨길 수 없었다.
[여보, 황노사, 내 도화도에서 이런 말 하지 않았습니까? 따님이 워낙 똑똑하고 재주가 많아 다른 사람을 속이면 속였지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구요. 그래 내 말이 옳은가 그른가 어디 한빈 말씀해 보시구려.]
황약사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딸의 손목을 잡고 홍칠공 앞에 이르렀다.
[노독물을 쫓아 버린 걸 축하합니다. 그가 패해 달아났으니 칠형이나 내겐 귀찮은 일 한 가지를 던 셈이오.]
[천하의 영웅 가운데 오직 황노사와 이 늙은 거지 두 사람만 남은 셈이군요. 나는 황노사의 따님만 보면 뱃속의 회충이 요동하면서 이렇게 침을 줄줄 홀리게 된단 말이오. 우리 지금 당장이라도 통쾌하게 대결을 합시다. 당신이 천하 제일이라도 좋고 내가 제일이라도 좋소, 빨리 용아가 만든 요리가 먹고 싶어 못 견디겠구려.]
[아데요. 사부님이 지셔야만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겠어요.]
황용이 웃으면서 응수했다.
[피, 염치도 없이 내가 지기를 바라나?]
[늙은 거지, 당신이 부상을 입고 이 년 동안 치료하기에 바빠 수련할 기회가 없었으니 이제 내 적수가 아닐 게요. 용아야, 누가 이기든지든 그에 관계없이 음식을 만들어 사부님께 대접해 드려야 한다.]
황약사가 은근히 거드름을 피우며 이렇게 말하자 홍칠공도 질세라 냉큼 받았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래야만 대종사의 말씀답지 않은가. 당당한 도화도의 도주께서 따님처럼 쩨쩨할 수야 없지. 우리 정오니 뭐니 기다릴 게 아니라 당장 대결을 합시다. 자 받으시오.]
그리고는 죽장을 휘두르며 황약사를 향해 접근했다.
황약사는 꿈쩍도 않고 머리만 설레설레 가로 저었다.
[방금 노독물과 오래 싸워 기진맥진해 있는데 어찌 이 황약사가 체면 없이 대결을 하자고 덤비겠소? 그래도 정오까지라도 기다려 겨루기로 하고 우선 좀 쉬기나 하시오.]
홍칠공은 그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기다리기가 지루해 어서 당장 대결하자고 우겼다. 그러나 황약사는 여전히 돌 위에 앉은 채 음직일 생각을 안 했다. 마침내 황용이 그들 앞에 나섰다.
[아버지, 사부님.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지금 당장 대결을 한다 해도 아버지 쪽에 특별히 유리할 게 없는 방법이죠.]
[좋아. 무슨 방법인지 어디 한번 들어 보자]
황약사와 홍칠공이 입을 모아 말했다.
[두 분은 오랜 친구지간이시지만 누가 이기고 지든 두 분의 우정은 깨지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나 오늘은 화산논검을 하는 날이니 승패는 가려야지요.]
홍칠공이나 황약사도 이미 이런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용의 말투로 보아 무슨 묘안이 있는 모양이었다. 당장 대결을 하면서도 황약사에게 유리하지도 않고 또 양편의 감정도 상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것이다.
[뭔지 말을 꺼내 보라구]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먼저 곽정 오빠와 시합을 하세요. 몇 초 만에 이기나 본 뒤에 다시 사부님께서 곽정 오빠와 대결을 하세요. 만약 아버지가 구십구 초 만에 이겼는데 사부님이 백 초를 끄셨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기는 거구요, 사부님께서 만약 구십팔 초 만에 이기셨다면 그건 사부님이 이긴 것이지요.]
[그것 참 묘한 생각이로구나.]
홍칠공이 웃으며 찬성했다.
[또 곽정 오빠가 먼저 아버지와 시합을 하게 된다면 둘 다 원기왕성한 상태에서 하는 셈이죠. 그리고 이따가 사부님과 대결한다면 둘다 한바탕씩 싸웠으니 이 얼마나 공평합니까?]
황용의 말에 황약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한 방빕이로구나. 그럼 곽정은 나와 대결해 보자꾸나. 병기를 쓰겠느냐 아니면 맨손으로 하겠느냐?]
[그저 분부대로 좇겠습니다.]
곽정도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일이 있어요. 만약 두 분께서 삼백초 이내에 곽정 오빠를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요?]
이 말에 홍칠공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황노사, 난 그래도 당신이 훌륭한 따님을 두었다고 부러워했지.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를 돕겠다고 나서니 효녀로구나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구려. 저 멍청한 녀석에게 무공 천하 제일의 영광을 안겨주려는 속셈이 너무나 빤히 들여다보이지 않소.]
황약사의 성미 괴팍한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지만, 딸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 또한 대단했다.
(그렇다면 딸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용아의 말이 그럴듯하구려. 우리 두 영감이 삼백 초 내에 곽정을 이기지 못하고서야 무슨 면목으로 무공 천하 제일이라고 자처하고 나서겠소?]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 또한 지울 수 없었다.
(고의로 양보를 해 그로 하여금 삼백 초를 막아내게 했는데도 늙은 거지가 양보하지 않고 삼백 초 내에 그를 패퇴시킨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는 곽정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늙은 거지에게 양보한 결과가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머뭇거리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홍칠공이 곽정의 등을 힘껏 밀며 재촉했다.
[빨리 시작하지 않고 뭘 기다려?]
곽정이 비실비실 황약사 면전으로 밀려갔다.
(좋다. 내 우선 이 녀석의 무공을 시험이나 하다가 결정을 내리자.)
좌장을 번쩍 들어 그의 어깨를 비스듬히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제일초다!]
황약사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곽정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공 천하 제일을 내가 차지할 수 없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에게 승리가 돌아가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렇듯 망설이고 있는데 벌써 황약사의 일 장이 어깨에 와 있었다. 오른팔을 휘둘러 막는데 몸이 비틀거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난 정말 바보야. 양보니 뭐니 생각할 게 뭐람. 그가 전력으로 나선다면 나는 삼백 초를 버티지도 못할 게 아니냐?)
그런데 또 황약사의 제 2초가 엄습했다. 정신을 가다듬어 막으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두 분이 자기 실력대로 나오게 그냥 내버려두고 내 최선을 다할뿐이다. 누가 이기고 지든 내가 알 바 아니다. 다만 편파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제일 공평한 것이다.)
수초가 지나는 동안 황약사는 은근히 놀랐다.
(몇 년 동안 이 녀석의 무공이 어떻게 해서 이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까? 내 만약 사정을 보아 가며 대들다가는 삼백 초를 끌기는 고사하고 이 녀석의 손에 지고 말겠다.)
고수의 대결에서 추호의 양보가 있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황약사가 자기 힘을 다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곽정의 반격에 오히려 자기가 밀릴 판이었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져 낙영장법을 펼치며 있는 힘을 다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곽정의 공력도 과거와는 완전히 달랐다. 황약사가 계속해서 10여 종의 권법을 바꾸어 가며 써보았지만 시종 싸움이 되지 않았다. 1백여 초를 대결하다가 황약사는 갑자기 꾀를 부렸다. 곽정은 중후하고 착실한 사람이라 그 눈치를 못 채고 있다가 하마터면 황약사의 왼발에 걷어차일 뻔했다. 그제야 황약사는 두 발짝 후퇴를 해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황약사가 후유 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창피하구나.)
이 틈을 노려 우위를 차지해 보려고 대들었지만 곽정이 어찌나 철통같이 방어를 하는지 뚫고 들어갈 재주가 없었다. 곽정도 이길 생각은 없고 그저 실수나 없기를 바랐다. 상체며 하체에 허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모았다.
딸이 옆에서 <이백삼 초, 이백사 초.....> 헤아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약사는 온몸이 죄어들며 몹시 초조했다.
(늙은 거지가 최선을 다해 일백 초 이내에 곽정을 패퇴시킨다면 나의 체면은 무슨 꼴이 된단 말인가?)
황약사는 장영을 나부끼며 무서운 기세로 공격을 폈다. 순식간에 곽정은 열세에 몰려 숨을 헐떡거렸다. 마치 큰 산이 몸을 덮쳐 누르듯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하며 더 이상 버틸 기운마저 없었다. 황약사의 공격이 눈부시게 빨라질수록 초수를 헤아리는 황용의 말소리도 빨라졌다. 곽정은 침이 마르고 목이 타들어 가며 사지가 나른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막 입을 벌려 패배를 인정하려는데 그 순간 황용이 <삼백 초!> 하고 외쳤다. 황약사가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곽정은 눈과 머리가 어지러워 자기도 모르게 왼쪽으로 10여 바퀴나 빙빙 돌았다. 다시 몇 바퀴만 돈다면 그냥 쓰러질 게 뻔했다. 위급한 가운데 왼쪽 발에 천근타(千斤墮)의 재주를 부려 겨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황약사의 공격술은 그 뒤가 무서웠다. 그가 비록 물러서기는 했지만 권초의 여세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곽정이 비록 몸은 바로잡았지만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숙이고 왼팔로 땅을 짚고는 항룡십팔장의 맹렬한 힘을 이용해 오른쪽으로 10여 바퀴를 돌고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황도주님, 몇 번 더 공격하셨다면 제가 쓰러지고 말았을 거예요.]
황약사는 자기가 10여 년에 걸쳐 수행한 기문오행전(奇門五行轉)에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곽정을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반가워했다.
[늙은 거지, 난 이제 안 되겠소. 천하 제일의 명성은 아무래도 당신의 것인가 보오.]
황약사는 홍칠공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읍을 하고는 그 자리를 뜨려했다.
[잠깐만, 세상일은 바둑과 같은 것이라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오.]
홍칠공이 발걸음을 떼는 그를 만류하며 곽정 앞에 다가서더니 타구봉을 버리고 장검을 뽑아 곽정에게 건네 주었다.
[너는 병기를 쓰도록 해라. 나는 빈손으로 너와 대결하겠다.]
곽정이 머뭇거리자 홍칠공이 이렇게 말했다.
[네 장법은 내가 가르쳐 준 것인데 장법으로 맞선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느냐?]
그리고는 홍칠공은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낚싯바늘처럼 구부리고 그의 팔을 잡은 뒤에 장검을 빼앗았다. 곽정은 그의 의도도 모르고 그냥 칼을 놓았다.
[이놈아, 우린 지금 시합을 하는 게야.]
왼손으로 칼을 되돌려주고 다시 오른손으로 뺏으려고 하자 그제야 곽정이 슬쩍 피했다.
[제일초!]
황용이 세기 시작했다.
고수들의 대결에서는 손에 병기를 가지고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다. 홍칠공이 항룡십팔장을 쓰기 시작했다. 장봉(掌鋒)이 일 장 정도의 거리까지 휩쓸어, 곽정이 장검을 들고는 있지만 도저히 근접할 수가 없었다. 원래 곽정은 병기를 잘 쓸 줄 몰랐다. 그래도 서역의 석실 안에 있을 때 구양봉의 강압에 못 이겨 병기를 가지고 대결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대로 병기를 쓰는 재주도 웬만큼 진보했다.
무학을 배워 수련을 하자면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익혀야 했다. 그러나 곽정의 병기 쓰는 법은 십중팔구 방어요, 그 나머지가 겨우 공격이었다. 일찍이 그가 강남 육괴로부터 배운 것은 초보적인 무술에 불과하고, 《구음진경》을 얻어 다시 한 번 발전을 한 것뿐이었다. 더욱이 서역의 석실에서는 방어에만 몰두했고 또 상대를 해칠 겨를이 없었다. 다만 목검으로 구양봉의 목장을 막으면서 방어의 기술만은 적지않게 터득했다. 그런데 이제 홍칠공의 무시무시한 장풍을 막는 데 그게 여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홍칠공은 그가 철통 같은 방어를 하자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
(이 녀석이 굉장히 발전했구나. 내 정말 제대로 가르쳐 준 셈이지. 그러나 내 만약 이백 초 내에 이 녀석을 패퇴시킨다면 황노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이백 초가 넘으면 그때부터 실력을 발휘하자.)
즉시 항룡십팔장의 초식에 따라 9가지 변법을 계속해서 썼다. 바람소리가 쉭쉭 날리는 가운데 그의 장영이 곽정의 전신을 감쌌다.
이때 홍칠공이 만약 자기 실력을 있는 대로 발휘했다면 곽정의 서툰 병기가 당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2백 초나 넘기고 나서 이겨 보겠다는 그의 생각은 잘못이었다. 곽정은 젊은데다가 원기왕성했다. 게다가 역근단골편을 익혀 내공이 더욱 강해졌다. 그에 비해 홍칠공은 이미 늙은 몸이었다. 더구나 구양봉의 일 장에 등을 맞고 2년 동안이나 치료를 한 뒤였다. 그리고 항룡십팔장을 쓸 때는 있는 힘을 다 써야 했다. 9번 변초를 쓰면 그것이 162장이 되므로 때릴 때의 힘은 맹렬했지만 여세가 강하지 못하고 자꾸만 약해지는 것이었다.
2백 초를 겨루는 사이 곽정은 장검을 마음대로 구사할 만큼 손에 익었다. 왼손에 의지한 초술이 시간이 갈수록 강해진 것이다.
홍칠공은 서서히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만약 힘과 힘으로 대결하다가는 오히려 이쪽이 불리했다. 꾀를 써야지, 힘으로는 상대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홍칠공은 쌍장의 간격을 넓혀 허점을 드러냈다. 곽정은 그 이유를 미처 몰랐다.
(이 장법은 사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적이 없는데.)
만약 다른 사람과의 대결이라면 이런 기회를 이용해 직격해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는 자기의 은사다. 어찌 살수를 쓴단 말인가?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홍칠공이 일갈했다.
[이놈아, 네가 속았다.]
그리고는 왼발을 번쩍 들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장검을 차버리고 우장을 비스듬히 해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래도 그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일 장에는 어느 정도 사정을 두었다. 그쯤 해두면 곽정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자기가 이길 줄 알았다. 그런데 곽정이 이 몇 년 동안 크게 진보했다는 사실을 홍칠공은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곽정은 이 일 장을 맞고는 어깨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홍칠공은 그가 예측대로 넘어지지 않고 서 있자 크게 놀랐다.
[세 번만 심호흡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내상을 입는다.]
곽정은 그가 시키는 대로 크게 세 번 심호흡을 했다.
[제자가 졌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졌다고 하지만 황노사가 승복하겠느냐? 자 이거나 받아라.]
그러면서 또 일 장을 날렸다.
곽정의 오른손에는 병기가 없었다. 예리한 공격에 직면하여 주백통으로부터 배운 공명권으로 대항했다. 공명권은 천하에 제일 부드러운 권법이다. 이 공명권은 주백통이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몇 마디 말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창안해 낸 것이다.
<군대가 강하면 멸망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인다. 강대한 것은 아래에 처(處)하게 되고 유약(柔弱)한 것은 위에 처하게 된다.>
또 이런 구절도 있었다.
<이 세상에 물보다 더 유약한 것은 없다. 그러면서도 견강(堅强)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렇게 하는 데는 물 이상 가는 물건이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유(柔)한 것이 강(剛)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이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실행하지는 못한다.>
이 항룡십팔장은 무학 가운데 가장 견강한 권술(拳術)이다. 말은 비록 유약한 것이 견강한 것을 제어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유약한공력이 능히 견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홍칠공의 무공이 주백통의 가장 유약한 술수에 맞서고는 있지만 꼭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곽정은 좌우호박의 술수를 익힌 사람이었다. 한 손으로는 공명권을, 다른 한 손으로는 항룡장을 쓰고 있으니 유와 강이 일치하고 음과 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홍칠공으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황용은 옆에서 계속 초수를 헤아렸다. 이제 3백 초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곽정한테서는 패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희색이 만면하여 l초 1초를 세어 나갔다.
299초에 이르자 홍칠공은 어떻게든 승리를 거두고 말겠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갑자기 그는 항룡유회의 일 장으로 산을 밀 듯 직격을 날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몹시 후회했다. 행여 곽정이 막지 못하고 중상이라도 입을까 몹시 걱정되었던 것이다.
[조심해!]
곽정이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장풍이 벌써 그의 면전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그가 항룡십팔장을 배울 때 바로 이 초술을 맨 처음 익혔다. 그래서 공명권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급한 가운데 오른팔로 획 원을 그리며 자기도 항룡유회로 맞섰다. 펑 소리가 나면서 쌍장이 마주치고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부르르 떨렸다. 황약사와 황용이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두 사람의 쌍장이 풀로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곽정은 자기 쪽에서 양보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부님의 무시무시한 장력을 익히 아는 터라 만약 이 시각에 자기가 물러섰다가는 오히려 크게 부상을 입을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버티고 있다가 그의 장력이 다소 완화된 뒤에 양보를 하고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홍칠공은 곽정이 태연자약하게 자기가 필생의 정력을 기울여 만든 이 일 장을 막아내자 놀랍고도 반가웠다. 그 순간 이겨야겠다는 충동적인 욕구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 일 장을 양보함으로써 명성을 곽정에게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남은 기력을 더 쓰지 않고 이미 내보낸 근력까지 서서히 거두어 들이기 시작했다.
쌍방이 서로 양보를 하겠다는 자세로 승패도 불분명하게 백중지세를 취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산 뒤에서 누군가가 세 번 고함을 지르며 세 번 곤두박질하여 나타났다. 바로 서독인 구양봉이었다. 홍칠공과 곽정이 동시에 수장을 거두어 들이며 뒤로 물러섰다. 구양봉의 옷은 갈가리 찢기고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천왕노자(天王老子)가 오셨으니 옥황대제(王皇大帝)는 물러가라.]
구양봉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사장을 들어 그들 네 사람의 허리를 후려치려고 덤볐다.
홍칠공이 타구봉을 들고 달려들어 막자 구양봉은 사장을 마치 소경 몽둥이 휘두르듯 했다. 구양봉의 초술이 본래부터 이상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갑자기 손을 뻗어 자기 얼굴을 할퀴고 발로 자기 궁둥이를 걷어차는가 하면, 사장을 쓰다가도 몇 번씩이나 방향을 바꾸어 도대체 어디를 치려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홍칠공은 그 어처구니없는 공격에 타구봉으로 철통 같은 방어만 할 뿐, 감히 공격할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구양봉이 갑자기 자기 따귀를 세 번 철썩철썩 때리더니 두 손을 땅에 대고 엉금엉금 기어 홍칠공을 향해 대드는 게 아닌가.
(이 타구봉은 개를 때리기에 알맞는데, 네 지금 개 형상을 하고 나오니 이걸 보고 자승자박이라 하는 게다.)
홍칠공은 재빨리 죽장을 뻗어 그의 허리를 번쩍 쳐들었다. 그런데 구양봉이 빙그르르 한바퀴 돌면서 죽장의 반 가랑을 깔고 누워 홍칠공을 향해 몸을 굴려 내려왔다. 그 바람에 홍칠공은 그만 죽장을 놓치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구양봉은 돌연 몸을 허공에 날리며 두 발로 홍칠공의 눈을 공격했다.
홍칠공이 크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황약사 또한 장검을 뽑아 들고 옆에서 나섰다.
[단황야, 나는 당신의 일양지쯤은 무서워하지 않소!]
그러면서 구양봉은 황약사에게 달려들었다. 황약사는 그의 이상한 행동거지를 보고 이미 그가 미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의 손은 그전보다 무섭고 재빨랐다. 그는 곽정이 엉터리로 써준 가짜 《구음진경》을 읽다가 머리가 이상해진데다가 황용의 사기 교습에까지 말려들어 맹목적인 훈련을 거듭했다. 그는 오직 이겨야 한다는 강박심리에 사로잡혀 밤낮없이 더욱 거친 수련을 했다. 그런데 그의 무공이 워낙 비범한 탓인지 길을 잘못 들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초술은 신비롭게 나왔다.
그래서 홍칠공이나 황약사 같은 대종사도 그 진상을 포착하기가 어려웠다. 수십 초가 지나는 동안 황약사가 또 패해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곽정이 칼을 들고 대신 나섰다. 이를 본 구양봉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이구 내 아들아, 네 얼마나 비참하게 이 세상을 떠났더냐?]
그는 사장을 집어 던지고 곽정을 껴안을 듯이 달려들었다. 곽정은 그가 자기를 조카 구양공자로 착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처절한지 불쌍한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뒤로 밀어붙이려고 하는데 어느새 그는 왼팔을 뒤집어 곽정의 오른팔을 꽉 잡았다. 곽정이 몸을 빼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어찌나 꽉 죄는지 좀처럼 움직일 수도 없었다.
홍칠공과 황약사 부녀는 놀라 곽정을 구출하기 위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홍칠공은 일양지의 수단을 써서 구양봉의 등에 있는 봉미혈(鳳尾穴)을 눌렀다. 웬만하면 그가 손을 놓아 곽정이 빠져 나올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때 그의 전신의 경맥이 거꾸로 역류하고 있었고 혈도의 위치도 모두 바뀌어 홍칠공이 눌러도 전연 효과가 없었다. 상대가 전연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황용이 큰 돌 하나를 주워 들고 구양봉의 머리를 꽉 눌렀다. 구양봉이 오른손 주먹을 위로 치켜 들며 돌을 치자 그 큰 돌이 날아 골짜기 아래로 떨어졌다. 곽정이 이 틈을 이용해 구양봉을 뿌리치고 뒤로 피해 물러섰다.
그런데 또 어느새 구양봉은 황약사와 붙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구양봉이 쓰고 있는 초술은 무학의 장법과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물구나무를 섰다가는 이내 곧추 서는가 하면 심지어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지면에 평행이 되게 하면서 한 손으로 상대하기도 했다. 황약사는 온 신경을 모아 상대하면서도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보고 있는 홍칠공, 곽정, 황용은 손에 땀을 쥐었다. 황용은 아버지가 위급한 고비를 당할 때면 다급하게 홍칠공에게 말했다.
[사부님, 저 미친 사람에게 무림의 법규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다 함께 대들지요.]
[그건 안 된다. 평시라면 우리가 합세해도 무방하겠지만 오늘은 화산에서 논검이 있는 날이다. 천하 영웅이 모두 일 대 일로 대결하는 날이야. 그런데 우리가 합세를 한 걸 알면 나중에 사람들이 우리보고 뭐라고 하겠느냐?]
구양봉은 여전히 정신없이 미쳐 날뛰었다. 그가 입에 거품을 물고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자 황약사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몰렸다. 그런데 갑자기 구양봉의 자세가 또 바뀌더니 엉금엉금 기면서 대들었다. 상체는 방어가 전혀 안 되고 있는 허점투성이었다.
(정말 자기 정신이 아니로구나!)
황약사가 달려들면서 식지를 뻗어 그의 코 옆에 있는 영향혈(迎香穴)을 급히 찌르려고 했다. 그 동작이 전광석화를 방불케 했지만 구양봉은 살짝 얼굴을 돌리더니 그만 그의 식지를 꽉 물었다. 깜짝 놀란 황약사가 손을 뻗어 그의 태양혈을 쳐 입을 벌리게 하려고 했지만 구양봉도 오른손을 뻗어 막으며 더 꽉 깨무는 게 아닌가.
곽정과 황용이 옆에서 각기 죽장과 목검을 들고 대들었다. 그제야 구양봉이 물고 있던 황약사의 식지를 놓아주고는 다시 열 손가락을 쫙 펴 황용의 얼굴을 할퀴려고 했다. 내리쬐는 햇빛을 맞받고 있는 그의 얼굴은 징그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황용이 무서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곽정은 물러서는 황용을 뒤쫓는 구양봉의 등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구양봉이 다시 몸을 돌려 곽정을 향해 덤볐다. 10여 합을 싸우는 동안 곽정은 어깨와 다리를 여러 번 얻어맞았다.
[곽정아, 비켜라. 내가 나서겠다.]
홍칠공이 다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격투가 아까보다 치열했다. 홍칠공은 그가 황약사와 곽정을 상대할 때 옆에서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술초가 괴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게 아니었다. 위가 아래로, 왼쪽이 오른쪽으로 그 위치가 바뀌어, 합마공을 역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십중팔구 그랬다.
이 사실을 간파한 터라 홍칠공은 대전할 때 열세에 몰리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백중지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강약지세가 균형을 이루어 아까와는 판도가 달라졌다. 황약사의 눈치는 홍칠공보다 빨랐다. 구양봉에게 물린 식지를 딸에게 내맡긴 채 그들 둘의 대결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터득했던 것이다.
[칠형, 발길로 차시오!]
[위에서 내리치시오!]
때로는 옆에서 보는 사람이 사태를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법, 홍칠공은 황약사가 응수하는 대로 공격과 방어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동사와 북개가 합세하여 서독 하나를 치는 것이 아닌가?)
어느덧 대세가 판가름나려는 찰나였다. 느닷없이 구양봉이 입을 쩍 벌리고 홍칠공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홍칠공이 급히 옆으로 피하자, 미리 눈치를 챈 구양봉이 일 장을 그쪽으로 날리며 짙은 가래침을 또 한 번 뱉었다. 홍칠공은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다. 행여 눈에 가래침이 튀면 부상을 입지 않는다 해도 그틈을 이용해 적은 맹공을 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방어가 어렵게 마련이었다. 급한 나머지 우선 오른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가래침을 받아 쥐고 왼손으로 반격했다. 수합을 겨루는 동안 구양봉이 다시 침을 뱉었다. 그가 침을 뱉고 주먹과 수장을 번갈아 가며 쓰는 바람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홍칠공은 처음 그가 미친 것을 보고 놀랍기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가 이렇듯 자기를 경멸하는 것을 보고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게다가 오른손에 움켜쥔, 끈적끈적하고 미끈미끈한 가래침도 여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더러운 가래침을 구양봉의 얼굴에 발라 주고 동시에 일양지의 무서운 살수를 쓰기로 했다. 합마공을 깨는 데는 일양지 외에 방법이 없었다.
구양봉이 제정신은 잃었지만 눈만은 전에 없이 밝았다. 홍칠공의 수장이 뻗자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얼굴을 돌려 피했다. 이어 홍칠공이 수장을 뒤집어 손가락으로 찌르려 하자 구양봉은 돌연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덥석 물었다. 이것은 바로 그가 방금 전 황약사를 물리칠 때 썼던 절초였다. 보기에 따라서는 우습기도 하지만, 그가 워낙 입을 갑자기 벌리는 바람에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다. 흥칠공도 황약사와 같은 비범한 무공을 가지고도 결국 당하고야 말았다. 황약사와 황용, 곽정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홍칠공의 수장이 벌써 그의 입 가장자리에 가 있었으며 그 거리는 1푼도 안 됐다. 이때 갑자기 그의 입이 벌어지고 하얀 이가 햇빛을 받아 번쩍이며 홍칠공의 손가락을 베어문 것이다.
[조심하세요.]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들 세 사람과 구양봉은 한 가지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홍칠공의 별명은 구지신개다. 그는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는 버릇을 경계하기 위해 오른쪽 식지를 스스로 잘라 없앤 지 오래였다. 구양봉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정확히 깨물었다. 만약 홍칠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영낙없이 물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식지를 잘라 낸 홍칠공의 오른쏙 손을 물어서 구양봉은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윗니와 아랫니가 맞부딪쳤을 뿐, 결국 허공을 물고 만 셈이었다.
고수의 대결에서 쌍방의 무공이 진정 지고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면 하루 종일 대전을 해봐도 그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운 법이다.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기회란 오로지 상대방에게 작은 실수가 있을 때 뿐이다. 이러한 순간에 구양봉이 허공을 깨물었으니 기회를 놓칠 홍칠공이 아니었다. 즉시 중지(中指)를 뻗어 그의 입 언저리에 있는 지창혈(地倉穴)을 눌렀다. 당년 왕중양, 단황야 등이 일양지를 익힐 때는 모두 식지를 사용했다. 그러나 식지가 없는 홍칠공은 중지로 이 일양지를 익혔다. 구양봉이 워낙 똑똑한 자라 평소의 그 같으면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 그는 불 맞은 황소처럼 미쳐 날뛰어서 도저히 그러한 점에까지 주의를 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세 사람은 홍칠공의 득승에 막 환호성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입을 빌려 갈채를 보내기도 전에 홍칠공이 땅바닥에 물구나무 자세로 나가 뒹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구양봉은 비틀비틀 뒤로 몇 발짝 물러서서 술에 취한 듯이 비틀거리다가는 자세를 바로잡고 앙천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그의 경맥이 역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홍칠공이 비록 족양명위경(足陽明胄經)의 대혈을 정통으로 찌르기는 했지만 잠시 전신에 마비 현상만 왔을 뿐 그는 금방 정상으로 돌아와 그 틈을 이용해 일 장을 날려 홍칠공의 어깨를 후려친 것이다.
이 일 장이 홍칠공의 어깨를 정통으로 때리기는 했지만 그가 물구나무 자세로 뒹구는 바람에 그 일각의 힘이 반 이상 약화되었다. 홍칠공은 그런 와중에서도 견룡재전으로 반격해, 구양봉은 그 일격을 맞고 비틀비틀 뒤로 물러선 것이다.
다행히도 홍칠공이 재빨리 피해 중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반신이 마비되어 금방 다시 대들 수가 없었다. 그는 대종사의 신분이다. 이러한 경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파렴치한 행위나 진배없었다. 그는 내심 구양봉의 무공이 대단하다고 탄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양형, 늙은 거지가 패배했습니다. 당신이 무공 천하 제일이오.]
홍칠공은 두 손을 마주잡고 그를 향해 읍하며 패배를 자인하고 나섰다. 구양봉이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앙천대소하다가 황약사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황노사, 당신도 내게 승복하겠소?]
황약사는 순간 망설였다.
(무공 천하 제일의 명성을 일개 미치광이에게 빼앗기다니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대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이라도 다시 대들어 싸워 봐야 이길 승산도 없었다. 그래 할 수 없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구양봉이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곽정에게 돌렸다.
[얘야, 네 아비의 무공이 천하 제일이란다. 기쁘지?]
사실 구양공자는 그와 그의 형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말은 숙질간이라고 했지만 실은 부자지간이었다.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 혼미한 상태라 곽정이 구양공자로 보여 수십 년 간 숨겨 왔던 비밀까지 자기 입으로 털어놓은 셈이었다. 곽정은 순박한 사람답게 여기 있는 사람이 모두 그의 적수가 아니라면 그가 무공 천하 제일의 영예를 차지한다고 해서 부끄러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로서는 당신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곽정도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구양봉은 바보 같은 미소를 머금고 황용을 바라보았다.
[착한 며느리야, 너도 기쁘지?]
황용은 아버지와 사부, 곽정 세 사람이 계속 패하는 것을 보고 벌써부터 어떻게 대처할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묘안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느닷없이 그의 질문을 받은 것이다. 그는 여전히 손발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땅에 길게 누운 그의 그림자는 더욱 기괴했다.
[누가 당신보고 천하 제일이라 했어요? 여기 있는 한 사람만은 이길 수 없을걸요.]
그 말에 구양봉은 화가 나서 눈을 부라리며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그게 누구야? 도대체 또 누가 있단 말야? 빨리 데리고 오라구.]
황용의 두 눈이 그의 눈을 쏘아보고 있었다. 《구음진경》에 기록된 섭심대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당일 동정호에서 있었던 군산의 개방대회에서 황용은 이 방법을 써서 팽장로를 괴롭도록 웃겨 골탕을 먹인 일이 있었다.
이는 원래 일종의 공심술(攻沁術)로서, 내력이 비교적 약한 사람을 상대로 쓰면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상대방이 만약 무림의 고수라면 대단히 힘이 들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입기 쉬웠다. 그래서 경문 가운데서도 이를 간곡히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황용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또 우선 구양봉이 횡설수설하는 등 정상이 아니라서 모험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평소의 구양봉 같으면 제아무리 이 섭심법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감히 그를 상대로 쓸 수는 없었다. 그가 반격이라도 하고 나온다면 내력이 약한 황용으로서는 오히려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멍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심신은 몹시 산란한 상태여서 쏘아보는 황용의 눈초리에 그나마의 자제력도 잃어버렸다.
[누구야? 도대체 그가 누구란 말야? 빨리 데리고 오라구]
헛소리처럼 이 말만 연신 되뇌었다. 황용은 눈썹 하나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 사람의 무공이 워낙 출중해서 이길 수 없을 거예요.]
[누구야? 도대체 그가 누구야? 빨리 데려오지 못할까?]
[구양봉이란 사람이에요.]
구양봉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구양봉이라구?]
[그래요. 당신의 무공도 훌륭하지만 그 사람은 당하지 못할 거예요.]
구양봉은 정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란 이름이 대단히 귀에 익었다. 자기와 가장 친한 사람의 이름 같기도 했다. 그럼 난 누구란 말인가?
[그럼 난 누구지?]
[당신은 당신이지 누구예요. 자신도 모르면서 왜 내게 물어요?]
구양봉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자기가 누구인지 생각할수록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뛰어난 사람들이 명상을 할 때는 혹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 때가 있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전생에는 무엇이었으며 사후에는 또 무엇이 될까?)
고래의 철인들이 늘 이 같은 의문을 가지고 고민했다. 구양봉 또한 지능과 재질이 워낙 뛰어난 사람인지라, 이전에도 이 같은 의문이 가끔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었다.
[나, 나는 누굴까? 내 몸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구양봉이 당신을 찾아 대결하자는 거예요. 구음진경을 뺏으려구요.]
황용이 다시 그를 충동질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황용은 구양봉의 뒤에 있는 그림자를 가리켰다.
[바로 당신 뒤에요.]
그 소리에 구양봉은 벌떡 일어나 섰다.
[그가 당신을 때리려고 해요.]
구양봉이 몸을 숙이며 그림자를 향해 일 장을 날리자 그림자도 동시에 반격을 했다. 당황한 구양봉이 좌장과 우장을 휘두르며 맹격을 가하자, 그림자의 두 손이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구양봉은 반격의 날카로움을 보고 피하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림자가 뒤로 돌아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달아나려고?]
왼쪽으로 몇 발짝 달려갔다. 왼쪽에 있던 바위 벽에 그림자가 길게 나타났다. 적이 곧추 서 있었다. 구양봉은 주먹을 내질러 바위를 쳤다. 손이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이 왔다.
[야, 정말 무섭구나!]
발을 들어 걷어찼다. 바위 벽의 그림자도 발을 번쩍 들었다. 두 발이 부딪치자 구양봉은 지독한 통증에 그만 투지를 잃고 줄행랑을 쳤다. 그가 해를 향해 달아나기 때문에 그림자 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참 동안 달아나다 고개를 돌리니 적이 바짝 자기 뒤를 추적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대경실색하여 소리를 질렀다.
[당신의 무공이 천하 제일이오. 내, 패배를 인정하리다!]
그래도 그림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구양봉이 다시 달아나다가 고개를 돌렸다. 적은 지칠 줄도 모르고 끈질기게 자기 뒤를 쫓아왔다. 싸울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는 소리소리 지르며 산 아래를 향해 달렸다. 그가 외치는 소리는 은은한 메아리가 되어 저 멀리서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왔다.
[내 뒤를 쫓지 말아요. 쫓지 말아요!]
황약사와 홍칠공은 이 일대 무학 대종사의 처참한 최후에 그만 한숨을 쉬었다. 황용은 너무나 신경을 쓴 탓인지 피곤해서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야 비로소 일어났다. 구양봉의 외침이 끊어졌다간 이어지곤 했다. 멀리 밖으로 사라졌을 텐데도 그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계속 산골짝을 울렸다. 볕이 따사로이 비치는데도 네 사람은 모두 한기를 느꼈다. 홍칠공이 못내 안타까운 듯 탄식했다.
[저 사람 얼마 살지 못하겠군.]
[나, 나는 누군가?]
곽정이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황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빠는 곽정이시잖아요. 자기 생각 그만 하고 다른 사람이나 생각해 주세요.]
곽정은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자기 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렇군. 사부님, 도주님, 우리도 하산하지요.]
[이놈아, 너 아직도 도주님이라고 부를 테냐? 따귀를 몇 번 맞아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로구나.]
홍칠공의 책망에 곽정은 어리둥절했다. 황용의 얼굴에 홍조가 감도는 것을 보고서야 그 까닭을 알았다.
[장인 어른!]
곽정이 겸연쩍게 말하자 황약사는 껄껄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홍칠공을 바라보았다.
[칠형, 우리가 오늘에서야 겨우 무학이 무궁무진함을 알게 되었구려. 무학에 천하 제일이란 말은 있을 수가 없군요.]
[그러나 용아의 요리 솜씨만은 천하 제일이오. 이 점만은 내 장담할 수 있소.]
황용이 입에 손을 대고 웃었다.
[그만 칭찬하세요. 빨리 하산해요. 요리를 만들어 대접해 드릴게요.]
홍칠공, 황약사, 곽정, 황용 네 사람은 화산에서 내려왔다. 과연 황용은 정성을 다해 요리를 만들어 홍칠공이 물릴 정도로 포식케 해주었다. 그날 밤 네 사람은 객점에서 쉬었다. 황약사 부녀가 한방을 쓰고 곽정이 홍칠공을 모시고 다른 방에서 잤다. 다음날 새벽 곽정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니 홍칠공은 온데간데없고 탁자 위에 글씨만 새겨져 있었다.
나도 간다.
손가락으로 새긴 글자가 분명했다. 곽정은 즉시 이 사실을 황약사 부녀에게 알렸다. 그 말을 듣고 황약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칠형의 행적은 마치 신룡이 머리만 보이고 꼬리를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단 말야.]
그는 곽정과 황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곽정아, 네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느냐. 이제 세상에 제일 친한 사람은 네 사부님인 가진악 그분 한 사람뿐이다. 나를 따라 도화도로 가자꾸나. 가서 사부님을 모셔 온 뒤에 너와 용아의 혼사를 치르는 게 어떻겠느냐?]
곽정은 희비가 엇갈려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아 고개만 끄덕였다. 황용은 웃으며 <바보!>라고 한마디 놀려 주고 싶었지만 아버지 눈치가 보여서 꿀꺽 삼켰다.
그 길로 세 사람은 산천경개를 두루 구경하면서 동남쪽을 향했다. 하루는 양절(兩浙) 남로(南路)에 당도했다. 여기서 도화도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서 수리의 다급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흰 수리 두 마리가 북쪽 하늘에서부터 급히 날아오다가 곽정이 반가워 휘파람을 불자 그의 어깨 위에 내려와 앉았다. 그가 몽고를 떠날 때 너무나 바삐 서두르느라 미처 수리를 챙기지 못했었다. 그러다 만났으니 반갑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곽정은 수리의 등을 다독거려 주다가 수놈의 발에 둘둘 말아 묶어 놓은 가죽을 발견했다. 급히 풀어 보니 가죽 위에 칼로 새긴 글자가 보였다.
우리 군사가 남공(南攻)에 나서 장차 양양(襄陽)을 칠 겁니다.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기에 죽음도 불사하실 분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대의 어머님까지 무참히 세상을 떠나시게 했기에 다시 뵈올 면목조차 없습니다. 큰오라버니를 따라 서역에 와 있습니다.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옵니다. 원컨대 옥체 만강하시고 만사 여의하소서.
가죽에 이름은 씌어 있지 않았지만 곽정은 화쟁 공주가 쓴 것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몽고 문자로 된 내용을 황약사 부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장인 어른,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여기서 임안이 별로 멀지는 않지만 조정에 알려 봐야 머뭇거리다가 대사만 그르칠 것이 아닌가. 자네의 홍마가 빠르니 지금 당장 양양으로 가 그곳 군수에게 알리게. 만약 그가 말을 듣거든 그를 도와 성을 지키되 그렇지 않거든 일격에 때려 없애고 백성과 사졸들을 통솔하여 몽고의 대군을 막아야 하네. 나는 용아와 함께 도화도로 가서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네.]
곽정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지만, 황용은 못내 서운한 눈치로 머뭇거렸다.
[용아도 가고 싶거든 따라가거라. 대사가 끝나거든 즉시 돌아오너라. 조정에서 중상을 내린다 해도 거들떠볼 것 없느니라.]
[그야 물론이지요.]
황용은 너무 좋아 깡충깡충 뛰며 대답했다.
둘은 부친께 하직하고 함께 말에 올라 서쪽을 향해 떠났다. 곽정은 하루라도 늦으면 행여 몽고병이 양양성을 함락해 버릴까 봐 걱정이 되어 피가 다 마르는 것 같았다. 그때의 참상은 필설로 형언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달리는 말을 계속 재촉해 몰았다. 이날 밤 투숙한 곳은 벌써 양절, 남로, 강남(江南), 서로(西路)의 교차점이었다.
第 六 卷. 第 十一 章.(通卷 章). 영웅, 영웅
곽정은 품속에 화쟁의 편지를 잘 간수했다. 어렸을 때 화쟁과 툴루이와 어울려 사막을 뛰놀던 일들이 바로 어제 일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용은 등불 밑에서 다소곳이 앉아 옷을 꿰매고 있었다.
[용아, 그녀가 어머니까지 무참히 세상을 떠나시게 해서 다시 만날 면목조차 없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
[자기 아버지가 오빠 어머니를 괴롭혀 죽게 했으니 자연 괴로워서 그런 말을 했겠지요.]
곽정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던 전말을 되새기다가 벌떡 일어서며 탁자를 꽝 내리쳤다.
[이제 알겠군. 그랬었구나.]
옆에 있던 황용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그만 바늘에 손가락을 찔렀다.
[아얏! 왜 그러세요? 뭘 아셨다고 야단이실까?]
[내가 어머니와 함께 대칸의 밀령을 몰래 뜯어 보고 남행할 결심을 했거든. 그때 장막 안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대칸이 어쩐 일인지 그 사실을 금방 알고 어머니를 잡아갔지. 그래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단 말야. 이 일이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통 모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그랬군그래.]
[그럴 리가 없어요. 화쟁 공주는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는데 왜 밀고를 했겠어요?]
황용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가 나를 해치려고 해서가 아니라 나를 잡아 두려고 했던 거야. 장막 밖에서 우리 모자가 하는 얘기를 듣고는 자기 아버지에게 알렸겠지. 그렇게 되면 대칸이 나를 붙들어 둘 줄 알았는데 그만 큰일이 벌어지고 만 거야.]
그는 연거푸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서역으로 한번 찾아가 보지 그러세요.]
[나와 그녀는 친남매나 다름없는 사이야. 큰오라버니를 따라 서역에 가 있다면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을 텐데 내가 무엇 때문에 그녀를 찾아가야 돼?]
황용이 이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몹시 흐믓한 표정이었다.
며칠 후 그들은 융흥부(隆興府) 무령현(武寧縣)에 도착했다. 악림(惡林)을 지나 장령(長嶺)을 경유하게 되었다. 산천이 낯익어 둘러보니 일전에 남금을 만나 혈조를 잡던 곳이었다.
[곽정 오빠, 오빠는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있군요. 오늘은 옛날에 서로 좋아하시던 분을 만나게 되겠네요.]
황용이 놀리는 말에 곽정도 천진한 미소로 받았다.
[쓸데없는 소리. 뭘 서로 좋아하고 말고 할 게 있겠어.]
[만약 또 한 번 큰비가 내린다면 그녀가 우산을 가지고 와서 오빠만 가려 줄 게 아니겠어요?]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데 공중을 날던 수리 두 마리가 울부짖으며 쏜살같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곽,황 두 사람도 이상한 일이 생겼다는 예감에 급히 말을 몰아 쫓아갔다. 숲을 끼고 돌자 수리가 공중을 선회하며 누군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혈조가 앞뒤로 수리를 도와 함께 싸우는 것이었다. 황용은 오랜만에 아끼는 혈조를 보자 소리소리 지르며 그들이 싸우고 있는 상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개방의 팽장로였다. 그는 강도(鋼刀)를 휘두르며 정신없이 방어하고 있었다. 세 마리의 새가 용감하게 대들기는 했지만 그의 칼 쓰는 솜씨가 워낙 완벽해 뚫고 들어가지를 못했다.
한참 동안 이렇게 싸우다 수리가 돌연 위험을 무릅쓰고 덮쳐 들어팽장로의 두건을 홱 벗기고 머리를 쪼았다. 팽장로 역시 재빠르게 강도를 휘두르니 수리의 깃털이 우수수 떨어졌다. 황용은 팽장로의 머리가 반 이상 벗겨져 머리카락 한 오라기 없이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고 금방 그 까닭을 알았다.
(전에 수리의 가슴에 화살 맞은 흔적이 있더니 바로 저 못된 거지가 쏜 것이었구나. 뒤에 또 두 마리가 청룡탄 옆에서 누군가와 싸워 사람의 머리 가죽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저놈의 늙은이 것이 틀림없다.)
황용이 땅바닥에서 돌 몇 개를 주워 들고 세 마리의 새를 도와주려고 하는데 또 한 번 수놈이 대들어 그의 머리를 쪼았다. 팽장로가 칼을 휘둘러 머리를 막고 있는 틈을 이용해 이번에는 혈조가 날쌔게 대들어 그의 왼쪽 눈알을 쪼았다. 팽장로는 비명을 지르며 강도를 버리고 옆에 있는 가시덤불을 뚫고 들어갔다. 그 가시덤불이 어찌나 빽빽한지 새들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혈조가 황용을 알아보고 날아와 반기고, 수리들은 그래도 미련이 남아 가시덤불 위를 빙빙 맴돌았다. 곽정이 수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눈 하나를 망쳐 놨으니 이제 그만 용서해 주라구.]
그런데 이때 뒤에 있는 풀숲에서 어린애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곽정이 홍마에서 뛰어내려 키가 높다란 풀을 혜치자 어린아이 하나가 독사 한 마리를 작은 손에 움켜잡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독사는 아이의 손에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했다.
곽정이 깜짝 놀라 어린아이 주위를 살펴보는데 옆에 여자의 발이 삐어져 나와 있었다. 풀을 헤쳐 보니 파란 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남금이었다. 곽정은 독사가 혹시 어린아이를 물지나 않을까 해서 뺏으려고 하니 아이는 두 손을 훠둘러 독사를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독사는 몇 번 꿈틀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아이가 워낙 억세게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목이 졸려 죽은 것이었다. 아이는 채 두 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힘이 그만큼 세다면 대단한 일이었다. 놀랍고도 반가웠다. 남금을 부축해 앉히고 코 밑의 인중을 가볍게 눌러 주었다. 남금이 정신을 차리며 서서히 눈을 떴다.
[아니 곽.... 곽.....]
[내가 바로 곽정이오, 진소저.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남금이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다가 채 가누지 못하고 다시 푹 쓰러졌다. 그녀는 두 손과 발이 꽁꽁 묶여 있었다.
황용이 달려들어 묶인 끈을 풀어 주자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옆에 있는 어린아이를 덥석 들어다 품에 꼭 안았다. 그녀는 정신이 들자 부끄러운 표정으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원래 남금은 철장봉에서 양강에게 몸을 뺏기고 그 사람 아기를 가졌다. 그녀는 옛집으로 돌아와서 아들을 낳고 달리 먹고 살길이 없어 옛날과 같이 뱀을 잡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다행히도 아이가 영악하여 그녀는 많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날도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부근에서 땔감을 줍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팽장로가 그곳을 지나다 그녀의 자색을 탐해 욕을 보이려고 했다. 남금이 곽정으로부터 상승의 내공을 전수받고 1년여 수련을 하는 동안 몸이 상당히 강건해지기는 했지만 팽장로는 그래도 개방 4대 장로 중의 하나였다. 남금의 미력한 무공이 어찌 그의 상대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금방 손발을 묶이고 말았다. 그 무렵 혈조는 청룡탄에서 황용을 잃고 옛날의 숲 속으로 돌아오다 남금을 만나게 되었다. 주인이 곤경에 빠진 걸 알고 즉시 팽장로에게 대든 것이었다.
남금은 손발이 묶인 채 꼼짝못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새가 이겨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숲에는 독사가 우글거렸다. 그중 한 마리가 아기를 물려고 대드는 게 아닌가.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남금은 이를 보자 그만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독사가 이미 아이의 손에 눌려 죽은 뒤였다.
이날 밤 곽정과 황용은 남금의 집에서 묵었다. 곽정은 양강을 닮아 똑똑하게 생긴 아기의 얼굴을 보고는 양강과의 옛정을 생각하며 탄식했다. 남금의 간곡한 부탁에 곽정은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와 이 아이의 아버지는 결의 형제였습니다. 종말이 비참하기는 했지만 나도 내 도리를 다하지 못해 평생의 한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성장해 과실이 있으면 꼭 고치고 힘써 인의(仁義)를 행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양과(楊過)라 하고 자(字)를 개지(改之)라 하면 어떨지 모르겠군요.]
남금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말씀대로 부르겠습니다.]
양과는 장성한 뒤에 무림에 명성을 크게 떨치며 혁혁한 공로를 많이 세우기는 했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얘기다.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남금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곽정은 그녀에게 황금 1백 냥을, 황용은 구슬 한 꾸러미를 주었다. 황용은 혈조만은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의지할 곳 없는 남금 모자를 생각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쪽으로 길을 잡아 양호남로(兩7胡南路)를 거쳐 북상하여 이윽고 양양에 당도했다. 그곳은 민정이 안정되고 상업도 빈창하여 전운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양양은 남송 북번의 요충으로서 안무사부(安撫使府)가 있어 정병을 거느리고 수어하고 있는 곳이었다. 곽정은 군무가 급박하여 객점을 찾아 투숙할 겨를도 없이 황용과 함께 곧장 안무사(安撫使)를 만나러 갔다.
안무사는 병권을 충괄하는 위풍당당한 고관이다. 곽정이 몽고에서는 비록 원수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송에서는 백의의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이런 고관을 쉽게 만날 수 있겠는가? 황용은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되는 것을 익히 아는 터라 문지기에게 금 한 냥을 뇌물로 주었다. 문지기의 태도가 금방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빨라야 보름 후에나 만나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안무가 접견하는 사람이 모두 고관대작이라 곽정의 차례가 올지는 그때 가봐야 한다는 대답이었다. 곽정은 화가 나서 소리를 빽 질렀다.
[일이 급한데 어찌 기다리란 말이오!]
황용이 황급히 눈짓을 하면서 그를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갔다.
[밤에 뛰어들어가 만나면 될 거 아녜요.]
둘은 객점에 들어 여장을 풀었다. 그들은 이경이 지나 경신 무공을 펴 안무사부로 들어갔다.
여(呂)가 안무는 때마침 희첩을 끼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곽,황 두 사람은 뛰어들어가 그의 앞에 읍을 했다.
[급한 군무가 있기에 아뢰러 왔습니다.]
여안무는 깜짝 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객이야! 자객!]
그는 그것도 모자라 희첩을 홱 밀쳐 버리고 술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엉덩이만 쑥 내놓고 벌벌 떨었다. 곽정이 그를 끌어내며 말했다.
[안무는 놀라지 마시오. 소인은 안무를 해칠 의사가 없소!]
그러면서 그롤 다시 의자에 앉혔다.
여안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었다. 당하에 수십 명의 군사가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안무를 구하러 나타났다. 황용이 잽싸게 비수를 뽑아 들어 여안무의 가슴에 대자 군사들은 고함만 지를 뿐 감히 대들지 못했다.
[조용히 하라고 하시오. 우린 할말이 있어 왔소]
여안무가 손발을 벌벌 떨며 조용히 하라고 하자 그제야 군사들은 조용해졌다. 곽정은 나라의 병권을 장악한 중임을 맡고 있는 자가 이토록 못난인가 싶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몽고 대군이 머지않아 이 양양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 주며 곧 병사와 장수들을 요소에 배치하여 방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안무는 곽정의 말을 귓전으로 들으면서 입으로는 연신 네네 대답했다.
[알아들었는가?]
황용의 질타에 여안무는 또 한 번 기겁을 하며 더듬거렸다.
[네 네, 알고말고요. 금....금나라 병사가 습격을 해온다니 마땅히 방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구요.]
[금나라 병사가 아니라 몽고병이란 말이오.]
황용이 화가 나 호통을 내지르자 여안무는 또 한 번 놀라 쩔쩔맸다
[몽.... 몽고병이라구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몽고는 우리 승상과 동맹을 맺고 금나라를 치기로 했으니 절대로 그럴 리 없어요.]
[몽고병이 온다면 오는 줄 알란 말이야!]
황용이 으르대자 여안무가 입을 쑥 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몽고병입니다. 몽고병이에요.]
[백성의 생명이 모두 대인의 손에 달렸소. 양양은 남송의 병장(屛障)이니 각별히 주의하기 바라오]
곽정의 다소 누그러진 말에 여안무는 생기를 찾았다.
[그렇습니다. 노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곽,황 두 사람은 한숨을 쉬며 담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자객을 잡아라! 자객을 잡아라!]
어지러운 함성이 뒤에서 들렸다.
두 사람은 이틀을 기다려 보았지만 성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 안무란 녀석 아무 쓸모가 없군. 용아 아버님 말씀대로 우선 그놈을 죽여 없앤 뒤에 대책을 강구해야겠어.]
[적군이 며칠 내에 도착할 텐데 그까짓 놈 죽여 없애는 것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그렇게 되면 성내가 소란해질 것은 뻔하고 또 우두머리도 없이 어떻게 방어를 해요?]
곽정이 눈썹을 찡그렸다.
[과연 그렇기도 해. 그럼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한다?]
황용이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좌전(左傳)에 있는 고사(故事)대로 해볼 수밖에 없겠군요.]
[용아는 정말 본 책도 많고 아는 것도 많단 말야. 무슨 고사인지 빨리 말 좀 해봐. 할 수만 있음 해봐야지.]
[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오빠 몸을 빌려야 해요.]
곽정은 어리둥절했다.
[뭐라구?]
황용은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킬킬거렸다.
[그럼 제가 그 고사 얘기를 할 테니 들어 보세요. 춘추시대 정(鄭)나라에 장사꾼이 있었는데 이름은 현고(弦高)라고 불렀어요. 그가 밖에 나가 장사를 하는데 진(秦)나라 대군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원래 그들은 정나라를 치러 오는 길이었죠. 그때 정나라는 아무 방비도 없었답니다. 진나라 대군이 들어오기만 하면 나라가 망할 판이었죠. 현고는 일개 장사꾼에 지나지 않았지만 애국심온 남달리 강했답니다. 그래 꾀를 쓰기로 결심했어요. 열두 마리의 소를 끌고 가 진나라 장군을 만났지요. 가서 정나라 군왕의 분부를 받고 군사들을 위문하러 왔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을 시켜 군왕께 이 사실을 알렸지요. 진나라 장군이 그의 말을 듣고는 정나라가 벌써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눈치챘지요. 그래 공격을 포기하고 군사를 이끌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답니다.]
[그것 참 묘하군. 그런데 어째서 내 몸을 빌려야 한다고 그랬지?]
[소 열두 마리가 있어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오빠는 소띠지요?]
[아니, 그러고 보니 은근히 날 놀리고 있는 거 아냐?]
손을 뻗어 간지럼을 태우려고 하자 황용이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둘은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었다.
[우리 오늘 밤 안무사부로 들어가 금은보화를 훔쳐서 내일 저는 남장을 하되 관복으로 갈아입고 나가 몽고 대군을 위문하기로 하죠. 그리고 오빠는 여기 남아 백성과 군사들을 규합해 방비할 준비나 하세요.]
그 말에 곽정은 손뼉을 치며 좋다고 했다. 그날 밤 둘은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안무사부에는 예기했던 그대로 수탈한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둘은 몇 차례나 왔다갔다하며 훔친 물건을 날랐다. 새벽이 되도록 부중에서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마침내 황용이 관복으로 남장을 하고 나니 그럴듯한 관인이 되었다. 그녀는 즉시 보물을 한 보따리 챙겨 가지고 홍마에 올라 북쪽으로 출발했다.
다음날 점심때가 되자 곽정은 북문 밖으로 나가 멀리 바라다보았다. 홍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황용이 곽정을 보고 고삐를 잡고 섰다. 얼굴에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다.
[몽고 대군이 한눈에도 십만이 넘을 것 같아요. 우리가 무슨 힘으로 당해 내죠?]
황용의 떨리는 목소리에 곽정도 놀랐다.
[그렇게까지 많던가?]
[칭기즈 칸이 군사란 군사는 모두 모아 출격한 것 같더군요. 일격에 송나라를 섬멸할 기세예요. 내가 금은보화를 선봉 장군에게 주니까 그 장군은 우리가 벌써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표정이었어요. 말로는 금나라를 치러 온 것이지 송나라를 치는 게 아니라고 우기더군요. 우리 송나라에서 다 알고 있다는 눈치를 넌지시 건넸더니 퍽 의아하게 여기더군요. 군사를 그 자리에 주둔시키는 것으로 보아 대원수에게 보고할 모양인가 봐요.]
[만약 그들이 그대로 회군한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을 테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럴 리가 없지.]
황용도 눈썹을 씽그렸다.
[대군의 기세로 보아 그리 쉽게 포기할 것 같진 않아요.]
[어디 한번 묘책을 강구해 보라구.]
곽정은 걱정이 되어 이렇게 말했지만 황용은 머리만 살래살래 가로 저었다.
[제가 하루 온종일 생각해 보았어요. 곽정 오빠, 만약 일 대 일 대결이라면 이 천하에 오빠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두서너 명에 불과하겠지요. 적이 열 명, 아니 백 명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지금 적군은 십만 명이나 되니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곽정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우리 대송의 인구가 몽고보다 훨씬 많고 백성과 군사들 가운데 충성스런 사람도 더 많은데 일치단결한다면 까짓 몽고가 뭐 그리 두렵겠는가? 썩어빠진 관가 놈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야. 어리석은데다 겁쟁이들이라 백성들 학대하기만 일삼아 나라를 그르치게 되다니.]
[몽고병이 안 오면 그만이지만 만약 온다면 우리가 나서서 죽일 수 있는 데까지 죽이고 봐야죠. 위급해지면 그래도 홍마가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 아니겠어요. 천하의 일, 근심만 한다고 해결이 되나요?]
이 말에 곽정이 정색을 했다.
[용아, 그 말은 안 돼. 우리가 무목유서에 있는 병법을 배우지 않았나? 무목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네 글자를 잊어서는 안 돼! 우리 둘의 힘이 보잘것없지만 최선을 다해 나라의 간성이 돼야 해. 비록 우리가 여기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 길만이 부모님이나 사부님의 가르침을 헛되이 하지 않는 걸 거야.]
황용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이런 날이 있을 줄 알았어요. 그만두세요. 오빠가 살면 나도 살고 오빠가 죽으면 나도 죽으면 그만이에요.]
결심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그 길로 숙소로 돌아가 그들은 술을 들며 담소를 나눴다. 적군이 국경을 위협하는 마당에 삶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시는 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하고 정겹기까지 했다. 이경 무렵까지 술을 마시다가 일어나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자려는데, 성밖에서 처절한 울음 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요!]
황용이 부르짖었다. 둘은 동시에 뛰어 일어나 성 위로 달려 올라갔다. 성밖에는 난민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남부여대, 그 행렬은 끝이 없었다. 그런데도 성을 지키는 관리나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들어오지 못하게 그들을 막았다. 잠시 후에 여안무사가 파견한 사졸들이 몰려와 활시위를 당기며 물러가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몽고병이 몰려와요. 우리 백성들을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시오.]
난민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성문은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난민들이 통곡을 하면서 문을 열라고 아우성이었다. 곽정과 황용은 성 위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득한 지평선에 꿈틀꿈틀 불빛이 아른거렸다. 몽고군의 선봉이 도착한 것이다. 곽정은 오랫동안 칭기즈 칸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전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들은 늘 사로잡은 적군을 앞장세웠다. 수만 명의 난민이 성문 밖에 모여 있으니 몽고의 선봉이 오기만 하면 양양성 안과 밖의 군민이 서로 다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세가 다급하니 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곽정이 성 위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양양이 일단 깨지면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용기 있는 남자는 나를 따라 적진을 향해 쳐들어갑시다!]
북문을 지키는 수문장은 여안무의 심복이었다. 그는 곽정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화를 냈다.
[여봐라, 민심을 교란시키는 저자를 빨리 잡아라!]
곽정은 성 위에서 뛰어내려 그자의 앞가슴을 움켜잡아 머리 위로 내팽개치며 그가 타고 있던 말을 뺏어 탔다. 관병 가운데는 충의로운 사람도 많이 섞여 있었다. 난민들이 성문 밖에서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 분개하던 차에 곽정이 나타나 수문장을 낚아채자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빨리 성문을 열라고 해라.]
곽정의 호통에 수문장은 벌벌 떨며 성문을 열게 했다. 북문이 열리자 난민들이 조수처럼 안으로 밀려들었다.
곽정은 수문장을 황용에게 인계한 뒤 창을 비껴 들고 말을 달려 성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황용은 그를 제지하며 수문장의 갑옷을 벗겨 그에게 입혀 주면서 낮은 소리로 그의 귀에 속삭였다.
[가짜로 성지(聖旨)를 전해 군사를 데리고 나가도록 하세요.]
곽정은 묘안이라고 생각했다.
[성지를 받들어 어리석은 양양무사는 그 관직을 파하니 중군을 나를 따라 성밖으로 나가 적과 싸우도록 합시다!]
낭랑한 목소리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내공이 심오한 곽정의 단전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말소리였다. 성 안팎이 떠들썩하니 소란스러웠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똑똑히 들었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는데 진위를 따질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군중 속에는 여안무의 어리석음에 평소 분노를 느껴 오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그가 이제 파직을 당하고 다른 사람이 나서서 군대를 이끌고 적과 싸우겠다고 하니 사방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곽정은 2,3천 명의 인마를 거느리고 성밖으로 나섰다. 군용이 어지럽고 대오 또한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어찌 몽고의 정병과 대적한단 말인가? 곽정은 무목유서 가운데의 병법을 떠올렸다. 일이 급하면 계교를 써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즉시 별도의 명령을 내렸다.
l천 명의 군사는 동쪽에 있는 산 뒤에 매복하고 있다가 포성이 울리면 함성을 지르고 깃발을 휘두르되 절대 나오지 말 것이요, 다른 l천 명은 서쪽에 있는 산 뒤에 매복하고 있다가 두 번째 포성이 들리면 깃발을 훠둘러 허장성세하라는 것이었다. 양편의 군사를 통솔하는 대장들은 곽정의 늠름한 위풍에 탄복하면서 각기 군사를 이끌고 자기 위치롤 찾아갔다.
난민들이 모두 성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았다. 북소리가 나며 철기의 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몽고군의 선봉이 성 가까이 접근했다.
황용은 수문장의 혈도를 눌러 성문 뒤로 집어 던지고 군사의 말과 창을 뺏어 타고 곽정의 뒤를 따랐다.
[대문을 활짝 열라. 성안에 있는 모든 군민은 집 안으로 들어가 숨으라.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모두 목을 베겠다!]
곽정의 엄한 군령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군령은 내리지 않아도 되었다. 성안의 군민은 이미 모두 숨어 버린 뒤였다. 젊고 용감한 사람들은 동서 양쪽에 있는 산 뒤에 매복한 지 오래였고 여안무 같은 겁쟁이들은 탁자 밑에 들어갔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었다.
몽고군의 철기 수백이 질풍처럼 달려왔다. 양양 성문이 활짝 열린 채 젊은 남녀 한 쌍이 창을 비껴 들고 성밖에 파놓은 해자 위에 서 있었다. 선봉대를 인솔하는 천부장은 뭔가 낌새가 이상함을 느끼고 감히 대들지 못했다. 쾌마를 보내 후속 부대의 만부장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만부장은 백전의 노장이었다. 보고를 듣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있을까 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말을 달려 성 앞에 이르렀다. 멀리 해자 위에 곽정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서정에 참여했을 때 곽정의 신출귀몰한 작전을 직접 본 바 있었다.
반공에서 낙하해 사마르칸트 성을 치던 용맹 앞에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곽정이 성문 앞을 지키고 성안은 텅텅 비어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가 틀림없이 묘책을 가지고 있을 텐데 어찌 함부로 공격을 감행한단 말인가? 즉시 말위에서 두 주먹을 포개 인사를 했다.
[금도부마,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소인 문안드립니다.]
곽정이 답례는 하면서도 말은 꺼내지 않았다. 만부장은 군사를 잠시 퇴각시키고 원수에게 이 사실을 급히 통보했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 큰 기를 펄럭이며 한 소년 장군이 철갑 군마를 타고 달려왔다. 넷째 왕자인 툴루이였다.
[곽정 안다, 그 동안 안녕하셨소!]
곽정도 말을 달려 그의 앞으로 나갔다.
[툴루이 안다, 이렇게 오실 줄은 정말 몰랐소.]
예전 같으면 그들 둘은 서로 얼싸안고 반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은 이 장쯤 떨어진 장소에서 약속이나 한 듯 말을 멈췄다.
[안다, 군대를 이끌고 우리 대송을 치러 온 것 아니오?]
[나는 부왕의 명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왔으니 양해하시기 바라오.]
곽정은 시선을 먼 곳으로 보냈다. 깃발이 하늘을 가리고 칼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였다. 그 수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철기가 몰려든다면 나 곽정은 오늘 여기서 죽게 되겠구나.)
[그렇다면 와서 내 생명을 가져 가시오.]
곽정의 단호한 말에 툴루이는 흠칫 놀랐다.
(용병이 워낙 귀신 같아 내 적수가 아니다. 하물며 나와 그는 친형제보다 친하지 않는가. 어찌 그를 다치게 하겠는가.)
툴루이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황용이 고개를 돌리고 왼손을 휘두르자 성안의 군사들이 호포를 쏘았다. 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자 동쪽 산 뒤에 매복했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고 깃발을 흔들었다. 툴루이의 표정이 금방 변했다. 이어 호포가 또 한 번 터지자 이번에는 서쪽 산에서 함성이 들려 왔다.
(큰일났구나. 복병이 있는 걸 몰랐구나.)
툴루이는 부황을 따라다니며 동정서토 격전을 수없이 치른 터라 수천 명의 군사가 매복해 있다고 해서 겁부터 먹을 그가 아니었다.
다만 곽정이 서정을 할 때 무목유서의 도음을 입어 혁혁한 공로를 세운 데 대해 크게 감탄해 은근히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이상한 조짐이 느껴졌다. 그래서 장령들에게 명령을 내려 후미가 선두가 되어 30리 밖으로 퇴각하고 거기에 진을 치게 했다.
곽정은 몽고병이 퇴각하자 황용을 바라다보며 웃었다.
[곽정 오빠, 공성계(空城計)가 성공했군요. 축하드려요.]
그러나 곽정은 오히려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툴루이는 위인이 워낙 강인하고 용단이 있어서 오늘은 물러갔지만 내일이면 틀림없이 다시 올 텐데 그땐 어떻게 대항한다?]
황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계책이 있기는 해요. 하지만 오빠가 의형제의 정리를 귀중히 여기니 쉽게 용단을 내리지 못하실 거예요.]
[그를 찔러 죽이란 말인가?]
[그는 대칸의 총애를 받고 있는 막내아들이 아녜요. 다른 대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존귀한 사람이지요. 넷째 왕자가 죽는다면 적은 필시 퇴각하고 말 거예요.]
곽정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안은 적군이 퇴각했다 해서 다시 소란해졌다. 여안무는 곽정에게서 몽고군이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그들 두 사람이 묵고 있는 숙소로 예방했다. 곽정은 그와 더불어 성을 지킬 대책을 상의했다. 몽고군이 내일 다시 공격해 올 것이란 곽정의 말에 여안무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가마를 대령시켜라. 빨리 안무사부로 돌아가야겠다.]
그는 벌써 밤을 틈타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곽정은 우울해 견딜 수가 없었다. 황용이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대접했지만 한 숟가락도 먹지 못했다. 밤이 되자 성안에는 사람을 찾는 소리와 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일 이 시간 양양성에 살아 남아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몽고군의 학살 현장을 너무나 많이 보아 온 곽정이다.
그때 사마르칸트 성의 살륙 참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이었다. 그 참상이 지금도 눈에 생생했다. 곽정은 주먹으로 탁자를 꽝 하고 때렸다.
[용아, 옛사람 가운데 대의를 위하여 자기 부모를 살해한 사람도 있는데 내 오늘 무엇을 돌보겠는가?]
황용이 한숨을 쉬었다.
[일이 워낙 어려워요.]
곽정은 결심을 하자마자 곧 야행에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곽정은 황용과 함께 흥마를 타고 북쪽을 향해 달렸다. 몽고 대군이 있는 곳 근방에 이르러 홍마를 산중에 매어 두고 툴루이의 장막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장막을 지키고 있던 순라군을 잡아 혈도를 누르고 그들의 옷을 벗겨 바꿔 입었다. 곽정은 몽고어도 유창할 뿐만 아니라 군중의 규율도 모르는 것이 없어 힘들이지 않고 툴루이의 장막에 접근하였다. 두 사람은 경신의 무공으로 장막 뒤에 숨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때마침 무슨 소리가 났다. 곽정은 툴루이가 벌써 자기가 온 것을 알고 부르는 줄 착각하여 하마터면 대답을 할 뻔했다. 황용이 눈치를 채고 잽싸게 손을 들어 곽정의 입을 막고 비수를 뽑아 쥐여 주며 속삭였다.
[이것을 쓰세요. 대장부는 기회가 오면 용단을 내려야 해요. 망설여봐야 좋을 것 하나 없어요.]
바로 이때 먼 곳에서 말발굽 소리도 요란히 한 필의 말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곽정은 긴급한 군정이 있어 보고하려고 온 줄 눈치로 알았다.
[잠깐만, 무슨 보고를 하는지 들어 본 뒤에 죽여도 늦지 않을 거야.]
노란 옷을 입은 사자가 황급히 말에서 내려 곧장 장막으로 들어가 툴루이 앞에서 이마를 조아렸다.
[사황야. 대칸의 명령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대칸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원래 몽고는 문자가 있기는 했지만 개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칭기즈 칸은 글자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분부나 하명을 할 때면 사자에게 말로 전하게 했다. 또 혹시 내용이 새나가지나 않을까 해서 그것을 노래로 엮었다.
사자가 두 무릎을 꿇더니 아뢰기 시작했다. 툴루이와 곽정은 제각기 눈물을 비쳤다. 칭기즈 칸은 노쇠한데다 최근에는 병이 도져 자신이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툴루이를 보고 급히 돌아와 만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곽정이 몹시 보고 싶으니 만약 그의 소재를 알거든 데리고 와서 마지막으로 한 번 보자는 것이었다.
곽정은 더 참지 못하고 비수로 장막을 찢고 안으로 들어갔다.
[툴루이 안다. 내 함께 가리다.]
툴루이는 깜짝 놀라 잠시 가만 있다가 곧 곽정을 알아보고 반가워 얼싸안았다. 사자도 곽정을 알아보고 절을 했다.
[금도부마, 대칸께서 꼭 만나 보시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곽정은 <금도부마>란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용이 혹시 오해를 하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즉시 밖으로 뛰어나와 황용의 손을 꽉 잡았다.
[용아, 우리 함께 갔다 함께 돌아오자구.]
황용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를 못 믿겠나?]
황용이 쌩긋 웃었다.
[다시 부마니 뭐니 쓸데없는 생각하면 이 칼로 죽여 버리겠어요.]
툴루이는 내일 새벽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음날 새벽 곽정과 황용은 홍마와 수리를 찾아 타고 함께 북으로 출발했다. 툴루이는 혹시 부황의 임종을 보지 못할까 봐 부원수에게 병사를 인솔하게 하고는 곽, 황 두 사람과 함께 쾌마를 달렸다. 어느덧 칭기즈 칸의 금빛 찬란한 장막이 멀리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툴루이는 금빛 장막 앞에 여전히 얼룩소 꼬리로 장식한 9개의 기가 펄럭이고 있는 것을 보고 부황의 무사함을 알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말을 달려 장막 앞으로 갔다. 말에서 내린 곽정은 고삐를 잡은 채 칭기즈 칸과 자기의 관계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길러 준 공도 컸지만 어머니를 죽게 한 원한도 대단했다.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호각 소리가 나며 호위병들이 두 줄로 장막 앞에 정렬했다. 칭기즈 칸이 검은 담비 가죽옷을 입고 툴루이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안에서 나왔다. 걸음걸이는 옛날이나 다름없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가볍게 떨었다. 곽정은 달려가 땅바닥에 엎드렸다. 칭기즈 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일어나거라. 일어나! 내 날마다 너희들을 그리워했느니라.]
곽정은 일어나 섰다. 대칸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요, 움푹 팬 두 볼이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걸 보니 증오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칭기즈 칸은 곽정의 어깨를 잡고 툴루이와 곽정을 번갈아 바라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곽정과 툴루이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라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칭기즈 칸은 다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초 내가 자무카와 의형제를 맺을 때 뒤에 와서 내가 그를 죽이게 될 줄 누가 알기나 했느냐? 내 천하의 대칸이 되고 그가 내 손에 죽기는 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더냐?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며칠 후에는 죽어 황토로 변하겠지? 누가 이기고 누가 지든 결국은 한 세상 살다 가기는 다 마찬가지야.]
그는 두 사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희들은 모쪼록 죽는 날까지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라. 절대로 서로 싸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자무카는 죽음으로 만사가 끝나 버렸지만 난 그와의 정을 생각하며 가끔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툴루이와 곽정은 어제만 해도 양양성 아래서 하마터면 사생결단을 벌일 뻔했으니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칭기즈 칸은 한참 동안 서 있었기 때문에 피곤을 느꼈다. 막 장막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한 떼의 인마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앞장선 사람은 흰옷에 금빛 요대를 두른 금나라 관인이었다. 칭기즈 칸은 적을 보자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말을 내린 금나라 관인은 달려와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도 감히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금나라 사자가 대칸을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측근의 보고에 칭기즈 칸은 화를 버럭 냈다.
[금나라가 투항은 하지 않으면서 무엇 때문에 사자를 파견한단 말이냐?]
[저희가 하릇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대칸의 위엄을 범했으니 그 죄 만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특별히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귀한 구슬 천 개를 가지고 와 바치오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천 개의 구슬은 저희 나라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자가 땅에 엎드려 이렇게 고하며 등에서 보따리를 끌러 옥으로 만든 쟁반에 비단 주머니 안에 있는 구슬을 쏟아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칭기즈 칸은 곁눈질로 바라다보았다. 손톱만한 구슬들이 쟁반 위에서 데굴거렸다.
이러한 구슬은 하나만도 대단한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또 나머지는 모두 그만그만한데 가운데 있는 한 개는 유난히 컸다. 구슬의 광채가 어찌나 부드럽고 영롱한지 옥쟁반에 무지개가 서린 듯했다.
평소의 칭기즈 칸이었다면 꽤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몇 번 이마를 찡그리더니 측근을 보고 거두어 들이라는 눈짓만 보냈다. 사자는 그가 예물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자 희색이 만면하여 거듭 인사를 했다.
[대칸께서 받아 주시니 이는 저희 나라의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누가 그것을 받겠다고 하더냐? 곧 너희 나라를 치러 갈 것이다. 여봐라, 저놈을 냉큼 묶도록 해라.]
친위병이 대들어 사자를 결박했다. 칭기즈 칸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구슬이 천 개 생겼다고 해서 내 목숨이 그만큼 늘어난다더냐?]
그는 측근한테서 은쟁반을 받아 힘껏 집어 던졌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입도 벙긋 못했다. 산지사방에 흩어진 구슬을 몽고 병사들이 주워 가졌다. 그러나 미처 발견되지 않은 구슬은 수백 년 동안 풀밭에 있다가 목동들이 우연히 줍기도 했던 것이다.
칭기즈 칸은 울적한 심사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황혼 무렵에 그는 곽정을 불러 단둘이 초원을 돌아보았다. 말을 달려 절벽 아래에 당도했다. 곽정은 어렸을 때 여기서 강남 칠괴를 만났고 어느 날 밤 동시 진현풍을 찔러 죽이기도 했다. 또 마옥으로부터 내공을 배운 곳도 바로 여기였다.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이때 머리 위에서 수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흰 수리가 짝을 지어 절벽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아마 이곳이 자기들의 옛 고향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칭기즈 칸이 활을 뽑아 시위를 당졌다.
[대칸, 쏘지 마십시오.]
곽정이 놀라 외쳤지만 긴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곽정은 평소 칭기즈 칸의 완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화살이 날아간 이상 사랑하는 수리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암놈이 방향을 꺾고 왼쪽 날개로 화살을 쳐 떨어뜨렸다. 수놈이 화가 나공중에서 칭기즈 칸의 머리를 찍으려고 달려들었다.
[아니, 이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곽정이 소리를 지르며 채찍으로 수놈을 후려쳤다. 수리는 주인이 채찍을 휘두르자 깃을 펄럭이며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칭기즈 칸은 암담한 표정을 지으며 활을 집어 던졌다.
[수십 년 동안 활을 쐈지만 이렇게 맞지 않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이구나.]
곽정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칭기즈 칸이 갑자기 두 발을 모으고 말을 북쪽으로 몰았다. 당황한 곽정이 그 뒤를 쫓았다. 홍마는 질풍처럼 달려 눈 깜짝할 사이에 칭기즈 칸의 말을 앞질렀다. 칭기즈 칸은 말고삐를 잡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곽정아, 역대에 내가 세운 대국만큼 넓은 나라는 없었다. 나라의 중앙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일년이 걸려야 온 나라를 돌 수 있게 되었구나. 고금의 영웅 가운데 그 누가 나와 비교가 되겠느냐?]
[대칸의 무공은 고래로 따를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칸 한 분의 혁혁한 무공을 위하여 천하에 얼마나 많은 백골이 쌓였으며 얼마나 많은 고아와 과부가 눈물을 흘렸는지 아십니까?]
칭기즈 칸의 두 눈썹이 꿈틀거리며 치켜 올라가더니 채찍을 들어 곽정의 머리를 후려치려고 했다. 그러나 곽정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그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채찍을 들었던 칭기즈 칸의 손이 맥없이 내려왔다.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곽정은 생각했다.
(앞으로 다시 대칸과 만날 날이 있을까? 대칸의 화를 돋우는 일이 있더라도 해야 할 말은 분명히 해두어야지.)
[대칸, 저를 길러 주신 은혜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만든 원한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사람이 죽어 지하에 묻히는 데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합니까?]
칭기즈 칸은 일순 어리둥절해하다가 말채찍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이 정도에 불과하겠지.]
[그렇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이셨고 또 그토록 많은 사람의 피를 홀리게 하셨고 영토를 이만큼 넓게 차지하셨지만 그게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고래의 영웅 호걸, 후세에 추앙을 받는 분들은 모두 백성을 위해 공헌한 사람들이요,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사람들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해서 반드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난 일평생 좋은 일은 하나도 안 했단 말이냐?]
[물른 좋은 일도 많이 하셨지요. 남정북벌하셨던 공과야 어떻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성격이 강직해서 하고 싶은 말은 거리낌없이 다 했다. 칭기즈 칸의 일생은 자부와 자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죽을 몸이란 생각에 곽정의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반박하지 않았다. 과거를 생각하며 망연자실하다가 그는 울컥 피를 토했다. 곽정은 놀라 그를 부축했다. 일순 자기의 말이 지나쳤나 후회했다.
[대칸, 이제 그만 돌아가 쉬시지요. 제가 너무 외람된 말씀을 많이 드렸나 봅니다. 용서해 주세요.]
칭기즈 칸이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내 좌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너같이 대담한 사람은 없었다. 너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구나. 자 이제 이만 돌아가자. 내 일생 동안 천하를 종횡하며 무수한 나라를 멸망시켰지만 네 말대로 한다면 영웅이 아니란 말이렷다.]
말엉덩이에 채찍을 휘두르며 두 사람은 장막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칭기즈 칸은 금빛 찬란한 장막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칸의 자리는 오고타이가 물려받았다. 임종할 무렵, 대칸은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영웅, 영웅이라.....]
마치 곽정이 한 말을 되씹는 듯했다.
곽정과 황용은 대칸의 장례식을 마치고 그 길로 남행길에 나섰다. 노상에는 백골이 허무하게 흩어져 있고 그 위에는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장래를 축복하는 바요, 천하 백성의 안거낙업(安居樂業)을 빌 따름이었다.
<제l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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