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4 김용(金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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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英雄門 第 1 部 蒙古의 별 第 四 卷
저자 : 김 용
역자 : 김일강
발행 : (주)고려원
1993년 11월 20일 2판 1쇄 발행본
타자,편집 : Zazeung
第 四十四 章. 격전 뒤에 술잔을
곽정은 나무에서 뛰어내려 높은 바위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다가 욕을 퍼부으며 그대로 내달렸다. 그 바람에 황용도 깨어 일어나 뒤쫓아가며 물었다.
[곽정 오빠,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저 고약한 놈들이 우리가 만든 뗏목에 오르고 있어!]
그 말을 듣고 황용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바닷가에 다다르자 이미 구양봉은 조카를 안아 뗏목에 태우고 돛을 높이 매단 채 벌써 수장 밖에 나가 있었다. 곽정이 화가 나서 물 속으로 뛰어들려는데 황용이 그의 옷소매를 잡고 말렸다.
[이젠 틀렸어요. 쫓아가 봐야 소용없어요.]
구양봉이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네들 뗏목 정말 고마우이.]
곽정은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다가 옆에 있는 자단수(紫檀樹)를 힘껏 걷어찼다. 그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황용은 문득 꾀가 하나 생각났다.
[됐어요. 됐어!]
황용은 큰 돌을 하나 주워 들고는 바다를 향해 뻗은 자단수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힘껏 잡아당겨요. 대포를 쏘는 거예요!]
곽정이 나뭇가지를 뒤로 힘껏 제쳤다. 자단수 가지는 질기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에 휘청 뒤로 구부러졌다. 휘어진 가지에 돌을 매달고 손을 떼자 쉭 하는 소리와 함께 그 큰 돌이 바다 쪽으로 날아가 뗏목 가까이에 떨어지며 사방에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아이고 아까워라!]
황용은 다시 돌 포탄을 장전했다. 이번에는 조준이 꽤나 정확했던지 뗏목을 정통으로 맞혔다. 그러나 뗏목이 워낙 튼튼하여 돌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자 황용은 또 엉뚱한 생각을 해냈다.
[오빠, 빨리 돌 대신에 나를 쏘아 올려 줘요.]
곽정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황용의 헤엄 솜씨와 경신술을 믿었기에 즉시 자기 비수를 뽑아 황용의 손에 쥐여 주었다.
[조심해!]
곽정은 있는 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뒤로 제쳤다. 황용이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소리쳤다.
[자, 손을 놓으세요!]
곽정이 손을 놓자 황용은 포탄처럼 공중을 날아 물구나무를 서며 뗏목 부근에 가볍게 떨어졌다. 물 한 방울 튀지 않는 절묘한 묘기였다. 구양 숙질은 놀라 입을 벌리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황용은 물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뗏목 밑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처음에는 비수로 뗏목을 묶은 끈을 다 잘라 버릴 속셈이었지만, 그냥 몇 군데 중요한 부분만 살짝살짝 건드려놓았다. 이제 뗏목은 망망대해로 홀러가서야 낱낱이 동강나 버릴 것이었다.
그녀는 군데군데 줄을 잘라 놓고는 다시 잠수해 뗏목 밑을 빠져 나와서 눈 깜짝할 사이에 10여 장 밖으로 물러나와 그제야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허푸허푸 수선을 피우며 도저히 쫓아가지 못하겠다는 시늉을 했다. 구양봉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돛을 더욱 높였다. 잠시후 구양봉의 웃음 소리와 함께 뗏목은 멀리 사라져 갔다.
황용이 바닷가로 나왔을 때는 홍칠공도 벌써 그곳에 이르러 곽정과 함께 구양봉의 뗏목을 향해 한바탕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들은 득의만면한 황용의 표정을 보고 까닭을 물어 들은 뒤에 박장대소했다.
[그 못된 자들은 바다 한가운데 수장되겠지만, 우린 또 처음부터 다시 일을 시작해야겠군요.]
황용은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 나서 다시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뗏목은 다 만들어졌고, 동남풍이 불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무껍질을 짜서 만든 돛을 높이 올리고 서쪽을 향해 섬을 떠났다.
[세 사람 다 하마터면 저 무인도에서 죽을 뻔했군요. 이제사 떠나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섭섭하군요.]
[다음에 한가할 때 또 놀러 오자구.]
곽정의 말에 황용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래요. 우리 꼭 다시 와요. 그럼 먼저 이 섬 이름이나 하나 지어주면 어떨까?]
[네가 그 녀석을 큰 바위로 눌러 놓았으니 압귀도(壓鬼島)라고 하는 것이 좋겠구나.]
홍칠공의 말에 황용은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고상한 이름을 붙이고 싶으면서 이 늙은 거지에게 묻긴 왜 물어? 내 생각 같아서는 아무래도 노독물에게 내 오줌을 먹였으니 차라리 식뇨도(食尿島)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황용은 웃으며 연방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오색 구름 한 조각이 때마침 섬 위에 드리우는 모습을 보고는 외쳤다.
[명하도(明霞島)라고 부르겠어요.]
이번에는 홍칠공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안 돼. 그건 너무나 고상해.]
이틀 동안은 순풍이 불고 풍향도 변함이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밤 홍칠공과 황용은 잠이 든 지 오래고 곽정 혼자 일어나 앉아 밤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해상의 바람소리와 파도 소리를 비집고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하는 외침이 들렸다. 마치 쇳조각이 맞부딪치는 듯한 새된 소리는 바람과 파도 소리를 뚫고 또렷이 들려 왔다. 잠을 깬 홍칠공이 일어나 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노독물이로구나.]
황용이 손을 벌벌 떨며 홍칠공의 어깨를 틀어잡았다.
[귀신이에요, 귀신!]
때는 바야흐로 유월 하순, 하늘에는 달도 보이지 않고 별만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깊은 밤 캄캄한 바다 위에서 듣는 비명 소리는 모골이 송연해지고도 남았다.
[노독물이오?]
홍칠공이 소리를 질렀지만 무공이 소실된 터라 그의 소리는 주위에서 맴돌 따름이었다. 곽정이 단전에 기운을 모으고 다시 외쳤다.
[구양아저씨입니까?]
멀리서 구양봉의 대답이 들려 왔다.
[나 구양봉이오. 사람 좀 살려 주오.]
황용은 놀란 가슴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아 쿵쿵거리고 있었다.
[사람이든 귀신이든 상관하지 말고 그냥 가요.]
[저자를 구해야 한다.]
홍칠공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요. 안 돼! 무서워요.]
[귀신이 아니라니까.]
[사람이라도 구해 주면 안 돼요.]
[사람을 구해 주는 일은 우리 개방의 방규(幇規)다. 너나 나 모두 방주의 처지로서 대대로 이어 내려온 방규를 어찌 어길 수 있겠느냐?]
그 말에 황용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뗏목의 노를 저어 소리나는 쪽으로 저어 가는 곽정만 바라보았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바다 위로 머리 두 개가 파도에 실려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머리들 옆에는 큰 나무 하나가 떠 있었다. 뗏목이 부서지자 구양 숙질은 이 나무 기둥을 얼싸안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곽정이 허리를 굽혀 구양공자의 뒷덜미를 잡아 뗏목 위로 끌어올리자 이에 질세라 홍칠공은 자기 무공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도 잊고 구양봉을 구하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의 손에 고스란히 자기 몸의 무게를 실어 뗏목 위로 올라섰다. 그 바람에 홍칠공은 물 속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곽정과 황용이 깜짝 놀라 동시에 물 속으로 뛰어들어 홍칠공을 구해 냈다. 그리고 황용은 구양봉을 힐책했다.
[우리 사부님이 호의로 당신을 구해 주었는데 그래 오히려 그분을 바다에 빠뜨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구양봉도 홍칠공의 무공이 소진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챘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금 전처럼 한 번 잡아당겼다고 해서 물 속으로 빠질 홍칠공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도 며칠 동안 물 속에서 허우적거렸기 때문에 기진맥진하여 항변할 기력조차 없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오, 홍형. 하지만 내 실수를 용서해 주시오.]
구양봉이 이렇게 사과하자 홍칠공이 껄껄 웃었다.
[괜찮소, 괜찮아. 그런데 그만 이 늙은 거지의 본색이 탄로나고 말았구려.]
그들은 모두 옷이 흠뻑 젖었지만 갈아입을 옷도 없고 보니 그냥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아가씨, 뭐 먹을 것 좀 주구려. 며칠 굶었더니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군요.]
구양봉이 애걸을 했다.
[뗏목 위엔 겨우 세 사람 먹을 음식과 마실 물밖에 없어요. 나누어 주는 거야 별문제가 아니지만 우린 도대체 뭘 먹고 지내란 말이에요?]
[사정이 그러하다면 내 조카에게만이라도 먹을 것 좀 주구려. 다리 상처가 너무 심해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라오.]
[정히 그렇다면 우리 흥정해요. 우리 사부님이 당신이 기르는 독사에 물려 아직까지 고생하고 계시니 해약을 주세요.]
구양봉은 품속에서 조그만 병 두 개를 꺼내 황용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가씨도 보다시피 병 속에 물이 들어가 해약이 못쓰게 되었다오.]
황용이 병을 받아 몇 번 흔든 뒤에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역시 그의 말대로 바닷물이 들어가 약은 못쓰게 되었다.
[그럼 해약을 만드는 방법이라도 알려 주세요. 육지에 도착하면 만들어 보게요.]
[내가 음식이나 얻어먹을 생각으로 그 처방을 아무에게나 알려 준다면 어떻게 되겠소?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지도 못할 텐데 말이오. 그러나 나 구양봉은 그런 사람이 아니오. 솔직히 말해 내가 기르던 괴사는 천하 제일의 기물인데다 무섭기 짝이 없는 것이오. 한번 물리는 날에는 제아무리 무공이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팔팔이 육십사, 육십사 일 후에는 반신불수가 되게 마련이오. 해약을 만드는 방법쯤 알려주는 거야 문제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약재를 구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삼 년의 겨울과 여름을 거쳐야만 만들 수 있는 것이라오. 더 말해봐야 소용없으니 여기서 그만두기로 하고, 만약 나더러 홍칠공 대신 죽으라면 죽을 테니 그건 마음대로 하시오.]
황용과 곽정은 이 말을 듣고 내심으로 탄복했다.
(이 사람, 악독하지만 그래도 생사 문제를 놓고는 무학의 대종사다운 체면만은 시종 잃지 않는구나.)
[황용아, 그 사람 말은 거짓이 아니다. 사람이란 누구에게나 운명이 정해져 있는 법이야. 이 늙은 거지도 그까짓 것 안중에도 없단다. 먹을 것이나 주도록 해라.]
홍칠공의 말에 황용은 더욱 가슴이 아팠다. 아무래도 사부님이 좋아지실 것 같지가 않았다. 구양봉에게 구운 양고기 다리 하나를 던져 주었다. 구양봉은 양고기 다리를 찢어 조카에게 주고 자신도 우물우물 씹어먹었다.
[구양아저씨, 우리 사부님에게 부상을 입히셨으니 화산에서 겨룰 이차 논검(論劍)에서는 일등을 하시겠군요.]
황용이 보다못해 아니꼽다는 듯 빈정거렸다.
[꼭 그런 것도 아니오. 아직도 천하에는 홍칠공의 부상을 치료할 약이 있으니 말이오.]
곽정과 황용이 이 말을 듣고 약속이나 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뗏목이 기우뚱거렸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구양봉은 태연자약하게 양고기를 뜯으며 웅얼거렸다.
[구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자네들 사부님도 알고 계신걸.]
두 사람의 눈길이 사부에게 가 멎자 홍칠공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물론 나도 알고는 있다만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꺼내 무얼 하겠니?]
황용이 홍칠공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애원했다.
[사부님, 말씀만 하세요.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 오겠어요. 아버님께 말씀드리면 도와주실 텐데요.]
황용의 말에 구양봉이 흥, 코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왜 코방귀를 뀌고 야단이세요?]
황용이 쏘아붙였지만 구양봉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네가 네 아버지를 무소불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 비웃은 게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건은 아무리 네 아버지라 하더라도 어림없단다.]
[아니,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군데 그러세요?]
[그 사람이 절세의 무공을 지녔다고 해도 아니, 설령 개나 닭을 잡을 힘조차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를 이롭게 하자고 남을 해치는 그따위 짓은 않겠다.]
홍칠공의 말에 황용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절세의 무공이라뇨? 아, 이제 알겠군요. 남제(南帝) 단황야(段皇爺)로군요. 그게 대체 무슨 물건인데 자기를 이롭게 하느라고 남을 해친다는 것인지 말씀해 주세요.]
[더 묻지 말고 잠이나 자거라. 이 일을 다시는 꺼내지 말아라. 알겠느냐?]
황용은 홍칠공의 단호한 말에 더 이상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혹시 구양봉이 먹을 것을 훔치지나 않을까 해서 물통과 음식물 위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황용은 구양 숙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러 날 물에 빠져 있었던 탓인지 두 사람의 얼굴이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신(申)시가 되자 까만 선(線)이 아련히 나타났다. 아무래도 육지 같았다. 곽정이 먼저 발견하고 외쳤다. 밥 한끼 먹을 정도의 시간을 가자 그것이 육지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다행히 바람도 없고 물결도 잔잔하고 햇볕만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순간 구양봉이 벌떡 일어서며 쌍수를 뻗어 곽정과 황용을 틀어잡으면서 동시에 발길로 홍칠공의 혈도를 내찼다.
곽정과 황용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어이없게 맥문을 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반신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입을 모아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러세요?]
구양봉은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흘릴 뿐 대답을 안 했다. 홍칠공은 혈도를 차인 채 뒤로 벌렁 넘어져 옴짝달싹 못하면서도 입만은 움직일 수 있었던지 탄식의 소리를 냈다.
[노독물은 일생 동안 은혜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구나. 우리가 생명을 구해 주었는데도 오히려 우리를 해치려고 하다니. 아! 내가 어쩌다 캄캄한 밤중에 너를 구해 줄 생각을 했더란 말이냐! 순간의 실수로 두 아이의 생명을 잃게 하다니.]
[아니 다행이오. 구음진경이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이 곽가 녀석을 세상에 남겨 무얼 하겠소? 화근이 될 뿐이지.]
홍칠공은 《구음진경》이란 말을 듣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노이칠육(努爾七六) 합과아(哈爪兒) 평도아(平道兒)....]
홍칠공이 《진경》에 있는 몇 마디를 읊조리자 구양봉이 멈칫했다. 곽정이 써 준 경문 가운데 있는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괴상한 글이었던 것이다. 홍칠공이 외우는 말을 듣자 그만은 그 뜻을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문 가운데 있는 그 괴문(怪文)이 전편의 내용을 풀 수 있는 열쇠인지도 몰라. 이 세 사람을 없애 버리고 세상에 그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진경을 가지고 있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뜻이오?]
구양봉이 답답증을 참지 못하고 홍칠공에게 물었다.
[혼화찰찰(混花蔡蔡) 설근허팔토(雪根許八吐) 미이미이(米爾米爾)....]
홍칠공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진경에 나오는 구절을 읊조렸다. 구양봉은 그 말 가운데 더 깊은 내용이 내포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어리둥절해 있었다.
[곽정아 대들어라!]
홍칠공이 외치는 소리에 곽정은 왼손을 뽑는 순간 오른손으로 일장을 날리며 왼발을 번쩍 들어 구양봉을 걷어찼다.
사실 곽정이나 황용이 모두 구양봉의 느닷없는 공격에 맥문을 잡힌 상태라 저항하려야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홍칠공이 이 소리 저 소리 마구 주워대는 바람에 구양봉은 그 꾀에 말려들어 어리둥절해 있다가 그만 곽정의 반격에 걸려든 것이다. 곽정은 《진경》 가운데에 있는 새로운 초수나 권법을 익힌 것은 아니지만 역근단골편(易筋鍛骨篇)의 제2단계 수련을 이미 끝냈기에 어느새 기왕의 공력이 배가되어 있었다. 그래서 팔을 뽑아 치고 차는 그 놀림이 모두 평범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위력만은 대단했던 것이다. 구양봉이 깜짝 놀라 피하려고 했지만 뗏목이 너무 좁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단지 손을 들어 막으며 황용을 거머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곽정은 장풍과 주먹을 번갈아 가며 소나기 퍼붓듯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공격이 허술한 틈을 타 구양봉이 합마공이라도 쓰게 된다면 자기 세 사람은 끝장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공세를 퍼붓는 바람에 구양봉은 손쓸 겨를도 없이 뒤로 밀렸다. 그때 황용이 몸을 비스듬히 돌리며 어깨로 구양봉을 들이받았다. 구양봉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요놈의 계집애, 받겠으면 받으라지. 그러다 제가 오히려 바다에 빠지려고 까불어.)
구양봉은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끙 하고 힘만 더 썼다. 그런데 가슴이 뜨끔 아팠다. 그제야 그녀가 도화도의 보물 연위갑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뗏목의 맨 가장자리에서 있었기 때문에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게다가 연위갑에는 가시가 많아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다.
구양봉은 엉겁결에 황용의 맥문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그녀를 밀어붙였다. 황용이 비틀거리며 바다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 곽정이 달려들어 잡아 주며 왼손은 여전히 구양봉을 향해 진경을 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황용이 비수를 뽑아 들고 구양봉에게 대들었다. 곽정과 황용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구양봉은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뗏목 가장자리에 잘 버티고 서 있었다. 홍칠공과 구양공자는 꼼짝할 수가 없고 보니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이 안타까운 사투를 마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구양봉의 무예는 곽정이 따를 수 없는 경지였다. 그러나 그는 바다에 며칠 동안 빠져 있는 바람에 기진맥진하여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또 황용의 무공이 높다 할 수는 없었지만 연위갑을 입은데다가 비수까지 들고 있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곽정의 항룡십팔장이며, 칩십이로의 공명권, 복사의 보혈,좌우호박, 전진파의 내공 및 근자에 와서 익힌 《구음진경》의 역근단골편 등이 한데 어우러져 뿜어내는 위력은 결코 평범하달 수 없었다.
바야흐로 세 사람은 목숨을 걸고 대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구양봉의 장법은 더 맹렬해졌다. 곽정과 황용이 구양봉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주춤주춤 밀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홍칠공은 초조하다 못해 불안해졌다. 장영이 난무하는 가운데 구양봉의 발이 번쩍 들리는가 했더니 미처 황용이 막지 못하고 뒤로 물구나무를 서며 바다에 풍덩 빠져 버렸다. 곽정 혼자 구양봉과 상대를 하자니 자연 악전고투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용이 뗏목의 왼쪽으로 빠져 들어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솟아 올라오며 비수로 구양봉의 등을 노리며 덤벼들자 구양봉의 공세가 다시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렇듯 혼전을 거듭하면서도 황용은 대책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싸우다가는 우리가 불리할 테니까 수중에서 싸우는 편이 차라리 낫겠구나.)
마침내 황용은 비수를 들어 돛의 동아줄을 잘라 버렸다. 돛이 스르르 내려앉으며 뗏목은 파도를 타고 출렁거릴 뿐 더 이상 나가지를 않았다. 황용은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서 돛을 맸던 동아줄로 홍칠공을 몇 번 감아 묶은 뒤에 다시 그 줄을 뗏목의 가장 튼튼한 나무에 얽어맸다.
황용이 공격에서 한 발 물러나 다른 일을 하느라 왔다갔다하다 보니 자연히 곽정은 수세에 몰려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 절호의 기회를 틈타 구양봉이 계속해서 맹렬한 공격을 펼쳤다. 곽정은 한발 한발 뒤로 밀리면서도 어약어연(魚躍於淵)의 솜씨를 발휘하여 구양봉의 7차,8차의 공격을 막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풍덩 바다에 빠졌다.
뗏목이 기우뚱거리자 황용이 그 기회를 틈타 뛰어올랐다가 다시 물 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곽정과 황용이 널을 뛰듯 번갈아 가며 오르락내리락하자 뗏목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했다. 만약 뗏목이 뒤집히는 날에는 구양공자는 끝장이 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구양봉도 물 속에서는 곽,황 두 사람을 당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홍칠공은 뗏목에 붙들어맸으니 우선 구양봉을 요절내고 난 후에 구출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었다. 구양봉이 그들의 꾀를 알아차리고 다리를 번쩍 들어 홍칠공의 머리를 겨눈 채 소리질렀다.
[네놈들 듣거라. 다시 한 번 뗏목을 흔들면 이 홍칠공을 그냥 요절내고 말 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황용은 또 다른 꾀를 생각해 냈다.
그녀는 즉시 뗏목 밑으로 들어가 비수로 뗏목을 묶은 끈을 자르기 시작했다. 거리를 따져 보아도 구양 숙질을 처치한 후 큰 나무 기둥을 붙잡고 헤엄을 치면 충분히 육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뗏목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두 동강이 나 버렸다. 그 바람에 구양공자 혼자 한쪽 뗏목에 남아 떨어져 나가자, 구양봉은 깜짝 놀라며 손을 뻗어 우선 자기 조카를 자기가 탄 뗏목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물 속을 주시했다. 황용이 다시 대들기만 하면 그대로 잡아 끌어올릴 태세였다.
이런 모습을 황용은 물 속에서 똑똑히 보고 있었다. 한번 걸리기만 하면 큰일날 것 같아 멈칫거리며 물 속에서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쌍방이 서로 노려보며 기회를 엿보는 순간이었다.
격돌의 순간이 지나고 정적이 흘렀다. 햇볕만 따갑게 수면에 내리쬐고 있었다. 그러나 반 토막이 난 뗏목의 위아래에는 일촉즉발의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반 토막 난 뗏목을 다시 한 번만 갈라놓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뒤집힐 텐데.)
황용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구양봉은 구양봉대로 자기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저놈의 계집애, 머리를 내밀기만 하면 그냥 박살을 낼 수 있을 텐데.... 물을 치는 충격 때문에라도 기절할 거야. 저 계집만 제거하고 나면 그까짓 곽가 녀석쯤이야 식은죽 먹기지.)
이렇게 두 사람이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순간 구양공자가 왼쪽을 가리키며 큰소리를 질렀다.
[배다, 배!]
홍칠공과 곽정이 구양공자의 손끝을 따라 바라보니 과연 용두(龍頭)가 달린 큰 배 한 척이 돛을 높이 올린 채 바람을 받으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뒤이어 구양공자는 뱃머리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큰 키에 빨간 가사(袈裟)를 걸친 모습이 꼭 영지상인(靈智上人) 같았다. 좀 시간이 지나 자세히 살펴보니 영지상인이 틀림없었다. 구양공자가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자기 숙부에게 알려 주자 구양봉은 단전에 기운을 모으고 외쳤다.
[친한 친구가 여기에 있으니 이쪽으로 오시오!]
황용은 물 속에 있어서 미처 이 사실을 몰랐다. 곽정은 일이 까다롭게 된 것을 눈치채고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 황용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다른 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황용이 손짓을 하여 곽정에게 구양봉의 장력을 받아 주면 그 틈을 이용해 자기는 뗏목을 맨 줄을 끊겠다는 시늉을 했다. 곽정은 자기의 공력을 가지고는 구양봉을 당해 내기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 급하고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양 어깨에 온 힘을 모은 채 수면 위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그 순간 구양봉이 기합 소리와 함께 쌍장으로 수면을 쪼갰다. 곽정 역시 쌍장으로 맞섰다. 물위에는 물 한 방울 튀어 오르지 않았지만 물밑으로는 두 가닥 강한 힘이 맞부딪쳤다. 그 충격을 받아 반 동강 난 뗏목이 번쩍 들리는 순간 황용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붙들어맨 줄을 끊어 버렸다. 이때 큰 배는 벌써 10여 장 밖에 와 있었다.
황용은 줄을 끊은 후 즉시 잠수해 들어가 다시 구양봉을 찌를 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곽정이 수족을 쓰지 못하고 점점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놀랍기도 하거니와 후회 또한 막급했다. 황용은 급히 곽정 쪽으로 헤엄쳐 달려가 그의 어깨를 잡고 수장 밖으로 벗어나 물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곽정은 얼굴이 백짓장처럼 변해 정신을 잃었는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 무렵 큰 배는 벌써 구명용 작은 배를 내려놓고 뗏목 옆으로 다가와 구양 숙질과 홍칠공을 모두 큰 배로 데려갔다. 황용이 연거푸 세 번이나 <곽정 오빠!>를 불러 보아도 곽정은 깨어날 줄 몰랐다. 황용은 그 배가 적선이라고는 하지만 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곽정의 뒷머리를 받쳐들고 마주 오고 있는 작은 배를 향해 헤엄쳐 갔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공이 곽정을 끌어올리고 다시 황용을 잡아 주려고 하자 그녀는 비어(飛魚)처럼 사뿐히 날아올라 배 안에 내려섰다. 사공들은 어안이 벙벙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전 물을 사이에 두고 장력으로 맞섰던 곽정은 그 진동에 의해 정신을 잃었었다.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황용의 품에 안겨 작은 배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보고는 내상을 입지 않은 것을 알고 황용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황용도 환한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그제야 놀라움과 근심이 눈녹듯 사라지며 큰 배에 도대체 어떤 인물들이 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황용은 고개를 들어 그쪽을 흘끗 바라보고는 깜짝 놀랐다. 가슴이 두근거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뱃머리에 서 있는 7,8명의 사람들은 바로 몇 달 전 대금의 중도 조왕부에서 만났던 무림의 고수들이 아닌가? 작은 키에 짧은 다리, 안광이 번들거리는 사람은 천수인도(干手人屠) 팽련호(彭連虎)요, 머리가 반들반들한 사람은 귀문용왕(鬼門龍王) 사통천(沙通天)이고, 그 밖에 이마에 혹 세 개가 달린 삼두교(三頭蛟) 후통해(候通海), 백발이 성성한 동안의 삼선노괴(參仙老怪) 양자옹(梁子翁), 빨간 가사를 걸친 장승(藏僧) 대수인(大手印) 영지상인이 있었으며 나머지 몇 명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곽정 오빠나 내 팔자도 어지간히 기구하구나. 올 봄에도 저자들과 어우러져 한바탕 곤욕을 치렀는데 또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팽련호 등과 1대 1로 겨룬다면 나야 어렵겠지만 곽정 오빠는 그런대로 이길 수 있을 텐데.... 노독물이 옆에 있고 또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으니 헤어나기가 어렵겠구나!)
배 위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구양봉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또다시 곽정 등이 나타나자 더욱 괴이쩍게 생각했다. 구양봉은 조카를 안고, 곽정과 황용은 홍칠공을 안은 채 각자 큰 배로 올라섰다. 그런데 그중 비단으로 수놓은 도포를 입은 한 사람이 그들을 보기 위해 중창(中艙)에서 나타났다. 그와 곽정은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 깜짝 놀랐다. 준수한 얼굴에 턱수염이 살짝 난 그 사람은 다름아니라 대금국의 육왕야인 조왕 완안열이었던 것이다.
그는 보응 유씨의 사당에서 달아난 후 곽정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뒤쫓을까 두려워 북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팽련호, 사통천 등과 함께 남하하여 악무목(岳武穆)의 유서를 훔치기로 했던 것이다.
이때 몽고군은 금나라를 토벌하기 위하여 대거 출병하여 중도를 몇 달째 포위하고 있었고 연운(燕雪) 16주도 이미 몽고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대금국은 한마디로 쇠퇴일로에 있었다. 완안열은 두렵기 그지없었다. 그가 보기에 몽고병은 표독하고 포악하고 날랬다. 금나라 병사의 수가 10배를 넘는다 해도 접전만 했다 하면 괴멸되고 말았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부국의 의지를 모두 악무목의 유서에만 기탁했다.
이 병서만 입수하는 날에는 용병여신(用兵如神)이요, 전무불승(戰無不勝)에 공무불극(攻無不克)일 것만 같았다. 당년의 악비처럼 그때는 몽고병이 제아무리 날래고 용맹스럽다 하더라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행을 하면서도 종적만은 극비에 부치며 혹시라도 남조(南朝)에서 미리 알게 되면 방비를 할까 염려해서 배를 타고 해로를 택했다. 귀신도 모르게 절강의 연해에 도착하여 임안부로 들어가 몽매에도 그리는 유서를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물론 구양공자를 찾아보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어떤 고수를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기다려도 소식조차 들을 길 없어 할 수 없이 그냥 떠났던 것인데 오늘 곽정과 함께 자기 배에 오른 깃이다. 놀랍고도 반가운 일이었다.
곽정은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를 보자 불같이 화가 치밀어 노려보고 서 있었다. 황용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벌써 누군가가 선창으로 총총 나오다가 그들을 발견하고 슬그머니 다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뒷모습만 보아도 그자가 양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양공자가 먼저 완안열을 자기 숙부에게 소개했다.
[숙부님, 이분이 바로 어진 사람 찾기를 가뭄에 비 기다리듯 하시는 대금국의 육왕야이십니다.]
완안열은 구양봉이 무림에서 얼마나 명성이 자자한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구양공자의 체면을 봐서 반가운 체했다. 그러나 팽련호나 사통천 등은 이 밀을 듣자마자 허리를 깊이 굽히며 공손히 인사했다.
[오래 전부터 구양선생께서는 무림의 태두이심을 알고 흠모해 왔었는데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이 영광 뭐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구양봉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대수인 영지상인은 평소 서장에만 있었기 때문에 서독의 명성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두 손만 마주잡고 선 채 묵묵히 있었다. 완안열은 영리한 사람이라 사통천 등 평소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 구양봉 앞에서 쩔쩔매는 꼴을 보고야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시 반갑게 인사를 했다.
큰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삼선노괴 양자옹만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필생의 일로 여기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복사의 보혈을 마신 곽정이 다시 나타났으니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평소 제일 두려워하던 홍칠공이 옆에 버티고 있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다만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앞으로 나서서 부복했다.
[불초 소생 양자옹 홍방주께 인사드리나이다. 그간 무고히 지내셨습니까?]
이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서독 북개의 위명은 이미 오래 전부터 들어 왔지만 만나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두 거물이 모두 자기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나서며 절을 하려고 하자 홍칠공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늙은 거지 재수가 없어 미친개에게 물려 죽을 뻔했는데 절은 해서 뭘 하오? 그보다 어서 먹을 거나 좀 주는 것이 더 좋겠소!]
사람들은 홍칠공의 엉뚱한 너스레에 적이 당황하여 흘금흘금 구양봉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구양봉은 이들 세 명을 해칠 흉계를 꾸며 놓고 있었다. 우선 홍칠공부터 제거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래야만 자기 본색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곽정은 먼저 경문 가운데 애매한 부분을 물어 알아낸 후에 처치해야 한다. 황용도 자기 조카가 지극히 사랑하는 여자이기는 하지만 남겨 둬 봐야 화근거리니 처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황용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만약 황약사가 알게 되는 날이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해치우는 것이 상책이었다. 일단 세 사람이 배에 오른 이상 달아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듯 흉계를 가슴에 품고도 구양봉은 태연자약하게 완안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세 사람 모두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입니다. 무공은 그런대로 쓸 만한 편이니 우선 조왕께서 사람을 시켜 잘 지켜 보도록 하십시오.]
양자옹이 이 말을 듣고 반가워 제일 먼저 나서며 곽정의 팔을 잡자 곽정은 팔을 홱 뒤집으며 양자옹을 쳐버렸다. 양자옹은 어깨를 얻어맞고 비틀비틀 뒤로 두어 발짝 물러섰다. 곽정의 견룡재전(見龍在田)의 솜씨는 빠르기가 전광석화였고 예리하기가 비수 끝 같았다.
팽련호 등이 겉으로는 양자옹과 친한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앙숙이었다. 그들은 양자옹이 비틀거리는 모습을 고소해 하며 뒤로 훌쩍 물러서서 자리를 넓혀 주었다. 우선 홍칠공 등 세 사람이 달려들어 양자옹을 해치우는 것을 보고 나서 다시 자기들의 무공을 자랑해 보일 심산이었다.
양자옹은 방금 곽정을 잡을 때도 그의 항룡유회(亢龍有侮)에 각별히 주의했었다. 그런데 한 달여 못 보던 사이에 벌써 항룡십팔장을 완전히 배운 모양이었다. 그래 한 번의 반격에 피해 보지도 못하고 얻어맞았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양자옹은 곽정이 계속해서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고 즉시 왼발을 찍으며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 쌍장을 날리며 그의 평생의 절학인 요동야호권법(遼東野狐拳法)을 썼다. 곽정을 이 자리에서 요절을 내야 방금의 수모를 씻을 수 있는 것이요, 지난날 뱀의 보혈을 빼앗긴 데 대한 원수도 갚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요동야호권은 요동파 무공의 일절(一絶)이다. 양자옹이 장백산을 오르내리며 산삼을 캘 때 늑대나 여우를 맞닥뜨리면 쓰던 재주였다.이 권법은 영(靈),섬(閃),박(撲),질(跌) 네 자가 요결인데 자기보다 강한 적을 상대할 때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우선 적이 자기의 전진 후퇴나 좌우 이동에 장애를 주지 않거니와 그러다 기회만 포착하면 진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유승무패(有勝無敗)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일생 동안 홍칠공에게 곤욕을 당한 것을 제외하면 실패라곤 해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 권법도 별로 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곽정에게 일 장을 맞고 보니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슬쩍 피하는 체하다가 돌격 자세를 취하고 덤벼든 것이다.
곽정도 이런 권법으로 공격받기는 처음이었다.
(용아의 낙영장에도 허초가 많다지만 그래도 오허일실이나 팔허일실인데 이 노인의 공격은 진부 허초뿐이니 도대체 무얼 어쩌자는 것인가?)
곽정은 이런 생각을 하며 홍칠공이 지난날 지적해 준 대로 적의 초술이 변하는 데 개의치 않고 오직 항룡십팔장의 장법에 의지해서만 움직였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광경을 바라보던 여러 고수들은 어느덧 머리를 절레절레 내흔들었다.
(양노괴가 그래도 일파의 종사인데 저 어린것을 당해 내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다니 어찌된 일인가?)
다시 몇 초를 더 겨루는 사이에 곽정의 장력에 밀린 양자옹은 자칫 바다에 빠질 듯 수세에 몰렸다. 양자옹은 이 야호권으로는 이길 승산이 없게 되자 다른 권법으로 바꿀 태세를 취했지만 곽정의 장력에 눌려 미처 손을 바꿀 겨를이 없었다. 장풍 소리가 쉭쉭 공기를 가르는 가운데 홍칠공의 외침이 들렸다.
[내려가지!]
곽정이 시승육룡(時乘六龍)의 솜씨를 발휘하면서 왼쪽 어깨를 낮추며 내려치자 양자옹은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비틀비틀 몸을 가누지 못하더니 그만 뱃전 밖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구양봉을 제외한 다른 고수들은 곽정의 솜씨를 눈여겨볼 염도 못 내고 그저 놀란 나머지 우르르 양자옹이 떨어진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바다 위에서 너털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양자옹의 몸이 붕 떠올라 갑판 위에 뚝 떨어지며 쭉 뻗어 다시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바닷물에 퉁겨 다시 솟아올랐단 말인가? 그들이 다투어 뱃전으로 달려가 허리를 굽히고 보니 한 노인이 흰 수염과 백발을 날리며 수면 위를 이리 닫고 지리 닫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속도가 보통 빠른 것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비비고 보니 그 노인은 큰 상어를 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육지에서 말을 타고 자기 마음대로 달리는 것과 같았다. 곽정은 놀랍고도 반가워 소리쳤다.
[주백통 형님, 저 여기 있어요!]
상어를 타고 있던 그 노인은 바로 노완동 주백통이었던 것이다.
그는 곽정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띌 듯이 반가워하면서 상어의 왼쪽 눈 가장자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쳤다. 그러자 상어가 즉시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배 옆으로 다가갔다.
[곽정 아우로군. 잘 지냈나? 앞에 큰 고래 한 마리가 있어. 온종일 그놈을 쫓고 있는 중인데 계속 쫓아가 봐야겠어. 다음에 또 만나세.]
[형님, 빨리 이 배 위로 올라오세요. 저는 지금 못된 사람들에게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에요.]
[뭐라구? 어느 놈이 감히 그런단 말이냐?]
주백통이 화를 벌컥 내며 상어 입에 물린 뭔가를 잡아당기자 상어가 공중으로 날아 사람들 머리 위를 스칠 듯 갑판 위로 떨어져 내려왔다.
[누가 감히 내 아우를 괴롭히느냐?]
주백통의 호통 소리에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누구 하나 산전수전 겪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지만 주백통의 기괴한 행장은 평생 듣도보도 못했던 것이다. 주백통은 황용을 발견하고는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가씨까지 여기 계셨군.]
[그래요. 빨리 상이 타는 법이나 알려 주세요!]
[그게 뭐그리 급한 일인가?]
주백통은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구양봉에게 가 멎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 아우를 괴롭힐 리가 없을 테고 음...., 그래 바로 당신이 그랬구먼.]
[사람이 한번 말을 했으면 신용을 지켜야지, 그냥 어물어물 넘어가려다간 천하 호인들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아요.]
구양봉이 냉랭하게 쏴 붙였다.
[그렇소, 내 그렇지 않아도 당신과 한번 따져 보려고 하던 참인데 차라리 잘됐소. 홍칠공 당신이 일어나 공평하게 말해 보시오.]
홍칠공은 여전히 갑판에 누운 채 웃기만 했다. 그러자 황용이 입을 열었다.
[노독물이 곤경에 빠진 걸 우리 사부님께서 구해 주셨는데 적반하장 격으로 우리 사부님을 해치고 혈도를 눌러 버렸어요.]
주백통이 허리를 굽히고 홍칠공의 곡지혈(曲池穴)과 용천혈(涌泉穴)을 두어 번 문질러 보았다. 원래 구양봉의 점혈 수단은 악랄하기로 소문나 있어 자신과 황약사 두 사람 외에는 풀 수 없는 것이었다.
[노완동, 재주 있거든 그의 혈도를 풀어 주구려.]
황용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알고 있는 점혈이란 별것이 아니었다.
[뭐 그리 신기하다고 야단이세요? 우리 아버지는 힘 안 들이고도 투골타혈법(透骨打穴法)으로 푸시는데....]
황용은 입을 비쭉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구양봉은 그녀가 타혈법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과연 부전자전이라더니 계집애가 정말 보통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주백통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내기를 하고도 어찌 그리 방귀 뀌는 소리만 하오?]
[아니, 방귀 뀌는 소리라니, 그 무슨 고약한 소리요? 그래 우리가 무슨 내기를 했단 말이오?]
[여기 곽정과 황용을 빼놓고는 모두가 유명한 영웅호걸인데 어디 그들의 이야기나 한번 들어봅시다.]
이 말을 듣고 팽련호가 나섰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우선 어디 말씀부터 해보시지요.]
[이분은 전진파의 주백통입니다. 강호에서는 모두들 노완동이라 부르지요. 구처기나 왕처일 등 그들 전진칠자의 사숙이오.]
구양봉이 우선 주백통을 소개했다.
원래 주백통은 15여 년 동안 도화도에 감금되어 있은데다 그전에는 무예가 대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강호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 모인 사람들도 그를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전진칠자의 사숙이라는 말을 듣고는 보통 인물이 아니겠구나 싶어서 자기들끼리 몇 마디 귀엣말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러나 팽련호만은 팔월 중추절에 가흥의 연우루에서 전진칠자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주백통이란 자가 만약 거기에 나타난다면 곤란할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이 주형이 바다에서 상어 떼에 걸려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제가 구해 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상어 떼쯤은 일격에 다 없앨 수 있다고 장담했지요. 허나 주형이 믿지 않아 우린 서로 내기를 했습니다. 주형, 내 말이 틀립니까?]
주백통이 구양봉이 하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도 틀림이 없는 이야기요. 무슨 내기를 했는지 그것까지 말씀을 하시오.]
[그럽시다. 내가 지면 주형이 시키는 일 아무거라도 다 하고, 만약 하지 않으면 바다에 뛰어들어 고기밥이 되기로 했고, 주형이 지면 역시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주백통이 계속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단 말이오?]
[아니, 어떻다니? 그때 당신이 지지 않았소?]
이번에는 주백통이 살래살래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틀린 말이오. 진 편은 내가 아니라 당신 쪽이오.]
[아니, 사내대장부가 무슨 일구이언을 그렇게 하오? 내가 만약 졌다면, 그래 무엇 때문에 당신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겠소?]
구양봉이 화가 나서 쏴붙이자 주백통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요. 원래 나도 이 노완동이 재수가 없어 진 줄 알았는데 해상에서 공교로운 일을 당하게 돼 그제야 내가 이긴 줄을 알았다오.]
[공교로운 일이라뇨?]
구양봉과 홍칠공, 황용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주백통이 허리를 굽히고 왼손으로 상어의 입에 물려 있던 나무토막을 잡아 상어째 끌어올렸다.
[내가 바로 이놈을 타게 되었단 말이오. 이걸 좀 보시오. 이게 바로 당신의 조카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그놈이란 말이오.]
그날 구양공자가 독계(毒計)를 쓸 때 나무로 상어의 입을 버텨 놓아 굶어 죽게 만들어 놓았던 일은 구양봉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지금 이 큰 상어의 모양을 보나, 입 언저리에 찍힌 낚시를 물었던 상처를 보나 분명 그놈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게 어떻단 말이오?]
그래도 구양봉이 반박하자 주백통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진 것이란 말이오. 우리가 내기를 한 것은 상어떼를 있는 대로 몰살시킨다는 것 아니었소? 그러나 이놈은 당신 조카 덕으로 죽은 상어를 먹을 수가 없었소. 그래 이놈 한 마리가 살아 남았으니 이 노완동이 이긴 게 아니고 뭐요?]
그러고는 껄껄 웃어 젖혔다. 구양봉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맛만 쩝쩝 다셨다.
[그래 그 동안 형님은 어디에 가 계셨습니까? 정말 뵙고 싶었어요.]
곽정이 반가움에 겨워 불쑥 끼여들자 주백통이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난 정말 재미있게 놀았는걸. 나는 바닷속에 뛰어들어 얼마 안 있다가 이놈을 만났지. 수면 위로 떠올라 몹시도 괴로운 모양이었어. 너나 나나 동병상련이로구나 했지. 그래 이놈 등에 올라탔더니 그냥 물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나도 숨을 죽인 채 죽자꾸나 이놈의 목을 두 손으로 끌어안고 두 발로 사정없이 배를 찼다네. 가까스로 수면 위로 떠올라 두어 번 숨을 쉬었을까, 다시 또 물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거야.한 반나절 이렇게 씨름을 하다 보니 제놈도 별수 없었던지 결국은 고분고분 말을 듣기 시작하더군. 동으로 가라고 하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라면 서로 가더란 말일세.]
그러는 사이에 주백통은 연신 상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몹시 흐뭇한 모양이다. 거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그 얘기를 가장 흥미진진하게 듣는 사람은 황용이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저도 바다에서 여러 해 놀았는데 어쩌면 그런 재미있는 일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정말 바보야.]
[이놈 이빨 좀 봐요. 나무로 입을 버텨 놓았으니 망정이지 감히 탈 생각이나 하겠어요?]
[고래, 그 동안 줄곧 이놈을 타고 돌아다니셨나요?]
[물론이지, 고기 잡는 재주도 아주 훌륭했다니까. 물고기만 나타나면 이놈이 뒤를 쫓고 난 주먹으로 이렇게 한 번 치기만 하면 물고기는 뻗어 넘어졌으니까. 거의 다 이놈이 먹어 치우기는 했지만 말야.]
황용이 상어의 배를 어루만지며 계속해서 물었다.
[고기를 이 상어의 뱃속에 밀어 넣으셨나요? 씹을 수 없었을 텐데 그냥 삼키던가요?]
[아 그야 물론이지. 한번은 말이야....]
황용과 주백통이 흥에 겨워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왁자하게 주고받는 말을 흘려 들으면서 구양봉은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하기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윽고 주백통이 구양봉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보 노독물, 승복할 거요? 안 할 거요?]
구양봉은 먼저 자기가 한 말이 있고 보니 여러 사람 앞에서 그렇지 않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졌다면 그래 어떻게 하겠다고 야단이오, 야단이!]
[음, 무슨 일을 시키면 좋을까? 어디 한번 생각 좀 해보자. 옳지, 그렇게 하면 되겠군. 방금 나에게 방귀 뀌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디 한번 방귀나 뀌어 보시지 그래.]
주백통이 구양봉을 보고 방귀나 뀌라고 하는 말을 듣고 황용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사람들 같으면 누가 해보란다고 아무 때나 뀔 수 있는 방귀도 아니다. 그러나 내공을 익힌 사람들은 평생 연습한 것이 호흡의 조절이요, 운기의 묘기다. 그래서 그 정도 일은 식은죽 먹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간교한 구양봉이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가볍게 방귀나 뀌고 어물어물 넘어가지나 않을까 해서 자기가 나섰다.
[안 돼요 안 돼. 우선 우리 사부님의 혈도나 풀어놓고 다음 얘기를 꺼내요.]
주백통이 웃었다.
[여보, 양갓집 규수가 당신의 구린 방귀를 싫어하나 보군. 그럼 그만둡시다. 나 또한 어려운 일을 당신에게 시켜 애먹일 생각은 없으니까, 홍칠공의 상처나 빨리 치료해 주구려. 홍칠공의 재주가 당신보다는 월등한데 당신이 무슨 흉계를 썼기에...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부상당할 사람이 아니잖소? 우선 상처나 치료한 뒤에 당신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정정당당하게 대결한다면 이 노완동은 즐거운 마음으로 증인을 서 주리다.]
구양봉은 홍칠공의 상처가 치료할 수 없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았다. 뒤에 그가 복수를 하러 찾아올 능력도 없을 게 뻔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주백통이 무슨 어렵고 곤란한 일을 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보는 가운데 방귀를 뀌기도 거북한 일이요, 그렇다고 안 뀌자니 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래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숙이고 홍칠공의 혈도를 풀었다. 황용과 곽정이 홍칠공을 부축해 거들어 주었다.
주백통이 갑판 위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휘둘러보았다.
[나는 일생 금나라 사람들이 양고기를 먹고 누린내를 풍기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니, 여보 구양봉, 당신이 저 작은 거룻배나 한척 내려 주오. 우리 네 사람이 타고 갈 수 있도록 말이오.]
구양봉은 주백통과 황약사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 사람의 무공이 괴이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사람과 싸움이 벌어진다면 아무래도 자기가 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당장은 모든 것을 참기로 마음먹었다. 장차 《구음진경》에 나오는 무공을 다 익힌 후에 다시 결판을 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만은 내기에서 졌다는 구실로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기로 작정을 했다.
[좋소, 당신이 재주가 좋아 내기에 이겼으니 시키는 대로 따르리다.]
구양봉은 선선히 응낙하고는 완안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왕야, 거룻배를 내려 이 네 사람이 육지에 오르도록 해주십시오.]
완안열은 잠시 머뭇거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저들을 육지로 올려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저들이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았으니 혹시 무슨 눈치나 채지 않을까?)
영지상인은 옆에서 방관하면서도 구양봉의 거드름피우는 태도가 심히 못마땅했다. 뿐만 아니라 평생 상대해 볼 만한 강적을 만나지 못해 늘 유감이었는데 구양봉의 무공이 제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여기 모인 고수들이야 당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완안열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만약 장소가 뗏목 위라면 그야 구양선생 마음대로 하실 일이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나서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왕야의 분부에 따르셔야 합니다.]
영지상인의 말이 떨어지자 다른 사람들은 고소하다는 듯 구양봉의 표정을 살폈다. 구양봉이 영지상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스님께서 감히 제가 하려는 일을 막으실 생각이십니까?]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소승은 서장에 있으면서 모자라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구양선생의 명성을 들었는데 제가 무슨 까닭으로 구양선생과 시비를 가리겠습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양봉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왼손을 번쩍 들고 오른손으로 영지상인의 장대한 체구를 거꾸로 들어올렸다. 그 솜씨가 어찌나 재빨랐던지 다른 사람들은 구양봉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똑똑히 보지도 못했다. 영지상인의 키는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큰 편이라 머리 하나는 더 있는 폭이었다. 구양봉은 그의 뒷덜미에 불끈 튀어나온 근육을 움켜쥐고 있었다. 만약 위로 들어올렸다면 그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텐데, 구양봉이 오른손을 반 바퀴 돌려 거꾸로 잡았기 때문에 머리가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렸다. 영지상인은 공중에서 발을 허우적거리며 연신 욕설을 퍼부어 댔다.
그날 영지상인이 조왕부에서 왕처일과 대결하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의 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 구양봉에게 잡히고 나서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린 것이, 어디가 부러졌는지 맥을 못 추었다.
구양봉은 여전히 두 눈을 하늘로 향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당신이 오늘 처음 내 이름을 들었기 때문에 깔볼 수 있다, 이거지?]
영지상인은 놀랍고도 분했다. 몇 차례나 벗어나려고 몸을 버둥거려 보았지만 구양봉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팽련호 등도 구양봉의 위세에 눌려 감히 대들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업신여기는 거야 왕야의 체면을 보아 참겠지만, 당신이 노완동이나 구지신개 홍칠공을 머무르게 하려는데 이따위 재주를 가지고 어떻게 그들과 어울린단 말이오? 여보 노완동, 이거나 받으시오.]
구양봉이 팔을 움츠렸다 휘두르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장심을 힘껏 뻗자 영지상인이 붉은 솜뭉치처럼 갑판의 왼쪽에서 오른쪽 끝으로 날아갔다. 영지상인은 구양봉의 장력을 벗어나 팔다리가 자유스러워지자 자세를 바로잡아 우뚝 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목 뒤 근육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왼손 손바닥의 대수인(大手印)으로 치려고 했다. 그런데 팔에 쥐가 나는 듯 뻣뻣해지면서 축 늘어지고 몸이 다시 허공에 떴다. 어느새 주백통이 그를 거꾸로 추켜든 것이다.
완안열은 그의 낭패한 꼴을 보며 구양봉은 고사하고 주백통 한 사람도 자기 수하 사람들이 당해 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자 주선생, 그만 해 두세요. 제가 배를 내어 네 분을 육지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좋지요. 자 어디 한번 받아 보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주백통은 구양봉이 한 대로 장심으로 기운을 몰아 뚱뚱한 영지상인을 완안열에게 냅다 집어 던졌다. 완안열이 무예를 안다고는 하지만 칼이나 창, 활을 쓸 수 있을 뿐인데 주백통이 집어던진 영지상인을 받으려 달려들었다간 오히려 부상을 입거나 자칫 죽을 수도 있었다. 사통천이 사세가 불리함을 보고는 이보환형(移步換形)의 재주를 부려 완안열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영지상인을 그대로 받다가는 자기가 다치거나 아니면 영지상인이 다칠 판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구양봉과 주백통이 한 대로 영지상인의 뒷덜미를 잡고 땅에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공이란 원래 한치의 착오라도 있으면 큰일나는 법이다. 그러나 구양봉과 주백통이 잡아 던지는 것을 보니 전연 힘이 드는 것 같지 않았다. 사통천은 영지상인의 장력이 무섭다는 것은 알았지만 허공에서 자세를 바꾸는 기술은 평범하려니 했다. 우선 충격을 피한 뒤에 그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자기 손이 영지상인의 뒷덜미에 가 닿자마자 불같이 뜨거운 기운이 위로 확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냥 막지 않다가는 그대로 오른팔이 부러질 것 같았다. 위급한 나머지 오른손을 뿌리며 왼손으로 파갑추(破甲錐) 재주를 부려 내리쳤다.
그런데 영지상인은 주백통과 구양봉이 계속 자기를 공깃돌 가지고 놀 듯하는 바람에 뜨거운 피가 거꾸로 몰려 어질어질했다. 그러다 주백통이 또 받으라고 하며 던지는 바람에 이번에 받는 사람도 틀림없는 적이라고 생각하고 허공에서 기운을 차리고 있다가 사통천의 손이 목덜미에 와 닿자마자 대수인으로 공격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피차에 상대방의 공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사통천이 서 있었기 때문에 유리하기는 했지만 영지상인은 미리부터 준비를 하고 있다가 공격한 것이다. 퍽 소리와 함께 사통천은 뒤로 비틀비틀하다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고 영지상인이 벌떡 일어나 보니 방금 자기를 때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사통천이 아닌가.
[아니, 저 쥐새끼 같은 놈까지 나를 치다니?]
영지상인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를 덮쳤다. 그러자 팽련호가 오해를 풀어 주려고 중간에 끼여들었다.
[대사님 화내지 마시오. 사형은 호의로 그런 것이오.]
이들 세 사람이 서로 콩이야 팔이야 하는 사이에 큰 배에서는 벌써 거룻배를 내려놓고 있었다. 주백통이 상어 입에 물린 나무를 추켜들고 밖을 향해 휘두르자 그 큰 상어가 반공을 날았다. 그가 손을 휘두를 때 벌써 장력을 이용해 나무토막을 분질러 놓았기 때문에 상어는 입안이 시원해지자 유유히 물 속으로 사라졌다.
[곽정 오빠, 우리도 이 다음에 주선생님처럼 상어를 타고 놀아요.]
황용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곽정에게 말했다.
완안열은 주백통 등 네 사람이 거룻배를 타고 가 버리자, 구양봉 같은 실력자만 나서 준다면 책을 훔치는 일은 여반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영지상인 등의 손을 잡고 구양봉에게 다가갔다.
[알고 보면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제 체면을 보아 한바탕 장난을 했거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듣고 구양봉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영지상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금나법이나 배웠다고, 내가 미리 방비하지 않고 있는 틈을 타 습격을 했기에 망정이지, 아무러면 수십 년 동안 수련을 거듭해 익힌 대수인 장력을 당해 낼 수 있단 말이냐?)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영지상인은 뒤틀리는 심사를 내색하지 않고 자기도 손을 내밀어 구양봉의 손을 틀어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채 힘을 쓰기도 전에 손끝이 화끈거렸다. 구양봉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껄껄 웃기만 했다. 영지상인도 자기 손을 내려다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 사람, 사술(邪術)을 부릴 줄 아는구나!)
구양봉은 양자옹이 아직도 갑판에 누워 꼼짝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가 살펴보았다. 곽정에게 얻어맞고 또 공교롭게도 주백통이 받아 던질 때 이미 그의 혈도를 눌러 놓았던 것이다. 구양봉은 그의 혈도까지 풀어 주었다. 이 바람에 구양봉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 모인 무인들의 수령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완안열은 술상을 차리게 하고 구양 숙질을 대접했다.
第 四十五 章. 동굴의 비밀
술을 마시면서 완안열은 구양봉에게 임안에 가서 악무목의 유서를 손에 넣을 작정인데 협조해 달라는 얘기를 꺼냈다. 구양봉은 이미 조카에게 그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완안열에게 직접 듣고 나니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 구양봉이 어떤 인물인데 그렇게 쉽게 당신의 흉계에 가담한단 말이냐? 그러나 악무목은 용병에만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것이 아니라 무공 또한 출중하다고 들었다. 악가의 산수(散手)는 무학 가운데의 일절(一絶)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 유서에는 병학과 도략(兵學韜略)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무공에 대한 말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선 책을 입수하는 데 협조하겠다고 대답을 해 놓고 다시 기회를 보아 내가 가져도 무방하겠지. 사실인즉슨 내가 당신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당신이 나를 돕는 결과가 되는 거라구.)
이렇게 완안열과 구양봉은 동상이몽에 잠겨서 대송 명장의 유서를 훔칠 일념으로 서로 비위를 맞추다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게다가 양자옹까지 옆에서 부채질하는 바람에 술을 다 비울 때까지 질펀하게 마시고 떠들었다.
구양공자만은 중상을 입어 술은 마시지 못하고 요리만 조금 집어먹다가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선실로 쉬러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이 한참 흥겹게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구양봉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며 술잔을 내려놓고 마시지 않았다. 좌중의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전전긍긍하고, 완안열은 왜 그러느냐고 막 물으려고 하는데 구양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소리를 들어보시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바람과 파도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영문을 몰라 의아한 시선으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들리지 않습니까? 퉁소 소리 말이오.]
다시 귀를 기울이니 과연 파도 치는 소리에 섞여 끊어졌다 이어졌다 퉁소 소리가 가냘프게 들려 왔다. 만약 구양봉이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듣지 못했을 그런 소리였다.
구양봉이 뱃머리로 다가서서 몸을 구부리고 갑자기 끅끅끅,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마치 두꺼비가 우는 소리 같았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감히 드러내 놓고 웃지는 못했다. 그가 계속해서 끅끅거리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가 퉁소 소리에 맞추어 괴성을 지른다는 것을 알았다. 퉁소와 구양봉의 소리가 기복을 타며 묘한 가락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심신이 이상하게 흐트러짐을 느꼈다. 영지상인은 심신을 애써 가라앉히며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과연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요술이로구나. 무슨 장난을 꾸미고 있는지 조심해야지.)
배 위에 타고 있는 사공들과 완안열이 견디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 쉬다가 마침내 덩실덩실 춤추기 시작했다. 이때 구양봉이 다시 괴상한 소리를 몇 번 크게 지르고 멈추자 그 퉁소 소리도 멈췄다. 그러나 구양봉은 계속해서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몰려와 구양봉의 등뒤에 숨어 불안한 마음으로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흐르자 바다의 아득한 한쪽 끝에 세 개의 청색 돛을 단 쾌선이 나타났다.
(그 퉁소 소리가 저 배에서 났나? 저렇게 먼데 어떻게 이쪽까지 들릴 수 있단 말인가?)
구양봉이 배를 돌려 쾌선 쪽으로 가라고 사공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참 후에 두 척의 배는 접근했다. 쾌선의 뱃머리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 청포 두루마기를 입고 과연 손에는 퉁소를 들고 있었다.
[구양형, 혹시 내 딸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따님의 재주가 만만치 않은데 설마 하니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두 배의 거리는 수장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들의 눈앞이 번쩍하더니 어느 틈에 그 사람이 벌써 큰 배의 갑판 위로 올라서 있었다. 완안열은 그의 재주가 비상함을 보고 혹시 그까지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그 앞에 나섰다.
[누구시온지? 이렇게 뵙게 되오니 여간 큰 영광이 아니올시다.]
왕야의 신분으로 이렇게 겸손을 부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완안열이 금나라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눈자위를 하얗게 해서 흘겨볼 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구양봉은 머쓱해서 입을 꼭 다문 완안열이 딱해 보였던지 나서서 소개했다.
[황형,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분은 대금국의 조왕이신 육왕야십니다. 그리고 또 이분은 도화도의 황약사 황도주로서 무공이 천하제일이요, 예업(藝業) 또한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팽련호 등이 이 말에 깜짝 놀라 흠칫흠칫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들은 황약사 황도주라는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그의 기세에 눌려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황약사는 딸이 사라진 뒤로 몸소 곽정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냥 있으려 했으나 며칠이 지나는 동안 생각하면 할수록 걱정이 되고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딸아이와 곽정이 곽정의 배가 침몰하기 전에 만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기가 만든 괴선에 함께 타고 있다가 일을 당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온갖 걱정이 꼬리를 물고 피어오르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딸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망망한 대해에서 배 한 척을 찾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이술(異術)에 뛰어난 황약사라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배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이날도 뱃머리에 나와 퉁소를 불고 있었다. 혹시나 딸이 듣고 찾아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다 우연히 구양봉을 만난 것이다.
황약사는 팽련호 등을 알지 못했다. 구양봉이 금나라 옷을 입은 한 사람을 왕이라고 소개하는 말을 듣고도 거들떠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구양형, 나는 딸을 찾아 나선 길이라 이만 실례하오.]
황약사는 말을 마치자마자 홱 몸을 돌렸다.
영지상인은 방금 구양봉, 주백통 등에게 당한 터라 아직까지 화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배에 오른 웬 사람이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데다 구양봉이 완안열에게 소개하는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천하에 고수가 이렇게도 많던가? 이들이 모두 약간의 사술을 가지고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이번엔 내가 한번 골탕을 먹여야지.)
그래서 황약사 곁으로 걸어갔다.
[찾고 계신 사람이 혹시 십오륙 세의 소저가 아닙니까?]
이 말에 황약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대사님께서 보신 일이 있습니까?]
[보기는 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시체였소.]
[아니 뭐라구요? 죽었다구요?]
황약사가 놀라 묻는데 그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사흘 전 해상에 떠오른 한 소저의 시체를 보았죠.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장식을 달았는데 얼굴이 꽤 예쁘장해 보이더군요.]
그의 얘기로 미루어 보아 황용이 틀림없었다.
황약사는 난데없는 충격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비틀비틀 몸을 가누지 못해 차마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황용이 배에서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영지상인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는 것을 들으며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소저 옆에 세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하나는 젊은 사람이요, 또 하나는 늙은 거지였고 다른 하나는 백발의 영감이었습니다.]
영지상인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곽정, 홍칠공, 주백통 세 사람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황약사로서는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눈을 치떠 구양봉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내 딸을 알고 있는데도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소?]
구양봉은 평소 황약사의 재주와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저런 눈초리로 자기를 보는 것으로 보아서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상심해 있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기세였다. 그래도 자기야 그의 손에 다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일이 터진다면 수습하기 곤란한 것만은 또한 사실이었다.
[나는 오늘에야 이 배를 탔기 때문에 이분들도 처음 만난 것이오. 이 대사께서 보신 시체가 꼭 당신의 따님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구양봉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따님처럼 그렇게 훌륭한 규수가 정말 요절을 했다면 그 얼마나 애석한 일이겠소.]
이 몇 마디 말로 자기 책임을 살짝 벗어 놓는, 정말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구양봉이었다. 그러나 황약사가 듣기에는 사실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더한층 굳히게 해주는 말이었다. 만감이 교차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화를 잘 내는 성미다. 그러기에 흑풍쌍쇄가 경서를 훔쳤을 때 애먼 육승풍 등까지 억울하게 두 다리를 잃고 사문에서 내쫓기지 않았던가? 지금 황약사의 심정은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걷잡기 어려웠다. 두 손을 벌벌 떨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황약사의 얼굴만 살필 뿐 갑판 위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느닷없이 황약사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더더욱 어찌할 바를 몰라 멀거니 황약사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황약사의 웃음 소리는 하염없이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 통곡으로 변해 애절한 슬픔을 자아냈다.
모인 사람들 가운데 다만 구양봉만이 그를 잘 알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간장이 녹아 내리듯 비통한 울음 소리를 들으며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노사가 저렇게 울다가는 몸이 상할 텐데. 과거에 완적(阮籍)이란 사람이 어머니를 잃고 슬피 울다가 피를 말로 토해 냈다더니 이 황노사가 진(晋)나라 사람의 유풍을 지니고 있구나. 철쟁(鐵箏)을 배가 뒤집힐 때 잃어버린 것이 애석하구나. 그렇지만 않다면 지금 꺼내 불어 그의 슬픔을 더해 주기만 하면 후일 화산에서 이차 논검을 할 때 강적이 하나 더 없어질 텐데....)
한바탕 울고 난 황약사가 미친 듯 옥퉁소를 들어 뱃전을 내려치자 뚝 소리와 함께 퉁소는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황약사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뱃머리로 걸어갔다.
영지상인이 앞으로 나서며 두 손으로 가로막았다.
[웃다 울다 왜 미친 사람처럼 이 야단이시오?]
완안열이 나서서 영지상인을 만류하려고 했다.
[영지상인, 말리지....]
완안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약사가 손을 뻗어 영지상인의 뒷덜미에 불끈 솟은 근육을 잡고 비틀자 영지상인이 허공에 거꾸로 매달렸다. 황약사가 힘을 다해 허우적거리는 그를 집어던지니 뚱뚱한 체구의 대머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갑판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리고는 황약사는 몸을 번쩍 날려 자기 배로 돌아가 키를 돌리고 돛을 올려 가 버렸다.
영지상인이 혹시 죽지 않았나 해서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 구하려고 하는데 바닥이 삐걱하고 둘리며 선창 밑에서 한 소년이 나타났다. 붉은 입술에 백옥 같은 흰 이, 얼굴이 관옥같은 그 소년은 완안열의 세자 양강이었다. 그는 목염자와 헤어진 후 줄곧 완안열의 <부귀영화가 한량이 없다>는 말을 되씹으며 회북(淮北)과 금나라 관부에 연락을 취했다. 얼마 안 있어 부왕을 찾게 되어 그를 따라 남행을 하게 된 것이다. 곽정과 황용이 배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계속 선실에 숨어서 나올 생각은 못하고 선실 문틈으로 갑판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황약사가 간 것을 확인하고야 얼굴을 내밀었다.
영지상인은 정말 호되게 당했다, 그래도 무공이 훌륭했기 때문에 대머리를 바닥에 박으면서 바닥에 구멍이 뚫어지기는 했지만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다만 머리만 어질어질할 뿐이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느라 한동안 처박힌 채로 있다가 간신히 구멍에서 빠져 나왔다. 사람들은 뻥 뚫린 구멍하며 그 꼴을 보고 웃음이 나왔지만 억지로 참았다.
완안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얘야, 이리 와 구양선생을 뵙거라.]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양강이 벌써 구양봉 앞에 엎드려 공손하게 네 번이나 절을 했다. 그의 이 같은 태도에 사람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원래 양강은 조왕부에 있을 때부터 영지상인 등을 십분 존경했다. 그런데 이제 구양봉이나 주백통, 황약사 등이 계속해서 몇 차례나 그들을 집어던지며 어린아이 놀리듯 하는 것을 보고는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고 사람 위에 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태호의 귀운장에 갇혀 있을 때 겪었던 치욕과 보응 유씨의 사당에 있을 때 곽정과 황용이 그토록 무서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제 눈앞에 이런 위인이 나타났으니 그를 사부로 모시지 못한다면 그보다 큰 손실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서슴없이 구양봉을 향해 대례를 하고 완안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저는 이 구양선생을 사부로 모시고 싶습니다.]
완안열도 기쁨에 못 이겨 구양봉을 향해 읍했다.
[제 아이, 무학을 배우기 좋아하는데 아직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선생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가르쳐 주신다면 소왕 부자는 참으로 큰 덕으로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소왕야의 사부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그런데 구양봉이 읍을 하며 이렇게 거절하는 것이다.
[저희 문중에서는 제자를 거두지 않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조카에게만 무예를 전수했으니 왕야께서는 그렇게 양해해 주십시오.]
완안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포기하고 하인들에게 주안상을 차리게 했지만 양강은 실망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구양봉이 웃으며 위로의 말을 꺼냈다.
[소왕야께서 저를 사부로 모시겠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조카가 몇 가지 무공을 가르쳐 드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그렇게 서서히 배워 나가도록 합시다.]
양강은 구양공자가 거느린 그 많은 희첩들을 본 일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구양공자에게 무공을 익혔다지만 그 무공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양강은 구양봉이 하는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입으로는 건성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구양공자의 무공이 구양봉과 비교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정도에 이를 수 있다면 그런대로 무림에서 행세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던 것이다.
술잔이 오가며 황약사의 오만불손한 태도로 화제가 돌아가자 여러 사람들은 영지상인이 그를 잘 속였다고 칭찬을 했다.
후통해가 궁금했던지 이런 말을 했다.
[사형, 그 사람 울다가 웃다가 웬 야단을 그렇게 떨었지요?]
[미친 사람처럼 발광하는 걸 알 게 뭐야?]
사통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 사람의 퉁소 소리에 마음이 들뜨던데 그건 무슨 까닭입니까?]
완안열이 묻는 말에 양자옹이 대답했다.
[그건 높고 심원한 내공의 일종인데 구양선생이 뱃머리에 나가 외친 소리는 그와 호응하며 대결한 것이에요. 구양선생, 저의 말이 맞나요?]
구양봉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자 여러 사람들이 분분히 찬사를 쏟아 놓았다. 그러나 유독 양강만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황약사로 말할 것 같으면 내겐 사조(師祖)인 셈인데 우선 매사부가 그분께 득죄를 했고 또 그의 딸이 나를 의심하고 있으니 앞으로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환심을 얻기는 어려울 거야. 그때 귀운장에서 만났을 때 천하에 그분을 이길 사람은 없는 걸로 알았는데 이 구양선생이 그분과 맞설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럽기는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를 제자로 거두려 하지 않으니 장차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 나간다?)
그 무렵, 황약사는 비분강개하여 울다 웃다 하면서 어이없이 죽어버린 딸아이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고 있었다. 황약사는 사공들에게 배를 육지에 대라고 명령하고는 언덕에 도착하자마자 손을 번쩍 들어 7,8명의 사공을 있는 대로 다 죽여 없앴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가 내 딸을 죽였단 말이냐? 도대체 누가 죽였단 말인가?]
황약사는 하늘에 대고 외치고 또 외쳤다.
[그래, 그 곽가 놈이야. 틀림없는 그 녀석이다. 그놈만 아니라면 용아가 무엇 때문에 그 배에 탔겠는가? 그런데 그 녀석이 용아와 함께 죽고 말았으니 이 원통한 심정을 누구에게 푼단 말이냐?]
황약사는 이렇게 곽정을 증오하다가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곽정의 사부라는 강남 육괴들이었다.
(옳지, 이 육괴가 내 딸을 죽게 한 원흉의 괴수들이야! 그들이 만약 곽가 녀석에게 무예를 전수하지 않았더라면 용아와 서로 알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육괴를 하나하나 없애야만 이 원통한 심사가 풀리겠구나!)
황약사는 분노가 그쪽으로 쏠리자 슬픈 마음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는 번화가로 들어가 식사를 하면서 강남 육괴를 찾을 방법을 생각했다.
(육괴의 무예가 대단치는 않아도 명성만은 높고 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정면으로 덤벼들려고 했다가는 곤란할 수도 있으니 밤에 쳐들어가 여섯 명을 깨끗이 해치워야 한다.)
그 즉시 황약사는 빠른 걸음으로 가흥을 향해 북쪽으로 떠났다.
이때 홍칠공, 주백통, 황용, 곽정 네 사람은 거룻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곽정이 선미에 앉아 노를 잡고 황용은 여전히 주백통과 더불어 상어를 타고 놀던 얘기를 재미있게 나누고 있었다. 주백통은 흥이 올라 지금 당장 상어를 잡아타고 놀자고 했다. 그러는 사이 곽정은 사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은근히 걱정이 되어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홍칠공은 대답도 하지 않고 가쁜 숨만 몰아 쉬었다. 그는 구양봉이 투골타혈법을 써 혈도는 이미 풀렸지만 내상은 오히려 더 심해져 가고 있었다. 노완동은 다른 사람이야 죽든 말든 여전히 바다에 뛰어들어 상어 잡을 궁리만 했다. 황용도 어느새 홍칠공의 안색을 살피며 그의 심신을 어지럽혀서는 안된다고 주백통에게 눈짓을 했지만 주백통은 아랑곳없이 연신 지껄여 댔다.
황용이 참다 못해 이맛살을 찌푸리며 주백통에게 핀잔을 주었다.
[상어를 잡으려 해도 미끼가 없는데 떠들기만 하면 뭘 해요?]
노완동은 어린 사람이 책망을 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 위인이었다.
[있어 있어, 곽정 아우, 내가 손을 잡아 줄 테니 몸을 반쯤 물 속에 담그고 있으라구.]
[곽정 오빠, 그런 말은 듣지도 마세요. 오빠를 미끼로 삼아 상어를 낚아 올리겠다는 거예요.]
주백통이 손뼉을 쳤다.
[그래 그래, 상어가 오면 내 손으로 낚아챌 테니 걱정 말라구. 절대로 곽정 아우를 다치게 하진 않을 테니까!]
[그러다 작은 배가 뒤집히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황용이 아무리 반박해도 주백통은 막무가내였다.
[뒤집히면 더욱 좋지. 그러면 바닷속으로 뛰어들 것도 없을 테니까.]
[그럼 우리 사부님은 어떡하라고요? 그래 사부님이 돌아가셔도 좋단 말이에요?]
그제야 주백통은 머쓱해져서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오히려 홍칠공이 구양봉에게 다친 것을 원망하는 듯이 그를 쏘아보았다.
[다시 쓸데없는 말 지껄이면 우리 셋은 주선생과 말도 하지 않겠어요.]
황용이 쏴붙이자 주백통은 혀를 쑥 내밀었다가 입을 꾹 다물고 곽정의 손에서 노를 받아 힘껏 젓기 시작했다.
그들이 거의 육지에 다다랐을 무렵엔 날도 이미 저물었다. 네 사람은 육지로 올라가 모래 위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홍칠공의 병세는 더욱 악화돼 있었다. 곽정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흘리자 홍칠공은 조용히 웃음 지으며 말했다.
[다시 백 년을 더 산다 해도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내게 소원이 하나 있는데 죽기 전에 부탁할 테니 그거나 들어주려무나.]
[사부님 말씀하세요.]
황용이 촉촉이 젖은 눈으로 홍칠공을 들여다보았다.
[그 노독물, 보기만 해도 밥맛이 없었는데 걱정 말고 죽기나 하구려. 내가 대신 원수를 갚아 줄 테니.]
주백통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이 말을 듣고 홍칠공이 빙그레 웃었다.
[원수를 갚는다는 것쯤을 가지고 어디 소원이라 할 수 있겠소? 난 지금 황궁의 어주(御廚)에서 만드는 원앙오진회(鴛鴦五珍膾)가 먹고 싶어서 그래요.]
세 사람은 무슨 큰일이 남아 있는 줄 알고 잔뜩 긴장했다가 요리를 먹고 싶은 것이 소원이란 말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사부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서 임안이 멀지 않으니 제가 황궁에 들어가 몇 그릇 훔쳐다 드릴게요.]
황용이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주백통이 또 주책없이 나섰다.
[나도 한 그릇 주게나.]
황용이 주백통을 향해 눈을 하얗게 흘기며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뭐가 맛이 있는지 알기나 하고 달라세요?]
[이 원앙오진회는 황궁에서도 아무 때나 만드는 음식이 아니야. 내가 그전에 석 달 동안이나 숨어 있으면서도 단 한 번밖에 맛보지 못했는데 지금 그 생각만 해도 침이 괸단 말이야.]
홍칠공의 말에 머쓱해지는가 싶더니 주백통이 또 참견을 하고 나섰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우리가 차라리 황제의 요리사를 잡아다 놓고 그놈에게 만들게 해서 먹으면 어떨까?]
[노완동의 의견이 아주 그럴듯하군요.]
황용이 칭찬하자 주백통은 우쭐했지만 홍칠공이 머리를 가로 내저었다.
[안 되오. 음식이란 원래 솜씨도 중요하지만 불이며 요리할 도구가 고루 갖추어져야지, 그중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그 맛이 달라지오. 그러니 우리가 직접 가서 먹는 게 좋다오.]
그들이 어디 황궁이라고 해서 무서워할 사람들인가.
[정말 그게 좋겠군요. 우리 다 같이 가서 어디 한번 맛 좀 봅시다.]
모두 의견이 일치하자 곽정이 홍칠공을 업고 넷이서 조그마한 마을에 당도했다. 그들은 마을 사람에게 먹을 것과 술을 부탁하여 먹고 난 뒤 값을 치르려고 했지만 넷 다 무일푼이었다. 도리없이 그 마을 사람을 붙잡고 전당포가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고 사정하자, 어찌나 마음씨가 좋은지 그 사람은 돈을 달라기는커녕 그들을 번화가로 안내해 주기까지 했다.
네 사람은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작별한 뒤 전당포를 찾아 들어갔다. 주백통은 큰소리로 주인을 찾으며 연신 전당포를 하는 사람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는 등 욕설을 퍼부었다.
[뭐 그리 덤빌 것 없어요.]
황용이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설쳐대는 주백통을 만류하고 머리에 꽂은 금장식을 잡히고 14냥을 얻었다. 그 돈으로 그들은 객점을 찾아 들어 다시 배불리 먹고 쉬기로 했다. 식사를 다 끝내고 보니 황용이 어디로 갔는지 안 보였다. 주백통이 곽정에게 물었다.
[자네 그 사나운 색시는 어디로 갔나? 난 그 아가씨만 보면 무서워 쩔쩔맨단 말이야.]
그때 황용이 식식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제가 그렇게 무서우세요?]
주백통은 그녀가 머리에 반짝반짝하는 금장식을 달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해서 물었다.
[아니 어떻게 벌써 찾아왔지? 그럼 우리 밥값이나 방값은 달리 변통이 됐단 말인가?]
황용이 그 말에는 코대답도 않고 품속에서 네 꾸러미의 은전을 꺼내 놓으며 웃었다.
[찾아오긴요. 제가 그 전당포 주인인데 가지고 싶으면 얼마든지 가지는 것 아녜요?]
주백통은 그녀가 눈 깜짝할 사이에 금장식과 은전을 가져다 꺼내놓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차며 감탄했다.
[아니, 세상에! 부전자전이라더니 어린 아가씨가 재주가 비상한걸.]
[그러나 곽정 오빠의 이사부인 묘수서생에 비하면 이만한 재주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그런 훌륭한 재주를 가진 분이 어디 계셔? 내가 좀 만나 봐야겠군.]
홍칠공의 병세가 호전될 기미가 전혀 없이 더 악화돼 갔다. 세 사람은 이런 시골 마을에는 명의도 없을 것이라 싶어 즉시 노새가 끄는 수레를 한 대 빌려 타고 임안부를 향해 출발했다.
다음날 그들은 전당강(錢塘江)을 건너 임안 근처에 이르렀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저녁놀이 곱기만 한데 둥지로 돌아가는 갈가마귀만 허공에서 한가롭게 우짖었다. 그들은 날이 어둡기 전에는 성내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 근처에 있는 마을을 찾아 쉬어 가기로 했다. 멀리 흐르는 냇가를 돌아 7,8채의 인가가 다정하게 모여 있었다.
[저 마을이 좋겠군요. 우리 저기 가서 쉬어요.]
황용의 말에 주백통이 눈을 부라렸다.
[뭐가 좋다고 야단이야?]
[보세요, 꼭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아요?]
[그림처럼 아름다우면 어쩌겠다는 거야?]
[싫으면 여기서 작별해요. 우린 저기로 갈 테니까요.]
[나 혼자 뭣 때문에 떨어져?]
황용과 주백통이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수레는 벌써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막상 다다르고 보니 마을의 인가는 담이 무너지고 벽은 헐 대로 헐어 형편이 없었다. 동쪽에 주막같이 생긴 집이 눈에 띄자 그쪽으로 갔다. 처마 밑으로 먼지가 뽀얗게 앉은 탁자가 두어 개 놓여 있었다.
[여보시오, 주인장 계시오?]
주백통이 몇 번이나 부르자 안채에서 17,8세의 소녀가 나타났다. 그런데 머리는 흐트러져 쑥밭이었고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광대싸리로 만든 비녀를 머리에 꽂은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황용이 밥을 달라 술을 달라 해보았지만 소녀는 머리만 살래살래 흔들 뿐이었다.
[아니, 술도 없고 밥도 없는데 주막은 뭣 하러 차렸느냐?]
주백통이 다그쳐 물어도 소녀는 여전히 머리만 흔들었다.
[난 몰라요.]
[너 정말 바보로구나.]
소녀가 입을 헤벌리고 벙긋 웃었다.
[그래요, 모두들 날 바보라고 불러요.]
황용이 안채로 들어가 부엌을 살펴보니 먼지투성이요, 거미줄뿐이었다. 솥을 열어 봐도 찬밥 덩이만 들어 있었다. 게다가 잠자리 위에는 다 해어진 거적 하나만 덜렁 깔려 있었다. 황용은 왈칵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혼자만 사나요?]
바보 소녀는 여전히 입을 헤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죽었어요.]
소녀는 손으로 눈 언저리를 비비는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요?]
소녀는 고개를 흔들며 모른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얼굴이며 손에 때가 잔뜩 낀 것이 몇 달 동안 세수도 안 한 것 같았다.
(밥을 해준다 하더라도 먹을 수도 없겠구나.)
황용은 이렇게 생각하며 쌀은 있느냐고 물으니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항아리 하나를 가리켰다.
항아리에는 쌀이 반 이상 담겨 있었다. 황용이 부리나케 쌀을 씻어 밥을 안치는 사이에 곽정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생선 두어 마리와 닭 한 마리를 사와 반찬거리로 내놓았다. 밥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는 사방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황용이 소녀에게 등잔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역시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할 수 없이 관솔을 구해다 불을 밝히고 그릇과 수저를 찾느라 찬장을 열어 보니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찬장 안에는 7,8개의 깨진 그릇이 놓여 있고 그릇 안에는 바퀴벌레가 죽어 있기까지 했다.
그릇 챙기는 것을 도와준다고 옆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곽정에게 황용이 말했다.
[이거 씻어 오고 그리고 어디 나가 젓가락 만들 나무도 잘라다 주세요.]
곽정은 그릇을 몇 개 주섬주섬 들고 밖으로 나갔다. 황용이 하나 남아 있던 그릇을 꺼내는데 손끝의 감촉이 차디찬 것이 이상하게도 다른 그릇과는 달랐다. 번쩍 들어올리려 했지만 못으로 박아 놓았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잘못하다 깨지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다시 한번 들어보아도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오래 되어 아주 들러붙은 모양이지?)
황용이 다시 유심히 살펴보니 녹이 잔뜩 슨 그 그릇은 쇠를 부어 만든 것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금그릇, 은그릇, 옥그릇을 다 보았지만 쇠로 만든 밥그릇은 처음 보네.)
문득 황용은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에 못으로 박아 놓았다 해도 자기가 드는 힘이라면 나무까지 부러져 떨어졌을 것이다.
(아니, 바닥도 쇠로 만들어 버렸나?)
황용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려 보니 과연 땅 하고 울리는 것이 철판이 분명했다. 황용은 호기심이 발동해 다시 한 번 그 그릇을 힘껏 들어올렸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릇을 왼쪽으로 돌려보아도 움직이지 않더니 오른쪽으로 돌리자 약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손에 힘을 주어 다시 한 번 돌리자 철판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시커먼 굴이 나타났다. 굴 안에서 새어 나오는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황용은 앗 소리를 지르며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풀쩍 피했다.
곽정과 주백통이 황용의 비명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와 찬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혹시 함정이 있는 주막이 아닌가? 저 소녀도 어리석은 척 위장하고 있는 것이고.)
이렇게 생각한 황용이 왼발로 땅을 찍으며 그 소녀 옆으로 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캄캄한 가운데 바람소리가 획 일어나며 소녀는 탈포양위(脫袍讓位)의 솜씨를 부려 황용의 손을 뿌리치고 반격을 가하며 황용의 어깨를 치려고 했다. 황용도 그녀가 호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추측했지만 그녀가 만만치 않은 무공 솜씨까지 지녔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황용은 가볍게 놀라며 왼손을 구부려 소녀를 치는 동시에 오른손으로 잡을 태세를 취해 공격했다.
황용은 역근단골편(易筋鍛骨篇)을 익힌 후 공력이 크게 진보하고 손놀림도 더욱 강하고 빨라졌다. 하지만 바보 소녀는 어깨를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여전히 공격과 방어 자세를 풀지 않았다. 이 쓸쓸한 마을의 다 쓰러져 가는 주막집에도 이런 함정이 있고, 때에 찌든 바보 소녀가 무예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황용과 더불어 7,8초를 겨루면서도 계속 버티는 바보 소녀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주백통은 호기심이 많고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황용의 무서운 장풍에 몰리는 소녀를 보며 이렇게 외쳤다.
[황소저, 그애를 다치게 하지 말아요!]
곽정은 바보 소녀의 동료가 어디에 숨어 덮치지나 않을까, 그래서 홍칠공이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홍칠공 옆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또 수초를 겨루는 동안 바보 소녀가 왼쪽 어깨를 얻어맞고 팔을 아래로 내려뜨리고는 꼼짝을 못했다. 이런 경우 황용이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을 해치기는 지극히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아 사정을 보아주기로 했다.
[빨리 꿇어 엎드려 살려 달라고 해라.]
[못 꿇겠다.]
바보 소녀는 당돌하게 응수하며 자세를 바꾸었다. 허허실실의 낙영장법(落英掌法)으로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이 낙영장법은 바로 황약사가 창안한 초술이었다.
황용은 깜짝 놀라 손을 뻗어 막으며 물었다.
[이 낙영장법을 어디서 배웠느냐? 너의 사부는 도대체 누구냐?]
바보 소녀가 웃으며 이죽거렸다.
[대답하기도 싫다면 어쩔 테냐?]
황용은 그녀가 결코 바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용은 왼손을 높이 들고 오른손으로 공격하는 체하다가 소녀의 아랫도리를 발로 걷어찼다. 소녀는 비틀거리더니 땅바닥에 넘어졌다.
[잔꾀 부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다시 싸우자.]
하지만 소녀가 승복을 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소리쳤다.
황용이 그녀를 덮쳐 깔고 뭉개다가 그녀의 옷깃을 찢어 손을 뒤로 꽁꽁 묶었다.
[내 낙영장법이 너보다 훌륭하지 않으냐? 빨리 승복해라.]
[승복 못하겠다. 정정당당하게 다시 싸우자.]
곽정은 황용이 그녀의 손을 묶은 걸 보고 지붕으로 뛰어올라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내려와 집 안 구석 구석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없었다. 곽정은 그제야 안심하고 안마당으로 돌아왔다.
황용이 소녀의 얼굴에 비수를 들이대고 위협하고 있었다.
[누가 네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느냐? 빨리 말을 해라. 말하지 않으면 한칼에 죽이고 말겠다.]
불빛 아래에서 바보 소녀는 입을 헤벌린 채 그저 웃기만 했다. 황용이 자기와 장난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황용이 다시 한번 다그쳐 물어도 역시 싱거운 대답이었다.
[나는 사부가 없다. 누가 내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다고 했었냐?]
[이놈의 계집애가 말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군요, 우리가 굴속에 들어가 보면 까닭을 알 수 있겠지요. 주선생님이 사부님과 이 계집애를 지켜 주세요. 곽정 오빠와 나는 굴에 들어가 볼게요.]
[안 돼. 나하고 함께 들어가자구]
주백통이 연방 손을 내저으며 자기가 가겠다고 나섰다. 황용이 이마를 찌푸리고 톡 쏘았다.
[누가 주선생님과 함께 들어가겠대요?]
주백통은 연배나 무공으로 보아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웬일인지 황용의 말에는 쩔쩔맸다.
[착한 아가씨, 내가 말 잘 들을 테니 함께 들어가요.]
황용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백통은 신이 나서 어디서 소나무 장작을 두 개나 구해다 불을 붙여 굴 어귀를 밝혔다. 황용이 그중 하나를 받아 굴 안에 집어 던졌다. 장작이 쿵 하며 굴 맞은 편 벽에 부딪혀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별로 깊은 굴은 아닌 것 같았다.
황용이 다시 장작불을 밝히고 굴 안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주백통이 참지 못하고 먼저 뛰어들어갔다.
황용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사방을 살펴보니 조그만 방이 나왔다.
[속았어 속아, 아무 재미도 없잖아.]
주백통이 실망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바닥을 샅샅이 살펴 나가던 황용이 앗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해골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다. 옷이 다 썩어 죽기 전의 신분조차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동쪽 구석에도 해골이 있는데 쇠로 만든 큰 상자 위에 엎드린 형체였고 그 위에 길이 한 자 반 정도의 날카로운 칼이 가슴을 뚫고 상자 뚜껑까지 꽂혀 있었다.
주백통은 굴 안이 어둡고 더러울 뿐만 아니라, 두 개의 해골이 별로 신기할 것도 없었지만, 황용이 하도 정신없이 살펴보고 있으니 감히 나가자는 말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히 얘기를 꺼냈다가 핀잔을 듣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황용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착한 아가씨, 나 먼저 나가면 안 될까?]
참다 못한 주백통은 황용의 눈치를 살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나가 보세요. 그리고 곽정 오빠에게 들어오라고 하세요.]
주백통은 반가워 나는 듯 달려나가고 그 뒤를 이어 곽정이 뛰어들어왔다. 황용이 장작불을 들어 두 개의 해골을 비추며 물었다.
[이 두 사람이 어쩌다가 죽은 것 같아요?]
곽정이 먼저 쇠로 만든 상자에 엎드린 해골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사람은 상자를 열려고 하다가 뒤에서 찌르는 칼을 맞고 죽은 것 같고, 저기 나뒹구는 해골은 갈빗대가 두 대 부러진 것이 아무래도 장력에 눌려 죽은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도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거든요.]
[무슨 일인데?]
[그 바보 소녀가 쓴 솜씨는 틀림없는 낙영장법이에요. 물론 서툴기는 하지만 초술이나 법문이 조금도 틀리지 않아요. 그리고 또 이 두 사람이 여기서 왜 죽었느냐 말이에요! 그 바보 소녀와는 무슨 관련이 없을까요? 사실을 알 수 없으니 정말 답답하군요.]
[우리 나가서 그 소녀에게 물어 볼까?]
곽정은 늘 바보라는 말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차마 바보 소녀라고 부르지를 못했다.
[그 소녀가 공연히 어리석은 체 하는지도 모르지만 대답을 하지 않으니 소용없어요. 차라리 여기서 잘 살펴보면 무슨 실마리가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황용과 곽정이 다시 장작불을 들고 두 개의 해골을 살펴보는데 쇠로 만든 상자 밑에서 뭔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황용이 그 물건을 주워 들어 살펴보니 황금패였다. 패 안에는 엄지손가락만한 마노(瑪瑙)가 박혀 있고 뒤쪽에는 글씨가 새겨 있었다.
<흠사무공대부충주방어사대어기계석언명(欽賜武功大夫忠州防禦使帶御器械石彦明)>
[이 패가 만약 죽은 사람의 것이라면 관직이 꽤 높았겠는데요.]
황용이 말했다.
[고관이 여기서 죽었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
황용은 바닥에 나뒹구는 해골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별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등뒤의 늑골 아래 부분이 웬일인지 불룩 솟아 있었다.
곽정이 장작개비로 해골을 들썩거려 뒤집자 풀썩이는 먼지 사이로 쇳조각이 나타났다. 황용이 깜짝 놀라며 재빨리 그것을 주워 들었다. 곽정도 황용이 손에 든 쇳조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거 뭔지 알겠지요?]
[알고말고, 이건 귀운장의 육장주가 쓰던 철팔괘(鐵八卦)가 아닌가?]
[그래요, 철팔괘가 틀림없지만 육장주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요.]
[그건 그럴 거야. 옷이 다 썩은 걸 보면 십 년도 넘었겠는걸.]
황용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뭔가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던지, 달려가 상자 위에 꽂힌 칼을 뽑아 들고 유심히 뜯어보았다. 과연 칼날 위에는 곡(曲)자가 씌어 있었다.
황용은 저도 모르게 탄식하듯 말했다.
[누워있는 해골은 바로 내 사형이로군요. 육사형이 말씀하시기를 곡사형이 아직도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여기 죽어 있을 줄 누가 알기나 했겠어요. 곽정 오빠, 이 다리 뼈를 좀 보세요.]
곽정도 허리를 숙이고 살펴보았다.
[그래, 이 두 다리의 뼈가 다 부러졌는데...., 아, 용아의 아버지가 부러뜨린 건가 봐.]
황용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분이 곡령풍(曲靈風)이에요. 아버지 말씀에 제자가 여섯 명인데 그중 곡사형의 무공이 제일 훌륭했다고 하셨거든요.]
그러고는 황용은 후닥닥 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곽정도 그 뒤를 쫓아갔다. 황용은 곧바로 바보 소녀에게 다가섰다.
[성이 곡씨지요?]
바보 소녀는 히히거리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 성이 뭐요?]
곽정이 부드럽게 물어도 소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몰라요.]
둘이 더 물어 보려고 하는데 주백통이 배고파 죽겠다고 엄살이었다.
[그래요, 우선 식사부터 해야겠군요.]
황용이 바보 소녀를 묶은 끈을 풀어 주며 함께 먹자고 하니 소녀도 사양하지 않고 대들어 꾸역꾸역 먹었다. 황용이 밀실에서 있었던 일을 홍칠공에게 들려주자 그도 이상하다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석가 성을 가진 사람이 네 곡사형을 죽이고 상자를 열려고 하는데 숨이 끊어지지 않은 곡사형이 칼을 던져 죽인 것이 아닌가 싶구나.]
[정황으로 보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황용은 칼과 철팔괘를 들어 바보 소녀에게 보이며 물었다.
[이게 누구의 것인지 알겠어요?]
그 물건을 보자 바보 소녀의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흔들면서도 칼을 든 채 되돌려 주려고 하지 않았다.
[칼을 보기는 했는데 세월이 오래 돼 잊은 모양이지요.]
황용은 이렇게 말하고 식사가 다 끝나기를 기다려 홍칠공을 부축해 잠자리에 누인 뒤 다시 곽정과 함께 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둘 다 실마리는 상자에 있다고 믿어 상자에 엎어져 있는 해골을 치우고 뚜껑을 열어 보았다. 불빛에 드러난 상자 안에는 주옥등 보물이 가득했다. 곽정은 예사롭게 여겼지만 황용은 그 모두가 한결같이 값진 물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는 보물이 많다고는 하지만 여기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용이 한 움큼 주워 들었다 놓으니 쨍그랑 쨍그랑 주옥이 부딪치는 해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 있는 보물들이 다 내력이 있을 텐데, 아버지가 보시면 출처나 근원을 아실 거예요.]
황용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이것은 옥환대(王環帶)고 저것은 서피합(犀皮盒)이요, 또 저것은 비취반(翡翠盤)이라고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지만, 몽고의 사막에서 자란 곽정으로서는 보기는커녕 들어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이었다.
황용이 한바탕 떠들어대며 다시 상자에 손을 넣고 뒤적이다 그 안의 딱딱한 판을 만지게 되었다. 그제야 그 상자가 이중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그 판을 들어올리니 거기엔 값진 골동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황용은 금석(金石) 문자를 배운 적이 있는 터라 골동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용문정(龍文鼎), 상이(商 ), 주반(周盤), 주돈(周敦) 등이었다. 위에 놓여 있는 주옥이나 진귀한 보물이 성(城)을 하나 살만한 값이라면 여기 있는 골동품들은 그보다 더 값이 나가는 것이었다. 황용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기하여 다시 한 층을 들어냈다. 이번에는 글씨며 그림이 그려진 두루마리 종이가 나왔다.
第 四十六 章. 굴속의 석함
황용은 곽정을 불러 그중 하나를 펴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한 폭의 천왕도(天王圖)였던 것이다. 또 하나는 조패(曹 )가 그린 오화총(五花 )이요, 다른 하나는 남당(南唐) 이후주(李後主)가 그린 임천도수(林泉渡水) 인물화였다. 상자 안에는 길고 짧은 두루마리 그림이며 글씨가 20여 폭이 있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명인의 수필(手筆) 아닌 것이 없었다.
황용은 어마어마한 물건들에 너무나 놀라 더 볼 생각도 못하고 골동품과 주옥들을 있던 그대로 다시 챙겨 넣은 후 뚜껑을 닫고 그 위에 걸터앉아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우리 아버지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골동품이나 서화가 많다고는 하지만 진품만을 따진다 하더라도 이 상자 안에 있는 것의 십분의 일에도 못 미치겠구나. 그러나저러나 곡령풍 곡사형이 무슨 재주로 이런 보물을 얻었을까?)
황용이 이마를 찡그리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주백통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들 나오지 않고 뭘 해? 황궁으로 원앙오진회 먹으러 가자고.]
[오늘 저녁에 가잔 말씀이십니까?]
곽정이 묻자 홍칠공이 서두르며 대답했다.
[빨리 갈수록 좋은 게야. 늦으면 난 못 참네]
[사부님, 아무리 빨라도 내일 아침에나 성내로 들어가게 돼요. 공연히 노완동이 지껄이는 헛소리는 듣지도 마세요.]
[그래그래, 또 내가 잘못한 모양이로군.]
황용의 말에 기가 죽은 주백통은 시무룩해져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황용과 곽정이 조반을 마련하여 바보 소녀와 함께 다섯 사람이 먹었다. 황용은 그 보물 상자를 적당한 장소에 옮겨 놓을 궁리를 했다.
[빨리 가자고. 자기 집 물건도 아닌데 공연히 신경을 쓸 게 뭐람.]
주백통이 서둘러 대는 바람에 황용은 이런 생각을 했다.
(하긴 십 년 이상 여기 놓여 있던 것이니 그냥 놔두는 게 가장 안전하겠구나.)
그래서 쇠로 만들어진 밥그릇을 비틀어 찬장을 원래대로 만들어 놓고 그 위에 깨진 그릇들을 자연스럽게 늘어놓았다. 바보 소녀는 이 일에는 관심이 없는지 보고도 못 본 체하며 그저 칼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황용이 은전을 두 꾸러미나 던져 주었지만 바보 소녀는 그것을 받아 식탁 위에 획 집어 던졌다.
[만약 배가 고프거든 이 은전을 가지고 쌀도 사고 고기도 사다 먹어요.]
바보 소녀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몰랐는지 그저 입을 헤벌린 채 웃기만 했다. 황용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 아가씨가 분명 곡령풍과 무슨 관계가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곡령풍의 친딸이거나 아니면 제자일지도 몰랐다.
아주 어려서부터 바보였는지 아니면 뒤에 무슨 일로 충격을 받아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어 보고 싶었지만 주백통의 성화에 어쩔 수 없었다. 네 사람은 즉시 수레를 타고 임안성을 향해 출발했다.
항성(杭城)은 원래가 천하의 명승지요, 번화하기로 이름나 있었는데 이제는 송실(宋室)까지 남도하여 이곳에 도읍을 정했으니 더욱 번창했다. 주백통, 홍칠공, 곽정, 황용 등 네 사람은 임안성의 동대문 격인 후조문(候潮們)으로 해서 성안에 들어갔다. 홍칠공이 황궁으로 가 보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그들 일행은 황궁의 정문인 여정문(麗正門)에 이르렀다.
홍칠공은 여전히 노새가 끄는 수레에 앉아 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고개를 뒤로 꺾고 문루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으리으리한 장식이며 화려한 채색이 눈부셨다.
[야, 이거 근사하구나!]
주백통이 환성을 지르며 안으로 달려들려고 했다. 황궁을 지키던 금위군들은 두 늙은이와 두 젊은이가 수레를 몰고 궁문 앞에 와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 큰 도끼를 꼬나들고 기세당당하게 대들었다. 그러나 주백통은 천성이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거 재미있게 됐다는 듯 맞서려고 나섰다.
[빨리 여기를 떠나요.]
황용이 외쳤지만 주백통은 오히려 눈알을 부라리며 고집을 부렸다.
[뭐가 무서워서 야단이야. 설마 하니 인형같이 생긴 것들이 이 노완동을 잡아먹을라구?]
[만약에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앞으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고는 황용이 채찍을 휘두르며 노새를 서쪽으로 몰자 곽정도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주백통은 정말 그들이 자기만 버리고 가는 줄 알고 금위군을 내버려둔 채 함께 가자고 외치며 쫓아왔다. 금위군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뜨기라고 여겼던지 더 쫓아오려 하지 않고 뒤에서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렸다.
황용은 수레를 한적한 곳으로 몰아 아무도 뒤쫓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야 멈췄다.
[아니, 궁으로 들어가자고 왔는데 들어갈 생각은 않고 여긴 뭐 하러온담? 그까짓 밥통 같은 것들이 감히 우리 앞을 막을라구?]
주백통이 원망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물론 뛰어들어가자면 못 뛰어들어갈 것도 없지만, 어디 한번 물어나 보겠어요. 그래 우리가 싸우러 왔나요? 아니면 황제의 어주에 들어가 뭘 먹으러 왔나요? 우리가 무작정 뛰어들어가면 궁 안이 소란해질텐데. 그래 누가 원앙오진회를 얌전하게 만들어 바칠 것 같아요?]
황용이 마구 몰아세우자 주백통은 풀이 죽어 눈만 멀거니 뜬 채 아무 말 없이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그래. 또 내가 잘못한 걸로 해두자고.]
그러면서 주백통은 곽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우, 천하의 계집은 모두 사납기 짝이 없어. 그래 이 노완동은 평생 장가들지 않기로 했다네.]
[곽정 오빠는 원래 사람이 좋으니까 누구든 오빠에게는 잘해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그럼 난 사람이 좋지 않단 말인가?]
황용이 나서자 주백통이 또 맞섰다.
[그럼 제가 또 한마디 여쭈어 보겠는데요, 그래 장가를 안 가시는거예요? 아니면 시집오겠다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솔직히 대답해 보세요.]
황용이 웃으며 묻자 주백통은 고개를 외로 꼰 채 대답을 못했다.
[우선 객점이나 잡아 놓고 나서 밤에 궁에 들어가야 되지 않을까?]
곽정의 제안에 황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우선 객점에 들어 두어 가지 요리를 만들어 사부님이 잡수시게 해드려야죠.]
잠자코 있던 홍칠공이 이 말은 반가웠는지 좋은 생각이라고 연방 칭찬을 했다.
넷은 즉시 황궁에서 멀지 않은 금화(錦華) 객점에 거처를 정했다. 황용은 정성을 다해 서너 가지 요리를 만들어 홍칠공에게 대접할 준비를 했다. 주백통은 아무도 자기에게 시집올 여자가 없을 것이라는 황용의 말에 심술이 나서 밥을 먹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세 사람은 그의 어린애 같은 성미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더 권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홍칠공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곽정이 주백통에게 놀러 나가자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럼 얌전하게 사부님을 모시고 계셔요. 제가 나가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물건을 사다 드릴게요.]
황용의 말에 주백통은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그럼 언제 제가 거짓말하는 것 보셨어요?]
그해 황용이 집을 떠나 북행길에 올랐을 때 항주에서 하루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항주는 도화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혹시 아버지가 찾아 나선다면 쉽게 잡힐 것 같아 더 머물지도 못하고 아쉽게 떠났던 곳이었다. 이제 다시 와 보니 시간도 많은데다 별일도 없는 처지라 곽정과 손을 잡고 함께 서호로 갔다.
그녀는 곽정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 사부의 부상을 걱정하고 있음을 헤아렸다.
[사부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 물건만 구한다면 치료할 수 있지만 구하기 어렵다고만 말씀하실 뿐 더 묻지도 못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그걸 알아내 치료해 드려야겠어요.]
[용아,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아낼 자신이 있어?]
[지금 그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에요. 제가 오늘 식사를 할 때 슬그머니 눈치를 떠보았는데 말씀을 하실 듯하다가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셨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알아내야죠.]
곽정은 그녀의 수완을 믿기에 적이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주고받으며 걷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덧 호숫가에 있는 단교(斷橋)에 이르렀다. 이 단교의 잔설(殘雪)은 일찍이 서호 10경 중의 하나로 꼽혔다. 여름이라 다리 밑에는 연꽃이 만발해 있었다. 황용은 다리 옆에 있는 아담하고 조촐한 주막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우리 저 집에 가 연꽃술이나 한잔 들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둘이 안으로 들어가 좌정하자 주모가 안주와 술을 내왔다. 황용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문득 동창 아래 놓여 있는 병풍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 많은 황용이 다가서서 병풍에 씌어 있는 글을 읽어보았다. 풍입송(風入松)이란 사(詞)였다.
<일춘장비매화전(一春長費買花錢) 일일취호변(日日醉胡邊)...., 명일중부잔취(明一重扶殘醉).>
[사의 내용이 그럴듯하군요.]
황용이 감탄하자 곽정은 그 글이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다. 황용이 한 구절 한 구절 짚어 가며 설명해 주었지만 곽정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긴 대송의 서울인데 사대부들은 종일 술이나 마시며 지냈지, 중원을 회복하겠다는 포부 같은 건 전연 없는 모양이로군.]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재주 있으면서도 나약한 선비를 제일 미워하는데 만약 이런 사를 보신다면 찾아가 단칼에 없애 버릴거예요.]
둘이 얘기하고 있는데 불쑥 등뒤에서 냉소 어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두 분이 무얼 아신다고 쓸데없이 떠들고 야단이신가요?]
그들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니 마흔 가량 됨 직한 선비 차림의 사람이 냉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곽정이 일어나 서며 읍을 했다.
[제가 몰라 그랬으니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순희(淳熙) 연간의 대학생 유국보(兪國寶)가 지은 것입니다. 당시에 효종 황제가 이곳에 오셔서 술을 자시다 이 사를 보시고 크게 칭찬하시면서 즉석에서 유국보에게 공명(功名)을 내려 주셨답니다. 이건 선비가 시절을 잘 만나지 못한 것을 비감하게 여겨 읊은 사인데 두 분이 무얼 안다고 감히 비평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이 병풍을 황제가 보셨다고 해서 이렇게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이죠. 병풍 가운데 명일중부잔취란 구절에 두 군데나 고친 흔적이 있지 않습니까?]
곽정과 황용이 유심히 살펴보니 부(扶) 자는 원래 휴(携)를, 취(醉)자는 원래 주(酒) 자를 고쳐 쓴 흔적이 역력했다.
[유국보가 쓴 것은 명일중휴잔주(明一重携殘酒)였는데, 황제가 웃으시며 사는 훌륭하지만 너무 그릇이 작아 보인다고 두 자를 고쳐 쓰신 것이라오.]
선비 차림의 그 사내는 말을 하면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탄사를 보냈다. 곽정이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황제까지 이렇게 취생몽사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로다.]
곽정이 발을 번쩍 들어 병풍을 걷어차자 병풍은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다.
원래 곽정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금나라 사람들의 잔학성에 대해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자랐다. 그리고 어머니는 송나라 사람들이 너무나 나약해 대항할 생각도 못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랬기에 곽정은 만약에 자기가 남행을 하면 통쾌하게 설욕해야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신 상하가 모두 음풍농월(吟風弄月)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음을 보자 더 참을 수가 없어 발길로 병풍을 차 부수고 선비 차림을 한 그자의 멱살을 잡아 흔들다 밀쳐 버렸다. 풍덩 소리와 함께 술방울이 사방으로 튀며 그자의 머리가 술독에 거꾸로 박혔다. 주막 안에는 술 향기가 진동했다.
황용도 옳다구나 하며 달려들어 허우적거리는 그자의 두 발을 잡아 꺾어 들어올려서 실컷 두들겨 팼다. 주막 안에 있던 손님과 주인은 영문도 모르면서 분분히 밖으로 달아났다.
둘이 신나게 두들겨 대는 바람에 술독이며 솥이 있는 대로 다 부서져 버렸다. 마침내 곽정이 항룡십팔장의 재주를 부려 기둥을 밀어 치자 기둥이 부러져 나가고 지붕이 내려앉아 삽시간에 주막은 기와 더미로 변해 버렸다.
그 앞에서 두 사람은 소리 높여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손을 마주잡고 북쪽을 향해 내달렸지만 누구 하나 감히 그 뒤를 쫓을 생각을 못했다.
[한바탕 야단을 부리는 바람에 울적했던 심사가 가셨군 그래.]
곽정이 웃으며 말하자 황용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또 아니꼬운 꼴 보거든 다시 한 번 시원하게 두들겨 부숴 버려요.]
둘은 호숫가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돌 위며 나무 위, 정자의 처마밑이 모두 시사(詩詞)로 가득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봄을 읊는 것이 아니면 기녀에게 바치는 것들 뿐이었다.
[우리 주먹이 천 개가 넘는다 해도 부술 게 너무 많아 다 부술 수가 없겠군. 용아는 뭣 때문에 이따위 시사까지 공부했지?]
[시사 가운데 훌륭한 것들도 있어요.]
황용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곽정은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래도 무공만이 쓸모 있는 것 같아.]
어느덧 그들은 비래봉 앞에 이르렀다. 그 앞에 취미정(翠微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가 하나 있었다. 글씨는 역시 한세충(韓世忠)이 쓴 것이었다. 곽정은 금나라에 대항해 싸운 명장이 직접 쓴 필적을 보자 반가운 나머지 단번에 정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정자 중앙에 돌비석이 하나 서 있고 그 위에는 시 한 수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 역시 한세충이 쓴 것이었다. 곽정은 읽어보더니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이 시는 정말 훌륭하군.]
[그건 악목왕(岳穆王) 악비(岳飛)가 지은 거예요.]
황용의 대답에 곽정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버지에게 들었어요. 소흥(紹興) 십일 년 겨울 악비 장군이 진회(奏檜)에게 살해된 다음해 봄, 한세충이 그분을 추도해 이 정자를 세우고 그분의 시까지 새긴 거예요.]
곽정은 오랫동안 정자 안에 머무르면서 전조의 명현들을 그리며 돌위에 새겨진 글씨를 어루만졌다.
곽정이 이렇게 넋을 잃고 있는데 황용이 돌연 몸을 낮추며 그의 옷소매를 거머쥐고 정자 뒤에 있는 숲 속으로 뛰어들어가 곽정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이어서 발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정자로 들어서며 말을 꺼냈다.
[한세충이야 물론 영웅이고 말고. 그의 부인이 창기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뒤에서 북을 치며 싸움을 격려하여 승리를 거두게 했으니 그녀 또한 여중 호걸이라 할 수 있지.]
곽정이 귀기울여 들으니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지만 누군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이어서 또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악비와 한세충을 영웅이라고들 하지만 황제가 죽으라면 죽고 병권을 해제하라면 해제했으니 제아무리 영웅이라 하더라도 명령에 좇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만 보더라도 황제의 위엄 앞에서는 꼼짝못하는 게 아닐까요?]
목소리를 듣고 보니 틀림없는 양강이었다. 그가 어째서 여기에 나타났는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곽정이 의아해 하면서도 여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바라 깨지는 듯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름아니라 서독 구양봉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군주가 제위에 앉아 정권을 잡고 있으면 제아무리 영웅호걸이 많다 하더라도 다 무용지물이지요.]
맨 먼저 말을 꺼냈던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밝은 임금이 있고 게다가 구양선생 같은 영웅호걸만 있다면 마음껏 포부를 펼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곽정은 이 두 마디에 비로소 그가 바로 아버지를 죽인 원수 대금국 육왕야 완안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세 사람은 계속 말을 주고받으며 정자를 떠났다. 곽정은 그들이 멀리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황용에게 물었다.
[저자들이 무슨 일로 이 임안에 왔으며 양강 아우는 어째서 저들과 함께 나타났을까?]
[저는 벌써부터 양강이 좋은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빠가 자꾸만 영웅호걸이라고 감싸는 바람에 공연히 나까지 어리숭하게 넘어가고 말았지요. 그래 양강이 좋은 일 하자고 저들과 함께 왔겠어요?]
곽정은 도대체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도 원, 그 까닭을 영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황용이 다시금 전에 조왕부 화취각(華翠閣)에서 들었던 얘기를 꺼냈다.
[완안열이 팽련호 등 그따위 인물을 끌어 모은 것은 악무목의 유서를 훔치기 위해서였는데 아무래도 그 유서가 이 임안성에 있나 봐요. 만약 저들이 그걸 손에 넣게 된다면 우리 대송의 백성들만 골탕먹을 텐데.]
[용아, 절대로 그들이 그걸 입수하는 걸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돼.]
[그런데 서독이 저들과 함께 있으니 일이 더 어렵게 됐지 뭐예요.]
[왜 무서운가? 서독이라면 나도 물론 무서워. 그러나 눈앞에서 이런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무섭다고 그냥 놔둘 수야 없지.]
이 말에 황용이 빙그레 웃었다.
[오빠만 무섭지 않다고 하시면 저도 무서울 것 없어요.]
[좋아, 그럼 저들의 뒤를 쫓자구.]
곽정과 황용은 그 즉시 정자를 빠져 나왔다. 그러나 완안열 등의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히는 수 없이 성안의 이곳 저곳 닥치는 대로 돌아다녀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항주성이 얼마나 넓은 곳인데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반나절을 찾아 헤맸지만 속절없이 날만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황용은 가면이 가득 걸려 있는 한 가게 앞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눈썹이며 눈동자가 생동하는 것이 근사한 가면이었다. 주백통에게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엽전 다섯 냥을 내고 가면 여남은 개를 샀다. 판관(判官)이며 토신(土神), 신병(神兵), 귀신(鬼神) 등 형형색색의 가면이었다.
가게 점원이 가면을 종이로 포장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주점에서 그윽한 술 향기가 풍겨 왔다. 둘은 반나절 이상 거리를 쏘다녔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황용이 넌지시 물었다.
[저건 무슨 주점인가요?]
[두 분은 이곳에 처음 오신 모양이로군요. 아무것도 모르시는 걸 보니. 이 삼원루(三元樓)의 안주며 기녀는 천하 제일이랍니다. 두 분이 한 번 가보시지 않으면 후회하실걸요.]
가게 점원이 웃으며 하는 말에 황용은 호기심이 일어 가면을 받아들고 곽정과 삼원루 앞에 이르렀다. 문 앞에는 오색 찬란한 비단이 드리워져 있고 치자나무 꽃등이 높직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마당 안에도 처음 보는 꽃이며 나무가 무성한 것이 과연 훌륭한 주점 같았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벌써 주모가 웃으며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촛불이 휘황한 가운데 회랑에는 수십 명의 기녀들이 화장을 곱게 하고 앉아 있었다. 곽정이 괴이하게 여기고 막 물어 보려는데 갑자기 옆방에서 완안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겠지요. 우리도 사람을 불러 노래나 시키며 술을 들지요.]
곽정과 황용이 서로 눈짓을 하며 생각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온종일 찾아다니다 허탕만 치고 돌아왔는데 일이 공교롭게 되었구나.)
심부름꾼의 대답 소리가 들리고 기녀 가운데서도 유난히 예쁘게 생긴 여자가 사뿐히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 기녀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황용과 곽정이 귀를 기울이니 과연 그럴듯한 노래였다. 상아로 만든 판목 치는 소리와 퉁소 소리가 약해지자 이윽고 노래는 끝났다. 완안열과 양강이 이구동성으로 감탄하며 기녀를 칭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노래를 잘 부르는군.]
이어서 기녀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악사와 함께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완안열이 두둑하게 상을 준 모양이었다.
[얘야, 노랫소리가 그럴듯하지?]
완안열의 물음에 양강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아버님, 아주 근사한데요.]
곽정과 황용은 그가 완안열을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서로 마주보았다. 곽정은 화도 나고 속도 상해 당장 뛰어들어가 양강을 한 주먹에 요절내고 싶은 충동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완안열과 양강이 있는 옆방에서는 계속해서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귀엣말이 오고 가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했으니, 우리 그만 해두고 술이나 듭시다.]
완안열의 말에 양강과 구양봉이 화제를 돌려 다른 얘기를 주고받는가 보았다. 황용이 곽정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홀가분하게 술이나 마시자고 왔는데 저자들 때문에 그만 흥이 다 깨지고 말았어요.]
둘이 슬그머니 나와 후원으로 갔다. 황용이 부싯돌을 켜 나뭇간에 불을 질렀다. 잠시 후 불길이 솟으며 삽시간에 주위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불이 야 불!]
이어서 꽹과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 빨리 앞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저자들의 뒤를 밟아요.]
황용의 제안에 곽정은 이를 부드득 갈며 낮은 소리로 부르짖었다.
[오늘 밤 저 완안열을 죽여 없애야 해!]
[우선 사부님을 모시고 궁궐부터 들어가기로 해요. 그리고 노완동을 시켜 서독과 대결하게 한 뒤에 우리 둘이 저들을 상대하면 그만큼 쉽지 않겠어요?]
[듣고 보니 용아의 말이 그럴듯하군.]
둘이 사람 틈을 비집고 나오는데 때마침 완안열, 구양봉, 양강 세 사람이 삼원루를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들과 멀리 떨어져 뒤를 밟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들이 서시장의 쌍봉(雙鳳) 객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곽정과 황용은 객점의 문밖에서 반시간 이상을 기다려 보았지만 완안열 등이 나오는 기척은 없었다.
[우리 그만 돌아가요. 나중에 노완동을 시켜 분풀이를 하면 어때요.]
그들은 금화 객점으로 다시 발길을 옮겼다. 미처 그들이 문앞에 당도하기도 전에 주백통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렸다. 곽정은 혹시 사부님의 상처가 더욱 악화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후닥닥 뛰어들어가 보니 주백통이 5,6명의 어린아이들과 함께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마 주백통은 부근의 어린아이들과 어울려 돈내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자기가 하도 지기만 하니까 어떻게 어물쩍 넘어가 보려고 수작을 부리다 그만 아이들에게 들통이 난 것이었다.
그는 황용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혹시 또 책망을 들을까 무서워 슬그머니 객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황용이 웃으며 가면을 꺼내 보이자 주백통은 희희낙락, 이것저것 써보며 수선을 떨었다. 잠시 후에 황용이 서독을 때려 주러 가자고 하자 주백통이 그 자리에서 좋다며 앞장서 나섰다.
[까짓것 문제도 아니야. 내 두 손을 가지고 두 가지 권법으로 두들겨 때려 줄 테니까]
황용은 당시 도화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주백통은 무의식중에 《구음진경》의 무공을 익혔던 터라 스스로 두 손을 묶고 자기 아버지와 대결하는 것을 피했던 것이다.
[그 서독이 정말 못돼먹었어요. 진경의 무공으로 그를 해친다 하더라도 사형의 유훈을 어기는 것은 아닐 거예요.]
황용이 이렇게 말하자 갑자기 주백통이 눈을 부릅떴다.
[그건 안 돼! 그러나 나도 진경의 무공이 아닌 다른 법문을 익혔으니까 서독쯤은 문제가 아니야]
이날 홍칠공의 마음은 벌써부터 궁중의 어주에 가 있었다. 가까스로 이경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곽정이 홍칠공을 업고 네 사람은 우선 황궁을 향해 출발했다. 그 황궁의 지붕은 민가보다 높은데다가 금빛이 번뜩거려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밥 한끼 먹을 시간도 채 못되어 그들은 벌써 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담장 위에 올라가 있었다.
궁내에는 칼을 찬 순라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그러나 주백통이나 곽정, 황용의 경공이 얼마나 훌륭한데 그들 순라군의 눈에 발각되겠는가? 홍칠공이 어주의 소재를 아는지라 낮은 소리로 길을 인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육부산(六部山) 뒤 가명전(嘉明殿) 동쪽에 있는 어주에 이르렀다. 이 가명전은 수라를 바치는 장소로 침궁(寢宮)이 있는 근정전(勤政殿)과는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더욱 경계가 삼엄했지만 황제는 벌써 침소에 든 후이고 어주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자기 처소로 돌아가고 없었다. 넷이 어주에 들어서니 촛불만 휘황하게 밝을 뿐 지키는 태감(太監)들도 하나같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곽정이 홍칠공을 부축해 대들보에 올려놓는 사이에 황용과 주백통은 찬장을 뒤져 먹을 것을 찾아다가 한바탕 포식을 했다.
[여보게 늙은 거지, 여기 음식이 황소저가 만든 것보다 맛이 없는 것 같은데 뭣 때문에 그렇게 오자고 야단을 치셨소?]
주백통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투덜거리자 홍칠공이 대답했다.
[나는 다만 원앙오진회를 먹고 싶다고 한 게요. 그 요리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내일 나타나기만 하면 당장 잡아 만들게 할 테니 그때 가서 맛이나 보시오.]
[난 그래도 황소저의 솜씨가 더 훌륭할 것으로 믿소.]
황용은 자기를 추켜세우는 주백통의 말을 들으면서 빙그레 웃기만 했다. 주백통이 단지 가면을 사다 준 것이 고마워 자기를 칭찬하는 것이려니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그 요리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흥미 없으시거든 곽정을 데리고 먼저 나가 보시오. 용아만 여기 나와 함께 있기로 하고 내일 밤 데리러 오기나 하시오.]
홍칠공의 말에 주백통은 성황보살(城隍菩薩)의 가면을 척 걸치고 히죽히죽 웃었다.
[아니오. 나도 여기 있으려오. 내일 이놈을 쓰고 황제를 한번 놀려 줘야지. 곽정 아우와 황소저는 나가서 서독을 좀 지키시오. 공연히 그러다 악비의 유서를 훔쳐 가지고 달아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노완동의 말씀에 일리가 있소. 너희들은 빨리 나가 보도록 해라. 조심들 해야 한다.]
곽정과 황용이 일어나 나오려는데 주백통이 다짐을 놓았다.
[절대로 오늘 밤 서독과 싸우지 말라구. 내일 내가 해치울 테니까.]
[우리가 이기지도 못할 텐데 뭣 때문에 싸우겠어요.]
황용은 이렇게 대답하고 서둘러 곽정과 함께 궁을 빠져 나왔다. 그들은 우선 쌍봉 객점에 가서 완안열 등의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궁전 모퉁이를 두 번 돌아가니 갑자기 시원한 미풍이 불어오며 어디에선가 물 소리가 들리고 바람에 실려 그윽한 향기마저 풍겨 오는 것 같았다.
황용은 꽃을 무척 좋아했다. 향기를 맡고 보니 가까운 곳에 화원이 있을 것 같았다. 황제의 금궁 안의 내원이고 보면 희한한 꽃이며 보기 드문 나무들이 많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회에 눈요기를 한번 실컷 해 두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즉시 곽정의 손을 잡고 꽃 향기를 따라 나섰다. 이상하게도 가까이 갈수록 시원해지면서 물 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둘이 지름길을 돌아 나오자 장송 수죽(長松修竹)이 하늘을 찌를 듯 숲이 울창하고 아늑한 곳이 나왔다. 황용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길이 도화도처럼 복잡하거나 묘하지는 않지만 화목의 아름다움만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다시 수장을 걸어나가자 은으로 발을 드리운 듯한 폭포가 눈앞에 펼쳐졌다. 산 위에서 쏟아지는 물이 커다란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그 연못 가운데는 희고 붉은 연꽃이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만발해 있었다. 연못 앞에는 화당(華堂)이 있는데, 취한당(翠寒堂)이라고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황용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름에 피는 말리꽃이며 소형(素馨), 사향등(麝香藤)이 가득했으며, 당 뒤로는 가란목(伽蘭木) 등 향나무가 우거져 짙은 향내를 뿜어냈다. 탁자 위에 신선한 과일과 부채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황제가 잠들기 전 이곳에서 바람을 쐬다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 황제 어지간히 복도 많군 그래.]
곽정의 말에 황용이 따라 웃었다.
[황제 노릇 한번 해보시지요?]
황용은 곽정의 손을 잡아 가운데 있는 나무 침상에 앉힌 다음, 무릎을 꿇고 과일 쟁반을 바치며 말했다.
[만세야(萬歲爺), 신선한 과일을 드사이다.]
곽정이 웃으며 그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경은 그만 일어서시오.]
[황제께서는 경을 보고 일어나라시는 법은 없는 것으로 사료되나이다.]
황용이 낮은 소리로 깔깔거리는데 그때 갑자기 먼 곳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둘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날려 가산 뒤에 숨었다. 둔탁한 발자국소리가 울리며 두 사람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황용은 달려오는 그들의 모습만 보고도 무예를 할 줄 모르는 자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거들떠보지도 말아요. 저 밥통들이 우리를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요.]
두 명의 호위병이 단도를 꼬나 들고 취한당 앞에 당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보 사(史)서방, 귀신 본 일 있소?]
호위병 중 하나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요즘 눈이 아파서....]
그리고는 호위병들은 물러 나갔다. 황용이 재미있다는 듯 생글거리며 곽정의 손을 잡고 막 나오려고 하는데 좀전의 호위병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닌가.
[에이, 에이.]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소리였지만 이쪽의 두 사람도 예사 인물은 아니었다. 혈도를 찔려 토해 내는 소리임을 알았다.
(아니, 주백통 형님이 심심하니까 쫓아 나오신 게 아닐까?)
곽정과 황용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폭포 옆의 정자가 바로 취한당이오. 우리 다 그쪽으로 갑시다.]
아니 이건 완안열의 목소리가 아닌가?
곽정과 황용은 깜찍 놀라 하마터면 자기들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둘은 마주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꼼짝 않고 희미한 별빛 아래서 취한당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안열 이외에도 구양봉, 팽련호, 사통천, 영지상인, 양자옹 등이 함께 왔다.
(저자들이 뭣 때문에 황궁에 들어왔을까? 그렇다고 어주의 음식을 훔쳐먹으러 온 것도 아닐 텐데?)
[악비가 남긴 그 서신을 유심히 연구해 보았고. 또 고종,효종 양대의 문헌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악무목의 유서는 틀림없이 이 대내의 취한당 동쪽에서 십오 보쯤 떨어진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완안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뭇 사람들의 눈초리가 동시에 완안열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취한당의 동쪽에서 15보 떨어진 위치라면 폭포 이외에 다른 장소는 없었다.
[이 폭포 아래 어떻게 책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문서를 관찰해 보면 틀림없이 이 장소거든요.]
완안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써 두 사람이 폭포를 뚫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물러 나왔다.
[왕야는 정말 훌륭하십니다. 과연 폭포 뒤에 굴이 있습니다. 굴 어귀를 철문으로 잠가 놓았을 뿐입니다.]
[악무목의 유서는 틀림없이 굴속에 있소! 자 여러분, 철문을 열고 들어가 봅시다.]
완안열은 뛸 듯이 기뻤다. 함께 온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 무림의 고수들이었다. 몸에는 보도며 보검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완안열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혹시 공(功)을 남에게 뺏기지 않을까 해서 일제히 폭포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구양봉만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완안열 옆에 서 있었다. 자기는 신분이 다르다고 체통을 생각한 것이었다.
사통천이 맨 앞장을 섰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폭포의 격류를 뚫고 얼굴을 디밀었다가 그만 강한 질풍에 얼굴을 얻어맞았다. 설마 하니 이런 곳에까지 적이 숨어 있으리라고 상상을 못했던 것이다. 사통천이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 피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왼팔을 홱 낚아챘다. 뒤이어 사통천이 무지무지한 힘에 끌어당기었다 밀리는 바람에 몸이 벌렁 날아가 넘어지면서 공교롭게도 양자옹을 들이받았다. 그나마 둘 다 무공이 강한 사람들이라 다행히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사통천이 또다시 폭포를 뚫고 들어가려고 했다. 이번에는 조심하며 두 손바닥으로 면전을 보호했다. 그런데도 폭포 안에서는 또 주먹이 날아왔다. 그가 왼팔을 들어 막는 동시에 오른팔로 반격을 했다. 적의 얼굴이나 형체도 미처 살피기도 전에 양자옹이 폭포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몽둥이 하나가 양자옹을 후려쳤다. 양자옹은 피하지 못하고 뒤로 벌렁 넘어지며 폭포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동시에 사통천도 무서운 장력의 힘에 밀려 폭포 밖으로 나왔다.
삼두교 후통해는 제일 우둔한 인간이라 사형의 무공이 어느 정도라는 것도 셈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그는 물에 좀 익숙하다는 것만 믿고 두 눈을 부릅뜬 채 폭포 안으로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팽련호는 일이 글렀다 싶어 도와줄까 하는데 난데없이 머리 위에서 사람 그림자 하나가 날아오더니 땅바닥에 쾅 떨어지면서 연이어 비명소리가 들렸다. 바로 후통해였다. 팽련호는 후통해에게 다가가서 낮은 소리로 물었다.
[쉿 조용히. 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빌어먹을...., 엉덩이가 깨졌나 봐요. 어이구 아파 죽겠다.]
팽련호는 놀라기도 했지만 웃음이 먼저 나왔다.
[설마 그럴 리가?]
팽련호가 그의 엉덩이를 만져 보았지만 별 이상은 없었다. 팽련호는 세심한 위인이라 그냥 안으로 뛰어드는 그런 모험은 피했다.
[그래, 안에 누가 있던가?]
후통해는 아파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냥 들어가자마자 얻어맞은걸요.]
그때 별빛 아래로 영지상인이 홍포 자락을 휘날리며 폭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서장말(西藏語)로 떠들썩하게 외쳐 대는 것이 아마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듯 싶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바라다보며 아연해 했다. 사통천과 양자옹이 비록 쫓겨나기는 했지만 어둠 속에서도 폭포 뒤에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남자는 장풍을, 여자는 죽장을 쓴다는 사실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때 또 영지상인의 비명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아마 된통 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완안열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니 저 사람이 주책없이 왜 큰소리를 치고 야단이람? 그러다가 순라군들이라도 달려오면 책이고 뭐고 다 틀릴 텐데....]
완안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의 눈앞이 번쩍하며 영지상인의 빨간 장삼이 폭포의 물줄기를 따라 연꽃이 만발한 못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의 병기인 두 개의 비발(飛 )이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팽련호는 혹시 비발이 땅에 떨어질 때 소리가 나 궁중을 소란하게 하지 않을까 해서 급히 손을 뻗어 잡았다. 그러나 폭포 안에서 뭐라고 떠드는 소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서장말로 지껄이는 욕소리가 들리더니 뚱뚱한 몸집 하나가 날아왔다. 아무래도 영지상인의 무공은 후통해와는 달랐다. 그는 사뿐히 땅에 내려서면서 욕을 퍼부었다.
[우리가 배에서 만났던 계집애와 그 녀석이오.]
곽정과 황용은 가산 뒤에 숨어 있다가 완안열이 골속에 들어가 책을 훔쳐내라는 말을 들었다. 만약 이 악무목의 유서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는 날에는 틀림없이 금나라 병사들이 거기 씌어진 병법을 악용해 송나라를 치러 올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그렇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구양봉이 여기 있으니 정면으로 대결하고 나설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묵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용은 어떻게 해서든 묘책을 꾸며 그들을 놀라게 해 물러서게 하려고 했지만, 곽정은 상황이 급박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황용이 주저할 틈도 주지 않고 잽싸게 그녀의 손을 잡고 가산의 뒤에서 폭포 뒤쪽으로 숨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워낙 커서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곽정과 황용은 있는 힘을 다 발휘해 사통천 등을 물리치고 나니 기분이 여간 좋지 않았다. 정말 《진경》 가운데 있는 역근단골편의 위력이 이토록 대단한 줄은 몰랐다. 또한 황용의 타구봉법이 변화무쌍하고 무궁무진한 것에도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은 사통천 등이 패해 물러났으니 이번에는 구양봉이 나타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 살수를 쓰는 날에는 둘의 목숨은 위태로울 것이 틀림없었다.
[곽정 오빠, 우리 빨리 밖으로 나가 큰소리로 떠들어요. 그래서 궁내의 병사들이 몰려오면 저들도 손쓸 겨를이 없지 않겠어요?]
[그래그래, 용아가 먼저 나가서 소리를 질러. 난 여기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곽정 오빠, 절대로 노독물과 대결해서는 안 돼요.]
[그래 빨리 나가 보도록 해.]
황용이 막 폭포 뒤로 빠져 나가려는데 끙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강한 힘이 폭포 밖에서부터 밀려왔다. 둘은 감히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각기 양쪽으로 뛰어 피했다. 쿵 하면서 구양봉의 합마공이 터진 것이다. 강한 물줄기와 함께 무지무지하게 센 강풍이 폭포 안을 향해 밀려들어 철문에 와 맞으며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황용이 급히 옆으로 피하기는 했지만 등뒤를 합마공의 장력에 맞았다. 정통으로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지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러나 황용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훌쩍 빠져 나왔다.
[자객을 막아요. 자객을....]
황용은 큰소리로 외치며 앞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렸다.
[저놈의 계집애부터 없애고 봅시다.]
황용이 자객을 잡으라고 외치는 바람에 취한당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 뛰쳐나왔고 그 뒤를 이어 사방에서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황용이 지붕 위로 뛰어올라 기왓장을 주워 들고 우당탕 소란을 부렸다. 팽련호와 양자옹이 양쪽에서 황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완안열은 그런 경황중에도 침착했다.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한 옆사람에게 나지막하게 외쳤다.
[강아. 너는 구양선생을 따라 들어가 책을 꺼내 오너라.]
복면의 사내는 다름 아닌 양강이었다. 이때 구양봉은 벌써 폭포 안으로 들어가 구부려 앉은 자세로 다시 한 번 끙 기합 소리를 내며 힘을 주어 밀자 굴 안의 양쪽 철문이 안쪽을 향해 날아갔다.
구양봉이 막 발길을 옮겨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는 순간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번쩍 스쳤다. 사람이 채 나타나기도 전에 벌써 장풍이 밀려왔다. 솜씨는 역시 비룡재천(飛龍在天)이었다. 구양봉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동요했다.
(아직은 저 어린것에게 진경의 괴문(怪文)을 배워야 하니 오늘 차라리 잡아가야겠구나.)
곽정이 허공에서 덮쳐 오는 것을 포착한 구양봉은 몸을 한쪽 구석으로 피해 일격을 막음과 동시에 손을 길게 뻗어 그의 등덜미를 낚아챘다.
곽정은 이때 벌써 생명의 위험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어쨌든 동굴을 지켜 적의 진입을 막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시간을 끌다 보면 궁내의 순라군들이 몰려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들은 달아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구양봉이 살수를 쓰지 않고 자기를 생포하려고 드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왼손을 들어 막으며 동시에 오른손은 공명권법으로 적의 어깨를 향해 쪼갰다.
곽정은 막고 쪼개는 쌍수호박의 기술에다가 공명권법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아무래도 항룡십팔장처럼 위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영이 번뜩이며 상대를 당혹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구양봉은 아주 대견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밀어 곽정의 오른쪽 팔뚝을 잡으려고 했다.
원래 구양봉은 무인도에 있을 때부터 곽정이 써 준 경문을 가지고 연공을 시작했다. 그런데 익히면 익힐수록 어딘가 이상했다. 그러나 그 경문은 곽정이 마음대로 고쳐 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다만 의미심장한 것이라 난해한 것이려니 여겼을 따름이었다. 뒤에 홍칠공이 뗏목 위에서 중얼중얼 외우는 괴문을 들으며 바로 저것이 진경을 깨치는 열쇠인가 보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곽정과 대결할 때마다 일취월장하는 곽정의 재주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놀랍고 반가웠다. 놀라운 것은 그의 진보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요, 반가운 것은 진경이 이미 자기 수중에 들어와 있으니 앞으로 자기의 진보는 한량이 없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지난번 뗏목 위에서는 1대 2의 대결이라 결사적으로 맞섰지만 이번에는 자기가 유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가지고 여유만만하게 나섰던 것이다.
이때 궁내의 순라군들이 초롱불과 횃불을 대낮처럼 밝히며 취한당의 주위로 벌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완안열은 구양봉과 양강이 폭포 안으로 들어간 지 이미 오래건만 나올 생각은 커녕 무소식인데 궁중의 순라군은 계속 몰려들어 대사는 이미 글렀다는 조바심에 발만 동동거리며 안타까워했다. 다행히도 순라군들은 고개를 젖히고 지붕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팽련호와 양자옹이 합세하여 황용을 뒤쫓는 진풍경에 넋을 잃고 있을 뿐, 폭포 뒤에서 또 하나의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순라군들이 이곳으로 몰려오면 대사는 끝장나는 것이다. 속으로만 애를 태우며 어쩔 줄 몰라 서성대는 완안열의 모습은 정녕 딱했다.
이를 본 영지상인이 말을 꺼냈다.
[왕야께서는 너무 당황하지 마십시오. 소승이 다시 한 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영지상인은 좌장을 흔들어 몸을 막으며 다시 폭포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동굴에서는 때마침 구양봉이 곽정과 대결하고 있었고, 양강은 몇 차례나 굴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좀처럼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화광 속에 비쳤다. 영지상인은 구양봉의 소극적인 방어를 보자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이 어느 땐데 저렇게 답답하게 연공을 하고 있나 싶어 벌컥 심사가 뒤틀렸다.
[구양선생, 제가 도와드리리다.]
[저만큼 물러가 계시오!]
구양봉이 버럭 큰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땐데 무슨 놈의 영웅호걸이 따로 있단 말이며 무슨 말라빠진 대종사의 거드름을 아니꼽게 부린단 말이야?)
이렇게 생각한 영지상인이 몸을 숙이고 곽정의 왼쪽을 공격하기 위하여 자기 특유의 대수인(大手印)으로 그의 태양혈을 노렸다. 화가 난 구양봉이 앞으로 나서며 영지상인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밖으로 낚아챘다. 원래 영지상인의 대수인은 공력이 대단했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독까지 묻어 있었다. 구양봉은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 당일 배에서 만나 한 번 보고도 그걸 알았다. 대수인의 공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온 정신을 한쪽의 수장(手掌)에만 쏟았다. 그래서 뒤는 늘 허를 보이게 마련이었다. 구양봉이 손을 썼으니 안 잡히고 배길 장사가 있겠는가?
영지상인은 잡히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라 온갖 욕을 다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서장말로 욕설을 퍼부어대니 구양봉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게다가 구양봉에게 덜미가 잡혀 허공에 발랑 나자빠져서 입을 쩍 벌리고 연신 욕을 내뱉으니 폭포 물이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결국 그는 물만 실컷 켜고 말았다.
완안열은 영지상인이 구름처럼 허공을 날아와 떨어지는 꼴을 보았다. 와지끈뚝딱, 취한당 앞에 놓인 화분들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때 궁중의 순라군들이 우르르 이쪽으로 몰려왔다. 완안열은 큰일났다 싶어 도포 자락을 틀어잡고 폭포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도 약간의 무공을 안다지만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폭포 물에 눌리고 발 밑이 미끈하는 바람에 벌렁 나자빠졌다. 양강이 이를 보고 재빨리 달려들어 부축했다. 완안열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살폈다.
[구양선생, 능히 저 어린 것을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 한마디만 듣고도 완안열이 얼마나 능수능란한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완안열은 구양봉이 누가 간청을 하기나 호통을 친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을 인물임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담담하게 던지는 이 한마디에 구양봉이 꼼짝없이 곽정을 내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었다.
[까짓것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구양봉은 몸을 숙이고 끙 하며 기합을 넣었다. 예의 합마공이었다.구양봉은 필생의 힘을 쏟아 부어 쌍장을 뻗어 곽정을 힘껏 밀어붙였다. 설사 홍칠공이나 황약사라 하더라도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을 텐데 하물며 곽정이 어떻게 당해 낸단 말인가!
구양봉은 이제까지 곽정과 대결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가 공명권의 재주를 하나하나 자기 앞에서 쓸 수 있도록 유도해 왔다. 초술이 오묘하고 변화무쌍한 공명권을 보면서 내심 곽정에게 찬사를 보내며 공명권을 끝까지 다 쓰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완안열이 끼여들어 단 한마디 말로 그를 자극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곽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그를 놀라게 하여 그 자리만 잠시 피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곽정은 만강의 충성심으로 무목의 유서를 지킬 각오로 충만해 있었다. 만약에 자기가 그 자리에서 1보만 양보해도 동굴 문이 열리고 유서는 틀림없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 줄 알았다. 밖에 궁중의 순라군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 누가 감히 구양봉과 같은 사람을 당해 내겠는가.
곽정은 대단한 돌격을 의식하면서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즉시 두 발로 땅을 찍으며 4가 정도의 높이로 치솟아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굴 앞을 막아섰다.
[좋구나!]
구양봉이 찬사를 보내며 쌍장을 거두어 들었다. 쌍장을 뻗을 때의 힘도 수백 근이 넘지만 거두어 들일 때 역시 수백 근이 넘는 위력이었다. 곽정은 등뒤의 강한 힘을 의식하고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끼는 동시에 신룡파미의 재주로 뒤를 향해 휘둘렀다.
삽시간에 쌍방의 몸이 모두 뻣뻣하게 굳었다. 고수들의 대결 가운데 이와 같은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강약이 판정되는 순간이요, 생사가 달린 결판이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손색이 있으면 죽거나 아니면 중상을 입는다. 곽정은 위험을 의식했지만 구양봉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자기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완안열은 양쪽이 다 빳빳한 시체처럼 굳어 숨도 죽인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모양을 지켜보면서 의아해 했다.
짧은 시간이 흘렀다. 곽정은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구양봉은 이렇게 계속 버티면 상대방이 중상을 입을 것을 알았다. 그래도 곽정을 살리고 싶어 반격할 기회를 주리라 마음먹고 힘을 살짝 뺐다. 그런데 가슴이 뜨끔 조이며 상대방의 장력이 엄습했다. 그의 공력이 조금만 부족해도 쓰러졌을 것이다.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저 어린 나이에 어디서 저런 장력이 솟아난단 말이냐?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반격했다. 그가 만약 힘을 조금만 더 써도 곽정을 물리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잠시 더 이렇게 버티다가 곽정의 힘이 쇠약해지기를 기다려 사로잡을 작정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대결의 순간이었지만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완안열과 양강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폭포 밖에서는 횃불이 휘황하게 비치고 떠드는 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양강이나 완안열은 일각이 여삼추였다. 이때 후닥닥 두 명의 위병이 폭포를 뚫고 나타났다.
양강이 앞으로 덮치며 한 손에 하나씩 위병의 정수리를 찔렀다. 그는 마침내 구음백골조의 솜씨를 발휘하여 두 명의 위병을 해치웠다. 순간 피비린내가 굴 안에 퍼졌다. 그때 또 양강은 신발 옆에 꽂고 다니던 비수를 뽑아 들고 곽정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곽정은 그 순간 결사적인 힘을 다하여 구양봉의 장력에 버티고 있었다. 어느 겨를에 이 비수를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자기의 옆구리를 겨냥해 비수가 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힘을 조금이라도 풀기만 하면 서독의 합마공에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때문에 비수는 거들떠보지도 못하고 있다가 옆구리가 뜨끔해서야 숨을 죽이고 본능적으로 양강의 팔을 내리쳤다. 곽정과 양강의 실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곽정의 단 한 번 타격에 양강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양강이 급히 손을 움츠리기는 했지만 이미 비수는 반 이상이나 곽정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곽정은 등뒤가 합마공에 눌려 신음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곽정이 쓰러지자 구양봉의 입에서는 아깝다는 탄식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이제 곽정이 살아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더 이상 거들떠 볼 필요조차 없었다. 여하튼 악무목의 유서를 입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려 세워 굴 안으로 들어섰다. 완안열과 양강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때 궁중의 위병들도 분분히 달려들었다. 구양봉은 몸도 돌리지 않고 손만 뒤로 뻗어 그중 하나를 낚아채 밖으로 집어 던졌다. 그가 눈도 돌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위병들을 집어던지자 다른 위병들은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양강이 횃불을 들어 굴 안의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다. 바닥에 먼지가 쌓인 것이 오랫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굴 한가운데에 돌탁자 하나가 놓여 있고 그 탁자 위에 역시 돌로 만든 함이 보이는데 함의 뚜껑이 봉해져 있을 뿐 다른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양강이 횃불을 바짝 대고 살펴보았지만 석함을 봉한 종이 위의 글씨가 오래 된 탓으로 희미하게 퇴색하여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를 본 완안열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그 책이 이 석함 속에 들어 있을 것이다.]
양강이 반가워 손을 뻗어 집어들려고 하는데 어느새 구양봉이 어깨로 그의 등을 살짝 밀었다. 양강은 비틀비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그만 나둥그러졌다. 양강이 영문을 몰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구양봉은 벌써 석함을 옆구리에 꼈다.
[대사는 성공했으니 우리 그만 물러가자.]
완안열이 외쳤다.
第 四十七 章. 밀실의 위기
구양봉이 앞장서 길을 뚫으며 세 사람은 내달리기 시작했다. 양강은 선혈이 낭자한 채 꼼짝못하고 몇 명의 위병과 함께 쓰러져 있는 곽정을 보자 뭔가 마음에 섬뜩 찔리는 게 있었다.
(괜히 뭐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참견하기 좋아하다가 그랬으니 나를 나무랄 수도 없을 테지.)
그러나 자기의 비수가 아직도 그의 몸에 박혀 있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가 즉시 몸을 숙여 비수를 빼려고 하는데 폭포 밖에서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곽정 오빠! 곽정 오빠, 어디 계셔요!]
양강은 황용이 들어온 것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곽정 옆구리에 꽂힌 비수고 뭐고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다. 양강은 곽정을 펄쩍 뛰어넘어 양자옹의 뒤를 쫓아 달려나갔다.
그 무렵 황용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팽련호, 양자옹과 더불어 지붕 위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내의 호위병들이 운집하자 팽련호와 양자옹도 놀라 추격을 포기하고 사통천 등과 함께 폭포 쪽으로 밀려 완안열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폭포 앞에서 호위병 몇 명을 살해하는 동안 구양봉도 빠져 나왔다.
황용은 곽정이 걱정되어 다시 폭포 안으로 들어와 몇 차례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자 몹시 당황했다. 불을 밝히고 둘러보니 곽정이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자기 발 밑에 누워 있는 게 아닌가. 황용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손이 바들바들 떨려 들고 있던 불을 놓치고 말았다. 폭포 밖에서는 자객을 잡으라는 호위병들의 고함소리가 어지러웠다. 구양봉이 호위병을 잡아 던지는 바람에 10여 명의 호위병이 또 박살이 나자 다른 위병들은 감히 달려들지는 못하고 소리만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황용은 허리를 굽혀 곽정을 보듬어 안고 맥을 짚어 보니 손이 아직은 따뜻했다. 황용은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어 곽정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 보았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사람이 무슨 대답인들 할 수 있으랴, 황용은 그를 등에 업고 슬그머니 폭포 옆을 빠져 나와 가산 뒤에 숨었다. 이때 취한당 주위는 횃불과 초롱불이 대낮처럼 밝게 비치고 있었다. 다른 곳의 호위병들도 소식을 듣고 분분히 몰려들었다. 황용이 제아무리 빠르다지만 여러 사람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벌써 위병 몇 명이 그녀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아니 저 바보 같은 것들이 진짜 악당은 쫓지 않고 오히려 자기편을 잡으려 들어.)
황용은 속으로 욕을 하며 이를 악물고 앞을 향해 달렸다. 무공이 비교적 뛰어난 호위병 몇이 그녀 뒤를 바짝 쫓았다. 황용이 금침을 내어 뿌리자 아이쿠 비명을 지르며 그중 몇 명이 고꾸라졌다. 나머지 위병들은 놀라 눈을 멀뚱멀뚱 뜬 채 그녀가 곽정을 업고 황궁의 담장을 뛰어넘는데도 닭 쫓던 개마냥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러 사람이 이렇게 부산을 떠는 바람에 궁중은 발칵 뒤집혔다. 어두운 밤이라 황족이 임금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모반을 한 것인지, 아니면 신하가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궁위(宮衛)며, 어림군(御林軍), 금군(禁軍)이 벌집 쑤셔 놓은 듯 했지만 통군장령(統軍將領) 가운데 누구 하나 소란이 어디서 일어난 것인지 알아보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공연히 온밤을 소란만 피우다가 날이 밝아서야 성안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완안열 등은 벌써 성을 빠져 나간 뒤였고 황용은 황용대로 곽정을 업고 지난날 묵었던 조그만 시골 마을에 돌아와 있었다.
황용은 궁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도대체 동서남북 방향을 미처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애써 떨리는 가슴을 누르고 뒤쫓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발길을 늦추어 골목길로 숨어 들었다. 황용은 곽정이 혹시 죽지나 않았나 걱정스러워 연신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맥은 뛰고 있었다. 그러나 부싯돌을 궁중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업고 돌아다니다 날이 새기나 하면 곤란할 것 같아 즉시 성벽을 뛰어넘어 바보 소녀가 사는 객점으로 달려갔다.
황용이 일신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등에 곽정을 업은 채 온밤을 헤맨데다가 놀라고 당황한 탓인지 바보 소녀의 객점으로 들어서자마자 허물어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황용은 잠시 숨을 가라앉히고 다시 일어나 관솔을 찾아 불을 밝히고 곽정의 상태를 살펴보다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곽정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얼굴이 백짓장처럼 흰 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용은 곽정이 부상을 입은 모습을 몇 차례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처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황용은 오장육부가 다 갈기갈기 찢어져 나가는 듯 가슴이 아파 관솔불을 든 채 넋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관솔불을 조용히 받아 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바로 그 바보 소녀였다. 인기척을 듣고 나타난 것이다.
바보 소녀도 곽정의 이런 모습을 보고 놀랐는지 부엌으로 가 냉수 한 사발을 떠가지고 왔다. 황용이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셔 곽정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는데 갑자기 그의 호흡이 더 가냘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어디를 다쳤는지 찾아보려던 참이었는데 화광이 번쩍이며, 그의 허리에 비수 한 자루가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황용의 놀람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살며시 그의 옷깃을 찢어 보니 비수 양날에 피가 엉겨 붙은 채 칼날이 살 속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멈칫했다. 당장에 비수를 뽑아 버리자니 아무래도 그의 생명이 위험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고 시간만 끌다가는 더욱 악화될 것 같았다. 황용은 큰맘 먹고 이를 악물고 비수를 뽑으려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그만 손을 움츠리곤 했다.
몇 번이나 해보려 했지만 종내 결심이 서질 않았다. 바보 소녀가 이를 답답하게 여겼던지 황용이 네 번째 손을 움츠리는 모습을 보고 곽정에게 달려들어 비수를 힘껏 잡아 뽑았다. 곽정과 황용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지만 바보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오히려 깔깔거리고 웃었다.
황용은 곽정의 상처에서 선혈이 샘솟듯 흘러나오는데도 낄낄거리는 바보 소녀가 못마땅해 손바닥을 뒤집어 힘껏 후려갈겼다. 그리고는 소녀가 벌렁 나자빠지는 것을 보며 부리나케 손수건을 꺼내 곽정의 상처를 눌렀다.
바보 소녀가 넘어지는 바람에 관솔불이 꺼져 방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화가 난 소녀가 벌떡 일어나 황용을 걷어찼지만 황용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차였다. 그래도 바보 소녀는 황용이 반격할까 걱정되었는지 다시 한 번 걷어차고는 휙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잠시 후 황용이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고 바보 소녀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관솔에 불을 밝히고 들어와 물었다.
[차인 데가 아파서 그래요?]
비수를 뽑을 때의 아픔 때문인지 곽정은 희미하게나마 정신을 차렸다. 황용이 자기 옆에 꿇어 엎드려 있는 것이 불빛 아래로 보였다.
[악비의 병서를 그놈들이 끝내 훔쳐 갔는가?]
황용은 곽정의 목소리를 듣자 너무나 반가웠다. 그리고 그 일을 잊지 않고 묻는 그의 말에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이 손도 대지 못했으니까요....]
곽정에게 상처가 아프지 않냐고 물으려는데 손가락 새로 뜨끈뜨끈한 선혈이 낭자하게 흘렀다.
[용아, 왜 울어?]
곽정이 힘없이 묻는 말에 황용이 쓸쓸하게 웃었다.
[울지 않았어요.]
이때 바보 소녀가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방금 울었대요. 울고도 안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는군요. 보세요, 얼굴에 눈물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걸요.]
[용아, 걱정할 것 없어. 구음진경에 치료 방법이 씌어 있거든. 난 죽지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 황용은 한 가닥 서광이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어떻게 치료하면 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행여 대답을 하다가 힘이 더 빠지지 않을까 싶어 그냥 꿀꺽 삼키고 옆에 있는 바보 소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웃었다.
[언니, 방금 내가 너무 아프게 때렸지요? 내가 우는 걸 분명히 보았는데 거짓말이야.]
바보 소녀는 그래도 황용이 운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에 황용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울었다고 합시다. 하지만 아가씨는 안 울었으니 장해요, 장해.]
소녀는 자기를 칭찬하는 말에 기분이 꽤 좋은 눈치였다.
곽정은 운기를 하면서 통증을 참다가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용아, 내 정촉혈(精促穴)과 소요혈(笑腰穴)을 금침으로 몇 번 찔러 봐.]
[그래요. 내가 정말 정신을 놓고 있었군요.]
황용은 즉시 금침을 꺼내 그의 왼쪽 허리 부위의 상처 아래위에 있는 혈도를 각기 세 번씩 찔렀다. 이는 유혈을 늦추고 통증을 가라앉히는 방법이었다.
[용아, 꽤 깊이 찔리기는 했지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야. 곤란한 것은 노독물의 합마공에 얻어맞은 것인데 그래도 다행히 그가 전력을 쓰지는 않은 것 같아 괜찮아. 하지만 아무래도 용아가 칠일 낮 칠일 밤은 고생할 것 같군]
[그야 칠십 년이면 무슨 상관이 있나요. 오빠를 위한 일이라면 즐거울 뿐인걸요.]
곽정은 이 말이 너무나 흐뭇해서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 마음을 다독이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때 사부님이 부상을 당하셨을 때 내가 즉시 그분을 뵙지 못해 치료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 생각할수록 원통해. 제아무리 사독(蛇毒)이 무섭다 해도 어느 정도 치료할 자신은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 이것저것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오빠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이나 빨리 말씀해 주세요.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군요.]
[우선 깨끗하고 조용한 장소가 있어야 돼. 그리고 우리 둘이 진경에 적힌 방법대로 동시에 운기를 하는 거야. 서로 손바닥을 마주 대고 용아의 공력으로 내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지. 가장 어려운 것은, 칠일 낮 칠일 밤을 해야 하는데 두 사람의 손바닥이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안 되며 함께 호흡을 맞춰 숨을 쉬어야 해. 둘은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과는 절대 금물이고 일어서서도 안 되고 반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더욱 큰일이지. 만약 누가 와서 소란이라도 부리는 날에는 그만 모든 것이.... 끝장나는 거지.]
황용은 이러한 치료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앉아서 수련해야 하는 무공과 그 이치가 상통하는 것이다. 일이 원만히 성공을 거두기 전에 외부로부터 장애를 받거나 내심의 동요로 간섭받는 날이면 만사는 끝장이다. 여태까지 쌓아 온 모든 공력을 잃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손실이 작으면 중상이요, 잘못하다가는 생명까지 잃는다. 그래서 일반의 무학 지사들도 연공(練功)을 할 때는 무공이 높은 사우들이 옆에서 보호해 주곤 한다.
황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내가 도와준다면 치료는 되겠지만 저 바보 소녀에게 보호해 달래 봐야 소용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자기가 나서서 방해할 것이 뻔하다. 조용하고 아늑한 곳을 물색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혹시 주백통 선생이 돌아오신다 하더라도 번연히 답답해할 것인데 어떻게 칠일 낮 칠일 밤을 견딘단 말인가?)
황용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찬장에 눈길이 미치자 갑자기 그 밀실이 생각났다.
(됐다! 그곳이면 충분하지. 밀실에 숨어 치료하면 돼. 당시 매초풍이 연공할 때도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어 지하의 굴속에서 하지 않았던가?)
어느새 날이 희뿌옇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바보 소녀가 부엌으로 들어가 죽을 끓여 왔다.
[곽정 오빠, 잠시 쉬고 계셔요. 먹을 것 좀 준비해 올게요. 그럼 우리 즉시 치료를 시작해요.]
날씨가 덥고 보니 밥이나 반찬을 7일 동안이나 놔두었다가는 썩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수박을 사기로 했다. 수박 장수가 수박을 두 짐 져다 풀어놓으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우가촌(牛家村)의 수박은 달고 맛있기로 유명하지요. 아가씨도 맛을 보면 금방 아실 겁니다.]
황용은 우가촌이란 말을 듣자 문득 가슴이 서늘해졌다.
(원래 여기가 우가촌이었구나. 그럼 바로 곽정 오빠의 고향이 아닌가?)
그러나 혹시 곽정이 들으면 흥분할까 봐 그녀는 어물어물 그 수박장수를 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곽정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허리의 상처도 피가 멎어 있었다.
황용은 찬장을 열고 쇠그릇을 몇 바퀴 돌렸다. 밀실의 문을 열고 수박 두 짐을 하나하나 안으로 들여놓았다. 바보 소녀에게는 안에 누가 있다는 말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하늘이 무너져도 밖에서 부르지 말라고 천번 만번 거듭 부탁했다. 바보 소녀는 그 의도는 몰랐지만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하고 또 말도 또박또박 해주는 바람에 연신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 속에 숨어서 수박을 다 먹고 나오겠다는 말이군요. 내 말이 맞지요? 그렇다면 말 안 할게요.]
[그래요, 아가씨가 말을 하지 않으면 착한 아가씨요, 말을 하면 나쁜 아가씨예요.]
[그럼, 말을 않고 착한 아가씨란 칭찬을 들어야지.]
황용은 곽정에게 죽 한 사발을 먹이고 자기도 한 그릇을 비웠다. 그런 뒤 곽정을 부축해 밀실로 들어서며 안에서 문을 잠그려고 하는데 바보 소녀가 또 한 번 순박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에게 말했다.
[나 절대로 말 안 할게요.]
이 말을 듣는 순간 황용은 불쑥 의구심이 일었다.
(아가씨가 저토록 어리숙한데 다른 사람을 만나서도 저런 말을 하지 않을까?)
바보 소녀가 또다시 혼자 중얼거렸다.
[그들이 찬장 속에 숨어 수박을 먹고 있지만 난 아무에게도 말 않는다.]
(차라리 죽어 없애야만 후환이 없겠구나.)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훈도를 받고 자랐다. 인의며 도덕이니 하는 것들을 별로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정사(正邪)며 시비(是非)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바보 소녀가 곡령풍(曲靈風)과 무슨 관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곽정의 생명에 영향이 있다면 열 번이라도 죽일 수 있었다. 황용은 곽정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비수를 뽑아 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곽정의 표정 속에서 자기를 의심하는 듯한 이상한 눈치를 읽었다. 살기등등한 자기의 표정을 보고 벌써 눈치챈 것 같았다.
(내가 저 바보 소녀를 죽이는 일이야 대단할 것 없겠지만 곽정 오빠가 쾌차한 후 이 일을 가지고 날 야단치면 어쩌지? 나를 책망하는 것쯤이야 시간이 흐르면 그만이지만 일평생 말도 건네지 않고 마음속으로 날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하는 수 없이 그냥 모험을 할 수 밖에 없겠구나.)
황용은 단념하고 문을 닫아걸고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서쪽 천장 부근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 간신히 햇빛이 비쳐 들어 실내를 희미하게나마 밝히고 있었다. 그 옆에 통풍 구멍이 있는데 먼지가 꽉찼다.
그녀는 비수를 들어 통풍 구멍을 다시 뚫어 놓았다. 곽정이 벽에 등을 댄 채 빙긋이 미소 지었다.
[정말 요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로군. 시체 둘을 옆에 놔두고도 무섭지 않아?]
황용은 마음속으로 은근히 떨고 있었지만 태연한 태도를 보였다.
[하나는 내 사형이니 나를 해칠 리 없구요, 다른 하나는 밥통 같은 장군이니 살아 있다 하더라도 무서울 것 없을 텐데 까짓것 죽은 시체가 무서울 게 뭐 있어요?]
황용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면서 두 구의 해골을 북쪽 모퉁이로 밀어붙였다. 그리고는 수박을 깔아 놓았던 짚을 바닥에 깔고 수박을 주위에 둥그렇게 둘러놓아 먹고 싶을 때는 아무때나 손만 뻗으면 집어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요?]
[좋군. 그럼 우리 시작해 볼까?]
황용은 곽정을 부축해서 깔아 놓은 짚 위에 앉히고 자기도 그의 왼쪽에 바싹 붙어 앉았다. 고개를 드니 동전만한 구멍이 하나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녀는 너무나 반가워 하마터면 큰소리를 지를 뻔했다. 벅 속에 조그만 거울이 박혀 있어서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밀실을 만든 사람의 용의주도한 설계였다. 자기는 밀실에 숨어 있어도 거울 속으로 외부의 동정을 감시할 수 있었다.
황용에게는 바보 소녀가 땅바닥에 앉아 누에콩을 까 입 안에 털어넣으며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말소리까지도 또렷이 들렸다. 아마도 자장가를 읊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우습게 들렸지만 들을수록 마음이 이상하게 일렁거렸다.
(자기 엄마가 불렀던 자장가인지도 몰라.... 나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다면 저런 자장가를 부르시며 나를 얼러 주셨을 텐데....)
[용아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내 부상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
곽정의 말에 황용은 얼른 눈물을 훔치고 해맑게 웃었다.
[치료할 연공법이나 빨리 알려 주셔요.]
그래서 곽정은 《구음진경》 가운데의 요상편(療傷篇)을 처음부터 한번 외서 황용에게 들려주었다.
무술을 하는 데는 늘 이런 말을 듣는다.
[미학타인 선학애타(未學打人 先學 打).]
때리는 것을 배우기 전에 얻어맞는 것부터 배우라는 뜻이다. 무공이 약할 때는 우선 사부로부터 어떻게 얻어맞고 또 어떻게 해야 중상을 입지 않는가부터 입문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무공이 깊어져야 호신술을 배우고 해혈(解穴)과 구상(救傷), 접골(接骨), 요독(療毒) 등 가지가지 법문(法文)을 익히는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속담과 마찬가지로 제아무리 훌륭한 무공을 지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실수를 하는 날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음진경》의 요상편에는 바로 그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황용은 한 번 듣고 벌써 다 기억했으나 두서너 군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곽정은 전진파 내공에 조예가 깊었고 황용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총명이 대단했다. 잠시 의논해 본 후 결국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곧 이어 황용은 오른손을 뻗어 곽정의 왼손 장심에 댄 채 용공(用功)을 시작했다.
두 시간을 연공하면 잠시 쉴 수가 있었다. 황용은 왼손에 칼을 쥐고 수박을 쪼개 곽정과 나눠 먹을 수는 있었지만 두 사람이 손바닥을 뗄 수는 없었다. 미(未)시까지 연공을 하자 곽정은 가슴의 답답한 증세가 상당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황용의 장심에서 전해 오는 열기가 서서히 전신에 퍼지며 허리의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다. 《진경》이 정말 신통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때일수록 해이해지면 안 되었다. 계속 연공을 해야 했다.
세 번째 휴식을 취할 때는 천장에서 스며 들어오던 햇빛이 점점 쇠잔해지고 있었다. 황혼이 깃들이기 시작했다. 곽정의 가슴만 시원해진 것이 아니라 황용까지도 정신이 더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둘이 몇 마디 한담을 주고받은 후 막 연공을 시작하려는데 밖이 왁자지껄해지며 사람들이 달려 들어오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렸다.
[빨리 밥 가져 오라고. 나으리들 배고파 죽을 지경이다.]
거친 말소리가 들렸다. 곽정과 황용의 시선이 마주쳤다. 방금 그 거친 말소리의 임자는 삼두교(三頭蛟) 후통해(候通海)가 분명했다.
황용이 재빨리 구멍에 눈을 대고 엿보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거울 속에 완안열, 구양봉, 양강, 팽련호 등의 얼굴이 비쳤다. 바보 소녀는 어디로 놀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후통해가 탁자를 부서져라 두들기며 호통을 쳤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양자옹과 팽련호가 한바퀴 휘둘러보고 나오면서 이마를 찡그렸다.
[여긴 사람 사는 집이 아니로군 그래.]
후통해만이 마을로 가서 밥과 술을 구해 오겠다고 부산스럽게 나섰다. 그러자 팽련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명색이 어림군이며 금군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어리석은 녀석들이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소란만 부리는 바람에 공연히 우리만 밥먹을 시간도 없었단 말야. 그런데 왕야(王爺)께서는 북방인이신데 어떻게 이런 벽촌을 다 알고 계셨습니까? 능자(能者)는 무소불능이라더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완안열은 추켜세우는 말을 듣고도 즐거워하는 기색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십구 년 전 여기 와 본 적이 있답니다.]
사람들은 감상에 젖은 그의 표정을 보면서 의아한 생각을 했지만 그가 19년 전에 이 마을에서 포석약이 자기 생명을 구해 준 일을 회상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후통해가 마을에서 밥과 술을 구해 가지고 나타났다. 팽련호가 사람들의 잔에 술을 부으며 완안열에게 말을 꺼냈다.
[왕야께서 오늘 병법의 기서를 입수하셨으니 이제 대금국의 무위가 천하를 떨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왕야를 위해 축배를 들겠습니다.]
팽련호는 말을 마치고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한지라 곽정은 벽을 사이에 두고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아니 그럼, 저들이 악비의 병서를 가지고 있다는 말 아닌가?]
곽정이 깜짝 놀라 외치는 바람에 가슴의 통증이 다시 역전해 엄습했다. 황용의 장심까지 파르르 떨렸다. 만약에 지금 단전의 기가 흔들렸다가는 자칫 생명까지 잃을 수가 있다. 황용은 다급하게 그에게 속삭였다.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에요. 그들이 책을 훔칠 수 있었다면 우리라고 다시 훔쳐 오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이사부(二師父) 묘수서생(妙手書生)만 계시면 열 권이라도 쉽게 찾아올 수 있을 텐데요.]
곽정은 일리 있는 말이라 여겨 다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황용이 다시 구멍으로 눈을 돌리자 완안열이 술을 마시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여러분이 도와주신 덕택입니다. 구양선생의 수고가 제일 크십니다. 만약 그 곽가 청년을 내쫓아 주지 않으셨다면 어디 어림이나 있었나요.]
구양봉이 헛웃음 터뜨리는 소리가 깨지는 듯 들리자 곽정의 가슴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황용은 혼자 마음을 졸였다.
(하느님 맙소사, 저 독물이 여기서 쟁(箏)을 통기지 않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만약 그렇다면 곽정 오빠는 끝장이 나는데.)
이제는 구양봉의 말소리가 들렸다.
[정말 벽촌은 벽촌이로군요. 송나라 군사가 찾을 수도 없겠습니다. 도대체 악비의 유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 다 같이 구경 좀 합시다.]
그러면서 구양봉은 품속에서 석함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 악무목의 유서에 만약 정묘(精妙)한 무공의 법문이라도 씌어 있다면 염치불구하고 자기가 차지할 것이요, 그것이 아니고 행군이라든가 전략의 병법 도략이 씌어 있다면 자기에게는 무용지물이니 기꺼이 인심쓰는 척하며 완안열에게 양보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일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석함 위로 쏠렸다. 황용은 순간 생각했다.
(저 책을 없앨 묘안이 없을까? 어떻게든지 없앨 수만 있다면 그래도 저놈들 손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텐데.)
그때 다시 완안열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는 악비가 남긴 벙어리 수수께끼 같은 문서를 보고, 또 조관(趙官)의 황궁 내 역대 영조 개축의 사록을 연구한 결과, 이 유서가 취한당 동쪽 15보 밖에 있는 석함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보니 제 추측이 틀림없었군요. 송조에는 정말 사람이 없군요. 궁중의 은밀한 곳에 이러한 보물이 있는 것도 몰랐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어젯밤 한바탕 소란을 피웠는데도 그게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일어난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겝니다.]
득의만면하여 완안열이 말을 마치자 다른 사람들도 이 틈을 놓칠세라 또 한바탕 그를 추켜세우기에 바빴다. 완안열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허허 웃었다.
[강아, 네가 그 석함을 열도록 해라.]
양강이 읍하고 앞으로 나서서 봉함을 뜯어 뚜껑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상자 안으로 집중했다. 그 순간 모두들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상자 속은 텅 비어 병서는 그만두고라도 백지 한 장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황용은 비록 상자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 표정을 보아 그 속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용으로서도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완안열을 넋 빠진 사람처럼 기가 죽어 당장에라도 풀썩 주저앉을 듯 엉거주춤 탁자 모서리를 짚고 있었다.
(내 백만 번 계산을 해보았지만 그 악비의 유서는 이 상자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어이 된 일인가?)
그런데 갑자기 완안열의 얼굴에 희색이 떠오르더니 석함을 들고 중앙으로 걸어 나와 그 함을 힘껏 돌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쩽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석함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황용은 워낙 총명한지라 석함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이미 짐작했다.
(아, 석함이 이중 장치가 되어 있구나.)
정말 이중 장치 속에 그 유서가 있는지 없는지 쫓아 나가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잠시 후 완안열이 돌아서며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혹시 석함이 이중으로 되어 있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로군.]
사람들은 제각기 한마디씩 거들고 나서고 가지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황용은 그들이 주고받는 소리를 들으며 고소를 금치 못했다. 곽정은 악무목의 유서가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다고 저자들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틀림없이 궁중으로 다시 들어가 보겠지요.]
곽정은 황용의 말을 듣고 보니 사부가 아직도 궁중에 계신데 재수없이 걸려들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비록 노완동 주백통이 보호를 한다지만 워낙 덜렁거리는 위인이고 보니 아무래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과연 그들이 예측한 대로 구양봉의 말소리가 들렸다.
[뭐 까짓것 대단할 것도 없소. 오늘 밤 다시 궁중으로 들어가 찾아봅시다.]
[오늘 밤은 안 됩니다. 우리가 어젯밤 그토록 소란을 부렸으니 오늘은 경계가 삼엄할 것이오.]
완안열이 만류했지만 구양봉은 고집을 피웠다.
[물론 경계야 삼엄하겠지요.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왕야와 세자께서는 오늘 밤 여기 계십시오. 제 조카도 여기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또 구양선생께 수고를 부탁드리기로 하지요.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완안열이 구양봉의 뜻을 받아들이자, 사람들은 아직 시간이 이르다며 짚을 구해다 깔고 자리를 마련한 뒤 누웠다. 그들은 반시간쯤 누워 쉬다가 구양봉과 함께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완안열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을 저쪽에서는 이따금씩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가 완안열의 상념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때 갑자기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며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완안열은 재빨리 일어나 앉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양강도 벌떡 뛰어 일어나 문 뒤에 숨었다. 머리가 쑥대밭처럼 헝클어진 여자가 달빛을 뒤로하고 노래를 읊조리며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바로 바보 소녀였다. 그녀는 숲 속에서 지치도록 놀다가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집 안에 다른 사람이 있건 없건 개의할 것도 없이 자기가 늘 자던 나뭇더미 속을 비집고 들어가 눕더니 벌써 드릉드릉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양강은 그 꼴을 보고 싱겁다는 듯 피식 웃고 다시 자리에 돌아가 누웠다. 그러나 완안열은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어나 앉았다 누웠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주머니를 뒤져 초 한 토막을 찾아내 불을 밝혀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책을 꺼내 뒤적거렸다. 황용은 구멍을 통해 불빛이 새어 들어오자 다시 눈을 갖다 댔다. 누에나방 한 마리가 촛불 주위를 맴돌다 불에 타 탁자 위에 떨어졌다. 완안열은 나방을 주워 들고 상념에 잠겼다.
(만약 포석약이 있었다면 너를 치료해 줄 텐데.)
그는 품속에서 은장도와 조그만 약병을 꺼내 들고 어루만졌다. 그 표정이 한없이 서글퍼 보였다.
황용이 곽정의 어깨를 치며 저것 보라는 시늉을 했다. 곽정은 내다보다가 발끈 화가 났다. 그 은장도와 약병은 포석약의 물건이 틀림없었다. 당시 조왕부 안에서 포석약이 토끼의 다리를 치료할 때 본 기억이 났다. 완안열이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십구 년 전 바로 여기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었지.... 하나 지금 내 곁엔 빈자리만 덩그렇다니....]
그는 말을 하다가 몸을 일으켜 세워 촛불을 들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아니 그럼, 여기가 바로 내 부모님의 고향이란 말인가?]
곽정이 황용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이자 황용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곽정은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황용은 오른손의 장심을 곽정의 왼손 장심에 대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격동하는 모습을 보고는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왼손의 장심을 그의 오른손 장심에 대고 버텼다. 둘이 동시에 힘을 기울이자 곽정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한참 지나서 불빛이 비쳐 들더니 그 불빛과 함께 완안열이 들어섰다. 곽정은 이미 완전히 안정을 되찾은 뒤라 황용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아 그에게 다시 완안열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곽정은 한쪽 손은 여전히 황용과 마주 댄 채 왼쪽 눈으로 거울에 비치는 광경을 응시했다. 완안열이 손으로 거무튀튀한 병기를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칼 같으면서도 칼이 아니요, 도끼같이 보이면서도 도끼가 아니었다. 그는 넋을 잃고 촛불 옆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양가의 집은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져 기왓장 하나 남아 있지 않건만 곽소천의 집에는 당시 그가 쓰던 이 짧은 삼지창이 남아 있구나.]
곽정은 부친의 이름이 살부의 원수 입에서 흘러나오자 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놈이 십 보 밖에 있으니 내가 비수만 던져도 원수를 갚을 수 있을 텐데.)
그는 오른손을 뻗어 비수를 뽑아 들고 황용을 향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용아, 한 손으로 문을 열 수 있겠지?]
[안 돼요. 저자를 없애려고 한다면 그야 쉬운 일이지만 우리가 숨은 장소가 탄로난단 말이에요.]
[저.... 저자가.... 내 아버지의 병기릍 들고 있단 말야!]
곽정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평생 아버지의 모습을 뵌 적이 없었다. 다만 어머니로부터 들은 얘기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그러니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에 대하여 애모와 존경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이제 아버지가 쓰시던 삼지창을 보니 깊은 사모의 정과 함께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길이 없었다.
황용은 더 이상 만류하기도 힘들겠다 싶어 곽정의 귀에 가만히 속삭였다.
[오빠의 어머님과 나는 오빠가 오래오래 사시기를 빌고 있어요.]
이 말을 듣고 곽정은 천천히 비수를 내려 허리에 차고 다시 구멍으로 밖의 동정을 살폈다. 어느새 완안열은 탁자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인데 그럴 수 없는 것이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통했다. 곽정이 몸을 돌리고 계속 연공이나 할까 하는데 볏짚더미에서 누군가가 서서히 일어나 앉았다. 그 사람의 얼굴이 촛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누구인지 확실히 분간할 수 없었다. 그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완안열의 뒤로 돌아가 탁자 위에 놓인 은장도와 약병을 주워 들며 고개를 들리는데 보니 바로 양강이었다.
그는 은장도와 약병을 든 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이윽고 품속에서 철창의 끝머리를 하나 꺼내 들고 또 한참을 응시하다가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그러더니 바닥에 떨어진 삼지창을 주워 들고 완안열의 등을 향해 높이 쳐들었다. 곽정은 반가웠다. 그는 자신의 친부모를 생각한 것이리라. 손만 쓰면 부모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삼지창이 떨어지기만 하면 완안열은 요절나는 것이다. 그런데 양강은 삼지창을 높이 치켜 든 채 마냥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죽여라 죽여! 지금 죽이지 않으면 언제 죽이겠느냐?)
곽정은 마음속으로 애타게 빌며 외쳤다.
(네가 만약 내려치기만 한다면 너는 훌륭한 내 형제다. 황궁에서 나를 찌른 일은 내 영원히 묻어 두마.)
그런데 그의 손이 가볍게 떨리다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삼지창을 놓치고 말았다. 곽정은 기가 막혔다.
(저런 못난 자식같으니라구!)
그러더니 양강은 몸에 걸친 두루마기를 벗어 완안열을 덮어 주는게 아닌가! 곽정은 이제 더 보고 싶지도 않았다. 도대체 양강이란 위인을 알 수가 없었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어쩌면 저렇게 좋아하며 따를 수 있단 말이냐?
황용이 곽정을 위로했다.
[조급히 굴지 마세요. 부상만 치료하면 그가 어디로 달아나든지 쫓아가 원수를 갚을 수 있지 않겠어요?]
곽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연공에 들어갔다. 날이 새는지 마을 여기저기에서 수탉 우는 소리가 밀실에까지 들렸다. 두 사람 체내의 기운은 벌써 일곱 바퀴나 돈 셈이었다. 그래서 둘의 심신은 가볍고 편안했다. 황용이 식지를 높이 치켜들고 웃었다.
[이제 하루가 지난 거예요.]
곽정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마터면 큰일을 저지를 뻔했지. 용아가 말리지 않았으면 난 참지못하고 일을 그르치고 말았을 거야]
[아직도 엿새가 남았는데, 내 말을 듣겠다고 약속하세요.]
[내가 언제 용아의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있었나?]
황용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 한번 생각해 보구요.]
이때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햇빛이 스며들어 황용의 고운 얼굴을 비춰 주었다. 그녀는 아침 햇살보다 더 고왔다. 곽정은 새삼스럽게 그녀의 손이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급히 심신을 가라앉히기는 했지만 빨개진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다. 황용과 늘 함께 있으면서도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런 감정 변화에 스스로 놀라 자신을 책망했다. 황용은 그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고는 적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곽정 오빠, 왜 그래요?]
곽정은 지나치게 순진해 거짓말을 못했다.
[내가 정말 나빠. 왜 갑자기 그런 걸 생.... 생각....]
[뭔데요?]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이에요?]
곽정으로서는 피할 길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용아를 껴안고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 말야.]
이 말에 황용도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더할 수 없이 귀엽고 예쁘기만 했다. 곽정도 그녀가 머리를 푹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자 은근히 걱정이 되어 물었다.
[용아, 화났어?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정말 구양공자처럼 나쁘겠지?]
황용은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화나지 않았어요. 저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머지않아 오빠가 저를 껴안고 입맞춰 주실 수 있을 거라고요. 나는 오빠의 아내가 될 텐데요 뭘.]
곽정은 그녀가 자기를 나무라지 않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곽정 오빠, 저를 그토록 껴안고 싶으세요?]
곽정이 막 대답을 하려는데 돌연 문밖에서 발소리가 나며 두 사람이 객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후통해의 말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내가 그전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는 정말 귀신이 있다구요. 그런데도 사형은 믿지를 않으시니.]
[무슨 빌어먹을 귀신이 있다고 야단이야. 우린 대단한 고수를 만났을 뿐이야.]
황용이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니 후통해는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된 채였고 사통천의 옷도 엉망진창으로 찢어져 있었다. 완안열과 양강이 그 꼴을 보고 놀라 웬일이냐고. 물었다.
[우린 재수가 정말 엉망이었습니다. 어젯밤 황궁으로 들어갔다가 귀신을 만났어요. 그 귀신이 제 귀를 잘라 가지 않았겠습니까, 이걸 보세요.]
과언 후통해의 두 귀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해괴망측한 일이었다.
[귀신이 아니라는데도 계속 우기는군.]
사통천이 핀잔을 주었지만 평소 사형을 무서워하는 후통해도 이번만은 막무가내로 대들었다.
[아니, 제가 분명히 이 두 눈으로 보았는데도요. 갑자기 파란 얼굴에 붉은 수염이 난 판관(判官)이 와그작거리며 내게 달려들더니 금방 두 귀가 없어지고 만걸요. 그 판관과 절에 있는 신상(神像)이 똑같은 모습이었는데 왜 아니라고 하십니까?]
사통천과 그 판관이 3초를 겨뤘는데 자기 옷만 찢겼다는 것이다. 솜씨로 보아서는 분명 무림의 고수가 틀림없는데 어째서 판관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네 사람은 의견과 추측이 분분했다. 누워 있는 구양공자에게까지 물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 영지상인, 팽련호, 양자옹이 숨이 턱에 닿도록 헐레벌떡 달려왔다. 영지상인은 두 손이 사슬로 꽁꽁 묶인 채요, 팽련호는 어찌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올라 멍투성이였다.
개중에서도 제일 우스꽝스러운 사람은 양자옹이었다. 백발이 모두 쥐어뜯겨 대머리가 된 것이 꼭 중대가리 같았다. 원래 세 사람 모두 궁에 들어간 후 각기 흩어져 무목의 유서를 찾다가 그만 귀신을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 사람이 만난 상대가 각기 다른 점이었다.
하나는 무상귀(無常鬼)요, 또 하나는 황령관(黃靈官)이고, 다른 하나는 토지보살(土地菩薩)이었다.
양자옹은 자기의 대머리를 어루만지며 욕을 퍼부어 대고, 팽련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냉가슴만 앓으며 사슬에 묶인 영지상인의 손을 풀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쇠사슬이 어찌나 꽁꽁 꼬였는지 살을 파고들어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끙끙거리다가 간신히 풀기는 했지만 팽련호와 영지상인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어젯밤 정체불명의 고수를 만나 그토록 곤욕을 당했으니 말을 꺼내 봐야 서로 창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자 완안열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구양선생은 왜 안 돌아오십니까? 그분도 귀신을 만났나요?]
[구양선생의 무공은 절세를 뒤덮을 정도인데 설마 하니 귀신을 만났다 해서 골탕을 먹을 리야 있겠습니까?]
양강이 나서서 하는 말에 팽련호는 쓴 입맛을 다셨다.
황용은 그들의 이런 꼴을 바라다보며 기분이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로 보아 자기가 주백통에게 사준 가면이 위력을 발휘한 것 같은데 정말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혹시 주백통이 노독물과 대결했는지 자못 궁금했다. 고개를 돌리고 곽정을 보니 계속 연공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도 자세를 바꾸고 앉아 연공에 들어갔다.
팽련호 등은 밤새 곤욕을 치르느라고 허기질 대로 허기져 각기 나뉘어 나무 팰 사람은 나무를 패고, 쌀을 사러 나갈 사람은 바삐 나가는 등 밥지을 준비를 서둘렀다. 후통해가 그릇을 찾다가 마침내 찬장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당연히 쇠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는 쇠그릇을 번쩍 들어보려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다시 들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용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이젠 모든 것이 탄로날 판이었다. 피차 싸움이 벌어진다면 이길 승산은 커녕 두 사람의 몸이 움직이기만 하면 곽정은 당장 죽고 말 테니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밀실 안에서는 황용과 곽정이 당황해 쩔쩔매고 있는데 밖에서는 사통천이 사제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부산 좀 떨지 말라고 호통을 쳐 댔다.
[그럼 어디 형님이 한번 들어보시구려.]
후통해가 볼이 부어 내뱉었다. 그러나 사통천이 들어 봐도 역시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으으, 괴상한 소리만 질렀다. 팽련호도 채소를 썰다가 이 소리를 듣고 건너와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슨 연유가 있는 모양이로군. 사대형, 그걸 어디 좌우로 돌려보지 그래요.]
황용은 일이 긴박해지자 비수를 곽정의 손에 쥐여 주고 자기는 홍칠공에게 받은 죽장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한 모퉁이에 있던 2구의 해골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걸 들어 수박 위에 던져 꽂았다. 삐걱 소리가 나며 밀실 문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황용은 재빨리 수박을 머리에 이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통천이 막 밀실의 문을 열려는 순간 찬장 속에서 머리가 둘 달린 괴물이 나타나며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괴물의 두 머리가 모두 해골이었다. 그 밑에 파란 줄이 그어진 둥그런 것이 있고, 그 아래로 산발한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들은 밤새 귀신에게 걸려 곤욕을 치른 뒤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찬장에서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후통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가 일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뛰었다. 다만 구양공자 한 사람만이 짚더미 위에 누운 채 꼼짝못하고 있었다.
황용은 깔깔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급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아 찬장 문을 도로 닫고 다시 생각했다. 그나마 임기응변으로 한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상대는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위인들이었다. 필연코 다시 나타날 텐데, 그때는 정말 피할 방법이 없었다. 황용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누군가가 먼저 객점의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황용은 아미강자를 꽉 쥐고 죽장을 가까운 곳에 세워 놓았다. 누구든지 찬장 문을 열기만 하면 그대로 강자를 던지리라 마음먹었다.
[주인 계시오? 주인!]
귀여운 여자의 목소리가 주인을 찾았다. 뜻밖에 주인을 찾는 소리에 놀란 황용이 재빨리 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당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단옷을 입은 여자였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보아 부잣집 아가씨 같았다. 거울을 등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 여자는 한참을 서성이다가 다시 주인을 찾았다.
[주인 계세요? 주인!]
귀여운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어 귀에 익었다. 보응현에서 온 정소저 같기도 했다. 바로 그때 여자가 몸을 돌렸다. 예측했던 대로 정요가(程瑤迦), 그녀였다. 황용은 놀랍고도 반가웠다.
(아니 정소저가 무슨 일로 이곳에 왔을까?)
이때 바보 소녀가 하품을 하면서 깨어나 눈을 비볐다.
第 四十八 章. 우가촌에 모인 사람들
[아가씨, 밥 좀 해줘요. 값은 후하게 드릴 테니.]
바보 소녀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밥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디서 구수한 밥 냄새가 났다. 바보 소녀가 재빨리 뛰어가 솥뚜껑을 열었더니 그 안에 밥이 가득했다. 원래 완안열 등이 먹으려고 지어 놓은 것이었다. 바보 소녀는 반가웠던지 어떻게 해서 생긴 밥인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얼른 한 그릇을 퍼 정요가에게 주고 자기도 바쁘게 입안으로 퍼 넣었다.
정요가는 부잣집 아가씨인지라, 반찬도 없고 또 되는 대로 지은 밥이라 몇 술 뜨다가 그만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바보 소녀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세 그릇이나 비워 놓고는 배를 두드리며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말씀 좀 물어 보겠는데 여기서 우가촌이 얼마나 먼가요?]
[우가촌요? 여기가 바로 우가촌인데, 얼마나 먼지는 모르겠는데요.]
정요가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인 채 옷깃을 매만지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여기가 우가촌이로군요. 그럼 누구 한 사람에 대해 물어 보겠는데요. 혹시 응.... 저 그 사람....]
바보 소녀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다가 밖으로 달려나갔다. 황용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니 우가촌에 누굴 찾아왔을까? 옳지, 손불이(孫不二)의 제자니까 어쩌면 사부나 사백의 심부름으로 구처기의 제자 양강을 찾아왔는지도 모르겠군.)
정소저는 단정하게 앉은 채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머리를 매만지며 배시시 웃었다. 얼굴에 홍조를 띠고 웃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황용이 재미있다는 듯 주시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나더니 문밖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헌칠한 키에 발걸음도 가볍게 안으로 들어서며 주인을 찾았다.
(공교롭기도 하구나. 천하에 낯익은 사람이 모두 우가촌에 모이다니.)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귀운장의 젊은 주인 육관영(陸冠英)이었다.그는 정소저를 보자 적이 놀라는 눈치였지만 계속 주인만을 찾았다. 정요가는 젊은 남자가 나타났기 때문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육관영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미모의 아가씨가 어쩌다 혼자 이곳에 있을까?)
육관영은 안으로 들어와 이곳 저곳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서며 배가 고픈지 솥뚜껑을 열고 밥을 퍼먹으며 정요가를 흘끗 쳐다보았다.
[배가 고파 몇 숟가락 먹겠으니 너무 허물 마십시오.]
정요가가 살포시 웃었다.
[제 밥은 아니지만 그냥 잡수셔요.]
육관영은 두 그릇을 먹고 나서 정요가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물었다.
[아가씨께 말씀 좀 여쭈어 보겠습니다. 우가촌이 여기서 얼마나 먼지 알고 계십니까?]
이 말을 듣고 정요가와 황용이 동시에 마음속으로 웃었다.
(하, 저이도 우가촌을 찾고 있구나.)
정요가도 역시 공손히 답례하면서 대답했다.
[여기가 바로 우가촌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아가씨께 누구 한 사람에 대해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정요가는 자기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얘기하려다 순간 생각을 바꿨다.
(누굴 찾는지 어디 얘기나 들어보자.)
[혹시 곽가 성을 가진 곽정이란 분이 어느 댁에 살고 계신지, 그리고 그분이 지금 댁에 계신지 아시나요?]
이번에도 정요가와 황용은 동시에 놀랐다.
(무슨 일로 그를 찾을까?)
정요가가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눈치 빠른 황용은 정소저의 이런 표정에서 벌써 뭔가 짐작할 수 있었다.
(응, 원래 곽정 오빠가 보응에서 자기를 구해 준 뒤부터 내심 사모하기 시작한 모양이로군.)
우선은 나이 탓도 있겠지만 성격이 쾌활한 황용은 질투는커녕 누가 곽정을 좋아한다는 생각에 덩달아 자기까지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황용의 추측은 틀림없었다. 정요가가 구양공자에게 납치를 당했을 때 비록 개방의 여생(黎生) 등이 도우려고 나서기는 했지만 그들은 구양공자의 상대가 아니었다. 만약 곽정이나 황용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꼼짝없이 욕을 당했을 것이다.
그녀는 곽정이 젊은데다가 재주도 비상하고 또 성품까지 후덕한 것을 보고는 사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여자의 몸으로 좀처럼 외간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다가 이러한 경우를 당하면 금방 사랑에 빠지게 마련인 것이다. 곽정이 떠난 후 정소저는 그리운 마음에 한숨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밤을 틈타 슬그머니 집을 떠났다. 그녀가 비록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혼자 집을 떠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호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생소했다. 그때 곽정이 임안부 우가촌 사람이라고 했던 말만 믿고 무작정 우가촌을 향해 길을 떠났던 것이다. 다행히도 의복이 화려하고 풍채가 훌륭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이곳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정요가는 바보 소녀로부터 바로 여기가 우가촌이란 말을 듣고는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천리를 멀다 않고 곽정을 찾아 나서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곽정이 집에 없기를 바라기도 했다.
(밤에 몰래 얼굴이나 한번보고 집으로 가야지. 만약 그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부끄러워 어쩐담.)
그런데 마침 육관영이 뛰어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도 곽정이란 사람을 찾았다. 정요가는 자기의 속마음이 탄로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에 달아나려고 했다. 바로 이때 문밖에서 추하게 생긴 얼굴이 고개를 디밀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사라졌다. 정요가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자 다시 그 추한 얼굴이 나타났다.
[머리 둘 달린 귀신아, 재주 있거든 이 햇빛 아래 나와 봐라. 삼두교 후 나으리와 어디 한번 겨루어 보자.]
육관영이나 정요가 모두 어리둥절했다. 황용만이 밀실에서 코웃음치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육관영이나 정요가는 팽련호 등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들이 공연히 끼여들었다가는 헛되이 생명만 잃을 것 같아 황용은 그들이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떠나 주기를 바랐다.
사실 후통해는 머리 둘 달린 괴물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줄행랑을 쳤고 다른 사람들도 주백통이 또 나타나 골탕을 먹이려는 줄 알고 멀리멀리 달아나 감히 돌아올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나 후통해만은 어리숭한 사람이라 정말 귀신이 있는 줄 알았다.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인데도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귀신은 대낮에 꼼짝못하는데 그것도 모르는 주제에 뭐 강호에서 행세를 한다고 야단들이야. 이 후 나으리가 가서 귀신을 쫓고 어디 한번 본때를 보여야지.)
그래서 후통해는 혼자 성큼성큼 객점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전전긍긍,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콩닥거렸다. 그가 큰맘 먹고 고개를 디밀고 보니 정요가와 육관영이 거기에 있었다.
[아니, 머리 둘 달린 귀신이 남자 여자로 변했구나. 조심해야 되겠다.]
육관영과 정요가는 횡설수설하는 후통해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후통해가 한바탕 욕설을 퍼부어도 안에서는 아무 낌새가 없었다. 정말 귀신은 햇빛을 무서워한다더니 사실인가 보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뛰어들어가자니 겁이 앞섰다. 그래서 다시 한 번안의 동정을 살폈는데 역시 아무 기척이 없었다. 불현듯, 귀신은 사람의 똥만 보면 꼼짝못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마을 여기저기에는 똥이 많았다. 객점 모퉁이에도 한 무더기가 있었다. 그는 귀신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더럽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위통을 벗어 똥을 한 보자기 싸가지고 다시 객점으로 돌아왔다.
후통해가 다시 객점 안으로 고개를 디미니 육관영과 정요가가 단정하게 중당에 앉아 있었다.
[대담한 요괴같으니라구. 빨리 본색을 드러내거라!]
후통해는 호통을 치면서 왼손에 든 삼고차(三股叉)를 쩔렁쩔렁 흔들며 오른손에는 똥 보자기를 들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육관영과 정요가는 미친 사람이 다시 나타난 것을 보고 가볍게 놀랐다. 게다가 그 사람은 구린내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후통해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남자가 사납지만 귀신은 여자가 더 무섭다더라.)
그래서 똥 보자기를 번쩍 들어 정요가의 면심을 향해 집어 던졌다. 정요가가 놀라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피하는 찰나 육관영은 벌써 긴 의자를 들어 날아오는 보자기를 막았다. 보자기가 풀어지자 고약한 냄새가 더욱 진동했다.
[머리 둘 달린 귀신은 빨리 본색을 드러내라.]
후통해가 크게 호통을 치며 삼고차를 들어 정요가의 얼굴을 찔렀다. 그는 어리석기는 하지만 무예만은 정통했다. 어찌나 빠른지 솜씨가 전광석화였다. 육관영이나 정소저 모두 깜짝 놀랐다.
(미친 사람이 아니라 무림의 능수로구나.)
육관영은 정요가가 양갓집의 규수로서 어찌 무예를 알 수 있으랴 싶었다. 이 미친 작자 때문에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또 한 번 긴 의자를 들어 막으며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후통해는 그 말에 코대답도 않고 연거푸 세 차례나 찔렀다. 육관영이 연방 긴 의자를 들어 막으며 누구냐고 물었다. 후통해는 육관영의 무예가 보통 수준은 넘지만 어젯밤 신출귀몰하던 그 사람과는 크게 다름을 알고는 역시 똥으로 공격을 한 것이 주효했다고 여기고 득의양양했다.
[이 요괴야, 내 이름을 알고 싶어 야단을 부리느냐? 나으리는 절대로 네게 이름을 밝힐 수 없느니라.]
다시 삼고차를 쩔렁거리며 후통해는 공격에 열을 올렸다.
육관영의 무공은 아무래도 그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는 긴 의자를 들어 병기로 삼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손에 맞지 않았다. 그래 허리에 찬 칼을 뽑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손쓸 겨를이 없었다. 수합을 겨루는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벽 쪽으로 몰려 공교롭게도 황용이 내다보던 구멍을 막아 버렸다. 후통해는 삼고차로 또 한 번 육관영을 찔렀다. 육관영이 번쩍 뛰어 피하자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삼고차가 벽을 뚫었다. 조그만 구멍으로부터 한 자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육관영은 상대가 벽에 박힌 삼고차를 뽑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틈을 노려 표하산강(豹下山崗)의 솜씨로 긴 의자를 휘둘러 그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후통해가 번쩍 발을 날려 그의 팔목을 침과 동시에 왼쪽 주먹으로 그의 면상을 쥐어박았다. 그 바람에 육관영이 의자를 놓치고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하자 후통해는 재차 삼고차를 뽑아 들었다. 정요가도 위급한 상황을 보고 몸을 날려 달려들어 육관영의 칼을 뽑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맙습니다.]
육관영은 급한 중에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연약한 처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두 사람 사이로 달려들어 칼을 뽑아 주는 날렵한 행동이 놀랍기만 했다. 그런데 번쩍이는 삼고차의 끝이 벌써 자기 가슴 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육관영이 칼을 옆으로 휘두르자 쩔그렁 소리가 울리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겼다. 그런데 손목이 뜨끔하며 아팠다. 상대의 완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손에 칼을 쥐고 있으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객점 안에서 수초를 겨루는 동안에 둘 다 똥을 밟고 돌아다녀 온통 똥투성이가 되었다. 후통해는 조급해 더욱 날뛰며 순수퇴주(順水推舟)의 솜씨를 발휘하여 상대의 아랫배를 노리고 소리를 질렀다.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무얼 꾸물거리느냐!]
육관영은 상대의 솜씨를 보고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었다.
[잠깐만!]
그는 펄쩍 세 발짝을 뛰어 물러나며 소리질렀다.
[귀문용왕은 당신에게 누구요?]
이 말을 들은 후통해가 육관영을 노려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하, 이 요괴가 내 사형의 명성은 알고 있구나.]
처음 육관영은 까닭도 없이 그와 고투를 벌이다가 이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필시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무공은 황하파의 솜씨인데다가 귀문용왕의 사제라고까지 자인하고 나서는 게 아닌가. 그제야 그가 황하사귀 가운데 탈백편(奪魄鞭) 마청웅(馬靑雄)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대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추측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대결할 때 후통해는 걱정도 되고 무서워 어떻게 해서든지 달아날 궁리만 했지 시종 전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러다 시간을 끌며 싸우다 보니 그 요괴가 별게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겨 초수를 거듭할수록 신바람이 나서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당연히 육관영은 반격은 고사하고 방어하기도 쩔쩔맬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정요가는 바닥이 똥으로 더러워져 한쪽 구석에 피해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잘생긴 미남자가 아무래도 저 미친 작자의 삼고차에 찔려 죽을 것만 같았다. 정요가는 잠시 머뭇거리다 보따리 속에서 장검을 뽑아 들고 육관영을 향해 외쳤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그녀는 검광을 번뜩이며 후통해의 등을 노렸다. 그녀는 청정산인(淸淨散人) 손불이의 수제자로 솜씨는 전진파의 검술이었다.
이렇게 되자 후통해는 당황하고 육관영은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그녀의 몸놀림은 민첩할 뿐만 아니라 검법 또한 신묘했다. 육관영은 후통해의 공격에 밀려 칼을 쓰던 솜씨가 산만해지고 이마에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는데 든든한 원군이 나타나자 다시 원기왕성해졌다. 후통해는 여자 귀신이 더 무서울 것 같아 지레 겁을 집어먹었지만 몇 초를 겨루다 보니 별로 대수로운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다.
정요가의 검술이 신묘하다지만 공력은 깊지 못했다. 게다가 아무래도 실전의 경험이 거의 없다 보니,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고도 자신이 오히려 당황해 했다. 후통해는 안심하고 삼고차를 더 맹렬하게 흔들며 1 대 2로 맞섰다. 방어보다는 공격을 더 많이 펼 수 있었다.
황용은 밀실에 앉은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대결을 지켜보며 공연히 초조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계속 싸우다가는 육관영과 정요가 쪽이 패배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고 싶었으나 도대체 곽정의 옆을 떠날 수 없었다. 이때 육관영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비켜나세요. 이건 아가씨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정요가는 자기가 혹시 다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하며 혼자 이 미친 작자와 대결하겠다는 육관영의 호의가 그저 고맙기만 했다. 그러나 육관영 혼자 힘으로는 당해 내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며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육관영은 한편으로 방어를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후통해를 향해 외쳤다.
[오해도 좋고 싸움도 좋지만 이 육(陸)모 한 사람과 대결합시다.자, 이서 길을 비켜 이 아가씨를 나가시도록 하오]
그즈음 이미 후통해는 이 두 사람이 요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정요가가 보기 드문 미모인데다 또 자기가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으니 양보할 까닭이 없었다.
[남자 귀신도 잡아야겠지만 여자 귀신은 더욱 놓칠 수가 없다.]
그는 껄껄 웃으며 삼고차를 비스듬히 찔렀다. 그래도 정요가에게는 사정을 봐주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벌써 찔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를 본 육관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가씨, 어떻게 해서든 빨리 빠져 나가시오. 이 육모 벌써 깊은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 성이 육씨인가요?]
정요가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아가씨의 성은? 그리고 어느 분의 문하인가요?]
[제 사부님의 성은 손씨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청정산인이라고들 하지요. 저.... 저는....]
자기의 성을 밝히자니 아무래도 쑥스러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가씨, 제가 이자를 잡을 테니 빨리 빠져 나가세요. 이 육모 살아남기만 하면 꼭 찾아 뵙겠습니다.]
정요가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이봐요, 미친 작자, 이분을 다치게 하지 말아요. 내 사부님은 전진파의 손진인이신데 그분이 곧 이리로 오셔요.]
전진칠자의 명성은 온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전에 철각선 옥양자 왕처일이 조왕부에서 군마들과 재주를 겨루는 것을 후통해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후통해는 정소저의 말에 약간 주춤하다가 다시 욕설을 퍼부었다.
[전진파의 일곱 요괴가 함께 대든다 하더라도 이 후 나으리가 하나하나 목을 자르겠다.]
이때 문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
[아니 누가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로군. 어떤 놈이 횡설수설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가!]
그때까지 세 사람은 닭 싸우듯 하고 있다가 이 소리에 놀라 주춤 뒤로 물러섰다. 육관영은 후통해가 혹시 독수나 쓰지 않을까 해서 정요가의 손을 잡아 뒤로 제치며 자기가 앞을 막아섰다. 문 어귀에는 청년 도사가 서 있었다. 이목이 수려하고 의관이 반듯한 젊은 도사가 손에 털이개를 들고 서 있었다.
[그 누가 전진칠자를 하나하나 죽이겠다고 했는가?]
[이 후 나으리가 말씀하셨다. 그래 어쩔 테냐?]
[그럼 어디 한번 죽여 보시지.]
그 젊은 도사는 몸을 움직여 털이개를 들어 후통해의 면상을 후려쳤다.
이때 곽정은 일단의 연공을 끝내고 소란스러운 밖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눈을 구멍에 대고 있었다.
[아니, 저 젊은 도사도 전진칠자 중의 한 사람인가요?]
황용이 묻는 말이다. 곽정은 이 도사가 바로 구처기의 제자인 윤지평(尹志平)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2년 전 사부의 서신을 가지고 강남육괴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당시 밤중에 무예를 겨루다 곽정이 패했던 것이다. 곽정은 이 일을 황용에게 들려주었다. 황용은 그가 후통해와 함께 수초를 겨루는 것을 보고 머리를 내흔들었다.
[틀렸어요. 삼두교를 이기지 못하겠는걸요.]
윤지평이 어느덧 수세에 몰렸다. 육관영이 즉시 칼을 들고나서며 그를 도왔다.
윤지평의 무공은 2년 전 몽고에서 밤에 곽정과 겨룰 때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육관영이 합세하자 비로소 후통해와 걸맞는 상대가 되었다. 정요가는 방금 육관영에게 잡혔던 손을 가슴에 모아 잡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어쩔 줄 몰랐다. 옆에서 세 사람이 어우러져 싸우는데도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자기 손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저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데 쨍그렁 소리와 함께 육관영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정요가는 그제야 깜짝 놀라 제정신을 차렸다. 후통해가 바쁜 틈에도 정요가의 어깨를 찌르려고 덤볐다. 이걸 본 육관영이 우선 칼을 들어 막으며 주의시킨 것이다. 정요가는 다시 얼굴을 살짝 붉히며 칼을 들고 합세했다.
정요가의 무예가 출중하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3 대 1이고 보니 후통해는 열세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급히 삼고차를 휘둘러 맹공을 펴면서 문밖으로 뛰어나가 도와줄 사람을 불러오려고 했지만 윤지평의 털이개가 이리저리 눈앞을 휩쓰는 바람에 어지러워 방향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는 발이 뜨끔하더니 윤지평의 칼에 찔리고 말았다. 화가 치민 후통해가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수합을 겨뤘지만 아랫도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후통해는 그 와중에도 삼고차를 내밀어 윤지평을 찔렀으나 그의 털이개에 말려 떨어지지 않았다. 쌍방이 서로 힘을 다하여 버티기는 했지만 힘은 오히려 후통해가 센 편이었다. 힘껏 잡아당기는 바람에 윤지평이 털이개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정요가가 성하요두(星河搖斗)의 솜씨를 발휘하여 후통해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후통해가 잡은 삼고차가 맥없이 땅바닥에 떨어지자 때를 놓치지 않고 윤지평이 잽싸게 대들면서 현기혈(玄機穴)을 눌렀다.
후통해가 벌렁 나가떨어지고 그 위를 육관영이 잽싸게 덮치며 그의 허리띠를 풀어 손을 뒤로 잡아 묶었다. 이를 본 윤지평이 껄껄 웃었다.
[전진칠자의 제자도 어쩌지 못하는 주제에 그래 그들을 베겠다고 큰소리를 쳤나?]
셋이 덤벼들어 놓고 무슨 놈의 영웅호한이냐고 후통해가 버럭버럭 소리질렀다. 그러자 윤지평이 그의 옷깃을 찢어 입을 틀어막았다. 후통해는 화가 치밀대로 치밀어 씨근덕거리기는 했지만 욕을 할 수가 없었다. 윤지평은 그제야 정요가를 향해 예의를 차렸다.
[사자께서는 손사숙의 문하이신 모양이니 소제가 먼저 인사를 드립니다.]
정요가도 황급히 답례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인사를 받겠습니까. 사형께선 어느 사백의 문하신지? 제가 먼저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소제는 장춘 문하의 윤지평이라 합니다.]
정요가는 집 밖을 떠난 적이 없는 처지라 사부 이외의 전진칠자 가운데 여섯 분을 뵈온 일이 없었다. 다만 장춘자 구사백이 가장 호방하고 무예 또한 출중하다는 얘기를 사부로부터 들은 바 있었다. 윤지평이 구처기의 문인이란 말만 듣고도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윤사형이 사형되시니 저를 사매라 불러 주세요. 제 성은 정가입니다.]
윤지평은 사부를 오랫동안 모시고 다녔기 때문에 성격도 그를 많이 닮았다. 나긋나긋하며 귀엽게 생긴 처녀가 무예를 한다니 슬그머니 우스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선 사문의 예의대로 인사를 나눈 후 다시 육관영과 통성명을 하고 또 후통해의 내력을 물었다. 육관영은 자기의 성명을 대기는 했지만 부친의 존함이나 자신이 태호 군도의 수령이란 말은 꺼내지 않았다. 또한 마청웅을 살해했기 때문에 후통해가 복수를 하려고 했다는 것조차 알리지 않았다. 정요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미친 작자, 무예가 높고 보니 놓아줄 수는 없겠지요?]
[소제가 데리고 나가 한칼에 베겠습니다.]
육관영이 죽이겠다고 나서자 정요가가 황급히 말렸다.
[그래도 죽이지는 마세요.]
그 말에 윤지평이 웃으며 대꾸했다.
[까짓것 죽이면 어때요. 그런데 정사매께서는 여기 오신지 오래되셨나요?]
정요가는 금세 얼굴을 붉혔다.
[저도 방금 이곳에 왔어요.]
윤지평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둘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인가 본데 내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겠구나. 인사나 하고 떠나야지.)
[저는 사부님의 명령을 받고 우가촌에 사는 사람을 찾아 급한 소식을 전하러 왔답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다음 기회에 또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윤지평은 정중하게 인사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요가는 붉힌 얼굴을 가볍게 숙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윤사형께서는 누굴 찾아오셨는지요?]
윤지평은 잠시 머뭇거렸다.
(정사매는 본문의 문인이요, 이 육형이란 사람은 그녀와 동행이니 말을 한들 어떠랴.)
[저는 곽가 성을 가진 친구를 찾아왔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밖에 있는 두 사람이나 밀실에 있는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육관영이 먼저 물었다.
[그분이 혹시 정(靖)이란 외자 이름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육형께서도 그분을 알고 계신가요?]
[저도 그 곽사숙을 찾아왔습니다.]
[아니, 그분이 사숙이 되시나요?]
윤지평과 정요가가 동시에 물었다.
[제 부친과 동배(同輩)라 소제가 사숙이라 부릅니다.]
자기의 부친인 육승풍과 황용이 동배라서 그는 곽정을 사숙이라 높여 부른 것이다. 정요가는 아무 말이 없고 윤지평만이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그래 그를 만났나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저도 방금 이곳에 당도했습니다. 막 찾아뵈려던 참에 이 미치광이를 만나 공연히 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아, 그럼 우리 함께 찾아갑시다.]
윤지평의 말에 따라 세 사람이 함께 밖으로 나갔다. 황용과 곽정이 서로 바라보며 고소를 머금었다.
[용아, 그들이 틀림없이 다시 나타날 텐데 찬장 문을 열고 부르지.]
[어떻게 그래요. 이 두 사람이 찾아온 걸 보면 틀림없이 중요한 일일 텐데요. 지금은 정양에만 정신을 모아야 해요.]
[그럴 테지, 틀림없이 중대한 일일 거야]
황용이 한숨을 쉬었다.
[천지개벽을 한대도 문을 열 수는 없어요.]
곽정은 초조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황용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는 다시 정양에만 열중하기 시작했다. 과연 예측했던 대로 얼마 후 윤지평 등 세 사람이 객점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도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니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하지요?]
육관영의 말을 윤지평이 받았다.
[육형께서는 무슨 중대한 일로 곽형을 찾으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육관영은 본래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요가의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보자 차마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바닥에 널려 있는 오물이나 치우고 천천히 말씀드리지요.]
바보 소녀의 이 객점에서 빗자루 같은 물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윤지평과 육관영은 어쩔 수 없이 장작과 풀을 가지고 대강 바닥을 치웠다.
세 사람이 탁자 옆에 좌정하고 육관영이 말을 꺼내려는데 정요가가 만류했다.
[잠깐만!]
그녀는 후통해의 옆으로 다가가 칼로 옷 한 귀퉁이를 두 조각 찢어 그의 귀를 틀어막으며 육관영을 보고 웃었다.
[듣지 못하게 해놓구요.]
[아가씨는 정말 용의주도하시군요.]
육관영이 칭찬을 했다. 밀실에 앉아 있던 황용이 슬그머니 웃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여기 이렇게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당에는 구양공자까지 누워 있는데도 깜쪽같이 모르면서 무얼 용의주도하다고 그래.)
정소저는 강호를 출입한 경험이 없고, 윤지평은 사부를 따라다니며 배워 호방한 것만을 미덕으로 알았고, 또 육관영은 태호에서 호령만하고 지낸 처지라 미처 세심해야 할 곳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세 사람이 중차대한 얘기를 나누려면 우선 사방의 경계를 철저히 함은 물론 먼저 구석구석 미리 살펴보았어야 했다.
정요가는 허리를 숙여 후통해의 귀를 막으려다가 그의 귀가 이미 잘려 나간 것을 보고 하마터면 큰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튼 옷조각으로 그의 귀를 단단히 틀어막고는 육관영을 바라다보았다.
[이제 말씀하세요.]
육관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제가 곽사숙을 찾아나서기는 했지만 도리로 말씀드린다면 그분을 찾아와서는 절대로 안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또 오지 않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고요.]
[그것 참 이상한 얘기로군요.]
윤지평이 말했다.
[그래요. 제가 곽사숙을 찾는 일이 사실 곽사숙을 위한 일이 아니라 실은 그분의 여섯 분 사부를 위한 일이거든요.]
윤지평이 꽝 하고 탁자를 내리치며 되물었다.
[강남육괴요?]
[그렇습니다.]
[아하, 육형께서 무슨 일로 오셨나 했더니 소제와 같은 일로 오신 모양이로군요, 그럼 그럴 것 없이 우리 둘이 땅바닥에 한 사람의 이름을 써 봅시다. 정사매께서 어디 한번 맞나 틀리나 봐주시고요.]
육관영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정요가가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군요. 어디 한번 두 분께서 등을 돌리고 써 보셔요.]
잠시 후 정요가는 그들이 써 놓은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윤사형, 서로 틀리는데요.]
윤지평이 의아하다는 듯 일어나 섰다.
[사형이 쓰신 것은 황약사란 세 글자요, 저분이 그린 것은 복숭아꽃인데요.]
황용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끔했다.
(아니, 저들이 곽정 오빠를 찾아왔다고들 하면서 어째서 우리 아버지와 연관을 시킬까?)
이때 육관영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렸다.
[윤사형께서 쓰신 것은 제 아버님 은사의 존함이라 저는 직접 글씨를 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윤지평은 깜짝 놀랐다.
[아버님의 은사라니요? 응, 우리가 쓴 것은 같은 것이었구먼. 황약사가 도화도 주인 아닌가요?]
[아, 원래 그랬군요.]
정요가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육형께서 소제를 친구로 여기지 않으시는 눈치신데 그렇다면 길게 얘기를 나눌 필요가 없겠군요. 자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윤지평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가려고 했다.
[윤사형, 잠깐만!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탁드릴 일도 있구요.]
윤지평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부탁하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성미였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 말씀을 해보시지요.]
[윤사형은 전진파의 문인이시니 다른 사람의 위험을 미리 알려 주고 또 위급을 예방해 주는 일은 협의(俠義)의 도리로 말해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귀파의 사장들께서 무고한 사람을 가해하려는 것을 미리 아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무고한 사람에게 알려 미리 피하게 하는 것이 타당한 일 아닐까요?]
[그야 물론이지요. 육형은 도화도의 문인이시라 난처한 모양이시니 어디 한번 말씀을 하세요.]
[이 일을 만약 소제가 수수방관한다면 그건 불의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관여를 하자니 이건 사문을 배반하는 일이구요. 제가 사형께 부탁을 드리고 싶으면서도 말이 나오지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윤지평은 어렴풋이나마 그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털어놓으려고 하지 않으니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난처하다 못해 머리만 긁적거리고 있었다.
정요가 쪽에서 답답했던지 먼저 방법을 제시하고 나섰다.
[윤사형께서 먼저 물어 보세요. 육사형은 맞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틀리면 흔드시지요. 말씀만 안 하시면 사문을 배반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정사매의 말씀이 그럴듯하군요. 육형, 그럼 제가 먼저 얘기를 꺼내겠습니다. 제 사부이신 장춘자 구진인께서 어쩌다 소식을 하나 들으셨는데 그건 도화도 주인 황약사가 강남육괴를 증오하여 그들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제 사부님께서 먼저 가흥에 가셨는데 육괴는 어디로 갔는지 가흥에는 계시지 않았답니다. 하는 수 없이 제 사부님은 육괴의 식구들에게 달아나라고 했답니다. 그러니 황약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 가족들이 모두 달아난 뒤였죠. 화가 난 황약사는 공연히 성질만 부리다 그냥 북쪽으로 가버렸다는데 그 뒤 소식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답니다. 그래 육형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신가요?]
육관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윤지평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말을 이었다.
[응, 아무래도 그가 육괴를 찾아다니는 것 같아요. 제 사부님은 원래 육괴와는 그리 친한 편이 아니랍니다. 그러나 이 일은 황약사의 오해로 빚어진 것이라 생각하시나 봐요. 게다가 공교롭게도 전진칠자가 모두 강남에 모이기로 돼 있답니다. 그래서 서로 흩어져 육괴를 찾고있어요. 만나면 멀리 달아나든지 어쨌든 황약사를 피하라는 것이지요. 어때요, 제 말이 맞나요?]
육관영이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황용은 생각에 잠겼다.
(곽정 오빠가 도화도의 약속을 지켰는데 아버지는 또 무엇 때문에 강남육괴를 찾으실까?)
황용은 자기 아버지가 영지상인의 거짓말을 듣고 화가 난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녀가 바다에서 익사했기 때문에 그 비통한 심사의 화풀이를 육괴에게 하려는 저의를 그녀는 까맣게 몰랐다.
윤지평이 계속해서 얘기를 꺼냈다.
[육괴를 찾다 지친 제 사부님은 육괴의 제자인 곽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가 임안부 우가촌 사람인데 혹시 고향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래 저를 여기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그를 만나면 사부들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을 거라고요. 육형이 여기 오신 것도 바로 이 일 때문이지요?]
육관영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가 고향에도 없을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 사부님 입장에서 본다면 하실 일은 다 하신 셈이지요. 그들을 찾을 수 없으니 도리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황약사도 그들을 찾아내지 못할 것 같군요. 육형께서 도움을 청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이 일과 연관이 있습니까?]
육관영이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육형, 무슨 분부든지 말씀하세요. 제 힘이 미치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윤지평의 말에 육관영은 잠자코 있었다.
[윤사형, 잊으셨나 보지요. 저분은 직접 말씀을 하실 수가 없잖아요.]
정요가가 웃으며 말참견을 하자 윤지평도 따라 웃었다.
[참 그렇군. 육형은 나보고 여기 머물러 있다가 곽정이란 분을 만나달라는 뜻입니까?]
육관영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저더러 여기저기 급히 돌아다니며 강남육괴와 곽정을 찾아보란 말씀입니까?]
육관영이 또 머리를 흔들었다.
[아, 그럼 이런 모양이로군요. 강호에 이 소식을 퍼뜨려 달라는 부탁이로군요. 육괴가 강남 사람들이니 그를 아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 자연 소식이 그들 귀에 들어가지 않겠느냐, 그 뜻이로군요.]
육관영은 그래도 아니라고 머리를 흔들었다. 윤지평이 계속해서 7,8번이나 말을 꺼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정요가까지 나서서 두서너 가지 의견을 제시해 보았지만 결과는 소용없었다. 윤지평만 답답한 것이 아니라 밀실에 앉아 있는 황용까지도 답답했다. 세 사람이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다시 윤지평이 입을 열었다.
[정사매, 잠시 앉아 계셔요. 난 벙어리 수수께끼 놀음엔 이제 흥미를 잃었습니다. 밖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객점 안에는 후통해와 그들 두 사람만이 남았다. 정요가가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있다가 슬그머니 육관영의 동정을 살폈다. 때마침 육관영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정요가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괜시리 두 손으로 칼자루에 달린 수술을 어루만졌다.
육관영은 천천히 일어나 부엌으로 가더니 거기에 그려 있는 부엌신의 화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엌신이여, 소인에게 고민이 있사온데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도 없는 처지라 이렇게 아뢰오니 굽어살피시고 부디 영험을 내려 주소서.]
정요가가 깜짝 놀라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이로구나.)
정요가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귀를 기울였다.
[소인 육관영은 태호반, 귀운장 육승풍의 아들이옵니다. 제 가친이 도화도주 황약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데 수일 전 황약사께서 귀운장에 오신 일이 있사옵니다. 그분은 강남육괴의 가족을 몰살하겠다며 제 가친과 사백인 매초풍에게 명하여 육괴의 거처를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매사백과 육괴는 원한이 깊은 사이라 자청이라도 해서 나설 입장이지만 제 가친만은 강남육괴가 충의로운 영웅호걸이니 그들을 살해하는 것은 불의라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래 스승의 명령을 듣고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마음속으로는 저를 보내 이 소식을 강남육괴에게 전하고 싶었으나 사문을 배반했다는 죄명은 도대체 어떻게 하겠습니까? 결국 제 가친은 황약사의 따님인 황용이 그려 준 한 폭의 그림 앞에 서서 괴로운 마음을 하소연했습니다. 소인은 이를 듣자마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들 육괴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나선 것입니다.]
황용과 정요가는 계속해서 주의 깊게 들었다.
[저는 육괴를 그토록 찾아 다녔지만 찾을 길이 없어 마침내 그들의 제자인 곽사숙을 찾기로 했습니다만 그분도 어디에 계신지 알 길이 없습니다. 곽사숙은 황약사의 사위 되시는....]
정요가는 곽정을 사모하고 있었다. 그리운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이렇게 우가촌을 찾아오기까지 했지만 이날 육관영의 준수한 모습을 보자 곽정에게보다 더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곽정이 황약사의 사위라는 말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육관영도 이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녀의 표정을 한번 살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꿀꺽 참았다.
(만약 시선이 부닥치기나 한다면 나는 더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날 아버지께서 화상을 보시며 혼자 말씀하실 때도 시종 나를 바라보지 않으셨다. 내가 이제 부엌신을 향하여 고민을 털어놓는데 그가 듣고 안 듣고는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는 시선을 옮기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 곽사숙을 찾기만 한다면 그는 황용과 함께 장인을 찾아가 사정하게 되겠지요. 황약사가 아무리 엄한 분이라 하더라도 따님과 사위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가친의 말씀으로는 곽사숙과 황용이 무슨 큰 재난을 당했다고 하시는 것 같았지만 여쭈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황용은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곽정 오빠가 중상을 입은 사실을 알고 계신 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래도 혹시 우리가 무인도에 들어간 일을 벌써 알고 계실는지도 몰라.)
육관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윤사형은 정의감이 있고 정소저는 총명하고 부드러워....]
정요가는 그가 자기 면전에서 칭찬하는 말을 듣자 즐겁기도 하고 또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분들은 제 마음을 몰라주십니다. 제 생각으로는 강남육괴가 이름난 영웅호걸인데 무공은 비록 황약사에게 뒤진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멀리 달아나라고 한다면 그들이 응할 리가 있겠습니까? 명예를 손상시키는 비겁한 행위는 절대로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분들이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황약사를 찾으러 나설 것이 분명하옵니다.]
황용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육관영이 명실공히 태호 군웅의 우두머리로 손색없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러기에 강호의 영웅호걸의 심리를 저토록 깊이 헤아리는 것이었다.
[제 생각으로는 전진칠자가 의협심이 강하고 명성이 있는데다 무공까지 훌륭하시니 정소저께서 만약 그분들께 부탁드린다면 그분들이 나서서 중재해 주실 것이요, 황약사로서도 그분들의 체면만은 지켜 주시겠지요. 황약사와 강남육괴가 무슨 깊은 원한이 있는 처지도 아니요, 설령 그분들이 황약사에게 득죄를 했다 하더라도 명망있는 분들이 나서서 화해를 주선한다면 화해 못할 일도 아니잖습니까? 부엌신이시여, 소인이 괴로워함은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탓이오니 신이 알아서 처리해 주시기를 간곡히 비나이다.]
육관영은 말을 끝내고 부엌신 화상을 향해 엎드려 큰절을 했다.
정요가는 그의 말이 다 끝난 줄 알고 급히 밖으로 나가 이 일을 윤지평에게 알리려고 했다. 그녀가 막 문을 나서는데 다시 육관영의 말소리가 들렸다.
[부엌신이시여, 만약 전진칠자가 나서신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칠자께서 절대로 황약사의 감정만 건드리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일이 어그러진다면 계속 풍파가 밀려올테니 그보다 더 큰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사뢸 말씀은 이제 여기서 끝맺겠습니다.]
정요가가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말이 끝난 모양이니 내가 나가서 이 일을 처리해야지.)
정요가는 객점을 벗어나 윤지평을 찾으러 마을을 한바퀴 둘러보았지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주점으로 돌아오는데 어디선가 윤지평이 부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정사매!]
그는 모퉁이를 돌아 나오며 손짓해 그녀를 불렀다.
[아, 여기 계셨군요.]
정소저가 알은체하자 윤지평은 조용히 하라는 손짓과 함께 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사람들이 있어요. 슬금슬금 우리를 감시하는데 모두들 병기를 가지고 있어요.]
[그냥 길 가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러나 윤지평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모두들 고수 같습니다.]
第 四十九 章. 신혼 초야
윤지평이 발견한 사람들은 다름아니라 팽련호 등이었다. 그들은 후통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소식이 없자 무슨 일이 생겼거니 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이기적인 인물들이라 어젯밤 황궁에서 귀신에 걸려 혼난 뒤 아무도 감히 후통해를 구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윤지평을 보자 앞을 다투어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윤지평이 쫓아가 보니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정요가가 육관영이 한 말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아내요? 정사매께서는 그걸 손사숙께 부탁드리고, 난 제 사부님께 말씀드리면 되겠군요. 전진칠자께서 나서기만 한다면 천하에 무슨 일을 해결하지 못하겠습니까?]
둘이 함께 주점으로 돌아오자 육관영이 하직 인사를 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분께서 다음에 태호를 지나시는 길이 있으시거든 꼭 귀운장에 들러 주세요.]
정요가는 이 말을 듣고 섭섭해 견딜 수 없었다. 윤지평은 등을 돌리고 부엌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부엌신이여, 전진교는 다른 사람을 곤경에서 구해 주는 것을 제일 좋아하나이다. 천하에 부당한 일이 있을 때 전진 문하의 제자가 일단 알기만 하면 수수방관하지 않는답니다.]
육관영은 자기 들으라고 하는 말인 줄을 뻔히 알고 자기도 부엌신의 화상을 향해 말했다.
[부엌신이시여, 신께서 보우하사 이 일이 원만히 해결되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제자는 이 일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의 큰 은덕에 언제까지나 감사하겠나이다.]
[부엌신이시여, 안심하소서. 전진칠자의 명성이 천하에 자자한데 해결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윤지평의 말에 육관영은 놀라 걱정이 되었다.
(전진칠자가 강압적으로 나온다면 황약사께서 승복하실 리가 없다.)
그래서 다시 부엌신을 향해 말했다.
[부엌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황약사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격인 인물이라 다른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누가 그에게 사귀자면 응하지만 도리를 가지고 따지려 들면 제일 싫어한답니다.]
[하하하, 부엌신이시여, 전진칠자가 어느 누굴 두려워하겠나이까? 이 일이 원래 우리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로 제 사부께서도 제자에게 소식만을 알리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 일을 가지고 전진교를 건드린다면 황약사고 흑약사고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육관영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부엌신이시여, 제자가 방금 아뢴 말씀을 잠꼬대로 들어주시기 바라나이다. 누구든지 우리를 깔본다면 아무리 큰 호의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렵니다.]
둘이 서로 등을 돌린 채 부엌신의 화상을 향해 이쪽에서 한마디하면 저쪽에서도 한마디를 꺼내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하게 변했다. 정요가가 보다못해 말리려고 했지만 쌍방이 다 젊고 혈기 왕성한 사람들이라 끼여들 겨를조차 없었다. 다시 윤지평이 말을 꺼냈다.
[부엌신이시여, 전진파는 천하 무술의 정종입니다. 다른 잡가의 무공이 제아무리 뛰어나기로서니 감히 어디라고 전진파와 겨룰 수 있겠나이까?]
[부엌신이시여, 전진파 무공에 대해서는 제자도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전진파에는 고수도 능인(能人)도 적지 않을 테지만 큰소리나 치고 다니는 무뢰배도 없지 않아 있겠지요.]
윤지평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아궁이를 치니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감히 나를 욕하다니?]
그 순간 육관영도 한쪽 아궁이를 무너뜨렸다.
[내가 감히 누굴 욕하겠소? 나는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미치광이를 욕하는 것이오.]
윤지평은 방금 그의 무예를 보았기 때문에 자기 재주가 그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흥, 그럼 우리 여기서 겨루어 봅시다. 그래야 누가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미친 사람인지 알 것 아니겠소.]
육관영은 자신이 그의 적수가 아님을 알았지만 일단 자기의 사문을 모욕한 이상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시퍼런 단도를 뽑아 들었다.
[그럼 어디 전진파의 높은 솜씨를 보겠소.]
정요가는 마음이 다급해 눈물부터 나왔다. 몇 차례나 달려들어 말리려고 했지만 여자의 연약한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윤지평이 털이개를 흔들며 공격하자 둘은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육관영은 먼저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단지 실수나 과오만이 없기를 바라며 고목대사로부터 배운 나한도법(羅漢刀法)으로 방어에만 전력했다. 윤지평이 공격을 감행했지만 상대방의 방비가 철통같아 하마터면 그의 단도에 어깨를 찔릴 뻔했다. 가슴이 철렁하며 상대를 깔보면 큰일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조심스럽게 대들었다. 그러자 비교적 유리한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황용은 거울을 통해 그들의 대결을 지켜 보았다. 점점 육관영이 수세에 몰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 저 녀석이 우리 아버지까지 욕을 하고 나서더니.... 곽정 오빠의 부상만 아니라면 어디 한번 도화도의 맛을 단단히 보여 주련만.)
그런데 이때 육관영이 단도로 윤지평을 내리찍었다. 그러나 초술이 미숙하여 오히려 윤지평의 털이개에 말려들어 비틀거리다 그만 단도를 놓치고 말았다. 윤지평이 이 틈을 타 철썩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이게 바로 전진파의 높은 재주니 똑똑히 기억하라구!]
털이개는 말총에다 은실을 섞어 만든 것이라 일단 얻어맞기만 하면 육관영의 잘생긴 얼굴도 피투성이가 될 것이 뻔했다. 육관영이 급히 얼굴을 숙여 피하자 털이개도 따라서 아래로 쫓아갔다.
[윤사형!]
정요가가 윤지평을 부르며 날쌔게 칼을 들어 막았다. 이 틈을 타서 육관영이 재빨리 땅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집어들었다. 이를 본 윤지평이 냉소를 터뜨렸다.
[정사매가 외인을 돕고 나서는군요. 차라리 둘이 덤벼드시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정요가도 화가 났다.
윤지평이 쉭쉭쉭 세 차례를 공격하자 정요가의 손발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육관영이 그녀의 위급함을 보고 황급히 끼여들어 협공했다. 2대 1의 대결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정요가는 정말 사형과 대결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칼을 든 채 옆으로 피해 물러섰다.
[덤비라니까요. 이 사람 혼자서는 나를 당해 내지 못할 텐데.]
윤지평이 큰소리쳤다.
황용은 세 사람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결과가 어찌 되려나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데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팽련호, 사통천 등이 완안열과 양강을 호위하며 들어섰다. 그들은 밖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무슨 낌새가 보이지 않자 그나마 사통천이 후통해의 동문이라고 관심이 있어 독한 마음을 먹고 접근해 살펴본 것이었다. 그 사통천이 살펴보니 안에서는 윤지평과 육관영이 다투고 있었다. 보아하니 무예도 대단치 않아서 혼자 들어가 볼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함께 작당해 뛰어든 것이었다.
윤지평과 육관영은 사람들이 나타나자 즉시 싸움을 멈췄다. 그들이 미처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사통천이 끓어 앉아 두 손으로 그들의 팔을 비틀어 잡았다. 그리고 팽련호는 몸을 숙여 바닥에 묶여 있던 후통해의 팔과 눌린 혈도를 풀어 주었다. 후통해는 반나절이나 묶여 있던 화가 폭발했다. 입 안에 물었던 헝겊도 뺄 새 없이 정요가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정요가는 몸을 숙이고 빙그르르 돌며 피했다. 후통해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나기 퍼붓듯 휘둘러 댔다.
[잠깐만! 누군지 물어나 보고 때리라구]
팽련호가 소리질렀지만 귀를 틀어 막힌 후통해에게는 들릴 리 없었다.
육관영은 팔의 맥문을 사통천에게 잡혀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정요가가 위급해지고 미친 듯 날뛰는 팽련호를 보니 아무래도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는지 힘껏 사통천의 팔을 뿌리치고 후통해를 덮쳤다.
그러나 그는 후통해를 채 덮치기도 전에 팽련호가 내민 다리에 걸려 나가떨어졌다. 팽련호는 허리를 숙이고 육관영의 덜미를 잡아 낚아채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귀신으로 분장했던 그 녀석은 어디로 갔느냐?]
이때 주점의 문이 삐걱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팽련호 등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바로 그때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비쭉 고개를 디밀었다. 양자옹과 영지상인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여자 귀신이다!]
팽련호가 그래도 눈치가 빠른 편이라 귀신이 아닌 평범한 시골 여자임을 즉시 알아차렸다.
[들어와!]
팽련호가 벌컥 소리를 지르자 바보 소녀가 입을 헤벌린 채 웃으며 들어와 혀를 날름거렸다.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양자옹은 여자 귀신이라고 소리질렀던 자신의 경솔함을 무마하느라 벌컥 화를 내며 몸을 날려 그 여자를 막아서며 팔을 틀어잡으려 했다.
[너는 누구냐?]
그는 소녀의 어리석어 보이는 표정을 보고는 그냥 시골의 바보 소녀려니 했다. 그런데 잡으려고 뻗었던 손을 오히려 얼얼하게 얻어맞고 말았다. 양자옹은 아무 방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호되게 반격을 당한 셈이었다. 그는 놀랍고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것이 아주 바보처럼 행세하며 대들어.]
양자옹은 몸을 날리며 두 주먹을 내뻗었다. 그러자 바보 소녀는 뒤로 물러서며 피하더니 그의 대머리를 가리키며 하하거리고 웃었다. 이 웃음 소리에 다들 깜짝 놀랐다. 너무나 뜻밖에 터져 나온 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양자옹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잠시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쉭 오른쪽 주먹을 날렸다.
바보 소녀가 손을 들어 막고는 비틀거리다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재빠른 양자옹이 놓칠 리가 없었다. 왼발을 뻗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팔꿈치로 내질렀다. 결국 바보 소녀는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할 만큼 코를 된통 얻어맞았다.
[수박 먹는 언니야! 빨리 나와서 나 좀 살려 쥐요. 누가 막 나를 때려요.]
황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작에 죽여 없앨 걸 공연히 살려 두었다가 화근이 되는구나.)
이때 돌연 누군가가 흥 코방귀를 뀌며 들어왔다. 비록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황용의 가슴은 뛰었다.
(아버지가 오셨구나.)
황용이 재빨리 구멍으로 내다보니 과연 예측대로 황약사가 청포 두루마기에 인피(人皮) 가면을 쓰고 문 어귀에 서 있었다. 아무도 그가 언제 들어왔는지 보지 못했다. 방금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아까부터 거기 서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황약사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간담이 싸늘하게 식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한 번 눈길을 주고는 고개를 돌린 채 다시 쳐다볼 생각조차 못했다.
방금 바보 소녀와 양자옹이 겨우 3초를 겨루었지만 황약사는 벌써 그녀가 본문의 제자임을 알아보고 적이 의아했다.
[아가씨 사부가 누군가? 그분은 어디 계시지?]
바보 소녀가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황약사의 괴상한 표정을 넋놓고 바라보다가는 손뼉을 치며 깔깔거렸다. 황약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자기 제자의 제자인 것만 같았다. 그는 본문의 제자는 각별히 사랑하여 누구든지 자기 제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사문을 반역한 매초풍이 곽정에게 얻어맞을 때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는데 이 천진난만한 바보 소녀를 보호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
[얘야, 다른 사람이 때리는데 대들어 때려 주지 않고 늘 얻어맞기만 하고 있느냐?]
일전에 황약사는 배 위에서 딸의 소식을 물었을 때는 가면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얼굴이 달라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목소리를 듣고 완안열이나 양강, 팽련호는 어렴풋이 그가 누군지를 알았다.
팽련호는 오늘 이 고수를 만났으니 아무래도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제 황궁에서 만난 사람이 혹시 이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다면 일은 여간 그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팽련호는 절대로 이자와는 싸워서는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기회만 오면 즉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서 목숨을 도모해야지 까짓것 체면이고 망신이고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다.
[제가 이길 수가 없는걸요.]
바보 소녀의 대답에 황약사는 버럭 화를 냈다.
[누가 이길 수 없다고 하더냐? 그자가 네 코를 때렸으니 너도 그의 코를 때려라. 한 대 맞으면 석 대는 때려야지.]
[그럼 그렇게 하지요.]
바보 소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자옹에게 다가섰다.
[내 코를 때렸으니 나도 코를 때려야지.]
그리고는 주먹을 번쩍 들어 양자옹의 코를 쳤다. 양자옹은 손을 들어 막으려고 했지만 갑자기 팔꿈치의 곡지혈이 뻣뻣해져 손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바보 소녀의 주먹에 퍽 하고 코를 맞았다.
[자, 또 한 번요.]
바보 소녀가 횟수를 세며 다시 주먹을 날렸다. 양자옹이 허리를 숙이며 등을 번쩍 쳐들고 왼손을 수평으로 뒤집었다. 이는 금나법(擒拿法) 가운데의 묘기다. 이제 곧 바보 소녀의 팔뼈가 탈골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자기의 손가락과 바보 소녀의 팔이 닿는 순간 팔 위의 비유혈(臂儒穴)이 또 뻣뻣하게 굳었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나며 다시 한 대를 얻어맞았다. 어찌나 힘이 셌던지 상체가 뒤로 발랑 젖혀지기까지 했다. 두 번이나 얻어맞은 양자옹은 경악과 분노를 가누지 못해 부들부들 떨었고 옆에서 바라보던 사람들도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암기와 청풍(聽風)의 술에 능한 팽련호만이 양자옹이 반격할 때마다 두 번이나 이상한 바람소리가 이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황약사가 금침과 같은 미소한 암기로 양자옹의 혈도를 때리는 줄 짐작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 암기가 날아갔는지는 몰랐다. 사실 황약사는 옷소매 속에 금침을 숨겨 놓고 쏠 때마다 금침이 옷을 뚫고 적에게 날아가기 때문에 상대방은 어디서 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자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때 바보 소녀가 셋!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양자옹은 두 팔을 쓸 수가 없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보고도 뒤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막 발걸음을 떼어놓으려는데 다시 오른쪽 다리 위의 백해혈(白海穴)이 뜨끔하고 저려 왔다. 눈앞에 불꽃이 번쩍하며 눈이 시렸다. 날아온 주먹이 코를 치는 바람에 누혈(淚穴)을 건드린 것이다. 무예를 겨루다 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눈물이 나오면 일생의 명성은 끝장이 나고 마는 법. 급히 옷소매를 들어올려 눈을 씻으려고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두 줄기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보 소녀는 어리숙했지만 마음만은 그지없이 착했다. 양자옹이 눈물을 흘리자 더 마음 아파하며 도리어 그를 달래기까지 했다.
[울지 마세요. 이젠 더 때리지 않을게요.]
양자옹에게 그녀의 이 말은 차라리 석 대를 얻어맞는 것보다 더 아프고 괴로운 것이었다. 양자옹은 속수무책이었다. 극도로 화가 난 나머지 왁 소리를 지르며 선혈을 토하면서 홱 고개를 들어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이런 식으로 사람을 해치고도 그래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단 말이오?]
[당신 주제에 감히 내 이름을 물을 수 있을까?]
황약사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방약무인한 태도로 소리쳤다.
[다들 꺼지지 못할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에게 덤벼들 용기도 없으면서도 어찌해야 좋을지 망설이던 판에 불같은 호통이 터진 것이다. 팽련호가 제일 먼저 빠져 나가려 했지만 두 발짝도 채 가지 못해 황약사가 앞을 막아섰다. 도무지 길을 비켜 줄 태세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우뚝 멈추었다.
[꺼지라는데도 꺼지지 않고 있으니 그럼 나보고 모두 죽여 달란 말인가?]
황약사가 욕설을 퍼부었다. 팽련호는 평소부터 황약사의 성미가 괴팍하여 무엇이든지 한다고 하면 하고야 마는 위인이라고 듣고 있던 터다.
[선배님께서 모두 물러가라 하시니 우리 물러갑시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후통해가 입 안을 틀어막고 있는 천 조각을 빼고는 욕을 했다.
[그럼 비켜나라구!]
후통해는 황약사의 면전에 다가서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황약사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보고 감히 길을 비키라고? 어림없는 소리다. 살고 싶은 녀석은 내 다리 밑으로 빠져 나가거라.]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마다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황약사의 재주가 제아무리 비상하다 하더라도 이 많은 무림의 고수들을 이렇게까지 깔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결사적으로 대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후통해가 소리를 지르며 황약사에게 대들었다.
그러나 황약사의 냉소와 함께 벌써 후통해의 몸이 높이 들렸다. 오른손으로 그의 방광을 잡은 채 밖으로 낚아채자 팔이 살과 뼈가 붙은 채 둘로 부러져 나갔다. 황약사는 다시 후통해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후통해는 이미 정신을 잃고 부러진 팔에서는 피가 샘솟듯 흘렀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파랗게 죽어 있었다. 황약사가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한 사람씩 훑어보았다.
사통천, 팽련호 등 모두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괴수들이지만 황약사의 눈초리가 자기를 쏘아보자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등골에서는 식은땀이 흐르며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내 다리 밑으로 빠져 나가겠느냐?]
모두들 그의 위세에 눌려 감히 대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팽련호가 제일 먼저 고개를 숙이고 황약사의 다리 밑을 기어 나갔다. 사통천이 윤지평과 육관영을 풀어 주고 사제를 안은 채 빠져 나가자 그 뒤를 이어 양강이 완안열을 부축해 기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양자옹과 영지상인이 빠져 나갔다. 그들은 주점 문을 나와서도 어느 누구도 감히 되돌아볼 생각을 못했다.
황약사가 앙천대소를 하며 그들을 비웃었다.
[관영은 이 아가씨와 잠시 머물러 있도록 해라.]
육관영은 이미 아버지의 은사인 황약사가 온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가면을 쓴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부를 수도 없었다. 육관영은 공손하게 땅바닥에 엎드려 네 번 절했다. 윤지평도 황약사의 위엄에 눌려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전진교 장춘 문하의 제자 윤지평, 선배님께 인사드리나이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지 않았느냐? 내 너에게 남아 있으란 말도 한 일이 없는데 그만 살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윤지평은 어리벙벙해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맸다.
[제자는 전진교 장춘 문하지 악한이 아니옵니다.]
[그래 전진교가 어떻단 말이냐?]
그러면서 손을 뻗어 탁자의 판자를 잡고 윤지평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판자가 가볍게 날았다. 윤지평이 털이개로 막았지만 그 가벼운 판자의 위력이 그토록 대단할 줄은 미처 몰랐다. 어마어마한 힘이라고 직감하는 순간 털이개와 함께 탁자가 자기 가슴을 치며 지독한 통증이 골수를 파고들었다. 입 안에 뭔가가 가득하여 뱉어 보니 부러진 이가 우수수 나왔다. 놀랍고도 무서워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
[나는 황약사요, 흑약사다. 네 전진파에게 어떻게 하면 본때를 보일 수 있겠느냐?]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지평과 정요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육관영도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이 젊은 도사와 말다툼하는 것을 들으신 모양이로구나. 그렇다면 내가 부엌신에게 한 말도 들으셨을 텐데 장차 무슨 벌을 내리실까?)
윤지평이 두 손으로 볼을 감쌌다.
[당신은 무림의 대종사신데 어찌하여 하는 일은 그 모양입니까? 강남육괴는 의로운 인물들인데 무엇 때문에 그들을 해치려고 하십니까? 만약 제 사부께서 소문을 퍼뜨리지 않았더라면 그들 육괴의 가족은 몰살되지 않았겠습니까?]
윤지평이 자기를 힐난하며 따지고 들자 황약사도 화가 났다.
[어째 그들을 찾을 수가 없나 했더니 쥐새끼 같은 네놈들이 농간을 부린 것이구나.]
윤지평이 펄펄 뛰었다.
[죽이겠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난 당신이 하나도 무섭지 않소!]
[그럼 사람이 없는 데서 욕하는 건 잘하는 짓이냐?]
윤지평은 이미 죽을 각오를 했다.
[정면에서도 욕할 수 있소. 당신은 요사마도(妖邪魔道)를 걷는 천하의 괴물이오.]
황약사는 유명해진 뒤로 이렇게 정면에서 욕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누구든지 자기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며 멀리 달아나는 줄로만 알았다. 윤지평의 이런 욕은 이 몇 십 년 동안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육관영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큰일났구나. 저 윤형 이제 살기는 다 틀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황약사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윤지평의 고집이나 대담함이 자기의 소년 시절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야 이놈아, 또 한 번 욕을 해봐라.]
[그런다고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았소? 욕하라면 하지요. 당신은 천하의 요물이오.]
듣다 못한 육관영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아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감히 내 조사야(祖師爺)를 욕할 수 있는가?]
육관영은 칼을 뽑아 들고 그의 어깨를 내려치려고 했다. 사실 그는 이렇게 해서라도 윤지평을 구하고 싶었다. 황약사가 손쓰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윤지평 같은 사람이 열 명 있어도 문제가 아닌 것이다. 차라리 자기가 나서면 조사야의 분이 풀려 윤지평의 생명만은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지평이 노한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차라리 오늘 실컷 욕이나 하다 죽으려오.]
육관영은 어떻게 해서라도 윤지평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골똘했다. 비록 부상을 입히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살려야 했다. 그래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정요가의 칼이 자기 칼을 막았다.
[나도 전진 문하예요. 죽이겠으면 우리 둘을 함께 죽여요.]
윤지평으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쪽은 육관영이었다. 황약사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좋다, 대담해서 맘에 들었다. 나 황노사 원래가 사마외도(邪魔外道)를 걷는 사람이다. 아주 시원하게 욕을 잘했다. 네 사부는 내 후배가 되는데 어찌 너를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겠느냐? 가보도록 해라.]
그러면서 황약사는 손을 뻗어 그의 앞가슴을 잡아 밖으로 집어 던졌다. 윤지평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에 끌려 밖으로 날아갔다. 이때 땅에 잘못 떨어지면 큰일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두 발이 얌전하게 땅으로 내려섰다. 마치 황약사가 안아서 가볍게 내려놓는 것과 같았다.
윤지평이 제아무리 배짱이 세다 하더라도 다시 들어가 욕할 수는 없었다. 그는 퉁퉁 부은 볼을 어루만지며 그곳을 떠났다.
정요가도 칼을 칼집에 넣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
황약사가 가로막고 가면을 벗어 들었다.
[저 사람과 혼인할 의사가 있는가?]
이렇게 말을 하며 육관영을 가리켰다. 정요가는 깜짝 놀랐다. 파랗게 질렸던 얼굴이 금방 빨갛게 변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네 사형이 나를 사마괴물(邪魔怪物)이라고 욕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도화도주 동사(東邪) 황약사다. 강호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황노사가 제일 미워하는 것은 인의(仁義)니 예법(禮法)이니 하는 것이요, 제일 싫어하는 것도 성현(聖賢)이니 절렬(節烈)이니 하는 것들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부우부(愚夫愚婦)를 속이는 것이야. 천하 사람들이 이 질곡에서 허덕이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거든. 불쌍하고도 우스운 일이지! 내가 사람을 해치는 예교(禮敎)를 믿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모두 나를 사마라 부르지만 이 사마가 절에 있는 성현보다 마음만은 착한 걸 누가 알겠느냐.]
정요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음만 두근거릴 뿐이었다. 도대체 황약사가 자기를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네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도대체 혼인할 의사가 있느냐? 나는 고집이 있고 성격이 시원한 사람을 제일 좋아한다. 아까 그녀석이 뒤에서는 내 욕을 하고 앞에서는 엎드려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했다면 벌써 그를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위급한 가운데서도 그를 도우려고 나서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 내 제자의 아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솔직히 얘기를 해보렴.]
정요가는 마음속으로는 대딥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친부모에게조차 하기 어려운 말을 어떻게 초면의 외인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육관영까지 옆에 있는데 말이다. 정요가는 거북하다 못해 얼굴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황약사는 육관영까지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을 보자 불현듯 딸 생각이 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너희 두 사람만 좋다면 내 이 일을 성사시켜 주마. 그러나 자식의 혼사라도 부모 마음대로 우길 수는 없는 일이지.]
만약 그전에 곽정에게 시집가라고 그냥 허락을 했더라면 사랑하는 딸이 바다에 빠져 죽지는 않았으리라. 황약사는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화가 불끈 솟았다.
[관영아, 너 어디 시원하게 말 좀 해보려무나. 이 색시에게 장가갈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육관영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사야님, 제가 부족함이 많은 것 같아서....]
[충분하고 말고. 너는 내 제자의 아들이니 공주에게라도 장가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느니라.]
육관영은 황약사의 성미로 보아 우물쭈물하다가는 불호령이 내릴 것만 같았다.
[저 아가씨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황약사가 빙그레 웃었다.
[좋다! 그럼 아가씨 생각은?]
정요가는 육관영이 하는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뻤지만 황약사가 자기에게 묻자 다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건 아버님의 허락이 있으셔야....]
[무슨 부모의 명령이야, 내 마음대로 했으면 좋겠다. 아가씨 부모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나와 사생결단을 하라고 해.]
정요가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 아버님은 계산이나 하시고 글이나 쓰시지 무공은 모르셔요.]
[뭐야! 계산하고 글 쓰는 것 가지고도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아가씨 마음이나 빨리 말해 봐.]
정요가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했다.
[원하지 않는 모양이로군. 그거야 자기 마음이겠지. 우린 말 한마디면 끝나는데, 후회해 봐야 이제 소용이 없느니라.]
정요가가 슬그머니 육관영을 훔쳐보았다. 그는 몹시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청혼만 하면 허락을 해주실 텐데 뭘 저렇게 초조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정요가는 혼자 생각했다. 이때 황약사가 벌떡 일어섰다.
[관영아, 강남육괴를 찾아가자! 일후 저 아가씨와 한마디 얘기라도 나눈다면 네 두 사람의 혀를 잘라 놓겠다.]
육관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황약사는 한번 말을 꺼내면 반드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 장난말이 아님을 알기에 그래 정요가의 옆으로 다가서서 읍을 했다.
[아가씨, 이 육관영은 무예도 보잘것없거니와 배운 것도, 재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연히도 아가씨를 뵙게 되었으니 혹시 무슨 인연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공자께서는 너무 겸양하지 마세요. 저는.... 제가 그런 것이 아니라....]
육관영은 고개를 끄덕이라던 황약사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아가씨, 제가 혹시 부족하다고 여기시거든 고개를 흔들어 주십시오.]
육관영은 이 말을 끝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눈을 조용히 들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정요가는 똑바로 선 채 꼼짝도 안 했다.
[아가씨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그런데 정요가는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육관영도 불안했지만 황약사는 더욱 답답했다.
[아니 고개를 흔드는 것도 아니요, 끄덕이지도 않으니 도대체 그건 뭔가?]
정요가가 미소를 머금고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흔들지 않으면 끄덕이는 것이에요.]
황약사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왕중양이 일평생 호연지기를 펴며 살더니 어디서 이런 부끄러움만 타는 제자가 섕겼나? 우습다, 우스워. 여하튼 잘됐으니 오늘 혼인식을 올리자구.]
육관영과 정요가는 이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 바보 소녀는 어디로 갔나? 그녀의 사부가 누군지 좀 알아봐야겠는데.]
황약사의 말에 육관영과 정요가도 함께 집 안을 돌아보았지만 그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 세 사람이 혼인 얘기를 꺼내자 바보 소녀는 답답했던지 벌써 밖으로 놀러 나가 버렸던 것이다.
[뭐 그리 서둘 것도 없지. 관영아, 너 여기서 정소저와 하늘에 절하고 부부가 되거라.]
[조사야님의 극진한 사랑은 분골쇄신한다 해도 보답키 어려울 줄 압니다. 그러나 여기서 성혼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창졸간이라....]
[뭐야? 너는 도화도의 문인이다. 그래 세속의 예법을 따르겠단 말이냐. 자, 이리 오너라. 여기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하늘에 절을 하면 된다.]
황약사의 말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위엄이 가득했다. 정요가로서도 이렇게 된 이상 육관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늘을 향해 절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나를 향해 절을 해라. 너희들의 조사야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좋다 좋아. 아주 통쾌하구나. 이제 너희 둘이 맞절을 해라!]
연극 같은 혼인식이 황약사의 호령 속에 치러졌다. 황용과 곽정은 밀실에 숨어 이 광경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새로 탄생한 부부에게 내가 선물을 줄 차례다. 보아라.]
그 순간 주점 안에 맹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벽이 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강풍이 불었다. 황용은 아버지의 몸이 보이지 않자 그가 지금 위력이 대단한 광표권(狂飄拳)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지나자 바람이 뚝 멈췄다.
[너희들은 바로 이렇게 연습을 하면 된다. 이 권법의 중요한 비결을 너희가 완전히 배울 수는 없겠지만 조금만 알아도 후통해 같은 그따위 상대는 무서울 게 없다. 관영아, 어디 가서 초 두 자루만 구해다가 신방을 밝히도록 해라.]
육관영이 얼떨떨해 황약사를 불렀다.
[조사야님!]
[왜 그러느냐? 천지에 절을 했는데 신방을 꾸며서는 안 되느냐? 너희 부부가 둘 다 무예를 배우는 사람들인데 그래 수놓은 비단 이불이 있는 방이 필요하단 말이냐?]
육관영은 황약사가 호통치자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빨간 초 두 자루와 술, 닭을 사다가 정요가와 함께 부엌으로 들어가 음식을 장만해서 황약사에게 대접했다.
식사를 끝내자 황약사는 아무 말 없이 하늘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딸 생각이 간절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황용은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및 번이나 문을 열고 아버지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혹시 곽정의 상처가 악화되지나 않을까 해서 손이 문에 갔다가는 다시 움츠러들곤 했다. 육관영과 정요가도 가끔 황약사를 쳐다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구양공자도 여전히 짚더미 속에 누운 채 허기져서 견딜 수 없었지만 꼼짝할 수도 없었다. 세 칸의 방에서 여섯 사람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는 사이에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정요가는 마음이 더한층 두근거렸다. 이때 황약사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그 소녀가 어째 아직 돌아오지 않나? 그 못된 녀석들이 그애를 어쩌지는 못했을 텐데.]
그는 고개를 돌려 육관영을 바라보았다.
[어째 신방에 촛불도 밝히지 않았느냐?]
[네, 곧 밝히겠습니다.]
육관영은 부싯돌을 쳐 촛불을 밝혔다. 촛불 밑에 정소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문밖에선 벌레가 울어대고 바람은 가볍게 대나무 잎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황약사가 의자를 들어다 문밖에 놓고 비스듬히 누웠다. 잠시 후에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육관영과 정요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촛불마저 다 타서 사그라지자 집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두 사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황용이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들리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곽정이 몸을 바르르 떨며 호흡이 몹시 빨라졌다. 연공의 중요한 고비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황용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운기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곽정의 호흡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다시 눈을 구멍에 가져다 댔다. 달빛이 어스름하게 비쳐 들어오고, 육관영과 정소저가 어깨를 나란히 기대고 앉아 있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겠어요?]
정요가가 먼저 소곤거렸다.
[우리가 혼인한 경사스런 날 아니오.]
[그걸 모를까 봐 그러세요. 오늘이 칠월 초이틀, 또한 제 생일이기도 해요.]
[아 그래요, 아주 공교롭게 됐군요.]
육관영이 다정하게 정요가의 손을 어루만졌다.
[행복해요.]
정요가가 속삭였다.
황용이 하마터면 킥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오늘이 칠월 초이틀, 곽정 오빠는 이렛날이나 완전히 나을 텐데.... 악양루의 개방 대회가 칠월 보름날, 팔 일 동안에 어떻게 거기에 도착한담?)
황용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는데 느닷없이 문밖에서 긴 휘파람 소리와 함께 크게 웃는 소리가 기왓장을 울렸다. 주백통의 웃음 소리였다.
[노독물! 임안에서 가흥까지 또 가흥에서 임안까지 하루 낮 하룻 밤을 쫓아왔지만 이 노완동을 잡지 못했으니 우리의 승부는 결판이 난 셈인데 무얼 다시 겨루겠다고 야단이오?]
황용은 깜짝 놀랐다.
(임안에서 가흥이라면 왕복 오백 리 길인데 둘 다 참 빠르기도 하구나.)
[하늘 끝까지라도 쫓아가 잡고 말겠소.]
구양봉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럼 우린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잔단 말이오?]
[물론이지, 누가 먼저 쓰러지나 끝까지 해봅시다.]
끈질긴 구양봉답게 억척스럽게 맞받았다.
이윽고 주백통과 구양봉이 말하는 소리가 뚝 끊어지고 웃음 소리만 길게 퍼져 나갔다. 그 웃음 소리는 벌써 10여 장 밖 먼 곳에서 퍼져오는 것이었다. 육관영과 정요가 두 사람은 도대체 이들이 어떤 인물인지도 몰랐다. 깊은 밤 그들이 왔다갔다하는 소리를 듣고 서로 눈길만 보내다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손을 마주잡고 문밖으로 구경을 나갔다.
(그들 두 사람이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으니 아버지는 꼭 나가서 보시겠지?)
황용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과연 육관영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응 이상한데, 조사야는 어디로 가셨지?]
[저길 보세요. 저기 세 사람의 그림자를.... 맨 마지막 분이 바로 조사야 같은데요.]
[그렇군 그래. 어쩌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저렇게 멀리 갔을까? 저 두 분은 어디 고수들인지 뵙지 못해 유감스럽구려.]
(그게 노완동이건 노독물이건 만나 봐야 별로 좋은 일도 없을걸.)
황용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내심 코웃음을 쳤다.
육관영과 정소저는 황약사가 가버리자 이 객점에는 자기 둘만이 있는 줄 알았다. 그래 육관영이 팔을 들어 새색시의 가는 허리를 껴안으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이름이 뭐죠?]
[얘기하지 않을 거예요. 어디 한번 맞혀 보세요.]
[고양이 아니면 강아지겠군 그래.]
[모두 틀렸어요. 나는 어미 호랑이예요.]
[아 그럼 잡아야겠군.]
육관영이 덮치려 하자 정요가가 펄쩍 뛰어 달아났다. 둘은 서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쫓고 쫓기며 빙글빙글 돌면서 깔깔거렸다.
불빛이 희미해 황용은 그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없었다. 다만 미소를 머금고 그들이 속삭이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곽정이 그녀의 옆에서 나지막이 물었다.
[용아, 저 친구 정소저를 붙잡을 수 있을까?]
[그야 물론이죠.]
[그래 잡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황용은 부끄러운 생각이 먼저 일어나 뭐라고 말을 못했다. 그런데 육관영은 벌써 정요가를 잡아 꼭 껴안고 의자에 앉아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용의 오른손은 곽정의 왼손 장심에 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장심이 점점 뜨거워지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흔드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자 황용은 깜짝 놀라 물었다.
[곽정 오빠, 왜 그러세요?]
곽정은 중상을 입은 후 기력이 크게 쇠퇴해 있었다. 《구음진경》에 씌어진 대로 요양을 하고 있었지만 많은 적들이 밖에서 소란을 부려 그의 치료를 방해했다. 게다가 육관영과 정요가까지 뜨거운 얘기를 그들 옆에서 주고받으며 그를 또 자극했다. 그리고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꽃 같은 황용이 옆에 있었다. 곽정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전신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변해 오른손으로 황용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호흡은 급박해지며 장심은 더할 수 없이 뜨거워졌다.
[곽정 오빠 정신을 차리고 진정하세요.]
곽정은 어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난 틀렸어. 용아, 난.... 나는....]
곽정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고 부들부들 떨었다.
[움직이면 큰일나요!]
황용은 곽정을 억지로 눌러 앉혔다. 그러나 몇 번 깊은 호흡을 해보아도 가슴이 더 답답해지는 것이 폭발할 것 같았다.
[용아, 나 좀 살려 줘!]
그가 다시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움직이기만 하면 혈(穴)을 누를 거예요.]
[그래 빨리 내 혈을 눌러. 못 참겠어.]
황용은 그의 혈을 누르기만 하면 이틀 동안의 연공은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이 급했다. 곽정이 다시 일어난다면 위험해질 것은 뻔했다. 황용은 이를 악물고 왼팔을 돌려 난화불혈수(蘭花拂穴手)의 솜씨로 그의 왼쪽 가슴 11번째 늑골에 있는 장문혈(章門穴)을 눌렀다.
황용의 손끝이 막 그의 혈도에 가 닿으려는 순간 뜻밖의 일이 생겼다. 곽정의 내공이 어느 정도 원상 회복이 돼 있었던 모양이다. 몸에 위험이 닥치자 근육에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황용이 두 번이나 실수를 한 것이었다. 세 번째 다시 누르려 하자 왼팔이 꽉 조였다. 곽정이 그녀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어느덧 날은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황용이 고개를 돌리고 보니 곽정의 두 눈에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만 조급할 뿐 손을 잡혔으니 꼼짝할 수가 없었다. 곽정은 정신을 잃어버린 듯 무어라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급한 김에 팔꿈치로 그의 어깨를 힘껏 때렸다. 연위갑에 있는 가시가 그의 어깨를 찔렀다. 곽정은 지독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났다. 이때 마을의 수탉들이 새벽을 알렸다. 곽정은 머리 속에 번개가 번쩍이는 듯하더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잡았던 황용의 팔을 맥없이 놓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황용은 땀이 비오듯 흐르는 그의 이마를 보았다.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위험한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곽정 오빠, 우린 이틀 밤을 무사히 넘겼어요.]
곽정이 자신의 따귀를 철썩 때렸다.
[아슬아슬했어.]
그가 다시 손을 들어 따귀를 때리려고 하자 황용이 이를 막았다.
[그럼 무슨 소용이 있나요. 노완동의 공력을 가지고도 아버지의 피리 소리를 견디지 못했는데 오빤 지금 중상을 입은 몸이잖아요.]
방금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는 바람에 그들은 소리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육관영과 정요가는 달콤한 밀어를 주고받는데 정신이 팔려 그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내당에 누워 있던 구양공자는 희미하게나마 황용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반갑고도 놀라워 정신을 모아 귀를 기울여 봤으나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두 다리가 부러져 걸을 수가 없었다. 손을 다리 삼아 밖으로 기어 나왔다.
第 五十 章. 의문에 빠진 사건
육관영은 새색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의자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사람이 내당에서 기어 나오는 게 아닌가. 육관영은 흠칫 놀라며 칼을 뽑아들고 일어섰다. 구양공자는 부상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나 여러 끼를 굶어 너무나 허약해져 있었다. 번쩍이는 검광을 보자 눈앞이 어지러워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육관영이 초췌한 그의 모습을 보고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정요가가 깜짝 놀라며 가벼운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일찍이 보응현에서 자기를 욕보이려고 납치했던 구양공자였기 때문이다.
육관영이 고개를 돌리니 아내가 놀라 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군 그래.]
[이 사람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제가 알아요.]
[그래?]
이때 구양공자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며 애걸했다.
[밥 한 그릇만 주세요. 배고파 죽겠습니다.]
정요가는 그의 푹 팬 볼이며 쑥 들어간 눈을 보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욕보이려고 할 때의 거드럭거리던 그가 아니었다. 정요가는 원래 마음이 착한데다가 신혼초였다. 그래서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부엌에 들어가 밥 한 그릇을 퍼다 그에게 주었다. 구양공자는 한 그릇을 다 먹고 또 한 그릇을 청했다. 그렇게 연거푸 세 그릇이나 비우자 비로소 정신이 드는지 정소저를 바라보았다. 정소저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황용 아가씨는 어디 계신가요?]
[황용 아가씨라니요?]
육관영이 의아해서 물었다.
[도화도 황약사의 따님 말입니다.]
[아니 황소저를 아시나요?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는데요.]
[저를 속이려고 하십니까? 제가 분명 그녀의 말소리를 들었는데요.]
구양공자는 빙그레 웃다가 왼손으로 탁자를 살짝 눌러 몸을 돌렸다. 두 손을 땅에 버틴 채 안팎을 한바퀴 휘둘러보았다. 방금 전 황용의 말소리가 동쪽에서 난 것 같았다. 그러나 동쪽은 벽이요 문이 없었다. 그는 총명한 위인이었다. 잠시 눈을 깜박이며 생각하다가 그 찬장에 뭔가 곡절이 숨어 있다는 확신을 내렸다.
구양공자는 즉시 탁자를 찬장 앞으로 밀어 놓고는 그 위에 올라앉아 찬장 문을 열었다. 찬장 속에 문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찬장 안은 컴컴하고 지저분하기만 했다. 잠깐 실망했지만 다시 그 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먼지 낀 쇠그릇 위에 사람의 손자국이 나 있었다. 옳지 이것이다 싶어 손을 뻗어 잡아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번 비틀어 보자 삐걱거리며 밀실의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그리고는 황용과 곽정이 얌전하게 앉은 채 얼굴을 드러냈다.
구양공자는 황용을 보자 왈칵 반가운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곽정을 발견하자 무섭기도 했지만 질투심도 일었다.
[누이, 여기서 무슨 연공을 하고 계셨나?]
황용은 구멍을 통해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탁자를 찬장 앞으로 미는 것을 보고 머지않아 자기들이 있는 곳이 탄로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벌써 그를 죽일 방법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급히 곽정의 귀에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
[내가 저 녀석을 안으로 유인할 테니 오빠는 항룡장으로 요절을 내요.]
[하지만 나는 힘을 쓸 수 없는걸.]
황용이 다음 말을 하려고 하는데 벌써 구양공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떤 거짓말을 해서 이놈을 멀리 쫓아 보내고 닷새를 버티지? 그러나 내가 입을 벌려 다른 사람과 말을 하게 되면 오빠의 일은 끝장이 나니 이 일을 도대체 어쩐다?)
구양공자는 처음 곽정을 두렵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초췌한 얼굴을 보자 모든 것을 알았다, 숙부가 벌써 황궁에서 그를 합마공으로 죽였다고 했었다. 그때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중상을 입은 게 틀림없었다. 그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 그들 둘의 태도만 보고도 벌써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자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누이, 밖으로 나와요. 거기 숨어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러면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소매를 잡았다. 황용은 아무 말 없이 죽장을 집어들었다. 당두봉갈(當頭捧喝)의 솜씨를 발휘하여 그의 정수리를 향해 무섭게 내려쳤다. 타구봉법(打狗棒法) 가운데의 묘기였다.
황용의 죽장 소리가 맹렬히 일자 구양공자는 번개처럼 왼쪽으로 피했다. 죽장의 공세도 변하여 옆으로 방향을 돌렸다. 구양공자가 깜짝 놀라 물구나무 자세로 돌아 탁자 위에 내려앉았다. 황용이 쫓아가서 대요천궁(大鬧天宮)의 묘기를 발휘하여 녀석의 급소를 노렸다면 일은 쉽게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무릎을 끓은 채 꼼짝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육관영과 정요가는 찬장 속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게 바로 곽정과 황용이란 것을 알았을 매는 벌써 황용과 구양공자가 싸움을 벌인 후였다. 구양공자는 탁자에 내려앉자마자 두 손으로 버티며 탁자를 뒤집어엎고 금나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 한편으로 죽장을 피하며 계속 황용의 혈도를 노리며 덤벼들었다. 황용의 타구봉법이 묘하다고는 하지만 구양공자의 무공이 두드러지게 우세한데다 황용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10여 초를 겨뤘지만 피차 좌충우돌할 뿐 결과가 없었다. 육관영 부부가 각기 단도와 장검을 들고 협공에 나섰다. 그러나 구양공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맹렬하게 곽정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이때 곽정은 저항할 기력도 없었다. 적의 공격을 의식하고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를 본 황용이 깜짝 놀라 죽장을 들어 막았다. 구양공자가 손을 뒤집어 죽장의 한끝을 잡고 밖으로 낚아챘다. 황용은 그의 힘을 당할 수는 없어 비틀비틀했다. 그녀의 손과 곽정의 장심이 떨어지면 큰일나는 것이다. 황용은 어쩔 수 없이 죽장을 놓친 채 품속을 더듬어 한줌의 강침을 찾아내 구양공자를 향해 던졌다.
두 사람이 대결할 때의 거리는 불과 몇 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구양공자는 눈앞에 강침이 반짝하고 날아오자 허리에 힘을 주며 탁자위에 벌렁 누워 강침을 피했다. 육관영은 이를 보자 도마 위의 고기라 생각하고 칼을 들어 그의 목을 찔렀다.
그 순간 구양공자가 재빨리 몸을 오른쪽으로 한바퀴 굴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육관영의 칼이 탁자 위에 꽂혔다. 머리 위로 강침이 쉭쉭거리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육관영은 갑자기 등뒤가 뻣뻣해지며 몸 한쪽을 쓸 수가 없었다. 급히 피하려고 했지만 벌써 오른팔을 적에게 잡힌 것이다. 정요가가 놀라 달려들었지만 구양공자는 징그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근사한데.]
구양공자는 재빨리 정요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앞섶을 낚아챘다. 정요가가 칼을 휘둘러 그의 팔을 치며 뒤로 펄쩍 뛰었으나 부지직, 옷이 쭉 찢어졌다. 놀란 정요가는 하마터면 장검까지 놓칠 뻔했다. 갑자기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고 그녀는 감히 더 대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구양공자가 탁자 모서리에 앉아 고개를 돌리니 밀실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하마터면 강침에 맞을 뻔한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저놈의 계집애 정말 만만치 않단 말야. 아하, 좋은 방법이 있군. 정소저를 희롱하고 있으면 저 곽가 녀석과 계집의 마음이 흩어질 게고 그렇게 된다면 연공을 백날 해봐야 소용없겠지. 그때가 되면 제까짓 것들이 내 말 안 듣고 배길 재간이 있나.)
구양공자는 이런 생각을 하자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저 계집애 꼭 선녀처럼 생겨 가지고 내 간장을 녹인단 말야. 무리를 하면 아무래도 재미없을 테고, 이 방법이 제일 그럴듯하겠군.)
그는 정요가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 정소저, 이자를 죽이길 바라나, 아니면 살리길 원하나?]
정요가가 보니 신랑은 팔을 잡힌 채 두 눈을 감고 꼼짝못하고 있었다.
[구양공자님! 원수진 일도 없는데 살려 주세요.]
[아니, 전진파가 다른 사람에게 애걸할 때가 다 있나?]
구양공자는 기분이 좋다는 듯 이죽거리고 있었다.
[그분은....그분은 도화도주 문하의 제자예요. 그를 해치면 안돼요.]
[그럼 누가 칼을 들고 나를 해치러 들래? 만약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이 머리가 아직도 목에 매달려 있을까? 괜히 도화도를 들먹여 나를 놀라게 하려구? 어림없는 소리, 황약사는 내 장인어른이야.]
정요가는 그의 말의 사실 여부를 몰랐다.
[그렇다면 그분은 공자의 후배 아니에요. 놓아주세요. 사과하면 될 것 아녜요?]
[하하하, 천하에 그리 쉬운 일도 있나? 이자를 놓아주기 바란다면 내 청을 하나 들어줘야 해.]
정요가는 그의 표정으로 보아 좋은 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걸 보라구!]
구양공자가 이렇게 외치며 손바닥을 번쩍 들어 탁자 한 모퉁이를 내려쳤다. 탁자 한쪽 귀퉁이가 얌전하게 칼로 도려낸 것처럼 반듯하게 부러졌다. 정요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사부님이라 하더라도 저렇게는 못할 것이다.)
구양공자는 어려서부터 숙부에게 직접 무예를 배우며 자랐다. 무공으로 따진다면 중년이 되어 배우기 시작한 손불이가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정요가가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득의만면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오.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이자의 목을 이 꼴을 내고 말 테니까.]
정요가는 오싹 소름이 끼쳐 비명을 질렀다.
[내 말을 듣겠소, 안 듣겠소?]
정요가는 달리 방법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래야지. 나가서 문을 닫아걸어요.]
정요가가 머뭇거리자 구양공자는 벌컥 화를 냈다.
[말을 듣지 않을 거요?]
정요가가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문을 잠갔다.
[암, 그래야지. 어제 결혼식 올리는 것을 내가 옆에서 모두 보았지. 그런데 첫날밤 신방에서 옷도 벗지 않다니 천하에 이런 부부가 어디 있단 말이오. 이제 옷을 모조리 벗는 게야, 알겠소? 만약 실오라기 하나라도 걸치면 신랑을 당장에 요절내고 말겠소. 그러면 청상 과부의 신세가 되는 거란 말이오.]
육관영은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구양공자가 하는 말만은 분명히 들었다. 눈이 찢어지게 구양공자를 노려보면서 자기 처에게 어서 달아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용은 구양공자가 육관영을 잡을 때 재빨리 밀실의 문을 닫아걸고 비수를 꺼내 들었다. 재차 공격을 해올 때를 대비해서였다. 그런데 정요가에게 옷을 홀랑 벗으라는 호령이 들려왔다. 화도 났지만 우습기도 했다. 그녀는 구양공자의 비열함이 미우면서도 정소저가 어떻게 나오려나 잔뜩 궁금했다.
[아니, 옷 좀 벗으라는데 뭘 꾸물거리고 있소?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옷을 걸치고 나왔단 말인가? 당신의 체면을 살릴 거요, 아니면 남편의 목숨을 바칠 거요?]
정요가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차라리 그를 죽이세요!]
뜻밖의 단호한 말에 구양공자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 순간 정요가는 칼자루를 자기 목에 들이대고 찌르려고 했다. 구양공자가 잽싸게 투골정(透骨釘)을 내던지자 쩽그렁 소리를 내며 칼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정요가가 몸을 숙이고 다시 장검을 주워 드는데 그때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렸다.
[주인 계셔요? 주인!]
여자 목소리였다. 정요가는 반가웠다.
(누가 나타났으니 상황은 달라지겠지.)
그녀는 칼자루를 거머쥐고 단숨에 달려가 대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소복을 입은 묘령의 여자가 문밖에 서 있었다.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허리에는 단도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초췌한 얼굴이지만 미모가 출중했다.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정요가로서는 구세주가 아닐 수 없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소녀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가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을 보자 적이 놀라는 눈치였다.
[두 구의 관(棺)이 밖에 있는데 안으로 들여와도 괜찮을까요?]
평범한 여염집이라면 어림없는 얘기겠지만 객점은 아무래도 달랐다. 게다가 정요가로서는 지금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관이 백 개 아니라 천 개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괜찮아요. 그게 무슨 상관 있나요.]
그 소녀로서는 더욱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아무튼 소녀가 밖을 향해 손짓을 하자 8명의 인부가 관을 메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그 소녀가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돌리다 구양공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갑자기 소녀가 칼을 뽑아 들었다. 구양공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정해 준 천생연분이로구나. 달아나려야 달아날 수도 없으니 오히려 잘됐군. 거저 굴러 온 염복을 사양할 리 있겠는가?]
그 소녀는 다름아니라 일찍이 그에게 납치되었다 살아난 목염자(穆念慈)였다.
그녀는 보응에서 양강과 헤어진 후 상심한 나머지 머리카락을 자르고 나자 세상에 오직 한 가지 일만 해결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도(中都)로 들어가 절에 안치했던 부모님의 영구를 찾아 남행을 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인 임안 우가촌에 두 분을 안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는 몽고병이 금나라를 공격하여 중도를 포위한 상태라 시절이 어수선하여 여자의 몸으로 두 구의 영구를 모시고 길을 떠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천신만고 고생 끝에 이제 겨우 고향에 당도했다. 그녀 나이 겨우 다섯에 고향을 떠났기에 고향 산천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가는 낯선 곳이나 다름없었다. 바보 소녀의 객점을 발견하고 우선 여기서 잠시 쉬다가 일을 처리하려고 들어왔는데 뜻밖에 구양공자와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눈앞에 서 있는 비단옷을 입은 미모의 여인이 때마침 마수에 걸려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정요가가 납치되어 있을 때도 구양공자가 목염자를 빈 관 속에 감금해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얼굴을 대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정요가도 구양공자의 희첩 가운데 한 사람이겠거니 싶은 생각이 들자마자 그 여자를 향해 칼로 내려치는 시늉을 해 보이며 문밖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 옷깃에 바람을 날리며 사람 그림자 하나가 머리 위로 날아왔다.
목염자가 칼을 위로 들어 휘둘렀지만 구양공자는 재빠르게 몸을 반공에 띄운 채 오른손 식지로 칼등을 잡아당기며 왼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목염자는 칼을 놓치며 허공에 떴다가 구양공자와 함께 이제 막 반쯤 문안에 들어선 관 위에 떨어졌다. 관이 땅에 떨어지고 관을 메고 있던 일꾼들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관 밑에 깔렸다.
구양공자는 왼손으로 목염자의 허리를 감아 품속에 끌어안고 오른손에 쥔 칼등으로 일꾼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관 밑에 깔렸던 일꾼들이 연신 비명을 지르며 기어 나와 밖으로 달아나자 뒤따르던 다른 일꾼들도 관을 버린 채 품삯 달라는 말도 할 새 없이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육관영은 적의 손에서 풀려나자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정요가가 달려들어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육관영은 눈앞에 펼쳐진 위급한 형세를 보며 어찌해야 좋을지 막연하기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달아나야겠다고 궁리를 하고 있는데 구양공자가 오른손으로 관을 누르며 왼팔에 목염자를 안은 채 몸을 날려 탁자 옆으로 되돌아오면서 정요가까지 오른팔에 껴안고 내려앉아 앙천대소했다.
[여보, 황용 누이도 내 품에 들어오라구.]
구양공자가 득의양양해 있는데 문밖에 사람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소년 공자가 들어섰다. 양강이었다. 그는 완안열, 팽련호 등과 함께 황약사의 다리 밑을 빠져 나가 우가촌을 벗어났었다. 모두들 그런 치욕을 당했으니 말 한마디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걷기만 했다. 양강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치욕만은 씻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구양봉에게 부탁해서라도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황궁으로 책을 가지러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완안열에게 허락을 받고 혼자 돌아와 마을 밖 숲 속에서 구양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밤 주백통, 구양봉,황약사 세 사람이 왔다갔다했어도 워낙 그들의 행동이 민첩했기 때문에 양강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는 캄캄한 밤중에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이른 아침에 목염자가 관을 멘 일꾼들을 거느리고 마을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슬그머니 그들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양강은 그들이 주점으로 들어서는 것도 보았고 일꾼들이 급히 달아나는 것도 똑똑히 보았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황약사는 벌써 간 지 오래고, 목염자가 구양공자의 품에 안겨 곤욕을 치르는 판이었다. 구양공자는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자 반겼다.
[소왕야, 돌아오셨군요!]
양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구양공자는 그가 왠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서자 금방 그 연유를 깨닫고 얘기했다.
[그 옛날 한신(韓信)도 유방의 다리 밑을 빠져 나가는 곤욕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대장부는 굽힐 때 굽히고 뻗을 때 뻗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 정도는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제 숙부님 돌아오시거든 그때 화를 푸시지요.]
양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목염자를 바라보았다. 구양공자가 웃으며 또 말을 꺼냈다.
[소왕야, 이 두 명의 미인이 어떻습니까? 근사하지요?]
양강이 또 머리를 끄덕거렸다. 예전에 목염자와 양강이 중도의 거리에서 무예를 겨룰 때 구양공자는 그 자리에 없었기에 그로서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사연을 알 턱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양강은 목염자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다가 뒤에 자기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두터움을 알고 감동했고 그래서 또 혼인까지 약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구양공자가 그녀를 억지로 품에 안고 있으니 입맛이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전연 드러내지 않았다.
[어젯밤 여기서 혼례식이 있었습니다. 부엌에 술도 있고 닭고기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마는 소왕야께서 가져 오셔서 몇 잔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 저는 이 두 미녀의 옷을 벗기고 춤을 추게 하여 주흥을 돋우겠습니다.]
구양공자가 웃으며 하는 말에 양강도 맞장구를 쳤다.
[더할 나위 없이 좋겠군요.]
목염자는 양강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자기를 배반한 약혼자 앞에서 자결할 결심을 했다,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으니 더 이상 창피고 수치심이고 없었다. 옷을 벗으라면 벗을 참이었다. 양강이 부엌에서 술과 안주를 들고 나와 구양공자와 함께 대작했다. 구양공자는 술 두 잔을 따라 두 소저의 입에 갖다 댔다.
[자, 우선 이걸 들어야 춤출 때 흥이 나지.]
두 소저는 화가 나고 기가 막혀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혈도를 눌러 놨으니 술잔이 입에 닿아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둘 다 어쩔 수 없이 꿀꺽꿀꺽 반 잔씩이나 마셨다. 그 광경을 보고 양강이 입을 열었다.
[구양선생, 나는 구양선생의 무예를 진심으로 흠모하고 있습니다. 이 잔이나 먼저 비우시고 가무를 즐깁시다.]
구양공자는 껄껄 웃으며 양강이 건네 준 술잔을 받아 단숨에 비운 뒤에 두 소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두 손은 여전히 그들의 등뒤에 있는 신당혈(神堂穴)에 대고 지껄였다.
[얌전하게 내 말을 들어야 고생도 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얻게 되는 게야.]
목염자가 문 앞에 있는 두 개의 관을 가리키며 처절하게 말했다.
[양강, 이게 도대체 누구의 영구인지 똑똑히 보기나 해요.]
양강이 목염자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앞에 있는 관 위에는 주홍 글씨로 이렇게 쐬어 있었다.
<대송의사양철심지령(大宋義士楊截小之靈) >
마음속은 뜨끔했지만 전연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구양선생, 당신은 두 계집을 잡고 계시오. 내 누구의 발이 더 작고 예쁜지 한번 봐야겠군요.]
이 말에 구양공자가 껄껄 웃었다.
[소왕야는 운치를 아는 분이오. 내가 보기에는 이 계집의 발이 더작고 예쁠 것 같군요.]
구양공자는 정요가의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겠지요.]
양강이 이렇게 말하며 탁자 밑으로 몸을 숙였다. 목염자와 정요가 두 사람은 그가 자기들 발을 건드리기만 하면 그의 태양혈(太陽穴)을 걷어차 요절낼 작정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구양선생 술 한잔 더 드시오. 그 동안 내가 누구의 발이 더 작은지 얘기하리다.]
[좋습니다.]
구양공자는 흔쾌하게 대답하고 술잔을 쳐들었다. 양강은 탁자 밑에서 눈을 치뜨고 구양공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목을 뒤로 젖히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양강은 품속에서 부러진 철창의 끝을 찾아내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구양공자의 아랫배를 찔렀다. 창 끝이 5,6치나 박힌 것을 확인한 그는 물구나무 자세로 탁자 밑을 빠져 나와 피했다.
창졸간에 일어난 뜻밖의 일이라 황용, 곽정, 목염자, 육관영, 정요가 누구 한 사람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줄은 알았지만 탁자 밑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구양공자가 두 팔을 벌벌 떠는 바람에 목염자와 정요가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만 땅바닥에 떨어졌다. 구양공자가 손에 든 술잔을 양강에게 집어 던졌다. 양강이 고개를 숙여 피하자 술잔은 쩽그렁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그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양강은 떼굴떼굴 굴러 문밖으로 달아나려다가 그만 문 어귀에 놓인 관에 걸렸다. 도리없이 벌떡 일어서며 고개를 돌려보니 구양공자가 두 손으로 의자를 짚은 채 우는지 웃는지 모를 괴상한 눈초리로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마음속으로는 결사적으로 달아나야 한다는 조바심에 발을 굴렀지만 구양공자의 괴상한 눈초리에 못이라도 박혔는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구양공자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이 구양공자 반평생 천하를 종횡하면서도 오늘 네놈의 손에 죽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일은 어째서 네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지 그 점이다.]
양강은 두 발로 땅을 찍으며 몸을 허공에 띄웠다. 문밖으로 달아난 뒤에 녀석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람소리가 일더니 뒷덜미를 구양공자의 억센 손에 잡히고 말았다.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양강은 구양공자와 함께 관 위로 쿵 떨어지고 말았다.
[말을 해라. 그 이유를 듣기 전에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양강은 녀석의 손에 잡힌 이상 이제 살기는 다 틀렸다고 체념을 했다.
[좋다, 말을 하마. 이 여자가 누군지 알겠느냐?]
양강은 목염자를 가리켰다.
구양공자가 목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손에 칼을 쥐고 대들려고 하다가도 혹시 양강이 다치지나 않을까 주저하는 게 분명했다. 방금 정요가가 육관영을 대하던 태도와 비슷했다.
[이 여자가 바로....]
양강은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마른기침을 했다.
[그녀는 나의 약혼녀다. 두 차례나 네놈이 농락하려고 했는데 내가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
[좋다, 그렇다면 우리 함께 저승으로 가가.]
구양공자가 음흉하게 웃으며 손을 높이 들어 양강의 천령개(天靈蓋)를 노렸다. 이제 내려치기만 하면 양강은 끝장날 판이었다. 목염자가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양강은 두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구양공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채 지워지지도 않았는데 그의 뒷덜미를 잡았던 손이 스르르 빠져 나갔다. 그가 가볍게 뿌리치자 구양공자가 허수아비처럼 관 위에 푹 엎어졌다. 그는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양강과 목염자가 서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달려들어 손을 마주잡았다. 서로가 할말은 너무나 많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를 몰랐다. 그들은 구양공자의 시체를 바라보며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렸다. 정요가도 육관영을 부축해 일으켜 그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육관영은 양강이 대금국의 사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가 구양공자를 죽여 은인이 되기는 했지만 국사를 생각하면 그 역시 자기의 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예를 차리느라고 앞으로 나서며 읍은 했지만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냥 정요가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
황용은 양강과 목염자가 다시 만나는 것을 보자 여긴 기쁘지 않았다. 곽정은 이 아우가 이번 기회에 개과천선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래서 황용과 마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목염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부모님 영구를 제가 여기까지 모시고 왔습니다.]
[원래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누이를 괴롭혀 드렸군요.]
목염자는 지난 일은 꺼내지 않고 어떻게 양철심 내외를 안장하느냐 하는 문제만을 상의했다, 양강은 구양공자의 아랫배에 꽂혀 있던 부러진 창 끝을 잡아 뽑았다.
[우선 이자를 후원에 묻어야 해요, 이 일이 만약 그의 숙부에게 발각되면 천하가 제아무리 넓다 해도 우리가 숨을 곳은 없어요.]
둘은 즉시 구양공자를 매장한 뒤에 동네 사람을 사다가 예전의 양씨댁 자리에 양철심 부부를 안장했다. 양철심이 고향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기에 그를 알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뒤라 아무도 그가 누군지를 알지 못했다.
장례를 끝내자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그날 밤 목염자는 마을의 인가에 들어가 잠자리를 구했고 양강만이 객점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목염자가 객점으로 다시 왔다. 양강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으려고 하는데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했다.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일을 그르친 것 같소. 어제 그 두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건데 그만 보내고 말았으니 어디 가 그들을 찾는단 말이오?]
[왜요?]
[내가 구양공자를 죽인 일이 항간에 퍼지면 큰일이란 말이오.]
이 말에 목염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장부가 지난 일을 가지고 뭘 그러세요. 그렇게 무섭거든 어제 차라리 구양공자를 죽이지 마실 걸 그랬군요.]
양강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육관영과 정요가를 찾아내 죽여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의 숙부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면 우리 멀리 도망쳐 버려요. 설마 하니 숨을 장소가 없을라구요.]
[누이는 모르는 소리요. 내게는 다른 생각이 있단 말이오. 그의 숙부는 무공이 천하 제일이라 나는 그를 사부로 모실 생각이라오.]
목염자는 그의 속셈을 알 듯했다.
[나는 벌써부터 그럴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문중에서는 제자를 거두는 법이 없다오. 그런데 유일한 후계자가 죽었으니 그 숙부가 이제는 나를 거두어 줄 거란 말이오.]
양강은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그의 말투나 표정을 보자 목염자는 여간 실망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위험을 무릅쓰고 구양공자를 죽인 것은 나를 구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속셈이 있어서 그랬군요?]
목염자가 힐난하듯 말해도 양강은 그저 웃기만 했다.
[누이, 그렇게 억울하게 말하지 마오. 누이를 위해서라면 천번이고 만번이고 분골쇄신할 나요.]
[그런 말은 다음에나 하세요. 그러나저러나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대송의 충의로운 백성이 되시겠어요, 아니면 부귀영화를 찾아 그냥 완안열을 아버지로 모시겠어요?]
양강은 그녀의 날씬한 자태를 훑으며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다가 가시돋친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언짢아졌다.
[부귀영화? 흥 내게 무슨 부귀영화가 있다고 야단이오. 대금국 중도는 몽고에 짓밟혔고 싸움을 하기만 하면 지니 망국의 화가 곧 눈앞에 닥칠 것이오.]
목염자는 들을수록 그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우리는 금나라가 지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는데, 그래 그게 그렇게도 슬프고 애석해요?]
[누이는 왜 만나기만 하면 그런 얘기를 꺼내오? 누이가 떠난 뒤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양강은 슬금슬금 그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목염자는 그가 부드럽고 은근하게 속삭이자 그만 약해졌다. 잡힌 손을 뿌리치려고도 않고 그저 얼굴만 붉혔다.
양강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때 공중에서 이상한 새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횐 수리 한 쌍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날 양강은 툴루이(拖雷)의 뒤를 쫓다가 이 흰 수리들을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 황용이 데리고 간 것도 알고 있었다.
(어째 흰 수리가 여기 나타났을까?)
양강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목염자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공중에는 흰 수리 한 쌍이 맴돌고 있고 큰 나무 아래에는 한 소녀가 준마에 올라타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녀는 가죽신을 신고 손에는 채찍을 쥐고 있었다. 몽고인의 옷차림이었다.
한 쌍의 휜 수리가 한바퀴 맴을 돈 뒤 큰길 쪽으로 날아갔다가 잠시 뒤에 다시 나타났다. 뒤이어 큰길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보아하니 흰 수리가 길 안내를 하는 모양이로구나.]
큰길에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며 말 세 필이 점점 가까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화살 하나가 쉭 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날았다. 소녀도 활통에서 화살을 뽑아 하늘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말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시위 소리를 듣고 환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소녀 역시 채찍을 들어 말들을 후려치며 마주 달려갔다. 양쪽의 거리가 3장이 넘는데도 서로 반가운 소리를 지르며 안장에서 벌떡 뛰어 공중에서 서로 손을 잡고 동시에 땅에 떨어져 내려왔다.
(몽고 사람들의 말 타는 솜씨와 활 솜씨가 저 지경이니 금나라 사람들이 당해 낼 도리가 없겠구나.)
양강은 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곽정과 황용도 밀실 안에서 수리가 나타난 사실을 알았다. 말 달리는 요란한 소리도 들었다. 잠시 후에 사람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객점으로 들어섰다. 곽정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
말에 탔던 그 몽고 소녀는 자기의 약혼녀인 화쟁 공주(華箏公主)였고, 다른 세 사람은 툴루이, 제베(哲別), 보구르치(博爾朮) 등이었다.
화쟁 공주는 자기 오빠인 툴루이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황용은 몽고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곽정만이 그들을 바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마음속에는 오직 황용 한 사람뿐이다. 화쟁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으니 장차 이 일을 어쩐다?)
[곽정 오빠, 저 아가씨는 누구예요? 그리고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오빠 표정이 왜 그렇지요?]
황용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다. 과거에도 몇 차례나 황용에게 이 일을 들려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는 다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묻고 나서니 더는 속일 수가 없었다.
[저 여자는 몽고의 대칸인 칭기즈 칸의 딸인데 내 약혼녀야.]
황용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느닷없이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그런데 어째서 한 번도 내게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요?]
[그전부터 말을 하려고 했었어. 그러나 용아가 속상해 할까 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어.]
[아니, 약혼녀라면서 그립지도 않으셨어요?]
[나도 몰라. 내 마음으로는 친오누이나 다름없이 생각하지만 아내로 맞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이 말에 황용의 볼우물에 다시 웃음이 고였다.
[왜 그럴까요?]
[그 일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대칸께서 결정을 내리셨던 거야. 물론 내가 그녀를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굉장히 좋아했던 것도 아니야. 나는 다만 대칸의 분부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야. 용아! 내 이제 용아를 버리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아내로 맞을 수 있겠어?]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나도 잘 모르겠어.]
황용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만이라도 제게 잘해 주신다면 그녀를 아내로 맞으신대도 저는 상관없어요.]
황용은 슬퍼지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아내로 맞지 않으시길 바라요. 저는 다른 여자가 늘 오빠 곁에 있는 걸 원치 않아요. 제가 화가 나서 그녀를 칼로 죽인다면 저를 욕하시겠지요. 그만 얘기해요. 그리고 저들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봐요.]
곽정이 귀기울여 들어보니 툴루이와 화쟁 공주는 이별한 뒤의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다. 일찍이 황용과 곽정이 바다에 빠진 뒤 그 흰 수리는 바람과 빗속에서 주인을 찾을 수 없는데다 바다 위에는 서식할 장소도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대륙을 향해 날아갔던 것이다. 화쟁 공주는 흰 수리가 돌아온 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수리의 다리에 묶인 헝겊을 보았다. 거기엔 한자(漢字)가 씌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자를 몰라 곽정의 어머니인 이평(李萍)에게 가지고 가 물었다. <유난(有難)>이란 두 글자였다.
화쟁 공주는 걱정스러워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남행길을 결심한 것이다. 이때 칭기즈 칸은 금나라를 토벌하는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연일 금나라 군대와 장성 내외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아무도 화쟁 공주를 만류할 사람은 없었다.
한 쌍의 흰 수리는 주인의 뜻을 알았다는 듯 매일 수백 리를 날아다니며 곽정을 찾아 헤맸다. 임안까지 와서도 곽정은 찾지 못했지만 툴루이만은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툴루이는 부왕의 명령을 받고, 송나라 조정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치기 위해 임안에 왔다. 그러나 남송의 군신은 금나라가 무서워 툴루이를 냉대했다.
그를 객점에 데려다 놓고 시일만 끌 뿐 거들떠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몽고의 출병 소식에 이어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소식은 계속 들려왔다. 금나라의 중도가 함락되었고 몽고병은 계속 남하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남송 대신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제 그들은 매일 그를 찾아와 엄살을 떨며 비위를 맞추기에 바빴다. 툴루이는 마음속으로는 그들의 비열한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그들과 금나라를 토벌하자는 동맹을 맺었다. 부왕의 명령을 완수하고 이날 그는 말머리를 돌려 북행길에 올랐다가 임안 교외에 이르러 우연히 횐 수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곽정이 나타난 줄 알고 있다가 뜻밖에 누이동생인 화쟁과 해후하게 된 것이다.
[그래 곽정 안다(安答)를 만나셨나요?]
툴루이가 화쟁 공주의 물음에 막 대답하려는데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갑옷과 무기가 맞부딪치는 소리였다. 송조가 몽고 사신을 호송하기 위해 파견한 군사가 도착한 것이다.
<공송몽고흠사사왕야북환(恭送蒙古欽使四王爺北還)>
송나라 군사들이 든 깃발에 씌어 있는 문구였다. 양강은 문간에서 이 깃발을 바라보며 착잡한 감회에 젖어 있었다. 몇 달 전 자기도 왕자의 신분으로 사신 대접을 융숭히 받았었다. 부귀영화만을 탐하던 그의 입맛이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염자는 차디찬 눈길로 양강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거니와 그의 표정이 야릇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부귀영화를 잊지 못해 연연해하는 듯했다. 송나라 병사를 인솔하는 군관이 객점으로 들어와 정중하게 툴루이를 뵙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후 밖으로 나갔다.
[여봐라, 모두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성이 곽씨인 곽정이란 분이 이 마을에 살고 계신지 알아보아라. 만약 계시지 않다거든 어디 가셨느냐고 상세히 물어 보도록 해라.]
병사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몰려 나갔다. 잠시 후 개 짖는 소리, 닭 모는 소리에 섞여 마을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외치는 비명 소리까지 들렸다. 아마 군사들이 이 기회를 이용해 노략질을 하는 모양이었다. 양강의 머리에 번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군사들이 노략질하는 틈을 타 몽고 왕자와 사귀면 될 것이 아닌가? 기회를 봐 죽일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몽고의 대칸은 송나라 사람의 소행으로 생각할 것이 아닌가? 일이 그리된다면 몽고와 송조의 맹약은 깨지고 말 테니 금나라에는 더욱 이롭지 않겠는가?)
마침내 양강은 결심하고 목염자에게 말했다.
[누이,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걸음을 성큼성큼 떼며 객점을 향했다. 군관이 큰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어 막았지만 양강이 휘두르는 바람에 벌렁 나가넘어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툴루이와 화쟁이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 그는 벌써 객점 안으로 들어와 품속에서 철창의 창 끝을 높이 들어 탁자에 올려놓고 땅에 꿇어 엎드려 방성대곡했다.
[어이구, 곽형. 형은 정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내 이 원수는 꼭 갚고야 말겠습니다. 곽형! 곽형! 아이고.]
툴루이 남매는 한어(漢語)를 몰랐다. 그러나 그가 곽정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모습을 보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때 양강에게 맞아 쓰러졌던 군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급히 까닭을 물어 보라고 일렀다. 양강이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저는 곽정과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입니다. 그런데 곽형이 누군가에게 이 철창 끝으로 찔려 죽었습니다. 저는 반드시 그자를 찾아내 복수를 하고야 말겠습니다.]
툴루이 남매는 몽고어를 아는 군관을 통해 양강이 하는 말을 전해 들었다. 모두들 번갯불에 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어 말을 잊었다. 제베나 보구르치 모두 곽정과는 정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몽고 사람들은 성품이 솔직한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서로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양강은 또 보응에서 금나라 병사를 물리치고 그들을 구출했던 과거의 일까지 들먹였다. 툴루이 등은 그를 더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곽정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전말을 상세히 물었다. 양강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짓말로 엮어 나갔다. 곽정은 밀실에 앉아 양강의 거짓말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화쟁은 그의 말이 끝나자 칼을 뽑아 들고 자결을 하려는지 목에 갖다 대다가 뗐다. 그리고 다시 칼을 휘둘러 탁자에 꽂으며 말했다.
[곽정을 위해 복수를 하지 않으면 나는 사람이 아니야!]
양강은 자신의 간사한 계략이 맞아떨어지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계속 흐느껴 우는 체하다가 구양공자가 황용으로부터 빼앗은 죽장이 비스듬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취빛으로 투명하게 번쩍거리는 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이상하게 여겨 그걸 주워 들었다. 그것을 본 황용은 큰일났다고 혀를 차면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사병들이 술과 밥을 마련해 왔지만 툴루이 등은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양강에게 즉시 군사들을 이끌고 곽정을 살해한 원수를 찾아보라고 부탁했다. 그 말에 양강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죽장을 가지고 문밖으로 나갔다.
[양강이 저들을 데리고 도대체 누굴 찾아가려고 저러지?]
곽정이 소리를 죽여 물었지만, 황용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칼로 오빠를 찌른 것은 자신이 아녜요? 정말 저사람 음흉하기 짝이 없군요.]
이때 문밖에서 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천하를 종횡하며 구속을 모르며 부귀영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도다.... 아니 이게 누구야? 목소저 어째 이곳에 와 계신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장춘자 구처기였다. 목염자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양강은 객점에서 나오다 사부가 오셨음을 알았다. 외나무다리라더니 달아날 곳도 없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사부 앞에 꿇어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구처기 옆에는 또 몇 사람이 있었다. 단양자 마옥, 옥양자 왕처일, 청정산인 손불이 그리고 구처기의 제자 윤지평 등이었다.
어제 윤지평이 황약사에게 얻어맞고 이가 반이나 부러진 채로 곧 달려가 사부에게 고했던 것이다. 때마침 구처기는 임안에 있었다. 윤지평이 하는 말을 듣고 놀라기도 했지만 몹시 화가 났다. 그 즉시 구처기는 황약사를 만나야 한다고 서둘러 댔다. 그러나 마옥은 신중을 기하자고 만류했다. 구처기는 워낙 성질이 급하고 칼날 같은 사람이었다.
[그 황약사가 왕년에 선사와 함께 명성을 나란히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칠형제 가운데 오직 왕사제만이 화산의 절정에서 그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일찍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를 만난다고 해서 꼭 싸움을 걸자는 것도 아닌데 대사형은 왜 만류하십니까?]
[평소에 황약사의 성미가 괴팍하다고 들었소. 자네 또한 성질이 벼락같지 않은가? 만나 봐야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을 것 같아 그러오. 그가 윤지평을 살려 준 것만 해도 우리 체면을 보아 그런 것 아니겠소?]
그래도 구처기는 한사코 가겠다고 우겼다. 그러자 마옥도 더 말릴 수가 없어 칠자가 다음날 우가촌으로 가기로 했던 것이다.
칠자가 한자리에 모였다면 그건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황약사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적과 친구도 잘 구별하지 못하는 그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 마옥, 구처기, 왕처일, 손불이, 윤지평 등 다섯 사람이 먼저 마을로 들어서고 담처단(譚處端), 유처현(劉處玄), 학대통( 大通) 세 사람은 마을 밖에 있다가 호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찾는 황약사는 보이지 않고 뜻밖에 목염자와 양강을 만나게 된 것이다.
구처기는 양강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먼저 윤지평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 도화도주가 바로 이 객점에서 제자를 때렸습니다.]
그는 황약사를 황노사라고 부르다가 마옥으로부터 몇 번이나 꾸지람을 듣고야 이렇게 호칭을 바꾼 것이다. 구처기가 안에다 대고 낭랑하게 외쳤다.
[전진 문하의 제자 마옥 등이 도화도주 황도주를 뵈오러 이렇게 왔습니다.]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양강의 말참견에 구처기는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게냐?]
양강은 사부와 사숙을 보자 두려움에 벌벌 떨 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화쟁이 한참 동안이나 마옥을 응시하다가 다가서며 반갑게 말했다.
[아니 제게 흰 수리를 잡아 주신 삼계도장(三 道長)이 아니세요? 그때 잡아 주신 수리가 이렇게나 컸어요.]
그러면서 입으로 휘파람을 불자 두 마리 수리가 날아 내려와 그녀의 양 어깨에 사뿐히 앉았다. 마옥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방에 놀러 오셨나?]
[도장님, 곽정이 누군가에게 창에 찔려 죽었어요. 원수를 갚아 주세요.]
화쟁이 울며 마옥에게 매달렸다. 마옥이 깜짝 놀라며 그 말을 한어로 사제들에게 들려주었다. 구처기와 왕처일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어찌 된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저 사람이 보았대요. 직접 물어 보세요.]
화쟁이 양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양강은 화쟁이 대사백과 서로 아는 사이임을 알자 더욱 불안에 떨었다. 한마디라도 말이 어긋나면 자기 거짓말이 탄로날 판이었다. 즉시 툴루이와 화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저 저 앞에 가셔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이 도장님들께 몇 마디 말씀드린 후 곧 쫓아갈게요.]
툴루이는 군관이 통역해 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을 북쪽으로 걸어갔다.
[그래 누가 곽정을 살해했는지 빨리 말을 해라.]
구처기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곽정은 내가 찔러 죽였는데 누구에게 뒤집어 씌울까?)
그 순간 한 가지 꾀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 사람이면 되겠구나. 사부는 그 사람을 찾아갈 게고, 그렇게 되면 목숨을 잃을 테니까 후환이 없을 것이다.)
[다름아니라 도화도주 황약사예요.]
이때 멀리서 은은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 뒤를 이어 깨진 방울을 치는 듯한 소리가 몇 번 들리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가볍게 숨을 내쉬는 소리까지 들렸다. 소리는 낮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또렷이 들려 왔다. 그 세 가지 소리가 마을 밖에서 한바퀴 돌다가 잠시 후에 또 멀리 사라졌다.
구처기는 놀랍고도 반가워 외쳤다.
[저 소리는 틀림없는 주사숙의 웃음 소리요. 그분이 아직도 세상에 살아 계셨군요.]
第 五十一 章. 연공이 끝날 무렵
마을 동쪽에서 다시 한 번 웃음 소리, 방울 소리, 숨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제각기 높낮이는 달랐지만 그런대로 화음을 이룬 듯 하더니 이윽고 다시 밀어져 갔다. 손불이가 말문을 열었다.
[세 분 사형이 뒤쫓아갔으니 곧 결과를 알 수 있겠지요.]
[깨진 방울 소리와 낮은 호흡 소리가 마치 주사숙을 쫓는 것 같은데.]
왕처일의 말을 듣고 마옥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저 두 사람 무공이 결코 주사숙에게 뒤지는 것 같지 않은데, 도대체 어떤 연고인지 알 수가 없군. 주사숙은 혼자요 적은 둘이니 아무래도....]
마옥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전진 사자가 귀를 기울이고 한참 동안이나 들었지만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벌써 그들은 몇 리 밖으로 멀리 가버린 모양이었다.
[담사형 등 세 사람이 뒤쫓아갔으니 주사숙이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요?]
손불이가 걱정하며 묻자 구처기가 대답했다.
[쫓아가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오. 주사숙께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줄 아셨다면 마을로 들어오셨을 텐데요.]
황용은 그들의 억측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와 노독물은 지금 노완동과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는 게지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닌데. 정말 싸움이 벌어졌다면 당신들 도사 몇 명이 돕는다고 아무러면 아버지나 노독물의 적수가 될 수 있을라구.)
마옥이 손짓을 하자 모두들 안으로 들어와 좌정했다. 먼저 구처기가 양강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여봐라, 지금도 너를 완안강이라고 부르느냐? 아니면 양강이라고 하느냐?]
양강은 사부가 반짝이는 눈초리로 자기를 쏘아보자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잘못 대답했다간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이다.
[만약 사부님이나 마사백, 왕사숙께서 깨우쳐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직도 그자를 아비로 알고 있었을 테지만 이젠 모든 것을 다 알았으니 마땅히 양강이라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어제 저녁 제자는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 어머님을 목소저와 함께 이곳에 안장한걸요.]
구처기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은지 머리를 끄덕이며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왕처일은 처음에 그가 목염자와 무예를 겨룬 후에도 혼사에 응하지 않으려 해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화가 조금 풀려 있던 차였다.
구처기가 고개를 돌리다 땅바닥에 떨어진 짧은 삼지창을 발견하고 주워 들었다. 곽소천의 유물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손에 들고 어루만지는 표정이 몹시 비통해 보였다.
[십구 년 전, 이곳에서 네 아버지와 곽소천 백부를 알게 되었지. 거의 이십 년이 지났어도 쓰시던 물건은 이렇게 남아 있는데 그분들은 황천에 가 계시다니.]
곽정은 밀실에서 자기 아버지를 추모하는 말을 다 엿들었다.
(구도장께서는 아직도 내 아버님을 사귀신 일을 잊지 않고 저렇게 생각하고 계신데 나는 아버님의 얼굴조차 뵌 일이 없으니....)
구처기는 또 황약사가 어떻게 곽정을 살해했느냐고 물었다. 양강은 여전히 청산유수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마,구,왕 세 도인은 모두 곽정과는 구면인지라 한숨을 내쉬고 탄식을 하며 듣고 있었다. 한참이나 떠들어대고 난 양강은 툴루이와 화쟁을 만날 생각에 안절부절 못했다. 왕처일이 그를 한번 바라보고 목염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 둘은 혼인했는가?]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양강이 먼저 대답하고 나섰다.
[그럼 빨리 하는 편이 좋을 게야. 여보 구사형, 오늘 아주 이 둘을 혼인시키면 어떻겠소?]
그 소리에 황용과 곽정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또 한바탕 신방 차리는 것을 구경해야 하나?)
[모든 일을 사부님의 분부대로 좇겠습니다.]
양강이 반갑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나섰다.
[아닙니다. 우선 제 말씀부터 들어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을지언정 따르지 않겠습니다.]
목염자가 단호하게 나섰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의부를 따라 강호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성격이 정요가와는 크게 달랐다. 구처기가 이 말을 듣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무슨 일인지 아가씨, 얘기를 해보시오.]
[제 의부는 완안열이 살해했습니다. 저이가 아비를 죽인 원수를 갚아야만 저도 결혼을 승낙하겠습니다.]
이 말에 구처기가 무릎을 쳤다.
[암, 그래야지. 목소저는 참으로 내 마음에 꼭 드는 말을 했소. 강아, 어디 한번 말해 보려무나.]
양강이 주저하며 어떻게 대답할까 망설이는데 대문 밖이 떠들썩하더니 목쉰 긴 타령 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 마나님, 적선하는 셈치고 이 거지에게 한푼만 줍쇼.]
목염자가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니 문밖에 거지 두 명이 서 있었다. 하나는 키가 크고 뚱뚱했고 다른 하나는 땅딸보에 깡마른 체구였다. 키 큰 거지가 땅딸보에 비해 4배나 더 커보였다. 이 두 사람의 체구가 너무 독특하여, 여러 해가 지났지만 목염자는 그들을 알아보았다. 13세 때, 그들 두 거지의 상처를 자기가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홍칠공이 그녀를 귀엽게 보아 사흘 동안 무예를 가르치게 된 것도 그 인연 때문이었다. 목염자는 앞으로 나서며 알은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두 거지는 문안으로 들어선 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양강이 가지고 있는 죽장만을 응시했다. 한참 뒤에 그들은 서로 바라보다가 양강 앞으로 걸어와 공손히 절을 하는 것이었다.
마옥 등은 두 명의 거지가 들어설 때 걸음걸이만 보고도 벌써 그들이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등에 8개의 마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개방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양강 앞에서는 공경스럽기 그지없으니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깡마른 거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임안성 내에서 방주의 법장을 보았다고 하기에 우리가 사방으로 찾아 나섰는데 이렇게 뵈오니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방주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양강은 손에 들고는 있었지만 그 죽장의 내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거지가 하는 말을 듣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어물어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개방의 규율로는 녹죽장만 보면 방주를 뵙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두 거지는 양강이 자기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하자 더욱 굽실거렸다. 이번에는 뚱뚱한 거지가 말문을 열었다.
[악주(岳州)의 집회가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동로(東路)의 간(簡)장로께서는 칠 일 전에 벌써 출발하셨습니다.]
양강은 들을수록 어리둥절해 멀뚱거리기만 했다.
[제자는 방주의 법장을 찾기 위해 시일이 지체되었습니다. 만일 오늘 출발하신다면 저희 제자들이 모시겠습니다.]
깡마른 거지의 말이었다.
양강은 마음속으로 이상히 여겼지만 줄곧 어떻게 해서든 사부 곁을 빨리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떠나기로 작정하고 마옥 등 다섯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제자는 급한 일이 있어 사부님들을 모시지 못하오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옥 등은 양강이 개방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평소 개방의 명성이 높다고 들었을 뿐만 아니라 방주인 홍칠공과 선사 왕진인은 특별한 교분이 있는 고인들이라 만류할 입장이 아니라고 여겼다. 게다가 두 거지는 강호의 예절에 어긋남이 없이 전진칠자 앞에서도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더욱이 그들이 양강의 사부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겸양하며 말끝마다 후배라는 말을 썼다.
목염자도 옛일을 꺼내 얘기하자 곧 그녀를 알아보고 더욱 친절을 다했다. 그들은 그녀와 개방이 원래부터 인연이 있는 사이이므로 악부의 집회에 함께 참석하자고 초청했다. 목염자로서도 호기심이 발동하는데다 양강과 동행하고 싶은 생각에 머리를 끄덕여 응낙했다. 그리하여 네 사람이 마옥 등에게 하직을 고하고 문밖으로 나섰다.
그날 밤 마옥 등은 그 객점에 머무르며 담처단 등 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음날 밤이 되어서야 마을 밖에서 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학사형이 돌아오셨군요!]
손불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전진 사자는 그때까지 단정히 앉아 연공을 하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녕자(廣寧子) 학대통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마옥도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문밖에 사람 그림자가 스치는 듯하더니 학대통이 표연히 안으로 들어섰다.
황용은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구멍으로 뚫어져라 내다보았다. 이날은 바로 칠월 초닷샛날이었다. 초생달 아래 두 사람의 거대한 체구가 보였다. 그들은 꼭 환관(宦官) 같은 모습이었고 도포 소맷자락이 팔꿈치까지 올라와 마옥을 비롯한 다른 사람의 차림과는 크게 달랐다. 원래 학대통은 출가하기 전 산동 영해주(寧海州)의 거부로 있었다. 그때 역리(易理)를 깊이 연구하다가 뒤에 연하동(烟霞洞)에서 왕중양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당시 왕중양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두 소매를 잘라 그에게 주며 이런 말을 했다.
[소매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스스로 대성하도록 하라.]
소매라는 수(袖) 자와 전수한다는 수(授) 자는 음이 같았다. 사부가 전수해 주는 것은 적다 하더라도 스스로 정진을 거듭하면 대성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뒤부터 학대통은 사부를 기념하기 위하여 소매짧은 도포를 입기 시작했다.
구처기가 성질도 급하게 물었다.
[주사숙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다른 사람과 장난을 하고 있던가요, 아니면 싸우고 있던가요?]
학대통이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대답했다.
[소제의 무공이 깊지 못해 칠팔십 리를 쫓아갔는데도 주사숙을 뵙지 못했습니다. 담사형과 유사형이 저보다 앞장서서 가셨습니다]
마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사제, 수고가 많으셨군. 앉아 쉬도록 하시오.]
학대통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운기를 하며 전신의 혈도를 한바퀴 돌렸다.
[소제가 돌아올 때 주왕묘(周王廟)에서 여섯 사람을 만났는데 아마 그들이 바로 구사형이 찾는 강남육괴 같더군요. 그래 제가 가서 물어보니 과연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분들은 어디 계시오?]
구처기가 반가워하며 물었다.
[그들은 막 도화도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구처기는 깜짝 놀랐다.
[육괴는 정말 대담하구먼. 결국 도화도에까지 들어가다니. 어쩐지 그들을 찾을 길이 없다고 했더니 바로 그래서 그랬군.]
[육괴 가운데 우두머리인 가진악의 말로는 황약사와 도화도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더군요. 그래 도화도에 갔었는데 황약사가 없더랍니다. 구사형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더니 이틀 후에 뵈러오겠다고 했습니다.]
곽정은 여섯 분 사부가 모두 아무 탈없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자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 또한 지금은 닷새나 연공을 했기 때문에 상처가 상당히 아물어 가고 있었다.
엿새째 되던 날 오후 신패(申牌)시에 마을 동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유사제가 고수 하나와 동행을 했는데 도대체 누굴까?]
구처기의 말에 다섯 사람이 동시에 일어서고 윤지평이 뒤따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유처현이 흰 수염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노인은 황갈색 짧은 옷에 미투리를 신고 손에는 부들풀로 만든 부채를 들고 웃으며 들어서더니, 전진오자를 보고도 가볍게 머리만 끄덕일 뿐이었다. 유처현이 먼저 그들에게 노인을 소개했다.
[이분은 명망 높으신 철장수상표(鐵掌水上飄) 구( )선배님이신데 오늘 우리가 이렇게 뵙게 되니 여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황용은 이 말을 듣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녀는 팔꿈치로 곽정의 몸을 살짝 건드렸다. 곽정도 우스운 모양이었다.
(저 사기꾼이 어떻게 전진 도인들을 속이나 보자.)
마옥이나 구처기 등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여간 공손하지 않았다. 구천인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허풍을 떨었다. 구처기가 구천인을 향해 주백통 사숙을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노완동 말이오? 벌써 황약사에게 살해되었소.]
뭇 사람들이 깜짝 놀라자 유처현이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후배가 그저께 주사숙을 뵙고 쫓아갔는데 어찌나 빠른지 뵈올 수가 없었는데요.]
구천인은 그 말에 어리둥절해져서 웃으며 할말을 잊고, 어떻게 거짓말로 얼버무릴까를 궁리하고 있었다.
[여보 유사제, 사숙을 쫓는 두 사람이 누군지 보았소?]
구처기가 다급히 물었다.
[한 사람은 횐 도포를 입었고 다른 한 사람은 청포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어찌나 빠른지 똑똑히 보지는 못했지만 청포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 표정이 마치 시체 같더군요.]
구천인은 귀운장에서 황약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래그래. 노완동을 살해한 사람이 바로 청포 두루마기를 입은 황약사였소. 다른 사람이야 그만한 재주가 있는가. 내 만류하려고 했지만 그만 한 발 늦었다오.]
철장수상표 구천인의 명성은 워낙 높았다. 전진육자가 어찌 그가 그렇게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는 사실을 알 리 있으랴. 그들은 모두 비분하여 말을 잃고 있었다. 곧 유처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담사형이 나보다 빨리 갔으니 어쩌면 사숙이 살해되는 광경을 보았을지도 모르지요.]
[혹시 담사형도 그자에게 살해된 것은 아닐까요?]
손불이가 불안한 듯 여기까지 말하다가 그만 입을 봉하고 말았다. 구처기가 칼을 뽑아 들고 일어섰다.
[우리 빨리 달려가 사람도 구하고 복수도 합시다.]
구천인은 그들이 쫓아가 주백통을 만날까 겁이 났다.
[황약사가 여러분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곧 이리로 올거요. 이놈의 황약사, 어찌나 악독한지 내 오늘만은 용서하지 않으려오. 여러분의 도움도 필요 없으니 여기서 반가운 소식이나 기다리고들 계시오.]
사람들은 이 선배를 존경하는 마음에 뭐라고 말참견을 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기들이 나섰다가 혹시 황약사와 길이 어긋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그냥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일제히 일어나 구천인에게 허리를 굽혔다. 구천인이 문지방을 넘다가 고개를 돌리고 왼손을 흔들었다.
[멀리 나올 것 없소. 황노사가 무공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나도 그를 제어할 방법은 있다오. 자, 모두들 보시오.]
그는 손을 뻗어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뽑아 들고 자기 배를 푹 찔렀다. 모두들 놀라 비명을 지르는데 세 자 정도 되는 칼날이 반 이상 뱃속에 박혔는데도 구천인은 껄껄 웃고 있었다.
[천하에 아무리 날카로운 이기가 있다 하더라도 나를 해치지는 못하니 놀랄 것 없소. 내 가다가 혹 황약사와 길이 어긋나서 이곳에 오더라도 절대로 싸우지 말도록 하시오. 공연히 인명이나 상하면 곤란하오. 내가 와서 처치할 테니까요.]
[어찌 제자 된 도리로 사숙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처기가 이렇게 말하자 구천인이 탄식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니 마음대로 하시오. 그것도 모두 운명이니까 말이오. 그러나 원수를 갚는다 하더라도 이 점 한 가지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거요.]
[무슨 말씀이시온지 구선배님께서 밝혀 가르쳐 주십시오.]
마옥의 말에 구천인은 표정이 진지해졌다.
[황노사를 만나거든 단번에 합세해서 살해하시오, 그와 쓸데없이 말을 주고받다가는 이 원수는 영원히 갚지 못할 것이오. 분명히 기억하시오.]
그는 말을 마치고 칼을 배에 꽂은 채 표연히 사라졌다.
모두가 이상스럽고 놀라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옥 등 여섯 사람은 모두 견문이 풍부한 사람들이었지만 날카로운 칼을 배에 꽂은 채 태연자약한 사람은 평생 듣도보도 못했던 것이다.
자연히 이 사람의 무공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진육자로서는 구천인이 꾸민 사기극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그의 그 칼날은 원래 세 토막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가벼운 자극만 받아도 첫째, 둘째 토막이 셋째 토막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칼날이 허리춤 틈에 끼여 멀리서 보면 마치 살 속에 박힌 것처럼 보였다. 그는 완안열의 초청을 받고 강남호걸들을 선동하여 서로 다투게 만들어 금나라 사람들의 남하를 돕는 한편, 기회만 있으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녔다.
이날 전진 육자는 앉아도 좌불안석이요, 식음조차 생각이 없었다. 마침내 초이렛날 밤 마을 북쪽에서 앞뒤로 은은한 휘파람 소리가 들리며 객점 쪽으로 가까워졌다. 마옥 등 여섯 사람은 짚더미 위에 단정하게 앉아 운기를 기르고 있던 중이었다. 윤지평만이 공력이 낮아 벌써부터 잠이 들었다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섰다.
[적이 담사제의 뒤를 쫓아온 모양이니 여러 사제들은 각별히 조심들 하시오.]
마옥이 이렇게 주의시켰다.
이날 곽정의 연공은 마지막 밤을 넘기고 있었다. 7일 동안 그의 내상은 점차적으로 나아가고 외상 또한 아물어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황용과 함께 두 사람의 내공은 더욱더 배증되었다. 이제 남은 몇 시간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고비였다. 황용은 마옥이 하는 말을 듣자 적이 걱정스러웠다.
(만약 아버지가 오신다면 전진칠자와 틀림없이 싸움이 벌어질 텐데,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해명할 수도 없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한다? 칠자가 아버지 손에 죽기라도 한다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다. 칠자의 사활이 나와는 별 관계가 없다지만 곽정 오빠는 마도장 등과 깊은 인연이 있지 않은가? 그가 벌떡 일어나 나가 버리기라도 하면 그 동안의 수고는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 생명까지 잃는 것이다.)
황용은 급히 곽정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
[곽정 오빠, 아무리 큰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나가면 안 돼요. 아시겠죠?]
곽정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밖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담사형, 천강북두(天 北斗)로 포진해요.]
구처기의 다급한 소리였다. 곽정은 <천강북두>란 말을 듣자 가슴이 싸늘해졌다.
(구음진경에 여러 차례나 천강북두대법(天 北斗大法)이란 말이 나왔는데, 그것이 상승의 무공을 익히는 기본적인 법문임은 알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 자세히 보아야겠다.)
곽정은 급히 구멍에 눈을 대고 밖을 주시했다.
꽝 소리와 함께 대문이 활짝 열리고 도인 하나가 나는 듯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도포 자락이 날리며 왼발이 문지방을 넘어서다가 기우뚱하며 다시 문밖으로 끌려 나갔다. 적이 뒤로 쫓아와 잡아 끈 것이다. 구처기와 왕처일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문간에 선 채 쌍장을 날렸다. 펑 소리가 나며 문밖과 안에서 뻗어 나온 장력이 부딪쳤다. 구처기, 왕처일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서고 적도 주춤 뒤로 두 걸음 후퇴했다. 담처단이 이 기회를 틈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달빛 아래 머리는 쑥밭이 되고 얼굴에는 두 줄기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적의 병기에 잘린 모양인지 오른손에 든 장검은 반 토막밖에 남지 않았다.
담처단이 문안으로 들어와서도 아무 말 없이 단정히 앉자 마옥을 비롯한 여섯 사람도 좌정했다. 그때 바깥 어둠 속에서 차디찬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담노도, 내 만약 당신 사형인 마옥의 체면만 아니라면 벌써 노상에서 죽였을 것이오. 그래 무엇 때문에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소? 방금 장풍을 날려 당신을 구한 사람이 누군지 이 흑풍쌍쇄에게 말해 주오.]
조용한 밤 매초풍의 까마귀 우는 듯한 소리는 여름 밤이라고는 하지만 듣는 사람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순간 정적이 흐르며 그 사이로 밖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후 우두둑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은 그것이 매초풍의 관절에서 나는 소리임을 알았다. 금방이라도 뛰어들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일주행와기십년(一住行窩幾十年).]
잠시 후 마옥이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웠지만 기백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봉두장일주여전(蓬頭長日走如顚).]
전진칠자의 둘째 담처단이 아랫 구절을 받았다. 그의 얼굴은 짙은 눈썹에 큰 눈이 특징이요, 체격이 유난히 장대했다. 담처단은 출가하기 전 산동에서 대장간을 하며 부자로 살았고 성격이 활달하기로 유명했다. 전진교에 귀의한 후 도명을 장진자(長眞子)라 불렀다.
세 번째 사람은 체격이 왜소하고 모습은 꼭 원숭이를 닮은 장생자(長生子) 유처현이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목소리만은 방울을 굴리는 듯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 뒤를 이어 장춘자 구처기가 한 수를 읊고 옥양자 왕처일이 받은 뒤 마지막으로 광녕자 학대통이 읊자 청정산인 손불이가 끝을 맺었다.
매초풍은 이들 일곱 사람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소리가 폐부를 꿰뚫을 듯 내공이 심오했기 때문이었다.
(전진칠자가 또다시 이곳에 모였나? 아니야, 마옥 이외에는 모두 다른 목소리다,)
그녀는 몽고 사막에 있는 절벽 위에서 마옥과 강남육괴가 전진칠자로 위장하여 낸 소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 눈은 비록 멀었지만 귀만은 예민했고 기억력도 비상하여 한번들은 목소리는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녀는 지금, 당시 마옥이 자기를 놀라게 하여 쫓으려고 꾸민 연극인 줄 몰랐다. 다만 오늘 듣는 일곱 사람의 목소리 가운데 마옥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절벽 위에서 듣던 그 목소리가 아니라는 생각만 했다.
[마도장,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매초풍이 낭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날 마옥은 그녀를 상당히 감싸주었다. 매초풍이 악독하다고는 하지만 그 점을 모를 리 없었다. 담처단은 주백통을 뒤쫓다가 놓치고 되돌아오는 도중 매초풍이 산 사람을 상대로 연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의협심이 강한 그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덤벼들었지만 덤비자마자 자기 적수가 아님을 직감했다. 다행히 매초풍이 그가 전진파 도인임을 알고 마옥의 체면을 보아 부상만 입히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덕분에 잘 지냈소! 도화도와 전진파는 원수진 일도 없고 감정을 산 일도 없는 사이요. 그래 황약사도 곧 도착하십니까?]
마옥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왜 우리 사부님을 찾으십니까?]
구처기의 성질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 요부, 빨리 사부나 불러오오. 전진칠자의 수단이 어떤지 맛을 보여 줘야겠소.]
매초풍도 화가 났다.
[당신은 누구요?]
[구처기요. 들어 본 일이 있소?]
구처기의 대꾸가 끝나기가 무섭게 매초풍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날려 목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호신을 하며 오른손으로 덮쳤다.
곽정은 매초풍의 재주를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덮치면 정말 당해 낼 상대가 드물었다. 구처기가 아무리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지만 무리해서 방어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얌전하게 앉은 채 막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
(큰일났구나! 구도장은 어찌 저리 버티기만 한단 말이냐?)
곽정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매초풍이 갈퀴 같은 손으로 구처기의 정수리를 덮치려는 순간 갑자기 좌우 양쪽에서 질풍 같은 장풍이 일었다. 유처현과 왕처일이 동시에 손을 쓴 것이다. 매초풍은 오른손에 힘을 주며 왼손을 휘둘러 두 사람의 장풍을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장력이 합치자 일음일양(一陰一陽) 상보상성(相輔上成)으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했다. 두 사람이 장력을 합치자 그 힘이 원래보다 몇 배나 배증한 것이다.
매초풍은 공중에서 그 큰 힘에 부딪히자 몸이 금방 위로 솟구쳤다. 재빨리 오른손의 공격 자세를 풀고 휘둘러 뒤로 피해 문지방 위로 뛰어내린 그녀는 대경실색했다.
(두 사람의 공력으로 보아 전진칠자는 결코 아닌데.)
[홍칠공, 단황야께서 여기 계십니까?]
매초풍이 큰소리로 묻자 구처기가 껄껄 웃었다.
[여기엔 전진칠자뿐인데 무슨 홍칠공, 단황야를 찾으오?]
매초풍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노도도 내 상대가 아닌데 어찌 그들 사형제 가운데 이런 고수가 있을까? 동문의 형제 가운데 고저와 강약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그녀는 유처현과 왕처일이 합친 장력에 밀려 하늘로 솟구쳤다 겨우 내려섰다. 밀실에 숨어 내다보던 곽정으로서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어서 두근거리는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 유,왕 두 사람의 공력이 제아무리 높다 해도 매초풍과는 백중지세로 맞설 줄 알았다. 비록 두 사람이 힘을 합쳤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렇게 쉽고 가볍게 매초풍을 내쳐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의 공력은 주백통이나 홍칠공,아니면 황약사나 구양봉 등이 가능했지 전진칠자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재주였다.
매초풍은 강인하면서도 용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사부 이외에는 이 세상에 두려운 사람이 없었다. 꺾일수록 더욱 악착스러워지는 그녀는 허리춤에서 독룡은편(毒龍銀鞭)을 꺼내 들었다.
[마도장, 오늘 실례를 범하겠습니다.]
[좋은 얘기요.]
[내 병기를 쓸 테니 여러분도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는 일곱, 당신은 혼자요. 게다가 눈까지 멀어 앞도 볼 수 없는데, 우리 전진칠자가 제아무리 불민하기로 당신과 병기를 가지고 겨룰 수 있겠소? 우린 앉은 채 움직이지도 않을 테니 공격하시오.]
왕처일의 말에 매초풍이 쌀쌀하게 쏘아붙였다.
[앉은 채 움직이지도 않고 내 은편을 막아내겠단 말이오?]
[이 요부, 오늘 밤이 당신 제삿날인데 웬 말이 그렇게 많은가?]
구처기가 욕설을 퍼붓자 매초풍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둘렀다. 갈퀴가 가득 달린 긴 채찍이 마치 구렁이처럼 휘돌며 손불이의 머리를 노렸다.
한편 황용은 밀실에서 그들이 벌이는 말다툼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매초풍의 독룡편이 얼마나 무서운 병기인데 전진칠자가 앉은 채 움직이지도 않고 맨손으로 당해 낸단 말인가? 그녀는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나오는가 보고 싶어서 곽정을 잡아당기며 보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전진칠자의 앉은 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건 북두칠성의 형상이로구나. 옳지, 구도장이 방금 말한 천강북두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황약사는 천문학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황용은 여름 밤에 바람을 쏘일 때면 늘 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 하늘의 별자리에 대한 얘기를 듣곤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일곱 명의 도인이 북두칠성처럼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황용은 안광이 날카롭고 꾀까지 많았다. 곽정은 아무리 보아도 그들이 왜 저렇게 앉아 있는지 그 까닭을 몰랐다. 그러나 황용은 한 번보고도 칠자가 모두 서로 왼손을 오른손에 댄 채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기가 곽정을 치료하는 것과 똑같은 자세였다. 매초풍의 독룡편이 손불이의 가슴을 노리고 대들었다. 공격 속도는 느리지만 매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손불이는 조용히 앉은 채 까딱도 하지 않았다. 황용이 채찍 끝을 따라 눈을 돌려보니 손불이의 도포 위에 해골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모두 전진교를 현문의 정종이라고 하는데 어찌해서 복장만은 매초풍과 같을까?)
예전에 왕중양이 손불이를 제자로 거둘 때 해골 그림 한 폭을 준 일이 있었다. 손불이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그림을 도포 위에 수놓았던 것이다.
매초풍의 은편이 느리기는 했지만 무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데 은편 끝이 손불이의 도포에 그려진 해골을 향해 날뛰고 있을 때 갑자기 구렁이 한 마리가 머리를 얻어맞고 잘려 나간 듯 꿈틀거리다가 되돌아서며 화살처럼 매초풍을 반격하였다.
그 반격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무서웠던지 매초풍은 손끝이 떨리고 동시에 거센 바람이 얼굴을 향해 닥쳐옴을 느꼈다. 그녀가 급히 고개를 숙이자 은편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다.
(큰일날 뻔했구나!)
매초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채찍을 옆으로 돌렸다. 은편이 이번에는 마옥과 구처기를 노리고 날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얌전하게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담처단과 왕처일이 손을 펴서 은편을 물리쳤다. 이런 동작의 연속 속에서 황용은 분명히 보았다. 전진칠자가 적을 맞아 대결할 때는 오직 일 장으로 나설 뿐 다른 한 손은 여전히 다른 사람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 쓰지를 않았다.
(이것은 곽정 오빠의 부상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구나. 저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힘을 합치니 매초풍 혼자 당해 낼 재간이 없겠다.)
천강북두는 전진교 가운데 최상승의 현문 무공으로서 왕중양이 당년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창안해 낸 것이다. 정면에서 적과 대결할 때 피하지도 막지도 않고 옆에 있는 사람이 대신 반격만 해주는 것으로 한 사람이 여러 명의 무공을 발휘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어 그 위력이 막대했다.
매초풍은 은편을 쓰면 쓸수록 당황스럽고 불안해졌다. 은편을 휘두른다 해서 상대방에게 타격을 주는 것도 아니요, 후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은편이 도는 회전 반경만 점점 더 좁혀지는 것이었다.
다시 또 시간이 흘렀다. 길이가 수장이 넘는 은편의 반 이상이 이제는 적진에 묶여 다시는 뽑아 낼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채찍을 버리고 뒤로 뛰어 피한다면 그래도 몸만은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매초풍은 이 채찍에 헤아릴 수 없는 심혈을 기울였다. 땅에 얌전히 앉은 채 맨손으로 대결하고 있는 그들에게 채찍을 뺏긴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머뭇거리는 사이에 매초풍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천강북두의 진(陣)이 발동을 한 것이다. 일곱 사람의 손놀림이 갈수록 더 빨라졌다. 매초풍은 이제 더 싸워 봐야 자기만 불리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 악물고 채찍을 놓으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유처현의 장력이 퍽 소리와 함께 길고 긴 채찍이 날아가 벽에 부딪친 것이다. 지붕이 흔들리고 기와가 무너지며 우수수 흙더미가 쏟아져 내려왔다. 매초풍의 발이 미끄러지며 비틀비틀하다가 그만 확 앞으로 쏠렸다. 쏠린 거리가 불과 두 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성패의 고비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좀더 빨리 채찍을 놓았더라면 앞으로 쏠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뒤로 몸을 뺄 수는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그냥 문밖으로 달아날 수도 있었다.
전진칠자가 쫓아올 겨를도 없겠지만 설사 쫓아 나섰다 하더라도 그녀를 잡을 수는 없었을 텐데, 이렇게 몸이 앞으로 쏠렸으니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매초풍은 좌우로 쌍장을 날리다 공교롭게도 손불이와 왕처일 두 사람의 장력과 부닥쳤다. 잠시 버티려고 하는 순간 이번에는 마옥과 학대통의 장력이 뒤를 때렸다. 그녀는 이렇게 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엄청난 위험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왼발을 반 보 앞으로 내딛고 기합을 넣으며 오른발을 날려 일시에 마옥과 학대통의 팔에 있는 외관혈(外關穴)과 회종혈(會宗穴)을 걷어찼다. 그러나 구처기와 유처현이 장풍을 날려 위기를 모면했다. 매초풍은 오른발이 미처 땅을 밟기도 전에 왼발을 들어 겨우 구처기와 유처현의 장력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오른발이 떨어질 때 또 한 발짝 그들 앞으로 몸이 쏠렸다.
이렇게 되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천강북두의 진궁에 빠지고 말았다. 칠자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쓰러뜨리지 않고는 도저히 몸을 뺄 수 없는 상황에 빠져 든 것이다.
황용은 손에 땀을 쥐고 관전했다. 달빛 아래 매초풍의 긴 머리카락이 춤을 추며 휘날리고 있었다. 쌍장과 두 발을 쉴새없이 쓰고 있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무서운 바람이 일었다. 생룡활호(生龍活虎)! 문자 그대로였다. 전진칠자는 그녀가 날뛰면 날뛸수록 이정제동(以靜制動)이었다. 얌전히 정좌한 채 머리를 치면 꼬리가 나서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호응하고 허리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동시에 나서며 매초풍을 더욱 중앙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매초풍은 필사적으로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의 재주를 발휘하여 포위망을 뚫으려고 했지만 몇 차례나 칠자의 장력에 눌려 실패하고 말았다.
칠자가 그녀를 해치우려고만 한다면 식은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수는 쓰지 않았다. 황용은 넋을 잃고 바라보며 느끼는 바가 있었다.
(아. 그렇군! 저들은 매초풍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야. 이렇게 무공이 강한 적수를 쉽게 만나기는 어렵겠지.)
황용의 이러한 추측은 반밖에 맞지 않았다. 그들이 매초풍의 무공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도가에서 살생은 금물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생명까지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황용은 매초풍에게 호감을 가진 컷은 아니었지만 칠자가 그녀를 너무 괴롭히자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보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곽정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밖에서는 장풍 소리가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며 아직도 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곽정은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서도 어리벙벙하기만 했다. 그는 칠자가 질서정연하게 앉은 채 매초풍과 대결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황용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들은 북두칠성의 성좌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는 거예요. 잘 보이지요?]
이 말이 곽정을 깨우쳐 주었다. 그는 《구음진경》 하반부 가운데 뜻을 몰라 그냥 넘긴 말들이 많이 있었다. 이제 칠자의 일거일동과 포진을 보자 그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곽정은 보면 볼수록 즐거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황용이 깜짝 놀라 그를 잡아 앉혔다. 곽정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바깥을 주시했다. 그는 천강북두의 운용 방법을 머리 속에 하나하나 새겨 넣었을 뿐 아니라 칠자가 벌일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까지 했다.
《구음진경》은 천하 무술을 총망라한 것이다. 왕중양이 이 진법을 창안할 때 진경을 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진중의 무상한 변화는 진경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곽정은 도화도에서 홍칠공과 구양봉의 대결을 관전하면서 적잖은 것을 배웠지만, 지금 칠자의 행동과 포진을 보고 배운 바는 더욱 컸다.
매초풍이 점점 더 위기에 몰려 이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다. 칠자의 장력도 점차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때 문밖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황형, 먼저 나서실래요, 아니면 제가 먼저 나설까요?]
곽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구양봉의 말소리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칠자도 그 소리를 듣고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흰옷과 청포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전진칠자는 강적이 나타난 줄을 알고서 휘파람 소리에 따라 손을 멈추고 모두 일어섰다. 황약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좋군! 일곱 놈의 잡것들이 합력하여 내 제자를 상대하다니. 구양형, 내 저들의 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는데 놀리시지 않으시겠소?]
[뭐 도화도의 수단이 어떤지 맛 좀 보여 주시겠다는데 놀릴 리가 있겠습니끼?]
왕처일은 당년 화산의 절정에서 동사, 서독 두 사람을 본 일이 있었다. 그들이 동시에 나타나자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때 황약사의 몸이 번쩍이더니 손이 올라갔다. 왕처일은 재빨리 막으려고 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철썩 따귀를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빨리 원위치로 앉으시오.]
구처기가 놀라 외쳤지만 철썩철썩 담,유,학,손 네 사람이 동시에 따귀를 맞았다. 구처기는 눈앞에 파란 빛이 번쩍하는 것을 보고도 장영의 방향을 몰라 어떻게 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급한 대로 도포 소매를 흔들며 황약사의 가슴을 노리고 후려쳤다.
구처기는 칠자 가운데서 무공이 가장 우수한 사람이었다. 돌격이 전광석화 같았다. 게다가 황약사는 그들을 너무 경시했기 때문에 마침내 가슴을 얻어맞고 말았다. 가슴이 뜨끔하게 아파 와 운기로 버티며 왼손을 들어 그의 도포 소맷자락을 잡고 오른손으로 구처기의 두 눈을 노렸다. 구처기는 잡힌 소매를 떨치려고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지만 옷만 찢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마옥과 왕처일이 쌍장을 날렸다. 황약사의 몸놀림은 기민했다. 구처기에 대한 일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어느 틈에 학대통의 뒤로 돌아가 다리를 번쩍 들어 걷어찼다. 학대통이 퍽 얻어맞으며 벌렁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미 곽정은 황용에게 구멍을 양보하고 물러나 앉아 있었다. 황용은 아버지가 용맹을 떨치자 기쁘기 한이 없었다. 만약 곽정의 상처만 걱정되지 않았더라면 아낌없이 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구양봉은 한쪽 옆에 서서 관전하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왕중양이 거둔 제자들이 모두 헛것이로다.]
구처기는 무예를 배운 후로 이런 참패는 처음이었다.
[빨리 원위치를 찾아요!]
그가 연방 소리를 질렀지만 황약사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순식간에 7,8초의 살수를 썼다. 모두들 방어하기에도 급급한데 원위치를 찾아 포진할 겨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우지끈우지끈, 황약사가 어느 틈에 마옥과 담처단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분질러 땅바닥에 집어 던졌다.
구처기와 왕처일이 쌍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이 전진검법은 변화무쌍한 것인데 쌍검을 들고나오니 보통 위력이 아니었다. 황약사로서도 소홀히 여길 수 없어 정신을 차리고 방어에 나섰다.
마옥이 이를 틈타 원위치를 찾아가 서며 장풍을 날리니 담,유 등이 각기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 천강북두의 진을 치기만 하면 대세는 급변하는 것이다. 앞에서 둘이 정면의 적을 방어할 때, 옆에서는 측면 지원이 가능하고 뒤에서는 또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었다. 황약사가 연타로 네 사람의 장력을 물리치고 웃었다.
[구양형, 왕중양이 뜻밖에도 이런 재주를 남겨 놓았군요.]
그는 입으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손이 다른 사람의 장력과 접할 때 이미 형세가 크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일곱 사람이 함께 공격할 때의 힘은 비할 수 없이 막강했다. 방금 일곱 사람이 흩어져 싸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황약사는 즉시 낙영장법(落英掌法)의 기술을 펴면서 천강북두의 진중을 날렵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몸을 바람처럼 날리니 장영이 난무했다. 황용은 계속 관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낙영장법에 오허일실(五虛一實), 칠허일실(七虛一實)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적과 대진할 때는 오허, 칠허가 모두 실초(實招)도 되는구나.)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는 가운데 칠자의 태도도 매초풍을 상대할 때와는 완연히 달랐다. 황용이 숨을 죽인 채 관전에 여념이 없음은 물론 구양봉까지도 넋을 잃고 있었다. 이때 앗 소리와 꽝 소리가 동시에 일어나며 윤지평이 정신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황약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에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늘이 돌고 땅이 돌고 도대체 몇 명의 황약사가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어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냥 쓰러져 버렸다.
전진칠자는 굳게 방위를 하며 필사적으로 항거하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소홀했다가는 칠자의 생명을 지키기 어려울 뿐더러 전진파는 아주 결딴이 나고 말 것이었다. 황약사도 마음속으로는 당황하고 있었다. 이길 승산도 없고 그렇다고 도중에 포기하고 손을 거둘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할 수 없이 전력을 다해 지탱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황약사는 한 시간 동안 13종의 기문(奇門)의 무공을 다 발휘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팽팽하게 맞설 뿐 새벽닭이 울고 집 안에 햇살이 퍼지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한편 곽정은 7주야의 연공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밀실 밖에서는 하늘과 땅이 뒤집힐 지경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그는 조용히 심신을 가라앉힌 채 두 눈을 감고 체내의 열기를 서서히 단전에 모으고 있었다.
황용은 그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신색이 용과 호랑이처럼 활기를 되찾는 모습을 보자 다시 구멍에 눈을 대고 밖을 내다보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황약사가 걸음걸이도 사뿐히 팔괘의 방위를 따라 밟으며 일장 일장을 서서히 내뻗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용은 이것이 아버지가 좀처럼 쓰지 않는 상승의 무공임을 너무나 잘 알았다. 전진칠자도 서로 격려하며 전심전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일곱 사람의 머리 위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도포는 모두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매초풍과 겨룰 때에는 너무나 자신만만했고 여유가 있던 그들이었다.
구양봉은 수수방관하면서도 칠자의 천강북두 포진이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감탄했다. 어떻게 해서든 황약사가 기진맥진하여 중상을 입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화산에서의 2차 논검 때에는 강적 하나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황약사의 무공은 무궁무진했다. 칠자가 비록 참패를 당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승산은 없어 보였다. 구양봉은 악독한 사람이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흉계를 꾸미기에 바빴다. 쌍방의 초수가 점점 늦어지면서도 더욱더 위험스러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머지않아 고투가 끝날 것 같았다. 황약사가 손불이와 담처단을 향해 쌍장을 날렸다. 손,담 두 사람이 손을 들어 막자 유처현과 마옥이 측면을 공격 지원했다. 그때 구양봉이 긴 휘파람을 불었다.
[황형, 제가 좀 도와 드리리다.]
그는 몸을 숙이고 담처단의 등을 향해 맹렬히 쌍장을 날렸다.
第 五十二 章. 열린 밀실 문
장진자 담처단이 때마침 혼신의 힘을 다 모아 황약사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는 등뒤에서 산이라도 뒤엎을 듯한 강한 힘이 밀려옴을 느꼈다. 동문들의 도움을 청할 여유는커녕 혼자 피할 겨를도 없이 펑 하고 얻어맞고 앞으로 넘어졌다. 화가 치민 황약사가 소리를 질렀다.
[누가 당신보고 도와 달라고 합디까?]
그러면서 구처기와 왕처일의 쌍검이 날아들자 소매를 휘둘러 막았다. 오른손은 마옥, 학대통 두 사람의 장력과 버틴 채였다.
구양봉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 저들을 도와야겠구먼.]
그는 쌍장을 들어 황약사의 등을 향해 밀어붙였다. 담처단을 쓰러뜨릴 때는 겨우 삼분의 일만 힘을 썼지만 이번에는 필생의 공력을 집중했다. 황약사가 칠자 가운데의 네 사람을 막기 위해 신경을 모으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구양봉은 황약사를 일거에 요절내고 싶었다. 그는 먼저 칠자 가운데 우선 하나를 죽여 없앤 뒤에 다시 황약사를 처치하기로 벌써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천강북두의 포진은 자연히 무너지는 것이요, 칠자가 자기를 향해 공격한다 하더라도 무서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번 구양봉의 황약사를 향한 돌격은 너무나 의외였다. 제아무리 황약사의 무공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전면에 있는 전진사자를 막고 다시 뒤로 공격하는 서독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등뒤에 기를 모으고 합마공의 일격에 버티려고 했다. 구양봉의 이 합마공은 무섭기 짝이 없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그 위력이 대단하고 게다가 백발백중이었다. 구양봉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비스듬히 옆에서 날아와 황약사의 등을 덮쳐 가로막고 합마공을 받았다.
황약사와 마옥 등이 동시에 손을 거두고 뛰어 피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황약사를 구한 사람은 매초풍이었다. 황약사가 고개를 돌리고 냉소를 날렸다.
[명실공히 노독물임에 틀림이 없구나!]
구양봉은 자기의 일격이 실패하자 더 머물러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 담처단을 제외한 전진 육자가 황약사와 협력한다면 자기의 생명은 끝장이 날 것이었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문밖으로 달아났다.
마옥이 몸을 숙이고 담처단을 부축해 일으키자 몸이 축 늘어지고 고개가 꺾어졌다. 구양봉의 일격에 늑골과 척추뼈가 모두 부러진 것이다. 마옥은 사제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가망이 없어 보이자 눈에서 비오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구처기가 칼을 움켜쥐고 구양봉을 쫓아 뛰어나갔다.
[황노사, 내 당신을 도와 왕중양의 천강북두 진법을 깼고, 또 도화도의 반도(叛徒)를 제거했으니 남은 여섯이야 이제 당신 혼자서도 넉넉히 처리할 수 있겠지요. 자, 우리 다시 만납시다.]
구양봉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며 이미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황약사는 기가 막혔다. 구양봉은 떠나면서까지 비열하게 담처단을 죽인 죄를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구양봉은 이래야만 황약사와 전진파의 원한이 깊어지리라 나름대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황약사는 성격이 활달하면서도 오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구양봉의 이런 독계를 뻔히 알면서도 전진 제자들에게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매초풍은 선혈을 쏟은 채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생할 가망은 보이지 않았다.
구처기가 수십 장을 쫓아가 보았지만 벌써 구양봉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옥은 그가 혼자 쫓아갔다가 무슨 일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를 불렀다.
[구사제, 그냥 돌아오시오.]
구처기의 눈에서는 이글이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황약사를 보자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전진파와 당신이 무슨 원수가 졌거나 원한이 있단 말이오? 사마악귀같이 주사숙을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우리 담사형을 죽였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요?]
[아니, 주백통을 내가 살해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럼, 살해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할 셈이시오?]
황약사와 주백통, 구양봉 세 사람은 정말로 누가 더 빠른가 경주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수백 리를 달려 보았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들 성미대로라면 승부를 가리고야 끝장을 내는 사람들이었지만 주백통이 도중에 기권을 하고 말았다. 그는 홍칠공이 혼자 궁중에 숨어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무공도 소실했는데 만약 누구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생명이 위험할 것 같았다.
[노완동은 긴한 일이 있어서 그만두겠소.]
그만두겠다면 그만두고 마는 것이 또 노완동이었다. 황약사나 구양봉으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그냥 가게 내버려두었다. 황약사는 사실 주백통에게 자기 딸 소식을 물어 보려고 했지만 시종 기회가 없었다. 물론 담처단 등이 그들을 뒤쫓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황약사 등은 그들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노완동이 일이 있다고 가 버리자 동사, 서독 두 사람도 우가촌이 궁금해 되돌아온 것이었다.
구처기는 화를 이기지 못해 펄쩍펄쩍 뛰었고, 손불이는 담처단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모두들 황약사와 사생결단을 벌일 각오를 하고 있었다. 황약사는 그들이 자기를 오해하고 있는 줄 알기 때문에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이때 담처단이 힘없이 눈을 뜨며 말했다.
[내 먼저 떠나오.]
구처기 등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그의 옆에 둘러앉았다. 담처단이 뭔가 더 말을 꺼내려고 입을 실룩거리다 그만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전진육자는 머리를 숙이고 흐느껴 울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마옥이 담처단의 시체를 끌어안고 일어서자 구처기, 윤지평 등이 그 뒤를 따라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황약사는 까닭도 없이 전진칠자와 일대 혼전을 벌이다 그만 깊은 원수를 맺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매초풍을 보니 호흡이 가냘펐다. 수십 년 동안의 애증을 생각하고는 상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솔직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 비통한 현실앞에 방성대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매초풍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날리며 최후의 공력을 다하여 오른손으로 자기 왼팔을 분질러 버리고 다시 오른손을 주춧돌에 대고 힘껏 갈겼다. 돌가루가 날며 오른손도 분질러졌다. 황약사가 깜짝 놀라자 매초풍이 힘없이 입을 얼었다.
[사부님, 귀운장에서 제자에게 시키신 세 가지 일 중 두 가지 일은 이제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군요.]
황약사는 그녀에게 《구음진경》을 찾아오고, 곡령풍과 그 밖의 제자 두 명의 거처를 알아 오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일은 몰래 배운 《구음진경》 상권의 무공을 반납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매초풍은 스스로 두 팔을 분질렀다. 이것은 바로 죽기 전에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의 무공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황약사는 어이가 없어 그만 껄껄 웃었다.
[좋다, 좋아. 나머지 두 가지 일은 벌로 대수로울 것도 없으니 그만두거라. 내 이제 다시 너를 도화도의 제자로 거두마.]
매초풍은 사문을 배반했던 일이 평생의 한이었다. 이제 죽는 마당에 다시 은사의 용서를 받고 보니 너무나 기쁘기만 했다. 그녀가 없는 기력에 억지로 일어나 사부를 뵙는 예를 갖추려고 땅에 꿇어 엎드려 절을 했으나 몸이 굳어 더 움직이지 못하고 그만 나무토막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황용은 밀실에서 이 비참한 광경을 보고 마음이 착잡하여 견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잠시만 더 계셔 주기를 바랐다. 곽정의 운기가 단전에 모이기만 하면 곧 나가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땅바닥에 쓰러진 매초풍의 시체를 안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어때 문밖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 곽정이 늘 타고 다니던 홍마의 울음 소리였다.그 뒤를 이어 바보 소녀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여기가 바로 우가촌이에요. 그런데 내가 곽씨 성을 가진 사람이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아니 여기 몇 집 되지도 않는 마을에서 서로를 모른단 말이냐!]
다른 사람의 말소리였다. 그 사람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면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황약사가 고개를 돌리다가 얼굴 표정이 확 달라졌다.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가 신발이 닳도록 찾아 헤매도 찾을 수 없던 강남육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에 황약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도화도를 찾아갔었다. 그런데 아무리 섬을 돌아보아도 황약사의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뒤에 가서야 겨우 벙어리 하인을 만나 황약사가 섬에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육괴는 홍마가 주인을 잃은 채 숲속을 이리 뛰고 저리 닫는 것을 보고 끌고 나와 우가촌을 향해 곽정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육괴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중 비천편복 가진악의 청각이 가장 예민한 탓으로 문 뒤에 있는 사람 숨소리를 들었다. 주총 등 다섯 사람은 황약사가 매초풍의 시체를 안은 채 문을 막고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주총이 맨 먼저 말문을 열었다.
[황도주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저희 육형제, 황도주님을 뵈오러 도화도에 갔다가 계시지 않아 뵙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여기서 이렇게 뵈오니 반갑기 한이 없습니다.]
이렇게 능청스럽게 말하면서 길게 읍을 했다.
황약사는 본래 육괴를 살해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이제 싸늘하게 식은 매초풍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육괴는 매초풍의 원수다. 오늘 비록 그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 손수 육괴를 살해하도록 해야만 지하에 가서도 눈을 감을 수 있겠지.)
그는 오른팔에 시체를 안은 채 왼손으로 그녀의 부러진 팔을 높이 들고 한보구를 향해 덤벼들었다. 매초풍의 손으로 그의 오른쪽 어깨를 친 것이다. 한보구가 놀라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겨를도 없이 퍽 하고 오른쪽 어깨를 얻어맞았다. 황약사의 무공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통하여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한보구는 어깨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반신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육괴는 황약사가 아무 말 없이 덤벼들어 살수를 쓸 뿐만 아니라 매초풍의 시체를 병기로 삼고 달려들자 각기 병기를 꺼내 진세를 폈다. 황약사는 시체를 머리 위로 번쩍 들고 육괴의 병기도 아랑곳없이 덤벼들었다. 한소영이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매초풍이 죽은 시체라고는 하지만 두 눈을 부릅뜬 채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입에서는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 보기만 해도 몸이 오싹해지는데, 시체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자기 머리를 치려고 하니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희인과 전금발이 각기 멜대와 저울추를 날리며 동시에 매초풍의 어깨를 내려쳤다. 황약사가 시체의 오른팔을 움츠리고 왼팔을 뻗어 한소영의 허리를 치자 그녀는 얻어맞고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한보구가 비스듬히 몸을 숙이고 금룡편(金龍鞭)을 땅에 댄 채 돌리자 황약사가 재빨리 오른발을 들어 채찍 끝을 밟아 버렸다, 한보구가 밟힌 채찍을 빼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매초풍의 손이 얼굴을 할퀴려고 대들었다. 깜짝 놀란 한보구는 채찍을 버리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피했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손을 들어 어루만지니 손바닥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다행히도 그녀가 이미 죽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구음백골조에 걸려 벌써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이렇게 수합을 겨루는 사이에 육괴는 몇 번이나 생사의 기로를 헤맸다. 만약 황약사가 매초풍의 시체를 병기로 삼지 않고 직접 나섰더라면 벌써 도화도주의 신출귀몰한 초술 앞에 그들 육괴는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곽정은 밀실에서 여섯 분 사부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 결사적인 항거 모습을 보고 있었다. 형세가 이토록 급박한데 자기의 운기가 단전에 모여 안정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여섯 사부의 은혜가 부모님 은혜보다 더 깊은데 어찌 그냥 보고만 있단 말인가? 곽정은 즉시 숨을 죽이고 장풍을 날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안팎의 밀실 문이 부서져 나갔다.
황용은 깜짝 놀랐다. 그의 공행(功行)이 원만하게 끝나려면 아직 마지막 고비를 몇 번은 넘겨야 하는데 이런 마당에 그만 폭발하고 말았으니 자칫하면 곽정의 생명만 억울하게 날리는 것이다.
[곽정 오빠! 참으세요.]
황용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곽정은 일 장을 뻗은 후 단전의 기가 일시에 위로 뻗침을 느낌과 동시에 불길 같은 열이 가슴을 치는 바람에 급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황약사와 육괴는 부엌문이 부서져 나가며 황용과 곽정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 우르르 달려들었다. 황약사는 사랑하는 딸을 보자 놀랍고 반가워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했다. 그가 두 눈을 비비며 허겁지겁 물었다.
[용아, 정말 용아가 틀림없느냐?]
황용은 여전히 한 손을 곽정의 손에 댄 채 미소를 머금고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었다. 황약사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벌써 짐작을 했다. 이 무남독녀 외딸 하나가 황약사의 유일무이한 혈육이었다. 이제 죽었다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고 보니 평생 이렇게 고맙고 반가운 일은 처음이었다. 그는 즉시 매초풍의 시체를 내려놓고 곽정 옆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손바닥을 펴 그의 다른 한쪽 손에 갖다 댔다.
곽정의 체내에서는 이글이글 열기가 끓어올랐다. 견디기 힘든 통증이 계속되었다. 곽정은 몇 차례나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황약사가 손을 쓰자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황약사의 내공은 보통 심오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손으로 곽정의 전신에 있는 요혈을 누르고 주물러 주었다. 밥 한끼 먹을 시간에 곽정의 심신은 상쾌해지며 부상이 완전히 치유되었을 뿐 아니라 근골이 가뿐해져 부상당하기 전보다 훨씬 무공이 강해졌다. 곽정은 벌떡 일어나 황약사를 향해 절을 한 뒤 여섯 사부께도 일일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쪽에서 곽정이 사부님들을 향해 석별 후의 소식을 아뢰고 있는 동안, 저쪽에서는 황약사가 귀여운 딸의 손을 붙잡고 웃으며 다정하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황용은 상세하고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엮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위험했던 대목에 이르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육괴도 어느새 하나 둘 황용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재미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곽정도 입을 다물고 옆에서 경청했다. 황용의 얘기는 거의 한 시간 이상이나 계속되었지만 사람들은 지루한 줄도 모르고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녀는 황약사와 육괴가 다투기 시작한 장면에 이르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두겠어요. 다음 얘기는 제가 할 필요도 없겠군요.]
[내 구양봉, 영지화상, 구천인, 양강 등을 죽이러 갈 테니 너도 재미있는 구경이나 하리 내 뒤를 따라오너라.]
황약사는 딸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시선을 육괴에게 돌렸다. 미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워낙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고개 숙여 사죄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재수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군. 다행히 착한 사람들을 살해하지는 않았으니.]
겨우 이 말 한마디가 고작이었다.
[아버지, 이 여섯 분 사부께 죄송하다는 인사는 하셔야죠.]
황용의 말에 황약사는 들은 체도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내 서독을 찾아갈 테니 곽정도 함께 가자꾸나.]
곽정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황용이 먼저 나섰다.
[아버지, 먼저 황궁에 가셔서 사부님이나 구해 모시고 나오세요.]
이때 곽정은 또 도화도에서 황약사가 혼인을 승낙한 일이며, 홍칠공이 자기를 제자로 거두었다는 말을 사부들께 고하고 있었다. 가진악이 맨 먼저 반갑다고 입을 열었다.
[네 팔자 소관이 그런 모양이로구나. 구지신개를 스승으로 모시고 또 도화도주를 장인으로 삼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있겠느냐? 물론 허락하고 찬성을 한다만, 다만 몽고 대칸의....]
그는 칭기즈 칸이 곽정을 금도부마로 삼은 일에 생각이 미치자 도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연했다.
이때 돌연 삐걱 대문이 열리며 바보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손에 노란 종이로 접어 만든 원숭이를 들고 황용을 향해 웃었다.
[수박 다 먹었나요? 어떤 영감님이 이걸 주라고 하던데요.]
황용은 대수롭지 않게 종이로 만든 원숭이를 받아 들었다.
[그 백발 영감님이 화내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던데요. 꼭 사부를 찾아내겠다고요.]
황용은 그 소녀가 주백통 얘기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종이 원숭이를 들여다보니 과연 글씨가 적혀 있었다.
<늙은 거지가 어디로 갔는지 보어지 않아. 노완동만 아주 얌전하게 건재해 있다오.>
꼬불꼬불한 글씨가 말이 아니었다.
[아이코, 사부님이 도대체 어디로 가셨기에 보이지 않을까?]
황약사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뗐다.
[노완동이 덜렁거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공은 대단한 사람이야. 홍칠공이 죽지만 않았다면 그가 틀림없이 구할 수 있을 게다. 또 개방에도 중대한 일이 한 가지 생겼다.]
[무슨 말씀이세요?]
황용이 묻자 황약사가 말을 이었다.
[홍칠공이 네게 준 죽장을 양강 그 녀석이 가져가지 않았느냐? 그녀석 무공은 보잘것이 없지만 아주 보통 놈이 아니야. 그놈이 죽장을 가지고 있으니 이제 풍파가 일어날 것은 틀림없어. 우리가 빨리 그것을 빼앗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홍칠공의 부하들이 골탕먹을 게 뻔하지않으냐?]
이 말에 육괴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간 지 벌써 여러 날이니 뒤쫓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곽정이 말하자 한보구가 나섰다.
[여기 네 홍마가 있으니 그걸 타면 되지 않겠느냐?]
이 말을 들은 곽정이 밖으로 달려나가자 홍마가 주인을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핥으려고 달려들었다.
황약사가 말을 꺼냈다.
[용아, 네가 곽정과 함께 쫓아가 먼저 죽장을 뺏도록 해라. 홍마가 빠르니 쫓아갈 수 있지 않겠니?]
여기까지 말하다가 옆에서 입을 헤벌리고 있는 바보 소녀에게 시선이 갔다, 그 소녀 표정이 마치 옛날에 제자였던 곡령풍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성이 혹 곡씨가 아니냐?]
바보 소녀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전 몰라요.]
[아버지, 이걸 보셔요!]
황용이 그의 손을 잡아끌고 밀실로 들어섰다.
황약사가 밀실로 들어가 그 배치를 살펴보니 모두 자기가 독창적으로 설계한 그대로였다. 분명히 곡령풍이 한 것 같았다.
[아버지, 이 쇠로 만든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을 보세요.]
황약사가 딸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몸을 날리며 손을 뻗어 밀실 서남쪽 지붕을 건드리자 천장이 열리며 굴 하나가 나타났다. 황약사는 오른손으로 굴 안쪽을 잡고 자세를 안정시킨 후 왼손을 뻗어 더듬다 종이 한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곧바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오른손으로 벽을 누르며 밀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황용이 급히 쫓아 나가 아버지 뒤에 서서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 종이는 먼지투성이요, 한쪽 구석이 찢어지고 누렇게 바랜 것이 꽤 오래 된 것 같았다. 그 위에 꼬불꼬불 글씨 몇 줄이 씌어 있었다.
<도화도 은사님에게 삼가 올리나이다. 제가 황궁에서 약간의 서화와 기명을 입수했나이다. 은사님께 드려 감상이나 하시라고 마련했는데 불행히도 궁중에서 시위들에게 포위. 공격을 당했습니다. 제게 딸이 하나 남아 있는데....>
딸이라는 말 뒤에는 글씨 대신 방울방울 떨어진 핏자국이 희미하게 바래 있을 뿐이었다. 황용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도화도의 제자들은 이미 모두 쫓겨난 후였다. 그러나 아버지 문하에 있던 제자들이 모두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황용은 곡령풍이 남긴 유서를 보니 착잡한 심정이었다.
황약사는 이 글씨 몇 줄을 보고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곡령풍은 억울하게 사문에서 쫓겨나 다시 도화도 문하의 복귀만을 노심초사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황약사가 골동품이며 이름난 서화를 좋아함을 알았다. 그래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몇 차례나 대내의 물건을 훔치러 들어갔었지만 그때마다 황궁 호위병들에게 발각되었다. 황약사가 지난번 육승풍을 만났을 때에도 이를 후회했는데 이번에는 더욱 마음이 괴로웠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바보 소녀는 계속 입을 벌린 채 헤헤 웃고 있었다.
[네 무공은 아버지에게서 배웠느냐?]
황약사가 날카롭게 물어 보았지만 소녀는 머리를 흔들다 밖으로 달려나가 대문을 닫고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몇 가지 권각(拳脚)의 재주를 부려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안을 살펴보고는 또 권각의 재주를 보였다.
[곡사형께서 연공을 할 때 몰래 배웠나 봐요.]
황용의 말에 황약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내가 보기에는 곡령풍이 그렇게까지 대담하지는 않았을 거야. 사문을 떠난 후 감히 본문의 무공을 타인에게 전수해 주었겠니?]
그러다가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용아, 너 저 소녀의 하체를 공격하여 한번 쓰러뜨려 보아라.]
황용은 아버지의 의도도 모른 채 웃으며 덤벼들었다.
[어디 나하고 연공이나 해보실까? 조심해요.]
이렇게 말하며 왼손으로 허초를 날리며 좌우 양 발로 걷어찼다. 원앙련환(鴛鴦連環)의 재주로 날렵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다. 바보 소녀가 멍하고 있다가 오른쪽 좌골을 얻어맞고 급히 뒤로 피했지만 황용이 기다리고 있다가 비틀거리는 그녀를 오른쪽 다리로 걸자 그만 벌렁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소녀는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 조그만 게 갑자기 대들고 야단이야! 우리 다시 한 번 해보자구.]
[아니 조그만 거라니. 고모라고 부르도록 해라.]
황약사가 호통을 치자 바보 소녀는 고모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불렀다.
[고모!]
(아버지가 그녀의 아랫도리 무공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랬구나. 곡사형이 두 다리를 못쓰게 되었으니 스스로 연공을 하자 해도 다리만은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러나 만약 딸에게 전수해 주었다면 상반(上盤), 중반, 하반의 무공을 착실히 가르쳐 주었겠지.)
황용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약사가 <고모>라 부르라고 한 것은 이 바보 소녀를 문하에 받아들이겠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왜 바보스런 체하느냐?]
황약사가 물었지만 소녀는 웃기만 했다.
[저는 바보예요.]
황약사가 이마를 찌푸렸다.
[네 어머니는?]
[친정에 간걸요.]
황약사가 계속해서 몇 마디 물어 보았지만 도무지 요령부득이어서 한숨을 내쉬며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바보였는지 아니면 어떤 충격 때문에 그랬는지, 곡령풍이 부활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매초풍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침묵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용아, 우리 곡사형의 보물을 보러 가자.]
황약사는 황용을 데리고 다시 밀실로 들어갔다.
곡령풍의 해골을 바라보는 황약사의 눈에 눈물이 괴었다.
[용아, 우리 문하의 여러 제자 가운데 곡령풍이 가장 훌륭한 무공을 지녔었다. 두 다리만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호위병 백 명이 대들어 봐야 어림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야 물론이겠지요. 그런데 아버지, 저 바보 소녀에게 직접 무예를 가르쳐 주실 생각이세요?]
[음, 내가 그애에게 무예뿐만 아니라 시며 거문고, 아니다, 기문오행까지 전부 전수해 주겠다. 네 곡사형이 당시 몹시 배우고 싶어하면서도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다 가르쳐 주련다.]
황용이 혀를 길게 뺐다.
(아버지가 충격이 굉장히 크신 모양이로구나.)
황약사는 쇠로 된 상자를 열고 한층 한층 벗겨 가며 살펴보았다. 상자 안에 있는 보물들이 진기할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괴롭기만 했다. 서화를 하나하나 펼쳐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물건들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고 기쁘게 하는 것이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뜻까지 잃어서는 안 되는 게야. 휘종도군(徽宗道君) 황제의 화조화(花鳥畵)는 기가 막히게 좋다마는 어쩌다 이 금수강산을 모두 금나라 사람들에게 바쳤단 말이냐?]
그는 이렇게 말하며 두루마리 한 폭을 펴다가 이! 하고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황약사가 수묵 산수화 한 폭을 가리켰다.
[이걸 봐라!]
그림 가운데 칼날같이 우뚝 솟은 산이 보였다. 그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하늘을 찌를 듯하고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산등성이에는 소나무가 열지어 있고 가지마다 눈이 쌓였는데 나무 기둥이 모두 남쪽으로 구부러진 것이 북풍이 세게 부는 곳이었다. 봉우리 서쪽에 유독 한 그루 소나무만이 두드러져 보였는데 그 아래로 바람을 맞으며 검무(劍舞)를 추고 있는 장군의 모습이 주필(朱筆)로 그려져 있었다.얼굴은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소맷자락을 나부끼는 자태가 속세를 벗어난 듯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림은 모두 수묵 산수화인데 유독 이 장군만은 주필로 그려 더욱 선명해 보였다. 낙관도 없는 이상한 그림에 시 한 수만 적혀 있었다.
황용은 전에 비래봉의 취미정에서 한세충이 쓴 시를 본 적이 있어 그 필적을 알아보았다.
[아버지, 이건 한세충이 쓴 건데요. 시는 악무목(岳武穆)이 지은 거구요.]
[틀림없는 말이다. 악무목의 이 시는 지주(池州)의 취미정을 읊은 것인데 그림 가운데 이 산은 산세가 험한 것이 취미(翠微)가 아니야. 화풍은 근사하지만 결코 이름있는 사람 솜씨는 아니로구나.]
황용은 예전에 취미정에서 곽정이 손끝으로 한세충이 쓴 필적을 따라 써 보며 즐기던 모습이 생각났다.
[아버지, 이 그림을 사위 될 사람에게 선사하세요.]
이 말에 황약사가 빙그레 웃었다.
[딸이나 사위나 같은 자식인데 뭘 아끼겠느냐!]
그는 쇠상자 속에 든 보물을 한 움큼 집어들었다.
[지난번 노독물이 네게 준 구슬은 내 도화도에 돌아가 찾아다 도로 그에게 돌려줄 테니 우선 이거나 받아 두어라.]
황용은 아버지가 구양봉을 증오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받아 목에 걸었다. 이때 공중에서 수리 우는 소리가 급박하게 들려 왔다. 그녀는 수리를 몹시 좋아했다. 그러나 이제 그 수리가 화쟁 공주에게로 돌아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 그들이 급히 밀실에서 나와 보니 곽정은 대문 밖 큰 버드나무 아래 서 있고 수리 한 마리가 그의 어깨를 물고 밖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곽정의 머리 위를 맴돌며 울부짖고 바보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그 뒤를 따라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용아, 그들이 위험에 빠졌나 봐. 우리 빨리 구하러 가자구.]
[누가요?]
황용이 딴전을 피웠다.
[내 의형제 자매 말이야]
황용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는 그만두겠어요.]
곽정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애들처럼 그러지 말고 빨리 가자구.]
홍마를 끌며 곽정이 말등에 올라탔다.
[그럼 난 갈까요, 그만둘까요?]
[아니, 내가 그만두라고 할 수 있나?]
곽정이 왼손으로 고삐를 잡은 채 오른손을 뻗어 황용을 잡아끌었다. 그제야 그녀는 활짝 웃어 보였다.
[아버지, 우리 사람 구하러 가요. 아버지도 여섯 분 사부와 함께 오세요.]
그러면서 두 발로 땅을 찍으며 몸을 날렸다. 왼손으로 곽정의 오른손을 잡고 말등에 올라 그 앞에 앉았다. 곽정이 여섯 사부에게 예의를 차리고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수리 두 마리가 앞에서 길을 인도했다.
홍마와 주인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지라 말도 기쁜지 전광석화처럼 내달렸다. 수리가 공중을 나는 것이 아니었다면 벌써 뒤처졌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앞을 향해 날던 수리가 어둠침침한 숲속으로 내려앉았다. 홍마도 눈치를 챘는지 주인이 몰기도 전에 벌써 숲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숲 속에 이르자 깨진 방울 소리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천인형. 옛날부터 철장영웅의 명성을 들었는데 한번 우러러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습니다. 제가 우선 보잘것없는 재주나마 한번 시범을 보일 테니 노형도 철장웅풍(鐵掌雄風)을 보여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어서 찢어질 듯한 사람 비명 소리가 들리고 나무 끝이 흔들거리다가 큰 나무 한 그루가 넘어졌다. 곽정이 깜짝 놀라 말에서 뛰어내려 숲속으로 들어갔다.
황용도 말에서 내려 홍마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빨리 가서 아버질 모셔 와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달려온 장소를 지적해 주자 홍마는 나는 듯 달려갔다.
(아버지가 빨리 오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노독물에게 또다시 골탕을 먹게 될 텐데.)
황용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소리난 쪽을 향해 찾아 들어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툴루이, 화쟁 공주, 제베, 보구르치 네 사람은 나무에 꽁꽁 묶여 있고 구양봉과 구천인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방금 쓰러진 나무에도 한 사람이 묶여 있었는데 몸에 걸친 갑옷도 선명한 것이 원래 툴루이 일행을 몽고로 호송하기 위해 왔던 송나라 장교였다. 그는 돌을 부수고 나무를 자르는 구양봉의 장풍에 벌써 죽어 있었다. 병정들은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들 두 사람에게 쫓겨 모두 흩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구천인이 감히 어떻게 구양봉과 장력을 겨룰 수 있겠는가? 황용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길까 궁리하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곽정이었다.
그녀는 놀랍고도 반가웠다. 구양봉을 제거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구양봉도 곽정이 자기의 합마공에 맞고도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자 뜻밖이라 의아해 했다. 화쟁 공주도 곽정을 보자 반갑게 외쳤다.
[곽정 오빠, 빨리 우리를 구해 주세요!]
눈앞의 정세를 보고 황용은 벌써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시간을 끌며 아버지 오시기를 기다려야지.)
[아니, 여기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게요? 또 사람을 살해할 생각이오?]
곽정이 호통을 치자 구양봉은 구천인의 재주를 한번 보겠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구천인이 먼저 곽정을 책망했다.
[건방지게 어린 사람이 구양선생을 뵙고도 절도 안 해? 살기가 싫증난 모양이로군.]
곽정은 밀실에서도 그가 속임수를 쓰는 수작을 다 듣고 보았다. 도대체 시비를 가릴 수 없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미운 생각에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달려들어 그자의 가슴을 내질렀다. 곽정은 항룡십팔장의 공력이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 일 장의 공력은 6분은 공격이요, 4분은 거두어 들이는 묘한 재주였다. 구천인이 옆으로 몸을 피하는 체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곧 뒤로 밀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틀비틀 앞으로 고꾸라졌다. 곽정이 흥 코방귀를 뀌며 달려들어 왼손을 날려 그의 입을 쥐어박았다. 이가 모두 부러지고 혀가 잘려 다시는 거짓말을 못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속셈이었다.
이 일 장의 위력은 강하기는 했지만 속력은 느렸다. 그러나 부위에 닿기만 하면 구천인으로서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한 자 정도 거리를 두고 일 장이 그의 볼에 닿으려는 순간 황용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곽정이 손을 갈퀴처럼 들어올리며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용아, 왜 그래?]
황용은 곽정이 이 늙은이를 해칠 경우 구양봉이 나설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꾀를 꾸며 냈다.
[빨리 손을 거두어요. 그 노인 얼굴 가죽의 무공이 대단히 무섭대요. 한 번 얼굴을 때리기만 하면 즉시 그 힘이 반사되어 오히려 때린 쪽이 내상을 입는다고 하더군요.]
곽정은 그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원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라구?]
[아니, 노인이 한 번 입김을 불기만 해도 황소 가죽이 벗겨진다던데 그래도 손을 놓지 않으시는군요.]
곽정은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지만 황용에게 다른 저의가 있는 줄은 알았다. 그래서 그의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을 풀어 주었다.
[그래도 이 아가씨가 무서운 걸 아시는군. 내 여러분과는 원한 관계도 아닌 터, 어른 체면에 함부로 젊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는가?]
구천인이 능청을 떨자 황용이 받았다.
[그럼요, 선생님의 무공을 오래 전부터 흠모해 왔는데 오늘 몇 가지 재주나 좀 보여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대결 자세를 취하고 왼손을 위로 번쩍 들고 오른손을 들어 꼬며 입에 대고 몇 번 부는 시늉을 했다.
[자, 조심하세요. 이건 대취법라(大吹法螺)라는 재주예요.]
[조그만 아가씨가 대담도 하시군. 구양선생은 만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분인데 농담을 다 하시다니.]
그때 황용이 오른손을 반대로 뿌리며 구천인의 따귀를 보기 좋게 철썩 후려쳤다.
[이건 반타후검피(反打厚瞼皮)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때 숲 밖에서 웃음 소리가 들렸다.
[잘한다. 다시 한 번 때리려무나!]
황용은 그 목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오셨음을 알아채곤 용기백배하여 대답을 하며 오른손을 들어 갈겼다. 구천인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피하기는 했지만 허초였다. 벌써 왼손이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육합통비권(六合通臂拳)으로 오른팔을 들어 막으려고 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황용의 조그만 손바닥이 나비처럼 눈앞에서 춤추고 있다가 어느 틈에 또 한 번 철썩 그의 볼을 때렸다.
구천인은 더 이상 싸우다가는 자기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쉭쉭 주먹을 날리며 옆으로 뛰어 피했다.
[잠깐만!]
[왜 그러세요? 이제 충분하신가요?]
황용이 이렇게 비웃자 구천인이 정색을 했다.
[아가씨, 이미 내상을 입었으니 빨리 밀실로 돌아가 칠칠이 사십구, 사십구 일 동안 정양을 하시오. 바람을 쏘이면 큰일나오. 조심하지 않으면 아까운 생명을 잃게 되오.]
황용은 너무나 정중한 그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꽃가지가 흔들리는 듯한 웃음 소리였다.
이때 황약사와 강남 육괴는 모두 달려와 있다가 툴루이 등이 나무에 붙들려 매여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구양봉은 평소 구천인의 무공이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구천인은 당년 철장 한 쌍으로 천남(天南)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형산파(衡山派)의 여러 무사들을 엉망진창으로 참패시켰다. 형산파는 이 패배로 인하여 다시는 무림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찌해서 오늘 황용 같은 소녀 하나도 이겨 내지 못한단 말인가? 정말 황용이 말한대로 그의 얼굴에 내공이 있어 그녀에게 내상을 입혔을까?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듣도보도 못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구양봉이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황약사 어깨 위에 비스듬히 걸린 주머니가 보였다. 횐 실로 낙타를 수놓은 것으로 바로 자기 조카의 물건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싸늘해졌다. 그는 담처단과 매초풍을 살해한 뒤 사라졌다가 지금 조카를 맞으러 오는 길이었다.
(황약사가 그 아이를 살해하고 자기 제자의 원수를 갚아 준 것이 아닐까.)
[내 조카를 어떻게 했소?]
구양봉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제자 매초풍을 도대체 어떻게 했소?]
황약사가 냉랭하게 반문하고 나섰다. 구양봉은 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원래 구양공자는 구양봉이 자기 형수와 사통해서 태어난, 말이 조카지 사실은 친아들이었다. 그는 잔인하기 짝이 없었지만 부정(父情)만은 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조카를 자기 생명보다 더 아껴 왔다. 황약사나 전진 제자가 모두 자기한테 깊은 원한을 가지고는 있다지만 그래도 그들은 모두 강호에 이름난 호걸들이었다. 구양공자가 두 다리를 다쳐 꼼짝못하고는 있지만 결코 그를 괴롭힐 사람들은 아님을 믿었다. 이 사람들이 다 가버린 뒤에 구양공자를 데리고 깨끗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가 요양을 시키려고 했었는데 독수에 걸리고 말다니, 앞이 캄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황약사는 꼿꼿이 선 채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고는 즉시 폭발할 것 같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 누가 죽였단 말이오? 당신 문하요, 아니면 전진 문하요?]
구양봉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토록 명망 높은 황약사가 직접 죽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가 다른 사람에게 명령을 내려 살해했을 것 같은 짐작이 들었다. 원래 귀에 거슬리는 그의 목소리가 이젠 쩌렁쩌렁 울리기까지 했다.
[그 사람은 전진파 무공도 배웠고, 또 도화도의 무공도 약간 익혔으니 직접 나서서 살해한 장본인을 찾아보시오.]
황약사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이 대답은 양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곽정에게 혐의를 돌렸다. 그는 슬프고 분한 마음 가눌 길이 없었지만 워낙 성격이 음험하고 침착한 사람이라 잠시 진정하고 다시 황약사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내 조카의 주머니를 가지고 계시오?]
[도화도의 지도가 이 주머니 안에 있으니 내가 가져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만약 그가 흙에 묻힌 뒤 다시 찾으려면 아무래도 곤란할 테니까 말이오.]
[말만은 그럴듯하오.]
구양봉은 황약사의 실력이 자기와 막상막하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천 초나 이천 초를 대결한다 하더라도 승부를 가리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한다 해도 꼭 이기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다행인 것은 《구음진경》이 자기 수중에 있으니 원수를 갚을 기회는 언제라도 있는 것이었다. 다만 구천인이 강남육괴와 곽정, 황용을 제거하고 도와주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황약사의 생명을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자식이 살해된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하게 남과 자신의 강약을 저울질할 수 있는 서독은 확실히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구천인을 바라보았다.
[천인형, 형이 이 여덟 사람만 제거해 주신다면 제가 황노사와 대결을 하겠습니다.]
구천인이 부들풀로 만든 큰 부채를 몇 번 부치고 웃었다.
[그것도 좋소. 내 여덟 사람을 먼저 제거하고 당신을 돕겠소.]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구양봉은 말을 마치자 황약사를 노려보며 천천히 몸을 숙였다. 황약사는 두 발로 동방을목(東方乙木) 방위를 밟았다. 두 사람은 이제 상승의 무공으로 강약과 생사를 겨루는 것이다.
그때 황용이 웃으며 구천인 앞에 나섰다.
[우선 나부터 죽이시지요.]
구천인이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내가 어떻게 손을 쓴단 말이오? 어이쿠, 큰일났구나. 이 일을 어떻게 한다!]
갑자기 이렇게 수선을 떨며 두 손으로 아랫배를 틀어쥐고 허리를 숙였다.
[아니, 왜 그러세요?]
황용이 이상해서 묻자 구천인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내 잠시 실례하고 돌아올 테니.]
황용은 픽 하고 웃으며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구천인은 어이구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찌푸리고 바지춤을 움켜쥔 채 옆으로 뛰었다. 복통이 일어나 금방 바지에 설사라도 할 것 같은 꼴이었다. 황용은 십중팔구 거짓인 줄 알았지만 혹 정말 설사라도 한다면 이쪽도 곤란한 일이었다. 주총이 주머니 속에서 초지(草紙) 한 장을 꺼내 들고 구천인을 뒤쫓아가 어깨를 툭 쳤다.
[아니, 휴지라도 가지고 가셔야지.]
[어이구 고맙습니다.]
구천인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수풀 속에 몸을 숙였다. 황용은 돌 하나를 주워 들고 그의 등을 향해 던졌다.
[좀 멀찌감치 비키세요!]
돌이 쏜살같이 날아 등을 치려고 하자 구천인은 손을 뒤로 돌려 받아 쥐였다.
[아가씬 고약한 냄새를 못 참는 모양이로군. 그럼 내 멀찍이 비키리다. 하지만 당신들 여덟 사람은 꼭 나를 기다려야 하오. 도망가면 안되오!]
그는 이렇게 외치며 바지춤을 틀어쥔 채 10여 장 밖으로 비켜나 다시 쭈그려 앉았다.
[사부님, 저 노인이 달아나려구 그래요.]
황용이 말을 꺼내자 주총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어려울 게야. 이 두 물건 가지구 장난이나 해봐요.]
황용이 보니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검 한 자루와 쇠를 부어 만든 수장(手掌)이 쥐여 있었다. 방금 노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휴지를 넘겨줄 때 슬쩍 소매치기해 둔 것이다. 황용은 밀실에 있을 때 구천인이 전진칠자 앞에서 날카로운 칼로 자기 배를 찌르는 촌극을 벌이는 광경을 보았었다. 물론 그날도 그것이 가짜라는 것은 알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날카로운 칼이 세 토막으로 나뉘어 자유자재로 수축이 가능하며 손잡이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그녀는 구양봉의 심사를 어지럽힐 속셈으로 그 앞으로 걸어갔다.
[구양선생님, 전 살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며 그 날카로운 칼로 배를 푹 찔렀다.
서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결하고 있던 구양봉과 황약사가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황용은 즉시 칼날을 들어 보이면서 세 토막이 저절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을 구경시키며 구천인의 사기 행각을 모두 아버지에게 고했다. 구양봉은 황용의 말을 듣고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말 그놈의 영감쟁이가 허명을 가지고 일세를 휩쓸고 다닌 것이 아닌가?)
황약사는 구양봉이 서서히 일어서는 것을 보고 벌써 그 마음을 알아차렸다. 딸의 손에서 쇠를 부어 만든 수장을 건네 받아 보니 과연 그 가운데 구( ) 자가 새겨져 있고 손등에도 뱀과 지네 한 마리가 서로 맴돌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는 철장수상표 구천인의 상징이며 영패(令牌)였다. 20년 전만 해도 이 영패는 강호에 막대한 위세를 떨쳤다. 누구든지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대강의 남북이며 황하의 상하를 거침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무림의 어느 파든지 이 영패만 보면 그만 기가 죽고 말았는데 그 주인이 큰소리만 치고 다니는 엉터리 노인이었단 말인가?
황약사는 침묵에 잠겨 이런 생각을 하며 그 철장을 다시 딸에게 넘겨주었다. 구양봉도 철장을 주시하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지고 놀기는 좋겠지만 이따위 엉터리 물건은 소용이 없어.]
황용이 웃으며 세 토막으로 된 칼을 번쩍 들어 구천인을 향해 던지려다가 그만두었다. 그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 던져 봐야 소용없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아버지가 대신 던져 주세요.]
第 五十三 章. 황용과 화쟁 사이에서
황약사는 그렇지 않아도 의심스러워 구천인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던 차였다. 그는 오른손을 번쩍 들고 그 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칼끝을 밖으로 향한 채 중지로 칼자루를 퉁겼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칼이 날았다. 강궁을 가지고 쏜 화살보다도 빨랐다. 황용과 곽정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으나 구양봉은 마음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무서운 솜씨로구나!)
사람들의 외침 속에 칼은 구천인의 등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칼날이 등에 막 꽂히려고 하는데도 구천인은 여전히 주저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칼날이 그의 등에 꽂히고 말았다. 날카로운 칼은 아니었으나 황약사가 그 대단한 공력을 실어 퉁겨 냈으니 그 칼은 그대로 칼자루까지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이제 구천인은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상을 입었음은 뻔한 일이었다. 놀라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간 곽정이 어이쿠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구천인의 웃옷을 공중에 휘둘렀다.
[이 영감 벌써 달아나 버리고 없는걸요.]
구천인은 벌써 웃옷을 벗어 나지막한 나무 위에 그럴듯하게 걸쳐놓은 채 달아난 것이었다. 거리도 멀고 또 초목이 무성하여 황약사나 구양봉 같은 고수까지도 속아넘어간 것이다.
황약사도 어처구니가 없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양봉은 황약사가 세심한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홍칠공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솔직한 인물이 아닐 뿐더러 속임수를 써봐야 쉽게 넘어갈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구천인이 달아난 것을 보고 앙천대소하느라 경계를 늦춘 황약사를 보고 이 기회를 그냥 넘겨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전광석화처럼 황약사를 향해 덤벼들었다. 황약사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왼손을 번쩍 들고 오른손을 갈퀴처럼 구부려 막았다.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가볍게 흔들렸다. 구양봉은 일격이 빗나가자 뒤로 세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황노사, 우리 다음 기회에 또 만납시다.]
구양봉이 긴 소매를 떨치고 옷자락을 나부끼며 몸을 돌려 떠나가려는 순간 황약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왼손을 들어 얼른 딸의 몸을 가렸다. 곽정도 서독이 몸을 돌리는 순간 벽공장 비슷한 재주로 황용을 습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기회를 포착하고 돌격하는 모양이 황약사보다 재빠르지는 못했다.
위험을 보고 그냥 있을 곽정이 아니었다. 그는 큰소리를 내지르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서독의 가슴을 때렸다. 방어를 하기 위해 자세가 흐트러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황용을 습격했던 힘이 그리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구양봉은 이제 황약사의 반격의 힘까지 합쳐 곽정을 역습하고 나섰다. 이런 재주는 원래 자기 힘에 황약사의 힘까지 보탠 것이니 대단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곽정이 방어하기 힘든 공격이었다. 그는 위급한 나머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피해 일어나면서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구양봉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 공력이 또 늘었구나.]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이런 역습을 곽정이 용케 피하자 구양봉도 꽤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강남 육괴는 쌍방이 손을 쓰는 것을 보고 어느 틈에 구양봉의 뒤를 가로막고 있었다. 구양봉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어 나가자 전금발과 한소영은 감히 막을 생각을 못하고 비켜섰다. 그는 이렇게 해서 숲속을 빠져 나갔다.
황약사가 만약 지금이라도 매초풍의 원수를 갚을 생각만 있다면, 그리고 곽정과 황용, 육괴가 합세한다면 서독 하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만한 성격의 황약사는 1 대 1이 아닌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날 혼자 찾아갈 생각을 하며 구양봉의 뒷모습을 냉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았다. 이때 곽정은 벌써 화쟁, 툴루이, 제베, 보구르치 등을 묶은 끈을 풀어 주었다. 화쟁은 곽정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에 몹시 반가워하며 거짓말한 양강을 욕했다. 툴루이가 말문을 열었다.
[그 양가 성을 가진 자가 일이 있어 악주로 가야 한다기에 나는 호인인 줄만 알고 준마 세 필까지 주었다네.]
[그런데 어쩌다 그 두 영감과 만나게 되었나요?]
곽정이 물었다.
화쟁이 웃으며 대답하고 나섰다. 툴루이, 화쟁 등은 곽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비통해하고 있던 차에 양강이 말끝마다 의형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바람에 그만 의기투합하게 되어 그날 밤 임안의 북쪽 50리 떨어진 시골 마을 객점에 함께 머물렀다. 양강은 밤을 틈타 몰래 툴루이를 살해하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방주의 죽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명의 거지는 밤새 양강을 호위하고 있었다. 양강은 자다가도 몇 번이나 일어나 툴루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 거지 둘이 병기를 든 채 지키는 바람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음날 양강은 툴루이에게 말 세 필을 얻어 타고 두 거지와 함께 서쪽으로 떠났다. 툴루이 등도 북쪽을 향해 떠나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남쪽으로 날아간 흰 수리가 돌아오지 않아 객점에 남아 기다렸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일이 급한 건 아니어서 그들은 이틀이나 더 묵으며 수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사흘째 되던 날 수리 두 마리가 돌아오기는 했지만 무슨 일인지 화쟁의 어깨에 앉은 채 울부짖으며 자꾸만 남쪽으로 길을 안내했다. 할 수 없이 수리가 이끄는 대로 다시 남쪽을 향해 가다가 재수 없게도 숲속에서 구천인과 구양봉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구천인은 대금국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강남의 호걸들로 하여금 자중지란을 일으켜 금나라 병사의 남하를 유리하게 도와야 했다. 그런데 때마침 숲속에서 구양봉과 더불어 노닥거리다가 툴루이 등을 만나고 보니 몽고의 사신이 아닌가. 그래서 즉시 구양봉과 함께 그들에게 달려든 것이다. 제베 등이 용감하다지만 서독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수리 두 마리가 남쪽을 향해 날아간 것은 홍마의 종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주인을 적지로 끌고 들어간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약 그때 곽정이나 황용을 인도하여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툴루이, 화쟁 등 일행은 억울하게도 이 숲속에서 생명을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화쟁이 이 같은 곡절을 다 알 리는 없었다. 다만 반갑고 기쁜 마음에 곽정의 손을 잡은 채 그냥 재잘거리기만 했다.
황용은 그렇게 친한 그들 모습을 보니 유쾌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고받는 몽고어를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더욱 답답했다. 황약사는 딸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눈치를 채고 물었다.
[용아, 저 변방 여자는 누구냐?]
[곽정 오빠의 약혼녀라나요.]
황약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구?]
[아버지가 직접 물어 보세요.]
황용이 고개를 떨구며 대꾸했다. 주총이 옆에 있다가 일이 묘하게 돌아감을 느끼고 황약사 앞에 나서서 지난날 곽정이 몽고에 있을 때 화쟁과 약혼하게 된 경위를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황약사는 원래부터 곽정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남독녀 외딸을 그에게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이런 곡절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일대 무학의 종사였다. 목숨보다 더 아끼고 애지중지하는 딸을 다른 사람의 첩으로 만든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그는 딸이 하찮은 일을 가지고 괴로움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용아, 내 한 가지 일을 해야겠는데 절대로 말리지 말아라.]
[아버지, 무슨 일이신데요?]
황용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떨리는 소리로 되물었다.
[저 연놈을 함께 죽여 없애자꾸나.]
황용이 당황해서 아버지 오른손을 잡아끌었다.
[아버지, 그러시면 안 돼요. 곽정 오빠는 정말 저만을 좋아한다고 했어요. 네? 아빠!]
황약사가 코웃음을 치며 곽정에게 말했다.
[야 이 녀석아, 그게 사실이라면 당장 한칼에 저 변방 여자를 내 눈앞에서 죽여 보여라. 그래야 네 마음을 믿겠다.]
곽정은 평생 이렇게 난처한 지경을 당해 본 일이 없었다. 원래 우둔한 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막해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먼저 약혼을 하고도 또 내 딸한테 구혼한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이냐!]
황약사가 추상같이 추궁하고 나섰다. 강남육괴는 파랗게 질린 황약사의 표정을 보자 겁이 덜컥 났다. 자칫 잘못하면 곽정이 요절날 판이었다. 그들은 각자 슬그머니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무공으로 그를 당해 낼 수 없으니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속수무책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인 곽정은 황약사가 추궁하자 솔직히 대답했다.
[저는 일생 용아하고만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라 다른 일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황약사의 노기가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건 좋다, 그럼 저 여자를 죽이지 않아도 돼. 그러나 오늘 이후로는 다시는 저 여자와 만나지 말도록 해라. 알겠느냐?]
그러나 곽정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럼 저 여자와도 만나시겠단 말씀인가요?]
이번에는 황용이 나섰다.
[나는 화쟁을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만나지 못한다면 괴로울거야.]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는 거야 나도 상관하지 않겠어요.]
황용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황약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좋다! 저 변방 여자의 오라버니도 여기 있고 또 나도 있고 네 여섯 사부님도 계시니 어디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네가 아내로 맞으려는 여자는 내 딸이냐, 아니면 저 변방 여자냐?]
그가 이렇게 양보하고 다시 한 번 묻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 모두가 사랑하는 딸의 체면을 보아 자기를 억제하고 참는 것이었다.
곽정은 고개를 떨군 채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 칭기즈칸이 하사한 금도(金刀)와 구처기가 준 비수가 동시에 눈에 띄었다.
(아버님 유언에 따른다면 나와 양강은 생사를 초월한 형제나 다름없는 처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르니 이 결의형제의 정도 지키기가 어려울 것 같다. 또 양철심 숙부의 유명에 따르자면 나는 당연히 목염자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어른들이 맺어준 약속은 따르기 어려워졌다. 나와 화쟁 누이의 혼사는 칭기즈칸이 정한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몇 마디 말 때문에 용아와 생이별을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결심을 내린 곽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때 툴루이는 벌써 주총에게 물어 황약사와 곽정이 주고받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곽정이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 여동생에게 무정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가슴속 가득 분노를 느낀 그는 화살통에서 낭아노령(狼牙鷺翎) 하나를 뽑아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곽정, 남아 대장부 천하를 횡행함에 모든 일은 한마디 말로 결정짓는 것이오. 내 누이에게 무정하다고 해서 칭기즈칸의 영웅스런 아들딸이 형을 향해 애걸복걸할 줄 아오? 형과 나의 형제지의를 단절하고 맙시다. 어려서 목숨을 버리고 나를 도와준 일이며 나와 아버님의 목숨을 구해 준 일 등은 잊지 않겠소! 우리 은혜와 원망을 분명히 가립시다. 형의 어머님이 북에 계시니 내 잘 봉양하리다. 그러나 만약 형이 남방으로 모시고 싶다면 사람을 시켜 호송하되 일말의 결례도 범하지 않고 잘 모시게 하리다. 장부 일언이 중천금이라 했으니 안심하시오.]
툴루이는 말을 마치고 화살을 두 토막으로 분질러 말 앞에 던졌다. 툴루이의 단호한 말에 곽정은 간담이 싸늘해졌다. 동시에 어려서 그와 함께 사막에서 지내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장부 일언이 중천금이라.... 화쟁 누이와의 혼사도 직접 내 입으로 허락하지 않았더냐. 자기가 한 말에 신용이 없으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황도주가 당장에 나를 죽인다 해도, 용아가 평생 나를 원망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황도주님! 그리고 여섯 분 은사님! 툴루이 형과 제베, 보구르치 두 사부님! 곽정은 결코 신의없는 그런 무뢰배는 아니올시다. 저는 반드시 화쟁 누이와 결혼하고야 말겠습니다.]
곽정은 단호하고 후련하게 말했다.
그는 이 말을 각기 한어(漢語)와 몽고어로 한 번씩 말했다. 듣고있던 사람들은 뜻밖의 말에 망연자실했다. 툴루이와 화쟁은 놀랍고도 반갑다는 표정이 역력했고, 강남육괴는 자랑스러운 제자를 두었다고 마음속으로 새삼 감탄했다. 그러나 황약사는 코웃음을 치며 노려보고 있었고, 상심한 황용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이 흐른 뒤 황용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곽정 오빠. 저도 이젠 알았어요. 저 여자와 오빠는 같은 사막 출신, 사막 위에 노니는 한 쌍의 횐 수리요, 저는 다만 강남 버드나무 아래서 노니는 한 마리 제비로군요.]
곽정이 앞으로 나서며 황용의 손을 꼭 잡았다.
[용아, 용아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난 몰라.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오직 용아 한 사람뿐이야. 그건 알아줘야 해. 내 몸이 칼에 천번 만번 찔려 갈기갈기 찢기거나 불에 타 재로 변한다 하더라도 내마음속에는 여전히 용아 하나밖에 없을 거야.]
황용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럼 왜 오빠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야. 어떻게 된 까닭인지도 모르겠어. 다만 내입으로 대답한 일이니 후회할 수도 없겠지? 그러나 난 거짓말도 못해. 어쨌든 내 마음속에는 용아 하나만이 영원히 있을 거야.]
황용은 착잡하기만 했다. 기쁜 것도 같고 괴롭기도 해서 그냥 암담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곽정 오빠, 좀더 일찍 그런 줄 알았더라면 우리 명하도(明霞島)에 그냥 있을 걸 그랬지요?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황약사가 긴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거야 쉽지.]
그는 옷소매를 풀썩 들어올리며 화쟁 공주를 향해 일 장을 갈겼다. 황용은 아버지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그의 눈빛이 차디차게 변하는 것을 보는 순간 먼저 선수를 치고 막아섰다. 황약사는 딸이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장세를 늦추었다. 황용이 이 틈을 이용해 화쟁의 팔을 잡아 말 위에서 끌어내렸다.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황약사의 일 장이 말안장을 때렸다. 말은 처음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듯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서서히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더니 풀썩 네 발이 꺾어지면서 쓰러져 죽었다. 이 말은 몽고의 명마로서 비록 한혈보마(汗血寶馬)에 비할 만한 준마는 아니더라도 근육과 골격이 튼튼한 양마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데 황약사의 일 장에 죽고 말았으니 확실히 그의 무공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화쟁이 이 일 장을 맞았다면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툴루이와 화쟁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황약사는 자기 딸이 나서서 화쟁을 구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가 곧 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만약 자기가 화쟁을 살해했다면 곽정은 황용을 배반할 뿐만 아니라 원수가 되는 것이다. 배반하면 하는 것이지 자신이 곽정이라는 존재를 무서워할 이유는 없다고 황약사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딸의 표정을 살피니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것이 아내가 임종할 때의 표정과 흡사했다. 황용은 세상을 떠난 아내와 너무나도 닮았다. 15년 전 일이지만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딸의 얼굴에서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고 보니 마음이 너무나 착잡했다. 곽정을 향한 애정이 딸의 가슴속 깊이 사무쳐 있다는 것을 느낀 황약사는 긴 한숨이 절로 흘러 나왔다. 황용은 멀거니 선 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용아, 우리 돌아가자꾸나. 영원히 곽정을 만나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니?]
황약사의 부드럽고 맥빠진 위로였다.
[아녜요, 아버지. 저는 악주로 가야 해요. 사부님이 저보고 개방의 방주가 되라고 하신걸요.]
황약사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거지 왕초가 된다고? 다 쓸데없는 수작이야. 별로 재미있을 것도 없다.]
[벌써 사부님께 그러겠다고 대답한걸요.]
황약사가 잠시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며칠 해보다가 재미없거든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려무나. 그러나저러나 이후에 곽정을 만날 테냐, 안 만날테냐?]
황용은 곽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련하면서도 무한한 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아버지, 그가 다른 사람을 아내로 맞겠다면 저도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저 하나뿐이라니 제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만약에 네 결혼 상대가 곽정과 만나는 걸 반대한다면 어쩔 테냐?]
[흥, 누가 감히 나를 막아요? 나는 아버지 딸이에요!]
[이 바보야, 이 아비가 몇 백 년 사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곽정 오빠가 저를 이렇게 대하는데 전들 오래 살아 무엇하겠어요?]
그들 부녀가 주고받는 애절한 말을 듣고는 곽정은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라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워낙 말주변이 없는 그로서는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황약사는 딸과 곽정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하늘을 향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산골짜기에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까치들이 숲을 맴돌며 날았다. 황약사가 모래 한줌을 주워들고 던지자 10여 마리 까치가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는 그는 몸을 돌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가버렸다.
툴루이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곽정이 옛 약속을 저버리지 않은 것만이 반갑고 기뻤다. 그는 부왕 칭기즈칸의 그 금도를 입에 대고 몇 번 입을 맞춘 뒤 다시 곽정에게 되돌려 주었다.
[대사를 조속한 시일 내에 끝맺고 우리 북에서 만납시다.]
[이 수리 한 쌍도 곁에 데리고 계시다가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화쟁이 다정하게 말하자, 곽정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등에 진 보따리 속에서 짧은 삼지창 한 자루를 꺼내며 이렇게 부탁했다.
[가서 제 어머니께 내 반드시 아버님의 병기로 원수를 갚겠다 하더라고 전해 주오.]
다음으로 제베와 보구르치도 곽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말에 올라 떠났다. 황용은 이들 네 몽고인이 떠났는데도 곽정이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양을 보고 말했다.
[곽정 오빠, 오빠도 가 보세요. 저는 오빠를 원망하지 않겠어요.]
목소리가 어딘가 쓸쓸하게 떨려 나왔다.
[용아, 그 죽장을 양강이 가져 가버렸으니 아버지 말씀대로 개방 내에 무슨 변고가 일어날지도 몰라. 오늘은 사부님을 찾아보고 내일 나와 함께 떠나도록 해.]
황용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오빠 혼자 사부님을 찾아가세요.]
황용은 허리에 차고 있던 곽정의 비수를 풀어 땅바닥에 내려놓고 등에 진 보따리에서 두루마리 한 폭을 꺼냈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오빠에게 주는 그림이에요.]
그리고 다시 보따리 속에 있는 오색찬란한 조개 껍데기를 반으로 나눴다.
[이건 우리가 그 무인도에서 함께 주운 거예요. 반을 드리겠어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보따리 속 물건을 펼쳐 놓고 살폈다. 그중에는 언젠가 곽정이 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겉옷 한 벌과 약간의 돈, 갈아입을 옷 등이 들어 있었다.
[오빠에게 드릴 마땅한 물건이 없네요.]
황용은 천천히 보따리를 챙긴 뒤 다시 등에 짊어지고 떠나려고 했다. 곽정이 홍마를 끌고 쫓아가며 말했다.
[이 말을 타도록 해.]
황용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옷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쏜살같이 사라졌다.
곽정은 몇 발짝 뒤쫓다 걸음을 멈추고 멀리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 본 한소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곽정아,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냐?]
곽정이 잠시 머뭇거렸다.
[궁중으로 홍사부님을 찾아가야겠어요.]
[암, 그래야지. 황노사가 우리들 집으로 찾아가 소란을 부렸다면 식구들이 걱정하고 있을 테니 우린 오늘 돌아가 봐야겠다. 네 홍사부님을 뵙거든 가흥으로 모시고 가서 정양하시게 해라.]
가진악이 하는 말에 곽정이 대답을 하고 즉시 여섯 사부에게 절하며 하직을 고한 뒤 비수며 조개 등을 챙겨 가지고 임안으로 떠났다.
곽정은 그날 밤 대내로 들어와 어주 주위를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홍칠공은 커녕 주백통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에도 다시 들어가 찾아보았으나 역시 허탕이었다.
(내 재주로는 소용없다. 차라리 황용 뒤를 쫓아가 개방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그녀와 함께 와서 찾아보는 것이 낫겠구나.)
이날은 칠월 초아흐레였다. 개방의 악주 모임은 겨우 엿새가 남아 있었다. 다행히도 한혈보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어서 단 하루만에 벌써 강남의 서쪽 경계에 당도했다.
이때 중국의 태반은 금나라에 예속돼 있었다. 동으로는 회수(淮水), 서로는 산관(散關)을 경계로 삼고 있었고, 남송은 양절(兩浙), 양회(兩淮), 강남의 동서로와 형호(荊湖)의 남북로, 서촉(西蜀)의 서로, 복건, 광동, 광서 등 겨우 15로만을 가지고 있었다. 국세는 나날이 쇠퇴하고 판도는 자꾸만 작아져 갔다.
곽정은 연도에서도 계속 황용의 종적을 찾기에 바빠 수시로 흰 수리를 날리며 동정을 살폈다. 그는 이날 융흥부(隆興府) 무녕현(武寧縣)에 당도했다. 이제 악주도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말을 천천히 몰았다. 황혼이 뉘엿뉘엿 기우는데 앞에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그 뒤로 난 긴 고개는 올라갈수록 길이 더욱 험했다. 날이 이미 저물기 시작했으니 다음날 고개를 넘기로 하고 곽정은 묵을 곳을 찾기로 했다. 숲을 돌아가자 나지막한 대나무 울타리가 보였다.
(울타리가 있는 걸 보니 인가가 있겠구나.)
울타리를 끼고 도니 과연 초라한 초가집이 나타났다. 곽정이 말을 끌고 가까이 다가가니 초가집 안에서 여자의 가냘픈 울음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곽정은 발길을 멈추었다.
(상심되는 일이 있는 모양이니 부르기도 거북하구나.)
그가 막 돌아서려고 하는데 집 안에서 말 투레질 소리를 들었는지 삐걱 사립문이 열리며 구부정한 백발 노인이 손에 긴 쇠작살을 들고나왔다.
[누구요? 뱀도 없고 여자도 없고 이 늙은이 목숨밖에는 없소.]
곽정은 무슨 오해가 있나 해서 공손히 절을 했다.
[노인장, 길 가는 나그네입니다. 근처에 묵을 만한 객점이 보이지 않아 댁에서 하룻밤 쉬어 갈까 했는데 불편하시다면 소인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노인은 곽정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작살을 놓고 답례를 했다.
[늙은 영감의 실례되는 말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방이 누추하기는 하지만 안으로 드셔서 차라도 한잔 드십시오.]
곽정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더럽기는커녕 먼지 하나 없이 정결했다. 방으로 들어가 막 좌정을 하는데 난데없이 요란한 말굽 소리가 들리더니 말 세 필이 집 앞에 당도했다. 말에 탄 한사람이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진(秦)영감, 뱀을 내놓을 거요, 아니면 손녀를 내놓을 거요?]
[우리야 영감을 용서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어디 나으리야 우리를 용서해 주겠소! 당장 나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오!]
또 다른 사람이 이렇게 호통을 치며 쉭 하고 말채찍을 들어 치자 초가 지붕이 번쩍 들려 떨어졌다. 진노인은 내실 문 앞으로 걸어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금(琴)아, 뒷문으로 달아나 숲 속에 숨어라. 오늘 밤에 돌아오지말고 내일 혼자 광동으로 가렴.]
그러자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와 함께 죽겠어요.]
진노인이 발을 굴렀다.
[빨리 달아날 생각 않고 뭘 하느냐?]
그때 파란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내실에서 나와 할아버지를 얼싸안았다. 그러나 진노인은 한사코 그녀를 밀어붙였다. 이때 화닥닥 소리가 나며 사립문이 부서지고 세 명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중 하나가 진노인의 덜미를 잡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다른 한 손으로 소녀를 품속에 끌어안았다. 소녀는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곽정이 보아하니 이들 중 앞장선 사람은 현아문의 도두(都頭)요, 다른 두 놈은 졸개들이었다. 도두가 소녀를 끌어안고 웃었다.
[진영감, 우리는 현태야(太爺)의 분부를 받고 나온 사람들이니 우리를 원망하지 말게. 오늘 밤 안으로 뱀 스무 마리를 보내겠나, 아니면 이 규수를 보내겠나? 내일 아침에 보낸다면 아무래도 늦을걸세.]
이렇게 말하며 당당하게 문밖으로 사라졌다.
진노인이 큰소리를 지르며 작살을 들고 내달아 도두의 등을 찔렀지만 그는 살짝 피하며 번개처럼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고 작살 자루를 내리쳤다. 진노인의 손에 쥔 작살이 쨍그랑 떨어졌다. 도두가 다시 발길로 걷어차자 진노인은 풀썩 쓰러졌다.
[아니, 이놈의 영감이 환장을 했나? 다시 이따위 수작을 부리거나 잔소리를 하면 한칼에 요절을 내고 말 테다.]
그가 꽥 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진노인의 손녀는 도두의 품속에서 놀라 기절하고 말았다. 이를 본 진노인이 죽기로 작정하고 도두의 오른쪽 다리를 꽉 물고늘어졌다. 도두는 비명을 지르며 칼등으로 진노인의 이마며 얼굴을 닥치는 대로 내려쳤다.
진노인은 피가 낭자한 채 그래도 이를 악물고 계속 물고늘어졌다. 두 졸개들이 앞뒤로 달려들며 치고 걷어차자 도두도 다시 칼등으로 내려쳤다. 이러다간 진노인의 생명이 위험할 것 같았다.
곽정은 도두가 소녀를 껴안을 때부터 이미 화가 나 있었다. 원래 성격이 느린데다가 행동까지 더디기만 한 그였지만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단숨에 달려들어 한 손에 한 명씩 졸개들의 덜미를 잡고 멀리 집어 던졌다. 도두가 칼로 진노인을 내려치는 순간 곽정이 왼손 끝으로 칼등을 막으며 밀자 칼끝이 도두의 목에 박혔다. 곽정은 오른손으로 소녀를 잡아끌며 왼발을 들어 도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어찌나 세게 걷어찼는지 그 뚱뚱한 몸이 허공에 붕 떴다. 그런데 진노인이 아래윗니로 도두의 다리를 꽉 문 채, 또 두 손으로 죽자고 녀석의 두 발을 틀어잡고 있다가 그만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다.
곽정은 깜짝 놀랐다. 연로한 진노인이 함께 떨어지는 날에는 그대로 죽는 것이다. 소녀의 손을 놓을 겨를도 없이 그녀를 껴안은 채 몸을 날렸다. 한 마리의 큰 새가 덮치듯 달려들며 도두의 옷깃을 틀어잡아 치켜들고 소리를 질렀다.
[노인, 이자를 그만 용서하시지요.]
그러나 진노인은 미쳐 날뛰는 호랑이가 되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소녀까지 함께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물고 있던 다리를 놓았다. 노인은 입 언저리에 피가 흥건한 채 고개를 들었다. 곽정이 왼손을 밖으로 휘둘러 도두를 집어던지니 땅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도두는 곽정이 또 한바탕 달려들어 때릴 줄 알았는지 죽은 체하며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두 졸개들은 곽정이 다시 덤벼들지 않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도두를 부축해 세우고 말도 타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도망을 쳤다.
곽정은 소녀를 내려놓고 진노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소녀는 곽정을 몇 번 바라보았다. 너무나 고마워 감격은 하면서도 부끄러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할아버지 얼굴에 묻은 피만 닦아 주었다.
진노인은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손녀가 무사한 것을 보자 정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노인이 즉시 땅에서 기어 일어나 곽정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자 소녀도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곽정은 급히 노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노인, 이러지 마십시오.]
진노인이 곽정을 방으로 안내하고 자리를 권하자 소녀가 안에서 차를 내다가 바쳤다.
[은인께서는 차를 드사이다.]
곽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사례를 했다.
[감히 은인의 존함을 여쭈어 보아도 좋겠습니까?]
노인이 정중하게 묻는 바람에 곽정도 공손하게 자기 성명을 알려주었다.
[만약 은인께서 구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손녀와 함께 오늘 그만 죽고 말았을 겝니다.]
그리고는 자기들 얘기를 다 들려주었다.
원래 진노인은 광동 사람인데 고향에 있는 토호의 핍박에 견디다 못해 남부 여대, 강서로 도망을 했다. 그런데 이 숲가에 주인 없는 버려진 땅이 있어 정착한 후 두 아들과 함께 개간을 했다. 그런데 이 숲속에는 독사가 득실거렸다.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두 아들과 며느리 하나가 그만 독사에 물려 죽고 말았다. 그래서 진노인과 손녀인 남금(南琴)만이 남았다. 진노인은 이것이 한이 되어 고향인 광동으로 돌아가 뱀 잡는 방법을 배워 가지고 다시 왔다. 숲 속에 있는 뱀을 다 잡아 없애서 아들과 며느리의 원수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그가 피땀 흘려 개간한 황무지를 현의 세력있는 사람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생업을 잃은 그는 할 수 없이 뱀 쓸개와 사주(蛇酒)를 담가 팔며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숲 속에는 뱀이 무진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탐내는 사람도 없었다. 할아버지와 손녀는 서로 의지하며 그럭저럭 살 수가 있었다. 이렇게 8,9년이나 살았다.
그런데 작년 가을 현아문에 교(喬)가 성을 가진 태야가 새로 부임을 했다. 이 교태야라는 사람은 어찌나 독사를 좋아하는지 노인에게 와서 돈을 주고 독사를 사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뒤에 와서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돈과 양곡을 바치는데 왜 진노인만 아무것도 바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매월 독사 20마리를 바치면 전량을 바치는 것과 같이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진노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노인은 손녀에게도 뱀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 매달 그들의 요구대로 뱀 20마리씩을 교태야에게 바쳤다. 그런데 금년 봄부터 숲 속의 뱀이 갈수록 적어졌다. 이전에는 뱀이 흔해 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반나절 동안 풀을 헤치고 돌을 뒤집어 봐야 한 마리를 잡을까말까 했다. 그러나 4월과 5월에는 그런대로 뱀을 바칠 수 있었지만 6월에 와서는 20마리를 채울 방법이 없었다.
곽정은 이 얘기를 들으며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자 진노인은 곽정을 보고 편안히 쉬라고 했다. 남금이 등에 불을 밝히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워낙 시골이라 누추하오니 은인은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아가씨, 자꾸만 은인이라 부르지 마시고 그냥 곽정 오빠라고 하시오.]
[시골 소녀가 어찌 감히 오빠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데 밖에서 이상한 새소리가 들렸다. 남금이 깜짝 놀라며 등잔불 심지를 낮췄다. 새소리가 어찌나 이상한지 곽정은 전신이 간질간질하고 토할 것처럼 괴롭기까지 했다.
[아가씨, 무슨 새소리가 저런가요?]
[저게 바로 독사를 잡아먹는 신조(神鳥)예요.]
[독사를 잡아먹는 새라니요?]
[그렇답니다. 저 새가 숲 속의 뱀을 다 잡아먹었기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저렇게 비참한 꼴이 되셨어요.]
[아니, 그럼 지 새를 잡아 없애지 않으시구요?]
곽정이 하는 말에 남금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은인, 조용하세요.]
그녀는 문 쪽으로 가서 문을 꼭 닫았다.
[저 신조가 어찌나 영리한지, 그런 말을 들으면 큰일난답니다.]
[아니 뭐라구요? 저 새가 우리 말을 알아듣는다구요?]
남금이 막 대답을 하려는데 진노인이 옆방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방문 앞으로 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녁에 말씀드리기 불편하니 내일 제가 은인께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요.]
그러더니 곽정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손녀의 손을 잡고 다른 방으로 갔다.
곽정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눕기는 했지만 그는 황용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자기를 만나면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 생각 저 생각에 몸만 뒤척일 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시나 되었을까, 갑자기 구구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 새울음 소리였다. 곽정은 가슴이 답답했다. 잠도 못 잘 바에야 차라리 독사를 잡아먹는다는 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하고 싶었다.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 문을 열고 새가 우는 곳으로 나섰다. 이때 갑자기 등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인, 제가 모시고 가지요.]
곽정이 고개를 돌리니 남금이 고개를 숙인 채 달빛 아래 서 있었다. 그녀 모습이 어딘가 매초풍이 달빛 아래서 연공을 할 때 형상과 닮은 듯해 곽정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소녀의 피부는 너무나 고왔다. 아마 어려서부터 산골짝 숲 속에서 자라 햇볕을 잘보지 못했기 때문이거니 했다. 저녁에 보았을 때보다 달빛을 받으니 더 한층 예뻐 보였다. 그녀는 양손에 뭔가 거무스름하고 둥글게 생긴 물건을 들고서 천천히 곽정 앞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은인, 정말 그 신조를 보시려고 하시나요?]
[은인이라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남금은 얼굴에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곽정을 불렀다.
[곽정 오빠.]
곽정이 손에 든 화살을 번쩍 치켜들며 말했다.
[제가 그 새를 이 활로 쏴 죽이겠어요. 그래야만 할아버지께서 다시 독사를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쉿! 조용히 말씀하세요.]
남금이 당황해 조용하라며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높이 들었다.
[이걸 머리에 쓰세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몹시 불안해 보였다. 곽정이 보니 쇠로 만든 솥이었다. 그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진남금이 먼저 쇠솥을 자기 머리 위에 썼다.
[그 신조는 바람처럼 날아다니며 사람의 눈을 쪼아요. 그리고 귀도 밝아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금방 알고 대드니까 곽정 오빠께서는 각별히 조심하세요.]
곽정은 사막에 있을 때 그 사나운 수리도 화살 하나로 잡은 일이 있었던지라, 까짓 뱀을 잡아먹는다는 그 새가 제아무리 신령스럽고 기이하다 하더라도 양 죽지에 날개 돋친 짐승이 뭐 그리 무서울 게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금이 간곡하게 말하는 호의를 묵살할 수 없어 쇠솥으로 머리를 가렸다, 남금이 앞장서서 안내를 하며 둘은 숲속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채 숲 속에 이르기도 전에 그 새가 또 구구구 울부짖었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바람이 숲을 휩쓸어 흔드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하네요. 어째서 뱀이 이렇게 많을까?]
남금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는 말이었다. 곽정이 이 말을 듣고 백타산(白駝山)의 뱀떼를 생각하며 정신을 가다듬을 때 먼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백타산의 사노(蛇奴)들이 뱀떼를 모는 소리였다. 그들의 황급한 말소리로 보아 뱀떼가 갑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곽정은 남금의 팔을 끌고 나는 듯 숲 속으로 들어갔다. 왼쪽에 보이는 늙은 느티나무 가지가 번쩍 들리고 잎이 무성해서 거기에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즉시 팔을 뻗어 남금의 허리를 감싸 안고 튼튼한 가지 하나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들이 막 안전한 자리에 앉자 다시 한 번 괴상한 새소리가 들렸다.이번에는 무척이나 가까운 곳에서 들려 와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눈깜짝할 사이에 숲 밖에서 물결처럼 뱀떼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곽정은 이미 여러 번 이런 경우를 당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남금은 달랐다. 그녀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곽정의 옷깃을 잡은 채 한사코 놓지 않았다. 뱀떼는 서쪽으로부터 밀려와 숲 속에 이르자마자 즉시 사방팔방에서 펄떡펄떡 뛰며 아무데나 쑤시고 들어가기에 바빴다. 땅 속에서 열기가 나와 견딜 수 없어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달빛 아래 수천 수만의 청사와 흑사들이 뛰어올랐다 떨어지고, 떨어졌다가는 다시 뛰어올랐다. 마치 큰 솥의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뱀떼는 무궁무진하게 몰려오고 동시에 사노들의 휘파람과 어우러져 일대 혼란을 빚었다. 7,8명의 흰옷 입은 남자들이 숲속으로 달려와 결사적으로 장대를 휘둘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곽정은 구양봉의 악독함을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수하 사람들이 이렇게 골탕먹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용아가 여기 있었더라면 얼마나 고소해 하며 구경했을까.)
남금은 슬그머니 곽정의 표정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곽정을 바라보며 새삼 그 대담함에 탄복했다. 이때 갑자기 고막이 찢어질 듯 새가 기묘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전신의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놀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뱀떼가 즉시 땅에 엎드려 꼼짝도 못하는 게 아닌가. 사노들이 한 사람의 손짓에 따라 재빨리 장대를 든 채 서서 휘파람을 멈췄다. 그중 두목 같은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말을 꺼냈다.
[우리는 백타산 구양선생 수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귀지(貴地)를 지나면서 눈이 멀어 영웅호한을 찾아뵙지 못했사오니 구양선생의 체면을 보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소서.]
곽정은 그의 이런 모양을 보고 곧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자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자 잠시 후에 또 한 번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말 속에 은근한 위협까지 담겨 있었다.
그자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발 아래 나무 그림자 속에서 사람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러나 모르는 체 느티나무를 등뒤에 둔 채 고개를 숙이고 절이라도 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대갈일성하며 두 손을 뒤로 돌려 느티나무 위를 향해 은으로 만든 북(梭) 4개를 발사했다.
만약 곽정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그자의 독수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곽정의 무공은 심오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달빛 아래 은빛을 번쩍이며 암기가 날아오는 것을 보자 머리에 쓰고 있던 쇠솥을 벗어 받았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4개의 암기가 솥 안으로 떨어졌다. 그자는 자기 술수가 빗나가자 맥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나무 위의 고인(高人)은 누구시온지 성명을 알려 주십시오.]
곽정은 대꾸도 하지 않고 쇠솥을 뿌렸다. 네 줄기 은광이 날아가 퍽하고 그자가 들고 있는 장대를 갈기니 장대가 다섯 토막으로 부러져 나갔다. 그자는 혼비백산하여 쩔쩔맸다. 상대방이 그래도 사정을 보아주었기에 망정이지 자기를 향해 날렸더라면 벌써 비명횡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했다. 뱀떼가 조용해졌으니 어떻게 해서든 몰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양봉의 징계는 무섭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그의 앞에서 애걸하고 용서를 빌어야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백타산의 신분은 물론이요 자칫하면 목숨까지 뺏길 것은 너무나 뻔했다. 그런데 이때 콧속으로 꽃 향기 같은 향내가 물씬 풍겨 오며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것이었다. 뱀떼가 꿈틀거리며 머리를 바짝 치켜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노의 수령은 곽정이 자기를 풀어 주는 줄 알고 급히 휘파람을 불며 뱀을 몰고 달아나려 했지만 향기가 점점 더 짙어 오자 고개를 들었다. 그때 공중에서 불덩이처럼 환한 빛이 허공을 날아 자기 앞에 떨어졌다. 그가 깜짝 놀라 피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그건 불이 아니라 전신이 시뻘건 새였다. 몸뚱이는 까마귀보다 약간 큰데 부리는 반 자가 넘을 정도로 길었다. 땅바닥에 내려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니 작은 새에 불과했지만 어딘가 위엄이 있어 보였다. 꽃향기 같은 것은 바로 그 새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곽정이 보니 귀엽기 짝이 없는 새였다. 전신이 붉은 게 잡털 하나 없었고 달빛 아래 굴리는 눈은 산호처럼 붉고 향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황용이 본다면 굉장히 좋아하겠구나.)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뱀떼는 이 새를 보더니 처음에는 놀라 꿈틀거리다 조용해졌다. 새가 구 하고 한 번 울자 뱀떼 가운데 큰 뱀 한 마리가 기어 나와 새앞으로 가서 배를 하늘로 향하고 누웠다. 새가 긴 부리로 긋자 네 마리 뱀의 배가 쑥 갈라졌다. 이윽고 새는 네 번을 쪼아 뱀 쓸개를 먹어 치웠다. 뭇 사노들은 그 광경을 보고 모두 놀랐다. 그중 우두머리가 손을 번쩍 들고 은으로 만든 북을 새를 향해 날렸다. 은북에 맞기만 하면 새는 다치는 것이다. 곽정은 얼른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따서 손톱으로 퉁겼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였지만 곽정이 손톱으로 퉁기니 은북보다 더 빨랐다. 새가 앉아 있는 데로부터 5,6자 떨어진 곳에서 나뭇가지가 은북과 부딪쳐 땅에 떨어졌다. 그 새는 영악스럽고도 기이했다. 은북과 나뭇가지가 날아오자 벌써 누군가는 자기를 해치려 하고 또 다른 한사람이 자기를 구해 주리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새는 곽정과 남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줄기 불빛처럼 날아 은북을 발사한 사노를 덮쳤다. 사노가 덮쳐 드는 새를 발견하고 재빨리 두 손을 번쩍 들어 은북 4개를 앞뒤로 발사했다. 다시 곽정이 재빨리 손을 쓰려고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다만 애석하게 되었다고 혀만 찰 뿐이었다.
그런데 그 새가 날갯죽지를 아래로 치며 은북 2개를 떨어뜨리고, 뒤로 날아오는 은북을 쫓아가며 늘어뜨렸던 죽지를 위로 쳐 반공에 날렸다. 곽정은 새의 몸놀림이 날렵하고 미묘한 것을 보고 무림의 고수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갈채를 보냈다.
곽정의 갈채 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사노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눈을 감싼 채 앞을 향해 몇 발짝 뛰어가다가 큰 나무에 부딪쳐 땅에 벌렁 넘어졌다. 고의 두 눈을 새가 벌써 쪼아 버렸던 것이다. 나머지 사노들이 놀라 분분히 암기를 꺼내 들고 사방에서 공격했다. 달빛이 교교한 가운데 섬광이 번쩍번쩍하니 온 하늘에 유성이 가로세로 선을 긋는 듯 했다. 새가 날갯죽지를 앞으로 밀며 후퇴하는데 그 속도가 전진하는 것과 다름없이 빨랐다. 사노들이 지르는 비명과 욕소리 속에 또 두 사람이 눈을 잃었다.
이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불빛이 새를 노리고 뻗어 올랐다. 곽정은 그것이 유황으로 만든 염전( 箭)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암기의 발사 속도가 은북보다 느리고 보니 새를 맞힐 수는 없었다. 새가 구구 하고 울며 앞으로 달려들어 발톱을 편 채 화살을 긁어 잡았다. 화염전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라 굉장히 뜨거웠다. 그러나 새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화살을 땅에 내려놓고 마른 나뭇가지와 가랑잎을 물어다 그 위에 불을 피웠다. 곽정은 구경할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정말 아깝다, 아까워!]
그는 이렇게 연방 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아깝다고 하시는 거예요?]
남금이 이상해서 물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광경을 용아가 못 보는 게 아까워서 그럽니다.]
[용아라뇨?]
[그래요, 용아 말입니다.]
남금이 재차 용아가 누구냐고 물으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여자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귀신이 나타났나?)
남금은 곽정의 팔을 꼭 잡은 채 상반신을 그의 품속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곽정 오빠, 분명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지요?]
곽정은 온 정신을 새 구경에만 쏟던 터라 한숨 소리는커녕 남금이 묻는 말도 듣지 못했다. 부드럽고 향내 나는 몸이 자기 가슴에 파고들자 잠시 당황해 할 뿐 계속 새가 화염 속을 뒹구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第 五十四 章. 의(義)의 편에 서다
그 새는 한참 동안이나 뒹굴다가 불이 점점 약해지자 다시 나뭇가지와 가랑잎을 물어다 불길 속에 집어넣었다. 불길이 강해지자 새는 날개를 펴서 불에 구웠다. 그런데 날개가 전혀 불에 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욱 광채가 났다. 새는 이렇게 불에 날개를 구우면서 긴 부리로 깃털을 쪼아 어루만졌다. 마치 목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새의 깃털이 불에 닿아도 타지 않는 것만도 이상한데 불에 구울수록 점점더 향기가 짙어지는 것이었다. 이 향기를 맡은 뱀들은 점점 더 기를 못 쓰다가 마침내 또 요동을 부리면서 서로 물어뜯기 시작하였다. 남금은 구경을 하다가 눈이 어지러워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래서 재빨리 눈을 감고 곽정을 부둥켜안았다.
이렇게 형세가 불리해지자 여러 사노들은 서로 손짓을 하며 일제히 숲 밖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새는 이들 횐 옷 입은 자들을 적이라고 생각했던지 유성처럼 날아 그들을 뒤쫓았다. 사노들은 무서움에 질려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나 새는 긴 부리로 그들의 손등을 찍었다. 사노들은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손을 허우적거리며 새를 잡으려고 덤벼들었지만, 일단 눈에서 손이 떨어지기만 하면 새는 영락없이 달려들어 눈을 쪼아댔다. 순식간에 사노들은 모두 눈먼 장님이 되고 말았다.
새는 대승을 거두고 다시 숲 속으로 돌아와 불에 날개를 구우려고 했지만 불길은 벌써 꺼져 있었다. 새가 두 날개로 부채질하여 다시 불을 피우려고 했지만 재만 날릴 뿐 불은 좀처럼 피어나지 않았다. 곽정이 가볍게 남금의 어깨를 밀쳤다.
[나무 기둥을 꼭 붙잡고 여기 가만히 있어요.]
남금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곽정은 벌써 나무에서 내려가 새 옆으로 다가갔다. 새는 곽정이 접근하는데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새야, 이리 오렴!]
곽정이 친근하게 손짓했지만 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곽정은 처음 나무에서 내려섰을 때 독사를 조심하며 걸었다. 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히려 뱀들은 길을 비켜 주었다. 아마 뱀떼도 그가 복사의 보혈을 마셨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모양이었다. 곽정은 대담하게 앞으로 나서서 왼손으로 새를 잡으려고 했다.
곽정의 손도 빨랐지만 새는 천생의 영물이라 더한층 빨랐다. 새가 몸을 기우뚱 피하면서 날아올라 곽정의 눈을 쪼려고 덮쳐 들었다.
[곽정 오빠, 조심하세요.]
남금이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곽정은 오른손에 든 쇠솥을 휘두르며 새를 덮어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새도 무림의 고수처럼 날쌔게 피했다.
[아주 대단한 솜씨로구나.]
곽정이 찬사를 보내며 몸을 날려 쇠솥을 옆에서부터 비스듬히 내둘렀다. 새는 날개를 위로 치켜들고 날아오르다 쇠솥을 보자 아래로 내려오며 곽정의 양 다리 사이를 빠져 나가 한바퀴 원을 그린 뒤 또다시 눈을 노리고 대들었다. 곽정은 날렵하게 노니는 새를 보자 왈칵 어린애 같은 마음이 솟았다.
[내 손에 병기를 들고 너를 잡는다면 호한이 아니다. 어디 맨손으로 한번 겨루어 보자꾸나.]
그는 쇠솥을 땅바닥에 집어던지고 오른손을 뻗어 밀었다. 혹시 새가 다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장력의 힘을 다 쓰지는 않았지만 재빨리 내뻗은 것이다. 그런데 곽정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힘이 먼저 뻗쳤던 모양이었다. 새가 견디지 못하고 그만 땅에 떨어졌다. 곽정은 반가워서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지만 새는 벌렁 한바퀴 땅바닥을 뒹군 뒤에 반 자쯤 떨어져 다시 한 번 날아올라 멀리 달아나려고 했다. 곽정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육룡회선(六龍廻旋)의 솜씨로 새를 때렸다.
이는 항룡십팔장 중 묘한 초수로서 일 장 가운데 두 줄기 힘이 뻗치는 것이다. 하나는 밖을 향해 뻗는 힘이요, 다른 한 줄기 힘은 밖에서 안으로 당겨 급회전의 소용돌이를 만드는 재주였다. 새가 이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공중에서 몇 바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곧바로 쑥 떨어져 내려왔다. 곽정이 달려들어 새를 틀어잡고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새를 잡았어요.]
남금은 반가워하며 품속에서 사약(蛇蘂) 두 알을 꺼내 한 알을 입에 물고 나무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리고 다른 한 알은 곽정에게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새는 곽정의 손아귀에 잡히는 바람에 정신을 잃어 위력을 상실한 모양이었다. 뱀떼가 특사라도 받은 것처럼 팔방으로 흩어져 숲 밖으로 달아났다.
곽정은 새가 꼼짝도 하지 않자 죽지나 않았나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두 손으로 새를 가볍게 안은 채 숲 사이 달빛이 비교적 밝은 곳으로 와서 살펴보았다. 남금이 가까이 다가오며 환약을 내밀었다.
[곽정 오빠, 이 약을 잡수시면 독사가 피해요.]
곽정은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 소녀의 갸륵한 호의가 고마워 받으려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 바람에 새는 푸드덕 날아가고 곽정은 발만 동동 굴렀다.
[아이고, 아깝게 되었구나.]
[새가 워낙 영리해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남금의 말이었다.
[그러기에 애석하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뭘 그걸 가지고 그렇게까지 애석하게 생각하세요?]
[내 이놈을 잡아 용아에게 주려고 했거든요.]
[용아라뇨, 아드님이신가요?]
남금은 그가 또 용아 말을 꺼내자 이렇게 물었다. 곽정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아니오. 여자인데요, 아가씨보다 한두 살 아래인걸요.]
[아주 예쁜 모양이지요?]
[그야 물론이지요. 예쁘고 총명하고 또 호기심도 대단하답니다.]
요 며칠 동안 곽정은 줄곧 황용만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남금이 황용에 대해 묻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그만 그녀 자랑을 침이 마르게 한 것이다. 황용이 똑똑하고 총명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닮아 어딘가 방종한 데가 있었다. 그렇지만 곽정의 눈에는 완전무결할 뿐 결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남금은 곽정과 함께 땅바닥에 비스듬히 옆으로 누운 나뭇가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가 황용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말만 꺼내자 듣기가 거북했다. 곽정도 혼자 떠들다 보니 계면쩍은 모양이었다.
[아니 내 어쩌자고 아가씨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꺼냈을까? 자, 우리 돌아가요. 할아버지께서 깨어 일어나 아가씨가 없는 것을 아시면 걱정하실 테니까요.]
[괜찮아요, 얘기가 아주 재미있는걸요.]
잠시 또 시간이 흘렀다.
[그래 그 황소저는 어디로 갔나요? 왜 함께 오시지 않으셨어요?]
남금의 이 두 마디가 곽정의 심금을 울리고야 말았다.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이제 자기는 화쟁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될 신세였다. 황용의 성격으로 보아 평생 자기와 만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화가 나서 벌써 자결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위로라도 해줘야겠는데 생각할수록 상심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남금은 재미있게 말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곽정을 보자 자기가 말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위로라도 해줘야겠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곽정이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고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곽정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음을 그치려고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때 등뒤에서 누군가가 끽 하고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곽정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용아!]
그러나 땅 위에는 나무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곽정 오빠, 그 황소저를 몹시 그리워하시는군요. 우리 그만 집으로 돌아가요.]
남금이 이렇게 권하자 곽정은 함께 숲속을 빠져 나왔다. 수십 장을 걸어 나오자 눈앞에 7,8명의 흰옷 입은 사람들이 열 지어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왼손에 긴 장대를 들고 한발 한발 더듬어 나가는 것이 바로 새에게 눈이 쪼여 장님이 된 사노들이었다.
곽정은 그들이 불쌍해 한숨을 쉬며 남금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 깨어 일어나니 진노인이 남금을 나무라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은인을 모시고 위험한 곳에 새를 잡으러 들어간 것이 잘못이라는 책망이었다. 곧 남금이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가 모시고 간 줄 아세요? 그분이 좋아서 갔던 거예요.]
[아니, 그분은 우리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야. 어린아이가 아니잖니? 그런데 뭐 그분이 좋아서 갔다구?]
[믿지 못하시겠거든 그만두세요.]
[그래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구나. 만약 그 은인이 독사나 새 때문에 다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분 재주가 아주 대단하던데 왜 다친다고 말씀하세요?]
[그래그래, 그만두자. 빨리 짐이나 챙기도록 해라.]
[할아버지, 무슨 짐을 챙기라고 하시는 거예요?]
[광동으로 돌아가는 게야. 어제 그 두목놈이 골탕을 먹었는데 그래 그냥 있을 것 같으냐? 은인이 먼저 길을 떠나시거든 우리도 빨리 이곳을 떠나자. 공연히 우물쭈물하다가 무슨 재앙을 입을지 모른다.]
[그럼 할아버지, 이 집과 살림은 어떻게 하지요?]
[아니 이 녀석아, 목숨이 중하지 그래 자질구레한 살림이 중하단 말이냐?.... 우리 팔자가 이렇게 기구하니 상심할 것도 없느니라.]
진노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곽정은 사람을 구해 주려면 끝까지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노인장,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관아에 가서 이 일을 수습해드리겠습니다.]
[은인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그 관아는 호랑이 굴이에요. 큰일납니다.]
[무서울 것 없습니다.]
노인이 무슨 말을 더 꺼내려고 하는데 곽정은 벌써 홍마에 올라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밥 한끼 먹을 정도의 시간이 걸려 성내로 들어섰다. 그가 관아가 어디 있느냐고 막 물으려고 하는데 앞에 불빛이 하늘에 가득하고 사람들이 어지럽게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 댔다.
[현 관아에 불이 났다. 정말 하느님도 무심치 않으시구나.]
(아니 일이 이렇게도 공교로운가? 어째 하필이면 이 시간에 불이 났을까?)
곽정은 이렇게 생각하며 불이 난 곳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곳은 열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관아가 벌써 반 이상 타들어 가는데도 이상한 일은 한 사람도 달려들어 불을 끄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멀찍이 선 채 불구경을 하면서 모두가 고소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곽정이 말에서 뛰어내리니 땅바닥에 도두 10여 명과 아노(衙奴)가 즐비하게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어떤 사람은 벌써 타 죽은 시체요, 살아 남은 자들도 수염이 그을려 말이 아니었다. 곽정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잡아 일으켜 살펴보니 혈도가 눌려 있었다. 곽정이 그의 허리를 문질러 혈도를 풀어 주며 물었다.
[현태야는 어디 계시오?]
그 아노는 불구덩이 속을 가리켰다.
[태야께서는 저 안에 계셨는데 아마 타 죽었을 겁니다.]
[어떻게 불이 일어난 게요? 그리고 누구에게 혈도를 눌렸소?]
아노는 울상을 지었다.
[소인도 잘 모르겠어요. 소인이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태야가 누구와 싸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서 불이 일어나 도망쳐 나왔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현태야가 다른 사람과 싸웠다구? 그럼 그가 무공을 할 줄 안단 말이오?]
[태야의 무공은 아주 대단하십니다. 그분은 두 손이 주사( 砂)처럼 붉습니다. 누구든지 한번 맞기만 하면 저 세상으로 간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니 도대체 믿을 수 없는걸요.]
(일개 지현(知縣)이 독사장(毒砂掌)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로구나.)
곽정은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백성들에게 독사를 바치라고 강요한다더니 그럼 그게 바로 독사장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였나요?]
[소인이 그것까지 어찌 알겠습니까?]
(아마 강호에 있는 원수가 현관을 찾아왔던 모양이로구나. 내 수고를 덜어 주었으니 차라리 잘됐다.)
그는 더 이상 아노를 거들떠보지 않고 빨리 돌아가 진노인과 남금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그런데 몸을 돌리고 보니 홍마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휘파람을 불며 기다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타나질 않았다.
이 홍마는 원래 길이 잘 들어 있어서 주인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자리를 뜨지 않는 말이었다. 게다가 놀랄 정도로 영리해 제아무리 재주 좋은 마적이라도 말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말이 없어졌으니 곽정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이 난 곳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말발굽 자국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안을 한바퀴 돌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돌아가 수리를 데리고 와 찾아보면 단서를 잡을 수 있겠지.)
그는 즉시 진노인 집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진노인과 남금은 현아에 불이 일어나 현관과 도두가 모두 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몹시 반가워했다. 곽정은 휘파람을 불어 수리를 불러 보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답답해서 밥이고 뭐고 생각이 없었다. 그날 밤은 어쩔 수 없이 진노인 댁에서 묵고 다음날 다시 홍마와 수리를 찾기로 했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이라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무더웠다. 진노인이 대나무 침상과 의자 두 개를 마당에 내놓고 셋이 청차를 달여 마시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진노인은 여러 가지 독사에 대한 얘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밤이 이슥해 오야(午夜)가 되자 날씨가 조금 선선해졌다. 진노인은 몇 차례나 들어가 자자고 했지만 남금이 응하지 않았다.
[여긴 좀처럼 손님이 오시는 경우가 드물답니다. 얘가 늘 이 할아비하고만 지내니 답답도 하겠지요.]
진노인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남금도 입을 열었다.
[내일 곽정 오빠가 떠나시면 또 할아버지와 단 두 식구만 남겠지요.]
그녀의 쓸쓸한 말투에 곽정은 잠자코 있었다.
[곽정 오빠, 먼저 들어가 주무세요. 저는 별 구경이나 하다가 자겠어요.]
[아니 이 녀석아, 별이 뭐 재미있다고 그러느냐?]
[그저 쳐다볼 뿐이에요.]
진노인이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검은 구름을 발견했다.
[날씨가 변하면 별도 보이지 않는 게다.]
바로 이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곽정은 벌떡 일어났다.
[내 말이 오는구나.]
달빛 아래로 말이 높은 고개를 달려 내려오고 있었고 말등에 탄 사람의 옷깃이 나부꼈다.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황용이 분명했다.
[용아! 나 여기 있어.]
남금은 곽정이 용아를 부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황용은 말에 탄 채 숲 속을 뚫고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 수리 한 쌍도 말등에 앉아 있었다.
(내 정말 깜박 잊고 있었군. 용아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홍마와 수리를 데리고 갈 수 있단 말인가?)
황용이 말에서 뛰어내리자 곽정이 달려가 그녀를 반겼다.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내 연공을 하다가 운기가 혈도에 몰려 두 손을 쓸 수가 없어요.]
황용이 말하자 곽정이 재촉했다.
[그럼 빨리 서둘러야지.]
두 사람은 즉시 대나무 침상에 좌정했다. 곽정은 두 손으로 황용의 등을 누르고 호흡이 순조로워지도록 도왔다. 이때 가까이에서 우레 소리가 나며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덮었다.
반시간쯤이나 지났을까? 황용의 단전의 기가 서서히 가슴을 향해 올라오고 동시에 좌우로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남금은 옆에서 유심히 황용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단정하게 앉은 채 두 눈을 감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눈처럼 흰 피부에 홍옥 같은 연붉은 빛이 투명하게 비치는 고운 얼굴이었다. 새벽 이슬과도 같고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처럼 예뻤다. 그녀의 목에 걸린 구슬 목걸이가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옥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황홀한 자태였다.
(선녀같이 예쁘고 보니 곽정 오빠가 그토록 반할 만도 하구나. 그런데 도대체 이들은 무얼 하는 사람들일까?)
남금이 궁금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검은 구름이 달을 가린 것이었다.
[곽정 오빠, 이 아가씨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세요. 곧 비가 오겠군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과 목에 시원하게 비가 몇 방울 떨어졌다. 여름날의 소나기는 내리기도 잘하고 멎기도 잘한다. 남금이 어이쿠 소리를 지르는데 벌써 장대 같은 빗줄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곽정과 황용은 때마침 역근단골편의 중요한 고비를 연공하고 있는 판인데 소나기라고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남금은 두 사람이 꼼짝도 하지 않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귀신에게 흘린 것이 아닌가 해서 곽정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별로 힘주어 민 것도 아닌데 그녀만 뒤로 주춤 밀렸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고 다시 한 번 밀었다.
[곽정 오빠, 왜 그러세요?]
상승의 무공을 지닌 사람이 외부의 힘을 받으면 반작용을 일으켜 반격을 한다는 사실을 그녀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남금은 곽정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벌렁 넘어져 물구덩이에 빠졌다.
곽정과 황용이 연공을 시작할 때 진노인은 보다가 답답해서 먼저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러다 우레 소리와 함께 큰비가 내리자 <남금아!> 하고 몇 번 손녀를 불렀다. 그래도 대답이 들리지 않자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니 손녀가 물구덩이 속에서 기어 일어나는데 꼴이 말이 아니라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 은인이 귀신에 흘렸나 봐요. 빨리 그를 구해 주세요.]
진노인은 곽정에 대해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던 차라 손녀의 말을 듣고 재빨리 그를 잡아당기며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잡아당겨도 요지부동이라 이번에는 있는 힘을 다해 당겼다. 그러나 자기만 물구덩이 속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노인은 어기적거리며 기어 일어나 비를 맞으며 멍청하게 서 있었다. 남금이 방으로 달려가 우산을 내다가 곽정과 황용에게 씌워 주었다.
[할아버지, 황지(黃紙) 좀 내다가 태워 콧속에 연기를 들여보내 보셔요.]
진노인은 절뚝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다 그만 등잔을 뒤집어 엎었다. 남금은 황용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은근한 질투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우산 한 자루 가지고 셋이서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금의 몸은 점점 곽정 쪽으로 기울어졌다. 황용의 머리 위에는 대야로 물을 퍼붓듯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진노인이 가까스로 더듬어 다시 등잔불을 켜고 황지에 불을 붙였다.
노인이 황지를 옷소매로 가려 갖고 가 곽정의 코앞에 댔다. 짙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며 곽정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곽정은 순조롭게 호흡하고 있다가 매운 연기 때문에 그만 역전하여 단전으로 막혀 들었다. 깜짝 놀란 곽정이 급히 전력으로 호흡을 버티자 그제야 뱃속의 기가 순조롭게 되돌아왔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호흡을 멈추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연기 한 모금만 마셔도 재채기는 나오게 마련이었다. 진노인과 손녀는 호의로 그러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곽정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진노인은 타는 황지를 코에 대봐도 아무 소용이 없자, 이번에는 손톱으로 곽정의 윗입술에 있는 인중을 힘껏 때렸다. 인중은 사람의 급소요, 요혈로서 여름에 더위를 먹고 쓰러졌을 때 이곳에 자극만 주면 금시 깨어난다. 이곳이 인신의 요혈이기 때문에 곽정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러나 연공의 중요한 고비라 함부로 입을 벌리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손으로 밀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때 번갯불이 번쩍이며 귀가 찢어져 나갈 듯 벼락치는 소리가 울렸다. 숲 속의 큰 나무 한 그루가 벼락에 맞아 불길에 휩싸였다. 남금은 놀라 가슴을 할딱거리면서도 여전히 우산을 받쳐 주고 있었다. 괴상하게 생긴 번갯불이 캄캄한 허공을 몇 번이나 찢고 지나갔다. 하얀 번갯불이 태연자약한 곽정의 얼굴을 비췄다가 미소를 머금은 황용의 얼굴도 비추고 진노인의 무뚝뚝한 표정 위에도 비췄다가 하며 어지럽게 난무했다. 갑자기 여러 사람의 눈앞이 또 한 번 환하게 밝아 왔다. 우레 소리를 듣기도 전에 진노인과 남금은 벌써 땅바닥에 엎드렸다.
이번 벼락은 공교롭게도 곽정 옆에 떨어졌다. 진노인과 손녀는 그 진동에 정신을 잃었다. 우레 소리가 난 뒤 곽정의 체내의 호흡이 갑자기 올라왔다가 전신을 돌았다. 이제 곽정은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황용은 그래도 좀더 시간을 끌어야 했다. 사방에 번갯불이 번쩍이고, 황용 옆으로 벼락이 떨어졌다. 곽정은 황용 위에 엎드려 그녀를 보호해 주었다.
밥 한끼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우레 소리가 점점 멀리 사라지고 쏟아지던 비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달이 구름 틈을 비집고 얼굴을 내밀었다. 황용은 팔맥(八脈)이 뚫리고 정신이 맑아져 서서히 허리를 펴면서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곽정 오빠, 정말 이토록 저를 사랑하세요?]
곽정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너무나 즐거워 말을 잊고 있었다. 황용이 벼락을 맞아 불타고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저걸 보세요!]
곽정이 바라보니 어제 그 새가 화염 가운데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우리 슬그머니 쫓아가 잡아요.]
황용이 속삭이자 곽정은 머리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진노인도 정신을 차리고 손녀를 잡아 일으켜 대나무 의자에 앉혔다. 황용이 왼손을 휘두르며 새를 향해 달려갔다.
그 새는 어제도 골탕을 먹어서 사람이 접근해 오자 구구 하고 울며 날개를 펴고 달아났다. 황용은 새를 쫓다가 놓치자 휘파람을 불며 수리를 찾아 말했다.
[빨리 저 새를 잡아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구.]
북방의 부자들은 모두 집 안에 매나 수리를 길렀다. 사냥할 때 부리기 위해서였다. 매나 수리는 사나울 뿐만 아니라 일단 길을 들인 후에는 사람을 잘 따르고 눈치가 빨랐다. 이 횐 수리 한 쌍은 더욱 영리해서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좌우로 퍼져 그 새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 새는 몸이 작아서 전체 크기라고 해봐야 겨우 횐 수리의 머리만 했다. 그러나 하늘을 날 때는 신속하고 유성처럼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리씩 날 수 있었다. 수리 두 마리가 자기 뒤를 쫓는 것을 확인한 새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역습을 했다. 수리 두 마리와 새 한 마리가 이제 공중전을 전개한 것이다. 강철처럼 단단한 수리의 부리나 쇠 같은 발톱은 호랑이나 표범같은 맹수라 할지라도 한 번 할퀴기만 하면 여지없이 찢어지는데, 이 조그만 새는 어찌나 날렵하고 기민한지 오히려 그놈의 긴 부리에 쪼여 수리의 깃털만 공중에 나부꼈다. 만약 2대 1의 대결이 아니라면 수리 쪽에서 참패를 당했을 것이다.
한참이나 어우러져 싸우는 동안 수컷 수리가 목을 쪼이고 말았다. 화가 난 수컷이 왼쪽 날개를 펴고 새를 덮치며 대들었다. 새가 재빨리 피하기는 했지만 워낙 수리의 날개가 길다 보니 그 끝에 걸리고 말았다. 새가 견디지 못하고 맥없이 떨어져 내려왔다. 암컷 수리가 급전직하로 날아오르며 두 발톱을 낚싯바늘처럼 구부려 할퀴었다. 새가 옆으로 빠져 나오며 전의를 잃고 달아나기 시작하자 두 마리의 수리가 뒤를 쫓아 산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곽정이 이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황용에게 말을 건넸다.
[용아 무공이 크게 진보했나 봐. 우레가 무섭게 치는데도 까딱하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야]
[오빠도 마찬가지던데 뭘요.]
곽정은 조금 전 진노인과 손녀의 호의 섞인 방해를 생각하자 진땀이 흘렀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만약 일이 잘못되었더라면 그들은 또 7일 7야의 연공을 해야 했다. 곽정은 곧 황용을 진노인과 남금에게 소개했다.
[용아, 현아문에 불을 지른 게 바로 용아가 한 짓이지!]
황용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나 아니면 누가 그랬겠어요?]
진노인과 남금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아니 이 조그만 소녀가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황용은 남금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곽정 오빠, 이 언니 앞에서 내 자랑을 그렇게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셨어요?]
[아, 어젯밤 숲 속에 있었던 게 바로....]
[만약 새를 잡아 내게 주겠다는 말씀만 하시지 않았더라면 내 두 팔이 중풍에 걸려 병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오빠를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뒤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울었어요? 창피하지도 않으셨어요?]
이 말에 곽정이 고개를 떨구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용아에게 너무 잘못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랬지.]
황용이 그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며 소곤거렸다.
[처음엔 다시는 오빠를 만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좋아요, 장래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함께 있을 수 있을 때까지 있기로 해요.]
남금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공중에서 수리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셋이 일제히 고개를 드니 수리 두 마리가 그 새를 뒤쫓아 나타났다. 세 마리의 새가 쫓고 쫓기며 앞뒤로 날았다. 그 새가 어찌나 빠른지 수리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황용이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그녀는 휘파람으로 암컷을 불러 쉬게 했다. 수컷 혼자 뒤를 쫓다 지치면 그제야 암컷을 날렸다. 이렇게 되자 그 새만 혼자 불리해졌다. 수리는 차륜전법(車輪戰法)을 쓰며 상대방이 기력을 다 소모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예닐곱 번 번갈아 날리자 새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어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마지막에 수컷이 대들어 날개로 치자 새는 두 날개를 맞고 서서히 떨어져 내려왔다. 암컷이 달려가 날쌔게 잡아채서 황용의 손에 쥐여 주었다.
황용은 너무나 기뻐 그 새를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새는 기진맥진하여 두 눈만 말똥거리고 있었다.
[말 잘 들으면 죽이지 않을게.]
황용이 이렇게 말하며 깃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진노인도 새가 잡히자 반가워했다.
[아가씨가 이 새를 잡으셨으니 이제 우리도 끼니 걱정은 안 하게 되었군요. 내 새장을 만들어 넣어 드리리다.]
남금은 새가 뱀의 쓸개를 먹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뱀 쓸개로 담근 술 한 병을 내다가 먹였다. 새는 반 병쯤 마신 뒤에 기운을 되찾았는지 두 눈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내 이놈을 잘 길들여 말을 듣게 만들어야지. 그래서 나쁜 사람들 눈이나 쪼으라고 시켜야지.]
황용이 새를 보며 말했다. 네 사람은 밤새 설쳤기 때문에 꽤 피곤했다. 남금은 자기 침대를 황용에게 주어 자라고 청했지만 그녀는 진노인이 대나무로 새장을 다 만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새를 새장에 넣은 뒤에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 일어나니 동창이 환하게 밝았는데 새는 벌써 새장을 부수고 나와 탁자 위에 앉은 채 황용을 보고도 달아나지 않았다. 황용이 놀랍고도 반가워 손짓을 하니 새가 그녀 손바닥 위에 날아와 앉았다.
[이제 내 말을 듣기 시작했구나!]
새장을 만든 대나무 살이 모두 망가져 있는 것으로 보아 새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황용은 혼자 즐거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옆방에서 자던 곽정이 큰일났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 오빠, 왜 그러세요?]
옆방으로 건너가 보니 그는 울상을 짓고서 손에는 황약사가 준 그림을 들고 있었다. 지난밤 비를 맞으며 연공을 할 때 흠뻑 젖어 못쓰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아깝게 되었군요.]
황용이 그림을 받아 보니 찢어진데다가 먹이 퍼져 엉망이었다. 표구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 버리려고 하는데 한세충이 쓴 시 옆에 희미한 글씨가 몇 줄 보였다. 가까이 눈을 대고 살펴보니 원래 이 글씨는 배접을 한 그림 뒤쪽에 씌어 있는 것으로 물에 젖지 않았더라면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비에 젖어 찢어진 곳이 있어 그 흔적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모두 네 줄로 씌어진 글씨요, 매행이 네 자로 되어 있었다. 황용이 자세히 들여다보며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목유서(穆遺書).... 철장(鐵掌).... 중(中)...봉(峯)... 제이(第二)....절(節).]
나머지 글자는 아무리 들여다봐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 이것이 무목의 유서를 말하는 것이로구나.]
곽정의 외침에 황용도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어요. 완안열이 무목의 유서가 궁중의 석함 안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석함을 인수했지만 유서는 없었는데 말이에요. 이 네 줄의 글자는 유서의 소재와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철장.... 중.... 봉....]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잠겼다.
[곽정 오빠, 오빠의 여섯 사부님들께서 무슨 철장방(鐵掌幇)이란 말씀을 꺼내신 적이 없었나요?]
[철장방이라니? 없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 사기꾼 구영감을 무슨 철장수상표라고 부른단 말은 들었지만.]
[그따위 영감이 어떻게 이렇게 중대한 일과 관계가 있겠어요? 어제 아침 내가 현 관아에 불을 지르러 갔을 때 그 교가 성을 가진 현관이란 자가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며 철장방이 어저구저쩌구 하며 빨리 독사를 구해 대향주(大香主)에게 보내야 한다고 쑥덕거리더군요. 뒤에 나와 싸울 때 보니 무공도 약하지는 않았지만 독사장 솜씨가 꽤 대단하던데요.]
[강호의 방회(幇會) 사람이 현관을 지낸다는 것도 어딘가 이상하단 말이야.]
둘이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이 네 줄의 글 뜻을 풀 길이 없었다. 황용이 찢어지고 남은 그림을 자기 옷보따리 속에 챙겨 넣었다.
[한번 천천히 궁리해 볼게요.]
그들은 즉시 진노인과 남금에게 하직을 고하고 홍마에 탄 채 그곳을 떠났다. 진노인과 남금이 전송을 하려고 뒤따라 나왔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하루 걸려 그들은 약주의 경내에 당도했다. 황용이 손가락을 짚어보니 이날이 7월 14일, 악주의 모임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아무 일도 없으니 우리 연도에서 구경이나 하며 가요.]
곽정도 좋다고 동의했다. 둘이 말에서 내려 손을 잡고 걸었다. 눈앞에는 온통 논뿐이었다. 논의 벼들이 쑥쑥 자라고 있는 것이 금년도 풍년임에 틀림없었다.
[금년에는 백성들이 굶주리지는 않겠군요.]
황용이 이렇게 말을 꺼내며 버드나무 위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가리켰다.
[저걸 보세요, 날마다 우는데 지치지도 않나 봐요.]
날씨가 어찌나 더운지 뜨거운 솥 안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논에서 일하는 농부들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버드나무 옆에서는 수차(水車)에 부인 하나와 7,8세 된 남자 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차바퀴가 무거워 좀처럼 잘 밟히지 않는지 둘 다 웃옷이 땀에 흠뻑 젖었고 남자 아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힘껏 수차를 밟고 있었다.
[엄마, 저 누이가 우리를 보고 있어요.]
자기가 일하고 있는 것이 꽤 대견하다는 표정이었다, 부인이 미소를 머금고 곽정과 황용을 향해 알은체했다. 황용은 품속에 손을 넣어 잔돈을 잦았다. 아이에게 사탕 값이라도 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멀리서 아득히 천둥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
[비가 올 모양인데 수차를 밟지 않아도 되겠군요.]
황용이 반가워하는 말에 부인이 귀를 기울이다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수차에서 뛰어내리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 두꺼비 왕(蛤 王)이 또 청개구리(靑蛙)를 잡아먹으러 오는 모양이지요?]
부인이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대답했다. 황용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 보려는데 갑자기 징소리가 꽝꽝 울렸다. 밀짚 모자를 쓰고 웃통을 벗은 한 농부가 징을 치며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사방팔방에서 징소리가 울리며 남녀 농부들이 수차를 버리고 서쪽으로 뛰어갔다. 황용이 고개를 돌리니 그 부인과 아이도 뛰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구경가자구.]
곽정의 말에 둘이 다른 사람들을 뒤따라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거기도 논만 있는 평야였다. 수백 명의 농부들이 모두 언덕 위로 뛰어가는데 긴장된 표정으로 백여 개가 넘는 징을 치니 귀가 멍멍해 말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황용이 언덕 위에 그럴듯하게 자란 은행나무 한 그루를 보고 곽정의 손을 잡은 채 뛰어올랐다. 거기서 농민들의 시선을 따라 앞을 보아도 파란 벼만 보일 뿐 다른 이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꿱꿱거리는 소리였다. 징소리가 요란했지만 그들의 예민한 귀를 막지는 못했다. 처음에 황용이 천둥소리로 들은 것이 바로 이 소리였다. 잠시 후 노란색의 물체가 펄떡펄떡 뛰는 것이 보였다.
[아, 두꺼비가 굉장히 많군요.]
황용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곽정이 유심히 살펴보니 과연 수천 수만 마리의 두꺼비 떼였다. 농민들은 두꺼비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치던 징을 멈추고 사뭇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두꺼비 떼 뒤에 수백 마리가 넘는 큰 두꺼비가 보다 큰 두꺼비 한 마리를 호위하고 나타났다. 보통 두꺼비보다 6,7배는 더 커 보였다. 이 큰 두꺼비가 꿱 하고 울자 다른 두꺼비들이 모두 따라 울었다. 또 큰 두꺼비가 꿱 하고 울자 다른 두꺼비들이 조용해졌다.
[두꺼비 우는 소리를 들으니 누구 생각나는 사람이 있군요.]
황용의 말에 곽정이 구양봉이냐고 물으니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웃었다.
이때 동쪽에 있는 큰 돌 위에서 청개구리 한 마리가 팔딱팔딱 뛰어나왔다. 농민들은 청개구리를 보자 징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곽정과 황용은 구경에 정신을 팔고 있는데 발소리도 요란하게 사방에서 농민들 수백 명이 또 모여들었다. 그런데 농민들 가운데 복장이 이상한 사람들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황용이 곽정의 옷을 잡아당기며 그쪽을 보라고 했다. 곽정이 보니 4,50명이 검은 옷을 입고 각자 손에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옷이 불룩 튀어나온 것이 안에 병기를 감춰 넣은 모양이었다. 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보아 평범한 농민들이 아닌 것 같았다. 언덕에 이르자 그들은 즉시 농민들과 수십 장 떨어진 장소에 함께 모였다.
청개구리가 뛰어나와 앞으로 나섰다. 그 뒤를 이어 두꺼비 가운데서도 한 마리가 나타나 서로 바라보며 꿱꿱, 개골개골 울어댔다. 마치 말다툼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거칠게 울어대는 두꺼비 울음 소리는 마치 소 울음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청개구리도 지지 않으려는 듯 개골댔다. 서로 우는 소리가 급박해지다가 두꺼비의 소리가 막히는 듯하더니 배가 점점 불러왔다. 잠시 후 뻥 소리와 함께 두꺼비는 배가 터져 그자리에서 죽었다. 농민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표정은 더욱 험악하게 변했다. 아마 농민들은 청개구리 편을 들고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은 두꺼비 편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청개구리가 승리를 거두고 뒤로 물러나려고 하는데 두꺼비 떼 가운데서 큰 두꺼비 6마리가 좌우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청개구리가 팔딱 뛰어 달아나려고 하자 6마리의 두꺼비가 일제히 그 뒤를 쫓았다. 그때 두꺼비 떼 가운데 왕두꺼비가 한 번 우니 6마리가 쫓던 것을 멈추고 되돌아섰다. 그런데 이때 밭두둑에서 청개구리 2,30마리가 나타나 6마리의 두꺼비 앞길을 막고 서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꺼비 6마리가 다 물려 죽었는데도 뒤에 있는 수천 수만 마리의 두꺼비는 어찌 된 일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황용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빼고 보니 밭두둑 옆에 있는 작은 개울물이 파랬다. 수천 수만 마리의 청개구리가 거기 열을 선 채 대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꺼비 떼가 대들지 않는 것은 상대방의 진세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거망동을 삼가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두꺼비 왕이 꿱꿱 두 번 울자 두꺼비 백여 마리가 청개구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개울물 속의 청개구리도 올라와 대결을 벌였다. 두꺼비 떼가 수합을 싸우다 남쪽으로 퇴각하니 청개구리가 상대방의 간계를 간파했는지 10여 자 정도를 쫓아가다가 멈추었다. 두꺼비들이 방향을 바꾸어 반격을 개시했다. 남쪽의 큰 돌 뒤에 복병이 있었던 것이다. 청개구리들이 벌써 그걸 알고 뛰어 달아났다.
청개구리들이 중과부적으로 고전하자 개울 속에서 원병이 합세하고 나섰다. 청개구리의 개골개골 소리와 두꺼비의 꿱꿱 소리가 어우러지며 한바탕 혼전이 벌어졌다. 삽시간에 밭에는 쌍방의 죽고 다친 청개구리와 두꺼비들이 속출했다. 부상을 입은 개구리가 한쪽으로 물러서면 다른 개구리들이 본대로 끌어가곤 했다. 이때의 싸움은 부분적인 싸움일 뿐 쌍방의 주력 부대는 아직도 관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쌍방이 서로 밀고 밀리며 승부가 나지 않았다.
또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왕두꺼비가 참을 수 없었던지 꿱꿱하고 두 번 우니 두꺼비 떼가 일시에 몰려들었다. 청개구리의 전초(前哨)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적진에 빠졌다. 남은 청개구리들이 전세가 불리함을 보고 원형의 진을 쳤다. 꼬리는 안쪽에, 입은 밖에 두고 물고 뜯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뒤가 든든하니 수가 많은 두꺼비 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두꺼비 떼는 몇 겹으로 밖에서 포위만 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쪽의 청개구리 우두머리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그냥 보고만 있었다. 두꺼비 수십 마리가 펄쩍펄쩍 뛰면서 청개구리의 원 중심으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그쪽에서 한 마리가 뛰어오르면 이쪽에서도 한 마리가 뛰어올라 진로를 막는 것이었다. 두꺼비가 종내 청개구리의 원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어이쿠, 큰일났구나.]
황용이 외쳐서 보니 청개구리 원진의 동서남북 네 귀퉁이에 두꺼비들이 서로 올라타 세 자 정도 높이로 층을 이루었고 10여 마리가 그 위에서 원의 중앙을 향해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두꺼비들이 높은 고지를 차지하고 진격하니 청개구리들로서도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큰 두꺼비들이 일단 원의 중심으로 들어오자 청개구리 떼는 앞뒤로 공격을 받아 속속 죽어 자빠졌다. 황용이 발을 동동 구르며 한숨을 쉬자 곽정이 저걸 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황용이 보니 동북 방향에서 파란 선 하나가 신속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원래 청개구리 가운데서 일대가 두꺼비의 후군을 향해 우회 공격을 벌이는 것이었다. 왕두꺼비도 이를 보고 대오(隊伍)를 파견하여 청개구리의 진로를 막았다. 우회 진격하던 청개구리의 반이 잘려 전투를 벌이고 나머지 반이 분분히 두꺼비의 후방으로 몰려들었다. 전대가 뒤로 공격을 받자 진세가 어지러워졌지만 두꺼비 떼는 용감하게 대항했다. 왕두꺼비는 접전이 불리함을 보자 꿱꿱 큰소리로 울면서 친병대를 인솔하여 쳐들어갔다. 그쪽의 두꺼비들은 유난히 크고 사나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마리의 청개구리들이 죽어 나갔다. 청개구리 떼가 견디지 못하고 뒤로 후퇴했다.
두꺼비 떼가 그 여세를 몰아 바짝 추격했다. 왕두꺼비가 펄쩍 반여장이나 뛰어 적진으로 들어가자 청개구리가 에워싸고, 큰 두꺼비 수백마리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순간 청개구리의 진세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두꺼비와 청개구리의 싸움터가 이동함에 따라 사람들도 이리 몰리고 저리 쏠렸다. 곽정과 황용도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농민들 틈에 끼였다. 농민들은 수심에 싸인 채 한숨만 쉬고 있었다. 황용이 답답하다 못해 옆에 있는 백발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 청개구리와 두꺼비 떼가 왜 저렇게 싸우고 있나요?]
늙은 농부는 그들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길 가는 나그네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저 두꺼비는 사람이 기르는 것인데 청개구리를 잡기 위해서라오.]
황용이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농사짓는 사람들이야 이 청개구리 힘에 의지해 벼를 보호하지요. 청개구리가 지면 근방 수십 리 안에 있는 벼는 해충 때문에 엉망이 된답니다. 그렇게 되면 금년 수확도 다 틀렸지요.]
[그럼 우리가 저 두꺼비 데를 물리치면 되지 않아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황용이 이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강침 한줌을 꺼내 들고 앞으로 나서자 노인이 황급하게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가씨, 큰일납니다. 이 두꺼비들을 누가 기르는 것인지 듣지 못했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을 가리켰다.
[바로 저 고약한 사람들이라오. 그들을 건드리기만 하면 큰 화를 입어요. 그러니 꽃 같은 처녀는 이 늙은이 말을 새겨듣고 구경 그만하시고 빨리 이곳을 떠나기나 하시오.]
황용이 미소를 머금고 아무 말이 없자 이번에는 곽정이 나섰다.
[우리 쪽 사람이 많은데 뭘 두려워하십니까?]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 때문에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대판 싸움이 벌어졌는데 사람만 무수히 다치고 말았다오. 뒤에 관가에 고발했지만 현관의 판결은 두꺼비와 청개구리 싸움에 왜 사람이 관여하느냐, 앞으로 이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벌을 내리겠다고 했답니다.]
[아니, 그따위 현관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분명 저 고약한 무리들을 은근히 두둔하는 처사예요!]
곽정이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하자 노인이 대답했다.
[글쎄 누가 아니랍니까? 현관과 그들은 본래부터 한패랍니다. 그래 청개구리를 잡아다가 뱀에게 먹일 줄만 알았지 백성이야 굶든 말든 오불관언이랍니다.]
황용과 곽정은 개구리를 잡아다 뱀에게 먹인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다시 물으려는데 이때 농민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전세가 갑자기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두꺼비 떼 주력이 연못가 한 귀퉁이로 몰려 고전하고 있었고, 다른 청개구리 한 떼가 연못으로 뛰어들며 두꺼비 떼의 후방과 측면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청개구리는 물 속에서 자유자재로 헤엄쳐 다니며 공격했지만 두꺼비 떼는 물이 무서워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꼼짝못하다가 서로 밀고 밀리는 바람에 연못 속에 분분히 빠지고 말았다. 수중전이라면 아무래도 두꺼비 떼가 불리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하얀 배를 뒤집으며 죽어 나갔다.
이때 두꺼비 떼는 괴멸 직전에 놓여 있었다. 왕두꺼비가 두꺼비 한 떼를 몰고 좌충우돌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농민들이 계속 환호성을 질렀다.
[금년은 틀림없는 대풍이로다.]
곽정과 황용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동정을 살펴보니 모두들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휘파람을 불자 10여 명이 손에 들고 있던 대나무 바구니의 뚜껑을 열었다.
第 五十五 章. 개방의 혼란
그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대나무 광주리를 열자 안에서 수백 마리의 크고 작은 독사들이 기어 나와 청개구리 틈에 뛰어들어 삽시간에 수많은 개구리를 삼켜 버렸다. 개구리는 독사의 밥이다. 청개구리들은 독사를 보자 투지를 잃었다. 어떤 놈은 재빨리 연못 속으로 뛰어 달아나고 어떤 놈은 놀라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농민들은 그들이 비열한 수단으로 나오자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검은 옷 입은 사람들 가운데 키가 크고 우람하게 생긴 사람 하나가 걸어 나와 농민들 앞에 섰다.
[현태야의 분부는 벌레들 싸움은 원래 그들의 본능이니 사람이 관여할 바 아니라고 하셨는데 왜들 떠들고 야단이오?]
[두꺼비와 독사는 당신들이 기르고 있는 것 아니오?]
[개구리가 어떻게 뱀과 싸운단 말이오?]
[이렇게 해마다 흉년만 들면 우리는 굶어 죽을 테니 차라리 이자들과 사생결단을 벌입시다!]
농민들이 이렇게 항의하고 나서자 그자는 허리에 찬 시퍼런 칼을 뽑아 들었다. 이를 본 무리들이 모두 병기를 꺼내 들고 일렬로 선 채 농민들을 향해 다가섰다.
[그래 뭘 어떻게 하겠단 말이오? 현태야의 말씀을 거역이라도 하겠다는 게요?]
방금 나섰던 그자가 엄포를 놓자, 농민들은 앞다투어 대들었고, 성급한 사람들은 흙덩이와 돌을 들어 그들을 향해 던졌다. 그자가 손짓을 하자 검은 옷 입은 사람들 틈에서 관가 소속인 듯한 한두 사람이 강도(鋼刀)와 철련(鐵鍊)을 비껴 들고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현태야의 분부를 누가 감히 거역하겠단 말이냐? 거역하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리겠다.]
농민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아문의 마군 도두와 보군 도두다.]
농민들이 낮은 소리로 그들의 정체를 서로 알려 주었다.
관아에서 상대편을 돕고 나서니 농민들은 화가 치밀었지만 뭐라고 감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독사가 개구리를 삼키고 있는 모습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용아, 우리 나설까?]
곽정의 말에 황용이 머리를 흔들었다.
[좀더 기다려 보구요.]
이때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며 어린아이 7,8명이 나서서 돌로 독사를 때리는 모습이 보였다. 순식간에 독사 몇 마리가 돌에 맞아 죽었다. 검은 옷 입은 자가 달려들어 한 어린아이를 때리자 다른 아이들은 일제히 달아나 버렸다. 그자는 땅에 넘어진 아이를 잡아 일으키며 징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네놈이 우리가 애써 길러 놓은 뱀을 죽였것다. 어디 맛 좀 볼테냐?]
한 부인이 농민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
[나으리,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애는 제 아들입니다. 제발 놓아주세요.]
그 모자는 방금 곽정과 황용이 만났던 이들이었다.
그자는 다른 한 손으로 부인의 뒷덜미를 잡아채 농민들을 향해 집어 던졌다. 부인이 두 농민에게 부딪혀 쓰러지자 농민들도 벌렁 넘어졌다. 그자가 손을 뻗어 두어 번 휘두르니 수하 사람들이 각기 병기를 들고나섰다. 농민들은 그들보다 수는 많았지만 적수공권이요, 게다가 대부분이 노약자나 부녀자들이었다, 그들이 험악하게 나오자 농민들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 꼴을 본 검은 옷 입은 무리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칼을 허공에 휘두르니 농민들은 아우성 치며 더욱 멀리 달아났다. 검은 옷 입은 무리들은 시시덕거리며 고개를 돌려 수령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수령이라는 자는 손을 뻗어 아이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옷깃을 잡아 북 찢었다. 한 번 치고 한 번 찢고 하기를 10여 차례나 계속하자 아이의 두 볼이 퉁퉁 부어 올랐고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아이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어 구해 보려고 했지만 검은 옷 입은 두 사람이 팔을 잡아 비트는 바람에 꼼짝하지 못했다.
그자가 휘파람을 한 번 불자 독사 수백 마리가 머리를 든 채 아이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대들었다. 아이가 놀라 파랗게 질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뜨거운 날씨인데도 아이는 바들바들 떨며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그러나 그자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기만 했다.
[야 이놈아, 재주 있거든 어디 달아나 보려무나.]
이렇게 말하며 밀치자 아이는 또다시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이가 벌떡 기어 일어나며 어머니를 향해 내달렸지만 몇 명의 검은 옷입은 자들이 긴 칼을 들어 치는 시늉을 하자 방향을 바꾸어 들판으로 뛰어 달아났다.
우두머리 격인 그자는 아이가 좀 멀리 달아나자 다시 한 번 휘파람을 불었다. 수많은 독사가 일제히 화살처럼 아이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아이는 뱀이 쫓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오색반점이 난 독사 수백 마리가 툭 불거진 눈에 혀를 날름거리며 질풍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다리야 날 살려라는 듯 죽자고 내달렸다.독사는 어찌나 재빠르게 기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덧 아이에게 접근하여 이제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보였다.
[얘야!]
아이 어머니가 큰소리로 울부짖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농민들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에 분분히 달려들어 뱀을 때려잡으려고 했지만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긴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황용은 양손에 금침을 들고 독사가 조금만 더 접근하면 즉시 홍칠공으로부터 배운 만천화우척금침(滿天花雨擲金針)의 절기를 발휘할 만반의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그 아이가 아! 하더니 미끄러져 넘어졌다. 곧 뱀 떼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 덤벼들려 했다.
[어이쿠,큰일났구나.]
황용이 몸을 날려 금침을 발사하려는 순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농민들 틈을 비집고 달려 나와 아이와 뱀 떼 사이를 막아서며 각기 쌍수를 휘둘렀다. 네 줄기 황색 분말이 땅바닥에 네 개의 노란 색을 그어 놓았다. 사람들의 콧속으로 진한 유황 냄새가 풍겼다. 뱀들이 이리저리 후퇴하는 것으로 보아 뱀을 물리치는 약품 같았다. 황용이 그들을 보니 개방의 낯익은 사람들로서 보응에서 만났던 여생과 여조흥이었다.
검은 옷 입은 장한은 두 사람이 뱀 떼를 막는 것을 보고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우리 철장방과 개방은 평소 서로 원한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남의 일에 나서는 거요?]
여생이 공손하게 두 손을 마주잡았다.
[이 아이가 나이 어려 세상 물정을 몰라 그랬으니 한 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자는 여생이 등에 여덟 개의 마대를 짊어진 것을 보고 개방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인물임을 알았다.
[만약 용서하지 않겠다면 어쩔 테요?]
그자가 이렇게 시비조로 나오며 코웃음을 쳤다. 여조흥이 나이가 젊은 탓에 먼저 화를 냈다.
[당신들이 이따위 짓을 하면 하늘도 용서하지 않을 테지만 우리가 본 이상 어떻게 그냥 지나친단 말이오?]
그자가 또 한 번 아니꼽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내일 악주에서 개방 모임이 있어 천하 거지의 왕초들이 동정호(洞庭湖)에 모인다고 들었는데, 그래 당신들 같은 거지까지 그걸 믿고 한번 뽐내 볼 생각이오? 흥, 어림없는 수작이지. 그래 개방 사람들은 모두 뱀 잡는 데 귀신이라더니 어디 재주 있거든 한번 해보구려.]
여조홍은 그자가 이렇게까지 업신여기고 나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숙이고 두 손에 각기 한 마리씩의 독사 꼬리를 잡고 힘껏 훑었다. 뱀 뼈는 원래 쇠사슬처럼 되어 있어 이렇게 꼬리에서부터 머리까지 한 번 훑으면 금방 죽지는 않지만 다시는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이는 거지들이 뱀을 잡을 때 흔히 쓰는 수법이라 뱀 기르는 사람들은 아주 질색했다. 그자는 여조흥이 채 허리도 펴기 전에 먼저 휘파람을 불었다. 뱀 수천 마리가 일시에 여조흥에게 달려들었다.
여조흥의 뱀 잡는 솜씨야 따를 사람이 없었지만 워낙 숫자가 많고 보니 당해 낼 재간이 없어 급히 황색 선 뒤로 피했다. 이를 본 여생이 상대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노형은 뉘신지 존함을 대시오!]
그자는 코웃음을 칠 뿐 대답이 없었다. 뱀떼는 황색 선을 사이에 두고 우와좌왕할 뿐 다시 접근하지 못했다. 이때 또 한 번의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이 휘파람 소리에 따라 뱀떼 안에서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뱀 한 마리가 입을 벌려 다른 뱀의 꼬리를 물면 그 뱀 역시 또 다른 뱀의 꼬리를 무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삽시간에 수십 개의 길고 긴 뱀줄로 변했다. 그자가 큰소리를 지르자 뱀줄 수십 개가 공중을 날아 황색 선을 넘어 두 거지를 겹겹으로 에워쌌다.
그 안에는 물론 달아나려던 그 아이도 함께 있었다.
[이 더러운 거지야, 뱀을 잡으라니까 뭘 우물거리고 있나?]
그자가 이렇게 빈정거렸다. 뱀들은 그자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듯 노리고만 있었다. 여생과 여조흥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우리 철장방도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의 생명을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다시는 뱀을 잡지 않겠다는 각서라도 쓰겠다면 특별히 용서해 주마.]
여생은 이 말이 자기들을 보고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요구라고 생각했다. 무릎 꿇고 애걸을 하라니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도 개방에서는 상당히 명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태연자약했다. 검은 옷 입은 자가 두 손을 한 자쯤 벌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이 두 손을 합치기만 하면 너희 두 사람 몸에는 수백 개의 독사 이빨 자국이 생길 텐데 그래도 꿇어 엎드려 살려 달라고 하지 않을 테냐?]
여조흥이 시선을 여생에게 돌렸다.
[사숙님, 우리 체면을 망칠 수는 없습니다.]
[그야 물론이지!]
여생은 이렇게 대답하고 다시 그자를 향했다.
[노형이 우리를 서천으로 보내 주신다니 한없이 고맙소. 그러나 아직 노형의 존함도 듣지를 못했소.]
[그야 물론 그렇게 되면 죽어도 두 눈을 감을 수 없겠지. 나는 구철장( 鐵掌)의 제삼(第三) 제자인데 사람들은 현배망(玄背蚌) 교태(喬太)라 하오.]
[어이구 실례했군, 나는 또 누구라구? 원래 구영감 제자의 제자였군.]
그자가 자기 소개를 채 끝내기도 전에 황용이 이렇게 말하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왔다. 그 현배망 교태라는 사람은 갑자기 들려 오는 말소리에 어리벙벙해 있다가 나타난 것이 묘령의 소녀임을 알자 기가 차는 모양이었다. 미처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황용이 또다시 말을 꺼냈다.
[철장수상표 구영감은 나를 보고 고모라고 부르는 처지요.]
[아니, 계집애가 무슨 개수작이야?]
교태는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도 슬그머니 의심이 일어났다.
(저렇게 나이 어리고 나약하게 생긴 계집애가 철장수상표의 이름을 알다니 이상한 일이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것들이 밖에서는 늘 말썽을 부리는 게 나는 가장 못마땅해요. 무령현에서 관리를 지내는 그 녀석도 한패지? 며칠전 이 고모가 그곳을 지나는 길에 없애 버리고 말았는데 그래 자네는 그걸 어떻게 생각하나?]
무령현의 교지현은 바로 이 교태의 형제였다. 현아에 불이 일어나고 지현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은 오늘 새벽에 이곳에서도 들어 알고 있었다. 교태는 분노와 비애가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황용을 노려보았다. 무공이 그토록 강한 형제가 설마 한들 이런 계집의 손에 죽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교태는 즉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수백 마리의 독사가 황용을 에워쌌다.
[무령현의 교지현을 누가 살해했는지 빨리 말해라!]
[내가 죽였다고 말하지 않더냐? 그자는 독사장으로 나와 싸웠다. 그 지현이라는 자의 황봉침(黃蜂針)이며 거화요천(擧火捺天) 등 몇 가지 재주는 그래도 쓸 만하더라. 뒤에 내가 그자의 곡지혈(曲池穴)을 눌렀더니 독사장도 꼼짝못하더군. 내 다시 그자의 기문혈(期門穴)과 견정혈(肩貞穴)을 눌러 당상에 얌전히 앉혀 놓은 채 현아에 불을 질렀다. 현아가 다 타 재가 되었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끝까지 나오지 않더구나.]
살인, 방화 등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술술 말도 잘하는 황용을 교태는 넋을 잃고 바라보며 이 계집을 산 채로 잡아다 고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삼(老三), 노사(老四), 이 계집을 잡아 묶어라.]
교태가 명령을 내리자 검은 옷 입은 두 명이 대답을 하고 나섰다. 그들이 허리를 숙이고 칼등으로 뱀 떼를 헤쳐 길을 튼 뒤에 몇 발짝 다가서며 황용의 어깨를 틀어잡으려고 했다.
[노삼, 노사, 함께 누우시지.]
황용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몸을 뒤로 움츠리며 양손으로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둘이 앞으로 고꾸라질 듯 나가다가 꽝 하고 뇌문(腦門)과 뇌문이 부딪쳤다. 이렇게 부딪치자 인사불성으로 몇 바퀴 맴을 돌다가 약속이나 한 듯 땅에 누워 버렸다.
농민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다가 그들이 괴상하게 넘어지는 꼴을 보고는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교태는 화가 나 오른손의 두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막 휘파람을 불어 뱀을 몰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구구구 괴상한 소리가 나며 황용의 손 위에 은홍색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이 혈조(血鳥)를 옷 소매 속에 숨겨 놓고 있다가 우선 한바탕 교태를 놀린 뒤에 이제야 꺼내 놓은 것이다. 새가 이렇게 세 번 울자 온 들에 꽃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순간 뱀떼가 소란을 부리는 듯하다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고 어느 놈은 벌써 배를 하늘로 향해 누워 있었다. 그 새는 거침없이 긴 부리로 쪼아 눈 깜짝할 사이에 7,8마리의 뱀 쓸개를 먹어 치웠다. 그토록 작은 몸집에 이만하면 배를 채웠을 것 같은데도 계속해서 긴 부리로 뱀의 배를 갈라놓는 것이었다.
교태는 이런 괴상한 광경을 보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칼날(鋼 )세 개를 꺼내 들고 둘은 새를 향해서, 하나는 황용을 향해서 발사했다. 황용은 연위갑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새는 풀썩 날아오르며 양쪽 날개를 펴 두 칼날을 떨어뜨리고 다시 번개처럼 대들어 황용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도 부리로 받아 떨어뜨렸다.
황용은 혈조가 자기를 호위해 주는 게 너무나 기뻤다. 그녀는 교태와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혈조에게 말했다.
[저 나쁜 놈들 눈을 쪼으렴.]
혈조가 덮치자, 붉은 빛이 난무하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검은 옷 입은 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개중에 잽싼 사람들은 용케 혈조의 공격을 피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장님이 되어 울부짖으며 엎어지고 기면서 허둥지둥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농민들은 신이 나서 괭이와 돌을 들고 독사와 두꺼비를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앴다. 그들이 황용에게 고맙다며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벌써 곽정과 함께 멀리 가 버리고 없었다. 여생과 여조흥도 뱀떼를 벗어나 황용과 인사를 나누려고 했지만 홍마가 워낙 빨리 달리는 바람에 뒤를 좇을 수가 없었다. 황용은 오늘 한 일을 생각하니 너무 기쁘고 흐뭇해서 저녁에는 불을 피워 새에게 불더미 속에서 즐겁게 목욕을 하도록 해주었다.
다음날 두 사람은 오시가 되지 않아 벌써 악주에 도착했다. 그들은 홍마와 수리를 데리고 악양루(岳陽樓)로 천천히 올라갔다. 악양루에 오른 그들은 술과 안주를 청해 놓고 동정호의 경치를 감상했다.
호호탕탕(浩浩蕩蕩), 일벽만경(一碧萬頃), 푸른 물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고 호수를 둘러싼 많은 봉우리가 하늘을 꿰뚫을 듯 우뚝 솟아 마치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았다. 이윽고 술과 안주가 나왔다. 그러나 호남(湖南) 요리는 너무 매워서 입맛에 맞지 않았고 다만 그릇들이 크고 젓가락이 유난히 길어 호기가 있어 보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먹는 듯 마는 듯 곧 젓가락을 놓았다. 곽정은 벽에 걸린 시를 보고는 범중엄(范仲淹)이 지은 악양루기를 조그만 소리로 읊조렸다.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긴다.)
황용은 이 두 마디를 큰소리로 읊었다.
[곽정 오빠, 이 시 구절 어때요?]
곽정은 시를 읊조리며 사색에 잠겨 있느라 황용의 말에 미처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문장을 쓴 범문정공(范文正公)은 문무를 겸비하고 있어 서하(西夏)에서 명성을 떨쳤는데 천하에 비길 사람이 없었대요.]
곽정은 황용에게 범중엄에 대해서 더 얘기해 보라고 했다. 범중엄은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했고,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까지 개가를 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며 자랐다. 후에 대성하여 부귀를 누릴 수 있었는데도 지독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자나깨나 백성만을 생각했다고 황용이 그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곽정은 자기도 모르게 존경심이 우러나고 감동에 겨워 밥그릇에 가득 술을 따라 단숨에 비웠다.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긴다! 대영웅, 대호걸이라면 마땅히 그만한 포부는 지녀야지.]
[물론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제 생각엔 이 세상이 우환만 많고 즐거움은 적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평생 즐겁게 사는 게 꼭 나쁠 건 없지 않아요?]
황용이 웃으며 말하자 곽정도 가볍게 웃었다.
[곽정 오빠, 저는 천하가 괴롭건 괴롭지 않건, 또 즐겁건 즐겁지 않건 상관없어요. 오빠가 즐겁지 않으면 저도 즐겁지 않고 오빠가 즐거우면 저도 즐겁고 그럴 뿐이에요.]
황용의 말소리가 작아지며 표정이 쓸쓸했다. 곽정은 황용이 자기들 장래 일을 생각하고 그러는 줄은 알았지만 뭐라 위로할 말이 없어 자신도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황용이 다시 고개를 들고 웃었다.
[오빠, 그런 얘기는 그만두기로 하고 다른 얘기나 해요. 제가 철장방 사람들을 골탕먹인 거 잘한 일일까요?]
[암, 잘했고 말고. 그야 여부가 있나.]
둘은 서로 잔을 들어 권하며 다시 즐거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황용이 거기 있는 다른 주객들을 살펴보니 동쪽에 있는 둥근 의자에 거지차림을 한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옷은 여기저기 기워 입었지만 단정하고 깨끗했다. 모양새로 보아 오늘 밤 개방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개방의 중요한 인물들 같았다. 그외에는 보통 벼슬아치와 장사꾼들이었다.
[그 철장방이란 것이 도대체 무얼 하는 사람들인데 서독 숙질과 마찬가지로 독사를 기를까요?]
황용이 궁금하다는 듯 낮은 소리로 물었다.
[만약 그들이 구천인 영감의 수하들이라면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지 않을까?]
그런데 곽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철장수상표 구영감도 안중에 없는 것처럼 큰소리를 치는군.]
곽정과 황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러서며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거무스름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늙은 거지가 대들보 위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곽정은 처음에는 철장방 쪽 사람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개방의 인물임을 알자 마음이 놓였다. 그는 부드럽고 악의 없는 인상이었다. 그래서 두 손을 마주잡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내려오셔서 저희와 함께 술이나 한잔 드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거 좋지.]
늙은 거지가 기다렸다는 듯 털썩 미끄러져 내려왔다. 마룻바닥이 흔들리며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그는 엉덩이를 털며 서서히 일어났다. 곽정과 황용이 오랫동안 얘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머리 위에 사람이 있었는데 까맣게 몰랐다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무학의 고수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떨어져 내려오는 자세가 이렇게 우둔하고 미련하다니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황용은 주모에게 잔과 젓가락을 더 가져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잔에 가득 술을 부었다.
[이 술 받으세요.]
[거지가 함께 의자에 앉아 마실 수는 없지요.]
늙은 거지는 이렇게 말하며 그냥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어깨에 메고 있던 마대 속에서 깨진 그릇과 대나무 젓가락을 꺼내 들었다.
[자시다 남은 반찬이나 여기 좀 덜어 주시오.]
[그럴 수야 있습니까? 무얼 잡숫고 싶으신지 말씀만 하시면 저희가 새로 시키겠습니다.]
곽정이 공손하게 말하자 거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천만의 말씀이오. 거지는 역시 거지라오. 유명무실하게 거지 행세를 할 바엔 차라리 거지 짓을 집어치우겠소. 좀 주시고 싶거든 주시오. 아니라면 난 다른 곳으로 가겠소.]
황용이 곽정을 건너다보며 웃었다.
[옳은 말씀이세요.]
그래서 먹다 남은 반찬을 거지가 내민 깨진 그릇에 듬뿍 담아 주니 늙은 거지는 마대에서 꺼낸 찬밥 덩이랑 함께 맛있게 먹었다. 황용이 그가 짊어진 마대 숫자를 세어 보니 모두 9개였다.
저쪽 둥근 의자에 앉아 있는 세 거지도 역시 모두 9개씩이었다. 다만 그쪽은 여러 가지 안주를 푸짐하게 시켜 놓고 먹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쪽 세 거지는 이 늙은 거지를 못 본 체 하고 있었지만 못마땅하다는 표정만은 역력했다.
늙은 거지가 맛있게 먹고 있을 때 계단이 삐걱거리며 몇 사람이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앞장선 두 사람은 임안 우가촌에서 양강을 모시겠다고 나섰던 뚱뚱보와 홀쭉이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나타난 사람은 바로 양강이었다. 그는 올라오자마자 곽정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보자 깜짝 놀랐다. 그가 곧바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두 거지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더니 뚱뚱보 거지만 그를 따라 내려가고 홀쭉이 거지는 세 거지가 앉은 탁자로 가서 뭐라고 소곤거렸다. 세 거지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는 술값을 치른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바닥에 앉아 식사를 하던 늙은 거지는 거들떠볼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꾸역꾸역 먹기만 했다. 황용이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지 10여 명이 양강을 호위하며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한참 뒤에 양강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공교롭게도 황용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는 깜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늙은 거지는 식사를 다 끝내고도 그릇 바닥을 맛있게 핥아먹고 젓가락을 두어 번 옷에 쓱쓱 문질러 마대에 챙겨 넣었다. 황용은 이 노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얼굴은 주름살투성이요, 고생에 찌든 기색이 뚜렷한데 두 손이 어찌나 큰지 다른 사람의 2배는 넘어 보이고 손등에도 힘줄이 툭 불거진 것이 평생 고생깨나 한 모양이었다. 곽정이 일어나 서며 두 손을 공손하게 마주잡았다.
[선배님, 이 의자에 앉으셔서 얘기나 나누시지요.]
[난 의자에 앉는 것이 오히려 거북해요, 습관이 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오. 두 분은 홍방주의 제자이니 나이는 나보다 몇십 살 더 적지만 나하고는 처지가 다름없소. 그러니 그냥 형이라 부르구려. 나는 노유각(魯有脚)이라 하오.]
늙은 거지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황용이 낄낄 웃었다.
[이름이 아주 재미있군요.]
[가난한 사람이 몽둥이도 없으면 개도 업신여긴다고 했는데 난 몽둥이는 없지만 다리만은 튼튼하오. 개가 대들면 내 이 발로 차버린다오. 그럼 꼬리를 감춘 채 멀리 달아나고 말지요.]
[그렇겠군요. 개가 만약 이름의 뜻을 안다면 차이기 전에 멀리 달아나겠지요.]
[내 오늘 아침 여생을 만나 두 분께서 보응과 악주에서 하신 일을 들어 알고 있었다오. 정말 장한 일들을 하셨습니다.]
곽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겸양을 하고 앉았다.
[방금 두 분이 하시는 얘기를 들으니 철장방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그래요. 선배께서 좀 알려 주세요.]
[그 철장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양호(兩湖) 사천(四川) 일대에서는 꽤 명성을 날리고 있다오. 그런데 살인, 방화 등 못된 짓만 골라 하고 있지요. 처음엔 관가와 내통을 시작하더니 점점 더 고약해지더군요. 관가에 뇌물을 바치고는 마침내 벼슬 자리를 꿰차고 앉은 거예요. 더욱 못돼먹은 것은 금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두 분이 그들을 죽였으니 아주 통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철장방의 수령이 구천인이라고 들었는데 그 사기꾼이 어떻게 해서 그만한 위세를 떨치게 되었나요?]
황용이 계속 궁금한 듯 물었다.
[구천인은 아주 대단한 인물이랍니다. 너무 그렇게 깔보지 마십시오.]
[그래 그를 만나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만나 보지는 못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그가 심산에 은거하면서 오독신장(五毒神掌)을 수련하고 있는데 십여 년 동안이나 하산을 하지 않고 있답디다.]
[다 거짓말이에요. 제가 몇 차례 만난 일도 있고 싸움까지 해본걸요. 오독신장을 수련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웃기는 얘기로군요.]
그녀는 구천인이 설사를 하는 체하며 달아난 생각을 떠올리면서 곽정을 보고 웃었다. 그러자 노유각이 정색을 했다.
[그들이 무슨 현학(玄學)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철장방이 근년 대단히 흥성하고 있으니 함부로 생각할 수는 없어요.]
곽정은 혹시 그가 화를 내지 않을까 해서 자기가 나섰다.
[노형 말씀은 지당하십니다. 용아는 늘 이렇게 웃기를 좋아해서 탈이랍니다.]
[내가 언제 쓸데없이 웃기만 좋아했어요? 아이고 배야, 배가 아파 못 살겠네.]
구천인을 흉내내면서 배를 움켜잡은 황용을 보고 곽정도 웃음을 터뜨렸다. 황용은 그러는 곽정을 보더니 즉시 화제를 바꿨다.
[방금 여기서 술을 드시던 세 분과는 아시는 사인가요?]
노유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두 분이 외인이 아니니 제가 말씀을 드리지요. 홍방주님으로부터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개방에는 정의파(淨衣派)와 오의파(汚衣派)가 있답니다.]
[우린 그런 말 들은 적이 없는데요?]
곽정과 황용이 동시에 대답했다.
[방내에 분파가 있다는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홍방주께서도 이 일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분도 그래서 많이 애쓰셨지만 결국 두 파를 통합시키지 못했습니다. 개방에는 홍방주 아래 네 분의 장로(長老)가 있습니다.]
[그 얘기는 저도 들었어요.]
황용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그녀는 홍칠공이 아직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가 자기에게 방주 자리를 물려주었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노유각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제이(第二) 장로고 그들 셋도 모두 장로들입니다.]
[아, 이제 알겠네요. 영감님께서는 오의파 수령이시고, 그 세 분은 정의파 수령이로군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곽정이 의아해서 황용에게 물었다.
[그야 뻔한 일 아니겠어요. 이분 옷이 얼마나 더러워요. 그들은 아주 깨끗하게 옷을 입었구요. 그럼 오의파가 좋지 않겠네요. 입은 옷이 더럽고 냄새가 나니 얼마나 거북하겠어요. 오의파에서 자주 옷을 빨아 입기만 하면 두 파가 똑같아지는 것 아니겠어요?]
[흥, 아가씨는 돈 많은 집 규수니 거지 추한 것이 싫을 테지.]
노유각이 화가 나 발을 한 번 꽝 구르며 일어났다. 곽정이 사죄를 하려고 했지만 노유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노기충천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황용은 혀를 날름거렸다.
[곽정 오빠, 나를 나무라지 마세요.]
곽정이 빙그레 웃었다.
[걱정이 돼서 그래요.]
[무슨 걱정?]
황용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혹시 그분이 발길로 오빠를 걷어차지나 않을까 해서요.]
[왜 얌전하게 있는 나를 걷어찬단 말야?]
그러나 황용은 입을 문지르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곽정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벙벙해 있었다.
[오빤 바보야. 그분 이름을 생각해 보시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인데 말이에요.]
[아니 그럼 날 개라고 슬그머니 욕하는 것 아냐?]
곽정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물 것처럼 달려들자 황용은 히히거리며 피했다. 둘이 이렇게 쫓고 쫓기며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계단이 울리며 방금 양강을 따라 내려갔던 세 거지가 다시 올라왔다. 그들은 곽정과 황용 앞으로 다가서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중 비교적 얼굴이 희고 약간 뚱뚱한 체구에 횐 수염을 기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옷만 여기저기 꿰매지 않았다면 돈 많고 점잖은 군자에 틀림없었다.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온 얼굴에서 춘풍이 부는 듯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방금 그 노가 성 가진 늙은 거지가 슬며시 두 분께 독수를 썼습니다. 우리가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 이렇게 구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무슨 독수를요?]
곽정과 황용이 놀라 동시에 물었다.
[그 늙은이가 두 분과 함께 음식을 들려고 하지 않았지요?]
이 말을 들은 황용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럼 그분이 우리 음식에 독이라도 넣었단 말씀인가요?]
[우리 개방이 불행해서 이런 못된 사람이 다 생겼습니다. 그 늙은 거지가 독약 쓰는 솜씨가 어찌나 대단한지 그냥 손가락만 가볍게 퉁겨도 손톱 끝에 숨긴 독약 가루가 귀신도 모르게 술과 안주 속에 들어간답니다. 두 분은 중독이 아주 심해 반시간이 넘으면 구할 길이 막연해집니다.]
황용은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반신반의했다.
[아니, 우리 둘은 그분과 아무 원한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독수를 씁니까?]
[두 분의 중독이 심하니 어서 이 약이나 드십시오. 그래야만 사실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며 노란 가루약을 꺼내 술잔에 나누어 넣고 거기에 술을 따라 섞은 후에 마시라고 했다. 황용은 방금 양강을 보았기 때문에 부쩍 의심이 일어났다. 그들이 몇 마디 권한다 해서 함부로 아무 약이나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양가 성을 가진 젊은이와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처지니 세 분께서 불러 한번 만나게 해주시면 어떨까요?]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몸에 독약이 퍼지고 있으니 빨리 이 약을 드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세 분 호의는 정말 감사합니다. 잠시 자리에 앉아 술이나 드시지 않으시렵니까? 당년 제11대 방주께서 북고산에서 혼자 군웅들과 대결할 때 일봉쌍장(一捧雙掌)을 가지고 낙양오패(落陽五霜)를 무찔렀던 일은 생각만 해도 통쾌하군요.]
개방의 세 장로는 그녀가 갑자기 개방의 옛일을 들먹이자 의아해 했다. 이렇게 어린 여자가 어떻게 그 일을 다 알고 있나 해서였다.
[홍방주님의 항룡십팔장은 천하무적인데 세 분께서는 몇 장(掌)이나 배우셨나요?]
황용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가자 세 장로는 그녀가 일부러 이 말 저말 꺼내며 약을 먹지 않으려고 하는 줄을 알았다. 부자같이 보이는 장로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의심하시니 우리로서도 강권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일만 말씀드리면 자연 믿으시겠지요. 자, 그럼 두 분께서는 제 눈을 한 번 보십시오. 어디가 이상합니까?]
곽정과 황용이 동시에 그의 두 눈을 주시했다. 두 개의 눈동자가 살찐 둥근 얼굴에 마치 피부를 찢어 놓은 것 같이 박혀 있고 다만 두 줄기 맑은 빚이 옥처럼 반짝반짝했다.
(뭐 별로 이상할 것도 없잖아? 꼭 돼지 눈같이 생겼군.)
황용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장로가 다시 말을 꺼냈다.
[두 분은 제 눈을 보면서 절대로 잡념을 가지시면 안 됩니다. 이제 두 분의 눈이 무겁고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전신이 나른하다고 생각되신다면 이건 중독이 됐다는 증거이니 눈을 감고 잠이나 자도록 하시오.]
그의 말씨가 어찌나 부드럽던지 마치 온몸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곽정과 황용은 웬일인지 온몸이 나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는 큰 호수 옆이라 아주 시원합니다. 두 분께서는 맑은 바람이나 쏘이시며 여기서 주무세요. 주무세요....]
그의 말은 점점 더 부드러워지며 달콤하기까지 했다. 곽정과 황용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품을 하다가 마침내 탁자에 엎드린 채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은 얼굴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눈을 떴다. 구름 사이로 동산 위에 둥근 달이 솟고 파도 소리가 적막을 깨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방금 대낮에 악양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째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날이 저물었단 말인가? 그들이 막 일어나려고 하는데 두 손과 발이 꽁꽁 묶여 있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입에도 재갈이 물려 있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황용은 즉시 그 희고 뚱뚱한 거지에게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수법을 썼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옆을 둘러보니 곽정은 자기 옆에 누워 있었다.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자 묶인 끈이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
곽정은 무공이 대단하여 제아무리 튼튼한 끈이라 하더라도 용만 한번 쓰면 대개는 다 줄이 끊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손발을 아무리 움직여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끈은 소가죽으로 만든 끈을 다시 철사와 엮어 만든 것이었다. 곽정이 다시 한 번 용을 쓰려고 하는데 갑자기 얼굴이 싸늘해지며 시퍼런 칼날이 두 번이나 볼을 가볍게 스쳤다. 그가 몸을 틀며 바라보니 네 명의 젊은 거지가 각기 병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었다.
황용은 정신을 가다듬고 우선 주위 사정을 살펴본 뒤에 몸을 뺄 궁리를 했다. 그녀는 몸을 비스듬히 움직여 살피다 다시 한 번 놀랐다. 몸이 조그만 봉우리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달빛이 밝아 사방이 똑똑히 보였던 것이었다. 사방은 모두 호수요, 자욱한 안개가 드넓은 호수를 뒤덮고 있었다.
(이런, 우리가 동정호 가운데 있는 군산(君山) 위에 누워 있었구나. 그런데 어째서 오는 도중에 그것도 몰랐을까?)
다시 고개를 돌리니 10여 장 밖에 높은 평지가 있는데 거기에 수백 명의 거지가 빙 둘러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달빛이 그들을 비추지 않아 못 보았던 것이다.
(아, 그렇구나. 오늘이 칠월 보름, 바로 개방 대회가 있는 날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부의 명령을 전한다면 모두들 승복할 텐데.)
그러는 사이 한참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거지들은 아무 동정이 없었다. 황용은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지만 몸을 꼼짝할 수 없고 보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다시 반시간쯤 시간이 흘렀다. 손발이 저려 와 견딜 수가 없었다. 달이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며 그 높지막한 평지의 반을 비춰 주고 있었다. 달빛에 헌원대(軒轅臺)라는 세 글자가 보였다.
다시 또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다. 이제 달빛은 평지를 완연히 드러내며 환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똑똑똑, 똑똑똑 세 번 치고 한 번 쉬고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는 급했다 늦었다, 높았다 낮았다 하며 운율을 이루었다. 거지들이 각자 짧은 몽둥이를 가지고 자기 옆에 있는 돌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황용이 머리 속으로 그 소리를 헤아려 보았다. 구구는 팔십일, 81번을 치자 그 소리가 뚝 그치고 거지 틈에서 네 사람이 일어섰다. 노유각과 정의파의 세 장로였다. 네 장로가 헌원대 네 모퉁이를 찾아 서자 거지들이 일제히 일어나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절을 했다. 얼굴이 희고 뚱뚱한 예의 그 장로는 거지들이 좌정하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형제 여러분, 하늘에서 개방에 화를 내려 우리 홍방주께서 이미 임안부에서 귀천하고 마셨소.]
이 말이 떨어지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때 그중 한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홍방주를 찾으며 땅바닥에 꿇어 엎드리자 거지들이 가슴을 치며 방성대곡했다. 호곡하는 소리가 숲을 울리고 호수수면 위로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곽정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그토록 사부님을 찾아도 안 계시더니 벌써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구나.)
곽정은 눈물이 비오듯 흘렀지만 입이 막혀 곡성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아니, 우리가 사부님을 그렇게 찾아도 안 계셨는데 이들이 찾을 수 있었을까? 여기엔 분명 음모가 숨어 있는 거야.)
곽정과는 달리 황용은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지들은 홍칠공의 은혜를 생각하며 슬피 울었다. 노유각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팽(彭)장로, 방주께서 귀천하신 걸 누가 보았답니까?]
[노장로, 방주께서 만약 아직도 살아 계시다면 오늘 이 자리에 오시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방주께서 귀천하시는 걸 친히 목격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양상공(相公), 직접 여러 형제들에게 말씀해 주시오.]
거지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일어섰다. 바로 양강이었다.
그는 손에 죽장을 쥔 채 높은 평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거지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울음을 멈췄다.
[홍방주께서는 한 달 전 임안부에서 다른 사람과 무예를 겨루시다 실수로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거지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원수는 누구요?]
[빨리 말을 하시오!]
[그토록 신통하신 방주께서 어찌 실수를 하신단 말이오?]
[원수들이 많아 방주께서 중과부적으로 당하신 것이 아닙니까?]
곽정은 양강의 말을 듣는 순간 비통이 분노로 변했다.
(한 달 전이라면 사부님은 분명히 내가 모시고 있었는데 양강 저놈이 거짓말을 하는구나.)
양강이 두 손을 뻗자 거지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방주를 살해한 사람은 도화도주 동사 황약사와 전진파의 도사들이오.]
황약사는 오랫동안 도화도를 떠난 일이 없었기 때문에 거지들 가운데 십중팔구는 그의 이름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전진칠자는 워낙 명성을 떨치고 있어 모두들 알고 있었다.
이날 군산 모임에 참석한 거지들은 개방 가운데서는 꽤 이름있는 인물들이라 칠자의 능력을 잘 알았다. 황약사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나 전진칠자가 합세했다면 제아무리 무공이 탁월한 방주인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거지들은 모두가 분개해서 욕을 퍼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즉시 복수하러 가자는 등 야단들이었다.
예전에 양강은 임안에서 구양봉과 함께 있을 때 그로부터 홍칠공이 자기의 합마공에 맞아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또한 양강은 자기가 금궁에서 비수로 곽정을 찔러 죽였다는 말도 했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악양루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곽정을 만난 것이다. 그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개방의 팽장로를 사주하여 섭심법(攝心法)으로 두 사람을 사로잡아 죽이기로 했다. 그는 이 일이 시일을 끌면 반드시 탄로나고 말 것도 잘 알았다. 황약사, 전진칠자, 강남 육괴 등이 자기를 죽이려고 찾을 것은 너무나 뻔했다. 육괴의 무공이야 대수롭지 않으니 별로 두려울 것 없었지만 동사와 전진칠자는 무섭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홍칠공을 살해한 죄를 그들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양강은 이렇게 되면 개방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고 그러면 도화도와 전진교는 망하고 말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第 五十六 章. 녹죽장과 양강
거지들이 여전히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는데 동로(東路)의 간(簡)장로가 별떡 일어섰다.
[형제 여러분, 제 말 좀 들어주시오!]
수염과 눈썹이 희고 키가 작달막한 그는 개방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말을 꺼내자 다들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우리 앞에는 지금 두 가지 대사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방주의 유명을 받들어 본방의 제19대 방주를 모시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을 떠나신 방주의 원수를 어떻게 갚을까 하는 문제를 상의하는 일입니다.]
거지들이 또 한 번 옳은 말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때 노유각이 큰소리로 외쳤다.
[우선 방주의 영령에 제사부터 지냅시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땅바닥에서 진흙 한줌을 모아 사람 형상으로 만들어 홍칠공의 영상(靈像)으로 삼았다. 그 영상을 헌원대 중앙에 놓고 꿇어 엎드려 곡을 하자 다른 거지들도 따라 울었다.
(우리 사부님이 멀쩡하게 살아 계신 터에 울기는 왜 울어? 흥, 까닭도 없이 곽정 오빠와 나를 여기 이렇게 묶어 놓고 아주 잘들 하는구나.)
황용은 그걸 보며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간장로가 손뼉을 세 번 치자 거지들이 눈물을 거두었다.
[본방의 각로 형제 여러분이 이번 악주의 군산 대회에 참석한 것은 원래 홍방주께서 방주의 계승자를 지정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방주께서 불행히도 귀천하고 마셨으니 방주의 유명에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유명이 없으시다면 본방의 사대 장로가 추천할 것입니다. 이는 본방의 관례입니다. 형제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거지들이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다. 팽장로가 일어섰다.
[양상공, 그럼 상공께서 방주의 유명을 전해 주십시오!]
방주를 모시는 일만큼 개방에서는 중대한 일이 따로 없었다. 개방의 흥망성쇠가 모두 방주의 유능과 유덕(有德)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당년 제17대 전(錢)방주는 용렬하고 나약해 무공은 높다지만 매양 하는 처사가 부당했었다. 게다가 정의파와 오의파는 계속 내분을 일으켜 개방의 명성이 크게 떨어졌는데 홍칠공이 방주가 되면서부터 강력하게 양파의 내분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강호에서의 명성을 되찾았던 것이다. 개방의 인물이라면 모두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새로 방주를 추대한다는 말을 듣자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
양강은 녹죽장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홍방주께서는 간교한 무리들의 공격을 받고 중상을 입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몰래 그분을 인가에서 판 움 속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즉시 명의를 청해 홍방주를 치료해 드렸습니다마는 너무나 큰 중상이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거지들은 여기까지 듣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양강은 잠시 그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다.
[홍방주께서 임종하실 때 이 죽장을 제게 주시면서 제19대 방주의 중임을 맡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개방 방주의 중임이 공자에게 돌아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양강은 임안 우가촌에 있을 때 바보 소녀의 객점에서 우연히 이 녹죽장을 주웠다. 그런데 두 거지가 뜻밖에도 자기에게 이상하리만큼 공손하게 굴었다. 그는 워낙 눈치 빠르고 꾀 많은 위인이라 전연 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기회를 보아 가며 녹죽장에 대한 내력을 물었다. 두 거지는 그가 죽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묻는 말에 공손하게 답변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악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개방의 모든 규율과 전통을 다 알게 되었다. 개방의 세력이 워낙 크고보니 방주의 권한 또한 대단할 것으로 믿은 양강은 홍칠공도 이제 세상을 떠났으니 이 기회에 방주가 되어 천하 거지들을 호령하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홍칠공이 자기보고 방주의 중책을 맡으라는 유명이 있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정의파의 간,팽,양(梁) 세 장로는 양강의 말을 듣자 희색이 만면했다. 홍칠공은 방주로서 만사에 공정무사했다. 일년 동안 깨끗한 옷을 입으면 다음해에는 더러운 옷을 입도록 하고, 이렇게 번갈아 입으며 정의파나 오의파 양쪽에 대해 전혀 불공평함이 없었다. 그러나 사대 장로 가운데도 유독 노유각만을 편애했다. 만약 노유각이 성질이 난폭하지 않고 몇 차례 대사를 그르치지만 않았다면 홍칠공은 벌써 그를 방주의 승계자로 지명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의파 거지들은 이번 악주 대회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었다. 방주의 승계자라면 덕이나 무공, 인망으로 보아 십중팔구 노유각이 될 것이었다. 정의파의 세 장로는 머리를 싸안고 방안을 강구해 보았지만 홍칠공의 명망을 생각하면 감히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다 뒤에 죽장을 가지고 악주에 나타난 양강을 만나 홍칠공의 부음을 들었다.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는 없었지만 차라리 일이 수월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홍칠공의 유명을 들으려고 양강에게 아주 친절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면서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그런데 양강은 워낙 약은 사람이라 혹시 무슨 변고라도 생길까 봐 함구하고 있다가 대회 석상에서 선포를 하게 된 것이다. 정의파의 세 장로는 방주가 되겠다는 희망은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노유각이 방주로 지명받지 않은 것만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셋은 서로 다행이라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 양상공이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한 본방의 성물(聖物)입니다. 형제 여러분 가운데 만약 의심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 위로 올라와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간장로가 이렇게 말을 꺼내자 노유각이 옆눈으로 양강을 째려보며 간장로에게 다가갔다.
(저렇게 어린것이 본방의 방주가 되어 천하 각로의 거지를 통솔할 수 있을까?)
그가 간장로한테서 죽장을 받아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방주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것이 분명했다.
(필시 홍방주가 자기를 구출해 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물려준 모양이로구나. 방주의 유명인데 감히 어길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내 당연히 충심으로 그를 보필하여 홍방주께서 애써 이룩해 놓으신 기업(基業)을 지켜 나가야지.)
노유각은 이렇게 다짐하며 두 손으로 죽장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어 정중하게 간장로에게 되돌려 주었다.
[우리 다 같이 방주의 유명을 받들어 양상공을 본방 제19대 방주로 모십시다.]
거지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곽정과 황용은 몸을 꼼짝할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과연 황도주께서 얘기하신 대로 양강이 대담하게 방주라고 나섰으니 앞으로 큰일이 일어나겠구나.)
(저 녀석이 우리 두 사람을 어쩌지는 못할 테니 우선 두고 보자.)
두 사람은 각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가 워낙 나이도 어린데다 지식도 없고 무능무덕하여 이런 중임을 감당 못할까 걱정입니다.]
양강이 겸양을 떨자 팽장로가 나섰다.
[홍방주의 유명이 이와 같으니 양상공은 너무 겸양하지 마십시오.]
[정말 그렇습니다.]
노유각이 맞장구를 치며 기침을 하다가 진한 가래침을 양강의 얼굴에 뱉었다.
양강은 너무나 뜻밖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다. 가래침은 양강의 오른쪽 볼로 튀어가 묻었다. 그가 깜짝 놀라 호통을 치려고 하는데 간,팽,양 세 장로가 모두 자기 옷에 침을 한 번씩 뱉더니 네 장로가 모두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일제히 부복을 하는 게 아닌가. 양강은 너무나 어리둥절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지들이 각기 자기 신분의 대소에 따라 차례로 올라와 한 번씩 침을 뱉고 개방의 예의대로 그에게 대례를 올렸다.
(아니, 침을 뱉는 것도 무슨 예절이란 말인가?)
양강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아직 개방의 역대 내규를 몰랐다. 방주로 모실 때는 그에게 우선 침을 뱉는 것이다. 거지란 사방을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으니 만인으로부터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개방의 장자가 되었으니 우선 거지들로부터 먼저 욕을 한번 당하라는 뜻이 거기 숨어 있는 것이었다.
이 의식은 반나절이나 걸려서야 끝났다.
[양방주께서는 이제 상좌로 오르십시오!]
거지들이 일제히 이렇게 외쳤다.
양강이 상좌라고 하는 헌원대를 보니 별로 높을 것도 없고 해서 이 기회에 자기 재주나 한 번 보여 주자 마음먹었다. 양강은 두 발로 땅을 찍으며 몸을 날렸다. 동작이 미묘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대 장로는 모두 무공이 높은 사람들이라 그의 무공이 겉만 화려하고 속은 부실하며 기초가 아직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이 정도라면 고수로부터 전수를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사대 장로가 개방에서 갖는 위치는 홍칠공 다음이었다. 그러나 무공으로 따진다면 구처기나 매초풍에 비할 처지는 아니요, 마옥이나 왕처일 등과 비슷한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은 양강이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 그의 심천(深淺)을 알아본 것이다. 양강이 헌원대에 올라 다시 입을 열었다.
[홍방주를 살해한 원흉을 아직 죽이지는 못했지만 동조자 두 명을 제가 여기 잡아왔습니다.]
거지들이 그 말을 듣자 곧 소란이 벌어졌다.
[어디 있소? 그놈들이 어디 있단 말이오?]
[빨리 끌어다 난도질을 해 죽여 버립시다!]
[한칼에 죽일 것이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해요.]
곽정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동조자를 잡아오다니 도대체 누군지 구경이나 좀 하자.)
[이 앞으로 끌어내시오!]
양강이 날카롭게 외치자 팽장로가 나는 듯 달려들며 곽정과 황용을 양손에 나누어 틀어잡고 높은 평지 앞으로 끌고 와 집어 던졌다. 곽정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저놈이 우릴 보고 동조자라고 했구나.)
노유각은 곽정과 황용을 보자 깜짝 놀랐다. 그는 여생으로부터 두 사람에 대한 내력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방주께 아룁니다. 이 두 분은 홍방주의 제자들인데 어떻게 사존을 살해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러기에 더욱 가증한 것이 아니겠소!]
양강이 이렇게 쏘아붙였다.
[방주께서 친히 목격하신 일인데 틀림이 있겠습니까?]
팽장로의 말이 끝나자 여생과 여조흥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뛰어나왔다.
[방주께 아룁니다. 이 두 분은 의로운 영웅들이십니다. 제가 감히 목을 걸고 책임을 지겠습니다. 홍방주를 살해한 일과는 전연 상관없는 분들임을 보증합니다.]
양장로가 눈알을 부라리며 그들을 나무랐다.
[할말이 있거든 너희들 장로를 통해서 할 것이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무엄하게 말참견을 하고 나선단 말이냐!]
원래 그 두 사람은 오의파에 속해 노유각의 통솔을 받고 있는데다 지위가 낮아 감히 더 말을 할 수가 없어 분한 마음으로 물러섰다.
[제가 감히 방주님 말씀을 거역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일은 본방의 대사이기 때문에 방주님께서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신문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노유각이 하는 말을 듣고 양강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이윽고 입을 뗐다.
[좋소, 내 그럼 다시 한 번 물어 보리다. 너희는 대답할 필요도 없이 옳거든 머리를 끄덕이고 아니면 흔들어라. 추호라도 거짓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가 손을 휘젓자 팽,양 두 장로가 각기 병기를 꺼내 들고 곽정과 황용의 목에 갖다 댔다. 팽장로는 검(劍)을 쓰고 양장로는 칼(刀)을 썼다. 황용은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얼굴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양강은 곽정이 성격이 온순해 우롱하기가 쉬우리라 생각하고 그를 번쩍 들어다 자기 옆에 놓고 큰소리로 물었다.
[저 계집은 황약사의 친딸이렷다. 그런가, 아닌가?]
곽정은 눈을 감은 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양장로가 다시 한 번 칼날을 번뜩이며 호통을 쳤다. 곽정은 끝까지 거들떠보지 않으려고 했다가 생각을 바꿨다.
(내 이렇게 입을 벌릴 수도 없으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
그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지들은 황약사가 홍칠공을 살해한 괴수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또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더 물을 것이 뭐 있느냐? 빨리 죽여 없애라.]
[먼저 저놈부터 죽이고 황약사를 찾아가자.]
[형제 여러분, 좀 조용히들 하시오. 내 좀더 물어 보겠소.]
양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지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양강이 다시 곽정에게 물었다.
[황약사가 자기 딸을 자네에게 시집보내기로 허락을 했지?]
곽정은 이것도 사실이니 그냥 머리를 끄덕였다. 양강이 허리를 굽히고 곽정의 몸에서 번쩍번쩍하는 비수 한 자루를 찾아 꺼내 들었다.
[이건 전진칠자 가운데 구처기가 자네에게 준 것이지? 그리고 그 구도장이 비수에 자네 이름도 새겨 준 게 맞지?]
곽정이 또 머리를 끄덕거렸다.
[전진칠자 가운데 마옥이 네게 무공을 전수해 준 바 있고 또 왕처일이 네 생명을 구해 준 일도 있는데 아니라고 우기지는 않을 테지?]
(우기기는 왜 우기느냐? 그게 사실인데.)
곽정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홍칠공 홍방주께서 너희 두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 줄 알고 그 분의 절기를 전수해 준 바도 있었지?]
곽정이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홍칠공이 적에게 중상을 입을 때 너희 두 사람은 바로 그분 곁에 있었지?]
곽정이 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양강의 목소리가 더욱 준엄해지는데도 곽정은 계속 머리만 끄덕거렸다. 거지들은 그가 자기 죄를 인정하는 줄로만 알았지 이런 질문들이 홍칠공을 살해한 일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노유각까지도 곽정과 황용을 증오하는 눈초리가 역력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곽정 앞으로 다가와 발길로 걷어찼다.
[형제 여러분, 이 두 연놈이 시원시원하게 자기 죄를 인정했으니 더 물어 볼 것도 없을 것 같소. 팽,양 두 장로께서 연놈을 죽여 없애시오.]
양강의 마지막 명령이 떨어지자 곽정과 황용은 처량한 눈초리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황용이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었다.
(곽정 오빠와 함께 죽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구나. 화쟁 공주가 아닌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
곽정은 고개를 들어 북두칠성이 유난히 반짝이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몽고에 계신 불쌍한 어머니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는 전진칠자와 매초풍, 황약사가 사투를 벌이던 포진이 생각났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심사는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예민하다. 그 천강북두진의 일초일식(一招一式), 일진일퇴가 눈에 선하게 나타났다. 팽,양 두 장로가 칼을 들고 곽,황 두 사람 앞으로 다가섰다. 이때 노유각이 재빨리 그들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
그가 곽정의 입에 물린 재갈을 뺐다.
[그래 홍방주께서 어떻게 살해당하셨는지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보아라.]
양강은 몹시 당황했다.
[내가 다 알고 있으니 더 물을 것도 없소.]
[방주님, 우리가 자세히 아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일과 관계되어 있는 자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양강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만약 그들이 사실을 털어놓으면 무슨 변고가 생길지 몰랐다. 그러나 노유각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더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곽정은 입을 틀어막은 재갈을 뺐는데도 여전히 넋을 잃은 채 북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노유각이 몇 번이나 다그쳐 묻는데도 곽정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천강북두진 생각에 골똘해 있었다. 그래서 노유각이 하는 말은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황용과 양강은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그가 한마디 변명이나 해명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일비일희하고 있었다. 양강이 손짓을 하자 팽,양 두 장로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때 쉭 소리와 함께 한줄기 자줏빛 불꽃이 호수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팽,양 두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보니 군산에서 몇 리 떨어진 호수 한가운데서 두 줄기 쪽빛 불꽃이 또 한 번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그때 간장로가 말했다.
[방주님, 귀빈께서 오십니다.]
양강이 깜짝 놀라 물었다.
[누구요?]
[철장방 방주십니다.]
[철장방이라니요?]
양강은 철장방의 내력을 몰랐다.
[사천과 호남에 있는 대방회입니다. 그들의 방주가 지금 이곳으로 인사차 오고 있으니 잘 대접해야 합니다. 이 두 연놈은 나중에 처치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무방하겠지요. 그럼 간장로께서 빈객을 맞이하도록 하시오.]
간장로가 분부를 받고 내려가자 펑펑펑 군산도에서도 세 줄기 빨간 불꽃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잠시 후 배가 군산에 닿자 거지들이 횃불을 밝혀 들고 마중을 나갔다. 헌원대는 군산의 정상에 있었다. 산 아래서 정상까지는 꽤 먼 거리여서 빈객이 경공을 쓴다 해도 반시간은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곽정과 황용은 거지들 틈 속에서 팽장로의 제자들에게 감시를 받고 있었다. 황용이 곽정을 살펴보니 그는 아직도 멍청한 표정으로 혼자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왜 저러고 있나 해서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데 빈객이 도착했다.
횃불을 받쳐 든 검은 옷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노인 하나를 가운데 모시고 높은 평지에 이르렀다. 이 노인은 황갈색 옷을 입고 손에는 부들풀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바로 구천인이었다. 간장로가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를 하는데 말씨가 여간 공손하지 않았다. 그리고 양강을 소개했다.
[이분은 철장수상표 구방주신데 신권(神拳)이 무적이요, 당세에 위명을 떨치고 계신 분이니 두 분께서 친하게 지내십시오.]
양강은 태호 귀운장에서 그가 망신을 당하는 꼴을 직접 본 일이 있었다. 이 사기꾼이 무슨 방회의 방주라니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 이거 참 반갑습니다.]
양강이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두 사람이 손과 손을 마주잡는 순간 양강은 전신의 힘을 손에 집중했다. 아주 비틀어 승복시키고야 말겠다는 수작이었다.
(사람마다 이자의 무공이 탁월하다고 믿고 있으니 어디 여러 사람 앞에서 본때를 보여야지.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로다.)
그런데 양강이 힘을 쓰자마자 장심이 화끈 달아오르고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숯을 만지는 것 같았다. 그가 급히 손을 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뜨거운 열기가 가슴속까지 배어 들어왔다.
[아이고, 이거 놓으시오. 아파 죽겠소.]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양강은 눈물까지 흘리며 몸을 비비꼬았다.
개방의 사대 장로가 이 모양을 보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간장로는 네 장로 가운데서 가장 어른이었다. 그가 손에 든 쇠지팡이로 바위를 치자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구방주님, 우리 양방주는 아직 나이가 어리신데, 그래 이분을 공력으로 시험하시다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니, 나는 그냥 악수를 하려고 했는데 귀방의 방주가 먼저 내 손을 분질러 버리려고 했단 말이오!]
구천인은 냉랭하게 말하면서도 손에는 여전히 힘을 주고 있었다. 양강의 신음 소리가 점점 약해지다가 마침내 정신을 잃어버렸다. 구천인이 손을 홱 뿌리치자 양강은 떨어져 나가며 데구르르 나뒹굴었다. 노유각이 급히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구방주님, 도대체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요!]
간장로가 화가 나서 힐난하자 구천인은 코웃음을 치며 왼손으로 그의 얼굴을 때렸다. 간장로가 쇠지팡이를 들어 막자 구천인은 재빨리 왼손을 아래로 내려 쇠지팡이 끝을 잡아 버렸다. 그는 지팡이 끝을 잡자마자 뺏으려고 낚아챘다. 간장로의 무공도 보통 수준은 넘지만 놀라 지팡이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구천인은 지팡이를 뺏지 못하자 오른손을 바람처럼 날려 왼쪽으로 후려쳤다. 땅 소리와 함께 쇠지팡이가 허리에 가 맞았다. 간장로의 양쪽 손아귀가 터져 선혈이 낭자하게 흘렀다.
간장로는 더 버티지 못하고 지팡이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구천인은 지팡이를 낚아챔과 동시에 팽,양 두 장로의 칼과 검을 막아 뿌리치고 다시 한 번 팔꿈치로 노유각의 얼굴을 쥐어박았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개방의 네 장로를 물리친 것이다. 거지들이 서로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각기 병기를 꺼내 들고 방주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명령만 떨어지면 철장방과 한바탕 혈전을 벌일 태세였다.
구천인은 왼손으로 지팡이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 끝을 잡은 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양손에 힘을 주어 분지르려고 했다. 간장로의 이 쇠지팡이는 수천 번이나 불에 달구어 두드려 만든 것으로 보통 견고한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견고한 지팡이이건만 구천인의 힘에 못 이겨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구천인의 이 철장 무공은 처음 힘을 쓰기 시작할 때는 별로 큰 위력을 가지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서워진다. 그는 쇠지팡이를 엿처럼 주물러 둥글게 휘어 놓은 후에야 비로소 힘을 거두었다.
거지들이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구천인은 왼쪽 어깨를 뒤로 움츠리고 구부러진 지팡이를 힘껏 공중에 던졌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구부러진 쇠지팡이가 맞은편에 있는 바위에 쨍그랑 부딪히고 손잡이가 바위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쇠와 돌이 부딪치는 윙윙 소리가 오랫동안 여운을 끌었다.
그가 이렇게 자기 재주를 과시하자 거지들도 놀라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황용은 더욱 의아했다.
(아니, 저놈의 영감은 아무 재주도 없는 사기꾼이 분명한데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올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달빛이 대낮처럼 밝고 수십 개의 횃불이 환하게 밝은 데서 본 그자는 틀림없이 귀운장과 우가촌에서 두 차례나 만났던 구천인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저 재주도 또 다른 사기극이란 말인가? 황용은 고개를 돌려 곽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랑곳없이 고개를 돌린 채 천문을 관측하고 있었다.
구천인이 냉랭한 소리로 말했다.
[철장방과 귀방은 평소 서로 침범하거나 간섭해 본 일이 없어 오늘 귀방이 군산에서 대회를 연다는 말을 듣고 인사차 들렀는데, 귀방 방주께서는 무엇 때문에 만나자마자 그런 독수를 내게 쓴단 말이오?]
간장로는 그의 위세에 눌려 겁을 집어먹고 있었는데 말투에 적의가 별로 없음을 느끼고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건 구방주님의 오해십니다. 방주님께서는 명성을 사해에 떨치고 계시기 때문에 저희로서도 늘상 존경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왕림해 주시니 저희들로서도 영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구천인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한껏 거만을 떨고 있었다.
[홍방주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천하 영웅이 또 한 분 없어졌으니 몹시 섭섭하오. 그런데 귀방에서는 어떻게 저런 방주를 새로 옹립했단 말이오. 심히 유감스럽소!]
이때 벌써 정신이 깨어난 양강도 그자가 자기를 조소하는 말을 들었다.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었다. 아직도 손바닥이 화끈거리고 다섯 손가락이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개방의 네 장로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찾아뵌 것은 두 가지 일에 대해 귀방에 간청할 것도 있고 귀중한 예물도 드릴 일이 있어서요.]
구천인이 하는 말에 간장로가 나섰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무슨 분부신지는 몰라도 말씀을 해주십시오.]
구천인이 사방을 한번 휘둘러보다가 사람들 틈에서 곽정과 황용을 발견하고 눈길을 멈춘 채 노려보았다. 황용은 그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피하지도 않고 자기도 똑바로 노려보며 경멸의 미소를 보냈다.
(당신이 아무리 허세를 부린다 해도 나는 당신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구천인이 고개를 돌려 간장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 처녀와 녀석이 내 제자를 여러 명이나 살해했는데 내게 그 처리를 맡겨 주셨으면 좋겠소.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간장로는 자기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서 양강을 바라보았다.
[방주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 두 사람이 원래 우리 개방의 원수들인데 구방주님에게까지 득죄한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오늘 여기서 함께 요절을 내고 말지요.]
양강의 말에 구천인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해도 무방하겠지요. 이것이 첫째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일은 어제 우리 철장방의 형제 몇 명이 내 명령을 받고 일을 보러 밖에 나갔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귀방의 두 친구가 그들을 장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 곽정과 황용을 가리켰다.
[저 연놈까지 거기 관여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의 무예가 신통치 않아 당한 일이라 할말은 없지만 이 소문이 강호에 퍼진다면 우리 철장방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귀방의 두 친구가 지닌 재주를 구경 좀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양강은 개방의 형제들에 대해 관심이고 뭐고 있을 리가 없었다. 까짓 거지 두 명 때문에 구천인의 비위를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누가 감히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빨리 앞으로 나와 구방주님께 사죄하도록 하시오.]
개방은 홍칠공이 방주가 된 이래 강호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홍칠공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새로 들어선 방주가 이토록 나약한 것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생과 여조흥이 사람들 틈에서 걸어 나왔다.
[방주님께 아뢰나이다. 본방 방규(幇規) 제4조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의로운 행위로 타인의 곤경을 구해 주어야 한다구요. 어제 우리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철장방 친구들이 뱀을 가지고 양민을 괴롭히는 현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다못해 말리려고 나섰습니다. 만약 이 청년과 소저가 도와주지 많았더라면 우리 두 사람도 독사에 물려 죽었을 것입니다.]
여생이 낭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해명했다.
[일이야 어쨌든 구방주님께 사죄를 하시오.]
양강이 말했다. 여생과 여조흥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죄를 하지 않으면 방주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요, 사죄를 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했기 때문이었다.
[형제 여러분, 만약 홍방주께서 살아 계셨다면 결코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을망정 욕을 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생이 큰소리로 이렇게 외치며 행전 속에서 비수 한 자루를 꺼내 자기 가슴을 찔러 자결했다. 여조흥도 앞으로 달려들어 비수를 뽑아 들고 가슴을 찌르며 여섕 옆에 쓰러져 죽었다.
거지들은 두 사람이 욕을 보지 않으려고 자결하는 광경을 보자 화가 솟구쳐 올랐지만 개방의 방규가 엄해 방주 명령이 없이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잠자코 있었다. 구천인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두 번째 일도 이렇게 끝내서 다행이오. 그럼 이제 제가 귀방에 예물을 바치겠소.]
그가 왼손을 들자 뒤에 서 있던 검은 옷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가지고 온 상자를 양강 앞에 바쳤다. 뚜껑을 여니 찬란한 금은보화가 빛을 내뿜었다.
거지들은 그들이 금은보화를 바치자 더욱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 철장방이 굶고 지내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보물을 내놓을 처지는 아닙니다. 이 예물은 대금국 조왕야께서 저보고 귀방에 전달해 달라는 물건입니다.]
양강은 놀랍고도 반가웠다.
[조왕야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제가 좀 뵈어야겠습니다.]
[이건 몇 달 전 일입니다, 조왕야께서 제게 사람을 보내시며 이걸 귀방에 전달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건 아버님께서 남하하시기 전인데 무엇 때문에 이 거지들에게까지 그러셨을까?)
[조왕야께서는 귀방의 영웅들을 경모한 나머지 특별히 저보고 직접 가서 이 예물을 전해 드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구방주께서 손수 이렇게 찾아 주시니 정말 무어라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양방주께서 젊으신데도 사리에 밝으신 것이 홍방주 이상이십니다 그려.]
양강은 연경에 있을 때 완안열이 개방에 대해 어떻게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빨리 그 의도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조왕야께서 우리 개방에 대해 어떤 분부를 하셨는지 궁금하오니 속히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분부라니 무슨 과분한 말씀이십니까? 조왕야께서는 지나는 말씀으로 북방은 부유하지 못해 남방만은 못하지 않느냐고 하시더군요.]
눈치 빠른 양강이 즉시 알아차렸다.
[조왕야 말씀은 우리보고 남방으로 가라는 것이군요.]
[양방주께서는 정말 총명하십니다. 아까는 제가 너무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조왕야는 양광(兩廣)과 복건(福建)은 땅도 넓고 따뜻하며 물산도 풍부한데 개방의 형제들이 왜 남방으로 가지 않느냐고 하시더군요. 이 북방보다 얼마나 좋겠느냐구요.]
[조왕야와 구방주님의 호의가 그러시다면 즉시 남방으로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구천인은 상대방이 이렇게 쉽게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혹시 다음에라도 후회하지 않을까 해서 한마디 더 못을 박았다.
[장부일언은 중천금인데 그럼 일후 개방의 형제들이 대강을 건너 남으로 가면 다시는 북방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이 말입니까?]
양강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노유각이 나섰다.
[방주님께 아룁니다. 우리는 구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금은보화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천하 어디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데 그 누가 우리더러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한단 말입니까? 방주께서 다시 숙고해 주시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양강은 벌써 완안열의 뜻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개방은 강북에서 금나라 사람들과 늘 적대 관계에 있었다. 금나라 병사들이 남하할 때마다 개방은 어김없이 금나라 군대의 후방에서 난동을 부려 장령을 살해하거나 양식을 불태우곤 했다. 만약 개방 사람들이 남쪽으로 철수한다면 자연히 금나라 사람들이 도강하여 강남에서의 위업이 크게 이로워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구방주님의 호의를 우리가 거절한다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요. 금은보화는 내게도 소용없는 물건이니 이따가 네 장로님께서 형제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해 주시기 바라오.]
[우리 홍방주님을 북개(北 )라 하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북방에 이룩해 놓은 기업을 어찌 그리 쉽게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개방은 예로부터 충의로 보국(報國)하여 금나라 사람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고 있는데 예물을 받는다는 것도 말도 되지 않으려니와 강남으로 철수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노유각이 강경하게 나서자 양강은 와락 성이 나서 얼굴빛이 변했다. 팽장로가 웃으며 나섰다.
[노장로, 우리 방의 대사는 방주께서 결정 내리실 문제지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잖소?]
노유각이 바르르 떨었다.
[충의지심을 버리겠다면 내 차라리 죽을망정 좇지 못하겠소.]
[간,팽,양 세 분 장로님의 의견은 어떠시오?]
양강이 이렇게 물었다.
[방주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셋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우리는 팔월 초하룻날부터 강남으로 철수하오.]
양강의 말이 떨어지자 개방의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개방은 정의파와 오의파로 분열되어 있는데, 정의파는 이곳저곳 기운 옷만을 입을 뿐 평상시 행동거지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의파는 계율을 엄수했고 금전을 주고 물품을 얻는 일도 없거니와 외인과는 같은 자리에 앉아 식사도 하지 않으며 무공을 모르는 사람과는 다투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기 고집을 부려 분쟁이 그치질 않았다. 사대 장로 가운데 세 사람이 정의파지만 대다수 거지들은 오의파였다.
양강은 거지들이 소란스럽게 떠들자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간,팽,양 세 장로가 조용히 하라고 큰소리를 질렀지만 떠드는 사람들은 거의가 오의파라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노장로, 정말 방주를 배반하실 생각이오?]
간장로가 발끈 화를 냈지만 노유각은 여전히 강경했다.
[내 천만번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방주를 배반하고 역대 방주의 유훈을 버리지는 않겠소. 금나라는 우리 대송의 불구대천지수가 아니오? 홍방주께서 평소 우리에게 무어라 말씀하셨던가요?]
간,양 두 장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구천인은 사세가 불리함을 보고 노유각을 누르지 않으면 대사를 그르치겠다고 생각했다.
[양방주님, 이 노장로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쌍수를 번쩍 들어 노유각의 어깨를 낚아채려고 했다. 노유각은 그가 냉소를 머금고 있을 때 벌써 방비를 하고 있었다. 구천인의 손이 매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막으려고 하지 않고 몸을 숙여 사타구니 밑으로 빠져 나가며 퍽퍽 엉덩이를 세 차례나 걷어찼다. 그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 노유각이다. 발 쓰는 재주가 비범할 뿐만 아니라 재빠르기 그지없었다. 구천인은 그가 자기 사타구니 밑을 빠져 나가자 초술이 비상하구나 생각했다. 이때 등뒤에서 바람소리가 들려 급히 장력으로 맞섰다. 노유각은 세 번째 발길질을 하다가 상대의 장력이 역습하고 나오자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진한 가래침을 구천인의 얼굴에 콱 뱉었다.
구천인이 제아무리 경험이 풍부하고 견문이 넓다 하더라도 이런 경우는 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가래침이 정통으로 얼굴에 와 맞자 아픈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가려운 것도 아니었지만 어리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장로, 빈객에게 무례하게 굴어서는 안 되오.]
양강이 소리를 지르자 노유각은 방주의 명령이라 꼼짝하지 못했다. 구천인은 인정 사정없이 두 손을 집게처럼 벌리고 노유각의 목을 노렸다. 노유각이 깜짝 놀라 뒤로 피하려고 하는데 어느 틈에 두 손이 상대방 손아귀에 붙잡히고 말았다.
노유각도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라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정신만은 잃지 않았다. 그는 잡힌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머리로 상대방의 배를 들이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박치기를 잘했다. 한번 받기만 하면 벽에도 구멍이 뚫렸다. 언젠가 그는 개방 형제들과 황소와 박치기하는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이마는 멀쩡한데 황소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런데 이렇게 박치기를 했으니 설령 구천인이 부상을 입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잡힌 두 팔만은 뺄 수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이마가 상대의 배에 부딪히는 순간 부드러운 것이 마치 솜이불을 받는 것과 같았다. 큰일났다 싶어 즉시 이마를 빼려고 하는데 상대의 뱃가죽도 함께 따라 나왔다. 노유각이 있는 대로 용을 써봤지만 구천인의 뱃가죽은 무서운 흡인력으로 그의 이마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두 손은 용광로속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이젠 굴복하겠지?]
구천인이 소리를 질렀지만 노유각도 버텼다.
[빌어먹을 놈의 영감, 굴복은 무슨 얼어죽을 굴복이냐?]
구천인은 왼손에 힘을 주어 그의 오른손 손가락 마디를 모두 분질러 버렸다.
[굴복하겠느냐?]
[어림없는 개수작이다.]
우두둑우두둑 또다시 왼손 손가락 마디가 분질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통증에 정신이 아물아물하면서도 계속 욕을 퍼붓고 있었다.
[내 배에 힘만 주면 네놈의 머리가 박살이 날 텐데도 그래 욕을 하느냐?]
구천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지들 속에서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바로 곽정이었다.
그는 큰 걸음으로 걸어 나와 노유각 뒤에 선 채 오른손을 높이 들어 그의 엉덩이를 세 번 찰싹찰싹 때렸다. 구천인은 한 가닥 강한 힘이 노유각의 머리를 통해 자기 배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지독한 통증과 함께 배의 흡인력이 풀려 나갔다.
노유각은 머리가 홀가분해지자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여전히 두 팔은 꼭 잡힌 채였다.
[노장로는 구선배의 적수가 아니니 비켜나시오.]
곽정이 이렇게 말하며 발을 들어 노유각의 어깨를 찼다. 이번에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노유각의 어깨를 찼지만 그 힘은 구천인의 두 어깨로 모였다. 그 구천인은 손아귀가 발발 떨리며 자기도 모르게 노유각을 틀어잡았던 손을 맥없이 놓았다. 노유각은 이 틈을 노려 비스듬히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워낙 오랫동안 머리를 죄이고 있었기 때문에 어질어질해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구천인은 곽정의 이런 재주에 놀라 그저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이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신권은 말로만 들었을 뿐 당해 본 일이 없는 무공이었다. 저토록 어린 나이에 연공이 벌써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면 함부로 깔보고 대들 수 없는 상대였다. 전신의 힘을 철장에 모은 채 방어만 할 뿐 선제 공격은 펴지 않았다. 장본인이야 물론 상대방 무공의 심도를 알 수 있었지만 거지들이야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은 노유각이 곽정의 발길에 쓰러지자 방주를 살해한 원흉이라고 여기고 있던 차라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곽정의 두 손과 발은 철사와 가죽으로 엮어 만든 오라에 묶여 꼼짝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갑자기 일어나 노유각을 위험에서 구해 줄 수 있었을까? 조금 전에 곽정은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전진칠자가 우가촌에서 쓴 진법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는 《구음진경》의 경문과도 비교해 보았다. 그때 수많은 의문점이 순식간에 풀렸다.
구천인과 양강, 간장로, 노유각들이 일문일답을 주고받고 있을 때 곽정은 경문 하권 가운데 수록된 수근축골법(收筋縮骨法)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축골법은 가장 하승(下乘)의 무공이었다. 쥐나 개처럼 슬금슬금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 같은 재주로 상승의 경지에까지 연공을 하게 되면 임의로 전신의 근골을 수축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마치 고슴도치 같은 동물이 적을 만났을 때 몸을 움츠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곽정은 명하도(明霞島)에 있을 때 홍칠공의 분부를 받고 역근단골편(易筋鍛骨篇)을 수련한 바 있었다. 이때 이미 어느 정도 기초를 닦아 놓은 셈이라 경문에 씌어진 대로 한번 해본 것인데 부지불식간에 묶인 오라가 풀려 나갔다.
팽장로는 그때 곽정 옆에 있다가 그가 소리도 없이 오라를 풀고 일어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곽정은 벌써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 격산타우의 솜씨로 노유각을 구출한 뒤였다. 팽장로는 그를 묶었던 오라만이 덩그러니 땅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보자 기가 막혔다.
[저놈 잡아라!]
그는 소리만 지를 뿐, 쫓아가 봐야 별로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아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곽정은 오랫동안 묶여 있었기 때문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었다. 게다가 거지들이 양강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기를 골탕먹이고 또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 없었다.
(내 오늘 네놈들을 실컷 두들겨 패 나와 황용의 분풀이를 통쾌하게 해야겠다.)
그는 이미 터득한 천강북두의 진법도 시험해 볼 겸 두 팔을 펼치고 발 밑은 벌써 천권(天權)의 위치를 밟고 있었다.
<제 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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