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3 김용(金庸)

一字師 2023.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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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3 김용(金庸)

 

                                         图片来源 | 《射雕英雄传》中郭靖那么笨,华筝和黄蓉为什么还会喜欢他?...

 

          小說 英雄門   第 1 部   蒙古의 별    第 三 卷 

 

                        저자 : 김  용 

                        역자 : 김일강 

                        발행 : (주)고려원 

                               1993년 11월 20일 2판 1쇄 발행본 

                        타자,편집 : Zazeung 

 

第 三十二 章. 영전 앞에서 맺은 의형제 

육승풍 부자와 완안강은 곽정의 의도도 모르면서 그의 뒤를 따라 뒤채로 왔다. 

 

[지필묵을 좀 가져다 주시오.] 

 

곽정이 시중을 들던 하인에게 말을 하자 금방 그것들을 가져왔다. 곽정이 백지 위에 <선부 곽의사 소천지령위(先父郭義士嘯天之靈位)>라 써서 책상의 중앙에 올려놓았다. 단천덕은 처음 그가 무얼 하려고 그러는지 몰라 어리벙벙해 있다가 곽소천이란 이름을 보자 혼비백산하여 고개를 돌리다가 땅딸보 한보구까지 발견하고는 그만 오줌까지 질금질금 바지에 싸고 있었다. 당시 그가 곽정의 어머니를 데리고 일로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을 때 강남육괴는 계속 그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때 여인숙 문 틈으로 몇 번이나 밖을 살펴보다가 땅딸보인 한보구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인상은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고만 있었다. 

곽정이 손을 번쩍 들었다 놓자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책상의 한쪽이 부서져 나간다. 

 

[통쾌하게 죽을 테냐? 아니면 고생 좀 하다가 죽을 테냐? 네 마음대로 양자 택일하라.] 

 

곽정의 노기 충천한 호령 소리를 들은 단천덕은 이제 살기는 다 틀렸다고 체념을 했다. 

 

[자네의 부친 곽소천은 내가 죽였다. 그러나 나는 상사의 명령에 따른 것이니 모든 것이 내 책임만은 아니다.] 

 

곽정의 두 눈에서는 이글이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네게 우리 아버지를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더냐? 빨리...., 빨리 말을 해라.] 

[그것은 대금국의 육태자 완안열이었다.] 

[뭐라구?] 

 

오히려 완안강 쪽에서 놀라 소리를 질렀다. 단천덕은 한 사람이라도 더 걸고 넘어져야만 자기의 죄명이 가벼워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실 그대로 당시 완안열이 어떻게 해서 양철심의 아내 포씨에게 반하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송조관부(宋朝官府)와 손이 닿게 됐으며 어떻게 관병에게 명령을 내려 우가촌에 가 양,곽 두 사람을 살해했으며 뒤에 가장 의로운 채 꾸며 포씨를 구출해 북경으로가 완안열을 만나게 되었고 그 뒤 다시 몽고로 파견되어 혼란 중 곽정 모자를 잃고 다시 임안으로 돌아와 서서히 승진을 하게 왼 경과와 곁과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일일이 털어놓았다. 그 동안의 긴 얘기를 다 끝낸 단천덕은 두 무릎을 곽정 앞에 끓었다. 

 

[곽영웅, 곽대인. 소인은 심부름만 했사오니 죄가 제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곽소천의 영전 앞에 이마를 조아린다. 

 

[곽나으리, 구천에 계시지만 사실만은 분명히 밝혀 주소서. 나으리를 살해한 장본인이 육태자 완안열이지 초개만도 못한 소인이 아니올시다. 나으리의 자제분께서 이렇게까지 훌륭하게 장성하셨으니 구천에서나마 얼마나 반가우시겠습니까? 나으리께서 보우하셔서 그로 하여금 개만도 못한 목숨이나마 살려 주시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그가 계속 중언 부언하고 있는데 완안강이 벌떡 몸을 솟구치며 쌍수로 단천덕을 내려치자 두골이 깨져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곽정은 책상에 엎어진 채 대성 통곡이다. 육승풍 부자와 강남육괴는 곽소천의 영전에 향을 사르고 배례를 올리고 있었다. 완안강도 끓어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곽형, 내 오늘에야 비로소 내 그 의부......, 그 완안열이 원래 나와 곽형의 철천지 원수임을 알았소.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못된 짓만 했으니 정말 만 번 죽어 마땅하구료.] 

 

그는 어머니의 고초를 생각하며 흐느껴 울었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하겠소?] 

 

곽정이 고개를 쳐들고 묻는 말이다.  

 

[제(弟)는 오늘에야 비로소 내 성이 양가라는 것을 알았으니 앞으로 나는 양강이오.] 

[잘 생각했소! 그래야만 배은망덕하지 않는 남자 대장부가 아니겠소. 나는 내일 북경으로 가 그놈의 완안열을 죽여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려오?] 

 

양강은 완안열이 양육을 해 준 은혜를 생각하고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곽정의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살폈다. 

 

[제(弟)도 형님의 뒤를 따라 복수를 하러 가겠습니다.] 

 

곽정은 한없이 반갑기만 했다. 

 

[좋소, 세상을 떠나신 아저씨나 내 어머님께서도 늘 말씀이 계셨다오. 내 아버님과 아저씨께서 일찌기 약속하시기를 우리를 의형제를 맺게 하시겠다고......, 그대 의견이 어떻소?] 

[그야 물론이지요.] 

 

둘은 그 즉시 곽소천의 영전에서 서로 여덟 번 절하고 의형제가 되었다. 

그날 밤은 각자 귀운장에서 쉬고 다음날 아침 육괴와 곽,양 두 사람 모두 육장주 부자에게 작별을 고했다. 육장주는 각자에게 두둑이 노자를 전했다. 귀운장을 벗어나자 곽정은 사부들을 향해 말을 꺼냈다. 

 

[제자는 양형과 함께 북상하여 완안열을 죽여야 하겠사온데 사부님들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중추절 약속은 아직 멀었고 또 우리도 일이 없으니 함께 가서 그 대사를 치르도록 하자.] 

 

가진악의 말에 주총 등이 모두 찬성을 했다. 

 

[사부님들의 은혜 태산보다 높음을 제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완안열의 무예가 출중한 것도 아니요, 게다가 여기 양형의 도움도 있고 하니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사부님들께서는 제자를 돌봐 주시느라 십여 년 동안 강남에도 가시지 못하셨는데 예서 고향이 멀지 않으니 차제에 귀향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육괴가 생각해 보니 그럴듯했다. 그래서 서로 헤어지기로 하고 세심한 일까지 하나하나 곽정에게 당부를 했다. 

 

[도화도의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 

 

맨 마지막 한소영의 간곡한 당부다. 그녀는 곽정이 착하고 어질기만 해서, 말을 했으면 꼭 실천에 옮기고 말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황약사의 괴팍한 성질로 보아 도화도에 간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보다는 불길한 일이 많을 것은 뻔한 일이다. 

 

[제자가 만일 가지 않으면 신용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양강이 웃으며 말참견에 나선다. 

 

[아니, 그 악마 같은 작자에게 무슨 신용을 가지고 운운할 게 있어요. 형님도 꽤 막혔단 말이야.] 

 

가진악이 <흥> 코방귀를 뀐다. 

 

[곽정아, 우리 무예를 하는 사람들은 말을 꺼냈으면 신용을 지켜야하는 것이니라. 오늘이 유월 초닷새, 칠월 초하루 우리가 가흥의 취선루에서 만나 함께 도화도로 들어가기로 하자. 지금 너는 네 홍마를 타고 북경에 가서 복수를 하려무나. 네 뜻대로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느냐만 만일 어렵거든 그 일을 전진파의 여러 도장님들께 부탁하기로 하자. 그분들은 의를 태산처럼 중히 여기는 분들이니 우리의 부탁을 물리치지 않으실 게다.] 

 

곽정은 대사부께서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도화도에 가자는 말을 듣고 감격한 나머지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네 이 의형제는 부귀한 가정의 출신이니 각별히 조심을 하거라.] 

 

남희인이 이렇게 말을 했지만 곽정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주총이 웃으며 다시 말문을 연다. 

 

[황약사의 딸이 아버지하고는 다르더라. 우리가 앞으로는 뭐라고 하지 않으마. 셋째 아우, 우리 그렇게 하지.] 

 

한보구가 수염을 어루만진다. 

 

[아, 그놈의 아가씨가 날 보구 호박같은 땅딸보라고 놀렸단 말이에요. 제딴엔 제가 아주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여기까지 말하고 자기도 웃는다. 곽정은 사부들이 황용을 좋게 생각하는 듯해서 흐뭇하고 반가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어디에 가 있는지 몰라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곽정아, 너 빨리 갔다 빨리 돌아와야 한다. 우리가 가흥에 가서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다.] 

 

전금발의 얘기다. 

강남육괴가 남쪽을 향해 먼저 길을 떠났다. 곽정은 홍마의 고삐를 잡은 채 육괴의 모습이 가물가물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제야 말에 올랐다. 

 

[여보 아우님, 내 이 말이 굉장히 빠르다오. 십여 일이면 북경엘 다녀올 수 있지만 우선 며칠 함께 가 봅시다.] 

 

둘은 말머리를 돌려 가지런히 북행을 시작했다. 양강의 감회는 착잡했다. 한 달 전만 해도 좌우로 호위를 받던 상국사신의 신분이었다. 그 위엄이나 위풍이 얼마나 늠름했던가. 이제 다시 북행을 하게 됨에 부귀 영화는 모두 일장 춘몽이 되고 만 것이다. 곽정은 그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괴로와하는 줄 알고 계속 위로의 말을 했다. 

점심때가 되어 그들은 율양(慄陽)에 당도했다. 객점을 찾아 점심을 시키려는데 심부름꾼 하나가 나서며 반긴다. 

 

[혹시 두 분이 곽,양 두 나으리가 아니시옵니까? 술과 밥, 벌써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들어가 드시지요.] 

 

곽정과 양강은 서로 바라다보며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어떻게 우리를 아느냐?] 

 

양강이 묻자 심부름꾼이 웃는다. 

 

[오늘 아침 한 나으리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두 분의 인상도 말씀을 해 주셔서 준비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둘이 타고 온 말을 끌어다 먹이를 준다. 

 

[귀운장의 육장주, 용의 주도하시군요.] 

 

양강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둘은 객점으로 들어섰다. 식사를 내오는데 모두가 일품 요리요, 안주도 정갈하고 맛이 있었다. 곽정이 제일 즐겨 먹는 닭고기도 준비가 돼 있었다. 둘이 배불리 먹고 일어나 셈을 치르려 했다. 

 

[두 분, 그냥 가셔도 됩니다. 셈은 벌써 끝났습니다.] 

 

주인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곽정도 따라 웃으며 두 냥의 은자를 심부름꾼에게 내리자 연방 허리를 굽실거린다. 곽정이 노상에서 육장주가 시원시원하고 손님 접대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 양강은 감금되어 있을 때의 원한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눈치다. 

 

[원래 그가 이런 수단으로 천하 호걸의 환심을 사서 태호 군웅의 주인이 되었군요.] 

[아니, 말투가 어째 그런가? 육장주는 아우님 사숙이 아닌가요?] 

[매초풍에게서 무공을 배우기는 했지만 사부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요. 그들의 그런 사문 외도(邪門外道)를 내 좀 일찍 배웠더라면 오늘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테지만요.] 

[아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 게요?] 

 

곽정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반문했다. 양강도 자기가 실언한 것을 알고 얼굴을 붉힌다.  

 

[제가 보기에 구음백골조는 아무래도 정파의 무공이 아닌 것 같거든요.] 

 

곽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건 아우님 말이 옳아. 사부이신 장춘진인은 무공이 훌륭하실 뿐 아니라 또 현문의 정종이니까 사부님께 사과를 올려요. 그분은 틀림없이 지나간 일을 용서해 주실 테니까.] 

 

양강은 묵묵 부답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다. 저녁 나절이 되어 금단(金壇)에 도착했는데도 객점은 마찬가지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흘이 지나도 계속 그렇게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날 둘은 벌써 강을 건너 고우(高郵)에 이르렀다. 객점의 심부름꾼이 영접을 하자 양강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어디, 귀운장의 손님 대접이 어디까지 계속되나 한번 봅시다.] 

 

그러나 곽정은 벌써부터 이상한 의심을 하고 있었다. 객점에 들를 때마다 자기가 제일 즐겨 먹는 음식이 한두 가지 꼭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육관영이 사람을 시켜 준비해 놓는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용의 주도하게 입맛을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식사가 끝날 무렵, 곽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우, 내 아무래도 먼저 가 봐야겠어. 도대체 누가 이렇게 앞서가며 준비를 해 놓는지 알아 봐야겠군.] 

 

홍마를 재촉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세 곳의 객점을 벗어나 보응(寶應)에 당도하니 과연 맞으러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곽정은 당지에서 제일 큰 객점에 들어가 출입문 가까운 방을 하나 골라 여장을 풀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나절이 되자 방울소리를 울리며 한 필의 말이 객점 앞까지 와서 멈췄다. 한 사람이 들어와 내일 식사와 안주를 준비했다가 곽,양 두 사람을 대접하라는 당부를 한다. 곽정은 황용의 짓이라고 미리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가슴이 펄떡펄떡 뛰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가 방을 하나 달라고 하는 말을 들으니 슬그머니 곯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체하고 있다가 밤에나 놀려 줘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곽정은 이경(二更)까지 푹 자고 나서 슬그머니 일어나 황용의 방으로 찾아 들어가려고 나오니 지붕 위에 사람 그림자 하나가 번쩍 스친다. 바로 황용이다. 

곽정은 이상한 생각을 했다.  

(이 야밤중에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그러나?) 

즉시 경공의 제종술(提縱術)을 펴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황용은 뒤에 곽정이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계속 교외를 향해 달렸다. 한참 달리다가 시냇물이 흐르는 냇물가 버드나무 아래에 가 앉아 품에서 뭔가 이것저것 꺼내 놓는다. 달빛이 비스듬히 그녀의 옆모습을 비치고 시원한 바람이 버드나무 가지에 살랑거리자 황용의 옷자락도 나풀거린다. 냇물은 흐르고 벌레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이 고요하기만 한데 황용의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린다. 

 

[이건 곽정 오빠, 이건 황용.] 

 

곽정이 슬그머니 뒤로 다가가 보니 달빛 아래 무석(無錫)에서 만든 진흙 인형을 가지고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 또 하나는 여자, 모두가 통통하게 살이 찐 인형이 귀엽게 생겼다. 무석의 진흙 인형은 천하에 이름난 명물이요, 태호의 자랑이기도 하다. 인형 앞에는 그릇들도 놓여 있었다. 

 

[이건 곽정 오빠가 먹고, 또 이건 황용이 먹고, 이거 맛이 있지요?] 

[그래 참 맛이 있다. 하나 더 먹자!] 

 

곽정이 되받는 말에 황용은 기겁을 하도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다가 그의 품안으로 뛰어든다. 둘은 이렇게 한참 동안이나 껴안고 있다가 떨어져 그간 헤어진 뒤의 일을 가지고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며칠 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몇 년 몇 달을 못 만난 것 같았다. 황용은 계속 지껄이며 웃고 떠들고 곽정은 멍청하게 듣고만 있었다. 

(용이가 저토록 나를 좋아하는데 함께 지내지 못하고 떨어지게 된다면 그 고통스런 세월을 어떻게 하나?) 

 

원래 그날 밤 황용은 위급한 사태하에서 아무래도 자기 아버지가 곽정을 죽일 것만 같아 말려 보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자,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겠다고까지 말을 했었다. 황약사는 딸을 워낙 사랑하기 때문에 사정을 보아 곽정을 용서해 준 것이었다. 황용은 물 속에 머물러 있다가 지금쯤은 아버지가 가셨겠지 생각하고 귀운장에 나타나 염탐해 보니 곽정은 아무 일 없이 무사했다. 반갑고 기쁘기는 했지만 섭섭하게 돌아선 아버지를 생각하면 자기가 너무 지나쳤다는 후회도 막급했다. 다음날 아침 귀운장 밖의 숲속에 숨어서 보니, 곽정과 양강이 말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북쪽을 향해 간다. 그래서 그들의 앞을 질러 달려가 식사를 준비해 놓게 되었던 것이다. 

 

둘은 달이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다정한 얘기를 끝없이 주고받았다. 황용은 그지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곽정의 품속에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때는 바야흐로 초하의 6월,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밤공기였다. 곽정은 황용이 잠에서 깰까 조심스러워 비스듬히 버드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 그만 자신도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버드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뜨고 보니 어느덧 아침해가 동녘 하늘에 솟아오르고 있었다. 황용은 그때까지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좀더 자게 내버려둬야지!) 

곽정은 이러한 생각을 하며 하나 둘 황용의 예쁜 눈썹을 세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왼쪽 두어 장 밖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 벌써 정가(程家) 소저의 거처를 알아 놓았는데, 바로 동인(同仁) 전당포 뒤에 있는 화원 가운데 있단 말이오.] 

[그것 좋군. 그렇다면 우리 오늘밤 가서 해치웁시다.] 

 

다른 또 하나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늙은이다. 둘은 조용히 소곤거리 듯 말을 했지만 곽정의 청각이 예민해서 똑똑히 다 들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틀림없이 강호에서 색시를 훔쳐 판다는 못된 무뢰배들 같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살펴보려는데 황용이 벌떡 깨어 일어나 큰 나무 뒤로 뛰어가며 소리를 지른다. 

 

[곽정 오빠, 어디 한번 나를 잡아 봐요.] 

 

역시 황용은 영리했다. 아이들이 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꾸미기 위해서 한 짓이다. 사뿐사뿐 피해 달아나는데 전연 무공을 모르는 것처럼 천연스럽게 달아난다. 말을 주고받으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치음에는 깜짝 놀라는 듯하다가 예사로운 일로 여기고 그대로 지나가면서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황용과 곽정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니 옷들이 남루한 것이 거지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이 멀리 사라지기를 기다려 황용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곽정 오빠, 저들이 오늘밤 정소저를 찾아가 뭔 어떻게 할 것 같아 보여요?] 

[아무래도 좋은 일 같아 보이지는 않아. 우리가 나서서 구해주면 어떨까?] 

[그야 물론이지요. 그런데 저 두 거지, 혹시 홍칠공의 아랫사람들이나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건 아닐 거야.] 

 

둘이 객점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거리를 걷다가 서성(西城)에 이르니 과연 커다란 전당포가 눈에 띄었다. 동인로당(同仁老當), 네 글자 하나하나가 사람의 키보다 더 크다. 전당포의 뒤에 화원이 있고 화원 가운데 그들의 말대로 집 한 채가 예쁘게 자리잡고 있었다. 문에는 파릇파릇한 세죽(細竹)의 주렴이 드리워져 있었다. 둘은 서로 바라다보며 웃다가 다른 곳으로 놀러 갔다. 저녁밥을 먹은 후에도 각자 방에서 한참 동안이나 쉬고 있다가 1경이 지난 후 다시 서성으로 와 화원의 담장을 뛰어넘었다. 방안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둘은 지붕 위로 올라가 발을 치마에 댄 채 몸을 거꾸로 내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름날의 밤이라 창문을 닫아걸지 않고 있었는데 대나무 주렴 사이로 비치는 방 안의 광경은 의의의 것이었다. 

 

방 안에는 일곱 사람이 있는데 모두 여자였다. 18,9세의 미모의 여자가 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가 바로 정소저라는 아가씨 같아 보였고, 나머지 여섯 사람은 하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각기 손에 병기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오구검(吳鉤劍)을, 또 하나는 일월쌍륜(日月雙輪)을 가졌고 그 밖의 하녀들은 단도(單刀)를 각기 가지고 있었다. 일월쌍륜이나 오구검 등 병기는 무공이 웬만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병기이다. 하녀들의 무공이 이와 같다면 소저의 무예는 정통한 것이 아닐까? 곽정과 황용은 원래 사람을 구해 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재미있는 구경을 보러 온 것같이 돼 버렸다. 호기심이 일어나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때 갑자기 담장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황용은 사람이 나타난 것을 알고 곽정의 옷깃을 잡아당겨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겼다. 이때 담장으로부터 두개의 그림자가 넘어 들어오는데 살펴보니 아침에 보았던 그 거지들이다. 그들이 창 밖으로 와서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하녀 하나가 주렴을 걷어들고 아는 체한다. 

 

[개방( 幇)의 영웅들이 오시는군요. 어서 올라오세요.] 

 

두 명의 거지가 방으로 들어서자 정소저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반긴다. 

 

[두 분의 존함을 듣고 싶습니다.] 

[제 성은 여(黎)가요, 이 사람은 내 사질(師姪)로 이름은 여조흥(余兆興)이라 합니다.] 

 

비교적 나이 든 사람이 이렇게 자기를 소개하자 정소저는 그의 얼굴 위의 상처를 바라다보다가 문득 생각이 떠오른다는 듯이 아는 체를 한다. 

 

[혹시 영웅께서는 강룡수(降龍手)라 불리는 여생(黎生), 여선배님이 아니십니까?] 

[눈치도 빠르십니다. 저는 존사(尊師) 되시는 청정산인(淸淨散人)을 한 번 뵈었을 뿐입니다. 깊이 사귀지는 못했지만 십분 앙모하고 있습니다.] 

 

곽정은 청정산인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청정산인 손불이(孫不二), 손선고(孫仙姑)는 전진칠자 가운데의 한 분이신데 그렇다면 이 정소저도 외인이 아니로구나.) 

 

[이렇게 영웅께서 의롭게도 도와주시니 후배는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모든 일 분부하시는 대로 좇겠나이다.] 

 

정소저의 겸손한 말을 여생이 받는다. 

 

[소저는 귀한 신분이신데 그런 미친 놈과 상면하는 것도 소저께는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정소저가 얼굴을 붉히자 여생이 다시 말을 잇는다. 

 

[소저는 어머님 방에 가셔서 쉬도록 하십시오. 여기 아가씨들은 그냥 이 방에 머물러 주시면 제가 알아서 그 미친 녀석을 적당히 처리하겠습니다.] 

[후배 비록 무예는 보잘것 없사오나 그따위 무뢰배쯤은 과히 무섭지 않습니다. 선배 영웅님께 말기고 가서 어디 죄송스러워 쉴 수 있겠습니까.] 

[우리 홍방주(洪幇主)와 귀파의 전진교주 왕중양 왕진인과는 평소부터 절친한 사이시라 한집안 같거늘 소저는 너무 겸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소저는 무예를 배우고도 한 번도 써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한번 써 보고 싶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여생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더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럼 모든 일, 여선배님과 여대가(余大哥)께 부탁드리고 물러가 있겠습니다.] 

 

정중히 절을 한 뒤 사뿐히 걸어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여생이 소저의 침상으로 가 비단 이불을 걷어올리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때가 꾀죄죄하게 묻은 옷 그대로 누워 버리며 여조흥을 건너다본다. 

 

[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다른 사람들과 파수나 보고 있거라. 내 명령 없이 먼저 손을 쓰면 안된다.] 

 

여조흥이 대답을 하고 사라진다. 여생이 얇은 비단 이불을 덮으며 하녀들에게 모기장을 치게 하고는 벽을 향해 누워 촛불을 꺼 버렸다. 

황용은 슬그머니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그들 개방( 幇)의 사람들이 방주(幇主)인 홍칠공을 닮아 모두 괴짜들이로구나. 그러나 저러나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는지?).  

그녀는 밖에서 사람들이 파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곽정과 둘이 처마 밑에 몸을 숨긴 채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다시 1경이나 지났을까? 3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땅땅땅 울리고 그 뒤를 이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화원 가운데로 돌이 하나 날아 떨어졌다. 황용이 곽정의 옷깃을 잡아당겨 사람이 온다는 신호를 보낸다. 잠시 후 아니나 다를까? 담장 밖으로 7,8명의 그림자가 넘어 들어와 2층 위로 뛰어오르며 불을 밝히고 소저의 침상으로 대든다. 불빛이 번쩍이는 가운데 나타난 사람들의 얼굴을 곽,황 두 사람은 분명히 보았다. 맨 앞에 선 두 사람은 구양공자의 수하로 장대를 들고 뱀을 몰던 백의의 남자들이요, 뒤에는 구양공자의 여제자들이었다. 

 

2명의 남자가 옆으로 비켜서자 4명의 여제자들이 달려들어 커다란 이불로 여생의 몸뚱이를 머리부터 뒤집어씌우자 다른 2명의 여제자가 큰 자루의 아가리를 벌리고 함께 여생의 몸을 번쩍 들어 자루 속에 집어넣고 자루 아가리를 오므려 버린다. 솜씨가 보통 재빠르지 않고 그 수단이 익숙하면서도 손발이 척척 맞는다. 2명의 여제자가 자루를 둘러메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려 밖으로 사라진다. 

곽정이 뒤를 쫓으려 하자 황용이 낮은 소리로 속삭인다. 

 

[가만히 있어요. 개방( 幇) 사람들이 먼저 떠난 후에 그 뒤를 밟아요.] 

 

곽정이 옳게 여기고 머리를 내밀어 밖을 살피니 구양공자의 8명의 제자가 여생을 잡아넣은 자루를 멘 채 앞서가고 그 뒤로 10여 명의 그림자가 쫓아가고 있는데 모두들 손에 죽장을 짚은 것이 개방( 幇)의 고수들 같아 보였다. 곽,황 두 사람은 그들이 멀찌기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제야 비로소 화원을 벗어나 맨 뒤에 처져 가고 있는 한 거지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이나 쫓아가자 그들은 어느덧 교외에 이르렀다. 앞에 선 8명이 자루를 둘러맨 채 커다란 건물로 들어가자 뭇 거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그 건물을 포위했다. 

 

황용은 곽정의 손을 잡고 뒷담장으로 돌아가 몸을 날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은 원래 유씨(劉氏) 문중의 사당이었다. 대청에는 무수한 신주들이 모셔져 있고 대들보 사이에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 유씨 일족 가운데 벼슬을 지냈던 사람들의 관직이 씌어 있었다. 대청에는 너댓 자루의 홍촉이 휘황하게 밝혀져 있고 그 중앙에 부채를 든 구양공자가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둘은 그의 무공이 심오한 것을 알기 때문에 발각될까 두려워 더 접근하지 못하고 창 밖에 몸을 숨긴 채 안을 엿볼 수밖에 없었다. 

(그 여생이라는 거지가 구양공자의 적수가 되기에는 부족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8명의 제자가 자루를 내려놓으며 아뢴다. 

 

[공자님, 정소저를 모시고 대령했습니다.] 

 

구양공자는 냉소를 머금은 채 대청 밖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친구 여러분, 기왕에 여기까지 오셨으니 들어와 차라도 한잔 드시지 않고?] 

 

(구양공자의 눈치가 빠르기도 하구나.) 

곽정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담장 위와 집 모퉁이에 숨어있던 거지들을 구양공자는 벌써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생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구양공자는 고개를 떨구고 발 아래 놓여 있는 자루를 쏘아보며 웃는다. 

 

[미인의 왕림이 이렇게까지 쉽게 이루어질 줄은 몰랐는걸.] 

 

몇 발짝 다가서며 손에 쥔 부채를 휘두른다. 벌써 그 부채는 철필(鐵筆)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황용과 곽정은 그의 수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벌써 자루 속에 있는 적의 정체를 알고 이제 독수를 뻗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황용은 손에 벌써 3개의 강침(鋼針)을 꺼내 들고 구양공자가 움직이기만 하면 발사하여 여생을 구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때 쉭쉭 바람 소리가 일며 창 밖으로부터 두개의 수전(袖箭)이 구양공자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개방( 幇)의 인물들 가운데서도 위기 일발의 급박한 상황을 간파하고 선수를 쓴 것이다. 구양공자가 왼손을 뒤집어 식지와 중지, 무명지와 새끼 손가락사이에 각기 수전 하나씩을 받아 끼고 분질러 버리니 수전이 네토막이 난다. 거지들은 그의 놀라운 무공에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다보고 서 있을 뿐이다. 이때 여조흥이 먼저 소리를 지른다. 

 

[여사숙, 빨리 나오세요!] 

 

자루가 찢어지는 찍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비도(飛刀)가 날며 비도의 섬광 가운데 여생이 떼굴떼굴 굴러 나오며 우뚝 서서 방비를 한다. 그는 벌써부터 구양공자의 무공이 심오하여 정면으로 대결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루 속에 숨어 들어와 급습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만 구양공자에게 먼저 들통이 나고 말았다. 

 

[미인이 거지로 둔갑을 하다니, 하하하...... 자루 속의 마술이 훌륭하오!] 

 

구양공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여생이 맞선다. 

 

[이 지방에서 사흘 동안에 네 명의 아가씨가 실종됐는데 모두가 당신의 훌륭한 솜씨였것다.] 

[보응현(寶應縣)이 결코 가난한 고장이 아닐 텐데 어찌해서 당신 같은 사람이 다 거지 노릇을 하오?] 

[내 본래 이곳 거지가 아니오. 어제 이곳에서 홀연히 몇 명의 미모의 아가씨들이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내 일시 호기심이 발동해서 구경을 온 것이라오.] 

 

여생은 화도 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 아가씨들이라는 것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미인들인데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체면을 보아 되돌려 드리리다.] 

 

구양공자가 이렇게 말하며 손짓을 하자 몇 명의 여제자들이 안으로 들어가 네 아가씨를 데리고 나왔다. 옷은 모두 흩어질 대로 흩어지고 얼굴은 초췌할 대로 초췌한데다 울어 눈들은 퉁퉁 부어 있었다. 

여생은 그들의 모양을 보자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당신의 이름은 뭐며 어느 분의 문하요?] 

 

구양공자는 여전히 아랑곳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복성으로 구양이오. 그래 노형이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요?] 

[어디 한번 겨루어 몹시다.] 

[그것 좋은 얘기요. 그럼 어디 대들어 보시오.] 

[좋소!] 

 

오른손을 번쩍 들어 공격을 하려는데 돌연 눈앞에 흰 그림자가 번쩍이고 등뒤로 바람 소리를 느끼며 앞으로 펄쩍 뛰었다. 하마터면 적에게 목을 긁힐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재빨리 앞으로 피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목덜미의 요혈을 잡힐 뻔했다. 

여생은 개방( 幇) 가운데서도 꽤 명성이 있었고 무공 또한 강한 편이다. 그래서 양호 양절(兩湖兩浙)의 뭇 거지들은 그의 통솔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만 첫 번째 공격에 적의 술수에 걸려들 뻔하지 않았는가? 얼굴이 화끈거려 몸을 돌리지도 않고 장풍을 뒤로 휘갈겼다. 

 

[저이도 강룡십팔장을 쓸 줄 아는군요.] 

 

황용이 곽정의 귓가에 소곤거리자 곽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구양공자는 그의 반격이 날카로운 것을 보고 감히 맞설 생각은 하지 않고 옆으로 피했다. 그제야 여생이 몸을 돌이키고 진격을 하면서 두 손을 가슴에 댄 채 휙 한 바퀴 원을 그렸다. 

 

[이건 파옥권(破玉拳)의 상여호벽(相如護壁)이지.] 

 

곽정의 말에 이번에는 황용이 고개를 끄덕인다. 구양공자는 여생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상대로 여겼던지 부채를 접어 허리에 꽂은 후 상대의 공격 범위를 벗어나며 번개처럼 그의 오른쪽 어깨를 휘갈겼다. 여생이 파옥권 가운데의 화씨헌박(和氏獻璞)으로 상대의 공격을 파헤쳤다. 구양공자는 다시 왼손 주먹을 낚시처럼 구부리고 상대방의 어깨가 접근하는 순간을 노려 그의 등뒤로 돌아 두 손의 다섯 손가락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뻗어 그의 등뒤의 요혈을 찌르려고 덤볐다. 

황용과 곽정이 동시에 깜짝 놀랐다. 

(이번에는 막기 어렵겠구나.) 

 

이때 담장 밖에서 파수를 보던 거지들도 여생이 적과 대결하는 것을 보고 분분히 들어와 구경을 하고 있다가 위급항을 보고 함께 대들려고 하고 있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여생은 등뒤의 바람 소리가 벌써 옷깃에 와 닿는 감촉을 느끼는 찰나 손을 뒤집어 장풍을 날렸다. 역시 강룡십팔장 가운데의 신룡파미(神龍擺尾)를 쓴다. 구양공자는 감히 막을 생각은 못 하고 몸을 뒤로 벌렁 제쳐 피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구나!) 

여생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몸을 정면으로 돌리고 대적했다. 그의 무공은 구양공자의 오묘함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다. 3,40초를 대결하는 가운데 벌써 5,6번이나 위험한 고비에서 겨우 신룡파미의 솜씨로 목숨을 구한 셈이다. 

 

[칠공께서 겨우 저 일 장밖에 전수해 주지 않은 모양이에요.] 

 

황용이 가만히 속삭이는 말을 듣고 곽정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자기가 그때 황룡유회로 양자옹과 대결했던 일이며, 홍칠공이 개방( 幇)의 수뇌 인물에게까지 겨우 1장 밖에 알려 주지 않고도 자기에게는 한 달 동안에 15장이나 알려 준 것에 생각이 미치자 다시 한 번 고마운 생각이 뭉클 가슴을 적셔 왔던 것이다. 

 

구양공자는 계속 한 발 한 발 접근하고 여생은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대청의 모퉁이로 몰린다. 구양공자도 여생의 한 가지 솜씨만이 위력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솜씨를 발휘하자면 반드시 몸을 돌려 세우고 뒤로밖에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모퉁이로 몰고 들어가 반격을 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여생도 경험이 상당히 풍부한 편이라 즉시 구양공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발걸음을 옮겨 중앙으로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한 발을 떼어 놓는데 구양공자가 너털웃음을 길게 터뜨리며 주먹을 휘둘러 그의 아래턱을 명중시켰다. 여생이 깜짝 놀라 어깨를 번쩍 쳐들고 막으려고 했지만 적의 왼손 주먹이 또 한 번 날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와 가슴을 5,6개의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여생은 어질어질한지 몇 번 비틀거리다 마침내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개방( 幇)의 사람들이 구출하기 위하여 대들었지만 구양공자가 몸을 돌려세우며 앞선 두 명의 거지의 머리를 양손에 잡아 부닥뜨리니 두 사람이 동시에 정신을 잃고 나가떨어진다. 뒤에 있던 거지들이 흠칫 놀라 감히 대들 생각을 못 하고 주춤거리자 구양공자가 득의 양양하여 웃어 제낀다. 

 

[내가 누구라고. 그래 네놈들 더러운 거지에게 말려들 줄 알았더냐? 어디 한번 내 솜씨가 어떤지 구경 좀 하겠느냐?] 

 

두 손으로 박수를 치자 2명의 여제자가 안으로부터 한 여자를 끌고 나왔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나오는 여자는 바로 정소저다. 모였던 거지들도 놀랐지만 황용과 곽정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구양공자가 손을 흔들자 여제자들이 정소저를 다시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하하하. 늙은 거지 녀석이 위층에서 자루 속으로 기어 들어갈 때 나는 아래층에 지키고 있다가 정소저를 모시고 먼저 와서 네 놈들의 왕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거지들이 어이없이 서로 바라다보며 일패 도지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구양공자가 부채를 흔들며 다시 입을 연다. 

 

[개방( 幇)은 명성이 쟁쟁하여 대단한 줄 알았더니 이게 도대체 뭐냐? 닭이나 훔치고 개나 훔치며 뱀이나 주무르던 솜씨를 가지고 대들다니? 웃다가 이빨이 빠질 지경이로구나. 앞으로 구양공자 하시는 일에 감히 참견하려 나서지는 않겠지? 내 잠시 이 늙은 거지의 목숨은 살려 주나 그 대신 기념품은 하나 남겨 두기로 하자.] 

 

두 개의 손가락을 뻗어 여생의 눈에 꽂으려 했다. 

 

[잠깐만!] 

 

한 사람이 대청으로 뛰어들며 장풍으로 구양공자를 밀어 젖힌다. 구양공자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장풍이 자기 가슴을 향해 불어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급히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장풍의 여파에 말려들어 흔들흔들하다가 결국 뒤로 한 발 물러서며 깜짝 놀란다. 

(서역(西域)을 떠난 후 계속해서 고수를 만나게 되는구나.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공력이 이렇게나 대단하단 말이냐?)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다보다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와 여생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 조왕부에서 동석한 바 있는 소년 곽정이 아닌가? 무공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알았는데 장풍이 그렇게나 셀 줄은 몰랐다. 

 

[못된 짓만 골라 하더니 아직까지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대드니 정말 천하 호한들이 안중에 없다는 말이오?] 

 

곽정이 호통을 친다. 구양공자는 눈을 치켜 떠 바라다보며 빈정거린다. 

 

[그래 너도 천하 호한 축에 낀단 말이냐?] 

[후배가 감히 어디라고 호한 축에 낄 수 있나요. 외람되지만 공자께 한 말씀 드릴 뿐이오. 빨리 정소저를 되돌려 보내시고 일찌감치 서역으로 돌아가시오.] 

[만약 제가 자네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그래 어쩔 텐가?] 

[곽정 오빠, 그 못된 놈 시원하게 두들겨 패기나 해요!] 

 

과정이 미처 구양의 말에 대답도 하기 전 창 밖에 서 있던 황용이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구양공자는 황용의 목소리를 듣자 몹시 반가운 눈치다. 

 

[황소저, 황소저께서 정소저를 되돌려 보내시라면 그야 어렵지 않지요. 황소저가 나를 따라오신다면 정소저뿐만 아니라 내 데리고 있는 여제자들마저 전부 집으로 되돌려 보내겠소. 또 그뿐 아니라 앞으로는 절대 다른 여자를 찾지 않겠소!] 

 

황용이 대청으로 뛰어들면서 웃는다. 

 

[그거 좋군요. 우리가 서역으로 놀러간다, 아주 좋은 얘기예요. 곽정 오빠 어떻겠어요?] 

 

구양공자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아니, 난 황소저 한 분만 모시고 갈 생각인데 저 비린내 나는 애를 데리고 가 무얼 하겠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황용이 벌컥 화를 내며 철썩 뺨을 때렸다. 황용이 구양공자에게 대들었다. 

 

[아니 누굴 욕해요? 감히.] 

 

구양공자는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며 생글생글 웃는 황용의 모습이 황홀해 넋을 잃고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뺨을 얻어맞은 것이다. 아무런 방비도 하고 있지 않았는데다 또 황용의 솜씨는 낙영장 가운데서도 오묘한 술수였던 것이다. 황용의 공력이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구양공자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왼손을 뻗어 황용의 앞가슴을 틀어잡았다. 황용은 피하지도 않고 두 손을 번쩍 들어 구양공자의 골통을 내리쳤다. 구양은 원래가 호색한이라 그녀가 피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반가운 생각에 머리에 두어 대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황용의 앞가슴을 건드리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손끝이 그녀의 옷깃에 가 닿는 순간 뜨끔하게 찔리고 말았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황소저는 연위갑(軟蝟甲)을 입고 있었지.) 

어루만지겠다는 생각 때문에 손에 힘을 주지 않아 다행히 크게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즉시 팔을 뻗어 내리치는 황용의 두 주먹을 막았다. 

 

[아주 나를 우습게 여기고 있군요. 얻어맞기만 하고 때리지는 않으니 말예요?] 

 

황용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러나 구양공자의 마음은 나긋나긋하기만 했다. 오히려 미운 것은 황용이 아니라 눈에 거슬리기만 하는 곽정 편이다. 

(차라리 이놈을 없애 버려야 황용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겠구나.) 

눈은 황용을 바라다본 채 뒷발질로 곽정의 앞가슴을 걷어찼다. 어찌나 빠르고 잽싼지 모르는 돌격이다. 바로 서독(西毒)인 구양봉(歐陽鋒)의 가전 절기이다. 얻어맞기만 하면 골절에 늑골이 부서지는 것이다. 곽정이 놀라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급히 몸을 돌리면서 반격을 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곽정은 엉덩이를 차이고 구양은 다리를 얻어맞았다. 두 사람 모두 골수에 베이는 통증을 느끼며 각자 몸을 돌려세우고 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개방( 幇)의 고수들은 모두 그들이 싸우는 것을 보며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저 일 장은 여생의 구명 절기인 신룡파미(神龍擺尾)가 분명한데 어째 저 사람도 쓸 줄 알까? 뿐만 아니라 더 빠르고 정확해서 여생보다 우위에 있는걸.) 

이때 개방 가운데 한 사람이 벌써 여생을 부축해 일으켜 세워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곽정의 장력이 세고 또 초수가 정묘함을 보면서 감탄을 하고 있었다. 평생 보지 못한 장관이다. 그는 다만 신룡파미 하나만 알고 있었는데 곽정의 다른 장법이 모두 자기가 알고 있는 신룡파미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룡십팔장은 홍방주가 절대로 남에게 알려 주지 않는 비법이라 나도 큰 공을 세운 덕택으로 겨우 하나를 배웠을 뿐인데 저 소년은 십팔장 모두를 배운 것이 아닌가?) 

구양공자도 곽정과 대결을 하면서 속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두 달 사이에 무공이 이토록 정진할 수 있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은 40여 초나 싸웠다. 곽정은 벌써 15장을 몇 차례나 반복 사용하면서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방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구양의 무공이 워낙 우세했기 때문에 승리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다시 10여 초를 겨루는 사이 구양공자의 권법이 어느덧 바뀌어 있었다. 앞뒤로 날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재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곽정이 어리둥절하여 틈을 보이는 사이 왼쪽 엉덩이를 차이고 말았다. 

즉시 발걸음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다행히도 그의 주요 무공은 장법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15장을 끝에서부터 다시 역순으로 쓰기 시작했다. 구양공자는 그의 공격이 이상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멈칫하고 접근을 못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수십 초를 겨루고 있다가 곽정의 장법이 변하는 이치를 깨달은 듯 허를 보아 공격을 시도한다. 

 

곽정은 뒤에서부터 앞으로, 앞에서부터 뒤로 계속 강룡십오장의 순서를 바꾸어 가며 버틴다. 제15장인 어약어연(魚躍於淵)이 끝나면 계속되는 것은 항룡유회(亢龍有悔)다. 역순으로 공격을 하게 되면 그건 다시 어약어연이 되는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는 틈을 노려 구양공자는 즉시 허를 발견하고 그의 어깨를 틀어잡으려고 대들었다. 곽정은 위급한 나머지 15장의 순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냥 손바닥을 뒤집어 적의 손등을 <퍽> 하고 쳤다. 이번의 공격은 아무런 목적이나 저의 없이 써 본 솜씨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만 예기치 않게 적의 팔뚝을 적중시키고 말았다. 구양공자가 깜짝 놀라 뒤로 몇 발짝 피하며 손을 뿌렸다. 다행히 완골이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곽정은 새로운 용기가 솟았다. 

(이렇게 손을 뒤집어 써 보는 운력(運力)이 거의 홍칠공께서 알려 주신 십오장과 비슷하구나. 좀더 힘을 썼더라면 좋았을걸. 십팔장을 모두 배워 반복해 쓸 수만 있다면 허점이 없었을 텐데. 나는 아직도 어깨 밑과 왼쪽 엉덩이, 오른쪽 허리에 빈틈이 있다. 나머지 세 가지 장법만 쓸 수 있다면 완전할 텐데.) 

이렇게 생각을 해 보는데 구양공자가 재차 공격해 왔다. 격전을 벌이는 가운데 연구고 사색이고 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강룡장(降龍掌)의 장법에 따라서 착실하게 엉덩이와 오른쪽 허리를 방어하기에 바빴다. 구양공자는 낭패함을 느꼈다. 

(장법이 불완전하기에 오래만 싸우면 꼭 이길 줄 알았는데 어째서 갑자기 세 가지나 재주가 늘었을까?) 

곽정은 싸우면 싸울수록 솜씨가 숙달됨을 느꼈다. 몇 번이나 반복을 해 보는 사이 혼자 창안해 본 3 장을 스승께 배운 15장 가운데 섞어 쓸 수 있게 되었다. 구양공자는 몇 차례의 선제 공격이 소용없게 되자 권법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곽정의 기력을 소모시켜 보자는 저의였던 것이다. 그런 

데 곽정의 17장 타법(打法)이 먼저와는 어딘가 다름을 발견한 것이다. 

(옳지! 이 일 장은 아직 완전히 숙달되지는 않았구나. 그러길래 처음에는 쓰지도 않았구나.) 

 

갑자기 몸을 날리며 왼손으로 곽정의 정심(頂心)을 틀어잡는 자세를 취하고 발길로 그의 왼쪽 엉덩이를 걷어찼다. 곽정이 세 가지 장법을 창안하여 맞서기는 했지만 아직은 미숙한데다 위력도 충분치 못한 처지인데 적이 자기의 약점을 노리고 치명적인 공격을 해 오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서 반격을 하다가 그만 손을 거두고 몸을 옆으로 돌려 피하려고 했다. 적과 맞서 싸우는 순간 멈칫거리는 것은 무학 최대의 금기이다. 차라리 그냥 원래대로 공격을 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상대를 치지는 못해도 방어만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몸을 돌리는 바람에 빈틈은 더욱 커지고 만 셈이다. 이제 곽정은 걷어차여 중상을 입게 되었다. 이 광경을 본 황용이 손을 번쩍 들어 7,8개의 강침(鋼針)을 구양공자를 향해 쐈다. 그러나 구양공자가 부채를 휘둘러 전부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복사뼈가 시큰하더니 무언가가 혈도 위에 와 부딪쳤다. 곽정을 걷어차기는 했는데 맥이 하나도 없다. 깜짝 놀란 구양공자가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른다. 

 

[어느 쥐새끼 같은 놈이 이러느냐? 정정당당하게 나서지 못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피하려고 했지만 어느 틈에 입 안에 무엇이 들어와 막힌다. 비린내와 시큼한 맛이 나는 괴상한 물건이다. 놀랍고도 화가 치밀어오른다. 뱉고 보니 그것은 닭 뼈다귀다. 구양공자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려는데 대들보 위에서 먼지가 털썩 쏟아져 내려왔다. 먼지를 털며 옆으로 몇 발짝 피하는데 또 한 개의 닭 뼈가 퍽 날아왔다. 얻어터진 이빨이 시큼시큼 아픈데 이번에 날아온 것은 닭다리였다. 구양공자의 무공이 탁월해 평생 이런 우롱은 당해 본 적이 없다. 대들보 위에 사람 그림자가 번쩍 하는 것을 보는 순간, 몸을 날리며 무서운 장풍을 허공에서 쪼갰다. 그런데 또 뭔가가 손바닥에 날아와 붙는다. 화가 나서 땅바닥에 내동댕이를 치며 내려다보니 이건 씹다 만 닭 발가락이다. 그때 대들보 위에서는 <하하하> 너털웃음이 터졌다. 

 

[그래 이놈, 거지의 닭이나 훔치고 개나 훔치던 그런 손재주가 뭐 어쨌다고?] 

 

황용과 곽정은 귀익은 목소리를 듣고 너무나 반가왔다. 

 

[칠공님!] 

 

동시에 외치는데 홍칠공이 대들보 위에 편안하게 앉은 채 손에는 닭 한 마리를 들고 맛있게 뜯어먹고 있었다. 구양공자는 그를 발견하는 순간 간담이 싸늘하게 식음을 느꼈다. 

 

[아, 홍세백(洪世伯) 아저씨, 이 조카 이렇게 머리를 조아립니다.] 

 

입으로는 머리를 조아린다 하면서도 두 무릎조차 꿇지 않고, 그대로 선 채다. 홍칠공은 닭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중얼거리듯 말을 한다. 

 

[음, 그래도 이 늙은이를 알아는 보는군.] 

[지난 번 뵈었을 때 미처 알아뵙지 못한 죄, 죽어 마땅한 줄 압니다. 뒤에 비둘기를 서역으로 날려 가숙(家叔)의 말씀을 듣고야 알았습니다. 가숙께서는 이 조카에게 분부를 내리셔서 다음번 칠공을 뵙게 되거든 꼭 안부를 여쭈어 달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아니 그놈의 독물이 호들갑을 떨었나? 잔소리가 많았구나. 이 늙은 거지도 먹을 것을 훔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양가집 규수를 훔치지는 않았고 훔쳐오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없으니 편안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네 녀석 삼촌, 그대 염병에 걸리지도 않았더란 말이냐?] 

 

구양공자가 우물쭈물하자 홍칠공이 다시 말문을 연다. 

 

[방금 내, 네 말을 듣다 보니 내가 닭이나 개를 훔치고 뱀이나 주무르던 손이 어떻다고 굉장히 깔보는 것 같은데 사실이 그렇것다?] 

 

구양공자는 점점더 난처해졌다. 

(벌써부터 숨어 있었구나.) 

 

[제가 감히 이 영웅께서도 칠공의 문하인 줄 몰라뵙고 철없이 지껄인 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칠공이 <하하하> 길게 웃으며 대들보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네놈이 이자를 영웅이라고 하다니? 하하하. 그러나 이자가 너를 이기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네놈은 더욱 훌륭한 영웅이 아니겠느냐? 창피하지도 않단 말이냐?] 

 

구양공자는 견딜 수 없이 난처했다. 적수가 아니니 맞설 수도 없고 비위를 건드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네 이놈, 늙은 독물에게서 몇 가지 재주를 배웠다고 중원에 와서 까불어 대지만 흥, 홍칠공 죽기 전에는 어림없을걸.] 

[칠공께서는 제 가숙과 명성을 함께 하시니 후배는 칠공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아 그래, 내가 나이 많음을 빙자해 젊은 네놈을 누른다는 뜻이렷다?] 

 

구양공자는 묵묵 부답이다. 

 

第 三十三 章. 화쟁 공주의 소식 

[이 늙은이 수하에 비록 대규화(大叫化), 중규화(中叫化), 소규화(小叫化) 등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내 제자들은 아니야. 이 여생(黎生)으로 말한다 해도 내게 기초적인 무술을 약간 배웠을 뿐이니 내 제자라 할 수는 없는 게다. 네놈이 날 보고 큰소리만 친다고 경멸할는지는 모른다만 내 정말 한 사람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기로 한다면 설마하니 네놈만이야 못할 리 있겠느냐?] 

[그야 물론 여부가 있겠습니까?] 

[네놈이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나를 욕하고 있으렷다.] 

[감히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홍칠공은 구양공자가 못마땅해서 계속 꼬집고 들었다. 이때 황용이 말참견을 하고 나선다. 

 

[칠공님, 저자의 거짓말 더 들으실 것도 없어요. 마음속으로는 칠공을 악독하게 욕하고 있어요.] 

 

홍칠공은 정말 화가 치밀어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이놈아, 네가 감히 내게 욕을 해!] 

 

전광 석화처럼 손을 뻗어 구양공자의 수중에서 부채를 뺏아 펴보니 몇 종이의 모란꽃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북송(北宋)의 대가인 서희(徐熙)가 그린 것이었다. 또 뒤에는 몇 줄의 글이 씌어 있었다. 맨 마지막에 백타산주(白駝山主)란 낙관이 찍혀 있는 것이 구양공자 자신이 쓴 것임이 분명했다. 홍칠공은 아니꼽다는 듯이 코방귀를 뀌며 황용을 향해 묻는다. 

 

[그래 이 글씨, 네가 보기에 어떠냐?] 

[유치하기 짝이 없군요. 전당포 주인이나 쓰는 글씨 같군요.] 

 

구양공자는 평소 자기는 풍류 인물이요, 문무를 겸비한 재사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황용의 아니꼬운 비평을 듣고보니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치뜨고 황용을 바라다보니 촛불 빛에 요염한 자태는 여전히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미녀다. 

홍칠공이 부채를 손바닥에 펴놓은 채 입을 대고 몇 번 문지른다. 방금 닭을 뜯던 입가장자리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 번 기름 묻은 입을 씻어 놨으니 부채는 이제 쓸모 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그냥 손에 쥔 채 우그러뜨려 땅바닥에 집어던진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야 예사로 생각하고 말았지만 구양공자는 그렇지 못했다. 이 부채야말로 적을 제압하고 무찌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병기였기 때문이다. 부채자루나 살은 모두 순강(純鋼)을 끓여 부어 만든 것인데 이 모양을 만들어 놨다면 홍칠공의 팔 힘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내 너를 상대로 손을 써서 죽인다 하더라도 네놈이 승복하지 않을 모양이니 즉시 제자를 하나 거두어 너를 치게 하마.] 

 

구양공자가 곽정을 가리키며 말문을 연다. 

 

[방금 제가 곽형과 더불어 수십 초를 겨뤘습니다. 만약 선배님께서 나서시지 않으셨다면 제가 이겼을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홍칠공이 앙천 대소를 한다. 

 

[곽정아, 네가 내 제자냐?] 

 

곽정은 전날 그가 홍칠공을 향해 몇 번이나 절을 했었지만 홍칠공도 답례로 절을 하며 거절했던 일을 생각했다. 

 

[이 후배, 제자 될 복도 타고나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홍칠공이 다시 구양공자를 향해 묻는다.  

 

[그래 어떠냐?] 

 

구양공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늙은 거지가 거짓말은 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저 어린 것이 어디서 그 묘한 장법을 배워 왔지?) 

 

[곽정아, 내 너를 제자로 거두고 싶은데 어떠냐? 이 늙은 거지의 제자가 되는 것이 창피하지 않겠느냐?] 

 

곽정은 기뻤다. 급히 땅에 엎드려 여덟 번이나 절을 했다. 

 

[바보 같은 녀석. 어째 사부라고 부르지 않느냐?] 

[제자에게는 원래 여섯 분의 사부가 따로 계십니다. 아무래도 제...., 생각으로는...., 여섯 분의 은사님께 여쭈어 보아야.....] 

[그래, 네 말이 옳다. 군자는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내 우선 네게 삼 장만 알려 주마.] 

 

즉시 강룡십팔장 가운데 남은 3장을 구양공자의 면전에서 가르쳐 주었다. 곽정이 독창해 낸 3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홍칠공은 곽정이 서너 번 연습하기를 기다려 다시 말을 꺼낸다. 

 

[얘 곽정아, 네가 내 대신 저 못된 녀석을 두들겨 주렴.] 

 

곽정 자신이 구양공자의 행각을 미워하고 있었던 터라 홍칠공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그를 향해 장풍을 날렸다. 구양공자도 몸을 옆으로 돌리며 발길을 옮겨 반격을 했다. 둘은 다시 한 번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곽정은 이제 강룡십팔강을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배운 것이다. 이렇게 되니 먼저 익혔던 십오장의 위력이 더욱 강해졌다. 구양공자는 네 가지 권법(拳法)을 변화 무쌍하게 놀리며 대들었지만 팽팽하게 맞설 뿐 승부가 나지 않는다. 다시 수십 초를 더 겨루는 사이에 구양공자의 마음은 초조해지기만 했다. 

 

(오늘 가전의 절기를 다 발휘해 보아도 이기기는 틀렸구나. 내 어려서부터 숙부님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는데 늙은 거지가 이제 막 새로 거둬들인 제자 하나도 이기지 못하다니 숙부님의 명성이 이제 늙은 거지 때문에 엉망이 되는구나.) 

갑자기 주먹으로 곽정을 쳤다. 곽정이 팔을 들어 막는다. 그런데 구양공자의 팔은 뼈도 없는지 가볍게 구부러지며 <퍽>하는 소리와 함께 곽정이 고개를 얻어맞았다. 깜짝 놀란 곽정이 고개를 숙이고 빠져나오며 반격을 했지만 구양공자는 살짝 옆으로 피하며 또 한 번 쳤다. 곽정이 다시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펄쩍 뛰어 피하는데 구양공자의 팔이 부드러운 채찍처럼 자유 자재로 변하며 다시 또 한 번 때린다. 연거푸 세 번이나 얻어맞은 것이다. 

 

[곽정아, 손을 멈추어라. 네가 진 것이다.] 

 

홍칠공의 말에 곽정이 1여 장이나 몸을 솟구쳐 피해 나왔다. 구양공자에게 얻어맞은 곳이 꽤 아팠다. 

 

[권법의 고명함이 여간 대단하지 않군요. 과연 나는 당신의 적수가 아니오.] 

 

겸손하게 승복하자 구양공자는 득의 만면해서 황용을 건너다본다. 이때 홍칠공이 다시 말문을 연다. 

 

[늙은 독물이 매일 뱀이나 기르더니 연피사(軟皮蛇) 권법을 거기서 터득한 모양이로구나. 내 아직 이 권법을 파할 계교가 없구나. 재수 좋은 걸로 여기고 얌전하게 물러가거라.] 

 

이 말을 들은 구양공자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삼촌이 이 금사권(金蛇拳)을 가르쳐 주실 때 생사의 고비가 아니거든 절대로 쓰지 말라고 천 번 만 번 당부하셨는데 내 오늘 이놈의 늙은이 앞에서 쓰고 말았으니 만일 숙부가 아시는 날에는 대단한 책망을 듣겠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득의 양양했던 생각이 사라지고 만다. 홍칠공을 향해 읍을 한 뒤 총총 밖으로 사라지려고 했다. 

 

[잠깐만, 내 할말이 있어요!] 

 

황용이 외치는 소리에 구양공자가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놀란다. 황용이 홍칠공을 향해 날아갈 듯 사뿐히 절을 한다. 

 

[칠공, 오늘 저까지 제자로 거두어 주세요.] 

[안 돼. 내 관례를 어기고 하나의 제자를 두었다만 어찌 하루 사이에 두 명씩이나 거둔단 말이냐? 하물며 너는 네 아버님의 재주가 그토록 대단하신데 어떻게 이 늙은 거지를 사부로 모시겠느냐!] 

 

홍칠공은 살래살래 머리를 저으며 웃는다. 

 

[아, 이젠 알겠어요. 우리 아버지가 무서워서 그러시는군요?] 

[아니, 내가 무얼 무서워한단 말이냐? 그렇다면 내 너를 제자로 거두어 주마. 설마하니 황노사(黃老邪)가 나를 잡아먹기야 하겠느냐.] 

 

홍칠공은 원래 황용을 좋아하고 있었던데다 자기 아버지가 무서워서 그러느냐고 묻는 황용의 술수에 그만 말려든 것이다. 

 

[좋아요. 장부 일언이 중천금인데 후회하셔도 소용없어요. 사부님, 그래 거지들이 뱀을 잡을 때 도대체 어떻게 잡는지 가르쳐 주세요.] 

 

황용이 웃으며 하는 말에 홍칠공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 아가씨가 총명하기 짝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대답한다. 

 

[뱀을 잡을 때는 칠촌(七寸)쯤 잡아야 하는데 두 손가락을 이렇게 해서 집으면 그만야. 제아무리 지독한 독사라도 일단 눌리기만 하면 꼼짝달싹 못 하고 말지.] 

[아주 굵은 뱀은 요?] 

[왼손을 가지고 뱀이 물게 유인을 하면서 오른손으로 칠촌을 치지.] 

[손이 재빨라야 되겠군요.] 

[그야 물론이지. 왼손에 약이나 바르면 그게 제일 안전하고 좋지. 혹시 물리더라도 괜찮을 테니까.] 

 

황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홍칠공을 향해 무언가 눈짓을 했다. 

 

[사부님, 그럼 제 손에 약 좀 발라 주세요.] 

 

홍칠공이 무서운 독을 가진 뱀을 만나게 되면 그냥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로 때려잡으면 그만이지 무슨 뱀 잡는 약을 몸에 지니고 다니겠는가? 그러나 황용이 눈짓을 하는 바람에 그냥 등에 이고 다니는 호리병에서 술을 쏟아 황용의 두 손에 발라 주었다. 황용은 손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말아 본 뒤에 다시 구양공자를 향해 입을 연다. 

 

[여보세요, 저는 이제 홍칠공의 제자가 되었어요. 어디 한 번 당신의 연피사(軟皮蛇) 권법의 맛 좀 봅시다. 그러나 먼저 말해 둘 것은 내 두 손에 당신을 제압할 수 있는 독약을 발랐으니 조심하라는 거예요.] 

 

(아무렴, 내 꼭 손을 써야 잡아올 줄 알고, 어림없는 수작이다.) 

이렇게 생각한 구양공자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아가씨 손에 죽을 수 있다면 그도 큰 영광이지요.] 

[다른 무공은 보잘것없는 것들이라 그 더러운 사권(蛇拳)만 구경하면 돼요. 다른 권법이나 장법으로 나오면 지는 거예요.] 

[그저 아가씨 분부라면 뭐든지 복종하겠나이다.] 

[못된 짓만 골라 하면서도 내게는 점잖은 얘기만 하시는군. 자. 이거나 받아요.] 

 

<쉭>하고 주먹을 날린다. 홍칠공에게서 배운 파옥권(破玉拳)이다. 구양공자가 몸을 비스듬히 피하자 황용은 왼발 옆차기를 하면서 오른손을 낚시 바늘처럼 구부린다. 홍칠공에게서 배운 다른 하나의 무공인 비서장(飛絮掌)이다. 

구양공자는 그녀의 장법이 오묘함을 보고는 얕잡아 볼 수 없었던지 오른팔을 뻗으며 한 바퀴 돌아 그녀의 어깨를 친다. 그의 금사권(金蛇拳)은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황용의 어깨에 가 있었다. 순간 그녀가 연위갑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냥 내려치면 자기의 주먹만 피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급히 손을 거두는데 황용의 쌍장이 어느 틈에 자기의 얼굴 앞에 와 있었다. 구양공자는 소매깃을 날려 황용의 쌍장을 막는다. 황용은 연위갑을 입은데다가 손에는 약까지 발랐다니 때릴 곳은 얼굴밖에 없다. 이렇게 되고 보니 구양공자는 수세에 몰려 얻어맞기만 하는 꼴이 되었다. 금사권의 위력이 제아무리 교묘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황용의 천변 만화하는 장영 가운데 요리조리 높고 낮게 피하고 있었다. 

 

(내 만약 얼굴을 때려 이긴다 하더라도 미인에 대해 실례를 범하는 결과가 될 것은 뻔하고, 그렇다고 머리채를 나꿔챌 수도 없으니 도대체 이를 어쩐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구양공자는 갑자기 소매깃을 찢어 쌍장에 감고 손바닥을 뒤집어 갈고리처럼 대들며 금나수(擒拿手)로 황용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황용이 펄쩍 뛰어 권외로 빠져 나오며 소리를 지른다. 

 

[내가 이겼어요. 그건 사장(蛇掌)이 아니잖아요!] 

[아, 내가 깜박 잊었군요.] 

[그 사장(蛇掌)을 가지고도 이 홍칠공의 제자를 이기지 못하니 별로 대단할 것도 없군요. 조왕부(趙王府)에서 무예를 겨룰 때 내가 한 번 졌으니 이제 피장파장 승부가 결정되지 않았으니 어때요. 또 한 번 겨루어 결판을 낼까요?] 

 

구경을 하고 있던 여생 등은 생각했다. 

(이 아가씨 제아무리 무예에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구양공자의 적수는 아닌데 무엇 때문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고 그러나?) 

홍칠공은 황용이 꾀가 많아 자기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적을 골탕먹이려고 그러나 보다고 잠자코 웃고만 있을 뿐이다. 닭 한 마리를 다 뜯어먹고도 몇 개 남지 않은 뼈를 계속 핥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누가 이기고 지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가씨께서 흥미 있으시다면 계속 모시고 겨루어 볼까요?] 

 

구양공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조왕부에서 겨룰 때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편 뿐인데 내가 이긴다 하더라도 그들이 틀림없이 대들 것 같아 일부러 져 준거예요. 이제 여기는 그쪽 편도 있고 또 내 편도 있으니까 괜찮아요. 비록 그쪽의 수가 많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건 내 눈감아 주지요. 우리 이렇게 하지요. 다시 이 땅 위에 원을 그려 놓고 누가 먼저 원에서 빠져나가나 보아 밖으로 나간 쪽이 지는 걸로요.] 

 

황용은 이렇게 말을 하며 구양공자의 희첩들을 바라다보았다. 구양공자는 황용의 말이 억지인 줄은 알지만 귀엽기도 해서 그냥 받아들였다. 즉석에서 왼발을 축으로 삼아 오른발을 세 자쯤 뻗고 몸을 돌렸다. 오른발 끝이 닿았던 벽돌 위에 직경이 여섯 자나 되는 원이 하나 둥그렇게 그어졌다. 개방( 幇)의 군웅들은 구양공자의 위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방금 보인 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용이 먼저 원 안에 들어서며 말을 꺼낸다. 

 

[우리 문(文)으로 싸울까요? 아니면 무(武)로 싸울까요?] 

 

황용의 느닷없는 한 마디에 구양공자가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문으로 싸운다면 어떻게 싸우고 무로 싸운다면 또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문으로 싸운다면 내가 세 번 공격하는 가운데 반격하지 말고, 그쪽에서 세 번 공격하는 동안 내가 반격하지 않는 거구요. 무로 싸운다면 난타전을 벌이자는 건데 누구든 먼저 빠져나가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문으로 싸웁시다. 그래야 피차 감정이 상하지 않을 테니까요.] 

[무로 다툰다면 틀림없이 그쪽에서 질 텐데 문으로 겨룬다면 혹시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 점도 제가 양보를 합시다. 그럼, 그쪽에서 먼저 공격하겠어요? 아니면 이쪽에서 먼저 할까요?] 

[그야 물론 아가씨 쪽에서 먼저 공격하셔야지.] 

[정말 교활하시군. 매번 유리한 쪽만 택하시니. 먼저 공격하면 손해인 줄 알지만 그냥 내가 먼저 공격하지요. 기왕 손해를 보는 김에 끝까지 양보하지요.] 

 

(그럼 내가 먼저 공격할 걸 그랬나?) 

구양공자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황용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 받아요.] 

 

장풍과 함께 은광이 번쩍이더니, 손바닥에 숨기고 있던 암기(暗器)를 발사했다. 구양공자는 암기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당황했다. 평소 암기를 막기 위해 가지고 다니던 부채는 벌써 홍칠공의 손에 의해 박살이 나 버렸고, 또 급하면 휘말아 방어하던 옷소매도 자기가 찢어 버렸기 때문이다. 수십 개의 강침(鋼針)이 6,7척의 원 안으로 날아 들어오니 잎으로 피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지고 마는 것이다. 더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펄쩍 허공으로 1여 장이나 뛰어 올랐다. 

이렇게 되자 강침은 그의 발밑을 스쳐 날아가 버렸다. 황용은 한 주먹의 강침을 발사한 뒤에 다시 두 주먹에 강침을 나누어 쥐고 구양공자가 뛰어 올랐다 내리는 순간을 이용해 다시 한 번 날렸다. 

 

두 손에 쥐고 있던 강침이 상하 좌우로 나는데 백 개가 넘는 숫자다. 그것은 바로 홍칠공이 그녀에게 전수해 준 만천화우척금침(滿天花雨擲金針)의 절기이다. 

구양공자의 재주가 제아무리 신출귀몰하다 해도 몸이 반공에 떠 있으니 발붙일 장소가 없었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이놈의 계집이 악독하기 짝이 없군.) 

바로 이 위급한 순간 뒷덜미가 조이며 몸이 허공에 뜬 채 발아래에서 우수수 강침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구양공자는 누군가가 자기를 구해 줬다는 것을 알았다. 벌써 자기의 몸을 누군가가 집어던진 모양이다. 왼쪽 어깨가 먼저 땅에 닿으며 나동그라졌다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구양공자는 홍칠공 이외에는 구해 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놀랍기도 하고 화도 치밀어 오른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가자 뭇 희첩들이 우르르 그 뒤를 쫓는다. 

 

[사부님, 무엇 때문에 그 못된 놈을 구해 주십니까?] 

[내 그 녀석 숙부와는 옛날부터 아는 처지다. 못된 짓만 골라하는 녀석이니 죽어 마땅하지만 내 제자의 손에 죽었다면 그 숙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황용의 물음에 홍칠공은 이렇게 대답하고 다시 그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귀여운 녀석이로다. 네 오늘 이 사부를 대신하여 체면을 세웠으니 무슨 상을 줄까?] 

[그럼 그 죽장 말고 또 뭐가 있어요!] 

[그건 절대로 안된다. 한두 가지 무공이나 알려 주고 싶다만 요 며칠 어찌나 게을러졌는지 흥미가 나지 않는다.] 

[그럼 제가 맛있는 음식이나 몇 가지 만들어 대접할께요.] 

[지금 내가 대접받을 틈도 없구나.] 

 

여생 등을 바라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개방( 幇) 안의 중요한 일을 상의해야 하는걸.] 

 

여생 등이 곽정과 황용 앞으로 다가와 예로서 뵙고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했다. 정소저도 묶인 오랏줄을 풀고 나와 부끄러운 표정을 띤 채 황용의 손을 잡고 고마운 인사를 했다. 황용이 정소저를 바라다보며 말을 꺼낸다. 

 

[당신의 대사백인 마도장께서 저 오빠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사백이나 왕사백께서도 중시하고 계시니 말하자면 우리는 한식구나 다름이 없어요.] 

 

여생이 다시 홍칠공과 곽정, 황용 세 사람을 향해 축하를 했다. 그는 홍칠공이 평소에 제자 두기를 좋아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방(幇) 중에서는 어쩌다 공을 세워 홍칠공의 환심을 산다 하더라도 한두 가지 무공을 배운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인데 곽,황 두 사람은 무슨 인연으로 저렇게까지 총애를 받는가 싶어 몹시 부러웠던 것이다. 

 

[내일 저녁 잔치를 마련해 칠공께서 두 제자를 거두신 일을 축하해야겠어요.] 

[저들이 더럽다고 우리 거지들이 마련한 음식을 먹을까?] 

 

여생의 말에 홍칠공이 하는 대답이다. 

 

[아닙니다. 내일 꼭 참석하겠습니다. 여형은 선배 협객이시니 소제는 더욱 친해지고 싶습니다.] 

 

곽정의 말에 여생은 흐뭇했다. 곽정의 도움으로 두 눈이 온전할 수 있었는데다 곽정의 겸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아주 옛날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같구나. 그러나 내 제자를 보고 거지가 되라고 하면 곤란해, 허허허. 그러나 저러나 곽정 제가 이 정소저를 모셔다 드려라. 우리 거지들은 닭도 훔치고 밥도 빌어 먹으러 가야겠다.] 

 

홍칠공의 말에 모두 밖으로 나왔다. 여생은 내일 저녁 이 사당에서 잔치를 베풀 태니 꼭 오라는 당부를 곽정에게 했다. 곽정은 황용과 함께 정소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정소저는 오는 도중 황용에게 자기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원래의 이름은 정요가(程瑤迦)요, 청정산인 손불이에게 무예를 배웠다고 했다. 그러나 부자집 딸로 귀엽게 자라나 만사에 수줍음을 타는 그런 규수였다. 

곽,황 두 사람은 정소저의 저택을 나왔다. 피곤한 생각이 들어 객점으로 돌아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한 필의 말이 남쪽에서 달려오다가 멈추는 것이 보였다. 황용은 호기심이 많은 여자라 경공의 제종줄을 펴 달려가 보려고 했다. 곽정도 그 뒤를 쫓아가 보니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양강이 손에 말 고삐를 잡은 채 길가에 서서 구양공자와 말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곽,황 둘은 구양공자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황용은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싶어했지만 거리가 먼데다 그들의 말소리가 너무 낮아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구양공자의 말 가운데 악비(岳飛)니 임안부(臨安府)니 하는 말과 양강의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더 자세히 듣고 싶어 귀를 기울이는데 구양공자가 손을 번쩍 들고 뭇 여제자들과 함께 동쪽을 향해 떠나가 버린다. 

양강은 거기 멍하니 선 채 한참이나 있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등에 올라탄다. 

 

[여보 아우님, 나 여기 있어요.] 

 

양강은 곽정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깜짝 놀랐다. 

 

[형님도 여기 계셨습니까?] 

[내 이곳에서 황소저를 만나게 되었고, 또 구양공자와 한바탕 싸우는 바람에 그만 늦어졌다오.] 

 

양강의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캄캄한 밤이라 곽정은 그런 줄도 몰랐다. 

 

[형님, 우리 오늘밤 계속해서 갈까요? 아니면 객점에 가 투숙을 할까요? 황소저도 우리를 따라 북경에 가나요?] 

[아니 제가 당신들의 뒤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당신이 우리들 뒤를 따라오는 거예요.] 

 

황용이 입을 삐죽 내밀고 하는 말에 곽정도 웃는다. 

 

[똑같은 얘기를 가지고 뭘 그래? 우리 함께 그 사당으로 가 쉬고 날이 밝거든 길을 떠나지.] 

 

셋이 사당으로 돌아와 구양공자가 남기고 간 초를 찾아 불을 밝혔다. 황용은 손에 촛대를 든 채 아까 뿌렸던 강침을 하나하나 주웠다. 

날씨가 꽤 덥기에 셋은 각기 문짝을 하나씩 떼어 마당 앞의 낭하에 놓고 잠을 청했다.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먼 곳에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셋이 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한 마리는 아니다. 잠시 후 말발굽 소리는 더욱 가깝게 들렸다. 황용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앞에는 세 사람, 뒤에서 십여 명이 쫓는 것 같군요.] 

 

곽정은 어려서부터 말등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뒤를 쫓는 사람이 모두 열 여섯인데 그것 참 이상하다.] 

[왜요?] 

[앞의 세 필은 모두 몽고 말(馬) 같은데 뒤를 쫓는 것은 아니거든. 사막의 몽고 말이 어째 이곳에 왔지?] 

 

황용이 곽정의 손을 잡고 사당 문 밖으로 나오니 <쉭>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때 세 필의 말은 벌써 사당 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살 하나가 또 날아와 맨 뒷사람이 타고 있는 말 엉덩이에 맞았다. 말은 슬픈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넘어진다. 말에 타고 있던 사람이 민첩하게 뛰어내리는데 경공은 아니다. 남은 두 사람이 고삐를 채며 묻는다. 

 

[괜찮아요. 먼저들 빨리 가세요. 내가 여기서 적의 진로를 막고 있을 테니까요.] 

 

말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하는 말이다. 

 

[내 당신과 함께 적을 막을 테니 사왕야(四王爺)는 빨리 가세요.] 

[어떻게 그렇게 한단 말이오?] 

 

사왕야라고 불린 사람이 하는 말이다. 셋이 주고받는 말이 몽고어다. 곽정이 들으니 귀익은 목소리다. 타뢰(拖雷)와 철별(哲別), 박이출(博爾朮)의 목소리 같다. 

(아니,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을까?) 

막 물어 보려고 하는데 뒤쫓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 3명의 몽고 사람들의 활 솜씨가 대단하다. 뒤쫓던 사람들이 더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활만 쏜다. 

 

[올라가자!] 

 

몽고 사람 하나가 이렇게 외치며 깃대를 가리키자 세 사람이 원숭이처럼 재빠르게 기어올라간다. 고지에서 아래로 공격하니 유리한 형세다. 뒤쫓던 병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사방을 에워싼다. 

 

[곽정 오빠가 틀렸어요. 열 다섯 사람이에요.] 

[아냐, 한 사람은 화살에 맞아 죽은 거야] 

 

황용과 곽정이 이렇게 소곤거리고 있는데 말 한 필이 시체 하나를 질질 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죽은 사람은 왼발이 말 등에 낀 채 긴 화살이 앞가슴에 꽂혀 있었다. 

곽정이 포복을 하여 다가가 화살을 뽑아 들고 어루만졌다. 과연 화살 끝에는 표범이 새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는 신전수(神箭手) 철별이 쓰는 화살이었다. 

 

[위에 계신 분은 혹시 철별 사부와 타뢰 아우가 아니오?] 

 

깃대 위에 있던 세 사람이 환성을 지른다. 

 

[그래요. 그런데 그쪽은 곽정이 아니오?] 

 

그런데 반공에서 횐 그림자가 번쩍하며 두 개의 흰 물체가 곽정을 향해 덮쳐 내려왔다. 곽정이 날개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쳐드니 자기가 몽고에서 화쟁 공주와 함께 기르던 두 마리의 흰 수리가 나타났다. 수리의 눈은 예민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어두운 밤중에도 옛주인을 알아보고 곽정의 어깨 위에 날아와 앉는다. 황용은 곽정을 처음 알았을 때 수리를 길렀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해 자기도 기르고 싶으니 몽고로 가자고 떼를 쓴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 흰 수리를 발견하고는 달려가 수리의 깃털을 어루만져 주려고 했다. 흰 수리는 황용이 손을 뻗는 것을 보자 부리로 찍으려고 대든다. 황용이 재빨리 손을 움츠리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찍혀 유혈이 낭자할 뻔했다. 곽정이 소리를 질러 막자 황용이 웃는다. 

 

[아니, 이놈의 수리들이 못돼먹었군요.]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반가와 가만히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황용, 조심해!] 

 

곽정이 놀라 외치는 소리 가운데 두 개의 화살이 황용의 가슴을 향하여 날아들었다. 황용은 거들떠볼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죽어 넘어진 금나라 병사의 주머니를 뒤진다. 두 개의 화살은 그녀의 연위갑에 맞고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황용은 금나라 병사의 주머니에서 마른 고기를 찾아내 수리에게 먹인다. 

 

[황용, 이 수리를 데리고 놀고 있어. 내 금나라 병사들을 처치하고 올께.] 

 

곽정은 몸을 날리며 날아오는 화살을 받아 쥐고 왼손을 뒤집어 옆에 있는 금나라 병사의 겨드랑이 뼈를 분질러 버린다. 

 

[어느 놈이 예서 까불고 있느냐?]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호통을 치는데 한어(漢語)다. 

(아니, 목소리가 귀에 익구나!) 

곽정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눈앞이 번쩍하더니 쌍도끼가 얼굴을 향해 대들었다. 곽정은 공세가 날렵함을 보고 보통의 군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몸을 숙이고 손을 뒤집어 장풍을 날렸다. 강룡십팔장 가운데의 신룡파미다. 장풍이 상대의 어깨에 가 닿자 어깨뼈가 여러 조각으로 분질러지고 몸이 저만큼 날아가 떨어지며 처참한 비명을 지른다. 

(아, 황하사귀 가운데의 상문부(喪門斧) 전청건(錢靑健)이었구나!) 

곽정의 무공이 요 몇 달 동안 크게 진보하여 과거 몽고에서 황하사귀와 대결하던 당시의 상황과는 크게 달랐다. 그러나 자신의 장풍의 위력이 이렇게까지 셀 줄은 몰랐다. 수장 밖으로 나가떨어진 그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 지나쳤다 싶어 후회가 생겼다.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좌우가 번쩍, 칼과 창이 동시에 곽정을 향해 찔러 왔다. 

곽정은 단혼도(斷魂刀) 심청강(沈靑剛)과 추명창(追命槍) 오청렬(吳靑烈)이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번개처럼 하며 오른손을 낚시처럼 구부려 늑골을 향해 찔러 오는 창끝을 잡아 비트니 오청렬이 비틀비틀하다가 앞으로 고꾸라지려고 했다. 곽정이 쓰러지려는 오청렬을 잡아 제치자 심청강의 칼이 사제의 뇌문(腦門)에 푹 박히려 했다. 곽정이 번쩍 발을 들어 올려 심청강의 오른팔을 걷어차자 어둠 속에서 파란 불이 번쩍이더니 긴 칼이 허공에 날았다. 곽정은 오청렬의 생명을 구해 주고 그의 등을 잡아 흔들었다. 

 

오청렬은 원래 비틀거리고 있다가 흔드는 바람에 쿵하는 소리와 함께 사형인 심청강과 서로 머리를 부딪치며 정신을 잃고 나가 떨어졌다. 황하사귀 가운데 탈백편(奪魄鞭) 마청웅(馬靑雄)은 태호도방(太湖盜幇에 섞여 들었다가 육관영의 손에 죽은 지 오래고 삼귀만이 남아 타뢰의 뒤를 쫓던 금나라 병사들 틈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캄캄한 어둠 가운데 금나라 병사들은 3명의 수령이 벌써 쓰러진 사실도 모르고 아직도 타뢰, 철별, 박이출을 향해 활을 쏘고 있었다. 

 

[아니, 이놈들이 아직도 달아나지 않은 결 보니 그래 여기서 죽고 싶은 게로구나.] 

 

곽정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차다가 두 손으로 금나라 군사를 잡히는 대로 집어던진다. 잠시 후 금나라 명사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심청강과 오청렬이 정신을 차린 후 상대가 누군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줄행랑을 친다. 

 

철별과 박이출의 활 솜씨는 놀라와 깃대 위에 매달린 채 암흑같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활줄을 당겨 3명의 금나라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타뢰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의형인 곽정이 금나라 병사를 집어던지고 돌아서서 오는 것이 보였다. 

 

[안다(安答. 몽고어로 결의 형제라는 뜻) 그래 안녕하셨소?] 

 

반가운 목소리로 외치며 깃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손에 손을 잡고 서로 바라다본다. 너무나 반가와 서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철별과 박이출도 아래로 내려왔다. 먼저 철별이 말문을 연다. 

 

[세 사람의 한인(漢人)이 모두 방패를 가지고 있어서 활을 쏴봐야 소용이 없었는데 만약 곽정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다시는 간난하(乾難河)의 맑은 물을 마시지 못할 뻔했어.] 

 

곽정은 황용을 불러 타뢰 등에게 소개를 했다. 

 

[내 의동생이오.] 

[이 한 쌍의 흰 수리를 내게 주세요.] 

 

황용이 웃으며 말을 했지만 타뢰는 한어(漢語)를 몰랐다. 그들이 데리고 온 통역은 쫓기는 도중 금나라 명사에게 살해되었다. 

 

[안다(安答)! 어떻게 흰 수리를 데리고 왔어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고 송나라 황제를 뵙고 남북이 함께 출병하여 금나라를 치자는 분부를 내려 왔는데 내 누이가 혹시 곽정형을 만나게 될지 모르니 데리고 가 보라고 해서......] 

 

곽정의 물음에 타뢰는 이렇게 대답했다. 곽정은 그가 화쟁공주의 말을 꺼내자 어쩔 줄을 몰랐다. 

(한 달 이내에 나는 도화도의 약속이 있는데 그때 환용의 아버지는 꼭 나를 죽이고 말 거야. 그런데 내 지금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있는가?) 

 

[이 한 쌍의 흰 수리는 내 것이니 가져도 돼요.] 

 

곽정은 즉석에서 황용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황용은 기쁘다고 수리들에게 또 고기를 나누어 먹인다. 

타뢰는 부왕인 징기스칸이 어떻게 금나라를 쳐 승리할 것이며, 어떻게 그를 송나라로 파견하여 연합 전선을 펴 협공하게 하며, 오는 도중 어떻게 해서 금나라 군사와 조우하여 종인과 위병들이 다 죽고 이제 여기까지 쫓기게 된 자초지종을 곽정에게 들려주었다. 곽정은 당시 귀운장에 있을 때 양강이 목염자보고 임안으로 가 사미원 승상을 만나 몽고의 사자를 살해하라고 시키던 말을 들은 생각이 났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제 타뢰의 말을 듣고 비로소 그것이 금나라에서도 사전에 알고 양강을 대금의 사신으로 파송하여 송조와 몽고의 연합을 저지하자는 의도였음을 알았다. 

 

[금나라에서는 나를 꼭 사로잡거나 살해하겠다고 마침내는 황제의 육왕야(六王爺)가 친히 군사를 인솔하여 나를 막았다오!] 

[뭐라고? 완안열이가?] 

 

타뢰의 말에 곽정은 놀란다. 

 

[그래요, 머리에 금투구를 쓰고, 내 똑똑히 보았는걸요. 내 화살을 세 차례나 쏘았는데 애석하게도 위병들의 방패 때문에 맞히지 못했다오.] 

[황용, 양강 아우, 완안열이 이곳에 와 있다니 우리 빨리 그놈을 찾아봐요.] 

 

곽정이 반갑다고 이렇게 외치자 황용은 대답을 하고 나타났지만 양강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용이! 용이는 동쪽으로, 나는 서쪽으로 가보자!] 

 

곽정은 조급해 이렇게 외치며 경공의 재주를 펴 나는 듯 달려나갔다. 몇 리를 달리다 패해 달아나는 금나라 병사를 발견하고 물어보니 과연 완안열의 친위대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완안열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왕을 잃고 달아나는 중이에요. 돌아가 봐야 목이나 잘릴 테니 차라리 군복을 벗고 농민이 되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곽정은 금나라 병사의 말을 듣고 다시 계속 찾기 시작했다. 날이 점점 부옇게 밝아 오지만 완안열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철천지 원수가 눈앞에 나타났다고 하는데도 찾을 길이 없으니 곽정은 더욱 초조해질 수 밖에 없었다. 계속 달려나가다 보니 수풀 속에서 흰옷이 번쩍 스치며 황용이 나타났다. 그러나 황용의 표정도 허탕임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둘은 다시 사당으로 돌아왔다. 

 

[그 완안열은 틀림없이 군대를 이끌고 다시 나타날 거요. 나는 부왕의 명령이 있으니 더 지체할 수도 없고, 우리 섭섭하지만 그만 작별합시다.] 

 

타뢰의 말에 곽정은 섭섭해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기약없이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랴? 타뢰, 철별, 박이출과 얼싸안고 작별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이 탄 말이 뽀얀 먼지 속으로 가물가물 사라진다. 

 

[곽정 오빠. 우리 숨어서 완안열을 기다려 보기로해요. 만일 인마가 많거든 몰래 뒤를 쫓다가 밤에 해치우면 될 거 아니에요?] 

[참 좋은 계책이야. 그럼 내 말들을 숲속에 숨겨 놓고 오지.] 

 

사당의 뒤뜰로 나서다 보니 풀 속에서 금빛 찬란한 물건이 아침 햇살에 비치고 있었다. 몸을 숙이고 들여다보니 그것은 금으로 만든 투구인데 투구 위에는 용눈만큼이나 큰 두 개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곽정이 얼른 주워 들고 황용에게로 달려왔다. 

 

[용이, 이것 좀 봐요.] 

[아니, 이건 완안열의 투구가 아네요?] 

[글쎄 말이야, 아마 아직도 이 사당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우리 찾아보지.] 

 

황용이 몸을 돌이켜 세우며 손을 담장에 대자 몸이 벌써 허공에 뜬다. 

 

[나는 위에서 찾아볼 테니 오빤 아래를 뒤져봐요.] 

 

곽정이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지붕 위에서 황용이 부른다. 

 

[곽정 오빠, 내 경공이 근사하지요?] 

[정말 훌륭하군. 왜?] 

[칭찬도 안 해 주니까 그렇지요.] 

[아이구 이 까불이, 지금 놀고 있을 땐가?] 

 

황용이 웃으며 손을 뻗고 후원을 향해 날아간다. 

양강은 곽정이 금나라 병사들과 싸우고 있을 때 그 컴컴한 가운데서도 완안열을 알아보았다. 비록 친자식이 아닌 줄은 알지만 그래도 18여 년을 양육해 준 아버지임에는 틀림없다. 이제 곽정이 금나라 병사를 다 해치우고 완안열을 발견하면 끝장이 나는 것이다. 형세가 이토록 위급한데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가 없다. 몸을 날려 달려가 구출하려고 하는데 바로 이때 곽정이 금나라 병사 하나를 집어 던졌다. 완안열이 말고삐를 채 피하려고 했지만 금나라 병사가 날아가 부딪치고 말에서 떨어졌다. 양강이 달려가 품에 안고 속삭였다. 

 

[부왕(父王), 안강이에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곽정은 싸우기에 정신이 없었고 황용은 흰 수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완안열을 안고 사당의 후원으로 숨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양강은 서쪽 채의 문을 밀치고 슬그머니 방 안에 들어가 숨었다. 비명 소리가 점점 멀리서 들리며 금나라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이윽고 곽정이 들어와 세 사람과 뭐라고 몽고어로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강아, 어째서 이곳에 와 있었니? 그리고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완안열이 속삭이듯 물었다. 

 

[성은 곽가요, 임안 우가촌 곽소천의 유복자랍니다.] 

 

이 말을 들은 완안열의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I9년 전의 일이다. 침통한 심사 때문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곽정과 황용이 자기들을 찾는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방금 곽정이 빈 손으로 황하삼귀와 뭇 금병을 치던 광경이 생각나자 간이 콩알만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왕, 지금 나가다가는 들키고 말아요. 여기 숨어 있으면 괜찮을 거예요. 그들이 멀리 사라진 뒤 천천히 나가도 늦지 않아요.]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런데 강아, 너 어째서 애비라 부르지 않고 부왕이라 하느냐?] 

 

양강은 묵묵 부답이다. 세상을 떠나신 모친을 생각하면 심사가 착잡하기만 했다. 

 

[네가 에미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양강의 손을 더듬어 어루만지지만 그의 손은 차디차기만 했다. 잠시 후 양강은 잡힌 손을 슬그머니 뺀다. 

 

[곽정의 무공이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에요. 아버지의 원수를 꼭 갚고야 말겠다니 큰일이군요. 한 반 년 동안 북경에 돌아가지 마세요.] 

[오냐, 잠시 피하는게 좋겠지. 그래 임안에는 갔었니? 사승상이 뭐라고 하더냐?] 

[아직 못 갔는걸요.] 

 

완안열은 그의 말씨로 보아 자기의 신세를 이제 알았구나 했다. 그런데도 이번 자기를 구해 준 걸 보면 도대체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둘은 18년 동안 자애로운 아비로, 효성이 지극한 아들로 살아온 것이다. 이제 한 방에 있기는 하면서도 피차 사이에 두꺼운 장벽이 가로놓여 있음을 막연히나마 느끼는 것이다. 양강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대 갈기기만 하면 내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인데......, 그러나 어떻게 손을 쓴단 말이냐? 내 영원히 왕자의 신분을 마다하고 곽정과 같이 떠도는 신세가 되어야 하는 전가?) 

 

[강아, 우리는 부자로 살아왔지? 너는 영원한 내 아들이다. 대금국은 십 년 안에 송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렇게 되면 대권은 내 손에 있는 거지. 부귀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이 금수강산 그 모두가 네것이 아니겠느냐?] 

 

(부귀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이 금수강산 그 모두가.......) 

이 말을 듣고 있는 양강의 가슴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대금국의 국력으로 보아 송나라를 멸하기는 쉬운 일이지..... 또 부왕의 영명함으로 말을 해도 지금의 금주(金主) 가운데 그 누가 감히 비하겠다고 나설 수 있단 말이냐? 대사만 이루는 날에는 천하의 주인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손을 뻗어 완안열의 손을 꽉 잡는다. 양강은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 완안열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끝까지 보필하겠나이다.] 

 

완안열은 그의 뜨끈뜨끈한 손의 감촉을 느끼며 반가와했다. 

 

[암, 그래야지.] 

 

양강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등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 무슨 소리냐?] 

[쥐 소린가 봐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날은 활짝 밝아 아침 햇살이 창 틈으로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7,8개의 관(棺)이 놓여 있었다. 이는 원래 사당의 일족들이 사용하기 위해 마련해 둔 관목이었던 것이다. 이때 곽정과 황용이 웃으며 찾아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났구나! 내 어째 부왕의 금투구가 밖에 떨어진 걸 몰랐을까? 이를 어쩌지.) 

 

[제가 나가서 저들을 유인하겠어요.] 

 

가만히 소곤거리고 슬그머니 문을 열고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섰다. 황용은 계속 찾아 들어오다가 사람이 번쩍 스치는 그림자를 재빨리 발견했다. 

 

[바로 여기 있었구나!] 

 

소리를 지르며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어찌나 민첩한지 집모퉁이를 방금 돌았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때 곽정도 황용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도망가지 못했을 거예요. 틀림없이 이 숲속에 숨어 있을 텐데.] 

 

두 사람이 숲속을 헤집고 들어서는데 나뭇가지를 헤치며 양강이 나타난다. 곽정은 놀랍고도 반가왔다. 

 

[아니 아우, 어딜 갔었나? 그래 완안열이를 못 보았나?] 

[완안열이 어떻게 여기 와 있겠어요?] 

[군사를 이끌고 왔겠지, 이 금투구가 바로 그의 것인데.] 

[아 원래 그랬던가요?] 

 

황용은 그의 눈치가 이상함을 느꼈다. 

 

[우리가 계속 찾고 있었는데 그래 어딜 가셨었어요?] 

[어제 먹은 것이 나빴던지 계속 배가 아파서.......] 

 

이렇게 말하며 저쪽에 있는 작은 나무를 가리킨다. 황용은 의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양강 아우, 우리 함께 샅샅이 뒤져 봐.] 

 

양강의 마음은 조급해 견딜 수 없었다. 지금쯤 달아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전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자기가 죽으려고 나타났으니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군요. 형님과 황소저는 동쪽으로 가 보세요. 나는 서쪽을 뒤질 테니.] 

[그렇게 하지.] 

 

곽정은 즉시 동쪽에 있는 절효당(節孝堂)의 문을 밀치고 들어간다. 

 

[양강 오빠,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서쪽에 숨어 있을 것 같아요. 제가 함께 찾아보지요.] 

 

양강은 속이 바짝바짝 타 들어 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요, 달아나면 큰일이니까.] 

 

둘은 방마다 들어가 이잡듯 뒤져 나갔다. 

보응(寶應) 유(劉)씨는 원래 송대의 대족이었다. 이 사당의 규모도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다. 금나라 병사들의 수차에 걸친 도강으로 말미암아 전화에 소실되기도 하고 짓밟히기도 하여 퇴락했을 뿐이다. 황용은 양강의 태도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입구에 먼지가 많고 거미줄이 쳐진 방만을 골라 샅샅이 뒤지는 태도가 어딘가 어색해 보였던 것이다. 서쪽 채에 당도해 보니 먼지 가운데 발자국이 보인다. 문에도 먼지가 부옇게 끼었는데도 문을 여닫은 손자국이 보였다. 

 

[여기 있군요!] 

 

황용의 외치는 소리를 곽정과 양강이 듣고 동시에 달려들었다. 황용이 발을 들어 문짝을 걷어찼다. 그런데 안에는 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완안열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양강은 완안열이 벌써 달아난 것을 확인하고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완안열, 이 개 같은 놈아. 너 어디 있느냐? 썩 나서지 못하겠느냐?] 

[양강 오빠, 떠들 것 없어요. 벌써 우리들이 오는 것을 알았는걸. 이제 선심을 쓰는 척할 건 없어요.] 

 

양강은 황용이 찌르는 말을 듣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우, 개의할 것 없소. 용이는 늘 농담을 좋아한다오.] 

 

곽정은 이렇게 말하면서 땅바닥을 가리켰다. 

 

[아니. 이게 뭐야? 정말 왔었군.] 

[빨리 뒤를 쫓아요.] 

 

황용이 이렇게 말을 하며 막 몸을 돌려세우는데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셋이 깜짝 놀라 보니 판 하나가 흔들렸다. 황용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관만은 무서워했다. 이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무시무시해 견딜 수가 없었는데, 이제 관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에구머니> 비명을 지르며 곽정의 팔을 꽉 잡았다. 

 

[황용, 무서워할 것 없어. 그 놈이 이 관 속에 숨었나 봐.] 

 

양강은 급한 가운데도 꾀가 생겼다. 

 

[아! 저쪽에 있군요.] 

 

밖을 가리키며 내달린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아요.] 

 

황용이 몸을 돌이켜 세우며 그의 맥문을 틀어잡았다. 황용의 무공은 양강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양강은 잡히자마자 반신이 뻣뻣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왜 이래요?] 

[곽정 오빠, 관 속에 뭐가 있다고 그랬어요?] 

[물론, 그놈이지.] 

 

곽정이 대들어 관을 틀어잡으려고 했다. 

 

[형님, 조심하세요. 송장이 대들면 어떻게 하려구 그래요?] 

 

양강이 외치자 황용이 그의 팔을 치며 야무지게 쏴 붙인다. 

 

[아니, 왜 나를 놀라게 해요?] 

 

관 속에 완안열이 숨어 있는 줄을 안다 해도 여자는 여자였다. 정말 송장이 나타나면 곤란한 일이다. 

 

[곽정 오빠, 잠깐만!]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왜?] 

[먼저 관 뚜껑을 꼭 눌러요. 안에서 송장이라도 튀어 나오면 어떻게 해요?] 

[무슨 송장이 있다고 야단이야?] 

 

곽정은 웃으며 말을 하면서도 하얗게 질린 황용의 얼굴이 귀엽고도 딱했다. 몸을 날려 관 위에 올라서며 그녀를 위로했다. 

 

[이젠 꼼짝 못할 거야.] 

 

그러나 황용은 무섭고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곽정 오빠, 내 익히고도 써 보지 않은 벽공장(壁空掌) 구경하실래요. 송장이면 어떻고 완안열이면 어때요? 몇 번 쳐보면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텐데요.] 

 

이렇게 말을 하면서 두어 발짝 앞으로 나서며 자세를 취한다. 

 

[잉!] 

 

그런데 갑자기 관 속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황용은 모골이 송연하도록 놀랐다. 

 

[여자 귀신이구나!] 

 

펄쩍 뛰어 방 밖으로 달아났다. 

 

[아우, 우리 관 뚜껑을 열어 보자구.] 

 

곽정이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다. 양강은 손에 식은 땀이 나 어쩔 줄 몰라 했다. 구해 주자니 곽,황 두 사람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관 속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난 것이다. 놀랍고도 반가왔다. 함께 대들어 관 뚜껑을 제쳤다. 송장이라도 튀어나온다면 단주먹에 박살을 내고 말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그 속에서는 두 눈이 반짝이는 미모의 소녀가 나타났다. 두 눈을 비비고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목염자다. 양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급히 대들어 부축을 했다. 

 

[황용, 빨리 와 봐요.] 

[나 안 갈래요.] 

[목염자 누이가 여기 있어.] 

 

곽정의 말을 듣고 황용이 고개를 디미니 과연 양강이 여자를 안고 나온다. 목염자는 초췌할대로 초췌해 두 눈에서 눈물만 좔좔 흘릴 뿐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용은 점혈의 전문가라 급히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며 물었다. 

 

[언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목염자는 오랫동안 혈도를 눌렸는지 꼼짝도 못 하고 가쁜 숨만 내쉬고 있다. 황용이 관절 등을 계속 주물러 주었다. 

한참 후에 목염자는 정신을 차렸는지 겨우 입을 열었다. 황용은 그녀가 찔린 점혈이 발바닥에 있는 용천혈(涌泉穴)임을 알았다. 중원의 무림의 인물 가운데 이렇게 점혈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벌써 짐작이 갔다. 

 

[서역에서 왔다는 그 못된 구양공자지요?] 

 

목염자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날 목염자는 양강의 심부름으로 매초풍에게 소식을 전하러 갔다가 해골 무더기 옆에서 구양공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뒤에 구양공자는 황약사의 천마무곡(天魔舞曲)에 걸려들었다가 달아나올 때 그녀를 함께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그 뒤 구양공자가 몇 차례나 목염자에게 대들었지만 죽을 각오로 완강히 거부했다. 구양공자는 자기의 용모나 무공, 풍류로 보아 시간이 지나면 자연 마음이 기울어지겠지 하고 기다렸다. 만일 무공으로 겁탈을 한다면 백타산주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자부심 덕택에 목염자는 정결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보응성에 이르러 구양공자는 여제자들을 각처로 보내 미모의 규수를 물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소저에게 눈독을 들인 것이 그만 개방( 幇)에 탄로가 되어 악전 고투를 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구양공자는 달아나기에 바빠 미처 목염자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만약 곽정 등이 완안열을 찾지 않았더라면 목염자는 빈 관속에서 그대로 굶어 죽는 신세가 될 뻔했던 것이다. 

 

 

 

第 三十四 章. 도화도의 퉁소 소리 

 

 

양강은 그리운 사람이 여기 있었던 것을 발견하자 몹시 놀라면서도 반가왔다. 

 

[누이, 잠시 쉬고 있어요. 내 가서 물 좀 끓여 올께. 세수나 하도록 해요.] 

[물 끓일 줄이나 아세요? 내가 갈께요. 곽정 오빠 나를 따라오세요.] 

 

황용의 의도는 잠시 자리를 비켜 두 사람만 조용히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염자는 초췌한 얼굴을 바짝 들고 양강을 쏘아본다. 

 

[잠깐만! 축하해요. 장래 부귀 영화를 누리게 되었으니까요.] 

 

양강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옳지, 내 부왕과 여기서 주고받은 말을 다 들었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목염자는 풀이 죽은 그의 표정을 보자 더 쏴 붙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완안열을 도망시킨 얘기를 꺼낸다면 곽정이 때려죽이고 말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면 좋지 않아요? 더욱 친밀해질 것 같은데 뭣 때문에 부왕(父王)이라고 했죠?] 

 

냉랭하게 쏴 붙였지만 곽,황 두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고 양강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황용은 곽정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조용히 소곤거린다. 

 

[우리만 나가면 곧 좋아질 거예요.] 

 

곽정이 웃으며 황용의 뒤를 따라 나갔다. 

 

[곽정 오빠. 우리 엿들으러 가 봐요.] 

[쓸데없이 까불지 마. 난 안 갈 테야] 

[좋아요, 후회하지 말아요.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도 들려주지 않을 테니까요.] 

 

지붕 위로 뛰어올라 그 방 근처로 접근했다. 

 

[아니, 그 도둑놈을 애비라고 하다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군요. 여전히 못된 생각만 하고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는 이 못난.......] 

 

목염자는 여기까지 말하고 화가 치밀어 목이 메인다. 

 

[누이, 나.......] 

[누굴 보구 누이래요. 이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해요!] 

 

철썩 양강의 따귀를 올려 친 모양이다. 

 

[아니, 말로 할 일이지 왜들 이렇게 거칠게들 그래요?] 

 

황용이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서니 목염자의 두 볼은 빨갛게 상기되었고 양강은 오히려 창백한 표정이다. 

(이거 안 되겠는걸, 내가 말려야지.) 

황용이 놀라 말리려고 나서는데 양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좋아, 새사람이 생겼다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렇게 괄시하는군.] 

[뭐....., 뭐라구요?] 

[아니, 그 구양공자를 쫓아다니더니, 문무 겸비한데다 미남이니 물론 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테니까 나 같은 것 안중에나 있겠소?] 

 

목염자는 기가 차 손발을 부들부들 떨며 기절할 것만 같았다. 

 

[양강 오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아요. 언니가 그를 좋아했다면 그 못된 녀석이 무엇 때문에 언니를 관속에 가두었겠어요?] 

[진정이든 진정이 아니든 간에 그자에게 잡혀가서 순결을 잃었는데 내 어떻게 좋아할 수 있단 말이오?] 

[뭐라구요? 순결을 잃었다구요?] 

 

목염자는 기가 막힌 모양이다. 

 

[아니, 그럼 그자와 며칠 있었을 테니 껴안기라도 했을 거며 어루만지기라도 했을 텐데 그래도 순결하단 말이오?] 

 

목염자는 <와> 하는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하며 뒤로 쓰러졌다. 양강은 마음속이 뜨끔하여 달려들어 부축해 주고 싶었지만 자기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그녀가 시끄럽게 떠들기라도 한다면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아 슬그머니 후원으로 나와 담장을 뛰어넘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황용이 목염자의 가슴을 한참 동안 쓸어 주자 비로소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일어난다. 울지도 않고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 자약하게 말을 한다. 

 

[지난 번 내가 주었던 그 비수 좀 잠깐만 빌려 쥐요.] 

 

황용이 큰 소리로 곽정을 부른다. 

 

[곽정 오빠. 이리로 좀 오세요.] 

 

곽정이 밖에서 달려 들어왔다. 

 

[양강 오빠의 비수를 이 언니에게 주세요.] 

[그렇게 하지.] 

 

품속을 더듬어 주총이 매초풍에게서 가져온 비수를 꺼낸다. 겉을 싼 엷은 가죽 위에는 바늘로 찌른 무수한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는 그것이 하반부의 구음진경 비결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냥 품속에 쑤셔 넣으며 비수만 목염자에게 건네준다. 

황용도 품에서 비수를 꺼내며 가만히 속삭인다. 

 

[곽정 오빠의 비수는 이것이고, 양강 오빠의 비수는 언니께 드렸어요. 언니, 아마 이게 바로 팔자 소관이요 연분이라 하는 것인가 보죠. 한때 다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속상하게 여기지 말아요. 나도 오빠와 가끔 다투는걸요. 저는 곽정 오빠와 함께 북경으로 완안열을 찾으러 가야 해요. 언니도 별로 바쁜 일 없거든 우리와 함께 동행하며 마음을 풀어요. 양강 오빠도 곧 우리를 따라올 거예요.] 

[양강 아우는 어딜 갔지?] 

[언니가 화가 나서 따귀를 때렸나 봐요. 그래서 어디로 달아난 모양이죠.] 

[전 북경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두 분께서도 갈 것 없어요. 완안열은 한 반 년 북경에 없을 거예요. 복수를 당할까 무서워서요. 곽정 오빠 두 분께서나 행복하게.......] 

 

여기까지 말하고는 오열 때문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문 밖으로 달려나가 두 발로 땅을 찍고 지붕 위로 올라가 사라진다. 

황용은 고개를 숙이고 목염자가 토한 땅 위의 선혈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었다. 그래서 즉시 담을 뛰어넘어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목염자의 뒷모습이 먼 곳에 있는 한 그루의 버드나무 밑에 보인다. 햇빛에 비수의 칼날이 번쩍하더니 그것을 높이 들어 머리에 댄다. 

 

[언니! 언니! 그러면 안 돼요.] 

 

황용이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거리가 멀어 말릴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목염자는 왼손으로 머리채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것을 싹둑 잘라 집어던지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가 버린다. 

 

[언니! 언니!] 

 

몇 번이나 불러 보았지만 목염자는 듣지 못했는지 멀리멀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황용은 멍하니 넋을 잃고 바람에 흩어지는 목염자의 머리칼을 하염없이 바라다보고 있었다. 황용은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제멋대로 자랐다. 즐거우면 웃고 불유쾌한 일이 있으면 시원하게 한바탕 울면 그만이다. 근심이나 걱정이 무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 그 광경을 보자 자기도 모르는 슬픔이 왈칵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맥없이 천천히 돌아와 이 일을 곽정에게 들려주었다. 

 

[그 누이, 무어 그럴 것까지는 없을 텐데...., 아마 고집이 센 모양이지.] 

 

왜 싸웠는지 이유를 모르는 곽정의 반응이다. 

(한 여자가 어루만지고 껴안기만 해도 순결을 잃는 것인가?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황용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일이란 모두 그런가 보지! 사당의 후원에 이른 황용은 기둥에 등을 댄 채 먼 하늘만 바라다보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고 말았다. 

그날밤 여생 등 개방의 군웅들은 홍칠공과 곽,황 두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밤이 깊도록 홍칠공은 나타날 줄을 몰랐다. 여생은 홍칠공의 괴팍한 성미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곽정과 황용 두 사람과 더불어 즐겁게 마시고 떠들었다. 개방의 군웅 모두가 곽,황 두 사람을 정중하게 대접했다. 정소저도 이 소식을 듣고 손수 음식을 만들어 하녀들을 시켜 보내 왔다. 

잔치가 파한 뒤에 곽정과 황용은 서로 앞일을 상의했다. 기왕 그 완안열이 북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찾기가 곤란할 것이요, 또 도화도의 약속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선 가흥으로 가서 여섯 분 사부와 다시 상의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둘은 말등에 올라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때는 바야흐로 6월 초순, 날씨는 무덥기 짝이 없었다. 강남의 속담에 <6월 햇볕에 오리알도 익는다>고 했듯이 쨍쨍 햇빛이 내리쬐는 여로가 꽤나 고달프기만 했다. 

곽정은 어느덧 가흥에 이르러 편지 한 통을 써서 취선루(醉仙樓) 주인에게 말기면서 7월 초 강남육협이 오거든 전해 달라는 당부를 했다. 제자 곽정이 황용을 만나 도화도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도화도로 들어가지만 황약사의 무남독녀 외동딸과 동행하므로 별 일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고 도화도에 오실 생각은 하지 말라는 내용 등을 썼다. 곽정이 편지는 그럴싸하게 쓰기는 했지만 황약사의 괴팍한 성질 때문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제 홍칠공까지 사부로 모셔 놨으니 아무래도 길한 일보다는 불길한 일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그러나 황용이 걱정을 할까 두려워 그런 내색은 전연 보이지도 않았다. 

 

둘은 동쪽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주산(舟山)에 이르러 배를 한 척 빌었다. 바닷가 사람들은 도화도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 벌벌 떤다, 도화도로 가자고하면 제아무리 많은 돈을 내 놔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황용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용은 하치도(蝦峙島)에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기두양(畸頭洋)을 벗어나자 선부를 위협했다. 선부는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도 황용이 가슴에 댄 비수를 보고는 시키는 대로 했다. 

배가 섬에 가까와지자 곽정은 벌써 해풍에 섞인 물씬한 꽃향기를 말을 수 있었다. 멀리 바라다보니 울창한 숲속에 울긋불긋한 꽃들이 만발한 것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경치가 어때요?] 

[내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는 처음 보는걸.] 

[칠공께서 우리 아빠 무공이 천하 제일이라고 말하시지 않았지만 꽃 가꾸는 재주는 아마 당할 사람이 없을 거라 했어요.] 

 

황용은 자랑스럽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둘은 배에서 언덕으로 뛰어올랐다. 곽정의 홍마도 그들 뒤를 따랐다. 선부는 어려서부터 도화도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을 들었다. 섬 주인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사람의 간과 심장을 제일 잘 먹는다고도 했다. 두 사람이 언덕에 오르는 것을 보고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했다. 뱃삯이고 뭐고 달랄 계제가 아니다. 황용이 품에서 열 냥이 넘는 1정(錠)의 은자를 던지니 땡그랑 뱃머리에 떨어진다. 선부는 이렇게 많은 뱃삯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멀어져 가면서도 연방 굽실거렸다. 

 

황용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자 무척이나 즐거운 모양이다. 

 

[아빠, 아빠 제가 돌아왔어요!] 

 

곽정에게 손짓을 하며 앞을 향해 달린다. 곽정은 꽃밭 사이를 이리저리 뚫고 나가는 황용의 뒤를 쫓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 급히 뒤를 찾아 달렸지만 오히려 방향만 잃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길이 뚫렸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 헤매다 보니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귀운장에 있을 때 귀운장의 배치가 어딘가 도화도를 모방한 것 같다는 황용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자기 혼자 찾아다녀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한 그루의 복숭아 나무 밑에 앉아 황용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황용은 커녕 다른 사람의 그림자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곽정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나무 위로 기어올라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남쪽은 바다요, 서쪽은 미끈미끈한 바위뿐인데 동쪽과 북쪽은 온통 꽃밭뿐이다. 울긋불긋한 꽃들이 눈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꽃밭 사이로 건물의 지붕이나 벽도 보이지 않고 연기 피어오름도 발견할 수가 없다. 닭이나 개가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곽정은 두려운 생각이 왈칵 들었다. 앞을 향해 마구 달렸다. 

그러나 더욱 깊은 숲속에 빠진다. 

(이러다 오히려 황용까지 나를 못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즉시 원위치로 돌아오려고 했다. 처음에는 근처를 맴돌았기 때문에 쉽게 원위치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게 아니다.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점점더 깊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곽정의 홍마는 원래 주인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는데 곽정이 나무 위에 올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곽정은 어쩔 수 없이 땅바닥에 앉아 황용이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풀밭이라 방석을 깔아 놓은 듯 푹신했지만 이제 주려 오는 배를 달랠 길이 없었다. 황용이 홍칠공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했던 음식들에 생각이 미치자 군침만 입안에 가득 괴고 배는 더욱 꼬르륵거렸다. 

(만일, 황용이 아버지에게 감금이라도 당했다면 올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나는 꼼짝없이 굶어 죽겠구나.) 

 

다시 또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한 일이며, 사부들의 은혜에도 보답치 못한 일들과 함께 홀로 몽고에 계실 어머니를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누구를 의지하고 사신단 말인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다가 마침내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는 황용과 함께 즐겁게 노닐던 명승 고적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은은하면서도 감미로운 황용의 노래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어디서 퉁소 소리까지 들린다. 정신을 가다듬고 들어도 퉁소 소리는 은은히 가락이 이어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는 교교한 달이 밝고 밤이라 꽃냄새는 더욱 짙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퉁소 소리는 꿈 속에 들린 것이 아님을 알았다. 

 

곽정은 반가왔다. 벌떡 일어나 퉁소 소리를 찾아 나섰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계속 쫓는다. 길이 막힌 곳에 이르러도 퉁소 소리는 멎지 않았다. 귀운장 안의 길도 이와 마찬가지로 복잡했던 것이다. 길이야 있든 없든 계속 찾아 나갔다. 길이 막히면 나무를 타고 넘었다. 피리 소리는 점점더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걸음을 더 재게 놀린다. 어느덧 눈앞에 흰 꽃이 만발한 화원이 나타났다. 달빛 아래 호수 같은 화원이다. 

그런데 거기 흰 꽃 가운데 우뚝 솟은 장소가 하나 보였다. 퉁소 소리는 높았다 낮았다 하며 자지러진다. 동쪽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서쪽에서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런가 하면 남쪽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북쪽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10여 명이 숨어 퉁소를 불며 자기를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곽정은 몇 바퀴 돌자 어질어질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냥 우뚝 솟은 장소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원래 돌로 만든 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도화도 여주 풍씨지묘(桃花島女主馮氏之墓)>란 비석이 서 있었다. 

(아, 황용의 어머님 무덤이로구나, 용이는 어려서 모친을 여의었으니 정말 불쌍해.) 

무덤 앞에 꿇어 엎드려 공손하게 재배를 했다. 절을 할 때는 퉁소 소리가 뚝 멈추고 조용하더니 그가 일어나 섰을 때는 또 들려왔다. 

(길한지 흉한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쫓아가 볼 수밖에 없다.) 

곽정은 이렇게 생각하고 즉시 화원 속으로 들어갔다. 가락이 부드럽게 변하며 사람의 마음을 유혹한다. 

(무슨 곡인데 이렇게까지 듣기 좋을까?) 

 

곽정이 화원 속으로 들어서자 퉁소 소리가 급해진다. 웬일인지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다. 맥박이 펄떡펄떡 뛰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즉시 땅바닥에 앉아 마옥에게서 배운 현문정종의 내공을 쓰기 시작했다. 마음이 어지러워 자꾸만 일어나 춤을 추고 싶었다. 억지로 참으며 계속 내공으로 버틴다. 점점 마음이 가라앉음을 느끼기 시작하며 내공이 제대로 되었다. 가락이 제아무리 꺾어지고 자지러져도 이제는 괜찮았다. 파도 소리를 듣는 것처럼, 솔잎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는 것처럼 편안했다. 배고픈 것까지도 까맣게 잊었다. 내공이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자 이젠 자신이 생겼다. 서서히 눈을 뜨니 앞쪽에 저만큼 떨어진 장소에 파란 두 눈에 빛을 발하고 있는 물체가 보였다. 곽정은 가볍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맹수일까?) 

뒤로 몇 발짝 물러서는데 갑자기 그 두 개의 파란 불꽃이 사라졌다. 

(이 도화도가 정말 이상하구나. 제아무리 재빠른 표범이나 삵쾡이라도 이렇게 빨리 없어질 리가 없는데.)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면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는 사람의 숨소리다.  

(사람이었구나! 번쩍이던 것이 바로 그 사람의 눈이었구나. 눈을 감았으면 볼 수 없었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상대의 정체도 알 수 없는데 함부로 인기척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때 퉁소 소리는 애절한 원망을 호소하듯 아니면 젊은 부인의 뜨거운 사랑이 불타오르듯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고 있었다. 곽정이야 원래 나이도 어린데다 순박하고 또 게다가 무공을 익힌 처지라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맞은편에 있는 그 사람은 숨을 할딱거리며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마도 퉁소 소리의 유혹을 물려치기 위하여 무한한 진통을 겪고 있는 듯했다. 

곽정은 그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있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서서히 접근했다. 그곳은 더욱 빽빽하게 꽃나무가 들어차 있었다. 

밝은 달이 중천에 떠 있었지만 나뭇가지에 가리어 컴컴했다. 더욱 가까이 접근하니 희미하게나마 상대방의 면목을 볼 수 있었다.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그 사람의 산발한 머리가 땅에 끌리고 긴 눈썹과 수염이 입과 코까지 온통 가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가슴을 문지르고 한 손은 등뒤에 대고 있었다. 곽정이 보고는 깜짝 놀랐다. 단양자 마옥이 몽고의 절벽 위에서 내공을 익히는 이 자세를 자기에게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심신(心神)을 거두어들이는 요결이다. 철저히 수련만 한다면 천지 개벽을 하는 굉음도 듣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현문정종의 상승 내공을 안다면 어찌 자기만도 못하며 이토록이나 퉁소 소리를 무서워한단 말인가? 

 

이때 퉁소 소리는 더욱 가쁘게 자지러졌다. 그 사람은 어쩔 줄 모르고 앉은 채 펄떡펄떡 뛴다. 몇 차례나 몸이 허공에 뜨다가 겨우 가라앉는다. 곽정은 그의 진통이 더욱 짧아지고 잦아지는 것을 보며 안타깝게 바라다보고 있었다. 퉁소 소리는 다시 가냘프고 은은하게 가라앉았다. 

 

[안되겠어! 안돼!]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그는 벌떡 일어났다. 곽정이 달려가 왼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꽉 누르고 오른손으로 그의 목 뒤에 있는 대추혈(大椎穴)을 가볍게 두드렸다. 곽정이 몽고의 절벽 위에서 연공(鍊功)을 할 때 심사가 어지러워 안정을 찾지 못하면 마옥은 매번 이렇게 곽정의 대추혈을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장심(掌心)의 열기로 그가 진경(進境)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곽정의 내공이 깊지 못하여 장심의 힘으로 퉁소 소리의 유혹을 막아 줄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두드린 부위가 공교롭게도 맞아들어간 모양인지 장발의 그 노인은 정신을 안정시키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내공을 쓰기 시작했다. 

곽정은 기뻤다. 그런데 등뒤에서 누가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어린 녀석이 내 큰 일을 망쳐 놨구나!] 

 

퉁소 소리가 뚝 멈췄다. 곽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가 황약사 같았다. 

(이 장발의 노인은 호인이냐? 아니면 악한이냐? 내 아무것도 모르고 도와주었다가 오히려 황약사의 심사를 건드린 것이 아닐까? 만약 이 노인이 악한이라면 큰 잘못을 저지른 결과가 되는 것이다.) 

 

장발 노인의 숨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곽정은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내공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날이 새고 이슬에 옷이 젖었다. 비로소 눈을 떴다. 햇빛이 꽃나무 사이로 비쳐 들어오며 장발의 노인을 비춰 주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수염과 머리를 깎지 않았는지 야인과 같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장발의 노인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곽정을 한번 훑어보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전진칠자 가운데 어느 분의 문하냐?] 

 

그의 표정이 온화한 것을 발견한 곽정은 마음이 놓였다. 몸을 일으켜 세우며 절을 했다. 

 

[제자 곽정, 선배님께 인사올리나이다. 제자의 은사는 강남칠협입니다.] 

[뭐 강남 칠협이라구? 거짓말이다. 강남칠협이 어떻게 전진파의 내공을 안단 말이냐?] 

[단양진인 마도장께 이 년 동안 내공을 배우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전진파의 제자로 거두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장발의 노인이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괴상한 표정을 짓는 것이 어린 아이가 누구를 놀리는 것 같은 표정이다. 

 

[그건 그렇다 하고, 그래 어찌해서 이 도화도에 들어왔느냐?] 

[도화도 황도주께서 오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노인의 얼굴이 싹 변했다. 

 

[그래, 뭘 하러 왔느냐?] 

[황도주께 죄를 범하고 죽으러 왔습니다.] 

[그럼 왜 달아나지 않고?]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장발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네 말이 옳다. 자 여기 앉거라.] 

 

곽정은 그가 시키는 대로 돌 위에 앉았다. 이제 보니 그 노인은 산비탈의 석굴 속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 몇 개의 줄이 쳐져 있었다. 굴 앞의 줄이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그 밖에 또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느냐?] 

[구지신개 홍칠공이.......] 

 

그 말을 들은 노인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한다. 웃는지 아니면 우는지 알 수 없는 그런 표정이다. 

 

[홍칠공도 네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홍칠공은 제게 강룡십팔장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 그분이 내공도 알려 주더냐?] 

[아뇨.] 

 

그 노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다보며 혼자 중얼거리듯 말한다. 

 

[아니, 저렇게 어린 나이에......,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수련을 시작했다고 쳐도 겨우 십 팔구 년......, 나는 퉁소 소리의 유혹도 감당해 내지 못하는데, 감당할 수 있다. 허 참.......]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면서 아래위로 곽정을 몇 번이나 훑어보다가 오른손을 뻗는다. 

 

[네가 내 손바닥을 한번 밀어 보렴. 어디 한번 공력을 시험해 보자꾸나.] 

 

곽정은 그가 시키는 대로 손바닥을 노인의 손바닥에 댔다. 

 

[기(氣)를 단전(丹田)으로 가라앉히고 힘을 써 보아라.] 

 

곽정이 있는 힘을 다 썼다. 노인이 손바닥을 움츠리자 한 가닥 강한 힘이 반대로 튀어나온다. 

 

[조심해라!] 

 

곽정도 견딜 수 없게 되자 왼손바닥을 위로 치며 노인의 팔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손을 바꾸자 식지(食指)가 벌써 그의 완골에 와 닿는다. 다만 손가락 하나의 힘으로 곽정을 퉁긴 것이다. 곽정이 비틀비틀 뒤를 향해 7,8보나 미끄러지다가 나무에 부딪치고 멎었다. 

 

[아니, 무공이 그만하면 쓸 만하긴 하지만 아직도 상승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는데도 어떻게 해서 천마무곡(天魔舞曲)의 위력을 당해 낸단 말인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다. 곽정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노인을 바라다보았다. 

(이 노인의 무공이 홍칠공과도 비슷하고 황약사와도 백중이겠는데 어떻게 해서 도화도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혹시 서독(西毒)이나 남제(南帝)가 아닐까?) 

곽정은 혹시 서독이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이거 잘못 걸려들었구나!) 

손바닥을 들어 햇빛에 비춰 본다. 붉게 부어 오른 것도 아니요, 까만 상처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었다. 노인이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그래 내가 누구 같으냐? 어디 한번 맞혀 보렴.] 

[제자는 천하무공제일에 다섯 분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전진교주 왕도장은 이미 타계하셨고, 구지신개 홍칠공과 도화도주 황약사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혹시 구양(歐陽) 선배이시거나 아니면 단황야(段皇爺)가 아니신지?] 

[그럼, 네가 보기에는 내 무공이 동사,북개나 비슷하단 말이렷다?] 

[제자 무학에 입문한 지 일천하여 잘 알지도 못하는 처지라 함부로 단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금 저를 미시는 것을 보니 제자가 만나 뵌 무학의 명가들 가운데 홍칠공과 황약사를 제외하고는 세 번째 뵙는 고수같습니다.] 

 

노인은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 보니 어지간히 흐뭇한 눈치다. 수염에 가린 얼굴 가운데 어린애 같은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서독인 구양봉(歐陽鋒)도 아니요, 또 무슨 황야(皇爺)도 아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무나.] 

[제자는 언젠가 자신의 실력이 전진 교주 등과 비슷하다고 하는 구천인( 千 )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무공은 유명 무실할 뿐이었습니다. 제자 과문한 탓인지 정말 선배님이 누구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인이 껄껄 웃는다. 

 

[내 성이 주(周)가인데 생각이 나는가?] 

[아, 그럼 주백통(周伯通)이라고 하는.....] 

 

이 말을 하다가 자기가 함부로 이름 석 자를 불렸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해 하며 급히 일어나 꿇어 엎드려 절을 했다. 

 

[몰라 뵙고 불경했음을 용서하십시오.] 

[괜찮다. 제가 바로 주백통이다. 내 이름이 주백통이라, 네가 주백통이라고 했는데 불경스러울 것이 있느냐? 전진교주 왕중양은 내 사형이요, 마옥,구처기 등은 모두 내 사질(師姪)이다. 네가 전진파 문하가 아닌 이상 선배니 뭐니 잔소리할 것 없이 그냥 주백통이라 부르면 되는 게야.] 

[제가 감히 어떻게 그렇게 부릅니까?] 

 

주백통은 나이는 많았지만 어린 아이 같았다. 무엇이고 생각나면 아무 거리낌없이 해 버리는 그런 성미의 소유자였다. 

 

[여보, 곽형! 우리 결의 형제를 맺으면 어떨까?] 

 

말조차 엉뚱하게 나온다. 곽정이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제자는 마도장, 구도장님의 후배올시다. 마땅히 사조(師祖)로 모셔야 하는 줄 압니다.] 

 

주백통이 두 손을 내저었다. 

 

[내 무예는 모두 사형께 배웠지. 그러나 마옥이나 구처기는 내가 선배답지 않다고 나를 공경치 않는걸.......] 

 

여기까지 말하는데 발자국 소리가 나며 늙은 하인이 찬합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야! 먹을 것이 왔구나!] 

 

주백통이 반가와 외치니 늙은 하인은 찬합의 뚜껑을 열고 뜨끈뜨끈한 반찬 네 접시와 술주전자, 목기에 담긴 밥통 등을 주백통의 앞에 있는 큰 돌 위에 꺼내 놓은 뒤 두 사람에게 술을 따르고 공손히 옆에 물러선다. 

 

[황소저는 어찌해서 나를 보러 안 오나요?] 

 

곽정이 물었지만 늙은 하인은 고개를 흔들며 자기의 귀와 입을 가리키며 벙어리요, 귀머거리라는 시늉을 했다. 

 

[이 사람의 귀도 황약사가 찔러 병신을 만들었다네. 입을 벌리게 하고 구경 좀 해 보라구.] 

 

주백통이 웃으며 하는 말을 듣고 곽정은 입을 벌려 보라는 시늉을 했다. 곽정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혀가 반 토막이나 잘려 있는 것이 아닌가? 

 

[섬 안에 있는 하인들이 다 이 모양이야. 자네도 도화도에 왔으니 죽지 않으면 똑같은 꼴이 될걸.] 

 

곽정이 듣고 보니 어이가 없었다. 

(황용의 아버지가 이토록 잔인한가?) 

주백통은 곽정에게 계속 말을 했다. 

 

[황약사가 밤마다 나를 괴롭히지만 나는 승복안해. 어젯밤 하마터면 걸려들어 끝장이 날 뻔했지만 요행히 자네가 도와서 겨우 위기를 모면했네. 자, 우리 안주도 있고 술도 있으니 하늘에 맹세하고 의형제가 되세.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고 재난이 오거든 함께 당하는 거야. 옛날 왕중양과 의형제를 맺을 때도 이 모양으로 우물쭈물 몇 차례나 거절하더군. 아니, 왜 그러나? 정말 의형제가 되고 싶지 않은가?] 

[절대로 결의 형제를 할 수 없습니다. 선배님의 말씀에 따라 의형제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욕하고 놀립니다. 또 일후 마도장이나 구도장을 제가 무슨 면목으로 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그 무슨 핑계가 그렇게 많단 말인가? 틀림없이 내가 너무 늙었다고 그러는 게로구나? 늙었다구. 아이구 아이구......]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운다. 곽정은 난처했다. 

 

[제자 그럼 선배님의 말씀에 좇겠습니다.] 

[억지로 대답했다가 다음 날 누가 물으면 전부 내게 뒤집어 씌우려고? 나는 자네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으로 아는데?] 

 

곽정은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점잖은 나이에 체통도 없을까? 그는 주백통의 별명이 노완동(老頑童)이라는 것을 모른다. 성질이 괴상한데다 나이도 들었건만 말이나 하는 짓이 꼭 어린 아이와 같았다. 반찬 접시를 집어던지며 심통만 부리고 밥조차 먹으려 하지 않았다. 늙은 하인이 주워 들며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몰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곽정은 할 수 없이 웃었다. 

 

[형님의 고마우신 말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주백통은 눈물을 씻으며 웃었다. 

 

[내 굴 앞에 이렇게 줄이 막혀 있어 나갈 수가 없으니 그냥 안에서 절을 할 테니 자네는 밖에서 하게.] 

 

곽정은 가로놓인 몇 개의 줄을 바라다보았다. 그냥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떻게 절세의 무공을 지닌 사람의 행동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없이 그냥 무릎을 꿇자 주백통도 함께 무릎을 꿇는다. 

 

[제자 주백통, 오늘 곽정과 함께 결의 형제를 맺습니다. 일후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고 화가 닥치면 함께 당하겠습니다. 만일 맹세를 어기는 날에는 하늘의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곽정도 그가 말한 대로 따라서 한 후 술을 뿌리고 형님으로 모시는 절을 했다. 주백통은 껄껄 웃으며 만족한 표정이다. 

 

[됐어 됐어. 그만해.] 

 

혼자 술을 잔에 가득 부어 마신다. 

 

[황노사는 쩨쩨한 사람이란 말야. 이렇게 싱거운 술을 보내다니..... 언젠가 이 집 아가씨가 준 술이야말로 상등품이던데 한 번 준 뒤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거든.....] 

 

곽정도 황용의 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좋은 술을 훔쳐 주백통에게 주었다가 그만 황약사에게 들켜 혼이 난 뒤 도화도에서 달아났던 것이다. 주백통은 아직도 이 일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곽정은 온종일 주렸다. 술 생각이 없어 밥만 대여섯 그릇 정신없이 퍼먹고 나니 살만했다. 늙은 하인은 그들이 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고 서서히 챙겨 돌아갔다. 

 

[아우, 무슨 일로 황약사에게 득죄했는지 이 형님께 들려주게.] 

 

곽정은 자기가 어렸을 때 엉겁결에 진현풍을 찔러 죽인 일과 귀운장에서 매초풍과 싸운 일, 화가 난 황약사가 강남육괴를 괴롭힌 일이며, 자기가 한 달 이내에 도화도에 와서 죽기로 대답했다는 사연 등을 들려주었다. 

노완동 주백통은 다른 사람의 얘기 듣기를 가장 즐겨 했다. 곽정의 얘기를 듣는 동안에도 고개를 끄덕이다 실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곽정이 조금만 멈춰도 재촉을 해가며 꼬치꼬치 물어봤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곽정의 말이 다 끝나자 또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여기 오지 않았습니까?] 

 

주백통은 침통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음, 원래 그 미모의 아가씨와 네가 좋아하는 사이란 말이렷다, 그런데 어째서 그 아가씨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종적을 감췄지? 곡절이 있을 게야. 황노사가 가뒀는지 모르지.] 

 

곽정은 황용이 걱정스러웠다. 

 

[제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지금 뭐라고 말했나?] 

[이 아우의 실언을 가지고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제자란 말 절대로 써서는 안 돼. 농담으로야 에미라고 부르면 어떻고 마누라라고 부르면 누가 뭐라나? 이제 또 틀리면 안 되네.] 

 

주백통이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다시 고개를 비스듬히 꼬았다. 

 

[내 어떻게 돼서 여기 있는 줄 알겠나?] 

[그렇지 않아도 여쭈어 보고 싶었습니다.] 

[말을 꺼내면 너무 길어. 하지만 내 들려주지. 동사,서독,남제,북개,중신통 다섯 사람이 화산에 모여 무예를 겨룬 일 아나!] 

[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엄동 설한, 섣달 그믐께였다네. 화산 위에는 백설이 하얗게 쌓였지. 그들 다섯 사람이 칠 일 밤 칠 일 낮을 겨루었는데 동사,서독,남제,북개 넷이 결국에 가서는 내 사형인 왕중양의 무공이 천하 제일이라고 승복했다네. 그런데 그들이 무엇 때문에 화산에서 싸웠는지 아나?] 

[글쎄요. 그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건 한 부의 경문(經文) 때문이었는데......] 

[아, 구음진경요?] 

[그래 그래, 아우는 나이가 어린데도 무림 가운데의 얘기를 다 알고 있군 그래. 그 구음진경은 무학 제일의 기서(奇書)야. 전하는 말로는 달마조사(達摩祖師)가 동래(東來)하여 중토무사(中土武士)와 기예의 승부를 가리기 위해 면벽 구년(面壁九年)하여 깨친 무학의 정수를 적은 것이라고 한다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되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단 말이야. 천하 무학지사들은 이 책을 손에 넣기 위하여 서로 다투기 시작했지. 내 사형의 말씀으로는 이 경문을 입수하기 위해 다투다 희생된 무학의 명사들이 백 명도 넘는다니까, 대단한 물건이지. 하여튼 경문을 입수한 사람은 경문에 적힌 그대로 무공을 수련했는데 일 년이나 반 년도 못 가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어 뺏기고 말았다는 게야. 뺏고 뺏기는 바람에 죽고 죽이고 하다 보니 희생자는 부지기수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손에 넣으면 천방백계 숨어서 수련을 했지만 워낙 관심이 많다보니 종내 들통이 나곤 했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 경문이 불길하기로 천하 제일이군요. 진현풍이 경문만 아니었다면 매초풍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황약사가 찾지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매초풍도 그것만 아니었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비참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아우는 어째 그런 바보 소리를 하나? 구음진경에 적힌 무공이야말로 오묘의 극치지. 무학을 배우는 사람이 그 진경을 가지고 무예를 익힌다면 그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 또 어디 있겠나? 그래서 희생당한들 뭐 그리 아까울 게 있어? 그래 이 세상에 안 죽는 사람도 있나? 한 번 죽는 것은 다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형님은 무학에 미친 사람이게요?] 

[그야 물론이지. 세상 사람들이 다 어리석기 짝이 없단 말일세. 어떤 사람은 관리가 되기 위해 독서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황금과 보석을 사랑하고 또 절세의 미녀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그러나 그 가운데의 즐거움이 어찌 무학에 비길 수 있단 말인가? 어림없는 소리일세.] 

[이 아우도 약간의 무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무궁한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걸요.] 

[바보야, 바보. 그럼 무엇 때문에 무공을 배웠나?] 

 

주백통이 한숨을 쉰다. 

 

[사부들께서 배우라고 하시니 배웠지요.] 

[그렇다면 던 정말 바보로구나. 내 말해 주지, 한 사람이 밥은 먹지 않아도 되고 생명도 포기할 수 있지만 무공은 버릴 수 없는 게야.] 

 

곽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무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지만 이렇게까지 빠진 사람은 처음인걸.)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하다 말았지?] 

[천하의 영웅호걸이 모두 구음진경을 얻으려고 야단들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래. 뒤에 일이 점점더 시끄러워졌단 말일세. 전진교 교주, 도화도주, 심지어 개방( 幇)의 홍방주 같은 대영웅들까지도 관여하게 됐단 말일세. 그들 다섯 사람이 약속하기를 화산에서 천하 제일의 무공이 누군지 겨루고 그 결과에 따라 그 경문을 갖기로 했던 거야.] 

[그럼, 그 경문은 결국 형님의 사형이 가지셨군요.] 

[그렇지. 나와 왕사형의 우정은 두터웠네. 그가 출가하기 전부터 우리는 친했으니까. 뒤에 그가 내게 무예를 가르쳤지. 그런데 그는 내가 너무 무학에 집착한다고 충고를 해 주었어. 도가의 청정무위의 도를 모른다는 게야. 그래서 나는 전진파이면서도 도사가 되지못한 걸세. 알겠나? 내 일곱 명의 사질 가운데 구처기의 무공이 제일 월등한데도 내 사형은 그를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 무학에만 열중하고 도가의 도에 게을리 한다는 게야. 무학에 열중하려면 맹렬한 수련을 겪어야 하고, 도가에 열중하려면 담담해야 하니 서로 조화가 잘 안되는 걸세. 마옥이 내 사형의 법통을 받기는 했지만 무공은 오히려 구처기나 왕처일에게 뒤지는 걸.] 

[그렇다면 중양선사 왕진인은 어째서 도가의 진인이며 또한 무학의 대사입니까?] 

[그분이야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한 분이라, 도리야 자연히 깨우치게 되었고 또 나처럼 많은 고련을 겪으셨으니까 자연 그렇게 된거지. 내 방금 어디까지 말하다 화제가 바뀌게 되었지?] 

[아, 사형께서 구음진경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참 그랬었지. 그분은 경문을 입수한 뒤 수련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것을 석갑(石匣)에 넣어 도관(道觀) 뒤에 있는 큰 돌밑에 묻으셨단 말야. 내 이상해서 여쭈어 봐도 웃기만 하실 뿐 대답이 없으셨어. 내가 계속해서 추궁하면 나보고 오히려 생각해보란 말씀만 하셨지. 이제야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누가 훔쳐갈까 봐 그랬나요?] 

 

주백통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아냐 아냐, 누가 감히 전진교주의 물건을 훔쳐? 어느 놈이 죽고 싶었던가?] 

 

곽정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벌떡 일어나 섰다. 

 

[그래요! 그걸 돌 밑에 묻어 둘 것이 아니라 차라리 태워 없앴어야 했어요.] 

 

주백통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곽정을 바라다보았다. 

 

[내 사형도 그때 그런 말씀을 하셨다네. 몇 차례나 없애려고 하시다가도 종내 그걸 없애지 못하셨어. 그런데 아우는 그 어리숙한 머릿속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곽정은 얼굴을 붉혔다. 

 

[제 생각은 이래요. 왕진인의 무공은 천하 제일인데 또 수련을 해봐야 역시 천하 제일 아니겠어요? 화산에서 무예를 겨룰 때도 천하 제일의 명성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구음진경을 얻기 위해서 그랬을 거예요. 구음진경을 얻으려고 한 것도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 영웅호걸을 서로 죽이고 죽는 액운속에서 구출해 주기 위해서지요.] 

 

 

 

第 三十五 章. 구음진경의 비밀 

 

 

주백통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한 채 멍하니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곽정은 혹시 자기가 실언을 하여 이 성질이 괴팍한 의형을 화나게 만든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주백통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자네가 그런 도리까지 생각해 냈는가?] 

 

곽정은 머리를 긁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구음진경이 제아무리 훌륭한 보배라 하더라도 그토록 많은 인명의 희생이 있었다면 마땅히 없애 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말해 보았을 뿐입니다.] 

 

주백통은 곽정을 앞에 놓고 말을 이었다. 

 

[이치야 더 말할 것 없이 당연하지. 그런데 나는 그 점을 생각 못했단 말야. 사형이 옛날 내게 말하기를 무학을 배우는 데 소질이 있고 또 본인이 열심히 하니까 좋기는 하지만 너무 집착하고 또 구세제인(救世濟人)을 하는 대인대용(大仁大勇)의 포부가 부족하니 평생토록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지고의 경지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단 말야. 나는 그때 그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어. 무학을 배우려면 무학에 열중하면 되는 거지 포부나 식견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생각이었네, 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내 이제 믿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지. 아우, 자네의 무공은 내게 비하면 아직도 멀었지만 마음이 착하고 포부가 원대하니 열 배는 훌륭하게 될 걸세. 유감스러운 것은 내 사형이 세상을 떠나신 일이야. 그렇지만 않다면 일신의 무공을 전부 자네에게 전수해 주실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사형! 사형! 사형의 말씀은 옳았어.] 

 

그는 사형의 은혜를 생각하고 갑자기 돌 위에 엎드려 통곡을 한다. 곽정은 그의 말 뜻을 십분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우는걸 보니 자기도 슬퍼지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한참이나 이렇게 울다가 고개를 든다. 

 

[아, 우리가 어디까지 말하다 그만 뒀지? 얘기가 끝난 뒤 울어도 늦을게 없는 걸 가지고 말이야. 우리 어디까지 말했나? 울지말라고 말리지도 않구?] 

[왕진인께서 구음진경을 돌 밑에 묻어 두셨다고 했어요.] 

[참 그렇군. 그 경문을 돌 밑에 묻자 나는 구경 좀 하자구 했지. 그런데 그게 아냐, 표정이 확 달라지고 정색을 하신단 말야. 그 뒤로 나도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네. 그렇게 되자 무림은 다시 조용해지는 것 같더군. 그런데 뒤에 사형이 세상을 떠나자 풍파가 일어났다네. 사형은 자기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아시고 도관의 일을 여러 가지로 당부하신 후에 나보고 그 구음진경을 꺼내 오라고 하시더군. 불을 피우고 경문을 태워 버리려고 하셨어. 오랫동안 어루만지시다가 한숨을 내쉬시더군. <선배가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쓰신 것을 내 손으로 없앨 수 있나? 뒷사람이 이 경문을 선용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내 문하에서는 절대로 구음진경을 가지고 무예를 익힐 수는 없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사심이 있어서 경문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겠나?> 이런 말씀을 하시며 눈을 감으셨다네. 그런데 그날 밤 영전에서 삼경도 되지 못해 그만 일이 벌어지고 말았네.] 

[아, 어떤 일이요?] 

[그날 밤 나와 전진칠자가 함께 영전을 지키고 있었지. 그런데 심야에 적들이 공격을 해 왔거든. 모두 고수들이야. 그래서 전진칠자는 즉시 방어에 나섰단 말일세. 혹시 사부의 시체에 손을 댈까 봐 적들을 모두 도관(道觀) 밖으로 유인해 싸우고 나 혼자 영전을 지키고 있는데 밖에서 <빨리 구음진경을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전진교 도관에 불을 지르겠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단 말야. 고개를 내밀어 보니 한 사람이 대나무 끝에 서 있는데 경신의 무공이 내 상위란 말야. 상대가 아닌 줄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당하고 말 수는 없어서 대들었지. 대나무 위에 서서 삼사십초를 대결했지만 싸울수록 나는 몰리기만 했어. 나보다 몇 살 덜 먹었는데 어찌나 손이 매운지 결국 어깨를 얻어맞고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네.] 

[아니, 형님의 무공을 가지고도 지셨다니 그 상대가 도대체 누구예요?] 

[누군지 어디 한번 맞춰 보게.] 

[글쎄요. 서독(西毒)이었나요?] 

[아니, 어떻게 서독인 줄 알았지?] 

[제가 생각하기로는 세상에 무공이 형님보다 상위라면 화산의 다섯 분밖에 없지 않습니까? 홍칠공은 정직한 사람이요, 단황야(段皇爺)는 황야의 신분이라 감히 체면 때문에 그럴 리 없고, 황약사는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남의 불행을 틈타 대들 비겁한 위인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원 밖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것이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군!] 

 

곽정이 몸을 날려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가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우, 돌아오게나, 황약사야! 벌써 멀리 사라졌을걸.] 

 

곽정이 다시 굴 앞으로 돌아왔다. 

 

[황약사는 기문오행(奇門五行)에 정통한 사람이야. 여기 있는 꽃나무도 무후(武侯)의 팔진도(八陣圖)에 따라 심은 거라구.] 

[제갈무후(詣葛武侯) 말입니까?] 

[그렇지. 황노사는 위인이 총명하여 거문고며 바둑,서화,의술,성상(星相), 심지어 농업,수리(水利),경제,병략(兵略) 등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인데 유감스럽게도 정도(正道)를 걷지 않을 뿐이야. 그가 여기 있는 화원 속에서 동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갔다 해 버리면 다른 사람은 찾을래야 찾을 재간이 없지.] 

 

곽정은 아무 말 없이 황약사의 다채로운 재주에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형님, 그래 서독에게 맞고 대나무 아래로 떨어진 뒤 어떻게 됐어요?] 

 

주백통이 자기 다리를 한 번 탁 치고 다시 말을 잇는다. 

 

[참 그렇구나. 이번엔 자네가 내 얘기를 재촉하는군 그래. 구양봉(歐陽鋒)에게 얻어맞은 곳이 어찌나 아픈지 꼼짝달싹할 수도 없었네. 그런데 그자가 영전으로 달려간단 말이야. 그래서 나도 죽을 각오를 하고 쫓아 들어갔지. 그런데 그가 사형의 영전 앞에 손을 뻗어 경서를 잡으려 했단 말야. 큰일났구나 했지. 상대를 할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요, 사질(師姪)들은 또 다른 적과 대결하느라 미처 돌아오지 않고 있었거든. 바로 이때 벽력같은 소리가 나며 관 뚜껑의 나무들이 부러져 나가며 커다란 구멍이 하나 뚫렸다네.] 

[아니, 그럼 서독이 장풍으로 왕진인의 영구(靈柩)를 친 건가요?] 

[그게 아니지, 내 사형이 자기의 장력으로 영구를 부순 게야.] 

 

곽정은 산해경(山海經)에 있는 황당무계한 기담(奇談)을 듣는 것처럼 놀라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래, 자네 생각으로는 내 사형의 영혼이 나타났겠나, 아니면 부활했다고 생각하나? 모두 아니야, 그는 거짓으로 죽었던 게야.] 

[뭐라구요?] 

[거짓으로 죽은 체 했단 말이다. 원래 내 사형은 죽기 며칠 전부터 서독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던 거야. 자기가 죽으면 금방 경서를 훔치러 올 줄 알았지. 그래서 상승의 내공으로 숨을 죽이고 죽은 체했던 거야. 만약 제자들이 알면 슬퍼하지 않을 게고, 그렇게 되면 교활하기 짝이 없는 구양봉이 대들겠나? 그래서 아무도 몰랐지. 그때 내 사형은 장풍으로 관을 깨고 튀어나오며 일양지(一陽指)로 서독을 쳤다네. 구양봉은 창 밖에서 내 사형이 분명 운명하는 것을 보았는데 관 속에서 튀어나왔으니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지. 물론 나도 이만저만 놀란 것이 아니니까.] 

 

주백통은 말을 이었다. 

 

[서독은 내 사형을 옛날부터 무서워 했는데다가 이렇게 놀라 놨으니 방어고 뭐고 할 수가 없었지. 내 사형의 일양지 일격이 그만 구양봉의 양미간 사이를 적중하고 말았네. 그가 수년 동안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던 합마공(蛤 功)이 박살이 나고 말았지. 구양봉은 그 뒤 서역으로 달아나 다시는 중원이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니까. 내 사형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제상(祭床)에 단정히 앉으시더군. 나는 일양지를 쓰면 체력이 굉장히 소모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용히 계시게 내버려둔 채 사질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들과 함께 습격해 온 적들을 물리쳤네. 사질들은 교주가 죽지 않았단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더군. 함께 도관으로 달려와 보니 아니, 이게 웬일이야?] 

[왜요? 어떻게 됐게요?] 

[사형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것이 이상하잖아. 달려가 만져 보니 차디차고 뻣뻣해. 이번에는 정말로 숨을 거두신 거야. 사형의 유언은 구음진경의 상반부와 하반부를 별도로 보관하여 설령 도난을 당하거나 분실을 하더라도 동시에 악한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막아야 되겠다는 거지. 그래서 나는 진경의 상반부를 감춰 둔 뒤에 하반부의 진경을 가지고 남방에 있는 어떤 명산에 숨기려고 가지고 가다가 그만 도중에서 황노사와 만나게 되었지.] 

[아, 원래 그런 일이 있었군요.] 

[황노사의 위인이 괴상하지만 그래도 나하고 지면이 있는 사이요, 서독처럼 그렇게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지. 그때는 공교롭게도 막 결혼한 신부와 함께 있었단 말야.] 

 

(그가 바로 황용의 어머니였던가 보다. 그는 이 일에 어떤 관련이 있었을까?) 

곽정은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가 좋아하는 표정을 보고 축하를 하기 위해 술대접을 했지. 내가 사형이 죽었다 부활한 일이며 구양봉을 박살낸 경위를 말했더니 신부가 듣고 구음진경 구경 좀 하자는 게야. 자기는 무예가 뭔지도 모르지만 허다한 무림의 고수들이 희생당했다는 그 책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그러냐는 게야. 황노사의 부인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지. 신부의 요구라면 뭐든지 들어주었거든. 내가 난색을 표명했지. 그랬더니 황노사가 나서는 게야. <여보 백통, 내자는 정말 무공을 모른다오. 젊은 나이라 호기심이 많아 그러니 좀 보여 준들 무슨 상관 있겠소? 이 황약사, 당신의 경서를 곁눈으로 훔쳐만 봐도 이 두 눈을 빼 당신에게 바치겠소.> 이런단 말야. 황노사는 당대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인물이었지. 그렇다면 그런 게지 두 말이 필요 있었나. 하지만 이 경서는 사실 보통 물건이 아니었단 말일세. 나는 머리만 설레설레 흔들었지. 황노사는 기분이 언짢아 이렇게 말하더군. <여보, 당신도 곤란할 때가 있을 게 아니오? 내자에게 한번 보여 주기만 하면 이 황약사 언제고 전진파를 위해 보답할 날 있으리다. 보여 주든지 말든지 모두 당신 마음대로요. 누가 날 보구 당신과 알고 지내랬던가? 내 전진파의 제자들과는 모르는 처지니 관계없소.> 나는 그의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었지. 그 사람은 말을 꺼냈다 하면 실천하는 사람이야. 나하고는 다투기 곤란하니까 마옥이나 구처기를 괴롭히겠다는 뜻이란 말야. 이 사람의 무공이 대단한데 건드렸다가는 큰일이거든. <여보 황노사, 화를 내려거든 노완동(老頑童) 주백통을 찾아 낼 것이지 내 사질들은 찾아 무얼 하려나?>] 

 

주백통의 말은 끝이 없다. 

 

[그의 신부는 내 노완동이란 별명을 듣더니 낄낄 웃어댄단 말야. <주선생님, 아주 장난꾸러기신 모양이로군요. 그런 별명을 다 가지고 계신 걸 보니요. 그럼 우리와 함께 놀아요. 그까짓 경서 이젠 보자구 안 할께요.> 나보구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황노사를 바라다보더군. <여보, 그 구음진경은 구양이라는 사람이 훔쳐간 모양이에요. 주선생님이 내놓지 못하시는 걸 보면 틀림없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입장 곤란하실 텐데 자꾸만 보여주라고 귀찮게 하시나요?> 그러니까 황노사도 웃더군. <그래 그래. 여보 백통, 내 당신을 도와 서독한테 가서 찾아다 주지.>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 

 

(황용의 어머니도 황용처럼 꾀가 많았구나!) 

 

[그렇게라도 해서 구음진경을 보고 싶었던가 보군요.] 

[그야 나도 물론 알지. 그렇다고 또 내가 질 수야 있었겠나? <경서는 내 수중에 있으니 형수님께 구경 한번 시켜 드리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황노사가 내가 경서 하나 간직하지 못할 것으로 깔보고 있으니 재주나 한번 겨루어 봅시다.> 황노사에게 이렇게 말했더니 그도 웃더군. <무예를 겨루다가 우정을 깰 것이 아니라 당신이 노완동이니 우리 어린아이 장난을 가지고 한번 놀아나 봅시다.> 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의 신부가 먼저 손뼉을 치더군. <그래요. 구슬치기 같은 것으로 겨루면 재미있겠네요.>] 

 

곽정은 미소를 머금고 주백통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구슬치기라면 나도 자신이 있었단 말일세.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겨루자면 겨루는 게지 설마하니 내 무서워할 줄 알았나?> 그랬더니 황부인이 웃더군. <주선생님, 지시면 그 경서 구경시켜 주시는 거예요. 만약 이기시면 무얼 요구하시겠어요?> 이 말을 들은 황노사는 <전진교만 보물이 있고, 도화도에는 없으란 법이 있나?> 이렇게 말하며 보따리 속에서 검고도 가시가 돋친 의복을 꺼내 상 위에 펼쳐 놓더군. 그게 뭔지 자네 알 수 있겠나?] 

 

주백통의 말에 곽정이 대답했다.  

 

[연위갑(軟蝟甲)요.] 

[그래 맞았어, 자네도 알고 있었구먼. <여보 주백통, 당신은 무공이 탁월하니 이런 갑옷은 필요 없겠지만, 만일 결혼해서 신부를 맞아들여 장난꾸러기 자식을 낳게 되면 어린아이들이 이것을 입으면 아주 훌륭하다오. 만약에 구슬치기를 해서 이기면 도화도의 보물은 바로 당신의 것이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지. <어린아이 날 생각은 없지만 당신의 그 연위갑은 무림 가운데 오래 전부터 소문이 난 귀물이니 제가 이기면 입고 다니며 자랑이나 하지. 도화도주를 꺾었다는 사실을 천하 호걸들에게 알릴 필요는 있지 않겠느냐>고. 그랬더니 또 부인이 나서더군. <큰소리 먼저 치지 말구 겨루어 보기나 하시다구요> 말일세. 그래서 각자 아홉 개의 구슬을 가지고 여덟 개의 구멍에 누가 전부 집어넣을 수 있는가를 가지고 시합을 했지.] 

 

곽정은 이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어려서 자기도 의형제를 맺은 타뢰와 더불어 늘 구슬치기를 했던 생각이 난 것이다. 

 

[셋이 함께 밖에 있는 공지로 나가 시합을 하게 했다네. 나는 황부인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관찰해 보았지. 과연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 여자에 틀림없더란 말일세. 내가 먼저 땅위에 구멍을 팠다네. 황약사가 먼저 구슬을 던지기로 했단 말이야. 그의 암기를 쓰는 솜씨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어. 그러니까 황노사는 자기가 이길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지. 그러나 암기를 쓰는 것과 구슬치기는 재주는 비슷한 것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달라. 또 내가 구멍을 팔 때 일단 구슬이 들어가더라도 퉁겨 나오게 만들어 놨었으니까 말일세. 힘을 너무 많이 써도 안 되고 또 너무 가볍게 던져도 안 들어가. 적당한 힘으로 알맞게 던져야 들어가거든. 황노사가 세 개를 던져 적중시켰지만 모두 튀어나오고 만걸. 그가 이치를 깨우쳤을 때 내 구슬은 벌써 다섯 개나 구멍에 들어가 있었다니까. 암기를 쓰는 그의 재주는 정말 비상해. 내게 남은 돌이 잘 들어가지 않을 구멍을 남겨 놓은 채 자기가 가진 세 개의 구슬을 구멍에 집어넣더군. 나야 뭐 이제 다 이긴 것 상관이 있었겠나? 내 구슬 하나를 또 구멍에 넣었지. 난 이제 자신과 여유가 생겼단 말일세. 황노사가 진게야, 신선이 나타나 도와준데도 별 수 없게 돼 버렸으니까. 그런데 말야, 그놈의 황노사가 잔꾀를 부린 게야. 무슨 꾀를 부렸는지 알겠나?] 

[무공으로 형님의 손을 쳤나요?] 

[그건 아니지, 황노사는 정말 못돼먹었어. 그런 우둔한 방법은 쓰지 않지. 그도 이기지 못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손끝의 잠력(潛力)을 이용해 세 개의 구슬을 퉁겨 이미 구멍에 넣은 내 구슬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자기 것만 얌전하게 들어가 있도록 한 게야.] 

[아, 그러니까 형님은 이제 쓸 구슬이 하나도 없네요?] 

[그렇게 된 거지. 눈을 멀쩡하게 뜬 채 황노사의 남은 구슬이 구멍에 하나하나 들어가 박히는 걸 구경만 하고 있었지. 꼼짝없이 지고 말았다네.] 

[그건 진 게 아니잖아요?] 

[나도 그렇게 말했지. <여보 백통, 누구의 구슬 아홉 개가 먼저 구멍에 들어가느냐, 이걸 가지고 결판을 내기로 약속하지 않았소? 떼를 써 봐야 소용없소. 당신이 진 것이오.> 나도 황노사가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내가 실수를 한게야. 사전에 막지를 못했으니 말일세. 입장을 바꾸어 내가 황약사의 구슬을 가루로 만들고 내 것을 집어넣었다고 해도 그렇게 말했을 텐데, 나는 그런 재주는 없었거든. 정말 대단한 인물이야. 할 수 없었지. <형수님, 경서를 보여 드릴 태니 오늘 밤 어둡기 전에 돌려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되돌려 주지 않을까 봐 조바심을 했다네. <여보 백통, 얼마 동안 빌기로 사전에 약속을 안했잖소? 언제까지 봐야 다 볼는지 모르는 일이니까.> 황노사는 이렇게 약을 올리는 게 아니겠나? 경서는 그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됐으니 십 년도 빌리는게고, 백 년도 빌리는거니까. 황부인도 웃더군. <주선생님, 선생님 별명은 노완동이지만 저는 그런 엉터리는 아니에요. 유비(劉備)가 형주(荊州) 빌리듯 할 줄 아시나 보죠. 제가 여기서 볼께요. 다 보면 금방 되돌려 드릴 테니 옆에 앉아 계셔요. 저녁때까지 갈 것도 없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품속에서 경서를 꺼내 부인에게 주었지. 부인은 그걸 받아 들고 나무 밑으로 가 돌 위에 앉은 채 펴 보더군. 내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았던지 황약사가 말을 걸더군. <노완동, 당세에서 당신이나 나를 능가할 무공을 지닌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당신을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게고, 나를 능가할 사람은 당신까지 합쳐 사오 명은 될 게요.> <나를 너무 추켜 세우는구료.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이 네 사람의 무공이 각기 특징을 가지고 있어 누가 누굴 이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오. 구양봉이 이미 당신 사형에게 그렇게 자랑으로 여기던 합마공(蛤 功)이 박살났으니 십 년 동안은 당신을 이기지 못할 것은 틀림없소. 강호에 무슨 철장수상표(鐵掌水上飄) 구천인( 千 )이란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때 화산에 나오지도 않았으니 제아무리 무공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대단한 인물은 아닐 게요. 여보 노완동, 당신의 무예가 어느 정도인지, 나도 좀 알지만 그래도 네댓 사람을 빼면 당신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니 우리가 협력하면 아무도 함부로 대들지는 못할 것이오.> <그야 물론이겠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뭣 때문에 그렇게 조바심을 하오? 우리 둘이 함께 있는데 누가 그 경서를 훔치러 온단 말이오?> 나도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다소 안심을 했지. 황부인은 한 장 한 장 자세히 보면서 입으로 중얼중얼 읽어 내려가더군. 나는 오히려 그걸 보고 우스운 생각을 하고 있었어. 구음진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가장 오묘한 무공인데 무학에 대해서는 백치나 다름없는 그 여자가 글자를 안다고 해서 그 뜻까지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지.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데 한 시간 이상 걸렸을 거야. 기다린다는 것이 어지간히 지루하더군. 마지막 한 장을 읽는 것을 보고 이제 다 끝났구나 했더니 웬걸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읽더군. 차 한 잔쯤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두 번째 다 읽은 거야. 그녀는 내게 책을 되돌려 주면서 이렇게 말을 꺼냈어. <주선생님, 아무래도 서독에게 속으셨나 봐요. 이건 구음진경이 아니에요!> 난 깜짝 놀랐지. <뭐라구요? 이건 분명히 사형의 유물임에 틀림없답니다. > <모양이 비슷한 게 무슨 소용 있어요? 구양봉이 벌써 경서를 훔쳐간 거에요, 이건 점이나 치는데 쓰는 잡서예요.>] 

 

곽정은 놀랐다. 

 

[구양봉은 왕진인이 관 속에서 나오기 전에 벌써 진경을 집어넣었던 모양이지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그러나 평소 황노사가 워낙 잔꾀가 많고 괴상한 사람이라 그 부인의 말도 믿을 수 있었어야지. 황부인은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반신반의 멍하고 있으니까 또 묻더군. <주선생님, 구음진경의 진본이 어떤 건지 아세요?> <그 경서가 사형 손에 들어온 뒤 본 사람이 없지요. 사형은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칠일 밤 칠일 낮을 다투어 경서를 손에 넣은 것은 무림의 일대 재난을 막자는 것이지 제가 욕심이 나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진파에서는 아무도 진경에 씌인 무공을 익혀서는 안 된다.> <왕진인의 어진 마음은 정말 존경할 만 해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속으신 거예요. 주선생님이 한번 읽어보세요.> 당시 꽤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네. 사형의 유언이 있는데 함부로 손을 댈 수 있어야지. <이 책은 강남 도처에 흔해빠진 책이에요. 아무 값어치도 없는 물건이구요. 또 진짜 구음진경이라 하더라도 무공을 익히지 않으면 그만인걸, 보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래서 내가 책을 펼쳐 보니 모두가 무공을 익히는 방법과 비결뿐이지 무슨 놈의 점칠 때 쓰는 책이야? 황부인은 또 이런 말을 하더군. <이 책, 저는 다섯 살 때부터 읽어 처음부터 끝까지 욀 수 있는데 우리 강남의 아이들은 열에 아홉은 다 외울 수 있답니다. 믿지 못하신다면 제가 외울 테니 어디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이렇게 말하더니 정말 청산 유수로 외 대더군. 난 내 몸이 꽁꽁 얼어붙는 줄 알았다니까. <주선생님, 어느 장에서든지 첫 글자만 알려 주세요. 그럼 내 한 자도 빼지 않고 욀 테니까요. 어려서부터 읽은 책이라 나이를 먹어도 잊혀지지 않는군요.> 그래서 내 중간에 있는 부분을 몇 가지 외 보라구 했지. 한 자도 어김이 없더라니까. 황노사는 하하 웃고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와 손에 걸리는 대로 찢어 불에 태우고 말았다네. <여보 노완동, 그렇게 성질만 낼 게 아니오. 내 이 연위갑을 드리리다.> 내가 우롱당한 것이 보기에 민망했던지 연위갑을 주겠다는 거야. 그러나 그때 내 심사가 그런 것 관심도 없는데다가 남의 보물을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나? 고맙다는 말만 몇 마디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 불출하고 수련만 쌓았지. 그때만 해도 내 무공이 구양봉에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았어. 한 오 년 열심히 익혀 가지고 서역으로 구양봉을 찾아가 책을 찾을 결심을 했던 거야.] 

[마도장이나 구도장과 함께 가시면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요.] 

 

곽정의 말이었다. 

 

[누가 아니래. 그때 마옥 등과 상의만 했더라도 해결이 됐을는지도 몰랐지. 몇 년이 지난 뒤에 강호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어. 도화도 문하의 흑풍쌍쇄가 구음진경을 얻어 그중에 수록된 오묘한 무공을 익혀 가지고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었어.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네. 그런데 소문은 점점 더 퍼지고 일 년이 지난 뒤에 구처기가 홀연히 나를 찾아왔는데 틀림없이 구음진경은 도화도 문인이 가지고 있다는 게야.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더군. <황약사는 친구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 그런 말을 했더니 구처기가 묻더군. <사숙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독한테 가서 책을 뺏아 오려거든 우선 내게 알려 주든지, 아니면 책을 얻은 뒤에 돌려주지 않겠거든 한 마디라도 무슨 말이 있어야 할 게 아니냐?>고 말했지.] 

[황도주께서 경서를 뺏아 온 후에 형님께 되돌려 드리려고 했는데 못난 제자가 그만 훔쳐가 버리고 말았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화가 난 그분이 무고한 네 명의 제자까지도 다리를 분질러 사문에서 내쫓겨 온 게 아닐까요?] 

 

곽정도 아는 체를 했다. 주백통은 머리를 흔든다. 

 

[자네도 나처럼 미련하군. 이 일을 자네가 당했어도 나처럼 속아넘어갈 뻔했네. 그날 나는 구처기와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고 또 며칠 동안 무공까지 연마한 후에 비로소 떠나고 말았지. 두 달도 안 돼 다시 그가 나를 찾아왔다네. 이번에는 그가 진현풍 매초풍의 소재를 확인한 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 매초풍이 하는 말을 숨어 듣고야 비로소 황노사의 경서는 구양봉에게서 뺏아 온 것이 아니라 내 손에서 뺏아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아니, 형님이 분명 책을 불에 태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황부인이 슬그머니 감춰 놓고 다른 가짜 경서를 되돌려 준 건가요?] 

[그렇다면 그거야 내 그때 벌써 막았게. 황부인이 그 경서를 볼 때 나는 눈도 깜짝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제아무리 손발이 빠르다 하더라도, 무공도 모르면서 암기를 쓸 줄 아는 우리 눈은 속일 수가 없는 게야. 훔쳐간 게 아니라 아주 경서의 전부를 외 버린 게야] 

 

곽정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외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우, 자네는 책을 몇 번이나 읽으면 욀 수 있나?] 

[쉬운 것도 이삼십 번은 읽어야 할 게고 어려운 건 육칠십 번, 팔구십 번 읽어도 욀 수 있을는지 모르지요.] 

[자네 말이 맞아. 자질을 가지고 말한다면 자네도 총명한 축은 아니야.] 

[저는 원래 자질이 둔한 편이에요. 독서고 무공이고 그래서 무척 더디답니다.] 

[독서야 잘 모르니 그만 두고 무학을 배우는 것만 가지고 말하세. 사부가 자네에게 권법이나 장법을 가르쳐 줄 때 몇십 번이나 알려 줘야 비로소 하게 될 테지?] 

 

곽정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이 쓰는 것을 한 번만 보고도 배우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주백통과 곽정의 대화는 끝이 없다. 

 

[정말 그래요. 황도주의 따님이 그래요. 홍칠공이 무예를 가르쳐 줄 때도 많아야 두 번을 반복했을 뿐 세 번을 배우는 법이 없었어요.] 

[그 아가씨가 그토록 총명하다면 자기 어머니처럼 단명하지는 말아야겠는데.... 그날 황부인이 내 경서를 빌어 볼 때 두 번 보고는 완전히 외 버린 게야. 그는 나와 헤어지자마자 그걸 남편에게 구술(口述)해 준 거야.] 

[황부인께서 경서 가운데의 뜻도 모르면서 치음부터 끝까지 욀 수 있었을까요? 천하에 그렇게까지 총명한 사람이 있을라구요?] 

[자네하고 친하다는 황소저도 그쯤은 문제가 없을 게야. 나는 구처기의 말을 들은 뒤, 전진교 일곱 제자와 함께 이 일을 상의했다네. 그래서 흑풍쌍쇄에게 경서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네. 그런데 구처기는 이런 말을 하더군. <흑풍쌍쇄의 무공이 제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전진교 문하의 제자들을 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사숙의 후배이니 사숙께서 직접 나서실 것은 없습니다. 강호의 영웅들이 알면 혹시 웃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나도 구처기의 말이 그럴싸해서 곧 구처기와 왕처일로 하여금 흑풍쌍쇄를 찾아가도록 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측면에서 지원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네. 그런데 구처기, 왕처일이 하남(河南)으로 가 보니 흑풍쌍쇄의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나? 그래 계속 수소문을 해보고 나서야 겨우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네. 황노사의 제자인 육승풍이라는 사람이 중원의 호걸 수십 명과 함께 그들 두 사람을 공격, 사로잡으려 했다가 그만 놓치게 되었고 그들은 어디로 달아났는데 향방을 모른다는 거지.] 

 

곽정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육장주도 억울하게 사문에서 쫓겨났으니 사형이나 사자가 꽤는 미웠을 거예요.] 

[흑풍쌍쇄를 찾지 못했으니 황노사라도 만나봐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진경의 상반부를 몸에 지닌 채 도화도를 찾아와 황약사에게 문책을 했다네. <여보 백통! 이 황약사, 하나라면 하나요, 둘이라면 둘인 줄 아는 사람 아니오? 내 언제 당신의 경서를 곁눈질로나마 본 적이 있소? 내가 본 구음진경은 내 아내가 쓴 것으로 당신의 진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오. > 나는 몇 차례나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하며 그럼 부인께 시비를 가려 달라고 하자고 졸랐지. 황약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뒤채로 안내하더군. 가서 보니 황부인은 벌써 세상을 떠난 뒤요, 후당에는 영위(靈位)만 모셔 놓았더란 말일세. 제가 막 영위 앞에 나가 절을 하려고 하니까 황노사가 냉소를 머금고 이런 말을 하더군. <노완동. 당신이 구음진경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자랑만 하지 않았어도 아내는 죽지 않았을 게요.> <뭐라구?> 내가 물어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다보다가 마침내 눈물을 흘리면서 부인이 세상을 떠난 사연을 들려주더군. 원래 부인은 총명한 분이라 남편을 도와 경문을 욌다는 게야. 황약사가 가진 그 진경은 하반부뿐이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상반부를 입수한 뒤에 수련을 하기로 했다는 게야. 그러다가 그만 진현풍 매초풍에게 도둑을 맞은 거지. 황부인은 남편을 위로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외기로 했었다네. 그는 원래 경문의 내용도 알지 못하면서 그날 억지로 욌던 것인데 이제 세월이 오래 지났으니 욀 수가 있어야지? 게다가 또 아기를 가진 지 팔 개월, 몇 일 낮 몇 일 밤을 생각에 골똘하고 칠팔천 자를 써 놓기는 했지만 앞뒤가 연관이 되지 않아 애를 태우다 그만 유산을 하면서 딸 하나를 낳았대. 의술에도 고명한 황약사지만 끝끝내 애처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니까. 황노사는 원래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 잘하는 성미인데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실성을 하여 내게도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 대더군. 나는 그가 아내를 잃고 애통해 하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오더군. <여보, 무예를 배우는 사람이 부부의 정을 너무 지나치게 중시하면 다른 사람이 웃지 않겠소?> <내 아내는 다른 여자와는 달랐다오. >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니 차라리 잘됐소. 차제에 열심히 무공이나 익히시오. 나라면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소.> 이랬지.] 

[아이구 형님도. 그런 말을 왜 함부로 꺼내셨습니까?] 

 

곽정도 주백통이 지나쳤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주백통이 눈알을 굴린다. 

 

[생각나면 아무 말이나 하는 게지. 못할 게 뭐 있어? 그러나 황노사는 듣고 벌컥 화를 내면서 대들더군. 그래서 싸움이 벌어졌지. 그 싸움 때문에 나는 십오 년이나 여기서 썩고 있는 게야.] 

[그래 형님이 지셨나요?] 

 

주백통은 웃는다. 

 

[내가 이겼다면 여기에 있지 않게? 그는 내 두 다리를 분질러 버리고 구음진경의 상반부를 내놓으라고 야단이야. 나를 화장해서 부인의 제사를 지내겠다던가? 나는 경서를 굴 속에 숨기고 이렇게 굴 앞에 앉아 있는 게지. 당할 수 없게 되면 경서를 없애 버릴 참이지. <당신을 굴 앞에서 내몰 수 있소!> 이건 황약사의 말이고 <어디 한번 해보구료!> 이건 내 말이지. 이래서 우리는 십오 년을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거라네. 그는 나를 굶길 수도 더 괴롭힐 수도 없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굴 밖으로 끌어내려고 유혹을 했지. 십오 년 동안 그는 온갖 심혈을 다 기울여 보았지만 허사였어. 어젯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는데 하늘이 도와 아우가 나를 구해 준 거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경서는 벌써 황노사 수중에 가 있을 텐데 말야.] 

 

곽정은 주백통의 말을 듣고 나니 착잡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 형님,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어요?] 

[누가 더 오래 사는가를 봐야 할 것 같아.] 

 

주백통은 어이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곽정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도장 등이 왜 구하러 오지 않지요?] 

[내가 여기 있는 걸 모를 게야. 설령 안다 하더라도 이 괴상 망측한 수목과 산석(山石) 때문에 들어올 수도 없을 게고, 만약 황약사가 들어오게 놔둔다 하더라도 도화도를 빠져나갈 방법이 있어야지.] 

 

곽정은 주백통과 거의 반나절이나 얘기를 주고받은 것이다. 나이는 들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말하는 것이 천진 난만하여 거짓이 없었다. 그래서 곽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끌리고 말았다. 점심때가 되어 늙은 하인이 또 식사를 날라 왔다. 식사를 물린 후 주백통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도화도의 십오 년, 결코 허송 세월만은 아니었다네, 내 이 굴속에서 반 발짝도 떠나지 않고 전심 전력 무공만을 익혔네. 만일 다른 곳에서 수련을 했다면 이십오 년의 실적에 해당될 수 있을거야. 다만 답답한 것은 크게 진경을 했다고 혼자 생각하면서도 시험해 볼 상대를 만날 수 없다는 점이란 말야. 그래, 할 수 없이 왼손과 오른손의 싸움을 붙였다네.] 

[왼손과 바른손이 어떻게 싸움을 합니까?] 

 

곽정은 이상해서 물었다. 

 

[바른손은 황노사로 위장하고 왼손은 나 자신이 되는 게야. 오른손이 한바탕 장풍으로 공격하면 왼손이 일단 방어를 한 뒤에 주먹으로 반격을 하는 거지, 이렇게 서로 싸움을 시키는 게야.] 

 

주백통은 이렇게 말하면서 정말 두 손을 가지고 공격과 방어, 반격과 재방어를 시도하는데 꽤 험악하게 싸웠다. 곽정은 웃긴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라다보고 있었는데 3초(招)를 다투는 것을 보니 두 손의 권법이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다보고 있었다. 천하에 무학을 하는 사람들이 주먹을 휘두르거나 장풍을 쓰거나 칼이나 창을 쓸 때 여하튼 두 손을 함께 쓰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주백통의 두 손은 서로 공방전을 벌이며 치열하게 싸우는데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맞은편의 급소를 노렸고 그러면 또 다른 한 손이 그 급소를 보호하면서 반격을 하는 것이었다. 좌우 두 손이 완전히 다른 사람의 손이 되어 다투는 괴상한 초술(招術)이었다. 평생 들어 본 일도 없고 본 적도 없는 묘한 권법이다. 

주백통은 계속해서 혼자 싸웠다. 

 

[형님, 형님의 이 초술은 임하진의(林下振衣) 같은데 왜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십니까?] 

 

주백통이 손을 멈추고 웃는다. 

 

[잘 보았네, 내가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사실까지 발견했으니, 자 한번 해 보려나?] 

 

이렇게 말하며 손바닥을 내민다. 곽정도 손바닥을 펴 주백통의 손에 댔다. 

 

[조심하게, 왼쪽으로 밀 테니.] 

 

말이 끝나자마자 임하진의의 힘이 몰려온다. 곽정은 주백통의 말을 듣고 미리 방비를 하면서 강룡십팔장의 힘으로 반격을 했다. 두 사람의 장력이 마주치는 찰나 곽정은 뒤로 7,8보나 밀리면서 팔이 뻣뻣하게 마비됨을 느꼈다. 

 

[이번 공격은 내 전력을 다 기울였는데도 겨우 자네를 밀어붙였지만 자 이번에는 내 힘을 쓰지 않을 테니 다시 한번 해보세.] 

 

곽정은 다시 손바닥을 내밀었다. 주백통의 장력이 미치는 듯하다가 후퇴한다. 곽정이 하체를 비틀거리다 앞으로 나가 고꾸라지며 이마로 땅을 받았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주백통이 웃었다. 

 

[알겠는가?] 

 

곽정이 머리를 옆으로 흔든다. 

 

[모르겠는데요.] 

[이 도리를 나는 굴 속에서 십 년이나 고련(苦練)해서 터득한거야. 내 사형이 살아 계실 때 내게 허(虛)로 실(實)을 치면 이길뿐만 아니라 다른 묘미도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나는 그냥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수심양성지도(修心養性之道)로만 알고 넘어갔었네. 그런데 오 년 전에 갑자기 두 손으로 싸우다가 도를 터득했네. 그런데 그 가운데 오묘한 점은 마음으로만 느낄 뿐 말로 전달할 수가 없단 말야. 내 통달한 뒤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아우가 와서 대결을 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아프다고 무서워 말고 몇 번만 더 넘어져 주게나.] 

 

주백통은 곽정이 난색을 표명하는 것을 보고 애원을 한다. 

 

[여보게 아우, 나는 무예를 생명보다 중하게 여긴다네. 여기 있는 십오 년 동안 누가 나와 함께 대결해 주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 몇 달 전 황노사의 딸이 찾아와 말벗이 되었을 때 한 번 시험해 보구 싶었는데, 웬걸 그 다음날부터 나타나지도 않았단 말일세. 아우, 내 가볍게 넘어뜨릴 테니 자 다시 몇 번만 더 해 보세.] 

 

주백통은 두 손을 써 보고 싶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형님, 그럼 제가 몇 번 넘어지기로 하지요.] 

 

둘은 다시 손을 뻗고 및 초를 겨루었다, 곽정은 주백통의 장력이 갑자기 '허(虛)해진다고 느끼는 순간 손을 거두려고 했지만 그만 또 공중에서 물구나무를 선 채 한 바퀴 돌아 떨어지고 말았다. 땅에 부딪힌 왼쪽 어깨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주백통도 몹시 미안한 표정이다. 

 

[아우, 그냥 넘어뜨리기만 했으니 이거 미안해서 되겠나? 내 이 수법을 자네에게 알려 주지.] 

 

곽정은 아픔을 참고 일어나 주백통 곁으로 갔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읽어 보았나?] 

 

곽정이 웃으며 살래살래 머리를 흔들자 주백통은 밥을 담았던 빈 그릇을 집어들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인데 속이 비었으니 밥을 담을 수 있는 것일세. 만일 이놈이 속이 비지 않은 흙덩이라면 무엇에 쓰겠나.] 

 

(그런 걸 다 말이라고 하나?) 

곽정은 속으로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을 뚫어 놓고 방을 만들어 놓았으니 공간이 생긴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들어가 설 수 있지 않겠나? 만약 방안에 공간도 없고 문도 없다면 아무 쓸모도 없는 무용 지물일세.] 

 

곽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 이 전진파 최상승의 무공의 요지는 공(空)과 유(柔) 두 글자야.] 

 

곽정은 알 듯 모를 듯해서 잠자코 있었다. 

 

[홍칠공의 무공은 외가(外家)의 최고봉인데 내 비록 전진파의 내가(內家) 요결을 비록 조금은 안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다네. 그러나 외가의 무공은 홍칠공과 같은 수준에 이르면 올 데까지 다 온 것이지만, 전진파의 무공은 무궁 무진해서 끝이 없지. 내 사형을 예로 들어 말해도 그분이 발전하겠다고 생각만 하셨다면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는 말일세.] 

[그가 천하 제일의 무공이라는 명성을 얻은 것도 결코 요행은 아니야. 지금도 살아계셔서 십여 년 동안 정진을 하셨고 다시 동사, 서독 등과 무예를 겨룬다면 칠일 밤 칠일 낮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단 하루면 그들을 꺾어 놓고 말 거야.] 

 

이 말에 곽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진인의 무공이 그토록이나 훌륭하신데도 저는 뵈올 복을 타고나지 못했군요. 홍칠공의 강룡십팔장은 천하의 지강(至剛)이요, 형님께서 방금 저를 넘어뜨린 수법은 천하의 지유(至柔)라 이 말씀이시죠?] 

[그래 그래, 유(柔)가 강(剛)을 이길 수 있다고는 하지만 만일 자네가 강룡십팔장을 홍칠공 정도로 익혔다면 내가 이길 수도 없었을 거야. 이건 어디까지나 공력의 깊고 얕음에 달려 있는 문제니까 말일세. 내 방금 자네를 넘어뜨릴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이치지. 주의해서 보게.] 

 

주백통은 즉시 자기가 썼던 수법을 자세히 곽정에게 설명해 주었다. 

곽정은 원래 착실한 전진파 내공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10여 번을 연습한 뒤에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주백통은 몹시 반가운 모양이다. 

 

[아우, 아프지 않거든 한 번만 더 넘어지지.] 

[아프지는 않은데 가르쳐 주신 수법에 대해서 제가 아직 익숙하지 못해 그럽니다.] 

 

곽정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머뭇거리자 주백통은 어린아이 보채듯 졸라댔다. 할 수 없이 달려들어 또 한 번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런 과정을 반복했다. 곽정의 온몸이 넘어져 퍼렇게 멍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무래도 7,8백 번 이상 넘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주백통이 15년 동안 동굴 속에서 창안하고 수련한 72수(手)의 공명권(空明拳)을 곽정은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第 三十六 章. 동자(童子)만 배우는 무공 

주백통과 곽정이 흥미진진하게 무공을 익힌 지도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 이날 점심 식사를 끝낸 후 주백통이 말을 꺼냈다. 

 

[아우, 이 공명권(空明拳)도 이제 다 배웠으니 내 자네를 넘어뜨리고 싶어도 넘어뜨릴 수 없게 되었네. 그러니 우리 방법을 바꿔서 한번 놀아 볼까?] 

[좋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놀지요?] 

[우리 네 사람이 싸움을 해 보자구.] 

[네 사람이라니요?] 

[조금도 틀림이 없네, 바로 네 사람이야. 내 왼손이 한사람 오른손이 한사람, 자네의 쌍수가 두 사람 아닌가? 네 사람이 서로 도와주지 않고 혼전을 벌인다면 아주 재미있을 걸세.] 

[재미있기는 하겠는데 저는 두 손을 따로따로 쓸 수 없지 않습니까?] 

[내 좀 있다 가르쳐 주지. 우선 먼저 우리 세 사람이 싸워 보자구.] 

 

이렇게 해서 주백통은 쌍수를 두 사람 몫으로 나누어 곽정과 겨루게 되었다. 한 손의 무공이 결코 다른 손 때문에 장애를 받지않는 것이다. 왼손이 곽정을 공격하다 궁지에 몰리면 오른손이 나와 도와주고 오른손이 이렇게 되면 또 왼손이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2대 1로 싸우다 보니 곽정이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될 때도 있었다. 이렇게 곽정이 유리해지면 주백통의 두 손은 동맹을 맺은 듯 다시 달려들곤 했다. 마치 삼국 시대의 전쟁과 흡사한 것이다. 

 

둘은 한참 동안 이렇게 싸우다 손을 멈췄다. 곽정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황용이 그리워졌다. 황용이 여기 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주백통도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곽정의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쌍수호박(雙手互搏)의 무공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재주는 공명권보다 몇 배나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속담에도 심무이용(心無二用)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왼손으로 정사각형을 그리고 바른손으로 원을 그리려 한다면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다. 이 쌍수호박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두 가지로 나누어 쓰자는 것으로, 연습할 때 왼손은 정사각형을, 바른손은 원을 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곽정이 처음 연습할 때 두 손으로 그린 그림은 둘 다 원이 아니면 사각형이요, 그것이 아니면 원 아닌 원, 사각형 아닌 사각형을 그렸다. 두 손이 임의로 사각형이나 원을 그릴 수 있게 숙달되자 주백통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네가 만약 전진파의 내공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빨리 숙달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제 왼손은 남산장(南山掌)을, 오른손은 월녀검(越女劍)을 써 보도록 하거라.] 

 

이것은 곽정이 어려서부터 남희인과 한소영에게서 배운 무공으로 식은 죽 먹기로 쓸 수 있는 재주였다. 그런데도 두 손을 나누어 쓰자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백통은 네 사람이 싸우는 장난을 하고 싶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여러 가지 비결을 가르쳐 주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곽정도 쌍수호박의 재주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주백통은 뛸 듯이 기뻐했다. 

 

[자, 이리 오게, 자네 오른손과 내 왼손이 일당이 되고, 내 오른손과 자네 왼손이 그들의 적이 되어 한바탕 무예를 겨루는 게야.] 

 

곽정도 어린 소년이라 이렇게 재미있는 장난을 좋아하지 않을 리 없었다. 즉시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 단검을 삼아 오른손에 쥐고, 주백통의 왼손과 한 패가 되어 자기의 왼손, 주백통의 오른손을 상대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결은 평생 들어 본 일도, 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둘이 서로 어우러져 대결하는 동안에도 주백통은 공격과 방어의 요령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주백통은 놀기에 팔려 정신이 없었지만, 곽정은 오히려 만고에 없는 괴상한 무공을 익히게 된 것이다. 

 

다시 또 며칠이 흘렀다. 이날도 곽정은 주백통과 더불어 네 사람으로 나누어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주백통은 너무나 즐거워 계속 싸우면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곽정의 공력은 아무래도 부족했다. 두 손이 다 막지 못하고 오른손이 위급하게 되자 왼손이 자기도 모르게 도와주려고 했다. 주백통의 권법은 재빠르기 짝이 없었다. 곽정은 마침내 네 손의 혼전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두 손이 협력하여 삼파전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괴상한 권법의 권로(拳路)에 통달되어 있었다. 두 손이 협력하게 되자 주백통의 왼손이나 오른손과 팽팽하게 맞설 수 있었다. 

주백통이 하하하 앙천 대소를 한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군 그래.] 

 

곽정이 펄쩍 뛰어 밖으로 나와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다. 

 

[형님!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뭔데?] 

[두 손의 권로 초수(招數)가 전연 다르니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적과 싸우게 될 때 이 무공을 쓰게 되면 2대 1, 천하무적이 되겠습니다.] 

 

주백통은 굴속에 앉아 있는 15년 동안 무료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쌍수호박의 장난을 창안하여 심심풀이로 삼았었다. 뒤에 가서야 이 무공이 적을 제어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지금 곽정이 하는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이 무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곰곰이 생각해 본 것이다. 벌떡 일어나 굴 속에서 뛰어나와 나무 위로 울라 가지 두 개를 꺾어 겨드랑이에 끼어 목발로 삼고 굴 앞을 오락가락하며 미친 사람처럼 웃기만 했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네? 도대체 왜 그러세요?] 

 

주백통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웃기만 한다. 이윽고 잠시 후에 입을 연다. 

 

[내가 굴을 나왔었지?] 

[네 그랬어요.] 

 

그는 여전히 굴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내 무공이 천하제일인데 까짓 황약사를 무서워하겠는가? 오기만 하면 내 묵사발을 만들고 말 테다.] 

 

주백통은 웃고 있었고 곽정은 늘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내 무공이 손색이 있다하더라도 무의식중에 분신쌍격(分身雙擊)의 무공을 익혔으니 이제 2대 1이다. 천하에 누가 나를 이기겠느냐? 황약사, 홍칠공, 구양봉의 무공이 제아무리 강하다 한들 두 명의 노완동, 주백통을 당할 장사가 있으랴?] 

 

곽정이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다. 자기도 기뻤다. 

 

[아우도 이 분신쌍격의 비결을 배우기는 했지만 아직 서툰 편이야. 몇 년 후 나처럼 숙달된다면 자네 무공은 배 이상 증강될걸.] 

 

둘이 서로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주백통은 그전에 황약사가 찾아와 귀찮게 굴까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빨리 왔으면 했다. 오기만 하면 시원하게 분풀이를 할 생각이었다. 그는 눈을 두리번거리며 연방 밖을 살폈다. 몹시 답답한 모양이었다. 만약 황약사가 기문(奇門)의 오행술(五行術)에 밝지 않아 이 도화도가 다른 섬만 같다면 벌써 자기가 찾아 나섰을 것이다. 

저녁 때가 되자 늙은 하인이 또 식사를 내왔다. 주백통이 그를 틀어잡았다. 

 

[빨리 황약사를 오라구 해라.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구. 내 수단이 어떤지 본때를 보여 주겠다.] 

 

늙은 하인은 고개를 살레살레 흔든다. 주백통은 말을 다 끝내고 비로소 알았다는 듯 웃었다. 

 

[피! 불쌍한 벙어리 귀머거리를 가지고 야단을 했구나!] 

 

고개를 돌려 곽정을 바라다본다. 

 

[오늘 저녁 든든히 먹으라구.] 

 

손을 뻗어 찬합을 연다. 물씬 닭고기 냄새가 코로 스며들어왔다. 자기가 제일 즐겨 먹는 닭찜이다. 마음속에 뭔가 찔리는 것이 있었다.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입에 넣었다. 국물의 양념 맛이 황용의 솜씨에 틀림없다. 곽정은 자기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 같아 마음이 두근두근 뛴다. 다른 음식을 보아도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찬합 안에 10여 개의 만두가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중 1개의 껍데기에 손톱으로 긁은 호로병(葫蘆甁)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식별할 수 없는 희미한 흔적이다. 곽정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어들고 반쪽으로 쪼개니 그 안에서 초로 싼 환약이 하나 나왔다. 곽정은 그것을 주백통과 하인이 보지 못하게 살짝 품속에 숨겼다. 

 

둘이 다 저녁 식사를 맛있는 줄 모르게 끝냈다. 하나는 자기가 무의식중에 천하 무적의 절세의 무공을 익혔다는 기쁨 때문에 그랬고, 다른 하나는 빨리 식사를 끝내고 황용이 몰래 보낸 소식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다. 가까스로 주백통이 만두를 다 먹고 꿀떡꿀떡 국그릇을 비우자 늙은 하인이 주섬주섬 빈 그릇을 챙겨 가지고 물러갔다. 곽정이 급히 초로 싼 환약을 꺼내 쪼개자 그 안에서 종이가 나왔다. 과연 생각했던 대로 황용이 보낸 편지였다. 

<곽정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와 벌써 화해가 되었어요. 틈을 봐서 오빠를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리겠어요. 황용 드림, > 

이런 내용의 사연이었다. 곽정이 편지를 주백통에게 보였다. 

 

[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구. 용서하지 않겠대두 까짓 것 무서울 것 있나?]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곽정은 조용히 앉아 내공을 써본다, 황용의 모습이 어른거려 안정이 되지 않았다. 한참 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겨우 마음이 가라앉고 잡념이 사라졌다. 단전(丹田)의 기운을 전신에 눌러 보았다. 갑자기 묘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1인 2역의 무공을 완전히 익히게 되면 좌우양측에서 공격할 수 있는 상승의 무공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체내의 운기(運氣)도 좌우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즉시 손가락으로 콧구멍 두 개를 번갈아 누르며 호흡을 해 봤다. 왼쪽 구멍으로 숨을 들이마시면 오른쪽 구멍으로 뱉고 오른쪽 구멍으로 숨을 쉬면 왼쪽으로 뱉는 것이다. 두어 시간을 연습했을까? 혼자 생각해 봐도 꽤 진전이 된 것 같았다. 

 

쉭쉭 바람 소리를 의식하며 두 눈을 떠보니 어둠 속에서 흰 수염과 백발을 나부끼며 주백통이 혼자 연권(練拳)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곽정은 눈을 크게 뜨고 주시했다. 그가 연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에게 전수해 준 칠십이로의 공명권이다. 그가 장풍을 쓰고 주먹을 휘두를 때 보면 상당히 느린 것같이 보이지만 일단 공격을 펴면 위력이 무시무시하여 이리저리 공기를 찢는 바람 소리가 무섭게 일어나곤 했다. 유(柔) 가운데 무한한 강(剛)이 숨어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감탄사가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나왔다. 

하나는 연습에 여념이 없고 다른 하나는 구경에 정신을 잃고 있는데 <아이쿠> 하는 주백통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뭔가 길고 검은 물체가 멀리 날아가 떨어진다. 아마 주백통이 뭔가를 집어던진 모양이다. 곽정은 그가 비틀비틀 쓰러지려 하는 것을 보고 급히 쫓아가며 물었다. 

 

[형님, 무슨 일이에요?] 

[독사에게 물렸어!] 

 

깜짝 놀란 곽정이 쫓아가 보았다. 주백통의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부축해서 굴 속으로 돌아와 옷깃을 찢어 다리를 싸맸다. 잠시라도 독기가 전신에 퍼지지 않게 막기 위한 것이다. 곽정이 품에서 부싯돌을 찾아 불을 밝히고 보니 주백통의 종아리가 상당히 부어 있었다. 

 

[섬에 이런 청복사(靑輹蛇)는 없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주백통이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독기가 벌써 깊이 파고든 모양이다. 만약 상승의 내공으로 버티지 않았다면 벌써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곽정은 급한 나머지 물린 자국에 입을 대고 빨았다. 

 

[그럴 필요 없다. 이 뱀의 독이 대단하구나.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 

 

곽정이 이런 말에 아랑곳할 성미가 아니다. 자기야 어떻게 되든지 우선 남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왼쪽 어깨를 주백통의 하체에 댄 채 계속 빨기만 했다. 주백통이 결사적으로 만류하려고 했지만 전신이 아파 꼼짝할 수 없었다. 마침내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곽정은 한시간 동안이나 정신없이 빨았다. 빤 독액을 다시 땅에 토해 냈다. 독이 많이 감퇴되자 주백통은 반 시간쯤 뒤에 힘없이 눈을 떴다. 공력이 심오한 탓도 있었으리라. 

 

[아우! 형은 오늘 죽게 되나 봐. 죽기 전에 이렇게 의리가 심중한 자네를 의형제로 맺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네.] 

 

힘없이 하는 말을 듣고 보니 곽정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권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정만은 깊이 들었던 것이다. 

주백통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구음진경의 상반부, 내가 누워 있는 땅 밑의 석갑(石匣)에 들어 있네. 원래 자네에게 물려줘야겠지만 자네도 복사의 독액을 마셨으니 얼마 살지 못할 게야. 황천에 가더라도 동행이 있으니 심심치는 않겠군.] 

 

곽정은 자기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정신은 맑기만 한 것이 아무 이상도 없었다. 다시 부싯돌을 켜고 주백통의 상처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러나 부싯돌로 붙인 불이 반도 더 탔다. 손에 잡히는 대로 저녁때 황용이 만두 속에 넣어 보낸 종이에 옮겨 붙였다. 마른 나뭇가지라도 찾아 불을 지피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여름이라 주위는 모두 파란 풀뿐이다. 

곽정은 조급했다. 혹시 무엇이 있을까 해서 품속을 더듬어 보았다. 종이 같기도 하고 가죽 같기도 한 물건이 손에 잡혔다. 원래 매초풍이 비수를 쌌던 것이다. 이것저것 생각할 처지가 아니다. 그냥 불에 붙여 주백통의 얼굴에 비췄다. 표정을 살피기 위해서다. 주백통의 얼굴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백발의 동안인 천진 난만한 광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주백통은 불빛을 보자 가벼운 미소를 띄었다. 곽정의 안색이 보통 때나 다름없었다. 전연 독물을 마신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런데 불타고 있는 물건에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 씌어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연공(練功)의 비결이다. 

10여 자를 보고 그것이 구음진경의 경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디서 구한 물건이냐고 물어 볼 새도 없이 확 불을 껐다. 

 

[아우, 자네는 무슨 영단(靈丹)이나 묘약을 복용한 일이 있나? 독사의 독이 아무렇지도 않으니 말일세.] 

 

곽정도 깜짝 놀랐다. 언젠가 홍칠공을 모시고 황용과 둘이 송림 가운데서 무예를 연마한 적이 있었다. 그때 뱀떼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한 마리도 그를 물려고 대들지 않았었다. 뒤에 홍칠공과 함께 곰곰이 그 까닭을 생각한 일이 있었다. 삼선노괴 양자옹이 기르던 복사의 보혈을 마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뱀의 독액을 마셨는데도 아무 탈이 없다면 역시 그 때문이리라. 

 

[제가 전에 큰 복사의 피를 마신 일이 있는데 혹시 그 덕인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대답했다. 주백통이 땅바닥에 떨어진 경문을 쓴 가죽을 카리켰다. 

 

[이건 천하의 보물이니 절대로 훼손시키면 안.....]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곽정이 그의 항문에 입을 대고 바람을 불어넣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의 다리를 어루만져 보니 화끈화끈 숯덩이처럼 뜨거운 것이 아까보다 더 부어 올라 있었다. 곽정은 불안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굴 밖으로 뛰어나와 나무 위로 올라가 고함을 지른다. 

 

[황용,황용! 황도주님! 황도주님! 사람살려요, 사람살려!] 

 

그러나 도화도의 주위는 1백 리도 넘는다. 황약사가 사는 거처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곽정은 있었다. 곽정의 목소리가 제아무리 크다 해도 들릴 리가 없었다. 잠시 후 산골짜기에서 메아리만 들려왔다. 

 

[...황도주! 사람살려요, 사람살려!] 

 

곽정은 땅으로 내려섰다.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새로 사귄 이 형님이 죽어가는 것을 눈을 뜬 채 멀거니 바라다볼 수만은 없었다. 

(독사가 나를 물지 못하는 것을 보면 혹시 내 핏속에 독물을 이겨내는 성분이 섞여 있을지도 몰라.)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평소 주백통이 늘 차를 마실 때 쓰던 청자로 된 찻잔을 찾아 놓고 비수로 자기의 왼쪽 팔뚝을 찔렀다. 피가 찻잔 속으로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얼마나 피가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피가 응결되어 더 나오지도 않는다. 곽정은 주백통을 부축해 그의 머리를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으로 그의 입을 벌린 뒤 찻잔에 있는 피를 입에 흘려 넣었다. 

곽정은 피를 많이 흘렸는지, 체질이 강건한데도 나른하고 무력해져서 견딜 수 없었다. 돌벽에 등을 기댄 채 쉬고 있다가 어느덧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는지 누군가가 자기의 상처를 매 주는 것을 의식하며 눈을 떴다. 백발을 땅에 드리운 것이 바로 노완동 주백통이다. 곽정은 반가왔다. 

 

[아니.....이제 좋아지셨군요.] 

[이제 괜찮아. 아우가 나를 살려 주었다네.] 

 

곽정이 그의 다리 위의 상처를 보았다. 과연 검은 기운은 사라지고 붉게 부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날 아침 둘은 조용히 앉아 운기(運氣)를 하면서 원기를 회복했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주백통은 비로소 인피(人皮)의 내력에 대해 물었다. 곽정은 한참 생각해 보고 사부인 묘수서생 주총이 매초풍의 품에서 비수와 함께 소매치기해 온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날 귀운장에서 주총이 비수를 훔친 일을 들려주었다. 주백통은 혼자 침묵에 잠긴 채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매초풍이 어째서 이 구음진경의 하반부를 인피에 써 놓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형님! 이것이 귀한 보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뭐예요?] 

[내 자세히 봐야 대답할 수 있는데 이게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모르겠단 말일세.] 

 

당시 왕중양이 경문을 손에 넣은 것은 결코 사심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무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큰 재난을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의도였을 뿐이다. 그래서 본문(本門)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경전에 쓰인 무공을 익히면 안된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사형의 유언을 주백통이 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기만 하고 익히지 않으면 그만이겠지!) 

그래서 굴 속에 있는 15년 동안 무료한 나머지 상반부의 경문을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읽었다. 상반부의 경문에는 권경(拳經)과 검리(劍理)만이 기록되어 있었다. 결코 적을 제어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하반부의 경문을 모르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주백통은 10여 년 동안 하권의 경문에는 도대체 무엇이 기재되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의 무공은 이미 상승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고 게다가 상권의 경문에 기록된 무학 정의(精義)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피에 기록된 문자를 보자마자 그것이 구음진경과 관계 있는 것임을 알았다. 이제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기의 생애와 깊은 관련이 있는 하권의 경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15년 동안 조석으로 올려다본 굴 천장을 향하여 누운 채 착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미칠 듯이 무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천하에 무학을 하는 사람들이 지보라 여기고 있는 경서를 보고 한번 배우고 싶다는 욕망과 충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것이 명성을 쟁취하자는 것도 아니요, 복수나 어떤 보복을 위한 것도 아니요, 이를 배워 가지고 천하를 횡행해 보자는 그런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단순히 무학이라는 사실 때문에 일어난 순수한 호기심에 불과했다. 경문 가운데 쓰인 대로 익히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가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사형의 유훈이 있으니 도저히 이를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묘책이 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인피를 품안에 챙겨 넣은 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한참 뒤에 눈을 뜬 주백통이 곽정을 보고 함께 굴 속의 땅을 파 인피로 된 하반부의 경서를 묻자고 했다. 나뭇가지로 땅을 몇 번 파자 주백통이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지 그래, 그보다 더 묘한 방법이 없는걸!] 

 

이렇게 말하며 하하하 큰소리로 웃는다. 마냥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다. 곽정이 고개를 쳐들고 묻는다. 

 

[형님, 무슨 묘안이라도 생각나셨습니까?] 

 

주백통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다. 그의 뇌리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그는 전진파의 문인이 아니니까 괜찮지. 내가 경문에 쓰인 무공을 가르쳐 준다. 완전히 배우게 하고 나는 구경만 해야지. 그러면 이 근질근질한 심사도 풀릴 게 아닌가?) 

곽정에게 알려 줄까 하다가 생각을 돌린다. 

(그의 말투로 보아 구음진경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거든. 그것이 음독(陰毒)의 사파무공(邪派武功)이라고 말했는데 기실 흑풍쌍쇄가 하반부의 경문만 알고 상반부의 내용을 몰랐기 때문에 이 최상승의 무공을 악용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내 미리 알려 줄 것이 아니라 다 익히고 난 뒤에 놀라게 해줘야지. 그때는 이미 배워 놓은 것이니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고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게 된단 말이야. 이것 참 재미있게 되는걸.) 

이 사람의 별명은 노완동이다. 장난꾸러기에 까불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욕하고 놀려 봐야 화도 내지 않는다. 칭찬하고 비위를 맞춰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저 재미있는 장난만이 한없이 즐거운 것이었다. 이제 마음속으로 작정을 하고도 전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우. 내 굴 속에 있는 15년 동안 공명권과 쌍수호박의 무공말고도 많은 것들을 창안해 냈는데, 심심하니 어디 한번 배워 볼 의향이 있나?] 

 

정색을 하고 곽정에게 묻는다. 

 

[아,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곽정은 기꺼이 응낙했다. 

(그렇게까지 좋아할 것 없다. 네가 내 속임수에 말려드는 것이니까.) 

주백통은 속으로 이렇게 웃으면서 구음진경의 상반부에 기록된 요지를 곽정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곽정이 잘못 알아들어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알아들을 때까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먼저 상반부에 씌어 있는 기초적인 법문(法門)을 가르쳐 준 뒤에 다시 하반부에 있는 권로(拳路)와 검술(劍術)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곽정에게 알도록 해 주었다. 

 

이번에 전수하는 무공은 다른 무학과는 완전히 달랐다. 배우는 사람이 배운 무공을 가르치는 사람은 전연 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는 입으로만 말했지 시범을 보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곽정이 구음진경에 씌어진 무공을 약간 할 수 있게 되자 그는 전진파 무공을 가지고 대결하면서 시험해 봤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 곽정은 점점 익숙해져서 구음진경에 기록된 무공을 하나하나 터득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곽정은 전연 눈치도 채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 좋아만 했다. 심지어 잠을 자다가도 웃는 소리를 냈다. 

이렇게 구음진경을 배우고 있는 며칠 동안에도 황용은 계속해서 곽정의 입맛에 맞는 음식만 정성스럽게 만들어 보냈다. 곽정의 마음이 편안하니 진경(進境)은 더욱 빨라지기만 했다. 이날 주백통은 곽정에게 구음신조(九陰神爪)를 가르치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열 손가락으로 석벽을 할퀴어 보라고 했다. 곽정은 몇 차례나 해 보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형님. 매초풍이 이와 같은 무공을 익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산 사람을 가지고 시험을 하더군요. 다섯 손가락을 산 사람의 두개골에 꽂는 것인데, 잔인하기 짝이 없었어요.] 

 

이 말을 듣고 주백통은 깜짝 놀란다. 

(그랬을테지. 매초풍은 정법(正法)의 연공(練功)을 모르고 하권만 읽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곽정이 의혹을 품기 시작했으니 이와 같은 무공을 계속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백통은 할 수 없이 웃었다. 주백통은 말을 이었다. 

 

[매초풍의 것은 사파의 무공이야. 어떻게 이 현문정종의 무공과 비교를 하나? 그럼 우리 이 구음신조는 잠시 보류하고 내가(內家)의 요결(要訣)을 가르쳐 주기로 하지.]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내심으로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내 상반부의 경문을 다 가르쳐 주어 속달되면 진경 가운데의 기본적인 법문과 그의 신체가 일치되겠지. 그때 가서 하반부에 기재된 무공을 익히게 되면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다른 의심은 하지 않게 될 거야.) 

그래서 한 자 한 자 상권의 진경 가운데 있는 법문을 완전히 곽정에게 가르쳐 주었다. 진경 가운데 기재되어 있는 도리는 귀절 귀절마다 심오할 뿐만 아니라 글자마다 의미 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곽정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았다. 주백통이 읽고 해석을 하면서 반복해서 곽정에게 외도록 했다. 몇십 번 이렇게 되풀이하는 사이에 자연 곽정도 외게 되었다. 이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곽정에게 외라고 한 경문의 내용을 가지고 연습을 시키는 것이다. 

 

이날 아침에도 곽정은 일찍 일어나 수련을 했다. 늙은 하인이 가져온 찬합을 열어 보니 만두 위에 편지가 있다는 암호 표시가 있었다. 미처 식사도 들기 전에 만두를 가지고 숲속으로 들어가 쪼개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황용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를 보던 곽정의 표정이 변하면서 손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곽정 오빠! 서독이 조카인 구양공자 대신 구혼을 해 왔어요. 저를 조카며느리로 맞아들이겠다는 뜻이죠. 아버지는 벌써 대답.... > 

편지를 쓰다 말았다. 분명 급급해 하다가 그냥 집어넣은 것 같았다. 곽정의 마음은 산란하게 흩어졌다. 늙은 하인이 물러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편지를 주백통에게 보였다. 

 

[황용의 아버지가 대답을 했건 말건 우리와는 상관없지 않느냐?] 

 

주백통의 반응이다. 

 

[안 돼요, 황용과 저는 장래를 약속했어요. 그녀는 미쳐 죽을 거예요.] 

[아내가 있으면 무공을 배울 수가 없어. 일양지(一陽指)나 순양기(純陽氣) 같은 재주도 동자(童子)라야만 익힐 수 있는 게야. 아우 내 말 들어. 장가가지 않는 게 좋을 걸세.] 

 

주백통의 말이 곽정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마음만 더 바짝 바삭 타 들어올 뿐이다. 

 

[내 만약 동자의 신분으로 일양지만 익혔더라도 황약사가 감히 나를 이곳에 가둘 수는 없었을 텐데.... 보게! 자네가 황소저 때문에 걱정을 하니 오늘 수련도 하나마나 아닌가? 황노사의 딸처럼 예쁜 규수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면 무공은 다 틀리는 게야.]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주백통이었다. 

 

[형님, 아내로 맞든지 말든지 그건 다음에 말하기로 하고 우선 구해 줄 방법이나 생각해 보세요.] 

[서독이란 위인이 원래 돼먹지 않은 인간인데 조카인들 별 수 있겠나? 골탕 좀 먹게 내버려두세.] 

 

점점 더 딴 소리만 지껄인다. 곽정은 한숨을 쉬며 숲속으로 들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내 도화도에서 길을 잃고 죽는 한이 있어도 황용을 찾아 구해줘야 해.) 

이렇게 결심한 곽정은 벌떡 일어나 섰다. 이때 공중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두 개의 흰 물체가 햇빛을 받으며 곽정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로 타뢰가 몽고에서 가지고 나온 두 마리의 흰 수리였던 것이다. 곽정은 반가와 손을 뻗었다. 수컷의 다리에 대나무통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곽정이 끌러 보니 그 안에는 편지가 숨겨져 있었다. 황용이 써보낸 것이다. 불일 내에 서독이 도화도로 온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어찌나 심하게 감시하는지 방 밖으로 반보도 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곽정을 위해 손수 음식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이 급하고 헤어날 길이 없다면 차라리 죽을 수 밖에 없다는 하소연과 함께 섬 안의 길이 이상하고 함정이 여기저기 많으니 절대로 자기를 찾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곽정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비수를 꺼내 대나무통 위에 <생즉동실 사즉동혈(生則同室 死則同穴,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겠다)>이란 여덟 글자를 새겨 수리 다리에 묶은 뒤 날려 보냈다. 두 마리의 흰 수리가 몇 바퀴 허공을 맴돌다 북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곽정은 이렇게 함께 죽을 비장한 각오를 하자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땅바닥에 앉아 운공(運功)을 한 뒤 주백통에게 경전을 배우러 갔다. 

 

다시 또 10여 일이 지났건만 황용의 소식은 들을 길이 없었다. 상반부의 구음진경은 이제 다 배운 것이다. 주백통은 내심으로 흐뭇한 생각을 하면서 하권의 경문을 곽정에게 들려주면서도 실제로 연습은 시키지 않았다. 혹시나 곽정이 눈치를 채지 않을까 염려해서다. 곽정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상하권의 경문을 완전히 욀 수 있게 되었다. 

 

이날 밤 하늘은 맑고 달빛이 교교히 도화도와 그 해면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주백통과 곽정이 또 한 차례 대결을 하면서 훈련을 끝냈다. 곽정의 무공이 놀랄 만큼 진전되어 있었다. 이렇게 나간다면 그의 무공은 황약사나 홍칠공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바위에 앉아 한담을 주고받는데 풀밭에서 쉭쉭쉭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곽정은 이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뱀이에요!]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뱀떼가 몰려왔다. 주백통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곽정은 큰 바위를 들어다가 굴 어귀를 막아 놓았다. 

 

[형님! 제가 나가 살펴볼 테니 나오지 마세요.] 

[조심해, 그리고 빨리 돌아오라구.] 

 

곽정이 대답하고 밖으로 나왔다. 달빛 아래 수천 수만의 청사떼가 열을 지어 북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수십 명의 흰옷을 입은 남자들이 장대를 들고 뱀을 몰고 있었다. 구양공자의 행차보다 더 그 위세가 등등했다. 

(서독이 도착했나?) 

곽정의 간담도 서늘하게 식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뭇가지 뒤에 숨어 북쪽을 향해 가는 뱀떼의 뒤를 밟았다. 다행히도 뱀을 모는 사내들의 무공이 시원치 않아 발각되지 않았다. 

뱀떼 앞에 황약사 수하의 벙어리 하인이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숲속을 꼬불꼬불 돌아 20여 리를 왔다. 고개를 넘자 앞에 파릇파릇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초원 북쪽은 대나무밭이다. 뱀떼는 초원에 이르자 더 전진하지 않고 멈춰 섰다. 

대나무 숲속에 뭔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초원 위에 몸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쪽의 숲속으로 뛰어들어 북쪽을 향해 달렸다. 대나무밭에 이르러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조용하기만 했다. 발걸음을 가볍게 떼며 대나무밭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 안에 대나무로 얽어 만든 정자가 나타났다. 

적취정(積翠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대련도 보였다. 정자 안에는 대나무로 만든 의자와 침상이 얌전하게 놓여 있다. 여러 해 동안 쏜 것인지 반들반들한 윤기가 달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곽정은 밖을 향해 시선을 들렸다. 청사떼만이 아니라 머리가 크고 꼬리가 길며 비늘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괴상한 금사(金蛇)도 있었다. 금사가 다 모이자 이번에는 흑사(黑蛇)가 몰려온다. 초원 위에 일대 장관을 이룬 뱀의 행렬이 이제 끝났다. 뱀떼가 동서로 갈라지며 길이 트인다. 수십 명의 흰옷 입은 여자들이 청사 초롱을 밝혀 앞장을 서고 뒤에 도포를 입은 구양공자가 손에 부채를 들고 나타났다. 

 

[서역의 구양선생, 도화도 황도주를 뵈오러 왔나이다.] 

 

구양공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곽정은 구양공자 뒤에 서 있는 그 사람을 유심히 주시했다. 등을 뒤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건장한 체구에 꽤 큰 키를 자랑하는 듯 했다. 역시 흰 도포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서자 대나무 숲속에서 또 다른 두 사람이 나타났다. 곽정은 하마터면 큰소리를 지를 뻔했다. 황약사가 딸의 손을 잡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구양봉이 앞으로 나서며 읍을 하자 황약사도 답례를 한다. 구양공자는 무릎을 땅에 꿇은 채 네 번 절을 했다. 

 

[불초 소생 장인 대인에게 문안드리나이다.] 

 

황약사가 그만 두라고 붙들어 일으킨다. 구양공자는 그가 틀림없이 자기의 무공을 시험할 줄 알고 절을 할 때부터 조심을 하고 있었다. 황약사의 손이 자기의 오른쪽 어깨에 닿자마자 힘을 모아 방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몸을 비틀거리다 <아이쿠!>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머리를 땅으로, 다리를 공중에 댄 채 머리방아를 찧고 말았다. 구양봉이 지팡이를 들어 구양공자의 등에 대고 가볍게 밀자 그 힘을 이용하여 자세를 바로잡고 섰다. 이 꼴을 본 구양봉이 웃는다. 

 

[약사형! 사위를 그래 물구나무를 서게 하니 체면이 되겠소? 하하하.] 

 

곽정은 그의 목소리에 금속성이 섞여 귀를 찌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번 내 눈먼 제자와 대결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디 얼마나 재주 있는지 시험해 본 게요.] 

[그래 댁의 따님과 어울릴 것 같습니까?] 

 

이렇게 황약사를 향해 말을 건네는 중에도 곁눈으로 황용을 뚫어지게 훑어보았다. 

 

[여보 황형, 이렇게 예쁜 따님을 두셨을 줄은 몰랐소. 허허허.] 

 

손을 품에 넣어 뭔가 꺼낸다. 비단으로 만든 조그만 상자였다. 상자를 여니 눈알이 번쩍 빛난다. 용 눈만큼이나 큰 4개의 보석이 부드러운 광채를 발하는 보기 드문 보물이었다. 구양봉이 황용을 그윽이 바라다보며 웃는다. 

 

[아버님이 종횡 천하하시니 무슨 보물이든 못본게 있으리오? 이 시골 노인이 처음 만나는 예물로 주는 것이니 그냥 받아 주구료.] 

 

말을 하면서 그걸 황용의 면전에 내민다. 곽정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받나 안 받나 봐야지.) 

그런데 황용이 웃으며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고맙습니다!] 

 

손을 뻗어 받으려고 했다. 구양공자는 눈꽃처럼 희고 아름다운 황용의 얼굴을 보면서 넋을 잃고 있다가 웃는 모습을 보니 여간 반갑고 흐뭇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아버지가 이미 내게 시집을 보내기로 작정을 했으니 마땅히 내게 대한 태도도 달라져야지.) 

득의 만면해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금빛이 번쩍했다. 

 

[큰일났구나!] 

 

비명을 지르며 철판교(鐵板橋)의 재주를 부려 뒤로 넘어져 피했다. 

 

[무얼 하는 게냐?] 

 

황약사가 호통을 치면서 왼손 소매를 휘둘러 황용이 던진 금침을 막으며 오른손바닥으로 그녀의 어깨를 쳤다. 황용은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차라리 저를 때려죽이세요. 저는 시집가지 않을래요.] 

 

구양봉은 보석을 황용의 손에 쥐어 주다가 황약사가 자기 딸을 향해 내리치는 손을 막고 웃는다. 

 

[따님께서 조카놈의 무공을 시험하는 것을 가지고 뭘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구양공자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지만 왼쪽 가슴이 은근히 아팠다. 금침에 맞은 줄 알았다. 그러나 억지로 참고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을 꾸몄지만 괴로운 표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약사형, 우리가 화산에서 헤어진 지 벌써 이십여 년, 서로 만나지 못했군요. 다행히도 조카의 혼사를 쾌히 승낙해 주셨으니 앞으로 어떤 분부를 내리시더라도 거역함이 없으리다.] 

[누가 감히 늙은 독물을 건드리겠소? 서역에서의 이십 년.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구경 좀 시키구료.] 

 

황용은 역시 어린아이라 부친이 무공을 보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흥미진진한 눈초리에 눈물을 걷고 구양봉을 지켜보았다. 그는 손에 흰색의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꼬불꼬불 비틀어진 것이 등나무로 만든 것 같아 보였지만 손잡이 위에는 입을 벌리고 웃는 사람의 머리 모양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인두(人頭)의 입에는 날카롭고 하얀 이빨이 괴상하게 드러나 보였다. 더욱 이상한 것은 지팡이에 은빛 비늘을 반짝이는 두 마리의 뱀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구양봉은 계속 웃는 표정이었다. 

 

[내 당시의 무공도 약사형에게 미치지 못했는데 이제 이십여 년 손을 매고 있었으니 더욱 뒤떨어졌을 게요. 우리 이제 한집안이 되었으니 도화도에 며칠 묵으면서 천천히 배울까 하오.] 

 

구양봉이 사람을 보내 조카의 청혼을 해 왔을 때 황약사는 당세에 무공이 그래도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 몇 명에 불과한데 구양봉이 그 중의 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었다. 자기 딸은 까불기만 좋아하고 고집이 세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다간 신랑이 꼼짝 못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황약사였다. 게다가 지난번 매초풍과 구양공자가 대결할 때 용모나 무공이 그만하면 쓸 만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딸이 마음에 든다는 곽가 성을 가진 소년보다는 훨씬 훌륭해 보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곽정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구양봉의 사람이 왔을 때 그 자리에서 쾌히 대답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구양봉이 겸손을 떠는 바람에 오히려 버쩍 의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입으로는 달콤하게 말을 하면서도 속에는 구렁이가 들어앉아 있다는 것을 평소부터 잘 알고 있었다. 

또 성격이 교활하여 무공에서도 누구에게 승복을 한 일이 없었던 그다. 설마하니 합마공(蛤 功)이 왕중양의 일양지에 깨진 뒤 다시 익히지도 못했단 말인가? 즉시 소매 속에서 옥퉁소를 꺼내 들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한 곡조 불어 보겠습니다. 조용히 앉아 들으세요.] 

 

구양봉은 그가 천마무곡(天魔舞曲)으로 자기의 공력을 시험해보자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 가볍게 미소를 머금은 채 왼손을 휘두르자 청사 초롱을 든 52명의 흰 옷 입은 여자들이 일제히 황약사 앞으로 나서며 부복했다. 

 

[이 32명의 처녀들은 제가 사람을 각지로 보내 사 온 사람들인데 옛 친구에게 바치기 위해 데리고 왔다오. 모두 명사(名師)의 지도를 받아 가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오. 다만 재색이 강남의 가인들에게 비해 손색이 있을 뿐이라오.] 

 

구양봉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第 三十七 章. 마음을 뒤흔드는 합주(合奏) 

황용이 그 여자들을 바라다보니 모두 피부가 희고 몸집이 큰 편이며 그 중 어떤 여자는 금발에 벽안이요, 또 어떤 여자들은 코가 오똑하고 눈이 깊이 파인 것이 과연 중원의 여자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구양봉이 손뼉을 세 번 치자 8명의 여자가 악기를 꺼내 불고 치니 나머지 24명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으로 넘어졌다 뒤로 일어났다가 다시 왼쪽,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도는데 몸이 부드럽기 한이 없었다. 춤을 추는 모든 사람들이 앞뒤로 돌며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모양이 긴 뱀이 꿈틀거리는 것과 흡사하다. 

 

황용은 구양공자가 쓰던 금사권(金蛇拳)이 생각나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뚫어지게 자기를 주시하고 있던 구양공자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저 극악무도한 작자에게 금침을 날렸는데도 아버지가 막는 바람에 허탕을 친 것이 분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양공자를 해치워 버리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제아무리 시집을 가라고 괴롭혀도 시집갈 상대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구양공자는 자기를 향해 웃는 황용을 보자 가슴의 통증까지도 까맣게 잊었다. 

 

이때 흰 옷 입은 여자들의 춤은 더욱 급하게 돌아가고 뱀을 몰던 낭자들은 차라리 눈까지 감고 있었다. 마음이 산란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황약사는 미소를 머금고 끝까지 지켜보다가 옥퉁소를 입에 대고 몇 번 불어 본다. 춤추던 여자들이 갑자기 놀라 발걸음이 흩어진다. 퉁소 소리가 다시 몇 번 울리자 그들은 그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구양공자는 골탕을 먹은 일이 있기 때문에 일단 춤이 시작되면 퉁소 소리가 맞을 때까지 계속 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춤추는 여자들이 죽어야 멈추게 되는 것이다. 자기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숙부님!] 

 

이렇게 구양봉을 부르자 구양봉이 두 손을 한번 탁 친다. 시녀 하나가 쇠로 만든 비파(箏)를 안고 나왔다. 이때는 구양공자의 마음이 벌써 동요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뱀을 몰던 남자들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광태를 부리고 있었다. 

구양봉이 비파의 줄을 몇 번 떵떵하고 퉁겼다. 퉁소 소리 가운데의 부드러운 음이 비파 소리에 눌리는 듯했다. 황약사가 웃으며 입을 연다. 

 

[자, 우리함께 합주를 해봅시다.] 

 

그가 옥퉁소를 입에서 떼는 순간 광란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잠시 행동을 멈췄다. 

 

[빨리 귀를 틀어막아라. 내 황약사와 합께 합주를 하겠다.] 

 

구양봉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모두들 옷깃을 찢어 귀를 틀어막고 다시 머리를 몇 번이나 칭칭 감아 쌌다. 혹시 귀로 소리가 새들어 갈까 해서다. 

구양공자와 같이 공력이 대단한 사람까지도 솜으로 두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 다른 사람이 주악을 울리면 귀를 기울여야지 무엇 때문에 귀를 틀어막고 야단들일까? 나는 그러지 않을 테예요.] 

 

황용이 웃으며 하는 말에 황약사가 호통을 친다. 

 

[아니, 네가 무얼 안다고 까부느냐? 구양봉 아저씨의 비파 솜씨는 천하에 절묘하기로 이름이 나 있다. 네가 무슨 공력이 있다고 야단이냐.] 

 

품에서 비단 수건을 꺼내 둘로 찢어 황용의 귀를 막아 준다. 곽정은 호기심이 동했다. 구양봉의 쇠로 만든 비파의 위력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몇 발짝 앞으로 나섰다. 

 

[구양형의 뱀은 귀를 막을 수 없지 않소?] 

 

황약사가 구양봉을 향해 이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벙어리 하인에게 손짓을 했다.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뱀을 몰던 남자들에게 자리를 피하라고 손을 휘둘렀다. 그렇지 않아도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구양봉이 허락하는 눈치를 보이자 급히 뱀떼를 몰고 벙어리 하인이 안내하는 대로 분분히 사라졌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약사형께서 양해하시구료.] 

 

구양봉이 이렇게 말하고 비파줄을 퉁기기 시작했다. 비파의 성조는 원래 처량하고 격한 것인데 구양봉의 쇠로 만든 비파는 더욱 대단했다. 곽정은 악기에 대해 전연 모르지만 이 비파 소리는 한 박자 한 박자가 자기의 가슴과 함께 뛴다는 것을 느꼈다. 비파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자기의 가슴도 한 번 뛰었다. 소리가 빨라지면 가슴도 함께 빨리 뛰었다. 여간 거북한게 아니다. 

(이렇게 계속되다간 가슴이 빠개지고 말겠구나.) 

급히 땅바닥에 정좌하고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내공을 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비파 소리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 

구양봉이 퉁기는 비파 소리와 함께 황약사가 부는 옥퉁소 소리가 어우러져 가락을 뽑았다. 금으로 만든 북을 치는 듯한 소리 속에 은은한 황약사의 퉁소 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곽정의 마음도 흥겨워지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지만 심신을 가다듬고 듣고 있었다. 황약사와 구양봉은 서로 지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불고 퉁긴다. 

황용은 합주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다. 아버지는 일어서서 걸어다니며 부는데 발걸음은 팔괘(八卦)의 방위를 찾아 딛고 있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평소 상승의 내공을 익힐 때 취하는 자세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다시 구양봉에게 시선을 돌렸다. 

만두 찌는 솥처럼 그의 머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솟고 있었다. 둘다 결사적인 힘을 다하여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곽정은 대나무 숲속에 숨어 두 사람의 합주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옥퉁소와 쇠로 만든 비파가 무공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마력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가? 즉시 심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조용히 귀를 기울었다. 하나는 부드럽고(柔) 다른 하나는 강(剛)했다. 역시 유(柔)와 강(剛)의 대결이 고수끼리의 대결과 큰 차가 없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옳지! 황도주와 구양봉이 상승의 내공으로 결사적인 대결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자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그들의 대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원래 운기(運氣)를 하여 동시에 퉁소와 비파 소리의 유혹을 물리치느라 꽤 힘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제 심신이 안정되어 조용히 쌍방의 승패를 경청할 수 있었다. 

 

구양봉이 처음에는 뇌성 벽력과 같은 위세로 황약사를 압도하고 나섰다. 그러나 옥퉁소 소리는 묘하게도 동서로 피하면서 비파 소리의 허를 이용해 뚫고 들어가곤 했다. 한참 지나자 비파 소리가 서서히 늦어지고 퉁소 소리가 더욱 자지러들었다. 곽정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주백통이 그에게 외라고 했던 두 마디 말이다. <강(剛)은 오래 가지 못하고 유(柔)는 지킬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제 비파 소리가 반격을 하겠구나.) 

아니나다를까? 옥퉁소 소리가 맑고 길게 퍼지는 듯하자 비파소리가 떵떵 크게 울리며 위세를 과시했다. 곽정이 그 구결(口訣)을 욀 때 그것이 천하 무술의 경전인 구음진경이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뜻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황약사와 구양봉이 악기를 가지고 서로 무공을 겨루게 됨에 쌍방의 진퇴와 공방이 묘하게도 자기가 늘 외던 구결과 부합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두 악기의 대결을 듣고 평소 몰랐던 이치를 깨우치게 되어 몹시 기뻤다. 여러 차례나 황약사가 승리를 거두는 것같이 들렸다. 퉁소 소리가 자지러지고 꺾어질 때마다 구양봉은 방어를 못 하고 몰렸다. 또한 구양봉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을 알았다. 곽정은 치음에는 서로 겸양을 하기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한 시간 이상 듣는 동안 퉁소 소리와 비파 소리의 공방전을 벌이는 법문(法門)과 주백통이 자기에게 전수해 준 구결을 비교하면서 많은 묘리를 터득한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희열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구결 가운데의 도리로 말한다면 쌍방의 공방 가운데 적지않은 허점과 아쉬움이 있다. 그렇다면 주백통 형님의 무공이 황도주나 구양봉보다 월등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지는 않을 거야. 만약 주백통의 무공이 그들보다 월등하다면 무엇 때문에 15년 동안이나 굴 속에 갇혀 고생을 했단 말인가?) 

이 생각 저 생각하는 동안 쌍방의 악기 소리가 더욱 급박해지면서 단병상접(短兵相接),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제 곧 결말이 날 막바지에 도달한 것이다. 혹시 황약사가 지는 것이 아닌가 조바심을 하는데 멀리 해상에서 한바탕 긴 휘파람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황약사와 구양봉이 동시에 놀랐는지 퉁소 소리, 비파 소리가 뚝 멈췄다. 휘파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린다. 누군가가 배를 타고 섬으로 오는 것 같았다. 

구양봉이 손을 휘둘러 땅땅 비파를 울린다. 비단을 찢는 듯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저쪽의 휘파람 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며 도전해 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황약사의 퉁소도 싸움에 휩쓸려 들었다. 어떤 때는 휘파람 소리와 또 어떤 때는 비파 소리와 얽히고 설킨다. 세 가지 화음이 오르락내리락 정신을 차리기 어렵게 들렸다. 곽정이 주백통과 함께 네 사람이 어우러져 싸우는 장난을 한 적이 있었다. 삼국이 서로 엇갈려 혼전을 벌이는 국면이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고수가 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휘파람 소리는 더욱 가까이서 들렸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용이 우는 듯 사자가 울부짖는 듯하더니 다시 새소리처럼 자지러지며 천변 만화하면서 혼전을 벌였다. 곽정은 너무나 재미가 있어 자기도 모르게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좋구나!] 

 

자기가 지른 소리에 자기가 놀랐다. 큰일났구나 싶어 뺑소니를 치려고 하는데 눈앞에 파란 그림자가 번쩍하며 벌써 황약사가 자기 면전에 와 서 있었다, 이때 악기 소리는 멈추고 황약사가 낮은 소리로 호통을 친다. 

 

[이 녀석 따라오너라!] 

 

곽정은 이왕 들킨 일이라 고개를 쳐들고 황약사의 뒤를 따라 대나무 정자로 올라섰다. 황용은 귀를 수건으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곽정이 외치는 환호성을 듣지 못했다. 곽정이 올라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들며 두 손을 마주 잡는다. 

 

[곽정 오빠, 종내 오시고 말았군요.......] 

 

채 말도 맺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흘린다. 구양공자는 곽정을 보자마자 못마땅한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황용이 반기는 것을 보자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몸을 날리며 주먹을 들어 곽정의 골통을 내리쳤다. 구양공자는 곽정을 우습게 본 셈이다. 

 

[거지같은 녀석이 왜 여기 나타나느냐?] 

 

곽정의 무공은 크게 발전하여 보응(寶應) 유(劉)씨 사당에서 겨룰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살짝 비켜서며 왼손은 신룡파미(神龍擺尾), 오른손은 항룡유회(亢龍有悔)를 폈다. 둘 다 강룡십팔장 가운데의 묘기이다. 이 강룡십팔장의 장법의 오묘함이 천하무학이라 1초(招)도 방어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주백통의 쌍수호박에 의한 1인 2역의 공격임에랴? 

구양공자는 그의 왼손이 자기 오른쪽 어깨를 향해 날아옴을 느꼈다. 그것이 강룡십팔장의 솜씨라는 것도 알았다. 피해야지 막다가는 오히려 큰일이 벌어진다. 왼쪽으로 피하는 순간 이쪽의 항룡유회에 결리고 말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가슴의 늑골이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구양공자의 내공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곽정의 장력을 힘으로 막다가는 자기의 심장이 터져 나갈 것을 알고 급히 뒤로 피해 뛰었다. 곽정에게 얻어맞고 자기가 몸을 날리는 바람에 몸이 허공에 떴다. 대나무 위로 떨어지고 다시 그 탄력에 의해 몇 번 깡충거리다 그제야 땅에 내려섰다. 부끄럽고 창피한데다 가슴이 아파 그냥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곽정의 돌발적인 솜씨에 황약사와 구양봉은 경악했고 황용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곽정 자신도 뜻밖이었다. 자기의 무공이 이토록 진전되어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얻어맞은 구양공자가 살수로 반격할까 봐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대비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화가 난 눈초리로 곽정을 쏘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홍노괴! 아주 훌륭한 제자를 두었군 그래.] 

 

이때 황용은 귀를 막고 있던 수건을 풀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야 홍칠공이 온 것을 알았다. 정말 하늘에서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대나무숲 밖으로 뛰어나가며 외친다. 

 

[사부님! 사부님!] 

 

황약사가 오히려 깜짝 놀란다.  

(아니, 저 애가 누굴 보구 사부래?) 

이때 홍칠공이 등에 큰 호로병을 멘 채 오른손에 죽장을 짚고 왼손에 황용의 손을 잡고 웃으며 나타났다. 황약사는 정말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용아! 너 방금 누굴 보구 사부라고 했느냐?] 

 

황용은 오히려 구양공자를 바라다보며 말을 꺼낸다.  

 

[이 못된 사람이 날 괴롭힐 때 만약 홍칠공께서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영영 아버지는 이 용이를 보시지 못할 뻔했어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게냐? 얌전한 그 사람이 너를 괴롭히다니?] 

[아버지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대가 한번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겠어요.] 

 

황용은 고개를 돌려 구양공자를 바라다본다. 

 

[우선 맹세부터 하세요. 만일 아버지께 대답할 때 추호라도 거짓이 있으면 구양 아저씨의 지팡이에 있는 뱀에 물려 죽을 거라구요.] 

 

황용의 이 말이 떨어지자 구양봉과 구양공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원래 구양봉의 지팡이에 있는 뱀은 10여 년 동안 공을 들여 키운 것이다. 여러 가지 종류의 뱀 가운데 독이 제일 많다는 뱀만 골라 교배를 시켜 만들어 내놓은 괴상한 뱀이다. 구양봉은 평소 수하의 반도를 벌할 때나 아니면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있을 때 지팡이의 이 뱀에 물리게 했다. 한 번 물리기만 하면 전신이 가려워 괴로와하다가 숨을 거둔다. 구양봉이 선심이 일어나 구하려 해도 치료할 약이 없으니 소용이 없는 것이다. 황용은 그의 지팡이에 서리고 있는 괴상한 뱀을 보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대로 한 말인데 공교롭게도 서독 숙질간에 가장 금기로 아는 곳을 찌른 결과가 되었다. 

 

[장차 장인 되실 어른께서 물으시는 말씀에 어디라고 감히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함부로 입을 놀리면 먼저 따귀를 때리겠어요. 자 그럼, 이제 하나하나 물을 테니 똑똑히 대답을 해요. 북경의 조왕부에서 나를 만난 일이 있어요? 없어요?] 

 

구양공자는 늑골이 부러지고 또 가슴에는 황용의 금침을 맞았다.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 결사적인 내공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차라리 말이나 하지 않으면 그런대로 운기(運氣)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두어 마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통증이 더하여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황용이 묻자 입을 벌려 대답할 수는 없고 고개를 끄덕여 시인하고 말았다. 

 

[그때 당신은 사통천, 팽련호, 양자옹, 영지상인 둥과 한패가 되어 나 한 사람을 친 일이 있어요? 없어요?] 

 

구양공자는 자기가 그렇게 유명한 고수들과 한패가 되어 어린 소녀 하나를 치거나 괴롭힐 수 있겠느냐고 반박하고 싶었다. 

 

[내....내가 그들과 한패가 아니라.......] 

 

그러나 가슴이 아파 한마디도 더 할 수가 없었다. 

 

[좋아요. 그럼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묻는 말에 시인하거든 고개를 끄덕이고, 아니면 머리를 흔들어요. 사통천, 팽련호, 양자옹, 영지상인들과 내가 맞선 일은 있어요? 없어요?] 

 

구양공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이 모두 나를 잡으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뒤에 당신이 나섰죠? 안 그래요?] 

 

구양공자는 꼼짝없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여 시인했다. 

 

[그때 나는 조왕부의 대청에서 혼자 외롭게 시달리고 있었는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도 모르고 계셔서 구하러 오시지 않았죠?] 

 

구양공자는 황용의 말이 황약사를 자극하겠다는 저의가 분명 있음을 알기는 했지만 사실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용은 아버지의 손을 끌어 잡았다. 

 

[아버지, 나를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군요.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이렇게 대하시지는 않았을 텐데.......] 

 

황약사는 그녀가 세상 떠난 애처의 얘기를 꺼내자 코끝이 시큰해져서 손을 뻗어 황용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구양봉이란 위인은 교활하면서도 얕은 꾀가 많았다. 형세가 불리하다고 생각했던지 이런 말을 꺼낸다. 

 

[황소저, 그토록 유명한 무림의 인물들이 황소저를 잡아 놓으려고 했지만 가전의 절세 무예를 지니고 계시므로 꼼짝 못하고 말았죠? 그렇지요?] 

 

황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황약사는 자기 가문의 무공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구양봉이 황약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약사형, 조카 녀석이 따님의 무예를 본 후 더욱 마음이 기울어 저를 졸라 이렇게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와 혼사를 논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랬던가요!] 

 

황약사는 흐뭇하고 만족한 표정이다. 구양봉이 시신을 홍칠공에게 돌린다. 

 

[홍형! 우리 숙질은 도화도의 무공과 인재를 흠모하여 이곳에 왔습니다만 홍형은 왜 오셨습니까? 지난번 내 조카 녀석 명만 짧았더라도 당신의 만천화우척금침(滿天花雨擲金針)의 절기에 그만 목숨을 잃을 뻔했더군요?] 

 

그날 황용이 구양공자를 향해 금침을 던져 위험한 고비에 있을 때 홍칠공이 나서서 그를 구해 준 일이 있었다. 오히려 그 일을 홍칠공이 그랬다고 뒤집어씌우는 말이다. 구양공자가 거짓말로 자기 숙부를 속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홍칠공은 전연 대수롭지 않다는 듯 껄껄 웃으며 호로병의 마개를 열고 술을 한 모금 마신다. 곽정이 오히려 참지 못하고 나선다.  

 

[홍칠공이 구양공자의 생명을 구해 준건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어디라고 어린 녀석이 말참견을 하느냐?] 

 

황약사가 호통을 치는 바람에 곽정은 당황한다. 

 

[용이, 구양공자가 정소저를 납치한 일을 아버님께 말씀드려요.] 

 

황용은 아버지의 성미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평소 세상의 속된 일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기를 잘했다. 다른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가 일쑤요, 다른 사람들이 그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옳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동사(東邪)라는 별명을 듣는지도 모른다. 

(구양공자의 못된 행위를 아버지는 오히려 풍류가 있다고 말하실지도 몰라.) 

아버지 황약사가 곽정을 째려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양공자를 향해 계속 말을 건다. 

 

[내 할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날 나와 조왕부에서 겨룰 때 두 손을 등뒤에 묶어 놓고 손을 쓰지 않고도 나를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셨죠?] 

 

구양공자가 고개를 끄덕여 시인한다. 

 

[뒤에 내가 홍칠공을 은사로 모시고 보응에서 두 번째 만나 겨루게 되었을 때 또 아버지나 홍칠공에게 배운 어떤 무공을 가지고 덤벼들어도 숙부에게 배운 권법으로 파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셨죠? 네?] 

 

(그야 자기가 그렇게 주장해서 그랬던 것이지, 내가 그렇게 하자고 했나?) 

황용은 머뭇거리는 구양공자의 표정을 살피고 다시 한 번 추궁한다. 

 

[하여튼 그때 그렇게 결정한 후 겨뤘던 건 사실이죠?] 

 

구양공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용이 다시 자기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버지 보세요. 홍칠공도 깔보고, 아버지도 업신여기는 거 아녜요. 두 분의 무예를 합쳐도 자기 숙부만 못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합세해도 자기 숙부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나는 그런 말 믿지도 않았지만요.] 

[어린 게 함부로 그렇게 입을 놀리는 게 아니다. 세상에 무학을 하는 사람치고 동사,서독,남제,북개의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더냐?] 

 

황약사의 입으로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구양공자의 경망함이 못마땅했다. 

 

[홍형, 먼 길에 이렇게 도화도를 찾아 주셨는데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가요?] 

[네,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홍칠공이 우스꽝스러운 인물이기는 하지만 위인이 정직하며 악한 것을 원수처럼 미워한다는 사실을 황약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내심으로 흠모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혼자 해결하지 누구에게 부탁하는 성미가 아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부탁이 있어 왔다는 말을 듣고 보니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가 수십 년을 사귄 사이인데 홍형의 분부시라면 여부 있겠습니까?] 

[그렇게 쉽게 대답할 일도 아니오. 일이 꽤 어려울 텐대요.] 

[쉬운 일 같으면 홍형이 제게 부탁이나 하시겠습니까?] 

 

황약사가 웃자 홍칠공이 손뼉을 친다. 

 

[그렇지요. 그래야만 지기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대답하신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불 속에 들어가라시면 불 속으로, 물 속에 들어가라시면 물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구양봉이 지팡이를 흔들면서 말참견을 한다. 

 

[황형! 잠깐만, 무슨 일인지 물어나 보시구료.] 

 

홍칠공은 구양봉이 나서는 게 못마땅했다. 

 

[여보 독물(毒物),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니 나설 것 없소. 구경이나 하다가 잔치 술이나 마시구료.] 

[잔치 술이라니요?] 

[그렇소. 바로 잔치 술이오.] 

 

오른손으로 곽정과 황용을 가리켰다. 

 

[둘 다 내 제자요. 황형께 간구해 성혼을 시키겠다고 이미 약속을 했었다오. 이제 황형도 쾌히 응낙하신게요.]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곽정과 황용은 너무 기뻐 서로 바라다보았고, 구양봉 숙질과 황약사는 깜짝 놀랐다. 구양봉이 먼저 나섰다. 

 

[홍형, 그 말씀은 거두시오. 황형의 따님은 벌써 제 조카와 혼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화도에 온 것이오.] 

[황형, 사실이 그런가요?] 

 

홍칠공이 황약사를 향해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홍형께서는 농담의 말씀을 거두어 주시오.] 

 

홍칠공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지는 듯했다. 

 

[누가 농담을 합니까? 딸 하나를 두 집에 시집보내려는 경우야 있을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다시 구양봉을 바라다본다. 

 

[나는 곽씨 가문의 중매자인데 구양씨 댁 중매는 도대체 누구요?] 

 

구양봉은 뜻밖의 질문을 받고 순간적으로 당황한다. 

 

[황형도 나도 응낙을 한 처지에 무슨 중매자가 필요하단 말씀이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응낙을 안했단 말이오.] 

[그래, 그가 누구요?] 

[바로 이 늙은 거지 홍칠공이오!] 

 

구양봉은 오늘 피비린내 나는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위인이 음흉하여 내색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었다. 홍칠공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당신의 조카 품행이 단정치 못한데 어떻게 황약사의 금지옥엽 같은 따님을 아내로 맞겠다는 말이오? 두 분이 억지를 부려 혼사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들 둘이 불화하여 날마다 치고 받으면 그래 어쩔 셈이오?] 

 

이 말을 들은 황약사의 마음이 흩어지는 듯했다. 딸의 눈치를 살피니 곽정을 바라다보는 눈매에 정을 담뿍 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곽정이 어쩐지 못마땅했다. 

황약사는 총명한 사람이다.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며 바둑이며 그림이며 글씨며 못하는 것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사귄 친구는 모두 재사(才士)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의 부인과 딸도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 있었다. 그런데 무남독녀 외동딸을 멍청해 보이는 곽정에게 줄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무래도 그것은 곤란한 일이다. 

구양공자 옆에 서 있는 곽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완전히 한 마리 봉과 촌닭이다. 구양공자가 백 배는 훌륭해 보이는 것이다. 딸은 아무래도 구양공자에게 시집을 보내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진다. 그러나 홍칠공의 체면도 세워 주어야 하는 것이다. 

 

[여보 구양형, 조카가 부상을 입은 것 같으니 우선 치료나 해주시고 천천히 상의하도록 합시다.] 

 

구양봉은 황약사의 말을 듣고 조카를 손짓해 대나무숲으로 들어갔다. 구양봉이 조카의 금침을 뽑아 주고 부러진 늑골을 붙여준 것이다. 한참 지나 그들이 다시 정자로 돌아왔다. 황약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제 딸아이 몸도 허약하고 까불기만 좋아해 군자의 아내로 부족함이 많습니다. 뜻밖에도 홍형과 구양형이 청혼을 해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구양 가문의 청혼을 받아들여 응낙을 했지만 홍형의 분부도 물리치기가 어렵군요. 제가 한번 두 신랑감을 시험해 봤으면 하는데 두 분의 의향이 어떠신지?] 

[그럼, 어디 빨리 말씀을 하시구료. 이 늙은 거지 그만 답답해 견딜 수가 없군요.] 

 

황약사는 가볍게 미소를 머금는다. 

 

[제 딸아이 덕이고 용모고 자랑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 욕심은 신랑만은 훌륭한 사람을 구해 주고 싶군요. 구양공자는 구양형의 어진 조카요 곽정은 또한 칠공의 제자이니 인품이야 더 말할게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망설여지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문제를 세 개 내어 두 분을 시험해 본 후 이긴 분에게 제 딸을 드릴까 합니다. 저는 아무 쪽에도 편들지 않을테니 두 분의 의향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 참 묘한 생각이십니다. 그러나 제 조카가 부상을 입었으니 무예로 겨루게 한다면 완쾌한 후에나 가능하겠습니다.] 

 

그러나 홍칠공의 생각은 달랐다. 

(이놈의 황노사, 말로는 편들지 않겠다고 하더니 새빨간 거짓말이로구나. 만약 시나 문장으로 겨루게 된다면 곽정은 어림없을텐데...... 제기랄, 저놈의 독물과 한바탕 싸울 수 밖에 없겠구나.) 

앙천 대소를 하며 입을 연다. 

 

[우리 모두가 무예를 하는 사람들인데, 그래 무예로 겨루지 않으면 뭘로 하겠다는 말이오? 밥 먹고 똥 싸는 걸로 시합을 하나? 당신 조카는 부상을 입었지만 당신은 멀쩡하니 우리가 대신 한번 겨루어 봅시다.] 

 

구양봉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의 어깨를 후려갈긴다. 구양봉이 어깨를 낮추어 피하고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홍칠공이 죽장을 옆에 있는 대나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소리를 질렸다. 

 

[반격을 하시오!] 

 

말을 끝내자마자 두 손을 들어 순식간에 7초(招)를 공격한다. 전광 석화처럼 날렵한 돌격이었다. 구양봉은 왼쪽으로 막고 오른 쪽으로 피하고 오른손을 땅에 꽂았다. 지팡이가 정자 안에 깔린 벽돌에 박혀 꼿꼿하게 섰다. 순간, 왼손이 벌써 홍칠공을 향해 7초(招)나 반격을 했다. 황약사는 갈채를 보내며 만류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와 더불어 이름을 날리는 무림의 고수가 2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진경을 했는가 보자는 속셈이다. 홍칠공이나 구양봉이 모두 일파의 종주다. 무공은 20년 전에 벌써 극치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화산에서 겨룬 후 더욱 정진을 거듭하여 닦아 온 무공이다. 화산에서 싸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둘은 서로 재빠른 공격과 방어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피차의 허실을 노렸다. 권세(拳勢)와 장영(掌影)이 대나무 잎 사이로 춤을 춘다. 

 

곽정은 옆에서 넋을 잃고 관전을 했다. 쌍방의 공방전이 너무나 묘했기 때문이다. 구음진경에 기재된 것은 원래 천하 무학의 원전이다. 내가 외가(內家外家)는 물론이요, 권법이나 검술의 기본적인 법문(法門)이 모두 경전의 상반부에 수록되어 있었다. 곽정은 외기는 다 욌지만 아직도 미숙했다. 그러나 부지 불식 가운데 식견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때 두 사람이 모두 상승의 무공으로 대결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동작 하나 하나가 경에 씌어진 법문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은 3백여 초(招)를 다퉜다. 홍칠공이나 구양봉이 다 상대의 솜씨에 놀라 서로 내심으로 감탄을 마지않았다. 황약사도 옆에서 관전을 하면서 한숨을 길게 내쉰다. 

(내 도화도에서 혼자 불철주야 단련을 했기로, 왕중양이 세상을 떠난 뒤 내 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로구나. 늙은 거지나 독물이 어디서 이런 훌륭한 무공을 익혔을까?) 

구양공자나 황용은 각기 다른 생각에 잠긴 채 구경을 하고 있었다. 구양공자는 숙부가, 황용은 홍칠공이 이겨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 둘은 지금 두 사람이 벌이고 있는 대결의 묘미를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황용이 어쩌다 시선을 돌리는데 땅바닥에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춤추듯 손발을 놀리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곽정이다. 표정도 괴상한 것이 신들린 사람처럼 미쳐 날뛴다. 깜짝 놀라 낮은 소리로 불러 본다. 

 

[곽정 오빠!] 

 

그러나 곽정은 알아듣지 못하고 여전히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고 있었다. 황용이 이상해서 자세히 관찰하니 그는 홍칠공과 구양봉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싸우는 두 사람의 권로가 이미 변하여 공격과 방어가 원만해져 있었다. 한 사람이 한참 동안 응시해 본 뒤에 공격을 했다가 상대가 피하면 땅바닥에 앉아 쉬다가 다시 일어나 공격을 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무인의 대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사제가 함께 무예 전수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늦고 허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양은 방금 격돌할 때보다 더욱 심각하고 진지해 보였다. 황용이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 또한 싸우는 두 사람보다 심각한 표정이다. 다만 구양공자만이 황용을 향해 야릇한 눈길을 보이며 부채를 흔들고 있을 뿐이다. 

곽정은 계속 자신을 잃은 듯 관전에 열중하다가 탄성을 발했다. 구양공자는 곽정의 그와 같은 태도가 몹시 눈에 거슬렸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떠들며 야단이냐?] 

[자기가 모른다고 남까지 모르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오히려 황용이 듣고 쏘아붙였다. 

 

[공연히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는 체하니까 그렇지요. 나이도 어린 게 어떻게 숙부님의 신묘한 솜씨를 알겠어요?] 

[자신이 모르면 모르는 게지 뭔 그래요?] 

 

둘이 이렇게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도 황약사와 곽정은 귀가 먹었는지 관전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이때 홍칠공과 구양봉의 손발은 더욱 완만해 있었다. 하나는 왼손의 중지로 자기 머리를 퉁기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두 귀를 감싸 쥔 채 땅에 쭈그려 앉아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러다 둘이 동시에 일어나 서며 한 차례 공방전을 편다. 

 

[잘한다 잘해!] 

 

곽정이 갈채를 보내면 그들은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 생각에 잠긴다. 둘의 무공이 이 상태에 도달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각기 각파의 무술치고 그들이 사용해 보지 않은 것이 없다. 제아무리 묘한 재주의 살수를 펴 봐도 피차에 아무런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승부를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20년 전 대결을 해 본 후 하나는 중원에서, 다른 하나는 서역에 떨어져 있으면서 오랫동안 소식도 없이 지냈다. 이제 다시 대결을 하는 동안 피차의 강점과 허점 금기를 완전히 파악한 것이다. 달빛이 사라지고 아침 해가 동산에 떠오르는 동안 둘은 근 1천여 초(招)를 겨뤘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홍칠공과 구양봉이 각자 지혜를 다 짜내 새로운 무공을 창출해냈고 권법과 장력에 천변 만화의 재주를 다 부려 보았지만 시종일관 우열이 가려지지 않았다. 이 틈에 덕을 본 것은 곽정 한 사람뿐이다. 그는 당대에 무공이 제일 강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면서 한없는 재주를 배웠다. 구양봉이 공격을 하면 홍칠공은 이렇게 방어를 해야겠구나, 오히려 자기 쪽에서 먼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홍칠공의 반격 자세가 자기가 상상했던 것보다 몇십 배 훌륭한 경우도 많았다. 또 홍칠공의 공격에 구양봉의 반격은 어떨까? 조바심을 해 보았지만 구양봉도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황용은 곽정의 이러한 태도를 주시해 보며 이상한 생각을 했다. 

(10여 일 만나지 못하는 동안 하늘에라도 올라가 무예를 익혔나?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저렇게도 기뻐하고 감탄해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저 오빠가 내 생각을 하다가 미쳐 버린 것이 아닐까?) 

곽정에게 쫓아가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이때 곽정은 때마침 구양봉을 흉내내어 몸을 되돌려 세우며 장풍을 날렸다. 보기에는 평범한 1장이었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힘이 감춰져 있는 그런 장풍이었다. 황용이 손을 뻗어 곽정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가 그만 정통으로 걸리고 말았다. 몸이 반공을 향해 높직이 올라가 떴다. 곽정이 깜짝 놀라 <아이쿠!> 하는 비명과 함께 몸을 솟구쳐 황용을 얼싸안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황용은 벌써 허공에서 허리를 꼬며 대나무 정자 지붕 위로 살풋 내려와 섰다. 곽정도 몸을 솟구치다가 왼손으로 정자 지붕의 한쪽 치마를 짚고 지붕 위에 올라섰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붕 위에 앉아 관전을 한다. 

 

이때 싸우던 장면도 다시 한 번 변했다. 구양봉이 땅에 엎드려 두 손을 구부려 어깨와 나란히 했다. 마치 한 마리의 청개구리가 먹이를 향해 덮치려는 듯한 자세다. 입으로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를 대고 있었다. 황용이 그 꼴을 보고 웃는다. 

 

[곽정 오빠, 뭘 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는걸.] 

 

그러나 주백통이 왕중양이 일양지(一陽指)로 구양봉의 합마공(蛤 功)을 파헤쳤다는 말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굉장히 무서운 무공인데, 합마공이라구 하는 게야.] 

[정말 두꺼비 같군요.] 

 

황용이 재미있다는 듯 손뼉을 친다. 

구양공자는 서로 기댄 채 웃고 떠드는 그들을 눈에서 불이 나서 바라다볼 수가 없었다. 당장에 뛰어올라 한 주먹에 곽정을 박살내고 싶었지만 가슴이 따끔거려 기운을 낼 수가 없었다. 오른손에 은으로 만든 북인 암기를 꺼내 들고 슬금슬금 정자 뒤로 돌아가 손을 번쩍 들어 구경에 정신이 팔린 곽정의 등을 향해 던졌다. 

이때 홍칠공은 앞뒤로 장풍을 날리며 구양봉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강룡십팔장과 합마공의 사투가 이제 막 벌어질 참이다. 

이 모두 두 사람이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자랑스런 무공이다. 이제 또다시 붙게 되면 이전 죽느냐 사느냐의 결판이 달린 싸움이 되는 것이다. 곽정의 무공 가운데 가장 정통으로 배운 것이 바로 이 강룡십팔장이다. 사부가 이 장법을 쓰기에 그 위풍 당당하고 묘기 백출함에 장탄을 연발하며 관전에 여념이 없으니 뒤에서 날아오는 암기를 의식할 리가 없었다. 

 

황용은 북개와 서독 두 사람이 당세에 최강의 고수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이 생사를 건 마지막 혈투를 벌이려 하는데도 웃고 까불고 있다가 갑자기 정자 밖에서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총명한 여자라 금방 구양공자가 뒤에서 무슨 농간을 부리기 위해 없어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등뒤에서 공기를 찢는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암기가 곽정의 등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곽정의 등을 감싸안았다. 

퍽퍽퍽 연속해서 북으로 된 암기가 황용의 등을 명중시켰다. 황용은 연위갑을 입었기 때문에 맞은 곳이 살짝 아프기만 했지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손을 뒤로 돌려 은으로 만든 북을 잡고 웃었다. 

 

[등이 가려워 긁어 주려고 했군요. 고마와요. 이걸 되돌려 드려야지.] 

 

구양공자는 황용이 던지면 받을 채비를 했다. 그러나 황용은 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가져가라고 손만 내밀고 있었다. 구양공자는 왼발 끝으로 땅을 찍으며 정자 위로 올라왔다. 경공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사뿐히 날아올라 지붕 모퉁이를 밟고 섰다. 흰 도복 자락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멋진 풍채가 신선을 닮았다. 

 

[경공이 정말 대단하시군요.] 

 

황용이 칭찬을 하며 한 발짝 나서서 은으로 된 북을 내밀었다. 구양공자는 그의 백설 같은 팔목을 보고 불현듯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순간 눈앞에 금빛이 번쩍 빛났다. 두 번씩이나 골탕을 먹었던 그는 물구나무를 서며 정자 밑으로 내려 뛰며 긴소매를 휘두르자 금침이 우수수 땅바닥에 쏟아져 흩어진다. 황용이 깔깔 웃으며 은으로 된 북을 땅에 꿇어 엎드린 구양봉의 정수리를 향해 힘차게 집어던졌다. 

곽정이 놀라 소리를 지른다. 

 

[그건 안 돼.] 

 

허리를 감싸안고 땅으로 뛰어내린다. 채 발끝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우지끈 퉁탕 벽력같은 괴성과 함께 황약사가 놀라 외치는 울부짖음이 들렸다. 

 

[구양 형, 손을 멈추시오.] 

 

그러나 곽정은 천지 개벽을 하는 것 같은 강한 힘이 자기를 향해 날아옴을 직감했다. 혹시 황용이 다치면 어쩌나 싶어 급히 내공을 쓰면서 강룡십팔장 가운데의 전룡재전(見龍在田)의 솜씨를 발휘하여 자기를 향해 엄습하는 힘을 밀어붙였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구양봉의 합마공이 7,8보나 뒤로 밀렸다. 급히 황용을 땅 위에 내려놓고 구양봉의 초술(招術)에 대항할 태세를 취했지만 홍칠공과 황약사가 벌써 쌍방의 면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구양봉이 가뜩이나 큰 키를 똑바로 세웠다. 

 

[아, 이거 부끄러워서..... 그래 소저가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황용은 놀라 새파랗게 질려 있다가 구양봉의 말을 듣고 억지로 웃었다. 

 

[아버님이 여기 계신데 제가 다치겠어요?] 

 

황약사도 걱정스러운지 황용의 손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묻는다. 

 

[그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느냐? 심호흡을 해 봐라.] 

 

황용이 아버지의 말에 따라 몇 번 심호흡을 해 보았지만 별로 이상한 곳이 없는 것 같아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자 황약사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눈치다. 

 

[그래, 두 아저씨가 연무(練武)를 하시는데 계집애가 왜 나서느냐? 구양 아저씨의 합마공은 보통의 무공이 아닌데 사정을 보아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넌 벌써 죽었겠다. 저 정자를 보렴.] 

 

황용이 정자를 보니 반쪽이 무너져 내렸다. 정자 기둥은 원래 천연의 거죽(巨竹)으로 뿌리가 땅속에 깊이 박혀 있던 것인데 그만 그것이 뿌리째 뽑혀 버린 것이다. 장력이 얼마나 세기에 그랬을까? 생각하고 혀를 내두른다. 

원래 구양봉의 이 합마공은 순전히 이정제동(以靜制動)하는 것으로 전신에 힘을 축적하고 있다가 적의 공격을 받으면 즉시 폭발 반격하는 것이다. 때마침 그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 홍칠공의 공격을 기다려 폭발하려고 줄당겨 놓은 활처럼 대기하고 있는 찰나에 황용이 건드렸던 것이다. 구양봉이 자기를 공격한 상대가 홍칠공이 아닌 황용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깜짝 놀란 나머지 눈앞이 아찔했다. 황약사는 꽃 같은 딸이 이제 자기 손에 죽었나 했다. 

 

황약사가 놀라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순간 우지끈 꽝! 정자가 무너지고 장력이 다시 억센 힘에 부닥쳐 되돌아왔다. 그리고 황용을 구출한 사람이 곽정이라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놀랐다. 

(과연 늙은 거지가 대단한 위인이로구나. 제자도 저렇게 훌륭하게 키워 놓았으니.....) 

황약사도 귀운장에서 곽정의 무예를 본 일이 있다. 

(저 녀석이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구양봉의 평생 절학인 합마공을 막겠다고 대들다니, 만약 구양봉이 내 체면을 보아 사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넌 벌써 묵사발이 되었을 게다.) 

그는 곽정의 공력이 귀운장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진보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방금 황용의 생명을 구해 준 것만은 사실이다. 자기 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준 그가 고마와 그에 대한 악감이 상당히 해소되었던 것이다. 

(저 녀석이 성격만은 성실하니 내 비록 딸은 주지 못해도 뭔가 상이라도 주어야 하겠다.)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홍칠공이 떠드는 큰소리가 들렸다. 

 

[이 독물(毒物), 정말 지독하군. 우리 승패가 나지 않으니 다시 한 번 겨루어 봅시다.] 

[좋소! 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해 보겠소.] 

 

홍칠공이 먼저 몸을 날려 장내로 들어선다. 구양봉이 따라 들어서는데 황약사가 손을 뻗어 가로막는다. 

 

[잠깐만, 두 형께서 벌써 1천여 초나 겨루셨지만 승부가 나지를 않는군요. 오늘 두 분은 도화도의 빈객으로 오셨으니 제가 담근 미주나 드십시다. 화산의 논검(論劍)도 얼마 있지 않으면 그 시기가 도래할 텐데 그때 다시 두 분께서 우열을 가리시게 될 테고, 저와 단황야(段皇爺)도 참가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그만하고 쉬도록 하십시다.] 

 

그러나 둘은 좀처럼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어디 한번 홍칠공의 훌륭한 재주를 구경합시다.] 

 

구양봉의 말에 홍칠공도 지지 않는다. 

 

[해 보겠으면 해 봅시다.] 

 

황약사는 둘이 다시 겨루려고 하자 웃으며 만류한다. 

 

[두 분이 도화도에 오신 것은 원래 무공을 자랑하기 위해서였군요.] 

 

이 말에 홍칠공도 따라 웃는다. 

 

[황형의 나무라심이 마땅한 줄 압니다. 우리가 혼사를 위해서 왔지 다투려고 온 것이 아닌데....] 

[제가 원래 세 가지 일로 시험해 보아 신랑감을 고르겠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이기면 사위로 맞을 게고 진다 하더라도 그냥 섭섭하게 되돌아가시게는 안 할랍니다.] 

[뭐라구요? 그래 또 따님이 한 분 계신가요?] 

 

홍칠공이 의외라는 듯 묻는다. 

 

[지금이야 없지요. 이제 새로 색시를 맞아 딸을 낳기로 한다해도 늦은 일이고, 허허허. 그러나 제가 변변치는 못하지만 의술(醫術)이며 성상(星相) 등에 대한 재주가 약간 있으니 지는 분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가르쳐 드릴 생각입니다.] 

 

홍칠공은 평소부터 황약사의 그런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만약에 사위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그런 재주를 배운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第 三十八 章. 사위라 칭함받다 

구양봉은 홍칠공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자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황형이 본래 제 조카의 청혼을 허락하셨지만 홍형의 체면도 있고 하니 그들로 하여금 한번 겨루게 합시다. 이래야만 피차의 감정도 상하지 않을 것 같군요.] 

 

고개를 돌려 구양공자를 바라다보았다. 

 

[만약 네 재주가 곽정에게 미치지 못하면 그전 네가 무능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 원망할 생각 말고 곽정을 위해 축배를 들어야 한다. 만일 다른 생각을 품고 경솔한 행동을 할 것 같으면 이 두 분의 선배께서 용서하시지 않음은 물론, 나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다.] 

 

홍칠공이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독물, 십중 팔구 이길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치며 우리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 같소. 지면 고분고분 물러가라고.....] 

[아시니 다행이오. 황형 빨리 시제(試題)나 내놓으시오.] 

 

황약사는 그래도 딸을 구양공자에게 주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양공자에게 유리한 제목을 내놓기 위해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홍칠공이 말을 꺼냈다. 

 

[시험을 본다. 그것도 괜찮지! 우리 모두가 무예를 하는 사람들이니 황형이 내놓는 시제는 모두 무학에 관련이 있는 것이라야 하오. 그렇지 않고 시사(詩詞)나 가부(歌賦), 무슨 경서(經書) 따위라면 우리는 궁둥이 털고 물러나겠소.] 

[그야 여부가 있습니까? 첫째 문제는 무예를 겨루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황약사의 대답에 구양봉은 반대다. 

 

[그건 안되오, 내 조카가 지금 부상당해 있는데 그게 됩니까?] 

[그거야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염려 마세요. 두 사람이 도화도에서 정말로 겨룬다면 양가의 감정이나 상하게요.] 

 

황약사가 웃으며 대답하자 구양봉이 다시 묻는다. 

 

[그럼 두 사람이 겨루는 게 아니란 말씀인가요?] 

[물론입니다.] 

[그럼 좋습니다. 그렇다면 둘이 서로 자기 재주를 자랑하는 건가요?] 

 

황약사가 머리를 흔든다. 

 

[그것도 아닙니다. 공연히 제가 한쪽 편을 든다는 오해가 생길 테니까요. 구양형이 방금 칠공과 천여 초(招)를 겨루고도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이렇게 합시다. 구양형은 곽정을, 홍형은 구양공자를 상대로 시험해 보기로....] 

[그것 참 묘한 생각이오, 자 우리 한번 해 보자구.] 

 

홍칠공이 웃으며 구양공자를 향해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황약사가 말렸다. 

 

[잠깐만! 우리 세 가지 약속을 해야 합니다. 첫째, 구양공자가 부상을 입어 운기(運氣)를 할 수 없으니 무예의 초술(招術)을 봐야지 공력의 심천(深淺)을 가지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둘째, 네 분이 모두 대나무 끝에 올라서서 시험을 하는데 먼저 땅에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셋째, 누구든지 후배가 부상을 당하면 부상을 입힌 쪽이 지는 것입니다.] 

[부상을 입히면 지다니요?] 

 

홍칠공이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그야 물론이지요. 두 분의 그런 무공을 가지고 이렇게 약속을 하지 않는다면 손을 쓰자마자 젊은 두 사람은 죽을게 아닙니까? 홍형! 홍형께서 구양공자의 살갗만 건드려 상처를 내기만 하면 지는 겁니다. 구양형도 마찬가지구요.] 

 

홍칠공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는다. 

 

[좌우지간 황형은 괴짜요. 상대에게 부상을 입히면 진다? 천고 기문의 규칙인걸. 하여튼 어디 해 봅시다.] 

 

황약사가 손을 번쩍 들자 네 사람이 모두 대나무 위로 뛰어올라 양쪽으로 갈라섰다. 홍칠공과 구양공자가 오른쪽에, 구양봉과 곽정이 왼쪽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황용은 구양공자의 무공이 곽정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안다. 그가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경공은 대단한 것이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못한다. 이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하나 둘 셋 세면 즉시 행동을 개시하는 겁니다. 구양공자나 곽정 어느 편이고 먼저 땅에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황용은 곽정을 도와 줄 방법이 없나를 궁리해 보았다. 구양봉의 무공이 그토록이나 대단한데 자기가 손쓸 기회가 있을까. 

 

[하나, 둘, 셋!] 

 

황약사의 구령이 떨어지자 대나무 위의 그림자들이 춤을 추듯 행동을 개시했다. 

황용은 곽정이 걱정돼 시선을 그쪽에만 쏟았다. 눈 깜짝할 사이 두 사람은 벌써 10여 초를 겨뤘다. 황용이나 황약사가 모두 놀람을 금치 못한다. 

(아니 언제 저렇게까지 무공이 정진됐지? 전연 질 것 같아 보이지 않으니?) 

구양봉은 더욱 초조했다. 장력(掌力)을 쓰며 한 발짝 한 발짝 몰아 들어갔다. 절대로 곽정에게 부상을 입힐 수는 없는 것이다. 갑자기 떠오르는 꾀가 있어 두 발을 차 바퀴 돌리듯 하며 곽정을 떨어뜨리려고 덤볐다. 곽정은 강룡십팔장 가운데의 비룡재천(飛龍在天)의 재주를 부려 몸을 높이 솟구치며 쌍장을 칼이나 가위처럼 써서 구양봉의 다리 근처를 친다. 

 

황용은 가슴이 두근거려 더 바라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선을 홍칠공 쪽으로 돌리니 그쪽의 싸움은 다르다. 구양공자는 경공을 쓰면서 대나무 위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시종 일관 홍칠공을 피하고 있었다. 홍칠공이 계속 접근을 하지만 그때마다 구양공자는 멀찌기 달아나 있었다. 

(아니, 저게 새처럼 피해 다니며 시간만 끄는구나. 곽정은 바보스럽게도 덤벼들고만 있으니 저러다가는 먼저 땅에 떨어지지.) 

홍칠공은 <흥> 코방귀를 뀌었다. 몸을 허공으로 솟구치며 열 손가락을 갈퀴처럼 벌리고 구양공자의 정수리를 노렸다. 구양공자가 깜짝 놀라 왼발의 차력을 이용해 오른쪽으로 빠져 나갔다. 그러나 홍칠공의 공격은 어디까지나 허초(虛招)였다. 그는 구양공자가 오른쪽으로 피할 것을 미리 알고 허공 중에서 허리를 꺾으며 먼저 대나무 위에 내려서며 두 손을 벌리고 소리를 지른다. 

 

[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오늘 네놈을 요절내고 말 테다.] 

 

구양공자는 그가 허공에서 몸을 꺾는 것을 보고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데 이렇게 소리를 지르자 그는 허공을 딛고 땅에 떨어지며 이젠 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바람 소리가 일어나며 곽정도 자기 옆에 떨어져 내려왔다. 

원래 구양봉은 곽정과 오래 겨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과 50초 이상 겨루게 된다면 서독의 명성이 무엇이 되나?) 

한 발짝 더 달려들며 왼손을 번개처럼 써서 곽정의 덜미를 비틀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놈이 내려가지 않고?] 

 

곽정이 고개를 숙이고 왼손을 뻗어 위로 막자 그 순간 구양봉이 갑자기 힘을 썼다. 

 

[아니, 왜 이렇게?] 

 

황약사가 정한 규칙을 어긴다고 말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막으려 하자 구양봉이 웃었다. 

 

[내 어쨌단 말이오?] 

 

갑자기 주던 힘을 거두고 말았다. 곽정도 그가 합마공으로 자기의 내장을 부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있는 힘을 다해 방어를 하고 있다가 그만 구양봉이 힘을 빼는 바람에 그 술수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다행히도 주백통에게서 칠십이로의 공명권을 배웠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난번 귀운장에서 황약사와 대결할 때처럼 탈골이라도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구양봉의 술수에 말려든 곽정은 비틀비틀하다가 그냥 거꾸로 땅바닥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구양공자는 선 채로 똑바로 떨어져 내려오고 곽정은 거꾸로 떨어지면서 둘이 동시에 땅에 닿게 되었다. 구양공자는 곽정이 자기 옆으로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의식함과 동시에 두 손을 들어 곽정의 두 발을 누르고 그 힘을 역으로 이용해 몸을 위로 솟구친다. 이제 영락없이 곽정이 지게 된 것이다. 

황용이 이 모양을 보고 <아이구!> 비명을 지르는데 곽정의 몸이 다시 허공에 뜨면서 <펑>하고 구양공자를 들이받고 대나무 위에 올라서고, 다시 그 탄력을 이용해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황용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다 떨어진 위치에서 어떻게 해서 곽정이 다시 몸을 솟구쳐 올랐는지 똑똑히 보지도 못했다. 

이때 구양봉과 홍칠공도 모두 땅 위에 내려와 서 있다가 이 모양을 보고 홍칠공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묘하다 묘해!] 

 

구양봉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홍형! 이 제자의 무공이 잡다하군요. 몽고 사람들이 하는 씨름까지 배웠으니.] 

[씨름은 나도 할 줄 모르는 게니, 공연히 그것까지 내가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홍칠공은 만족스럽다는 듯 계속 웃었다. 원래 곽정은 구양공자가 다리를 미는 바람에 더 빨리 떨어져 내려오다 보니 구양공자의 다리가 눈앞에 걸렸다. 두 손을 모아 그의 다리를 껴안고 있는 힘을 다해 아래로 밀치며 그 힘을 이용해 자기 몸을 솟구쳐 일으켜 세운 것이다. 이 재주가 바로 몽고 씨름이라는 것이었다. 

몽고 사람들의 씨름 재주는 소문난 것으로 천하에 이름이 나 있었다. 곽정은 어려서부터 몽고에서 자라면서 강남육괴에게서 무공을 배우기 전에도 타뢰 등 친구들과 더불어 날마다 씨름을 하고 놀았던 덕을 뜻밖에 본 셈이다. 

 

[자, 맨 처음 시합은 곽정 쪽에서 이겼습니다. 구양형은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2, 제3의 대결에서는 이길지도 모르잖습니까?] 

 

황약사가 구양봉을 위로했다. 

 

[그럼, 황형이 빨리 두 번째 문제를 내놓으시오.] 

[우리, 두세 번째 시험은 글로 할까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황용이 입을 삐쭉 내민다. 

 

[아빠,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이게 뭐예요? 곽정 오빠 그만 두세요.] 

[아니, 네가 무얼 안다고 나서느냐? 무공이 상승의 경지에 이르러도 맨날 치고받는 일만 한다더냐? 두 번째 시제는 악곡(樂曲)을 가지고 해 보자는 게야.] 

 

구양공자는 자신이 있었다. 제까짓 시골뜨기가 무얼 알겠느냐 하고 깔본 것이다. 

 

[후학들의 무공이 아직 깊지 못하여 황형의 연주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구양봉은 걱정스럽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제가 불 곡조는 평범한 것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약사는 다시 구양공자와 곽정을 바라다본다. 

 

[두 분은 각자 대나무가지를 하나씩 꺾어가지고 계시다가 퉁소를 불면 곡조에 따라 박자를 쳐 보시오. 잘치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곽정이 앞으로 나서며 황약사에게 읍을 했다. 

 

[황도주, 제가 너무 우둔하여 음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 없습니다. 그냥 제가 진 것으로 하지요.] 

 

이 말에 홍칠공이 나선다. 

 

[서두를 것 없다. 아무래도 지는 것이라면 한번 들어나 보자꾸나. 누가 뭐라구 하겠느냐?] 

 

곽정은 사부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공자가 벌써 대나무가지를 꺾어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하나 꺾었다. 

 

[홍형과 구양형이 계신데 외람되오나 한 곡조 불어 보겠습니다.] 

 

옥퉁소를 입에 대고 은은한 가락을 뽑기 시작했다. 구양공자는 가락에 맞추어 한 번 두 번 정확히 박자를 치지만 곽정은 망연히 대나무를 쥔 채 한참 동안이 나 불어도 단 한 번 쳐다보지도 못한다. 구양봉 숙질은 득의 만면해 있었다. 틀림없이 승산이 있었다. 세 번째도 글로 보겠다고 했으니 십중 팔구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황용은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다.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팔을 살짝살짝 치며 곽정이 그대로 자기를 따라 쳐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곽정은 먼 하늘을 바라다보며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황약사가 또 한바탕 불자 곽정이 번쩍 대나무를 들어 쳤다. 박자와 박자 사이를 친 것이다. 구양공자가 <킥!> 하고 웃는다. 곽정이 계속해서 네 차례나 쳤지만 모두 박자와 박자 사이에 친 것이다. 황용이 고개를 흔든다. 

(저 멍청한 오빠는 원래 음률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공연히 아빠가 우겨서 이 꼴이야.) 

 

고개를 돌려 자기 아버지를 보니 아버지의 표정이 이상하다. 곽정이 몇 차례 계속해서 치자 이상하게도 퉁소 소리가 어지러워지다가 다시 원음을 찾아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황약사는 몇 차례나 정신을 가다듬었고, 홍칠공과 구양봉의 표정도 의외라는 듯 사뭇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원래 곽정은 방금 세 사람의 퉁소 소리와 비파 소리, 휘파람 소리가 어우러져 혼전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것을 들으며 뭔가 터득한 바가 있었다. 이제 황약사의 퉁소 소리를 들으며 대나무가지를 다른 대나무가지에 쳐서 나오는 소리로 황약사의 퉁소 가락을 교란시켜 본 것인데 황약사는 몇 차례나 곽정이 치는 소리에 말려들 뻔했던 것이다. 

 

황약사가 정신을 가다듬고 다른 부드러운 곡조로 바꿔 불기 시작했다. 구양공자는 잠시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대나무를 손에 쥔 채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구양봉이 한숨을 쉬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달려들어 그의 팔의 맥문을 누르고 수건을 꺼내 두 귀를 막아 주었다. 그제야 구양공자가 춤을 멈췄다. 황용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이 천마무곡(天魔舞曲)을 연습하는 것을 늘 들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아버지의 퉁소 소리는 마력이 있는 것으로 곽정이 당해 대지 못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곽정은 얌전하게 앉아 전진교의 내공으로 정신을 가다듬어 퉁소 소리의 유혹에 대항하면서 대나무를 들어 치며 퉁소 소리를 교란시키려고 했다. 황약사나 홍칠공, 구양봉쯤 되면 피차 공방전을 벌이는 사이에도 틈만 있으면 뚫고 들어가 이길 수도 있으련만 곽정은 아직 어렸다. 퉁소 소리가 더욱 가늘어지면서 이제 듣기도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때가 바로 가장 위험한 고비인 것이다. 소리가 가늘어지면 질수록 더욱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곽정이 정신을 제아무리 가다듬으려 애를 쓰지만 마음속의 박자는 어느덧 퉁소 소리와 일치되는 것 같음을 느꼈다. 만약 다른 사람 같으면 꼼짝없이 걸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곽정은 쌍수호박(雙手互搏)의 기술을 익혔기 때문에 마음을 둘로 나누어 쓸 수 있었다. 위험한 고비라는 것을 직감하자마자 심신(心神)을 분리시키고 대나무를 들어 딱딱딱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놀란 것은 오히려 황약사 쪽이다. 

(몸에 이술(異術)을 지니고 있구나! 정말 무시할 수 없는 상대로구나.) 

발을 팔괘(八卦) 방향으로 떼어 짚으며 계속 분다. 곽정이 두 손으로 박자를 치면서 퉁소 소리와 맞서게 되니 2대 1로 황약사와 겨루는 꼴이 되었다. 곽정의 힘이 배장되기는 했지만 황약사가 어떤 인물이라고 속이겠는가? 적이 강해지면 장해질수록 정신은 더욱 새로와지는 황약사다. 퉁소 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자지러지며 더욱 괴상하게 변해 간다. 곽정이 한참 버티다 보니 퉁소 소리에 무한한 한기(寒氣)가 숨어 자기를 엄습함을 느꼈다. 몸이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떨린다. 

 

퉁소 소리가 더욱 자지러지게 세찬 북풍을 몰고 오는 듯 오싹오싹한 한기가 뼛속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큰일났구나 싶어 마음을 분리시켜 뜨거운 태양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숯불을 연상하며 버텼다. 몸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한기가 감퇴된다. 

황약사는 그의 왼쪽 몸뚱이가 냉기에 벌벌 떨면서도 오른쪽 몸에서 땀이 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퉁소 소리는 어느덧 엄동 설한이 지나고 봄을 거쳐 여름이 오는 것처럼 가락이 변해 있었다. 

(이 녀석, 억지로 이렇게 버티고 있다간 후에 큰 병에 걸리겠는걸.) 

황약사는 이렇게 생각하며 길게 낮게 퉁소 소리를 멈추었다. 곽정은 황약사가 자기 사정을 봐 준 줄 알고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황도주님 정말 고맙습니다. 제자는 큰 은혜를 입었나이다.] 

 

(아니, 어린 나이에 무공이 이 경지에 이르렀다면 보통 인물이 아니다. 공연히 어리석은 체하지만 사실은 가장 총명한 인물이 아닐까? 사실이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딸을 줄 수밖에 없다. 하여튼 다시 한번 시험해 보자.) 

이렇게 생각한 황약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아주 훌륭하군. 그런데 아직도 나를 황도주라고 불러야 하나?] 

 

분명 세 개의 관문 가운데 두 개를 거쳤으니 <장인 어른>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말투였다. 그러나 곽정은 순박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의 이런 말뜻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제가..... 제가......] 

 

어물어물 말도 못 하고 황용을 바라다보며 도움을 청하는 눈초리를 보낸다. 황용은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구부려 절을 하라는 시늉을 했다. 곽정은 그제야 눈치를 채고 일어나 황약사를 향해 네 번이나 절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내게 무엇 때문에 절을 하는게냐?] 

[용이가 절을 하라고 해서......] 

 

황약사가 웃으며 물었지만 멍청한 대답이다. 

(어리석긴 어리석은 녀석이로구나.) 

손을 뻗어 구양공자의 귀를 싼 수건을 풀어 주었다. 

 

[내공으로 따진다면 곽정 편이 강하지만 내가 시험한 것은 음률이니 그렇다면 구양공자가 우세하다고 할까?..... 우리 이렇게 합시다. 이번 판은 비긴 것으로 하고 다시 한 번 승부를 가리지.] 

 

구양봉이 자기 조카가 분명히 졌는데도 황약사가 이렇게 편을 들고 나서자 기뻤다. 

 

[그래요 그래, 다시 한 번 겨뤄야지.] 

 

홍칠공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잠자코 있었다. 

(딸이야 네가 낳았으니 사위야 네 마음대로 얻으려는 걸 다른 사람이 상관해 소용이 있나? 내 네놈과 한바탕 겨루고 싶다만 나는 두 주먹이요 너희는 손이 네 개니 어쩔 수 없구나. 다음 단황야(段皇爺)와 함께 와서 시비를 가리자.) 

그런데 황약사가 품에서 빨간 비단으로 표지를 만든 책을 꺼내들었다. 빨간 비단 책을 꺼내든 황약사는 말을 이었다. 

 

[저와 아내가 겨우 이 딸 하나를 낳고 말았는데 불행히도 아내는 애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소. 이제 그래도 구양형과 홍형이 청혼을 해주셨으니 만일 아내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마는.....] 

 

황용은 아버지의 이 말에 눈시울이 젖었다. 

 

[이 책은 제 아내가 심혈을 기울여 손수 적은 책이랍니다. 두 분이 한 번씩 읽고 외는데 누가 더 많이 외고 틀리지 않는가를 보아 승부를 냅시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자 홍칠공은 냉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원래 약속한 대로라면 곽정 편에서 한 번 더 이기기는 했지만 이 책과 저는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제 아내도 이 책 때문에 죽었다고 할 수 있으니 구천에서라도 현명한 사위를 볼 수 있도록 보우해 달라고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홍칠공은 더 참지 못하고 왈칵 분통을 터뜨린다. 

 

[여보 황노사, 이거 너무하오. 누가 당신의 쓸데없는 잔소리를 듣겠다고 했소? 내 제자가 어수룩해 보이고 또 시서(詩書)를 모른다고 해서 책을 외라니 너무하오. 죽은 아내까지 들먹이고. 그래 창피하지도 않소?] 

 

소매를 휘저으며 가 버리려고 했다. 황약사가 차디찬 냉소를 머금고 한마디 한다. 

 

[여보 홍형, 도화도에 와서 큰소리 치려거든 몇 년 더 무공을 배워야 할 게요.] 

[뭐라구?] 

 

홍칠공이 발길을 멈추고 홱 돌아섰다.  

 

[기문(奇門)의 오행도실도 모르는데 내 허락도 없이 이 도화도를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도 마시오.] 

[내 이 더러운 놈의 섬에다 불을 질러 버릴까 보다.] 

[재주 있거든 불을 지르구료.] 

 

곽정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걸 보고 자기가 나섰다. 

 

[황도주, 홍선배님, 그만들 두세요. 제자가 구양형과 한번 외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자질이 둔해서 지는 건 당연하겠지요.] 

 

황약사는 곁눈으로 곽정을 흘겨보았다.  

 

[방금 자네 사부를 보고 뭐라고 불렀나?] 

[제자가 최근에 은사로 모시기는 했지만 아직 여섯 분 사부의 허락을 얻지 못해 그냥 홍선배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슨 놈의 잔소리가 그렇게 기냐?] 

 

그는 성격이 호방해서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는 성질이 아니다. 그래서 곽정의 하는 꼴이나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좋다! 나를 사부라 부르고 싶지도 않은 모양인데, 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렴.] 

 

홍칠공은 약이 올라 더 있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때 황약사는 웃고 있는 자기 딸을 바라다보았다. 

 

[너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얌전하게 있어야 한다.] 

 

황용은 웃고 있었지만 곽정이 꼭 질 것 같아 조바심을 하면서 어떻게 함께 도화도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해 보는 것이다. 

황약사는 구양공자와 곽정을 나란히 바위 위에 앉히고 그 책을 자기 손에 든 채 두 사람 앞에 펼쳐 보였다. 책 표지에는 전서(篆書)로 구음진경 하권이라는 여섯 자가 씌어 있었다. 구양공자가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옳지! 천방백계 매초풍에게 책을 바치라 했는데 그게 바로 장인 될 분의 손에 있었군.) 

곽정이 전서를 보니 한 자도 알 수가 없다. 

(공연히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 이 책을 꺼내들었구나. 꼬불꼬불한 것이 올챙이 같은데 알아볼 재간이 있나? 까짓것 지면 그만이지 뭘.) 

황약사가 맨 첫장을 펼쳤다. 대용은 해서(楷書)로 또박또박 쓴 것이 과연 여자 글씨다. 곽정이 한 줄을 보자 마음이 두근거린다. 주백통이 주야로 외라고 가르쳐 준 말들이다. 다시 눈을 비비고보니 다 욀 수 있는 내용들이다. 황약사는 다 읽었겠다 싶었는지 다음 장으로 넘긴다. 이렇게 장을 넘길 때마다 글씨가 엉망이요, 무기력한데다 빠진 게 많아 보였다. 

곽정은 보다가 마음이 아픔을 느꼈다. 주백통은 황부인이 구음진경을 외 쓰다가 너무나 힘이 들어 그만 아기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바로 그녀가 임종시에 외서 쓴 것이다. 

(그렇다면 주백통 형이 내게 외라고 한 것은 바로 구음진경이었더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 진경의 하권은 벌써 매초풍이 잃어버렸는데 그게 어떻게 주백통 형 손에 있겠는가?) 

황약사는 곽정이 멍하니 넋을 잃은 모양을 보자 벌써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계속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겼다. 

구양공자는 처음 몇 줄은 그런대로 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연공(練功)의 실제 법문(法門)은 이리 꼬불 저리 꼬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그가 원래 진경을 남에게 보여 주지 않으려고 그랬구나.) 

또 이런 생각도 했다. 

(내 비록 진경의 전문을 보지는 못했지만 저 어리석은 녀석보다야 많이 욀 수 있겠지? 이번 시험은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늘의 선녀보다도 예쁜 저 아가씨가 결국 내 사람이 되는구나.) 

곽정이 다시 책장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모두가 주백통이 자기에게 외라고 했던 것이다. 책 속에 있는 말이 자기가 왼것에 비해 상당히 많이 빠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무 꼭대기를 바라다보면서도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황약사가 책장을 덮고 묻는다. 

 

[그래 어느 분이 먼저 외 보겠소?] 

 

구양공자는 생각했다. 

(글자가 뒤죽박죽 외기가 어렵구나. 아직 잊어버리기 전에 먼저 왼다면 아무래도 저 녀석보다야 많이 욀 수 있겠지.) 

 

[그럼 제가 먼저 외겠습니다.] 

 

구양공자가 먼저 나서자 황약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곽정을 바라다보았다. 

 

[자넨 저 대나무 속에 들어가 있게. 이 사람이 외는 걸 들으면 안 되니까.] 

 

곽정이 그 말에 따라 멀찌기 떨어져 걸어갔다. 황용은 기회를 포착했다는 듯 슬그머니 곽정 곁으로 접근했지만 이를 본 황약사가 소리를 질렀다. 

 

[어딜 가느냐? 이리 돌아오너라. 너도 이 사람 외는 걸 들어봐야 할 게 아니냐? 공연히 어느 편을 들어주었다고 뒷말하지 말아라.] 

[아빠는 그쪽 편을 들면서 공연히 날 보구 야단이셔.] 

[아니 버릇없이 뭐라고하는게야. 빨리 오지 못할까!] 

 

그녀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 안 갈래요.]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버지가 벌써 눈치를 챘는데 이러다간 정말 달아날 길이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걸어와 구양공자를 향해 방긋 웃음을 보였다. 

 

[구양공자님. 그래 제가 뭐 그렇게까지 좋다고 야단이세요?] 

 

구양공자는 황용의 미소에 그만 황홀해지고 말았다. 

 

[정 말...... 정 말...... 당신은.......] 

 

말조차 잊는 구양공자다. 

 

[서역으로 돌아가지 말고 그냥 도화도에 계셔 주셔요. 서역은 춥지 않아요?] 

[서역은 워낙 땅이 넓어서 추운 곳도 많지만 어떤 곳은 강남처럼 따뜻한 곳도 있답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워낙 거짓말을 잘 하시니까.] 

 

구양공자가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구양봉은 황용의 흉계를 눈치챘다. 황용은 이렇게 구양공자를 꾐으로 해서 왼 글을 깨끗이 잊게 하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놈아, 그런 얘기는 천천히 나누고 빨리 책이나 외거라.] 

 

이렇게 차디차게 쏴붙였다. 그제야 구양공자는 깜박 정신을 차렸다. 억지로 욌던 글의 두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더듬더듬 외기 시작했다. 

 

[천지도(天之道), 손유여이보부족(損有餘而補不足), 시고허승일(是故虛勝溢), 부족승유여(不足勝有餘)...] 

 

구양공자는 과연 남달리 총명한 사람이라 앞의 몇 마디는 한 자 틀리지 않고 잘 욌다. 그러나 뒤에 있는 실용(實用)의 연공법문(練功法門)은 황부인 자신이 무공을 모르는 탓으로 외서 쓴 본문 자체가 애매하고 문자도 질서가 없었기 때문에 구양공자도 열에 겨우 하나쯤 욀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왼 것도 대단한 일이야.] 

 

황약사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소리 질러 곽정을 불렀다. 곽정이 이쪽으로 오니 구양공자의 표정이 자신만만해 보였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한 번 읽고도 왼 모양이지. 나는 틀렸어. 하지만 주백통 형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욀 수 밖에 없구나.) 

곽정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외려는데 홍칠공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 녀석아, 저 사람들이 공연히 우리를 망신시키려고 그랬던 것인데 그냥 졌다고 하고 말렴.] 

[제 원래가 구양공자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곽정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때 황용은 벌써 발끝으로 땅을 찍고 허공에 뛰어올라 반이나 무너져 나간 대나무 정자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비수를 꺼내 자기 가슴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억지로 저 못된 녀석을 따라 서역으로 가라고 하신다면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겠어요.] 

 

황약사는 황용이 한다고 하면 끝까지 하고야 마는 성미임을 잘 알았다. 

 

[우선 그 비수나 치워라. 말로 해도 되지 않느냐?] 

 

구양봉이 지팡이를 땅에 대고 치자 뭔가 이상한 암기(暗器)가 황용을 향해 날아간다. 암기가 어찌나 빨랐던지 황용이 미처 볼 새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비수가 쩔그렁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황약사는 몸을 번쩍 날려 대나무 정자로 올라서서 딸의 가냘픈 허리를 얼싸 안았다. 

 

[정말 시집가기 싫거든 그만두기라. 도화도에서 평생 이 애비와 함께 살면 되지 않겠니?] 

[아버지는 정말 저를 사랑하지 않으셔요?] 

 

황용은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홍칠공은 강호에 종횡하며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당대의 황약사가 어린 딸 하나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는 꼴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다. 구양공은 생각에 잠긴다. 

(우선 명분을 세워 저놈의 늙은 거지와 곽가 저 녀석을 보내기만 하면 뒷일이야 쉽게 해결되겠지. 계집애 고집이야 거들떠볼 것 있나?) 

 

[곽정 소년의 무예가 정말 대단하오. 과연 소년 영웅이오. 글 외는 솜씨도 대단할 테니 우선 한번 외도록 하십시다.] 

 

황약사를 향해 재촉을 했다. 

 

[정말이군요. 용아, 네가 소란을 부리면 이 곽정 소년 왼 것도 다 잊어버리겠다.] 

 

황용은 이 말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자, 우리가 여기서 조용히 듣고 있을 테니 한번 외 보게.] 

 

구양봉도 한마디 거만하게 거든다. 곽정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틀렸어. 주백통 형님이 외라고 했던 것이나 외야지.) 

 

[천지도(天之道), 손유여이보부족(損有餘而補不足),.....] 

 

그는 이 구음진경을 반복해서 수백 번도 더 왼 셈이다. 이제 다시 한 번 외기 시작하더니 술술 잘도 넘어갈 뿐만 아니라 한 자도 틀림이 없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너무 총명해서 바보스러워 보였나?)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곽정은 단숨에 넉 장째를 외고 있었다. 황약사가 곽정이 외는 경문을 들어보니 책에 쓰인 것보다 10배는 많아 보였다. 뿐만 아니라 구구 절절이 순서가 맞는 것이 원래의 경문에 틀림없어 보였다. 마음이 싸늘해지면서 등골에 식은 땀이 흘렀다. 

(정말 저승에 간 아내의 영혼이 경문을 이 소년에게 알려 준 것이 아닐까?) 

곽정은 줄줄 잘도 외고 있었다.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다 보았다. 

 

[아형(阿衡), 아형! 그렇게나 정이 두텁더니 이 소년의 입을 빌어 진경을 내게 알려 주는구료. 한 번이라도 좋으니 얼굴이나마 보게 해주구료. 내 밤마다 퉁소를 불었는데 그래 계속 듣고 있었더란 말이오?] 

 

황약사가 말하는 아형(阿衡)은 황부인의 어렸을 때 이름이다. 황용도 어머니의 이 이름을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표정이 심각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이렇게 있던 황약사가 손을 휘저으며 표정이 서릿발처럼 굳어져 소리를 지른다. 

 

[매초풍이 잃어버린 구음진경을 네놈이 가지고 있지?] 

 

곽정은 그의 살기 등등한 눈초리를 보며 어쩔 줄을 모른다. 

 

[제자는 매...... 매선배님이 경문을 어디서 잃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알면 함께 찾아서 황도주님께 돌려드렸지요.] 

 

황약사는 그의 거짓 없는 표정과 자신 있는 말을 듣고 역시 죽은 아내가 저승에서 도와 준 것으로 믿었다. 

 

[홍형, 구양형, 이는 제 아내가 저승에서 골라 준 사위입니다. 이에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 딸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잘 대해 주게. 황용을 내 버릇없이 키운 점도 이해해 주게나.] 

 

황용은 아버지의 이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아빠, 나 이렇게 얌전한데 뭘 그런 말씀을 하셔요?] 

 

황용은 웃고 곽정은 땅에 꿇어 엎드려 황약사를 향해 사배(四拜)를 올렸다. 

 

[장인 어른!] 

 

이렇게 부르고 채 일어서기도 전에 구양공자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홍칠공은 곽정이 글까지 이렇게 잘 욀 줄은 몰랐다. 너무나 기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구양공자의 일갈을 들었다.  

 

[왜? 그래도 지지 않았단 말인가?] 

[곽형이 외운 것이 책에 쐬어 있는 것보다 많습니다. 틀림없이 구음진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뒤져 봐야겠군요.] 

[황도주께서 이미 혼약을 내리신 걸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려 하나? 방금 자네 숙부가 뭐라고 했는데?] 

 

구양봉이 눈알을 부라리고 나선다.  

 

[그레 이 구양봉이 뭐라고 했단 말이오?] 

 

그는 조카의 말을 듣고 필시 곽정이 구음진경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경문만 뺏으면 그만이지 혼사니 뭐니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인 것이다. 

곽정이 옷깃을 풀어 제쳤다.  

 

[구양 선배님. 뒤져보셔요.] 

 

곽정이 품속에 지니고 다니던 물건을 하나씩 꺼내 돌 위에 올려놓는다. 구양봉은 내놓은 물건이 은량(沂)이요, 손수건, 부싯돌이자 손을 뻗어 곽정의 몸을 뒤지기 시작한다. 황약사는 구양봉이란 위인이 악독하다는 것을 평소부터 잘 알고 있었다. 화가 난 나머지 슬그머니 독수를 쓴다면 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기침을 하면서 왼손을 뻗어 구양공자의 목 뒤 등골뼈에 닿았다. 그곳은 인신의 요혈로 손에 힘만 주면 등골뼈가 부러지고 구양공자는 끝나는 것이다. 홍칠공은 황약사의 저의를 알아차리고 웃는다. 

 

[하하, 이제 이쪽 편만 드시는구료. 내 어리석은 제자를 그토록 염려해 주시니.] 

 

구양봉은 원래 합마공(蛤 功)으로 곽정의 배를 한번 슬쩍 누르려고 했었다. 그렇게 되면 3년 뒤에는 영락없이 죽는다. 그런데 황약사가 벌써 눈치를 채고 방비를 했으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곽정의 몸을 뒤져보아도 다른 물건이 나오지 않았다. 황부인이 저승에서 사위를 골라 주었다는 말은 너무나 황당 무계하다. 어리숙한 곽정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혹시 물어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즉시 짚고 있던 지팡이를 흔들자 거기 매달린 금방울이 짤랑거리고 두 마리의 뱀이 오르락내리락 혀를 날름거렸다. 황용과 곽정은 이 괴상한 모양을 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구음진경의 경문을 어디서 배웠나?] 

 

구양봉이 날카롭게 쏘아보며 물었다. 

 

[저는 구음진경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은 없습니다. 상권을 주백통 형님이 가지고 계시고......] 

[너 주백통을 어째서 형님이라 부르느냐?] 

 

홍칠공이 이상해서 물었다. 

 

[그 형님과 제자가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홍칠공이 웃으며 나무랐다. 

 

[그럼 그 하권은?] 

 

구양봉이 다그친다. 

 

[그건 매초풍 매사자가 태호에서 잊어버렸는데 장인 어른의 분부를 받고 지금 사방으로 찾는 중일걸요. 제자도 장인 어른의 허락을 받은 후 나서서 도와주려고 합니다.] 

 

구양봉과 구양공자가 서로 바라다본다.  

 

[구음진경을 보지도 못했다며 어떻게 그리 줄줄 욌나?] 

[내가 왼 것이 구음진경이라구요? 아녜요! 그건 주백통 형님이 외라고 하셔서 왼 건대요.] 

 

황약사는 몰래 한숨을 내쉬며 크게 실망을 했다. 

(연분이라더니 정말 내 딸과는 인연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어쩌면 그리도 공교로울 수가 있단 말인가?) 

황약사는 혼자 탄식을 하고 구양봉은 계속 추궁을 했다. 

 

[그래, 그 주백통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곽정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황약사가 꽥 소리를 질렀다. 

 

[곽정아, 쓸데없는 말하지 말아라.] 

 

고개를 돌려 구양봉을 바라다보았다. 

 

[그 따위 일 물어 무얼 하오? 구양형이나 홍형, 다같이 20여 년 만이니 한 사흘 이 도화도에서 통쾌하게 술이나 마십시다.] 

 

이 말에 황용이 또 나선다. 

 

[칠공님, 제가 요리를 만들어 대접할께요. 이 섬의 연꽃이 정말 훌륭하답니다. 연꽃잎으로 닭을 찜하고, 또 신선한 연밥과 잎으로 죽을 만들께요.] 

[아니, 오늘 원하는 대로 됐다고 그렇게까지 좋아하나?] 

 

홍칠공은 황용을 이렇게 놀렸다. 

 

[칠공님, 구양 아저씨, 자 우리 다들 들어가시지요.] 

 

황용이 웃음을 머금고 권했지만 구양봉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황약사를 향해 읍을 했다. 

 

[황형, 성의는 고맙지만, 오늘 여기서 작별하고 맙시다.] 

[아니, 그렇게 먼 곳에서 오셨는데 대접도 않고 가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구양봉이 만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여기에 온 것은 물론 조카의 혼사도 중요했지만 다른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약사와 사돈이 되면 두 사람이 협력하여 천하의 기서인 구음진경을 손에 넣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파의 종주 신분으로 이렇게 쉽게 동토(東土)를 밟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 실망이 여간 큰 것이 아니요, 체면 또한 말이 아니다. 떠나겠다고 계속 우기자 구양공자가 나서서 만류했다. 

 

[숙부님, 이 조카가 불민하여 숙부님 체면을 손상시켰습니다. 그러나 황약사님의 말씀도 있었으니 이 조카 무공이라도 하나 더 배우고 가게 해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구양봉이 먼저 코방귀를 뀐다. 제놈이 황소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무예를 배운다는 구실로 더 머무르면서 수작을 부리겠다는 속셈을 알아채지 못할 그가 아니다. 

황약사는 원래 곽정보다는 구양공자가 더 마음에 들었었다. 그래서 무공은 곽정에게 전수하려니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상대가 바뀌어 마음속으로도 섭섭한 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구양공자, 숙부님의 무공이 천하에 절묘한데 내 무얼 더 가르칠 게 있겠소? 그래도 배우고 싶은 의향이 있다면 한번 말이나 해 보구료. 이 늙은이가 아는 거라면 최선을 다하리다.] 

 

구양공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일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을 배워야겠는데. 도화도의 오행기문술(五行奇門術)이 천하 무쌍이란 말을 들었는데 그걸 일조 일석에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허리를 굽혀 절을 한 뒤 말을 꺼냈다. 

 

[제자 평소부터 황도주님의 오행기문술을 흠모해 왔사오니 지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약사는 침묵에 잠긴 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평생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학문이다. 친딸에게도 아직 전수해 주지 않은 것을 어떻게 외인에게 알려 준단 말인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난치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전에 약속을 한 일이니 이제 못 하겠다고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글쎄, 기문지술(奇門之術)이라면 워낙 그 범위가 넓은데 그래 어느 일문(一門)을 배우고 싶다는 것인지?] 

 

구양공자는 어쨌든 이 도화도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제자가 보오니 도화도의 길이 절묘하게 나 있고 또 꽃이나 나무가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원컨대 몇 달 이곳에 머무르며 소상하게 배우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황약사의 표정이 싹 변하며 구양봉을 한 번 건너다본다. 

(네놈들이 도화도의 비밀을 조사해 보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구양봉도 약은 사람이라 황약사가 벌써 의심하는 줄 알고 조카를 나무란다. 

 

[너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이로구나. 도화도는 황약사가 일생의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곳으로 섬 안의 배치가 오묘해 적이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어떻게 그 비밀을 네놈에게 알려 준단 말이냐?] 

 

황약사도 냉소를 머금고 한마디 한다. 

 

[도화도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돌산이라 해도 천하에 어느 놈이 감히 나 황약사를 해치러 올 수 있단 말이오?] 

[농담이 실언이 되었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구양봉이 사과 비슷하게 말을 하자 홍칠공이 껄껄 웃는다. 

 

[구양형! 당신의 격장지계(激將之計)가 아주 고명(高明)하오.] 

 

황약사가 옥퉁소를 옷깃에 꽂으며 다들 들어가자고 권했다. 구양공자는 황약사의 노기 띤 표정을 보고 숙부의 눈치를 살핀다. 구양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약사의 뒤를 쫓자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꼬불꼬불 대나무밭을 벗어나자 눈앞에 근 연못이 나타났다. 막 피어오른 백련(白蓮)이 청향(淸香)을 발산하고 있었다. 연잎이 드리운 사이로 하나의 제방 비슷한 길이 연못의 중앙을 꿰뚫고 지나갔다. 

연못을 좌우 양쪽으로 갈라놓은 그런 제방이다. 황약사가 그 길을 따라 여러 사람을 정사(精舍)로 안내해 들였다. 이 건물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소나무로 만들었고 밖에는 등나무를 드리웠다. 무더운 여름철인데도 시원한 청량감을 주는 그런 건물이다. 황약사는 네 사람을 서재로 들게 하고 벙어리 하인을 시켜 차를 내오게 했다. 내온 차의 색깔이 벽록(碧緣)이요, 입안에 들어가니 꼭 빙수처럼 차디차다. 

 

[거지 삼 년이면 관리도 하지 않는다더니, 여보 황형! 여기서 삼 년만 살면 거지 짓도 하지 않겠다고 하겠소.] 

 

홍칠공이 웃으며 하는 말에 황약사도 흐뭇한 모양이다. 

 

[홍형께서 묵으신다면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함께 술이나 마시며 담소라도 나누며 지내십시다 그려.] 

[두 분이 함께 계시며 다투지만 않는다면 새로운 권법이나 검법이 몇 개는 더 나올 테지요.] 

[왜? 배가 아프시오?] 

 

홍칠공이 놀리자 구양봉이 정색을 한다. 

 

[그야 무학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라구요?]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구양봉과 홍칠공이 무슨 원한을 지닌 사이는 아니라 하더라도 피차 서먹서먹한 처지라 그냥 웃고 말았다. 황약사가 책상을 누르자 서쪽 벽에 걸린 한 폭의 묵화가 서서히 올라가고 거기 하나의 비밀문(門)이 나타났다. 황약사가 문을 열고 그 안에서 한 권의 두루마리를 꺼내 들고 어루만지며 구양공자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이게 바로 도화도의 지도요. 섬 안의 오행 생극(五行生剋)과 음양 팔괘의 변화가 여기 전부 기록되어 있으니 가지고 가서 잘 연구해 보오.] 

 

구양공자는 크게 실망했다. 도화도에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어서 한 말인데 겨우 지도를 꺼내 주다니. 마음속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굽히고 공손하게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황약사는 지도를 내주지 않았다. 

 

[잠깐만!] 

 

구양공자가 깜짝 놀라 손을 움츠린다. 

 

[이 지도를 가지고 임안부에 가서 객점이나 절에 묵으며 보게. 석 달 뒤에 내가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 되돌려주어야 하네. 그리고 지도에 있는 모든 지형은 마음속으로 기억해야지 절대로 베끼거나 다른 종이에 그리면 안 되네.] 

 

구양공자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도화도에 묵지도 못하게 하는데 이 따위 것은 가져다 무얼하나? 그러다가 자칫 잘못하여 잃어버리는 날에는 나만 골탕을 먹을 게 아닌가?) 

거절할까 하다가 또 다른 생각을 해 본다. 

(석 달 뒤에 사람을 보낸다면 혹시 황용을 보낼지도 몰라. 그렇다면 기회는 또 오는 거야.) 

그래서 지도를 받아 품속에 간직했다. 구양봉이 하직을 고하자 황약사도 더 말리지 않았다. 문 앞에 이르자 홍칠공이 한마디 꺼낸다. 

 

[여보 구양형 명년 석 달에 또 화산에서 만나게 될 테니, 기력이나 잘 다듬고 있다가 그때 통쾌하게 한번 싸웁시다.] 

 

구양봉이 담담하게 웃는다. 

 

[내가 보기에는 겨룰 것도 없소. 천하 제일의 무공은 벌써 주인이 있다오.] 

 

第 三十九 章. 꽃배 

홍칠공이 이상해서 묻는다. 

 

[아니, 주인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구양형이 그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무예를 익혔단 말씀입니까?] 

 

구양봉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는다. 

 

[이 구양봉 무슨 복으로 무공 천하 제일의 명성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제 말은 이 곽정 소년에게 무공을 전수해 준 그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 홍칠공이 웃는다. 

 

[나를 가리켜 하는 말이오? 허허허...... 물론 나도 생각이야 있지만 여기 계신 황약사로 말할 것 같으면 무공이 일익 정진(日益精進)이요, 구양형 당신도 노익장을 자랑하고 있는 처지며, 단황야(段皇爺)도 아마 무공을 버리지 않고 있을 텐데, 그렇다면 어디 내 차례가 오기나 하겠습니까?] 

[곽정 소년에게 무공을 전수해 준 사람들 가운데 홍형의 무공이 제일 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게 아닙니까?] 

[아니, 뭐라구요?] 

 

홍칠공이 막 반문을 하는데 황약사가 나섰다. 

 

[음, 노완동 주백통을 두고 하시는 말씀 같구료.] 

[바로 그말입니다. 노완동이 구음진경을 익혔다면 우리 동사나 서독, 남제, 북개가 모두 그의 적수가 아닐 테니까요.]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오. 경문은 죽어 있지만 무공은 살아있으니 말이오.] 

 

황약사가 반박하는 말을 듣고 구양봉은 은근히 기뻤다. 주백통의 소재를 확인하고 싶어 곽정에게 물어 본 말인데 그만 황약사가 나서는 바람에 깨지고 말았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화제로 꺼내 본 말인데 황약사가 순순히 대답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전연 보이지 않았다. 

 

[전진파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 너무 잘 아는 것이오. 노완동이 구음진경에 통달했다면 왕중양이 부활한다 해도 그의 적수가 아닐 거요. 그런데 우리 같은 시골 영감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요.]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노완동의 무공이 물론 나보다는 우월하지만 절대로 구양형이나 홍형과 비길 바는 아니오.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황형은 너무 겸양하지 마시오. 당신이나 나나 비슷비슷한 처지인데 그래 그 주백통을 가지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주백통의 무공에는 자신이 있다는 말씀 같은데 글쎄...... 그게......] 

 

이렇게 말하면서 계속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내년 화산에 모이면 자연 아시게 될 거요.] 

 

미소를 머금고 하는 황약사의 말에 구양봉이 정색을 한다. 

 

[황형의 무공에 대해 나는 평소부터 감탄과 흠모를 해왔지만 그렇다고 노완동을 제압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무래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너무 그를 깔보지 마세요.] 

 

황약사는 구양봉이 이렇게 비위를 건드리고 나서자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노완동이 바로 이 도화도에 있단 말이오. 내 벌써 그를 15년 동안이나 감금해 두었소!] 

 

이 갈이 떨어지자마자 구양봉과 홍칠공이 동시에 깜짝 놀란다. 

 

[황형! 농담도 잘 하시는구료!] 

 

구양봉이 껄껄 웃었다. 

황약사가 더 대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저쪽으로 가자는 시늉과 함께 앞장을 선다. 발끝에 힘을 주고 나는 듯 대나무숲을 벗어났다. 홍칠공은 양손에 곽정과 황용을 잡고, 구양봉은 조카의 팔목을 잡은 채 상승의 경공을 써서 그 뒤를 따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벌써 주백통이 있는 동굴 밖에 와 있었다. 황약사가 보니 동굴 밖에 쳐 있던 줄이 가닥가닥 끊겨 있다. <아니!> 두 발로 땅을 찍어 굴 어귀로 달려가 봤다. 조용한 것이 주백통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황약사의 왼발이 닿는데 이게 허공이었다. 그의 경공은 벌써 극치의 경지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변고가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오른발로 허공을 차면서 몸을 솟구쳐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땅으로 떨어지며 왼발로 바닥을 가볍게 찍어 보니 역시 허공이다. 제아무리 기고 나는 황약사라 하더라도 발을 붙이고 힘을 쓸 장소가 없었다. 손을 뒤로 돌려 목에 꽂았던 옥퉁소를 꺼내 굴 속의 벽에 버티고 화살처럼 뒤로 물러나왔다. 홍칠공과 구양봉이 그의 재치 있는 동작에 갈채를 보내는데 <퍽> 하고 황약사의 두 발이 굴 밖의 깊은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발밑이 미끈미끈 이상함을 느낀 황약사가 다시 그 발끝에 힘을 주고 몸을 반공에 솟구쳤다. 그런데 홍칠공 등은 아무 일 없이 벌써 굴 앞에 와 있었다. 그제야 황약사도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딸의 옆으로 사뿐 내려섰다.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보니 두 발이 온통 똥 투성이로 엉망진창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약사 같은 고수요, 그토록 꾀가 많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술수에 말려들 수 있을까 해서다. 황약사는 화가 나서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들고 땅 위의 이곳 저곳을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자기가 빠졌던 3개의 구멍만이 허탕이요, 다른 곳은 모두 실지(實地)였다. 이건 분명 주백통이 황약사를 골탕먹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구멍임에 틀림없었다. 틀림없이 첫째 구덩이에 빠질 것도 알았고 그가 경공을 이용해 그냥 안으로 뛰어들어올 것까지도 예측했던 것이다. 그래서 굴속에도 다시 구덩이를 하나 더 파 놓았고 둘째 구덩이에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밖에 세 번째의 구덩이를 파놓은 뒤에 오줌과 똥을 무더기로 싸놓고 기다렸던 것이다. 

황약사가 다시 굴 속으로 들어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굴 안에는 몇 개의 물동이와 질그릇이 뎅그마니 놓여 있을 뿐 다른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굴 벽에 가늘게 쓴 몇 줄의 글이 눈에 띄었다. 구양봉은 먼저 황약사가 다른 사람의 술수에 말려든 것을 보고 속으로 웃고 있다가 황약사가 다시 굴 벽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틀림없이 구음진경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달려가 보았다. 굴 벽에는 끝이 뾰족한 물건으로 새긴 글씨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황노사, 당신은 내 두 다리를 분질러 놓고 여기 15년 동안이나 감금해 놓았소. 나도 당신의 두 다리를 분질러야 화가 풀릴 것 같소. 그러나 심사 숙고한 결과 당신을 용서하기로 했다오. 다만 오줌과 똥을 몇 무더기 대신 바치는 것이니 청컨대....... > 

<청컨대> 다음을 나뭇잎으로 가려 놓아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황약사가 손을 뻗어 나뭇잎을 들췄다. 그 위에도 가는 글씨가 보인다. 뚝 잡아떼는데 머리 위에서 화닥닥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왼쪽으로 피하니 구양봉도 재빠르게 오른쪽으로 피했다. 그런데 와장창 소리가 나며 머리 위에서 물동이가 몇 개 떨어져 내려와 쏟아진다. 고약한 오줌 냄새와 함께 둘이 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야, 그 향기 그럴 듯하구나!] 

 

홍칠공이 큰소리로 외치며 앙천 대소를 한다. 황약사도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부었지만 구양봉은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 황용이 나는 듯 달려가 옷과 신발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께 갈아입히고 구양봉에게도 겉옷을 한 벌 주었다. 

황약사가 또다시 굴 속으로 들어가 상하 좌우를 살폈다. 먼저 나뭇잎이 가려졌던 곳에 두 줄의 글자가 보인다. 

<절대로 나뭇잎을 떼지 마시오. 위에서 고약한 오줌이 떨어지니 조심하시기 바라오.> 

우습기도 하고 화도 치밀어 오른다. 방금 쏟아진 오줌이 차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다시 밖으로 뛰어나왔다. 

 

[노완동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우리 다같이 쫓아가 봅시다.] 

 

(두 사람이 마주치면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질 텐데.) 

곽정은 이런 생각을 하며 만류하려고 했지만 황약사는 벌써 동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섬의 길이 괴상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혹시 뒤떨어질세라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얼마 쫓지 않아 과연 주백통이 앞에서 천천히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황약사가 발끝에 힘을 주었는지 줄 떠난 화살처럼 날아가 주백통의 뒤로 붙어 그의 목을 틀어잡으려 했다. 주백통이 왼쪽으로 비키면서 몸을 돌린다. 

 

[향기가 물씬 풍기는 황노사로구나.] 

 

황약사는 수십 년간 고련한 재주를 다해 주백통을 나꿔채려고 했었다. 민첩하기 전광 석화 같았고 위력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주백통이 그렇게까지 가볍게 피할 줄은 몰랐다. 황약사는 마음이 뜨끔하여 재차 공격을 하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주백통은 왼손과 오른손을 끈으로 묶은 채 미소를 머금고 태연 자약하게 서 있었다. 곽정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형님, 황도주가 제 장인이 되셨어요. 이제 우리 모두가 한식구로군요.] 

 

주백통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어째서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느냐? 황노사는 괴팍한 사람이야. 딸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니? 네 고생문이 훤하구나!] 

 

황용이 다가서며 웃는다. 

 

[안녕하세요? 뒤 좀 보세요. 누가 오셨는지?] 

 

주백통이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황용이 손을 번쩍 들어 아버지가 갈아입은 옷보따리를 집어 던졌다. 주백통이 바람 소리를 듣고 옆으로 피했지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보따리가 흩어지며 고약한 냄새가 사방으로 풍겼다. 

주백통이 허리를 꺾고 웃는다. 

 

[황노사, 당신이 나를 15년 동안 감금해 놓고 그래 얼마나 괴롭혔소? 그런데 나를 똥구덩이에 빠지게 하고 오줌 한 통 끼얹고 말았으니 그만하면 되지 않았소? 이걸로 그냥 끝내고 맙시다!] 

[그런데 왜 굴 앞의 줄을 끊고 두 손을 묶었소?] 

[그야 다 까닭이 있어서 한 일이라오.] 

 

원래 당시 주백통이 처음 동굴 속에 갇혔을 때는 몇 번이나 견디지 못하고 뛰어나가 황약사와 사생 결단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황약사는 결코 자기의 적수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수십 개의 끈을 거미줄처럼 얽어 놓고 자신을 억제했던 것이다. 일시의 충동으로 큰일을 그르치면 안된다는 자신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곽정을 만나게 되었고 무의식중에 분심합격(分心合擊)이라는 기상천외의 절정의 무공을 터득했다. 

 

제아무리 황약사의 무공이 특출하다 하더라도 두 명의 주백통이야 당해 낼 수 있으랴? 어떻게 하면 15년 동안의 수모를 통쾌하게 갚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곽정이 떠난 후 굴속에 혼자 앉아 가지가지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은혜와 원한, 사랑과 증오, 모든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착잡한 고민과 갈등 속에서 갑자기 옥퉁소, 철쟁(鐵箏), 휘파람이 어울려 싸우는 은은한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와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 아우는 무공이 나만도 못한데 어째서 황약사의 옥퉁소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당시 곽정과 함께 있을 때는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했던 것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 천성이 어질다 보니 무욕(無慾)이요, 무욕즉강(無慾則剛)이라 했으니 적자지심(赤子之心)을 잃지 않은 게야. 나는 나이를 이렇게 많이 먹고도 원수갚을 일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마음이 이렇게 옹졸해서야 정말 창피한 일이지.) 

 

그가 비록 전진도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전진교의 청정무위(淸靜無爲)와 담박현묵(淡泊玄默)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이다. 이제야 뒤늦게 그런 도리를 깨우친 것이다. 허탈한 웃음을 길게 길게 웃으며 일어나 섰다. 굴 밖은 청공 만리(晴空萬里) 흰 구름만 하늘 위에 두둥실, 마음속이 공명(空明)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생각해 보니 15년 동안의 시달림이 한날 닭이나 벌레 싸움만도 못한 작은 일이라는 느낌이었다. 다만 천성이 장난을 좋아하는 그었다. 

(이대로 떨치고 한 번 가버리면 도화도에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 텐데, 그냥 가버리면 다음날 황노사는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그래서 그는 굴 속과 밖에 구덩이를 파 놓고 물동이를 매다는 등 한바탕 바쁘게 움직인 후 굴을 벗어난 것이었다. 몇 발짝 걷다가 또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도화도의 길이 괴상한데 만일 황노사에게 빨리 발각된다면 틀림없이 쫓아올 게 아닌가? 하하하, 싸움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한다? 설마하니 지기야 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득의 만면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손을 번쩍 들자 길 옆에 서 있던 나무가 우지끈 부러져 나갔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내 공력이 언제 이렇게 강해졌지? 쌍수호박(雙手互搏)과는 관계없는 무공인데.) 

손을 나무에 댄 채 멍하니 넋을 잃고 생각에 잠겼다. 다시 두 손을 휘둘러 보았다. 닥치는 대로 7,8그루의 나무가 부러져 나간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깜짝 놀란다. 

(아니, 이전 구음진경의 무공이 아닌가? 내가 언제 진경의 무공을 익혔지?) 

사형인 왕중양의 유훈이 생각났다. 절대로 진경에 기록된 무공을 익혀서는 안되는데, 곽정에게 전수해 주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배우고 만 것이다. 주먹과 발을 써 보니 이건 분명 진경에 기록된 권리(拳理)와 법문(法門)에 일치하는 것들이다. 

 

[큰일났구나! 귀신에 걸렸구나!] 

 

그는 나무껍질을 이빨로 벗겨 두 손을 꽁꽁 묶었다. 

(내 이제부터 진경에 기록된 무공을 완전히 잊을 때까지는 절대로 다른 사람과 싸워서는 안된다. 황노사가 쫓아와도 손을 쓰지 않아야 한다. 사형의 유훈을 어기면 천벌을 받는다.) 

황약사가 어찌 주백통의 이런 내심을 알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장난을 하는 줄만 알았다. 

 

[노완동, 이 구양형은 만나 보신 일이 있을 태고, 이분은.......] 

 

황약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백통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주위를 맴돌면서 냄새를 말아 보고 있었다. 

 

[이분이야 틀림없는 노규화(老叫化) 홍칠공이시겠지? 잘 맞히지요. 천망이 회회(天網恢恢)한데 고약한 냄새가 나는 사람은 동사, 서독 두 사람뿐이로군요. 구양형, 당년에 내 따귀를 한번 때린 일이 있고, 오늘은 내 오줌 바가지를 썼으니 피장파장이 아니겠소?] 

 

구양봉은 미소를 머금은 채 묵묵 부답이더니 이윽고 황약사의 귀에 조용히 소곤거린다. 

 

[황형, 이 사람 신법(身法)이 민첩한 것이 아무래도 무공이 황형의 우위에 있소.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너나 나나 20여 년이나 만나지 못했는데 어떻게 내 무공이 이자만 못한 줄 안단 말이냐?) 

황약사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주백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보 백통, 그전에도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 구음진경을 내게 주오. 죽은 아내의 영전에 불살라 제사나 지내면 즉시 풀어주리다. 그러나저러나 지금 어디를 가는 중이오?] 

[이 섬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답답해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바깥 세상 구경 좀 하려구 하오.] 

[그럼 그 경문을......] 

 

황약사가 손을 내밀었다.  

 

[벌써 당신에게 주지 않았소?] 

[쓸데없는 소리 그만 두오. 그래 언제 내게 주었단 말이오?] 

[곽정이 당신 사위가 아니오? 곽정의 것이 당신의 것이고, 당신 것이 곽정의 것 아니겠소? 내 구음진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곽정에게 전해 주었으니 당신에게 전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오.] 

 

곽정이 깜짝 놀라 외쳤다. 

 

[형님, 그게 정말 구음진경이었나요?] 

 

주백통이 껄껄 웃었다. 

 

[그럼 가짜도 있단 말이냐?] 

[상권의 경문은 원래부터 당신이 가지고 있었다지만 그래 하권은 어디서 얻었소?] 

 

황약사가 물었다. 

 

[그것도 역시 당신의 사위가 내게 직접 줍디다.] 

 

황약사는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아니, 저 어린 게 감히 나를 놀려? 장님이 된 매초풍은 지금도 죽자고 찾아다니지 않겠나?) 

눈을 부릅떠 곽정을 노려본 다음 다시 주백통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말하는 것은 실물의 원전이오.] 

[여보게 아우, 내 품속에서 그 책을 꺼내 주게.] 

 

곽정이 나서서 그의 품에서 책을 찾아냈다. 두께가 반치쯤 되는 책이다. 주백통이 받아 들고 황약사를 향해 말을 꺼낸다. 

 

[이전 진경의 상권이오. 하권의 경문도 이 안에 끼어 있소. 재주 있거든 가져가구료.] 

[어떤 재주를 말하는 게요?] 

 

주백통이 두 손에 경서를 잡은 채 고개를 숙인다. 

 

[잠깐만 내 생각 좀 해 봅시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표구하는 재주요.] 

[뭐라구?] 

 

주백통이 두 손을 번쩍 머리 위에 쳐들고 퉁겼다. 수천 수만의 종이 조각이 나비처럼 날아 해풍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약사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났다. 주백통의 내공이 이렇게까지 위력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순식간에 일부의 경서를 장력으로 눌러 가루로 만들고 말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노완동, 나를 희롱하다니? 오늘 섬을 벗어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오.] 

 

앞으로 달려나가며 주백통의 면상을 후려 갈긴다. 주백통이 살짝 피하고 나서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바람 소리가 쉭쉭거리며 황약사의 장영(掌影)이 주백통의 주위를 춤추듯 감싸고 돌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황약사는 그가 반격을 하지 않는 걸 보고 놀란다. 

(이 황약사가 두 손을 붙들어 맨 사람과 대결할 수 있나?) 

뒤로 3보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노완동, 빨리 손 묶은 끈을 풀고 반격을 하시오. 어디 한번 구음진경의 무공이 어떤지 구경 좀 합시다.] 

[솔직히 말해 말할 수 없는 고민이 내게 있다오. 손을 묶은 이 끈은 어떤 일이 있어도 풀 수 없소.] 

[그럼 내가 대신 풀어 드리리다.] 

 

앞으로 나서며 그의 팔을 잡으려 했다. 

 

[아이쿠,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주백통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떼굴떼굴 구른다. 

 

[장인 어른!] 

 

곽정이 깜짝 놀라 앞으로 나서서 만류하려고 했지만 홍칠공이 그의 팔목을 잡고 낮은 소리로 말한다. 

 

[쓸데없는 일 그만 둬라.] 

 

곽정이 발길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주백통이 여전히 떼굴떼굴 구르고 있는데 어찌나 빠른지 황약사가 잡으려고 쫓아다녔지만 잡히지 않았다. 

 

[저 몸놀림을 자세히 보거라.] 

 

홍칠공이 깨우쳐 주는 말을 듣고보니 주백통의 동작은 바로 진경 상(上)에 씌어 있는 사행리번(蛇行狸翩)의 술수와 같은 것이다. 

자세히 관찰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발했다. 

 

[묘하구나 묘해.] 

 

황약사는 더욱 화가 나서 주먹을 도끼 휘두르듯 했다. 주백통의 옷깃이며 도포자락이 조각조각으로 찢겨 나가고, 긴 수염과 머리카락까지 황약사의 장력에 잘려 나갔다. 주백통이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나간다면 아무래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한 대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죽거나 중상을 입는 것이다. 

황약사는 계속해서 공격을 한다. 왼손바닥을 옆으로 비스듬히 치면서 오른손바닥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뻗었다. 매 3초(招)마다 한 번씩 독초(毒招)가 숨어 있다. 제아무리 주백통이 재빠르다해도 피할 도리가 없었다. 팔에 힘을 주었는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묶었던 글이 끊어져 나갔다. 왼손으로 황약사의 공세를 막으며 오른손을 뒷등에 갖다 대고 이를 한 마리 잡아 입 안에 집어넣고 씹는다. 

 

[아이구, 간지러워 죽을 뻔했다.] 

 

황약사는 결사적으로 공격을 펴고 있다가 이런 주백통의 모양을 보자 놀랍기도 하거니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맹렬하게 평생의 절학을 총동원하여 3초(招) 더 공격을 퍼부어 보았다. 

 

[한 손으로는 막을 수가 없으니 두 손 다 써야겠구나.] 

 

주백통이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고 오른손으로 공격을 막으면서 왼손으로 황약사가 쓴 모자를 뺏으려고 했다. 그의 무공은 원래 황약사보다 약했다. 오른손으로 막는 것을 본 황약사가 왈칵 떠밀자 비틀비틀하다가 벌렁 뒤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왼손에는 벌써 황약사의 모자를 틀어쥐고 있었다. 

황약사가 몸을 날려 엎치며 쌍장을 날렸다. 주백통이 장력에 눌려 꼼짝 못한다. 

 

[자, 이 쌍장을 받으오. 한 손으론 막지 못할 게요.] 

[안 되오, 그래도 한 손으로 버티겠소!] 

 

황약사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그럼 어디 견뎌 보오.] 

 

쌍장과 단장이 허공에서 꽝하고 부닥쳤다. 주백통이 땅바닥에 앉은 채 두 눈을 감는다. 황약사도 더 진격하지 않았다. 주백통이 <와!>소리를 내며 입으로 선혈을 토한다. 얼굴빛이 순식간에 백짓장처럼 변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약사와 대결하면서도 끝까지 두 손을 쓰지 않는 까닭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주백통이 서서히 일어나 서며 말문을 연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구음 기공(奇功)을 배우고 말았다오. 이미 사형의 유훈을 어긴 셈인데 만약 두 손을 썼다면 황노사 당신은 나를 당할 수 없었을 게요.] 

 

황약사는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었다. 자기는 아무 까닭도 없이 그를 15년 동안이나 감금했었다. 이제 이렇게 부상까지 입혀 놨으니 할 말이 없다. 뭄 속에서 옥갑(玉匣)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고 세 개의 핏빛 같은 단약(丹藥)을 꺼내 주백통에게 건넨다. 

 

[여보 백통, 천하의 상약(傷藥) 가운데 도화도의 이 단약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게요. 이리 만에 한 알씩만 잡수시면 곧 쾌유하실 것이오. 자, 내가 전송할 테니 섬을 떠나시오.] 

 

주백통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한 알을 먹고 숨을 몰아쉰다. 곽정이 주백통을 업고 황약사의 뒤를 따라 해변으로 나오니 항구에 크고 작은 배들이 5,6척이나 정박하고 있었다. 먼저 구양봉이 입을 열었다. 

 

[약사형! 주형을 위해 별도로 다른 배를 낼 것이 아니라 그냥 제 배를 이용해 나가시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구양형께 폐를 끼치는 게 아닙니까?] 

 

황약사가 이렇게 말하고 옆에 있는 벙어리 하인을 향해 손으로 수화를 하자 그 하인은 다른 큰 배로 가서 쟁반에 금은 보화를 잔뜩 담아 들고 나왔다. 황약사가 그것을 주백통에게 건넸다. 

 

[여보 백통, 이 금은을 가져다 쓰시오. 확실히 당신의 무공은 나보다 훌륭하오. 내 탄복했습니다.] 

 

주백통이 눈을 깜박이며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구양봉의 배를 바라다본다. 뱃머리에는 백기가 꽂혀 있고 백기 위에는 머리가 둘 달린 뱀이 그려져 있었다. 구양봉이 나무로 만든 피리를 꺼내 불자 잠시 후 수풀 속에서 도화도의 벙어리 하인 두 명이 흰 옷을 입은 남자를 데리고 나왔다. 그 뒤로 뱀떼가 몰려오고, 길고 가는 널빤지를 타고 열을 지은 채 선장으로 기어들어간다. 

 

[나 서독의 배는 타지 않겠소. 뱀이 무서워서.] 

 

황약사가 미소를 머금는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저쪽 배를 타시면 됩니다.] 

 

옆에 있는 한 척의 작은 배를 가리키자 주백통이 머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작은 배는 안 타겠소. 저쪽에 있는 큰 배를 타겠소.] 

 

황약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백통, 저 배는 고장이 났는데 수리를 하지 않아서 타실 수가 없다오.] 

 

여러 사람들이 그 배를 보니 선미가 삐쭉 올라간 것이 화려한 배였다. 칠한 지도 얼마 안되는지 번쩍번쩍 빛이 나는 최근에 만든 배로, 고장이 났다는 말은 거짓말 같았다. 주백통은 어린아이처럼 조른다. 

 

[나는 꼭 저 새 배를 탈라오. 황노사! 뭐 그리 쩨쩨하오.] 

[쩨쩨한 게 아니오. 저 배는 아주 재수가 없는 배로 타는 사람은 병들지 않으면 재앙을 당하기 마련이오. 그래서 저기 저렇게 매어 놓은 채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오. 믿지 못하시겠다면 내 즉시 저 배를 불살라 버리겠소.] 

 

손짓을 몇 번 하자 4명의 벙어리 하인이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가지고 달려가 배를 불사르려 했다. 주백통이 갑자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수염을 뜯으면서 대성 통곡을 한다. 떼굴떼굴 구르는 주백통을 보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지만 곽정만은 그의 성질을 잘 아는지라 속으로 웃고 있었다. 주백통이 한참 동안이나 수염을 뜯다가 이젠 땅바닥을 떼굴떼굴 구른다. 

 

[나는 새 배를 탈래요, 새 배를 타.] 

 

황용이 달려가 4명의 하인을 밀린다. 홍칠공이 웃으며 말문을 연다. 

 

[황형, 이 노규화(老叫化) 평생 재수가 없는 사람이니 내 노완동을 모시고 저 흉선(凶船)을 타겠습니다. 이독공독(以毒攻毒)이라고, 노규화의 재수가 이기나 지나 한번 봅시다.] 

[홍형, 섬에 며칠 더 머무르다 가셔야지 뭐 그리 빨리 가시려고 서두르십니까?] 

[천하의 대규화, 중규화, 소규화가 불일 내에 호남의 악양루에 모이게 돼 있습니다. 이 노규화가 분파의 개방 주지를 임명하고 내 후계자도 결정을 해야 합니다. 제가 후계자도 지명하지 않은 채 귀천하게 되면 천하의 거지를 통령할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저는 빨리 가봐야 합니다.] 

 

황약사가 한숨을 내쉰다. 

 

[홍형, 정말 열성이 대단하시군요. 평생 다른 사람만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니 말이오.] 

[놀리지 마시오.] 

 

홍칠공이 웃자 황용도 나서며 말참견을 한다. 

 

[사부님, 아버지가 놀리시는 게 아니에요.] 

[아무래도 사부가 친부모만은 못한 모양이로구나. 다음에 나도 마누라를 얻어 꼭 너 같은 딸을 하나 낳아야겠구나.]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구양공자가 눈을 비스듬히 뜬 채 황용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햇빛이 담담하게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봄꽃이 핀 것처럼 발그레하고 아침 놀처럼 곱기 그지없었다. 홍칠공이 손을 뻗어 주백통을 부축해 일으킨다. 

 

[여보, 백통. 나하고 함께 새 배에 탑시다. 황노사는 괴상한 사람이니 우리 둘이 속지 맙시다.] 

 

주백통은 반가왔다. 

 

[노규화, 당신은 정말 사람이 좋아. 우리 아주 의형제를 맺고 맙시다.] 

 

홍칠공이 대답도 하기 전에 곽정이 나섰다. 

 

[백통형님, 형님과 제가 의형제인데 어떻게 제 사부님과 또 의형제를 맺을 수 있단 말씀입니까?]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자네 장인이 내게 새 배만 준다면 내 기뻐서 그와도 의형제를 맺겠네.] 

 

주백통이 괜찮다는 듯 웃으며 말하자 황용이 나선다. 

 

[그럼 난 뭐예요?] 

 

주백통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내 너한테는 안 속는다.] 

 

홍칠공의 어깨를 틀어잡고 새 배가 있는 곳으로 간다. 황약사가 몸을 번쩍 움직여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이 황약사가 평소에도 쓸데없는 수작은 안했지만 저 배는 안 돼요. 불길하다는데 왜들 야단들이시오?] 

 

홍칠공이 하하하 앙천 대소를 한다. 

 

[이 노규화, 배멀미로 귀천한다면 정말 당신은 내 친구에 부족함이 없을 게요.] 

 

홍칠공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비록 우스꽝스럽지만 위인만은 착실했다. 황약사가 완강하게 말리는 말을 들어보면 이 배에는 틀림없이 어떤 곡절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백통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막을 재간이 없는 노릇이다. 만일 이변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혼자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부상까지 입었으니 도와주지 않을래야 도와주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함께 다겠다고 자기도 우기고 나선 것이다. 홍칠공이란 위인이 의롭다는 사실을 이런 데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황약사가 <흥> 하고 코방귀를 뀐다. 

 

[두 분의 무공이 워낙 훌륭하시니 이변이 생긴다 해도 문제가 아니겠지요, 공연히 내 사서 걱정할 일이 아닐 테니까. 곽정, 자네도 가 보게.] 

 

곽정은 그의 말투가 차디차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들어 바라다보았다. 

 

[장인.......] 

[요 잔꾀 많고 욕심 많은 어린 녀석이 누굴 보구 장인이라고 하느냐? 다시는 도화도에 발길을 들여놓을 생각을 말아라. 오기만 하면 용서하지 않을 테다.] 

 

손바닥을 뒤집어 벙어리 하인의 뒷등을 친다. 

 

[바로 이 꼴을 만들어 버리고 말 테다.] 

 

그 벙어리 하인의 혀는 벌써 잘린 지 오래다. 목구멍 속으로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몸이 허공에 떴다. 오장이 벌써 황약사의 일격에 부서진 것이다. 해면에 풍덩 떨어져 파도에 밀려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벙어리 하인들이 놀라 벌벌 떨며 모두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도화도에 있는 이 벙어리 하인들은 모두가 배은망덕한 악한들이다. 황약사는 사전에 죄과를 모두 확인한 후 그들을 섬 안에 가두고 벙어리를 만들고 귀머거리를 만들어 자기의 명령에만 복종하게 했다. 그도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 황약사는 정인 군자(正人君子)가 아니다. 강호에서 나를 <동사>라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 어찌 정인 군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는가? 수하의 종놈들도 악독한 놈일수록 내 마음에 든다.] 

 

물론 벙어리 하인들도 죽어 마땅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갑자기 까닭도 없이 일격에 죽여 바닷속에 던지는 것을 보고 모두들 아연했다. 

(황노사는 정말 악독하구나.) 

곽정은 더욱 놀라 어쩔 줄을 몰라 두 무릎을 땅바닥에 꿇었다. 

이를 본 홍칠공이 나섰다. 

 

[그래, 저 아이의 어느 점이 못마땅해서 그러십니까?] 

 

황약사는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곽정을 향해 날카롭게 묻는다. 

 

[그 구음진경의 하권을 네가 주백통에게 주었지?] 

[글쎄, 뭔가 하나를 제가 주대형에게 드리기는 했지만 그게 진경이라는 것은 몰랐어요. 만약에 알았다면......] 

 

주백통은 일의 경중도 모르면서 옆 사람이 신경질을 낼수록 더욱 농담을 하고 싶은 생각에 곽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참견에 나섰다. 

 

[아니 몰랐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매초풍에게서 뺏아 왔는데 다행히도 황약사가 모르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리고 또 경서를 배우게 되면 그땐 자기가 천하 무적이라고까지 말하지 않았어?] 

 

곽정은 깜짝 놀라 말조차 떨려 나왔다. 

 

[아니 형님,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주백통이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정색을 한다. 

 

[네게 그런 말한 건 사실이야] 

 

곽정은 경문을 완전히 욀 수 있었지만 그것이 구음진경이었다는 사실은 몰랐었다. 사실대로 말을 해 봐도 다른 사람들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주백통이 이렇게 말을 꺼냈으니 화가 나 있는 황약사로서는 그것이 노완동이 꾸민 농담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주백통이 천진 난만한 동심에서 곽정을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대로 진상을 털어놓는 것이라고만 믿었다. 황약사는 두 손을 들고 주백통, 홍칠공, 구양봉을 향해 읍을 했다. 

 

[어서들 가 보시오.] 

 

황용의 손을 잡고 몸을 홱 돌려 가 버린다. 황용이 곽정과 몇 마디 이야기라도 나누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곽정 오빠.......] 

 

이렇게 불러 보았지만 아버지에게 손을 잡힌 채 벌써 여러 장 밖으로 끌려가다가 순식간에 수풀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주백통이 하하하 웃다가 가슴이 또 뜨끔 아파 오자 억지로 웃음을 참는다. 

 

[황노사, 또 내 꾀에 속았구나. 내가 농담으로 속인 걸 정말로 알아들었으니.] 

 

이 말을 들은 홍칠공이 놀라 묻는다. 

 

[그럼, 곽정이 정말 사전에 몰랐단 말이오?] 

[물론 몰랐지요. 구음기공은 사기(邪氣)라고까지 말했는데 알았다면 제게 배우려고 했겠습니까? 자네는 이제 완전히 익혔으니 이제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이 돼 비렸지?] 

 

배꼽을 쥐고 웃으며 말을 하면서도 진통을 참느라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홍칠공이 발을 구른다. 

 

[여보 노완동, 어쩌자구 그런 농담을 하오? 내 황약사에게 사실을 알려야지.] 

 

발을 뽑아 산 속으로 들어가 보았지만 숲속에는 길이 종횡으로 나 있어 황약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벙어리 하인들도 주인이 떠나자 어디론가 모두 가버린 후였다. 홍칠공은 길 안내를 부탁할 사람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다. 구양공자가 도화도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여보, 구양공자, 도화도 지도를 좀 보여 주오.] 

 

구양공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황약사의 허락 없이는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홍칠공이 흥 코방귀를 뀐다. 

(내가 바보지. 저런 녀석에게 지도를 보여 달라고 하다니? 저 녀석이야 곽정이 황노사의 눈에 나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라구.) 

숲속에서 흰 옷을 번쩍이며 벙어리 하인 하나가 구양봉이 데리고 온 32명의 무녀(舞女)를 데리고 나타났다. 앞장선 여자 하나가 구양봉의 면전으로 걸어나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황약사께서 우리들 보고 나으리를 따라 돌아가라고 하셨나이다.] 

 

구양봉은 그들에게 눈동자도 돌리지 않고 손을 흔들어 배에 오르라는 시늉을 한 뒤에 홍칠공과 주백통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황약사의 배에 정말 뭔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두 분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제가 바짝 뒤를 쫓겠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백통이 화를 낸다. 

 

[아니, 누가 우리 환심을 사라고 했소? 나는 일부러 황약사의 배를 골라 탔는데 그래 뒤를 바짝 쫓겠다니 무슨 재미로 가란 말이오?] 

[그럼 좋도록 합시다. 뒤에 만날 날이 있겠지요. 안녕히들 가시오.] 

 

구양봉은 그래도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자기 배로 올랐다. 곽정은 멍하니 황용이 사라진 쪽을 바라다보며 서 있었다. 이를 본 주백통이 웃었다. 

 

[여보게 아우, 우리도 배에 타세. 어디 한번 무슨 일이 생기나 구경 좀 해야겠네.] 

 

홍칠공과 곽정을 양손에 잡고 배에 올랐다. 벌써 7,8명의 사공이 대기하고 있는데 역시 모두 벙어리들이다. 

 

[언젠가는 황노사가 광기가 나서 자기 딸 혀도 잘라 놓을지 몰라. 내 그럼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탄복하겠네.] 

 

주백통이 웃으며 하는 말을 듣자 곽정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친다. 

 

[왜? 무서운가?] 

 

주백통이 하하 웃으며 사공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사공들이 닻을 걷고 돛을 달자 배는 남풍을 받아 해면으로 나섰다. 

홍칠공의 말에 세 사람은 선수에서 선미로 또 갑판에서 선창으로 다니며 구석구석 뒤져보았지만 별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새로 칠을 한 탓으로 칠만이 햇빛을 받아 번쩍이고 선창 안에는 식수며 쌀이며 술과 고기, 채소 등이 고루 고루 마련되어 있었다. 

 

[그놈의 황노사, 또 사람을 속였군. 뭐 이상하다더니 아무것도 없잖아. 공연히 싱겁게 돼 버리고 말았군.] 

 

주백통이 투덜거리는 말이다. 

홍칠공은 그래도 이상하다며 몸을 날려 돛대 위로 올라가 돛대와 돛을 힘껏 밀어 보았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눈을 먼 곳에 돌리니 갈매기만 오락가락하고 파도 멀리 수평선이 아득하게 보인다. 가슴을 헤치고 바람을 쏘이자 한결 마음속이 시원하고 후련했다. 돛대에 매달린 세 폭의 돛이 가득 바람을 먹고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구양봉이 탄 배가 5리(里) 뒤에 따르고 있었는데 흰 돛의 중앙에는 혀를 날름거리는 쌍두(雙頭)의 괴상한 뱀이 그려져 있었다. 

홍칠공이 돛대 위에서 뛰어내린 뒤 사공에게 손짓을 하여 서북향으로 방향을 돌리라는 명령을 했다. 그리고 다시 선미로 달려가 구양봉의 배를 보니 그 배도 방향을 바꾸어 쫓아오고 있었다. 

 

[바짝 뒤를 쫓는데 무엇 때문에 저럴까? 호의로 그러지는 않을 텐데...... 저놈의 독물이 그럴 호인이 아니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혹시 주백통이 알면 성질을 부릴까 봐 말은 하지 않고 다시 사공에게 정동으로 방향을 돌리게 했다. 돛이 옆으로 기울어 바람을 반밖에 받지 못하게 되자 배의 속도가 늦어졌다. 예상했던 대로 구양봉의 배도 계속 방향을 바꾸어 뒤쫓아오는 것이다. 

(이거 바다 위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벌어지면 싸우는 게지.) 

홍칠공은 이런 생각을 하며 선실로 들어섰다. 곽정은 우울한 표정으로 그냥 앉아 있었다. 

 

[곽정아, 거지가 밥 얻어먹는 재주나 알려 줄까? 주인이 밥을 주지 않으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문 밖에서 떠나지 않으면 줄까? 안 줄까?] 

 

주백통이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만약에 주인이 사나운 개를 길러 물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부자면서도 인색한 그런 주인을 만나면 저녁에 들어가 한바탕 훔쳐 내오는 게지.] 

 

홍칠공도 웃는 말로 응수를 했다. 주백통이 다시 곽정을 향해 입을 연다. 

 

[여보게 아우, 사부님 말씀을 알아듣겠나? 자네 장인이 우기고 딸을 주지 않거든 밤에 들어가 훔쳐오란 말일세.] 

 

곽정도 이 말에는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주백통이 선창을 오락가락하며 잠시도 가만히 안정하지 못하는 모양을 보자 한가지 궁금한 생각이 떠올랐다. 

 

[형님,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글쎄 아무데나 다니며 구경이나 할까?] 

[제가 형님께 부탁이 있는데요.] 

[그만 둬, 날 보구 도화도로 들어가 색시 훔치는 일 도와 달라구? 난 그건 못해.] 

 

주백통이 손을 흔들자 곽정은 얼굴을 붉힌다. 

 

[그게 아닙니다. 제 부탁은 귀찮으시겠지만 형님께서 태호 옆에 있는 의흥의 귀운장에 한번 가 주십사는 얘기입니다.] 

[뭣 때문에?] 

 

주백통이 눈알을 굴리며 묻는다. 

 

[귀운장의 육장주 육승풍이란 사람이 호걸인데 원래는 제 장인의 제자였어요. 흑풍쌍쇄 때문에 죄도 없이 장인이 다리를 분질렀는데 아직도 걷지 못하고 있거든요. 형님은 이제 다리를 완전히 고치셨으니 좀 그 방법을 알려 주셨으면 해서요.]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곽정은 반가왔다. 막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사공 하나가 뛰어들었다. 얼굴이 놀라 흙빛이 되어 손발만 허우적거릴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세 사람은 변고가 있음을 직감하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선창을 뛰어나갔다. 

 

이때 황용은 아버지에게 끌려 집안으로 들어섰다. 작별할 때 곽정과 한마디 말이라도 나누려고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회가 나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흐느끼고 있었다. 

황약사가 화가 나서 곽정을 내쫓기는 했지만 지금쯤 사경을 헤맬 생각을 하면 딸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딸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황용은 거들떠볼 생각은커녕 문조차 열지 않았다. 저녁밥을 먹으러 나오지도 않았다. 황약사가 하인을 시켜 식사를 들여보냈지만 와지끈 쨍그렁 상이고 밥그릇이고 집어 던져 박살을 대는 소리만 들렸다. 황용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말을 꺼내면 꼭 그대로 실천하고야 마는 성미인데 만약에 곽정 오빠가 도화도로 오는 날이면 맞아 죽고 말거야. 내가 만약 섬에서 도망을 쳐 그를 찾아 나간다면 아버지는 나를 다시는 용서하지 않으시겠지. 그리고 아버지 혼자 쓸쓸하게 이 섬에서 지내신다면 너무나 불쌍하지 않을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간장만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팠다. 몇 달 전에도 아버지의 꾸중을 듣고 그냥 섬을 벗어난 일이 있었다. 뒤에 다시 아버지를 뵈었을 때는 백발이 더욱 많아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었다. 몇 달 동안에 10년 이상 늙으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맹세를 했는데 또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책상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만약 어머니만 살아 계셨더라도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을 거야......) 

어머니에게 생각이 미치자 슬픔이 복받쳐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뭇 별이 반짝이고 꽃향기는 더욱 짙기만 했다. 

(곽정 오빠는 지금쯤 어디에 가 계실까? 언제 다시 만나게 되려나?) 

한숨을 내쉬며 소매를 들어 올려 눈물을 훔치고 꽃밭 깊숙이 들어선다. 그녀는 꽃나무를 헤치며 어머니의 무덤 앞에 이르렀다. 가목(佳木)이 울창하고 이름 모를 꽃들이 찬란했다. 무덤 앞에는 사철 꽃이 지는 날이 없었다. 한 그루 한 그루 황약사의 정성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달빛 아래 더욱 요염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황용은 묘비를 좌로 세 번 우로 세 번 밀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당겼다. 묘비가 서서히 움직이며 돌로 깐 층계가 나타났다. 그녀는 층계를 내려 세 번이나 모퉁이를 돌아 들어갔다. 또 한 번 돌문을 열고 묘 안의 광실(擴室)로 들어서서 불을 밝혔다. 

 

이때 묘비의 돌문은 벌써 자동으로 닫힌 후다. 혼자 광실에 남아 아버지가 손수 그린 어머니의 영정을 바라다보았다. 

(나는 어머니를 뵌 적이 없는데 내가 죽으면 어머니를 만나 뵐 수 있을까? 어머니는 지금도 저렇게 그림처럼 예쁘실까?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하늘 위에? 아니면 지하에? 그것도 아니라면 이 광실 안에 계시겠지! 내 영원히 어머니를 모시면 되겠지!) 

광실 가운데의 벽이나 탁자에는 기이한 보물들이 가득가득했다. 어느것 하나 진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원래 황약사가 천하를 종횡할 때 황실의 내원이며 거부의 부실(富室), 대도의 산채(山寨)에서 거두어 모은 것들이다. 그 모두를 저 세상으로 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렇게 여기 모셔 놓은 것이다. 황용은 그런 명주와 미옥, 비취며 마노(瑪瑙)를 하나하나 불빛에 비춰 든다. 담담한 광망(光芒)이 실내에 아롱진다. 

(이런 보물이 지각(知覺)은 없지만 수백 년을 두고도 망가지거나 썩지 않는구나. 내 오늘은 이렇게 이것들을 볼 수 있지만 한 줌 흙으로 변한 뒤에도 진주 백옥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겠지. 세상의 물건은 영혼이 없으면 없을수록 오래 가는 모양이로구나. 내 어머니는 절세에 총명한 분이라 스무 살도 못 사시고 저 세상에 가버리신 것이 아닐까?) 

 

그녀는 하염없이 어머니의 화상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불을 끄고 주렴을 걷어올린 후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옥관(玉棺)을 한참 동안이나 어루만지다 거기 몸을 기댄다. 아늑하고 포근한 것이 정말 어머니 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잠시 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꿈속이다. 어느덧 북경의 조왕부에 와 있었다. 혼자 군웅(群雄)들과 대결을 한다. 새북(塞北)의 노상이다. 곽정과의 해후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데 홀연 어머니가 나타났다. 똑바로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다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어머니가 천공을 난다. 힘껏 쫓아가지만 어머니는 점점 더 높이 난다. 조바심에 마음을 죄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른다. 그 소리가 더욱 똑똑하게 귀에 파고들었다. 

 

꿈속에서 눈을 떴다. 아버지의 중얼중얼하는 소리가 들린다. 주렴을 격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야 꿈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도 이 광실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어머니의 영전을 찾았었다. 소곤소곤 부녀가 많은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최근 몇 년은 그리 자주 드나들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목소리가 의아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아버지와 고집을 가지고 맞서는 때라 부르지 않을 뿐이다. 아버지가 나가신 후에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소리가 다시 들린다. 

 

[여보, 나는 당신의 영전에 맹세를 한 일이 있었소. 구음진경을 찾아다가 당신의 영전에 불사르겠다는 것이었소. 당신도 아다시피 내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애를 태웠소. 15년 동안 성취하지 못했던 일을 오늘에야 겨우 이루었다오.] 

 

황용은 마음속으로 의아한 생각을 했다. 

(아니, 아버지가 어디서 구음진경을 얻으셨지?) 

 

[내 고의로 사위 될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사코 그 배를 탄 것이오.] 

 

아버지의 이 말에 황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사위 될 사람이라니? 곽정 오빠를 두고 하는 말인가? 그 배를 타면 무슨 일이 생기기에 그러나?) 

즉시 귀를 기울여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려 했다. 그런데 황약사는 중언 부언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어떻게 쓸쓸하고 외로왔다는 말만 했다. 황용은 아버지가 진정을 토로하는 말을 듣자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을 했다. 

(곽정 오빠나 내가 이제 겨우 열 몇 살 먹은 어린아이인데 설마하니 장래 못 만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내 아무래도 아버지 곁을 떠날 수는 없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아버지 말소리가 들렸다. 

 

[그 노완동이 진경의 상하권을 모두 장력으로 없애버려 나는 당신 앞의 맹세를 이루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들이 끝까지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꽃배를 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매번 내가 그 꽃배에 가서 놀려고 할 때마다 아버지는 화를 벌컥 내시며 못 가게 하시더니 어머니와 만나기 위해 만든 배라니 도시 알 수가 없구나.) 

황약사는 원래가 괴팍한 위인이었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만은 깊기 한이 없었다. 그래서 아내가 죽자 자기도 따라 죽으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무공이 깊고 보니 목을 매거나 극약을 먹어도 쉽게 죽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육지로부터 배 만드는 기술자를 잡아다가 이 꽃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배의 용골(龍骨)은 다른 배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배 밑창에 있는 나무는 못으로 단단히 박은 것이 아니라 생고무 끈으로 묶어 놓았다. 정박해 있을 때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꽃배였지만 대해로 끌고나가 풍랑을 만나기만 하면 반나절을 견디지 못하고 침몰하게 되어 있었다. 황약사는 본래 아내의 유해를 이 배에 옮겨 싣고 바다로 나가 함께 수장을 지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로 끌고 나갈 때마다 애지중지하는 딸이 불쌍해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묘지를 만들고 그곳에 아내의 유해를 안장했다. 그러나 해마다 한 번씩 배에 칠을 해서 새것처럼 보존했던 것이다. 황용이 이러한 곡절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부친의 말을 듣고도 못 알아듣는 것이다. 

 

[노완동이 구음진경을 완전히 욌고 또 곽정이란 소년까지도 욌으니 그 둘만 죽으면 당신의 영전에 진경을 불사르겠다는 염원은 성취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하늘에서라도 이제 안심할 수 있을 것이오. 다만 홍칠공이 까닭도 없이 함께 죽게 되었으니 원망스럽지만 할 수 없는 일이구료. 내 하루 사이에 당신을 위해 세 명의 천하고수를 없애게 되었으니 후일 함께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은 말을 꺼내면 꼭 실천에 옮기는 남편이라 할 것 아니오.] 

 

황용은 이 말을 듣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분명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그 꽃배에 기묘한 함정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능력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지금쯤은 그 세 사람이 벌써 독수에 걸렸을 것만 같았다. 놀랍고도 마음이 아파 즉시 부친을 붙들고 세 사람을 구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나 놀란 나머지 사지에 맥이 탁 풀려 발걸음이 떼어지지도 않았고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황약사는 벌써 묘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황용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아도 다른 묘안이 없었다. 

(곽정 오빠를 구하러 가야 한다. 구하지 못하면 나도 함께 죽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께 떼를 써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즉시 묘지 밖으로 나와 해변으로 달려가 잠든 사공을 깨워 배를 출범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한 필의 말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동시에 황약사가 부는 퉁소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황용이 언덕으로 올라가 바라다보니 곽정의 홍마가 달빛 아래 달려오고 있었다. 

(이 망망한 바다 위에 곽정 오빠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찾는담? 홍마가 영리하지만 육지라면 몰라도 바다에서 무슨 도움이 되랴?) 

 

第 四十 章. 해상에서의 일전 

이때 홍칠공과 주백통, 곽정 등이 선창을 뛰쳐나오니 물은 벌써 정강이까지 올라와 찼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셋이 모두 출중한 무공을 지닌 사람들이라 즉시 발끝에 힘을 주고 돛대 위로 뛰어올랐다. 홍칠공은 그 중에도 두 손에 2명의 벙어리 사공의 덜미를 잡은 채 올라와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갑판 위로 파도가 넘실거리며 해수가 선체로 몰려들어 온다. 

 

[노규화! 황노사 솜씨가 정말 훌륭하군요. 이 배를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글쎄 나도 모르겠군요. 곽정아, 돛대를 잘 잡아라. 놓치지 말고.....] 

 

주백통이 묻는 말에 홍칠공은 이렇게 대답하며, 곽정에게 조심하라고 당부를 한다. 곽정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와장창 소리가 나며 배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2명의 사공이 놀라 돛대를 잡았던 손을 놓치면서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여보 노완동, 헤엄칠 줄 아오?] 

 

홍칠공이 묻는 말에 주백통이 웃는다. 

 

[억지로 해 봅시다 그려.....] 

 

뒤에 뭐라고 하는 말이 해풍에 날려 들리지도 않았다. 이때 돛대는 점점 기울어 곧 물 속에 누울 것만 같았다. 

 

[곽정아, 돛대가 배에 닿으면 우리 힘을 합쳐 부러뜨리자. 자, 어서......] 

 

두 사람은 동시에 돛대의 중앙에 장력을 모았다. 제아무리 튼튼한 돛대라지만 홍칠공과 곽정의 장력을 당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지끈> 소리에 부러지고 둘은 그것을 껴안은 채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도화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라 사방은 산더미 같은 파도만 밀릴 뿐 육지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홍칠공은 큰일났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무공이 강해 봐야 먹을 것도 없이 열흘을 버티기가 어려운 것이다. 멀리 남쪽의 해상에서 하하거리는 너털웃음 소리가 들렸다. 주백통의 웃음 소리가 분명하다. 

 

[곽정아, 우리 저 쪽으로 가자.] 

 

둘은 한 손에 부러진 돛대를 잡은 채 손을 허우적거렸다. 죽을 힘을 다해 앞을 향해 저어 나가면 산 같은 파도에 밀려 다시 제자리로 밀려오곤 했다. 홍칠공이 단전에 기(氣)를 모아 외친다. 

 

[노완동, 우리 여기 있소!] 

 

그의 내공은 과연 심오했다. 바다 위에서 해풍이 포효하고 파도 소리가 귀를 찢는 듯한데도 그의 목소리는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잠시 후 주백통이 의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노완동, 물 속에 빠진 개가 되고 말았소.] 

[이건 소금물에 빠진 개요.] 

 

곽정은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위급한데도 농담을 할 여유가 있다니 과연 명실 상부한 노완동이다. 세 사람이 동시에 바다에 빠졌는데도 파도에 밀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리나 서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천신 만고 고생을 하다가 반 시간 후에 겨우 함께 모일 수 있었다. 

홍칠공과 곽정은 주백통을 보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두 발 밑에 돛을 매는 끈을 이용하여 널빤지를 묶어 맨 채 상승의 경공으로 물 위를 걸어온 것이다. 파도가 크기 때문에 몸이 파도를 따라 출렁거리고 있었다. 전진 후퇴만 곤란할 뿐 파도를 타는 재미에 팔려 눈앞의 위험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곽정이 사방을 휘둘러보았지만 타고 온 배나 사공들은 벌써 물속에 수장을 지낸 뒤라 아무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백통이 당황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쿠, 이것 야단났군!] 

[왜요?] 

 

홍칠공과 곽정이 동시에 물었다.  

 

[상어야! 아주 큰 상어떼야.] 

 

주백통은 손끝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곽정은 사막에서 자랐기 때문에 상어가 뭔지 모른다. 고개를 돌려 홍칠공을 바라다보니 표정이 이상하다. 도대체 상어가 어떤 괴물이길래 평소 태연 자약하던 사부나 주대형이 저렇게 놀랄까? 

홍칠공이 장력을 기울여 돛대의 끝을 비스듬히 갈겼다. 나무토막이 몽둥이처럼 잘려 나간 것을 주워 들고 곽정에게 던지려고 했다. 그런데 해면의 흰 안개 가운데서 화다닥 소리를 내며 커다란 고기 한 마리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톱날 같은 이빨을 햇빛에 반짝 드러내고 다시 물 속으로 사라진다. 홍칠공이 몽둥이를 곽정에게 던졌다. 

 

[상어의 정수리를 후려쳐야 한다!] 

 

곽정은 품속을 더듬어 비수를 꺼내 들었다. 

 

[제게 비수가 있어요.] 

 

몽둥이를 멀찍이 집어던지자 주백통이 받았다. 이때 벌써 네댓 마리의 상어떼가 그를 둘러쌌다. 주백통이 허리를 굽히고 한 마리의 골통을 <탁> 내리쳤다. 골통이 터지며 피가 흘렀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떼가 동시에 대들었다. 

곽정이 해면을 보니 엎치락뒤치락하는 상어가 도시 몇천 마리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한 입씩 죽은 상어의 고기를 덩어리로 찢어 삼키는 이빨이 무서워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갑자기 발 아래를 뭔가가 건드리는 감촉을 느끼며 발을 움츠렸다. 

몸이 파도에 밀려 흔들리는데 한 마리의 상어가 수면 위로 불쑥 솟구쳐 올라왔다. 비수는 금과 옥도 쪼개던 날카로운 것이다. 푹하고 찌르자 상어 머리에 구멍이 뚫리고 선혈이 낭자하게 수면을 물들었다. 상어떼가 몰려들어 물고 찢는 수라장이 순식간에 벌이진 것이다. 

 

세 사람의 무공이 탁월하여 상어떼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동서로 번쩍이며 손을 쓸 때마다 한 마리씩의 상어를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다. 상어의 몸에서 피만 보이면 다른 상어들이 벌처럼 대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골만 앙상하게 남아 가라앉는 것이다. 세 사람은 무예가 출중하고 담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와 같은 광경을 보며 송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상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은 상어를 모조리 다 없앨 재주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싸우는데까지 싸우며 버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 순간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겨를도 없다. 셋이 모두 장풍과 비수, 주먹과 몽둥이로 치고받을 뿐이다. 한 시간 동안에 벌써 2백여 마리의 상어가 죽었다. 그러나 해면에는 안개가 뽀얗게 일어나며 해는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노규화, 곽정 아우, 해가 저물면 우리도 저렇게 한 조각 한 조각 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겠는걸. 우리 내기할까? 누가 먼저 고기에게 먹히나?] 

[먼저 먹히는 사람이 이기는게요? 지는게요?] 

[물론 지는 거지요.] 

[아이구, 그럼 내가 차라리 지는 걸로 하고 맙시다.] 

 

홍칠공이 이렇게 응수를 하면서 손을 뒤집어 신룡파미의 재주로 큰 상어의 옆구리를 쳤다. 그 상어는 어찌나 큰지 2백여 근이 넘을 것만 같았다. 홍칠공이 휘두른 장력을 따라 해면 위를 날아 반공에서 두 번이나 재주를 넘고 수면 위로 떨어진다. 풍덩 물방울이 하늘 높이 올랐다 떨어지고 고기는 뱃가죽을 하늘로 향한 

채 죽었다. 

 

[멋있는 장법이오! 어디 한번 내기를 할 거요, 아니면 그만둘거요?] 

 

주백통은 찬사를 보내면서도 여전히 장난질이다. 

 

[난 그만 둘라오.] 

 

주백통이 껄껄 웃으며 곽정에게 묻는다.  

 

[아우, 무섭지 않은가?] 

 

곽정은 정말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보면 싸울수록 더욱 침착해지는 듯했다. 생사의 기로에 있으면서도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이것은 보통의 여유가 아니다. 새로운 정신과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치음에는 무섭더니 지금은 괜찮아요.] 

 

갑자기 한 마리의 커다란 상어가 지느러미를 꿈틀거리며 곽정을 향해 대들었다. 

곽정은 흠칫 놀라 몸을 한쪽으로 피하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적을 유인하기 위한 허초(虛招)였다. 그 상어는 과연 유인한 그대로 상반신을 수면으로 솟구치며 나는 듯 그의 왼손을 물려고 대들었다. 곽정은 오른손의 비수를 들어 상어의 목을 찔렀다. 상어가 위로 솟구치는 바람에 비수가 뱃가죽에 긴 금을 그린 것이다. 피가 샘처럼 솟구쳐 나오며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이때 주백통과 홍칠공도 각자 한 마리씩의 상어를 잡았다. 주백통은 황약사의 장력에 얻어맞은 후 채 치유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싸우는 동안 다시 가슴의 상처가 아프기 시작했다. 

 

[노규화, 곽정 아우, 내 먼저 실례를 해야 할까 봐. 고기 뱃속에 먼저 들어가오.]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멀리서 횐 돛을 높이 단 배 한 척이 파도를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홍칠공도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돌리며 달려드는 상어를 피하다가 오는 배를 발견했다. 구양봉이 탄 그 배였던 것이다. 

세 사람은 배가 오는 것을 보자 더욱 신나게 싸운다. 곽정은 주백통 옆으로 다가가서 달려드는 상어를 물리친다. 한 끼의 밥을 먹을 시간이 지났을까? 큰 배가 이르러 작은 배 두 척을 내리고 세 사람을 구출해 올렸다. 주백통은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도 여전히 웃고 떠들며 상어떼를 향해 욕지거리를 했다. 구양봉과 구양공자가 큰 배의 갑판에 서서 맞으면서도 시선은 바다 위에 꿈틀거리고 있는 상어떼를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다보았다. 

구양공자는 수하의 사공을 시켜 쇠고기를 미끼로 상어를 낚아올리게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7,8마리를 낚아 올렸다. 홍칠공이 상어를 가리키면서 웃는다. 

 

[우리를 먹지 못했으니 이젠 우리가 네놈들을 먹을 차례로구나.] 

[제게 묘안이 있습니다. 홍선배님의 분풀이를 대신 해 드리지요.] 

 

구양공자가 이렇게 웃으며 말을 하고 아랫사람에게 명령하여 양쪽 끝이 뾰족한 몽둥이를 가져오게 했다. 철장으로 상어의 입을 벌리게 한 뒤 그 몽둥이를 아랫턱과 입천정 사이에 버텨 놓은 뒤에 다시 산 상어를 물 속에 집어던졌다. 구양공자가 의기 양양해서 웃는다. 

 

[먹을 것을 영원히 못 먹게 한 거예요. 한 열흘 버틸 테지만 쉽게 죽지도 못할 테니까요.] 

 

곽정은 방법이 너무 악랄하다고 생각했다. 산 채로 굶어 죽게 내버리는 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여보, 이렇게 악독한 방법을 쓰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단 말이군 그래? 부전 자전이란 말이 있더니 독숙(毒叔)에 독질(毒姪)이구먼!] 

 

주백통은 여전히 껄껄거렸다. 

서독인 구양봉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악랄하다고 욕을 해도 전연 개의치 않는 인물이다. 오히려 내심으로는 그것을 흐뭇하게 여겼다. 주백통의 말을 듣고도 가벼운 미소만 날린다. 

 

[노완동, 조그만 장난을 가지고 뭘 그러오? 이 노독물의 재주에 비한다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오. 망신들 세 사람이 하잘것 없는 상어에 쫓겨 숨을 헐떡거렸으니 이건 아무것도 아니잖소?] 

[노독물, 큰소리 그만 치시오. 신통(神通)을 발휘해서 바다의 상어를 있는 대로 다 없앤다면 이 노완동, 고개를 숙이고 삼백 번이라도 할아버지라 부르겠소.] 

[할아버지라니? 그 무슨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시오? 믿지 못하신다면 내기라도 합시다.] 

[내기라면 얼마든지 좋소. 목숨이라도 걸어 놓고 합시다 그려.] 

 

홍칠공도 마음속으로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수천 수만 마리의 상어를 어떻게 처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구양봉은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목숨을 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만약 내가 이기면 일이나 한가지 부탁할 테니 물리치지 마시오. 그러나 내가 지면 어려운 심부름이나 하나 시키면 어떻겠소?] 

[아무렇게나 합시다.] 

 

구양봉이 홍칠공을 바라다본다. 

 

[그럼, 홍형께서 보증인이 되어 주시오?] 

 

홍칠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만약 이긴 쪽에서 시킨 일을 진 쪽에서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아, 그럼 바다에 던져 상어밥을 만들지 뭘 그러오?] 

 

주백통이 하는 말이다. 구양봉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 말 없이 수하의 하인을 시켜 작은 술잔을 가져오게 했다. 그는 오른손의 두 손가락을 뻗어 지팡이를 둘둘 감고 있는 괴상한 뱀의 목을 눌렀다. 뱀이 입을 벌리자 날카로운 이빨 끝에서 독액이 뿜어나왔다. 구양봉이 술잔을 갖다 대자 묵즙같이 까아만 독액이 술잔에 반이나 찬다. 그는 그 뱀을 손에서 풀어 주고 다른 뱀 한 마리의 독액을 받아 잔을 채웠다. 

 

두 마리의 뱀은 독액을 토하고 탈진했는지 꼼짝도 못하고 그냥 지팡이에 서린 채 가만히 있었다. 구양봉이 다시 사람을 시켜 한 마리 상어를 낚아 올리게 했다. 낚아 올린 상어를 갑판 위에 놓고 상어의 입술을 잡은 채 치켜들면서 왼발로 아랫입술을 눌렀다. 상어의 길이가 2장(丈)이 넘었지만 이렇게 되자 그 큰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꼭 비수를 닮았다. 구양봉이 술잔에 가득 찬 독액을 상어의 입에 흘려 넣고 손바닥으로 배를 탁 치자 수백 근이 넘는 큰 상어가 공중을 날다가 풍덩 바다 속에 빠졌다. 

 

[저걸 좀 보시오.] 

 

구양봉이 바다를 가리킨다. 괴사의 독액을 마신 상어가 하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죽어 있고, 7,8마리의 상어가 대들어 물어뜯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은 상어는 앙상한 뼈만 남긴 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상한 것은 죽은 상어의 고기를 뜯어먹은 7,8마리의 상어도 잠시 후에 죽어 하얗게 물 위에 떠오른 것이다. 상어떼가 대들어 계속 물어뜯었다. 한 마리가 열 마리로, 열 마리가 백 마리로, 백 마리가 천 마리로,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해면은 온통 상어의 시체로 덮였다. 얼마 남지 않은 상어도 계속해서 죽은 상어의 고기를 물어뜯다가 잠시 후에는 모조리 다 죽어 쓰러지고 말았다. 홍칠공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노독물! 노독물 당신의 독계(毒計)도 악독하지만 뱀 두 마리의 독즙도 여간 무서운 게 아니로군요.] 

 

구양봉은 주백통을 바라다보며 득의 만면한 표정이다. 

주백통은 어쩔 줄을 몰라 자기 수염을 잡아뜯고 있었다. 못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다보니 죽은 상어의 하얀 뱃가죽만 파도에 밀려 출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구양형,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는데 좀 여쭈어 보고 싶소.] 

 

홍칠공이 구양봉을 향해 묻는 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한 잔의 독즙이 제아무리 극독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 수천 수만 마리의 상어를 몰살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독즙의 독성은 아주 특이합니다. 어떤 피고 독즙에 섞이기만 하면 그 피는 독즙으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독액이 겨우 한 잔밖에 되지 않지만 한 마리의 상어가 마시면 그 상어의 몸에 있는 피는 모두 독액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한없이 퍼져 나가기만 할뿐이지요.] 

[빨리 여기를 떠납시다. 여긴 독기가 너무 많아요.] 

 

홍칠공의 재촉하는 말에 구양봉이 명령을 내린다. 전돛(前帆)이며 주돛(主帆), 삼각돛을 일제히 올리고 남풍을 받아 일로 북행을 시작했다. 주백통이 먼저 말을 꺼냈다. 

 

[노독물, 당신 수완이 정말 대단하오. 그래 무슨 일을 시킬 것인지 말을 해 보구료.] 

[세 분이 우선 선실로 들어가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좀 쉬신 뒤에 서서히 얘기를 합시다.] 

[안 돼요. 그건 안 돼! 지금 여기서 당장 말하시오.] 

 

주백통이 조급하게 대들자 구양봉은 여유 만만하게 웃는다. 

 

[그러시다면 백통형은 나를 따라오시오.] 

 

홍칠공과 곽정은 구양봉 숙질이 주백통을 데리고 뒤에 있는 선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다른 선실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4명의 흰 옷 입은 소녀가 시중을 들자 홍칠공은 흐뭇하다는 듯 웃는다. 

 

[노규화, 평생 이런 호강은 처음인걸.] 

 

위 아래 옷을 벗자 소녀 하나가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다. 곽정은 얼굴을 붉힌 채 옷 벗을 생각을 못했다. 

 

[뭐가 무서워 그러느냐? 잡아먹힐까 봐 걱정이 되느냐?] 

 

홍칠공이 놀리는 말을 듣고 2명의 소녀가 대들어 허리띠를 풀려 했다. 곽정은 급히 신발과 외투를 벗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내복을 벗었다. 홍칠공이 껄껄 웃자 4명의 소녀도 낄낄거린다. 

옷을 다 갈아입자 다른 2명의 소녀가 쟁반에 밥과 안주 등을 들고 선실로 들어섰다. 

 

[저희들 나으리께서 요기나 하시라고.] 

 

곽정은 하루 종일 피곤하게 지냈고 배도 몹시 고팠다. 의자를 끌어다 홍칠공을 앉게 하고 식사를 할 준비를 했다. 홍칠공이 몇 명의 소녀들을 향해 손짓을 한다. 

 

[아가씨들은 좀 나가 있지. 이 노규화, 미모의 아가씨들이 옆에 있으면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단 말야] 

 

소녀들이 웃으며 선실 밖으로 나가며 가볍게 문을 닫자 홍칠공은 반찬과 술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말아 본다. 

 

[반찬은 먹지 말라구. 노독물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냥 백반만 먹게.] 

 

등에 맨 호로병을 내려 마개를 열고 꿀떡꿀떡 술 두 모금을 마시고 곽정과 함께 밥만을 먹은 뒤에 반찬은 모두 선실 바닥에 버렸다. 

 

[주백통 형님에게 무슨 일을 하라고 했을까요?] 

 

곽정이 소곤거리듯 조용히 물었다. 

 

[결코 좋은 일은 아닐 테지.] 

 

이때 선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흰 옷의 소녀가 들어섰다. 

 

[주백통 어른께서 곽도련님께 하실 말씀이 계시다고 오시랍니다.] 

 

곽정은 사부를 한 번 바라다본 뒤 소녀의 뒤를 따라 선실을 벗어나 좌현(左舷)으로 해서 뒤쪽으로 갔다. 이때 풍랑은 점점더 거세지고 그 큰 배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곽정은 뱃전을 조용히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만 보고도 무공의 기초가 꽤 든든함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뒤에 있는 선실의 문을 가볍게 세 차례나 두들기고 나서 문을 밀친다. 

 

[곽도련님 오셨습니다.] 

 

곽정이 선실로 들어서자 문이 뒤에서 잠겼다. 사방을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곽정이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왼쪽에 있는 쪽문을 밀치고 구양봉 숙질이 불쑥 나타났다. 

 

[주백통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구양봉이 손을 등뒤로 돌려 쪽문을 잠그고 한 발짝 나서며 손을 뻗어 곽정의 왼팔 맥문을 틀어잡는다. 곽정은 아무 방비도 없이 멍하니 있다가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워낙 구양봉의 솜씨가 전광석화처럼 빨라 미처 손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잡힌 팔이 뻣뻣해지면서 전신을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구양공자도 신속하게 숙부의 몸놀림을 주시하고 있다가 벽에 걸린 장검을 빼고 끝을 곽정의 등에 댔다. 곽정은 어리둥절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도대체 그들 숙질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양봉이 냉소를 꿀꺽 삼킨다. 

 

[노완동과 내기를 해서 내가 이겼다.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하겠다고 말해놓고선 하지 않는다.] 

[네?] 

[내 구음진경을 외서 쓰라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우긴다.] 

 

(주백통 형님이 구음진경의 내용을 알려 줄 리 있으랴?) 

곽정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주백통 형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구양봉이 차디찬 미소를 짓는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바다에 던져 상어밥이 되게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곽정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럼....., 그는......] 

 

선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다. 구양봉이 잡은 팔에 힘을 주고 안으로 나꿔챘다. 구양공자가 손에 가볍게 힘을 주자 칼끝이 옷깃을 찢고 그의 등뒤에 간질간질하게 와 닿았다. 구양봉이 책상 위의 벼루와 먹을 가리켰다. 

 

[지금 세상에서 다만 너 하나만이 진경의 전문을 알고 있을 뿐이다. 빨리 써라.] 

 

곽정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자 구양공자가 얄궂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방금 너와 노규화가 먹은 술과 반찬에는 독약이 들어 있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열 두시간 내에 독성이 퍼져 상어처럼 죽게 된다. 잘 쓰기만 하면 네 사부와 네 목숨만은 살려 주마.] 

 

곽정은 마음속으로 홍칠공의 비상한 예측에 감탄했다. 

(사부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벌써 걸려들었겠구나!) 

구양봉은 묵묵 부답하고 있는 곽정을 쏘아보며 여전히 차디차게 웃고 있었다. 

 

[네가 경문을 다 외고 있으니 빨리 쓰도록 해라. 쓰기만 하면 네 털끝도 건드리지 않겠다. 무얼 우물거리고 있느냐?] 

[당신들이 벌써 내 의형을 살해했으니 우린 철천지 원수요. 죽이겠으면 마음대로 죽일 일이지 뭘 조르고 있소? 쓸데없는 망상은 걷어치우시오.] 

 

곽정의 단호한 말에 구양봉이 코방귀를 뀐다. 

 

[아니,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고집은 세구나!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좋다만 네 사부의 목숨조차 구하지 않겠느냐?] 

 

곽정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 <와지끈> 문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뒤에 있는 문짝이 부서져 나가며 한 가닥 물길이 쏟아져 구양봉의 얼굴을 때렸다. 구양봉은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벌써 홍칠공이 나타난 줄 알았다. 홍칠공이 양손에 물통을 들고 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홍칠공의 무공이 세고 보면 그가 뿌리는 물줄기의 힘도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니다. 웬만한 사람이 걸렸다면 물벼락을 맞고 쓰러졌을 것이다. 구양봉은 두 발로 바닥을 찍으며 곽정을 잡은 채 왼쪽으로 네 발짝 피했다. 여전히 곽정의 맥문을 꽉 틀어 쥔 채다. 선실 내에 물이 사방으로 튀기자 구양공자가 놀라 비명을 지르는 사이 홍칠공이 대들어 뒷덜미를 잡아챘다. 홍칠공이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노독물, 아무리 애를 써 봐야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 걸 어떻게 하겠소?] 

 

구양봉은 조카가 벌써 그의 수중에 걸려든 것을 보고 억지로 웃는다. 

 

[홍형, 내 무공을 시험해 보자는 게요? 우리가 육지에 상륙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텐데요?] 

[아니, 내 제자하고 그렇게 친한 체 해 뭘하오? 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니 말이오.] 

[내 노완동과 내기를 해서 이기지 않았소? 홍형이 보증인이 되셨는데 노완동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오.] 

[그럼 안 되지. 그런데 노완동은?] 

 

홍칠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곽정은 몹시 괴로왔다. 

 

[주백통 형님은 벌써 바다 속에 던져졌대요.] 

 

홍칠공이 깜짝 놀라며 구양공자를 잡은 채 선창으로 달려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파도에 밀린 거품만 넘실거릴 뿐 주백통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구양봉이 곽정의 손을 잡은 채 갑판으로 걸어나가 팔을 놓는다. 

 

[곽정 도령, 무공이 아직도 멀었군 그래. 아무렇게나 잡았는데도 꼼짝을 못하다니 사부님께 한 십 년 더 배운 뒤에 강호에 뛰어들지 그래.] 

 

곽정은 주백통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그가 하는 조롱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돛대 위로 기어올라가 사방을 살펴보았다. 홍칠공은 구양공자의 뒷덜미를 잡은 채 구양봉을 향해 집어던졌다. 

 

[노독물, 당신이 노완동을 죽였으니 전진교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요. 당신 숙질의 무공이 제아무리 탁월하다 하더라도 전진칠자의 협공을 막아 낼 수 있겠소?] 

 

구양공자는 몸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손을 뻗어 받치며 일어나 섰다. 

(빌어먹을 놈의 늙은 거지, 열 두 시간 안에 내 앞에서 벌벌 기는 꼴을 봐야지.) 

그러나 구양봉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는다. 

 

[그땐 보증인도 할 말이 있을 테지요.] 

[물론이오. 그때 가서 또 한 번 봅시다 그려.] 

 

구양봉이 두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총총 선실로 들어갔다. 곽정은 아무리 사방을 살펴보아도 눈에 걸리는 게 없다. 그제야 비로소 갑판으로 내려서서 구양봉이 진경을 쓰라고 욱박지르던 얘기를 사부님에게 했다. 홍칠공은 고개만 끄덕거릴 뿐 아무말이 없다. 

(노독물은 한번 눈독을 들이면 끝장을 내고 마는 성미인데 이것 큰일났구나. 진경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아무래도 곽정이 시달림을 받겠는걸.) 

타고 있는 배가 서쪽으로 달린다. 이틀만 지나면 육지에 당도하는 것이다. 그는 구양봉이 또 음식에 독약을 넣을까 두려워 손수 부엌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챙겨다 놓고 곽정과 더불어 배를 채운 뒤 쿨쿨 잠이 들었다. 

구양봉 숙질은 다음날 하오가 되어 14,5시간이 지나도록 홍칠공이나 곽정이 아무 동정도 없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을 했다. 구양봉은 그들이 독성이 발해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곽정이 죽었다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다. 살그머니 다가서서 문틈으로 살펴보니 두 사람이 얌전하게 앉아 한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노규화가 눈치를 챘거나 아니면 다른 해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군.) 

이렇게 판단한 구양봉은 다른 흉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홍칠공은 때마침 흥미진진하게 곽정을 향해 개방( 幇)의 방주(幇主)를 뽑는 규약을 들려주고 있었다. 

 

[애석한 것은 네가 거지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게야. 너같은 인품을 따를 사람이 없을 텐데 말이다. 다만 내 이 지팡이 하나만 네게 주면 너는 개방의 우두머리가 되는 건데.] 

 

재미있게 얘기를 주고받는데 선창의 벽에서 연장으로 탕탕 구멍을 뚫는 소리가 들렸다. 홍칠공이 벌떡 자리에서 튀어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이거 큰일났구나. 저 빌어먹을 녀석들이 배에 구멍을 뚫는구나.] 

 

선실 입구로 달려가서 곽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빨리 배 뒤에 있는 작은 배를 차지해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펑>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구멍이 뚫리고 들어오는 것은 바닷물이 아니라 수십 마리의 복사(輹蛇)였다. 

 

[노독물이 뱀으로 공격을 하는구나.] 

 

손을 번쩍 들어 강침을 던지니 수십 마리의 복사가 벽에 박혀 꿈틀거리다 그대로 뻗는다. 

(황용이 이 만천화우척금침(滿天花雨擲金針)의 재주를 부린다고는 하지만 사부님의 솜씨에 비한다면 아직도 멀었구나.) 

곽정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홍칠공은 연방 강침을 던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들어오는 복사는 계속해서 벽에 박혔다. 그러나 뱀을 모는 피리 소리가 계속 들리며 구멍으로 들어오는 뱀의 숫자는 더욱 많아졌다. 

 

[노독물이 연공한 재주를 한 번 부릴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니 어차피 잘된 일이다.] 

 

손을 주머니에 넣어 한 움큼의 강침을 또 집어냈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는 이제 7,80개의 강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뱀은 계속해서 밀려드는데 당해 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조바심이 나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와당탕 소리가 나며 문짝이 넘어지고 강렬한 장풍이 등뒤에서 불었다. 

 

곽정은 사부의 옆에 서 있다가 불어오는 장풍의 강렬함을 느끼는 순간 미처 몸을 돌릴 새도 없이 쌍장을 들어 반격을 했다. 평생의 기력을 다해 겨우 막을 수 있는 억센 장풍이었다. 구양봉은 의외라는 듯 <잉> 소리를 내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비스듬히 장풍을 내려 쪼갰다. 곽정은 무리를 해서 막아 봐야 소용이 없다고 짐작했다. 즉시 왼손을 들어올리며 오른손으로 적의 측면을 공격하면서 구양봉의 왼쪽 갈비를 위협했다. 구양봉의 재주도 범상한 것은 아니다. 어깨를 낮추며 곽정의 팔을 내려친다. 곽정은 위험한 입장에서 구양봉을 입구에서 물리치지 않으면 안된다. 독사가 계속 밀려들어오는 날이면 자기와 사부는 끝장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왼손으로는 결사적으로 구양봉의 초술(招術)을 막아 가면서 오른손은 계속 공격을 시도했다. 

 

좌당 우진(左撞右進) 좌허 우실(左虛右實), 곽정의 이 권술(拳術)은 기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구양봉으로서도 좌우 분심(左右分心)으로 박격(搏擊)하는 이런 권로를 본 적이 없었다. 멍해 있는 동안에 곽정에게 밀려 수세에 몰렸다. 실지의 무공으로 말한다면 곽정이 양손을 나누어 쓰는 권법을 이용해 2대 1로 대든다 하더라도 구양봉의 적수는 아니다. 다만 너무나 이상한 공격에 구양봉이 주춤하는 사이 잠시 우위를 차지했을 뿐이다. 

서독인 구양봉은 수십 년 동안 쟁쟁한 명성을 날린 무학의 대사이다. 잠시 동안 주춤했을 뿐이지 즉시 곽정의 분심 합격(分心合擊)의 재주에 대항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쌍장을 동시에 뻗어 밀었다. 

 

[어, 묘하다 묘해. 노독물, 그래 내 제자 하나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영웅호걸이라고 떠들고 야단이오.] 

 

쉭 소리와 함께 비룡재천(飛龍在天)의 재주를 부려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날아가며 앞을 막고 선 구양공자를 발길로 걷어차자 땅재주를 넘고 나뒹구는 동시에 팔꿈치로는 구양봉의 등을 <꽝>하고 찍었다. 구양봉은 몸을 비스듬히 구부려 피하며 반격을 했다. 곽정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부님과 구양봉의 실력은 막상 막하요, 구양공자는 이젠 내 적수가 아닌데다가 부상을 입고 미처 완치도 못했으니 2대 2라 하지만 그래도 우리 측이 유리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주먹과 발길질로 폭풍우처럼 대들어 구양봉을 공격했다. 홍칠공은 공격을 하면서도 계속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10여 마리의 복사가 곽정의 뒤로 접근하여 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곽정, 조심해.] 

 

손에 힘을 주어 구양봉의 공격 태세를 교란시키고 있었다. 구양봉은 앞뒤로 공격을 받아 꽤나 고전을 하는 듯했다. 몸을 한쪽으로 비켜서며 곽정이 빠져나가도록 한 뒤 홍칠공과 맞붙어 싸웠다. 1백여 마리의 복사가 벌써 갑판 위에까지 기어나왔다. 

 

[싸우겠으면 정정당당하게 우리와 싸울 일이지, 뱀까지 동원할 게 뭐요? 창피하지도 않소?] 

 

그러나 복사는 더욱더 접근해 왔다. 홍칠공은 오른손에 쥔 죽장을 들고 춤추듯 휘둘렀다. 10여 마리의 복사가 죽어 뻗은 것을 보면서 곽정의 손을 잡고 돛대를 향해 달렸다. 순간 구양봉은 당황했다. 

 

[야단났구나! 저들이 돛대 위로 뛰어오르면 곤란한데.] 

 

나는 듯 달려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홍칠공이 맹렬한 장풍을 두 번이나 날렸지만 구양봉이 주먹을 휘둘러 막았다. 곽정도 대들어 사부를 돕는다. 

 

[빨리 돛대 위로 올라가거라.] 

[내 구양공자를 때려 죽여 주백통 형님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어요.] 

[뱀이다! 뱀!] 

 

홍칠공의 당황한 부르짖음에 곽정이 보니 전후 좌우에서 독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더 싸울 용기가 나지 않는다. 손을 뒤집어 구양공자가 던진 은으로 만든 북(梭)을 받아 쥐고 몸을 1여 장이나 솟구치며 왼손으로 돛대의 기둥을 잡았다. 뒤에서 암기가 날아오는 바람소리를 의식하며 손에 받아쥐고 있던 암기를 던졌다. 땡그렁 소리를 내며 2개의 암기가 허공에서 부닥치며 불꽃을 튀기고 좌우로 날아 바다에 떨어졌다. 곽정이 두 손을 번갈아 놀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돛대의 중간까지 기어올라갔다. 

구양봉은 홍칠공까지 올라가려는 기미를 알아채고 더욱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홍칠공이 팽팽하게 맞설 수는 있었지만 틈을 보아 올라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곽정은 복사떼가 벌써 사부의 발 아래까지 기어온 것을 보고 위급한 나머지 큰소리를 지르며 두 발을 돛대 기둥에 댄 채 미끄러져 내려왔다. 

 

홍칠공은 왼발로 땅을 찍고 몸을 솟구치며 오른발로 구양봉의 면상을 걷어찼다. 곽정은 사부의 손에 든 지팡이를 잡고 위로 뛰어올랐다. 홍칠공의 몸이 한 마리 큰 새처럼 날아올라 돛폭을 잡고 대롱대롱 반공에 매달린 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되자 그들 둘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공격하는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구양봉은 쫓아 올라가 봐야 불리할 것을 알고 큰소리를 질렀다. 

 

[그럼 방법이 없을 줄 알고? 어림없는 소리, 여봐라! 배를 동쪽으로 돌려라.] 

 

돛이 옆으로 꺾이며 배는 동쪽을 향해 망망 대해로 질주했다. 돛대 기둥 아래는 독사가 득시글거렸다. 홍칠공은 돛대의 도리(桁)에 앉은 채 흥얼흥얼 장타령을 읊조리면서 득의 만면한 표정이었지만 내심으로는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 돛대 위에 얼마나 있어야 될까? 노독물이 돛대를 자른다 해도 뱀이 있으니 뛰어내릴 수도 없는 일이요, 우리가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으니 도대체 대소변을 어디서 본담. 옳지, 오줌이나 싸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즉시 바지를 풀고 아래를 향해 오줌을 갈겼다. 

 

[곽정아, 저것들에게 오줌이나 먹이자.] 

 

곽정도 어린 나이라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지요.] 

 

사제 둘이 동시에 오줌을 갈겼다. 

 

[야, 이 뱀들을 거둬라.] 

 

구양봉이 이렇게 외침과 동시에 뒤로 몇 발짝 피했다. 워낙 구양봉의 몸놀림이 날래고 보니 오줌을 싸 봐야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구양공자는 숙부의 황급한 외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얼굴을 드는 순간 그만 뜨뜻한 오줌 줄기에 맞고 말았다. 그는 평소 정결한 것을 좋아했다. 몹시 화가 났지만 뱀이 사람의 오줌을 무서워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나무 피리 소리가 들리며 뱀떼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돛대 바로 밑에 있던 뱀들은 뜨거운 오줌에 맞았다. 구양봉이 기르는 이 독사들은 모두 서역의 백타산(白駝山) 사곡(蛇谷) 가운데서 서로 교배시켜 얻은 것들이다. 독성이 무시무시한 반면, 사람이나 짐승의 오줌만은 질색이다. 오줌에 맞은 10여 마리의 독사가 쓰러져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며 서로 물어뜯는 바람에 뱀을 몰던 사람들은 속수 무책이다. 홍칠공과 곽정은 쩔쩔매고 있는 그들이 너무나 재미있어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주백통 형님이 이걸 보신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러나 이 망망 대해에 떨어지셨으니 무슨 일이 없을까?) 

두 시간이 지나자 날은 완전히 어두웠다. 구양봉은 선상의 모든 사람을 갑판으로 불러 먹고 마시고 야단들이다. 술 냄새, 고기 냄새가 물씬물씬 풍겼다. 홍칠공은 음식을 탐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라 견딜 재간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호로병에 든 술을 다 비웠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번갈아 밤을 지켰다. 갑판 위에서는 수십 명이 횃불을 밝히고 그들을 지켰다. 홍칠공은 구양봉의 18대 조상까지 들먹이며 있는 욕 없는 욕 마구 퍼붓다가 입이 말랐는지 그냥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구양봉은 사람을 시켜 돛대 아래서 외치게 했다. 

 

[홍방주, 곽도령, 우리 구양 나리께서 푸짐한 술상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시니 얼른 내려오세요.] 

[구양봉을 불러 오우. 오줌이나 대접하게.] 

 

오히려 곽정이 화를 벌컥 내며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돛대 아래서는 다시 잔치상이 벌어겼다. 음식에서는 김과 냄새가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잔치상 옆에는 2개의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마치 홍칠공과 곽정이 내려와 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홍칠공은 또 계속해서 욕만 퍼부었다. 

사흘이 되자 둘은 이제 배가 고파 머리까지 어질어질했다. 

 

[내 그 여자 제자만 여기 있대도 문제가 없을 텐데....... 워낙 영리하니까 저놈의 노독물에게 응수할 방법도 생각해 낼 수 있었을 게야. 우린 눈이나 멀거니 뜨고 침이나 흘릴 수밖에 별 도리가 없구나.] 

 

홍칠공이 황용의 얘기를 꺼내자 곽정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서쪽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뭔가 먼 곳에 하얀 점이 2개 시야에 들어왔다. 치음에는 흰 구름 조각인가 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점점 커지며 가까와졌다. 꾸르륵 꾸르륵 두 마리의 흰 수리다. 

곽정은 반가왔다. 왼손의 식지를 구부려 입 안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두 마리의 흰 수리가 배 위를 두어 바퀴 선회하다가 곽정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몽고의 사막에서 기르던 그 흰 수리다. 

 

[어쩌면 황용이 배를 타고 오면서 우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니?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곽정은 비수를 뽑아 들고 범포(帆布)를 두 조각 찢어 냈다. 그 위에 비수 끝으로 유난(有難)이란 두 글자를 새기고 그 밑에 호로병을 그린 뒤에 그것을 수리의 발목에 매었다. 

 

[빨리빨리 날아가 황소저를 모시고 오너라.] 

 

두 마리의 흰 수리도 영감이 있는지 곽정의 손등에 부리를 비비다가 나래를 펴고 하늘 높이 날아 배 위를 선회한 뒤에 서녘 하늘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第 四十一 章. 어두운 밤의 흉계 

 

 

한 쌍의 흰 수리가 날아간 뒤 미처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구양봉은 또다시 돛대 아래에 주안상을 차려 놓고 홍칠공과 곽정에게 내려와 먹으라고 권했다. 

 

[주색 재기(酒色財氣)라는 네 글자 가운데 노규화는 술주자(酒) 하나밖에 모르는데 저자가 그걸 알고 나를 괴롭히는구나. 내 일생동안 외공(外功)만 익히느라고 정력(定力)이 좀 모자란단 말이다. 곽정아, 우리 내려가 저놈들 혼을 내 주고 다시 올라오도록 하자.] 

 

홍칠공이 웃으며 하는 말에 곽정은 반대했다. 

 

[흰 수리가 소식을 가지고 갔으니 무슨 변화가 있을 거예요. 잠시 더 기다려 보지요.] 

 

잠시 후 홍칠공이 또 웃으며 말문을 연다. 

 

[곽정아,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게 뭔지 알겠니?] 

[모르겠어요. 그게 뭔데요?] 

[내 언젠가 한번 북방의 눈구덩이 속에서 8일간 굶은 일이 있었다. 다람쥐라도 잡아먹을까 했지만 보이지 않고 나무껍질이나 벗겨 먹을래도 그것조차 없었다. 그래서 눈구덩이 속을 여기저기 파다가 산 벌레를 한 마리 잡았단 말야. 그 벌레 때문에 하루를 더 견딜 수 있었지. 다음날은 늑대를 한 마리 잡아 잘 먹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무슨 벌레였는데요?] 

[바퀴벌레(蟬螂), 아주 살찐 놈이었네.] 

 

곽정은 <욱> 하고 구토증을 일으켰다. 홍칠공은 껄껄 웃는다. 

천하에서 제일 더럽고 추한 것을 골라 말함으로써 밑에서 올라오는 술과 고기 냄새의 유혹을 이기겠다는 뜻이었다. 

 

[곽정아, 지금 여기 바퀴벌레가 있다면 나는 먹겠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더러운 게 하나 있는데 그건 차라리 내 다리를 뜯어먹으면 먹었지 못 먹겠다. 그게 뭔지 알겠느냐?] 

 

곽정이 고개를 흔들다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었다. 

 

[알겠어요. 고약한 냄새나는 오줌요.] 

 

홍칠공이 고개를 흔든다. 

 

[그것보다 더 더럽다.] 

 

곽정이 몇 가지 더 말해 보았지만 맞히지 못했다. 

 

[그건 내가 말해 줄께, 천하에 가장 더러운 물건은 서독인 구양봉이야.] 

[그래요, 그래요!] 

 

홍칠공과 곽정이 즐겁다는 듯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의 날씨는 무덥기 짝이 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도 않았다. 돛이 축 늘어진 채 어찌나 늦은지 배가 바다 위에 정박해 있는 것 같았다. 배 위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연방 이마 위의 비지땀을 훔치고 있고 가끔 고기들이 펄쩍펄쩍 주면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 있을 뿐이었다. 홍칠공이 사방을 휘둘러보아도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레살레 흔든다. 

 

[날씨가 괴상한 데가 있구나.]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흘렸을까, 홍칠공은 갑자기 동남쪽 하늘에 나타난 한 줄기 검은 구름을 발견했다. 자기도 모르게 <아이쿠> 하는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러세요?] 

[괴상한 바람이 부는구나! 돛대 위가 안전하지 못한대 아래는 뱀이 득시글거리니 이걸 어떻게 한다?] 

 

침묵에 잠긴 채 아무 말이 없다가 혼자 중얼거린다. 

 

[한 배에 타고 있으니 이 역경을 피해 나갈 수 없는 신세, 하다 보면 함께 죽겠지!] 

 

홍칠공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친다. 폭에 걸린 줄들이 파르르 흔들렸다. 

 

[곽정아, 만약 이 돛대가 부러지거든 그냥 미끄러져 내려가라. 물 속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 

 

곽정은 이렇게 맑은 날씨에 무슨 변화가 갑자기 일어나랴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부의 말씀을 존중하는 그라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고개를 쳐들다 보니 짙고도 검은 구름이 동남쪽에서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괴상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에 있는 돛대가 우지끈 부러지면서 배가 번쩍 들리는가 싶더니 산더미 같은 파도가 갑판을 덮쳤다. 눈도 뜰 수 없고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곽정은 두 손과 발로 돛대를 잡은 채 버티고 있었다. 홍칠공이 내공을 집중하여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아, 빨리 밑으로 내려가.] 

 

손을 놓자 몸이 두어 장이나 미끄러져 내려왔다. 장풍과 산더미같은 파도에 돛폭 여러 개가 바람에 날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이때 갑판 위에 득시글거리던 뱀들도 파도에 밀려 깨끗이 쓸려 갔다. 키를 잡고 있던 타부(舵夫)는 부러져 내려온 돛대에 깔려 머리가 깨진 채 죽어 있었다. 배가 바다 위를 맴돌며 기우뚱거린다. 곧 침몰할 것 같았다. 

 

[곽정아, 빨리 키를 잡아라.] 

 

검은 구름이 낮게 머리 위에 깔리고 광풍은 미친 듯 불었다. 배위에 있는 나무토막이며 철기(鐵器) 등이 깨지고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곽정이 선미로 달려가며 고개를 숙여 날아오는 나무토막을 피하고 허리를 굽혀 키를 잡았다. 그는 육지에서 자라 배를 저어 본 일은 없었지만 무공을 익힌 몸이라 파도에 밀리면서도 키만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바람 소리는 계속해서 귀를 찢고 배는 쏜살처럼 앞을 향해 질주했다. 홍칠공은 돛대의 도리(桁)에 뛰어올라 돛폭을 거둬 내리려고 했다. 벌써부터 돛폭에 걸친 줄을 끊기는 했지만 돛폭이 바람을 받아 수천 근이 넘는 것 같았다. 홍칠공이 제아무리 힘이 세다고는 하지만 돛폭을 거둘 수가 없었다. 다만 <찍> 하는 소리와 함께 돛폭 한 쪽을 겨우 찢을 수 있었다. 이때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형, 우리 북개 서독이 함께 힘을 써 봅시다.] 

 

구양봉이 두 손으로 돛폭의 오른쪽을 잡고 홍칠공이 왼쪽을 잡고 함께 힘을 썼다. 

 

[자, 내려요!] 

 

두 사람의 무공은 과연 보통이 아니었다. 그 큰 돛폭이 두 사람의 힘에 의해 떨어져 내려왔다. 그러자 바람을 받던 힘이 약해졌다. 파도가 사납게 계속해서 밀려오기는 했지만 위기는 모면한 셈이다. 홍칠공과 구양봉이 다른 돛폭도 거둬 내렸다. 폭우의 빗방울이 콩보다 굵었다. 얼굴을 때리면 뜨끔뜨끔 아프기까지 했다. 둘 다 몸이 흠뻑 젖었고 날이 저물면서 그제야 바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여보 홍형, 당신의 제자가 키를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벌써 물 속에 빠져 죽을 뻔했소. 자 우리 한잔 들면서 몸이나 녹입시다. 내 만약 음식에 독약을 섞는다면 구양봉은 당신의 십팔대 손자요.] 

 

홍칠공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는다. 구양봉이 악랄하여 못돼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대의 종주(宗主)로 자처하는 인물이다. 자기가 한 말에는 책임을 질 줄 알았다. 독약을 넣지 않는다면 넣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공에게 키를 잡으라고 이르고 선실에 돌아와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 술잔을 들었다. 

홍칠공은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고 선실로 돌아와 오랜만에 기분좋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깊은 잠결 속에서 뱀떼가 기어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났다. 곽정도 이미 일어나 있다가 둘이 선실의 문을 밀치고 보니 뱀떼가 벌써 진을 치고 있었다. 구양공자가 그 뒤에 부채를 들고 서 있다가 웃는다. 

 

[홍선배님, 곽형, 숙부님께서 구음진경을 보고 싶다면서 분부를 내리신 것입니다. 결코 다른 뜻은 없습니다.] 

 

홍칠공이 낮은 소리로 욕지거리를 한다. 

 

[빌어먹을 녀석들 같으니라구.] 

 

그러다 무슨 꾀가 떠올랐는지 내색도 하지 않고 말을 꺼낸다. 

 

[자네 숙부의 잔꾀에 또 걸리고 말았으니 할 수 있나? 요구하는 대로 해 줄 수 밖에 없지. 우선 술과 고기나 들여보내고 그 얘기는 날이 밝거든 다시 꺼내세.] 

 

구양공자는 기쁜지 사람을 시켜 술과 안주를 차려 선실에 들여보냈다. 홍칠공이 선실의 문을 닫아걸고 꿀떡꿀떡 반 주전자의 술을 들이켠 뒤에 닭 반 마리를 찢어 입 안에 넣고 씹는다. 

 

[이 안주에 혹시 독약을 넣지 않았을까요?] 

[바보 같은 녀석, 아니 지금 구음진경을 보고 싶어 조갈이 나 있는데 그래 우리를 죽일 것 같으냐? 실컷 먹기나 하고 궁리하자.] 

 

곽정이 이렇게 물었지만 홍칠공은 태연 자약했다. 곽정은 옳은 말이라 여기고 자기도 밥을 네 그릇이나 비웠다. 홍칠공이 입언저리에 묻은 기름기를 소매로 훔치고 곽정의 귀에 입을 댄 채 속삭인다. 

 

[노독물이 구음진경을 요구하니 가짜로 하나 만들어 주렴.] 

 

곽정은 고게 무슨 말인지 몰라 다시 물었다. 

 

[가짜 구음진경이라니요?] 

[그래. 지금 세상에 너 한 사람만이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네 쓰고 싶은 대로 써 주란 말이다. 누가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기나 하겠느냐? 네가 경문 가운데의 문구를 뒤죽박죽 써 놓고 노독물에게 연공(練功)을 시키는 게야. 백 년을 배워도 소용이 없을게 아니냐?] 

 

곽정은 기뻤다. 

(옳지, 그렇게 하면 골탕을 먹겠구나.) 

 

[그 구양봉이 무학에 정통한데 속아 넘어갈까요? 그려다 들통이라도 나는 날이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럴듯하게 쓰란 말이다. 세 마디가 진짜라면 한 마디쯤은 가짜를 섞어야지 연공의 비결에 가서는 네 마음대로 증감을 시켜. 열 여덟 번 치라고 했거든 열 두 번을 치라고 하든지, 아니면 스물 네 번을 치라고 하든지 말야. 제아무리 노독물이 영리하다 하더라도 몰라보게 하란 말이다. 내 차라리 칠일 낮 칠일 밤 식사를 못 하고 술을 못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노독물이 가짜 구음진경을 가지고 연공을 익히는 꼴 좀 구경해야겠다.] 

 

여기까지 말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낄낄거린다. 

 

[그가 만약 가짜 구음진경으로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시일을 낭비할 뿐 아니라 잘못하다간 몸을 망치게 되거든요.] 

 

곽정이 웃으며 말하자 홍칠공도 따라 웃었다. 

 

[어떻게 고쳐 쓸까? 한 번 잘 생각해 보라구. 그가 의심만 하지 않으면 대사는 성공이니까.] 

 

곽정은 진경의 경문을 생각해 보며 어디를 어떻게 고칠까 궁리해 보았다. 그럴듯한 곳에 생각이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런 일은 황용이나 주백통 형님이 제일 좋아할 텐데....... 하나는 생이별을 하고 다른 하나는 사별을 해 놨으니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 만나게 돼야만 재미있는 이 일을 들려줄 텐데.) 

다음날 아침 홍칠공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큰 소리로 구양공자를 불렀다. 

 

[이 노규화의 무공은 일가를 이뤄 구음진경이 눈앞에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못돼먹은 소인배들이나 자기 무공이 신통치 않으니까 뭘 진경이 어쩌구 저쩌구 야단들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자네 그 숙부에게 말하게. 진경을 써 줄 테니 한번 고련을 해 보라구. 십 년 뒤에 다시 이 노규화와 대결해 보면 알테니까. 진경이 제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난 그까짓 거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단 말일세. 진경을 보고 배우면 나를 이길 것 같은 모양이지.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구 해.] 

 

구양봉은 선창 문 옆에 서서 홍칠공이 떠드는 소리를 분명히 다 들었다. 

(그럼 그렇지. 노규화 쓸데없는 자존심만 강했지 별 수 있나? 그렇지 않구서야 고분고분 진경을 내놓을 리 있나? 죽으면 죽었지 틀어쥐고 내놓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인데.) 

 

[홍선배님 말씀 어딘가 틀리셨습니다. 제 숙부님 무공은 지금 진경에 도달되어 있습니다. 홍선배님의 재주를 가지시고도 제 숙부님을 이기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또 구음진경을 배우시겠습니까? 숙부님이 늘 제게 말씀하시기를 구음진경은 허명뿐이라 진경 가운데의 허망한 곳을 지적하여 천하 호걸들에게 유명 무실한 물건임을 알릴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하셨답니다.] 

 

이 말을 들은 홍칠공이 앙천 대소를 한다. 

 

[야 거짓말도 꽤 잘하는구나! 곽정아. 경문을 써서 주렴. 만약 노독물이 구음진경 가운데 허망한 곳을 지적해 내기만 한다면 내 무릎 꿇고 절을 하겠다.] 

 

곽정이 대답하고 나서자 구양공자가 그를 큰 선실로 안내하고 지필묵을 내다가 옆에서 먹을 갈며 곽정이 붓 잡기를 기다렸다. 

곽정은 글을 얼마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글씨가 엉망이다. 또 어떻게 고칠까 생각을 해 가면서 쓰다 보니 꽤 더디기만 했다. 쓸 줄 모르는 글씨가 있을 때는 구양공자에게 물어 써야 했다. 점심 먹을 때까지 썼지만 상권 경서의 반밖에 쓰지 못했다. 구양봉은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고 곽정이 한 장을 쓰면 구양공자가 그것을 숙부에게 갖다 바치곤 했다. 

구양봉이 보니 뜻이 깊고 난해한데다 의미 심장한 것이었다. 일후 서역으로 가지고 가 서서히 읽어 나가면 설마하니 자기의 총명한 두뇌로 이해하지 못할 곳이 있으랴 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수십 년 동안의 심원을 달성한 것 같아 흐뭇했다. 곽정의 어수룩한 머리나 형편없는 글씨로 보더라도 그가 사부의 분부를 받아 경문의 글귀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내용을 수정해 놓았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가질 수가 없었다. 

 

곽정은 날이 어둡도록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하권의 경문도 이제 반 이상이나 쓴 셈이다. 그러나 구양봉은 그를 선실로 되돌려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 홍칠공이 생각을 바꾼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대부분의 경문이 손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푸짐한 주안상을 마련해 놓고 계속 쓰도록 했다. 

 

홍칠공은 술(戌)시가 지나고 해(亥)시가 되었는데도 곽정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만약 경문을 가짜로 썼다는 사실이 구양봉에게 발각되는 날에는 곽정은 끝장이 나는 것이다. 이때 갑판 위의 뱀떼는 다 물러가 있었다. 그래서 홍칠공은 슬그머니 선실의 문을 열어 보았다. 2명의 백의의 장한이 파수를 보고 있었다. 홍칠공은 왼손의 장풍을 돛폭을 향해 부르르 떨었다. 2명의 장한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자 홍칠공은 벌써 오른쪽으로 빠져 나온 후였다. 그의 몸놀림은 귀신이 곡할 정도로 빠른 것이다. 벌써 우현(右舷)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선실의 창문으로는 은은한 불빛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홍칠공이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곽정이 책상에 엎드린 채 글을 쓰고 있고, 2명의 흰 옷을 입은 소녀가 옆에서 차를 달이고 먹을 갈며 공손히 시중을 들고 있었다. 홍칠공은 이런 광경을 보자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줄 냄새가 향긋하게 콧속으로 스며든다. 눈을 비비고 보니 곽정의 면전에 한 잔의 호박(琥珀)색 술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홍칠공은 공연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노독물이 형편없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래, 내 제자가 경전을 써 준다니까 저렇게 좋은 미주를 대접하면서 내겐 하잘것없는 술만 주다니?) 

그는 천하의 미식가다. 이렇게 좋은 술을 보고 그냥 물러설 그가 아니다. 

 

(미주를 틀림없이 선창 어디에 숨겨 두었을 게야. 내 찾아내 통쾌하게 한번 들이켜야지. 그리고 술통에 오줌이나 싸서 노독물을 골탕먹여야 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만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먼저 피어올랐다. 음식을 훔쳐먹는 재주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홍칠공의 특기였다. 그해 임안에 있는 황궁의 어주(御廚)에 숨어 들어가서 달포 동안이나 부엌 대들보에 엎드려 지내면서 황제가 먹을 술과 안주를 고루고루 먼저 맛보기도 한 그었다. 황궁의 경계가 그토록 삼엄했는데도 방약무인하게 자유 자재로 드나든 그에게 선실에 들어가 술 훔쳐 마시는 일쯤은 식은죽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는 살금살금 갑판 뒤쪽으로 돌아가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본 뒤 선창으로 내려서서 뚜껑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시 뚜껑을 덮은 뒤에 코를 벌름거려 냄새를 말아 보고 음식물을 저장해 둔 장소를 알아냈다. 

 

선창 안은 칠흑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홍칠공은 냄새만 따라 안으로 들어가 불을 밝혔다. 과연 벽모퉁이에 5,6개의 나무통이 놓여 있었다. 그릇을 하나 찾아 들고 불을 끈 뒤에 통 앞으로 다가서서 흔들어 보니 빈 통이다. 다음 통을 흔들어 보니 묵직하다. 왼손으로 통의 마개를 잡아 바른손의 그릇으로 받을 채비를 한 뒤에 막 마개를 비틀려 하는데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선창 입구에서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어찌나 가볍고 사뿐한지 홍칠공은 구양봉 숙질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또 다른 음모가 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즉시 나무통 뒤로 몸을 움츠리고 쭈그려 앉았다. 선창문이 가볍게 열리고 불빛을 번쩍이며 그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선다. 

홍칠공은 그들의 발길이 나무통 앞에 와 서는 소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술을 마시려고 들어왔나? 그렇다면 하인에게 시킬 수도 있을텐데.) 

그런데 구양봉의 말소리가 먼저 들렸다. 

 

[모든 선창에 마른 나무와 유황이 고루고루 준비되었느냐?] 

[네, 준비되었습니다. 불만 붙이면 이 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재로 변할 거예요. 그럼 그 늙은 거지도 타 죽을 테지요.] 

 

홍칠공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저놈들이 배에 불을 지르려고 하는 모양이지?) 

다시 구양봉의 말소리가 들린다. 

 

[너 가서 제일 사랑하는 희첩들을 선창에 모여 있게 하거라. 잠시 후 곽정이 잠이 들거든 다들 작은 배로 옮겨 타도록 해. 나는 여기 와서 불을 붙일 테니까.] 

[뱀과 뱀 몰던 자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 거지는 그래도 일대의 무학 대사니 순장(殉葬)은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둘은 이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나무통의 마개를 열었다. 통 속에 든 것은 술이 아니라 기름이었던 것이다. 구양 숙질은 또 나무 상자 속에서 봉지에 싼 유황을 꺼내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고 자루 속에서 대팻밥 같은 불쏘시개까지 쏟아 놓았다. 잠시 후 선창 안에는 기름이 무릎까지 차 올라왔다. 둘은 밖으로 나가며 구양공자가 웃음을 섞어 말을 했다. 

 

[삼촌,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곽정은 수장을 지내게 될 게고 그렇게 되면 세상에 구음진경을 아는 사람은 삼촌 한 분뿐일 거예요.] 

[아니다. 두 사람이다. 아무렴 내 네게 알려 주지 않겠느냐?] 

 

구양공자는 마냥 기쁘기만 했다. 손을 뒤로 돌려 선창의 문을 닫았다. 

홍칠공은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도 치밀어 올랐다. 만약 술을 훔쳐 마시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흉계를 알 수 있었겠는가?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면 꼼짝없이 당하는 도리 밖에 없는 노릇이다. 두 사람이 멀리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자기의 선실로 돌아왔다. 곽정은 벌써 돌아와 잠을 자고 있었다. 깨워 일으켜 대책을 의논하려고 하는데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분명 구양봉이 잠이 들었는지 확인하려고 왔다는 생각을 했다. 

 

[야, 그 술 참 좋구나. 다시 열 주전자만 가져오너라.] 

 

밖에 있는 구양봉이 깜짝 놀랐다. 이놈의 늙은이가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나 했다. 

 

[노독물, 우리 다시 천 초(招)를 다투는 한이 있더라도 승부를 내고 말자. 응, 응, 버릇없는 늙은이 같으니라구.] 

 

구양봉은 그제야 홍칠공이 잠꼬대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저놈의 늙은 거지가 이제 곧 저승으로 갈 텐데 무슨 잠꼬대를 저렇게 하고 있나?) 

홍칠공은 이렇게 능청스럽게 잠꼬대를 하면서도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아무리 경공이 탁월한 구양봉이기는 하지만 그의 발자국 소리쯤은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구양봉이 좌현으로 돌아서는 발자국 소리를 확인하고 곽정의 귀에 입을 댄 채 가만히 불렀다. 

 

[곽정아!] 

[네?] 

[너 내 하라는 대로 해라. 이유를 묻지도 말고 지금 살그머니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밖으로 나가야 한다.] 

 

곽정이 일어나 앉자 홍칠공은 가만히 선실 문을 밀어 열고 그의 옷깃을 잡은 채 우현으로 왔다. 구양봉은 보통 위인이 아니라 조그만 동정만 있어도 발각이 나는 것이다. 왼손으로 배 턱을 잡은 채 몸을 배 밖으로 내놓았다. 곽정은 의아한 생각을 하면서도 감히 물을 수도 없고 해서 홍칠공이 하는 대로 따라 했다. 홍칠공은 벽호유장공(壁虎遊牆功)의 재주를 부려 서서히 아래로 이동하면서도 계속 곽정을 주시했다. 배 바깥쪽은 물이 묻어 굉장히 미끄러웠다. 자칫 잘못하여 물 속에 빠지는 날에는 소리가 나 발각이 되는 것이다. 

 

이 벽호유장공의 재주는 비교적 거친 벽 위에서는 쉽게 사용할 수 있지만 배는 원래 기름칠을 많이 했기 때문에 미끄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또 안쪽으로 비스듬히 구부러진데다 파도를 따라 출렁이는 바람에 그 위를 기어내려간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곽정은 일찌기 몽고에 있을 때 마옥을 따라 밤마다 절벽을 오르내린 일도 있고 최근에 이르러 공력이 더욱 진보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기어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홍칠공은 반신을 물 속에 담근 채 계속 더듬어 가며 선미 쪽으로 접근해 갔다. 곽정도 바짝 그 뒤를 쫓아가면서 물결에 휩쓸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홍칠공이 선미에 도착하여 뒤를 돌아다보니 과연 끈으로 묶인 작은 배가 한 척 매달려 있는 것이 보았다. 마음속으로 반갑게 생각하며 곽정을 향해 말을 건넨다. 

 

[작은 배로 올라타거라.] 

 

자기가 먼저 작은 배에 올라타고 곽정이 타기를 기다렸다. 

 

[배에 매달린 끈을 끊어라.] 

 

곽정이 비수를 뽑아 들고 묶인 끈을 끊자 배가 물 위에서 한바퀴 맴을 돈다. 홍칠공이 노를 꽉 잡고 보니 큰 배는 점점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큰 배의 선미가 번쩍하더니 구양봉이 손에 초롱불을 든 채 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작은 배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부르짖는 소리였다. 홍칠공은 기운을 단전(丹田)에 모은 채 호탕한 웃음을 길게 터뜨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우현 쪽에서 한 척의 작은 배가 풍랑을 가르며 쏜살같이 큰 배를 향해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홍칠공이 깜짝 놀라 외친다. 

 

[아니, 저게 무슨 배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공에서 두 마리의 흰 수리가 날아들며 큰 배의 돛대 위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작은 배에서 흰 그림자 하나가 번쩍 큰 배로 뛰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 위에 꽂은 금으로 만든 장식품이 번쩍번쩍 두 번이나 빛을 발했다. 곽정이 놀라 낮은 소리로 외친다. 

 

[용이!] 

 

이 작은 배를 타고 온 사람은 황용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도화도를 떠날 때 홍마가 숲속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보았다. 

(바다 위에서 말이 무슨 소용이 있담? 그러나 흰 수리는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 몰라.) 

그래서 휘파람을 불어 흰 수리를 찾았던 것이다. 수리의 눈은 예민했다. 게다가 몹시 빨리 날았다. 망망 대해 가운데서도 마침내 곽정이 타고 있는 배를 찾아내고 말았다. 황용은 수리의 발에 매달린 곽정이 쓴 <유난(有難)>이란 두 글자를 발견했다. 놀랍고도 반가와 돛폭을 올리고 서둘러 온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늦어 홍칠공과 곽정이 막 그 배를 떠난 후였다. 

그녀는 <유난(有難)>이라는 두 글자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다. 한 발이라도 늦었다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조바심에 흰 수리가 큰 배 위를 선회하는 것을 보자 즉시 양손에 금침(金針)과 아미강자(蛾眉鋼刺)를 나누어 든 채 큰 배에 뛰어올랐다. 때마침 구양공자가 뜨거운 가마솥 위의 개미처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곽정 오빠는 지금 어디 있어요? 그를 어떻게 했어요?] 

 

황용은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구양봉은 선실 바닥에 불을 지르고 올라와 보니 선미에 매달았던 배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 큰일났구나 싶어 당황하고 있는데 홍칠공의 웃음 소리가 해풍을 타고 들려왔다. 그들을 해치우겠다고 꾸민 음모에 오히려 자기들이 걸려들게 된 것이다. 속수 무책으로 어떻게 손을 쓸 겨를이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황용이 작은 배를 달려 이쪽으로 나타난 것이다. 

 

[빨리 저 배로 갈아타라!] 

 

그러나 그 배 위에 타고 있던 벙어리 사공들은 모두 간악한 무리들이다. 황용이 배에 타고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쩔쩔매며 시키는 대로 시중을 들었지만, 그녀가 떠나자마자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났다고 좋아하며 뱃머리를 돌려 멀리 삼십 육계 줄행랑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홍칠공과 곽정은 황용이 큰 배로 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바로 이때 그 배의 선미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곽정은 아직도 그 까닭을 몰라 소리를 질렀다. 

 

[불이야, 불!] 

[그렇다, 노독물이 배에 불을 질러 너와 나를 태워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곽정은 그제야 뭔가 알 것 같았다. 

 

[가서 황용을 구출해야지요.] 

[그래, 빨리 가 보자.] 

 

곽정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그 큰 배도 뱃머리를 돌려 황용이 타고 온 작은 배의 뒤를 쫓고 있었다. 갑판 위에 있는 사람들이 갈팡질팡하면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황용, 나하고 곽정이 여기 있으니 헤엄을 쳐 이쪽으로 와요.] 

 

홍칠공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 망망 대해에 파도는 사납고 밤은 칠흑처럼 어두운데 헤엄을 친다는 것이 원래 위험 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홍칠공은 황용의 실력이 훌륭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일이 급하고 보니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다. 황용은 사부의 목소리를 듣자 너무나 반가왔다. 구양봉 숙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뱃전으로 달려가 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다. 갑자기 황용의 팔이 뻣뻣하게 죄어 오며 허공에 떴던 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보니 구양봉이 벌써 자기의 오른팔을 꽉 잡고 서 있는 것이다. 

 

[이것 놓으세요!] 

 

이렇게 외치며 왼쪽 팔을 내질렀지만 구양봉이 번개처럼 손을 써서 왼팔까지 틀어잡았다. 그는 황용이 타고 온 배가 벌써 멀리 사라져 더 쫓을 수 없음을 알았다. 게다가 불길은 더욱 세차게 하늘을 향해 치솟으며 돛폭까지 불길에 나부끼고 불길에 싸인 기둥들이 우지끈 부러져 나갔다. 배는 이제 곧 침몰할 기세다. 살 길은 오직 홍칠공이 타고 있는 저 배 한 척뿐이다. 

 

[여보 늙은 거지, 황소저는 여기 있소. 잘 보이오?]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황용의 몸을 반공에 번쩍 쳐들어 보였다. 이때 불길은 해면을 대낮처럼 밝게 밝히고 있었다. 홍칠공과 곽정은 이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홍칠공은 분노에 차 부르르 몸을 떨었다. 

 

[황용을 미끼로 이 배에 타겠다는 수작이다. 흥, 내가 가서 황용을 뺏아 오마.] 

 

곽정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다보며 안절부절 못한다. 

 

[저도 모시고 함께 가겠습니다.] 

[안된다, 너는 이 배를 지켜야 한다. 잘못하다가는 이 배까지 노독물에게 뺏긴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힘껏 노를 저었다. 큰배가 움직이지 않아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홍칠공은 뱃머리로 나가 발끝을 찍으며 몸을 날려 왼손을 뻗어 뱃전에 5개의 구멍을 뚫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며 몸을 뒤집어 큰 배 위로 올라섰다. 

구양봉은 황용의 두 팔을 잡은 채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늙은 거지, 그래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자, 천 초(招)라도 겨루어 보자.] 

 

<쉭쉭쉭> 3장을 연속해서 날렸다. 구양봉이 황용의 몸을 번쩍 들어 막으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힘을 거두고 말았다. 구양봉이 다시 황용의 늑골 아래 부분에 있는 혈도를 누르자 축 처지며 꼼짝하지 못한다. 

 

[그 애를 저 배에 옮겨 싣고 여기서 다시 승부를 가립시다.] 

 

홍칠공이 제안을 했지만 구양봉이 쉽게 응할 리가 없다. 그는 자기 조카가 불길에 쫓겨 꼼짝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황용을 들어 그쪽으로 던지며 외친다. 

 

[너희 둘이 먼저 작은 배에 가 있거라.] 

 

구양공자가 황용을 받아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곽정이 작은 배에 타고 있었다. 경공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배가 너무 작은 것 같았다. 게다가 한 사람을 안은 채 뛰어내리다가는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굵은 줄을 하나 구해 돛대 기둥에 붙들어 매고 왼손에 황용을 안은 채 오른손으로 줄을 잡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곽정은 황용을 보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가 혈을 찔렸다는 사실은 몰랐다. 불빛 가운데 사부와 구양봉의 결사적인 대결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부의 안위가 염려스러워 황용과는 미처 말도 건네지 못했다. 고개를 쳐들고 관전에만 열중했다. 

 

이에 우지끈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며 큰 배의 용골(龍骨)이 불길에 타 부러지며 배가 두 쪽으로 갈라져 나갔다. 선미가 파도에 밀리며 서서히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불길이 홍칠공과 구양봉을 향해 미친 듯 춤을 추며 날름거린다. 둘은 각자 상승의 무공을 펴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불 타는 나무토막을 피하며 상대의 결사적인 공격을 피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런 순간에도 홍칠공은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의 옷은 바닷물에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불길에 타지 않았지만 구양봉은 옷깃과 머리칼이 가끔 불길에 그을리곤 했다. 두 사람의 무공이 본래 백중지세다. 그러나 한쪽이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다른 한쪽은 어쩔 수 없이 수세에 몰린다. 구양봉은 홍칠공의 공격에 점점 불길이 맹렬하게 타고 있는 선창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밀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기회를 보아 바다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지만 홍칠공의 진격을 받아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무리를 해서 뛰어들다간 영락없이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홍칠공의 권세(拳勢)와 장풍이 무섭기 짝이 없는데 한 대라도 얻어맞는 날에는 부상이 가벼울 리 없는 것이다. 구양봉은 필사적인 방어를 하면서도 몸을 뺄 궁리만을 했다. 홍칠공은 싸울수록 더 신이 났다. 

(그런데 이러다가 불 속에 들어가 죽게 되면 아무 재미도 없는 것이 아닌가? 곽정에게서 가짜 구음진경을 얻어 들었으니 골탕을 먹고 수련을 하는 꼴을 봐야지, 그냥 죽는다면 억울하다고 할테지?) 

그래서 하하하 큰 소리로 웃으며 그만 두자고 말문을 열었다. 

 

[여보 노독물, 내 용서할테니 오늘은 이만하고 배에 오릅시다.] 

 

구양봉이 괴상한 눈초리로 한 번 쏘아본 뒤에 몸을 바다 속으로 날렸다. 홍칠공이 그 뒤를 따르려는데 구양봉이 외친다. 

 

[잠깐만. 나도 이제 옷이 젖었으니 우리 공평하게 승부를 내고 맙시다.]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구양봉이 벌써 선상으로 뛰어올랐다. 

 

[그것 좋군. 노규화, 생전 처음 통쾌하게 싸워 보게 됐군.] 

 

주먹이 날면 장풍으로 막고 장풍이 날면 주먹으로 막으며 둘은 더욱 맹렬하게 싸웠다. 

 

[용이, 저 서독 좀 봐요.] 

 

곽정이 황용을 향해 입을 열었지만 황용은 혈도를 눌려 아무 반응이 없다. 

 

[내가 가서 사부님을 모셔 오는게 어떨까? 저 배가 곧 침몰할 것 같은데.] 

 

황용은 여전히 대답을 못했다. 곽정이 고개를 돌리니 구양공자가 그녀의 팔목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화를 벌컥 내며 소리를 지른다. 

 

[손놓지 못할까!] 

 

구양공자는 천신 만고 잡아 본 황용의 손이다. 그렇게 쉽게 놓을 리가 있겠는가? 

 

[움직이기만 하면 황용의 머리를 박살낼 테다.] 

 

구양공자의 말에 곽정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노를 들어 후려갈겼다. 구양공자가 고개를 숙여 노를 피한다. 곽정의 쌍장이 면문(面門)을 향해 무섭게 날아왔다. 구양공자도 어쩔 수 없이 황용의 손을 놓고 장신으로 맞선다. 곽정의 두 주먹이 정신없이 불꽃을 튀긴다. 구양공자는 배가 너무 작아 손발을 움직이기 곤란했다. 그런데다 곽정의 공격은 너무나 맹렬했다. 할 수 없이 금사권(金蛇拳)으로 반격을 하자 곽정이 막는다. 

구양공자는 팔목을 구부리고 주먹으로 곽정의 볼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눈앞에 별이 반짝이며 오락가락했다. 위기를 의식하며 살수를 쓸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두 번째 주먹이 날아든다. 왼쪽 팔을 들어 막았다. 

구양공자는 여전히 팔을 구부린 채 또 한 번 주먹으로 후려치려고 했다. 곽정이 머리를 뒤로 들어 피하면서 오른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권리(拳理)로 말한다면 뒤로 피하면서 동시에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백통에게서 두 손을 나누어 쓰는 기술을 익혔기 때문에 왼쪽으로 막고 오른쪽으로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양공자의 오른팔이 공교롭게도 곽정의 두 팔 사이에 끼여 막고 미는 바람에 그만 팔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원래 구양공자의 무예가 결코 마옥이나 왕처일, 사통천 등에 비해 손색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력이나 초수(招數)가 곽정보다는 우월했다. 다만 두 손을 나누어 쓸 줄 아는 무공은 무학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이술(異術)이다. 그래서 두 차례나 곽정의 기이한 초술에 부상을 당하게 된 것이다. 구양공자가 벌렁 뒤로 나가 떨어졌지만 곽정은 거기에 정신을 쓸 겨를이 없었다. 즉시 황용을 부축해 일으키려고 달려들었지만 그녀의 몸이 나긋나긋한 것이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급히 혈도를 찾아 풀어 주었다. 다행히도 구양봉이 보통의 점혈법을 썼기 때문에 쉽게 찾아 풀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빨리 사부님을 도와 드리세요.] 

 

황용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사부와 구양봉이 화염이 날름거리는 가운데 춤추듯 치열한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목재(木材)가 불타며 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권풍과 장풍이 더욱 무섭게 들리고, 두 동강이 난 배도 이제 곧 침몰할 기세다. 곽정이 노를 잡고 기력을 다해 접근해 그 배에 오르려고 했다. 

홍칠공이 먼저 물에 빠졌기 때문에 젖었던 옷은 이제 불길에 다 마르고 구양봉의 옷은 아직도 척척하게 젖어 서독이 오히려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홍칠공은 결사적으로 방어를 하면서 촌보도 양보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불이 붙어 이글이글 타오르는 돛대의 기둥이 허공에서부터 떨어져 내려오는 바람에 둘 다 급히 뒤로 뛰어 피했다. 그 돛대 기둥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구양봉이 사장(蛇杖)을 흔들며 돛대 위로 내지르자 홍칠공도 허리춤에서 죽장을 뽑아 들고 맞선다. 둘은 처음부터 공수로 대결했는데 이제 각기 자기의 무기를 대들고 싸우게 되니 형세는 더욱 치열하고 맹렬해졌다. 곽정은 사부의 안위 때문에 조심을 하면서도 둘의 신묘한 초수에 탄사를 보내고 있었다. 

 

무학에는 이런 말이 있다. 

<칼(刀)은 1백 일을 수련하고, 창(槍)은 1천 일을 수련하고, 검(劍)은 1만 일을 수련한다.> 

과연 그 말 그대로 검법은 가장 어려운 것이다. 모든 무학 지사들은 공력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면 반드시 검술을 익히게 된다. 각자마다 독특한 절초(絶招)를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것이다. 20년 전 화산의 대결이 있은 후 홍칠공이나 구양봉은 서로의 무공에 대해 경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술에 의지해서는 이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 그후부터 검을 버리고 쓰지 않고 있었다. 홍칠공은 몸에 늘 지니고 다니는 죽장으로 바꾸어 쓰기 시작했다. 이는 개방( 幇)의 역대방주들이 쓰다가 물려준 죽장이다. 단검보다는 한 자가 더 길고 그 질이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했다. 홍칠공은 외가의 고수라 무공은 유(柔)보다 강(剛) 쪽이다. 이 병기를 쓰기 시작하자 강중유유(剛中有柔)라 그 위력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구양봉이 쓰는 사장(蛇杖)은 더욱 기이한 것으로 그것을 사용할 때는 봉법(捧法)과 곤법(棍法), 장법(杖法)이 모두 섞여 나오는 것이다. 지팡이 끝에는 입을 벌리고 웃는 사람의 머리가 새겨져 있다. 웃는 입의 날카로운 이빨에는 독이 묻어 있다. 

 

움직일 때는 마치 귀신이 사람을 물려고 대드는 꼴이다. 거기 지팡이 끝을 살짝 누르기만 하면 인두(人頭)의 벌린 입에서 무서운 암기가 발사되는 것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지팡이에 서리고 있는 두 마리의 독사다. 서로 오르락내리락하며 공격의 대상을 노려 대들 태세다. 둘 다 자기들의 독특한 병기를 휘두르며 괴이한 초술을 벌이고 있었다. 구양봉이 병기를 들고 유리한 입장을 취하고는 있었지만 홍칠공도 천하 거지의 왕초다. 뱀 잡는 기술은 당할 장사가 없는 것이다. 죽장을 휘두르며 적을 향해 공격할 뿐만 아니라 틈을 보아 독사의 급소를 노렸다. 구양봉은 내심으로 노규화가 정말 지독한 인물이라고 욕을 하면서 사장을 뻗었다 움츠렸다 하면서 더욱 빨리 휘둘렀다. 곽정은 뱃머리에 선 채 뛰어올라가 사부를 도우려고 했지만 두 사람의 치열한 공방전에 끼여들 재간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다. 

 

구양봉은 뜨거운 열기와 합께 발 아래의 선판이 크게 흔들림을 느꼈다. 두 동강이 난 선체가 이제 곧 침몰할 참이다. 고전을 하고 있는 홍칠공을 바라다보며 노규화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오른손의 사장을 움츠리며 왼팔을 비스듬히 해 후려갈겼다. 홍칠공이 죽장으로 사장을 쫓으며 왼손을 휘둘러 구양봉의 왼팔을 뿌리쳤다. 구양봉의 팔이 구부러지며 주먹으로 변해 홍칠공의 오른쪽 태양혈을 노렸다. 

 

이 금사권(金蛇拳)은 구양봉의 평생의 자랑거리다. 원래 화산에서의 대결에서도 이 금사권으로 버티면서 다른 사람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권법의 오묘한 점은 도저히 팔을 구부릴 수 없는 입장에서 구부릴 수 있는 점이다. 적이 주먹을 뿌리쳤다고 생각할 때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구양봉은 위급한 지경에 이르면 갑자기 이 절초(絶招)를 한 번씩 쓴다. 홍칠공이 감당해 내지 못하고 부상을 입거나 아니면 궁벽하게 몰리게 되어 있다. 그것은 구양공자가 보응에서 곽정과 대결할 때 한 번 쓴 일이 있었다. 그때 금사권으로 위급한 지경을 모면하고 이기기는 했지만 홍칠공은 그 요령과 비결을 그때 분명히 보았다. 그날 여생 등이 잔치를 베풀고 곽정을 대접할 때 참석하지 않은 것도 사실은 이 금사권을 마할 묘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구양봉이 갑자기 금사권을 쓰는 것을 보고 팔뚝을 구부리고 다섯 손가락을 펴 금나수(擒拿手)로 그의 주먹을 잡으려 대들었다. 어찌나 빠르고 정확했던지 구양봉이 깜짝 놀라 뒤로 몇 발짝 물러서는데 돌연 공중에서 구름 같은 불이 떨어져 내리면서 그의 전신을 감싸 버리고 말았다. 홍칠공도 놀라 엉겁결에 뒤로 뛰어 피했다. 떨어져 내려온 것은 불붙은 큰 범포(帆布)였다. 구양봉의 무공으로 따진다면 제아무리 범포가 빨리 떨어져 내려온다 하더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자기가 10년 동안 궁리하고 고련한 금사권이 홍칠공에게 어이없이 깨지는 것을 보고 당황했기 때문에 범포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그 범포는 크기도 하거니와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니다. 돛대에 가로질린 도리까지 있으니 수백 근도 넘을 것이다. 구양봉이 두 차례나 뛰어올랐지만 범포를 들추고 뚫고 나올 수가 없었다. 

서독도 무학의 대사임에는 틀림없었다. 위급한 가운데서도 정신을 차리고 사장(蛇杖)을 꼿꼿이 세워 범포를 받쳐들려고 했다. 그런데 돛대에 눌려 도저히 일으켜 세울 수가 없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끝장이다 끝장이야. 오늘이 귀천(歸天)하는 날이로구나!) 

그런데 눈앞이 번쩍하며 범포가 위로 들춰졌다. 홍칠공이 죽장으로 범포를 헤쳐 준 것이다. 홍칠공은 착하고 어진 사람이라 구양봉의 악독함을 미워는 하면서도 타 죽는 꼴을 차마 바라다볼 수 없어 손을 써 구해 주려고 한 것이다. 

 

이때 구양봉의 옷이며 수염이며 머리카락이 모두 불에 타고 있었다. 그는 벌떡 뛰어 일어나 떼굴떼굴 갑판 위를 뒹굴며 불을 끄려고 했다. 그런데 설상 가상으로 반 쪽의 배가 기우뚱 기울어지며 커다란 닻(錨)이 쇠사슬에 묶인 채 그를 향해 내려쳐졌다. 홍칠공이 <아이쿠>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어 닻을 치웠다. 

쇠로 된 닻이 불에 달대로 달아 시뻘건데 손이 부지직 타들어가며 고기 타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가 두 손을 털며 닻을 바다 속에 집어던짐과 동시에 따라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등과 목덜미가 동시에 뻣뻣해졌다. 

멍한 뇌리 속에 전광 서화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 서독의 생명을 구해 주었는데 사장으로 나를 해치우려고 했나?) 

고개를 돌리니 과연 사장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두 마리의 독사가 입에 선혈을 묻힌 채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홍칠공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쉭쉭> 두 손의 장풍을 구양봉을 향해 날렸다. 

구양봉이 음험한 표정으로 한쪽 옆으로 피하는데 우지끈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돛대가 홍칠공의 장풍에 두 동강으로 부러져 나갔다. 

홍칠공이 미친 듯 장풍과 권풍을 날리니 구양봉은 그 사나운 기세에 몰려 이리저리 피하면서도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부님! 사부님!] 

 

곽정이 이렇게 홍칠공을 부르며 배 위로 올라서는데 홍칠공이 비틀비틀 쓰러지려고 한다. 구양봉이 대들며 <퍽> 하고 그의 등골을 향해 장풍을 쪼갰다. 장력이 어찌나 센지 돌이라도 쪼갤 듯한 위세다. 홍칠공이 정통으로 등골을 맞고 입으로 선혈을 뿜으며 선창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구지신개 홍칠공의 명성은 강호에 떨친 지 오래요, 무공 또한 보통이 아니다. 구양봉은 자기의 1장으로는 그의 생명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만약 후일 그의 상처가 치유되는 날에는 후환이 몹시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차제에 그를 요절내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또 한 번 대들어 발길로 그의 등을 차려고 대들었다. 곽정은 사부가 넘어지고 구양봉이 또 독수를 뻗으려는 것을 보고 미처 달려갈 여유도 없이 쌍장을 뻗어 쌍룡취수(雙龍取水)의 재주로 그의 허리를 내질렀다. 

 

구양봉은 곽정의 무공이 약하지 않음을 알기는 했지만 별로 안중에 둘 것도 없어 왼손을 뻗어 막으며 오른발로 홍칠공을 짓밟으려 했다. 곽정은 깜짝 놀라 자신의 안위는 돌볼 새도 없이 몸을 날려 구양봉의 목을 틀어잡으려고 대들다 그만 허점을 드러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서독에게 얻어맞고 말았다. 심하게 얻어맞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구양봉의 손은 몹시 매서운 것이다. 만약 곽정의 내공이 조금만 허약했어도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어쨌든 얻어맞은 옆구리가 몹시 아프고 반신이 마비되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는 이렇게 아픈데도 불구하고 결사적으로 덮치며 마침내 구양봉의 목을 틀어잡고 말았다. 구양봉은 그가 이렇게까지 결사적으로 나오리라고는 예기치 못했다. 자기가 이렇게 쳤으니 분명 후퇴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는 전연 개의치도 않고 자신의 부상을 무릅쓴 채 죽을 힘을 다해 자기의 목을 죄는 것이 아닌가? 

 

홍칠공의 등을 짓밟으려던 발을 어쩔 수 없이 움츠리고 말았다. 상대방에게 타격을 주는 것보다 자신의 방어가 더욱 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리를 숙이고 팔을 뒤로 젖히며 곽정을 치려고 했다. 이러한 육박전의 입장에서는 그의 합마공(蛤 功)이며 금사권 등의 상승 무공이 다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만다. 무공이 높은 고수일수록 상대가 자기 신변에 접근하는 것을 금기로 알았다. 곽정이 자기 목을 쥐고 있는 마당에 손을 뒤로 뻗어 쳐 봤자 별로 소용이 없었다. 곽정이 왼쪽으로 피하는 바람에 그만 헛손질을 하고 만 것이다. 구양봉은 점점 호흡이 곤란해짐을 느꼈다. 그럴수록 곽정의 두 손이 더욱 꽉 죄어 옴을 느꼈다. 어쩔 수 없어 왼팔 팔꿈치를 뒤로 돌려 쳤다. 

 

곽정이 몸을 오른쪽으로 피하는 바람에 왼손이 저절로 풀렸다. 그러나 갑자기 몽고의 씨름 솜씨를 발휘하여 풀린 그 손을 적의 겨드랑이 사이로 넣어 목뒤를 당겼다. 구양봉의 무공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렇게 당기니 목뒤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당기는 것을 씨름에서는 반운반(攀雲板)이라고 한다. 씨름의 고수가 아니고는 풀기 어려운 자세다. 구양봉도 이것이 씨름하는 데 쓰는 수법이라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불행하게도 자신은 이런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른손 주먹을 들어 뒤로 쳤다. 곽정은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과 함께 오른손을 놓고 그대로 그의 옆구리를 통해 목 뒤를 잡고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비스듬히 교차시킨 채 힘을 주었다. 이는 씨름에서 단산교(斷山絞)라고 부르는 재주로, 목이 눌린 사람은 벌써 사경에 빠지는 것이다. 제아무리 등뼈가 강하고 씨름을 잘하는 장사라 하더라도 목 뒤를 이렇게 눌리고 보면 항복을 해야 한다. 만일에 항복을 하지 않으면 목뼈가 부러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서독인 구양봉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이렇게까지 불리하게 궁지에 몰려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만회를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곽정이 두 손으로 당기자 그는 오히려 상승의 경공을 이용해 머리를 아래로 빼며 한바퀴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곽정의 사타구니 밑을 뚫고 빠지며 왼손 주먹으로 곽정의 뒷등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러나 곽정이 먼저 그의 왼쪽 팔뚝을 틀어잡았다. 곽정은 자기의 무공이 그의 적수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았다. 다행한 것은 서로 몸을 댄 채 육박전을 벌이면 자기는 그래도 씨름을 할 줄 알기 때문에 당장 수세에 몰리지도 않거니와 그가 사부에게 부상을 입히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 발을 동동 구르며 조급해 어쩔 줄 모르는 것은 황용이었다. 홍칠공의 몸이 반 이상이나 선체(船體) 밖으로 축 처진 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곽정은 곽정대로 구양봉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는데 둘다 몸에 불이 붙은 채 뒹굴고 있는 것이다. 정세가 급박하다고 생각하며 즉시 노를 들어 구양공자의 골통을 내리쳤다. 구양공자는 오른팔이 부러지기는 했지만 무공이 강하고 보니 몸을 옆으로 피함과 동시에 왼손을 길게 뻗어 황용의 팔을 잡아 버렸다. 황용이 두 발을 힘껏 구르자 배가 기우뚱한다. 구양공자는 헤엄을 칠 줄 모르기 때문에 몸을 비틀거리다가 공세를 취했던 손을 거두고 만다. 황용은 배가 빙글 돌다 뱃머리가 위로 솟구치는 틈을 이용해 몸을 바다속에 던졌다. 

 

그녀는 원래 헤엄을 잘 치므로 두 팔을 두어 번 허위적거리자 몸이 한 마리의 갈치처럼 벌써 큰 배를 향해 물을 가르며 내달렸다. 배는 벌써 반이상이 물에 잠겨 갑판이 물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황용이 선상으로 기어오르며 아미강자(蛾眉鋼刺)를 꺼내들고 앞으로 나서며 곽정을 도우려고 했다. 그런데 곽정은 구양봉과 한덩어리가 되어 엎치락뒤치락 뒹굴고 있었다. 그래도 구양봉의 무공이 강한 편이라 곽정을 바닥에 누인 채 깔고 뭉개는 것이다. 곽정도 그의 두 팔을 잡은 채 죽을 힘을 다해 비틀고 있었다. 황용은 어떻게 손을 써야 할까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아미강자를 구양봉의 등에 꽂으려고 대들었다. 

 

구양봉은 곽정과 사생 결단을 벌이면서도 황용의 강자가 자기 등을 찌른다는 것을 직감하고 곽정을 번쩍 들어 위로 올리며 자기 몸을 막았다. 황용도 앞으로 대들며 강자로 그의 뇌리에 꽂으려고 했지만 구양봉이 요리조리 묘하게 피한다. 황용이 계속해서 세 차례나 찔렀지만 모두 허사였다. 한바탕 검은 연기가 바람에 불려 왔다. 어찌나 매운지 두 눈에 눈물이 비오듯 흐른다. 손을 뻗어 눈을 비비는데 다리가 뜨끔하여 나가 넘어지고 말았다. 구양봉의 뒷발길질에 걷어채인 것이다. 황용이 한 바퀴 나뒹굴며 몸을 일으켜 세울 때 머리에 불이 붙었다. 앞으로 또 한 번 대들려고 하는데 곽정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사부를 구해요. 사부를.......] 

 

황용도 그제야 생각이 미쳤는지 홍칠공에게 달려가 그를 안고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몸이 물에 닿자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몸의 불이 꺼지자 황용은 홍칠공을 업고 두발로 물을 헤치며 작은 배를 향해 헤엄쳐 나갔다. 구양공자가 노를 높이 쳐들고 소리를 지른다. 

 

[늙은 거지는 그냥 버리고 혼자 올라와요.] 

 

황용이 강자를 번쩍 치켜든다. 

 

[좋아요, 해 보겠으면 마음대로 해요.] 

 

뱃전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 배가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뒤집힐 것 같다. 구양공자가 깜짝 놀라 뱃전을 잡고 주저앉는다. 

 

[그만, 그만 흔들어요. 배가 뒤집히겠어요.] 

 

그제서야 황용이 빙그레 웃는다. 

 

[그럼 빨리 내 사부님을 모셔요. 무슨 수작을 부리면 내 물 속에 빠뜨릴 테예요.] 

 

구양공자는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홍칠공의 등을 잡아끌어 올렸다. 

 

[암, 그래야 착한 사람이지요.] 

 

황용이 살포시 웃으며 조롱을 한다. 

구양공자는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황용이 다시 몸을 돌려 큰 배를 향해 헤엄을 치려고 하는데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소리와 함께 바닷물이 공중으로부터 날아와 머리를 덮쳤다. 깜짝 놀라 몸을 돌리며 손을 뻗어 젖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보니 해상에는 빙글빙글 큰물이 소용돌이를 칠 뿐, 불타고 있던 반 쪽의 배가 보이지도 않았고 결사적으로 어우러져 싸우던 곽정이나 구양봉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 황용의 머리는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세상 천지와 자기가 순식간에 소멸된 것 같은 착각뿐이었다. 갑자기 짜디짠 소금물이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기 몸이 자꾸 물 속에 가라앉고 있을 때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두 손을 허위적거리며 몸을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와 보니 망망한 대해에는 오직 한 척의 작은 배만이 홀로 떠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황용은 머리를 숙이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헤엄을 쳤다. 워낙 헤엄 솜씨가 훌륭하다 보니 힘차게 돌아가는 파도 속에서도 자유 자재로 몸을 움직인다. 계속 헤엄을 치면서 곽정을 찾기 위해 여러 바퀴 돌아보았지만 그의 그림자는 고사하고 구양봉도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아마도 가라앉는 배와 함께 물 속 깊이 빠져 들어간 것 같았다. 

황용도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곽정을 찾아 대해를 헤맨다. 더는 견딜 수 없는 피곤함을 느끼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찾을 생각으로 배에 오르려 하자 구양공자가 손을 뻗어 끌어올린다. 

 

[내 숙부님을 못 보셨나?] 

 

구양공자도 자기 숙부가 실종된 것을 알고 몹시 당황해 한다. 황용이 심란한 마음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는지 그만 졸도를 하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황용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심신이 마치 허공에 뜬 채 구름을 타고 출렁이는 듯했고 귓속에서도 웡웡하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앉으니 배는 파도를 타고 앞을 향해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이 망망한 대해 가운데 배가 표류하고 있는데도 구양공자는 노를 저을 줄 몰라 손을 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있었다. 배가 침몰한 장소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제 곽정과 다시 만날 가망도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황용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구양공자는 두 손으로 뱃전을 틀어잡은 채 혹시 배가 뒤집혀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한 발짝도 움직일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뒤 황용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힘없이 눈을 떴다. 아무래도 곽정 오빠를 이 바다에 장사지낸 것 같은 절망감이 들었다. 자기만이 살아 보아야 아무 재미도 없을 것 같기만 했다. 그런데 구양공자의 얼굴이 보이자 미운 생각이 왈칵 든다. 

(저 짐승만도 못한 인간과 함께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벌컥 소리를 지른다. 

 

[빨리 바닷속에 빠져 죽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어요?] 

[뭐라구요?] 

 

구양공자가 깜짝 놀라 반문을 한다. 

 

[빨리 바닷속에 빠져 죽으란 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내 이 배를 뒤집어 엎어 버릴 테니까요.] 

 

몸을 날려 우현(右舷)에서 번쩍 뛰어오르자 배가 기우뚱거린다. 다시 좌현(左舷)으로 달려가 구르자 배는 금방 뒤집힐 것처럼 기우뚱거렸다. 

구양공자가 놀라 비명을 지르자 황용은 더욱 재미가 났다. 다시 우현으로 달려가 굴렀다. 구양공자는 헤엄을 칠 줄 몰랐다. 그래도 무공은 대단한 위인이다. 황용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배가 뒤집힐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우현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자 자기는 좌현으로 달려갔다. 황용이 몸을 솟구치는 것을 보면 자기도 뛰어올라 동시에 떨어져 내려왔다. 배가 한번 내려앉았다가는 다시 원위치를 찾아 돌아오는 것이다. 황용이 두어 차례나 시도해 보았지만 구양공자도 계속 이렇게 대치를 하고 나서는 것이다. 

 

[좋아요, 내 배 바닥에 구멍을 몇 개 뚫어야지. 어떻게 되나 구경 좀 하게요.] 

 

강자(鋼刺)를 들어 바닥을 향해 찍으려고 하다가 꼼짝하지 못하고 엎어져 있는 홍칠공을 그제야 발견했다. 황용이 깜짝 놀라 달려가 숨결을 살피니 그래도 호흡은 멎지않고 있었다. 다소 안심을 하면서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보니 두 눈이 굳게 감긴 채 얼굴이 백짓장보다 희기만 했다. 가슴을 헤치고 만져 보니 심장이 약하게 뛰고 있었다. 황용은 사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구양공자를 더는 거들떠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홍칠공의 웃옷을 벗기고 상처를 살펴보았다. 

이때 갑자기 배가 탕 하고 흔들리더니 구양공자가 외치는 환호성이 들렸다.  

 

[육지에 도착했다. 육지에......] 

 

황용이 고개를 쳐들고 보니 먼 곳에 울창한 숲이 보인다. 배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모래더미에 걸려 있는 것이다. 언덕과는 꽤 떨어져 있는 장소였지만 물이 맑아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곳이다. 깊이도 겨우 배나 가슴에 와 닿을 정도의 수심이다. 구양공자가 배에서 뛰어내려 몇 발짝 걸어 보고 다시 되돌아온다. 

황용은 홍칠공의 등뒤 우갑골(右甲骨) 근처에 흑색의 장인(掌印)이 살 속 깊숙이 찍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꼭 인두로 지진 것처럼 장인 주위가 검게 탄 것같이 보인다. 

(그놈의 서독의 장력이 이렇게까지 대단하단 말인가?) 

다시 또 자세히 살펴보니 홍칠공의 오른쪽 등과 목덜미에도 바늘 구멍 같은 것이 보였다. 유심히 살펴보지 않고는 발견하기 어려운 상처다. 손을 뻗어 가볍게 눌러 보는데 손끝이 이상하게 아프고 뜨거웠다. 급히 손을 떼고 묻는다. 

 

[사부님 어떠세요?] 

 

홍칠공은 <끙> 하는 신음 소리만 낼 뿐 대답이 없다. 황용이 구양공자를 바라다보며 입을 연다. 

 

[이것 보세요. 빨리 해약을 가져와요.] 

 

구양공자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해약은 모두 숙부님이 가지고 계신걸.]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그럼 찾아 보시구료.] 

 

옷 주머니를 뒤져 가지고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모두 꺼내 놓는다. 

 

[그럼, 사부님이나 부축해서 육지로 모시도록 해요.] 

 

둘은 각기 홍칠공의 양팔을 자기 어깨에 얹어 놓았다. 황용이 오른손을 뻗어 구양공자의 왼손을 잡은 채 홍칠공을 손등 위에 태워 육지로 모시는 것이다. 황용은 사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조급해 어쩔 줄을 몰랐다. 구양공자는 나긋나긋한 황용의 손을 잡고 흐뭇해 마냥 즐겁기만 했다.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손인데 유감스럽게도 육지가 너무 가깝기만 했다. 황용은 몸을 숙이고 홍칠공을 땅 위에 내려놓는다. 

 

[빨리 가서 저 배나 육지로 끌어올려요. 잘못하다간 조수에 떠내려갈 테니까.] 

 

구양공자는 왼손을 입술에 댄 채 넋을 잃고 있다가 황용이 뭐라고 하는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똑똑히 듣지 못했다. 다행히도 황용은 그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한 번 쏘아 본 뒤에 방금 한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구양공자가 배를 육지로 끌어올리고 보니 황용은 홍칠공을 부드러운 풀밭에 누인 채 상처를 어루만지며 간호를 해 주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궁금하게 여기며 부근에 있는 낮은 산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놀람과 기쁨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동서 남북이 모두 망망 대해로 둘러싸인 조그만 섬이다. 섬 안은 수목이 울창하여 인가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놀란 것은, 무인도라면 의식이 문제며 주거가 문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살아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기쁘고 반갑기도 했다. 

하늘이 맺어 준 연분, 선녀가 하강한 듯한 미녀와 함께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저 늙은 거지는 아무래도 얼마 가지 못해 죽을 것 같으니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다. 

(미인과 함께 지낼 수 있는 무인도라도 이곳이 천당이요 낙원이 아니겠는가. 조만간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런데 오른팔이 뜨끔하게 아파 왔다. 그제야 그 팔이 곽정에게 걸려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왼손으로 나뭇가지를 두 개 꺾어 팔에 대고 옷깃을 찢어 꼭꼭 붙들어 맨 뒤에 목에 매어 걸었다. 

 

황용은 독사에게 물린 홍칠공의 상처에서 많은 독액을 뽑아냈다. 어떻게 다시 손을 써야 할지 몰라 커다란 바위가 두 개 있는 아래로 옮겨 누인 채 쉬도록 했다. 그리고 큰소리로 구양공자를 향해 외친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봐요. 그리고 부근에 인가나 객점이 있는지 찾아봐요.] 

[여긴 외딴 섬이오. 객점은 없을 테고 인가가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 재수에 달려 있는 것 같군요.] 

 

구양공자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황용은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찾는 대로 찾아 봐요.] 

 

구양공자는 황용이 심부름을 시켜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즉시 경공을 펴 동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모두 이름 모를 잡목과 가시넝쿨이요, 사람이 다닌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 북쪽을 향해 한 바퀴 돌다가 도중에 두 마리의 산토끼를 돌로 잡아들고 돌아왔다. 

 

[여긴 무인도요.] 

 

황용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데 황용은 그의 입언저리에 웃음이 감도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인도라며 뭐가 그리 좋아서 웃고 야단이에요?] 

 

구양공자는 이렇게 핀잔을 얻어듣고도 혀만 두어 번 낼름거릴 뿐 대답을 잊고 토끼 가죽을 벗겨 황용에게 꺼냈다. 황용이 품속을 더듬어 부싯돌을 꺼냈다. 다행히도 기름 종이로 쌌기 때문에 젖지는 않았다. 즉시 불을 지피고 토끼 두 마리를 구어 그 중 한 마리를 구양공자에게 주고 다른 한 마리의 뒷다리를 찢어 홍칠공을 주어 먹게 했다. 홍칠공은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천성이 음식을 탐하는 사람이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고기 굽는 냄새를 말고는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토끼 고기를 입에 대자 입을 크게 벌리고 씹는다. 다리 하나를 다 먹고도 더 달라는 시늉을 했다. 황용은 너무나 반가와 또 다리 하나를 찢어 그에게 주었다. 홍칠공은 반쯤 먹다가 기운이 지쳤는지 고기를 입에 문 채 잠이 들었다. 

 

황용은 날씨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부근에 있는 굴을 하나 찾아 우선 홍칠공을 부축해 굴로 자리를 옮겼다. 구양공자도 그녀를 도와 홍칠공을 누인 뒤에 다시 마른 풀로 두 사람의 잠자리를 마련했다. 황용은 차디찬 눈초리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가 자리를 마련하고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켠 뒤에 자리에 누우려고 하는 꼴을 보고 강자를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른다. 

 

[썩 나가지 못해요!] 

[여기서 좀 자기로 뭐 그리 방해될 것도 없을 텐데 그리 사납게 굴어요?] 

 

구양공자가 웃으며 이렇게 대꾸를 하자 황용이 눈썹을 치켜세운다. 

 

[아니, 빨리 나가지 못하겠어요?] 

[내 얌전하게 잘 테니 안심해요.] 

 

황용은 불붙은 나뭇가지를 들어 그가 마른 풀로 만들어 둔 잠자리에 불을 질렀다. 그의 잠자리가 즉시 잿더미로 번했다. 구양공자는 고소를 머금고 굴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아무래도 섬 안에는 독충이나 맹수가 있을 것 같아 큰 나무 위에 올라가 자기로 했다. 이날 밤 그는 나무 위에서 수십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했다. 굴 어귀에는 밤새 불이 이글거리며 고요히 잠들고 있는 황용의 고운 얼굴을 은은히 비치고 있었다. 몇십 번이나 뛰어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담대하지 못한 스스로를 저주하기도 했다. 자기의 짧은 생애를 통해 이렇게 규방에 뛰어들어 본 일이 수없이 많았었다. 그런데도 이 소녀에게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겁을 먹는 것인지 자신이 생각을 해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비록 한쪽 팔이 부러졌다고는 하지만 남은 한쪽 팔만으로도 문제없이 처리할 자신은 있었다. 홍칠공이 옆에 있다고는 하지만 생명이 경각을 다투고 있는 처지에 거들떠볼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더미 앞에까지 갔다가는 종내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이날 밤 황용도 안심하고 잠들 수는 없었다. 구양공자가 뛰어들까 봐 걱정도 되거니와 홍칠공의 부상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녘에 겨우 한 시간쯤 단잠을 잤을 뿐이다. 꿈속에서 홍칠공의 신음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눈을 떴다. 

 

[사부님, 왜 그러세요?] 

 

홍칠공이 입을 가리키며 치아를 몇 번 움직였다. 황용이 미소를 머금고 어제 저녁 먹다 남긴 토끼 고기를 찢어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홍칠공은 고기가 들어가자 생기가 나는지 일어나 앉아 호흡을 조절했다. 황용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그의 안색만 살펴보았다. 얼굴빛이 불그레 피어오르다 다시 파랗게 질린다. 이렇게 붉으락 푸르락 몇 차례나 하더니 갑자기 머리 위로 열기를 내뿜으며 이마 위로 땀을 비오듯 흘리다가 다시 전신을 벌벌 떨기 시작한다. 

 

갑자기 굴 어귀에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구양공자가 머리를 기웃거리며 들어서려고 했다. 황용은 사부가 상승의 내공을 써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는 생사의 기로를 헤매며 애를 태워야 하는 것이다. 구양공자가 뛰어들어 소란을 부리기라도 하면 일은 끝장이다. 

 

[빨리 나가요.] 

 

낮은 소리로 책망을 했지만 구양공자는 웃기부터 한다. 

 

[어떻게 이 무인도에서 살아야 할지 상의라도 좀 합시다.] 

 

第 四十二 章. 무인도에서의 밤과 낮 

홍칠공이 실눈을 뜨고 묻는다. 

 

[여기가 무인도인가?] 

[사부님, 다른 걱정은 하지 마세요.] 

 

황용이 고개를 돌려 구양공자를 바라다본다. 

 

[날 따라오세요. 우리 밖에서 얘기해요.] 

 

구양공자는 너무나 좋아서 그녀의 뒤를 따라 굴 밖으로 나왔다. 날은 맑게 개어 있었다. 황용이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아도 아물아물 파란 하늘과 바다의 수평선과 두둥실 떠 있는 몇 조각의 흰 구름뿐 육지라고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황용이 전날 상륙한 지점까지 오자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어제 그 배가?] 

[아니, 어딜 갔지요? 아마 조수에 밀려 떠내려 간 모양이로군요.] 

 

황용은 구양공자의 표정과 말에서 벌써 눈치를 챘다. 그가 밤에 몰래 일어나 배를 바닷속에 밀어 넣은 것이다. 그의 비열한 속셈은 묻지 않아도 뻔한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와 더불어 이 무인의 고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설령 배가 있다 하더라도 물이 무서워 그는 혼자 쫓겨나거나 떠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황용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사부나 자기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게 될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황용은 구양공자를 바라다보면서 전연 그런 내색은 비치지 않았다. 다만 내심으로만 어떻게 저놈을 죽이고 사부를 구할까 궁리했다. 구양공자는 황용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고개를 떨군 채 바로 바라다보지도 못했다. 황용이 몸을 날려 해변의 큰바위 위에 올라가 턱을 무릎에 괸 채 먼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구양공자는 생각했다. 

(이럴 때 접근하지 않고 언제까지 기다리랴!) 

그래서 두 발로 망을 찍고 바위 위에 올라가 황용 옆에 앉았다. 그런데도 황용이 화를 내는 기색이 없다. 바짝 다가가 앉으며 낮은 소리로 속삭인다. 

 

[우리 둘이 늙어 죽을 때까지 여기서 신선처럼 삽시다. 내 전생에 무슨 덕을 닦았기에 이런 복이 다 있나?] 

 

황용이 깔깔 웃는다. 

 

[이 섬에 사부님까지 합쳐 세 사람뿐인데 외롭지 않겠어요?] 

 

구양공자는 그녀의 부드러운 말투가 여간 고맙고 반갑지 않았다. 

 

[내가 옆에 있는데 뭐 의로울 게 있겠어요? 게다가 장차 아이를 낳으면 더 재미있을 텐데 뭘.] 

[누가 아이를 낳아요? 나는 그런 거 몰라요.] 

[내 알려 주리다.] 

 

구양공자가 웃으며 손을 뻗어 황용의 손을 어루만지려고 한다. 그런데 손바닥이 따뜻한 것이 벌써 황용도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마주잡은 것이다. 구양공자는 가슴이 두근두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황용은 몸을 그의 품에 파묻은 채 슬금슬금 왼손을 위로 움직여 그의 팔목에 있는 맥문(脈門)을 더듬으며 소곤거린다. 

 

[누가 그러던데 목염자 아가씨의 정절을 뺏었다면서요?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요?] 

 

구양공자가 껄껄 웃는다. 

 

[그 목가 소저, 시골뜨기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말을 듣지 않더군요. 이 구양공자가 어떤 사람인데 무리하게 강요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아가씨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군요.] 

[그 아가씨 헛거야 헛거.] 

 

구양공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데 갑자기 황용이 바다를 가리키며 외친다. 

 

[아니, 저게 뭐예요?] 

 

구양공자가 황용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냐고 다시 물어 보려고 하는데 왼팔이 꽉 조여지며 맥문을 틀어 잡히고 말았다. 반신의 맥이 탁 풀리며 꼼짝달싹할 수가 없다. 황용이 오른손에 강자(鋼刺)를 잡은 채 손을 뒤로 돌려 뻗으며 질풍같이 그의 배를 찔렀다.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나 가깝기만 했다. 구양공자는 황홀한 기분에 빠져 있을 때다. 게다가 오른팔의 골절이 아직도 다 낫지 않고 있었으니 막을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고인의 전수를 받은 백타산의 20여 년 동안의 고련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다. 이 위급하기 짝이 없는 순간에도 장신을 앞으로 구부려 가슴으로 황용의 등을 들이받았다. 황용이 비틀거리며 바위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강자는 그의 오른쪽 다리 위에 반 촌 깊이의 상처를 대고 말았다. 

 

구양공자가 바위 아래로 뛰어내리고 보니 황용은 아미강자(蛾眉鋼刺)를 잡은 채 웃고 서 있었다. 구양공자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제야 방금 황용을 받는 바람에 목숨은 잃지 않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연위갑에 있는 수백 개의 바늘에 찔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다정하게 얘기를 주고받다가 왜 갑자기 까닭도 없이 나를 받아 버렸어요? 내 다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예요.] 

 

황용이 화를 내면서 몸을 돌려 가 버린다. 구양공자는 분하면서도 귀엽고 반가왔다.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멍하니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기만 했다. 황용은 굴을 향해 돌아오면서도 자기의 무예가 신통하지 못함이 원망스러웠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나 분하고 원통했다. 굴 안으로 들어서니 홍칠공이 까만 피를 토한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깜짝 놀라 몸을 숙이고 묻는다. 

 

[사부님, 좀 어떠세요?] 

 

홍칠공이 맥없이 숨을 내쉰다. 

 

[술을 마시게 해 줘.] 

 

황용은 난치해 견딜 수 없었다. 이 무인도에서 어떻게 술을 구한담? 입으로만 건성으로 대답하며 그를 위로한다. 

 

[내 구해 볼께요. 사부님, 상처는 괜찮으시겠어요?] 

 

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변을 당해서도 울어 본 일이 없다. 그런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홍칠공의 품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홍칠공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등을 토닥거리며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달랜다. 홍칠공은 강호를 종횡하면서 거칠게만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정을 몰라 쩔쩔맨다. 

 

[울지 마, 착하지, 사부가 사랑하잖아? 착한 아이가 울면 쓰나? 자 이제 사부가 술 안 마실께.] 

 

그저 이 말만 수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황용은 이렇게 한바탕 울고 나자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 고개를 드니 홍칠공의 옷 앞자락이 자기의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매만진다. 

 

[방금 그 녀석을 죽었어야 하는 건데 정말 분해 죽겠어요.] 

 

방금 바위 위에서 멀어졌던 일을 홍칠공에게 들려주었다. 홍칠공이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이 없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연다. 

 

[사부는 이제 쓸모없이 돼 버렸구나. 그놈의 무공이 너보다는 월등하니 꾀로 싸워야지 힘으로는 안 돼.] 

[사부님, 며칠 누워 계시며 요양을 하신 뒤에 일장으로 끝내 버리면 되지 않아요?] 

[아니다. 내 독사에 두 번이나 물린데다가 또 서독의 합마공 장력에 얻어맞아서 이젠 틀렸다. 전신의 공력을 써서 독기를 내보냈으니 몇 년이야 그냥 살 수 있을 테지만 수십 년의 무공이 이제 아무 소용도 없이 돼 버리고 말았단다. 네 사부는 이제 늙어빠진 영감이요, 공력이라고는 전연 가지지 못한단다.] 

 

홍칠공은 쏠쏠하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사부님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황용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홍칠공은 쏠쏠한 미소를 띄었다. 

 

[노규화의 심장은 뜨겁다만 일이 눈앞에 닥쳐도 어쩔 수 없이 돼 버렸단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있다가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얘야, 이 사부가 부득이 네게 아주 어려운 일을 부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구나. 내 본성에 맞지도 않을 테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럼요. 하구 말구요. 사부님, 뭔지 말씀해 주세요.] 

 

홍칠공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사부라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월이 너무 짧았다. 그래 무공도 변변하게 전수해 주지 못했는데 이제 또 이렇게 어려운 짐을 네게 맡기게 되니 정말 마음이 무겁기만 하구나.] 

 

황용은 홍칠공이 평소 말을 할 때는 거리낌없이 아무 말이나 잘하는데 이제 이렇게까지 침착하게 더듬는 것을 보니 자기에게 부탁하려는 일이 굉장히 중대하고 어려운 일일 것만 같았다. 

 

[사부님, 빨리 말씀을 해 주셔요. 사부님께서 이렇게 중상을 입으신 것도 모두 제자를 위해 도화도에 오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요. 제자 분골쇄신한다 하더라도 사부님의 은혜를 갚기 어려운 줄 압니다. 제가 너무 나이가 어려 사부님의 분부를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될 뿐입니다.] 

 

홍칠공은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그럼 네가 응낙을 하겠단 말이지?] 

[그저 분부만 내려 주세요.] 

 

홍칠공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고 두 손을 가슴에 댄 채 북쪽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조사야(祖師爺)께서 개방( 幇)을 세우시고 이제 제자에게까지 중임을 맡겨 주셨지만 제자는 부덕하고 무능하이 개방을 위해 큰일 한가지를 이루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나이다. 오늘 일이 급해 제자는 부득불 이 중임을 벗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사야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이 아이를 보우해 주시고 화를 당하더라도 길한 것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천하에 퍼져 고생하는 많은 형제들에게 복이 돌아가도록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말을 끝내고 다시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황용이 처음에는 엄숙하게 듣고 있다가 끝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얘야, 너도 꿇어 엎드려라.] 

 

홍칠공의 말에 따라 무릎을 꿇자 그는 녹죽장(綠竹杖)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고 다른 손을 가슴에 댄 채 황용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황용이 깜짝 놀라 묻는다. 

 

[사부님, 나를 보고 개방의....., 개방의......] 

[바로 그렇다. 나는 개방의 제십팔대 방주다. 너는 십구대 방주가 되는 게야. 이제 우리 조사야께 감사를 드리자.] 

 

황용은 정신없이 홍칠공이 시키는 대로 가슴에 손을 댄 채 북쪽을 항해 허리를 굽혔다. 홍칠공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피곤한 표정 위에 만족스런 미소가 피어 올랐다. 황용이 그를 부축해 자리에 뉘었다. 

 

[이제 너는 방주가 되었고 나는 개방의 장로(長老)가 되었다. 장로가 방주의 존경을 받기는 하지만 큰일을 당하게 되면 방주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는 조사야로부터 전해 내려온 규약이니 절대로 어길 수 없는 것이다. 손에 녹죽장을 쥐고 있는 이상 한번 명령만 내리면 천하의 거지들이 다 좇기 마련이다.] 

 

황용은 다급해하면서 걱정이 되었다. 

(이 무인도에 있으니 어느 세월에 중원으로 돌아가게 된단 말이냐? 하물며 곽정 오빠가 세상을 떠났으니 난들 살아 뭘 하겠는가? 그런데도 사부께서 나를 방주로 삼아 천하 거지를 통솔하라고 하시니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러나 눈앞에 사부가 중상을 입고 누워 계시니 그에게 걱정을 끼쳐 드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분부를 내리는 대로 응할 수 밖에 없는 처지다. 홍칠공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금년 칠월 보름날 천하 군개(窘 )의 수령들이 동정호(洞庭湖) 옆에 있는 악양성(岳陽城)에서 대회를 가지게 되어 있다. 원래 내가 개방의 계승자를 지명하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네가 이 죽장을 가지고 나타나면 그들도 내 뜻을 알게 될 거야. 개방의 모든 일은 사대장로(四大長老)가 알아 보좌할 것이니 너무 염려할 바는 아니다. 다만 아무 까닭도 없이 착하고 귀엽기만 한 너를 거지떼 속에 밀어넣었으니 너만 억울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구나.] 

 

이렇게 말을 하고 낄낄 웃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웃음이 그의 상처를 건드렸는지 계속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황용이 그의 등을 가볍게 문질러 주자 한참 만에야 기침이 멎었다. 홍칠공이 한숨을 내쉰다. 

 

[이 노규화는 정말 쓸데없이 돼 버리고 말았구나. 언제 죽게 될는지도 모르니 빨리 타구봉법(打狗棒法)이나 전수해 주어야겠다.] 

 

황용이 홍칠공으로부터 수십 종의 무공을 배우기는 했지만 타구봉법이란 말은 처음들어 본 말이다. 타구봉법이라면 개를 때리는 봉법인 것이다. 어째 이렇게 듣기 거북한 봉법이 있느냐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우스운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사부가 엄숙하게 말씀하시는지라 잠자코 있었다. 홍칠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홍칠공은 말을 이었다. 

 

[네가 방주가 되었다고 해서 타고난 천성까지 바꿔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까불고 싶을 때 까불고 놀고 싶을 땐 노는게지. 우리 거지들은 아무 구속을 느끼지 않아 자유 자재 마음먹은 대로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건 또 저래서 안된다면 차라리 관리가 되든지 부자가 되든지 하지 무엇 때문에 거지가 되겠느냐? 네 생각에 타구봉법이 시시하게 생각되거든 속시원하게 말을 하려무나.] 

 

황용도 미소를 머금고 말을 한다. 

 

[제자 생각은 이래요. 세상에 개가 뭐 그리 무섭고 대단하다고 타구봉법이란 것까지 만들어 냈느냐구요!] 

[이제 너도 거지 왕초가 되었으니 생각도 거지처럼 해야 할 것 아니냐? 너처럼 옷이 깨끗해서 부잣집 규수같이 하고 다닌다면 개야 물론 꼬리를 흔들고 야단일 텐데 뭣 때문에 그 개를 때리려 든단 말이냐? 그러나 가난한 거지는 개를 만나면 딱 질색이다. 거지가 몽둥이를 가지지 않으면 개까지 업신여긴단 말이다. 가난하게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고충을 모르지.] 

[사부님 말씀 어딘가 틀리는 것 같은데요.] 

[뭐가 틀린단 말이냐?] 

[금년 삼월 제가 도화도에서 달아나 북방에서 떠돌 때 거지 노릇을 했거든요. 노상에서 개를 만나 물려고 대들면 발길질로 쫓았지요. 그랬더니 꼬리를 감추고 꽁무니만 빼던대요.] 

[그래? 그러나 개가 사나우면 발길로 찰 수도 없고 그땐 몽둥이로 때려야지.] 

[무슨 개가 그렇게 사나운 개가 있기에요?] 

 

이렇게 말을 하다 보니 문득 느끼는 바가 있었다. 

 

[아참, 그렇군요. 못된 사람도 사나운 개라고 할 수 있겠군요.] 

[넌 정말 똑똑해. 만일......] 

 

홍칠공은 원래 곽정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코끝이 시큰해져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치빠른 황용은 벌써 알아차리고 모르는 체 했을 뿐 마음속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이 삼십육로의 타구봉법은 우리 개방의 조사야께서 만드신 것으로 역대의 방주가 다음 방주에게만 전했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전해 본 일이 없는 것이다. 전하는 말로는 개방의 십일 대 방주가 북고산(北固山)에서 군웅들과 고전을 벌일 때 일봉쌍장(一捧雙掌)으로 낙양(洛陽)의 오패(五覇)를 무찔렀다고 하는데 바로 이 타구봉법을 썼다는 얘기야.] 

 

이 말을 들은 황용이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부님. 그럼 왜 배 위에서 서독과 다툴 때 한 번도 쓰지 않으셨어요?] 

[이 봉법은 우리 개방의 대사에나 쓰는 게야. 쓰지 않아도 서독쯤은 이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 그리고 또 그 작자 죽게 되었는데도 그렇게까지 비열하고 몰염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 내가 생명을 구해 주었는데도 뒤에서 독수를 쓰다니....] 

 

황용은 홍칠공이 가련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부님, 그 봉법을 제게 가르쳐 주세요. 황용이 서독을 죽이고 사부님을 위해 복수를 하게요.] 

 

홍칠공이 담담하게 웃으며 땅 위에서 나무토막을 주워 들고 입으로 구결(口訣)을 설명하며 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누운 채 삽십육로의 봉법을 하나하나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황용이 총명하고 또 자기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단숨에 이 봉법을 전부 그녀에게 전수해 준 것이다. 이 타구봉법은 명칭은 비록 저속하지만 변화 무쌍하고 초술(招術)이 오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역대의 개방 방주들에게만 전수해 줄 까닭이 없는 것이다. 황용이 제아무리 총명하다고는 하지만 내용만을 기억했을 뿐 그 가운데의 오묘한 정수를 일시에 터득할 수는 없었다. 홍칠공이 전수를 끝내고는 한숨을 몰아쉰다. 땀방울을 뚝뚝 떨구며 입을 열었다. 

 

[내 너무 급하게 가르쳤지? 그래서는 안되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야. 다시는 못 가르칠 테니까.] 

 

그러더니 아이구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황용이 놀라 <사부님! 사부님!> 외치며 대들어 부축했을 때는 손발이 차디찬 것이 이제 가망이 없어 보였다. 

황용은 이 며칠 동안 너무나 많은 우여 곡절을 겪었다. 사부의 가슴에 엎드렸어도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할딱할딱 뛰고 있는 가냘픈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그의 두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호흡을 도와주고 있는 이 긴박한 찰나에 뒷전에서 가벼운 인기척 소리가 나며 그 누군가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황용은 사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언제 구양공자가 들어왔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부님은 틀렸어요. 빨리 그를 구해 주셔요.] 

 

구양공자는 그녀의 애절한 눈동자에 눈물이 담뿍 고인 것이 가련해 견딜 수 없었다. 몸을 숙이고 홍칠공을 바라다보니 백짓장같은 얼굴에 눈을 위로 뒤집어 깐 것이 전연 가망이 없어 보였다. 마음속으로 이젠 됐다는 반가운 생각만이 앞섰다. 그와 황용의 거리가 반 자를 넘지 못했다. 숨소리까지 난초꽃 향기를 풍기는 것 같았고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칼이 더욱 예뻐 보였다. 왼팔을 뻗어 그녀의 가는 허리를 껴안았다. 황용이 깜짝 놀라 팔꿈치로 내질렀다. 그가 고개를 돌려 피하는 순간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구양공자는 원래 홍칠공이 두려워 황용에게 마음대로 대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제 막 호흡을 거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몸을 번쩍 날려 굴 어귀를 막고 섰다. 

 

[자 이봐요. 내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까지 거칠게 굴지는 않을 거요. 그러나 소저의 미모 앞에서는 정말 어쩔 수가 없소. 그러니 한 번 껴안기라도 합시다.] 

 

두 팔을 짝 벌린 채 한 발 한 발 접근해 왔다. 황용의 놀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오늘의 위험이 조왕부에 있을 때보다 더 다급하구나. 차제에 아주 죽여 없애거나 아니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 

이렇게 생각한 황용은 두 손에 강자(鋼刺)와 강침(鋼針)을 나누어 잡았다. 구양공자는 미소를 머금고 두루마기를 벗어 들어 병기로 삼은 채 다시 두 발짝 다가선다. 황용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가 그가 다시 한 발짝 떼어 놓으려고 하는 것을 보자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구양공자가 방향을 돌리자 황용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가 옷을 휘둘러 자기의 강침을 막으려 하자 황용의 몸은 줄 떠난 화살처럼 굴 밖을 향해 날았다. 

 

그녀의 몸도 빨랐지만 구양공자는 더욱 빨랐다. 황용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그의 장력이 벌써 자기 등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황용은 오히려 반갑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연위갑을 입고 있으니 적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고 이미 죽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자신이야 어쨌든 상대에게 타격만 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방어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손을 뒤로 뻗어 강자로 그의 가슴을 찔렀다. 구양공자도 원래 황용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이번의 공격도 역시 헛손질로 황용을 놀리기 위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황용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자는 속셈이다. 그녀의 강자가 찔러 오는 것을 보고 팔을 들어 그녀의 손을 막음과 동시에 몸을 빼어 문 밖에 막아서서 황용을 굴 속에 밀어넣었다. 굴 안이 너무 좁아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황용은 결사적으로 대든다. 공격만 필 뿐 방어를 하지않으니 공력이 배나 더 세진 것 같았다. 구양공자의 무공이 황용보다는 월등했지만 해치지 않겠다는 속셈 때문에 아무래도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5,60초를 겨뤘다. 한창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황용이 앞을 향해 덮치며 한 주먹의 강침을 던지자 구양공자가 옷을 휘둘러 막았다. 황용이 갑자기 뚫고 들어서며 그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구양공자는 오른팔이 부러져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왼팔을 들어 막으려했다. 황용의 손에 든 강자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원을 돌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벌써 그의 부러진 팔뚝에 가 꽂히고 말았다. 

바로 이러한 찰나 황용의 아랫팔이 빳빳해지면서 <떨그렁> 소리를 내며 한 자루의 강자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랫배의 혈도를 찔린 것이다. 구양공자의 손이 너무나 재빠르기만 했다. 

황용이 막 몸을 돌려 빠지려는 것을 보고는 몸을 속임과 동시에 팔을 길게 내뻗어 그의 왼쪽 발 복사뼈에 있는 현종혈(懸鐘穴)과 오른발 복사뼈에 있는 중도혈(中都穴)을 찔러 버렸다. 황용이 두어 발짝 걷다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구양공자가 재빨리 달려들며 긴 외투를 땅바닥에 깔아 놓고 웃는다. 

 

[아이구, 넘어지면 다쳐요.] 

 

황용의 무공은 부친에게서 직접 배운 것이요, 구양공자의 무공은 숙부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황약사와 구양봉의 무공은 막상막하 둘 다 비슷한 처지다. 그런데 어째서 황용이나 구양공자의 무공은 고하가 있는 것일까? 

이는 황용이 겨우 열 다섯 꽃다운 나이인 데 반해 구양공자는 삼십이 넘었으니 두 사람이 무예를 배운 기간은 거의 20여 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 공력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용이 비록 뒤에 홍칠공으로부터 수십 종의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기간이 너무나 짧기만 했다. 구양공자가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황용은 역시 그의 적수가 아니다. 

 

황용이 고꾸라지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왼손에 쥐고 있던 한줌의 강침을 집어 던졌다. 상대가 덮치려는 것을 방비함과 동시에 몸을 벌떡 솟구쳐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두 다리가 마비되어 몸이 제대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몸이 허공에 살짝 떴다가 다시 쓰러졌다. 구양공자가 손을 길게 뻗어 부축해 준다. 황용은 겨우 왼손만을 그런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주먹으로 바꾸어 쥐고 휘둘러 보았지만 무력하기 짝이 없는 헛손질에 그치고 만다. 

구양공자가 미소를 머금고 다시 그녀의 왼팔 혈도를 눌렀다. 이렇게 되자 황용의 사지는 포승에 묶인 것처럼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후회스럽기만 했다.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눈앞이 깜깜해지다가 정신을 잃는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구양공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를 하면서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그런데 머리 위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 

 

[아니, 죽고 싶으냐? 아니면 살고 싶으냐?] 

 

구양공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고 보니 홍칠공이 지팡이를 짚은 채 굴 어귀에 서서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혼비백산이다. 숙부가 전에 왕중양이 거짓으로 죽은 체하고 있다가 사람을 골탕먹였다는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전광 석화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노규화가 원래 죽은 체하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나는 이제 끝장이다!) 

홍칠공의 재주는 벌써 몇 차례나 당해 봐서 너무나 잘 안다. 도저히 자기의 적수는 아닌 것이다. 급한 김에 두 무릎을 땅에 꿇었다. 

 

[그냥 황소저와 장난을 했을 뿐이지 다른 악의는 전연 없었습니다.] 

 

홍칠공이 <홍> 코방귀를 뀐다. 

 

[아니, 그래도 혈도를 풀어 주지 않고 그래 나더러 손을 쓰란 말이냐?] 

 

구양공자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황용의 사지에 눌린 혈도를 풀어 주었다. 

 

[네 이놈! 다시 이 굴 속에 한 발짝만 들여놓아 봐라, 그때 가서 날보구 무정하다 원망할 것 없어.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홍칠공이 이렇게 꾸짖으며 몸을 한쪽으로 비켜 준다. 구양공자는 특사라도 받은 것처럼 연기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황용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몽롱하기만 했다. 홍칠공이 더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넘어진다. 황용은 놀랍고도 반가와 단숨에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지만 홍칠공은 선혈과 함께 이빨 세 개까지 토해 냈다. 

(사부님은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이제 이렇게 맥없이 넘어지시고 또 이까지 부러져 나갔구나.) 

황용이 이렇게 마음 아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도 홍칠공은 세 개의 부러진 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웃는다. 

 

[이야 이야, 너는 정말 수고가 많았구나. 나를 위해 평생토록 천하의 산해 진미를 다 씹어 주다가 이제 노규화가 죽게 되자 먼저 내게서 떠나는구나.] 

 

홍칠공의 이 번 부상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등뒤의 근맥(筋脈)이 구양봉의 일장에 엉망 진창으로 깨지고 부서졌다. 다행히도 그의 무공이 심오하였기에 당장 죽지는 않았지만 전신의 근력을 다 잃어 무예를 모르는 사람만도 못하게 되었다. 황용이 혈도를 구양공자에게 눌렸을 때도 홍칠공은 기실 풀어 줄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왕년의 위풍에 의지하여 구양공자를 위협해 풀게 했던 것이다. 그는 황용의 표정에서 슬퍼하는 기색을 보고 위로의 말을 꺼냈다. 

 

[노규화의 위풍은 아직 남아 있으니 그 녀석이 다시 너를 괴롭히지는 못할 게야.] 

 

황용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굴 속에 있는 이상 그 녀석이 감히 나타나지는 못할 테지만 마실 물이나 먹을 것을 어떻게 마련한담.) 

홍칠공도 배고픈 생각에 머리를 푹 속이고 있는 황용을 바라다보았다. 

 

[먹을 것 구할 생각이 난감해서 그렇지?] 

 

황용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나를 부축해 해변으로 나가 보자. 햇볕이나 쪼이게.] 

 

영리한 황용은 금방 알아듣고 손뼉을 치며 웃는다. 

 

[그래요, 우리 고기 잡아먹어요.] 

 

즉시 홍칠공을 부축하고 천천히 걸어 바닷가로 나왔다. 이날 날씨는 맑게 개어 있었다. 해면이 끝없이 넓은 비단같이 곱고 화사하게 깔려 있고, 맑은 바닷바람에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몸에 햇볕을 쪼이자 홍칠공도 정신이 상쾌해지는 모양이다. 구양공자는 멀리 떨어진 바위 위에서 이들이 나오는 것을 보자 급히 뛰어 달아났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뒤를 쫓는 것이 아님을 알고 나자 발길을 멈춘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홍칠공이나 황용은 내심으로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워낙 눈치가 빨라서 시간이 지나면 탄로가 나고 말텐데.) 

그러나 지금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홍칠공은 등을 바위에 기댄 채 앉아 있었고 황용은 나뭇가지를 꺾어 낚싯대로 삼고 껍질을 벗겨 줄을 만들었다. 주머니 속에 강침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라 구부리기만 하면 낚시 바늘이 되는 것이다. 해변에서 어린 새우나 게를 잡아 미끼로 삼았다. 한 시간도 못 가 묵직한 고기를 세 마리나 낚아 올릴 수 있었다. 황용이 그것을 맛있게 구워 홍칠공과 함께 오랜만에 한바탕 포식을 했다. 

 

포식을 한 후 한참 동안 쉬고 나자 홍칠공은 황용에게 타구봉법을 하나하나 해 보도록 했다. 자기는 바위에 몸을 기댄 채 서툰 점을 지적해 주었다. 이 봉법의 오묘한 변화에 대해서 황용도 이제 적지않은 터득을 했다. 저녁 나절이 되도록 연습을 한 뒤 황용은 겉옷을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헤엄을 치며 목욕을 했다. 벽파(碧波)를 헤치며 오락가락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당나라 때 쓴 소설 가운데 바다 밑에 용궁이 있다고 하던데 용왕의 딸은 얼마나 예쁠까? 곽정 오빠가 혹시 용궁에 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물 속으로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갑자기 발이 아파 급히 움츠렸는데 뭔가에 발이 물린 것 같았다. 황용은 어려서부터 물 속에서 자주 놀았기 때문에 그것이 커다란 조개라는 생각을 했다. 서두르지도 않고 허리를 굽혀 더듬어 보다가 깜짝 놀랐다. 조개가 어찌나 큰지 식탁만큼이나 큰 것이다. 즉시 두 손을 조개껍질에 대고 양쪽으로 힘을 써 보았다. 그러나 조개의 힘이 어찌나 센지 꼼짝하지 않고 오히려 조개가 오므라드는 바람에 발이 아프게 조여 왔다. 황용이 두 손으로 몸을 떨며 조개를 수면으로 끌어올린 뒤에 다시 요리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조개의 무게가 2,3백 근이 넘을 것 같았고 또 바다 밑에서 오랜 세월 묵은 놈이라 암초에 붙어 있어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황용이 몇 번이나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발은 더욱 아프기만 하고 마음도 조급해져서 몇 번이나 소금물을 켜기만 했다. 

(난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불쌍한 사부님을 외롭게 무인도에 남겨 놓고 내가 먼저 죽게 되다니....., 게다가 저 흉악한 구양공자까지 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구나.) 

급한 김에 두 손으로 큰 돌을 쥐고 조개껍질을 쳐봤지만 워낙 껍질이 두꺼운데다가 물 속이라 힘을 쓸 수도 없었다. 조개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황용이 돌로 몇 번 치는 바람에 조개는 더욱 입을 닫아 버린 것이다. 황용은 또 헛물을 켰다. 손에 쥐고 있던 큰 돌을 버리고 이번에는 모래를 쥐어 조개껍질 틈 속으로 쑤셔 넣어 보았다. 급한 김에 해 본 것인데 조개는 원래 모래를 질색으로 안다. 그래서 금방 모래를 토해 내기 위해 입을 벌렸다. 황용이 이 틈을 이용해 재빨리 발을 빼고 두 손을 허위적거려 수면으로 올라와 후련한 심호흡을 했다.  

 

홍칠공은 바위에 기대앉은 채 황용이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솟아올라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황용은 솟아오르지 않았다. 틀림없이 바닷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물 속으로 들어가 구출해 내야 한다고 조바심을 했지만 보행이 불편한 자기로서는 속수 무책이다.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불끈 황용이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며 심호흡을 하는 것이 아닌가? 반갑다 못해 왈칵 기쁨의 눈물이 흘렸다. 

황용은 사부를 향해 몇 번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시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이번에는 조심을 하면서 조개를 좌우로 몇 번이나 흔들어 조개껍질과 바위 사이에 붙어 있는 것들을 우선 떼놓은 다음 그 조개를 받쳐들었다. 그리고 그 조개를 든 채 물이 얕은 곳으로 나왔다. 물이 얕아지고 조개껍질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부력을 잃고 다시 무거워졌다. 황용이 들래야 들 수도 없게 되자 조개를 내려놓고 언덕으로 올라와 큰 돌을 주워다가 조개껍질을 부쉈다. 이제야 분풀이를 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조개에게 물렸던 자국에 핏발이 서 있었다. 

방금 있었던 위험을 생각해 보니 등골이 오싹하게 식는다. 

 

이날 밤 사제 두 사람은 조개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홍칠공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보니 상처의 통증이 상당히 감소되어 있었다. 가볍게 운기를 해 보니 흉부와 복부 사이가 그만하면 견딜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의아한 탄성을 발했다. 황용이 몸을 뒤쳐 일어나 앉으며 묻는다. 

 

[사부님, 왜 그러세요?] 

[하룻밤 자고 일어났는데 상처의 통증이 많이 가라앉았단 말이야] 

 

황용은 너무나 기쁘고 반갑기만 했다. 

 

[틀림없이 조개를 잡수셨기 때문일 거예요.] 

 

벌떡 일어나 굴 밖으로 달려나가 어제 베어먹고 남은 조개 고기를 가져오려고 했다. 놀랍고도 기쁜 생각 때문에 구양공자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다. 그녀가 막 두 덩어리의 고기를 베어 냈는데 갑자기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황용이 허리를 구부려 부서진 조개껍질을 한줌 들어 뒤로 던지며 벌떡 몸을 날려 해변에 나와 섰다. 구양공자는 차디찬 눈초리로 방관하며 홍칠공의 동정을 살피기만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래도 이상하고 생각해 볼수록 더욱 의심을 하게 되었다. 홍칠공이 틀림없이 중상을 입어 보행조차 곤란해 보이기만 했다. 그렇다고 굴 속으로 뛰어들자니 아무래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황용이 제발로 걸어 굴 밖으로 나왔으니 이는 하늘이 내린 기회다. 그래서 즉시 달려든 것이다. 황용이 조개껍질을 던졌지만 구양공자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피했다. 

 

[착한 누이야, 가지 말아요. 내 할 말이 있어요.]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은데 왜 치근치근 귀찮게 야단이에요. 창피한 것도 모르고.] 

 

두 손가락을 볼에 대고 빈정거렸다. 구양공자는 그러는 황용이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두어 발짝 다가서며 웃었다. 

 

[모두가 자기 탓이오. 누가 그렇게 예쁘게 잘 생기라고 했나? 원, 사람이 견딜 수 있어야지.]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말했으면 거들떠보지 않는 거예요. 환심을 사려고 해 보지만 어림없는 수작이에요.] 

 

구양공자가 다시 한 발 다가서며 웃는다. 

 

[믿지 못하겠는걸. 어디 한번 시험해 봐야지.] 

 

황용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진다. 

 

[한 발짝만 더 접근하면 사부님을 부르겠어요.] 

[그만 둬요. 그 늙은 거지가 걸음이나 걸을 수 있다고 그런 말을 하나요? 내가 가서 업고 오면 모를까.] 

 

구양공자가 껄껄 앙천 대소를 한다. 이 말을 들은 황용이 깜짝 놀라 뒤로 두 발 물러선다. 

 

[바닷속에 뛰어들고 싶거든 뛰어들구료. 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물 속에 오래 있고 싶으면 있구료. 내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흥, 이제 마음대로 놀리시는군. 내 영원히 증오할 테니 두고 봐요.] 

 

몸을 돌려 내달리다 세 발짝도 가지 못해 오른쪽 발을 돌에 부딪치고 <아이쿠> 소리를 지르며 넘어지고 말았다. 구양공자는 혹시 흉계에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해서 긴 외투를 벗어 손에 들고 강침이 날아오면 막을 태세를 취한 후 한 발 한 발 접근해 들어왔다. 

 

[접근하지 말아요.] 

 

황용이 이렇게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억지로 일어나 다시 한발 내딛다가 또 한 번 넘어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무겁게 넘어졌는지 상반신을 물 속에 잠근 채 정신을 잃은 듯 한참이 지나도 아무 동정이 없다. 

(아니, 저 계집애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려고 그러나? 내 이번에는 안 속지 안 속아.) 

이렇게 생각한 구양공자는 발길을 멈춘 채 동정만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요지 부동이다. 머리부터 가슴에 이르기까지 물에 잠긴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니, 정말 졸도한 것이 아닐까? 저러다 저 귀여운 계집애가 정말 익사를 할지도 몰라.) 

걱정스러워 조바심이 일어난 구양공자가 앞으로 달려들며 손을 뻗어 황용의 발을 잡아당겼다. 이렇게 잡아당기다 구양공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용의 전신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급히 몸을 숙여 황용을 끌어안고 일으켰다. 이때 황용이 두 손을 뻗어 구양공자의 두 다리를 얼싸안고 소리를 질렀다. 

 

[물 속으로 들어가요!] 

 

구양공자가 비틀거리다 둘이 다 물속으로 텀벙 빠져 들어갔다. 구양공자의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물 속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그토록이나 조심을 했지만 결국 이 계집애에게 속았구나. 나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 

황용은 자기 계획대로 일이 되어 나가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있는 힘을 다해 구양공자를 물속에 처박기에 바빴다. 구양공자는 찝찔한 소금물이 입 속으로 꿀떡꿀떡 넘어가자 어질어질 눈앞이 캄캄해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손과 발을 허위적거리며 황용을 잡으려고 사지를 버둥거렸지만 황용은 자유 자재로 피해 다니면서 잡히지 않는다.  

 

구양공자는 계속 소금물을 켜면서 바닷속으로 빠져 들어가다가 두 발이 땅에 닿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워낙 무공이 탁월한 사람이라 발이 땅에 닿는다는 것이 느껴지자 즉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다시 자기 몸이 뜬다고 의식하자 허리를 구부려 바닷속에 있는 바위를 틀어잡았다. 내공을 쓰면서 호흡을 멈추고 눈을 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 길을 찾는다. 하지만 주위는 파란 물 속이라 동서 남북을 가릴 수가 없었다. 전후 좌우로 발길을 더듬어 보면서 아무래도 높은 곳으로 기어올라가야만 살 것 같은 생각을 했다. 바닷속의 암초는 울퉁불퉁한데다 미끄럽기까지 하여 걷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경공에 의지하여 단숨에 위를 향해 결사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황용은 그가 물 속으로 가라앉은 뒤 다시 솟아오르지 않자 즉시 잠수를 하여 살펴보았다. 그가 때마침 바위를 타고 올라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슬그머니 헤엄을 쳐 그의 등뒤로 달려들면서 아미강자로 찔렀다. 그러나 구양공자는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피하고 팔꿈치로 반격을 하면서도 쉬지 않고 전속력을 다해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제 숨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바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몸이 부력 때문에 불쑥 수면 위로 뜬다. 고개를 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해안이 코앞에 보였다. 

황용은 이제 어쩔 수 없음을 느끼며 한숨을 길게 내쉬고 또 다시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바닷물 속에서 골탕을 먹은 구양공자는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이 되어 후줄근해져서 언덕 위로 올라섰다. 귓속, 콧속이 막히고 어질어질해 견딜 수 없었다. 들이켠 소금물을 모래밭에 엎드려 토해 낸다. 전신이 나른한 것이 중병을 앓고 난 뒤와 같았다. 가쁜 숨을 오랫동안 내쉬느라니 슬그머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온다. 

 

[내 먼저 늙은 거지를 죽여 없애 버려야지. 그래도 제년이 내말에 쫓지 않는지 어디 두고 보자!]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구양공자가 비록 마음은 이렇게 먹었다지만 그래도 홍칠공은 역시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즉시 호흡을 조절하며 한참 동안 정신을 가다듬는다. 이제야 겨우 피곤이 가시는 듯했다. 그래서 단단한 나뭇가지를 꺾어 평소 점혈을 찍는 데 써 오던 철선(鐵扇)의 대용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손에 쥐고 살금살금 굴을 향해 걸었다. 그는 굴어귀의 정면을 피해 옆에서부터 접근해 들어가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굴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기다려 본 뒤에야 비로소 머리를 디밀어 안을 살폈다. 홍칠공이 단정하게 앉아 햇볕을 향해 운기를 하고 있었다. 혈색이 좋은 것이 중상을 입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 

구양공자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내 어디 한번 시험해 봐야지 걸음을 걸을 수 있나 없나?) 

즉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소리를 질렀다. 

 

[홍선배님, 큰일났어요!] 

 

홍칠공이 눈을 뜨고 묻는다. 

 

[왜 그러나?] 

 

구양공자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황소저가 산토끼를 쫓다가 그만 벼랑으로 떨어졌는데 중상을 입고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홍칠공이 깜짝 놀라 서둔다. 

 

[빨리 구해 주도록 하게.] 

 

이 말을 들은 구양공자는 뛸 듯이 기뻤다. 

(자기가 걸음을 걸을 수 있다면 벌써 뛰쳐나왔을 것이다.) 

장신을 끌고 굴 어귀를 막아서며 웃는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내 생명을 뺏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왜 제가 구해 줍니까? 직접 구해 주세요.] 

 

홍칠공은 그의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 흉물스런 놈이 벌써 내 무공의 소실을 눈치챘구나. 노규화 갈 날이 이제 당도한 모양이다.) 

구양공자를 상대로 사생 결단을 펴는 방법 이외에 다른 묘안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전신의 기력을 팔뚝에 모아 보았다. 대들기만 하면 불시에 일격으로 때려 누일 생각이다. 그러나 가볍게 운기를 했는데도 등뒤의 상처가 뜨끔거려 전신의 골절이 마디마디 부러져 나가는 것 같은 진통을 느꼈다. 그런데 구양공자는 징그러운 미소를 띄운 채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자기도 모르는 장탄식과 함께 눈을 감고 죽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황용은 구양공자가 언덕으로 도망쳐 나가는 것을 보고 혼자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어쩐담. 저 녀석은 저 녀석대로 방비를 할 테니 이젠 다 틀렸겠지.) 

그냥 물속에서 잠수를 한 채 수십 장을 헤엄쳐 나가다 숨이 가빠서야 수면 위로 떠올라 호흡을 조절했다.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다시 한 차례 잠수를 한 뒤 고개를 내밀고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니 나무가 무성한 것이 방금 물 속에 뛰어들었던 곳과는 다른 장소다. 황용은 자기 집이 있는 도화도의 경치에 생각이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만약 은밀한 장소를 찾아 사부와 숨는다면 그 녀석이 찾아오지는 못할 텐데.) 

 

황용은 내륙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혹시 구양공자를 만나게 되면 피하기 곤란해질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안을 따라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내 지난 날 놀기를 탐하지 않고 아버지의 기문오행실을 철저히 익혔더라면 그 녀석을 이렇게까지 겁내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아이, 이젠 다 틀렸어. 아버지께서 도화도의 지도까지 저 녀석에게 주셨으니 저 녀석 약은 꾀에 벌써 터득한 바 적지 않을 거야.)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만 등나무 넝쿨의 가지를 밟고 말았다. 발이 등나무에 걸리자마자 머리 위에서 우수수 돌과 흙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녀는 급히 몸을 솟구쳐 피했지만 사방은 모두 큰 나무들이라 등으로 나무 한 그루를 받고 말았다. 어깨 위에 돌이 떨어져 얻어맞았다. 다행히 연위갑을 입어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들고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마음이 두근거려 견딜 수 없었다. 원래 머리 위는 험준하기 짝이 없는 절벽이요, 그 절벽 위에 작은 산만큼이나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것이다. 그 바위의 반은 절벽 위에 걸쳐 있고 남은 반은 허공에 걸린 채 흔들리면서 이제 곧 떨어져 내려올 것 같은 형세다. 바위에는 무수한 등나무와 칡넝쿨이 얽히고 설켜 있었다. 그녀가 방금 밟았던 등나무 넝쿨이 바위 옆의 사석(沙石)과 연결되어 있었다. 만약 밟은 것이 큰 바위와 연결된 넝쿨이었다면 이 수만 근도 넘는 바위가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분골 쇄신 그 자리에서 요절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 바위는 좌우로 계속 흔들리면서도 떨어져 내리지는 않았다. 황용은 덩쿨이 없는 곳을 골라 발길을 옮기며 그 자리를 피해 나왔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그 절벽과 흔들바위를 바라다보면서 조물주의 신기한 재주에 경탄을 마지못했다. 손가락으로 밀기만 해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바위가 그대로 계속 흔들리고만 있는 것이다. 절벽 주위는 뭇 봉우리가 우뚝 솟아 사방의 해풍을 막아주는 것이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이 바위는 흔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황용이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다시 앞으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몸을 돌려 후퇴하면서 사부님 시중이나 들기로 작심을 했다. 5리쯤이나 걸었을까,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하늘이 저 고약한 녀석을 없애라고 만들어 주신 기회인지도 몰라. 왜 내가 그걸 몰랐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너무나 기뻐 노상에서 두어 번 물구나무까지 서며 웃었다. 

그녀는 급히 절벽 아래로 돌아와 지형을 살펴보았다. 절벽 좌우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고목들이 많다. 만약 물러서기 위해 뛰어본다 하더라도 4,5자를 넘기 힘들 것 같았다. 그 큰 바위가 떨어져 내려오기라도 한다면 제아무리 재빠른 다람쥐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품속을 더듬어 금으로 자루를 만든 접는 칼을 찾아냈다. 길이가 4촌이 채 못되는 손칼이다. 그러나 칼날은 날카롭기 그지없는 것이다. 평소 노상에서 닭을 잡을 때나 또는 고기를 썰 때 쓰던 칼이다. 즉시 오른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절벽 아래로 다가섰다. 

그녀는 그 큰 바위와 연결된 7,8개의 등 넝쿨만 건드리지 않고 다른 넝쿨은 눈에 띄는 대로 잘라 버렸다. 칼을 댈 때는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가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여 바위와 연결된 넝쿨을 건드리기만 하면 자기는 그 자리에서 묵사발이 되는 것이다. 10여 개의 넝쿨을 다 잘랐을 때는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한바탕 악전 고투를 치르고 난 후보다 더욱 고달픔을 느꼈다. 

그녀는 끊어진 넝쿨을 한 데 묶어 표가 나지 않도록 가려 놓고 나서 통로를 유심히 관찰한 뒤 기억해 놓았다. 그런 뒤에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귀로에 나섰다. 동굴에 가까이 올 때까지도 구양공자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동굴 속에서 너털웃음 소리가 길게 흘러나왔다. 

 

[당신이 절세의 무공을 지녔다고 뽐내더니 오늘 이 공자 나으리의 손에서 꼼짝 못하는군. 그래 억울한 생각이 들지 않으오? 자,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 늙은 당신을 불쌍히 여겨 우선 세 번 공격하도록 하고 나는 반격을 하지 않으리다.] 

 

황용은 큰일났다는 생각을 했다.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머리를 스치는 꾀가 하나 떠올랐다. 

 

[아빠, 아빠 웬일이세요. 여길 다 오시게요. 아니 구양 아저씨까지도 오셨군요.] 

 

구양공자는 굴 속에서 홍칠공을 고양이 쥐 놀리듯 가지고 놀다가 이제 막 손을 쓰려는 참에 황용이 의치는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숙부님과 황노사가 오시다니? 아냐 아냐. 틀림없이 저 깜찍한 계집애가 노규화를 구해 주려고 허튼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걸 거야. 어쨌든 노규화는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 나가 본들 무슨 상관이 있을라구?) 

도포 소매를 허위적거리며 굴 밖으로 나섰다. 황용이 해변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 아빠!] 

 

구양공자가 아무리 눈을 씻고 바라다보아도 황약사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누이, 나를 속여 굴 밖으로 나와 함께 놀자구 그랬구나. 그래서 여기 이렇게 나와 있지 않은가? 허허허.....] 

 

황용도 눈웃음을 흘려 보낸다. 

 

[누가 속이고 싶어서 그랬나요?] 

 

이렇게 말하고 해변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이젠 조심해서 다시는 물 속에 끌려들어가지 말아야지. 어디 한번 놀아 볼까?] 

 

구양공자가 황용의 뒤를 쫓는다. 그의 경공은 놀라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황용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황용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일났구나. 절벽 아래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잡히겠는걸.) 

다시 수십 장을 달려나갔다. 구양공자와의 거리가 더 한층 단축되었다. 황용이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해안에서 몇 자 떨어져 나갔다. 구양공자는 얌전하게 뒤쫓으면서도 어쩐 일인지 황용을 잡으려 들지는 않았다. 뒤를 쫓기는 하면서도 무슨 속임수에 걸려들까 조심을 하기 때문이다. 

황용이 발길을 멈춘 채 웃으며 말문을 연다. 

 

[앞에 큰 호랑이가 한 마리 있는데 나를 더 쫓아오면 아마 물리고 말걸요.] 

[나도 큰 호랑이니 어디 황용을 한 입 물어 볼까?] 

 

구양공자가 웃으며 이렇게 농담으로 받고 번쩍 몸을 날려 덮치려고 했지만 황용이 깔깔거리며 또 다시 앞을 향해 내달렸다. 둘은 이렇게 앞뒤를 다투며 잠시 후 절벽 부근에 이르렀다. 황용은 점점 더 빨리 달려 모통이를 돌아서며 큰 소리로 외친다. 

 

[빨리 와요.] 

 

황용이 벌써 절벽 앞을 빠져나가는데 눈앞이 번쩍, 해변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이 장소, 이 찰나, 마음속으로는 의심이 부쩍 일어났지만 잠시나마 지체할 수 없는 것이다. 끊어 놓은 넝쿨을 정확히 확인하고 세 번이나 껑충껑충 뛰어 절벽 아래로 내려와 섰다. 

 

[어디 호랑이가 있단 말야?] 

 

구양공자가 웃으며 쏜살처럼 절벽 앞으로 다가섰다. 가볍고도 이상야릇한 소리가 두어 번 들렸다. 구양공자는 머리 위에서 질풍이 쏟아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낌과 동시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산더미같이 큰 바위가 자기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황급한 가운데서도 급히 뒤를 향해 피했다. 그러나 뒤에는 수목들이 빽빽이 차 있어 큰 나무에 부닥치고 말았다. 

<우지끈> 하는 소리에 나무가 부러지고 파편이 등뒤에 와 꽂혔다. 목숨이 살아야지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다. 결사적인 힘을 다해 피해야 하는 것이다. 

이 순간 넋이 나간 구양공자의 목이 누군가에게 잡혀 끌려나갔다. 재빠르기도 하거니와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구양공자의 몸이 몇 자나 끌려나가기는 했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 천지 개벽을 하는 듯한 굉음 속에 구양공자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온 천지가 먼지에 뒤덮인 채 사석이 난무했다. 

 

황용은 자기의 계책이 적중한 것을 보자 놀랍고도 반가왔다. 그런데 바위가 떨어져 내려올 때의 질풍을 예기치 못했던 것이다. 강렬한 바람에 몸이 밀려 땅바닥에 넘어지고 우수수 돌과 모래가 머리 위에 떨어져 내려왔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한참이나 그렇게 있었다. 모래와 돌이 쏟아지는 소리가 멈춘 뒤 눈을 뜨니 먼저 가운데 떨어져 내려온 큰 바위 옆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꿈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두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바라다보았다. 틀림없이 하나는 서독인 구양봉이요, 다른 하나는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곽정이 아닌가? 

뜻밖의 장소에 뜻밖에 곽정이 나타나자, 황용이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들었다. 곽정도 달려왔다. 둘은 얼싸안고 반가와 어쩔 줄을 몰랐다. 

 

원래 그날 구양봉과 곽정은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반 동강난 배 위에서 사생 결단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배가 침몰하면서 그들도 바닷속에 빠지고 말았다. 깊은 바닷속이라 물살이 말할 수 없이 세기만 했다. 두 사람의 코와 입으로 해수가 밀려 들어갔다. 서로 읽히고 설켜 싸우던 두 손을 자신들도 모르게 풀고 입과 코를 막았다. 해저 밑으로는 빠른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멀리멀리 떠내려갔다. 곽정이 손과 발을 허위적거리며 있는 힘을 다해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황용 등이 타고 있는 작은 배는 가물가물한 점으로 보였다. 

 

곽정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그때 황용은 공교롭게도 바닷속을 잠수하면서 곽정을 찾고 있을 때였다. 해상의 파도 소리는 높기만 하고 거리는 너무나도 멀기만 했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곽정이 몇 번 더 외치고 있는데 갑자기 왼발이 조여 오며 한사람의 머리가 불쑥 물 위로 솟아올라왔다. 구양봉 바로 그 사람이었다. 구양봉이 헤엄을 약간 칠 줄은 알았지만 넓고 넓은 대해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되는 대로 허위적거리다 공교롭게도 곽정의 발을 틀어잡은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죽자고 틀어 쥘 뿐 놓을 생각을 할 리가 없다. 곽정이 있는 힘을 다해 떨구려 했지만 오히려 오른발까지 잡히고 말았다. 

둘은 서로 물 속에서 밀고 당기며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다시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두 번째 수면으로 떠올랐을 때 곽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내 발을 놓아주시오.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 

 

구양봉은 한사코 손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렇게 잡고 있어 봐야 결과는 둘 다 죽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쪽 발을 놓아주었다. 곽정이 손을 뻗어 그의 옆구리를 받쳐 주자 그제야 물 위로 떠올랐다. 바로 이때 거목 하나가 파도에 밀려 그들 앞으로 떠내려오고 있었다. 곽정이 손을 뒤로 돌려 껴안으며 반가와 소리를 지른다. 

 

[빨리 이걸 붙잡아요.] 

 

날이 새기를 기다려 보니 그 거목은 원래가 부러진 돛대였다. 사방을 두리번거려도 망망한 대해만 보일 뿐 배라고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구양봉은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사장(蛇杖)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알 수도 없었다. 

(만약 상어떼라도 만나면 어쩐다? 그렇게 되면 주백통처럼 되는 대로 치고받을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땐 나라도 있어 구해 주었지만, 이제 그 누가 나를 구해 준단 말인가?) 

둘은 마냥 바다 위를 표류했다. 어쩌다 큰고기 한 마리가 그들 옆을 스쳐 지나는 것을 보고 곽정이 비수를 들어 찌르자 구양봉이 장력으로 쳐죽인 뒤 나누어 먹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동주공제(同舟共濟)다. 둘은 원래 죽자 하고 싸운 처지다. 대해 가운데 표류하면서 어쩔 수 없이 부러진 돛대를 잡고 서로 의지하고 지내는 신세로 변한 것이다. 며칠 동안 이렇게 표류를 하면서도 다행히 위험한 일은 당하지 않았다. 이 해류는 원래 홍칠공과 황용이 도착한 섬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배가 도착한 이틀 뒤 또다시 곽정과 구양봉을 이곳에 데려다 준 것이다. 

 

두 사람이 언덕 위에 올라와 한참 동안 쉬고 있는데 갑자기 간드러진 웃음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던 것이다. 구양봉이 벌떡 일어나 웃음 소리가 난 곳을 찾는데 때마침 구양공자가 끊어진 넝쿨을 밟자 큰 바위가 떨어져 내려와 덮친 것이다. 

구양공자는 통증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구양봉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위험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카를 살펴보았다. 숨이 채 멎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요지 부동이다. 그는 두 발을 끓은 채 합마공의 상승 무공으로 두 손을 뻗고 기합을 넣어 보았다. 이 기합이야말로 그 위력이 비할 데 없이 강한 것이기는 하지만 바위가 워낙 수만 근이 넘는 것이라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가 몸을 숙이자 구양공자가 눈을 떴다. 

 

[숙부님!] 

 

소리가 힘없고 맥이 빠져 있다. 

 

[오냐, 좀 참거라.] 

 

그의 상처를 얼싸안고 살짝 잡아당겼지만 구양공자는 신음 소리를 내며 정신을 잃었다. 바위가 그의 두 다리를 덮치고 있었기 때문에 잡아당기는 바람에 더 아프기만 해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땅바닥도 딱딱한 바위가 깔려 있어서 팔래야 팔 도리도 없었다. 구양봉도 속수 무책이라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곽정이 황용의 손을 어루만지며 묻는다. 

 

[사부님은?] 

[저기 계세요.] 

 

황용이 손을 뻗어 홍칠공이 있는 방향을 가리킨다. 곽정은 사부가 무양한 줄 알고 반가와한다. 막 가서 뵈려고 하는데 구양공자의 처참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구양봉은 소리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가 도와 드리지요.] 

 

황용이 곽정의 옷소매를 잡았다. 

 

[사부님이나 뵈러 가요. 거들떠 볼 것도 없어요.] 

 

구양봉은 바위가 조카를 엎친 것이 설마하니 황용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라고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바위가 그토록 큰데 어찌 한 여자의 힘으로 그것을 절벽 위에서 뗄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곽정이 돕겠다고 나서는 것조차 만류하는 것을 보자 화가 슬그머니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홍칠공까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황용이 곽정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보고는 몸을 숙이고 어떻게 바위를 치우나 궁리를 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자기 조카를 향해 소곤거린다. 

 

[좀 참고 기다리면 내 구해 주마.] 

 

몸을 날려 나무 꼭대기 위로 올라섰다. 멀찍이 떨어져 그들 두 사람의 뒤를 살금살금 밟는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에 손을 맞잡고 가는 뒷모습을 바라다보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 만약 네 연놈을 요절내지 못할 컷 같으면 그건 서독이 아니렷다.)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뒤를 쫓는 사이 어느덧 굴 어귀에 당도했다. 곽정이 나서며 사부를 불렀다. 홍칠공은 두 눈을 감은 채 석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얼굴이 창백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구양공자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바람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곽,황 두 사람이 근심스러운 눈초리로 내려다보면서 하나는 앞가슴을 풀어 헤쳐 주고 다른 하나는 손과 발을 주물러 주었다. 홍칠공이 실눈을 뜨고 바라다보다가 곽정임을 확인했는지 입가에 가냘픈 미소가 피어오른다. 

 

[곽정이냐? 너까지 이곳에 왔구나.] 

 

곽정이 막 대답을 하려는데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노규화, 나도 왔소!] 

 

금속성이 섞여 귀를 찌르는 목소리다. 곽정이 급히 몸을 들쳐 세우며 신룡파미(神龍擺尾)의 솜씨를 발휘하여 굴 입구를 막았고 황용은 사부의 옆에 기대 놓았던 죽장을 잽싸게 잡고 곽정 옆에 섰다. 구양봉이 웃으며 말문을 연다. 

 

[노규화, 나오구료.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가겠소.] 

 

곽정과 황용이 서로 바라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구양봉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슬금슬금 올라선다. 곽정이 공격을 하자 구양봉은 벌써 그것이 강룡십팔장 가운데의 재주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옆으로 피하는 체하다가 그의 오른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면전으로 지팡이 하나가 달려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지팡이가 위를 향해 대드는 줄 알았는데 아래쪽을 향해 세 방향에서 대들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당황이 됐다. 구양봉이 주춤거리며 왼손을 위로 들어 막고 왼발을 들어 옆차기를 했다. 그런데 황용의 손에 든 죽장이 한 번 흔들리는 듯하더니 어느 틈에 허리를 공격했다. 구양봉이 깜짝 놀라 뒤로 벌떡 뛰어 피하며 쏘아본다. 

 

황용은 처음으로 구봉법(狗棒法)을 써 본 것인데 쓰자마자 상대가 밀리는 것을 보고 득의 양양하다. 구양봉은 이러한 봉법을 본 적이 없었다. 코방귀를 뀌면서 몸을 날려 위로 대들며 죽장을 뺏으려 했다. 그러나 황용이 처음 배운 죽장을 휘둘러 보는데도 장영(杖影)이 난무하며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구양봉이 계속해서 7,8종의 장법과 권법을 써 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곽정은 놀랍고도 반가와 좌장우권(左掌右拳)으로 협공을 했다. 구양봉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몸을 속이고 <쉭쉭> 쌍장을 날렸다. 

장력이 채 미치기도 전에 장풍이 먼저 지상의 먼지를 날렸다. 곽정은 그 위세가 맹렬한 것을 보고 황용이 그대로 있다가는 내상을 입을 것 같아 그녀의 어깨를 밀어 합마공의 위력을 피하게 했다. 구양봉이 앞으로 두 발짝 나서며 또 한 번 쌍장을 내뻗어 밀어붙인다. 그의 이 합마공은 비할 수 없이 지독한 것이다. 

홍칠공은 그와 같은 공력을 가지고도 당시 도화도에서 겨우 엇비슷하게 겨룰 수 밖에 없었는데 곽,황 두 사람의 초술이 비록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공력이 그에게는 미칠 바가 아니다. 곧 몰리기 시작하며 점점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구양봉은 굴 속으로 들어서자마자 왼손을 뒤집어 장풍을 날렸다. 석벽이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다시 오른손을 들어 올리면서 괴상한 함성과 함께 홍칠공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이었다. 

홍칠공은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고 있다가 머리 위의 장풍을 의식하고 두 눈을 뜨면서 미소를 지어 탄사를 발한다. 

 

[훌륭한 장법이오.] 

 

구양봉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어지면서 들었던 손을 멈춘다. 

이때 황용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 사부님께서 생명을 구해 드렸는데도 오히려 반격을 하시다니 창피하지도 않으셔요?] 

 

구양봉이 대답도 하지 않고 손을 뻗어 홍칠공의 가슴을 살짝 밀어 보았다. 가슴의 근육이 쑥 들어가는 듯했다. 홍칠공은 절세의 무공을 지닌 사람이라 전 같으면 근육이 외력을 받으면 즉시 탄력을 발휘해 튀어나왔을 것이다. 홍칠공의 무공이 소실되었다는 사실을 안 구양봉이 허리를 굽혀 홍칠공을 번쩍 들어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이 나를 도와 내 조카를 구해 주면 이 노규화의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아니, 천지 신명이 벌을 내리시려고 큰 돌로 눌러 놓은 것을 똑똑히 보시고도 그런 말을 하세요? 누가 감히 그를 구할 수 있다구요. 조심하세요. 당신까지 그렇게 돌로 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황용의 쏘아붙이는 말을 들은 구양봉은 홍칠공을 더 높이 들어올려 집어던질 태세를 취했다. 곽정은 심지가 착한 사람이다. 구양봉이 사부를 가지고 자기들을 위협이나 하면 했지 설마하니 내동댕이까지 칠 정도로 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빨리 사부님이나 내려놓으세요. 우리가 도와 드리면 될 거 아닙니까?] 

 

곽정의 말에 구양봉은 조카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다. 즉시 달려가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하지도 않고 천천히 홍칠공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당신을 도와서 그를 구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먼저 세 가지 약속부터 하셔야 해요.] 

[아니, 이 계집애가 또 무슨 애를 먹이고 싶어서 그래.] 

[당신의 조카를 구출한 뒤에는 우리가 함께 이 무인도에서 살아야 할 텐데 다시는 못된 생각 갖지 마시고 우리 사제 세 사람에게 가해를 할 생각을 말아야 해요.] 

 

황용의 제안에 구양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 숙질은 물에 서툰데 아무래도 육지로 돌아가자면 저것들 신세를 지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그건 좋아. 이 섬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겠네. 그러나 이 섬을 벗어난 후에는 몰라.] 

[그땐 우리가 먼저 공격하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둘째, 우리 아버님께서 내 장래를 이 곽정 오빠에게 맡기시겠다고 하신 일을 직접 듣고 보신 일이니까 일후 당신의 조카가 만일 나를 향해 다른 수작을 부린다든지 한다면 그건 개 돼지만도 못한 짐승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에요.] 

 

구양봉이 <흥> 코방귀를 뀐다. 

 

[좋아, 그것도 이 섬에서만이야. 이 섬을 떠나선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자구.] 

 

 

 

第 四十三 章. 탈출 음모 

 

 

자기 조카를 구하자는 구양봉의 제안에 황용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세 번째예요. 우리가 도와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어요. 그러나 만일 천지 신명의 도움이 없어 당신의 조카가 죽는데도 그건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다른 말씀은 안하시는 거예요?] 

 

구양봉이 괴상하게 눈알을 부라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만약 내 조카가 죽는다면 노규화도 살 생각은 하지 말라구. 쓸데없는 수작 그만 부리고 빨리 구하러 가기나 하자구.] 

 

굴을 벗어나 절벽을 향해 내달렸다. 

곽정이 막 그 뒤를 쫓으려는데 황용이 막아선다. 

 

[곽정 오빠, 잠깐만. 잠시 후 서독이 바위를 밀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뒤에서 일격에 요절을 내고 말아야 해요.] 

[뒤통수를 치는 일은 떳떳한 일이 아니야!] 

 

곽정의 이 말에 황용이 발끈 화를 낸다. 

 

[그럼 그자가 사부를 해치려던 일은 떳떳하단 말이에요?] 

[우리가 말을 했으니 신용을 지키자는 뜻이야. 우선 조카부터 구해 주고 나서 다시 사부 대신 복수를 할 생각을 하자는 게지.] 

 

황용이 간드러지게 웃는다. 

 

[그래요. 오빠는 성인(聖人)이니까 오빠 말을 들어야지.] 

 

둘은 절벽 아래를 향해 달렸다. 구양공자의 처절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구양봉이 발끈 소리를 질렀다. 

 

[빨리 오지 않고 뭘 해!] 

 

둘은 몸을 날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여섯 개의 손바닥을 동시에 바위에 댔다. 구양봉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자!] 

 

세 사람의 장력이 일제히 가 닿았다. 그 큰 바위가 가볍게 흔들리는 듯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구양공자가 비명을 지르다가 두 눈을 위로 치뜬 채 정신을 잃었다. 구양봉이 깜짝 놀라 허리를 굽히고 살펴보았다. 조카는 가늘게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고통을 참기 위해 문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절세의 무공을 지닌 구양봉이었지만 정말 속수 무책이다. 

바위를 더 밀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거에 바위를 제쳐놓기 전에는, 들었다 놓았다 하게 되면 조카만 죽었다 살았다 할 뿐이다. 당황해 하고 있는 사이에 척척한 땅에 발이 빠져 있었다. 번쩍 발을 드니 신발만 진흙 속에 빠졌다. 

구양봉이 고개를 속이고 신발을 찾다가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란다. 조수가 점점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바닷물이 벌써 바위가 있는 곳에서부터 5,6장밖에 안되는 거리에 와 있었다. 구양봉이 급해 소리를 지른다. 

 

[아니 요놈의 계집애, 사부를 구하려거든 빨리 내 조카를 살릴 생각부터 하지 않고 뭘 꾸물거려!] 

 

황용도 벌써부터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위가 이렇게 무겁기만 하고 섬은 무인도라 도움을 청해 볼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저 바위를 옮긴단 말이냐? 10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어느것 하나 신통한 것이 없었다. 구양봉이 호통을 치자 황용도 눈을 하얗게 흘긴다. 

 

[만약 우리 사부님이 부상만 망하지 않으셨데도 외가의 무공이 그토록 훌륭하신데다가 그 장력만 보탠다면 우리 네 사람의 힘으로 충분히  할 말이 없었다. 

텐데.... 이제....] 

 

두 팔을 벌린 채, 말을 해 봐야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시늉만 했다. 

황용으로서는 화가 나서 하는 말이겠지만 구양봉으로서도 사실이 사실이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정말 하늘의 뜻인지도 몰라. 만약 노규화가 부상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의협심에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게고 틀림없이 도와주었을 텐데.) 

구양봉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리니 바닷물이 벌써 몇 자나 더 밀려와 있었다. 이때 구양공자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숙부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저는....., 정말 더 견딜 수가 없어요.] 

 

구양봉이 품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 들고 입술을 깨문다. 

 

[좀 참고 있거라. 두 다리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살아야한다.] 

 

앞으로 달려들며 바위에 눌린 두 다리를 자르려고 했다. 구양공자가 놀라 소리를 지른다. 

 

[아녜요, 숙부님. 차라리 한칼에 저를 죽여주세요!] 

 

구양봉도 노기 충천하여 소리를 지른다. 

 

[어째 사내 녀석이 그 모양이냐. 수십 년 동안이나 가르친 게 다 허사였구나.] 

 

구양공자는 통증으로 가슴을 긁어 대면서도 아무 말을 못한다. 황용은 그의 처절한 눈동자를 보자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도화도에서 돌을 나를 때 쓰던 방법이 떠올랐다. 

 

[잠깐만! 두 다리를 잘라 봐야 공연히 목숨만 잃는 것이 아니겠어요? 내게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 소용이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빨리 말을 해 봐요, 착한 아가씨. 아가씨가 생각하는 방법이라면 소용이 있을 테지.] 

 

구양봉이 급히 재촉을 한다. 황용은 생각했다. 

(조카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에 이젠 계집애라는 욕도 하지 않고 착한 아가씨라고까지 부르는구나.)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대꾸를 한다. 

 

[좋아요.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우리 우선 나무껍질을 벗겨 저 돌을 끌어올릴 만한 줄부터 준비래야 해요.] 

[그래, 그걸 누가 끌어올린단 말야?] 

[배에서 닻을 끌어올리듯 하면 돼요.] 

[뭐라구, 닻을 끌어 올리 듯 하다니......?] 

 

구양봉도 즉시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래 그래. 그러면 되겠군.] 

 

곽정은 황용이 나무껍질을 벗겨 쓰자는 말을 듣고는 그것을 어떻게 쓰려고 하는지 물어 보지도 않고 비수를 뽑아 들고 나무 위로 올라가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구양봉과 황용도 함께 달려들어 순식간에 수십 개의 긴 나무껍질을 벗겼다. 

구양봉은 나무껍질을 벗기다 말고 조카를 살펴보더니 장탄식을 한다. 

 

[벗길 필요도 없어.] 

[왜요? 안 되겠어요?] 

 

황용이 이상해서 묻자 구양봉이 자기 조카를 가리킨다. 황용과 곽정이 고개를 속이고 바라다보니 조수가 밀려와 구양공자의 몸이 반 이상 물에 잠겨 있었다. 필요한 만큼의 나무껍질을 벗기는 동안이라면 벌써 물에 잠기고 말 것 같았다. 

그러나 구양공자는 물에 잠겨 있으면서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낙심하지 말고, 빨리 껍질이나 벗겨요.] 

 

황용이 이렇게 호통을 치듯 말했지만 일세를 횡행하는 구양봉으로서도 아무 말 못 하고 다시 나무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황용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구양공자 옆으로 다가가서 큰 돌 몇 개를 주워다가 그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고 등을 높게 받쳐 주었다. 이렇게 되자 코가 높아져 물을 켜지 않게 되었다. 

구양공자가 낮은 소리로 말을 꺼낸다. 

 

[착한 누이, 정말 고맙군요. 내 살기는 다 틀렸지만 이렇게 도와 주시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군요.] 

 

황용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씀 그만 두세요. 내가 꾸민 함정이었던 걸 몰랐나요?]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마시오. 만약에 숙부님이 들으시면 그냥 놔두지 않으실 텐데.... 나도 벌써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누이 손에 죽는 것이 다행이로군요.] 

 

황용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정말 비열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꽤 잘해 주려고 애쓰던 사람이야....) 

나무 밑으로 돌아와 다시 껍질을 매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나무껍질 세 개로 새끼를 꼬아 줄을 만들고 다시 그것을 굵은 밧줄로 엮은 다음에 네 개의 굵은 밧줄을 한데 묶어 아주 튼튼한 닻줄로 만드는 것이었다. 구양봉과 곽정은 계속해서 나무껍질을 벗겨 오고 황용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새끼를 꼬았다. 

세 사람이 재빠르게 손을 쓰기는 했지만 조수는 더욱 빨리 밀려와 아직도 10여 자를 더 꼬아야 하는데 물은 벌써 구양공자의 코밑에 바짝 와 있었다. 구양봉이 보다못해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며 소리를 질렀다. 

 

[너희는 가 보도록 해라. 내 조카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너희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나도 알았으니까.] 

 

곽정도 가망 없음을 알고 그냥 나무에서 내려와 황용과 나란히 비켜 섰다. 10여 장을 물러서자 황용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우리 저 바위 뒤로 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봐요.] 

[그럴 것 없어. 또 구양봉이 눈치를 챌 테니까.] 

[저 조카가 죽으면 아무래도 사부님을 해치려 덤빌 텐데, 그 사람 꿍꿍이 속이라도 알아야 방비를 할 것 아니에요. 혹시 노독물에게 들키면 우리도 구양공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고 그러지요.] 

 

곽정도 그럴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모퉁이를 돌아 나무 뒤로 해서 슬그머니 큰 바위 뒤로 숨었다. 구양봉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잘 가거라, 내 네 마음을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 평생 소원이 황노사 따님을 아내로 맞고 싶었던 것이지. 소원을 풀어 주마.] 

 

황용과 곽정은 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 입이 딱 벌어졌다. 

(아니, 조금만 있으면 죽을 텐데 소원을 풀어 주겠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할까?) 

구양봉이 하는 다음 말을 듣고 두 사람은 놀랍고도 기가 차 식은땀이 한바탕 등줄기로 흘렀다. 

 

[내 곧 가서 황노사의 딸을 죽여 너와 함께 수장을 지내 주마. 사람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야. 네가 살아서는 그녀와 한방에 거처하지 못했지만 죽어서라도 함께 묻힌다면 그나마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느냐?] 

 

구양공자는 물이 입 위까지 차 있어서 말도 하지 못했다. 황용이 곽정의 손을 꼬집어 둘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다. 구양봉은 비통한 나머지 그들이 엿듣고 있다는 것조차 살필 겨를이 없었다. 모퉁이를 완전히 돌아나온 뒤 곽정이 분통을 터뜨렸다. 

 

[용이, 우리 가서 노독물과 사생 결단을 벌이자구.] 

[꾀로 싸워야지 힘으로는 안 돼요] 

[꾀로 싸우다니?] 

[제가 지금 그걸 생각하고 있어요.] 

 

다시 모퉁이 하나를 돌아서자 산등성이 아래로 갈대가 우거져 있는 것이 보였다. 황용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노독물이 그렇게 악독하지만 않아도 내 그 조카를 살릴 방법이 있는데....] 

[뭐라구?] 

 

황용이 칼을 꺼내 갈대를 잘라 높이 들고 한쪽 끝을 입에 문 채 불어 본다. 

곽정도 희한하다는 듯 손뼉을 친다. 

 

[아, 정말 묘안이군. 용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그래 구해 줄 거야? 아니면 집어치울 거야?] 

 

황용이 입을 삐쭉 내민다. 

 

[물론 집어치워야죠. 노독물이 나를 죽이겠다고 야단인데, 흥, 죽이려면 죽여 보라지. 겁낼 줄 알구!] 

 

곽정은 아무 말 없이 그냥 바라다보고 있었다. 황용이 곽정의 손을 더듬어 잡는다. 

 

[곽정 오빠, 설마하니 날 보구 그 못된 사람을 구하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공연히 나 때문에 걱정스러워 그러는 거지요. 우리가 그를 구해 준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잘 대해 주리라는 보장은 없어요.] 

[말은 그렇지만 난 그래도 용이가 걱정이 되고 또 사부님도 걱정이 돼서 그래. 내 생각 같아서는 노독물이 그래도 일파의 종사로서 자기가 한 말은 어느 정도까지는 책임을 지지 않을까?] 

[그럼, 우선 그를 구해 놓고 보지요.] 

 

둘은 다시 돌아왔다. 구양봉이 물 속에 서서 조카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는 곽,황 두 사람을 발견하자 눈에서 살기 등등한 불꽃을 튀긴다. 이제라도 곧 대들어 죽이고 말 형세다. 

 

[내 비켜나라고 했는데 뭣 때문에 다시 돌아왔나?] 

 

황용이 바위에 기대앉으며 시시덕거린다. 

 

[죽었나 살았나 구경 좀 하려구요.] 

[죽었으면 어떻고 살았으면 또 어쩌겠다는 거야?] 

 

구양봉이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만약 벌써 죽었다면 이제 소용이 없겠지요.] 

 

구양봉이 물 속에서 펄쩍 뛰었다. 구양봉은 조카를 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 착한 아가씨, 아직 죽지 않았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빨리 말을 해 봐요.] 

 

황용이 손에 든 갈대를 건네 준다. 

 

[이 갈대를 입 안에 물려요. 그럼 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구양봉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갈대를 뺏듯 받아 가지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조카의 입에 물렸다. 이때 해수는 벌써 구양공자의 코를 막고 있었다. 가슴속에 남은 마지막 호흡을 토하고 있다가 숙부와 황용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갈대가 입에 물려지자 호흡을 해 보았다.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다리의 통증조차 까맣게 잊었다. 

 

[자, 빨리 빨리 줄을 만들자.] 

 

구양봉이 재촉을 하고 나서자 황용이 웃으며 받는다. 

 

[구양아저씨, 나를 물속에 순장하려고 했지요?] 

 

구양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저게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만약 저를 죽이셨더라면 하늘이 무슨 재앙을 내렸을는지 아세요? 그렇게 되면 누가 와서 구해 줄까요?] 

 

황용이 웃으며 빈정거렸지만 구양봉은 못 들은 체 다시 나무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한 시간쯤 부지런히 손을 놀린 결과 30여 장이 넘는 튼튼한 닻줄을 만들었다. 조수가 벌써 절벽 아래까지 밀려와 있었다. 큰 바위도 반 넘어 물에 잠겼고 구양공자가 입에 문 갈대 끝만 겨우 물 밖에 나와 있었다. 구양봉은 걱정스러워 가끔 물속에 손을 뻗어 조카의 맥을 짚어 보았다. 다시 한 시간쯤 지나자 조수가 밀려나기 시작했고 구양공자의 머리가 서서히 물 밖으로 삐져 나왔다. 황용은 닻줄의 길이를 한번 가름해 보고 외쳤다. 

 

[이만하면 충분해요. 이제 맬 큰 통나무 세 개만 있으면 돼요.] 

 

구양봉은 심히 주저하고 있었다. 

(이 무인도에 도끼나 톱은 그만 두고라도 칼 하나 변변한 게 없는데 어디서 통나무를 구해 온단 말이냐?) 

 

[어떻게 한담?] 

[걱정하지 말고, 그냥 나무만 구해 오세요.] 

 

구양봉은 황용이 화를 내며 그만두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 더 묻지도 못하고 세 그루의 큰 나무 옆으로 가서 몸을 움츠리고 합마공의 재주를 부렸다. 그가 몇 번 밀자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부러져 나갔다. 곽정과 황용은 그의 이와 같은 공력에 놀라 혀를 내민 채 서로 바라다보고 있었다. 구양봉은 길고 날카로운 돌을 주워다가 곁가지를 쳐 없앤 뒤에 그것을 황용 옆에 끌어다 놓았다. 

이때 황용과 곽정은 벌써 그 큰 밧줄의 한쪽 끝을 큰 바위 왼쪽에 있는 세 그루의 은 나무 밑동에 붙들어 매고 있었다. 다시 밧줄을 바위에 돌려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에 잡아 맸다. 소나무는 수백 년 묵은 노송이다. 대여섯 사람이 팔을 벌려도 싸기 어려운 그런 나무였다. 

 

[이 소나무가 저 바위의 무게를 감당해 내겠지요?] 

 

황용이 묻는 말에 구양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용은 다시 아홉 가닥의 나무껍질로 줄을 만들게 하고 두 개의 나무토막을 열십자(十)로 묶어 큰 밧줄을 그 위에 감도록 했다. 구양봉이 찬사를 보낸다. 

 

[착한 아가씨, 정말 총명하시군. 부전 자전이라더니 훌륭한 아버님의 훌륭한 따님이군요.] 

[원,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디 구양 아저씨의 조카님에게야 비할 수 있겠어요?] 

 

황용이 이렇게 웃으며 응수를 하고 밧줄을 감자고 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나섰다. 노송을 지주로 삼고 열십자로 만든 나뭇가지를 움직이는 것이다. 바위가 조금씩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벌써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노을이 곱게 수평선을 물들이고 있었다. 조수는 밀려간지 오래다. 구양공자는 갯벌 바닥에 빠진 채 눈을 멀거니 뜨고 그 큰 바위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조금씩 움직이는 바위를 보며 밧줄 감기는 삐거덕 소리가 울릴 때마다 조마조마했지만 기쁘기도 했다. 

세 개의 나무로 엮어 만든 교반(絞盤)이 한 바퀴 돌자 큰 바위가 반 촌(寸)쯤 들렸다. 노송이 파르르 흔들린다.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굵은 닻줄이 나무를 긁어 팠다. 구양봉은 평소 천도(天道)도 믿지 않고 귀신도 믿지 않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은 뭔가 간절히 빌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미처 기원할 사이도 없이 우지끈하는 소리에 그 긁은 밧줄이 끊어져 나간 것이다. 구양공자가 다시 깔리고 말았다. 

세 사람이 모두 상승의 무공을 지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나가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구양봉도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황용도 낙담의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우리 이 밧줄을 이어 놓고 다시 하나를 더 만들어 함께 감아보지요.] 

 

곽정이 이렇게 제안을 했지만 구양봉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그건 더 감기 어렵네. 우리 세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겠어.] 

[누가 도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곽정이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황용이 한참 동안이나 잠자코 있다가 펄쩍 뛴다. 

 

[그래 그래, 도와 줄 사람이 있어요.] 

[뭐라구? 도와줄 사람이 있다니?] 

 

곽정이 반가와 이렇게 물었다. 

 

[음, 그렇기는 하지만 구양공자가 하루를 더 고생해야해요. 아무래도 내일 조수가 밀려올 때쯤에나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요.] 

 

구양봉과 곽정은 황용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면서 무슨 뜻인지 몰라 궁금해 했다. 

(내일 조수가 밀려올 때쯤 도와 줄 사람이 온다니?) 

 

[하루종일 설쳤더니 배고파 죽겠군요. 우리 우선 뭣 좀 먹고 나서 다시 얘기를 해요.] 

 

황용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가씨, 내일 누가 도와주러 온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구양봉은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내일 이 시간 구양공자를 덮치고 있는 돌을 치울 수 있어요. 지금 이 시간에 그 비밀을 누설할 수는 없구요.] 

 

황용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구양봉은 반신반의했다. 설사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양봉은 조카 옆을 지키고 있었고 곽정과 황용은 몇 마리의 들토끼를 잡아다가 구웠다. 구운 고기를 구양봉에게 나누어 준 뒤 남은 고기를 들고 굴 속으로 돌아와 홍칠공과 함께 먹었다. 곽정은 그 큰 바위가 황용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란 말을 듣자 놀랍고도 반가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세 사람은 구양봉이 조카 때문에 염려가 되어 이 밤만은 쳐들어오지 않겠지 하는 마음에 굴앞에 얼기설기 나무를 걸쳐놓은 뒤 안심하고 푹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날이 새자 곽정이 먼저 눈을 뗬다. 그런데 굴 어귀에 사람의 그림자가 스쳤다. 벌떡 일어나 보니 굴 앞에 구양봉이 선 채 낮은 소리로 묻는다. 

 

[황소저 일어났는가?] 

 

황용은 곽정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눈을 떴다. 그런데 구양봉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체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시죠?] 

 

곽정도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일어나거든 사람 좀 구해 달라는 말을 하려고.......] 

[네.] 

 

이때 홍칠공이 나선다. 

 

[내가 그에게 백일취(白日醉)의 미주를 마시게 했으니 아마 한 서 달 뒤에나 깨어 일어날거요.] 

 

이 말을 들은 구양봉의 당황하는 꼴을 보고 홍칠공은 껄껄 웃는다. 구양봉은 농담인 줄 알면서도 약이 올라 물러섰다. 황용이 일어나 앉으며 웃는다. 

 

[지금 곯려먹지 않으면 언제 곯려먹어요!] 

 

느릿느릿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바로잡더니 또 나가 낚시질을 하고 토끼를 잡아 아침 식사를 마련했다. 그 동안 구양봉은 7,8번도 더 다녀갔다. 꼭 가마솥의 개미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용이, 조수가 밀려올 때 정말 도와 줄 사람이 오나?] 

 

곽정이 궁금해 묻는데도 황용은 웃기만 한다. 

 

[누가 올 것으로 믿어요?] 

[못 믿겠어.] 

[나도 믿지 않아요.] 

 

곽정은 깜짝 놀란다. 

 

[그럼 노독물을 속인 것 아냐?] 

[속인 건 아녜요. 조수가 밀려올 때 내 구할 방법이 있어서 그랬어요.] 

 

곽정은 워낙 꾀가 많은 황용임을 알기 때문에 더 묻지도 않았다. 둘은 모래톱을 거닐며 예쁜 조개껍질을 줍고 놀았다. 황용은 어려서부터 외롭게 혼자 놀며 자랐다. 이제 곽정이 옆에 있으니 그 기쁨을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둘의 주머니 속에는 예쁜 조개껍질이 두둑해졌다. 웃음소리가 해안을 따라 그칠 줄 모르고 퍼져 나간다. 만약 배라도 한 척 그 부근을 지났다면 아마도 무릉도원으로 착각을 했을 것이다. 

한바탕 즐거운 시간이 흐른 뒤에 황용이 입을 열었다. 

 

[곽정 오빠, 머리가 엉망이에요. 내 빗겨 드릴께요.] 

 

둘은 나란히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황용이 품속에서 빗을 꺼내 곽정의 머리를 얌전하게 빗겨 주다가 한숨을 내쉰다. 

 

[어떻게 저 서독 숙질을 내쫓고 우리 둘이 사부님을 모시고 이 섬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 그러고 보니 여섯 분의 사부님이 생각나는걸.] 

[그래요. 우리 아버지도 계시군요.] 

 

또 장시 침묵이 흘렀다. 

 

[목(穆)언니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 사부님께서 날보구 개방의 방주가 되라고 하셔서 대답을 했으니 거지들 생각을 안 할 수 없네요.] 

[아무래도 돌아갈 생각이나 하는 것이 좋겠지?] 

 

곽정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황용이 머리를 다 빗기고 나서 천천히 상투를 틀어 준다. 

 

[용이가 이렇게 내 머리를 빗겨 주니 꼭 어머니 같은 생각이 드는군.] 

[그럼 날 어머니라고 불러요.] 

 

황용이 이렇게 웃으며 말을 하자 곽정은 그냥 따라 웃을 뿐 아무 말이 없다. 황용이 손을 뻗어 곽정의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운다. 

 

[어머니라 부를 거예요? 안 부를 거예요?] 

 

곽정이 웃으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머리가 다시 헝클어졌다. 

 

[부르기 싫으면 그만 두세요. 설마하니 훗날에도 엄마라 부를 사람이 없을까 봐서요. 빨리 다시 앉기나 해요.] 

 

곽정이 그 말에 쫓아 앉자 황용이 다시 상투를 매만져 주면서 뚱딴지같은 소리를 꺼낸다. 

 

[곽정 오빠, 어떻게 하면 아이가 생기는지 알고 있어요?] 

[알지.] 

[어디 한번 말해 봐요.] 

[서로 모르는 사람이 일단 부부가 되면 아이가 생기는 것 아냐?] 

[그거야 나도 알아요. 그런데 어째서 부부가 되면 아이가 생기냐 말예요?] 

[그전 나도 몰라. 어디 한번 용이가 말해 봐.] 

[나도 몰라요. 내 아빠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아기는 겨드랑이에서 생겨 빠져 나온다나요?] 

 

곽정이 자세히 물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방울 깨지는 듯한 호통 소리가 들렸다. 

 

[아이 낳는 일이야 너희가 크면 자연히 알 일인데 뭐 지금부터 야단들이야. 이제 곧 조수가 밀려올 텐데......] 

 

황용은 구양봉이 줄곧 자기들 뒤를 밟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녀지간의 일을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자기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었다니 공연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절벽 쪽을 향해 내달리니 구양봉과 곽정도 그 뒤를 따른다. 

구양공자는 하룻밤 하루 낮을 바위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기진맥진해 있었다. 구양봉이 험악한 표정으로 나섰다. 

 

[황소저, 조수가 밀려올 때 도와 줄 사람이 온다고 했는데 이건 인명에 관계되는 일이니 쓸데없이 지껄일 일이 아니오!] 

[우리 아버지께서 음양의 오행지술에 정통하신데 나도 조금은 알고 있어요. 별로 대수로운 재주랄 것은 없지만요.] 

 

구양봉도 평소 황약사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조바심치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아버지께서 오신단 말인가? 그렇다면 문제가 아니지.] 

 

황용이 <흥> 코방귀를 뀐다. 

 

[뭐 이까짓 일을 가지고 아버지까지 나서실 게 뭐예요. 또 아버지께서 우리 사부님을 해친 일을 아시면 가만히 계시지도 않을 텐데 뭘 그리 반가와하세요?] 

 

구양봉은 황용의 말에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곽정 오빠, 나무 좀 구해 오세요. 많을수록 좋아요. 그리고 좀 큰 것으로요.] 

 

곽정이 대답하고 가 버렸다. 황용은 어제 끊어진 밧줄을 다시 이었다. 구양봉은 도대체 황약사가 오느냐고 몇 번이나 물어 보았지만 황용은 콧노래만 흥얼거리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구양봉은 정말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도 나무를 자르러 갔다. 그는 곽정이 강룡십팔장의 장법으로 두어 번 치기만 하면 큰 나무가 부러져 나가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란다. 

(저 어린것의 무공이 정말 대단하구나. 게다가 구음진경까지 외고 있으니 그냥 놔 두었다가는 화근이 되겠구나.)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카는 구하든 못 구하든 곽정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즉시 서너 자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두 그루의 잣나무 사이에 꿇어 엎드려 두 손을 구부렸다. 한 손에 각기 한 그루의 나무를 잡은 채 기합을 넣으며 두 손을 들자 두 그루의 잣나무가 동시에 부러져 나갔다. 곽정이 탄복을 했다. 

 

[구양 아저씨, 전 언제쯤이나 그런 공력을 지니게 될까요?] 

 

구양봉의 얼굴 표정이 음험해지고 관골의 살덩이를 가볍게 떨며 생각했다. 

(내세에 가서나 그렇게 수련을 하거라.) 

두 사람은 반 시간 동안에 10여 그루의 나무토막을 절벽 아래로 끌어다 놓았다. 조수가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계속해서 지평선을 지켜보았지만 돛폭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뭘 그렇게 기다리고 계셔요?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데.] 

 

황용의 말에 구양봉은 어이가 없었다. 

 

[뭐라구! 아무도 안 온다니.....?] 

[아니, 무인도에 오긴 누가 와요?] 

 

구양봉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황용이 곽정을 향해 묻는다. 

 

[곽정 오빠, 최고로 몇 근까지 들 수 있어요?] 

[시험해 본 일은 없지만 사백 근 정도는 들겠지.] 

[음, 육백 근이 넘는 돌은 아무래도 들 수 없겠지요?] 

[그야 어려울 테지.] 

[그럼 물속에 있는 육백 근짜리는요?] 

 

구양봉이 즉시 알아채고 기뻐 소리를 지른다. 

 

[그래 그래, 그럼 틀림없이 될 거야.] 

 

곽정은 아직도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한데 구양봉이 말을 꺼냈다. 

 

[조수가 밀려올 때 저 빌어먹을 놈의 돌이 반 이상 물에 잠길테니까 그때 가선 바위가 가벼워지거든. 그때 우리가 밧줄을 감으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란 말이야.] 

 

이 말을 들은 황용이 냉랭하게 받는다. 

 

[그땐 조수에 밀려 소나무도 반이나 잠길 텐데 도대체 어디 서서 일을 하겠단 말이에요?] 

 

구양봉이 입술을 꼭 깨문다. 

 

[결사적으로 대들어 볼 수 밖에 없지.] 

[흥! 그렇게 마구 덤벼든다고 되나요. 이 나무나 바위 옆에 붙들어 대세요.] 

 

이 말이 떨어지자 곽정도 즉시 알아채고 환호성을 지르며 구양봉과 함께 달려들어 10여 개의 나무를 끈으로 꼭꼭 바위 주위에 붙들어 맸다. 구양봉은 부력이 혹시 부족하지 않을까 해서 다시 7,8그루의 나무를 잘라다 묶어 놓는다. 

황용은 미소를 머금고 옆에 선 채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이 바삐 움직이는 것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반 시간쯤 지났을까? 이제 모든 준비는 다 끝나고 조수만 밀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용과 곽정은 굴로 돌아와 사부님을 모시고 있었다. 

다시 또 반시간쯤 기다리자 해가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며 조수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기다리기가 답답했던지 곽,황 두 사람을 불러 밧줄을 감자고 성화같은 재촉을 했다. 이번에는 바위에 큰 나무를 붙들어 맨 탓에 부력이 증가했고 또 바위가 물 속에 잠겨 훨씬 가벼워졌기 때문에 별 힘 안 들이고 바위를 움직일 수 있었다. 세 사람이 교반을 몇 번 감자 구양봉이 재빨리 물 속으로 들어가 조카를 안고 나왔다. 

곽정은 일이 성공하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환호성을 질렀다. 황용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굴로 돌아왔다. 

 

[용이, 내 환호성을 지른 것이 잘못됐나?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으니 말야.] 

[제가 지금 세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너무나 어려울 것 같아서 그래요.] 

[아니, 그렇게 총명하면서 뭘 걱정하고 있어요?] 

 

황용이 슬며시 웃다가 잠시 후 또 미간을 찌푸린다. 이를 본 홍칠공이 말문을 열었다. 

 

[한 가지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두 번째 세 번째는 정말 속수 무책이로군.] 

[아니, 사부님께서는 어떻게 알고 계시지요?] 

 

곽정이 이상해서 묻는다. 

 

[내 황용의 심사를 추측해 봤을 뿐이야. 첫 번째 일은 틀림없이 어떻게 해서 내 부상을 치료해 주나 하는 것 같은데, 이곳에는 의사도 약도 없으니 나 노규화는 천명이 시키는 대로 있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만, 두 번째 어떻게 해서 구양봉의 독수에 대항을 하나 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아. 그자는 변덕이 심한데다가 신용이 없고 흉악하지. 무공까지 높고 보니 너희 두 사람의 적수는 절대 아니란 말야. 세 번째야 빤한 일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 중토(中土)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야. 황용이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게 바로 이 세 가지 일이지?] 

 

황용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요.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대책을 마련해 놔야겠는데요. 어떻게 노독물을 설득해서 만행이라도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꾀로 싸워야지, 힘으로는 싸우기 어려워. 노독물이 교활하다 보니 속이려 해도 여간해선 속아 넘어가지 않을 거란 말야.] 

 

두 사람은 다시 깊은 침묵에 잠겼다. 황용이 비록 꾀가 많고 아버지인 황약사까지 나선다 하더라도 이기기가 어려운 상대를 놓고 대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홍칠공은 신경을 쓴 탓인지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며 밭은 기침을 했다. 

황용이 급히 대들어 부축해 뉘는데 굴 앞의 햇빛을 사람의 그림자가 막고 섰다. 고개를 쳐드니 구양봉이 양손에 조카를 안은 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굴 밖으로 나가라구. 굴 속에서 내 조카를 정양하도록 할테니까.] 

 

곽정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섰다. 

 

[여긴 우리 사부님이 계신 곳이오!] 

 

구양봉이 냉랭하게 받는다. 

 

[옥황상제가 여기 있데도 비키라고 하겠다!] 

 

곽정이 화가 나서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황용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사부를 부축해 굴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구양봉의 옆을 스쳐 지나자 홍칠공이 똑바로 그를 바라다보며 놀린다. 

 

[아주 위풍이 당당하고. 살기 등등하오.] 

 

구양봉이 흠칫 놀란다. 웬만하면 1장에 박살을 내려고 대들테지만 어인 일인지 홍칠공의 눈총을 슬그머니 피하며 입을 열었다. 

 

[잠시 후 우리 먹을 것을 보내 오너라. 네 두 연놈이 음식물에 농간을 부리는 날에는 그냥 요절을 대고 말 테다.] 

 

세 사람이 산뒤로 돌아오면서 곽정은 계속해서 투덜거렸지만 황용은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잠시 여기서 쉬고 있어요. 내 거처할 장소를 찾아볼 테니.] 

 

곽정의 말에 따라 황용은 홍칠공을 부축해 서늘한 그늘을 드리운 한 그루의 나무에 기대앉게 했다. 잠시 뒤에 두 마리의 다람쥐가 나타나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가 다시 쭈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3자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조그만 눈알을 말똥말똥 굴리며 세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황용이 재미있다는 듯 땅에서 솔방울을 주워 들고 손을 내민다. 다람쥐 한 마리가 대들어 코로 냄새를 말아 보더니 앞발로 받아 들고 물러난다. 다른 한 마리는 벌써 홍칠공의 소매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여긴 정말 사람이 와 본 적이 없는 곳인가 봐요. 다람쥐들이 전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말예요.] 

 

황용이 감탄하듯 이렇게 말했다. 다람쥐들이 말소리를 듣고 다시 나무 위로 기어오른다. 황용의 시선이 그 뒤를 쫓는다. 나뭇가지가 무성하여 우산처럼 드리워졌다. 게다가 칡덩굴이 얼기설기 걸려 있었다. 

 

[곽정 오빠, 다른 장소를 찾을 것 없이 우리도 나무 위로 올라가요.] 

 

곽정이 황용의 말에 발길을 멈추고 소나무를 바라다본다. 과연 훌륭한 장소다. 둘이서 다른 나무의 가지를 꺾어다 그 나뭇가지 사이에 평틀(平臺)을 맸다. 두 사람이 각기 홍칠공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소리를 지르자 동시에 위로 솟구치며 그를 편안히 평틀 위로 모셨다. 

 

[우린 나무 위에서 새가 되고, 그들은 굴 속에서 야수가 되었군요.] 

 

황용이 웃으며 하는 말이다. 

 

[용이. 도대체 음식물을 갖다 줘야 하나?] 

[지금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그렇다고 노독물과 싸울 수도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지요.] 

 

곽정은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들은 산뒤에서 산양 한 마리를 잡아 불에 구워 두 쪽으로 갈랐다. 황용이 구운 양 반 쪽을 땅바닥에 집어던지며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여기다가 오줌이나 갈겨요!] 

[그들이 알 텐데?] 

[까짓 것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냥 갈기기나 해요.] 

 

곽정이 얼굴을 붉혔다. 

 

[안 돼!] 

[왜요?] 

[지금 소변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래.] 

 

곽정이 우물쭈물 이렇게 말하자 황용은 허리를 꺾으며 웃는다. 이 꼴을 보고 홍칠공이 나무 위에서 외친다. 

 

[그걸 여기로 던져. 내가 오줌을 눌 테니까.] 

 

곽정이 웃으며 집어던지자 홍칠공이 거기에 오줌을 누고 하하 거린다. 곽정이 다시 그것을 받아 들고 굴 쪽으로 향했다. 

 

[아녜요, 이것을 가지고 가세요.] 

 

곽정이 머리를 긁는다. 

 

[아니, 이건 깨끗한 건데.] 

[그래요. 깨끗한 걸 그들에게 먹여요.] 

 

곽정은 정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황용이 시키는대로 깨끗한 양고기로 바꿔 들고 갔다. 황용이 더러운 양고기를 다시 불에 구워 놓고 산열매를 따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갔다. 홍칠공도 황용의 거동을 이해하지 못해 마음속으로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양고기는 신선하고도 연한 것인데 황용이 솜씨를 부려 더욱 맛있게 구웠다. 구양봉은 곽정이 채 오기도 전에 벌써 냄새를 말고 달려와 뺏듯이 받아 들고 득의 만면해 하다가 불현듯 다른 생각부터 했다. 

 

[다른 반 쪽은 어디 있나?] 

 

곽정이 고개를 돌려 뒤쪽을 가리켰다. 구양봉이 큰 걸음으로 소나무 밑으로 달려와 더러운 양고기를 뺏고 깨끗한 고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사라졌다. 곽정은 지금 이 순간 이상한 표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천성이 순박하여 꾸밀 줄을 모르는 그다. 고개를 떨군 채 구양봉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가 그가 멀리 가버리자 그제야 달려와 황용 옆에 섰다. 

 

[용이, 어떻게 그가 바꾸러 올 줄을 알았지?] 

[병법에 가로되 허허실실이라구 하지 않았어요? 노독물이 혼자 약은 체 하지만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든 거지요.] 

 

황용도 허리를 꼬며 웃는다. 곽정도 황용의 꾀에 혀를 차며 깨끗한 양고기를 홍칠공과 함께 맛있게 뜯어먹었다. 

 

[용이, 정말 묘책이기는 하지만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왜요?] 

[만약 노독물이 바꾸러 오지 않았더라면 우린 꼼짝없이 사부님 소변을 먹을 뻔했지 뭐야.] 

 

황용이 나뭇가지에 걸터 앉았다가 이 말을 듣고 허리를 꼬며 웃는 바람에 그만 나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 나무 위로 올라와 정색을 한다. 

 

[정말 큰일날 뻔했군요] 

[이 바보야. 그가 바꾸러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더러운 고기 좀 먹으면 어떠냐?] 

 

홍칠공이 나무라듯 하는 말에 곽정이 하하거리고 웃다가 그도 그만 나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구양봉은 양고기롤 뜯으며 어딘가 시금털털한 비린내가 난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까닭은 알 리가 없었다. 잠시 후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구양공자는 상처가 더욱 아파 계속 신음 소리를 냈다. 구양봉이 소나무 아래로 와서 외친다. 

 

[계집애 어디 갔나? 빨리 내려오라구.] 

 

황용이 깜짝 놀란다. 이 시간에 또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왜 그러세요?] 

[내 조카가 차를 달라 물을 달라 야단이니 시중 좀 들라구!] 

 

나무 위의 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빨리 내려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어?] 

 

구양봉은 계속 호통을 치면서 사뭇 명령이다. 

 

[우리 저자와 사생 결단을 벌이자구.] 

 

곽정이 이렇게 소곤거렸다. 

 

[내 걱정 말고 빨리 산 뒤로 피해 달아나도록 해라.] 

 

홍칠공이 하는 말이다. 황용은 벌써 이 두 가지 방법을 생각 안해 본 것은 아니다. 사생 결단을 벌이든지 아니면 달아나든지 간에 사부는 끝장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지금 이러한 형편이라면 우선 구양봉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요. 상처가 어떤지 가 보도록 하지요.] 

 

황용이 이렇게 말하며 나무 위에서 내려오자 구양봉은 계속 코방귀를 뀐다. 

 

[곽가 녀석도 내려오너라. 편안하게 자려 들다니 팔자가 늘어졌구나.] 

 

곽정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꿀꺽 참아 넘기고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오늘밤 어떻게 해서든 나무 기둥 백 개만 마련해 오너라. 하나라도 모자라면 네놈의 다리를 분지르고 말 테다.] 

[기둥은 뭘 하시게요? 그리고 이 캄캄한 밤에 어디 가서 그걸 구해 오란 말씀이세요?] 

 

황용이 나서자 구양봉은 더 화를 낸다. 

 

[계집애가 웬 잔소리가 많으냐? 빨리 내 조카 시중이나 들 것이지 웬 참견이야.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다.] 

 

황용이 곽정을 향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구양봉과 황용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다보며 곽정은 분하고 억울해 왈칵 눈물이 나왔다. 이를 본 홍칠공이 말문을 연다.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도 내 어렸을 때는 다들 금나라의 노비 노릇을 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도 별 것 아니야.] 

 

홍칠공은 곽정이 딱해 이런 말로 위로를 했다. 

(원래 은사님께서도 어렸을 때는 노비 노릇을 했는데 후에 절세의 무공을 익혔구나. 내 오늘 일시 억울함을 당하기로 뭐 대단할 게 있겠느냐?) 

그는 천성이 중후한 위인이라 즉시 관솔에 불을 붙여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가 강룡십팔장의 수법으로 굵직한 나무를 하나하나 자르기 시작했다. 그는 황용의 기지가 뛰어난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조왕부에서 군마(群魔)들에게 포위되어서도 위험을 뚫었거늘, 이제 재앙을 눈앞에 두었다고는 하지만 황용이 어떻게 해서든 극복할 것을 믿었다. 그래서 묵묵히 나무 베기에만 열을 올리기로 했다. 

 

그러나 그 강룡십팔장의 무공은 근력의 소모가 너무 큰 것으로, 위력은 크지만 오래 쓰다보면 쇠뭉치 같은 체격이라도 당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한 시간도 못 돼 곽정은 기진맥진했다. 벤 나무를 세어 보니 겨우 21그루뿐이다. 다시 또 한 그루의 나무를 향해 운기를 모아 때려 보았지만 어깨만 쑤실 뿐 소용이 없었다. 견룡재전(見龍在田)의 솜씨를 발휘하여 쌍장을 날려 보았지만 나뭇가지만 흔들릴 뿐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고 근력이 장심을 뚫지 못하고 반대로 반사되어 돌아올 뿐이다. 곽정은 깜짝 놀라 무릎을 꿇고 앉아 운기를 모아가며 호흡을 조절했다. 반 시간이나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다시 초술을 써 봤다. 겨우 한 그루의 나무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다시 또 손을 쓰려고 하니 전신이 나른하고 호흡까지 가빠 견딜 수 없었다. 

억지를 부려 봐야 일은 일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상만 입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무인도에서 도끼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계속 나무를 벤단 말인가? 1백 그루를 채우자면 아직도 78개가 남았다. 계속 무리를 하다가는 자기만 골병이 드는 것이다. 

 

(자기 조카의 두 다리가 상했으니 내 사지가 멀쩡한 것이 못마땅해서 그랬구나. 오늘밤 내가 백 그루의 나무를 다 벤다 하더라도 내일은 또 천 그루를 베라고 하겠지? 그렇다고 대들어 싸울 수도 없으니 이 노릇을 장차 어이한단 말이냐?) 

이렇게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만일 여기가 무인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누가 나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홍은사는 이미 무공이 소실되어 존망을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고 용의 아버지는 나를 마땅치 않아 하는 처지요, 전진칠자나 여섯 분의 은사는 서독의 적수가 아니니......, 있다면 오직 의형 주백통뿐인데....... 그러나 그는 벌써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으니.....) 

생각이 주백통에게 미치자 구양봉에 대한 분노가 더 한층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이 의형은 구음진경에 정통하여 좌우호박(左右互搏)의 기술(奇術)까지 창안해 내신 분인데 그를 괴롭혀 죽게 했다니 분통이 폭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구음진경! 좌우호박?] 

 

이 몇 마디 말이 뇌리를 스치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밝은 별이 반짝 발하는 것 같았다. 

(내 무공은 영원히 서독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구음진경은 천하 무학의 요결이 아니냐? 좌우호박의 기술은 사람의 공력을 배로 증강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내 황용과 더불어 날마다 고련을 한 후에 서독과 대결하면 되겠구나. 그러나 어느 무공을 불문하고 일조 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한다?) 

그는 숲속에 선 채 고뇌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내가 이걸 사부님께 여쭈어 볼 생각을 안 했지? 무공은 비록 소실되었다지만 알고 계신 무학이야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틀림없이 내게 밝은 길을 제시해 주실거다.) 

즉시 소나무 위로 돌아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홍칠공에게 들려주었다 

 

[네 어디 구음진경을 내 앞에서 외 보아라. 쉽게 배울 수 있는 무공이라도 있는지 들어보자.] 

 

곽정은 진경에 있는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외기 시작했다. 홍칠공은 인도지고좌식(人徒知枯坐息)...., 이하의 문구를 듣다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응> 하고 이상한 소리를 지른다. 

 

[아니, 왜 그러세요?] 

 

곽정이 황급하게 물었다. 

홍칠공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 몇 마디 말을 한참 동안이나 음미해 보는 듯했다. 

 

[어디 다시 한 번 외 보아라.] 

 

곽정은 너무나 기쁘고 반가왔다. 

(사부님께서는 필시 이 말 가운데서 서독을 제압할 법문을 찾아내신 거야.) 

그래서 다시 이 말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홍칠공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 계속해서 외 봐라.] 

 

곽정은 계속해서 왔다. 거의 다 욀 무렵 홍칠공은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너 지금 뭐라구 했느냐?] 

[이건 주백통 형님이 외라고 하신 경문이에요.] 

 

홍칠공이 미간을 찌푸린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저도 모르고 주백통 형님도 몰라요.] 

[그래, 어디 계속해서 외 보거라.] 

 

곽정이 또 외 나간다. 

 

[별아법사 갈라(別兒法斯, 葛羅)......] 

 

알쏭달쏭한 말들을 이제 다 왔다. 홍칠공이 <흥> 코방귀를 뀐다. 

 

[원래 진경 가운데 그런 요망한 주술도 있다더냐?] 

 

그는 본래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장난꾸러기. 사람을 골탕먹이기 좋아하는 못된 버릇이 있어서.) 

그러나 전부의 경문은 그 뜻이 너무나도 오묘했다. 일시에 그 내용을 다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의 말은 그냥 입안에 꿀꺽 삼키고 말았다. 

한참 동안이나 시간이 흐르자 홍칠공은 겨우 말문을 연다. 

 

[곽정아, 경문에 쓰인 오묘한 무공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모두 일조 일석에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곽정은 크게 실망했다. 

 

[너 빨리 가서 이십여 그루의 나무로 뗏목이나 만들어 타고 달아나거라. 나와 황용은 그때그때 사정을 봐서 임기응변해 나갈테니 말이다.] 

[아닙니다. 제 어찌 사부님을 두고 떠난단 말입니까?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홍칠공이 한숨을 내쉰다. 

 

[서독은 황노사를 두려워하고 있어. 그래 절대로 황용을 해치지 못할 거야. 그리고 이 노규화는 아무래도 다 틀리지 않았느냐? 걱정 말고 너나 빨리 떠나도록 해라.] 

 

곽정은 비분이 교차하여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어 <꽝> 하고 나뭇가지를 때렸다. 어찌나 힘있게 때렸는지 그 소리가 산골짜기에 퍼졌다가 다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홍칠공이 깜짝 놀라 묻는다. 

 

[곽정아, 방금 그 일장이 무슨 수법이냐?] 

[왜요?] 

[그렇게 무섭게 때렸는데도 나뭇가지가 흔들리지 않았거든.] 

 

곽정은 심히 부끄러웠다. 

 

[제 방금 나무를 치느라고 힘이 다 빠졌어요. 그래서 어깨가 시큼시큼 아프고 해서 기운도 쓰지 않았는데요.] 

 

홍칠공이 머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아니다, 아니야. 네가 친 일장의 공력이 어딘가 이상하단 말이다. 어디 다시 한 번 때려 봐라.] 

 

손이 번쩍 들렸다. 곽정은 홍칠공이 시키는대로 다시 한번 나무를 때렸다. 소리가 숲속을 흔들었다. 소나무는 여전히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곽정이 먼저 알고 말했다. 

 

[이전 주백통 형님께서 제자에게 전수해 주신 칠십이로의 공명권(空明拳) 수법이에요.] 

[뭐라구? 공명권이라니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는걸.] 

[그러실 거예요. 주백통 형님께서 도화도에 감금당해 계실 때 심심해서 혼자 창안해 낸 거래요. 그분께서 제게 열여섯 자의 요결을 알려 주셨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곽정은 주백통이 가르쳐 준 그대로 16자의 요결을 홍칠공에게 들려주었다. 

 

[제자가 한번 시범을 보여 드릴 테니 구경하시겠습니까?]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는데 그만 두어라. 그리고 또 그런 상승의 무공은 시범을 보일 필요도 없다. 그냥 말로나 듣자구나.] 

 

그래서 곽정은 제 1로 <공완성반(空碗盛飯)> 제 2로 <공옥주인(空屋住人)>부터 시작해서 권로의 변화나 근력을 써야 할 곳 등을 홍칠공에게 들려주었다. 주백통은 천성이 장난을 좋아해서 일로 일로의 권법에 괴상 망측한 명칭을 부여했다. 홍칠공은 무학에 정통한 사람이라 십팔로까지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곧 서독과 함께 대결이나 해 보자.] 

[이 공명권으로 말입니까? 제자는 아직도 부족한 데가 많은데요.] 

[나도 안 될 줄 안다. 그러나 살 구멍을 찾자면 모험을 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 너 구처기가 주었다는 비수를 지니고 있지?] 

 

캄캄한 밤중에 찬 빛을 번쩍이며 곽정이 비수를 뽑아 들었다. 

 

[이 비수를 써서 공명권의 무공으로 나무를 베는 것이다.] 

 

곽정이 비수를 든 채 머뭇거린다. 

 

[내가 네게 전수해 준 강룡십팔장은 외가 절정의 무공이요, 그 공명권은 내가무공의 정수를 모은 것이다. 네가 가진 비수는 금과 옥을 자를 수 있는 것인데 그까짓 나무 베는거야 뭐 대단하겠느냐? 중요한 것은 손을 쓸 때 공(空)이란 그 비결을 지키는 것이니라.] 

 

곽정은 크게 깨달은 바 있었다. 몸을 날려 나무 아래로 뛰어내려가 한 그루의 삼나무를 붙잡고 공명권의 수법을 이용해 살그머니 대고 자르니 맥없이 그대로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곽정은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이 수법을 이용해 10여 그루의 나무를 계속해서 벴다. 이렇게 나가면 날이 새기 전에 1백 개는 문제없이 마련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이 나서 나무를 베는데 홍칠공이 소나무 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아, 좀 올라오렴.] 

 

곽정이 평틀 위로 뛰어올라갔다. 

 

[정말 할 만한데요. 전연 힘이 들지 않아요.] 

 

홍칠공은 친절히 대책을 설명해 주었다. 

 

[힘을 쓰면 오히려 안 되지. 그렇지?] 

[그래요. 정말 그래요.] 

[네 그 공력을 가지고 나무를 베는 것이야 여유 작작하지만 만약 서독과 사생 결단을 벌이기로 한다면 아직도 멀었다. 그러니 다시 구음진경을 익히며 승리할 기회를 노려야지. 우리 무슨 방법이 없는지 어디 한번 생각해 보자. 그래서 끄는 데까지 끌어보게 말이다.] 

 

뭣이든 곰곰이 생각해서 묘안을 찾아대는 일이 곽정에게는 제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 옆에 선 채 가만히 있었다. 

한참 동안 시간이 흘러도 홍칠공은 계속 머리를 살레살레 흔들 뿐이다. 

 

[나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구나. 내일 황용에게 생각해 보라구 하자. 내 방금 네가 구음진경을 외는 것을 듣다가 한 가지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틀림없는 것 같구나. 나를 좀 부축해 다오. 아래로 내려가 연공(練功)을 해야겠다.] 

 

곽정이 펄쩍 뛴다. 

 

[안 됩니다.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는데 어떻게 연공을 하십니까.] 

[아니다. 구음진경에서 내 깨달은 바 있어서 그런다. 자, 우리 내려가자.] 

 

곽정은 더 거역할 수 없어 그를 부축해 조심조심 나무에서 내려왔다. 

홍칠공이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를 취하더니 일장을 뻗는다. 캄캄한 가운데 곽정은 그가 쓰러지는 줄 알고 달려들어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홍칠공은 어느새 자세를 바로잡고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괜찮다.] 

 

잠시 후 그는 또 왼손의 일장을 뻗는다. 곽정은 땀을 뻘뻘 흘리며 비틀거리는 홍칠공을 몇 번이나 만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홍칠공은 연습을 거듭할수록 점점더 원기 왕성해지는 듯했다. 처음에는 일장을 쓴 뒤 한참이나 호흡을 가다듬더니 이젠 자유자재로 몸을 놀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진전이 나타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강룡십팔장을 끝까지 연습하고 다시 복호권(伏虎拳)을 쓴다. 곽정은 그가 자세를 거두는 것을 보고 달려갔다. 

 

[상처가 다 나으신 모양이지요?] 

 

곽정이 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를 안고 다시 올라가자.] 

 

홍칠공의 말에 곽정이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껴안고 평틀 위로 뛰어올랐다. 기쁜 마음을 형언할 길이 없었다. 

 

[정말 좋아지셨습니다.] 

 

홍칠공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뭐 나아진 게 없구나. 이 같은 무공이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사실 아무 소용이 없단다.] 

 

곽정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부상을 당한 뒤 운기만 조절할 줄 알았지, 내 이 외가의 무공이 심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유익하다는 걸 몰랐어.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도 좋았을 걸 너무 늦었다. 이제 내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무공을 되찾기란 아무래도 틀렸다.] 

 

곽정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다시 가서 나무나 자르겠어요.]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앉아 있던 곽정이 이런 말을 하면서 부스스 일어났다. 

 

[곽정아, 내 노독물을 놀래 줄 계책이 생각났는데 어디 한번 될는지 들어보렴.] 

 

홍칠공이 그 계책을 곽정에게 들려주었다. 

 

[틀림없이 성공할거예요!] 

 

곽정은 즉시 뛰어내려가 홍칠공이 시킨 대로 준비를 해 놓았다. 다음날 이른 아침 구양봉이 소나무 아래로 와서 곽정이 베어 쌓아 놓은 나무를 세어 보니 90개 밖에 되지 않았다. 냉소를 머금고 큰소리로 호통을 친다. 

 

[야, 이 빌어먹을 녀석아, 썩 나서지 못하겠느냐. 그래 나머지 열 개는 어디 있느냐?] 

 

황용은 밤중 내내 구양공자 옆에서 병 시중을 들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는 신음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아파 미안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날이 새자 구양봉이 굴 밖으로 나간다. 그래서 자기도 그 뒤를 따라 나섰다가 곽정을 향해 호통치는 소리를 들으니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구양봉이 소나무 위를 살펴보아도 아무 동정이 없다. 귀를 기울이니 산 뒤쪽에서 <쉭쉭> 바람 소리가 들린다. 누가 거기서 무예를 연습하는 것 같은 소리다. 그래 그쪽을 향해 발길을 돌려 가보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홍칠공이 초술을 발휘하며 곽정과 어우러져 각박한 대결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황용은 사부가 마음대로 보행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력까지도 회복된 사실을 발견하자 너무나 기뻐 왈칵 눈물이 솟아나오려고 했다. 

 

[곽정아, 이번에는 조심해라.] 

 

홍칠공이 이렇게 말하며 일장을 내미는 것이 보인다. 곽정이 손바닥을 펴 막는데 미처 홍칠공의 손바닥과 부닥치기도 전에 몸이 벌써 뒤를 향해 날아가다가 <꽝> 하고 한 그루의 소나무에 가 부닥쳤다. 소나무가 그리 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꽤 자란 나무인데 <와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져 나간다. 이를 본 서독 구양봉의 눈이 등잔만큼 커지고 입이 딱 벌어져 다물어질 줄을 모른다. 

 

[사부님, 훌륭한 벽공장이에요!] 

 

황용도 찬사를 보낸다. 

 

[곽정아, 운기로 몸을 보호해야 한다. 장력에 다쳐서는 안 돼.] 

 

홍칠공이 곽정을 향해 주의를 시킨다. 

 

[제자, 알고 있습니다.] 

 

곽정이 이렇게 대답하자 홍칠공이 또다시 장력을 발사했다. <와지끈> 곽정이 나무에 부딪히고 나무는 또 한 그루가 부러져 나갔다. 하나는 초술을 발휘하고 다른 하나는 방어를 하는 사이 홍칠공의 벽공장에 의해 10여 그루의 나무가 넘어지고 말았다. 황용이 헤아려 보더니 그만 멈추라고 외친다. 

 

[벌써 열 그루가 되었어요.] 

 

곽정이 숨을 헐떡거린다. 

 

[제자 이만 숨 좀 돌리게 해 주세요.] 

 

이 말에 홍칠공이 웃으며 자세를 거두었다. 

 

[이 구음진경의 공력이 정말 신통하구나. 내 그토록 심한 중상을 입어 아침에 일어나 단 한 번 연습을 해 보았을 뿐인데 벌써 효과가 나타나다니.] 

 

구양봉은 의심이 일어나 몸을 숙이고 부러진 나무를 살펴보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중심의 지름이 1촌 정도에 불과한 나무가 마치 예리한 톱으로 잘라 놓은 것처럼 가지런했기 때문이다. 

(그 진경에 기록된 무공이 이토록 신묘하단 말인가? 노규화의 공력이 옛날보다 크게 진보한 것 같구나. 저들 세 사람이 일시에 달려든다면 나 혼자 어떻게 감당한단 말이냐? 일이 더 늦어지기 전에 빨리 경문의 요결부터 익혀야겠구나.) 

세 사람을 한번 훑어본 뒤 나는 듯 동굴로 달려가 품속에서 곽정이 써 준 책을 꺼내 들었다. 기름 종이와 기름 헝겊으로 단단히 싸 놓은 경문을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홍칠공과 곽정은 구양봉이 사라지자 허리를 잡고 껄껄댄다. 

 

[사부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정말 그 진경이 그토톡 묘한가요?] 

 

홍칠공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곽정이 먼저 나셨다. 

 

[용이, 우리가 위장을 했던 거야.] 

 

그래서 일의 자초지종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원래 곽정이 사전에 비수를 가지고 나무를 반 이상 도려 놓았었다. 홍칠공의 장력은 기실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었고 곽정이 등에 힘을 주고 부딪치는 바람에 나무는 쓰러진 것이다. 구양봉이 비수를 가지고 공명권의 재주를 부려 미리 잘라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황용은 따라 웃으며 듣고 있다가 곽정의 말이 다 끝나자 아무말 없이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노규화.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만도 천만다행인데 까짓 진짜든 가짜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용이야, 넌 서독이 눈치를 챌까 봐 그걸 걱정하고 있는 거지?] 

 

황용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서독의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그를 오래 속일 수 있겠느냐? 그러나 세상 일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도 아니야. 미리 걱정해봐야 다 소용없는 일이다. 내 곽정이 외는 경문을 들어보았는데 그 가운데 역근단골편(易筋鍛骨編)이 꽤 재미있는 것 같더라. 우리 지금 일이 없으니 그거나 배우도록 해 보자.] 

[그래요, 사부님. 우리 빨리 배워요.] 

 

황용이 재촉하고 나서자 홍칠공은 곽정에게 그 역근단골편을 두어 번 외 보라고 했다. 그리고 문중에 씌어진 대로 두 사람에게 익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는 잡아 온 고기와 생선을 불을 피워 구웠다. 곽정과 황용이 도우려고 했지만 홍칠공은 한사코 만류했다. 이렇게 하는 동안 벌써 7일이 흘렀다. 곽,황 두 사람의 연공도 크게 진보했지만 구양봉도 동굴 속에서 경문을 보면서 고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8일째 되는 날 홍칠공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용이야, 사부가 구운 양고기 맛이 어떠냐?] 

 

황용이 오물오물 고기를 씹으며 웃고 고개를 살레살레 흔든다. 

 

[그래, 나도 잘 넘어가지 않는구나. 일단의 연공이 이미 끝났으니 오늘은 좀 쉬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몸을 상한다. 우리 이렇게 하자. 용이는 먹을 것을 마련하고 나와 곽정은 뗏목을 만들자구.] 

[뗏목을 만들다뇨?] 

 

곽정과 황용이 동시에 물었다. 

 

[그래. 일평생 이 무인도에서 노독물을 모시고 지낼 수야 없지 않겠니?] 

 

곽,황 두 사람은 훌륭한 생각이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즉시 손을 쓰기 시작했다. 곽정이 그날 잘라 놓은 나무 1백여 그루가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나무껍질을 벗겨 단단하게 묶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다. 나무껍질로 뗏목을 묶을 때 곽정이 힘껏 잡아당기기만 하면 뚝뚝 끊어지고 만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동안의 연공이 그의 공력과 힘을 배증시킨 것이다. 그래서 껍질을 혹시 잘못 연결했나 해서 다시 꽁꽁 묶은 뒤 잡아당기면 역시 마찬가지로 끊어져 나간다. 곽정이 놀라 멍하니 선 채 아무 말이 없다. 

저쪽의 황용도 떠들썩하니 두 손에 양 한 마리씩를 안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원래 그는 양을 잡기 위해 손에 돌을 주워 들고 양을 만나면 던져 때려 잡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몇 발짝 쫓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양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돌려세우며 그냥 산 채로 잡는 것이다. 몸의 날렵함이나 솜씨가 전연 뜻밖이었다. 이를 본 홍칠공이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구음진경이 정말 사람을 골탕먹이는 장난감이 아닌 모양이지. 그러기에 그 많은 영웅호걸들이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 

[사부님, 우리 가서 노독물을 실컷 두들겨 패 분풀이나 할까요?] 

 

황용이 웃으며 하는 말에 홍칠공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도 멀었다. 그래도 사오 년은 연공을 해야지. 그자의 합마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해. 왕중양만이 당년 일양지로 맞섰을 뿐이지, 다른 공력으론 파할 수가 없어.] 

 

이 말에 황용이 입을 삐쭉 내민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오 년 수련을 해도 소용이 없겠군요.] 

[글쎄, 혹시 진경에 씌어 있는 무공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 더 훌륭할 수도 있을 테니까.] 

[용이, 너무 조급하게 서둘지 마. 하여튼 우린 계속해서 수련을 해야 할 테니까.] 

 

다시 또 7일이 지났다. 곽정과 황용은 역근단골편의 2단계 수련을 끝냈고 뗏목도 다 다듬어 놓았다. 세 사람이 나무껍질을 이용해 돛도 짜 놓았다. 마실 음료수며 식품도 뗏목 위에 옮겨다 놓고 있었다. 구양봉은 시종일관 차디찬 눈초리로 그들이 서두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날 밤 모든 준비를 끝낸 뒤 내일 뗏목을 타고 출발하기로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황용이 입을 열었다. 

 

[내일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하나요, 마나요?] 

[해야지, 그들과 십 년 뒤에 꼭 만나자는 약속은 하고 떠나야지, 우리가 그토록 골탕을 먹었는데 그냥 떠날 수는 없지 않아?] 

 

곽정의 말에 황용은 기분이 좋아 손뼉을 친다. 

 

[그래요, 그래! 하느님께 우리를 중토로 편안히 돌아갈 수 있게 보우해 주십사고 빌고 또 노독물이 십 년 후에까지 살게 해 달라고도 빌어야겠군요.] 

 

홍칠공은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바닷가에서 사람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앉으니 물소리까지 들린다. 

 

[곽정아, 바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제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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