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천룡팔부10 김용
46. 그대에게 세 마디 말을 묻노라(酒罷問君三語)
파천석과 주단신 등이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단예가 보이지 않았다. 왕어언의 방문 앞으로 가서 몇 번 불러 보았으나 역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방문은 닫혀져 있었다.
몇 번 두드려 본 다음에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으나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파천석과 주단신 두 사람은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주단신은 말했다. “우리 소왕자는 바로 황태제를 닮아서 곳곳에 정을 남기는 모양이외다. 틀림없이 왕 소저와 야밤에 도망친 것 같은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구려.
파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왕자는 풍류 남아로서 강산을 사랑하지 않고 미녀를 사랑하는 그런 인물이외다. 그가 왕 소저에게 흠뻑 정을 쏟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나 친히 본 바가 아니겠소? 그로 하여금 서하의 부마가 되게 한다는 것은......아, 우리 소왕자는 정말 말을 잘 듣지 않는구려. 과거 황상과 황태제께서 그에게 무공을 연마하라고 했을 때도 그는 듣지 않았으며 급히 다그치자 그만 훌쩍 떠나지 않았소?
주단신은 말했다.
우리들은 길을 나누어 쫓아가서 애써 달래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파천석은 두 손을 벌려 보이며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주단신은 다시 말했다.
파 형, 과거 황태제께서 소제에게 소왕야를 찾아오라고 분부하실 때 소제는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소왕자는......
거기까지 말한 그는 음성을 낮추고 말했다.
소왕자는 목완청 소저에게 흠뻑 빠져서는 두 사람이 야밤에 도망치려고 했소이다. 어쨌든 소제의 운이 나쁘지 않아 일찌감치 앞쪽 길에서 지키고 있었기에 두 분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소이다.
파천석은 무릎을 탁 쳤다.
아, 주 아우님. 이것이야말로 그대의 잘못이 아니겠소? 그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실수를 하셨단 말이오? 우리 형제 두 사람이 차례로 방문을 지키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어야 하지 않았소?
주단신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그가 소 대협이나 허죽 선생과의 의리를 생각하여 이번 일을 내동댕이치고 떠나지 않을 줄 알았지요. 그런데......그는......
그는 원래 "색을 중시하고 친구를 가볍게 여겼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그야말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위엄을 거슬리게 되는 판이라 차마 그와 같은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소봉과 허죽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함께 나가 찾게 되었다.
꼬박 하루를 찾았으나 조금도 단서를 얻을 수 없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 뭇 사람들은 단예의 빈 방에 모여서 의논을 했다. 정히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서하의 관리가 빈관에 와서 파천석을 만났다.
그 관리는 이튿날 팔월 십오 일 저녁 황상께서는 서화궁(西華宮)에서 잔치를 베풀어 청혼을 한 손님을 환대하니 대리국의 단 왕자도 반드시 왕림해 달라는 말을 했다.
파천석은 그저 네, 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인사말을 하고 사신이 돌아갈 때 파천석은 그를 문 입구까지 전송하게 되었다.
그 관리는 파천석의 귀에 대고 살그머니 말했다.
파 사공, 내 한 가지 소식을 알려 드리리다. 내일 밤 황상께서 잔치를 벌일 때 그 자리에서 여러 손님들의 재주나 모습, 그리고 행동거지를 관찰하게 될 것이외다. 그리고 연회가 끝난 이후 어쩌면 화살을 쏘거나 무공을 겨루는 시합을 하여 여러 손님들로 하여금 승부를 내게 할지도 모르오이다. 누가 부마가 되어 우리 공주마마와 짝을 짓게 될런지는 이번 잔치에 달려 있소. 그러니 단 왕자에게 조심하고 신경을 쓰라고 하십시오.
파천석은 읍을 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소맷자락 안에서 다시 한덩이의 황금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파천석은 빈관으로 돌아가 그 사실을 뭇 사람에게 이야기하며 한숨을 쉬었다.
황태제께서는 반드시 소왕자로 하여금 공주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는데 우리 형제 두 사람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돌아가 황태제를 대할 면목이 없소이다.
죽검이 갑자기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파 나리, 내가 한마디 해도 괜찮겠어요?
파천석이 말했다.
소저, 이야기해 보시오.
죽검은 웃으며 말했다.
단 공자의 부왕께서 그에게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라고 한 것은 혼사를 이룸으로써 서하와 대리가 인척지간이 되어 서로 돌보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어요?
파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죽검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서하 공주가 서시처럼 아름답거나 멧돼지처럼 흉악하거나 시아버님이 되는 단 왕께서는 마음에 두지 않겠죠?
파천석은 말했다.
상대방은 공주의 몸이니 화용월태의 용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자색은 갖추었으리라고 생각하오.
매검은 말했다.
우리 사매들에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있어요. 공주를 대리로 데려가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예요.
난검은 웃으며 말했다.
단 공자와 왕 소저는 강호를 떠돌아다니면서 실컷 놀다가 일 년 반이나 이년, 또는 삼 년 후에는 반드시 대리로 돌아갈 거예요. 그때 서하 공주와 동방화촉을 밝힌다 하더라도 늦지는 않을 거예요.
파천석과 주단신은 놀람과 기쁨에 얽혀서 일제히 물었다.
소왕자가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서하 공주를 대리로 모셔갈 수 있다는 말이오? 네 분 소저에게 그와 같은 묘책이 있다면 자세히 듣고 싶소이다.
매검이 말했다.
이 목 소저는 단 공자의 친누이동생이니 오라버니를 대신해서 올케를 맞아들인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는 것이고, 아버님의 환심을 살 수도 있을 것이에요. 그러니, 그야말로 일거삼득이 아니겠어요?
죽검은 말했다.
목 소저가 부마에 선택된다고 하더라도 혼례를 올릴 날짜까지는 약간의 시일이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는 단 공자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국검은 말했다.
설사 그때 단 공자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목 소저가 대신 혼례를 올린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들은 손으로 입을 막고는 네 자매가 함께 킥킥거리고 웃었다.
파천석과 주단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계책은 너무나 대담하다고 생각되었다.
만약에 서하국에서 간파하게 된다면 화친을 맺기는커녕 오히려 원수가 될 판이 아닌가.
서하의 황제가 대노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된다면 그 화는 그야말로 엄청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검은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듯 입을 열었다.
기실 단 공자에게는 소 대협과 같은 의형이 계시니 서하나라와 사돈 관계를 맺을 필요조차 없어요. 다만 진남왕의 명령이 있는지라 받들지 않을 수 없을 뿐이죠. 정말 어떤 변고가 있게 되었을 때 소 대협은 대요의 남원대왕으로서 수십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니 가운데서 몇 마디 좋은 말만 하면 서하가 대리를 치는 불상사를 저지할 수 있을 거예요.
소봉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천석은 대리국의 사공으로서 정사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소봉이 대리국의 원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계산에 넣고 있었다.
다만 그 자신은 그와 같은 말을 내놓기 거북한 터에 매검이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소봉이 또 그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마음이 놓였다.
청혼이 실패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라에는 결코 큰 화가 미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네 소저의 계책은 어린애 장난과 같다. 그러나 이 방법밖에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구나. 그런데 목 소저가 이 모험을 할지는 의문이다."
그는 말했다.
네 분 소저의 그와 같은 제의는 정말 묘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러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위험한 점도 없잖아 있소이다. 만약 탄로나게 된다면 목 소저는 사로잡힐 우려가 있소이다. 더군다나 천하의 재주있는 사람이나 준수한 젊은 호걸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판인지라 목 소저의 인품은 으뜸이겠지만 무공으로 겨룰 때 군웅들을 압도할 수 있을지는 자신하기 어렵소.
뭇 사람들은 시선을 돌려 목완청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는 생각이었다.
목완청은 말했다.
파 사공, 나를 자극할 필요는 없어요. 나의 오라버니는......나의 오라버니는......
"나의 오라버니"라고 말하며 갑자기 그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단예와 왕어언이 몰래 떠나간 것은 과거 자기와 야밤에 손을 맞잡고 도망치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만약 그가 자기 오라버니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되었고 이제 그가 다른 사람과 사랑을 속삭이며 신선보다도 즐거운 삶을 누리는데 반하여 자기 자신은 이곳에서 쓸쓸하게 시일을 보내야 하는 것은 고사하고 대리국의 뭇 신하들이 오히려 자기가 대신 나서서 단예의 처를 맞아들이라고 하는지라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불현듯 슬픔과 분노가 함께 치밀어오르는 걸 느끼고 벼락같이 손을 뻗쳐서는 앞에 놓인 탁자를 뒤집어 엎었다.
그 바람에 찻주전자와 찻잔이 챙그랑, 하는 소리를 내며 박살나게 되었다. 그 순간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방문을 나섰다.
뭇 사람들은 아연해져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천석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외다. 만약 좋은 말로 부탁을 드렸더라면 목 소저는 기껏해야 응하지 않았을 뿐이겠죠. 그러나 나는 그녀를 자극하는 말을 해서 그만 그녀가 화를 내게 했소이다.
주단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 소저가 화를 낸 것은 결코 파 형의 그 몇 마디 말씀 때문이 아니고 달리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죠.
이튿날 뭇 사람들은 다시 나누어서 단예를 찾았다.
해질 무렵이 되자 뭇 사람들은 차례로 빈관으로 되돌아왔다.
소봉은 말했다.
셋째 아우가 이미 떠나간 이상 우리들도 모두 떠나가도록 합시다. 그 누가 부마가 되든 우리들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니겠소?
파천석은 말했다.
소 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른 사람이 부마가 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속으로 화만 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종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주 선생은 처자를 두셨나요? 단 공자가 부마가 되기 싫어 한다면 그대가 왜 한 번 해보려고 하지 않으세요? 그대가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게 된다면 역시 대리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주단신은 웃었다.
소저께서는 농담을 하시는구려. 만생은 이미 처첩이 있는 몸이고 자식도 있소이다.
종영은 혀를 쑥 내밀었다.
주단신은 다시 말했다.
애석하게도 소저의 모습이 너무나 어리고 얼굴에 보조개가 있어 남자 같지 않아 탈이외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나서서 오라버니를 대신해서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게 된다......
종영은 물었다.
뭐라구요? 나의 오라버니를 대신한다구요?
갑자기 문밖에서 그 누가 입을 열었다.
파 사공, 주 선생, 이대로 곧장 떠나시는 건가요?
휘장이 들춰지며 영기발랄하고 준수한 젊은이가 들어 섰다. 바로 서생으로 분장한 목완청이었다.
뭇 사람들은 놀람과 기쁨을 느끼고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오? 목 소저께서는 응낙하시겠다는 것이오?
목완청은 말했다.
불초의 성은 단씨이고 이름은 예로서 대리국의 진남왕의 세자이니 여러분들이 말씀을 하실 때는 좀 조심을 해주셔야겠소이다.
그 음성은 낭랑했다. 여전히 여자의 음성이긴 했으나 젊은이들의 음성은 본래 뾰족한지라 주의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뭇 사람들은 그녀가 그럴싸하게 단예의 말투를 흉내내는 것을 보고는 한바탕 웃어댔다.
원래 목완청은 신경질을 부린 이후 자기 방으로 되돌아가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많은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데 대해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단예로 가장하여 서하의 공주를 맞아들이는 것도 퍽이나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은연중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대는 왕 소저와 함께 도망을 쳐 즐거운 나날을 보내려고 하지만 나는 그대를 대신해서 한 사람의 공주마마를 맞아들여 온종일 울고불고 싸우도록 만들어 그대로 하여금 번거로움을 실컷 맛보여 주겠어요."
단예에게 만약 정식으로 시집을 온 공주마마가 있어 정비가 된다면 왕어언은 단예의 정실 부인이 될 수 없게 된다.
자기 자신이 단예에게 시집을 갈 수 없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간드러진 왕 소저로 하여금 쉽게 단예의 처가 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의기양양해졌다.
이렇게 되어 파천석 등은 정신이 번쩍 들어 재빨리 모든 일을 준비하게 되었다.
파천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예부 시랑은 빈관에 온 적이 있으니 소왕야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입을 막아야겠지."
그리하여 그는 삼백 냥의 황금을 주단신에게 주어서는 도 시랑에게 갖다 주도록 했다. 본래 예물은 이미주었지만 이것은 특별히 더 보태어 선물을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도 시랑이 만약 어떤 잘못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그저 속으로만 알고 있을 뿐 입을 다물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목완청은 말했다.
소 큰오라버니, 허 둘째 오라버니, 두 분께서는 저와 함께 연회에 나가시는 것이 좋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정말 손을 쓰게 되었을 때 제가 어찌 남들을 이길 수 있겠어요? 황궁 안에서 함부로 독화살을 쏴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 아니겠어요?
난검은 웃었다.
맞았어요. 단 공자가 만약 독전을 사방으로 쏘아댄다면 서하의 황궁은 시체가 즐비하게 될 것이고 공주마마는 그만 겁이 더럭 나서 시집오려고 하지 않을거예요.
소봉은 웃었다.
나와 둘째 아우는 이미 숙부님의 부탁을 받은 몸이니 온힘을 기울이도록 하겠소이다.
즉시 뭇 사람들은 옷차림을 바꾸고 함께 황궁의 연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소봉과 허죽은 대리국 진남왕부의 시종으로 변장했다.
일행이 빈관의 문을 나서게 되었을 때 파천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이쿠, 하마터면 큰일을 그르칠 뻔했군요. 모용복 역시 부마가 되고자 하는 판이고 그가 단 공자를 알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죠?
소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파 형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모용 공자 역시 단 세째 아우와 똑같이 인사도 없이 떠나고 말았소이다. 조금 전 내가 가 보았는데 등백천, 포부동 그들은 그야말로 뜨거운 부뚜막 위의 개미처럼 초조해 하더구려.
뭇 사람들은 크게 기뻐서 말했다.
그것 참 공교로운 일이구려.
주단신은 칭찬의 말을 했다.
소 대형은 정말 생각이 치밀하시군요. 모용 공자의 행방까지 알아 볼 줄은 몰랐습니다.
소봉은 미소했다.
나의 생각이 치밀한 것이 아니라 모용 공자의 인품이 뛰어나고 무예가 고강한지라 정말 목 소저에게는 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허허허!
파천석은 웃었다.
원래 소 대협은 가서 그에게 오늘 밤 그 연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전하려 하셨군요.
종영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천리 먼길을 달려온 것은 바로 부마가 되고자 함인데 어찌 그대의 권고를 듣겠어요? 소 대협은 그 모용 공자와 교분이 두터운가요?
파천석은 웃으며 말했다.
소 대협과 그분의 교분은 별로 대단하지 않소. 하지만 소 대협은 무예와 언변이 뛰어나시니까 그는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외다.
종영은 그제서야 알아차리고 웃었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좋은 말로 권한다면 상대방은 반드시 듣게 될 거예요.
목완청, 소봉, 허죽, 파천석, 주단신 등 다섯 사람은 황궁 문밖에 이르렀다. 파천석은 단예의 명첩을 디밀었다. 서하국의 예부상서가 친히 그들을 궁안으로 맞아들였다.
중화전(中和殿)에 이르러 보니 연회에 참석한 젊은이는 이미 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각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중화전의 중앙 좌석과 탁자와 의자에는 용을 수놓은 노란 비단을 깔아 놓고 있었다. 아마도 서하 황제의 어좌(御座)인 모양이었다.
동서쪽 두 자리에는 자색 비단을 깔아 놓고 있었다. 동쪽 자리에는 이미 짙은 눈썹의 커다란 눈망울의 젊은이가 앉아 있었는데 체구가 우람했고 몸에는 붉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옷차림과 모습은 조화를 이루어 그 젊은이의 위풍은 몹시 당당해 보였다.
그 젊은이의 등뒤로는 팔 명의 무사가 서 있었으므로 파천석 등은 그가 바로 토번국의 왕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부상서는 목완청을 서쪽 자리에 앉혀 다른 사람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않도록 했다.
소봉 등은 그녀의 등뒤에 가 섰다. 아마도 이번 청혼을 한 뭇 젊은이들 가운데 토번국의 왕자와 대리국의 왕자의 신분이 가장 존귀한 듯했다. 그래서 서하 황제도 특별히 예의를 갖추는 모양이었다.
그 밖의 귀공자들은 일반 준걸들과 다름없이 흩어져 여러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뭇 사람들이 잇따라 들어와 다투어 자리에 앉았다.
자리가 가득 차게 되자 두 명의 당직을 보던 장군이 우렁찬 음성으로 말했다.
귀빈이 모두 당도했으니 문을 닫아라!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소리와 더불어 두 쪽의 두터운 중화전의 문이 네 명의 창을 든 위사들에 의해 서서히 닫혀졌다.
낭하에서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가운데 한떼의 기다란 창을 든 금갑위사(金甲衛士)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창날은 촛불 아래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곧이어 주악 소리가 다시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무리의 내시가 내당에서 걸어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똑같이 하나의 백옥향로가 들려 있었고 향로에서는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뭇 사람들은 황제가 곧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숨을 죽였다.
최후로 네 명의 내시가 몸에 금포를 걸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아무 물건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어좌의 양쪽으로 나뉘어 섰다. 소봉은 그 네 사람의 태양혈이 높다랗게 솟아 있는 것을 보고 황제의 심복 시위로서 무공이 얕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곧이어 한 명의 내시가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만세께서 당도하셨으니 모두들 맞이하도록 하시오.
뭇 사람들은 모두 다 무릎을 꿇었다.
곧이어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한 사람이 안으로 걸어나와 어좌에 앉았다. 내시는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몸을 똑바로 하시오.
뭇 사람들은 몸을 일으켰다.
소봉은 서하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체구는 별로 크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다부지고 영명한 기개가 엿보였다. 예부상서는 어좌의 옆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펼치더니 낭랑히 외쳤다.
하늘의 법도에 순응하여 널리 거룩하신 무훈을 세우신 서하의 황제께서 내리신 칙서를 대독하노니, 여러분들은 부름을 받아 멀리 오셨으니 짐은 심히 갸륵하게 생각하여 술을 내리노라.
뭇 사람들은 다시 무릎을 꿇고 사의를 표했다. 내시는 외쳤다.
몸을 똑바로 하시오.
뭇 사람들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황제는 술잔을 들어 입에 대는 시늉을 하더니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당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뭇 내시들도 그 뒤를 따라 삽시간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뭇 사람들은 아연해져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주연을 베푸는 적은 없었던 것이었다.
모두들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는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사위를 어떻게 뽑자는 것일까?"
이때 예부상서가 말했다.
여러분들은 앉으시오. 앉아서 술과 음식을 들도록 하시오.
뭇 궁감(宮監)들이 음식을 날라왔다. 서하는 서북의 춥고 고달픈 지방이라 평소 먹는 음식은 소와 양이 주식이었다.
황궁의 황제가 친히 벌이는 잔치라고 했지만 역시 커다란 조각의 쇠고기와 양고기가 대부분이었다.
목완은 소봉이 옆에서 시립해 서 있는 것을 보고 미안한 생각이 들어 나직이 말했다.
소 큰오라버니, 허죽 둘째 오라버니, 두 분도 함께 앉아서 술을 마시도록 하세요.
소봉과 허죽은 모두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완청은 소봉이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라 마음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손짓을 하며 말했다.
술을 따르시오.
소봉은 그 말에 따라 술을 한 잔 따랐다.
목완청은 말했다.
그대가 한 잔 들도록 하시오.
소봉은 무척 기뻤다. 두 모금에 큰 대접의 술을 비웠다.
목완청은 다시 말했다.
다시 한 잔 드시오.
소봉은 다시 한 대접의 술을 마셨다.
동쪽 자리에 앉아 있는 토번의 왕자는 몇 모금의 술을 마시고 접시에서 한 조각의 쇠고기를 먹었다.
몇 번 뜯어 먹더니 뼈다귀만 남은 것을 아무렇게 던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지만 그 뼈다귀가 목완청의 몸으로 날아왔는데 그 기세가 무척 세찼다.
주단신은 섭선을 뽑아들고서는 소뼈다귀 위를 슬쩍 쳤다. 그러자 그 뼈다귀는 왕자에게로 되돌아갔다.
한 명의 토번 무사가 손을 뻗쳐 낚아채더니 욕을 하고는 그 탁자 위의 커다란 대접을 들어 주단신에게 던졌다.
파천석이 재빨리 손을 들어 후려쳤다. 장풍이 이르는 곳에 그 그릇은 중도에서 수십 조각이 나서 뭇 토번 사람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다른 한 명의 토번 무사가 급히 장포를 벗더니 날아드는 수십 조각을 모조리 장포에 싸 버리더니 똘똘 말았다. 그 수법이 매우 깨끗했다.
우지끈 뚝딱, 챙그랑, 하는 소리가 잇따라 이는 가운데 뭇 사람들이 대뜸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별안간 종 소리가 쾅쾅쾅, 하고 울려퍼졌다. 그리고 내당에서 두 줄의 사람이 걸어나왔다.
어떤 사람은 경장 차림을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느긋한 장포에 띠를 느슨하게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무기를 들고 있었다.
한 명의 금포를 입은 서하의 고관이 낭랑히 외쳤다.
황궁의 내원에서 여러분들은 무례해서는 못 쓰오. 이 분들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일품당의 고수들이오. 여러분들에게 흥취가 있다면 하나씩 나서서 무공을 겨루도록 합시다. 마구잡이로 싸우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겠소.
그러나 토번의 무사들은 여전히 손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쇠고기와 양고기도 마구잡이로 목완청에게 던졌다.
그 금포를 입은 고관은 토번 왕자에게 말했다.
아무쪼록 전하께서 손을 멈추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불편하게 될 것입니다.
종찬 왕자는 일품당의 군웅들의 수가 적어도 백여 명은 되고 더군다나 상대방의 궁궐 안에 있으니 주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왼손을 내저어 뭇 사람들의 행동을 막았다.
서하의 예부상서가 금포를 입은 고관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혁련 정동대장군, 공주마마께서는 또 어떤 분부가 계시던가요?
그 금포를 입은 고관은 바로 일품당의 총관인 혁련철수였다.
그의 벼슬이 바로 정동대장군이었다.
연전에 그는 일품당의 무사들을 이끌고 중원으로 달려갔던 적이 있었다.
혁련철수가 낭랑히 소리쳤다.
공주마마께서는 여러 귀빈들께서 술과 밥을 드신 이후 일제히 청봉각(靑鳳閣)의 서재에서 차를 드시라고 명령하셨소.
뭇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은천 공주(銀川公主)는 청봉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모든 사람들에게 그쪽으로 가서 차를 마시라고 하는 것은 그녀가 친히 뭇 사람들을 만나 보고 스스로 부군될 사람을 뽑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뭇 젊은이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 흥분되어서 생각했다.
"설사 공주가 나를 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녀를 만나보게 되는구나. 서하의 사람들은 모두 다 공주가 천하에 짝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나 한 번 만나보아야만 멀리 찾아온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 토번 왕자가 소맷자락을 뻗쳐서 입을 닦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느 때든지 술과 고기는 먹을 수 있지 않겠소. 이제 그만 먹고 공주를 보러 갑시다.
따라왔던 팔 명의 무사가 일제히 대답했다.
예.
토번 왕자는 혁련철수에게 말했다.
앞장을 서시죠?
혁련철수는 말했다.
좋소. 전하께서 뒤따르십시오.
그는 몸을 돌려서 목완청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단 전하께서도 가시죠.
목완청은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장군께서 앞장을 서십시오.
일행은 혁련철수의 인도를 받아 커다란 화원을 지나고 몇 번 낭하를 돌았다. 그리고 가산을 지나게 되었을 때였다.
목완청은 갑자기 옆에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사람은 금포에 옥대를 두르고 있었는데 바로 단예가 아닌가.
단예는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단 전하, 놀라실 것 없습니다.
목완청은 되물었다.
모두 알고 있었나요?
단예도 웃었다.
모두 안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형세를 보니 어느 정도 짐작을 하겠더군요! 단 전하, 정말 고생이 많으셨소.
목완청은 좌우를 돌아보았다.
서하의 관리가 옆에 있지 않나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단예의 등뒤로 두 명의 젊은 공자가 따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삼십여 세 정도로 두 눈이 비스듬히 치켜올라가 퍽이나 오만하고 차가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용모가 몹시 준수했다.
목완청은 잠시 더 살핀 후 그 미소년이 바로 왕어언이 가장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대뜸 화가 치밀어서 말했다.
그대는 참 잘하는구려.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왕 소저와 떠나다니, 그리고는 나에게 이 짐을 지어 주는 것인가요?
단예는 말했다.
누이, 화내지 마시오. 이 일을 이야기하자면 길다오. 나는 그 누구에 의해 진흙바닥의 우물 안으로 던져져 하마터면 산 채로 굶어 죽을 뻔했다오.
목완청은 그가 위험을 겪었다는 말을 하자 대뜸 치미는 울화를 억제하고 재빨리 물었다.
상처를 입지 않았나요? 안색이 좋지 않군요.
원래 단예는 우물 밑바닥에서 구마지에게 목을 졸리게 된 이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점차 정신을 잃게 되었다. 다급한 나머지 왕어언은 입을 벌리고 구마지의 오른팔을 물어뜯었다.
구마지는 갑자기 오른팔의 곡지혈이 아픈 것을 느끼게 되었고 체내의 소용돌이치던 내력이 삽시간에 일사천리 격으로 손바닥에서 단예의 목덜미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본래 그의 내식은 팽창되어 전신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빠져나갈 구멍을 찾게 되었는지라 대뜸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따라서 단예의 목을 조르던 손가락을 점차 풀게 되었다.
구마지는 단예의 몸뚱이와 접촉을 갖게 되었으나 단예의 엄지와 손목 등의 혈도에 부딪치지 않는 이상 단예는 스스로 북명신공을 돋우고서 그의 내력을 빨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왕어언이 그의 곡지혈을 한 번 물자 구마지는 깜짝 놀라게 되었고 그 바람에 내식의 관문이 크게 열려져 내력이 급히 쏟아지게 되었으며, 끊임없이 단예의 목에 있는 염천혈(廉天穴)로 쏟아져 들어가게 되었다.
염천혈은 임맥에 속했으며 천돌(天突), 선기(璇璣), 화개(華蓋), 자궁(紫宮), 중정(中庭)의 여러 혈도를 지나서는 기해(氣海)라 할 수 있는 전중혈로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구마지는 본래 정신이 오락가락 했으나 내력이 흘러나갈 길을 찾게 되자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이쿠, 나의 내력을 모조리 흡취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다면 얼마 후에 나는 폐인이 될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다지?
그는 공력을 돋우고서는 애써 항거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감이 있었다.
그의 내력은 본래 단예의 내력만큼 웅후하지 못했다. 게다가 태반이 이미 상대방의 체내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는지라 이쪽은 점점 줄어들게 되는 대신 단예의 공력은 더욱더 불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쌍방의 강약이 더욱 현격해지게 되었다.
그런 관계로 그가 아무리 발버둥쳤지만 내공을 모아서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왕어언은 자기가 한 번 물자마자 구마지가 단예의 목을 조르던 것을 멈춘 것을 알고는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구마지의 손바닥은 여전히 단예의 목에 못박힌 듯 붙어서는 그녀가 아무리 힘을 써서 잡아당겨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왕어언은 천하 각문 각파의 무공을 알고 있었으나 구마지의 이와 같은 일 초는 어떠한 무공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끝내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반드시 단예에게 해가 미칠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더 힘주어 잡아당겼다.
구마지는 오직 그녀가 자기의 손바닥을 떼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컸다.
왕어언도 갑자기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대뜸 자기의 내력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원래 단예의 북명신공은 적과 자기편을 분간하지 못했다. 그래서 왕어언의 얕은 내력마저도 흡수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 단예와 왕어언, 그리고 구마지 세 사람은 일제히 혼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모용복은 한참 동안이나 아래쪽의 세 사람의 기척이 들리지 않자 몇 번 불러보았다.
그래도 대답 소리가 들리지 않자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세 사람은 함께 죽은 모양이로구나."
그는 처음엔 속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왕어언과 자기와의 정분을 생각할 때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어이쿠, 우리는 커다란 바위로 우물 안에 갇혀 있는 꼴이 아닌가. 만약 세 사람이 죽지 않았더라면 우리 네 사람이 힘을 합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 혼자밖에 남지 않았으니 빠져나간다는 것은 매우 힘들게 되었다. 아, 당신네들은 죽으려면 모두 바깥에 가서 죽자 사자 결판을 냈어야 했어."
그는 우물 아래로 뛰어내려 다시 세 사람을 살펴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떠들썩한 소리를 들어 보니 아마도 서하의 시골 농부들 같았다.
원래 네 사람은 야밤에 소란을 피우게 되었는데 어느덧 날이 밝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외의 농부들이 채소를 짊어지고 영주성 안으로 팔러 가다가 마침 이 우물가를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모용복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만약 소리쳐 부른다면 시골 농부들은 이 수백 근이나 되는 커다란 바위들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몇 번 움직여 보려다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만 자기 갈 길을 가고 말 것이다. 재물로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야 한다."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많은 금은보화! 이 많은 보물은 모두 나의 것이니 너희들은 가까이 오지 마라!
곧이어 그는 음성을 뾰족하게 변화시켜 부르짖었다.
본 사람에게는 몫이 돌아가는 법이다! 그 누가 보았으면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의 몫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는 목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해! 본 사람에게 모두 몫이 돌아간다면 금은재보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나누게 되면 얼마 되지 않을걸세.
이와 같이 말을 주고받는 척 꾸몄으며 그 음성에는 내력을 실어 멀리 퍼지도록 했다.
시골 농부들은 그 말을 듣고는 놀람과 기쁨에 얽혀서는 우르르 모여 들어서는 바위를 옮기게 되었다.
바위가 무겁기는 했으나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서 옮기자 끝내 하나씩 들어낼 수 있었다.
모용복은 커다란 바위가 모두 치워지기 전에 몸을 통과시킬 수 있는 빈틈이 난 것을 보고 즉시 우물벽을 타고 올라서는 휙, 하니 뛰쳐나갔다.
시골 농부들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눈깜짝할 사이에 그 사람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뭇 사람들은 귀신인가 도깨비인가 여기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끝내 재물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고생고생하면서도 십여 개나 되는 바위들을 한편으로 치우고 채소나 나뭇단들을 묶었던 줄을 이어서 가장 대담한 사람이 밧줄을 타고 우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 농부가 우물 안으로 들어가 손을 더듬어 보는 즉시 구마지가 손에 만져지게 되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지라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그만 혼비백산한 그는 재빨리 밧줄을 흔들었고 다른 사람은 그를 끌어올렸다, 그래도 여러 사람들은 단념을 하지 않고 상의를 한 이후 몇 조각 마른나무 가지를 찾아내어 불을 밝히고 우물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세 구의 시체가 진흙바닥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죽은지 오래된 것 같았고 금은재보는 보이지도 않았다.
시골 농부들은 살인 사건이니 이야말로 관가에 알리면 관가에서는 오히려 사람을 죽여 재물을 빼앗으려 했다고 모함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 간담이 서늘해진 그들은 떼를 지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오시 무렵이 되어서야 우물 안의 세 사람은 차례로 정신을 차렸다.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 사람은 왕어언이었다.
그녀의 공력은 본래 얕아서 내력을 깡그리 상실했다고 하나 본래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손해를 입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린 후 즉시 단예를 생각했다.
이때 밖은 대낮이었지만 깊은 우물 안은 여전히 사물을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을 뻗쳐서는 더듬었다.
단예를 더듬게 된 그녀는 부르짖었다.
낭군, 낭군, 그대는...... 그대는...... 어떻게 되었어요?
단예의 대답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저 단예가 구마지에게 목졸려 죽은 줄 알고 그녀는 그만 단예의 시체를 안고서 통곡을 했다. 그리고는 단예를 품안에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낭군, 낭군, 그대는 나에게 이토록 깊은 정을 보였는데 나는 한 번도 좋은 말로 상냥하게 대한 적이 없었어요. 이제 그대에게 보답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뜻밖에도...... 우리 두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가혹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나요. 오늘 그대는 고약한 승려의 손에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갑자기 구마지가 입을 열었다.
소저는 겨우 반만 알아맞추었소. 노납은 고약한 화상이오. 하지만 단 공자는 결코 나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외다.
왕어언은 놀라 부르짖었다.
설마하니...... 우리 고종 오라버니가 쓴 독수라는 말이에요? 그가...... 그가 어째서 그토록 심보가 악독하단 말이에요?
바로 이때 단예는 내식이 순조로워져서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왕어언의 간드러진 음성이 바로 귓가에서 들여오는지라 그는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는 자기가 그녀에게 안겨 있는 것을 알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그녀가 알아차리고 손을 놓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때 구마지가 말했다.
그대의 낭군은 고약한 승려의 손에 목숨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로 이 고약한 승려가 하마터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했소이다.
왕어언은 눈물을 흘렸다.
이와 같은 때 그대는 무슨 심정으로 그 같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대는 남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모른단 말이예요 차라리 저마저 목졸라 죽여 낭군을 따라 저승으로 가도록 해주세요.
단예는 그녀의 정이 가득 담긴 말을 듣고 몹시 흐뭇해졌으며 가슴속으로부터 치미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구마지는 내력을 상실했으나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식견도 여전히 뛰어난 데가 있었다.
단예의 가느다란 호흡 소리를 듣고 억지로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또한 단예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단 공자, 나는 소림 칠십이 절기를 잘못 익혀 주화입마되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소. 만약 그대가 나의 내력을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노납은 이미 미쳐서 죽게 되었을 것이오. 이제 노납은 무공을 상실한 대신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으니 그대에게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판이오.
단예는 예의바른 군자였다. 갑자기 그가 자기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자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십시오. 불초에게 무슨 덕과 능력이 있다고 대사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어언은 단예가 입을 열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순간 어리둥절해졌고 즉시 그가 일부러 움직이지 않은 뜻을 알아차렸다.
그만 크게 부끄러워진 그녀는 단예를 품에서 밀어내며 뾰로통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그대는 나쁜 사람이에요!
단예는 자기의 의도를 그녀가 간파하자 그만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는 우물 벽에 등을 기대었다.
구마지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노납은 불문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승부욕은 다른 사람보다도 더욱 강했소. 오늘의 열매는 실로 삼십 년 전에 심은 것이라 할 수 있소이다. 아, 실로 탐(貪), 진(瞋), 치(癡) 삼독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고승이랍시고 자부했으며 오만무례한 행동을 했으니 그야말로 부끄럽기 짝이 없소. 아, 명이 다한 이후 지옥으로 떨어져서는 다시 환생할 수 없게 될 것이오.
단예는 속으로 정히 당황하고 있었다. 왕어언이 화가 났는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구마지가 좌절감에 빠져서 하는 말을 듣고 동정심이 불쑥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대사께서는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사께서는 조금 전 몸이 편찮았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까?
구마지는 본래 슬기롭고 사리 밝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불학의 조예도 매우 깊은 편이었다.
다만 무공을 연마하다가 승부욕이 강해서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이 엷어져서 오늘의 결과를 맺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진흙바닥에 앉아 별안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여래께서는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욕심, 사랑, 그리고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매달리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야만이 해탈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떨쳐 버릴 수 없었으며 명예와 이득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늘 무공을 깡그리 상실하게 된 것은 부처님께서 올바른 길로 되돌아와 해탈을 할 수 있도록 깨우쳐 준 일인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단예는 그가 대답하지 않자 왕어언에게 물었다.
모용 공자는 어떻게되었소?
왕어언은 아, 하더니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는 어떻게 되었죠? 어마, 저는 깜빡 잊고 있었어요.
단예에게는 그녀의 깜빡 잊고 있었다는 말이 마치 하늘의 음악처럼 아름답게 들렸으며 금세라도 혼백이 날아갈 듯 기분이 황홀해졌다.
본래 왕어언의 마음은 모용복에게만 쏠려 있었는데 이제 반나절이 지나도록 그를 깜빡 잊고 있었다니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녀의 자기에 대한 마음은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인 줄 알 수 있었고, 그녀의 마음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기의 위치가 모용복과 서로 맞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구마지가 말했다.
노납은 과거 많은 죄를 지었소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사과를 드립니다.
그는 합장하고 허리를 구부렸다. 단예는 그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반례하며 말했다.
만약 대사께서 이 만생을 중원으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이 만생이 어찌 왕소저와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만생은 오히려 대사님께 실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구마지가 말했다.
그것은 공자 스스로 쌓은 덕 때문에 보답을 받은 것입니다. 노납의 악행이 오히려 공자를 도와 주는 인연이 된 것이죠. 공자께서는 인정이 많으시니 뒤에 무궁무진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노납은 오늘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이후 만리의 간격을 두게 되어 만나 보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이 한 권의 경서는 공자께서 훗날 수고스럽지만 노납을 대신해서 소림사로 되돌려 주십시오. 그리고 두 분이 백년해로할 것을 기원합니다.
그러면서 그 진흙이 묻은 역근경을 단예에게 주었다.
단예는 물었다.
대사께서는 토번국으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구마지가 답했다.
나는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토번국이라고는 할 수 없소이다.
단예가 다시 물었다.
귀국의 왕자가 서하 공주에게 구혼을 하고 있는데 대사께서는 그 일이 결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마지는 빙그레 웃었다.
세상 밖의 한가한 사람이 어찌 그런 속된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소이까. 마음가짐을 편안히 가질 참입니다. 마음이 편한 곳이면 바로 몸이 편안한 곳이 되겠죠.
그는 시골 농사꾼들이 남겨 두고 간 밧줄을 잡아당겨 보았다. 윗쪽이 커다란 바위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고서 천천히 기어올라갔다.
이렇게 되어 구마지는 대천대오하여 끝내는 일대의 고승이 되었다. 천축의 불가경론을 서장의 글로 옮겨서 불법을 크게 떨치고 많은 사람을 부처님 앞으로 인도했다.
그 후 천축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고 경(經), 율(律), 론(論), 삼장(三藏)이 모조리 흩어져 사라지게 되었으나 서장에서만은 무척 많이 보존할 수 있었는데 이 또한 구마지의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단예와 왕어언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으며 숨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비록 더러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즐거움으로 넘쳐 흘러 두 사람 모두 우물 밖으로 기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천천히 손을 뻗쳐서는 서로 꼭 쥐었다. 마음과 마음이 말하지 않아도 교류하고 있었다.
한참 후 왕어언이 입을 열었다.
낭군님, 그대의 목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몰라요. 우리 위로 올라가 살펴보도록 해요.
단예는 말했다.
지금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으며 서두를 것 없다고 생각하오.
왕어언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대가 올라가시기 싫어한다면 저는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그대와 함께 있겠어요.
그녀는 정말 고분고분했으며 조금도 단예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다.
단예는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어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이와 같은 진흙더미 속에 빠져 있다가 병이 나면 큰일이오.
그는 왼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껴안고 오른손으로 밧줄을 끌어당기는데 그 힘이 엄청나 조금 기운을 쓰는 사이에 두 사람은 몇 자 위로 오를 수 있었다.
단예는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사실 자기가 구마지가 한평생 쌓은 공력을 흡수해서 그런지도 모르고 그저 자기의 기분이 좋아서 공력이 크게 불어난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이 우물 안에서 나오자 햇살 아래 상대방이 진흙으로 더러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기의 얼굴도 그와 같으리라 생각하고 그만 참지 못하고 서로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곧이어 두 사람은 조그만 개울을 찾아가서는 물 속에 뛰어들어 한참 동안 씻었다.
그제서야 머리카락, 코와 입, 옷, 신발과 버선에 묻은 흙을 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물에 흠뻑 젖어서는 개울물에서 걸어나왔다.
그 모습은 그제 밤 단예가 연못에 떨어졌다가 뛰쳐나오는 모습과 비슷했으나 마음은 크게 다른 상태라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없잖아 있었다.
왕어언은 말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누가 보게 되면 어쩌죠?
단예는 말했다.
그럼 차라리 이곳에서 옷을 햇볕에 말렸다가 날이 어두워진 후에야 돌아가도록 합시다.
왕어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는 산비탈에 있는 바위에 가서 등을 기대었다.
단예는 왕어언의 그러한 모습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야말로 가인은 꽃과 같았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 또한 절색이라 그만 흐뭇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왕어언은 그의 그와 같은 시선을 느끼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고 결국은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무척 빨리 흘러갔다. 눈깜짝할 사이에 해가 서산으로 지게 되고 옷과 신발, 그리고 버선짝들이 말랐다.
단예는 속으로 기뻐하다가 갑자기 모용복을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언 누이, 오늘 나는 소원을 풀게 되었소. 그러나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가 오늘 서하 공주에게 청혼을 하는 것은 성사될런지 모르겠구려.
왕어언은 본래 이 일을 생각하면 그저 죽고 싶도록 슬픔이 복받쳤으나 이때는 마음이 크게 변해 있었고 모용복에 대해서도 약간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녀는 오히려 모용복이 서하 공주를 맞아들였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들어서 말했다.
그렇군요. 우리 빨리 가 보도록 해요.
두 사람은 총총 빈관으로 갔다. 그런데 문밖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담장가에서 그 누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도 왔구려.
바로 모용복의 음성이었다.
단예와 왕어언은 기뻐서 일제히 말했다.
그렇군요. 그대는 여기 계셨군요.
모용복은 흥, 하고 코웃음치더니 말했다.
방금 토번국의 무사들과 한바탕 싸워 십여 명을 죽이게 되었소. 그러느라 적잖은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소. 그대는 어째서 스스로 황궁의 잔치에 참석하지 않고 소저로 하여금 그대를 변장하여 가도록 했소? 나는......나는......그대가 그와 같은 교활한 계책을 쓰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으며 반드시 폭로하고 말겠소.
단예는 의아하여 물었다.
어떤 소저가 나로 변장했다는 것이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소.
왕어언 역시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 우리는 우물 안에서 방금 나와......
그러다가 그녀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자기네들은 산비탈에서 한참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근 반나절을 보내지 않았던가.
다행히 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을 때라 모용복은 그녀의 겸연쩍어 하는 얼굴을 살피지 못했다.
그는 급히 황궁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어서 그녀의 옷에 묻어 있던 진흙들이 모두 가셔져 결코 우물에서 막 나온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도 눈여겨 볼 여유가 없었다.
이때 왕어언은 다시 입을 열었다.
고종 오라버니, 그......그......단 공자와 저는 그대에게 미안하게 생각해요. 아무쪼록 그대가 서하 공주를 처로 맞아들이기를 바래요.
모용복은 정신이 번쩍 들어 기뻐서 말했다.
그게 사실이오? 단 공자는 정말 나와 부마 자리를 다투지 않겠소?
단예는 말했다.
나는 결코 그대와 서하 공주를 두고 다투지 않겠소. 그러니 그대 역시 나와 언 누이를 놓고 다투지 않도록 하시오. 사내 대장부의 일언은 중천금이니 결코 어기지 않도록 합시다.
그는 모용복을 만나자 어느 정도 걱정이 되어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모용복은 기뻐서 말했다.
빨리 황궁으로 갑시다. 그리고 그 소저가 부마가 되지 않도록 하시오.
즉시 그는 총총이 목완청이 남자로 변장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즉시 세 사람은 모용복의 처소로 들어갔다.
등백천 등은 정히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공자가 돌아온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시간이 촉박한지라 여러 사람들은 손발이 어지럽도록 옷차림을 바꿔 입어야 했다.
단예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왕어언과 헤어지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렇지 않으면 황궁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다.
모용복은 어찌할 수 없어 왕어언으로 하여금 남장으로 고쳐 입고 함께 궁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세 사람이 등백천, 포부동, 공야건, 풍파악 등과 황궁에 도달했을 때 궁문은 닫혀져 있었다.
모용복은 그대로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살그머니 궁 담장 밖의 외진 곳에서 담장을 뛰어 넘었다.
풍파악은 담장 위로 올라가 손을 뻗쳐 단예를 붙잡아 주려고 했다. 단예는 왼손으로 왕어언을 끌어안고는 힘을 주어 뛰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쳐서 풍파악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한 번 뛰자 두 사람은 날렵하게 풍파악의 머리 위를 서너 자나 더 높이 뛰어 넘어섰다가 곧이어 가볍게 내려서는데 그 떨어지는 것이 나뭇잎이 떨어지는 듯 전혀 기척이 나지 않았다.
담장 안의 모용복과 담장 위의 풍파악, 그리고 담장 밖의 등백천과 공야건 등은 이구동성으로 나직이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경신법이군!
다만 포부동만이 시큰둥한 말을 했다.
내가 보기엔 형편없는걸?
일곱 명은 화원으로 잠입해서는 손님들을 환대하는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는 대청으로 들어가 잔치석에 같이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잔치는 금방 끝나게 되고 청혼을 한 뭇 젊은이들은 은천 공주의 초청을 받아 청봉각으로 가서 차를 마신다고 하지 않는가.
단예와 모용복, 그리고 왕어언 세 사람은 그리하여 뭇 젊은이들과 함께 청봉각으로 가다가 화원에서 목완청을 만나게 된 것이다.
소봉과 파천석 등은 단예가 신출귀몰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고 모두 놀람과 기쁨을 억제하지 못했다.
뭇 사람들은 살그머니 상의를 했다. 구혼자가 많으니 서하국의 관원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리라고 여겼다.
모두들 함께 청봉각으로 가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따라서 단예가 이왕 도달했으니 이제 들통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행이 화원을 지나게 되었을 때 멀리 꽃나무 사이로 한 채의 누각 모퉁이가 보였다. 그 누각의 옆으로 두 개의 궁등이 달려 있었다.
혁련철수는 뭇 사람들을 이끌고 그 누각 앞에 이르더니 낭랑히 말했다.
사방의 귀빈들이 와서 공주님을 배알하고자 합니다.
누각의 문이 열리면서 몇 명의 궁녀가 나왔다.
모든 궁녀들은 손에 등롱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한 명의 자색 장삼을 걸친 여관(女官)이 나오더니 말했다.
여러분들은 먼길을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공주께서는 여러분들이 청봉각으로 들어오시어 차를 드시라고 하십니다.
종찬 왕자는 말했다.
잘됐소, 잘됐소.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마르던 참이오. 공주를 만나려고 몇 걸음 더 걷는거야 무슨 상관이 있겠소? 또 무슨 고생을 했다고 할 수 있겠소? 하하하!
그는 가슴을 편 채 뚜벅뚜벅 걸어서 그 여관의 옆을 지나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투어 몰려 들어갔다. 모두 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덤볐다. 공주의 자리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은 자리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청봉각 안에는 매우 커다란 대청이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두터운 양털로 만든 담요가 깔려 있었다.
담요 위에는 오색 찬란한 꽃송이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차탁자들이 줄을 지어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푸른 꽃무늬의 뚜껑이 있는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릇 옆에는 푸른 꽃무늬 접시가 놓여 있었고 접시 위에는 떡이나 꿀 같은 요기할 음식이 담겨져 있었다.
대청의 끝 쪽에는 서너 자 높이의 평대가 있었고 엷은 황색의 담요가 깔려 있었으며 평대위에는 하나의 비단 방석을 얹어 놓은 둥근 걸상이 놓여 있었다.
뭇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곳이 공주의 자리라 생각하고 서로 밀고당기며 그 평대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다.
단예와 왕어언은 손에 손을 잡고 대청 한모퉁이의 조그만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나직이 말을 주고받으며 싱글벙글하며 다른 일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각처의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되자 그 여관은 조그만 구리로 만든망치를 들어 백옥으로 만들어진 운판(雲板)을 동동동, 세 번 쳤다. 그러자 대청 안은 조용해졌고 단예와 왕어언마저도 말하는 것을 멈추고 공주가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잠시 기다리자 귀거리와 패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내당에서 여덟 명의 파란 장삼을 걸친 궁녀들이 나오더니 양쪽으로 나누어 섰다. 잠시 후 한 엷은 녹의를 걸친 궁녀들이 나오더니 양쪽으로 나누어 서더니 한 엷은 녹의를 걸친 소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뭇 사람들은 대뜸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소녀의 몸매는 매우 아리따웠으며 행동거지도 우아했다. 그리고 얼굴은 더욱 아름다운 편이었다. 뭇 사람들은 암암리에 갈채를 보냈다.
"사람들은 은천 공주의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서 무쌍이라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모용복은 생각했다.
"나는 처음에 은천 공주의 용모가 아름답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외사촌 누이보다는 좀 못하지만 그런대로 천 사람 가운데 혹은 만 사람 가운데 있을까 말까한 미녀로구나. 조금 전의 걱정은 필요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용모는 말할 것도 없고 태도가 단정한 것을 보면 훗날 대연나라의 황후가 되어도 손색이 없겠구나. 나와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된다면 대대로 대연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 소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평대 위로 올라가더니 약간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뭇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뭇 사람들은 그녀가 들어올 때부터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고 모두 맞절을 했다.
어떤 사람은 공주가 그토록 겸손하고 오만한 빛을 조금도 띄우지 않자 칭찬의 말을 했다.
소녀는 눈으로 코를 보고 코로 마음을 보듯 시종 눈을 들어 뭇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매우 부끄러움을 타는 소녀였다.
뭇 사람들은 크게 숨 한번 쉬지도 못했다. 혹시나 그녀를 놀라게 할까 두려워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공주는 금지옥엽으로 구중궁궐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갑자기 많은 남자들을 대하게 되었다. 자연 부끄러워해야만이 그녀의 존귀한 신분에 맞는다."
그런데 잠시 후 소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가늘고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주께서 유시를 내리셨습니다. 여러 손님들께서는 멀리서 오셨는데 청봉각에는 귀빈을 대접할 만한 좋은 음식이 없어 무척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여러분들은 아무쪼록 조금이라도 들도록 하시라는 분부였습니다.
뭇 사람들은 흠칫해서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부끄러운 노릇이다. 알고 보니 그녀는 공주가 아니었구나. 아마도 공주를 시중드는 궁녀 가운데 한 사람인가 보다."
그러나 그들은 궁녀가 이토록 뛰어나니 공주는 더욱더 어여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부끄러워하는 마음 가운데서도 몇푼 더 기뻐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되었다.
종찬 왕자는 말했다.
알고 보니 그대는 공주가 아니었구려. 그렇다면 공주보고 빨리 나오시라고 하시오. 차와 음식을 먹을 경황이 어디 있겠소?
그 궁녀는 말했다.
여러분들이 차를 마신 이후에 공주마마께서는 달리 유시를 내리실 것입니다.
종찬은 웃었다.
매우 좋소, 좋아. 공주 전하께서 그와 같이 명령을 내렸다면 받드는 것이 좋겠지.
그는 찻잔 뚜껑을 열어 제쳤다. 그리고 그릇을 한쪽으로 기울여 그 안의 찻물은 물론 찻잎까지도 입안에 털어넣고는 물을 꿀꺽 삼키고 찻잎을 씹었다. 토번국의 사람들은 차를 마실 때 차에 소금을 탔다. 그리고 우유 같은 것도 탔으며 찻물과 찻잎을 함께 들이마셨다.
그는 찻잎을 미처 다 삼키기도 전에 네 가지의 음식을 재빨리 입안으로 털어넣고는 애매모호한 어조로 말했다.
되었소. 나는 명을 받들어서 다 먹었소. 이제 공주마마보고 나오라고 하시오.
그 궁녀는 나직이 말했다.
예.
그러나 걸음을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종찬은 그녀가 다른 사람이 다 먹고 난 이후에 움직이려는 것으로 알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연신 재촉을 했다.
이것 보시오. 빨리들 먹어 치우도록 합시다. 그까짓 찻잎을 씹어 삼키는데 뭐가 시간이 걸리오?
그리하여 간신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차를 마시게 되고 음식 그릇을 비우게 되었다.
종찬 왕자는 다그치듯 물었다.
이제 되었소?
궁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여러 귀빈들께서 서재로 옮기시어 서화를 구경하시라는 분부이십니다.
종찬은 흐흐 하고 입을 열었다.
서화에 뭐가 볼 것이 있겠소? 그까짓 미녀를 그려 놔 봐야 어찌 참된 사람만큼 예쁠 수가 있느냔 말이오? 만질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소?
그는 몸을 일으켰다.
모용복은 속으로 기뻐했다.
"그렇다면 되었다. 공주는 우리들에게 서재로 가라고 했는데 서화를 구경하라는 것은 구실이고 글재주를 시험해 보겠다는 것이 진짜일 것이다. 종찬 왕자같이 거친 사람들이야 어찌 시사가부(時詞歌賦)나 서법(書法)과 그림을 알아보겠는가? 한두 마디 말에 공주에 의해 서재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때 궁녀는 말했다.
공주께서는 유시를 내리셨습니다. 무릇 남장을 한 소저들과 사십 세가 넘은 선생들께서는 모조리 이 응향당(凝香堂)에 쉬면서 차를 들도록 하시라는 분부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의 귀빈들은 안쪽 서재로 가시죠.
목완청과 왕어언은 속으로 놀라 생각했다.
"내가 남장을 한 것을 그들은 이미 알아내었구나."
이때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그 궁녀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어릴 적에 궁안으로 들어왔는데 몇 살이 지난 후부터 그저 만난 사람이래야 반 남자이며 반 여자인 태감이었다 그리고 한 번도 남자와는 대화한 적이 없었다.
황제와 황태자도 만나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많은 남자를 대하게 되자 자연 당황하게 되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에야 그녀는 말했다.
이 분 선생께서는 어떤 고견이 계신지요?
포부동은 말했다.
고견은 없지만 얕은 견해는 있소이다.
포부동과같이 입으로 억지를 쓰는 사람은 궁녀는 더욱더 일찍이 만나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상대를 해야 할지 몰랐다.
포부동은 곧이어 말했다.
아마도 그대는 반드시 나에게 선생에게는 무슨 얕은 견해가 계십니까 하고 물으려고 한 것이외다. 그대는 부끄러워하니 내가 대신 말해 드리는 것이외다.
궁녀는 미소했다.
선생, 고맙습니다.
포부동은 말했다.
우리가 만리 먼길을 멀다 하지 않고 공주를 뵈오러 오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오. 어떤 사람들은 모래 바람이 몰아치는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사자와 호랑이 밥이 되었으며, 어떤 사람든 토번 왕자의 수하 무사들에게 살해를 당했소. 따라서 영주에 도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열 명 가운데 한두 명밖에 되지 않소이다. 모두들 그저 생각하는 것은 공주의 용안을 한 번이라도 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외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몇 년 더 일찍 낳아서 불초로 하여금 나이 사십이 지났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고생을 헛수고로 돌리다니 이럴 수도 있는 것이오이까? 진작 이럴줄 알았더라면 나는 좀더 늦게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외다.
궁녀는 입술을 깨물고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농담을 잘하시는 군요. 사람이 일찍 태어나거나 늦게 태어난다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종찬은 포부동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 듯 노기 띤 눈으로 노려보며 호통을 내질렀다.
공주 전하께서 유시를 내렸다면 모두들 받들 것이지 당신은 무엇 때문에 잔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오?
포부동은 냉랭히 말했다.
왕자 전하, 나의 이와 같은 말은 그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외다. 그대는 금년 사십 일세이니 매우 늙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십이 넘은 것은 사실이니 공주를 만나 볼 수 없는 몸이외다. 그저게 나는 그대의 운명을 점치지 않았겠소? 그랬는데 그대는 바로 병인년(丙寅年) 경자월(庚子月) 을축일(乙丑日) 기묘시(己卯時)의 팔자를 가졌으니 따지고 보자면 사십하고도 한 살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종찬 왕자는 기실 스물 여덟 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온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어서 도대체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그 궁녀는 남자를 오늘 처음 만나는 형편인지라 남자의 나이가 몇 살인지 더욱더 판단할 수가 없었고 포부동이 말하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찬 왕자는 얼굴 가득히 노기를 띄우고 달려가 포부동을 때리려고 하지 않는가.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고 말했다.
그만......그만두세요. 각자의 생일은 언제나 그 자신이 더욱더 잘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하여튼 사십 세가 넘은 사람은 이곳에 남아 계시고 사십 세가 되지 않은 사람은 서재로 가시도록 하세요.
종찬은 말했다.
매우 좋소. 나는 삼십 세도 되지 않았으니 마땅히 서재로 가야 하오.
그는 성큼성큼 내당 쪽으로 걸어들어갔다.
포부동은 그의 말투를 흉내내서 말했다.
매우 좋소. 나는 팔십 세도 되지 않았으니 마땅히 서재로 가야 할 것이오. 내 나이는 불혹을 지나게 되었으나 성격은 결코 불혹이 아니고 그야말로 크게 흔들리는 상태이외다.
그는 몸을 날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궁녀는 저지하려고 했으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라 감히 말리지를 못했다.
뭇 사람들은 덩달아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사십 세를 넘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오륙 십 세가 된 사람도 적잖게 들어갔다. 다만 십여 명의 좀 근엄하고 행동이 단정한 노인들만이 대청에 남아 있었다.
목완청과 왕어언은 남아 있게 되었다.
단예는 원래 남아서 왕어언과 행동을 같이 하려고 했으나 반드시 들어가 모용복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예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안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한 걸음 떼어 놓을 때마다 세 번씩 돌아보았다.
그야말로 천리 먼 타국으로 떠나는 사람 같았고 이번에 가면 삼사 년 내지 오 년 동안 만날 수 없는 사람 같은 태도를 보였다.
일행은 기다란 통로를 지나게 되었다. 그들은 속으로 매우 답답하게 생각했다.
"청봉각은 밖에서 볼 때 그렇게 웅장하지 않았는데 안으로는 따로이 천지가 있고 이토록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구나."
수십 장의 통로가 끝나고 두 쪽의 커다란 바위로 된 문앞에 이르렀다.
궁녀는 한 조각 금붙이를 꺼내서는 석문을 똑똑똑, 하고 몇 번 두드렸다. 그러자 석문은 끼득끼득 하면서 열렸다.
사람들은 석문이 한 자 두께나 되고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걱정을 했다.
"우리가 들어간 이후 석문이 닫혀진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일망타진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서하에서 공주로 부마를 뽑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천하 영웅 호걸들이 일제히 스스로 그물에 뛰어들도록 만든 것인지 누가 알겠느냐 말이다."
그러나 이왕 왔으니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겁을 집어먹고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뭇 사람들이 석문 안으로 들어간 이후 석문은 서서히 닫혀졌다. 석문 안은 다시 기다란 통로였고 양쪽의 석벽에는 기름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통로를 다 지나게 되자 다시 하나의 석문이 나타났다. 석문을 지나자 다시 통로가 나타났다. 잇따라 커다란 석문을 세 곳이나 지났다.
이렇게 되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사람도 약간 당황하게 되었다. 다시 몇 번 구비를 틀자 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게 되었고 그들은 어느덧 깊은 개울가 옆에 당도하게 되었다.
깊은 궁안에서 갑자기 이와 같은 개울을 대하게 되니 실로 불가사의한 노릇이라 생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궁녀는 말했다.
서재로 가자면 반드시 이 개울을 지나야 한답니다. 이 개울은 유란간(幽蘭澗)이라고 하지요. 자, 여러분들, 가시죠.
그녀는 몸을 슬쩍 날리더니 깊은 개울 위로 내려섰다. 개울가 옆으로는 네개의 밝은 횃불이 켜져 있었다. 그런데 그 궁녀는 몸매도 날렵하게 사뿐사뿐 개울 위를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뭇 사람들은 의아하여서는 개울 위에 반드시 쇠밧줄 같은 것이 있어 발을 딛을 수 있게 된 모양이라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허공을 가로지를 만한 공력이 그 궁녀에게 있을 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 가닥 강철 철사가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강철 철사는 가늘고도 시커먼 칠을 해 놓았는지라 정말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개울은 매우 깊어 보였다. 만약 실족하여 떨어진다면 목숨을 잃을 우려는 없다고 하더라도 매우 낭패한 꼴을 보이게 될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서하로 온 것은 청혼을 하거나, 청혼하러 온 사람들을 호위하기 위하여 온 몸이라 하나같이 무공에는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즉시 그 누가 경신법을 펼쳐서는 강철 줄을 타고 맞은편 언덕으로 날아갔다.
단예는 무공이 형편없었으나 능파미보의 경신법은 심히 익숙하게 연마한 터였다. 파천석이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몸을 날리자 두 사람은 즉시 건너뛸 수 있었다.
뭇 사람들이 모두 지나가게 되자 그 궁녀는 하나의 바위 옆의 기관장치를 눌렀다.
그러자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 줄은 대뜸 움츠러들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뭇 사람들은 더욱 경계심을 품었다.
어떤 사람은 후회까지 했다.
"내가 왜 바보처럼 궁안으로 들어올 때 무기나 암기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그 궁녀는 말했다.
여러분들은 이곳으로 오시죠.
뭇 사람들은 그녀를 따라 커다란 소나무 밭을 지나 어느 동굴문 앞에 이르게 되었다.
궁녀는 말했다.
자, 들어 가시죠.
그녀는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주단신은 나직이 파천석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파천석 역시 어떻게 되는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단예에게 남아 있으라고 권해야 할 것이지 모험을 해보아야 한다고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부마로 선택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이 망설이고 있을 때 단예는 어느덧 소봉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파천석과 주단신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고는 따라서 들어갔다.
동굴 안에서 다시 통로를 따라 한참 들어갔다. 그러자 눈앞이 환히 밝아졌다. 뭇 사람들은 어느덧 어느 커다란 대청에 와 있었다.
이 대청은 먼젓번 차를 마셨던 응향당보다 세 배나 더 큰 곳이었다. 아마도 본래 산허리 속의 동굴인데 인공을 가해서 대청으로 만든 모양이었다.
대청의 벽에는 서화록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일반 산의 동굴 안은 습기가 차거나 물방울이 떨어지는데 이곳은 매우 건조했다. 서화가 벽에 걸려 있었지만 습기를 받은 현상은 전혀 없었다.
대청 한옆으로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탁자가 있었고 탁자 위에는 문방사보와 골동품이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는 몇 채의 서가와 서너 장의 돌로 만들어진 걸상과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궁녀는 말했다.
이곳은 공주 전하께서 사용하시는 서재입니다. 여러분들은 서화폭을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뭇 사람들은 이 대청의 모양과 꾸며 놓은 것이 매우 특이하고 썰렁할 뿐만 아니라 지분 냄새가 전혀 없는 것을 보고 공주의 서재라고 하는 말에 대해 모두 다 크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봉이나 허죽은 무공이 고강했으나 문예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은 모두 나란히 땅바닥에 주저앉아서는 다른 사람의 동정을 엿보게 되었다.
소봉이 견식이나 경력에 있어서는 허죽보다 백 배나 뛰어난 편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벽에 걸린 서화폭에 대해서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기실 그의 눈초리는 시종 그 녹색의 의상을 걸친 궁녀의 좌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 궁녀가 관건의 소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서하국에서 몰래 어떤 간계를 펼치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저 부끄럼 잘 타고 가냘픈 궁녀가 발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예, 주단신, 모용복, 공야건 등은 먼저 벽앞으로 가서 서화폭을 구경했다. 등백천 등은 서가마다 뒤쪽으로 조그만 구멍이 있어서 독기를 내뿜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을 살폈다.
다만 포부동만이 나오는 대로 서화폭에 대하여 마구 깍아내리는 말을 씨부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 서화폭의 모양이 좋지 않다든가 아니면 붓에 힘이 덜 들어 갔다든가 하는 식으로 비난을 했다.
공주의 서재에는 진나라 때 그림이나 북위(北魏) 때의 글씨들이 있는가 하면 당나라 때나 오대(五代)의 그림들도 있었다.
그런데 모두 다 포부동에 의해서 한푼의 가치도 없는 작품으로 깎이고 말았다. 이 당시 소동파(蘇東坡), 황산곡(黃山谷)의 서예는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서하 황궁에도 약간의 그들 작품이 있었다. 그런데 포부동의 언변에 의하면 그런 사람들조차 대단치 않은 존재에 불과했다.
궁녀는 그가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비평하는 소리를 듣고 그만 놀라서는 다가서며 나직이 물었다.
포 선생, 정말 이 서화폭들은 그렇게 가치가 없나요? 공주 전하께서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고 하시던데요?
포부동은 말했다.
공주 전하는 서하라는 외진 곳에 있어서 우리 중원 땅의 참으로 이름난 명사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의 서화를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그러니 이후 반드시 중원으로 나가 견문을 쌓아야 할 것이오. 나이 어린 누이. 그대 역시 공주 전하를 모시고 중원 땅으로 놀러 오도록 하시구려.
그 궁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그러나 중원을 가 본다는 것은 수월한 노릇이 아닐 거예요.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공주 전하가 중원의 영웅 호걸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면 중원으로 갈 수 있지 않겠소?
이때 단예는 담벽에 걸려 있는 서화를 한 폭 한 폭 눈여겨보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 폭의 옛날 복장을 한 소녀가 검을 휘두르는 그림을 발견하고서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으며 어, 하는 소리까지 내질렀다.
그림 속의 미녀는 바로 왕어언의 용모와 똑같았다. 그런데 옷차림이 전혀 달라 오히려 무량산 석동의 그 신선 누님과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림 속의 미녀는 오른손에 검을 들고 있었고 왼손가락으로는 검결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바로 호숫가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태도는 금방이라도 날아 오를 것 같았고 아름답기 이를데 없었다.
단예는 삽시간에 혼백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일시 왕어언의 곁으로 달려가는 듯했고 일시에 다시 무량산의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는 한참 동안 넋을 빠뜨리고 있다가 갑자기 부르짖었다.
둘째 형님, 이리 와 보십시오!
허죽은 대답을 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도 그 그림을 보고 역시 의아함을 느꼈다.
"왕 소저의 그림이 이곳에 또 한 폭 나타났구나. 사부가 나에게 준 한 폭의 그림과 비교해 볼 때 모습에는 차이가 없으나 다만 자세가 약간 다를 뿐이로군."
단예는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손을 뻗쳐서는 그 그림을 만졌다. 그런데 그 그림 뒤의 벽이 울퉁불퉁하여 달리 어떤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가만히 그림을 들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벽에는 많은 선들이 그어져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벽에는 무수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앉아 있었고 어떤 사람은 뛰어서 몸을 날리는 자세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자세들은 실로 이상야릇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모습들은 대부분 한 둥근 원 안에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둥근 원 옆에는 대개 천간지지(天干地支)와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허죽은 대뜸 이 그림이 영취궁 석실벽에 새겨져 있는 도형들과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몇 점의 그림을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아마도 이추수 사숙의 무공인 것 같다."
그는 곧이어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 사숙은 서하의 황태비이다. 궁안에 이와 같은 도형을 그려 놓는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못 된다."
그런데 그 도형은 아직도 벽에 남아 있는데 이추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그만 침울해졌다.
그는 또한 이것이 소요파 무공의 상승비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내력의 수위가 얕은 사람이 일단 빠지게 된다면 심하게 되었을 때 주화입마하게 되고 가볍게 되었을 때는 인사불성이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단예가 상처를 입게 될까봐 재빨리 말했다.
세째 아우, 이 도형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네.
단예가 물었다.
어째서요?
허죽이 답했다.
이것은 지극히 고심한 무학일세. 만약 제대로 그 방법을 알고 익히지 않는다면 손해만 끼치게 될 뿐 이익은 없는 것이라네.
단예는 본래 무공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설사 지극히 흥미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 왕어언의 그림이 그려진 듯한 그 초상화를 보았으면 보았지 무공의 비급을 볼 생각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 즉시 그는 들어올렸던 그림을 내려 놓고 다시 그 호반의 소녀가 검을 휘두르는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왕어언의 몸매나 용모에 대해서는 아무리 미세한 점이라도 똑똑히 보아온 터였고 또한 정확히 기억해 두고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그 그림을 바라보니 그림 속의 인물과 왕어언의 차이를 분간해낼 수 있었다.
그림 속의 인물의 몸매는 비교적 풍만했으며 이목에는 영기발랄한 기상이 넘쳐 있어 왕어언처럼 부드럽거나 온순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이에 있어서도 왕어언보다는 서너 살 위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무량산 동굴의 그 신선 누님과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부동은 입으로는 여전히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으나 단예와 허죽의 일거일동이나 한 마디의 말도 유심히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허죽이 벽의 도형이 고심한 무공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뭐가 고심한 무학이야. 소화상이 또 사람을 속이는구나.
그리고 달려와 그림을 들추고서는 시력을 가다듬고 그 그림을 보았다. 단예는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돌리고 발돋움을 하면서까지 그림 속의 미녀를 바라보려 했다.
그때 그 궁녀가 입을 열었다.
포 선생, 그 그림은 보아서는 안 돼요. 공주 전하께서는 무공이 어느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보아 봐야 손해만 입지 득은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포부동이 말했다.
무공이 어느 경지에 도달했다면 어떻게 되오? 그것이야말로 득은 있을지언정 손해는 없지 않겠소? 나의 무공은 어느 경지에 도달한 상태이오.
그는 본래 호기심이 강할 뿐 결코 무학의 심오한 점을 훔쳐 보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둥근 원 안의 사람 모양을 한 그림의 자세를 한 번 보고는 그 자세에서 수천 수만 가지의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느꼈으며 그 변화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손을 뻗치고 발뒤꿈치를 든 채 그 도형을 따라 흉내를 냈다.
삽시간에 옆의 사람들도 그의 이상한 행동을 주의하게 되었고 곧이어 벽에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쪽의 그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어, 이쪽에도 그림이 있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곳에도 도형이 있군!
각기 다투어 서화폭을 들추어서는 벽에 새겨져 있는 사람 모양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본 이후 손짓 발짓을 하기 시작했다.
허죽은 암암리에 놀라 소봉의 곁으로 달려가서는 입을 열었다.
큰형님, 저 도형은 보아서는 안 된답니다. 보았다가 아마도 모두 중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모두 미치게 된다면 매우 큰 소란이 일게 될 것입니다.
소봉은 속으로 흠짓해서는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들 벽에 걸린 그림을 보지 않도록 하시오! 우리 모두는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빨리 모여서 상의를 하도록 합시다.
그가 호통을 지르자 몇 사람은 고개를 돌리고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벽의 도형에 대한 유혹이 너무나 큰 듯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임의로 하나의 도형을 보게 되었고 잠시 생각해 본 끝에 그 그림 속의 자세가 자기가 오랫동안 애써 생각했지만 얻지 못한 무학의 난제들을 풀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자세가 도대체 어떠한지는 애매모호하기만 했고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연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봉은 갑자기 이 많은 사람들이 마술에 걸려 버린 듯 제정신이 아닌 것을 보고는 암암리에 당황함과 전율을 느껴야 했다.
별안간 누군가가 아, 하는 소리를 내지르더니 몇 번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그러더니 푹, 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또 한 사람이 목에서 나직한 소리를 내며 석벽으로 달려들어서는 마구 할퀴고 기어오르는 시늉을 했다. 마치 벽의 그림을 뽑아내려는 것 같았다.
소봉은 잠시 생각해 본 이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손을 뻗쳐서 대뜸 주위의 의자를 잡았다.
그는 두 손에다 대고 힘주어 부볐다. 그러자 수십 조각이 되었다. 그는 즉시 손으로 그 나무 조각들을 내던졌다.
찍찍찍, 하는 소리가 잇따라 일었다. 몇 번 소리가 날 때마다 서재 안의 기름덩이나 촛불이 하나씩 꺼지게 되었다. 그리고 수십 번 그 소리가 울려퍼지게 되었을 때 등불은 모조리 꺼져 서재 안은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이게 되었다.
어둠속에 여러 사람이 몹시 가쁘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가 나직이 부르짖었다.
위험했다, 위험했어.
어떤 자가 부르짖었다.
빨리 촛불에다 불을 켜시오. 나는 똑똑히 보지 못했소.
소봉은 낭랑히 외쳤다.
여러분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시오. 함부로 움직이다가 잘못하면 기관장치를 건드리게 될 것이오. 벽의 도형은 사람의 심신을 흐트러지게 하는 것이니 손을 뻗쳐서 만져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가 이 말을 하기 전에 손을 뻗쳐서 석벽의 그림을 만져보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억지로 심신을 가다듬었다.
소봉은 나직이 말했다.
실례함을 용서하시오. 그리고 빨리 석문을 열고 모두들 내보내 주시오.
원래 그는 나무 조각을 던져 등불을 끄기 전에 후딱 한 걸음 옮겨 그 궁녀의 오른팔을 잡았던 것이다.
그대는...... 그대는 나의 손을 잡지 말아요.
소봉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어둠 속이었지만 소리를 듣고 형체를 구분할 수 있으니까 그녀가 어떤 수작을 부려도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 궁녀는 말했다.
저는 포 선생에게 이 도형은 보면 안 된다고 했어요. 무공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보게 된다면 손해만 입었지 득은 볼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는 보겠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가 나에게 보라 하면 나는 보지 않고 그대가 보지 말라고 하면 나는 꼭 보는 성격이라오.
바로 이때 갑자기 우아하면서도 엷은 향기가 코에 와 닿았다. 소봉은 깜짝 놀라 급히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과거 개방의 제자들이 서하 일품당의 인물이 쏟아낸 비수청풍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사실을 상기한 것이었다.
이때 한 궁녀의 꾀꼬리 같은 음성이 들렸다.
공주 전하께서 왕림하셨소이다.
뭇 사람들은 공주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가 놀람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어둠속이라 공주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이때 그 소녀의 간드러진 음성이 다시 들렸다.
공주 전하께서는 유시를 내리셨습니다. 서재의 벽에 새겨져 있는 무학 도형은 다른 파의 인사들이 보아서는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화폭을 매달아 가리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주 전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어요.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화섭자를 밝히거나 화석으로 불을 켜지 마시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위험한 일을 당하거나 불편한 일이 많다고 했어요. 그리고 공주 전하께서는 여러분들 귀빈에게 밝혀 두고자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어둠 속이라 퍽이나 실례되는 점 여러분들께서 용서하시라는 것이에요.
이때 키득키득, 하는 소리가 나면서 석문이 열렸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은 사람은 먼저 물러나셔도 됩니다. 그리하여 바깥에 있는 응향당으로 가서 차를 마시며 쉬도록 하십시오. 물론 돌아가는 길에는 안내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길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뭇 사람들은 공주가 이미 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 물러나고자 하겠는가. 한 사람도 떠나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분들께서 먼길을 오신 데 대해 공주 전하께서는 지극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희 나라에서 대접이 소홀한 점 양해하십시오. 공주께서는 평소 감상을 하시던 서화폭을 여러분들 한 사람에게 한 가지씩 선물하여 찾아준 뜻에 보답코저 한답니다. 이것은 전부 다 이름난 분들의 서화폭이니 여러분들은 웃으며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떠나시게 될 때 좋다면 스스로 벽에서 떼어가셔도 좋습니다.
강호의 호걸들은 공주가 예물로 그 서화폭을 준다는 말을 듣고 의문을 금치 못했다.
다만 단예 혼자만이 크게 좋아하고 있었다. 그는 그 한 폭의 호반무검도(湖畔舞劍圖)를 가져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왕어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감상할 작정이었다.
종찬 왕자는 그저 그 궁녀만이 공주를 대신해서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자 매우 초조해져서 큰소리로 말했다.
공주 전하, 이곳에 불을 켤 수 없다면 우리들은 장소를 바꾸어서 대면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곳은 너무나 어두워서 그대도 저를 볼 수 없지만 저 역시 그대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 궁녀는 말했다.
여러분들이 공주 전하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어둠속에서 백여 명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우리들은 공주를 뵙고 싶소이다. 우리들은 공주를 뵙고 싶소이다.
그 궁녀는 천천히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 여러분들을 서하로 오시게 한 것은 바로 여러 귀빈들을 만나고자 하는 뜻에서입니다. 이제 공주에게 세 가지 문제가 있는데 여러분들은 차례로 대답을 해주십시오. 만약 공주의 마음에 맞는 대답을 하게 된다면 자연 만나뵈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뭇 사람들은 대뜸 흥분해서 야단이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나는 그저 창이나 칼을 휘두를 줄 알 뿐이오. 나에게 어떤 시나 책의 제목을 대답하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나를 죽이는 꼴이외다. 묻는 것은 무공 초식입니까?
궁녀는 말했다.
공주께서 묻는 말을 이미 저에게 모두 이야기하셨답니다. 어느 선생께서 먼저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뭇 사람들은 다투어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내가 먼저 하겠소이다. 내가 먼저 대답하겠소이다.
궁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호, 여러분들은 다툴 것 없습니다. 먼저 대답하는 사람은 오히려 손해를 본답니다.
뭇 사람들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서로 꽁무니를 빼려고 했다.
좀더 남들이 대답하는 소리와 다른 사람들이 공주와 응수하는 말을 듣고 자신들 나름대로 짐작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 궁녀는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세 가지의 문제를 내시고자 합니다. 첫번째 질문은 포 선생께 하겠어요. 일생 동안 어느 곳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했었습니까?
포부동은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곳은 어느 자기 그릇을 파는 가게였소이다. 나는 어릴 적에 그 가게에서 도제가 되어 그릇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주인은 언제나 학대를 했으며 매일같이 때리고 욕을 했소이다. 어느 날 나는 미친 듯이 성질이나서 자기 가게의 그릇과 접시, 찻주전자, 화병들을 모조리 때려 부숴 박살을 냈소이다. 한평생 가장 통쾌했던 일은 바로 그 일이외다. 궁녀 아가씨, 내 대답이 그럴 듯합니까?
궁녀는 말했다.
그럴 듯한지 안 한지 저로서는 모르겠으며 공주 전하께서 결정할 일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포 선생께서 한평생 가장 사랑한 사람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포부동은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고 대답했다.
포부정(包不靜)이라고 부른다오.
궁녀는 다시 말했다.
세 번째 질문은 포 선생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모습은 어떠합니까?
포부동은 말했다.
그 사람의 나이는 약 여섯 살 정도이고 한쪽 눈은 크고 한쪽 눈은 작으며 콧구멍은 하늘을 향해 있고 귀는 커서 바람을 일으킬 정도이지요. 이 포모가 어떤 분부를 내리더라도 그 사람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그녀에게 울라고 하면 반드시 웃고 웃으라고 한다면 울죠. 그리고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두 시간 동안 멈추지 않는데 이 사람은 바로 나의 보배와 같은 딸인 포부정이외다.
그 궁녀는 훗, 하고 웃었다. 그리고 뭇 호걸들도 덩달아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궁녀는 말했다.
포 선생께서는 한쪽으로 가셔서 쉬도록 하십시오.
단예는 급히 나가 왕어언과 만나고 싶었고 공주를 만나 보든 못 보든 전혀 상관할 것 없다고 여기고 있는 참이라 즉시 앞으로 나섰다.
그는 길게 읍을 하고는 말했다.
불초는 대리의 단예라 하며 삼가 공주 전하에게 문안을 여쭈는 바입니다. 불초는 남쪽 지방의 외진 곳에서 살아왔는데 오늘 이렇게 상국으로 관광을 하러오게 되었고 또한 두터운 대접을 받게 되어 실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궁녀는 말했다.
원래 대리국 진남왕의 세자였군요. 왕자께서는 너무 겸손한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멀리서 오셨는데 실로 소홀한 점이 많습니다. 초라한 거처라 귀빈을 접대하기에 부족합니다. 모든 점에 있어서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단예가 말했다.
누님께서는 너무나 겸손해 하십니다. 공주께서 오늘 여가가 없으시다면 훗날 배알하도록 해도 관계없습니다.
궁녀는 말했다.
왕자께서 이곳에 오신 이상 역시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첫째의 질문은 왕자께서 일생 동안 어느 곳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했습니까?
단예는 불쑥 말했다.
한 메마른 우물의 진흙 바닥이었습니다.
뭇 사람들은 그만 참지 못하고 실소했다.
모용복 한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어째서 그가 그런 대답을 했는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누구든 나직이 비웃었다.
설마하니 자라 새끼인가? 진흙바닥에서 가장 즐거웠다니!
궁녀는 입술을 깨물며 나직이 웃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왕자께서 한평생 가장 사랑한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합니가?
단예가 막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 소맷자락과 오른쪽 옷자락을 당기는 사람이 있었다.
파천석은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진남왕이라고 말하시오.
주단신은 그의 오른쪽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진남왕비라고 하십시오.
두 사람은 단예의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크게 실례된 것을 보고 두 번째 대답 역시 남의 비웃음을 살까봐 걱정이 되었다.이곳에 온 것은 공주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왕어언이나 목완청, 또는 다른 소저라고 한다면 공주가 어찌 시집오겠다고 응낙하겠는가 말이다.
부친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충효사상을 나타낸 것이고 또한 조정의 상공이 마땅히 생각할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문학재사의 생각이기도 했다.
단예는 그 궁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성명을 대라고 했을 때 불쑥 왕어언의 이름을 들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파천석과 두 사람과 두상이 그와 같이 들먹이자 단예는 대뜸 자기의 신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을 들먹이게 되자 자연 가슴속으로부터 부모님에 대한 그리운 정을 느꼈다.
부모에 대한 사랑과 왕어언에 대한 사랑은 어느 것이 얕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모를 사랑한다고 한 말은 결코 거짓말일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그 궁녀는 다시 물었다.
영존과 자당의 얼굴 모습은 어떤가요? 왕자님과 퍽이나 닮았습니까?단예는 대답했다.
우리 아버님은 네모진 얼굴로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졌으며 매우 위풍당당한 모습이죠. 그러나 그의 성질은 퍽이나 부드럽고 착하답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속으로 흠칫했다.
"원래 내 모습은 어머님만 닮았지 아버님은 하나도 닮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예전에 생각해 본 적이 없구나."
그 궁녀는 그가 반쯤 말하다가 더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어머님은 왕비라는 존귀한 신분인지라 여러 사람 앞에서 어머님의 모습을 들먹이기 싫은가보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왕자님 감사합니다. 저쪽으로 가셔서 쉬도록 하시죠.
종찬은 궁녀가 단예에 대해서 매우 깍듯이 대하는 것을 보고서 속으로 질투심이 복받쳐 올라 생각했다.
"네가 왕자라면 나도 왕자이다. 토번국으로 말하면 너희 대리국보다 훨씬 강하다. 혹시 너는 멀쑥한 얼굴을 가졌다고 해서 득을 보려는 것이 아니냐?"
그는 즉시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나가 말했다.
토번국의 왕자 종찬이 공주를 뵈올까 합니다.
궁녀는 말했다.
왕자께서 왕림하신 데 대해서 저희 나라 아래위 할 것 없이 모두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희 나라 공주께서는 세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종찬은 매우 시원시원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공주의 그 세가지 문제는 내 이미 들었소이다. 하나하나 질문을 할 것 없이 내가 한꺼번에 대답하지요. 한평생 가장 즐겁고 행복한 곳이 있다면 이후 부마가 되고 공주와 부부가 되어서는 동방화촉을 밝히는 방이 되겠지요. 그리고 내가 평생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은천 공주가 될 것이며 그녀의 성은 자연 이씨가 될 것이나 방명은 아직까지 모릅니다. 장래 부부가 되었을 적에 그녀는 반드시 나에게 알려줄 것입니다. 공주의 모습이 어떠냐 하면 물론 선녀같아 하늘에서도 보기 드물 것이며 땅에서는 버금가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하하, 하하, 저의 대답이 그럴싸합니까?
뭇 사람들 가운데 태반의 사람들은 종찬 왕자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먼저 그가 선수를 치고 나서게 되자 모두들 후회했다.
"내가 한 걸음 먼저 나서서 대답을 하는 것인데, 이제 다시 그와 같이 말한다 하더라도 그를 흉내내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갑자기 모용복의 음성이 들렸다.
불초는 고소 연자오 모용복이라 하오. 오래 전부터 공주의 방명을 듣고 특별히 만나러 왔소이다.
궁녀는 말했다.
상대의 수법을 상대의 몸에 펼친다는 고소 모용 공자였군요. 이 몸은 깊은 궁중 안에 있었으나 공자의 대명은 들은 바 있습니다.
모용복은 속으로 기뻐했다.
"이 궁녀는 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공주도 알고 있겠구나. 어쩌면 그녀들은 나에 대해서 논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즉시 말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천한 이름이라 오히려 소저의 귀를 더럽게 하지 않았는가 모르겠구려.
그 궁녀는 말했다.
우리 서하 나라는 외딴 곳에 세워졌지만 북교봉, 남모용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소문에 들으니 북 교봉 교 대협은 이미 성을 소씨로 바꾸고 대요나라에서 커다란 벼슬을 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지요?
모용복은 말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그 궁녀는 말했다.
공자와 소 대협은 함께 명성을 드날렸으니 그를 잘 알리라고 생각합니다. 소 대협은 인품이 어떠하며 무공은 공자와 비교해 누가 고강하고 누가 못합니까?
모용복은 그 말을 듣자 그만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았다. 그는 소봉과 소림사앞에서 싸웠고 소봉에게 잡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지 않았던가.
무공이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본 바이니 뭇 사람들 앞에서 부인을 하게 된다면 천하의 호걸에게 비웃음을 사게 되리라. 그러나 소봉보다 못하다고 솔직히 시인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소저가 묻는 것은 공주가 묻는 세 가지 질문에 해당합니까?
그 궁녀는 말했다.
아닙니다. 공자께서는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이 몸은 이 몇 년 동안 소 대협의 영명을 들먹이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흠모한 나머지 그만 몇 마디 말을 더 물었습니다.
모용복은 말했다.
소봉은 바로 지금 소저의 옆에 있습니다. 소저께서 흥취가 있다면 스스로 그에게 물어 보도록 하시지요.
그 말이 떨어지자 대청은 대뜸 소란스러워졌다.
그 궁녀는 마음속의 격동을 참을 수 없는지 말하는 소리마저도 떨렸다.
소 대협께서는 존귀하신 몸으로 이곳까지 오셨군요. 저희들이 미리 알지 못해 소홀한 점 소 대협께서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소봉은 흥, 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모용복은 그 궁녀의 말하는 투를 듣고 소봉에 대해 우러러보는 마음이 자기에 대한 것보다 훨씬 위인지라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봉이란 녀석도 아직 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람은 대요나라의 남원대왕으로서 병권을 한 손에 쥐고 있으니 일개 서생인 나와 어찌 견줄 수 있겠는가. 그의 무공이 또 그토록 뛰어나니 나는 결코 그와 맞서 다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이를......어떻게 하면 좋지?"
그 궁녀는 말했다.
이 몸은 먼저 모용 공자에게 여쭈어 봐야겠습니다. 소 대협께서는 아무쪼록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잇따라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그제서야 모용복에게 질문을 던졌다.
실례지만 공자께서는 한평생 어떤 곳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했습니까?
이 문제를 모용복은 그녀가 다른 여러 사람에게 묻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되자 그는 그만 입을 벌리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한평생 그저 연나라를 세우고자 분주히 돌아다녔으며 언제 한 번 즐겁고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일찌기 한 번도 진정으로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그는 일순 어리둥절해 있다가 대답했다.
내가 진정으로 즐거움을 느낄 것은 장래에 있지 과거가 아니오이다.
궁녀는 모용복이 종찬 왕자 등과 같은 소리를 하는 줄 알았다. 공주와 혼례를 올려야만이 진정한 즐거움을 가질 수 있노라는 그런 대답과 똑같은 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용복이 말하는 즐거움이란 장래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대연나라를 중흥시킨 군주가 되었을 때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녀는 빙그레 웃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공자께서 한평생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모용복은 어리둥절해졌으나 잠시 생각해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소이다.
그 궁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의 질문도 더 할 필요가 없군요.
모용복은 말했다.
나는 공주를 만나 보게 된 이후에야 소저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궁녀는 말했다.
모용 공자께서는 이쪽으로 와서 서도록 하십시오. 소 대협, 그대가 저희 나라에 오셨으니, 손님은 주인의 뜻을 따른다고, 이 몸 역시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지겠는데 이해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먼저 이 몸이 사의를 표해 묻고자 합니다.
그녀가 잇따라 몇 번을 말했으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허죽은 말했다.
우리 큰형님은 떠났소이다. 소저께서는 너무 탓하지 마시오.
그 궁녀는 깜짝 놀라 물었다.
소 대협께서는 떠나셨다구요?
허죽은 대답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소봉은 서하 공주가 그 궁녀에게 시켜 뭇 사람에게 세 가지의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보고 이 가운데는 깊은 뜻이 있으나 여러 사람을 해칠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세가지의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따라서 아주를 생각하게 되었고 아주를 생각하게 되자 가슴팍이 쓰라려왔다. 그는 남들 앞에서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고 싶지 않아 즉시 몸을 돌려서는 석실을 나서고 말았다.
이때 석실의 문은 이미 열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살금살금 발걸음을 죽여 나가자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궁녀는 물었다.
소 대협께서는 어째서 물러가셨나요? 이와 같은 행동이 무례하다고 뜻하시는 건가요?
허죽이 말했다.
우리 큰형님은 결코 아량이 좁은 사람이 아니니 이를 탓할 분은 아니외다. 음, 아마도 그는 술을 마시고 싶어 바깥으로 술을 마시러 갔을 것이외다.
궁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소 대협께서는 주량이 천하무쌍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술을 준비하여 귀빈을 붙잡고 대접하지 못했으니 정말 소홀한 점이 많군요. 선생께서 소 대협을 만나게 되면 공주 전하의 미안하다는 뜻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궁녀는 꽤 말을 잘 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말하는 것도 모가 나지 않아 바깥 쪽에서 손님을 대접하던 그 부끄러움을 타던 궁녀보다는 훨씬 언변이 뛰어난 편이었다.
허죽은 말했다.
제가 우리 큰형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그 궁녀가 물었다.
선생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허죽은 말했다.
나 말인가요......나 말인가요......나는 도호를 허죽이라고 합니다. 나는...... 청......청......저는......결코 청혼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세째 아우와 함께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그 궁녀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한평생 어떤 곳에서 가장 즐거웠습니까?
허죽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느 어두운 얼음 창고 안이었습니다.
갑자기 어떤 여자가 나직이 아, 하고 부르짖었다. 곧이어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 잔이 땅바닥에 떨어져서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 궁녀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선생께서 한평생 가장 사랑한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허죽은 말했다.
아! 나는......나는 그 소저의 이름을 모른다오.
뭇 사람들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모두들 이 사람은 바보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름을 모르면서도 어떻게 마음을 쏟아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 궁녀는 말했다.
그 소저의 성명을 모르는 것도 결코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과거 효자로 유명한 동영(童永)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보고 그녀의 성명과 내력을 모르면서도 사랑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허죽 선생. 이 소저의 용모는 반드시 아름답기 그지 없겠지요?
허죽은 말했다.
그녀의 용모가 어떠한지 역시 한 번도 본 적이 없소이다.
삽시간이 석실 안은 웃음 소리로 가득차고 말았다. 모두들 천하에서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또 어떤 사람은 허죽이 일부러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뭇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여인의 음성이 나직이 물었다.
그대는......그대 혹시 몽랑이 아닌가요?
허죽은 깜짝 놀라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그대는......혹시 몽고가 아니오? 정말 그리워 죽을 뻔했소.
자기도 모르게 그는 몇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코에 향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고 한 부드럽고 매끄러운 손이 그의 손을 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귀에 익숙한 음성이 그의 귓전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몽랑, 나는 그대를 찾지 못해서 부황에게 방문을 붙이도록 하여 그대를 이곳으로 오게 한 거예요.
허죽은 더욱더 놀람과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그대......그대가 바로......
그 소녀는 말했다.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몽랑, 저는 밤낮으로 바로 이 시각을 기다렸어요......
한편으로는 나직이 속삭이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손을 잡고 그녀는 기척도 없이 걸음을 옮겨 휘장을 들치고 두터운 융단을 밟으면서 내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석실 안의 뭇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 궁녀는 여전히 세 개의 문제를 뭇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보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질문을 다하고 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바깥 응향전으로 가서 차를 마시며 휴식하도록 하십시오. 벽에 걸린 서화폭은 밖으로 내보내 여러분들이 취하도록 하겠어요. 공주 전하께서 어느 분과 만나고 싶어한다면 자연 사람을 보내 초청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주를 뵈어야겠소.
즉시 뵈어야겠소.
우리를 이리저리 오라가라 하는 것은 우리를 희롱하겠다는 수작이 아니오?
그 궁녀는 말했다.
여러분들은 역시 바깥으로 나가시어 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공주 전하의 불쾌한 마음을 살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그 최후의 한 마디에는 정말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즉시 뭇 사람들은 조용해졌고 차례로 그 석실에서 나왔다. 석실 밖은 환히 횃불을 비춰 주고 있었다. 뭇 사람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서서는 먼저 차를 마시던 응향전으로 되돌아갔다.
단예는 왕어언과 다시 만나 공주가 질문한 세 가지 문제를 이야기했다.
왕어언은 단예가 한평생 가장 즐거웠던 곳은 바로 메마른 우물 안의 진흙바닥이었다는 말을 듣고 킥킥 웃으면서 두 뺨을 붉히며 나직이 말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뭇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잠시 후 내감이 서화폭을 두루마리로 말아서는 가져나와 여러 사람들에게 한가지씩 선택하라고 했다.
이 사람들은 그저 가슴을 두근거리며 공주가 자기를 불러 주지 않을까하는 기대에만 차 있었지 서화폭을 선택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단예는 그리하여 가볍게 그 한 폭의 호반무검도를 취할 수 있었고 누구도 그와 그 그림을 두고 다투지 않았다.
그는 왕어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감상을 했다.
왕어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 속의 이 사람은 정말 우리 어머니와 비슷하네요.
그녀는 어머니와 헤어진 지 오래된 것을 상기하고 무척 그리워했다.
단예는 별안간 허죽에게도 이와 비슷한 한 폭의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함께 보자고 하려고 사방으로 찾았으나 응향전에는 허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잇따라 불렀다.
둘째 형님, 둘째 형님!
대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큰형님과 함께 갔나? 아니면 또 위험한 일에 부딪혔나?"
정히 걱정을 하고 있을 때 한 명의 궁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입을 열었다.
허죽 선생께서는 이 쪽지를 단 왕자에게 갖다 드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두 손으로 한 장의 접은 종이쪽지를 바쳤다.
단예는 그 종이쪽지를 받았을 때 엷은 향기가 풍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시 그 쪽지를 펼쳐 보니 그 쪽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나는 잘 있네. 매우 잘 있다네.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즐겁다네. 그대로 하여금 헛걸음을 하게 한 데 대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며 단 숙부님에게 신용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네. 세째 아우에게 드림.
그 아래에는 둘째 형이라고 서명이 되어 있었다.단예는 이 화상인 둘째 형님이 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장이 별로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쪽지에 실린 글은 정말 뚱딴지 같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한참 동안 손에 들고는 멍하니 생각을 해보았다.
종찬 왕자는 멀리서 궁녀가 한 장의 쪽지를 단예에게 주는 것을 보고 공주가 단예를 초청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만 크게 질투심을 일으키게 되었다.
"잘한다. 아니나 다를까, 너 멀쑥한 녀석이 득을 보게 되었구나. 그렇다면 이대로 둘 수가 없지."
그는 호통을 쳤다.
우리는 너를 용납할 수가 없다.
그는 훌쩍 단예에게로 달려 들었다. 왼손으로 쪽지를 빼앗아든 동시에 오른손 주먹으로 단예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단예는 허죽의 편지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 뜻을 더듬어 보고 있었다. 따라서 종찬 왕자가 한 대의 주먹을 내지르게 되었을 때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앞가슴을 얻어맞게 되었다. 그런데 단예의 체내에는 소용돌이치는 내력이 충만해 있어 대뜸 반탄력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자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곧이어 퍽, 챙그랑, 어이구, 하는 소리와 더불어 종찬 왕자는 몇 걸음 밖으로 날아가 차탁자 위에 떨어지게 되었고 차탁자 위의 찻잔과 찻주전자들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종찬은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지른 이후 미처 설 사이도 없이 그 쪽지에 실린 글을 보고 큰소리로 읽었다.
나는 잘 있네. 무척 잘 있다네.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기쁘다네.뭇 사람들은 그가 단예에게 되퉁기듯 하고서 나가떨어진 것을 보았는데 그가 잘있다며 무척 즐겁다고 하는 말을 하는지라 모두 의아한 중에도 웃음을 금치 못했다.
왕어언은 재빨리 단예의 앞으로 가 물었다.
혹시 아프게 맞지는 않았어요?
단예는 웃었다.
상관없소. 둘째 형님이 나에게 한 통의 쪽지를 건네 주었는데 저 왕자는 아마도 공주가 나를 불러 보려고 하는 것인 줄로 알고 오해한 모양이외다.
토번의 뭇 사람들은 왕자가 남에게 쓰러진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달려와 부축을 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기세등등하게 단예에게 도전을 하려고 하였다.
단예는 말했다.
이곳은 시비가 붙은 곳이니 더 오래 남아 봐야 득 볼 것은 없소이다. 우리 돌아가도록 합시다.
파천석은 말했다.
공자께서는 이왕 내친 걸음이니 좀더 기다렸다가 가시지요. 급히 서둘러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주단신 역시 말했다.
서하국의 황국 내원에서 토번 사람들이 손을 쓸까봐 두려우십니까? 공주께서 초청을 할지도 모르는데 지금 가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끊임없이 권하면서 단예에게 잠시 머물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품당의 사람들이 나와서는 토번의 무사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호통을 내질렀다.
한창 시끌시끌할 때 목완청이 갑자기 단예에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왼손으로 한 장의 종이를 들어 보였다. 단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가가 그 쪽지를 받았다.
종찬은 다시 단예가 그 쪽지를 펼쳐 보는 것을 보고 얼굴 빛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쪽지는 반드시 공주가 부르는 것이겠지."
그는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첫번째 나를 속일 수 있었지만 두 번째도 나를 속일 작정이냐?
그는 두 발로 바닥을 차며 덮쳐 들어 대뜸 그 쪽지를 낚아챘다. 이번에 그는 먼저 당한 경험이 있는지라 주먹을 뻗쳐 단예의 가슴팍을 때리지 못했다. 종이쪽지를 낚아채는 동시에 오른쪽 발을 들어서는 단예의 아랫배를 걷어 차려고 했다. 배꼽 아래에 있는 단전은 바로 기를 연마하는 사람들의 내식의 근원이었고 내경을 돋울 필요도 없이 반응을 보여 주는 곳이기도 했는데 그 반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빠른 편이었다. 따라서 휙, 하는 소리가 나는가 했는데 다시 철썩, 챙그랑, 어이쿠,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종찬의 몸뚱이가 뒤로 날아 수십 명의 머리를 지나서 일곱 여덟 개의 차탁자를 뒤집어엎고서야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 종찬 왕자는 살갗은 거칠고 살은 두터운 편이었다. 거기다가 단예가 일부러 운기해서 그를 해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낭패한 꼴로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지만 내상은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 쓰러지자 서둘러 그 쪽지를 들고 큰소리로 읽었다.
어떤 무서운 인물이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 해요. 또 그대의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고 하니 빨리 가 구하도록 해요.
뭇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더욱더 아리송하게 여겼다. 어째서 종찬 왕자가 나의 아버지니 또 너의 아버지니를 찾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단예와 파천석, 그리고 주단신 등은 그 말을 듣고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쪽지는 목완청이 쓴 것이다. 그리하여 목완청의 곁으로 다가가 일제히 물었다.
목완청은 말했다.
그대의 눈에는 왕 소저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이 보일 수 있겠어요? 매검과 난검 두 분 언니는 본래 그대에게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대를 몇 번 불렀으나 그대는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못 본 것인지 대답하지 않더군요.
단예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확실히 보지 못했소.
목완청은 다시 냉랭히 말했다.
그녀들은 급히 허죽 둘째 오라버니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지 못한 거예요. 내가 그대를 부르려고 해도 그대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 그 쪽지를 써서 건네 주려고 한 거예요.
단예는 속으로 겸연쩍어했다. 자기가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할 여가가 없어 눈으로는 그저 왕어언이 기뻐하고 근심하는 양만 지켜보고 귀로 듣는 것 또한 왕어언의 말 한 마디와 웃음 소리인지라 하늘이 무너져도 아랑곳할 수 없는 판이었으니, 목완청이 멀리서 보자는 시늉을 한다고 했지만 자기가 쳐다보면서도 보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종찬 왕자가 달려들어 맹렬히 한 대의 주먹을 내지르지 안았다더라면 여전히 고개를 쳐들어 목완청이 손짓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슬쩍 얼굴을 돌리고 파천석과 주단신에게 말했다.
우리는 밤을 도와 길을 떠나 아버님의 뒤를 쫓도록 합시다.
파천석과 주단신 두 사람은 말했다.
그러죠.
그들은 진남왕에게 위기가 들어닥쳤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단예가 서하의 부마가 되고 못 되고는 지금으로서는 아랑곳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즉시 일행들은 황궁을 나섰다.
단예 등은 돌아가 종영과 만나 짐을 챙기고는 즉시 출발했다.
네가 만약 나의 분부대로 따른다면 나는 이 노루의 목숨을 해치지 않겠다. 그러나 네가 만약 이대로 떠난다면 나는 자연 매일 같이 노루를 열 마리나 여덟 마리쯤 죽이게 될 것이다. 적게 죽이고 많이 죽이는 것은 모두 너의 생각에 달려 있다. 보살께서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으로 들어가겠느냐고 말했다. 네가 이 노파와 며칠만 더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은 지옥으로 들어가 고통을 당하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너는 노루떼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을 보고서 못 본 척하려고 하니 그러고도 불문의 제자로서 자비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느냐? [2146] 제목 : [김용] 천룡팔부(天龍八部) 47장
올린이 : 멀티피씨(김효범 ) 96/09/01 02:53 읽음 : 166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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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누구를 위해 문을 열까, 다화가 길에 가득 피었네
(爲誰開, 茶花滿路)
단예 일행은 쉬지 않고 달렸다.
길을 오는 동안 잇따라 영취궁의 현천부와 주천부 여인들이 보내는 전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전갈의 내용은 진남왕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전갈에는 진남왕이 두 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두 분 부인은 자동(梓潼)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였으나 승부를 낼 수 없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틀이 못 되어 다시 소식이 전해졌다. 두 분 부인은 이미 사이좋게 되었고 진남왕과 어느 주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현천부의 전갈은 이미 진남왕에게 경고의 말씀을 전했고 그의 무서운 적수가 앞길에서 해를 가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렸다는 것이었다.
달려오는 동안 단예와 파천석, 그리고 주단신 등은 몇 번이나 상의를 했으며 진남왕의 적이라면 사대 악인의 우두머리인 단연경 외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파천석은 말했다.
우리들은 일단 단연경을 만나게 된다면 다짜고짜 우르르 달려 들어서는 많은 사람의 수로 그를 이겨야 합니다. 결코 소경호가의 전철을 밝아 그와 왕야가 일 대 일의 싸움을 벌이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삼일 후 뭇 사람들이 면주에 이르게 되었을 때 앞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두 필의 말이 달려왔다.
말 위에서 두 여인이 내리더니 부르짖었다.
영취궁의 속하인 현천부에서 대리 단 공자에게 인사드립니다.
단예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 마주 인사했다.
두 분은 수고하셨소이다. 저희 가친을 만나 보셨습니까?
오른쪽의 중년 부인이 말했다.
공자에게 말씀드립니다. 진남왕께서는 우리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으시고 이미 동쪽으로 길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빙 돌아서 대리로 돌아가도록 하겠으며 원수와 만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단예는 그 말을 듣자 대뜸 마음을 놓고는 기뻐서 말했다.
그것 참 잘되었소이다. 아버님은 매우 귀하신 몸이니 어찌 흉악한 자들과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겠소이까? 독충이나 흉악한 짐승들은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결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그 적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이 소식을 어느 곳에서 듣게 되었습니까?
그 중년 부인이 말했다.
가장 먼저 국검 소저가 다른 한 분의 소저에게 들은 것입니다. 그 분 소저의 이름은 아벽......
왕어언은 기뻐서 말했다.
아벽이었군요. 오랫동안 그녀를 못 만나 보았습니다.
단예는 그 말을 받았다.
아, 아벽 소저였군. 나는 그녀를 알고 있소. 그녀는 본래 모용 공자의 시녀였지.
그 부인은 말했다.
그렇다면 맞아요. 국검 소저는 아벽 소저의 나이가 자기와 비슷하다고 했으며 생김새가 아름다워 매우 사람의 귀여움을 사게 했다는군요. 그런데 말씨가 강남 땅의 말씨여서 말하는 소리를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벽 소저는 또 우리 주인의 사질인 강광릉 선생의 제자이므로 따지고 보면 우리 영취궁과는 한집안 사람입니다. 국검 소저가 말하기를 주인이 공자를 모시고 황궁으로 부마가 되기 위해 갔다는 말을 듣고 아벽 소저는 서하로 달려가 모용 공자와 만나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소식을 듣고 지극히 무서운 인물이 진남왕야를 괴롭히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대나 봐요. 그녀는 단 공자가 그녀에게 잘 대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방법을 강구해서 소식을 전하라고 했어요.
단예는 고소에서 처음 아벽을 만났을 때의 정경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와 아주의 소개를 받고 그는 왕어언과 만나게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다시 그녀가 소식을 전해 주자 마음속으로 고마워서 물었다.
그 아벽 소저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중년 부인은 말했다.
속하는 모릅니다. 단 공자, 매검 소저의 말투를 듣건데 단 왕야를 괴롭히는 그 측은 상당히 무서운 것 같았습니다.
단예는 말했다.
아주머니가 온갖 수고를 다하시니 뭐라고 고마운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중년 부인은 다른 한 여인과 절을 하더니 말을 타고 떠나갔다.
단예는 파천석에게 물었다.
파 숙부,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파천석은 말했다.
왕야께서 이미 동쪽으로 길을 드셨다면 우리들은 곧장 남쪽으로 내 려가도록 하지요. 아마도 성도(成都) 일대에서 왕야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단예가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일행은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뭇 사람들은 대리와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약간 마음이 느긋해지게 되었다.
이제 길을 가는 것도 심심치 않았다. 길 양쪽에는 꽃들이 활짝 피어 그들을 맞아 주었다.
단예는 왕어언과 말을 나란히 하고 달렸다. 그러나 혹시 목완청과 종영이 화를 낼까봐 두 누이 동생이 너무 쓸쓸해 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 주었다.
목완청은 도중에 이미 종영에게 단예가 기실은 자기의 오라버니이며 또한 종영 역시 단정순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두 소녀는 서로 언니 동생으로 칭하게 되었다.
이날 해질 무렵 양류장(楊柳場)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날씨가 갑자기 변했다. 콩알 같은 빗방울이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뭇 사람들은 재빨리 말을 몰아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으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줄로 늘어선 버드나무를 지나 조그만 냇가에 하얀 담장의 기와집이 일곱에서 여덟 채 정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뭇 사람들은 크게 기뻐서는 말을 몰아 달려갔다. 그런데 처마 아래에 한 늙은이가 뒷짐을 진채 서서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단신은 말에서 내리며 앞으로 나가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노인장, 실례합니다. 불초 일행은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인데 그만 비를 만나게 되어 귀장에서 잠시 비를 피할까 하니 편리를 좀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노인은 말했다.
원 별말씀을 다하시오. 그 누가 집을 나올 때 집과 함께 길을 가는 법이 있답디까? 여러분들은 안으로 드십시오.
주단신은 그의 말하는 소리가 맑고 또 사천성 남쪽 지방의 말투가 아닌데다가 두 눈은 형형히 빛나는 것을 보고 속으로 흠칫해서는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그렇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뭇 사람들은 집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주단신은 단예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분은 저희 윗사람이신 여(余) 공자이십니다. 막 성도로 가서 친척을 만나보고 돌아오는 길이죠. 이분은 석(石) 노형이고 불초는 진(陣)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인장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십니까?
노인은 헤죽 웃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의 성은 가(賈)씨라고 하외다. 여 공자, 석 형, 그리고 진 형, 그리고 몇 분 소저들은 안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도록 하시죠. 이 빗줄기로 보아 금방 끝날 비 같지가 않소이다.
단예 등은 주단신이 거짓 성씨를 대는 것을 보고 어떤 이상한 일이 있는가보다 생각하며 모두들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노인은 뭇 사람들을 한 칸의 상방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벽에는 몇 폭의 서화가 걸려 있었고 방안의 풍경은 퍽이나 깨끗하고 우아했다.
결코 시골 사람이 거처하는 곳으로는 볼 수 없었다. 주단신과 파천석은 서로 눈짓을 하며 더욱더 조심을 했다.
가 노인은 말했다.
제가 사람을 시켜 차를 끓여 오도록 하죠.
그는 몸을 돌려 나가더니 문을 닫았다.
그가 방문을 닫자 문 뒤쪽으로 한 폭의 그림이 나타났다. 그려진 것은 몇 그루의 지극히 큰 산다화였다.
한 그루는 새빨간 빛이었는데 금방이라도 새빨간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그루는 하얀 색이었는데 가지가 이미 반쯤 메말라 있었으나 매우 힘찬 모습을 하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단예는 이를 보자 대뜸 기뻐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 그림 옆에는 한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다화최갑해내(茶花最甲海內), 종류칠십유일(種類七十有一), 대어목단(大於牧丹), 일망약화○(一望若火), 雲○(운), 삭日蒸○(火樂日烝)."
그 가운데 몇 자는 비워 두었다. 이 한 줄의 글은 바로 전중다화기(전中茶花記)에서 베낀 것이었다.
단예는 거의 그 글의 내용을 암기하다시피 했다.
산다화의 종류는 분명히 칠십 하고도 두 가지인데 거기에는 칠십하고 한 가지라고만 적어 놓고 있었다.
흘낏 보니 탁자 위에 문방사보가 놓여 있는지라 그는 그만 붓을 들고 먹을 찍은 후에 일 자 위에다 한 획을 더 그어 이 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화 자 다음에 가지런할 제(祭)를 넣었고 구름 운 자 다음에는 비단 금(錦)을 써 넣었고 증자 다음에는 노을 하(霞)자를 써 넣었다.
종영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와 같이 첨가하니 한 폭의 그림이 완전하게 되어 이제 더 손볼 데라고는 없어졌어요.
단예가 붓을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노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인은 문을 닫았다.
그는 그림에 비워 둔 글자가 이미 첨가된 것을 보고는 즉시 얼굴 가득히 기쁜 빛을 띄우고는 웃었다.
정말 귀한 손님을 모시게 되었군. 정말 귀한 손님을 모시게 되었어. 이 늙은이가 실례를 했소이다. 이 한 폭의 그림으로 말하면 옛친구가 그린 것인데 그의 기억력이 좋지 못해 글자를 몇 개 잊어버려서 집으로 돌아가 책을 찾아본 이후에 다시 적어 넣겠다고 했소이다. 아, 그런데 그는 집으로 돌아간 후 그만 병석에 눕게 되어 일어나지를 못해 다시 더 첨가를 하지 못했구려. 그런데 여 공자께서는 그야말로 고금의 학문에 통달하시어 이 늙은이와 돌아간 친구의 소원풀이를 해준 셈이오. 자, 술상을 차려야 겠소이다. 술상을 빨리 차려야지.
그는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가 노인은 새 명주 장포를 걸치고 와서는 단예 등에게 대청으로 가서 술을 마시자고 청했다.
뭇 사람들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억수 같은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일시 정말 길을 떠날 수도 없는 형편이었고 그 노인의 뜻이 간곡한 것 같아 거절할 수도 없고 하여 함께 대청으로 나가게 되었다. 대청에 나와 보니 싱싱한 물고기와 닭, 오리, 소 등 십여 가지의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단예 등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가 노인은 잔에다 술을 따르며 웃었다.
시골에서 빚은 술이지만 마실 때 목구멍을 따갑게 하지는 않는답니다. 여공자, 이 늙은이는 본래 강남 땅의 사람인데 젊었을 적에 약간 무공을 익혀 남과 다투는 바람에 실수하여 두 원수를 죽이고 말았소이다. 그래서 고향에서는 그대로 살 수가 없어 사천성까지 도망쳐 온 셈이죠. 아, 이미 수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고향 생각이 납니다. 이 늙은이의 고향 술은 이 대곡(大곡) 술보다 순하며 독하지 않답니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파천석과 주단신은 술을 매우 적게 마셨으며 안주를 집을 때도 가 노인이 먼저 젓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야 안주를 집곤 했다.
술과 밥을 다 먹고 나도 비는 멈출 줄을 몰랐다.
가 노인이 또 간곡하게 붙잡는지라 단예 등은 그날 밤 바로 이 장원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잠이 들게 되었을 때 파천석은 목완청에게 살그머니 이야기했다.
목 소저, 오늘밤 경각심을 돋우도록 하시오. 내가 보기에 이곳은 아무래도 좀 이상한 데가 있소이다.
목완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밤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누웠으며 소맷자락 안에 독전을 준비해 놓았다.
창밖의 후두득 후두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반쯤 자고 반쯤 깬 상태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날이 밝을 때까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뭇 사람들은 세수가 끝나자 큰비가 멎은 것을 보고 즉시 가 노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가 노인은 곧장 문밖 수십 장까지 나와 전송을 했으며 매우 깍듯한 예의를 보여 주었다.
뭇 사람들은 멀리 떠나온 후에야 모두 이상하다는 말을 한 마디씩 했다. 파천석은 말했다.
저 가 노인은 도대체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지 실로 이상야릇하구만. 이번에야말로 나로서도 짐작할래야 짐작할 길이 없구만.
주단신은 말했다.
파 형, 제가 볼 때 저 가 노인은 본래 좋지 못한 뜻을 품고 있었으나 공자가 그 그림에 비워 둔 글자를 첨가하게 되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공자, 그대는 그 한 폭의 그림과 몇 줄의 글자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두 그루의 산다화는 평범한 것입니다. 한 그루는 분후(紛侯)라고 하며 한 그루는 설탑(雪塔)이라고 하지요. 유명한 산다화이기는 하나 보기 드문 물건은 아니랍니다.
뭇 사람들은 짐작할 도리가 없자 더 아랑곳하지 않기로 했다.
종영은 웃으며 말했다.
길을 가던 도중에 몇 폭의 글자가 없는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단 공자가 일일이 첨가하게 되고 한 번 붓을 휘두를 때마다 두 끼의 밥, 그리고 하루 밤 유숙하는 비용마저 절약할 수 있지 않겠어요?
뭇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종영이 말한 것은 농담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중에 정말 잇따라 그림이 나타났다.
그 그림에 그려진 것은 반드시 산다화였는데, 어떤 것은 그 위에 적힌 싯구에 비워둔 칸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글자를 잘못 적은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그림에 가지는 있었지만 꽃이 없었고 또 어떤 것은 꽃이 있는데 잎이 없었다.
단예는 이를 보면 역시 붓을 들어서는 첨가해 주게되었다.
첨가해 주게 되면 언제나 그림의 주인이 나와서 맛좋은 음식으로 은근히 대접했으며 그렇다고 한푼의 돈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파천석과 주단신은 몇 번이나 그럴싸한 말을 주워대어서는 그 연유를 물었으나 상대방의 대답은 언제나 천편일률적이었다.
원래 그림쟁이가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거나 혹은 싯구를 몰랐는데 단예가 보충을 해줘 고맙다는 말이었다.
단예와 종영은 젊은 사람의 심정이라 그저 재미있어 했으며 글자가 없거나 그림이 완전치 못한 서화폭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
왕어언은 단예가 기뻐하는지라 그저 덩달아서 기뻐했다.
목완청은 언제나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땅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만큼 상대방이 호의를 품고 있든 악의를 품고 있든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다만 파천석과 주단신만이 시간이 갈수록 걱정을 했다.
상대방이 이토록 치밀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이 가운데 반드시 음모가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시월 상순이라곤 하지만 날은 별로 차지 않았다.
가는 길마다 깊은 산속이 아니면 숲이 우거져 있었고 기다란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북쪽의 서하와 비교해 볼 때 또다른 정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해질 무렵 그들은 초해(草海) 부근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곳에 이르러 사방을 두리번거려 봐도 그저 사방은 무궁무진한 푸른 잡초로 뒤덮혀 있을 뿐이었다.
다만 왼쪽은 커다란 숲이 보였는데 수십 리 안팎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같지 않았다.
파천석은 입을 열었다.
공자, 이곳은 지세가 험악하니 우리들은 일찌감치 머무를 곳을 정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오늘은 아마도 이 기다란 풀밭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 유숙을 해야될지 모르겠군요.
주단신은 말했다.
초해에는 독모기나 독충이 무척 많고 또한 독장이 많은 법입니다. 지금은 계화장(桂花장)이 필 때가 막 지났고 부용장(芙蓉장)이 피기 시작할 무렵이죠. 두 가지의 독장이 한데 어울려지게 되면 독성은 더욱더 매서워집니다. 우리가 숙박할 곳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나뭇가지의 높은 곳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비교적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독장의 독기가 침입하지 못하고 독충이나 독모기도 적게 되죠.
즉시 일행은 방향을 틀어 왼쪽의 숲속으로 나아갔다.
왕어언은 주단신이 독장에 대해서 그토록 무섭게 말하는지라 그에게 계화장이나 부용장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주단신은 말했다.
장기(장氣)라는 것은 산과 들이나 소택(沼澤) 등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같은 독기(毒氣)이지요. 삼월달에는 도화장(桃花장)이 피고 오월에는 유화장(유花장)이 가장 무섭답니다. 기실 독장은 모두 마찬가지이지요. 때에 따라 다른데 그 달에 피는 꽃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이랍니다. 삼월과 오월은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독충이나 독모기가 나타나기 때문에 가장 큰 해를 입히지요. 잡초가 썩어 더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독장이 반드시 무서우리라고 생각됩니다.
왕어언은 말했다.
음, 그러면 다화장(茶花장)이라는 것도 있나요?
단예와 파천석은 모두 다 웃었다.
주단신은 말했다.
우리 대리 사람들은 다화를 가장 좋아한답니다. 그러나 다화와 그 귀찮은 독장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말을 나누는 사이에 숲속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말발굽이 진흙바닥을 밟게 되자 진흙 속으로 푹 빠졌다. 뽑기가 또 여간 거북하지 않아 나아가는 것이 느리기 그지 없었다.
파천석은 말했다.
내가 보기에 더 나아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은 새를 흉내 내어 높은 나무 위에서 자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해가 뜨면 독장이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니 그때 길을 가면 될 것입니다.
왕어언은 말했다.
태양이 나오면 독장이 그렇게 무섭지 않게 되나요?
파천석은 말했다.
바로 그렇지요.
종영이 갑자기 동북쪽을 가리키며 놀라 부르짖었다.
어머, 야단났어요. 저쪽에 독장이 피어올랐군요., 저게 무슨 독장이죠?
여러 사람들은 그녀가 손가락질 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가닥 검은 구름이 모락모락 숲 사이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파천석은 말했다.
소저, 그것은 밥짓는 독장이외다.
종영은 걱정이 되는 듯 말했다.
뭐가 밥짓는 독장이에요? 무서운가요? 무섭지 않은가요?
파천석은 웃으며 말했다.
저것은 독장이 아니라 밥을 지을 때 나는 연기란 말이외다.
뭇 사람들은 모두 다 웃음을 터뜨렸고 또한 정신이 번쩍 들어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들은 밥짓는 독장을 찾아가도록 합시다.
종영은 여러 사람들이 웃는 바람에 겸연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왕어언은 그녀를 위로했다.
영 누이, 다행히 그대가 그 밥짓는...... 밥짓는 연기를 발견했기에 우리 모두 나무 위에서 노숙하게 되는 것을 면하게 되었어요.
일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숲속에 칠팔 칸의 나무집이 있었다. 그리고 집 옆으로는 목재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벌목을 하는 나무꾼들의 거처인 모양이었다.
주단신은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 형씨들, 길을 가는 사람인데 하루밤 묵어 가고자 합니다. 되겠습니까?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집안에서는 대답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붕 위에 연통에서는 밥짓는 연기가 끊임없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집안에는 틀림없이 사람이 있었다.
주단신은 품속에서 무기로 삼은 철골선(鐵骨扇)을 손에 뽑아들고 가만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후두둑후두둑 나무에 불붙는 소리만은 들려오고 있었다.
주단신은 뒷쪽으로 가 보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서자 아궁이 앞에 한 노파가 불을 지피고 있었다.
주단신은 입을 열었다.
할머니, 이곳에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그 노파는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혼자 이곳에 계십니까?
그 노파는 그제서야 자기의 귀를 가리켰고 또다시 자기의 입을 가리키며 아아, 하는 소리를 몇 번 냈다.
자기가 벙어리에 귀머거리라는 것을 표시한 것이었다. 주단신은 식당으로 돌아갔다.
마침 단예와 목완청 등도 나머지 몇 칸의 나무집 안을 살펴본 이후 그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칠팔 칸이나 되는 나무집 안에는 그 노파밖에 달리 다른 사람이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각 칸의 나무집에는 판자대기로 만든 침대가 있었다. 침대 위에 요와 이불은 없었다. 아마도 이때 벌목을 하는 나무꾼들이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파천석은 나무집 밖을 한두 바퀴 돌며 이상한 점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폈다.
주단신은 말했다.
노파는 귀머거리에다가 벙어리이니 그녀와 말을 해볼 수가 없구려. 왕 소저는 가장 참을성이 많으니 역시 그대가 가서 노파에게 뜻을 타진해 보도록 하시구려.
왕어언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가 시험해 보겠어요.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그 노파에게 손짓 발짓을 한 이후 한 덩이 은자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이렇게 되자 어느 정도 뜻이 통하게 되었다.
뭇 사람들은 그 노파가 밥을 다 짓자 그녀에게 약간의 밥을 얻었다. 나무집안에는 술도 없었고 고기도 없었다. 모두들 마른 반찬으로 밥을 먹어 배를 채워야 했다.
파천석은 말했다.
우리는 바로 이 한칸의 집안에서 자도록 합시다. 따로 떨어지지 않도록 합시다.
남자들은 동쪽 방에서 자게 되었고 여자들은 서쪽 방에서 자게 되었다. 노파는 문간방의 탁자 위에 있는 한 개의 기름 등잔에 불을 붙였다.
여러 사람들이 막 잠이 들려고 했을 때 갑자기 중간 방에서 탁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누가 화도와 화석으로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불을 붙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파천석은 문을 열고 나갔다. 탁자 위의 기름 등잔은 불이 꺼져 있었다. 어둠속에서 그저 탁탁, 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 노파가 끊임없이 화석과 화도를 치고 있었다. 파천석은 자기 품속의 화도와 화석을 꺼내 탁 하니 불을 당겨서는 등잔에 불을 붙였다.
노파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그에게 화도와 화석을 빌려 달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 아닌가.
파천석은 화도와 화석을 그녀에게 주고 방으로 들어가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중간 방에서 또 탁탁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예 등은 막 눈을 감고 잠이 들락말락할 때였는데 그 소리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벽 틈으로 비춰 오는 불이 없었다. 그 등잔불이 꺼진 것이다. 주단신은 웃었다.
노파는 늙어 망령이 난 게로군.
본래 그는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탁탁탁, 하는 소리가 시종 끊임없이 들려왔다.
만약 하루밤 동안 불을 켜지 못한다면 그녀는 하루밤 동안 내리 화도와 화석을 치고 있을 모양이었다.
주단신은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중간 방으로 갔다. 어둠 속에서 몽롱하나마 노파가 화도와 화석을 탁탁 치고 있었다. 그리고 탁탁, 하고 불을 붙이려고 하나 좀처럼 불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주단신은 자기의 화도와 화석을 꺼내 탁탁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을 내어서는 등잔불에 불을 붙였다.
그 노파는 웃어 보이고 몇 번의 눈짓을 했다. 그리고 화도와 화석을 빌어서는 부엌에 가서 사용하겠다는 시늉을 했다. 주단신은 생각없이 그녀에게 화도와 화석을 주고는 스스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중간 방에서 또 탁탁,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파천석과 주단신은 그만 화가 나서 욕을 했다.
도대체 이 할망구는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거야?
그러나 탁탁탁, 하는 소리는 시종 그치질 않았다. 파천석은 벌떡 일어나 달려가서 노파의 화도와 화석을 빼앗아 들고는 탁탁탁, 하고 몇 번 쳤다. 그러나 불똥이 조금도 일지 않았다. 만져 보니 자기의 화도와 화석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큰 소리로 물었다.
나의 화도와 화석은 어쨌소?
그 한 마디를 부르짖고 나서야 그는 픽 하니 실소했다.
내가 어찌하여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인 노파에게 신경질을 부린다지?
이제 목완청 역시 나와서는 화도와 화석을 꺼내며 말했다.
파 숙부, 불을 켤 참인가요?
파천석은 말했다.
이 노파는 정말이상야릇하구만. 등잔불을 껐다가 다시 켜곤 하는 짓을 밤이 새도록 반복하는구려.
그는 화도와 화석을 받아서는 탁탁, 하고 불을 당겨 등잔에 불을 켰다.
그 노파는 그제서야 매우 만족한 듯 빙그레 웃으며 등잔의 불길을 바라보았다.
파천석은 목완청에게 말했다.
소저, 길에서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을 터이니 일찌감치 쉬도록 하시구려.
그는 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채 차 한 잔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아서 다시 탁탁탁, 하는 화석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천석과 주단신은 동시에 침대 위에서 일어나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별안간 두 사람은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세상에 이와 같이 이상한 할머니가 있을까? 이 가운데는 반드시 어떤 연유가 있다."
두 사람은 가만히 손을 잡고는 살그머니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좌우로 갈라져서는 노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막 달려 들려고 했을 때 갑자기 코에 담담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등잔불 밑에서 화석을 치는 사람은 목완청이었다.
두 사람은 즉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파천석이 말했다.
소저, 그대였구려.
목완청은 말했다.
그래요. 이곳이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아 등불을 켜 보려고 해요.
파천석은 말했다.
내가 불을 켜리다.
그러나 탁탁탁, 하니 화석을 쳐도 불똥은 튀지 않았다. 파천석은 놀라 부르짖었다.
이 화석이 잘못되었군. 그 노파에 의해서 바꿔치기를 당했소이다.주단신은 말했다.
빨리 그 노파를 찾으시죠. 놓치면 안 됩니다.
목완청은 부엌으로 달려갔고 파천석과 주단신 두 사람은 나무집을 나섰다. 그런데 노파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파천석은 말했다.
너무 멀리 쫓아가지 마시오. 공자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외다.
두 사람은 다시 나무집으로 되돌아왔다. 단예와 왕어언, 종영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물었다.
누가 화도와 화석을 가지고 있소? 먼저 불을 켠 다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그러자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나의 화도와 화석은 그 노파가 빌려 갔어요.
바로 왕어언과 종영이었다.
파천석과 주단신은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걸음마다 조심을 한다고 했는데 뜻밖에도 이곳에서 적의 간계에 빠져 들게 되었군."
단예는 품속에서 화도와 화석을 꺼내 탁탁탁, 몇 번 쳤다. 그러나 역시 불똥이 일어나지 않았다.
주단신은 말했다.
공자, 그 노파가 그대에게 화석을 빌려 쓰지 않았소?
단예는 말했다.
그렇소이다. 그것은 밥 먹기 전이었지요. 그런데 그녀는 친 이후에 즉시 나에게 되돌려 주었소이다.
주단신은 말했다.
화석을 바꿔치기 당했을 것입니다.
일시에 모든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어둠속에서 그저 가을의 벌레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날 밤은 바로 달이 없는 밤이었고 별빛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섯 사람은 집안에 모여서 그저 몽롱하게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쳐다보며 속으로 주위의 사정이 매우 흉험하다고 느꼈다.
목완청은 말했다.
그 노파가 우리들의 화석을 바꿔치기 해 간 것은 우리로 하여금 등에 불을 켜지 못하도록 하자는 데 있었어요.
종영은 갑자기 날카로운 어조로 부르짖듯 말했다.
나는 그들이 어둠속에서 지네나 독개미를 풀어 발을 물게 할까봐 제일 겁이나요.
파천석은 흠칫해서 말했다.
어둠속에서 만약 작고 가늘은 동물들이 습격을 해온다면 정말 방비할래야 방비할 수가 없겠군.
단예는 말했다.
우리들은 역시 나가서 나무 위로 몸을 숨기도록 합시다.
주단신은 말했다.
아마 나무 위에도 이미 독물을 풀었는지도 모르죠.
종영은 다시 아, 하더니 목완청의 팔을 잡았다.
파천석은 말했다.
소저, 두려워하지 마시오. 우리 불을 켠 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종영은 말했다.
화석이 없어졌는데 우리가 어떻게 불을 켜죠?
파천석은 말했다.
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소. 그러나 그들이 우리들에게 불이 없도록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들은 불을 켜 놓는 것이 아무래도 제일 좋을 것 같구려.
그는 몸을 돌려 부엌으로 가서는 두 조각의 나무를 가져왔다. 그리고 주단신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주 형제, 이 나무를 잘게 부수어 주게. 가늘면 가늘수록 좋다네.
주단신은 그 말을 듣고 즉시 깨달은듯 말했다.
맞았습니다.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받고 있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는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나무를 한 조각씩 베어내기 시작했다. 단예와 목완청, 왕어언, 종영도 함께 손을 썼다. 제각기 비수와 작은 칼을 꺼내서는 나무를 자를 사람은 자르고 분지를 사람은 분지르며 매우 가늘은 톱밥처럼 잘게 부쉈다.
단예는 한숨을 쉬었다.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천룡사 고영 대사 조부님의 신공이 없습니다. 그 신공이 있다면 내력을 일으켜서 나무조각에 즉시 불을 당길 수 있지요. 그것은 구마지도 해낼 수 있답니다.
기실 이때 그의 체내에 축척된 내력은 고영 대사나 구마지보다 훨씬 위였다. 다만 그는 그 내력을 운용할 줄 몰랐을 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손을 멈추지 않고 나무조각을 가느다랗게 부수었다.
파천석은 잘게 부숴진 나무조각이 대접만한 크기의 무더기를 이루자 즉시 함께 쌓았다. 그리고는 몇 장의 화매지(火媒紙)를 그 위에 놓았다. 그리고 자기의 칼을 왼손에 쥐고 종영의 칼을 빌려서는 오른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갑자기 두손을 합쳤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칼의 칼등이 맞부딪치면서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불똥은 나무조각 위에 떨어져서 타는 듯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즉시 꺼졌다. 불똥이 화매지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뭇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천석은 창칼을 연신 부딪쳤다. 창창, 하는 소리가 잇따라 일었다. 십여 번을 부딪치게 되었을 때 화매지에 불똥이 튀어 결국 타기 시작했다.
단예 등은 큰소리로 환호성을 내지르며 화매지를 가져가 등잔 불에 불을 붙였다. 주단신은 하나의 등잔불로는 바람에 꺼지게 될까봐 부엌과 양쪽 상방의 기름 등잔불도 모조리 가지고 나와 불을 켰다.
불꽃은 미약했으나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비췄다. 등잔불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파랗게 보였으며 등잔의 타는 냄새가 심하게 풍겨 그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기분이 언짢았다. 그러나 간신히 등잔불에 불을 붙였는지라 여러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들었어며 마치 한판의 싸움에서 이긴 듯한 기분이 되었다.
나무집은 매우 간단하게 얽혀져 있어서 문틈으로 적잖게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여섯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무기를 잡고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에 나무가 움직이는 소리와 벌레들이 우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파천석은 한참 동안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자 나무집 각처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개의 기둥에는 가마니가 싸매져 있었다. 그리고 바깥에는 새끼줄로 묶여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일이지만 처음 나무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와 같은 현상은 엿보이지 않았다.
즉시 새끼줄을 끊자 가마니가 떨어지게 되었다. 단예가 두 기둥 위에 새겨져 있는 대련(對聯)을 볼 수 있었다.
오른쪽 귀절은 다음과 같았다.
"춘구수동다화○(春溝水動茶花)."
그리고 왼쪽의 귀절은 다음과 같았다.
"하곡○(夏谷) 생예지홍(生예枝紅)."
그러니까 싯귀마다 한 자가 모자라는 셈이었다. 단예는 다시 눈을 돌려서 주단신이 가마니를 벗겨 놓은 두 기둥을 바라보았다. 거기의 기둥에도 다음과 같은 대련이 적혀 있었다.
"청군옥○(靑裙玉) 여상식(如相識), 구○(九) 다화만로개(茶花滿路開)."
단예는 말했다.
내가 이곳까지 오면서 글을 많이 첨가했는데, 그것이 화가 될 것인지 복이 될 것인지 말을 하기 이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둥에다가 가마니로 싼 것을 보면 내가 이 대련을 보지 못하도록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들이 바라지 않는 일을 해서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보도록 합시다.
그는 손을 뻗쳤다. 찍직, 하는 소리가 나면서 대련의 화 자 아래에 흰 백(白)자를 써 넣고 곡 자 아래에는 구름 운(雲) 자를 써 넣었다.
그의 내력이 너무 심후하고 지력이 너무나 세서 나무가루가 다투어 떨어졌다.
종영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진작 그런 줄 알았더라면 그대가 손가락을 나무에 대고 몇 번 휙 긋기만 했다면 잘게 부서진 나무 조각을 얻을 수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렇게 되었더라면 우리는 한동안 바쁘게 설칠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단예는 다시 저쪽의 빈칸에도 글짜를 써 넣었다. 그리고 입으로 나직이 읊었다.
청군옥면여상식(靑裙玉面如相識), 구월다화만로개(九月茶花滿路開).
한편으로는 그는 고개를 흔들며 시를 읊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곁눈질로 왕어언을 바라보았다.
왕어언은 아리따운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종영은 말했다.
이 나무는 어떤 나무에서 떼어 온 것인지 모르겠군요. 정말 향기가 좋네요.
여러 사람들은 그 말에 따라 냄새를 맡아 보았다. 단예의 손가락이 나무에 글을 새로 새긴 곳에서 짙은 꽃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는데 그 냄새는 계화 향기 같기도 했지만 계화 향기는 아니었고 매괴 향기 같기도 했지만 매괴 향기도 아니었다.
단예 역시 칭찬의 말을 했다.
정말 향기롭군.
그 향기는 갈수록 짙어졌으며 그 냄새를 맡은 후 심신이 상쾌해졌고 정신이 번쩍 들 지경이었다.
주단신은 갑자기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이거 잘못되었소. 이 향기에 독이 있을지 모르니 모두 입과 코를 틀어막도록 하시오.
뭇 사람들은 그의 깨우침을 받자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거나 소맷자락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향기를 적지 않게 들이마셨다. 만약 독기라면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가물가물해지며 가슴속이 답답해져 와야 하는데 전혀 불쾌한 감은 없었다.
잠시 후 여러 사람들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게 되자 참을 수 없어져 입을 벌리고 숨을 쉬게 되었는데 여전히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각자 천천히 코와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 내고 의논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적의 의도를 반푼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시 한참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갑자기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완청은 놀라 부르짖었다.
어머나, 독이 퍼지게 되었어요. 내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종영도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파천석은 정중히 말했다.
이것은 귀에 헛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외다. 한 떼의 벌들이 날아오는 것 같구려.
아니나 다를까, 웅웅거리는 소리가 더욱더 가깝게 울려퍼졌다. 마치 수천 수만 마리의 벌들이 사면팔방에서 모여 드는 것 같았다.
삽시간에 모두들 멍해지고 말았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웅웅거리는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마치 무수한 요마와 도깨비들이 휘파람을 크게 불며 춤추듯 달려들어 사람을 씹어 먹을 것만 같았다.
종영은 목완청의 팔을 붙잡고 왕어언은 단예의 손을 꼭 쥐었다. 각기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별안간 팍, 하는 소리가 났다. 가늘고 작은 물체가 나무집 밖의 판자 벽에 부딪혔다. 곧이어 팍팍팍, 하는 소리가 잇따라 울려퍼졌다. 얼마나 많은 물체들이 부딪혀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목완청과 종영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벌떼예요.
파천석은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그런게 갑자기 집밖에서 말들이 길게 울부짖으며 마구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종영은 부르짖었다.
벌들이 말을 쏘고 있어요!
주단신은 말했다.
내가 나가서 말고삐를 잘라야겠소이다.
그는 장포를 찢어서는 머리에다 감고 왼손으로 판자문을 열었다. 그러 자 바깥에서 일진의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오게 되었고 수천 수만 마리나 되는 벌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종영과 왕어언은 일제히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파천석은 주단신을 집안으로 끌어들였으며 무릎으로 판자문을 밀어 닫아 걸었다. 그러나 집안은 이미 벌들로 가득 차고 말았다.
이 벌들은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을 쏘아댔다. 일시에 모든 사람의 머리와 손, 얼굴은 벌에게 일곱 여덟 번 또는 십여 번을 쏘이게 되었다.
주단신은 섭선을 펼치고는 마구 휘둘러댔다. 파천석은 옷자락을 찢어서는 맹렬히 휘둘러댔다. 단예와 목완청, 왕어언 등 네 사람도 아픈 것을 참고 마구 벌들을 때렸다.
파천석, 주단신, 단예, 목완청 네 사람은 손을 쓰게 되었을 때 모두 공력을 돋운 상태였다.
얼마 후 집안의 벌들이 이삼십 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벌들은 마치 불을 보고 날아드는 하루살이처럼 여전히 자기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마구 독침을 쏘아댔다. 잠시 후 여섯 사람은 집안의 벌들을 모조리 때려 죽일 수 있었다.
종영과 왕어언은 아파서 눈물을 글썽이게 되었다.
이때 퍽퍽, 하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들려왔다. 수천 수만 마리나 되는 벌들이 재차 나무집으로 온 것이다.
각자는 그만 아연해져서는 안색이 변하게 되었고 일시 자신의 아픈 것을 돌보지 못하고 급히 옷자락과 소맷자락을 찢어서는 나무집의 각처 빈틈을 틀어막아 버렸다.
여섯 사람의 몸과 얼굴은 붉거나 부풀어 있어서 매우 낭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예는 말했다.
이곳에 나무집이라도 있어 몸을 숨길 수 있었으니 다행이오. 만약 그렇지 않고 넓은 들 같은 곳에서 이 수천 수만 마리의 벌떼들이 달려와 쏘는 것을 어찌 감당해 내겠소? 그때는 그저 죽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외다.
목완청은 말했다.
이 벌들은 적이 보내 온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들은 이대로 그냥 손을 멈출 것 같아요? 그들이 이 나무집을 부수지 않겠어요.
종영은 놀라 부르짖었다.
언니, 언니...... 이 나무집을 그들이 부순다구요?
목완청이 뭐라고 말을 하기 전이었다. 머리 위에서 쿵,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한 커다란 바위가 지붕 위에 떨어졌다.
지붕의 석가래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몇 번 났다. 그러나 다행히 분질러 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또 다시 퍽퍽, 하는 소리가 나게 되었고 두 개의 큰 바위가 지붕 천정을 뚫고는 안으로 떨어졌다. 그 때문에 집안의 등잔불이 모조리 꺼지고 말았다.
단예는 재빨리 왕어언을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웅웅거리는 소리가 고막이라도 터뜨릴것처럼 들려왔다.
모든 사람들은 다시 손을 써서 벌들을 때려 잡는다 하더라도 부질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옷자락을 뒤집어써 얼굴과 머리를 가렸다. 삽시간에 손, 발, 팔, 다리에 만 개의 침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후 여섯 사람은 일제히 쓰러져서는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단예는 망고주합을 먹었기 때문에 백독이 침범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러나 이 벌들은 사람들에 의해 키워진 것들로서 꼬리의 침에는 벌의 독 이외에도 마약(麻藥)이 묻혀 있었다. 그리하여 수백 마리의 벌들에게 쏘이게 된 이후 역시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시 내력이 심후해서 여섯 사람 가운데 제일 첫번째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게 되자 그는 손을 뻗쳐 왕어언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팔을 움직여 보았으나 움직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왕어언도 자기 품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는 눈을 떴다.
주위는 칠흑과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원래 두 손과 두 발은 꽁꽁 묶여 있었고 눈마저도 검은 베로 가리워진 상태였다. 그리고 입은 어떤 물건에 의해 틀어막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니 입을 놀려 말을 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가 없었다.
온몸의 살갗이 점점 아파왔다. 아마도 벌들에게 쏘인 곳인 듯했다. 그런데 자기가 땅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앉아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또 정신을 잃은 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정히 망연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여인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나는 이토록 심혈을 기울여서 대리 단가라는 늙은 개를 잡으려고 했는데 너는 어째서 이 작은 개를 잡아 왔느냐?
단예는 그 음성이 매우 귀에 익다고 생각했으나 일시 누구인지 기억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 늙수그레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쇤네는 모든 점에 있어서 소저의 분부대로 일을 처리했으며 아무런 차질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말했다.
흥, 내가 볼 때 이 가운데는 이상한 점이 있다. 그 늙은 개는 서하에서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큰 길을 따라 사천성 서쪽으로 해서 대리로 들어와야 할텐데 어찌하여 갑자기 동쪽으로 돌게 되었지? 그리하여 우리가 도중에 안배한 그 약주들을 모두 다 이 작은 개에게 먹이는 꼴이 되지 않았느냔 말이다.
단예는 그녀가 말하는 늙은 개는 바로 자기의 부친 단정순을 가리키고 소위 작은 개는 말할 것도 없이 단예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여자와 노파가 주고받는 말은 한 두터운 판자 벽을 격하고 있는 것 같고 이로 미루어 볼 때 바로 옆방에서 말하는 소리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노파는 말했다.
단 왕야가 이번에 중원으로 나갔다가 적잖은 시일을 지체했는데도 중도에 동쪽으로 길을 돈 것을 보면......
그 여자가 노해 그 말을 가로챘다.
너는 아직도 그를 단 왕야라고 부르느냐?
그 노파는 말했다.
예, 옛날......소저는 저에게 그를 단 공자라 부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나이가 많아졌으니......
그 여자는 호통을 내질렀다.
더 말하지 마라!
예.
그 여자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침울히 말했다.
그는...... 그는 이제 나이가 많아졌지......
그 소리에는 처량한 감과 허전한 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단예는 즉시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또 누구라고? 알고 보니 또 옛날 아버지와 사귀었던 여자로구나. 그녀가 아버지를 찾아 시비를 걸고자 하는 것은 본래 아버지를 잡자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내가 가운데 뛰어들어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꼴이 되었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들은 우리들에게 막무가내로 독수를 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부인이 누구인지 모르겠군."
이때 그 여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각처의 객점과 산장에 걸어 둔 서화폭의 빈 자리를 이 작은 개가 모조리 메꿨단 말이지? 나는 믿을 수가 없다. 늙은 개가 외우고 있는 글귀를 작은 개가 어떻게 외우고 있다는 말이냐? 정말 이렇게 공교로울 수 있단 말이냐?
노파는 말했다.
애비가 잘 외우는 싯귀를 아들이 외워 둔다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여자는 노해 부르짖었다.
도백봉이라는 계집년은 오랑캐의 계집애다! 그녀가 어찌 그토록 총명한 아들을 낳는단 말이냐? 나는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가 없다.
단예는 그녀가 자기의 모친에게 욕을 하는 소리를 듣게 되자 그만 크게 노기가 치밀었다. 따라서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입이 막혀 있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때 노파가 권했다.
소저, 이미 지나간 일을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마음에 두고 있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소저에게 잘못한 사람은 단 공자이지 그 아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대는...... 그대는...... 그 젊은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우리 취인봉(醉人蜂)에게 그토록 고통을 당했으니 그로서는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여자는 뾰족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단가라는 작은 녀석을 용서해 주란 말이냐? 흥! 나는 그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놓은 후에야 용서해 주겠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그 벌들은 취인봉이라 하는 것들이로구나. 그런데 그녀가 어디서 이 많은 벌들을 찾아내서는 우리들을 쏘게 했지?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녀는 종 부인은 아니다. 두 사람의 음성은 완전히 다르다."
갑자기 한 남자가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외숙모님, 생질이 인사드립니다.
단예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음속의 의문이 즉시 풀어지고 말았다.남자는 바로 모용복이었다. 그가 외숙모라고 부르는 사람은 물론 고소 만다산장의 왕 부인, 즉 왕어언의 모친이며 자기의 미래 장모님이 아닌가.
삽시간에 단예는 마음속이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당시 만다산장의 광경이 선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다화는 만다화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만다화는 대리에서 나는 것이 가장 유명했다.
고소의 다화는 별로 훌륭하지 못했다. 그러나 만다산장에는 적잖은 다화를 심었다.
유명한 것들이 적지 않았으나 제대로 심지를 못해서 꽃송이가 매우 적지 않으면 시들어 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장원을 만다산장이라고 했다. 장원에는 만다화 이외의 다른 꽃은 심지 않았다. 이는 무슨 까닭이었을까?
만다산장의 규칙에는 무릇 남자가 장원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게 되면 두 발을 잘라낸다고 했다.
왕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대리의 사람이든가 혹은 단가가 나의 손에 걸리면 나는 그를 산 채로 매장해 버릴 것이다.
그때 무량검의 제자가 왕 부인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대리의 사람도 아니고 다만 고향이 대리에서 불과 사백여 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서 생매장을 당하지 않았던가.
왕 부인은 한 젊은이보고 조강지처를 버리라고 하면서 말하지 않았던가.
네게 처가 있는 이상 다른 처녀를 건드려서는 아니 되었다. 그런데 너는 교묘한 언변으로 남을 속였으니 반드시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
단예는 대리 사람이었고 또한 성이 단씨였으나 다화를 심을 줄 알았기 때문에 왕 부인은 그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운금루에서 푸짐한 음식을 내놓아 대접까지 했다.
단예는 그녀와 산다화의 품종을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 일종의 다화를 들먹이게 되었다.
그 다화는 하얀 꽃잎에 붉은 무늬가 있는 것인데 이름은 조파미인검이라했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부인 생각해 보십시오. 미녀라면 온순하고 우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은 크게 왕 부인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어 왕 부인은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그대는 누구의 말을 듣고 그와 같은 엉터리 말을 날조해서는 나를 비웃느냐? 여자가 무공을 익히게 되면 아름답지 못하다고? 온순하고 우아하지 못할 이유가 뭐냐?
그녀는 단예를 잡아채서는 자리에서 끌어내렸고 하마터면 그 일 때문에 단예를 죽일 뻔하지 않았던가.
드디어 옆방의 그 여자가 바로 왕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든 것을 환히 깨닫게 되었다.
"원래 그녀 역시 아버지의 옛 연인이었구나. 그러니 그녀는 산다화를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고 대리의 단씨 성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또 그토록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구나. 왕 부인이 산다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과거 아버지와 그녀가 정을 나누게 되었을 때 산다화와 관련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대리의 사람이나 단씨 성을 가진 사람을 잡게 되면 산 채로 매장을 하는 것도 물론 아버지의 성이 단씨이고 대리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예는 이 많은 의문스러운 일들을 깨닫게 되자 마음속으로 짐을 내려놓은듯한 감이 들긴커녕 오히려 커다란 바위가 내리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디에있는지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왕어언의 어머니와 자기의 부친이 옛날에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커다란 공포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이 무서운 일을 똑바로 생각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이 답답하고 번거러우며 두렵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 왕 부인이 말했다.
복이냐? 정말 잘 되었구나. 너는 이제 대연나라의 황제가 될테지? 이제 곧 등극하게 되느냐?
그 어조는 비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모용복은 정중히 대답했다.
이것은 조상님들이 남기신 뜻이옵니다. 이 생질이 무능하여 강호를 떠돌아 다녔지만 아직까지도 전혀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외숙모님께서 아무쪼록 많은 지도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왕 부인이 말했다.
내가 무엇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냐? 우리 왕씨 집안은 왕씨 집안이고 너희 모용씨 집안은 모용씨 집안이다. 내가 너에게 만다산장으로 찾아오지 말고 또 어언이를 너와 만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바로 너희 모용씨 집안의 쓸데없는 일에 말려들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어언이는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갔지?
독벌들이 내습을 해왔을 때 왕어언은 단예의 품에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부인의 어조로 미루어 볼때 정말 모르는 것같지 않은가.
모용복이 말했다.
외사촌 누이가 어디로 갔는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녀는 줄곧 대리 단 공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천지신명에게 알리고 부부가 됐을지도 모르죠.
왕 부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무슨 개방귀 같은 소리를 하느냐?
그녀는 쿵, 하니 탁자의 한 모서리를 힘주어 내리치더니 노해 부르짖었다.
너는 어째서 그 애를 돌보지 않았느냐? 나이 어린 소저가 강호에서 함부로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다니, 너는 외사촌 남매간의 정을 조금도 돌보지 않는단 말이냐?
모용복이 말했다.
외숙모님은 왜 또 그토록 화를 내십니까? 그녀가 대리의 단 공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으니 장래 정정당당하게 대리국의 황후가 될 터이고 이야말로 정말 멋드러진 일이 아니겠습니가?
왕 부인은 다시 손을 뻗쳐 탁자를 쿵, 하니 내리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무슨 소리야! 뭐가 멋들어진 일이냔 말이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예는 그렇지 않아도 옆방에서 근심에 휩싸여 있었는데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을 듣자 더욱 심란해졌다.
이때 창밖에서 그 누가 입을 열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왕 소저와 단 공자는 그야말로 하늘이 짝지어준 한쌍이외다. 부인께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왕 부인은 노해 부르짖었다.
포부동, 누가 너보고 예의도 없이 불쑥 나서라고 했느냐? 네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사람을 시켜 너의 딸을 죽이도록 하겠다.
포부동은 왕 부인이 날카롭게 꾸짖는 말을 듣더니 그만 아무 소리도 못하고 쑥 들어가고 말았으며 한 마디도 감히 더하지 못했다.
단예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포 세째 형, 포 세째 아저씨, 포 세째 나리, 제발 부탁이니 빨리 부인과 맞서서 이야기하도록 하시오. 그녀의 말은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이외다. 오로지 그대와 같은 영웅 호걸만이 감히 그녀와 사리를 다툴 수가 있소이다."
그런데 포부동은 다시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 부인은 포부동이 입을 다물자 노기가 약간 가라앉는 듯 모용복에게 물었다.
복아, 네가 나를 찾아온 것은 또 무슨 까닭이지?
외숙모님, 생질은 외숙모님과 아주 가까운 친척이 아닙니까? 속으로 항상 외숙모님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
왕 부인은 냉소했다.
호호호, 너는 꽤 양심이 있구나. 이 외숙모를 잊지 못하다니 말이다. 네가 진작에 그토록 나를 위해 주었더라면 이 외숙모는 오늘 이토록 처량한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용복은 말했다.
외숙모님께서 무슨 유쾌하지 못한 일이 있으시면 이 생질에게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이 생질은 외숙모님의 뜻을 이루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왕 부인은 침을 뱉았다.
퉤퉤퉤, 몇 년 보지 못한 사이에 너는 입술에 침을 바른 듯 언변만 늘었구나!
모용복이 말했다.
왜 입술에 침을 바른 듯 언변만 늘었다고 하십니까? 외숙모님의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을 이 생질은 심성까지 짐작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외숙모님의 소원을 풀어 드리는 데 있어서, 이 생질이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칠팔 푼 정도는 자신이 있습니다.
왕 부인은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 네가 짐작해 보아라. 만약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나에게 따귀를 얻어맞을 줄 알아라.
모용복은 낭랑히 한 구절의 시를 읊었다.
청군옥면여상식, 구월다화만로개!
왕 부인은 깜작 놀라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네가 어떻게 알지? 너는 초해의 나무집에 가 보았느냐?
모용복이 말했다.
외숙모님은 제가 어떻게 아는지 물어 보실 것 없습니다. 그저 이 생질에게 그 사람을 만나시겠는지 만나시지 않겠는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왕 부인은 놀라 반문했다.
그...... 그 사람을 만나다니.
반문을 하고 있었으나 그 어조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 생질이 말하는 사람은 바로 외숙모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 사람입니다. 춘구수동다화백, 하곡운생예지홍.
왕 부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를 만나 볼 수 있지?
모용복이 말했다.
외숙모님은 적잖은 심혈을 기울여 그를 사로잡으려고 했지만 역시 한 수의 차이로 그가 피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끝내 그를 사로잡아서 그가 순순히 외숙모의 분부를 따르도록 해야 됩니다. 외숙모님이 눈썹을 그리라면 그리고, 그가 감히 연지를 찍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최후의 두 마디 말은 경박한 뜻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왕 부인은 가슴이 설레어 귀담아 듣지 않은 듯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모용복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 생질은 그 사람의 소재지를 알고 있습니다. 외숙모님께서 만약 저를 믿으신다면 함정을 짰던 그 자세한 사정을 이 생질에게 말슴해 주십시오. 어쩌면 저에게 약간의 계책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왕 부인이 말했다.
이번에 내가 쓴 계책은 바로 취인봉을 이용하는 것이다. 나는 만다산장에서 수백 통의 벌을 키웠다. 그리고 장원에는 다화 이외에 다른 꽃을 심지 않았다. 거기다가 산장은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섬의 벌들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 꿀을 채집하지 않았지.
모용복이 말했다.
그렇군요. 그 취인봉은 그러니까 산다화 외에는 다른 꽃의 향기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왕부인이 말했다.
이 한떼의 벌을 기르는데 나는 수십 년이라는 심혈을 기울였다. 나는 벌들이 먹는 벌꿀에 마약을 보태 넣게 되었고 다시 다른 한 가지의 약물을 섞어 넣었다. 그리하여 이 취인봉의 독침에 사람이 쏘이게 되면 그 사람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되는데 사오 일 동안 인사불성이 된단다.
모용복은 말했다.
외숙모님의 신기묘산은 정말 다른 사람이 따를 수가 없군요. 그런데 어떻게 벌들로 하여금 사람을 쏘게 하지요?
왕 부인이 말했다.
그것은 반드시 사람에게 약물을 먹어야 한다. 이 약물에는 독성이 없고 또 무색무미하지만 약간 쓴맛을 지니고 있단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에 대량으로 복용시킬 수 없다. 너도 생각해 보아라. 그 사람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지만 그의 부하들은 또 얼마나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냐? 미혼약이나 독약으로 상대해서는 결코 뜻을 이룰 수가 없지. 그래서 나는 계책을 세워 사람을 길목에 내보내 그에게 술과 밥을 대접하되 암암리에 그 약물을 밥과 술에 섞도록 했단다.
단예는 내심 감탄했다.
왕 부인은 다시 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고 그 아들이 뛰어들었구나. 이 녀석은 그의 애비의 시사가부를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그러니 그 역시 풍류를 즐기고 여인을 탐하며 방탕하기 이를데 없는 건달이겠지. 이 녀석은 길을 오면서 서화에 일부러 비워 두었던 글자나 획을 제대로 메꾸었지. 그 녀석은 먹고 마시는 가운데 그의 애비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약을 탄 술과 밥을 배불리 먹었구나. 그는 이윽고 초해에 있는 나무집에 도달하게 되었단다. 그 나무집 등잔에 사용되는 기름은 미리 약을 탄 것이었고 또 나무 기둥에도 약을 숨겨 두어 그 녀석이 그 기둥에 글씨를 쓴답시고 흔적을 내자 몇 가지 약물의 향기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취인봉을 이끌어 가게 되었지. 아, 나의 계책은 틀림이 없었지만 걸려든 사람이 틀렸어. 이 녀석이 나의 큰일을 망친거지. 흥! 내가 그를 열 일곱 여덟 토막 내지 않는다면 내 가슴속에 맺힌 한을 풀기 어려울 것이다.
단예는 그녀의 어조가 그토록 악독하자 그만 두려운 마음이 치솟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왕 부인은 나를 열 일곱 여덟 토막을 내겠다고 했다. 만약 잡은 사람이 나의 아버님이었다면 오히려 공손하게 시중을 들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 부자 두 사람의 경우가 크게 다르구나."
이때 왕 부인은 이를 갈더니 말했다.
나는 저 시녀로 하여금 귀머거리에다가 벙어리인 노파로 변장을 하고 대국을 이끌어 가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사람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결국에는 일을 망쳐 놓았다.
그 노파는 변명했다.
소저, 쇤네는 이미 소저에게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나타난 사람 가운데 그 분이 안에 없는 것을 보고 그들의 화도와 화석을 모조리 바꿔치기 해서 그들로 하여금 등잔불을 켜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또 가마니로 기둥에 새겨 놓은 대련을 가려서 취인봉이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고통을 억지로 자초하듯 끝내 불을 피우게 되었고 그 대련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모용복은 물었다.
외숙모님, 그 취인봉은 사람을 쏜 후 다시 사용할 수는 없습니까?
왕 부인은 말했다.
벌들은 사람을 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만다. 그러나 내가 키운 벌들은 수천 수만 마리가 된다. 몇 백 마리 없어졌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모용복은 손뼉을 쳤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먼저 어린 것을 잡았으니 다시 늙은 것을 잡아도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이 생질은 만약 그 녀석의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나 장식품 또는 무기 같은 것을 가지고 외숙모님의 그...... 그 사람에게 보여 주어 그를 그 초해의 나무집으로 유인해서......
왕부인은 아, 하고 탄식을 발하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생질, 넌 역시 젊은 사람이라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맞다, 맞아! 그들 부자의 정이 깊으니 아들이 나의 수중에 들어 왔다는 것을 알고 그는 반드시 구하러 달려올 것이다. 그때 다시 취인봉의 계책을 쓴다 하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모용복은 웃었다.
그때가 되면 벌이 없다 하더라도 아마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외숙모님이 술에다 미혼약을 약간 타서 그에게 한 석 잔쯤 먹인다면 그가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기실 그는 외숙모님의 화용월태와 같은 모습을 대하게 된다면 취인봉이고 미혼약을 쓸 것도 없이 크게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 부인은 꾸짖었다.
망할 녀석, 외숙모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녀는 단정순과 만나게 되고 그에게 술을 먹이는 정경을 떠올리게 되자 불현듯 얼굴에 웃음을 띄우게 되었다.
그녀는 달콤한 콧소리로 입을 열었다.
맞다, 맞아, 우리는 바로 이 계책대로 하자꾸나
모용복이 신나서 말했다.
외숙모님, 이 생질의 생각이 그럴싸하죠.
왕 부인은 웃었다.
만약 이 일에 차질이 없다면 이 외숙모는 결코 너의 좋은 점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첫째로 밝혀야 할 것은 그 양심없는 것이 지금 어디로 가있느냐 하는 것이다.
모용복은 말했다.
그 사람은 지금 남에게 잡혀 있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왕 부인의 소맷자락에 걸려 찻잔이 땅바닥에 떨어져서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단예 역시 깜짝 놀랐다.
왕 부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 누구에게 잡혔느냐? 너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우리들은 어쨌든 간에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구출해내야 한다.
모용복이 말했다.
외숙모님, 상대방의 무공은 지극히 고강합니다. 이 생질은 결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혜로써 취해야지 힘으로 맞설 수는 없습니다.
왕 부인이 말했다.
어떻게 지혜를 써야 하느냐?
모용복이 말했다.
외숙모님의 취인봉 계책을 다시 한 번 써야겠습니다. 그러나 나무기둥만은 몇 개 바꾸고 기둥에 새로이 글씨를 새겨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대리국의 당금 천자는 보정제 단정명이라는 글자 같은 것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보고 반드시 속으로 대노해서는 손가락을 뻗쳐 보정제 단정명이라는 글자를 지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약 기운은 그 기둥에서 흩어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왕부인은 물었다.
그를 사로잡은 사람은 혹시 단정명과 대리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툰다는 단연경이라는 사람이 아니냐?
모용복이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왕 부인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가...... 그가...... 단연경의 손에 들어 갔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다. 단연경은 시시각각 그를 해쳐 죽이려고 했다. 어쩌면 지금 쯤 이미 그를 그...... 죽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용복은 말했다.
지금 대리국의 황제는 단정명입니다. 그리고 그분 외숙모님의 단 공자는 이미 황태제로 봉해져 있죠. 이는 대리국의 신민들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단정명은 세금을 적게 받아들이는 등 백성을 돌보는 정사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다 그를 어진 천자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연경은 함부로 백성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짓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왕 부인은 말했다.
너는 한평생 황제가 되고자 했으니 이 중간의 단계를 자연 똑똑히 짐작했겠구나.
모용복은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그러나 그 생질이 생각할 때 단연경이 진남왕을 잡았더라도 결코 즉시 죽이지 못하고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진남왕으로 하여금 먼저 등극하여 황제가 되도록 한 이후 다시 단연경에게 제위를 물려 주도록 하는 방법을 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명분이 서게 되고 대리국의 뭇 신하들과 백성들도 다른 할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
왕 부인은 물었다.
어떻게 돼서 명분이 선다는 것이냐?
모용복은 말했다.
단연경의 부친은 원래 대리국의 황제였습니다. 다만 간신이 그 자리를 찬탈함으로써 단연경이 혼란 중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단정명이 황제가 된 것입니다. 단연경이야말로 진짜 연경 태자임을 대리국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진남왕이 등극해 황제가 되고 또 그에게 후사가 없다면 단연경을 황태자로 모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명분이 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왕 부인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에게는...... 그에게는 분명히 아들이 있는데 왜 후사가 없다는 것이냐?
모용복은 웃었다.
외숙모님께서 하신 말을 눈깜짝할 사이에 잊어버렸습니까? 외숙모님은 그 단가라는 녀석을 열 일곱 열 여덟 토막 내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열 일곱 열 여덟 토막난 황태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왕 부인은 기뻐서 말했다.
맞다, 맞았어! 도백봉이라는 계집년이 낳은 후레자식을 이 세상에 남겨 두는 것은 생각만 해도 화가 가는 노릇이다.
단예는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죽었구나. 그런데 어언은 어디로 갔지? 그렇지 않으면 왕 부인은 딸의 체면을 보아서 나의 한 목숨을 용서할지도 모르는데......"
왕 부인이 말했다.
나는 그가 대리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나는 그를 데리고 만다산장으로 가겠다.
모용복이 말했다.
진남왕이 자리를 내놓은 이후 물론 외숙모님을 따라 만다산장으로 오게 되겠지요. 그때 그가 대리에 남아 있게 된다 하더라도 재미없어 할 것이며 단연경 역시 그와 같은 화근을 남겨 두겠습니까? 하지만 진남왕은 황제 자리에 한 번 올라야 합니다. 열흘 이라도 좋고 보름도 좋으니 한 번은 황제가 되어야지요?
왕 부인이 말했다.
단연경을 잡게 되고 단 공자를 구출하게 된 이후에는 먼저 단연경을 한 칼에 없애도록 하자.
모용복은 한숨을 내쉬었다.
외숙모님께선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군요. 우리는 아직까지 단연경을 사로잡지 못했습니다.
모용복이 말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너는 반드시 알겠구나. 너의 성질을 이 숙모가 모를 리 있겠느냐. 네가 나를 도와 이 일을 해준 데 대하여 도대체 어떤 보답을 바라는 것이냐? 너는 시원하게 이야기해 보아라.
모용복은 웃으며 말했다.
저에게 몇 만 냥의 황금을 내려 주십시오. 혹은 낭환각의 몇 권의 무학비전을 내리셔도 됩니다.
왕 부인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말했다.
흥, 네가 군자금이 필요하다면 나에게 달라고 하려므나. 내가 어찌 너에게 주지 않겠느냐? 그리고 네가 낭환간의 무학비전을 본다면 그것은 더욱더 환영할 노릇이다. 좋아, 네가 이제 어떻게 단연경을 사로잡고 어떻게 사람을 구할 것인지 너의 생각을 토로해 보아라.
모용복이 말했다.
제일보는 단연경이 진남왕을 데리고 초해에 있는 나무집으로 가도록 유인하는 것이죠.
왕 부인이 말했다.
너에게 무슨 방법이 있어 단연경으로 하여금 초해 나무집으로 가게 하려는 것이냐?
모용복이 말했다.
우리는 단예의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을 가지고 가 단정순에게 보여 줍니다. 단정순은 물론 아들을 구하고자 할 것이고 단연경은 단정순을 데리고 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숙모님이 여기에 있는 단가 녀석을 사로잡은 것은 조금도 잘못 잡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를 두고 좋은 미끼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금거북이를 낚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왕 부인은 웃었다.
이 단가 녀석이 좋은 미끼라는 것이지?
모용복은 웃으며 농담을 했다.
제가 보기에 그는 반은 좋고 반은 나쁩니다.
왕 부인은 반문했다.
그것은 또 무슨 말이냐?
모용복이 말했다.
진남왕의 반쪽은 좋은데 진남왕비 그 계집년의 반쪽은 좋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 부인은 소리내어 웃었다.
호호호.
모용복이 웃으며 말했다.
이 생질은 아예 일을 서둘러서 하루 바삐 이 일을 해치워서는 외숙모님으로 하여금 하루라도 일찍 기쁘게 해 드려야겠습니다. 외숙모님, 그 녀석을 불러내도록 하십시오.
왕 부인이 반문했다.
그는 취인봉의 독침에 소이게 된 이후 적어도 사흘은 지나야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은 바로 옆방에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너에게 물어 볼 말이 또 있다. 이...... 이......진남왕은 양심이 없다고 하나 굳굳한 사내인데 단연경은 그를 다그쳐서 양위하도록 약속을 얻어낼 수 있을까? 혹시 혹독한 고문을 가해서 그로 하여금...... 그로 하여금 많은 고통을 당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냐?
거기까지 말한 그녀의 어조는 근심하는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모용복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리의 단가가 양심이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외숙모님 같은 용모에다가 문무를 겸비하신 분을 이 천하에 어디 가서 찾는단 말입니까? 이 생질로 말하면 전생에 어떤 복을 타고 났는지는 모르지만 외숙모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을 때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외숙모님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런데......아, 천하에 이토록 분수를 모르는 멍청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복을 주는 데도 누리질 못하고 달 속의 항아를 사랑할 줄 모르고서 진흙바닥을 구르는 암퇘지 같은 계집애들만 상대를 하고 있으니......
왕 부인은 큰 소리로 물었다.
너는 그......그......양심이 없는 것이 또 다른 여자와 놀아났다는 말이냐? 누구냐?
모용복이 말했다.
그와 같은 천한 계집들은 외숙모님의 신발을 들 자격조차 없습니다. 기껏해야 장삼(張三)의 할멈이 아니면 이사(李四)의 딸이겠지요. 외숙모님께서 그런 여자 때문에 화를 낸다는 것은 신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왕부인은 대노하여 탁자를 쾅쾅,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빨리 말해라! 그가 나를 버리고 대리로 가서 대리의 왕 노릇이나 하는 것을 나는 결코 탓하지 않는다. 그의 집안에 처가 있는 것도 나는 탓하지 않겠다. 내가 그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아내가 있는 남자였다.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그가 또 다시......그가 다른 여인과 놀아났다니, 그 여인이 누구냐? 그게 누구냐 말이다?
단예는 옆방에서 그녀가 그토록 화를 내는 소리를 듣자 그만 간이 콩알만해졌다.
모용복이 말했다.
외숙모님, 이렇게 큰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잠시 쉬도록 하십시오. 생질이 천천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왕 부인은 말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짐작할 수 있다. 단연경이 그 천한 계집년을 사로잡아서는 그에게 황제가 된 이후 양위하도록 협박을 했겠지. 그리고 만약 응낙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계집애를 괴롭히겠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의 성질을 내가 모를 리가 있느냐? 다른 사람이 그에게 무슨 응낙을 받아내려고 강철 칼로 그의 목을 겨눈다 하더라도 그는 죽어도 응하지 않지.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건드리기만 하면 모든 것을 응낙하며 자기의 목숨마저도 돌보지 않는다. 흥! 그 천한 계집애가 어떻게 생겨 먹었지? 그 여우는 무슨 수단으로 그를 홀렸지? 빨리 말해라. 그 계집년이 누구냐?
모용복이 말했다.
외숙모님, 제가 말씀을 드리죠. 화내지 마십시오. 그 계집년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왕 부인은 놀람과 분노에 휩싸여서는 쿵, 하니 탁자를 힘주어 내리쳤다.
뭐라구? 두 사람이나 된단 말이냐?
모용복은 말했다.
두 사람만이 아닙니다.
왕 부인은 말했다.
뭐라구? 그는 여행 중인데도 여자를 마구 건드린단 말이냐? 한 사람도 부족해서 두 사람 세 사람을 달고 다닌단 말이냐?
모용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금 모두 네 사람의 여인이 그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후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삼궁육원(三宮六院)에 얼마나 많은 여인을 거느릴지 모르는 일이죠.
왕 부인은 욕을 했다.
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황제가 되지 못하도록 했다. 어디 말해 봐라. 그 네 계집년들은 누구 누구냐?
단예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로서는 진홍면과 원성죽 두 사람이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웬 두 여자가 더 나타났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모용복은 말했다.
한 사람은 진가이고 한 사람은 원가입니다......
왕 부인은 말했다.
흥, 진홍면과 원성죽이군! 그 두 여우들이 다시 그와 함께 얽혀 있군.
모용복은 말했다.
또 한 사람은 남편이 있는 부인으로서 저는 그들이 종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딸을 찾아나선 사람 같았습니다. 종 부인은 매우 예의를 차렸으며 진남왕에 대해서 시종 좋은 얼굴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진남왕은 그녀에 대해서 역시 예의를 다해 대했으나 여전히 싱글벙글 하면서 그녀를 보보(寶寶)라고 매우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왕 부인은 노해 부르짖었다.
감보보라는 계집애로구나! 뭐가 예의를 다해 대했단 말이냐? 정말 예의를 지킨다면 마땅히 멀리 해야 될 것인데 왜 함께 어울려 있단 말이냐? 네 번째의 계집애는 누구냐?
모용복은 말했다.
네번째는 천한 여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진남왕의 정실인 진남왕비입니다.
단예와 왕 부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어머니까지도 오셨지?"
왕부인은 아, 하더니 매우 뜻밖이라 말을 잇지 못했다.
모용복은 웃으며 말했다.
외숙모님은 이상하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다시 생각해 보시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진남왕은 대리에서 떠난 후 근 일 년 동안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중원에는 꽃과 같이 어여쁜 여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외숙모님과 같은 미녀도 있고 또 진홍면, 원성죽과 같은 여우들도 있으니 진남왕비가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왕부인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너는 나를 그 못되 먹은 여우들과 함께 비교하는 것이냐? 그들 네 계집이 지금 여전히 그와 함께 있단 말이지?
모용복은 웃었다.
외숙모님, 안심하십시오. 쌍봉역(雙鳳驛) 홍사탄(紅沙灘)에서 한바탕 악투를 벌인 끝에 진남왕은 단연경에게 일망타진 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다 혈도를 짚혀서는 사로잡힌 몸이 되었습니다. 단연경은 진남왕 일행을 상대한다고 옆에 숨어 있는 나를 주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모든 광경을 똑똑히 본 셈이죠. 그리하여 생질은 말을 달려 그들보다 한 백여 리 앞질러 달려왔습니다. 외숙모님, 너무 늦어서는 안 될 테니까 우리들은 한편으로 취인봉과 미혼약을 안배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 연경을......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지극히 날카롭고 듣고 거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이미 도달해 있네. 그러니 나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네. 그러나 취인봉과 미혼약은 잘 준비해야 할 것이네.
그러자 저쪽에서도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2147] 제목 : [김용] 천룡팔부(天龍八部) 48장
올린이 : 멀티피씨(김효범 ) 96/09/01 02:54 읽음 : 166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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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왕손은 낙담하고 버들가지엔 감로가 맺히다.
(王孫落魄, 즘生消得, 楊枝玉露)
이때 집 밖의 풍파악과 포부동은 일제히 호통을 내지르며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모용복은 문앞으로 달려갔다.
달빛 아래 푸른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가운데 곧이어 잿빛 그림자가 옆에서 덮여 들었다.
바로 등백천과 공야건이 좌우 양쪽에서 협공을 한 것이다.
단연경은 왼쪽 지팡이로 땅을 짚고는 오른손의 지팡이를 옆으로 비껴 들고서 등백천과 공야건 두 사람을 나누어 찌르려고 했다. 찍찍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순식간에 일곱 번의 살수를 펼쳤다.
등백천은 간신히 맞설 수 있었으나 공야건은 견뎌내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포부동과 풍파악 두 사람이 몸을 날려 공격해 갔다.
단연경은 일 대 사의 싸움을 벌이게 되었으나 여전히 여유가 있었으며 크게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모용복은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들고 싸늘한 한 무더기의 푸른 광채를 쏟아내며 단연경을 찔렀다.
단연경은 다섯 사람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었다. 더구나 모용복은 일류 고수였다. 그러나 그는 지팡이 그림자를 흩날리며 여전히 매섭기 이를데 없는 공세를 펼쳐 내었다.
과거 왕 부인과 단정순이 열렬한 사랑을 하게 되었을 때 달빛 아래 꽃 앞에서 영원히 사랑하자는 맹세의 말을 주고 받은 이외에도 무공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었다.
단정순은 일양지와 단씨 검법 등의 무공을 일일이 펼쳐 보이기도 했다.
이때 왕 부인은 단연경이 펼치는 초식이 옛날의 단랑이 펼치던 무공과 똑같은지라 서글픈 심정이 치밀어 올랐다.
별안간 풍파악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미 풍파악은 땅에 쓰러져 있었다.
단연경은 오른손의 지팡이로 그의 몸 밖 한 자쯤 되는 곳을 이리 찌르고 저리 찔렀으나 그의 급소를 찌르지는 않았다.
모용복은 벼락 같이 뒤로 물러서며 부르짖었다.
잠깐!
등백천과 공야건, 포부동 세 사람은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모용복은 말했다.
단 선생, 손에 사정을 두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대와 나는 본래 아무런 원한이 없습니다.
풍파악은 부르짖었다.
이 풍파악이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니 목숨을 잃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공자, 절대 풍가를 위해서 졌음을 시인하지는 마십시오.
단연경은 목에서 괴이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흣, 풍가는 꽤 굳굳한 사내로군.
모용복은 두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단 선생의 신공은 절세적입니다. 정말 탄복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적에서 친구가 되는 것이 어떻습니까?
단연경은 물었다.
조금 전 그대는 취인봉을 준비해서 나를 해치고자 했는데 이제 그런 말을 하는데는 또 무슨 계책을 짜고 있는 것이지?
모용복은 말했다.
당신과 내가 만약 손을 잡고 같이 계책을 세우게 된다면 큰 득을 볼 수 있습니다. 연경 태자, 그대는 대리국의 직계 군주가 아닙니까? 황제의 자리를 남에게 빼앗겼는데 어째서 방법을 강구해서 되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단연경은 말했다.
그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게지?
모용복은 말했다.
당신이 대리국의 황제가 되려면 반드시 나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단연경은 냉소했다.
나는 그대가 나를 도우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아마 그대는 나를 일검에 죽였으면 시원하겠다고 여기고 있을걸?
모용복은 말했다.
내가 그대를 도와 대리국의 황제로 세우자고 하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첫째 나는 단예라는 녀석이 죽도록 밉습니다. 그는 소실산 위에서 나로 하여금 하마터면 자결을 하도록 만들었으며 모용씨가 무림에서 거의 발을 딛고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나는 단예라는 녀석을 죽이고 그대가 황제 자리를 찾도록 도와 내 가슴에 맺힌 분을 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그대가 대리국의 황제가 된 이후 그대가 나를 도울 일을 따로 말씀드리지요.
단연경은 모용복이 기민하고 또한 지혜가 많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이 말하자 칠팔 푼 정도 믿게 되었다.
그 날 단예는 소실산 위에서 육맥신검으로 모용복을 공격하여 모용복이 낭패한 꼴을 당하도록 한 것을 단연경은 친히 목격했다. 따라서 단연경은 그 일을 상기하게 되자 대뜸 불안해졌다.
그는 단정순을 사로잡기는 했으나 단예가 펼치는 육맥신검의 적수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결코 단예의 적수가 되지 못했는데 무슨 방법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냐?
모용복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했다.
힘으로 맞설 수 없으면 꾀로써 취해야지요. 어쨌든 간에 단예라는 녀석은 불초가 사로잡아서 귀하에게 넘겨 처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단연경은 크게 기뻐했다.
그가 줄곧 크게 마음을 놓지 못하던 것은 바로 단예의 무공이 너무 고강해서 자기가 이길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모용복이 그를 사로잡는다면 자기로서는 최대의 화근을 없앨 수 있는 것이었다.
단연경은 말했다.
네가 단예를 사로 잡을 수 있다고?
모용복은 빙그레 웃었다.
이분 왕 부인은 불초의 외숙모님입니다. 단예라는 녀석은 이미 저의 외숙모님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때 왕 부인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바로 단정순의 소재를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용복의 말하는 소리를 듣고 즉시 몸을 돌렸다.
모용복은 다시 말했다.
단예라는 녀석의 부친 단정순은 과거 우리 외숙모님에게 큰 잘못을 저질러 그야말로 깊은 원한은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외숙모님은 그저 귀하로부터 한마디의 약속의 말을 받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귀하가 대리국 황제를 선위받게 된 이후 단정순은 우리 외숙모에게 건네 주시면 됩니다.
단연경은 이 일이 너무나 수월하게 이루어져 아무래도 이 가운데 속임수가 있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단연경은 말했다.
모용 공자, 그대는 내가 등극한 이후에 나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는데 내 능력이 미치는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구려. 그러니 이후 불초가 처리할 수 없을 때 신용없는 소인이 되지 않도록 지금 밝혀 두시는 것이 어떻겠소?
모용복은 말했다.
단 전하께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니 불초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단 전하를 믿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큰 거래를 하고자 하는 마당이니 불초가 마음속에 있는 일을 더 숨길 필요가 없지요. 고소 모용씨는 과거 대연나라 황제의 후손입니다. 우리 모용씨의 역대 조상께서는 반드시 대연나라를 세우라는 유시를 남겼습니다. 전하께서 대리국의 황위에 오르게 된 이후 모용복은 대리국의 황제에게 일만 명의 군사와 그에 따르는 양식을 빌어 대연나라를 세우는 데 사용코자 하려는 것입니다.
모용복이 대연나라 황제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모용박이 소실산 위에서 모용복의 자결을 저지하였을 때 단연경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모용복이 친히 그와 같은 큰 비밀을 자기에게 토로하자 그 의도가 매우 성실하다고 생각했다.
단연경은 말했다.
대리국은 나라가 작고 백성은 가난하여 일만이라는 군사를 창졸지간에 모으기는 어려우나 오천이라면 귀하에게 제공하리다. 그 대신에 대연나라와 대리는 영원히 형제가 되고 사돈의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외다.
모용복은 깊이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모용복이 만약 대연나라의 기업을 회복할 수 있다면 대대손손 대리의 울타리가 되겠으며 결코 폐하의 커다란 은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단연경은 그가 자기를 폐하라고 바꾸어 불러주는 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
거기다가 모용복이 나중에 흐느끼는 말소리까지 내는 것을 보자 재빨리 손을 뻗쳐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공자, 너무 예의를 차릴 것 없소. 그런데 단예라는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소?
모용복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왕 부인이 두 걸음 나서며 말했다.
단정순이라는 사람은 또 어디 있나요?
모용복은 대답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시중들을 거느리고 저희 외숙모님의 처소에서 잠시 쉬도록 하십시오. 단예는 이미 포박을 했으니 즉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단연경은 기뻐했다.
그것 참 좋소이다.
별안간 그의 배에서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 부인은 깜짝 놀랐다.
이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은연중 들려왔고 수레 소리가 덜커덕거리며 들려왔다. 그리고 몇 대의 노새가 끄는 수레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얼마 후 네 사람이 말을 타고 세 대의 커다란 수레를 압송해서 큰길 쪽에서 달려왔다.
왕 부인은 몸을 날려 서둘러 달려나갔다. 속으로 단정순이 반드시 수레 안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더 참을 수 없어진 그녀는 두 필의 말 곁을 지나 손을 뻗쳐 첫번째 커다란 수레의 휘장을 들추려고 했다.
별안간 눈앞에 메기처럼 넓적한 입에 콩알 같은 눈, 그리고 커다란 귀에 대머리가 벗겨진 사람의 머리가 나타났다.
그 사람은 호통을 내질렀다.
뭐하는 것이오?
왕 부인은 깜짝 놀라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제서야 그 추악한 사람의 손에 채찍이 들려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바로 수레를 모는 마부였다.
이때 단연경이 말했다.
세째 아우, 이분은 왕 부인일세. 우리는 함께 그의 장원으로 올라가 쉬도록 하세. 수레 안의 손님들은 모두 다 데리고 들어가도록 하세.
그 마부는 남해악신이었다.
수레의 휘장이 들춰지면서 한 사람이 휘청거리며 걸어 내려왔다. 왕 부인은 그 사람의 안색이 초췌하고 몸에 주름잡힌 비단 장포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밤낮으로 생각하는, 바로 단정순이었다.
그녀는 그만 가슴이 쓰라렸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앞으로 나가며 외쳤다.
단...... 단...... 그대...... 안녕하셨어요!
단정순은 그 소리를 알아 듣고 속으로 크게 놀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왕 부인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그의 안색은 더욱 핼쓱하게 변했다. 그는 각처에서 적잖은 풍류의 빚을 지고 있었다. 빚쟁이들 가운데 왕 부인이 가장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단정순은 한 여자에게만 정을 쏟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나 모든 연인에 대해서는 정말 진실로 대했다. 흠칫하긴 했으나 즉시 왕 부인의 입장을 생각하고 불렀다.
아라(阿羅), 빨리 떠나시오. 저 청포 노인은 대악인이오. 그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시오.
그가 "아라"하고 한 번 부르는 소리에는 사랑하는 정이 가득 실려 있었고 또 지성에서 우러나온 음성이기도 했다.
왕 부인은 가슴 가득히 끓어 오르던 원한과 분노가 삽시간에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단연경과 생질 앞에서 그와 같은 정을 드러낼 수 없는지라 즉시 싸늘히 냉소했다.
그가 대악인이라면 설마하니 그대는 크게 좋은 사람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단연경에게 말했다.
전하, 들어가시죠.
단연경은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보통 관계가 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수작에 말려들지 않도록 해야지."
그는 무예가 고강할 뿐 아니라 대담한 면도 있었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늠름하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왕 부인이 단정순을 잡기 위해서 사들인 한 채의 장원이었다. 그리고 그 규모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장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커다란 마당이 있고 그 마당에는 갖가지의 산다화가 심어져 있었다.
달빛 아래 꽃그림자들이 흐느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무척 운치가 있었고 또 깨끗했다.
단정순은 산다화를 심어 놓은 광경이 마치 과거 왕 부인과 고소 땅에서 즐기던 화원과 똑같은 모양임을 깨닫고 가슴이 쓰라리는 것을 느꼈다.
이때 남해악신과 운중학은 뒤에 있는 두 대의 수레 안의 포로들도 모조리 끌어내렸다.
한 대의 수레 안에는 도백봉, 종 부인, 감보보, 진홍면, 원성죽 네 여인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대의 수레에는 범화 등 대리의 세 대신과 최백천, 과언지의 두 손님이 있었다.
이들은 모조리 단연경에 의해 요혈을 짚힌 상태였다. 원래 단정순은 파천석과 주단신으로 하여금 단예를 호위케 하여 서하로 청혼을 보낸 직후 얼마되지 않아 보정제의 어사가 보내온 논지(論旨)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즉시 대리로 돌아와 등극하라는 전갈이었다. 그리고 보정제 자신은 천룡사로 들어가 출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단정순은 즉시 진홍면과 원성죽을 데리고 천천히 남쪽 길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는 두 여인을 대리성 안에 은밀히 안치할 생각이었으며 왕비 도백봉에게 알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도백봉과 감보보 역시 차례로 도달했다. 곧이어 영취궁의 여인들로부터 전갈을 받게 되었다.
무서운 적이 연도에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단정순이 조심하라는 전갈이었다.
봉황역 옆에 있는 홍사탄에서 일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단정순은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고 고득성마저도 남해악신에게 맞아서 강물 속으로 떨어졌는데 시체조차 찾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남은 사람들은 단연경에게 혈도를 짚혀 사로잡힌 몸으로 남쪽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모용복은 등백천 등 네 사람에게 집밖에서 지키라고 일렀다.
자기가 엄연한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며 시녀와 하인들을 호령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왕 부인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도백봉, 감보보, 진홍면, 원성죽 등 네 여자를 바라보았다. 각 사람들에게는 각기 요염한 데가 있고 각기 아름다운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단연경이 입을 열었다.
왕 부인, 내가 큰일을 끝낸 이후에 이 단정순은 당연히 그대의 손에 넘겨 처치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런데 그 단예라는 녀석은 어디에 있소이까?
왕 부인은 손뼉을 세 번 쳤다. 그러자 두 명의 시녀가 문앞에 이르러 허리를 굽히고 명을 기다렸다.
왕 부인은 말했다.
그 단가 녀석을 데리고 오너라.
단연경은 의자 위에 앉아서 왼손을 단정순의 왼쪽 어깨 위에다 걸쳤다. 그는 단예의 육맥신검을 크게 꺼려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단정순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단예로 하여금 부친을 염려하여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할 속셈이었다.
이때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네 명의 시녀가 단예를 들고 객당 안으로 들어왔다.
단예의 두 손과 두 발은 모두 우근으로 묶여져 있었고 입은 틀어막혀 있었다. 거기다가 눈은 검은 베로 가려져 있어 다른 사람이 볼 때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남왕비 도백봉은 소리내어 부르짖었다.
예아야!
그녀는 달려들어 빼앗으려고 했다. 왕 부인은 손을 뻗쳐 그녀의 어깨를 밀며 호통을 내질렀다.
가만히 앉아 있어요!
도백봉은 요혈을 짚힌 몸이라 힘을 깡그리 잃은 상태였다.
그녀에게 밀리게 되자 그만 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다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왕 부인은 말했다.
이 녀석은 나의 몽약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죽지는 않았지만 지각을 회복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연경 태자, 그대는 사람을 잘못 보았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이다.
왕 부인은 그녀가 기른 한 떼의 취인봉의 침에 스며 있는 독기운이 무섭다는 것만 알았지 단예가 망고주합을 먹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단정순은 쓰디쓰게 웃었다.
아라! 그대가 나의 예아를 사로잡아서 어디다 쓰겠다는 것이오? 그가 그대에게 죄를 짓지는 않았지 않소?
왕 부인은 흥,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들 앞에서 단정순에 대하여 정이 있는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곱지 않은 말로 응수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모용복은 왕 부인이 단정순에 대한 옛 정이 되살아나 그의 큰일을 그르치게 될까봐 입을 열었다.
왜 나의 외숙모에게 죄를 짓지 않았겠소? 그는......단예는 우리 외사촌 누이 어언을 홀려서는 그녀의 순결을 더럽혔소. 외숙모님, 이 녀석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릴 필요없이......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단정순과 왕 부인은 동시에 놀라 부르짖었다.
뭐라구! 그가...... 그녀와......:
단정순은 안색이 창백해서는 왕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직이 물었다.
여자애 이름이 어언이라고 하오?
왕 부인의 성질은 본래 열화와 같았다. 이때까지 오래도록 참은 셈이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한평생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이때는 더 참을 수 없었는지 그녀는 왁, 하니 울음을 터뜨리며 부르짖었다.
모두 다 양심없는 박정한 사내, 그대 때문이에요. 나를 해쳤을 뿐만 아니라 나의 친딸까지 해쳤어요. 어언...... 그녀는...... 그녀는 그대의 친골육이란 말이에요!
몸을 돌린 그녀는 발로 단예의 몸을 마구 차며 욕을 했다.
이 금수만도 못한 색마야! 이 양심도 없는 새끼야! 자기의 친누이인 동생마저 건드리다니...... 나는...... 나는 너와 같은 짐승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여 젓을 담궈도 시원치 않다!
그녀가 그와 같이 발길질을 하며 부르짖자 객당에 있는 사람들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진홍면은 즉시 자기의 딸 목완청을 상기하게 되었고 감보보는 자기의 딸 종영을 떠올리게 되었다.
모두들 겸연쩍고 또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단연경과 모용복은 잠시 생각해보자 모든 것을 환히 내다볼 수 있었다.
진홍면은 부르짖었다.
너 이 계집애야. 그날 나와 내 딸이 고소로 가서 너를 죽이려고 했을 때 너 이 여우 같은 계집애는 피해 버리고 그저 조무래기들만 내보내 우리들만 귀찮게 했었지. 그날 너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런데 너는 왜 사람을 차고 야단이냐?
왕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예를 마구 걷어찼다.
남해악신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바로 사부인지라 즉시 손을 뻗쳐 왕 부인의 어깻죽지를 밀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것 보시오! 그는 나의 사부이외다. 당신이 나의 사부를 차는 것은 나를 차는 것과 마찬가지요. 그대가 나의 사부를 짐승이라고 욕한다면 나 역시도 짐승이 되지 않소? 이 악랄한 여편네 같으니, 우지끈 뚝 하고 그대의 희고 부드러운 목을 비틀어 버릴까 보다.
단연경은 말했다.
악노삼, 왕 부인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 말게. 단가 녀석은 몰염치한 자로서 교묘한 언변으로 그대로 하여금 그를 사부로 부르게 했잖는가. 그러니 오늘 그를 제거하여 그대가 강호에서 사람을 대할 체면이 서지 않도록 하는 일은 없도록 하세.
남해악신은 반문했다.
그가 나의 사부라는 것은 정말 틀림없는 일이외다. 나를 속인 것도 아닌데 내가 어찌 그를 해칠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손을 뻗쳐 단예의 손과 발을 묶은 줄을 끄르려고 했다.
단연경은 말했다.
세째, 내 말을 들어. 빨리 악치전을 꺼내서 그 녀석의 목을 잘라 버리라구.
남해악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오늘만은 악노삼이 그대의 말을 듣지 않겠소. 나는 반드시 사부를 구해야겠소이다.
그는 힘주어 잡아당겼다. 그러자 단예를 묶고 있던 우근의 한 줄이 끊어져 나갔다.
단연경은 깜짝 놀랐다. 단예가 만약 속박에서 벗어나고 육맥신검을 펼치게 된다면 그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일을 이루기는커녕 목숨을 잃을 우려마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한 김에 그는 휙, 하니 지팡이로 남해악신의 뒷등을 노리고 찔렀다. 내력이 실린 지팡이라 그만 남해악신의 등과 가슴팍을 꿰뚫고 말았다.
남해악신은 뒷등과 가슴팍에 격렬한 고통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고 한 자루의 강철 지팡이가 가슴팍에서 불쑥 튀어 나온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시 아연해져 고개를 돌려 단연경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가득히 의문의 빛이 서려 있었고 어째서 단 첫째가 자기에게 갑자기 살수를 쓰는지 알지를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단연경은 그의 눈빛을 대하게 되자 마음속에 삽시간에 뉘우치는 마음이 일었고 미안한 마음 또한 겉잡을 수 없이 치밀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가책은 얼핏 떠오르고는 즉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오른손을 떨쳐서는 강철 지팡이를 그의 몸에서 뽑으며 호통을 내질렀다.
네째, 그를 데리고 가서 묻어라. 이 첫째의 말을 듣지 않은 본보기다.
남해악신은 크게 한소리 부르짖더니 땅바닥에 쓰러졌다. 가슴팍과 등허리 두곳의 상처에서 피가 샘솟듯 흘러나왔다. 그리고 한쌍의 눈동자를 크게 부릅떴다. 정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운중학은 그의 시체를 잡더니 끌고 나갔다. 그는 남해악신과 똑같은 사대 악인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평소 화목하지 못한 터였다. 그리고 남해악신보다 못했기 때문에 부득불 양보를 했지만 이때 남해악신이 첫째에게 죽음을 당하자 속으로 통쾌하게 여겼다.
뭇 사람들은 남해악신이 단연경의 일당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서로 주고받는 한 마디가 어긋나자 그만 그의 목숨을 취하는 것을 보고 단연경의 흉폭 잔인함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형편인지라 그만 간이 콩알만해지고 말았다.
단예는 남해악신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피가 자기의 얼굴과 목에 뿌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토록 오랜 시간을 두고 그의 사부가 되었는데도 한 번도 그에게 어떤 이득을 베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해악신이 수차에 걸쳐 자기를 구했으며 오늘은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데 대해 지극히 마음이 아팠다.
단연경은 냉소했다.
나에게 순종하는 자는 크게 일어날 것이고 나를 거역하는 자는 망하게 될 것이다.
그는 강철 지팡이를 들고는 단예의 가슴팍을 찌르려고 했다.
별안간 한 여인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천룡사 밖 보리수 아래의 거지는 초라하기 이를데 없었고 관세음보살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길렀네.
단연경은 천룡사 밖이라는 한 마디를 듣게 되었을 때 강철 지팡이를 허공에 멈춘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 네 마디의 말을 듣게 되자 강철 지팡이를 부들부들 떨며 천천히 거두어 들였다.
그는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도백봉의 시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수천 수만 마디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단연경은 속으로 크게 충격을 받고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관...... 관세음보살......
도백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대답했다.
그대는...... 그대는 그 애가 누구인지 아세요?
단연경은 그만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사물이 모호해졌다. 마치 이십 년 전 어느 달 밝은 밤으로 되돌아 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날 그는 끝내 동해에서 대리로 돌아와 천룡사 밖에 이르게 되었다.
단연경은 호남성과 호북성, 그리고 광동성과 광서성의 길에서 강적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적을 모조리 죽이긴 했으나 자기 자신도 중상을 입고 두 다리가 분질러졌으며 얼굴에도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목에도 적의 한 칼을 받아 목소리도 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그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으며 전신은 더러워서 악취가 풍겼다. 그리고 상처에서는 구더기 끓고 있었으며 수십 마리나 되는 파리들이 그를 에워싸고 윙윙대며 마구 날아 다녔다.
본래 그의 무공은 고강해서 족히 만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중상을 입은 몸으로 여느 병졸 한 사람도 당해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가 버티고 버텨서 길을 와 천룡사 밖에 이른 것은 다만 한 가닥의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고영 대사로 하여금 일을 처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고영 대사로 말하면 그의 부친과는 친형제였고 그에게는 친숙부였다. 고영대사는 득도한 고승이었다.
천룡사는 대리국 단씨 황제의 울타리이기도 했다. 역대 황제가 자리에서 물러나 중이 되었을 때 은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감히 대리성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먼저 고영 대사를 만나보고자 했다. 그리고 지객승은 단연경에게 무슨 볼일인지 할 말이 있으면 자기가 방장에게 전할 것이니 말하라고 했다.
단연경으로서는 감히 자기의 신분을 들추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팔굽으로 땅바닥에 대고 기어서는 절 옆에 있는 한 그루 보리수 아래로 기어가서는 고영대사가 참선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오로지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저 화상은 고영 대사가 설사 참선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외부의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대리에서 일각이라도 더 머무르게 된다면 그만큼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누구든지 나를 알아 보기만 한다면...... 나를 죽여 단정순에게 잘 보이려고 할 것이다."
그의 전신은 높은 열로 휩싸여 있었고 각처의 상처는 아프고 또 근질근질해서 실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면서 그날까지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 것만 못할테니 이대로 자결을 하자."
그는 몸을 일으켜서는 보리수에다 머리를 부딪쳐 죽고자 했다. 그러나 전신에는 기운이 빠졌고 또 기갈에 허덕이고 있는 판이라 땅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살아날 용기가 없었고 죽을 용기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달이 중천에 떠오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한 백의의 여인이 안개 속에 두둥실 가까이 다가오게 되었다.
나뭇가지 사이와 잡초 위로는 허연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그 백의의 여인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드리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발을 땅에 대지 않고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달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몽롱하여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연경은 그녀의 청초한 아름다움에 놀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 여자가 관세음보살처럼 단정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틀림없이 보살께서 하강하시어 이 어려움에 처한 황제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거룩한 천자에게는 백이나 되는 영물들이 뒤따르며 보호한다고 하지 않는가. 관세음보살님, 만약 내가 왕위에 오를 수 잇도록 보살펴 주신다면 나는 반드시 그대의 불상을 만들고 절을 세워서는 대대로 공양을 바치고 쫓지 않겠습니다."
이때 그 여인은 천천히 다가왔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서 떠나가려고 했다. 단연경은 그녀의 옆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옆 얼굴은 창백하여 혈색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돌연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오로지 성심성의로 그대를 대했다. 그런데 그대는......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 한 여인이 생겨나자 또 한 여인을 거두어 들였다. 우리들이 보살 앞에서 한 맹세를 모조리 저버렸다. 나는 그대를 한 번 또 한 번 용서했으나 이제는 더 용서할 수 없다. 그대가 나에게 잘못했으니 나도 그대에게 잘못을 저지르겠다. 그대는 나를 돌려 세워놓고 다른 사람을 찾았으니 나 역시 다른 사람을 찾겠다. 그대들 한 나라 남자들은 우리 파이족의 여자들을 사람처럼 여기지 않고 나를 업수이 여기고 고양이와 개, 돼지, 또는 소처럼 여기고 있다. 나는...... 반드시 보복을 해야겠다. 우리 파이족의 여자들도 너희 한 나라 남자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겠다.
그녀의 말하는 소리는 매우 나직했고 완전히 중얼거리는 소리였으나 그 어조에는 깊은 노기가 서려 있었다.
단연경은 그만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녀는 관세음보살이 아니다. 원래 파이족의 여자였구나. 한 나라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 모양이구나."
파이는 대리국 일대의 종족이었다. 파이족 여자들은 퍽이나 아름답고 피부도 희고 고와 한 나라 사람보다 훨씬 나은 편이었다. 다만 남자들은 문약하고 사람의 수가 적기 때문에 한 나라 사람의 업신여김을 받았다. 그런데 그 여자가 점점 멀리 떠나게 되자 단연경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니다. 파이족 여자들은 아름다움으로 유명하기는 하나 이와 같이 신선과 같은 모습을 갖추지는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녀의 몸에 걸치고 있는 백의는 그야말로 얼음으로 만들어진 비단 옷과 같지 않은가. 파이의 여자에게 어찌 저와 같이 우아한 옷차림이 있겠는가. 저분은 틀림없이 보살의 화신이다. 나은...... 절대로 그를 놓쳐서는 안된다."
그는 이때 생사의 갈림길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저 보살이 나타나 구원해 주어 그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보살이 점점 멀어져 가게 되자 죽어라 하고 기어 나가며 부르짖으려고 했다.
보살, 나를 좀 구해주십시오.
그러나 목의 상처로 그저 쉰 듯한 음성만이 몇 번 울려 퍼졌다.
그 백의 여인은 보리수 아래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몸을 돌렸다. 흙 위에 한 무더기의 사람 같기도 하고 짐승 같으나 짐승이 아닌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온 몸에 피칠을 하고 더럽기 이를데 없는 거지가 아닌가. 그녀는 몇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세히 쳐다보았다.
이 거지의 얼굴, 손, 몸 도처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구더기가 기어 다니고 있었으며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그 여자는 이때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남편의 박정한 마음에 대해 보복을 하자고 결심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자포자기한 끝에 자기 자신을 짓밟고 싶은 심정에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이 거지의 형상이 그토록 흉칙한 것을 보고 처음에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려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을 돌렸다.
"나는 천하에서 가장 추악하고 가장 더러우며 가장 비천한 남자와 관계를 맺어야겠다. 그대는 왕야이고 대장군이니 나는 냄새 나는 거지와 관계를 맺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 소리도 하지않고 천천히 비단 적삼을 풀어 헤쳤다. 그리고는 단연경의 앞으로 가 단연경의 품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하얀 산다화 꽃잎과 같은 팔을 뻗쳐 그의 목을 껴 안았다......
엷은 구름이 두둥실 흘러와 달빛을 가렸다. 달이 마치 엷은 구름을 손짓하여 불러서는 단연경의 눈을 가리도록 한 것 같았다.
달은 그와 같은 광경이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토록 고귀한 부인이 하얀 산다화 꽃잎처럼 그토록 희고 고운 몸뚱이를 온몸이 피고름으로 얼룩져 있는 거지에게 바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 백의 여자가 떠나간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단연경은 여전히 꿈속에 잠겨있는 듯했다.
그러나 코에는 아직도 그녀의 몸에서 풍기던 담담한 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자기가 조금 전 손가락으로 흙바닥 위에 쓴 글씨가 있지않은가.
"그대는 관세음보살인가?"
그가 그와 같은 일곱 자를 써서 물었을 때 그 여보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안간 몇 방울의 물방울이 글자가 적혀 있는 흙 위에 떨어졌다.
바로 그녀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단연경에게는 관세음보살이 수양버들가지에 맺힌 감로(甘露)를 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연경은 사람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관세음보살은 때때로 여자의 몸을 하고서 욕념에 사로 잡힌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보살은 가장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다.
"반드시 관세음보살의 화신일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나에게 좌절하지 말라고 깨우쳐 준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속된 사내가 아니고 진짜 하늘이 내린 천자가 아닌가? 그렇지 않을진대 어찌 그와 같은 일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단연경은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을 때 갑자기 기다란 머리카락의 백의 관음이 자기를 상대해 주게 되자 대뜸 크게 정신이 솟구쳤다.
천명이 자기에게 돌아 왔으니 이후에 반드시 보위에 오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서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결코 자기의 목숨을 빼앗지 못하리라는 신념이 굳어지게 되자 그의 눈앞에는 광명의 빛이 비치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고영 대사가 참선에서 나섰는지의 여부를 묻지 않고 보리수 아래에서 관세음보살의 은덕에 깊이 감사드렸다.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삼아서는 옆구리에 끼우고 표연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는 감히 대리의 경내에서 머물 수가 없었다. 멀리 남쪽 황량하고 외진 곳으로 내려가서는 상처를 치료한 이후 가전의 무공을 고되게 연마했다. 처음 오년 동안은 지팡이로 발을 대신하는 것을 습득했다. 그리고 다시 일양지의 무공을 강철 지팡이에 실어 펼치는 수법을 익혔다.
그리고 다시 오 년을 연마한 이후 호남성과 호북성으로 달려가 모든 원수들을 잡아 죽였는데 그 집안의 닭 한 마리나 개 한 마리 남기지 않았다.
그 수단의 흉폭하고 악랄함은 실로 듣도 보지도 못한 일이어서 천하 제일 대악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다시 섭이랑, 남해악신, 운중악 세 사람을 망라하여 자기 편으로 삼았다.
그는 수차에 걸쳐 암암리에 대리로 돌아와서는 황제 자리에 오르려고 했으나 매번 단정명의 기틀이 견고하여 좀처럼 흔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맥없이 물러서곤 했다.
최근 한 번은 황미 노승과 바둑판으로 내력을 겨루게 되었다. 이제 이겼는가 보다고 생각했을 때 뜻밖에도 단예라는 녀석이 중도에서 끼여들어 그의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그는 강철 지팡이를 뻗쳐 단예를 찔러 죽여서는 단정명과 단정순의 후사를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단 부인이 그 네 귀의 말을 읊은 것이었다.
천룡사 밖에서 보리수 아래의 거지는 초라하고, 관음세보살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길렀네.
이 한마디의 말은 매우 나직했으나 단연경이 들을 때는 청천벽력과 다름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단 부인의 얼굴 표정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설마...... 그녀가 바로 그때 관세음보살......"
이때 단 부인은 천천히 손을 쳐들더니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풀어 헤쳤다. 그러자 구름 같은 머리채가 어깨 위로 드리워지게 되었고 어떤 머리카락은 앞 얼굴로 흘러 내리게 되었다.
바로 그날 밤 천룡사 밖 보리수 아래서 모습을 드러냈던 관세음보살의 형상이었다. 단연경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보살인줄 알았더니 원래 진남왕비였구나."
기실 그때 그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상처가 치유되면서 그렇게 올랐던 열도 떨어져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 자기에게 몸을 바친 백의의 여인이 사람이지 결코 보살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환상이 물거품 되는 것이 싫어 끊임없이 자기에게 타이르고 있었다.
"그것은 백의의 관음이다. 그것은 백의의 관음이다."
이때 그는 진상을 알아 차리게 되자 마음속으로 커다란 의문이 솟구쳐 올랐다.
"어째서 그녀는 그와 같은 행동을 했을까? 어째서 그녀는 온몸에서 피고름이 흐르는 거지를 예쁘게 보았을까?"
그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별안간 몇 개의 물방울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바로 그날 밤처럼...... 눈물인지 아니면 수양버들가지의 감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 보니 단 부인도 눈에 눈물을 듬뿍 담고 있지 않는가. 갑자기 그의 굳굳하던 마음도 누구러졌다.
그는 목쉰 어조로 물었다.
그대는 그대의 아들의 목숨을 용서하라는 것이오?
단 부인은 고개를 가로젓고 나직이 말했다.
그의......그의 목에는 조그만 금붙이가 달려 있는데 거기는 그의 팔자(八字)가 새겨져 있어요.
단연경은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자기 아들의 목숨을 나에게 빌지 않고 나보고 무슨 금 조각을 보라는 것일까?"
그는 과거 천룡사 밖 보리수 아래에서 일어난 진상을 알게 된 이후 단 부인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우러러보고 고마워하는 정이 솟아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팡이를 뻗쳐서는 그녀의 짚혔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단예의 목을 살폈다.
단예의 목에는 지극히 가느다란 금 목걸이가 달려 있었다. 금 목걸이를 꺼내 놓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목걸이 끝에는 기다란 네모진 조그만 금패가 달려 있었다.
한쪽에는 장명백세(長命百歲)라고 씌어 있었다. 뒤집어 보니 아래와 같은 조그만 글귀가 씌어 있었다.
"대리보정이년계해십일월이십삼일생(大理保定二年癸亥十一月二十三日生)."
단연경은 보정 이년이라는 글자를 보자 속으로 흠칫했다.
"보정 이년? 바로 그해 이월에 나는 포위 공격을 받고 몸에 중상을 입고 천령사 밖에 도달하게 되었다. 어이쿠, 그가......십일월이 생일이라면 그때부터 꼭 열달이 아닌가. 열달 만에 아아......그는...... 놀랍게도 나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의 얼굴은 심한 상처를 몇 곳에 입고 있었다. 따라서 여러 가지 경악하고 의아스러운 표정을 모조리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의 얼굴은 한점의 핏기도 없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는 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동되어 고개를 돌려서는 단 부인을 바라보았다.
이때 단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업보예요, 업보.
단연경은 한평생 남녀의 정을 누려보지 못했고 가정을 가진 즐거움을 누려보지 못한 터였다. 그런데 별안간 이 세상에 자기의 친아들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 가득이 끓어오르는 기쁨은 실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세상의 명예나 영광, 그리고 제왕의 기업 같은 것은 아들 하나를 두는 것보다도 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람과 기쁨에 얽혀서 그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크게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오른손에 들렸던 강철 지팡이가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왼손의 강철 지팡이도 땅에 떨어뜨렸다. 가슴 속에서는 그저 우렁찬 소리로 내뱉고 싶은 한 마디가 있었다.
"나에게 아들이 있다!"
그는 흘낏 단정순을 바라 보았다.
단정순의 얼굴에는 의혹의 빛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자기 부인의 그 몇 마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단연경은 다시 단정순을 바라보았다가 단예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얼굴이 네모지고 한 사람은 얼굴이 갸름했다.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그런데 단예의 준수한 얼굴 모습은 자기의 젊을 때와 칠팔 푼 비슷하지 않는가.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자부심을 느꼈다.
"네가 설마 대리국의 황제가 되고 내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뭐가 대수롭단 말이냐. 나에겐 아들이 있지만 네게는 아들이 없다."
이때 그의 머리 속은 다시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눈앞이 약간 어두워졌다.
나는 너무나 기뻐서 어지러워진 모양이군.
별안간 쿵, 하는 소리가 나면서 한 사람이 문가에 쓰러졌다. 바로 운중학이었다.
단연경은 깜짝 놀라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그는 왼손을 들어 허공을 격하고 낚아채려 했다. 허공을 격하고서 강철 지팡이를 들려고 했으나 잡는 시늉을 했을 뿐 내력을 돋울 수가 없었다. 땅바닥의 강철 지팡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연경은 더욱더 놀랐다.
그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오른손에 다시 힘을 주어 낚아채려고 했다.
오른손의 강철 지팡이 역시 꼼작하지 않았다.
진기를 돋우었으나 내력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다른 사람의 술수에 넘어간 것을 깨달았다.
이때 모용복이 말했다.
단 전하, 저쪽 방에 단 전하께서 급히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시어 한 번 보시도록 하시지요.
단연경은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구요? 모용 공자가 그를 데려오도록 하시오.
모용복은 말했다.
그는 걸음을 옮겨 놓을 수가 없습니다. 역시 단 전하께서 수고를 하셔야겠습니다.
이 몇 마디의 말을 듣자 단연경은 모든 것을 환히 알 수 있었다. 몰래 미혼약을 쓴 것은 모용복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자기의 무공이 무서운 것을 알고는 혹시나 약기운이 부족하게 될까봐 걸음을 옮겨 보라고 한 것이었다. 그것은 공력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려는 수작이기도 했다.
단연경은 집안으로 들어와 각별히 조심을 했으며 한 모금의 찻물도 마시지 않았고 어떤 특이한 냄새를 맡은 바도 없는데 어째서 중독이 되었을까 하고 의아해했다.
"틀림없이 내가 단 부인의 말을 들은 후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고 주위의 이상한 움직임에 경각심을 돋우지 않게 되었을 때 그의 수작에 넘어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 우리 단씨는 독을 쓰는데 뛰어나지 못하오. 그대는 마땅히 일양지로써 나를 상대해야 옳았소.
모용복은 미소했다.
단 전하께서는 일대 영걸이신데 어찌 평범한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불초의 이 비수청풍은 과거 서하의 사람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다만 조금 다른 약을 보태어 냄새를 없게 했죠. 단 전하께서는 한때 서하 일품당에 예속되었죠? 불초가 비수청풍으로 상대해 드리는 것은 고소 모용씨의 "그대의 수법을 그대의 몸에 펼친다"는 가풍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연경은 마음속으로 너무 소홀했다고 자책했다. 그 즉시 눈을 감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으며 암암리에 운기행공하여서는 독기를 몸밖으로 몰아내려고 했다.
모용복은 웃었다.
이 비수청풍의 독은 운기행공을 한다하더라도 해독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왕 부인은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어째서 이 외숙모마저도 독을 써서 쓰러뜨리려고 하느냐! 빨리 해약을 가져 오너라!
모용복은 말했다.
외숙모님, 이 조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중에 가장 먼저 외숙모님의 독을 풀어드리죠.
왕 부인은 노해 부르짖었다.
뭐가 잠시 후냐, 빨리 빨리 해약을 가져 오너라!
모용복은 말했다.
정말 외숙모님께 미안합니다. 해약은 이 생질의 몸에 없습니다.
단 부인 도백봉은 짚혔던 혈도가 원래 풀어지긴 했으나 곧이어 비수청풍에 의해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객당의 뭇 사람들 가운데 다만 모용복만이 먼저 해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괜찮았고, 단예는 백독이 침범하지 않는 몸이라 중독되지 않았다.
그러나 단예는 정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왕 부인의 말을 들은 것이다.
모두 그대 양심없는 박정한 사내 때문이야. 나를 해친 것은 고사하고 그대의 친딸까지도 해쳤다. 어언은......어언......그녀는......그녀는 바로 그대의 친 골육이란 말이에요!
이때 그는 가슴팍이 꽉 막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삽시간에 그는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았다. 만약에 손과 발이 묶여 있지 않고 입이 틀어 막혀 있지 않앗더라면 그야말로 마구 날뛰며 큰소리로 부르짖고 말았으리라.
그는 마음속의 슬픔으로 한 무더기의 기식이 가슴팍에 꽉 막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차츰 손과 발이 차가와졌으며 뻣뻣해졌다. 그는 속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이쿠, 이것은 십중팔구 백부님이 말하던 주화입마의 상태이다. 내공이 심후하면 심후할수록 이 기세가 무섭다고 하던데 큰일이구나. 내가......어떡하다가 주화입마하게 되었지?"
이때 차가운 기운이 삽시간에 무릎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단예는 처음엔 속으로 두려워 했으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어언이 나의 누이라면 나의 이 정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니 이 세상에 살아서 무슨 재미를 느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주화입마되어 몸뚱이가 흙먼지가 되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한평생을 번민 속에서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이때 단연경은 세 번이나 진기를 끌어올리려고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가슴속은 더욱더 답답해졌다. 그 즉시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모용복은 말했다.
단 전하, 불초가 그대에게 독을 써서 꼼짝 못하게 했지만 결코 그대를 해칠 뜻은 없습니다. 단 전하께서 저에게 한 가지 일만 응락해 주신다면 불초는 두손으로 해약을 바치겠으며 전하에게 큰절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은 매우 겸손하고 깍듯했다.
단연경은 냉랭히 말했다.
이 단가가 이토록 오랜 나이를 살았으며 무수한 풍랑을 겪어 온 사람인데 어찌 남의 협박을 받고 무슨 일을 응락할 수 있겠는가?
모용복은 말했다.
불초가 어찌 전하에게 협박을 하겠습니까. 이곳의 뭇 사람들은 모두가 견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불초는 먼저 전하에게 사과를 드리고 다시 공손히 전하에게 한 가지 일을 부닥드리도록 하죠.
그는 무릎을 꿇고 즉시 절을 했다. 쿵쿵쿵쿵, 네 번 큰절을 올리는데 심히 공손했다.
뭇 사람들이 모용복이 갑자기 그와 같은 대례를 올리자 모두다 의아하게 생각했다. 지금 그는 전 형세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연경은 크게 의혹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 이토록 공손한 태도를 보이자 마음속의 울화도 약간 누그러졌다.
불초의 소원은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대연나라를 세우겠다는 생각은 결코 일조일석에 이룰 수 있는 공이 아닙니다. 오늘 제가 먼저 전하를 도와 대리국의 황위에 오르시도록 하겠습니다. 전하에게는 자식이 없으니 아무쪼록 전하께서는 저를 의아들로 삼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이 합심협력하여 큰일을 이루게 되면 서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단연경은 전하에게 난 자식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단 부인을 바라보았다. 네 개의 시선은 서로 마주치게 되었고 삽시간에 많은 말을 주고받은 셈이 되었다.
단연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한 마디의 말을 조금 전에 했더라면 확실히 서로 좋은 일이 될테지. 그러나 지금 나는 이미 나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어찌 황위를 너에게 내려줄 수 있으랴?"
생각을 마친 단연경은 말했다.
그대는 진정 내가 그대를 의아들로 삼기를 바라는 것이오?
모용복은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단연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나는 독약에 중독되어 있다. 그러니 억지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독기가 풀어지게 되었을 때는 즉시 그를 죽이는 수밖에 없구나."
그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성을 단씨로 고치겠다는 것이오? 그대가 대리국의 황제가 된다면 연나라를 회복하겠다는 생각은 거두워들여야 할 것이외다. 모용씨는 이후 후손이 없어지게 되는데 그대는 모두 할 수 있소?
모용복은 속으로 우선 응낙하고 나중에 권력을 잡은 후에 단연경을 죽이리라 결심했다.
그는 짐짓 망설이는 체하다가 입을 열었다.
불초는 근본을 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사를 이루는 자는 조그만 일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전하를 부친으로 삼는 이상 마땅히 단씨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며 한 마음에 두 가지 뜻을 품지 못할 것입니다.
단연경은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정말 잘 되었군, 잘 되었어! 노부는 강호를 떠돌아 다니느라고 처도 없고 자식도 없는데 뜻밖에는 만년에 이르러 훌륭한 아들을 두게 되었으니 크게 흐뭇한 노릇이외다. 그대라는 아들은 나이가 젊고 준수하여 정말 이 늙은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는구려. 내가 한평생 가장 좋아하는 일은 이외에는 아마 없을 것 같구려. 관세음보살님, 제자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며 온몸이 가루가 된다하더라도 그대 백의의 관세음보살이 베풀어 준 은덕에 만의 하나라도 보답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이 격동된 그는 두 줄기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합장하는데 그가 똑바로 대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단 부인이었다.
단 부인은 지극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는 그녀의 시선은 시종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단연경의 그 몇 마디의 말은 실제에 있어서 그의 진짜 아들인 단예를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단 부인 이외에는 그 누구도 알아 듣지를 못했다.
모용복은 기뻐서 말했다.
전하는 무림에서 선배이시고 또한 영명한 협사이시니 자연 한 마디가 무서운 것을 알고 결코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의부님께서는 아들의 절을 받으십시오.
그는 무릎을 꿇고는 다시 절을 했다.
별안간 문밖에서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이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바로 포부동이었다.
모용복은 즉시 몸을 일으켰으며 안색이 약간 변해서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포 세째 형은 어째서 그와 같은 말을 하시오?
포부동은 말했다.
공자는 대연나라 모용씨의 당당한 황손의 후손인데 어찌 성을 단씨로 바꾼단 말입니까? 공자께서 이 사람 같지도 않고 도깨비 같으나 도깨비 같지도 않는 녀석을 의부로 삼는다면 설사 장래에 황제가 된다 하더라도 영광스러운 일이 못됩니다. 더군다나 모용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대리의 황제가 된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모용복은 그의 말이 무례한 것을 듣고 속으로 크게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포부동은 그의 심복이었다.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이때에 크게 꾸짖고 싶지 않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포 세째 형, 많은 일을 그대는 일시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오. 이후 내 천천히 설명을 해드리겠소.
포부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공자, 이 포부동이 어리석기는 하나 그대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소이다. 그대는 그저 한신의 흉내를 내어 사타구니 밑을 기어 지나간 욕됨을 잠시 참고서 훗날의 출세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이까? 공자, 그대의 마음 씀씀이는 좋다고 할 수 있으나 이렇게 된다면 불충하고 불효하고 불인하고 불의한 자가 되고 말 것이며 양심의 가책을 면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거기다가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은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모용복은 마음속으로 지극히 분노에 차서는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포 세째 형은 지나치구려. 내가 어찌하여 불충, 불효, 불인하고 불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오?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가 대리로 투신했다가 이후 다시 반역을 도모한다는 것은 불충이고 그대가 단연경을 부친으로 삼고 단씨에 효성을 다한다는 것은 모용씨에 대한 불효이며 만약 모용씨에 대한 효성을 하고자 한다면 단씨에게 불효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대리의 많은 신하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것은 불인이라 할 수 있고 또 그대가......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돌연 퍽, 하는 소리가 났다. 포부동은 등을 심하게 얻어맞게 되었다. 곧이어 모용복이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친구를 팔아 영화를 꾀하니 불의하다 하겠지.
그의 일장은 음유한 내력을 잔뜩 돋우고서 포부동의 영대와 지양 두 곳의 요혈 위를 후려쳤다.
바로 치명적인 장력이라 할 수 있었다. 포부동은 그만 왁, 하니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고는 땅바닥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포부동이 모용복에게 반박을 하게 되었을 때 등백천, 공야건, 풍파악 세 사람은 문 입구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포부동의 말이 지나치긴 하지만 옳은 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모용복이 일 장으로 포부동을 내려치자 세 사람은 깜짝 놀라 일제히 달려 들어왔다. 풍파악은 포부동의 몸을 안고 불렀다.
세째 형, 세째 형, 어떻게 되었소?
포부동의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풍파악은 그의 코앞에다가 손을 가져가 보았다. 이미 숨이 멈추어진 이후였다. 죽게 된 바로 직전에 극도의 슬픔에 도달하여 눈물을 주르르 흘린 것이 틀림없었다.
풍파악은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세째 형, 그대는 숨이 끊어지기는 했으나 공자에게 "어째서 독수를 써서 나를 죽였소"하고 물어보려 했지요?
그는 고개를 돌리고 모용복을 쳐다보았다. 그 눈초리는 적대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등백천은 낭랑히 말했다.
공자, 포 세째 아우는 남의 말끝마다 붙잡고 늘어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쯤 공자는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던 일입니다. 설사 공자에게 드리는 말씀에 무례한 일이 있고 아래위를 돌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약간 꾸짖기만 하면 될 일이지 어찌하여 그의 목숨을 빼앗는단 말입니까?
모용복은 다급한 김에 그만 독수를 쓰고 말았다. 그렇지 않을 때 금방 손에 들어올 황관(皇冠)이 날아갈 판이었던 것이다. 이때 모용복은 풍파악과 등백천의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의 일은 양쪽 다 어렵게 되었다. 풍과 등 두 사람에게 죄를 짓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연경 태자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의심을 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말했다.
포부동이 나에게 무례한 언사를 썼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가 나를 따른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어찌 몇 마디 반박했다고 해서 그의 목숨을 해쳤겠소? 그러나 나는 지성으로 전하를 의부로 삼고자 하는데 그는 우리 부자의 정을 이간질하니 어찌 용납할 수 있겠소?
풍파악은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공자는 마음속으로 십여 년간 그대를 따라 생사를 같이 한 포부동이 단연경이란 사람에 비할 바가 안 된다고 생각하신단 말씀입니까?
모용복은 말했다.
풍 네째 형, 화내지 마시오. 내가 대리의 단씨에게 투신하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받들겠다는 것이지 결코 다른 생각은 갖지 않고 있소. 포 세째 형은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라 부득이 사정없이 손을 쓰게 된 것입니다.
등백천과 공야건, 그리고 풍파악 세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등백천은 낭랑히 입을 열었다.
공자, 우리 형제 세 사람은 의형제로 맺어지지는 않았지만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으며 그 정은 골육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 점 공자께서 평소부터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모용복은 기다란 눈썹을 꿈틀하고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등 첫째 형은 포 세째 형의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오? 세 분이 함께 덤벼들도록 하시오. 그런다고 모용복이 두려워할 줄 아시오?
등백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옛부터 함께 하게 되면 남게 되고 함께 할 수 없을 때는 떠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다시는 공자를 받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군자는 절교를 할 때 욕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공자께서는 훌륭히 되십시오.
등백천, 공야건, 풍파악, 세 사람은 동시에 읍을 하며 말했다.
공자, 안녕히 계십시오.
풍파악은 포부동의 시체를 어깨에 들쳐멨다. 그리고 세 사람은 성큼성큼 대문을 나섰는데 결국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모용복은 헛웃음을 흘리며 단연경에게 말했다.
제가 홀몸으로 대리로 들어가는 것으로 볼 때 충성을 다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며 결코 다른 뜻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짐작하리라 믿습니다.
단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매우 잘 되었소, 매우 잘 되었어.
모용복은 말했다.
이제 저는 의부의 독을 풀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품속에서 조그만 자기병을 꺼내서는 내밀려다가 속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는 휙, 하니 장검을 뽑아 들고 말했다.
의부, 저의 첫번째 공로는 바로 단예라는 녀석을 먼저 죽여 단정순의 후사를 끊어서 그로 하여금 황위를 의부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언이 다시 나의 누이 동생으로 변했으니 나는 이미 살고 싶지 않다. 그대가 일검으로 나를 죽인다면 더 말할 나위없이 잘된 일이다."
이때 단연경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너의 효성심은 정말 장하다. 그러나 저 녀석은 너무나 고약하여 몇 번이나 이 애비에게 죄를 지었다. 그의 백부와 부친은 나의 황제 자리를 빼앗았으며 나의 전신이 불구가 되고 형체도 다 갖추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니 이 애비가 반드시 저 녀석을 친히 죽여야만 내 가슴속에 맺힌 한을 풀 수 있겠구나.
예.
모용복은 몸을 돌려 장검을 단연경에게 주며 말했다.
어이구, 제가 멍청해졌습니다. 먼저 의부의 독을 풀어 드려야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는 장검을 검집에 꽂고 다시 그 조그만 자기병을 꺼냈다. 흘낏 보니 단연경의 눈에는 득의의 빛이 약간 맺혀 있었다. 그 어떤 옆사람에게 눈짓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모용복은 그의 눈초리를 따라 바라보니 단 부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고맙고도 기뻐하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모용복은 이를 보자 더럭 의심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꿈에도 단예가 바로 단연경과 단 부인의 소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모용복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단연경과 단정순은 암암리에 어떤 결탁을 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오로지 단연경을 위해 몇 가지 큰 공을 세워 그의 믿음을 두텁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즉시 고개를 돌리고 단정순에게 말했다.
한 달 안으로 그대는 등극을 하시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난 이후 연경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시오.
단정순은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나의 황위는 나의 아들 단예에게만 전위(傳位)할 수 있소. 내가 황제 자리를 일찌감치 물려주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남에게 물려준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모용복은 노해 부르짖었다.
좋아, 그렇다면 나는 이 단예라는 녀석을 일검에 죽여버리겠소. 그때 그대는 황제 자리를 그의 귀신에게 물려주도록 하시오.
그는 휙, 하니 다시 장검을 뽑아 들었다.
단정순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대는 이 단정순을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는가? 그대가 나의 아들을 죽인다면 설마하니 내가 그대의 뜻에 즐겁게 따를 성싶은가?
모용복은 일시 망설이며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단예를 죽인다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단정순이 아들을 죽인 원한을 품게 된다면 그야말로 자기의 목숨도 돌보지 않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된다면 단연경은 황위에 오를 수가 없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단연경이 황위에 오를 수 없다면 자기는 더욱더 대리국의 황위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손에 장검을 들었다.
검날에는 푸른 광채가 감돌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하얀 얼굴에는 파란 빛이 떠올랐다. 모용복은 별수 없다는 듯이 단연경을 바라보며 그의 지시를 받으려고 했다.
단연경은 말했다.
이 사람은 고집이 세니 만약 이 자가 이대로 자결이라도 한다면 우리의 커다란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마네. 좋아, 단예라는 녀석을 잠시 죽이지 않도록 하지. 그들이 우리 부자의 손아귀에 쥐어진 이상 하늘로 도망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얘야, 먼저 나에게 해약을 주렴.
예.
이때 왕 부인이 부르짖었다.
모용복, 너는 첫번째로 이 외숙모를 해독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새로이 아버님을 모셨다고 해서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그 못난 자만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느냐? 이렇게 된다면 내가 점잖지 않은 욕을 해댄다고 해서 나를 탓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사람이면서 사람같지 않고......
모용복은 그 말을 듣자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단연경에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의부님, 저희 외숙모님의 성질은 고약합니다. 만약 어떤 말로써 어르신의 비위를 거슬리게 한다 하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점잖지 못한 말을 쓰지 않도록 저는 먼저 외숙모님의 독을 해소시켜 드린 연후에 의부님의 독을 해소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는 자기병을 왕 부인의 코앞으로 가져갔다.
이대 왕 부인은 고약한 악취가 코에 와락 풍기는 것을 느끼고 다시 욕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사지의 공력이 점차 회복되는 것이 아닌가.
그 즉시 그녀는 단정순, 단 부인, 그리고 진홍면, 원성죽, 감보보 세 여인의 얼굴을 돌아보게 되었다. 갑자기 겁잡을 수 없는 질투심이 복받쳐 그녀는 큰소리로 말했다.
복아, 빨리 저 네 도적 같은 계집들을 모조리 죽여라!
모용복은 속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외숙모님은 단정순의 성격이 굳굳해서 결코 남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처나 정부를 자기의 목숨보다 중요시한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그녀들을 상대로 위협을 하면 어떨까?"
그는 즉시 검을 들고 원성죽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단정순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진남왕, 저의 외숙모님은 저에게 이 여자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대의 뜻은 어떠하오?
단정순은 속으로 매우 초조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자 부득이 왕 부인에게 말했다.
아라, 이후 그대가 나에게 어떻게 하라면 그대로 하겠소. 모든 것은 그대의 분부에 따르도록 하겠소. 설마하니 그대와 나 사이에 반드시 한평생 풀지 못할 원한을 맺어야 한단 말이오? 그대가 사람을 시켜 이 여자들을 죽이게 된다면 이후 내가 그대를 좋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소?
왕 부인은 질투심이 많은 여자였지만 단정순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입을 열었다.
생질, 잠깐 손을 멈추게. 내가 생각해 본 연후에 다시 이야기 해 보도록 하세.
모용복은 말했다.
진남왕, 그대가 황제 자리를 연경 태자에게 물려주겠다고 응낙을 한다면 그대의 모든 왕비나 충신들을 내가 모조리 그대를 대신해서 보호토록 하겠으며 결코 그 누구도 그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도록 하겠소.
단정순은 흐흐 냉소만 흘릴 뿐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용복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풍류적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강산을 사랑하지 않고 미녀를 사랑하는 자이다. 그로 하여금 황위를 물려주도록 응낙케 하려면 그의 여자들 몸에서부터 손을 쓸 수밖에 없다."
그는 장검을 들고 검끝을 원성죽의 가슴팍에 갖다대며 말했다.
진남왕, 우리 사내 대장부들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한 마디로 결정을 내는 것이 아니겠소? 그대가 고개를 끄덕여 응낙을 한다면 나는 즉시 모든 사람들에게 해독약을 맡게 하고 술상까지 차려서 사과를 올리리다. 그리하여 적이 친구가 된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소? 만약 그대가 정말로 응낙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일검을 찌를 수밖에 없소이다.
단정순은 원성죽은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눈동자에 공포의 빛이 드러나 있었다.
모용복은 소리쳤다.
내가 하나, 둘, 셋을 셀 때까지 그대가 응낙하지 않는다면 이 모용복의 손이 맵다고 탓하지 마시오.
그리고 소리를 길게 빼며 부르짖었다.
하나--둘--.
단정순은 고개를 돌려 원성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정이 담뿍 서려 있었으나 그렇다고 선뜻 대답할 수도 없었다.
모용복은 부르짖었다.
셋--. 진남왕, 그대는 정말 응낙하지 않겠소?
단정순은 속으로 과거 원성죽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아름다웠던 정경을 생각했다.
별안간 악, 하는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모용복의 장검은 그녀의 가슴팍을 꿰뚫어 등뒤까지 칼날이 삐져 나왔다.
왕 부인은 단정순의 얼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고 지극히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그의 일검은 자기 자신의 몸뚱이를 꿰ㄷ은 것보다 더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짐작한 그녀는 부르짖었다.
빨리, 빨리 그녀를 구하게! 내가 정말 그대에게 그녀를 죽이라고 한 줄 알아? 그저 저 양심없는 사람을 놀라게 해주려고 한 것뿐이었다구!
모용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하였다.
"이미 깊은 원한이 맺혀진 셈이니 한 사람을 더 죽이고 덜 죽인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번에 그는 검의 끝을 진홍면의 가슴팍에 겨누고 호통을 쳤다.
진남왕, 강호에서는 그대를 두고 정이 많으며 의리가 깊다고 했지만 그것도 헛소문에 불과하구려. 그대는 그대의 연인이 목숨을 구할 한 마디도 하지 않으려 하는군. 하나--둘--셋!
이 셋 하는 소리가 입밖에 퍼져 나오자마자 아악, 하는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진홍면을 죽이고 만 것이었다.
이때 감보보는 이미 놀라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억지로 침착함을 되찾고는 낭랑히 외쳤다.
날 죽이려면 죽이시오. 그러나 진남왕인가 하는 사람에게 위협을 하지 못할 것이오. 나는 종만구의 처이며 진남왕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모용복은 냉소했다.
단정순이 처녀도 좋고 과부도 좋으며 남편이 있는 부녀까지도 함께 거둬들인다는 것을 누가 모를 줄 아시오?
그는 몇 번 호통쳐 묻더니 다시 감보보를 죽이고 말았다.
왕 부인은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평소 사람을 죽여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용복이 삽시간에 단정순의 세 여인을 죽이고말자 그만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감히 단정순의 시선과 마주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쯤 단정순의 얼굴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때 단정순은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라, 그대는 나와 한때 잘 지냈으면서도 나의 뜻을 모르는구려. 천하의 많은 여자들 가운데 나는 오로지 그대 한 사람만을 사랑했소. 내가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린 것은 그저 일시적인 장난에 불과했던 것이오. 그와 같은 여자들을 내 어찌 마음에 둘 수 있겠소? 그대의 생질이 나의 세 연인을 죽였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소? 오직 그대만을 해치지 않는다면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오.
그의 이 몇 마디 말은 매우 부드러웠다. 그러나 왕 부인이 들을 때 두렵기 이를데 없었다.
단정순이 그녀를 극도로 증오해서 모용복을 충돌질하여 그녀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생질, 그대는 그의 말을 믿지 않도록 하게!
모용복은 반신반의하게 되었다. 장검의 끝은 자연스럽게 왕 부인의 가슴팍을 겨누게 되었다. 검끝에서 한 방울, 두 방울의 피가 그녀의 옷자락 위로 떨어졌다.
왕 부인은 평소 생질의 심보가 악랄하고 수단이 매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황위에 올라야 한다는 커다란 소망을 풀기 위해서는 외숙모고 외숙모가 아니고를 따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단정순이 계속 일부러 자기를 매우 사랑하는 척하기만 한다면 모용복은 반드시 자기의 생명을 가지고 위협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그만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듯 말했다.
단랑, 단랑! 설마하니 그대는 정말 나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여 나를 해쳐 죽게 할 작정인가요?
단정순은 그녀의 두 눈에 두려운 빛이 서려 있고 얼굴에 처연한 빛이 감도는 것을 보자 옛날 그녀와의 사랑을 생각하고 대뜸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리하여 그는 큰소리로 욕을 했다.
이 도적 같은 할멈아! 질투심에 눈이 어두워서 나의 사랑하는 세 여인을 모두 죽도록 만들었구나! 모용복, 빨리 일검을 찌르도록 해라. 어째서 저 도적 같은 여편네는 죽이지 않느냐?
그는 자기가 무섭도록 욕을 하면 할수록 모용복은 자기의 외숙모를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 부인은 단정순의 욕하는 소리를 듣고 처음엔 고마움을 느꼈으나 그 어조에 사랑하는 감정이 별로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단랑, 옛날 그대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어요? 혹시 모두 잊어버렸나요? 어째서 조금도 저를 마음에 두지 않아요? 단랑, 나는 그저 한마음 한뜻으로 그대를 사랑했어요. 우리 두 사람이 이토록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이제서야 간신히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대는...... 그대는 어찌 좋은 말 한 마디도 저에게 하지 않는가요? 저는 그대의 딸 어언을 낳았어요. 그대는 그녀를 만나 보았나요? 그대는 그녀를 좋아하시나요?
단정순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라는 그야말로 정신이 약간 흐트러진 모양이다. 내가 만약에 한 마디라도 옛정을 생각하는 말을 한다면 목숨이 어찌 붙어 있겠는가?"
그는 즉시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는 내가 사랑하는 세 여인을 해쳐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그대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한다. 십 년 전 우리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그저 그대가 미워서 그대에게 몇 번이라도 심한 발길질을 해야만이 가슴속의 한을 풀 수가 있을 것 같다.
왕 부인은 흐느끼며 불렀다.
단랑, 단랑!
그녀는 갑자기 앞으로 달려들어 자기의 가슴을 검끝으로 부딪혀 갔다.
모용복은 일시에 작정을 할 수가 없었다. 장검을 거두어들이고도 싶었고 또 거두어들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장검은 이미 왕 부인의 가슴을 깊숙이 찌르고 말았다.
모용복이 급히 손을 움츠리며 검을 뽑자 선혈이 왕 부인의 가슴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왕 부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단랑, 그대는 정말 그토록 나를 미워하나요?
단정순은 그 일검이 그녀의 급소를 찔러 그녀는 다시 목숨을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줄기 눈물을 흘리며 목멘 어조로 말했다.
아라, 내가 그와 같이 욕을 한 것은 그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소. 오늘 다시 만나게 되어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소. 내 어찌 그대를 원망하겠소? 나의 그대에 대한 마음은 과거 그대에게 한송이의 만다화(曼茶花)를 선물하던 그 날과 영원히 같을 것이오.
왕 부인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나직이 말했다.
그럼 좋아요. 나는 원래...... 원래 그대의 마음을 알고 있었어요. 그대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내가 자리잡고 있으며 영원히 저를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대는 응낙했죠? 우리 두 사람은 장래 대리 무량산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그리고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와 함께 보낸 동굴 안으로 들어가 그대와 내가 그때부터는 동굴 안에서 행복하게 지내며 다시는 나오지 않기로 말이에요. 그대는 아직도 기억하나요?
단정순은 말했다.
아라, 물론 나는 기억하고 있소. 우리 내일 바로 그곳으로 찾아가 그대의 어머니의 옥으로 깍아 놓은 조각상을 보도록 합시다.
왕 부인은 얼굴 가득히 기쁜 빛을 띄우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것...... 그것 참 잘되었군요...... 그 석벽에는 한 자루 보검의 그림자가 드러나기도 하죠. 빨갛고 파란 것이 정말 멋있어요. 그대는 보세요. 보세요. 보이나요......
그 소리는 갈수록 낮아ㅈ다. 그러더니 고개를 힘없이 떨구며 그대로 죽어갔다.
모용복은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진남왕, 그대가 사랑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대를 위해 죽어갔소. 설마하니 최후의 정실 왕비마저도 죽일 작정이오?
그는 검의 끝으로 단 부인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단예는 땅바닥에 쓰러져서 원성죽, 진홍면, 감보보, 왕 부인이 하나하나 모용복의 검 아래 죽는 것을 보고 있었다.
왕 부인이 무량산 석동의 옥상이니 석벽의 검의 그림자니 하는 말을을 했으나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이때 모용복이 다시 자기 어머니의 목숨으로 부친을 위협하는 것을 보고 그는 그만 크게 다급해졌다.
그는 참을 수 없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우리 어머니를 해치지 마시오! 우리 어머니를 해치지 마시오!
그는 입속에 커다란 씨앗이 틀어박혀 있어서 소리는 조금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저 한사코 바둥거렸다.
이때 모용복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진남왕, 나는 다시 하나, 둘, 셋을 세겠소. 그대가 여전히 황제 자리를 연경 태자에게 물려주겠다고 응낙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대의 왕비를 해쳐 죽이는 결과가 될 것이오.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나의 어머니를 해치지 마시오
그 소리는 물론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단연경이 말했다.
잠깐 손을 멈추게. 이 일은 좀더 시간을 두고 의논을 해보도록 하세.
모용복은 말했다.
의부, 이 일은 관계가 중대합니다. 진남왕이 만약 황제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커다란 계획은 모조리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
단정순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에게 응낙을 받아내려면 반드시 나에게 한 가지 일을 응낙해 줘야겠네.
모용복은 말했다.
응낙하려면 응낙하시고 응낙하지 않으려면 응낙하지 마시오. 나는 그대의 시간을 늦추겠다는 계책에 말려들고 싶지 않소. 둘--, 어떠시오?
단정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한평생 많은 죄를 지었으니 모두들 함께 죽기로 하지. 정말 죽을 장소를 제대로 찾은 셈이군.
모용복은 말했다.
그렇다면 응낙하지 않는 것이군. 셋--
모용복의 셋이라는 한마디가 튀어 나오자 단정순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모용복은 검을 뻗쳐 단 부인의 가슴팍을 찌르려고 했다.
이때 단연경이 호통을 쳤다.
잠깐!
모용복은 잠시 주저하며 고개를 돌려 단연경을 바라보았다.
별안간 단예가 땅바닥에서 퉁겨지듯 몸을 일으키더니 머리를 들고 자기의 아랫배에 부딪혀 오는 것이 아닌가.
모용복은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으나 놀람과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 녀석은 취인봉에 쏘였고 또 비수청풍의 독을 맡았으니 두 가지의 미혼독에 중독되었을 터인데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지?"
원래 단예가 처음 왕어언이 자기의 누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야말로 한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식이 다른 경맥으로 잘못 흐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모용복이 자기의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자 대뜸 왕어언의 일을 한옆으로 제쳐 놓게 되고 자기가 주화입마의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내식은 자연스럽게 올바른 길로 흐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모용복이 셋, 하고 부르짖는 순간 자신의 손발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뛰어일어나 모용복의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뛰듯이 하며 부딪혀 간 것인데 놀랍게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용복이 피하는 바람에 단예의 어깻죽지가 탁자의 가장자리에 심하게 부딪치게 되었다.
그 바람에 그는 두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을 주었고 그러자 그의 두 손을 묶고 있던 우근이 즉시 뚝 하며 끊어졌다.
모용복이 외쳤다.
이 녀석!
그 순간 단예는 일지를 찍어내었다. 바로 육맥신검 가운데 상양검을 펼쳐서는 모용복을 찔러간 것이다.
모용복은 몸을 옆으로 기울여 피하고 난 이후 검으로 반격했다. 단예는 검은 베로 눈을 가리고 있었고 입안에는 커다란 씨앗이 물려 있어서 말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모용복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당황한 가운데 그는 눈에 가린 검은 베를 떼어 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두 손을 마구 휘젓듯이 했다. 혹시 모용복이 재차 어머니께로 가까이 다가가 해를 끼치지 않나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모용복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속박에서 풀려나게 된다면 야단이다. 그의 두 눈이 사물을 보기 전에 죽여야 할 것이다."
그는 즉시 일 초 대강동거(大江東去)를 펼쳐 장검을 수평으로 해서는 단예의 가슴팍을 찔러갔다.
단예가 두 손으로 정히 마구 찔러대고 있을 때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급히 옆으로 피한다고 피했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게 장검의 끝이 그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단예는 고통을 느끼고 몸을 훌쩍 날렸다. 그는 메마른 우물 안에서 구마지의 심후한 내력을 흡취한 까닭으로 가볍게 몸을 날렸는데도 일 장 남짓 뛰어오르게 되었고 쿵, 하는 소리와 함게 머리를 대들보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는 몸이 허공에 떴을 때에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없으니 그가 나를 죽일 수 있어도 내가 그를 죽일 수가 없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지? 그가 나를 죽이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구할 수 없게 될 것이 아닌가."
동시에 그는 두 발에 힘을 주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발목에 묶였던 우근도 토막토막이 나고 말았다. 단예는 속으로 기뻤다.
"잘 되었다. 그 날 물레방앗간 안에서 그는 서하국의 무슨 이 장군으로 가장했을 때 나는 능파미보로 피했다. 그때 그는 나를 죽일 수 없었다."
그는 왼쪽발이 땅에 닿자마자 즉시 비스듬히 발걸음을 내딛으며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어느덧 모용복이 찔러온 일검을 피했다. 그 간격은 수치에 불과했다. 단연경, 단정순, 단 왕비 세 사람은 푸른 광채가 감도는 장검의 검날이 그의 배 바깥 쪽으로 스칠듯 지나쳐 가는 것을 보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그만 놀라 멍청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단예가 몸을 피하는 신법 또한 교묘하기 이를데 없어 실로 형언하기 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는 정말 공교로운 일이기도 했다. 만약 그가 사물을 볼 수 있었다면 능파미보를 펼치지 않았을 것이고 전혀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로서는 모용복의 날카롭고 매서운 일검을 피하기가 어려웠으리라.
모용복은 일검을 찔러내고 또 그보다 더 빠른 일검을 찔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시종 단예를 찌를 수가 없었다.
그는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또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단예는 시종 눈에 가리고 있던 검은 베를 떼어 내지 않았다. 단예가 다급한 김에 그만 멍청해져서 그런 줄을 모르고 일부러 자기의 수단을 자랑도 할겸 자기를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내가 눈을 가리고 있는 장님 한 사람마저 이기지 못한다면 무슨 얼굴로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되자 모용복의 두 눈에서는 불똥이 튈 것처럼 푸른 광채가 번뜩였다. 한 자루의 장검을 마치 커다란 푸른 공처럼 휘둘러댔다.
삽시간에 단예를 검의 테두리 안에 가두고 살수를 펼쳐내고 있었다.단연경, 단정순, 단 부인, 범화, 화혁간 등은 뻗쳐나는 검광에 싸늘한 한기마저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가 하면 머리 위의 모발도 우수수 떨어졌고 옷자락과 앞섭자락도 다투어 산산조각이 나서는 너울거렸다.그런데 단예는 검의 테두리 안에서 왼쪽으로 걸음을 내딛는가 하면 오른쪽으로 내딛기도 했다. 그리고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하는 것이 마치 정원에서 산보를 하는 사람과 같았다. 모용복의 예리한 장검은 그의 옷자락 한 조각도 베어낼 수가 없었다.
단예는 매우 한가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듯했으나 그의 마음속은 초조하기 이를데 없었다.
"내가 수비만 했지 공격을 못하고 눈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니 만약 그가 일검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찌른다면 어떻게 하면 좋지?
모용복은 오로지 단예만이 참된 심복대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단 부인을 죽이고 죽일 수 없다는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백여 검을 찔러댔으나 시종 상대방을 찌를 수 없게 되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암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능통하여 내가 검을 찌르는 소리를 듣고 잘도 피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유서검법(柳絮劍法)을 펼쳐 소리없이 날렵하게 찔러 간다면 이 녀석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그는 검법을 일변시켜서는 일검을 천천히 내찔렀다.
단예의 능파미보는 일관된 법칙에 따라 그 스스로 걷는 것이지 적수의 초식이 어떠한가를 아랑곳하지 않는 신법이었다.
상대방의 검초가 우르릉거리는 우뢰 소리를 일으켜도 좋았고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아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단연경의 뛰어난 견식으로는 그 가운데의 요결을 간파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게 되면 자연 마음이 어지럽기 마련이었다.
모용복이 검초를 천천히 펼쳐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지 않게 되자 속으로 깜짝 놀라 목쉰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복아, 너는 빨리 단예라는 녀석을 죽여라. 그가 만약에 눈에 가리고 있던 검은 베를 떼어 낸다면 너나 내가 모두 그의 손 아래 죽게 될 것이다.
모용복은 어리둥절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멍청하게시리, 이렇게 된다면 단예를 깨우쳐 주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한 마디로 깜박 잊고 있던 사람을 깨우쳐 주는 꼴이 되었다. 단예는 일시 어리둥절해졌으나 즉시 손을 뻗쳐서는 눈에 가린 검은 베를 떼어냈다. 별안간 눈앞이 훤해졌다. 그런데 눈부신 광채와 더불어 한 자루의 싸늘하기 이를데 없는 장검이 자기의 안면을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무공을 몰랐고 또 임기응변의 능력이 모자랐다. 깜짝 놀란 나머지 대뜸 발걸음이 흐트러지게 되었다. 싹,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다리를 검에 찔려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모용복은 크게 기뻐서 검을 뻗쳐서는 내려찍으려 들었다. 단예는 몸을 옆으로 틀면서 소택검의 일검을 찔러내 반격을 했다.
모용복은 황망히 뒤로 피했다. 단예는 다리에서 피가 샘솟듯 흘렀으나 육맥신검을 마구 펼쳐내었다.
이렇게 되자 삽시간에 모용복이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고 낭패한 꼴을 보이게 되었다.
그 날 소실산 위에서 모용복은 단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때 단예는 구마지의 심후한 내공을 얻게 된 나머지 펼치는 육맥신검은 더욱더 위력이 강해져 있어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몇 초를 교환하는 사이 창, 하는 날카로운 음향이 울려퍼졌다.
모용복의 장검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 곧장 위로 날아가더니 대들보에 가서 꽂혔다. 곧이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모용복의 어깻죽지가 검기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는 좀더 머뭇거렸다가는 단예의 육맥신검에 죽고 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크게 한소리 부르짖더니 창문으로 뛰쳐나가 나는 듯 도망쳐 버렸다.
단예는 의자를 잡고서는 몸을 일으키며 부르짖었다.
어머니, 아버지. 상처를 입지는 않으셨죠?
단 부인은 말했다.
빨리 옷자락을 찢어서 상처를 싸매도록 해라.
단예는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는 왕 부인의 시체의 손에 들린 조그만 자기병을 꺼내 먼저 아버지와 어머니가 맡도록 하여 비수청풍이라는 독을 풀도록 했다. 그리고 부친의 지도를 받아 내력으로 부모의 짚혔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단 부인은 즉시 단예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단정순은 훌쩍 몸을 날리더니 대들보에 꽂힌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날에는 아직도 원성죽, 진흥면, 감보보, 왕부인 네 여인의 피가 굳어 있었다.
단정순은 네 여자가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왕 부인의 머리에는 진흥면의 다리가 얹혀져 있고 감보보의 몸은 원성죽의 아랫배에 걸쳐저 있었다.
네 여인은 살아 생전에 자기를 위해 온갖 상사(相思)의 고통을 당했으며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통함을 맛보았다. 즐거울 때는 적었고 근심할 때가 많았었다. 그런데 결국에는 자기 때문에 다 죽고 만 셈이 아닌가. 원성죽이 모용복에게 살해를 당할 때 단정순은 이미 그녀를 따라 죽으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단예도 이미 자라 성인이 되었고 무무를 겸비한 몸이 되어 대리국에서는 영명한 군주가 없으리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자기로서는 마음을 놓지 못할 일이 하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개를 돌리고 단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정말 죄송하게 되었소. 그러나 내 마음속에 이 여자들은 그대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소. 나는 그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그대 역시 똑같이 진정으로 사랑했소.
단 부인은 부르짖었다.
그대는......그대는 그러면......
그녀는 몸을 날려 단정순에게 덮쳐갔다.
단예는 조금 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크게 용기를 내어서는 모용복과 싸웠으나 모용복이 창문으로 도망을 치게 되자 그제서야 가까스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럼데 그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 주화입마되었는데 어떻게 하다가 갑자기 놓아지게 되었지?"
그만 흠칫한 생각이 들게 되었고 전신에 맥이 빠졌다. 그리하여 그는 천천히 몸을 웅크리게 되었고 일시에 다시 일어서지를 못했다.
이때 단 부인이 참담한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단정순은 이미 검의 끝을 자기의 가슴팍에 찌른 것이었다.
단 부인은 황망히 손을 뻗쳐 그 장검을 뽑아 들고 왼손으로 그의 상처를 막으며 울부짖었다.
그대에게 네 명이 아니라 만 명의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역시 전과 같이 그대를 사랑할 거예요. 내가 때로 생각이 모자라서 그대에게 화를 내고 몹쓸 짓도 했어요......하지만 그것은 옛날의 일이에요......그 또한 바로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어요......
단정순의 일검은 자기의 심장을 찌른 것이라 이미 숨이 끊어저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단 부인은 장검을 되돌려서는 자기의 가슴팍을 찌르려고 했다. 이때 단예가 부르짖었다.
어머니!
첫째로 검날이 너무 길었고 둘째로 마음이 흐트러져 검의 끝이 약간 기울어 지면서 아랫배를 찌르고 말았다. 단예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자결하는 것을 보고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그의 두 다리는 시큰거렸고 마비되어 걸음을 옮겨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고 기어가며 부르짖었다.
어머니! 아버지! 두......두 분은......
단 부인은 말했다.
예야, 아버지와 이 에미는 모두 떠난다. 너는......너는 네 자신을 잘 돌보도록 해라.
단예는 울부짖었다.
어머니, 죽어서는 안 됩니다. 죽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님은...... 아버님은......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손을 뻗쳐서 도백봉의 머리를 얼싸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대신해서 장검을 뽑아 주려고 했다. 그러나 뽑게 된다면 오히려 그녀가 더 빨리 죽게 될까봐 감히 뽑지는 못했다.
단 부인은 말했다.
너는 너의 백부님을 뵈옵도록 하고 훌륭한 황제가 되기를 바란다......
별안간 단연경이 입을 열었다.
빨리 해약의 냄새를 나에게 맡게 해주게. 그러면 그대의 어머니를 내가 구하도록 하지.
단예는 크게 노해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 간악한 당신 때문이요! 우리 아버지를 잡아서 그 분이 비명횡사하도록 해쳤지 않소? 나는 그대와 불구대천의 원한이 있소.
휙, 하니 몸을 일으킨 그는 땅바닥에서 한 자루의 강철 지팡이를 들고 단연경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했다.
단 부인은 날카로운 어조로 부르짖었다.
안 된다!
단예는 고개를 돌리고 어리둥절해져서는 말했다.
어머니, 이 사람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저는 어머님과 아버님의 원수를 갚아야겠습니다.
단 부인은 여전히 날카로운 어조로 부르짖었다.
안 된다. 너는......그에게 대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단예는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의문을 느끼고 물었다.
제가......제가......큰 죄를 저질러선 안 된다니요?
그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부르짖었다.
반드시 이 간악한 적을 죽여야 합니다!
그는 강철 지팡이를 다시 쳐들었다.
단 부인은 말했다.
고개를 숙여라. 내 너에게 말해 주마.
단예는 고개를 숙이고 귀를 어머니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자 도백봉은 나직이 말했다.
얘야, 저 분 단연경은 너의 친아버지이다. 너의 아버지가 나에게 잘못했기에 나는 홧김에 그에게 못할 짓을 한 가지 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너를 낳게 되었단다. 너의 아버지는 이런 일을 모르고 너를 줄곧 자기의 아들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기실은 아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아버지이니라. 너는 결코 그를 해칠수 없다. 그렇지 않을 때......그렇지 않을 때......너는 부친을 죽인 큰 죄를 범하게 된다. 나는 한 번도 이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다. 그러나......그러나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네가 장래에 죽은 이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떨어져 서방 극락 세계로 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단 말이다. 나는......나는 본래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말을 한다면 너의 아버지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서 부득이 말하는 것이다......
짧은 한 시진 안에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들이 잇따라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단예는 그만 놀라 입이 쩍벌어졌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어머니의 몸은 안고는 부르짖었다.
어머니, 어머니! 거짓말이죠? 그렇죠?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 거지요?
단연경은 말했다.
빨리 나에게 해약을 다오. 너의 어머님을 구하게.
단예는 어머니의 내쉬는 숨이 점점 더 미약해져 가는 것을 보고 즉시 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땅바닥의 조그만 자기병을 주어서는 단연경에게 주어 해독을 하게 했다.
단연경은 공력을 회복하자 즉시 강철 지팡이를 집어서는 찍찍찍, 하니 단 부인의 상처 옆에 있는 혈도를 짚었다.
단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다시는 나의 몸을 건드리지 말아요.
그녀는 단예에게 말했다.
얘야, 나는 또 너에게 할 말이 있구나.
단예는 몸을 굽혔다.
단 부인은 나직이 말했다.
너의 아버지의 그 딸들, 목 소저고 황 소저고 종 소저고 네가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맞아들이도록 해라......남매끼리는 혼인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친남매가 아니면 되느니라. 이 많은 소저들을 네가 함께 맞아들인다 하더라도 탓할 사람은 없다. 너는......너는 기쁘냐?
단예는 눈물만 주르르 흘렸다. 그로서는 기쁘다거나 기쁘지 않다거나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단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착한 아이야. 애석하게도 내가 친히 네가 몸에 용포를 걸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리하여 황제의 보좌에 앉아서 훌륭한......훌륭한 황제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니 유감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반드시 훌륭한 황제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갑자기 그녀는 손을 뻗쳐 검자루를 눌렀다. 그렇게 되자 검은 그녀의 몸을 꿰뚫고 말았다.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머니!
그는 그녀의 몸에 엎드렸다. 도백봉은 천천히 눈을 감았는데 입가에는 여전히 한 가닥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단예는 다시 부르짖었다.
어머니......
그런데 별안간 등뒤가 약간 마비되었다. 곧이어 허리께와 다리, 그리고 어깻죽지 몇 곳의 혈도가 그 누구에 의해 찍혀졌다. 그리고 가느다란 음성이 귓가로 전해졌다.
나는 너의 부친인 단연경이다. 진남왕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지금 전음입밀의 수법을 써서 너와 이야기하고 있다. 너의 어머니의 말을 모두 들었겠지?
단 부인이 아들에게 한 최후의 몇 마디 말은 나직하다고는 했으나 단연경은 이때 몸에 중독된 것이 풀리게 되어 내공을 회복한 터라 일일이 듣게 되었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나는 듣지 않았소이다! 나는 듣지 않았소이다! 나는 그저 이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이기만을 바랄 뿐이외다.
기실 그의 말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단연경은 대노해서 물었다.
설마하니 너는 나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단예는 부르짖었다.
인정하지 않겠소! 인정하지 않겠소! 나는 믿을 수가 없소. 나는 믿을 수가 없소!
단연경은 나직이 말했다.
지금 너의 목숨은 나의 손 아래 쥐어져 있으니 너를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 더군다나 너는 확실히 나의 아들이니 네가 너를 낳아 준 친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크게 불효한 노릇이 아니냐!
단예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모친의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십여 년간 그는 단정순을 아버지라 불러왔으며 또 단정순은 자기에 대해서 언제나 인자함과 사랑으로 대해 왔지 않는가. 그런데 그가 어찌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을 아버지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부모의 죽음은 단연경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자기가 원수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영원히 당신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오.
단연경은 울화가 치밀었고 또 한편으로는 극도로 실망했다.
"나에게 아들이 있으나 나라는 애비를 인정하지 않으니 없는 것과 같구나."
삽시간에 그는 흉악한 성질이 복받쳐올라 강철 지팡이를 들고는 단예의 등을 찌르려고 했다.
지팡이의 끝이 단예의 등에 닿게 되었을 때 그는 그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한평생 고통을 당해 왔으며 이 세상에서 가까운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겨우 아들이 생겨나게 되었느데 내 어찌 차마 친히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좋고 나를 인정해도 좋다. 어쨌든 나의 아들이 아닌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대리국의 황제 자리는 끝내 나의 아들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황제가 되진 못하나 황제가 되는 것과 같다. 여지껏 품고 있던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나를 죽이려고 하면서 어째서 빨리빨리 손을 쓰지 않으시오!
단연경은 그의 봉해진 혈도를 풀어 주고 여전히 전음입밀이 수법을 써서 말했다.
나는 내 자신의 아들을 죽이지 않겠다. 네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육맥신검으로 나를 죽여 단정순과 너의 어머니의 원수를 갚도록 해라.
그는 가슴을 내밀고 단예가 손을 쓰기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불쌍하게 여겨졌다.
단예는 왼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모든 것이 망연하기만 했다. 육맥신검으로 눈앞의 원흉을 죽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은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저 사람은 바로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하는데 자기가 어찌 손을 쓸 수 있겠는가.
단연경은 한참 동안 기다렸다. 단예가 손을 쳐들었으나 다시 내려 놓았다가 재차 손을 쳐드는 등 시종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사내 대장부가 손을 쓰려면 쓸 것이지 뭐가 그리 두려우냐?
단예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거두어 들였다.
어머니는 저를 속이지 않았을 것이오. 나는 그대를 죽이지 않겠소.
단연경을 크게 기뻐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아들이 끝내 자기를 부친이라 인정한 것임을 알고는 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는 지팡이 두 개를 짚고는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났으며 기절해 쓰러져 있는 운중학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단예는 속으로 만의 하나라도 하는 희망을 품고 다시 부친과 어머님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코앞으로 손길을 가져가 보았다.
부모님을 끝내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시신 위에 쓰러져서는 통곡을 했다.
한참 동안 울게 되었을 때 갑자기 등뒤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단 공자, 슬퍼하지 마세요. 우리의 구원이 늦었으니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단예는 몸을 돌렸다. 문앞에는 칠팔 명의 여인이 서 있었다. 앞장을 선 두 사람의 모습은 똑같았다. 바로 허죽의 부하이며 영취궁 사검 가운데 어느 두 여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여전히 흐느끼면서 말했다.
저희 부모님이 사람들에게 해침을 당해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이곳에 도달한 두 여인은 바로 죽검과 국검이었다.
국검은 말했다.
왕어언 소저 등은 지하 뇌옥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이미 구출했으며 무사합니다. 공자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이때 멀리서 갑자기 삘리리 하는 피리 소리가 들렸다. 죽검은 말했다.
매 언니와 난 언니도 모두 도착했어요.
얼마 후 말발굽 소리와 더불어 십여 필의 말이 집앞으로 달려왔다. 앞장을 선 사람은 난검과 매검이었다.
두 여인은 재빨리 들어오더니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보고 그만 발을 구르며 부르짖었다.
아이쿠,아이쿠.
매검은 단예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저희 주인은 단 공자에게 인사를 드리고 한 가지 일에 정말 미안하게 되었으며 어쩔 수 없었다는 말씀을 드리라고 하더군요. 저희 주인은 약속을 저버려서 공자님을 대하기가 민망하다고 했습니다. 다만 공자께서 욕하시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예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목멘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인데 서로 잘잘못을 따질 것은 없소이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셨는데 그까짓 쓸데없는 일을 상관해서 무엇 한단 말이오?
이때 범화, 화혁간, 부사귀, 최백천, 과언지등 다섯 사람이 해약 냄새를 맡고 몸에 짚혀졌던 혈도마저도 풀 수 있게 되었다. 화혁간은 운중학이 여전히 땅바닥에 쓰려져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크게 울화가 치밀어 한칼을 내려쳤다. 궁흉극악한 운중학은 대뜸 몸뚱이와 목이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범화와 화혁간 등 다섯 사람은 단정순 부부의 시체를 향해 절을 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이튿날 아침 범화 등은 나누어 밖으로 나아가서는 관목을 사왔다. 점심 때가 되었을 때 영취궁 주천부의 뭇 여인들이 왕어언, 파천석, 주단신, 목완청, 종영등을 데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에는 아직도 취인봉의 독침을 찔려 혼수 상태에 빠져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즉시 단예와 범화 등은 죽은 사람들을 일일이 나누어 염을 하고 관 안에 넣었다. 이곳은 대리국의 국경인지라 범화는 즉시 인근 고을에 명령을 내렸다.. 주관(州官)이나 현관(縣官)들은 황태제 진남왕 부부가 자기네 경내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그만 입이 쩍 벌어지게 되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게 되었다.
범 사마는 바삐 사람들을 부려서는 진남왕 부부의 영구를 운송하도록 했다. 영취궁의 뭇 여인들은 도중에 또 어쩐 변고가 있게 될까봐 단예 등을 곧장 대리국의 경성까지 호송했다.
왕어언, 파천석 등은 도중에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진남왕이 오다가 돌아가시게 되었고 세자가 영구를 호송해서 돌아온다는 소문이 대리국의 경성에 쫙 퍼지게 되었다.
진남왕은 나라에 공을 세웠으며 무척 인심을 얻은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뭇 관리나 백성들은 십 리 밖으로 마중을 나오게 되었고 성 안팎은 슬피 우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단예가 궁에 이르게 되었을 때 단정명은 두 눈이 붉어져서는 부어 있었다.
단예가 절을 하려고 하자 단정명은 부르짖었다.
얘야, 어쩌다가......이렇게 되었느냐?
그리고 그는 팔을 벌려 단예를 안았다. 백부와 조카 두 사람은 함께 얼싸안았다.
단예는 조금도 속이지 않고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일일이 품했다. 단 부인의 말도 하나 빠트림없이 말씀드리고 말이 끝나자 다시 절을 하며 흐느꼈다.
만약 아버지가 정말 저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면 저는 바로 후레자식이니 다시는......다시는 대리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단정명은 놀란 나머지 연신 탄식을 했다.
업보로군, 업보야!
그는 단예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얘야, 이 가운데의 원인을 세상에서 나와 단연경 두 사람만이 알고 있다. 너는 근본적으로 나에게 품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너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으니 네가 얼마나 솔직한지 알 수 있다. 나와 너의 아버지는 아들이 없다. 더군다나 너의 본래 성은 단씨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너를 후사로 세울 결심이다. 황제 자리는 본래 연경 태자의 것이었는데도 내가 이 자리를 가로채어 앉은 지 수십 년이 되었다. 마음속으로 그렇지 않아도 부끄럽게 여기고 있던 차인데 하늘이 이와 같이 안배를 했으니 정말 잘되었다.
그는 손을 ㅃ쳐 머리에 얹어 놓은 노란 비단으로 만든 모자를 벗었다. 머리는 이미 빡빡 깎여진 상태였으며 정수리에는 열두 개의 계점이 찍혀져 있었다.
단예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백부님, 백부님은......
그 날 천룡사에서 구마지를 상대해 싸울 때 사부님은 나를 위해 삭발을 해 주시고 계율을 전했는데 그 일은 네가 친히 본 것이 아니냐.
단예는 고개를 숙였다.
예.
나는 이제 불문에 몸을 담게 된 몸이다. 그래서 황제 자리를 너의 부친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너의 부친은 중원으로 나가 있었고 나라에는 하루라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나는 부득이 사부의 명을 받고 잠시 황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라. 너의 부친이 불행히도 길을 오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오늘 나는 이 황위를 너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단예는 놀람과 의아함에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견식이 좁은데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저는 출생이 불분명하니 저로서는......저로서는......, 역시 산야에 은거하여......
단정명은 호통을 내질렀다.
출생에 관한 일은 이제부터는 다시 더 들먹이지 않도록 해라. 너의 부친과 어머니가 너에게 어떻게 대했지?
단예는 흐느끼며 말했다.
몸소 제게 베푼 은혜는 그야말로 바다와 같이 깊고 산과 같이 높습니다.
단정명은 말했다.
바로 그렇다. 네가 부모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고자 한다면 응당 그들의 명예를 지켜 드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황제가 되었을 적에 단지 두 가지 일만은 잘 기억해 두어라. 첫째는 백성을 사랑하고 둘째는 신하의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도록 해라. 너는 천성이 착해서 백성을 학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장래 나이가 조금 들게 되었을 때 자기의 총명함만을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리고 나라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처리하지 말고 특히 이웃 나라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해라.
모용복은 말했다. [2148] 제목 : [김용] 천룡팔부(天龍八部) 49장
올린이 : 멀티피씨(김효범 ) 96/09/01 02:56 읽음 : 178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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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생사와 영화를 뜬구름처럼 여기니 그 무엇이 두려우랴
(生死榮華, 浮雲生死, 比身何小瞿)
대리의 황궁에서 단정명이 황위를 조카인 단예에게 물려 주면서 당부의 말을 할 무렵, 이때 수천 리 밖 북쪽 대송나라의 수도 변량의 황궁 안 숭경전(崇慶殿) 뒷 전각에서도 태황태후(太皇太后) 고씨가 병이 급격히 악화됨에 따라 손자 조후(趙煦), 역사상으로는 철종(哲宗)이라 일컫는 분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 있었다.
얘야, 조상이 대업을 이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단다. 그런데 천행으로 조상의 은덕이 심후해서 오늘날 태평성대를 이루게 되었구나. 그러나 너의 아버지가 정권을 쥐게 되었을 때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졌고 하마터면 커다란 변고가 일어날 뻔했다. 무엇 때문인지 아느냐?
조후는 말했다.
저는 종종 할머님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황은 왕안석(王安石)의 말을 듣고 옛법을 고쳐 백성들이 생활을 해나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하더군요.
고씨는 말했다.
얘야, 너는 구 년 동안 황제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년......이 구 년 동안 참된 황제는 바로 이 할머니였다. 너는 무슨 일이든지 이 할머니의 부부를 따라 행했다. 너는......너는 마음속으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고 또 매우 이 할머니를 미워하겠지?
조후는 말했다.
할머니가 저를 대신해서 황제가 되어 주신 것은 제가 피곤해서 몸을 그르치게 될까봐 그런 것이니 저를 귀여워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도 할머니가 썼고 성지도 할머니가 내리신 것이라 저는 매우 한가롭게 세월을 보낼 수 있었는데 뭐가 나쁘다는 것입니까? 어찌 할머니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태황태후는 한숨을 내쉬고 나직이 말했다.
너는 정말 너의 아버지를 닮았구나. 너는 스스로 총명하고 능력이 있어 큰일을 한 번 하려고 하지? 네가 마음속으로 줄곧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내가 설마하니 모를 줄 아느냐?
조후는 빙그레 웃었다.
할머니는 물론 알고 계실 겁니다. 궁중 어림군의 지휘자는 할머니의 심복이었고 내시 태감의 우두머리도 할머니의 심복이었으며 조정의 문무대신들로 할머니가 위임하거나 파견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순순히 할머니의 분부를 따르는 이외에 멋대로 일을 한다거나 한 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태황태후는 천정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매일같이 오늘이 있기를 바랐겠지? 그저 내가 병이 중해서 죽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너는 크게 한 번 솜씨를 보일 수 있지 않겠느냐?
조후는 말했다.
저의 모든 것은 할머니가 내리신 것입니다. 과거 할머니께서 극력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부황이 붕어하셨을 때 조정의 대신들은 옹왕(雍王)을 세우거나 조왕(曺王)을 세웠을 것이다. 할머니의 깊은 은혜를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하지만......
태황태후는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냐?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우물쭈물하지 말고 이야기해 보아라.
조후는 말했다.
제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건대, 할머니가 저를 세운 것은 그저 제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할머니께서 친히 조정 일을 돌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대담하게 이 몇 마디의 말을 했지만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리하여 전각의 문을 몇 번 바라보았다. 문을 지키고 있는 태감이 자기의 심복들임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다.
태황태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말이 맞다. 나는 확실히 내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다. 이 구 년 동안 내가 다스린 것이 어떻더냐?
조후는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더니 말했다.
할머니, 조야의 선비들이 할머니의 공덕을 칭송하는 말은 이 구년 동안 많이 들어서 이제 듣기조차 싫어졌을 겁니다. 오늘 북쪽에서 사람이 와 요나라의 재상이 요나라의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에 할머님이 다스린 것을 언급하는 구절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것은 적국의 대신이 논하는 바이니 할머니께서는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태황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덕이 있다고 천하에 칭송을 받아도 좋고 천하의 비방을 받아도 좋다. 이 늙은이는...... 이 늙은이는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다. 아! 나는...... 내일 아침 떠오른 해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요나라의 재상...... 그는...... 그는 나를 어떻게 평가했지?
조후는 두루마리를 펼치며 말했다.
그 재상은 상소문에서 태황태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수렴정치를 해온 이래 충신들을 임용하여 가혹한 신법(新法)을 폐지했으며 구 년 동안 정사를 다스리시며 조정은 밝고 중원 땅은 편안했다. 그야말로 안으로 요행을 바라는 사람을 물리치고 밖으로는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지 못하도록 했으며, 문사원(文思院)에서 올린 물건은 크고 작고 간에 한평생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기까지 읽던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 그러고 보니 태황태후의 이미 초점이 흐려져 있는 눈동자에서는 다시 몇 가닥 기뻐하는 빛이 보이지 않는가. 조후는 다음을 읽었다.
......"사람들은 그를 여자 가운데 요순이라 일컬었다."
태황태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자 중의 요순이라고, 여자 중의 요순이라고! 설사 정말 요순이라 하더라도 끝내 죽음을 면치는 못했지.
별안간 그녀는 흐릿해져 가는 뇌리에 한 가닥 번개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요나라의 재상은 어째서 나를 들먹였지? 얘야, 너는...... 너는 조심해라. 그들은 내가 곧 죽게 될 것을 알고서는 너를 괴롭히려고 하는 짓일게다.
조후의 젊은 얼굴에는 대뜸 교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를 괴롭힌다구요? 흥, 말은 그럴싸하지만 그렇게 쉽지는 않을걸요? 거란 사람은 동경(東京)에 첩자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할머니의 병이 심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겠죠. 그러나 우리들이라고 상경에 첩자가 없겠습니까? 그들 재상의 상주문을 우리들은 베껴 오지 않았습니까. 거란의 뭇 신하들은 상의를 했다더군요. 만약 제가 무슨 짓을...... 흥흥, 어떤 경거망동...... 경거망동을 하게 된다면 그들도 경거망동을 하겠다더군요.
태황태후는 놀라 부르짖었다.
정말 그랬었구나. 그들이 남쪽으로 군사를 내려 보내겠다더냐?
조후는 말했다.
맞았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창가에 이르렀다. 북두칠성이 밤하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북두칠성 옆에 떠 있는 북극성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 대송나라의 군사는 강하며 양식도 풍족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수도 많은데 어찌 거란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제가 북쪽으로 올라가 그들과 한 번 겨루어 볼 참입니다.
태황태후는 귀가 밝지 못한 듯 물었다.
너는 뭐라고 했느냐? 무엇을 겨루어 본다고 했느냐?
조후는 태황태후의 침상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할머니, 우리 대송나라의 사람은 요나라 사람보다 십 배나 많습니다. 그리고 양식만 하더라도 삼십 배가 넘지 않습니가? 열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하는데 설마하니 그들을 이겨낼 수 없겠습니까?
태황태후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요나라와 싸우겠다는 것이냐? 과거 진종(眞宗) 황제는 그토록 영명하신 분으로 친히 출정을 했어도 겨우 전연지맹(전淵之盟)을 맺지 않았느냐? 네가...... 네가 어찌 감히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느냐?
조후는 울분이 치민다는 듯 말했다.
할머니는 언제나 이 손자를 업수이 여기시는군요. 아직도 이 손자를 젖비린내나 풍기고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로 보고 있습니까? 제가 태조와 태종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렇다고 진종 황제보다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태황태후는 나직이 말했다.
바로 태종 황제도 과거 북쪽에서 싸움에 졌으며 중상을 입고 돌아와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끝내 붕어하시지 않았느냐.
천하의 일이란 것은 일괄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과거 우리가 거란 사람을 이기지 못했다고 해서 영원히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태황태후는 가슴 가득히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정력이 한 방울 한 방울 물이 새듯 그녀의 몸에서 떠나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는 그저 희뿌연 안개와 같은 것이 오락가락하고 머리속은 망연하기만 했다. 말하는 것조차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굳건하고도 또렷한 음성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군사를 일으켜 싸움을 하게 된다면 피차가 다 위태롭게 되고 생명이 도탄에 빠지게 되니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잠시 후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야, 이 구 년간 내가 대권을 잡고 있으면서 너에게 사태를 제대로 분석해 주지 않았구나. 그것은 이 할머니의 잘못이다. 나는 내 자신이 더 많은 세월을 두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하여 네가 나이가 좀더 들게 되었을 때 너를 깨우쳐 주게 된다면 너는 더욱더 알기 쉬워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녀는 몇 번 헛기침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쪽의 사람이 많고 양식이 풍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송나라의 사람들은 문약하여 거란 사람만큼 용감하지 못하다. 더구나 싸움을 벌이게 된다면 군사고 백성이고 할 것 없이 간과 뇌수를 땅바닥에 뿌려야 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가족들을 잃고서 처자와 헤어지게 될지 모르는 노릇이다. 인군이 되는 자는 가슴속에 시시각각 인자한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한다. 승패라는 것은 예측하기 힘들다. 반드시 필승의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싸움은 역시 벌이지 않는 것이 좋다.
조후는 말했다.
우리의 연운 십육 주를 요나라 사람에게 빼앗긴 이후 매년 그들에게 조공을 바쳐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속국인 것 같기도 하고 신하 나라인 것 같기도 한데 대송나라의 천자로서 어찌 참고 견딜 수가 있겠느냔 말입니다. 설마하니 우리들이 영원히 요나라 사람들의 핍박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의 음성은 점점 더 높게 울려퍼졌다.
과거 왕안석이 변법(變法)을 구사하여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역대 조상들이 받은 치욕을 씻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자손이 된 자로서 조상의 한을 풀어 주어야 효성을 다했다 할 수 있습니다. 부황께서는 한평생 나라를 굳건히 하려고 했는데 그것 또한 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저는 반드시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겠습니다. 그 유지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이 의자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서는 옆에 놓인 의자를 두 쪽 내었다.
황제는 군사들이 훈련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할 때 이외에는 평소 칼이나 검을 지니지 않았다.
태황태후는 손자가 갑자기 검을 뽑아 의자를 쪼개자 깜짝 놀라 흐릿한 머리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어째서 검을 차고 있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나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까? 이 녀석은 너무나 당돌하다. 황제 자리에서 내좇아야지."
그녀는 인자했으나 권세를 오랫동안 쥐고 있었기 때문에 권세에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는 즉시 적을 없애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설사 그 적이 아주 가까운 골육이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못했다.
삽시간에 그녀는 자기가 이미 목숨이 다 되어 눈깜짝할 사이에 영원히 이 세상에서 떠나게 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조후가 가슴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진을 깨뜨리고 적을 죽인 후 연운 십육 주를 거두어들이느냐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자기가 커다란 준마를 타고서 백만 대군을 이끌고 요나라의 상경을 깨뜨리고 요나라 임금인 야율홍기가 벌거벗은 몸으로 항복하는 환상을 그리곤 했다. 그리하여 그는 검을 높이 쳐들고서 가슴을 편 채 입을 열었다.
국가 대사가 모두 담이 적은 진부한 유생들의 손에 의해 그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군자라 칭하나 사실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는 소인배들이외다. 나는...... 나는 반드시 그들에게 큰벌을 내리고야 말겠습니다.
태황태후는 별안간 맑은 정신이 돌았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애는 당금 황제이다. 그는 자기대로의 주의 주장이 있을 것이니 다시는 그로 하여금 나의 말을 듣게 할 수 없다. 나는 이제 다 죽어가는 할멈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나이가 젊고 힘이 좋은 황제이다. 그는 황제이다. 그는 황제이다."
그녀는 온힘을 다해서 언성을 높였다.
얘야, 너에게 그와 같은 갸륵한 뜻이 있다니 이 할머니는 무척 기쁘다.
조후는 기뻐서 검을 검집에 꽂고는 말했다.
할머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매우 옳죠?
태황태후는 말했다.
그런데 너는 만전지책(萬全之策)과 필승의 계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조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장수를 뽑아 군사를 조련시키고 말을 키우고 양식을 저축하면 요나라 사람들과 전장에서 자웅을 결하게 될 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는가 합니다.
태황태후는 말했다.
너 역시 싸우는 전장에서는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줄 아는구나. 그러나 우리 대송나라에는 싸우지 않고도 요나라 군사를 굴복시키는 방법이 있다.
조후는 그 말을 받았다.
백성과 더불어 쉬고 인자한 정사로 다스리게 된다면 싸우지 않고도 상대방의 군사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겠죠. 할머니, 이것은 사마광 같은 서생의 진부한 의견에 불과합니다. 큰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태황태후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식견은 탁월한데 너는 어째서 진부한 서생의 의견이라고 하느냐? 너는 한나라의 군주이니 수시로 사마 상공이 지은 자치통감을 읽어야 한다. 천여년 동안 왜 왕조가 어떻게 해서 흥하고 어떻게 해서 쇠락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패했으며 어떻게 해서 망했는가를 그 책은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 대송나라는 토지가 비옥하고 사람의 수도 많아 요나라의 십 배에 달한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키지 않고 다시 십 년 혹은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게 되면 우리들은 더욱더 부유하게 될 것이다. 요나라 사람들은 용감하고 싸움을 좋아하기에, 우리가 엄히 변경을 지키게 된다면, 그들 부락 안에서 반드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다. 한 번 두 번 싸우게 된다면 원기를 크게 손상시킬 것이다. 전에 초왕의 난리로 요나라의 전력은 많이 감소되지 않았느냐......
조후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쳐올라가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요나라는 내란이 일고 있던 터라 반드시 우리들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태황태후는 날카롭게 외쳤다.
너는 그저 요나라와 싸움할 것만을 생각하고 있구나. 너는...... 너는...... 너는......
별안간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오른손 식지를 뻗쳐서는 조후에게 손가락질했다.
태황태후의 위세 아래서 잔뼈가 굵은 조후는 그만 깜짝 놀라 잇따라 세 길을 물러섰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손으로 검자루를 쥐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는 부르짖었다.
빨리, 너희들은 빨리 와 봐라.
뭇 태감들은 황상께서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시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조후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 그녀...... 어떻게 되었는지 너희들이 보아라. 어떻게 되었지......
그는 조금 전 기고만장해서 거란 사람과 결사일전을 벌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병이 골수에 사무친 노파가 위세를 돋우자 그는 대뜸 혼비백산해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한 명의 태감이 몇 걸음 다가가 태황태후를 잠시 동안 쳐다보더니 대담하게 손을 뻗쳐 맥박을 거머쥐어 보고 말했다.
황상께 말씀드립니다. 태황태후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조후는 크게 기뻐서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잘 되었다. 잘 되었어! 나는 황제다, 나는 황제야.
기실 그는 이미 구 년 동안 황제 노릇을 해온 셈이었다. 그러나 구 년 동안 이 황제는 유명무실한 존재로서 대권은 태황태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제서야 그는 진정으로 황제가 된 것이었다.
조후가 친히 정사를 돌보게 되자 첫번째 한 일은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있던 소식(蘇軾)을 정주 지부(定州知府)로 좌천한 것이었다.
소식의 글재주는 천하에 그 이름이 알려져서 그 당시는 많은 사람의 기대를 모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왕안석과는 큰 적이었다. 언제나 신법을 반대했다.
원우(元祐) 연간에 태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마광과 소식, 소철 형제를 중용했었다. 이제 태황태후가 죽자 황제는 소식을 조그만 벼슬자리로 내쫓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물론이고 백성들도 하나같이 근심걱정을 하게 되었다.
"황제께서는 다시 신법을 펼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고달프게 되겠구나."
물론 속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황제가 다시 신법을 펼치게 된다면 그들은 벼슬에 오르고 재물을 긁어모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때 조정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태황태후가 임용한 옛 신하들이었다.
한림학사(韓林學士) 범조우(范祖禹)가 상소문을 올려 간했다.
돌아가신 태황태후께서는 공정한 마음으로 왕안석과 여혜경 등 신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치고 조상의 옛 정사를 다시 시행함으로써 위태로웠던 사직을 공고히 하고 떠났던 인심도 다시 한데 뭉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요나라 임금은 재상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남쪽 송나라에서 인자한 정사를 베푸니 연경을 지키되 연경의 관리들에게 무단히 일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제 폐하께서 친히 정사를 돌보시니 소인들은 반드시 어떤 동요를 보이게 될 것이고 이득을 탐하는 자들도 역시 관망하고 있는 참이라, 신은 폐하께서 조상들의 어려웠던 일들을 염두에 두시고 태황태후의 부지런함을 본받으시어 후회가 없도록 처리하시길 바랍니다. 소인을 잘못 등용했던 사실을 뼈에 사무치도록 경계하시고 천우 연간의 정사를 지키게 된다면 나라는 반석과 같이 되고 안팎의 민심은 자연 하나로 뭉쳐지게 될 것이니 천하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조후는 보면 볼수록 화가 나서는 상주문을 탁자 위로 내던지며 입을 열었다.
소인을 등용한 일을 뼈에 사무치도록 경계하라구? 이 한 마디의 말은 옳긴 옳다. 하지만 누가 군자이고 누가 소인인가?
그는 두 눈을 형형히 빛내며 범조우를 바라보았다.
범조우는 큰절을 했다.
폐하께서는 명찰하십시오. 태황태후께서 수렴청정하실 때 처음에 안팎의 신하들과 백성들 중 글을 올린 자는 수만에 달했습니다. 모두들 정사가 불편하고 백성을 고달프게 해친다고 했습니다. 태황태후께서는 천하의 민심에 따라 법을 고치게 되었고 법을 어긴 자들은 죄가 있을 때 유배를 보냈습니다. 폐하께서도 태황태후의 뜻을 따라 민심을 따르도록 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쫓겨났던 그 신하들은 소인인가 합니다.
조후는 냉소하며 말했다.
그것은 태황태후께서 물리치신 것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그는 소맷자락을 떨치며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조후는 뭇 신하들을 대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처음 정사를 돌보게 되었는지라 많은 신하들을 모조리 꾸짖고 물리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친히 칙서를 내려 내시 악사선(樂士宣), 유회간(劉淮簡), 양종정(梁從政) 등의 벼슬을 올리고 그들이 자기를 떠받들었다는 데 대해서 크게 상을 내렸다. 그리고는 며칠간 병이라 칭하고는 조정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태감이 한 통의 상소문을 가지고 왔다. 필적은 매우 힘찼는데 그 서명은 소식으로 되어 있었다.
조후는 말했다.
소털보는 글자만은 잘 쓴단 말이야. 그런데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였는지 모르겠군.
조후는 상소문을 읽고 나서는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은 소털보가 총명한 인재라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그는 내가 선제의 유지를 받들어 신법을 다시 펼치리라는 것을 알고 막기가 무엇하여 나보고 삼 년간만 연기하라고 하는군. 흥, 뭐가 그렇게 한다면 천하의 미움을 사지 않고 폐하께서도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야? 그가 말하는 것은 완곡하나 그 뜻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가 만약에 급히 공을 세우려고 서둘러 큰일을 일으키게 된다면 천하의 미움을 사게 될 것이고 나 역시 후회하게 될 것이란 말이 아닌가."
그는 노해 대뜸 그 상소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며칠 후 다시 조정의 일을 돌보러 나갔다. 그러자 범조우의 상소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후는 보면 볼수록 화가 나서는 몇 줄을 건너뛰어서는 아래를 훑어보다가 그만 더 참을 수 없어 앞에 놓인 탁자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조후는 이때 나이가 십팔 세였다. 황제라는 존귀한 몸에다가 젊은이가 가지는 패기가 넘치던 터에 조정에서 갑자기 성질을 부리자 뭇 신하들은 모두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그는 날카로운 어조로 다그쳤다.
범조우, 그대가 상소문에서 말을 한 것은 그야말로 선제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오?
범조우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께서 살피소서. 소신은 결코 감히 비방한 것은 아닙니다.
조후는 처음 대권을 쥐게 되었고 뭇 신하들이 공포에 떠는 것을 보자 속으로 흐뭇해져서는 노기가 사그러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거친 표정을 띄우고 큰소리로 말했다.
선제는 하늘이 내리신 재주를 타고났으며 그야말로 훌륭한 뜻을 행하여 오랑캐를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코자 했으나 불행히도 한창 나이에 붕어하시고 말았소. 짐은 선제의 남기신 뜻을 이어받았는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오? 그대들이 시끄러운 잔소리로 오히려 선제의 변법이 그르다고 말하니 가당치 않소.
이때 뭇 신하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한 명의 대신이 걸어 나왔다. 그 얼굴 모습은 청수했으며 늠름한 위엄이 서려 있었는데 바로 재상인 소철(蘇轍)이었다.
조후는 속으로 달갑지 않았다.
"저것은 소털보의 아우로구나. 두 사람이 결탁하여서는 간교한 짓을 하는 처지이니 그의 입에서 상아가 돋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소철은 말했다.
폐하께서는 밝히 살피소서. 선제께서는 여러 가지 정사를 펼쳤으며 그 일은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선제 폐하께서는 제위 십이 년 동안에 한평생 존호(尊號)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사에 있어 약간 잘못된 점은 있다고 하겠으나 어느 조정에 잘못이 없는 때가 있었겠습니까? 부친이 앞에서 한 일을 아들이 그 후에 바로 잡을 수 있는 바 이를 옛날 사람들은 효성이라 했습니다.
조후는 싸늘히 코웃음을 치고 냉랭히 말했다.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이 나중에 바로잡는다는 것은 무슨 말이오?
소철은 말했다.
예로서 한 무제를 들 수 있습니다. 한 무제는 밖으로 사방의 오랑캐와 충돌을 일삼았으며 안으로는 궁궐을 세웠습니다. 그러느라고 나라의 돈을 마구 써버렸죠. 그리하여 소금밭을 가꾼다, 무쇠를 모은다, 다리를 세우고 길을 닦는다 등의 정사를 베풀었습니다. 그야말로 백성의 재물을 빼앗았으며 백성은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크게 반란을 일으킬 지경이었지요. 그런데 한 무제가 붕어한 이후 한나라 소제(昭帝)가 뒤를 이어 곽광(藿光)을 등용시켜서는 백성들의 가혹한 짐을 덜게 하자 한나라는 안정되었습니다.
조후는 싸늘히 코웃음치고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한 무제를 나의 부황에게 견주는구나."
소철은 황제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보자 사태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시 말을 하게 된다면 황상은 노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나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면 천하는 다시 시끄러워지게 될 것이고 수천 수만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내가 한나라의 대신으로 어찌 그와 같은 광경을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오늘이야말로 내가 한 목숨을 바쳐 태황태후의 깊은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
그는 다시 말했다.
후한 때 명제(明帝)는 모든 일을 밝게 한답시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당무계한 야릇한 미신을 믿었으며, 신하들의 언행을 사찰하는 등 온갖 짓을 다했습니다. 그 당시 아래윗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다 두려워했고 모든 사람들이 불안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장제가 뒤를 이어 그 잘못됨을 깊이 명찰하시고 너그러운 정사를 펼쳐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천하를 크게 다스렸습니다. 이 모두가 자식이 부친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으로서 성인의 큰 효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철은 조후가 십 세 때에 즉위해서 구 년 간 매사에 있어 태황태후의 명을 받들어야 했기 때문에 속으로 울화가 치밀어 태황태후의 정치를 폐하고 신종때의 변법을 회복함으로써 부친에 대한 효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특별히 성인의 효도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황제에게 간하게 된 것이다.
조후는 큰소리로 외치듯 물었다.
한 명제가 선비들을 존중한 것이 뭐가 나쁘다는 말이오? 그대는 한 무제와 선제를 견주어 말했는데 그것은 무슨 의도이오? 이것은 공공연한 비방이 아니겠소! 한 무제는 그야말로 끝까지 군사를 일으켰다가 말년에 이르러 자기의 잘못을 알고 칙서를 내렸으며 심히 후회하는 말을 남겼소. 그의 행위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것으로서 천하의 후세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어찌 선제와 견줄 수 있단 말이오?
그는 더욱더 소리를 높였으며 날카롭게 다그치기도 했다. 소철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아래쪽 마당으로 내려가 꿇어 엎드려서는 감히 한 마디의 말도 더 하지 못했다.
많은 대신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선제의 변법으로 백성들은 해를 입어 좌불안석이었다. 한 무제야말로 그보다는 훨씬 낫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그와 같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누가 있어서 소철을 위해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한 백발이 성성한 대신이 뭇 사람들을 헤치고 나섰다. 바로 범순인(范純仁)이었다.
그는 여유있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소철의 말은 혹시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인군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훌륭한 생각에 그런 것입니다. 폐하께서 정권을 처음 잡으신 이때 신하를 대함에 응당 예의를 갖추셔야지 하인이나 노복을 꾸짖듯 하면 안 됩니다. 더군다나 한 무제는 말년에 이르러 자기의 잘못을 크게 뉘우쳤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은 나쁜 황제가 아님을 드러낸 것입니다.
조후는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진시황과 한 무제라고 말하고 한 무제와 포악하게 백성을 해친 진시황을 아울러 칭하고 있으니 한 무제 역시 무도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 아니겠소?
범순인은 말했다.
소철이 논한 것은 그때의 상황과 사정이지 사람을 논한 것은 아닙니다.
조후는 범순인이 되풀이해서 변명하는 소리를 하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소철은 올라오시오.
소철은 마당에서 대전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감히 원 위치로 가서 서지는 못하고 여러 신하들의 말미에 꿇어앉아서는 말했다.
소신이 폐하에게 죄를 지었으니 아무쪼록 물리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튿날 칙서가 내렸다. 소철을 단명전(端明殿)의 학사로 하고 여주(汝州)의 지주(知州)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즉 재상으로 하여금 조그만 지방의 관리가 되도록 조치한 것이다.
남쪽 송나라의 조신들의 동정은 이미 첩자가 있어서 상경에 보고됐다. 요나라의 황제인 야율홍기는 송나라 태황태후가 붕어하고 소년 황제 조후가 중신들을 물리친 후 곧 신법의 정사를 펴리라는 전갈을 듣게 되자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즉시 준비하여 남경으로 가자. 소 대왕과 의논을 해야겠다.
야율홍기는 또 말했다.
남쪽 송나라에서는 상경에 적지 않은 첩자를 보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남경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경계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신속하게 달려가도록 하되 남원대왕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
그는 삼천 철갑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지난번 초왕이 반란을 일으켰던 점을 상기하고 상경을 지키는 관병들은 소후가 친히 통솔하도록 했다. 그리고 십여 명의 어가를 보호하는 군사들은 뒤따라 나누어 남쪽으로 내려오도록 했다.
며칠 후 야율홍기는 남경성 밖에 이르게 되었다.
이 날 소봉은 이십여 명의 친위병들을 거느리고 북쪽 들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나라 황제가 갑자기 들이닥쳤다는 말은 듣고는 말을 몰아 북쪽으로 마중을 나갔다.
멀리서 하얀 깃발과 노란 차일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말에서 내려서 서둘러 앞으로 나가 땅바닥에 엎드렸다.
야율홍기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에서 내렸다.
형제, 그대와 나는 명분에 있어서는 군신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골육과 다름이 없는데 이토록 대례를 해야할 게 뭔가.
그는 즉시 소봉을 부축해 일으키며 웃었다.
야수들이 많은가?
소봉은 말했다.
며칠간 추위가 닥쳤기 때문에 야수들은 모두 다 남쪽으로 피난을 했습니다. 몇 마리 이리와 노루들만 잡았지 큰 것은 잡지 못했습니다.
야율홍기는 말했다.
우리 남쪽 들로 나가 찾아보세.
소봉은 말했다.
그곳은 남쪽 송나라와 맞닿는 곳이라 신은 두 나라의 충돌이 있을까봐 부하들의 사냥을 엄금하고 있습니다.
야율홍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타초곡도 할 수 없겠구만.
소봉은 말했다.
신이 금지시켰습니다.
야율홍기는 말했다.
오늘 우리 형제가 모였으니 파격적으로 한번 놀아 봐도 상관이 없을 것이네.
소봉이 답했다.
예.
호각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야율홍기와 소봉은 말을 나란히 달려 남경의 성벽을 돌아서는 곧장 남쪽으로 갔다.
삼천 기갑병이 뒤를 따랐다. 이십여 리를 달려가게 되었을 때 기갑병들은 일제히 호통을 내지르며 동서쪽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부채꼴 모양을 하고는 멀리서 에워싸 갔다. 그러나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어울리는 가운데 사방에서 점점 포위망을 좁혀 가게 되고 풀더미 안에서 여우와 토끼 같은 짐승들이 쫓겨나왔다.
야율홍기는 그와 같이 조그만 짐승들을 사살해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반나절을 기다렸으나 시종 곰이나 호랑이 등과 같은 큰 짐승은 나타나지 않아 정히 흥을 잃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부르짖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동남쪽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달려나왔다.
송나라의 나무꾼이나 사냥꾼 같았다.
요나라 군사들은 야수를 몰아내지 못하자 황상께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참이었는데 마침 십여 명의 송나라 사람들을 몰아서는 즉시 호통을 질러 황제 앞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야율홍기는 웃으며 말했다.
잘 나타나 주었군.
그는 금과 옥이 박힌 철태궁(鐵胎弓)을 들고 조령낭아전(조翎狼牙箭)을 시위에 매겨서는 잇따라 화살을 쏘았다. 쉭쉭쉭, 하는 소리가 나는 가운데 화살은 한 대도 어긋나지 않고 삽시간에 여섯 명의 송나라 사람들을 쏘아 쓰러뜨렸다.
나머지 송나라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는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요나라 사람들이 긴 창으로 마구 찔러대며 다시 이쪽으로 몰았다.
소봉은 보기가 민망스러워 부르짖었다.
폐하!
야율홍기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그대에게 넘겨 주지. 나는 형제의 화살 솜씨를 보도록 하겠네.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으니 용서하도록 하십시오.
야율홍기는 웃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너무나 많아. 다 때려 죽여야만 천하는 태평할 수 있다네. 그들이 송나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죄이지.
그는 잇따라 화살을 쏘았다. 다시 한 대의 화살이 다섯 사람씩을 꿰ㄷ었다.
십여 명의 한나라 사람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어떤 사람은 즉시 목숨을 잃고 어떤 사람은 배에 화살을 맞아서는 일시 숨을 거두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져서는 신음 소리를 냈다.
요나라 군사들은 큰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소봉이 손을 써서 저지하였더라면 요나라 황제의 낭아전을 쳐서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들 앞에서 공공연히 황제의 체면을 깎기가 민망했다. 하지만 얼굴에 언짢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게 되었다.
야율홍기는 웃으며 물었다.
어떤가?
그는 활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한데 별안간 한 필의 말이 요나라 군사의 포위를 뚫고 질풍같이 달려왔다.
야율홍기는 말 위에 탄 사람이 한나라 사람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더 묻지 않고 활을 당겨 시위를 메기더니 퍽, 하고 그 사람을 쏘았다.
그 사람은 한 번 손을 뻗쳐 대뜸 두 손가락으로 낭아전을 낚아채었다. 야율홍기가 다시 두 번째의 화살을 쏘았다.
그 사람은 왼손을 뻗쳐 다시 두 번째의 화살을 손가락 사이에 끼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타고 있는 말은 조금도 달려오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곧장 요나라 황제에게로 달려왔다.
야율홍기는 잇따라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앞 화살에 이어서는 그의 앞쪽에 꼬리가 맞닿는 듯하면서 날아갔다.
그러나 그가 화살을 빨리 쏘아대면 상대방도 역시 빨리 받아냈다. 삽시간에 잇따라 일곱 대의 화살을 쏘았으나 상대방은 일곱 개의 화살을 모조리 낚아채었다.
요나라 군사들의 친위병들은 큰소리를 내지르며 각기 창을 뻗쳐내며 요나라 황제의 앞을 막았다.
이때 쌍방의 거리는 별로 멀지 않았다. 소봉은 나타난 사람의 얼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는 부르짖었다.
아자, 그대였군! 황상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 마라!
말에 탄 사람은 깔깔 소리 내어 웃으며 일곱 개의 낭아전을 포위병들에게 내던지고는 말에서 내리더니 야율홍기에게 꿇어 엎드려 절을 했다.
황상, 제가 황상의 화살을 받은 것을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야율홍기는 웃었다.
정말 훌륭한 솜씨고 훌륭한 재간이군.
아자는 몸을 일으키며 불렀다.
형부, 저를 마중하러 나왔나요?
그녀는 두 발을 박차더니 대뜸 소봉의 말앞으로 뛰어갔다.
소봉은 그녀의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람과 기쁨에 얽혀 부르짖었다.
아자, 그대의 눈이 어떻게 나았지.
아자는 웃었다.
형부의 둘째 아우가 치료해 준 것이에요. 기쁘지 않으세요?
소봉은 다시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 갑자기 속으로 흠칫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형용할 수 없는 쓰라리고 마음 아파하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도리를 따져 말한다면 그녀의 두 눈이 시력을 회복하고 또한 자기와 만나게 되었으니 매우 좋아해야 할 것인데 어째서 그와 같이 쓰라린 표정을 드러내는 것일까?
"아마도 아자는 도중에서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한 모양이로구나."
이때 아자는 갑자기 한소리 날카롭게 부르짖더니 앞으로 달려나왔다. 소봉은 동시에 그 누가 자기 등뒤에서 암산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즉시 몸을 돌렸다. 그러자 한 자루의 엽차(獵叉)가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아자는 왼손을 뻗쳐 잡더니 냅다 되던졌다. 그러자 그 엽차는 땅바닥에 누워있는 한 사람의 가슴팍에 꽂혔다.
그 사람은 송나라 사냥꾼이었다. 야율홍기의 활을 맞고도 아직 죽지 않고 있다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손에 들고 있던, 사냥할 때 쓰는 엽차를 소봉의 등을 향해 내던졌던 것이다.
그는 소봉이 요나라의 높은 벼슬아치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일 것 같으면 무단히 해를 입은 한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아자는 이미 숨진 그 사냥꾼을 향해 욕을 했다.
너 분수도 모르는 개 돼지가 감히 우리 형부를 암살하려고 하다니!
야율홍기는 아자가 대뜸 그 사냥꾼에게 엽차를 되던져 죽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무척 기뻐하는 듯 말했다.
정말 솜씨가 민첩하군! 대단해. 조금 전 그 엽차로 우리의 남원대왕을 해칠수는 없었겠지만 만약에 그로 인해 그가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었더라면 짐의 큰일을 그르칠 뻔했지. 좋아. 소저, 그대에게 어떤 상을 내렸으면 좋겠는가?
아자는 말했다.
황상, 황상께서는 형부에게 큰 벼슬을 내리셨습니다. 저 역시 벼슬을 하고 싶어요. 그러나 형부처럼 그렇게 큰 벼슬도 싫고, 너무 작은 벼슬은 남들이 업수이 여길까봐 싫어요.
야율홍기는 웃었다.
우리 대요나라에서는 여인이 일을 하기는 하지만 벼슬을 하는 사람이라곤 없는데, 이렇게 하기로 하지. 그대는 본래 군주이니 한 계급 더 올려서 그대를 공주로 봉하지. 무슨 공주가 되었으면 좋을까? 그렇군. 평남 공주(平南公主)라고 부르도록 하지.
아자는 조그만 입술을 쑥 내밀었다.
공주는 하기 싫어요.
야율홍기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 하기 싫다는거지?
아자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우리 형부와 결의형제 사이가 아니에요. 만약 내가 공주로 봉해진다면 황상의 딸과 같으니 한 항렬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야율홍기는 아자의 소봉에 대한 태도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소봉은 높은 벼슬 자리에 있었지만 여색을 가까이는 하지 않았다.요나라 사람들의 습관으로 말하면 그토록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었을 때는 삼처 사처는커녕 더 많은 처도 맞아들일 수 있는 처지였다. 그렇게 본다면 소봉도 아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을 느끼고 있으며 십중팔구 그녀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혼례를 미루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대의 공주는 장공주(長公主)로서 나의 누이와 같은 항렬이지, 나의 딸과 같은 항렬은 아니다. 나는 그대를 평남 공주로 봉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소원도 함께 풀어 주도록 하지?
아자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입을 열었다.
제게 무슨 소원이 있죠? 폐하께서는 또 어떻게 아시죠? 황제의 몸으로 아무렇게나 말씀하시면 안 돼요.
그녀는 하늘이 얼마나 높은 줄 모르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야율홍기에 대해서도 군신의 예의 같은 것을 따지지 않았다.
요나라의 예법은 본래 거치른 편이었다. 소봉이 또한 야율홍기에게 지극히 총애를 받는 귀인인지라 아자가 그와 같이 말하자 야율홍기는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평남 공주를 그대가 마다한다면 봉하지 않도록 하지. 하나, 둘, 셋, 그대는 하겠어, 안 하겠어?
아자는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나직이 말했다.
아자는 황상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소봉 역시 허리를 굽혔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아자를 자기 친누이동생처럼 여겼다. 그녀가 요나라 황제에 의해 공주라는 직위를 받게 되자 소봉 역시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율홍기는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봉 형제로 하여금 신나는 혼례를 올리도록 해야지. 그런 연후에 그에게 명하여 송나라를 치도록 한다면 그는 죽을 힘을 다할 것이 아니겠는가?"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황상께서 이번에 남쪽으로 오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어째서 아자를 공주에 봉했으며 칭호를 평남이라고 했을까? 평남, 설마하니 그는 송나라를 평정하겠다는 것일까?"
야율홍기는 소봉의 오른손을 잡고 말했다.
형제, 우리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누도록 하세.
두 사람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삽시간에 십여 리 밖으로 달려 나갔다. 평야에는 밭들이 황폐해져 있었고 밀밭에는 가시나무와 잡초들이 무성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송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타초곡을 하게 될까봐 수십만 마지기의 밭을 모조리 버려 놓았구나."
야율홍기는 말을 몰아 한 조그만 언덕 위로 올라가서는 말을 세웠다. 그리고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소봉은 뒤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남쪽을 바라보았다. 봉우리가 중첩되어 뻗어 있었는데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야율홍기는 채찍 끝을 남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형제, 삼십여 년 전 부황은 나를 이곳까지 데리고 와 남쪽의 대송나라 금수강산을 손가락질해 보였다네.
예.
그대는 어릴 적부터 남쪽 오랑캐 땅에서 컸으니 남쪽의 산천이나 인물을 많이 알겠구만. 남쪽에서 사는 것은 우리 북쪽의 추운 고장에 사는 것보다 편하지?
소봉은 말했다.
거기나 여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어디서 살든 근심걱정이 없으면 생활이 즐거운 법이지요. 북쪽 사람들은 남쪽에 사는 것이 습관되지 않았고 남쪽 사람들 역시 북쪽에 사는 것이 습관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이와 같은 안배를 했는데도 만약 억지로 바꾼다면 스스로 번뇌를 자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는 북쪽의 사람으로서 남쪽 지방에 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사는 것이 습관이 된 이후에 다시 북쪽으로 와서 살자니 마음속으로 번거롭게 생각되었겠지.
소봉은 말했다.
신은 강호를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며 사해를 내 집으로 아는 사람이니 일반 농부나 목인(牧人)들과는 다르지요. 폐하께서는 신에게 거처할 장소를 주셨고 또한 높은 벼슬과 두터운 녹봉을 내리셨으니 그 은혜 심히 감사하게 여깁니다. 또 무슨 번거로운 일이 있겠습니가?
야율홍기는 고개를 돌리고 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봉은 감히 그의 시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미소를 띄운 채 시선을 돌렸다.
형제, 그대와 나는 군신지간이기는 하지만 결의형제이네. 오랫동안 만나 보지 못한 사이에 어째서 서먹서먹한 감을 느끼도록 하는가?
소봉은 말했다.
과거 소신은 폐하가 바로 대요나라의 천자인 줄을 몰라 외람된 짓을 많이 했으며 그야말로 버릇없는 짓을 했습니다만 이제 알게 된 이상 어찌 결의형제를 한 사이로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야율홍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된 사람은 오히려 마음을 줄 수 있고 의기가 깊은 사내들과 사귀지를 못하는 법. 형제, 만약 내가 그대를 따라 강호로 떠돌아다니게 된다면 구속 받는 것이 없어서 오히려 더 즐거울 것 같구만.
소봉은 기뻐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친구를 좋아하신다면 몇 사람 사귀는 것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소신은 중원에 두 명의 결의형제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영취궁의 허죽자이고 한 사람은 대리의 단예입니다. 모두가 의리가 깊은 사내들이죠. 폐하께서 만약 만나고 싶어 하신다면 신은 그들에게 요나라로 와서 한 번 놀다 가라고 청하겠습니다.
그는 남경으로 되돌아온 이후 매일같이 요나라의 신하인 막료들이나 장수들 또는 군사들과 벗하며 지냈다. 그러나 언어나 성격에 있어서 서로 맞지 않을 때가 많았다. 허죽과 단예에 대한 그리운 정이 절로 더해감을 금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을 요나라로 초청하여 며칠 묵어가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퍽이나 간절 하였다.
야율홍기는 기뻐서 말했다.
아우의 결의형제라면 또한 나의 형제가 되겠군. 그대는 급히 편지를 보내 그들에게 요나라로 달려오도록 하게. 짐은 그들 두 사람에게 커다란 벼슬을 내리도록 하겠네.
소봉은 미소했다.
그들을 불러와서 놀다가도록 하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만 두 분 형제는 벼슬을 하라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야율홍기는 잠시 침묵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우, 내가 그대의 얼굴이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종종 우울한 감이 떠오르는 것 같더군. 나는 그야말로 천하를 거머쥐다시피 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세력이 큰 군주의 한 사람일세.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그대는 이 형에게 심정을 털어놓지 않는가?
소봉은 무척 황송해서 말했다.
폐하께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게는 한평생 한스럽게 여기는 일이 있습니다.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는데 다시 만회할 길이 없답니다.
그는 어떻게 하여 아주를 죽이게 되었는가를 대략 이야기했다.
야율홍기는 왼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아우가 삼십여 세가 되도록 처를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원래 잊을 수 없는 옛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군! 무리는 아니야. 아우, 그대가 그와 같은 큰 잘못을 저지르게 한 장본인은 바로 그 한나라 남쪽 오랑캐들이겠지? 개방의 거지떼들은 배은망덕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 그대는 번뇌하지 말게. 내 며칠 안으로 군사를 일으켜서는 남쪽 오랑캐를 치겠네. 그리하여 중원 무림과 개방의 뭇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 자네가 안문관 밖에서 어머니를 잃은 원한이나 취현장에서 포위 공격을 받은 원한을 갚아 주도록 하지. 그리고 그대가 남쪽 오랑캐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좋아한다면 천 명이나 이천 명을 뽑아서 그대를 시중들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네.
소봉은 얼굴에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잘못하여 아주를 죽인 이후 나는 평생 다시 여자를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주는 아주다. 이 세상 어떤 나라라 하더라도, 또 수백 수천 년이 흐른다 하더라도 아주는 한 사람뿐이다. 어찌 천 명이나 일만 명의 한나라 미인들로 대체할 수 있겠는가. 황상은 후궁의 수천 수백 명이나 되는 궁녀들이나 비자들을 대하다 보니까 정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폐하의 높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신은 중원 무림과의 원한은 모두 없어진 것으로 했습니다. 소신의 손 아래 죽은 중원 무림 인물 또한 적지 않습니다. 서로 원한을 갚고자 한다면 그 원한이 언제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큰 재난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니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아니 될 줄로 압니다.
야율홍기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송나라 사람들은 문약해서 그저 큰소리만 칠 뿐이지 싸움터에서는 일격도 감당해낼 수 없다네. 아우는 천하무적의 영웅이니 군사를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게 된다면 남쪽 오랑캐는 수일 안으로 평정이 될 것인데 무슨 재앙이 내린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형제, 이 형님이 이번에 남쪽으로 온 것이 무슨 일 때문인지 아는가?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 가르침을 받고자 하던 참입니다.
야율홍기는 웃으며 말했다.
첫번째로는 형제와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회포를 풀자는 것이라네. 형제는 이번에 서쪽으로 가 봤으니 서하국의 형세가 어떻고 군사와 말들의 강약을 이미 속으로 환히 짐작하리라 믿네. 형제는 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소봉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황상께서는 계획하는 일이 작지 않구나. 대송나라를 차지하려할 뿐만 아니라 서하까지도 노리고 있군."
그는 말했다.
신이 이번에 서쪽으로 간 것은 그저 서하 공주가 부마를 맞게 되는 일을 구경하려 한 것이지 전쟁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명찰하십시오. 신하는 근접전에는 그대로 경험이 있지만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는 일은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야율홍기는 웃었다.
아우님은 너무 겸손해 할 것 없네. 서하 국왕이 이번에 부마를 뽑겠다고 크게 일을 벌였는데 결국에는 용두사미격이 되지 않았는가. 정말 우습기 짝이 없군. 기실 그 날 아우님이 십만 병을 거느리고 가서 서하의 공주를 남경으로 맞아들였다면 좋았을걸 그랬어.
소봉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황상께서는 강한 군사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다 되는 줄 아는구나."
야율홍기는 다시 말했다.
두 번째로 이번에 이 형이 남쪽으로 온 것은 아우의 벼슬을 올려 주려는 것일세. 그러니 잘 듣게.
소봉은 말했다.
소신은 이미 깊은 은혜를 입은 몸이라 감히 더 바라는 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야율홍기는 낭랑히 외쳤다.
남원대왕 소봉은 영을 들어라!
소봉은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렸다.
야율홍기는 말했다.
남원대왕 소봉은 나라에 충성을 다했으니 짐의 기쁨이로다. 이에 송왕(宋王)으로 올려 주며 아울러 평남대원수라는 직책을 내려 삼군을 통솔케 하노라.
소봉은 속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말했다.
소신에게는 공이 없어서 그와 같은 무거운 은혜를 감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야율홍기는 싸늘히 말했다.
아니 그대는 명을 받지 않겠다는 것인가?
소봉은 그의 어조가 준엄해지는 것을 보고 더 사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큰절을 했다.
신 소봉은 황상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야율홍기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야만 나의 훌륭한 형제이지.
야율홍기는 즉시 말에서 내려 두 손으로 소봉을 부축해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아우, 내가 이번에 남쪽에 온 것은 결코 남경까지 오려는 것이 아니고 직접 변량까지 내려갈 생각이라네.
소봉은 다시 한 번 놀라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변량까지 내려가신다구요? 그럼......그렇게 된다면......
야율홍기는 웃었다.
형제는 평남대원수로서 삼군을 통솔하고 나보다 앞서 가도록 하게. 그리하여 곧장 변량으로 쳐들어 가세. 이후 형제의 송왕부(宋王府)를 변량 조후의 황궁에다 세우도록 하세.
폐하께서는 남쪽 송나라와 싸움을 벌이겠다는 것입니까?
내가 남쪽 송나라와 싸움을 벌이겠다는 결심이 아니고 남쪽 오랑캐들이 나에게 도전할 것일세. 남쪽 송나라 태황태후라는 노파가 정사를 잡고 있을 때 모든 것은 질서정연했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쪽을 정벌할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큰 자신이 없었네. 이제 노파가 죽은 뒤 조후라는 젖비린내 나는 녀석이 놀랍게도 사람을 보내 북쪽의 지형을 조사하고 삼군을 훈련시키는 한편 또다시 군사를 모집하고 말들을 키우며 양식을 저축하고 있다지 않은가. 흐흐흐, 그 녀석이 나를 상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그 누구를 상대하겠는가?
소봉은 말했다.
남쪽 송나라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상관할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몇 년간 송나라와 요나라는 서로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태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조후가 만약 침범해 온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그를 추풍낙엽처럼 무찔러 버릴 수 있습니다. 그가 만약에 폐하의 위세를 두려워해서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녀석과 똑같이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야율홍기는 말했다.
형제는 잘 모르네. 남쪽 송나라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으며 물산(物産)이 풍부하다네. 만약에 뛰어난 군주가 나서서 정말 우리 요나라와 적이 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이길 수 없다네. 다행히도 조후라는 녀석은 막돼먹은 자로서 충신들을 몰아쳐내고 서털보마저도 지방의 한 관리로 내쫓았다고 하더군. 이제 군신이 화목하지 않고 인심이 조후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마당이니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일세. 이때 치지 않는다면 언제 치겠는가?
소봉은 눈을 들어 남쪽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선히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수천 수만의 요나라 군사들이 남쪽으로 공격해 간다면 집들은 불에 탈 것이고 그 뜨거운 화염은 충천할 것이리라.
무수한 남녀노소들이 말발굽 아래에서 신음하게 될 것이고, 화살은 허공을 뒤덮게 될 것이며, 송나라 군사와 요나라 군사가 서로 죽고 죽이면서 다투어 말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선혈은 강물처럼 흐르게 되고 시체는 온 들을 뒤덮을 것이다.
야율홍기는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거란의 옛 조상들은 모두 다 남쪽 송나라를 우리 판도로 집어넣으려 했지만 몇 번인가 거의 공을 다 세우다시피 하고서는 실패를 했다네. 오늘 하늘의 명이 이러할진대 나의 손에서 큰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형제, 나와 그대는 군신지간이지만 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될 것이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소봉은 두 무릎을 꿇고 연신 큰절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 소신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야율홍기는 약간 놀라 입을 열었다.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이 형이 힘이 닿는 일이라면 모두다 응낙하겠네.
소봉은 말했다.
폐하께서는 송나라와 요나라의 수천만이나 되는 생명을 생각해주십시오. 그리고 남쪽을 토벌하겠다는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 거란 사람들은 언제나 유목으로 생계를 삼아와 남쪽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한 번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 화가 오랫동안 갈 것이며 또한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좌절을 당하게 된다면 오히려 폐하의 위명을 손상시키게 될 것입니다.
야율홍기는 소봉의 말이 끝까지 남쪽 정벌을 싫어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소봉은 두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이 깊은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야율홍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를 송왕과 평남대원수로 삼게 된 것은 우리 대요나라에 있어서 내 한 사람 아래이고 만인지상의 높은 벼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 눈치이다. 그렇다. 그는 요나라 사람이기는 하나 어릴 적부터 남쪽 오랑캐 땅에서 자랐기 때문에 남쪽 오랑캐라고도 할 수 있다. 대송나라로 말하면 그의 부모의 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군사를 일으켜 남쪽 오랑캐를 친다고 하니까 애써 저지하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설사 내가 억지로 그에게 군사를 주어 남쪽을 치게 한다 하더라도 그는 힘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남정의 뜻을 굳힌 지 이미 오래이니 형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네.
소봉은 말했다.
전쟁은 국가의 대사이니 아무쪼록 세 번 생각해 주십시오. 만약 폐하가 남쪽을 치겠다면 폐하께서는 다른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도록 하십시오. 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하다가는 페하의 큰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야율홍기는 말했다.
그대의 마음에는 남쪽 송나라가 요나라보다 더욱 중요하다 이건가? 그대는 남쪽 송나라에 충성을 했으면 했지. 우리 대요나라에 충성을 할 수는 없다 이것이겠지?
소봉은 땅바닥에 엎드려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명찰하십시오. 소봉은 거란 사람이니 자연 대요나라에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대요나라에 어려움이 있다면 소봉은 끓는 물속이 아니라 불속이라 뛰어들겠으며 진충보국하고 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야율홍기는 말했다.
조후라는 녀석은 우리 대요나라의 국토를 노리고 있지 않은가. 흔히들 먼저 손을 쓰게 되면 강하게 되고 후에 손을 쓰는 자는 재난을 당하게 된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서 제압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망하고 멸종의 커다란 화를 입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네. 그런데도 그대는 진충보국을 하며 만 번 죽어도 사양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그대보고 나라를 위해 군사를 통솔하라고 하는데도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는군.
소봉은 말했다.
신은 한평생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실로 두 손에 다시는 피비린내를 풍기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신하에게 관직에서 물러나 산천에 은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야율홍기는 그가 벼슬도 마다하겠다는 말을 듣고 더욱 분노했다. 속으로 즉시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손을 칼자루에 가져갔다.
칼을 뽑아서는 그의 목을 내려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생각을 곧 바꾸었다.
"이 사람은 무공이 무섭다. 내가 한칼에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에게 해침을 당할 것이다. 더군다나 옛날 그는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또한 나와는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가 아닌가. 그런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공신을 죽인다는 것은 은혜나 의리에 있어서도 할 짓이 못된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칼자루에서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그대와 나의 견해가 같지 않으니 일시에 억지로 떠맡길 수도 없군. 그대는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도록 하게. 아무쪼록 그대가 마음을 돌려서 나의 명에 따라 남정해 주기를 바라는 바일세.
소봉은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으나, 옆에 있는 사람이 눈썹을 한 번 꿈틀하고 손가락 하나를 든다 하더라도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야율홍기가 칼자루로 손을 가져가 즉시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야율홍기와 더 말해 봤자 더욱 의견을 같이 할 수 없으면 끝내는 얼굴을 붉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는 몸을 일으켜서는 야율홍기의 말을 끌고 왔다.
야율홍기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말 위에 오르더니 질풍같이 말을 몰고 갔다.
처음에는 군신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남쪽으로 갔으나 북으로 돌아갈 때는 한 사람은 앞에 서고 한 사람은 뒤에 섰는데 그 간격은 몇 마장이나 되었다.
남경성으로 되돌아와 소봉은 야율홍기에게 남원대왕의 왕부에서 머물도록 간청했으나 야율홍기는 웃었다.
나는 그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 그대는 조용히 생각을 해보게. 그리고 이해득실을 잘 따져 보도록 하게. 나는 어영(御營)으로 되돌아가 잠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네.
즉시 소봉은 야율홍기가 어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전송했다.
야율홍기는 상경에서 올 때 보도와 이검(利劍), 그리고 준마와 미녀들을 많이 데리고 와 소봉에게 상으로 내렸다.
소봉은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그 물건들과 사람을 받아서는 왕부로 데리고 왔다.
소봉이 친히 정사를 돌볼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는 문방사보나 서적 같은 것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왕부에는 서재가 없었다. 평소 바로 대청에서 장수들과 땅바닥에 앉아서는 술을 돌리며 마셨고 고기를 잘라서 먹었다. 과거 개방의 제자들과 앉아서 통쾌하게 술마시던 습성을 그대로 유지해온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란의 뭇 장수들은 본래 대막의 장막 안에서 역시 그와 같은 생활을 누리던 사람들이라 대왕이 아무렇게나 앉아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오히려 호탕하다고 생각하고 모두들 좋아하며 따랐다.
이때 소봉이 어영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문 후였다. 대청으로 들어가게 되자 소기름으로 만든 촛불이 켜 있었고 호피(虎皮)에는 자삼을 입은 한 소녀가 엎드려 있었다.
바로 아자였다.
그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달려와 소봉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제가 온 데 대해서 형부는 좋아하지 않으세요? 형부는 어째서 별로 기쁘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지요?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일 때문에 그런다. 아자, 네가 온 것을 나는 무척 기뻐한다. 이 세상에서 내가 근심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너 한 사람밖에 없다.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오고 또 눈마저 치료하게 되었으니 이제 나는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자는 웃었다.
형부, 저는 눈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께서는 저를 공주로 봉해 주셨어요. 형부는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소봉은 말했다.
공주로 봉해지든 봉해지지 않든 아자는 역시 아자다. 황상께서는 조금 전 다시 나의 벼슬을 올려 주셨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들고 마개를 뽑았다.
그는 두 모금의 술을 들이켰다. 대청 사방에는 술을 담은 가죽 주머니가 가득 놓여 있었다.
아자는 말했다.
형부, 축하해요. 또 다시 벼슬이 올랐군요.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상께서는 나를 송왕과 평남대원수로 봉해서는 내가 군사를 일으켜 남쪽 송나라를 쳐 주기를 바라고 있다. 생각해 봐라. 이 싸움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많은 관병이나 백성들이 목숨을 잃게 되겠느냐? 나는 그 명을 따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황상께서는 화를 내시기까지 했다.
아자는 말했다.
형부는 또 이상해졌군요. 제가 소문에 들으니까 형부는 취현장에서 무수한 중원 무림의 그 오랑캐들이 그토록 형부를 못살게 굴었으니 오늘 황상께서는 그야말로 형부에게 신이 나도록 대군을 이끌고 그 녀석들을 모조리 죽일 기회를 주신 건데 어째서 기뻐하지 않나요?
소봉은 가죽 주머니의 술을 크게 한 모금 마시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나와 너의 언니 두 사람은 포위 공격을 당해 애써 싸우지 않는다면 난도질을 당할 판이라 어쩔 수 없이 싸운 것이란다. 그 날 나에게 죽은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은 옛날에 절친한 나의 친구였다.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여간 괴롭지 않았단다.
아자는 말했다.
아, 알겠어요, 그때 형부는 아주를 위해 사람을 죽였군요? 그렇다면 이제 아무쪼록 저를 위해서 그 남쪽 나라의 오랑캐들을 죽여 주세요. 좋지 않아요?
소봉은 그녀를 노려보며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일인데 너는 마치 소와 양을 잡는 듯 이야기하는구나. 너의 아버지는 대리국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너의 어머님은 남쪽 송나라 사람이 아니냐?
아자는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몸을 돌렸다.
나는 벌써 형부의 마음을 알고 있단 말이에요. 만 명의 살아 있는 아자도 한 명의 이 세상에 없는 아주보다 못하단 말이지요? 내가 거의 죽을 때가 되어서야만이 형부는 저를 조금 생각할 것 같군요. 진작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저는...... 먼길을 달려와 형부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형부는...... 형부는 언제 남을 마음에 둔 적이 있어요?
소봉은 그녀의 말속에 크게 원망하는 빛이 스며 있는 것을 보고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과거 그녀가 독침으로 자기를 암산했던 것도 바로 자기가 그녀와 함께 오래 오래 있어 주도록 하는 바람에서 그랬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어서 입을 열었다.
아자, 너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저 말괄량이 짓만 할 줄 알았지 어른들이 일을 모르는구나......
아자는 재빨리 그 말을 가로챘다.
뭐가 어른이고 어린애란 말이에요? 나는 이미 어린애가 아니에요. 형부는 언니에게 나를 돌보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요? 형부는......그저 내가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만 돌보았지......언제 제 마음속의 일을 돌본 적이 있나요? 형부는 내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아요.
소봉은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 감히 그 말을 받지 못했다.
아자가 다시 말했다.
그때 내 눈이 멀게 되었을 때 형부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나 역시도 형부를 가까이 하지 않았어요. 이제 눈이 나았는데도 형부는 여전히 나를 아랑곳하지 않는군요. 저의...... 저의 어떤 점이 아주보다 못해요? 모습이 그녀만치 예쁘지 않은가요? 총명함이 그녀보다 못한가요? 그저 그녀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형부는 시시각각 그녀를 생각하고 있나요? 내가 그 날 형부의 일 장에 얻어맞아 죽었더라면 형부는 아주를 생각하듯 나를 생각했을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그만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듯 몸을 홱 돌리더니 소봉의 품속으로 달려들어서는 소리내어 울었다.
소봉은 일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자는 한참 동안 울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어린애예요? 그 날 뇌성폭우가 몰아치던 날 밤 나는 형부가 언니를 쳐죽인 후 그토록 슬퍼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무척 형부를 좋아하게 됐단 말이에요. 나는 마음속으로 "형부는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요. 형부에게는 아주가 없어졌지만 나 역시 아주처럼 진정으로 형부를 잘 대해 주겠어요"하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난 그렇게 작정하고 한평생 형부를 따르리라고 마음먹었던 것이에요. 그러나 형부는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리하여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거예요. "좋아, 내가 따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형부를 불구로 만들어서 한평생 나를 따르도록 하겠다"라고.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들먹여서 무엇 하느냐.
아자는 부르짖었다.
왜 지나간 일이에요? 저의 마음은 그때부터 앞으로 영원토록 변치 않을 것이에요. 제가 형부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형부는 언제나 저를 마음속에 두지 않았어요.
소봉은 가만가만 아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나직이 말했다.
아자, 나의 나이는 너보다 배나 더 많다. 그저 아저씨처럼, 오라비처럼 너를 돌볼 수밖에 없다. 나는 한평생 한 여자만을 좋아했었다. 그 여자는 바로 너의 언니다. 영원히 두 번째 여자가 있어 아주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다시는 어떤 여자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황상께서는 나에게 일백 명이나 되는 미녀를 내리셨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녀들을 거들떠본 적이 없다. 내가 너에게 관심을 두는 것도 모두 아주 때문이다.
아자는 그만 울화가 치밀어서 돌연 손을 뻗쳐서는 철썩, 하니 소봉의 뺨을 후려쳤다.
소봉이 이를 피하려고 했다면 아자가 어찌 그의 뺨을 칠 수가 있겠는가. 그는 아자가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전신을 바르르 떨고 두 눈에 처량하고도 애달픈 빛을 띄우는 것을 보고 무척 괴로운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차마 그 일 장을 피하지 못했다.
아자는 일 장을 때린 후 매우 후회스러운 듯 부르짖었다.
형부, 저의 잘못이에요. 형부가...... 형부가 나를 때려서 빚을 갚도록 하세요. 네?
소봉은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어린애의 투정이 아니냐? 아자, 이 세상에는 대단한 일이 있을 수 없으니 그토록 상심할 것은 없다. 너의 눈은 어째서 그토록 슬픈 빛을 띄우고 있느냐? 형부는 거친 사내이다. 네가 언제나 나와 함께 있게 된다면 너는 속으로 통쾌하게 여길 때가 없을 것이다.
아자는 되물었다.
저의 두 눈에는 언제나 슬프고도 괴로운 빛이 떠오르는가요? 그렇죠? 아, 그것은 모두 다 못난 녀석 때문이에요.
소봉은 물었다.
뭐가 못난 녀석 때문이라는 것이냐?
아자는 말했다.
이 한 쌍의 눈동자는 바로 그 못난이 철두인이 나에게 준 것이에요.
소봉은 일시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없어 물었다.
못난이 철두인이라구?
아자는 말했다.
그 개방의 장주 장취현이지 누군 누구예요. 정말 말하자면 우스워서 배꼽이 빠질 지경이에요. 사실 그는 바로 내가 무쇠탈을 씌워 준 유탄지란 말이에요. 그리고 바로 취현장의 둘째 장주 유구의 아들로서 석회를 형부의 눈에 뿌리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는 어느 곳에서 이상야릇한 무공을 배워 와서 줄곧 나의 곁에서 나의 환심을 사려고 했어요. 저는 그에게 깜박 속아 넘어갔죠. 그 때 나는 눈이 멀었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그저 장 공자, 장 공자 하면서 그를 불러 주었어요. 이제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 죽고 싶을 지경이에요.
소봉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그 개방의 장 방주는 바로 너에게 조롱을 당할 대로 당한 철축이었구나. 아마도 무쇠탈을 벗게 되었을 때 얼굴 가죽을 상했겠구나. 그 철축이 바로 유탄지라고? 아, 너는 정말 너무나 터무니없는 짓을 했구나. 그토록 사람을 괴롭히다니. 그런데 그 사람이 옛날의 원한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너에게 잘 대해 주었다니 정말 가상한 일이다.
아자는 냉소했다.
흥, 뭐가 가상해요. 그가 뭐 좋은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어요? 그저 나를 꼬여 그에게 시집을 가도록 만들려고 그랬죠.
소봉은 그 날 소실산 위에서 일어났던 정경을 생각해 보았다.
유탄지가 아자를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깊은 정이 담겼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별로 유의하지 못했던 터였다.
그는 입을 열고 물었다.
너는 진상을 알게 되자 그만 노해서 그를 죽였니? 아니면 그의 눈동자를 파 버렸니?
아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어요. 이 눈동자는 그가 스스로 원해서 나에게 준 거예요.
소봉은 더욱더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
그는 어째서 자기의 눈을 뽑아 너에게 주었지?
아자는 말했다.
그 사람은 멍청해요. 나와 그가 표묘봉 영취궁으로 찾아가서 그대의 의형제 허죽자를 찾아 나의 눈을 치료해 달라고 했지요. 허죽자는 살아 있는 신선한 사람의 눈동자로 바꾸어야 된다고 했어요. 영취궁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다 허죽자의 부하가 아니겠어요. 내가 그에게 눈을 바꾸어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그 여인들의 눈을 뽑을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유탄지보고 산 아래로 내려가 한 사람을 잡아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녀석은 울면서 내가 눈을 치료하게 되어 자기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면 자기를 아랑곳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러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는 갑자기 첨도(尖刀)를 들더니 허죽자를 찾아가서는 자기의 눈을 나에게 주겠다고 했어요. 허죽자는 뭐라고 말해도 안 된다고 했어요. 그 철두인은 그 칼을 가지고 자기의 몸과 얼굴을 마구 그어댔어요. 허죽자가 만약 응하지 않는다면 즉시 자살하겠다는 거예요. 허죽자는 별수 없이 그의 눈을 저에게 바꾸어 끼운 거예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이야기를 했다. 그저 흔히 있는 일인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소봉이 들을 때는 한없이 끔찍했다.
아니 한평생 간담을 싸늘하게 하던 사람을 죽고 죽이는 격렬한 싸움에 비해도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손이 떨려 그만 텅, 하니 손에 들고 있던 술주머니를 떨구고 말했다.
아자, 유탄지가 기꺼이 눈을 너에게 바쳤다는 것이냐?
아자는 말했다.
그래요.
소봉은 말했다.
너는...... 너라는 사람은 정말 무쇠 심장을 가졌구나! 상대방에서 눈을 너에게 준다고 해서 너는 받아들였느냐?
아자는 그의 어조가 근엄해지는 것을 느끼고 두 눈을 깜박였다. 다시 눈물을 흘리려고 하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형부, 형부가 만약 눈이 멀게 되었다면야 저는 기꺼이 저의 멀쩡한 눈을 형부가 바꾸어 끼우도록 해드리겠어요.
소봉은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정이 듬뿍 담겨 있는 것을 느꼈다. 결코 꾸며대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퍽이나 감동하여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자, 그 유군이 너에 대해서 그토록 깊은 정을 보였다면 너는 행복 속에 있으면서도 행복을 몰랐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이 세상 어디에서 그토록 정이 많은 낭군을 찾는다는 거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자는 말했다.
십중팔구 영취궁에 있겠지요. 눈이 없으니 그 험준하기 이를데 없는 표묘봉을 어떻게 내려오겠어요?
소봉은 말했다.
아, 어쩌면 둘째 아우가 죽을 죄를 지은 죄수의 눈을 찾아서는 그에게 바꾸어 끼어 줄지도 모르겠구나.
아자는 말했다.
안 돼요. 그 소화상...... 아니 허죽자는 말했어요. 나의 눈은 그저 정춘추 노적의 독에 의하여 망막이 망가졌을 뿐 근맥이 잘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꾸어 줄 수 있었다고 했어요. 철축의 눈동자는 파낼 때 근맥이 모조리 잘려졌기 때문에 다시는 바꿀 수 없다고 했어요.
소봉은 말했다.
너는 빨리 가서 그와 함께 행동하도록 해라. 이제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해라.
아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가지 않겠어요. 그저 형부를 따르고 싶어요. 그같이 요괴처럼 추악한 사람을 나는 쳐다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데 한평생을 어떻게 지내란 말이에요?
소봉은 노해 말했다.
상대방의 얼굴은 추악하나 심기는 너보다 백 배나 더 아름답다. 나는 네가 옆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너를 만나는 것도 바라지 않아!
아자는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저는...... 저는......
이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두 명의 위사가 일제히 말했다.
성지가 하달되었습니다.
곧이어 대청의 문이 열렸다. 소봉과 아자는 일제히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황제의 사자가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사자는 낭랑히 외쳤다.
황상께서는 평남 공주를 뵙고자 합니다.
예.
눈물을 닦고 아자는 그 사자를 따라갔다.
소봉은 아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 유탄지는 정말 그녀에 대하여 정이 깊구나. 정말 고금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아자가 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 나와 조석으로 함께 있게 되고 또 그녀는 중상을 입었을 때라 나는 남녀의 비밀을 피하지 않고 정성껏 돌보았기 때문에 그녀가 나에게 어린애 투정과 같은 순정을 느끼게 된 것이로구나. 나는 반드시 그녀로 하여금 유탄지의 곁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상대방에서 그렇게 그녀를 대했는데 그녀가 만약 두 눈이 멀어 버린 사람을 배반한다면 하늘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그 사자와 아자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그리고 끝내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야율홍기가 그에게 송나라를 치라는 뜻을 생각해 보았다.
"황상은 왜 아자를 불러간 것일까? 틀림없이 그녀로 하여금 나에게 명을 받들어 송나라를 치도록 권하라고 하겠지. 내가 한사코 그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국법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조금 전 남쪽 들에서 내가 한사코 간할 때에 황상께서는 칼자루를 쥐었다. 이미 살의를 느낀 것인데 아마도 그는 군신의 정과 형제의 의리를 돌봐 억지로 참은 것일게다. 만약에 내가 명을 받들고 송나라를 치게 된다면 군사를 이끌고 수천 수만이나 되는 송나라 사람들을 도살하게 될 것이니 내 마음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아버님은 지금 소림사에 출가하고 계신데 만약 내가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크게 언짢아하실 것이다. 아! 군주님의 명에 항거하는 것은 불충이고 의형제의 정을 돌보지 않는 것은 바로 불의이다. 그러나 만약 남쪽을 공격하여 백성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은 불인이고 아버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불효이다. 충효를 겸비하기도 어렵고 인의까지도 돌볼 수가 없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만두자, 그만둬. 남원대왕은 이제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인장을 걸어놓고 창고를 봉한 후 황상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가 버리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또 어디로 간다지? 넓고 넓은 세상에 이 소봉의 몸둘 곳이 없구나."
그는 다시 소가죽으로 만든 술 주머니를 들고서 두 모금의 술을 마시고 생각했다.
"아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와 함께 표묘봉으로 가자. 첫째 그녀를 유탄지에게도 데려 가고 둘째로 나는 둘째 아우가 있는 곳에서 며칠 묵으면서 다시 앞일을 생각하기로 하자."
아자는 사자를 따라 어영으로 갔다. 야율홍기를 보자 그녀는 불쑥 입을 열었다.
황상, 평남 공주는 되돌려 드리겠어요. 저는 하지 않을래요.
야율홍기가 아자를 불러들인 것은 소봉의 짐작대로 그녀에게 소봉에게 권해 명령을 받들고 남정을 하라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하는 말을 듣고 그만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히 말했다.
조정에서 벼슬을 내리거나 상을 내리는 것은 국가의 대사이다. 어린애 장난이 아니다. 어찌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이냐?
아자는 왁, 하니 울음을 터뜨렸다.
야율홍기는 발을 구르며 말했다.
말이 되지 않는군. 말이 되지 않아!
갑자기 천막 뒤쪽에서 간드러진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황상, 무슨 일로 화를 내세요? 어찌하여 나이 어린 아가씨로 하여금 놀라 울게 만들었죠?
챙그랑거리는 금속성이 울려퍼지면서 한 명의 귀부인이 걸어나왔다.
그 부인의 눈동자는 초롱초롱했다. 그리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자는 그녀가 황제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목귀비(穆貴妃)임을 알아 보았다.
그녀는 즉시 흐느끼면서 말했다.
목귀비께서 공평한 말을 한 마디 해주세요. 제가 평남 공주가 되지 않겠다고 하니 황상께서는 저를 꾸짖는군요.
목귀비는 그녀가 우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겼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이에 아자의 키는 전보다 커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더욱더 예뻐져 있지 않은가.
목귀비는 야율홍기에게 눈을 곱게 흘겨 주고는 방긋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황상, 그녀가 평남 공주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녀를 평남귀비(平南貴妃)로 봉해 주도록 하세요.
야율홍기는 자기 허벅지를 탁 치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야! 내가 이 아이를 공주로 봉한 것은 소봉 형제 때문이야. 한 사람은 평남대원수가 되고 한 사람은 평남 공주가 되어서는 그들이 혼례를 올릴 수 있도록 하자는 뜻이었어. 한데 소봉은 평남대원수가 싫다는 거야. 그리고 이 아가씨 역시 평남 공주가 싫다는군. 그렇군. 그대는 남쪽 오랑캐니 우리가 남쪽을 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지?
그의 어조에는 은연중 위협의 뜻이 서려 있었다.
아자는 말했다.
저는 그대들이 남쪽을 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요. 황상께서 동쪽을 쳐도 좋고 서쪽을 쳐도 좋아요. 그러나 저의 형부......형부는 저에게 한 눈먼 못난이에게 시집을 가라고 했어요.
야율홍기는 그 말에 매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
아자는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아 그저 단순하게 말하였다.
저의 형부는 저를 좋아하지 않아서 남에게 시집가라는 거예요.
바로 이때였다. 장막 밖에서 그 누가 나직이 불렀다.
황상!
야율홍기는 장막 밖으로 나갔다. 보니 소봉에게 보내어 위사가 되도록 한 심복이었다.
그 자는 나직이 말했다.
황상께 알립니다. 소 대왕은 창고문을 봉했습니다. 그리고 인장을 노란 베에 싸서는 대들보 위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 모양을 보건대 그는...... 그는...... 인사없이 떠나려는 것 같습니다.
야율홍기는 그 말을 듣자 그만 발끈해졌다.
이것이야 참을 수가 있나. 그는 아직도 나를 황제로 생각하는 것인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그는 말했다.
어영도지휘(御營都指揮)를 불러 오너라.
삽시간에 어영도지휘가 앞에 나타났다.
너는 병마를 이끌고 남원대왕부를 사방에서 에워싸도록 해라.
그는 다시 성지를 내렸다.
영을 내려 사방의 성문을 꽉 닫아 내리고 그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해라.
그는 소봉이 부하를 이끌고 반기를 들까봐 두려웠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명령을 내려서는 남원대왕의 부하 대장들을 하나하나 불러들였다.
목귀비는 장막 안에서 밖에서 호각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이는지라 변고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거란 사람들은 남녀간의 차이도 심히 가볍게 보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장막 밖으로 나가서는 나직이 야율홍기에게 물었다.
폐하, 무슨 일이옵니까? 왜 이토록 화를 내시죠?
야율홍기는 노해 부르짖었다.
소봉이란 녀석이 분수를 모르고 나를 배반하고서 떠나가려고 하는 모양이야. 이 녀석의 마음은 남쪽 송나라로 기울어졌어. 그러니 틀림없이 남쪽 오랑캐들에게 전갈을 할거야. 그는 우리 요나라의 군국비밀을 많이 알고 있단 말이야. 따라서 그가 송나라로 가게 된다면 나의 심복대환이 돼.
목귀비는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 녀석의 무공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폐하께서 종종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만약 그를 잡지 못하여 포위망을 뚫고 나간다면 정말 큰 화근이군요.
야율홍기는 말했다.
그렇고 말고.
그는 위사들에게 분부했다.
비룡영, 비호영, 비표영에 영을 보내 재빨리 남원대왕부 밖에 증원군을 보내도록 해라.
위사들은 명령을 받들고 영을 전했다.
목귀비는 말했다.
폐하, 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어요.
그녀는 귓속말로 나직이 속삭였다.
야율홍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사하구만. 이 일을 만약 성공시킨다면 짐이 큰 상을 내리도록 하지.
목귀비는 미소했다.
폐하께서 즐거워하신다면 큰상이라 할 수 있어요. 폐하께서 저를 이토록 잘 대해 주시는데 제가 또 무엇을 욕심내겠어요?
어영 밖에서는 군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자는 장막 안에 앉아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란 사람들은 크고 작은 소리를 부르짖으며 달려갔다. 그녀는 옛날부터 이런 일을 많이 보아온 터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낙타의 안장 위에 앉아 마음만 어지러웠다.
"형부에 대한 나의 마음을 형부가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전혀 나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으며 나보고 그 못난이에게 가라고 한다. 나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 가지 않겠어. 암 가지 않고 말고."
마음속으로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오른쪽 발끝으로 끊임없이 융단 위에 새겨져 있는 호랑이 머리의 무늬를 발길로 툭툭 차고 있었다.
별안간 한 가벼운 손이 그녀의 어깻죽지에 얹혀졌다. 아자는 약간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게 되자 목귀비의 부드러운 눈초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때 목귀비는 웃으며 물었다.
누이, 왜 넋을 잃고 있지? 아마도 형부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지?
아자는 그녀가 자기의 심사를 꼬집어 말하자 그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목귀비는 그녀와 나란히 앉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는 가볍게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누이, 남자들은 모두가 거칠고 성질을 마구 부리는 버릇이 있어요. 더우기 우리 황상이나 남원대왕은 당금 세상의 영웅 호걸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실로 쉽지가 않아요.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그 몇 마디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목귀비는 다시 말했다.
우리 궁안의 여인들은 수백 수천에 달하고 있지. 나보다 잘나고 황제의 환심을 더 잘 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도 황상께선 가장 나를 총애하는 것은 반은 연분이라 할 수 있고 반은 상경 성덕사(聖德寺) 노화상이 돌봐주신 덕택이지. 누이, 그대의 형부가 지금 그대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 대해서 걱정할 것 없어요. 나중에 내가 황상을 따라 상경으로 가면 그대는 나와 함께 성덕사로 가서 그 고승에게 부탁을 해봐요. 그러면 그대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실거야.
아자는 물었다.
그 노화상에게 어떤 방법이 있나요?
목귀비는 말했다.
그 일을 그대에게 이야기해 줄까? 하지만 그대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서는 안 돼요. 그러니 그대가 그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해요.
아자는 말했다.
내가 만약 목귀비가 저에게 말한 비밀을 누설한다면 난도질을 당해 곱게 죽지 못할 거예요.
목귀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내가 그대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은 너무나 관계가 커. 그러니 그대가 다시 좀더 강한 맹세를 하라구.
아자는 말했다.
좋아요. 그대가 나에게 알려 준 비밀을 만약 내가 누설한다면...... 나는 저의 형부에게 일 장을 얻어맞아 죽게 될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마음속의 처량함과 쓸쓸함을 어느 정도 느끼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달콤한 심정에 젖어들기도 했다.
목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일 장을 얻어맞아 죽는다는 것은 남에게 난도질을 당해 죽는 것보다 백 배가 더 비참한 노릇이지. 그렇다면 나는 믿을 수 있어. 누이, 이분 고승은 불력이 끝이 없고 신통력이 광대한데 내가 그에게 꿇어 엎드려서 빈 이후 그는 나에게 두 조그만 병의 성수(聖水)를 주었어. 그러면서 몰래 기도를 올리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한 병을 먹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되면 그 남자는 영원히 나 한 사람만을 사랑하게 되며 죽어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대나. 그래서 나는 황상에게 한 병을 먹이게 되었고 이제 한 병이 남아 있어.
그러면서 그녀는 품속에서 한 짙은 붉은 빛의 조그만 자기병을 꺼내서는 손에 꼭 쥐었다. 마치 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아자는 놀람과 기븜을 느끼며 부탁했다.
언니, 저에게 보여 주세요.
그녀는 어릴 적부터 성숙파의 문하에서 자랐기에 그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고혹시키는 요령이나 방법에 대해서 언제나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목귀비는 말했다.
보는 건 상관없지만 떨어뜨리지 말아요.
두 손으로는 자기병을 들어서 조심스레 건네 주었다. 아자는 받아서 병마개를 뽑고 냄새를 한 번 맡아 보았다.
한 가닥 담담한 향기가 코에 풍겼다. 목귀비는 손을 뻗쳐 자기병을 가져 가더니 나무 마개로 꼭 닫았다.
마치 약 기운이 없어지는 것이 두려운 듯했다.
본래 그대에게 나누어 줘도 상관이 없겠지만 만일 황상께서 이후 마음이 변하게 된다면 이 성수는 그때 써야 하기 때문에 주지 못하는 거예요.
아자는 말했다.
황상께서 한 병을 먹은 이후 영원히 그대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목귀비는 미소했다.
말은 그렇지만 성수의 효과가 그토록 오래 갈지 의문이잖아. 그렇지 않다면 그 고승은 어째서 나에게 두 병이나 주었겠어. 더군다나 나는 이 성수가 다른 비빈의 손에 들어가 그들이 살그머니 황상에게 먹이게 될까 봐 걱정돼. 그렇게 된다면 황상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을 나누게 될 것이 아니겠어......
거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야율홍기가 장막 밖에서 불렀다.
아복. 그대에게 할 말이 있으니 이리 나오시오.
목귀비는 웃었다.
가겠어요.
그녀는 총총히 달려갔다. 그 순간 착,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그 자기병이 그녀의 품속에서 융단 바닥에 떨어졌는데 목귀비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자는 놀람과 기쁨에 얽혀 그녀가 장막 밖으로 나가자마자 즉시 몸을 날려서는 자기병을 집어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빨리 가져가 형부에게 먹여야지."
그녀는 뒷 장막의 휘장을 걷고 살그머니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줄달음치듯 남원대왕의 왕부로 향해 달려갔다.
왕부 밖에는 군사들이 많았다. 남원대왕이 군사를 이동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아자는 대청으로 들어갔다. 소봉은 뒷짐을 진 채 대청밖 처마 끝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자를 보자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아자, 마침 잘 돌아왔다. 나는 네가 황상에게 역류되어 나오지 못하는 줄 알았지. 이제 우리 출발하자. 늦으면 때를 놓치고 말거야.
아자는 의아하여 물었다.
어디로 가요? 어째서 늦으면 때를 놓친다는 거죠? 황상이 또 어째서 나를 억류해요?
소봉은 말했다.
들어 봐!
두 사람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왕부의 사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그리고 철갑이 쩡쩡거리며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동서남북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아자는 말했다.
뭐하는 거죠? 군사를 데리고 싸우러 나가는 것인가요?
소봉이 쓰디쓰게 웃었다.
이 군사들은 이제 나의 지휘를 받지 않아. 황상께서는 나를 의심하게 되어 나를 잡으려고 하는거야.
아자는 말했다.
좋아요. 우리 오랫동안 싸우지 못했는데 우리 함께 뚫고 나가요.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황상에게 적잖은 은혜를 입었고 황상께서는 나를 남원대왕으로 봉했다. 거기다가 이번에 친히 달려와서는 벼슬을 올려 주기도 했어. 그런데 내가 의심을 받게 된 것은 내가 남쪽의 송나라를 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내가 만약에 그의 부하를 해친다면 형제의 의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천하영웅의 웃음을 사게 될 것이며, 이 소봉이 배은망덕한 자라고 말할 것이야. 아자, 우리 이대로 살그머니 떠나자. 작별을 고하지 않고 떠나게 되면 나를 잡을 수 없을 터이니 그것으로써 끝이 나는 거야.
아자는 물었다.
음, 우리 바로 가요. 그런데 형부는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소봉은 말했다.
표묘봉 영취궁으로 가자.
아자는 안색이 대뜸 굳어졌다.
나는 그 못난이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소봉은 말했다.
사태가 긴급해. 표묘봉으로 가고 안 가고는 이 위험한 곳에서 빠져나간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아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형부가 나를 표묘봉으로 보내려고 하는 것을 보면 전혀 나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일찌감치 성수를 먹여 나에게 마음이 쏠리도록 한다면 자연 나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더 지체했다가는 목귀비가 달려와 빼앗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말했다.
그것도 좋아요. 내가 몇 가지의 바꿔입을 옷을 가져 오도록 하죠.
그녀는 총총히 달려갔다. 그녀는 그릇을 찾아 자기병의 성수를 그릇 안에 쏟았다. 그릇 그득하게 술을 붓고서는 속으로 기도했다.
"영험하신 보살님, 소봉이 이 성수를 마신 이후 한마음 한뜻으로 이 아자를 사랑하고 처로 맞아 주되 다시는 아주 언니를 생각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녀는 대청으로 나아가서는 말했다.
형부, 이 한 잔의 술을 먹고 정신을 돋우도록 하세요. 이제 떠나면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없잖아요.
소봉은 그 그릇을 받았다. 촛불 아래 아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고 눈초리에는 기이한 빛이 감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그녀의 얼굴은 흥분에 싸여 있었고 또한 온순하기 이를데 없었다. 소봉은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과거 아주가 나에게 매우 마음을 쏟을 때 얼굴에 역시 이와 같은 표정을 보였지. 아, 아마도 아자는 정말 나에 대해서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는 즉시 술을 마시고 물었다.
옷을 가져 왔느냐?
아자는 그가 성수를 마신 것을 보고 속으로 크게 기뻤다.
여기 있어요. 이제 곧 떠나도록 해요.
소봉은 보따리를 등에 메었다. 그 보따리에는 몇 가지의 의복과 몇 조각의 금은이 들어 있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그들은 내가 남쪽으로 달려갈까봐 경계하고 있을 것이니 나는 북쪽으로 나가겠다.
그는 아자의 손을 잡고는 가만히 옆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위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쪽으로 순시를 돌았다.
소봉은 문뒤에 몸을 숨기고는 기침을 했다. 두 명의 위사는 일제히 달려와 살펴보려고 했다.
소봉은 손가락을 내밀어 두 사람의 혈도을 짚어 쓰러뜨리고는 아래로 끌어들여 나무 그늘 아래에 눕혀 두고는 나직이 말했다.
빨리 이 두 사람의 갑옷으로 바꿔 입자.
아자는 기뻐했다.
정말 잘 됐네요.
두 사람은 위사의 갑옷을 벗겨서는 몸에 걸쳤다. 그리고 각기 한 자루의 긴 창을 들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순찰을 돌듯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이 이십여 걸음 나가게 되었을 때 한 명의 십부장이 열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소봉과 아자는 한켠에 서서는 창을 들고 경의를 표했다.
그 십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갔다. 그런데 횃불 아래 보니 아자의 옷이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허리께에 찬 칼집 역시 땅바닥에 끌렸다. 약간 울화가 치민 그는 주먹을 들어 그녀의 어깻죽지를 툭 치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무슨 옷을 이렇게 입은거야!
아자는 자기의 신분이 탄로났다고 생각하고 냅다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왼발로 그의 허리께를 걷어찻다.
십부장은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곧장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소봉은 부르짖었다.
빨리 가자.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달려나갔다. 십 명의 군졸들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첩자다!
자객이다!
그들은 아직도 두 사람이 바로 소봉과 아자임을 알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이 한동안 달려가다 보니 바른편에서 십여 필의 말이 달려왔다.
소봉은 긴 창을 들어서는 비스듬히 쓸어졌다. 말 위에 탄 사람들이 다투어 떨어졌다. 그는 오른손으로 아자를 말등에 태웠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한 필의 말에 올라서서는 말머리를 돌려 곧장 북문 쪽으로 달려갔다.
이때 남원대왕 왕부 사방의 군사들은 이미 소문을 듣고 사면팔방에서 에워싸듯 하면서 달려들었다.
소봉은 말을 질풍같이 몰았다. 그의 짐작대로 요나라의 군사들 가운데 십분의 팔은 남쪽 길을 지키고 있었고 그가 남쪽으로 도망 못하도록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문 일대에는 희끗희끗 별로 많지 않은 사람들만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군사들은 소봉을 보자 먼저 겁을 집어 먹었다. 그저 군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와 막았다. 그러나 소봉이 호통을 내지르며 달려들자 다투어 길을 텄다. 그리고 멀리 뒷쪽에서 고함을 치고 뒤쫓아올 뿐이었다.
어영도지휘가 사람들은 데리고 후원차 달려오게 되었을 때 소봉과 아자는 이미 멀찌감치 가고 있었다.
소봉은 말을 몰아 북문에 이르렀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런데 성문 앞에는 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겹겹이 서 있었다.
각기 기다란 창을 뻗쳐 내어서는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소봉이 만약 달려들어 공격을 한다면 백여 명의 요나라 군사들은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만 바랐을 뿐 본국의 군사들을 하나라도 더 해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왼손을 뻗쳐 아자를 말등에서 안더니 오른발로 말등을 차고 말 위에 올라섰다.
곧이어 한가닥 진기를 돋우고는 몸을 날려 성 위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한 번 날림으로써 성 위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그 순간 오른손의 긴 창을 성벽에다 꽂았다. 그리고 그 힘을 빌어서는 성 위로 올라섰다.
성 밖을 바라보니 어두침침 하니 등불이 없었다. 아마도 그가 북쪽으로 달아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한 명의 병졸도 지키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소봉은 길게 휘파람을 내불고는 성 안을 향해 낭랑히 외쳤다.
그대들은 황상에게 품해라. 소봉이 황상의 명을 듣지 않아 감히 직접 찾아 뵙고 떠나는 인사를 하지 못한다고 해라. 그러나 황상의 커다란 은혜는 소봉이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전해라.
그는 아자의 허리를 껴안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 성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면 그야말로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이고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을 판이었다.
그는 속으로 기뻐하며 몸을 날려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별안간 아랫배에 격렬한 통증이 전해졌고 곧이어 두 팔이 시큰거렸다.
아자의 허리께를 껴안았던 왼쪽 팔을 자기도 모르게 풀었고 두 무릎에 맥이 빠져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뱃속은 마치 수천 자루의 조그만 칼이 마구 찌르는 듯 격렬한 아픔을 느끼고 참을 수 없어 음,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아자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형부, 어떻게 되었나요?
소봉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이빨이 다닥 딱딱 마주치도록 용을 쓰며 말했다.
나는......나는......극독에......중독되었다.......잠시......기다려라......운기하여......독을 몰아내야......
그 즉시 그는 진기를 단전에 모으고 배안의 독물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런데 운기를 하지 않을 때는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는데 진기를 돋우자 대뜸 사지백해에 격렬한 아픔이 찾아 들었다.
소봉은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수천 필이나 되는 말들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가닥의 진기를 끌어올리려고 했으나 사지가 전혀 감각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자기가 중독된 독이 대단히 무서워 내력으로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자, 너나 빨리 떠나라. 나는......너와 함께 갈 수 없구나.
아자는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자기가 목귀비의 간계에 빠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자는 놀람을 참지 못하고 소봉의 머리를 얼싸안고는 울부짖었다.
형부......제가 그대를 해쳤군요. 독약은 제가 형부에게 먹인 것이에요.
소봉은 속으로 흠칫해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물었다.
네가 어째서 나를 해쳐 죽이려고 했느냐?
아자는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목귀비는 나에게 한 병의 물을 주면서 형부에게 마시게 한다면 형부가 영원히 저를 좋아하게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저를 처로 맞으리라고 했단 말이에요. 저는 정말 바보같이 그 말을 믿었어요. 형부, 저는 형부를 따라 함께 죽겠어요. 우리는 다시 헤어지지 말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는 자기의 목을 베려고 했다.
소봉은 부르짖었다.
자......잠깐!
그의 온 몸뚱이는 뜨거운 불길 속에 던져진 듯했고 또한 칼로 살을 가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야말로 몸 안팎으로 동시에 격렬한 고통을 느끼고 있어 제대로 생각을 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아자의 말속에 있는 뜻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너도 죽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이때 두 쪽의 육중한 성문이 끼끽 하면서 열렸다. 수백 명의 기병들이 북문으로 달려나와 고함을 지르며 진을 쳤다. 그리고 수많은 병마들이 남쪽에서 달려와 계속 성을 나섰다.
소봉은 성 위에 앉아서 북쪽을 바라보았다. 횃불이 수 마장 안쪽으로 훤히 비추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남쪽을 바라보았다. 남문 부근의 성 안쪽이 횃불로 뒤덮여 있었다.
"황상께서는 어영의 군사까지도 모조리 움직여 나 한 사람을 잡으려 하는구나."
이때 성 안의 군사들이 일제히 소리 높이 외쳤다.
역적 소봉은 빨리 투항하도록 해라!
소봉은 뱃속에 다시 격렬한 고통을 느끼고 나직이 말했다.
아자, 너는 빨리 방법을 강구해서 도망을 치도록 해라.
아자는 말했다.
내가 친히 독을 써서 형부를 해쳐 죽게 만든다면 내 어찌 혼자 살 수 있겠어요? 저는......저는......형부와 함께 죽을래요.
소봉은 쓰디쓰게 웃었다.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 아니다. 그저 나에게 중상을 입혀 손을 쓸 수 없도록 만든 데 지나지 않는다.
아자는 기뻐서 되물었다.
정말이에요?
그녀는 몸을 돌려 소봉을 자기의 등에 입었다. 그러나 그녀의 체구가 너무나 작고 가냘픈 데 반해서 소봉은 유난히 우람한 체구였다.
아자가 그를 업고 일어서자 소봉의 두 다리는 여전히 땅바닥에 닿을 지경이었다. 바로 이때 십여 명의 거란 무사가 성 위로 올라왔다.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횃불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러나 소봉을 겁내서는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 못했다.
소봉은 말했다.
항거해야 소용없으니 그들 보고 우리를 잡으라고 해.
아자는 울부짖었다.
싫어요. 싫어요. 그 누구라도 형부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나는 그를 죽여 버리겠어요.
소봉은 말했다.
나 때문에 사람을 죽일 생각은 하지 말아라. 만약 내가 사람을 죽이고자 했다면 명을 받들고 군사를 이끌고서 남쪽을 쳤을 것이며 이런 처지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언성을 높여 외쳤다.
그렇게 꽁무니를 빼서야 거란의 남아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와 함께 황상을 뵈러 가자.
무사들은 어리둥절해져서는 일제히 허리를 구부리고 공손히 말했다.
예, 저희들은 명을 받들고 대왕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으니 대왕께서는 탓하지 마십시오.
소봉이 남원대왕이 된 지 시일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부하들에게는 매우 부드럽게 대했고 또 그의 위세나 덕망이 북쪽에까지 널리 알려진 터이라 거란의 장수들이나 군졸들은 모두 그를 존경했다.
소봉은 아자의 어깻죽지를 잡고 억지로 버티며 일어섰다. 오장육부가 마치 서로 엉키고 마구 씹어대는 것처럼 아파왔다.
뭇 군사들은 일장 밖에서 칼을 칼집에 꽂았다. 그리고 그가 한 걸음 두 걸음 돌계단을 잇따라 딛으며 성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지켜 보았다.
장수와 군졸들은 소봉이 내려오자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내렸다. 성 안팎의 장수와 군졸들은 만 명이 넘었건만 삽시간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소봉은 횃불 아래 그 성실하고 소박하며 공손한 얼굴들을 대하게 되자 별안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남쪽을 치게 된다면 이곳의 만여 명이나 되는 장수와 병사 가운데 반수는 북쪽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만약 이토록 많은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황상께서 설사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한이 없다. 다만 황상께서 나를 죽인 이후에 다른 사람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남쪽을 치러 갈까 봐 두려울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게 되었을 때 가슴팍에 또다시 격렬한 아픔을 느끼고 몸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한 명의 장수가 자기가 타고 온 말을 끌어서는 소봉을 부축해서 말 위에 올라타게 했다.
아자 역시 한 필의 말을 바꾸어 타고 뒤를 따랐다. 일행은 두 사람을 에워싸듯 하고서는 남쪽 왕부로 되돌아갔다.
뭇 장수와 군사들은 소봉을 잡았으니 큰 공을 세운 셈이지만 즐거워하는 빛이 없었다.
철갑이 철그덕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수만의 말발굽들이 석판 위를 밟는 소리가 달그닥거리고 울려퍼지고 있을 뿐 환호하는 소리는 한 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일행은 곧장 북문의 큰거리로 들어섰다. 그리고 백마교(白馬橋) 옆에 이르렀다.
소봉이 말을 몰아 다리 위로 올라가는데 아자가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두 발로 말안장을 차고는 휙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소봉은 이 뜻밖의 일을 당하자 그만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곧 기뻐했다.
처음 그 말괄량이 소저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소경호에 빠져서 죽은 척 하지 않았던가. 자맥질이 매우 훌륭하여 실로 보기 드물 정도였고 그녀의 부모들도 그녀의 그와 같은 속임수에 깜빡 속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그녀가 물로 도망을 치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만날 날이 없으리라고 생각을 하자 마음이 무척 허전했다. 그러나 그는 큰소리로 짐짓 외쳤다.
아자, 네 스스로 자결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황상께서는 너를 괴롭히려 하지 않을것인데 너는 왜 강물로 뛰어들어 자결을 하느냐?
뭇 장수와 군사들은 소봉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아자가 물 속에 떨어진 이후 다시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정말 그녀가 자결을 한 줄로 알았다. 그리고 황제가 그저 소봉 한 사람 잡아오라고 했을 뿐이니 아자가 자결을 하거나 도망쳐도 상관이 없는 일이라 모두들 마음에 두지 않았다.
왕부에 이르게 되었을 때 야율홍기는 소봉과 만나려고 하지 않고 어영도지휘에게 명을 내려서는 감금하도록 했다.
그 어영도지휘는 소 대왕이 천생의 신력을 타고난 몸이니 여느 뇌옥으로서는 그를 감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즉시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가장 크고 가장 무거운 쇠사슬과 쇠고랑을 가져 오도록 하고는 그의 손과 발을 묶었다. 그리고 그를 커다란 철책 우리 안에 가두었다.
이 철책 우리는 바로 아자가 사자를 데리고 놀 때 사자를 가두었던 그 철책이기도 했다. 이 철책은 모두다 어린애의 팔뚝만한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철책으로 된 우리 밖에는 백 명의 어영친위병들을 세웠다. 그리고 제각기 긴창을 들고 겹겹이 사방에 늘어서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 소봉이 철책 우리 안에서 어떤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만 해도 어영친위병들이 철책 우리 안의 그를 찔러 죽일 판이었다.
그의 기운이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삽시간에 쇠고랑을 자르고서는 쇠우리 안에서 도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왕부 밖으로는 일대의 친위병들이 엄히 경계를 했다. 야율홍기는 원래 남경에 주둔시켰던 장수들과 군사들을 모조리 남경성 밖으로 물러나도록 했다.
그들이 소봉에게 충성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소봉을 구하려고 날뛸지 모른다는 점을 염려해서였다.
소봉은 철책 우리의 난간에 기대서는 입술을 깨물며 배 아픈 것을 참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열두 시진이 지나 이튿날 밤이 되었을 때야 독약의 약 기운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고 그 격렬한 아픔도 점차 감소되었다.
소봉은 점차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이상 이곳에서 빠져나갈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번거롭게 생각해도 쓸모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평생 지극히 위험한 위기도 적지 않게 겪어온 그인데 설마하니 이 소봉이 일세의 호걸로서 정말 이렇게 쇠우리 안에서 죽고 말 것인가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다행히 친위병들은 그를 영웅처럼 대접했으며 좋은 술과 밥을 주었고 예의도 차렸다.
소봉은 마음껏 술을 마셔대 수 일 후 쇠우리 옆에는 술 항아리 등이 더미를 이루게 되었다.
야율홍기는 시종 그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저 몇 명의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내 권하려 했다.
그 말들은 황상의 아량이 넓어 옛날의 정과 의리를 생각해서 형벌을 가하고자 하지 않으니 소봉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라는 따위의 말이었다.
소봉은 그와 같은 세객(說客)들을 제대로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술만 따라 마시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달포 남짓하게 되었다. 네 명의 세객은 여전히 귀찮은 줄 모르는 듯 매일같이 진부한 논조로 되풀이 해서 똑같은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말들은 황상께서 소 대왕에게 태산과 같은 은혜를 입혔으니 소 대왕은 황상의 말을 들어야만이 살아날 수 있다는 등의 말이었다.
이 세객들은 좀처럼 소봉을 권해서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저 매일같이 똑같은 말을 씨부려댔다.
어느 날 소봉은 갑자기 의심이 더럭 났다.
"황상께서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을 시켜 나에게 너절구레한 말만 늘어놓게 하는 것일까? 이 가운데는 이상한 점이 없잖아 있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그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렇군. 황상께서는 이미 내세울 장수들을 내세우고 긁어 모을 군사들은 모조리 긁어 모아 대거 남쪽을 치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쓸데없는 사람을 보내 내가 이곳에서 꼼짝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반항할 힘이 없다. 그는 수시로 나를 죽일 수 있는데 왜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까?"
소봉은 다시 생각을 해 보던 중 어느 정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상은 자기 자신이 영웅이라는 것을 나타내려 하고 있다. 그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남쪽을 쳐 송나라의 강산을 수중에 넣은 이후 내 앞으로 와서 한바탕 자랑을 하겠지. 그러나 그는 혹시나 나의 성격이 굳건하여 노한 끝에 음식을 먹지 않고 자결이라도 할까 봐 소인들을 보내 터무니없는 말을 늘어놓게 하는 것이로구나."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의 생사안위 같은 것은 도외시하고 있었다. 달아날 생각도 아예 하지 않았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남쪽을 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천하의 근심을 자기 일로 삼는 성현은 아니었다.
야율홍기가 이미 군사를 일으켰다면 커다란 액겁은 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길게 장탄식을 하여 단숨에 열 대접의 술을 비웠을 뿐 다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 네 명의 세객은 여전히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소봉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우리 거란 대군은 황하를 건넜소?
네 명의 세객은 아연해져서 서로 쳐다보더니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한 명의 세객은 말했다.
소 대왕의 그 말은 무척 옳습니다. 우리의 대군은 즉시 출발을 하고자 합니다. 황하를 건너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건너게 될 것입니다.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대군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군.
네 명의 세객은 서로 눈짓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들은 말단 관리에 불과해서 군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소 대왕께서 마음을 돌리신다면 황상께서는 직접 달려와 대왕과 군국대사를 논의하게 될 것입니다.
소봉은 코웃음을 했을 뿐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황상이 만약 파죽지세로 송나라를 수중에 넣게 된다면 나를 변방으로 압송해서 만나 보고자 하겠지. 그러나 싸움에 져서 돌아오게 된다면 나를 대할 면목이 없으니 첫번째로 죽일 사람은 내가 될 것이다. 도대체 나는 그가 송나라를 손에 넣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패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흐흐흐, 소봉아, 소봉아, 이 문제는 너 자신도 대답하지 못하는구나!"
이 날 황혼 무렵이었다. 네 명의 세객은 다시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소봉을 지키던 친위병들은 매일 그와 같은 말을 되풀이 듣게 되는지라 이미 혐오감을 일으킨지 오래였다.
네 사람이 도달하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한켠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일 개월 동안 소봉이 전혀 도망칠 뜻을 비치지 않는지라 그를 감시하던 관병들도 예전처럼 엄밀히 경계하거나 조심을 하지 않았다.
첫번째 세객은 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 대왕, 황상께서는 성지를 내리셔서 받으라고 하셨소. 만약 그대가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소이다......
이 말들을 소봉은 몇 백 번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음성이 약간 이상야릇했다. 목에 병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고 다음 순간 그는 크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 세객은 눈짓, 코짓을 하며 얼굴에 여러 가지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봉은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모습은 처음 나타났던 세객과 달랐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았을 때 그는 놀람과 기쁨을 함께 느꼈다.
그 사람은 드문드문 난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진짜로 기른 것이 아니라 갖다 붙인 것이었다. 그리고 얼굴도 엷은 검은 색을 칠해 거무튀튀한 빛을 내도록 하고 있었는데 무척 보기가 흉했다. 그런데 싯누런 수염 아래 드러난 것은 앵두와 같은 입과 단정한 코를 지닌 바로 아자가 아닌가.
이때 그녀는 음성을 낮추고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황상의 말씀은 영원히 틀리지 않을 것이오. 그대가 황상 말을 따르게 된다면 반드시 득을 보게 될 것이오. 자, 이것은 우리 대요나라 황제의 성지이니 공손하게 읽어 보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그녀는 커다란 소맷자락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소봉에게 내밀었었다.
이 무렵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몇 명의 친위병들이 대청 사방의 등롱과 촛불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소봉은 촛불에 비추어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씌어 있었다.
"구원병이 이미 도달했으니 오늘 밤 위험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소봉은 코웃음을 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자는 말했다.
이번 우리가 일으킨 군사는 적지 않소. 군사는 강하고 말들은 건장해서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승리를 하게 될 것이니 그대는 걱정할 것 없소이다.
소봉은 말했다.
나는 그저 쓸데없이 생명들을 해치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황상께서는 나를 가두신 것이오.
싸움에 이기는 것은 신기묘책에 있는 것이지 쓸데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다고 되는 일은 아니외다.
소봉은 다른 세 명의 세객을 바라보았다. 그 세 사람은 섭선을 들어 부채질을 하거나 커다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는 등 참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아자가 데리고 온 협조자인 듯했다.
소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들의 호의를 나는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적의 경계가 엄밀하여 성을 공격하는 데 있어 나는 자신이 없구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몇 명의 친위병들이 부르짖었다.
독사다! 독사! 어디서 이 많은 독사가 나타났지?
그러자 대청, 문, 창틀에서 무수한 독사들이 기어들어와 혀를 날름거리며 꾸물꾸물 기어 들어왔다.
이렇게 되자 대청 안은 대뜸 소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소봉은 속으로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이 독사들의 기세를 보니 아마도 우리 개방의 형제가 친히 지휘하고 있는 것 같구나."
친위병들은 창날과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들어서는 다투어 후려쳤다. 친위병의 두령은 부르짖었다.
소 대왕을 시중들고 있는 친위병들은 한 걸음도 옮기지 마라. 명을 어기는 자는 참수하겠다!
그 우두머리는 매우 기민했다. 뱀들이 나타난 것이 괴이한지라 소란스러운 끝에 소봉이 그 기회를 타 도망을 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철책 우리 밖에 에워싸고 있던 뭇 친위병들은 꼼짝하지 않고 그저 기다란 창날로 우리 안의 소봉을 겨누었다. 그러나 각자의 시선은 자연 그 독사들을 곁눈질하게 되었고 뱀이 가까이 다가오자 자연 창대로 후려쳤다. 매우 소란스럽게 되었을 때 갑자기 왕부 뒤쪽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불이 났다! 불을 꺼라! 빨리 불을 꺼라!
그 우두머리는 호통을 내질렀다.
개호아(凱虎兒)! 빨리 가 어영도지휘사 대인에게 보고해라. 소 대인을 옮겨야 할지 여쭈어 보란 말이다!
개호아는 한 명의 백부장(百夫長)이었다. 그는 대답을 하고 몸을 돌려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누가 대청 입구에서 날카로운 어조로 호통을 쳤다.
첩자의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에 빠져들지 말아라! 만약에 그 누가 뇌옥을 깨뜨리려고 한다면 먼저 소봉을 창으로 찔러 죽여라.
바로 어영도지휘사였다. 그는 손에 긴 칼을 들고 위풍도 늠름하게 대청 입구쪽에 서 있었다.
별안간 푸른 그림자가 번쩍였다. 그 누가 한 마리의 청색 조그만 뱀을 그의 안면에다 던졌다.
그 지휘사는 칼을 들어 막았다. 그런데 쉭쉭,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가운데 암기를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대청은 대뜸 촛불이 모조리 꺼지게 되었고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지휘사는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몸에 암기를 맞고는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아자는 소맷자락 안에서 보도를 꺼내서는 쇠우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삭삭삭, 하는 소리가 나면서 소봉의 발목과 손목에 채워 놓은 쇠고랑의 쇠사슬을 잘랐다.
소봉은 생각했다.
"이 쇠우리의 강철 철책은 지극히 굵고 견고해서 아무리 예리한 보도라 하더라도 일시에 자르기가 힘들 것이다."
바로 이때 갑자기 발밑의 땅이 움푹 꺼졌다. 아자는 쇠우리 밖에서 나직이 말했다.
지하도로 도망을 치세요.
곧이어 소봉의 두 발이 땅 밑에서 뻗쳐온 한 쌍의 손에 잡히게 되었고 아래로 끌어당겨졌다. 이렇게 되자 소봉의 몸뚱이는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바로 대리국의 땅굴을 잘 파는 화혁간이 도달한 것이었다.
그는 십여 일의 수고를 해서는 지하도를 파 소봉이 갇혀 있는 쇠우리 아래로 통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화혁간은 소봉을 끌고서 지하도 안으로 들어가더니 되돌아 나갔다. 그 속도는 땅바닥 위를 걷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삽시간에 백여 장이나 끌고 가더니 소봉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자 동굴 입구에 세 사람이 온 얼굴 가득히 기쁜 빛을 하고는 다가왔다. 바로 단예, 범화, 파천석이었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큰형님
그는 달려들어 소봉을 끌어안았다.
소봉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오래 전부터 화 사도의 재간을 들어왔었는데 오늘 친히 시험해 볼 수 있었소이다. 정말 탄복했소이다. 정말 탄복했소.
화혁간은 기뻐서 말했다.
소 대왕의 칭찬을 듣게 되니 소인으로서는 그야말로 한평생 처음으로 영광스럽게 느껴집니다.
이곳은 남원대왕부와는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다. 사방에서는 요나라 군사들이 떠들썩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자 그 누가 호각을 부는 소리가 들렸고 말들이 집밖을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적이 동문을 공격해 왔다. 어영친위병들은 원자리를 지키되 함부로 떠나지 않도록 해라!
범화는 말했다.
소 대왕, 우리는 서문으로 달려나가도록 합시다.
좋소. 아자 그녀들은 위험에서 벗어났는지 모르겠구려.
범화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아자의 음성이 지하 땅굴에서 들려왔다.
형부, 그래도 나를 생각하시는군요.
그 소리는 기쁨의 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지하도에서 뛰어 나왔는데 턱 아래에는 여전히 싯누런 수염을 달고 있었다.
온 얼굴은 흙투성이라 더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소봉의 눈으로 볼 때 그녀를 알게 된 이후 어느 때보다도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는 보도를 뽑아들더니 소봉의 쇠고랑을 끊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쇠고랑은 살에 박힌듯 붙어 있었다.
칼날이 조금이라도 삐긋한다면 살갗에 상처를 입기 마련이라 좀처럼 끊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보도를 단예에게 건네 주었다.
오라버니가 자르도록 하세요.
단예는 보도를 받아서는 내력을 돋우고 쇠고랑을 마치 썩은 나무 짜르듯 잘라냈다.
이때 지하동굴에서 다시 세 사람이 기어 나왔다. 한 사람은 종영이었고 한 사람은 목완청이었으며 세 번째 사람은 개방의 여덟 푸대를 짊어지는 제자였다. 조금 전 대청에서 뱀들이 마구 날뛰게 된 것은 그가 뿌린 수작이었다.
이 사람은 소봉이 무사한 것을 보자 너무나 기뻐 눈물마저 흘렸다.
방주, 어르신께서......
소봉은 오랫동안 자기를 방주라 칭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이제 그 개방 제자의 표정을 보고 역시 서글픈 마음이 들어 말했다.
정말 수고가 많았소.
그가 한 마디 칭찬의 말을 하자 그 여덟 푸대의 제자는 고맙기도 하고 영광스럽기도 해서인지 눈물을 마구 펑펑 쏟았다.
범화는 말했다.
대리국의 인마가 동문 쪽에서 손을 쓰고 있으니 우리들은 이 소란해진 틈을 타서 떠나도록 하지요. 소 대왕께서는 될 수 있으면 손을 쓰지 마시도록 하십시오. 적이 알아 보지 못하게 말입니다.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옳은 말이외다.
아홉 사람은 곧장 서쪽으로 달려갔다. 단예 일행은 이미 거란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때 성 안은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별로 주의하지를 않았다. 때로는 한 떼의 거란 기병들이 쫓아오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러면 아홉 명은 어두컴컴한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그리하여 십여 곳의 거리를 달려가게 되자 북쪽에서 호각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났다. 복병이 북문을 깨뜨리려고 하고 있다. 황상께서 적에게 잡혀갔어.
소봉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요나라 황제가 사로잡혀 갔단 말인가? 세째 아우, 요나라 황제는 나와 결의한 형님일세. 그가 나에게 인자하지 못했다고 하나 나는 그에게 의롭지 못한 짓을 할 수가 없네. 결코 그를 해쳐서는 안 돼......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형부, 안심하세요. 이것은 영취궁 속하인 삼십육 동의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들이에요. 저는 그들에게 몇 마디 거란 말을 가르쳐 그들이 잘 외우도록 했어요. 지금은 크게 소리치고 떠들어 대면서 유언비어를 퍼뜨려야 민심을 소란시킬 수 있을 것 아니에요. 남경성 안에는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고 황제는 만여 명이나 되는 친위병들이 보호하고 있는데 어찌 그를 잡겠어요?
소봉은 놀람과 기쁨에 말했다.
둘째 아우의 부하들도 왔구먼.
아자는 말했다.
어찌 소화상의 부하들뿐이겠어요? 소화상도 왔어요. 그리고 소화상의 마누라도 왔구요.
소봉은 물었다.
소화상의 마누라?
형부는 모르세요. 허죽자의 마누라는 바로 서하국의 공주예요. 그러나 그녀는 얼굴을 시종 가리고 있어요. 소화상 한 사람에게만 보여 줄 뿐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 주지 않는다나요. 저는 소화상에게 마누라가 예쁘냐고 물었더니 소화상은 그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아요.
소봉이 한참 도망을 치면서 그와 같은 기이한 이야기를 듣게 되자 허죽을 위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그는 단예를 한 번 쳐다보았다. 단예는 웃었다.
큰형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제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습니다. 둘째 형은 신의를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길죠. 우리 천천히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이와 같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뭇 사람들은 다시 한 가닥의 길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앞쪽 광장에는 한 채의 높다란 대(台)가 있었는데 불길에 완전히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고대(高台) 앞 깃대 위의 두 폭의 커다란 깃발에도 불이 붙어 있었다. 바로 남경성 안의 조련장으로서 요나라 군사들이 훈련을 하는 곳이었다.
언제 그 고대를 세웠는지 소봉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파천석은 단예에게 말했다.
폐하, 요나라 황제의 점장대(點將台)와 원수의 깃발을 불태웠으니 요나라 군사에게는 크게 불길한 일이 될 것입니다. 야율홍기가 송나라를 치더라도 날을 달리 잡아야 될걸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구려.
소봉은 파천석이 단예에게 폐하라고 부르고 또 단예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다시 궁금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째 아우, 그대...... 그대가 황제가 되었는가?
단예는 침울히 말했다.
선친은 불행히도 길을 가시다가 붕어하셨습니다. 백부님께서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천룡사에 출가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제에게 자리를 이어가도록 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덕망도 능력도 없는데 그와 같은 큰자리에 오르다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소봉은 놀라 말했다.
어이쿠, 숙부님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세째, 그대는 대리국의 황제인데 어찌 또 이와 같은 위험한 곳까지 오게 되었나? 그리고 나를 위해서 이토록 위험한 짓을 하다니. 만약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게 된다면 내...... 내...... 어떻게 대리국의 군민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단예는 헤벌쭉 웃었다.
대리는 남쪽 외진 곳의 조그만 나라에 불과합니다. 황제라는 칭호도 외람되지요. 소제는 그저 흐리멍텅해서 보기에도 임금 같지 않으니 어디 황제라는 인상이 조금이라도 있겠습니까? 그저 남들이 폐하라고 부를 때마다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으로 말하면 정은 골육보다 더하지 않습니까? 큰형님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데 소제가 달려와 형님과 함께 어려운 일을 어찌 겪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범화는 말했다.
소 대왕께서 이번에 요나라 황제에게 간하여 송나라를 치지 말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대리국의 아래 윗 사람들은 모두 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나라 황제가 만약 대송나라를 수중에 넣게 된다면 제이 단계는 자연 대리를 취하려고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나라로 말하면 군사는 적고 장수는 약해 거란의 정예 군사들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소 대왕이 대송나라를 구한 것은 바로 대리를 구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대리국으로서는 나라의 온힘을 기울여 대왕의 도움이 된다면 이는 당연한 일을 한 셈이죠.
소봉은 말했다.
나는 일개 필부지용을 가진 사람에 불과하오. 두 나라가 싸우게 된다면 쓸데없는 인명만 해치게 될 뿐이라고 생각했지, 무슨 공을 세웠다고 자처할 수 있겠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홀연 남쪽에서 불길이 크게 치솟았다. 한떼의 백성들이 가족들을 이끌고 군사들 사이로 몰려왔다.
모두들 말했다.
남쪽 송나라 소림사의 화상들이 무수한 호걸들과 더불어 남문을 깨뜨렸다네.
또 다른 사람은 말했다.
남원대왕 소봉이 난을 일으켜서 송나라에 항복을 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이미 대요나라의 황제를 죽였다고 하더군.
몇 명의 거란인은 이를 갈았다.
소봉이 나라를 배반하고 적에게 투신하다니,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그의 살을 뜯어먹고 싶은 심정이오.
그러자 한 사람이 당황하여 물었다.
황제께서는 정말 소봉이라는 그 간악한 도적에게 해침을 당했소?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왜 아니겠소? 나는 친히 소봉이 백마를 타고 황제 앞으로 달려들어 창으로 황제의 가슴에 구멍을 내는 것을 직접 보았소.
다른 한 노인이 말했다.
소봉, 이 개 같은 도적은 어째서 그토록 양심이 없지? 그는 도대체 우리 거란 사람인가, 아니면 한나라 사람인가?
한 사내가 말했다.
소문에 들으니 그는 거란 사람으로 가장을 한 남쪽 오랑캐라고 하더구려. 그 개도적으로 말하면 간악하기 이를데 없다오. 정말 금수만도 못한 녀석이지.
아자는 그 사람들이 소봉을 욕하는 소리를 듣자 그만 울화가 치미는 듯 말채찍을 쳐들고 옆의 거란 사람을 후려치려고 했다. 소봉은 손을 들어 막고 채찍을 밀어 버린 후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이 말했다.
멋대로들 떠들게 내버려 둬.
그리고 그는 물었다.
정말 소림사의 뭇 고승들이 이곳에 왔소?
그 개방의 여덟 푸대 제자가 말했다.
방주에게 말씀드리지요. 단 소저는 남경을 나서자마자 본방의 오 장로를 만나게 되었고 방주가 대송나라의 강산과 수천만의 백성을 위해서 요나라 황제에게 송나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간하였다가 사로잡히게 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전했지요. 오 장로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방주께서는 요나라 사람인데 어찌 대송나라를 편들겠느냐고 했죠. 그리고 즉시 남경으로 잠입해서는 친히 수소문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단 소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슨 위엄을 감히 거스를 수 없다는거냐? [2149] 제목 : [김용] 천룡팔부(天龍八部) 50장(완결편)
올린이 : 멀티피씨(김효범 ) 96/09/01 02:57 읽음 : 413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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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분노한 영웅, 오랑캐로 하여금 전쟁을 포기하게 만들다
(敎單于折箭, 六軍避易, 奮英雄努)
그 제자는 말을 계속했다.
오 장로는 즉시 본방의 청죽령(靑竹令)을 돌렸으며 방주의 인자하고도 의로운 행위를 중원 각처의 영웅들에게 알렸습니다. 중원의 무림은 방주의 인의로운 정서에 감동되어 소림사의 뭇 고승들의 영도하에 함께 달려와 방주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소봉은 과거 취현장에서 중원의 군웅들과 맞서 싸우게 되었고 적잖은 영웅 호걸들을 죽인 사실을 상기했다. 그런데 오늘 중원의 군웅들은 오히려 자기를 구하려고 달려오지 않았는가.
생각하니 괴롭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아자는 말했다.
개방의 모든 제자들이 사방으로 전갈을 했으니 소식이 빨리 전해지지 않았겠어요. 아이구, 야단났군. 애석해라, 애석해.
단예는 물었다.
뭐가 애석하냐?
아자는 말했다.
나의 그 신목왕정은 대청에서 뱀을 끌어들이도록 향을 지핀 후 총망해서 그만 잊고 가져오지 않았네요.
단예는 말했다.
그와 같은 방문좌도의 물건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몸에 지녀서 무엇하느냐?
아자는 코웃음을 쳤다.
흥, 뭐가 방문좌도예요? 그와 같은 보물이 없었다면 그 많은 독사들은 어떻게 삽시간에 그토록 많이 모을 수 있었겠어요? 그리고 저희 형부가 어찌 이토록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겠어요?
이와 같이 말하는 사이에 챙그랑, 챙그랑, 하는 무기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횃불 속에 무수한 요나라 병사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소봉은 의아하여 말했다.
어! 자기편끼리 왜......
단예는 말했다.
큰형님, 목에 하얀 수건을 두른 사람은 우리 쪽의 사람입니다.
아자는 하얀 베를 한 조각 꺼내더니 소봉에게 주었다.
형부도 두르도록 하세요.
소봉이 흘낏 보니 요나라 군사들이 적과 아군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서 누구를 죽여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치고 베는 가운데 종종 진짜 요나라 군사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목에 하얀 수건을 두른 가짜 요나라 군사들은 어김없이 요나라 장수들과 군사를 찔러 댔다.
소봉은 요나라 사람들이 하나하나 피를 흘리며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하얀 베조각을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거란 사람이다! 나는 한나라 사람이 아니다! 나는 거란 사람이다! 한나라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 하얀 베조각을 자기의 목에 두를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끼끼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쪽의 육중한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단예와 범화는 소봉을 이끌고 달려나갔다.
성문 바깥에는 횃불이 눈부시게 밝혀져 있었다. 무수한 개방의 무리들이 말을 이끌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봉이 달려 나오는 것을 보자 대뜸 우뢰와 같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교 방주, 교 방주!
불빛이 충천한 가운데 고함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때 두 줄의 횃불이 좌우로 나뉘어지면서 한 필의 말이 그 가운데로 달려 왔다.
말 위에는 한 거지가 두 손을 높이 머리 위까지 쳐들었는데 손에 들린 것은 바로 개방의 방주 신표인 타구봉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오 장로였다.
그는 소봉의 앞으로 달려 오더니 구르듯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리고는 말했다.
오장충은 뭇 형제들의 부탁을 받고 본방의 타구봉을 방주에게 되돌려 드립니다. 우리들은 실로 죽어 마땅하도록 멍청했으며 좋은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방주로 하여금 무궁무진한 고통을 당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들은 그야말로 개 돼지보다 못합니다. 방주께서는 대인의 아량으로 소인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들을 한떼의 부모없는 고아들처럼 여기시고 다시 본방의 우두머리가 되어 주십시오. 모두들 간악한 자의 선동을 받아 방주가 거란의 오랑캐라고 했으니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모두들 그 간악한 자 전관청을 난도질해 죽여 방주의 화풀이를 해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타구봉을 소봉에게 내밀었다. 소봉은 마음이 쓰라린 것을 느끼고 말했다.
오 장로, 불초는 확실히 거란 사람이외다. 여러분들이 의리를 지켜준 데 대해서 불초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오이다. 그러나 방주 자리는 절대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그는 손을 뻗쳐 오장충을 부축해 일으켰다.
오장충은 얼굴에 의혹의 빛을 띄우고 머리를 긁적긁저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그대는 또 거란 사람이라고 말하십니까? 그대는......그대는 방주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까? 교 방주, 이제 너무 탓하지 마시고 옛일은 떨쳐 버리도록 하시오.
이때 성 안에서 북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많은 요나라 군사들이 달려나왔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오 장로, 우리 빨리 갑시다. 요나라 군사의 세력이 크외다. 일단 진세를 펼치게 된다면 우리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오.
소봉 역시 개방과 중원의 군웅들이 일시적으로 우세를 점한 것은 상대방의 의표를 찔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봉은 말했다.
오 장로, 방주의 일은 천천히 이야기 하도록 합시다. 빨리 영을 내려서 형제들로 하여금 서쪽으로 물러나도록 하시구려.
오 장로는 말했다.
예.
그는 명을 전달했다. 개방의 무리들이 선봉이 되어서는 서쪽을 향해 질풍같이 달려갔다.
얼마 후 허죽자가 영취궁의 부하인 여자들과 삼십 육동 및 칠십이 도의 기인 이사들을 데리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뭇 사람들과 합세했다.
수 마당을 달려나가게 되었을 때 대리국의 무사들도 부사귀, 주단신 등의 인솔하에 달려왔다. 그러나 소림의 뭇 승려와 중원 호걸들이 도달하는 것은 시종 볼 수가 없었다.
남경성 안에서 싸우는 고함 소리가 크게 일고 있었다.
소봉은 말했다.
소림파와 중원 호걸들은 성안에서 막힌 모양이오. 우리 좀더 기다리도록 합시다.
잠시 후 성안에서 고함 소리가 더욱더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단예는 말했다.
큰형님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제가 그들을 응원하여 데리고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대리의 무사들을 데리고서는 다시 남경성 안으로 들어갔다. 날은 점점 밝아져 오고 있었다. 소봉은 속으로 여간 걱정되지 않았다. 중원의 군호들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여간 걱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죽여라, 하는 고함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있었고 대리국의 무사들이 되돌아 간 지가 한참 되었는데도 시종 군호들이 위험에서 벗어나 함께 모이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개방의 염탐꾼이 한 명 나는 듯 말을 몰아 달려와서는 전갈을 했다.
수천 명의 요나라 철갑 군사들이 서쪽 문을 막고 있습니다. 대리국의 무사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중원의 군호들도 안에서 밖으로 달려나올 수가 없습니다.
허죽이 오른손을 흔들며 부르짖었다.
우리 영취궁에서 접응하러 가세.
그는 이천 명이나 되는 삼산오악의 호걸들과 영취궁 구부의 여인들을 데리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서서 달려갔다.
소봉은 말 위에 앉아서는 멀리 동쪽을 바라보았다. 남경성 안에서는 짙은 연기가 곳곳에서 오르고 있었는데 동쪽에 한 무더기의 불길이 보이는가 하면 서쪽에 한 무더기의 불길이 보였다. 반 시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염탐꾼이 보고를 했다.
대리의 단 황야와 영취궁의 허죽자 선생께서는 혈로를 뚫고 성안으로 달려들어 갔습니다.
과거 싸움이 있을 때 소봉은 언제나 앞장을 섰다. 이번에 그는 싸움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저 초조하기만 했다.
그는 말했다.
내 가서 보고 오리라.
아자, 목완청, 종영, 세 소녀가 일제히 권했다.
요나라 사람들은 그대를 붙잡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절대 모험을 할 필요가 없어요.
상관없소.
그리고 그는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개방의 무리들이 뒤를 따랐다.
남경성 성문 밖에 이르게 되었을 때 성벽 아래와 성 위, 그리고 호성하(護城河) 양쪽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어떤 것은 요나라의 장수와 군사들이었고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단예와 허죽 두 사람의 부하들이었다.
성문은 닫혀 있듯 만듯한 상태였다. 돌연 남쪽과 북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크게 일었다.
소봉은 놀라서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요나라의 군사들이 남북에서 포위해 오는구나. 우리들은 이곳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
그는 한 자루의 창을 빼앗아서는 분질렀다. 그는 몸을 훌쩍 날렸다.
창끝으로 성벽을 한 번 찌르고 그 힘을 빌어 다시 몸을 날렸다. 창날을 다시 한 번 성벽 위에 찌르고는 몇 번 몸을 날리지 않아 성 위로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성안을 바라보았다.
서쪽 성 둘레 수 마장 안은 동쪽에 한 무리 서쪽에 한 무리 중원의 호걸들이 무수한 요나라 군사들에 의해 나뉘어져서는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거의 각자 싸우는 형국이 된 상태가 아닌가.
군호들의 무공이 고강하다 하지만 한 사람이 적을 칠 팔명 내지 십여 명을 상대로 해야 했다. 그리고 오래 싸우게 된다면 역시 중과부적일 수밖에 없었다.
소봉은 성머리에 서서는 성 안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성 밖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군호들은 자기를 구하기 위해서 달려왔는데 그들이 하나하나 요나라 군사의 칼 아래 죽는 것을 눈뜨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래로 뛰어내려가 구하자니 그것은 또 공공연히 요나라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이니 그야말로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도우는 요나라의 간신이 될 판이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자기의 조상에게도 매우 미안한 노릇이 될 것이고 천추만대에 걸쳐 영원히 본국의 동료들에게 욕을 얻어 먹을 판이었다.
남경에서 도망을 치는 것은 나라를 떠나 피난길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소봉이 불충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무기를 들고 요나라 군사를 공격한다는것은 그야말로 지극히 큰 죄인이 되는 것이었다.
소봉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언제나 깨끗하고 시원시원했다. 그리고 결단력이 지극히 빠른 편이었으나 이때만은 진퇴유곡이었다.
흘낏 보니 성가에는 칠팔 명의 거란 무사들이 두 명의 소림사 노승을 상대로 매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 명의 소림승은 손에 계도를 휘두르고 있었으나 입으로 피를 내뿜고 있는 것이 중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소봉은 눈길을 가다듬고 바라보았다. 바로 중상을 입은 소림 승려는 현명(玄鳴)이 아닌가? 바로 한 명의 소림 승려는 선장을 휘둘러 죽어라 하고 옹호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현석(玄石)이었다.
두 명의 요나라 군사가 긴 칼을 휘둘러 현명을 내리찍으려 했다. 현명은 중상을 입은 끝이라 받아낼 힘이 없었다.
현석이 선장을 거꾸로 들고 선장의 끝을 튕기듯 쳐올리고 두 자루의 긴 칼과 부딪쳐서는 두 자루 칼이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별안간 현명이 아, 하고 큰소리를 내질렀다. 왼쪽 어깨에 칼을 맞은 것이었다.
현석은 선장을 비껴들고 달려가 그 요나라 군사를 내려쳤다. 이렇게 되자 그 요나라 군사는 그만 가슴팍에 선장을 얻어맞고는 모두 뼈가 부러지는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현석은 자기 자신의 가슴팍을 크게 드러낸 셈이었다. 한 명의 거란 무사가 창을 들고 곧장 찔러 들어와 현석의 아랫배를 찌르는 데 성공했다.
현석은 선장을 내려쳐 그 거란 무사는 대뜸 두개골이 박살나고 말았으며 현석보다 일찍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현명은 계도를 마구 휘둘러댔는데 이미 법칙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현명은 눈물을 흘리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제, 사제!
소봉은 그와 같은 광경에 그만 뜨거운 피가 끓어올라 더 참을 수가 없어 한 소리 크게 부르짖었다.
소봉이 여기에 있다! 죽일테면 나를 죽이고 쓸데없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
그는 성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두 다리가 땅바닥에 닫기도 전에 그는 두명의 거란 무사를 걷어차 나가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왼발이 땅에 딛는 즉시 현명을 잡아 끌면서 오른 손으로는 현석의 선장을 받아들며 부르짖었다.
불초의 구원이 늦었습니다. 정말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선장을 휘둘러 두 명의 거란 무사를 수장 밖으로 나가떨어지도록 만들었다.
현석은 쓰디쓰게 웃었다.
우리들은 거사를 거란 사람이라고 모함했으니 더욱 큰 죄를 지었소이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으니......
그 한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개를 옆으로 숙이며 그대로 숨지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현명을 보호하면서 왼쪽에서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몇 명의 대리 무사 쪽으로 달려갔다. 요나라 장수와 군사들은 남원대왕이 갑자기 늠름한 기상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불현듯 겁을 집어 먹는 것 같았다.
소봉은 선장을 휘두르며 멀리 있는 사람은 찍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마구 때렸다.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손에 걸린 자들은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요나라 군사들은 다투어 뒤로 물러섰다. 소봉은 좌충우돌하여 삽시간에 근 이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그는 낭랑히 외쳤다.
여러분들은 절대 흩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는 이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을 데리고 사방으로 오락가락 했다. 그리고 그 누가 포위된 것을 보면 즉시 달려가 포위당한 사람을 구출해냈다.
이는 마치 눈덩이를 굴리면 굴릴수록 커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불어나갔다. 그리하여 천 명 이상이 되었을 때 요나라 군사는 이제 저지할래야 저지할 수가 없었다.
그 즉시 소봉과 허죽, 단예 그리고 소림사의 현도 대사가 이끄는 중원 군호들은 한데 모일 수 있었고 재차 그들은 성문 쪽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소봉은 손에 선장을 들고 성문가에 섰다. 그리고 대리국, 영취궁, 중원 군호들이 일일이 성을 빠져 나가도록 지켰다. 요나라 장수와 군사들은 멀리서 고함을 지를 뿐 감히 앞으로 달려들지를 못했다.
소봉은 뭇 사람들이 물러난 후에야 성을 나섰다.
성문을 나설 때 고개를 돌아보니 시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중첩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을 빼앗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두 명 영취궁의 여호걸들이 피바다 속에 누워서 신음 소리를 뱉어내며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봉은 성문 안으로 달려 들어가 두 여인의 등을 잡고서 들어올린 채 성문을 나섰다.
별안간 북 소리가 천둥치듯 들려왔다. 이 대의 기병이 남북에서 공격해 왔다. 소봉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이 대의 기병들은 각 일 대마다 만 명 이상의 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쪽 편에서는 오랫동안 싸운 끝이라 상처를 입거나 모두 지쳐 있었는데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소봉은 부르짖었다.
개방의 뭇 형제들은 뒤를 막으시오! 그리고 말은 상처입은 친구에게 주어 먼저 물러나도록 하시오.
개방의 무리들은 큰소리로 대답하고 다투어 말에서 내렸다. 소봉은 다시 부르짖었다.
타구대진(打拘大陣)을 펼쳐라!
개방의 제자들은 입으로 연화락(蓮花落)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한 줄 한 줄 늘어서기 시작했다.
소봉은 부르짖었다.
현도 대사, 둘째 아우, 세째 아우는 빨리 중원의 친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퇴각하고 개방으로 하여금 뒤를 막도록 하시오!
해가 동녘 하늘로 막 떠올랐다. 이렇게 되자 햇살에 요나라 군사들의 창날과 칼날이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수만이나 되는 말발굽 소리가 땅을 밟고 달려오는 그 기세는 그야말로 천지를 뒤흔들어 놓을 지경이었다.
허죽과 단예는 요나라 군사의 형세를 보고 개방의 타구대진으로서는 어떻게 하더라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은 나누어 소봉의 좌우에 늘어서며 말했다.
큰형님, 우리 결의형제들은 어려움을 같이 견뎌내고 생사도 함께 하도록 합시다.
소봉은 말했다.
그렇다면 빨리 부하들보고 먼저 물러나도록 하게나.
허죽과 단예는 다투어 영을 전했다.
영취궁의 부하들은 주인을 내버려 두고 가지 않으려 했고 대리국의 무사들도 황제를 위험한 곳에 내버려 두고 스스로 물러가려고 하지 않았다.
요나라 군사들은 더욱 가까이 달려왔다. 그리고 쏘아대는 화살 중에는 어느덧 소봉 등이 있는 십여 장 밖에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현도는 본래 중원의 군호들을 이끌고 먼저 물러갔다. 그러나 군호들 가운데 이쪽의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는 수십 명이 되돌아와 도와 주려고 했다.
소봉은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무공이 고강하기는 하나 한데 모아 놓으니 그야말로 오합지졸에 불과하구나. 병법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어떻게 요나라 군사들과 대항할 수 있겠는가? 나 하나 죽는 것은 상관없으나 모두들 요나라 군사에 의해서 남경성 밖에서 섬멸을 당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그야말로......"
정히 어떻게 할 줄을 몰라할 때 별안간 요나라 군사 진중에서 징 소리가 급히 울려퍼졌다. 놀랍게도 물러서라는 북 소리였다.
질풍같이 달려들던 요나라 군사들은 그 징 소리를 듣자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뒤에서 달려오던 사람들이 앞장을 서게 되고서는 제각기 남북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소봉은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랐다. 그런데 요나라 군사들 뒷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데 또 다른 군마가 있어 요나라 군사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더욱더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니 요나라 군사 뒤에 또 한 군마가 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 것일까? 황상이 등뒤로 적을 맞게 되었다면 형세가 불리할텐데."
그는 요나라 군사가 포위를 당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자 자연스럽게 야율홍기가 머리에 떠올랐다.
소봉은 말머리를 돌리고 요나라 군사들의 진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쪽 한쪽의 하얀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요나라 군사들은 다투어 말에서 떨어졌다.
소봉은 확연히 깨달았다.
"아, 나의 여진 부족의 친구들이 도달했군. 그들은 또 어떻게 해서 소식을 알게 되었을까?"
여진족의 사냥꾼들은 화살 솜씨가 뛰어난 바 있었고 또 용감하기 이를데 없었다.
매 백 명을 일 소대로 하고 있었고 말에 올라타고서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 달려들었다.
이렇게 되자 삽시간에 요나라 군사의 진이 흐트러지게 되었다. 여진 부족은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싸움에 용감했다. 게다가 요나라 군사의 의표를 찌른 셈이 되었다.
요나라 군사의 원수는 정세가 불리해지자 소봉이 통솔하는 인마가 앞쪽에서 협공을 할까봐 급히 북을 쳐서는 군사를 성안으로 후퇴하도록 만들었다.
범화는 대리국의 사마인만큼 병법에 정통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소봉에게 말했다.
소 대왕, 빨리 우리는 돌격을 하지요. 이것이야말로 적을 깨뜨릴 좋은 기회입니다.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화는 말했다.
이곳은 안문관과 무척 머니 만약 이 기회에 요나라 군사를 대파하지 않는다면 후환을 남길 것이 틀림없습니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은 수이니 무사히 물러서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소봉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화는 크게 의혹을 느끼고 속으로 생각했다.
"소 대왕은 그야말로 적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수를 피하고 있다. 혹시 훗날 요나라 황제와 다시 사이 좋게 될 여지를 남겨 두자는 것이 아닐까?"
흙먼지가 이는 가운데 한 떼의 여진인들이 윗몸을 벌거숭이로 드러내거나 짐승의 가죽옷을 두른 채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휙휙휙, 활을 쏘아대자 요나라 군사들이 말에서 픽픽, 떨어졌다.
요나라 군사의 뒤에 처진 천여 명은 미처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거의가 여진인들의 화살을 맞고 성벽 아래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여진 오랑캐들은 앞쪽의 머리를 밀고 뒤통수에는 머리카락을 땋아 하나같이 얼굴이 흉칙해 보였다. 그리고 온몸에 피칠을 하고 있었다.
적을 활로 쏘아 죽인 이후 즉시 칼을 휘둘러 수급을 허리에 꿰어 차는데 어떤 사람은 허리에 십여 개나되는 수급을 두르고 있었다.
군호들은 강호에서 사람을 죽이고 죽는 사건을 많이 보아 왔지만 이와 같이 흉폭하고 잔인한 오랑캐들은 처음 보는지라 모두 다 아연실색했다.
한 명의 우람한 체구의 여진 사냥꾼이 말등에 서서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소 형님, 소 형님, 완안 아골타가 형님을 도와 주러 왔습니다!
소봉은 말을 짓쳐 달려나갔다. 두 사람은 네 손을 꽉 잡았다.
아골타는 기뻐서 말했다.
소 형님, 그 날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간 이후 형제는 매일처럼 걱정을 했습니다. 그후 염탐군은 형님이 요나라에서 큰 벼슬을 했다는 보고를 해오기에 편안히 잘 있는가 생각했죠. 그러나 요나라 사람들은 교활하기 때문에 그 벼슬을 오래 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전 염탐꾼이 와서 소형님이 그 개새끼 같은 황제에 의해 뇌옥에 갇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형제는 급히 사람들을 데리고 구하러 왔는데 다행히 형님께서는 죽지도 않았고 상처도 입지 않아서 이 형제는 무척 기쁩니다.
소봉은 말했다.
형제가 구원해 주러 온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성 위에서 화살이 다투어 쏟아져 왔다. 두 사람은 성쪽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화살은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아골타는 노해 부르짖었다.
거란의 개새끼들이 형님과 이야기하는데 방해를 하다니!
그러더니 커다란 활을 잡아당겨 휙휙휙, 하니 세 대의 화살을 성 아래쪽에서 위로 쏘아올렸다. 그러자 세 마디의 비명 소리와 더불어 세 명의 요나라 군사가 화살을 맞고는 성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요나라 군사들이 쏜 화살은 이쪽으로 날아들지도 못했지만 완안 아골타의 억센 활은 멀리까지 날아갔으며 세 발 모두 적의 가슴팍에 적중되었다.
이렇게 되자 성 위의 요나라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다투어 활을 거두어들이고는 방패를 들었다. 그런데 성안에서는 북 소리가 둥둥 울려퍼졌다.
요나라 군사는 다시 군사를 모으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골타는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 형제들은 듣거라! 거란의 개새끼들은 또다시 개집에서 기어나오려 하고 있다. 우리는 또다시 한바탕 통쾌하게 싸우자!
여진인은 큰소리로 떠들어대며 호응을 하는데 그 소리는 만 마리의 야수들이 일제히 울부짖는 것 같았다.
소봉은 속으로 이 일장의 싸움을 하게 된다면 쌍방의 사상자가 많아지리라 생각하고 재빨리 말했다.
형제, 그대가 나를 구하러 왔고 이제 나는 위험에서 벗어났으니 다시 싸움을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대와 나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조용한 곳을 찾아가 우리 실컷 술이나 마시도록 하게.
완안 아골타는 말했다.
그 말씀도 옳습니다. 우리 가지요.
그런데 성문이 활짝 열리면서 한 대의 철갑 기마병들이 급히 달려나왔다. 아골타는 욕을 했다.
죽여도 못다 죽일 거란의 개새끼들 같으니라구!
그는 활에 시위를 메기더니 화살을 쏘았다. 휙, 하니 화살은 앞장서서 달려오던 사람의 얼굴을 맞혔다.
그 사람은 대뜸 뒤로 벌러 쓰러졌다.
나머지의 여진인들도 다투어 화살을 쏘아댔다. 모두들 요나라 군사의 얼굴을 쏘아댔다.
이 사람들의 화살 쏘는 방법은 정묘했고 화살촉에는 극독을 묻히고 있어서 맞은 사람은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즉시 죽었다.
삽시간에 성문 쪽에 수백 명이 쓰러지게 되었다.
인마와 갑옷이 조그마한 언덕을 쌓듯 더미를 이루어 성문을 막아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의 요나라 군사들은 놀라 성문을 꽉 닫은 채 다시 나서지를 못했다.
완안 아골타는 부족인들을 데리고 기고만장하여 고함을 질러댔다.
소봉은 말했다.
형제, 우리 가세.
아골타는 말했다.
예.
그는 손가락을 들어서는 성 위쪽을 가리키며 소리 높이 외쳤다.
거란의 개들은 들어라! 다행이 너희들이 우리 소 형님의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기에 오늘 너희들의 목숨은 살려 둔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을 무너뜨리고 너희 거란 개들을 하나하나 쏘아 죽였을 것이다.
즉시 그는 소봉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을 서쪽으로 몰았다. 십여 리쯤 달려가 어느 산 언덕 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골타는 말에서 내려 가죽 주머니를 풀더니 소봉에게 내밀었다.
형님, 술을 마십시오.
소봉은 꿀꺽꿀꺽 반 주머니를 마시고는 아골타에게 건네 주었다.
아골타는 나머지 반 주머니의 술을 모두 마시고는 말했다.
형님, 차라리 이 형제와 장백산으로 가서는 사냥이나 하며 술을 마시는 것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소봉은 야율홍기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가 오늘 남경성 아래서 완안 아골타에 의해 패배를 당했고 또 실컷 욕을 얻어 먹었으니 크게 체면을 잃은 끝이라 반드시 가만 있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서는 여진족을 상대로 싸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진인들이 용감하기는 하나 역시 사람이 적어 승패는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반드시 그들에게 어떤 좋은 생각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장백산 아래에서 보내던 나날들은 아자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이외의 다른 걱정은 없었던 터고 또한 명리를 다투거나 하는 일이 없어서 입으로는 여진부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 쓸데없는 번뇌를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형제, 이 중원에서 온 영웅 호걸들은 모두 다 나를 구하러 온 것일세. 나는 그들을 안문관까지 전송을 한 이후 다시 형제와 만나도록 하겠네.
아골타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중원의 오랑캐들은 말이 많아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소이다. 나는 그들과 만나지 않겠소이다.
그는 부족 사람들을 이끌고는 북쪽으로 향해 떠났다.
중원의 군호들은 그 오랑캐들이 질풍과 같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한 용감무쌍하기 이를데 없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한떼의 오랑캐들은 요나라의 개새끼들보다 더 무섭구나. 다행히 그들이 교 방주의 친구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말 야단날 뻔했지 않은가."
각처의 인마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조금 전 남경성 아래의 싸움을 화제로 삼았다.
소봉은 허리를 깊숙이 굽히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의 인자함과 의리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더군다나 소모의 옛날 나쁜 짓을 생각하지 않고 천리 먼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달려와 도와 주신 이 은혜는 소모가 영원히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도는 말했다.
교 방주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옛날 여러 가지 일들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외다. 무림의 동포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더군다나 교 방주는 중원의 수백만 생명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사안위를 돌보지 않고 부귀영화마저도 떨쳐 버렸으니 그야말로 천하의 사람들에게 인덕을 베풀었다 할 수 있으니 우리들이 오히려 교 방주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외다.
범화는 낭랑히 말했다.
여러 영웅호걸들, 불초가 볼 때 요나라의 군사는 틀림없이 추격을 해올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견은 어떠신지?
군웅들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요나라 군사와 결전을 벌이도록 합시다. 설마하니 그들을 두려워 한대서야 말이 되겠소?
범화는 말했다.
적은 많고 우리는 숫자가 적으니 평지에서 싸우게 된다면 우리들에게 불리하외다. 불초의 견해로는 역시 서쪽으로 물러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첫째로 송나라 군사와 거리를 당길 수 있으니 서로 접응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둘째로는 적이 오래 쫓으면 쫓을수록 사람의 수가 적어지는고로 그 기회에 우리는 반격을 할 수도 있을 것이외다.
군호들은 일제히 그렇다고 말했다. 즉시 허죽이 영취궁의 부하들을 이끌고 제 일로가 되고 단예가 대리국의 병마를 이끌고 제 이로가 되고 현도가 중원 군호들을 이끌고 제 삼로가 되었다.
소봉은 개방의 무리들을 이끌고 뒤를 막았다.
그들은 서쪽으로 퇴각을 했다. 그리고 매 일로의 간격은 수 마장에 불과했으며 연락병이 말을 타고 오고가며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적이 나타났다는 경고를 발하게 된다면 서로 응원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하루를 나아가게 되었다.
이날 밤 그들은 산간에서 야숙을 했다. 그런데 밤새도록 요나라 군사들이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뭇 사람들은 점차 안심을 하게 되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다시 나아갔다.
소봉은 도중에 아자에게 물었다.
그 유군은 아직도 영취궁에 있느냐?
아자는 입을 삐죽했다.
누가 알겠어요? 아마그렇겠지요. 두 눈이 멀었는데 어떻게 산을 내려올 수 있겠어요?
그녀의 어조에는 유탄지에 대한 관심의 빛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 날 그들은 오대산 아래의 백락보(白樂堡)에 이르게 되었을 때 솥을 내놓고 밥을 지었다.
범화는 중도에 한떼의 호걸들을 매복시켜서는 험악하고 중요한 곳을 지키도록 했으며 다리를 무너뜨리거나 길을 막아서 요나라 군사의 추격을 늦추도록 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홀연 동쪽에서 낭연(狼烟)이 크게 일었다.
이것은 바로 요나라 군사들이 추적해 온다는 신호였다.
군호들은 흠칫했다. 어떤 젊은 호걸들은 되돌아가 매복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으나 현도와 범화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날 밤 군호들은 한 산등성이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야밤이 되었을 때 홀연 그 누가 놀라서 부르짖었다.
군호들은 모두 놀라서 잠에서 깨었다. 그러고 보니 북쪽 하늘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소봉과 범화는 서로 쳐다보며 속으로 은연중 불길함을 느꼈다.
범화는 나직이 말했다.
소 대왕, 그대가 보건대 요나라 군사가 길을 돌아서 협공을 해 오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범화는 말했다.
이 불길에 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집이 불살라지는지 모르겠구려!
소봉은 야율홍기가 여진인의 손에 패배를 당한 만큼 속으로 대단히 분노해서 화를 모조리 무고한 백성에게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야말로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오면서 보는 사람마다 죽이게 되었을 것이고 보는 집마다 불을 질렀을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그 큰 불은 날이 밝을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남쪽에도 불길이 치솟았다.
그러나 뜨거운 햇살에 불꽃은 보이지 않고 그저 짙은 연기만 솟아 오르고 있었다.
현도는 본래 사람들을 이끌고 앞장을 서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쪽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는 말을 길 옆에 세운 뒤 소봉이 도달하기를 기다려서는 물었다.
교 방주, 요나라 군사는 세 길로 나누어 공격을 해오고 있는데 교 방주가 보기에 안문관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소? 우리는 이미 사람을 보내 끊임없이 안문관에 전갈을 하고 있으나 관을 지키는 장수가 겁이 많고 군사들에게 위엄이 서지 않아 거란의 철기에 대항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지는구려.
소봉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현도가 다시 말했다.
보기에 여진인들은 요나라 군사를 꽤나 잘 상대하는 것 같구려. 장래 송나라와 여진인이 손을 잡게 되고 남북에서 협공을 하게 된다면 거란의 철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려.
소봉은 그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기가 방법을 강구해서 여진인의 수령인 완안 아골타와 연락을 취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는 바로 거란인인데 어찌 외적과 결탁하여서는 자기의 본나라를 치겠는가.
그는 질문을 던졌다.
현도 대사, 우리 아버님은 귀찰에서 잘 지내고 계신가요?
현도는 어리둥절해졌다.
영존께서는 삼보에 귀의하셔서 소림 후원에서 조용히 수양을 하고 있소이다. 이번에 우리가 남경에 온다는 사실은 영존에게 알리지 않았소이다. 이것은 그의 속세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될가봐 조심을 한 것이죠.
소봉은 말했다.
저는 아버님을 뵙고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이 있소이다.
현도는 물었다.
무슨 말인가요?
소봉은 말했다.
나는 아버님에게 만약 요나라 군사가 소림사를 공격해 온다면 그 분께서는 어떻게 처신하겠느냐고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현도는 말했다.
그 분이야 용감히 일어서서 적을 무찌르겠죠. 그리하여 절을 지키는 법을 지키려고 할 것이니 더 의문을 가질 것은 없으리라고 보여집니다.
소봉은 말했다.
그러나 우리 아버님은 거란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가 한나라 사람을 위해서 거란 사람을 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현도는 생각해 보고 말했다.
본래 방주는 정말 거란 사람이었구려.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되찾은 데 대해서는 정말 감탄해마지 않는 바이외다.
소봉은 말했다.
대사는 한나라 사람이니 한을 밝음이라 하고 거란을 어둠이라 일컫겠죠. 하지만 우리 거란 사람들은 대요나라를 밝음이라고 하고 대송나라를 어둠이라 한답니다. 생각컨대 우리 거란의 선조들은 갈인(갈人)에게 잔혹한 죽음을 당했으며 선비족들에게 협박을 받아 동쪽으로 도망치고 서쪽으로 살 길을 찾는 등 그 고생은 말할 수가 없었소이다. 당나라 때 그대들 한인의 무공이 지극히 성하여 우리 거란의 얼마나 많은 무사들을 죽였는지도 모르며 우리 거란의 얼마나 많은 부녀자들을 사로잡아갔는지 모른다오. 이제 그대들 한나라 사람의 무공이 성하지 않게 되자 우리 거란 사람들이 오히려 그대들을 공격하고 죽이려 하는구려. 이렇게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구려.
현도는 잠자코 있더니 잠시 후에야 불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단예가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오다가 두 사람의 뒷말을 듣게 되어 나직이 읊었다.
봉화는 여전히 불타오르고 싸움은 여전히 끝날 날이 없어라. 싸움을 죽을때까지 벌이니 주인 잃은 말은 하늘을 향해 슬피 우는구나. 새들은 사람들의 창자를 쪼아 먹고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날아와 앉더라. 군사들은 초야를 뒤덮고 장군은 헛되이 존재할 뿐이더라. 군사가 흉기라는 것을 알고서도 성인들은 부득이 해서 사용할 뿐이더라.
소봉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군사가 흉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성인들은 부득이 사용했다. 둘째 아우, 그대는 정말 훌륭한 시를 지었군.
단예는 말했다.
이것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시인 이백의 시이지요.
소봉은 말했다.
내가 이곳에 있을 때 부족의 사람들이 종종 어떤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답니다.
그는 소리 높이 불렀다.
우리 기련산이 망하게 되니 우리의 가축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더라! 우리의 언지산(焉支山)이 망하게 되니 우리의 여자들은 빛을 잃게 되더라!
그의 음성은 우렁차 노래 소리는 멀리까지 퍼져갔다. 그런데 그 노래에는 구슬프고 처량한 뜻으로 가득차 있었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흉노의 노래이지요. 과거 한 무제가 흉노를 크게 토벌하고 커다란 땅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흉노인들은 고달픔에 그 노래를 지어 부른 것인데 뜻밖에도 그 노래가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군요.
소봉은 말했다.
우리의 거란 조상들도 당시의 흉노인과 다름없이 고달픔을 맛보았다네.
현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의 장군들과 제왕들이 불법을 신봉하고 자비를 품을 때가 와야 전쟁을 일으키는 참국을 빚지 않게 될 것이외다.
소봉은 말했다.
그런데 어느 해 어느 달에 그와 같은 태평세대를 이루게 될지 모르겠구려.
일행들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러고 보니 동남북 세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주야로 끊이지를 않았다.
요나라 군사는 길을 오면서 마구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 같았다. 군웅들은 속으로 분노를 느끼고 끊임없이 욕을 했으며 요나라 군사와 결사일전을 벌이고자 했다.
범화는 말했다.
요나라 군사는 더욱더 가까이 다가오는구려. 우리는 끝내 물러날래야 물러날 곳이 없게 될 것이외다. 이 형제의 의견으로는 우리들이 사방으로 분산하여 요나라 군사들이 어느 쪽으로 쫓아야 할지 모르게 하는 것이 좋겠구려.
오장충은 큰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졌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되지 않겠소? 범 사마, 남의 기세는 돋우고 자기의 기풍을 멸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이겨도 좋고 져도 좋으나 우리들은 어쨌든 요나라 개새끼들과 끝까지 싸워 봐야 할 것이외다.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대의 화살이 동남쪽에서 날아들었다.
한 명의 개방 제자가 화살에 맞아서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곧이어 산 위에서 일대의 요나라 군사들이 크게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원래 이 일대의 요나라 군사들은 쉬지 않고 말을 몰아 지름길로 달려와 뒤를 막던 군호들을 추월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 일대의 암습을 가해 온 요나라 군사는 약 오백 명이나 되었다. 오장충은 크게 부르짖었다.
죽여라!!
그는 앞장서 달려갔다. 군웅들은 그렇잖아도 분노에 가득 휩싸여 있던 터이라 다투어 앞으로 나섰다.
군웅들의 수가 그 일대의 요나라 군사보다 많았다. 그리고 또 무공도 훨씬 고강한 편이었다.
크게 부르짖는 함성 속에 과일을 쪼개고 채소를 자르듯 요나라 군사를 포위하고 죽였다. 그리하여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오백여 명이나 되는 요나라 군사들을 깨끗이 몰살시키고 말았다.
겨우 십여 명의 거란 무사들이 산을 타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중원의 군호들 가운데 경신법이 뛰어난 사람들이 달려가 일일이 죽이고 말았다.
군호들은 한바탕 승리를 하게 되자 환호성을 내지르며 고함들을 질러댔다. 사기가 크게 솟구치게 되었다.
범화는 살그머니 현도, 허죽, 단예 등에게 말했다.
우리가 섬멸한 것은 요나라 군사의 일개 소대에 불과하오. 이제 싸움이 붙게 된다면 두 번째 요나라 군사가 곧이어 달려올 것이니 우리들은 빨리 서쪽으로 물러서야 할 것이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동쪽에서 우르릉우르릉 하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군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동쪽을 바라보았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것이 마치 검은 구름이 하늘 반쪽을 가리는 것 같았다. 삽시간에 군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르릉우르릉 거리는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우뢰 소리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마도 대대적인 요나라 군사가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수만은 됨직했다.
강호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군호들은 많이 보아 왔지만 이토록 대군이 달려오는 형세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따라서 남경성 밖에서 싸움을 벌였던 때보다 이번 요나라 군사의 수는 몇 배나 더 강한지 모를 일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하나같이 용기가 있고 호탕한 사람들이었지만 별안간 천지가 진동할 것 같은 대군의 위세를 대하게 되자 그만 가슴이 뛰고 온 손에 식은땀이 배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범화는 부르짖었다.
여러 형제들, 적의 세력은 크니 헛된 죽음을 해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외다. 청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할 것이 없다고, 우리들은 오늘 잠시 피하기로 하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시 반격을 하도록 합시다.
즉시 군호들은 다투어 말에 올라 서쪽으로 급히 달렸다. 그런데 그 우르릉거리는 소리는 등뒤에서 여전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날 밤 여러 사람들은 잠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점점 안문관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군호들은 말을 재촉하거나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안문관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위험을 일단 피하고 그곳을 지키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적군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안문관을 깨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을 오는 도중 말들이 다투어 쓰러졌다. 어떤 사람들은 경신법을 펼쳐서 걸음을 옮기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이 한 필의 말에 올라타고 말을 몰아야 했다.
날이 밝게 되었을 때 안문관은 이제 십여 리밖에 되지 않았다. 뭇 사람들은 마음을 놓고 말에서 내려 고삐를 틀며 천천히 나아갔다. 말이 기운을 되찾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등 뒤의 우르릉우르릉 거리는, 만 마리의 말들이 달려오는 소리는 더욱더 우렁차게 들려왔다.
소봉은 산 고개길 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산 옆으로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는 것을 갑자기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 흠칫했다.
"과거 현자 방장과 왕 방주가 중원 호걸을 거느리고 매복했다가 우리 아버님을 습격해서 우리 어머니와 적잖은 거란의 무사들을 죽인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산벽에 도끼질을 한 자국이 완연했다. 바로 현자 대사가 소원산이 남긴 자취를 찍어 없앤 것이었다.
소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석벽 옆에 한 그루의 꽃나무가 서 있었다. 그러자 그의 귀에 아주가 당시 꽃나무 뒤에서 하던 소리가 들려왔다.
교 나리, 다시 더 때리다간 이 산벽이 무너지고 말겠어요.
그는 일순 멍해지고 말았다. 아주의 정이 담긴 몇 마디의 말은 똑똑히 그의 뇌리에 울려퍼졌다.
저는 이곳에서 꼬박 닷새 낮 닷새 밤을 기다렸어요. 그리고 그대가 오지 않는 줄 알았어요. 그대는...... 그대는 정말 왔군요. 천지신명의 보호를 받아 끝내 그대가 무사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소봉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을 뻗쳐서는 나무를 어루만졌다. 그 나무는 그 날 아주와 만났을 때보다 키가 적잖게 커져 있었다. 일시 서글픔에 잠겨 그는 주위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별안간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형부, 빨리 물러나요, 물러나!
아자가 달려와서는 소봉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소봉은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멀리 바라보니 동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 세 방면이 요나라 군사의 기다란 창날의 숲처럼 밀집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합세를 하고 있었다.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는 먼저 안문관으로 물러난 이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이때 군호들은 모두 안문관 앞에 모여 있었다.
소봉과 아자는 말을 나란히 달려 안문관 입구에 도달했다. 그런데 관문은 꼭 닫혀진 채 열리지 않았다. 관문 위에는 한 명의 송나라 군관이 서서 낭랑히 외쳤다.
명을 받고 안문관을 지키고 있는 지휘사 장 장군의 영을 전하는 바이외다. 그들은 중원의 백성들이니 원래 관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요나라 군사와 결탁을 한 첩자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소? 따라서 모두들 무기를 버리고 우리 군사가 일일이 몸 조사를 해보도록 합시다. 몸에 무기를 갖지 않은 자는 장 장군께서 관문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겠다는 전갈이외다.
그 말이 떨어지자 군호들은 대뜸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우리들은 천리길을 멀다하지 않고 애써 요나라 군사와 대항했는데 어찌 우리를 첩자라고 의심을 한단 말이오?
어떤 사람은 말했다.
우리가 무기를 휴대하고 있는 것은 장 장군을 도와 요나라 군사와 대항하자는 것이오. 만약 손에 맞는 무기가 없다면 어떻게 요나라 군사와 싸우란 말이오?
더욱 성질이 급한 사람은 떠들어댔다.
제기랄! 우리들을 들여 보내지 않는다면 모두들 공격해 들어가자.
현도는 재빨리 저지하고 그 군관에게 말했다.
수고스럽지만 장군에게 알려 주시오. 우리들은 모두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대송나라 백성이외다. 적군이 눈깜짝할 사이에 도달하게 되어 있는데 이제 와서 몸수색을 한다면 시각을 지체할 뿐이외다. 그렇게 되었을 때 다시 안문관의 문을 연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 군관은 사람들 틈에서 욕하는 소리를 듣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중원 땅의 사람 같지 않자 말했다.
노화상, 그대는 그대들이 중원 땅의 양민이라고 말하는데 내가 볼 때 다른 사람들은 중원인이 아닌 것 같소. 좋소. 내가 한번만 봐 주기로 하지. 대송나라 양민은 관문으로 들어오고 대송나라 백성이 아닌 자들은 관문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소이다.
군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두 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예의 부하들은 대리국의 신하들이었다. 그리고 허죽의 부하들은 각 부족의 사람들이 다 있었다. 어떤 사람은 서역인이며 어떤 사람은 토번인이고 또는 고려 사람도 있었다.
만약에 대송나라의 사람들만 관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대리국이나 영취궁의 인마들은 대부분 들어갈 수 없게 된다.
현도는 말했다.
장군께 알려 주십시오. 우리의 이 많은 동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대리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서하 사람인데 모두가 우리와 손잡고 요나라와 싸운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송나라 사람이니 송나라 사람이 아니니 하며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 군관은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안문관은 대송나라의 북쪽의 관문이라고 말할 수 있소. 얼마나 중요한 곳이오? 요나라의 대인마가 눈깜짝할 사이에 공격을 해올 판인데 내가 함부로 문을 열었다가 그 기회에 요나라 군사가 쳐들어오게 된다면 이야말로 큰 화근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 그 누가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이오?
오장충은 더 참을 수 없어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이 쉰소리를 적게 하고 일찌기 관문을 열었더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 아니겠소?
그 군관은 노해 부르짖었다.
늙은 거지가 본관 앞에서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그는 오른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성벽 위에 대뜸 천여 명이나 되는 궁수들이 시위에 활을 먹인 채 성 아래 쪽을 겨냥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군관은 호통을 내질렀다.
빨리들 물러서시오! 다시 이곳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헛갈리게 하거나 군심을 흐트러지게 한다면 나는 활을 쏘겠소!
현도는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안문관의 양쪽 봉우리는 우뚝 솟아 있었으며 구름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 관문의 이름을 안문이라고 한 것은 기러기가 남쪽으로 날아갈 때 반드시 쌍봉우리 사이로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즉, 지세의 험악함을 비유한 것이었다.
군호들 가운데 경신법에 뛰어난 사람들이 적지 않아 산을 타고 얼마든지 도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위험한 길을 넘으려 하다가는 요나라 군사에게 관 아래에서 섬멸당할 것이었다.
이때 요나라 군사는 산세에 의해 동서 이로가 점점 한데 합쳐짐에 따라 정면에서 몰려 들었다. 그러나 말발굽 소리, 철갑이 부딪히는 소리, 큰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 이외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전혀 들을 수가 없엇다.
정말 군기가 엄정한 정예 부대라 할 수 있었다.
일대 일대의 요나라 군사가 안문관 앞으로 다가들면서 진을 쳤다. 그리고 화살을 쏘아 닿을 만한 거리에 이르러서는 더 나오지 않고 걸음을 멈추었다.
소봉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동쪽, 서쪽, 북쪽은 요나라 군사들이 들고 있는 깃발이 어지럽게 펄럭이고 있는데 그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소봉은 낭랑히 외쳤다.
여러분은 원위치에서 잠시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도록 하시오. 불초가 우선 요나라 황제와 따져 보기로 하겠소이다!
그는 단예와 아자 등이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단신필마로 말을 몰아 나섰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어 몸에 무기나 활이 없다는 뜻을 비친 후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대요나라 황제 폐하, 소봉이 몇 마디 할 말이 있으니 나오도록 하십시오!
이 몇 마디의 말은 내력을 돋우었기 때문에 그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갔다. 요나라 십여 만이나 되는 장수와 군사들은 하나같이 똑똑히 듣고는 그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잠시후 요나라 군사의 진중에서 북과 호각 소리가 크게 일었다.
천군만마가 물결처럼 양쪽으로 나누어지면서 여덟 폭의 금황색 큰 깃발이 바람을 맞아 펄럭이는 가운데 여덟 명의 기사가 그 깃발을 들고 진안에서 말을 몰아 나왔다. 여덟 폭의 금황색 깃발 뒤에는 일대의 장모수(長矛手), 도부수(刀斧手), 궁전수, 순패수(盾牌手)들이 질풍과 같이 앞으로 나와 양쪽으로 늘어섰다.
곧이어 십여 명의 금포에 철갑을 두른 장수들이 야율홍기를 모시고 진 밖으로 나섰다.
요나라 군사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그 고함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다.
안문관 뒤의 송나라 군사들은 적이 이토록 당당한 것을 보자 모두가 벌벌 떨었다.
야율홍기는 오른손의 보도(寶刀)를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요나라 군사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간혹 말이 힝힝, 울부짖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야율홍기는 보도를 내려놓고 큰소리로 웃었다.
소 대왕, 그대는 요나라 군사를 이끌고 안문관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어째서 아직도 관문을 크게 열어 놓지 않았소?
그 말이 떨어지자 안문관 위의 송나라 군사는 즉시 크게 떠들기 시작했으며 소봉을 손가락질하며 욕을 해댔다.
소봉은 마음속이 쓰라린 것을 느끼고 즉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몇 걸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폐하, 이 소봉이 두터우신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친히 이곳까지 오시게 하는 수고를 끼쳐 드렸으니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막 이 몇 마디의 말을 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두 사람의 그림자가 그의 옆을 후딱 스치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번개와 같이 야율홍기에 달려 들었다. 바로 허죽과 단예였다.
그들 두 사람은 오늘의 형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의 일은 오로지 요나라 황제를 인질로 사로잡아 위협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모두들 무사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손짓을 하고는 좌우로 달려나간 것이었다.
야율홍기는 진 밖으로 나올 때 소봉이 과거 진 앞에서 초왕 부자를 죽이고 사로 잡는 방법을 다시 쓰게 될까봐 경계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친위군 지휘사는 한소리 호통을 내지르게 되었고 삼백 명의 순패수는 즉시 한데 모여졌다.
삼백 개의 방패가 하나의 성벽을 이루어서는 요나라 황제의 앞을 막아서게 되었다. 거기다가 장모수, 도부수들이 겹겹이 방패 앞에 늘어서게 되었다.
허죽은 천산동모의 내력을 이어받았고 또한 영취궁 석벽에 있는 무학의 오묘한 점을 모조리 터득한 상태였다. 따라서 무공의 고강함은 이미 마음대로 되는 상태였다.
단예는 구마지의 한평생 쌓은 공력을 흡수하게 된 이후 내력의 고강함은 천고에도 드물 지경인데다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됨으로써 단정명으로부터 가전 내공을 전수받아 이제 육맥신검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거기다가 그가 능파미보를 펼치니 요나라 군사들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단예는 동쪽에서 흔들 서쪽에서 기우뚱하면서 미꾸라지가 빠져 나가듯 불과 한 자도 되지 않는 장모수, 도부수 사이의 빈틈을 파고들어갔다.
요나라 군사들 기다란 창을 뻗쳐 찌르려고 했으나 단예에게는 조금도 상처를 입힐 수 없었고 오히려 너무나 밀착되어 있어 무기를 자기의 동료들에게 향하는 결과가 되었다.
허죽은 두 손을 잇따라 뻗쳐내어 요나라 군사의 가슴팍이나 등을 잡고서는 진 밖으로 내던졌다. 그러는 한편으로 야율홍기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명의 장수가 말을 몰아 달려들어 창날을 일제히 뻗쳐 허죽의 가슴팍을 찌르려 했다. 허죽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는 두 발로 나누어 두 장수의 창날 위에 섰다.
두 명의 요나라 장수는 일제히 호통을 내지르며 창날을 떨쳐서는 허죽의 몸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려고 했다.
허죽은 두 창을 떨치려는 기세를 타고 몸을 허공으로 날렸고 허공에서 곧장 야율홍기의 머리 위로 덮쳐 내렸다.
한 사람은 미꾸라지 같은 발걸음을 보였고 한 사람은 비조와 같은 민첩성을 보였다. 따라서 두 사람은 쌍쌍이 야율홍기의 옆으로 다가들게 되었다.
야율홍기는 깜짝 놀라 보도를 들어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다가오는 허죽을 베려고 했다.
허죽은 왼손의 손바닥을 뻗쳐 그의 보도의 칼등을 눌렀다. 그 기세를 빌어 미끄러뜨리듯 하면서 손목을 홱 뒤집었다. 그렇게 되자 야율홍기의 오른쪽 손목이 그의 손아귀에 쥐어지게 되었다.
바로 이때 단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와서는 야율홍기의 왼쪽 어깨를 움켜잡았다.
두 사람은 일제히 호통을 내질렀다.
갑시다.
그들은 야율홍기의 우람한 체구를 말등에서 끌어내려 급히 몸을 돌려 달렸다.
사방의 요나라 장수들과 요나라 군사들은 황제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는 미친 듯이 부르짖었으나 일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수십 명이나 되는 친위병들이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어 황제를 구하려고 했으나 모두 허죽과 단예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요나라 황제를 붙잡게 되자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갑자기 소봉이 나는 듯 달려왔다.
두 사람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큰형님!
소봉은 두 손을 벼락같이 뻗쳐내었다. 휙휙, 하니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나누어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장력이 뻗쳐오는 것이 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고 바다라도 뒤덮을 것 같은지라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는 손을 들어 막지 않을 수 없었다. 챙챙, 하는 소리와 함께 네 손바닥이 맞닥뜨리게 되었다.
장풍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소봉이 몸을 앞으로 달려들더니 그 기회를 빌어 야율홍기를 낚아채고 말았다.
이때 요나라 군사와 중원 호걸들은 남북으로 몰려들었다. 한편에서는 황제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소봉, 허죽, 단예 세 사람을 접응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소봉은 요나라 황제를 붙잡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 마시오! 나는 대요나라 황제에게 할 말이 있소이다
요나라 군사와 군호들은 대뜸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쌍방이 모두 자기편 사람을 해치게 될까봐 그저 멀리서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지도 못했고 활을 쏘지도 못했다.
허죽과 단예는 세 걸음 물러서서는 야율홍기 등뒤에 섰다. 그가 자기의 진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방비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란 고수가 달려와 구원하는 것을 저지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이때 야율홍기의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소봉의 성질은 매우 굳건하다. 내가 그를 사자 우리에 감금해 두고 그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다. 이제 그의 손에 잡히게 되었으니 그는 모조리 보복을 하려 할 것이고 나의 목숨을 용서하려고 하지 않겠구나."
이때 소봉은 입을 열었다.
폐하, 이 두 분은 나의 결의형제들입니다. 폐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야율홍기는 흥, 하며 고개를 돌려 허죽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단예를 한 번 바라보았다.
소봉은 말했다.
나의 이 둘째 아우는 허죽자이며 영취궁의 주인입니다. 세째는 대리의 단공자입니다. 일찌기 폐하에게 두 사람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야율홍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뛰어나구려.
소봉은 말했다.
우리들은 즉시 폐하를 진으로 되돌아가도록 놓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폐하께서 약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율홍기는 자기의 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천하에 이토록 수월한 일이 어디 있는가? 아, 그렇군. 소봉은 이미 마음을 돌려 나에게 그들 세 사람에게 벼슬을 내려 달라는 것이겠군."
그는 대뜸 온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게 무슨 부탁이 있는지 나는 모두 응낙하리다.
그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으나 이 두 마디의 말에는 황제의 위엄이 엿보이고 있었다.
소봉은 말했다.
폐하는 이미 우리 두 형제의 포로가 된 몸입니다. 거란인의 규칙에 의하면 폐하는 반드시 공물을 바쳐야만 풀려 날 수 있습니다.
야율홍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무엇을 달라는 것인가?
소신이 당돌하나마 두 형제 대신 입을 열기로 하겠습니다. 그저 폐하께서 금쪽 같으신 약속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야율홍기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정말 내 놓을 수 없는 물건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대는 마음대로 큰값을 불러 보게나.
폐하께서는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가겠다고 약속을 해주십시오. 그리고 한평생 요나라 군사 한 명이라도 송나라 지역으로 넘어오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단예는 그 말을 듣고 대뜸 기뻐하며 생각했다.
"요나라 군사가 송나라 변경을 넘지 못한다면 대리를 침범하는 일은 영영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바로 그렇소이다. 그대가 한 마디로 응낙할 것 같으면 우리는 즉시 그대를 놓아 드리겠소이다.
그는 생각했다.
"요나라 황제를 잡는 데는 둘째 형님이 나보다 더 많은 힘을 썼다. 그런데 그가 부탁할 일은 무엇인지 모르겠군."
그는 허죽에게 물었다.
둘째 형님, 형님은 거란 황제에게 무슨 요구를 하고 싶습니까?
허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역시 그 한 마디를 바랄 뿐일세.
야율홍기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감히 나를 협박하자는 것인가? 내가 응낙하지 않는다면?
소봉은 낭랑히 외쳤다.
그렇게 된다면 소신은 폐하와 함께 죽겠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과거에 결의형제를 맺게 되었을 때 동년 동월 동일에 죽겠다는 맹세를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야율홍기는 흠칫해서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소봉으로 말하면 하늘이 얼마나 드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 모르는 사람이다. 언제나 하나라고 말하면 하나였지 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응낙하지 않을 때 그는 정말 손을 써서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이와 같은 망명도배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정말 가치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즉시 그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낭랑히 외쳤다.
하하하! 이 야율홍기의 한 목숨으로 송나라와 요나라 양국을 수십 년간 편안히 하자는 것이겠지. 형제, 그대는 나의 목숨을 너무나 비싸게 여기고 있군.
소봉은 말했다.
폐하는 대요나라의 주인이십니다. 천하에 폐하보다 귀중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야율홍기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요나라의 장수와 군사만 하더라도 백 걸음 밖에 있었다. 어떻게 하더라도 자기를 위험에서 구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무겁고 가벼운 것을 따져 볼 때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보다 더 귀중한 물건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즉시 전통에서 한 대의 조령낭아전을 뽑아 두 손을 구부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토막을 내어 땅바닥에 던지고 입을 열었다.
응낙하는 바이다.
소봉은 허리를 굽혔다.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야율홍기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허죽과 단예는 형형한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며 길을 비켜 줄 의사가 없는 것같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소봉을 바라보았다. 그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뜸 그는 알아차렸다.
그들 세 사람은 자기가 약속을 하고서도 식언을 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즉시 보도를 높이 쳐들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대요나라 삼군은 영을 듣도록 하라!
요나라 군중에서는 북 소리가 우뢰처럼 울려퍼졌다. 한 차례 북 소리가 들린 후 곧 조용해졌다.
야율홍기는 입을 열었다.
대군은 곧 북으로 되돌아간다. 남쪽 땅을 정벌하려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나의 한평생 우리 대요나라 일군 일졸이라도 대송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말이 끝나자 그는 보도를 내렸다. 그러자 요나라 군중에서 다시 북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봉이 말했다.
삼가 폐하께서 집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전송하는 바입니다.
허죽과 단예 역시 양쪽으로 물러나더니 소봉의 등뒤로 돌아가 섰다.
야율홍기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급히 위험한 곳에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소봉과 요나라 군사들 앞에서 겁먹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침착한 채 천천히 걸어서 요나라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요나라 군중에서 수십 명의 친위병의 말을 몰아 달려나와 황망히 그를 영접했다.
야율홍기는 처음 발을 떼어놓을 때 느린 듯했으나 나중에는 첨차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두 다리에 맥이 빠져 몇 번 쓰러지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가누게 되었다. 두 손이 벌벌 떨려왔으며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두 명의 시위가 그의 뒷허리를 붙잡고 힘주어 밀어 주어서야 야율홍기는 말위에 오를 수 있었다.
요나라 군사들은 황제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큰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때 안문관 위의 송나라 군사와 관 아래의 군호들 역시 요나라 황제가 명을 내려 군사들로 하여금 회군하도록 하는 동시에 한평생 요나라 군사 한 명이라도 송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자 우뢰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뭇 사람들은 모두가 거란 사람이 흉폭하고 잔인하지만 언제나 신의를 지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송나라 사람들과도 내왕이 있었는데 좀처럼 약속을 어기거나 식언한 일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야율홍기의 안색은 매우 침울했다.
"내가 이번에 소봉이라는 녀석의 위협을 받아 그토록 큰 약속을 한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창피 막심한 일이고 요나라의 국위를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요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만세를 내지르는 환호성을 들을 때 군사들이 자기를 옹호하는 정 또한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슬쩍 군사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 보았다.
모두 다 얼굴 빛이 환했으며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군사들은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 처자와 만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머나먼 만리 땅에서 싸움을 벌여야 하는 고달픔도 없고 또 이역땅에서 목숨을 잃게 될 위험도 없다는 사실을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야율홍기는 속으로 흠칫했다.
"원래 이 군사들도 남쪽 송나라를 치는 것을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구나. 내가 군사를 이끌고 남쪽을 친다고 해서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 여진의 오랑캐들은 너무나 고약하다. 거란의 등뒤에 남겨둔다는 것은 역시 심복대환이다. 나는 군사를 보내 그 오랑캐를 소탕한 이후에 다시 방법을 갈구해야겠다."
그는 즉시 보도를 쳐들고는 소리 높이 외쳤다.
북원대왕은 영을 전하도록 하라! 뒷부대가 선봉이 되어 남경으로 되돌아간다!
즉시 군중에서 북 소리와 호각 소리가 울려퍼지고 그 말이 전달되었다. 그러자 환호성이 높이 울려퍼졌다. 그 환호성은 가까운 곳에서 점차 멀리까지 퍼져 갔다.
야율홍기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소봉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야율홍기는 냉소하며 낭랑히 외쳤다.
소 대왕, 그대가 대송나라를 위해서 이와 같은 큰 공을 세웠으니 높은 벼슬과 두터운 공록을 조만간 바라볼 수 있겠군!
소봉은 큰소리로 말했다.
폐하, 소봉은 거란 사람입니다! 오늘 폐하를 협박하였으니 그야말로 거란의 대죄인이 되었습니다. 차후에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겠소이까?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두 토막의 화살을 집어들더니 내공을 돋우고 두 팔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푹 찔렀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부러진 화살은 그의 심장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야율홍기는 아, 하고 놀라 부르짖으며 말을 짓쳐 몇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허죽과 단예는 그만 혼비백산해서 쌍쌍이 달려들며 부르짖었다.
형님, 형님!
두 토막의 부러진 화살은 바로 심장에 박혀 있었고 소봉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이미 숨져 있었다.
허죽은 재빨리 그의 가슴팍의 옷자락을 찢고는 구원을 하려고 했으나 화살이 심장에 박혀 있는지라 도저히 살려 볼 길이 없었다. 그런데 그 가슴팍 살갗에는 푸르죽죽한 이리의 머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 수놓아진 이리는 입을 벌려 치아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매우 흉칙했다.
허죽과 단예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땅바닥에 엎드렸다.
개방의 뭇 제자들이 일제히 몰려들어서는 큰절을 했다.
오장충은 가슴을 치며 부르짖었다.
교 방주, 그대는 거란 사람이나 우리 못난 한나라 사람보다 만 배나 더 큰 영웅이셨습니다!
중원의 군호들은 하나같이 그를 에워쌌다.
많은 사람들은 나직이 의논했다.
교 방주가 정말 거란 사람이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오히려 우리 대송나라를 도우려 하는 거지? 아마도 거란 사람들 가운데 역시 영웅 호걸들이 적지 않은 것 같군.
그는 어릴 적부터 우리 한나라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나라 사람의 인자함과 의지를 배운 것이오.
두 나라에서 군사를 철수시킨다면 그는 분규를 해결한 큰 공신이지 않소. 그러니 스스로 자결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는 대송나라에 공을 세웠으나 요나라에 있어서는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도운 매국노가 되지 않겠소. 그러니 그는 죄가 두려워 자살한 것일게요.
뭐가 두렵다는 것이오? 교 방주와 같은 대영웅이 천하에서 또 두려워할 일이 있겠소?
야율홍기는 소봉이 자결하는 광경을 보고 망연하기만 해서 생각했다.
"도대체 그는 우리 대요나라에 공을 세운 것일까, 아니면 잘못이 있는 것일까? 그는 나에게 송나라를 치지 말도록 극구 간하였다. 도대체 그는 송나라 사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거란 사람을 위한 것일까? 그는 나와 결의형제가 되어 시종 나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런데 오늘 안문관 앞에서 자결한 것을 보면 결코 남쪽 나라의 부귀공명을 탐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또 무엇 때문인가?"
그는 고개를 흔들며 미미하게 쓰디쓴 웃음을 짓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요나라 진중으로 들어갔다.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요나라의 수천 수만 명이나 되는 기병들은 다시 북쪽으로 향해 갔다.
뭇 장수와 군사들은 연신 고개를 돌리며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봉의 시선에 눈길을 던지곤 했다.
이때 끼륵 끼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떼의 기러기들이 군사들의 머리 위를 지나 안문관을 통과하고 있었다.
요나라 군사들은 점차 멀리 사라졌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갔다.
허죽과 단예 등 몇 명은 소봉의 시체 곁에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은 소리내어 울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갑자기 한 소녀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물러나요! 모두들 물러나요! 그대들은 우리 형부를 해쳐 죽인 거예요! 이 곳에서 몇 방울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녀는 손을 뻗쳐 맹렬한 기세로 여러 사람을 떠밀어냈다.
바로 아자였다.
아자는 소봉의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형부, 이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들이에요. 형부는 그들을 아랑곳할 필요 없어요. 오로지 아자만이 진정으로 형부를 잘 대해준 사람이에요.
그녀는 몸을 굽혀서 소봉의 시체를 안았다. 소봉의 몸이 하도 우람하고 크기때문에 상반신은 그녀에게 안겼으나 두 다리는 여전히 땅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아자는 다시 말했다.
형부, 이제야말로 정착할 곳을 찾게 되었군요. 제가 안아도 형부는 나를 밀치지 않아서 기뻐요. 그래요. 저는 한없이 행복해요.
허죽과 단예는 서로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슬픔이 지나친 나머지 약간 정신이 이상해진 모양이구나."
단예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누이, 소 큰형님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헌신짝 버리듯 목숨을 버렸다. 사람은 한 번 죽어 다시 살아나지 않는 법. 우리는...... 우리는......
그는 몇 걸음 다가서며 소봉의 시체를 안으려고 했다.
아자는 날카롭게 외쳤다.
그대는 내게서 형부를 빼앗으려고 하지 말아요! 그는 내거예요. 그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어요.
단예는 고개를 돌려 목완청에게 눈짓을 했다. 목완청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아자의 곁으로 다가가서는 나직이 말했다.
누이, 소 오라버님은 세상을 떠났어. 이제 우리는 그를 어떻게 안장해야 할 것인가를 상의해야 돼......
돌연 아자는 날카로운 소리를 크게 내질렀다. 목완청은 깜짝 놀라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아자는 부르짖었다.
비켜요! 비켜. 다시 다가오면 나는 일검으로 그대부터 먼저 죽일 거예요.
목완청은 눈살을 찌푸리며 단예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별안간 안문관 왼쪽의 산속에서 그 누가 커다란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자, 아자! 나는 그대의 음성을 들었소. 그대는 어디 있소. 그대는 어디 있소?
그 부르짖는 소리는 무척 처절했다. 모든 사람들은 개방의 방주이며 장취현이라는 이름을 썼던 유탄지의 음성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유탄지는 두 손에 각기 한 자루의 죽장을 들고 있었다.
왼쪽 지팡이로는 길을 더듬고 있었고 오른쪽 지팡이는 한 중년 사내의 어깻죽지에 걸려 있었다. 그는 그런 모양으로 산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앞선 중년의 사내는 바로 영취궁을 지키도록 한 오노대였다. 그의 얼굴은 초췌하고 옷자락은 남루해져 있었으며 얼굴에는 어찌할 수 없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죽 등은 대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탄지가 그를 핍박해서 길을 안내하여 아자를 찾아온 것인데 그 동안 오노대는 유탄지에게 쓴맛을 단단히 본 모양이었다.
아자는 노해 부르짖었다.
그대는 뭐하러 왔지요? 나는 그대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대를 만나고 싶지 않아!
유탄지는 기뻐서 말했다.
아, 그대가 과연 여기에 있었군! 나는 그대의 음성을 들었소. 끝내 그대를 찾아냈군!
그는 오른쪽 지팡이에 힘을 주어 밀었다. 오노대는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두 사람의 달려오는 기세는 너무나 빨라 삽시간에 아자의 곁에 당도했다.
허죽과 단예는 정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지라 유탄지가 오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기꺼이 두 눈을 파서 아자에게 주었으니 그녀와 관계가 깊은만큼 어쩌면 아자의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시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유탄지는 말했다.
아자 소저, 잘 있었어요? 그 누구도 소저를 괴롭히지 않았지요?
그 못난 얼굴에 기쁨과 관심 어린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자는 되물었다.
그 누가 나를 괴롭혔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실래요?
유탄지는 재빨리 말했다.
그 누가 소저를 괴롭혔소? 빨리 나에게 말해 주시오. 내 그와 사생결단을 내리다.
아자는 냉소하더니 곁에 있는 뭇 사람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들 모두가 나를 괴롭혔어요. 그대는 이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도록 해요.
유탄지는 대답했다.
예.
그리고 오노대에게 물었다.
오노형, 어떤 사람들이 소저를 괴롭혔소?
오노대는 말했다.
사람들이 무척 많아서 그대는 다 죽이지 못할 것이오.
죽이지 못해도 죽여야 하오. 누가 그들보고 아자 소저에게 죄를 지으라고 했소?
아자는 노해 말했다.
나는 지금 형부와 함께 있어요. 이후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대는 좀 멀찌감치 서 있어요. 나는 다시 그대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유탄지는 금방 괴로운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대가...... 그대가 다시 나를 만나지 않겠다니......
아자는 소리 높이 외쳤다.
아, 그렇군! 나의 눈은 그대에게 꾼 것이지. 형부는 내가 그대의 은혜를 입었으니 그대를 잘 대해 주라고 했지만 나는 싫어요!
별안간 그녀는 오른손을 내밀어 자기의 눈가를 푹 찔러 두 개의 눈동자를 파내었다. 그리고는 힘주어 유탄지에게 내던지며 부르짖었다.
되돌려 주겠어요. 이후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어요. 우리 형부는 이제 나에게 그대와 함께 있으라고 다그치지 못할 거예요!
유탄지는 사물을 볼 수 없었으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라 부르짖는 소리와 그 소리에 당황과 두려움이 서려 있는 것을 듣고는 참혹한 변고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목멘 어조로 부르짖었다.
아자 소저, 아자 소저!
아자는 소봉의 시체를 안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형부,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어요. 옛날 내가 독침으로 형부를 쏜 것은 바로 형부와 영원히 함께 있자는 데 목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어쨌든 나의 소원을 풀게 되었군요.
그러면서 소봉을 안더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군호들은 그녀의 움푹 꺼진 눈에서 피가 흘러나와 하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보고 공포심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녀가 다가오자 모두 다 놀라서는 피해 버렸다.
그녀는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점차 산가의 깊은 골짜기 쪽으로 다가섰다. 뭇 사람들은 부르짖었다.
걸음을 멈추시오! 걸음을 멈추시오! 앞쪽은 깊은 골짜기이외다!
단예는 나는 듯 달려와 부르짖었다.
누이, 그대는......
아자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더니 만장의 깊은 골짜기로 떨어졌다.
단예가 손을 뻗쳐 잡았을 때 그녀의 소맷자락 한쪽을 잡았을 뿐이었고 쫙, 하니 그 소맷자락은 찢어져 나가 버렸다.
별안간 옆에서 바람 소리가 세차게 일었다. 그 누가 단예를 앞지르는 듯했다. 단예는 왼쪽으로 피했다.
바로 그 순간 유탄지가 골짜기 아래로 떨어졌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어이쿠!
그는 골짜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구름과 안개에 가려 아래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가 없었다.
군호들은 산골짜기 가에 서 있었다. 모두 다 탄식을 했다.
현도 등 나이 많은 사람들은 과거 현자와 왕 방주 등이 안문관 밖에서 거란 무사를 습격했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소봉의 어머니의 시체가 바로 그 깊은 골짜기 아래에 묻혀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별안간 관문에서 북 소리가 울려퍼졌다.
한 군관이 큰소리로 외쳤다.
명을 받고 안문관을 지키던 도지휘사 장 장군의 영이시오. 그대들은 요나라의 첩자가 아니니 특별히 안문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겠소. 다만 법을 지켜 분수밖의 일을 저지르지 말 것이며 소란을 피우지 마시오!
관 아래의 군호들은 대뜸 욕을 퍼부었다.
우리들은 죽는다 하더라도 개 같은 관리들이 지키고 있는 관문 안으로는 들어서지 않겠다.
만약 개 같은 벼슬아치가 비겁하지 않았더라면 소 대협이 목숨을 잃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들 관문 안으로 들어가 개 같은 벼슬아치를 죽이자!
뭇 사람들은 관 윗쪽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발을 구르는 등 비난을 해댔다.
허죽, 단예 등은 골짜기 아랫쪽을 향해 엎드려서는 몇 번 절을 한 후 산을 타고 재를 넘어 그곳을 떠나갔다.
안문관을 지키던 지휘사는 군호들의 기세가 거센 것을 보고 재빨리 또 명령을 바꾸어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관문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했다. 군호들은 한참 동안 욕을 한 이후에는 점점 흩어져 갔다. 어떤 사람들은 산위의 길을 돌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 광경을 보고서야 안문관을 지키던 군사들은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첩보를 써서 쾌마로 변량에 보냈다. 즉 자기가 친히 부하들을 거느리고 며칠간 피를 흘리는 싸움을 벌인 끝에 요나라 십여 만이나 되는 군사들을 막을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폐하의 흥복이라는 내용이었다.
장수들과 군사들이 목숨이 바치다시피 해서 요나라 대장수인 남원대왕 소봉을 죽였으며 요나라 군사 수천을 죽였더니 요나라 황제 야율흥기도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했다.
단예는 허죽과 현도, 그리고 오 장로 등 군호들과 헤어졌다. 그리고 목완청과 종영, 화혁간, 범화, 파천석, 주단신 등과 함께 대리로 돌아갔다.
대리의 국경으로 들어서자 이내 대리의 시위 무사들이 변경에 나와 영접을 했다. 단예는 소봉과 아자의 사정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모두들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일행은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단예는 백성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여러 사람들에게 조복을 입지 않도록 하고 여전히 원래의 장사치 차림을 했다.
이날 거의 경성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단예는 천룡사로 달려가 고영 대사와 백부 단정명을 만나 보려고 했다. 한데 날은 점차 어두워지는데 천룡사는 아직도 육십여 리나 남아 있어서 쉴 곳을 찾아 아무래도 묵었다가 이튿날에야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숲속에서 애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폐하! 내 이미 절을 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사탕을 주지 않아요?
뭇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찌 이곳에서 폐하를 알아 보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은 숲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자 숲속에서 그 누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우리 황제 만세, 만세, 만만세"하고 불러야만 먹을 사탕을 줄거야.
그 음성은 매우 귀에 익었다. 바로 아벽의 음성이었다.
단예와 왕어언은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서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모용복이 무덤 위에 앉아 있었고 머리에는 종이로 만든 높다란 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엄숙했다.
칠팔 명의 시골 어린애들이 무덤 앞에 꿇어앉아서 고개를 조아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우리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어린애들은 마구잡이로 부르짖으면서 엎드려 절을 했다.
어떤 어린애는 손을 내밀고 부르짖었다.
빨리 나에게 사탕과 과자를 줘요!
모용복은 엄숙히 말했다.
경들은 몸을 똑바로 하시오. 짐이 대연나라를 세우고 제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모든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게 될 것이오.
무덤가에 한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바로 아벽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엷은 녹색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아름답고 풍성하던 얼굴은 퍽이나 초췌해진 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녀는 한 바구니에서 사탕과 과자, 떡 같은 것을 꺼내더니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말했다.
모두들 착하지. 내일 다시 와서 놀아라. 내일 또 사탕과 과자를 주마.
그 음성은 흐느끼는 듯한데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 대바구니 안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떠나가며 말했다.
내일 다시 와서 놀자!
왕어언은 고종 오라버니가 이미 정신 착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귀영화의 꿈에 더욱더 깊이 빠진 것이라 생각하고 처연해마지 않았다.
단예는 아벽의 표정을 보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크게 일었다. 그리하여 그녀와 모용복에게 인사를 하고 함께 대리로 가자고 권하려고 했다. 그들이 대리성에서 자리를 잡도록 도와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모용복을 쳐다보는 눈동자에는 부드러운 정이 가득차 있었고 모용복 역시 만족하고 흐뭇해하는 표정이 아닌가.
그는 속으로 흠칫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인연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법이다. 모용형과 아벽이 그러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만 기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만족하고 있을지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쓸데없는 일에 관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왕어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은 슬그머니 물러갔다.
모용복은 여전히 무덤 위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은 채 입 속으로 뭐라고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기 있어요. 이제 곧 떠나도록 해요.
천룡팔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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