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무협소설 천룡팔부7 김용

一字師 2023.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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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천룡팔부7 김용

 

                                                图片来源 | 你知道金庸小说天龙八部三大最强高手都是谁吗?

 

31. 바둑의 승부로 영웅들을 끌어모으다.

마차는 삐걱거리며 밤낮으로 달렸다. 현난, 강광릉 등은 당대 무림의 호걸들이었으나, 현재는 무공을 쓸 수 없고, 남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죄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단지 마차가 동남쪽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팔 일이 지나고 구 일이 되던 날, 일행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정오쯤 되니까 길은 점점 가파라져 마차는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었다.

성숙파 제자들은 현난 등을 마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걸어서 반 시진이 지나자 일행은 고요하고 대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는 숲에 도착했다.

산골짜기 옆에 대나무로 만든 정자가 있었는데 구조가 너무 정교하고 아름다워 언뜻 보아서는 대나무 숲인지 정자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일행이 정자에서 쉬고 있는데 네 사람이 이쪽으로 뛰어왔다. 앞의 두 사람은 정찰을 보냈던 정춘추의 제자들이다. 뒤에는 농부의 옷을 입은 두 청년이었다.

그들은 정춘추 앞에 오더니 허리를 굽히며 서찰을 내밀었다.

정춘추는 편지를 읽어 보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매우 좋았어! 나와 또 한 번 생사의 승부를 겨루고 싶다면 얼마든지 응해 주겠다.

청년은 가슴 속에서 폭죽 하나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폭죽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보통 때는 폭죽이 펑하면서 하늘에서 산산조각이 났는데 이 폭죽은 하늘로 치솟은 뒤 팍, 팍, 팍 세 번 재차 솟아오르며 불꽃을 찬연히 빛냈다.

풍아삼은 강광릉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큰형, 이 폭죽은 저희 파에서 제조한 것입니다.

얼마 후 언덕에서 농부 차림을 한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손에 길다란 병기를 들고 내려왔다.

가까이 오자 비로소 그들이 든 것이 병기가 아니라 대나무 막대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대나무 사이에 줄을 연결하여 사람이 앉을 수 있게 한 들것이었다.

정춘추는 냉소하며 말했다.

대접이 소홀하지만, 사양 말고 타시오.

현난 등이 한 사람씩 의자에 앉자, 청년들은 두 사람이 한 개를 들고 날 듯이 산을 올라갔다.

정춘추는 소매를 바람에 날리면서 앞서 갔다. 그는 험악한 산길에서도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발을 땅에 대지 않고 단숨에 대나무숲의 중심지에 도착했다.

등백천은 그의 화공대법(化功大法)에 당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가 경공에 깊이 통달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자신들도 모르게 탄복하며 생각했다.

"저자의 무공은 요괴의 무공이야. 나는 놈의 상대가 안 되겠군!"

풍파악은 칭찬하듯 말했다.

저 늙은 놈의 경공은 보통이 아닌데? 정말 대단해!

그가 칭찬을 하자 성숙파 제자들은 정춘추의 무공은 어느 누구도 당할 자가 없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무학대사(武學大師)라고 칭하는 달마노조(達摩老組)도 상대가 되질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아첨을 떠는 제자들은 실로 보기 드물었다.

포부동은 말했다.

여러 형제들, 성숙파의 무공은 천하제일이오!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상대할 자는 아무도 없을거요.

이 말을 듣자 제자들은 크게 기뻐했다.

한 사람이 물었다.

당신 생각에 우리 파의 무공 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무엇인 것 같소?

어째 한 가지뿐이겠소? 최소한 세 가지가 있소.

포부동은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더욱 기뻐하며 또 물었다.

무엇 무엇입니까?

포부동은 말했다.

첫번째는 마비공(馬 功:말이 방귀를 뀌는 무공). 이 무공을 열심히 연마하지 않으면 하루를 넘기지 못해 배가 터지지. 둘째는 법라공(法螺功:나발을 분다는 뜻)으로 천하에서도 알아 주는 무공이지. 그 무공을 사용하지 않으면 동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아 발 붙일 곳이 없을 것이고, 셋째는 바로 후안공(厚顔功)이오. 양심을 저버리고,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만이 마비공과 후안공과 법라공을 연마할수 있지.

성숙파 제자들이 화를 내며 그에게 주먹질을 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오히려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말했다.

형씨는 정말 총명하오. 본파의 기공(奇功)을 너무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마비, 법라, 후안 세 신공(神功)은 연마하기 힘든 무공이오. 보통 사람들은 세 속의 영향을 너무 깊게 받아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 것으로 알고 있소. 마음속에 그러한 선악지념(善惡之念), 시비지분(是非之分)을 지니고 있으면, 후안공을 배울 때 효험이 반으로 줄어들 것이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 될거요.

포부동은 비꼬아 말했는데 뜻밖에 이들의 표정이 태연하기에 웃으면서 말했다.

귀파의 신공은 심오하기 이를데 없어 나는 마음속으로 존경해 왔소. 대선(大仙)께서 잘 이끌어 주길 바라오.

그 자는 포부동이 자기에게 대선이라 부르자 얼떨떨해 하며 말했다.

당신은 본파의 사람이 아니니, 신공은 전수할 수 없소. 하지만 간단한 도리는 말해 줄 수도 있지. 제일 중요한 비결은 역시 사부님을 신처럼 모시고, 사부님께서 방귀를 뀌면.....

포부동은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챘다.

틀림없이 향기로울거요! 크게 들이켜야 충성심이 있는거요.

그 사람이 다시 말했다.

당신 말도 맞지만 틀린 점도 있소. "크게 들이켜야" 하는게 아니고, 크게 들이킨 다음 적게 내뱉는거요.

포부동은 말했다.

알겠소. 대선의 말씀은 만약 숨을 크게 내뱉으면 사부님의 방귀가 향기롭지 못하다고 의심을 받는다, 이거군요?

그 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당신은 역시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 본파에 들어왔으면 대성할 수 있었는데,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들어 고생을 하는군. 본파의 무공은 비록 변화무궁하지만 기본 동작은 어렵지 않아. "말살양심(抹殺良心)" 네 글자만 기억하고 있으면 대충 배운거나 마찬가지요.

포부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 말을 들으니 마치 십 년 공부를 한 것 같소. 난 귀파를 오래 전부터 사모하고 있었소. 지금이라도 귀파에 들어가고 싶은 데 좋은 말씀 좀 해주시오.

그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파에 가입하려면 그리 쉬운 게 아니오. 먼저 어렵고 힘든 시험을 거쳐야만 가입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다른 한 제자가 말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많으니 말 조심하게. 자네가 진짜로 본파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사부님이 기분 좋을 때 내가 자네의 말을 전해 주지, 자넨 체격도 괜찮은 것 같은데, 사부님의 제자가 되면 후에 크게 성공할거야.

포부동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선의 은덕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등백천, 공야건 등은 포부동이 성숙파 제자들을 데리고 노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느 사이 일행은 골짜기에 도착했다. 골짜기에는 소나무가 가득했다. 바람이 불자 소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나무 숲을 몇 마장 지나 세 채의 통나무 집 앞에 도착했다.

집 앞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좌측 사람 뒤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정춘추는 멀리 떨어져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는데, 태도가 매우 거만스러웠다.

일행이 가까이 접근하자, 포부동 뒤에 서 있던 이괴뢰가 무엇인가 말하려고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시 닫았다.

포부동이 뒤로 돌아다 보니까 그의 얼굴은 매우 창백하고 불안해 보였다.

포부동은 이상하다는 듯 물어봤다.

왜 그래? 귀신을 봤어? 왜 그리 겁을 먹는거야?

이괴뢰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보니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중간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위에는 바둑판이 있었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우측은 키가 작고 깡마른 노인이고 좌측은 청년 공자였다.

포부동은 그 공자가 바로 단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평소 내가 저 자식에게 무례하게 굴었는데, 오늘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 틀림없이 비웃을거야."

바둑판은 커다란 청석 위에 조각이 되어 있었고, 검은 알과 흰 알이 번쩍번쩍 빛났으며, 백여 개의 바둑알이 서로 나란히 대치하고 있는 국면이었다.

정춘추는 가까이 걸어가 바둑을 지켜봤다. 키가 작은 노인은 검은 알을 두고 마치 승리한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단예는 흰 알을 손에 들고 곰곰히 생각했다.

포부동이 크게 말했다.

이봐! 단예라는 작자, 자네도 패했으니, 우리와 함께 항복하지!

단예 뒤에 서 있던 세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화가 난 듯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주단신 등의 호위였다.

이때 갑자기 강광릉, 범백령 등의 함곡팔우는 하나하나 의자에서 뛰어내려, 청석 바둑판 앞으로 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포부동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뭣들 하는거야?

말을 내뱉자마자, 키가 작고 깡마른 노인은 바로 농아 노인 총변 선생(聰辨先生)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이 바로 강광릉 등 함곡팔우의 사부였다. 더욱이 노인은 성숙파 정춘추와 원수지간이었다. 원수가 왔는데 어째서 모르는 척하고 바둑을 계속 두는걸까?

바둑 상대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인물이며, 무공을 할 줄 모르는 서생이 아니겠는가?

강광릉이 말을 꺼냈다.

노인께서 건강하신 것을 보니 저희 여덟 형제는 정말 기쁩니다.

함곡팔우는 총변 선생 소성하(蘇星河)에게 사문에서 쫓겨났기에 감히 사부님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범백령이 말했다.

소림파 현난 대사께서 오셨소.

소성하는 일어나서 모두에게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현난 대사께서 오셨는데 소성하가 친히 마중나가지 못해 정말 미안하오!

말을 마친 뒤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돌아서서 다시 바둑판을 쳐다봤다.

사람들은 전에 설모화에게서 그의 사부가 왜 벙어리처럼 행세했는가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입을 연 것을 보니 정춘추와 한판 생사 승부를 겨누려는 것 같았다.

강광릉과 설모화는 정춘추를 쳐다보면서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현난이 말했다.

좋아! 좋아!

소성하가 이번 바둑을 중요시하는 것을 보고 그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너무 잡다해. 책, 그림, 가야금, 바둑, 안 좋아하는 게 없군! 그러니까 무공이 제자들보다 못하지."

그때 단예가 갑자기 말했다.

좋소. 이렇게 두겠소!

말과 동시에 흰 알을 바둑판에 놓았다. 소성하는 얼굴에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검은 바둑알을 놓았다.

두 사람은 다시 십여 차례 두었다.

단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선생의 바둑 솜씨는 너무 오묘하여, 후배가 이길 수가 없군요.

그런데 소성하가 틀림없이 이길 것 같았는데,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말했다.

공자의 바둑 솜씨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소. 단지 좀더 깊이 생각했으면 되는건데, 아깝군 아까워. 정말 아깝군, 아까워!

그는 연달아 네 번 아깝다고 말했다. 정말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바둑판은 다시 팽팽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단예는 바둑판을 보고 생각했다.

"저 진롱(珍瓏)은 전에 무량산 동굴에서 본 적이 있다. 총변 선생은 틀림없이 동굴의 신선누님과 인연이 있을거다. 이따가 아무도 모르게 슬쩍 물어 봐야지. 다른 사람들까지 알게 되면, 서로 신선 누님을 보러 가려고 할거야."

함곡팔우 중의 둘째 제자 범백령은 바둑광이었다. 그는 멀리서 바둑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그 젊은 공자가 사부의 진롱에 걸려들어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 잘 보려고 목을 앞으로 쏙 내밀었다.

소성하는 말했다.

모두 일어나라! 백령, 이리 와서 이 진롱을 풀어 봐. 이 진롱을 풀 수만 있다면 정말 훌륭한 일이다.

예.

범백령은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바둑판 옆으로 가서 주의 깊게 쳐다봤다.

등백천은 낮은 소리로 물어봤다.

둘째, 진롱이 뭐야?

공야건도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진롱은 바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야. 한 사람이 일부러 진을 쳐 놓은 것이지.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 예측할 수 없어.

진롱은 적으면 십여 개, 많아야 사십 오 개의 돌로 구성되는데 이번의 진롱은 이백 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공야건은 오랫동안 내려다보았으나 볼수록 어지러워 그만 눈을 떼고 말았다.

범백령은 수십 년 동안 바둑을 연구해서 거의 국수급이었다. 하지만 이 바둑판은 위기와 반전이 얽혀 있어 함께 사는 수도 있고 둘 다 죽는 수도 있었다. 정말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시 쳐다봤지만 결국 눈앞이 어지러워, 단지 우측 하단에서 작은 승부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쳐다봤다. 처음에는 흰알이 죽은 줄만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살 길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살아 남으려면 옆의 검은 알을 죽여야 한다.

수를 계산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구역질이 나며 한 덩어리의 선혈(鮮血)을 토해냈다.

소성하는 싸늘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 바둑판은 어렵다. 너의 바둑 실력은 괜찮지만 이번 것은 놓기 힘들겠다. 더욱이 정춘추라는 악당이 옆에서 마술을 쓰고 있어서 머리가 어지러울거다. 계속 둘거냐, 안 둘거냐?

범백령은 말했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성하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천천히 해봐.

범백령은 눈을 바둑판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몸을 흔들거리더니 또 한 차례의 선혈을 토해냈다.

정춘추은 쌀쌀히 웃으며 말했다.

일부러 고생문을 찾는군. 알고 보니 저 늙어빠진 놈은 사람을 학대한 뒤 죽이는군. 범백령, 이런 걸 가리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고 하는 거야.

소성하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날 뭐라고 불렀느냐?

정춘추는 대답했다.

늙은 놈이라 했다!

소성하가 말했다.

농아 노인이 오늘은 벙어리 짓을 안 하겠다. 그 이유를 알겠느냐?

정춘추가 말했다.

좋을 대로 해라! 약속은 네가 깼으니 무덤을 스스로 판 것이다. 날 원망하지 말아라.

소성하는 옆의 큰 돌을 현난 옆에 갖다 놓으며 말했다.

대사, 앉으시오.

현난이 보기에 그 돌은 약 이백여 근이 되는 것 같았다. 소성하와 같이 마르고 키가 작은 노인이 힘 들이지 않고 커다란 돌을 든다는 것은 대단한 공력(功力)이었다. 그는 돌에 앉으면서 말했다.

고맙소!

소성하는 다시 말했다.

이 진롱은 선사님께서 만드셨소. 선사님은 삼 년이란 세월을 보내고서야 겨우 만들어 내셨소. 바둑계의 유명인사들도 풀지 못했소. 나도 삼십 년 동안 연구해 봤지만 역시 풀 수가 없었소.

여기까지 말하고 현난, 단예, 범백령을 쳐다본 뒤 다시 말했다.

현난 대사께선 선리(禪理)에 정통하다고 들었는데, 난 선종(禪宗)의 요지는 돈오(頓悟)라 알고 있소. 오랜 세월의 고공(苦功)이 없이는 깨닫지 못할거요. 기도(棋道)도 마찬가지요. 이것은 천하의 어떤 기사도 풀지 못할거요. 누가 만약 이 바둑판을 풀 수만 있다면 선사님의 소원이 풀어지는거요. 선사님은 비록 세상에 안 계시지만 틀림없이 기뻐할거요.

현난은 속으로 생각했다.

"총변 선생의 사부나 제자는 정말 똑같구나. 모두 가야금, 바둑, 책, 그림에 미쳐 버렸어. 저 자들은 총명과 재질을 쓸데없는 곳에 사용하니 결국 정춘추가 나쁜 일만 저지르고 다녀도 막지 못하지. 정말 한심하다."

소성하의 음성이 들렸다.

내 사제야.

그는 정춘추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사문을 배반하여, 선사님으로 하여금 돌아가시게 하고, 날 거의 죽도록 때렸지. 난 그때 죽음으로 충성을 다 하려 했지만 사부님의 심원(心願)이 아직 남아있어 죽지 못했다. 사부님의 소원을 풀지 못하면 죽어서도 후회할 것 같아 오늘까지 수치를 참으며 살아 왔다. 몇 십 년 동안 난 사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벙어리 행세를 했다. 나 자신이 농아 노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새로 받은 제자들까지도 벙어리가 되라 명했다. 하지만 삼십 년이 지난 오늘 아무런 성과도 없다. 아, 바둑 또한 아무도 풀 사람이 없구나. 이 분 단예 공자는 잘 생기고 멋있소.....

포부동이 끼어들며 말했다.

단 공자는 잘 생기지도 않았으며 멋있지도 않소. 사람의 인품이 바둑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거요?

소성하가 말했다.

아주 크게 관련이 있지.

포부동이 말했다.

노인네의 인품도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소성하는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포부동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 같은 늙은이보다 못생겼다는 말을 하고 싶겠군?

소성하는 더 이상 포부동을 상대하지 않고 말했다.

단 공자의 바둑 솜씨는 정말 오묘하오. 처음에 커다란 기대를 가졌었는데 한 점 차이군. 결국 바둑에서 내가 졌소.

단예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전 우둔한데 귀엽게 봐 주셔서 정말 부끄럽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백령이 소리를 치며 피를 토하고 뒤로 벌렁 자빠졌다.

소성하가 왼손을 들자 쉿, 쉿, 하며 세 개의 바둑알이 튕겨 나갔다. 바둑알이 범백령의 가슴 혈도에 맞자 피를 토하던 것이 멈춰졌다.

갑자기 팍,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한 개의 흰 물체가 날아왔다. 흰 것은 정확히 바둑판에 놓여졌다.

소성하가 보니 그것은 방금 소나무에서 긁어낸 작은 소나무 속살이었다.

흰 나무조각은 정확히 진롱을 풀 수 있는 자리에 놓여져 있었다. 그가 머리를 들어 좌측 오 장 밖을 쳐다보니 한 그루의 소나무 뒤에 엷은 노랑색 장포(長袍)자락이 보였다. 틀림없이 누가 숨어 있었다.

소성하는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기뻐하며 말했다.

고인(高人)을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오

그때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한 개의 검은 물건이 날아와 바둑판의 팔팔로(八八路)에 놓였다. 그곳은 마침 소성하가 두려던 위치였다.

모두 아, 하며 뒤를 쳐다봤지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우측에 있는 나무들은 별로 크지가 않았다. 나무 뒤에 숨었으면 보일텐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소성하가 보니 검은 것은 소나무 껍질이었다. 날아와 놓인 위치도 정확했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좌측 소나무 뒷쪽에서 또 한 개의 작은 소나무 속살이 날아와 바둑판의 오육로(五六路)에 놓였다.

다시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작고 검은 물체가 하늘로 치솟더니 정확히 바둑판의 사오로(四五路)에 놓였다.

검은 물체는 빙빙 돌면서 공중으로 치솟았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쏘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 물체가 빙빙 돌아 공중으로 오른 뒤 정확한 위치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 그 자의 무공은 틀림없이 대단할 것이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이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소나무 뒤에서 맑은 소리가 들렸다.

모용 공자께서 한 번 진롱을 풀어 보시지요? 내가 상대해 주겠소.

나뭇잎이 살짝 움직이더니 바람 소리와 함께 바둑판 옆에 한 명의 승려가 나타났다.

승려는 회색 승복을 입었으며 매우 장엄해 보였다. 얼굴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단예는 놀라 생각했다.

"구마지(鳩摩智), 이 괴물이 또 왔군!"

그는 또 생각했다.

"아까 흰 것은 혹시 모용 공자가 던진 게 아닐까? 오늘 드디어 모용 공자를 보게되는군!"

구마지는 두 손을 모으고 서, 정춘추 그리고 현난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넸다.

소승이 길을 지나가던 중, 총변 선생께서 바둑을 두시길래 한수 배우려고 이렇게 왔소.

그는 또 말했다.

모용 공자도 이제 나타나시지!

웃음 소리와 함께 소나무 뒤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단예는 그들을 보다 눈앞이 어두워지고 입이 마르며 온몸에서 열이 났다. 걸어오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는 바로 단예가 밤낮으로 생각하고 영원히 잊지 못하던 왕어언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귀여웠으며, 그녀는 멍하니 옆의 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예는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엷은 노란 색 옷을 입었으며 허리에 긴 검을 차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왔다.

단예는 옆의 남자를 보자 몸이 차가워지고 눈이 충혈되었으며 눈물이 나왔다.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모용 공자는 사람 중의 용봉(龍鳳)이라 했는데 역시 사실이군! 왕소저가 그를 사모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는 나는....."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왕어언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 빛은 윤이 났으며 혈색도 매우 좋았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기쁘게 미소지며 웃는 것도 오늘 처음 봤다.

두 사람은 이쪽으로 걸어왔다. 왕어언은 단예를 못 본 척했으며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단예는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엔 나라는 존재는 전혀 없는 것 같다. 하기야 옛날에 나와 함께있을 때도 그녀는 자기 사촌 오빠만 생각했으니까."

등백천, 공야건, 포부동, 풍파악은 서로 마중하려 했다. 공야건은 모용 공자에게 낮은 목소리로 소상하, 정춘추, 현난 등이 왜 이곳에 있는가에 대해 말해주었다.

포부동이 말했다.

저 단씨라는 서생은 무공을 할 줄 모르며 아까는 바둑에서 한판 졌소.

모용복은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를 하며 담화를 나눴다. 고소 모용은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지만 모두를 모용복이 이렇게 귀티나는 귀공자인 줄은 몰랐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중에 정춘추도 겸손한 말을 몇 마디 했다.

모용복은 맨 나중에 단예와 인사를 나누며 말했다.

단 형, 잘 있었소?

단예는 얼굴에 근심이 있는 듯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좋겠지만, 난..... 조금도 좋지 않소.

왕어언은 아, 하며 말했다.

단 공자도 여기 계셨군요?

단예는 대답했다.

예, 난..... 난.....

모용복은 그를 몇 번 바라본 뒤 바둑판 옆으로 걸어갔다. 그는 흰 알을 들더니 바둑판 중간에 놓았다.

구마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용 공자, 당신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해도 기도(棋道)는 쉬운 게 아니오.

말을 끝낸 뒤 검은 알을뒀다.

모용복이 말했다.

당신에게 패하지는 않을거요.

그러면서 흰 알을 뒀다. 구마지가 또 바둑을 뒀다.

모용복은 이 바둑은 틀림없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구마지의 검은 바둑알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바둑을 다시 뒀다.

구마지는 빨리 한 수를 놨다. 두 사람이 이십여 개의 바둑을 두자, 구마지가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모용 공자, 패배를 인정하시지?

모용복은 화를 내며 말했다.

시끄럽소! 그럼 당신이 한 번 풀어 보시오.

구마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바둑은 세상 사람 어느 누구도 풀지 못하는거요. 사람을 속이려 만든 것이지. 소승은 더 이상 쓸데없는 곳에 힘을 낭비하기 싫소. 모용 공자, 당신은 바둑판의 함정도 빠져나가지 못하면서 어떻게 중원을 쟁취하겠소?

모용복의 머리가 띵 하니 울렸다. 그의 머리속엔 구마지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바둑판의 함정도 빠져나가지 못하면서, 어떻게 중원을 쟁취하겠소."

눈앞이 모호해지더니 바둑판의 흰 알 검은 알들이 마치 장군과 병사처럼 보였다. 동쪽엔 병사와 말, 서쪽엔 진영, 네가 날 포위하고, 내가 널 포위하고, 서로 쉴새없이 상대방을 비참히 죽였다.

모용복이 자세히 보니 우리 편의 백기와 흰 색 병사들이 흑기 병사들에게 포위돼 있었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마음속은 더욱 초조해졌다.

"모용의 생명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평생 동안 노력한 것이 하루 아침에 없어지다니! 난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더니, 검을 뽑아 자신의 목을 베려 했다.

모용복이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왕어언, 단예, 등백천, 공야건등은 모두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용복이 갑자기 검을 뽑아 자신의 목을 베려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등백천 등이 그를 구하려 했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그와 동시에 단예가 소리쳤다.

그러면 안 돼!

휙, 소리와 함께 모용복의 손에 있던 긴 검이 땅, 하며 땅에 떨어졌다.

구마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단 공자, 정말 멋진 육맥신검(六脈神劍)이오!

모용복은 긴 검이 손에서 떨어지자 놀라 겨우 환각에서 깨어났다.

왕어언은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오빠, 그까짓 바둑 좀 못 풀면 어때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눈물방울이 그녀의 볼로 흘러내렸다.

모용복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어떻게 된거야?

왕어언이 말했다.

다행히 단 공자께서 오빠의 검을 떨어뜨렸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았다면.....

공야건이 말했다.

공자, 이 바둑은 속임수요. 더 이상 바둑에 신경 쓸 것 없소.

모용복은 단예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의 아까 그 검법이 틀림없는 육맥신검이란 검법이요? 운이 없어 자세히 보질 못했으니 한 번만 더 보여 주겠소? 정말 보고 싶소.

단예는 구마지를 쳐다봤다. 그가 자신의 육맥신검의 검법을 봤다면 자기를 잡으려 할 것이다. 이 검법은 어떤 때는 효력이 있고 어떤 때는 효력이 없었다.

만약 악질 중이 공격한다면 방어하기 힘들 것이다. 그는 겁이 나서 좌측으로 삼 보 물러서서 구마지와는 거리를 두고 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주단신 등 세명이 있었다.

단예는 말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어쩌다가 실수를 했나 보오. 다시 하기는 힘들어요. 아까 정말로 자세히 못 봤소?

모용복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아까는 잠시 정신이 멍 했소. 마치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소.

포부동은 큰소리로 말했다.

맞아, 틀림없이 성숙파 노인이 마술을 썼을거야. 공자, 조심해요.

모용복은 정춘추를 흘겨 보고 단예에게 말했다.

하마터면 마술에 걸릴 뻔했소. 구해 줘서 정말 고맙소. 단 형의 육맥신검 검법은 혹시 대리(大理) 단씨의 것이 아니오?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 소리쳤다.

대리 단씨라는 사람 거기 있소? 단정순이오?

그것은 바로 악관만영(惡貫滿盈) 단연경의 목소리였다.

주단신 등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했다.

이때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것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 형님이 진짜 대리 단씨야. 다른 놈들은 모두 가짜라구!

단예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내 제자도 왔군!"

남해악신이 소리를 치자 저쪽 산 아래서 빠른 걸음으로 한 사람이 올라왔다. 바로 운중학이었다.

그가 말했다.

천하 사대 악인이 총변 선생의 바둑대회에 초청을 받고 왔습니다.

소성하가 말했다.

환영하오.

말이 끝나자마자 운중학은 사람들 앞에 도착했다.

잠시 후 단연경, 섭이랑, 남해악신 세 사람이 나란히 도착했다. 남해악신은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형님께서 초청장을 받고 매우 기뻐하시며, 다른 일은 모두 제쳐 두고 바둑을 두러 오셨다! 형님의 무공은 천하무적이며 나보다 더 무섭다! 기분 나쁜 사람이 있으면 나와서 한판 붙어봐! 일 대 일로 싸울거냐, 아니면 한 번에 덤빌거냐? 무기들은 다 어쨌어?

섭이랑이 말했다.

세째, 미친 소리 하지 마! 바둑은 무기로 겨루는 게 아닌데 무슨 무기가 필요하다고 그래?

남해악신이 말했다.

너나 미친 소리 하지 마. 무기로 안 싸우면 큰형께서 뭣하러 여기까지 왔겠어?

단연경은 바둑판을 쳐다보고 뭔가 깊이 생각하더니 쇠 지팡이를 바둑 알 상자에 넣었다. 흰 알이 지팡이에 붙더니 다시 바둑판에 놓여졌다.

현난이 칭찬하며 말했다.

대리 단씨의 무공은 역시 듣던 대로 천남(千南)에서 제일이군.

단예는 전에 단연경이 황미 노승과 바둑 두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내공은 대단할 뿐만 아니라 바둑 실력도 굉장히 높았다. 잘하면 그가 진롱을 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주단신은 그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그만 갑시다. 기회를 놓치겠어요.

하지만 단예는 첫째로 단연경이 이 난국을 어떻게 푸는지를 보고 싶었고, 둘째로 겨우 왕어언을 만났는데 그녀 곁을 떠나기 싫었다.

그는 "응, 응"하면서 오히려 바둑판 옆으로 몇 발자국 더 가까이 갔다.

소성하는 이번 바둑의 천변만화(天變萬化)에 대해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는 검은 알을 한 수 놨다. 단연경도 잠시 생각하고 한 수 놨다.

소성하가 말했다.

정말 잘 하시네? 어디 관문을 풀고 빠져나갈 수 있는지 봅시다.

그는 검은 알을 놓고 길을 봉쇄했다. 단연경은 또 한 수 놨다.

그때 소림승 허죽이 말했다.

그곳에 두면 안 되오!

그는 모용복이 그 자리에 바둑알을 둔 뒤, 검을 뽑아 자신을 베려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단연경도 똑같은 행동을 할까봐,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네 주의를 준 것이다.

남해악신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너 같은 작은 중이 우리 큰 형님께 왜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야!

그리고 허죽의 입을 때리려고 했다.

단예가 말했다.

이봐, 스님에게 상처를 입히면 안 돼!

남해악신은 이곳에 도착할 때 단예가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단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는데 그가 말을 꺼낸 것이다.

남해악신은 화를 내며 말했다.

안 때리면 되잖아? 괜히 상관이야!

그는 허죽을 놓아 줬다.

사람들은 난폭한 남해악신이 단예의 말에 순순히 복종하고, 단예가 "이봐!" 하고 말하는데도 꼼짝 못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단지 주단신만이 알고 있었다.

허죽은 땅에 앉아 무언가 깊이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불조(佛祖)에서 전해오는 수증법문(修證法門)은 계, 정, 혜(戒定慧) 세 가지라고 늘 말씀하셨다. 나와 같은 둔한 사람을 위해 달마 조사(達摩祖師)께서 편한 법문을 전수하셨다. 우리에게 무술을 배움으로써 바른 마음을 수양하라 했다. 바둑에서도 바른 마음을 배울 수 있다. 무술도 승패를 중요시하고 바둑도 승패를 중요시하는데 그것은 선정(禪定)의 도리와 상반된다. 무술과 바둑을 배우지 않으면 승패의 마음도 없을거다. 경을 읽고, 밥을 먹고, 길을 걸을 땐 승패의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쉽지만, 무술 시합, 바둑 시합에서는 쉽지 않다. 무술시합, 바둑시합에서 승패의 마음이 없으면 곧 도(道)에 도달한 것이다. 내 무공실력은 높지 않고, 바둑 기술도 높지 않다. 사형제들과 시합을 하면 항상 승리할 때는 적었고 패배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항상 칭찬하셨듯 나의 승부욕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런데 오늘은 왜 단씨 시주가 바둑을 잘못 두자 지적을 해 주었을까? 그리고 나의 실력은 다른 사람의 착오를 지적할 실력이 못되지 않는가? 그의 이번 바둑은 비록 앞의 모용 공자와 비슷하지만,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 줄 모르는 일이다. 나 자신도 풀 수 없으면서 "그곳에 두면 안되요!" 하고 말한 것은 내가 너무 자만한 것이 아닐까?"

단연경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림파는 명문정파라고 들었는데 귀하의 생각에는 이것을 어떻게 푸는게 좋겠소?

현난은 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이번 바둑은 마술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데 정도(正道)로는 풀 수 없을 것이오.

단연경은 왼쪽 손을 들고, 시종 바둑을 두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말했다.

앞엔 길이 없고, 뒤엔 추적병이 있고, 마술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고, 정말 힘들군!

그는 본래 대리 단씨의 전통 무공을 전수받았으나, 나중에 사도(邪道)의 길에 잘못 들어섰다. 현난의 말은 그의 가슴에 충격을 줘 모용 공자처럼 점점 마음이 산란해 왔다.

이 진롱은 변화무쌍하여 사람을 궁지에 빠지게 하고, 재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망하게 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는 일을 망치게 한다.

단예는 마음이 너무 착해서 패배한 것이다. 모용복은 권세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끝까지 버티다 결국 패한 것이다.

단연경은 불구자가 된 후 어쩔 수 없이 본문의 정통 무공을 포기하고 사술(邪術)을 연마한 것이었다. 정신이 집중되는 순간 마음이 흔들리고 자신을 자제할 수 없었다.

정춘추는 웃으면서 말했다.

한 사람이 바른 데서 나쁜 곳으로 가긴 쉬워도 나쁜 데서 좋은 데로 가긴 힘들지. 너의 일생은 이제 끝이다! 정말 불쌍하군. 한 번의 실수로 평생 고생하는 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

말 속엔 불쌍해 하는 연민의 정이 들어 있었다.

현난 등의 고수들은 성숙파의 늙은 놈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단연경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기회에 적수 하나를 없애려는 것이었다.

단연경은 과연 움직이지 않고 처량하게 말했다.

대리국의 황자(皇子)인 내가 오늘 강호에서 패하고, 이런 지경에 빠진 것은 정말 선조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정춘추는 말했다.

자네는 죽더라도 하늘에서 단씨의 선친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을거야. 죄를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자결하는 것이 좋아. 그게 진짜 영웅의 갈 길이다. 자결하는 편이 좋아! 자결하는 편이 좋고 말고!

정말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다. 공력이 약한 사람은 금방 넘어 갔을 것이다.

단연경은 혼자 중얼거렸다.

아! 자결하는 편이 좋아.

그는 쇠 지팡이를 들더니 천천히 자기 가슴에 갖다댔다. 하지만 그는 수양이 매우 깊었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이러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러나 그의 쇠 지팡이는 점점 그의 가슴에 가까워졌다. 그가 나라를 잃고 유랑 생활을 할 때는 자결하려고 마음 먹은 적도 있었다. 그땐 그의 정신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자결하려는 충동이 일어났다.

주위의 고수들 중에서 현난의 자비심이 제일 컸다. 그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려 했지만, 공력이 단연경과 비슷하지 않은 상황에선 소용이 없었다. 잘못하면 효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더 큰 화를 입힐지도 모른다. 마음만 초조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소성하는 사부님과의 약속 때문에 구할 수가 없었다. 모용복은 단연경이 나쁜 사람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그가 지옥으로 간다면 더욱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구마지는 재난을 좋아하는 자라 웃으면서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단예와 유탄지는 공력이 모두 매우 깊었지만 단연경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어언은 각문 각파의 무공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정춘추가 심력(心力)으로 유인한 사파무공은 무학(武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섭이랑은 단연경이 평소 그녀에게 무례하게 대해서 기분 나빠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가 자결하겠다고 하자 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등백천, 강광릉은 무공을 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숙파 노인과 제일 악인(弟一惡人)의 싸움에 끼어들기 싫었다.

이들 중에 남해악신이 제일 초조했다. 단연경의 지팡이 끝이 가슴에 가까워지며 막 심장의 사혈(死穴)을 찌르려 할 때 허죽을 잡고 말했다.

큰 형, 이 중을 받아!

이렇게 말하면서 단연경에게 던졌다.

정춘추가 장풍을 쓰며 외쳤다.

상관 말고 꺼져!

남해악신은 힘을 너무 세게 썼기 때문에 허죽은 앞으로 곧장 날아갔다. 하지만 정춘추의 장풍에 의해 허죽의 몸은 다시 남해악신에게 곧장 날아왔다.

남해악신은 두 손으로 받아 다시 단연경에게 던지려 했지만, 정춘추의 장풍속엔 여력이 남아 있었다.

남해악신은 갑자기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뒤로 세 걸음 물러선 뒤, 그 자리에 섰으나 급기야 두 다리에 힘이 빠져 땅에 털석 주저앉았다. 더 이상 고통이 없을줄 알았는데 세 번째 음유한 힘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공중회전을 한 뒤, 두 손으로 허죽을 잡고 물러앉았다. 그는 정 노인의 네 번째 음유한 힘이 덮쳐올 줄 알고 허죽의 몸을 급히 앞으로 던졌다.

남해악신은 눈을 크게 뜨고 욕을 했다.

네 엄마 젖이나 먹어라!

정춘추는 장풍을 쓰고 나니 심력이 약간 약해졌다. 단연경의 쇠 지팡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정춘추가 말했다.

이미 늦었어. 이미 늦었어. 단연경 내가 좋은 말 할 때 자결하는 게 좋아! 자결하는 게 좋아!

단연경은 소리쳤다.

맞아, 살아봤자 무슨 재미가 있어? 자결하는 게 좋겠다!

말과 동시에 지팡이 끝이 그의 가슴에 더욱 가까이 접근했다.

허죽의 자비심이 움직였다. 그는 단연경을 마술에서 구하려면 먼저 바둑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바둑 솜씨는 얕았기 때문에 이 복잡한 바둑을 푼다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단연경이 두 눈으로 멍청히 바둑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바둑은 풀지 못하더라도 방해를 놓으면 될게다. 그게 쉬울 것 같다. 정신만 차리게 하면 구할 수 있을게다. 바둑판이 없으면 승부도 없겠지?"

그가 말했다.

내가 풀어 보겠소.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가, 바둑 상자에서 흰 알을 꺼낸 뒤, 눈을 감고 바둑판 위에 놓았다.

그가 두 눈을 뜨기도 전에 소성하가 화내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난 치고 있군. 자기가 자신을 죽이는 바둑이 세상에 어디 있어?

허죽의 얼굴이 빨개졌다.

알고 보니 자기가 눈을 감고 둔 곳은 이미 검은 알들에게 포위되어,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백기는 아직도 살 가망은 있었고, 비록 흑기가 공격한다 해도 잘만 막아내면 살아 남을 수도 있었다. 허나, 자기가 자기의 백기를 먹었다. 기도에서도 자기가 자신을 죽이는 법도는 없다. 백기가 죽자 백군은 완전히 몰살당하고 만 것이다.

구마지, 모용복, 단예 등이 이 광경을 보고 킬킬 웃었다.

현난은 머리를 저으며 빙그레 웃었다. 범백령이 참지 못하고 말을 했다.

지금 장난치고 있는거냐?

소성하가 말했다.

선사께선 어느 누구도 바둑을 둘 수 있다고 하셨소. 이 분의 기법은 좀 특이하지만 그래도 바둑이오.

허죽은 자살하여 죽은 흰 알을 바둑판에서 꺼낸 뒤, 검은 바둑알을 두었다.

단연경은 큰소리를 치며 환각에서 깨어난 뒤, 정춘추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성숙노괴, 위기를 이용하여 날 죽이려 하다니, 우린 좋게 헤어질 수가 없다."

정춘추는 허죽을 한 번 노려보고, 얼굴에 독기를 띠고 욕했다.

괘씸한 놈!

단연경은 바둑판의 변화를 보고, 자신이 구사 일생으로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죽의 구원에 대해 매우 고마웠다.

정춘추가 허죽에게 복수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단연경은 생각했다.

"소림 고승 현난이 여기 있는데 성숙노괴도 함부로 하지 못하겠지. 만약 현난이 힘을 쓰고 보호하지 못하면, 젊은 승려가 나 때문에 죽게 할 수는 없다."

소성하가 허죽에게 말했다.

당신이 자신 편을 죽이는 바람에 더욱 포위됐는데 이제 어떻게 할거요?

허죽이 웃으면서 말했다.

소승의 바둑 실력은 높지가 않습니다. 아깐 사람을 구하려고 장난을 친겁니다. 소승은 바둑을 두지 않겠습니다. 선배님께 용서를 부탁합니다.

소성하는 얼굴 색을 바꾸더니 힘을 주고 말했다.

선사께서 이 바둑을 만든 건, 천하의 고수들에게 풀어 보라고 한 것이오. 풀수 없어도 상관없고 다시 둬도 무방하오. 하지만 만약 이 바둑판에서 장난을 친다면, 그건 선사님의 심혈(心血)을 욕되게 한 것이오. 내가 비록 벙어리이지만, 그 사람을 끝까지 죽여 버리겠소.

그를 "농아 노인"이라 불렀지만 그는 귀와 입이 멀지 않았다. 그는 입을 열고 말을 하면서 자칭 "벙어리"라 했다. 그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더니 표정이 매우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 어느 누구도 웃지를 못했다.

허죽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노선배.....

소성하는 큰소리로 말했다.

바둑을 두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아? 내 사부님이 너의 놀이갠 줄 알아?

말과 동시에 오른손을 내밀더니 장풍을 썼다. 펑, 하며 눈앞에 먼지가 떠오르더니 허죽이 서 있는 자리 앞에 커다란 구멍이 파져 있었다.

정말 무서운 장풍이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장풍을 썼다면 허죽의 뼈는 산산 조각이 나 벌써 죽었을 것이다.

허죽은 놀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슬쩍 현난을 쳐다보며 은근히 사백조(師佰祖)가 자기를 구해 주길 바랬다.

현난은 바둑 실력이 없었으며 더욱이 무공을 쓸 수가 없었다.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소성하에게 봐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

이때 허죽이 상자에 손을 집어 넣어 흰 알을 꺼낸 뒤, 바둑판에 놨다. 그곳은 흰 알이 죽고 없어진 빈 자리였다.

이번에 정말 잘 뒀다. 소성하는 삼십여 년 동안 수천 개의 바둑 변화를 봐 와서 상대방이 어떤 수법으로 공격해도 막을 수가 있었다. 아무도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허죽이 눈을 감고 바둑을 둔 것은 결국 자기가 자신을 죽인 결과가 되었고 그것은 근본 기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바둑의 도리를 조금만 아는 사람도 그렇게는 두지 않았을 것이다. 칼로 자신을 베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소성하는 국면이 이렇게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생각한 후 검은 알을 뒀다.

소성하의 기세는 무서웠다. 이때 어디에선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위(平位) 삼구로에 두게!

허죽은 누구의 지도인지 상관하지 않았다. 더욱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상관치 않고 흰 알을 평위 삼구로에 뒀다. 소성하가 검은 알을 두고 나자 목소리가 또 허죽의 귀에 들려왔다.

평위 이팔로.

허죽은 흰 알을 이팔로에 뒀다.

그가 바둑을 두자 구마지, 모용복, 단예 등이 아, 하며 소리쳤다. 허죽이 머리를 들고 주위를 살피니 옆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모두 놀라움이 어려 있다. 아주 멋지게 바둑을 둔 것이 틀림없었다.

소성하의 얼굴 색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불안한 듯 두 개의 길다란 눈썹을 계속해서 움찔거리고 있었다.

허죽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가 왜 기뻐할까? 혹시 내가 잘못 둔 게 아닐까?"

그는 다시 생각했다.

"어쨌든 상관없다. 그와 열 번 이상만 바둑을 두면 나도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게 된다."

소성하가 검은 알을 두자, 그는 누가 암암리 일러 주는 대로 바둑을 뒀다. 그는 바둑을 두면서 한편으로는 사백조가 도와 주는게 아닌가 하고 쳐다봤다. 하지만 현난의 표정은 초조해 있었고 입을 열지도 않고 있었다.

그의 귀에 들려 온 목소리는 틀림없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의 내공이었다. 그 사람은 심후한 내력(內力)으로 말을 상대방의 귀에 전하는 것이다. 물론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허죽은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의 입술을 쳐다봤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틀림없이 "거위(去位) 오륙로에서 검은 알 세 개를 먹어" 하는 맑은 소리를 들었다.

허죽은 바둑을 두면서 깊이 생각했다.

"날 가르친 사람은 사백조밖엔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된거지? 저 사람들은 나와 친하지도 않으니 도와 줄 리도 없을테고? 이 사람들 중에 사백조만이 바둑을 두지 않았고, 모두들 바둑에서 패했잖아? 사백조의 신공(神功)이 대단하군!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전음입밀을 펼치다니! 난 언제쯤 저런 경지에 도달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자기에게 바둑을 가르친 자가 바로 천하제일 대악인 악관만영 단영경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단연경은 혼미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자 정춘추의 마법에 자살을 할 뻔했다. 다행히 허죽이 방해를 해서 그의 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소성하가 허죽에게 화를 내며 죽이려고 할 때, 허죽을 도와 위험에서 빠져 나오게 했다.

그는 복화술(腹話術)에 능통하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할 수 있었으며, 다시 심후한 내공을 전할 수 있었다. 비록 옆에 많은 고수가 서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바둑을 몇 번 두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단연경은 비로소 이 진롱의 비밀을 알아냈다. 먼저 자기 편을 죽여야만이 비로소 영원히 살아날 수가 있는 진롱이었다.

바둑에는 "반복(反僕)", "도탈화(倒脫靴)"의 법칙이 있다. 일부러 함정에 빠져 적에게 잡혀 죽은 뒤 승세(勝勢)를 취득하려는 것이다. 일부러 잡혀 죽은 바둑알은 팔구 개뿐이지만, 나중에 더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자살 행위의 수법은 아무리 기술이 능통한 사람도 절대 이 길을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위험에서 탈출하려고만 하지 일부러 자살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허죽이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바둑을 두지 않았으면 아마 천 년이 지나도 이 진롱을 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단연경의 기술( 術)은 본래 매우 높았다. 전에 대리에서 황미 노승과 대결을 할 때 황미 노승도 속수무책일 정도였다.

구마지, 모용복등은 단연경이 몰래 지도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허죽이 이쪽 저쪽으로 연달아 두 개의 검은 알을 먹자 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현난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번 바둑은 너무 복잡해서 아무도 풀 수가 없었다. 허죽은 이번에 생사와 승패를 빠져나왔을 뿐만 아니라 생사와 승패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일생 동안 무학(武學)과 선정 공부(禪定功夫)를 연마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그는 갑자기 생각했다.

"농아 선생과 함곡팔우가 잡학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무공이 정춘추보다 못하다. 전에 내가 그들에게 길을 잘못 들었다고 비웃은 적이 있다. 나도 무공을 열심히 연마했지만 다 죽게 됐다. 나도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한 그의 몸은 땀으로 젖었다.

단예는 처음에는 바둑판만 쳐다봤지만 나중에는 시선을 왕어언에게 옮겼다. 그녀를 보면 볼수록 가슴이 아팠다.

왕어언의 눈빛은 시종 모용복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단예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만 떠나자. 그만 떠나야겠다! 더 남아 있으면 고생을 자초하게 되고 결국 피를 토하게 될지도 몰라."

그는 왕어언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왕 소저가 머리를 돌리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야지. 왕 소저, 당신과 고종 오빠의 재회를 진심으로 축하하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소. 난 그만 가 봐야겠소. 그녀가 만약 예, 가보세요 하면 난 떠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녀가 할말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기다려야겠다."

사실 단예는 왕어언이 그를 돌아볼 리도 없고, 더욱이 "할 말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하고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왕어언의 머리가 약간 움직였다. 단예의 가슴이 둥, 둥, 하고 울렸다.

"그녀가 돌아본다!"

하지만 그녀는 기침을 하더니 작은 소리로 "고종 오라버니"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모용복은 바둑판을 쳐다보며 백기가 우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조급해하며 생각했다.

저런 것은 나도 생각해 낼 수 있다. 처음 시작할 때가 어려운 것처럼 시작이 어려웠어. 그래서 내가 풀 수 없었던 거다.

왕어언이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왕어언은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돌렸다.

단예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머리를 돌린다! 그녀가 머리를 돌린다!"

왕어언은 예쁜 얼굴을 이쪽으로 돌렸다. 단예는 그녀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운 기색을 볼 수 있었다. 약간 슬픈 눈빛이었다.

단예는 생각했다.

"그녀가 모용복 공자와 함께 온 후 줄곧 기뻐하는 것 같았는데 왜 갑자기 기뻐하지 않을까? 혹시 그녀가 날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녀가 눈을 우측으로 돌리자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단예는 앞으로 한 걸음나가 "왕 소저, 왜 그래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곧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먼 곳을 쳐다보더니 다시 모용복을 쳐다봤다.

단예의 마음은 더욱 슬퍼졌다. 그는 속이 상했다.

"그녀는 날 쳐다본 게 아냐. 차라리 날 바라보지나 말지. 그녀의 눈빛은 나에게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지 않았어. 그녀는 날 봤지만 나의 그림자는 그녀의 마음속에 없었어. 그녀는 자기 고종 오라버니의 일만을 걱정하고 있으니 이 단예를 생각할 리가 없다. 이곳을 떠나는게 좋아, 이곳을 떠나는게 좋겠다!"

한편 허죽은 단연경의 지시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검은 알이 모든 수법을 다 동원해도 결국 흰 알에게 하나하나 잡혀 먹혔다. 검은 알이 약간의 틈만 보이면 흰 알은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소성하는 잠시 생각하고 웃으면서 검은 알을 뒀다. 단연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위(上位) 칠팔로!

허죽은 목소리에 따라 바둑을 뒀다. 그가 비록 바둑에 대해선 자세히 모르지만, 지금은 이렇게 바둑을 둠으로써 진롱을 풀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손뼉을 치고 웃으며 말했다.

이젠 됐지요?

소성하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스님은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소. 축하드리오.

허죽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건 내가.....

그는 이번 바둑은 사실 사백조의 도움이었다고 말하려 했으나 "전음입밀"의 소리가 들렸다.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더욱 조심하시오.

허죽은 현난의 목소리인 줄 알고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소성하는 일어서서 말했다.

선사께서 이 바둑을 만들어 놓은 뒤 수십 년 동안 아무도 풀지 못했소. 이번에 소승께서 진롱을 풀었으니 정말 기쁘오.

허죽은 무슨 영문인 줄 모르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아무렇게나 두었는데 운이 좋았나 봅니다. 다 선배님의 사랑 덕택입니다. 너무 칭찬을 해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소성하는 통나무집 앞으로 가더니 정중히 말했다.

소신승(小神僧), 들어갑시다!

허죽은 통나무집들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문이 없어서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몰랐다. 그는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잠시 후 그 목소리가 또 들렸다.

바둑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최선을 다해 싸워서 얻은거요. 집에 문이 없으면 소림파 무공을 사용하여 들어가시오.

허죽은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마보(馬步)의 자세로 오른쪽 손을 들더니, 힘껏 한 곳을 밀었다. 하지만 그의 무공에는 한계가 있었다.

정춘추에게 장풍을 한 대 맞고 땅에 넘어진 뒤 성숙파 제자들에게 잡혔었으나 다행히 그의 내력(內力)은 완전히 상실되지는 않았다.

옆에 서 있던 고수들의 눈에는 그의 내력이 결코 약하지는 않다고 느껴졌다. 다행히 문짝은 단단하지 않았다. 그의 장풍으로 문짝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 허죽이 다시 장풍을 쓰자 문짝이 갈라졌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이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남해악신이 하, 하, 웃으면서 말했다.

소림파의 경공(硬功)도 별게 아니군!

허죽이 뒤로 돌아보며 대답했다.

소승은 소림파에서 제일 못난 제자이오. 나의 무공이 얕은거지, 절대로 소림파의 무공이 얕은 것이 아니오.

그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빨리 들어가시오.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앞사람에게도 신경 쓰지 마시오!

허죽이 대답했다.

예!

허죽은 집안에 들어섰다.

정춘추가 소리치며 말했다.

그건 본문의 문인데 너 같은 중놈이 들어가면 어떡해?

팍, 팍, 하는 소리가 두 번 들리더니 허죽은 바람이 날아와 자기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두 개의 커다란 힘이 그의 가슴을 쳤다.

그는 몸을 한 바퀴 뒹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다.

정춘추는 장풍으로 그를 죽이려 했다.

구마지는 공학공(控鶴功)으로 그르 꺼내려 했다.

단연경은 무공을 써 정춘추의 장풍을 약하게 했다.

소성하는 그와 구마지의 중간에 서서 왼쪽 손으로 공학공을 소멸시키고 오른손으로 두 대 쳐서 그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두 개의 장풍이 너무 세어 허죽은 머리를 벽에 부딪혔다. 머리를 부딪히자 앞이 컴컴해지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후 일어서서 머리를 만져 보니 커다란 혹이 하나 나 있었다.

아무런 물건도 없고, 썰렁한 집안에 있다고 느낀 그는 문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안에는 문이 없었고 단지 자신이 깨고 들어온 작은 구멍이 있었다. 그는 멍하니 있다가 그 구멍으로 기어 나가려 했다.

반대편 벽쪽에서 늙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왔으면 됐지 왜 나가려 해?

허죽이 몸을 돌리고 말했다.

노선배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은 자네가 만들었으니 아무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 내가 만든 바둑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풀지 못했는데, 오늘 결국 자네가 풀었군. 빨리 이쪽으로 오지 못해?

허죽은 "내가 만든 바둑"이라는 말을 듣고 등골이 오싹해져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그는 틀림없이 소성하가 이 바둑은 그의 선사가 만든 것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사람이란 말인가 귀신이란 말인가?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시간이 없어, 난 삼십 년을 기다렸다. 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빨리 이쪽으로 오거라!

그 목소리가 매우 자상했으며 악의는 없는 것 같았다. 허죽이 왼쪽 어깨를 벽에 부딪치자 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벽은 너무 오래되어서 부패되어 있었으며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허죽은 두리번거리며 들어가서는 또 한 번 놀랬다. 안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썰렁한 방이었으나 한 사람이 공중에 뜬 채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곧 생각이 났다.

"귀신이야!"

놀라 두로 돌아 도망치려 하는데 그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알고보니 작은 스님이었군! 얼굴이 못생긴 작은 스님이었군! 힘들어! 힘들어! 힘들겠어!

허죽은 그가 세 번 한숨을 쉬고 세 번 "힘들어!"라고 말하자, 돌아서서 다시 그를 쳐다봤다. 비로소 그 사람의 몸에 검은 줄이 묶여 있었고 그 줄은 천장 지붕에 매달려 있었다.

단지 그 사람 뒤의 벽이 검정색이고 줄도 검정색이어서 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허죽의 얼굴은 본래 잘 생긴 편이 아니었다. 짙은 눈썹, 커다란 눈, 콧구멍은 위로 뚫렸고, 입술은 두꺼웠으며, 더욱이 벽에 얼굴을 부딪히면서 생긴 상처로, 더욱 보기 흉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소림사 스님들이 불쌍히 여겨 데려가 키운 것이었다.

소림사 스님들은 불공을 열심히 드리지 않으면 무공을 않으면 연마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불가에선 사람의 육체를 취피낭(臭皮囊)이라 했다. 취피낭이 잘 생겼나 못 생겼거나를 너무 따지게 되면 도를 닦는 데 지장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자가 허죽에게 못 생긴 작은 중이라고 말한 것은, 그로서는 오늘 처음 들어 본 소리였다.

허죽은 머리를 들고 그 사람을 쳐다봤다. 그의 머리카락은 삼척(三尺)이나 됐으며 흰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었다.

얼굴은 빛이 났고 주름살이 전혀 없었다. 나이는 적어 보이지 않았지만 신체는 든든했고, 위세가 당당해 보였다.

허죽은 부끄러하며 생각했다.

"얼굴에 대해선 저 사람이 나보다 훨씬 미남이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말했다.

소승 허죽,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의 성이 뭐냐?

허죽이 말했다.

출가한 사람에겐 속가 성씨(俗家姓氏)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다.

그럼 출가하기 전에는 성이 뭐였느냐?

허죽이 말했다.

소승은 어려서 출가했기 때문에 성씨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말을 했다.

네가 나의 바둑을 풀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총명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얼굴이 그 모양이니 어쩔 수 없다. 음! 힘들겠다!

허죽이 그 사람의 말을 들으니, 매우 중대한 일이 있는데 도와 줄 사람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승불법(大乘佛法) 제 일장에 "도중생일체고액(度衆生一切苦厄)"이란 글이 있다.

허죽이 말했다.

소승의 바둑 실력은 실은 매우 얕습니다. 이런 바둑은 제가 푼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배님께서 어려운 일이 있으시다면 비록 소승에게 능력이 없지만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사례는 받지 않습니다.

그 노인은 말했다.

착한 마음을 갖고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바둑 실력이 낮아도 괜찮고, 무공실력이 낮아도 다 상관없다. 네가 이곳까지 온 것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지만, 너의 모습이 너무 추악하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허죽은 웃으면서 말했다.

얼굴이 잘 생기거나 추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나도 어쩔 수 없고 부모님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소승의 면모가 추악하여 선배님께서 불쾌하시다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하면서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허죽이 뒤로 돌아서려 하자 노인이 말했다.

잠깐!

그는 옷소매를 허죽의 우측 어깨에 올려 놓았다. 허죽의 몸은 아래로 눌렸다. 옷소매는 마치 손목처럼 그의 몸을 잡았다.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젊은이가 오기가 있는 것도 괜찮지.

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절대 거만을 떠는게 아닙니다. 단지 선배님께서 화가 나실까봐 나가려는 겁니다.

그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오늘 바둑을 둔 사람들은 누구냐?

허죽은 하나하나 말해 줬다.

그 노인은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천하 고수가 열 가운데 육칠 명은 모였구나. 대리 천룡사의 고영 대사(枯營大師)도 왔느냐?

허죽이 대답했다.

저 외에 출가한 사람은 구마지 대사 한 사람뿐입니다.

노인은 또 물었다.

최근 무림에 무공이 굉장히 높은 교봉이란 자가 나타났다고 하던데 그도 왔느냐?

허죽이 말했다.

오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 많은 세월을 기다렸는데 더 기다려 봤자 내외(內外)가 모두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겠군. 세상에 모든 일이 다 잘 되라는 법은 없지. 여기서 끝내는 수밖에 없다."

얼마 후 이미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이 바둑을 자네가 풀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럼 성하가 왜 자넬 이곳에 들여보냈지?

허죽이 말했다.

첫번째 바둑알은 제가 대담무지(大膽無知)하여 눈을 감고 둔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저의 사백조가 "전음입밀"의 방법으로 절 지도했습니다.

그는 여지껏 있었던 일을 상세히 얘기해 줬다.

노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늘의 뜻이로다! 하늘의 뜻이로다!

갑자기 눈썹을 올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하늘의 뜻인가 보구나! 네가 눈을 감고 바둑을 둔 것이 결국 나의 바둑을 풀었구나! 이건 복과 운이 많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 일을 도울 수도 있겠다. 좋아, 좋아. 무릎을 꿇고 나에게 절을 해라!

허죽은 어려서부터 소림사에서 컸기 때문에, 매일 보는 사람은 사부님 아니면 사숙백(師叔伯), 사백조(師伯祖), 사숙조(師叔祖) 등의 선배였다.

나이가 같더라도 무공이 그보다 훨씬 좋은 사형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복종하는 것은 습관이 돼 있었다.

불문(佛門) 제자들은 도를 중시했다. 노인이 그에게 절을 하라고 명하자, 무슨이유 때문인지도 몰라도, 노인은 무림계에서 선배님이니까 절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정중히 꿇어앉아 동, 동, 동, 동, 네 번 절을 하고 일어서려 하자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다섯 번 더 해라. 그것이 본문이 규칙이다.

허죽이 대답했다.

예!

그는 다섯 번 절을 더 했다.

노인이 말했다.

착한 아이로군! 이리 오너라!

허죽은 일어서서 그의 옆으로 걸어갔다.

노인은 그의 손을 잡더니 위아래로 천천히 몇 번 쳤다. 갑자기 맥문(脈門)이 뜨거워지면서, 일종의 내력(內力)이 팔에 전해졌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그의 심장으로 접근했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소림심법(少林心法)으로 대항하자 노인의 내력은 후퇴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죽은 노인이 자신의 내력이 얼마나 깊은지 시험해 봤다는 것을 알았다.

허죽은 귀와 얼굴이 빨개지며 쓴 웃음을 짓고 말했다.

소승은 평시 불경을 좋아하고 놀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부님이 가르쳐 주신 내공을 잘 연마하지 못했습니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반대로 노인은 매우 기뻐하며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매우 좋아! 다행히 소림파 내공이 약하기 때문에 골치가 덜 아프겠다.

노인은 그의 손을 놓고 웃으면서 말했다.

됐어. 내가 본문의 북명신공(北冥神功)으로 너의 소림 내력을 모두 없앴다.

허죽은 놀라서 소리쳤다.

뭐라고요?

그는 깜짝 놀라 뛰었다가 두 발이 땅에 닿자 갑자기 무릎에 힘이 없어지면서 땅에 주저앉았다. 그는 사지(四肢)와 모든 뼈에 힘이 없어졌으며 머리는 어지러웠다. 얼마 후 이 노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슬퍼져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난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고, 당신에게 죄진 것도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짓을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무례한 놈이구나! 사부님이라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 부르면 어떡해? 정말 버릇없는 놈이로군!

허죽이 놀라 말했다.

뭐요? 당신이 어째서 저의 사부입니까?

그 사람이 말했다.

아까 나에게 아홉 번 절을 한 것은 날 사부로 모시겠다는 뜻이다.

허죽이 말했다.

아닙니다! 전 소림 제자인데 어떻게 당신을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까? 사람을 해치는 사술(邪術)은 죽어도 배우지 않을 겁니다.

허죽은 말을 마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배우기 싫으냐?

그 노인이 두 손을 휘두르자 두 소매가 앞으로 날아가 허죽의 어깨에 얹혀졌다.

허죽은 어깨가 매우 무겁다고 느꼈고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두 무릎에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허죽은 말했다.

날 때려 죽인다 해도 배우지 않겠소.

그 사람은 하, 하, 웃더니 반공(半空)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가 쓰고 있던 네모난 모자는 천장으로 날아가고 우측 발은 지붕 기둥에 갖다댔다.

그의 몸은 거꾸로 내려왔다. 그의 머리통과 허죽의 머리통이 서로 마주쳤다.

허죽이 놀라 말했다.

당신 뭐하는거요?

그를 떨어뜨리려고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머리통은 마치 허죽의 머리통에 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허죽은 당황한 나머지 두 손을 들어 그를 떨어뜨리려고 했다. 왼손으로는 그를 밀고 오른손은 잡아당겼다. 하지만 한 손으로 밀려고 하자 그 자신의 팔이 마치 솜처럼 힘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초조했다.

"저 사람의 사법(邪法)을 당한 이후 무공을 못 쓰게 됐을 뿐만 아니라 이젠 밥먹고 옷 입을 기운도 없게 됐다. 이제 힘도 못 쓰는 병신이 됐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지?"

겁을 집어먹고 한숨을 쉬자 갑자기 백회혈(百會穴)을 따라 뜨거운 기운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게 됐다.

그는 생각했다.

"큰일났다. 이젠 내 목숨도 끝이구나!"

그는 단지 머리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더니 머리통이 깨어질 것만 같았다. 그 열기는 자꾸 몸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 후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잠시 후에는 몸이 가벼워지더니 마치 구름 위를 날아 다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몸이 차가와졌다. 마치 깊은 바닷물 속에서 물고기들과 놀고 있는 것 같았다.

초조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오더니 빗물이 그의 몸에 떨어졌다. 빗물은 이상하게도 따스했다.

그의 머리는 점차 맑아졌다.

눈을 뜨니 그 노인의 몸과 얼굴엔 온통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목, 피부에 숨통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땀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허죽은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고 노인이 자기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의 머리는 붙어 있지 않았다.

허죽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당신.....

허죽은 "당신" 한 마디만 하고 놀랐다. 그 노인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하얀 미남형의 얼굴에는 어느 새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나 있었다. 많고 짙던 검은색 모발들은 거의 다 빠졌으며, 조금 남아 있는 모발도 백발로 변해 있었다. 허죽은 생각했다.

"내가 몇 년 동안 기절했었지? 삼십 년? 오십 년? 이 사람이 어째서 수십 년이나 늙었을까?"

눈앞의 노인은 백 이십 세, 적어도 백 세는 돼 보였다.

그 노인은 눈을 슬그머니 감고 웃으면서 말했다.

대공(大功)이 성공했다! 넌 자질이 풍부해서 내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다. 이 벽을 한 번 힘껏 쳐봐라!

허죽은 무슨 영문인 줄 몰라 노인의 말대로 벽을 힘껏 치니까, 와지직, 하며 벽이 반 조각이나 부서졌다. 그가 평소에 힘껏 열 번 치는 것보다 더 무서운 힘이었다.

허죽은 놀라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요?

노인은 안면에 미소를 짓고 기뻐하며 얘기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허죽이 말했다.

내가 갑자기 왜 이렇게 강해졌지요?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넌 본문의 장법(掌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발휘한 내력은 일 할도 안 돼. 내가 칠십여 년 동안 고생 끝에 완성한 무공이다.

허죽은 벌떡 일어나며 뭔가 잘못 됐다는 듯 물었다.

칠십여 년 동안 무공을 연마했다고요?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아직까지 아무것도 모르겠느냐? 정말 모르겠어?

허죽은 노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략 알고 있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이라 얼떨떨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떠듬떠듬 말했다.

선배님께서 신공(神功)을..... 신공을 저에게 전수했군요?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사부라 부르지 않겠느냐?

허죽은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소승은 소림파의 제자입니다. 다른 파에 가입할 수가 없습니다.

너의 몸속엔 이제 소림파의 무공은 전혀 없다. 그런데 무슨 소림파 제자냐? 너의 몸 속엔 소요파(逍遙派) 칠십여 년의 신공이 들어 있다. 어째서 본 파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이냐?

허죽은 소요파라는 이름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멍하니 말했다.

소요파?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천하의 정의를 위하고, 육기(六氣)의 논쟁을 막고, 끝없이 유랑하는 것이 바로 소요이다. 자 한 번 뛰어 봐라!

허죽은 의심하듯 두 무릎을 구부리고 다리에 힘을 주어 위로 천천히 뛰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아팠다. 눈이 번쩍 부시더니 그의 반신이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의 몸이 계속 올라갔다. 그의 몸이 계속 올라가자 그는 두 손으로 기둥을 잡았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자 몇 번을 더 뛰고서야 겨우 설 수 있었다.

이렇게 굉장한 경공은 처음이었다. 그는 기쁨보다는 겁을 집어 먹었다.

노인이 말했다.

어때?

허죽이 말했다.

내가 마도(魔道)에 빠졌군요?

노인이 말했다.

조용히 앉아서 내 말을 들어 봐라. 시간이 없어서 요점만 말하겠다. 네가 날 사부로 모시지 않고 파를 고치기 싫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하지만 부탁이 있다. 날 위해 일 좀 해주기 바란다. 승낙할 수 있겠느냐?

허죽은 남을 돕는 것을 좋아했다. 불가에선 사람이 곤란에 빠지면 최선을 다해 도우라고 했다.

허죽이 대답했다.

선배님의 명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나서 노인의 무공이 요사스런 무공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 해내고 말았다.

하지만 선배님께서 소승에게 나쁜 일을 하시라면 그 명령은 따르지 않겠습니다.

노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엇이 나쁜 짓이지?

허죽이 말했다.

소승은 불문 제자입니다. 사람을 해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전문적으로 사람은 해치고,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고 하자. 그 자를 죽이라고 명령하면 승낙하겠느냐?

허죽이 말했다.

소승이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을 선해지도록 타이르겠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개선의 여지가 없다면?

허죽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악당을 해치는 것은 본래 저의 의무입니다. 단지 소승의 능력이 천박하여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승낙하겠단 말이냐?

허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승낙하겠습니다.

노인은 기뻐하며 말했다.

좋아! 매우 좋아! 넌 어떤 한 인간을 죽여야 돼. 아주 나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바로 나의 제자 정춘추이다. 무림에선 성숙노괴(星宿老怪)라 부르고 있다.

허죽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그는 전에 성숙노괴가 아무 이유 없이 한 번에 열 명의 마부를 살해하는 것을 봤었다. 정말 나쁜 자였다. 사백조 현난 대사도 그의 사술(邪術) 때문에 무공을 못 쓰게 됐다. 허죽은 현난의 말이 생각났다.

"성숙노괴를 죽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공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의 무공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허죽은 노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눈빛을 보자 "너의 무공으로는....."이란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 노인이 말했다.

현재 너의 보잘것없는 무공은 이미 성숙노괴의 무공과 맞먹는다. 하지만 그를 해치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나에게 좋은 계획이 있다.

허죽이 말했다.

소승은 전에 설모화 시주에게 성숙해 정춘추의 악행(惡行)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에게 살해당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세상에 살아 계셨군요. 정말 잘 됐습니다.

노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역도(逆徒)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키고 날 깊은 골짜기로 밀어 떨어뜨렸다. 그때 명이 길어서 살아 남았지. 나의 큰 제자 소성하가 거짓으로 벙어리인척하여 역도를 속이고 날 보살펴 줬다. 그래서 삼십 년을 더 살았다. 소성하의 자질도 괜찮은 편인데 단지 갈림길로 들어서서 마음이 분사됐다. 그는 바둑, 그림, 서적등 쓸데없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나의 최고 무공을 아무리 가르쳐 줘도 배우지를 못하고 있다. 삼십 년 동안 난 똑똑하고 노력하는 제자를 찾았다. 그에게 나의 무공을 전부 전수한 뒤 정춘추를 죽이라고 보내려 했다. 하지만 운이 나쁜지 총명한 제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새끼 호랑이를 키우게 된거나 마찬가지다. 난 나이가 들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해서 일부러 진롱을 만들어 놓고 유능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에게 기회가 온 것 같아서 널 제자로 삼았다. 틀림없이 총명준수한 청년일거다.

허죽은 그가 총명준수(聰明俊秀)라 말하자 자신이 총명하지 못한 것같이 느껴졌다. 준수라는 두 글자는 더욱 그랬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세상에는 뛰어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밖에도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단씨라는 공자입니다. 그들을 만나 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난 북명신공(北冥神功)을 칠십여 년 동안 연마한 뒤, 모두 너의 몸속에 집어 넣었는데 어떻게 또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겠느냐?

허죽은 놀라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정말로 저에게 모든 내공을 전수하셨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너에게 복이 올지 화(禍)가 올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무공이 높다고 꼭 복은 아니다. 세상에서 무공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런 걱정과 아무런 경쟁이 없으니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나도 무공을 배우지 않고 가야금, 바둑, 그림만 배웠더라면 평생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노인은 말하면서 한숨을 쉬고 머리를 들었다. 허죽이 부딪쳐서 뚫어 놓은 지붕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 옛일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춘추는 내가 그의 손에 정말로 죽은 줄 알고 나쁜 일들을 하고 있다. 여기 한 폭의 그림이 있는데 옛날 내가 대리국 무량산을 그린 그림이다. 내가 숨겨 둔 무학(武學) 서적들을 찾아서 거기 써 있는 대로 무공을 연마하면 너의 무공이 정춘추와 비슷해질 것이다. 단 너의 자질이 그리 좋지 않아 본문의 무공을 배우려면 아마 힘이 좀 들거다. 그러니 무량산 동굴에 있는 여자의 도움을 받아라. 그녀는 추한 얼굴을 보고 승낙하지 않을 것이나 나의 체면을 봐서 가르쳐 달라면.....컥..... 컥.....

여기까지 말하고 노인은 계속 기침을 했다. 숨쉬기가 곤란한 것 같았다. 노인은 가슴속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내 허죽의 손에 쥐어 줬다.

허죽은 부담되는 듯 말했다.

소승은 아직 무공을 완전히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사부님의 명을 받고 서신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절에 보고하러 가야 합니다. 앞으로 저의 모든 행동은 사부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본사의 방장(方丈)과 업사(業師)의 승낙이 없으면 선배님의 분부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노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늘의 뜻이 그렇다면 악당의 행패가 더욱 악독해지겠군..... 너..... 너.....

두 마디의 "너"를 말하더니 갑자기 온몸을 떨며 두 손을 땅에 짚었다. 굉장히 허약해진 것 같았다.

허죽은 매우 놀라 그를 부축하고 말았다.

선배님, 왜 그러세요?

노인이 말했다.

내가 칠십여 년 동안 연마한 내공을 너에게 모두 전수해서 난 이제 죽게 됐다. 얘야, 끝까지 날 "사부"라 한 번 불러 주지 않겠니?

이 말을 하고 숨을 헐떡였다.

허죽은 노인의 눈빛에서 가련한 모습이 보이자 마음이 약해져서 사부라는 두 글자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왼손에서 한 개의 보석반지를 빼더니 허죽의 손가락에 끼워 주려 했다. 하지만 그는 힘이 다 빠져 허죽의 팔도 잡질 못했다. 허죽이 또 한 번 소리쳤다.

사부님!

그는 반지를 자기 손에 꼈다.

노인이 말했다.

좋아, 넌 나의 세 번째 제자다. 소성하를 만나거든 그를 큰 사형이라 불러라. 너의 성이 뭐냐?

허죽이 말했다.

전 정말 모릅니다.

노인이 말했다.

얼굴이 추해서 곤란한 일이 많았겠다. 하지만 넌 소요파의 장문인(掌門人)이니 그 여자가 너의 명령을 거역하지는 않을거다. 좋아, 매우 좋아!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낮아졌다. 두 번째로 "좋아"하고 말할 때는 소리가 적어서 잘 들리지가 않았다. 갑자기 하, 하, 하, 몇 번 크게 웃더니 몸을 앞으로 돌진하여 머리를 땅에 부딪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허죽은 노인의 몸을 일으켜 숨소리를 들어 봤지만 이미 죽고 말았다. 그는 급히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보살님, 노선생이 서방 극락 세계로 가게 해 주십시오.

허죽과 노인은 함께 한 시진도 같이 있지 않아 정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허죽은 노인이 연마한 칠십여 년의 무공을 전수받아서 은근히 이 노인이 어느 누구보다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다시 말해서 이 노인의 일부분이 자신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슬퍼져서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 울던 그는 바닥에 엎드려 노인에게 절을 몇 번하고 말했다.

노선배님, 당신에게 사부라고 부른 것은 거짓이었으니 믿지 마십시오. 절 나쁘다고 욕하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말을 끝내고 몸을 돌려 벽에 나 있는 틈으로 나와, 두 개의 벽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왔다.

32. 스스로 노니는데 그 누가 간섭하랴 (且自逍遙沒誰管)

허죽은 나무로 만든 집에서 나오자 깜짝 놀랐다. 넓은 빈터에는 소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었다. 밖에서 큰 소란이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이 소나무들은 그가 정신을 잃었을 때 쓰러진 듯하였다. 빈터의 가운데에서 불기둥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불기둥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서 있었다. 농아 노인 소성하는 오른쪽에 있었고, 소림승, 강광릉을 비롯한 함곡팔우 등 몇 명의 사람들은 그의 등뒤에 서 있었다.

성숙 노괴는 왼쪽에 서 있었는데 무쇠 탈을 쓴 유탄지와 성숙 파의 제자들은 성숙노괴의 뒤에 서 있었다.

모용복과 왕어언, 단예, 구마지, 단연경, 남해악신 등은 드문드문 먼 곳에 서서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성하와 정춘추 두 사람은 한창 장력을 돋구어 불기둥을 상대방에게 밀어내고 있었다. 상대방을 태우려는 것이었다.

불기둥이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아 정춘추가 이미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은 중앙에 불기둥에 쏠려 있었다. 그러느라고 허죽이 집안에서 나오는 것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왕어언의 관심은 그의 고종 오라버니 모용복에게 쏠려 있었고, 단예는 그저 왕어언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허죽은 멀리서 여러 사람의 등뒤를 돌아 오른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혜경대사의 뒤에 섰다. 이때 불기둥은 점점 더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소성하의 옷자락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정춘추는 태연자약하게 웃고 이야기하며 소성하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옷자락을 가볍게 휘두르고 있었는데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성숙파의 제자들이 칭송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커다랗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성숙노선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라도 가볍게 들 수있으며 신공이 절세적이시다. 오늘 너희들은 진정한 무공이란 무엇인지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그 누구든 승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중에 한 사람 한 사람 나서서 성숙노선의 신공이 어떠한지 맛보아도 좋다.

당신네들이 그분에게 겁을 집어 먹었다면 함께 덤벼도 상관없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숙노선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 누가 감히 버마재비가 수레 앞을 막아서는 어리석음을 저질러 보이겠느냐? 죽으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

별안간 불길이 소성하를 향해 뻗어나갔다. 타는 냄새가 나는 가운데 소성하의 기다란 수염이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소성하는 애를 써서 항거했다. 그제서야 불기둥을 약간 밀어 젖힐 수 있었다. 그러나 화염은 그의 몸에서 불과 두자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을 뿐이었고 여전히 소성하를 향해 뻗쳐 오곤 하는데 그 모양은 그야말로 커다란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그를 물어 뜯으려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쾅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곧이어 둥둥,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징과 북을 치는 소리였다.

원래 성숙 파의 제자들은 품속에 징, 북, 꽹가리, 동발, 호적, 나발 따위를 숨기고 있었는데 이때 꺼내서 입으로 불고 손으로 때리며 사부의 위세를 돋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푸른 깃발, 노란 깃발, 붉은 깃발, 자색 깃발을 흔들며 큰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두 사람이 내공을 겨루는 마당에 다른 사람이 옆에서 징을 치고 북을 쳐서 응원하는 일은 무림에서는 몹시 보기 드문 일이었고 우스운 일이었다.

구마지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성숙노괴의 얼굴 가죽은 일찌기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두껍군!

징과 북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는 가운데 한 명의 성숙파 제자가 종이를 한장 꺼내 들더니 목청을 돋우고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넉 자와 여섯 자의 글로 이루어진 한 편의 "공송성숙노선양위중원찬(恭頌聖宿老仙揚威中原讚)"이라는 것으로서 성숙노괴가 중원에서 위세를 크게 떨치는 것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그 누가 할 일 없는 선비에게 그같이 아부하는 내용의 문장을 쓰게 했는지는 모르나 그 내용은 그야말로 아첨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드러내 주고 있었다.

글 읽는 소리는 우렁차 징소리 북소리와 함께 높다랗게 울려퍼졌다.

징소리 북소리 그리고 칭송하는 함성 속에서 불기둥은 더욱 왕성해져 다시 앞으로 반 자 정도 뻗어나갔다.

별안간 발걸음 소리가 나며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달려와 소성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바로 현난 등을 산 위까지 떠메고 올라온 벙어리요 귀머거리인 사내들로서 모두 소성하의 문하 제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때 정춘추가 장력을 돋구고 밀어붙이자 불기둥은 이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의 몸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대뜸 찍찍,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스무 명의 살갗과 살이 타 버렸다.

이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그대로 서 있었으며 전신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꼼짝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우기 그들은 입으로 말을 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에 그 모습은 더욱 비참해 보였다.

이렇게 되자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달라지고 말았다. 왕어언과 단예의 시선마저 그들을 향해 옮겨졌다. 거센 불기둥은 거센 화염을 내뿜으며 이십여 명이나 되는 귀머거리와 벙어리 사내들을 완전히 휩싸고 말았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하면 못 써요!

그는 오른손을 뻗쳐내어 육맥신검으로 정춘추를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신검을 돋우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전신에 충만한 내력은 그저 몸안에서 돌고 돌 뿐 손가락에서 뻗쳐나가지 않았다.

그는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부르짖었다.

모용 공자! 빨리 손을 써서 제지하도록 하십시오!

모용복은 대답했다.

당신과 같은 뛰어난 분이 계시는데 어떻게 소제가 알량한 재주를 펼칠 수 있겠소? 당신의 육맥신검을 다시 한 번 펼쳐보도록 하시구려.

단연경은 늦게 왔기 때문에 단예가 육맥신검을 펼치는 광경을 보지 못했었다. 모용복의 말을 듣고 속으로 흠칫해서 곁눈질로 단예를 바라보았다.

단예는 오른손 손가락을 들고 허공을 찍고 긋는 시늉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손가락을 찌르거나 긋는 행동은 매우 그럴 듯 했으나 내력은 쏟아지지 않았다. 단연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게 무슨 육맥신검이야? 알고 보니 저 녀석은 허장성세로 남을 속이고 있군! 우리 단씨 집안에 육맥신검이라는 기공이 있지는 하지만 언제 그 육맥신검을 연성한 사람이 있었던가?"

그러나 모용복은 단예가 손을 쓰지 않는 것을 보고 단예가 손을 쓸 뜻이 없는 줄로 알았다.

다시 한동안 시간이 흘러 이십여 명이나 되는 벙어리와 귀 머거리들은 불기둥에 휩싸여 태반이 죽게 되었고 나머지 몇 남지 않은 사람들도 다투어 픽픽 쓰러졌다.

징 소리와 북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정춘추는 소맷자락을 다시 한 번 휘 둘렀다. 불기둥은 재차 소성하 쪽으로 덮쳐갔다.

설모화는 부르짖었다.

나의 사부를 해치지 마시오!

그는 몸을 날려 불기둥 앞을 막아서려고 했다. 소성하는 손을 휘저어 그를 밀어내고 말했다.

헛되이 죽어선 안된다!

그는 왼손에 남은 공력을 모아서는 불기둥을 향해 후려쳤다. 이때 그의 내력은 거의 다 소모된 상태였다. 그 일 장은 불기둥을 잠시 막아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허죽은 소성하의 처지가 매우 위태로운 것을 보고 더 두고 볼 수 없어서 앞으로 달려나가 그의 등을 붙잡고 부르짖었다.

쓸데없는 죽음은 무익할 뿐이니 빨리 피하십시오!

바로 이때 소성하는 손을 휘저어 바깥으로 일 장을 밀어내고 있는 상태였다. 본래 그의 일 장에 실린 힘은 지극히 약하여 어떤 효과를 거두리라고는 애당초부터 생각지 못하던 터였으며 그저 죽을 때까지 싸워 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등에 갑자기 웅후하기 이를데 없는 내력이 스며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그가 앞으로 내민 일 장은 대뜸 조금 전에 휘두른 일 장보다 몇 배나 강해지게 되었다.

순간 휙,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불기둥은 뒤로 물러났으며 곧장 정춘추의 몸에 가 달라붙게 되었고 그 기세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성숙파의 뭇 제자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삽시간에 징과 북 소리가 어지러워졌고 꽹과리와 동발, 그리고 나팔 등은 땅바닥에 떨어져 마구 뒹굴었다.

성숙파는 중원에 위세를 크게 떨쳤으며 우리 은사께서는 당금 천하에서 무적이시다!

이 같은 칭송가운데 비명 소리가 섞이게 되었다.

아이구! 엄마야!

야단났다! 성숙파에서는 목숨을 건지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에 다시 와서 중원에 위세를 떨치도록 하자!

이와 같은 부르짖음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정춘추는 깜짝 놀랐다. 동시에 정춘추는 상대방의 일 장에 실린 내력이 원숙하고 노련한 점에 있어서 자기의 사형 소성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을 느낄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 내력은 본파의 무공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의 사부의 귀신이 묵은 빚을 갚으려고 자기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이 생각하자 심신이 어지러워졌고 내력을 돋울래야 돋울 수가 없었다.

이때 옷자락과 수염, 그리고 머리카락에 불이 붙게 되었다. 정춘추는 황급히 부르짖었다.

무쇠탈의 제자야! 빨리 손을 써라!

유탄지는 즉시 손을 휘둘러 불기둥을 밀어젖혔다. 그러나 찍찍찍, 하는 소리가 났다. 불기둥은 그의 장풍에 서려 있는 차갑기 이를데 없는 기운을 맞아 삽시간에 꺼져들었고 푸른 연기도 빠르게 사라졌다. 땅바닥에는 몇 토막의 타다 남은 숯덩이가 떨어졌다.

정춘추는 수염과 눈썹을 모두 태우고 말았고 이곳 저곳 옷자락에도 구멍이 뚫어져 그야말로 낭패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사부의 영혼이 나타날까봐 두려워 더 이상 이곳에서 날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자!

정춘추는 흔들 하는 순간 이미 칠팔 장 밖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성숙파 제자들은 죽어라 하고 그 뒤를 따라 도망쳤다.

소성하는 이때 허죽의 손가락에 있는 사부의 보석반지를 보고 어떻게 된 노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슬픔과 기쁨을 느꼈다.

소성하는 사부의 안위가 걱정되어 현난과 모용복에게 인사치레의 말을 몇 마디 하고는 허죽의 손을 잡았다.

젊은 스님, 그대는 나를 따라 들어갑시다.

허죽은 현난을 바라보았다. 현난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현난이 말했다.

소 선배님은 무림의 고인이시니 어떤 분부가 있으시면 마땅히 받들어야 하느니라.

허죽은 대답했다.

네.

그는 소성하를 따라 그가 뚫은 나무집 안으로 들어 갔다. 소성하는 한 조각의 나무 판대기를 집어 그 구멍을 막았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강호의 견문이 넓었다. 소성하의 그와 같은 거동은 다른 사람이 다가와 엿보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을 명백히 한 것임을 알아보고 누구도 이 일에 상관하려 하지 않았다.

견문이 넓지 못한 사람은 단예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정신을 왕어언에게만 쏟고 있어서 소성하와 허죽이 집안으로 들어간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소성하와 허죽은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곳의 판자벽을 지나게 되었다.

한명의 노인이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소성하는 손을 뻗쳐 보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된 상태였다.

이 일은 이미 그가 십중팔구 짐작했던 일이었으나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소성하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몇 번 절을 올리고 흐느꼈다.

사부님, 사부님! 사부님은 끝내 저를 버리고 가셨군요.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노인은 정말 소 선배님의 사부였구나."

소성하는 눈물을 거두고 일어나더니 사부의 시체를 일으켜 세워 판자대기에 단정한 모습으로 기대어 앉도록 했다.

곧이어 허죽을 부축해서 역시 벽에 기대어 앉도록 했으며 그 노인의 시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했다.

허죽은 의아했다.

"나와 노선생의 시체를 나란히 앉힌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설마…… 설마…… 내가 그의 사부를 모시고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몸에 소름이 끼쳤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감히 일으킬 수 없었다.

소성하는 불에 탄 옷자락을 가다듬더니 갑자기 허죽을 향해 꿇어 엎드려 큰절을 했다.

소요파의 제자가 본파의 신인 장문에게 인사드리옵니다.

이렇게 되자 허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사람은 정말 미쳤다. 이 사람은 정말 미쳤어!"

그는 황급히 엎드려 반례하고 물었다.

노선배님께서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은 소승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소성하는 정색했다.

사제, 그대는 우리 사부의 후계 제자이고 또한 본파의 장문인일세. 내 비록 사형이지만 그대에게 큰절을 올리지 않을 수 없네.

허죽이 말을 더듬거렸다.

이건…… 이건……

이때서야 그는 소성하가 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처지가 더욱 겸연쩍어졌다.

소성하는 입을 열었다.

사제, 이 한 목숨은 그대가 구한 것이고 사부님의 평생 소원도 그대가 완성시킨 셈이니 나로부터 큰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수있네. 사부님은 그대에게 아홉 번 큰절을 하라고 하셨을텐데. 그대는 아홉 번 절을 했는가?

허죽은 대답했다.

절은 했지요 하지만 당시 저는 사부에게 드리는 인사인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소림파의 제자이니 다른 파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소성하는 그 말을 받았다.

사부님께서는 물론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셨다네. 그 어르신께서는 틀림없이 그대가 원래 가지고 있던 무공을 해소시키고 그대에게 다시 본파의 무공을 전수했을 것이네. 사부님께서는 이미 필생의 공력을 그대에게 전수해 주었겠지?

허죽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소성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본파 장문인의 표기는 바로 그 보석반지일세. 사부님께서 자기의 손에서 뽑아 자네의 손가락에 끼워 주신 것이 아닌가?

허죽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이것이 장문인의 표기인 줄은 몰랐습니다.

소성하는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아 입을 열었다.

사제, 그대는 커다란 복을 얻었네. 나와 정춘추는 그 보석반지를 수십 년 전부터 손가락에 끼워 보고 싶었으나 시종 손에 넣을 수 없었다네. 그런데 그대는 한시진 안에 사부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큰 행운인가?

허죽은 재빨리 반지를 뽑아 내밀었다.

선배님이 가져가도록 하십시오. 이 반지는 소승에겐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소성하는 엄숙히 말했다.

사제, 그대는 사부님의 무거운 부탁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어찌 그 책임을 피하려 하는가? 사부님께서 반지를 그대에게 주실 때 정춘추라는 녀석을 없애달라고 당부하시지 않았는가?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소승은 무공이 얕은데 어찌 그와 같은 중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소성하는 한숨을 내쉬며 보석반지를 허죽의 손가락에 다시 끼워 주었다.

사제,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그대는 잘모를테니 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지. 본파는 소요파라고 하며, 전해 내려오는 규칙에 의하면 장문인이 반드시 큰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문하제자 가운데 무공이 가장 고강한 사람이 바로 장문인이 되어야 한다는 규칙이네.

허죽은 대답했다.

네, 그렇겠지요. 하지만 소승의 무공은 형편없습니다.

소성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설명했다.

우리 사조께서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네. 사부님은 둘째인데 무공이 우리의 사백부나 사숙보다 뛰어나시기 때문에 우리 사부님이 장문인이 되었네. 그후 사부님께서는 나와 정춘추라는 두 사람을 거두어들이게 되셨는데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규칙을 정해 주셨네. 즉 사부님께서 배운 것은 무척 잡다하셨는데 누구든 장문인이 되고자 한다면 여러 가지 재간을 모두 겨루어야 한다는 것일세. 비단 무공을 겨룰 뿐만 아니라 거문고와 바둑과 서예와 그림의 재주까지도 겨루어야 한다는 것일세. 정춘추는 여러 잡다한 학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까 장문인이 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갑자기 암산을 하여 사부님을 깊은 골짜기로 쳐서 떨어뜨렸으며 또 나를 때려 중상을 입혔다네.

허죽은 설모화의 지하실에서 설모화로부터 그 사정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일이 자기와 직접적으로 관계되자 속으로 야단났다고 조바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춘추는 그대를 죽이지 않았군요.

소성하는 대꾸했다.

그대는 그에게 한 가닥 정이 있어 나의 목숨을 남겨 주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오해일세. 첫째, 그는 내가 일시 펼쳐놓은 오행팔괘와 기문둔갑의 진을 깨뜨릴 수 없었다네. 그리고 둘째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지. "정춘추, 네가 사부님을 암살하고 또 무공에 있어서 나보다 뛰어나지만 소요파의 심후한 무공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북명신공이라는 책을 너는 보고싶지 않느냐? 능파미보라는 경신법은 배우지 않겠느냐? 천산육양장(天山六陽掌)과 소요절매수(逍遙折梅手) 그리고 소무상공(小無相功)을 배우지 않겠느냐?"

그 무공은 본파의 최상승 무공이라네. 우리 사부님마저도 잡다한 학문을 배우기에 바빠 많은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네. 정춘추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기뻐서 전신을 부르르 떨며 말했지.

"네가 그와 같은 무공비급을 꺼내 준다면 오늘 너의 목숨을 용서해주마."

그래서 나는 말했네.

"나에게 어찌 그와 같은 비급이 있겠느냐? 다만 사부님께서 그 비급을 감춰둔 곳을 난 알고 있지. 네가 나를 죽이려면 얼마든지 손을 쓰도록 해라."

그러자 정춘추는 아는 척하며 말했다네.

"비급이 성숙해 부근에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맞아, 정말 성숙해 부근에 있다. 그만한 재간이 있다면 얼마든지 네 스스로 찾아보도록 해라."

그러자 그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성숙해는 주위가 수백 리나 되니 조그만 몇권의 비급을 숨긴 곳을 찾기는 어렵다고 여겼는지 다음과 같이 말을 하더군.

"좋아. 내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러나 이제부터 너는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 본파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아야 한다."

그가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그는 그저 나를 살려 두어 나중에 고문을 가해 그곳을 알아내겠다는 생각이었지. 그렇지 않고 나를 죽이게 된다면 그 비급의 소재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지 않겠나? 기실 그 무공비급들은 결코 성숙해에 있지 않았네. 사백부님과 사부님 그리고 사숙부님 세 사람의 수중에 분산되어 있었네. 정춘추는 성숙해에 거처를 정하고 샅샅이 살펴 보았지만 숨긴 비급을 찾아내지 못했네. 그리하여 나를 찾아와 귀찮게 굴려 했지만 모두 내가 토목기관과 기문둔갑 등의 술법을 써서 피해 버렸다네. 그런데 이번에 그는 다시 나에게 물어 보려고 왔지만 가망이 없고 또 내가 맹세를 깨뜨린 것을 보고 나를 죽여 분을 풀려고 했네.

다행히도 선배님께서는……

그대는 본파의 장문인인데 어찌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는가? 마땅히 사형이라고 불러야하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이야말로 진정 골치 아프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언제쯤 가서야 이 일을 제대로 해명하지?"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의 사형인지 아닌지 잠시 덮어 두기로 합시다. 그러나 설사 진짜 사형이라 하더라도 선배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소성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일리가 있군. 그런데 다행히 내가 어쨌다는 것인가?

허죽은 대답했다.

다행스럽게도 선배님께서는 고통을 참으며 힘을 모았다가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벼락같이 기습을 가해 성숙노괴로 하여금 크게 패하여 물러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소성하는 연신 손을 내저었다.

사제, 분명히 그대가 사존께서 전수하신 신공을 나에게 주입하여 나를 도왔기 때문에 나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그대는 어째서 또 겸손하게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가? 그대와 나는 동문 사형제이고 장문인의 지위가 이미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나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바로 그대가 아닌가? 나는 어떻게 되었든간에 그대의 장문 자리를 엿보지 않을 사람일세. 그대는 이후 그와 같은 섭섭한 생각은 말게.

허죽은 이상히 생각하고 말했다.

제가 언제 그대를 도왔다는 말씀입니까?

소성하는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어쩌면 그대가 무심코 도운 것인지도 모르지. 그대의 손바닥이 나의 등을 거머잡자 그대의 신공이 나에게 전해져 나로 하여금 패하기 직전에서 승리를 거둘수 있게했다네.

허죽은 말했다.

아, 알고 보니 그랬었군요? 그러나 그것은 그대의 사부가 구한 것이지 제가 구한 것은 아닙니다.

소성하는 말했다.

나는 사존께서 그대의 손을 빌어 나를 구했다고 말하는거네. 이 점은 그래도 인정하겠지?

허죽은 더 부인할래야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입니다.

소성하는 다시 말했다.

조금 전 그대가 신공을 벼락같이 떨쳐내어 정춘추의 의표를 찌르고 일격을 가함으로써 그를 놀라 도망가도록 했네 만약 정말 서로 싸우게 되었다면 그대와 내가 힘을 합친다 해도 여전히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을거네. 이 삼십여 년간 여러 모로 방법을 강구했지만 시종 사부의 무공을 이어받을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네. 그 전인(傳人)으로 말하면 이해력이 기이하도록 뛰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준수한 미소년이어야 했단 말일세.

허죽은 미소년이라는 말을 듣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무공을 수련함에 있어서 모습이 잘나고 못난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의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거듭 전인의 모습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소성하는 그를 흘낏 쳐다보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죽은 말했다.

소승의 얼굴 모습은 추악하여 결코 존사의 전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노선매님, 그대는 저 말고 다른 준수하고 헌칠한 미소년을 찾아보도록 하십시오. 그렇게하면 제가 존사의 신공을 그에게 건네 주도록 하겠습니다.

소성하는 어리둥절해졌다.

"본파의 신공은 심맥(心脈)의 기혈과 이어져 있네. 공력이 남아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고 공력이 소실된다면 사람도 죽고 만다네. 사부님께서 그대에게 신공을 전수한 이후 즉시 돌아가신 것을 자네도 보았겠지?

이 일을 어떡하면 좋지요? 제가 존사와 선배님의 큰일을 그르쳤군요?

소성하는 말했다.

사제, 이것은 사제가 짊어져야 할 책임일세. 사부님께서 그와 같은 바둑판을 만들어 놓은 뜻은 찾아온 사람의 이해력을 고찰하려는데 있었네. 그 진롱은 실로 너무나 어려워서 내가 수십 년간 고생고생 하며 생각해 보았지만 시종 풀 수가 없었는데, 오직 사제만이 바둑판의 문제를 풀 수있었으니 이해력이 기이하도록 뛰어나다고 할 수 있네.

허죽은 쓸쓸히 웃었다.

그 진롱을 제 스스로 푼 것이 아닙니다.

그는 즉시 사백조이신 현난이 어떻게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몰래 가르쳐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소성하는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현난 대사의 그때 상태를 생각해 보면 그분은 이미 정춘추의 독수에 의해 몸에 지녔던 신공을 깡그리 상실했으니 전음입밀의 재간을 펼칠 수 있다고는 보이지 않던걸?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나 소림파는 천파무학의 정통이 아닌가? 현난 대사가 어쩌면 일부러 당한듯이 가장했는지도 모르지. 그것이야 말로 나같은 우물안 개구리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일세. 사제, 내가 사람을 시켜 도처로 명첩을 보내 천하 바둑 고수들을 초청하여 이 진롱을 풀게 한 것은,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와같은 바둑의 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참여하기 때문일세. 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고 얼굴 모습이……이건……너무 준수하지 못하다고 느낀다거나 또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청하지 말라고 분부를 내렸다네. 고소 모용공자는 얼굴이 관옥과 같고 천하의 무공에 대해서 정통하지 않은 무공이 없는지라 원래는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바둑판의 문제를 풀지 못했네.

허죽은 그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모용 공자는 저보다 백 배나 더 낫습니다. 그리고 대리 단 공자만 하더라도 풍모가 의젓하고 헌칠한 공자가 아니겠습니까?”

소성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 일은 더 들먹이지 않도록 하세. 나는 평소부터 대리 진남왕 단정순이 일양지라는 신기에 정통하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네. 그리고 더욱 높이 사는 것은 그가 풍채가 뛰어난 남아이기에 강호의 처녀나 중년 여인들은 그를 보기만 하면 넋을 빼앗기게 되고 자기고 모르게 정에 빠진다는 사실일세. 그리하여 나는 몇 명의 제자를 대리로 보내 초청했으나, 그는 대리에 있지 않았으며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네. 그 결과 한 멍청한 그의 아들이 단정순 대신 오게 된 것이지.”

허죽은 빙그레 웃었다. “그 단 공자께서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왕 소저만 바라보고 있더군요.”

소성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정말 애석한 노릇이야. 단정순은 그야말로 곳곳에서 여자를 건드렸고 그래서 무림에서 제일 가는 풍류남아(風流男兒)라고 일컬어지는데, 그 아들은 전혀 그를 닮지 않았으며 그저 못나기 이를데 없어서 애비의 얼굴에 흙칠을 하고 있더군! 그는 그저 왕 소저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만 왕 소저는 그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니 정말 옆에서 보기에도 딱하더군!”

허죽은 물었다.

“단 공자가 그토록 한 여인에게 깊은 정을 준다는 것은 풍류남아가 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선배님께서는 어째서 애석하다고 하십니까?”

소성하는 대답했다.

“그는 총명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마음속은 우둔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야. 한 여인을 상대로 손톱만큼의 수단도 쓸 줄 모르니.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네.”

허죽은 그저 대답했다.

“네.”

그는 속으로 몰래 기뻐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미소년을 한 사람 청해다가 여인을 상대코자 했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든 결코 이 못난 화상에게 그와 같은 일을 떠맡기지는 않겠지.’

소성하는 그에게 물었다.

“사제, 사부님께서는 그대에게 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지시하지 않던가? 혹은 그대에게 어떤 지도 같은 것을 주지 않았는가?”

허죽은 더듬거렸다.

“그건……그건……”

소성하는 설명을 했다.

“그대는 장문인이네. 그대가 만약 나에게 무엇을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즉시 나를 쳐 죽일 수 있네. 그러나 내가 그대에게 무슨 일을 묻는다면 그대는 대답하고 싶으면 대답하는 것이고 대답하기 싫으면 나에게 쓸데없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이네.”

소성하가 그와 같이 말하자 허죽은 연신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어찌 선배님에게 오만방자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선배님의 사부님께서는 이것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품속에서 그 두루마리를 꺼내 놓았다. 이때 소성하는 몸을 굽히고 매우 공손한 태도를 취했으며 감히 두 손을 뻗쳐 받지 못하고 다가와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두루마리가 펼쳐지자 두 사람은 어리둥절해 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이 어,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원래 두루마리에 있는 것은 어떤 산천 풍경도 아니었고 지리도형(地理圖形)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궁장(官裝)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허죽은 말했다.

“알고 보니 바깥에 있던 왕 소저군요?”

그러나 그 두루마리의 비단은 누렇게 바래 있었다. 그림의 단청이나 먹물 빛깔도 많이 바랜 것으로 미루어 오래 묵은 옛날 그림이 틀림없었다. 더욱이 왕어언이 태어나기 전에 그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림의 붓놀림은 매우 공을 들인 것 같았고 또한 활발하면서도 매끄러워 그림 속의 인물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왕어언이라는 소녀를 축소하여 그림 속에 집어넣은 것 같았다.

허죽은 찬탄을 금하지 못하고 소성하를 바라보았다.

소성하는 정신없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넋을 빠뜨린 듯했다.

갑자기 소성하는 오른손의 둘째 손가락을 허공에 치켜들더니 그림의 필법을 따라 한 획 한 획 그려보며 탄성을 내지르곤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소성하는 정신을 차리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제, 너무 탓하지 말게나. 나의 못난 습성이 다시 발작을 일으켰네. 나는 사부님의 단청 솜씨를 대하자마자 그만 또 배우고 싶은 생각이 났네. 아, 음식을 많이 먹으면 제대로 삼키지를 못한다고, 나는 무엇이든지 배우려고 해서 끝내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성사시킬 수 없었고 결국 정춘추의 손 아래 그토록 처참한 패배를 당했지.”

그는 재빨리 두루마리를 말아 허죽에게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더 보게 된다면 그 그림의 필법에 빠져들까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는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더니 힘주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조금 전에 본 그림을 뇌리에서 지워 버리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뜨고 말았다.

“사부님게서 이 두루마리를 그대에게 건네 주면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허죽은 대답했다.

“그 분은 지금 저의 무공으로 정춘추를 주살할 수 없으니 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대리국 무량산으로 가서 과거 그 분이 숨겨 두었던 많은 무학의 전적(典藉)을 찾아내어 무공을 익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십중팔구 내 스스로 제대로 배우지 못할 것이니 다른 한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두루마리에 그려진 것은 그분이 옛날 크게 복을 누렸던 곳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유명한 산이나 큰 냇가 또는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어야 하는데 어째서 왕 소저의 초상이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혹시 그 분께서 두루마리를 잘못 주신 것이 아닐까요?”

소성하는 말했다.

“사부님의 일은 다른 사람이 예측하기 어렵다네. 그대는 나중에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일세. 그대는 반드시 사부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무공을 제대로 배워 정춘추를 제거하도록 하게.”

허죽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건……그건……소승은 소림사의 제자이니 즉시 돌아가서 복명(覆命)해야 합니다. 절로 돌아가면 그때부터는 도를 닦고 참선을 해야 하며 부처님에게 예배를 올리고 독경을 해야 하니 다시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소성하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허죽의 앞에 꿇어 엎드려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장문인, 그대가 사부님의 가르침을 받들지 않는다면 그 어르신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허죽 역시 마주 꿇어 엎드려 절을 하며 말했다.

“소승은 이미 불문에 든 몸이라 살생을 한다는 것을 계율을 어기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존사께 정춘추를 제거하겠다고 약속을 드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적절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소림파의 규율은 지극히 엄해 소승은 어떤 일이 있더라고 감히 못된 짓을 마구할 수가 없습니다.”

소성하가 아무리 통곡하고 애걸하며 비유를 들어가며 깨우쳐 주려고 해도 허죽은 막무가내였으며 심지어 위협을 하고 다그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소성하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부의 시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부님, 장문인은 사부님의 유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제자는 어떻게 해 볼 능력이 없어서 사부님을 뒤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몸을 벌떡 솟구쳐서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채 허공에서 곧장 아래로 향하여 떨어졌다. 정수리로 바닥에 깔린 석판을 향해 부딪혀 죽으려고 한 것이다.

허죽은 놀라 부르짖었다.

“안 됩니다!”

그는 즉시 소성하의 몸을 받아 안았다. 이때 허죽의 내력은 웅후하기 이를데 없었고 손발도 민첩하여 옛날과는 크게 달랐다. 단번에 소성하를 안으니 소성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소성하는 부르짖었다.

“그대는 어째서 내가 자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가?”

허죽은 대답했다.

“출가인은 자비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지요.”

소성하는 말했다.

“나는 놔 주게. 나는 더 이상 살 생각이 없네.”

허죽은 말했다.

“놓지 않겠습니다.”

소성하는 물었다.

“그대는 한평생 나를 잡고 놓지 않을 생각인가?”

허죽은 생각해 보니 그 말이 틀리지 않는지라 그의 몸을 다시 바로 잡아서 머리를 위로 하고 발을 아래로 한 채 내려 놓고 말했다.

“좋습니다. 내려 놓도록 하지요. 그러나 자결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소성하는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떠오르는 좋은 생각이 있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에게 자결하지 말라고 했는가? 그렇지 마땅히 장문인의 명령을 받들어야지, 정말 잘 되었군. 장문인, 그대는 끝내 본파의 장문인이 되는 것을 승낙하였구려!”

허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응낙하지 않았소이다. 내가 언제 응낙했습니까?”

소성하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장문인, 그대는 이제 후회해도 소용이 없소이다. 그대는 이미 나에게 명령을 내렸고……나는 이미 그대의 명령을 받아 다시는 자결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총변 선생 소성하가 어떤 사람입니까? 본파 장문인의 말씀을 듣는 외에 그 누가 감히 나에게 호령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소림파의 현난 대사에게 물어보도록 하시구려. 설사 소림파의 현자 방장이라 하더라도 감히 나에게 명하여 이리 해라 저리 해라 하지는 못할 것이외다.”

농아 노인은 강호에서 혁혁한 위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 점은 길을 오는 동안 사백조인 현난 대사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소성하가 감히 그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다고 한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허죽은 입을 열었다.

“저는 감히 그대에게 어떻게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대에게 목숨을 아끼라는 권고를 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또한 호의에서 말씀드린 것이죠.”

소성하는 말했다.

“나는 감히 그대에게 호의인지 악의인지 따져 물을 엄두가 나지 않소이다. 그대가 나에게 죽으라 한다면 나는 즉시 죽겠으며 그대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면 나는 감히 살지 않을 수 없소이다. 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세를 장문인은 가지고 있소. 그대가 만약 우리 장문인이 아니라면 어찌 함부로 나에게 죽여라 살아라 명령할 수 있겠소?”

허죽은 그와 입씨름을 해봤자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조금 전 내 말은 잘못된 것으로 하고 취소하도록 하지요.”

소성하는 그 말을 받았다.

“그대가 나에게 자결할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취소한다면 그것은 나보고 자결하라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명을 받들어 나는 즉시 자결하도록 하죠.”

그의 자결 방법은 매우 특이했다. 다시 몸을 솟구쳐서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채 석판을 향해 곧장 떨어져 내려왔다.

허죽은 다시 그를 꼭 껴안고 말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저는 그대에게 자결하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다시 또 내가 자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구려. 삼가 장문인의 호령을 받들기로 하겠습니다”

허죽은 그의 몸을 바로 세워 놓고는 밍숭밍숭한 머리를 긁적거리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소성하는 총변 선생이라 일컫는 만큼 결코 그것이 터무니없는 별명이 아니었다. 본래 그는 말재주가 좋았다.

삼십 년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시 입술을 놀리게 되자 입술에서 연꽃이 피어날 정도로 능수능란한 말솜씨를 구사할 수 있었다.

허죽은 나이가 젊었고 또 성격이 소박한 편이었다. 거기다가 절 안에서 사형제들과 말씨름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어찌 소성하의 적수가 되겠는가?

허죽은 한참 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선배님, 저는 입씨름으로는 선배님을 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배님이 저에게 귀파의 문하로 개종하라고 하시는 말씀은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소성하는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올 때 대사께서는 그대에게 무슨 말을 분부했소? 현난 대사의 말씀을 그대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허죽은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사백조께서는 저에게……저에게……선배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라고 하셨죠.”

소성하는 매우 득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이다. 현난 대사는 그대에게 나의 말을 들으라고 당부했소이다. 나의 말은 그대가 우리 사부님의 유명을 받들어 본파의 장문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외다. 그러나 그대가 소요파의 장문인이 된 이상 소림파 고승의 말은 이제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외다. 따라서 그대가 만약 현난 대사의 말을 받든다면 그대는 바로 소요파의 장문인이 될 것이고 또 그대가 현난 대사의 말을 쫓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그대는 소요파의 장문인이 되는 것이외다. 왜냐하면 그대가 소요파의 장문인이 되었기 때문에 현난 대사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대가 어찌 사백조의 분부를 듣지 않을 수 있소이까?”

이와 같이 장황스럽게 하는 말을 허죽이 듣기에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옳은 것 같았다. 잠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성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제, 현난 대사와 소림파의 다른 몇 분 화상은 모두 정춘추의 독수에 걸려들고 말았소이다. 만약에 치료를 해주지 않는다면 목숨을 조만간 보전하기 어렵게 될 것이외다. 그런데 당금 세상에 오로지 그대 혼자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소이다. 그들을 구하고 구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그대의 뜻에 달렸소이다.”

허죽은 말했다.

“우리 사백조게서는 확실히 정춘추의 독수에 당한 것이 틀림없으며 다른 몇 분의 사백숙들 역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그러나 저의 재간이 얕은데 어찌 그들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소성하는 빙그레 웃었다.

“사제, 본문은 결코 무학만 뛰어난 것이 아니외다. 의복성상(醫卜星相), 금기서화(琴棋書畵)등 갖가지 학문을 모두 포괄하고 있소이다. 그대의 사질이 되는 설모화는 겨우 얄팍한 의술을 알고 있을 뿐인데도 강호에서는 설신의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염왕적이라는 별호를 얻었습니다, 현난 대사는 정춘추의 화공대법에 적중된 것이고, 그 나머지 네 명의 협사는 그 무쇠탈을 쓴 사람의 빙장(氷掌)에 상처를 입었으며, 그 키가 크고 비쩍 마른 협사는 정춘추의 한 발길질에 왼쪽 옆구리 아래 세 치 되는 곳을 걷어차여 경맥이 상하게 되었소이다.

소성하는 도도한 언변으로 여러 사람이 입은 상처와 그 원인을 이야기 했다.

허죽은 크게 감탄했다.

선배님, 저는 선배님이 오로지 바둑판에만 정신을 쏟고 있으며, 그들을 한 번 쳐다보거나 상처입은 사람들을 진맥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소성하는 대답했다.

무림에서 싸우거나 겨루다가 상처를 입게 된 것은 한번 보아 척 알아낼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알아내기 아주 쉬운 노릇이외다. 다만 선천적인 허약체질 이나 감기 몸살 같은 것은 진맥하기 어렵지요. 사제, 그대는 사부님이 수십여 년 동안 쌓아온 소요신공을 이어받은 몸이라 상처를 치료하고 병을 낫게 하는데 있어서는 그야말로 귀신과 같은 솜씨를 보일 수 있을 것이외다. 현난대사의 없어진 공력을 회복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목숨을 보존시키는 것은 손을 한번 쓰기만해도 가능한 일이지요.

그는 즉시 어떻게 혈도를 주물러 주고 운기행공을 하고 또한 독을 어떻게 해소시켜야 하는지 그 방법을 허죽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다시 현난을 구하고 치료하는데 어떤 수법을 써야 하며 풍파악을 치료하는데 또 어떤 수단을 써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허죽은 소성하가 가르쳐준 수법을 머리속에 곧 암기할 수 있었다.

소성하는 몇 번 시험해 보고 허죽이 틀리지 않자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장문인의 영력은 정말 좋군요. 한번 들어 아시는구려.

그런데 이때 그의 웃음은 퍽이나 어색했다. 허죽은 의아해서 물어보았다.

선배님, 왜 웃으시죠?

소성하는 대뜸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소형이 어씨 희희덕거릴 수가 있겠소이까? 만약에 그렇게 보였다면 장문인 께서 용서하시구려.

허죽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말했다.

우리 밖으로 나가 살펴보죠.

소성하는 말했다.

그러지요.

그는 허죽을 따라 집 밖으로 나섰다.

이때 상처입은 사람들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모용복은 암암리에 내력을 운기하여 포부동과 풍파악의 통증을 풀어 주고 있었다.

왕어언은 공야건의 상처를 싸매주고 있었다. 그리고 설모화는 땀을 뻗뻘 흘리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저쪽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 누구든지 위급한 상태에 놓이는 것을 보면 서둘러 달려가서 치료해 주곤 했다. 그러나 이쪽의 한 사람이 잠깐 조용해지면 다른 한쪽에서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소성하가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마음이 놓이는 듯 달려와 말했다.

사부님, 어르신께서 빨리 방법을 강구해 주십시오.

허죽은 현난의 앞으로 다가갔다. 현난은 눈을 감고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허죽은 그옆에 공손히 시립하고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현난은 기척을 듣고 천천히 눈을 떠 바라보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 쉬었다.

너의 사백조가 무능하여 정춘추의 독수를 입게 되었고 본파의 위명을 깍이게 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너는 돌아가서 방장에게 품하도록 해라. 바로 내가 말하더라고……나와 너의 현통 사숙조는 절로 돌아갈 체면이 없노라고 전해라.

허죽은 옛날에 사백조를 처음 만났을 때 언제나 그 모습이 장엄하여 노하지도 않았는데 위엄이 절로 풍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래서 감히 마주쳐다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 그의 표정이 침울하고 처량한 표정을 띠우고 있는데다가 또한 그와 같이 말을 하는 것을 듣자 자결하려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되어 입을 열었다.

사백조는 너무 괴로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삼보(三寶)에 귀의한 사람들은 반드시 성을 내거나 화를 내는 마음이 없어야 하고 남과 다투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승패에 관심이 없어야 하며……

그는 이야기하다 보니 사부가 그에게 평소 훈계한 말을 사백조에게 들려 준 꼴이 되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멈추었다.

현난은 빙그레 웃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이 맞다만 너의 사백조는 내력을 깡그리 상실했는지라 참선을 하여 얻은 정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허죽은 고개를 숙였다.

네. 이 사손은 가볍고 무거운 것을 헤아리지 못해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손을 써서 상처를 치료하려고 했다. 그런데 소성하의 이상야릇한 웃음이 뇌리에 떠올라 속으로 흠칫하며 생각했다.

"그는나에게 손을 써 사백조의 천령개(天靈蓋)의 요혈을 후려치라고 했는데 일부러 사람을 해치도록 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내가 만약에 일 장 을 후려쳤을 때 공력을 상실하게된 사백조를 죽이게 된다면 어떡하지?"

이때 현난이 입을열었다.

너는 방장에게 품하되 본사에는 머지 않아 커다란 어려움이 닥칠 것이니 반드시 경계하라고 말씀드려라. 그리고 길을 가는 동안 조심해야 한다. 너는 천성이 소박하니 게율을 지키는 것과 참선에 있어서는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니 이후로는 지혜에 대하여 어느 정도 공부하도록 하고 네 권의 릉가경(楞伽經)을 애써 연구하며 읽도록 해라. 아, 애석하게도 너의 사백조는 너에게 잘 가르쳐 줄 시간이 없구나!

허죽은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그가 자기에게 무척 관심을 보이는지라 속으로 고마워서 다시 입을 열었다.

사백조, 본사에 커다란 어려움이 들이닥치게 된다면 어르신께서는 몸을 보중하시어 절로 돌아가 방장 스님을 도와 대적을 함께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난의 얼굴에 쓰디 쓴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나는 정춘추의 화공대법을 막아내지 못하여 이미 폐인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방장스님을 도와 대적을 막을 수 있겠느냐?

허죽은 공손히 입을 열었다.

사백조님, 총변 선생께서는 제자에게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을 한 가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는 당돌하나마 혜방 사백부에게 시험해 보고 싶으니 사백조께서는 허가해 주십시오.

총변 선생께서 전수한 것이라면 매우 고명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현난은 소성하를 한번 쳐다본 다음 허죽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시험해 보도록 해라.

허죽은 혜방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혔다.

사백부님, 제자가 법령을 받들어 사백부님의 상처를 치료해 주려고 합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혜방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죽은 소성하가 가르쳐 준 대로 혜방의 왼쪽 옆구리 아래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부위를 확인한 후 오른손을 들어 냅다 그의 옆구리를 때렸다.

혜방은 음, 하고 신음 소리를 내더니 몸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옆구리 아래에 구멍이 뻥 뚫린 듯 전신의 피와 정기(精氣)가 끊임없이 그 구멍으로 흘러나가는 것 같았고 삽시간에 전신이 텅 비어 의지할 데가 없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유탄지의 한독 빙장에 맞아 생겨난 근질근질하고 시큰시큰한 아픔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죽의 이 치료법은 내력으로 그를 도와 한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고 칠십여 년간 쌓은 북명진기로 그의 옆구리를 한대 때려 한독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즉 그 누군가가 독사에게 물리게 되었을 때 독사의 독액을 짜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때 허죽은 일 장을 후려치게 된 후 속으로 놀라움과 의혹에 쌓여 혜방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혜방은 잠시 몸을 휘청거리다가 차츰 안정을 이루게 되었고, 눈을 감고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괴로워하던 표정이 점차 시원하고 상쾌한 표정으로 바뀌어지는 것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혜방은 길게 숨을 내쉬더니 미소했다.

정말 훌륭한 사질이군. 그 일 장의 힘이 적지 않더군 그래.

허죽은 크게 기뻤다.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현난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백조님, 나머지 몇 분 사백부님과 사숙조님들도 역시 제자가 치료하는 것이 어떨까요?

현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너는 먼저 다른 파의 선배님을 치료해 준 후 우리 문파 사람들을 치료하도록 해라.

네.

허죽은 대답하고 생각에 잠겼다.

"먼저 남을 돌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대자대비한 본분이 아닌가?"

이때 포부동은 몸을 벌벌 떨고 있었으며 이빨을 우드득 우드득 소리가 나도록 마주치고 있었다.

허죽은 즉시 포부동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포 선생, 총변 선생께서 소승에게 한독을 치료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승은 오늘 처음 배워 정통하고 익숙해진 것은 아니지만 포 선생을 위해 치료를 해 드릴까 합니다. 실례된 점 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포부동의 가슴팍을 만져 보았다.

포부동은 웃으며 물었다.

무엇 하려는 것이오?

허죽은 오른손을 쳐들고 퍽, 하니 소리가 나도록 그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포부동은 대노해서 욕을 했다.

이 더러운……

화상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며칠 동안 떨쳐 버리려고 해도 떨쳐 버릴 수 없던 한독이 신속하게 가슴팍의 얻어 맞은 곳으로 몰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따라서 화상이라는 한 마디는 감히 입 밖으로 쏟아내지 못했다.

허죽은 중독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유탄지의 빙잠독을 배설하도록 한 후 다시 정춘추의 독수에 걸려든 사람을 치료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화공대법으로 공력이 해소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을 상대로 허죽은 그의 천령개에 있는 백회혈(百會穴)이나 가슴팍에 있는 영태혈(靈台穴)을 일 장으로 후려쳐 원기를 돋구도록 했다.

그의 기억력은 무척 좋아 소성하가 가르쳐 준 각기 다른 치료법을 모조리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사람에 따라 다른 방법을 골고루 펼쳐냈다. 그리하여 밥 한끼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 여러 사람이 느꼈던 고통은 모조리 사라지게 되었다. 치료를 받은 사람은 속으로 고마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농아 노인의 신기에 가까운 의술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들은 과연 농아 노인은 설신의의 사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후로 허죽은 현난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사백조님, 제자가 외람되게도 사백조의 백회혈에 일 장을 후려쳐야 되겠습니다.

현난은 미소했다.

네가 총변 선생의 총애를 받고 그토록 영묘하게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을 배우다니 정말 적지 않은 복이라 할 수 있다. 너는 마음 놓고 나의 백회혈을 후려치도록 해라.

허죽은 허리를 굽혔다.

그렇다면 방자하나마 손을 쓰겠습니다.

그는 소림사에 있을 때 현난을 가까이서 대할 기회가 없었다. 현난은 뭇 승려들을 모아 놓고 소림파의 신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때 허죽 역시 여러 사라ㅁㄹ 따라 시립해서 그 강의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으나 대화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사백조의 천령개를 후려친다고 생각하니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역시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그의 웃는 모습이 퍽이나 기이하여 어떤 뜻으로 저와 같은 웃음을 지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엄숙히 말했다.

제자가 위엄을 거슬린 점, 사백조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다가가 현난의 백회혈을 향해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기세로 일 장을 후려쳤다.

허죽의 손이 현난의 성수리에 닿채 되었을 때 현난의 얼굴에는 갑자기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곧이어 악, 하고 길게 부르짖더니 대뜸 푹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몸을 몇 번 비틀더니 땅바닥에 엎어진 상태로 꼼짝하지 않았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놀라 부르짖게 되었다. 허죽은 더욱놀라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급히 현난을 부축해 일으켰다.

혜방 등 소림사의 승려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현난을 들여다보니 그는웃음을 띠우고 있었으나 숨은 이미 멎어 있는 것이 이미 죽은 후였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사백조님! 사백조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별안간 소성하가 부르짖었다.

게 누구냐? 서라!

그는 현난 대사의 시체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누군가 뒤에서 암산을 했는데 그 사람의 신법이 너무 빨라 똑똑히 알아볼 수 없었소.

그는 현난의 완맥을 짚어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현난 대사의 공력이 이미 상실되어 다른 사람의 암산에 걸려들어도 전혀 항거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만 원적하게 되었소이다.

소성하는 미미한 웃음을 띄우고 말했다.

허죽은 머리가 착잡하게 얽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크게 울부짖었다.

사백조님! 사백조님! 어르신...어르신께 어떻게...어떻게...

별안간 그는 소성하가 나무집 안에서 이상야릇한 웃음을 떠올리던 사실을 상기하고 노해 부르짖었다.

총변 선생, 솔직히 말하시오! 도대체 우리 사부께서는 어떻게 죽음을 당하셨소? 이것은 그대가 일부러 해친 것이 아니오?

소성하는 두 무릎을 땅바닥에 꿇고 말했다.

장문인께 말씀드립니다. 소성하는 결코 장문인을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만드는 함정에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현난 대사가 갑자기 원적하게 된 것은 정말 그 누가 숨어 있다가 몰래 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허죽은 말했다.

그대는 그 나무집 안에서 이상야릇한 웃음을 지었소. 그것은 무슨 가닭이오?

소성하는 놀라 물었다.

내가 웃었다고? 내가 웃었다고? 그러다면 장문인께서는 조심해야...그가 ...

한 마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얼굴에 다시 이상야릇하기 이를데 없는 웃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닌가?

설모화는 이를 보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부님!

그는 재빨리 품속에서 하나의 약병을 꺼내 급히 마개를 뽑더니 세 알의 알약을 손바닥에 쏟고 그 세 알의 알약을 총변 선생의 입안에 털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소성하는 이미 숨진 후라 해독약이 그의 입안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설모화는 대성통곡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는 정춘추의 독에 죽음을 당하셨소. 정춘추...정춘추 이 악적...

여기까지 말하더니 흐느기느라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강광릉은 소성하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던지고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설모화는 재빨리 그의 등을 잡고 힘주어 잡아당기며 울부짖었다.

사부의 몸에는 독이 있소!

범백령, 구독, 오영군, 풍아삼, 이괴뢰, 석청로는 일제히 소성하는 에워싸고 비통해 했다.

 

강광릉은 소성하를 따른 지 가장 오래된 사람이라 본문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다. 사부가 허죽에게 꿇어 엎드리면서 장문인이라 호칭하게 되었을 때 이미 십중팔구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인가 짐작하게 되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허죽의 손가락을 살펴본 결과 아니나 다를까 하나의 보석반지를 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광릉은 말했다.

여러 사제, 나를 따라 본파의 새로운 장문인께 인사를 드리도록 하세.

그는 허죽의 앞에 꿇어앉아 큰절을 올렸다. 범백령 등은 어리둥절했으나 깨닫는 바가 있어 재빨리 큰절을 올렸다.

허중은 마음이 어지럽기만 했다.

정...정...정춘추라는 간악한 도적은 우리 사백조님을 해쳐 죽였고 또 그대들의 사부를 해쳐 죽였소.

강광릉은 말했다.

원한을 갚고 간악한 자를 주살하는 것은 장문 사숙께서 모두 처리하시고 주관하셔야 합니다.

허죽은 세상 일을 알지 못하는 젊은 화상에 불과했다. 지금 그의 뇌리엔 복수의 일념밖엔 없었다.

"반드시 사백조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반드시 총변 선생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그리고 반드시 나무집 안에 있던 노인의 원수를 갚아야한다."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반드시 정춘추를...정춘추라는 이 악적을...악적을 죽여야 하오!

강광릉은 다시 큰절을 하며 말했다.

장문 사숙께서 간악한 자를 주살하여 저희들 사부의 원수를 갚겠다니 저희 사질들로서는 장문 사숙의 커다란 은혜를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범백령과 설모화등도 일제히 큰절을 올렸다. 허죽은 재빨리 꿇어앉아 반례 하며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여러분들은 일어나십시오.

강광릉은 말했다.

사숙, 소질이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사람이 많아 거북하니 집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소질이 직접 말씀 드리겠습니다.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도 몸을 일으켰다.

허죽은 강광릉을 따라 나무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범백령이 말했다.

잠깐! 사부께서는 이 집안에서 정 노적의 독수에 걸렸소. 장문 사숙과 대사형은 역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소이다. 그 노적은 간계가 많아 방비할래야 방비할 수가 없는 형편이외다.

강광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무척 옳아. 장문 사숙께서는 그야말로 고귀하신 몸이니 다시는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 없도록 해야지.

설모화는 말했다.

두분은 바로 이곳에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십시오. 우리들이 사방에서 살피며 노적이 다시 어떤 간계를 쓰든지 막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먼저 자리를 피했다. 나머지 풍아삼, 오영군 등도 십여장 밖으로 물러갔다.

모용복과 등백천 등은 그들마저도 멀찌기 피하는 것을 보고 모두 한편으로 물러섰다.

구마지와 단연경 등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보았으나 자기와는 관계없는 일인지라 곧 서로 갈 길을 떠났다.

강광릉은 입을 열었다.

사숙...

허죽은 그 말을 가로챘다.

나는그대의 사숙이 아니며 그대들의 장문인도 아니외다. 나는 소림사의 화상이며 그대들 소요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이다.

강광릉은 말했다.

사숙께서는 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소요파라는 이름을 외부의 사람은 결코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고의로 혹은 우연히 듣게 되었을 때, 본문의 규칙은 즉시 그 자를 죽여 용서하지 않으며 설사 이 세상 끝까지 도망친다 하더라도 쫓아가서 죽여 입을 봉하게 하는 것입니다.

허죽은 그 말을 듣자 깜짝놀랐다.

"이 규칙은 너무나 요상하구나. 그렇다면 내가 그들 문파에 들어가겠다고 응낙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즉시 나를 죽일 것이 아니겠는가?"

강광릉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숙께서 조금 전 여러 사람을 위해 상처를 치료하신 수법은 바로 본파의 적전내공(適傳內功)입니다. 사숙께서 어떻게 들어오게 되시고 또 언제 사조의 전수를 이어받게 되었는지 소질은 감히 더 물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사숙께서 사조가 만드신 바둑판의 문제를 풀었기 때문에 저의 사부님께서는 사조의 유명에 의거하여 사부를 대신하여 제자를 거두어들이고 대신해서 장문인의 직위를 전수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어찌되었든 본파의 소요신선환(逍遙神仙環)은 사숙의 손가락에 끼어져 있고 또 가사께서 돌아가실 때에 사숙에게 큰절을 올리며 장문인이라고불렀으니 사숙께서는 더 사양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양을 한다거나 남에게 미룬다하더라도 역시 소용없는 일입니다.

허죽은 좌우를 몇 번 살폈다. 혜방 등의 승려는 현난의 시체를 들고 한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소성하의 시체는 뻣뻣한 채 여전히 땅바닥에 꿇어앉은 상태였고 얼굴에는 이상야릇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허죽은 그만 마음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그와 같은 일들은 일시에 다 설명을 할 수가 없소이다. 지금 우리 사백조님 께서 돌아가시게 되어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노선배님...강광릉은 급히 꿇어 엎드리며 말했다.

사숙께서는 절대로 그와 같은 칭호를 쓰지 마십시오. 그야말로 이 소질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입니다.

허죽은 눈살을 찌푸렸다.

좋소이다. 그대는 빨리 일어나십시오.

강광릉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허죽은 다시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강광릉은 다시 털썩 꿇어앉았다.

허죽은 재빨리 변명을 했다.

깜박 잊었소이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야되는 것을, 그만 실수했군요. 빨리 일어나십시오.

노인이 그에게 준 두루마리를 펼치며 말했다.

그대 사부께서는 나에게 이 두루마리를 주시면서 방법을 강구하여 무공을 익혀 정 시주를 주살하라고 하셨소이다.

강광릉은 그림 속의 궁장을 한 미녀를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질은 이 속에 숨어 있는 이치를 이해할 수 없으니 사숙께서 적절히 갈무리 하도록 하고 남에게 보여 주지 않도록 하십시오. 저의 사부님이 생전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면 사숙께서는 저의 사부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 말에 따르도록 하십시오. 소질이 사숙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가사가 중독된 독은 삼소도요산(三笑道遙散)이라는 것입니다. 이 독은 무의식 중에 중독되어 처음에 이상야릇한 웃음을 떠올리게 되는데 중독이 된 당사자는 전혀 모른답니다.

그리하여 세 번째 웃었을때 숨이 막혀 죽게됩니다.

허죽은 고개를 숙였다.

말하기는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존사께서 처음에 얼굴에 이상야릇한 웃음을 떠올렸는데 저는 소인의 마음으로 함부로 추측하여 존사께서 좋은 뜻을 품지 않은 줄로 알았습니다. 만약 그당시 탁 털어 놓고 물었다면 존사께서도 즉시 치료를 하시게 되었을 것이고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광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삼소도요산이 몸에 스며들게 되면 해소시키기가 어렵 답니다. 정 노적이 거칠 것 없이 날뛰는 것은 바로이 삼소도요산 때문입니다. 모든사람들은 화공대법이라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화공대법에 걸려들었을 때 공력을 상실하게 되나 목숨을 건질 수있어 널리 말을 퍼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소도요산에 중독되면 필시 유명을 달리하게 되니 알아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악독하기 그지없는 독이군요. 나는 존사의 곁에 서 있었으나 정춘추가 어떻게 독을 썼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소이다. 나는 무공이 평범하고 견식이 얕습니다. 그런데 정춘추가 어째서 손을 쓰지 않고 나의 작은 목숨을 살려 주었는지 알수가 없군요.

강광릉은 말했다.

아마도 그는 사숙의 재간이 얕아서 독을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죠.장문 사숙, 제가볼 때 사숙은 나이가 젊으셔서 별로 위명을 떨치지는 않고 있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독을 치료하는 방법이 홀륭하기는 했으나 그것 역시 저의 사부님께서 사숙에게 가르친 것이지요. 따라서 정 노괴가 사숙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게 되었을 때 그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덧붙였다.

장문 사숙, 제가 이같이 솔찍히 털어 놓게 된 것을 어쩌면 사숙께서 탓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사 사숙께서 탓하신다 하더라도 역시 저도 사숙의 무공이 고명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나의 무공은 지극히 낮소이다. 정 노적은...... 정말 죄를 짓는구려. 소승이 함부로 욕을 하다니 말입니다. 이것은 악구계(惡口戒)를 범하는 것이며 불문 제자답지 못한 언행이지요...그 정춘추, 정 시주는 확실히 나를 죽일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허죽은 심기가 소박하고 성실했으며 강광릉은 세상일을 잘 몰랐기 때문에 하나같이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삼소도요산은 내력으로 독을 상대방의 몸에 튕기듯 뿌리는 것이었다.

정춘추는 나무집 안에서 내력으로 삼소도요산을 소성하와 허죽에게 뿌렸고 나중에는 역시 삼소도요산으로 현난을 해쳤다.

소성하는 악전고투를 치룬 나머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현난은 내력을 깡그리 상실한 몸이라 그대로 중독되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허죽은 칠십여 년이나 되는 신공을 전수받은 몸이라 정춘추의 내력이 그의 몸에 닿기 전에 오히려 허죽의 몸에서 퉁기는 반탄력에 의해 삼소도요산이라는 독가루가 튕겨나가게 되었으나 오히려 그 독가루가 모조리 소성하의 몸에 뿌려지게 되어 허죽은 조금도 그 독가루에 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정춘추가 다른 사람과 정면대결을 벌일 때 감히 함부로 삼소도요산을 쓰지 못한 것은 혹시나 상대방의 내력이 자기보다 뛰어날까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의 공력이 자기보다 뛰어나다면 그 독이 되튕겨나오기 때문에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강광릉은 허죽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사숙, 그 점에 있어시는 그대의 잘못이외다. 소요파는 불교나 도가에 억매이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이야말로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대가 본파의 장문인 이라면 이 천하에서 그대를 상관할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대는 한시 바삐 가사를 벗어 던지고 머리카락을 길러서 십 칠팔 명의 소저를 아내로 맞아들이도록 하십시오. 그까짓 불문이고 불문이 아니고 상관할게 뭐 있겠습니까? 그리고 악구계나 선구계(善口戒)를 따질 것도 없습니다.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허죽은 나무아미타불을 읊곤 했다. 이윽고 그의 말이 끝나자 허죽은 정색하며 말했다.

내 앞에서 우리 부처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이오?.

강광릉은 그제야 생각이 난듯 말했다.

아이구, 정말 내가 늙어서 멍청해졌나 봅니다. 반 나절이나 이야기를 하면서도 해야할 말을 하지 못했군요. 장문 사숙, 장래 나이가 들게 되더라도 나를 본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참 야단났어! 또 엉뚱한 말을 했을 뿐 해야 할 말을 못했군요. 정말 죽을 죄를 졌습니다. 장문 사숙, 저는 장문 사숙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드리고 싶은데 아무쪼록 허락해 주십시오.

허죽은 말했다

무승 일인데 나보고 허락을 해 달라고 하십니까?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소이다.

강광릉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본문의 큰 일을 장문인에게 허락 받지 않고 누구에게 부탁하겠습니까?

우리 사형제 여덟 사람이 과거 사부에게 쫓겨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을 자지른 것이 아니라 사부께서 정 노적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까봐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며 또 차마 여덟 사람의 고막을 찔러 귀머거리로 만들수가 없었고 또 혓바닥을 잘라낼 수가 없어서 그같은 궁여지책을 쓴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오늘 그 명령을 거두어 들이시어 우리가 다시 사문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장문인에게 품하지 못했고 또 대례를 거행하지 못했으니 아직도 본문의 정식 제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장문인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을 때 우리 여덟 사람은 죽을 때까지 어느 문파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톨이 귀신이 될 것이며 무림에서 고개를 쳐들고 다니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 그와 같은 입장이야말로 견디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소요파의 장문인 노릇을 나는 결코 하지 않겠다. 그러나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고 언제까지 귀찮게 할지 모를 일이니 먼저 응낙을 해놓고 보자"

그는 입을 열었다.

존사께서 그대들에게 다시 문하로 들어오도록 허락을 내리셨다면 그대들은 사문으로 되돌아온 것이라 할 수있는데 무엇을 걱정하시오?

강광릉은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돌려 부르짖었다.

사제들, 사매. 장문 사숙께서는 우리가 사문으로 되돌아온 것을 허락하셨네!

함곡팔우 가운데 나머지 일곱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했다. 즉시 둘째인 바둑광 범백령, 세째인 책벌레 구독, 네째인 단청 명수오영군, 다섯째 염왕적 설모화, 여섯째 목수 풍아삼, 일곱째인 원예사 석청로, 여덟째인 창극배우 이괴뢰 등은 일제히 다가와 허죽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큰절을 올렸다.

허죽은 지극히 겸연쩍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갈수록 장문 사숙의 직위를 떨쳐 버리기가 어렵게 되리라 생각되었다. 그야말로 자기는 명문 정통의 제자인데 어찌하여 방문좌도의 장문인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너무나 황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범백령 등이 너무나 기뻐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이때 자기가 만약 장문인의 명분과 직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들이 너무 실망할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눈을 돌려보니 모용복, 단연경, 단예, 왕어언 등과 혜(慧) 자(字) 항렬의 여섯명 승려들과 현난의 시체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 고개 위의 소나무밭에는 그들 소요파의 아홉명만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놀라 물었다.

어!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오영군은 대답했다.

모용공자와 소림파의 뭇 승들은 우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각기 흩어졌습니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어이쿠!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혜방 등의 뒤를 쫓아서 함께 소림사로 돌아가 방장대사와 자기의 사부님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속 깊이 이곳에서 빵소니치자는 뜻과소요파 제자들이 귀찮게 달려드는 것을 떨쳐 버리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는 질풍같이 반시진을 달렸는데 달리면 달릴수록 그의 몸놀림은 빨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여섯 명의 승려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소요 노인의 칠십여 년이나 되는 신공을 이어받은 몸이라 달려가는 속도는 그야말로 준마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이미 그는 고개에서 내려올 때 혜자 항렬의 여섯 승려를 앞지르게 되었는데도 혜 자 항렬의 여섯 명 승려가 앞서가고 있는 줄로만 알고 죽어라 하고 뒤쫓아가는데 바빠 산모퉁이를 돌게 되었을 때 미처 여섯 승려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몇 번 몸을 솟구치게 되자 그들 여섯 명의 승려들을 멀리 뒤로 떼어놓게 되었다.

허죽은 곧장 해질 무렵까지 쫓아갔으나 여전히 여섯 명의 사백과 사숙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혹시 길을 잘못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되돌아 이십여 리를 돌아와서는 길 가는사람에게 여섯 명의 화상을 보지 못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달려가고 돌아와도 전혀 피곤한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고을의 반점으로 들어가 두 그릇의 고기를 넣지 않은 소면(素麵)을 시켰다.

소면이 일시 장만되지 않아 허죽은 계속 반점 밖의 큰길 쪽을 두리번거렸다.

이때 옆에서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화상, 당신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허죽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서쪽 창가에 청삼을 입은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이목에 살결이 희고 생긴 것이 꽤나 준수한데 나이는 십 칠팔 세로 보였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허죽은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실례지만 상공께서는 여섯 명의 화상을 보셨습니까?

그 소년은 웃으며 말했다.

여섯 명의 화상은 보지 못했으나 한명의 화상은 보았지요.

허죽은 물었다.

한명의 화상을 상공께서는 어디서 보았습니까?

그 젊은이는 말했다.

바로 이 반점에서 보았지요.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 명의 화상이라면 혜방 사백부 등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승려라니 어떤 소식을 얻어낼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마친 그는 말했다."

실례지만 상공에게 여쭤 보겠는데 그 화상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나이가 몇 살 정도 먹어 보였으며 어느쪽으로 갔는지요?

그 젊은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 화상은 이마가 넓고 귀가 컸으며 입은 넓적하고 입술이 두툼했을 뿐만 아니라 코는 하늘을 향하고 있었는데 나이는 스무 서너 살쯤 되었소, 그는 바로 이 반점에서 두 그릇의 소면을 먹으려고 하고 있는 중이며 아직 출발하지 않은 상태랍니다.

허죽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소상공께서는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구려!

젊은이는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상공이면 상공이지 어째서 앞에다 작은 소(小) 자를 보태는 것이죠? 나는 그대를 그저 화상이라 불렀지 소화상이라 부르지는 않았소이다.

그 젊은이의 음성은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카랑카랑한 것이 듣기 좋았다.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마땅히 상공으로 칭해야 옳은 일이죠.

이와 같이 말하는 사이에 점소이가 두 그릇의 소면을 식탁에 올렸다. 허죽은 인사말을 했다.

상공, 소승이 국수를 들겠소이다.

젊은이는 말했다.

채소만 얹었을 뿐 기름기는 전혀 없으니 맛이 있을 게 뭐요? 이쪽으로 오시오. 내가 고기와 구운 닭고기를 잡수실 수 있도록 한턱 내겠습니다.

허죽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큰일날 말씀입니다. 소승은 한평생 비린 것을 손에 대지 않는 몸이랍니다. 상공이나 잡수시도록 하시구려.

그는 몸을 돌려서 국수를 먹기 시작했으며 그 젊은이가 고기와 닭고기를 먹는 꼴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배가 무척 고팟던 참이라 순식간에 한 그릇의 국수를 거진 다 먹어치우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젊은이가 부르짖었다.

이…… 이게 뭐죠?

허죽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 젊은이는 오른손에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떠서 입안으로 가져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무슨 기이한 물건을 발견한 듯 숫가락을 입에서 약 반 자정도 떨어진 곳에 세운 채 왼손으로 탁자에서 한가지 물건을 집어들었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키면서 오른손으로 그 물건을 집어들고 허죽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화상, 이 벌레가 이상하지 않으시오? 좀보시오.

허죽은 그가 쥐고 있는 것이 검은 빛이 나는 조그마한 풍뎅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와 같은 검은 풍뎅이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라서 그는 물었다.

도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오?

그 젊은이는 말했다.

이 벌레를 보세요. 이 벌레의 껍질이 매우 딱딱하고 시커먼 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마치 기름을 칠해 놓은것 같지 않습니까?

허죽은 말했다.

그것은……풍뎅이는 모두 그런 법이외다.

그 젊은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요?

그는 풍뎅이를 땅바닥에 던지더니 발로 밟아 죽이고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허죽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가 크도다! 죄가 커!

그는 젊은이가 살생을 했다는 사실에 탄식하며 즉시 고개를 떨구고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는 온종일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해 그 국수를 정말 맛있게 먹어 치웠으며 국물까지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그가 두 번째의 국수 그릇을 앞으로 당겨 젓가락을 들고 먹으려고 할 때 그 젊은이가 갑자기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화상, 나는 당신이 계율을 엄히 지키는 훌륭한 화상인 줄 알았는데 알아보니 말과 행동이 다른, 일부러 점잖은 체하는 화상이었군요?

허죽은 물었다.

내가 어찌해서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요?

그 젊은이는 말했다.

그대는 한평생 비린 것이라면 손도 대보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그 닭국물로 만든 국수를 어째서 그토록 맛있게 먹을 수 있단 말이오?

허죽은 그 말을 받았다.

상공께서는 농담을 잘도 하시는구려. 이것은 소채만 얹은 국수인데 어째서 닭국물이라 합니까? 내가 점소이에게 부탁하여 비린 것이라고는 손끝만큼도 넣지 말라고 했소이다.

그 젊은이는 미소했다.

그대는 입으로 비린 것을 먹지 않는 양 말했으나 닭국물을 마시게 되었을 때 얼마나 맛있게 마셨는지 모른다오. 화상, 내가 그 국수 그릇에도 닭국물을 좀 끼얹어 드릴까요?

그는 숟가락에 앞에 놓인 닭국물을 듬북 떠 몸을 일으켰다.

허죽은 깜짝 놀랐다.

그대는……그대는……조금전에……이미……

그 젊은이는 웃었다.

그렇소. 조금 전 그 국수 그릇에 한 숟가락의 닭국물을 쏟아 넣었단 말이외다. 그런데 그대는 보지 못했단 말인가요? 아하, 화상 빨리 눈을 감고 모르는 척해요. 내가 그대의 국수 그릇에다 다시 한 숟가락의 닭국물을 보태게 된다면 틀림없이 맛이 좋을 것이오. 어찌 되었든 그대 스스로 넣은 것이 아니니 보살님도 그대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허죽은 놀람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이제서야 상대방이 조그만 풍뎅이를 잡아 자기에게 보여 준 것은 바로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치는방법을 써서 자기의 시선을 돌리게 한 이후 그 기회를 틈타 닭국물을 자기의 국수그릇에 쏟아 부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그 국물이 정말 구수하고 맛이 좋았다.

그는 한평생 닭국물을 마셔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그것이 바로 닭국물의 맛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제 닭국물은 이미 마셨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당장 토해 내야할까? 그는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 젊은이는 갑자기 말했다.

화상, 그대가 찾는 여섯 명의 화상이 저쪽에서 오고 있지 않소?

그는 문 밖을 가리켰다. 허죽은 크게 기뻐 문쪽으로 달려가 내다 보았다. 그러나 한명의 화상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또 그 젊은이에게 기만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여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출가인은 화를 내거나 성질을 부릴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억지로 화를 참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젊은 상공은 나이가 어린데 짖꿎은 장난을 걸어 오는구나"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젓가락을 들고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 근 한그릇의 국수를 다먹어 치웠다, 그런데 별안간 이빨에 매끄럽고 미끈미끈한 것이 물렸다. 깜짝 놀라 그는 그릇 안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국수사이에 커다란 비계살이 한조각 섞여 있었으며 그 비계살 반쪽은 입으로 물어뜯긴 자국이 나 있었다. 나머지 반쪽은 틀림없이 자기 자신이 먹어 치운 게 분명했다.

허죽은 젓가락을 탁자 위에 탁하는 소리가 나도록 내려 놓고 부르짖었다.

야단났구나! 야단났어!

그 젊은이는 웃었다.

화상, 그 비계가 맛이 없던가요? 왜 야단났다고 부르짖지요?

허죽은 노해 말했다.

그대는 날 속여 문 앞으로 달려가게 한 후 내 그릇에다 비계살을 넣었소. 나는……나는……이십 삼 년간 한 번도 비린 것을 먹어 본 적이 없소. 나는……나는……그야말로 그대의 손에 당하고 말았소!

그 젊은이는 빙그레 웃었다.

이 비계살의 맛은 배추나 두부보다 열 배나 맛이 좋지 않소? 그대가 예전에 먹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바보스럽기 이를데 없는노릇이지요.

허죽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때 갑자기 문밖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나며 많은 사람들이 반점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그는 얼른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한패의 사람들은 성숙파의 제자들 이었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이쿠! 큰일났다, 성숙노괴에게 잡힌다면 내 목숨은 끝장이다."

그는 급히 뒷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뒷문을 통하여 반점에서 도망을 칠 작정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어 한걸음 내딛고보니 그곳은 침실이 아닌가! 허죽은 멈칫했다.

이때 등뒤에서 누군가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사환, 사환, 빨리 술과 음식을 가져오게.

성숙파 제자들은 이미 객당으로 들어 온 이후였다.

허죽은 급히 방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가만히 닫았다. 갑자기 한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이 뚱보 화상을 방안에 눕혀 쉬도록 해라.

정춘추의 음성이었다. 한명의 성숙파 제자가 대답했다.

예, 그러지요

그들은 발걸음 소리도 무겁게 방을 향해 다가왔다. 허죽은 깜짝 놀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몸을 움추리고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의 머리통이 침대 밑으로 기어드는 순간 어떤 물건과 부딪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침대 밑 안쪽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

알고보니 침대 밑에는 이미 먼저 와서 숨어 있는 사람이 있었다. 허죽은 더욱 깜짝 놀라 침대 밑에서 기어나오려 했다. 그런데 그 성숙파의 제자는 혜정을 안은채 방으로 걸어 들어와 침대위에 눕힌 후 다시 물러갔다.

이때 그의 곁에 있던 사람이 입을 허죽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화상, 비계살이 맛있었지요? 그런데 그대는 왜 숨으려 하죠?

원래 거기에 먼저 와서 숨어 있던 사람은 바로 그 젊은 상공이었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의 솜씨는 퍽이나 민첩하구나. 나보다 먼저 침대 밑으로 들어와 숨었군."

이와같은 생각을 하면서 나직이 대답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한 떼의 대 악인들 이외다. 상공께서는 절대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시오.

그 젊은이는 말했다.

그대는 그들이 대 악인 인줄을 어떻게 알았죠?

허죽은 대답했다.

나는 그들을 알고 있소. 그들은 사람을 죽여도 눈 한번 깜박이지도 않는 사람들이라오. 결코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외다.

그 젊은이는 허죽에게 아무 소리도 하지 말라고 하려는데 갑자기 침대 위에 누워 있던 혜정이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침대 밑에 사람이 있다! 침대 밑에 사람이 있다!

허죽과 그 젊은이는 깜짝 놀라 동시에 침대 밑에서 튀어 나왔다.

정춘추가 문앞에 서서 냉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 얼굴 표정은 득의에 차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매섭고 악독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 젊은이는 놀라 안색이 창백해졌다. 곧 꿇어앉아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사부님!

정춘추는 웃었다.

좋다. 매우 좋다. 가져 오너라.

그 젊은이는 말했다.

몸에 지니고 있지는 않아요.

정춘추는 물었다.

어디에 있느냐!

그 젊은이는 말했다.

요나라 남경성에 있습니다.

정춘추는 두눈에 흉칙한 안광을 번득이며 나직이 말했다.

너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를 속일 작정이냐? 나는 너로 하여금 살려고 해도 살 수 없고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할 수 있다.

그 젊은이는 말했다.

제자는 감히 사부님을 속이지 못합니다.

정춘추는 눈을 들어 허죽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그 젊은이에게 물었다.

너는 어쩌다가 이 녀석과 함께 있었지?

그 젊은이는 대답했다.

조금전 이 가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춘추는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 또 거짓말을 하는군!

그는 두 사람을 흘겨보더니 돌아서 나갔다. 곧이어 네 명의 성숙파 제자가 방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에워쌌다.

허죽은 젊은 상공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알고보니 그대 역시 성숙파의 제자였군!

그 젊은이는 발로 방바닥을 차며 매섭게 말했다.

모두 너 못난 화상의 잘못이야! 그런데도 나를 탓하고 있어!

한명의 성숙파 제자가 입을 열었다.

대사저, 그동안 안녕하셨소!

그 어조는 심히 경박스러웠다. 허죽은 의아하여 물었다.

뭐라고! 그대는……그대는……

그 젊은이는 퇴, 하고 침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바보 화상! 못난 화상! 물론 나는 여자야. 설마하니 그대는 여지껏 몰라봤단 말이에요?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이 소상공은 여자일 뿐 아니라 성숙파의 제자였구나. 아니 성숙파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대사저이기도 하구나! 아이구! 야단났다. 그녀는 나를 속여 닭국물과 비계살을 먹도록 했는데 그 속에 독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이 젊은이로 변장한 소녀는 물론 아자였다. 그녀는 요나라 남경에서 부귀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활발한 편이라 시일이 오래 흐르자 그와같은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소봉은 공무에 바쁜 몸이라 매일같이 그녀를 데리고 사냥을 가거나 놀아줄 여가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날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홀로 밖으로 놀러 나오게 되었다.

그날 밤 자정쯤 되었는데 뜻밖에도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겨 한사람을 뒤쫓게 되었다. 끝내는 그 사람을 독살하게 되었으나 어느덧 남경에서 훨씬 아래로 내려오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예 중원땅으로 들어와 며칠 놀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날 허죽과 정춘추를 동시에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가 허죽으로 하여금 비린 것을 맛보도록 한 것은 일시 장난기가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이 낭패하고 어쩔줄 몰라 하는 꼴을보고 즐겨 보자는 것이었지 결코 다른 뜻은 없었다.

아자는 사부가 성숙해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으니 결코 중원으로 들어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격으로 이 조그만 반점에서 부딪친 것이다.

그녀는 혼비 백산했다. 큰소리로 허죽을 꾸짖고 있었지만 그것은 허장성세에 불과했으며 그녀의 말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빠져 나갈 방법을 빨리 강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사부를 남경으로 꼬여서 데려가는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형부의 손을 빌어 사부를 죽이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형부 외에는 그 누구도 사부를 이겨낼 수 없다. 다행히 신목왕정이 남경성 안에 있으니 사부님은 반드시 그 보물을 되찾으려고 할 것이니까 틀림없이 남경성으로 달려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녀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만약 사부가 나를 때려 불구의 몸으로 만든다든가 나의 무공을 없앤 다음 남경으로 압송해 간다면 어떻게 하지? 그와 같은 고통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의 얼굴은 다시 창백해졌다.

이때 한 명의 성숙파 제자가 문 앞에 이르러 싱글벙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대사저, 사부님께서 부르십니다.

아자는 사부가 부른다는 말을 듣고 쥐가 고양이 소리를 들은 듯 무서워했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라 부득이 그 성숙파의 제자를 따라 객당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춘추는 혼자 한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술과 음식이 놓여 있었고 제자들은 멀찌감치 서서 손을 내려뜨리고 서 있었는데 그 태도는 무척 공손했다.

그 누구도 감히 크게 숨 한번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아자는 다가서서 불렀다.

사부님!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정춘추는 물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아자는 대답했다.

저는 감히 사부님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에요. 확실히 요나라 남경성 안에 있습니다.

정춘추는 다시 물었다.

남경성 안 어디에 있지?

아자는 대답했다.

요나라 남원대왕이신 소 대왕의 왕부 안에 있습니다.

정춘추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다가 오랑캐의 손안에 들어가게 되었지?

아자는 대답했다.

그 자의 손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제자는 북쪽에 이르게 된 후 사부님의 그 보물을 잃게 되거나 실수하여 훼손하게 될까봐 몰래 소 대왕의 집에 있는 화원으로 숨어 들어가 땅을 파고 묻어 두었습니다. 그곳은 은밀하기 이를데 없는 곳이고 또 소 대왕의 화원은 넓이가 육천여 평이나되어 제자외에는 그 누구도 그 왕정을 찾을 수 없으니 사부님께서는 안심 하십시오.

정춘추는 냉소했다.

너만이 찾을 수 있다는 것이겠지? 이 조그만 것이 꽤 영악하게 나오는구나. 너는 내가 독을 깰까 봐 쥐새끼를 때려잡을 수 없듯 감히 너를 잡아죽이지 못 하리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그래서 너를 죽이게 된다면 왕정을 되찾지 못한다는 것을 은근히 말하려는 것 아니냔 말이다.

아자는 전신을 벌벌 떨며 전전긍긍해서 말했다.

사부님께서 만약 이 제자의 짓꿎은 장난을 용서하시지 않고 저의 공력을 해소시키거나 저의 심맥을 끊거나 또는 한 발이나 한 손을 자르게 된다면 제자는 죽으면 죽었지 결코 그 왕정이……그 왕정이……그 왕정이 있는 곳을 토로하지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극도로 두려움을 느껴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정춘추는 미소했다.

이 조그만 것이 감히 당돌하게 흥정을 하려 하는구나. 나의 성숙파 문하에 너와 같은 무서운 인물이 있는데 내가 사전에 방비하지 못한 점은 역시 성숙노선이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탓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한명의 제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성숙노선께서는 과거와 미래를 통찰하고 계십니다. 신목왕정에 그와 같은 액겁이 있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내다보시고 아자의 손을 빌어 그 보배로 하여금 한바탕 어렵고도 험난한 길을 걷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보물같은 왕정을 가다듬고 닦아서 능력을 더욱 증가시키자는 것이죠.

그러자 다른 한명의 제자가 말했다.

온 천하의 사물가운데 어느 하나 노선의 신선과 같은 계산에 들지 않는 것 이 있겠습니까? 노선께서 겸손해서 하시는 말씀을 제자들은 결코 정말로 여기지 않습니다.

다시 한명의 제자가 말했다.

성숙노선께서 오늘 조그만 재주를 살짝 펼쳐서 소림파의 고수인 현난을 죽였고 농아노인의 사도 수십 명을 주살했습니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큰 승리를 거둔 인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자, 네가교활한 재주를 피운다 하더라도 어찌 성숙노선의 손아귀에서 빠져 달아날 수 있겠느냐? 아무리 뻗대거나 애걸을 하여도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정춘추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수염을쓰다듬으며 귀를 기울였다.

허죽은 침실에서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백조와 총변 선생은 정말 저 정 시주가 죽였구나. 아! 이제 그 원수를 갚기는커녕 내 이 조그만 목숨도 보전 할 수 없게 되었다."

성숙파의 제자들은 나 한 마디 너 한 마디 하며 아자에게 빨리 순순히 승복하여 사실대로 털어놓으라고 권고하고 있었다. 겁을 주는 언사 가운데 태반은 성숙노괴의 덕망과 위세를 크게 칭송하는 말이었다. 한마디 아자에게 권고하는 말을 할 때마다 두 마디 세 마디를 더 보태서 정춘추를 추켜세웠다. 정춘추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남들이 자기에게 바치는 아첨의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속이 뻔하게 드러나고 그야말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는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듣고 흐뭇하게 여겼다. 이와같이 제자들에게 추켜세워지게 되자 그는이미 제자들이 노래처럼 칭송하는 한마디가 진짜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만약 그 누가 그를 높여 추켜세우지 않으면 그는 충성심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그와같은 그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적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아첨을 떨곤 했다. 사실 그들은 만약 칭송하는 말이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된다면 사부의 환심을 사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시시각각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들 성숙파의 제자들은 모두가 이 세상에서 태어날 때 이토록 허황된 말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형식에 얽매이다 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할 수가 없었고 매일같이 그와 같은 언행을 일삼다보니 자연스럽게 습관이 되어 아첨하는 말을 술술 흘려내게 되었으며 그 누구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정춘추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띄고 두 눈은 감은 듯 마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뭇 제자들의 칭송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야말로 도취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그의 기다란 수염은 사형인 소성하와 싸우게 되었을 때 거의 태반은 불에 탔으나 그래도 드문드문 약간은 남아 있는 편이었다.

그후 그가 독을 몰래 펼쳐 삼소도요산으로 소성하를 독살하게 되었으니 궁극적으로 두사람의 싸움에 있어서는 역시 그가 이겼다고 할 수 있는지라 약간의 수염이 탄데 대하여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자라는 이 조그만 계집애는 오늘 이 노선의 손아귀에서 도망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저 뒷방에 있는 소화상은 반드시 멋지게 족쳐야할 것이다. 나의 삼소도요산으로 그를 독살 할 수 없었으니 나중에 부시독(腐屍毒)이나 화공대법을 쓰든가 해야겠다. 그렇다면 본파 장문인의 소요신선환이 나에게 들어 오게 될 것이니 어찌 좋지 않으랴?"

족히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제자들이 칭송하는 소리가 점차 누그러졌다. 계속해서 말하려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춘추는 왼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칭송하는 소리가 멎고 제자들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사부님의 공덕은 하늘에 닿고 땅을 덮을 지경인데 제자들은 우둔하여 그 만분의 일조차 표현하기에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정춘추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자, 네게 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아자는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옛날 사부님이 나를 편들고 총애한 것은 내가 그에게 아첨을 할 때 특별히 생각하여 남과 다른 아첨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이 바보들처럼 매일 하는 소리를 되풀이 하거나 백년이 가도 역시 그 진부하기 이를데 없는 말을 남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제자가 몰래 사부님의 신목왕정을 가지고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춘추는 두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무슨 이유가 있다는 것이냐?

아자는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젊었을 적에 오늘과 같이 절정에 이르지 않았을 때 여전히 왕정의 힘을 빌어 무공을 연마하는데 사용했겠지요?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은 어떤 사람이라도 사부님께서 하늘에 통하고 땅 속까지 뻗치는 신통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왕정으로 말하면 동물을 모으는 데 불과한 것이라 사부님의 조예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개똥벌레의 빛을 달빛과 햇빛에 견주는 것처럼 함께 논할 수 없는 것이죠. 사부님께서 그 왕정을 아무렇게나 내버리시지 않은 것은 묵은 정을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뭇 사제들이 호들갑스럽게 사부님께 그 왕정이 없어서는 절대 안되는 것처럼 수선을 피우며 그 왕정이 본문의 귀중한 보물이라고 말하면서 그 왕정을 잃게 된다면 그 영향이 중대한 것처럼 떠벌리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둔하기 이를데 없는 언행이고 그야말로 사부님의 신통력을 너무나 낮추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정춘추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음, 그말도 일리가있다. 그말도 일리가 있어.

아자는 다시 말했다.

그래서 제자는 다시 생각했죠. 우리 성숙파 무공의 고강함은 천하 어떤 문파에서도 미칠 수 없지만 그저 사부님께서는 커다란 아량으로 중원 무림인들과 똑같이 행동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친히 고귀하신 걸음을 옮기면서까지 중원으로 달려와 우물 안의 개구리라 할 수 있는 무림의 인사들을 가르쳐 놓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러나 중원 무림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만을 떨게 되고, 사부님이 그들에게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서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죠. 그리고 서로를 추켜세우며 그 사람은 당금 세상의 고인이니 저 사람은 무학의 명숙이니 하게 되었죠. 하지만 입으로는 요란하게 떠들면서도 누가 감히 우리 성숙파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사부님에게 몇 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던가요?

천하의 무학에 능통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부님의 무공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다는 것만 알았지 도대체 어느 정도로 깊이가 있는지에 대해선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을 못하죠. 이렇게 되자 고소 모용씨의 명성이 높아졌고 하남 소림사는 스스로 무림의 태산북두와 같은존재로 자칭하였고 심지어 농아선생이나 대리의 단씨 집안이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되어 버렸죠. 사부님, 정말 우스꽝스럽지 않으세요?

그녀의 음성은 맑고 고운 데다가 자세하게 예를 들어 설명을 하는지라 그야 말로 한마디 한마디가 정춘추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실로 뭇 제자들이 그저 무턱대고 칭송하는 것과는 격이 달랐다.

정춘추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점점 짙어졌고 눈은 실눈처럼 가늘어지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매우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이었다.

아자는 계속 말했다.

제자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뭐냐하면 사부님이 그토록 신통하신데 만약 중원으로 들어와 한두 수 보여 주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은 그 자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들에게 하늘 밖에 하늘이 있고 사람위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저는 방법을 강구해서 사부님을중원으로 모셔와 그 잘난척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알도록 해주려고 했어요.

그러나 평범한 수단을 써서는 천고 이래로 제일 고인이신 사부님을 모셔낼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사부님께서는 신분이 남과 다르니까 사부님을 중원으로 모시는 방법이 특별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자는 그 왕정을 빌리게 된 것입니다. 원래의 뜻은 바로 사부님으로 하여금 중원 땅으로 납시도록 하자는데 있었읍니다.

정춘추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네가 왕정을 가져간 것은 그야말로 충섬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아자는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제자에게 충성심만 있고 사사로운 욕심이 조금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춘추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사로운 욕심?

아자는 방긋 웃었다.

사부님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저는 성숙파의 제자가 아닙니까? 본문이 천하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이때 제자가 강호를 떠돌아 다니면 남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이것이야말로 이 제자의 사사로운 욕심이라 할 수 있읍니다.

정춘추는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말 한 번 잘 했다. 말 한 번 잘 했어. 내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그 누구도 너만큼 머리가 좋은 사람이 없다. 원래 네가 신목왕정을 훔쳐간 것은 역시 나의 위세를 떨치도록 하자는 데 있었구나. 헤헤해……너와 같이 영리하고 언변이 좋은 제자를 죽인다는 것은 너무나 애석한 노릇이고 또 이 사부의 곁에서 말로 심심한 마음을 달래 줄 사람도 없으면 나 역시 기분이 좋지는 않을게다. 그러나 이대로 덮어 두고 따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자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물론 이 제자를 너무 가볍게 용서하실 수는 없으실 거예요. 하지만 바다처럼 넓고 깊은 아량을 베푸신다면 모두가 사부님을 우러러보게 될 거예요.

정춘추는 말했다.

네가 그와 같은 말로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와 같은 말로 나를 속이려 한다는 것은 이 늙은이를 멍청이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냐? 그야 말로 그 심보가 크게 곱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너는 내가 너의 공력을 제거하고 너의 심맥을 끊어 놓는다면……

거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한마디 음성이 들려왔다.

사환, 주문을 받도록 하게!

정춘추는 결눈질해 보았다, 한 젊은 공자가 몸에 황삼을 걸치고 허리에 장검을 찬채 바로 옆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낮에 바둑

대회에서 자기가 해를 입히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모용복이 아닌가?

정춘추는 조금전 아자의 하는 말을 듣고 흐뭇해서 구름을 타고 하늘을두둥실 떠오르 듯 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을 뿐 아니라 극락세계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든데다, 동시에 뒷방에 있는 허죽이 창문으로 도망을 치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 동정에 줄곧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게에 한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모용복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암습을 가해 왔다면 정춘추 자신으로서는 크게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흠칫해서 안색이 변하였지만 즉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33. 북두칠성이 자리를 옮겨 천지가 어두어지다.(奈天昏地暗,斗轉星移)

모용복은 정춘추에게 아는척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정말 세상을 살다 보면 어디에선가 만나게 된다더니 조금전 대면을 하고 헤어진 이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이와 같이 보게 되었군요.

정춘추는 웃으며 그말을 받았다.

이거야말로 공자와 인연이 있는 게 아니겠소?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의 부하 몇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오늘 바둑대회에서 하마터면 그의 하찮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뻔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에게 도전해 오지 않겠는가? 평소 듣기에 고소모용씨의 무공은 해박하기 짝이 없어서 상대의 수법을 상대의 몸에 펼친다고 무림에 알려져 있지 않던가? 결코 헛소문만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바둑알을 던지는 암기의 재간은 정말 훌륭한 솜씨였다. 먼저번에 그가 바둑판을 보고 넋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 그 기회에 그를 제거하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다른 사람이 있어 구해 주었지. 그런 점으로 따져 볼 때 이 녀석의 무공은 고강하다 하나 다른 수법에 있어서는 별로 대단하지 않은가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자에게 말했다.

너는 만약에 내가 너의 무공을 제거하거나 너의 심맥을 끊거나, 너의 한 손이나 한 발을 자른다면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 목정이 있는 위치를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

아자는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넓으신 아량을 베푸어 주십시오. 제발……제발……제자가 터무니없이 지껄인 말을……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모용복은 웃으며 정춘추에게 말을 걸었다.

정 선생, 그토록 나이 많이 잡수신 분이 어찌 나이 어린 사람과 똑같이 하려고 하십니까? 자 자 자, 그러지 마시고 우리 함께 석 잔의 술을 비우면서 문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외부의 사람이 있는 곳에서 문호를 정리한다는 것은 너무 살풍경하지요.

정춘추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한 명의 성숙파 제자가 노기를 띠며 호통을 내질렀다.

네 녀석은 정말 아래위를 알아보지도 못하는구나! 우리 사부님으로 말하자면 무림의 지존이시다. 어찌 너와 같은 후배 녀석과 문무를 논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너는 무슨 자격으로 우리 사부님과 문무를 논하겠다는 것이냐?

그는 또 호통을 내질렀다.

네가 공손히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사 한다면 성숙노선께서는 후배를 이끌어 가르치기를 좋아하시니 어쩌면 너에게 두어 수 가르쳐 주실지 모른다. 그런데 너는 성숙노선과 문무를 함께 논하자고? 하하하! 그야말로 웃음을 금할 수가 없구나! 하하하하!

그는 두 번 소리내어 웃었는데 얼굴 표정은 야릇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그 웃음을 웃은 후에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얼굴에는 여전히 이상야릇하고 우스꽝스러운 웃음빛을 띄우고 있는것이 아닌가?

성숙파의 뭇 제자들은 그가 바로 사부님의 삼소도요산이라는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그들은 세 번 웃고 숨을 거둔 동문을 본 후 감히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으며 사부님의 눈초리와 마주칠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 속으로 생각 했다.

"그가 방금 한 몇 마디의 말 가운데 어느 구절이 사부님을 노하게 만들었을까? 그가한 몇 마디 말을 조심스럽게 연구해 보아 결코 다시는 그와 같은 말을 지껄이지 않도록 해야겠구나!"

한편 정춘추는 속으로 여간 울화가 치밀지 않았고 또한 두렵기조차 했다. 그는 조금 전 아자와 말을 할 때 소맷자락을 살짝 쳐들고 암암리에 삼소도요산의 독가루를 모용복에게 휘둘러 보냈다. 이 독가루는 무색무취하고 지극히 미세했다. 더군다나 이 무렵 날이 어둑어둑해졌고 반점의 객당에는 몽롱한 어두운빛이 감돌고 있어서 모용복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용복은 어떤 수단을 썼는지 그 삼소도요산을 자기 제자의 몸으로 날아가도록 만든 것이다.

한 사람의 제자를 죽게 한 것은 별로 애석히 여길 것이 없었지만 모용복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순간 손을 들거나 발을 들지도 않았는데 독가루를 다른 사람의 몸에다 옮겨 놓은 사실이 여간 놀랍지 않았다. 이는 결코 내력으로 되받아 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견문이 넓은 정춘추로서도 일시 그게 어떤 무공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 사람의 수법을 그사람의 몸에 펼친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삼소도요산을 날렸으니 그는 마땅히 그 독가루를 나에게 되돌려 보내야한다. 흥! 감히 호랑이 수염을 뽑으려 들다니!"

호랑이 수염을 뽑으려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손에 만져지는 것은 일곱 내지 여덟 가닥의 다 타버린 수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성을 내기는커녕 속으로 기뻐했다.

"소성하와 현난 노화상과 같이 견식이 뛰어나고 공력이 심후한 사람도 끝내는 이 노선의 손 아래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모용복은 아직도 젖비린내 나는 녀석인데 더 말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모용공자, 그대와 나는 정말 인연이 있는 모양이구려. 자,자,자, 한 잔의 술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리라.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 앞에 놓인 술잔이 수평으로 모용복에게 날아갔다. 한 방울의 술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만약 평소였다면 제자들은 이미 우뢰같은 고함을 질러 칭송했으리라. 그러나 조금전 동문이 이상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을 보고 아첨을 잘못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할까봐 겁부터 났다.

사부님의 의도를 완전히 짐작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경솔하게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한 소리의 환호성만은 생략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 않을 때 사부가 따지고 든다면 그야말로 또한 큰 벌을 받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술잔이 막 모용복의 앞으로 날아가게 되었을 때 뭇제자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터뜨렸다.

훌륭하다!

그런데 간이 유난히 작은 사람은 이런 환호성조차도 감히 내지르지 못하고 뭇 동문들이 부르짖고 난 후에야 자기가 환호성을 터뜨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머리에 떠올리고 황망히 외쳤다. 그러나 그 훌륭하다는 말은 결국 늦게 되어 다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와 맞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 세 사람은 뭇 동문들이 가득 꾸지람하는 빛을 담은 눈초리를 받게 되었고 대뜸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조여야했다.

모용복은 이때 한마디를 슬쩍 던졌다.

정 선생님의 이 한 잔술은 역시 귀하의 고제자에게 내리도록 하시지요.

그는 훅 하니 숨을 내불었다.

그 앞으로 날아갔던 술잔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서는 왼쪽에 서 있는 한명의 성숙파 제자 앞으로 날아갔다.

그는 입김을 불어 술잔을 밀어 보냈는데 손가락으로 술잔을 튕기는 것과 견주어 볼 때 어느 것이 어려운지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정춘추가 진 게 틀림없었다.

이때 성숙파 제자는 술잔이 자기 앞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미처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쳐 입을 열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너에게 마시라고 한거야.

그는 술잔을 모용복에게 던졌다. 순간 그는 처참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벌렁 쓰러지더니 다시는 꼼짝하지 못했다.

이번엔 뭇 제자들이 환히 알아 차리게 되었다. 사부가 술잔을 튕기게 되었을 때 손톱 속에 숨겨진 극독이 술잔에 문게 된 것임을 알았다. 모용복이 손가락을 내 밀어 술잔을 건드리게 되었다면 술을 입술에 갖다댈 필요가 없이 그 성숙파의 제자처럼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정춘추는 그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마음속으로 극도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 이렇게 된 이상뭇 제자들의 시선을 속일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일부러 여유있는 척해 보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 손으로 하나의 술잔을 들고 몸을 천천히 일으킨 후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 노부는 어떻게 하더라도 이 한 잔의 술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겠소.

그는 모용복의 앞으로 다가왔다.

모용복은 힐끗 쳐다보았다. 그 하얀 술잔의 술은 은연중 파란 빛이 감돌고 있어 한눈에도 무섭기 짝이 없는 독약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친히 술잔을 들고 다가오니 이제는 어떡할 도리가 없었다. 이때 정춘추는 탁자하나 정도의 간격을 두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모용복은 즉시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러자 정춘추가 들고 있던 술잔의 술이 갑자기 곧장 치솟아 올랐으며 파란 물줄기로 화하는 것이 아닌가?

정춘추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정말 대단하다!"

그는 상대방이 숨을 들이 마시게 된 후 내뿜으면서 그 물줄기를 자기에게 쏘아지게 되리라는 것을 내다보았다. 물론 그 술에 적중된다 하더라도 큰 장애는 있을 수 없지만 온 몸에 술 방울이 튀겨 낭패한 꼴을 보인다는 것은 역시 좋은 일이 못되었다. 그리하여 즉시 운기행공하여서는확, 소리가 나도록 그 물줄기를 향해 숨을 내뿜었다.

그 물줄기는 모용복의 코끝과 불과 반 자 정도의 간격을 둔 곳까지 쏘아졌다가 별안간 옆으로 비스듬히 방향을 틀었으며 둥글게 원을 그리며 그의 뒤통수를 향해 신속무비하게 쏘아져 나갔고 이어 한명의 성숙파 제자의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제자는 바야흐로 크게 입을 벌리고 환호성을 터트리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훌륭합니다"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한 줄기의 술이 그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물줄기의 기세는 너무도 신속하여 그는 여전히 신이 나서 "훌륭하다"는 소리를 내지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한소리를 내지른 이후에야 흠칫하더니 다급히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몸에서 기운이 쑥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고 맥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삽시간에 그의 온 얼굴이 새까맣게 변하더니 즉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독약이 이토록 무섭다는 데에 모용복 역시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강호로 떠돌아다닌 지 오래지만 이토록 패도적인 독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구나."

두 사람이 겨루는 마당에 성숙파의 제자가 잇따라 세 사람이나 죽었으니 그야말로 승부는 이미 판가름 났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춘추는여간 울화가 치밀지 않았다. 술잔을 탁자에 내려 놓는 즉시 손을 휘둘러서 일 장을 후려쳤다. 모용복은 오래 전부터 그의 화공대법에 대한 악명을 듣고있던 참이라 몸을 비스듬히 날려 피했다.

정춘추는 잇따라 삼장을 후려쳤고 모용복은 하나같이 잔재주라 할수 있는 신법을 펼쳐서 피했을 뿐 그의 손과 자기의 손이 맞닥뜨리도록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싸우면 싸울수록 빨리 돌아갔다. 조그만 반점에는 탁자와 걸상들이 가득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소가 협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서 실로 이리저리 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바로 탁자와 의자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데 전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주먹이나 장법을 교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탁자와 걸상들을 건드려 쓰러뜨리는 일이 없었다.

여러 제자들은 형세가 실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장풍에 조금이라도 스치게 된다면 목숨을 잃을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의 몸이 한장의 앎은 조각처럼 되도록 죽어라하고 벽에다 등을 찰싹 갖다붙이고 있어야 했다.

모용복은 공격보다 수비하는 때가 많았다. 장법은 정묘하고 기이하다 할 수 있었으나 감히 정춘추와 장법을 맞닥뜨릴 수 없었기 때문에 손을 쓸 때 자연 장애를 받게 되어 열세에 빠지게 되었다.

정춘추는 몇 초를 휘두른 후 모용복이 감히 자기와 일 장이라도 마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것은 자기의 화공대법을 두려워 하기 때문인 듯 했다. 상대방이 그와 같이 화공대법을 두려워 한다면 더욱 더 화공대법으로 모용복을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용복의 몸놀림이 여간 빠르지 않았고 손을 쓰는 것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라 모용복으로 하여금 자기와 일장이라도 마주치게 만든다는 것은 역시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다시 수장을 겨루게 되었을 때 정춘추는 한 가지의 방법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오른손을 마구 휘두르며 상대방을 핍박했다. 그러나 왼손은 약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척 가장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실을 일부러 애써 감추려는 태도를 피함으로써 왼손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모용복에게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척 했다.

모용복의 무공은 정순한데 상대방의 약점이 조금이라도 드러나게 되었을 때 어찌 알아차리지 못하겠는가?

모용복은 비스듬히 몸을 반 쯤 돌리면서 벼락같이 이 장을 후려쳤다. 잔뜩 벼르고 있었던 터라 날카릅기 이를데 없는 그의 이 장은 곧장 정춘추의 왼쪽 옆구리를 노렸다.

정춘추는 나직이 흠, 하더니 한 걸음 물러났을 뿐 감히 왼손을 뻗쳐 그 초식을 맞받지 못했다.

모용복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노괴물은 왼쪽 가슴과 왼쪽 옆구리 사이에 어떤 내상을 입은 모양이다."

그는 상대방의 약점을 안 다음부터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공세를 취했다.

물론 여전히 적의 오른쪽을 노리고 공세를 폈으나 내력을 응용한 초식은 전적으로 그의 왼쪽을 노리고 있었다.

다시 십여 초를 싸우게 되었을 때 정춘추는 왼손을 소맷자락 안으로 움츠렸고 오른손을 갈쿠리처럼 만들어 모용복의 얼굴을 할퀴려고 했다.

모용복은 비스듬히 피한 후 주먹을 들어 그의 왼쪽 옆구리를 똑바로 쳐 나갔다. 정춘추는 그의 그와 같은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상대방이 끝내 주먹을 뻗어내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하며 즉시 왼쪽 소맷자락을 떨쳐 모용복의 오른팔을 휘감으려고 했다. "너의 소매 바람이 아무리 세도 나를 상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팔에다 더욱 기운을 돋우어 그가 소매로 감으려는 수법을 맞받아내려고 했다. 그 순간 짝, 하는 소리가 나면서 모용복의 오른쪽 소맷자락의 한쪽이 크게 찢어져 나갔다.

모용복은 깜짝 놀라 그 주먹에 더욱 힘을 주어 내질렀다. 별안간 주먹 바깥쪽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상대방의 손아귀에 자기의 주먹이 들어가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일 초는 모용복이 예상하지 못했던 터였다. 모용복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이 노괴가 왼쪽에 상처를 입은 척 가장한 것은 원래 나를 유인하려는 계책이 었구나. 그런데 내가 그만 이 노괴의 술수에 말려들고 말았구나."

그는 속으로 후회했다.

"나는 너무 오만했다. 천하에 유명한 성숙노괴를 너무 얕보았구나! 군자의 원한은 십 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갚는다 하더라도 늦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어째서 일시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사전에 미리 만전지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위험을 무릅쓰고 왜 그에게 도전을하게 되었을까?"

이때 그로서는 뒤로 물러설 겨를이 없었다. 전신의 내력을 돋우어 곧장 주먹을 떨쳐내었다.

주먹으로 쏟아낸 내력은 대뜸 돌이 바다에 떨어지듯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모용복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이쿠!"

그는 정춘추와 싸우면서 줄곧 정신을 가다듬고 상대방이 화공대법을 자기의 몸에 쓰지 못하도록조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술수에 넘어가 역시 화공 대법과 맞서게 되고 말았다

모용복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만약에 내력을 계속 돋우어 대항을 한다면 아무리 강한 내력이라 해도 모조리 상대방에게 해소될 것이고 얼마되지 않은 시간에 공력을 깡그리 잃게 되어 폐인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 형편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내경을 안으로 움추려 들인다면 정춘추의 여러 가지 불가사의 할 정도로 무서운 독약이 그의 진기가 되돌아오는 길을 따라 바로 그의 경맥과 오장육부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 틀림없었다.

진퇴유곡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등뒤에서 누가 큰소리로 외쳤다.

사부님께서 가볍게 손을 휘두르시자 저 못난녀석은 어느덧 막다른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모용복은 뒤쪽으로 물러서며 왼손을 뻗쳐 그 성숙파 제자의 가슴팍을움켜잡았다.

이것은 고소모용씨 집안에서 가장 자랑하는 수법으로 상대방의 힘으로 상대방을 치는 재간으로서 이름은 두전성이(斗轉星移)라고 했다.

모용씨 집안의 사람이 상대방의 수법을 상대방의 몸에 펼친다는 신기에 가까운 수법은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게 되었을때 언제나 상대방이 명성을 떨친 재간을 상대방의 몸에 펼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용씨 집안의 사람들이 천하 각문 각파의 절기를 모조리 터득하고 정통한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기실 무림의 절기는 수천 수만 가지에 이르렀다. 아무리 총명하고 해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절기를 다 배울 수 는 없었다. 더군다나 절기라고 한다면 결코 일조 일석에 공을 들여 연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용씨 집안에는 이와 같이 교묘하기 이를데 없는 두전성이라는 수법이 있어 상대방이 어떤 무공을 펼친다 해도 하나같이 상대방의 힘을 전환시켜 오히려 후려치는 결과를 낳게 할 수 있었다.

소후창(銷喉槍)을 잘쓰는 사람이 창을 뻗쳐 모용씨 집안의 사람의 목을 찔르려 할 때 모용씨 집안 사람이 두전성이로 그 창끝을 되돌려 놓게 된다면 그 창은 바로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목을 찌르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사용되는 적절한 요령은 완전히 그의 집안에 전해 오는 비전의 요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단비도(斷臂刀)를 잘 쓰는 사람이 칼을 휘둘러 내려친다면 오히려 자기의 팔을 잘라내는 꼴이 될 것이다. 바로 같은 무기와 같은 초식에 의해 당하는 것이다.

모용씨 집안의 사람이 이와 같은 두전성이의 수법을 펼치는 것을 친히 목격 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그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이 실제에 있어 스스로를 죽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가 손을 쓰는 사람이 고강 하면 할수록 그 죽는 방법은 더욱 교묘했다. 그리고 모용씨 집안의 사람들이 만 약 일 대 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또한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자신이 없을 때는 이 두전성이라는재간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소 모용씨 집안의 이름은 강호를 크게 뒤흔들어 놓게 되었건만 참된 재간이 어떤 것인지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상대방의 무기나 주먹, 그리고 다리의 방향을 전환시켜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펼쳐 스스로 당하게 하는 이치는 전적으로 반탄(反彈)이라는 두 글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누가 한 주먹으로 벽을 치게 되었을 때 손 에 힘을 주면 줄 수록 주먹이 받게 되는 충격이 더 크게 되는 것처럼 무겁고 가볍거나 약하고 강하거나 하는 점은 상대방 스스로에 의해 결정되었다.

형체가 있는 무기나 주먹, 또는 발을 전환시키는 것은 그래도 쉬운 편이나 무형무질의 내력이나 기공을 전환시키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모용복은 바로 이와 같은 재간을 수 년간 갈고 닦았지만 역시 연륜이 얼마 되지 않아 절정의 경지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고, 정춘추와같은 일류의 고수를 상대로 하게 되었을 때 자기가 두전성이의 수법으로 상대방의 힘을 상대방에게 되돌려 상대방에게 해를 입힐 수 없었다.

정춘추가 화공대법을 펼치게 되었을 때 모용복은 그 화공대법을 전환시킬 상대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때 그 성숙파의 제자가 급히 아첨을 하느라고 소리를 쳐서 자기의 위치를 가르쳐준 셈이 되고 말았다.

모용복은 다급한 김에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성숙파의 제자를 움켜잡게 되고, 그 즉시 공력의 방향을 바꾸어 그 성숙파 제자에게 밀어보냈다. 그가 모험을 하면서 수단을 쓴 결과 뜻밖에도 효과가 나타났다.

성숙노괴는 본래 모용복의 공력을 해소시키고자 했는데 해소시키게 된것은 바로 자기 제자의 내공이 되고 말았다.

모용복이 한 번 시험하여 성공을 하게 되자 그야말로 죽음에서 목숨을 건진 꼴이라 즉시 좋은 기회를 붙잡고 늘어져 정춘추로 하여금 다른 궁리를 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움켜잡은 성숙파의 제자를 밀어 그 몸이 다른 한 명의 제자 몸에 부딪히게 했다.

이 두 번째 제자의 공력도 역시 정춘추의 화공대법이 이르자마자 신속히 해소되고 말았다.

정춘추는 모용복이 힘을 빌어서 타격을 입히는 방법으로 자기의 제자를 해치는 것을 보자 극도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만약 인재가 될 수 없는 제자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일단 그의 주먹을 놓은 다음 다시 붙잡으려고 한다면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녀석은 반드시 도망을 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성숙파에서는 다섯 명 의 제자가 죽음을 당했는데 그저 그의 반조각 소맷자락을 씻어 놓았을 뿐이니 성숙파에서 크게 패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성숙노선이 무슨 얼굴로 중원 땅에서 위세를 떨칠 수 있는가 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다시 손가락에 힘을 주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모용복의 주먹을 놔주려고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세 명의 제자가 공력이 해소되어 맥없이 망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은 마치 흡혈귀에게 몸안의 피를 모조리 빨린 꼴과 같았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성숙파 제자들은 경악하게 되었고 모용복이 재차 물러서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 하나같이 소리를 내지르며 피하려 했다.

모용복이 다시 손과 팔을 뻗치자 붙어 있던 성숙파의 세 제자가 풀썩 풀썩 쓰러졌다.

나머지 성숙파의 제자들은 사부가 모용복의 주먹을 놓지 않는 한 모용복이라는 녀석이 끊임없이 사부의 힘을 빌어 자기들을 해치게 되리라는사실을 알아 차리게 되었다. 따라서 뭇 제자들의 공력은 모조리 성숙노선에 의해 해소될 판 이었다. 하지만 그저 두려움을 느꼈을 뿐 그 누구도 감히 문을 박차고 도망을 치지 못했다. 그저 반점 안에서 낭패한 꼴로 독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뛸 뿐이었다.

이 조그만 가게가 얼마나 넓겠는가? 모용복이 손과 팔을 휘두르는 사이 다시 서너 명의 성숙파 제자들과 부딪히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그들도 맥없이 쓰러 지고 말았다.

이때 그는 이미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형세였으나 마음 속으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숙파의 제자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다 써 버리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 즉 성숙파의 제자들이 모조리 정춘추의 화공대법에 공력을 상실당하게 되었을 때, 어디 가서 자기를 대신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 이 됐다.

그는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잇따라 진력을 쏟아내어 정춘추의 손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정춘추는 제자가 한 사람 한 사람 모용복이 휘두르는 손짓에 따라 쓰러지는걸 보자 여간 울화가 치밀지 않았다.

정춘추는 수치와 분노에 사로잡혀 더욱 모용복의 주먹을 움켜잡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한 떼의 못난 제자들을 모조리 죽인다고 하더라도 이 녀석의 공력을 해소시킬 수 만 있다면 이 성숙노선이 고소 모용씨를 이기는 것이고 이 일은 천하를 진동시킬 것이다. 제자쯤 거둬들이는 것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며 이 세상에 아첨을 떠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그와 같이 생각을 하고 그는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는 한 점의 노기도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여유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치 자기가짜놓은 계책대로 되어간다는 듯한 태도였다.

성숙파의 뭇 제자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부가 쥐를 잡으려 하다가 독을 깨게 될까 두려워 모용복의 손을 놔주어 그들 모두가 공력을 모두 깡그리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해 주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정춘추가 시종 그토록 아무런 내색도 보이지 않자 요행스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두들 하나같이 놀라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부의 위엄 아래 눌려왔던 그들은 감히 도망칠 생각을 못 했고 또는 사부에게 애걸하여 잠시라도 노선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녀석을 놓아 주십사 하고 애걸하지도 못했다.

이때 정춘추는 사방을 살펴봤다. 그러고 보니 뭇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만이 이리저리 피하지 않고 있었다.

한사람은 유탄지로서 한 모퉁이에서 무쇠탈을 쓴 머리통을 두 발 사이에 쳐박고 있었는데 몹시 두려운 듯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자였다.

안색이 창백해진 채 역시 다른 한 모퉁이에 몸을 움츠린 채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정춘추는 호통을 내질렀다.

아자!

아자는 한창 싸움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갑자기 사부가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자 일순 움찔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부님, 어르신께서는 크게 위세를 떨쳐……

그 반 마디를 말하고는 겸연쩍게 웃을 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사부 어르신 께서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이 모두 사부님의 문하 제자이니 어떻게 칭송을 해야 할지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춘추는 모용복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지라 그렇지 않아도 이미 초조해질 대로 초조해져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아자의 웃음 속에 비웃는 듯한 빛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미칠 듯이 노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왼손 소맷자락을 휘둘러 탁자 위의 젓가락을 날려 곧장 아자의 두눈을 향해 쏘아가도록 했다.

아자는 부르짖었다.

어마!

그녀는 손을 뻗쳐 날아드는 젓가락을 내려치려고 했다. 그러나 끝내 한걸음 늦고 말았다. 젓가락 끝이 어느덧 그녀의 두 눈을 때렸다. 눈동자가 근질근질하게 되면서 마비되어 왔다.

재빨리 소맷자락으로 눈알을 비볐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눈앞에 허연 그림자가 오락가락할 뿐인데 그것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덧 칠흑과 같은 어둠만이 펼쳐져 있는것이 아닌가?

그녀는 깜짝 놀라 미친 듯 부르짖었다.

내 눈!……내 눈!……나외 눈이……볼 수없게 되었어요.

별안간 차가운 기운이 몸으로 뻗어 왔다. 곧이어 한 팔이 뻗쳐져 그녀의 허리께를 안더니 그녀를 안고 달려 나갔다.

아자는 부르짖었다.

내 눈!……내 눈!……

그때 뒤에서 펑,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두 손바닥이 서로 맞닥뜨리는 것 같았다.

아자는 몽롱한 의식 속에 어렴풋이 모용복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만 실례하겠소. 성숙 노괴, 다음에 만납시다……

아자는 몸에 뼈를 에이는 듯한 냉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귓가로 휙,하니 바람소리가 일었다.

어름보다 더 차가운 사람에게 안겨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너무나 추워 이를 딱딱 마주치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너무 춥다……나의 눈이……아이 추워!

그 사람은 말했다.

조금만 참으시오. 우리가 저 숲속으로 도망치면 성숙 노선은 우리를 찾지 못할 것이오.

그는 입으로 말을 하면서 발을 끊임없이 놀려 여전히 미친 듯 달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 아자는 그가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은 그녀를 가볍게 내려놓았다.

몸 아래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한 무더기의 말라 비틀어진 나뭇잎 위에 내려놓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말했다.

소저, 그대의 눈이 어떻게 되었소?

아자는 두 눈이 심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 죽어라 하고 두 눈을 부릅 떴으나 아무 것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은 모두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이제서야 자기 두 눈이 정춘추의 독약 때문에 멀게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성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나의……나의 눈이 망가졌어! 나는……나는소경이 되었어!

그사람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위로했다.

어쩌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자는 노해 부르짖었다.

정 노괴의 독약이 얼마나 무서운데 치료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당신은사람을 속이는군요. 내 눈이 멀게 되었어요. 내 눈이 멀게 되었어요.

그녀는 다시 소리내어 울었다. 그사람은 달래듯 말했다.

저쪽에 조그만 개울이 있으니 우리 저쪽으로 가서 눈안의 독약을 깨끗이 씻어 냅시다.

그는 그녀의 오른손을 잡고 가볍게 끌어당겼다.

아자는 그의 손이 기이하도록 차가운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움츠렸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손을 놓았다. 아자는 두 걸음 옮기다가 하마터면 쓰러 질 뻔했다.

그사람은 말했다.

조심하시오.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 아자는 손을 움츠리지 않고 그가 이끄는대로 개울가로 갔다.

그 사람은 말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요. 여기가 바로 개울가예요.

아자는 개울가에 꿇어 앉아 두 손으로 개울물을 떠서 두 눈을 씻었다. 시원한 개울물이 눈알에 닿게 되자 아픈 것이 차차 멈추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온 세상은 캄캄했으며 시종 밝은 빛 반점도 바라볼 수 없었다. 삽시간에 절망과 서글픔,분노,그리고 좌절감등 만가지 생각이 끓어오르게 되었다.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며 두 발로 개울물을 마구 차면서 울부짖었다.

당신은 거짓말을 했어요! 거짓말을 한 거예요! 나의 눈은 멀고 말았어요! 멀고 말았단 말이에요!

그 사람은 말했다.

소저,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오. 내 그대의 곁을 떠나지 않을테니 그대는……안심하시오.

아자는 마음이 약간 놓여 물었다.

그대……그대는 누구인가요?

그 사람은 말했다.

저는……저는……

아자는 말했다.

미안해요. 그리고 저의 목숨을 살려 주신 데 대하여 정말 감사드려요. 그런데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나요?

그 사람은 말했다.

저는……저를……소저는 모르실 겁니다.

아자는 말했다.

그대는 성명마저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으면서 나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속이는 거예요? 나의……나의 눈이 멀게 되었어요. 나는……나는 역시 죽는 게 낫겠어요.

그녀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은 그녀를 달랬다.

소저, 결코 죽어서는 안돼요. 나는……정말 영원히 그대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하겠소. 소저가 나로 하여금 소저를 모시도록 한다면 나는 영원히……영원히 그대의 곁을 떠나지 않겠소.

아자는 부르짖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은 날 속이고 있어요! 당신은 내가 죽지 못하도록 속이고 있는거예요. 나는 죽을래요! 눈이 멀게 된 이상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한단말이에요?

그 사람은 말했다.

난 결코 그대를 속이지 않소. 만약에 내가 그대를 떠나게 된다면 나는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것이오.

그 어조는 초조하고 다급했으며 진정이 어려 있었다.

아자는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죠?

그 사람은 대답했다.

저는……저는 취현장……아니, 아니에요. 내 성은 장(莊)씨이며 이름은 취현(聚賢)이라고해요.

아자를 구한 사람은 바로 취현장의 소상주였던 유탄지였다.

아자는 말했다.

알고 보니 장……장 선배님이었군요? 절 구해주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유탄지는 말했다.

나는 그대를 구해서 성숙 노선의 독수에서 벗어나도록 하게 된데 대하여 마음 속으로 무척 기뻐하고 있으니 그대는 나에게 고맙다고 말할 필요가 없소. 나는 또 선배가 아니고 그저 그대보다 몇 살 위일 뿐이오.

아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그대를 장오라버니라고 부를께요.

유탄지는 마음속으로 너무 기뻐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감당할 수 없소이다.

아자는 입을 열었다.

장오라버니,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유탄지는 말했다.

그대는 부탁이라는 말씀을 하지 말고 그저 분부가 있으면 분부를 내리도록 하시구려.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를 위해 힘을 다해 처리해 드리리다.

아자는 방긋 웃었다.

그대와 나는 서로 모르는 처지인데 어째서 저에게 이토록 좋게 대하나요?

유탄지는 말했다.

서로 모르는 것은 사실이오. 일찌기 난 그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그대 역시 나를 본 적이 없소이다, 사실……우리는 오늘 처음 대면을 한것이죠.

아자는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러고도 대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영원히 그대를 바라볼 수 없게 되었어요.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눈물을 흘렸다.

유탄지는 재빨리 말했다.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외다.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외다.

아자는 물었다.

그것은 어째서인가요?

유탄지는 말했다.

저는……저의 얼굴은 무척 보기 흉하다오. 소저가 만약 보게 된다면 틀림 없이 불쾌하게 여길 것이외다.

아자는 방긋 웃었다.

그대는 또 거짓말을 하는군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희귀하고 야릇한사람도 보았어요. 나에게 한 명의 하인이 있었어요. 그는 머리에 무쇠탈을 쓰고 있었으며 그 무쇠탈을 영원히 벗을 수 없었어요. 그 모양이야말로 보기 흉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죠. 만약 그대가 보게 된다면 사흘 낮 밤을 두고 웃을 거예요. 그대는 보고 싶지 않나요?

유탄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나는 보고 싶지 않소이다.

유탄지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아자는 말했다.

그대의 무공이 이토록 뛰어나니 정말 좋겠어요. 나를 안고 달려올 때 거의 우리 형부처럼 빠르더군요. 그런데 다만 호기심이 적어서 무쇠탈을 쓴 사람도 보려 하지 않는군요. 장오라버니, 그 철두인(鐵頭人)은 정말 재미있어요. 내가 그에게 재주를 넘도록 해서 그대에게 보여 드릴게요. 그의 무쇠 머리를 사자나 호랑이의 울안으로 디밀어 야수가 그의 무쇠머리를 물도록 해드리겠어요. 그런가 하면 다시 사람을 시켜 그를 연처럼 하늘 위로 떠오르게 하겠어요. 그것은 정말 재미있어요.

유탄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잇따라 말했다.

나는 보지 않겠소. 나는 정말 보지 않겠소.

아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요 그대는 조금 전 내가 어떤 부탁을 하더라도, 그대가 목숨을 버리는 일이 있는 한이 있어도, 나의 부탁을 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모두 사람을 속이는 거였군요.

유탄지는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결코 그대를 속이지는 않소. 소저는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하는 것이오?

아자는 말했다.

나는 형부의 곁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는 요나라의 남경성에 있어요. 장오라버니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줘요.

유탄지는 머리속이 어지러워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자는 물었다.

왜 그러죠? 싫은가요?

유탄지는 말했다.

아니오……싫은 것이 아니오……하지만 나는 요나라 남경성으로 가고 싶지 않소.

아자는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재미있는 무쇠탈을 쓴 어릿광대를 보라고 해도 그대는 싫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를 우리 형부 곁으로 데려다 달라고 해도 그대는 싫다고 했으니, 나는 혼자 떠나는 수 밖에 없군요.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두 손을 내밀어 앞으로 가려고 했다.

유탄지는 말했다.

내가 그대를 모시고 가겠소. 그대 혼자……어떻게 가겠소?

유탄지는 아자의 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조그만 손을 붙잡고 그녀와 함께 숲속에서 걸어나왔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천천히 걸어갈 수만 있다면 팔층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끝없이 기쁘기만 할 것이다."

막 큰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한떼의 거지들이 다가왔다. 앞장을 선 사람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편이었는데, 얼굴은 꽤 청수했다. 바로 개방의 대지분타 타주인 전관청이었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그날 나의 사부에게 독상(毒傷)을 입었는데도 죽지 않았구나."

그는 그들과 마주치기가 싫어 재빨리 아자를 끌고 큰길에서 벗어나 황량한 들판길로 나아가려 했다. 아자는 땅바닥이 평탄하지 못한 것을 느끼고 물었다.

왜 그러죠?

유탄지가 뭐라고 미처 대답하기 전에 전관청이 이미 두 사람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와 앞을 막으며 날카로운 어조로 호통을 질렀다.

슬금슬금 피하자는 것인데 무엇하는 짓이지? 당신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게 뭐야?

유탄지는 크게 다급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철두인(鐵頭人)이라는 한 마디를 하게 된다면 아자 소저는 즉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고 다시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녀가 여전히 나에게 남경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 달라고할지 모르나, 결코 나에게 손을 잡히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일시 어떻게 해야될지 그는 알지 못했다. 돌연, 그는 무릎을 꿇고 잇따라 큰절을 몇 번 했다. 그러면서 크게 손짓을 해서는 전관청에게 자기의 참 모습을 들추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전관청은 그가 손짓을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거요?

유탄지는 아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고 손을 흔들어 보인 후 다시 자기의 입을 손가락질 하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전관청은 아자의 두 눈이 이미 멀게 된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따라서 어렴풋이 이 철두인이 자기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크게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개방의 제자들이 모두 다 가까이 다가왔다.

한 사람이 유탄지의 머리를 가리키고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정말 희귀하구나! 그 철……

유탄지는 벼락같이 앞으로 몸을 날려 일 장을 후려쳤다. 그 개방의 제자는 급히 손을 올려 막으려고 했다. 우지끈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의 팔뼈와 늑골이 일제히 부러지면서, 몸뚱아리는 뒤로 일 장 남짓 날아가더니 땅바닥에 떨어져서는 즉시 숨을 거두었다.

뭇 제자들은 놀람과 분노를 느꼈다. 다섯 사람이 동시에 유탄지에게 공격해 왔다.

유탄지는 두 손을 마구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때리고 후려쳤다.

그의 무공은 매우 얕은 편이었다. 사실 이 개방의 제자들에 비해서 훨씬 뒤 떨어진 편이었으나 그의 손이 이르는 곳마다 우지끈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어이쿠, 아악, 하는 비명 소리가 잇따라 일었다.

그런가 하면 펑펑,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다섯 명의 개방제자가 나가떨어 지게 되었는데 모두 땅바닥에 닿는 즉시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머지 사람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

그들은 유탄지와 아자를 한복판에 두고 에워쌌다. 하지만 감히 앞으로 나서서 공격은 하지 못했다.

유탄지는 다시 전관청을 향해 무릎을 꿇고 몇 번 절을 했다. 그리고 재차 손짓을 했다. 즉 아자(阿紫)에게 손가락질하고 자기의 무쇠 머리를 가리킨 후 끊임없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전관청은 그가 단숨에 여섯 명의 거지를죽이는 것을 보고, 공력의 심후함은 한평생 보기 드문 정도라고 여겼다.

자기가 만약 앞으로 나아가서 손을 쓴다 하더라도 이길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다시 자기쪽을 향해 꿇어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을 보고 정말 불가사의한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손짓을 해보였다. 손가락으로 아자를 가리켜 보이고 그의 무쇠탈을 쓴 머리를 가르켜 보이고 자기의 입을 가리켜 보이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유탄지는 기뻐서 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전관청은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이 사람의 무공이 기이하도록 높으나 내가 그의 비밀을 누설할까봐 몹시 두려워하는구나. 그렇다면 이 일로 그를 위협하여 내 휘하에 거둬들여서 이용 할 수도 있겠구나."

그는 즉시 부하 거지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도록 해라.

유탄지는 더욱 더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재차 그에게 몇 번의 절을 했다.

아자는 물었다.

장(莊) 오라버니, 어떤 사람이에요? 그대는 몇 사람이나죽였나요?

유탄지는 말했다.

개방의 친구들인데, 모두 약간의 오해를 하게 되었소. 이 분은 대지 분타의 전 타주이시며, 어질고 의리가 있는 분으로 정말 좋은 분이라 할 수 있소. 나는 언제나 이분을 존경하여 왔소. 내가……실수를 하여 형제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 데 대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거지들에게 읍을 해 보였다.

아자는 물었다.

개방에도 좋은 사람이 있나요? 장오라버니, 그대의 무공이 그토록 훌륭하니 차라리 그들을 모두 죽여서 저의 형부의 한을 풀어 주도록 해요.

유탄지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그것은 오해이외다. 나는 전 타주와 절친한 친구이외다. 그는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 나는 전 타주에게 지금의 사정을 설명해 드려야겠소.

그는 전관청에게 손짓을 했다.

전관청은 그가 자기를 알아보는 것을 보고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보기에 전혀 악의(惡意)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 즉시 그를 따라십 여장 밖으로 걸어갔다.

유탄지는 아자와 멀리 떨어졌다.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는 결코 자기네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하자, 두손을 맞잡아 보인 후 입을 열었다.

전 타주, 이 형제의 참모습을 감추어 주신 데 대한 큰 은덕은 결코 잊지 않겠소이다.

전관청은 말했다.

지금의 사정은 이 형제로서는 전혀 아리송하기만 하구려. 형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유탄지는 말했다.

형제의 성은 장씨(莊)라고 합니다. 이름은 취현(聚賢)이라고 하지요. 불행한 일을 당하여 머리에 이 같은 것을 뒤집어쓰게 되었는데 저 소저에게 알려서는 안된답니다.

전관청은 그가 말을 하면서도 두 눈으로그저 아자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무척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래서 어느정도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소녀는 정말 아름답게 생겼다. 이 철두인은 틀림없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자기의 무쇠탈을 뒤집어쓴 괴상한 꼴을 알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한 전관청은 물었다.

그런데 장형은 어떻게 불초를 알아보시었소?

유탄지는 대답했다.

귀방(貴幇)의 대지분타(大智分舵)에서 모임을 열고 방주(幇主)를 추대하는 일을 상의하게 되었을때 이 형제는 마침 옆에서 그 누가 전타주라고 호칭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형제가 오늘 실수하여 귀방의 몇 분 형제들을 해치게 된 것은 실로……실로 잘못된 일이라 할수 있으나 아무쪼록 전 타주께서 용서해 주십시오.

전관청은 말했다.

모두 오해에서 빚어진 것이니 개의치 마시구료. 장형, 둘러쓰고 있는그 물건에 대해서 이 형제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겠소. 그리고 나중에 이 형제가 수하들에게 분부해서 그 누구도 전혀 소문을내지 못하도록 하겠소이다.

유탄지는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연신 읍을 하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감사합니다.

전관청은 말했다.

그러나 장 형과 저 소녀가 손을 잡고 길을가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 띄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나서는 마구 소리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외다. 그때 장 형이 그들을 아무리 죽인다 하더라도 때는 늦고 말지요.

유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아자를 자기가 구했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만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줄곧 이 일을 생각지 못했는데 이때 전관청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지라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말을 더듬거렸다.

저는……저는 그녀와 사람이 없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을 수 밖에 없군요.

전관청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저 소저가 의심을 하기 쉽지요. 장형이 저 소저와 부부로 맺어지게 된다면 그녀는 조만간 발견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유탄지는 가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부부로 맺어진다는 것은……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그것은……있을 수 없는 일이죠. 나에제 무슨……자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하지만……정말 난처하군요.

전관청은 말했다.

장 형, 그대가 이 몸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그대의 친구라고 여기고 이야기하니, 나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소. 친구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으니 자연 친구를 위해 좋은 방법을 강구해 보지 않을 수 없구려. 이렇게 하지요. 우리 함께 앞의 고을로 들어가서 커다란 한 채의 수레를 빌어서 그대와 저 소저가 수레 안에 타도록 하시오. 그렇게 된다면 그 누구도 그대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외다.

유탄지는 크게 기뻤다. 아자와 함께 한 수레를 탄다는 것은 신선 놀음보다 더 즐거운 일이라 생각하고 재빨리 말했다.

맞습니다. 전 타주의 생각은 정말 고명합니다.

전관청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방법을 강구해서 장형의 그 무쇠탈을 제거하도록 합시다. 이 형제가 보장을 하건대 저 소저는 영원히 장형에게 그와 같은 검연쩍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될 것이외다. 장형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털썩 하니 유탄지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전관청에게 끊임없이 절을 했다. 무쇠탈이 땅바닥에 닿는 소리가 덩덩덩, 울려펴졌다.

전관청 역시 무릎을 꿇고 반례했다.

장 형이 이와 같이 큰 절을 하니 형제가어떻게 감당을 할수있겠소? 형이 만약에 이 몸을 밉게 보시지 않는다면 우리 두사람은 의형제를 맺는 것이 어떻 겠소?

유탄지는 기뻐서 발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이 형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대와 같은 한분의 지혜가 많은 형님이 있어 저의 앞 길을 밝혀 준다면 이 형제가 바라던 바가 아니겠습니다

전관청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이 형님이 그대보나 몇 살 더 위이니, 이제 더 겸손하지 않고 그 대를 형제라부르겠소.

정춘추와 소성하가 요란하제 싸우고 있을 때에도, 단예의 시선은 시종 왕어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왕어언의 시선은 가득 정을 담은채, 그녀의 고종오라버니인 모용복에게 못박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예와 왕어언의 시선은 마주칠 수가 없었다.

정춘추가 크게 패해서 달아나고 허죽과 소요파의 제자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모용복 일행은 그 자리에서 떠났다. 단예 역시 자연스럽게 왕어언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고개에서 내려오자, 모용복은 단예의 두손을 맞잡았다.

단 형, 오늘 이렇게 만나서 반가왔습니다. 그럼 이만 작별을 하죠.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단예는 말했다.

정말 만나서 반가왔습니다. 이만 작별을 하고 다음에 다시 만나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왕어언에게 쏠려 있었다. 모용복은속으로 불쾌하게 생각하고, 코웃음을 친 후 몸을 돌렸다. 단예는 그래도 미련이 남아 뒤따라갔다.

포부동은 두손을 들어 단예의 앞을 가로막았다.

단공자, 그대가 오늘 손을 써서 우리 공자를 도와주신 데 대해서 이 포모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오.

단예는 말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포부동은 말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사의를 표했으니 우리 서로 빚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소이다. 그런데 그대가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우리 왕소저를 쳐다보고 있는 행동이 무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거기다가 지금 또다시 따라 오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이오. 그대는 선비이신데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말도 모르시오? 이 포모는 지금 몸에 힘이 없어 전혀 기운을 쓸 수가 없으나 사람을 욕할 기운은 아직 남아 있소.

단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포 형은 역시 예의가 아니면 따르지 않도록 하시오. 나도 예의가 아니면 따르지 않도록 하겠오.

포부동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야 옳다고 할 수 있소이다.

그는 몸을 돌려 모용복의 뒤를 따라갔다.

단예는 왕어언의 뒷모습이 나무들에 의해서 가려질 때 까지 눈으로 전송을 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사라진 이후에도 멍하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주단신이 말했다.

공자, 우리도 가지요!

단예는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야지요.

그러나 그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주단신이 세 번이나 재촉을 해서야 겨우 고득성이 끌고 온 말에 올라탔다. 그는 말등에 올라랐으나 시선은 여전히 왕어언이 떠나간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예는 그 날 서신을 전관청에게 전해 준 이후 즉시 말을 타고 달려가 단정순에게 인사를 올릴 수 있었다.

부자는 오랫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원성죽은 더욱더 이 소왕자에게 호감을 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자는 이미 말없이 떠난후 여서 두 남매는 대면을 하지 못했다. 원성죽과 단정순은 아자의 일을 말하기가 거북하여 단예에게 언급을 하지 않았다.

십여 일이 지나게 되었을때, 최백천과 과언지 두사람 역시 찾아와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들 사숙질은 소주 쇄금운소축에서 단예와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후 백방으로 찾았으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하남 복우산의 자기파 사람으로부터 대리 진남왕이 하남에 와 있으며 바로 복우산 부근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달려왔던 것이다. 그들은 단예가 무사한 것을 보자 더욱 기뻐했다.

단예는 부친의 곁에서 천륜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우 기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왕어언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날로 더해갔다. 바둑대회 기간이 다가오자 그는 부친의 허가를 받고 고득성 등을 데리고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아니나다를까,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 그 바둑대회에서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만남은 부질없이 근심과 고통을 더하도록 만들었다. 도대체 만난 것이 좋았는지 만나지 않은 것이 좋았는지 그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예의 일행은 모용복 등과 헤어진 후 이십여 리 길을 달렸다. 그때 맞은편 대로에서 크게 먼지가 이는 가운데 십여 필의 말이 달려왔다.

바로 대리국의 삼공인 범화, 화혁간, 파천석, 그리고 대리에서 데리고 온 뭇 위사들이었다. 일행은 말을 달려 가까이 다가와 일제히 말에서 내려 단예에게 절을 했다.

원래 뭇 사람들은 단정순의 명령을 받고, 응접차 나선 것이었다. 혹시 총변선생의 바둑대회에서 어떤 위험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염려한것이다.

더구나 단연경까지도 참가했다는 말을 듣고 단예에게 단연경이 손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겼으나 모두 손바닥에 땀을 쥐기도 했다.

주단신은 슬그머니 범화등 세 사람에게 단예가 바둑대회에서 고소 모용씨 집안의 한 어여쁜 소저에게 빠져서는 눈 한번 돌리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든가 어떻게 넋을 잃고 있었다든가, 또 따라가려고 했는데 다행히 상대방에서 꾸지람을 듣고 물러서게 되었다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범화등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속으로 똑같은 생각을 했다.

소왕자에게 풍류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성이며 가문 대대로 이어받은 유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로서 그가 자기 친 누이동생인 목 소저에 대한 그리운 정을 잊어 버릴 수 있게 될테니, 크게 좋은 일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해가 질 무렵 일행은 객점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법화는 강남으로 갔던 일을 이야기했다.

공자, 모용씨 집안사람들은 야릇하기 이를데 없었소이다. 이후 만나게 되더라도 조심해야 할 것이외다.

그게 무슨말씀이죠?

범화는 말했다.

이번 우리 세 사람이 왕야의 명을 받들고 소주 연자오 모용씨 집안으로 찾아간 것은 소림파 현비대사가 모용씨 집안에게 해를 입은 것이 아닌지 그 어떤 단서라도 찾아낼까해서 살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최백천과 과언지는 무척 관심어린 어조로 일제히 물었다

세 분은 그어떤 단서라도 찾아냈습니까?

범화는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은 나서서 공공연히 방문한 것이 아니고 그저 몰래 살펴보았소이다. 그런데 모용씨의 집안에는 남녀 주인이 없고 그저 시녀와 하인들만이 남아 있었소이다. 그 넓다란 장원의 가사를 나이 어린 소저가 이끌어가고 있더구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벽이란 소저는 무척 좋은분이죠. 세분은 그녀를 해치지 않았겠죠?

법화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없죠. 우리는 잇따라 며칠 밤을 두고 모용씨 장원의 여러 곳을 살펴 보았으나 아무런 이상도 없었지요, 그런데 파형제가 갑자기 그 번승 구마지가 공자를 대리에서 강남으로 모셔와서 모용선생의 무덤 앞으로 찾아가 제를 지내겠다고 한말을 상기하게 되었죠.

최백천은입을 열었다.

그랬죠 그런데 모용장원의 그나이 어린 시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오랑캐 중을 무덤 앞으로 데리고가서 제사를 올리도록 하지 않았죠. 다행히 그랬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그 오랑캐 중의 독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소이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아벽 두 소저는 그야말로 정말 좋은 사람이외다. 지금 그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파천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들은 창밖에서 사흘 밤이나 아벽 소서가 남자의 장포를 짓고 있 는 것을 보았죠.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더군요. "공자께서는 밖에 계시니까 무척 추울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공자께서는 언제쯤 돌아오시게 되나요?" 그녀가 짓는 옷은 공자에게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까?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외다 그녀는 모용공자의 옷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파천석은 말했다.

그렇군요 우리가 보기에도 그 시녀는 정신을 빠뜨린 채 그녀의 공자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세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간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하더군요.

그가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은 단예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를 본받아 곳곳에 정을주지 않도록 하려는 것 이었다. 아벽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용공자 뿐이니 단공자는 그녀에 대해서 쓸데없는 생각을 갖지 말라는 충고이기도 했다.

단예는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는 준수하고 우아하기 짝이 없으니 그러한 일도 무리가 아니죠. 정말 무리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사촌지간이고 어릴 때부터 소꼽 친구로 자라났으니까....

법화, 파천석 등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이 어린 시녀와 모용 공자가 어릴 때 소꼽 친구라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어찌 사촌간이 된다는 것일까!"

그들이 어찌 단예가 왕어언을 두고 한 말인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최백천은 물었다.

범 사마, 그리고 파사공, 그 번승이 모용 선생의 무덤 앞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겠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 이지요? 혹시 우리 사형의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범화는 말했다

내가 이 일을 들먹이게 된 것은 여러분들께서 상세히 참고하시고 연구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화 형님은 "무덤"이라는 말을 듣자 대뜸 손이 근질거리는 듯 말했죠. "어쩌면 그 늙은이의 무덤 속에는 이상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니 우리가 파고 들어가 살펴보기로 하세." 그러나 파 형은 불찬성이었죠. 고소모용씨로 말하면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데 우리 단씨 집안에서 그의 무덤을 파헤치게 된다면 너무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화 형은 우리들이 살그머니 지하 밑으로 파고 들어가게 된다면 귀신도 모를터인데 그 누가 알겠느냐고 굳이 우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두사람은 그의 고집을 꺾을 수없어 그의 말을 따르게 되었지요. 그 무덤은 바로 장원의 뒤에 모셔져 있었는데 매우 외지고 은밀한 곳이어서 정말 쉽게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세 사람은 옛날의 경험을 살려서 무덤을 발견하고 땅굴을 파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 관뚜껑을 열어 보게 되었지요. 최 형, 최 형은 우리가 무엇을 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최백천과 과언지는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범화는 말했다.

관은 빈 것이었습니다. 시체가 없었습니다.

최백천과 과언지 두 사람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한참 동안 다물지를 못했다. 한참 후에야 최백천은 무릎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 모용박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에게 중원으로 나아가 곳곳에 얼굴을 내밀도록 하고 그 자신은 수천 리 밖에서 사람을 죽여 신비한척 일을 꾸민 것입니다. 우리 사형...우리 사형은 모용박이라는 악적에게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범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 형도 말하지 않았소! 모용박의 무공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사람을 죽일 때 다른 수단을 얼마든지 쓸수있는데 어째서 반드시 그대의 수법으로 그대의 몸에 펼치는 재간을 펼쳐 고소모용씨가 손을썼다는 것을 알도록 하겠느냐 말이오. 만약 무림에서 그의 무서움을 알도록 하자는 뜻이었다면, 또 어째서 거짓으로 죽은 척한다는 말이오! 그리고 또 화 형에게 그러한 재간이 없었다면 그 누가 이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겠소!

단예는 말했다.

천하각문 각파의 절기는 수천, 수만이나 되죠. 그리고 일일이 그 가운데의 내력과 사연을 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인데도 그녀는 어떤 무공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다 안단말입니다.

최백천은 단예가 왕어언을 두고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모용씨 집안사람이 그랬다는줄 알고 입을 열었다.

그렇소, 우리 사형의 "천령천렬"이라고 하는 일 초는 우리 복우파에서 남에게 전수하지 않는 무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알고 그와 같은 절초로써 우리 사형의 목숨을 해쳤을까요?

단예는 그저 온통 왕어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지라 최백천이 말하는 상대가 왕어언이라고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그녀는 이해하죠. 그러나 그녀에게는 닭 잡을 힘조차 없습니다. 각문 각파의 무공을 알고 있기는 하나, 무공은 일 초도 펼칠 줄 모르며 더구나 남의 목숨을 해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죠.

뭇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앉다 그리고 잠시 후 일제히 고개를가로 저었다.

아자의 두눈이 정춘추의 독에 멀고 유탄지가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그녀를 가로채듯이 해서 달아나게 되자 정춘추의 심신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따라서 손가락의 내력이 풀어지게 되었다.

모용복은 바로 그와 간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전성이라는 절기를 펼쳐 내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정춘추의 다섯손가락은 한 제자의 팔을 움켜쥐게 되었고, 모용복의 주먹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 순간 모용복은 몸을 밖으로 날리며 껄껄 웃었다.

이만 실례하겠소. 다음에 만납시다.

그는 경공법을 펼쳐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나가고 말았다.

이번 싸움에 그는 성숙파의 제자 이십여 명에게 상처를 입히고 전승을 거둔후, 끝내 정춘추가 암암리에 그를 해쳐 자결을 하도록 만들려고 했던 사실에 대한 앙갚음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후에 이르러서 무사히 빠져나오게 된 것은 실로 요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길을 오면서 조금 전의 광경을 돌이켜 볼 때 그야말로 절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왕어언과 등백천 등의 일행과 떠난 후 객점에서 푹 파묻힌 채 바깥 출입을 삼가하여 등백천등의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수일이 지난후 포부동과 풍파악 두사람의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었고, 곧이어 등백천과 공야건의 몸도 회복되었다. 여섯 사람은 아주의 행방을몰라 매우 염려했다. 그들은 즉시 낙양으로 가서 수소문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낙양에서 전혀 소식을 얻을 수가 없게 되자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며 수소문을 했다. 이 날 그들 여섯 명은 길을 쫓느라고 유숙할 곳을 지나쳐 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날이 어두울 때까지 걷게 되었으나여전히 산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발길에 걸렸다. 풍파악은 입을열었다.

우리가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습니다. 앞쪽의 모퉁이를 돌아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잘못될 것 같은데요.

등백천은말했다.

어떻게 되었든 동굴이나 황량한 절간을 찾아 하루 밤 지내도록하세.

풍파악은 앞장을 서서 달려나가 몸을 쉴 만한 곳을 찾느라고 살펴보았으나 길은 험하고 어지럽게 바위들만이 늘어서 있는 형편이었다.

그 자신은 어느 곳이든지 누워서 쿨쿨 잠들 수 있었으나 왕어언이 잠잘 수 있는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단숨에 몇 마장을 달려가 한모퉁이를 돌게 되었을때 하나의 등불빛을발견하게 되었다. 풍파악은 크게 기뻐 고개를 돌리고 부르짖었다.

민가가 보입니다!

모용복은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공야건은 기뻐서 말했다.

보기에 사냥꾼이나 산에서 밭을 가꾸고 사는 화전민의 집 같군. 왕소저 한 사람이 편안하게 잠잘 곳은 어떻게 마련할수 있을 것 같소이다.

여섯 사람은 등불이 있는 곳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등불은 상당히 멀었다.

한참동안 가도록 여전히 반짝반짝할뿐, 그것이 집인지 절간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풍파악은 말했다.

제기랄! 저 등불은 아무래도 좀 요상한데가 있군.

갑자기 등백천은 나직이 호통을내질렀다.

잠깐만, 공자. 저것보시오. 저것은 파란 등이외다.

모용복은 시력을 가다듬고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등불은 파란 광채를 뿜어 내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등불은 빛이 붉은 색이거나, 아니떤 침침한 누런 색인데 그런 색깔들과는 전혀 달랐다.

여섯 사람은 걸음을 빨리 해서 다시 파란 등불이 있는 쪽으로 한 마장 정도 나아갔다. 좀더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포부동은 큰소리로 외쳤다.

사마외도가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있군!

이 다섯 사람의 기지와 무공으로써는 강호의 어떤 문파나 방회에 대해서도 전혀 꺼리길 바가 없었다. 그러나 즉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은 왕소저와 함께 있으니 시비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겠다."

포부동과 풍파악은 오랫동안 사람들과 싸우지 않아 속이 근질근질해 지면서 한번 나서서 주먹을 휘둘러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억지로 자제했다.

풍파악은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오늘은 온종일 걸었더니 피곤하구만! 이곳은 역시 좋지 못한 곳 같으니 물러가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모용복은 빙그레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풍파악이 버릇을 고치다니 정말 희한한 일이군!"

그는 입을 열었다.

누이, 저곳은 깨끗하지 못한 곳이니 우리는 되돌아 가야겠소.

왕어언은 그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종오라버니가 그와 같이 말하자 기꺼이 따랐다.

여섯 사람은 몸을 돌려 이때 몇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때 어렴풋이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사마외도가 이곳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신네 제대로신통력을 갖추지 못한 요마괴물들은 어째서 다가와 함께 즐기려고 하지않소!

그 소리는 갑자기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 했으며 끊어질 듯 알듯하면서 이어졌는데 귓구멍으로 파고드는 그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거북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가 뚜렸했다.

모용복은 흥,하니 코웃음을 쳤다. 그는 포부동이 "사마외도가 이곳에서 모임을 갖는다."고 한 한마디를 상대방이 이미 듣게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이 몇 마디 전음으로 미루어 볼 때 말하는 사람의 내력 수위가 결코 낮지 않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코 참된 제일류의 재간이 있는 자라고는 볼 수 없었다.

모용복은 왼손을 흔들며 말했다.

귀찮게 상대할 여가가 없으니 내버려 두고...

그는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는 걸음으로 되돌아 걸었다.

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꼬마녀석이 함부로 큰소리 치는구나. 꼬리를 감추고 도망치려는 것이냐! 정말 도망을 치려고 한다하더라도 너희 할아버지인 이 몸에게 삼백 번 큰절을 올리고 가도록 해라.

풍파악은 참을 수 없어 걸음을 멈추고 나직이 말했다.

공자, 내가 가서 저 건방진 녀석의 버릇을 가르쳐 놓겠소.

모용복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니 내버려 둡시다.

풍파악은 말했다.

그러죠.

여섯 사람은 다시 십여 보를 걸었다. 그러자 그 소리가 다시 전해졌다.

수컷들이 도망을 치려고 하는 것은 접어 두더라도 그 암평아리는 남겨서 이 할애비를 모시고 심심함을 풀어 주도록 해야겠다.

다섯 사람은 상대방이 감히 왕어언을 모욕하는 말을 하자, 하나같이 안색이 변해서 걸음을 멈추고일제히 돌아섰다.

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왜 그러느냐! 순순히 암컷을 돌려보내라. 이 할애비가...

그가 막 "가"까지 말하게 되었을 때 등백천이 단전에 기를 돋우고 호통을 내질렀다.

가!

그러자 그 "가"자와 상대방의 "가"자는 쌍방의 음이 혼합되어 산골짜기를 진동시켰다. 각자의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아, 하는 처참한 비명 소리가 파란 등불이 있는 곳에서 들려왔다. 조용산 밤중에 등백천의 "가"하고 외친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와 같은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퍼지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케 했다.

등백천의 이와 같은 호통은 바로 더욱 고강한 내력으로 상대방에게 충격을 주어 상처를 입히는 수법이었다.

그 처참한 비명 소리로 미루어 볼 때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고 어쩌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마자, 퍽, 하는 소리와 더불어 한대의 불화살이 하늘로 쏘아지더니 펑,하고 터졌다. 그것은 밤 하늘을 파란빛으로 물들여 놓았다.

풍파악은 입을 열었다.

이왕 내친 김에 저 요사하고 도깨비 같은 무리들의 소굴을 소탕하지요.

모용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한 걸음 양보하게 된 것은 본래 있었던 일을 덮어두고 좋게 해결을 짓자는 것이었소. 그런데 이왕 내친 걸음이니 마무리를 짓도록 합시다.

여섯 사람은 그 파란 불빛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모용복은 왕어언이 놀라거나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봐, 발걸음을 늦추고 그녀와 함께 걸었다. 그러자 포부동과 풍파악이 내지르는 호통소리를들을 수 있었다. 이미 상대방과 손을 쓰게 된 모양이었다. 곧이어 파란등불의 희미한 빛속에 세 사람의 그림자가 날아오더니 퍽퍽퍽, 하는 세 마디와 함께 산벽에 부딪쳤다.

포부동과 풍파악 두사람에 의해서 깨끗이 요리된 모양이었다.

모용복은 파란등불 아래로 달려갔다. 그러고보니 등백천과 공야건은 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향로 옆에 서 있었는데 얼굴이 무척 엄숙해보였다. 그리고 동정(銅鼎) 옆에는 한 늙은이가 누워 있었고, 동정 안에서는 한가닥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실낱같이 가늘었으나 화살같이 직선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를 본 왕어언은 입을 열었다.

벽린동(碧燐洞)의 상토공(桑土公) 일파군요.

등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저는 정말 박학하시구려.

포부동은 몸을 돌리더니 물었다.

소저가 뭘 알겠소! 이와 같이 연기를 피워 전갈하는 방법은 수천년 전부터 있었던 방법이오. 반드시 사천성(四川省) 서쪽의 벽린동의...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공야건은 동정의 한쪽 끝을 보라는듯이 가리켰다.

포부동은 허리를 굽히고 화섭자를 가까이 가져가 비쳐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동정의 발에 "상(桑)"자가 양각되어 있었는데 바로 몇 마리의 조그만 뱀과 지네가 웅크리고 있는 형태로 양각된 것이었고 파란 녹이 얼룩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물건 같았다. 포부동은 왕어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를 썼다.

설사 이 동정이 사천성 서쪽의 상토공 일파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빌려오거나 훔쳐올 수도 있는일이 아니겠나! 더군다나 가짜 향로가많다는 소리를 들어 보면, 열 개의 향로 가운데는 아홉 개가 가짜란 말이외다.

모용복 등은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곳은 사천성 서쪽과는 거리가 무척 멀다. 설마 이곳도 상토공 일파의 지역이란 말인가?"

그들은 모두 사천성 서쪽의 벽린동에 있는 상토공 일파의 사람들이 모두 묘인(苗人)과 요인(瑤人)으로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중원땅의 무림 인사들과 크게 다르며 독을 쓰는 데 정통하기 때문에 강호의 인사들이 퍽이나 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 상토공 일파의 사람들은 세상사람들과 다투지 않았다. 다만 사천성 서쪽이 요산(瑤山)지역 내로 허가없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가볍게 남을 침범하지 않았다.

모용복과 등백천 등은 물론 상토공인가 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와 같이 사악하고 악독한 오랑캐들과 원수를 맺어 귀찮게 얽혀들게 된다면 매우 성가신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모용복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와 같이 시비가 일어날 수 있는 곳에서는 일찌감치 떠나는 것이 좋겠군요.

동정 옆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겨우 한가닥 숨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커다랗게 뜨고, 분노에 찬 표정으로 여러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 얼굴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조금 전에 말을 해서 화를 일으킨 사람이 분명했다. 모용복은 포부동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 노인 쪽으로 턱을 치켜 들어 보였다.

포부동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파란 등불을 달아 놓은 대나무를 잡더니 거꾸로 들고 대나무 머리쪽으로 냅다 그 노인의 가슴팍을 찔러 버렸다. 그렇게 되자 파란등불은 대뜸 꺼지고 말았다.

왕어언은 아,하고 놀란소리를 내질렀다.

공야건은 말했다.

담이 적으면 군자가 아니고 독하지 않으면 사내 대장부가 못 된다고 했소.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죽여 후환을 면하자는 것이오.

그는 오른발을 들어서는 동정을 차서 거꾸러뜨렸다. 모용복은 왕어언의 손을 잡고 비스듬히 왼쪽으로 몸을 날려 나아갔다.

겨우 십여 장을 나아가게 되었을까! 어둠속에서 찍찍,하는소리, 휙휙, 하는 소리와 함께 예리한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한자루의 검과 칼이 무성한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그들을 후려친 것이었다. 모용복은 소매자락을 펼쳐 상대방의 힘으로 상대방을 쳤다.

왼쪽 사람이 들고 내리치던 칼은 오히려 오른쪽 사람의 머리를 치게 되었고, 오른쪽 그 사람의 일 검은 왼쪽의 칼을 든 사람의 심장을 찔러 버리게 되었다.

삽시간에 두사람을 해치운 모용복은 발걸음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공야건은 칭찬의 말을 던졌다.

정말 훌륭한 재간이외다.

모용복은 빙그레 웃고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오른손을 휘두르자 눈앞에서 달려들던 한 명의 적이 데굴데굴 굴러 산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왼손을또 한 번 후려치자 왼쪽의 적이 아. 하는 소리를 크게 내지르며 입으로 선혈을 토해내었다.

그런데 어둠속에 갑자기 왈락 비린내가 풍겼으며 곧이어 미미하나마 날카로운 바람이 얼굴로 덮쳐들었다.

모용복은 급히 장풍을 돋우고 두 가지 이름모를 암기를 쳐서 되날려 보냈다. 그러자 아, 하는 놀람의 소리가들렸다. 적은 자기 자신이 던진 악독한 암기에 적중된 모양이었다.

어둠속에서 겹겹이 에워싼 포위 속으로 빠져든 모용복은 그저 닥치는 대로 몇 사람을 죽였다. 여섯 번째의 사람을 죽이게 되었을 때 모용복은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세 사람은 모두 상토공 일파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세 사람의 무공은 전혀 다른 세 파의 무공이다. 원한을 많이 맺게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된다."

이때 등백천이 부르짖었다.

모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청향수사 쪽으로 뚫고 나갑시다.

청향수사는 고소 연자오에 있는 한 장원이었다. 그 위치는 서쪽에 있었는데 모용목의 시녀인 아주가 거처하던 곳이기도 하다.

등백천전이 청향수사 쪽으로 뚫고 나가자고 한말은 서쪽으로 물러가자는 말인데 적에게 그와같은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은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모용복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등백천의 장풍이 등뒤 오른쪽에서 두 번 울려퍼지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는즉시 왕어언의 손을 잡고 비스듬히 뒤로 세 걸음 물러서서 등백천쪽으로 접근했다. 그러자 옷깃이 펄럭하는 가벼운 음향이 두번 일어났다. 등백천이 적과 이 장을 마주치는 모양이었다. 그 장풍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역시 상당한 고수인 것 같았다. 곧이어 등백천이 얏, 하고 기합소리를 질렀다.

모용복은 등백천이 바로 석파천경(石破天警)이라는 일 초의 장력을 펼쳤으며 상대방은 십중 팔구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사람은 놀람에 찬 비명을 내질렀는데, 그 소리는 매우 날카로웠다.

그 울부짖는 소리는 울려퍼질수록 낮아져 갔으며 마치 땅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이따금 돌들이 구르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용복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발을 ㅎ디뎌 깊은 골짜기로 떨어지게 되었구나 다행히 등 형이 먼저 그 사람을 깊은 골짜기 아래로 쳐서 떨어뜨렸기에 망정이지 느렇지 않았더라면 어둠속에 발을 잘못 디딜 뻔했다."

이때 왼쪽 높다란 언덕 위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어디서 온 자들이기에 만선대회(萬仙大會)에 와서 행패냐? 삼십육동(三十六洞)의 동주(洞主)와 칠십 이도(七十二島)의 도주(島主) 모두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것인가?

모용복 등은 모두 나직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삼십육 동의 동주와칠십이도의 도주라는 이름은 그들이 들은 바가 있었다.

소위 동주니, 도주니 하는 말은 어느 문파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방에도 예속되지 않는 방문좌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의 무공은 고강했고, 어떤 사람의 무공은 낮았으며 인품에 있어서도 착한사람이 있었고 악한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 다 혼자서 행동을 했으며, 그 행동이 제멋대로이고 서로 연락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일을 성사시 수 있는 세력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강호에서는 그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그들 가운데 어떤 자는 동해와 황해의 섬에 흩어져 있었고 어떤 자들은 곤륜이나 기련산 깊숙이 은거하고 있었으나 근년에 이르러 종적을 감추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있었다.

한데 뜻밖에도 오늘 이곳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용복은 낭랑히 외쳤다.

우리 여섯 사람은 발길을 재촉하다가 여러분들이 이곳에 모이는 것을모르고 그만 위엄을 거슬기는 일을 하게 되었구려. 사과드리는 바이외다. 어둠속이고 오해에서 빛어진 일이니 쌍방에서 웃으며 없던 일로 하고 여러분들께서는 길을 비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몇 마디의 말은 비굴하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기 신분을 발설하지 않고 상대 몇 사람을 죽인 데 대해서 사과를 한 것이었다.

별안간 사방에서 하하, 껄걸, 흥, 흥 하며 웃는소리가 크게 일었고, 갈수록 웃는 사람의 수는 불어났다.

처음에는 십여 명이 웃음을 터트리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사면팔방에서 모두 그 웃음의 대열에 끼어드는 것 같았으며, 그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적게 잡아도 오륙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바로 가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수 마장 밖에 있었다.

모용복은 상대방의 기세가 그토록 엄청난 것을 알고는 그 사람이 "만선대회" 라고 언급한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밤은 그야말로 재수없게 되었구나. 어쩌다가 이 방문좌도의 인사들이 모인장소에 뛰어들었는지 모르겠군! 나는 아직까지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역시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 일이 커져 수습할 수 없게 되면 곤란하다. 더군다나 우리들 여섯 사람이 어찌 수백 명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뭇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가운데 언덕 위의 그 사람이 또다시 외쳤다.

당신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일을 너무 간단하게 보는 것 같군. 당신네들 여섯 사람은 이미 손을 써서 우리 몇 분의 형제를 해쳤소.

만선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여러 신선들이 그대로 당신들을 놓아 보내 준다면 삽십육동과 칠십이 도의 체면은 어떻게 되겠소?

모용복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전후좌우의 산비탈, 산봉우리, 산골짜기 산등성이 각처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속이라 각자의 자태나 얼굴 모습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이 사람들의 본래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별안간 땅바닥에서 솟아나듯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때 등백천, 공야건, 포부동, 풍파악, 네 사람은 모용복과 왕어언의 주위에 늘어서서 두사람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수천 명이 포위하고 있는 이 상황은 그야말로 커다란 파도에 휩쓸린 일엽편주와 같았다.

모용복과 등백천 등은 지금까지 살아오는동안 크고 작은 싸움을 무수히 겪어온 사람들이었으나 이 같은 형세를 보고는 속으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은 이상야릇하다. 여덟 명이나 열 명쯤이라면 두려워할 것이 없겠으나 수백 명이 한데 모여 있으니 상대하기가 그야말로 쉽지 않다."

모용복은 단전에서 기를 끌어올리고 낭랑히 말했다.

모르고 저지른 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삼십육 동의 동주, 칠십이 도의 도주들의 위명은 불초 역시 들은 바 있으며, 결코 일부러 죄를 지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오. 사천성 서쪽 벽린동의 상토공, 서장(西藏)의 변경에 자리잡고 있는 규룡동의 현황자(玄黃子), 북해(北海) 현명도(玄冥島) 의 도주(島主) 장달부(張達夫) 선생께서 이곳에 계신다면 불초가 모르고 저지른 행동을 아무쪼록 용서해 주기 바라오.

왼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당신은 우리들의 이름을 한 번 들먹이고서 수월히 이곳에서 빠져 나가리라고 생각하시오! 하하하!

모용복은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불초는 여러분들을 윗어른으로 우러러보기 때문에 먼저 예의를 갖추고 겸손의 말을 먼저한 것이외다. 설마하니 이 모용복이 여러분을 두려워하리라 생각하시오?

이때 사방의 많은 사람들은 아,하는 소리를 냈다. 모용복이라는 이름 석 자 를 듣고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상대의 수법을 상대의 몸에 펼친다는 고소 모용씨요?

모용복은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 그러나 바로 불초임에 틀림없소이다.

그 사람은 말했다.

고소 모용씨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지 불을 켜라! 그를 한 번 보기나 하자.

그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동남쪽에서 세 개의 누런 등이 떠올랐다. 곧이어 서북쪽에서 붉은 등이 떠올랐다. 삽시간에 사면팔방에서 등불이 떠올랐다.

어떤 것은 등롱이었고 어떤 것은 횃불이었다. 또 어떤 것은 공명등(孔明燈)이었고, 또 어떤 것은 송진이 붙어 있는소나무 가지였다.

각 동주나 도주가 가지고 온 등불은 각기 달랐다. 어떤 것은 간단하고조잡 했으며, 어떤 것은 매우 공을 들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다 숨기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등불은 갑자기 밝아졌다 어두어졌다 하명서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으며, 잘난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승려도 있었고 도사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커다란 소맺자락을 펄럭이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몸에 꼭맞는 간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기다란 수염을 날리는 노인이었고, 어떤 사람은 머리를 높이 틀어올린 여자였는데 복장은 대체로 이상야릇했다.

중원 땅의 사람들 같지 않은 차림새였다. 그리고 태반의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있었는테, 무기 또한 이상야릇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다.

모용복은 사방을 향해 읍을 하며 낭랑히 외쳤다.

여러분들, 실례하오 불초 고소 모용복이 인사드리오.

사방에 섰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반례를 했고, 어떤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왼쪽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모용복! 그대 고소 모용씨가 중원에서 위세를 떨치고 싶어 한다면 그걸로 그만이다. 그러나 만선대회에 이르러 함부로 날뛰다는 것은 우리들을 완전히 얕보는 수작이 아니겠느냐! 상대의 수법을 상대의 몸에 되돌려 펼친다고 알려져 있는데 내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는 나의 수법을 내 몸에 어떻게 펼치겠는가!

모용복은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서쪽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커다란 머리를 가진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대머리였다. 머리카락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얼굴은 새빨간 핏빛이어서 멀리서 볼 때 마치 커다란 핏덩어리로 된 공처럼 보였다.

모용복은 포권의 예를 해보이고 말했다.

실례하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오?

그 사람은 배를 잡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를 시험하고자 하는 것은 고소모용씨에게 정말 진짜 실력이 있는지 아니면 헛된 이름만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내가 방금 그대에게 물었다. 그대가 만약 나의 수법을 나의 몸에 펼친다면 어떻게 펼치겠느냐고 하지 않았는가? 그대가 옳게 대답을 한다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으며 결코 그대를 괴롭히지 않겠다. 그대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하라.

모용복은 이와 같은 국면에 접어들게 되자 오늘의 이 일을 몇 마디 말로 좋게 해결할 수 없고, 반드시 몇 수의 솜씨를 보여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불초가 몇 수 상대해 드릴 것이니, 선배께서는 손을 쓰도록 하십시오.

그사람은 여전히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내가 그대를 시험하자는 것이지 그대로 하여금 나를 시험해 보라고 하는 것은아니다. 그대가 만약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상대의 수법으로 상대의 몸에 펼친다는 말을 일찌감치 취소해라.

모용복은 두 눈을 살짝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인데 내가 어떻게 당신의 문파와 성명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대가 어떤 절초를 자랑하는지 알수 있겠는가? 더구나 당신에게 어떤 재간이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당신의 몸에 펼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그 커다란 머리통의 노인은 냉소했다.

우리 삼십육동과 칠십이 도의 친구들은 이 세상끝 닿는 곳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중원의 쓸데없는 일에 상관하지 않고 있다. 산속에 호랑이가 없으면 원숭이가 대왕 행세를 한다고 하더니 그대와 같이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녀석이 감히 북교봉, 남모용이니 하고 떠들다니, 하하하! 정말 가소롭고 가소로우며, 몰염치하고도 몰염치한 일이로다! 내 그대에게 말하지만 그대가 오늘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아, 그대가 삼십육동의 여러 동주와 칠십 이 도의 여러 도주에게 열 번 큰절을 한다면, 모두 합쳐 천 번하고도 열 번의 큰절을 한다면 그대 여섯 명의 꼬마들이 길을 가도록 놓아주지.

포부동은 이미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있은 지 오래되었다. 이제 더 참을 수 가 없어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우리 집안의 공자에게 그대의 수법을 그대의 몸에 펼치라고 청하고 또한 그로 하여금 당신에게 큰절을 하라고 하지만 당신의 하찮은 절기는 우리 공자께서 배울 가치가 없다. 허허허! 가소롭고도 가소롭다! 그리고 몰염치하고도 몰염치한 일이로다!

그 음성은 높았다 낮아졌다 하면서 그 머리통이 큰 노인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다.

이때 머리통이 큰 노인은 기침을 하더니 짙은 가래침을 냅다 포부동 얼굴 쪽으로 뱉았다.

포부동은 몸을 기울여 피했다. 그런데 그 가래는 그의 왼쪽 귓가를 스치고 지나 별안간 허공에서 빙글돌더니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포부동의 이마에 철썩 와 붙는 것이 아닌가?

가래에 실린 힘이 대단해서 포부동은 그저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끼게 되었고, 목을 휘청거려야 했다. 이 짙은 가래는 정확하게 그의 눈썹 위에 있는 양백혈(陽白穴)을 적중시켰던 것이다.

모용복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늙은이가 가래침에 기운을 담은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가 뱉은 가래침이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이때 머리통이 큰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모용복, 이 늙은이는 자네에게 나의 수법을 나의 몸에 펼쳐 보라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그대가 나의 가래침의 비밀을 말해 준다면 그대에게 승복하겠다.

모용복은 궁리를 해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갑자기 옆에 있던 왕어언이 맑고 고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단목(檀木) 도주, 그대가 귀거래혜(歸去來兮)라는 오두미신공(五斗米神功)을 연성하는 동안 정말 고생이 많았을 거예요. 그러느라 많은 생명을 살상하게 되었을 거예요. 우리 공자께서 그대의 그 같은 재간의 내력을 갈파하지 않은 것은 그대가 동도들의 시기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데 있어요. 설마하니, 우리 집 공자께서 그와 같은 재간으로 그대를 상대해야 한다고 하지 않겠죠?

모용복은 한편으로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 기쁘기도 했다.

"오두미신공"이란 이름을 모용복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외사촌 누이가 알고 있다니 그로서는 희한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맞는지 안맞는지 알 수가 없어 긍금하게 여겼다.

이때 그 큰 머리통을 가진 노인의 새빨간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면서 핏기가 싹 가셔지고 말았다. 그러나 즉시 안색이 붉은색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웃음을 흘렸다.

젊은 처녀애가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군. 그대가 무엇을 안다고 그래. 오두미신공은 남에게 해를 입히고 자기 자신에게 이득만 되는, 음흉하고, 악랄하며, 지독하기 이를데 없는 무공인데, 설마하니 나 같은 사람이 그 같은 무공을 연마했을까? 그러나 그대가 이 늙은이의 성을 알아 맞춘 것 역시 수월한 일이 아니라고 할수있지.

왕어언은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자기의 짐작이 맞기는 맞았으나 상대방이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해남도(海南島) 오지산(五指山) 적엽동(赤葉洞) 단목 동주를 강호에서 그 누가 모르겠으며 또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단목 동주의 그 무공은 원래 오두미신공이 아니었군요. 그렇다면 아마도 지화공(地火功)에서 파생돼 나온 신묘한 재간이라 할수 있겠군요?

지화공은 적염동 일파의 기본 무공이라 할 수 있다. 적염동 일파의 동주는 누구나 단목이라는 성을 지녔다. 이 머리가 큰 노인의 이름은 단목원(端木圓) 이라고 했다.

그는 왕어언이 자기의 출신성분 내력을 말하면서도 자기를 위해 오두미신공을 연성했다는 사실을 은폐해 주는지라 그녀에 대해서 대뜸 호감을 느꼈다.

누구한테나 적염동은 강호에서 그저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문파였는데, 그녀가 모르는 사람이 없고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식으로 칭찬을 해 주는지라 더욱 기뻐 웃으며 말했다.

맞았소, 맞았어! 그것은 지화공 가운데 한 가지 잔재간에 불과하지....., 노부는 먼저 한 마디 했고, 또 그대가 우리 문파의 내력을 간파했으니 내 그대를 괴롭히지 않겠다.

별안간 흐느껴 우는듯한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단목원, 내 남편과 형제들은 모두 그대가 죽인 것이지? 그대가 천벌을 받을 오두미신공을 연마한답시고 그들을 해쳐 죽이게 된 것이지?

말한 사람의 모습은 바위의 음영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모습을 제대로 살 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렴풋이 몸에 흑의를 걸치고 있는 여자이며 키가 큰 편으로 옷과 소매자락이 매우 넓은 것을 알수있었다.

단목원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낭자는 누구요? 나는 오두미신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몸이외다. 그대는 저 소저가 함부로 하는 말을 듣지 말도록 하시오.

여자는 왕어언에게 손짓을 했다.

소저, 이리 오시오. 내 그대에게 한마디 물어보겠소.

그리고 갑자기 미끄러지듯 다가서더니 한 자루 지극히 긴 대나무를 휘둘렀다. 그 대나무 끝에는 세 개의 무쇠로 만들어진 갈고리가 달려 있었는데 그 갈고리가 그 즉시 왕어언의 허리띠를 낚아채게 되었다. 그녀는대뜸 왕어언을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왕어언은 그녀에게 끌려 두어 걸음 앞으로 내딛게 되었으며 그만 놀라 소리를 질렀다.

모용복은 손가락을 가볍게 휘둘러 소맷자락이 대나무에 걸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두전성이의 재간을 펼쳐 왕어언을 잡아당기고 있는 기운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여자는 아,하는 소리를 지르며 제대로 서지를 못하고 바위의 짙은 그늘 아래서 뒤뚱거리며 딸려 나왔다. 그리하여 모용복의 앞 일 장 정도 되는 곳까지 이르러 그녀를 잡아당기는 기운이 사라지게 되어서야 겨우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그녀는 대경실색하게 되었다. 혹시나 모용복이 손을써서 해를 입게 될까봐 대나무를 놓는 즉시 힘주어 몸을 뒤로 날렸다. 단번에 일 장 밖으로 물러가서는 겨우 똑바로 섰다.

왕어언은 자기의 허리띠에 걸린 무쇠 갈고리를 떼어 내어 대나무와 함께 모용복에게 건네 주었다.

모용복은 왼쪽 소맷자락을 한번 흔들었다. 그랬더니 그 대나무는 천천히 그 여자의 허리쪽으로 날아갔다.

그 여자는 손을 뻗쳐 받으려고 했는데 대나무가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면서 그녀의 몸 앞 석 자 되는 곳에서 멈췄다.

왕어언은 말했다.

남해 야화도(椰花島) 여 부인(黎夫人)의 채연공(採燕功)은 정말 신묘하군요. 정말탄복했어요!

그 여자는 얼굴에 불안한 빛을 띠우고 입을 열었다.

소저....그대는 어떻게 나의 솜씨를 아시지? 또... 어떻게 나의... 이 채연공을 아시지?

왕어언은 대답했다.

조금 전 여 부인께서는 한 수의 신묘한 재간을 펼치지 않으셨어요? 기다란 대나무로 물건을 취하는 데에 있어서 백발백중이시니 야화도의 유명한 채연공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원래 야화도는 남해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섬은 바위산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험준한 벼랑위에 제비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

제비집들은 모두 지극히 높고 험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은 여씨 집안에서는 오래도록 이 섬에 살다보니 수백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동안 제비집을 채집하기 위해 지극히 기다란 대나무를 무기로 사용하는 채연공을 연성하게 되었다.

야화도 여씨 집안의 경신법은 여느 문파의 경신법과 달랐다. 왕어언은 그녀가 몸을 날릴 때 마치 바다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듯한 모습을보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녀의 신분내력을 말한 것이다.

여 부인은 모용복이 소맷자락을 한 번 휘두르는 순간 도리어 끌려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 속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거기다가 왕어언이 단번에 자기의 무공수법을 간파하는지라 자기의 모든 재간을 상대방에서 완전히 헤아려 보고 있는줄 알았다. 그리하여 감히 더 나서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단목원에게 입을 열었다.

단목 노인이 사내 대장부라면 자기가 한 일에 마땅히 자기 혼자 책임을 져야 하는 거예요. 내 남편과 형제들은 도대체 그대가 해친 거예요, 아니에요?

단목원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실례했소이다, 실례했소, 알고보니 남해 야화도 도주이신 여 부인이었구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같은 남해에 사는 처지이며 그대는 노부의 이웃이 되지 않겠소? 그대의 바깥 양반을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찌 해쳤다는 말을 하시오?

여 부인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세월이 흐르면 자연 드러나게 될 것이지만 그대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기를 바래요.

그녀는 기다란 대나무를 뽑아들고 다시 바위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여 부인이 물러서자 갑자기 획,하는 소리가 나면서 머리 위의 소나무에서 무거운 물건이 퉁,하는 소리와 함께 암석 위로 떨어졌다. 그것은 한 개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향로가 아닌가?

모용복은 다시 한 번 놀라면서 고개를 쳐들고 소나무 위를 살폈다. 소나무 위에 어떤 사람이 숨어 있길래 수백 근이나 되는 커다란 향로를 나무 위에까지 올려 놓았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뜨렸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나무는 가지와 잎들이 무성해서 얼핏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청동 향로의 모양은 바로 조금 전 공야건이 쓰러뜨린 벽린동의 청동으로 만든 향로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 암석 위에 떨어진 향로 자체가 훨씬 클 뿐이었다. 그렇다면 상토공(桑土公)이 바로 나무 위에 숨 어 있는 것인가? 한데 소나무 가지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볼 수 있었으나 사람의 그림자는 아무리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미세하기 이를데 없는 소리가 몇 번 났다. 그 소리는 바람 소리와 섞여 거의 구분할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모용복의 임기응변은 신속 하기 이를데 없었다. 두 소맷자락을 휘둘러 세찬 한줄기의 바람을 일으키며 반격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은빛이 번쩍이는 가운데 수백 수천 개나 될 것 같은 새 털 모양의 조그만 침들이 사방팔방에서 이쪽으로 날라왔다가 되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모용복은 속으로 외쳤다.

"야단났다!"

그는 손을 뻗쳐 왕어언의 허리를 감아 쥐고는 몸을 날려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바로 이때 공야건과 풍파악, 그리고 사방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호통을 내질렀다.

독침에 맞았다.

악독한 암기다!

어이쿠! 어떻게 나의 몸에 맞게 되었지!

모용복이 허공에 떠오른 채 살펴보니 그 청동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향로의 뚜껑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물건이 그 향로 안에서 기어나오려는 것 같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밧줄을 타고 왕어언의 몸을 위로 끌어올리며 부르짖었다.

나무 위에 앉아있도록 해라!

모용복은 떨어지는 즉시, 두 발로 청동 향로의 뚜껑을 눌러 밟았다. 그러자 향로의 뚜껑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모용복은 즉시 천근추(千斤墜)의 신법으로 힘껏 향로의 뚜껑을 내리 눌렀다.

그가 몸을 솟구쳤다가 내려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모용복이 그 뚜껑을 꼼짝 못하도록 내리누르려 할 때 사방에 서 있던 사람들의 고통소리는 온통 부르짖는 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아악! 빨리 해약을 꺼내!

이것은 벽린동의 우모침(牛毛針)이다! 한 시진 안에 심장으로 스며드는 것 으로서 가장 무서운 것이다!

상토공이라는 도적은 어디 있느냐? 어디 있어?

빨리 그를 끌어내서 해약을 빼앗자!

그 못난 도적은 마구잡이로 우모침을 쏘아댔구나! 나에게까지 상처를 입히다니, 정말 너무하다!

상토공은 어디 있지!

빨리 해약을 꺼내라!

독침에 중독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마구 펄쩍 펄쩍 뛰었고 어떤 사람은 나무를 얼싸안고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이로 미루어 우모침에 묻힌 독성이 매우 무서워 침에 맞은 사람으로 하여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만드는 듯 했다.

모용복이 얼핏 보니 공야건은 왼손으로 가슴팍을 쓰다듬고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배를 만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풍파악은 두발로 풀쩍풀쩍 띄며 마구잡이로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이미 암산에 걸려들었다는증거였다. 마음속으로 걱정 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이 무수한 독침들은 누군가 향로 안에 있는 장치를 움직여서 쏘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향로가 허공에서 떨어질 때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는 사이에 향로 안에 있던 사람이 그 기회를 틈타 독침을 쏘아낸 것이 틀림이 없었다. 만약 모용복이 눈치 빠르게 신속히 대처하지 않았고 내력이 강하지 않았더라면 그 수 천 개나 되는 독침은 이미 그의 살속에 파고 들었을 것이다.

모용복은 이 독을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향로안에서 침을 쏘아낸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발밑의 뚜껑이 연신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 사람이 기어나오려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모용복은 왼손으로 커다란 소나무의 몸통을 얼싸안았다. 이렇게 되자그 향로의 뚜껑을 그 커다란 나무 위에 못박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 사람이 동정에서 기어나오려고 한다면 보도(寶刀)나 보검(寶劍)으로 그 향로의 구멍을 내어서 나오든가, 그렇지 않으면 등과 허리에 힘을 주어서 그 한 그루의 소나무를 뿌리채 뽑아올려야 했다.

향로 안의 사람은 연신 기운을 쓰는 것 같았으나 이미 모용복의 몸뚱이와 그 커나란 소나무가 한덩어리처럼 붙어 있으니 어찌 뚜껑을 들어올릴 수 있겠는가?

모용복은 두전성이의 재간을 펼쳐 향로 안에서 뻗쳐내는 힘을 커다란 소나무 쪽으로 옮겨 놓았다.그렇게 되자 그 소나무는 좌우로 흔들거렸으며 나무의 뿌리에서 우드득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뿌리째 뽑혀진다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다만 그 나무 주위의 작은뿌리들은 그와 같은 힘에 적지 않게 잘려져 나갔다.

모용복은 그가 다시 몇 번 더 뚜껑을 들어올리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기운을 풀어 그로 하여금 그 향로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 자는 향로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반드시 손 안에 쥐고 있던 우모침들을 재차 쏟아낼 것이지만 바로 그러한 때에 모용복은 일 장을 휘둘러서 그 수백 수 천 개나 되는 독침을 모조리 그의 몸에 박히도록 만들 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가 자연히 해약을 꺼내 자기 자신을 구하려고 할 것이고 그때 해약을 뺐는 것은 그에게 부탁하여 해약을 얻는 것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런데 그 향로의 두껑이 두어 번 들씩이는 것 같더니 잡자기 움직임을멈추었다.

모용복은 그가 운기행공하여 힘을 저축하고 있다가 일거에 뚜껑을 열고 튀어 나오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아래 발에 주었던 힘을풀고 오른손에 원래의 기운을 돋우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흐르도록 청동향로 안의 사람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안에서 힘을쓰지 못해 죽은 것 같았다.

이때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는 점점 더 처참해지고 있었다. 각 동과 각도의 제자들 가운데에 공력어 비교적 약한 제자들은, 마비되고 근지러운 것을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어진 나머지 땅바닥에 몸을 데굴데굴 굴렸다. 또 어떤 사람은 머리로 바위를 마구 들이박았고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절말 그 정경은 가공 스러웠다.

이때 칠팔 명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상토공을 끌어내라! 끌어내서 빨리 해약을 손에 넣자!

고함소리와 동시에 서너 명이 두눈을 붉힌 채 동시에 모용복에게 달려들었다.

모용복은 왼발을 향로 뚜껑 위에 한 번 살짝 딛고는 날렵하게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 소나무 옆으로 뻗쳐 있는 가지 위에 올라 앉으려고 했다.

바로 이때 별안간 쐐쐐, 하는 소리와 함께 비스듬히 은빛 광채가 번쩍이는 가운데 다시 수천 가닥의 가느다란 독침이 그에게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독침을 발사한 상토공은 물론 여전히 동정 안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한무더기의 독침이 날아드는 기세와 수량을 볼 때 틀림없이 어떤 장치를 이용해서 쏘아낸 것이지 결코 손으로 쏘아 낸 것은 아니었다.

이때 모용복은 몸이 허공에 떠올라 있는 상태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장력으로 반격한다면 등백천 등 네 사람이 모두 아래 쪽에 있는지라 다칠 우려가 있었다.

이와 같이 매우 다급한 상태에서 그는 오른손의 소맷자락을 한 번 떨쳤다. 그렇게 되자 그는 허공에서 힘을 빌릴 수 있게 되었고 몸을 옆으로 석 자 정도 두둥실 날릴 수 있었다. 동시에 오른손의 소맷자락을 휘둘러 한줄기 부드러우면서도 웅후한 내경을 쏟아내어 수백 수천 개나 되는 독침을 모조리 허공으로 떠오르도록 만들었다. 그 자신은 종이연처럼 두둥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 당시 하늘에는 별빛과 달빛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사방의 등롱과 횃불때문에 주위가 매우 밝은 편이라 사람들은 모용복이 날렵하기 이를데 없이 허공 에서 몸을 미끄러뜨리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놀라워하고 감탄하지 않는사람이 없었다. 참담한 울부짖음과 신음소리, 그리고 욕지거리 가운데 갈채가 크게 울려퍼졌다. 그 소리는 엄청나게 커서 처절한 울부짖음을 뒤덮고 말았다.

모용복은 몸이 허공에 떠 있을 때 두 눈은 그 한무더기의 우모침이 날아든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몸뚱이가 땅바닥과는 약 일 장쯤 되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왼발로 허공에 뻗어 있는 나뭇가지를 살짝 딛었다. 그리고 그 힘을 빌어 오른쪽으로 쏘아나갔다.

그가 처음 아래로 두둥실 떨어지게 되었을 때의 속도는 지극히 완만했다. 그러나 이번 덮쳐나갈 때의 속도는 그야말로 독수리와 같이 빨랐다.

그는 일진의 세찬 바람을 일으키면서 두 발로 암석 곁에 있는 한 명의 땅딸한 사람의 머리 위를 밟으려고 했다.

원래 그가 허공에 떠 있을 때 아래의 모든 광경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그땅딸한 자가 품속에 조그만 향로 모양의 물건을 안고서 재차 독침을 쏘아내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땅딸한 자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피하는데 행동이 신속하기 이를데 없어 마치 둥근 공이 땅바닥에서 뒹구느 것 같았다. 따라서 모용복은 허공을 딛고 말았다. 그러나 펑, 하는 소리가 나도록 그 자의 뒷등을 적중시킬 수 있었다.

그 땅딸한 자는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 일 장을 얻어맞고는 다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비틀거리던 몸을 일으키더니 몸을 몇 번 흔들었다. 곧이어 등을맥없이 구부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방의 십여 명이 부르짖었다.

상토공! 해약을 꺼내라!

그러면서 그에게 몰려갔다. 등백천과 포부동은 똑같이 생각했다.

"알고보니 저 땅딸한 난장이가 바로 상토공이었구나.

두 사람은 급히 상토공을 사로잡아서 해약을 받아내 형제들의 상처를 치료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동시에 대갈하며 상토공에게 덮쳐갔다.

상토공은 왼손으로 땅을 딛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상처가 가볍지 않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포부동은 손을 뻗쳐 그의 어깻죽지를 잡으려고 했다. 다섯 손가락이 막 그의 어깨에 닿게 되었을 때 갑잦기 손가락과 손바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 왔다.

그가 즉시 손을 움츠리고 손바닥을 살펴보니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 이 아닌가!

원래 그 땅달보의 어깻죽지에는 밤송이처럼 독침이 돋아나 있었던 것이다. 삽시간에 포부동은 자기의 손바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근지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야말로 그 근지러움은 심장에까지 파급되는 듯 했다.

그는 놀라움과 분노를 함께 느끼며 발을 들어 금구파빙(金鉤破氷)이라는 일초를 펼쳐 상토공의 엉덩이를 노리고 힘껏 차려고 했다.

이때 상토공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미비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한 발길질은 정확하고도 무겁게 상토공의 엉덩이에 적중될 것 같았다.

포부동이 한 발길질은 그야말로 빠르기 이를데 없어 눈깜짝할 사이에 발끝은 상토공의 엉덩이와 몇 치도 안되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별안간 포부동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이쿠! 야단났다! 그의 엉덩이에도 만약 뾰족한 가시 같은게 장치되어 있다면 나의 이 왼발은 또 야단이 나게 될 것이 아닌가!"

촉망중에 그는 왼손을 질풍같이 뻗쳐내어 땅바닥을 힘껏 후려쳤다. 몸은 그 기세를 빌어 뒤로 날아가게 되었고 어찌 되었든 눈치 빠르게 행동한 나머지 발끝은 그저 상토공의 바지가랑이를 살짝 스치고 지나가기만했다.

이때 등백천과 나머지 일곱 명이 모두 다 상토공의 등뒤로 다가들었다. 그리고 포부동이 손을 뻗쳐 상토공을 잡는가 했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오히려 상처를 입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상토공은 땅바닥에 엎드려서 꼼짝하지 않았지만 일시에 감히 나서서 경솔하게 손을 쓰는사람이 없었다.

포부동은 크게 손해를 입은 몸이라 이대로 덮어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땅바닥에서 백여 근이나 되는 바위돌을 하나 집어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비키시오! 내가 이 커다란 자라를 때려 죽이겠소!

그 누가 부르짖었다.

안되오! 그를 때려 죽이고 나면 해약이 없어지고 마오!

해약은 그의 몸에 있을터이니 때려 죽인 후 꺼낼 수 있을 것이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모임을 갖고 있었으나 각기 다른 뜻을 품고 있는 듯 협심합력하려고 하지 않았다. 포부동이 상토공을 때려 죽이려고 하는 데도 사람들은 반대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포부동은 손에 커다란 바위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 상토공의 등을 겨냥하고 호통을 내질렀다.

몸에 가시가 잔뜩 돋아난 커다란 자라야, 박살나라!

이때 그의 오른손 손바닥은 갈수록 근지러워졌다. 그는 두팔을 뻗쳐 커다란 바위를 상토공의 등을 향해 던졌다.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땅바닥에서는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사람들은 놀라고 말았다. 그 커다란 바위가 상토공의 등을 내려쳤으니 상토공은 피와 살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큰 바위에 내려 찍힌 이상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야지 흙먼지가 피어 오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시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고는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커다란 바위는 그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상토 공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포부동은 왼발을 들어 큰 바위를 굴렸다. 땅바닥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원래 상토공의 이름자 위에 흙토(土) 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땅속을 파고드는 재간에 지극히 정통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나. 그러니까 그가 땅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 손과 발을 함께 써서는 자기 몸 아래의 흙을 파헤쳐 땅 속으로 기어들어간 것이다.

조금 전 모용복이 상토공을 향로 안에 가두어 놓고 뚜껑을 열지 못하게 하였을 때도 그는 역시 향로의 바닥을 뚫고서 땅밑으로 빠져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포부동은 어리둥절해 하며 몸을 돌려 상토공이 있을만한 곳을 찾았다.

그는 상토공이 땅밑을 잘 파고들어 간다고 해도 두더지가 아닌 이상 기껏해야 몇 자 정도밖에 더 들어가겠냐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는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땅밑으로 해서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별안간 모용복이 부르짖었다.

이곳에 있다. 이곳에 있어!

왼손으로 소맷자락을 휘둘러 하나의 바위를 휘감았다. 원래 그 바위 모양을 한 물건은 바로 향로의 뒷등이었다. 이 사람은 이상야릇한 구석이 있었고 또한 남의 이목을 어지럽히는 재주가 많았다.

만약 모용복의 눈이 날카롭지 않았더라면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토공은 세찬 소매 바람에 말려 들여 올려지게 되었고 비계살로 만들어진 곰 같은 그의 몸뚱이는 허공으로 솟아오르게 되었다.

사실 그는 모용복에게 일 장을 맞은 이후 이미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때 도저히 항거할 힘이 없는지라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독수를 쓰지 마시오! 내 그대에게 해약을 드리리다!

모용복은 껄껄 웃으며 오른손 소맷자락을 펼쳐내어서는 왼손 소매가 뻗쳐낸 기운을 해소시켰다. 동시에 한가닥 힘을 내쏟아 상토공의 몸을 받들어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먼 곳에서 누가 부르짖었다.

고소 모용씨는 정말 명성이 헛되이 전해지지 않았군!

모용복은 손을 들어보이고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오. 부끄러울 뿐 이외다.

바로 이때였다, 한 줄기 금빛과 한 줄기 은빛이 왼쪽에서 번개와 같이 쏟아 졌다. 날카로운 파공성이 함께 들려왔다.

모용복은 두 소맷자락을 잔뜩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마주쳐 나아갔다.

큰음향이 울려퍼지면서 금빛과 은빛이 뒤로 밀려났다.

이때서야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다란 띠였다. 하나는 금빛이었고 또 하나는 은빛이었다.

그쪽에는 두사람이 서 있었는데 모두 노인이었다. 금띠를 사용한 사람은 은빛 장포를 입고 있었고, 은띠를 사용한 사람은 금빛 장포를 입고 있었다. 금빛과 은빛은 찬란하게 번뜩였고 화려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와 같은 금빛과 은빛의 장포를 보통사람은 입지 못한다. 이때 은빛 장포를 걸친 노인이 말했다.

탄복했소, 탄복했소. 다시 우리 형제의 일 초를 받아보시오.

금빛이 번뜩이는 가운데 금빛 띠가 옆으로 쏘아져 왔다. 그리고 은빛 띠는 곧장 하늘로 치솟는가 했더니 허공에서 아래로 떨어지면서 곧장 모용복의 상반신을 공격해 왔다.

모용복은 입을 열었다.

두분 선배님...

겨우 한 마디를 말했을 때 돌연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세 자루의 긴 칼이 땅바닥 위를 헤엄치듯 공격해 왔다. 세 사람이 지당도(地當刀)라는 수법을 써서 모용복의 하반신을 공격해 온 것이다.

모용복은 위쪽과 앞쪽, 왼쪽을 동시에 공격받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상대방은 삼십육동 동주와 칠십이 도 도주를 망라하고 있으니만큼 사람이 많고 세력이 크다. 이와 같은 혼전이 벌어졌을 때 그들에게 무서운 맛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언제 이 싸움이 끝날 수 있겠는가?"

그는 긴 칼이 땅에 붙을 듯 다가드는 것을 보고 즉시 세 번 발길질을 가하였다. 한 발길질마다 적의 손목을 정확히 걷어찼고 하얀 광채가 번뜩이는 가운데 세 자루의 칼은 모두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었다.

그 순간, 모용복은 몸을 살짝 기울이면서 오른손을 뻗쳐내었다. 그리고 두전성이(斗轉星移)의 수법을 써서 금빛 띠의 앞쪽을 한 번 후려쳤다. 칙, 하는 소리가 나면서 금빛 띠와 은빛 띠가 어느덧 얽히고 마는 것이 아닌가?

지당도라는 무공을 썼던 세 사람은 칼이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하하하 웃으면서 두 팔을 벌린 채 모용복의 두 다리를 얼싸안으려 들었다. 모용복은 즉시 발끝을 들어 질풍과 같은 기세로 잇따라 세 사람의 가슴팍에 있는 혈도를 걷어찼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팔이 길고 다리가 긴 흑의인이 뭇 사람들을 헤치고 나서더니 솔뚜껑 같은 큰 손을 쩍 벌려서는 단숨에 상토공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이 사람의 손바닥은 태어날 때부터 아주 두꺼웠는지 아니면 금속에 속하는 실로 싼 장갑을 끼고 있었는지 상토공의 몸에 돋아있는 가시 같은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덤썩 상토공을 낚더니, 곧 뻗뻗한 다리를 움츠리지도 않은 채 뒤로 몸을 날려 일 장 밖으로 물러났다.

모용복은 그 사람의 솜씨가 매우 침착하면서도 노련한 것을 보고 무공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 훨씬 고강하다고 생각했다.

"상토공이 만약 저 사람에게 구원을 받게 되면 해약을 얻기 힘들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몸을 솟구쳐 땅바닥에 누워 있는 세 사람을 가로지르며 오른손을 후려쳐 흑의인을 공격했다.

그 사람은 차갑게 웃으며 칼을 가슴팍 앞에 비껴들었다. 파란빛이 번쩍번쩍 빛나는 그 한 자루의 칼은 등이 두껍고 날이 옅은 예리하기 이를데 없는 귀두도(鬼頭刀)였는데 칼날이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내밀고 있었다.

모용복이 만약에 일장을 후려치면 비스듬히 세워 놓은 칼힘에 자기의 손목을 잘리우고 말 형편이다. 그러나 그는 곧 힘을 거두지 않고 손바닥이 그 칼날과 약두 치 정도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손바닥을 칼날을 따라 아래로 쓰윽 내려가게 하면서 흑의인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손목을 곧장 베어갔다.

그의 손칼에는 진기가 잔뜩 담겨 있어 귀두도 못지 않게 예리했다. 따라서 만약 이 손칼을 내려치게 된다면 상대방의 손목은 뼈채 잘려질 형편이었다. 그 흑의인은 의표를 찔리고는 윽, 하고 소리 지르더니 급히 칼을 놓고 손을 홱 뒤집어서 마주쳐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두사람은 일 장을 마주치게 되었다.

흑의인은 음,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을 흔들하더니 뒤로 일 장 정도 물러 섰다. 그러나 왼손에 쥐고 있는 상토공을 여전히 놓지 않았다.

모용복은 이 순간 손바닥을 휙 뒤집어 상대방이 놓아 버린 귀두도를 움켜잡았다.

그 순간 왈락 비린내가 풍기며 구역질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즉시 이 칼에 극독이 묻혀 있으며 이 극독은 매우 요사하고 악랄하기 이를데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순식간에 적의 무기를 빼앗을 수 있었으나 이미 칠팔 명이나 되는 사람이 각기 무기를 들고 흑의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보고 상토공을 빼앗아오기가 꽤나 힘들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에 흑의인과 일 장을 마주치게 되었을 때는 그의 공력이 자기보다 조금 약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칼을 빼앗게 된 것은 그의 의표를 짤렀기 때문에 가능했고 정말 손을써서 싸우게 된다면 삽시간에 그를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이때 사람들이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상토공, 빨리 해약을 꺼내라. 너의 그 빌어먹을 우모독침의 독을 빨리 해소 시키지 않고 반 시진을 더 기다리게 된다면 목숨을 잃게 된다.

오노대(吳老大), 빨리 해약을 꺼내시오. 더 지체하다간 큰일이 나오.

등불 아래 여러 사람이 오락가락하면서 모두 다 흑의인 오노대를 보고 해약을 꺼내라고 아우성이었다.

오노대가 입을 열었다.

좋아, 상토공 빨리 해약을 꺼내라.

상토공이 말했다.

나를 땅바닥에 놓아주시오.

오노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손을 놓으면 적이 그대를 다시 잡아갈텐데 어떻게 놓아줄 수 있겠는가? 빨리 해약을 꺼내라.

옆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떠들었다.

그렇지 빨리 해약이나 내놓아라!

어떤 사람이 욕을 했다.

이 도둑같은 놈아. 아직도 잔소리를 하고 있느냐? 너의 벽린동의 자라 새끼들을 모조리 깨끗하게 불태워 죽이고 말겠다.

상토공은 말했다.

나의 해약은 흙속에 숨겨 놓았다. 나를 놓아 주어야 꺼내놓지 않겠는가?

뭇 사람들은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상토공은 두더지처럼 산동굴이나 햇빛을 보지 못하는 땅속 어두침침한 곳에 숨어 있기를 좋아 했다. 그러니 땅속에 해약을 숨기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모용복은 공야건과 풍파악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용복은 지금으로서는 전력을 기울여 상토공을 빼앗아 온 이후에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귀두도를 휘둘렀다. 그는 동시에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등백천과 포부동은 풍파악과 공야건을 지키고 반걸음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혹시나 적이 다가와 해를 입힐까 걱정한 것이다.

모용복이 갑자기 몸을 날려 앞으로 나아가 마치 양떼들 틈에 뛰어든 호랑이 같은 기세로 덤벼드니 감히 맞서려는 자가 없었다.

오노대는 그의 기세가 무척 흉한 것을 보고 감히 정면으로 맞서려 하지 않고 멀찌감치 피했다.

이때 사람들이 소리 질렀다.

모두 조심해라! 그 사람이 손에 든 것은 녹파향로도(綠波香露刀)이다! 그 칼에 맞지 않도록 해라!

아이고! 오노대의 녹파향로도를 저 녀석에게 빼앗겼구나. 이야말로 큰일이다.

모용복은 칼을 휘두르며 나아갔다. 그러니 화상이나 도사는 말할 것도 없고 추한 남자와 아름다운 부인 등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뒤로 물러섰으며 얼굴에는 하나같이 놀람과 공포의 빛을 띠었다. 따라서 모욕복은 이 귀두도에 커다란 내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이토록 악취가 무섭게 나는 칼을 어째서 향로도라고 부르는지 매우 이상스러웠다.

"내가 이 독도를 휘둘러 동주와 도주들 가운데 열 명이나 스무 명쯤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무런 원한이 없는 데 더 많은 살상을해서 무엇하겠는가? 원한을 터욱 깊게 맺게 된다면 그들은 한사코 해약을주지 않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둘째 형과 넷째 형이 중독된 독을 해소시키기 힘들어 진다."

그는 칼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치는시늉을 했지만 인명을 살상하지는 않았다.

간혹 가다가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칼자루로 상대방의 혈도를 짚어 쓰러뜨리거나 아니면 발길질로 쓰러뜨리곤 했을 뿐 이었다.

그 사람들은 처음에는 놀람과 두려움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의 칼의 위력이 별로 대단치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삽시간에 장검과 단극(短戟), 연편, 그리고 방패 등을 들고 사면에서 다투어 공격해 왔다. 모용복은 금세 십여 명의 사람들에게 에워싸이게 되었고 그밖에도 겹겹이 에워싼 사람이 삼사백 명이나 되자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복은 생각했다.

"이렇게 싸우다가 언제 끝이 나겠는가? 아무래도 살수를 써야겠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도법을 일변시켰다.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칼자루로 두사람을 때려 기절하게 만들었다.

별안간 등백천이 소리질렀다.

비열한 것, 왕소저를 놀라게 하지 말아라.

모용복은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몸을 날리더니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왕어언을 공격하고 있었다. 등백천이 달려가 손을 뻗쳐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세 사람이 나무 위로 기어오르는 것 아닌가? 모용복은 그 사람들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들은 나를 상대하여 이기지 못하게 되자 외사촌 누이를 사로잡아서 인질로 삼으려 하고 있구나. 그야말로 비열하기 짝이 없구나!"

그러나 그 자신은 싸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으니 일시 왕어언의 곁으로달려갈 수 없었다.

바로 이때 두 명의 여자가 왕어언의 팔을 잡고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머리에 금빛 테를 두른 기다란 머리카락의 두타(頭陀)가 손에 계도를 들어 왕어언의 목에 갖다대고 소리쳤다.

모용복아! 만약 투항하지 않으면 네가 좋아하는 계집애의 목을 자르고 말겠다!

모용복은 생각했다.

"이 녀석들은 사악하기 이를데 없다. 뱉은 말은 반드시 실천할 것이고 정말 외사촌 누이를 해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 모용씨는 무림을 주름잡아온 집안인데 어찌 투항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 투항을 한다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다닐 수 있단말인가?"

그는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모용복은 갑자기 왼손으로 휙 휙, 양장을 후려쳐서 두명의 적을 멀리 나가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이때 두타는 다시 부르짖었다.

네가 정말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꽃과 같고 옥과 같은 미녀의 머리통을 자르겠다!

그는 날이 퍼렇게 선 계도를 연신 흔들어 댔다.

34. 표묘봉에는풍운이 감돌다

별안간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안돼요, 절대로 소저를 상처 입혀서는 안 돼요. 내가 그대에게 투항하리다.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날아갈 듯 달려왔다. 그의 발걸음은 날렵하기 이를데 없었다, 바깥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를 막으려고 했으나 그 사람은 동쪽에서 번쩍 서쪽에서 번쩍 하더니 사람들을 피해 앞으로 달려들어 오는데, 불빛 아래에서 보니 바로 단예가 아닌가.

그는 크게 부르짖었다.

투항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 아니겠소! 왕소저를 위해서라면 내가 천 번이고 만번이고 투항하겠소.

그는 두타 앞으로 달려가더니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모두들 빨리 손을 놓으시오. 무엇 때문에 왕소저의 손을 잡고있는 것이오!

왕어언은 그의 무공이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형편없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련데도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자신을 구하려 뛰어든 것을 보고 속으로 고마워서 떨리는 음성으로말했다.

단공자, 그대였군요!

단예는 기뻐서 말했다.

그렇소, 나외다

그러자 두타가 욕을 했다.

너는, 너는 무슨 물건이냐?

단예는 말했다.

나는 사람인데 어째서 물건이라 하시오!

두타는 냅다 주먹을 내질러 퍽, 하니 단예의 아래턱을 후려쳤다. 단예는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왼쪽으로 넘어지게 되었고, 넘어지는 바람에 이마를 바위에 부딪혀 대뜸 피가 흘러 내렸다.

두타는 단예가 달려오는 경신법이 뛰어난 것을 보고, 그의 무공이 약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파여 허초에 불과한 한대의 주먹을 그냥 날려 보았을 뿐 이었다.

사실 한 대의 주먹을 내지른 이후 오른 손의 계도를 휘둘러 단예를 상대할 속셈이었다. 그런데 왼쪽 주먹을 허초로 내질러 그를 쓰러뜨리게 되자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이때 단예의 내력이 반탄력을 일으킴으로써 두타는 왼팔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다행히 그 한주먹을 별로 힘 주어 치지 않았기 때문에 반탄력도 강한편이 되지 못했다.

두타는 단예가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모용복이 여전히 오락가락 하면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다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모용복아, 투항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이 계집의 머리를 잘라내겠다. 이 부처님으로 말하면 한 번 말한 것을 실천하는 성미로 한번도 사람을 속인적이 없다. 하나, 둘, 셋! 항복하겠느냐, 못 하겠느냐?

모용복은 매우 난처했다. 외사촌 남매의 정을 두고 말할 때 그는 왕어언이 사악한 자의 손에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고소 모용씨는너무나 존귀한 신분이었다. 결코 사람을 인질로 하여 협박해 온다해서 방문좌도의 무리에게 투항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투항을 하게 된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남의 비웃음을 받게 되지않겠는가? 더군다나 투항을 하게 된다면 그의 목숨도 잃게 될 것이 확실했다. 그리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이 도둑같은 두타야. 이 공자로 하여금 졌다는 것을 시인케 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네가 그 소저의 머리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나는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왕어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각기 무기를 들고 왼쪽에서 찌르고 오른쪽에서 공격해 올 뿐만 아니라 앞쪽에서 막고 뒤에서는 압박을 가해 오니 일시에 그들을 뚫고 달려올 수 없없다.

두타는 노해 부르짖었다.

나는 이 계집을 죽이겠다! 어디 네가 이 부처님을 어떻게 하는지 두고보기로 하자.

그는 계도를 들고 획, 하니 왕어언의 목을 내려치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어언의 팔을 잡고 있던 두 여자는 혹시 자기네가 칼에 맞을까 두려운나머지 동시에 손을 놓고 옆으로 물러났다.

단예는 버둥거리며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왼손으로 이마의 상처를 눌렀다. 그 표정은 그야말로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

이때 두타는 정말 왕어언을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왕어언은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놀라서 정신을 잃었는지, 혈도를 짚혔는지 항거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광경에 단예는 이만 저만 다급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번쩍 쳐들었다. 다급한 상황때문에 자연스럽게 진기가 충만하게 되었고 그 즉시 육맥신검을 펼쳐내게 되었다. 찍찍, 하는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짝, 하는소리가 들렸다.

두타의 오른손이 팔에서 부터 잘라졌으며 계도를 움켜잡은 손바닥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단예는 급히 앞으로 달려나가 후딱 왕어언을 등에 업고 부르짖었다.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외다!

두타는 오른팔을 잘리게 되자 뼛속까지 스며드는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크게 격노한 끝에 왼손으로 잘라진 손과 팔뚝을 집어들어 미친듯 한소리를내지르며 단예에게 던졌다 그의 잘려진 오른손에는 여전히 계도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잘려진 손과 계도가 단예에게로 날아갔는데 그 기세가 심히 맹렬했다.

단예는 오른손의 한손가락을 들었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일초소양검이 그 계도를 찌르게 되었다.

계도는 짱, 하니 튕겨졌다. 그러나 잘려진 손은 여전히 날아와 철썩 하니 단예의 따귀를 심하게 때렸다.

단예는 머리가 어찔하고 발걸음을 휘청거렸으나 큰 소리로부르짖었다.

훌륭한 재간이로군, 잘려진 손으로도 따귀를 때릴 수있다니!

그러나 마음속으로 왕어언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능파미보를 펼쳐서 바깥쪽으로 질풍같이 내달았다.

뭇 사람들이 큰소리를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나와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단예는 왼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했다가 오른쪽으로 기우뚱 하는등 꾸불꾸불 곡선을 그리며 바깥쪽으로 달려나갔다.

동주와 도주들은 무기를 들거나 주먹질을 하는가하면 발길질을 그의 몸에다 가했지만 그의 몸이 하도 빨리 움직였으므로 모조리 빗나가고 말았다.

이 며칠 동안 단예가 생각한 것은 그저 왕어언뿐이었고 꿈속에서 보는 것도 그저 왕어언뿐이었다.

그날밤 객점에서 파천석등과 이야기를 나눈 후 잠자리에 들었으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온통 왕어언 뿐이었다.

야밤에 그는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객점에서 나와 모용복과 왕어언 일행이 떠나간 방향을 따라 쫓아오게 되었다.

모용복과 정춘추가 한바탕 싸움을 치룬후, 등백천 등은 객점에서 조섭을 취했기 때문에 단예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그들을 쫓아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객점의 다른 한칸방에 몸을 숨긴 채 방문 밖으로 한걸음도 내딛지 않았다. 그저 왕어언과 불과 수 장밖에 안 되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니 마음속으로 기쁘기만 했다. 급기야 모용복과 왕어언등이 객점을 나서서 출발하자 다시 멀리서 뒤를 따랐다.

길을오면서 자기 자신에게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지 모른다.

"나는 한 마장만 더 따라간 이후 다시 따라가서는 안 된다. 단예야, 단예야, 너는 어째서 네 자신을 그르치고 남마저 그르치려 하느냐! 왜 깊이 빠져들어서 헤어나질 못하느냐! 진정 시를 읽고 책을 읽은 것이 헛되고 말았구나. 사람이란 벼랑가에 이르게 되면 말고삐를 잡아당겨야 하는 것이고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반드시 지혜의 검을 휘둘러 정이란 그물을 짤라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너의 한평생은 헛되고 말 것이다. 불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던가! 마땅히 색(色)을 무상(無常)으로 보아야만이 혐오감을 일으킬 수 있고, 욕심이 가셔진 것을 기뻐해야만 마음은 해탈을 얻을 것이다. 색은 무상이고 무상은 즉 고달픔이니 고달픔은 바로 나 자신이 만든게 아닌가! 색을 혐오함으로써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니라.

그러나 왕어언을 색으로보고 무상으로 여겨 혐오감을 일으키려 했지만 도대체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은 가볍기 이를데 없었다 멀리서 왕어언의 뒤를 따르고 있는지라 모용복과 포부동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어언이 나무 위로 오르게 되고 모용복이 적을 맞아 싸우게 되는 사정 등을 멀리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두타가 왕어언을 죽이려 하자 그는 자연히 나서게 되었고 기꺼이 모용복을 대신해서 투항하고자 했다.

그런데 상대방은 그 투항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아서 오히려 그 자신의 한팔을 잘리운 결과가 되었다.

삽시간에 단예는 왕어언을 업고서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그는 혹시나 누가 쫓아올까봐 수백 장이나 달려간 후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한숨을 내뱉고 그녀를 땅위에 내려 놓았다.

왕어언은 얼굴을 붉혔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단공자, 나는 혈도가 짚혀서 서 있을수가 없암어요.

단예는 그녀의 어깻죽지를 끌어안고 쓰러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대가 나에게 혈도를 푸는 방법을 알려 주시오. 그대의 막힌 혈도를 풀어 드리리다.

왕어언은 더욱 얼굴을 붉히며 맡했다.

잠시 지나고 나면 자연히 협도가 풀어질 것이니 그대는 나의 혈도를 풀어줄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자기의 혈도를 풀려면 반드시 신봉혈(信封穴)을 손으로 문질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봉혈은 바로 젖꼭지 옆에 있는데 어떻게 단예보고 문질러 달라고 할수 있겠는가?

단예는 그와 같은 사정을 모르고 말했다.

이곳은 위험하여 오래 머무를 수 없소이다. 역시 먼저 내가 그대의 혈도를 푼다음 이곳을 빠져나갈 방도를 강구하도록 합시다.

왕어언은 얼굴을 붉혔다.

싫어요..

왕어언은 얼굴을 쳐드는 순간 모용복과 등백천 등이 사람들 틈에서 좌충우돌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고종오라버니가 걱정되어 말했다.

단공자, 우리 고종 오라버니가 포위되었어요, 우리는 그들을 반드시 구해 내야해요.

단예는 가슴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모용복 한사람뿐이었다. 갑자기 그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 나의 노력은 모두 허사였구나. 그럴 바에야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주도록 하자. 모용복을 위해 죽는다면 그뿐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단예는 말했다.

매우좋소, 그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내 모용복을 구하리다.

왕어언은 말했다.

안돼요. 그대는 무공을 모르는데 어떻게 사람을 구할 수 있겠어요!

단예는 미소했다.

방금 나는 그대를 업고 나오지 않았소!

왕어언은 그의 육맥신검이 때로는 맡을 잘 듣지만 때로는 말을 잘 듣지 않아 단예의 마음대로 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조금 전에는 운수가 좋았어요. 그대는...그대는 나의 안위를 걱정하여 육맥신검을 펼쳤던 거예요. 그러나 그대는 나의 고종오라버니를 대할때 나를 대하듯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래...아무래도...

단예는 그 말을 가로챘다.

그대는 걱정할 것 없소.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에 대해서도 그대를 대하듯 하면 될 것이오.

왕어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공자,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일이에요.

단예는 가슴을 쑥 내밀며 입을 열었다.

왕 소저, 그대가 나에게 모험을 하라고 한다면 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결코 사양하지 않겠소.

왕어언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나직이 말했다.

그대가 나에게 이토록 잘 대해 주니 그야말로 감당할 수가 없어요.

단예는 크게 기뻤다.

어째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오! 감당할 수 있소, 감당할 수 있소.

그는 몸을 돌렸다. 그는 신이 나서 싸우고 있는 와중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왕어언은 재빨리 단예를 불렀다.

단 공자, 저는 움직일 수가 없어요. 만약 그대가 떠난다면 돌볼 사람이 없는 틈을타서 나쁜 사람이 나를 해치려고 한다면....

단예는 몸을 돌려 다가와 머리를 긁적긁적 했다.

그건....그건...그건....

왕어언의 본래 뜻은 단예가 다시 자기를 업고서 달려가 모용복 도와주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노릇이다. 입밖으로 내놓기가 거북했다.

단예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저 머리만 긁적이고 발을 구르며 심히 난처해 할 뿐이었다.

이때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쩡, 챙그랑, 무기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모용복 등은 더욱 맹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왕어언은 적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몹시 초조해졌다. 즉시 부끄럼을 무릅쓰고 단예에게 말했다.

단 공자, 수고스럽지만...다시 저를 업고서 우리 함께 저의 고종 오라버니를 구하러 가요. 그러면...그러면...

단예는 그제서야 깨달았다는듯 발을 굴렀다.

옳은 말이오. 옳은 말씀이오. 정말 나는 멍청이야. 내가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는 다시 몸을 웅크리고 그녀를 업었다.

단예는 처음 그녀를 업었을때, 오직 그녀를 구해 위험한 곳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뿐이어서, 다른 것을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다시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등에 업게 되고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들게 되자 여러 겹의 옷으로 막혀져 있는 상태였지만 그녀의 매끄러운 살갗을 느낄 수 있어서 그만 크게 마음이 설레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단예야, 단예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와 같은 상상을 하고 있느냐! 그야말로 너는 짐승보다 못하다. 상대방은 고결하고 존귀하기 짝이 없는 소저가 아니냐! 네가 마음속으로 반 푼 어치라도 못된 생각을 품게 된다면 그것은 그녀를 모독하는 것이다. 마땅히 맞아야한다. 정말 맞아야해!"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심하게 두 번 쳤다. 그리고 질풍과 같이 앞쪽으로 달려갔다.

왕어언은 매우 이상하게 물었다.

단공자, 무엇하는 거죠!

단예는 본래 성실했고, 또 왕어언을 하늘의 선녀처럼 받드는지라 조금도 속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털어놓았다.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소저에게 불경스러운 생각을 가졌소이다, 마땅히 맞아야하오, 맞아야해!

왕어언은 그만 귀밑까지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바로 이때였다. 한명의 도사가 손에 장검(長劍)을 들고 나는듯 달려오며 부르짖었다.

빌어먹을! 네 녀석이 다시 와서 훼방을 놓으려고 하는구나!

그는 독룡출동(毒龍出洞)이라는 일 초를 펼쳐서는 단예를 찌르려고 들었다.

단예는 자연스럽게 능파미보를 펼쳐 피해버렸다.

왕어언은 나직이 말했다.

그가 두 번째의 검을 왼쪽으로 찔러올 때, 그대는 먼저 그의 오른쪽으로 다가서서는 천종혈(天宗穴)을 한번 후려치도록 하세요.

아니나다를까, 그 도사는 일검이 빗나가자 재차 청철매화(淸澈梅花)라는 초식을 펼쳐 왼쪽에서 찔러왔다.

단예는 왕어언이 가르쳐 준 대로 도사의 오른쪽으로 다가서며 일 장을 후려쳐 그의 천종혈을 강타했다. 이곳은 바로 그 도사의 조문(치명적인 급소)이었다. 단예의 일 장은 별로 세지 않았는데도 그 도사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고꾸라져 즉사하고 말았다.

그 도사가 막 쓰러지자마자 다시 한 사내가 달려들었다. 왕어언은 그야말로 무학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단예의 귀에 입술을 대고 방법을 알려 주었고 단예는 그녀가 시키는대로 하여 즉시 그 한 명의 사내도 처치할 수 있었다.

단예는 쉽게 상대방을 이겼고 왕어언이 자기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당부할 뿐만 아니라 그 부드러운 몸을 등에 업고 향기마저 맡을 수 있는 형편이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마당이었지만 그야말로 행복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그로서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황홀감을 맛보았다.

그는 다시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이렇게 되자 모용복과는 이 장도 되지 않는 거리를 남겨 두게 되었다.

별안간 바람 소리가 이는 가운데 체구가 왜소한 두 명의 청삼객(靑衫客)이 달려오더니 두 자루의 연편(軟鞭)으로 동시에 공격해 왔다.

단예는 발걸음을 미끄러뜨리며 피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연편이 허공에서 쭉 뻗쳐지며 오히려 자기 쪽으로 와락 날려들어 얼굴을 후려쳐 오는데 그 민첩함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왕어언과 단예는 일제히 놀라 부르짖었다.

어이쿠!

그 두 자루의 연편은 무기가 아니라 바로 두 마리의 살아 있는 뱀이었다. 단예는 발걸음을 빨리해서 두사람을 지나쳐 가려고했다. 그런데 두 청삼객의 발걸음도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몇 번이나 단예의 앞을 막으며 단예로 하여금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단예는 연신 물었다.

왕소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왕어언은 각문 각 파의 무기와 권각(拳脚)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거의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두 마리의 살아 있는 뱀을 움직여 사람을 물려고 하는 지금의 판국에서는 결코 어느 문파의 무공에 의거할 수도 없었고, 두마리의 살아있는 뱀이 어느쪽에서 공격해 올지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녀로서는 전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두 명의 청삼객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는가 하면 낮게 몸을 움츠리기도 하는데 그 자세가 졸렬하여 보기에 흉했지만,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아마 두 사람은 어떤 무예를 연마한 적은 없었으나 호랑이와 표범들처럼 천성적으로 민첩함을 지닌 것 같았다.

단예는 연신 피하려고 했으나, 잇달아 위험한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살아 있는 뱀의 초식은 나로서도 알아낼 수가 없다. 도둑을 잡으려면 먼저 두목을 잡으라고 했는데 먼저 저 독사의 주인을 쓰러뜨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뱀의 주인의 몸놀림은 종잡을 수 없었다. 손을 쓰고 걸음을 내딛는 것도 전혀 무공을 모르는 사람처럼 멋대로 행하는 것이지 어떤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왕어언은 그들이 다음 한 걸음을 어느쪽으로 내딛을 것이고, 또 다음의 일 초는 어느 쪽으로후려칠 것인가를 알아내기란 그야말로 하늘에 오르기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냥 있을 수 없어서 그들의 기문혈(氣門穴)을 때리고 그들의 곡천혈(曲泉혈)을 찍도록 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단예가 공격해 가자 그들은 즉시 민첩하기 이를데 없는 동작으로 피해 버렸다. 그 기민함이나 민첩함은 실로 타고난 것이었다.

왕어언은 한편으로 적을깨트릴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기의 고종오라버니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귀에 처참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수 명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뒹굴고 있었는데 모두 다 상토공의 우모침에 맞은 사람들이었다.

오노대는 상토공의 손을 잡고 빨리 그에게 해약을 꺼내라고 재촉했지만, 바로 그 약은 모용복 옆 땅 밑에 파묻어 두고 있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오노대는 모용복을 무척 꺼려 해서 감히 경솔하게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그저 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급히 공격하라고 재촉하기만 했다. 먼저 모용복을 해치워야 해약을 꺼낼 수 있고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모용복을 쓰러뜨린다는 것은 수월하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다.

오노대는 형세가 별로 유리하지 못한 것을 보자 소리를 질러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모용복의 곁을 에워싸고 있는 뭇 사람들 가운데 세 사람이 물러나게 되었고 다른 세 사람이 대신 나섰다.

이 세 사람은 고수인 모양이었다. 더우기 키가 작달막한 사내는 팔힘이 대단히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두 자루의 강추(鋼錐)를 휘둘렀는데 세찬 바람이 휙휙 일어났으며 그 기세는 위맹하기 짝이 없었다.

모용복은 향로도를 들어 일 초를 막아 보았는데, 그 순간 손과 팔이 은근히 마비될 정도로 저려왔다 고리하여 그는 그 자가 다시 강추를 휘둘러 공격해 오자 즉시 몸을 날려 피하고는 맞받을 엄두를내지 못했다.

한참 격투를 벌이고 있을 때 왕어언이 부르짖었다.

고종 오라버니! 금등만잔(金燈萬盞)을 펼쳤다가 피금당풍(披襟當風)으로 바꾸도록 하세요!

모용복은 외사촌 누이의 무학에 대한 견식이 탁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즉시 더 생각도 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잇따라 세 개의 원을그렸다. 칼날을 번뜩이며 점점이 차가운 빛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녹파향로도(綠波香露刀)의 빛이 파란빛을 띠우고 있었기 때문에 펼쳐진 초식은 그야말로 녹등만잔(綠燈萬盞)이라고 해야지 금등만잔(金燈萬盞)이라고 할 수 없었다.

뭇 사람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몇 걸음씩 물러섰다.

바로 이때 모용복은 왼쪽 소매자락을 떨쳐내었다. 동시에 소매자락 안에 손을 숨긴 상태로 살짝 잡아당겼다.

이때 그키가 작달막한 사내는 개천벽지(開闢天地)라는 일 초를 펼쳐서 강추로 하늘과 땅을 가를 듯한 기세로 맹렬히 공격해 오고 있었다. 순간 창, 하는 커다란 음향이 울려퍼졌다.

뭇 사람들의 고막이 응웅거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나면서 그 작달막한 키의 사내가 휘두르던 두 개의 강추가 서로 맞부딪히면서 불똥을 튀겼다. 그가 두 팔에 돋운 힘은 날카롭고도 위맹했다. 한쌍의 강추가 서로부딪치게 되는 순간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두 팔의 팔뼈가 절로 분질러져서 대뜸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모용복은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이 장을 후려쳐 포부동에게 덤비던 두 명의 강적을 물리쳤다.

포부동은 몸을 구부려 공야건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런데 공야건의 얼굴빛이 꺼멓게 변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크게 중독된 듯했다. 만약 빨리 손을 써서 구하지 않는다면, 목숨마저 잃고 말 것 같았다.

이때 단예 쪽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왕어언이 모용복에세 관심을 쏟고 이 초의 수법을 지도하게 되자 신경을 두 곳에 쏟을 수가 없어지게 되어, 단예의 앞을 막고 선 두사람의 적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되었다.

단예는 그녀가 갑자기 그녀의 고종 오라머니를 가르치자, 그녀의 몸이 자기의 등에 업혀 있기는 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모용복 곁으로 달려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삽시간에 마음이 아파왔고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게 되었다.

그 순간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독사가 달려들어와 그의 왼팔을 물어 뜯었다.

왕어언은 아,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부르짖었다.

단공자, 단공자 그대는....

단예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독사에게 물려 죽는 것도 죽는 건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왕소저, 이후 그대의 손자에게 전해 주시오...

왕어언은 그 두 마리의 독사가 온몸이 푸르고 누런 얼룩점이 있고 그 얼룩진 색갈이 선명할 뿐만 아니라 뱀의 머리가 납작하게 세모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지극히 극독을 품고있는 뱀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시에 그녀는 놀라고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별안간 두 마리의 뱀은 몸을 뻗더니 두 번 꿈틀꿈틀하고 땅바닥에 떨어져서 즉시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두마리의 뱀을 사용했던 청삼객은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리고 뭐라고 뭐라고 몇 마디 오랑캐 말로 중얼거리더니 몸을 돌려 도망쳤다.

이 두 사람으로 말하면 어릴 적부터 뱀을 키워 왔고 또 뱀을 신봉해 왔다. 그런데 단예가 독사에게 물렸는데도 죽지 않고 오히려 독사를 죽게 만드는 것을 보자, 단예가 뱀의 신(神)이라고 생각했다. 감히 더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그만 황망히 뺑소니를 치고 만 것이다.

왕어언은 단예가 망고주합을 먹게 된 후 특이한 체질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지라 잇따라 물었다.

단공자? 어떻게 되었나요? 그대는 어떻게 되었나요?

단예는 정히 서글픈 생각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그녀가 부드럽고도 관심어린 어조로 은근히 물어오자 그만 흐뭇해져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때 다시 그녀가 물어왔다.

그 두마리의 독사가 그대를 물었는데 지금은 좀 어때요?

단예는 말했다.

조금 아프군요. 상관없소. 상관없어요.

단예는 속으로 그녀가 그에게만 관심을 가져 준다면 매일같이 독사에게 몇 번 물린다 하더라도 기분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걸음을 옮겨 모용복쪽으로 달려갔다.

벌안간 한 맑은 음성이 허공에서 들려왔다.

모용 공자, 그리고 여러 동주와 도주들! 여러분들은 과거 아무런 원한이 없었고 최근에 이르러 무슨 감정을 갖게 된 사이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토록 험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오!

뭇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 그루 나무위에 검은 수염을 기른 도사가 서 있었는데 손에 불진(拂塵)을 들고 있었으며, 그가 서 있는 곳은 바로 높다란 나뭇가지였다.

그 나뭇가지는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면서 흔들거리고 있었는데 그에 따라 그의 몸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있었다.

그 도사의 표정은 매우 소탈해 보였다. 등불 아래 드러난 그의 나이는 약 오십쯤 되어 보였다.

그는 미소를 띄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중독된 사람들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으니, 역시 한시 바삐 치료를 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 빈도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잠시 싸움을 멈추고, 천천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어떻겠소?

모용복은 그가 한 수의 경신술을 드러낸 것을 보고 그 사람의 무공이 매우 뛰어나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공야건과 풍파악의 상처가 근심되던 참이라 즉시 입을 열었다.

귀하가 나서서 이 분규를 해결한다면 그보다 좋은일이 없겠습니다. 불초는 싸움을 그만두기로 하죠.

그는 칼을 들어 하나의 원을 그린 후 칼을 든 채 우뚝 섰다. 이때 그의 오른 손과 오른팔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속으로 생각했다.

"강추를 사용하던 작달막한 사내는 정말 기운이 대단한가 보구나! 그 충격에 나의 팔이 아직도 시큰거리는구나."

이때 상토공을 잡고있던 오노대가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그 도인이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오노대! 이 사람의 내력은 ...내력은 대단하오...대단해. 대단한 인물이오, 그는...그는교(蛟)... 교... 교...

그는 잇따라 세 번이나 교라고 말했으나 시종 그 뒤를 잇지 못했다 그 사람은 말더듬이라 마음이 다급해지자, 그만 그저 "교" 무엇인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오노대는 별안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가 교왕(蛟王)...교왕 불평도인(不平道人)이란 말이오?

그러자 말을 더듬던 자는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말을 대신해 주었다는 듯이 재빨리 그말을 받았다.

그... 그... 그렇소! 그... 그... 그는, 교... 교... 교... 교... 이번에도 "교"까지 말했으나 다시 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오노대는 그가 애써서 말하는 것을 더 기다리지 않고 나무 위에 선 노인에게 공손히 예를하고 입을 열었다.

귀하가 바로 이름을 세상에 떨친 불평도인이시오? 오래 전부터 대명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소이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소.

그가 말을 할 때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손을 멈추고 싸움을 중단하고 있었다.

그 도사는 미소를 지었다.

감당,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강호의 소문에 빈도가 이미 죽었다고 말하고있기 때문에 오 선생께서도 믿을수 없단말이오?

그는 몸을 훌쩍 날리더니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두둥실 아래로 내려섰다.

그의 두 발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게 되자 자연 지극히 빠른 속도로 땅바닥에 떨어질 판이었으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불진을 휘둘러 세찬바람을 일으켜 땅바닥을 후려쳤기 때문에 그 반탄력에 의해 몸이 천천히 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걸로 보아도 불진에서 떨쳐낸 진기가 반탄력을 일으키는 힘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 같았다.

오노대는 부르짖었다.

빙허임풍(憑虛臨風)! 정말 훌륭한 경신법이외다!

그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불평도인은 두발로 땅을 딛고서서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쌍방의 충돌은 순전히 오해에서 빛어진 것이외다. 그러니 이 빈도의 엷은 얼굴을 보아서, 서로 싸움을 그만두고 친구가 되는 것이 어떻겠소? 먼저 상토공께서 해약을 꺼내 여러 사람들의 독상을 치료하시구려.

그의 어조는 무척 부드러웠으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위엄이 있었다. 더군다나 상처를 입은 수십 명이 땅바닥에서 ㄷ굴며 신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표정이 크게 일그러진 것을 보고 쌍방의 친구들은 빨리 치료 했으면 하고 바라던 참이었다.

오노대는 상토공을 내려놓고 말했다.

상 동주, 불평도장의 고귀한 얼굴을 보아서라도 우리들은 반드시 한 번쯤 양보를 해야되겠소.

상토공은 즉각 모용복 앞으로 달려오더니 두 손으로 땅바닥을 팠다. 신속하기 이를데 없이 구멍을 파헤치더니, 거무튀튀한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보따리였다. 그는 보따리를 펼치고 한조각의 검은 쇳덩어리를 손에 들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옆에 있는 사람의 상처에 박혀 있던 우모침을 뽑기 시작했다. 그 시커먼 무쇠 조각은 바로 자석이었다. 먼저 독침을 뽑고 나서야 해약을 바를 수 있었다.

불평도인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동주, 사람을 믿으려면 완전히 믿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먼저 남을 치료한후 자기 편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는 말도 있소. 그러니 먼저 모용공자의 친구를 치료해 주는 것이 어떻겠소?

상토공은 말했다.

어쨌든 치료할 것이니, 누가 먼저 치료받고 누가 뒤에 치료 받아도 마찬가지요. 그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역시 불평도인이 말한대로 공야건과 풍파악을 치료한 후, 다시 포부동의 손바닥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런 연후에야 그의 친구들을 치료해 주었다.

이 사람은 땅딸하고 뚱뚱하여 매우 우둔하게 보였으나 동작은 민첩하기 이를데 없었다. 열 개의 통통한 손가락은 수를 놓는 아가씨의 길쭉하고 섬세한 손가락보다 영민하게 움직였다.

밥 한 끼를 먹을 시간이 지나게 되자, 상토공은 뭇 사람의 상처 위에서 우모침을 뽑아내고 해약을 바르게 되었다.

모두는 마비되고 근질근질한 기운이 대뜸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성질이 매우 난폭한 듯 상토공이 그같이 악독한 암기를 사용하니 장래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하리라고 욕을 해주었다. 그러나 상토공은 반응이 매우 둔한 듯했고 또한 멍청한 듯 남이 자기를 욕하는 소리를 듣고도 모르는 척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불평도인은 미소를 띄우고 입을 열었다.

오 선생, 삼십육동의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가 이곳에 모인 것은 바로 천산(天山)의 그 사람 때문이오?

오노대는 안색이 변했으나 곧 침착함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불평도장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불초는 잘 알수가 없군요. 여러 형제들은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일년 내내 한번 만나기 어려우므로 이번만큼은 이곳에서 약속을하고 모임을 갖게 된 것이지 별로 다른 뜻은 없소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고소 모용 공자께서 우리들을 찾아와서 여러 사람들을 괴롭혔던 것이오.

모용복은 그 말에 가만 있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불초는 이곳을 지나칠 때까지는 여러 고인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소. 여러 모로 실례된 점 사과를 드리리다.

그는 사방을 향해 읍을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불평도장께서 나서서 분규를 무마해 주게 되어 불초는 이 일을 더 크게 벌이지 않아도 되겠구려. 불초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다음에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하오.

그는 삽십육 동과 칠십이 도의 방문좌도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은밀히 모임을 갖게 된 데엔 반드시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고, 그 사정을 바깥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불평도인이 천산의 그 사람이라고 들먹이자 오노대가 급히 화제를 바꾸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이때 물러서지 않는다면 너무 눈치를 모르는 짓이 될 뿐만 아니라 일부러 남의 은밀한 사정을 엿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두 손을 흔들어 보인 후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오노대는 즉시 허리를 굽혀 답례했다.

공자, 오노대는 오늘 그대와 같은 영웅을 만나게 된 것을 지극히 영광스럽게 생각하오. 청산은 변하지 않고 녹수는 언제나 흐르는 법, 다시 만나뵙기를 기대합니다.

그 말은 모용복이 더 머물지 말고 여기를 떠나기를 바라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불평도인이 입을 열었다.

오노대, 그대는 모용 공자가 어떤 사람인 줄 아시오?

오노대는 어리둥절했다.

"북교봉, 남모용"이라 하지 않았소? 무림에서 대명이 쟁쟁한 고소 모용씨를 그 누가 모르겠소? 오늘 만나뵙게 되니, 정말 명불허전이었소이다.

불평도인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바로 그렇소 이와 같이 커다란 인물을 그대들이 사귈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너무나 애석한 일이 아니겠소! 평소 모용씨에게 부탁을 드려 도움을 청하기란 어렵고도 어렵소. 다행히도 모용 공자께서 오늘 이곳에 게시지 않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부탁을 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보물이 가득한 산위로 올라갔다가 맨손으로 돌아오는 격이 아니겠소?

오노대는 우물쭈물했다.

이건... 이건...

그는 결단을내릴 수 없는 듯했다.

불평도인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모용 공자의 대명은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소. 그대들은 한평생 표묘봉 영취궁(靈鷲宮) 천산동모(天山童母)에게 온갖 고초를...

천산동모라는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사방에 서 있던 군호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은 그들의 심성이 무척 격동되어 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워했고, 어떤 사람은 당황한 듯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모용복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천산동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토록 두려움에 떨게하는 것일까?"

그는 다시 생각했다.

"오늘 본 사람들 가운데 이 불평도인과 오노대는 무척 뛰어난 사람들이건만 나는 전혀 그들의 내력을 모르고 있다. 따라서 천산동모는 더욱 대단한 인물일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세상은 넓고 넓으며, 그 반면 나의 견문이 얼마나 좁은지를 알 수 있구나. 고소 모용이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이 명성을 지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쉬운 노릇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마음속으로 더욱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왕어언은 곰곰히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표묘봉 영취궁 천산동모라니요? 그것은 어떤 무공이지요? 그리고 어떤 무공수법을 쓰나요?

단예는 다른 사람의 말은 듣고도 알아듣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나 왕어언의 한마디 한마디는 듣지 않을수 없었다. 대뜸 그는 무량산에서 겪은 일을 상기 했다. 그날 영취궁휘하의 신농방이 무량궁을 빼앗으려고 했고, 무량검은 영취궁에 병합되어 무량동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았던가? 그리고 몸에 녹색의 바람막이를 걸치고 가슴팍에 검은 독수리를 수놓은 여자는 자기를 멀쑥한 사내 녀석이라고 하면서 산 아래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모든 일은 천산동모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왕어언의 질문에는 그도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어, 그저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 뿐이었다.

대단히 무섭소이다. 대단히 무서워! 하마터면 나를 잘 생긴 늙은이가 될 때까지 가둬 놓을뻔 했지요. 그야말로 간신히 빠져나온 셈이지요.

왕어언은 평소 그의 말이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라 빙그레 웃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평도인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천산동모의 박해를 받아왔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이 없었을 것이오. 천하호걸들은 모두 그와 같은 소문을 듣고 애석하게 생각했소. 이번에, 여러분들이 용기있게 일어나 대항하려고 하는데 그 누가 도우려고 하지않겠소! 빈도와 같이 무능한 사람도 검을 뽑아 그 의거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바이오. 더군다나 모용공자는 의협심이 강하고 호탕한 분인데, 어찌 구경만 하겠소!

오노대는 씁쓸히 웃었다.

도장께서는 어디서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잘못된 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파파(童婆婆)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 어르신께서 우리들을 좀 엄히 단속을 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또한 우리들을 위한 것이지요.

우리들은 그야말로 그 은덕을 감사히 여겨 기리고저 할 뿐인데 어찌 반항하려고 한다 하시오?

불평도인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 빈도가 쓸데없는 일에 뛰어든 격이구려 모용공자 우리들은 함께 천산으로 가서 동모에게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의 형제들이 그녀에 대해 충성을 바치고 있으며 한창 그 어르신의 생신을 축하할 일을 상의하고 있더라고 말해 주도록 합시다.

그는 슬쩍 몸을 움직여서는 모용복의 앞으로 다가섰다.

사람들 틈에서 한사람이 놀라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오노대, 저 엉터리 도사를 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기밀이 누설될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결과는 뻔하오!

그리고 나서 냅다 호통을 질렀다.

저 모용이라는 녀석까지도 막자구!

그러자 한 거친 음성이 부르짖었다.

이왕 내친 걸음이니 끝까지 해치우세.

곧이어 삭삭, 휙휙, 쩡그랑, 하는 무기 뽑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결국 사람들은 무기를 거두어 들였다가 다시 무기를 뽑은 것이다.

불평도인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사람을 죽여 입을 봉하고자 하는 것이오? 아마도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을걸!

그는 갑자기 음성을 높여 부르짖었다.

부용선자(芙蓉仙子), 검신(劍神) 노형, 이곳에 있는 삼십육 동의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들은 동모를 배반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그 음모를 나에게 발각당하자 나를 죽여서는 입을 봉하려 하고 있소! 야단났소이다. 내 목숨좀 구해 주시오. 이 불평이라는 늙은 도사가 오늘은 그야말로 학을타고 서쪽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었소이다.

그 소리는 멀리까지 울려퍼졌고 사방의 산골짜기에 우렁차게 메아리쳤다.

불평도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쪽 산봉우리에서 차갑고도 오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엉터리 도사! 불평도인! 그대는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치고 도망칠 수 없으면 체념하시오. 동모의 제자들이고 사손들인 그 사람들은 그야말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끈질긴 데가 있소. 나는 기껏해야 그대를 위해 전갈을 할수 있을 뿐, 그대의 목숨을 구할 만한 능력은 없소이다.

그 소리는 적어도 삼 사마장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사람의 말이 막 끝나자마자, 북쪽 산봉우리에서 한 여인의 밝고 고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엉터리 도사, 누가 그대보고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라고 했나요? 상대방에서는 이미 모든 준비를 다 갖춰놓고 있어요. 한번 공세를 펼쳤다하면 동모는 그야말로 운수사납게 될 거예요. 나는 곧 천산으로 올라가 동모에게 직접 알려 주겠어요. 그리고 그녀가 무슨말을 하는지 두고보겠어요.

그 소리는 서쪽 산봉우리의 남자소리보다도 더 멀리서 들려왔다.

뭇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자 그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두사람은 모두 삼 사마장 밖에 있었기 때문에 따라가서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로 미루어 볼 때 불평도인이 먼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멀리 접응할 사람을 박아둔 것이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그 말소리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은 모두 내공이 심오한 자들로서 설사 뒤쫓아가서 잡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어떻게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오노대는 두 남녀의 내력을 알고 있는터라 음성을 높여 말했다.

불평도장, 검신 탁(卓) 선생, 부용선자, 세 분께서 우리들을 도와주시겠다니 고맙기 짝이 없소이다. 사실 알고 있는 분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세분이 이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더 숨겨도 소용이 없는 일이죠 이리와서 함께 계획을 의논해 봄이 어떠하오?

그 검신은 하하, 운더니 말했다.

우리들은 역시 멀찌감치 서서 구경을 하는 것이 낫겠소. 만약에 어떤 변고라도 생기면 좀더 빨리 도망칠 수 있지 않겠소? 이 일에 끼어든다는 것은 실로 이득이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 여자도 말했다.

그렇소 우리 두 사람은 그대들을 위해 망을 봐드리겠소. 그대가 난도질 당해 몸이 토막나게 된다하더라도 전달할 사람이 없다면 너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겠소!

오노대는 낭랑히 발했다.

두 분께서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실로 상대방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화살에 놀란 새처럼 조심에 조심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죠. 세 분이 의협심을 내세워 도와준다면, 우리 역시 옳고 그름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외다. 조금전 성의 있게 말씀드릴 수 없었던 것은 부득이한 고충이 있어서 그랬으니 세 분 께서는 용서해 주시구려.

모용복은 등백천과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오노대는 결코 수월하게 상대할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그들은 사람이 많고 세력이 큰 데도 불평도인 일행에게 굽신거리는 것을 보면 기밀이 누설될 까 봐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하다. 불평도인과 검신, 그리고 부용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도와주겠다고 하지마는 기실 십중팔구 호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달리 도모하는 바가 있을게다. 우리들은 그야말로 이 일에 휩쓸릴 필요가 없다."

두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등백천은 입을 삐쭉하며 역시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표했다.

모용복은 입을 열였다.

여러분들은 그야말로 많은 인사들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으니 아무리 크고 어려운 일이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구려. 더군다나 불평도장과 같은 세 분의 고수가 의리로 도와주려고 하시니 이 세 분을 누가 당해낼 수 있겠소이까? 따라서 불초는 옆에서 고함을 질러 위세를 돋우어 줄 필요도 없다고 느끼며, 오히려 이곳에 남아있는 것이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만 작별할까 합니다.

오노대는 입을 열었다.

잠깐, 이곳의 비밀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는 수백 명의 생사가 달려 있는 중대한 일이외다. 이곳의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의 뭇 형제들의 존망과 안위가 달린 문제외다. 모용 공자, 우리들은 그대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실로 그 연관성이 큰만큼, 우리들로서는 감히 위험을 무릅 쓸 수가 없구려.

모용복은물었다.

그렇다면 귀하는 불초에게 떠나지 말라는 것이오?

오노대는 말했다.

그래 주셨으면 고맙겠소.

포부동은 말했다.

동모가 누구인지 우리 고소 모용씨는 견문이 좁아 오늘 처음으로 그이름을 들었소. 그러한 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소. 당신들은 당신네가 할 일만 하면 될 것이오. 우리들은 결코 한 마디도 이 일에 대해서 누설하지 않을 것을 맹세 하겠소. 고소 모용복이 어떤 사람인데 뱉은 말을 지키지 않겠소! 그대들이 만약 억지로 우리를 붙잡아두려고 하더라도 뜻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이오. 이 포부동을 잡아두기는 쉽지만, 설마 당신네들이 모용 공자나 저 단공자를 붙잡아 둘수 있겠소?

오노대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 단공자는 보법이 이상야릇했다.

등에 한 여자를 업고서도, 걸음을 옮겨놓는 것이 마치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 두둥실하니 그가 지나가고자 하면 그 누구의 옆이라도 지나 갈수 있었으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광경을 친히 목격하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지금, 자기 앞에 떨어진 불도 끄지 못할 판국이라, 더 강적을 만들어 놓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고소 모용씨의 비위를 거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불평도인을 바라보았는데 그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불평도인은 입을 열었다.

오노대, 그대의 적수는 너무나 강하오. 협조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 모용씨로 말할 것 같으면, 학문이 깊은 사람이고, 은혜를 베풀고도 보답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니 그대는 너무 거리낄 것 없소이다. 오늘의 이 일은 그대의 강적을 죽이는데 있지 않소? 이번에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모든 것은 끝장이 나는 것이오. 그런데 모용공자와 같은 협조자에게 그대는 어째서 청을 드리지 않는 것이오?

오노대는 입술을 깨물고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모용복 앞으로 다가와서 깊이 읍을 한후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의 형제들은 수십 년간 모진 고통을 당해왔으며 사람으로서 견뎌낼 수 없는 세월을 보내 왔소이다. 이번에야 말로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늙은 마녀를 해치우고자하니 아무쪼록 그대가 의리의 손길을 뻗쳐서 우리들을 고통에서 건져 주시오. 그러면 그 커다란 은덕은 영원히 잊지 않겠소이다.

그가 모용복에게 도와 달라고 청을 하게 된 것은 분명히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청을 하게 된 것이지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는 할수 없었다. 그러나 몇마디의 말은 퍽이나 진지하고 간곡했다.

모용복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고수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모여 있소. 그런데 어찌 불초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겠소?

그는 이미 해야 할 말을 생각해 놓고 있었으며 거절함으로써 이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오노대는 커다란 은덕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했다.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에는 뛰어난 고수들이 적지 않다. 내가 훗날 큰일을 도모할 때는 그야말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 아닌가? 만일에 그들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면 내가 급하게 되었을때 그들이 나서도록 초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의 수백 명이나 되는 고수들은 실로 한떼의 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공평하지 못한 일을 보게 되었을 때 칼을 뽑는 것이 우리들 무인들의 본분이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오노대는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얼굴에 기쁜빛을 띠고 말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등백천은 연신 눈짓을 했다. 모용복에게 급히 이곳을 떠나자는 눈짓이 었다.

그는 이 사람들이 결코 선량한 사람들 같지가 않아 사귀게 된다면 손해가 될 뿐 이익은 없다고 생각했다. 모용복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뜻을 알았다는 의사를 표명한 다음 게속해서 말했다.

불초는 여러분의 무공이 고강하고 또한 호방하며 의협심을 내세운 데 대해서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 많은 친구들과 사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소. 기실 여러분들이 적을 죽이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불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 것이오. 하지만 여러분들과 같은 친구를 사귀게 된 이상 우리 모두는 금후 화복(禍福)을 함께 하며 어려운 처지에서 서로 도와 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소? 이 모용복이 기꺼이 여러분들이 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 드리겠소.

뭇 사람들은 우뢰와 같은 환호성을 터뜨리면서 다투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고소 모용씨의 명성은 무림에서 그야말로 쩌렁쩌렁 했다. 조금 전 그가 손을 쓰는 것을 보고 모두들 모용세가의 위명이 과연 사실이라고 생각했었다.

오노대는 그에게 도움은 청했지만 그가 응낙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저 모용복으로 하여금 맹세를 하도록 한 후 이 비밀을 결코 누설하지 않도록 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단번에 허락을 하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 말하는 소리가 매우 겸손할 뿐아니라, 화복을 함께 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자는 말을 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생사를 같이 하자는 뜻이라, 오노대는 놀람과 함께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등백천 등 네 사람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모용복의 명령을 받들었다. 매사에 있어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포부동도 이 공자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결코,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속으로 하나같이 생각했다.

"공자께서 도와주겠다고 한 것을 보면, 물론 달리 의도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일시 이해를 하지 못할뿐이다."

왕어언은 고종오라버니의 말을 듣고 이제부터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적이 아닌 친구로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단예에게 말했다.

단공자 그들은 이제 싸우지 않게 되었으니 나를 내려줘요.

단예는 허전한 심정으로 마지 못해 말했다.

예. 예.

그는 두 무릎을 살짝 구부려 그녀를 내려 놓았다. 왕어언은 고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나직이 말했다.

고마웠어요.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 세상은 끝날 때가 있어도 내 마음속의 한은 끝날 때가 없으리다.

왕어언은 물었다.

그대는 뭐라고 했죠? 그건 백낙천의 장한가(長恨歌)에 있는 귀절이 아니에요?

단예는 깜짝놀라 환상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다. 이 순간 그는 마음속으로 무수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왕어언을 땅에 내려 놓게 된다면 그녀는 모용복을 따라가게 될 것이고, 앞으로 영원히 만날 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기는 강호에서 수십 년동안 떠돌아다니며 울적한 세월을 보내다가 끝내는 한을 품고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상이 다하는 날이 있을지라도 자기의 가슴속에 품은 한은 영원히 끊이는 날이 없으리라는 탄성을 발하게 된 것이다.

이때 그는 왕어언이 묻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 나... 나...,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소.

왕어언은 그가 읊는 두 마디의 시(詩)가 내포하고 있는 뜻을 헤아리고 얼굴을 다시 붉혔다.

그녀는 즉시 모용복의 곁으로 다가가고 싶었지만 혈도가 풀리지 않아 걸을 수가 없었다.

이때 불평도인은 입을 열었다.

오노대, 정말 축하하오. 모용 공자께서 돕겠다고 승락하셨으니 대사는 이미 구성(九成)이나 성공한 셈이외다. 모용 공자 본인의 신공(神功)이 무적일 뿐 아니라 그의 수하인 단 상공만 하더라도 무림에서는 보기 힘든 고인이외다.

그는 단예가 왕어언을 업고 있었으며, 또한 왕어언에 대한 태도가 매우 공손한 것을 보고 단예가 등백천등과 같은 신분이며 모용복의 수하라고 생각했다.

모용복은 재빨리 말했다.

이분 단 형께서는 바로 대리 단씨 집안의 명문 자제올시다. 불초는 그를 매우 존경하는 터이지요. 단형, 이리 와서 여러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소?

단예는 왕어언의 결에 서서 곁눈질로 그녀를 훔쳐보며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를 남 몰래 맡고 있는 중이었다. 감히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백옥같이 작은 손을 보고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며 그 이상 바라는 바도 없었다. 그는 모용복이 부르는 소리를 아예 듣지도 못했다.

모용복은 다시 불렀다.

단형, 이리 오셔서 몇 분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하죠.

그는 강호의 영웅호걸들을 끌어 모을 속셈을 갖고 있었던 관계로 단예에 대해서도 그 전처럼 오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예가 보고 있는 것은 왕어언의 손이었다. 열 손가락이 가늘게 쪽쪽 뻗어 있으며, 부드럽고 고운 것이 그야말로 백옥과 같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왕어언이 입을 열었다.

단공자 저희 고종오라버니가 그대를 부르고 계세요.

단예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아! 그가 왜 날 부를까요?

왕어언은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께서는 당신이 저쪽으로 가셔서 몇 분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라는 거예요.

단예는 그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말했다.

그럼 그대도 저쪽으로 가지 않겠소?

왕어언은 그의 질문에 어색해 하며 말했다.

그들이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그대이지, 제가 아니잖아요!

단예는 말했다.

그대가 가지 않으면 나도 저쪽으로 가지 않겠소.

불평도인은 단예의 보법이 특이한 것을 보기는 했으나,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왕어언과 주고받는 말을 듣고 단예가 완전히 왕어언에게 빠져서 그 소저 이외에는 천하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서도 못 본 척하게 된 사정을 알지 못하고, 그저 단예가 자기를 경시하여 인사를 나누기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속으로 약이 올랐다.

왕어언은 뭇사람들의 시선이 단예와 자기에게 쏠려 있는지라 매우 검연쩍어졌고 또한 고종오라버니의 오해를 살까봐 걱정되었다.

고종오라버니, 저는 혈도를 집혀서 꼼짝못해요. 저를, 저를 좀 부축해주세요.

모용복은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가 직접 왕어언을 돌봐주기가 쑥스러웠다.

등큰 형, 그대가 왕소저를 좀 돌봐주시구려. 그리고 단형은 이쪽으로 오시는 것이 어떻겠소!

왕어언은 말했다

단공자 저희 고종오라버니가 오시라고 하지 않아요! 가보세요.

단예는 그녀가 모용복에게 부축해 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삽시간에 마음이 쓰려 왔다. 그는 정신이 흐릿해진 상태에서 모용복에게 다가갔다.

모용복은 입을 열었다.

단 형, 몇 분의 고인들을 그대에게 소개시켜 드리리다. 이분은 불평도장이고, 이분은 오선생이시고, 이분은 상동주이외다.

단예는 말했다.

예! 예!

그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그녀 곁에 있었는데 왜 나보고 부축하라고 하지 않고 자기의 오라버니보고 부축하라고 했을까! 그로 미루어 볼 때 그녀가 조금 전 나에게 업힌 것은 위급한 상태를 당해서 임시방편으로 취한 행동이다. 만약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가 그녀를 업을 수 있었다면,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에게 업으라고 했지 결코 내가 그녀의 몸에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녀가 만약 고종 오라버니의 등에 업혀 있었다면 흐뭇하게 여겼을 것이다. 심지어 등백천과 포부동 이 사람들도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의 부하이니 나보다 더 가까울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어떠할까! 나는 그녀와 아무 연고가 없으며 우연히 만난 사이이니, 이런 아무런 비중도 있을 수 없는 낯선 사람에 불과한 나를 어찌 마음속에 두고 있겠는가! 그녀가 나에게 그녀를 몇 번 쳐다보도록 허락하고, 그 가을의 호수처럼 밝은 눈동자로 나의 미천한 몸을 몇 번 흘겨보는 것만해도 나에게는 커다란 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눈앞에서 받고 있는 이 복도 더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아! 그녀는 이제 다시 나보고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해 달라고 하지 않겠구나."

불평도인과 오노대는 이때 단예의 눈빛이 망연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단예는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으며, 모용복이 소개하는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다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얼굴 가득 근심의 빛을 띠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네들과 인사 나누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불평도인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반갑소이다, 반나서 반가워.

그는 손을 내믿어 단예의 오른손을 잡았다. 오노대도 즉시 그 뜻을 알아차리고 손목을 휙 뒤집어서 단예의 왼손을 움켜 쥐었다.

오노대는 무공이 매우 패도적인 면이 있어서 손을 쓰자마자 아주 무지막지하게 나왔다. 물론 불평도인의 의도는 오노대의 의도와 마찬가지로 단예에게 쓴 맛을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평도인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매우 다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단예의 손을 잡게 되자, 네 개의 손바닥은 서로 맞닿게 되었으며 동시에 서로 운기행공한 상태로 상대방의 손을 쥐게 되었다. 그순간! 불평도인은 삽시간에 체내의 진기가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느끼고, 그만 깜짝놀라 급히 손을 떨치며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단예의 내력은 지극히 심오한 상태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불평도인의 손바닥에 자석처럼 붙어 있었다. 북명신공이 작용하여 상대방의 내력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노대는 단예의 손을 잡자마자 내경(內勁)을 돋우어서 독장을 내쏟았다. 독이 스며 있는 공력을 돋우어 단예가 온몸이 근질근질 해지면서 감당할 수 없도록 만들고 소리내어 용서를 빌어온다면 그때서야 해약을 주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단예는 망고주합을 먹게된 후 백독이 침범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오노대의 손으로 흘러 들어오는 독기는 단예에게 전혀 해를 입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오노대의 진기내력 역시 단예에게 흡수되고 말았다.

오노대는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이것 봐! 그대는 화공대법을 사용하고 있구려!

단예는 여전히 허공을 향한 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부축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는 했으나 더 무슨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천룡사에 출가하여 화상이 되자, 그리하여 고영 대사 아래 귀의하여 매일같이 몸을 깨끗하게 하고 모든 번뇌를 씻어 버릴 수있다면 속세의 죄를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니...."

모용복은 단예의 무공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불평도인과 오노대가 일제히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는 그만 안색이 크게 변하고 말갔다.

단예가 일부러 반격하는줄 알고 재빨리 불평도인의 등을 잡고 낚아채 듯 끌어당겼다. 그리고 진력을 벼락같이 쏟아냈다가는 즉시 거두어들여 북명신공의 흡인력을 막아냈다. 이렇게 되자, 간신히 불평도인을 떼어낼 수 있었다.

동시에 모용복은 부르짖었다.

단 형, 손에 사정을두시오!

단예는 깜짝 놀라 환상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즉시 백부 단정명으로부터 전수받은 신법을 펼쳐 신공을 거두어들였다.

오노대는 이때 온 힘을 다하여 바깥쪽으로 자기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손바닥이 떨어지고 상대방의 흡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자 그만 뒤로 몇 걸음 휘청하니 물러서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몇 걸음 물러선 후에야. 겨우 똑바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만 얼굴이 새빨개졌고 놀람과 분노에 얽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화공대법이다! 화공대법이야!

불평도인은 견문이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단예가 자기의 내력을 흡수하는 재간이 강호에서 악명이 자자한 화공대법과는 다른 점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로서도 단예의 흡인력이 화공대법과 똑같은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가 다른 무공인지 화공대법에 당해 보지 않았으니 꼬집어 말할수 없었다.

단예는 이 북명신공이 남들에 의해 화공대법으로 인식되었던 적이 몇 번 있었던지라 미소하여 입을 열었다.

성숙노괴 정춘추로 말할 것 같으면, 비열하기 짝이 없는 사람인데, 내 어찌 그의 추잡한 재간을 배우겠소! 그야말로 정말 견문이 좁구려....,아아아...

그는 본래 오노대를 비웃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왕어언이 자기를 남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그녀에 대해서 그야말로 넋을 빠뜨리고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생각에 하던 말을 중단하고 잇따라 세 번 크게 탄식을 불어내게 된 것이다.

이때 모용복 역시 화공대법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이 분으로 말하면 대리 단씨의 직계로 명문 정파이외다. 육맥신검은 천하무쌍이라고 할 수 있는 무공이외다. 그런데 어찌 성숙파의 정 노괴와 함께 논할 수 있겠소이까!

그는 그 순간 갑자기 자기의 손바닥과 팔이 갈수록 부어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결코 그키가 작달막하고 두 강추를 사용하던 사람의 공세를 맞받아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는 속으로 놀람과 의아함을 품게 되었고 손을 쳐들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손 등에 은연중 파란빛이 돌았고 코에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것이 아닌가! 그는 즉시 깨달았다.

"아, 그렇군! 나의 손등으로 녹파향로도의 독기가 살갗속으로 침입해 들어 오는 것을 막지 못했구나!"

그는 즉시 칼을 비껴들고 칼날을 자기쪽으로 향하게 한 이후, 오노대를 향해 말했다.

오 선생, 그대의 무기는 되돌려 드리겠소,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오노대는 손을 뻗쳐, 그 칼을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모용복은 칼자루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노대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칼은 좀 이상한데가 있지요.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품속에서 한 조그만 병을 꺼내더니 병마개를 뽑고 약간의 가루를 손바닥에 부어 모용복의 손등에 뿌리고는 부벼 주었다.

삽시간에 약기운이 살갗 안으로 스며들게 되었고, 모용복은 손바닥과 팔이 곧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해약이 이미 효과를 가져온 것이라 여기고 빙그레 웃고는 귀두도를 상대방에게 건네 주었다.

오노대는 칼을 받아들고 단예에게 말했다.

단형은 우리와 궁극적으로 적이 되겠소 아니면 친구가 되겠소! 불초는 심정을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만약 적이라면 그대의 무공이 고강하더라도 부득이 결사일전을 벌일 수밖에 없소.

그는 눈을 부릅뜨고 단예를 바라보는데 그 기세가 흉흉하기 이를데 없었다.

단예는 정에 얽혀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터인데 오노대와 같은 기개를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말했다.

내 자신의 번뇌도 너무 많아서 밀어낼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형편인데 무슨 심정으로 다른 사람의 쓸데없는 일을 상관하겠소! 나는 그대의 친구도아니고, 더우기 그대의 적도 아니외다. 내가 그대들의 일을 도와 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결코 훼방을 놓지는 않겠소, 아! 나는 천고에 드물게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며, 이 세상이 넓고 넓은 것을 생각하면서도 홀로 처연히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외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도 내가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만을 할 수 있을뿐인데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소! 강호의 이해득실을 이 단예가 어찌 마음에 두겠느냔 말이오!

불평도인은 그가 실성한 것처럼 중얼중얼 혼자서 씨부렁거리고 한마디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왕어언의 표정을 훔쳐보는지라 어떻게 된 사연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음성을 높여서 왕어언에게 말했다.

왕소저,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 모용 공자께서는 이미 의리로서 도움의 손길을 뻗칠 것을 약속했으며, 우리와 함께 의거에 참가하도록 했으니, 아마 소저 역시 참여하리라 생각되는구려.

왕어언은 말했다.

그래요 우리 고종오라버니 모용 공자께서 그대들과 함께 행동을 하신다면 저 역시 물론 도장의 뒤를 따르도록 하겠어요.

불평도인은 미소했다.

뒤를 따른다니 감당할 수 없구려. 왕소저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신 말씀이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단예에게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도 우리와 함께 행동하기로 했으며 왕소저 역시 우리와 함께 행동하기로 했소. 단 공자, 만약 그대 역시 참여해 준다면 모두들 고맙게 생각할 것이오. 그러나 공자께서 참가할 뜻이 없다면, 이곳을 떠나주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면서 오른손을 들고 손님을 전송하겠다는 시늉을 했다.

오노대는 입을 열었다. 이건...이건...아무래도 적절하지 못한 것 같구려. 그는 속으로 크게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혹시 단예가 떠나게 된다면 기밀을 누설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손에 바짝 힘을주고 귀두도를 꼬나 쥐었다.

단예가 한걸음 내딛기만하면 앞으로 나와 막을 작정이었다. 그는 왕어언을 붙잡아두고 있는 이상 열필의 말로 단예를 끌어갈려고 해도 끌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때 단예는 어슬렁거리며 한바퀴 원을 그리듯 하더니 말했다.

그대는 나보고 가보라는 말을 하는데, 나더러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오! 이 세상이 넓다하지만, 이 단예가 한몸 누울곳이 어디 있단말이오! 나는 갈 곳이 없는 몸이외다.

불평도인은 미소했다.

그렇다면 단 공자는 우리 모든 사람들과 행동을 함께 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 그대는 구경을 하면서 양쪽 다 도와 주지 않으면 그걸로 족하오.

오노대는 여전히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불평도인은 재빨리 그에게 눈짓을 하고 입을 열었다.

오노대, 그대가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치밀하구려. 자자자, 이곳의 삼십육동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에 대해, 빈도는 오래 전부터 대명을 듣고 흠모하던 차 였으나, 한 번도 얼굴을 맞댄 적이 없소이다. 차후에는 모두 똑같은 적개심을 갖고 적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그대는 마땅히 모용 공자, 단공자, 그리고 빈도에게 소개를 해주셔야 하오.

오노대는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는 즉시 뭇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한 사람씩 소개를 했다. 이 사람들은 한지방을 주름잡는 사람들이었지만 서로가 거의 모르는 처지였다.

오노대가 모용복등에게 소개를 하자 옆에 있던 사람중에는 종종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 원래 그가 바로 어느 동의 동주였구나!

어떤 사람은 나직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어느 도주가 위명을 크게 떨치는 소문을 진작부터 들을 수 있었는데, 저렇게 생겼다니 뜻밖이군.

모용복은 인사를 받으면서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인가? 그들은 오늘 밤 처음 만난 사람들 같지 않은가?"

이 일백 하고도 여덟 명의 고수 가운데 네 명은 조금 전 혼전 중에 모용복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네 사람의 부하들은 모용복을 대하자 자연히 음침한 표정에 적대시하는 눈빛을 드러내게 되었다.

모용복은 낭랑히 입을 열었다.

불초는 실수하여 여러분들 가운데 몇 분의 친구에게 상처를 입혔소. 마음속으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오. 이후부터는 온 힘을 다해서 잘못을 보상하도록 하겠소. 그러나 어느 분의 친구가 있어, 나를 이해해 줄 수 없다면, 지금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외부의 적을 상대해야할 판국이니 우선 그 원한은 제쳐 두었다가, 큰 일을 치른 이후, 고소 연자오로 불초를 찾아와 해결을 짓도록 하시구려.

오노대는 말했다.

옳은 말이외다. 지극히 옳은 말이외다. 모용 공자께서는 정말 시원스럽게 말씀을 해주셨소. 이곳의 뭇 형제들 간에는 조그만 원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적을 눈앞에 둔 이상 각자의 조그만 감정 같은 것은 모두 버려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시야를 좁게 갖고서 큰일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기회를 빌어 우리들의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려 할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많은 사람들은 다투어 부르짖었다.

만약 천산의 그 할망구를 상대해 내지 못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지키기가 어려운 판인데, 무슨 사사로운 원한을 왈가왈부 할 수 있단말이오?

둥지가 떨어지게 되면 알이 하나라도 성할 수 있겠소? 오노대, 단공자, 그대들은 얼마든지 마음을 놓으십시오. 그 누구도, 그처럼 우둔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외다.

모용복은 말했다.

그렇다면 잘되었소이다. 불초는 여러분들 앞에서 사과를 하겠소. 여러분들이 불초에게 어떤 분부를 내리실 것인지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소.

불평도인은 입을 열었다.

오노대, 모두들 큰일을 함께 하는 판이니, 운명을 같이 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그대는 모든 사람을 거느리는 두령 격이니 천산동모의 일을 우리들에게 들려 주도록 하시오. 그 노파에게 도대체 어떤 무공이 있는지, 어떤 놀라운 재간이 있는지를 말씀해 주셔야 빈도 또한 방비를 할 수 있고, 나중에 몸과 머리가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을 때도 어떤 수법에 당했는지 알게 되지 않겠소?

오노대는 말했다.

좋습니다 여러 동주와 도주들은 이번에 불초를 내세워 큰일을 이끌어 나가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오가는 재주도 없거니와 학문도 없는 사람으로서 원래 중임(重任)을 담당할 인물이 못 되는 터인데 다행히 모용공자와 불평도인, 그리고 탁선생 및 부용선자등 여러분이 이 의거에 참가하겠다고 하시니 불초의 짐은 훨씬 가벼워지게 되었소이다.

그는 단예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듯 단공자라는 이름은 들추지 않았다.

한사람이 입을열었다.

겸손한 인사말은 생략합시다.

또 다른 사람이 외쳤다.

제기랄! 우리들은 흰 칼을 찔러 붉은칼을 뽑아내는 사람들이오. 목숨이 걸린일에 그와 같은 빈껍데기의 말을 해서 무엇 하겠다는 것이오? 사람들을 데리고 놀자는 것이오?

오노대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홍(洪) 형제는 입을 열자마자 사정없는 상소리를 해대는구려 해마도(海馬島) 흠(欽) 도주께서는 수고스럽겠지만 동남쪽을 지켜주시오. 그리고 만약 적이 엿본다면 신호를 쏘아올려 주시오. 그리고 자암동(紫巖洞) 곽(藿확) 동주는 수고스럽지만 서쪽을 지켜 주셔야겠소.

그는 잇따라 여덟 명의 고수들로 하여금 여덟 방위를 지키도록 했다. 그 여덟사람은 각기 대답한후 부하들을 데리고 자기들이 지켜야할 곳을 찾아갔다.

모용복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덟 명의 동주와 도주들은 보기에만 오만하고 거친 것이 아니라 음침하고도 흉악한 인물인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놀랍게도 오노대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 모든사람들이 무언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빛을 드러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꾀하는 일이 대단히 엄중하며 상대가 두려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들과 함께 손잡을 것을 허락했으나, 아무래도 이 일은 정말 해내기가 힘들 것 갈구나."

오노대는 여덟 방위를 지킬 사람들이 멀리 떠나가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땅바닥에 앉도록 하시지요. 붙초가 우리들의 고충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소.

포부동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들과 같은 인물들은 살인 방화는 말할 것도 없고, 독을 쓰거나 노략질을 밥먹듯 한다고 생각되오. 보기에 하나같이 음독하고 흉폭할 것 갔소. 그리고 아무래도 한평생 나쁜 일을 적지 않게 했으리라고 보는데 무슨 고충이 있다는 것이오? 고충(苦衷)이라는 말이 노형의 입에서 흘러나오다니 그야말로 말이 어불성설이구려. 이치에 닿지 않아!

모용복은 말했다.

포 세째형, 조용히 오동주의 말씀을 듣도록 하시오, 그의 말을 가로채지 않도록 하시오.

포부동은 중얼거렸다.

나는 상대방의 말이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솔직히 말씀드린 것 뿐이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용복이 분부하자 더 입을 열고 따지지 않았다.

오노대는 얼굴에 쓰디쓴 미소를 띠우고 입을 열었다.

포 형의 말씀은 옳소. 이 오가는 재간이 얕지만 세상에 태어날 때 남 앞에 굴복하지 않는 성질을 타고 났소. 그리하여 내 쪽에서 사람을 업수이 여기는 일은 있어도 결코 남이 나를 업수이 여기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소, 그런데 그 누가 알았겠소! 아....

오노대가 한숨을 불어내게 되자 갑자기 옆에 있던 한 사람 역시 아, 하며 길게 장탄식을 불어냈다. 그 한숨소리는 너무나 처량하여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다.

뭇 사람들은 일제히 한숨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단예가 내뱉은 한숨이었다. 그는 두손으로 뒷짐을 지고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목청을 돋우고 시를 읊기 시작했다.

월출교혜, 교인요혜, 서료규혜, 노심초혜!

그가 읊는 것은 시경(詩經)중의 "월출(月出)"이라는 일 장이었다. 그뜻은 달빛이 고결하고 미인의 자태 또한 아름다운데, 내 마음속의 근심은 풀 길이 없어, 그만 우수에 잠겨 있더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사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학문과는 거리가 먼 무인들이라 그의 시경에서 따온 구절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들 노기를 띠우고 그를 바라보았으며, 그가 그와 같은 한숨으로 오노대의 말머리를 끊은 사실을 못따땅하게 여겼다.

왕어언은 물론 단예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혹시 고종오라버니가 탓할까봐 슬쩍 모용복을 한번 훔쳐보았다. 그런데 모용복은 온 정신을 가다듬고 오노대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 단예가 시를 읊는데 대해서는 전혀 유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왕어언은 안심을 했다.

오노대가 입을 열었다.

모용 공자와 불평도장 여러분들은 이제 남 아니니까 말을 해도 상관없을 것이오. 우리 삼십육 동의 도주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산 속에서 외따로 지내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섬에서 그 일대를 주름잡고 지냈소이다. 그야말로 자유롭고 멋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기실 하나같이 동모의 제약을 받고 있었소이다. 우리 모두 그녀의 노예외다. 일 년에 한두 번 그녀는 사람을 보내와 우리들을 사정없이 꾸짖고는 하는데 그야말로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러나 그대들은 우리가 그녀의 통렬한 꾸지람을 듣고 마음속으로 반드시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오? 사실은 그렇지 않소이다. 그녀가 보내온 사람이 욕을 무섭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기뻐한답니다...

포부동은 참을 수 없다는듯 입을 열었다.

그것 참 이상하군! 천하에 그와 같이 천한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이오? 남에게 욕을 무섭게 얻어먹을수록 더욱 기뻐하다니?

오노대는 말했다.

포 형은 잘 모르는 점이 있소. 동모가 파견한 사람이 우리들을 매섭게 한번 꾸짖을 경우 우리는 그 일년을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게 된다오. 그리하여 동굴이나 섬에서는 크게 며칠간 잔치를 벌여, 서로 평안무사해졌음을 축하하지요.

사람이 이 지경이 되다보니 그야말로 천하다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런데 동모가 파견한 사자가 우리를 후레자식이니 하면서 우리의 십파대 조상까지도 욕을 하지 않는다면 이후의 세월은 고달프게 된답니다. 그녀가 만약에 사람을 보내 욕을 하지 않는다면, 바로 사람을 보내 매질을 하지요. 그리하여 운수가 좋은 사람은 서른 번의 커다란 곤장을 맞게 되는데, 다리뼈가 부러지지 않는다면 역시 잔치를 벌여 경축하게되지요.

포부동과 풍파악은 서로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한참 애를 써서야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

남에게 수십 대의 곤장을 맞고서도 술자리를 벌여 잔치를 벌인다니.. 그러나 오노대의 말하는 소리가 처량할 뿐만 아니라 사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를 갈며 욕하는 것으로 보아 결코 그일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단예는그저 왕어언 한사람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다. 그가 왕어언을 바라 보니 그녀는 오노대가 하는 말에 귀를 귀울이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단예는 그녀가 듣고있기 때문에 자연 오노대의 말에 귀를 귀울이게 되었는데 몇 마디 말을 듣게 되자, 참을수 없어 손벽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을수 있을까? 그런 일이 있을수 있어? 천산동모는 도대체 신선이오, 사람이오, 아니면 요괴요? 그토록 날뛰다니. 그것이야 말로 사람을 업수이 여기는 행동이 아니겠소?

오노대는 그 말을 받았다.

단공자의 말씀이 옳소이다. 동모는 그야말로 너무나 우리들을 업수이 여기고 핍박했으며, 우리들을 개 돼지만도 못하게 학대했지요. 만약 그녀가 사람을 보내 우리의 볼기짝에 곤장을 때리지 않을 경우에는 종종 구렁이로 만들어진 채찍으로 등줄기를 갈기거나, 우리의 등에다가 몇 개의 못을 박는답니다. 사마(司馬) 도주, 그대가 구렁이 채찍에 얻어 맞은 상처 자국을 여러 친구들에게 보여 주도록 하시오.

그러자 삐쩍 마른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부끄럽소이다. 부끄러워.

그는 옷자락을 벗고 등뒤에 가로로 세 가닥, 세로로 세 가닥, 즉 종횡으로 아홉가닥의 새빨간 상처 자국이 교차되어 있는 모양을 드러내었다. 사람들은 이를 보자 구역질이 나는 것을 느꼈고, 그 노인의 몸으로 당시 그와 같은 매질을 당할 때의 광경을 상상하고 부르르 전율했다.

이때 한 흑의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게 대수요? 나의 등에 박혀 있는 부골정(腐骨釘)을보시오.

그는 옷을 벗었다. 세 개의 커다란 쇠못이 그의 등에 박혀 있었는데 그 쇠못에는 누렇게 녹이 슬어 있었다. 아마도 박힌지 오래된 모양이었으나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 흑의의 사나이는 그 못을 뽑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러자 한명의 승려가 목이 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于) 동주께서 몸으로 당하게 된 처참한 상처는 그래도 소승보다는 나은편 이외다.

그는 승포자락을 벗었다. 뭇 사람들은 그의 목 옆에 있는 비파골(琵琶骨)을 뚫고 한 가느다란 쇠사슬이 관통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쇠사슬은 아래로 내려와서, 그의 손목에 있는 완골을 꿰뚫어 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손목을 가볍게 움직이기만 하더라도 비파골을 건드리게 되니 그 아픔을 가히 상상할 수 있었다.

단예는 극도로 분노해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어처구니가 없어! 천하에 이토록 음흉하고도 악랄한 인물이 있다니! 오노대, 이 단예는 여러분에게 도움을 줄 것을 결심했소. 모두들 합심협력하여, 무림의 이 커다란 해악을 제거하도록 합시다!

오노대는 인사말을 했다.

단공자께서 의리로 도와주시겠다니 정말고맙소.

그는 고개를 돌려 모용복에게 말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동모의 억압을 받거나 해독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소이다. 우리들은 만선대회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사실은 우리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백귀대회(白鬼大會)라고 해야만 명실상부 한거죠. 우리들이 이 몇 년간 보낸 세월은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영혼들보다 더했답니다. 옛날에는 그녀의 수단이 악독한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달픈 세월을 보냈지만 다행히 하느님에게 눈이 있어서, 그 노파가 한 때는 날뛰었지만 역시 불운할 때도 있게 되었습니다.

모용복은 물었다.

여러분들이 천산동모에게 제압을 당하여 반항하기조차 어려웠던 것은 그 노파의 무공이 절정으로 고강하기 때문에 그녀와 손을 쓸 때마다 매번 졌기 때문이오?

오노대는 대답했다.

그 할망구의 무공은 물론 무섭기 짝이 없답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느 정도로 고명한지 그 누구도 모르지요.

모용복은 다시 물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가요?

오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지요.

모용복은 다시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그 노파도 끝내 불운하게 될 때가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은 무슨 뜻인지요?

오노대는 정신이 번쩍 드는 듯 입을 열었다.

뭇 형제들이 오늘 이곳에 모이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금년 삼월 초사흗 날 불초와 천풍동(天風洞) 안(安) 동주와 해마도 흠(欽) 도주 등 아홉 명이 차례가 돌아와 물건 바치게 되었죠. 그리하여 진주 보배와 능라비단, 산해진미, 연지화분 등 물건을 구해서는 천산 표묘봉으로 가져 갔죠.

포부동은 낄낄 소리를 내어 웃으며 물었다.

하하하, 그할망구는 늙은 요괴가 아니오! 할망구라고 하면서 어찌 아직도 연지분을 사용한단 말이오?

오노대는 말했다.

그 할망구는 나이가 많지만 그녀 아래의 시녀와 하녀들도 적지 않죠. 그리고 그 가운데는 젊은 여자들도 있으니까 자연 연지분을 사용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 봉우리 위에는 남자라고는 전혀 없으니, 도대체 그녀들이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화장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죠.

포부동은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았다.

아마도 그대에게 보여 주려고 화장을 했겠죠.

오노대는 정색했다.

포 형은또 농담을 하는구려. 어쨌든 우리들은 표묘봉으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때 검은 베로 우리의 눈을 가리게 되어, 소리는 들을 수 있었으나 사물은 볼 수 없었소이다. 그리고 표묘봉의 그 사람들이 아름다운지 추한지 아니면 늙었는지 젊었는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죠.

모용복은 물었다. 그렇다면, 천산동모가 도대체 어떤 모양의 사람인지 오노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단말입니까?

오노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사람이 보기는 보았죠 하지만 그녀를 본 사람은 실로 참혹한 일을 당하게 되었죠. 그 일은 이십삼 년 전의 일인데, 그는 대담하게도 몰래 눈을 가린 검은 베를 올리고 그 할망구를 한 번 보았죠. 그런데 미처 검은 베를 내리기도 전에 그 할망구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그 노파에게 두눈을 찔려 멀게되고, 다시 혓바닥을 잘리고, 두 팔을 잘리는 화를 당하게 되었죠.

모용복은 그 말을 받았다.

눈을 찔러 멀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겠지만, 혀를 자르고 팔을 자른 것은 또 무엇 때문이죠?

오노대는 말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그 할망구의 모습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하느라고 혀를 잘라 말을 못하게 하고, 팔을 잘라 손을 쓰지 못하도록 한 것이겠지요.

포부동은 혀를 내밀었다.

저런 망할년이 있나? 정말 무섭군, 무서워!

오노대는 입을 열었다.

저와 안 동주, 흠 도주 등이 표묘봉에 이르게 되었을 때 우리 아홉 사람은 그야말로 여긴 두려움을느끼지 않았답니다. 그 할망구가 삼년 전 갖추라고 명령한 약물 가운데 몇 가지는 너무나 구하기 어려웠죠. 그것은 바로 삼백 년 된 거북이의 알과 다섯 자 길이의 녹각 등이니 그야말로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없죠. 우리들은 그 분부대로 완전히 물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심한 벌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아홉 명이 전전긍긍하며 물품을 바치게 되자 할망구는 사람을 보내 전갈을 내렸죠. "구입한 물건을 받았으니 너희들 아홉 명 후레자식들은 빨리 빨리 봉우리 아래로 굴러 내려가도록 하라." 우리들은 그야말로 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즉시 봉우리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일각이라도 빨리 내려갈수록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왜냐하면 노파가 바친 물건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따지게 된다면, 그 책벌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소이까? 그런데 우리 아홉 명이 표묘봉 아래로 내려와 얼굴을가렸던 검은 베를 떼내자 산봉우리 아래에 세 사람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의 한사람은 서하국 일품당의 고수로서 이름 구익도인(九翼道人)이라고 하는 자였지요.

불평도인은 아,하고 입을 열었다.

구익도인은 원래 그 노파에게 살해를 당했군. 강호에서 고소 모용씨가 쓴 독수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포부동은 말했다.

개방귀 같은 소리, 팔미화상(八尾和尙)이고 구익도인이고 우리는 본 적도 없소이다. 어째서 우리의 짓이라고 할수 있단말이오?

그가 개방귀 같은 소리라고 한 것은 강호의 소문을 두고 한말이지, 결코 불평도인 보고 개방귀 같은 수작을 한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옆에서 들을 때 귀에 거슬리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불평도인은 여전히 화를 내지 않고 미소했다.

나무가 크면 바람을 많이 맞게 되는 것이고 또 여러 사람의 선망과 질시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

포부동은 호통을 쳤다.

개...

그러다가 그는 모용복을 흘낏 쳐다보고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불평도인이 입을 열고 넌지시 물었다.

포 형은 어찌하여 다음 할말을 뱃속으로 삼켜 버리고 마는 것이오!

포부동은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만 화가 치밀어 호통을 쳤다.

뭐라고! 그대는 내가 방귀를 삼켰다고 욕하는 것이오!

불평도인은 웃으며 말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소! 포 형께서 뭘 잡수시고 싶다면, 그 음식을 먹으면 될 것이 아니겠소.

포부동은 여전히 말다툼을 하려고 했는데 모용복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생각지 못했던 명예를 얻는 수도 있고 바라지 않았던 오해를 받는 수도 있지 않겠소? 포 형은 너무 따지지 않도록 하시오. 그런데 구익도인의 경신법이 지극히 고강하고 또 뇌공당(雷公撞)으로 펼치는 무공은 한평생 적수를 만나보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소. 그러니까 그와 불초는 전혀 원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진짜 원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초가 반드시 "뇌동어구천지상(雷動於九天之上)"이라 일컫는 구익도장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외다.

불평도인은 미소했다.

모용 공자께서 너무 겸손한 말씀을 하시는구려. 구익도장의 "뇌동어구천지상"이라는 재간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모용 공자께서 그에게 뇌동어구천지상이라는 무공을 되돌려 준다면 그로서는 그저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될 것입니다.

오노대는 불평도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구익도인의 몸에는 모두 두 곳의 상처가 있었는데, 모두 검에 의한 상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호에서는 고소 모용씨의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리지요 불초가 친히 목격한 바가 있으니, 어찌 거짓일 리가 있겠소! 모용 공자가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면 당연히 구익도인의 뇌공당으로 그에게 중상을 입혔을 것이 아니겠소!

불평도인은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두 곳의 검상이라고! 그대는 두 곳에 상처가 났다고 말하는 것이오! 그것참 이상하군.

오노대는 손을 뻗쳐 무릎을 탁, 치더니 입을 열었다.

불평도장은 정말 대단하시구려. 한 번 듣고 그 가운데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시는구려. 구익도장이 표묘봉 아래서 몸에 두 곳의 검상을 입었다는 것은 어쩐지 뭔가 잘못된 일 같단 말이외다.

모용복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것일까? 불평도인은 그 가운데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생각해낼 수가 없군."

삽시간에 그는 자기가 상대방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을 느껴야했다.

그런데 오노대는 모용복을 시험하고자 입을 열었다.

모용공자, 그대는 보기에는 크게 잘못된 것 같지 않소!

왕어언이 입을 열었다

구익도장의 한 곳에 난 검의 상처는 아마도 오른 다리에 있는 풍시혈(風市穴) 과 복토열(伏 穴) 사이에 있고, 다른 한곳에 나있는 검의 상처는 바로 등 의 현추혈(縣樞穴)에 나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일격에 그의 척추를 잘라버린 셈이지. 저의 말이 맞는가요?

오노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 당시 소저 역시 표묘봉 아래 계셨소? 어찌하여 우리들은 모두... 소저를 볼 수 없었죠?

그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무척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는 왕어언이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이후의 모든 행동을 그녀가 지켜보았을 터이니 지금쯤 비밀은 이미 누설되었고 대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천산동모에게 알려졌으리라 생각했다.

그러자 다른 한사람의 목소리가 사람들 틈에서 들려왔다.

그대는 어떻게 알... 알... 알...내 어찌 보지... 보지 보지... 못...

말을 한 사람은 대단히 말을 더듬거리는듯 했다. 거기다가 마음이 더욱 다급해 지자 제대로 설명을 못했다.

모용복은 그 사람이 더듬거리는 것을 보고 심히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십육 동의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웃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수단이 악랄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를 무척이나 꺼리나 보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즉시 포부동에게 눈짓을 해서, 그 말더듬는 사람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도록 당부했다.

이때 왕어언은 담담하게 말했다.

서역에 있는 천산은 이곳에서 만리 길이 더 되는 곳인데 제가 언제 가 볼 수 있었겠어요?

오노대는 더욱 두려워했다.

"그대가 친히 목격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전하는 것을 들었다면 이 일은 이미 강호에 확하니 소문이 나지 않았겠는가?"

그는 재빨리 물었다.

소저는 누구에게 들었소?

왕어언은 설명했다.

나는 그저 짐작으로 한 말이에요. "구익도인은 뇌전문(雷電門)의 고수예요. 손을 쓰게 되면 반드시 경신법을 펼치게 되지요. 그는 왼손으로 철퇴를 사용했으며, 사십이로(四十二路), 촉도난패법(蜀道難牌法)으로 가슴팍과 뒷등, 그리고 상반신과 왼쪽을 보호하는데 그야말로 철통과 같은 수비를 한 셈이라 상대방은 좀처럼 손을 쓸 수가 없어요. 유일하게 보이는 빈틈은 오른쪽에 있지요. 따라서 적이 검을 사용하여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반드시 그의 오른쪽 다리에 있는 풍시혈(風市穴)과 복토열(伏 穴) 사이로 손을 써야 하지요. 이 두 혈도 사이에 검을 찌르게 된다면, 구익도인은 자연히 철퇴를 들어서 가슴팍을 보호하려고 할 것이고, 동시에 뇌공당으로 춘뢰사동(春雷乍動)이라는일 초를 펼쳐 비스듬히 적을 내려치게 되겠지요. 만약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고수라면, 자연히 그 기회를 틈 타, 그의 등을 베게 될 것인데, 저의 짐작으로는, 그 일 초가 십중팔구 백홍관일(白虹貫日)이나 백제참사세(白帝斬蛇勢)와 같은 종류의 초식일 것이며 그의 현추혈(縣樞穴)에 있는 척추골을 베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구익도장의 무공이 고강한 점을 감안한다면, 검으로 그를 해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니까 가장 좋기로는 판관필(判官筆)이나 점혈궐(點穴厥) 같은 짧은 무기로써 제압해야 하지만 검을 쓰게 되었다면, 당연히 그와 같은 초식을 펼쳐야만 가장 커다란 효과를 나타낼 수 있겠지요.

오노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놓은 듯한 태도였다. 그는 잠시 후에야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입을 열었다.

탄복했소이다! 탄복했소이다! 고소 모용의 문하에는 실로 헛되이 이름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구려. 소저의 분석은 정말 사리에 합당하여, 그야말로 친히 본 것 같소이다.

단예는 참을수 없다는듯 불쑥 입을 열어 말했다.

소저는 왕씨외다. 그녀는...그녀는...고소모용씨가 아니라...

왕어언은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고소 모용씨로 말하자면, 저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 되지요. 그러니까 저를 고소모용씨 집안의 사람이라고해도 상관이 없어요.

단예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고 몸을 휘청거렸다. 귀에 웅웅거리고 메아리치는 소리는 그 한마디 뿐이었다.

"저를 고소모용씨 집안의 사람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어요"

그때 그 말더듬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그 댁...그댁...그택...

오노대는 그가 "며느리"라는 말을 다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구익도장의 몸에 난 상처는 바로 왕소저가 추측한 것처럼 오른쪽 다리의 풍시혈과 복토혈 사이에 일 검을 찔렸고, 뒷등, 현추혈이 있는 척추골이 잘라져 있었소이다...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듯 다시 한마디를 물었다.

왕소저, 그대는 확실히 무학의 도리로써 추리를 한 것이고 결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은 것이 아니란 말씀이오?

왕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더듬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만약 그대가... 오노대를 죽...죽인다면...어떻게...어떻게...

오노대는 그가 왕어언에게 어떻게 자기를 살해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말을 듣고 울화가 치미는듯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가 그와 같은 말을 묻는것은 어떤 심보에서지?

그러나 그는 즉시 생각을 돌렸다.

"저 소저는 나이가 젊다. 저와 같은 소저의 무학으로 추측하여 구익도인이 죽게된 사정을 알아낸다는 것은 실로 불가사의하다. 십중팔구, 그때 그녀는 표묘봉 아래에 숨어서 친히 그 누가 그와같은 검초를 써서 구익도인을 죽이는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이 일은 관계가 크니 다시 한번 똑똑히 물어 봐야겠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았소. 소저에게 묻겠는데 그대는 나를 죽이려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왕어언은 방그레 웃으며 모용복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나직이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 저 사람의 무공에 있어서의 빈틈은 바로 어깨 뒤의 천종혈(天宗穴)과 팔꿈치 뒤의 청냉혈(淸冷穴)에 있어요. 오라버니가 손을 써서 그의 두 곳을 공격한다면, 그를 제압할 수 있어요.

모용복은 이 수백 명이나 되는 고수들 앞에서 한소녀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직이 코웃음 치더니 낭랑히 입을 열었다.

오동주가 그대에게 묻고 있으니, 그대는 큰 소리로 말을 해도 상관이 없소.

왕어언은 얼굴을 붉히며 매우 부끄러워했다.

"나는 그저 오라버니의 호의를 사고자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와 같은 것이 남 앞에서 뽐내는 것이고, 그대 사내 대장부의 위풍을 해치는 일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내가 바보예요."

그녀는 입을 열었다.

고종 오라버니. 고소 모용씨는 천하 무학에 관해서 모르는 것이 없지 않아요! 그대가 오노대에게 들려 주도록 하세요.

모용복은 더 시치미를 떼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아서 입을 열었다.

오 동주의 무공이 고강하니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 어찌 수월하겠소! 오 동주, 우리들은 그와 같은 문제 밖의 일에 대해서는 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아무쪼록 계속해서 표묘봉 아래서 보고 들은 바를 말해 주시구려.

오노대는 그 날 표묘봉 아래에 정말 다른 사람이 있었는가를 알고 싶은 마음 뿐이어서 입을 열었다.

왕 소저, 그대가 이 오모에게 상처를 입히는 방법을 모른다면 구익도인을 주살하게 된 검초 역시 알아낼 수 없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말씀은 그야말로 이 오가를 희릉한 것이 되지 않겠소? 구익도인이 죽게 된 사연에 대해서 소저는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반드시 사실대로 알려 주시오. 이 일은 엄청난 일로서 결코 장난이 아니외다.

단예는 왕어언이 모용복의 결으로 다가가자, 온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가 모용복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지 주의했으며, 잔뜩 귀를 기울여 그녀가 모용복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의 내공은 심오하여, 왕어언이 모용복에게 한 말은 나직했으나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때 오노대의 어조가 마치 왕어언이 거짓말을 했다고 꾸짖는 듯 하자, 그야 말로 하늘의 선녀처럼 받드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모독하는 것을 보아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입을 열어 말하지 않고, 오른발을 들었으며, 오른발을 드는 즉시, 능파미보를 펼쳐서는 동쪽으로 흔들, 이쪽으로 후딱돌아 벼락같이 오노대의 등뒤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노대는 깜짝놀라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는 무엇...

순간 단예는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쪽 어깨 뒤에 있는 천종혈을 누르고, 왼손으로는 팔꿈치 뒤의 청냉혈을 움켜쥐었다.

이 두 곳의 혈도는 바로 오노대의 조문이 있는 곳이기도 했으며 그의 무공에 있어 가장 큰 약점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무릇 적과 마주쳐서 싸우게 될 때는, 누구나 자기의 조문에 대해서는 매우 엄밀히 지키기 마련이었고, 설사 상처를 입거나 상대방의 초식에 얻어맞는 경우는 있어도, 결코 조문이 있는 곳에 상처를 입는 수는 없었다.

단예는 그저 손을 쓸 뿐 그 수법은 전혀 법칙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보법이 정묘하여 삽시간에 오노대의 등뒤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왕어언이 오노대의 무공 수법에 대해 정확히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에 두 곳의 조문을 삽시간에 제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힘을쓰게 된다면 그는 즉시 폐인이 되고 말 형편이었다.

오노대는 단예가 내공을 헛되게 지니고 있을 뿐 뜻에 따라 쏟아낼 수 없기 때문에 설사 그의 조문을 움켜잡고 있다하더라도 실제로는 전혀 그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금 전 그는 단예의 손 아래 쓴 맛을 단단히 보았던 터인데 어찌 고강한 척 반항할 수 있겠는가? 그는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단공자의 무공은 정말 심오하구려, 불초는 정말 탄복했소이다.

단예는 입을 열었다.

불초는 무공을 모르오. 이것은 모두 왕소저가 가르져 준 것이오.

그는 천천히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오노대는 놀람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는 듯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 있더니 입을 열었다.

오모는 오늘에야 천하가 크고 넓다는 사실을 알았소이다. 그리고 무공이 고강한 사람이 천산동모 한사람 뿐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소이다.

그는 단예의 뒷모습을 몇 번이나 쳐다보며 혼란과 의혹을 흙처럼 떨쳐 버리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평도인은 입을 열었다.

오노대, 그대에게 이와 같이 재간이 큰 고인(高人)들이 있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니, 그야말로 기쁘고도 축하할 일이외다.

오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그렇소이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아지게 되었소이다.

불평도인은 말했다.

구익도인에게 그와 같이 두 곳에 검상을 입혔다면, 그것은 천산동모가 손을 쓴 게 아니겠구려.

오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당시 나는 그의 몸에 두 곳의 검상이 있는 것을 보고 도장과 똑같은 생각을 했소이다. 천산동모는 먼 길을 떠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요. 그리고 또 보통 사람이 어찌 표묘봉 백리 안으로 들어가 소란을 피우겠소이까? 그러니 만큼 그녀는 무공을 펼칠 때가 좀처럼 없지요. 따라서 표묘봉 백리 안에서 사람을 죽인다면, 틀림없이 그녀가 친히 손을 쓴 것으로 보아야 했죠. 또 우리들은 평소 그녀의 성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두 명의 고수를 표묘봉 아래로 유인하여, 그 할망구로 하여금 사람을 죽여서 얻는 쾌감을 맛보도록 하기도 했지요. 그녀가 사람을 죽일 때는 언제나 단 일 초에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지 상대방의 목에 잇따라 이 초를 펼칠 리가 없지 않소?

모용복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우리 모용씨 집안의 그대의 수법을 그대의 몸에 펼친다는 수법만 하더라도 이미 무림에서는 세간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재간이라고 높이 사고 있다. 그런데 천산동모는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서 제 이초를 사용하지 않는다니 이 세상에 그와 같은 무공이 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포부동은 모용복처럼 심지가 깊어서 좀처럼 마음을 드러내지 않을 위인이 되지 못했다. 그 역시 똑같은 의심을 갖게 되자 즉시 질문을 던졌다.

오동주! 그대는 천산동모가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서 제 이초를 펼치지 않는다고 했소. 무공이 평범한 자들을 상대로 할 때는 물론 어렵지 않으나, 고수를 상대하게 되었을 때도 설마하니 단 일 초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을수 있단말이오? 과장이 지나치군. 과장이 지나쳐! 그야말로 좀처럼 믿기가 어렵소이다!

오노대는 그 말을 받았다.

포 형이 믿지 못하는 것은, 불초로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소. 그러나 우리 사람들이 기꺼이 천산동모의 억압과 모욕을 받아들이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감히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에게 초인적인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외다. 이곳에 삼십육 동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 가운데 어느 누구 하찮은 사람이 있소? 그런데도 이 몇 년간 순순히 그녀가 시키는대로 했을 뿐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한 것이 무슨 이유겠소이까?

포부동은 마음속으로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가운데 정말 이상한 점이 있다. 이 곳의 여러 사람들은 결코 기꺼이 종놈이 되고자 했을리는 없지 않은가?"

그는 오노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즉시 반박하고 나섰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그대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은 다른 마음을 품고, 반역을 꾀하고 있지 않소이까?

오노대는 설명했다.

이 가운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외다. 당시 나는 구익도인의 두 곳 상처를 보고 마음속으로 의심을 품게 되었소. 그리고 다시 다른 두 사람의 시체를 살펴보았는데, 그들 역시 일초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 아니고 한바탕 크게 싸움을 벌인 것이 분명했으며, 그야말로 온몸이 상처투성이었소. 나는 즉시 안 형제와 흠 형제 등과 상의했으며, 이 일은 아무래도 수상한 데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소. "구익도인 등 세 사람은 동모가 살해한 것이 아닐까. 만약 동모가 살해한 것이 아니면, 영취궁의 동모 부하인 그 여인들이 어찌 감히 표묘봉 아래에서 사람을 죽여 동모가 일 초로써 사람을 죽이는 즐거움을 빼앗아 갈 수 있단말인가? "구익도인과 같은 고수를 죽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궁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이와 같은 즐거움은 좀처럼 누릴 수 없는 것이니, 그와 같은 행위야말로 동모의 입에 들어가려던 맛좋은 음식을 가로채는 것처럼 불경스러운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소. 따라서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여러가지 의문을 느끼게 되었고, 두 마장을 걸어나오게 되었을 때, 안 동주가 갑자기 입을 열고 말했소. 혹………혹시, 노부인께서………병이………병이………

모용복은 그가 일부러 말을 더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본래 그 더듬는 사람은 바로 안동주였구나."

이때 오노대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시 우리들은 표묘봉에서 멀리 떠나지 못한 상태였지요. 하지만 사실 만리 밖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할망구에 대한 말을 하게 되면, 그 누구도 감히 불평스러운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며 언제나 노부인이라고 칭했지요. 안 형제가 혹시 그녀에게 병이………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게 되자 모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말 병이 난 것이 아닐까하고 그의 말을받게 되었지요.

불평도인은 물었다.

그 동모는 도대체 몇 살이나 되는 분이오?

왕어언은 나직이 말했다.

결코 젊지는 않을 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그렇지요. 그 "모"자를 붙여서 이름을 지은 것만 보아도 결코 젊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대는 장래 모모라고 불리게 된다 하더라도 역시 젊고 예쁘게 보일겁니다.

그러다가 왕어언이 오노대의 말을 귀를 기울이고 있을뿐, 자기가 하는 말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약간 머쓱해져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오노대의 말을 나도 똑똑히 들어 볼 수밖에 없구나. 왕소저가 만약에 나에게 묻게 되었을 때, 내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야 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이때 오노대가 불평도인의 묻는 말에 대답했다.

천산동모가 몇 살이나 되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오. 우리는 그녀에게 예속되어 다스림을 받게 된 지 삼사십 년이 되지요. 다만 무량동의 동주 등 소수의 사람만이 근년에 영취궁의 휘하로 귀속된 것이죠. 어찌 되었건 그 누구도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으며 그 누구도 그녀의 나이를 묻지 못했답니다.

단예는 거기까지 듣게 되었을 때, 무량동주가 자기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방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신쌍청이 멀리서 한 커다란 바위에 기대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노대는 계속해서 말했다.

따라서 모두들 즉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지요. "사람은 모두 죽는다. 동모도 끝내 신선이 될 정도로 수련을 하지는 못할 것이고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몸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 우리들이 바친 물품은 제대로 갖추어지지도 못했는데 그녀가 벌을 가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이미 이상한노릇이다. 거기다가 "구익도인 등이 봉우리 아래 죽어 있는데 몸에 상처가 여러 개 있다는 것도 더욱 의심스러운 일이다." 어찌되었던 간에 그 간에 반드시 커다란 이상야릇한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모두들 각자의 심사에 빠져 있었으나, 거의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서로 나는 너를 쳐다보고, 너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을 뿐 그 누구도 감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었죠. 어떤 사람은 놀람과 기쁨의 표정을 지었고, 어떤 사람은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울상을 짓고 있기도 했죠. 각자 모두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동모가 우리를 얼마나 엄하게 다스렸습니까? 그러니 어찌 감히 알아보자는 말을 꺼낼 수 있었겠소! 한참 후에 흠 형제가 입을 열었죠. "안 둘째형의 짐작에는 정말 일리가 있다 하겠지만 이 일이 너무 위험하니, 이 형제의 의견으로는 우리가 각자 돌아가서 조용히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확실한 소식을 얻은후, 다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흠 형제의 신중론은 매우 적절한 방법이었으나………우리들로서는 도저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심정이었지요. 안동주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 생사부……… 생사부………"

그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죠. 그 할망구는 손에 우리의 생사부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반항할 수가 없었죠. 만약에 그녀가 병이 들어 죽게 된다면, 생사부는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은 다시 그 두번째 사람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겠소? 이야말로 한평생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단 말이외다. 만약 그 사람이 더욱 흉폭하고 악독하여 할망구보다 더욱 더하다면 우리가 장래 입게 될 해독은 오늘보다 더욱 더 무서울 게 아니겠소? 이것이야 말로 활을 시위에 메기고 당긴 이후 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죠. 분명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들은 반드시, 어떻게 된 노릇인가를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죠.

우리 가운데 무공과 기지에 있어 안 동주가 제일이었죠. 또한 그의 경신법(輕身法)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고강한 편이었죠. 그때 모두 조용히 입을 열지 않는 상태에서 여덟 명의 시선은 안동주의 얼굴에 못박히게 되었었죠.

단예, 왕어언, 등백천, 그밖의 안동주를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은 여러 사람 들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말은 더듬거리나 무공이 고강하다는 안모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뭇 사람들은 조금 전 오노대가 모용복과 불평도인 등에게 뭇 동주와 도주들을 소개했을 때 그속에 안동주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모두 떠올리게 되었다.

오노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동주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남을 사귀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터라 조금 전 여러분에게 소개시켜 드리지 않았으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라오. 당시 모두들 안동주가 나서서 결과를 알아냈으면 하고 바랬죠. 그때 안동주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불초로서는 조금도 사양할 수 없는 일이외다. 마땅히 가서 살펴보고 오겠소."

뭇 사람들은 당시 안 동주가 말을 할 때 결코 이토록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다만 오노대가 말더듬는 광경을 그대로 옮겼다가는 뭇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까봐 유창하게 옮긴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안동주라는 사람이 모용복과 불평도인등에게 인사를 하지 않은것도 말을 더듬기 때문이라는 점도 아울러 짐작할 수 있었다.

오노대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는 표묘봉 아래에서 기다렸소. 그야말로 일각이 여삼추같이 지루하고 초조하였소. 안동주에게 어떤 변고라도 일어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소. 모두들 동지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소이다. 우리들은 안동주가 할망구의 독수를 입지 않았는가 걱정을 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두려워한 것은, 할망구가 대노해서 우리들을 괴롭히지 않겠는가 하고 두려워했소. 그러나 사태가 그 지경으로 된 이상 억지로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고, 어찌되었든 그 할망구가 엄한 벌을 내리게 된다면 모두들 피할 수 없으리라고 각오를 했었소. 그리하여 세 시진이 흐르고 나서 안 동주는 약속한 장소로 돌아와 우리와 만나게 되었지요. 우리들은 그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우선 마음을 놓게 되었죠.

그는 곧, 입을 열고 말했죠. "노부인에게 병이 생겼으며, 그녀는 봉우리 위에 없소."

원래 그는 살그머니 표묘봉 위로 올라가 그 할망구의 시녀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 할망구가 깊은 병을 얻어 약을 구하려고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거죠!

오노대가 거기까지 말하자 사람들 틈에서 대뜸 환호성이 터졌다. 천산동모가 병을 얻었다는 소식에 대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으며, 여기에 모인 것도 바로 그 문제를 상의하자는데 있었다. 그런데도 이때 오노대가 하는 말을 듣고 다시금 갈채를 보내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병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하다니 이야말로 남이 재난을 당한 것을 고소하게 여기는 태도로군!

그러나 그의 이 몇 마디 말은 우뢰와 같은 갈채 소리에 파묻혀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오노대는 입을 열었다.

그와 같은 소식을 듣고 모두들 기뻐했죠. 하지만 할망구는 간계가 많아서 일부러 병이 난 척하여 우리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지요. 그리하여 아홉 명의 사람들이 상의하게 되었고, 다시 이틀이 지난 후 함께 표묘봉으로 올라가 염탐을 했소. 그때 오모도 친히 두 귀로 그와 같은 사실을 듣게 되었지요. 그런데 할망구는 정말 중병에 걸려 있었소. 다만 생사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포부동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것 보시오. 오노형, 그 생사부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상한 물건이오!

오노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물건을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죠. 일시에 포 형에게 제대로 설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외다. 어찌되었던 그 할망구가 생사부를 지니고 있는 한 언제라도 우리의 목숨을 빼았을 수 있다는 것만 아시면 되오.

포부동은 물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무서운 보물이겠구려?

오노대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신농방의 방주인 사공연 역시 천산동모의 생사부를 지극히 두려워하여 벼랑 아래로 뛰어들어 자결하지 않았는가? 이로 미루어 볼 때 그 보물은 정말 무서운가 보다."

오노대는 생사부에 대해서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리더니 뭇 사람에게 낭랑히 소리쳤다.

그 할망구가 중병을 얻은 것은 절대 틀림없는 사실이외다. 우리가 차제에 그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용기를 내어 목숨을 걸고 한바탕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외다. 하지만, 그 할망구가 지금쯤 이미 표묘봉의 영취궁으로돌아와 있는지 우리들은 알 길이 없소. 이후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모두들 함께 의논을 합시다. 더우기 불평도인과 모용 공자, 왕 소저………단 공자 네 분에게 어떤 고견이 있으시다면 아무쪼록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단예가 입을 열었다.

천산동모가 흉폭하면서도 패도적으로 여러분들을 업수이 여기며 핍박한다는 말을 듣고 불초는 마음속으로 분노를 느꼈으며, 표묘봉으로 올라가 그 노부인에게 따지겠다는 결심을 했소이다. 그러나 그녀가 병이 났다면, 그야말로 상대방의 위험을 틈타서 취하는 행동으로 결코 군자가 본받을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오. 나에겐 고견도 없지만, 설사 고견이 있다 하더라도 말하지 않을 것이외다.

35. 어린 여자애가 삽시간에 할머니로 변하다

(紅顔彈指老,刹那芳華)

오노대는 안색이 변해서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불평도인은 재빨리 그에게 눈짓을 하고 미소를 띠우며 단예에게 말했다.

단 공자는 군자이오. 사람이 위기에 처한 때를 노리지 않으니 그야말로 인격이 고상한 분이라고 할수 있소이다. 정말 탄복했소. 오 형, 우리가 표묘봉을 공격해 가는 데 있어서, 첫번째로 요긴한 것은 영취궁의 허실을 알아내는 것이외다. 안 동주와 오 형등 아홉분이 친히 염탐을 할 때 할망구가 떠나간후 궁중(宮中)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가 남아 있었으며, 그들의 준비는 어떠했소? 오 형이 모든 것을 알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들은 것이 있을테니까, 여러분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말해 주시면 어떻겠소?

오노대는 말했다.

사실 말하기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우리들이 염탐하러 가서 살펴보았을 때, 그 누구도 감히 마음을 놓고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애써 자기 몸을 숨기며 혹시나 누구와 만나게 될까봐 두려워 했소. 그러나 불초는 결국 영취궁 뒤의 화원에서 한 여자애한테 발견되고 말았습니다. 그 여자애는 시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고개롤 쳐드는 바람에 그만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게 되었죠. 불초는 혹시나 비밀을 누설하게 될까봐 달려들어, 금나수법을 펼쳐 그녀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나로서는 목숨을 건 행동이었지요. 영취궁의 소저들과 부인들은 할망구의 지도를 받아 무공에 있어서 하나같이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불초는 상대방이 여자아이에 불과한데도 매우 두려워했죠. 내가 달려들었을 때, 이야말로 구사일생의 모험을 걸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의 음성이 약간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형세가 얼마나 위험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노대가 감히 표묘봉에서 손을 쓰게 된 것은 실로 부득이한 처지에서 모험을 한 것이었지만 역시 대담한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달려들자마자 전력을 기울였으며 두손으로 펼친 것은 호조공(虎爪功)이었지요. 그 생각은 만약 일 초에 이 여자애를 잡지 못하고 그녀가 소리를 지르게 된다면, 많은 사람이 달려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즉시 수백 장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위에서 뛰어 내려 시원하게 자결을 함으로써 할망구의 수하인 그 여자들의 손에 잡혀 무궁무진한 고통을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였지요. 그런데……… 그런데 내가 왼손으로 그 여자의 어깻죽지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자 그녀는 전혀 항거하지 못했으며 몸을 혼들하더니 그만 쓰러져 버리고 마는 것이 전신에 기운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고, 또 전혀 무공을 모르는 것 같았소. 그때 나는 너무나 기뻐서 일순 멍청해졌으며,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소이다. 여러분들이 웃으실런지 모르지만 그야말로 나는 내 자신에게 놀라게 된 셈인데, 그 여자애가 맥없이 쓰러지는 바람에 이 못난 오노대 역시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것이죠.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사람들 틈에서 한 차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각자 심정이 약간 풀어지는 모양이었다.

오노대 자신은 자기를 담이 적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비웃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가 기실 지극히 용감하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었다.

용감하지 않으면 그 누가 감히 표묘봉 위에 올라가 영취궁의 사람을 사로잡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때 오노대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부하 한 사람이 검은 부대자루를 들고 다가와서는, 그것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오노대는 자루주둥이를 묶은 밧줄을 풀더니 부대자루 주둥이를 아래로 하고 흔들어댔다. 그러자 그 속에서 한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뭇 사람들은 모두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사람은 체구가 무척 작은 조그만 여자아이였다.

오노대는 의기양양하며 말했다.

이 여자애가 바로 이 오모가 표묘봉 위에서 잡아온 꼬마라오.

뭇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오노대는 정말 대단하시오!

정말 영웅호걸이시오!

삼십육 동, 칠십이 도의 뭇 호걸들 가운데, 역시 오 노대가 으뜸이라고 할 수 있소!

뭇 사람들의 환호성 가운데 어어어, 하는 울음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 여자애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오노대는 입을 열어 설명했다.

우리들은 이 계집애를 잡은 이후에 더 지체했다가는 소문이 나게 될까봐 즉시 봉우리에서 내려왔소이다. 그리고 줄곧 이 계집애에게 물어보았으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벙어리였소. 처음에는 그녀가 귀머거리 벙어리인 척하는 줄 믿고 많은 방법으로 시험해 보았으며 때로는 그녀의 등뒤에서 크게 고함을 질러서 그녀가 놀라지 않는가도 살펴보았지만 정말 벙어리임에 틀림없었소.

뭇 사람들은 그 여자애의 우는 소리가 어버버버, 하는 벙어리 소리인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물었다.

오노대,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글자도 쓸 줄 모르오?

오노대는 대답했다.

글자도 쓸 줄 몰랐소. 우리는 고문도 해봤고, 물에 담궈 보기도 했고, 밥을 굶겨 보기도 했소.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지만, 그녀는 버티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르는 것 같았소.

단예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흥! 비열한 수단으로 나이 어린 소녀를 괴롭힌 것이 부끄럽지도 않소?

오노대는 단예를 노려보았다.

우리가 천산동모에게 받은 고통은 그보다 십 배나 더 비참한 것이었소. 그만큼 당했기에 그만한 앙갚음을 하는 것인데, 뭐가 부끄럽다는 것이오?

단예는 말했다.

그대들이 원한을 갚겠다면, 마땅히 천산동모에게 찾아가 상대해야 옳은 일 이외다. 그녀 수하의 일개 나이 어린 시녀를 상대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오노대는 말했다.

물론, 소용이 있지요.

그는 음성을 높여서 말했다.

여러 형제들, 우리가 오늘 협심합력하여 표묘봉에 반기를 들게 된 것은, 차후로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고 화가 있으면 함께 극복해 나가자는 뜻 이외다. 따라서 모두들 피로써 맹세를 하고 대사를 도모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싫은 사람이 있다면 말을하시오.

그가 잇따라 두 번이나 물었으나 나서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묻게 되었을 때 한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몸을 돌리더니 아무 소리도 하지않고 서쪽을 향해 달려갔다.

오노대는 소리 질렀다.

검어도(劍魚島) 구(區) 도주, 어디로 가시오?

그 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발걸음을 빨리 해서 달려갔으며 몸놀림이 지극히 빨라 순식간에 산모퉁이를 돌아가게 되었다.

뭇사람들은 부르짖었다. 저 사람은 담이 적어서, 막판에 이르러 도망을 치려는 것이니 붙잡읍시다!

삽시간에 십여 명이 뒤쫓아 갔는데, 하나같이 경신법이 훌륭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구 도주와는 이미 상당한 간격이 벌어져 쫓아갈 수 있을는지 의문이었다.

별안간 아,하는 기다란 비명 소리가 산 뒤쪽에서 울려퍼졌다. 뭇 사람들은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안색을 바꾸었고, 뒤를 쫓던 십여 명의 사람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이때 휙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한 둥근 공 같은 것이 산모퉁이 뒤쪽에서 질풍같이 날라오더니 허공을 가로질러서는 사람들 틈바구니로 떨어졌다.

오노대는 몸을 날려 앞으로 나아가, 그 둥근 것을 바라보았다. 등불아래 보니, 그것은 피와 살로 얼룩져 있었는데 바로 한 사람의 머리가 아닌가! 그얼굴을 살펴보니 수염과 눈썹을 칼날처럼 곤두세우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바로 조금전 도망을 친 구 도주였다.

오노대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시에 그는 구 도주가 어떻게 해서 이같이 짧은 시간에 목숨을 잃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지극히 공포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혹시 천산동모가 살해한 것이 아닐까?

불평도인은 낄낄 웃으며 입을열었다.

하하하! 검신(劍神)의 신검은 과연 명불허전이외다. 탁형(卓兄), 정말 잘 지켜주셨소.

산모퉁이 서쪽에서 밝은 음성이 들려왔다.

막판에 이르러 물러선 놈은 모든 사람이 때려 죽여야 마땅하오. 여러 동주들과 도주들은 너무 꾸짖지 마시오.

모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다행히 검신이 반역도를 없애 주었기 때붉에 우리의 큰일을 그르치지 않게 되었소이다.

모용복과 등백천 둘은 똑같이 생각했다.

이 사람이 검신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너무 지나친 감이 있다. 검법이 아무리 고명하다 하더라도 어찌 스스로 신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는가? 강호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검법이 어느 정도 고명한지 모르겠구나."

오노대는 큰소리로 발했다.

뭇 형제들은 모두 무기를 뽑아들고 이 계집애에게 한 번씩 칼질을 하시오. 이 계집애는 나이가 어리고 벙어리이긴 하나 역시 표묘봉 사람이외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피를 묻히는 것은 이후부터 표묘봉과는 결코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살지 않겠다는 의미이니 또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할 것이오.

그는 말을 끝내고 즉시 귀두도를 손에 들었다. 한무리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맞소,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오. 모두들 피를 뿌려 맹세를 하게 된다면 이후부터 앞으로 나아갈 뿐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그 할망구를 상대로 싸우게 될 것이오.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말도 안되오!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이외다! 모용 형, 그대는 반드시 손을써서 이와 같은 악행을 저지해야 하오.

모용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형, 여러 사람들의 목숨이 바로 이 행동에 달려 있다고 할수 있소. 우리는 외부의 사람이니 함부로 간섭을 할 수 없소.

단예는 격분하여 부르짖었다.

사내 대장부는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나서서 해결을 해야 한다고 들었소. 그런데 어찌 한눈을 감고 한눈을 뜬 채 모른 척한단 말이오! 왕소저, 그대가설사 나를 욕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녀를 구해야겠소. 다만………다만……… 이 단예는 손에 닭조차 잡을 힘이 없으니, 저 소녀의 목숨을 구하기란 정말 어렵겠지요. 이보시오, 등 형, 그리고 공야 형, 그대들은 어째서 손을 쓰지 않으시오! 포 형, 내가 달려들어 사람을 구할테니까, 그대들은 뒤에서 후원하는 것이 어떻겠소?

등백천 등은 언제나 모용복이 하자는 대로 해왔다. 그런데 모용복이 뛰어들기 싫어하는 것을 보자 단예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검연쩍은 빛을 띠우고 있었다.

오노대는 단예가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 단예의 무공이 지극히 고강한데 정말 나서서 방해를 한다면 상대하기가 수월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밤이 길면 꿈이 많은 법이라고 빨리 처단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즉시 귀두도를 들고 부르짖었다.

오노대가 가장 먼저 손을 쓰겠소!

그는 몸뚱이가 아직도 푸대자루 안에 들어 있는 여자아이를 향해 칼을 내려 쳤다.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그는 손가락을 뻗쳐 중충검(中衝劍) 일 초를 펼쳐 오노대의 귀두도를 찔러갔다. 그런데 그는 이 육맥신검을 자기의 마음대로 내쏟거나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어떤 때는 진기가 넘쳐흐르면서 무궁무진한 위력을 보였으나, 어떤 때는 손톱만큼의 내력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이때 일 검을 찔러내기는 했으나 진기가 손바닥까지 와서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바로 오노대의 한 칼이 그 여자아이의 몸에 닿게 되었을 때였다. 별안간 바위뒤에서 한 검은 그림자가 달려나와, 왼손을 뻗쳐내어 엄청난 힘으로 오노대를 밀어 버렸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땅바닥의 푸대자루를 잡아들더니, 그 여자애와 함께 등에 메고 서북쪽의 산봉우리로 질풍같이 달려갔다.

뭇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다투어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달려가는 속도는 매우 빨라서 삽시간에 산등성이의 밀림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뭇 동주들과 도주들이 던진 암기는 죄다 나무에 맞거나, 아니면 나무가지와 잎사귀에 맞아 떨어지고 말았다.

단예는 크게 기뻐했다. 그는 시선이 날카로와 이미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알아볼 수 있었는데, 바로 그날 총변 선생 소성하의 바둑대회에서 만난적이 있었고, 그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진롱(珍瓏)을 풀었던 사람이었다.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로 소림사의 허죽(虛竹) 화상이오! 허죽 사형! 이 단가가 그대에게 합장하고 예를 하는 바이오. 그대 소림사는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하던데, 과연명불허전이외다!

뭇사람들은 그사람이 일 장으로 오노대를 밀쳐 버렸고 또 발걸음도 가벼워 무공이 탁월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거기다가 단예가 소림사의 화상이라고외치는 말도 듣게 되었다.

소림사는 그야말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형편이라, 모두들 마음속으로 겁을 집어먹고, 감히 너무 가깝게 다가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 일은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여자애가 승려에게 구원을 받게 되어 그녀를 죽여 입을 봉할 수 없게 되면, 뭇 사람들이 도모하던 바는 즉시 누설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해아릴 수조차 없는 엄청난 화가 그들 자신에게 미치게 될 형편이었다. 따라서 각기 휘파람을 내불거나 고함을 치면서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갔다.

이때 그 소림사의 승려는 질풍과 같이 산봉우리 위로 올라갔다. 산봉우리는 구름 위로 솟아 있었으며 산봉우리 일대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산꼭대기까지 기어 오르려면, 경신법의 고수라 하더라도 사오 일은 걸릴 것 같았다.

불평도인은 부르짖었다.

모두들 놀라고 당황할 것 없소이다. 저 화상이 산봉우리로 올라간 이상, 제발로 막다른 길로 접어든 격이니, 그가 하늘로 올라가게 될까봐 두려워 할필요는 없소이다. 모두들 봉우리 아래의 통로를 지키면 될 것이오.

여러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약간 마음을 놓았다. 즉시 오노대가 사람들을 나누어, 그 산봉우리의 사방 통로를 겹겹이 지키게 되었다.

혹시나 그 소림승이 내려오게 되었을 때 지키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될까봐 길목마다 세 곳의 초소를 세웠다.

첫번째 초소의 사람들이 막지 못할 때에는 두 번째 초소의 사람들이 막고, 두번째 초소의 사람들이 막지 못하게 될 때에는 세 번째 초소의 사람들이 막도록 했다. 그리고 달리 십여 명의 고수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순라를 돌며 접응토록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수를 안배하여 정하고 나서 오노대는 불평도인, 안동주, 상 토공, 곽 동주, 흠 도주 등 수십 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산위로 수색하며 올라갔다. 반드시, 그 승려를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려는 생각이었다.

모용복 등 몇몇 사람들은 동쪽 길을 지키게 되었다. 겉으로는 그들에게 동쪽을 지키도록 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 승려를 잡는 데 참여 시키지 않겠다는 수작이었다. 모용복은 오노대가 자기들에 대해 아직도의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환히 내다보고 그저 빙그레 웃고 등백천 등과 동쪽 길을 지켰다. 단예는 다른 사람이 싫어하든 말든, 그저 허죽의 영웅적인 행동을 소리내어 칭찬했다.

부대자루 안의 사람을 빼앗아 달아난 사람은 바로 허죽(虛竹)이었다. 그는 조그만 반점에서 모용복과 정춘추가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만 혼비백산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다가 유탄지가 아자를 구하여 달아나고, 모용복이 정춘추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문 밖으로 달려나가고 정춘추가 그들 뒤를 쫓아나간 기회를 틈타, 즉시 뒷문으로 뺑소니를 쳤다.

그는 오로지, 혜방 등 사백들과 사숙들을 찾을 생각뿐이었다. 사실 그는 일장으로 사백조 현난대사를 쳐죽이게 된 후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니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거기다가 그는 강호를 떠돌아 다녀 본 경험도 없었고, 길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정춘추와 모용복이 한바탕 크게 싸우는 것을 보고는 그야말로 화살에 놀란 새처럼 겁을 집어먹고 조그만 반점이나 객점에 감히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산길만 찾아 마구 뛰었다.

이 무렵 삼십육 동의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들은 이곳 산골짜기에서 모임을 갖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제각기 제자와 부하들을 이끌고 이 골짜기로 모여들게 되었으며, 그 수가 적지 않아 허죽은 길에서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죽은 이 사람들이 강호의 인물들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혜방 등 사숙, 사백의 행방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흉악한 것이 정춘추와 한패거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들이 가만이 상의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을 해치자는 내용이었다.

허죽은 속으로 의로운 일을 행하고, 위태롭거나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출하는 일이야말로, 소림사 제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즉시 그 사람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고, 끝내 그날 밤의 정경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강호의 은원(恩怨) 관계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오 노대가 귀두도를 쳐들며, 항거할 힘이 없는 벙어리 여자애를 쳐죽이려고 하자 그만 자비심이 솟아 올라 여자애를 반드시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즉시 바위 뒤에서 달려나가 부대자루를 가로채고 도망쳤던 것이다.

그는 산봉우리 위에 이르자 진기를 돋우고, 더욱 빨리 달려갔다. 달려갈수록 숲속의 나무들이 빽빽해졌다.

얼마 후에는 뒤쫓아 오는 사람들의 부르짖는 소리도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가 손을 써서 사람을 구한 것은 그저 일시 끓어오르는 자비심 때문이었다.

그는 사실 보살이나 부처님이 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여러 중생의 어려움을 보고 반드시 구해 내야 한다고 평소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무서운 무공을 생각하고, 악랄한 수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누구라도 나서게 된다면 자기가 상대방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디 으슥한 곳으로 도망쳐서 숨어야 그들이 다시 나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래야 이 여자애와 나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

이때 그는 나무들이 빽빽하고 또 무성하게 서 있는 곳을 찾아 기어들어 가곤 했다. 다행히 그는 소요파 노인이 칠십여 년이나 쌓아올린 내공을 이어받은 몸이라 내력이 끝없이 충만하여 약 두 시진이나 달려왔으나, 조금도 피로하지 않았다. 다시 한참 동안 달려가게 되었을 때 날이 훤하게 밝아왔고 발 밑에 쌓인 눈이 밟혔다.

이미 산허리께까지 달려온 것이었는데 밀림에 햇볕이 제대로 내려 비치지 않아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사방의 지세를 살폈다. 그런데 그의 심장은 아직도 여전히 쿵쿵, 뛰고 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디로 도망가야 좋지?

이때 등뒤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저 도망만 치다니 너의 그 행동에 내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다.

허죽은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이쿠!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산봉우리 위로 달려갔다. 수 마장을 달려간 이후에야, 겨우 고개를 돌렸으나, 그 누가 쫓아오는 것을 볼 수 없어 나직이 중얼거렸다.

뒤쫓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등뒤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사내 대장부가 이토록 놀란 모양을 보이다니, 정말 강아지와 같고, 쥐새끼 같으며 짐승새끼 같구나.

허죽은 다시 한 번 크게 놀라 앞으로 달려갔다. 등뒤에서 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겁쟁이이고, 우둔하구나! 정말 형편없는 녀석이다!

그 소리는 등뒤, 한두어 자 되는 곳에서 들려와 그야말로 손을 뻗치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야단났다. 야단났어! 이 사람의 무공이 이토록 고강하니 이번에야말로 독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게 되었구나."

그는 죽어라 하고 점점 힘을 주어 달렸다.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렇게 무섭다면 영웅호걸이랍시고 사람을 구하지 말아야 하지 않았느냐? 너는 도대체 어디까지 도망칠 셈이냐?

허죽은 그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 그만 두 다리에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몸을 돌렸다.

이때 날은 이미 훤히 밝았고 햇살은 짙은 그늘을 뚫고 스며들고 있었는데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허죽은 그 사람이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공손히 입을 열었다.

소승은 그 사람들이 한 나이 어린 소녀를 해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자기 분수도 생각지 않은 채 손을 써서 사람을 구하게 된 것 뿐이지 결코 영웅이랍시고 뽑내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그 음성이 냉랭히 말했다.

분수를 모르고 일을 처리했다면, 그야말로 단단히 쓴맛을 보아야 하겠군.

그 소리는 바로 그의 등뒤 귓가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허죽은 더욱 의아함과 기이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등뒤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 사람의 수법이 이토록 빠르니, 무공은 자기의 십 배나 더 강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손을 뻗쳐 자기를 해치려 한다면, 허죽에게 목숨이 열 개가 붙어 있다 하더라도 모자랄 형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조로 미루어 볼 때, 자기가 담이 작고 무능한 것을 꾸짖을 뿐이지 결코 오노대 등과 한 패거리의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입을 열었다.

소승이 무능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쪼록 선배님께서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그 소리는 냉소했다.

너는 나의 제자나 사손이 아닌데, 내가 어찌 너를 지도 할수 있겠느냐? 허죽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소승이 함부로 말씀드린 것을 선배님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 적은 사람 수가 많아, 소승은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저는 도망을 쳐야 되겠습니다.

그 한 마디를 하고 그는 진기를 돋우고는 산봉우리 쪽으로 달려갔다.

등뒤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산봉우리는 그야말로 막다른 길이야. 그들이 산봉우리 아래에서 지키고 있으면, 너는 어디로 도망을 치지?

허죽은 어리둥절 해져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저는……… 저는………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선배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밝은 길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 음성의 주인은 싸늘히 냉소를 흘렸다.

지금 눈앞에는 두 길밖에 없다. 한길은 몸을 돌려 달려내려가 그 요사한마귀들을 모조리 주살하는 것이다.

허죽은 재빨리 대답했다.

소승은 무능하고, 또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는 말했다.

그렇다면, 두번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지. 너는 몸을 훌쩍 날려 저 만장이나 되는 깊은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려라. 그렇게 된다면, 온몸이 박살나서 모든 것이 끝장나, 해탈을 얻게 될 것이다.

허죽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

그는 고개를 돌리고 보았다. 이때 그의 주변은 하얀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눈이 쌓여 있는 땅위로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이 나 있을 뿐 다른 사람의 발자국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사람은 눈을 밟는데도 흔적을 내지 않으니, 무공의 고강함은 실로 불가사의한 경지에 도달했구나"

이때 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뭘 우물쭈물 하느냐? 할말이라도 있느냐?

허죽은 대답했다.

제가 뛰어내리게 된다면, 소승이 죽는 것은 물론이지만 소승이 구하고저 하는 여자애도 동시에 목숨을 잃게 되옵니다. 사람을 구하려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고, 소승이 불도를 닦은 것이 아직도 얕아 마음을 넓게 가지고서 열반으로 들어설 처지가 못됩니다. 반드시 재차 윤회하여, 생사와 유전의 고달픔을 다시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음성은 물었다.

그럼 그대는 표묘봉과 어떤 관계가 있지? 어째서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그 사람을 구하려고 했지?

허죽은 재빠른 걸음으로 봉우리 위를 향해 달려가며 말했다.

표묘봉이고, 영취궁이고, 소승은 오늘 처음 듣는 바이오. 소승은 소림 제자입니다. 이번에 명을 받고 산을 내려왔는데 강호의 어떤 문파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야말로 정의를 위해 용감히 나선 소화상이시군!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 나선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소승에게는 아무런 견식도 없고, 그저 부질없는 행동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슴속에 많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어서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처지입니다.

그 소리는 말했다.

그대의 내력이 충만하고 착실한 것을 보건대, 이 공력은 소림 일파의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떻게 된 것이지?

허죽은 대답했다.

이 일은 말하자면 깁니다. 바로 소승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는 풀기 어려운 문제이지요.

그 소리는 다그치듯 말했다.

뭐가 말을 하자면 길다는 것인가? 나는 그대가 여러 모로 변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빨리 말해라.

그 어조는 매우 준엄해서 실로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허죽은 소성하가 하던 말을 생각했다. 소성하는 그 일은 지극히 은밀하니, 결코 본파 이외의 사람에게 들려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허죽은 등뒤에 있는 사람이 무공이 무척 고강한 선배임을 알 수 있었으나, 얼굴까지도 보지 못한 처지라서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선배님 용서하십시오. 소승에게는 실로 고충이 있어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빨리 나를 내려 놓아라.

허죽은 깜짝 놀라 물었다.

뭐……… 뭐라고요?

그 소리는 말했다.

빨리 나를 내려 놓으라니까? 뭐긴 뭐야, 말이 많다.

허죽은 그 목소리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고 그저 늙수그레하다는 것만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빨리 내려 놓으라는 말을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등뒤의 그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정히 당황해 할때 그 목소리가 다시 꾸짖는 것이 아닌가?

못난 화상 같으니라구! 빨리 나를 내려 놓으라니까? 그대 등뒤의 부대자루 안에 들어있단 말이야!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허죽은 더욱 깜짝 놀라 그만 두 손을 놓고 말았다. 푹,하는 소리와 함께 푸대 자루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부대자루 안에서 어이쿠, 하고 부르짖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줄곧 들려왔던 그 음양이었다. 허죽 역시 어이구,하고 놀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나이 어린 소저, 바로 그대였군! 그런데 그대의 음성이 어찌 그리 늙수그레하지?

그는즉시 푸대자루를 풀어헤치고, 그 여자애를 밖으로 내놓았다.

부대 안에서 나온 사람은 체구가 왜소한, 바로 그 팔구 세의 여자애였다. 그러나 두 눈에서 번개불처럼 형형한 안광이 빛나고 있었는데, 허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한가닥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허죽은 그만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여자애는 입을 열었다.

윗어른을 보고도 절을 하지 않다니 예의를 모르는구나!

그 목소리는 매우 늙수그레했고, 표정 또한 의젓했다. 허죽은 입을 열었다.

나이 어린……… 나이 어린………소저.

그 여자애는 호통을 내질렀다.

뭐가 나이 어린 소저이고 나이가 많은 소저야? 나는 그대의 할머니뻘이 돼!

허죽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장난은하지 맙시다. 자, 그대는자루 안으로 들어가시오. 내가 그대를 업고 산위로 오르겠소. 잠시 후면 적이 쫓아올지도 모르오.

그 여자애는 허죽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갑자기 그의 왼손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롤 발견하고 안색이 변하여 물었다.

그대………그대의 그것은 무슨 물건이지, 나에게 보여 줘.

허죽은 본래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물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혹시나 잃어 버리게 될까봐 주머니나 품속에 넣지 않고 손가락에 끼워 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애가 묻는 말을 듣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별로 놀기 좋은 물건도 아니오.

그 여자애는 손을 뻗더니, 그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 반지를 살폈다. 그녀는 허죽의 손바닥을 요모조모로 한참 동안 뜯어 보았다.

허죽은 자기의 손을 잡고 있는 조그만 손이 끊임없이 떨리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때 그녀의 맑고 고운 두 커다란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한참 후에야 그녀는 허죽의 손을 놓았다.

그 여자애는 입을 열었다.

이 칠보(七寶) 반지를 그대는 어디서 훔쳐 왔지?

그 소리는 매우 준엄하여, 마치 도적을 심문하는 것 같았다. 허죽은 속으로 불쾌하게 생각하고 말했다.

출가하여 계율을 엄히 지키는 몸인데,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친단 말이오? 이것은 남이 나에게 준 것이오. 어찌 훔쳐 왔다고 말할 수 있소?

그 여자애는 말했다.

터무니 없는 소리! 그대는 소림의 제자라고 했는데, 상대방에서 어찌 그 반지를 그대에게 주었겠어? 그대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는다면, 내 그대의 힘줄을 뽑고 가죽을 벗기는 등 내 그대에게 온갖 고통을 당하도록 할 것이다.

허죽은 실소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만약 친히 목격한 것이 아니고 그저 너의 말만 들었더라면, 정말 너의 그 어린애 장난에 깜짝 놀라고 말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나직이 불렀다.

나이 어린 소저………

별안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에 한 대의 주먹을 얻어 맞았다. 물론 그 여자애가 내지른 것이지만 힘이 약해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허죽은 약간화가 나서 입을 열었다.

어찌 함부로 사람을 치시오? 어린 나이에 정말 너무 거칠고 무례하군!

그 여자애는 다부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분명 허죽이라고 한다면, 은(恩), 영(靈), 현(玄), 혜(慧), 허(虛)라, 그대는 소림파의 삼십 칠 대 제자겠군. 현자(玄慈), 현비(玄悲), 현고(玄苦). 현난(玄難) 등 소화상은 모두 그대의 사조(師祖)들인가?

허죽은 한걸음 물러서며, 놀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 팔구 세 먹은 여자아이가 감히 자기 사문의 내력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자, 현비 등 사백조와 사숙조를 소화상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그 말하는 버릇이 나이 어린 소녀 같지가 않았다.

불현듯 허죽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세상에는 시체를 빌려 혼을 되살린다는 차시환혼(借屍還魂)이라는 술법이 있다고 들었다. 혹시………혹시………어느 노선배의 영혼이 이 소녀의 몸에 붙은 것이 아닐까?

그 여자애는 다시 다가섰다.

내 그대에게 묻는데, 그러면 그렇다고 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지 어째서 대답을 하지 않는가?

허죽은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소. 하지만 본사의 방장 대사를 소화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그 여자애는 말했다.

왜 소화상이라 부를 수 없다고 그러지? 나와 그들의 사부 영문 대사(靈門大師)와는 한 항렬의 신분인데 현자가 어째서 소화상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또 지나치다니 뭐가 지나치다는 것인가?

허죽은 더욱 놀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현자 방장의 사부인 영문 선사는 소림사의 제 삼십사 대 제자들 가운데서도 걸출한 고승임을 허죽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 여자애가 차시환혼한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그렇다면………너는누구이지?

그 여자애는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처음에 그대는 말끝마다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존대를 했는데, 어째서 이제와서는 너니 그니 하고 부르지? 만약 네가 이 몸을 구해 준은덕을 생각지 않았더라면 이 몸은 일 장에 이미 너의 목숨을 빼앗았을 것이다.

허죽은 그녀가 할머니뻘이라고 자칭한 것을 상기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말했다.

모모(할머니), 실례지만, 모모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그 여자애는 그제서야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암 그래야지. 내 먼저 묻겠는데 그 칠보반지는 어디서 얻었느냐?

허죽은 대답했다.

한분의 노선생께서 저에세 주신 것입니다. 저는 갖지 않으려고 했지요. 저는 소림사의 제자이니까 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 노선생께서는 명이 경각에 달려서 저에게 변명할 여유를 주지 않았죠………

그 여자애는 갑자기 손을 뻗쳐 다시 그의 손목을 잡고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그………그 노선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했느냐? 그가 죽었느냐? 아니 아니, 그래 그 노선생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말해 보아라.

허죽은 말했다.

그 노인은 수염을 석 자 성도로 기르고 있었고 얼굴은 관옥(冠玉)과 같았며, 인품은 지극히 의젓했습니다.

그 여자애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어쩌다가 그 노인의 명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지? 그의………그의 일신에 지닌 무공은………

갑자기 그녀는 성난 어조로 소리쳤다.

이 못난 화상아! 무애자(無崖子)는 한평생 무공을 쌓은 분이야. 그가 무공을 흐트리지 않은 이상 어떻게 죽는단 말이냐? 한 사람이 죽는 것이 그렇세 수월한 줄 알아?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

여자아이는 나이가 젊었으나, 그 기개는 정말 사람을 억누르는 위엄이 있었다. 따라서 허죽은 그녀가 하는 말에 감히 이유를 달지 못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엇이 무공을 흐트리는 것이지? 한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은 수월하기 짝이 없는데 또 뭐가 어렵다는 것인가?"

그 여자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디에서 무애자를 보았느냐?

허죽은 대답했다.

바로 그 용모가 청수하신 노선생, 즉총변 선생 소성하의 시부님을 말씀하시는겁니까?

그 여자는 말했다.

물론이다. 너는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르면서, 감히 거짓말을 하다니. 더군다나 그 칠보반지를 너에게 주었다고 말하다니, 정말 뻔뻔스럽고, 당돌하기 짝이 없구나.

허죽은 말했다.

선배님도 그 무애자 선생을 아십니까?

그 여자애는 노해 부르짖었다.

내가 너에게 묻는 것이냐, 네가 나에게 묻는 것이냐? 나는 네가 무애자를 어디에서 만났는가를 묻고 있다. 빨리 대답해라

허죽은 말했다.

그것은 어느 산봉우리 위인데 내가 우연히 펼쳐진 바둑판의 어려운 문제를 풀게 되자 그 노선생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여자애는 주먹을 뻗쳐 때리려고 하면서, 노해 부르짖었다.

어림없는 소리. 그 진롱 바둑은 수십 년 동안 천하의 얼마나 많은 재주 있는 사람들을 난처하게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너와 같이 우둔하기가 황소와 같은 소화상이 풀수가 있다고? 네가 터무니 없는 큰 소리를 친다면,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

허죽은 말했다.

그저 소승 자신의 재간으로는 풀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그때는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탄 격이었습니다. 총변 선생은 반드시 소승에게 바둑알을 놓아야 한다고 다그쳤기 때문에, 소승은 부득이 눈을 감고, 이무렇게나 돌 하나를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기의 집에 한알을 놓아서는, 그 부근의 흰 바둑알을 모조리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바둑의 형세가 갑자기 좋아 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다가 고인이 가르치는 바가 있어서 풀 수가 있었지요. 그야말로 요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승이 일시적으로 행한 망동은 그후 적지 않는 죄를 짓는 결과를 낳게 되었지요. 정말 죄과로소이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는 두손을 합장하고 잇따라 불호(佛號)를 외었다.

그 여자애는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사리에 맞기는 하다.

그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아래에서 은은히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어이쿠!

그는 부대자루를 들고서 그 여자애를 안에 넣고 부대자루를 등에 짊어진 후에 산위로 미친 듯 달려 올라갔다.

한참동안 달려 올라가자, 산 아래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뒤돌아 보니. 쌓인 눈 위로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이 똑똑히 나 있지 않은가?

그는 그만 소리내어 부르짖었다.

야단났는걸.

그 여자애는 물었다.

뭐가 야단 났느냐?

허죽은 대답했다.

눈 위에 저의 발자국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멀리 도망친다 하더라 도, 그들은 끝내 우리들을 찾아내게 될 것입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무 위로 올라가 건너뛰면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의 무공이 너무나 얕아서 그까짓 조잡한 경신법도 펼치지 못할 것 같구나. 소화상, 내가 보기에 너의 내력은 약하지 않은데 한번 시험해 보기로 하자.

허죽은 말했다.

좋습니다.

그는 훌쩍 몸을 날렸다. 그리하여 상당히 뛰어오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나무 위보다 일 장이나 더 높이 뛰어오르게 되었다. 한데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는 발을 뻗쳐 나뭇가지를 밟았다.

그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나뭇가지가 부러짐에 따라 그는 그만 그 나뭇가지와 함께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그는 그대로 떨어지게 되면, 반드시 부대자루를 깔고 뭉갤 형편이었다.

허죽은 혹시나 여자애를 다치게 할까봐 허공에서 재주를 부리듯 휙 몸을 뒤집어 가슴팍과 머리가 아래를 향하도록 하고서 떨어졌다. 퍽, 하는 소리와함께 그의 이마빡이 바위 위에 부딪쳐서는 대뜸 머리가 깨져 피가 흘러내렸다. 허죽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이구! 아이구!

버둥거리며 일어나긴 했으나, 무척 부끄러워 말했다.

저는………저는 무공이 얕고 또한 우둔하기 이를데 없어 되지 않는군요.

그 여자애는 말했다.

네가 스스로 상처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감히 깔고 뭉개려고 하지 않았으니, 어쨌든 이 모모에게 공손하게 예의를 차렸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모는 첫째 너를 이용해야 햐겠고, 둘째로 후배를 장려한다는 뜻에서 너에게 한수의 몸을 날리는 수법을 전수해 주도록 하마. 잘들어라. 위로 뛰어오를 때 두 무릎을 구부리고 진기를 단전으로 끌어올려서 진기가 위로 오른다고 느끼게 되었을 때 반드시 근육과 뼈마디에서 느슨하게 힘을 빼고 옥침혈(玉枕穴) 사이에………

그녀는 즉시 자세히 그에게 설명을 했다. 어떻게 허공에서 몸을 틀고 어떻게 옆으로 날고 뛰는가를 가르친 이후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는 나의 이 방법에 따라서 다시 한 번 더 뛰어 오르도록 해라.

허죽은 대답했다.

내가 먼저 혼자서 시험을 해보지요. 다시 떨어지게 된다면 선배님을 아프게 할 우려가 있지 않습니까?

그는 푸대자루를 내려 놓으려고 했다.

그 여자애는 노해 부르짖었다.

이 모모가 너에게 가르쳐 준 재간에 틀림이 있단 말이냐? 시험해 보기는 무엇을 시험해 봐? 네가 다시 쓰러지게 된다면, 이 모모는 즉시 너를 죽이고말테다.

허죽은 그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등 뒤에 차시환혼을 한 혼(魂)을 업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전신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저 푸대자루를 던져 버리고 싶었지마는 감히 그럴 용기는 없었다.

이윽고 그는 입술을 깨둘며, 그 여자애가 전수해 준 운기행공의 요령대로 진기를 돋우어서는 옥침혈에 신경을 쓰고 두 무릎을 살짝 구부린 다음 가볍게 퉁기듯 위로 몸을 솟구쳤다.

이렇게 뛰어 오르자 몸뚱아리는 천천히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허공이라서 힘을 쓴 곳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몸을 틀거나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는 크게 기뻐서 브르짖었다.

됐어요! 됐어요!

그런데 그가 입을 벌리게 되자, 그만 진기가 빠져 나가게 되고 그의 몸뚱아리는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곧장 떨어지게 되어 발바닥을 사정없이 땅바닥에 부딪혔으므로 발바닥은 아팠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그 여자애는 꾸짖었다.

이 둔한 것, 입을 열고 말을 하려면 먼서 내식을 조절해야 한다. 일 단계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주제에 오단계, 육단계를 펼치려고 하니까 그렇지.

허죽은 대답했다.

네네, 소승의 잘못입니다.

그는 다시 가르쳐 준 요령대로 그 여자아이를 안고 진기를 돋워 몸을 위로 날렸다. 그리하여 사뿐히 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섰다. 그 나뭇가지는 몇 번 흔들렸으나 부러지지는 않았다.

허죽은 마음으로 무척 기뻤으나,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그 여자애가 전수해 준 방법대로 앞으로 몸을 날렸다.

수평으로 일 장여 남짓 날아서 두 번째 나뭇가지 위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살짝 퉁기듯 재차 몸을 솟구치자 두번째 나뭇가지 위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리고 진기를 순조롭게 순환시키자 몸이 가벼워지고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으며 날면 날수록 그 폭이 넓어졌다. 나중에는 단번에 두 그루의 나무를 가로 지를 수 있었고, 허공에서 마치 바람을 타듯 날아갈 수 있었다.

그는 놀람과 기쁨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눈 덮힌 봉우리 위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그가 나뭇가지들을 밟고 날자 땅바닥에는 어떤 자국도 남지 않았다.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나자 밀림 안으로 깊이 들어설 수 있었다.

그 여자는 말했다.

됐다, 이제 내려가자.

허죽은 대답했다.

네.

가볍게 땅에 내려서서 여자애를 부대자루에서 꺼내 놓았다.

여자애는 그가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띠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온몸이 근질근질하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고 꾸짖었다.

이 못난 소화상 녀석아! 겨우 그까짓 얄팍한 재간을 배우고서 그같이 좋아해?

허죽은 말했다.

예! 네, 소승의 시야가 좁아서 그런지 몰라도 무척 기쁩니다. 모모께서 저에게 가르쳐 준 무공은 크게 쓸모가 있군요.

그 여자는 말을 가로챘다.

네가 한번 가르쳐서 깨닫는 것을 보면, 이 몸의 눈이 아직 나빠지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군. 그런데 소화상, 네가 몸에 지니고 있는 내공은 소림일파의 내공이 아니더구나. 너의 그 무공은 도대체 누구에게 배운 것이지? 어찌하여, 어린 나이에 내공이 그토록 심오하지?

허죽은 가슴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끼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것은 무애자 노선생께서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그 어른이 칠십 년 쌓은 내공을 억지로 소승의 몸에 주입했기 때문입니다. 소승은 실로 소림사를 배반하고 다른 문파에 투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애자 노선생님께서는 다짜고짜 소승의 내공을 해소시켜 버렸습니다. 소승의 본래 지니고 있던 내공은 보잘 것 없었지요. 하지만 소승은 그만한 내공이라도 연마한답시고, 적지 않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자 무애자 노선생께서는 자기의 공력을 저에게 전수해 주었습니다. 소승 역시 이게 화인지 복인지, 마땅히 이어받아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없더군요. 아………어찌 되었던간에, 소승이 소림사로 돌아가게 된다면 어찌 되었든간에, 어찌 되었든간에………

그는 잇따라 몇 번 "어찌 되었든간에"를 되풀이 했지만, 어찌 되었든간에 어떻게 될런지 그 자신도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 여자애는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푸대를 바위 위에 깔고, 그위에 앉아 손으로 턱을 고이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무애자는 소요파 장문의 자리를 너에게 전수해 주었구나.

허죽은 깜짝놀랐다.

이제 보니………선배님도 소요파라는 이름을 알고 계셨군요?

그는 줄곧 소요파라는 이름을 들먹일 수가 없었다. 소성하는 본파의 사람 이외에는 소요파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을 때에는 그 사람을 살려 두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 그 여자가 먼저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그는 말을 받아 입에 담을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찌 되었든, 상대방이 귀신이고 사람이 아니니, 상대방을 죽이려고 하더라도, 죽일 수가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그 여자애는 노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소요파를 모르겠느냐? 이 모모가 소요파를 알게 되었을 때, 무애자는 아직 소요파를 모르고 있을 때였어.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그대는 수백 년 전의 영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무애자 노선생님보다 더 나이가 많은 편이겠지."

그 여자애는 한 마른 나뭇가지를 집어들더니, 땅바닥에 쌓인 눈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리는 것은 모두 쭉쭉 뻗은 직선이었다. 얼마 후에 종횡으로 열 아홉 줄의 줄이 그어진 바둑판 모양이 되었다. 허죽은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나에게 바둑을 두라고 할 셈이구나. 이거 야단났다!"

그녀는 바둑판을 다 만든 후에 바로 바둑판 위에 돌을 놓기 시작했다. 둥근 원을 친 것은 하얀 돌이고 푹 찔러 놓은 것은 검은 돌이었다. 그런데 그 돌들은 겹겹이 놓여지게 되었고, 거의 바둑판 전체를 가득 채우다시피 했다. 그런데 겨우 반쯤 바둑알을 채우게 되었을때, 허죽은 바로 그가 풀었던 그 진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없다.

"원래 그대 역시, 이 진롱을 알고 있었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혹시 그녀 역시, 과거에 이 진롱을 깨뜨리려고 고생 고생하다가 그만 울화가 터져서 죽은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다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 여자애는 진롱을 다 펼치고 나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이 진롱을 풀었다고 했다. 첫번째의 돌을 어떻게 두었는지 나에게 보여다오.

허죽은 대답했다.

네.

그는 즉시 하나의 돌을 집 안에 놓아 자기의 흰 돌들이 죽게 만들었다. 그렇게 되자, 바둑판의 형세가 대뜸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후 허죽은 단연경이 그날 전음으로 지시한 대로 흑집을 향해 반격했다. 그 여자애는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중얼거렸다.

하늘의 뜻이다 하늘의 뜻이야! 세상에 그 누가 자신을 먼저 죽이고 적을 공격하는 이상한 방법을 생각해 내겠는가?

허죽은 한판의 진롱을 다 풀게 되었다. 그러자, 그 여자애는 깊이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소화상은 결코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인 것이 아니었군! 하지만 무애자가 어떻게 칠보반지를 너에게 전수했는지 모든 경과를 너는 상세히 이야기 해라. 반마디라도 속여서는 안된다.

허죽은 대답했다.

네.

그는 처음 사부가 어떻게 하여 그를 산 아래로 내려보냈고, 어떻게 진롱을 깨뜨릴 수 있었으며 무애자가 어떻게 공력을 주입해주고 또 반지를 전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정춘추가 어떻게 독을 써서 소성하와 현난을 암살하게 되고, 자기가 어떻게 혜방 등 승려들의 뒤를 쫓게 되었는가를 일일이 설명했다.

그 여자애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무애자는 너의 사부님이다. 너는 어찌하여 사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무애자 노선생님이라고 하느냐?

허죽은 겸연쩍은 표정을 띠우고 말했다.

소승은 소림사의 승려이니, 실로 다른 문파에 투신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너는 소요파 장문인이 되기 싫다는 뜻을 굳혔느냐?

허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정말 싫습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그러려면 너는 그 칠보반지를 나에게 주면 된다. 내가 너 대신 소요파의 장문인이 되마. 어떠냐?

허죽은 크게 기뻐했다.

그이야말로 바라던 바입니다.

그는 손가락에서 보석반지를 빼내 그녀에게 주었다.

그 여자애의 얼굴은 표정이 수시로 변했다. 어떻게 보면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반지를 받아 손가락에 끼우려고 했으나 그녀의 손가락이 너무 가늘어 중지와 무명지에 끼웠으나 그냥 빠져 나왔다. 그리하여 엄지손가락에 끼우게 되었는데, 그녀는 엄지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한참 동안 살펴보더니, 매우 불만스럽게 여기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듯 그녀는 물었다.

너는 무애자가 너에게 한 폭의 그림을 주면서 대리국 무량산으로 가서 그 어떤 사람을 찾아, 북명신공을 배우도록 했다고 했지? 그 한폭의 그림은 어디 있느냐?

허죽은 품속에서 그림을 꺼냈다. 그 여자애는 그림을 펼치고 그림 속의 궁장미녀(宮裝美女)를보더니 얼굴색이 확 달라지며 욕을 했다.

그가 이 계집년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도록 하라고 했단 말이지?! 그………그는 죽을 때도 이 계집년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고, 또 그녀를 이토록 예쁘게 그려 놓았구나!

삽시간에 그녀의 얼굴빛은 분노와 질투로 일그러졌으며, 급히 그림을 땅바닥에 팽개치더니 발로 밟으려고 했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어이쿠!

그는 손을 뻗쳐 그림을 빼앗아 들었다. 그 여자애는 노해서 부르짖었다.

왜? 애석하다는거냐?

허죽은 말했다.

이와 같이 훌륭한 한폭의 그림을 짓밟아 뭉개 버린다면, 정말 애석한 노릇이죠.

그 여자애는 물었다.

그 계집년이 누구인지 무애자라는 도적이 너에게 말하지 않더냐?

허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무애자 노선생이 도적이 되는 것일까?"

그 여자애는 노해서 말했다.

흥! 그 도적은 헛된 망상을 하고 있구나! 이 계집년이 수십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여전히 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아는 모양이지? 흥! 옛날에도 그녀는 그림처럼 이토록 예쁘지는 않았단 말이야!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 듯 그녀는 다시 손을 뻗쳐 그림을 빼앗아 찢으려고 했다.

허죽은 재빨리 그림을 품속에 집어 넣었다. 그 여자애는 키가 작고 힘이 약해 빼앗을 수 없게 되자, 씩씩거리며 욕을 했다.

양심없는 도적 같으니! 염치없는 계집년 같으니!

허죽은 그저 어리둥절해져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여자애의 몸에 붙은 귀신이 틀림없이 그림 속의 미녀를 알아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사람 사이에 원한이 있기 때문에 한폭의 그림을 대하게 되었지만 끓어오르는 노기를 참을 수 없게 된 모양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짐작을했다.

그 여자애는 여전히 악독한 욕을 퍼부었다. 이때 허죽의 배에서 꾸룩꾸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반 나절 동안 그저 바쁘게 뛰고 달리기만 했을뿐, 쌀 한톨 입에 넣지 못했으니, 자연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애는 물었다.

너는 배가 고프냐?

허죽은 대답했다.

네, 이 눈에 덮힌 봉우리 위에는 먹을만한 것이 없을듯 하군요.

그 여자애는 말했다.

왜 없겠느냐! 이 설봉 위에 가장 많은 것은 꿩이다. 그리고 노루와 영양도 있다, 내가 너에게 평지에서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경신법을 가르쳐 주고, 다시 너에게 꿩이나 노루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줄테니………

허죽은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출가인이 어떻게 살생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비린 물건을 먹지 않겠습니다.

그 여자애는 욕을 했다.

이 도적 같은 화상아! 설마하니 너는 한평생 비린 것을 먹지 않았단 말이냐?

허죽은 대뜸 그 날 조그만 반점에서 남장을 한 소녀에게 희롱을 당한 끝에 한 조각 돼지 비계를 먹고 닭국물을 마셨던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소승은 남에게 속아서 한 번 비린 것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모르고 한 짓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탓하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친히 살생을 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네가 꿩이나 노루를 죽이려 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죽이려 한다는 것은 더 추악한 죄를 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허죽은 물었다.

내가 언제 사람 죽이는 것을 원했습니까? 아미타불, 죄과로소이다. 죄과로소이다.

그 여자애는 빈정대듯 말했다.

그래도 염불을 하다니, 성맡 가소롭구나. 네가 가서 꿩이라도 잡아서 나에게 먹여 주지 않는다면, 다시 두 시진이 흐르게 되었을 때 나는 죽고 만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너에게 해침을 받아 죽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

허죽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말했다.

이 산봉우리 위에는 버섯이나 죽순 같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 여자애는 얼굴을 굳히며 태양을 손으로 가리켰다.

해가 머리 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내가 신선한 피를 마시지 못하면 반드시 죽게 된다.

허죽은 무척 두려움을 느끼고 놀라 물었다.

왜 피를 마셔야 합니까?

그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고 불현듯 흡혈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나에게는 이상야릇한 습관이라고 할까 병이라고 할까, 한 가지 버릇이 있다. 매일 정오에 신선한 피를 마시지 못화면 진기가 끓어올라서 스스로 나 자신을 태워 죽이게 된다. 그리고 죽을 때는 미친듯 성질을 부릴 것이니 자연 너에게도 크게 불리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허죽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되었든간에 소승은 불문의 제자이니, 계율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내 자신이 결코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대가 살생할 뜻을 품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전력을 다해 막겠습니다.

그 여자애는 두 눈을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죽은 얼굴에 황송하고 두렵다는 표정을 띠우고 있었으나 결코 굴복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녀는 즉시 냉소를 흘리며 물었다.

흐흐, 너는 스스로 불문의 제자라고 칭하면서 계율을 엄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했는데, 도대체 어떤 계율을 지킨다는 거지?

허죽은 대답했다.

불문의 계율에는 근본계(根本戒)와 대승계(大乘戒)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 여자애는 냉소했다.

별 희한한 것도 다 있구나. 뭐가 근본계이고 대승계인가?

허죽은 대답했다.

근본계는 기초적인 계율인데 모두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번이 오계이고 그 다음이 팔계이며, 그 다음은 십계이고, 최후는 구족계(九足戒)라는 것으로서, 바로 이백 오십 계를 일컫는 것입니다. 오계는 부처님을 모시는 거사(居士)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서, 첫째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가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이고, 세째는 음란한고 사악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이며, 네째는 말을 함부로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술을 함부로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가한 비구니는 반드시 팔계, 십계 및 이백 오십 계를 지켜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오계를 지키는 것보다 엄하기 이를데 없죠. 어쨌든간에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문의 제 일 계입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내가듣건대 불문의 고승이 정과(正果)를 얻게 되려면, 반드시 대승계를 지켜야하며, 이를 십인(十忍)이라고 일컫는다고 들었다.

허죽은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대승계는 자기 자신을 던져서 사람을 구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지만, 결코 정말 반드시 그 열 가지 일을 행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여자애는 물었다.

무엇을 십인(十忍)이라고 하지?

허죽은 무공이 비범하지는 않았으나 불경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것이 없었다.

첫째는 살을 잘라 독수리에게 먹이는 것이고, 둘째는 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던지는 것이고, 세째는 머리를 잘라 하늘에 사의를 표하는 것이고, 네째는 뼈를 분질러 골수를 드러내는 것이고, 다섯째는 몸을 던져 천 개의 등불을 켤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눈을 뽑아 남에게 줄 수 있어야 하고, 일곱째는 껍질을 벗겨 책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여덟째는 염통을 찔러 뜻을 굳건히 해야하며, 아홉째는 몸을 태워 부처님에게 바쳐야 하며, 열째는 피를 땅에 뿌리는 것입니다.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그 여자애는 한 번씩 냉소를 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그 여자애는 물었다.

고기를 잘라 독수리에게 먹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허죽은 대답했다.

그것은, 부처님이신 석가모니께서 살아 계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석가모니께서는 굶주린 독수리가 비둘기를 쫓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측은히 여겨 비둘기를 품속에 숨겼습니다. 그러자 굶주린 독수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비둘기를 구하게 된다면 나를 굶어 죽게 하는 것이니, 나의 목숨은 당신이 해친 것이 아니겠소?" 그리하여, 부처님은 자기 자신의 피와 살을 잘라내어 굶주린 독수리에게 배불리 먹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여자애는 다시 물었다.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던졌다는 얘기도 아마 비슷하겠지?

허죽은 대답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 여자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봐라. 불가에서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광대하고 정묘하며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서, 어찌 살생을 하지 말라는 단 한마디로써 표현할 수 있겠느냐? 네가 만약 꿩이나 노루를 잡아서 나에게 먹여 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석가모니를 본받아서 네 자신의 피와 살을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게 해 주어야 해, 그렇지 않을 때는 너는 불문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그녀는 허죽의 왼손 소맷자락을 들어올려서 그의 팔뚝을 드러내도록 한 다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의 이 팔을 먹게 된다면, 하루쯤은 기갈을 면할 수 있을거야.

허죽이 흘낏 보니, 그녀는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데,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그의 팔뚝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본래 팔구세된 여자아이라서 나약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건만 허죽은 마음속으로 줄곧 그녀가 차시환혼을 한 여자 귀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자, 그만 간담이 서늘해졌고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그녀의 손을 떨쳐 버린 후, 산봉우리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너무 크게 부르짖었기 때문에, 그 기척을 듣고 산허리에서 한 사람이 부르짖었다.

저 위에 있다! 모두들 저리로 가보자!

그 호통소리는 매우 맑고 낭랑한 것이 바로 불평도인의 음성이었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이쿠! 야단났다. 내가 그렇게 부르짖는 바람에 우리의 행적이 드러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담?

그는 돌아가서 그 여자애를 업고 싶었으나 무척 겁이 났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고 혼자 도망치자니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산비탈 위에 서서 망설이며 산허리께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 다섯 개의 검은 점이 위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간격은 아직 멀었으나, 끝내는 이곳까지 쫓아올 것이고 그 여자애는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인즉, 그렇게 되면 그 여자애도 요행을 바랄 수 없게 된다. 그런 생각이 들자 허죽은 걸음을 옮겨 몇 걸음 내려오며 말했다.

이봐요, 그대가 나를 깨물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내가 그대를 업고 도망칠게요.

그 여자애는 소리내어 깔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리 오너라, 내 너에게 말해 주마 올라오고 있는 저 다섯 사람중에 첫번 째는 불평도인이고, 두번째는 오노대이며, 세번째는 안가이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성이 나씨(羅氏)이고 다른 한사람은 이씨(李氏)이다.

내가 너에게 몇 수의 재간을 가르쳐 줄테니, 너는 먼저 불평도인을 때려 눕히도록 해라.

그녀는 잠시 쉬었다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를 때려 눕히기만 해서 그로 하여금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해라. 그의 목숨을 해치는 것이 아니니 살생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파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허죽은 말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흉악한 자를 쳐서 때려 눕히는 것은 마땅한 일이죠. 하지만 불평도인이나 오노대는 무공이 무척 고강한데, 내 어찌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겠습니까? 선배님의 재간이 훌륭하기는 하나 삽시간에 제가 제대로 배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여자애는 말했다.

바보, 멍텅구리! 무애자는 소성하와 정춘추 두 사람의 사부야. 소성하와 정춘추 두 사람의 무공을 너도 친히 보았을 것이다. 제자가 그 정도이니, 사부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칠십여 년간 부지런히 닦은 공력을 모조리 너에게 전수했다.

그 여자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불평도인을 가리켰다.

불평도인과 오노대 같은 사람들이 어찌 너와 비교될 수 있겠느냐? 네가 멍청해서 응용할 수 없을 뿐이다. 너는 그 푸대자루를 이리 가지고 오너라. 오른손으로 이와 같이 잡고 부대의 주둥이를 벌린 다음 진기를 왼팔에 돋우고 왼손으로 그들의 허리에 있는 혈도를 후려쳐라.

허죽은 그 여자애의 말을 듣고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처럼 쉬운 동작으로 어떻게 불평도인 같은 무림의 고수들을 제압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여자애는 다시 말했다.

너는 그 즉시 왼손 식지로 적의 이 부위를 찔러야 한다. 반드시 운기행공한 후 찔러야 함은 물론이고 부위 또한 추호도 어긋나서는 안된다. 손톱만큼의 실수가 천 리의 차이를 나게 한다는 말이 있다. 적을 상대할 때는 반드시 침착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르게 되면 적을 쳐서 쓰러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상대방의 손에 쥐어 주는 꼴이 된다.

허죽은 그 여자애가 가르쳐 주는 대로 애써 기억했다. 그 몇 가지의 수법은 단숨에 익힐 수 없었다. 대여섯 초식밖에 되지 않았으나 매 초식 가운데 신법과 보법, 그리고 장법 및 지법이 포함되어 있어 하나같이 특이했다. 두 발을 어떻게 딛고 서야하며 윗몸을 어떻게 기울여야 하는지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허죽은 제대로 배울 수 가 없었다. 그는 이해력은 높지 않지만 기억력은 무척 좋은 편이다. 그 여자애가 가리키는 방법과 요결을 한 마디 한 마디 모조리 기억하긴 했으나 모든 초식을 완벽하게 펼쳐 내기는 불가능했다.

그 여자애는 잇따라 몇 번씩이나 바로 잡아주며 욕했다.

바보, 무애자가 너 같은 녀석을 뽑아서 전인으로 삼다니 그야말로 눈이 멀었구나. 그는 너에게 그 계집년으로부터 무공을 배우라고 했는데 만약 네가 준수한 젊은이라면 몰라도 이건 뭐 얼굴이 추악하기 이를데 없는 화상이니 무애자가 어째서 너를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허죽은 말했다.

무애자 노선생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는 풍채가 뛰어나고 으젓한 젊은이를 찾아 전인으로 삼으려고 했으나………소요파의 규칙은 정말 이상야릇하군요. 이제는………그대가 소요파의 장문인이 되었으니………

거기까지 말한 허죽은 생각했다.

"늙은 귀신이 몸에 붙은 당신도 결코 그렇게 아름답다고 볼 수가 없지"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불평도인 등이 나는 듯 비탈 위로 올라오면서 웃었다.

소화상, 그대는 정말 빨리도 도망쳐 왔군. 허허허.

불평도인은 두 발로 땅바닥을 차며 덮쳐오려고 했다.

허죽은 그의 기세가 매서운 것을 보고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여자애가 호통을 쳤다.

가르쳐 준대로 펼치되 실수가 없도록 해라!

허죽은 미처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푸대의 주둥이를 벌리고 진기를 왼팔에 돋우어 불평도인에게 일 장을 가했다.

불평도인은 꾸짖었다.

소화상, 감히 도사 나리께 손을 쓰겠다는 것인가?

불평도인은 즉시 손을 들어 맞받아쳤다. 허죽은 쌍방의 손길이 서로 마주치기 전에 그를 걷어찼다. 희안하게도 그다리에 불평도인이 걸려 들었으며 앞으로 휘청하면서 고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허죽은 왼손을 돌려 진기를 돋운 채 그의 뒷등을 내리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삼십육 동의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들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던 불평도인이 그 일 장을 얻어맞고 몸을 흔들하더니 부대자루 속으로 기어드는 것이 아닌가? 허죽은 크게 기뻐 잇따라 식지로 그의 의사혈(意舍穴)을찔렀다. 이 의사혈은 바로 등뒤 척추에 있다.

허죽은 점혈 수법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총망 중에 의사혈을 찍는다는 것이 약간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의사혈을 위에 있는 양강혈(陽綱穴)을 찌르고 말았다.

불평도인은 크게 한번 비명을 내지르더니 부대자루 속에서 기어나와 산아 래 쪽으로 몇 번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그 여자애는 연신 부르짖었다.

애석하군, 애석해!

그 여자애는 다시 허죽을 꾸짖었다.

바보, 의사혈을 짚어서 그로 하여금 즉시 꼼짝 못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는데 누가 너보고 양강혈을 짚으라고 했냐?

허죽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말했다.

이 방법은 정말 잘들어 맞는군요. 애석하게도 소승이 너무 우둔해서 혈도를 잘못 짚세되었습니다만 그를 놀라 자빠지게 만들었어요. 참 재미있군요!

이때 오노대가 달려 올라왔다. 허죽은 부대자루를 들고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당신도 와서 시험해 보시지.

오노대는 불평도인이 일 초에 패배당하고 산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고 속으로 경각심을 갖고있었다. 그는 즉시 녹파향로도를 들고 몸을 비스듬히 틀며 옆으로 접근하면서 운요무산(雲繞巫山)이라는 초식을 펼쳐, 허죽의 허리를 베려고 했다. 허죽은 급히 몸을 날려 피하며 부르짖었다.

어이쿠, 야단났다. 이 사람은 칼을 쓰니 나………나는 상대할 수가 없구나. 선배님은 이럴 때 나에게 어떻게 하라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소이다. 다시 가르치려고 해도 이미 때가 늦고 말았소.

그 여자애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리 달려와라. 나를 안고 나무위로 도망치도록 해라!

오노대는 잇따라 세 번의 칼질을 했다. 그런데 그는 마음속으로 허죽을 대단히 꺼려하고 있었던 터라 감히 가깝게 달려들지 못했고 휘두른 칼질은 허장성세였다.

허죽은 여자애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기뻐했다.

"나무위로 뛰어올라 도망치는 방법을 나는 배운 적이 있지."

그는 즉시 달려가 여자애를 안으려고 하는데 오노대가 어느덧 칼을 잇따라 휘두르며 질풍 같은 속도로 그의 급소를 노리고 찔러왔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그는 진기를 돋구어 몸을 훌쩍 날렸다. 그의 몸뚱이는 곧장 위로 치솟았다. 마치 하늘을 나르는 것처럼 훌쩍 뛰어올라 가볍게 한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 위에 사뿐이 내려섰다.

그 소나무의 높이는 삼 장이나 되는데도 선뜻 올라선 것이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놀란 쪽은 오노대였다.

그는 무공이 상당히 고강한 편이었으나 경신법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이토록 높은 소나무 위는 도저히 뛰어올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노리고 있던 것은 허죽이 아니라 바로 그 여자애였다.

그는 버럭 소리쳤다.

이 죽일 놈의 화상아! 너는 나무 위에서 한평생 머물고 영원히 내려오지 않도록 해라.

그는 몸을 날려 여자애에게 쫓아가 손을 뻗쳐 그녀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는 여자애를 잡아다가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칼질을 하게 하고 그녀의 피를 마시도록 한 뒤에 그들에게 맹세시킬 작정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누구도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허죽은 여자애가 다시 사로잡히게 되자 속으로 크게 초조해졌다.

"그 여자애가 나에게 자신을 안고 나무 위로 도망치라고 당부했는데 나만 나무 위로 도망치게 되었구나. 이 경신법은 그녀가 나에게 전수한 것인데 그야말로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행위가 아닌가!"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즉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손에는여전히 부대자루가 들려 있었고 뛰어내렸을 때 부대자루의 주둥이를 아래쪽으로 벌리고 있었다. 뛰어내리는 순간 즉시 주둥이를 오노대의 머리통에 씌우고 왼손의 식지로 그의 등을 찔렀다. 이 일지 역시 오노대의 의사혈을 찌르지 못하고 한 치 정도 아래쪽에 있는 위창혈(胃倉穴)을 찌르고 말았다. 오노대는 머리에서 바람이 인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자 깜짝 놀라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 칼질은 허공만 치고 말았다. 이때 허죽이 손가락을 뻗쳐 그의 위창혈을 찔러 버렸다. 오노대는 위창혈을 짚혔으나 맥없이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팔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고 쨍그랑 소리를 내며 녹파향로도를 땅바닥에 떨어뜨렸고, 왼손으로 뒷덜미를 잡고 있던 여자애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급히 머리에 씌워진 부대자루를 벗기 위해 재빨리 몸을 던져 땅바닥을 ㄷ굴었다.

허죽은 그 여자애를 안고 다시 나무 위로 뛰어오르며 잇따라 소리쳤다.

정말 위험했다! 위험했어!

그 여자애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꾸짖었다.

이 못난 것아! 이 어르신이 너에게 무공을 가르쳤는데도 너는 두 번이나 실수를 했어!

허죽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예. 예. 제가 혈도를 잘못 짚었습니다.

그 여자애는 아래를 손가락질했다.

저것 봐라, 그들이 또 오고 있다.

허죽은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불평도인과 오노대가 어느덧 비탈 위로올라 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세 명이 있었는데 멀찌감치 서서 손가락질만 할 뿐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키가 작고 뚱뚱한 사람이 큰소리를 내지르며 급히 내달려왔다. 그는 소나무 가지와 수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오자 땅바닥에 몸을 굴렸다.

그 순간 그의 몸은 한 무리의 둥근 광채로 뒤덮이게 되었다. 그는 두자루의 짧은 도끼를 휘둘러 몸을 보호하면서 허죽이 올라앉은 그 소나무 아래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는 쩡쩡, 하는 소리와 함께 쌍도끼로 나무 아래 부분을 내리찍었다.

그 사람은 매우 힘이 좋아 보이고 도끼의 날도 예리해 보였기 때문에 기껏해야 십여 번 찍으면 이 커다란 소나무는 자빠질 것 같았다.

허죽이 다급하여 부르짖었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지요?

그 여자애는 냉랭히 말했다.

너희 사부는 너에게 그 그림 속의 계집애로부터 무공을 전수받도록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는 그녀에게 가서 부탁해라. 그 계집년이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게 된다면 너는 아래로 내려가서 다섯 마리의 개 돼지들을 쳐서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허죽은 다급해져셔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아, 아!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때 그림 속의 여자를 상대로 질투를 느낄 겨를이 있다니!"

쩡쩡,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려퍼지고 그 키가 작고 뚱뚱한 사람은 쌍도끼를 들어 다시 소나무 아래쪽을 두 번 내리찍었다.

나무 전체가 마구 흔들렸고 소나무 잎들이 우수수 아래로 떨어졌다.

그 여자애는 입을 열었다.

너는 단전의 진기를 어깻죽지가 있는 거골혈(巨骨穴)로 돋우었다가 다시 팔꿈치에 있는 천정혈(天井穴)로 옮긴 이후 다시 손목에 있는 양지혈(陽池穴)로 옮겨라. 그리고 양활(陽豁), 양곡(陽谷), 양지(陽池) 세 혈도에서 진기를 세 바퀴 잇따라 돌린 뒤 무명지의 관충혈(關衝穴)로 집중시켜라.

그 여자애는 말하면서 손가락을 뻗쳐 허죽의 몸의 혈도를 가리켰다. 그 여자애는 허죽이 몸에 있는 혈도 부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경맥이나 혈도의 이름만 가지고는 그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친히 손가락으로 혈도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허죽은 무애자로부터 공력을 전수받은 이후 진기가 체내에서 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부위든 진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 여자애가 말을 끝내자 허죽은 시키는 대로 운기행공을 했다. 이때 다시 쩡쩡,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나무가 다시 한번 흔들거렸다.

허죽은 곧 입을 열었다.

운기했습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너는 솔방울을 한 알 따서 저 땅딸보의 뒤통수도 좋고 심장이 있는 가슴도 좋으니, 무명지에 전력을 돋우서는 그것을 퉁겨내도록 해라.

허죽은 대답했다.

예.

그리고 그는 한알의 솔방울을 따서는 무명지에 올려놓았다.

그 여자애는 부르짖었다.

퉁겨라!

허죽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확 퉁겼다. 그러자 무명지에 얹혀 있던 솔방울이 퉁겨나갔다. 휙,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솔방울은 맹렬하게 쏘아졌다.

그 기세는 그야말로 위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암기 수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과녘을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솔방울은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파고들어가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곳은 땅딸보와 적어도 석 자나 떨어진 곳이다. 위맹하기는 했으나 아무런 실효가 없었다. 그 땅딸보는 깜짝놀라는 눈치였으나 잠시 어리둥절했을 뿐, 다시 도끼를 휘둘러 소나무를 찍기 시작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바보 화상, 다시 한번 더 퉁겨 봐라.

허죽은 속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여자애가 하는 말대로 재차 운기하여 한알의 솔방울을 퉁겨냈다. 그는 이번에는 꼭 맞혀야겠다고 긴장을 하는 바람에 손목을 떨게 되었다. 그 결과 솔방울은 땅딸보와는 다섯 자떨어진 곳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여자애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과 왼쪽 저 소나무가 있는 곳과는 너무나 멀어서 네가 나를 안고서는 건너뛰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정세가 위급하니 네 스스로 도망쳐 살 생각이나 해라.

허죽은 비통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내 어찌 삶을 탐내 의리를 저버리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마음과 힘을 다해 선배님을 구하겠습니다. 정 안될 때는 내 선배님과 함께 죽도록 하죠.

그 여자애는 말했다.

바보 화상, 나는 너와 친척도 아니고 잘 아는 처지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와 함께 목숨을 버리려고 하느냐? 음, 음, 그들이 우리,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만 쉽지 않을걸? 너는 열두알의 솔방울을 따서 한 손에 여섯 알씩을 쥐고 이렇게 운기하도록 해 보아라.

그러면서 그 여자애는 허죽에게 운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허죽은 속으로 기억했지만 그 방법에 따라 시행하기도 전에 소나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우지직 툭, 하는 소리가 크게 나더니 소나무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불평도인과 오노대, 땅딸보 및 나머지 두 사람은 환호성을 크게 지르며 일제히 덮쳐왔다.

여자애는 호통을 내질렀다.

솔방울을 던져라!

이때 허죽의 손에는 진기가 용솟음쳐 올랐다. 두손을 번쩍 치켜 들고내던지자 열 두알의 솔방울은 동시에 날아갔다. 퍽, 퍽, 퍽, 하는 소리가 몇 번 이는 가운데 네 사람이 일제히 나뒹굴었다.

그 땅딸보만 솔방울에 맞지 않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이쿠!

그는 쌍도끼를 던져 버린 채 비탈 아래로 굴러 내려가고 말았다. 다섯 사람 가운데 그 땅딸보의 무공이 가장 낮은편이었다. 그러나 허죽이 내던진 이 열두알의 솔방울은 신속하기 이를데 없어서 네 사람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허죽은 솔방울을 던진 후 그 여자애가 쓰러지는 소나무에 다칠까봐 재빨리 그녀를 안고 땅 위로 뛰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눈으로 덮혀 있는 땅위에는 붉은 반점이 곳곳에 뿌려져 얼룩져 있었고 네 사람의 몸에서는 꿀룩꿀룩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죽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 여자애는 환호성을 내지르더니 그의 품속에서 바둥거리며 땅위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불평도인에게 달려가 입을 그의 이마의 상처에 갖다대더니 맹렬히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허죽은 깜짝놀라 부르짖었다.

무엇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여자애의 등을 잡고 쳐들어 올렸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네가 이미 그를 죽였으니 내가 그의 피를 빨아 병을 고친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없지 않느냐?

허죽은 그 여자애의 입가가 피로 얼룩져 있고 말을 할 때 입을 벌리고흉측하게 웃는 모습을 대하게 되자 그만 겁이 더럭 나서 천천히 그녀의 몸을 내려놓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내가 그를 죽였나요?

그 여자애는 말했다.

그럼 거짓으로 죽은 체하는 줄 알아?

그러면서 그 여자애는 몸을 구부리고 다시 피를 빨기 시작했다.

허죽은 불평도인의 이마에 게란만한 크기의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흠칫했다.

"어이쿠, 나는 솔방울을 그의 이마빡에 때려 넣었구나. 솔방울은 가볍고 부드러운데 어떻게 됐길래 그의 이마빡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다시 나머지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가슴팍에 두 알의 솔방울을 얻어맞았고, 한 사람은 목뼈가 있는 곳과 콧잔등에 각기 한 알씩 얻어 맞았는데 모두 숨을 거둔 뒤였다. 다만 오노대만이 뱃가죽에 한알을 맞고 끊임없이 숨을 헐떡이며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었으며 아직 숨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허죽은 그의 앞으로 다가가 절을 하며 말했다.

오 선생, 소승이 실수하여 상처를 입혔군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큰 죄를 짓게 되었으니 정말 미안합니다.

오노대는 숨을 헐떡이며 욕을 했다.

이 못난 화상 무슨………무슨 장난을 치는거냐? 빨리………빨리………한 칼에 나를 죽여라! 빌어먹을.

허죽은 말했다.

소승이 어찌 선배에게 장난을 치겠소이까? 하시만………하지………

별안간 그는 자기가 단숨에 세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뇌리에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 오노대마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렇게 된다면 그로서는 자연 불문의 살생을 하지 말라는 가장 큰 계율을 어기게 된 셈이 아닌가.

그는 마음속으로 놀람과 두려움에 빠져 전신을 벌벌 떨면서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그 여자애는 피를 실컷 빨아마신 뒤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때 허죽이 한창 바쁘게 오노대의 상처를 싸매 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오노대는 꼼짝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입으로는 연신 악독한 욕을 해대고 있었다. 그런데 허죽은 그저 사과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맞습니다. 정말 소승의 잘못입니다. 정말 천만 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배가 우리 부모님을 욕한다 하더라도 나는 부모없는 고아이며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배가 욕을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우리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니 물론 우리 할머니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십 팔대 조상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오 선생, 그대의 뱃가죽이 무척 아플테니까 성질이 나겠지요. 결코 탓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저 아무렇게나 던진다고 던졌는데………뜻밖에도 그 몇 알의 솔방울이 그토록 위력적이고 무서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 이 솔방울들은 정말 요상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아마도 다른 품종인 것 같습니다. 여느 솔방울과는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오노대는 언성을 높였다.

제기랄, 이 솔방울이 여느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이냐? 너는 죽어서 기름 가마 안으로 들어가게 될 뿐만 아니라 십팔층 아비지옥으로 떨어질 땡초이다. 너는………너는………헉헉, 내공이 고강하여 나를 쳐죽인다 하더라도 이 오노대는 무공이 너만 못하니 죽어도 원망을 하지 않겠다. 그런데 왜 헉헉………빈정거리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뭐 솔방울이 이상한 품종이며 요상하다구? 네가 북명신공을 연성했다 하더라도 이토록 무지막지하고………패도적으로 나올 필요는………

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크게 기침을 했다.

허죽은 의아하여 물었다.

뭐가 북………북………

그 여자애는 웃으며 말했다.

소화상, 너는 큰 덕을 본 셈이다. 이 모모의 북명신공은 그야말로 좀처럼 전수하지 않는 무술이다. 그러나 너의 마음이 너무나 성실하고 이 모모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뛰어난 인재였다. 그야말로 내가 무공을 전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더군다나 위급한 때라 이 모모는 너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네가 손을 쓰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노대, 너의 안목이 괜찮구나 놀랍게도 소화상이 펼친 초식의 이름을 알아맡추다니 말이다.

오노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대는………그대는 누구시오? 그대는 본래 벙어리였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

그 여자애는 냉소했다.

네까짓 것이 내가 누구인가를 물을 자격이 있느냐?

그 여자애는 품속에서 하나의 자기병을 꺼내더니 두 알의 황색 알약을 꺼내 허죽에게 내밀었다.

저 자에게 먹여 주어라.

허죽은 대답했다.

예.

그는 속으로 이것이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라면 물론 좋겠지만 독약이라 하더라도 오노대는 이미 목숨을 건질 수 없는 형편이라 일찍 죽는 편이 차라리 고통을 덜게 되어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즉시 알약을 오노대의 입가에 가져갔다.

오노대는 갑자기 지극히 강렬한 시고 매운 냄새를 맡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몇 번 재채기를 하더니 놀람과 기쁨에 얽혀서 입을 열었다.

이것은………이것은 구전………구전웅사환(九轉熊蛇丸)이 아니오?

그 여자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너는 견문이 넓어 삼십육 동 가운데 걸출한 놈이라 할 수 있다. 이 구전웅사환은 전문적으로 외상을 치료하는 약이며 혼을 되돌려 주고 목숨을 잇는 효과가 있다.

오노대는 말했다.

그대가 어째서 나의 목숨을 구해 주려는거지?

그는 혹시나 이 좋은 기회를 잃게 될까봐 그 여자애가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두 알의 알악을 삼켰다.

그 여동은 말했다.

첫째, 너는 나에게 한번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약간의 보답을 해야했고, 둘째로 이후 너를 쓸데가 있기 때문에 너를 구해 준 것이니라.

오노대는 더욱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내가 그대에게 언제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지? 이 오가는 너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을 뿐 그대에 대해서 한 번도 좋은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 여자애는 냉소했다.

너는 꽤 솔직하구나. 역시 사내다운 데가 있어………

그 여자애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이미 머리 위에 솟아오른 것을 보더니 허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화상, 내가 무공을 연마해야겠으니 네가 옆에서 나를 지켜다오. 만약 그 누가 방해를 한다면 너는 내가 전수한 북명신공을 돋우어서는 모래라도 좋고 돌이라도 좋으니 집어던지도록 해라.

허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다시 사람을 때려 죽이게 된다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싫소이다.

여자애는 비탈가로 다가가더니 아래쪽을 한번 내려다본 후 말했다.

잠시 동안 올라올 사람이 없을 터이니 싫다면 그만두어라.

그 여자애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오른손의 식지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의 식지로 땅을 가리키더니 입으로 훗,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콧구멍으로 두줄기 담담한 하얀 기운을 내뿜었다.

오노대는 놀라 부르짖었다.

이건………이것은 팔황육합유아독존공(八荒六合唯我獨尊功)………

허죽은 물었다.

오선생, 약을 먹고 나니 상처가 좀 나아졌습니까?

오노대는 욕을 했다.

이 냄새나는 땡초야! 후레자식 같은 화상아! 내 상처가 낫고 안 낫고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더냐? 이 요사한 중아, 일부러 인정을 베푸는 척하지 말아라.

그렇게 욕을 하기는 했으나 그는 배의 통증이 많이 가라앉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구전웅사환이 바로 천산 표묘봉 영취궁의 상처를 치료하는 영약이며 기사회생의 효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어쩌면 자기의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 여자애가 그와 같은 무공을 연마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놀람과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는 팔황육합유아독존공이 영취궁의 지고무상한 무공이기 때문에 반드시 최상승의 내공을 기틀로 삼아야 수련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애는 영취궁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아홉 살이나 열 살밖에 되지 않았을 터인데 어떻게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기 그지 없었다. 혹시 자기가 잘못 알고 그녀가 다른 무공을 연마하는 것을 유아독존공이라고 오해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때 그 여자애의 콧속에서 품어 나오는 하얀 기운은 그 여자애의 머리 주위를 감싸 듯하면서 모락모락 피어올라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아니 점점 갈수록 더욱 더 그 하얀 기운은 짙어져 한 무리의 하얀 안개처럼 그 여자애의 얼굴 모습을 모조리 가려 버리고 말았다.

곧이어 그 여자애의 전신에서 뼈마디가 우두둑,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콩을 볶는소리 같았다. 허죽과 오노대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고 이어 그 하얀 안개도 점점 없어져 갔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애는 콧구멍으로 하얀 안개를 들여마시고 있었다. 하얀 안개를 모조리 들여마시자 그 여자애는 두 눈을 뜨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때 그 여자애의 얼굴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 것처럼 느껴졌으나 도대체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는 딱 꼬집어서 말할 수가 없었다. 여자애는 오노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정말 아는 것이 꽤 많구나. 나의 이 팔황육합유아독존공도 알고 있고.

오노대는 말을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대는……그대는 누구시지? 천산동모의 제자요?

그 여동은 코웃음쳤다.

흥! 너의 담은 정말 작지 않구나.

그녀는 그의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허죽에게 말했다.

너는 왼손으로 나를, 오른 손으로는 오노대의 뒷허리를 잡은 채 내가 가르친 방법대로 운기행공하여 나무 위로 뛰어올라 다시 봉우리 뒷쪽으로 수백 장 정도 더 오르도록 해라.

허죽은 말했다.

아무래도 소승에게 그와 같은 공력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여자애를 안고 그 오른손으로 오노대의 뒷허리를 잡았다. 그런데 들고 보니 매우 힘이 들어 좀처럼 나무위로 뛰어 오를 것 같지가 않았다.

이때 그 여자애는 꾸짖었다.

왜 진기를 끌어올리지 않지?!

허죽은 검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예, 예, 일시 바쁘게 설치다보니 그만 깜박 잊었습니다.

그는 진기를 돋우었다. 정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오노대의 몸뚱이가 대뜸 가벼워졌으며 여동은 아무런 무게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몸을 훌쩍 날려 높다란 나무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여자애가 가르쳐 준방법대로 한걸음 성큼 내딛었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일 장밖의 다른 나무위로 옮겨갈 수 있었는데 마치 평지에서 한걸음을 내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허죽은 걸음을 내딛어 저쪽 나뭇가지를 밟으며 너무나 뜻밖의 결과에 오히려 깜짝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깜짝 놀라게 되자 진기는 다시 단전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만 무게를 지탱할 수가 없어져 즉시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래도 안고 있던 여동과 오노대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땅에 내려선 이후 즉시 재차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 혹시나 그 여자애가 꾸짖고 욕을 할까봐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봉우리 위로 질풍같이 달려 올라갔다.

처음 그가 진기를 돋우게 되었을 때 익숙하지 못해 발걸음은 때때로 정체되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체내의 진기가 거침없이 흐르게 되었고 평소 숨을 쉬는 것처럼 순조롭게 이루어져 생각을 할필요도 없이 진기는 자연스럽게 전신의 경맥을 따라 돌고 돌았다. 그는 달리면 달릴수록 걸음을 빨리하게 되었고 산위로 오르는 것이 산아래를 내려가는 것처럼 쉬웠다.

이때 그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너는 처음으로 북명신공을 배운 까닭에 지나치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목숨을 건지려면 이제 발을 멈추어야 한다.

허죽은 대답했다.

네.

그러나 그는 다시 몇 장을 달려 올라가서는 겨우 달려가는 기세를 늦추고서 나무 아래로 뛰어 내릴 수 있었다.

오노대는 탄복했으며 또한 어느 정도 허죽을 부러워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자애에게 말했다.

이……이 북명신공은 그대가 오늘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인데도 이토록놀랍다니 정말 대단하구려. 표모봉 영취궁의 무공은 그야말로 커다란 바다처럼 깊군요. 그대는 어린몸으로 이미……이……미……헉헉……정말 대단하시오.

이때 여자애는 눈을 들어 살펴보았다. 사방을 살펴보아도 빽빽하게 둘러선 나무뿐인지라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사흘안으로는 너희 패거리들이 이곳까지 찾아올 수 없겠지?

오노대는 참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일패도지하지 않았소? 이……이 소화상이 북명신공을 연마한 몸으로서 전력을 다해 그대를 지키고 있으니 모두들 그대를 찾아낸다 하더라도 그대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오.

그 여자애는 냉소하더니 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그루 커다란 나무에 몸을 기대고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허죽은 한동안 달려온 끝이라 배가 매우 고팠다. 그는 여자애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오노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음식을 찾아 주어야겠는데 그대가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 나의 나이 어린 친구를 해할까 봐 두렵고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역시 그대를 데려가야겠소. 그는 손을 뻗쳐 오노대의 뒷허리를 움켜쥐려고 했다.

그 여자애는 눈을 뜨고 말했다.

바보,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준 점혈 수법은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 설마하니 지금 그사람이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데 너는 혈도를 제대로 짚을 수 없다는 것이냐?

허죽은 대답했다.

제가 혹시 잘못 짚어 그가 여전히 움직일까봐 두려워서 그럽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그의 생사부가 나의 손 아래에 들어 있는데 그가 어찌 함부로 움직이겠느냐?

생사부란 말을 듣자 오노대는 아, 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그대는……그대는……그대는……

그 여자애는 되물었다.

조금 전 너는 나의 알약 몇알을 먹었지?

오노대는 말했다.

두 알입니다.

그 여동은 말했다.

영취궁의 구선웅사환은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데 왜 두알을 써야했을까? 더군다나 너와 같은개 돼지만도 못한 녀석이 나의 두알의 영단을 먹을 자격이 있을까?

오노대는 이마에서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다른 한 알은……?

너는 천지혈(天地穴)이 어떻게 변했는지 한 번 보려느냐?

오노대는 두 손을 벌벌 떨며 재빨리 옷자락을 풀어 제쳤다. 그러고 보니 왼쪽 가슴팍 젖꼭지 옆의 천지혈에 한 점의 빨간 반점이 돋아나 있지 않은가! 그는 큰 소리로 어이쿠, 하며 부르짖더니 까무러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대는……그대는……도대체 누구시오? 어찌……어찌……어찌 내 생사부의 소재를 알고 계시지? 그대는 나에게 단근부골환(斷筋腐骨丸)을 먹인 것이오?

여동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너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즉시 그 약 기운이 퍼지지 않도록 했으니 그토록 당황해 할 필요는 없다.

오노대는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뜨며 전신을 벌벌 떨고 입으로 아아, 하는 소리만 낼 뿐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허죽은 몇 번이나 오노대가 두려워하는 빛을 띄우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극도로 공포에 떠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어 물었다.

단근부골환이란 것이 무엇이죠? 일종의 독약인가요?

오노대는 얼굴의 근육을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갑자기 허죽을 손가락질하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더러운 땡초야! 잡귀신 같은 화상아! 너의 십팔대 조상 남자들은 모두 다 후레자식이고 여자는 모두가 창녀다! 너는 이후 자손이 끊어지게 되어 아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고자를 낳을 것이고 딸을 낳게 된다면 세 개의 팔에 네 개의 다리가 달릴 것이다……

그는 갈수록 희한한 욕을 했다. 그리고 마구 침을 튀기는 것이 극도의 분노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힘을 써서 욕을 하는 바람에 상처를 건드리게 되어 커다란 고통을 느끼고서야 겨우 입을 멈추었다.

나는 화상이니 자연 자손이 없을 것이오. 자손을 안보는 마당에 그 자손들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오.

오노대는 욕을 했다.

너 이 잡귀신 같은 땡초야, 아무런 고통도 없이 쉽게 자손이 끊어질 것 같으냐? 그렇게 쉽진 않을 것이다. 너는 장래 열 여덟 명의 아들과 열 여덟 명의 딸을 낳게 될 것이고 그들은 하나같이 단근부골환을 먹고서 네 앞에서 아혼 아흡 날을 두고 울부짖으며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고통을 느끼다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최후로 너 자신도 단근부골환을 먹고 네 스스로 그 맛이 어떤가를 경험할 것이다.

허죽은 놀라서 물었다.

단근부골환이 그토록 무섭고 악독한 것이오?

오노대는 말했다.

너의 전신의 근육이 한가닥씩 모조리 끊어져 보아라. 그때 너는 입을벌릴 수도 없고 혓바닥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그리고……

그는 자기가 이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독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다음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온 마음이 얼음같이 차가워지는 것을느끼게 되어 대뜸 머리를 소나무에 부딪쳐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이때 그 여자애는 미소를 띠우고 입을 열었다.

네가 나의 말을 순순히 듣기만 한다면 나는 그 약 기운이 퍼지지 않게 해주마. 그렇게 된다면 그 알약의 독성은 십 년이 가더라도 퍼지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왜 그토록 무서워하는거지? 소화상, 너는 그의 의사혈(意舍穴)을 짚도록 해라. 그가 미친 병이 도져서 나무에 머리를 받고 자결할까봐 두렵다.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는 오노대의 등뒤로 돌아가 왼손을 뻗쳐 그의 등에 있는 의사혈을 만졌다.

자세히 탐색을 해보고 틀림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일지를 찔렀다.

오노대는 나직이 신음 소리를 내더니 그 즉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때 허죽은 체내의 북명진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초보적인 응용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이 일지를 찌르는데 기실 혈도를 확인하고 짚을 필요가 없었다. 무조건 상대방의 몸 어느 부위를 찌른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었다.

허죽은 그가 정신을 잃자 즉시 또 손발을 어지럽게 눌러 그의 인중혈을 잡아 당기고 가슴팍도 안마하여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오노대는 지극히 허약한 상태에 빠져 숨을 헐떡이고 있을뿐 이제는 반마디의 욕도 할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허죽은 그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서야 음식을 찾아나섰다. 숲속에는 노루, 영양, 꿩, 토끼 등과 같은 짐승들이 적잖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살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동안 찾았으나 먹을만한 음식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부득이 그는 소나무 위로 올라가 솔방울을 따서는 씨를 발라내어 배를 채웠다. 씨는 매우 향기롭고 고소한 것이 맛이 좋았다. 그러나 그 한 알 한 알이 너무나 작아 단숨에 이삼백 알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겨우 허기를 면하게 된 그는 따놓은 솔씨를 더 먹지 않고 두 주머니에 잔뜩 집어넣고서는 여자애와 오노대에게 먹으라고 갖다주었다.

그 여자는 말했다.

정말 호의가 고맙기는 하지만 이삼 개월 동안 나는 소채를 먹을 수가 없다.

너는 오노대의 혈도나 풀어 주어라.

그는 혈도를 푸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허죽은 말했다.

그렇군요. 오노대 역시 매우 배가 고플 것입니다.

그는 그 여자애가 가르쳐 준 대로 오노대의 혈도를 풀고 한 움큼의 솔씨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오 선생, 먹도록 하시오.

오노대는 매섭게 그를 한 번 노려보더니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알 먹고는 욕을 한마디 했다.

죽일 놈의 땡초 같으니!

그는 다시 몇 알을 먹고는 욕을 한마디 했다.

귀신 같은 중놈!

허죽은 화를 내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죽을까 말까 할 정도로 크게 상처를 입혔으니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이때 여자애가 말했다.

먹고 잠을 자라. 다시 시끄럽게 굴지 않도록 해라.

오노대는 대답했다.

예.

오노대는 신속하게 솔씨롤 먹어 치우더니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잠을 청했다.

허죽은 한 그루 커다란 나무에 다가가 등을 기대고 쉬었다.

"저 늙은 여자 귀신과는 너무 가까이 앉지 말아야지."

그는 연일 피로했던 몸이라 얼마 후 곤히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잠이 깨었을 때 날씨는 음울했고 시커먼 구름이 나지막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여자애는 오노대에게 말했다.

오노대, 너는 가서 한 마리 매화록(梅花鹿)이나 영양을 잡아 오도록 해라.

사시(巳時) 이전에 잡아오되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오노대는 대답했다.

예.

그는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마른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그것을 지팡이 삼아 땅바닥을 딛어가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허죽은 그를 부축해 주려고 했으나 그가 살생을 하러 간다는 생각이 들자 연신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노루야, 양아, 토끼야, 꿩아, 모든 축생들은 빨리 피하도록 해라. 그리하여 오노대에게 잡히지 말아라.

여자애는 입술을 삐죽하고 냉소할 뿐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데 허죽이 그와 같이 불경을 외쳤건만 중상을 입은 오노대는 무슨 방법을 썼는지 사시가 되기도 전에 한마리 조그만 노루를 잡아서 끌고 돌아왔다. 허죽은 다시 잇따라 염불을 외웠다.

오노대는 외쳤다.

소화상, 빨리 불을 피워라. 우리 노루고기를 구워 먹도록하자.

허죽은 대답했다.

죄과로소이다. 죄과로소이다. 소승은 결코 그대를 도와 그와 같은 죄짓는 일을 하지 않겠소이다.

오노대는 손을 홱 뒤짚어 신발목에서 한 자루 번쩍번쩍 빛이 나는 비수를 뽑아 들더니 노루를 죽이려고 했다.

여자애가 말렸다.

잠깐.

오노대는 순순히 응했다.

예.

그는 비수를 내려 놓았다. 허죽은 크게 기뻐서 말했다.

그렇죠, 그렇죠. 노선배님은 심기가 인자하시니 장래 반드시 좋은 보답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 여동은 냉소할 뿐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듯했다. 그 조그만 노루는 끊임없이 매앵, 매앵, 울었다. 허죽은 몇 번이나 달려가 노루를 놓아주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점차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갈수록 짧아지게 되었다. 이때 날씨가 음침해서 나무 그림자 역시 지극히 엷어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이제 오시가 되었군.

그 여자애는 자그마한 노루를 안더니 노루 머리를 쳐들고 입으로 노루의 목을 깨물었다. 조그만 노루는 아파서 크게 울부짖으며 바둥거렸으나그 여자애는 꽉 붙잡고서 입으로 꿀꺽꿀꺽 하는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노루피를 빨아 마셨다.

허죽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이건……이건……너무 잔인하지 않소?

그 여자애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힘주어 피를 빨기만 했다. 조그만 노루는 갈수록 바둥거리는 몸짓이 약해지게 되었고 끝내 한차례 경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몸을 떨더니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 여자애는 노루 피를 잔뜩 마시고 난 이후 배가 불룩하게 솟아오르자 죽은 노루를 던졌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더니 한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손으로 땅을 가리킨 채 다시 그 팔황육합유아독존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콧속에서 하얀 김을 내뿜으며 머리 위에 뭉쳐 오르도록 했다. 한참 후에 그 여자애는 안개와 같은 김을 모두 들여마시고는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오노대, 자네는 노루 고기를 굽도록 하게.

허죽은 마음속으로 혐오감이 일어 말했다.

노 선배님. 이제 오노대가 노 선생님의 명령을 듣고 진심으로 보살펴 주고 있으니 다시는 감히 해치려고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소승은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나는 네가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급히 사숙과 사백님들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찾지 못한다면 반드시 소림사로 되돌아가 알리고 명령을 받들어야 하며 더는 시일을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여자애는 냉정히 말했다.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네 멋대로 하겠다는 것이냐?

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이미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제가 승복자락 안에 마른 풀잎과 나무 잎사귀를 잔뜩 집어넣고 커다란 보따리처럼 만들어 업고 도망을 친다면 산아래의 사람들은 모두 볼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들은 곧 보따리 안에 든 것이 노 선배인 줄 알고 반드시 저를 쫓아올 것입니다. 소승이 그들을 멀리 멀리 유인한 다음에 노선배님과 오노대는 표묘봉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 아닙니까.

여자애는 말했다.

그 방법이 그럴싸하군. 정말 생각해 내느라고 애썼다. 하지만 나는 결코 도망칠 생각은 없다.

허죽은 말했다.

그것도 좋겠지요. 노 선배님은 이곳에 숨어 있도록 하십시오. 이 높고 눈이 쌓인 산위에는 숲이 깊고 울창할 뿐만 아니라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서 그들은 노 선배님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껏 여드레나 열홀 정도 찾은 뒤 반드시 흩어져 돌아갈 것입니다.

그 여자애는 말했다.

다시 팔일이고 십일이 지나가게 되면 나는 십팔구 세 때의 공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때 내가 어찌 그들이 드나들도록 용납할 수 있단 말이냐?

허죽은 의아하여 물었다.

뭐라구요?

그 여자애는 말했다.

너는 나를 자세히 쳐다보아라. 내 지금의 모습이 이틀 전과 어떻게 다르지?

허죽은 눈을 가다듬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과 얼굴을 보니 몇 살 더 많아진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한 열두 살 먹은 여자애 같았고 팔구 세 먹은 여자애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대……그대……이 이틀 사이에 두세 살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그러나 몸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애는 무척 기뻐했다.

흐흐흣, 너의 눈이 꽤 쓸만하구나. 내가 두세 살 커졌다는 것을 알아보다니. 이 바보 화상아, 천산동모의 몸은 영원히 여동과 같으니 물론 몸이야 커질 수 없지 않겠느냐.

허죽과 오노대는 모두 깜짝 놀라 일제히 부르짖었다.

천산동모! 그대가 바로 천산동모이십니까?

그 여자애는 오만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내가 누구인 줄 알았느냐? 너희 모모의 몸은 원래 어린애와 같다. 설마하니 너희들은 눈이 멀어서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냐?

오노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를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입가를 부들부들 떨며 무엇이라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시종 말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갑자기 땅바닥에 털썩 엎드리며 흐느꼈다.

내가……내가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나야말로 진정 천하에서 제일가는 큰 바보인가 보다. 나는……영취궁의 일개 나이어린 시녀나 여자애인 줄만 알았지……당신이……당신이……바로 천산동모인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천산동모는 허죽에게 물었다.

너는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느냐?

허죽은 말했다.

나는 그대가 차시환혼을 한 늙은 여자귀신이라고 생각했소.

동모는 안색을 굳히고 호통을 내질렀다.

터무니 없는 소리! 차시환혼을 한 늙은 여자 귀신이 뭐냐?

허죽은 대답했다.

노 선배님의 모습은 여자애 같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꾀나 음성은 나이 많은 할머니 같으며 또 스스로 모모라고 칭하니 늙은 여인의 혼이 여자애 몸에 붙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동모는 흐흐, 하고 웃으며 말했다.

소화상은 정말 별 희한한 생각을 다 하는구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오노대에게 말했다.

그 날 내가 너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너는 나의 목숨을 취하지 못한 것이 크게 후회스럽지?

오노대는 몸을 일으켜 앉더니 말했다.

맞소이다. 나는 전에 세 번이나 표묘봉 위로 올라가 그대가 하는 말소리를 들었소이다. 다만 눈을 가리고 있어 그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오노대는 정말 눈은 있어도 눈알이 없어 그저 그대를, 그대를 벙어리 여자애로 알았소이다.

그 여동은 말했다.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의 요괴 마귀들 가운데 나의 말을 들어본 사람은 적지 않다. 이 모모가 너희들에게 잡히게 된 이상 벙어리 행세를 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내 말소리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

오노대는 연신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그대의 무공은 신의 경지에 도달하여 사람을 죽이는데 이 초도 쓰지 않는 형편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제가 붙잡아도 항거하지 못하고 붙잡히게 되었죠?

동모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나는 네가 손을 써서 나를 도와준 데 대해서 매우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러했다. 그 날 나는 강적이 찾아오게 되어 있었다. 이 모모는 몸이 불편하여 제대로 항거할 수가 없었는데 마침 네가 부대자루로 나를 업고 산봉우리를 내려와 이 모모로 하여금 한번 치루어야 할 액겁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러니 너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갑자기 두 눈에 흉칙한 안광을 번뜩이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로잡은 뒤 내가 벙어리로 가장하고 있다고 하여 여러가지 무례한 수단으로 이 모모를 대했으니 실로 그 죄를 사할 수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원래 너의 목숨을 살려 주었을 것이다.

오노대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두 무릅을 꿇고 말했다.

모모, 모르고 저지른 죄는 죄가 아니라고들 말하지 않습니까? 오노대는 그 때 어르신께서 바로 제가 한 마음으로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동모이신 줄 알았더라면 이 오 이무개가 아무리 담이 크다고 해도 결코 반푼어치의 죄도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모는 냉소했다.

두려워했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존경했다고는 볼 수가 없지. 너는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의 요마들을 모아 나를 배반하기로 결심한데 대해서 어떻게 변명 할 참이냐?

오노대는 끊임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 바람에 이마를 바위에 부딪히게 되었다. 열 몇 번 부딪히게 되자 이마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게 되었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나이 어린 소녀가 알고보니 천산동모였구나! 동모. 동모라! 나는 본래 그녀의 성이 동씨 인줄 알았는데 동자는 어린애라는 뜻이지 동이라는 성씨가 아니었구나. 에이!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이 사람의 무공은 심오하고 간계가 많아 모든 사람들이 호랑이처럼 두려워하는 상대다. 이 며칠간 나는 힘써 그녀를 도왔지만 그녀는 마음속으로 내가 분수를 모르고 날뛰었다고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허죽아, 허죽아! 너야말로 정말 우둔하기 짝이 없는 화상이로다."

그는 오노대가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천산동모는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게 섰거라.

허죽은 몸을 돌리고 합장했다.

사흘 동안 이 소승은 많은 바보짓을 했습니다.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동모는 웃었다.

무슨 바보짓을 했다는 것이냐?

허죽은 대답했다.

여시주의 무공은 신묘하여 천하에 위세를 떨칠 정도인데, 소승은 눈이 있어도 태산을 몰라보고 오히려 도움의 손길을 뻗쳐 사람을 구하고자했습니다. 여시주께서 그 즉시 비웃지 않은데 대해서 소승은 무척 고맙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동모는 허죽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오노대에게 말했다.

나는 이 소화상에게 할 말이 있으니 너는 좀 비켜다오.

오노대는 대답했다.

예, 예.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절룩거리며 동북쪽으로 걸어가 한 그루의 소나무 뒤로 돌아가 몸을 숨겼다.

동모는 허죽에게 말했다.

소화상, 이 사흘동안 너는 나의 목숨을 구해 주었지 바보짓을 하지는않았다. 천산동모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네가 나의 목숨을 구해준 데 대하여 이 모모는 이후 반드시 보답을 하고자 한다.

허죽은 손을 내저었다.

이토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계신데 내가 구해 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대는 분명히 저를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모는 안색을 굳혔다.

네가 나의 목숨을 구했다고 말한 이상 바로 너는 나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모모는 한평생 자기가 한 말에 그 누구가 나서서 반박하는 것을좋아하지 않는다. 모모가 연마한 내공은 확실히 팔황육합유아독존공이다. 이 재간의 위력은 엄청나게 크지만 한 가지 큰 약점이 있다. 그것은 삼십 년마다 한번찍 반로환동(反老還童)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허죽은 되물었다.

반로환동이라구요? 그거……야 매우 좋은 일이 아닙니까?

동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젊은 화상은 정말 중후하고 암전할 뿐만 아니라 나의 목숨을 구해 은혜를 베풀었다. 거기다가 우리 소요파와 관계가 지극히 깊으니 내 너에게 말해 주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섯 살 되던 때부터 이 무공을 연마하기 시작했으며 삼십육 세에 반로환동하게 되었는데 삼십 일이라는 시일이 걸려서야 원래의 공력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육십육 세에 또 다시 반로환동하게 되었는데 그때에는 육십 일이라는 시일이 흘러서야 원래의 공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금년은 아흔 여섯 살로서 재차 반로환동하게 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구십 일이란 시일이 흘러야만이 원래의 공력을 회복할 수 있다.

허죽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해 하며 물었다.

뭐라구요? 그래……그대는 금년에 이미 구십 육세나 된다는 말씀입니까?

동모는 대답했다.

나는 너의 사부이신 무애자의 사저이다. 무애자가 만약 죽지 않았다면 금년 구십 삼세가 된다. 내가 그보다 세 살 더 많으니 구십 육 세가아니고 몇 살이겠느냐?

허죽은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자세히 그녀의 얼굴 모습을 뜯어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구십 육 세의 노파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동모는 설명을 계속했다.

이 팔황육합유아독존공은 원래 신기하기 이를데 없는 공력이다. 그런데 나는 너무나 일찍 연마를 하게 된 셈이었다. 육 세때부터 연마를 시작해서 수년 후 이 내공의 위력이 드러나게 되었지만 나의 몸은 그때부터 크지 않아 영원히 팔구 세 정도의 어린애 모양을 하게 되었다.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보니 그랬었군요.

그는 확실히 사부님에게 들은 기억이 있었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체구가 엄청나게 커서 칠팔세 때에 이미 성인보다 크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난장이로 늙으막에 가서도 키가 석 자가 될 둥 말둥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부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선천적으로 삼초(三焦)가 잘못되어 생기는 현상이라고 했다. 만약에 일찍 상승의 내공을 연마하게 된다면 치유될 가망성이 있다고 했다. 허죽은 입을 열고 물었다.

그럼 이 내공은 바로 수소양삼초경맥(手少陽三焦經脈)에서부터 연마하는 것 입니까?

동모는 어리둥절해 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소림파의 일개 젊은 화상이 제법 견식이 넓구나. 무림에서 소림파를 천하무학의 으뜸이라고 하더니 과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사부님에게서 수소양삼초경맥에 대한 이치를 약간 들은 적이 있으나 지극히 얄팍한 지식에 지나지 않으며, 그저 함부로 추측하여 알아맞춘 것에 불과합니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럼 금년에 반로환동하게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되죠?

동모는 설명했다.

반로환동을 하게 된 이후에는 공력을 깡그리 상실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루를 수련하게 된다면 칠세 때의 공력을 회복할 수 있고 이튿날 다시 팔 세 때의 공력을 회복하고 사흘째 되는 날 구 세의 공력을 회복하게 되는데 하루가 바로 일 년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리고 매일 오시에 생피를 마셔야만 무공을 연마할 수 있다. 나에게는 한 강적이 있었는데 나의 내공의 내력을 깊이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반로환동을 하게 될 날짜를 헤아려 반드시 그 기회를 틈타 나를 해치려고 한단다. 이 모모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표묘봉 아래로 내려가 몸을 숨기거나 하지 않았다. 따라서 손 아래의 하인들과 시녀들에게 분부하여 여러 가지 방어책을 강구하는 동시에 이 모모는 스스로 내공을 연마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호적수가 도달하기 전에 오노대 등이 봉우리 위로 달려 올라오게 된 것이다. 나의 그 수하들이 온 정신을 가다듬고 방비한 것은 바로 나의 강적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안 동주나 오노대와 같은 얄팍한 재간으로 어찌 표묘봉 위로 올라올 수 있었겠느냐?

나는 그때 바로 반로환동한 지 사흘째에 해당되는 날인데 그만 오노대에게 잡히게 되었다. 나의 몸에는 아홉 살 먹은 여자애의 공력밖에 지니지 못했으니 어찌 항거할 수 있었겠느냐? 부득이 귀머거리와 벙어리인 척해서 그의 부대자루 안에 들어가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후 이 며칠 동안 나는 생피를 마시지 못하여 시종 아홉 살난 어린애의 힘밖에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 반로환동은 마치 뱀이 허물을 벗는 것과 같다. 한번 허물을 벗게 되면 한번 커지게 되는 것인데 만약 반쯤 허물을 벗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잡히게 되면 실로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다시 하루 이틀을 지체하게 되고 내가 여전히 생피를 마시지 못해 무공을 연마할 수 없게 된다면 진기는 체내에서 부풀어 터지게 된다. 그때는 그야말로 죽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나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 것인데 그것은 정말 손톱만큼도 거짓이 없는 참말이니라.

허죽은 물었다.

지금 그대는 열 한 살때의 공력을 회복했으니 구십 육 세의 공력을 회복하려면 아직도 팔십 오 일이라는 날자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예순 다섯 마리의 노루나 사슴 또는 토끼를 죽여야 하지 않습니까?

동모는 빙그레 웃었다.

소화상이 하나를 들어 셋을 깨우치니 그야말로 총명하기 그지없군. 이 팔십 오 일 동안 매일같이 어려움과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의 공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불평도인이나 오노대 같은 조라기들이야 쉽게 처치할 수 있다만, 만약 나의 강적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나를 괴롭히려 한다면 이 모모 혼자서 지탱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반드시 네가 지켜 주어야겠다.

허죽은 말했다.

소승의 무공은 얄팍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선배님께서 상대 할 수 없는 강적이라면 소승은 더욱 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겠죠. 소승의 의견으로는 선배님께서는 역시 멀리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팔십 오일이 지난 이후 공력을 완전히 회복하여 적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때 나서도록 하시지요.

동모는 말했다.

너의 무공이 얕기는 하나 무애자의 내력 수위가 모조리 너의 몸안으로 주입 되었다. 네가 응용할 방법을 알기만 한다면 나의 적수와 한바탕 크게 겨룰 수 있다. 이렇게 하자. 우리가 거래를 하는 것이다. 내가 정묘하기 이를데 없는 무공을 너에게 전수해 줄 터이니 너는 그 무공으로 나를 지켜 주고 적을 막도록 해라. 이렇게 된다면 쌍방이 모두 득을 보는 셈이다.

그녀는 허죽이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큰 부자집의 큰 아들에 비유할수 있다. 조상으로부터 만관(萬貫)의 가재(家財)를 이어받게 된 몸이라 그야말로 알찬 부자이다. 그러니 다시 재물을 저축할 필요가 없는 몸이기도 하다. 그저 돈을 쓰는 요령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 돈을 쓰기는 쉬워도 재물을 모으기는 어렵다. 너는 한달동안 연마하면 어느 정도 무공을 이루게 될 것이고 두 달 연마하게 되면 간신히 나의 큰 강적과 겨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너는 먼저 이 구절을 외우도록 해라. 첫번째 한 마디의 법천순자연(法天順自然)이다.

허죽은 연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노선배님, 소승은 소림의 제자입니다. 선배님의 재간은 신묘하기 이를데 없으나 소승은 결코 배워서는 안됩니다. 실례되는 점 용서하십시오.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너의 소림파 무공은 이미 무애자에 의해 깨끗히 해소되었는데 아직도무슨 소림의 제자라고 하느냐?

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부득이 소림사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연마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너는 나를 방문좌도라고 업신여기고 나의 무공을 배우지 않으려는 것이지?

허죽은 변명했다.

부처님의 제자는 자비를 가슴에 품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뜻을 품기 때문에 탐욕을 없애고 밝은 마음으로 진리를 보아야 합니다. 무공으로 말하면 지극히 고명하도록 연마하게 되었을 때 참선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불가의 팔만 사천이나 되는 법문(法門)은 반드시 무학으로부터 입문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의 사부님께서는 무공 연마에 너무 마음을 기울이게 되면 무공에 집착하게 되어 해탈하기가 어려워지는데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모는 그가 눈을 내려뜨고 엄숙한 표정을 짓는 것이 어느 정도 고승의 기상을 엿보이게 하는지라 속으로 이 화상은 진부하기 이를데 없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고 궁리해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계책이 있어 부르짖었다.

오노대, 너는 가서 두마리의 노루를 잡아와 즉시 죽이도록 해라.

오노대는 멀리 피해 있었고 동모의 이때 공력은 아직 부족한지라 그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지 못해 세 번을 불러서야 오노대는 겨우 알아듣고 대답했다.

허죽은 놀라 물었다.

어째서 또 노루를 죽이라는 것입니까? 노선배님은 오늘 이미 생피를 마시지 않았읍니까?

동모는 웃었다.

네가 나로 하여금 노루를 잡아죽이게 해 놓고 왜 또 묻는 것이냐?

허죽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제가……언제 노선배님에게 살생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까?

동모는 말했다.

네가 나를 도와 강적을 대항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반드시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당하다가 죽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마음속으로 얼마나번뇌를 하게 되는지 너도 생각해 보려무나.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도 옳습니다. 원증회(怨憎會)는 인생의 일곱 가지 고통 가운데 하나 입니다. 모모께서 해탈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모는 말했다.

흐흐흑, 네가 나를 깨우쳐 주려는 것이냐? 이미 때는 늦었다. 내 가슴속에 맺힌 한을 풀 수가 없으니 그저 양이나 노루를 잡아서 될 수 있는 한 많이 죽이는 것으로 화풀이를 할 수 밖에 없느니라.

허죽이 합장했다.

아미타불, 죄과입니다. 죄과입니다. 노 선배님, 그노루와 양들은 정말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노 선배님은 그들의 목숨을 용서해 주십시오.

동모는 냉소했다.

내 자신의 목숨마저도 눈 깜박할 사이에 보존하기 어렵게 되었는데 그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긴단 말이냐?

그녀는 언성을 높여 부르짖었다.

오노대! 빨리 가서 노루를 잡아오게!

오노대는 멀리서 응답했다.

허죽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약 즉시 떠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양들과 노루들이 무고하게 동모의 손 아래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동모는 그 짐승들을 죽이고는 바로 허죽이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터이고 그 말에는 일리가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남아서 그녀의 무공을 배우기는 너무나 싫었다.

오노대의 노루를 잡는 재간은 정말 뛰어났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한 마리의 노루를 잡아들고 왔다.

동모는 냉랭히 말했다.

오늘은 노루피를 이미 마셨다. 너는 그 한 마리의 노루를 한칼에 죽여서는 산골짜기 아래로 던져 버리도록 해라.

허죽은 재빨리 말했다.

잠깐! 잠깐!

동모는 말했다.

네가 만약 나의 분부대로 따른다면 나는 이 노루의 목숨을 해치지 않겠다. 그러나 네가 만약 이대로 떠난다면 나는 자연 매일 같이 노루를 열 마리나 여덟 마리쯤 죽이게 될 것이다. 적게 죽이고 많이 죽이는 것은 모두 너의 생각에 달려 있다. 보살께서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으로 들어가겠느냐고 말했다. 네가 이 노파와 며칠만 더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은 지옥으로 들어가 고통을 당하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너는 노루떼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을 보고서 못 본 척하려고 하니 그러고도 불문의 제자로서 자비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느냐?

허죽은 속으로 흠칫했다.

선배님의 가르침이 옳습니다. 아무쪼록 그 노루를 놔 주십시오. 허죽은 분부대로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동모는 크게 기뻐서 오노대에게 말했다.

너는 그 노루를 놔주어라. 그리고 멀찌감치 꺼져 있거라.

동모는 오노대가 멀리 가기를 기다려서는 구결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죽에게 체내의 진기를 응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무애자와 동문의 사남매였고 한 스승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무공의 수법이나 성질이 똑같았다. 허죽은 그대로 연마하고 닦게 되자 진전이 매우 신속했다.

이튿날 동모는 재차 팔황육합유아독존공을 연마하게 되었을 때 노루의 목을 깨물어 피를 마신 후에는 노루의 목에 난 상처에다가 금창약을 발라 주고서는 놓아주었다.

그리고 오노대에게 말했다.

이 젊은 스님께서는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너도 비린 것을 먹지 말고 잣을 먹도록 해라. 만약에 노루 고기를 먹거나 양 고기를 먹는다면 그때 나는 너를 죽여 노루나 양의 원한을 갚을 것이다.

오노대는 입으로 대답을 했으나 속으로는 허죽의 십구 대 이십 대의 선조까지 저주를 했다. 그러나 동모가 이때 허죽에게 지극히 잘 대하라고 이르고, 또 단근무골환이라는 약이 퍼지게 된다면 얼마나 참혹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감히 허죽에게 조금도 불손한 언사를 쓰지 못했다.

이와 같이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허죽은 동모가 다시는 양이나 노루의 목숨을 해치지 않고 오노대마저도 비린 것을 먹지 않게 하고 식물만 채집해서 먹는 것을 보게 되자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상대방에서 나에게 엄하게 약속을 지키는데 내 어찌 그녀를 위해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으려!"

그는 매일같이 무공을 닦고 연마하기에 노력했으며 추호도 게으름을 피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모의 얼굴은 날로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이 대엿새 되는 사이에 이미 열 한두 살의 여자애로부터 십육칠 세의 소녀의 얼굴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몸매만은 여전히 매우 왜소했다.

이 날 오후 동모는 내공을 연마한 다음 허죽과 오노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곳에 머문 지도 오래 되었다. 아마도 그 못된 녀석들이 지금쯤 이곳으로 찾아올 것 같구나. 소화상, 너는 나를 업고 저 봉우리 위로 올라가라. 그리고 오른손에 오노대를 들어 눈으로 덮혀 있는 땅위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도록 하여라.

허죽은 대답했다.

예.

그는 손을 뻗쳐 동모를 안았다. 그런데 그녀의 용모가 매우 예뻤고 두 눈빛도 가을의 호수물처럼 초롱초롱한 것이 그야말로 아름다운 소저와 같아 그만 깜짝놀라 손을 움츠리며 말을 더듬거렸다.

소……소승은 감히 위엄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동모는 의아하여 물었다.

무슨 위엄을 감히 거스를 수 없다는거냐?

허죽은 대답했다.

노 선배님은 이미 한 분의 소저가 되었으며 이제 나이 어린 소녀가 아닙니다. 남……남녀는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출가외인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동모는 헤벌죽 웃으며 옥같은 고운 뺨에 봄빛이 무르익듯 화사한 붉은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그를 쳐다보고 말했다.

소화상은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이 모모는 구십육 세의 할망구 이다. 그런데 네가 나를 한 번쯤 업기로서니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냐?

그녀는 허죽의 등에 업히려고 했다. 허죽은 놀라 부르짖었다.

안 됩니다. 안돼요!

그는 줄달음질 쳤다. 동모는 경신법을 펼쳐서는 그의 뒤를 쫓았다.

이때 허죽의 북명진기기는 이미 삼사 성 정도의 조예를 쌓게 된 상태였고 동모는 그저 십 칠세 때의 공력만을 회복한 터이라 경신법에 있어서 허죽보다 크게 떨어졌다. 그리하여 몇 걸음 쫓아 가게 되었을 때 허죽은 더욱 더 멀리 앞서서 달려가게 되었다.

동모는 부르짖었다.

빨리 돌아오너라!

허죽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제가 선배님의 손을 잡고 나무 위로 뛰어오르도록 하죠.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너란 녀석은 정말 진부하기 짝이 없구나! 융통성이 그야말로 눈곱만큼도 없어서 한평생 상승무공을 배우기는 틀렸다. 틀려 먹었어!

허죽은 어리둥절해졌으나 속으로 생각했다.

"금강경(金剛經)은 가로되 무릇 상(相)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고 했다. 그녀가 나이 어린 소녀가 되든 커다란 소저가 되든 모두 허망한 상에 불과하다."

그는 중얼거리듯 다시 말을 이었다.

여래께서는 사람의 몸이 커지는 것은 몸이 큰 것이 아니라 큰 몸이라고 이름지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여래의 말씀대로 한다면 커다란 소저는 커다란 소저일 수가 없고 그저 이름이 커다란 소저일 뿐이니……

이와 같이 중얼거리면서 그는 되돌아 왔다.

별안간 눈앞이 번쩍하며 한 백의의 사람 그림자가 동모 앞을 가로막아섰다.

그 사람은 마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했으며 그 자리에 서 있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전신을 하얀 옷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그 빛이 온누리의 하얀 눈송이와조화를 이루어서 그런 것인지 몽롱하여 똑똑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허죽은 깜짝 놀라 앞으로 두 걸음 달려나갔다. 동모는 깜짝 놀라 날카로운 음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허죽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나직이 말했다.

사저, 이곳에서 꽤나 자유롭게 지내시는군요?

듣고 보니 여자의 음성인데 매우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허죽은 다시 두 걸음을 다가서서 살펴보았다. 그 햐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몸매가아리따운 여자였다. 얼굴을 햐얀 비단조각으로 가리고 있어 얼굴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사저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들은 한 문파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동모를 도와줄 사람이 생겼으니 이제는 자기를 귀찮게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동모를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은 매우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놀람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가 하면 극도의 분도에 휩싸인 듯한 표정이었다.

동모는 번쩍 몸을 날리더니 허죽의 결으로 다가오며 부르짖었다.

저 계집년이 쫓아와 나에게 불리한 행동을 하려고 하는데 너는 보지도 못했느냐?

천산동모는 허죽의 따귀를 철썩, 때렸다. 허죽은 그녀에게 따귀를 얻어 맞자 한쪽 얼굴이 대뜸 부어오르게 되었다.

그 백삼인(白衫人)은 말했다.

사저, 늙어서도 그 성질은 버리지 못하는군요. 남이 하기 싫은 일을 사저는 언제나 억지로 시키며 때리거나 욕을 하는데 그게 무슨 재미가 있소. 제가 권고 하건데 역시 남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좋겠소.

허죽은 속으로 크게 호감을 느꼈다.

이 사람은 동모와 무애자 노선생과 동문이지만 성격에 있어서는 그들과 크게 다른 모양이다. 매우 부드럽고 점잖으며 사리에 밝구나."

동모는 끊임없이 허죽을 재촉했다.

빨리 나를 업고 떠나자. 저 계집년과 멀어질수록 좋다. 이 모모는 장래 너의 은덕을 잊지 않고 반드시 크게 보답하겠다.

그 백삼인은 여유있게 한 곁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에 옷자락을 가볍게 나부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선녀와 같았다. 허죽은 이 소저는 정말 의젓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모가 어찌하여 그녀를 이토록 혐오하고 두려워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백삼인은 다시 말했다.

사저, 우리 자매들끼리 오랫동안 보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만나게 되었는데 사저는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급히 떠나려 하는군요. 이 소매는 이 며칠이 바로 사저가 반로환동하는 크게 기쁜 날인 것을 헤아려 냈어요. 그리고 근년에 사저가 수하에 적지 않은 요마들을 거두어들였다고 하더군요. 이 소매는 그들이 이 기회에 반역하는 마음을 품게 될까봐 친히 표묘봉 영취궁으로 달려와 사저를 찾아 사저의 한 팔의 힘이 되어 적을 막고자 했으나 사저를 찾을 수가 없더군요.

동모는 허죽이 자기를 업고 도망치려고 하지 않자 백삼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진기를 흐트리고 공력이 없어질 때를 기다려서 표묘봉 위로 슬금 슬금 찾아온 것이니 어떻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느냐! 그러나 너는 공교롭게도 그 누가 나를 봉우리 아래로 업고 내려온 사실을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너는 그야말로 헛 걸음을 해서 실망했겠지? 이추수(李秋水), 오늘 너에게 발견되었다만 너는 이미 늦고 말았다. 물론 나는 너의 적수가 못되지만 네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내가 한평생 쌓은 신공을 훔쳐 가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백삼 여인은 말했다.

사저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소매는 사저와 헤어진 이후 매일같이 보고 싶어했답니다. 그리고 종종 영취궁으로 와서 사저를 만나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전 사저가 저에게 오해를 품은 이후 매 번 뵈올 적마다 사저는 불문곡직하고 저를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매는 사저가 화를 내고 손을 써 때릴까봐 줄곧 뵈러 가지를 못했지요. 사저께서 만약 이 누이에게 어떤 좋지 못한 생각을 가졌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너무나 지나친 생각입니다.

그녀의 말투는 매우 공손했고 또한 다정해 보였다.

허죽은 속으로 동모를 포악하고 거치른 여자이며 이 두 여자 가운데 한 여자는 착하고 한 여자는 악하니 그야말로 과거에 원한을 맺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동모가 잘못했으리라고 판단했다. 이때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이추수,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네가 아무리 교묘한 말로 나를 비웃는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네각 직접 봐라. 이게 뭐지?

그녀는 왼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에 끼워 져 있는 보석 반지를 보여 주었다.

백삼여인 이추우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놀라 외쳤다.

장문칠보지환(掌門七寶之環)! 그대……그대는 어디서 얻었지?

동모는 냉소했다.

물론 그가 나에지 준 것이지. 너는 어째서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 것이냐?

이추수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흥! 그가……어떻게 그대에게 주었겠어요? 그대가 훔친 것이 아니면 빼앗은 것이겠지.

동모는 큰소리로 말했다.

이추수! 소요파의 장문인께서 명령을 내리노라! 무릎을 꿇도록 명령하니 명을 받도록 해라.

이추수는 말했다.

장문인은 그대 스스로 봉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십중팔구……그대가 그를 몰래 해치고 그 칠보반지를 훔쳤겠죠.

그녀는 본래 매우 여유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보석 반지를 본 이후에는 말하는 어투 속에 크게 초조한 빛이 어려 있었다.

동모는 날카롭게 외쳤다.

너는 장문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니 본문을 배반하겠다는 것이냐?

별안간 하얀빛이 번쩍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동모의 몸이 붕 떠서 멀찌기 나가떨어졌다.

허죽은 놀라 부르짖었다.

아니 어떻게 된 노릇이지?

어느새 눈에 뒤덮힌 땅바닥 위에 시뻘건 핏물이 뿌려져 있었다. 동모의 잘라진 엄지 손가락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 보석 반지는 어느덧 이추수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가 그야말로 번개같이 동모의 엄지손가락을 자르고 반지를 빼앗은후에 다시 손으로 동모의 몸음 쳐서 날려 보낸 것이다.

그러나 엄지손가락을 자를 때 어떤 무기를 썼는지, 또한 어떤 수법을썼는지는 너무나 손 씀씀이가 빨라서 허죽이 볼래야 볼 수가 없었다.

이때 이추수는 입을 열었다.

사저. 도대체 그를 어떻게 해쳤는지 이 소매에게 이야기해 주도록 하세요. 소매는 사저에 대해서 정이 깊고 의리를 존중하는 몸이니 결코 지나치게 사저로 하여금 난처하게 하지는 않겠어요.

그녀는 보석 반지를 갖게 되자 어조가 다시 변했다. 여전히 부드럽고 얌전한 말투로 변한 것이다.

허죽은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이 소저, 그대들은 동문의 사자매지간인데 어찌 그토록 무섭게 손을 쓰는 것이오! 무애자 노선생은 결코 동모가 해쳐서 죽인 것이 아니외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법, 나는 결코 그대를 속이는 것이 아니오.

이추수는 허죽에게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실례지만 대사의 법명은 어떻게 되시나요? 그리고 어느 보찰에 출가하셨나요? 나의 사형의 이름을 어떻게 아셨죠?

허죽은 대답했다.

소승의 법명은 허죽이라 하고 소림사의 제자이며 무애자 노선생으로 말하면……아, 아, 이 일을 이야기 하자면 길답니다……

바로 이때 이추수가 옷자락을 살짝 떨쳤다. 순간 허죽은 자기의 두 무릎이 대뜸 마비되면서 전신의 기혈이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즉시 그는눈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것 보시오. 이것 보시오! 무엇하자는 것이오? 나는 그대에게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어째서……어째서 나마저도……

이추수는 미소했다.

스님이 소림파의 고승이란 말을 듣고 나는 그저 그대의 공력을 시험해 본 것이에요. 소림파의 명성이 쟁쟁하기는 하지만 그대를 가르쳐 낸 고승도 별것 아니군요? 정말 실례했어요. 용서하세요.

허죽은 눈바닥에 쓰러져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하얀 비단으로 가리워져 있었으나 어렴풋이 그녀의 얼굴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녀의 나이는 약 사십쯤 되어 보였으며 눈썹은 그린 듯했으며 눈은 가을 호수처럼 맑았다.

그러나 비단천을 통해 몇 가닥의 상처자국 같기도 하고 핏자국 같기도 한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것은 은근히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허죽은속으로 겁이 났다.

나는 소림사에서 가장 못난 소화상이오. 그대는 이 소승 한 사람의 무공으로 소림파를 얄보아서는 아니 되오.

이추수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동모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사저, 이 몇 년 동안 소매는 정말 사저를 무척 생각했다구요. 어찌됐든 하늘이 돌보아 이 소매로 하여금 다시 사저의 얼굴을 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군요. 사저, 그대가 옜날 저에게 베푼 호의는 이 소매가 밤낮으로 마음에 새겨 두고 있었어요……

별안간 다시 하얀 광채가 번쩍하고 빛났다. 동모는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하얀 눈위에 대뜸 한무더기의 선혈이 뿌려졌다. 동모의 왼쪽다리가 그녀의 몸에서 잘려져 나갔다.

허죽은 깜짝 놀라 노성을 터뜨렸다.

동문 사자매지간에 어찌 이토록 무지막지한 독수를 쓴단 말이오? 그대는……정말 짐승만도 못하군요!

이추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왼손을 뻗치더니 얼굴을 가렸던 하얀 비단천을 벗겨 내고 눈같이 흰 얼굴을 드러냈다.

허죽은 놀라 나직이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종횡으로 교차된, 모두 네 가닥의 지극히 기다란 칼자국이 나 있었는데 그 모양은 하나의 우물 정(井)자를 이루고 있었다.

이 네 곳의 검상으로 인해서 오른쪽 눈은 불쑥 튀어나와 있었고 왼쪽 입술은 비틀어져서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악했다.

이추수는 입을 열었다.

오래 전에 그 누가 검으로 나의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죠. 소림사의 대법사 그대는 내가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서서히 들쳤던 비단천을 내렸다.

허죽은 물었다.

그건……동모가 그런 것 입니까?

이추수는 말했다.

그대가 직접 그녀에게 물어 보도록 하세요.

동모는 다리가 잘린 곳에서 피가 샘솟듯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맞아. 그녀의 얼굴은 내가 그어 놓은 것이다. 나는……무공을 연마하여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스물 여섯 살 나던 그 해 본래 몸이 커져서 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게 될 형편인데도 그녀가 몰래 함정에 빠뜨려서 나로 하여금 주화입마(走火入魔)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이 같은 원한을 내 어찌 보복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허죽은 눈으로 이추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역시 이 여 시주가 먼저 악한 짓을 한셈이로구나."

동모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너의 손에 떨어진 이상 또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이 소화상은 바로 그이와 망년지교(忘年之交)라고 할 수 있는 처지이다. 너는 이 소화상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선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땐 그이가 너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두 눈을 감더니 상대방이 마음대로 처리하라는 듯 체념의 빛을 띠었다.

이추수는 한숨을 내쉬며 담담히 말했다.

사저. 그대는 나이가 나보다 많고 나보나도 훨씬 총명하지만 오늘 다시 이 소매를 속이기란 그렇게 쉽지 않을 거예요. 그가……그가 만약에 오늘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 있다면 이 칠보 반지가 어떻게 그대의 손 안에 들어갔겠어요? 좋아요. 이 소매는 이 소화상과 아무런 원한이 없어요. 더군다나 소매는 세상에 태어날 때 부터 담이 적어 감히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파와 원한을 맺지 못할 거예요. 소매는 이 나이 어린 스님을 해치지 않겠어요. 사저, 소매에게 두알의 구전웅사환이 있는데 사저께서 복용하세요. 그렇게 된다면 다리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멎게 될 거예요.

허죽은 그녀가 말끝마다 사저, 사저, 하고 부르는 소리가 매우 다정스럽다고 느꼈다. 그러나 얼마 전 동모가 오노대에게 두 알의 구전웅사환을 먹이던 광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자기도 모르게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네가 나를 죽일테면 빨리 손을 써라. 나에게 단근부골환을 먹이고 네 마음대로 모욕하고 비웃으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추수는 말했다.

소매는 사저에게 호의로서 대하려고 하는데 사저는 자꾸만 저의 뜻을 곡해 하는군요. 그대의 다리 상처에서 너무 많은 피가 흘러 내리고 있어요. 사저의 몸에 크게 해로우니까 사저는 역시 이 두 알의 알약을 먹도록 하세요.

허죽은 그녀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백옥 같은 손바닥에 두 알의 누런 알약이 들려 있었다. 바로 동모가 오노대에게 먹여 준 것과 똑같은 모양이라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동모가 업보를 빨리도 받게 되는구나."

동모는 부르짖었다.

소화상, 이 계집년에게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빨리 나의 정수리를 일장으로 후려쳐 이 모모를 서쪽 하늘로 보내다오.

이추수는 웃었다.

젊은 스님은 피곤해서 좀 더 땅바닥에 누워 있어야 할 거예요.

동모는 그만 다급해진 나머지 한모금의 선혈을 내뿜었다. 이추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저, 그대의 한 다리는 길고 한 다리는 짧은 모양을 그이에게 보여 준다면 정말 멋 대가리 없는 일이 되지 않겠어요! 멀쩡한 미녀의 다리가 한쪽은 높고 한쪽은 얕아서, 어깨를 한쪽으로 기울인 미녀가 된다면 그이는 크게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소매는 역시 사저를 제대로 돌봐주어야 겠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할 때 하얀 광채가 번쩍이며 그녀의 손에는 어느덧 무기가 들려 있었다.

이번에 허죽은 똑똑히 블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길이가 한 자도 채 되지 않는 비수였다. 이 비수는 마치 수정으로 만들어진 듯 투명했다.

이추수는 일부러 동모로 하여금 놀람과 두려움을 많이 느끼도록 하려는 듯 이번에는 결코 신속하게 손을 쓰지 않았다. 비수를 들고 동모의 잘라지지 않은 오른쪽 다리를 이리저리 겨누는 시늉을 했다.

허죽은 대노하여 부르짖었다.

여 시주는 너무나 잔인하구려!

그는 마음이 크게 격동되는 것을 느꼈다. 체내의 북명진기가 각처에서 신속하게 흐르더니 갑자기 두 다리의 혈도가 풀어지면서 시큰거리고 마비된 것이 멈취지게 되었다. 그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몸을 날려 동모를 얼싸안고 산봉우리 쪽을 향해 질풍과 같이 내달렸다.

이추수는 한수불혈(寒袖拂穴)이라는 재간으로 허죽을 쓰러뜨렸을 때 그의 무공이 매우 평범하다고 판단하고는 전혀 그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었다. 다만 천천히 동모를 다루는 광경을 그로 하여금 옆에서 구경시키려고 했다.

한 사람이 더 있어 구경을 하게 된다면 원수를 괴롭힐 때 더욱 더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에 이르러서는 역시 허죽도 죽여 입을 봉할 참이었다. 그런데 허죽이 놀랍게도 스스로 자신의 진력으로 봉쇄되었던 혈도를 풀었다. 이와 같이 의표를 찔리게 된 순간 허죽은 이미 동모를 안고 오륙 장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추수는 걸음을 옮겨 쫓으면서 웃었다.

젊은 스님, 그대는 나의 사저에게 홀딱 반했나요? 그녀는 정말 꽃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구십육 세 되는 노파이지 십팔 세의 소저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녀는 믿는 데가 있는듯 자신만만했고 또한 삽시간에 뒤쫓아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소화상의 무공이 얼마나 높겠는가 하고 얕본 것이다.

한데 허죽이 급히 달리게 되자 허죽의 몸안에 흐르는 혈맥의 흐름이 더욱 더 빨라지게 되었고 북명진기의 기운이 발휘되어 갈수록 더욱 빨라졌다. 그리하여 오륙 장이나 되는 간격을 시종 좀처럼 좁힐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비탈진 등성이를 따라 삼 마장 가량 쫓고 쫓기게 되었는데 이추수는 놀람과 분노를 함께 느끼고 부르짖었다.

젊은 스님,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장력으로 그대를 해치겠어요!

동모는 이추수가 몇 장을 후려치게 될 것 같으면 허죽이 즉시 목숨을 잃게 되고 자기 자신은 여전히 그녀의 손 아래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동모는 말했다.

네가 나를 구해준 것은 정말 고맙다만 우리는 저 계집년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가 없다. 너는 빨리 나를 산골짜기 아래로 던져 버려라. 그러면 그녀는 어쩌면 너를 해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허죽은 말했다.

그건……절대로 있을 수 없소이다. 소승은 결코 그럴 수……

그가 단지 두 마디의 말을 하게 되었을 때 그만 진기가 흐트러지게 되었고 이추수는 어느덧 가까이 다가오게 되었다.

별안간 허죽은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한 조각의 지극히 커다란 얼음이 살갖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곧 이어 그의 몸뚱이가 붕하고 떠오르더니 자기 자신이 몸을 주체할 시간도 없이 산골짜기 아래로 떨어져갔다.

그는 이미 이추수의 음랭한 장력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두손은 여전히 동모를 꼭 끌어안고 곧장 아래로 떨어지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야 말로 박살이 나서 한 무더기의 핏떡이 되겠구나. 아미타불!"

어렴풋이 이추수의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어마, 내가 너무나 심하게 손을 썼구나! 이렇게 되면 너무 쉽게……

원래 산봉우리 위에는 깊고 좁은 벼랑이 있었다. 다만 눈으로 뒤덮여 있어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추수는 일 장을 후려쳐 허죽을 쓰러뜨린 후 다시 동모를 사로잡아 갖가지 악랄한 방법으로 그녀를 실컷 괴롭힐 작정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 장을 받는 허죽이 계곡 위를 덮고 있는 눈을 밟게 되어 동모와 함께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허죽은 자기의 몸이 허공에 뜬 터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냥 곧장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고 귓가로는 바람소리가 휙휙, 일었다.

별안간 그 누가 호통을 내질렀다.

누구냐?

한 가닥의 힘이 비스듬히 닥쳐와 허죽의 허리께에 미쳤다. 허죽의 몸뚱이는 미처 땅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비스듬히 날게 되었다. 이 순간 흘낏 보니 손을 쓴 사람은 바로 모용복이 아닌가?

그는 기뻐서 공력을 돋우어 동모를 내던질려고 했다. 모용복으로 하여금 동모를 받게 해 동모를 구하려는 생각이었다.

모용복은 두 사람이 산봉우리 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일시 누군지 알 수 가 없었다. 즉시 두전성이(斗轉星移)라는 가전절기를 써서 두 사람이 아래로 떨어지는 힘을 옆으로 뻗어 내어 두 사람이 옆으로 날아가도록 해주었다.

그의 이 두전성이라는 재간은 물론 자기 자신의 힘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허죽과 동모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기세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모용복은 삽시간에 눈이 가물거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허죽은 그 같은 거대한 힘이 몰아붙이는 바람에 손에 안고 있던 동모를 내던질래야 내던질 수가 없었다. 즉시 그의 몸뚱이가 십여 장 날아가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두 발이 갑자기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끈질긴 물건을 밟게 되었다. 팍, 하고 소리가 나며 그의 몸은 다시 튕겨 올랐다.

허죽이 흘낏 보니 눈이 쌓인 땅위에 땅딸하고 쌀로 빚어진 공처럼 생긴 사람이 누워 있는데 바로 상토공이 아닌가? 정말 공교롭게도 허죽은땅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의 커다란 배를 밟게 되었던 것이다. 그 떨어지는 기세가 너무 세차 그만 그의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와 목숨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커다란 뱃가죽이 튕겨 주는 바람에 허죽의 두다리는 부러지지 않고 멀쩡하게 보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튕겨진 허죽은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 옆으로 날아가게 되었고 다시 한 사람에게 덮쳐들게 되었는데 어렴풋이 보니 단예가 아닌가?

허죽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단상공, 빨리 피하시오!

단예는 허죽의 기세가 너무 다급한지라 자기가 아무리 애써도 그를 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외쳤다.

내가 그대를 업겠소.

그는 몸을 돌려서 등으로 받았다. 동시에 능파미보를 펼쳐서 앞으로 곧장 나갔다. 그는 등에 가해지는 압력에 거의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등에 가해지는 힘이 한 푼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단숨에 삼십여 걸음을 달려간 뒤 허죽은 가볍게 그의등에서 미끄러져 내려올 수 있었다.

허죽과 동모가 수백 장이나 되는 곳에서 아래로 떨어졌으나 공교롭게도 모용복이 그 떨어지는 힘을 해소시켜 주었고 상토공이 튕겨 주었으며 최후에는 단예가 등에 업고 한동안 달린 덕택으로 세 번 방향이 틀어짐에 따라 조금도 상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허죽은 몸을 똑바로 세운 후 말했다.

아미타불, 여러분들이 구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상토공이 자신의 발길질에 죽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양심상 크게 가책을 받았으리라. 별안간 산비탈 쪽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동모는 다리가 잘린 이후 너무 많은 피를 흘렸지만 정신을 잃지 않았다.

동모는 놀라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저 귀신이 쫓아왔구나! 빨리 가자! 빨리 가!

허죽은 이추수의 악랄한 수법이 생각나자 자기도 모르게 동모를 안은 채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추수가 산비탈에서 달려 내려오는 기세는 실로 빨랐으나 역시 허죽이 곧장 떨어지는 기세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 사이 간격은 상당히 멀어졌다. 허죽은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조금도 그곳에 남아있길 원하지 않았다.

그가 몇 마장을 달려갔을 때 동모가 입을 열었다.

나를 내려 놓아라. 옷을 찢어 다리의 상처를 싸매 피방울이 떨어지지 않도록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 계집년이 쫓아오게 될 것이다. 너는 먼저 나의 환도(丸都)와 기문(氣門) 두 혈도를 몇 번 짚어 피가 천천히 흐르도록 해라.

허죽은 말했다. 예.

그는 그녀의 말대로 시행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이추수가 달려오는 동정을 엿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동모는 품속에서 한알의 누런 알약을 꺼내 복용한 후 말했다.

그 계집년은 나와 바다보다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하더라도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칠십구 일을 지나야만 신공을 되찾을 수 있다. 그때가 되면 그 계집년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그 칠십구 일을 어디가 숨어야 좋지?

허죽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반나절을 숨기도 어려운데 칠십구 일을 어디 가서 숨는다지?"

동모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만약 너의 소림사로 들어가 숨는다면 그야말로 안성맞춤인데……

허죽은 깜짝 놀라 몸을 흠칫했다.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이 죽일 화상 같으니. 네가 왜 두려워하느냐? 소림사는 이곳에서 천 리나 떨어져 있는데 우리가 어찌 갈 수 있겠느냐?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말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다시 백여 리를 가면 서하(서하) 나라이다. 그 계집년은 서하와 커다란 관계가 있다. 만약 그녀가 명령을 내려 서하국 일품당의 고수들이 일제히 나서서 수색토록 한다면 그녀의 독수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소화상, 너는 우리가 어디로 가서 숨어야 좋겠다고 생각하느냐?

허죽은 말했다.

깊은 산속이나 산줄기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칠팔십일 동안 숨어 있게 된다면 그대의 사매가 반드시 찾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동모는 말했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느냐? 그 계집년이 만약 나를 찾지 못하면 반드시 서하국으로 가서 한 떼의 개들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그 수백 마리나 되는 개들은 코가 매우 영민한 사냥개들로 일단 출동하게 되면 우리가 어디에 숨어 있던간에 그 짐승들에게 발각되고 말것이다.

허죽은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동남쪽으로 가야 하며 서하국과는 멀어질수록 좋겠군요.

동모는 살며시 코웃음치며 이가 갈린다는듯 말했다.

그 계집년의 이목이 너무 많기 때문에 동남쪽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을 쫙 깔아 놓았을 것이다.

동모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갑자기 손뼉을 쳤다.

되었다! 소화상 너는 그 무애자와 진롱 바둑판을 둘 때 첫번째 한 수를 어디다 두었지?

허죽은 이같이 위급할 때 무슨 심정으로 바둑을 논하려는 것일까 생각되었으나 대답했다.

소승은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한 수를 놓았지요. 그러자 스스로 한 집을 막게 되어 자기의 바둑을 망치는 결과를 낳게 되었지요.

동모는 기뻐사 말했다.

그렇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총명하고 재주가 백 배나 뛰어난 사람들이 시험해 보았지만 모두가 그 진롱 바둑판을 풀지 못했다. 스스로 죽을 길을 찾는다는 것은 그 누구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묘하다. 정말 묘해! 소화상, 너는 나를 업고 나무 위로 올라가 저쪽으로 빨리 가도록 하라.

허죽은 말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죠?

동모는 말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운 곳으로 가는것이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사지에 든 이후 살아남게 된다고 하지않더냐? 그러니 한 번 모험을 할 수 밖에 없다.

허죽은 그녀의 잘라진 다리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걸음을 옮길 수 없으니 내가 모험을 하지 않겠다고 해도 어쩔 수 없군!"

그는 그녀가 중상을 입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남녀를 꺼리는 꺼리김이 없어지고 말았다. 급히 그녀를 품에 안고 나뭇가지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동모가 지시하는 방향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갔다.

단숨에 십여 리를 달려갔다. 그러자 멀리서 부드럽고 완곡히 부르짖는음성이 들렸다.

소화상, 너는 떨어져 죽었느냐? 사저, 그대는 어디 있나요? 이 소매는 정말 그리워 죽겠으니 빨리 나오도록 하세요.

허죽은 이추수의 소리를 듣고 두 다리에 맥이 빠져 하마터면 나뭇가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동모는 꾸짖었다.

소화상, 정말 쓸모가 없구나. 무엇이 두려우냐? 너는 그녀가 부르면 부를수록 멀어지며 또한 동으로 쫓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단 말이냐?

아니나 다를까, 그 부르짖는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허죽은 동모의 지혜에 무척 탄복해서 말했다.

그녀는 우리가 수백 장의 산봉우리에서 떨어졌는데도 어째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동모는 말했다.

많은 사람에겐 입이 달려 있지 않느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모모가 수십 년간 표묘봉에서 내려오지 않는 동안 세상의 무학이 그처럼 신속하게 진전을 했더구나. 우리가 아래로 떨어지는 기세를 해소시킨 젊은 자는 일 장의 힘을 빌어서 때리는 힘 즉 넉 냥으로 천 근을 떨쳐내는 그 수법은 정말 신의 경지에 도달했더구나. 그리고 또 다른 젊은 공자는 누구지? 어떻게 능파미보를 알고 있을까?

그녀는 스스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지 결코 허죽에게 묻고 있는 것은아니었다.

허죽은 이추수가 뒤를 쫓아오게 될까봐 진기를 돋우어 급히 달리기만 했지 동모가 하는 말은 귀에 담아두지도 않았다.

평지 위를 걷게 되었을 때 허죽은 여전히 소로만 찾아서 달려갔다. 그는 그날 밤 밀림의 기다란 풀밭에서 하루 밤을 묵고 이튿날 다시 나아가게 되었다.

동모는 여전히 서쪽을 가리켰다.

허죽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서쪽으로 얼마 가지 않으면 서하국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볼 때 우리가 다시 서쪽으로 나가면 안될 것 같습니다.

동모는 냉소했다.

어째서 서쪽으로 가면 안된다는 것이냐?

허죽은 말했다.

만일 서하국의 국경 안으로 뛰어들게 된다면 그야말로 그물 안으로 뛰어드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동모는 말했다.

네가 밟고 있는 땅은 벌써 서하국의 땅이니라.

허죽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뭐라고요? 이곳이 바로 서하국이라구요? 이추수는 서하국에서 지극히 큰 세력을 떨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동모는 웃었다.

그렇다 서하라는 나라에서는 그 계집년이 제멋대로 날뛴단다. 바람을원하면 바람을 얻을 수 있고 비를 얻고자하면 비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녀의 근거지로 뛰어든 것이다. 이는 그녀로 하여금 짐작하지 못하도록 한것이다. 그녀는 사방에서 죽어라하고 수색을 하겠지만 내가 바로 그녀의 소굴에서 조용하게 수련을 하리라고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호호호!

그녀는 매우 의기양양해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소화상, 이것은 너의 바둑에서 배운 것이야. 한 수 가장 우둔하고 가장 불합리한 바둑알을 둔 것인데 결국 크게 쓸모가 있지 않았는가?

허죽은 탄복했다.

선배님의 귀신 같은 계산은 정말 사람이 예측하기 힘들군요. 다만……

동모는 물었다.

다만 무엇이냐?

허죽은 말했다.

이추수의 근거지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발견된다면……

동모는 말했다.

흥! 만약 그곳이 사람이 없는 곳이라면 우리가 모험을 할 수 있겠느냐? 온갇 괴로움을 겪고 위험한 장소로 들어가야만 영웅호걸의 행위라 할 수 있단다.

허죽은 생각했다.

"만약에 세상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을 겪는 것도 보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과 이추수는 막상막하 그 누구도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데 내가 어째서 당신을 위해 이토록 위험을 무릅써야 할까?"

동모는 그의 주저하는 빛과 검연쩍어하는 표정을 보고 즉시 그의 심사를 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내 너에게 위험을 무릅쓰게 한 데 대해 물론 나는 훌륭한 물건으로 너에게 보답을 하고자 하며 결코 너로 하여금 고생을 시키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나는 너에게 세 가지의 장법과 세 가지의 금나수법을 가르치겠다. 이 여섯 가지의 무공을 합쳐서 천산절매수(天山折梅手)라고 한단다.

허죽은 말했다.

선배님께선 중상을 입은 지 아직 며칠도 되지 않았으니 힘을 써서는 안 됩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동모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너는 나의 무공이 방문좌도라고 배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허죽은 대답했다.

그건……그건……그건……이 후배가 결코 그런 뜻으로 한 소리는 아닙니다. 선배님께선 오해하지 마십시오.

동모는 말했다.

너는 소요파의 직계 전인이다. 나의 천산절매수는 바로 본문의 상승무공인데 너는 어찌 배우려고 하지 않느냐?

허죽은 대답했다.

후배는 소림파의 사람입니다. 소요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동모는 침을 뱉었다.

퇘! 너는 일신에 소요파의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냐?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천산동모라는 위인은 남에게 이롭기만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일을 하지 않는다. 내가 네게 무공을 가르치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의 손을 빌어 강적을 막아야하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이 여섯 가지의 천산절매수를 배우지 않는다면 반드시 서하국에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소화상이 서하국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별상관이 없지만 이 모모마저도 너와 함께 살아남지 못하게 된단 말이다.

허죽은 대답했다.

예, 그렇군요.

그는 천산동모라는 사람의 심보가 별로 좋은 편은 아니지만 모든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보아 광명정대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즉시 동모는 천산절매수의 첫번째 장법 구결을 그에게 전수해 주었다. 이 구결은 일곱 자가 한 구절로 되어 있었는데 모두 열 두 구절이었으며 팔십 네 자로 되어 있었다. 허죽의 기억력은 매우 좋아 동모가 세 번 말했을 때 모조리 기억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팔십 네 자는 매우 난잡했다. 잇달아 일곱 자의 평성(平聲) 자가 있은 후 곧이어 일곱 측성(仄聲) 자가 잇따랐는데 음율이 전혀 조화되지 않아 마치 높이 부르짖는 타령과비슷했다. 다행히 허죽은 평소 실탄다(悉坦多) 발탄라(鉢坦多)니 게체(揭諦) 파라승게체(波羅僧揭諦)니 하는 등등의 경문을 익숙하게 읽어 왔기 때문에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모는 말했다.

너는 나를 업고 서쪽으로 달려가면서 그 구결을 큰소리로 읊어 보도록 해라.

허죽은 그 말을 따라 읊었다. 그런데 석 자를 읊었을 때 네 번째 글자인 부(부) 자를 소리내어 읊을 수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린 후에야 그 네 번 째의 글자를 읊을 수 있었다.

동모는 손바닥을 들어 그의 정수리를 내리치며 꾸짖었다.

쓸모없는 소화상 같으니, 첫 구절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구나.

이번에 때린 것은 심하다고 할수 없었으나 바로 허죽의 백회혈을 내려친 것이었다. 따라서 허죽은 몸이 휘청거렸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리하여 재차 요결을 외우려고 했을 때 역시 네 번째 글자에서 숨이 꽉 막히고 마는 것이 아닌가? 동모는다시 일 장을 후려쳤다.

허죽은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이 부자를 순조롭게 입밖에 토해 내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세 번째 다시 읊게 되었을 때 자연히 진기를 돋우게 되었고 그부 자를 대뜸 입밖으로 뿜어낼 수 있었다.

동모는 웃으며 말했다.

훌륭한 녀석이군! 이제 첫 번째의 관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원래 이 한수의 노래처럼 된 요결의 자구는 발성법의 원칙과는 전혀 상반되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읊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달리면서 소리를 내기란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 구결을 읊는 것은 기실 진기를 조절하는 요령에 속했던 것이다.

오시가 되었을 때 동모는 허죽에게 그녀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하고 손가락으로 튕겨 한 알의 돌을 하늘로 날려 보내더니 한 마리의 까마귀를 때려잡았다. 까마귀의 피를 빨아마시고 즉시 팔황육합유아독존공을 연마했다.

이때 그녀는 이미 십칠 세 때의 공력을 회복했으나 이추수와 비교할 때 여전히 훨씬 떨어지는 편이었다. 다만 지풍을 날려 까마귀를 죽이는 것은 쉽게 행할 수 있었다.

동모는 무공 연마를 끝내자 허죽에게 다시 업으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에게 재차 요결을 외우도록 했다. 앞으로부터 읊는 것에 성공하자 다시 거꾸로 읊도록 했다. 이 요결을 앞에서부터 뒤로 읊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는데 거꾸로 읊으니 더욱 더 진기와 역행하고 목안을 막는 듯한 감이 있을 뿐 아니라 자꾸만 이빨에 혀가 걸리는 듯 했다. 그러나 허죽은 그저 한 가닥 의지력으로 버텨냈으며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첫번째 장법의 구결을 바로 읊던 거꾸로 읊던 낭랑히 외울 수 있었고 전혀 지체됨이 없었다.

동모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소화상, 정말 너는 대단하구나……아이구……아이구……

별안간 그녀의 어조가 크게 변하더니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 허죽의 머리를 마구 내리치며 욕을 했다.

아이구! 이 양심도 없는 좀도적 같으니 너는……너는 그녀와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일을 했구나! 나는 줄곧 너에게 속아왔다. 이 좀도적아, 너는 그대로 나를 속일 작정이냐? 너는……너는 어떻게 나를 대하겠다는 것이냐?

허죽은 깜짝 놀라 재빨리 그녀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물었다.

노선배님, 도대체……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동모의 안색은 이미 시뻘겋다 못해 자주 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부르짖었다.

너와 이추수라는 계집년은 사통을 했지? 그렇지? 네가 억지를 쓰고 아직도 인정을 하려고 하지 않으니,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그녀가 소무상공(小無相功)을 너에게 전수했겠느냐? 좀도적아, 너는……나를 정말 고통스럽게 속여왔구나.

허죽은 아리송하기만 해서 물었다.

노선배님, 뭐가 소무상공입니까?

동모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곧 정신을 가다듬는 듯 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 너의 사부가 내게 잘못한 일이 있어 그런다.

원래 허죽이 요결을 외우게 되었을 때 많은 난관이 있는데도 신속하게 통과하고 거꾸로 외우는데 있어서도 더욱 유창함을 보이는지라 동모는 벼락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반드시 소무상공을 연성한 까닭이라는 생각이었다.

동모와 무애자, 이추수 세 사람은 한 사부 밑에서 무공을 전수 받았지만 각기 다른 절예를 지니고 있었다. 세 사람이 배운 무공은 퍽이나 달랐는데 그 소무상공은 사부가 이추수 한 사람에게만 전수했다. 그 무공은 이추수의 몸을 보호하는 신공이기도 한데 위력이 지극히 강했다.

과거 동모가 수 차례나 그녀에게 해를 입히려고 했지만 이추수는 소무상공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동모는 그 무공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이 무공을 펼칠 때 증상이 어떻게 된다는 것은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이 때 허죽의 몸에 비단 그와 같은 소무상공이 숨겨져 있을 뿐 아니라 공력이 심후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람과 분노에 얽혀 그만 허죽을 무애자로 착각하고 그를 때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심신을 가다듬게 되자 무애자가 자기 몰래 이추수와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 울화가 치밀기도 하고 한편으로 슬픈 감정성이 들기도 했다.

이날 밤 동모는 끊임없이 무애자와 이추수를 욕했다. 허죽은 그녀의 욕하는 소리가 지독했지만 오히려 그녀가 안스럽고 측은하게 느껴져서 말했다.

노 선배님, 인생은 무상하다고 했으며 무상은 바로 고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번뇌는 모두 다 탐욕과 노기 그리고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선배님께서는 반드시 그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다시 선배님의 사형을 생각하지 않고 선배님의 사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마음속의 번뇌도 없어질 것입니다.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나는 너의 양심없는 사부를 생각하고 또 그 추한 꼴을 두려워하지 않는 계집년을 미워하겠다. 내 마음속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더욱 흐뭇해진다.

허죽은 고개를 가로젓고 감히 더 권유하지 못했다.

이튿날 동모는 다시 그에게 두 번째 제 이 초의 장법 구결을 전수해 주었다.

이같이 두 사람은 길을 가면서 끊임없이 무공을 연마했다. 그리고 닷새째 되는 날 저녁 무렵 그들 앞에는 사람들이 조밀하게 보이는 한 채의 커다란 성을 대하게되었다.

동모는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서하의 도성인 영주(靈州)이다. 너는 아직도 한 가지 구결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으니 오늘 우리들은 영주의 서쪽에서 숙박을 하도록 하고 내일 서쪽으로 이백 리 정도 나갔다가 다시 길을 되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죽은 물었다.

우리가 영주로 들어가야 합니까?

동모는 말했다.

물론 영주로 들어가야지 영주로 들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위험한 곳으로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느냐?

다시 하루가 지났다. 허죽은 이미 육 초의 천산절매수의 구결을 모조리 줄줄 외우게 되었다. 동모는 광야에서 그에게 응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의 한다리가 잘라졌기 때문에 땅에 앉아 허죽과 대결을 했다.

이 천산절매수는 육 초밖에 없었지만 소요파의 무학의 정수가 담겨져 있었다. 장법과 금나수 가운데 검법, 도법, 편법, 창법, 조법(爪法), 부법(斧法) 등 여러 가지 무기를 쓰는 절초를 내포하고 있어서 그 변화가복잡 다단했다. 허죽은 일시에 그 많은 것을 다 배울 수가 없었다.

동모는 말했다.

나의 이 천산절매수는 영원히 제대로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장래 너의 내공이 더욱 고강해지고 견문이 넓어지면 천하의 어떤 무공과 초식도모조리 이 육초의 절매수안에 융화 시킬 수가 있단다. 다행히 너는 이미 구결을 외웠으니 이후 어느 정도 배우게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너 자신에게 달려 있다.

허죽은 물었다.

후배가 이 무공을 배우는 것은 그저 선배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선배님께서 공력을 되찾는데 성공하게 된다면 저는 소림사로 돌아가 선배님께서 전수해 준 것을 깡그리 잊고 다시 소림파의 무공을 연마하려 합니다.

동모는 그를 이리 뜯어 보고 저리 뜯어 보며 저울질을 했다. 마치 희귀하기 이를데 없는 괴물을 바라보는 듯 했다.

이윽고 동모는 잠시 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의 이 천산절매수는 소림파의 어떤 무공과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다. 너는 복을 버리고 화를 취하겠다니 정말 바보로구나. 그러나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을 보니 의리가 있구나. 너도 눈을 감고 쉬도록 해라. 날이 어두워진 뒤에 우리들은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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