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천룡팔부4 김용
1. 물레방앗간의 사랑
그 소녀는 왕어언을 부축하여 이층의 누각으로 올라가 의상을 바꿔 입도록 해주었다. 누각위에는 나락과 쌀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농기구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그 농가의 소녀는 원래 몇 벌의 헌옷을 꿰매고 있었는데 그때 젊은이가 오자 한쪽으로 밀어 놓아 두었던 것이었다. 그 중 다꿰멘 옷이 있어 왕어언에게 마침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농가의 젊은이는 약간 위축된 모습으로 단예를 쳐다보면서 몸둘 바를 몰라했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형씨, 성이 무엇이요?]
그 젊은이는 말했다.
[저의...... 저의 성씨는 금(금)씨 이옵니다.]
단예는 말했다.
[알고 보니 금형이셨군!]
그 젊은이가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요. 나를 금아리(금아이)라고 불러 주십시요. 금아대(금아대)는 저의 형님입니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면 금 둘째 형이셨군!]
막 여기까지 말하였을 때 급촉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십여 필의 말이 물레방앗간을 향해 달려왔다.
단예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왕소저, 적이 뒤쫓아 왔소!]
왕어언은 농가 소녀의 도움을 받으면서 젖은 저고리를 비틀어 짜고서 막 몸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말발굽 소리를 듣게 되자 내심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몇 필의 말은 매우 빨랐다.
삽시간에 문 밖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부르 짖었다.
[이 말은 우리 것이다! 그 계집과 사내는 여기서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때 왕어언은 누각에 있었고 단예는 아래쪽에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진작 말을 방아간 안으로 끌어 들였으면 좋았을 걸.)
그때 '쾅'하는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판자문을 발길로 걷어차서 열었다.
곧이어 3,4명의 무사가 걸어 들어왔다.
단예는 오로지 한 마음으로 왕어언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이층 누각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중독된 이후 손과 발이 시큰거리고 힘이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왼손으로 젖은 옷을 들어 가슴팍을 가렸으나 다시 손이 아래로 미끌어지곤 했다.
단예는 눈을 크게 뜨고 정신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정말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왕어언은 다급히 말했다.
[난 몰라요!]
이때 한 명의 무사가 금아이에게 물었다.
[그 계집아이는 어디 있느냐?]
금아이는 물었다.
[남의 소저에 대해서 왜 물어 보지요?]
그러자 무사가 '탁'하며 주먹으로 금아이의 가슴을 한 대 내질렀다.
그 바람에 금아이는 저만큼 나가 떨어졌다.
그러자 금아이는 성질이 나고 분한 듯 크게 욕을 해댔다. 농가의 소녀가 크게 부르짖었다.
[아이 오라버니! 아이 오라버니! 욕을 하지 마세요!]
그녀는 사랑하는 젊은이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걱정스러워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그 젊은이의 욕지거리를 말린 것인데 느닷없이 한 무사가 칼을 뽑아 들더니 금아이의 머리통을 반쪽으로 갈라 놓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농가의 소녀는 깜짝 놀라 사닥다리에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한 무사가 얼른 그녀를 안아 들고 흉칙하게 웃었다.
[이 계집애가 스스로 나를 찾아 오는군!]
곧이어 '쫙'하는 솔와 함께 그는 그녀의 옷자락을 찢었다.
그 농가 소녀는 손을 뻗혀서는 그 무사의 얼굴을 매섭게 할퀴었다. 대뜸 그의 얼굴에는 다섯 줄기의 손톱자국이 생겼다.
무사는 매우 화가 나서 힘주어 일장으로 그녀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늑골이 모조리 부러져서 즉시 절명하고 말았다.
단예는 아랫층에서 처참한 비명소리를 듣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그 농가의 젊은 남녀가 비명횡사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단예는 속으로 미안하게 생각했다.
(모두 내 잘못이다. 나 때문에 저 젊은 남녀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구나!)
그는 무사 한 사라미 사닥다리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사다리를 밀어 버렸다.
그 사다리는 본래 누각 바닥에 그냥 걸쳐져 있던 것으로 단예가 밀어버리자 반대 쪽으로 그냥 쓰러졌다.
그 무사는 사뿐히 땅 위로 내려서더니 사닥다리를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는 다시 사다리를 이층에다 걸치더니 올라오기 시작했다. 단예가 다시 사닥다리를 밀쳐 내려고 하자 다른 한 무사가 오른손을 뻗더니 한 대의 수전(수전)을 그에게 쏘았다. 단예가 막 피하려고 할 때 '팍'하는 소리와 함께 그 한 대의 수전이 어깨에 박히게 되었다.
예의 그 무사는 그가 손을 뻗혀 어깨를 잡는 순간에 사닥다리를 빠르게 밟고 급히 뛰어 올라왔다.
왕어언은 단예 등뒤의 곡식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농가의 소녀를 격살하는 것과 한 명의 무사가 위로 올라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왼손 식지로 그의 아랫배에 있는 하완혈(하완혈)을 찌르세요.]
단예는 대리에서 북명신공과 육맥신검을 배울 때 사람의 몸에 있는 혈도를 정확히 익혀 두었었다.
왕어언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릴 때는 이미 그 무사의 왼발이 누각위로 내딛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때는 다시 생각하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이 그는 반사적으로 식지를 뻗어 무사의 아랫배 하완혈을 찔렀다.
그 무사는 위로 성큼 올라오는 순간에 하완혈을 찍혔고 그러자 크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아니, 허공에서 아래로 떨어지더니 즉시 절명하고 말다니, 절묘해!]
단예는 부르짖었다.
[이상하군, 이상해!]
이때 온 얼굴에 구렛나루가 무성한 서하의 무사가 큰 칼을 휘둘러 상반신을 보호하면서 나무 사다리 위로 뛰어 올라왔다.
단예는 급히 물었다.
[그의 어디를 짚죠? 그의 어디를 짚어야 할까요?]
왕어언은 놀라 말했다.
[아이쿠, 야단 났어요!]
단예가 당황하며 물었다.
[무엇이 야단났단 말이요?]
왕어언은 말했다.
[그의 칼 휘두르는 기세가 매우 세차요. 만약 그대가 그의 가슴팍에 있는 단중혈을 잡으려 한다면 그대의 손가락이 그의 가슴에 닿기도 전에 그대의 팔이 먼저 잘라지게 될거예요.]
그녀가 거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그 구렛나루의 무사는 이미 누각 위로 올라온 후였다.
단예는 오로지 왕어언을 보호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팔이야 잘라지든지 말든지 오른손을 쭉 뻗히는 동시에 내경(내경)을 돋구어서는 그의 가슴팍에 있는 단중혈을 짚어갔다.
그 무사는 칼을 들고 내려치려 했으나 갑자기 '악'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의 가슴팍에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뚫려져 피가 용솟음쳤는데 무려 두 자 높이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왕어언과 단예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들로서도 그 일지(일지)의 힘이 그토록 무서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였다.
단예가 삽시간에 두 사람을 죽이게 되자 나머지 무사들은 섣불리 올라오지 못하고 아래층에 모여서 서로들 상의했다.
왕어언은 말했다.
[단공자, 어깨죽지의 수전을 뽑아요.]
단예는 속으로 몹시 기뻐했다.
(그녀가 이제는 나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내 어깨에 입은 상처마저도 걱정을 해주는구나!)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손을 젖혀 그 수전을 뽑아들었다. 그 수전은 이미 한 치 정도 살을 파고들어 뼈에 닿아 있었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힘을 주어 뽑는 것은 매우 아팠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왕소저, 그들은 또 올라오려고 하고 있소. 어떻게 상대를 하면 좋지?]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려 하다가 그녀의 앞을 가렸던 옷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이쿠, 미안합니다.]
왕어언은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때 왕어언은 옷을 입으려 해도 힘이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즉시 자신의 몸을 집단 속에다 파묻고는 고개만 내밀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이제는 고개를 돌리셔도 돼요.]
단예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잔뜩 경계를 했다.
만약 그녀의 옷이 흐트러져 있고 고운 속살이 드러나 있다면 곧 고개를 되돌리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고개를 반쯤 돌렸을 때 창문 밑에서 한 명의 서하 무사가 말의 등 뒤에 올라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저쪽에 적이 있군요!]
왕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분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구나!)
그리고는 말했다.
[수전을 던져 맞추세요.]
단예는 그 말대로 손을 쳐들고는 무사를 향해 수전을 던졌다.
그는 무기를 던지는 방법도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수전을 던졌는 데도 전혀 겨냥이 맞지 않아 그 자의 머리와는 거의 두 자나 떨어지게 던졌다.
그런데 그 무사는 아랑곳 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단예가 던지는 기세에 많은 팔힘이 가해져서 한 대의 조그만 수전이 날아가는 소리가 '휙'하는 파공성을 내자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몸을 웅크리며 피하려 했다. 말 안장 위에서 그 무사의 몸은 한 덩어리로 움츠러들었다. 왕어언은 고개를 내밀고 그 무사의 모습을 살펴본 다음 말했다.
[저 사람은 서하인으로서 씨름선수일거예요. 그가 그대를 붙잡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손을 들어 그의 정수리를 내려치세요. 그러면 이길 수 있어요.]
단예는 말했다.
[그거야 쉽죠.]
그리고는 창문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 무사는 이미 말안장에서 몸을 훌쩍 뛰어 오르면서 창문을 몸으로 부수더니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무엇하러 왔소?]
그 무사는 한나라 말을 몰랐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더니 왼손을 젖혀서는 단예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그 사람의 솜씨는 몹시 빨랐다.
그렇게 잡는 순간 팔을 위로 젖혀서 단예를 위로 들어올렸다. 단예는 다시 일장을 들어 '퍽'하니 그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그 무사는 본래 단예를 마루바닥에 내동댕이 쳐서 반쯤 죽여 놓을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단예에게 일장을 맞자 두개골이 박살이 나서 그만 절명하고 말았다.
단예는 한 사람을 더 죽이게 되자 속으로 소름이 끼쳤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겁이 덜컥 나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는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소! 다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차마 못할 것이니 당신들은 어서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소!]
그리고 그는 힘주어서 그 씨름 선수의 시체를 아래층에다 내던졌다.
방앗간까지 쫓아온 서하의 무사는 모두 15명이었고 아직 열두 명이 남았으며 그 중 네 명은 일품당의 고수였다. 네 명의 고수 가운데 두 명은 한나라 사람이었고 두 명은 서하 사람이었다.
네 명의 고수는 어떨 때는 단예의 무공이 고강하기 그지 없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그 솜씨가 유치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어 보여 도저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감히 경거망동 하지 못하고 한 곳에 나뭇 가지를 모으더니 불을 지르려고 했다. 왕어언은 놀라 부르짖었다.
[야단났어요! 그들이 불을 지르려 해요!]
단예는 발을 굴렀다.
[그럼 어떻게 하지요?]
그러고 보니 방앗간의 물레방아가 개울물을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의 마음 역시 그 물레방아처럼 어지러이 돌고 도는 형편이었다. 이때 한 명의 한나라 사람이 부르짖었다.
[대장군께서는 그 소저를 반드시 사로잡아야지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리셨다. 잠시 동안만 불을 지르는 것을 참기로 하자!]
그리고는 목청을 높여 소리질렀다.
[이봐, 젊은 녀석과 소저, 빨리 아래층으로 내려와 항복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을 산 채로 태워 죽이겠다!]
그는 잇따라 세 번이나 부르짖었다. 그 사람은 화섭자를 들고 불을 붙여서는 하나의 볏단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그 볏단을 높이 쳐들고 말했다.
[그래도 항복하지 않겠다면 불을 놓겠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불을 지르려는 듯 볏단을 흔들어 보였다.
단예는 형세가 위급해지자 말했다.
[내가 미쳐 손을 쓰지 못하도록 그를 공격하겠소!]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물레방아 위에 올라섰다. 그 물레방아는 엄청나게 컸다.
지름이 약 2장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방앗간의 천정보다 더 높았다.
단예는 두손으로 물레방아 위에 가로질러 놓은 엽자판(葉子板)을 잡고 돌아가는 바퀴를 따라 천천히 하강했다. 그 사람은 여전히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단예와 왕어언에게 항복하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단예는 슬그머니 누각에서 물레방아를 타고 내려온 것이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뻗혀 그 사람의 등을 찔러댔다. 그가 펼치는 것은 육맥신검 중의 소양검법이었다.
원래 일지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그 자신이 남에게 암습을 가한다는 생각에 자기가 먼저 긴장하게 되어 힘을 들이지 못한 까닭에 내력이 쏟아지지 않았다.
그의 내력이 쏟아지는 것과 쏟아지지 않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만 내경을 쏟아 낼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그 사람은 누가 자신의 등을 가볍게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단예가 바로 자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은 단예가 잇따라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터였다.
그런데다가 오른손을 마구 휘두르고 있는 것을 보자 또 어떠한 살수를 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꺼림직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급히 왼쪽으로 몸을 피했다.
단에는 다시 일지를 찔러 넣었으나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리하여 단예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 사람이 호통을 내질렀다.
[못난 녀석!, 뒤로 슬그머니 다가와서 무슨 짓을 하려했지?]
그리고는 왼손을 짝 벌리더니 그의 정수리를 움켜잡으려 하고 있었다.
단예는 급히 몸을 움츠리며 두 손을 마구 휘저어댔다.
그런데 마침 물레방아가 잡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다시 물레방아를 잡고는 위로 올라갔다.
그 사람의 손은 그 바람에 물레방아의 엽자판을 치게 되었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조각들이 날아오르는 가운데 엷자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왕어언은 막 올라온 단예에게 말했다.
[그의 등 뒤로 돌아가서 그의 등심을 공격하되 일곱 번째 척추뼈 아래에 있는 지양혈(至陽穴)을 찌르기만 하면 그는 끝장이 나요. 즉, 저 사람은 진남(晉南)호조문(虎爪門)의 제자로서 아직 지양혈까지 단련을 못시켰어요.]
이때 단예는 누각의 마루바닥으로 올라서려다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그것 참 잘 되었군요.]
그는 물레방아를 따라 방아간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서하의 무사들은 그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세 사람이 손을 뻗혀서는 한꺼번에 그를 잡으려고 했다.
단예는 오른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불초는 많은 적수를 상대할 수 없소! 그리고 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한 번에 여러사람을 상대할 수는 없다오. 나는 저 한 사람만 상대하겠소!]
그리고 그는 비스듬히 몸을 옮겼다. 바로 능파미보를 펼친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 번 움직이는 사이 단예는 바로 그 사람의 등뒤로 돌아가게 되었고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자, 받아랏!]
그리고 일지를 찔러넣었다. '찍'하는 소리와 함께 그 일지의 진기는 그 자의 지양혈을 찌르게 되었다. 그 사람은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푹'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져서는 즉사해 버렸다.
단예가 한 사람을 죽이고 다시 물레방아를 타고 왕어언의 곁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한 명의 서하 무사가 그의 퇴로를 막은 채 칼을 들고 후려쳐왔다.
단예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이쿠, 큰일났구나! 오랑캐들이 나의 퇴로를 차단하고 십면(十面)에서 매복을 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군사에게 포위된 꼴이니 야단났구나!]
그러면서 그는 왼쪽으로 한 발을 비스듬히 내딛었다. 그러자 그의 칼질은 허공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방아간의 열한 명의 서하 무사는 일제히 그를 에워싸고 칼과 검을 일시에 휘두르는 꼴이 되었다.
단예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왕소저, 우리는 다시 내세에서 만납시다. 이 불초는 사면초가가 되어서 내 한 몸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불가불 황천에 먼저 가서 소저를 기다리겠소!]
그는 일부러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러면서 낭패한 꼴을 보였으나 발로는 여전히 능파미보의 보법을 펼치고 있었다. 정말 그의 보법만은 교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왕어언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물었다.
[단공자, 지금 펼치는 것은 능파미보가 아니예요? 나는 그 이름만 들었지 그 보법을 몰라요.]
단예는 기뻐서 말했다.
[맞아요, 맞아. 다시 한번 보시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 보이리다. 하지만 끝까지 펼치고 못펼치고는 내 머리통의 조화를 보아야 할 것이오!]
그리고 그는 두루마기에서 배운 보법을 처음 일보부터 펼쳐내기 시작했다.
열한 명의 서하 무사들은 저마다 주먹을 내지르고 발길질을 했다. 그런가 하면 칼을 휘두르고 검을 찔러댔다. 그런데도 그의 옷자락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서하
무사 열 한 명은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고 악을 썼다.
[이봐, 너는 어딜 때리는 거냐?]
[너는 동북쪽을 지키고 사정을 보지 말아라!]
[아이고! 큰일났다! 이 후레자식이 이 틈새로 빠져 나가는구나!]
단예는 앞으로 한 걸음 뒤로 한 걸음씩 옮기면서 물레방아와 절구 옆을 마구 휘저으며 돌아다녔다. 왕어언은 총명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어떻게 된 까닭인지 보법을 이해할 수가 없어 부르짖었다.
[그대는 적을 피하면 되는거예요. 일부러 나에게 펼쳐 보일 필요는 없어요.]
단예는 말했다.
[좋은 기회를 잃지 마시요. 지금 펼쳐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사람이요. 그렇게 된다면 그대가 다시는 능파미보를 볼 수 없게 될 것이 아니오?]
그는 자기의 생사는 돌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정에 얽힌 행동이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그가 만약 적의 숱한 공격을 보면서 절묘한 재간으로 피하려 했다면, 첫째, 그는 무공을 몰라 상대방 고수의 허허실실과 무한한 변화를 모르기 때문에 피하려는 마음이 있어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적은 모두 열한 명이나 되어서 한 사람은 피할수 있어도 둘째 번 적은 피할 수 없고 둘째 사람을 어떻게 피한다 해도 세째 번 적을 피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멋대로 능파미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펼치면서 상대방의 공격은 아랑곳 하지 않게 되자 열한 명의 적은 하나같이 그를 추격하는 꼴이 되었다. 그런데 이 능파미보의 매 한 걸음은 모두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하는 곳을 밟았다. 얼떨결에 그는 왼발을 동쪽으로 내딛고 있었다.
그런데 한 곳을 딛고 있을 때 그의 몸뚱아리는 이미 서북쪽에 가 있는 그런 형편이었다.
11명의 서하 무사들은 갈수록 초식을 빨리 했다. 그러나 십중팔구 그들의 초식은 자기편의 사람들에게 디밀어지고 있었고 그 나머지 십분지 일은 허공을 치고 있는 꼴이 되었다.
예를 들어, 갑, 을, 병 세 사람이 단예가 물레방아 옆에서 있는 것을 보고는 주먹과 발 그리고 검으로 일제히 그에게 공격을 한다고 했을 때 정, 무, 기라고 하는 세 사람의 무기는 또 다른 방향에서 단예가 있는 곳을 향해 디밀어졌다고 하자.
그런데 단예가 몸을 움직이는 그 순간 돌연 방향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되자 '퍽' '탁' '창창' 하는 소리와 함께 갑, 을, 병, 정, 무, 기 등 각자의 무기들은 한데 어우러지게 되어서는 내가 너를 막으면 네가 나를 막는 꼴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몇 명의 서하 무사들은 손놀림이 약간 느리기만 하여도 자기편끼리 해칠 형편이 되었다.
왕어언은 몇 번 보지 않아 그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부르짖었다.
[단공자, 그러한 보법은 절묘하고 복잡해요. 일시에 알아 볼 수가 없으니 한번 더 펼쳐 보세요.]
단예는 말했다.
[좋소, 그대가 분부하는 것이라면 내 모두 따르리다!]
그리하여 그는 근근히 팔팔 육십사괘의 방위를 모두 밟아 보이고는 처음부터 다시 보법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왕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단공자는 잠시 동안 생명을 지키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나는 옷을 입을 수도 없으니 정말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다.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단공자에게 손을 써서 그들 열한명을 일일이 죽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단예의 보법을 보지 않고 눈을 돌려 그 열한 명의 무공 수법을 눈여겨 보았다.
바로 이때 갑자기 '딱'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 중 한 명이 나무 사다리를 다시 누각 쪽에다 갖다 대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서하 무사가 누각으로 오르려 하고 있었다. 열한 사람은 오랫 동안 단예를 상대 했으나 어떻게 하지 못하자 두령급인 서하인이 부하에게 분부하여 왕어언을 먼저 잡도록 한 것이었다.
왕어언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어마!]
단예는 고개를 쳐들었다. 한 서하 무사가 사닥다리를 타고 누각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재빨리 물었다.
[그의 어딜 때리죠?]
왕어언은 대답했다.
[지실혈(志室穴)을 움켜잡는 것이 제일 묘하겠어요!]
단예는 성큼 다가가 냅다 그의 허리께에 있는 지실혈을 움켜 잡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그대로 그 무사를 내던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람은 쌀을 찧고 있는 절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백 근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돌방망이가 돌아가면서 줄곧 절구를 찧고 있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절구 속에 있던 낱알은 지극히 고운 가루로 빻아져 있었지만 돌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방아는 여전히 '쿵당쿵당' 찧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서하 무사의 몸뚱이가 돌절구 안으로 들어갔으며 거의 이백 근이나 되는 돌방망이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쿵'하는 소리가 나자 그의 머리통은 박살이 나게 되었고 그 피가 쌀가루를 빨갛게 물들이게 되었다.
그러자 서하의 고수는 다른 무사에게 재촉 했다.
다시 한 명의 부하가 사다리를 타고 누각 위로 오르려고 했다.
왕어언은 다급히 소리쳤다.
[똑같이 하세요!]
단예는 다시 손을 뻗혀 한 사람의 지실혈을 잡고 힘주어 내던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부러 그렇게 내던진 것이라 힘 씀씀이가 지난 번처럼 알맞지가 못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절구통에 반쯤 걸리게 되었다. 그러자 절구공이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그 사람의 허리께를 때렸다.
곧 처참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져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일시에 죽지는 않았지만 반죽음이 되어 있는데 다시 절구공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퍽'하는 소리와 함게 그 사람은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데 이미 다른 두 명의 무사가 사닥다리를 타고 누각으로 기어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단예는 놀라 부르짖었다.
[안돼, 빨리 물러서시오!]
그리고 왼손의 손가락을 마구 펼쳐서는 닥치는 대로 찔렀다.
당황한 까닭에 진기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으며 육맥신검의 위력이 발휘되었다. '칙',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두사람의 등을 찌르게 되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당장에 아래로 떨어져 죽어 버리고 말았다.
나머지 일곱 명의 서하 무사는 단예가 맨손으로 허공을 사이에 두고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재간이 실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단예가 이 재간을 마음대로 펼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급하게 되었을 때는 우연히 효과를 보지만 정말 펼치려고 할 때는 불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곱 명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겁이 나고 두려움이 앞섰으나 그대로 물러간다는 것도 무사의 체면으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때 왕어언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방앗간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똑똑히 보고 있었는데 적들은 아직 일곱 명이 남아 있으나 그 중 세 사람의 무공이 퍽이나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사실 그 서하 사람은 호통을 치며 은연 중 무리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아마도 서하인들의 수령쯤 되어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단공자, 먼저 몸에 황의를 걸치고 가죽모자를 쓴 사람을 죽여요! 어떻게 하든 방법을 강구하여 그의 뒤통수에 있는 옥침혈(玉枕穴)과 천주(天柱)두 곳의 혈도를 찌르도록 하세요!]
단예는 말했다.
[명을 받들지요.]
그리고는 그 서하인에게 달려들었다.
그 서하인은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옥침과 천주는 바로 내 무공의 급소가 아닌가? 저 소저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다가 단예가 달려드는 것을 보고 칼을 들고 비스듬히 내려쳐서는 단예가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단예는 몇 번이나 달려들었으나 그의 등 뒤로 돌아 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하마터면 그의 칼에 상처를 입을 뻔했다.
어찌됐든 그 사람은 왕어언의 말소리를 듣게 되어 등을 조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뒤통수에 있는 급소를 방비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 않고 단예를 죽이려 했다면 어쩌면 단예가 크게 당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왕소저, 이 사람은 대단하오. 나로서는 이 사람의 등 뒤로 돌아갈 수가 없소.]
왕어언은 말했다.
[그 잿빛 장포를 걸친 사람의 급소는 바로 목의 염천혈(廉天穴)이예요. 그리고 그 노란 수염이 익힌 무공의 수법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의 가슴팍을 몇 번 찔러 보도록 하세요.]
단예는 말했다.
[명을 받들지요.]
그리고는 손을 펼쳐서 그의 가슴을 몇 번 찔러 보았다.
단예의 열 손가락의 수법은 올바르긴 했으나 힘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노란 수염의 서하 무사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이나 몸을 움츠려 피해 버렸다. 그리고 단예가 네 번째 손을 뻗혔을 때 허공으로 후딱 뛰어올랐다. 그
리고 허공에서 떨치듯 떨어지며 날카로운 장력을 펼쳐서는 단예의 전신을 감싸듯 했다. 단예는 그 순간 호흡이 급박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란 그는 눈을 감고 두손을 마구 휘둘러댔다. '칙, 칙, 칙'하는 소리가 잇달아 일었다. 소상, 상양, 중층, 관충, 소충, 소택의 육맥신검이 일제히 발출된 것이다. 그 노란 수염의 서하 무사의 몸에는 여섯개의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장력은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일장을 들어 단예의 어깨죽지를 내려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단예의 전신은 진기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일장의 힘이 맹렬하기는 했으나 단예의 웅후한 내력이 발산하는 힘에 오히려 단예를 해치기는 커녕 그 노란 수염의 서하 무사가 일장 밖으로 튀어나가게 되었다.
왕어언은 그가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지라 놀라며 물었다.
[단공자 별일 없어요? 상처를 입지 않았나요?]
단예가 눈을 떠서 바라보니 그 노란 수염의 무사가 벌렁 나가자빠져 있고 가슴팍과 아랫배에는 여섯 개의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 조그만 구멍에서는 선혈이 솟아 오르고있지 않은가? 그리고 얼굴 표정이 매우 흉칙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단예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단예는 깜짝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는 당신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소.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이 스스로 나에게 덮쳤던 것이 잘못이요.]
그러면서도 그러한 경황 속에서 여전히 능파미보를 펼쳐 내고 있었다. 방앗간 안에서 재빠르게 돌아가며 포권을 하고 나머지 여섯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절을 했다.
[여러...... 영웅호걸들......불초 단예와...... 여러분들과는......과거에도 원수진...... 일이 없고 최근에도...... 원한을...... 맺은 일이 없소이다...... 그러니 한 번만 용서하시고 이대로 나가 주십시오. 나는...... 나는 실로 감히 이제 더 사람을...... 죽일 수가 없소이다. 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실로...... 너무나...... 잔인합니다........ 그러니 당신네들은 제발 빨리빨리 물러가 주시오. 이 단예가 졌다고 해둡시다. 제발...... 당신들이 양보 좀...... 해...... 주십시오.]
그리고 몸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문 밖에 한 명의 서하 무사가 서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중간 키에 복장은 나머지 서하 무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얼굴빛이 누렇고 표 정이 없는 것이 죽은 사람과 같았다. 단예는 가슴 속이 서늘해졌다.
(저 사람은 산 사람이냐, 죽은 사람이냐, 나에게 혹시 죽은 서하 무사의 혼백이 흩어지지 않아 원령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시요? 무엇하려는 것이요?]
그 서하 무사는 여전히 우뚝 서서는 대답하지 않았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예는 몸을 비스듬히 해서 냅다 옆에 있던 한 명의 서하 무사의 뒷 허리께에 있는 지실혈을 움켜잡아서 그 서하인에게 던졌다.
그 사람은 약간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던져진 서하 무사의 머리가 '쿵'하고 벽에 부딪히더니 두개골이 깨져 즉사하고 말았다.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사람이지 귀신이 아니군!]
이때 그 새로이 온 괴인 이외의 서하 무사는 이제 5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중 한 명의 서하인과 한 명의 한나라 사람은 일품당의 고수였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보통 무사들이었는데 그 들은 자기쪽의 사람들이 갈수록 적어지는 것을 보고 물러날 뜻이 있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문가로 가서는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자 새로 나타난 서하의 고수가 호통치며 단예에게 덮쳐들었다. 그리고는 '휙휘휙' 세 번 칼을 휘두르며 단예를 후려쳐 왔다. 단예는 푸른 빛이 번쩍번쩍하고 상대방의 칼끝이 끊임없이 얼굴 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이 언제라도 자기의 몸을 찔러 올 것 같아 두렵기 그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르짖었다.
[당신이 이토록 야만스럽다니, 그렇다면 나도 당신의 옥침혈과 천주혈을 찌르겠소. 아마 당신이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으니 내 권고하겠는데 역시...... 역시 당신의 군사를 거두어 들이도록 하시요. 그러는 것이 쌍방에게 다 좋을 것이외다.]
그러나 그 사람의 도법은 더욱더 맹렬해졌다. 칼날이 노리는 곳은 단예의 요혈이었다. 만약에 단예가 재빨리 능파미보를 펼쳐 물러나지 않았다면 단 한 칼에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때 한나라 사람인 고수는 줄곧 뒤로 쳐져 있으면서 후퇴할 기미를 엿보고 있다가 갑자기 묘책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절구통 옆으로 다가가서는 이미 고운 가루가 된 쌀가루를 두 웅큼 집어들었다.
그리고 단예의 안면을 향해 던졌다. 단예의 보법이 교묘한 만큼 그렇게 두 번 쌀가루를 던진다 한들 단예가 그것을 뒤집어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한나라 고수는 두 웅큼씩 잇따라 던져 내는 것이 아닌가?
두 웅큼 던지고 나면 다시 잇따라 두 웅큼을 던지곤 했다.
그렇게 되지 방앗간 안은 쌀가루로 가득 덮이게 되어 삽시간에 연기와 안개로 가득찬 듯했다.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야단났군, 야단났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구나!]
왕어언 역시 정세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단예가 여러명의 고수 사이에서 아직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능파미보 덕택 이었다.
적이 그에게 공격을 가할라 치면 시종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갑자기 뒤에서도 나타나고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기나 주먹, 발길이 떨어진 곳은 언제나 단예의 몸과는 간격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방앗간에 쌀가루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리게 되자 서하의 고수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초식을 펼칠 수 있게 되었고 이와 같이 눈을 감고 마구잡이로 무기와 손발을 휘둘러댄다면 단예의 몸에 적중될 것이다.
사실 이 서하의 무사들이 처음부터 단예의 몸이 어디 있는가를 상관하지 않고 자신들의 독특한 무공을 펼쳤다면 이미 단예의 몸뚱아리는 열 토막, 아니 스무토막도 더 나고 말았을 형편이었다.
단예는 사방이 쌀가루로 뒤덮이게 되자 두 눈으로 사물을 분별 할 수도 없었고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라 하고 물레방아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물레방아에 있는 옆자판을 밟고 위로 올라갓다.
그 순간 '악, 악'하는 처량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두 서하 무사와 서하 고수가 서로 난도질을 하는 바람에 칼에 맞아 죽고 말았던 것이다. 곧이어 '창, 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 호통을 내질렀다.
[나야!]
그러면 다른 한쪽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란 말야!]
서하 고수과 한나라 사람인 고수가 칼과 검으로 이초를 부딪히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악'하는 처량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최후로 남은 서하 무사가 어떻게 된 것인지 그 누구에겐가 급소를 맞고는 바깥 쪽으로 날라갔다. 그리고 죽을 당시의 울부짖음은 단예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했으며 전신이 벌벌 떨려오레 만들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이 보시요, 당신네 사람들은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만 두려고 하질 않지요? 사람을 죽이는 것도 머리가 항복하면 끝나는 것이요. 내가 이렇게 빌고 있으니 그것으로 끝난 것 아니오?]
그 한나라 고수는 그 음성을 듣고 방향을 가늠한 모양이었다. 오른손을 휘둘러 한 개의 강표를 그에게 내던졌다.
이 강표의 기세는 정확하기 그지없었으나 물레방아는 계속돌고 돌아서 이 강표가 날아들었을 때는 이미 물레방아는 단예를 이끌고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강표는 그의 소매자락 한 모퉁이를 엽자판에 못 박히도록 만들었다.
단예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암기를 피할 줄 모른다. 만약 적이 강표와 수전 등을 계속 하여 던진다면 나는 재앙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이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되자 그의 내부로부터 힘이 빠졌다. 그래서 다섯 손가락으로 물레방아의 엽자판을 그대로 쥐지 못하고 '툭'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한나라 고수는 쌀가루가 자욱한 가운데 어렴풋이 단예를 발견하자 달려들어 낚아채려 들었다. 단예는 왕어언이 그의 염천혈을 짚으라고 하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당황하여 혈도를 알아 보았으나 평소 연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허겁지겁 손을 움직여서 그의 염천혈을 짚으려 했으나 오히려 방향이 전혀 틀려지게 되었다.
왼쪽과 아랫쪽으로 기울어져서는 그만 한나라 고수의 기호혈(氣戶穴)을 짚게 되었다.
기호혈은 바로 사람을 웃게 하는 혈도였다. 그 사람은 진기가 역으로 흐름에 따라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내어 '껄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검을 다시 단예에게 찔러갔다.
그렇게 단에를 공격하면서도 계속해서 그는 히히, 헤헤, 하하, 후후 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아닌가?
그 사이 다른 고수가 물었다.
[용형, 왜 웃으시오.]
그 한인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끝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서하인은 노해서 부르짖었다.
[대적을 앞에 두고서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오?]
그 한나라 고수는 말했다.
[하하하, 나는...... 나는...... 하하하......]
그리고 그는 검을 몰아쳐 단예의 등을 찔러갔다. 단예는 왼쪽으로 비스듬히 나아갔다. 서하의 고수는 뿌연 쌀가루 때문에 형체를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도 이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그와 단예가 그만 '쿵'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그 사이, 그 고수는 단예와 몸을 부딪히는 순간 왼손을 홱뒤집었다. 그리고 금나수법으로 단예의 오른팔을 움켜잡았다. 그는 상대방이 장기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보법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한 번 오른손을 붙잡고 비틀자 이것이야말로 곧 승리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화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오른손의 칼을 던져 버리고는 그 손으로 다시 단예의 왼쪽 손목을 움켜잡았다.
단예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야단났군 야단났어!]
그리고는 힘주어 버둥거려 보았다.
그러나 그 서하 고수의 두 손은 마치 쇠고리와 같아서 도저히두 팔을 뽑아 낼 수가 없었다.
이때 한인 고수는 기회다 싶었는지 검을 펼쳐서는 단예의 등을 냅다 찔렀다.
서하의 고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차, 이 일검을 몇 치 정도 찌른다면 적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일을 돌보지 않고 혼자 공을 독차지 하기 위해 한 자 정도 찌르게 된다면 나까지도 찔러 죽이게 되는 꼴이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즉시 단예를 이끌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 한나라 고수는 여전히 웃음을 터트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장검을 펼쳐서는 다시 찌르려고 했다. 그런데 돌연 '쿵'하면서 물레방아의 옆자판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 충격에 그는 기절을 했다. 그러나 단지 기절을 했을 뿐 숨이 끊어진 것이 아닌지라 그 한나라 고수는 여전히 '하하하'하며 웃어대고 잇었다.
그 웃음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웃음소리가 괴이하기 그지 없었다. 물레방아의 엽자판은 다시 돌아가 두번째의 옆자판이 '쿵'하며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러자 그의 웃음소리는 조금 낮아졌고 옆자판이 예닐곱 번 그를 치게 되었을 때 '하하하'하며 웃는 소리는 코 고는 소리처럼 낮게 들렸다.
왕어언은 단예가 사로잡혀서는 도저히 상대방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거기다가 대문 옆에는 아직도 무서운 인상의 서하 무사가 서 있지 않는가? 그 무사가 아무렇게라도 한 칼을 휘두르거나 일지를 찌른다면 단예는 즉시 절명하고 말 상태에 이를 것이다.
그녀는 놀람과 당황함에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단공자를 해치지 말아요! 모두들...... 좋게 상의하도록 해요!]
그 서하의 고수는 단예를 잔뜩 움켜잡고는 오른팔을 내리눌렀다.
그리고는 구부러지게 해서는 단예의 가슴팍 쪽을 내리누르려 했다.
그는 그렇게 누름으로 해서 단예의 늑골을 분지르거나 아니면 숨을 못 쉬게 하여 질식해 죽이려는 생각이었다.
단예는 속으로 여간 두렵지 않았다. 그가 상대방에게 잡힌 곳은 왼쪽 팔목과 오른팔이었다. 그러므로 상대의 내력을 흡취해 내는 북명신공도 펼쳐낼 수가 없었다.
다만 왼손을 죽어라 하고 움직여서는 손가락으로 마구 찔러대었다.
그러나 그 손가락은 모두 허공밖에 찌를 수가 없었다. 점점 가슴팍에 압력이 세어졌으며 점차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게 되었다. 갑자기 이 위급한 순간에 '칙칙'하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서하의 고수는'아'하고 나직한 신음소리를 토해 내더니 말했다.
[정말 훌륭한 재간이군, 당신은 끝내 나의...... 나의 옥침혈을.]
그리고 힘을 주고 있던 두 손을 차츰 놓았다. 그러면서 머리를 푹 수그리는가 했더니 벽에 기댄 채 그대로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이상해서 그의 등 뒤로 돌아가 자세히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그의 뒤통수에 있는 옥침혈에는 조그만 구멍이 나있었고 선혈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 상처는 바로 그의 육맥신검에 의해서 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시적으로 어떻게 된 사연인지를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요긴한 순간에 공력을 끌어올려 일지의 진기를 격추했다. 이렇게 되자 그 진기는 벽에 부딪히게 되고 되퉁겨져 나와 그서하 고수의 뒤통수를 찌르게 된 것이었다. 물론 단예는 모두 합해 수십 지의 지력을 날렸으나 담벽에 부딪혀서 일일히 되퉁겨져 나온 지력은 상대방 등 뒤의 여러 곳을 적중시켰다. 그러나 그 서하 고수의 공력은 대단했고 단예의 진기는 반사됨으로 인해 크게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조금도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그러나 최후로 한가닥 진기를 쏜 것이 공교롭게도 반사되어서 그의 옥침혈에 적중하게 된 것이었다.
옥침혈은 그의 무공으로는 단련할 수 없는 급소였다.
그래서 가장 에민하고 진기가 약하면서 부드러운 상태라 대번에 그의 지력으로서 서하 무사의 옥침혈을 꿰뚫어 절명하게 했던 것이다.
단예는 놀람과 기쁨에 젖어서는 그 서하무사의 시체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왕소저, 왕소저. 적은 모조리 다 죽었소!]
그러자 갑자기 등 뒤에서 얼음같이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다 죽지는 않았을걸.]
단예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무표정한 서하의 무사가 아닌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깜박 당신을 잊고 있었군. 당신의 무공이 뛰어나지 못하다면 나는 당신의 지실혈을 움켜잡아 죽게 해주리라.)
그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노형은 그만 돌아 가도록 하시요. 나는 더 이상 그대를 죽이고 싶지 않소.]
그 사람은 말했다.
[그대에게 과연 나를 죽일 수 있는 재간이 있을까?]
그 어조는 매우 음산했다.
단예는 실로 더 살상을 하고 싶지 않아 포권의 예를 했다.
[이 불초는 귀하의 적수가 못 되니 귀하께서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나를 용서해 주구료.]
그 서하의 무사는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의 몇 마디 말하는 태도는 그저 씩씩 웃으며 장난같이 하는 소리로서 진심으로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 같군. 단씨 집안의 일양지와 육맥신검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다시 저 소저에게서 요결을 지도받게 되니 정말 대단하군. 불초는 그대의 절묘한 초식을 가르침 받겠소.]
그 몇 마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평범하게 내뱉아졌다. 그리고 높고 낮음도 전혀 없는 억양이라 듣기에 매우 거북살스러웠다.
아마도 그는 외국인이라서 한나라 말을 함에 있어서 낱말 선택이나 어법은 매우 훌륭했지만 음조만은 서투른 듯했다.
단예는 사실 천성적으로 무공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이토록 많은 살상을 하게 된 것은 정세의 부득이함 때문이었다.
사실 손을 써서 싸우는 것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본심이었다.
따라서 그는 읍을 하면서 성의있는 어조로 간곡히 말했다.
[귀하의 꾸지람이 옳습니다. 불초가 용서를 비는 마음이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사과를 드리지요. 그리고 불초는 한번도 무공을 익힌 적이 없습니다. 조금 전 사람을 죽이게 된 것도 모두 요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 그저 목숨만 보존할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그런데 어찌감히 잘났다고 남과 다툴 수 있겠습니까?]
서하 무사는 냉소를 날렸다.
[허허허...... 그대가 한번도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면서 손 한번 움직이는 사이에 서하 일품당의 네 분 고수를 모조리 죽이고 서하 무사 열한 명을 죽였단 말이요? 그렇다면, 무공을 배웠다면 무림에서 살아 남을 사람이 없겠군.]
단예는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방앗간에는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시체마다 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괴로움을 느끼며 얼굴을 가렸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내가 이 많은 사람을 죽였지? 나는...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어떡하지?]
그 사람은 냉소를 몇 번 흘리며 곁눈질로 단예를 쳐다보았다. 단예가 진심에서 그러한 말을 하는지 그는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단예는 눈물을 흘렸다.
[이 사람들은 모두 부모와 처자가 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해도 살아서 펄펄 뛰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에게 해침을 당해 죽었다. 나는...... 나는...... 어떻게 하면 그들에 대한 죄를 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그만 가슴을 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는 흐느끼며 말했다.
[그들은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명을 받들어 그저 사람을 잡아가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들과 면식도 없는 처지였으면서도 갑작스레 그러한 독수를 써서 죽게 했으니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그는 마음이 본래 착했다. 그런데다 어려서부터 불경을 읽어온터라 평소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해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그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그 서하 무사는 냉소했다.
[위선자가 눈물을 흘린다고 죄가 사해질 것 같으냐?]
단예는 눈물을 거두었다.
[그렇소. 사람도 죽였고 죄도 지은 지금 운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는 이 시체들이나 곱게 묻어 주어야겠소.]
왕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15구의 시체를 일일이 매장하자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지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말했다.
[단공자, 어쩌면 많은 적이 몰려 올지 모르니 우리는 일찌감치 멀리 떠나도록 해요.]
단예는 말했다.
[그러지요.]
그리고는 물레방아의 엽자판을 타고 누각 위로 오르려 했다. 그때 서하 무사는 말을 했다.
[그대는 날 죽이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단예는 고개를 들었다.
[난 당신을 죽일 수 없소. 더군다나 나는 당신의 적이 못되오.]
그 사람은 말했다.
[우리는 싸워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나의 적수가 못 된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왕소저는 능파미보마저 그대에게 전수하지 않았는가? 허허허, 정말 남과 다른 데가 있더군!]
단예는 능파미보가 왕어언에게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구태여 그와 같은 일을 남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며 말했다.
[그렇소. 나는 본래 어떠한 무공도 모르오. 그런데 모두 왕소저가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까닭에 큰 액난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소.]
그 사람은 말했다.
[매우 좋아. 내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대는 그녀에게 나를 죽일 수 있는 요령을 가르침 받도록 하라.]
단예는 말했다.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없소.]
그 사람은 말했다.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를 죽이지.]
그리고는 땅바닥에 있는 칼을 집어들었다. 별안간 방앗간 안은 하얀광채로 번뜩이게 되었고 일장 남짓한 테두리 안은 모두 칼빛으로 뒤덮이는 듯했다. 단예는 미처 발을 옮기기도 전에 칼등으로 어깨를 무겁게 한 대 얻어멎았다. '악'하는 소리와 함께 단예는 휘청했다.
이와 같이 그의 발걸음이 흐트러지자 그 서하 무사는 기회를 놓칠세라 곧장 그에게 달려들었고 칼날로 어느덧 그의 뒷덜미를 겨누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그만 온 몸에서 식은 땀이 흐르며 멍청해져서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사람은 말했다.
[빨리 가서 그대의 사부님에게 무슨 방법으로 나를 죽일 것인지 가르침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는 칼을 거두었다. 이어 오른발을 살짝 쳐들더니 '퍽'하며 단예를 곤두박질치도록 걷어찼다.
왕어언은 부르짖었다.
[단공자, 빨리 올라와요!]
단예는 말했다.
[네.]
그리고는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단예가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며 뒤를 돌아다 보니 그 사람은 칼을 거두고 앉아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시체처럼 무표정했다. 단예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았으며 결코 그가 사다리를 올라가는 틈을 타서 배후에서 암습을 가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았다. 단예는 누각으로 오르자 나직히 말했다.
[왕소저, 나는 그를 이길 수가 없소. 빨리 방법을 강구해서 도망치도록 합시다.]
왕어언은 말했다.
[그가 아래서 지키고 있으니 우리는 도망칠 수가 없어요. 어쨌든 윗저고리부터 하나 건네 주세요.]
단예는 말했다.
[네.]
그리고 그는 그 농가의 소녀가 남겨 두었던 헌옷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자 왕어언은 잇따라 말했다.
[눈을 감고 이리 다가와요. 좋아요. 멈추어요. 그리고 눈을 뜨지 말고 나에게 저고리를 입혀 주세요.]
2. 미래의 천하 제일의 고수
단예는 본래 착실한 군자(君子)였다.
하지만 그녀가 옷을 벗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왕어언은 옷을 입혀 주느라고 단예의 손이 자신의 몸을 건드릴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곤 했다.
얼마 후 왕어언은 말했다.
[됐어요. 나를 부축해서 일으켜 주세요.]
단예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손을 내밀었다. 뭉클한 촉감이 손에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게 된 것이었다. 그는 손바닥에 와닿는 것이 부드러운 살결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 재빨리 손을 움츠렸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왕어언은 그가 옷을 입혀 줄 때부터 두 볼을 홍당무처럼 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손길이 젖가슴을 더듬자 몸을 움츠리며 부끄러워했다. 그녀는 잠시 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봐요. 저를...... 일으켜 의자에 앉혀 줘요.]
[예. 예.]
단예는 대답을 했다. 하지만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으므로 손을 어느 쪽으로 뻗어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다시 그녀의 가슴을 만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왕어언 역시 가슴이 설레였다. 그러나 단예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고 뾰로통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내 말이 들리지 않나요? 그리고 어째서 눈을 감고 있죠?]
이때 서하 무사가 아래층에서 냉소를 날렸다.
[흥! 나를 상대할 무공을 배우라고 했지 둘이서 사랑을 속삭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허허...... 놀아나는 꼴이 가관이로군!]
단예는 그 음성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뜨자 왕어언이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를 내려다보았다.
왕어언은 단예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더욱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말아요. 저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혀 줘요.]
단예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왕어언을 공손히 부축했다.
이때 그는 그녀의 한 쪽 어깨와 반대편 옆구리를 손으로 부축하게 되었는데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감촉이어서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콧속으로 처녀의 내음새가 스며들었다. 왕어언은 힘이 없는지 단예의 가슴에 쓰러질 듯 안기며 '으음'하고 나직히 콧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는 왕어언을 부축해서 조그만 의자에 앉도록 해 주었다.
왕어언은 두 손을 벌벌 떨며 간신히 앞섶을 여미고서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자기의 무공 수법을 드러내지 않으니, 나는...... 나는 저 사람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단예는 말했다.
[그는 매우 무섭나요?]
왕어언은 말했다.
[조금 전 그는 한꺼번에 열 일곱 가지 각기 다른 문파의 무공을 펼쳤어요.]
단예는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뭐라고요?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지 않았는데 열 일곱가지 다른 무공을 펼쳤다구요?]
왕어언은 말했다.
[그래요, 그가 조금 전 칼로 그대를 감싸듯이 하고 갑자기 한 칼로 내려친 것은 소림사의 강마도법(降摩刀法)이예요. 그리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후려친 한 칼은 광서(廣西) 여산동(黎山洞) 여(黎) 늙은이의 시도십팔로(柴刀十八路)예요. 그리고 회전시키면서 베어 낸 그 한 칼은 강남 사(史)씨 집안의 회풍불류도(廻風拂柳刀)예요. 그리고 잇따라 열 한 칼을 휘둘렀는데 모두 열 한 가지 문파의 다른 도법이었어요.
그 후에 칼등으로 그대의 어깨죽지를 후려친 수법은 영파(寧波)의 천동사(天童寺) 심관(心觀) 화상이 창안한 자비도(慈悲刀)예요. 이 도법은 적을 제압하기만 하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요.
그리고 그가 그대에게 칼을 갖다대기만 한 것은 송나라 금도(金刀) 양로령공(楊老令公)이 전장에서 적장과 싸울 때 적을 잡았던 초식으로서 '후산삼절초'(後山三絶招)가운데 한 가지 초식이예요. 본래 자루가 긴 대감도로 펼치는 것인데 그는 일반적인 칼로 응용해 펼친 것이예요.
그리고 최후에 발길질하여 그대로 하여금 곤두박질치게 한 것은 서하 회족(回族)의 탄퇴(彈腿)라는 재간이예요.]
그녀는 일초 일초를 설명하는데 그야말로 자기 집의 보물 헤아리듯 그 근원과 문파의 내력까지 모조리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듣기만 했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왕어언은 고개를 갸웃하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대는 저 사람을 이길 수 없어요. 졌음을 시인하도록 하세요.]
단예는 말했다.
[나는 벌써 졌음을 시인했소.]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이 보시요. 나는 어떻게 하더라도 그대를 이길 수 없어요. 여기서 그만 두는 것이 어떻겠소?]
서하 무사는 냉소했다.
[그대의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은 어렵지가 않지. 다만 한 가지 일만 들어 주면 되네.]
단예는 재빨리 대답했다.
[무슨 일이요?]
서하인은 말했다.
[그대는 나를 만날 때마다 땅바닥에 엎드려 세 번씩 절을 하며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면 되네. '큰 나리 제발 저의 개 같은 목숨만은 살려 주십이요'하고 말일세.]
단예는 그 말을 듣고는 그만 울화가 치밀었다.
[선비는 죽으면 죽었지 욕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요. 나보고 당신에게 절을 하며 애걸을 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죽일테면 지금 당장 죽이시요.]
그 사람이 말했다.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소?]
단예는 말했다.
[죽는 것이야 두렵기는 하지만 매번 당신을 만날 때마다 꿇어 엎드려 애걸을 한다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소.]
서하인은 냉소했다.
[나를 볼 때마다 꿇어 엎드려서 절을 하는 것은 그렇게 억울한 일이 아니다. 만약 내가 중원의 황제가 된다면 그대는 나를 볼 때마다 꿇어 엎드려 큰 절을 할 것이 아니겠는가.]
왕어언은 그의 "내가 언젠가 중원의 황제가 된다면"이라는 말을 듣고 속으로 흠칫했다.
(어째서 저 사람도 그러한 말을 할까?)
단예는 말했다.
[황제를 보고 절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요. 황제를 보고 존경하는 의미로 절을 하며 예의를 다 하는 것이지 용서를 비는 것은 아니지 않소?]
그 서하 무사가 말했다.
[그럼 나의 제안은 응낙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제안을 받아들일수 없소. 노형께서 양해해 주시오.]
그 사람은 말했다.
[좋아, 내려오게. 단칼에 죽여 줄테다.]
단예는 왕어언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대가 나를 꼭 죽여야겠다면 할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나에게도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소.]
그 사람은 말했다.
[무슨 일인가?]
단예는 말했다.
[이분 소저는 기이한 독에 중독되어 사지에 힘이 빠져 걸을 수도 없다오. 그러니 그대가 편의를 보아 드려 태호의 만다산장까지 바래다 주시오.]
그 사람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내가 왜 그러한 편의를 봐 주어야 하지? 서하의 정동 대장군께서는 명을 내리셨어. 그 누구라도 박학다식한 저 소저를 잡아온다면 황금 천 냥을 내리고 벼슬은 만호후(萬戶侯)에 봉하겠다고.]
단예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한 통의 편지를 써 줄테니 그대는 이 소저를 그녀의 집으로 돌려보낸 후 내가 준 편지를 가지고 대리국으로 가서 황금 오천 냥을 받도록 하시오. 그리고 만호후에도 어김없이 봉해 드리도록 하겠소.]
그 사람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자네가 무엇이길래 자네의 편지 한 통이 나에게 황금 오천 냥을 주고 게다가 만호후에게까지 봉해 준다는 거지? 내가 세살 먹은 어린아이인 줄 아는가? 하하하하......]
단예도 그와 같은 말로는 남을 믿게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이거...... 이거...... 큰일났구나. 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소저가 떠돌이 신세가 되어 나쁜 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나는 만 번 죽어도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할거야.]
왕어언은 그가 자기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자 커다란 감동을 받은 나머지 큰 소리로 서하인에게 말했다.
[이것 봐요. 그대가 무례한 짓을 한다면 우리 고종 오라버니가 반드시 나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할 것이며 반드시 서하국을 발칵 뒤집어 놓고 말거예요.]
그 사람은 물었다.
[그대 고종 오라버니가 누구지?]
왕어언은 자랑스런 어조로 말했다.
[우리 고종 오라버니는 중원 무림에서 명성이 뛰어난 모용공자에요. '고소 모용씨'의 이름은 아마 그대도 들어 보았을 거예요. '그 사람의 방법으로 그사람에게 펼친다.'는 말도 있지 않아요? 그대가 나에게 불순한 언사를 쓴다면 아마 십 배를 더해 그대에게 보복할 거예요.]
그 사람은 냉소했다.
[모용공자가 만약 그대가 저 준수하게 생긴 젊은이와 다정하게 지내는 광경을 보게 된다면 그래도 그대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할까?]
왕어언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터무니없는 소리 마세요. 나는 이분 단공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그녀는 그와 같은 일은 더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화제를 돌려 물었다.
[이 봐요, 그대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나요. 나에게 알려줄 수 있나요?]
서하 무사는 말했다.
[감히 못할 것이 무엇이겠소. 나는 바로 서하의 이연종(李延宗)이라는 사람이요.]
왕어언은 말했다.
[음, 이씨라면 서하의 국성이잖아요.]
그 사람은 말했다.
[어찌 국성이다 뿐이겠소. 충성으로 나라에 보답하여 요나라를 밟고 송나라를 멸하고 토번국을 제거하고 남으로는 대리국을 병합할 것이요.]
단예는 말했다.
[그대의 뜻이 크구려. 이장군, 내 그대에게 말하겠지만 그대는 각파의 절기에 정통하고 있소. 따라서 무공이 천하 제일의 무예를 이루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천하를 통일한다는 것은 결코 무공만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외다.]
이연종은 '흥'하고 코웃음을 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왕어언은 말했다.
[무공이 천하 제일이라고할 수는 없을거예요.]
이연종은 말했다.
[어째서?]
왕어언은 말했다.
[제가 보는 견해로는 두 사람의 무공이 그대보다는 훨씬 뛰어나요.]
이연종은 한 걸음 나서며 물었다.
[그게 누구지?]
왕어언은 낭랑히 말했다.
[제일은 개방의 전임 방주 교봉이예요.]
이연종은 코웃음쳤다.
[흥, 이름은 대단하지만 실제 무공이 어떨지는 두고보아야 알지. 그리고 두 번째는?]
왕어언은 말했다.
[두 번째 분은 바로 저의 고종 오라버니로서 강남의 모용복, 모용공자예요.]
이연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가 교봉의 이름을 모용복의 이름 앞에다 넣는 것은 어째서이지?]
[물론,우리 오라버니가 교 방주를 이길 수 있기를 바래요. 하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불가능해요.]
이연종은 말했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교봉이 정통한 것은 한 문파의 무공뿐이고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는 천하 무학을 널리 알고 있지 않은가? 장래에 무공이 일취월장하게 될 것이니 그의 무공이 천하 제일이 될 것이야.]
왕어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될 수 없어요. 나중에 무공이 천하 제일이 될 사람은 십중팔구 이 단 공자일 거예요.]
이연종은 고개를 젖히고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말씀을 정말 잘 하시는군! 저 책벌레는 소저의 가르침을 받아 능파미보라는 한 가지 재간만을 배운 것이 아니겠소? 설마하니 머리를 감싸쥐고 목을 움츠린 채 도망가는 재간을 가지고 천하 제일의 고수로 일컬어 질 수 있단 말이오?]
왕어언은 능파미보가 자신이 전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그리고 단예의 내력이 웅후하고 기초가 잘 잡혀 있기 때문에 감히 따를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은 마음이 매우 편협한 것 같다.만약 내가 사실대로 말한다면 저 사람은 반드시 단 공자를 죽이고 말것이다.어디 그를 한번 자극해 보아야지.'
생각을 마친 그녀는 말했다.
[그가 만일 나에게 가르침을 받아 삼 년 후면 교방주를 이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대를 이기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노릇이에요.]
이연종은 말했다.
[좋소,나는 소저의 말을 믿기로 하지.그렇다면 훗날의 화근을 남기기보다는 오늘 한칼을 써서 죽여 버려야겠군.단 공자,내려오시오.내 그대를 죽여야겠소.]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나는 내려가지 않겠소,그대도 ...... 그대도 올라오면 안돼요.]
왕어언은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될 줄은 몰랐다.결국 그 사람의 호승심을 자극하지 못하게 되자 냉소를 했다.
[알고 보니 그대는 두려워하는군요. 삼 년 후에 단 공자가 그대를 이길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죠?]
이연종은 말했다.
[그대가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써서 나로 하여금 단 공자를 살려 두려 하려는 모양인데,허허허,이 이연종이 어떤 사람인데 그 수작에 넘어갈까? 내가 그의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은 어렵지 않소.일찌기 이야기한 것과 같이 매번 나를 볼 때마다 세 번 큰 절을 하고 용서를 빈다면 나는 결코 그를 죽이지 않겠소.]
왕어언은 단예를 바라보았다. 단예는 큰절을 하고 용서를 비는 일을 절대로 할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죽음으로부터 목숨을 건지는 일이 중요한지라 왕어언은 단예를 향해 나직이 물었다.
[단 공자,그대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검기가 때로는 잘 쏘아지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지요?]
단예는 말했다.
[나도 모르오]
왕어언은 말했다.
[그럼 힘껏 한 번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어요. 검기(劍氣)로 그의 오른쪽 손목을 찌른 후 그의 장검을 빼앗도록 하세요. 그리고 그를 꼭 껴안고'육양융설공'을 펼쳐서 그의 공력을 제거하는 거예요.]
단예는 의아해서 말했다.
[육양융설공이라니요?]
왕어언은 말했다.
[그 날 만다산장에서 엄씨 아줌마를 제거하고 나를 구할 때 대리 단씨의 신공을 썼다고 하지 않았어요.]
단예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날 왕어언은 그의 북명신공(北冥神功)을 무림에서 모든 사람의 멸시를 받는 화공대법(化功大法)인 줄 알고 있기에 그는 일시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마무렇게나 대리 단씨의 가전비법으로 육양융설공이라고 둘러대었던 것인데 그 자신도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왕어언은 천하 각문 각파의 무공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그와 같이 대단한 기공을 어찌 기억에 담아 두지 않았겠는가?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방법 외에는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조금도 자신이 없었다. 어찌됐든간에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옷자락을 단정히 하고 말했다.
[왕 소저,불초가 무능하여 소저를 댁으로 모셔다 드리지 못해서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훗날 소저가 댁으로 돌아가서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와 혼례를 올리게 된다면 그때 불초가 만다산장에 심어 놓은 몇 그루의 다화 옆에 몇 잔의 술이나마 부어 주시오.그러면 불초는 잔치술을 마신 걸로 하겠소이다.]
왕어언은 '고종 오라버니와 혼례를 올리게 된다면'이라는 소리를 듣자 속으로 무척 기뻤다.그러나 단예가 이대로 나아가 상대의 손아귀에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차마 안 됐다는 생각에 처량해져 입을 열었다.
[단 공자, 그대는 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에요.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은헤를 잊지 않겠어요.]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장래 두 눈을 뜨고서 그녀와 모용 공자가 혼례식을 올리는 것을 본다면 질투심을 못 이겨 살아가기가 힘들겠지?그럴 바에야 차라리 오늘 그대를 위하여 죽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한걸음 두 걸음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왕어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 정말 이상하구나.이 급박한 상황에서 웃음을 짓다니!'
단예는 아래로 내려가 이연종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이 장군, 당신이 나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면 손을 써 보시오.]
그리고 한 걸음 내딛었다. 바로 능파미보를 펼친 것이다.
이연종은 칼을 휘둘러 휙휙휙,하니 세 번 내리쳤다.
이번에 세 번 후려친 것은 제각기 문파가 다른 도법(刀法)이었다.
왕어언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기 가운데 도법을 쓰는 문파가 가장 많기 때문에 만약 정말 박학한 사람이라면 칠팔십 초를 펼쳐지는 동안에 한 문파의 도법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예의 능파미보는 한 번 펼쳐지자 정말 그 변화가 무쌍했다.이연종은 칼을 휘둘러 단예를 검광 속에 가두다시피 했고 몇 번이나 그를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이유인지 단예는 유령처럼 그칼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왕어언은 단예가 이번에도 오래 지탱하는 것을 보고 약간 기대를 걸었다.
단예는 암암리에 공력을 돋우었다. 그리고 오른손 다섯 손가락으로 진기를 쏟아내려고 했다.그러나 매번 팔까지 올라온 진기는 그냥 사그라들곤 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능파미보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그리하여 이연종이 아무리 빠르게 칼을 휘둘러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이연종은 그가 기이하기 짝이 없는 지력(指力)으로 잇따라 서하의 고수들을 죽이는 것을 보아 왔다. 이제 그가 다시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을 보고는 그가 내력을 끌어내려고 그러는 줄을 모르고 그저 사악한 수법을 펼치려는 준비 동작인 줄 알았다.
'이 사람은 보법이 기이한 것 이외에 다른 무공은 평법하기 짝이 없다.그러나 그 사악한 수법은 무섭기 그지 없다.그러니까 그가 손가락으로 사악한 수법을 펼치기 전에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한다.그런데 아무리 해도 칼로 그를 벨 수 없으니 어떻게 한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즉시 손을 뒤로 돌려 일 장으로 물레방아의 한쪽을 내리쳤다.그는 그 엽자판을 크게 한 조각 뜯어내서는 왼손에 쥐고는 단예의 발을 향해 내던졌다.
단예는 마치 바람처럼 앞으로 나왔다가 뒤로 물러서고 좌로 내딛었다가 우로 날아가곤 했다.
이연종이 던지는 판대기 조각은 단예에게 적중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연종은 주먹으로 치고 장력으로 후려쳐서 방앗간안에 있는 질그릇은 말할 것도 없고 대나무로 만든 채와 가마니 등 모든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단예의 발밑에다 던졌다. 마구 부순 집기와 가구들이 발밑에 쌓이자 단예는 더 이상 발을 옮겨 놓기가 어려워졌다.
그의 능파미보는 마치 바람이 수면 위로 불어가듯 거침이 없어야 했다.그런데 지금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에 채이는 물건이 있는지라 물이 흐르듯 나아가고 물러날 수가 없었다.
단예는 조금이라도 능파미보를 펼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바닥을 상관하지 않고 그저 익숙해진 보법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서곤 했다.
왕어언 역시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 소리를 질렀다.
[단 공자,어서 대문 밖으로 달려나가 스스로의 목슴을 구하도록 하세요.이곳에서 조금만 더 싸운다면 즉시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요.]
단예는 대답했다.
[이 단가의 한가닥 숨이 붙어 있는 한,마땅히 소저를 보호해야 되지 않겠어요?]
이연종이 냉소했다.
[그대라는 사람은 무공이 숙맥 같아도 왕 소저에 대한 정은 바다처럼 깊군! 정말 다정하기 이를데 없는 사내로군!]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로소이다!왕 소저는 마치 신선과 같은 존재요.이 단예로 말하면 속된 범부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애정을 논할 수 있겠소. 그녀는 나를 예쁘게 보고 나와 함께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를 찾겠다고 했소. 나를 알아 주는 것이 고마워 나는 그녀에게 보답을 해야 하는 것이외다.]
이연종은 말했다.
[음, 그녀가 그대를 따라나온 것은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를 찾겠다는 이유 때문이었군. 그렇다면 그녀의 심중에는 아예 그대라는 존재는 있지도 않군 그래. 그런대도 헛된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니, 그대야말로 두꺼비가 하늘의 거위고기를 먹으려는 심산이 아닌가? 하하하...하하하... 정말 사람 웃기는 군!]
단예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대가 나를 두꺼비로 비유하고 왕 소저를 하늘의 거위라고 비유한 것은 정말 합당하오. 그러나 이 두꺼비는 보통 두꺼비와 다르다오. 하늘의 거위고기를 먹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저 한두 번 바라볼 수만 있어도 만족한다오 어찌 먹을 생각을 품겠소?]
이연종은 자기라는 두꺼비는 보통 두꺼비와 다르다는 말에 참을 수 없어 소리내어 웃었다. 이상한 것은 그가 아무리 우렁차게 웃어도 얼굴의 근육은 그대로 경직된 상태로 있었으며 조금도 웃는 티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단예는 연경 태자가 말을 할 때 입술 한 번 움직이지 않던 모습을 보았던 터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얼굴이 무표정한 점을 든다면 그대는 연경 태자보다 훨씬 떨어지는군! 그대는 그의 동생이 되기도 어렵소.]
이연종은 말했다.
[연경 태자가 누구지?]
단예는 말했다.
[그는 대리국의 고수요. 그대의 무공은 그보다 못 하오.]
사실 그는 다른 사람의 무공의 높고 낮음을 분간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다만 상대방의 손에 죽을 바에야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런 소리를 지껄여댄 것이었다.
이연종은 코웃음을 쳤다.
[흥, 나의 무공이 높은지 혹은 낮은지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알지?]
그는 입으로 말하면서 손에 든 칼을 멈추지 않고 휘둘렀다.
왕어언은 단에가 몸이 기우뚱거리며 발걸음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등 정세가 어려운 것을 보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단 공자, 빨리 문밖으로 나가요!그리고 그를 붙잡고 늘어져요. 문밖에서 싸워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단예는 말했다.
[그대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어찌 이곳에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갈 수가 있겠어요.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군요. 이곳에는 시체들이 많고 그대는 아녀자이니 반드시 두려움을 느낄 것이오.그러니 이곳에서 내가 그대를 모시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왕어언은 한숨을 내쉬고 생각했다.
'저 사람은 정말 멍청하구나! 내가 시체를 두려워 하리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돌보지 않다니!'
이때 단예는 발에 이것저것 걸리는 바람에 상대방의 칼끝이 머리 위와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자 겁이 났다.
'그가 이렇게 계속 공격하다가 나의 머리를 반쪽으로 쪼개 버린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대장부라면 펼 수도 있고 움츠릴 수도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왕 소저를 위해 무릎을 꿇고 비는 것이 옳지 않을까?'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으나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이연종은 단예가 안절부절 못 하는 것을 보자 냉소하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대는 무척 겁에 질려 있군! 멀리 도망치려는 생각뿐이잖아!]
단예는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큰일인데 그 누가 겁을내지 않겠소? 죽고 나면 모든 일이 끝장이 아니겠소? 나도 도망을 치고 싶지만 도망을 칠 수가 없구려.]
이연종은 말했다.
[어째서 도망을 못 치지?]
단예는 말했다.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소, 내가 하나에서 열까지 셀 동안 당신이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마시오. 당신도 나를 죽일 수 없고 나도 당신을 죽일 수 없소. 서로 끈덕지게 숨박꼭질하듯 붙잡고 늘어져 봤자 옆에서 보는 왕 소저만 답답할 것이오.]
그는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둘,셋......]
이연종이 말했다.
[무슨 멍청한 짓을 하는거냐?]
단예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 헤아려갔다.
[넷,다섯,여섯.....]
이연종이 웃으며 말했다.
[천하에 네 녀석처럼 미련한 사람이 있을까?실로 네가 펼치는 무예가 아깝구나!]
그는 휙휙휙,하니 세 번의 칼질을 했다.
단예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하며 수를 빠른 속도로 헤아려 갔다.
[일곱,여덟,아홉,열,열하나,열둘....이제 됐소.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했소.그런데도 졌음을 시인하지 못하겠소? 내가 볼 때 그대는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 것 같소. 무석산의 송학루에 가서 몇 잔의 술을 들이키고 산해진미 음식을 먹는 것이 더 기분 좋은 일이 아니겠소?]
그는 상대방이 손을 멈추지 않자,술과 음식으로 유혹하려고 했다.
이연종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평생 얼마나 많은 대적들과 싸워 보았는지 모른다.그러나 저런 녀석은 처음 본다.녀석은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멍청하고 멍청한 듯하면서도 바보가 아니다.또한 무공이 고강하지도 않지만 형편없지도 않다.이와 같은 사람은 한평생 보기 드물다.그와 이렇게 겨룬다면 언제 끝날지 모른다. 거기다가 조금만 소홀히 하면 저 사람의 요상한 수법에 걸려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달리 좋은 계책을 생각해야 겠다.'
그는 단예가 왕어언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누각을 향해 호통을 내질렀다.
[좋다,좋아!얘들아,한칼로 저 소저를 죽여 버리고 이리 내려와 나를 도와다오!]
단예는 깜짝 놀랐다.
정말 적이 누각 위로 올라가 왕어언을 해치는 줄 알고 급히 고개를 돌려 누각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느라고 발걸음이 조금 느려지는 순간 이연종은 옆으로 발길질 해서 그를 쓰러뜨렸다.그리고 왼발로 단예의 가슴팎을 내리밟고 칼로 그의 목을 겨누었다.
단예는 손가락을 뻗쳐 그를 찌르려고 했다. 이연종이 오른팔에 힘을 조금 가하자 그의 칼끝이 단예의 목줄기를 파고 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그는 호통을 내질렀다.
[꼼짝하기만 해봐.머리통을 두 쪽으로 갈라 놓을테다.]
단예는 누각위에 아무도 올라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놓여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보니 그대는 사람을 속였군!왕 소저에게는 아무 위험도 없지 않소.애석하군, 애석해!]
이연종은 물었다.
[무엇이 애석하단 말이냐?]
단예는 말했다.
[그대는 본래 무공이 뛰어나 영웅호걸이 아니겠소? 그러므로 이 단예가 그대에게 죽는 것은 영광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외다.하지만 그대가 무공으로 이기지 않고 간교한 계책을 썼으니 비열한 무명소졸이 되고 말았단 말이오. 무명소졸에게 죽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소?]
이연종이 말했다.
[나는 그따위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 나에게 죽는 게 억울하여 승복할 수 없다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나아가 하소연을 하면 된다.]
이때 왕어언이 외쳤다.
[이 장군,잠깐만!]
이연종은 말했다.
[왜 그러지?]
왕어언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가 만약 단 공자를 죽이자마자 나를 이 자리에서 즉시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언젠가 당신을 죽여 단 공자의 원수를 갚겠어요.]
이연종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너는 너의 오라버니를 시켜 나를 혼내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생각이 바뀌었느냐?]
왕어언이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의 무공은 그대보다 뛰어나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나는 그대를 죽일 자신이 있어요.]
이연종이 냉소했다.
[그것은 어째서 그렇지?]
왕어언이 말했다.
[그대가 무학에 대해서 비교적 아는 것이 많지만 나의 반도 되지 않아요, 처음 나는 그대의 도법이 복잡한 것을 보고 퍽이나 탄복했어요.그러나 오십초 이후부터는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어요.그대에게 잔재주가 많다고 말한다면 너무 각박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대가 아는것은 나보다 훨씬 적어요.]
이연종은 말했다.
[내가 펼친 도법 가운데 같은 문파의 수법을 거듭 펼친 적이 없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내가 너보다 아는 것이 훨씬 적다고 하지?내가 아직도 많은 무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어떻게 알겠느냐?]
왕어언은 말했다.
[조금 전 그대는 청해(靑海) 옥수파(玉樹派)의 대막비사(大漠飛沙)라는 일초를 펼친 이후 단 공자가 재빠른 걸음으로 지나치게 되었을 때 태을파(太乙派)의 우의도(羽衣刀) 제십초를 쓰고 재차 영비파(靈飛派)의 청풍서래(淸風徐來)를 썼다면 이미 단 공자를 땅바닥에 쓰러뜨렸을 거예요.그런데도 어째서 겉으로는 화려하나 효과가 효과가 없는 산서성의 혁가도법(혁家刀法)을 펼쳤지요? 그리고 간교한 수단을 써서 단 공자의 정신을 팔게 해서 승리를 취했느냐고요! 내가 볼 때 그대는 도가(道家)의 이름 있는 도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어요.]
이연종은 그말을 받았다.
[도가의 이름있는 도법이라니?]
왕어언은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짐작하건데 그대는 도가(道家)에는 검법(劍法)만 있는 줄 알고 있을 뿐, 도가의 도법 가운데 굳건한 가운데 부드러움이 있는 도법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요.]
이연종은 냉소하며 말을 받았다.
[그대는 정말 자부심이 대단하군!그대는 이 단가에 대해서 깊은 정을 느끼고 있군!]
왕어언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깊은 정을 느끼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예요? 나는 그에 대해서 아무런 정도 느끼고 있지 않아요.다만 그가 나를 위해서 죽기 때문에 그를 위해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을 했을 뿐이에요.]
이연종은 물었다.
[그대는 진심에서 하는 말이오?]
왕어언은 말했다.
[물론 진심이예요.]
이연종은 냉소를 흘리며 허허허, 웃더니 품속에서 자기로 된 병을 꺼내어 단예의 얼굴 위에 던졌다.그리고는 칼을 집어 던지고는 휙하니 몸을 날렸고 그는 어느덧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곧이어 말울음 소리가 들리고 뒤따라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그 말발굽 소리는 점차 멀어지더니 끝내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단예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목에 난 칼자국을 만져 보았다. 약간 쓰라렸으며 선혈이 조금 배어나와 있을 뿐이었다. 정말 꿈속에서 일어난 일 같았다. 왕어언 역시 천만 뜻밖인 모양이었다.
한참 후에 단예는 입을 열었다.
[그는 갔구료.]
왕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갔어요.]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묘하군, 묘해! 그가 나를 죽이지 않고 그냥 가다니! 왕소저, 그대의 무학에 관한 조예가 그보다 한층 뛰어난 걸 보자 그는 겁이 났던 모양이오.]
왕어언은 말했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그가 당신을 죽인 이후 다시 한 번만 칼을 더 휘두른다면 나를 죽일 수 있었을 거예요.]
단예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소. 하지만...... 하지만...... 그는 그대와 같은 미녀를 향해 차마 칼을 내리칠 수가 없었을 것이오. 아......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군!]
왕어언은 얼굴을 붉히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책벌레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와 같이 악독한 서하 무사가 어찌 나의 용모에 현혹되었겠는가?)
단예는 갑자기 그녀가 부끄러운 빛을 띠우자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나는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를 보호하려 했소. 그런데 뜻밖에도 그대가 무사하고 또한 나의 목숨까지 부지하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꿈만 같구려!]
그리고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자 '툭'하며 자기로 된 병이 발길에 채었다.
조금 전 이연종이 단예의 몸에 던진 바로 그 병이었다.
병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비소청풍(悲소淸風), 냄새를 맡으면 즉시 해독된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비소청풍이 무어지? 음, 해독약이라니까 해독약이겠지.)
그는 병마개를 뽑았다.
한 가닥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그는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몸을 흔들거렸다. 그는 급히 병마개를 막고 부르짖었다.
[속았군, 속았어! 대단히 고약한데! 절인 생선의 내장을 떼어낸 것보다 더욱 심하군! 심해!]
왕어언은 말했다.
[내가 냄새를 맡아 볼께요. 저에게 주세요. 어쩌면 독으로써 독을 공격하는 효과를 볼지도 몰라요.]
단예는 말했다.
[그러죠.]
그리고 자기병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이 냄새는 정말 고약하여 맡을 수가 없소. 그래도 한 번 시험해 보겠소?]
단예는 손에 병마개를 잡고 뽑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삽시간에 그의 뇌리에 무수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이 해약이 정말 쓸모가 있어서 그녀의 독을 해독시켜 준다면 그때부터는 나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겠지? 본래 그녀의 재간은 나보다 백 배나 뛰어나니 내가 계속해서 돌볼 필요가 없겠지? 그녀가 마음 속에 두고 있는 모용복을 찾으러 간다면 나는 그녀 곁에 서서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그들이 다정하게 구는 모습을 구경해야 되겠지? 진정 이 단예는 차분한 마음으로 그러한 광경을 지켜보며 얼굴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왕어언은 단예가 우두커니 서서 입을 다물고 있자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나에게 그 냄새를 맡게 해 주세요. 나는 고약한 냄새를 두려워 하지 않아요.]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그러죠.]
그리고는 병마개를 뽑아 자기 손에 든 병을 그녀의 콧가에 가져갔다.
왕어언은 힘주어 그 냄새를 맡더니 놀라며 소리쳤다.
[어머, 정말 고약하네요!]
단예는 말했다.
[그렇지요? 내가 십중팔구는 쓸모가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리고는 병뚜껑을 닫아 자기 품속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때 왕어언은 말했다.
[다시 나에게 맡도록 해주세요.]
단예는 다시 병을 그녀의 콧가로 가져갔다.
그는 자기 자신이 정말 그 해약이 효과가 있기를 바라는지 없기를 바라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왕어언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을 들어 코를 움켜쥐며 웃었다.
[차라리 손발을 움직이지 못했으면 못했지 이 냄새를 맡지는 못하겠어요. ......아, 나의 손, 나의 손이 움직였어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움직여서 콧구멍을 감싸 쥐었던 것이다.
사실 그러기 전에는 그녀가 선 채로 옷을 걸치려 해도 매우 어렵지 않았는가?
그녀는 기쁜 나머지 단예의 손에서 자기병을 빼앗아 들고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몇 번 냄새를 맡자 무력하던 사지에 힘이 넘치는 게 아닌가?
그녀는 단예에게 말했다.
[내려가 계세요.. 저는 옷을 바꾸어 입어야겠어요.]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그러시구료.]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대부분이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닌가?
그는 커다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 시체 중 한 명의 서하 무사는 죽어서도 눈을 크게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깊이 읍을 하며 말했다.
[내가 노형을 죽이지 않았으면 노형이 나를 죽였을 것이오. 그렇게 되었다면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이 단예였을 것이오. 불초로서는 어찌할 수 없어 노형을 죽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실로 많은 가책을 받고 있다오. 장래 대리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고승을 청해다가 염불을 하여 여러 노형들이 극락왕생하기를 빌겠소.]
그는 고개를 돌리고 농가의 젊은 남녀의 시체를 바라보고는 다시 서하 무사의 시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대들이 죽이려 한 것은 나이고 잡으려 한 사람은 왕소저인데 왜 쓸데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었소?]
이때 왕어언이 옷을 갈아입고 비에 젖은 옷을 들고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녀는 단예가 시체를 향해 중얼중얼 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나는 이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많은 가책을 받고 있소.]
왕어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단공자, 그 이가라는 사람이 어째서 우리에게 해약을 주었는지 아세요?]
단예는 말했다.
[그건...... 그건...... 나도 모르겠소...... 아...... 알았소. 그는...... 그는......]
그는 잇따라 그는, 그는..... 이라고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본래 그는 '그 이가라는 서하의 무사가 그대를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솟구쳤기 때문'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거칠기 짝이 없는 사람이 왕어언과 같은 어여쁜 미녀에게 정을 느낀다고 한다면 어폐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 단예가 그녀에 대해 이토록 사모하게 된 것이 평범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따라서 자기 자신도 천하의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 없는 꼴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꺼이 그녀를 위해 죽는다는 사실 역시 별로 대단한 일이 못 되지 않겠는가?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그는 말하였다.
[나는...... 나는 모르겠소.]
왕어언은 말했다.
[어쩌면 한 떼의 서하 무사들이 들어닥칠지도 몰라요. 우리는 한시 바삐 여기를 떠나도록 해요.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물론 고종 오라버니를 찾아가고 싶었으나 그런 이야기를 하기가 겸연쩍어 슬쩍 단예에게 운을 띄워 보았다.
단예는 그녀의 마음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슬쩍 되물었다.
[그대는 어디로 가려 하오?]
그렇게 물어 보는 그의 마음은 매우 쓰라렸다.
그녀가 자기의 고종오라버니를 찾으러 간다 해도 체면 불구하고 '내가 그대를 따라 가겠소'하는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왕어언은 손에 든 자기병을 만지작거리면서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그건...... 그건.]
그리고 잠시 뜸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개방의 영웅호걸들이 모두 이 '비소청풍'이라는 독에 중독되었어요. 만약 저의 고종 오라버니가 이곳에 계셨다면 그 해약을 가져가 그들에게 몇 번 냄새를 맡게 했을거예요. 거기다가 아주와 아벽이 지금쯤 적의 수중에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고요......]
단예는 큰 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렇소! 아주와 아벽 두 소저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테니 우리는 즉시 그 곳으로 달려가 그들을 구해야 할 것이오!]
3. 아주와 아벽
왕어언은 생각에 잠겼다
(이일은 몹시 위험하다. 우리 두 사람의 실력으로 개방의 고수들을 구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주와 아벽은 고종오라버니의 심복이 아닌가? 그녀들을 구하면 고종 오라버니께서 나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녀는 말했다.
[어쨋든 좋아요. 우리 가 봐요.]
단예는 바닥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들을 안장해야 되지 않겠소? 그리고 각자의 성명을 알아내어 그들 무덤 앞에다가 묘비라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오. 그래야 그들의 가족들이 나중에라도 시체를 찾아 그들의 고향에다 안장을 하기가 편할 것이외다.]
왕어언은 '깔깔깔' 웃었다.
[호호, 좋아요. 그대는 여기 남아서 그들의 장례를 치루도록 하세요. 염을 하고 관을 짜고 부고를 돌리고 조문을 쓰고 제문을 낭송하고 만장(輓章)을 달아 주고 절을 올리도록 하세요. 그리고 뭐 초이레는 어떻게 하고 두번째 이레는 어떻게 하든 상례를 치르세요. 그리하여 49일제를 지낸 후에 그들 가족에게 일일히 통지하여 이장하게 하세요.]
단예는 그녀의 말 속에 비웃음이 서려있음을 알아채고는 그 자신도 역시 무엇이 잘못 되었구나 생각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소저의 견해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왕어언이 말했다.
[불을 질러 태워 버리는 게 어떻겠어요? 그게 좋지 않을까요?]
단예는 말했다.
[그건 너무나 무례하지 않소?]
그는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불을 피워서 방앗간의 볏단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왕어언과 함께 얼른 방앗간을 나섰다. 삽시간에 방앗간은 불길에 휩싸였다. 단예는 공손히 꿇어 엎드려서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색신(色身)은 무상한 것, 오래도록 보존할 수 없소이다. 여러 어른들은 오늘 나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을 전생의 업보라고 생각 하시오. 오로지 혼이나마 왕생극락하며 영원한 윤회의 고달픔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오. 너무 원망마시오.]
그리고 속으로 중얼중얼 기다랗게 말을 늘어 놓은 후 몸을 일으켰다. 방앗간 밖의 나무에는 십여필의 말이 묶여 있었다. 바로 서하무사들 한떼가 타고 왔던 말이었다. 단예와 왕어언은 각기 한 필의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큰 길을 따라 나아갔다. 어렴풋이 '땅땅'하는 징소리가 들려왔으며 사람들의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의 농민들이 불을 끄려고 달려 오는 것 같았다. 단예는 말했다.
[한 채의 멀쩡한 방앗간이 나 때문에 불타게 되었으니 정말 진심으로 안되었구료.]
왕어언은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그렇게 꺼리는 것이 많고 말도 그렇게 많지요. 우리 어머니는 여자지만 일을 행함에 있어서는 시원시원해요. 한번 한다면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대는 사내 대장부이면서 어찌 그토록 꺼리는 것이 많아요?]
(그대의 모친은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고 그 살로 꽃의 비료를 삼는데 내 어찌 그녀와 비교 될 수 있겠는가?)
생각을 마친 그는 입을 열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이고 집에다 불을 질렀다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구료.]
왕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것도 그래요. 하지만 이후부터 습관이 된다면 아무렇지도 않을거예요.]
단예는 깜짝 놀라 연신 손을 내저었다.
[절대로 안 돼요, 절대로 안 돼. 한 번으로도 지나친데 더 할수 있소? 살인과 방화 같은 일은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소!]
왕어언은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예의 말을 듣고 그녀는 고개를 단예 쪽으로 돌리며 의아한 듯이 말했다.
[강호에서는 살인, 방화 같은 일이 흔히 일어나요. 어느 날이고 그러한 일이 없는 날이 하루라도 있던가요? 단공자는 오늘 이후 손을 씻고 강호에 떠돌아 다니지 않을 작정인가요?]
단예는 말했다.
[저희 백부님과 아버님은 나에게 무공을 가르치려고 무던히 애썼오. 나는 한사코 배우지 않으려 했었지만 일이 코 앞에 닥치자 부득불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소. 나는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왕어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대의 뜻은 책을 읽어서 장래 학사(學士)나 재상이 되겠다는 것인가요?]
단예는 말했다.
[그것도 아니오. 벼슬아치가 되는 것도 별 재미가 없소.]
왕어언은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되겠다는 것인가요? 설마하니 그대도 우리 고종 오라버니처럼 황제가 되고 싶어 하는 건가요?]
단예는 의아해서 물었다.
[모용공자는 황제가 되고 싶어하오?]
왕어언은 얼굴을 붉혔다. 우연히 고종오라버니의 비밀을 말한 것이었다. 방앗간에서 그녀는 단예와 죽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환난을 겪고나자 그녀는 단예의 성격이 차분하여 쉽게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느낀 것이다. 그렇게 되자 그의 앞에서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모용복이 오로지 한 마음 한 뜻으로 연나라를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역시 누설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그녀는 얼른 덧붙였다.
[내가 그냥 한 번 말해 본 것이예요. 그러니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돼요. 더구나 우리 오라버니 앞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들먹이면 안 되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오라버니는 저를 크게 탓하실 거예요.]
단예는 그 말을 듣자 다시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그는 생각했다.
(그대가 이토록 당황해 하다니...... 그대의 오라버니가 꾸짖으려면 꾸짖으라고 내버려 두면 될 것인데 걱정할 필요가 어디있소?)
[그럽시다. 나야 뭐 그대 고종 오라버니의 쓸데없는 일에 상관하고 싶지도 않소. 그가 황제가 되어도 좋고 더러운 거지가 되어도 좋소.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외다.]
왕어언은 다시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의 어조에 불쾌한 빛이 서려 있는 걸 느끼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단공자, 화가 나셨나요?]
단예가 그녀와 알게 된 이후 그녀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는 것은 모두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인 모용공자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기의 기분을 살피는 지라 마음이 흐뭇해졌다. 너무 기쁜 나머지 말 안장에서 떨어질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내가 어째서 화를 내겠소. 왕소저, 나는 이 한평생 영원히 그대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을 것이요.]
왕어언의 정은 전적으로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에게 쏠려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단예가 아무리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그녀를 구해 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그의 은덕을 고맙게 생각했을 뿐이지 정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예가 한평생 영원히 그녀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겠다는 말을 하자 그녀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그는...... 그는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했다.
[화를 내지 않는다면 되었어요.]
단예는 속으로 기쁜 나머지 일시 무슨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후에야 그는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소. 영원히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소. 그것만으로 만족할 뿐 달리 더 구하는것은 없소.]
영원히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바로 그녀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것을 의미했다. 왕어언은 더 이상 말하는 것이 싫었다. 그리하여 아리따운 얼굴을 살짝 굳히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단공자, 오늘 구해 주신 큰 은덕을 저는 영원히 잊지 못할거예요.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나의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가 있어요. 그러니 그대는 말할 때 신중을 기하도록 하세요.]
이 몇 마디의 말은 그야말로 무거운 쇠망치로 그의 뒤통수를 내려치는 것과 같은 충격을 주었다. 아니, 단예는 눈에 불똥이 튀기는 것을 느끼며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녀의 몇 마디의 말은 더 없이 분명했다.
[나의 마음은 이미 모용공자에게 속해 있으니 이후부터는 어떠한 경우라도 사랑한다는 말은 입에도 담지 마세요.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다시는 그대와 만나지 않겠어요. 그대가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고 해서 헛된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세요.]
단예 역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직접 그와 같은 말을 들려 주게 되자 그 충격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단예는 몰래 왕어언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엄숙해서 동굴 속에서 본 옥녀상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단예야, 단예야, 너는 이 소저를 만났지만 이 소저는 벌써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두고 있다. 그러니 너는 한평생 온갖 정신적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고 더 할 수 없는 고달픈 신세가 될 것이다.)
두 사람은 묵묵히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나아갔다. 왕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그는 십중팔구 화를 내고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매우 화를 내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사과를 한다면 이후 그는 언제나 내게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만약 그와 같은 말이 고종 오라버니의 귀에 들어간다면 고종 오라버니가 좋아할 리가 없을 것이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다시 마음속에 있는 말을 토로한다면 경박한 사람이 되고 또한 그녀에 대해서 불경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후부터 이 단예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같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
왕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말만 달리고 있구나. 아마도 아주와 아벽을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나 보다.)
단예도 역시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 마디도 없이 말을 달리는 것을 보면 어디로 가면 아주와 아벽을 구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덧 그들은 두 갈래 길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물었다.
[왼쪽으로 가야 하나요? 아니면 오른쪽으로 가야 하나요?]
그리고 상대방이 대답을 못하자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대는 길을 모르나요? 아, 난 그대가 길을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이 두 마디 말이 두 사람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그들은 그러한 사실이 재미가 있다는 듯이 똑같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하여 조금 전 침울하던 분위기는 싹 가셔지게 되었다. 단예가 말했다.
[그들은 개방의 많은 사람들을 사로 잡았으니 그들을 죽이든 가두어 두었든 어느 정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요. 우리들은 역시 그 행자나무 숲으로 가서 살펴본 이후 다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왕어언은 말했다.
[행자나무 숲으로 가자구요? 만약 거기로 되돌아갔다가 아직 서하 무사들이 거기 남아 있다면 우리들은 스스로 그물로 뛰어 드는 꼴이 되지 않겠어요?]
단예는 말했다.
[조금 전 그토록 큰 비가 왔으니 그들은 떠나고 없을 것이요. 이렇게 합시다. 그대는 숲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나 혼자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겠소. 만약 아직도 적이 그 곳에 있다면 우리들은 몸을 돌려 도망치도록 합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의논을 했다. 즉, 단예가 능파미보를 펼쳐 아주와 아벽 두 사람에게 살그머니 다가가 아주와 아벽에게 그 냄새가 나는 해독약을 맡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독을 시킨후에 다시 방법을 강구하여 그녀들을 구해 내자는 것이었다. 얼마후 그들은 행자나무 숲 밖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 렸다. 그리고 말을 한 그루의 행자나무에 매었다. 단예는 자기로 된 그 병을 손에 들고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그머니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속은 질퍽질퍽했다. 그리고 풀잎 위에도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단예는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숲속 한복판의 빈 터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쳤다.
[왕소저, 이곳에는 사람이 없소!]
왕어언은 숲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정말 떠나고 없군요. 우리 무석성으로 가서 소식을 들어 보도록 해요.]
단예는 말했다.
[매우 좋소.]
그는 그녀와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을 더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하자 무척 기뻤다. 따라서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띠웠다. 왕어언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말을 잘못 했나요?]
단예는 말했다.
[아니오, 우리는 곧 무석성으로 갑시다.]
왕어언은 말했다.
[그런데 왜 웃었나요?]
단예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미소를 지었다.
[나는 때때로 바보처럼 웃는다오. 아랑곳하지 마시오.]
왕어언은 그 말이 우스꽝스러워 '픽'하니 웃음소리를 냈다. 이렇게 되자 단예는 더 참을 수가 없어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4. 변장의 명수
두 사람은 말을 몰고 천천히 무석을 향해 나아갔다. 수 마장을 나아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길 옆에 서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에 한 구의 시체가 걸려 있는것을 보았다. 의복의 모양과 색깔로 보아 서하 무사였다. 다시 수 마장을 나아가자 산비탈 옆으로 두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역시 서하 무사들이었다. 상처의 핏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단예는 말했다.
[이들 서하인들이 적수를 만난 것 같소. 누가 이들을 죽였을까요?]
왕어언은 말했다.
[그 사람의 무공은 매우 높아요. 조금 전에 사람을 죽이고 여기서 또 죽였군요. 어, 저쪽에 누가 와요.]
아니나 다를까 큰 길 저쪽에서 두 필의 말이 서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붉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녹색 옷을 걸치고 있었다. 바로 아주와 아벽 두 소녀였다. 단예는 크게 기뻐서 소리쳤다.
[아주 소저, 아벽 소저, 정말 위험에서 벗어나셨구료. 좋아요, 참 잘 되었소! 정말 잘 되었소!]
네 사람은 말을 몰아서 한데 모였다. 모두들 기쁨에 넘쳐서 어쩔줄을 몰랐다.
아주는 말했다.
[왕소저, 단공자, 그대들은 어떻게 해서 안전하게 돌아왔지요? 저와 아벽은 그대들을 찾아 나선 길이예요.]
단예는 말했다.
[우리도 그대들을 찾고 있었소.]
그리고 그는 왕어언을 한번 바라보았다. '우리'라는 말을 하니 가슴이 뿌듯해졌던 것이다. 왕어언은 물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지? 그 고약한 냄새를 맡았어?]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약하기 이를 데 없더군요. 소저도 냄새를 맡았나요? 역시 교방주께서 구해 주셨는가요?]
왕어언은 말했다.
[아니, 단공자가 나를 구해 주었어. 그대들은 교방주가 구해 준 모양이군!]
단예는 왕어언이 친히 "단공자가 나를 구해 주었어"라고 말하는 그 한 마디를 듣자, 몸이 두둥실 하늘로 떠오르는 듯 황홀해졌다. 그리고 머리가 띵 해져서 하마터면 말안장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주가 입을 열고 설명했다.
[그래요. 저와 아벽은 중독이 되어 정신이 흐릿해졌고 꼼짝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개방의 사람들과 함께 서하의 오랑캐들에게 묶여서는 말 잔등에 올려졌어요. 잠시 어디론가 가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지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서하 무사들은 각기 나뉘어 비를 피하게 되었죠. 그런데 몇 명의 서하 무사들은 저와 아벽을 데리고 저쪽에 있는 한 채의 정자에 가서 비를 피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큰 비가 멎게 되자, 그 정자에서 나오게 된 것이죠. 바로 이때 뒤에서 말을 탄 사람이 달려왔어요. 바로 교방주였지요. 그는 우리 두 사람이 서하 무사들에게 붙잡혀 묶여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가 미처 입을 열어 묻기도 전에 저와 아벽이 입을 열어 큰 소리로 부르짖었지요.
'교방주, 저희를 구해 주세요!'
서하 무사들은 교방주라는 말을 듣고는 다투어 무기를 뽑아 그를 공격했어요. 결국 어떤 자들은 소나무 가지에 걸리게 되고 어떤 자들은 산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며 또한 어떤 자들은 냇물 아래에 풍덩 빠지고 말았어요.]
왕어언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겠지?]
아주는 말했다.
[그래요. 그래서 제가 조금 전에 말했죠. '교방주, 저의 자매들이 중독되었으니 수고스럽지만 서하 오랑캐의 몸에서 해독약을 찾아 주세요!' 교방주는 한 명의 서하 무사의 시체에서 한 조그만 자기병을 찾아내었어요. 그 냄새가 향기로운지 어떤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왕어언은 물었다.
[교방주는 어떻게 되었죠?]
아주는 말했다.
[그는 개방의 사람들이 모두 중독되어 잡혔다는 말을 듣자 그들을 구하려고 급히 달려갔어요. 그리고 그는 단공자에 대해서 물었는데 무척 근심하는 빛이었어요.]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의형은 정말 의리가 깊다오.]
아주는 말했다.
[개방의 사람들은 분수를 모르고 정말 훌륭한 방주를 쫓아내어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꼴이죠. 정말 고소하게 되었어요. 제 의견으로 말하면 교방주는 그들을 아예 구할 필요가 없을거에요.]
단예는 말했다.
[우리 의형은 의리가 깊기 때문에 차리리 남이 그를 배신할지언정 그가 누굴 배신하는 법은 없소이다.]
아벽은 말했다.
[왕소저,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지요?]
왕어언은 말했다.
[우린 원래 단공자와 상의하여 그대들을 구하러 오던 중이었어요. 이제 그대들도 무사하고 넷이 모두 모였으니 더할 나위없이 좋군요. 개방의 일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나의 의견은 역시 우리는 소림사로 모용공자를 찾으러 가는 것이 좋겠어요.]
아주와 아벽이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역시 모용공자였다. 그러므로 왕어언의 그와 같은 말에 좋아서 손뼉을 쳤다. 단예는 속으로 질투심이 복받쳤으나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들의 공자를 나도 사실 앙모하고 있소이다. 그러니 반드시 만나 보아야겠소. 어쨌든 지금 할 일도 없고 하니 그대들을 따라 소림사로 한 번 가 보아야겠구료.]
그리하여 네 사람은 말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가게 되었다. 왕어언과 아주, 아벽, 세 소녀는 웃고 재잘대며 떠들었다. 왕어언은 방앗간에서 어떻게 위험을 맞았으며 그리고 또 단예가 어떻게 적을 맞이하여 그들을 죽였는가, 그리고 또 단예가 어떻게 그들의 목숨을 살려 주고 약을 주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아주와 아벽은 놀라움과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세 소녀는 재미있는 대목에 이르렀는지 갑자기 쉬지 않고 깔깔거리며 나직이 웃었다. 그리고는 단예는 힐끔힐끔 쳐다보며 옷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단예는 그녀들이 바로 자기의 바보 같은 짓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가 못난 짓을 수없이 했지만 끝내 왕어언을 안전하게 보호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했지만 대단한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 소녀가 자기들끼리는 다정하게 굴면서 자기를 완전히 남으로 대하듯 하는 것을 보니 약간 서운했다. 지금 그녀들의 태도가 이럴진대 나중에 모용공자를 만나면 그 자신은 점점 소외될 것이 아닌가? 모용복이 포부동처럼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기를 몰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니 그만 모든 일에 흥미가 싹 가시었다. 수 마장쯤 나아갔을 때 그들은 울창한 뽕나무 숲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그들은 숲가에서 두 소년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네 사람은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십 사오 세 정도로 보이는 소사미(小沙彌)들이었다. 그들의 소매자락은 핏방울로 얼룩져 있었다. 한 소사미는 이마에 상처까지 입고 있었다. 아벽은 빠른 어조로 물었다.
[소사미, 누가 그대들을 괴롭혔나요? 어쩌다가 상처를 입었지요?]
이마에 상처를 입은 소사미가 울면서 말했다.
[절에 오랑캐 악인들이 많이 왔어요. 그래서 우리 사부님을 죽이고 우리들을 쫓아내었어요.]
네 사람은 오랑캐 악인들이라는 말을 듣고는 서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들은 서하 사람들이 아닐까?]
아주는 물었다.
[그대들의 절은 어디 있지? 어떤 오랑캐 악인들이었지?]
그 소사미는 말했다.
[우리는 천녕사(天寧寺)의 사람이예요, 천녕사는 저쪽에 있지요.]
그러면서 동북쪽을 손가락질 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오랑캐들은 이백여명이나 되는 거지들을 묶어서 비를 피하려 절 안으로 들어 왔어요. 그리고 술과 고기를 내놓으라고 하면서 닭을 잡고 소를 잡겠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사부님은 그렇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절 안에서 소를 잡지 못하게 했어요. 그랬더니 그들은 사부님과 절 안에 있던 십여명이나 되는 사형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았어요. 흑흑흑!]
아주는 물었다.
[그들은 떠났나요?]
그 소사미는 뽕나무 숲 뒤쪽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저쪽에서 소고기를 삶고 있어요. 정말 못할 짓을 하는 거죠. 부처님께서 그들을 아비지옥(阿鼻地獄)으로 떨어뜨렸으면 좋겠어요.]
아주는 말했다.
[그대들은 빨리 떠나도록 해요. 만약 오랑캐들에게 또 다시 잡힌다면 그들은 그대들을 죽여서 잡아먹을지도 몰라요.]
두 소사미는 깜짝 놀라서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단예는 불쾌한 듯 말했다.
[저들은 갈 곳도 없는데 왜 아주 누이는 저들에게 겁주는 소리를 하시오?]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과장되게 한 말이 아니라 진실을 말한거예요.]
아벽은 말했다.
[개방의 모든 사람들이 천녕사에 감금되어 있으니 교방주가 무석성으로 달려가도 헛걸음을 하시겠네요.]
아주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왕소저, 저는 교방주로 분장하여 절 안으로 잠입하여 그 냄새나는 병을 모든 거러지들에게 주어서 냄새를 맡게 하겠어요. 그러면은 그들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 이후 반드시 교방주를 고맙게 생각하게 될거예요.]
왕어언은 미소를 지었다.
[교방주는 체구도 크고 또 우람한 사내인데 그대가 어떻게 그처럼 분장을 하지?]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힘이 들수록 이 아주의 수단이 더욱 두드러지지 않겠어요?]
왕어언은 웃으며 말했다.
[교방주로 변장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뛰어난 무예를 어떻게 흉내내지? 천녕사에는 서하 일품당의 고수들이 모여 있는데 그대가 어떻게 드나들겠어? 나의 의견으론 차라리 시골의 소채를 파는 아주머니로 변장을 하는 게 잠입하기 쉬울 것 같아.]
아주는 말했다.
[시골의 아주머니로 가장하는 것은 재미가 없어요. 그럴러면 전 가지 않겠어요.]
그러자 왕어언은 단예를 한번 쳐다보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단예는 말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소?]
왕어언이 대답했다.
[나는 본래 그대가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여서는 아주와 함께 천녕사로 들어갔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단예는 물었다.
[누구로 가장하라는 것이요?]
왕어언은 말했다.
[개방의 영웅호걸들은 의심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우리의 모용공자와 교방주가 결탁하여 그들의 마부방주를 해친 줄 알고 있어요. 만약에... 만약에... 저의 고종 오라버니와 교방주가 가서 그들을 구해 준다면 그들은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을거예요.]
단예는 속이 쓰라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로 분장하라는 것이오?]
왕어언은 고운 얼굴을 붉혔다.
[천녕사의 적은 너무나 강해요. 그대들 두 사람이 변장을 하고 가더라도 무척 위험하니까 역시 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대가 나에게 무엇을 시키더라도 나는 할 수 있소. 이 몸이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겠소.)
그러다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로 가장하게 된다면 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잠시 동안이라도 그녀에게서 다정한 대접을 받는다면 역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정신이 번쩍 나서 말했다.
[그게 뭐 위험할 것이 있소? 도망치는 것은 이 단예가 자랑하는 재간이 아니겠소?]
왕어언은 말했다.
[내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 고종 오라버니는 적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죽일 뿐 한번도 도망친 사실이 없다는 것이예요.]
단예는 그말을 듣자 다시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는 대영웅이고 대호걸이 아니겠소? 나같은 사람은 변장할 자격이 없지. 그를 가장하고 나섰다가 추한 꼴을 보이면 그의 명성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소?]
아벽은 그가 우울해 하는 것을 보고 위로의 말을 던졌다.
[적의 수는 많고 우리는 적으니 잠시 양보하는 것도 상관이 없어요. 우리의 목적은 다만 사람을 구하자는 것이지 무공을 겨루어 명성을 떨치자는 것은 아니예요.]
아주는 단예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단공자, 우리 공자의 모습으로 변장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에요. 하지만 다행히 개방의 여러 사람들은 본래 우리 공자의 모습을 모르고 웃는 모습이나 음성이 어떤지 모르니 적당히 하면 될것 같군요.]
단예는 말했다.
[모용공자는 인중룡봉(人中龍鳳)인데 어찌 다른 사람이 그의 흉내를 낼 수 있겠소? 나는 그로 변장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소. 나중에 뺑소니를 치게 되었을 때 모용공자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이 되지 않겠소?]
왕어언은 얼굴을 붉히며 나직히 말했다.
[단공자,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아직도 화를 내고 있나요?]
단에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내가 왜 그대에게 화를 내겠소.]
왕어언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주, 어디로 가서 옷차림을 바꾸려는거지?]
아주는 말했다.
[조그만 고을로 들어가야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을거예요.]
그리하여 네 사람은 즉시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향했다. 한 7,8마장 나아가자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이 고을은 마랑교(馬郞橋)라고 했다. 고을은 매우 작았고 객청도 없었다. 아주는 생각해 보더니 한 척의 배를 빌어 냇물 위에 띄우고 옷가지를 사서 배안으로 들어가 옷차림을 바꾸었다. 강남땅은 곳곳에 개울이나 냇물이 흐르고 있어서 배들이 무척 많았다. 그야말로 북방에서 말이나 황소를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먼저 단예의 옷차림부터 바꾸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섭선을 쥐도록 하고 청색의 장포를 입혔다. 왼손에는 하나의 반지를 끼워 주면서 말했다.
[우리 공자가 끼는 것은 한옥반지이지만 이곳에서는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 청전석(靑田石)으로 만든 반지로 대치할 수밖에 없어요.]
단예는 쓸쓸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공자는 진기한 옥그릇이고 나는 비천한 돌멩이에 불과하구나! 이 세 소녀의 마음 속에서 차지하는 두 사람의 몸값 또한 그와 같지 않겠는가?)
아주는 그의 얼굴에 밀가루를 조금 칠했다. 그리고 코를 조금 더 세워 그의 얼굴이 전체적으로 풍성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눈썹을 그리고 눈가를 약간 고쳤다. 화장이 끝나자 그녀는 웃으면서 왕어언에게 물었다.
[소저, 또 어디가 닮지 않은 데가 있으면 말하세요.]
왕어언은 넋을 잃고 멍하니 단예를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틀림없이 가슴이 설레이고 그녀의 마음을 빼앗겨 버린 듯했다. 단예는 그녀가 취한 듯, 넋을 잃은 듯 자기를 바라보자 그만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곧 생각했다.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은 모용복이지 결코 이 단예가 아니다.)
그는 또 다시 생각했다.
(그 모용복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궁금하군. 또 나보다 어떻게 백 배나 나은지 애석하게도 볼 수가 없구나!)
단예와 왕어언은 서로를 쳐다보며 제각기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느라고 아주와 아벽이 선실로 옷을 바꾸어 입으러 간 것도 몰랐다. 한참 후에 남자의 거친 음성이 들려와 두 사람은 정신을 차렸다.
[아, 자네가 여기 있었군! 이 형이 자네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네.]
단예는 고개를 돌렸다. 말하는 사람은 바로 교봉이 아닌가? 그는 매우 기뻐서 말했다.
[형님, 형님이셨군요. 마침 잘 되었소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형님으로 분장을 하고 사람을 구하러 가려던 참입니다. 이제, 형님이 친히 와 주었으니 아주 누이가 변장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교봉은 말했다.
[개방의 형제들이 나를 쫓아내었으니 그들이 죽든 살든 나는 마음에 두지 않네. 자, 형제, 우리 뭍으로 올라가서 술내기나 하세. 한 스무 대접만 들이켜 볼까?]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형님, 개방의 군호들은 모두 옛날의 형제들이 아니었습니까? 역시 그들을 한번쯤 구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교봉은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 같은 책벌레가 무엇을 안다고 그래. 자, 나와 같이 술이나 마시러 가세.]
그러면서 대뜸 단예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단예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좋습니다. 먼저 함께 술을 마신 후 사람을 구하러 가지요.]
교봉은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소리는 맑고 고왔다. 한 우람한 체구의 대한이 그와 같은 아녀자의 웃음소리를 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단예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누이, 알고 보니 당신이었군요!]
아주는 교봉의 음성을 흉내내었다.
[형제, 우리 이제 가세. 그 냄새나는 병은 자네가 가지고 가게.]
그녀는 왕어언과 아벽에게 말했다.
[두 분 소저께서는 이곳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시구료.]
그리고는 단예의 손을 붙잡고 뭍으로 성큼 올라갔다. 그녀는 손에 무엇을 발랐는지 그녀의 부드럽고 조그마했던 손이 단예에게 내밀어졌을 때는 이미 놀랍도록 거무튀튀해져 있었다. 교봉의 손처럼 굵고 크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이 보고 분간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왕어언은 단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저분이 고종 오라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고종 오라버니, 그대도 나를 생각하고 계신가요?)
아주와 단예는 말을 타고 천녕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게 되자, 절에 있는 서하 무사들이 말발굽 소리를 듣게 될까봐 말에서 내려서는 한 농가의 외양간에 말을 매어 놓고 걸어서 나아가게 되었다. 아주는 말했다.
[모용 형제, 절에 도착하게 되면 내가 큰 소리를 쳐 위협을 할테니 그대는 그때를 틈타 개방의 사람들에게 그 냄새를 맡게 하여 그들의 독을 풀어 주도록 하시게.]
그녀의 이와 같은 몇 마디 말은 아주 거칠었다. 영락없는 교봉의 말투였다. 단예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지요. 형님.]
두 사람은 성큼 성큼 걸어 천녕사 밖에 이르렀다. 절의 문 앞에는 십여명의 서하 무사들이 손에 큰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모양이 매우 흉악했다. 아주와 단예는 그들이 모습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또한 당황해졌으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는 나직이 말했다.
[단공자, 나중에 나를 끌고 급히 도망치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았다가 만약 그들이 나에게 무공을 겨루자고 제의하면 내가 상대하기 어려워요.]
단예는 말했다.
[그러겠소.]
그 한마디를 할 때 단예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여간 두렵지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이와 같이 나직이 이야기 하며 절 안쪽의 동정을 살피려 할 때, 절 문밖에 서 있던 한 명의 서하 무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 두 녀석은 뭘 살그머니 살피고 있는거지? 혹시 첩자가 아니냐?]
호통소리와 더불어 네 명의 무사가 그들에게 달려왔다. 아주는 어찌할 수 없어서 가슴을 펴고 성큼 성큼 걸어나가며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빨리 그대들의 장군에게 가서 알리시오. 개방의 교봉과 강남의 모용복이 서하의 혁련대장군(赫連大將軍)을 만나러 왔다고 전해 주시오.]
앞장을 섰던 서하 무사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알고 보니 개방의 교방주께서 왕림하셨군요? 실례했습니다. 소인은 즉시 전하겠습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공손히 한편으로 비켜섰다. 얼마 후 호각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절 문이 활짝 열렸다. 서하 일품당의 당수 혁련철수가 노아해를 비롯한 고수들을 데리고 영접을 나왔다. 섭이랑, 남해악신, 운중학 세 사람도 그 속에 있었다. 단예는 가슴이 두근거려 고개를 숙이고 감히 그들을 쳐다보지 못했다. 혁련철수는 입을 열었다.
[오래 전부터 '고소 모용씨'의 명성을 들었소이다. '상대의 방법을 상대의 몸에 펼친다'라는 말을 들어 왔던바 오늘 이렇게 고인(高人)을 만나 뵙게 되니 정말로 영광스럽소이다.]
그리고 단예를 향해 포권의 예를 했다. 그는 이미 서하와 개방은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교봉에게는 일부러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단예는 급히 답례했다.
[혁련대장군의 대명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불초는 일찍부터 서하 일품당의 영웅호걸들을 만나 뵈었으면 하던 참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 오게 된 점, 양해하여 주십시오.]
원래 예의 바르고 점잖은 말투는 그에게 익숙해 있었으므로 전혀 빈틈을 드러내지 않았다. 혁련철수는 말했다.
[무림에서는 북교봉, 남모용이라고 말하며 중원의 영웅을 말할때는 먼저 두 분을 내세웠습니다. 오늘 두 분이 함께 왕림해 주시니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자, 우선 안으로 들어 가시지요.]
그러면서 그는 옆으로 물러가며 두 사람이 대전 안으로 들어서기를 권했다. 아주와 단예는 혁련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단에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서하 장군의 언행으로 미루어 보건데 모용공자에 대해서는 무척 존경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모용복의 무공과 인품이 교봉 형님보다도 한 수 더 뛰어나단 말인가? 내가 보기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흥! 정말 그럴리가 없겠지.)
이때 갑자기 그 누군가가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지 않을걸? 그렇지 않아!]
단예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하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바로 남해악신이었다. 남해악신은 콩알만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단예의 아래 위를 훑어보면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단예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야단났어! 그가 눈치챈 모양이로구나!)
이때 남해악신은 말했다.
[그대의 뼈대를 보아하니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데 무슨 쓸모가 있겠소? 이것 보이소. 내 묻겠소. 그대가 '상대의 수법으로 상대에게 펼친다'는 수법에 정통하다고 하는데 이 악노이는 믿을 수가 없소.]
단예는 즉시 마음을 놓았다.
(알고보니 그는 나를 알아본 게 아니로구나!)
남해악신은 다시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손을 쓰고 싶지는 않소. 그러나 한 가지 묻겠는데 그대는 이 악노이에게 어떤 특별한 재간이 있는지 아시요? 그리고 그대가 어떤 재간으로 나를 상대해야만이 빌어먹을! '그 늙은이의 방법을 그 늙은이에게 펼친다'는 꼴이 될 수 있겠소?]
그리고 두 손으로 허리를 턱 짚고는 오만한 태도로 단예를 노려보았다. 혁련철수는 저지하려고 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았다. 모용복의 명성이 자자한데 과연 그 명성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약간 모자라는 듯한 남해악신을 통해 알아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말을 하는 동안 모든 사람들은 대전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혁련철수는 단예를 윗자리에 앉히려고 했는데 단예는 첫 번재 자리를 아주에게 양보했다. 남해악신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 보시요! 모용 집안의 작은 어른, 어디 내가 제일 자랑하는 재간이 무엇인지 알아 맞춰 보시요.]
단예는 빙그레 웃으며 생각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바를 몰라 당황하겠지만 그대가 묻는다면 수월히 대답할 수 있지.)
그리하여 그는 섭선을 가볍게 쫙 펼친 후 두어 번 흔들어낸 후 입을 열었다.
[남해악신 악노삼, 그대의 가장 자랑하는 재간은 '우지끈 뚝'하며 상대방의 목을 비틀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소? 최근에는 재간이 많이 진보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지금 가장 자랑하는 재간은 바로 악미편과 악취전이 아니겠소? 내가 그대를 상대한다면 물론 악미편과 악취전으로 상대하게 될 것이요.]
그가 대뜸 악미편과 악취전의 이름을 들먹이게 되자 남해악신은 놀라 입을 떡벌리게 되었고 섭이랑과 운중학도 매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 두가지 무기는 남해악신이 최근에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한번도 펼친적이 없었다. 다만 대리국 무량산 봉우리에서 운중학과 손을 썼을 때 겨우 한 번 썼을 뿐이었다. 그 당시 목완청 이외에는 달리 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목완청이 그와 같은 사실을 지금 눈 앞에 있는 가짜 모용공자에게 알려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다. 남해악신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단예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의 사람됨은 잔인하고 포악했으나 영웅호걸을 보면 탄복하는 기질이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엄지 손가락을 쑥 치켜들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시오!]
단예는 말했다.
[과찬이시오.]
남해악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최근에 연마하게 된 무기까지도 알아 맞추니 나머지 무공에 대해서는 알아볼 필요도 없다. 애석하게도 첫째가 이곳에 있지 않구나! 그렇지 않다면 그를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인데...)
남해악신은 큰 소리로 말했다.
[모용공자, 그대가 나의 무공을 알아낸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요. 만약 나의 사부가 이곳에 계시다면 그의 무공을 그대는 알 수가 없었을거요!]
단예는 미소했다.
[그대 사부는 누구시오? 그에게 무슨 대단한 재간이 있다는 것이오?]
남해악신은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나의 사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말하지 않기로 합시다. 그런데 내가 최근에 모시게 된 사부의 재간은 무척 대단하다오. 다른 것은 고사하고 '능파미보'만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펼칠 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오.]
단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능파미보?' 음, 그것은 확실히 대단한 무공이라오. 대리 단공자가 그대를 제자로 두었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구료.]
남해악신은 재빨리 말했다.
[내가 왜 당신을 속이겠소? 이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친히 들었소. 단공자는 친히 나를 제자라고 불렀단 말이오.]
단예는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그는 죽어라 하고 나를 사부로 모시려고 하지 않더니 오늘은 내가 그를 제자라고 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군!)
단예는 말했다.
[음, 그대는 이미 사부의 절기를 익혔겠구려? 축하하오. 축하해!]
남해악신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그대는 천하의 무공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랑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능파미보 중의 세 걸음만 내딛어 보시오. 그러면 나 악노이는 깨끗하게 승복하겠소.]
단예는 미소를 지었다.
[능파미보가 어렵긴 하지만 이 불초는 얼마든지 펼칠 수가 있소. 악 어른 어디 한번 나를 잡아 보시구려.]
그는 장삼을 펄럭이며 대전 한복판에 가서 섰다. 서하의 군호들은 능파미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남해악신이 매우 신기한듯 이야기하자 한번 구경해 볼 양으로 대전을 둘러싸고 쭉 늘어섰다. 그리고는 단예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려고 했다. 남해악신은 한 마디 날카로운 호통을 내지르며 왼손을 뻗쳐 내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왼손 밑으로 뻗쳐 내더니 단예를 잡으려고 했다. 단예는 비스듬히 두 걸음 내딛었다가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그의 몸뚱아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매우 날렵한 동작으로 남해악신의 손을 피해 버렸다. 그때 '퍽'하는 소리와 함게 남해악신의 손이 대전의 기둥을 때리게 되었으며 손가락의 몇치 정도가 기둥을 움푹 파고 들게 되었다. 구경하던 여러 사람들은 남해악신의 그와 같은 공력을 보고 모두 놀라워했다. 남해악신은 일결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더욱더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는 허공에서 단예를 덮쳐내렸다. 단예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팔괘의 보법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날렵하게 능파미보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남해악신은 더욱더 빨리 덮쳐들었으며 내지르는 호통소리도 더욱 우렁차게 되었다. 그야말로 한 마리의 맹수가 달려드는 것 같았다. 단예는 그의 흉칙한 얼굴을 마주대하게 되자 가슴이 섬뜩했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소맷자락 안에서 수건을 꺼내어 자신의 눈을 싸매고는 말했다.
[설사 내가 눈을 가린다 하더라도 당신은 나를 잡지 못할 것이요.]
남해악신은 두 손을 마구 휘두르며 맹렬한 기세로 단예의 몸을 향해 후려쳐왔다. 그러나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서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자 조마조마했으며 손바닥에 땀이 홍건이 괴었다. 아주는 단예를 걱정하느라고 간담이 서늘해져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거친 음성으로 호통쳐 물었다.
[남해악신, 모용공자의 이 능파미보는 그대의 사부에 비해 어떠시요?]
남해악신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더니 가슴속에 끓어오르던 울화가 사그러졌는지 똑바로 서며 말했다.
[정말 훌륭하오! 정말 훌륭하오! 당신이 눈을 감고서도 그렇게 기이한 걸음을 내딛는 것을 보니 아마 사부님도 그러하지는 못할 것이오. 좋소, 고소 모용은 역시 명불허전이오. 이 남해악신은 승복했소.]
단예는 즉시 눈을 가렸던 수건을 떼어내고 자기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대전에는 대뜸 갈채 소리로 뒤덮이게 되었다. 혁련철수는 두 사람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찻잔을 쳐들며 말했다.
[자, 차를 드시지요. 그리고 두 분 영웅께서 찾아오셨는데 어인 가르침을 내리시려는지 알고 싶소이다.]
아주는 말했다.
[개방의 형제들이 장군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장군은 고수들을 내보내 상승의 무공으로 이곳에 잡아다 놓으셨는지요. 불초가 당돌하나마 장군께서 그들을 석방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오.]
그녀는 일부러 "고수들을 내보내 상승 무공으로 잡아왔다" 말에 힘을 주었다. 즉 서하인들이 비열한 수단으로 사람들을 잡아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한 것이었다. 혁련철수는 빙그레 웃었다.
[그 말이 옳소이다. 조금 전 모용공자의 솜씨를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었소. 교방주는 모용공자와 함게 명성을 날리고 있으니 한 수의 재간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어 우리 서하 사람으로 하여금 승복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개방의 영웅호걸들을 풀어 주지 않겠습니다.]
아주는 속으로 크게 초조해졌다.
(교방주의 솜씨를 보이라니, 이것이야말로 본색이 드러나는 지름길이군!)
그녀는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손과 발이 시큰하며 힘이 빠졌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어젯밤 독기에 중독되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 깜작 놀라고 말았다.
(야단났다! 우리에게도 이 서하의 오랑캐들이 비열한 수법을 쓸 줄은 몰랐다. 어쩌면 좋지?)
단예는 독이 침범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꼼작도 못 하자 그녀가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하여 그는 재빨리 품속에서 그 고약한 냄새가 나는 병을 꺼내 재빨리 그녀의 코끝에다 갖다대었다. 아주는 몇 번 깊이 들이마시더니 중독이 심하지 않았는지 사지가 서서히 풀렸다. 그녀는 손을 뻗혀 병을 들고 여전히 그 고약한 냄새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어찌하여 적들이 나서서 병을 뺏지 않을까?)
그녀가 서하인들을 바라보니 모든 사람들이 맥없이 의자에 앉아서 꼼작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다만 눈망울만 디룩디룩 굴리고 있었다. 단예는 말했다.
[정말 이상한걸? 이 사람들이 자기들 스스로를 망쳤단 말인가? 어찌하여 독기를 풀어서 스스로 중독이 되었을까?]
아주는 나아가서 혁련철수를 한 번 떠밀었다. 혁련철수 대장군의 몸이 기울어졌다. 비스듬히 기대어서 꼼짝도 못하는 것이 정말 중독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말을 할줄은 알았다.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이봐, 누가 함부로 '비소청풍'을 썼어? 어서 해약을 꺼내! 빨리 해약을 꺼내란 말야!]
그의 부하들 역시 꼼작 못 하고 앉아서 입으로 말했다.
[저희들도 중독이 되어 꼼짝 할 수가 없습니다.]
노아해는 말했다.
[반드시 이 안에 첩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 복잡한 비소청풍의 사용법을 알겠습니까?]
혁련철수는 노해 부르짖었다.
[맞다, 그게 누구지? 자네는 즉시 그가 누구인지를 조사해서 밝히게. 내가 그를 즉시 죽여 버리겠네.]
노아해는 말했다.
[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해약을 손에 넣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혁련철수는 말했다.
[그 말이 맞네. 자네가 빨리 가서 해약을 가져오게!]
노아해는 아주의 손에 들려 있는 자기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방주, 수고스럽지만 그 해약의 냄새를 우리에게도 좀 맡게 해주시오. 그러면 반드시 우리 장군께서 크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게 될 것이외다.]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가서 개방의 형제들을 구해야겠소. 그 누가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줄 아시요?]
노아해는 말했다.
[모용공자, 나에게도 그 조그마한 병이 있으니 내 가슴에서 그병을 꺼내 주시지 않겠소? 그리고 병마개를 뽑아 나에게 냄새를 좀 맡게 해주시요.]
단예는 그의 품 속을 뒤져 조그만 병을 꺼냈다. 틀림없는 해약이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해약은 꺼냈소만 당신이 냄새를 맡도록 하지는 않겠소.]
그리고 아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대전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동쪽에 있는 상방(床房)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모두 개방에서 잡혀온 무리들이었다. 아주가 들어가자 오장로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교방주, 그대였구료. 정말 고맙소이다.]
아주는 해약을 내밀어 그에게 냄새를 맡게 한 후 말했다.
[이것은 해약이오. 형제들에게 차례로 냄새를 맡게하여 그들의 독을 풀도록하시요.]
오장로는 손발을 움직이게 되자 크게 기뻐서 그 병을 들고서는 송장로의 독기를 풀어 주었다. 단예는 노아해의 해약으로 서장로의 독기를 풀어 주었다. 이때 아주가 말했다.
[개방의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하나씩 하다가는 언제 끝날지 모르겠소. 오장로, 그대는 서하인들에게 가서 품속을 뒤져 보시요. 해약이 있다면 찾아서 가져오도록 하시구려.]
오장로는 말했다.
[그러죠.]
그리고는 재빨리 대전 쪽으로 갔다. 곧이어 대전에서 욕을 하는 소리 '왁'하고 부르짖는 소리, '철썩철썩'따귀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오장로가 해약을 찾으면서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여섯 개의 자기 병을 찾아 들고 왔다. 오장로는 웃으며 말을 했다.
[나는 복장이 화려한 자의 옷을 뒤졌죠. 아니나 다를까? 잘입고 있는 녀석의 품 속에서 해약이 나옵디다. '하하하'하지만 그 녀석은 꼴 좋게 되었지요.]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되었지요?]
오장로는 말했다.
[나는 두 대씩의 따귀를 때려 주었소. 그리고 해약이 나온자의 따귀는 좀더 강하게 때려 주었지요.]
그는 갑자기 단예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 분 형씨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는지요? 구해 주어서 고맙소이다.]
단예는 말했다.
[불자는 복성으로 모용씨외다. 구하러 온 것이 늦은 점, 그리고 여러분들을 조금이라도 더 긴 시간을 고생하게 한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개방의 뭇사람들은 눈 앞의 사람이 바로 명성이 쟁쟁한 고소 모용복이라는 말을 듣고 놀라마지 않았다. 송장로는 말했다.
[우리의 눈이 잘못됐소. 그러니 우리들이 모용공자가 마부방주를 죽였다고 억울한 누명을 씌웠지. 오늘 만약 그와 교방주가 손을 써서 구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서하 오랑캐들에게 무슨 일을 당했을 것이오.]
오장로 역시 말했다.
[교방주, 대인은 소인의 잘못을 마음속에 새기지 않는다고 했소이다. 그대는 역시 돌아와 우리들의 방주가 되어 주시구료.]
진관청은 냉랭히 말했다.
[교나리와 모용나리께서는 정말 절친한 친구이시구료!]
그는 교봉을 교나리라고 부르며 교방주라 부르지 않았다. 이것은 그를 방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와 모용공자가 정말 좋은 친구라고 한 말은 무섭기 짝이 없는 한 마디였다. 개방의 사람들은 교봉이 모용복의 손을 빌어 마대원을 죽였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교봉은 줄곧 모용복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두 사람이 함께 천녕사에 모습을 드러냈고 더구나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 표정이 퍽이나 다정스럽지 않은가? 틀림없이 처음알게 된 사이는 아니었다. 아주는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교봉과는 오래 사귄 사람들로서 시간이 오래 경과할수록 자신의 빈틈이 드러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는 말했다.
[방의 일은 천천히 상의해도 늦지 않소. 나는 서하 오랑캐들에게 가 보아야겠구료.]
그리고는 대전 쪽으로 걸어갔다. 단예는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대전에 이르게 되었을 때 혁련철수가 심한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빨리 알아내게! 그 배반한 서하인이 누군지를! 돌아가서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그의 집안의 남녀노소를 모조리 몰살시켜야 겠어. 빌어먹을! 그는 서하인이면서 어째서 남을 도와 주고 나의 비소청풍을 훔쳐서는 우리에게 독을 풀어 놓았다지?]
단예는 어리둥절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어느 서하인을 욕하는 것일까?)
이때 혁련철수가 한 마디 욕을 하면 노아해는 대답을 하곤 했다. 혁련철수는 말했다.
[그가 벽에다가 그와 같은 한 마디를 쓴 것은 우리를 비웃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단예와 아주는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얀 벽에는 용사비등한 글귀가 씌어 있었다.
'그대의 방법을 그대의 몸에 펼치나니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독기운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는 바이오'
아직도 먹물이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글을 써 놓고 떠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단예는 '아'하고 말했다.
[아, 이거... 아, 이건 모용공자가 쓴 것이군!]
아주는 나직히 말했다.
[그대 자신이 모용공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우리집 공자께서는 여러가지 필적으로 글을 쓸 수 있어요. 따라서 나는 이 몇 자의 글이 그가 쓴 것인지 아닌지 알아 볼 수가 없네요.]
단예는 노아해에게 물었다.
[이것은 누가 쓴 것이오?]
노아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근심하고 있었다. 개방의 사람들이 자기들을 때려 죽일까봐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개방의 사람들을 잡아서 고문을 가하고 모욕을 하는 등 못할 짓을 많이 저질렀던 것이다. 아주는 개방의 군호들이 대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단예에게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제 큰일은 끝났소. 우리는 갑시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나는 중요한 일을 모용공자와 다시 처리해야 하니 이후에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대전을 나섰다. 오장로등은 큰 소리로 외쳤다.
[방주, 잠깐만 기다리시오! 방주, 잠깐만 기다리시오!]
아주는 더 머뭇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단에와 함께 걸음을 빨리 했다. 개방의 인물들은 교방주를 존경하면서도 어려워했다. 그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서서 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일 마장 정도 나아갔다.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단공자, 정말 공교롭군요. 그 못난 제자가 그대에게 능파미보를 펼쳐 보이라고 하다니 말이예요. 그리고 뭐, 자기 사부보다는 낫다니요? 참 재미있더군요.]
단예는 '음'했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는 또 말했다.
[그런데 누가 그와 같은 마약을 풀어 놓았을까요? 서하장군이 첩자가 있다고 하던데 아마 십중팔구 서하인이 한 짓 같아요.]
단예는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말했다.
[혹시, 이연종이 아닐까? 바로 우리가 물레방앗간에서 만난 그 서하 무사가 아닌지 모르겠군?]
아주는 이연종을 만나 보지 못한 터라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 가서 왕소저에게 이야기해 봐요. 그녀가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할거예요.]
그러면서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가 크게 들려오면서 앞쪽에서 말 한필이 질풍과 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단예는 멀리서 보고 그가 바로 교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단예는 기뻐서 부르짖었다.
[아, 교봉 형님이시다!]
그리하여 큰 소리로 부르려고 했을 때 아주는 재빨리 그의 옷 자락을 붙들며 말했다.
[소리치지 말아요. 장본인이 왔어요.]
그리고 몸을 돌렸다. 단예는 대뜸 알아차렸다.
(아주는 교봉 형님으로 가장을 하고 있다. 그러니 그에게 그 얼굴을 보인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교봉은 말을 달려 가까이 다가왔다. 단예는 그를 마주 바라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교봉 형님과 개방의 군호들이 만나게 된다면 진상이 곧 규명 되겠지. 나중에 아주가 지나친 장난을 했다고 나무라지 않을지 모르겠구나.)
교봉은 아주와 아벽 두 소녀를 구한 후 개방의 뭇사람들이 서하 사람들에게 잡혀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초조하게 사방으로 그들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강남의 시골길은 곳곳에 논이 있거나 뽕밭이었다. 그리고 수로와 육로가 종횡으로 놓여 있어 북방에서처럼 길이 단순하지가 않았다. 교봉은 반 나절을 돌아다닌 끝에 천녕사의 두 소사미를 만나게 되었고 방향을 물어본 이후 이제서야 천녕사로 달려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단예의 훤칠한 모습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공자는 우리 단예 형제와 비슷하게 잘 생긴 인물이로군!)
아주는 미리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에는 개방의 형제들에 대한 걱정뿐이어서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는 말을 몰아 질풍과 같이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천녕사 밖에 이르렀을 때 십여명의 개방 제자들이 한 사람 한사람씩 서하 무사들을 묶어 압송하듯이 끌고 나오고 있었다. 교봉은 크게 기뻐했다.
[개방의 형제들이 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기고 있군!]
개방의 제자들은 교봉이 갔다가 다시 돌아오자 다투어 그를 맞으며 말했다.
[방주, 이 도적들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분부를 내리십시요.]
교봉은 말했다.
[나는 이미 개방의 사람이 아니오. 방주라는 호칭은 더 이상 쓰지 말도록 하시오. 그런데 모두들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소?]
절 안에 있던 서장로 등이 전갈을 받고 빠른 걸음으로 교봉을 맞으러 나왔다. 교봉을 발견하자 어떤 자는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었고 어떤 자는 매우 기쁜 빛을 띠었다. 송장로는 큰 소리로 말했다.
[방주, 어젯밤 행자나무 숲속에서 본방이 서하로 보냈던 첩자가 보내온 긴급한 연락을 서장로가 제멋대로 생각하고 방주에게 보여 주지 않았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장로, 빨리꺼내서 방주에게 보여 주도록 하시오.]
서장로는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우며 밀납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 조그마한 쪽지를 꺼내어서 교봉에게 내밀며 한숨을 쉬었다.
[나의 잘못이오.]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미는 쪽지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송장로는 그 엷은 쪽지를 펼치고 큰 소리로 읽었다.
- 방주에게 알립니다.
속하는 서하의 혁련철수 장군이 한 때의 일품당의 고수들을 데리고 중원으로 나아가 우리 방을 상대코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무서운 한 가지 독이 있습니다. 그 독기를 풀어 놓게 된다면 냄새를 맡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꼼작도 할수 없게 된답니다. 그들과 대면하게 되었을때 우선 콧구멍을 막으십시오. 그렇지 않을 시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먼저 때려 눕히고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냄새가 나는 해약을 빼앗도록 하십시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니 잊지 말도록 하십시요.
대신분타(대신분타) 속하 역대표 올림.
송장로가 읽고 난 후 오장로, 해장로를 비롯하여 모든 장로들은 모두 서장로를 노기띤 눈으로 바라보았다. 백세경은 말했다.
[역대표의 긴급한 전갈은 정말 때 늦지 않게 접하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그 즉시 펼쳐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우리 많은 형제들이 고생은 했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방주, 우리 모두 방주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방주야말로 정말 의리가 깊은 분입니다. 아, 우리로서는 정말 할 말이 없군요.]
오장로는 말했다.
[방주, 그대가 떠나자마자 우리들 모두가 서하인들의 독기에 쓰러 졌답니다. 만약 그대와 모용공자가 때맞춰 달려와 우리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개방인들은 모두 전멸당할 뻔했습니다. 방주가 돌아와 개방을 이끌어 가야 하며 또한 우리 모든 형제의 우두머리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교봉은 의아하여 물었다.
[모용공자라니? 무슨 말을 하는것이오?]
[진관청이라는 녀석이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데 그 말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친구를 사귀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저는 방주와 모용공자가 오늘에서야 만났다는 것을 밑습니다.]
교봉은 말했다.
[모용공자라니, 모용복 말이요? 나는 한번도 그를 본 적이 없소.]
5. 누명(陋名)
장로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전에 모용공자와 함께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모용공자를 모른다고 할까?)
해장로는 잠시 생각해 본 뒤 황연히 깨달은 듯 말했다.
[아, 그렇군. 조금 전 그 젊은이는 자칭 성이 모용이라 했지만 모용복이라고 하지는 않았소.천하에 모용이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이 어찌 한 둘뿐이겠소. 그러니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소이다.]
장로는 말했다.
[그는 벽에다 '그대의 방법으로 그대에게 펼친다'는 한 마디를 썼으니 그게 모용복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이오?]
갑자기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젊은이는 모든 재간을 다 펼쳐 보였소. 그리고 그 재간이 당사자보다 더욱 월등했소. 그러니 모용복이 아니고 누구겠소? 당연히 그란 말이요. 틀림없이 그란 말이외다.]
뭇사람들은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쥐눈에 밤송이 같은 수염을 기르고 얼굴이 싯누런 남해악신이 아닌가?
그는 묶이게 되었으나 참을 수 없어 남의 대화에 끼어든 것이었다.
교봉이 의아해서 물었다.
[그 모용복이 왔다갔단 말이오?]
남해악신은 노하여 말하였다.
[개방구 같은 소리 하지 마시요! 조금 전 당신과 모용복이 손과 손을 붙잡고 들어와서는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이 늙은이의 몸을 마비되게 만들었소. 빨리 이 늙은이를 풀어 주어야지 그렇지 않을 때는.... 흥, 흥...]
그는 잇따라 '흥흥'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콧방귀만 뀌었던 것이다. 교봉은 말했다.
[당신도 무림의 고수인데 어찌하여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시오? 내가 언제 왔다는 것이오? 모용복과 손을 맞잡고 들어왔다니 더욱 황당하구려.]
남해악신은 울화가 터진다는 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교봉! 이 빌어먹을 교봉! 당신은 개방의 우두머리인데 감히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정말 방주 자리가 부끄럽소. 여러 친구들, 조금 전 교봉이 나타나지 않았었소? 그리고 우리 장군이 그를 윗자리에 앉히고 차를 대접해 드리지 않았소?]
그러자 서하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그렇소, 모용복은 우리들 앞에서 '능파미보'를 펼쳐 보였으며 교봉은 그 옆에서 갈채를 보내기까지 했소. 자, 이래도 거짓이란 말이오?]
오장로는 교봉의 소매자락을 잡아당기며 나직히 말했다.
[방주, 정정당당한 사람은 남이 모를 짓은 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조금 전 있었던 일은 잡아떼면 아니되오.]
교봉은 쓸쓸히 웃었다.
[오 네째형, 설마하니 오 네째형도 조금 전에 나를 보았다는 말이오?]
오장로는 해약이 담겨진 작은 자기병을 꺼내 내밀었다.
[방주, 이 병을 되돌려 드리겠소. 어쩌면 또 소용이 될런지도 모르니까.]
교봉은 되물었다.
[나에게 돌려 준다니, 어째서 나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오?]
오장로는 말했다.
[이 약은 조금 전 방주가 나에게 준 약이오. 잊었소?]
교봉이 말했다.
[아니, 오 네째형, 정말 조금 전에 나를 보았소?]
오장로는 교봉이 한사코 부정을 하자 속으로 불쾌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교봉은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그 누군가가 자기로 가장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가운데 반드시 어떤 중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장로와 해장로는 성격이 올바른 사람들이라 결코 비열한 수단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권모술수를 가지고 계책을 펼친 사람은 모든 일을 빈틈없이 안배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자기의 소행이 뭇사람들의 눈에는 턱없이 황당무계하고 사악하게 보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개방의 군호들은 그에게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본래 하나같이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한사코 부인하자 매우 놀랍고 의아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며칠 동안 많은 변고를 겪게 되어 정신 착란이 일어난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교봉이 달리 서하인들을 대적할 계략이 짜여져 있기 때문에 서하인들이라는 적 앞에서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마대원을 확실히 모용복의 손을 빌어 교봉이 해친 것인데 그와 같은 비밀이 타로날까봐 한사코 모용복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다시 개방의 방주로 앉기 위해 또 다른 계책을 안배하는 것이라고 추측했으며 또 일부는 그가 거란을 위해서 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서하 사람들에게도 맞서지만 송나라 사람들에게도 해를 입히리라 생각했다. 그들 각자는 스스로의 추측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교봉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떻든, 여러분들이 다시 안전하게 되었으니 이제 그만 작별을 할까 하오.]
그리고 포권을 하고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채찍질을 가하여 질풍과 같이 그들을 떠났다. 홀연히 송장로가 부르짖었다.
[교봉, 타구봉을 남겨 두고 가시오!]
교봉은 벼락같이 고삐를 잡아 당겨 말을 세웠다.
[타구봉이라니, 은행나무 숲 속에서 이미 건네 주지 않았소?]
서장로는 말했다.
[우리가 실수하여 사로잡혔을 때 타구봉을 서하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소. 그런데 여태까지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그대가 가져간 것이 아니겠소?]
교봉은 앙천대소 했다. 그 소리는 웃음이 아니라 분노에 찬 부르짖음 같았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 교봉은 이제 개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 타구봉을 가져가서 어디다 쓰겠소? 서장로, 그대는 이교봉을 너무나 작게 보는구료!]
그리고는 발길로 말 배를 힘껏 찼다. 말은 네 발굽을 함게 놀리며 북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교봉은 어릴 적부터 부모의 인자한 손길 아래서 자랐고 후에 소림사 현고대사와 개방의 방주 왕방주를 사부님으로 모시게 되었고 그런 이후 강호로 떠돌아 다니며 많은 어려운 고초를 겪었지만 많은 친구나 사부는 한결같이 그를 위해 성심성의껏 도와 주었다. 그런데 이 이틀간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풍파를 겪게 되었다. 위명이 혁력하고 성실한 의협심이 깊은 방주가 이제는 나라를 팔고 백성을 해치며 몰염치하고 신의가 없는 소인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말이 가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의 마음은 그토록 혼란스럽고 착잡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정말 거란 사람이라면.... 과거 십여 년 동안 나는 적지않은 거란 사람을 죽였고 또 적지 않은 거란의 음모를 파헤쳤으니 크게 불충한 사람이 아닌가? 만약 나의 부모님이 안문관 밖에서 한인들에게 해침을 당하셨다면 나는 오히려 부모를 살해한 원수를 사부라고 모셨으며 삼십 년간 남을 부모님으로 섬겼으니 이것 또한 크게 불효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교봉아! 교봉아! 네가 그토록 불충불효하다면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이냐? 만약 삼괴공(三槐公)이 나의 부친이 아니라면 나도 자연히 교봉이 아니겠지. 그렇다면 나의 성은 무엇일까? 나의 친부모가 지어준 나의 이름은 무엇일까? 하하하! 나는 비단 불충불효한 사람일 뿐 아니라 성도 이름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어떤 간악한 사람의 크나큰 모함인지도 모른다. 나 교봉 으로 말하면 당당한 사내 대장부로서 남의 음모에 의해 패가망신하였고 옛 명성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구나! 그렇다고 일시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만약 그대로 이 자리를 떠나고 개방과 손을 끊는다면 그야말로 그 간악한 자의 음모가 성공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음, 어쨌든 이 모든 일은 명백히 밝혀지도록 조사해 봐야겠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우선 하남 소실산으로 가서 삼괴공에게 이 모든 진위를 알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소림사에 들어가 무공을 그에게 전수해 준 현고대사를 만나 뵙고 진상을 밝혀 달라는 청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삼괴공과 현고대사는 평소 그를 아껴 주고 이모저모로 보살펴 주었던 터이라 결코 사실을 숨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생각한 그는 더 이상 번뇌하지 않았다. 이틀 후 그는 숭산 아래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는 곧장 소실산으로 향했다. 이곳은 그가 소년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모든 풍경은 옛날 그대로였다. 그가 개방의 방주가 된 이후 개방은 강호에서 제일 큰 문파가 되었으며 소림사와 함게 나란히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따라서 개방의 방주인 그가 소림사가 있는 소실산에 찾아온다면 여러 가지 의식이 따르게 되고 또 걸리는 일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소실산에 들른 적이 없었다. 다만 매년 사람을 보내 부모와 은사에게 의식비를 드리거나 선물을 보내 주면서 문안을 묻는 데 그쳤었다. 이제 다시 고향에 돌아오게 되고 자기의 내력에 얽힌 수수께끼가 잠시 후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무리 침착한 그였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옛날 그가 살던 집은 바로 소실산 남쪽의 어느 산비탈 옆에 있었다. 채원 옆의 커다란 대추나무 아래에 하나의 초립과 하나의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찻주전자의 손잡이는 이미 떨어지고 없었다. 교봉은 즉시 부친 교삼괴의 주전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갑자기 그는 가슴이 따듯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님은 근검절약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저 수십 년이나 된 다 깨진 찻주전자를 내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리고 커다란 대추나무를 바라보며 어릴 적 대추가 익을 무렵 그의 부친이 언제나 그와 함께 대추나무를 쳐서 떨어뜨리던 광경을 떠올렸다. 붉게 익은 대추는 익을 대로 익어 터진 것도 있었는데 터진 대추는 달콤하고 맛이 좋았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설사 그 분들이 나를 낳아 준 친부모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를 키워 주신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나는 한평생 그 은혜를 보답하기 어렵다. 나의 내력의 진상이야 어떻든 나는 그들을 부모라고 부르겠다.)
그는 세 칸의 돌담 집 앞으로 다가갔다. 집 밖에는 대나무로 엮은 자리가 있었고 그 위에 채소를 널어놓아 말리고 있었다. 한마리의 암탉이 병아리들을 이끌고는 그 채소를 쪼아 먹고 있었다. 그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오늘 밤 어머님께서는 반드시 닭을 잡아 오래 동안 보지 못했던 아들을 대접하시려 하겠지?)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님, 어머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두어번 불렀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두 분은 이제 나이가 드셔서 듣지 못하시는구나!)
그는 판자로 만든 문을 열어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의 조그마한 객청에는 판자로 만든 탁자와 걸상 그리고 삽자루 등이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가 집을 떠날 때와 같았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교봉이 다시 불렀다.
[아버님, 어머님.]
그러나 대답하는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모두들 어디로 가셨지?]
그러면서 고개를 쑥 디밀고 침실 안을 살펴보았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교삼괴 부부 두 사람은 모두 땅바닥에 비스듬히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게 아닌가? 교봉은 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가 먼저 모친을 부축해 안았다. 그런데 그녀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몸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그는 다시 부친을 안아 일으켰다. 부친 역시 숨이 끊어져 있었다. 교봉은 놀라고 당황했으며 비통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부친의 시체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햇살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늑골은 모조리 부러져 있었다. 바로 무학 고수의 매섭기 그지없는 장력에 격살당한 것이었다. 다시 모친의 시체를 살펴보니 역시 똑같았다. 교봉은 머리가 혼란해졌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충실하기 이를데 없는 농사군들인데 어찌하여 무학의 고수가 이분들에게 독수를 썼을까? 이것은 틀림없이 나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세 칸의 집 안과 집 뒤, 지붕 위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흉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을 쓴 사람은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교봉의 온 얼굴이 눈물에 젖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그는 대성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잠시 울적해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애석하구나, 애석해. 우리가 한걸음 늦었다.]
교봉은 벼락같이 고개를 돌렸다. 네 사람의 중년에 접어든 승려가 서있었다. 복장이나 옷차림이 소림사의 승려 같았다. 교봉은 소림사의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나 그를 가르친 현고대사가 매일 야밤에 와서 무공을 전수해 주었기 때문에 소림사의 승려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이때 키가 큰 승려가 얼굴 가득히 노기를 띠우고 큰 소리로 말했다.
[교봉, 당신을 정말 돼지, 개만도 못하다. 교삼괴 부부가 설사 네 친부모가 아니라고 해도 십여 년 간 너를 키워 주신 은인이 아니더냐? 너는 어찌하여 손을 써서 두 분을 해쳤느냐?]
교봉은 울면서 말했다.
[불초가 조금 전 집에 당도해 보니 부모님이 벌써 해를 당한 뒤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흉수를 찾아서 원수를 갚으려고 하던 참인데 대사는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시오?]
그 승려는 노해서 부르짖었다.
[거란 사람은 이리와 같은 심보를 가졌다고 하더니 정말 금수와 똑같구나! 네가 친히 부모님을 살해하고도 무슨 변명이냐? 우리가 조금 늦게 온 것이 한스럽구나! 이 교가야, 네가 소실산에 와서 소란을 피우기에는 아직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는 '휙'하니 일장을 들어 교봉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교봉은 그 일장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뒤에서도 '휙'하니 바람소리가 이는 것이 아닌가? 그는 뒤에서도 누군가가 암수를 펼치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소림사의 승려들과 싸우기 싫었다. 그래서 왼발로 가볍게 땅을 차며 날렵하게 일장 밖으로 날아갔다. 네 명의 소림승들은 그가 그토록 가볍게 공격을 피하는 것을 보고는 얼굴에 한결같이 놀랍다는 빛을 띠었다.
[너의 무공이 비록 강하다만 네가 양부모를 죽여 입을 봉한다고 해서 너의 출신 내력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은냐? 애석하게도 네가 거란의 종자라는 것은 이미 무림에 다 퍼졌고 강호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네가 이와 같이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으니 너의 죄는 더욱 커졌다!]
다른 한 사람의 승려 역시 욕을 했다.
[너는 먼저 마대원을 죽였고 또다시 교삼괴 부부를 죽였다. 흐흠! 그 추악한 일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으냐!]
교봉은 두 승려가 그토록 욕을 해댔건만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차서 분노하지도 못했다.
[네 분 대사의 법명은 어떻게 되시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소림사의 고승이신가요?]
그러자 중간 키의 화상이 성질이 누그러진 듯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소림사의 제자들이오. 아, 그대의 의부와 의모는 한평생 충실하게 살아오신 분인데 이와 같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다니, 교봉 당신네 거란 사람들은 손 씀씀이가 악독하기 이를 데 없구료.]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법명을 밝히려 하지 않을진데 더 물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저 키가 큰 화상은 그들이 구원하러 왔으나 늦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반드시 전갈을 받고 구원하러 왔을텐데 그렇다면 누가 전갈을 보냈단 말인가? 어느 누가 미리 우리 부모님이 위험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입을 열었다.
[네 분 대사께서 자비를 품으시고 산을 내려와 저의 부모님을 구하려 하셨으나 애석하게도 한 걸음 늦었소이다.....]
그 키가 큰 승려는 성질이 열화와 같았다. 그는 아무 말없이 솥뚜껑 같은 주먹을 '획'하니 교봉에게 내지르는 동시에 호통을쳤다.
[우리가 한 걸음 늦었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이러한 무모한짓을 하게 했다. 그 것이 자랑스럽다고 우리를 비웃는 것이냐?]
교봉은 그들 네 사람이 호의로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자기의 부모를 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이라 그들과 손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진상을 영원히 밝힐 수가 없는지라 입을 열었다.
[불초는 네 분의 호의를 고맙게 생각하오. 오늘은 부득이 죄를 지어야겠소.]
그리고 나서 그는 몸을 질풍과 같이 돌렸다. 손을 뻗쳐서는 세번째 승려의 어깨쭉지를 후려쳐 갔다. 그 승려는 호통을 내질렀다.
[정말 손을 쓸 것이냐?]
그 한마디가 미쳐 끝나기도 전에 어깨쭉지에 교봉의 일장을 얻어 맞은 승려는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교봉은 소림파의 고승으로부터 무예를 전수받았기 때문에 네승려의 무공 수법을 환히 내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네 명의 승려를 차례로 쓰러뜨리고는 말했다.
[미안하오. 그런데 네 분 스님, 그대들은 구하러 오는 것이 늦어졌다고 했소.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우리 부모님이 액난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소. 누가 그와 같은 사실을 네 분에게 전해주었소?]
키가 큰 승려는 노해 부르짖었다.
[너는 그 전갈을 해준 사람을 알아내어 반드시 독수를 써서 죽이겠지? 소림의 제자는 거란의 개새끼가 하는 고문에 못이겨 굴복하지 않는다. 설사 네가 아무리 지독한 형벌을 가한다 할지라도 나는 절대 입을 열지 않겠다.]
교봉은 속으로 탄식해마지 않았다.
(갈수록 오해가 깊어지는구나! 내가 어떠한 질문을 하건 고문을 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답하지 않겠지?)
그는 손을 뻗혀 네 승려의 봉해졌던 혈도를 풀어 주며 말했다.
[만약 사람을 죽여 입을 봉하려고 했다면 나는 지금 네 분의 생명을 빼앗았을 것이외다. 그러나 시비곡절이 언젠가는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요.]
그러자 산비탈 쪽에서 한 사람이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여 입을 봉한다고? 그렇게 쉽지는 않을걸.]
교봉은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산비탈 옆에 십여 명의 소림사 승려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손에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앞장을 선 두 승려는 오십 정도의 나이로 보였는데 손에는 방편산을 들고 있었다. 방편산의 위쪽에 붙어 있는 강철로 만든 월아(月牙)에서 푸른 빛의 싸늘한 광채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 두 승려는 흉흉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 보았는데, 교봉은 즉시 그들의 내공이 심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봉은 포권의 예를 하며 말했다.
[교봉이 무례했던 점, 여러 대승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는 별안간 뒤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등으로 판자문을 부수고는 흑담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와 같은 변고는 너무나 찰나적인 순간에 일어났다. 뭇승려들은 너무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대여섯 명이 동시에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문가에 다다랐을 때 한 줄기 세찬 바람이 문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대여섯명의 승려들은 각기 왼손을 들어 일제히 내력을 돋우어서 막았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그들 대여섯 사람들은 문안에서 나온 장력에 뒤로 서너걸음 물러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슴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교봉의 이 일장은 맹렬하기 이를데 없으나 아직도 여력을 남겨두고 있다 두번째 장으로 다시 후려친다면 우리는 즉시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뭇승려들은 잔뜩 자세를 가다듬고 경계를 했다. 그러나 한참 동안 기다려도 반응이 없는지라 앞장선 두 승려가 동시에 방편산을 치켜들고 '쌍룡입동'(雙龍入洞)이라는 초식을 펼쳤다. 그리고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방편산을 따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교봉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교삼괴 내외의 시신도 함께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 방편산을 쓴 두 승려는 소림사의 '계율원'(戒律院)에서 소림파 제자들의 행동을 감독하고 보살피는 '지계승'(持戒僧)과 '수율승'(守律僧)이었다. 평소 강호로 떠돌아 다니면서 문하 제자들의 공과 잘못을 사찰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무공은 말할 수 없이 고강했고 견문 또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그들 두 사람은 교봉이 삽시간에 종적을 감추기도 어려운데 교삼괴 부부의 시체까지도 가지고 가자 더욱더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다. 승려들은 집 안팎을 살피고 방 머리맡이나 부엌 쪽을 살폈다. 계율원의 두 승려는 질풍과 같이 산 아래로 쫓아가 곧장 이십여리를 나아가며 살폈지만 교봉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교봉은 부모님의 시체를 안고 소실산 윗쪽으로 달려 갔다. 그는 사람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은 수목이 울창한 언덕받이로 올라가 부모님을 묻었다. 그리고는 꿇어 엎드려서 큰 절을 여덟 번 올리고는 속으로 빌었다.
(아버님, 어머님 어떤 자들이 독수를 써서 두 분을 돌아가시게 했는지 모르지만 이 아들은 반드시 그 흉수를 잡아 두 분의 무덤앞에 그들의 심장을 도려내어 바치겠습니다.)
그는 다시 참을 수 없어서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굳건해서 좀처럼 우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실로 슬픔이 복받쳐서 눈물이 샘솟듯했으며 좀처럼 걷잡을 수가 없었다. 별안간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차! 야단났다! 나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신 현고대사도 혹시 위험한 일을 당했는지 모른다.)
동시에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그 흉수가 나의 부모님을 죽인 것은 시간적으로 그렇게 공교로울 수가 없다. 때맞추어 내가 돌아가기 직전에 손을 썼다는 것은 일찍부터 계획을 짜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는 손을 쓴 후 즉시 소림사로 달려가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통지하여 내가 소실산으로 달려가 우리 부모님을 죽여 입을 봉하려 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들 승려들은 의협심이 깊기 때문에 오로지 나의 부모님을 구하려고 달려왔다가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나의 신세와 진상을 알고 있는 또 한 사람은 현고 사부님이시다. 따라서 그 흉수가 다시 독수를 써서 현고대사를 죽이고 그 죄명을 나에게 덮어 씌울 가능성이 있다.)
현고대사는 어쩌면 자기로 인해 변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오장육부가 타는 듯 답답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대뜸 소림사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소림사에는 고수들이 구름떼처럼 많고 달마당의 몇 분 노승만 하더라도 비범한 절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가 얼굴을 내밀기만 하면 뭇승려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 것이고 그리하면 벗어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황량한 소로길을 찾아 급히 달렸다. 형극과 잡초들이 그의 바지가랭이를 마구 찢어 놓았으며 정강이와 장딴지는 가시에 질려 선혈이 흘러 내렸지만 그는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소로길을 따라 빙 돌아서 올라가는 것은 노정이 몇 배나 늘어나게 된다. 그는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소림사의 뒷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근심이 되었다. 기쁜 것은 어둠 속에 자기 자신이 쉽게 모습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었고 근심스러운것은 흉수가 어두운 밤을 타서 암습을 가하게 된다면 그의 종적을 좀처럼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호를 주름잡았던 천하제일의 고수였다. 소림사가 비록 용담호혈과 같은 곳이지만 그는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소림사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소림사의 대전이나 대법당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현고대사의 거처도 모르는 터였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쪼록 사부님게서 무사하시기를 빈다. 은사를 만나 뵙고 경과를 알린 후 그 어르신께 조심하십사고 청을 드린 이후 다시 나의 신세 내력을 여쭈어 본다면 어쩌면 은사께서는 진범이 누구인지 짐작하실지도 모른다.)
소림사의 대전이나 법당은 수십 채나 되었다. 동쪽에 한 채 서있고 서쪽에도 한 채 서있었으며 산비탈 여기저기에흩어져 있었다. 현고대사는 절 안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현'(玄)자 돌림의 승려는 어디로 찾아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한 명의 소림 승려를 잡아다가 그를 현고 사부님께 안내하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그러나 소림 승려들은 대부분이 사부를 존중하고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만약 내가 현고대사에게 불리한 일을 하거라고 생각한다면 죽어도 굴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결코 현고대사의 거처를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높고 낮은 곳을 뛰고 기는데 고양이보다 더 날렵했으며 시종 그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 어느 조그마한 정자 옆에 이르게 되었다. 집 안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방장께서 중요한 일로 상의를 하신답니다. 사숙께서 빨리 증도원(證道院)으로 들어오시랍니다.]
그러자 한 늙수그레한 음성이 대답했다.
[좋아, 곧 그리로 가자.]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방장께서 사람을 모아 중요한 일을 상의한다면 우리 사부님도 오실지 모르겠구나. 나는 우선 저 사람을 따라 증도원으로 가보아야 하겠다.)
이때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판자문이 열리고 두 명의 승려가 나왔다. 한 사람의 늙은 승려는 서쪽으로 향하고 젊은 승려는 총총히 동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그는 다시 전갈을 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방장이 이 노승에게 중요한 상의를 할 것이 있어 오라고 했다면 반드시 지위나 배분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소림사는 다른 사원들과 달리 배분이 높을수록 무공 역시 고강하다. 따라서 나는 이 노승의 뒤를 바짝 따르지 말고 멀찍이서 지켜보며 미행해야겠다.)
그 노승은 줄곧 서쪽으로 향해 가더니 서쪽 끝에 있는 한 채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교봉은 그가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후 빙 돌아서 그 집의 뒷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사방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창 밑으로 다가가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그의 심사는 편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슬프고 한편으로는 울화가 치밀었다.
(교봉이 강호에 떠돌아 다닌 이후 어떤 일이든 광명정대하게 처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슬금슬금 남에게 발각될까봐 염려하며 행동을 하는구나! 만약에 행적이 탄로나게 된다면 이 교모가 한평생 쌓아 올린 영명은 땅에 떨어지게 되고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돌렸다.
(과거 사부님께서는 매일 밤 하산하시어 나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설사 풍우가 치는 날이라도 거르지 않으셨다. 이와 같은 깊은 은혜를 입은 나는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을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 조그마한 욕을 못 참는데서야 말이 안 된다.)
이때 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곧이어 네 사람이 차례로 집으로 들어섰다. 얼마후에 다시 두 사람이 왔다. 창호지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는 십여 명이나 되었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그들의 의논하는 것이 소림사의 중요하고도 비밀스런 이야기라면 내가 훔쳐 듣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은 아니다. 역시 멀지감치 떨어지는 게 낫겠다. 만약 사부님이 안에 계신다 해도 무서운 고수들이 안에 많이 있으니 아무리 간악한 흉수라도 해치지 못할것이 아닌가? 상의가 끝난 후 뭇승려들이 흩어질 때 나는 다시 방법을 강구하여 사부를 만나보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척도 없이 물러서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십 여명의 승려들이 염불을 했다. 교봉은 그들이 어떤 염불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장엄하고 엄숙했다. 그리고 염불 소리 속에는 슬프고도 고달픈 뜻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마치 어떤 급사를 행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불경을 참선하고 연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사부는 어쩌면 여기 계시지 않을 지도 모르겠구나.)
교봉은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염불하는 소리에는 현고대사의 그 침착하고도 웅후한 음성은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일시 좀더 기다려야 할지 그 자리를 떠나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염불하는 소리가 멎더니 위엄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현고사제, 더 무슨 할 말이 없는가?]
교봉은 크게 기뻐했다.
(사부는 정말 이곳에 계셨구나. 그 어르신께서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이다. 원래, 그 분은 조금 전의 그 염불을 하지 않았었군!)
그러자 웅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교봉은 바로 그의 사부인 현고대사의 음성임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현고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게 아닌가?
[소제가 계(戒)를 받는 날 선사께서는 저에게 현고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소이다. 부처님께서 말하는 칠고(七苦)는 바로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원증회(怨憎會), 애별리(愛別離), 구부득(求不得)입니다. 소제는 애써 그와 같은 고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으나 내 자신만을 인도할 수 있었을 뿐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이 '원증회'의 고달픔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반드시 겪어야 할 관문입니다. 그 어떤 원인을 심게 되면 그와 같은 업보를 받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를 위해 기뻐해야 될 것이외다.]
교봉은 현고대사의 음성이 매우 차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은 모두 불가의 언어들이라서 그 뜻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 위엄있는 음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현비사제는 수개월 전 간악한 자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우리는 전력을 다해 흉수를 잡으려 했는데 그와 같은 일은 우리 부처님게서 화도 내지 말고 성도 내지 말라는 계율을 어기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네. 그러나 마(魔)를 종복시키고 간악한 자를 주살하는 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무공을 배운 본 뜻은 불법을 널리 펼치는데 있으며 우리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을 배워서 중생들의 고난을 풀어 주는 데 있지 않은가?]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음성은 정말 위엄으로 가득차 있다. 아마도 소리사의 방장이신 현자(玄慈)대사이신 것 같구나.)
현자대사는 말을 계속했다.
[... 한 마두를 제거하게 된다면 바로 무수한 세상 사람들을 구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제, 그 사람은 혹시 고소 모용이 아니던가?]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어쩌다가 고소 모용씨와 연관이 되었을까? 소림파의 현비대사는 대리국에서 암살을 당했다고 했는데 설마 소림사의 고승들도 모용공자가 쓴 독수라고 의심하는 것일까?)
이때 현고대사는 말했다.
[방장사형, 소제는 사형과 뭇사형제들이 나를 위해 금식하는 것을 원하지 않소이다. 그러면 나의 업보가 더욱더 증가될 뿐이기 때문이외다. 만약 그 사람이 칼을 놓게 된다면 그야말로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것이고 만약 놓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 역시 부질없는 고달픔을 자초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 사람의 모습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현자대사는 말했다.
[그렇네, 사제의 교훈에는 이 사형되는 사람도 깨우치는 점이 많네. 나는 너무 집착하는 것이 많아. 그야말로 사제와 비교하면 아직도 불심이 모자란다고 할 수밖에 없겠구만.]
현고대사는 말했다.
[소제는 잠시 동안이나마 조용히 앉아서 참회를 하고 싶소이다.]
현자대사는 말했다.
[음, 그러게. 사제는 몸 조심하게.]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키가 크고 몸이 마른 노승이 앞장을 서서 나왔다. 그가 일장쯤 걸어나오자 그 뒤로 나머지의 사람들이 차례로 나왔는데 그 표정이 엄숙했다. 뭇승려들이 몰려 나간 이후 집안은 조용하여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교봉은 주위의 정경에 눌려 일시 모습을 드러내고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현고대사가 입을 열었다.
[손님이 먼 곳에서 오셨는데 어째서 배회할 뿐 들어오지 않으시오?]
교봉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내가 숨을 죽이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라면 나와 지척지간에있다 하더라도 내가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부님의 귀밝음이 이런 정도이니 내공 조예가 정말 훌륭하구나.)
그는 즉시 문 앞으로 공손히 다가가서는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는 안녕하셨습니까? 제자 교봉이 사부님께 인사 올립니다.]
현고대사는 나직이 '아'하더니 입을 열었다.
[봉이냐? 그렇지 않아도 내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너를 한번 만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지 빨리 들어 오너라.]
그 소리는 기쁜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교봉은 매우 기뻐서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큰 절을 올렸다.
[제자가 평소 잘 받들어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이토록 걱정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사부님께서 건강하신 것을 뵈오니 저로서는 기쁨을 누를 길 없군요.]
그리고 고개를 쳐들고는 현고대사를 바라보았다. 현고대사는 본래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그런데 등잔불 아래 드러난 교봉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안색이 대변해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너는... 바로 너였구나! 네가 바로 교봉이로구나! 내가... 내가 친히 가르쳐 놓은 제자란 말이지?]
그러한 현고대사의 얼굴에는 경악과 고통의 표정이 그리고 깊은 연민과 애석하다는 빛이 뒤섞여서 드러났다. 교봉은 사부가 순식간에 얼굴이 크게 변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람과 의아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부님, 저는 바로 교봉입니다.]
현고대사는 말했다.
[좋아, 좋아, 좋아.]
그는 '좋아'라고 연달아 세 번을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교봉은 감히 더 묻지 못했다. 그래서 조용히 앉아 그가 또 어떤 가르침을 내리실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 동안 기다려도 현고대사는 시종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교봉은 다시 그의 얼굴 빛을 바라보았다. 현고대사의 얼굴 근육은 얼어 붙은듯 굳어 있었다. 그 표정은 조금 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깜짝 놀란 교봉은 손을 뻗혀 그의 손바닥을 만져 보았다. 손바닥은 차가왔다. 다시 그의 코에 손을 대어 보았다.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사태가 아닌가? 이렇게 되자 교봉은 그만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그의 머리 속은 착잡하기만 했다.
(사부님은 나를 본 즉시 놀라 돌아가셨구나.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어째서 그토록 두려운 존재인가 말이다. 십중팔구는 그는 이미 상처를 입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문 밖으로 걸어 나아가 낭랑한 어조로 소리쳤다.
[방장대사, 현고 사부님께서 원적하셨소이다! 현고 사부님께서 원적하셨소이다!]
그 두 마디의 외침은 멀리까지 울려 퍼졌고 산골짜기에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소림사 전체가 모두 들을 수 있는 음성이었다. 그 부르짖는 소리는 웅후하기 짝이 없었으나 지극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현자방장 등은 아직 자기의 거실로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교봉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자 모두들 몸을 돌려서 나는듯 '증도원'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한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증도원'의 문 옆에 서서는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모든 승려들은 하나같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현자는 합장 하고 물었다.
[시주는 누구시오?]
그는 현고의 안위가 걱정되는 듯 그와 같은 물음을 던지고는 교봉이 대답하기도 전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현고대사는 뻣뻣이 선 채 쓰러지지도 않은 그 자세 그대로 죽어 있었다. 뭇승려들도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염불을 하기 시작했다. 교봉은 최후에 방 안으로 들어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속으로 빌었다.
(사부님, 제자의 전갈이 늦어 사부님게서는 이미 독수를 당하셨었군요. 제자와 그 간악한 자의 원한은 더욱더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제자에게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 간악한자를 반드시 잡아 죽여서는 은사의 원한을 갚겠습니다.)
현자방장은 염불이 끝나자 교봉을 아래 위로 훑어 보며말했다.
[시주는 누구시오? 조금 전 부르짖은 사람이 바로 시주시오?]
교봉은 말했다.
[제자는 교봉이외다. 사부님이 원적하신 것을 보고 슬픔을 이길 수 없어 방장님의 사찰 안을 소란스럽게 하였습니다.]
현자대사는 교봉이라는 이름을 듣더니 깜짝 놀라 몸을 흠칫했다. 그리고 얼굴에 기이한 빛을 띠우고 그를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시주, 그대는... 그대... 그대가 바로 개방의... 전임 방주란 말이오?]
교봉은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강호의 소문은 정말 빨리 퍼지는구나. 내가 이미 개방의 방주에서 물러난 사실을 알고 있다면 내가 개방에서 축출된 이유도 알고 있겠구나.)
그는 대답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현자는 물었다.
[시주는 어재서 이 야밤에 폐사를 찾게 되었소? 그리고 어쩌다가 현고대사가 원적하시는 것을 보시게 되었소?]
교봉은 할 말이 태산 같았으나 일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대답했다.
[현고대사는 제자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신 은사입니다. 그런데 저의 은사께서는 어떤 상처를 입으셨으며 그누구에게 독수를 입으셨습니까?]
현자방장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현고 사제는 암습을 받게 되어 가슴팍에 무서운 일장을 얻어 맞게 되어 늑골이 일제히 부러지고 오장이 짓이겨지게 되었소. 다만 내공이 심오하여 지금까지 견디어 내었소. 우리가 그에게 적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모른다고 했소. 또한 흉수의 나이와 모습까지도 말하지 않았소. 그 대신 그는 불가의 고(苦)를 들먹이며 '원증회'는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이라고 말했소. 그리고 원수를 만나게되었으나 이로써 해탈을 하게 된다면 잘 된 일이니 흉수의 모습을 말해 무엇하겠느냐며 말하기를 거부했소.]
교봉은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원래 조금 전 뭇승려들이 염불을 한 것은 사부님이 중상을 입은 것을 알고 바로 사부님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염불이었구나!)
그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여러 고승께서는 자비를 품으시어 원한을 기억하지 않겠지만 제자는 속인이라 반드시 그 흉수를 잡아서 천갈래만갈래로 찢어 죽여 사부의 원한을 갚아야만 하겠습니다. 귀사의 산엄한 경계를 뚫고 그 흉수가 어떻게 뛰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자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명의 몸이 왜소한 노승이 갑자기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시주가 소림사로 뛰어들었는데도 우리는 저지할 수도 없었고 발견할 수도 없었소. 그러니 흉수도 마음데로 왔다갔다 했을 것이 아니오?]
교봉은 허리를 굽히고 포권의 예를 했다.
[제자는 일이 너무 급박해서 사문(寺門)밖에서 뵙자는 통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실레했습니다. 여러 사부님께서 양해해 주십시요. 사실 제자는 소림사와 관계가 매우 깊습니다. 결코 소홀히 위엄을 거슬릴 뜻은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였다. 한 소사미가 한 대접의 뜨거운 김이 나는 약대접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현고의 시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부님, 약을 드십시요.]
그는 바로 현고대사를 모시고 있는 소사미였다. '약왕원'(藥王院)에서 상처를 치료하는데 영약인 '구전회춘탕'(九轉回春湯)을 한첩 다려서는 사부에게 복용하라고 가져 온 것이었다. 그는 현고대사가 서서 쓰러지지 않은 것을 보고 죽지 않은 줄 알았다. 교봉은 매우 슬픈 목메인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소사미는 고개를 돌려 교봉을 한번 바라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이군! 당신이... 또 왔군!]
'쨍그랑'하느 소리와 함게 약사발을 땅바닥에 떨어 뜨렸다. 그 바람에 약물과 사발의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소사미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서 벽에 기대어 서더니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예요! 사부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예요!]
이렇게 부르짖자 모든 사람들은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봉은 당황한 나머지 큰 소리로 물었다.
[너는 무어라고 하는거지?]
소사미는 불과 열 서너 살 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교봉을 바라보더니 매우 두렵다는 듯 현자방장의 등 뒤로 숨어서는 현자방장의 소매자락을 잡아 당기며 부르짖었다.
[방장님, 방장님...]
현자는 말했다.
[청송, 두려워 하지 말고 말해라. 저 사람이 사부를 때렸다고 말하는 것이냐?]
소사미 청송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는 손바닥으로 사부님의 가슴팍을 후려쳤습니다. 나는 창문에 서 보았습니다. 사부님, 사부님, 반격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이때까지도 현고대사가 이미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현자방장은 말했다.
[너 자세히 보아라. 사람을 잘못 보면 안 된다.]
청송은 말했다.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어요. 그는 잿빛 장포를 걸치고 있었고 네모진 얼굴에 눈썹이 이렇게 올라갔으며 큰 입에 커다란 귀를 가진 것이 바로 저 사람이었어요. 사부님, 어서 그를 때려 주세요! 어서 그를 때려 주세요!]
교봉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그 흉수는 내 모양으로 변장을 하여 모든 죄를 나에게 덮어씌우려 하는구나! 사부님께서는 내가 왔다는 말을 들으시고 처음에는 몹시 기뻐하시더니 내 모습을 보자, 나와 사부님을 해친 흉수의 모습이 같은지라 실망하시어 그제서야 '그렇구나! 알고 보니 너였구나! 네가 교봉이었구나! 내가 친히 가르쳐 길러낸 제자였구나!' 하시고 탄식하셨구나! 사부님과 나는 십여년 간 만나 보지 못했다. 내가 어린애로부터 성인으로 자랐으니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현고대사가 죽기 바로 전 세 번이나 '좋아! 좋아!'라고 하던 말씀을 상기하자 그야말로 칼로 창자를 에이는 듯 했다.
(사부님께서는 상대방에게 심한 일장을 얻어맞게 되었으나 적이 누구였는지를 모르셨구나! 그러다가 나를 보자 흉수의 모습과 같았는지라 그때서야 속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나머지 슬픔을 견디지 못해 돌아가셨구나! 사부님께서는 중상을 입은 몸이고 또 위태로운 경지에 놓여 있었으니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손을 써서 그 분을 해쳤다면 어째서 두번째에 몸을 드러냈겠느냐 말이다.)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한 떼의 사람들이 재빨리 달려왔다. 그들은 증도원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두 명의 승려만이 허리를 굽힌 채 공손이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소실산 아래서 교봉과 싸웠던 지계, 수율, 두 승려였다. 그 지계승은 겨우 입을 열었다.
[방장에게 알립니다...]
그 순간 그는 교봉을 발견하고 놀람과 의아함 그리고 분노의 빛을 얼굴에 띠었다. 어째서 교봉이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머지 승려들 모두 노기를 띤 표정으로 교봉을 매섭게 노려 보고 있었다. 현자방장은 매우 장엄한 어조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주께서는 이미 개방에 적을 두고 있지 않지만 역시 무림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외다. 오늘 폐사에 왕림하시어 현고 사제를 격살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라오.]
교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현고의 시체를 향해 부복하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돌아가실 임시에도 이 제자가 손을 써서 그리 되신 줄 알고 한을 품고 운명하셨지요. 제자가 결코 사부님을 해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간악한 자가 사부님게 해를 가한 것은 바로 이 제자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제자는 오늘 죽음으로써 사은에 보답한다 할지라도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사부님의 원한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가 소림의 위엄을 거스린 점 사부께서도 용서를 해주십시요.]
그리고 그는 별안간 '휙휙'하니 숨을 길게 두 모금 내어 불었다. 그러자 증도원 당상의 두 개의 기름 등불이 꺼지고 대뜸 집안은 칠흙과 같은 어두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교봉은 사부에게 부복하여 빌고 있을 때 이미 이곳을 벗어날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기름등잔을 불어 끄자마자 왼손을 들어 수율승의 등을 가볍게 후려쳤다. 이 일장에는 모두 음유한 힘을 기울였고 수율승이 내상을 입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수율승의 우람한 체구는 그 힘으로 밖으로 날아갔다. 어둠속에서 뭇승려들은 그 소리를 듣고 하나같이 교봉이 문으로 도망치는 줄 알았다. 그리하여 각자가 금나수법을 써서 수율승을 잡았다. 뭇승려들은 똑같이 생각했다. 무서운 수법으로 교봉을 때려 죽이지 않고 잡아서 고문을 하여 자초지종을 들으려고 붙잡기만 한것이다. 그러니까 교봉을 붙잡아서 어찌하여 현고대사를 해쳤는지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십여명의 승려들은 모두 소림사의 제일의 고수였다.
6. 소림사(小林寺)
소림사의 일류 고수는 바로 무림의 일류 고수였다. 각자의 수법은 달랐으며 제각기 독특한 조예를 쌓고 있었다. 이때 일제히 금룡수(擒龍手), 응조수(鷹爪手), 호조공(虎爪功), 금강지(金剛指), 악석장(握石掌) 등 갖가지의 소림에서 자랑하는 금나수법이 수율승의 몸에 모조리 펼쳐지게 되었다. 고승들의 무공은 정말 대단했다. 어둠 속에서 그저 날리는 소리만을 듣고 손을 쓰는데도 털끝 만큼의 차이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수율승은 졸지에 심한 곤욕을 치루게 되었다. 삽시간에 온몸의 요혈은 여러 금나수법에 의해 잡히게 되었고 몸은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려 있는 꼴이 되었으나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곧이어 소사미 청송이 화섭자를 들고 기름이 든 등잔에 불을 켰다. 그제서야 뭇승려들은 수율승을 잘못 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달마원의 현난대사는 즉시 명령을 내려 전 소림사의 승려들이 원 위치에 서서 지키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게 했다. 뭇승려들은 하나같이 교봉의 담이 제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결코 혼자의 몸으로 소림사 같은 용담호혈로 뛰어 들어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반드시 그 뒤에는 달리 도움을 주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증도원의 십여 명이 되는 고승과 지계승이 거느린 몇 명의 승려들은 바로 증도원 근처의 여러 곳을 자세히 수색했다. 돌맹이 하나도 그대로 두지 않았을 정도로 세밀하게 뒤졌다. 그리고 풀더미마다 곤봉으로 후려쳐서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이렇게 되자 각 고승들은 자비를 품고 호생지덕을 키웠다고 하나 두깨비, 두더지, 귀뚜라미, 개미 들을 많이 죽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시진 남짓 바삐 돌아다녔다. 그러나 교봉의 자취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소란을 떨고난 즉시 소림사의 고승들은 현고대사의 법체를 사리원(舍利院)으로 옮기고 화장을 했다. 그리고 수율승은 약왕원으로 보내서 상처를 치료받게 했다. 뭇승려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맥이 빠져서는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이번에 체면을 깎일 대로 깎였다고 생각했다. 소림사에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았다. 더군다나 이 10여 명의 고승들이 지닌 명성이나 무공은 그야말로 쟁쟁했다. 그런데 맨손으로 나타난 교봉이 사라질 때까지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고 또는 사로잡기는 고사하고 어떻게 도망쳤는지 조차도 짐작할 수 없어서 그들은 실로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교봉은 변고가 일어나자마자 뭇승려들이 사방으로 그를 찾아나서리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조금 전 그들이 머물렀던 증도원의 거실은 그들이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수율승을 일장으로 밖으로 내몬 이후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기척도 없이 평소 현고대사가 잠을 자던 침대 아래로 기어들었다. 그리고 열 손가락을 침대 판대기에 꼭 갖다 붙였다. 물론 침대 밑을 촘촘히 살펴보는 사람이 있었지만은 침대에 깔아놓은 널판지와 딱붙어 있는 그를 발견할 사람은 없었다. 현고대사의 법체가 옮겨진 이후 집사승이 증도원의 판자문을 닫아 건 이후에는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교봉은 침대 밑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었다.
(날이 밝게 된다면 이곳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이때 빠져 나가지 않는다면 언제까지 기다리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침대 밑에서 살그머니 기어 나왔다. 그리고는 기척도 없이 문을 밀고 나서자마자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승려들의 떠드는 소리는 이미 멎은 상태였다. 그러나 소림사의 고승들이 이대로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증도원은 소림사의 맨 서쪽에 있었다. 그러므로 계속 서쪽으로 나간다면 더욱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소림사를 나서기만 한다면 뭇승려들이 흩어지게 되므로 설사 교봉과 부딪히게 된다 하더라도 교봉을 막을수는 없는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소림사의 승려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후에 진범을 잡아서는 절로 데리고 와서 그 원유를 설명하고 싶었다. 그는 절 서쪽에서 그가 실종되었으니 여러 승려들이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곳이 절 서쪽에서 소주성으로 통하는 각처 산길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헤아려 본 그는 가장 적절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절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나가 절을 떠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몸을 웅크리고는 나무에 몸을 숨겨가면서 살그머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네번재의 뜨락을 가로질러서는 한 그루의 보리수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보니 맞은편 나무 뒤에 두 승려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교봉은 시력이 날카로와 한 승려가 들고 있는 계도(戒刀)에서 번쩍이는 광채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위험했다. 조금 전 내가 조금이라도 나무 뒤에서 빨리 떠났더라면 행적이 탄로날 뻔했다.)
교봉은 잠시 생각한 끝에 조그만 돌을 집어 들고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그런데 이번에 기운을 적절히 썼기 때문에 처음에 천천히 날아가던 돌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다가 칠팔 장 밖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때 매우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었다. 그리고 그 돌은 커다란 나무에 '딱'하는 소리와 함게 박혔다. 두 승려는 몸을 일으키고 질풍과 같이 그 커다란 나무 쪽으로 달려갔다. 교봉은 두 승려가 자기가 있는 곳을 지나쳐 달려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몸을 날려 옆에 있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달빛 아래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는데 조그마한 편액에는 '보리원(菩리院)'이라는 석자가 씌어 있었다. 그는 두 승려가 이상한 조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되돌아 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으므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후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보리원의 앞에 있는 법당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하고 뒤에 있는 대전으로 들어섰다. 흘깃 보니 한 대한의 그림자가 신속하기 이를데 없이 그의 등뒤에서 번쩍하니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 신법의 재빠름은 정말 보기 드물 정도였다. 교봉은 깜짝 놀랐다.
(정말 훌륭한 솜씨이다. 저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는 그는 손을 들어 자기의 몸을 보호한 채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맞은편에는 역시 커다란 대한이 한 손을 세우고 비스듬히 서서는 안면을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몸을 약간 구부리고 있었는데 그 기상이 태산과 같았다. 원래 이 대전의 불상 앞에는 하나의 병풍을 세워 놓았는데 병풍 뒤에는 지극히 커다란 구리거울을 걸어 놓고 있었다. 구리 거울은 매우 맑게 닦여져 있었기 대문에 구리거울에 교봉 자신이 비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거울에는 네 귀절의 경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불상 앞의 몇 개의 기름 등잔의 불빛 아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당작여시관(當作如是觀)'
교봉은 씩 웃고 머리를 돌리어 발걸음을 옮겨 놓으려 했다. 그런데 별안간 그의 마음에 무엇인가가 와 닿는 느낌이 있어 그만 멍해졌다. 바로 이 순간에 그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호하기만 할 뿐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우두커니 잠시 서있던 그는 우연히 고개를 돌리게 되어 다시 구리 거울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순간 자기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얼마 전에 나는 나의 뒷모습을 본 것 같다. 그것이 어디였던가? 나는 예전에는 한 번도 저와 같이 커다란 구리거울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내 자신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을까?)
이와 같이 넋을 잃고 있을 때 갑자기 보리원 바깥에서 몇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교봉은 대전 위에 나란히 세 개의 불상이 놓여 잇는 것을 보았다. 즉시 위로 뛰어올라 세번째 불상 뒤에 몸을 숨겼다. 발걸음 소리에 이어 곧 여섯 명의 승려가 들어섰다. 그들은 곧 두 줄로 늘어서더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각자가 하나씩의 방석을 찾아 앉았다. 교봉은 불상 뒤에서 살펴보았다. 여섯 명의 중은 모두 중년의 승려였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내가 뒤로 도망친다면, 저 여섯 명의 무공이 평범하다면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내공이 심오하고, 이목이 날카롭다면 분명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잠시 두고 보아야겠다.)
이때 오른쪽의 한 승려가 입을 열었다.
[사형, 이 보리원은 텅 비어 있는데 무슨 경서가 있다고 그러지요? 사부가 어째서 우리보고 지키라고 하는겁니까? 적이 훔쳐가지 못하게 방비하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가장 왼쪽에 앉은 승려가 빙그레 웃었다.
[이것은 보리원의 비밀이니 더 말해 봤자 소용이 없다.]
맨 오른쪽의 그 승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흥, 내가 보기에 사형도 모를 것 같은데요.]
맨 왼쪽의 승려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내가 모르긴 왜 몰라! '일몽여시'(一夢如是)...]
그는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갑자기 '아차'싶은 듯 입을 다물었다. 맨 오른쪽의 승려가 다시 물었다.
['일몽여시'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그러자 두번째 방석 위에 앉아 있던 승려가 입을 열었다.
[지청(止淸)사제, 평소에는 말이 많지 않더니 오늘은 어째서 이것 저것을 따져 묻지? 보리원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그대 자신의 사부에게 물어보도록 하게나.]
그 지청이라 불리는 청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나는 뒤로 가서 소변을 좀 보아야겠어요.]
그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맨 오른쪽에서 왼쪽의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그런데 왼쪽에서 다섯번째 승려의 등 뒤를 지나가게 되었을 때 지청이 갑자기 오른발을 쳐들어 그 승려의 등 뒤에 있는 현추혈(玄樞穴)을 걷어찼다. 현추혈은 열 세번째 척추의 아래에 있었다. 그 승려가 방석 위에 단정히 앉아 있다가 지청이 발끝으로 차게 되자 천천히 오른쪽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지청의 발길질은 재빠르기 이를데 없었다. 아무런 기척도 일어나지 않았다. 곧이어 그는 네번째 승려의 현추혈을 걷어찼고 곧이어 세번째 승려의 현추혈을 걷어찼다. 삽시간에 잇따라 세 승려를 쓰러뜨린 것이다. 교봉은 불상 뒤에서 그와 같은 일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어째서 소림사의 승려들이 갑자기 사형사제들끼리 암수를 쓰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청은 다시 발을 뻗쳐서는 왼쪽에서 두번째에 앉아 있는 승려의 현추혈을 걷어찼다. 그의 발끝이 막 그의 혈도에 닿게 되었을 때 그에게 발길질을 당한 세 승려 가운데 두 승려가 방석 위에 쓰러지게 되었으며 머리통을 대전 바닥 벽돌에 '쿵쿵'하고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자 가장 왼쪽에 있던 승려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서는 살펴보게 되었다. 그 순간 그는 지청이 발을 뻗쳐 그의 오른쪽에 있는 승려를 차서 쓰러뜨리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지청, 무슨 짓인가?]
지청은 바깥쪽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저것 보시요. 누가 왔소.]
그 승려는 고개를 돌려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지청은 오른발을 들어 재빨리 그의 뒷등을 걷어차려고 했다. 발길질이 너무나 재빠르기 때문에 반드시 적중될 판이었으나 반대쪽 구리거울에 그 발길질 하는 모양이 똑똑히 비추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맨 왼쪽에 있던 그 승려는 비스듬히 몸을 날려 피하면서 오히려 일장을 날려 반격하며 부르짖었다.
[너 미쳤느냐?]
지청은 질풍과 같이 손을 뻗쳐 다시 공격을 했다. 제 8초를 겨루게 되었을 때 그 맨 왼쪽에 있던 승려는 아랫배를 발길에 걷어 차이게 되었다. 교봉은 지청의 무공이 음유하고 악랄한 것이 결코 소림사의 수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더욱더 의아해졌다. 그 승려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첩자다! 첩자야!]
지청은 성큼 다가서더니 왼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대뜸 내질러 버렸다. 이렇게 되자 그 승려는 그만 쓰러져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지청은 구리거울 앞으로 달려가더니 오른쪽 식지를 내밀어 구리거울에 새겨져 있는 첫번재 행의 첫째 글자인 일(一)자를 가볍게 눌렀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승려는 비밀을 '일몽여시'라고 했다.)
지청의 손가락이 미처 거울에서 떠나기도 전에 '끼륵끼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구리거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교봉은 그 소림승이 어째서 동문을 해쳤으며 구리거울 뒤에는 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이 일과 현고대사가 해를 입은 일이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살펴보았다. 이때 소림사에서 백여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사방을 순라하고 있다가 비명 소리를 듣고 다투어 달려왔다. 따라서 보리원 동서남북 사방에서 적지 않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지청은 손을 뻗쳐 구리거울 뒷쪽의 조그만 공간을 더듬었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지 지청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때 북쪽에서 다가온 발자국 소리가 이미 보리원 문 밖에 이르고 있었다. 지청은 발을 구르며 몸을 돌려 곧 떠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낮추고 구리거울의 뒷면을 살퍼더니 나직히 부르짖었다.
[이곳에 있군!]
그는 손을 뻗쳐 구리거울 뒷면에서 하나의 조그만 보따리를 끄집어내더니 자기의 품 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도망을 치려 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사방팔방에서 뭇승려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지청은 사방을 한 번 둘러 보더니 즉각 보리원의 앞문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 저사람이 저렇게 나간다면 즉시 붙잡히게 될 것이다.)
바로 이때 바람소리가 '휙'하니 일더니 누군가가 교봉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으로 달려 들었다. 교봉은 바람소리를 듣고 왼손을 뻗혀 적의 왼쪽 완맥을 움켜 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혀서는 그의 등심에 있는 신도혈(神道穴)에 갖다대고는 내력을 약간 쏟아 내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전신이 시큰거리며 마비되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교봉은 적을 사로잡고는 그의 얼굴을 바로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지청이었다. 교봉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알아차릴수 있었다.
(그렇다! 이 사람도 나같이 불상 뒤에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세번째 불상을 선택한 이유는 이 불상의 신형이 가장 비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앞문으로 도망나가는 듯하더니 살그머니 뒷문쪽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가? 음, 음... 땅바닥에 다섯 명의 화상이 쓰러져 있지만 나중에 다른 승려들이 들어와 그들의 혈도를 풀어 주고 묻게 된다면 그 다섯 명의 화상은 지청이 바로 앞문으로 달아났다고 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모두들 이 보리원을 수색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 참, 이 자는 정말 계책에 뛰어나구나!)
교봉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붙잡고 있는 지청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입을 그의 귓가에 갖다대고 나직히 말했다.
[만약, 떠든다면 나는 일장으로 너의 목숨을 빼앗고 말겠다. 알겠느냐?]
지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때 앞문으로 칠팔 명의 화상이 들이닥쳤다. 그 중에 세 명은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다. 대전은 대뜸 환하게 밝아졌다. 뭇 승려들은 대전에 다섯 명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떠들기 시작했다.
[또 교봉이란 악적이 독수를 썼군!]
[어이쿠, 큰일났다. 이 구리거울이 어째서 위로 올라가 있지? 교봉이 보리원의 경서를 훔쳐갔다!]
[빨리, 방장스님께 알려라!]
교봉은 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쓰게 웃었다.
(또 이 빚은 내 앞으로 계산되는구나.)
대전에 모여든 승려는 점점 늘어만 갔다. 별안간 대전에서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멎었다. 곧이어 뭇승려들은 일제히 입을 열어 부르짖었다.
[방장스님께서 인사드립니다. 달마원 수좌님께 인사드립니다. 용수원(龍樹院) 수좌님께 인사드립니다.]
곧이어 '철썩철썩'하는 가벼운 음향이 들려왔다. 그 누가 손을 써서 지원과 지감 등 다섯 승려의 혈도를 풀어 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교봉이 부린 수작이냐? 그가 어떻게 이 구리거울의 비밀을 알았지?]
지감은 말했다.
[교봉이 아닙니다. 지청입니다.]
곧이어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 좋아, 너는 어째서 동문을 암살했지?]
교봉은 불상 뒤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누구를 보고 말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지감 사형! 왜 나를 모함하십니까?]
[우리 다섯 사람을 발로 차고 경서를 훔쳐간 것이 바로 네가 아니냐? 너, 정말 대단하구나! 방장스님께 알립니다 이 지청이 사사로이 보리원의 구리 거울을 열고 숨겨 놓은 경서를 훔쳐 갔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리쳤다.
[뭐라고? 뭐라고? 나는 줄곧 방장스님 곁에 있었소. 언제 와서 숨겨 놓은 경서를 훔쳐 갔단 말이오?]
그러자 늙수그레한 음성이 싸늘히 말했다.
[먼저 구리거울을 내려 놓고 사정을 이야기해 보아라.]
지연이라고 불리우는 승려가 다가가서는 구리거울을 원 위치로 되돌려 놓았다. 이렇게 되자 대전에 있는 뭇승려들의 사정을 교봉은 거울을 통해서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한 승려가 손짓 발짓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교봉은 그를 바라본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그 사람이 바로 지청이었던 것이다. 교봉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자기에게 붙잡혀 있는 그 승려를 바라 보았다. 이 자의 모습과 대전의 지청의 모습은 정말 똑같지 않은가?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모습이 이토록 닮은 사람이 있다니! 그렇다. 이들 두 사람은 아마 쌍동이 형제일 것이다. 그 방법이 괜찮군! 한 사람은 소림사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있고 한 사람은 밖에서 지키고 있다가 기회가 도래하게 되었을 때 다른 쌍동이 화상인 척 절안으로 들어와 경서를 훔쳐 간다면 감쪽 같겠지.)
지감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지연 등 네 승려가 보조를 맞추었으며 그의 말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현자방장은 줄곧 그렇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지감의 말이 끝나자 천천히 물었다.
[자네는 똑똑히 보았는가? 정말 지청이 틀림없던가?]
지감과 지연은 동시에 대답했다.
[방장 스님께 알립니다. 우리는 그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찌 지청을 모합하겠습니까?]
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지청은 조금 전까지 줄곧 내 곁에 있었으며 한번도 떠난 적이 없다. 달마원 수좌도 함께 게셨느니라.]
방장의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대전에 있던 뭇승려들은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어 반박하지 못했다. 달마원 수좌인 현난대사는 입을 열어 말했다.
[그렇다. 나 역시 지청이 방장 사형을 모시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언제 보리원으로 와서 경서를 훔쳤겠느냐?]
용수원의 수좌인 현적대사가 물었다.
[지감, 그 지청이 너와 싸우게 되었을 때 권각법 가운데 특이한 점이 없더냐?]
지감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이쿠! 내가 왜 미처 생각을 못했을까요? 그 지청은 제자와 손을 쓰게 되었을 때 본문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현적대사는 말했다.
[어느 문파의 재간인지 너는 알아볼 수 있었느냐?]
지감은 얼굴에 망연한 빛을 띠우고 대답하지 못했다. 현적대사는 다시 물었다.
[펼치던 무공이 장권(掌拳)이더냐? 아니면 단타(短打)이더냐? 아니라면 금나수(擒拿手)? 그것도 아니라면 지당(地堂), 육합(六合), 통비(通臂) 같은 재간이더냐?]
지감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의... 그의 무공은 음독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제자는 몇 번이나 그의 무공에 넘어 갔습니다.]
현적과 현난 등 배분이 높은 노승과 방장은 서로 쳐다보았다. 현자대사는 두 손을 합장하더니 입을 열었다.
[보리원에 숨겨 놓았던 경서는 본사의 선배 고승이 저술하신, 불법을 크게 펼치고 세상 사람을 인도하는 대승경론(大乘經論)이다. 만약 불문의 제자가 손에 넣어서 그 내용을 연구한다면 퍽이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속세의 사람이 얻어가서 그 경서를 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실로 큰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러 사제들은 각기 거처하는 곳으로 돌아가 쉬도록 하고 오늘밤 직무가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봉행하도록 하시오.]
뭇승려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흩어졌다. 뭇승려들이 물러가자 대전에는 다만 현자, 현적, 현난 세 고승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불상 앞의 방석 위에 앉았다. 갑자기 현자가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정말 죄를 짓는군!]
그 한 마디가 떨어지자마자 세 고승은 갑자기 몸을 날렸다. 그리고 번개같이 불상의 뒤로 달려 왔으며 각기 다른 방향에서 일제히 교봉을 향해 손을 뻗쳐 일장을 후려쳤다. 교봉은 세 승려가 구리거울에서 자기의 종적을 발견한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 노승이 다짜고짜 손을 써오리라고는 더욱더 생각하지 못했었다. 삽시간에 교봉은 호흡이 가빠오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소림사 세 고승의 합격(合擊)은 대단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장력이 들이닥치는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아래 위와 좌우 그리고 등 뒤 이렇게 다섯 군데의 방위는 이미 이 세 고승의 장력에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만약 억지로 뚫고 나간다면 자기 역시 강경한 무공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된다면 상대방을 후려쳐서 다치게 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상처를 입어야 했다. 그는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두 손을 뻗쳐 공력을 돋우고는 앞으로 내밀었다. '와르르'하는 소리가 크게 나면서 그의 앞에 있던 불상이 대뜸 쪼개져 나가고 말았다. 교봉은 그 여세를 타서 지청을 들고 앞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순간 동으로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장풍이 밀어닥쳤다. 장력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바람이 이미 와 닿는 형편이었다. 교봉은 소림의 고승과 맞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대전 바닥에 내려서는 즉시 오른손에 구리거울을 달아 놓은 병풍을 들고 팔을 돌리면서 병풍을 방패처럼 등 뒤에다 세웠다. 그 순간 '창'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현난의 일장이 구리거울을 후려치게 되었다. 그 충격에 교봉의 오른팔이 시큰거렸다. 놀랍게도 구리거울이 달려 있는 병풍은 여러 조각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교봉은 덮쳐온 일장의 힘을 빌어 앞으로 일장 정도 재차 몸을 날렸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심상치 않았다. 교봉은 한 분의 소림 고승이 '벽공신권'(劈空神拳)과 같은 종류의 무공을 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렵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공력에 맞서 싸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구리거울을 등 뒤로 가져가 막았으며 오른팔에 내력을 잔뜩 돋우었다. 바로 이때 상대방의 장풍이 비스듬히 닥쳐 들어왔다. 교봉은 구리거울을 밀어 막았다. 그 순간 '퍽'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원래 이 구리거울은 이미 금이 가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현자방장의 벽공장을 받게 되자 병이 깨어지는 소리를 내게 되었다. 교봉이 거울을 돌려 막았을 때는 이미 지청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 섰을 때였다. 그는 지청의 몸이 매우 가벼운 것을 느꼈다. 그의 우람한 체구와는 실로 어울리지 않는 무게였다. 그런데 깨어진 병소리가 나는 순간 그 자신은 지붕 위의 처마끝에 그냥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무릎이 힘없이 꺾이면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강호에 나선 이래 한 번도 이와 같이 무서운 적수를 만나 본적이 없었다. 그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혜성과 같은 눈초리로 그 자리에 똑바로 서서는 세 고승을 맞았다. 그의 그와 같은 태도는 강적의 포위 공격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듯 장중해 보였다. 현자방장은 말했다.
[아미타불, 교시주, 그대가 소림사에 와서 사람을 죽이고 다시 불상을 훼손한 이유를 말하시오.]
그러자 현적대사는 호통을 내질렀다.
[나의 일장을 받아라!]
그러면서 두 손을 뻗쳐 바깥에서 안쪽으로 하나의 원을 그리더니 천천히 교봉 쪽으로 밀어 붙였다. 그의 장력이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교봉은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을 쉬기가 여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현적의 장력이 노도와 같이 밀려 들었다. 교봉은 구리거울을 내던지고 오른손으로 '강룡십팔장' 가운데 '강룡유회'(降龍有悔)라는 일초로 맞받았다. 두 가닥의 장력이 서로 부딪히자 '칙칙'하는 소리가 났다. 현적과 교봉은 똑같이 세 걸음을 물러섰다. 교봉은 눈깜짝 할 사이에 전신의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지청을 내려 놓고는 진기를 끌어 모았다. 그러자 그 즉시 새로운 기운이 넘쳐나는 것이 아닌가? 그는 현적이 두번째 장을 쓰기 전에 부르짖었다.
[이만 실례하겠소!]
그리고는 지청을 들고 나는 듯 지붕 위로 올라갔다. 현자와 현난 두 승려는 동시에 '어'하는 소리를 내었다. 경악해 마지않는 눈치였다. 현적이 조금 전 펼쳐보인 그 일장에는 그야말로 필생의 공력이 담겨져 있었는데 이를 '일박양산'(一拍兩散)이라 했다. 소위, 양산이라고 하는 것은 돌을 후려칠 때 돌가루가 날게 되듯이 사람의 몸에 후려치게 되면 혼백이 날아가 흩어지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 장법은 이 일초밖에 없었다. 장력이 너무 웅후한 까닭에 적에게 사용하게 되었을 때는 제 이초가 필요없이 적이 죽기 때문이었다. 이 일장은 산이라도 무너뜨리고 바다라도 뒤엎을 만한 내력을 기초로 하여 펼치기 때문에 인간의 몸으로 받아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교봉은 그 일초를 맞고도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는 커녕 놀랍게도 극히 짧은 시간에 기력을 되찾고 사람을 데리고 지붕 위로 하여 떠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군!]
현적은 말했다.
[반드시 일찍 제거해야만이 무궁한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외다.]
현자방장은 교봉이 떠나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교봉은 떠날 때에 뒤를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 그 구리거울은 현자방장의 한 주먹에 수십 조각이 나서는 땅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매 조각에 그의 뒷모습이 비추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자 교봉은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해졌다.
[어째서 내 자신의 뒷모습을 보게 될 때마다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일까? 어째서일까? 이 가운데 어떤 이상 야릇한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때는 소림사를 급히 떠나야 했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그러한 의문이 떠올랐으나 길을 재촉하게 되자 다시 그러한 사실을 잊어 버리게 되었다. 소실산의 길을 그는 지극히 잘 알고 있었다. 산 뒤로 달려가자마자 가파른 소로길을 찾아 나아갔다. 수마장을 나아가게 되자 소림사의 승려들이 쫓아오는 기척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제서야 안심하고 지청을 내려놓고 호통을 내질렀다.
[네 스스로 걸어가되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런데 지청을 땅바닥에 내려 놓자 맥없이 주저않는 것이 아닌가? 아니, 털썩 쓰러져 버렸다. 이미 죽은 것 같았다. 교봉은 어리둥절해서 그의 입김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았다. 그의 숨은 지극히 미약했다. 다시 맥박을 짚어 보았다. 지극히 느리게 뛰고 있었으나 금방이라도 맥이 끊어질 것 같았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 많은 의문이 있어 물어 보려던 참이니 이렇게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 화상은 나의 수중에 떨어지자 음모가 발각나는 게 두려워 십중팔구 강한 독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나 보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가슴 속에 손을 갖다 대고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을 알아보려 했다. 그런데 손이 닿는 곳은 몹시 부드러웠다. 놀랍게도 여자인 것 같지 않은가! 교봉은 급히 손을 움츠렸다. 그는 더욱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 자는... 이자는 여자가 가장한 게 아닌가?)
어둠 속이라 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교봉은 호방하고 활달한 사람이라 조그만 예의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단예처럼 예의를 따지거나 꺼리낌이 많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지청의 등을 잡고 일으키며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도대체 당신은 남자요, 여자요?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다면 그대의 옷을 벗겨서라도 진상을 알아내겠소!]
지청의 입술이 몇 번 달싹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처럼 입을 놀릴 기운마저도 없는 것 같았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자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또는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는 즉시 오른손을 뻗혀 그의 등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렸다. 진기는 배에서 팔로 옮겨지게 되었고 다시 팔에서 손바닥으로 옮아져서는 지청의 몸 안으로 스며 들었다. 설사 그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더라도 그의 입을 통하여 어떤 단서라도 얻어내고 싶은 것이 교봉의 심정이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지청의 맥박은 강해지기 시작했고 호흡도 순조로워졌다. 교봉은 그가 일시에 죽을 것 같지 않게 되자 약간 마음을 놓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곳은 소림사와 그렇게 먼 편이 아니니 너무 오래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
그는 즉시 두손으로 지청을 안고 성큼성큼 서북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그는 다시 지청의 몸이 지극히 가볍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우람한 체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체중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대의 옷을 벗긴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겠지만 신발이야 벗기지 못할 것도 없겠지?)
그리고는 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신발을 벗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발목을 쥐고 보니 딱딱한 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살 같지 않았다. 약간 힘을 주어 잡아 당기자 한 가지 물건이 뚝 떨어졌다. 그것은 바로 나무로 만든 가짜 발이었다. 지청의 발을 만져보았다. 부드럽고 조그마한 발이 만져졌다. 교봉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음, 정말 여자로군!)
그는 즉시 경공법을 펼쳐 더욱더 빨리 달렸다. 새벽까지 달리게 되었을 때 그는 적어도 소림사와는 오십여 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그는 지청을 안고 오른쪽에 있는 조그만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맑은 개울이 그 숲 속을 가로지르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개울가로 다가가 물을 떠서는 지청의 얼굴에 뿌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승포자락으로 몇 번 문질렀다. 그녀의 얼굴 조각이 한 조각 씩 떨어져 나갔다. 교봉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째서 그녀의 살갗이 이토록 썩게 되었을까?)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의 썩은 것 같은 살결 아래에 매끄럽고 윤기있는 살갗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지청은 교봉에게 안겨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전히 혼수상태였다. 그런데 이때에 맑은 물이 얼굴에 닿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교봉을 발견하자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교방주!]
그런데 그 소리는 너무나 미약했다. 한 마디 부른 후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교봉은 그녀의 얼굴이 얼룩지고 또 울퉁불퉁해서 참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녀의 승포자락을 냇물에 적셔서는 힘껏 그녀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잿빛가루들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들어났다. 교봉은 놀라 부르짖었다.
[아아... 아주 소저였군!]
지청으로 변장하고 소림사로 잠입한 사람은 바로 모용복의 시녀인 아주였다. 그녀는 역용술이 아주 뛰어난 편이었다. 나무다리로 키를 높였고 그리고 솜뭉치로 어깨를 세웠으며 배가 불룩하게 나오도록 했다. 그리고 또 밀가루와 풀을 얼굴에 발랐으며 거기다가 승모를 걸치고 승포를 입게 되자 지감이나 지연 등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록 깜쪽 같은 지청의 모습으로 변했던 것이다. 그녀는 희미한 정신 속에 교봉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려 하였고 소림사로 잠입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 했지만 전혀 기운이 없었다. 혀도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그저 '음'하는 소리로써 대답을 대신했을 뿐이었다. 교봉은 처음 지청이 간사하고 음흉한 자로서 자기의 부모님과 사부의 죽음에 반드시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진력이 소모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목숨을 구해내어 그에게서 모든 진상을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고 지청이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때는 온갖 참혹한 형벌로써 고문하여 다그치리라 결심했던 터였다. 그런데 그 사람의 참모습이 들어난 것을 보니 놀랍게도 갸날프면서도 아름답기 그지 없는 소저인 아주가 아닌가? 그로서는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교봉은 아주, 아벽 두 사람과 몇 번밖에 대면하지 못했고 또 서하 무사의 손에서 그녀 두 사람을 구했지만 아주가 역용술에 정통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교봉은 이때 그녀가 결코 중독된 것이 아니고 장력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생각을 더듬어 본 그는 그 이유를 짚어내었다. 현자방장이 벽공장으로 후려쳐 올 때 그 자신은 구리거울로 막았는데 아주에게 적중되지는 않았지만 그때 그가 왼손으로 그녀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장력이 어느새 그의 몸을 타고 그녀의 몸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연을 알게 되자 그는 마음속으로 미안한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쓸데없이 간섭하지 않고 그녀가 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었더라면 벌써 소림사에서 도망쳤을 것이고 결코 이와 같은 화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실 모용복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시녀에 대해서도 달리 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소녀가 이와 같은 중상을 입게 된 것은 모두 나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기필코 이 소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고을에 들어가서 의원에게 치료를 부탁해 보아야지.)
그리고 교봉은 말했다.
[아주 소저, 내가 그대를 데리고 고을로 들어가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겠소.]
아주는 말했다.
[내 품 속에 약이 있어요.]
그러면서 오른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는 기운이 없이 손을 더 뻗혀 품 속으로 가져가질 못했다. 교봉은 손을 뻗혀 그녀의 품 속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꺼내주었다. 약간의 은자이외에 하나의 목걸이에 넓적한 금붙이가 있었는데, 그 금붙이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그 위에는 두 줄의 조그만 글짜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써 있었다.
'천상성(天上星), 양정정(亮晶晶), 영찰란(永擦爛), 장안영(長安寧)'
그 밖에 조그마한 백옥으로 된 상자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담공이 행자숲속에서 그녀에게 준 것이었다. 교봉은 속으로 기뻐했다. 이와 같은 금창약은 지극히 효과가 탁월하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대의 목숨을 구하는 데 필요하니 실례가 되는 점을 이해하시오.]
그리고는 손을 뻗쳐 그녀의 상의를 벗겼다. 그리고 한 조그만 상자 속에 있는 한옥빙섬고(寒玉빙蟾膏)를 모조리 그녀의 가슴팍에 발라 주었다. 아주는 부끄러운데다가 상처의 격렬한 고통 때문에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교봉은 그녀의 옷을 다시 입혀 주고는 백옥상자와 금붙이를 도로 그녀의 품 속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약간의 은자는 자기가 갈무리한 후 다시 그녀를 안아들고 재빠른 걸음으로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이십여 리쯤을 나아가게 되자 사람이 꽤 많이 살고 있는 큰 고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곳은 허가집(許家集)이라는 곳이었다. 교봉은 이곳에서 가장 큰 객점으로 들어가 두 칸의 방을 얻은 후 아주를 쉬게 해주었다. 그리고는 의원을 불러와 그녀의 상처를 살피도록 했다. 그 의원은 아주의 맥박을 짚어 보더니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저의 병은 치료할 약이 없소이다.]
교봉은 처방전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감초, 박하, 질경, 반하 같은 따위의 약이름들이 씌어 있었다. 모두 다 배앓이도 고칠 수 없는 흔해빠진 약물들뿐이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담공의 영약도 그녀를 치료할 수 없다면 이 고을의 범용한 의원의 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즉시 진기를 돋우고 내력을 그녀의 몸 안에 넣어 주었다. 삽시간에 아주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았다. 그녀는 말했다.
[교방주, 그대가 저를 구해 주었군요. 천만 다행이예요. 만약에 그 중들 손에 잡히게 되었다면 아마도 목숨을 잃었을거예요.]
교봉은 그녀의 말하는 음성에 기운이 있는 것을 느끼자 크게 기뻐했다.
[아주 소저, 나는 정말 그대가 낫지 않을까봐 걱정하던 참이요.]
아주는 말했다.
[저를 소저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아주라고 부르시면 되어요. 교방주, 교방주는 어떻게 소림사로 가시게 되었나요?]
교봉은 말했다.
[나는 이미 방주가 아니니 이후로 나를 방주라 부르지 마시오.]
아주는 말했다.
[음, 미안해요. 이제부터는 교나리라고 부르기로 하지요.]
교봉은 물었다.
[내가 먼저 묻겠는데 그대는 소림사로 무얼 하러 갔었소?]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아, 이야기하자면 제가 너무 짓궂다고 웃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우리 공자가 소림사로 갔다는 말을 듣고 공자를 찾아 왔지요. 저의 일을 이야기해 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절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사문을 지키고 있던 그 지청이라는 화상이 아주 거칠게 '여자는 소림사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질 않겠어요? 나는 그와 언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나에게 욕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꼭 소림사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의 모습으로 변장을 했지요. 도대체 그에게 무슨 방법이 있어 나를 저지하려는지 보려고 했던거예요.]
교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대가 역용술로 변장하여서 끝내 소림사로 들어갔었군. 그렇다면 그 화상들은 그대가 여자인지 모르니 들어가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서 그 화상들에게 보여 주지 그랬소? 그렇다면 그 화상들은 울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라했을거요.]
그는 본래 소림사에 대해 지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째로 현고대사가 이미 죽었고 둘째로는 뭇승려들이 시비곡절을 따지지 않고 그에게 부친을 죽였다는, 천하에서 가장 악한 세 가지의 죄를 지었다고 누명을 씌웠기 때문에 자연 소림사에 대해 울화가 치밀었다. 아주는 몸을 일으켜 앉더니 손뼉을 치며 웃었다.
[교나리, 그 생각은 정말 그럴싸하네요. 제가 몸이 다 낫으면 다시 남장을 하고 절 안으로 들어가 다시 여자의 옷차림으로 바꾸어 입고서 여봐란듯이 대웅전에 가서 앉겠어요. 그러면 그 화상들은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어서 땅바닥에 누워 마구 뒹굴겠지요. 그것 참 재미있네요. 아...!]
그러다가 그녀는 맥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침대에 엎드린 채로 꼼짝을 하지 못했다. 교봉은 깜짝 놀라 식지를 그녀의 코 앞에 대어 보았다. 그녀는 숨이 완전히 멎은 것 같았다. 그는 초조하여 재빨리 손바닥을 그녀의 등으로 가져가서 그녀의 영대혈에 대고 자신의 진기를 그녀에게 쏟아 넣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지 않아 아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말하는 사이에 어떻게 그만 제가 잠이 들었네요. 교나리, 정말 미안해요.]
교봉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그대의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소. 잠시 잠을 청해 정신을 되찾도록 하시오.]
아주는 말했다.
[저는 피곤하지 않지요. 하지만 교나리는 밤을 새우다시피 하셨으니 가서 좀 쉬도록 하세요.]
교봉은 말했다.
[좋소, 조금 후에 내 다시 그대를 보러 오리다.]
그는 자기의 침실로 가지 않고 객당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다섯 병의 술과 두 근의 익힌 쇠고기를 달라고 하여 혼자 따라서 술을 마쳤다. 이때 그의 마음은 정말 번뇌스러웠다. 술이 들어가자 근심에 차 있던 그는 쉽게 취하였다. 그리하여 다섯 병의 술을 다 마셨을때 그는 거나하게 취기가 돌았다. 그는 두 개의 빵을 들고 아주에게 갖다 주려고 아주의 방으로 갔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두어 번 불렀으나 대답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침대 앞에 이르고 보니 그녀는 두 눈을 살포시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뺨이 움푹 꺼져 있어 마치 죽어 있는 것 같았다. 교봉은 손을 뻗혀 그녀의 이마에 대어 보았다. 다행히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재빨리 진기를 그녀의 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녀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교봉이 가져온 빵을 보더니 기쁘게 먹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교봉은 그녀가 지금 자신이 진기를 불어 넣어 주기 때문에 목숨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기를 그녀의 몸 안에 불어 넣어 주지 않는다면 한 시진도 못 되어 기운이 고갈되어 죽고 말 현편이었다. 그로서는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아주는 그가 생각에 잠겨서 말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띠우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교나리, 제 상처가 너무나 무거워서 담노선생의 영약으로도 치료하지 못하는 거지요? 그렇지요?]
교봉은 재빨리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그렇지 않소. 며칠만 쉬게 되면 낫게 될 것이오.]
아주는 말했다.
[저를 속이지 마세요. 저는 알 수 있어요. 가슴 속이 텅 빈 것 같은게 전혀 기운을 쓸 수가 없어요.]
교봉은 말했다.
[안심하고 조섭이나 해요. 내가 어떻게든 그대의 상처를 치료해 줄테니까.]
아주는 그의 말투로 미루어 자기가 매우 심한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만 겁이 덜컥 나서는 손을 떨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반쯤 먹은 빵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교봉은 그녀의 기운이 다 소진되어 버린 것을 알고 즉시 손을 뻗혀서 그녀의 영대혈을 눌렀다. 아주는 이때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따뜻한 한 줄기의 열기가 교봉의 손바닥에서 자기의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녀는 사지백해가 상쾌해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본 이후 자기 자신이 여러 번 고비를 맞았으나 매번 교봉이 진기를 불어넣어 살려 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속으로 매우 고마와하는 한편 매우 당황하고 놀랍기도 하였다. 그녀는 영악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역시 나이가 어렸다. 그녀는 그만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교나리,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저를 이곳에 내버려 두고 혼자 떠나지 마세요.]
교봉은 그녀가 가련하게 생각되어 위로의 말을 했다.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니 안심해요. 이 교봉이 어떤 사람이요. 어찌 어려운 처지에 놓인 친구를 버릴 수 있겠소.]
아주는 말했다.
[저는 교나리의 친구가 될 자격이 없어요. 교나리, 제가 만일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죽는다면 귀신이 된다지요?]
교봉은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요. 그대는 나이가 이토록 젊은데 그까짓 가벼운 상처로 어찌 죽을 리가 있겠소?]
아주는 물었다.
[그대가 날 속이는 것이 아닌가요?]
교봉은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아주는 말했다.
[교나리는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영웅호걸이예요. 모든 사람들은 '북교봉 남모용'이라고 하고 있어요. 따라서 교나리와 저희 공자께서는 남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어요. 그러니 교나리께서는 한평생 터무니없는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교봉은 미소했다.
[어릴 때 나는 종종 거짓말을 했었소. 그러나 훗날 강호에 되돌아 다니게 되었을 때부터는 사람을 속이지 않았소.]
아주는 물었다.
[내 상처가 심하지 않다고 하는 말은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요?]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자기의 상처가 매우 심한 것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급해 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더욱더 구하기 어렵게 된다. 이 소저를 위해서는 부득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는 말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요.]
아주는 한숨을 내저었다.
[그렇다면 안심이예요. 교나리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교봉은 물었다.
[무슨 일이요?]
아주는 말했다.
[오늘밤 저와 함게 이방에 계셔 주세요. 저를 떠나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교봉이 떠나기만 한다면 내일 아침까지 견디어 낼 수가 없을 것 같아 겁이 났던 것이다. 교봉은 말했다.
[좋소, 그대가 말하지 않더라도 나는 여기 앉아 그대와 하룻밤을 보내려고 하던 참이요. 그대는 말을 하지 말고 편안하게 한숨자도록 해요.]
아주는 눈을 감더니 다시 잠시 후에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교나리, 잠이 오지 않는군요.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어요?]
교봉은 말했다.
[무슨 일이요?]
아주는 말했다.
[나는 어릴 적에 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땐 어머님이 침대 옆에서 노래를 불러 주곤 했지요. 노래를 세 번만 불러 주면 꼭 잠이 들곤 했어요.]
교봉은 미소했다. 아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의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계신지도 몰라요.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 계신 지도 모르구요. 교나리, 저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시지 않겠어요?]
교봉은 그만 쓸쓸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와 같이 우람한 체구의 사나이가 한 조그만 소녀를 달래느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실로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나는 정말 노래할 줄을 모르오.]
아주는 말했다.
[어릴 적에 어머님이 노래를 불러 주지 않았나요?]
교봉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말했다.
[그런 일은 있었지. 하지만 기억을 한다 해도 부르지는 못할 것이요.]
아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래를 못 부르겠다니 할 수 없군요.]
교봉은 겸연쩍게 말하였다.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르지를 못한다오.]
아주는 갑자기 생각이 난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되었어요. 교나리, 다시 한가지 일을 부탁드리겠어요. 이번에는 응낙해 주세요.]
교봉은 아주가 아주 천진난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이나 행동이 종종 엉뚱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따라서 그녀가 자기에게 다시 부탁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짓궂은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여기며 말했다.
[먼저 말해 보시요. 응낙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응낙하고 그렇지 못한 일이라면 응낙할 수 없소.]
아주는 말했다.
[이 일은 세상에 너댓살 되는 사람이라면 모조리 다 할 수 있는 일이예요. 참 쉬워요.]
그래도 교봉은 그 술수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먼저 분명히 말하도록 하시요.]
아주는 방긋 웃었다.
[좋아요. 저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토끼 오라버니의 이야기도 괜찮고 이리 할머니의 이야기도 좋아요. 그렇게 한다면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교봉은 눈쌀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난감한 일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질타풍운의 군호를 거느리는 강호제일의 방주였다. 그런데 며칠 사이로 방주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방에서도 축출됐다.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과 사부님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하루 사이에 잃어 버리고 말지 않았는가? 거기다가 자기 자신이 오랑캐인지 한나라 사람인지 근원조차 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부친과 어머니 그리고 사부를 죽였다는 세 가지의 큰 죄를 뒤집어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와 같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나 그 누구도 그와 같이 근심을 나누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위로받기는 고사하고 뜻밖에 이 객점에서 한 나이 어린 소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노래를 해야 하느니, 이야기를 해야 하느니 하는 딱한 입장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그였다면 이 따위의 남자답지 못한 상황에서 두말 없이 귀를 막고 그 자리를 떠났을 터였다. 사실 그가 한평생 즐긴 것이라고는 뭇형제들과 술을 마시며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떠들고 노는 일이었다. 그리고 술이 얼큰해지면 나라일을 논하거나 천하 영웅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그와 같은 그가 토끼 오라버니 이리 할머니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흘낏 아주를 보니 아주의 눈동자에는 아주 간절한 소망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게 되자 그는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속으로 생각했다.
(이토록 중상을 입었으니 완전히 치유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숨에 숨이 끊어져 금방이라도 세상을 하직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니 아무 이야기나 하나 해주자.)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좋소. 내가 이야기를 해드리지. 그러나 재미가 없을 것 같군.]
아주는 기쁜 빛을 띠우머 말했다.
[반드시 재미있을거예요.어서 빨리 해주세요.]
7. 유년시절(幼年時節)
교봉은 천천히 말했다.
[음... 그럼 이리의 이야기를 해주겠소. 옛날 어느 할아버지가 산길을 가고 있는데 마침 한 마리의 이리가 자루 안에 잡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소. 그 이리는 지나가던 할아버지를 보고 말했소. '이봐요, 할아버지. 이 자루를 풀고 나를 꺼내 주세요. 그러면 나는 은혜를 잊지 않을께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자루의 입구를 열고 이리를 꺼내 주었소. 그러자 그 이리는... 그 이리는...]
아주는 얼른 말했다.
[이리는 배가 고프다고 하면서 그 할아버지를 잡아 먹었겠죠?]
교봉은 말했다.
[그대도 그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구려.]
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중산(中山)이 쓴 이리 이야기잖아요. 저는 책에 씌어진 이야기는 듣고 싶지가 않아요. 시골 이야기를 해주세요. 책에 씌어진 얘기 말고요.]
교봉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시골 어린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지. 옛날 옛적에 어느 산골에 한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밖에 없는 아주 단란한 가족이었소. 그런데 그 아이는 일곱 살에 불과했지만 몸이 매우 건장하고 키도 컸다오. 따라서 아버지를 도와 나무를 하기도 했소.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병이 났소. 그들 집안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의원을 초청할 수도 없었고 약을 살 수도 없었소. 그런데 아버지의 병은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져서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소. 그래서 어머니는 집에 있는 여섯 마리의 암탉과 한 광주리의 계란을 고을로 가져다가 팔았소. 암탉과 계란을 팔아받은 돈은 몇푼 되지 않았소. 어머니는 곧장 의원의 집으로 가서 의원을 청하려고 했소. 그런데 그 의원은 산길이 너무 멀어서 환자를 보러 가지 않겠다고 했소. 어머니는 애걸을 했지만 그 의원 역시 막무가내로 고개를 흔들었소. 그래서 어머니는 엎드려 간곡히 빌었소. 그러자 그 의원은 이렇게 말했소. '산속에 사는 가난한 사람을 보러 갔다가 잘못하여 내가 장독(장毒)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라고 그러시요? 그리고 몇 푼으로 무슨 병을 치료하겠다는거요?' 어머니는 그의 소매자락을 붙들고 늘어졌소. 의원 역시 그것을 뿌리치려 했는데 어머니가 너무나 꽉 붙들고 있는 바람에 그 의원의 소매자락은 '쫘악'하는 소리와 함게 길게 찢어지게 되었소. 그 의원은 크게 노하여 어머니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발길질을 하였소. 그리고 그녀를 협박하고 옷값을 물어내라고 하였소. 그 옷은 새로 만든 것으로 두 냥을 물어내야 한다고 했소.]
아주는 거기까지 듣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 의원은 실로 고약한 사람이군요.]
교봉은 고개를 쳐들고 어두워져 가는 창밖을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그때 그 아이는 어머니의 옆에 있었소. 어머니가 남에게 업신 여김을 받고 발길에 채이기까지 하는 걸 보고 의원에게 달려들어 입으로 깨물려고 했소. 하지만 어린 아이에게 무슨 기운이 있겠소? 오히려 의원에게 잡혀서 대문 밖으로 던져지고 말았소. 어머니는 어린 아이를 부축하기 위해 대문 밖으로 달려나갔소. 이때 그 의원은 그들이 다시 와서 귀찮게 할까봐 대문을 걸어 잠그었소. 어린 아이는 이마를 돌에 부딪히고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소. 그 어머니는 일이 더 커질까봐 의원집 앞에서 더 머뭇거리지 못하고 울면서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게 되었소. 그러던중 그들은 한 대장간 앞을 지나가게 되었소. 그 대장간앞에는 돼지를 잡거나 소를 잡을 때 쓰는 몇 자루의 예리한 칼이 놓여져 있었소. 이때 대장장이는 한참 손님을 상대로 삽을 팔거나 곡괭이를 파느라고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었소. 그 아이는 한 자루의 칼을 슬쩍 훔쳐 품 속에 갈무리 하였소. 그 사실을 어머니는 눈치채지 못했소. 집에 돌아가자 어머니는 의원에게 당했던 일에 대해 한 마디도 아버지에게 얘기하지 않았소. 혹시 아버지가 화를 내게 된다면 병이 악화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오. 어머니는 그 몇 푼의 은자를 꺼내 아버지에게 주려고 했소. 그런데 어머니 품 속에 있떤 은자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소. 어머니는 당황하고 놀라는 한편 이상하게 생각했소. 그리하여 아들에게 물어보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 마침 아들은 시퍼런 칼을 숫돌에 대고 갈고 있었소. 이상하게 생각한 어머니는 물어 보았소. '그 칼은 어디서 났느냐?' 그 어린 아이는 훔쳤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서 거짓말을 했소. '누가 준거예요.' 어머니는 그 말을 믿지 않았소. 그와 같이 날카로운 칼이라면 시장에서 네 푼 반 정도는 주어야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소. 어린 아이에게 그런 칼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소?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누가 줬느냐고 물었소. 하지만 그 아이는 대답할 수 없었소.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소. '얘야, 어머니 아버지가 가난해서 평소 변변한 장난감 하나 사준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사내 아이가 한 자루의 칼을 사서 노는 것은 별로 대수로운 일아 아니란다. 하지만 나머지 돈은 이 어머니에게 주렴. 아버지가 병이 났으니 고기나 한근 사서 국을 끓여드러야 겠다.' 어린 아이는 그 말을 듣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소. '나머지 돈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어머니는 말했다. '약을 사려고 했던 네 푼의 은자 말이다. 칼을 사고 남은 돈이 있지 않았니?' 그애는 다급해져서 부르짖었소. '나는 돈을 갖지 않았어요! 나는 돈을 갖지 않았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번도 그아이에게 야단을 친 적이 없었소. 몇 살 먹지 않은 아이였지만 언제나 손님처럼 깍뜻하게 대해 주었소...]
교봉은 거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그랬을까? 나는 천하의 부모들이 친아들에게 그렇게 깍듯이 대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설사 아이를 아무리 귀여워한다 하더라도 아이에 대해 그토록 존중하고 깍듯이 대하지는 않지 않은가?)
교봉은 그런 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랬을까? 정말 이상하구나.]
아주는 물었다.
[무엇이 이상해요?]
이렇게 묻는 그녀는 이미 기운이 쇠진하여 목소리는 한가닥 실낱처럼 가늘었다. 교봉은 그녀의 진기가 고갈된 것을 알고 즉시 손을 벌려 그녀의 등에 갖다대고 체내의 내력을 돋우어 그녀의 몸 안에 밀어넣었다. 아주는 점차 정신을 되찾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교나리가 나에게 진기를 불어넣을 때마다 교나리의 내력은 그만큼씩 작아지지 않겠어요?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에게는 진기와 내력이 제일 요긴한 것인데 이와 같이 나에게 넣어 주시니 이 아주...아주는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하지요?]
교봉은 웃었다.
[나는 잠시 앉아사 운기행공을 몇 시간만 하면 곧 내력이 정상으로 회복되오. 그러니 보답을 할 것까지는 없소. 더군다나 나와 그대의 주인인 모용공자는 수천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흠모하는 처지가 아니겠소? 비록 대면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를 마음 속으로 친구처럼 여기고 있다오. 그대는 그의 집안 사람이니 나를 남처럼 생각하지 마시구려.]
아주는 침울히 말했다.
[한 시진이 지날 때마다 체내의 진기가 사그러드니 그대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교봉은 말했다.
[그대는 안심하시오. 나는 언젠가 의술이 고명한 의원을 찾아내어 그대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요.]
아주는 미소지었다.
[그 의원도 우리가 가난하다고 나의 병을 치료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그런데 교나리,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나요?]
교봉은 말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잘못을 시인하지 않자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갔소. 아들은 칼을 다 갈고 집 안으로 들어오다가 아버지와 나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소. 그 이야기는 아들이 돈을 훔쳐서 새 칼을 샀는데도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소. '그 애가 우리 집에 와서 한번이라도 기운차게 논 적이 있소? 그가 무엇을 하건 내버려 두구려. 우리는 지금까지 그에게 소홀히 대해 오지 않았소?' 두 사람은 거기까지 이야기하다가 아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소. 아버지는 부드러운 얼굴을 하여 아들의 머리와 어깨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소. '착한 아이지? 다음부턴 길을 다닐 때 머리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어쩌다가 넘어져서 머리를 다쳤느냐?' 아버지는 사라지게 된 네 푼의 은자와 아들이 새로 산 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조금도 기분이 상한다는 표정을 짓지 않으셨소. 그 아들은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제법 철이 들어 있었소. 그는 속으로 생각했소.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돈을 훔쳐서 칼을 산 줄로 알고 계시는구나. 차라리 실컷 때려 주거나 욕을 하고 야단을 쳐주신다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그들은 나에게 좋게만 대해 주시는구나' 아이는 속으로 불안하여 아버지에게 말했소. '아버지, 나는 돈을 훔치지 않았어요. 이 칼도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예요.' 아버지는 말했소. '너의 어머니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돈이 없어졌다고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니? 호들갑스럽기는... 여자들이란 그렇게 마음이 좁아 애야, 머리는 안 아프냐?' 그 애는 대답했소. '그런 대로 괜찮아요.' 아이는 마음이 답답하여 저녁밥도 먹지 않고 자러 갔소. 그는 침대 위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소. 이때였소. 어머니가 나직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소.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을 근심하고 있기 때문에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낮에 그 의원에게 모욕을 당하고 얻어맞은 것이 분해서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소. 그리하여 아이는 살그머니 몸을 일으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소. 그리고 밤을 도와 30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그 의원집의 대문 밖에 이르렀소. 그 의원집의 앞문이나 뒷문은 꼭 닫혀서 들어갈 수가 없었소. 아이는 몸집이 작았소. 그는 개구멍으로 기어 들어갔소. 한칸의 방에 있는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소. 의원이 아직 자지 않고 약을 다리고 있는 중이었소. 그 아이는 문을 열고 들어갔소...]
[어린 아이가 야밤에 남의 집에 들어갔으니 아무래도 큰 화를 당했겠군요?]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 의원은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도 쳐들지 않고 물었소 '거기 누구냐?' 아이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서는 소잡는 칼을 꺼내들고 그 의원을 힘껏 찔렀소. 그 아이의 키가 작았기 때문에 그 칼은 의원의 배를 찌르게 되었소. 그 의원은 몇 마디의 신음소리를 내뱉고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소.]
아주는 놀라와하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의원을 찔러 죽였나요?]
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아이는 다시 개구멍으로 기어나와 집으로 돌아갔소. 어두운 밤에 수십 리 길을 왔다갔다 했으므로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소. 그 이튿날 의원집의 식솔들은 의원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소. 그는 배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 나온 채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소. 그런데 대문과 뒷문은 꼭 잠긴 채 그대로였고 대문을 잠가 놓은 빗장에도 사람이 손을 댄흔적이 없었소. 그러니 흉수가 외부에서 들오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모두들 의원의 집안사람중의 누군가가 그랬다고 생각하게 되었소. 고을의 원님은 의원의 형제와 처자들을 잡아다가 매질을 하고 고문을 했소. 몇 년동안 소란을 피우게 되었는데 그 바람에 의원의 집은 폭삭 망하게 되었소. 그 사건은 지금까지 허가집의 커다란 의문으로 남아 있다오.]
아주는 물었다.
[허가집이라구요? 그렇다면 그 의원은... 이 고을에 살고 있었나요?]
교봉은 말했다.
[그렇소. 그 의원은 성은 등(鄧)이었소. 본애 이 고을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이었으며 멀고 가까운 이웃 고을에까지 소문이 났던 의원이요. 그의 집은 본래 이곳에서 서쪽에 있었는데 높다란 하얀 담장을 쌓아 놓고 있었소. 그런데 지금은 모두 황폐해졌을거외다. 조금 전 나는 의원을 찾아내어 그대의 병을 진찰받으려고 가는 도중에 그 집 앞을 지나게 되었소.]
아주는 물었다.
[그런데 그 병이 난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나요? 병이 낫게 되었나요?]
교봉은 대답했다.
[그후 소림사의 어느 한 분 화상의 약을 구해서 병을 치료하게 되었소.]
아주는 말했다.
[소림사에도 퍽이나 좋은 화상이 있군요?]
교봉은 말했다.
[그야 물론이오. 소림사에 계시는 몇 분의 고승들은 인정이 많고 의협심이 대단하다오. 정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오.]
그렇게 말하는 그는 다시 침울해졌다.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은사인 현고대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주는 '응'하더니 말했다.
[그 의원이 가난한 사람을 업수이 여기고 가난한 사람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은 정말 고약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죽을 죄를 지은 건 아니었어요. 그 어린 아이는 너무나 거칠군요. 저로서는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어떻게 감히 손을 써서 사람을 죽였는지 믿어지지 않는군요. 아, 교나리, 이 이야기는 진짜가 아니겠지요?]
교봉은 대답했다.
[정말로 있었던 일이요.]
아주는 한숨을 쉬며 나직이 말했다.
[그와 같이 흉악한 아이는 거란인과 비슷하군요.]
교봉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대는... 그대는 방금 무어라고 했소?]
아주는 그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별안간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교나리, 교나리, 정말 미안해요. 저는... 결코 일부러 교나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예요. 정말이예요.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요...]
교봉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대는 짐작했구려?]
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봉은 말을 이었다.
[우연히 하게 된 말이 종종 진실이 되는 수가 있소. 내가 그토록 잔인하게 손을 쓰게 된 것은 정말 내가 거란의 종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
아주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교나리, 이 아주가 터무니없는 말을 한거예요. 개의치 마세요. 그 의원이 교나리의 어머니를 발길로 찼으니 어릴 적부터 영웅적 기질이 있떤 교나리가 그를 죽인 것은 당연해요.]
교봉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그것은 비단 그가 우리 어머니를 발로 걷어찼기 때문만은 아니오. 사실 그 의원 때문에 내가 억울한 누명을 썼기 때문이었소. 어머니의 그 몇 푼 은자는 틀림없이 의원의 집에서 서로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땅바닥에 떨어뜨린 것이오. 내가... 한평생 가장 참지 못하는 일은 누명을 쓴다는 것이오.]
아주는 교봉을 위로했다.
[교나리, 그들은 교나리를 거란 사람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모함에 불과한 것 같아요. 사실 교나리가 호방하고 인정이 깊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 아니겠어요? 보잘것 없는 시녀인 이 계집애에게도 성의를 다해 돌보아 주고 있지 않아요? 거란 사람들은 이리처럼 흉폭해요. 교나리와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견줄 수 있겠어요?]
교봉은 물었다.
[아주, 내가 만약 정말 거란 사람이라면 그래도 나의 보살핌을 받겠소?]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나라 사람들은 거란인들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었으며 독사와 맹수처럼 두려워했다. 아주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져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린 하지 말아요. 그런 일은 절대 없어요. 거란족 가운데 만약 그대와 같이 그렇게 뛰어나고 인품이 좋은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 모두가 그토록 거란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았을거예요.]
교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정말 거란 사람이라면 아주 같은 계집아이도 나를 상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불현듯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아주에게 진기를 몇 번이고 넣어주는 바람에 내력이 적지 않게 소모되어 있었다. 그는 멍하니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다가 단정히 가부좌를 틀고 침대 곁의 의자위에 앉아서 천천히 운기행공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역시 눈을 감았다.
교봉은 한참 동안 운기행공을 했다. 갑자기 서북쪽의 지붕 위로부터 '스슥'하는 가벼운 음향이 두 번 일었다. 그는 즉시 어떤 무림의 고수가 지붕 위를 걸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동남쪽에서도 그와 같은 소리가 두어 번 들려왔다. 처음 서북쪽에서 그 소리가 났을 때 교봉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동남쪽에서 그와 같은 소리가 들려오자 십중팔구 자기를 찾아오는 것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직이 아주에게 말했다.
[내가 나가 보고 오겠소. 두려워하지 마시요.]
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봉은 촛불을 끄지 않은 채 방문을 반쯤 열어 놓고 몸을 옆으로 비껴 조용히 나가 후원 창 밖으로 돌아가서 벽에 기대어 섰다. 그러자 객처 동쪽에 있는 한 칸의 땅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상(尙) 여덟째 나리요?]
서북쪽 지붕 위에 있떤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관서(關西)의 기(祁)여섯째도 왔소.]
그러자 방 안의 그 사람은 말했다.
[그것 참 잘되었소. 함께 들어오도록 하시오.]
지붕 위의 두 사람은 함께 뛰어 내리더니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관서의 기 여섯째라면 '쾌도기육'(快刀祁六)이라는 사람으로서 바로 관서땅의 유명한 호한이 아닌가? 그리고 상 여덞째 나리라면 아마도 상동(湘東)의 상망해(尙望海)일 것이다. 소문으로 듣기에 이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나누어 주며 무공이 뛰어나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말하자면 음흉한은 아닐 것이다. 괜히 내가 쓸데없는 의심을 했구나. 그런데 그 방안에 있는 사람의 음성은 귀가 익은데 누군지 모르겠군.)
그러자 상망해가 입을 열었다.
[염왕적(閻王敵) 설신의(薛神醫)가 갑자기 영웅첩을 널리 돌려 강호의 동도들을 초청하고 있소. 그런데 그 영웅첩에는 '영웅 호걸들은 영웅첩을 보는 즉시 왕림해 주시길 바라오'라는 글귀가 적혀 있소. 포(鮑)형, 포형은 무엇 때문인지 알고 계시오?]
교봉은'염왕적 설신의'라는 말을 듣자 놀람과 반가룸을 감출수가 없었다.
(설신의가 바로 이 부근에 있었구나. 나는 멀리 감주(甘州)이 있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 있다면 아주 소저를 구할 수 있겠구나.)
그는 일찌기 설신의가 바로 당금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의원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신의'라는 두 자가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에 그의 본이름은 모두들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은 대부분이 과장된 것이지만 설신의는 죽은 사람을 살려 놓는다고 했으며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었어도, 아무리 중한 병에 걸려 있어도 살릴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염라대왕마저도 설신의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지옥의 사자를 보내 사람을 데려 오려고 할 때 옆에서 설신의가 종종 방해를 하며 사람을 살려 놓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의술이 신과 같이 뛰어날 뿐 아니라 무공 역시 탁월하다고 했다. 설신의는 강호 친구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며 또한 남의 병을 치료하게 되었을 때는 상대방에게 몇 초의 무공을 가르침받기를 즐긴다고 했다. 그에게 병을 치료받은 사람은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무공을 한두 수 전수해 주는데, 결코 자기의 무공을 숨기거나 하지 않고 자기가 제일 자랑하는 무공을 전수해 준다고 했다.
이때 쾌도기육이 물었다.
[포 노형, 이 며칠 무슨 장사를 했소?]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쩐지 방 안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있다 했더니'몰본전'(沒本錢) 포천령(鮑天靈)이었구나! 이 사람은 부자를 털어서 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로서 퍽이나 유명했다. 내가 개방의 방주 자리에 취임하는 날 그도 취임식에 참가했었지.)
그는 방 안의 사람이 바로 상망해와 기육, 그리고 포천령이라는 사실을 알자 더 이상 그들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내일 아침 일찌기 포천령을 방문하자. 그리고 그에게 설신의가 있는 곳을 물어 보아야겠다.)
이와 같이 생각하며 그는 방 안으로 되돌아오려고 했다. 그때 였다. 포천령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며칠간 마음이 괴로워서 장사할 흥미가 나야지. 그리고 오늘 들었는데 그는 부친과 어머니, 그리고 사부님을 죽였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듣자 더욱더 울화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요.]
그가 손을 휘둘러 탁자를 한 번 힘주어 내려치는 소리가 '탁'하고 들렸다. 교봉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음, 그는 나에 대해 말하고 있구나!)
이때 상망해가 입을 열었다.
[교봉이란 녀석은 명성이 자자했는데 거짓 인정과 의협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속여 온 것이 아니겠소? 그 누가 그와 같이 천인공노할 망행을 저지를 줄 알았겠소?]
포천령은 말했다.
[그가 개방의 방주로 있을 때 나는 그와 한번 만난 적이 있소. 나는 이제껏 그를 존경해 왔다오. 며칠 전 조(趙)세째가 '그는 거란 오랑캐의 종자이다'라고 하기에 나는 화를 내며 그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으며 그와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언쟁을 벌이기도 했었다오. 하마터면 그와 손을 써서 싸울 뻔할 정도로 교봉을 변명했었소. 그런데 역시 오랑캐는 금수와 다를 바가 없는가 보오. 그는 일시 흉폭한 성격을 감출 수 있었지만 끝내는 그 흉폭한 본성이 드러난 것이 아니겠소?]
기육은 말했다.
[그런 그가 소림사 출신이며 현고대사의 제자라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구려.]
포천령은 말했다.
[본래 이 일은 지극히 은밀해서 소림사의 승려들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봉이 그의 사부를 죽이게 되자 소림사에서도 이젠... 남을 속일 수 없게 되었던 것이지. 그런데 그 교가라는 악적은 그의 부모와 사부를 죽이면 그의 출신 내력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오. 하지만 자기의 출신 내력을 감추려다가 더 큰 죄를 짓게 되었고 마각을 드러내게 된 것이지.]
교봉은 문 밖에 서서 포천령이 자기를 비방하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몰본전 포천령은 나와는 조금 교분이 있는 자이다. 그는 경솔하게 남을 헐뜯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저와 같이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은 더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아! 이 교모가 이런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을 쓰게 되다니! 내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믿어 줄 사람은 없겠구나! 이후부터 성명을 감추고 은거해 버린다면 10년이 흐른 후 강호의 친구들은 나라는 존재를 잊어 버리겠지?)
삽시간에 그는 커다란 좌절감을 맛보았다. 이때 상망해가 입을 열었다.
[이 형제의 짐작으로는 설신의가 영웅첩을 돌리는 것은 바로 교봉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를 상의하기 위해서인 것 같소. 그 분 염왕적은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이고 말을 듣자하니 설신의는 소림사의 현관 현적 두 대사와도 교분이 돈독하다고 합니다.]
포천령은 말했다.
[맞았소. 강호에는 근래에 교봉의 악행 이외에는 영웅첩을 돌릴 만한 일이 없었소. 자, 상형과 기형, 우리 몇 근의 고량주나 마시면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합시다.]
교봉은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아 아주의 방으로 되돌아 왔다. 아주는 그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물었다.
[교나리, 적을 만났던가요?]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는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상처는 입지 않았겠지요?]
교봉은 강호에 뛰어든 이래 친구에게는 존경을 받았고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어 왔었다. 이 며칠간 겪은 것처럼 경멸이나 천대를 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아주의 그와 같이 부드러운 말을 듣게 되자 다시 자부심이 솟구쳐 올라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그들 무지한 소인들은 이 교봉에 대해서 쓸데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나를 모함하고 있소. 나를 모함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손을 써서 상처를 입히기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는 갑자기 크게 호기가 치솟았다.
[아주 소저, 내일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에게 가서 그대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할테니 안심하고 자도록 하시오.]
아주는 교봉의 그와 같은 천하를 굽어보는 듯한 태도를 보고 속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일었고 한편으론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눈 앞의 이 사람과 모용공자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우 닮은 점도 없지 않았는데 그것은 두 사람이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무척이나 교만하면서도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데 교봉은 거칠면서도 호방하여 한 마리의 호랑이를 연항시켰고 모용공자는 의젓하여 한 마리의 봉황을 연상시켰다. 교봉은 큰소리를 한번 치고는 더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듯 의자에 앉더니 눈을 감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아주는 등잔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교봉의 얼굴 근육이 실룩이는 것이 아닌가? 이때 교봉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비통하고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는 갑자기 연민의 정을 느꼈다. '눈 앞의 체격이 우람하고 거친 사내가 속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구나. 그리고 자기보다도 더욱 불행하구나'하고 생각했다.
이튿날 이름 아침, 교봉은 다시 내공을 아주의 몸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방값을 치르고 객점의 점원에게 한 대의 노세가 끄는 마차를 빌리도록 했다. 그리고 아주를 부축하여 마차에 태우고는 포천령이 기거하는 방 밖에 이르러 큰소리로 외쳤다.
[포형, 소제 교봉이 만나뵈러 왔소!]
포천령과 상망해, 기육 세 사람은 밤새도록 교봉을 욕하다가 피곤한 나머지 그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교봉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면서 각자 칼을 가진 자는 칼을 들고 검을 가진 자는 검을 뽑았으며 채찍에 능한 자는 채찍을 거머쥐었다. 세 사람은 무기를 드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자기의 무기에는 조그맣고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하얀 종이 위에는 교봉배상(喬峯拜上)이라는 조그마한 글자가 씌어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어젯밤 그들이 잠자고 있을때 교봉이 벌써 이 방에 들어와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교봉이 그들 세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다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포천령은 연편을 도로 허리에 찼다. 교봉이 그들을 해치려 했다면 이미 어젯밤에 손을 썼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문을 열어젖히며 낭랑히 말했다.
[포천령의 목 위에 있는 머리를 교형이 취하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와서 가져가시오. 이 포모는 전문적으로 도둑질을 하여 왔으므로 자랑할 거리라고는 없소. 그러나 귀하는 부친과 모친, 그리고 사부마저 죽이지 않았소? 하물며 포천령쯤 죽이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소. 죽이려면 어서 죽이시구려.]
교봉은 포권의 예를 했다.
[그 날 산동성 청주부에서 헤어진 이후 어느덧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갔구료. 포형의 풍채가 여전한 걸 보니 정말 반갑소이다.]
포천령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는 몸이오만 오늘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소이다.]
교봉은 말했다.
[소문에 들으니 '염왕적' 설신의가 영웅첩을 크게 돌린다 하더군요. 불초도 한번 가보고 싶은데 세 분과 함께 가도 좋겠소?]
포천령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설신의가 영웅첩을 돌리는 것은 모두 너를 상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너는 살기가 귀찮아져서 홀로 그곳으로 가려는 것이냐? 도대체 어떤 의도로 혼자서 가려고 하는 것이냐? 오래 전부터 개방의 교방주가 대담하면서도 세심하며 지용을 겸비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만약 믿는 데가 없다면 스스로 함정에 뛰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 아닌가? 나는 그의 속임수에 말려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교봉은 그가 주저하며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말했다.
[교모에게는 설신의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이다. 그러니 포형이 안내를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포천령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의 독수에서 벗어나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니 그를 영웅회(英雄會)로 데리고 가서 수십 명이 포위 공격을 한다면 그에게 머리가 세 개 있고 손이 여섯 개 달렸다 하더라도 끝내는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속으로 여간 걱정하지 않았으나 그는 역시 교봉을 영웅회로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영웅연(英雄宴)은 이곳에서 70여리 떨어진 취현장(聚賢莊)에서 열리게 되어 있소. 교형이 가시겠다면 더욱 좋은 일이요. 그런데 포천령이 미리 말해 두겠소만 본래 연회는 좋은 연회가 없고 모임도 좋은 모임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교형이 거기에 간다면 아마 위험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이 포천령이 먼저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마시요.]
교봉은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포형의 호의는 이 교모가 새겨 두겠소이다. 영웅연이 취현장에서 열린다면 주인은 유씨(游氏) 쌍웅(雙雄)이 아니겠소이까? 그곳은 익히 잘 알고 있으니 세 분은 먼저 떠나십시요. 저는 한시간쯤 있따가 천천히 떠나겠소이다. 그래야만 모두들 나를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 아니겠소?]
포천령은 고개를 돌려 기육과 상망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포천령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세 사람이 취현장으로 먼저 가서 교형이 왕림하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포천령과 기육, 상망해 세 사람은 방값을 치루고 말 위에 올라가 채찍질을 가하며 취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세 사람은 길을 가면서 의논하고 추측을 해보았으나 교봉이 홀로 영웅연에 나오겠다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기육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포형, 교봉이 옆에 세워둔 그 마차를 보았소? 그 마치에 아마도 미심쩍은 일이 있을 것 같더이다.]
상망해는 말했다.
[설마하니 그 마차 안에 무슨 인물을 매복시켜 두었겠소?]
포천령은 말했다.
[설사, 그 마차 속에 사람들을 가득싣는다 해도 7,8명 밖에는 싣지 못할 것이오. 교봉까지 합해야 열 명도 채 안 될터인데 그사람들이 영웅연에 와봤자 큰 바다에 한 척의 조그마한 배를 띠우는 것에 불과할테니 그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와 같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무림의 고수들이 삼삼오오로 떼를 지어 길을 재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두들 취현장의 영웅연에 참석하러 가는 무사들이었다. 이번 영웅연은 무예를 익힌 사람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다. 일정한 사람에게만 영웅첩을 돌린 것이 아니라 영웅첩을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참가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환영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영웅첩을 받은 사람들은 밤을 세워 쾌마로 동도들을 청했기 때문에 그 소식은 입에서 입을 통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 따라서 하루밤 하루 낮 사이에 아주 멀리까지 청첩장이 돌게 되었다. 하남성은 중원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만큼 그 고장의 무림인들 이외에도 북으로 가거나 남으로 가는 무림의 인사들이 소식을 듣고 모조리 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각지의 영웅호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번 영웅연은 취현장의 유씨 쌍웅과 '염왕적' 설신의가 함게 이름을 내어 개최한 것이었다. 유씨 쌍웅인 유기(游驥)와 유구(游駒)는 재산이 많은 부호였다. 그리고 교제도 매우 넓은 편이었고 무공도 대단했으며 명성 또한 꽤 알려진 사람이었다. 설신의는 모든 사람들이 애써 그와 사귀고저 하는 인물이었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부심이 강했다. 그러나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장담할 사람은 없었다. 설사 자기의 무공이 당장 무림에서 제일 간다 하더라도 병이 나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설신의와 같은 친구를 두게 된다면 그야 말로 하나의 목숨을 더 가지게 되는 셈이었다. 그 자리에서 당장 절명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설신의가 치료를 해주겠다고 나서기만 한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다시 건질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신의의 초청장은 그야말로 목숨을 구해 주는 부적과 다름없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본래 영웅첩(英雄帖)에 서명한 사람은 설신의, 유기, 유구의 세 사람이었다. 포천령과 기육, 그리고 상망해 세 사람은 취현장에 도착했다. 그러자 유씨 쌍웅의 둘째인 유가가 친히 그들을 맞아들였다. 대청으로 들어서니 대청에는 이미 각자의 무사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포노형! 돈 많이 벌었소?]
[포형, 이 며칠 장사가 잘 되지요?]
포천령은 잇따라 공수의 예를 해보였다. 각지의 영웅들의 인사치레에 대답을 한것이다.
8. 염왕적(閻王敵)
유구(游駒)는 포천령을 동쪽에 있는 주인석으로 안내했다. 주인석에 앉아 있던 설신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포형과 기형, 그리고 상형, 세 분이 이렇게 왕림하여 주시니 이 늙은이는 그야말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격이로소이다. 정말 고맙소.]
포천령은 재빨리 답례를 했다.
[설 어르신께서 부르신다면 이 포천령은 병이 나 꼼짝을 못한다 하더라도 들것에 실려서라도 왔을 것입니다.]
이때 유씨 쌍웅 가운데 형인 유기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정말 병이 나서 꼼작 못하게 됐다면 오라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떠메인 채 설나리를 찾아왔겠지.]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유구가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서는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을테니 뒤에 있는 대청으로 가셔서 음식이라도 약간 들도록 하십시요.]
포천령은 말했다.
[음식은 천천히 먹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초에게 한 가지 여쭈어 볼 말이 있습니다. 설 어르신과 두 분 유나리께서 초청하신 여러 손님들 가운데 교봉이 있습니까?]
설신의와 유 쌍웅은 교봉이라는 이름을 듣자 하나같이 안색이 변하였다. 유기가 말했다.
[우리가 이번에 돌린 것은 영웅첩이외다. 보는 사람마다 오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포형이 교봉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포형은 그 교봉이라는 자와 무척이나 교분이 두터운가 보지요?]
포천령이 말했다.
[교봉이란 녀석이 취현장에 와 영웅연에 참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그 곳에 모여 있떤 여러 군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객청에 앉아 있던 그들은 본래 제각기 때를 지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포천령의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입을 다물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포천령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으나 삽시간에 조용해지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모두 하던 이야기를 중간에서 뚝 끊고 남들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되었다. 삽시간에 대청은 조용해졌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바람에 뒤의 객청에서 술을 마시며 떠드는 소리, 그리고 복도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형편이었다. 설신의가 물었다.
[포형은 교봉 그 녀석이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포천령은 말했다.
[불초와 기형, 그리고 상형이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실, 말씀드리기가 부끄럽지요. 불초 세 사람은 어제밤 크게 낭패한 꼴을 당했습니다.]
상망해는 잇따라 그에게 눈짓을 했다. 어제밤에 일어났던 못난일을 들추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포천령은 설신의와 유씨 쌍웅이 똑똑할 뿐 아니라 이 영웅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지혜로운 자들이 많아 자신이 조금이라도 무엇을 속인다면 반드시 그들의 의심을 사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천히 허리에 차고 있던 연편을 풀었다. '교봉배상'이라고 씌어있는 조그만 종이쪽지는 여전히 그 연편에 붙어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그 연편을 설신의에게 바치며 말했다.
[교봉은 우리 세 사람에게 오늘 이곳으로 온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어떻게 교봉을 만나게 되었고 또 그가 교봉에게 어떠한 말을 하였던가를 한 자도 빠짐없이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상망해는 수치스러운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포천령은 태연자약하게 그와 같은 이야기를 끝마치고 끝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교봉이라는 녀석은 거란의 종자가 아닙니까? 설사 그가 인정이 많고 의협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그를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이미 고약한 본성을 드러내어 하루가 다르게 큰 사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가 멀리 도망쳐 버린다면 뒤쫓아 잡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도우심인지 그 스스로 이곳에 달려오겠다니 그야말로 천만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유구는 생각에 잠기며 침울하더니 말했다.
[교봉은 지용을 겸비한 인물이라 들었소. 그리고 그의 재주는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군요. 필시 경망스런 필부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찌 영웅전에 참가하러 오겠소?]
포천령은 말했다.
[그에게 어떤 간교한 계책이 있을지 모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자연 좋은 계책도 많이 나올테니 우리 모두 함께 의논해 보도록 합시다.]
그와 같은 말을 하는 사이에 밖에 또 다른 많은 영웅호걸들이 당도했다. 그안에는 '철면판관' 단정과 그의 다섯 아들, 그리고 담공 및 담파 부부와 조전손 등도 끼어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소림파의 현난, 현적 두 고승도 도착했다. 설신의와 유씨 형제들은 밖으로 나가서 그들을 환영하며 맞아 들였다. 이때 청지기가 들어와 보고했다.
[개방의 서장로가 전공장로 및 집법장로, 그리고 송, 해, 진, 오 네 장로를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뭇사람들은 흠칫했다. 상망해는 말했다.
[개방이 대거 교봉을 지원차 나타났나 봅니다.]
단정은 말했다.
[교봉은 이미 개방에서 추방되었고 개방의 방주도 아니요. 나는 친히 그들이 서로 원수가 되는 광경을 목격하였소.]
상망해는 말했다.
[옛날의 의리를 깡그리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유기가 말했다.
[개방의 뭇장로들은 모두 꿋꿋한 사내 대장부들인데 어찌 시비를 분간하지 못하고 원수를 변호하겠소? 만약 교봉을 돕는다면 그야말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가 되지 않겠소?]
뭇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신의와 유씨 쌍웅은 개방의 사람들을 맞으러 나갔다. 개방의 인물들은 불과 열 두세 명에 불과했다. 군웅들은 마음을 놓고 한결같이 생각했다.
(거러지의 두령들이 교봉을 편들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열 두 세명이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잠시 후에 개방의 사람들은 대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개방의 뭇사람들은 얼굴에 무거운 빛을 띠우고 있어 매우 심사가 어지러운 것처럼 보였다. 여러 사람들은 주인과 손님으로 나누어 앉게 되었다. 서장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설형, 그리고 유씨 집안의 두 분 노제, 당신들이 강호의 호걸들을 이곳으로 초청한 것은 바로 무림에 새로이 나타난 화근인 교봉 때문입니까?]
유기는 입을 열었다.
[바로 그렇소이다. 서장로와 개방의 여러 장로께서 일제히 왕림하여 주신것은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오랑캐를 잡아 죽여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귀방의 여러 장로들께서 응낙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떤 오해가 생겨 쌍방간의 화기가 깨어진다면 얼마나 유감스런 일이겠습니까?]
서장로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 자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소. 본래 그는 폐방을 위해 적지 않은 공을 세웠소. 최근만 하더라도 우리가 서하 일품당의 암수에 넘어갔을때 그가 나서서 구출해 주었지요. 그러나 사내대장부는 언제나 대국적인면을 중시해야 하고 조그만 은혜는 뒤로 제쳐두어야 하지 않겠소? 그는 우리 송나라의 원수요. 폐방의 뭇장로들은 비록 그에게 은혜를 입긴 했으나 사사로운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대의를 잊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외다. 대의멸친(大義滅親)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는 지금으로서는 폐방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외다.]
그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은 다투어 손뼉을 치며 갈채를 보냈다. 유기는 곧이어 교봉이 친히 이 영웅연에 참가하러 온다는 사실을 밝혔다. 개방의 뭇장로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들은 교봉을 따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교봉의 하는 일이 용기 있거니와 지략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교봉이 정말 혼자 이 취현장으로 달려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상망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교봉이란 녀석이 일부러 우리에게 그런 전갈을 하게 하여 우리가 이곳에 다 모여 있을 때 먼 곳으로 도망을 치려고 그러는지도 모르지요. 이것이야말로 금선탈각(金蟬脫殼)이라는 계책이 아니겠소이까?]
오장로는 손을 뻗쳐 탁자를 한번 후려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그따위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교봉이 어떤 인물이오? 그가 언제 한번 한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이 있었소?]
상망해는 그에게 욕을 얻어먹자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은 교봉을 돕겠다는 것이지? 좋아, 이 상모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군! 자, 우리 한번 겨루어 봅시다.]
오장로는 교봉이 부모를 죽이고 사부님을 죽였으며 소림사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속으로 여간 번민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슴 가득히 끓어 오르는 울분을 누구에게 터뜨려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상망해가 분수도 모르고 그에게 도전을 해오는 것이 아닌가? 오장로는 몸을 흔들하며 대청 앞의 정원으로 나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교봉이 거란의 종자인지 당당한 한나라의 사람인지 아직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정말 거란의 오랑캐라면 이 오모가 첫번재로 그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겠다. 그러나 교봉과 싸울 사람은 1,000명을 뽑는다 하더라도 너와 같은 후레자식에게는 차례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뭔데 이곳에서 큰소리를 치며 금선탈각이니 뭐니 지껄인단 말이냐? 이리 나오너라. 노부가 너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
상망해는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시퍼래졌다. 그는 '휙'하니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유기가 급히 끼어들었다.
[두 분은 모두 이 유모의 귀빈이시요. 그러니 이 유모의 얼굴을 봐서라도 서로 싸워서는 안 될 것이요.]
서장로 역시 말했다.
[오형제, 경망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어떻게 하더라도 본방의 명성은 지켜야할 게 아니겠소?]
그러자 사람들 가운데서 갑자기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개방에서 교봉과 같은 인물이 나타났으니 정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군! 모두들 그 명성을 돌보고 지켜야 할 것이외다!]
개방의 군호들은 그 말을 듣자 다투어 호통을 내질렀다.
[누가 한 말이냐?]
[사내라면 나서라! 사람들 틈에 숨어서 지껄인다는 것은 사내대장부의 할 짓이 못 된다!]
[어떤 후레자식이냐?]
그런데 그 사람은 한 마디를 던진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개방의 군호들은 그와 같이 비웃는 말을 듣자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상하였으나 말을 한 장본인을 찾지 못하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개방은 강호에서 제일 큰 방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개방의 군호들은 모두 거러지였다. 결코 예의를 따지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호통을 내질렀고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의 선조 18대까지 욕을 해댔다.
이와 같은 소란이 일고 있을때 한 명의 청지기가 총총히 달려와 유기의 곁에서더니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무어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유기는 안색이 변해서 한마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 문지기는 공포에 젖은 얼굴을 하고 손가락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유기는 설신의에게 귀엣말로 무어라고 했다. 그러자 설신의의 안색이 즉시 변했다. 유구는 그의 형님 곁으로 다가갔다. 유기가 유구에게 무어라고 몇 마디 말을 하자 유구 역시 안색이 확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그 분위기는 한 사람에게서 두 사람에게로 전해졌고 두 사람에게서 네 사람에게로, 네 사람에게서 여덟 사람에게로 전해졌다. 떠들썩하던 대청은 삽시간에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교봉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설신의는 유씨 형제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다시 현난과 현적 두 승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 모셔 오게.]
그 청지기는 몸을 돌려 나갔다. 군호들은 긴장된 표정을 하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자기편 사람들이 많아서 뭇사람들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교봉을 즉시 난도질 해서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봉의 위명은 너무나 컸다. 더군다나 그가 혼자 왔다는 말에 더욱 불안해졌다. 군호들은 교봉에게 어떤 간교한 음모가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어 더욱더 전전긍긍했다. 사방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따그닥, 따그닥'하고 들려왔다. 그리고 수레바퀴가 석판 위를 구르는 소리가 '우르릉, 우르릉'하고 들려왔다. 한 마리의 노새가 끄는 마차가 대문 앞에 이르는가 했더니 멈추지 않고 그대로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유씨형제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 사람이 너무나 무례하고 방자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쿵쿵'하는 소리와 함께 노새가 끄는 마차바퀴가 문턱을 지나게 되었다. 한 명의 대한이 손에 채찍을 들고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노새가 끄는 마차의 휘장이 내려져 있어 그 안에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군호들의 시선은 일제히 마차를 몰고 온 그 대한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네모진 얼굴에 키가 컸으며 어깨가 넓었다. 그리고 눈썹과 눈에서는 절로 위엄이 우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개방의 전임방주 교봉이었다. 교봉은 채찍을 자기 옆자리에 놓더니 마부석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포권의 예를 했다.
[설신의와 유씨 형제가 취현장에서 영웅연을 베풀고 있는데, 이 교모는 중원의 형제들에게 비난을 받는 몸으로서 후안무치하게 영웅연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급한 볼 일이 있어 설신의를 뵙고자 당돌하게 찾아 왔으니 용서해 주십시요.]
그리고 재차 깊이 읍을 했다. 그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교봉이 예의가 바르면 바를수록 뭇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어떤 음모를 준비해 놓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구는 왼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제자 네 명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장원 안팎에 어떤 이상이 없는지 알아 보려는 것이었다. 이때 설신의는 손을 맞잡고 반례하며 말했다.
[공께서는 무슨 일로 불초에게 부탁을 하러 왔소이까?]
교봉은 두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수레의 휘장을 걷고 손을 뻗어 아주를 부축하여 수레에서 내리게 했다.
[불초가 변변치 못하여 이 소녀가 다른 사람의 장력을 받아 중상을 입는 것을 막지 못했소이다. 당금 세상에서 설신의 이외에는 고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당돌함을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무쪼록 설신의께서 이 소녀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요.]
군호들은 수레에서 16~17세 정도의 처녀가 내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군호들은 마차에 어떤 무서운 계략이 꾸며져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 소녀는 몸에 담황색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광대뼈가 '툭'튀어 나온 소녀의 모습은 보기에도 징그러운 추녀였다. 원래 아주는 고소 모용씨가 강호에서 원망을 많이 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설신의가 아주의 내력을 알게 된다면 치료를 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허가집에서 옷을 새로 사서입고 수레 안에서 용모를 바꾸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의원이 진맥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남자나 나이가 많은 노파로 분장을 하면 쉽게 탄로가 날 것 같아 십 육칠 세 정도의 얼굴이 아주 못난 소녀로 분장을 했던 것이다. 설신의는 교봉의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천만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들 방법을 강구하여 사로잡으려고 하는 교봉이 자기 앞에 환자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 아닌가? 설신의는 아주의 용모를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용모도 아주 추악했다. 그러니 교봉이 이 나이 어린 소녀의 미색에 빠져 이곳에 나타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술에 밝은 만큼 체질이나 모습을 척 보기만 해도 사람 나름대로의 특징을 알아차릴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봉과 아주 두 사람이, 한 사람은 건장하고 거친데 반하여 한 사람은 약하고 섬세하여 전혀 비슷한 데가 없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는 그들 두 사람이 친척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잠시 생각해 본 뒤 물었다.
[이 소저의 성씨는 어떻게 되며 귀하와는 어떤 관계인지요?]
교봉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아주를 알게 된 이래 다만 그를 아주(阿朱)라고 만 불렀을 뿐 진짜 성이 주(朱)씨인지 아니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주에게 나직이 물었다.
[그대의 성이 주씨요?]
아주는 미소지었다.
[저의 성은 원(阮)씨에요.]
교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설신의, 그녀의 성이 원씨라는 것을 저도 지금에야 알았소이다.]
설신의는 더욱 의아해져 물었다.
[그렇다면 이 소저와 깊이 사귄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오?]
교봉은 말했다.
[이 소저는 나의 친구의 시녀입니다.]
설신의는 말했다.
[귀하의 그 친구는 누구요? 아마도 혈육과 같은 사이인가 보구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친구의 시녀를 이토록 보살펴 줄 수가 있겠소.]
교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친구와는 서로 대면한 적이 없는 사이입니다.]
말이 떨어지자 대청에 있던 군호들은 모두 '아!'하는 소리를 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들은 교봉이 이 일을 꼬투리삼아 어떤 간계를 부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교봉이 평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아무리 흉폭하고 악독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신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공공연히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속이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설신의는 손을 뻗어 아주의 맥을 짚어 보았다. 그녀의 맥은 지극히 미약했다. 그러나 체내에서는 진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지 않은가? 극히 어울리지 않는 증세였다. 그는 재차 그녀의 왼쪽 완맥을 짚어 보았다. 그러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교봉을 향해 말했다.
[이 소저가 만약 태행산 담공의 금창약과, 그대가 불어넣어 준 내공을 얻지 못했다면 이미 현자대사의 대력금강장력(大力金剛掌力)아래 죽었을 것이오.]
군호들은 그 말을 듣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담공과 담파 역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어떻게 하여 우리의 금창약을 바르게 되었을까?)
현난과 현적 두 대사는 더욱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방장사형이 언제 대력금강장력으로 저 소저를 때렸단 말인가? 만약 그녀가 정말 방장사형의 대력금강장력에 적중되었다면 어찌 지금까지 살아 있는가?)
그리하여 현난대사는 입을 열었다.
[설신의, 우리 방장사형은 수년 동안 본사에서 떠난 적이 없소이다. 그리고 이 수년 동안 소림사에 여자가 들어온 적도 없었소이다. 따라서 이 대력금강장력은 우리 사형의 손에서 뻗쳐 나온 것이 아닐겁니다.]
설신의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세상에 누가 또 있어 이 대력금강장력을 펼쳤단 말이요?]
현난대사와 현적대사는 서로 쳐다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 두 대사는 소림사에서 수십 년 동안 현자와 같은 사부에게서 무예를 배웠다. 그리고 힘써 무공을 연마했으며 온갖 심혈을 기울였으나 대력금강장력만은 자질의 한계로 말미암아 끝내 익히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력금강장력을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섭섭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사실 소림사에서는 종종 백여 년 만에 한 사람씩 특출한 인재가 나타나 그 장법을 익히곤 허던 것이다. 다만 무공을 연마하는 요결 등등은 역대 고승들이 남긴 무학경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백 명의 소림사 제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그 장법을 연성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어떤 무공요결을 잊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현적대사는 정말, '당신은 정말 대력금강장력에 상처를 입은 것이오?'하고 물고 싶었으나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묻는 것은 바로 설신의의 의술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였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개를 돌리고 교봉에게 물었다.
[그대는 소림사에 와서 우리 현고사형을 죽였고 우리 방장 사형의 대력금강장력에 일장을 맞은 적이 있소. 그런데 만약 그 일장이 이 소저에게 적중되었다면 어찌 살아 숨쉴 수가 있었겠소?]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고대사는 나의 은사입니다. 그 분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고도 보답을 못해드렸습니다. 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분을 해친 흉수를 잡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현난대사가 노해 말했다.
[그대는 그래도 잡아떼려는 것이오? 그렇다면 사로잡아간 소림승은 어떻게 되었소? 그 일도 설마 그대가 부인할텐가?]
교봉은 말했다.
[대사께서는 내가 한 분의 소림 고승을 사로잡아갔다고 했는데 그 고승이 누구지요?]
현적과 현난은 서로 쳐다볼뿐 입을 열지 못했다. 현자와 현적, 그리고 현난 3대 고승은 교봉에게 함께 협공을 했으나 교봉은 유유히 달아났었다. 그리고 분명 한 명의 소림고승을 잡아갔겄만 그 후 소림사의 모든 승려들을 살펴본즉 어느 한 사람도 없어진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이 괴이한 일은 실로 백 번 생각해도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이때 설신의가 입을 열었다.
[교형이 어제 홀로 소림사에 들어갔다 나왔으나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소림의 고승까지 사로잡아갔다니 그것 정말 이상하구료.]
교봉은 말했다.
[현고대사는 결코 내가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소림사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나 한 분의 소림고승도 잡아간 사실이 없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상하시겠지만 저 역시도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난대사는 말했다.
[어찌 되었든 이 소저는 우리 방장 사형의 장력에 맞은 것이 아니오. 그래도 우리 방장사형은 득도한 고승이고 일파의 장문지존인데 어찌 나이 어린 소녀에게 상처를 입히겠소? 이 소저에게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 방장사형은 결코 그녀를 상대로 하여 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두 화상이 차라리 아주소저가 현자방장에게 맞은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설신의는 소림사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치료를 해주지 않으려고 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교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현자방장은 자비로우신 분이오. 결코 중수법으로 나이 어린 소녀에게 중상을 입히지는 않았을 것이오. 십중팔구는 누군가가 소림사의 고승으로 변장하고 소녀에게 상처를 입혔을 것입니다.]
현적과 현난은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교봉 이 녀석은 간악하기는 하지만 말에 일리가 있다.)
아주는 속으로 웃었다.
(교나리의 말이 옳다. 정말 소림사의 고승으로 변장하여 사람을 속이고 함부로 손을 써서 상처를 입힌 사람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변장한 사람은 현자방장이 아니라 지청화상이었지.)
설신의는 현적과 현난 두 분 고승이 그렇게 말하니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이 세상에는 대력금강장력을 쓰는 사람이 또 있는 모양이오. 그 사람은 힘을 쓸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소. 그래서 원소저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거두지 않게 된 것이요. 그러나 그 자의 장력의 웅후함은 아마도 현자방장보다 뒤지지 않을 것이오.]
교봉은 속으로 탄복해 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자방장의 그 일장을 내가 구리거울로 막았기 때문에 그 힘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 설신의의 의술은 정말 신과 같구나. 맥을 한번 짚고 그 당시의 손을 쓴 상황까지 확실하게 짚어내는 것을 보아도 그에게 아주를 치료할 의술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생각한 그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우며 말했다.
[이 소녀가 만약 대력금강장력 아래 죽게 된다면 소림사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 셈이니 설신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는 깊히 읍을 했다. 현적은 설신의가 미쳐 대답을 하기 전에 아주에게 물었다.
[그대에게 금강장력으로 상처를 입힌 사람이 누구요? 그대는 어디서 상처를 입었소?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소?]
아주는 짖궂은 데가 있었다. 그녀는 교봉처럼 있었던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성질이 아니었다. 그녀는 때로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이기도 했고 때로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해서 사람을 골려 주기도 했다. 그녀는 현적의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화상들은 우리 공자를 모두 두려워하고 있으니 나는 아예 그를 내세워 그들에게 겁을 주어야겠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젊은 공자였어요. 얼굴 모습도 준수하고 풍채도 훤칠한데 나이는 28세 가량 되었어요. 나는 이 교나리와 객청에서 설신의의 의술이 얼마나 뛰어나며 이 세상에서는 다시 찾아 보기 힘들 뿐 아니라 옛부터 그와 같은 분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칭찬하는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신의는 한 평생 그와 같은 칭찬을 수없이 듣고 살았지만 묘령의 소녀로부터 듣기는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조금도 스스럼없이 과장까지 해가며 칭찬하는지라 설신의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은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교봉은 눈쌀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일이 언제 있었다고 이 소저는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지?)
아주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세상에는 설신의가 계시니 모두들 무공을 배울 필요가 없어졌어요. 그러자 교나리가 물었지요. '어째서?'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때려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설신의는 살려 놓을 수 있다지요? 그러니 검법을 배워서 무엇하겠어요? 교나리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그 분이 한 사람을 살려놓고, 교나리가 두 사람을 죽인다면 그분이 다시 한 쌍의 사람을 살려 놓을테니 모두들 헛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녀는 정말 언변이 좋았고 음성 또한 맑았다. 중상은 입었지만 그 고운 음성으로 청산유수같이 지껄여댔다. 그녀의 음성은 마치 옥쟁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듣기가 좋았다. 뭇사람들은 그녀의 말이 재미있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웃음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아주는 한번도 웃지 않고 계속 지껄여댔다.
[그런데 우리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 공자는 냉소를 치는 것이었어요. '천하의 장력에는 공력이 실려 있다. 그러므로 그 설가라는 사람은 헛되이 명성을 날리고 있을 뿐 내상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나의 이 일장을 그가 치료할 수 있는지 보아야겠다.' 그렇게 몇 마디 말하더니 갑자기 저를 향해 허공을 격하고 일장을 후려쳐왔어요. 나는 그가 나와는 3장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저 해본 소리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그러자 교나리는 깜짝 놀랐어요.]
그때 현적이 물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뻗쳐서 막았소?]
아주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교니라기 만약 손을 뻗쳐서 막았더라면 그 젊은 공자는 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을거예요. 교나리는 나와 무척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미처 저를 구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교나리는 급히 의자를 던져 장력을 막았지요. 그때 교나리는 힘을 매우 적절히 사용하였어요. 따라서 '우지끈'하며 그 의자는 젊은 공자의 벽공장력에 박살이 났어요. 그 공자는 바로 부드러운 소주땅의 말씨를 썼는데 손의 재간만큼은 절대로 부드럽지가 않았어요. 저는 대뜸 온몸이 두둥실하니 구름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았으며 반 푼의 힘도 쓸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그 공자는 말했지요. '너는 설신의에게 가서 치료를 해보라고 해.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 현자대사의 상처를 치료하게 될 때 손발이 어지럽지 않게 될 것이다.']
현난은 눈쌀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지?]
아주는 대답했다.
[그는 장래에 대력금강장력으로 현자대사에게 상처를 입히겠다는 듯이 말했어요.]
군중들은 모두 '아'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몇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그 자의 방법으로 그 자에게 펼친다는 수법이군!]
그리고 몇 사람은 말했다.
[그 사람은 과연 고소 모용이군!]
그들이 과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짐작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유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교형은 조금전 그 누군가가 소림의 화상으로 사칭해서 떠돌아 다니다가 이 소저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했소. 그런데 이 소저는 젊은 공자가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했소. 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이오?]
아주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림의 화상으로 사칭한 사람이 있긴 있었어요. 저는 친히 두 사람이 소림의 승려라고 자칭하면서 남의 집 검은 개를 잡아서 먹는 걸 보았어요.]
그녀는 자기의 거짓말 가운데 많은 헛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터무니 없는 소리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설신의 역시 그녀의 말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는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할지 어떨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서 현난과 현적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유기와 유구 형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교봉과 아주를 쳐다보았다. 교봉은 말했다.
[설신의께서 오늘 이 소저를 구해 주신다면 이 교모는 이후 설선생의 은혜를 길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설신의는 냉소했다.
[허허허, 이후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설마 하니 오늘 그대가 살아서 이 취현장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교봉은 말했다.
[살아서 나가든 죽어서 나가든 상관할 바 없겠지요. 어쨌든 이 소저의 상처만은 치료해 주십시요.]
설신의는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왜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야 하오?]
교봉은 대답했다.
[사람의 한 목숨을 구하는 것은 칠층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소녀가 무단히 목숨을 잃고 있는 상태이니 선생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요.]
설신의는 말했다.
[그 어떤 사람이 이 소녀를 데리고 와서 치료를 부탁해 왔다면 나는 분명 치료해 주었을 것이오. 그러나, 흥! 당신만은 안 되겠소. 당신이 데리고 온 사람이라면 나는 치료를 해 줄 수가 없소.]
교봉은 안색이 변하여 싸늘히 말했다.
[여러분이 오늘 취현장에 모인 것은 이 교모를 상대할 방법을 의논하자는것이 아니오? 이 교모가 모를 줄 아시오?]
아주는 불쑥 입을 열었다.
[어머, 교나리. 그렇다면 저를 위해 이곳으로 오는 모험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교봉은 말했다.
[나는 여러분들이 당당한 사내 대장부이며 분명히 시비곡절을 가릴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하오. 당신들이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 교모가 아니겠소? 이 소저는 나와 아무 관계도 없소이다. 설선생님은 이 교모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소. 그 감정을 이 원소저에게 연루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것이 아니겠소?]
설신의는 그 말에 할 말을 잊은 듯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사람의 병을 치료해 주거나 목숨을 구해 주는 일은 내 기분에 따라 행할 일이지 남이 억지로 권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오. 교봉, 그대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소. 우리는 그대를 포위 공격해서 난도질을 해 그대의 부모와 사부 앞에 제사를 지낼까 하던 참이오. 그런데 그대 스스로 찾아왔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소. 그대 자신이 스스로 자결토록 하시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오른손을 들어 한번 흔들었다. 그러자 뭇 영웅호걸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다투어 무기를 뽑아 들었다. 대청 안은 즉시 싸늘한 광채로 눈이 부실 정도가 되었다. 가지각색의 칼(刀)과 검(儉), 그런가하면 도끼나 채찍들이 번뜩거리게 되었다. 곧이어 높은 곳에서 함성이 들렸다. 또 처마 위와 집 모퉁이서 잠복해 있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 역시 무기를 들고 있었고 각처의 요로를 지키고 있었다.
9. 죽음을 위한 건배(乾杯)
교봉은 적지 않은 싸움을 치루어 왔으나 대부분은 개방의 제자들을 이끌고서 였었다. 그러니만큼 자기 쪽에서 언제나 사람이 많은 편이었으며 한번도 이처럼 많은 적들 속으로 홀로 뛰어든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심한 중상을 입은 소녀를 데리고 있지 않은가? 아주는 두려운지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부르짖었다.
[교나리, 어서 혼자서 도망치세요! 저는 상관하지 마시구요. 저들은 저와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저를 해치지는 않을거에요.]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이 사람들은 모두 의협심이 강한 사람들이니 이유없이 그녀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역시 이 시비의 장소에서 떠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사내 대장부가 사람을 구하겠다고 나섰으면 끝까지 구해야 한다. 이 교봉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떠나다니 말이 될 소리인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한 그는 즉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취현장에 모여 있는 고수들 가운데 태반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절기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기도 했다. 그는 그들을 대하게 되자 즉시 호기가 치솟아 올랐다.
(이 교봉이 피를 취현장에 뿌리게 되고 난도질을 당하게 된다해도 대수로울 게 무엇이랴? 사내 대장부라면 살아있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으며 죽는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그는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당신들은 모두 나를 거란 사람이라고 말하며 나라는 사람을 죽여 없애려고 하고 있소! 하하하...! 거란 사람인지 한나라 사람인지 이 교모 역시 모르고 있소이다! 하하하!]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 틈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지. 당신은 잡종이지! 당신 자신도 누구의 새끼인지 모르는 게 당연해!]
이 음성은 바로 조금 전 사람들 틈에서 개방의 사람들을 비웃었던 사람의 음성이었다. 이 자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가끔씩 한 마디를 내뱉고 입을 다물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군웅들은 누구인지 살피려고 시종 고개를 돌렸지만 입술을 움직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교봉은 그 말을 듣자 눈을 가늘게 뜨고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설신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만약 내가 한나라 사람이라면 오늘 당신이 나를 거란인이라고 모욕했으니 이 교모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만약 내가 정말 거란 사람이고 대송나라의 호걸들과 적이 되어 싸울 작정이라면, 대송나라의 영웅 한 사람을 해치게 되었을 때 당신이 그 사람을 다시 살려내지 못하도록 먼저 당신부터 죽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설신의는 대답했다.
[그렇소. 어찌 됐든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
교봉은 말했다.
[그래서 오늘 당신에게 이 소저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외다. 한 목숨과 한 목숨을 바꾸자는 것이오. 이 교모는 평생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않겠소.]
설신의는 냉소했다.
[허허허... 노부는 이제껏 사람을 치료해 달라는 부탁은 받았지 한 번도 협박을 받은 적은 없소.]
교보은 말했다.
[한 목숨과 한 목숨을 바꾸는 것은 무척 공평한 일이오. 어찌 협박이라고 하시오?]
그러자 사람들 틈에서 그 가느다란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당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가? 당신 자신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난도질당해 죽을 판인데 누구의 목숨을 용서하고 말고 하겠다는 것인가? 당신은...]
교봉은 갑자기 노해 소리쳤다.
[썩 이리 나서랏!]
그 소리에 대청 안이 쩌렁하게 울렸고 대들보 위에 쌓였던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군웅둘은 귀에 '윙'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 틈에서 한 대한이 쓱 나섰는데 그는 비틀거리고 있었으며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다. 아니 술취한 사람 같았다. 그자는 몸에 청포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잿빛이었다. 군웅들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담공이 갑자기 부르짖었다.
[아, 저자는 추혼장(追魂杖) 담청(譚靑)이로군! 맞아! 저자는 악관만영(惡貫滿盈) 단연경(段延慶)의 제자야!]
개방의 군호들은 악관만영 단연경의 제자라는 소리에 더욱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하나같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 그 날 서하의 현련철수 장군과 일품당의 고수들이 그들 자신의 '비소청풍'에 중독되어 개방의 방도들에게 사로잡혔을때 갑자기 단연경이 나타났었다. 개방의 군호들 가운데 그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단연경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해약으로 일품당 고수들이 중독된 독을 풀었었다. 그리고 떼를 지어 오히려 개방에 반격을 가해왔었다. 그러므로 개방의 군호들은 단연경이라고 하면 한편으로는 화도 났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꼈다. 개방에서 교봉이 떠난 이후 '천하 제일의 악인'을 만나게 된다면 끝끝내 대항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때 추혼장 담청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고통이 극에 달한듯 두 손으로 연신 자기의 앞가슴을 쥐어 뜯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배에서 사람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나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재서... 나의 법술(法術)을 깨트리는 것이지?]
여러 사람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모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청에 있는 사람 중에 극소수만이 그의 이런 재간이 복화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복화술이라는 것은 높은 내공과 결합시켜 펼쳐내면 상대방의 심신을 흔들리게 만들고 혼백을 앗아 죽게 하는 무예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공력이 자기보다 더 심오한 적을 만나게 되면 그 공력이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펼친 사람이 해를 입게 되는 것이었다. 설신의는 노해 부르짖었다.
[너는 악관만영 단연경의 제자가 맞느냐? 이 영웅연에 초대된 사람들은 천하의 호한들이다. 너와 같이 몰염치한 망나니가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오게 되었느냐?]
갑자기 높다란 담장 밖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영웅연이야? 내가 보기엔 개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데!]
처음 한 마디는 매우 먼 곳에서 들려왔으나 마지막 말이 끝나면서 그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높은 담장 위에서 표연히 내려서는데 키는 매우 컸고 행동은 민첩하기 이를데 없었다. 지붕 위에 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먹을 쓰거나 칼로 막으려 했으나 그 자는 유유히 피해냈다.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바로 궁흉극악(窮兇極惡), 운중학이었다. 운중학은 표현히 마당으로 내려서더니 몸을 흔들 하며 대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담청을 안더니 질풍과 같이 설신의에게 다가 들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설신의를 해칠까봐 7,8명이나 서서 설신의를 보호하려 했다. 운중학은 이미 그러한 것을 계산에 넣고 있는 듯했다. 그는 공격하는 듯하면서 뒤로 물러섰고 또한 동쪽을 치는 듯하면서 서쪽을 쳤다. 뭇사람들이 설신의를 보호하자 그는 번쩍 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높은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이번 영웅연에 참가한 고수들은 실로 많았다. 운중학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진 고수들이 50~60명은 안 되어도 30~40명은 족히 되었다. 그러나 운중학은 선기를 먼저 점하고 그 누구에게도 방비할 여유을 주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운중학의 경공법이 지극히 탁월하기 때문에 그가 담장 위로 올라가자 그 누구도 그를 쫓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군웅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죽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암기를 꺼내려 했다. 그리고 원래 지붕 위에 있던 사람들은 다투어 호통을 내지르며 운중학을 뒤쫓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때 교봉이 호통을 내질렀다.
[거기 서랏!]
그리고는 손을 들어 허공을 사이에 두고 일장을 후려쳤다. 장력이 질풍과 같이 뻗어나갔다. 마치 한 줄기 무형의 기운이 운중학의 등을 후려쳐가는 듯했다. 운중학은 답답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힘없이 담장 아래로 떨어지더니 그의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담청은 여전히 뻣뻣하게 서있었다. 다만 몸이 휘청하며 동쪽으로 기울어졌다가는 또 갑자기 서쪽으로 기울어지곤 했다. 그리고 입으로는 '야, 야'하는 매우 이상한 소리를 흥얼거렸는데 그 모양이 몹시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눈 앞에 있는 광경은 한평생 듣지도 못했던 광경이라서 두렵기만 했다. 설신의는 운중학이 무척 중한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빨리 손을 쓰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담청은 혼이 떠나간 상태라서 천하의 어떤 영단(靈丹)으로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교봉이 아무렇게나 호통을 내지르고 일장을 들어 허공을 격하고 후려쳤는데도 그와 같은 위력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교봉이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편 담청은 꼿꼿이 선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커다란 눈망울은 똑바로 뜨고 있었다. 이미 숨이 끊긴 것이었다. 조금 전 담청이 개방을 모욕하였을 때 모든 개방의 군호들은 십분 화를 내었으나 그 장본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헛되이 화만 내고 있었다. 그러나 교봉이 나타나자마자 쉽게 그 자를 죽여 버리는지라 하나같이 통쾌하게 생각했다. 송장로와 오장로같이 솔직한 사람들은 하마터면 소리내어 갈채를 보낼 뻔했다. 다만 교봉이 거란의 원수라는 생각에 그러한 감정을 억지로 참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생각하였다.
(그가 우리의 방주가 된다면 개방은 언제나 승리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의 개방은 걸음마다 가시밭길일 것이다. 따라서 개방은 다시 옛날의 위풍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운중학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어슬렁거리며 문을 나섰다. 그러나 역시 몇 걸음 가지 못해 입으로 다시 피를 토해내었다. 군웅들은 그의 상처가 깊은 것을 보자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저자는 우리들을 개들의 모임이라고 욕했으나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자를 어찌할 수 없었다. 오히려 교봉이 손을 써서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 것이 아닌가?)
이때 교봉은 입을 열었다.
[두 분 유형, 불초는 오늘 여기서 적지 않은 옛 친구를 만나 보게 되었구료. 이후에는 적이 되면 되었지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니 불초로서는 서글픔을 금할 길이 없구료. 따라서 몇 잔의 술을 얻어 마시고 싶소이다.]
뭇사람들은 그가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자 모두들 매우 놀랍고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유구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두고 보아야지.)
그는 장정들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취현장에서는 영웅연을 열기 위해 술과 음식을 충분히 장만해 놓고 있었다. 삽시간에 장정들이 술주전자와 술잔을 갖고 왔다. 교봉은 이를 보고 입을 열었다.
[작은 잔으로써야 어찌 흥을 돋굴 수 있겠소. 수고스럽지만 큰 잔을 갖다 주구려.]
두 명의 장정은 곧 큰 대접을 가져왔다. 그리고 한 주전자의 술을 교봉의 앞에 놓인 대접에 모두 부었다. 교봉은 말했다.
[모든 대접에 술을 가득 따르도록 하시오.]
두 명의 장정은 그 말을 따라 몇 개의 대접에 가득 술을 따랐다. 교봉은 한 대접의 술을 들고 입을 열었다.
[이곳에 모인 분들 가운데 많은 분이 교봉의 옛날 친구였소. 그러나 오늘 나를 사악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니 우리 함께 건배함으로써 절교합시다. 어느 분의 친구이고간에 이 교모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와서 한 대접의 술을 함께 마십시다. 그 사람에게는 지금까지의 교분을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소이다. 따라서 그대를 죽이는 것은 결코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대가 나를 죽이는 것도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외다.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증인이 되어 줄 것이오.]
뭇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잠시 흠칫했다. 대청 안은 조용했다. 여러 사람들은 한결같이 생각했다.
(내가 만약 먼저 나가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신다면 반드시 그가 쓰는 암수에 걸려들고 말 것이다. 그의 공격이 펼쳐진다면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소복을 걸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바로 마대원의 부인인 마부인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대접을 받아들더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신 주인이 그대의 손에 목숨을 잃었으니 그대와 무슨 옛정이 있다고 하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술대접을 입가로 가져가더니 한 모금을 마시자 입을 떼고 말했다.
[양이 많아 다 마시지는 못했으나 서로간에 원수가 되었음은 이 술과 같을 것이예요.]
그리고 그녀는 대접에 남은 술을 모조리 땅바닥에 쏟아 버렸다. 교봉은 얼굴을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목이 청수했고 얼굴은 상당히 고왔다. 그날밤 은행나무 숲 속에서는 횃불이 어른거려서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무서운 여자가 이렇게 갸날픈 모습을 지녔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교봉은 아무 말 없이 대접을 들어서는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옆에 있는 장정에게 손짓하여 다시 술을 따르도록 했다. 마부인이 물러간 후 서장로가 뒤어어 나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 대접의 술을 들이켰다. 교봉은 그와 함게 마주 바라보고 서서 다시 한 대접의 술을 비웠다. 전공장로가 그 다음으로 나왔고 그 다음으로 집법장로 백세경이 걸어나왔다. 그가 대접을 들고 술을 마시려 할 때 교봉이 입을 열었다.
[잠깐!]
백세경은 물었다.
[교형, 무슨 분부하실 일이 있소?]
그는 교봉에 대해서 평소처럼 공손했으며 이때의 어조도 평시와 다름이 없었다. 다만 방주라고 칭하지만 않았을 뿐이었다. 교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다년간 우애 깊은 형제로 지냈소. 그런데 이후부터는 원수가 되겠구료.]
백세경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교형의 신세에 대해서 불초는 일찌기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만약에 나라의 원한이 아니라면 이 백세경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교형에게 감히 덤비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내가 잘 알고 있소이다. 나중에 친구가 원수로 변하게 된다면 한바탕의 큰 싸움을 면할 수 없을 것이외다. 따라서 교봉은 한 가지 부탁이 있소다.]
백세경은 말했다.
[나라와 대의에 관계가 없는 일이라면 이 백모는 명을 받들겠습니다.]
교봉은 빙그레 웃으며 아주를 가리켰다.
[개방의 뭇형제들이 만약 이 교모가 옛날에 조금이라도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한다면 저 소저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뭇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그가 한 말이 곧 유언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러 친구들과 일일이 건배를 한 것에 곧이어 큰 싸움을 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내다보고 있었다. 중원의 뭇고수들의 포위 공격하에 그가 십 명이고 팔명이고 죽인다 해도 죽음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군호들은 그의 늠름한 기상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세경은 평소 교봉과 교분이 지극히 두터웠다. 그의 몇 마디 말이 일종의 유언과 다름이 없는지라 처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교형, 안심하시오. 백세경은 반드시 설신의에게 부탁을 드려 저 소저를 치료하도록 하겠소이다. 저 원소저에게 어떤 변고가 생긴다면 이 백세경은 자결을 하여 교형께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이 몇 마디의 말은 명백했다. 설신의가 치료해 줄런지 그것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반드시 전력을 기울여 간청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교봉은 말했다.
[그러면 이 형제는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백세경은 말했다.
[나중에 싸우게 될 때 교형은 조금도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 백모가 만약 교형의 손에 죽게 된다면 개방에선 자연히 다른 사람이 이 원소저를 돌봐 드릴 것입니다.]
그는 큰 대접을 들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술을 단숨에 비웠다. 교봉 역시 한대접의 술을 단번에 마셨다. 그 다음으로 개방의 송장로 해장로 등이 다가와 그와 술을 마셨다. 개방의 옛 사람들이 모두 술을 마시게 되자 나머지 문파의 영웅호걸들이 일일이 다가와서 그와 마주보며 대접의 술을 비웠다. 뭇사람들은 보면 볼수록 놀랐다. 교봉은 이미 사오십 대접의 술을 비운 것이다. 그러니까 커다란 통의 술을 모두 혼자 마신 격이었다. 따라서 장정은 다시 한 동이의 술을 내놓게 되었는데 교봉은 여전히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배가 약간 불룩해지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뭇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저렇게 마시다가는 취해서 죽게 되겠다. 손을 써서 싸울 필요도 없겠구나!)
그런데 교봉은 술기운이 있을수록 정신이 더 맑았고 기운도 더 용솟음쳤다. 이 며칠간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였고 답답한 심정을 풀 길도 없었다. 그는 마음껏 마시고 크게 싸워 보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60여 대접의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 포천령과 쾌도 기육 역시 그와 술잔을 나누었고 이어 상망해가 술잔을 들고 말했다.
[이 교가야, 나도 너와 술잔을 나누기로 하겠다.]
그 말투는 매우 무례했다. 교봉은 술기운이 올랐다. 그를 쏘아 보며 말했다.
[이 교모가 천하영웅들과 절교의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은 바로 옛날의 은혜와 우의를 단번에 없애자는 것이다. 그런데 네까짓것도 나와 술을 마실 자격이 있는가? 너와 나 사이에 무슨 교분이 있었지?]
그는 상대방의 대답도 듣지 않고 한 걸음 나서며 오른손을 뻗어 상망해의 가슴을 움켜쥐고 그를 대청 문 밖으로 내던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상망해는 심하게 벽에 부딪혀 대뜸 기절을 하고 말았다. 대청 안은 대뜸 소란스러워졌다. 교봉은 마당으로 나가 호통을 치며 말했다.
[어느 분이 먼저 나와 싸우겠소?]
군웅들은 그의 늠름한 기상을 보고 일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교봉은 호통을 쳤다.
[당신들이 손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손을 쓰겠소!]
그는 손을 쳐든 채 펑펑하며 이미 두 사람을 벽공장으로 후려쳐 땅바닥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이어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와 팔굽으로 치고 주먹으로 때리는가 하면 손으로 내리치고 발로 걷어차면서 삽시간에 몇 사람을 쓰러뜨렸다.
유기는 부르짖었다.
[모두들 벽에 기대어 서되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대청에는 삼백여 명이 모여 있었다. 만약 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교봉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더라도 결코 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중앙에 모여 있으니 교봉의 앞에 나설 사람은 불과 오륙인에 지나지 않았다. 칼과 창검을 사방에서 휘둘러댔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때 유기가 부르짖게 되자 대청 한복판에 빈터가 생겨나게 되었다. 교봉은 부르짖었다.
[나는 취현장 유씨쌍웅의 수단을 가르침받고 싶소이다!]
그리고 왼손을 쳐들더니 커다란 술항아리를 들고 유기 쪽을 향해 던졌다. 유기는 두 손을 들어 막는 동시에 장력을 돋우어 술항아리를 치려고 했다. 그런데 교봉이 잇따라 오른쪽 손을 뻗어 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술동이가 수천 조각으로 나누어졌다. 그 조각들은 지극히 예리했다. 교봉의 날카로운 장력에 밀려서 마치 수백 수천 자루의 강표와 비도처럼 날았다. 유기는 얼굴에 세 조각을 얻어맞아 얼굴이 핏물로 낭자하게 되었다. 옆의 10여 명도 상처를 입었다. 이렇게 되자 욕하는소리, 놀람에 찬 소리, 경고하는 소리 등이 크게 일어났다. 갑자기 대청 한 모퉁이에서 한 소년이 놀라 부르짖었다.
[아버님! 아버님!]
유기는 자기의 외동아들인 유탄지(游坦之)인 것을 알고 촉망중에 곁눈질을 해보니 그의 왼쪽뺨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역시 술동이의 파편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그는 호통쳤다.
[빨리 피해라!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나서느냐?]
유탄지는 말했다.
[네.]
그리고 대청뒤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개를 내밀고 교봉의 움직임을 살폈다. 교봉은 왼팔을 내밀어 또 다른 술항아리를 허공으로 쳐올렸다. 그리고 다시 일장을 가하려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등 뒤에 부드러운 장력이 휙 밀려왔다. 이 장력은 부드럽기는 했으나 웅후한 내력을 싣고 있었다. 교봉은 고수가 격출해낸 것임을 알고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손을 뒤로 돌려 일장을 받았다. 두 사람의 내력이 펑하고 부딪치면서 소용돌이를 쳤다. 각자 정신을 가다듬고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교봉이 바라보니 그 사람은 바로 그 형편없이 생겼으며 자칭 조전손리 주오정왕이라고 하는 무명씨 조전손이 아닌가? 그는 생각했다.
(이 사람의 내력이 대단하구나! 결코 얕볼 수 없는 상대이다.)
그는 숨을 들이키며 제 2장을 쳐냈다. 산이라도 넘어뜨리고 바다라도 가를 듯한 장력이 뻗쳐나갔다. 조전손은 두 손을 일제히 뻗어 교봉의 일장을 맞받으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가 호통을 쳤다.
[죽고 싶어요?]
그러면서 그를 비스듬히 끌어당겨 교봉에 의해 갈겨진 일격을 피하도록 했다. 그러나 교봉의 장력은 여전히 거세게 앞으로 밀려나갔다. 이렇게 되자 조전손의 뒤에 있는 세 사람이 그 장력을 맞게 되었다. 펑펑펑 세 번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세 사람이 일제히 날아서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바람에 벽에 발라 놓은 회가루가 펑펑펑 하며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조전손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를 잡아당긴 사람은 바로 담파였다. 그는 기뻐서 말했다.
[소연, 그대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구료!]
담파는 말했다.
[내가 그의 왼쪽을 공격할테니 그대는 오른쪽을 공격하도록 해요.]
조전손이 좋다고 응낙했을 때 갑자기 한 왜소하고 비쩍 마른 늙은이가 교봉에 게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바로 담공이었다. 담공의 몸은 매우 왜소한 편이었으나 무공은 확실히 뛰어났다. 왼손으로 장력을 후려치더니 곧이어 오른손을 질풍같이 내밀었다. 그리고 왼손을 일단 움츠렸다가 오른손이 장력을 뻗어낸 후 곧이어 왼손으로 장력을 보태어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연이어 펼치는 이 3장은 세 겹으로 밀려오는 파도처럼 보였다.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면서 그 힘이 한군데 모여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 위세는 그가 한손으로 뻗어내는 장력보다 세 배나 큰 위력을 나타냈다. 교봉은 말했다.
[훌륭한 장감삼접랑(長江三접浪)이오!]
그러면서 그는 왼손을 뻗어냈다. 두 개의 장력이 서로 부딪치면서 소용돌이쳤다. 그 기세에 사람들은 양편으로 물러섰다. 바로 이때 조전손과 담파 역시 공격을 해왔다. 곧이어 개방의 서장로와 전공장로 집법장로 등이 다투어 싸움에 가입했다. 전공장로는 부르짖었다.
[교형제! 거란과 송나라는 세불양립이오! 우리는 공을 위해 사사로운 정을 잊기로 합시다! 이 형이 실례를 무릅써야겠구려!]
교봉은 웃으며 말했다.
[절교의 술까지 마셨는데 형이고 아우가 어디 있소? 자, 받으시오!]
그리고 왼발을 내밀어 그를 걷어찼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개방에 대해 의리와 정이 남아있었다. 그들의 생명을 해치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외부 사람들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이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의 발길질은 중도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그 순간 쾌도기육이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둥실 떠 올랐다. 그는 스스로 뛰어오른것이 아니고 교봉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게 된 것이다. 그는 본래 손에 칼을 들고 교봉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몸은 위로 떠올랐으나 팔은 여전히 맹렬히 내려치는 자세가 되니 그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의 대들보를 내려치게 되었다. 그 칼은 한 자 정도 대들보에 박히게 되었고 그는 그만 허공에 매달린 꼴이 되었다. 쾌도기육의 이 칼은 그로 하여금 명성을 떨치게 한 무기였다. 오늘 대적을 맞이했는데 어찌 손을 놓을 수 있겠는가? 그는 오른손으로 힘주어 칼자루를 쥐고 놓지 않았다. 이러자 그의 몸은 높이 허공에 매달린 셈이 되었다. 이같은 광경은 괴이했으나 대청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생사의 기로에 임한 때라 그 누구도 정신이 헛갈리도록 그에게 주의할 수가 없었다. 누가 여유가 있어 웃음을 띠우겠는가? 교봉은 강호에 뛰어든 이후 많은 싸움을 겪었고 또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처럼 많은 사람과 대적하기는 한평생 처음이었다. 이때 그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내력이 소용돌이침에 따라 술기운은 더욱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는 두 손을 마구 흔들며 뭇고수들이 감히 덤비지 못하게 했다. 설신의는 의술은 지극히 고명했으나 무공은 보잘것 없었다. 그는 의술에 대해서는 뛰어난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서 환자를 보지 않고도 병세를 알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공을 좋아했다. 그의 사부는 무학의 조예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 설신의와 그의 일곱 사형제들은 동시에 사부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다. 설신의는 달리 스승을 모시지 않고 남들이 일찌기 생각지 못한 수단을 썼다. 즉 병을 치료해 주고 상대방의 무공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동쪽에서 일초를 배우고 서쪽에서 일식을 배워 그가 아는 무학의 종류는 강호에서 가장 많았다. 나쁜 것은 박식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만큼 박식하다보니 욕심만 많았지 제대로 소화를 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무공도 익숙하게 연마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의술은 신과 같다는 칭송을 받는 만큼 그가 이르는 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삼 푼 정도는 우러러보았다. 그가 상대방에게 무공을 겨루자고 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어느 누구도 설신의와 진짜로 무공을 겨루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아도취하여 천하의 무공을 십중팔구는 자기가 다 배웠다고 생각했다. 이때 교봉과 군웅들이 싸우는 것을 보니 출수의 재빠름과 뻗치는 힘이 실로 무섭기 짝이 없어 한평생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바라 얼굴이 잿빛처럼 창백해졌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 나가 손을 쓴다는 것은 더욱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있었으며 속으로 존경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살그머니 대청을 빠져나가자니 체면이 손상되는 것은 뻔한 노릇이 아닌가. 그가 흘낏 바라보니 한 노승이 자기 곁에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현난대사였다.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현난대사에게 말했다.
[조금 전 제가 실례된 말을 했소이다. 대사께선 탓하지 마시기 바라오.]
현난은 온 정신을 쏟아 교봉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여 설신의의 말을 듣지 못하고 두번재로 말했을 때에야 어리둥절해 물었다.
[무슨 말을 했길래 그토록 실례를 했다는 것이오?]
설신의는 말했다.
[나는 아까 교봉이 혼자서 소림에 들어갔다가 소림을 나오면서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고 또 한 분의 소림 고승을 인질로 사로 잡아 왔다니 그것 참 대단하다고 했죠.]
현난은 말했다.
[그게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오?]
설신의는 겸연쩍게 말했다.
[이 교봉의 무공을 보니 실로 세상에서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 것 같소이다. 이제서야 나는 그가 소림에 들어갔다 나오고 사람을 해쳤을 뿐 아니라 승려를 인질로 사로잡아서 나갈 충분한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몇 마디는 본래 현난대사에게 사과를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난대사가 들었을 때는 기분이 나쁜지라 코웃음을 쳤다.
[설신의는 소림사의 무공을 시험해 보자는 것이오?]
그는 설신의에게 핀잔을 주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커다란 소매자락을 휙 휘둘렀다. 그러자 소매자락 아래서 휙휙하는 힘이 교봉에게 발출되었다. 이 재간은 소림사 칠십이절기 가운데 하나로서 수리건곤(袖裏乾坤)이었다. 소매를 펼치면서 주먹의 힘을 소매자락 밑에서 발출하는 수법이기도 했다. 소림의 고승들은 참선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을 근본으로 했다. 그리고 무공을 익히는 것을 그 다음으로 쳤다. 화를 낸다는 것은 이미 계율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림사는 수백 년 동안 천하 무학의 종주격이었다. 따라서 권각법은 탁월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이 수리건곤은 주먹을 소매자락에 숨기고 주먹의 힘을 뻗쳐내기 때문에 보기에 우아했다. 그러니까 옷자락으로 주먹의 힘을 슬쩍 뒤덮고 있기 때문에 적이 주먹의 힘이 어디로 뻗치는지 볼 수 없게 할 수 있었고 상대방에게 손 쓸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옷자락에도 매섭고 날카로운 힘이 실려 있다는 것을 일반 고수들은 몰랐다. 이같이 소매자락을 펼치며 주먹의 힘을 발출하기 때문에 적은 온 신경을 그의 소매자락에 숨겨진 권초에만 쏟게 되는데 이때 그는 수세에서 공세로 나오고 소매자락의 힘으로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다. 이때 교봉은 그가 공격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넓은 소매자락이 고무펑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마치 태풍에 밀려오는 바닷물처럼 위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크게 호통을 쳤다.
[수리건곤! 역시 대단하군!]
그리고 휙 하며 그의 옷자락을 내리쳤다. 현난의 옷자락은 넓게 퍼졌고 교봉의 일장은 힘을 한 곳에 집결하고 있었다. 두 힘이 서로 부딪치자 수십 마리의 잿빛 나비들이 날아오르는 듯했다. 군웅들이 깜짝놀라 바라보니 그 잿빛나비는 모두 현난대사의 옷자락이 조각조각이 나서 날아오른 것이었다. 군웅들이 바라보니 현난은 두 팔의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쩍 마르고 뼈마디가 툭 튀어나왔는데 보기가 흉했다. 두 사람의 내경이 부딪히자 소매자락이 힘을 감당치 못해 찢겨나간 것이었다. 현난은 소매자락이 없어졌으니 소매자락 안의 건곤이 자연히 없어지게 되었다. 그는 크게 놀랐다. 또한 체면을 크게 깍인 것에 화가 나서 두 팔을 곧장 뻗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뭇사람들은 그가 펼치는 수법이 강호에서 널리 전해진 태조장권(太祖長拳)임을 알았다. 원래 송태조 조광윤은 한 쌍의 주먹과 한 자루의 간봉(桿棒)으로 대송나라의 금수강산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제왕들 가운데 송태조처럼 용맹한 자가 없었다. 태조장권과 태조봉(太祖棒)은 강호에 흘러나오게 되었고 그 당시에 무림에서 가장 유행하는 무기가 됐었다. 군웅들은 소림의 고승이 펼치는 수법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권법임을 알자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세번째 주먹을 내지르자 군웅들은 찬탄을 토했다.
(소림사가 명성을 떨친 것은 우연이 아니구나! 똑같은 일초의 천리횡행이지만 저 손 안에선 엄청난 위력이 쏟아지는구나!)
본래 수십 명이 교봉을 포위공격 하는 상태였으나 현난이 손을 쓰게 되자 나머지 사람들은 방해가 될까봐 자연스럽게 멀리 피하게 되었고 교봉이 도망칠수 없도록 에워싼 채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교봉은 다른 사람들이 물러서자 마음에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그는 휙하고 일권을 펼쳐냈다. 이 일초는 형진참장(衡陳斬將)으로, 역시 태조장권 가운데 한 초식이었다. 이 초식은 날렵하면서도 의젓했다. 굳굳한 가운데 부드러움이 엿보이고 부드러운 가움데 굳굳함이 엿보였다. 무림고수들이 한평생 바라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여지없이 내보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갈채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퍼지는 순간 곧 잘못되었다는것을 느꼈다. 이 갈채소리의 상대는 바로 대적해야 할 오랑캐가 아닌가. 이때 교봉은 다시 제 2초인 하삭입위(河朔立威)를 펼쳐냈다. 그의 1초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초식이었다. 대청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갈채를 보냈다.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아아''오오!'하는 나직한 탄성을 발했던 것이다. 이때 교봉와 현난은 칠팔초를 겨루게 되었으며 우열은 이미 판가름이 난 셈이었다. 그런데 교봉의 매일초는 조금 늦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난이 초식을 펼치면 교봉이 잇따라 펼쳐내는데 그가 젊고 힘이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행동이 신속해서 그런지 매일 초가 상대방에 먼저 닿는 것이었다. 이 태조장권은 640초밖에 되지 않았으나 매 1초가 서로 상극하고 있었다. 현난이 이 일초를 펼치면 교봉은 그 일초를 제압할 수 있는 일초를 펼쳤으니 현난이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이 도리는 누구나 알지만 뒤에 손을 써서 이긴다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었다. 현적은 현난이 열세에 몰리자 말했다.
[저 거란의 오랑캐 수법은 너무나 비열하군!]
교봉은 늠름하게 말했다.
[내가 펼치는 것은 송나라 태조의 친법인데 어찌 비열하다고 하시오?]
군웅들은 그 말을 듣고 그가 태조장권을 쓰는 의도를 알아차렸다. 만약 그가 다른 권법으로 태조장권을 패퇴시킨다면 그의 공력이 심후하지 않고 송나라를 세운 태조의 무공을 모욕하려고 했다고 탓하였을 것이다. 즉 오랑캐와 중화의 차이를 뭇사람에게 더욱 심어주고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두들 양편에서 태조장권을 쓰고 있으니 무공을 겨룬다는 그 자체에 아무런 명목도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현적대사는 삽시간에 현난이 생사의 고비길에 이르게 되자 더 말하지 않고 '찍'하고 일지를 날려 교봉의 선기혈(선璣穴)을 짚으려 했다. 그 점혈법은 소림사의 점혈절기인 천축불지(天竺佛指)였다. 교봉은 그가 일지를 찔러내자 경미한 소리가 일어나는 것을 듣고 몸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천축불지의 이름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는데 정말 대단하구려! 그런데 천축오랑캐의 무공으로 송나라 태조의 권법을 공격하여 이간다면 오랑캐와 내통하고 나를 팔아 먹게 될 뿐 아니라 중화라는 상국(上國)을 모욕하는 꼴이 되지 않겠소?]
현적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소림사의 무공은 달마조사로부터 전해내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달마조사는 천축의 오랑캐인이 아닌가? 지금 군웅들은 교봉이라는 오랑캐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소림의 무공은 이미 중원 땅에 전래된 지가 오래되었고 중원 각 파의 무공은 어느 정도 소림사와 연관을 갖고 있었다. 모두들 소림사와 오랑캐의 관계를 잊고 있다가 교봉이 하는 말을 듣자 모두 마음이 흔들렸다. 뭇영웅들 가운데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생각했다.
(우리들은 달마조사를 신처럼 받들고 있는데 어찌 거란사람만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는 것일까? 모두 오랑캐가 아닌가?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물론 크게 다르다. 천축 사람들은 우리 한민족을 잔혹하게 죽인 적이 없으나 거란 사람들은 포악하고 무섭게 우리 중화 동포를 죽이곤 했다. 그렇다면 결코 오랑캐라고 해서 모두 죽여 마땅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도 선하고 착하다는 구별이 있을 것이다. 거란사람 중에도 착한 사람이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대 대청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웅들은 생각했다.
(교봉이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이 아닌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히 옳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현난과 현적대사는 협공을 펼쳤으나 여전히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고 있었다. 현난대사는 자기의 권법이 매일초마다 적에게 당하게 되자 권법을 변화시켜 즉시 소림의 나한권법으로 공격했다. 그러자 교봉이 말했다.
[이것 역시 천축 오랑캐의 무술이 아니오? 오랑캐의 무공이 훌륭한지 아니면 우리 송나라의 무공이 훌륭한지 두고 봅시다.]
그러면서 그는 태조장권을 휙휙하고 격출했다. 뭇사람들은 교봉의 말을 듣고 입맛이 썼다. 모두 그를 오랑캐라는 이유로 포위공격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오랑캐의 무공이고 교봉은 송나라 태조가 직접 전해 준 권법을 펼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조전손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어떤 권법을 펼치든 부친을 죽였고 모친을 죽였으며 사부를 죽인 사람이니 죽여 마땅하오! 달려듭시다!]
그가 외치면서 달려가자 담공과 담파, 개방의 서장로, 진장로, 철면판관, 단씨 부자 등 수십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무공이 높은 고수들이었다. 이들은 이쪽이 공격하고 쉬면 저쪽이 공격하는 형식으로 차륜전(車輪戰)을 펼쳤다. 교봉은 주먹을 휘둘러 초식을 해소시키면서 낭랑히 외쳤다.
[당신들은 나를 거란인이라고 했소. 그렇다면 교삼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의 부모가 아니란 말이되오. 그 두 분 어르신을 나는 한평생 받들어 모셔 왔으며 또 사랑했고 절대로 해를 입힐 생각이 없었소. 내게 부모를 죽이고 사부를 죽였다고 누명을 뒤지어 씌우지 마시오. 현고대사는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준 은사요. 소림에서 현고대사를 나의 사부로 인정한다면 난 소림의 제자요. 여러분들이 소림제자를 포위공격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소?]
현적은 코웃음을 쳤다.
[흥! 터무니 없는 소리! 그런 말로 변명을 하지 마라!]
교봉은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소림제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사부를 죽였다는 죄명을 나에게 씌울 수는 없소. 흔히들 죄를 가하려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소? 당신들이 나를 죽이고 싶으면 공명정대하게 손을 쓰면 될 것이지 왜 말도 되지 않는 죄명을 뒤집어 씌우시오?]
그는 입으로 말을 하면서도 손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주먹으로 단중산을 치고 발로 조전손을 걷어찼고 팔굽으로 백발의 노인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이 간악한 자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손에 사정을 두고 시종 싸움에 임했다. 그에게 쓰러진 사람이 17~18명이나 되었으나 한 사람도 목숨을 잃은 자가 없었다. 또한 개방의 형제들에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서장로가 손을 써오면 그는 몸을 날려 피하곤 했다. 그러나 영웅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10 여 명을 쓰러뜨리면 다시 10 여 명으로 바꾸어지는 것이었다. 잠시 싸운 교봉은 놀랐다.
(이대로 싸우다간 나는 언젠가는 지칠 대로 지칠 것이다. 빨리 물러나는 게 좋겠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손을 쓰면서 한편으론 빠져나갈 기회를 살폈다. 조전손은 땅바닥에 쓰러져 꼼짝할 수 없었지만 교봉이 떠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그를 놓치지 말고 붙잡고 계시오! 저 용서할 수 없는 자식이 도망을 치려고 하오!]
교봉은 한참 술기운이 오르고 점점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러다가 조전손이 욕하는 소리를 듣자 밀려오는 노기를 억제할 수 없었다.
[이 자식이 처음으로 당신을 죽여 살인을 해야 하겠소!]
그는 공력을 돋우고 일장의 벽공장력으로 조전손을 격타했다. 현난과 현적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두 사람은 각기 오른손을 뻗쳐 교봉의 일장을 받으며 조전손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다. 그때 별안간 허공에서 사람 그림자가 번쩍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악'하고 기다란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앞쪽으로는 현난과 현적 두 사람의 장력을 받게 되고 뒤로는 벽공장력에 격타되었던 것이다. 그는 대뜸 늑골이 산산조각나서는 오장육부가 파열되어 입으로 선혈을 내뿜고 땅바닥에 힘없이 움츠려들었다. 그 사람은 쾌도기육이었다. 원래 그는 허공에 매달려 있던 시간이 짧지 않았다. 흔들흔들거리고 있던 중 대들보에 박혔던 검이 뽑혀지면서 아래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사람이 전력을 다한 장력의 중앙으로 떨어졌으니 어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현난은 말했다.
[아미타불, 교봉 그대는 더 많은 죄를 짓게 되었소.]
교봉은 대노해 말했다.
[이 사람은 반은 내가 죽였고 반은 그대 두 사람이 죽인 것인데 어찌 내가 죽였다고 하시오!]
현난은 부르짖었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업보로다! 만약 그대가 먼저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면 오늘 이 같은 싸움이 어찌 있었겠는가?]
교봉은 노해 부르짖었다.
[모두 내 앞으로 달아놓도록하시오. 그렇다고 나를 어떻게 하겠소?]
네 사람을 상대로 싸우다 그는 성질이 복받치게 되었다. 갑자기 그는 맹수로 변한 듯 한 사람을 움켜 잡았다. 바로 단중산이었다. 그러면서 왼손으로 그 사람의 칼을 뺏고 오른손으로 내려놓으며 왼손으로 내려치자 단중산의 머리는 두 쪽이 나고 말았다. 군웅들은 놀랐으며 분노했다. 교봉은 사람을 죽인 후 더욱 미친 듯 싸웠다. 칼을 춤추 듯 휘두르며 오른손으로는 주먹을 내지르곤 했다. 왼손의 칼의 기세는 감당할 수 없었다. 점점이 선혈들이 뿌려지고 대청안에는 시체들이 늘어갔다. 두 눈이 붉게 충혈돼 개방이고 뭐고 간에 닥치는 데로 죽이는 것이었다. 해장로가 그의 칼 아래 죽음을 당했다. 대청에는 피와 살이 튀고 머리가 굴러다니고, 단말마의 처참한 비명소리로 가득찼다. 교봉에게 죄가 있건 없건 그 자신은 이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아 태반의 사람들은 도망치고 싶었다. 유씨쌍웅은 정세가 불리해지자 한 사람은 단창을 들고 한 사람은 칼을 들었다. 두 사람은 소리를 내지르며 왼손의 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좌우 양쪽에서 교봉을 공격했다. 교봉은 아무 꺼리낌없이 사람을 죽이면서 싸우고 있었다. 공격해오는 일초일식은 눈을 떠 주시하는데 마음은 조금도 흐뜨러지지 않았다. 그는 상처를 전혀 입지 않았다. 유씨형제의 날아오는 기세가 날카로운 것을 보고 휙휙 하고 칼질을 해 옆에 있는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곧이어 기선을 제압하며 유기에게 공격해갔다. 그가 칼을 내려치자 유기는 방패를 들어 막았다. 교봉의 칼이 튀어 올랐다. 칼날이 이미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무디어진 것이다. 유씨형제가 들고 있는 방패는 무슨 무기든 막을 수 있는 방패였고 교봉이 가지고 있는 칼은 단중산에게 빼앗은 강도(鋼刀)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기가 교봉의 아랫배를 찌르려고 하자 싸늘한 섬광이 번쩍하면서 유구의 손에 들린 방패가 교봉의 허리를 그었다.
10. 교봉의 무예
교봉은 크게 외쳤다.
[좋아!]
말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집어던지고 왼쪽 주먹으로 유기의 방패를 후려쳐 갔다. '창'하는 커다란 음향이 울려퍼졌다. 그 순간 교봉은 오른쪽 주먹을 날려 유구의 방패를 곧장 내질렀다. 유씨쌍웅은 반신이 저려옴을 느꼈다. 교봉의 강맹한 주먹질에 한 번 맞자 팔이 시큰거려 방패를 땅에 떨구고 말았으며 눈에서 불똥이 튀는 걸 느꼈다. '쨍그랑'하고 방패와 칼이 떨어졌다. 유씨쌍웅의 오른손 손아귀가 길게 찢겨져 있었으며 손바닥엔 선혈이 낭자했다. 교봉은 껄껄 웃었다.
[좋아! 방패는 내가 사용하도록 하지!]
그는 한 손에 하나씩 강철로 만든 방패를 들고 사람들에게로 덮쳐들며 마구 휘둘러대었다. 둥근 테가 예리한 방패는 공격을 할 수도 있었고 수비를 할 수도 있었다.
[으아악!]
[퍽!]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게 피보라가 자욱이 번져 오르는 가운데 삽시간에 다섯 명의 고수가 방패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다. 대청 안은 즉시 핏물로 질퍽거리게 되었다. 유씨쌍웅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유기가 부르짖었다.
[아우, 사부님께서는 방패가 있으면 사람이 있고 방패를 잃으면 사람도 없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유구는 말했다.
[형님, 이와 같이 수치를 당한 마당에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 자기의 무기를 집어 들더니 한 사람은 칼로 한 사람은 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질러 죽고 말았다. 군웅들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아앗!]
그때 교봉이 풍차처럼 방패를 휘둘러 대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곁으로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때 한 소년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버지! 아버지!]
바로 유구의 아들 유탄지였다. 교봉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유씨쌍웅이 자결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술이 한꺼번에 깨는 기분이었다. 그는 사방에 즐비하게 죽어 있는 시체들을 내려다 보았다. 수 십 명이나 되는 시체들은 팔다리가 잘리거나 목이 달아났거나 허리가 동강났으며 두개골이 짓이겨지거나 배가 터져 오장육부가 쏟아져 나온 끔직한 모습으로 죽어 있지 않은가? 교봉은 몸서리쳤다. 그는 스스로가 그토록 잔인무도한 살인을 저질렀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교봉은 버럭 소리쳤다.
[유씨 형제,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어디 있소? 내가 방패를 돌려드리리다!]
그는 두 개의 방패를 유씨쌍웅의 시체 옆으로 던졌다. '퍽'소리와 함께 방패는 그들의 발 옆에 반 이상이나 파고들었다. 이때 갑자기 한 소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조심하세요.]
교봉은 급히 왼쪽으로 껑충 뛰어 나갔다. 푸른 빛이 번쩍이며 그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만약 아주가 소리를 질러 경고하지 않았다면 교봉은 큰 상처를 입고 말았을 것이다.지금 공격을 가한 사람은 담공이었다. 그는 일격이 빗나가자 이미 멀찌감치 피해 버리고 있었다. 이때 아주는 대청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체내의 공력이 점점 사그러지고 있었다. 아주는 교봉이 스스로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아주를 위해 용담호혈로 뛰어든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고맙고도 초조했다. 담파는 노해 부르짖었다.
[잘한다! 육실할 년! 우리가 네 년을 죽이지 않았더니 이제는 적을 도와 주기까지해?]
그녀는 노갈을 터뜨리며 아주에게 달려들며 손을 들어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교봉이 어느샌가 달려와 대뜸 담파의 뒷등을 움켜잡더니 한 쪽으로 내던졌다. '우지끈'소리와 함게 매화나무로 만든 의자 하나가 그녀의 몸에 부딪쳐 박살이 나버렸다. 아주는 담파의 일장에서 가까스로 벗어나기는 했으나 크게 놀란 나머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교봉은 크게 놀랐다.
(이미 아주 소저는 진기가 고갈되고 말았구나! 아! 위급한 이때 어떻게 그녀에게 진기를 밀어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설신의가 말했다.
[이 소녀는 잠시 후면 내력이 모두 소모되고 말 것이오. 그대는 내력을 그녀에게 주입하시오. 조금만 지나면 신선이 와도 그녀를 구하지 못할 것이오.]
교봉은 난처했다. 설신의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말을 따른다면 옆에서 노리고 있는 군웅들이 대뜸 무기를 휘둘러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들 가운데 부친이나 아들이 죽은 사람도 많은데 어찌 교봉을 가만 내버려 두겠는가? 그러나 눈을 멀거니 뜨고 아주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큰 위험을 각오하고 아주를 취현장까지 데리고 왔다. 그런데 설신의의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고 그녀로 하여금 진기가 소모되어 죽게 한다면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내력을 아주의 몸에 주입하게 된다면 자기와 그녀의 목숨을 바꾸는 격이 된다. 아주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에 불과했으며 교봉은 그녀에게 별다른 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애써 그녀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의협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고 그녀를 구한다는 것은 말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친척도 아니고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도 아니다. 내가 애를 써서 이곳까지 데려온 것만 해도 나의 할 일은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자리를 떠난 후 설신의가 그녀를 구하고 안 구하고는 그녀의 운명에 맡길 수 밖에 없다.)
교봉은 두 개의 방패를 급히 뽑아 들고 대뜸 대붕전시(大鵬展翅)라는 초식을 펼쳤다. 두 무더기의 흰광채가 파도처럼 밖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섬광은 곧장 대청 문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군웅들은 비록 숫자는 많았으나 교봉의 무시무시한 무공와 방패가 무서워 감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교봉이 대청 문 앞에 이르러 왼발을 막 문지방 밖으로 내딛었을 때였다. 갑자기 늙그수레한 음성이 처량한 어조로 부르짖는 게 아닌가.
[저 계집을 죽이고 형제의 원수를 갚자!]
바로 철면판관 선정이었다. 그의 큰아들 선백산이 대답했다.
[예.]
그는 칼을 들고 아주의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교봉은 경악했다. 생각할 여유도 없이 왼손의 방패를 휙 던졌다. 방패는 무겁게 맴을 돌면서 유성처럼 날아갔다. 몇 명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조심하시오!]
선백산은 급히 칼을 들고 막으려 했다. 그러나 교봉의 힘은 이미 인간의 힘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둥근 방패의 가장자리는 너무도 예리하여 '싹'하는 음향과 함게 선백산은 칼과 더불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는 허리가 잘라져 대뜸 즉사하고 말았으며 오장육부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방패는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대청의 한 기둥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그러자 지붕 위의 기왓장이 와르르 떨어졌다. 선정과 세 아들은 미친 듯 부르짖었다. 그러나 교봉의 태산 같은 위세에 눌려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주를 향해 덮쳐갔다. 교봉은 욕설을 퍼부었다.
[몰염치한 놈들!]
휙휙휙 하니 일장이 네장(掌)을 후쳐려 그들을 멀리 날려 보냈다. 그리고 왼팔로 아주를 안고 방패로 그녀를 보호했다. 아주는 나직이 말했다.
[교나리, 저는... 틀렸어요. 당신은... 당신은... 빨리 혼자 도망치세요.]
교봉은 군웅들이 중상을 입은 아주를 죽이려는 것을 보자 크게 분기가 치솟아 큰 소리로 외쳤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이상 그들은 결코 그대를 살려 두지 않을것이오. 우리 죽어도 함께 죽읍시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쳐 한 자루의 기다란 장검을 빼앗아 들고 찌르고 베고 내리치는 등 삽시간에 대여섯 명을 짚단처럼 베어 넘기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교봉이 생사를 도외시하고, 지닌 무예를 다 발휘하자 그 위세는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지경이었다. 장검은 무지개 같은 광채를 사방으로 폭사해냈고 그것이 이르는 곳마다 대뜸 피분수가 뻗쳐 올라갔다. 잘라진 팔다리가 허공에 난무했으며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갑자기 교봉은 등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교봉은 왼발을 뒤로 내질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게 숨 끊어지는 비명이 울려퍼졌다. 한 사내가 가슴이 짓이겨진 채 뒤로 날아가 어떤 사람의 몸에 부딪혔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즉시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이때 교봉은 다시 오른쪽 어깨에 한 번 창(槍)을 맞았고 오른쪽 가슴팍을 일검에 찔리게 되었다. 교봉은 일성대갈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마치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우는 듯했고 사자가 포효를 터뜨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 교봉은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나를 죽일 수 없다!]
이때 십여 명의 군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교봉도 이미 태반이나 힘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교봉은 몇 명이 달려드는 것을 보자 눈에서 형형한 빛을 폭사하며 오른손을 질풍처럼 내뻗어 선두에세 달려드는 한 사람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우두둑'소리와 함게 그 대한의 가슴뼈가 부러져 나갔다. 교봉은 그 대한을 머리 높이 치켜들었다. 달려들던 사람들은 그의 흉악한 기세에 겁을 먹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교봉은 그 자세 그대로 문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군호들은 슬금슬금 물러섰다. 교봉은 커다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나는 처음 소림(少林)의 무예를 전수받았으며 소림 칠십이절기를 약관이 되기 전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내가 어찌 사부님을 해쳤겠는가!]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 사내를 땅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늠름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손을 쓰시오.]
이때 철면판관 선정은 교봉에게 두 아들을 잃게 되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는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교봉에게로 덮쳐왔다. 그는 칼을 들고 교봉의 가슴을 찍어 내렸다. 순간 여기저기서 교봉을 지켜보던 군호들이 벌떼처럼 다시 교봉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교봉은 갑자기 처량한 심사에 사로잡혔다.
(나는 거란 사람일까 아니면 한인일까? 나의 부모와 사부를 살해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한평생 어질고 의로운 일을 행했건만 오늘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되었구나! 나는 아주를 구하기 위해 고집을 피우다가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되었다. 아...)
바로 이때 선정의 칼이 막 교봉의 가슴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교봉은 비분하여 고개를 하늘로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음성은 미친 맹수가 울부짓듯 처절하고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이대 그는 선정의 칼이 찔러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많은 살인을 하고 구차하게 살아서 무엇하랴?]
그는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선정의 칼이 그의 가슴을 깊숙히 파고 들려는 순간 갑자기 '쉭'하는 음향과 함게 허공에서 벼락처럼 무언가가 떨어져 교봉의 가슴과 선정의 칼날 사이를 막았다. 퍽! 하면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선정의 칼이 내려떨어진 한 사내의 가슴에 깊숙히 꽂혀 있었다. 너무나 돌발적인 사태에 모든 사람은 '아'하는 소리를 질렀다. 다시 허공에서 한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그 사람은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발을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곧장 선정의 아들 선소산(선小山)을 향하여 부딪쳐갔다. 다시 '퍽'하는 음향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 두개골끼리 충돌하자 머리뼈가 박살이 나며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군웅들은 놀라 부르짖었다. 아래로 던져진 사람은 바로 지붕 위를 지키던 무사들이었다. 별안간 지붕 위에서 기다란 밧줄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기세는 흉맹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여러 군호들의 머리를 후려치려고 했다. 그러자 모두들 무기를 휘둘러 막았다. 밧줄은 한 바퀴 빙 돈 다음에 교봉의 허리를 휘감고 위로 끌어올렸다. 이때 교봉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대청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때 교봉은 두 팔에 힘이 빠진 상태였다. 아주는 땅바닥으로 '쿵'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기다란 밧줄을 한 명의 흑의대한이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붕 위에 서있었다. 몸매는 아담하고 얼굴은 검은 두건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다만 두 눈만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 대한은 왼손으로 교봉을 옆구리에 끼더니 밧줄로 다시 던져 대문 밖에 있는 취현장의 깃대를 휘감았다. 군웅들은 큰 소리를 내지르며 급히 강표(鋼표), 수전(袖箭), 비도(飛刀), 철추(鐵錐), 비황석(飛蝗石), 용수전(用手箭)등 각종의 암기를 교봉과 그 대한을 향해 발출했다. 그 흑의대한은 한 번 밧줄을 잡아당기더니 교봉을 끼고 그네를 타듯 밧줄을 이용해 담장을 넘어 밖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되자 암기들은 그들이 있던 허공을 쉭쉭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말았다. 군웅들은 놀란 눈길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때 담장 밖에서 급촉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그 소리는 점점 멀리 사라져 갔다.
11. 다시 찾아온 안문관(雁門關)
교봉은 심한 상처를 입었으나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흑의대한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밧줄을 던지는 정확성과 팔힘은 나보다 못하다. 하지만 기다란 밧줄을 휘둘러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을 일시에 후려치려고 한 것은 천녀산화(天女散花)라는 채찍의 수법이 아닌가? 그 수법만은 나보다 뛰어나다.)
이때 흑의대한은 그를 말 등에 태우더니 같이 말 위에 올라타고 곧장 북쪽으로 말을 몰았다. 대한은 품 속에서 금창약을 꺼내어 교봉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 교봉은 피를 많이 흘려 몹시 피곤했다. 몇 번이나 깊이 숨을 들이켜야 맑은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대한은 말을 서북쪽으로 몰았다. 한참 가게되자 길은 점점 험해졌고 나중에는 길 자체조차 없어졌다. 그 말은 난석 사이를 힘들여 걸어갔다. 다시 반 시진을 나아가게 되자 말은 지칠대로 지쳐 입에서 흰거품을 뿜어내며 그 자리에 털썩 앞무릎을 꿇고 말았다. 대한은 교봉을 안더니 하나의 산봉우리 위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대한은 교봉을 품에 안고도 전혀 힘이 들지 않는지 빠르게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산길은 점점 험해졌건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침내 두 개의 절벽이 마주보고 있는 곳에 도달하자 그 대한은 기다란 밧줄을 던져 반대편 벼랑 위에 있는 나무 줄기를 휘감고 껑충 뛰어 벼랑을 건너는 것이었다. 이런 위험한 절벽을 7, 8개나 뛰어넘더니 어느 깊은 골짜기 아래에 이르렀다. 그 골짜기는 어찌나 깊은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교봉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큰 은혜를 입었으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소이다. 실례가 되는 부탁입니다만 형씨의 참모습을 뵙고 싶소이다.]
그 대한은 한 쌍의 맑게 빛나는 눈동자로 교봉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말했다.
[저쪽 산 동굴에는 반 개월간 먹을 양식이 있으니 이곳에서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십시오. 적은 이 곳에 올 수 없을 것입니다.]
교봉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음성을 들으니 나이가 적지 않은 것 같군!)
그 대한은 다시 교봉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왼손을 휘둘러 교봉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손이 어찌나 빠른지 교봉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대한은 다시 두번째로 따귀를 때리려는 게 아닌가? 첫번째 따귀와 두번째 따귀 사이의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작할 찰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찰나 시간에 교봉은 눈부신 반응을 보였다. 교봉은 왼손의 식지를 꼿꼿이 편 채 자기의 뺨에 갖다댄 것이다. 만약 대한이 따귀를 때린다면 영락없이 손바닥을 손가락에 찔리게 될 형세였다. 지금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대한의 손바닥에 있는 노궁혈(勞宮血)이었다. 대한은 자신의 손바닥이 교봉의 뺨과 한 자도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재빨리 손을 뒤집더니 손등으로 교봉의 뺨을 때려갔다. 그 변화는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교봉 역시 손가락을 들어서는 신속하게 상대방의 손등에 있는 이간혈(二間穴)을 노렸다. 그 대한은 길게 웃더니 그 오른손을 거두는 대신 왼손으로 비스듬히 교봉의 따귀를 때리려고 했다. 교봉은 왼손의 식지를 뻗쳐서는 상대방의 손바닥 가장자리에 있는 후할혈(後할血)을 겨누었다. 그런데 그 대한은 갑자기 손을 들어올렸으므로 교봉 역시 재빨리 손가락을 들어올려 그의 손바닥에 있는 전곡혈(前谷穴)을 찌르려고 했다. 삽시간에 그 대한은 두 손을 마구 휘둘러 잇달아 10여 초나 공격했다. 교봉은 다만 수비만 할 뿐 공격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언제나 상대방 손바닥의 혈도를 노렸다. 그러니까 대한은 처음에는 교봉이 방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한 대의 따귀를 갈길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교봉을 때릴 수가 없었다.두 사람은 이와 같이 내력을 내쏟지 않은 채 초식을 주고받았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보기드문 결투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대한은 순식간에 20초를 펼쳤다. 교봉은 비록 중상을 입은 몸이긴 했으나 그가 펼치는 초식의 변화는 여전히 빠르고 혈도를 겨냥함이 정확하기 이를데 없었다. 대한은 별안간 손을 거두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우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군! 나는 정말 그대를 구하지 말아야 했었는데.]
교봉은 말했다.
[은공(恩公),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요.]
대한은 욕을 했다.
[바보 같군! 일신에 천하무적(天下無敵)의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째서 계집애 하나를 위해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고 했소! 그녀는 그대와 친척도 아니며 은혜를 베푼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국지색의 미인도 아니고 다만 비천한 시녀에 불과하지 않소? 천하에 어찌 당신 같은 바보가 있겠소.]
교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교봉은 귀중한 무공을 무익한 일 때문에 상실한 뻔했습니다. 저는 일시의 화를 누르지 못하고 결과를 자세히 생각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 대한은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말했다.
[허허허... 알고 보니 우직한 성격이 발동한 것이로군.]
그러더니 고개를 제치고 소리내어 웃었다. 교봉은 그의 커다란 웃음 속에 슬픔과 분노의 빛이 스며 있는 것을 알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별안간 그 대한은 몸을 날려 수장 밖으로 나가더니 어느 커다란 바위 뒤로 사라져 버렸다. 교봉은 크게 부르짖었다.
[은공... 은공...]
그 대한은 이미 몇 번 훌쩍훌쩍 몸을 날리더니 절벽을 타고 멀리멀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교봉은 한걸음 내딛었다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그자리에 쓰러질 뻔했다. 그는 재빨리 손을 뻗쳐 옆의 바위를 붙잡고서야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한이 말한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석벽 뒤에는 동굴이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는 익힌 고기와 볶은 쌀, 그리고 대추, 땅콩, 말린 물고기 등의 건량(乾糧)이 놓여 있었다. 더욱 묘한 것은 한동이의 술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동이의 뚜껑을 열었다. 술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는 손으로 술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보았다. 입에 감도는 술맛을 보니 좀처럼 구할 수 없는 미주였다. 그는 속으로 무척 고맙게 생각했다.
(정말 그 은공은 자상하게도 준비해 놓았군! 내가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술까지 마련해 놓았군! 산길이 험해서 이 술동이를 가져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이 그에게 발라 준 금창약은 지극히 효과가 좋아 이미 피는 멎어 있었고 잠시 후에는 통증 역시 가라앉게 되었다. 그는 몸이 건강했고 내공이 심후했다. 일 주일이 지나자 그의 상처는 거의 회복되었다. 그 동안 그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나의 원수는 누구일까? 나를 구한 그 은공은 누구일까?)
교봉은 그가 생각하는 두 사람의 무공이 매우 뛰어나 결코 자기보다 못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교봉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 제일의 고수였다.그는 자기 만큼 무예가 출중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원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은공은 그와 20여 초나 겨루었으니 당연히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은공의 수법은 모두 평범한 초식뿐이었다. 평범한 초식을 어찌나 익숙하게 사용하는지 천하의 어떤 초식보다도 위력이 있었다. 마치 교봉이 평범한 태조장권을 전개할 때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하던 경우와 같았다. 따라서 초식을 통해서는 결코 그의 신분과 내력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교봉은 20여일을 동굴에서 보내게 되자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그 한동이의 술은 이틀이 가지 않아 모두 마셨기 때문에 교봉은 술 생각이 간절하여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리 험준한 절벽일지라도 자기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산에서 내려와 다시 강호(江湖)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산에서 내려온 교봉은 생각했다.
(아주는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죽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고 살았다면 내가 상관할 필요가 없겠지. 가장 먼저 해결할 일은 내가 도대체 거란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일이다. 부모님과 사부님께서 하루 아침에 돌아가셨으니 나의 신세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라리 안문관(雁門關) 밖으로 나아가 그 석벽에 새겨진 글을 보도록 하자.)
이렇게 생각한 그는 서북쪽을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고을에 이르자 그는 10대접이 넘는 술을 마셨다. 다시 3일이 지나자 그의 주머니에 남았던 몇 냥의 은자는 술값으로 모조리 날아가고 말았다.
이 무렵, 중원(中原)은 송(宋)나라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천하를 15로(十五路)로 나우고 있었다. 대량(大梁)은 도읍지였고, 흔히들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라고 일컬었다. 낙양(洛陽)을 서경하남부(西京河南府)라고 일컬었으며, 송주(宋州)를 남경(南京)으로, 북경(北京)을 대명부(大名府)라고 했다. 이것이 곧 사경(四京)이었다. 교봉은 경서로(京西路)에 있는 여주(汝州)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은자를 한 푼도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날 밤 고을의 관아(官衙)로 들어가서 수백 냥의 은자를 훔쳤다. 그때부터 그는 길을 갈 때 닭고기, 물고기와 육류를 반찬 삼아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며 고량주 역시 실컷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두가 그를 대신해서 지불해 준 격이었다. 하루가 지나자 하동(河東)의 대주(代州)에 이르렀다. 안문관은 대주로부터 30리 북쪽에 있는 안문(雁門)이라는 험로(險路)의 길목이었다. 교봉은 옛날 강호를 떠돌아 다닐때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무관심하게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가 대주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이미 오시(午時)초였다. 그는 식사를 하고 술을 몇 사발 들이킨 다음 성을 나서서 북쪽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은 신속하기 이를데 없어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산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험악한 산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를듯 솟아 있었고 그 사이로 꼬불꼬불한 길이 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기러기가 남쪽에 왔다가 북쪽으로 돌아갈 때 높은 봉우리를 넘어가지 못해 봉우리 사이로 지나간다고 하여 안문이라고 한다고 했다. 오늘 나는 남쪽에서 왔는데 석벽에 글씨가 확실히 나를 거란 사람이라고 증명해 준다면 나는 기러기처럼 안문관을 통해 북쪽으로 가서 영원히 안문관 안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그렇게 된다면 일 년에 한 번씩 남북을 왔다갔다하는 기러기 만큼도 자유롭지 못하겠구나!)
이와 같이 생각하자 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안문관은 송나라의 중요한 요새였다. 산서성에는 40여 개나 되는 관(關)이 있었는데 안문관이 가장 견고했다. 안문관 밖으로 수십 리를 나가면 곧 요(遼)나라의 국토였다. 따라서 안문관에는 많은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교봉은 군사들에게 조사받는 게 싫어서 관의 서쪽에 있는 높은 산봉우리를 타고 길을 우회하여 나아갔다. 높은 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보니 번치(繁峙)와 오대(五坮)가 동쪽에 우뚝 솟아 있었고 영무(寧武)같은 산은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정양(正陽), 석고(石鼓)같은 산은 남쪽에 서있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삭주(朔州)와 마읍(馬邑)같은 산봉우리가 기다란 방파제처럼 뻗어 있는데 길이는 끝이 없는 듯했고 한대에서 자라는 수목이 우거져 있어 그 정경이 소슬하기만 했다. 교봉은 과거 안문관을 지날 때 동료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의 대장 이목(李牧)과 한(漢)나라 때의 대장 질도(侄都)가 안문관을 지키면서 흉노(匈奴)의 침입을 막았다는 얘기였다. 만약 자기가 흉노족인 거란(거丹)의 후예라면 이 몇 천 년간 중국을 침입한 오랑캐를 조상으로 둔 것이 아닌가? 교봉은 지세를 살피며 생각했다.
(그 날 왕방주와 조전손 등은 안문관 밖에서 숨어서 거란 무사를 기다렸다고 했다. 필시 몸을 숨기기 좋은 산비탈을 선택했을 것이다. 왼쪽으로 십여 리 이내에서 가장 좋은 지형은 서북쪽의 이 산비탈이다. 십중팔구 그들은 이곳에서 매복을 했을 것이다.)
교봉은 봉우리에서 내려와 산비탈에 이르렀다. 별안간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산비탈 옆에도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지광대사(智光大師)는 중원의 무사들이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 독을 묻힌 암기를 던졌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 바위인 것 같았다. 산길에서 몇 보 옆으로는 깊은 골짜기가 있었는데 그 골짜기는 운무(雲霧)에 가려져 밑이 보이지 않았다. 교봉은 생각했다.
(만약 지광대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의 어머님은 이곳에서 살해되셨을 것이고 아버님은 이곳에서 어머님의 시체와 간난 아기인 나를 안고 저 밑으로 뛰어내리셨을 것이다. 그 분은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아시고 나를 다시 위로 던져 올리면서 왕방주의 몸 위에 떨어지도록 하셨을 것이다. 그 분은... 그분은... 석벽에 무슨 글자를 썼을까?)
그는 고개를 돌려 오른쪽 석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석벽은 칼로 내려친 듯 매끈했다. 그 석벽의 한복판에는 도끼로 부수어 놓은 자국이 완연히 남아있지 않은가? 이는 바로 어떤 사람이 일부러 남이 쓴 글자를 지운 흔적이었다. 교봉은 석벽 앞에 멍하니 서있었다. 갑자기 분노가 걷잡을 수 없도록 치밀어 올랐다. 칼을 휘두르고 주먹을 내려쳐 마구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개방을 떠날 때 선정(禪正)의 칼을 부러뜨리면서 맹세하지 않았는가? 나는 거란인이라도 좋고 한인이라도 좋으나 결코 한나라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취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그런데 또다시 사람을 죽인다면 그야말로 크게 맹세를 어기는 게 아닌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내가 그들을 죽이지 않아도 그들이 먼저 나를 죽이려고 드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렇다고 그대로 앉아서 죽는다는 것도 남아 대장부가 할 짓이 아니지 아닌가?)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것은 자기의 신세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 그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는 한나라 사람이 아니다! 나는 한나라 사람이 아니다! 나는 거란의 오랑캐다!]
그는 손을 쳐들어 일장으로 석벽을 후려쳤다. 이때 사방에서 그가 외친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는 한나라 사람이 아니다! 나는 한나라 사람이 아니다! 나는 거란의 오랑캐다! 나는 거란의 오랑캐다!]
석벽에서 장력을 맞아 떨어진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교봉은 마음속의 우울함과 분노를 풀 길이 없어 거듭 일장을 후려쳤다. 한 달 동안 받은 굴욕을 석벽에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몇번 손으로 바위를 치자 손에서 새빨간 피가 방울방울 흘려내렸다. 석벽에는 핏물로 얼룩진 손바닥 자국이 새겨지게 되었다. 교봉은 쉬지 않고 석벽을 후려쳤다. 갑자기 뒤에서 맑은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교나리, 다시 몇 번만 더 때린다면 그 산벽이 무너져 버리겠어요.]
산비탈 아래에 있는 한 그루의 꽃나무 곁에 한 소녀가 몸을 기대고 서있었다. 몸에는 붉은 색 의상을 걸치고 있었으며 입가에는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바로 아주였다. 교봉은 뜻밖에 그녀가 나타나자 놀랍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그는 몸을 돌려 아주의 곁으로 가서 웃었다.
[아주 소저, 상처는 다 나았소?]
교봉의 웃음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아주는 인사했다.
[교나리, 안녕하셨어요.]
인사를 마친 그녀는 교봉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교봉의 품 속을 뛰어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저는... 저는 이곳에서 닷새 낮 닷새 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는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 와 주셨군요! 정말 하늘에 감사드려요. 정말... 정말... 무사하셨군요!]
이 몇마디의 말 속에는 기쁨과 안도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교봉은 그 말을 듣고 아주가 자기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교봉은 생각되는 바가 있어서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나를 닷새 낮 닷새 밤이나 기다렸소? 그대는 내가 이곳에 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소?]
아주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자기가 한 남자의 품속에 안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은 능금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별안간 그녀는 몸을 돌려 꽃나무 뒤로 숨어 버렸다.
[이봐요, 아주 소저, 왜 그러시오?]
아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꽃나무 뒤에서 걸어나왔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부끄러운 빛을 띠우고 있었다. 그녀는 머뭇머뭇하며 말도 하지 못하고 어떤 다른 행동을 하지도 못했다. 교봉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무슨 말 못할 고충이 있소? 그러면 나에게 털어 놓으시오. 우리는 그야말로 환난을 함께 겪은 바이고 생사를 같이 한 사이인데 무얼 그리 꺼리시오?]
아주는 교봉의 얼굴을 살짝 훔쳐보고 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드릴 말씀은... 없어요.]
교봉은 그녀의 양쪽 어깨를 가볍게 잡고 그녀의 얼굴을 햇살이 비추는 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안색은 매우 초췌했다. 그러나 창백한 가운데 은은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중상을 입었을 때의 창백하던 표정보다 훨씬 요염하고 아름다와보였다. 교봉은 그녀의 나긋나긋한 손목을 잡고 맥박을 짚어 보았다. 아주는 손목에 교봉의 손가락이 닿자 전신을 흠칫했다. 교봉은 물었다.
[아직도 편찮으시오?]
아주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그렇지 않아요.]
교봉은 그녀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맥박은 매우 차분했으며 힘찼다. 교봉은 탄복했다.
[설신의는 과연 놀라운 사람이구려!]
아주는 말했다.
[다행히 백세경 장로께서 설신의에게 칠초의 전사금나수(纏絲擒拿手)를 전해준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설신의는 저를 치료해 주었어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교나리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 꼭 저를 살려두어야 했다는 사실이에요. 그들은 매일같이 물어보았어요. '교봉 그 악적은 너와 무슨관계냐?' '그는 어디로 도망갔지?' '그를 구한 흑의대한은 누구지?' 내가 알 게 뭐예요.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들이 나에게 고문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했어요. 나는 그들에게 엉터리 이야기를 꾸며서 그럴듯하게 둘러댔죠. 그 흑의대한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황당무계했어요. 오늘은 그가 곤륜산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고 내일이 되면 다시 동해에서 온 고수라고 하는 등 그들에게 터무니없는 이야기만을 지껄여 주었죠.]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재미있는 듯 활짝 웃었다. 교봉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들이 믿었소?]
아주는 말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어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어요. 나는 점점 이야기를 괴상망측하게 꾸며댔으며 그들로 하여금 긴가민가하게 만들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했어요.]
교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흑의대한이 어떤 사람인지 나 역시 모른다오.]
아주는 이상한 듯 말했다.
[교나리도 모르신다고요? 참 이상하군요. 그는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교나리를 구해냈을까요?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는 대협(大俠)의 풍모는 원래 그래야 하죠.]
교봉은 말했다.
[나는 은혜와 원한, 보답과 복수를 구분할 수 없구려. 나는 내가 오랑캐인지 한인인지도 모르겠고 나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도 알 수가 없소. 교봉아, 교봉아, 너는 정말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아주는 그의 표정이 처량하고 서글픈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교봉의 손을 잡았다.
[교나리, 스스로를 학대하지 마세요. 모든 일이 언젠가는 명백하게 드러날거예요. 다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행한다면 그것으로 족한거예요.]
교봉은 말했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받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라오. 그 날 은행나무 숲속에서 칼을 부러뜨리고 맹세를 하지 않았소? 결코 한 사람의 한인도 죽이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러나...]
아주는 말했다.
[취현장의 인물들은 시비를 따지지 않고 그대를 포위 공격했어요. 만약 반격하지 않았다면 온몸이 난도질당해 죽고 말았을 거예요.]
교봉은 말했다.
[그 말도 옳은 말이오.]
그는 본래 성격이 소탈한 호인이었다. 일시 슬픔에 잠겼으나 그 시각이 지나게 되자 그 슬픔을 떨칠 수가 있었다. 교봉은 다시 말했다.
[지광대사와 조전손은 이 석벽에 글자가 씌어 있다고 했는데 누군가 글을 모조리 지워 버렸구려.]
아주는 말했다.
[그래요. 반드시 안문관으로 와서 이 석벽을 바라볼 거라고 생각했기에 저는 이곳에 와서 교나리를 기다린거예요.]
교봉은 물었다.
[어떻게 그대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소?]
아주는 미소지었다.
[제가 소림사의 화상으로 변장했떤 사실을 기억하세요?]
교봉은 빙그레 웃었다.
[그대의 짓궂은 장난은 정말 그럴싸했소.]
아주는 말했다.
[나는 상처를 치료받게 된 후, 매일 같이 이야기를 꾸며내는데 한계를 느꼈어요. 어느 날 밤 나는 다시 변장을 했어요.]
[이번에는 누구로 가장했소?]
아주는 말했다.
[나는 설신의로 분장했어요.]
교봉은 놀랐다.
[설신의라고? 어찌... 어찌...]
아주는 말했다.
[그는 매일 나를 보러 왔어요... 그리고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의 모습과 음성, 태도와 습관을 나는 거의 완전하게 파악하게 되었어요. 그와 나는 밤에 단둘이 있을 때가 많았어요. 저는 일부러 기절한 척했어요. 그러자 그는 저에게 다가와서 맥을 짚어보려고 했죠. 저는 냅다 손을 내밀어 그의 손목 혈도를 눌러 꼼짝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는 내가 하는 데로 몸을 맡길 수 밖에 없었어요.]
교봉은 생각했다.
(설신의는 병만 치료할 줄 알았지 이 맹랑한 아가씨가 속임수를 쓸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아주는 말했다.
[저는 그의 옷과 신발을 바꾸어 신은 다음 수건을 뭉쳐서 입에 넣고 사지를 꽁꽁 묶은 후 침대 위에 엎어놓고 이불로 덮어 놓았어요. 다만 힘드는 것은 수염이었지요.]
교봉은 말했다.
[설신의의 수염은 반은 희고 반은 검으니 가짜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겠군!]
아주는 말했다.
[가짜가 비슷하지 않다면 진짜를 사용해야죠.]
[진짜를 사용하다니?]
아주는 말했다.
[그럼요. 저는 그의 수염을 모조리 뽑아서 저의 얼굴에 갖다 붙였어요. 정말 감쪽같았죠. 그는 수염을 뽑히고 나자 십 년 정도 젊어 보였고 얼굴 모습도 더 준수해졌어요. 그러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어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아주는 계속하여 말했다.
[저는 유유히 방에서 나와 말을 준비하라고 하고 천천히 빠져 나왔어요.]
교봉은 손뼉을 쳤다.
[정말 묘하군! 묘해!]
별안간 그는 소림사의 보리원에서 비쳤던 자기의 뒷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흠칫했다. 웬지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교봉은 잠시 생각해 본 다음 입을 열었다.
[돌아서 보시오.]
아주는 영문을 몰랐으나 몸을 돌렸다. 교봉은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아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더니 부끄러운 듯 말했다.
[전... 춥지 않아요.]
교봉은 갑자기 훤히 깨달았다. 그는 아주의 손목을 꽉 움켜쥐며 날카롭게 물었다.
[알고 보니 너였군!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말해라!]
아주는 당황하여 말했다.
[교나리, 무슨 말이예요?]
교봉은 엄숙히 말했다.
[그대는 나로 가장한 적이 있지? 나를 사칭한 적이 있었지?]
교봉은 그 날 무석에서 일품당에 사로잡힌 형제들을 구하러 갈 때 길에서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었다. 그 당시에는 별로 주의하지 않았으나 보리원의 구리거울에 비친 자기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도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불안해졌떤 것이다. 그리고 개방의 인물들은 교봉이 일품당에서 방도들을 구원했다고 한사코 우기지 않았던가?
12. 이리(狼)의 문신
이때 아주는 갑자기 깔깔 소리내어 웃었다.
[좋아요. 제가 시인하죠.]
아주는 그녀가 어떻게 해서 교봉의 모습으로 변장하게 되었으며 해약으로 개방의 방도들을 구해 주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교봉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나직이 호통쳤다.
[하필 나를 가장해서 사람을 구해준 의도는 어디에 있소?]
아주는 미안해 했다.
[저는 장난으로 그런 것이었어요. 나와 아벽은 교나리에 의해 구원을 받고 교나리 당신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지요. 더구나 개방의 거지들이 교나리를 쫓아내는 광경을 보고, 그대로 변장하여 그들을 구했어요. 그렇게 된다면 개방의 사람들은 다시 교나리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도 그들은 취현장에서 여전히 그대에게 악랄하게 대하면서 은혜를 돌보지 않더군요.]
교봉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그녀에게 다그쳤다.
[흥!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의 부모를 죽였지? 또한 어째서 소림사에 잠입하여 나의 사부님을 죽였지?]
아주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랐다.
[저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요. 내가 그대의 부모님과 사부님을 죽였다고 누가 말하던가요?]
교봉은 말했다.
[나의 사부님께서는 누구에게 맞아 중상을 입고 있었소. 그 분은 나를 보고 흉수라고 하셨소. 당신이 그 분을 해치지 않았다면 또 누가 소림사에서 그 같은 일을 저질렀단 말이오?]
거기까지 말한 교봉은 오른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그의 얼굴은 살기로 가득차 있었으며 눈에서는 맹수 같은 빛이 번뜩였다. 이 일장이면 열 명의 아주 정도는 단번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아주는 교봉의 얼굴에 떠오른 살기를 보자 속으로 두려움을 느꼈으며 자기도 모르게 두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다시 한 걸음만 물러난다면 만 장이나 되는 골짜기 아래로 떨어질 판이었다. 교봉은 나직이 말했다.
[거기 서서 움직이지 마시오.]
아주는 놀란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그대의 사부님을 죽이지 않았어요. 그대의 사부님의 재간이 그토록 뛰어나신데 내가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었겠어요?]
그녀의 마지막 두 마디는 날카롭기 이를데 없었다. 교봉은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 그녀를 흉수로 잘못 판단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번개같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우리 사부님은 당신 같은 사람한테 당할분이 아니지.]
현고대사는 소림사의 현자 행렬의 강호들과 같은 배분이었다. 따라서 무예의 고강함은 당금 천하에서 일류에 속했다. 그가 세상을 등지게 된것은 중독되지도 않았었고 무기와 암기에 의한것도 아니었다. 바로 무서운 장력을 맞고 오장육부가 산산이 조각이 났기 떠문에 죽은 것이었다. 아주의 재주로써는 현고대사를 어찌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만약에 그녀의 장력이 현고대사를 한번 때려 오장육부를 부수어 놓을 정도였다면 현자방장의 대력금강장력에 맞아 중태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주는 교봉이 자기에 대한 오해를 푼 것을 보자 눈물진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자기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교나리, 저는 하마터면 놀라서 죽을 뻔했어요.]
교봉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이 며칠동안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했다오. 그래서 터무니 없는 생각을 했었다오. 아주 소저, 너무 탓하지 마시구려.]
아주는 빙그레 웃었다.
[탓하지 않아요. 정말 탓했다면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교나리, 나는 영원히 그대를 탓하지 않을거예요.]
교봉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내가 그대를 구했다고는 하지만 마음에 둘 필요는 없소.]
그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아주 소저, 그대의 변장술과 역용술(逆用術)은 어디서 배웠소? 그대의 사부님은 또 다른 제자가 있었소?]
아주는 고개를 저었다.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길 좋아했어요. 단지 그것뿐이예요. 그런데 어찌 사부님이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런 장난을 하는 데도 사부가 필요한가요?]
교봉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상한 일이구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있어 나의 사부님을 속였다니...]
아주는 말했다.
[그 사람을 찾기란 어렵지 않을거예요.]
[아니오. 이 넓은 세상에서 그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오. 십중팔구 그 역시 그대처럼 변장술에 능한 자일꺼요.]
그는 석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도끼 자국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지광대사를 찾아가 이 석벽에 새겨진 글이 어떤 내용인지 알아봐야겠소. 이 일을 밝히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도 없고 음식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가 않소.]
아주는 말했다.
[지광대사는 제대로 말해 줄지 모르겠군요.]
교봉은 말했다.
[그는 말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그가 말을 할때까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겠소.]
아주는 잠시 생각해 보고 말했다.
[지광대사는 무척 꿋꿋한 사람이예요.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억지로 다그친다거나 부드러운 말로 회유한다고 해서 말을 할 사람이 아니예요. 역시...]
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역시 조전손에게 물어 보는게 낫겠군! 조전손 역시 꺽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성격이긴 하오.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좋은 방법이 떠올랐소.]
교봉은 옆의 깊은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나는 내려가 보겠소.]
아주는 깜짝 놀랐다. 운무에 가려 진 계곡을 보기만 해도 머리끝이 주뼛 곤두설 지경이었다. 아주는 뒷걸음질쳐 계곡에서 멀어지며 말했다.
[안돼요, 절대로 내려가지 마세요. 내려간다고 볼 만한 게 있겠어요?]
교봉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한나라 사람인지 거란 사람인지 나는 모르오. 이 문제는 항상 내 머리 속에서 맴돌았고 결코 떨쳐 버릴 수가 없었소. 나는 아래로 내려가서 거란 사람의 시체가 있는지 확인을 해야겠소.]
아주는 말했다.
[그 사람이 떨어진 지 이미 삼십 년이 지났어요. 남아 있는 것이라곤 백골에 불과할텐데 무슨 도움이되겠어요.]
교봉은 말했다.
[나는 그 분의 백골이라도 보아야겠소. 그가 만약 나의 친아버지라면 그의 유골이라도 안장을 해야 하지 않겠소?]
아주는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그럴리 없어요! 그럴리 없어요! 그대는 인자하고 의협심이 강한 분에예요. 어찌 간악하고 포악한 거란의 후예가 될 수 있겠어요?]
교봉은 말했다.
[그대는 이곳에서 하루만 기다려 주시오. 내일 이때까지 내가 올라오지 않는다면 더 기다릴 필요가 없소.]
아주는 다급한 나머지 눈물을 떨구며 부르 짖었다.
[교나리, 내려가지 마세요!]
교봉은 아주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취현장의 그 많은 고수들도 나를 어쩌지 못했소. 그런데 이까짓 산골짜기가 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아주는 말했다.
[아래에는 많은 독사와 독충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흉악한 괴물이 있을지도 몰라요.]
교봉은 껄껄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만약에 괴물이 있다면 내가 잡아 올려 그대가 가지고 놀도록 해주겠소.]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동북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소리를 듣고 교봉은 생각했다.
(적어도 이십여 필의 말이 달려오고 있구나! 무슨 일일까?)
교봉은 즉시 산비탈에 올라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누런 갑옷과 누런 옷을 입은 송나라 군사들이 한 줄로 달려오고 있었다. 교봉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아주가 있는 곳은 바로 새외와 중원이 연결되는 곳이었다. 중원과 새외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군졸들이 그들을 보게되면 수상히 여기고 죽이려고 덤벼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봉은 즉시 아주를 이끌고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말했다.
[송나라 관병들이오.]
얼마 후 군사들은 그곳에 이르렀다. 교봉은 바위 뒤에서 내다보았다. 앞장을 선 군관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가슴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과거 중원의 무사들이 이 바위뒤에 숨어 있을 때 거란의 무사들이 저들처럼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치려고 했겠지? 경치는 변함이 없건만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미 백골로 화하고 말았구나.)
그때 갑자기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교봉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어찌하여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오는 걸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어 여인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교봉은 고개를 내밀고 살펴보았다. 지금 송나라 군사들은 각자 말 위에 여인들을 사로잡아 오고 있는 중이었다. 사로잡힌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은 거란인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몇명의 송나라 군사들은 손을 뻗어 거란 여인의 몸을 이곳저곳 마구 주무르고 있었다. 어떤 여자들은 군사들의 손길에 반항했으나 곧 군사들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고는 잠잠해졌다. 이십여 필의 말은 큰 바위를 지나 곧장 안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가 물었다.
[교나리, 그들은 무엇을 하는거죠?]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관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어찌 그토록 황당무계한 짓을 저지르고 있을까?)
아주는 다시 말했다.
[그 관병들은 꼭 도적떼들 같군요.]
곧이어 다시 삼십여 명이나 되는 송나라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들은 수백 마리나 되는 소와 양, 그리고 십여 명의 거란 여인들을 앞세우고 있었다. 한 명의 군관이 말했다.
[이번 약탈은 별 수확이 없군! 대원수(大元帥)께서 벌을 주시지 않을까 걱정이군!]
그러나 다른 한 명의 군관이 말했다.
[요나라의 가축들은 많이 빼앗지 못했지만 납치한 계집애들 중 두세 명은 매우 아름답지 않습니까? 대원수에게 갖다 바치면 대원수께서도 좋아하실겁니다.]
먼저 말한 군관이 대꾸했다.
[여자가 아직 부족해. 내일 고생스럽지만 하루 더 약탈을 해야겠다.]
그러자 한 명의 군졸이 웃으며 말했다.
[요나라 놈들은 소식을 듣고 벌써 멀리 도망쳤을겁니다. 재차 약탈을 하려면 이삼 개월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교봉은 울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관병들의 행위가 흉악한 도적떼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별안간 한 여인의 품 속에서 간난아이가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 거란 여자는 울고 있는 어린애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고 있던 군관은 어린애를 빼앗아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말을 달려 말발굽이 어린애의 몸을 밟아 죽이도록 했다. 그 아이는 대뜸 배가 터져서는 창자를 드러낸 채 죽고 말았다. 거란 여자는 놀란 나머지 울지도 않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관병들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면서 하나하나 그 아이의 시체 위로 말을 몰아 아이를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교봉은 한평생 흉폭하고 괴이한 일을 적지 않게 보아온 터였다. 그러나 이토록 공공연히 아기를 밟아 죽이는 광격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극도의 분노를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뛰어나가 송나라 군졸들을 때려 죽이고 싶었으나 가슴을 겨우 억눌렀다. 그 관병들이 물러나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십여 명의 관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그들 역시 말을 타고 있었으며 손에는 긴 창을 들고 있었는데 그 창 끝에는 사람의 수급이 피에 범벅이 된 채 꽂혀져 있었다. 그들의 말에는 밧줄이 달려 있었는데 밧줄 끝에는 다섯명의 거란 남자가 묶인 채 끌려오고 있었다. 교봉이 거란인들의 옷차림을 바라보니 모두 양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15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송나라 군졸이 노략질을 할 때 건장하고 젊은 거란 사람들은 모두 도망을 쳤기 때문에 연약한 아녀자와 병약한 남자들만을 사로잡아 오는 것이었다. 이때 한 명의 군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열 네 명의 목을 자르고 요나라 놈 다섯 명을 사로잡았으니 공로는 크다고 할 수 없겠지만 적다고 할 수는 더욱 없지. 그러니 계급이 한 등급 오르고 상으로 백 냥의 은자를 받게 될거야.]
다른 한 군졸이 말했다.
[고형, 이곳에서 서쪽으로 오십여 리 정도 가게 되면 거란인들의 마을이 있는데 그대는 그곳에 약탈을 하러 갈 용기가 있소?]
고씨 성을 가진 군관은 말했다.
[내가 어찌 못 가겠는가? 그대는 내가 신참이라고 해서 얕보는 모양인데 내가 얼마나 공을 세우고 싶어하는지 모르고 있군!]
그들은 커다란 바위가 있는 부근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거란의 한 노인이 땅바닥에 짓밟힌 간난 아기의 시체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크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달려가 시체를 안고 거란 말로 뭐라고 지껄였다. 교봉은 그 죽은 아이와 그 노인이 어쩌면 한 가족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늙은이를 끌고 가던 군졸이 밧줄을 와락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 노인은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 노인은 몸을 다시 일으키더니 미친 듯 괴성을 지르며 그 군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군졸은 깜짝 놀라 칼을 들어 내려쳤다. 노인은 머리가 두 쪽이 난 채 땅위로 널브러지고 말았다. 그 군졸은 화가 났는지 몇번이나 칼을 내려쳐 그 노인의 몸을 난자 했다. 그러자 다른 군졸들도 일제히 창과 칼을 휘둘러 그 노인의 몸을 마구 난도질했다. 이때 다른 한 명의 거란 노인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그 음성은 비분에 가득차 있었다. 그 음성은 상처입은 이리가 죽기 직전에 울부짖는 것과 같이 듣기에 소름이 끼쳤다. 교봉은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그 거란인과 심령(心靈)이 서로 통하는 것을 느꼈다. 송나라 군졸들은 이번에는 그 노인의 몸을 마구 찌르고 베었다. 그 노인은 버티고 서서 최후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상처입은 맹수처럼 부르짖고 있었다. 취현장에서 교봉은 선정의 칼이 자기 몸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불현듯 비통한 생각에 참지 못하고 야수처럼 울부짖은 적이 있었다.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을 때 야수와 같은 광포한 본능이 그를 휘감아 왔던 것이다. 갑자기 교봉은 바위뒤에서 뛰어나갔다. 그는 번개처럼 한 명의 송나라 군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 송나라 군졸의 목이 '우두둑'소리를 내며 부러져 나갔고 눈알은 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길게 혀를 깨문 채 죽어 버리고 말았다. 교봉은 계곡 아래로 그 군졸을 집어 던졌다. 그는 다시 몸을 이리 번쩍 저리 번쩍 움직이며 삽시간에 대여섯 명의 송나라 군졸을 절벽 아래로 죽여서 던져버렸다. 그가 장력을 내뿜자 송나라 군졸이 탔던 말은 그대로 뱃가죽이 터지며 낭떠러지 아래로 날아갔다. 그는 잇따라 이리처럼 부르짖으며 손과 발을 휘둘렀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하나같이 산을 허물고 바다를 뒤엎을 만한 위력이 있었으며,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영락없이 한 사람이 비명을 채 지르지도 못한 채 묵사발이 되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잠시 후 장내에는 교봉 한 사람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의 주변에는 검붉은 핏물이 여기저기 무더기를 이룬 채 응고되어 있기도 했고 흘러내리기도 했다. 계곡은 쥐죽은 듯한 정적에 덮혔다. 아주와 세 명의 거란인들은 그의 그와 같은 기세를 보고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교봉은 송나라 군졸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후 길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휘파람 소리는 비장하고 드높아 수십 개의 산봉우리를 한참 동안울리며 메아리 치는 여운을 남겼다.
교봉은 눈길을 돌려 몸에 수없이 많은 칼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은 채 죽어 있는 거란의 늙은이를 바라 보았다. 그 늙은이는 가슴팍의 옷자락을 풀어헤친 채 북쪽을 바라보고 숨져 있었다. 교봉은 노인의 가슴팍을 바라보고 '아'하고 놀랐다. 그리고 다리를 휘청하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아주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교나리.... 어떻게 된거예요?]
그 순간 '쫙쫙쫙'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교봉은 미친듯 자기의 가슴팍 옷자락을 찢어 버렸다. 그리고 털이 숭숭 난 가슴팍을 드러내었다. 아주가 보니 그의 가슴팍에는 푸르죽죽한 이리의 머리 하나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이리는 입을 쩍 벌리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흉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문신의 모양은 노인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과 생김이 똑같았다. 갑자기 세 명의 거란인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다. 교봉은 철이 든때부터 자기의 가슴팍에 푸른 이리의 머리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보아 왔기 떠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후 부모에게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교삼괴 부부는 그 무늬가 아름답다고 칭찬했을 뿐 그 내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알려주지 않았다. 북송시대에만 해도 사람의 몸에 꽃을 새기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목에서부터 발끝까지 꽃의 문신을 한 사람도 있었다.
원래 송나라는 후주(後周)시(試)씨의 강토를 물려받았다. 후주를 세운 황제 곽위(郭威)는 목에 한 마리의 참새를 문신으로 수놓고 다녀 사람들은 그를 곽작아(郭雀兒)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는 몸에 꽃을 새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를 좋아했다. 개방의 인물들도 십중팔구는 몸에 꽃을 수놓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봉 역시 자신의 몸에 수놓아진 이리의 머리를 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죽은 거란의 노인 가슴팍에도 그의 몸에 새겨진 이리의 문신과 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자 깜짝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세 명의 거란인은 교봉을 향해 뭐라고 계속 지껄이면서 가슴팍의 옷자락을 풀어헤쳤다. 그들의 앞가슴에도 한 마리의 이리 머리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교봉은 자기가 거란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 가슴팍의 이리 머리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문신을 하는 모양이었다. 교봉은 평소 짐승같이 생각하던 거란인이 자기의 동족이라는 사실에 커다란 괴로움을 느꼈다. 그는 멍하니 서있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부르짖고 미친듯이 산비탈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주는 부르짖었다.
[교나리! 교나리!]
말과 함께 그녀는 교봉을 뒤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주는 십여 리를 달려갔을 때 교봉이 머리를 감싸쥐고 커다란 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교봉의 안색은 푸르스름했으며 이마에는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아주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교봉은 말했다.
[나는 개, 돼지만도 못한 거란의 오랑캐요. 이후부터는 나를 만날 필요가 없을 것이오.]
아주는 본래 거란 사람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해 왔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속에서 교봉이 차지하는 위치는 이미 흔들릴래야 흔들릴 수 없을 정도로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거란 사람이 아니라 맹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주는 생각했다.
(지금 이 분은 마음이 괴롭기 한량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잘 위로를 해드려야겠다.)
그녀는 생각을 마치고 조용히 말했다.
[한나라 사람 가운데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것처럼 거란 사람 역시 마찬가지에요. 교나리. 이 일을 마음에 두지 마세요. 아주의 목숨은 그대가 구했어요. 그대가 한나라 사람이라도 좋고 거란 사람이라도 좋아요. 저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교봉은 냉랭히 말했다.
[그대는 나를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소. 그대는 겉으로 좋은 말을 할 필요는 없소. 내가 그대의 목숨을 구한 것은 단지 일시적인 의협심 때문이었소. 그 일은 이제 없었던 일로 합시다. 빨리 가보시오.]
아주는 당황스럽고 안타까웠다.
(스스로가 거란의 오랑캐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 그는 어쩌면 막북(幕北)으로 돌아가 이후 다시는 중원 땅을 밟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주는 몸을 일으키고 입을 열었다.
[교나리. 만약 저를 버리고 가신다면 저는 산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리겠어요. 아주는 식언을 하지 않아요. 그대는 거란의 영웅이예요. 그렇다고 저를 신분이 낮은 시녀라고 업수이 여긴다면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고 말겠어요.]
아주는 절벽의 끝에 가서 금새라도 몸을 날릴 듯한 자세를 취했다. 교봉은 그녀의 말이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깨닫고 속으로 퍽이나 감동을 받았다. 교봉이 거란의 오랑캐라는 것을 안 다음부터 천하의 사람들은 그를 사갈처럼 여기며 피하려고들었는데 아주만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었다. 정말 뜻밖이었다. 교봉은 가슴이 뭉클해져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주 소저, 그대는 모용공자의 시녀이지 나의 시녀가 아니잖소? 내 어찌 그대를 업수이 여기겠소?]
아주는 말했다.
[나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시나요? 그러지 마세요. 마음속으로는 나를 업수이 여기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듣기 좋은 말을 하지 마세요.]
그녀는 교봉이 한 말투를 흉내 냈는데 그녀의 눈동자에는 은은한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교봉은 그녀의 말을 듣고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좌절과 실의에 빠졌을 때 이와 같이 총명하고 영리한 소녀가 농담을 하며 위로해 주자 괴로운 심사가 한결 가셔지는 듯했다. 갑자기 아주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교나리, 제가 모용공자를 시중들었다고 해서 결코 그에게 몸을 맡긴 게 아니에요. 다만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고아 신세라서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게 되었으며 어느 날 모용선생께서 저를 데리고 집으로 간 것이에요. 그리고 시녀가 되었지만 모용공자 역시 저를 시녀처럼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오히려 몇 사람의 시녀를 사서 저의 시중을 들게 했어요. 아벽누이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다만 그녀의 아버지께서 연자오에 있는 모용박 옛주인 나리의 집으로 피난을 시킨 데 불과해요. 모용 선생과 부인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어요. '언젠가 아주와 아벽이 연자오를 떠나게 될 때는 모용씨의 집안 사람들은 멀리까지 전송하러 나가겠다'고요.]
거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원래 모용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언젠가 아주와 아벽이 시집을 가게 된다면 우리 모용씨 집안에서는 꽃가마에 태워서 나팔을 불며 그녀들이 문을 나가도록 해 줄 것이다. 딸을 시집보낼 때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게 해 주마.)
아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계속했다.
[이후부터 저는 교나리의 시녀가 되어 교나리를 시중들겠어요. 그렇다고 해도 모용공자는 절대 탓하지 않을거예요.]
교봉은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나는 오랑캐인데 어찌 시녀를 거느릴 수 있단 말이오? 그대는 강남(江南)의 부유한 집에서 생활하여 왔으니 나와 같이 떠돌아 다니며 고생을 해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을 것이오. 자아, 나를 보시오. 이처럼 거친 사내가 그대의 시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겠소?]
아주는 방긋 웃었다.
[우리 이렇게 해요. 저를 교나리가 사로잡아온 노예쯤으로 간주하세요. 그리고 기쁠 때는 저에게 웃어보이고 기분이 나쁠 때는 저를 때리고 꾸짖으세요. 그러면 되겠죠?]
교봉은 빙그레 웃었다.
[아주 소저, 내가 한 주먹만 휘둘러도 아마 그대는 죽고 말텐데 어떻게 때려서 화풀이를 할 수 있겠소?]
아주는 말했다.
[그러니까 가볍게 때려야 하는 거예요. 심하게 때리면 못써요.]
교봉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가볍게 때릴 바에야 차라리 안 때리고 말지! 그리고 나는 노예를 두고 싶지가 않소.]
아주는 말했다.
[그대도 거란의 대영웅이에요. 한나라의 여자를 사로잡아 노예로 삼는다고 안될 것이 어디 있어요? 송나라 군졸들을 보세요. 그들 역시 많은 거란 여인들을 사로잡아 갔지 않아요?]
교봉은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수심의 빛을 본 아주는 혹시 자기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잠시 후 교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거란 사람들이 흉폭하고 잔인해서 한나라 사람들을 학대하고 해치는 줄로만 알았소. 그러나 오늘 친히 목격한 바에 의하면 송나라 군졸들도 거란의 약한 아녀자와 노인들을 잔인하게 죽이더구려. 나는... 나는... 아주, 나는 거란의 사람이오. 이제부터 거란 사람이라고 해서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송나라 사람이 된다고 영광스럽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오.]
아주는 그의 말을 듣고 교봉이 이미 울적하던 심사를 풀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는 매우 기뻐했다.
[나는 오랑캐 사람들 가운데도 좋은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한나라 사람 중에도 나쁜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오랑캐 사람들은 한나라 사람보다 교활하지 않아요. 따라서 나쁜 사람은 더 적을지도 몰라요.]
교봉은 왼쪽의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아주, 나의 친부모님은 한나라 사람에게 살해되셨소. 이후 나는 그 원수를 갚지 않을 수가 없구료.]
아주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교봉이 원수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간단히 말했지만 그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싸움과 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관련되어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교봉은 깊은 골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의 어머님께선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셨고 아버님께선 너무나 슬픈 나머지 살아 남으려고 하지 않았소. 따라서 바로 저 암석 옆에서 깊은 골짜기로 뛰어들었소. 그리고 허공에서 내가 함께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위로 던졌소. 그래서 교봉은 오늘까지 살아 있게 된 것이오. 아주, 아버님은 나를 지극히 사랑하셨다오!]
아주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교봉은 말했다.
[나의 부모님의 피맷힌 원한을 어찌 잊겠소? 이전에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적을 친구로 여겼으니 그것은 불효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소. 그런데 오늘 날에 이르러서도 나의 부모님을 해친 원흉을 죽이지 않는다면 이 교모는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겠소? 그들이 말하는 통솔자는 누구요? 그가 왕방주에게 쓴 편지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으나 지광화상은 그 서명을 찢어 배속으로 삼키고 말았소. 이 통솔자는 틀림없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를 위해 감추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는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며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주가 그의 원수를 찾는데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이 옆에서 그의 말을 들어 준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그의 번뇌를 감소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통솔자가 중년의 나이에 호걸들을 이끌 수 있는 것을 보면 무공이 지극히 고명하고 명성도 높은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이오. 그리고 그 편지에 쓴 말투로 보아 왕방주와는 교분이 무척 두터운 듯했소. 그리고 왕방주에 대하여 호칭하는 것을 보면 나이는 왕방주보다 많을 것이오. 이 같은 인물을 찾기는 어렵지 않소. 그 편지를 본 사람은 지광화상, 개방의 서장로와 마부인, 철면판관 단정 등이오. 조전손 역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조전손이 그 같은 사실을 사매인 담파에게 이야기했고 담파 역시 남편에게 감추지는 않았을 것이오. 당연히 죽여야 할 사람은 그 통솔자가 아니겠소? 나는 그의 집안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이겠소. 아니 닭이나 개도 한 마리 남겨 두지 않겠소.]
아주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교봉은 다시 말했다.
[지광화상은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조전손 역시 정처없는 몸이니 그 두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오. 그러나 철면판관, 단정은 나의 부모를 해친 일에 참여하지 않았고 또 내 이미 그의 두 아들을 죽였으며 그의 작은 아들마저 나 때문에 죽었으니 그를 찾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개방의 서장로를 찾아가도록 합시다.]
아주는 그가 우리라고 표현하자 크게 기뻐했다. 그것은 바로 그녀를 데리고 동행하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아주는 생각했다.
(이 세상 끝까지라도 저는 그대와 동행하겠어요.)
13. 흉수(兇手)는 누구냐
그 즉시 두 사람은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산꼭대기 사이를 빙 돌아서 안문관을 지나 어느 조그만 고을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한 객점으로 찾아 들었다. 아주는 교봉이 입을 열기 전에 점소이에게 20근의 술을 시켰다. 점소이는 그들 두 사람이 부부 같은가 하면 부부 같지 않고 남매 같은가 하면 남매 같지 않은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거기에다 20근의 술을 시키자 더욱더 의아하게 여긴 나머지 멍하니 그 두 사람을 바라 볼 뿐 술을 가져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교봉은 그를 한번 노려보았다. 성을 내지 않는데도 저절로 위엄이 우러나는 표정이었다. 그 점소이는 깜짝 놀라 그제서야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스무 근의 술이라? 술로 목욕을 할 셈인가?]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교나리, 우리가 서장로를 찾아 다시 이틀을 가게 된다면 즉시 상대방이알아 차리게 될거에요. 길을 가는 동안 싸우고 죽이는 것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서장로가 소문을 듣고 도망을 쳐버린다면 그를 찾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 돼요.]
교봉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나를 추켜세울 것 없소. 길을 가는 동안 계속 싸워 나가다 보면 적은 점점 더 많아지고 우리 두 사람은 끝내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아주는 그 말을 가로챘다.
[어떤 위험이 있다고는 볼 수 없어요. 다만 그들이 하나같이 소문을 듣고 모습을 감추게 된다면 일을 해결하기 어렵게 돼요.]
교봉은 말했다.
[그대에게는 무슨 좋은 방법이 있소? 우리는 낮에 객점에서 쉬고 어두운 밤에 길을 가는 것이 어떻겠소?]
아주는 미소지었다.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주 쉬워요. 다만 천하에 명성을 드날리고 있는 교대협께서 역용을 하고 변장을 해주실지 의문이군요.]
교봉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한나라 사람이 아니라서 이 한나라 사람의 옷은 이제 입고 싶지 않소. 그렇다고 거란 사람의 옷차림을 한다면 중원땅에서는 한 걸음도 옮기기 전에 죽고 말거요. 아주, 그대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분장하는 것이 좋겠소?]
아주는 말했다.
[그대의 체구가 우람하니 나서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될거에요. 그러니 모습이 평범하고 몸에 추호도 특이한 점이 없는 강호의 무사로 변장을 하는 것이 가장 좋겠어요. 이와 같은 사람은 길을 가다 보면 하루에도 수백 명을 만나게 되니까 그 누구도 그대를 눈여겨 쳐다보지 않을거예요.]
교봉은 무릎을 쳤다.
[정말 묘하군! 묘해! 술을 마신 이후 우리들은 바로 변장을 하도록 합시다.]
그는 20근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주는 즉시 손을 썼다. 밀가루와 풀, 그리고 검은 아교등 물건을 샀다. 그리고 손질을 하게 되자 교봉의 얼굴의 특징이 하나하나 사라지게 되었다. 아주는 다시 그의 윗쪽 입술에다 엷은 한가닥 수염을 붙여 주었다. 교봉이 거울을 비쳐보니 자기자신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주는 이어 그 자신의 옷차림을 바꾸고 중년의 사내로 분장을 했다.
아주는 말했다.
[그대의 외모는 완전히 변했으나 말을 하게 되고 술을 마시게 된다면 상대방은 바로 그대의 정체를 간파해 낼거예요.]
교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음, 말도 적게 하고 술도 적게 마시도록 하겠소.]
그리하여 남쪽을 향해 길을 가게 되었는데 길을 가는 동안 교봉은 정말 입을 열어 말할 때가 적었다. 그리고 매 끼니마다 술을 마셨으나 두세 근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약간만 마시고 그만두는 형편이었다. 이 날 그들은 산서성 남쪽 삼갑진(三甲鎭)에 이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어느 조그만 국수집에서 국수를 먹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 밖에서 두 거렁뱅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명이 말했다.
[서장로는 그야말로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어. 앞가슴과 뒷등의 근골이 모조리 부러졌다고. 틀림없이 교봉이란 그 악적이 독수를 쓴거야.]
교봉은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서장로가 죽었다고?)
그리고 아주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때 다른 한 명의 거렁뱅이가 말했다.
[모레 하남성 위휘(衛輝)에서 초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방의 장로나 형제들이 모두 가서 서장로의 명복을 빌게 될거야. 그때 교봉을 사로잡는 방법을 강구했으면 좋겠군.]
그러자 먼저번에 말한 거렁뱅이가 몇 마디 개방의 은어로 말했다. 교봉은 물론 그 뜻을 알고 있었다. 그 거렁뱅이의 말은 교봉의 기세가 무서우니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었다. 교봉과 아주는 국수를 다 먹은 이후 삼갑진을 떠나 교외로 나섰다. 교봉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위휘로 가서 살펴봐야겠소. 어쩌면 그곳에서 어떤 단서를 얻게 될 지도 모르겠소.]
아주는 말했다.
[그래요. 위휘에 반드시 가야 해요. 서장로에게 조의를 표하는 사람들은 대개 다 그의 옛날 부하들이예요. 그러니 그대는 언행에서 마각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세요.]
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있소.]
그들은 다시 동쪽으로 길을 꺾어 위휘쪽으로 향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은 위휘에 도착했다. 그런데 성 안에 들어서자 온 거리와 골목에는 개방의 제자들로 가득차 있었으며 또 어떤 개방의 제자는 골목길 안에서 돼지나 개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개방제자는 거리에서 동냥을 하기도 했다. 교봉은 마음 속으로 여간 괴롭지 않았다. 강호에서 제일 대방이라 일컫는 개방의 방규가 헤이해지고 과거 자기가 방의 일을 주관할 때의 삼엄하면서도 세력을 떨쳤던 기상은 되찾을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반드시 세상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 것 같았다. 이제 개방은 그의 적이지 친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이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 쌓은 정성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되자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몇 명의 개방제자들은 방의 은어로 몇 마디 말을 주고 받았다. 교봉은 그들의 말을 듣고 서장로의 빈소가 바로 성서쪽에 있는 한 채의 황폐해진 집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봉과 아주는 초와 지전, 그리고 돼지머리와 제사 물품을 갖추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 그 황량해진 집의 빈소를 찾아가서 서장로의 영전에 절을 올렸다. 서장로의 영패는 선혈이 잔뜩 칠해져 있었다. 이것은 개방의 규칙이었다. 그 뜻은 죽은 사람이 누구에게 해를 입었으니 개방의 무리들은 반드시 그를 위해 원한을 갚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봉을 욕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봉이 바로 그들 곁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교봉은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개방의 수뇌인물에 속하는지라 혹시나 그들에게 발각될까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아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걸으며 그는 생각했다.
(서장로가 죽어 버렸으니 이 세상에서 통솔자라는 사람을 알고 있는자가 또 한 사람 줄어들었구나.)
그때 별안간 골목길 저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였다. 키가 큰 여인이었다. 교봉은 안력이 뛰어나 대뜸 담파라는 사실을 알아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묘하군! 그녀도 반드시 서장로의 빈소를 찾아보려고 온 것일게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녀를 찾던 중이었다.)
그런데 곧이어 다시 한 사람이 번쩍하고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역시 경신법이 뛰어났다. 바로 조전손이었다. 교봉은 어리둥절해졌다.
(저 두사람은 왜 남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이상야릇한 짓이라도 저지른 것일까?)
그는 두 사람이 본래 사남매이며 옛날에 얽혔던 정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태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생각해 봤다.
(두 사람은 이미 60~70세의 나이인데 설마하니 아직도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말인가?)
그는 본래 쓸데없는 일에는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전손이 영도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담공과 담파 부부도 십중팔구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그들의 비행을 꼬투리삼아 그들에게 진상을 토로하도록 다그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아주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객점에서 나를 기다리시오.]
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봉은 즉시 조전손이 사라져 간 쪽으로 몸을 날렸다. 조전손은 으슥한 곳을 골라서 나아가고 있었다. 동쪽 담벼락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서쪽 처마 아래에 몸을 움츠리곤 했는데 행동거지가 매우 신비했다. 그는 동문을 나섰다. 교봉은 멀리서 그를 따랐으며 시종 그에게 발견되지 않았다. 조전손은 강가로 달려가더니 허리를 구부리고 한 척의 커다란 목선으로 기어드는게 아닌가? 교봉은 진기를 돋우고 재빨리 몸을 날렸다. 몇 번 몸을 날리지 않아 배 옆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교봉은 가볍게 선실 위로 올라가 귀를 선실쪽에 갖다대고 엿들었다. 선실에서 담파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형, 그대와 나는 이미 이와 같은 나이가 되었으니 어릴 때의 일은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짓이예요. 그런데 다시 이야기를 들먹여서 무엇하자는 것이예요?]
조전손은 말했다.
[나의 한평생은 끝장이 났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소. 내가 그대를 만나자고 한 것은 다른 게 아니오. 소연, 그대에게 옛날 그 몇 수의 노래를 한번만 불러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 왔다오.]
담파는 말했다.
[아! 그대는 역시 우스울 정도로 순진하군요. 우리 바깥 양반은 의심이 많으니 그대는 역시 나와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조전손은 말했다.
[뭐가 두렵소? 우리 사남매의 행동은 광명정대하여 옛일을 이야기할 뿐인데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이오?]
그러자 담파는 한숨을 내쉬고 나직히 말하였다.
[옛날 그 노래들은 .....]
조전손은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더욱 애절하게 말했다.
[소연,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났으나 이후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오. 거기다가 나의 목숨은 얼마 남지 못했으니 그대는 한번만 노래를 불러주시오.]
담파는 말했다.
[사형, 그대가 꼭 듣겠다면 내가 조용히 한 수의 노래를 불러드리겠어요.]
조전손은 기뻐서 말했다.
[좋소! 정말 고맙소! 소연, 정말 고마워!]
담파는 나직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옛날 낭군은 다리 위를 지나고 누이는 다리아래 냇가에서 빨래를 하네...]
두 마디의 노래를 불렀을 때 '철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선실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의 대한이 걸어 들어왔다. 교봉은 역용을 했기 때문에 조전손과 담파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두 사람은 깜짝 놀랐으나 상대방이 담공이 아닌 것을 알고는 안심을 한듯 호통쳐 물었다.
[뉘시오?]
교봉은 그들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한 사람은 경박하고 음탕하여 남편이 있는 부인을 유혹하고, 한 명은 음탕하고 몰염치하게도 지아비를 속인 채 낭군과 밀통을 하는구나....]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담파와 조전손은 동시에 손을 써서 좌우로 나누어 공격해 왔다. 교봉은 몸을 슬쩍 틀어서는 담파의 손목을 움켜 잡으려 했고 곧이어 팔굽을 내밀어 조전손의 옆구리를 공격해 갔다. 조전손과 담파는 모두 무림의 고수였다. 그들은 한 수면 적을 처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습이 별로 특이하지 않은 사내의 무공은 기이할 정도로 고강하지 않은가? 선실 안은 본래 장소가 협소하여 손발을 제대로 놀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봉은 금나수와 단타근공(短打近攻)의 재간을 자유자재로 펼쳤다. 그리하여 일장 둘레도 되지 않는 선실 안에서 지극히 날렵하게 움직였다. 제 7 초를 주고 받게 되었을때 조전손을 허리께를 교봉의 손가락에 찔리게 되었다. 담파는 깜짝 놀라 손 쓰는 것이 조금 둔해지게 되었고 대뜸 등에 일장을 맞고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교봉은 냉랭히 말했다.
[그대들 두 분은 이곳에서 잠시 쉬도록 하시오. 안휘성 내의 폐가에 적잖은 영웅호걸들이 서장로의 빈소를 지키고 있소. 나는 가서 그들을 데리고 와 당신네의 모습을 보여주겠소.]
조전손과 담파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억지로 운기행공하여 혈도를 풀려고 했으나 혈도가 완전히 봉쇄되어 손가락 하나 꼼짝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나이도 많았고 정욕 같은 것도 있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만난 것은 옛일을 주고 받으며 옛정을 이야기해 보자는 데 있었지 어떤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는 북송시대라서 모든 사람들은 예의를 중시했다. 그리고 강호의 영웅호한이 만약 여자를 범하게 된다면 뭇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일남일녀가 남 몰래 배의 선실에서 만난다고 했을 때 그 누가 그저 한 수의 노래나 부르고 몇마디의 멍청하고 쓸데없는 말이나 주고받는 것으로 생각하겠는가? 그리고 뭇사람들이 달려와 보게 된다면 이후 어떻게 얼굴을 내밀 수 있겠는가. 담파는 재빨리 말했다.
[어느 영웅이신지 잘 모르지만 우리는 결코 귀하에게 죄를 짓지 않았소. 손에 사정을 둔다면 나는... 반드시 보답을 하리다.]
교봉은 말했다.
[보답을 할 필요는 없소. 단지 한마디만 묻겠는데 그대는 세마디로 대답해 주기만 하면 되오. 그대가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불초는 즉시 두 분의 혈도를 풀어주고 길을 떠나겠으며 오늘의 일을 영원히 다른 사람에게 들먹이지 않겠소.]
담파는 말했다.
[이 늙은이가 알고 있는 일이라면 마땅히 말씀 드리죠.]
교봉은 말했다.
[그 누가 개방의 왕방주에게 편지를 보내 교봉을 헐뜯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편지에 서명을 한 사람을 통솔자 형님이라고 부르는데 그 사람은 누구시오?]
담파는 주저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조전손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소연, 말하면 안 돼! 말하면 큰일나오!]
교봉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대는 망신을 당해도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조전손은 말했다.
[나는 죽으면 그뿐이오. 그 통솔자 형님으로 말하면 나에게 은혜를 베푼 몸, 이 늙은이는 결코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소.]
교봉은 말했다.
[그렇다면 소연이 망신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대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조전손은 말했다.
[담공이 만약 오늘의 일을 알게 된다면 나는 즉시 그의 앞에서 자결하여 죽음으로 사죄할 뿐이외다.]
교봉은 담파를 향해 말했다.
[그 사람은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니 그대가 말하시오.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편안무사하게 되고 담공과 그대의 체면도 보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대 사형의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것이오.]
담파는 그가 조전손의 목숨으로 위협하자 부르르 몸을 떨고 말했다.
[좋소. 내 그대에게 말하지. 그 사람은 ....]
조전손은 급히 부르짖었다.
[소연, 절대 말하지 마시오! 제발 부탁이오. 이 사람은 십중팔구 교봉의 부하요. 그대가 말하게 된다면 그 통솔자 형님의 목숨이 위험해지게 되오.]
교봉은 말했다.
[내가 바로 교봉이오. 만약 그대들이 말하지 않는다면 무궁한 후환을 남기게 될 것이오.]
조전손은 깜짝 놀라더니 말했다.
[어쩐지 무공이 뛰어나다 생각했더니 무리도 아니었군! 소연, 나는 한평생 그대에게 부탁을 해본적이 없소. 이것은 내가 유일하게 부탁드리는 일이니 그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대답을 하지 마시오.]
담파는 조전손이 수십 년 동안 자기에게 보여준 사랑과 정을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교방주, 오늘의 일은 좋게 해결될지 나쁘게 해결될지는 그대에게 달렸소. 우리 사남매 두 사람은 양심에 물어 가책 받을 일이 없소. 하늘에 두고 맹세할 수 있소. 그러나 그대가 알고자 하는 일은 내가 말씀드릴 수 없으니 용서하시오.]
그녀의 이 몇 마디 말은 매우 겸손했으나 단호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실토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엿볼 수 있었다. 조전손은 기뻐서 말했다.
[소연, 정말 고맙소! 정말 고마워!]
교봉은 더 다그쳐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싸늘히 코웃음치고는 담파의 머리 위에서 한 자루의 옥차를 뽑아 들고 선실에서 달려나와 곧장 안휘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담공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았다. 그가 역용을 하고 옷차림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담공과 담파 부부가 안휘성 안의 어느 객점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은 비밀스러운 일이 아니어서 단번에 수소문하여 알아낼 수 있었다. 교봉이 객점으로 찾아가자 담공은 두 손을 뒷짐진 채 방 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매우 초조했다. 교봉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바로 담파의 옥차가 놓여있었다. 담공은 조전손이 그림자처럼 자기네들을 따라 안휘성으로 온것을 보고 줄곧 우울해 하며 불안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 나절 동안이나 처가 보이지 않자 크게 염려하여 그녀가 어디로 갔을까 궁금히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처의 옥차를 대하게 되자 놀람과 기쁨에 급히 물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나의 안사람이 그대를 보낸 것이오? 도대체 무슨 일로 그러시오?]
그러면서 담공은 손을 뻗쳐 그 옥차를 집어 들었다. 교봉은 그가 옥차를 가져가는 것을 내버려 두고 말했다.
[존부인께서는 이미 남에게 사로잡혀 지금 위기에 처해있소.]
담공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우리 안사람의 무공은 매우 뛰어나오. 어찌 가볍게 남에게 사로잡힌단 말이오?]
교봉은 말했다.
[상대방은 교봉이오.]
담공은 교봉이란 말을 듣자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초조하여 재빨리 물었다.
[교봉, 아! 그였구나. 그렇다면 야단이군! 나의... 나의 안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교봉은 말했다.
[그대가 존부인을 살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매우 수월한 일이오. 반대로 그녀를 죽게 만드는 것도 수월한 일이오.]
담공은 성격이 침착햇다. 마음 속으로는 여간 다급하지 않았으나 얼굴에 조금도 내색하지않고 물었다.
[어디 한번 말씀을 들어 보기로 합시다.]
교봉은 말했다.
[교봉에게는 한 가지 담공에게 여쭈어 볼 말이 있다는 것이오. 그대가 만약 솔직히 말한다면 즉시 존부인을 놓아 주어 그녀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했소. 그러나 만약 귀하가 말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죽이되 그녀의 시체를 조전손의 시체와 한 구덩이에 합장하여 묻겠다고 했소.]
담공은 최후이 한 마디를 듣고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소리의 노갈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교봉의 얼굴을 내려치려고 했다. 교봉은 비스듬히 몸을 날려 물러섰다. 그렇게 되자 담공의 일장은 그만 허공을 치고 말았다. 담공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일장은 그야말로 기세가 우뢰와 같이 강맹하고 빨랐는데 상대방이 아무렇지도 않게 피할 수 있으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오른손을 비스듬히 끌어 당기며 왼손을 들어 옆으로 쓸어쳐 나갔다. 교봉은 방안의 장소가 협소하여 제대로 피할 수 없자 즉시 오른팔을 들어서 억지로 맞받았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일장은 그의 팔을 때렸다. 그러나 교봉의 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른팔을 홱 뒤집더니 아래로 내려 누르는 듯 담공의 어깨죽지를 잡고 아래로 밀었다. 삽시간에 담공은 어깨죽지에 마치 수천근이나 되는 커다란 바위가 얹혀진 것 같은 중압감을 느꼈다. 즉시 내공을 돋우고 밀어 올리려고 했으나 어깨죽지가 받는 중압감은 마치 태산과 같았다. 그의 척추뼈가 우두둑 우두둑 하는 소리를 냈다. 거의 분질러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되면 무릎을 꿇고 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버티어 어떻게 하더라도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가닥의 숨조차 들이마실 수가 없었다. 갑자기 두 무릎이 시큰해졌다. 마침내 풀썩 하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무릎의 관절은 부드러운 것이라 그와 같이 무거운 힘이 내리누르게 되니 굽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교봉은 일부러 그의 오기를 꺾어 놓으려고 그가 무릎을 꿇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그가 무릎을 꿇어도 팔에 가한 힘은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았으며 그의 등이 활처럼 구부러지도록 더욱더 압력을 가해서 이마가 땅에 거의 닿도록 만들었다. 담공은 온 얼굴이 씨뻘개졌다. 그는 억지로 버티려고 했으며 젖먹던 힘을 다해 어깨 위로 가해지는 힘에 항거하며 몸을 위로 버티려고 했다. 별안간 교봉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담공의 어깨죽지에 가해지던 압력이 갑자기 사라졌다. 이것은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는 자세를 가다듬지 못하고 대뜸 위로 뛰어올라 훌쩍 일장 높이 솟은 끝에 '꽝'하니 머리를 무섭게 대들보에 부딪치게 되었고 하마터면 대들보를 분질러 놓을 뻔했다. 담공이 허공에서 떨어지게 되자 교봉은 그의 두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오른손을 뻗쳐 내어서는 대뜸 그의 가슴팍을 움켜 잡았다. 교봉의 팔은 길고 담공의 몸은 왜소하여 그가 주먹으로 치나 발로 차더라도 상대방의 몸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그의 두 발이 허공에 들려 있기 때문에 아무리 고강한 무공이있다 하더라도 펼쳐 낼 수가 없었다. 담공은 그만 다급해지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깨닫고 말했다.
[너는 바로 교봉이구나!]
교봉은 말했다.
[물론 나요.]
담공은 노해 부르짖었다.
[너는... 너는... 제기랄, 어째서 조전손이란 그 늙은 녀석을 이 일에 끌어들이는 거지?]
그가 가장 화를 내는 것은 교봉이 담파를 죽인 이후 그녀의 시체를 조전손과 합장하겠다고 말한 사실에 있었다. 교봉은 말했다.
[그대의 할멈이 그와 얽혀 돌아가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그대는 담파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싶지 않소? 그리고 그녀와 누구와 정담을 나누고 있으며 정이 담긴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소?]
담공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즉시 처가 조전손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급히 달려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소? 그대는 나를 안내해 주시오.]
교봉은 냉소했다.
[그대는 나에게 어떤 좋은 점을 베풀겠다는 것이오?]
담공은 그가 먼저 물어 볼 말이 있다고 한 사실을 상기하고 물었다.
[그대는 나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고 했는데 무엇을 묻고자 했소?]
교봉은 말했다.
[그 날 무석성 밖 은행나무 숲 속에서 서장로가 가지고 온 편지는 바로 개방 전임방주 왕검통에게 보낸 것이었소. 그런데 그 편지는 누가 썼소?]
담공은 손과 발을 미미하게 떨었다. 이때 그는 여전히 교봉에게 들린 채 허공에 떠있는 상태였다. 교봉이 내력을 쏟기만 한다면 그의 목숨은 사라지게될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말했다.
[그 사람은 그대의 부친을 죽인 원수가 아니겠소? 나는 결코 그의 성명을 누설 할 수 없소.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를 찾아 원한을 갚게될 것인즉 이는 내가 그의 목숨을 해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오.]
교봉은 말했다.
[그대가 만약 말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담공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대는 이 담모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내 어찌 죽음이 두려워서 친구를 판단 말이오?]
교봉은 그가 의리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태도를 보고 속으로 퍽이나 탄복했다. 만약에 다른 일이었다면 아예 그에게 다그칠 생각도 안 했을 것이나 부모의 원수는 여느 일과 다른지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는 자기의 목숨은 아까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처의 목숨까지도 아까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담공과 담파의 명성이 땅에 떨어져 천하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 해도 그대는 두렵지 않다는 것이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바로 명성이었다. 그리고 명성을 중시하고 몸을 천시하는 것은 강호 호한들의 일반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담공은 말했다.
[이 담모가 앉거나 서되 한평생 친구에게 미안한 짓을 반가지라도 한 적이 없는 이상 어찌 명성이 땅에 떨어져 천하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는 것이오?]
교봉은 싸늘히 말했다.
[담파는 앉으나 서나 자세를 똑바로 가다듬을 수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조전손 역시 친구에게 미안한 일을 결코 하지 않으리라 할 수 없을 것이오.]
삽시간에 담공은 온 얼굴이 다시 시뻘개지더니 곧이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는 두 눈썹을 곤두세우고 노기를 띤 눈으로 매섭게 교봉을 노려보았다. 교봉은 손을 놓아 그를 바닥에 내려서도록 한 후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담공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안휘성을 나섰다. 적잖은 강호의 호걸들이 담공을 알아보고 공손히 길을 비켰으며 절을 했다. 담공은 흥! 하면서 지나쳐 갔다. 얼마 후 두사람은 커다란 목선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교봉은 몸을 훌쩍 날려 뱃머리에 올라서서는 선실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 자신이 보도록 하시오.]
담공은 곧이어 뱃머리로 올라가서 선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니 처와 조전손은 서로 얼싸 안은 채 선실 한 모퉁이에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담공은 끓어오르는 화를 누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손을 들어 맹렬히 조전손의 머리를 내려쳤다. '퍽'하는 소리가 들리고 조전손의 몸이 움직였으나 그는 반격을 하지도 않았고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담공은 자기의 손이 그의 머리와 부딪치게 되었을 때 이미 일이 잘못됐다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손을 뼉쳐서는 처의 뺨을 더듬어 보았다. 얼음과 같이 차가운 촉감이 전해졌다. 원래 담파는 이미 죽은지 오래 되었던 것이다. 담공은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도 좀처럼 단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손을 뻗쳐 그녀이 코 앞에 갖다 대었다. 역시 숨쉬는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멍청해졌다. 다시 조전손의 이마를 만졌다. 역시 차가운 촉감만 전해졌다. 담공은 슬픔과 분노에 홱 몸을 돌리며 교봉을 노려 보았다. 그 눈에서는 불똥이 튀어 나올것 같았다. 교봉은 담파와 조전손이 갑자기 비명횡사한 것을 보고 역시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그가 배에서 떠나 성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두 사람의 혈도를 짚었을 뿐인데 어찌하여 두 고수가 갑자기 죽게 되었단 말인가? 그는 조전손의 시체를 들고 살펴보았다. 몸에는 무기에 입은 상처도 보이지 않았고 핏자국도 없었다. 교봉은 허리띠 앞섶자락을 북 하며 찢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가슴팍에 커다랗고 새까만 응어리가 생겨 있는 것이 아닌가? 틀림없이 장력에 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와 같은 중수법이 지극히 교봉 자신의 손에 의한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담공은 담파를 안고 등을 돌린채 그녀의 앞섶자락을 풀어 헤치고 가슴팍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 상처는 바로 조전손이 입은 상처와 똑같았다. 담공은 울고 싶었으나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교봉에게 말했다.
[너는 인면수심이구나 이토록 악랄하다니.....]
교봉은 놀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어 일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중수법으로 담파와 조전손을 때려 죽였을까? 이 하수자의 공력은 심후하기 짝이 없다. 설마하니 또 나의 원수가 이곳에 도달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가 어떻게 이 두사람이 이 선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담공은 사랑하는 처가 참혹한 죽음을 당하자 슬픈 나머지 두 팔에 공력을 돋우고는 힘주어 교봉을 후려치려고 했다. 교봉은 옆으로 피해 버렸다. 그러자 '와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담공의 장력은 선실 한쪽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교봉은 오른손을 번쩍 내밀어 그의 어깨죽지에 얹으며 말했다.
[담공, 그대의 부인은 결코 내가 죽인 것이 아니오. 그대는 믿을 수 있겠소?]
담공은 말했다.
[그대가 아니라면 또 누구인가?]
교봉은 말했다.
[지금 그대의 목숨은 나의 손에 달렸소. 이 교모가 만약 그대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노릇인데 그대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담공은 말했다.
[그대는 그저 부친을 죽인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 내고자 할 뿐이다. 나의 무공은 그대만 못하지만 어찌 너의 그와 같이 뻔뻔스러운 수작에 넘어 가겠느냐!]
교봉은 말했다.
[좋소. 그대가 나의 부친을 죽인 원수의 성명을 말해준다면 내가 그대의 처를 죽인 원수를 그대 대신 갚아 드리도록 하겠소.]
담공은 참담한 얼굴이 되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잇따라 세 번이나 공력을 돋우어서는 어깨죽지를 잡고 있는 교봉의 손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담공이 더 큰 힘을 돋우면 돋울수록 상대방의 손에 실린 힘도 그에 따라 커져서 시종 그 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담공은 모질게 마음을 가다듬고 혓바닥을 잘라냈다. 그리고 온 입안 가득 고이는 피를 교봉에게 훅 내뿜었다. 교봉은 급히 몸을 날려 옆으로 피했다. 담공은 달려가더니 발을 들어 조전손이 시체를 걷어차 저만치 굴러가게 만든 후 두 손으로 담파의 시체를 안았다. 그러더니 머리를 떨구며 숨지는 것이 아닌가? 교봉은 그와 같은 참상을 보게되자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무척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담씨 부부와 조전손은 그가 친히 죽인것은 아니나 역시 자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시체를 없애고 흔적을 감추려고 한다면 발을 한번 굴러 뱃바닥에 구멍을 내기만 한다면 배는 강물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내가 범인이 아닌데 어찌 세 구의 시체를 숨기려고 하겠는가?)
그는 선실을 나와 뭍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뭍에서 단서를 잡으려고 했으나 전혀 종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14. 교봉의 내력
교봉은 총총히 객점으로 돌아갔다. 아주는 줄곧 문 앞에 서서 두리번 거리며 교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봉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무척 기뻐했다.
[어떻게 됐어요?]
교봉은 말했다.
[모두 죽었소.]
아주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담파와 조전손이?]
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담공 역시 죽었소. 모두 세 사람이오.]
아주는 그가 죽인 줄로 알고 속으로 불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조전손은 그대의 부친을 죽인 범인이니 죽였다 하더라도...별 것 아니에요.]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니오.]
아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죽인 것이 아니라면 되었어오. 저는 본래 담공과 담파가 그대에게 죄를 짓지 않았으니 용서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누가 죽였나요?]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오.]
그는 손가락을 꼽아 보며 말했다.
[그 원흉의 성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세 사람밖에 남지 않았소. 우리는 빨리 일을 처리해야 하오. 적이 우리 앞에서 선수를 치게 된다면 우리는 끝내 알아내지 못하게 될 것이오.]
아주는 말했다.
[그래요. 그 마부인은 그대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니 어떠한 수단을 쓰더라도 말하지 않을거에요. 더군다나 과부를 다그친다는 것은 사내 대장부가 할 짓이 못돼요. 그리고 지광화상이 머무는 절간은 강남에 멀리 있으니 산동 태안의 선씨 집으로 달려 가도록 해요.]
교봉은 아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이 며칠 동안 그대는 너무나 고생이 많소.]
아주는 살포시 웃더니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사환, 사환! 빨리 계산하도록 해요!]
교봉은 말했다.
[내일 아침 계산해도 늦지 않소.]
아주는 말했다.
[아니예요. 오늘 밤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도록 해요. 적이 선수를 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교봉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름한 어둠을 뚫고 그들은 길을 재촉했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은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악마 교봉이 갑자기 독수를 써서 담공부부와 조전손을 죽였다는 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말을 하면서도 좌우를 두리번 거렸다. 혹시나 교봉이 그들 곁에 나타날까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교봉이 바로 그들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을 바꾸어 가며 밤낮으로 동쪽을 향해 질풍같이 말을 달렷다. 이틀 동안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아주는 피곤하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잠이 오는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는데 몇 번이나 말등에서 떨어질 뻔했다. 교봉은 그녀가 견디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말을 버리고 수레로 바꾸었다. 두 사람은 수레 안에서 서너 시간을 잤다. 그리고 충분히 수면을 취한 후 수레를 버리고 말로 바꾸어 타고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갔다.
[이번에는 그 대악당을 앞지를 수 있을 거에요]
그녀와 교봉은 적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들먹이게 되었을 떠 그녀는 언제나 대악당이라고 불렀다. 교봉은 은연중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악당이 시종 선수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무공이 결코 자기 못지 않고 지모에 있어서도 자기보다 훨씬 뛰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교봉은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시종 오리무중에 빠져 있는 형편인데 그는 그 자신의 모든 수작과 수행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평생 그는 이와 같이 무서운 적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기개는 더욱더 호탕해졌으며 추호도 두렵다는 생각을 품은적이 없었다. 철면판관 선정은 대대로 산동성 태안현 대동문 밖에서 살고 있었다. 태안 경내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의 위명을 알고 있었다. 교봉과 아주가 태안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들은 선씨 집의 위치를 물어 보고 즉시 성을 가로질렀다. 대동문을 나오게 되어 일 마장도 가기 전에 짙은 연기가 하늘 위로 솟아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큰 불이 난 것 같았다. 곧이어 징소리가 '쾅 쾅 쾅'하고 울려퍼지면서 멀리서 사람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이 났다! 불이 났다! 빨리 불을 꺼라!]
교봉은 개의치 않고 말을 달렸다. 그런데 달려 갈수록 불이 난 곳과 가까워지는게 아닌가? 이때 누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빨리 불을 끄자! 빨리 불을 꺼! 철면판관 선씨네 집이다!]
교봉과 아주는 깜짝 놀라 일제히 말을 세웠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대악인에게 또 선수를 빼앗긴 것일까?)
아주는 위로의 말을 했다.
[선정은 무예가 고강하니 집을 태웠다 하더라도 불타 죽지는 않았을 거에요.]
선가장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뜨거운 기운은 점점 심해졌다. 불길은 하늘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이때 사방의 향민(鄕民)들이 떼를 지어서 불을 끄려고 달려왔다. 물동이를 든 사람은 물을 길러왔고 모래를 들고 온 사람은 모래를 끼얹었다. 교봉과 아주는 불타고 있는 선가장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이때 한명의 사내가 탄식하며 말했다.
[선나으리는 무척 좋은 분이시고 이 지방의 가난한 사람과 재난을 당한 사람을 구제하며 수십 년간 적지 않은 공덕을 쌓았는데 어쩌다가 집이 불타 전 가족 삼십여 명이 한 사람도 도망쳐 나오지 못하다니!]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이건 반드시 원수가 지른 불이라오. 문을 막고 사람들이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오. 그렇지 않았다면 선씨 집안의 사람들은 다섯 살 먹은 어린애까지도 무공을 아는데 어찌 도망쳐 나오지 못했겠소?]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소문에 들으니 선 첫째와 둘째, 그리고 다섯째가 하남에서 교봉이란 악인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하더군. 이번에 불을 지른 사람도 혹시 그 대악당이 아닐까?]
이때 나이가 비교적 젊은 사람이 말했다.
[그야 물론 교봉의 짓이겠지.]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는 음성을 낮추고 말햇다.
[그는 아마도 한 떼의 졸개를 데리고 장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 선씨 집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닭이나 개마저도 살려주지 않은 모양이야 아! 하느님은 정말 눈도 없어.]
나이가 좀 든 사람이 말했다.
[교봉이라는 자는 악독한 짓을 많이했으니 장래 반드시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될거야.]
아주는 그가 교봉을 욕하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그리하여 손을 뻗쳐서는 말의 목을 세게 쳤다. 그 말은 깜짝 놀라 왼발을 걷어차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사람의 엉덩이를 차게 되었다.
[왜 쓸데없이 더러운 말을 함부로 지껄이시오?]
그 사람은 말발굽에 걷어차이게 되었으나 대악당 교봉에게 많은 부하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깜짝 놀라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급히 도망쳐 버렸다. 교봉은 미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처량하고 쓸쓸했다. 시체가 타는 고약한 냄새가 불이 나고 있는 곳에서 끊임없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선정의 전 가족은 모두 불구덩이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는 나직이 말했다.
[그 대악당은 정말 악랄하군요. 선정 부자를 죽이면 그뿐이지 어째서 그의 전가족을 죽였을까요? 그리고 왜 집마저 불태웠을까요?]
교봉은 싸늘히 코웃음을 치고 말햇다.
[흥! 이것이야말로 풀을 베되 뿌리까지 뽑겠다는 것이 아니겠소? 만약 나라고 하더라도 집을 불태웠을 것이오.]
아주는 놀라 물었다.
[어째서요?]
교봉은 말했다.
[그 날 밤 은행나무 숲 속에서 선정이 몇 마디의 말을 하는 것을 그대도 들었을 것이오. 그때 그는 자기네 집에 그 통솔자가 쓴 몇통의 편지를 가지고 있으니 그 편지를 가지고 필적을 대조해 보았다고 하지 않았소?]
아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그가 설사 선정을 죽인다 하더라도 그대가 선가장에 이르러 그 몇 통의 편지를 찾아내게 된다면 역시 그 사람의 이름을 알아낼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대악당은 선가장을 몽땅 불태워 편지까지 남기지 않으려고 생각했겠지요.]
화염과 열기가 사방으로 번짐에 따라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우르르 떼를 지어 뒤로 물러서곤 했다. 뭇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탄식하고 한편으로는 교봉을 욕했다. 시골 사람들이 입에 담은 욕은 그야말로 여간 고약하지 않았다. 교봉의 얼굴 표정은 매우 이상했다.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고 후회하는 것 같기도 했다.그리고 연민의 빛이 떠오르기도 했다. 교봉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천태산으로 갑시다.]
지광대사는 과거 그의 부모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지만 그후 지광대사는 크게 뉘우치고 멀리 이역으로 나아가 나무 껍질을 채집해서는 절강성과 복성, 그리고 광동성, 광서성 일대에서 장기, 학질 같은 병에 걸린 백성들을 치료하여 무수한 사람을 살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 자신은 심한 병에 걸리게 되었고 무공을 모조리 잃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지광대사에게 만가생불(萬家生佛)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교봉이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그를 괴롭히려고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태안을 떠나 남쪽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이번에는 천천히 길을 갔다. 천태산은 절강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들은 절강성의 동쪽에 있었다. 두 사람은 금산사(金山寺)로 올라가 강물을 굽어 보았다. 교봉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거침 없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입을 열었다.
[그 통솔자와 대악당이 어쩌면 한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아주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렇군요. 어째서 우리들은 줄곧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교봉은 말했다.
[물론 두 사람일지도 모르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그 대악당이 온갖 계책을 다 부려 통솔자의 신분을 감추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그 통솔자는 왕방주와 같은 사람도 즐겁게 복종하는 걸로 미루어 보아 범상한 인물이 아닐 것이오.]
아주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을 수긍했다. 그녀는 말했다.
[교나리, 그 날 밤 은행나무 숲 속에서 그 사람들이 과거의 일을 이야기할 때 아무래도... 아무래도...]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음성이 떨려 나오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교봉은 말했다.
[그 대악당이 은행나무 숲 속에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아주는 얼굴에 두려운 빛을 띠우며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미미하게 몸을 떨었다. 교봉은 말했다.
[그 자의 악랄함은 정말 세상에서 보기 드물 정도이오. 조전손은 망신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진상을 토로하지 않으려 했고 선정은 그와 사이가 절친한 편인데 놀랍게도 두 사람에게 독수를 펼쳤소.]
교봉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말햇다.
[또 한 가지 나는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일이 있소.]
아주는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교봉은 강물 위에 떠있는 범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대악당의 총명함이나 지략은 나보다 뛰어나오. 그리고 무공에 있어서도 결코 나보다 약하지 않은 것 같소. 따라서 그가 나의 목숨을 빼앗고자 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텐데 어째서 이토록 내가 원수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아주는 말했다.
[교나리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그 대악당은 마음속으로는 그대를 무척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는 이 며칠동안 마음속으로 전전긍긍하며 혹시나 그대가 그 진상을 알게 되어 그를 찾아 복수를 할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그가 교씨 집안의 두 어르신네와 현고대사, 조전손, 담파, 철면판관 일가족을 죽이지는 않았을 거에요.]
교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말에는 일리가 있소]
교봉은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고 말했다.
[그가 감히 나를 해치지 못하는 것은 가까이 다가올 용기가 없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그대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진강을 건너게 된 이후 그들은 다시 전당강(錢塘江)을 건너 천태현에 이르게 되었다. 교봉과 아주는 객점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사환에게 천태산 위로 오르는 길을 물어 보려고 했을때 객점의 주인이 총총히 달려와 말했다.
[교나리, 천태산 지관사(止觀寺)의 한 분 스님이 나리를 뵙고자 찾아 왔습니다.]
교봉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나의 성이 교씨라는 사실을 알았소?]
객점주인은 말했다.
[지관사의 스님께서 교나으리의 모습을 말씀하셨는데 틀림이 없었습니다.]
교봉과 아주는 서로를 쳐다보며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교봉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좋소. 그를 안으로 들여 보내시오.]
주인은 몸을 돌려 나갔다. 얼마 후 삼십여 세 되는 땅딸한 승려가 들어 왔다. 그 승려는 합장하며 교봉에게 예를 하더니 말했다.
[가사이신 지광선사께서 소승 박자(樸者)에게 명하여 교나으리와 아주소저를 폐사로 청해 오시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불초의 성을 알았소?]
박자화상은 말했다.
[가사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교봉은 다시 물었다.
[우리는 어젯밤 이곳에 도달했는데 존사께서 어떻게 알고 계시오? 설마하니 그가 정말 앞을 내다보는 재간이 있단 말이오?]
박자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주인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지광선사께서는 신승(神僧)이십니다. 신통력이 대단하시지요. 손가락을 헤아려 보고 교나으리께서 오시는 것을 아신거죠. 내일모레의 일을 똑똑히 내다보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만 년 이후의 일도 그 어르신께서는 십의 육칠은 헤아려 본답니다.]
교봉은 지광대사의 명성이 지극히 높아 우둔하고 양순한 백성들은 지광대사를 마치 신처럼 받들어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교봉은 더 질문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대는 우리 두 사람을 안내하여 존사를 만나 뵙도록 해 주십시오.]
박자화상은 말했다.
[예.]
교봉은 방 값과 밥 값을 치루려고 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재빨리 말했다.
[나으리는 지광선사의 손님이십니다. 저희 객점에 머무르신 것은 그야말로 우리들에겐 커다란 영광입니다. 그 몇 푼 안되는 방값과 밥 값은 절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교봉은 말했다.
[그렇다면 실례하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지광선사는 백성들에겐 덕을 베풀고 있으니 그가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을 죽인 원한은 없었던 것으로 해두자. 그저 그가 통솔자와 대악당이 누구라는 것을 말해 주기만 하면 나로서는 만족하겠다.)
그리고 그는 박자화상을 따라 현성을 나서서 곧장 천태산 위로 올랐다. 천태산의 풍경은 매우 맑고 아늑한 편이었다. 그러나 산길은 크거나 험준하여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 유진(劉진)과 원조(阮肇)가 천태산에 잘못 들어가 선녀를 만나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산수가 수려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산길이 구불구불하여 실로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교봉은 박자화상의 등뒤를 따르는데 그의 발걸음은 매우 힘차 보였으나 결코 무공을 지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방에서 나를 알고 있는 이상 어찌 조심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무사히 지관사 밖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천태산의 여러 사찰 가운데 국청사(國淸寺)가 천하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다. 수나라 시대의 고승인 지자대사(智者大師)께서 바로 국청사에 머물련서 천태종(天台宗)을 크게 일으켰기 때문에 수백 년간 불문의 중요한 성지로 일컬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관사의 명성이 더 높았다. 지관사는 매우 평범한 한 채의 조그만 절간에 불과했다. 단청은 이미 하얗게 바래 있었다. 박자화상은 절간 문을 열어 젖히며 큰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교나리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지광선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귀한 손님이 먼 길을 오시는데 이 늙은 것이 마중을 나가지 못했구려.]
그러면서 문께로 다가와 합장하며 예를 했다. 교봉은 즉시 아주와 함께 얼굴의 화장을 지우고 본래의 모습으로 지광선사를 대했다. 교봉은 깊히 읍을 하고 말했다.
[대사의 청수(淸修)를 방해한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지광선사는 말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교시주, 그대의 본래 성은 소(蕭)씨라오. 그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소?]
교봉은 흠칫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거란 사람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으나 부친의 성이 무엇인지 줄곧 모르고 있었다. 이때 지광선사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성이 소씨라는 것을 알고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자기 신세와 진상이 차츰차츰 밝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허리를 굽히고 말았다.
[불초는 불효막심한 사람이라 아직 아버님의 존함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지광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분은 앉으시오.]
세 사람은 의자에 않았다. 박자화상이 차를 가져왔다. 지광선사는 계속해서 말하였다.
[영존께서는 안문관 밖 석벽에다 글을 새겼는데 스스로 소씨이며 원산(遠山)이라고 했소. 그가 남긴 글 속에서 그대에게 봉아(峯兒)라고 했다오. 그래서 우리들은 원래의 그대 이름을 남겼고 다만 교삼괴에게 키워 달라고 부탁을 했기 떠문에 그의 성을 따르도록 한 것이오.]
교봉은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불초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부친의 성명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대사의 은덕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초의 절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는 절을 했다. 아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광선사는 합장하며 반례하고 말하였다.
[은덕이라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오? 요나라의 국성은 야율(耶律)이었소. 그리고 황후는 역대로 모두가 소씨였소. 소씨 집안은 대대로 황후가 되었으며 장수와 재상들이 되어 조정에서 큰 벼슬을 했고 지극한 권세를 누렸소. 그리고 때로 요나라의 임금이 나이가 어리면 소태후가 섭정을 하기도 했소.]
교봉은 갑자기 자기가 바로 거란의 권문세가인 소씨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감개가 끓어올라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고 아주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소봉(蕭峯)이지 교봉이 아니오.]
아주는 말했다.
[예, 소나리]
지광선사는 말했다.
[소대협, 안문관 밖 석벽에 남긴 글자를 그대는 이미 보았겠지요?]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보았습니다. 제가 관외로 달려가게 되었을 떠 석벽의 글자는 이미 그 누구에 의해 깨끗이 지워지고 아무런 흔적도 남겨 놓지 않았더군요.]
지광선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저지른 일, 석벽에 새겨진 글을 지울 수 있다 하더라도 수십 명의 목숨을 어떻게 구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소매자락 안에서 한 조각의 커다랗고 오래된 삼베조각을 꺼내며 말했다.
[소시주, 이것이 바로 석벽에 남긴 글의 탁본이오.]
소봉은 속으로 흠칫했다. 그리고 그 낡은 삼베조각을 받아서 펼쳤다. 그런데 그 커다란 삼베조각은 바로 많은 옷을 찢어서 잇대어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삼베조각 위에 탁본을 했기 때문에 하얀 글자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필획이 특이하고 모양은 한문과 비슷했으나 소봉으로서는 한 글자도 알수가 없었다. 바로 거란의 문자였다. 그런데 필적이 매우 힘차 칼과 도끼로 내려 찍은 것 같았다. 그 날 지광선사의 말에 의하면 자기 부친이 죽기 전에 단도로써 새긴 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눈 앞이 흐릿해지면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그 눈물방울은 한 방울 두 방울 모조리 그 삼베조각 위에 떨어졌다. 소봉은 말했다.
[대사께서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광대사는 말했다.
[과거 우리가 탁본을 하게 되었을 때 안문관 밖에서 거란 문자를 아는 사람들을 찾아 해석을 해달라고 했소. 몇 사람에게 물었으나 그 뜻은 한결같았으니 아마 틀림이 없을 것이오. 소시주, 이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오.]
지광선사는 목이 타는지 찻잔을 들어 마셨다. 소봉과 아주는 지광선사를 바라보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지광선사는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 4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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