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무협소설 천룡팔부6 김용

一字師 2023.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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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천룡팔부6 김용

 

                                                  图片来源 | 《天龙八部》遇史上最乱播法 24集一夜"消失"

 

26. 맨손으로 곰을 때려 죽이고 호랑이를 잡다 (赤手屠熊搏虎)

소봉은 장백산맥을 향해 동북방으로 가면서 도중에 약방이 있으면 찾아가 인삼을 샀다. 나중에는 금과 은을 모조리 다 써 버리자 염치불구하고 약방 안으로 뛰어들어 빼앗았다.

아자는 대량의 인삼을 복용한 후에 놀랍게도 간혹 눈을 뜨고 나직이 소봉을 부르기도 했다.

형부!

밤에 잠을 잘 적에도 몇 시진 정도는 그녀에게 진기를 계속해서 불어 넣지 않아도 그녀는 스스로 미약하나마 호흡을 할 수 있었다.

동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날씨는 더욱 추워졌다. 이윽고 소봉은 아자를 안은채 장백산에 이르게 되었다. 장백산에 산삼이 많이 자란다는 말은 들었으나 지세를 잘 알고 산삼을 캐는 방법을 아는 경험 많은 심마니가 아닌 그로서는 반년이고 일 년 동안 노력해도 한 뿌리도 찾아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소봉은 무작정 북으로만 향했다.

길을 가는 행인들은 점차 드물어졌고 나중에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끝없이 펼쳐진 삼림과 기다란 풀들, 그리고 높다란 언덕과 쌓인 눈뿐이었다. 며칠을 가도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큰일났는걸! 곳곳에 눈이 쌓여 있으니 어떻게 삼을 캐낸다지? 역시 인삼을 팔고 사는 시장으로 가서 돈이 있으면 사고 돈이 없으면 빼앗을 수밖에 없겠다."

그는 아자를 안은 채 다시 돌아섰다.

이때 날씨는 여간 춥지 않아 내린 눈이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곳도 있었다. 만약 그의 무공이 탁월하지 않았더라면 얼어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커다란 눈 웅덩이 속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리라.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날씨가 매우 음침한 것이 금방이라도 큰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눈을 들어 보니 전후좌우 모두 하얀 눈뿐이었다.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 땅위에는 사람의 발자국은커녕 짐승의 발자국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소봉은 마치 끝없이 뻗어 있는 망망대해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람은 칼날처럼 매섭게 휘몰아쳐 휘파람 소리를 일으키며 귓가를 스쳐가곤 했다.

소봉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번이나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사방은 온통 백설로 뒤덮힌 넓은 삼림(森林)이어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아자가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잘못될까 두려워 자기의 장포를 벗어 그녀의 몸을 싸 안았다.

그는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이 두터운 줄 몰랐지만 이 넓은 세상에 자기 혼자 외로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두려움이 치솟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만약에 정말 그 혼자라면 그런 대로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눈으로 덮힌 천지가 넓다고 하나 끝내 그를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품속에는 정신을 잃고 반쯤 죽어 있는 아자가 안겨 있지 않은가?

그는 이미 사흘간 음식을 먹지 못했다. 그는 꿩이나 토끼라도 잡을 생각이었지만 꿩이나 토끼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마구 헤매다가는 끝내 이 숲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이 숲속에서 하루 밤을 묵고 눈이 멈춘 후에 방향을 가늠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숲속에서 바람을 등진 곳을 찾아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지폈다. 모닥불을 피우자 몸에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뱃속에서는 꾸룩꾸룩하는 소리가 났다. 마침 나무뿌리에 버섯이 자라나 있는 것이 보였다. 빛깔이 약간 잿빛을 띤 휜색인 것으로 보아 독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바로 그 모닥불에 약간 그을려 먹어 치웠다.

이십여 개의 버섯을 먹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그는 아자를 부축하여 자기 가슴팍에 기대게 하고 불을 쪼이도록 했다. 막 눈을 감고 잠이 들려고 할 때 별안간 으르릉,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바로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아닌가?

소봉은 크게 기뻐했다.

"호랑이가 내 앞에 나타나 주었군! 그야말로 호랑이 고기를 먹게 되겠구나!"

그는 귀를 기울였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눈 위를 달려오고 곧이어 다시 호통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호랑이를 뒤쫓는 것 같았다.

사람 소리를 듣자 그는 더욱 기뻐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쪽에서부터 급히 달려왔다.

그는 즉시 아자를 가볍게 모닥불 옆에 내려 놓고 경신법을 펼쳐 비스듬히 소리나는 곳으로 나아갔다. 이때 눈은 펄펄 날리고 있었고 북풍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어서 온 천지는 눈보라로 다섯 자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약 십여 장을 달려가자 눈 위로 두 마리의 얼룩 무늬를 한 호랑이가 포효하며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로 한 사람의 대한이 몸에 짐승 가죽을 걸치고 손에 한 자루의 커다란 철차(鐵叉)를 들고 급히 뒤쫓아오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맹호는 매우 컸다. 한동안 달리더니 그 중의 한 마리가 고개를 돌리고 포효하더니 그 사냥꾼에게 덮쳐들었다.

그 사냥꾼은 철차를 뻗쳐 맹호의 목을 노리고 찔렀다. 그런데 그 맹호의 움직이는 동작은 몹시 민첩했다. 즉시 고개를 돌려 철차를 피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다른 한 마리의 맹호가 재차 그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그 사냥꾼의 솜씨도 지극히 빠른 편이었다. 철차를 거꾸로 돌리더니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철차의 자루로 맹호의 몸뚱이를 힘주어 한 번 때렸다.

그 맹호는 고통스러운지 크게 한 마디 울부짖더니 꼬리를 내려뜨리고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러자 다른 한 마리의 호랑이도 더 싸우려 하지 않고 뒤따라 달려갔다.

소봉은 그 사냥꾼의 솜씨가 민첩하고 팔힘도 대단히 센 편이나 무공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저 그 사냥꾼은 야수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맹호가 미처 달려들기 전에 철차로 호랑이의 급소를 후려쳐 호랑이가 제대로 덤벼들지 못하도록 했을 뿐이었다. 이는 그야말로 적을 먼저 헤아려보고 선수를 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사냥꾼이 일거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찔러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소봉은 부르짖었다.

노형, 내가 그대를 도와 호랑이를 잡도록 하겠소!

그는 비스듬히 몸을 날려 두 마리 호랑이의 앞길을 막았다. 그 사냥꾼은 소봉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깜짝 올라 큰소리로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말은 한나라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아니었다.

소봉은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호랑이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 호랑이는 후딱 나뒹굴었다. 그러나 우뢰와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재차 소봉에게로 달려들었다.

소봉은 조금 전의 그 일 장에 칠성의 공력을 돋우었었다. 설사 무공이 고강한 자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일장을 정수리에 맞게 되면 골통이 부숴질 판인데 맹호는 머릿통과 뼈마디가 단단하고 굵어서 바위라도 쪼갤 수 있는 그 장력을 머리에 맞고도 그저 곤두박질쳤을 뿐 재차 달려드는 것이었다. 소봉은 호탕하게 소리쳤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군!

그는 몸을 슬쩍 피하며 오른손을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쳤다. 맹호의 몸뚱이를 칼로 베듯 친 것이다. 이번에 그는 팔성의 공력을 돋우었다.

그 맹호는 앞으로 몇 걸음 달려나가다가 곧 비실거렸다. 하지만 곧 죽어라 달아나려고 했다.

소봉은 즉시 두 걸음을 다가서며 오른손을 뻗쳐 호랑이의 꼬리를 잡았다. 그리고 일성을 대갈하여 온 힘을 다해서는 잡아끌었다. 소봉이 그와 같이 끌어당기자 호랑이의 몸뚱이가 곧장 허공으로 날아 오르게 되었다.

그 사냥꾼은 철차를 들고 다른 한 마리의 맹호와 한창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봉이 맹호를 허공으로 던져 올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봉은 한소리 우렁찬 호통을 내지르며 두 손을 일제히 뻗쳐내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두 손은 맹호의 배를 강타했다.

그 일 초는 배운쌍장(排雲雙掌)으로 바로 소봉이 자랑하는 무공이었다.호랑이의 배는 부드러웠기 때문에 그 호랑이는 대뜸 창자가 산산조각이 나서 땅바닥에 나뒹굴더니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 사냥꾼은 속으로 여간 탄복해마지 않았다. 상대방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죽였는데 자기 자신은 손에 철차를 들고 있으면서도 호랑이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즉시 왼쪽으로 찌르고 오른쪽으로 찌르는 등 철차로 그 호랑이의 몸을 찔러댔다. 그 호랑이는 몇 번이나 철차에 찔리자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몸을 날려 그 사냥꾼에게 덮쳐갔다.

그 사냥꾼은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하더니 철차를 들어 옆에서 찔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맹호의 목을 찌르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그 사냥꾼은 두 손을 높이 들었다가 철차를 내려쳤다.

그 맹호는 비명을 지르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 사람은 두 팔에 힘을 주어 맹호를 눈바닥 위에 못박듯 철차로 찔러 꼼짝 못하게 했다. 바로 이때 후두둑,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의 윗몸에 걸쳐졌던 짐승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의 등 부분이 커다란 틈바구니가 나도록 갈라지면서 맹숭맹숭한 살갗이 드러났다. 근육이 울퉁불퉁한 것이 몹시 건장해 보였다.

소봉은 자기도 모르게 찬탄의 말을 내뱉었다.

훌륭한 사내다!

이때 그 맹호는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네 발로 허공을 마구 할퀴더니 끝내 잠잠해지고 말았다.

그 사냥꾼은 철차를 들어올리더니 껄껄 소리내어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소봉을 향해서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보이며 무엇이라고 몇 마디를 지껄였다.

소봉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그 사람이 자기를 영웅답다고 칭찬하는 말인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를 흉내내어 역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영웅! 영웅!

그 사람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의 코끝을 손가락질하더니 말했다.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

소봉은 그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코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봉!

그 사람은 물었다.

소봉? 거란?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란, 그대는?

그리고 손을 뻗쳐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사람은 대답했다.

아골타! 여진!

소봉은 요나라 동쪽, 고려의 북쪽에 여진(女眞)이라는 부족이 있는데 그 부족의 사람들은 용감하여 싸움을 잘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원래 이 완안 아골타는 여진 사람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망망하기만 하던 눈바다?雪海=속에서 사람을 만나자 역시 기쁜 마음이 앞섰다.

소봉은 즉시 손짓을 해서 아골타에게 동료가 있다는 시늉을 해보이고 죽은 호랑이를 들고 아자가 눕혀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골타는 다른 호랑이를 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호랑이가 갓 죽었기 때문에 피가 응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소봉은 호랑이를 거꾸로 쳐들고 목을 땄다. 그는 호랑이의 피를 아자의 입속에 흘려 넣었다. 아자는 눈을 뜨지 못했으나 호랑이의 피를 삼킬 수는 있었다.

그녀는 십여 모금 삼킨 후에야 입을 다물었다.

소봉은 무척 기뻤다. 즉시 두 호랑이의 다리를 찢어 모닥불에 굽기 시작했다.

아골타는 그가 맨손으로 호랑이의 몸을 찢는 것이 마치 익은 닭고기를 찢는 듯하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와 같은 손의 힘을 그로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터였다. 멍하니 그의 두 손을 바라보더니 한참 후에 자기의 손을 뻗쳐 소봉의 손목과 팔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온 얼굴에 존경하는 빛을 띄웠다.

소봉은 호랑이 고기를 구워서 아골타와 배불리 나누어 먹었다.

아골타는 손짓을 해가며 이곳까지 온 연유를 물었다. 소봉도 역시 손짓으로 산삼을 캐어 아자의 병을 고치려고 했던 것인데 그만 길을 잃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아골타는 웃으며 한참 동안 손짓을 했다. 삼을 캔다는 것은 쉬운 일로써 자기를 따라가면 얼마든지 캐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소봉은 크게 기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왼손으로 아자를 안고 오른손으로는 한 마리의 죽은 호랑이를 들었다. 아골타는 다시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칭찬했다.

정말 굉장한 힘이시오!

아골타는 이 일대의 지세에 매우 익숙했다. 눈보라가 크게 치고 있는데도 길을 잃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날이 어두울 때까지 걸어가다가 숲속에서 잠을 잤다. 날이 밝은 후에야 다시 길을 갔다. 이와 같이 줄곧 서쪽을 향해 이틀을 가게 되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소봉은 눈위에 많은 사람의 발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골타는 연신 손짓을 하며 자기의 부족과 가까운 곳에 이르렀다는 시늉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산모퉁이를 돌자 동남방 산 언덕에 수백 채나 되는 짐승가죽으로 만들어진 천막이 시커멓게 쳐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골타는 손을 입술로 가져가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그 천막 쪽에서 사람이 나오더니 마주 걸어왔다.

소봉은 아골타를 따라 가까이 걸어갔다. 그런데 천막 앞에는 하나같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있었고 모닥불 옆에는 여인들이 에워싸듯 앉아 짐승의 가죽을 기우거나 사냥해 온 짐승의 고기를 절이고 있었다.

아골타는 소봉을 데리고 한복판에 위치한 가장 큰 천막 안으로 데리고 가더니 휘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봉은 그를 따라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십여 명이 빙 둘러앉아 한참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골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큰소리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골타는 소봉을 가리키며 무엇이라 말을 하면서 손짓발짓을 했다.

소봉은 자기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 잡은 광경을 설명하고 있다는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뭇 사람들은 다투어 소봉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며 칭찬의 말을 지껄여댔다.

한찬 시끌벅적할 때 한 사람의 장사치 차림을 한 한나라 사람이 들어오더니 소봉에게 입을 열었다.

이분 나리께서는 한나라 말을 할 줄 아시오?

소봉은 기뻐서 말했다.

할 줄 알고 말구요!

그는 이곳의 사정을 물었다. 원래 이곳은 여진인(女眞人) 족장의 천막이었다.

한복판의 검은 수염을 기른 노인이 바로 족장 화리포(和里布)였다.

그에게는 모두 열 한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 같이 뛰어난 호걸들이었다. 아골타는 바로 그의 차남이었다.

이 한나라 사람의 이름은 허탁성(許卓誠)이었다. 그는 매년 겨울철이 되면 이곳으로 와서 산삼이나 모피를 구입했으며 봄이 되면 돌아가곤 한다는 것이었다.

허탁성은 여진의 말을 잘 했다. 그는 즉시 소봉의 통역이 되었다.

여진인과 거란인은 본래 수시로 전투를 하곤 했으며 여진인들은 영웅을 가장 존경했다.

그 완안 아골타로 말하면 똑똑하고 부지런한 편으로 부친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그 부족의 사람들도 그를 매우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가 소봉을 극구 칭찬하자 모든 사람들은 소봉이 거란 사람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꺼리지 않고 귀빈의 예우로 그를 대접했다.

아골타는 자기의 천막을 소봉과 아자에게 양보해 주었다. 소봉은 몇 마디 사양의 말을 했으나 아골타는 고집을 피웠다. 소봉은 상대방의 뜻이 간곡한 것을 알고 그 천막에 들어가 머물게 되었다.

이날 밤 여진족은 크게 연회를 베풀어 소봉을 환영했다. 물론 두 마리의 호랑이 고기는 이 연회의 진기한 음식이 되었다.

소봉은 보름 동안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한 상태였다. 이때 여진족의 사람들은 가죽 주머니마다 독한 술을 잇따라 꺼내왔고 소봉은 닥치는 대로 가죽 주머니의 술을 비워 모든 가죽 주머니를 거의 비우기에 이르렀고 기분은 매우 좋아졌다.

여진족들이 빚은 술은 맛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었으나 상당히 독해서 보통 사람들은 가죽 주머니의 술을 반도 마시기도 전에 취해 버렸다. 그런데 소봉은 한 자리에 앉아서 십여 자루의 가죽 주머니를 비우면서도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여진인들은 주량이 큰 사람을 진짜 호걸로 여기고 있었다. 그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어떻게 죽였는지 사람들은 친히 목격하지 못했으나, 술을 마시는 것은 친히 목격하게 되었고 열 명의 여진족 대한들도 그를 당해낼 수 없는지라 자연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허탁성은 여진인들이 소봉을 매우 우러러보는 것을 보고 역시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썼다.

소봉은 별 할일도 없고 해서 낮에는 아골타와 함께 나가 사냥을 하고 날이 어두워진 후에는 허탁성에게 여진의 말을 배웠다. 여진인들의 말을 어느 정도 배우게 된 후 자기 자신은 거란 사람인데 거란의 말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생각하여 그는 다시 허탁성에게 거란의 말을 배웠다.

허탁성은 각지로 떠돌아다니는 장사치라 거란말, 서하말, 그리고 여진의 말까지 매우 유창하게 지껄였다.

소봉이 말을 배우는 재간은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진의 말이나 거란의 말들은 한나라 말보다 간단하고 쉬웠다.

시일이 흐르자 결국 그는 자기 스스로 뜻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덧 수 개월이라는 세월이 흘러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아자는 산삼을 양식으로 삼다시피 했기 때문에 병세가 호전되어 일어날 기미를 보였다.

여진인들은 황량한 산속이나 깊은 산골짜기에서 산삼을 캐내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산삼들마다 오래된 최상품이어서 황금보다 귀중하다고 할 수 있었다.

소봉은 한 번 사냥을 나가게 될 때마다 적지 않은 짐승들을 잡아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잡아온 짐승들과 산삼을 바꾸어 아자에게 밥 대신 먹였다. 아무리 큰 부잣집이라 하더라도 이같이 산삼을 먹어대는 아가씨가 있었다면 그 집은 필경 망해 버리고 말았으리라.

소봉은 여전히 내력으로 그녀를 도와 주었다. 이제는 매일같이 한두 번 정도만 내력을 불어넣으면 족했으며 옛날처럼 교봉이 손을 그녀의 품에서 떼지 못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아자는 때로 간신히 몇 마디의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지에 힘이 없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든 시중을 소봉이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주와의 깊은 정을 생각하여 그 수고를 달게 받아들였다. 아니 오히려 아자를 한 번 더 시중들게 된다면 아주에 대한 정을 한푼 더 보답하는 것 같아서 기뻐하기조차 했다. 어느 날 아골타는 십여 명의 부족 사람들을 데리고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곰사냥을 가게 되었는데 소봉에게 같이 가자고 청했다.

큰 곰의 가죽은 두텁고 기름이 많으며 웅장(熊掌)은 맛이 좋다고 했다. 더군다나 웅담은 상처를 치료하는데 지극한 영효(靈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아자의 정신이 무척 맑은 편이라 자기가 마음놓고 사냥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응했다. 일행은 날이 밝기도 전에 출발하여 곧장 북쪽으로 향했다.

이때는 이미 초여름이라 얼음과 눈이 녹아 땅바닥은 질퍽했다. 숲속에는 썩은 나뭇가지와 잎들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걷기가 불편했다.

그러나 여진인들의 발걸음은 경쾌하고 힘차게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점심 때가 됐을 때 한 명의 늙은 사냥꾼이 부르짖었다.

곰이다! 곰!

여러 사람들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 진흙바닥에 커다란 발자국이 나 있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한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뭇 사람들은 신이 나서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커다란 곰의 발이 진흙더미를 밟은 자국은 몇 치 정도로 깊이 파였기 때문에 어린애라도 뒤따라 갈 수가 있을 정도였다.

일행은 크게 소리를 내지르며 재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그 발자국은 줄곧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진흙바닥에서 벗어나 초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뭇 사람들은 더욱 발걸음을 빨리했다.

한창 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앞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크게 들렸으며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한 떼의 인마가 질풍같이 달려왔다.

한 마리의 커다란 검은 곰이 몸을 돌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로 칠팔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각기 높다란 말에 올라타고 호통을 내지르며 곰을 뒤쫓아오고 있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손에 긴 창을 들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활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다부지고 날쌔게 보였다.

아골타는 그들을 발견하더니 부르짖었다.

거란 사람이다! 그들은 수가 많으니 빨리 가자! 빨리 가!

소봉은 자기의 부족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친근감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골타 등은 몸을 돌려 달음질쳤으나 그는 따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어떻게 되는가를 주시했다.

그때 거란 사람들이 부르짖었다.

여진의 오랑캐다! 활을 쏘아라! 활을 쏴!

곧이어 쉭쉭, 하는 소리가 잇따라 일었다. 화살들이 다투어 쏟아졌다.

소봉은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어째서 다짜고짜 사람을 보고 활을 쏜다지?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말이다."

그런데 몇 대의 화살이 그의 앞으로 날아오자 그는 손을 뻗쳐서 떨어뜨렸다.

바로 이때 악, 하는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여진의 늙은 사냥꾼이 등에 화살을 맞고 땅에 쓰려져 죽고 만 것이었다.

아골타는 뭇 사람들을 이끌고 산등성이 뒤로 달려가더니 땅바닥에 엎드려서 활에 화살을 먹이고 쏘아 역시 두 명의 거란인을 쓰러뜨렸다.

소봉은 그 가운데 서서 어느 쪽을 도와야 할지 몰랐다.

거란인들은 끊임없이 소봉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소봉은 한 자루의 화살을 받아서는 휘둘러 날아드는 화살을 일일이 쳐서 떨어뜨리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무엇하는 짓이오? 어째서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써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오?

아골타는 언덕 뒤에서 부르짖었다.

소봉! 소봉! 빨리 오시오! 그들은 그대가 거란 사람인 것을 모르고 있소!

바로 이때 두 명의 거란인이 기다란 창을 비켜들고 말을 달려 소봉에게로 달려오더니 창을 일제히 쳐들고는 좌우 양쪽에서 소봉을 찔러 왔다.

소봉은 자기 부족의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나누어 상대방의 창을 낚아채어 가볍게 한 번 떨쳤다. 그러자 두 명의 거란인은 말에서 떨어졌다.

소봉은 창대를 사용해 두 사람의 몸을 앞쪽으로 내던졌다.

두 사람은 허공에서 아아, 하는 고함을 질러댔으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그리고 자기편 사람들이 있는 곳에 떨어져서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아골타 등의 여진인 등은 큰소리로 잘 한다고 부르짖었다.

거란인 가운데 한 명의 붉은 장포를 걸친 중년 사내가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수십 명의 거란인들은 학의 날개처럼 양쪽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더니 이쪽을 에워싸려고 하며 아골타 등의 뒷길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붉은 장포를 걸친 중년 사내의 주위에 아직도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아골타는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크게 소리쳐 부족 사람들과 소봉에게 도망치자고 했다.

그런데 거란 사람들은 화살을 비오듯 쏘아댔다. 다시 몇 명의 여진인을 쏴서 쓰러뜨렸다.

여진의 사냥꾼들은 억센 활로 상대했는데 한 대의 화살도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삽시간에 여진인들은 십여 명의 거란의 말을 탄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중과부적이라 한편으로는 쏘면서 한편으로는 도망쳐야 했다.

소봉은 이 거란인들이 도리를 따지지 않는 것을 보고 자기 부족의 사람이라고 하나 이것저것 따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자루의 활을 빼어 들고 휙휙휙, 하니 잇따라 네 대의 화살을 쏘았다. 한대의 화살마다 한 명의 거란인의 어깻죽지나 허벅지에 가서 적중되어 네 사람이 말에서 떨어졌으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홍포인은 더욱 호통 소리를 내지르게 되었고 그들 거란 사람들은 말을 재촉해 쫓아오는데 지극히 용감하고 날쌔 보였다.

소봉은 함께 온 동료들 가운데 아골타와 다섯 명의 젊은 사내만이 한편으로 도망치면서 한편으로 활을 쏠 뿐 나머지의 사람들은 모조리 거란 사람들의 화살에 맞아 죽은 것을 알게 되었다.

대초원이라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더 싸웠다가는 아골타마저도 피살될 것이 뻔했다.

여진인은 그야말로 자기를 귀빈처럼 대접했다. 그런데다 친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하지 못한다면 무슨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한바탕 크게 거란 사람들과 싸워 거란인들로 하여금 두려워 물러서도록 하려면 반드시 동족인 거란인들의 많은 목숨을 빼앗아야 될 형편이었다.

소봉은 우두머리가 되는 홍포인을 사로잡아 그를 협박하여 나머지의 사람들을 물러서게 함으로써 싸움을 멈출 수 있게 해야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 같은 결심을 하고 나서 그는 거란 말로 크게 외쳤다.

이것 보시오! 당신들은 빨리 물러가시오! 만약 물러나지 않는다면 나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겠소!

그 순간 휙휙,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세 자루 긴 창이 소봉에게로 날아들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네들은 정말 분수를 모르는구나!"

그는 몸을 낮추고 홍포인에게 질풍과 같이 달려갔다.

아골타는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자 부르짖었다.

안돼요! 소봉, 빨리 돌아오시오!

소봉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달려들어갔다.

거란인들은 다투어 호통을 내지르며 기다란 창과 화살을 던지거나 쏘아댔다.

소봉은 한 자루의 기다란 창을 받아드는 즉시 두 토막을 냈다. 그리고 반 토막의 창을 들고 한 자루의 장검을 휘두르듯 상대방이 던지는 것이나 쏟아지는 창과 화살을 일일이 쳐서 떨러뜨렸다. 그는 나는 듯 홍포인이 타고 있는 말 앞으로 달려갔다.

그 홍포인은 온 얼굴에 구레나룻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매우 위풍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는 소봉이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좌우에 거느리고 있는 호위의 손에서 세 자루의 표창(漂槍)을 받아들더니 휙, 하니 한 자루의 창을 소봉에게로 던졌다.

소봉은 손을 뻗쳐 그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의 날아드는 표창을 낚아챘다.

곧이어 그가 두 팔을 한 번 떨치자 두 자루의 표창이 되날아가 홍포인의 좌우에 있던 호위를 찔러 말에서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홍포인은 탄성을 내질렀다.

훌륭한 재간이다!

그는 세 번째의 표창을 다시 던졌다.

소봉은 왼손을 위로 뻗혀 표창을 다시 되날아가게 했다.

그 표창은 질풍과 같이 날아온 곳으로 되날아가더니 홍포인이 타고 있는 말의 가슴팍에 푹, 꽂혔다.

그 홍포인은 어이쿠,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말안장에서 떨어졌다.

소봉은 벼락같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왼팔을 뻗쳐 그 홍포인이 오른쪽 어깻죽지를 움켜잡았다.

이때 등뒤에서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발로 땅을 차며 앞으로 퉁기듯 몸을 날렸다.

그러자 탁탁,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기다란 창이 땅바닥에 꽂혔다.

소봉은 그 홍포인을 안고 왼쪽으로 몸을 날려서 한 명의 거란 기사의 등뒤로 내려앉는 즉시 일 장으로 그를 후려서 말등에서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말을 몰아 아골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홍포인은 주먹을 쥐어 소봉의 안면을 때리려고 했다. 소봉이 왼팔로 그를 안고 힘을 주자 그 사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봉은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은 그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이대로 눌러 죽이고 말겠소!

홍포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부르짖었다.

모두들 물러서라! 싸울 필요 없다!

그러나 거란인들은 다투어 소봉 앞으로 달려와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소봉은 창날을 홍포인의 오른쪽 뺨에 갖다 대고 호통을 내질렀다.

이 사람을 찔러 죽일까?

한 명의 거란 늙은이가 호통을 내질렀다.

빨리 우리의 수령을 놓아 줘라! 그렇지 않을 때는 다섯 필의 말로 너의 몸뚱이를 찢어 죽이겠다.

소봉은 껄껄 웃으며 휙, 하니 일 장을 들어 그 늙은이를 향해 허공을 격하고 후려쳤다.

그 일 장으로 위엄을 보여 뭇 사람들을 놀라게 함으로써 많은 살상을 피하자는 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손에 있는 힘을 모두 끌어올린 것이다.

다음 순간 펑,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고 그 거란의 늙은이는 장력에 맞아 곧장 뒤로 날아갔다. 수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지게 되었는데 입에서 선혈을 내뿜는 것으로 보아 다시 살아날 것 같지가 않았다.

거란인들은 한 번도 이와 같은 벽공장의 수법을 본 적이 없었다. 장력은 그림자도 없고 정적도 없는 것이 마치 요술을 쓰는 것 같아 모두들 약속이나 한듯 말고삐를 잡아당기고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얼굴에 놀람과 공포의 빛을 띄웠다.

소봉이 자기에게 그와 같은 일 장을 먹이게 될까봐 두려워하는게 분명했다.

소봉은 부르짖었다.

당신네들이 다시 물러서지 않는다면 나는 먼저 이 자를 단번에 쳐죽이겠소!

그는 손을 쳐들고 홍포인의 정수리를 내려치는 시늉을 했다.

홍포인은 부르짖었다.

너희들은 물러서라! 모두들 물러서라!

뭇 사람들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대는 넓은 들판이다. 만약 그들의 수령을 놓아 준다면 이 거란인들은 말을 타고 쫓아올 것이니 끝내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 그는 홍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들에게 여덟 필의 말을 보내라고 하시오.

홍포인은 그 말에 따랐다.

거란의 병사들은 여덟 필의 말을 끌고 오더니 아골타에게 건네주었다.

아골타는 그 거란인들이 자기의 동료를 죽인데 대한 감정이 치미는 듯 퍽, 하니 한 대의 주먹을 내질러 말을 끌고온 거란 기사를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거란인들은 수가 많았으나 감히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봉은 다시 말했다.

그대는 다시 명령을 내려 각자 타고 있던 말을 죽이되 한 필도 남기지 말라고 하시오.

그 홍포인은 꽤나 시원시원하게 나왔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큰소리로 호령을 내렸다.

모두들 말에서 내려 타고 온 말을 남기지 말고 죽여라!

뭇 기사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등에서 뛰어내리더니 차고 있던 칼이나 장창으로 자기의 말을 모조리 죽였다.

소봉은 뭇 무사들이 이토록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때문에 속으로 찬탄하여 마지 않았다.

"이 홍포인은 신분이나 명망이 꽤나 높은 것 같구나! 한 마디 했는데 무사들은 조금도 거역하는 빛을 보이지 않는군. 거란인들의 군령(軍令)이 이토록 엄한 것을 볼 때, 송나라 사람들과 싸워 이길 때가 많고 질 때가 적은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소봉은 말했다.

당신은 각자에게 쫓아오지 말라고 하시오. 한 사람이라도 쫓아오게 되면 나는 당신의 한 팔을 자르겠소. 그리고 네 사람이 쫓아오게 되면 당신의 사지를 모두 자르겠소.

홍포인은 울화가 치미는지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돌아가라! 나중에 인마를 수습하여 여진의 소굴을 짓밟도록 하자!

무사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재차 허리를 굽혔다.

소봉은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아골타 등 여섯 사람이 모두 말 위에 오르기를 기다려 동쪽으로 왔던 길을 돌아서 달려갔다.

수 마장을 달려 갔으나 거란 사람들이 정말 뒤쫓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른 한 필의 말에 옮겨 타고 그 홍포인으로 하여금 한 필의 말을 타도록 했다.

그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여진인들의 부락으로 돌아갔다.

아골타는 부친 화리포에게 어떻게 적을 만나 어떻게 소봉이 구원해 주었으며 어떻게 거란의 수령을 사로잡았는지를 이야기했다.

화리포는 무척 기뻐했다.

좋다. 그렇다면 그 거란의 개새끼를 끌고 오너라.

그 홍포인은 천막 안으로 들어섰으나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뻣뻣이 선채 무릎을 꿇으려고 하지 않았다.

화리포는 그가 거란의 귀족임을 알아보았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요나라에서 어떤 관직에 있소?

그 사람은 가슴을 편 채 늠름한 기상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잡혀온 것이 아닌데 당신이 나에게 물을 자격이 있소?

거란 사람과 여진인들에게는 한 가지의 관례가 있었다. 그것은 적의 포로로 잡히게 되면 그 포로는 사로잡은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화리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곧이어 그 홍포인은 소봉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오른쪽 다리를 굽혔다.

한 발을 굽히고 오른 손을 들어 이마에 대더니 입을 열었다.

주인, 그대야말로 정말 뛰어난 영웅이시오! 나는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었는데도 그대를 이기지 못했으며 결국 사로잡히고 말았소. 나는 그대의 포로가 되었으나 조금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겠소. 그대가 만약 나를 놓아 돌려보내 준다면 황금 오십 냥과 은 오백 냥, 그리고 준마 삼십 필을 바치리다.

아골타의 숙부 파랍소(頗拉蘇)는 말했다.

당신은 거란의 대귀족이니 그와같은 속금(贖金)으로는 크게 부족하오. 소형제, 그대가 그에게 황금 오백 냥과 은 오천 냥, 그리고 군마 삼백 필로 몸값을 올려야 한다고 해 보시오.

이 파랍소는 똑똑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속금을 십 배나 불려 이야기했다. 본래 황금 오십 냥이나 은 오백 냥, 군마 삼십 필이라면 간소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여진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보기 드문 큰 재물이라 할 수 있었다.

여진인과 거란인은 수십 년 동안 싸워왔지만 한 번도 이와 같은 거액의 속금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이 홍포 귀인이 더 내놓지 않겠다면 그가 허락하는 액수를 그대로 받는다 하더라도 역시 큰 횡재를 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홍포인은 망설이지 않고 대뜸 대답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천막 안에 있던 여진인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두들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거란과 여진 두 부족은 물론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사나 약속에 대해서는 언제나 하나면 하나이고 둘이면 둘이었지 나중에 가서 번복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몸값의 액수였다. 따라서 만약에 그 액수대로 바치지 못하거나 그 약속을 저버리게 된다면 홍포인은 자기 동족에게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헛된 약속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파랍소는 그가 사로잡히게 된 후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제 정신을 잃었는지 모른다고 여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당신은 똑똑히 들었소? 내가 말하는 것은 황금 오백 냥과 은 오천 냥, 군마 삼백 필이오.

홍포인은 오만하게 말했다.

그게 뭐가 대단하오? 우리 요나라로 말하면 천하에서 으뜸가는 부를 누리고 있으니 그까짓 액수쯤은 안중에도 두지 않소.

그는 몸을 돌려 소봉을 향해 매우 공손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

주인, 저는 그저 한 사람의 분부만 따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아랑곳하고 싶지 않소이다.

파랍소는 말했다.

소 형제, 그대가 그에게 요나라에서 어떤 귀족이며 어떤 벼슬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게나.

소봉이 미처 입을 열기 전에 그 사람이 말했다.

주인, 그대가 반드시 나의 출신과 내력을 묻는다면 나는 함부로 거짓말을 해서 속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주인께서는 진짜와 가짜를 분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영웅호걸이고 나 역시 영웅호걸이라 결코 그대를 속이고 싶지 않소이다. 그러니 그대는 묻지 마십시오.

소봉은 왼손을 홱 뒤집어 허리에 찼던 패도를 뽑아들고 오른손으로 그 칼등을 내려쳤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칼은 대뜸 부러졌다.

소봉은 날카롭게 외쳤다.

정말 말을 못하겠다는 것이냐? 내가 이 손으로 너의 머릿통을 이렇게 한 번 내리치면 어떻게 되지?

홍포인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말했다.

훌륭한 재간이고 훌륭한 무공이외다. 오늘 당대 제일가는 대영웅을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보람있는 일이라 할 수 있소이다. 소 영웅, 그대가 힘으로 핍박하여 나로 하여금 마음에도 없는 굴복을 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오. 그대는 나를 죽이려면 죽이시오. 거란인은 그대를 상대로 싸워 이기지 못했지만 뼈대만은 그대와 같이 굳건하오.

소봉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좋소, 좋아! 내 이곳에서 그대를 죽이지 않지, 만약 내가 한 칼로 그대를 죽인다면 그대는 승복할 수 없을테니까 우리 멀찌감치 가서 다시 한바탕 싸워 보도록 합시다.

화리포와 파랍소는 일제히 말렸다.

소 형제, 이 사람을 죽이기는 매우 아깝소. 차라리 남겨서 속금을 받아내는 것이 좋겠소. 그대가 만약 화가 났다면 나무 막대기나 가죽 채찍으로 매섭게 내리치도록 하시오.

소봉은 말했다.

아니외다. 그가 호한이라고 뽐내려고 하는데 나는 그에게 뽐낼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진인에게 두 자루의 기다란 창과 두 자루의 활과 화살을 받아 들고 홍포인의 손목을 잡고 함께 큰 천막을 나섰다. 그는 말에 오르면서 말했다.

말에 오르시오.

홍포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소봉과 싸운다면 틀림없이 자기가 죽게 되는데 소봉이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자기를 희롱한 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두려운 기색없이 늠름한 기상으로 말 위에 올라 곧장 북쪽으로 나아갔다.

소봉은 말을 몰아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수 마장을 나아갔다.

소봉은 뒤에서 말했다.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시오.

홍포인은 말했다.

이곳의 풍경이 매우 좋구려. 나는 바로 이곳에서 죽겠소.

소봉은 말했다.

그럼 받으시오.

그는 기다란 창과 활과 화살을 던졌다. 그 사람은 일일이 받았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소 영웅, 나는 그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거란 사람들은 죽어도 굴복하지 않는 법이오. 나는 손을 쓰겠소.

소봉은 말했다.

잠깐, 이것도 받으시오.

그는 자기 손에 들린 긴 창과 활과 화살을 던져 주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두 손에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않게 되었는데 말안장을 짚고서 미소를 띠운 채 홍포인을 바라보았다.

홍포인은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고 크게 노해서 부르짖었다.

하, 그대는 맨손으로 나와 싸우겠다는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오?

소봉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이 소모가 한평생 우러러보는 사람은 영웅이고 아끼는 사람은 호한이라 할 수 있소. 그대의 무공은 나보다 못하나 대단한 영웅호걸이외다. 따라서 이 소모는 그대를 친구로 삼고 싶소. 그러니 그대는 스스로 그대 부족을 찾아가도록 하시오.

홍포인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뭐라구?

소봉은 미소했다.

이 소모가 그대를 친구로 여기고 편안히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오.

홍포인은 그야말로 지옥 문턱에서 돌아선 느낌이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대는 정말 나를 놓아 주시겠소? 그대는...... 그대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것이오? 되돌아가서 속금을 십 배로 늘려서 그대에게 보내 드리리다.

소봉은 불쾌해져서 말했다.

나는 그대를 친구로 알고 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친구로 여기지 않소? 소봉은 당당한 사내 대장부인데 어찌 재물을 탐한단 말이오?

홍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렇소.

그는 무기를 던지더니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큰절을 했다.

은공이 목숨을 용서해 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소봉 역시 재빨리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은 채 반례하며 말했다.

이 소모는 친구를 죽이지 않으며 친구의 큰절을 받지 않는다오. 만약 노예라면 이 소모는 그대가 꿇어엎드려서 하는 절을 받겠지만 그대의 목숨을 용서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오.

홍포인은 더욱 기뻐하며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소 영웅, 그대는 말끝마다 나를 친구로 여긴다고 했는데 그럼 나와 의형제를 맺는 것이 어떻겠소?

소봉은 무예를 연성한 후에 개방에 가입했다. 방의 배분은 매우 엄하게 구분되어 있었으며 방주와 부방주 아래에 전공과 집법 장로가 있었고 사대 호법 장로 및 각타의 향주가 있을 뿐만 아니라 팔대 제자, 칠대 제자를 위시해서 푸대가 하나도 없는 제자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는 차츰 공을 세워 지위가 높아지게 되었으나 개방의 형제들과는 의형제를 맺지 않았다.

다만 무석에서 단예와 한바탕 술내기를 하고 서로 우러러본 나머지 형제의 의를 맺었다. 그런데 이때 다시 홍포인이 그와 같은 말을 하는 소리를 듣고 다시 옛날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그는 중원에서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친구로 삼았었다. 그런데 오늘날 오랑캐의 땅에서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그야말로 외롭기 짝이 없는 처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의형제를 맺자는 사람이 있으니 그만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홍포인의 성격이 매우 호탕한 것으로 보아 진정 훌륭한 사내임을 짐작할 수 있어 응락을 했다.

무척 좋소이다. 불초는 소봉이라 하며 금년 서른 한 살이외다. 형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그 사람은 웃으며 대답했다.

불초는 야율기(耶律基)라고 하며 은공보다 세 살이 많소.

소봉은 말했다.

형님, 저의 절을 받으십시오.

그가 절을 하자 야율기는 즉시 답례했다.

두 사람은 즉시 세 자루의 화살을 땅에 꽂고 화살의 깃에 불을 붙여 향과 초로 삼아 하늘을 향해 여덟 번 큰절을 하고 형제의 의를 맺었다.

야율기는 속으로 무척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형제, 그대의 성이 소씨인데, 우리 거란 사람의 성씨에는 소씨가 많다네.

소봉은 말했다.

솔직히 형님에게 말씀드립니다만 소제는 원래 거란 사람입니다.

그는 윗저고리를 풀어헤치고 가슴팍에 수놓아진 청색의 이리 머리 문신을 보여 주었다.

야율기는 그것을 보더니 크게 기뻐했다.

정말 틀림없군! 그대는 우리 거란의 후족(后族) 사람이오. 형제, 여진인들이 살고 있는 땅은 매우 춥고 고달프니 차라리 상경(上京)으로 가서 함께 부귀영화를 누이도록 합시다.

소봉은 말했다.

형님의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소제는 언제나 가난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부귀한 생활을 누릴 수가 없을 겁니다. 소제는 여진인들이 사는 곳에서 사냥이나 하고 술을 마시는 것이 무척 자유롭고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훗날 형님이 생각나면 반드시 요나라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는 아자와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상처가 염려되어 다시 말을 이었다.

형님은 일찍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가족과 부하들이 걱정을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은 절을 하고 헤어졌다.

소봉은 말머리를 돌렸다.

아골타가 십여 명의 부족 사람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왔다. 원래 아골타는 소봉이 간 지 오래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혹시 홍포인의 간계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해서 마음을 놓지 못해 응원차 달려온 것이다.

소봉은 그를 석방해서 요나라로 되돌려 보냈다고 했다.

아골타 역시 도량이 넓은 영웅이었다. 소봉이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중시하며, 넓은 아량을 품은 데 대해서 심히 칭찬을 했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어느 날 소봉은 아골타와 한담을 나누다가 아자가 상처를 입은 원인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바로 자기의 장력에 잘못 맞아 그렇게 된 것으로 산삼을 먹고 목숨을 지탱하고 있으나 오랫동안 낫지 않아 심히 걱정스럽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아골타는 말했다.

소 형, 우리 여진인들이 상처를 입거나 다리와 팔을 삐었을 때는 언제나 호근(虎筋)과 호골(虎骨), 그리고 웅담(熊膽) 세 가지의 약물을 사용하며, 매우 효과가 좋습니다. 소 형은 어찌 시험해 보지 않으시오?

소봉은 크게 기뻐서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호근과 호골은 이곳에 많지 않소. 다만 웅담이라면 내가 나가서 곰을 잡도록 하면 될 것이 아니겠소.

그는 그 용법을 물어보고 호근과 호골을 삶아서 죽처럼 만들어 아자에게 복용시켰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봉은 혼자 깊은 산골짜기로 곰 사냥을 떠났다.

그는 홀로 사냥을 나왔기 때문에 마음껏 경신법을 펼쳤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냥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했다.

첫날은 검은 곰의 종족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틀째 되는 날 한 마리를 잡게 되었고 그는 곰의 배를 갈라 웅담을 꺼내 여진인들이 천막을 치고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와 아자에게 복용시켰다. 호근, 호골, 웅담 및 오래된 산삼은 진귀하기 이를데 없는 상처를 치료하는 약물이었다. 더우기 신선한 웅담은 여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설신의는 물론 신과 같은 의술을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약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산삼을 환자에게 밥 먹이듯 한다는 것은 그의 재주로서도 행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소봉처럼 신선한 웅담을 구해서 아자에게 먹이는 일을 그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그는 천막 앞에서 호근, 호골을 가지고 죽을 쑤고 있었다. 이때 한 명의 여진인이 총총히 달려오더니 말했다.

소형, 십여 명의 거란인들이 그대에게 예물을 가지고 왔소.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형 야율기가 보내온 것임을 곧 알아차렸던 것이다. 잠시 후 말발굽 소리가 나면서 수십 필의 말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말등에는 물품이 가득 실려 있었다.

앞장 선 거란의 대장은 야율기로부터 소봉의 얼굴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지라 소봉을 보자마자 멀리서 말에서 내리더니 재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다가와 땅바닥에 부복을 하고 입을 열었다.

주인께서는 소 나리와 작별을 한 후 매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특별히 소인 실리(室里)를 시켜 약소하나마 예물을 올리게 되었으며, 아울러 소 나리께 상경에 오셔서 며칠 묵어 가시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몇 번 절을 하고 두 손으로 선물의 이름을 적어 놓은 단자를 올렸다. 그의 태도는 공손하기 이를데 없었다.

소봉은 예단(禮單)을 받고 웃었다.

고생이 많았구려. 몸을 일으키도록 하시오.

그는 예단을 펼쳐보았다.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거란의 문자였다.

그는 말했다.

나는 거란의 글을 모르니 볼 필요가 없소이다.

실리는 말했다.

이번에 가지고 온 예물은 황금 오천 냥, 은 오만 냥, 비단 천 필, 상등품의 밀 천석, 황소 일천 마리, 양 오천 마리, 준마 삼천 필, 그밖에 약간의 옷들과 집기들이 있습니다.

소봉은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기만 했다.

이 많은 예물은 파랍소가 그날 요구한 속금보다도 십 배나 더 많은 것이었다. 그는 처음 십여 필의 말들이 물건을 싣고 있는 것을 보고 예물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만약 이 대장이 하는 말 그대로라면 굉장히 많은 마필과 수레를 동원해야만이 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실리는 다시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주인께서는 짐승들이 도중에서 흩어지게 될까봐 소와 양, 그리고 말들을 일할 정도 더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소 나리의 홍복으로 소인은 길을 오면서 눈보라나 야수들을 만나지 않아 짐승들의 손실은 매우 적었습니다.

소봉은 탄식했다.

야율 형님이 이토록 치밀하게 생각하시는데 내가 받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그의 호의를 저버리는 것이고, 그렇다고 내가 모조리 받아들이자니 미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구려.

실리는 말했다.

주인께서는 재삼 당부하셨습니다. 소 나리께서 만약 겸손하시어 선물을 받지 않게 된다면 소인에게 반드시 중벌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별안간 호각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각처의 천막에서 여진인들이 칼과 창은 물론 활을 들고 다투어 달려나왔다. 어떤 사람이 크게 명령을 내렸다.

적의 내습이다. 싸울 준비를 해라.

소봉은 호각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먼지가 크게 이는 것이 마치 무수한 군마가 이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실리는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놀라지 마시오! 이것은 소 나리의 소와 양, 그리고 말떼들입니다.

그는 여진의 말로 잇따라 몇 번 소리쳤다. 그러나 많은 여진인들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화리포와 파랍소, 그리고 아골타 등은 나누어 부족 사람들을 데리고 천막의 서쪽에 대오를 지어 섰다.

소봉은 처음으로 여진인들이 진을 펼치고 싸우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진족은 사람수가 많지는 않으나 하나같이 민첩하고 용맹하다. 야율 형님의 수하들인 거란 기사들도 대단하지만, 이 여진인들의 다부지고 날쌘데 비하면 뒤지는 것 같구나. 그러니 대송나라 관병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실리는 부르짖었다.

오해가 없도록 내가 가서 부하들에게 전진을 잠시 늦추도록 하겠소!

그는 몸을 날려 말 위에 오르더니 서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아골타는 손을 흔들었다. 몇 명의 여진족 사냥꾼들이 말에 올라서서 그 뒤를 따랐다. 다섯 사람은 말을 몰고 천천히 앞으로 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온 산과 들에는 소와 양, 그리고 일백여 명이나 되는 거란의 목인(牧人)들이 손에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호통을 내지르며 짐승떼를 몰고 있을 뿐 무사는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

네 명의 여진인들은 웃으면서 몸을 돌리게 되었고 돌아와 화리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얼마 후에 그 짐승떼가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들리는 것은 소의 울음 소리, 말의 울부짖음이라 사방은 대뜸 떠들썩해져서 뭇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날 밤 소봉은 여진족에게 부탁해서 양을 잡고 소를 잡아 멀리서 온 손님들을 접대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튿날 예물 가운데에서 금은과 비단을 꺼내 예물을 가지고 온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거란인들이 작별을 하고 돌아간 후에 그는 금은과 비단은 물론 소와 양, 그리고 말들을 모조리 아골타에게 넘겨 주어 아골타로 하여금 여진의 부족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여진인들을 떼를 지어 살고 있었으며, 제각기 자기 집에 어떤 사사로운 재산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같이 많은 재물을 얻게 된 데 대해 모두들 기뻐했다.

모든 부족들은 며칠을 두고 큰 연회를 베풀어 축하를 했으며 모든 사람들은 소봉에게 고마워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아자의 병은 상당히 호전되었다.

그녀는 정신이 맑아지자 매일 천막 안에 누워 있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다. 종종 소봉에게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함께 말을 타고 기분을 전환하자고도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말을 탈 때가 많았다. 말을 탈 때마다 그녀는 소봉의 가슴팍에 거의 안기듯이 하여 앉았기 때문에 조금도 힘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소봉은 그녀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이후 수 개월 동안 큰 바람이 불거나 눈보라가 칠 때를 제외하고는 두 사람은 언제나 바깥에서 지낼 때가 많았다. 가까운 곳에서 노는데 별 흥미가 없어지자 아예 천막을 가지고 먼 곳까지 나가 천막을 치고 며칠이나 묵다가 돌아오곤 했다.

이럴때면 소봉은 기회가 날 때마다 호랑이를 잡거나 곰을 사냥했다. 그리고 산삼을 캐내기도 했다.

아자가 교봉에게 한 대의 독침을 쏘는 바람에 장백산맥의 검은 곰이나 맹호들은 그야말로 운수사나운 꼴을 당하게 되었고 얼마나 많은 곰과 호랑이들이 그로 인해 소봉의 손 아래 죽음을 당했는지 모른다.

소봉은 산삼을 캐기 편리하도록 매번 동쪽이나 북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아자는 동쪽과 북쪽의 풍경은 모조리 보았으니 이제부터 서쪽으로 가자고 했다.

소봉은 말했다.

서쪽으로 가면 넓다란 초원이 나타날 뿐 볼만한 산천이 없단다.

아자는 말했다.

대초원도 좋잖아요? 마치 큰 바다처럼 보일 것이 아니에요. 저는 정말 큰 바다를 본 적이 없어요. 우리의 성숙해를 바다라고 하지만 역시 언덕이 있고 끝이 있어요.

소봉은 그녀가 성숙해를 들먹이자 속으로 흠칫했다.

일년 동안 여진인들과 함께 살면서 무림의 모든 일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오로지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목숨을 구하는데 전념했다. 그녀가 상처가 낫게 되면 또 못된 습성이 다시 고개를 쳐들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아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하얀 얼굴에서 여전히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두 뺨은 약간 꺼져 있었으며 한 쌍의 커다란 눈망울도 움푹 꺼진 것이 매우 초췌한 용모였다. 게다가 몸은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소봉은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스스로를 책망했다.

"본래 그녀는 얼마나 활발하고 귀여운 소녀였던가! 그런데 나에게 맞아 반 죽다시피 했고 그야말로 해골과 다름없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어찌하여 그녀의 나쁜 점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서쪽으로 가고 싶다면 우리는 서쪽으로 가기로 하자. 아자, 너의 병이 다 낫게 된다면 내가 너를 데리고 고려(高麗)의 변경으로 가서 진짜 큰 바다를 구경시켜 주도록 할게. 파란 물결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광경은 정말 대단하지.

아자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좋아요, 좋아! 저의 병이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지금 갈 수 있어요.

소봉은 어, 하며 놀람과 기쁨에 얽힌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자, 너 두손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구나?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보름 전부터 저의 두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됐어요. 그런데 오늘은 더욱 가볍군요!

소봉은 기뻤다.

매우 잘 됐다! 그런데 이 짓궂은 아가씨야, 어째서 줄곧 나에게 숨기고 있었지?

아자는 눈동자에 한 가닥 교활한 빛을 띠었으나 곧 지우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는 형부가 매일 저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가 영원히 움직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어요. 나의 상처가 좋아지면 형부는 또 나를 쫓아낼 것이 아니겠어요?

소봉은 그녀의 말투가 꽤 진지한 것을 보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말했다.

나는 거치른 사내라 그때 조심하지 않고 너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매일 같이 너와 함께 있다고 해서 좋을 게 뭐냐?

아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나직이 물었다.

형부, 그날 어째서 그렇게 큰 힘을 써서 나를 때렸죠?

소봉은 옛날을 들먹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인데 뭣 때문에 들먹이느냐? 아자, 내가 너에게 그 같은 상처를 입힌 데 대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너는 나를 미워하지 않느냐?

아자는 말했다.

물론 미워하지 않아요. 제가 왜 형부를 미워하겠어요? 본래 저는 형부와 함께 있기를 바랬는데 지금 형부는 저와 함께 있잖아요? 저는 정말 기쁘기만 해요.

소봉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이 소녀가 괴상한 소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래에 들어 성질이 많이 착해진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자기가 정성껏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거치른 성격이 많이 좋아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즉시 돌아가 마필과 수레, 천막, 마른 음식 등의 물건을 준비했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즉시 서쪽으로 출발했다. 십여 리를 가게 되었을 때 아자가 물었다.

형부, 알아냈어요?

소봉은 물었다.

무엇을 알아냈다는 거지?

아자는 말했다.

그날 내가 갑자기 독침을 써서 형부를 해치려고 했는데, 형부는 내가 왜 그랬는지 그 까닭을 알아냈느냔 말이에요.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의 생각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느냐?

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부가 짐작할 수 없다면 알려고 하지 마세요. 형부, 저것 보세요. 저 많은 기러기들은 어째서 떼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죠?

소봉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커다란 기러기들이 인(人)자 형태로 늘어서서 남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날이 곧 추워지기 때문에 기러기들은 추위를 타니까 남쪽으로 갔다가 추위를 피하러 가는 것이겠지.

아자는 물었다.

그럼 봄이 되면 어째서 그들은 다시 되돌아오죠? 매년 왔다갔다 하면 고생스럽지 않겠어요? 그들이 추위를 탄다면 아예 남쪽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니겠어요?

소봉은 옛날부터 무학에만 정성을 다해 왔으며 짐승들과 새들의 습성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녀의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되자 대답할 바를 몰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나 역시 그들이 어째서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 하는지 알 수가 없는걸? 아마도 기러기들은 북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고향을 그리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저기 가장 뒷쪽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세요. 몸뚱이가 별로 크지 않은데도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어요. 장래 그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가 모두 북쪽으로 되돌아올 때 자연 그들을 따라 되돌아올거예요.

소봉은 그녀가 언니, 형부라는 말을 들먹이자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멍하니 하늘가의 기러기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조금 전에는 한 마디 무심히 내뱉은 것 같았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무심코 한 마디 한 것이지만 나를 그녀의 친부모와 연관짓고 있다. 이로 미루어 그녀는 마음속으로 나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제 그녀를 함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녀의 병이 낫게 되면 반드시 대리로 데리고 가 그녀의 부모에게 무사히 돌려주어야 내 책임을 다한 것이다."

두 사람은 길을 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아자가 피곤하게 되면 소봉은 말등에서 그녀를 안고 내려와 뒤의 수레에 눕혀 편안히 잠을 자도록 했다. 해질 무렵이 되면 숲속에 천막을 치고 잠을 잤다. 이와 같이 며칠 동안 앞으로 나아가자 어느덧 대초원의 가장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아자는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

대초원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매우 기쁜 듯 말했다.

서쪽을 보면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정말 커다란 바다처럼 보이려면 반드시 동남과 서북쪽을 바라보아도 끝이 없어야 해요.

소봉은 그녀가 대초원 한복판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뜻을 거역하고 싶지 않아 그는 채찍을 들어 말을 서쪽으로 몰았다.

대초원에서 서쪽으로 며칠을 가니 정말 사방을 둘러보아도 초원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때는 가을철이라 하늘은 높고 바람은 시원했다. 기다랗게 자란 풀의 싱그러운 냄새를 맡자 무척 유쾌했다. 거기다가 풀속에는 여러 가지 작은 짐승들이 무척 많았다.

소봉은 손 닿는 대로 사냥을 해서 먹었으며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다시 며칠이 지나갔다. 그런데 이 날 정오 무렵, 멀리 앞쪽에 무수한 천막이 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울긋불긋한 깃발들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병영(兵營) 같기도 하고 한 떼의 부족이 모여서 살고 있는 곳 같기도 했다.

소봉은 말했다.

앞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무엇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군. 귀찮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돌아서 가는 게 좋겠다.

아자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는 가서 봐야겠어요. 저는 이제 두 발을 움직일 수 없는 몸인데 어찌 형부에게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생겨날 수 있겠어요?

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귀찮은 일은 반드시 네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상대방에서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네가 피할려고 해도 피할 수 없게 된단다.

아자는 웃었다.

하여간 우리 가서 보기나 해요. 보는 것이야 상관 없겠지요.

소봉은 그녀가 아직도 어린애의 마음으로 호기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말을 몰았다.

초원의 지세는 매우 평탄했다.

그 천막들은 멀리에서도 보였으나 실제로 가보니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칠팔 마장을 나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우우, 하는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먼지가 크게 일면서 말을 탄 사람들이 두 줄로 나뉘어졌다.

일대는 북쪽으로 향하고 일대는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소봉은 약간 놀라며 말했다.

야단이다! 거란인들의 기병이다!

아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형부와 한 집안 사람이 아니에요? 정말 잘 되었는데 뭐가 야단이라고 그러세요?

소봉은 말했다.

나는 그들을 모르지 않느냐? 그러니 역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둥둥, 하는 북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다시 몇 개 대열의 거란 기병들이 달려왔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방에 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 이 사람들은 진법을 조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때 함성이 크게 일었다.

사슴을 쏘아라. 사슴을 쏴!

서쪽, 북쪽, 남쪽에서 모두다 "사슴을 쏴"하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소봉은 말했다.

그들은 아마도 사방에서 짐승을 쫓으며 사냥을 하는 모양이다. 이 기세야말로 대단하구나!

그는 즉시 아자를 안고 말등에 올라 동쪽에서 그 기병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거란인 기병들은 모두가 몸에 금포(錦袍)를 걸치고 있었으며 안으로는 철갑(鐵甲)을 받쳐 입고 있었다. 금포는 가지각색으로 일대(一隊)는 홍색이고 일대는 녹색이며 일대는 황색이고 일대는 자색이었다. 깃발과 금포는 같은 빛깔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초원 위로 마구 말을 달리는데, 병사들은 강인해 보였고 말은 건장해 보여 몹시 멋졌다.

소봉과 아자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병사들은 각기 군령에 따라 종횡으로 나아갔다가 물러가곤 하면서 기다란 창을 뻗쳐 사슴떼를 쫓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봉과 아자 두 사람을 발견하고도 그저 힐끗 쳐다보았을 뿐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대(四隊)의 기병들은 사면에서 에워싸고 점점 그 포위망을 좁혀 왔으며 수십 마리나 되는 커다란 사슴들을 한 가운데로 포위했다.

간혹 한 마리의 사슴이 자기네들의 대열에서 빠져나와 빈틈을 타고 도망치려고 할 때면 몇 명의 기마무사들이 달려나와 그 사슴을 몰아 다시 사슴떼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도록 몰았다. 소봉이 한참 구경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 누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쪽에 계신 분은 소 나리가 아니십니까?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나를 알아보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런데 청색의 금포를 입고 있는 대열 중에서 한 필의 말이 달려나오더니 곧장 이쪽으로 달려왔다.

바로 몇 개월 전 야율기가 선물을 보내올 때 책임지고 호송을 해왔던 대장 실리였다.

그는 소봉의 앞으로 십여 장쯤 되는 곳에 달려오더니 훌쩍 말에서 내려 재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오른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저의 주인께서는 바로 멀지 않은 곳에 계십니다. 주인께서는 종종 소 나리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며 그리워하신답니다.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 소 나리께서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습니까? 빨리 가셔서 주인과 만나도록 하십시오.

소봉은 야율기가 바로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뻤다.

나는 그저 밖으로 구경을 나왔을 뿐인데 의형이 바로 부근에 있다니 정말 잘 됐구려. 좋소. 그대가 안내하시오. 나도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소.

실리는 입술을 모으고는 휘파람을 휘익, 하고 불었다.

그러자 두 명의 기병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실리는 소리쳤다.

빨리 가서 장백산의 소 나리께서 오셨다고 보고 드려라!

두 명의 기병은 허릴 구부리며 영을 받고 나는 듯 되돌아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슴 사냥을 했다.

실리는 일대(一隊)의 청포 기병들을 이끌고 소봉과 아자를 뒤에서 호위하며 곧장 서쪽으로 나아갔다.

야율기가 한 무더기의 금은과 소, 말떼를 선물로 보내 주었을 때 소봉은 그가 반드시 거란의 큰 벼슬아치일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이제 이와 같은 기세를 보고 자기의 의형이 십중팔구 요나라에서 어떤 장군이나 고관대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원에는 말을 달리며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마치 풀잎이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는 듯했으며 의갑(衣甲)이 선명했다.

실리는 말했다.

소 나리께서는 오늘 정말 잘 오셨습니다. 내일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는 볼만한 구경거리가 벌어진답니다.

소봉은 아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오른 것을 보고 물었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소?

실리는 말했다.

내일은 바로 연무일(演武日)입니다. 영창(永昌), 태화(太和), 양궁(兩宮)의 궁위군(宮衛軍)의 통령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거란의 관병들은 제각기 무예 솜씨를 겨루어서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통령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소봉은 무예를 겨룬다는 말을 듣고 싱글벙글하며 매우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그야말로 정말 잘 됐군. 이번에야말로 거란인들의 무예를 한 번 구경 해야겠구나.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대장, 내일 그대가 크게 솜씨를 보이게 될 터이니 통령 자리를 차지하게 될것이에요. 미리 축하드리죠.

실리는 겸손하게 말했다.

소인에게 어찌 그와 같은 실력이 있겠습니까?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통령의 자리쯤 빼앗는 게 뭐가 대단해요? 저의 형부께서 그대에게 두세 가지의 무공을 가르치기만 한다면 그대는 통령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예요.

실리는 기뻐서 말했다.

소 나리께서 소인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신다면 그야말로 영광이지요! 그러나 소인에게 그만한 행운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행은 이야기를 하면서 십여 리를 가게 되었다. 그러자 앞쪽에서 일대의 기병이 급히 달려왔다.

실리는 말했다.

대장피실군(大帳皮室軍)의 비웅대(飛熊隊)가 도달했군!

그 일대의 관병들은 모두가 곰 가죽으로 만든 옷과 모자를 쓰고 있었다. 검은 곰 가죽으로 바깥에 걸치는 장포를 만들어 입었고, 하얀 곰가죽으로 커다란 모자를 만들어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위풍당당했다.

이 일대의 기병들은 가까이 다가오더니 일제히 구령을 붙이면서 동시에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두 줄로 늘어서며 외쳤다.

삼가 소 나리를 맞습니다.

소봉은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그는 손을 들어 예의를 갖추었다. 그리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비웅대는 그의 뒤를 따랐다.

다시 십여 리를 나아가자 일대의 호피로 된 옷과 호피 모자를 쓴 비호병(飛虎兵)이 마중을 나왔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의 야율기 형은 도대체 무슨 큰 벼슬을 하는게 이와 같은 기세를 보이는 것일까?"

그러나 실리도 말하지 않았고 또 지난 번 만나게 되었을 때 야율기가 자기의 신분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봉은 묻지 않았다.

저녁 나절이 되었을 때 커다란 천막이 세워져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몸에 표범 가죽 옷과 모자를 걸친 비표대(飛豹隊)가 그들을 맞았다. 비표대의 군사들은 소봉과 아자를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천막으로 안내했다.

소봉은 그 천막 안으로 들어가면 야율기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천막 안에는 융단이 깔려 있고 기물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매우 화려했다. 나지막한 탁자 위에는 음식과 과일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지만 천막의 주인은 없었다.

비표대의 대장은 말했다.

주인께서는 소 나리께서 이곳에서 하루 밤 편안히 주무시도록 하고 내일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소봉은 더 묻지 않고 탁자에 앉아서 술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네 명의 병사가 술을 따르고 고기를 잘라 주는 등 공손히 시중을 들었다.

이튿날 기마병들은 서쪽으로 이백여 리를 행군했다. 해질 무렵엔 다시 한 커다란 천막 안에서 쉬게 되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정오가 되었을 때 앞장을 섰던 실리가 말했다.

앞쪽의 산등성이를 돌아가면 곧 도착합니다.

소봉은 앞쪽의 커다란 산의 기상이 꽤나 웅장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커다란 냇물이 산언덕 옆을 끼고 남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일행은 산등성이를 돌았다. 그러자 눈앞에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보였고 넓은 대초원에 겹겹이 천막들이 늘어선 장관이 눈에 들어왔다.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기병과 군졸들이 중간의 커다란 넓은 빈터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소봉을 호송하던 비웅, 비표, 비호, 각대의 관병들은 일제히 호각을 꺼내서 우, 하니 불기 시작했다.

별안간 북 소리가 크게 일었으며 펑펑펑, 하는 호포(號袍)가 울려퍼졌다.

빈터에 늘어섰던 수많은 관병들은 좌우로 늘어섰고 한 필의 커다란 황색의 준마가 달려 나왔는데 그 말등에는 한 명의 구렛나루를 무성하게 기른 대한이 앉아 있었다.

바로 야율기였다.

그는 말을 타고 소봉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며 큰소리로 말했다.

소 형제, 정말 보고 싶었네!

소봉 역시 말을 몰아 마중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말등에서 내려서는 두 손을 마주 쥐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때 사방에 서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질렀다.

만세! 만세! 만만세!

소봉은 깜짝 놀랐다.

"어째서 군사들이 만세를 외치는 것일까?"

그는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군관이나 사졸들이 하나같이 허리를 굽히고 칼을 뽑아서 땅에 대고 있었다.

야율기는 그의 손을 잡고 중간에 서서 동쪽과 서쪽을 둘러보는데 그 표정이 매우 의기양양했다.

소봉은 아연해져 물었다.

형님, 형님이...... 형님이...... 형님이......

야율기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만약 자네가 일찌기 나라는 사람이 대요나라의 황제인 줄을 알았더라면 나와 결의형제를 맺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소 형제, 나의 진짜 이름은 야율홍기(耶律洪基)라네. 자네가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네.

소봉은 활달하고 호탕한 성격이었지만 한평생 황제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와 같은 위세를 대하게 되니 그만 겸연쩍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인은 폐하이신 줄 모르고 위엄을 손상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는 거란의 백성이니 자기 나라의 황제를 보고 꿇어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야율홍기는 재빨리 손을 뻗쳐 소봉을 부축해 일으키며 웃었다.

모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네. 그대와 나는 의형제 사이가 아닌가? 오늘은 다만 의리만을 논하고 내일 다시 군신의 예의를 갖추어도 늦지는 않네.

그는 왼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대오 가운데서 북치는 소리와 더불어 귀빈을 환영하는 주악 소리가 울려퍼졌다.

야율홍기는 소봉의 손을 잡고 커다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요나라 황제가 거처하는 천막은 몇 겹의 소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안에 훌륭한 그림과 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찬란하고 휘황했다.

황제가 머무는 이 천막을 요나라에서는 피실대장(皮室大帳)이라고 했다.

야율홍기는 가운데 앉았고 소봉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얼마 후 어가를 모시는 문무백관이 들어와 인사를 했다. 북원대왕(北阮大王), 북원추밀사(北阮樞密使), 우월(于越), 남원지추밀사사(南阮知樞密使事), 피실대장군(皮室大將軍), 소장군(小將軍), 마군지휘사(馬軍指揮使), 보군지휘사(步軍指揮使) 등등이었는데 소봉은 일시에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이날 밤 천막 안에서는 큰 연회가 베풀어졌다.

거란 사람들은 여자를 존중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자 역시 피실대장의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술은 얼마든지 있었고 고기는 산처럼 쌓일 지경이었다.

아자는 그 같은 광경을 보고 신이 나서 싱글벙글했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십여 명의 거란 무사가 황제 앞에서 무예를 겨루는 놀이를 했다. 윗통을 벗고 씨름을 하는 등 격렬한 시합을 벌였다.

소봉은 그들 거란 무사들의 솜씨가 민첩하고 팔힘이 세차며, 손을 들고 발을 쳐드는 가운데 여러 가지 무공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변화와 교묘한 점에 있어서는 중원의 무사를 따를 수가 없었으나 곧장 앞으로 나아가 공격하는 수법은 만약 싸움터에서 떼싸움을 벌이게 되었을때 사용하게 된다면 중원 무술보다 더욱 쉽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요나라의 문무 관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앞으로 나와 소봉에게 술을 들어 경의를 표했다.

소봉은 그들이 경의를 표할 때마다 잔을 들어 술을 비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삼백여 잔을 마시게 됐다. 그런데도 얼굴 빛은 태연자약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율홍기는 평소 자신의 용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번에 소봉에게 사로잡힌 것은 온 나라가 다 알게 된 일이라 그는 소봉의 초인적인 능력을 신하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기가 소봉에게 사로잡히게 된 것이 자신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님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소봉은 내일의 무술 시합에서 크게 솜씨를 떨치기도 전에 바로 지금 뛰어난 주량을 보였으며 이 주량만으로도 군웅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금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야말로 야율홍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자기의 뜻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는 크게 기뻐하여 말했다.

형제, 그대는 그야말로 우리 요나라에서 제일가는 영웅호걸일세.

갑자기 아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그는 두 번째에 불과해요.

야율홍기는 웃으며 물었다.

소저, 그가 둘째라면 첫째 영웅은 누구이지?

아자는 말했다.

첫번째 영웅호걸은 물론 폐하이시죠. 저의 형부는 재간이 뛰어나지만 폐하에게 순종해야 하며 감히 폐하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니 폐하께서 제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그녀는 성숙노괴의 제자인지라 아첨하는 재간에 정통했다. 따라서 이 한마디의 말은 그저 자기의 실력을 조금 발휘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야율홍기는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하하하하! 말 한 번 잘 했군. 잘 했어! 소 형제, 나는 그대에게 커다란 벼슬을 내리려고 하네. 어디 좀 생각해 볼까. 무슨 벼슬을 내리면 좋을까?

야율홍기는 이때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소봉은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소인의 성격은 거칠고 소홀해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정처없이 오고가는 몸이라 정말 벼슬길에 오르고 싶지 않습니다.

야율홍기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그대에게 그저 술만 마시고 일을 하지 않는 벼슬을 내리도록 하지......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멀리서 호르륵, 하는 지극히 날카롭고 급박한 호각 소리가 울려퍼졌다.

요나라 사람들은 본래 땅바닥에 주저앉아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곤 했다. 그런데 그 호각 소리를 듣자 갑자기 우, 하니 동시에 몸을 일으켰으며 얼굴에 하나같이 놀람과 당황한 빛을 드러냈다.

호각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십여 리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는데 두 번째 울려퍼지게 되었을 때는 이미 수 마장 가까워져 있었고, 세 번째 호각 소리가 들릴 때는 다시 수 마장이 가까워져 있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천하에서 아무리 빠른 말이 있고 제일가는 경신술이 있다 하더라도 이토록 신속하게 달려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군! 아마도 먼저 긴급한 군정을 전하는 전신참(傳信站)을 미리 배치해 둔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호각 소리를 듣자마자 곧 다음 전신참으로 전달을 하게 되는 것이리라."

호각 소리가 나는 듯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피실대장 밖에까지 전해지더니 뚝 끊어지게 되었다.

이때 수백 채의 천막에 자리잡고 있던 관병들은 환호성을 내질러가며 술을 마시는 등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이 순간 사방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야율홍기는 매우 침착하게 금으로 만든 잔을 들어 서서히 술을 비우더니 말했다.

서울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있군! 우리 곧 돌아가도록 하세. 천막을 모조리 거두도록 하라!

행군대장군은 즉시 출발 명령을 전했다. 그의 한 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출발이라는 호령이 대뜸 열 마디로 변하게 되었고 열 마디는 다시 백 마디로 변하고 백 마디는 천 마디로 변하는 등 그 소리는 갈수록 커졌으나 매우 질서정연한 것이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 어지러운 기색이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소봉은 생각했다.

"우리 대요나라가 나라를 세운 지 이미 이백 년이 가까웠고 국위를 천하에 떨치고 있는 만큼 내란이 있다고 해도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는구나! 이로 미루어 볼 때 대대로 요나라 군주가 군사를 잘 통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때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선봉의 척후병들이 먼저 달려갔다. 곧이어 좌우의 선봉대들이 출발했다. 그리고 전군, 좌군, 우군 등 일대가 천막을 거두고 남쪽을 향해 진군했다.

야율홍기는 소봉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나가세.

두 사람은 천막에서 걸어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어둠속에 깃발마다 하나의 등롱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홍색, 황색, 백색, 남색 등 등롱의 불빛이 사방을 훤하게 밝혀 주고 있는 가운데 십여 만이나 되는 대군은 물밀듯 남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말의 울음 소리와 말발굽 소리만 들려올 뿐 사람의 음성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소봉은 크게 탄복했다.

"이와 같이 군사를 다스리니 천하에서 그 누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날 황상께서 홀로 사냥을 나왔다가 나에게 잡히게 된 것이구나! 만약 대군을 끌고 왔더라면 여진인들이 아무리 용감하다 하더라도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2120] 제목 : [김용] 천룡팔부(天龍八部) 27장

올린이 : 멀티피씨(김효범 ) 96/08/31 03:04 읽음 : 405 관련자료 없음

 

소봉과 야율홍기가 커다란 천막에서 나오자마자 호위 무사들은 즉시 천막을 걷기시작했다. 그들의 행동은 몹시 민첩하고 숙달되어 있어서 즉시 모든 천막을 정리했다.

봇짐을 비롯한 사용하는 물건들은 모두 낙타와 말, 그리고 큰 수레에 실었다.

중군(中軍)의 원수(元帥)가 호령을 하자 군사들은 곧 출발했다.

북원대왕(北院大王), 우월(于越), 태사(太師), 태부(太俯)등은 야율홍기를 전후좌우에서 호위했다.

모든 사람들의 표정은 무척 엄숙하였다.

그 누구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면 소문은 이미 전해졌으나 도대체 그 반란의 주모자가 누구이며 반란을 일으킨 후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대 인마는 남쪽을 향해 쉬지 않고 삼일 동안 행군했다. 그날 저녁 무렵 천막을 치고났을 때 첫 번째의 전령이 말을 달려 와서 야율홍기에게 보고를 했다.

남원대왕이 난을 일으켰으며 황궁을 점거했습니다. 그리하여 태후와 황후, 왕자, 공주 및 백관(百官)의 가족들은 모조리 체포, 구금했습니다.

야율홍기는 깜짝 놀라 안색이 확 변하고 말았다.

요나라의 군사는 남원과 북원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이번에 북원대왕은 황제를 따라 사냥을 나왔고 남원대왕은 서울에 남아 수도를 지키고 있었다. 남원대왕은 야율열노고(耶律涅魯古)라는 자인데 초왕(楚王)에 봉해진 사람이었다.

그의 부친 야육중원(耶律重元)은 바로 당금의 황태숙(皇太叔)으로 천하병마대원수(天下兵馬大元帥)라는 관직에 봉해진 사람이었다.

두 부자는 거란에서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야율홍기의 조부인 야율융서(耶律隆緖)를 요사(遼史)에서는 성종(聖宗)이라고 일컬었다.

성종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자는 종진(宗眞)이며 차자는 중원(重元)이었다.

종진은 성격이 인자하고 너그러운 반면 중원은 지극히 용맹스러웠으며 병법에 뛰어난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성종은 유언을 내려 큰 아들 종진으로 하여금 황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그런데 성종의 부인은 차남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중원을 황제로 세우고자 하는 음모를 꾸몄다.

요나라에서는 황태후의 권력이 대단했다. 이렇게 되자 종진은 황위를 지키기는커녕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런데 중원은 오히려 어머니의 계책을 형에게 알려 주어 황태후의 음모가 성공할 수 없도록 했다.

종진은 이 아우에 대해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그를 황태제(皇太弟)로 삼았다.

그것은 이후 황제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어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이었다.

야율종진은 요나라 역사에서 흥종(興宗)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황위는 황태제인 중원에게 전해지지 않고 여전히 그의 아들인 야율홍기에게 전해졌다.

야율홍기는 황위를 이어받게 된 이후 마음속으로 미안함을 느끼고 중원을 황태숙(皇太叔)으로 봉해 그가 여전히 대요나라의 황족임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천하병마대원수에 봉하고 황제 앞에서 절을 하고 이름을 아뢰는 절차를 하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주었다. 거기다가 금권서서(金券誓書)와 사정모(四頂帽), 이색포(二色袍)를 내렸는데 그와 같은 은총을 입은 사람은 요나라의 역사상 처음이었다. 거기다가 그의 아들 야율열노고를 초왕으로 봉하여 남원의 군정(軍政)을 맡도록 했다.

그리고 그에게 남원대왕이라는 직위를 내려 주었다.

과거 야율중원이 분명히 황제가 될 수 있었는데도 형에게 양보한 것을 보아도 그는 매우 의리를 중시했으며 권력에 뜻이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야율홍기는 사냥을 하러 나올 때 서울의 군사권을 모조리 황태숙에게 넘겼으며 추호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모반을 꾀한 사람이 바로 남원대왕 야율열노고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 야율홍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열노고의 성격이 음침하고 일마다 처리함에 있어서 지극히 용의주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거사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면 이미 대세를 만회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아야 했다. 북원대왕은 황제에게 품했다.

폐하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황태숙께서는 사리를 아시는 분이라 반드시 못된 아들이 역심을 품은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쯤 군사를 이끌고 난을 평정했을지도 모릅니다.

야율홍기는 씁쓸하게 말했다.

아무쪼록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오.

저녁밥을 먹을 때 두 번째 전령이 달려와 보고를 했다.

남원대왕은 황태숙을 황제로 삼았으며 이미 교시를 내려 천하에 알렸습니다.

전령은 새로운 황제의 조서를 두 손으로 바쳤다.

야율홍기는 받아서 읽어 보았다. 조서에는 야율홍기가 제위(帝位)를 찬탈하고 거짓 황제가 되었다는 말이 서두에 적혀 있었다. 그리고 선제(先帝)가 야율중원을 황태제로 삼았으며 그 사실은 이십사년 동안 천하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일이었는데 선제가 붕어하자 야율홍기가 선제의 유서를 고쳐 제위를 찬탈함으로써 나라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고 있다는 내용과 황태숙이 이제 제위에 올라 친히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역적 야율홍기를 토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그 조서에 실려 있었다.

야율홍기는 크게 노해 조서를 불더미 속에 집어던졌다. 그의 마음은 여간 초조하지 않았다.

"이 거짓 조서는 그럴싸하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요나라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보면 인심이 흔들리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황태숙은 천하병마대원수의 자리에 앉아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팔십여 만이나 되는 병마를 모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의 아들 초왕이 남원의 병마까지 관활하고 있으니 그 위세는 너무도 엄청나다. 나를 따라온 병사는 불과 십여 만에 불과하니 그야말로 중과 부적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고."

이날 밤 그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봉은 요나라 황제가 자기에게 관직을 수여하겠다는 말을 듣고 본래 아자를 데리고 어둠을 틈타 인사도 없이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의형이 위기를 당하고 있는 이때 훌쩍 떠날 수가 없었다. 의형을 위해 힘이 되어 주어야 의형제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는 천막 밖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이날 밤 뭇 관병들은 나직이 수근거리고 있었다.

부모 처자들이 모두 서울에 있는데 지금쯤 모두 황태숙에게 잡히게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을 생각하고 흐느껴 울기도 했다.

울음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다른 천막의 관병들도 같은 처지였다. 울음 소리를 듣자 큰소리로 통곡을 했다.

군사를 거느리는 윗사람들이 호통을 쳐 저지했으며 유난히 울음 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을 몇 명 참수하기도 했으나 이미 저지할 수가 없었다.

야율홍기는 울음 소리가 진동하는 것을 듣고 군심(軍心)이 동요하는 조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더욱 심사가 착잡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척후병이 달려와 보고했다.

황태숙과 초왕이 병마 오십여 만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야율홍기를 정벌하러 온다는 전갈이었다.

야율홍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의 결전은 앞으로 나갈 뿐 뒤로 물러설 수 없다. 설사 패한다 하더라도 결사의 각오로 일전을 치를 수밖에 없다."

그는 즉시 문무백관은 소집하여 상의했다. 모든 신하들은 야율홍기에 대해서 지극한 충성심을 보였으며 결사일전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음을 걱정했다.

야율홍기는 명령을 내렸다.

뭇 관병들은 기운을 내서 역적을 토벌하라! 이 난을 평정한 뒤에 벼슬을 올려 주는 이외에도 커다란 상을 내릴 것이다.

그는 황금갑주를 입고 친히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황태숙의 군사를 향해 진격해 갔다.

뭇 관병들은 황상께서 친히 선봉에 서는 것을 보자 대뜸 용기백배해서 세 번이나 만세 소리를 외치며 죽음을 다해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십여 만이나 되는 병마는 전군, 좌군, 우군, 중군으로 나뉘어졌다. 그들은 기치도 선명하게 남쪽으로 나아갔다.

몇 개 소대의 유격대가 양쪽으로 흩어져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를 적병을 경계했다.

소봉은 활과 창을 들고 야율홍기의 뒤를 따랐다. 그는 이제 야율홍기의 호위가 된 것이다.

실리(室里)는 일대의 비웅대(飛熊隊)를 거느리고 아자를 호위하며 후군으로 처지게 되었다.

소봉은 야율홍기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이번 전쟁에 자신이 없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오가 될 때까지 그들은 나아갔다. 갑자기 앞 쪽에서 호각 소리가 크게 일었다.

중군장(中軍將)은 명령을 내렸다.

말에서 내려라!

뭇 기병들은 말에서 내리고 손으로 말고삐를 잡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다만 야율홍기와 대신(大臣)들 만이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소봉은 뭇 기병들이 어째서 말에서 내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의혹을 느꼈는데 그 눈치를 알았는지 야율홍기가 입을 열고 웃으며 말했다.

형제, 그대는 중원 땅에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거란 사람들이 행군을하고 싸움을 하는 방법을 모르겠지?

소봉은 말했다.

그렇잖아도 폐하께 가르침을 받으려던 참입니다.

홍기는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이 형은 오늘 해가 서산으로 질 때까지 살 수 있을런지도 의문일세. 그대와 내가 형제의 의를 맺게 된 이상 왜 폐하라고 부르는가?

소봉은 그의 웃음 소리 가운데 쓸쓸함이 깃들어 있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아직 양쪽에서 싸움을 하지 않았으니 폐하께서는 너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홍기는 말했다.

평원에서 싸우게 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을 말의 힘이고 그 다음이 사람의 힘일세.

소봉은 대뜸 깨닫는 바가 있어 말했다.

아, 그렇군요. 기병들이 말에서 내리는 것은 타고 있는 말을 피로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군요?

홍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말의 힘을 잔뜩 비축해 두어야 적을 맞게 되었을 때 달려 들어가 적진을 무너뜨릴 수 있네. 그렇게 되면 거칠 것 없이 승리를 이루게 되네. 거란인들이 동쪽이나 서쪽을 정벌하면서 백 번 이기게 된 이유는 바로 이같은 비결이 있었기 때문일세.

거기까지 말할 때 앞 쪽 멀리에서 먼지가 크게 이는 것이 보였다. 그 먼지는 십여장이나 높이 치솟아 마치 노란 구름이 땅을 뒤덮고 몰려 오는 것 같았다.

야율홍기는 말채찍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황태숙과 초왕은 많은 싸움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요나라에서 손꼽히는 장수들인데 어째서 군사들을 급히 몰아 달려 오며 말의 기운을 축내는 것일까? 음, 그들은 믿는 데가 있으며 아마도 자기네들이 반드시 이기게 된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군!

그런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좌군과 우군에서 동시에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봉은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적은 중군을 중심으로 동쪽에 따로 이대의 군마를 배치해 두었고 서쪽에도 따로 이대의 군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오 대 일의 형세였다.

야율홍기는 안색이 변해 중군장에게 명령했다.

진을 치도록 하게!

중군장은 응답했다.

예.

그는 말을 달리며 명령을 전했다. 즉시 전군(前軍), 좌군(左軍), 우군(右軍)이 되돌아왔다.

뭇 군사들은 황제의 천막기둥을 땅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가죽으로 만들어진 천막을 펼쳤다.

이어 그 사방에 빙둘러 녹각( 角)을 세웠다.

삽시간에 초원에는 하나의 지극히 큰 요새가 구축되었다. 전후좌우를 기병대가 호위했으며 수만 명이나 되는 궁전수들이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은신하고 활에 시위를 메겨 화살을 쏠 준비를 했다.

"이번에 큰 싸움이 전개된다면 어느 쪽이 이기고 지든 우리 거란의 동족들은 그야말로 많이 죽게 될 것이고 그 시체는 이 들을 가득 메우게 될 것이다. 물론 의형이 이기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게 되었을 때 나는 방법을 강구해서 의형과 아자를 안전한 곳으로 구해내야 한다. 그까짓 황제를 그만두는 것이 뭐가 대수롭겠는가!"

야율홍기가 영채(營寨)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 반군의 선봉이 진격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앞으로 나와 도전을 하지 않고 멀리서 이쪽을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화살이 닿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이 쪽을 관망하고 있었다.

갑자기 북 소리와 호각 소리가 사면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일대, 일대의 반군들이 사방을 포위하기 시작했으며 사면팔방에 진을 치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그저 온 들을 뒤덮다시피 한 것은 적군이었고 그 적군들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소봉은 생각했다.

"의형의 군사는 실로 중과부적이다. 아무래도 지고 말 것 같구나. 낮에는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기가 어려우니 어두운 밤까지 견디다가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구하도록 해야지"

그는 영채의 기둥으로 만든 대문의 그림자가 짧게 땅바닥에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태양이 빛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점심 때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이때 기러기의 울음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한 떼의 기러기들이 떼를 지어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야율홍기는 머리를 쳐들고 한참 동안 살펴보더니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기러기가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야 이 곳에서 벗어날 방도란 없을 것이다.

북원대장과 중군장은 그 말을 듣고 일제히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황제가 반군의 군세를 보고 이미 두려움을 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적진에서 북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수백 개나 되는 북이 둥둥둥 크게 울려퍼졌다.

중군장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북을 쳐라!

그러자 어영(御營)의 수 백이나 되는 북들도 역시 둥둥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별안간 맞은 편의 군중에서 들려오던 북 소리가 멈춰 지고 수 만이나 되는 기병들이 천지를 진동할 듯한 함성을 지르며 창을 겨눈 채 곧장 돌진해 왔다.

적군의 선봉이 돌진해 오는 것을 보자, 중군장은 즉시 깃발을 아래로 휘둘렀다.

어영의 북 소리가 즉시 멈춰지고 수 만 대의 화살이 일제히 쏟아져 나가자 적군의 선봉들은 다투어 땅에 쓰러졌다. 그러나 적군들은 앞 쪽에서 사람이 쓰러지면 뒤쪽에서 달려드는 것이 그야말로 벌떼가 몰려드는 것 같았다.

적군의 보병과 궁전수들은 방패로 몸을 보호한 채 앞으로 나서며 어영을 향해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야율홍기는 처음에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으나 싸움을 하게 되자 즉시 용기 백배한 듯 높은 곳에 서서 긴 칼을 휘두르며 호령을 하면서 지휘를 했다.

어영의 장수와 사졸들은 황상이 친히 독전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적군들은 만세 소리를 듣고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야율홍기가 노란 금포와 금갑(金甲)을 걸치고 어영의 높다란 단위에서 전군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랫동안 그의 위세를 보아 오던 적군들은 그만 머뭇거리며 앞으로 더 나오지 못했다.

야율홍기는 이와 같이 좋은 기회를 포착하자 큰소리로 외쳤다.

좌군의 기병은 돌진하라!

좌군은 북원추밀사가 거느리고 있었다. 황상의 명령을 듣자 삼만의 기병이 곧 옆에서 달려나와 돌진해 갔다.

반군이 일시 주저하는 틈을 타 어영이 군마들이 이미 돌격해 갔던 것이다.

반군은 대뜸 크게 어지러워지더니 다투어 뒤로 물러섰다.

어영에서는 북을 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반군은 싸움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즉시 피해서 물러갔다. 어영의 군마들은 그들을 추살을 했는데 그 기세가 대단히 흉흉했다.

소봉은 기뻐서 크게 부르짖었다.

형님,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크게 이기게 되었습니다!

야율홍기는 높다란 대 위에서 내려와 전마(戰馬)에 올라탔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대대적인 돌진을 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호각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반군(叛軍)의 주력 부대가 도달했다.

반군의 선봉들은 다시 몸을 돌리고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화살과 장창이 하늘을 난무하며 오고갔다. "죽여라"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피와 살이 마구 튀었다.

소봉은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이와 같이 흉험한 싸움은 내 한평생 처음 보겠다. 한 사람의 무공이 아무리 천하무적이라 하더라도 이같은 천군만마 가운데로 들어가게 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고 기껏해야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 끝나겠구나! 이와 같이 대군이 접전을 벌이는 것은 무림에서 벌이는 떼싸움과 비교할 수 없는 것 이구나!"

바로 이때, 반군의 진 뒤에서 징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들이 군사를 거두어들인 것이다.

반군의 기병들은 물러가면서 비오듯 화살을 쏘아댔다. 즉 이 쪽에서 추살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중군장과 북원추밀사는 군사를 이끌고 세 번이나 돌진을 감행했으나 적진을 깨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수천의 군사가 적의 화살에 쓰러지게 되었다.

야율홍기는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의 살상이 너무 많으니 우선 군사를 거두도록 하라!

어영에서 즉시 징을 쳐 군사를 거두어들였다.

반군 쪽에서 이 대의 기병대를 내보내 습격을 감행했다. 중군에서는 이미 방비하고 있었던 터라 짐짓 피해서 물러가는 척 적을 깊숙이 유인한 다음 양쪽에서 포위해 들어가 추격해 온 삼천 명이나 되는 반군을 모조리 그 자리에서 섬멸하였고 나머지 수백 명은 말에서 내려 투항하게 되었다.

야율홍기가 왼손을 쳐들자 어영의 군사들은 창을 들고 달려가 그 수백 명이나 되는 투항병들을 모조리 찔러 죽였다.

한바탕의 악전고투는 한 시진이 채 못 되어 끝났는데 그 싸움은 그야말로 참혹하기 이를데 없었다.

쌍방의 주력 부대는 각기 뒤로 수십 장이나 물러서게 되었다. 그리고 중간의 빈터엔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신음 소리와 슬피 울부짖는 소리는 참으로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다.

이때 양쪽 진에서 각기 일 대의 삼백 명이나 되는 흑의 병사들이 달려나왔다.

이쪽 어영의 흑의 병사들은 머리에 노란 모자를 쓰고 있었고 반군 쪽의 흑의 병사들은 머리에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중간지대로 나아가 상처입은 사람을 살폈다.

소봉은 이 사람들이 상처입은 사람들을 떠메고 와서 치료해 주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흑의의 병사들은 긴 칼을 뽑아 들고 상대방의 상처입은 병사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아닌가.

상처입은 사람들을 모조리 쳐죽인 이후 쌍방의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어영의 노란 모자를 쓴 흑의 병사들은 무공이 비교적 고강한 듯 칼을 맞아 죽은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즉시 두세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쌍방의 관병들은 그저 고함을 지르고 위세를 돋울 뿐이었다.

반군의 수 십만이나 되는 사람들도 그저 구경만 할 뿐 병사를 내보내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끝내 반군의 삼백 명이나 되는 하얀 모자의 흑의 병사들은 모조리 섬멸당하고 말았으며 어영의 흑의 병사 약 이백 명이 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요나라 사람들의 규칙이 이런가 보다."

이렇게 전장을 청소하는 싸움은 규모에 있어서 앞서 벌어진 싸움보다 못했지만 사람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는 참혹함과 잔인함에 있어서는 더 했으면 했지 못하지 않았다.

야율홍기는 기다란 칼을 높이 쳐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반군은 수는 많으나 투지가 없다! 다시 한 번 싸움을 벌인다면 그들은 즉시 패해 도망칠 것이다.

어영의 관병들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별안간 반군의 진에서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섯 필의 말이 천천히 달려나왔다.

그 가운데의 한 사람이 두 손으로 한 장의 양피지를 들고 낭랑히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는 것은 바로 황태숙이 천하에 배포한 조서였다.

야율홍기가 황제의 위를 찬탈한 것이니 바로 거짓 황제인데 이제는 황태숙이 황제의 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잘못을 바로 잡은 것이라 했다. 그리고 요나라의 충성스러운 관병들이 즉시 귀순해 온다면 일률적으로 세 계급씩 올려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조서를 읽는 사람을 향해 어영에게 십여 명의 궁전수가 활을 쏘았다.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 쪽으로 화살이 날아갔다. 그러자 그 사람의 옆에 있던 네 사람이 방패를 들어서 보호해 주었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다섯 필의 말이 모조리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다섯 사람은 방패 뒤에 숨어서 끝까지 황태숙의 조서를 다 읽고는 몸을 돌려 물러갔다.

불원대왕은 부하 관병들이 그 거짓 조서를 들은 후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호통을 내질렀다.

나가서 욕을 해 주어라!

그러자 삼십 명의 관병이 앞으로 십여 장 나아갔다. 그들 중에서 스무 명의 관병들은 손으로 방패를 들어 나머지 열 명을 보호했다. 열 명은 바로 욕을 하는 매수(罵手)인데 목소리가 우렁찼고 또 언변이 좋았다.

첫 번째의 매수가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라를 배반한 간악한 역적놈들아! 죽어서도 뼈를 묻을 곳이 없을 것이다!

곧이어 두 번째의 매수가 욕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온갖 더러운 상소리를 있는 대로 퍼부어댔다.

소봉은 거란의 말을 얼마 알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 매수들의 언사를 대부분 알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야율홍기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퍽이나 가상하다는 빛을 띠우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매수들이 욕하는 것이 상당히 그럴싸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소봉은 적진을 바라보았다.

멀리 햇빛을 가리고 있는 황개대독(黃蓋大纛) 아래 두 사람이 준마를 타고 손에 말채찍을 들고 이 쪽을 가리키며 무어라고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전신에 황포(黃袍)를 걸치고 있었고 머리에 충천관(沖天冠)을 쓰고 있었으며 아랫턱에 회백색의 기다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몸에 황금갑주(黃金甲胄)를 걸치고 있었는데 키가 크고 약간 여윈 듯한 체구인데도 늠름한 기상이 엿보였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모양으로 보건데 두 사람이 바로 황태숙과 초왕, 두 부자 같구나."

별안간 열 명의 매수들이 나직이 상의하더니 일제히 목청을 돋구어 황태숙과 초왕의 남모르는 일들을 들추어 내 욕을 했다.

그 황태숙은 그래도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았는지 별로 욕할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따라서 십여 명이 욕을 하는 주요 상대는 바로 초왕이었다.

십여 명의 매수들은 초왕이 부친의 첩들을 강간하고 부친의 권세를 믿고 못된 짓만 일삼았다고 매도했다. 이와 같은 말을 한 목적은 물론 그들 부자를 이간질하려는 데 있었다.

십여 명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고 욕하는 소리는 합창을 하듯 한 마디를 동시에 외쳤으므로 그 소리는 수 마장 밖까지 들렸으며 수십 만이나 되는 군사들이 대부분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초왕은 채찍을 들어 흔들었다. 반군에선 일제히 큰소리를 내질렀다. 모두가 와와 하니 함부로 부르짖는 소리였다. 그렇게 되자 대뜸 십여 명의 욕하는 소리를 삼켜 버렸다.

한참 동안 소란을 피운 뒤에 적군이 갑자기 양 갈래로 나뉘어지면서 수십 대의 수레를 밀어 내더니 어영군 앞까지 수레를 밀고 와서 세웠다. 그리고 수레를 따라온 군사들이 그 수레 안에서 수십 명의 여자들을 꺼냈다.

어떤 사람은 백발의 노파였고 어떤 사람은 묘령의 소녀였다. 그런데 옷차림은 모두 화려하고 고아했다.

이 여자들이 수레에서 나오자 쌍방의 욕지거리는 대뜸 멎게 되었다.

야율홍기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머니, 어머니, 이 아들이 반도를 잡아 갈기갈기 찢어 죽여 어르신의 화풀이를 해드리겠습니다!

그 백발의 노파는 바로 당금의 황태후이며 야율홍기의 어머니인 소태후(蕭太后)였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소황후와 비빈 및 공주들이었다.

황태숙과 초왕은 야율홍기가 멀리 사냥 나간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켜 초궁(楚宮)을 에워싸고 황태후 들을 모조리 체포한 것이다.

황태후는 낭랑히 외쳤다.

폐하는 이 늙은이와 처자를 생각하지 말고 힘써 역적들을 무찔러 죽이도록 하시오!

이때 수십 명의 군사들이 긴 칼을 뽑아 들더니 황태후와 비빈 등의 목에다 칼을 들이댔다.

나이 젊은 비빈들은 대뜸 놀람에 찬 절규를 토해냈다.

야율홍기는 크게 노하여 부르짖었다.

울부짖는 여인들을 모조리 쏘아 죽여라!

쉭쉭, 하는 소리가 잇따라 일었다. 십여 개의 화살이 날아갔다. 울부짖는 비빈들은 화살을 맞고 연이어 쓰러지고 말았다.

황후는 부르짖었다.

폐하께서는 잘 쏘셨습니다! 잘 쏘셨습니다! 조상의 기업을 결코 간악한 도적의 손에 멸망케 할 수는 없습니다!

초왕은 황태후와 황후가 그토록 굳굳한 것을 보고 이와 같은 행동은 오히려 야율홍기를 협박하기보다는 자기 쪽 군사의 심리를 동요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 여인들을 수레에 태워 물러나도록 해라.

군사들은 황태후와 황후 일행을 다시 수레 안으로 밀어 넣고 수레를 진의 뒤쪽으로 끌고 갔다.

초왕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적군의 가족들을 진 앞으로 데려오너라!

그러자 삑삑 하는 대나무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매우 처량했다.

군사와 말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쇠사슬 부딪히는 소리가 챙그랑거리는 가운데 남녀노소가 진 뒤에서 끌려나왔다. 삽시간에 양쪽 진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원래 이 사람들은 어영군의 가족들이었다. 어영군은 요나라 황제의 친위군으로서 야율홍기가 특별히 우대하여 그들 가족을 서울에서 살도록 해 주었다. 친위군으로 하여금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함으로써 유사시에 황제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도록 하자는 의도에서였고, 이 정예부대가 출정할 때 추호라도 역심을 품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초왕 휘하의 한 장군이 말을 달려 진에서 나오더니 소리 높여 외쳤다.

어영군의 장병들은 듣거라! 너희들의 가족들은 모조리 감금되었다! 투항을 하는 사람은 가족과 다시 해후를 하게 될 것이고 세 계급이 높아지게 될 뿐만 아니라 상금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투항을 하지 않는다면 새로 등극한 황제께서 모든 가족을 사정없이 죽이라는 성지를 내리셨다.

거란인들은 언제나 잔인하여 살인하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사정없이 죽인다는 말은 결코 위협의 말이 아니었고 정말 모조리 살해할 것이었다.

어영군 가운데 어떤 장병들은 자기의 친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얘야!

부군!

여보!

양쪽 진영에서는 서로 부르는 소리가 드높이 울려 퍼졌다.

반군 중에서 북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천 명의 도부수(刀斧手)들이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그들은 손에 큰 칼을 번뜩이고 있었다. 북 소리가 멎자 이천 자루의 커다란 칼들이 들어 올려지게 되었고 그 칼은 바로 어영군 가족들의 머리를 겨냥하게 되었다.

그 장군은 부르짖었다.

새로이 등극하신 황제께 투항을 한다면 크게 상을 내리겠지만 만약 투항하지 않을 때는 가족들은 일제히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는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북 소리가 다시 일었다.

어영군의 장병들은 그의 왼손이 다시 한 번 휘둘러지게 된다면 북 소리가 멈추고 이천 자루의 시퍼런 칼날이 아래로 내려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친위군으로 말하면 야율홍기에 대해 지극히 충성심이 강했다. 황태숙과 초왕이 벼슬을 올려 주고 큰 상을 내리겠다는 말로 유인을 하더라도 좀처럼 넘어가지 않을 만큼 충성심이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으로 자기의 부모와 자녀들이 목을 잘리게 되는 광경을 보게 되자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 소리는 둥둥둥, 하며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영의 친위군 장병의 마음도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별안간 어영군 가운데 한 병졸이 부르짖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죽이지 마시오!

그는 기다란 창을 내던지고 적진 앞의 한 노파에게로 달려갔다.

곧 이어 쉭, 하며 화살이 어영군 가운데서 쏘아졌으며 그 화살은 그 사람의 등을 꿰뚫고 말았다. 그래도 그 사람은 일시에 죽지 않고 여전히 자기 어머니 쪽으로 기어갔다.

이때 아버지, 어머지, 얘들아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왔다. 그리고 어영군에서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나갔다.

야율홍기의 심복 장군들이 검을 뽑아 마구 내려쳤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수백 명들이 나가자 곧이어 수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달려나가게 되었고 수천 명이 달려나간 후에 와와, 하는 커다란 소란이 일었으며 십오 만의 친위군 가운데 육칠 만이나 되는 군사들이 반군 쪽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야율홍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알았던 것이다. 친위군과 가족들이 서로 얼싸안고 울며 불며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반군과 어영군은 서로 공격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야율홍기는 이 기회를 빌어 즉시 명령을 내렸다.

서북쪽에 있는 창망산(蒼茫山) 쪽으로 퇴군하라!

중군장은 즉시 살그머니 명령을 내렸다. 나머지의 항복하지 않은 팔만 명의 군사들은 후군이 전군이 되어 서북쪽으로 달려갔다.

초왕은 급히 기병을 시켜 쫓아가려고 했으나 전장에는 남녀노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터라 기병들은 말을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야율홍기는 어영의 친위군들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창망산 아래로 후퇴 할 수 있었다.

팔만 명이나 되는 친위군들이 창망산 아래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는 황혼 무렵이었다.

군사들은 배도 고팠고 지쳐 있었다. 산미탈에 재빨리 영채를 세웠다. 그들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기 좋도록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영채를 세우고 난 후 밥을 짓기도 전에 초왕은 이미 정예부대를 이끌고 산 아래에 도달했으며 즉시 산 언덕을 향해 돌진해 왔다.

어영군은 비오듯 활을 쏘아대며 돌을 던져 반군들을 격퇴했다.

초왕은 위로 공격하는 것이 불리하자 즉시 군사를 거두어 산 아래에 영채를 세웠다. 이날 밤 야율홍기는 산 벼랑가에서 남쪽을 굽어 보았다. 반군의 진영에 켜놓은 불이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반짝이고 있었다. 멀리서 세 마리의 불로 이루어진 용(龍)이 구불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는데 바로 반군의 후속부대가 포위 공격에 참여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야율홍기는 그만 침울해져 장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때 북원추밀사가 앞으로 나와 품했다.

소신이 거느리고 있는 일만 오천의 병마가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가 반역자 들에게 투항하고 말았습니다. 소신이 군사를 잘못 다스렸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야율홍기는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그대를 탓할 수 업소. 물러가 쉬도록 하시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소봉이 넋을 잃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날이 밝게 된다면 반군들이 대거 공격을 해 올 것이네. 우리들은 아마 모조리 포로가 되고 말 것이야. 나는 한 나라의 군주이니 반도들에게 욕을 당할 수 없네. 마땅히 자결하여 사직에 보답하겠네. 형제는 밤을 도와 포위망을 뚫고 달려가도록 하게. 그대의 무예가 고강하니 반군들은 그대를 막지 못할 것일세.

거기까지 말한 그는 처연한 낯빛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본래 자네가 부귀공명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려고 했네. 그런데 이 형이 내 몸 하나 보존할 수 없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오리려 자네에게 누를 끼치게 됐군!

소봉은 말했다.

형님, 사내 대장부라면 굽힐 줄도 알고 뻗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싸움에서 불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형님을 보호하여 이 자리를 피했다가 다시 옛날 부하들을 소집하여 서서히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야율홍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늙으신 어머니와 처자조차 보호하지 못하는데 무슨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거란 사람들에게는 이기는 자가 영웅이요 지는 자는 반역자일세. 나는 그야말로 일패도지 하였는데 어찌 다시 세력을 떨칠 수 있겠는가? 자네 혼자 떠나도록 하게.

소봉은 분명히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형님을 모시고 내일 반적들과 결사일전을 벌이도록 하겠습니다. 형님과 저는 의리로 맺은 사이입니다. 형님이 황제라도 좋고 일반 백성이라도 좋습니다.

이 소모는 언제나 의형으로 모시겠습니다. 따라서 형님에게 어려움이 있는 이상 형제인 제가 마땅히 생사를 같이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홀로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야율홍기는 뜨거운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두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형제, 정말 고마우이.

소봉은 자기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자는 천막 한 쪽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물었다.

형부, 저를 탓하지 않으세요?

소봉은 의아하여 물었다.

무엇 때문에 너를 탓한다는 것이냐?

아자는 말했다.

모두 제 잘못이에요. 만약 제가 반드시 대초원으로 놀러 오자고 하지 않았다면 형부를 이 곳에 갇히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니에요? 형부, 우리들은 이곳에서 죽게 되겠죠? 그렇죠?

천막 밖의 붉은 횃불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붉은 빛이 비치게 되어 더욱 그녀를 가냘프게 보이게 했다.

소봉은 연민의 정을 느끼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탓하겠느냐? 내가 만약 너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런 곳으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자는 빙그레 웃었다.

만약 제가 형부에게 독침을 쏘지 않았더라면 형부는 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을 것이 아니에요?

소봉은 큰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자는 중상을 입은 이후 머리카락의 태반이 빠지게 되었고 남은 머리카락도 누렇고 윤기가 없었다.

소봉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나이도 어린데 하필이면 나를 따라다니다가 이런 고생을 겪는구나.

아자는 말했다.

형부, 저는 본래 언니가 어째서 형부를 그토록 좋아했는지 몰랐어요. 그러나 얼마 후에는 알게 됐어요.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의 언니는 그야말로 나에게 무한히 깊은 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너와 같은 어린 소녀가 무엇을 안단 말이냐? 아주가 무엇 때문에 나같이 거친 남자를 좋아 하게 되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는 일인데 네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이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형부, 그 날 제가 왜 형부에게 독침을 쏘았는지 짐작해 봤어요? 저는 형부를 쏴서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어요. 저는 다만 형부를 꼼짝 못 하게 하고서 형부의 시중을 제가 들려고 했던 거예요.

소봉은 의아하여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자는 미소지었다.

형부가 꼼짝하지 못하면 영원히 저의 곁을 떠날 수 없을 것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으면 형부가 속으로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을 때 언제든지 저를 떨쳐 버리고 아랑곳하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소봉은 그녀가 하는 말이 어린애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가 함부로 하는 말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내일은 모두 죽게 되니 그녀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해주어야겠구나."

그는 말했다.

넌 정말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네가 정말 나와 함께 있기를 바랬다면 나에게 말을 했으면 될 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결코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자는 눈빛이 반짝였다. 기쁨을 금치 못하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얼른 말했다.

형부, 저의 상처가 나은 후에도 나는 계속 형부를 따라다닐 거예요. 그리고 영원히 성숙파의 사부에게 돌아가지 않겠어요. 형부는 저를 버리고 모른 척하면 안 돼요.

소봉은 그녀가 성숙파에 저지른 잘못이 실로 적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감히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라 짐작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성숙파의 대사저이며 장래의 우두머리가 아니냐. 네가 돌아가지 않게 된다면 성숙파는 머리가 없게 되는 셈인데 그걸 어떻게 하면 좋지?

아자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들이 난장판이 되도록 내버려 두는 거예요. 그까짓 것 상관해서 무엇해요?

소봉은 담요를 끌어 그녀의 목 부근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고 다른 담요자락을 들고 천막의 다른 한 쪽에 웅크리고 누웠다.

천막 밖의 불빛은 때로는 밝았다가 때로는 어두웠다가 하며 마구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나직이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영군의 장병들이 가족들을 생각하고, 내일 아침이면 싸움터에서 목숨을 건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모두들 황상께 충성을 다해 배반을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소봉은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실리 대장에게 마필을 준비 시키고 아자를 돌보도록 했다. 그 자신은 옷차림을 단단히 하고 한 근의 양고기와 세 근의 술을 마셨다. 그리고 산 밑으로 다가갔다. 이때 사방은 아직 어스름했다.

동녘 하늘이 천천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어영군 가운데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쩡쩡, 쨍쨍, 하는 무기와 갑옷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영채에서 일대의 병마들이 달려나가 각처의 중요한 곳을 지켰다.

소봉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동쪽과 남쪽, 그리고 동남쪽 삼면에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몰려 있었는데 모두가 반군이었다. 허연 안개가 자욱이 대지를 덮고 있어서 적군의 진 뒤쪽은 살필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해가 초원 위로 슬쩍 얼굴을 드러냈다. 금빛 광채가 한 줄기 뻗쳐나와 하얀 안개를 비추자 짙은 안개가 점점 사그러들고 안개 속에 싸여 있던 군마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별안간 북 소리가 크게 이는 가운데 적진에서 이대(二隊)의 황색 깃발을 앞세운 군사가 달려나왔다. 곧이어 황태숙과 초왕이 말을 타고 산 아래로 달려오더니 말채찍을 들고 산 위를 가리키며 무엇인가 상의했다.

야율홍기는 시위를 거느리고 산 위에 서 있었는데 그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자 노기가 치미는 듯 호위 무사의 손에서 활을 받아 들고 시위에 활을 메겨 초왕을 향해 한 대의 화살을 쏘았다. 산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가까운 것 같았으나 기실 상당히 먼 거리였다.

그 화살은 중도에서 힘이 다하여 떨어지고 말았다.

초왕은 껄껄 웃으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홍기, 너는 우리 아버님의 자리를 찬탈하고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짜 임금 노릇을 했으니 이제는 자리를 양보해 줄 때도 됐다. 빨리 투항하라! 그러면 우리 아버님은 너의 한 목숨을 살려줄 것이다. 거기다가 인정과 의리를 베풀어 너를 황태질(皇太姪)로 봉하겠다. 어떠냐? 하하하하!

이 몇 마디의 말은 야율홍기가 야율중원을 황태숙으로 봉한 것을 인정과 의리를 베푼 척한 것이라고 비꼬아 욕을 한 것이었다.

야율홍기는 크게 노하여 욕을 했다.

이 몰염치한 반적아! 아직도 그곳에서 주둥이를 놀리고 있느냐?

북원추밀사가 부르짖었다.

주군이 욕됨을 당하면 신하도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상께서는 저희들에겐 태산과 같은 은혜를 베풀었으니 오늘 바로 제가 주군에게 보답을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삼천 명의 친위병을 거느리고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산 위에서 달려 내려갔다.

이 삼 천 명의 군사는 모두 거란의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죽을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한 사람이 열 명을 당해낼만한 용사를 착출했던 것이다.

크게 고함을 치고 돌격을 하게 되자 대뜸 적군을 한 마장 가량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초왕이 영기를 휘두르자 수 만의 군마가 그들을 에워싸고 칼과 창을 일제히 휘둘러댔다.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가운데 피와 살이 마구 튀었다. 삼천 명의 군사들은 싸우면 싸울수록 수가 적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모조리 죽어 충절을 지켰다.

북원추밀사는 수 명을 힘 써 죽이고는 자결했다.

야율홍기와 장군, 대신들, 소봉 등은 산봉우리 위에서 이와 같은 광경을 지켜보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북원추밀사의 충의에 감동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다.

초왕은 다시 산 밑으로 달려오더니 웃으며 외쳤다.

홍기! 도대체 항복하겠느냐, 못 하겠느냐! 그까짓 군사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이냐! 너의 부하들로 말하면 모두가 대요나라의 용사들인데 왜 그들로 하여금 너와 함께 죽도록 하느냐? 사내 대장부라면 시원하게 항복을 하든 결판을 내든해야 할 것이 아니냐! 만약 스스로 운이 다했다는 것을 안다면 차라리 자결하여 천하에 사죄하고 병사들을 많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야율홍기는 길게 탄식했다. 그는 눈물을 머금으며 칼을 쳐들고 말했다.

이 금수강산을 너희 부자에게 양보해 주겠다. 너의 말이 맞다. 우리들은 숙질 사이고 형제지간이다. 골육끼리 서로 죽고 죽이고 있는 것이다. 쓸데없이 거란용사의 목숨을 많이 해쳐 무엇하겠느냐?

그는 칼을 들고 자기의 목을 찌르려고 했다.

소봉은 팔을 뻗쳐 칼을 빼앗았다.

형님, 영웅호걸이라면 전장에서 죽어야 합니다. 어찌 자결하려 하십니까?

야율홍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 이 많은 장병들은 나를 따른지 오래됐네. 그들이 죽는 것을 나는 차마 볼 수가 없네.

이때 초왕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홍기! 아직도 자결하지 않고 언제까지 기다리겠느냐?

그는 손에 든 채찍으로 이 쪽을 가르키며 기고만장하였다.

소봉은 그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보자 마음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 나직이 말했다.

형님은 그와 아무렇게나 말을 나누도록 하십시오. 내 살그머니 다가가서 그에게 한 대의 화살을 먹이도록 하겟습니다.

야율홍기는 그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기뻐서 말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일세. 만약 먼저 그를 쏴 죽인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네.

그는 목청을 돋구어 부르짖었다.

초왕, 내 너희들 부자를 박대하지 않았다. 너의 부친이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못 될 것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의 이 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살상하여 우리 요나라의 원기를 크게 상하도록 하느냐?

이때 소봉은 한 자루의 경궁(硬弓)과 열 대의 낭아장전(狼牙長箭)을 들고 한필의 준마를 끌고 천천히 산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몸을 낮추어 말의 배 밑에 찰싹 붙어 몸을 숨긴 채 두 발을 말의 등에 걸고 발 끝으로 살짝 말 등을 찼다.

그러자 그 말은 질풍같이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산 아래의 반군들은 말 한 필이 사람을 태우지 않은 채 달려 내려오고 말 등에 사람이 보이지 않자 그저 군마의 고삐가 풀어져 도망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 누구도 유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반군 군사 가운데 한 사람이 말의 배 밑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대뜸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소봉은 발 끝으로 말을 차서 말로 하여금 초왕이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초왕과 약 이백 보 간격을 두게 되었을 때 말의 배 아래에서 경궁의 시위를 당겨 휙 하니 한 대의 화살을 초왕에게 쏘았다.

초왕의 옆에 있던 시위들이 방패를 들어 활을 막았다. 소봉은 말을 달리며 잇따라 화살을 쏴댔다. 한 대의 화살이 그 시위를 쏘아 넘어뜨리게 되었고 두 번째의 화살은 곧장 초왕의 가슴팍으로 파고 들었다.

초왕은 눈이 빨랐고 손도 민첩했다. 말채찍을 휘둘러 날아드는 화살을 후려쳤다.

이와 같이 채찍으로 화살을 후려치는 재주는 초왕이 자랑하는 재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화살을 쏜 사람이 비단 팔힘이 대단히 셀 뿐만 아니라 화살에도 내력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말채찍은 화살을 후려칠 수 있었으나 다만 그 화살의 겨냥이 약간 빗나가게 만들었을 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왼쪽 어깨에 꽂히고 말았다. 초왕은 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말안장 위에 엎어졌다. 소봉의 화살은 다시 허공을 가르고 날았다. 이번에는 거리가 더욱 가까워 한 대의 화살은 초왕의 왼쪽 옆구리에 사정없이 깊숙이 박혀 몸속으로 파고들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초왕은 몸을 흔들하더니 말 등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초봉은 초왕을 쏴 죽이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황태숙마저 쏴 죽이자."

초왕이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자 반군의 군사들은 아우성치며 수 만 대의 화살을 쏘아댔다.

소봉이 몸을 숨기고 있는 말은 삽시간에 이백 개의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처럼 되어 나뒹굴었다.

소봉은 말이 쓰러지기 전에 땅바닥에 몸을 데굴데굴 굴려 한 명의 군관이 타고 있는 말의 배 아래로 날아들었다. 그는 이 말의 배 아래에서 저 말의 배 아래로 후다닥 뛰어들었다가 다시 몸을 데구르 굴려 다른 한 필의 말 아래 쪽으로 기어들곤 했다.

관병들은 화살을 쏠 수 없게 되자 다투어 긴 창으로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소봉은 동쪽으로 기어들어가는가 싶으면 서쪽으로 몸을 굴리는 등 말 아래에서 오락가락했다.

이렇게 되자 적의 군관들은 그만 난장판을 일으키게 되었고 수천의 인마가 서로 밀고 당기며 짓밟는 꼴이 되었다.

소봉이 펼친 것은 중원 무림에서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지당공부(地堂功夫)였다.

지당권(地堂券), 지당도(地堂刀) 또는 지당검(地堂劍) 등은 모두가 땅바닥에서 몸을 뒹굴며 이리저리 몸을 날리면서 기회를 보아 적의 하반신을 공격하는 무공이었다.

싸움터에서 이를 사용하자 눈이 밝고 손이 빨라 수천 마리의 말발굽 아래에서도 짓밟히지 않았다.

그는 황태숙의 위치를 짐작하고 데굴데굴 몸을 굴려 갔다. 그리고 휙, 휙, 하니 세 대의 화살을 날려 황태숙을 쏘았다.

황태숙의 시위들은 먼저 초왕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기에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삼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각기 방패를 들고 겹겹이 황태숙의 몸을 가로막고 섰다. 쨍, 쨍, 쨍,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세 대의 화살이 모두 방패에 맞고 튕겨나왔다.

소봉이 가지고 온 열 대의 화살 가운데 이미 일곱 대의 화살을 쏴 버린 셈이었고 이제는 세 대만 남았다. 그리고 적은 삼십여 개나 되는 방패로 서로 엄호하고 있다.

이때 소봉은 이미 적진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다. 등뒤에는 수 천의 군사가 창을 들고 쫓아 오고 있었으며 앞쪽에는 천군만마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터라 소봉은 실로 막다른 골목에 빠졌다고 할 수 있었다.

과거 그가 중원의 군웅들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을 때 상대방은 불과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되지 않았던가? 다행히 누군가가 구해 주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으나 오늘은 수십 만이나 되는 군사들의 포위 속에 빠져 있으니 어떻게 살아남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별안간 그는 한소리 호통을 내지르며 몸을 훌쩍 날렸다. 휙, 하니 삼십여 명이 들고 있는 방패의 위로 껑충 날아오르며 황태숙의 말 앞에 내려섰다. 황태숙은 깜짝 놀라 말채찍을 들어 그의 얼굴을 내려쳤다.

소봉은 비스듬히 몸을 날려 황태숙의 말안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그를 움켜 잡아 높이 쳐들고 부르짖었다.

당신은 죽고 싶소, 아니면 살고 싶소? 빨리 군사들에게 무기를 내려 놓으라고 명하시오!

황태숙은 깜짝 놀랐다.

그가 말하는 소리를 제대로 알아 듣지도 못하고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수 만이나 되는 군사들이 소봉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그러나 황태숙이 그의 손에 잡혀 있으므로 함부로 쏘지는 못했다.

소봉은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크게 부르짖었다.

황태숙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모든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황제께서는 마음이 너그러워 모두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기로 하셨다!

이 몇 마디의 말은 십여 만이나 되는 적군들이 떠드는 소리를 완전히 압도하고 수 마장 밖까지 울려 퍼졌다.

소봉은 개방의 무리들이 자기를 배반했던 경험이 있었던 터라 배반자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배반자들은 모두 죄를 용서받고 싶어한다. 옛날의 잘못을 들추지 않겠다고 보증을 하면 반군들은 자연 투지를 상실하게 되는 법이다.

이때 반군의 세력은 컸고 야율홍기의 곁에는 불과 칠팔 만의 인마밖에 없어 수의 많고 적음에 현격한 차이가 나서 중과부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소봉은 이때의 형세가 지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반군 가운데서 그 누가 나서서 승복할 수 없다고 부르짖기만 하면 수십만 명의 반군들은 즉시 벌떼같이 일어나 어영군을 공격해 갈 것이고 자기 자신 역시 살아 날 수 없었다.

소봉은 다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황제께서는 성지를 내리셨다! 반군들 가운데 관직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모조리 죄가 없는 것으로 덮어 두겠다고 하셨으며 지난 죄는 모조리 용서해 준다고 하셨다! 군관들과 사병들은 각자 원위치로 돌아가 빨리 무기를 내려 놓도록 해라!

일순 주위가 조용해졌다. 갑자기 챙그랑, 챙그랑, 하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몇 사람이 손에 들고 있던 장창을 내던진 것이다. 이 무기를 내던지는 소리에 서로 감염된 듯 삽시간에 챙그랑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그들 가운데 반수 이상의 군사들이 무기를 버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도 망설이며 작정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소봉은 왼손으로 황태숙의 몸을 높이 쳐들고 말을 몰아 천천히 산 위로 올라갔다.

반군들 가운데 그 누구도 감히 막지 못하고 그의 말이 이르면 스스로 물러나 길을 터 주었다.

소봉은 말을 타고 산허리에 이르렀다. 어영군 가운데 한 떼의 병마가 아래로 내려와 영접을 했으며 산봉우리 뒤에서는 즉시 북 소리와 주악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봉은 말했다.

황태숙, 빨리 명을 내리시오. 그리고 부하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하시오.

그러면 그대의 목숨을 용서하리다.

황태숙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가 나의 목숨을 보증할 수 있겠소?

소봉은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많은 반군들의 손에는 아직도 활과 창이 들려있었다. 군심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없었다.

소봉은 생각했다.

"지금은 군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황태숙 한 사람의 생사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저 사람을 보내 은밀히 감시를 한다면 앞으로는 나쁜 짓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그대가 죄를 씻고 공을 세우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요. 폐하께서도 모두 그대의 아들 잘못인 줄로 알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그대의 목숨을 반드시 살려 주실 것이오.

황태숙은 원래 황제 자리를 빼앗을 생각이 없었다. 모두 그의 아들 초왕이 야심이 많아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 그는 혼자의 몸이 되자 그저 죽음에서 면할 수 있기만을 바랬기 때문에 순순히 응락했다.

좋소, 내 그대의 말대로 따르리다.

소봉은 그로 하여금 편안히 말안장 위에 앉도록 한 후 낭랑히 외쳤다.

뭇 삼군은 들으시오! 황태숙께서 분부할 말씀이 계시다오!

황태숙은 큰소리로 말했다.

초왕이 반란의 죄를 일으켰으나 이제 벌을 받아 처형되었다. 황제께서도 넓으신 아량으로 모두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빨리 무기를 놓고 황상에게 사죄를 드리도록 하라.

황태숙이 이렇게 되자 뭇 반군들에게는 우두머리가 없어진 셈이었다. 흉악하고 뻣뻣한 도배들이 없잖아 있었지만 감히 나서서 다시 반항하지 못했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든 반군들은 무기를 버렸다.

소봉은 황태숙을 압송하여 창망산 위로 올라왔다.

야율홍기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소봉의 곁으로 달려오더니 소봉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형제, 형의 강산을 이후로는 자네와 함께 나누도록 하겠네.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만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황태숙은 땅바닥에 엎드려 말하였다.

난신(亂臣)이 폐하께 사죄드리오니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야율홍기는 마음이 무척 흐뭇해 소봉에게 물었다.

형제, 자네가 볼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소봉은 말했다.

반군은 사람이 많으니 지금으로서는 군심을 안정시켜야 할 때입니다. 폐하께서는 황태숙의 죽을 죄를 사면하셔서 모두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심이 좋을듯합니다.

야율홍기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 좋아. 그대의 말을 따르도록 하지. 그대로 하고말고!

그는 고개를 돌려 북원대왕에게 말했다.

그대가 성지를 내려 소봉을 초왕에게 봉하고 남원대왕의 벼슬을 내려 반군을 이끌고 상경(上京)으로 돌아가도록 하게.

소봉은 깜짝 놀랐다. 그가 초왕을 죽이고 황태숙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의형의 목숨을 구하려는 것이었지 결코 벼슬을 탐낸 것이 아니었다.

야율홍기가 그에게 그같은 높은 벼슬을 내리자 그로서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북원대왕은 소봉에게 공수의 예를 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초왕의 작위는 이제껏 국성(國姓) 이외의 사람에게 봉해진 적이 없습니다. 소 대왕께서는 빨리 황상에게 고마움을 표하십시오.

소봉은 야율홍기에게 말했다.

형님, 오늘의 일은 모두 형님에게 크나큰 복이 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입니다. 거기다가 관병들이 형님에게 귀순할 뜻이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 형제는 그저 조금 힘을 쓴 것에 지나지 않으며 공로를 세웠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형제는 벼슬에 관심이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명령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야율홍기는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손을 뻗쳐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초왕에 봉하는 것과 남원대왕이라는 관위는 우리 요나라에서는 가장 높은 작위일세.

형제가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신하로 승복하는 것을 마다한다면 이 형님으로서는 황제의 자리를 양보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구만.

소봉은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형님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지금은 어지러운 상태에 놓여있으니 모든 일을 반드시 명쾌하고 과감성 있게 처리해야지 조금도 망설여서는 안된다.

그렇게 된다면 어떤 화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신 소봉은 성지를 받들겠으며 폐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야율홍기는 웃으며 그를 두 손으로 부축해 일으켰다.

소봉은 다시 말하였다.

신은 감히 성지를 어길 수 없어서 관직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초야의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조정의 법도를 모르오니 어떤 잘못이 있더라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율홍기는 손을 뻗쳐 그의 어깨를 몇 번 툭툭 치며 웃었다.

걱정 말게.

그는 고개를 돌려 좌장군, 야율막가(耶律幕歌)에게 말했다.

야율막가, 나는 그대를 남원추밀사로 봉한다. 소 대왕을 보좌하여 군군(軍國)의 중대사를 처리하도록 하라.

야율막가는 크게 기뻐하며 재빨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다시 소봉에게 절하며 말했다.

대왕님께 인사드립니다.

야율홍기는 말했다.

막가, 그대는 소 대왕의 영을 받들어 반군을 이끌고 상경으로 돌아가도록 하게. 우리는 먼저 황태후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네.

그는 즉시 산봉우리 위에서는 북을 치고 주악을 울렸다.

야율홍기 일행은 산 아래로 내려갔다. 반군의 군사를 이끄는 장군들이 이미 황태후와 황후 등을 수레에서 모셔 내어 공손하게 장막 안에 모셔 놓고 있었다.

야율홍기는 장막 안으로 들어가 모자는 모자끼리 부자는 부자끼리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야말로 죽음에서 목숨을 건진 셈이라 꿈만 같았다.

모두들 소봉의 큰 공을 칭찬해마지 않았다.

야율막가는 앞장을 서서 소봉을 안내하여 남원에 속하는 부하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했다.

조금 전 소봉이 천군만마 가운데 홀로 뛰어든 행위는 그야말로 용감하기 이를데 없었다. 사실 남원에 속하는 관군들은 모두가 초왕의 옛날 부하였다. 그러나 소봉의 위세가 늠름하여 두려움을 느끼고 감히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왕은 평소 성질이 못돼 먹어서 부하들을 학대했다. 그리고 반군들은 죄를 용서받아 감지덕지하고 있었다.

소봉이 그들 앞에 나서자 반군들은 하나같이 그를 우러러 보았으며 그의 호령에 귀를 기울였다.

소봉은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는 각자가 역모에 가담한 죄를 사면하셨소. 이후 모두들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다른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시오.

한 명의 수염이 허연 장군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대왕님께 아룁니다. 황태숙과 초왕이 저희들의 가족을 억류하고 저희들에게 가담하도록 협박하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들의 고충을 이해해 주십시오.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과거의 일은 모두 덮어 드리겠소.

그는 야율막가에게 말했다.

뭇 군사들에게 바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고 배불리 먹인 후 영채를 정돈하여 상경으로 돌아가기로 합시다.

즉시 남원에 속하는 부하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나서서 관직의 고하에 따라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소봉은 벼슬을 한 적이 없었으나 오래 전부터 개방의 방주로서 군호들을 통솔해 왔던 터라 자연 위엄이 있었다. 개방의 호걸과 거란의 장병들을 거느리는데는 큰 차이가 없었다.

소봉이 대군을 거느리고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황태후와 황후가 사자를 보내 군중의 소봉에게 포대(袍帶)와 금은을 하사했다. 소봉이 사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을 때 실리가 아자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몸에 비단 옷을 걸치고 있었고 백마를 타고 있었는데 황태후께서 내린 것이라고 했다.

소봉은 그녀의 조그만 몸이 넓다란 금포에 싸여 있고 조그만 얼굴이 옷깃에 반쯤 가려져 있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아자는 소봉이 초왕을 활로 쏴 죽이고 황태숙을 사로잡은 사실을 직접 보지 못했고 그저 실리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아자는 그를 보자마자 원망하는 투로 말했다.

형부, 그렇게 큰 공을 세웠는데 어찌 사전에 제게 한 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산 위에 서서 친히 형부가 달려 들어가고 달려나오는 것을 보며 얼마나 기분 좋아 했겠어요? 그런데 괜히 반 나절 동안 걱정만 했잖아요.

소봉은 말했다.

그것은 요행이 세운 공로에 불과하다. 내가 어떻게 사전에 너에게 알릴 수 있었겠니? 너는 보자마자 어린애같은 말만 하는구나.

아자는 말했다.

형부, 이리 가까이 다가와 보세요.

소봉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비단 옷과 조화를 이루어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우스꽝 스럽기도했고 귀엽기도하여 소봉은 껄껄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아자는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진지한 말을 하는데 형부는 왜 껄껄 웃어요?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이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꼭 장난감에게 옷을 입힌 것 같아 매우 재미있게 느껴지는구나.

아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형부는 언제나 나를 어린애로 취급하고 나를 조롱하기만 하더라.

소봉은 웃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자, 이번에 나는 우리 두 사람이 비명횡사 하는 줄 았았는데 뜻밖에도 죽음에서 묵숨을 건졌기 때문에 자연 기뻐하게 된 것이란다. 남원대왕과 초왕의 작위는 마음에 두지 않고 있으나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척 기쁘지 않을 수 없구나.

아자는 물었다.

형부도 죽음을 두려워하세요?

소봉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에 부딪히면 물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아자는 말했다.

나는 형부가 영웅호걸이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죽음이 두려웠더라면 수천 수만의 반군들을 상대로 어찌 홀로 달려 들어갈 수 있었어요?

소봉은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사지(死地)에서 생(生)을 찾는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내가 만약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죽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행동은 용감하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갇힌 짐승이 발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한 마리의 커다란 곰이나 호랑이를 에워싸면 도망을 치지 못 하게 된 곰이나 호랑이는 죽어라 하고 달려들며 마구 사람을 물어 뜯으려고 하지 않더냐?

아자는 방긋 웃고 말했다.

형부는 자신을 짐승에 비유하는군요?

이때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나가고 있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대초원에는 무수한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고 군병들의 대열은 무수히 늘어져 있어 끝을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자는 매우 기쁜 듯 말했다.

그날 형부가 저를 도와 성숙파 전인의 자리를 빼앗아 주었을 때 저는 성숙파의 이대 제자와 삼대 제자들이 수백이나 되지만 사부님 이외에 내가 가장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고 의기양양했어요. 그러나 형부가 천군만마를 거느리는 것을 보니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군요. 형부, 개방에서 형부를 방주에서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어요? 흥! 그까짓 조그만 개방쯤 대수로울게 뭐가 있어요? 형부는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개방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도록 하세요.

소봉은 연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철없는 말을 또 하는구나. 나는 거란 사람이다. 개방에서 나에게 방주 노릇을 못 하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개방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날 나의 친구들인데 내가 어찌 그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이냐?

아자는 말했다.

그들은 형부를 방에서 쫓아냈으니 형부에게 몹쓸 짓을 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 그들을 죽여야 해요. 형부, 설마하니 그들을 아직도 친구로 생각하세요?

소봉은 일시 대답하기 곤란하여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취현장에서 옛날 친구들과 의리를 끊겠다고 선포한 사실을 생각하니 자연 호기가 사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아자는 또 물었다.

만약 그들이 형부가 요나라의 남원대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후회를 하면서 형부에게 개방의 방주가 되어 주십사 부탁한다면 형부는 가겠어요, 가지 않겠어요?

소봉은 빙그레 웃었다.

천하에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 대송나라의 영웅호걸들은 거란 사람들을 온갖 못된 짓이나 일삼는 용서할 수 없는 간악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요나라에서 큰 벼슬을 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나를 미워할 것이다.

아자는 말했다.

쳇! 그들이 형부를 미워한다면 우리도 역시 그들을 미워해야 해요.

소봉은 눈을 들어 남쪽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듯 먼 곳에 산들이 중첩해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산봉우리들을 넘으면 바로 중원 땅이다."

그는 거란 사람이지만 어릴 적부터 중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대송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고 컸으며 요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적었다.

만약에 개방에서 그에게 직분도 없고 명분도 없는 제자가 되라고 한다 하더라도 요나라의 남원대왕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아자는 다시 말했다.

형부, 황상께서 형부를 남원대왕으로 봉한 것은 정말 총명하신 조처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후 요나라에서 다른 나라와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 형부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게 되면 당연히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수 있지 않겠어요? 형부가 그저 적진으로 달려 들어가 상대방의 대장을 때려 죽인다면 적군들은 대부분이 칼과 창을 버리고 꿇어 엎드려 항복을 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 싸우는 족족 승리 할 수 있겠네요?

소봉은 미소했다.

황태숙의 무사들은 모두 요나라의 관병들이고 언제나 황사의 호령을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초왕이 죽고 황태숙이 사로잡히자 투항을 한 것이다. 만약에 나라끼리 싸움을 하게 된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원수(元帥)를 죽이게 된다면 부원수가 있고 대장군을 죽이게 된다면 편장(偏將)이 있어서 하나같이 죽을 때까지 싸우려 한단다. 나 혼자 필마단창으로는 전혀 힘을 써 볼 도리가 없단다.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원래 그렇군요. 형부, 그런데 형부가 적진으로 달려 들어가 초왕을 쏴죽이고 황태숙을 사로잡은 것이 용감한 일이 아니라면 형부가 한평생 참으로 가장 용감했던 일은 무엇이에요? 저에게 들려 주세요.

소봉은 평소 자기의 자랑할 만한 무용담을 꺼내기 좋아하지 않았다. 옛날 개방에 있을 때 간악한 자를 추살하게 되었을 때 갖은 격전과 악투를 치루었을 때도 개방으로 돌아온 후에는 그저 담담하게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 누구를 죽였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의 위험했던 일과 어려웠던 경과를 다른 사람이 아무리 물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아자가 묻는 말을 듣고 그는 한평생 수없는 싸움을 치뤄 왔으며 적을 상대할 때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는지라 용감했던 일은 그야말로 다 열거할래야 다 열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람들과 싸우게 된 것은 대부분이 부득이해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용감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아자는 말했다.

하지만 저는 알아요. 형부가 가장 용감하게 싸웠던 일은 바로 취현장에서 벌어졌던 일전이었어요.

소봉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네가 어떻게 알지?

아자는 말했다.

그날 소경호 가에서 형부가 떠난 후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부하들은 형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형부의 무공에 대해서 모두들 탄복해 마지 않았죠. 그러나 형부가 홀로 취현장 영웅대회에 나타나서 군웅들을 상대로 싸운 것이 그저 한 소녀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란 말들을 하더군요. 물론 그 소녀는 저의 언니겠죠. 그들은 그때 아주가 아버지의 친딸인 것을 모르고 형부가 의부모나 무공을 가르쳐 준 은사에 대해서는 매우 악독하면서도 여인에게는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말했으며 망은부의(忘恩負義) 자닌호색(殘忍好色)하는 사람으로 인정머리가 없는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소봉은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허, 망은부의 잔인호색이라. 중원의 영웅호걸들이 소봉을 그와 같은 여덟 글자로 비난했구먼.

아자는 그를 위로했다.

형부는 화낼 필요 없어요. 저의 어머니는 오히려 형부를 크게 칭찬했어요. 어머니는 아버님 역시 망은부의 잔인호색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아버님은 연인에 대해서 호색부의(好色負義) 하고 딸에게는 잔인무정(殘忍無情)하다고 하시면서 아버님은 결코 형부를 따라갈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옆에서 손뼉을 치며 동의한다고 소리쳤죠.

소봉은 쓰디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군은 며칠 동안 나아가 이윽고 상경에 도달했다. 서울에 남아 지키던 백관과 백성들은 이미 소문을 듣고 멀리까지 마중을 나왔다.

소봉의 원수 깃발이 이르는 곳에 뭇 백성들은 일제히 향을 피워 무릎을 꿇고 칭송해 마지 않았다.

그가 일거에 이 커다란 변란을 평정함으로써 무수한 요나라 군사들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었다. 사실 이 서울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대부분 어영 친위군의 가족들이라 자연 소봉에게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소봉이 천천히 말을 몰고 지나가니 뭇 백성들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남원대왕께서 목숨을 살려 주신데 대하여 정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남원대왕이 장명백세(長命百歲)하시고 대부대귀(大富大貴)하시도록 보호해 주시옵소서.

소봉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백성들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고마워하는 정이 지성에서 나온 것이 확실했다.

"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그의 일거일동은 수천 수만 백성들의 화와 복에 연관이 되는구나. 내가 초왕을 사살할 때에는 그저 일시 용기를 부려 의형을 구하고 내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도 뜻밖에 뭇 백성들에게도 이토록 좋은 덕을 베풀게 되었구나. 아, 중원에 있을 때 나는 남에게 으뜸가는 간악한 자로 몰리게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북쪽의 이 요나라에 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뭇 백성들의 구세주가 되었으니 시비와 선악은 실로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로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곳은 나의 부로의 나라이다. 과거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은 반드시 이 큰길을 따라 오가셨으리라. 아! 내가 어머님과 아버님의 모습을 모르니 그 분들이 과거 어떻게 이 거리를 나란히 지나가셨는지 알 도리가 없구나!"

상경은 요나라의 서울이었다. 이때 요나라는 천하에서 제일 큰 대국(大國)이었다.

대송나라보다도 훨씬 강했다. 그러나 거란 사람들은 유목으로 생계를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따라서 상경성 안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집이나 점포는 초라하고 보잘것이 없는 것으로 중원과 비교해 보면 훨씬 뒤떨어졌다.

남원에 속하는 관리나 장수들은 소봉을 초왕부에 맞아들였다. 이 저택은 매우 넓었으며 집안의 장식은 휘황찬란했다.

소봉은 한평생 가난하게 살았을 뿐 이와 같이 호화스러운 저택에서 살아 본적이 없었다. 들어가 한 바퀴 돌아보고 매우 거북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군영(軍營)에 두 개의 천막을 세우도록 했다. 그는 아자와 각기 한 개의 천막에서 생활했다.

사흘째 되는 날 야율홍기와 황태후, 황후, 비빈, 공주 등이 상경으로 되돌아왔다.

소봉은 백관을 거느리고 어가를 맞았다. 조정에서는 며칠 동안 매우 바빴다.

먼저 난을 평정한데 대해서 축하를 하고 논공행상을 했으며 북원추밀사 등은 죽은 관병들의 가족을 위로했다. 황태숙은 스스로 염치없음을 느껴서인지 도중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야율홍기는 약속을 지켜 역모에 가담한 관병들의 죄를 일체 따지지 않았으며, 그저 초왕의 부하로서 반역을 발의한 스무 명 남짓한 관리와 장군들을 추살했을 뿐이었다.

황구에 크게 연회석을 베풀어 애쓴 장수와 사졸들을 포상했는데 커다란 연회는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소봉은 물론 이 연회석상에서 으뜸가는 영웅이었다. 야율홍기, 황태후, 황후, 비빈들, 공주들은 그에게 큰 상을 내렸고 문무백관들은 그에게 큰 선물을 했다. 그야말로 소봉은 선물을 산더미처럼 받게 되었다.

포상이 끝나자 소봉은 남원으로 들어가 일을 보살피게 되었다.

요나라에는 수십 개의 부족이 있었는데 그 족장들이 일일이 찾아와 인사를 드렸다.

그 부족들의 이름은 오외부(烏 部), 백덕부(伯德部), 북극부(北剋部), 남극부(南剋部), 실위부(室韋部), 매고실부(梅古悉部), 오국부(五國部), 오고랍부(烏古拉部)들 등으로 일시에 기억할래야 기억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황제가 직접 관할하고 있는 대장피실군군관, 황후에게 소속되는 산군군관(珊軍軍官), 홍녕궁(弘寧宮), 장녕궁(長寧宮) 영흥궁(永興宮), 적경궁(積慶宮), 연창궁(延昌宮)등 각 궁을 지키는 군관들이 다투어 찾아와 인사를 올렸다.

요나라의 속국은 모두 오십 구 개국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토곡혼(吐谷渾), 돌궐(突厥), 당항(黨項), 사타(沙陀), 파사(波斯), 대식(大食), 회골(回骨), 토번(吐蕃), 고창(高昌), 우격(于 ), 돈황(敦煌)등등이었다.

각국에서 보내온 사신들 가운데 상경에서 머문 사람들은 소봉의 일을 알게 되었고 소봉이 군국의 대권을 쥐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달려와 진기한 보물이나 노리개 등을 선물하며 소봉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야말로 소봉은 매일같이 손님들을 만나야 했고 또한 부하들을 접견해야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금은진보였으며 귀로 듣는 것은 아첨하고 칭송하는 말이라 그는 크게 혐오감을 느꼈다.

이와 같이 한 달 남짓 바쁘게 돌아가게 되었을 때 야율홍기는 편전으로 그를 불러 말했다.

형제, 그대의 직분은 남원대왕이니 반드시 남경(南京)에 버티고 앉아 기회를 보아 중원 땅을 정벌해야 한다네. 이 형은 자네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천추만대에 걸치는 공을 세우기 위해 자네는 역시 일찌감치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하게.

소봉은 황상이 자기에게 군사를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라고 하자 깜짝 놀랐다.

폐하, 남쪽을 정벌하는 것은 큰일이라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소봉은 그저 필부에 지나지 않으며 군략(軍略)에 있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야율홍기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나라가 이번 새로이 변란을 겪게 되었기 때문에 군사들을 반드시 쉬도록 해야 하네. 대송나라는 지금 태후가 정권을 쥐고 있으며 사마광(司馬光)을 크게 등용하고 있기 때문에 조정의 정사가 밝아서 빈틈을 노릴 수 없는 형편일세. 따라서 지금 남정을 하자는 것이 아닐세. 형제는 남경에 가서 시시각각 남쪽 송나라를 쳐부술 일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 되는거야. 우리들은 그저 빈틈을 타서 움직이면 된다네. 남쪽 송나라에 어떤 내란이 일게 되면 그때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을 치는 것일세. 그러나 그들 내부가 잘 정돈되어 있을 때 우리 요나라에서 군사를 보내 공격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쓰는 힘은 크지만 거두어들이는 수확은 적게 되지.

소봉은 대답했다.

예, 바로 그렇습니다.

야율홍기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남쪽 송나라의 내정이 밝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백성들의 인심이 조정에 귀의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소봉은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폐하께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오.

야율홍기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자고로 모두가 같은 이치라네. 그것은 금은과 재물을 많이 써서 첩자를 매수하는 것이라네. 남쪽의 송나라 사람들은 재물에 욕심이 많고 비열하면서도 염치가 없는 자들이 무척 많다네. 자네는 남원추밀사에게 명하여 재물을 아끼지 말고 많은 사람들을 매수하라고 하게.

소봉은 대답하고 궁에서 나왔으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사귀게 된 사람은 모두가 영웅호걸들이었다. 물론 강호에서는 몰래 사람을 해치고 함정에 빠뜨리거나 매복을 하고 독을 쓰는 간계가 행해지는 것을 많이 보아온 터였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시원시원하게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짓을 했으면 했지, 금은으로 다른 사람을 매수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요나라 사람이지만 어릴 적부터 남쪽 송나라에서 자랐기 때문에 황제가 그에게 송나라를 집어삼키는 과업을 내리자 무척 못마땅했다.

"형님이 나를 남원대왕으로 봉한 것은 어쨌든 호의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내가 이때 사직을 한다면 그의 성의를 저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고 형제의 의를 상하게 된다.

내가 남경으로 가서 일 년이나 반 년 동안 남원대왕 노릇을 하다가 사직하면 되겠지.

만약 그때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관인을 남겨둔 채 사라져 버리면 그뿐이다."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아자를 데리고서 남경으로 갔다. 요나라 시대의 남경은 바로 오늘의 북경(北京)이었고 당시에는 연경(燕京)이라고 일컬었으며 또한 유도(幽都)라고 일컫기도 했는데 이것은 유주(幽州)의 도읍이란 말이었다. 후진(後晉) 석경당(石敬塘)이 스스로 황제라 일컬었을 때 요나라의 거족적인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석경당은 연운 십육 주(燕雲十六州)를 끊어주어 사의를 표한 바 있었다.

연운 십육 주라고 하면 유(幽), 계( ), 탁( ), 순(順), 단(檀), 영( ), 막(莫), 신(新), 규( ), 유(儒), 무(武), 위(萎), 운(雲), 응(應), 환( ), 삭(朔)들이었고 모두 다 기북(冀北)과 진북(晉北)의 요지였다. 그런데 연운 십육 주를 요나라에 잘라준 후에 후진, 후주, 송조 등 삼조(三朝)는 매년 연운 십육 주를 두고 요나라와 쟁탈전을 벌였으나 시종 수복할 수가 없었다.

연운 십육 주는 지리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에 요나라에서는 많은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매번 남쪽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이쳐 송나라를 골탕먹이곤 했다.

사실 평지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는지라 송나라는 험준한 곳을 차지하고 수비를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송나라와 요나라는 백여 년간 싸움을 벌였는데 송나라에서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이는 군사와 무기에 있어서 요나라보다 못 하다는 것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요나라에서 지리적으로 유리한 싸움터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봉은 성 안으로 들어오자 남경성의 거리가 넓고 시가가 번화하여 상경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 남쪽 송나라의 백성들이고 들리는 것은 모두 중원땅의 말이라 마치 중원땅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봉과 아자는 기뻤다. 이튿날 가벼운 수레를 타고 몇 사람의 시종을 거느리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남경성은 둘레가 삼십육 리나 되었으며 모두 여덟 개의 문이 있었다.

동쪽에는 안동문(安東門)과 영춘문(迎春門)이 있었고, 남쪽에는 개양문(開陽門)과 단봉문(丹鳳門)이 있었고, 서쪽에 현서문(顯西門)과 청진문(淸晉門)이 있었고, 북쪽에는 통천문(通天門)과 공진문(拱辰門)이 있었다. 북쪽 두 곳의 문을 통청과 공진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곳에서 신하들이 부복하여 북으로부터 온 황제의 성지를 받들기 때문이었다.

남원대왕의 왕부는 바로 성의 서남쪽에 위치했다.

소봉과 아자는 반 나절 동안 구경을 했는데 거리 저자와 주택지, 절과 도관, 관아 등이 사방에 서 있는 것을 볼 수는 있었지만 일시에 모조리 구경할 수는 없었다.

소봉의 벼슬은 남원대왕인지라 연운 십육 주를 그가 관할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경도(西京道)의 대동부(大同府)일대, 중경도(中京道) 대정부(大定府) 일대도 모두 그의 관할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야말로 위엄과 명망이 대단하여 조그만 천막에서는 살기가 불편했다. 따라서 부득이 왕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며칠 정사를 돌보자 골치가 아팠다. 그야말로 지극히 고달픈 일이라 생각되었다. 다행히 남원추밀사 야율막가는 똑똑하면서도 매우 일을 잘 할 뿐 아니라 정무(政務)에 익숙하여 모든 일 처리를 그에게 맡겨 버리고 말았다.

큰 벼슬을 하는 것도 역시 좋은 점이 있었다. 왕부에는 몸을 보호하는 약이 부지기수로 있었다. 따라서 아자는 그와 같은 약을 밥먹듯 할 수 있었다. 그와같이 보약을 쓰게 되자 그녀의 내상은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게 되었다. 초겨울에 이르러 그녀는 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연경성 안을 여러 번 구경하게 되었고 또 실리를 데리고 성 밖 십 리 안 쪽의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게 되었다.

어느 날 큰 눈이 내린 후 날이 맑게 개이자 아자는 몸에 초피(貂皮:담비가죽)로 만든 가죽 옷을 입고 소봉이 거처하고 있는 선교전(宣敎殿)에 와서 입을 열었다.

형부, 성 안에 있으니까 답답해 죽겠어요. 저와 함께 사냥을 가도록 해요.

소봉 역시 오랫동안 궁전에서 살다보니 답답하던 터라 그녀의 그와 같은 말을 듣자 무척 기뻤다. 즉시 부하들에게 말을 준비하여 사냥 준비를 하도록 일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대거 사냥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몇 명의 시종들을 데리고 나와 아자를 돌보도록 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백성들이 야단 법석을 떨게 될까봐 일반 군사들이 입는 양피포자(羊皮袍子)를 걸치고 한 자루의 활과 한 주머니의 화살을 가지고 준마를 탄 채 아자와 함께 청진문을 나서 서쪽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일행이 성에서 십여 리쯤 떠나왔을 때까지 겨우 몇 마리의 조그만 토끼를 잡을 수 있었을 뿐 큰 짐승들은 보이지 않았다.

소봉은 말했다.

우리 남쪽으로 가서 시험해 보도록 하자.

그는 말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다시 이십여 리를 나가게 되었을 때 한 마리의 노루가 쏜살같이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자는 손에서 화살을 받아들고 시위를 메기고 시윗줄을 잡아당기려고 했지만 팔에 힘이 없어서 당겨지지 않았다.

소봉이 왼손을 그녀의 등뒤에서 앞으로 뻗쳐 활대를 잡고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조그만 손을 잡아서 시윗줄을 당겼다가 놓았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쏘아졌으며 사슴이 곧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시종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소봉은 아자의 손을 놓고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이때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의아하여 물었다.

왜 그러지 내가 도와 짐승을 쏘는 것이 싫으냐?

아자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했다.

저는...... 저는..... 폐인이 되고 말았어요. 이까짓 가벼운 화살마저도..... 당길수가 없게 되었어요.

소봉은 위로했다.

너무 성급히 굴지 마라. 천천히 기운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나중에 가서도 정말 낫지 않는다면 나는 너에게 내공을 연마하는 방법을 전수해 주겠다. 그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아자는 눈물진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형부가 한 번 말한 이상 약속을 저버리지 말고 반드시 저에게 내공을 가르쳐 주셔야 해요?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반드시 가르쳐 주겠다.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남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졌다.

한떼의 인마가 눈길위로 달려왔다.

소봉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떼의 사람들은 모두 요나라의 관병들인데 깃발을 세우거나 들지 않았다.

뭇 관병들은 떠들썩하니 노래를 부르는 등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 뒤에는 많은 포로들이 묶여서 끌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싸움에 이기고 돌아오는 것 같았다.

소봉은 생각했다.

"요즈음은 그 누구와 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어디서 싸우다 온것일까?"

그는 그 일행의 관병들이 동쪽의 성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한 시종에게 말했다.

네가 가서 물어 보아라. 어디서 온 군사이고 무엇하러 왔는지 알아 보아라.

그 시종은 대답했다.

예.

시종은 곧 이어 말했다.

우리 형제들이 조그만 싸움을 벌인 후 돌아온 모양입니다.

그는 말을 몰아 관병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가까이 달려가더니 몇 마디의 말을 했다. 그러자 관병들은 남원대왕이 이곳에 있다는 마을 듣고 큰소리로 환호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고삐를 손에 잡고 재빠른 걸음으로 소봉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하더니 일제히 부르짖었다.

대왕 천세!

소봉은 손을 드어 답례하고 말했다.

인사는 그만두게.

그러고 보니 그 일대의 관병들은 약 팔백여 명이나 되었다. 말등에는 옷가지들과 기물들이 잔득 실려 있었다.

걸어오는 포로들도 칠팔백 명은 되었는데 대부분이 젊은 여자들이었고 몇 명의 젊은 남자들도 끼어 있었다. 입고 있는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모두 송나라 사람들이었다.

노략질을 나갔다 온 그 대장은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흑랍독대(黑拉篤隊)의 차례가 되어 노략질을 하게 되었는데 대왕의 덕택으로 괜찮은 수확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호통을 내질렀다.

가장 아름다운 젊은 여자들과 가장 좋은 금은재보를 모조리 꺼내라. 그리하여 대왕께서 선택하여 사용하시도록 하여라.

그러자 관병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예.

이십여 명이나 되는 소녀들을 소봉의 말 앞에 늘어세우고 많은 금은과 장식품 따위를 다투어 한 장의 담요 위에 쌓았다.

관병들은 소봉을 쳐다보았는데 그 눈에는 존경과 기대의 빛이 서려 있었다.

남원대왕에게 자기네들이 약탈해 온 여자나 금은을 바친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는 영광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작년, 소봉은 안문관 밖에서 대송나라 관병들이 거란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는 거란의 관병들이 대송나라의 백성들을 사로잡아 온 것을 보고 있었다.

사로잡힌 사람들의 처참한 표정이나 태도는 서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요나라에 어느 정도 머무르게 되었는지라 요나라의 군사 상황을 대략 알게 되었다.

요나라의 조정에서는 군대에 양곡을 공급하지 않았고 은자도 부족하게 주었다.

모든 것은 적군으로부터 빼앗아 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같이 군사들은 송나라, 서하, 여진, 고려 등 이웃에 있는 나라의 백성을 노략질해서 쓸 물건을 강탈해 왔다. 이 행위를 그들의 말로는 타초곡(打草穀)이라고 하는데 사실 강도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송나라 관병들도 마찬가지로 요나라 사람들에게 타초곡이라는 노략질을 해서 보복했다. 그렇기 때문에 변경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고달프기 이를데 없었다.

소봉은 줄곧 그와 같은 방법이 잔인무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는 오랫동안 벼슬길에 머물 생각이 없었고 야율홍기에게 적당히 얼버무린 이후 한동안 은거할 작정으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군국대사에 있어서도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때 그는 친히 포로들의 참상을 대하게 되자 그만 측은한 마음이 생겨 그 대장에게 물어보았다.

어디서 잡아 온..... 타초곡을 한 것인가?

그 대장은 공손히 대답했다.

대왕에게 말씀드리죠. 바로 탁주 바깥 쪽의 송나라 땅에서 노략질을 한 것입니다.

대왕께서 오신 이후 부하들은 감히 본주(本州) 부근에서 양식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말을 듣건데 옛날에 그들은 바로 본주에 살고 있는 송나라 사람들에게 노략질을 한 모양이구나."

그는 말 앞에 서 있는 소녀에게 한나라 말로 물었다.

너는 어디 사람이냐?

소녀는 즉시 무릎 꿇고 울면서 말했다.

소녀는 장가촌(張家村) 사람입니다. 대왕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소녀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소봉은 고개를 쳐들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수백 명이나 되는 포로들은 모두 꿇어앉아 있었다. 그러데 그들 가운데 한 소년만이 뻣뻣이 서서 무릎을 꿇지 않고 있었다. 그 소년은 소년이라기보다 나이가 십 육칠 세 정도의 청년이었는데 얼굴은 조금 긴 편이었으며 아래턱이 뾰족했다.

얼굴이 음침한 것이 밝지 못했다.

소봉은 그 젊은이이게 물었다.

젊은이, 자네는 어디에 사는가!

그 젊은이는 말했다.

저에게 한 가지 중대한 기밀이 있는데 직접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좋아. 이리 다가와서 말하게.

젊은이의 두 손은 밧줄로 묶여 있었다.

아무쪼록 부하들을 물리치도록 하십시오. 이 일은 다른 사람이 듣게 할 수 없습니다.

소봉은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와 같은 젊은이가 무슨 비밀 대사를 알 수 있다는 것일까? 그렇군, 그는 남쪽에서 왔으니 어쩌면 대송나라의 군사 상황을 이야기해 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구나."

송나라 사람으로서 거란 사람에게 비밀을 알린다는 것은 바로 염치없는 매국노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소봉은 그를 업수히 여기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중대한 기밀이 있다고 했으니 들어보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을 타고 앞으로 십여 장 나아가며 손짓을 했다.

자네가 이리 다가오게.

그 젊은이는 다가왔다. 그는 두 손을 들었다.

제 손에 묶인 밧줄을 잘라 주십시오. 저의 품속에 올릴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소봉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곧장 내려쳤다. 그 한 칼을 내려치는 기세는 그 젊은이의 몸뚱이를 두 조각으로 낼 것 같았다. 그러나 칼이 떨어진 부위는 매우 정확하여 그 젊은이의 두 손을 묶고 있는 밧줄만을 잘라 놓았을 뿐이었다.

그 젊은이는 깜짝 놀라 두 걸음 물러서더니 소봉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봉은 빙그레 웃고 칼을 칼집에 넣고 물었다.

무슨 물건이냐?

그 젊은이는 손을 품속으로 집어넣고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보시면 알게 됩니다.

그는 소봉의 발치로 다가왔다. 소봉은 손을 내밀어 받으려고 했다.

별안간 그 젊은이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벼락같이 소봉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소봉이 말채찍을 들어 휙, 하니 그 물건을 쳐서 떨어뜨리자 하얀 가루가 마구 날려 흩어졌는데 알고 보니 베로 만든 조그만 주머니였다.

그 조그만 주머니가 땅바닥에 떨어지자 하얀 가루가 주머니 주위에 흩어지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바로 생석회가 아닌가?

이것은 강호의 비열한 도적들이 사용하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만약 얼굴에 던져 생석회가 눈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두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소봉은 싸늘히 코웃음을 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젊은이는 대담하구나! 알고 보니 매국노는 아니었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어째서 나를 해치려 했느냐?

그 젊은이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소봉은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네가 순순히 실토한다면 나는 너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

그 젊은이는 말했다.

부모의 원수를 갚지 못하게 되었으니 더 할말이 없소.

소봉은 되물었다.

자네의 부모가 누구신가? 그 분들을 내가 해쳐 죽였다는 것인가?

그 젊은이는 두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온 얼굴 가득히 분노의 빛을 띠우고 소봉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교봉! 너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백부님을 해쳐 죽였나! 나는.....나는 그야말로 너의 살을 뜯어 죽이고 싶으며 너의 몸에 있는 힘줄을 뽑고 가죽을 벗겨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소봉은 그가 교봉이라는 옛이름을 들먹이고 또 그의 부모와 백부를 죽였다고 하는 말에 아마도 옛날 중원에서 원한을 맺게 된 원수인가보다고 생각했다.

자네 백부님은 누구이며 또 부친은 누구인가?

그 젊은이는 말했다.

어찌됐든 나는 살고 싶지 않으니 당신에게 말해 주겠소. 나는 취현장 유씨 집안의 아들로서 결코 삶을 탐내어 죽음을 두려워하는 도배는 아니외다.

소봉은 아, 하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대는 유씨 쌍웅(游氏雙雄)의 후손이었군. 부친은 유구(游駒) 둘째 나리시겠지?

소봉은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날 나는 귀장에서 중원 군웅들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어 부득이 응해 싸운 것으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죽였네. 그리고 영존과 백부님은 모두 자결하여 죽은 것이라네.

거기까지 말하다가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자결한 것도 피살된 것과 별 차이가 없지. 그날 내가 자네 백부와 부친의 무기를 빼앗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결했지. 그런데 자네 이름은 무엇인가?

그 젊은이는 가슴을 펴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유탄지(游坦之)라고 하오! 나는 당신이 나를 죽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나는 백부님과 아버님을 본따서 자결하겠소.

그는 오른손을 바지 가랑이로 가져 가더니 한 자루의 단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가슴팍을 찌르려고 했다.

소봉은 말채찍을 휘둘러 단도를 휘말아 낚아챘다.

유탄지는 대노하여 욕을 했다.

내가 자결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냐? 이 죽어 마땅할 요나라의 개새끼야! 어찌 그토록 악독하더란 말이냐!

이때 아자가 말을 몰아 소봉의 곁으로 달려와 호통을 내질렀다.

네 이 녀석! 감히 함부로 욕을 하다니, 너는 죽고 싶은게냐? 그러나 그렇게 쉽지는 않을걸?

유탄지는 갑자기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소저를 대하게 되자 어리둥절해져 말을 하지 못했다.

아자는 다시 말했다.

꼬마야, 눈이 멀게 되는 맛은 참 좋단다. 나중에 너는 그 맛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소봉을 향해 말했다.

형부, 이 녀석은 악독하기 이를데 없어요. 석회로 형부를 해치려고 했으니 우리는 그 석회로 먼저 그의 한쌍의 눈동자를 못 쓰게 만든 이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군사를 이끌고 노략질을 하고 돌아온 대장을 향해 말했다.

오늘 타초곡으로 얻은 송나라 사람들을 모두 나에게 줄 수 없느냐?

그 대장은 기쁨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왕께서 그토록 체면을 세워 주시겠다니 정말 대왕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소봉은 말했다.

포로를 나에게 바친 관병들은 나에게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관병들은 흐뭇한 듯 말하였다.

우리들은 성의로써 대왕에게 바치고자 하는 것이오니 상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소봉은 말했다.

그대들은 포로들을 남겨 두고 먼저 성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잊지 말고 상을 타가도록 하여라.

관병들은 허리를 굽히고 사의를 표했다.

그 대장은 말했다.

이곳에는 짐승들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아마도 이 송나라 돼지들을 살아 있는 과녁으로 만들 참이시겠죠? 옛날 초왕은 바로 그런 일을 좋아했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잡은 것들은 대부분이 여자들이라 도망을 빨리 치지 못하니 아쉽군요.

다음에는 대왕을 위해서 건장한 송나라 돼지들을 많이 잡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사라졌다.

송나라 돼지들을 살아 있는 과녁으로 만들겠냐는 몇 마디의 말을 듣자 소봉은 속으로 흠짓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초왕이 자행했던 잔인무도한 행동을 보는 것 같았다. 수백 명의 송나라 사람들이 짐승처럼 눈 위를 울부짖으며 도망을 치고 거란의 귀신들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면서 활에 시위를 메기고서 하나 하나 쏴 잡는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어떤 송나라 사람이 멀리 도망을 치면 거란 사람들은 말을 타고 재빨리 뒤를 쫓아가 노루나 여우를 쫓듯 끝내는 일일이 쏴서 죽여 버린다. 그와 같은 참혹한 일을 거란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지껄였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표정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과거 그러한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소봉은 눈을 들어 포로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얼굴은 흙빛이 되어 차가운 바람에 벌벌 떨고 있었다. 이들 변경에서 살고 있는 백성들 가운데는 거란 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살아 있는 과녁으로 삼아 사람을 쏜다는 일을 들은 적이 있는지라 이 말을 듣고는 더욱 놀라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소봉은 길게 탄식을 하며 남쪽에 있는 구름에 가려 있는 중첩된 산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사람들이 나의 신세에 얽힌 수수께끼를 폭로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늘까지도 대송나라의 백성인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과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밥을 먹게 되었을 것인즉 어떤 점에서 다르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모두들 멀쩡한 사람인데 억지로 거란 사람이니 대송나라 사람이니 하고 나눌뿐 아니라 여진이니 고려니 하고 나누어야만 하는가? 네가 우리 경내로 와서 노략질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너의 경내로 가서 방화를 일삼으며, 네가 나를 요나라의 개새끼라고 욕을 하면 나는 얼른 송나라의 돼지라고 욕을 해야 하느냔 말이다."

일시 그의 뇌리에서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포로들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오늘 너희들을 놔줄 터이니 모두들 빨리 돌아가도록 해라.

포로들은 소봉이 그들에게 도망을 치게 한 이후 등 뒤에서 화살을 쏘는줄 알고 주저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소봉이 다시 말했다.

너희들은 돌아간 이후 변경에서 멀리 떠나 살도록 해라. 그래야 노략질을 할 때 잡혀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한 번은 구했지만 두 번 구할 수 없을 것이다.

포로들은 그제서야 정말인 줄 알고는 환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대왕의 은덕은 태산과도 같습니다. 저희들은 집으로 돌아가 대왕님의 장수를 빌겠습니다.

그들 송나라 백성들은 요나라 군사들의 노략질에 사로잡혀 간 후에 부자들만이 금은이나 비단으로 몸값을 치루고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을 때 포로들은 하나같이 요나라 땅에서 죽거나 시골(屍骨)마저도 고향으로 되돌아 오지 못했다.

그런데 송나라와 요나라는 매년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돈있는 사람들은 벌써 남쪽으로 도망친 이후였다. 그리하여 대개 잡혀오는 변경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사람들이라 금은이나 비단 등이 없어 몸값을 치루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들도 벌써 자기의 운명이 소와 말보다도 못한 처지에 빠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요나라의 대왕이 자기들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 주겠다니 그야말로 죽었다 살아난 것이어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봉은 포로들이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띠우고 서로 부축을 해가며 남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거란 사람들이 그들을 잡아와 다시 되돌려 보낸다 하더라도 길을 오는 동안 온갖 고초를 겪고 놀람을 당하게 했으니 그들에게 은덕을 베풀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덧 난민들은 점차 멀어져 가게 되었는데 그 유탄지는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었다.

소봉은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왜 가지 않는가? 중원으로 돌아갈 노자가 없는가?

그는 손을 품속으로 집어넣어 약간의 금은을 꺼내 주려고 했다. 그러나 몸에 지닌 돈이 없었다. 그런데 잡히는 게 있어 꺼내보니 조그만 기름을 묻힌 삼베로 만들어진 보따리가 아닌가? 그는 그만 마음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 조그만 보따리에 싸여 있는 것은 범문으로 된 한 권의 역근경이었다.

그날 아주는 소림사에서 훔쳐와 소봉에게 가지고 있으라 했었다. 그런데 맡긴 사람은 이미 죽고 없으나 역근경은 아직도 자기의 품속에 있으니 그만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그는 아무렇게나 그 조그만 보따리를 품속에 넣고 말했다.

나는 오늘 사냥을 나온 길이라 돈을 가지고 있지 않구나. 자네가 돈이 필요하다면 나를 따라 성 안으로 가서 가져가도록 하게.

유탄지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 교가야! 죽일테면 죽일 것이지 왜 그와 같은 간계를 써서 나를 희롱하려 하느냐?

설사 굶어 죽는다 하더라도 어찌 너의 돈을 쓸 수 있겠느냐?

소봉이 생각해 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자기로 말하면 그의 부친을 죽인 원수가 아닌가? 이와 같은 불구대천의 깊은 원한은 해소시킬래야 해소시킬 수 없는 일이라서 말해봐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를 죽이지 않겠다. 자네가 원한을 갚겠다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도록 해라.

아자는 재빨리 말했다.

형부, 그를 놓아 보내서는 안 돼요. 이 녀석은 원수를 갚는데 정당한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비열하고도 못된 수단을 마구 사용했어요. 풀을 자르려면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후환을 없애야 돼요.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호란 가는 곳마다 가시밭이고, 걸음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나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걸어 왔다. 아마도 저 젊은이는 나를 해지치 못할 것이다. 내가 그 날 그의 백부와 부친으로 하여금 자결하도록 부채질을 한 것은 사실이다. 역시 내가 죄값을 치뤄야 하는 것이니 유씨 쌍웅의 아들이자 조카인 그를 탓할 수는 없단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사냥을 할 흥미를 잃게 되어 입을 열었다.

우리 돌아가지. 오늘은 사냥할 짐승도 없을 것 같다.

아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저 녀석을 한바탕 괴롭혀 줄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그것이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일인데 형부는 그를 놓아 주려고 하는구나. 성 안으로 돌아간다 해서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끝내 소봉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서 소봉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수 장 더 나아가게 되었을 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네 녀석은 백 년 동안 무공을 쌓은 후에 다시 우리 형부를 찾아와 원수를 갚도록 해라.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에 채찍을 가하더니 질주해 갔다.

28. 끈질긴 목숨이 무쇠탈을 쓰다 (草木殘生로) 유탄지는 소봉 일행이 곧장 북쪽으로 달려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고 자기가 죽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간악한 적은 어째서 나를 죽이지 ㅇ는 것일까? 흥, 그는 아예 나를 무시하고 있구나. 나를 죽이는 것이 자신이 손을 더럽힌다는 것이겠지? 그는.....그는 요나라에서 무슨 대왕인 모양이니 원한을 갚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어찌됐든 저 간악한 도적의 소재지를 알게 된 셈이다."

그는 몸을 굽혀 석회 주머니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소봉이 말채찍으로 빼앗은 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단도를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 수풀 속에 기름을 먹인 삼베 보따리가 보였다. 바로 소봉의 품속에서 흘러내린 것이었다.

유탄지는 즉시 그 보따리를 집어들고 펼쳐 보았다. 안에는 책이 있었는데 아무렇게나 뒤적거려보니 한 장 한 장마다 꾸불꾸불한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한 자도 알 수 없는 글자였다. 원래 소봉은 그 물건을 보고 죽은 아주를 생각하느라고 그만 정신이 다른 곳에 쏠렸다. 그리하여 그 역근경을 품속에 집어 넣는다는 것이 제대로 밀어넣지를 못 했고 말 위에 앉아 손을 흔들자 그 물건은 그의 품속에서 떨어지고 말았는데 소봉은 이를 알아 차리지 못한 것이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아마도 십중팔구 거란의 문자일 것이다. 그 간적이 이 책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에게 크게 소용이 있는 것이겠지. 나는 그에게 돌려 주지않고 그로 하여금 한동안 난처하게 만들어야겠다. 그 놈을 골탕먹이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복수의 통쾌함을 맛보았다. 그는 책을 보따리에 싸서 품속에 집어넣고 곧장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어릴 적에 부친을 따라 무공을 익히게 되었으나 몸이 약한 편이고 팔힘도 강하지 못해 유씨 쌍웅의 강맹한 외공 수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리하여 삼 년 동안 무공을 익혔으나 진전이 지극히 미미해서 명가의 자제 같지 않았다.

그가 열 두 살 되던 해 유구는 그에게 실망을 느끼고 형님인 유기와 상의했다.

두 사람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 유씨 집안의 자제 가운데 이와 같이 형편없는 녀석을 세상에 내놓으면 그야말로 남들이 배꼽을 잡고 웃을거야. 그가 취현장의 유씨 쌍웅의 자제라는 말을 듣게 되고 손을 쓰지 않으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와 손을 쓰게 된다면 전력을 다 기울이게 될 것이니 단번에 그의 목숨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역시 그에게 학문을 익히도록하여 목숨을 보존케 하는 것이 옳겠다."

유탄지가 열두 살 되는 해에 무공을 배우지 못하도록 했다. 유구는 한 명의 이름있는 선비를 초빙해 글공부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유탄지는 글공부에도 마음을 쓰지 않고 언제나 스승의 말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의 스승이 "공자왈, 배우고 익히게 되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하고 가르치면 그는 "그거야 무엇을 배우는가에 따라서 다르지요. 우리 아버지가 주먹질을 가르쳐 줄 때는 배우고 익혀도 전혀 즐겁지 않던데요? 하는 식으로 응수했다.

그러면 그 스승은 화를 냈다."

공자가 말씀하시는 것은 성현의 학문이고 이 세상을 다스리는 큰일을 말하는 것인데 어찌 주먹질이나 하고 창칼을 쥐는 일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면 유탄지의 대답은 이러했다.

좋아요. 당신이 우리 백부님과 아버님이 주먹질이나 하고 창칼을 쥐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했으니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 일러 바칠 거예요.

이런 식으로 그는 스승을 화나게 만들어 스승이 집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스승을 화나게 해서 쫓아내자 유구는 그에게 수십 차례나 매질을 했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유탄지는 맞으면 맞을수록 고집을 피웠고 또 짓궂은 일을 골라 했다.

유구는 아들이 형편없는 망나니로서 도저히 가르칠래야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길게 탄식한 끝에 그를 내버려 두고 말았다. 유탄지는 금년 십팔 세가 되고 또한 명문의 출신이었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학문대로 무공에 있어서는 무공대로 아는 것이 빈약한 형편이었다.

백부와 부친이 자결하여 죽고 어머니는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남편을 뒤따르자 그는 그만 외톨이가 되어 각처로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교봉을 찾아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이었다.

그 날 취현장에서 크게 싸움을 벌이게 되었을 때 그는 벽 뒤에서 싸움을 구경했다.

따라서 교봉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후 교봉이 거란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는 무작정 북쪽으로 올라온 것이다.

어느 날 강호에서 한 좀도적이 석회를 적에게 뿌려 적의 두 눈을 멀게 하는 것을 본 그는 그럴싸하다고 생각하고 석회를 사서 몸에 지니게 되었다. 변경으로 무작정 올라오다가 노략질에 나선 거란의 군사들에게 잡히게 되었고 뜻밖에도 소봉을 만났다. 그리하여 준비했던 석회까지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가장 요긴한 것은 될 수 있으면 멀리 떠나는 것이다. 그에게 다시 잡혀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든 한 마리 큰 독사나 한 마리 큰 지네라도 잡아서 몰래 그의 침대에 풀어 놓으면 그가 잠자리에 들게 되었을 때 그만 독사나 지네에게 물려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소녀..... 그 소녀는, 아, 그녀는 그녀는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

그는 아자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만 가슴이 찌르르해지며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얼굴마저도 화끈거렸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쯤 그 안색이 창백하고 가냘프면서도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구나."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옳기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교봉이 풀어준 한 떼의 난민들을 앞지르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동행하자고 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걸음만 옮겨 놓았다.

십여 리를 걸어가게 되었을 때 뱃속에서 쪼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먹을 것을 찾았으나 초원에는 마른 풀과 흰 눈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한 마리의 소나 양이라면 좋겠다. 그러면 풀을 뜯고 눈을 먹으며 매우 즐거웠을텐데..... 만약 내가 한 마리의 조그만 양이고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인 두 마리의 늙은 양을 끌고가서 잡아 먹었다면 나는 원수를 갚아야 할까, 갚지 말아야 할까? 부모의 원수는 불구대천이라 했으니 물론 갚아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갚지? 두 자루의 뿔로 우리 부모님을 잡아먹은 사람을 찔러야 할까? 사람들이 본래 소와 양을 기르는 것은 잡아 먹기 위해서다. 그러니 무슨 원수를 갚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와 같은 공상을 하면서 그저 기분내키는 대로 걸었다. 별안간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눈 위로 세 명의 거란의 기병이 말을 타고 달려오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 명의 거란병이 대뜸 오랏줄을 던졌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오랏줄은 그의 목에 걸리게 되었다. 그 거란의 기병은 바짝 잡아당겨 오랏줄이 조여들게 만들었다.

유탄지는 손을 뻗쳐 그 오랏줄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거란의 기병은 휘파람을 불어대더니 벼락같이 말을 달리는 것이 아닌가?

유탄지는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 그만 털썩 쓰러지고 말았으며 그 거란 기병이 끄는 대로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유탄지는 처참한 비명을 몇 번 토했으나 목의 밧줄이 바짝 조여짐에 따라 다시 소리를 지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거란의 기병은 그를 목 졸라 죽이게 될까봐 즉시 말을 멈추었다. 유탄지는 땅바닥에 버둥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목을 바짝 조이고 있는 밧줄을 느슨하게 했다. 그러나 거란의 기병은 다시 힘주어 오랏줄을 잡아당겼다.

유탄지는 휘청하여 하마터면 다시 엎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세 명의 거란병들은 모두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때 그 오랏줄을 잡고 있던 거란병이 큰소리로 유탄지에게 무슨 말을 했다.

유탄지는 거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 거란의 기병은 손을 흔들더니 말을 짓쳐 앞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급히 달려가지 않고 유탄지가 목 졸려 죽지 않도록 했다.

세 명의 거란 기병들이 곧장 북쪽으로 나아가자 유탄지는 겁이 났다.

"교봉 이 녀석이 입으로는 그럴싸하게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나를 놓아 준다고 하더니 돌아서자마자 부하들을 시켜 나를 잡아 오게 했구나. 이번에 잡혀가게 되면 어떻게 목숨을 건질 수 있겠는가?"

그가 집을 떠나 북쪽을 향해 오게 되었을 때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생각은 오직 복수라는 두 글자뿐이었다. 그는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몰랐다.

그는 갑자기 소봉을 만나자 부모가 참혹하게 죽은 참상이 뇌리에 떠오르게 되었고 단숨에 석회를 던져 그의 눈을 멀게 한 후 다시 달려들어 단도로 그를 찔러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격에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예기가 꺾일 대로 꺾여서 그저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었는데 다시 거란 기병들에게 잡혀가게 된 것이다.

노략질을 나온 거란의 군사들에게 그가 처음 잡혀 가게 되었을 때는 부녀자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여인들의 걸음이 빠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발걸음으로 충분히 따를 수가 있어 별로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었다. 다만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등을 칼등으로 한 대 얻어 맞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질질 끌리는 판이라 종종걸음을 쳐야 했고 숨을 헐떡여야 했다.

수십 걸음을 가지 못해 쓰러지곤 했는데 한 번 쓰러질 때마다 목에 걸린 밧줄에 긁혀 그의 목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거란의 기병은 조금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가 죽고 사는 것을 돌보지 않았다. 줄곧 그를 끌고 남경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에 들어가 유탄지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빨리 죽고 싶은 생각 밖에 나지 않았다. 죽게 된다면 이 많은 고통을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세 명의 거란 기병은 성 안에서 다시 몇 마장을 가더니 그를 한 채의 커다란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유탄지는 땅바닥에 깔아 놓은 것이 모두 청석판이며 기둥을 굵고 문이 높다란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곳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문 입구에서 차 한 잔 마실 시진을 기다리니 그를 끌고 온 거란의 기병이 다시 그를 끌고 커다란 마당으로 데려 갔다. 별안간 길게 휘파람을 내불더니 두발로 말의 배를 찼다. 말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유탄지는 자기를 마당으로 끌고 오자마자 즉시 말을 달려 가도록 만들 줄은 상상을 못하고 있던 터여서 세 걸음을 따라 간 다음 땅 위에 넘어지고 말았다.

거란의 기병은 잇따라 휘파람을 내불며 유탄지를 마당에서 질질 끌며 세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말이 더욱 빨리 달리도록 채찍을 휘둘렀다. 구경을 하고 있던 수 십 명의 관병들은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러 그의 기세를 돋우어 주었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는 나를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녀 죽일 작정이로구나!"

이마와 사지, 그리고 몸뚱이가 땅바닥의 청석에 부딪쳤다. 어느 한 곳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뭇 거란의 관병들이 왁자하니 웃는 웃음 속에 맑고 고운 여자의 웃음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유탄지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은연중 여자의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호호호, 저 사람 연(人鳶)을 아마도 하늘로 띄울 수는 없을걸?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엇이 사람 연이란 말인가?"

바로 이때였다. 그는 뒤덜미가 와락 조여드는 것을 느꼈고 그 순간 자기의 몸이 허공으로 붕 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대뜸 거란의 기병이 말을 세차게 몰기 때문에 바짝 당겨진 그 자신이 허공에 붕 하니 떠올라 그야말로 연과 같은 장난감이 되어 희롱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전신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게 되자 뒷덜미가 아파서 지각을 잃게 되었다.

그의 코와 입으로 세찬 바람이 밀어 닥치는 바람에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여자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호호호! 정말 재미있다! 재미있어! 진짜 사람으로 연을 띄우게 되었어!

유탄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손뼉을 치며 웃는 사람은 바로 몸에 자색 옷을 걸치고 있던 아름다운 소녀가 아닌가?

그는 그녀를 발견하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알수가 없었으며 그의 몸뚱이가 허공에서 두둥실 떠올라 있는 처지까지도 잊고 말았다.

그 아름다운 소녀는 바로 아자였다.

그녀는 소봉이 유탄지를 놓아 주는 것을 보자 속으로 몹시 불쾌했었다. 한동안 말을 달린 이후에 일부러 뒤로 떨어져 시종에게 분부하여 살그머니 유탄지를 잡아 오되 소 대왕 모르게 하라고 일렀다.

뭇 시종들은 소 대왕이 그녀를 무척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라 기꺼이 명을 받들었다.

그들은 짐짓 말안장이 잘못되어 수선하는 척하면서 산비탈에 머물고 있다가 소봉 일행이 멀리 가자 말머리를 돌려 유탄지를 잡아 온 것이다.

아자는 남경으로 돌아가는 즉시 소봉의 거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성궁(佑聖宮)으로 와서 기다렸다. 유탄지를 잡아 오자 그녀는 거란 사람들에게 신선하고도 재미있는 고문을 가해 죄인을 괴롭히는 방법에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누가 사람 연을 띄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방법이 아자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하여 유탄지를 허공에 붕 띄우게 된 것이다.

아자는 매우 재미가 있는 듯 잇따라 소리쳤다.

내가 할게!

그녀는 달려 나와 그 기병이 타고 있는 말안장 위에 오르며 고삐를 받아 쥐고 말했다.

당신은 내려가.

그 기병이 말에서 즉시 뛰어내리고 아자가 제멋대로 사람 연을 띄우도록 했다.

아자는 밧줄을 쥐고 말을 몰아 한 바퀴 돌았다. 그녀는 큰소리로 웃으며 연신 부르짖었다.

정말 재미있다! 재미있어!

그녀는 중상을 입은 후 가까스로 치료된 상태여서 기운이 달렸다. 따라서 손목의 힘이 빠지게 되고 밧줄이 아래로 처지게 됨에 따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유탄지는 땅바닥에 떨어졌으며 청석판에 이마를 부딪히게 되었다. 하필 계단의 뾰족한 곳에 부딪히게 되어 대뜸 이마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샘 솟듯 흘러내렸다.

아자는 매우 기분을 잡친 듯 성이 나서 말했다.

이 우둔한 녀석은 더럽게 무겁구나!

유탄지는 아파서 거의 기절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가 그래도 자기의 몸이 무겁다고 욕하는 소리를 듣고 몇 마디의 변명을 하고자 했으나 너무 아파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한 명의 거란병이 다가오더니 그의 목에 맨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다른 한명의 거란병은 그의 옷자락을 찢어 아무렇게나 그의 상처를 싸맸다. 그러나 선혈은 끊임없이 상처에서 흘러나와 멈추지 않았다.

아자는 말했다.

됐다. 됐어! 우리 다시 놀기로 하자! 다시 그를 날리되 높이 날릴수록 좋다.

유탄지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거란 말이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손짓 발짓 해가며 머리 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한 명의 거란병이 밧줄을 그의 겨드랑이 아래로 집어 넣더니 그의 몸을 밧줄로 옭아매는 것이 아닌가? 밧줄이 목에 걸려 혹시나 그를 졸라 죽이게 될까봐 그러는 것이었다.

자, 시작!

거란병은 말을 돌아 급히 달렸다. 유탄지는 땅바닥에서 몇 바퀴 질질 끌리더니 다시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거란인 기병의 손에 들린 밧줄은 길게 늘어나게 되었고 유탄지의 몸은 점차 두둥실 떠오르게 되었다.

거란의 기병은 별안간 손을 놓았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유탄지의 몸은 마치 활을 떠난 시위처럼 위로 치솟아 올랐다.

아자와 뭇 관병들은 큰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유탄지는 자기의 뜻과는 달리 몸이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죽었구나!"

치솟던 기운이 다하게 되자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뒤로 한 채 곧장 떨어져 내리게 되었다. 그야말로 그의 머리통이 바로 청석판 위에 떨어질 찰나 네 명의 거란 관병이 동시에 밧줄을 내던져 그의 허리를 감더니 사방으로 잡아당겼다.

유탄지는 이때 기절하고 말았으나 네 가닥의 힘은 그의 몸이 허공에서 정지하도록 했다.

이때 그의 머리통은 땅바닥에서 약 석 자 높은 곳에 있었다. 이와 같은 짓은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밧줄이 조금이라도 느슨하거나 힘이 고르지 않게 된다면 유탄지는 반드시 골통을 부딪쳐 박살이 나 죽는 것이다.

거란의 병사들은 종종 잡아온 송나라의 포로들을 이와 같이 희롱했다.

그리고 사람 연이 되어 허공에 떠오르게 된 포로는 십중팔구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

설사 초원의 부드러운 땅 위에서 그와 같은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토록 높은 곳에서 떨어지게 되면 설사 골통이 바수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목뼈가 부러져 목숨을 잃곤 했다.

갈채 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네 명의 거란 병사들은 유탄지를 내려 놓았다.

아자는 은자를 꺼내 몇 명의 관병들에게 일 인 당 다섯 냥씩 상금을 내렸다.

관병들은 큰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었다.

소저, 또 어떤 재미있는 장난을 할깝쇼?

아자는 유탄지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고 또 조금 전 사람 연을 띄우게 되었을 때 너무 지나친 힘을 썼기 때문에 가슴이 은근히 아파와 다시 놀 기운이 없었다.

이제 충분해. 이 녀석이 죽지 않는다면 내일 나에게 데리고 와. 나는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데리고 놀아야겠어. 이 자는 소 대왕을 암살하려고 했으니 너무 쉽게 죽도록 하면 안 돼.

뭇 관병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그들은 몸에 피칠을 한 유탄지를 끌고 나갔다. 유탄지는 곰팡이 냄새가 코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신 어느 한 군데도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음을 느꼈다. 목이 바짝 말라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목쉰 소리로 부르짖었다.

물..... 물.....

그러나 아무도 그를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 소리를 지르다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별안간 백부와 부친이 교봉과 크게 싸우며 사방에 피를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모친이 자기를 껴안고 부드러운 어조로 자기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곧이어 그의 눈앞에 아자의 아리따운 얼굴이 나타났는데 그 맑고 고운 눈동자에서는 기이한 광채가 번쩍이고 있었다. 별안간 그 얼굴이 축소되더니 세모꼴의 뱀머리로 변해 핏빛과 같은 기다란 혀를 내밀었고 송곳같은 이빨을 드러낸 채 그를 깨물려고 했다.

유탄지는 죽어라 하고 발버둥쳤다. 그런데 그 뱀은 덥썩덥썩 그를 깨무는 것이 아닌가? 손, 다리, 목, 어느 한군데도 물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특히 이마를 심하게 물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살이 한 조각 두 조각 물어 뜯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큰소리로 부르짖고 싶었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고통에 그는 밤새 시달렸다.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는 온갖 괴로움을 당해야 했고 잠을 자면서도 똑같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튿날 두 명의 거란병이 그를 압송해 아자에게 데리고 갔다. 유탄지의 몸에서는 여전히 높은 열이 나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앞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수 명의 거란병은 재빨리 그의 왼팔과 오른팔을 잡고 큰소리로 욕을 하며 끌다시피하여 어느 커다란 집안으로 들어갔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끌어내어 목을 베려는 것이 아닐까?"

그는 머리 속이 띵 하고 몽롱해서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자기가 두 곳의 기다란 낭하를 지나 어느 대청밖에 이르른 것을 알았다.

두 명의 거란병은 문밖에서 몇 마디 말로 알렸고 안에서 한 여자의 대답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어 제쳐지고 거란병은 그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유탄지는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대청에는 꽃무늬로 얼룩진 커다란 융단 끝 쪽에 두터운 비단 방석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 한 아름다운 소녀가 앉아 있었다. 바로 아자였다.

그녀는 맨발로 융단 위를 딛고 있었다. 유탄지는 그녀의 희고 수정같이 윤기가 나는 조그만 발을 대하자 정말 옥과 같이 윤기가 나고 비단처럼 부드럽다는 생각과 더불어 갑자기 심장이 맹렬히 뛰놀기 시작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못박힌 듯 그녀의 발을 쳐다보았다. 발 등의 살빛은 투명한 듯했으며 은연 중 몇 가닥 푸른 힘줄이 돋아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손을 뻗쳐 몇 번이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생각이 치밀었다. 두 거란병은 그를 부축했던 손을 놔주었다.

유탄지는 몸을 몇 번 흔들거렸으나 끝내 힘들게 몸을 가누고 일어섰다. 그는 시종 아자의 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발가락의 발톱이 모두 분홍빛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 열 잎의 조그만 꽃잎 같다고 생각했다.

아자는 온몸에 피칠을 한 추악한 젊은이가 얼굴의 근육을 일그러뜨리고 아래턱을 뾰족히 내민 채 눈에서 불을 뿜는 듯 탐욕스런 빛을 내쏟고 있는 것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대뜸 한 마리의 상처 입은 굶주린 이리를 상기했다.

성숙해에 있을 때 그녀는 두 명의 사형과 사냥을 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한 대의 화살로 한 마리 굶주려 있는 이리를 쏘아 맞히게 되었으나 그 이리를 곧 죽일 수는 없었다. 그 이리는 중상을 입자 매섭게 자기를 노려 보았는데 그 눈초리가 바로 유탄지의 눈빛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이리는 그저 달려들어 자기를 죽이려고 했으나 몸을 날릴 수가 없는지라 그저 허연 송곳니를 드러낸 채 나직이 으르렁 거릴 뿐이었다.

아자는 바로 그와 같은 야수의 눈빛을 보기를 즐겼다 이리의 흉폭하고도 어찌할 수 없다는 듯한 울부짖음을 좋아했다.

유탄지는 너무 약골이라 전혀 반항을 하지 않아 재미가 없었다. 어제 유탄지가 소봉에게 석회를 던지고 꿇어 엎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뻣뻣하게 나오는 태도와 소봉의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자 아자는 그에게 호기심을 느꼈던 것이다.

속으로 그녀는 이 자야말로 한 마리의 흉맹하기 이를데 없는 야수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그를 괴롭히고 싶었고 그의 온몸에 상처를 입혀 그가 몸에 상처를 입을 때마다 자기에게 달려들어 매섭게 물어뜯기를 바랬다. 물론 그가 물어뜯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를 사로잡아 와서 사람 연으로 띄우게 되었을 때 그녀가 생각했던 이 야수는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고 그저 죽은 듯이 하는대로 내버려 두고 있어서 별 재미가 없었다.

이때 그녀는 눈쌀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신선한 방법으로 그를 괴롭혀 주어야 재미있을까?"

별안간 유탄지의 목구멍에서 킁킁거리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그리고 어디에서 나온 기운인지 마치 한 마리의 표범처럼 신속하기 이를데 없는 속도로 아자에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두 발 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자는 깜짝 놀라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두 명의 거란병과 아자 곁에서 그녀를 모시고 있던 네 명의 시녀가 일제히 호통을 내지르며 달려들어 유탄지를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유탄지는 아자의 두 다리를 얼싸안은 채 죽어라 하고 손을 놓지 않았다.

거란병이 잡아당기는 바람에 아자 마저 두터운 방석 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두 명의 거란병은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감히 더 끌어당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힘주어 유탄지의 등을 때렸고 다른 한 사람은 유탄지의 오른쪽 뺨을 때렸다.

유탄지는 상처가 심해서 여전히 정신이 맑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아자의 두 발을 껴안고 본능에 따라 끊임없이 그녀의 발 등에 입맞춤을 해댔다.

아자는 그의 후끈 달아오르면서도 삐적 마른 입술이 자기의 발 등에 입맞춤을 하게 되었을 때 속으로 겁이 나기도 했지만 간질간질하고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별안간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어마! 나의 발가락을 물었군!

그녀는 재빨리 두 명의 거란병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빨리 비켜! 이 사람은 미쳤어! 아이쿠! 내 발가락을 깨물어 잘라 버리지 않도록 해요!

유탄지는 가만 가만 그녀의 발가락을 깨물고 있었다. 아자는 아프지 않았으나 갑자기 그가 힘을 써서 깨물지 않을까 겁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다급한 가운데서도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거란병이 만약 힘주어 그를 구타하게 된다면 그가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마구 깨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두 명의 거란병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손을 놓게 되었다.

아자는 부르짖었다.

그만 깨물어! 그만 깨물어!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을게! 아야! 그대를 놓아 주도록 할게!

유탄지는 이때 심신이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워 있어 그녀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한 명의 거란병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자루를 잡았다.

그는 칼로 유탄지의 뒷덜미를 내려쳐 그의 목을 잘라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유탄지가 아자의 다리를 안고 있기 때문에 칼을 내려치게 되었을 때 까딱하면 아자의 다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잠시 망설였다.

아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요. 당신은 야수가 아닌데 어째서 사람을 깨물지? 빨리 입을 떼! 내 너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중원으로 돌려보내 줄게!

유탄지는 여전히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빨에 힘을 주지 않았고 아프도록 깨물지도 않았다.

그는 한쌍의 손으로 그녀의 발 등을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이때 유탄지는 그야말로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마치 사람 연이 되어 구름이 있는 곳까지 솟아오른 듯한 기분이었다.

이때 한 명의 거란병이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유탄지의 목을 움켜쥐고 힘껏 조였다.

유탄지는 목을 조이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자는 급히 다리를 움츠렸고 발가락을 그의 입속에서 뺀 다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미친 듯 다시 달려들어 물까봐 두 발을 비단 방석 속으로 파묻었다.

두 명의 거란병은 유탄지를 잡더니 그의 가슴을 마주 주먹으로 내지르며 구타했다.

십여 대의 주먹질을 하게 되었을 때 유탄지는 왁, 왁, 하며 몇 모금의 선혈을 토해 아름다운 융단을 피로 물들였다.

아자는 외쳤다.

손을 멈춰요! 더 때리지 말아요!

한바탕 놀라운 일을 겪고 난 그녀는 유탄지가 꽤나 이상하고 재미있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거란병은 그녀의 명령에 따라 손을 멈추었다. 아자는 비단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쌍의 맨발을 엉덩이 아래로 밀어넣고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어떤 방법으로 그를 괴롭혀야 재미가 있을까?"

아자는 고개를 쳐들었다. 유탄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물었다.

너는 왜 나를 쳐다보지?

유탄지는 말했다.

그대가 아름답기 때문이오.

아자는 얼굴을 붉히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정말 대담하구나! 감히 나에게 그따위 경박한 말을 하다니!"

그러나 그녀는 한평생 한 번도 젊은 남자로부터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성숙파에게 무공을 익힐 때 뭇 사형들은 모두 다 그녀를 영악하고 짓궂은 조그만 계집애 정도로만 여겼었다.

소봉은 그녀가 몹쓸 짓을 하지 않나 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녀가 갑자기 죽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을 뿐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이 예쁘다고 하지 않았다.

유탄지가 그와 같이 솔직한 말로 칭찬하는 것을 보면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 같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흐뭇함을 느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이 녀석을 곁에 두고 데리고 다니며 심심풀이를 삼는다면 꽤나 좋겠구나.

그러나 형부는 그를 놔 준다고 했는데 만약 내가 그를 다시 잡아 왔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반드시 내게 화를 낼 거야. 오늘은 형부를 속일 수 있어도 내일은 형부를 속일 수 없을거야. 형부가 시종 모르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아주는 변장을 잘했다. 우리 아버지의 모양을 하니까 형부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 하지 않았던가? 내가 이 녀석의 얼굴을 바꾸어 놓는다면 형부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분장시킨다 해도 그가 즉시 세수를 하여 화장을 지워 버리면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소용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녀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갑자기 손뼉을 치며 웃었다.

"좋은 생각이다! 정말 멋진 생각이야!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녀는 두 거란병에게 한동안 뭐라고 말했다. 거란의 병사는 어떤 점은 알아 차리지 못 하겠다는 듯 다시 자세한 설명을 청했다.

아자는 자세히 설명을 하고 시녀에게 명하여 오십 냥의 은자를 그들에게 건네 주도록 했다.

두 명의 거란병은 은자를 받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더니 유탄지를 끌고 대청을 나갔다.

유탄지는 부르짖었다.

나는 그녀를 봐야 한다! 나는 그 마음이 모질고 얼굴이 몹시 아름다운 소녀를 봐야겠단 말이야!

거란병과 뭇 시녀들은 한나라의 말을 모르는지라 그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지 못했다.

아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총명함을 떠올리고 더욱 우쭐해 했다.

유탄지는 다시 지하 뇌옥으로 끌려오게 되었고 건초더미 위에 던져졌다. 해질 무렵이 되니 한 그릇의 양고기와 몇 조각의 밀가루로 빚은 음식이 날라져 왔다.

유탄지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던 중이라 큰소리로 신음 소리를 질렀다. 유탄지는 배가 고픈 줄도 몰라 끝내 그 양고기와 밀가루를 빚어 만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날 밤 갑자기 세 명의 거란인이 들어왔다. 유탄지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몸을 버둥거리며 일어서려고 했다. 도망을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두 거란 사람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를 붙잡아 눕혔다. 그의 얼굴이 천정쪽을 쳐다보도록 눕히게 되자 유탄지는 마구 욕을 했다.

이 개새끼 거란놈들아! 곱게 죽지 못할 것이아! 이 나리는 너희들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이고 말겠다.

별안간 세 번째의 거란 사람이 두 손에 허연 한 무더기의 진흙같은 것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 물건은 솜 같기도 했고 또 백설 같기도 했다.

그 거란인은 그 허연 것으로 힘주어 그의 얼굴을 눌렀다. 유탄지는 그저 얼굴이 끈적끈적하고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머리가 좀 맑아졌다.

그러나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이 자들은 나의 일곱 구멍을 막아 숨을 못 쉬게하여 죽일 생각이구나."

그러나 그의 짐작은 맞지 않았다. 코와 입 부위를 그 사람이 몇 번 찔러 구멍을 내놓자 숨을 쉴 수 있었다. 그저 얼굴이 끈적끈적한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 거란인은 그의 얼굴 이곳 저곳을 계속 누르고 있었다. 마치 물에 적신 밀가루나 부드러운 진흙을 얼굴에 발라놓은 것 같았다.

유탄지는 생각했다.

"이 악적들은 또 무슨 이상한 방법으로 나를 해쳐 죽이려는 것일까?"

잠시 후 얼굴에 씌워졌던 그 한 겹의 부드러운 흙이 떨어졌다.

유탄지는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밀가루 반죽으로 그의 얼굴 모습을 떠낸 모형이 보였다.

거란 사람은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유탄지는 욕을 해댔다.

이 요나라의 개새끼들아! 너희들은 죽어도 뼈를 묻힐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세 명의 거란인들은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조각의 물에 이긴 밀가루 반죽을 들고 나가버렸다.

유탄지는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렇군! 그들은 나의 얼굴에 독약을 발랐구나. 얼마 후에 나의 얼굴은 썩어 문들어져 요귀와 같은 모습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겁이 났다.

"그들에게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죽느니 차라리 내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죽는 편이 낫겠다."

그는 즉시 머리로 벽을 들이받았다. 쿵, 쿵, 쿵, 하니 세 번을 세차게 들이박았다.

옥졸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는 그의 손 발을 묶었다. 유탄지는 본래 세 번 부딪힘으로써 거의 반죽음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그의 얼굴은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을 결심이 되어 있는지라 배가 한없이 고파도 옥졸이 가져다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거란인이 다시 지하 뇌옥 속으로 걸어 들어와 그를 부축해 데리고 나갔다. 유탄지는 처량하고 고달픈 가운데서도 한 가닥 달콤한 상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는 아자가 다시 그를 불러 모욕을 주고 때리려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겠지만 다시 그녀의 아리따운 용모를 볼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엔 한 가닥 미소가 떠올랐다.

세 명의 거란인은 그를 데리고 골목길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 몇 곳의 골목길을 지나 어두침침한 커다란 석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석옥 안에는 거센 숯불이 석옥 반 쪽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한 명의 근육이 울퉁불퉁한 대장장이가 윗몸을 벌거벗은 채 한 커다란 철첩(鐵帖) 옆에 서서 한 시커먼 물건을 들고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세 명의 거란인들은 유탄지를 그 대장장이 앞으로 밀었다. 두 사람은 그의 두 팔을 잡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등을 움켜 쥐었다.

그 대장장이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다시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쳐다보는데 아마도 서로 비교해 보는 것 같았다.

유탄지는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쳐다보았다. 바로 무쇠로 만들어진 면구(面具)였는데 코, 입, 두 눈에 해당하는 네 개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물건을 무엇하러 만들었을까?"

그런데 그 대장장이는 무쇠 면구를 들더니 그의 얼굴에 덮어씌웠다.

유탄지는 자연히 고개를 뒤로 젖혔으나 뒤통수를 그 누가 즉시 붙잡고 앞으로 밀었기 때문에 무쇠로 만들어진 면구를 얼굴에 쓰고 말았다.

그 순간 그는 얼굴이 얼음과 같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살갗과 무쇠가 서로 맞닿은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그 면구가 유탄지의 눈, 입, 코의 형상과 꼭 맞는다는 사실이었다.

유탄지는 잠시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곧 어떻게 된 노릇인지를 깨달았다. 별안간 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이쿠! 이 면구는 바로 나에게 씌우려고 만든 것이로구나! 그날 그들이 물에이긴 밀가루를 발랐던 것은 바로 이 면구의 모형을 만든 것이로구나! 그들이 꼼꼼하게 이 무쇠로 만들어진 면구를 제조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 대장장이는 면구를 그의 얼굴에서 떼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런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한 자루의 커다란 무쇠로 만들어진 집게로 면구를 집어 들더니 화로 속에 넣어 시뻘겋게 달구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쇠망치를 들고 탕,탕,탕 하니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는 면구를 한동안 후려치더니 손을 뻗어서 유탄지의 광대뼈의 이마를 만졌다.

아마도 면구에서 제대로 맞지 않는 곳을 수정하려는 것 같았다.

유탄지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천벌을 받을 요나라 새끼들아! 너희들이 이와 같이 천륜에 어긋나는 악한 짓을 하다니, 정말 흉폭하고 악랄하구나! 하늘이 너희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며 너희들로 하여금 곱게 죽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소와 말은 이유없이 쓰러져 죽게 될 것이고 갓난아기는 요절을 하게 될 것이다.

거란 사람들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대장장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매섭게 그를 노려보더니 시뻘겋게 달아오른 무쇠 집게를 들어 그의 두 눈을 찌르려고 했다. 유탄지는 깜짝 놀라 날카롭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 대장장이는 그저 그를 놀래 주려고 한 듯 껄껄 웃으며 무쇠로 만들어진 집게를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바가지 같은 모양의 무쇠 조각을 들어 유탄지의 뒤통수에 올려 보았다.

어느 정도 수정을 가하고 앞과 뒤쪽의 무쇠탈이 완전히 꼭 맞게 되자 그 대장장이는 그 얼굴 쪽의 면구와 바가지와 같은 반원의 무쇠탈을 화로에 집어 넣고 시뻘겋게 달구었다.

그가 소리 높여 몇 마디 했다. 그러자 세 사람의 거란인은 유탄지를 떠메더니 한 탁자 위에 가로 눕히고 그의 머리를 탁자 가장자리 밖으로 나오도록 만들었다.

또 두 사람의 거란인이 와서 유탄지의 머리카락을 잡고 그가 머리를 흔들지 못하도록 했다. 다섯 사람이 손을 잡고 발을 누르는 형편이라 유탄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장장이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면구를 들어올리더니 잠시 식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대장장이는 크게 소리치며 유탄지의 얼굴에 무쇠탈을 뒤집어 씌웠다.

허연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살타는 냄새가 사방으로 번져갔다. 유탄지는 큰소리를 내지르고 기절하고 말았다. 다섯 명의 거란인들은 그의 몸을 뒤집었다. 그 대장장이는 다시 그 반원의 무쇠탈을 그의 뒤통수에 씌웠다. 그러자 두 개의 반원형의 무쇠탈은 하나의 무쇠로 만들어진 공처럼 유탄지의 머리에 씌워지게 된셈이었다. 그런데 무쇠탈은 무척 뜨거운 듯 살갗에 닿자 살갗을 사정없이 태웠다.

그 대장장이로 말하자면 연경성 안에서는 솜씨가 제일 가는 사람이었다. 앞뒤의 무쇠탈 반쪽을 꼭 들어맞게 했으며 전혀 빈틈이 드러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유탄지는 얼마나 시간이 흐르게 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잃고 있다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는 얼굴과 뒤통수에 격렬한 고통을 느꼈다. 끝내 참을 수 없어 그는 재차 혼절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세 번이나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었으나 목이 쉬어 있어서 사람이 내는 소리같지 않았다.

그는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빨을 악물고 얼굴과 뒤통수의 고통을 참았다. 두 시진이 흐르자 그는 손을 쳐들고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손에 느끼는 촉감은 얼음과 같이 차갑고 딱딱했다. 이거야 말로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다는 것을 실증한 셈이었다.

그 무쇠로 만들어진 면구는 어느덧 그의 머리에 씌워진 것이었다. 분개한 그는 함을 주어 무쇠탈을 벗기려고 했다. 그러나 면구는 이미 완전히 봉합되어 있어서 도저히 그의 힘으로는 뜯어낼 수가 없었다. 절망한 나머지 그는 그만 소리내어 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며칠이 지난 후 상처가 점차 아물자 통증이 점점 가셔지고 배고픔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양고기와 면병(麵餠)의 구수한 냄새를 맞고 식용을 금할 수 없어 먹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머리의 무쇠탈을 골고루 만져본 이후여서 이 무쇠탈이 자기의 머리통을 완전히 밀봉하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벗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 며칠 동안은 노발대발 했으나 끝내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교봉이란 개새끼가 나의 얼굴에다 무쇠탈을 씌운 것은 도대체 어떤 의도일까?"

그는 이 모든 것이 소봉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실리 대장이 아자의 명을 받들어 행한 것이었다. 아자는 매일 같이 실리에게 물었다. 유탄지가 철면구를 쓰게 된 이후 동정은 어떠한가에 대해서였다.

처음에 그녀는 유탄지가 그와 같은 무쇠탈을 쓰기 때문에 도중에 죽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소봉이 남쪽 교외에서 열병식을 갖는 날 아자는 실리에게 명하여 유탄지를 단복궁(端福宮)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야율홍기는 소봉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아자를 단복군주(端福郡主)로 봉했다.

이 단복궁은 야율홍기가 그녀에게 내린 궁이었다.

아자는 유탄지의 모양을 보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나의 방법은 정말 쓸모가 있군! 이 녀석이 면구를 쓰고 있으니 형부는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유탄지가 다시 앞으로 몇 걸음 나서자 아자는 손뼉을 치며 "좋아, 좋아!"를 연발했다.

실리, 이 면구는 정말 잘 만들었어요. 그대는 다시 오십 냥의 은자를 가져가 그 대장장이에게 내리도록 해요.

실리는 대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유탄지는 면구에 뚫어져 있는 두 개의 구멍을 통해 아자의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귀엽고 순진하기 이를데 없어 보였다. 거기다가 그녀의 맑고 고운 음성을 듣게 되자 그만 멍해졌다.

아자는 그의 얼굴에 면구를 씌운 모양이 이상야릇했으나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자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물었다.

이 바보 녀석아, 너는 왜 나를 쳐다보지?

유탄지는 말했다.

저는..... 저는..... 모릅니다. 그대는..... 그대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아자는 미소했다.

그 면구를 쓰고 나니 편해, 안 편해?

유탄지는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는 편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불편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자는 깔깔 웃었다.

호호호, 나는 짐작할 수 없는데?

그녀가 보니 그의 면구에 음식을 먹게끔 만들어 놓은 입구멍이 좁게 나 있었다.

국물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은 간신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기를 먹으려면 반드시 손으로 찢은 후에 입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으며 그와 같은 상태에서는 자기의 발가락을 깨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들자 까르르 웃었다.

내가 그대에게 이같은 면구를 씌운 것은 영원히 나를 깨물지 못 하게 하려는 거야!

유탄지는 속으로 기뻐했다.

소저는 저로 하여금..... 저로 하여금..... 그대의 곁에서 시중을 들도록 하려는 것입니까?

아자는 퇘, 하니 침을 뱉었다.

네 녀석은 대단히 나쁜 자야. 나의 곁에 있게 된다면 너는 수시로 방법을 강구하여 나를 해치려고 할텐데 내가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나?

유탄지는 말했다.

저는..... 저는..... 결코 소저를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원수는 교봉 한 사람뿐입니다.

아자는 되물었다.

우리 형부를 해치는 것은 바로 나를 해치는 것과 다름이 없어.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지?

유탄지는 그와 같은 말을 듣자 가슴이 갑자기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고 그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자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우리 형부를 죽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려운 노릇이야. 바보 녀석아! 너는 죽고 싶으냐?

유탄지는 말했다.

나는 물론 죽고 싶지 않소. 하지만 지금 머리에 이 괴상한 면구를 뒤집어 쓰고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모양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죽은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차라리 죽기를 바란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하지만 나는 결코 너를 단번에 죽이지는 않겠다. 먼저 너의 왼손을 잘라주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곁에 서서 시중을 들고 있는 실리에게 말했다.

실리, 그대는 이 녀석을 끌고 나가 먼저 왼손을 자르도록 해요.

실리는 대답했다.

예.

그는 손을 뻗쳐 유탄지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유탄지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니오! 아니오! 소저, 나는 죽고 싶지 않소이다! 그대는..... 그대는.....나의 손을 자르지 마십시오!

아자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한 번 말을 내뱉은 이상 여간해서 거두어 들이지 않는다. 네가..... 네가.....무릎을 꿇고 큰절을 한다면 몰라도.....

유탄지는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이때 실리가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달려들었다.

유탄지는 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무쇠탈이 푸른 돌에 부딛히자 탕, 하는 소리가 났다.

아자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큰절을 하는 소리가 이토록 아름답다니, 나는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는걸? 너는 몇 번 더 절을 해 보아라!

유탄지는 취현장의 소장주였다. 학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며 중원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못난 소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구에게는 이같은 아들 하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소장주가 한 번 부르면 그야말로 백 사람이 달려와 시중을 드는 형편이라 어릴 적부터 귀엽게 자랐지 이와 같은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 소봉을 만나게 되었을 때 죽으면 죽었지 굴복하지 않겠다는 한 가닥의 오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며칠 동안 심령과 육체에 지극히 무서운 상처를 입게 되자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젊은이의 호기는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자가 이같이 말을 하자 즉시 연신 머리를 조아렸으며 탕, 탕, 탕, 하는 소리가 잇따라 방안에 메아리치게 되었다.

유탄지는 선녀와 같은 이 소저가 자기의 절하는 소리가 듣기 좋다고 칭찬해 주자 속으로 은근히 기쁘기도 했다.

아자는 방긋 웃었다.

잘 했어. 이후 네가 나의 말을 잘 듣고 조금도 거역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언제라도 너의 손과 발을 자르겠다. 알았지?

유탄지는 대답했다.

예, 예.

아자는 물었다.

내가 너에게 이와 같은 무쇠탈을 씌워 준 이유를 너는 알겠느냐?

유탄지는 말했다.

저는 잘 모릅니다.

아자는 말했다.

녀석은 정말 둔하기 짝이 없군. 내가 너의 생명을 구해 주었는데도 너는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할 줄 모르는구나. 소 대왕께서는 너를 마구 칼질을 해 박살을 내려 했는데 너는 그것도 모른다 말이냐?

유탄지는 말했다.

그는 우리 아버님을 죽인 원수이니 물론 저를 용납할 수 없겠죠.

아자는 말했다.

그는 일부러 너를 놔 주는 척하고 다시 사람을 시켜서 너를 잡아 왔으며 다른 사람에게 명해 너를 갈기 갈기 찢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네 녀석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죽이지 않았던거야. 그를 속인 채 너를 숨겨주었다. 그러나 소 대왕이 만약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는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한단 말이야. 그리고 나까지도 혼이 나게 돼.

유탄지는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아, 원래 소저가 이 무쇠탈을 만들어 나에게 씌워준 것은 나를 위하고 나의 목숨을 살려 주기 위한 것이었군요. 저는...... 저는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정말.....고맙게 생각합니다.

아자는 그를 희롱했을 뿐만 아니라 속임수를 써서 충심으로 고마워하도록 만들자 마음속으로 무척 우쭐해서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소 대왕을 만나게 되었을 때 절대 말을하여 그에게 너의 목소리를 들려 주면 안돼. 그가 만약 너를 알아 보게 된다면! 흥! 흥! 이와 같이 한 번 잡아당김으로써 너의 왼팔을 잘라 내게 될 것이고 다시 이와 같이 한 번 떨침으로써 너의 오른팔을 찢어 버리게 될 것이다. 실리, 그대는 가서 이 녀석에게 거란 사람의 옷을 입혀 줘요. 그리고 그의 몸을 씻어 주도록 해요.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이 고약해 죽겠어요.

실리는 대답하고 그를 데리고 나갔다.

얼마 후 실리는 다시 유탄지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때 유탄지는 이미 거란인의 옷차림으로 바꿔 입은 후였다.

실리는 아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일부러 유탄지를 울긋불긋한 옷을 입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모양은 마치 어릿광대 같았다.

아자는 입술을 살짝 깨물어 웃었다.

내가 너에게 이름을 지어 주겠다. 어디 보자...... 그래 철축(鐵丑)이라고 부르자.

이후 내가 너를 철축으로 부르면 너는 대답을 해야 한다. 철축!

유탄지는 재빨리 응답했다.

예.

아자는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갑자기 떠오른 일이 있는 듯 말했다.

실리, 서역의 대식국(大食國)에서 한 마리의 사자를 보내왔다죠? 그대는 그 사자를 길들이는 조련사를 데려오도록 해요. 그리고 다시 십여 명의 위사(衛士)들을 불러요.

실리는 대답하고 나갔다.

열 여섯 명의 위사들이 손에 긴 창을 들고 들어와 허리를 굽혀 아자에게 절을 했다.

얼마 후에 대전 밖에서 사자의 포효 소리가 몇 번 들렸다. 곧이어 여덟 명의 장정이 커다란 무쇠로 만들어진 철책을 떠메고 들어왔다. 철책 안에는 한 마리의 숫사자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누렇고 긴 갈기, 발톱과 이빨은 예리했으며 매우 위풍당당했다.

사자를 길들이는 사람은 손에 가죽 채찍을 들고 앞장서서 들어왔다.

아자는 사자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대하자 무척 기뻐했다.

철축, 너는 입으로 그럴싸하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데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구나. 이제 나는 한 가지 시험하여 네가 나의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두고봐야겠다.

유탄지는 대답했다.

시험해 보십시오.

아자는 유탄지의 다답을 듣고 말했다.

네가 머리에 쓰고 있는 무쇠탈이 견고한지 모르겠구나. 너는 머리를 쇠창살 안으로 밀어 넣어 사자가 몇 번 물도록 해 봐라. 사자가 그 무쇠탈을 물어서 깨뜨리는지 봐야겠다.

유탄지는 깜짝 놀랐다.

그건..... 그건 시험해 볼 수 없습니다. 만약 깨진다면 나의 머리통은.....

아자는 언성을 높였다.

너는 왜 이렇게 쓸모가 없느냐! 그까짓 조그만 일을 두고 겁을 내다니, 사내대장부라면 마땅히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 더군다나 내가 볼 때 십중팔구 깨뜨릴 수 없을텐데 왜 겁을 내느냐?

유탄지는 말했다.

소저, 이 일은 장난이 아닙니다. 설사 무쇠탈이 완전히 박살나지 않고 조금 납작하게 된다고 해도 나의 머리는.....

아자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 무쇠탈이 납작해지면 기껏해야 너의 머리도 납작해지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네 녀석은 정말 잔소리가 많구나. 본래 너의 몸은 아름다운 것이 못 되었다. 머리통이 납작해져도 무쇠탈 안에 있어서 남들이 너의 모습을 쳐다볼 수 없는데 잘나고 못난 것을 따져서 무엇하겠다는 것이냐?

유탄지는 급히 변명을 했다.

나는 예쁘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아자는 안색을 굳혔다.

말을 듣지 않겠다 이거지? 좋아, 이젠 네 마음을 알겠다. 너는 그야말로 나를 속일 작정이구나. 너를 저 창살 안으로 집어 넣어 사자의 먹이가 되도록 해주겠다.

그녀는 거란 말로 실리에게 분부했다.

실리는 대답했다.

예.

실리는 대답하고 나서 유탄지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몸이 사자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목숨을 건질 수 없다. 그보다 소저의 말대로 무쇠탈을 쓴 머리를 집어 넣고 나의 운을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구나."

그는 부르짖었다.

잡아당기지 마시오! 잡아당기지 말아요! 소저, 제가 말을 듣겠소.

아자는 웃었다.

그래야 착하지. 내 너에게 말하지만 다음에도 내가 너에게 뭐라고 하면 즉시 해내야 한다. 이러쿵 저러쿵 변명을하여 이 소저가 화가 나게 만든다면.....흥! 흥! 그런 뜻에서 실리, 그에게 서른 번 채찍질을 가하도록 해요.

실리는 대답했다.

예.

그는 사자 조련사의 손에서 가죽채찍을 받아들더니 휙, 하니 유탄지의 등을 내리쳤다.

유탄지는 아파서 악,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아자는 말했다.

철축, 내 너에게 말하지만 내가 사람을 시켜 너를 치는 것은 너를 예쁘게 봤기 때문에 그러는거야. 그런데 네가 그토록 큰소리로 비명을 지른다는 것은 때리는 것이 싫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유탄지는 말했다.

저는 좋아합니다. 소저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시 때리도록 해요.

실리는 휙휙, 하니 잇따라 십여 번을 내리쳤다. 유탄지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머리 위에는 무쇠탈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채찍이 머리 위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슴팍과 등을 채찍에 마구 얻어맞게 되었다.

아자는 그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 넘기는 것을 보고 재미있는지 입을 열었다.

철축, 내가 사람을 시켜 너를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지?

유탄지는 대답했다.

예.

아자는 다짐을 받듯 물었다.

너의 그 말은 정말이냐? 함부로 지껄여 나를 속이자는 것이 아니냐?

유탄지는 황망히 대답했다.

정말입니다. 어찌 감히 소저를 속이겠습니까?

아자는 되물었다.

네가 좋아한다면 어째서 울지 않느냐! 어째서 시원하다고 소리치지 않느냔 말이다.

유탄지는 그녀가 자기에게 안겨 주는 고통에 그만 간담이 서늘해져 분노마저도 잊어 버릴 지경이었다. 따라서 그는 속에 없는 말을 했다.

소저는 저에게 정말 잘 대해 주십니다. 사람을 시켜 저를 때리는 것이 무척 통쾌합니다.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서야 그럴싸한 말을 하는구나. 자, 우리 다시 시험해 보기로 하자꾸나.

철썩, 하니 채찍이 떨어졌다.

유탄지는 재빨리 말했다.

소저께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채찍에 맞으니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순식간에 다시 스물 몇 번의 채찍질을 가했다. 그때마다 유탄지는 "좋습니다."를 연발했다.

아자는 그제서야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해 두기로 하지. 너는 머리를 쇠창살 안으로 디밀어 보아라.

유탄지는 전신의 뼈마디가 갈라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창살가에 이르러 머리통을 철책 사이로 디밀었다.

그 사자는 갑자기 유탄지가 나서서 도전해 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두걸음 물러섰다.

그의 무쇠 머리통을 한참 동안 지켜보더니 다시 두 걸음 물러서서는 입으로 으르릉, 하며 부르짖었다.

아자는 외쳤다.

사자 보고 물라고 해야지! 왜 물지 않는거지?

그 조련사는 몇 번 호통을 내질렀다. 사자는 호통을 듣게 되자 펄쩍 달려오더니 입을 쩍 벌리고는 유탄지의 머리를 깨물었다. 그러나 빠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자의 이빨이 무쇠탈과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였다. 유탄지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저 뜨거운 사자의 입김이 무쇠탈의 숨구멍과 콧구멍, 그리고 입구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자기의 머리통이 사자의 입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앞 쪽 이마와 뒤통수가 격렬하게 아파왔다.

무쇠탈을 뒤집어 쓰게 되었을 때 그의 얼굴 곳곳은 뜨거운 무쇠에 의해 화상을 당해 심한 상처를 입게 되었다. 며칠 지난 후 차츰 상처에 딱지가 앉게 되었으나 사자가 그와 같이 무는 바람에 모든 상처가 일제히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사자는 몇 번 물었으나 이빨이 들어가기는 커녕 오히려 아프기만 하자 성이난듯 오른 발톱을 내밀어서는 유탄지의 어깨를 할퀴었다. 유탄지는 어깨가 격렬히 아픈 것을 느끼고 악, 하는 큰소리를 내질렀다.

사자는 갑자기 자기 입 안에 든 물건이 커다란 소릴 내지르자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유탄지의 머리통을 놔준 후 한 모퉁이로 물러섰다.

조련사는 큰소리로 호통을 내지르며 사자에게 다시 유탄지를 물라고 명령했다.

유탄지는 크게 울화가 치밀어서는 별안간 손을 뻗쳐 조련사의 뒷덜미를 잡고 힘주어 그를 밀었다. 그의 머리통이 철책 안으로 디밀어지도록 했다.

조련사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광경을 보고 아자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잘 한다! 잘 한다! 그 누구도 상관하지 말아요! 그들 두 사람이 죽자사자 싸우도록 내버려 둬요.

거란의 병사들은 유탄지의 손을 떼내려고 하다가 아자의 말을 듣고 손을 멈추었다.

조련사는 힘주어 발버둥쳤다. 그러나 유탄지는 야성이 발동하여 죽어라 하고 그를 놓지 않았다.

조련사는 숫사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깨물어라. 그를 힘주어 깨물어라.

사자는 재촉하는 소리를 듣게 되자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 짐승은 그가 물라고 소리치는 것을 알아 들었을 뿐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두 줄의 허연 이빨로 와락 악물게 되자 우지직, 하는 소리가 나면서 조련사의 머리통이 반쪽 달아나게 되었고 곳곳에 골수와 선혈이 뿌려졌다.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철축이 이겼다.

그녀는 사병들을 시켜서 조련사의 시체와 사자의 철책을 떠메고 나가도록 명했다.

그녀는 유탄지에게 말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네가 나를 즐겁게 해 준다면 나는 너에게 상을 내리겠다.

그런데 무슨 상을 내리는게 좋을까?

그녀는 손으로 턱을 고인 채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유탄지는 말했다.

소저, 저는 상을 바라지 않고 다만 한 가지 일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자는 물었다.

무슨 부탁이냐?

유탄지는 대답했다.

제가 소저의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저는 소저의 노복(奴僕)이 되겠습니다.

아자는 말했다.

나의 노복이 되겠다고? 어째서? 뭐가 좋아서? 음, 알았다. 너는 소 대왕이 나를 보러올 적에 그 기회를 틈타 손을 써서 그를 해쳐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겠지?

유탄지는 재빨리 부인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자는 말했다.

그럼 너는 복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냐?

유탄지는 말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할 수 없고 또 소저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자는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찌하여 나의 노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냐?

유탄지는 말했다.

소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으며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미녀입니다. 저는.....저는..... 매일같이 그대를 보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말은 무례하기 이를데 없었다. 지금 그의 처지를 두고 볼 때 대담하기 짝이 없는 언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자는 매우 흐뭇해 했다.

그녀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용모는 아름답지만 몸매는 아직 제대로 숙성하지 못한 편이었다. 더군다나 중상을 입은 나머지 초췌해지고 누런 얼굴 빛에 삐적 말라 있어 천하제일의 미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결점이 많았다. 그런데 유탄지가 자기의 용모에 그토록 넋을 빠뜨리자 그만 흐뭇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유탄지의 부탁을 들어 주려 했다. 그런데 별안간 궁의 위사가 보고했다.

대왕께서 왕림하셨습니다.

아자는 유탄지를 곁눈질로 쳐다보고 나직이 물었다.

소 대왕께서 오시는데 너는 무섭지 않느냐?

유탄지는 그야말로 두려워서 죽을 지경이었으나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무섭지 않습니다.

그러자 대전 문이 열어 젖혀지고 소봉이 가벼운 가죽 옷차림에 띠를 느슨히 두른 채 걸어 들어왔다.

그는 대전 문 안으로 들어오자 땅바닥에 한 무더기의 선혈과 골수가 뿌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한 사람이 머리에 무쇠탈을 쓰고 있는데 그 모양이 매우 기이하고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아자에게 웃으며 물었다.

오늘 너의 기색이 매우 좋구나, 또 무슨 새로운 장난을 쳤지? 이 사람은 머리에 왜 이와 같이 이상한 것을 쓰고 있느냐?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서역 고창국(高昌國)에서 진공(進貢)한 출두인(鐵頭人)으로 이름은 철축이라고 해요. 사자도 그의 무쇠 머리를 깨지는 못했어요. 이것 보세요. 이것은 바로 사자의 이빨 자국이에요.

소봉은 그 무쇠탈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맹수의 이빨 자국이 완연했다.

아자는 다시 말했다.

형부는 그의 무쇠탈을 벗겨 낼 재간이 있어요, 없어요?

유탄지는 그 말을 듣고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그는 소봉이 중원 군웅들을 상대로 그야말로 용감하게 싸우던 광경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소봉이 두 주먹을 후려치게 되자 자기의 백부님과 부친의 손에 들렸던 강철 방패가 그만 충격을 받고 손에서 빠져 달아나지 않았던가? 그러한 소봉이 자기의 머리에 씌운 무쇠탈을 벗기는 행위는 그야말로 머리통과 몸통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무쇠탈이 처음 그의 머리 위에 씌워지게 되었을 때 그는 그야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낙담했으나 이때만은 무쇠탈이 영원히 자기의 머리에서 벗겨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소봉은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무쇠탈을 가볍게 몇 번 퉁겼다. 쩡, 쩡,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무쇠탈은 정말 견고하고 또한 정교하게 만들어졌는데 망가뜨리기가 아깝다.

아자는 말했다.

고창국의 사자는 이 철두인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푸르죽죽한 얼굴에 송곳같은 뻐드렁니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삼 푼 쯤 사람 같고 칠 푼 쯤은 도깨비 같아 그를 대한 사람들 가운데 놀라 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대요. 그래서 그의 부모가 이와 같은 무쇠탈을 그에게 씌워 주어 다른 사람을 놀라지 않도록 한 것이래요. 형부, 저는 그의 본래 모습이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지 매우 보고 싶어요.

유탄지는 그만 놀라 전신을 바들바들 떨 지경이었고 자기도 모르게 이빨을 딱딱 마주치게 되었다.

소봉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저 사람은 저토록 두려워하는데 그의 무쇠탈을 벗겨서 무엇하느냐? 저 사람이 어릴 적부터 저와 같은 무쇠탈을 쓰는데 버릇이 들어 있었다면 무쇠탈을 무사히 벗겨 낸다고 해도 그는 마음 편안한 날을 보내지 못할 것이다.

아자는 손뼉을 쳤다.

그래야 재미있잖아요? 저는 거북이를 보게 되면 언제나 잡아서 등의 두꺼운 껍질을 벗기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거북이가 껍질이 없어도 사는지 못 하는지 두고 보는 거예요.

소봉은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 거북의 등이 없는 거북의 모양을 상상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 같아 그는 말했다.

아자, 너는 어째서 언제나 남으로 하여금 죽지도 살지도 못 하는 처지에 빠뜨리는 일을 좋아하느냐!

아자는 코웃음을 쳤다.

흥, 또 형부는 저를 탓하시는군요? 저는 물론 아주와 다르겠죠. 제가 아주와 같다면 형부가 어째서 며칠 동안이나 저를 보려고 하지 않았겠어요?

소봉은 말했다.

남원대왕인가 하는 자리에 앉고 보니 매일같이 바빠서 여가가 없구나. 그러나 나는 언제나 매일같이 너를 찾아와서 한 동안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느냐?

아자는 말했다.

한동안 저와 시간을 보낸다구요? 흥! 한동안 시간을 보내요? 나는 바로 형부가 그저 그렇게 얼렁뚱땅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만약 내가 아주였다면 형부는 반드시 언제나 내 곁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한동안이니 반 동안이니 찾지 않았을 것이 아니에요?

소봉은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도 사실인지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형부는 어른이라 어린애인 너와 함께 놀 흥미가 없단다. 너는 나이 어린 여자 친구들과 함께 우스개 소리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도록 하려므나.

아자는 울화가 치민다는 듯 말했다.

어린애, 어린애..... 나는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에요! 나와 함께 놀 흥미가 없다면 형부는 또 무엇하려 왔죠?

소봉은 말했다.

나는 너의 몸이 좀 나아졌는가 보러 왔다. 오늘 웅담을 먹었느냐?

아자는 비단 방석을 들어 땅바닥에 던지며 발길로 찼다.

내 마음 속이 즐겁지 못 할 때는 매일 백 개의 웅담을 먹는다 하더라도 몸이 나아질 수가 없어요!

소봉은 그녀가 마구 성질을 부리는 것을 보고 그녀가 만약 아주였다면 자기로서는 그녀로 하여금 화를 풀고 기뻐하도록 달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짓궂기만하고 악독하기만 한 이 소녀에 대해서는 혐오감이 치밀어 오를 뿐이었다.

너는 좀더 쉬도록 해라.

소봉은 몸을 일으키고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아자는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면서 금세라도 울음을 터드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흘낏 유탄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슴 가득히 끓어 오르는 분노를 대뜸 유탄지에게 쏟았다.

실리, 그에게 다시 서른 번 채찍질을 가해요.

실리는 대답했다.

예.

그는 채찍을 들었다.

유탄지는 큰소리로 물었다.

소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아자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빨리 쳐요!

실리는 휙, 하니 채찍을 내려쳤다.

유탄지는 말했다.

소저,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말씀을 해 주신다면 다시 어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실리는 휙, 하니 다시 채찍질을 가했다.

아자는 말했다.

나는 때리고 싶으면 때리는 것이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을 자격조차 없다. 설마 내가 너를 잘못 때린다는 것이냐? 너는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묻는데 바로 네가 그런 질문을 하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다.

유탄지는 말했다.

그대가 먼저 나를 때렸기 때문에 제가 묻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묻기도 전에 그대는 사람을 시켜 나를 때린 것입니다.

휙, 하며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철썩, 하는 소리가 유탄지의 몸에서 났다. 쉭, 쉭, 하니 다시 세 번 채찍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자는 웃으며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질문을 해오리라 짐작했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먼저 너를 때리게 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너는 질문을 했다. 그러니 이야말로 내가 귀신처럼 일을 미리 알아 맞춘 것이 아니겠느냐! 이로써 네가 나에게 아직도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 충성심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아가씨가 갑자기 사람을 때리고 싶은 때 네가 정말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면 네 스스로 용기 있게 나서서는 때리라고 몸을 바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는 잔소리만 늘어 놓고 마음속으로 승복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좋아 네가 때리는 것이 싫다면 너를 때리지 않도록 하지.

유탄지는 "너를 때리지 않도록 하지" 라는 말을 듣자 전신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섰다.

아자가 만약 그를 때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 채찍질을 가하는 것보다 십 배나 더 참혹한 형벌을 생각해 내어 자기에게 가할 것이 틀림 없었다. 따라서 그는 순순히 서른 대의 채찍을 맞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저가 저를 때리는 것은 커다란 은덕을 베푸는 것이고 소인의 몸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소저께서는 더 많은 채찍질을 해주십시오. 많이 때리면 때릴수록 좋습니다.

아자는 방긋 웃었다.

역시 너는 총명한 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든 잔꾀를 부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너는 많이 때리면 때릴수록 좋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기뻐서 너를 용서할 줄 아느냐?

유탄지는 말했다.

아닙니다. 소인은 소저에게 감히 잔꾀를 부리지 못합니다.

아자는 말했다.

그럼 많이 때리면 때릴수록 좋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바란다는 말이겠지?

유탄지는 대답했다.

예, 소인은 진정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대의 뜻을 이루어 주지. 실리, 그에게 백 번의 채찍질을 가하도록 해요.

그는 많이 맞을수록 좋아한대요.

유탄지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백 번의 채찍을 맞게 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설사 자기가 싫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은 때리려고 마음먹은 이상 때릴 것이고 자기가 아무리 항변을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자는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너는 어째서 말을 하지 않느냐? 속으로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이겠지? 내가 사람을 시켜 너를 때리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느냐?

유탄지는 말했다.

소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승복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소저가 소인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것은 완전히 소인의 뜻을 이루어 주겠다는 호의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방금 너는 어째서 말을 하지 않았지?

그건..... 그런..... 소저가 나에게 태산과 같은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하니 소인은 감격한 나머지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장래에 어떻게 이 은혜에 보답할까 하는 생각만 했었죠.

아자는 그 말을 받았다.

좋아. 그대는 나에게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를 생각했다고 말했겠다? 내가 채찍질을 가해 너를 때리게 될 때마다 너는 그 채찍질의 원한을 마음속에 기억해 두겠다는 수작이 아니냐?

유탄지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답이라고 말한 것은 진정한 보답입니다. 소저를 위해서는 이 몸이 가루가 되어도 좋고 끓는 물 속이나 치솟는 불길 속에 들어가라고 하더라고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다면 때려 주지.

실리는 그 말에 응하듯 채찍을 휘둘렀다. 휙, 하니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채찍이 철썩, 하고 떨어졌다.

오십 여 대를 때리게 되었을 때 유탄지는 무릎에 기운이 빠져 서서히 꿇어 앉게 되었다.

아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소리내어 용서를 빌기만 기다렸다.

그가 용서해 달라고 한 마디만 한다면 또 구실을 붙여 재차 그에게 오십 번의 채찍질을 더 가할 생각이었다.

유탄지는 이때 정신이 흐릿해졌으며 어느새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그저 나직이 신음 소리를 내고 있을 뿐 용서를 빌 수가 없었다. 실리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꼬박 백 번을 채운 이후에야 손을 멈추었다.

아자는 유탄지가 거의 숨이 다 넘어가는 상태로 반 이상은 죽어가는 것을 보자 흥미가 싹 가시고 말았다.

소봉이 자기를 아랑곳하지 않던 표정을 떠올리게 되자 마음이 여간 우울하고 답답하지 않아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를 떼메고 나가도록 하세요. 저 사람은 재미가 없구만! 실리, 무슨 새로운 장난이 없을까?

이번 채찍질로 인해 유탄지는 한 달 동안 상처를 조섭해서야 겨우 치유되었다.

거란 사람들은 아자가 그를 잊어 버린 줄 알고 다시 그를 끌어내서는 괴롭히지 않고 송나라 포로들 틈에 넣어 온갖 거칠고 힘든 일들을 시켰다. 똥을 퍼내거나 양의 우리를 짓거나 소똥을 줍고 양가죽을 다듬는 일들을 시켰던 것이다.

유탄지는 머리에 무쇠탈을 쓰고 있어 모든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모욕을 주었다.

한나라의 동료들까지도 그를 짐승처럼 취급했다.

유탄지는 그와 같은 수모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마치 벙어리처럼 행세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욕하고 때려도 그는 항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누가 말을 타고 달려가게 되면 그는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오로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언제쯤 소저는 다시 나를 불러 채찍질을 가하게 될까?"

그는 아자를 볼 수만 있다면 채찍질을 얻어맞는 고통쯤은 즐겁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 번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두 달이 지나 날이 점차 따뜻해졌다. 어느 날 유탄지는 뭇 사람들을 따라 남경성 밖에서 흙을 옮겨 벽돌을 쌓고 있었다.

남경성 남문 옆의 성벽을 더 두텁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몇 필의 말이 남문으로 달려왔다.

그때 맑고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어마, 저 철축이 아직도 죽지 않았구나. 나는 이미 죽은 줄 알았지. 철축, 너 이리 오너라.

바로 아자의 음성이었다.

유탄지가 밤낮으로 생각하고 기다렸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런데 아자가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의 두 다리는 마치 땅에 못박힌 듯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가슴이 쿵쿵 크게 뛰놀았고 신바닥에 땀이 흥건히 고이게 되었다.

아자는 소리쳤다.

철축, 이 죽일 녀석 같으니, 내가 부르는데 너는 못 들었단 말이냐?

유탄지는 그제서야 대답했다.

예, 소저.

그는 몸을 돌려 그녀의 말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때는 거의 사 개월이 지난 터라 아자의 얼굴은 더욱 붉고 윤기가 돌고 있었으며 더욱 아리따워져 있었다.

유탄지는 가슴이 쿵 하니 뛰노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만 돌에 걸려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뭇 사람들이 왁, 하니 웃는 가운데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감히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고 황망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자는 기분이 매우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철축, 너는 어떻게 아직 죽지 않았느냐?

유탄지는 말했다.

저는..... 소저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보답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죽을 수 있겠습니까?

아자는 더욱 기쁜 듯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오로지 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는 노복이 필요했던 참이었다.

거란 사람들은 행동이 거칠어서 일을 그르치기 쉬운데 네가 아직 죽지 않았다니 참 잘 되었다.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유탄지는 대답했다.

예.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아자는 손을 저어 실리와 다른 세 명의 거란 위사를 돌려보냈다. 실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간에 다른 사람이 권고하거나 간여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이 무쇠탈을 쓴 사람은 약한 체질이니 그녀의 곁에 있어도 결코 그녀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당부했다.

아무쪼록 군주께서는 일찍 돌아오도록 하십시오.

네 사람은 말에서 내려 성문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아자는 말을 천천히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칠팔 마장쯤 나가게 되자 그녀는 더욱 황량한 곳으로 찾아들더니 끝내 음산하기만 한 산골짜기 안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그 골짜기의 땅바닥에는 오래 묵은 풀과 나뭇잎들이 썩어 질퍽거리고 있었다.

다시 한 마장쯤 나아가게 되자 산길이 험악해서 말을 탈 수가 없었다. 아자는 말에서 내려 유탄지에게 말을 끌고 가도록 했다. 다시 한동안 나아갔다.

사방은 음산하기만 했다. 싸늘한 바람이 좁디좁은 산골짜기 동굴의 저쪽에서 휙휙 불어와 두 사람은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아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되었다. 바로 이곳으로 정하자.

그녀는 유탄지에게 마고삐를 나무에 매게 한 다음 말했다.

너는 오늘 본 일을 남에게 조금도 누설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에게 들먹여서도 안 된다. 알겠느냐?

유탄지는 대답했다.

예, 예.

그는 마음속으로 미칠 듯 기뻐했다. 아자가 그 한 사람만을 시종으로 데리고 이토록 으슥한 곳을 찾아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자는 손을 품속으로 집어넣더니 짙은 황색의 조그만 나무 향로를 꺼내 땅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나중에 어떤 이상야릇한 벌레들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너는 호들갑을 떨지 말아라.

그리고 절대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

유탄지는 대답했다.

예.

아자는 다시 조그만 보따리를 꺼내 펼쳤다. 안에는 몇 조각의 황색, 흑색, 자색, 홍색의 향(香)이 있었다.

그녀는 몇 조각의 향을 집어 그 나무 향로 안에 집어넣고 화도와 화석으로 불을 당겨 향을 피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저쪽 나무 아래에 가서 지켜보도록 하자.

아자는 나무 아래에 가 앉았다. 유탄지는 감히 그녀의 곁에 앉을 수 없어서 일장쯤 떨어진 그녀의 아랫쪽에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바람이 그녀 쪽에서 불어오는지라 한풍이 불 때마다 바람에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엷은 향기가 실려와 유탄지는 그만 정신이 멍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는 아자가 영원히 그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 있기를 바랬으며 자기는 영원히 이와 같이 그녀를 모시고 싶었다.

그가 정히 취한 듯 넋을 잃은 듯한 심정에 젖어 있을 때 갑자기 풀밭에서 삭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란 풀밭 속에서 불그레한 것이 움직였다. 커다란 한 마리의 지네였는데 온몸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고 머리에는 조그만 혹같은 것이 툭 불거져 있었다.

흔히 보는 지네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 지네는 향로에서 풍기는 향냄새를 맡은 듯 곧장 나무향로로 다가갔다. 그리고 목정 아래 쪽에 있는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아자는 품속에서 한 조각 두터운 비단을 꺼내더니 발걸음을 죽이고 목정으로 다가가 그 비단으로 목정을 덮었다.

아자는 목정을 꽉 싸매 지네가 기어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 후에야 목정을 말 목에 걸려 있는 가죽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고 웃으며 말했다.

가자.

그녀는 말을 끌고 나아갔다.

유탄지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이 조그만 목정은 정말 이상야릇하기 짝이 없구나. 십중팔구 향을 피웠기 때문에 커다란 지네를 이끌어 들인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커다란 지네로 무슨 장난을 치려고 소저는 이험한 산골로 들어와 잡아가는 것일까?

아자는 단복궁에 돌아오자 시위들에게 분부하여 단복궁의 대전 옆에 있는 조그만 방을 치우도록 분부하고 유탄지가 거처하도록 안배했다.

유탄지는 크게 기뻐햇으며 이제부터는 종종 아자와 만날 수 있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아자는 유탄지를 불렀다. 그를 편전으로 데리고 가서 두 사람만 남자 편전의 문을 닫았다.

이렇게 되자 편전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아자는 서쪽에 있는 한 옹기 그릇 앞으로 다가서더니 옹기 그릇의 뚜껑을 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 봐, 꽤 웅장하지?

유탄지는 그 옹기 그릇 옆으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어제 잡아온 그 커다란 지네가 옹기 그릇 안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아자는 옆에 준비해 두었던 한 마리의 커다란 숫닭을 들더니 단도를 뽑아 들고 그 수닭의 날카로운 주둥이와 발톱을 잘라 내고 그 옹기 그릇 안으로 넣었다.

그 커다란 지네는 즉시 숫닭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닭의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 커다란 숫닭은 중독이 되어 죽고 말았다. 지네의 몸뚱이가 부풀어 오르는 듯 점점 커졌으며 붉은 머리는 더욱 붉어져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떨어질 듯했다.

아자는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띠우며 나직이 말했다.

됐다. 됐다. 한 가지 무공을 연마할 수 있게 되었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지네를 잡은 것은 한 가지의 무공을 연마하려고 했던 것이군. 이것을 오공공(蜈蚣功)이라고 하던가?"

이와 같이 이레 동안 지네에게 먹이를 먹여 주었다. 매일같이 지네로 하여금 커다란 숫닭의 피를 빨아 마시게 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여드레가 되는 날 아침, 아자는 다시 유탄지를 편전으로 부르더니 싱글벙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철축, 내가 너에게 어떻게 대해 주었지?

유탄지는 대답했다.

소저는 저에게 태산과 같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아자는 말했다.

너는 나를 위해 몸이 박살이 나도 좋다고 했으며 끓는 물 속, 타는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겠다고 했다. 그게 정말이냐, 아니면 거짓말이냐?

유탄지는 대답했다.

소인은 감히 소저를 속이지 못합니다. 소저께서 명하시는 일이 있다면 소인은 결코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아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잘 되었다. 내 너에게 말하지만 나는 한 가지 무공을 익히려고 하는데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있어서 도와 주어야 한다. 너는 나를 도와 무공을 연마 하도록 하겠느냐? 만약 연마하는데 성공한다면 나는 반드시 너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유탄지는 말했다.

소인은 물론 소저의 분부를 마땅히 받들어야 하지요. 상을 내릴 것도 없습니다.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잘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연마하도록 하자.

그녀는 단정히 앉아 두 손을 마구 비볐다. 그리고 눈을 감고 운기행공하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는 손을 뻗쳐 옹기 그릇 안으로 집어 넣어라. 그러면 그 지네는 반드시 너를 물 것이나 너는 절대 움직여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그 지네가 너의 피를 빨도록 하되 될 수 있으면 많이 빨도록 하는 것이 좋다.

유탄지는 이레 동안 매일 같이 그 커다란 지네가 닭의 피를 빨아 마시는 것을 보아왔다.

지네가 몇 번 빨지 않아 살아 펄펄 날뛰던 커다란 숫닭이 죽는 것을 보고 지네의 독이 지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자가 그와 같이 말하자 크게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자는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왜 그래? 싫다는 것이냐?

유탄지는 대답했다.

싫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만.....

아자는 그 말을 받았다.

왜 그래? 다만 오공의 독성이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죽을까봐 두려워졌다는 것이지?

너는 사람이냐, 아니면 숫닭이냐?

유탄지는 대답했다.

나는 숫닭이 아니죠.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숫닭은 지네에게 피를 빨려서 죽게 되었지만 너는 숫닭이 아닌데 어찌 죽는단 말이냐? 너는 기꺼이 나를 위해 끓는 물 속이나 타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간다고 했으며 몸이 박살이난다 하더라도 거절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네가 너의 피를 빨아 마신다고 해서 너의 몸이 가루가 되기라도 한단 말이냐?

유탄지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쳐들고 아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불그레한 입술을 삐죽 내밀고 경멸에 가득찬 표정을 짓고 있는게 아닌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대하자 멸시를 받기보단 죽는 게 낫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귀신에게 홀린 듯 말했다.

좋습니다. 소저의 분부를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고 오른손을 천천히 옹기 그릇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가 손가락을 옹기 그릇 안으로 집어넣자마자 손가락 끝에 마치 침으로 찌르는 듯 격렬한 아픔이 전해왔다. 그는 참을 수 없어 손을 움츠리려고 했다. 아자가 부르짖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마!

유탄지는 억지로 참고 눈을 떴다.

지네는 바로 자기의 중지를 깨물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피를 열심히 빨아들이고 있었다.

유탄지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즉시 손을 들어 땅바닥에 지네를 팽겨쳐 버리고 발로 밟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자와 마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두 눈이 자기의 등을 주시하고 있음을 상기하고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지네가 피를 빠는 것은 별로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지네는 점점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기의 중지는 은은히 짙은 자색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색 빛은 점점 짙어 가더니 새까맣게 변했다. 그리고 다시 조금 이후에 보니까 그 검은 빛이 손가락에서 손바닥으로 전해지고 손바닥에서 팔을 따라 위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유탄지는 이때 이미 죽음을 각오한 터라 오히려 태연한 표정으로 지네가 자기의 피를 빨아들이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런데 그 미소는 무쇠탈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아자는 볼 수가 없었다.

아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네를 지켜보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한 듯 조금도 눈을 떼지 않았다.

끝내 그 지네는 유탄지의 손가락을 놓고 옹기 그릇 밑바닥에 웅크리고 꼼짝하지 않았다.

아자는 유탄지에게 명했다.

너는 가만히 지네를 조그만 목정 안에 넣어라. 지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

유탄지는 그녀의 말을 따라 그 지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걸상 앞에 놓여 있는 조그만 목정 안에 집어넣었다.

아자는 뚜껑을 닫았다. 잠시 후 목정의 구멍에서 한 방울 한 방울 시커먼 피가 흘러나왔다.

아자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우고 재빨리 손바닥을 뻗어 그 피를 받았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운기행공하여 그 피를 모조리 손바닥으로 흡수해 들였다.

"저것은 나의 피인데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구나. 원래 그녀는 오공독장(蜈蚣毒掌)을 연마하고 있었구나."

잠시 시간이 흐르자 목정에서는 검은 피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자는 목정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지네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자는 두 손을 비비고 자기의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두 손바닥은 백옥처럼 희고 고왔으며 피로 얼룩져 더러워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는 사부에게서 훔쳐 들은 그 무공을 연마하는 방법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고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그녀는 목정을 거꾸로 들어 죽은 지네를 땅바닥에 쏟은 후 총총히 편전에서 나갔다.

나가면서 그녀는 유탄지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유탄지란 사람이 바로 그 죽어 있는 지네와 똑같은 것처럼 다시 쓸모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유탄지는 멍하니 아자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옷자락을 풀어헤치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 검은 기운은 이미 겨드랑이까지 만연되어 있었고 팔이 몹시 근질거리고 있었다.

수천 수만 마리가 되는 벼룩이 동시에 깨무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리를 내지르며 손을 뻗쳐서는 긁기 시작했다. 긁으니 더욱 근질근질해졌다.

마치 골수 속에, 그리고 심장과 폐속에도 벼룩이 기어들어가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간지러운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펄쩍펄쩍 뛰며소리 높이 외쳤다. 그리고 무쇠탈이 씌워진 머리로 벽을 마구 들이받았다.

탕, 탕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는 그저 자기가 빨리 기절해 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의식을 잃게 된다면 이와 같이 견디기 어려운 간지러움에서 해방될 것 같았다.

그런데 몇 번 더 벽에다 머리를 부딪히게 되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품속에서 한 가지의 물건이 떨어졌다. 그것은 기름을 먹인 베로 만든 조그만 보따리였다.

보따리가 풀어지면서 한 권의 노란 표지의 책이 굴러나왔다.

이것은 바로 그가 들은 범문(梵文)의 경서였다. 이때 너무나 간지러워 그는 그 책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책은 떨어지면서 펼쳐져 있었다. 유탄지는 전신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워 마구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몸을 땅바닥에 비벼대는가 하면 마구 몸뚱이로 쾅쾅 들이받기도 했다. 잠시 후 탈진한 그는 엎드려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침까지 무쇠탈의 구멍으로부터 줄줄 흘러 내리게 되었다.

그 눈물과 콧물, 그리고 침은 범문으로 씌어진 경서 위에 떨어지게 되었다.

정신이 몽롱해진 가운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책장은 이미 눈물, 콧물과 타액으로 젖어 있었다. 우연히 고개를 쳐들고 힐끗 바라 보았을 때 갑자기 책장 위의 꾸불꾸불한 글씨 사이에 한 승려의 모습을 그린 도형이 나타났다.

그 승려의 자세는 매우 특이했다. 머리를 사타구니 사이로 집어넣고 손을 뻗쳐서는 두 손으로 발(足)을 잡고 있는 형태였다.

그는 그 책의 이상야릇한 자세를 유의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간지러워서 거의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라 땅바닥에 엎드려 마구 온몸을 긁어댔다.

그는 마구 몸을 뒹굴며 긁었다. 그러다가 조심하지 않는 사이에 어쩌다 보니 머리통이 두 다리 사이에 끼어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일시 움질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득이 손을 잠시 동안 멈추어서 한숨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책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 책에 그려져 있는 그 삐쩍 마른 승려의 자세는 바로 자기가 지금 취한 자세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그는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한편 또한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와 같은 자세를 취한 이후 몸에 간지러운 기운은 똑같았으나 숨을 내쉬고 뱉는 것은 한결 수월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즉시 머리를 사타구니 아래에서 급히 뽑을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그와 같은 자세로 땅바닥에 웅크린 채 그려져 있는 승려의 자세를 ㅂ받아 왼손마저 뻗쳐 왼발을 잡고 아래턱이 땅에 닿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그 자신은 이미 도형 중의 승려의 자세와 똑같게 되었고 숨쉬는 것이 더욱 수월해지고 쾌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엎드려 있게 되자 두 눈은 더욱 그 책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재차 그 승려를 보게 되었을 때 그 승려의 옆에 두 개의 커다란 누런 글자가 씌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꾸불꾸불한 것이 그 형상이 매우 이상야릇했다. 그런데 그 필획에는 지극히 많은 조그만 붉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유탄지는 그렇게 웅크려 있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자마자 즉시 온몸이 간지러워지면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다시 머리를 두 발 사이에 끼우고 두 손으로 발을 잡았다. 그리고 아래턱을 땅바닥에 닿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이상야릇한 자세를 취하자 비로소 숨쉬는 것은 재차 순조로워졌다.

그는 그림의 승려를 바라보며 그 승려의 곁에 그려진 두 개의 괴상한 글자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글자 가운데 그 조그만 화살표를 보고 있으려니까 그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필획을 따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오른팔의 매우 간지럽던 현상이 한 가닥 따뜻한 기운으로 화하는 것 같더니 목구멍에서 가슴팍으로 나아갔으며 몇 번 돌고 돌아서는 양쪽 어깨를 지나 머리 위로 치솟아 오른 후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 괴이한 글자 옆에 그려져 있는 조그만 화살표를 따라 잇따라 그와 같은 생각을 몇 번 하게 되었다.

매번 생각을 할 때마다 한 가닥 따뜻한 기운이 머리 속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팔의 간지러움도 어느 정도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매우 이상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원인을 생각해 볼 여가가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을 되풀이했다.

삼십여 차례 반복하게 되었을 때 팔은 이제 조금밖에 간지럽지 않았다. 다시 십여 차례를 하게 되자 손가락과 손, 그리고 팔, 각 처에 전혀 간지러운 느낌이 없었다.

그는 머리를 사타구니 아래서 뽑아내고 손을 뻗쳐 바라보았다.

손의 검은 기운은 이미 모조리 가셔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는 크게 기뻤다.

그러나 번쩍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부르짖었다.

어이쿠, 야단났다! 지네의 극독이 모조리 내 머리속으로 흘러들어가고 말았구나!

그러나 그토록 간지러운 것이 사라졌는지라 설사 어떤 후환이 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는 본래 그림이 분명히 없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이상야릇한 화상이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 화상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게 되었을까? 이 화상이야말로 틀림없이 부처님으로서 나의 목숨을 구하러 나타나신 것일게다."

그는 즉시 땅바닥에 엎드려 공손하게 그 그림 속의 괴이한 승려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무쇠탈이 땅바닥에 부딪히자 땅땅, 소리가 났다.

그는 물론 책 속의 도형이 천축에 있는 일종의 약초물로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젖었을 때는 그림이 드러나게 되고 마르게 되면 그 그림이 사라지기 때문에 아주와 소봉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림 속의 자세와 운기행공하는 노승 곁에는 하나같이 범문이 있어 설명을 해 놓고 있었다.

소림사의 윗대 고승들은 범문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 도형의 비밀을 알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문자의 가르침에 따라 역근경이란 신공(神功)을 연성할 수 있었다.

유탄지는 너무나 간지러워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눈물 콧물을 짜내며 침마저 질질 흘리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분비액들이 모조리 책장 위에 떨어지게 되어 그림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은 무공을 연마할 때 마음속에서 생겨나 정신을 어지럽히는 심마(心魔)를 물리치는 방법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천축(天竺)에서 고대의 고인이 창안해 낸 유가비술 이었던 것이다. 이때 유탄지는 한참 동안 멍해 있다가 너무나 지친 나머지 그만 땅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막 몸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아자가 총총히 편전을 걸어 들어왔다.

그러다가 그의 거의 벌거 벗다 시피한 이상야릇한 모습을 보고는 아, 하더니 부르짖었다.

어째서 너는 아직도 죽지 않았느냐?

유탄지는 깜짝 놀라 말했다.

소인..... 소인은 아직 죽지 못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슬퍼했다.

"그녀는 이미 내가 죽은 줄로 알고 있었구나."

아자는 말했다.

네가 죽지 않았다면 잘 되었다. 빨리 옷을 입고 나를 따라 다시 독벌레를 잡으러 가자.

유탄지는 대답했다.

예.

그는 아자가 편전에서 나간 다음 거란의 병사에게 가서 한 벌의 옷을 얻어 입었다.

아자는 유탄지를 데리고 황량하고 으슥한 곳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신목왕정으로 독충을 유인해서 사로잡았고 다시 수닭의 피로 키운 후 유탄지의 몸에 흐르는 피를 빨아 마시도록 했다. 그런 연후에 그녀 자신의 무공을 연마했다.

두 번째 피를 빤 것은 한 마리의 푸른 거미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한 마리의 커다란 전갈이었다.

유탄지는 매번 그 책에 있는 도형을 따라서 벌레의 독을 해소시킬 수 있었다.

아자는 과거 성숙해에서 사부가 이 신공을 연마하는 것을 훔쳐 보았는데 그때마다 매번 한 구의 시체를 보았었다.

그 시체들은 하나같이 성숙파의 제자들이 인근의 주민들을 사로잡아 온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유탄지가 중독된 이후 틀림없이 죽게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속으로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와 같이 끊임없이 벌레를 잡아 무공을 연마했다. 삼 개월이 지나게 되자 남경성 밖 주위의 십여 리 안의 독물들은 점차 갈수록 적어지게 되었고 향기에 끌려나온 독벌레는 대체로 몸이 가늘고 적을 뿐만 아니라 독기가 대단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독충들뿐이었다.

두 사람은 갈수록 성에서 멀리 가게 되었다.

이날 그들은 성의 저쪽 삼십 리 밖에서 목정에다가 향을 피우게 되었고 꼬박 한 시진 이상을 기다려서야 풀밭에서 삭삭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뱀이나 벌레가 다가오는 기척이었다.

아자는 말했다.

납짝 엎드려.

유탄지는 즉시 몸을 엎드렸다. 그러자 삭삭하는 소리가 크게 이는데 여느 때의 소리와 달랐다. 그리고 그 기이한 소리 가운데는 한 가닥 구역질을 나게 하는 비린내가 풍겼다. 기다란 풀들이 나누어지면서 하얀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한 마리 커다란 구렁이가 슬슬 기어왔다.

구렁이의 머리는 세모꼴을 하고 있었으며 머리끝에는 하나의 울퉁불퉁한 혹이 높다랗게 달려 있었다.

북쪽에는 본래 뱀이나 독벌레가 적은 편이었다. 구렁이의 머리에 혹이 달린 것은 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구렁이는 목정 곁으로 다가가더니 목정을 가운데 두고 빙빙 돌았다. 그런데 그 구렁이의 몸 길이는 이 장이나 되었고 두께는 팔뚝만 해서 도저히 목정에 난 구멍으로는 기어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구렁이는 향로와 목정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는 커다란 머리를 끊임없이 흔들며 힘주어 그 목정을 들이받았다.

아자는 이토록 커다란 독물을 유인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무척 놀라서 일시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살그머니 유탄지의 곁으로 다가가서는 나직이 말했다.

어떡하지? 만약 구렁이가 저 목정을 부수게 된다면 야단나는 것이잖아.!

유탄지는 갑자기 그녀가 이토록 부드럽게 상의하는 투로 말하는 소리를 듣자 그야말로 커다란 총애를 받은 듯 황송하게 생각하여 대뜸 용기백배해져서 말했다.

상관 없습니다. 내가 뱀을 쫓도록 하죠.

그는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구렁이에게 다가갔다. 그 구렁이는 기척을 듣고 즉시 또아리를 틀며 머리를 쳐들었다. 핏빛 혓바닥을 내밀며 쉭, 쉭, 하는 소리를 내는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유탄지는 그와 같은 위세를 보고 감히 경솔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일진의 싸늘한 바람이 엄습해 왔다. 서북쪽에서 한가닥 불에 탄 듯한 선이 쭉쭉 이쪽으로 뻗쳐왔다. 그리고 삽시간에 그들 앞에 이르렀다.

가까이 이르러 똑똑히 보니 그것은 불에 탄 자국이 아니라 풀덤 속을 헤치고 어떤 물건이 기어서 다가오는데 푸른 풀이 그 물건에 닿자마자 즉시 말라 불에 탄 듯한 모양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차가운 한기는 그 물건이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심해졌다. 유탄지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는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풀더미 위의 말라 비틀어지고 불에 탄 듯한 누런 선이 자꾸만 목정 쪽으로 그어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불에 타는 듯한 선을 긋고 있는 것은 바로 한 마리의 누에였다.

이 누에는 옥처럼 순백색을 띠고 있었는데 약간 푸른 빛이 감돌았고 보통 누에보다 두 배 정도 컸다. 그리고 몸뚱이는 수정처럼 투명했다.

본래 그 구렁이는 기세가 등등했는데 이때는 매우 겁을 내는 듯햇으며 될 수 있는 한 세모꼴의 커다란 머리를 자기의 몸뚱아리 아래쪽으로 숨기려고 했다.

그 수정과 같은 누에는 신속하기 이를데 없이 구렁이의 몸 위로 기어올랐다.

이 누에가 기어오르는 곳마다 불에 탄 것과 같은 흔적이 나게 되었다. 그렇게되자 그 구렁이의 척추에는 불에 탄 듯한 선이 저절로 그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누에가 뱀의 대가리 쪽으로 기어올라 가게 되었을 때 구렁이의 기다란 몸통이 세로로 두 조각으로 쪼개지는 것이 아닌가?

그 누에는 구렁이의 머리통에 있는 독 주머니 안으로 기어들어 가더니 독액을 빨아 마시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누에의 몸은 크게 부풀어올라 멀리서 보니 수정병에 청자 색의 액즙을 담아 놓은 것 같았다.

아자는 놀랍고 기뻐 나직이 말했다.

저 한 마리의 누에가 저토록 무서운 것을 보이 아무래도 독물 가운데서는 대왕 노릇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유탄지는 속으로 크게 걱정이 되었다.

"저토록 극독을 가진 누에가 만약 나의 피를 빨아 마시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되겠구나."

이때 누에는 목정을 가운데 두고 빙글 한 바퀴 돌더니 목정 위로 기어올랐다. 누에가 이르는 곳마다 목정 위에는 타는 듯한 흔적이 새겨지게 되었다.

누에는 마치 영물인 듯 목정 위에 기어올라 한 바퀴 돌더니,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가는 죽어서 살아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듯 놀랍게도 다른 독물처럼 목정 안으로 기어들지 않았다. 목정 위에서 기어내려 오더니 곧장 서북쪽으로 기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자는 한편으로는 흥분되고 한편으로 초조해서 부르짖었다.

빨리 쫓아! 빨리 쫓아!

그녀는 비단폭을 꺼내 목정을 싸서 품에 넣고 누에 뒤를 쫓아갔다. 유탄지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불에 탄 듯한 흔적을 찾아서 쫓아가는 것이라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 누에는 조그만 벌레에 불과했으나 그야말로 기어가는 것은 질풍과 같이 빨라 삽시간에 수장을 나갔다.

다행히 누에가 이르는 곳마다 탄 듯한 흔적을 남기게 되어 그 종적을 잃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삽시간에 사 마장을 나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쪽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어떤 개울가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탄 듯한 흔적은 개울가에 이르러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맞은 편 언덕을 보았으나 누에가 기어서 지나간 흔적은 없었다. 아마도 누에는 개울물에 빠져 그 물결을 따라 흘러 내려간 것 같았다.

아자는 발을 구르며 원망했다.

너는 왜 좀 더 빨리 쫓지 못했느냐! 이제 또 어디로 가서 찾아내지? 나는 모르겠다.

너는 반드시 나를 위해 누에를 잡아와야 해!

유탄지는 아자의 꾸지람을 듣게 되자 그저 당황하고 황송하기만 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찾았으나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개울가에서 한 시진 남짓 왔다갔다 했다. 날이 점점 어두워져 왔다.

아자는 피곤하고 참을성도 없어 노해 부르짖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잡아와야 해! 그렇지 않을 때는 다시 나를 보러 오지마!

그녀는 몸을 돌려 곧장 성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유탄지는 매우 초조했다. 그는 개울을 따라 아래쪽을 더듬으로 내려갔다. 칠팔 마장을 내려가게 되었을 때 어스름한 빛이 온누리를 뒤덮는 가운데 갑자기 맞은 편 풀더미 속에 탄 듯한 흔적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유탄지는 크게 기뻐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소저, 소저, 제가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자는 이미 멀리 간 이후였다.

유탄지는 물을 건너 그 탄 듯한 선을 따라 쫓아갔다. 그 탄 듯한 선은 곧장 앞쪽의 산등성이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단숨에 질풍같이 내달았다. 그러고 보니 산세가 다한 곳에 한 채의 규모가 웅장한 사찰이 서 있었다.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바라보았다. 그 사찰 앞에는 편액이 걸려 있었고 칙건민충사(勅建憫忠寺)라는 다섯 개의 큰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는 안팎을 자세히 살펴볼 여가도 없이 탄 듯한 선을 따라 뒤쫓아갔다. 그 탄 듯한 선은 사찰 옆을 지나 뒤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탄지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때 절 안에서는 종 소리와 경 소리, 그리고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읊는 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면서 들려오고 있었다.

승려들이 한참 예불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에 무쇠탈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열등감이 앞섰다. 혹시나 절의 중들에게 발견되면 민망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는 담장가에 붙어서 가만가만 소리나지 않게 바삐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그 탄 듯한 선은 한 진흙바닥을 가로질러 한 채소밭에 이어져 있었다.

그는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누에는 채소를 먹고 있을 것이니 대뜸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채소밭 울타리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그 채소밭 안에서 누가 큰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났다.

그는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람은 욕을 했다.

너는 어째서 이토록 규칙을 지키지 않느냐? 몰래 혼자서 나가 놀다니, 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봐 나는 반 나절이나 걱정을 하지 않았느냐! 나는 곤륜산(崑崙山) 위에서 만리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너를 데려왔다. 너는 내가 너를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나의 고충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거냐? 너야말로 너무나 옳고 그름을 모르는 놈이로구나! 이대로 나간다면 너에게 무슨 기대를 걸 수 있겠느냐? 장래에 너 스스로 전도를 망치게 될 것이니 그 누구도 너를 가련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말투로 보아 무척 화가 나 있었으나 실제로 그 말속에는 퍽이나 기대를 걸고 또 가여워하는 뜻이 서려 있었다. 따라서 그 말은 부형이 못난 자제를 훈계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곤륜산 위에서 만리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데리고 왔다 했으니 십중팔구 사부이거나 웃어른이지 부친은 아니겠구나."

그는 살그머니 대나무로 엮어져 있는 울타리 곁으로 다가가서 안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말을 하는 사람은 화상이었다. 이 화상은 매우 뚱뚱했으나 키는 오히려 무척 작아 마치 곰 같았다.

그런데 그 화상은 손가락을 땅 쪽을 가리키며 여전히 꾸짖고 있었다.

유탄지는 그가 손가락질하는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놀람과 기쁨을 함께 맛보아야 했다. 그 땅딸한 화상이 꾸짖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투명하고 커다란 누에가 아닌가?

그 땅딸한 화상의 모양은 매우 기이했다. 그가 누에에게 말을 건네고 있으니 더욱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누에는 땅바닥에서 급히 움직이는 것이 도망을 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누에는 마치 한가닥 무형의 담벼락에 부딪힌 듯 다시 머리를 돌리곤 했다.

유탄지가 시력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땅바닥에는 황색으로 이루어진 둥근 하나의 원이 그려져 있었고 그 누에가 좌충우돌하고 있었으나 시종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탄지는 즉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저 둥근 원은 약물로서 저 누에의 극성(剋星)임에 틀림없다."

그 땅딸한 화상은 한바탕 꾸짖더니 품속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내서 씹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삶은 양의 머리고기였다.

그는 맛있게 씹었다. 그러다가 기둥에 매달려 있는 호로를 내리더니 병마개를 뽑고 목을 젖히고는 꿀꺽꿀꺽 마셨다.

유탄지는 술 향기가 좋다는 것을 느끼고 호로에 술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저 화상은 주육화상(酒肉和尙)이로구나! 아마도 저 누에는 그가 기르는 것 같고 또 매우 보물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떻게 해야 훔쳐 낼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채소밭 저쪽에서 그 누가 부르짖었다.

혜정(慧 )! 혜정!

그 땅딸한 화상은 흠칫하더니 재빨리 양의 머리고기와 술 호로를 볏단더미 아래로 푹 집어넣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부르짖었다.

혜정, 혜정! 저녁 공부는 하지 않고 왜 거기 숨어 있지?

땅딸한 화상은 다리 밑에 놓여 있는 한 자루의 곡괭이를 들고는 재빨리 채소밭에 곡괭이질을 하며 대답했다.

저는 채소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다가왔다. 중년 화상이었다.

그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공부는 아침과 저녁 모두 해야 한다. 채소밭을 가꿀 여가가 없어서 하필 저녁 공부 시간에 그 일을 하고 있느냐? 빨리 가! 밤 공부를 끝내고 나서 다시 채소밭을 가꾸도록 해라. 민충사에 적을 두고 있는 이상 민충사의 규칙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설마하니 너의 소림사에는 그러한 규칙도 없더란 말이냐?

그 혜정이라고 불리운 땅딸한 화상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곡괭이를 놓고 그를 따라갔다. 감히 고개를 돌려 그 누에를 한 번 쳐다보지 못하는데 아마도 중년 화상에게 그와 같은 사실이 발견될까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땅딸한 화상은 원래 소림사의 승려였구나. 소림사의 화상들은 하나같이 무공이 뛰어나다고 들었다. 저 누에를 훔칠 때 나는 더욱 조심을 해야지."

그는 두 사람이 멀리 가기를 기다려 사방을 살폈다. 사방이 조용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그는 대나무로 엮은 담장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 누에는 노란 테두리 안에서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잡아가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그는 볏짚더미에서 그 호로를 꺼내 흔들어 보았다. 아직도 반 호로의 술이 들어 있었다.

그는 몇 모금을 마신 이후 나머지의 술을 채소밭에 쏟아 버렸다. 그리고 호로의 주둥이를 천천히 노란 선이 그어진 둥근 원 안으로 옮겨갔다. 호로의 주둥이가 그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자 누에가 호로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유탄지는 크게 기뻐서 마개로 호로의 주둥이를 막고 두 손으로 호로를 든채 담장을 기어나와 잽싸게 걸음을 옮겨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민충사에서 수십 장을 달려 나오게 되었을 때 호로가 기이할 정도로 차가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차가움은 얼음보다도 더했다.

그는 호로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겼고 그러다가 또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기곤 했다. 그러나 정말 뼈에 사무치는 차가움이라 실로 손으로 들 수가 없었다.별 도리 없이 그는 호로를 머리에 이러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하자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차가운 기운이 무쇠탈에 전해져서 그의 머리통이 아파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마치 전신의 피마저도 얼음으로 얼어 버리는 것 같았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라 허리띠를 풀어서 호로의 중간을 묶고 손에 들었다. 허리띠는 차가운 기운을 전달하지 않아 가까스로 들고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냉기는 호로에서 뻗쳐 나오고 있었고 삽시간에 호로에는 하얀 서리로 덮히고 말았다.

29.누에의 한기를 받아들여 얼음 장풍을 익히다.

( 蟲표凝寒掌作빙) 유탄지는 호로를 들고 재빨리 걸음을 옮겨 남경으로 돌아가 아자에게 빙잠(氷蠶)을 잡았다고 말했다.

아자는 크게 기뻐하며 재빨리 그 누에를 옹기 그릇 안으로 넣으라고 하였다.

이때는 칠월이어서 더위가 한창일 무렵이었는데 그 빙잠을 편전의 옹기 그릇에 넣어 기르게 되자 편전 안은 갈수록 추워지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편전의 차주전자와 찻잔 안의 찬물까지도 얼음이 얼게 되었다.

"저 누에의 괴이한 점은 정말 천하에서 보기 드물 정도이구나. 만약 소저가 누에를 시켜 나의 피를 빨게 한다면 독에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얼어 죽고 말겠구나."

아자는 잇따라 몇 마리의 독사와 독충을 잡아와서 누에와 싸움을 시켰다. 그러나 모든 독사나 독벌레들은 빙잠이 그 옆에서 한 번 원을 그리자마자 그만 얼어서 뻗어 버렸다. 빙잠은 그것들의 독을 빨아먹었다. 잇따라 십여 일 동안 실험을 해 보았으나 빙잠을 당해 내는 독충이 없었다.

어느 날 아자는 편전에 와서 말했다.

철축, 오늘 우리는 이 빙잠을 죽여야 한다. 네가 손을 뻗쳐 옹기 그릇 안으로 넣어 누에로 하여금 피를 빨게 하여라.

유탄지가 이 며칠 동안 밤낮 걱정하고 있던 일을 바로 그녀가 말한 것이었다.

때가 되자 이 소저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끝내 그에게 빙잠과 함께 희생이 되라는 요구를 해 오는 것이 아닌가!

유탄지는 속으로 침울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참 동안 아자를 바라보며 말도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때 아자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우연히 이 귀한 보물을 얻었다. 내가 연성하게 될 독장은 사부보다도 더욱 무서워질 것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재촉했다.

빨리 손을 옹기 그릇 안에 넣어라.

유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꿇어앉아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소저, 그대가 독장을 연성한 이후 그대를 위해 죽은 소인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의 성은 유씨이고 이름은 탄지로서 철축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아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좋다. 너의 이름이 유탄지라고 하는 것을 내 기억해 두도록 하지. 너는 정말 나에게 충성을 다했다. 좋아, 정말 충성심이 강한 노복이었다.

유탄지는 그녀의 그와 같은 몇 마디 칭찬을 듣게 되자 크게 위로를 받았다.그리하여 그는 두 번 절한 후 말했다.

소저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죽음을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두 다리를 뻗고 몸을 구부린 후 사타구니 사이에 머리를 끼웠다. 그리고 왼손으로 발을 잡고 오른손을 옹기 그릇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경서의 벌거벗은 승려 옆에 쓰여 있는 두 괴상한 글자 가운데의 조그만 화살표를 생각했다. 별안간 식지 끝이 미미하게 근지러워졌다. 그 순간 한 가닥 한기가 얼음 화살처럼 팔을 따라 신속무비하게 가슴 쪽으로 옮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유탄지는 마음속으로 그저 조그만 화살머리가 가리키는 방향만을 생각했다. 그러자 그 한기는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맥락(脈絡)을 따라 손가락에서부터 팔을 지나게 되었고 다시 가슴 쪽에서 머리 쪽으로 치솟아 오르는데 가는 선이 이르는 곳마다 뼈에 사무치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자는 그가 이 괴상망칙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고 매우 우스꽝스럽게 생각했다.

한참 후에도 그가 여전히 그와 같이 윗몸을 거꾸로 한 채 서 있는 것을 보자 의아한 생각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러고 보니 빙잠은 그의 식지를 물고 있었다.

빙잠의 몸뚱아리는 수정과 같이 투명해서 한 줄의 피가 빙잠의 입으로부터 흘러들어와 빙잠의 몸 왼쪽을 지나서 한바퀴 돌고 다시 오른쪽으로부터 입으로 흘러나와 재차 유탄지의 식지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뚜렷히 볼 수가 있었다.

잠시 후에는 유탄지의 무쇠 탈과 옷, 그리고 손, 발 위에 한 겹의 엷은 서리가 앉게 되었다.

아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종놈은 죽었구나. 그렇지 않고 살아 있는 몸이라면 몸에 뜨거운 기운이 있을 터이니 몸 바깥으로 어찌 서리가 생기게 되겠는가?"

그런데 빙잠의 몸안에서는 여전히 혈액이 돌고 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피를 다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갑자기 빙잠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김처럼 피어올랐다.

아자가 정히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을 때 뚝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빙잠은 유탄지의 손가락 끝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이미 손에 한 막대기를 들고 있다가 그 누에를 힘주어 짓이겼다. 그녀는 빙잠을 무척 영묘하기 때문에 이 막대기로 짓이겨 죽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빙잠이 옹기 그릇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이후 배를 위로 한 채 멍청하니 일시 몸을 뒤집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자가 한 번 막대기로 짓이기자 대뜸 짓이겨지고 말았다.

아자는 크게 기뻐 재빨리 손을 옹기그릇 안으로 넣었다. 그리고 빙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액체와 핏물을 두 손바닥으로 받아 눈을 감고 운기행공하여 그 액체와 핏물을 모조리 손바닥 안으로 스며들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한 번 액체와 핏물을 손에 바르고 운기행공을 하고 다시 액체와 핏물을 묻혀서는 운기행공을 하는 등 옹기 바닥의 액체와 핏물이 모조리 깨끗하게 흡수될 때까지 운기행공을 한 후 손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반 나절 수고를 한 셈이라 피곤했다. 몸을 일으키고 유탄지를 바라보았다.

유탄지는 여전히 머리통을 두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있었고 전신은 눈이 쌓인 것처럼 허옇게 서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손을 뻗쳐 그의 몸을 만져 보니 차갑기 이를데 없었고 유탄지의 옷자락도 얼어 붙어서는 뻣뻣해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람과 의아함을 느끼는 한편 우스꽝스러움을 금치 못했다.그러나 그녀는 유탄지가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 실리를 불러 유탄지를 데려나가 묻도록 명했다.

실리는 몇 명의 거란병을 데리고 유탄지의 시체를 말이 끄는 수레에 싣고 성문 밖으로 끌고 갔다. 아자가 그에게 곱게 묻어 주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리는 구덩이를 파고 매장하기가 귀찮았다. 가다 보니 길가에 개울물이 있는지라 시체를 개울물 속에 던져 버리고 성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리가 이와 같이 게으름을 피워서 오히려 유탄지의 목숨을 구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원래 유탄지의 손가락이 빙잠에게 물리게 되었을 때 즉시 역근경에 있는 운기행공의 방법으로 독기를 해소시킬 수 있었다.

빙잠에 의해 빨린 혈액은 빙잠의 몸을 돈 후 다시 그의 손가락 혈관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그는 그 극독의 빙잠이 지니고 있는 정화(精華)를 몸속으로 흡수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자가 빙잠이 흘려내린 액체와 핏물을 흡수한 것은 전혀 아무런 효험이 없는 것으로서 그저 헛고생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 만약 유탄지가 이미 역근경의 모든 운기행공의 요결을 알았더라면 자연히 빙잠의 독을 점차 해소시킬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겨우 한 가지 방법밖에 몰랐고 안으로 흡수할 줄만 알았지 쏟아낼 줄은 몰랐다.

이 빙잠이 지니고 있는 기독(奇毒)은 으뜸 가는 음한지질(陰寒之質)로서 대뜸 그의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만약 실리가 그를 땅속에 파묻게 되었더라면 설사 수백 년 후라도 그의 몸뚱이는 녹지 않을 것이며 한 구의 썩지 않는 시체로 화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그의 몸뚱이가 개울물 속으로 들어가 물줄기를 따라 천천히 떠내려 가게 되고 십여 리를 흘러간 후 개울물이 구비를 돌게 되자 유탄지의 몸뚱아리는 개울가의 갈대에 걸려 멈추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의 몸 옆을 흐르는 개울물은 모두 얼어붙어 그야말로 한 개의 수정으로 만들어진 관을 이루게 되었다.

한데 개울물은 끊임없이 그의 몸에 부딪혔다가 흘러감으로써 그의 몸안의 한기를 한 방울씩 씻어 보내게 되었고 그의 몸 주위의 얼음 조각은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는 머리에 무쇠탈을 쓰고 있었고 무쇠의 성질이 빨리 뜨거워지지만 또 빨리 식는 특성이 있는 관계로 무쇠탈 안팎에 얼어불었던 얼음이 먼저 녹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흘러들어 오는 개울물을 들이마시고 사래가 들려 기침을 얼마 동안 한 이후 정신이 맑아져 몸을 개울물에서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자 전신에 여전히 남아 있던 얼음 조각들이 떨어졌다.

그의 몸뚱이가 처음 얼음으로 화하게 되었을 때 결코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얼음이 얼어붙게 된 이후 꼼짝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끝내 너무나 심한 추위에 정신을 잃게 되었는데 이제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게 되자 한바탕 기나긴 악몽을 꾸고 난 것 같았다.

그는 개울가에 않아 생각해 보았다. 자기는 사실 아자에게 충성을 다했다.그리고 독벌레에 물려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그녀의 무공 연마를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고도 아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얼음이 얼어붙은 상태에서도 아자가 환히 웃으며 빙잠의 액체와 핏물을 손바닥에 발라 운기행공하던 광경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운기행공이 끝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자기를 들여다보았는데 그저 자기의 죽은 꼴을 재미있게 여기는 듯한 눈치였고 결코 아쉬워 하거나 애석해 하는 감정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생각했다.

"빙잠이 지니고 있는 극독은 수백 수천 종류의 독충이나 독사들보다 더 지독한 것이다. 그런데 그 독을 소저가 손바닥으로 흡수하게 되었으니 그녀는 반드시 독장을 연마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돌아가서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별안간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면 반드시 나를 그녀의 독장의 위력을 시험하는 대상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만약 독장을 연성하게 되었다면 물론 일 장에 나를 쳐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연성을 하지 못했다면 다시 나를 시켜 독사나 독충을 잡아와 그녀의 독장이 연성될 때까지 부려 먹을 것이고 또 연성한다 하더라도 역시 나를 일 장에 때려 죽일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간에 죽을 판인데 내가 돌아가서 무엇하겠는가?"

그는 몸을 일으키고 몇 번 땅 위에서 굴렀다. 몸에 붙어 있는 얼음조각들을 모조리 떨쳐 버리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교봉은 찾아 부친의 원수를 갚는 것은 이제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무작정 걸음가는 대로 정처없이 걸었다. 그는 넓은 광야와 황량한 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일이 있으면 따서 먹었고 새나 조그만 짐승들을 잡아 양식을 삼기도 했다.

이튿날 저녁 무렵 너무 무료함을 느낀 그는 그 법문의 역근경을 꺼내 그림에 그려져 있는 승려의 자세를 배우려 했다.

그 역근경은 개울물에 흠뻑 젖었던 관계로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겼다. 혹시나 책자를 상하게 할까봐 걱정되었다. 그런데 매 첫 장마다 승려의 도형이 나타나 있었다. 자세는 각기 달랐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을 가다듬고 바라보다가 끝내 책 속의 그림은 물에 적셔 지면 나타나며, 결코 부처님이 나타나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도형의 모습대로 자세를 취하고 그 괴이한 글자 가운데의 조그만 붉은 화살표를 따라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은연 중 한 가닥 지극히 차가운 빙선이 사지백해를 돌고 도는 것이 아닌가? 그 느낌은 마치 빙잠이 되살아 나서 그의 몸안에서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겁이 나서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몸안의 빙잠을 즉시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두 시진이 지났을 때는 그는 생각했다.

"내 체내에 기어들어간 빙잠이 떠났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만질 수도 없었고 더듬어 볼 수도 없었다. 빙잠의 종적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끝내 참을 수 없어진 그는 다시 그 괴이한 자세를 취하고 역시 괴이한 글자 가운데의 작고 붉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빙잠은 다시 그의 몸안에서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마음속에 그 조그맣고 붉은 화살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러자 빙잠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을 떠올리게 되면 빙잠은 재차 그의 몸안에서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는 것이었다.

빙잠이 몸속에서 한동안 기어다니고 나면 전신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해졌고 쾌적해졌다.

책 속의 승려의 자세는 여러 가지였다. 그리고 괴이한 글자 중의 조그만 화살머리 역시 꾸불꾸불 변화가 복잡했다.

그는 각기 다른 자세에 따라 빙잠을 자기 몸안에서 기어다니게 해보았다.그러자 그의 몸안도 갑자기 차가워졌다가 다시 갑자기 따뜻해졌다 하면서 각기 다른 쾌감을 안겨 주었다.

이와 같이 수 개월 지나게 되자 날짐승과 야수들을 잡으려고 할 때 손과 발이 장차 날렵해지게 되고 한 번 뛰는 간격과 달려가는 속도가 옛날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어느 날 밤이었다. 한 마리의 굶주린 이리가 나와 음식을 찾다가 그를 발견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유탄지는 깜짝 놀라서는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 굶주린 이리의 예리한 발톱이 어느새 그의 어깻죽지를 할퀴었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그의 목을 깨물려고 했다.

그는 놀랍고 당황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일 장으로 이리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굶주렸던 이리는 데굴데굴 저쪽으로 굴러가더니 몇 번 몸을 버둥거리다가 움직이지 않았다.

유탄지는 몸을 돌려 수 장이나 도망을 쳤으나 그 이리가 시종 꼼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속으로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며 돌을 집어 던져 보았다.

돌이 이리의 몸에 맞았으나 그 이리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놀람과 기쁨에 얽혀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펴 보니 이리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아무렇게나 후려친 일 장이 그토록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터라 손바닥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짚으면서 살펴 보았으나 어떤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기뻐서 부르짖었다.

빙잠의 혼이 정말 영묘하구나!

그는 빙잠이 죽은 후 그 혼이 자기의 몸안으로 스며들게 되어 그와 같은 커다란 능력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역근경을 익힌 덕택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 빙잠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극독물인데 그 극독에는 음한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그러한 기운을 그가 몸속으로 흡수하게 됨에 따라 역근경에 실려 있던 상승내공을 연마할 수 있었고 내력도 불어나게 되었지만 그 내력에 지극히 무서운 음경 즉 음유한 기운이 실리게 된 것이다. 이 역근경은 실로 무학에서 지고무상의 보전(寶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역근경의 무공은 연마하고 익히는 방법이 무척 어려웠다.

이 무공을 익히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깨달아야 하며 마음속에 무공을 닦고 익힌다는 생각을 갖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승의 무학을 익히는 승려들은 반드시 무공이 하루가 다르게 증진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림사에서는 과거 수백 년 동안 역근경을 익히려는 고승이 사실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몇 개월 아니라 수 년을 두고 열심히 연마했지만 종종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리하여 뭇 승려들은 이 역근경이 별로 염험하거나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그날 아주에게 도적을 맞게 되었을 때 절 안의 뭇 고승들은 속으로 분노하기는 했지만 큰일로 여기지 않았다.

일백여 년 전 소림사에는 어떤 화상이 있었다. 이 화상은 어릴 때부터 출가했는데 머리가 우둔했고 사람이 실성한 듯했다. 그의 사부가 역근경을 고되게 수련을 했지만 끝내 연성하지 못하고 분노에 휩싸여 앉은 채 숨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자 이 아둔한 풍승( 僧)은 사부의 시체 곁에서 역근경이라는 경서를 집어들고 희희덕거리며 역근경의 무공을 연마하여 놀랍게도 일대의 고수가 되었다.

그의 무공이 어떻게 하여 그토록 고강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가 원적하여 왕생극락할 때까지 시종 까닭을 밝히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도 역근경의 공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유탄지는 무공을 익히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고 그저 몸안의 빙잠을 이리 저리 자기 몸안에서 기어다니게 만듦으로써 장난을 쳤으며 유희를 즐겼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공력이 날로 증진되어 바로 과거 풍승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이다.

그후 수일 동안 그는 잇따라 몇 마리의 야수들을 쳐서 죽였다. 자기의 장력이 무척 고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담이 점점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는 하루라도 빙점의 혼을 불러 그의 몸안에서 돌고 돌게 하지 않는다면 그 빙잠의 혼이 자기의 몸에서 떠나게 될까봐 매일같이 불러 내어 그의 몸안에서 움직이도록 만들었고 하루도 그 같은 짓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 누에의 혼은 정말 그가 마음속에서 부르는 대로 나타나 주는 것이 정말 영특하기 이를데 없었다.

유탄지는 점점 남쪽으로 향하게 되었고 어느 날 그는 중주(中州) 하남성의 경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무쇠탈을 쓰고 있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황량한 산 속의 동굴이나 숲속에서 잠을 자고 날이 어두어진 후에야 인가 쪽으로 달려가 음식을 훔쳐 먹곤 했다. 그러나 그의 몸과 손발은 민첩하기 이를데 없어서 시종 남에게 발견되지 않았다. 이 날 그는 어느 조그맣고 황량한 절간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걸음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세 사람이 절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급히 불상 뒤로 몸을 숨기고 그 세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그런데 그 세 사람은 대전 안으로 걸어오더니 땅바닥에 주저앉아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러쿵저러쿵 강호의 쓸데없는 일들에 관해 주고 받았다.

한 사람이 입을 열고 물었다.

도대체 교봉이란 그 녀석은 어디로 숨었지? 일 년이 넘도록 어찌하여 시종 그의 소식을 손톱만큼도 알아낼 수 없는 것일까?

유탄지는 교봉이란 이름을 듣게 되자 속으로 흠칫하게 되었으며 대뜸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그 녀석은 너무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자라가 목을 움추리듯 숨어 버렸겠지. 아마 다시 찾을래야 다시 찾아낼 수 없을걸.

그렇다곤 할 수 없어. 그는 기회를 보아 움직일거야.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누가 외톨이가 되었을 때 그는 바로 나타나서 그 사람을 해치우지. 헤아려 보게나. 취현장에서 커다란 싸움이 있은 이후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서장로, 담공, 담파부부, 조전손이, 태산의 천면판관 선 노영웅 전 가족, 천태산 지광 노화상, 개방의 마 부인, 백세경 장로. 아! 그야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세.

유탄지는 취현장의 싸움이란 말을 듣게 되자 마음이 쓰라렸다. 따라서 그 사람의 다음 말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한 늙수그레한 음성이 입을 열었다.

교 방주는 언제나 인의로서 사람을 대했다네. 그런데 뜻밖에도..... 아.....뜻밖에도 이것이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아니겠는가? 아, 우리 가세.

그는 몸을 일으켰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왕(汪)형, 본방에서 새 방주를 추대하게 된다면 누구를 추대하겠소?

난 모르겠네. 이미 추대를 한 지도 일 년이 넘었으나 전체 방의 아래 위 사람들이 모조리 탄복할 수 있는 영웅호걸을 아직도 발견해 내지 못하지 않았는가? 아, 모두 두고 보기로 하세.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왕 형의 마음을 알고 있소. 왕 형은 언제나 교봉이라는 그 녀석이 다시 우리의 방주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지. 제발 그와 같은 생각은 버리도록 하시오. 만약 그와 같은 말이 전 타주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왕 형의 목숨까지도 부지하기가 힘들 것이오.

그 왕 형이라고 불리운 사람은 다급해진 듯 말했다.

필(畢) 형제, 그 말은 자네가 한 것이지 내가 언제 교 방주가 우리의 방주가 다시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가?

그러자 필가는 냉소했다.

왕 형은 말끝마다 교 방주가 어떻고 교 방주가 어쨌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소? 그러니 그것이야말로 한마음으로 교 방주 그 녀석이 다시 방주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왕가는 노해 부르짖었다.

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함부로 지껄인다면 내가 너와 같은 후레자식을 쳐 죽이고 말 것이다.

그러자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됐소. 됐소. 모두 친형제와 같은 사이인데 이런 일을 두고 입씨름을 벌여서야 되겠소? 빨리 갑시다. 늦겠소. 사실 교봉이 어찌 우리의 방주가 될 수 있겠소? 그는 거란의 개새끼이고 모두들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죽음을 걸고 싸우게 될 처지가 아니오? 더군다나 모두가 그에게 우리 방주가 되어 주십사 청한다 하더라도 그는 응하지 않을 것이오.

왕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네.

세 사람은 절간에서 나갔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개방에서 교봉을 찾고 있으나 찾지 못한 모양이군. 사실 그들이 그 녀석이 요나라에서 남원대왕이 된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곧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지. 개방은 사람이 많고 세력이 큰 데다가 다시 한 떼의 중원 호걸들을 끌여들인다면 그 악적을 어쩌면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들과 함께 가서 교봉을 죽여야지"

그는 남경으로 가게 된다면 아자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크게 설레였다.

그는 발걸음을 죽이고 절간에서 나왔다. 세 명의 개방 제자들은 산길을 따라 곧장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살그머니 그들 뒤를 따랐다. 이때는 어스름한 빛이 짙어 갈 때라 산에는 다른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수 마장을 걸어가게 되었을 때 한 골짜기에 이르렀다. 멀리서 보니 골짜기 안에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유탄지는 생각했다.

"나는 무쇠탈을 쓴 꼴이 매우 기이하다. 그들은 나를 보게 된다면 모두들 깜짝 놀라 소동을 일으킬 것이니 풀더미 속에 숨어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나 들어 보기로 하자."

그는 길게 자란 풀속에서 천천히 모닥불이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몇 장을 기어간 후 멈추었다가 다시 조금 더 접근했다. 사람들의 소리가 시끌벅적했고 모닥불 옆에 모여있는 사람의 수가 실로 적지 않아 말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모닥불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는 느리게 기었다. 이윽고 그는 한 커다란 바위 뒤까지 기어갔다.

그 곳은 모닥불과 약 수 장의 간격이었다. 그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몸을 웅크리고 귀를 기울였다.

모닥불 가에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씩 일어나 말을 하곤 했다. 유탄지는 잠시 들은 이후 개방의 대지분타의 제자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있으며 나중에 개방대회가 열리게 되었을 때 대지분타에서 어떤 사람을 방주로 내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상의하고 있음을 알았다.

어떤 사람은 송 장로를 추대하자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오 장로를 추대하자고 했다.

다른 한 사람은 말했다.

사실 지용은 겸비한 것에 있어서는 마땅히 본방의 전 타주를 추대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 타주는 그날 교봉이라는 녀석이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 공무를 집행하는 척하면서 그를 방에서 쫓아냈으니 아직 본방에 되돌아오지 못한 상태란 말이외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교봉의 간교한 계책은 우리 전 타구가 가장 먼저 용감하게 폭로한 것이오. 따라서 전 타주는 본방에 커다란 공을 세웠으니 방으로 되돌아 와야 마땅하오. 대회가 열리기만 하면 우리들은 먼저 전 타주가 방으로 되돌아오는 일을 처리한 이후에 다시 전 타주가 그 날 세운 큰 공로를 내세우면서 그를 방주로 추대 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낭랑한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본인이 방으로 되돌아오는 일은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오. 그러나 여러 형제들은 나를 방주로 내세우겠다는 말은 들먹이지 마시오. 그렇지 않을 땐 다른 사람들은 이 형제가 교봉이라는 녀석의 간교한 계책을 폭로한 것이 사사로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외다.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했다.

전 타주, 좋은 일에는 앞장을 서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내가 보기에 본방의 몇 분 되지 않는 장로들은 무공은 뛰어나나 지혜에 있어서는 그대를 따를 사람이 없소. 우리가 교봉이란 그 녀석을 상대하려면 지혜로 맞서야지 힘으로 맞설 수는 없는 일이외다.

전 타주.....

전 타주는 그 말을 가로챘다.

시(施)형제, 나는 아직 정식으로 방으로 되돌아온 몸도 아니오. 전 타주라고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모닥불을 에워싸고 있던 이백여 명이나 되는 거지들은 다투어 입을 열었다.

송 장로께서 그대가 임시로 본타의 타주로 취임해 줄 것을 당부했소이다. 그런데 왜 전 타주라고 부르지 못한단 말씀이오?

장래 그대가 방주가 된다면 그까짓 타주라는 자리는 대수로울 것도 없소.

전 타주가 설사 잠시 동안 방주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장로로 오르게 될 것이오. 그때 아무쪼록 열심히 이끌어 주시기 바라오.

맞소. 전 타주가 방주가 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 대지 분타의 타주 직을 겸임할 수 있을 것이오.

한참 떠들썩할 때 한 명의 제자가 산 골짜기 입구에서 달려오더니 낭랑히 외쳤다.

전 타주께 알립니다. 대리국의 단 왕자가 찾아오셨습니다.

전관청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대리국의 단 왕자라구? 본방은 대리국과 평소 내왕이 없지 않았는가?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 형제들, 단씨 집안은 유명한 무림세가요. 단 왕자가 친히 방문해 왔다니 모두 함께 나가 맞도록 합시다.

그는 방의 제자들을 이끌고 골짜기 입구 쪽으로 마중을 나갔다.

한 명의 젊은 공자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입구 쪽에 서 있었는데 그의 뒤에는 칠팔 명의 시종들이 서 있었다.

젊은 공자는 바로 단예였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인사를 했다. 알고보니 서로 안면이 있는 처지였다. 그 해 추석 살구나무 숲속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전관청은 그 당시 단예의 신분과 내력을 몰랐던 터였다. 그러나 자기가 교봉에 의해 방에서 쫓겨나는 추태를 모두 단예에게 보였다는 생각에 내심 겸연쩍었다. 그러나 곧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포권을 한 후 말했다.

단 왕자께서 찾아주실 줄 몰라 멀리 마중을 나가지 못한 점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예는 웃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만생(晩生)은 가친의 명을 받고 한 가지의 일을 귀방에 알리려고 찾아왔는데 오히려 폐만 끼치게 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몇 마디 인사치레의 말을 주고 받았다. 단예는 즉시 함께 온 고득성,부사귀, 주단신 세 사람을 소개했다.

전관청은 단예를 모닥불 앞의 한 바위에 앉도록 하고 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단예는 술을 받아 마신 다음 말했다.

수 개월 전 가친은 중주 신양에 있는 귀방의 마 부방주 댁에서 한 가지 기이한 사건을 만나게 되었고 귀방의 백세경 장로가 세상을 등지게 된 경과를 친히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귀방과 관계된 중대한 일일 뿐만 아니라 중원 무림의 다른 영웅들과도 관계되는 일이라 줄곧 귀방의 수뇌 인물에게 말씀을 올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가친께서는 상처를 입으신 몸이라 지금에 이르러서야 겨우 낫게 되었고 또 귀방의 여러 장로들께서는 언제나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으시기 때문에 만나 뵈올 수가 없어서 가친이 친히 쓰신 한 통의 서찰을 시종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수일 전 귀 분타가 이곳에 모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제서야 이만생에게 명하여 달려 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는 소맷자락 안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서 전관청에게 건네 주었다.

전관청 역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단 공자께서 친히 서찰을 전해 주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단 왕야께서 폐방을 보살펴 주시고 아끼는 정과 은덕에 대해서는 폐방의 모든 제자들이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 서찰을 보니 밀봉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겉장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개방제위장로친계( 幇諸位長老親啓) 즉 개방의 여러 장로들이 친히 뜯어 보라는 말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입장으로서는 뜯어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개방에서는 얼마 후 대회를 열게 됩니다. 여러 장로들께서는 모두 대회에 참석하게 되니 그때 불초가 단 왕야의 서찰을 여러 장로들에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단예는 말했다.

그렇다면 수고를 해 주십시오. 만생은 이만 가볼까 합니다.

전관청은 재빨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를 전송했다.

폐방의 백 장로와 마 부인이 불행히도 교봉이라는 간악한 자의 독수에게 죽음을 당한 사실을 그날 단 왕야께서 친히 목격하셨단 말씀입니까?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 장로와 마 부인은 교 형님이 해쳐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 부방주를 살해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가친의 이 서찰에 명백히 씌어 있으니 얼마 후 전 타주께서 편지를 뜯어 보게 되면 자연히 상세한 사정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을 이야기 하자면 길어진다. 네 녀석은 좋은 사람이 아니니 더 말하지 않겠다. 너는 우리 아버지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감히 은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전관청에게 포권을 하고 말했다.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멀리 나오실 것까진 없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맞은 편에서 두 명의 개방 제자가 두 사내를 데리고 왔다.

두 명의 사내는 서로 눈짓을 하더니 앞으로 몇 걸음 다가와서는 단예에게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다. 그리고는 한 장의 커다란 붉은 명첩(名帖)을 올렸다.

단예가 바라보니 그 명첩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 있었다. 소성하(蘇星河)는 삼가 천하에서 바둑에 정통한 뛰어난 인재를 초청하는 바입니다.

이월 초여드레 날 하남 뢰고산( 鼓山) 천농지아곡(天聾地啞谷)으로 왕림해 주셔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바입니다. 단예는 평소 바둑두기를 좋아했다. 따라서 그와 같은 글귀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으며 기쁜 어조로 말했다.

그것 참 잘 되었구려. 만생이 달리 바쁘지 않으면 그때 반드시 찾아 가겠소이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어떻게 만생이 바둑을 둘 줄 안다는 사실을 아셨소?

그러자 그 두명의 사내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우고 입으로 "어어"하면서 크게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은 모두 벙어리였다.

단예는 그들 두 사람의 손짓을 알아차릴 수 없어서 빙그레 웃고 주단신에게 물었다.

뢰고산은 이곳에서 멀지 않죠?

그는 명첩을 주단신에게 건네주었다.

주단신은 받아 보더니 먼저 두 명의 사내에게 포권을 했다.

대리국의 진남왕 세자이신 단 공자께서 총변 선생(聰辨先生)에게 인사를 드린다고 전해 주시오. 초청해 주신 점, 먼저 사의를 표하며 그때 반드시 찾아가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단예를 가리키며 다시 손짓을 했다. 그것은 그 모임에 참가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두 명의 사내는 허리를 굽혀 단예에게 절을 하더니 또 다시 한 장의 명첩을 꺼내 전관청에게 내밀었다. 전관청은 받아 보더니 공손하게 되돌려 주며 손을 흔들고 말했다.

개방의 대지분타 임시 타주 직을 맡고 있는 전관청은 뢰고산 총변 선생에게 인사드립니다. 그러나 이 전모는 바둑에 재간이 얕아 남의 비웃음을 사기에 알맞기 때문에 감히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총변 선생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고 전해 주십시오.

두 명의 사내는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하더니 다시 단예를 향해 절을 한 후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갔다.

주단신은 그제서야 단예의 물음에 대답했다.

뢰고산은 바로 숭현(崇縣)의 남쪽에 있으며 굴원강(屈原岡)의 동북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별로 멀지 않소이다. 단예는 전관청과 작별을 한 후 산골짜기에서 걸어 나오면서 주단신에게 물었다.

총변 선생 소성하는 어떤 사람입니까? 중원의 바둑 국수라도 됩니까?

주단신을 말했다.

총변 선생은 바로 농아 선생입니다.

단예는 아, 했다. 농아 선생의 이름을 그는 대리에서 백부님과 부친으로부터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중원 무림에서 한 분의 명숙이라고 할 수 있는 고수이지만 귀머거리에 벙어리라고 했다. 그러나 소문에 듣기에 그의 무공이 무척 고강하다고 했다.

그의 백부님은 농아 선생을 들먹일 때마다 퍽이나 우러러보는 표정을 짓곤 했었다.

주단신은 다시 한 마디의 설명을 덧불였다.

농아 선생은 몸은 불구이나 스스로 총변 선생이라 칭히고 있죠. 이것은 자기 자신의 심총(心聰)과 필변(筆辯)이 보통 사람의 이총(耳聰)과 설변(舌辯)보다 뛰어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일리가 있구려.

그는 몇 걸음 옮긴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농아 선생의 심총과 필변이 보통 사람의 이총과 설변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말에 불현 듯 왕어언이 입으로 말해 주는 무공이 보통 사람들의 권각법이나 무기를 휘두르는 무공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이 생각났던 것이다.

무석에서 아주와 함께 개방의 무리들을 구출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포부동과 풍파악 두 사람이 달려와 왕어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들 다섯 사람은 바로 북쪽으로 가 모용 공자를 찾으려고 했다.

단예는 물론 뒤따라 가려고 했다. 풍파악은 그가 입으로 전갈의 독을 빨아주었으므로 고맙게 생각하고 함께 가려 했다. 그러나 포부동은 말할 때 조금도 예의를 차리지 않았으며 단예가 모용 공자로 변장하여 모용 공자의 명성을 그르치고 말았다고 꾸짖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꺼지지 않으면 패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왕어언은 그저 풍파악과 어디로 가서 자기의 고종오빠를 찾느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을 뿐 단예의 매우 겸연쩍어 하는 처지를 보고도 못 본 체했다.

단예는 할 수 없어 왕어언과 헤어지게 되었다. 당시 그는 곧장 북쪽으로 향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너희들이 하남으로 가서 모용복을 찾겠다면 나도 하남으로 가겠다. 하남 중주는 너희 모용씨 집안의 땅이 아니다. 너희들 모용복과 포부동이 갈 수 있는데 이 단예는 갈 수 없단 말이냐! 만약 길에서 우연히 너희들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니 포부동은 나를 탓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그와 왕어언을 다시 보게 하지 않았다. 이 몇 달 동안 단예는 하남을 두루 살피며 명승지를 찾아다녔다.

명분이야 산천 구경을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는 이리 두리번 저리 두리번 하면서 왕어언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을 볼 수 있으면 하고 바랬으며 아름다운 산천 경치는 그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날 단예는 낙양의 백마사(白馬寺)에서 방장과 아함경(阿含經)을 논하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전륜성왕(轉輪聖王)에게 칠보(七寶)가 있다는 고사를 연구했다.

단예는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몸이 따뜻해지고 여름에는 몸이 시원해진다는 옥녀보(玉女寶)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방장 화상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단 거사(段居士), 그것은 우리 부처님의 비유에 불과하오. 더군다나 부처님께서는 칠보 모두 무상에 속한다고 했소이다.....

거기까지 말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세 사람이 백마사로 찾아왔는데 그 세 사람은 바로 부사귀와, 고득성, 그리고 주단신이었다.

원래 단정순은 신양 마 부방주 집에서 떠난 이후 다시 원성죽을 만나 따로 장소를 찾아 상처를 치료하게 되었다. 그런데 단정순은 소봉이 개방으로부터 마대원을 해쳐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소봉을 위해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 통의 서찰을 써서 부사귀 등 세 사람에게 명하여 개방에 갖다 주라고 했다.

부사귀 등은 낙양에 이르렀으나 개방의 총타에서 개방의 수뇌 인물을 만나볼 수 없었고 그저 대지 분타의 사람에게 편지를 전하려고 했다. 그런데 술집에서 어느 공자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두고 이야기거리로 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가 형용하는 모습이나 행동거지가 단예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다. 그리하여 그 사람에게 공자의 간 곳을 묻게 되었고 백마사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네 사람은 만나자 매우 반가워했다.

단예는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모시고 편지를 전달하겠소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역시 빨리 나를 데리고 부왕을 뵈옵도록 해 주시오.

그는 부친이 바로 하남성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만나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며칠 동안 왕어언에 관한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어 밤낮으로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따라서 그는 개방의 대지 분타의 모임은 그야말로 강호의 인물들이 모이는 것이니 어쩌면 왕어언의 아리따운 모습을 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먼저 편지를 전달한답시고 이곳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주단신은 그가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을 보고 목완천을 생각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 일은 권하거나 위로할 수 없는지라 그의 마음을 다른 데로 이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 총변 선생이 명첩을 크게 돌려서 바둑을 두러 오라고 사람을 청하는 것을 보면 바둑을 매우 잘 두는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는 진남왕을 뵈오신 후 총변 선생과 바둑을 몇 판 두시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되는군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바둑판의 검은 돌과 하얀 돌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번거로움을 쫓아버릴 수 있습니다. 비록 그녀는 천하 각문 각파의 무공에 익숙하며 그야말로 병법이나 학문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 하지만 바둑은 모를 것입니다. 총변 선생의 바둑 모임에 그녀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단신은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길을 오면서 단예가 제 정신이 아닌 듯 앞의 말과 뒷 말이 맞지 않는 것을 흔히 보아온 터였다.

일행은 말을 몰아 서북쪽으로 나아갔다. 단예는 마상에서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띠우더니 중얼거렸다.

"불경에서는 미녀를 생각할 때 몸에 피고름을 감추고 있으며 백 년 후에는 백골로 화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그 말이 맞기는 맞지만 그녀가 설사 백 년 후에 백골로 화한다 하더라도 역시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백골이 될 것이다."

이때 그는 왕어언의 백골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를 상상하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두 필의 말이 질풍같이 달려왔다. 안장에 두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이 두 필의 말은 사람의 조종을 받지 않는 듯 곧장 단예 일행에게로 부딪쳐왔다.

부사귀와 고득성은 손을 뻗쳐 한 필의 달려 오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그런데 말 등에 타고 있는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사귀가 약간 놀라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사람은 농아 선생의 사자가 아닌가?

그들은 얼굴에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띠우고 있었으나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이 사람들은 한 장의 명첩을 단예에게 건네 주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다른 한 사람 역시 농아 선생의 사자였고 똑같이 얼굴에 야릇한 웃음을 띠우고 죽어 있었다.

부사귀 등은 이와 같은 광경을 보자 두 사람이 바로 독에 중독되어 목숨을 잃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말을 멈추어 세운 후 두 걸음 물러섰으며 감히 두 구의 시체에 손을 대지 못했다.

단예는 노해 부르짖었다.

개방의 전가라는 타주는 정말 악독하군. 어째서 이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독수를 썼을까? 내가 가서 따져야 겠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전관청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별안간 앞쪽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이 천하에서 성숙노선(星宿老仙)의 제자 외에 그 누가 있어 이와 같이 사람을 무형 중에 죽이는 재간을 가지고 있단 말이냐? 농아 늙은이가 순순히 숨어서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있으면 몰라도 만약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성숙노선은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봐, 꼬마야! 이 일은 너와 관계없는 일이니 빨리 갈 길이나 가도록 해라.

주단신은 나직이 말했다.

공자, 저 사람은 성숙파의 인물입니다. 우리와 상관이 없으니 가시도록 하죠.

단예는 왕어언을 찾지 못하게 되자 그야말로 심사가 뒤틀리고 울적하기 이를데 없었다.

농아 노인이 보낸 두 사자가 만약 죽지 않고 다만 위험에 빠져 있다면 그는 반드시 생사를 도외시하지 않고 나서서 그들을 구하려 들었을 것이다.

단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단지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해. 애당초 눈까지 멀고 코로 향기를 맡을 수 없으며 마음속으로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어야 비로소 번뇌에서 해탈할 수 있을거야.

그의 이 말은 왕어언을 만나게 된 후 그녀의 음성이나 웃는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일거일동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어 설사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된다 하더라도 그리워하는 정을 좀처럼 떨쳐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맞은편의 그 사람은 껄껄 웃으며 손뼉을 치더니 부르짖었다.

하하하, 맞다, 맞아! 너의 말에 일리가 있다. 마땅히 가서 그의 두 눈을 찔러 멀게 하고 그의 코를 잘라 낸 후 다시 그가 마음속으로 어떤 궁리도 할 수 없도록 해 주어야 한다! 단예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외부의 힘으로 짓밟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반드시 스스로 마음을 갈고 닦아 부주색생심(不住色生心), 부주성향미촉법생심(不注聲香味觸法生心), 응생무소주심(應生無所注心)이 되어야 하는 법이지. 만약에 모든 상(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이 아니겠는가.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와 같은 수양을 쌓을 수 있겠는가? 원증회(怨憎會), 애별리(愛別離) 구부득(求不得), 오음치성(五陰熾盛)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고달픔이라 할 수 있다. 유탄지는 바위 뒤의 풀더미 속에 숨어 단예 일행이 왔다가 떠나가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누군가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이때 두명의 개방 제자가 바른 걸음으로 달려 오더니 전관청에게 나직이 말했다.

전 타주, 두 벙어리는 어떤 사람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수인은성숙파의 무슨 성숙노선의 수하라고 자칭하고 있습니다.

전관청은 깜짝 놀라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는 성숙파의 성숙노괴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였다. 이 성숙노괴는 독을 잘 쓰며 무공 또한 기이하다고 하지않던가.

전관청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제자가 농아 노인의 사자를 죽인 것은 우리와 아무상관이 없는 일이니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않도록 하자."

그는 말했다.

알았다. 도깨비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 두고 우리는 상관하지 않도록 하자.

별안간 앞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정말 앞 뒤 가리지 않고 씨부렁거리는구나, 내가 성숙노선의 문하인 줄 알면서 도깨비라고 욕을 해? 아마 살기 싫어진 게로구나.

전관청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귀하는 누군데 귀신처럼 꾸미고 수작을 부리시오? 도대체 무엇하러 왔소?

그 사람은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대담하구나. 내 앞에서 귀신이란 말을 들먹이다니. 좋아, 나는 성숙노선의 제자이다. 성숙노선께서 중원 땅으로 왕림하신 것은 스무 마리의 독사와 백 마리의 독충이 필요해서였다. 개방에서는 독사와 독충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빨리 바치도록 해라. 성숙노선은 너희들 한떼의 거지들을 용서해 주실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흥, 흥, 바로 이 사람처럼 될 것이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 잇던 개방 제자가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모닥불 옆에 떨어져 꼼짝하지 않았다.

알고보니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개방의 제자가 서 있는 자리에 몸에 갈색 장삼을 걸친 난장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그가 다가와 개방의 제자를 죽였으며 개방 제자의 등뒤에 몸을 숨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관청은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도 났다.

"성숙노괴가 우리 개방에게 시비를 걸려고 하는구나. 지금의 사태로서는 굴복을 하든가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다. 이 일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만약 내가 그의 한 마디의 위협에 놀라서 독사와 독충을 바친다면 방의 형제들은 이후 나를 업수이 여기게 될 것이니 내가 개방을 방주가 되기 힘들다. 다행히 성숙노괴가 친히 온 것이 아니고 이 녀석 한 사람뿐인 듯하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알고보니 성숙파의 노형께서 오셨구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그 난장이는 말했다.

나의 본명은 천랑자(天狼子)라고 한다. 너는 빨리 독사와 독충을 준비하도록 해라.

귀하가 독사, 독충을 가져가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땅바닥에서 한 자루의 푸대를 집어들며 말을 이었다.

이 곳에 몇 마리의 뱀이 있으니 귀하가 살펴 보시구려. 성숙노선께서 좋아하실 물건이외다.

난장이, 천랑자는 전관청이 성숙노선이라 칭하는 것을 듣고 속으로 자연 기뻐하게 되었고 전관청의 태도가 공손한지라 우쭐해져서 생각했다.

"개방이 중원에서 가장 큰 방이라고 하더니 우리 사부 어르신의 이름을 듣자 마자 즉시 놀라서 어쩔줄 모르는구나. 내가 이 독사와 독충들을 가지고 간다면 사부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고, 내가 일을 잘 처리했다고 칭찬을 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사부 어르신의 위명의 덕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고개를 내밀고 그 푸대 자루 안을 들여다 보았다. 별안간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푸대 자루가 그의 머리를 덮어 씌운 것이다.

천랑자는 깜짝 놀라 급히 일 장을 후려쳤다. 그러나 허공을 후려치고 말았다.

바로 이때였다. 얼굴과 이마 그리고 뒷덜미가 동시에 따끔했다. 이미 푸대자루 안의 독물에 물린 것이다.

천랑자는 미처 머리에 씌워진 푸대 자루를 벗기지 못하고 매섭게 이 장을 후려친 후 재빨리 걸음을 옮겨 놓으며 미친 듯 달려갔다.

그는 머리에 푸대 자루를 쓰고 있어서 사물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두 손을 마구 휘두르고 있었는데 얼굴의 여기저기를 독사와 독물이 마꾸 깨물었다.

다급한 그는 질풍과 같이 달려 가게 되었는데 별안간 허공으로 붕 하니 뜨게 되었다. 곧이어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산비탈 아래의 냇물 속으로 떨어져 물결을 따라 흘러 가게 되었다.

전관청은 본래 그를 죽여 입을 봉하려고 했으나 그가 잽싸게 도망을 쳤기에 죽일 기회가 없었다.

전관청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거망진(巨莽陳)을 펼쳐 성숙노괴와 사생결단을 내기로 하세. 설마 교봉이 떠났다고 해서 우리 개방이 자립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업신 여김을 당할 수야 없지 않겠소? 성숙파에서는 극독을 잘 쓰니 우리들은 그들을 상대로 무기나 권각법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독으로써 독을 공격해야 할 것이오.

뭇 거지들은 우렁차게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즉시 모닥불 밖 수장 되는 곳에 진을 펼쳐 놓고 각기 단정히 앉았다.

유탄지는 전백광이 푸대 자루를 이용하여 천랑자를 쫓아 보내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의 자루 안에는 원래 독물이 들어 있었구나. 그들은 많은 자루를 가졌는데 모두다 많은 독사와 독충을 넣은 것일까? 거지들은 뱀도 잘 잡지만 벌레도 잘 잡으니 별로 희한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그런데 내가 만약 그 푸대를 훔쳐 아자 소저에게 갖다준다면 그녀는 기뻐할 것이다."

이때 거지들은 앉아서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는데 모든 사람의 곁에는 몇 개의 푸대가 놓여 있었다.

어떤 푸대 자루는 지극히 컸으며 그 속에서는 무언가가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사방은 조용했다. 만약 자기가 기어서 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가는 반드시 개방의 제자들에게 발각당하리라 생각되었다.

"그들이 만약 푸대 자루를 내 머리 위에 씌운다면 나는 무쇠탈이 있어서 머리를 보호해 주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의 몸뚱이를 커다란 푸대 자루 안에 집어 넣고 뱀과 벌레들과 함께 묶어 놓는다면 그야말로 야단이야."

그런데 몇 시진이 흘러도 시종 동정이 없었다.

날이 점점 밝아 왔다. 그리고 해가 떠올라 온누리를 밝게 비춰 주었다.

나뭇가지 위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갑자기 전백광이 나직이 부르짖었다.

왔소. 모두들 조심하시오.

그는 가부좌를 튼 채 진 밖의 한 바위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곁에는 푸대 자루가 없었고 손에 한 자루의 철적(鐵笛)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서북쪽에서 주악 소리가 울려퍼졌다. 한떼의 사람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주악 소리 속에는 종 소리와 북 소리가 섞여 있었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새 색시가 시집을 가나?"

주악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십 장밖에 이르러서야 멈추었는데 몇 사람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성숙노선께서 중원에 왕림하셨으니 개방의 제자들은 빨리 나서서 꿇어 엎드려 맞아들일지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둥,둥,둥 하는 북 소리가 울려퍼졌다. 세 차례의 북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을 때 꽝, 하는 징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러나 북 소리가 멈추고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제히 외쳤다.

성숙노선께서 대법력(大法力)을 펼치시어 개방의 조무래기들을 항복시켜 버리십시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도사가 법사(法事)를 하는 것 같구나."

그는 살그머니 바위 뒤에서 고개를 반쯤 내밀었다. 서북쪽에 이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일 자로 늘어서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징이나 북, 그리고 악기를 들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손에 기다란 비단으로 만든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웃긋불긋한 것이 꽤 아름다워 보였다.

깃발 위에는 성숙노선 신통광대(神通廣大), 법력무변(法力無邊), 위진천하(威震天下) 등의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주악과 징 소리와 북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등뒤로 수십 명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는데 그와는 수 장의 간격을 두고 따르고 있었다.

노인은 손에 한 자루의 아모선(鵝毛扇)을 들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그의 얼굴은 불그레했으며 머리카락은 허연 백발이었다. 턱 아래로 석 자 길이의 은빛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동안학발(童顔鶴髮)로서 그림 속의 신선 같았다.

노인은 뭇 거지들과 삼 장 정도 되는 곳에 멈추더니 갑자기 입술을 모아 힘껏 휘파람을 내불었다. 몇 번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휘파람 소리를 내지르더니 들고 있던 우선(羽扇)을 부채질하여 휘파람 소리를 밀어 보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땅바닥에 앉아 있던 거지들 가운데 대뜸 네 사람이 뒤로 벌렁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유탄지는 깜짝 놀랐다.

"저 성숙노선은 과연 법력이 무섭구나."

그 노인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우선을 휘둘렀다. 그러자 또 한 명의 거지가 쓰러졌다.

그 노인의 휘파람 소리는 마치 일종의 무형유질(無形有質)의 무서운 암기처럼 삽시간에 개방의 제자들 가운데 예닐곱 명을 다시 쓰러뜨렸다.

노인의 등뒤에서 뭇 사람들은 큰소리로 칭송했다.

사부님의 공덕은 고금을 통털어 으뜸갑니다. 이 거지들이 감히 우리와 맞서다니 이야말로 개똥벌레가 해와 달과 밝음을 겨루려는 웃기는 짓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이 분수를 모르니 정말 가소롭군요! 가소로워요!

이는 천하에서 일찍이 없었던 위대한 공적입니다. 만약 사부 어르신께서 이 한 수를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중원의 무림인들은 이 세상에 이와 같은 무공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칭송하는 소리가 노래처럼 울려 퍼지게 되었고 덩달아 주악 소리도 울려퍼졌다.

별안간 닐니리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전백광이 철적을 입에 갖다 대고 불기 시작했다.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왜 피리를 부는 것일까? 성숙노선의 위세를 꺽자는 것일까?"

그런데 갑자기 땅바닥에서 삭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푸대 자루 속에서 몇 마리의 오색으로 얼룩진 커다란 뱀이 기어 나와 곧장 그 노인에게로 기어갔다.

노인 곁에 있던 한 떼의 제자들은 놀라 부르짖었다.

뱀이다! 뱀이야! 독사다!

어이구, 야단났다! 이 많은 독사들이 나타나다니!

사부님, 이 많은 독사들은 우리들을 향해 달려 오는 것 같습니다!

이때 뭇 거지들의 푸대 속에서 다투어 독사들이 기어 나왔다. 큰 것도 있었고 작은 것도 있었는데, 모두 다 고개를 쳐들고 혀를 날름거리며 노인과 뭇 제자 들에게로 달려갔다. 이렇게 되자 그 제자들이란 사람들은 더욱 입을 열고 어지럽게 소리치며 떠들었다.

성숙파의 뭇 제자들은 강철 지팡이를 들고 다투어 꾸불꾸불 달려 드는 독사들을 후려쳤다. 그런데 그 노인은 태연자약했다. 여전히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며 부채를 휘둘러 적을 공격하고 있었다.

전관청의 피리 소리는 멈추어지지 않았으며 뭇 거지들도 덩달아 함성을 질러 위세를 돋우었다.

뱀들은 점차 더 많이 기어 나오게 되었다. 삽시간에 성숙파의 제자들 옆에 수백 마리나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는 대 여섯 마리의 커다란 구렁이도 있었다.

몇 마리의 커다란 구렁이는 다가가더니 대뜸 꼬리를 돌려 두 사람을 휘감아 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또 다른 두 사람이 구렁이의 꼬리에 감겼다. 성숙파의 뭇 제자들이 도망을 친다면 뱀들은 뒤쫓아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부가 적을 만나 싸우고 있는 판인데 제자들이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무기를 휘둘러 마구 내려치고 때렸다.

따라서 그들에게 맞아 죽는 독사들도 이미 수십여 마리나 되었다. 그러나 독사들에게 물려서 상처를 입은 사람도 팔 명이나 되었다.

그 커다란 구렁이는 더욱 무서웠다. 껍질이 거칠고 살이 두툼하여 강철 지팡이에 맞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으며 오히려 몸을 돌려 사람을 휘감고 갈수록 바짝 조였다.

철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푸대 자루에서 기어나온 커다란 구렁이는 점차 수가 불어나게 되었고 모두 합하면 스물 여덟 마리나 되었다.

그 노인은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자 물러섰다가 전관청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두 마리의 조그만 뱀이 벼락같이 뛰어오르며 그의 얼굴을 물려고 했다.

그는 크게 노해 부르짖었다.

당돌하다!

그는 우선을 휘둘러 세찬 바람을 뻗쳐내어 두 마리의 작은 뱀을 쳐서 떨어뜨렸다.

그런데 갑자기 한 부드러운 물건이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그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몸을 솟구치려 했다. 그런데 이때 닐리리 하는 피리 소리와 더불어 네 마리의 구렁이와 뱀이 동시에 기다란 꼬리를 휘두르며 그를 감으려고 달려 들었다.

그 노인은 몸이 허공에 뜬 채 펑펑, 하며 이 장을 후려쳤다. 앞 쪽과 왼쪽의 두 마리 구렁이와 뱀을 후려친 후 몸을 흔들더니 어느덧 이 장 밖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 번째 네 번째 커다란 구렁이의 꼬리가 동시에 공격해 왔다.

그는 다급한 김에 운기행공해서 다시 일 장을 격출했다. 장풍이 이르는 곳에 대뜸 한 마리의 커다란 구렁이의 머리가 박살났다.

뱀떼들은 조수처럼 몰려 들었다. 노인은 다시 세 마리의 커다란 구렁이를 때려 죽였다. 그러나 그 동안 허리와 왼다리는 어느덧 두 마리의 커다란 구렁이의 꼬리에 감기고 말았다.

그는 내력을 돋우어 일성을 대갈하며 손가락을 뻗쳐 허리를 감은 커다란 구렁이의 배를 움켜 잡고 찢었다. 그 바람에 그의 온몸은 핏물로 얼룩지게 되었다.

이 구렁이는 배에 구멍이 나게 되었으나 일시에 죽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당한 끝에 더욱 힘주어 조여왔다. 이렇게 조이는 바람에 노인은 허리뼈가 거의 분질러질 지경이었다.

그는 힘 주어 두 번 허리에 감긴 뱀을 떨쳐 보려고 했다. 그런데 곧이어 두 마리의 커다란 구렁이가 휙 하니 달려들더니 그의 몸을 몇 바퀴 감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그의 팔목마저 뱀의 꼬리에 감겨 들게 되어 그로서는 이제 항거할래야 항거할 수도 없게 되었다.

유탄지는 풀더미 속에서 이와 같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정경을 보고 제대로 숨마저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전관청은 속으로 크게 기뻤다. 많은 적들이 하나같이 커다란 구렁이에게 감겨 신음 소리를 내거나 욕지거리를 하는 외에는 반항할 힘이 없는 것을 보자 더 피리를 불지 않고 다가가서 싱글벙글 웃었다.

성숙노괴, 당신네 성숙파와 우리 개방과는 평소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요. 그런데 어찌하여 이유 없이 우리에게 도전을 해 오는거요. 이제 또 무슨 할말이 있으신지 해 보시구려?

이 동안학발의 노인은 바로 중원 무림 인사들이 가장 혐오하고 증오하는 성숙노괴 정춘추였다.

그는 성숙파 삼보 가운데 하나인 신목왕정을 여 제자 아자에게 도둑맞게 되자 몇 대의 제자들을 내보내 아자를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심지어 큰 제자인 적성자까지 파견했다. 그러나 비합전서로 전해 오는 보고를 보니 불리한 소식뿐이었다.

심지어 아자가 개방의 방주 교봉의 힘을 의지하여 적성자를 반 쯤 죽여 놓았다는 것이 아닌가?

정춘추는 놀람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개방은 중원 무림의 제일 큰 방파여서 가볍게 다룰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농아 노인이 근년에 이르러 강호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으며 어떤 행동을 보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심복지환이라고 할 수 있는 농아 노인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신목왕정을 되찾은 후 이 기회에 옛날에 해결하지 못했던 큰일을 매듭 지으리라 생각하고 성숙파의 제자들을 모조리 이끌고 친히 중원으로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연마하는 화공대법은 종종 독사나 독벌레의 독질(毒質)을 손바닥에 바른 다음 몸안으로 흡수해야 했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짓을 칠 일 동안 하지 않는다면 공력이 감퇴될 뿐만 아니라 몸안에 축적되었던 수십 년 묵은 독질이 새로운 독의 제압을 받지 못함으로써 점차 발작을 일으키게 되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큰 화는 실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 신목왕정으로 말하면 본래부터 한 가닥 특이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 목정에 향을 피우면 삽시간에 독충을 유인해 올 수 있었으며 주변 십리 안의 어떠한 독충이라도 그 향기에 유인되곤 했다.

정춘추는 그와 같은 기이한 목정을 가지고 있을 때는 독충을 사로잡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고 화공 대법도 자연 날이 갈수록 심후해지고 극한에 가깝게 연마할 수 있었다.

과거 정춘추에게는 사랑하는 제자가 한 명 있었다. 그 제자는 그의 지도를 받아 화공대법을 익히게 되었고 커다란 성취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 후 자기의 능력을 믿고 사부인 그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정춘추는 그를 제압한 후에 칼이나 지팡이로 형벌을 하지 않고 그 제자를 한 칸의 석옥에다 감금하여 그로 하여금 독사나 독충을 잡아 그 독질을 흡수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 되자 그 제자의 몸안에 잠재해 있던 독소가 발작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 제자는 감당할 수 없어서 자기의 전신 근육을 한 조각 한 조각 찢어 내게 되었으며 신음과 더불어 울부짖음을 토해내기를 사십여 일이나 하다가 죽게 되었다.

성숙노괴는 물론 그 제자를 그와 같이 처치하고 의기양양하게 생각했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또한 경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화공대법을 그 어느 제자 에게도 다시는 전수하지 않았다.

적성자도 화공대법을 모르고 있었다. 아자는 그와 같은 신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신공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몰래 훔쳐 배워야 하며, 훔쳐 배우려면 반드시 목정을 훔쳐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자는 본래 심계가 뛰어난 편이었다. 그녀는 사부가 막 독공을 연마한 그날 사부에게 하직을 고하고 동쪽으로 떠나 오게 되었다.

성숙노괴가 신목왕정이 절취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레가 지난 후였으며 아자가 멀리 도망친 후였다. 더군다나 그녀가 선택한 길은 외진 소로였다.

그녀를 뒤쫓아 잡으려는 뭇 사형들의 무공은 그녀보다 고강했으나 지략에 있어서는 그녀에 미칠 바가 못 되었다.

그녀는 꾀를 짜내어 뒤를 쫓아 오는 뭇 사형들을 모조리 떨쳐 버렸던 것이다.

성숙노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은 그늘지고 어둡고 습기가 많은 깊은 골짜기라 독사와 독충이 번식하고 있었다.

신목왕정을 잃었다고 하나 독충을 잡아 독을 몸에 더 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반 독충은 잡기 쉬웠다. 반면 옛날처럼 괴상야릇하고 보기 드물게 무서운 극독을 지닌 독사나 독충은 좀처럼 구할 수가 없었다.

그가 더욱 걱정하는 것은 중원의 고수들이 신목왕정의 내력을 알고 즉시 없애버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되찾아 오지 않는다면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섬서성 경내에서 파견햇던 뭇 제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대제자 적성자는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공은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거기다가 뭇 제자들에게 길을 오면서 구타를 당하거나 욕지거리를 당하는 등 시달림을 받아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다.

둘째 제자, 사자 코의 사내인 사자후(獅子喉)가 잠시 대사형의 직위를 이어 받고 있었다.

뭇 제자들은 사부가 친히 나서게 된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하나같이 사부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벌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성숙노괴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때라 벌을 내리는 것을 잠시 보류하고 각자에게 공을 세워 죄를 면하도록 하라고 일렀다.

뭇 제자들을 길을 오면서 개방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첫째로 이 사람들은 특이한 몰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어나 행동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감을 일으키게 한 까닭에 그 누구도 알고 있는 소식을 알려 주려 하지 않았다.

둘째로는 소봉이 요나라로 가서 남원대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무림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이 무척 적었기 때문에 전혀 그에 대한 소식을 알아낼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개방의 총타가 어디로 이전했는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이날 천랑자는 우연히 개방의 대지분타가 이 곳에서 모인다는 소문을 듣고 공을 세우기 위해 급히 홀몸으로 달려 들었다가 전관청의 암산에 걸려들고 말았던 것이다.

천랑자는 몸안에 독소가 잠재하여 있기 때문에 전갈의 독은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었다.

도망을 치게 된 후 물에 빠졌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진 후 급히 사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래서 정춘추는 급히 달려 오게 되었는데 일신의 극독과 심후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커다란 구렁이에 몸이 감겨 꼼짝할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춘추는 전관청의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냉랭히 되물었다.

너희들 개방의 교봉이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지? 빨리 그를 나오라고 해라.

전관청은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서 물었다.

귀하는 교봉을 만나려는 것이오? 무엇 때문이오?

정춘추는 오만하게 대답했다.

성숙노선이 너에게 말을 묻고 있는데 네 어찌 대답을 하지 않는단 말이냐? 더군다나 나에게 이것 저것 따져 묻다니 당돌하다. 교봉은 어디 있느냐?

전관청은 그가 커다란 구렁이에 감겨서 항거할 힘을 잃고 있는데도 행동거지가 그토록 오만한 것을 보고 이와 같이 괴팍한 사람은 천하에서 보기 드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숙노괴의 이름은 천하 사람들이 다 들어 알고 있는 터이지만 뜻밖에도 헛된 명성을 지니고 있는데 불과하구려. 몇 마리 조그만 뱀들을 상대해 내지 못하다니 정말 실망했소. 오늘은 미안하지만 우리들은 천하를 위해서 커다란 해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정춘추는 빙그레 웃었다.

노부가 조심하지 않아 너같은 녀석의 손 아래 꺽이게 되었으니 오늘 서방극락으로 혼백이 돌아간다 하더라도 운명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구렁이에게 감겨 있던 성숙파의 제자가 갑자기 부르짖었다.

개방의 대영웅, 나를 놓아 주신다면 커다란 이득을 보도록 해주겠소! 우리 사부님은 간계가 무척 많아 그대로서는 방비할래야 방비할 수가 없을 것이오. 잘못하다가는 그의 술수에 말려 들게 된답니다.

전관청은 냉랭히 말했다.

당신은 놓아 주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는 것이오?

그 사람은 말했다.

우리 성숙파에는 모두 세 가지의 보물이 있는데 성숙삼보라고 한다오. 숨겨져 있는 곳도 알고 있지요. 그대가 나의 목숨을 살려 준다면 그대가 이 성숙노괴를 죽인 후 나는 보물을 꺼내 받치리다. 만약 그대가 나를 죽이게 된다면 그대는 성숙삼보를 영원히 얻지 못하게 될 것이오.

다른 한 명의 성숙파 제자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대영웅! 대영웅!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성숙삼보 가운데 한가지 보물은 이미 도적질을 당했소. 그대는 나를 놓아 주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나만이 그대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결코 그대를 속이지 않을 것이오.

삽시간에 성숙파의 뭇 제자들은 다투어 부르짖기 시작했다.

개방의 대영웅, 그대가 나의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오! 그들은 모두 그대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을 것이고 오로지 나만이 죽어라 하고 그대를 위해 충성을 바치게 될 것이오.

대영웅, 성숙파의 무공에 관해서 내가 아는 것이 가장 많소이다. 나는 반드시 그 무공을 털어 놓겠으며 조금도 숨기지 않겠소이다.

본파의 사람들이 중원 땅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중대한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주된 목적은 바로 당신네 개방을 상대하는 것이외다. 대영웅이신 여러분들은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지 않소이까?

우리 성숙해 옆에는 헤아릴 수 없는 금 은과 보물이 숨겨져 있소이다. 나는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을 모두 알고 있소이다. 내가 그대들을 데리고 가서 파내게 된다면 개방의 영웅 호걸들은 이제부터 밥을 먹지 않아도 될 것이외다.

이 사람들은 남에게 뒤질세라 아첨과 충성을 다하겠다고 아우성쳤다. 어떤 사람은 이득으로 마음을 움직이려 했고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호기심을 자극시키려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공공연히 황당무계한 거짓말을 해댔다.

어떤 제자들은 이미 독사에게 물려 상처를 입고 또는 커다란 구렁이에 몸이 감겨 한 가닥 숨만 붙어 있게 되었는데도 남에게 뒤질세라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면서 용서를 비는 말을 했다.

개방의 제자들은 성숙파의 제자들이 이토록 뼈대가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관계로 그들이 비굴해 보이기도 했거니와 또한 호기심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투어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당신네들은 자기의 사부에 대해서도 충성을 다하지 않는데 어찌 평소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이오? 그 어찌 가소롭지 않소?

한 명의 성숙파 제자가 말했다.

그건 다르외다. 그건 크게 다르지요. 성숙노괴는 무공이 얕으니 내가 한평생 그를 따른다 해도 무슨 출세를 하겠소? 그리고 그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소? 개방의 대영웅들께서 무공으로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또 뱀을 몰아 적을 제압하는 커다란 법술을 알고 있으니 어찌 성숙노괴의 재주와 비교할 수 있겠소?

그렇죠. 개방에서 성숙파의 뭇 제자들을 거두어들이게 된다면 서역과 중원의 군웅들은 크게 놀라게 될 것이고 개방의 인물들이 영웅답다는 사실에 탄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외다.

영웅이란 두 글자로써는 뭇 고인협사들을 칭하기에 부족하지요. 마땅히 대협(大俠)이나 성인(聖人), 혹은 구세주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합당합죠.

나는 도리를 따져 말을 하는데 능하답니다. 이후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여러분들의 덕망과 위세를 선전해 드리겠소이다. 그렇게 된다면 개방의 대협들의 명망을 천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외다.

쳇, 개방 대협의 명성은 이미 천하에 두루 알려진 사실인데 네가 나가서 말할 필요가 어디 있다더냐?

성인이나 구세주의 칭호는 소인이 제일 먼저 말한 것이외다. 그들은 내 말을 본받아 한 것으로서 전혀 공로를 세웠다고 할 수 없죠.

이때 한 명의 개방 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네 같이 비열한 소인들이 소리치는 꼴은 정말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성숙노괴, 그대는 어찌 이와 같은 염치도 모르는 자들을 제자로 삼았단 말이오? 내 먼저 그대를 보낸 이후 이 녀석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그대 뒤를 따르도록 만들겠소이다. 오늘 나는 크게 살인을 해야 되겠소.

그리고 그는 획, 하니 일 장을 들어 정춘추를 후려쳤다.

이 일 장의 기세는 질풍노도와 같았고 그 세찬 기운 또는 강맹한 것이었다.

그 한 대의 일 장은 바로 정춘추의 가슴을 때리게 되었다. 그런데 정춘추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자약했다.

반면에 그 거지는 두 무릎을 맥없이 꿇더니 땅바닥에 털썩 쓰러져 몸뚱아리를 웅크린 채 미미하게 두 번 떨더니 꼼짝하지 못했다.

뭇 거지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부르짖었다.

어떻게 된 거야? 두 명의 거지가 손을 뻗쳐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손이 그의 몸에 닿자마자 그들 역시 쓰러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나머지의 모든 개방 제자들은 모두 놀라 어리둥절해졌으며 감히 손을 뻗쳐 동료를 부축해 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전관청은 호통을 내질렀다.

이 늙은이의 몸에는 독이 있으니 모두들 그의 몸에 손을 대지 말고 암기를 쓰도록 하게.

팔구 명의 제자들이 동시에 암기를 꺼내 던졌다. 강표, 비도, 수전, 비황석등이 다투어 정춘추에게 날아 갔다.

정춘추는 일성을 대갈하더니 머리를 급히 휘둘렀다. 머리의 허연 백발을 떨쳐내는데 그것은 마치 짧디 짧은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십여 가지의 암기를 퉁겨 개방 쪽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어이쿠, 어이쿠, 하는 소리가 잇따라 이는 가운데 육칠 명의 개방 제자들이 암기에 적중되었다.

이 암기들이 모두 급소에 적중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암기는 그저 살갗에 약간의 상처를 입히게 되었을 뿐인데도 그 몇 명의 거지들은 즉시 맥 없이 쓰러져 죽고 말았다.

전관청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물러 서시오! 물러 서시오!

별안간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대의 강표가 전관청에게 날아왔다. 바로 정춘추가 머리카락 끝으로 휘감았던 강표에 공력을 돋우어 전관청에게 쏜 것이다.

전관청은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쇠 피리를 들어 내리쳤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강표는 멀찌감치 날아가고 말았다.

그는 성숙노괴가 정말 무섭다고 행각했다. 오로지 구렁이를 몰아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즉시 철 피리를 입가로 가져가 불려고 했다. 별안간 입이 마비되면서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는 아차, 하고 급히 철 피리를 내던졌다. 그 순간 털썩, 하며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거지들은 깜짝 놀랐다. 즉시 두 사람이 달려 들어 부축을 했다.

전관청은 부르짖었다.

나는..... 나는 중독되었소. 모..... 모두들..... 빨리..... 떠나시오.....

뭇 거지들은 그만 혼비백산해서 전관청을 떼메다시피 하고 나는 듯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곳곳에 널려 잇는 시체와 푸대 자루, 그리고 독사들을 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탄지는 풀더미 속에 웅크린 채 놀람과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는 꼼짝하지 못했다.

사방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십여 명의 거지들은 하나의 둥근 공처럼 웅크린 상태로 죽어 있었다.

그 커다란 구렁이들은 전관청이 다시 피리 소리로 재촉을 하지 않자 사람을 해칠 줄 모르는 듯했다.

그저 정춘추의 사도들을 칭칭 감고만 있었다. 성숙파의 뭇 사람들은 그 누구도 함부로 버둥거리거나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된다면 뱀의 흉악한 성질을 자극하여 자기 자신을 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잠시 조용해졌을 때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부님, 어르신의 신공은 그야말로 천하에서 독보적입니다.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거지들을 죽여 황망히 도망치도록 만들었군요.....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른 한 명의 제자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사부님, 그의 개방귀 같은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조금 전 그 거지들에게 대협이니 성인이니 하고 불렀던 놈이 바로 저놈입니다.

그러자 또 한 명의 제자가 말했다.

우리들은 사부를 따른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사부에게 하늘에 통하고 땅에 통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겠는가. 조금 전 그 거지들에게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인 것은 그들을 속여 그들로 하여금 방비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사부님께서 신통하기 이를데 없는 법력을 쉽게 펼치도록 한 것이야.

갑자기 누군가 대성통곡을 하며 말했다.

사부님, 사부님, 제자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자는 멍청해서 살기를 욕심내고 죽기가 두려워 적에게 투항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야말로 후회막급입니다. 차라리 독사에게 물려 죽었으면 죽었지 다시는 사부에게 용서를 빌 수가 없군요.

뭇 제자들은 대뜸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들의 사부는 변명을하여 자기의 죄를 숨기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멍청하고 죽어 마땅하다고 통렬히 자책하고 각종각양의 죄명을 함부로 자기에게 씌워야 사부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삽시간에 그들은 다투어 자기 자신들을 욕했다. 자기의 양심이 어떻게 곱지 못했다느니, 또 만 번 죽어 마땅한 죄를 어떻게 지었다느니.....

풀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유탄지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어리벙벙해졌다.

정춘추는 암암리에 공력을 돋구고 몸을 감고 있는 세 마리의 구렁이의 몸을 잘라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구렁이의 몸은 신축성이 있었다.

정춘추가 힘을 주어 끊으려고 하면 구렁이의 몸이 약간 늘어나기만 할 뿐 끊어지지 않았다.

정춘추의 온몸은 독으로 뭉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의복과 머리카락에도 극독이 모여 있었다.

뭇 거지들이 그를 격타 하거나 암기를 쏴 붙이게 되었을 때 모조리 독이 묻게 되었고 그래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커다란 구렁이의 껍질은 두껍고 질길 뿐 아니라 매끄러워 독소가 제대로 침입할 수 없었다.

이때 뭇 제자들이 여전히 넋두리를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 정춘추는 노해 부르짖었다.

그 누구든 뱀을 쫓아 내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면 나는 그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설마하니 너희들은 아직도 나의 성질을 모른단 말이야? 나에게 쓸모가 있을 때 나는 죽이지 않는다. 너희들이 언제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면 그야말로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느냐?

그 말이 떨어지자 뭇 제자들은 대뜸 조용해졌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어느 한 사람이 횃불을 들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구렁이나 뱀의 배에 갖다대게 된다면 이것들은 그만 도망을 치고 말 것입니다.

정춘추는 욕을 했다.

개방귀 같은 소리 작작해라. 이곳은 넓은 들이다. 앞으로 마을이 없으며 뒤로 가게가 없는데 그 누가 지나간다는 것이냐? 설사 시골 사람이 길을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독사들을 보게 된다면 놀라서 도망치기에 바쁠 터인데 어느 겨를에 횃불을 들고 뱀들을 불태우려고 달려 들겠느냐?

다른 제자가 또 마구 방법을 생각해 낸답시고 지껄였으나 그 방법이란 것이 돼먹지 못해 쓸모가 없었다. 그런데도 여러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자기가 확실히 사부님의 명령을 받들어 애써 생각해 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한참 시간이 흐르게 되자 한 명의 제자는 커다란 구렁이에 감겨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진 가운데 그는 그만 구렁이의 몸을 물어 뜯게 되었다.

그 구렁이는 깜짝 놀라 그만 그의 목을 되려 깨물었다. 그 제자는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대뜸 숨지고 말았다.

정춘추는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만약 적에게 포위 공격을 받게 되었다면 이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반드시 독을 쓰거나 이상야릇한 행동을 함으로써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교묘한 계책이라 할지라고 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커다란 구렁이들이 배가 고프게 되면 단번에 자기를 집어 삼키지 않을까 두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걱정하던 일은 현실로 나타났다. 한 마리의 커다란 구렁이는 오랫 동안 피리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고 굶주려 지치게 될 정도가 되자 그만 크게 입을 벌리고 감고 있던 한 명의 성숙파 제자를 덥석 깨물었다. 그 제자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부님, 구해 주십시오. 사부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두 다리는 이미 커다란 구렁이의 입 속에 삼켜진 상태였다.

그의 몸뚱이는 커다란 구렁이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입으로 처참한 비명을 질러댔다.

구렁이와 뱀의 이빨은 거꾸로 매달린 갈고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발과 다리가 먼저 뱀의 입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천천히 허리가 빨려 들어갔고 끝내는 가슴팍까지 삼켜지게 되었다.

일시 죽지 않은 그는 소리 높여 처참한 울부짖음을 토해 냈는데 그 소리가 넓은 들판으로 멀리멀리 퍼져 갔다.

사람들은 자기 역시 눈 깜박할 사이에 그를 뒤따르게 되리란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모두들 겁을 집어 먹게 되었다.

한 사람이 성숙노괴 역시 속수무책인 것을 보고 그만 울화가 치민 듯 입을 열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성숙노괴의 탓이라는 것이었다. 자기는 멀쩡하게 성숙해에서 양을 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가 위협하고 유혹하여 제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바람에 제자가 되었으며 오늘은 참혹하게 독사의 밥이 되었다고 원망했다.

저승에 가게 된다면 반드시 염라대왕님에게 성숙노괴를 고자질하겠다고 저주했다.

이 사람이 욕을 하기 시작하자 나머지 제자들도 다투어 욕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은 평소 성숙노괴의 학대를 받아온 몸이라 하나같이 마음 속에 증오심을 품고 있었으나 평소에는 화가 나더라도 감히 입을 벌리고 말을 할 수 없지만 오늘은 어찌 되었든 함께 죽게 된 몸이니 실컷 욕이나 하여 가슴 속의 울분을 풀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크게 욕지거리를 하면서 몸을 심하게 움직이게 되었고, 그 바람에 그를 감고 있던 커다란 구렁이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 구렁이가 대뜸 그의 어깻죽지를 물자 그 사람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이쿠, 어이쿠, 목숨만 살려 줘! 목숨만 살려 줘!

유탄지는 그 한 떼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구렁이나 뱀에게 감겨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풀더미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결코 머물 곳이 못되니 한시 바삐 떠나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성숙파의 뭇 사람들은 갑자기 머리에 무쇠탈을 쓴 괴상한 모습의 사람을 대하게 되자 모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곧 무쇠탈을 쓴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에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대영웅! 대협사! 아무쪼록 마른 가지를 주워서 불을 붙인 후 이 구렁이와 뱀들을 쫓아 주시오! 그러면 즉시 그대에게..... 그대에게 천 냥의 은자를 드리리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천 냥으로는 부족하죠. 나는 일만 냥을 드리리다.

다른 한 사람은 말했다.

이 분 선생께서는 인자하시고 의협심이 깊은 협사이시죠. 그리고 양심이 지극히 올바른 분으로서 반드시 올바른 일을 보고 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불을 붙여 뱀을 태운다는 것은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니 더 말할나위가 없지요.....

삽시간에 칭송하는 소리가 크게 일었고 모두 그 보답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는데 순식간에 그 보수는 백만 냥의 황금으로 뛰어 올랐다.

이 사람들의 욕하는 재간은 그야말로 일등이라 할 수 있었는데 아첨과 칭송하는 재간은 더욱 오랜 훈련을 쌓은 듯했다.

유탄지는 한평생 남에게서 자기를 대영웅, 대협사, 인정 많고 의리 있는 협사, 당금 세상에서 둘도 없는 호걸 등 칭찬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그들에게 떠받들려 하늘로 올라가는 듯 했으며 정말 자기가 대영웅이고 대협사의 기개를 갖은 것처럼 느껴졌다. 따라서 백만 냥의 황금은 별로 대수롭게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아자 소저가 옆에 없어 뭇 사람들이 자기를 칭송하는 말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유감이었다.

그는 즉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았다. 그리고 화섭자를 꺼내 불을 당겼다.

그러나 그 많은 흉칙하게 생긴 구렁이와 뱀들을 보게 되자 역시 무서운 느낌이 치솟았다. 혹시 커다란 뱀들을 건드려 자기 자신마저 뱀들에게 감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한 끝에 그는 한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자기 앞에다가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 자기 자신을 보호하도록 했다. 그는 불이 붙은 한 대의 마른 나뭇가지를 집어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커다란 뱀에게 던졌다.

그 자신은 모닥불 뒤에 몸을 숨기고 있어 몸을 돌린 채 자세를 가다듬었다.

만약 그 커다란 뱀이 자기에게 달려든다면 그는 즉시 뺑소니칠 작정이었고 대영웅 대협사 노릇은 잠시 덮어 둘 작정이었다.

구렁이와 뱀은 정말 불은 무척 두려워했다. 불꽃이 뱀의 곁으로 던저져 타오르는 것을 보자 즉시 감고 있던 사람들을 풀고는 풀더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유탄지는 불로 공격하는 것이 효과가 있는 것을 보자 성숙파 뭇 사람들의 환호성 가운데 한 대, 한 대의 불 붙은 나뭇가지를 뱀 떼들에게 던졌다. 뱀 떼들은 대뜸 다투어 도망을 치게 되었으며 길이가 수 장이나 되는 커다란 구렁이도 불을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르르 몸을 풀더니 꾸불텅거리며 기어갔다. 삽시간에 수백 마리나 되는 커다란 구렁이와 독사들은 모조리 도망치고 말았다.

성숙파의 뭇 제자들은 큰소리로 칭송했다.

사부님은 정말 앞 일을 잘도 내다보시며 귀신과 같이 잘 알아 맞추었습니다. 과연 불로 공격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가 있군요!

사부님의 복은 하늘만큼 커서 아무리 위험한 일도 운 좋게 풀리고 맙니다.

모두 사부님이 올바른 지휘를 해 주셔서 저희들 개미 같은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칭송하는 말들이 이곳 저곳에서 울려 퍼지게 되었는데 모두가 성숙노괴의 공으로 돌렸고 유탄지가 불을 붙여 뱀을 쫓는 데 대해서는 반 마디의 인사말도 없었다.

유탄지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저 사람들은 크게 사부를 욕하더니 지금은 또 크게 사부를 칭찬하는구나! 그리고 나를 대영웅이니 대협사니 하고 부르더니 이제는 그 칭호가 이 녀석에게로 바꾸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까닭이지?"

정춘추는 그에게 손짓을 했다.

무쇠 머리를 한 꼬마야! 이리 오너라. 너의 이름은 뭐지?

유탄지는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데 습관이 되어서 상대방이 무례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유탄지라고 합니다.

그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

정춘추는 말했다.

저 거지들이 다 죽었느냐? 너는 그들의 코 앞에 손을 갖다 대어 보아라.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유탄지는 대답했다.

예.

그는 몸을 굽히고 손을 뻗어서 거지의 코 앞으로 가져가 그 사람을 만져 보았다.

손에 와 닿는 촉감은 얼음과 같이 차가웠다.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그는 다시 다른 한 명의 거지를 시험해 보았다. 역시 숨을 멈춘 지 오래 되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숨이 멈추었고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자 성숙파의 제자들은 하나 같이 얼굴에 꼴 좋다는 조롱의 빛을 띠었다.

유탄지는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어서 다시 되풀이하여 말했다.

숨을 쉬지 않는 것이 모두 죽었습니다.

뭇 사람들의 얼굴에 꼴 좋다고 하던 표정들이 점점 사라지고 그대신 의아한 빛이 떠오르고 그 의아한 빛은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정춘추는 다시 당부했다.

너는 모든 거지에게 다가가서 알아 보아라. 아직도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보란 말이야.

유탄지는 대답했다.

예.

그는 십여 명의 개방 제자들을 모조리 살펴본 이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죽었습니다. 노 선생의 공력이 실로 무섭습니다.

정춘추는 냉소했다.

너의 독에 항거하는 재간은 그야말로 정말 무섭기 이를데 없구나.

유탄지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제게..... 무슨..... 독에 항거하는 재간이 있다구요 정춘추가 도대체 그와 같은 말을 한 저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로서는 음흉한 성숙노괴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성숙노괴는 커다란 구렁이에 몸이 감겨 꼼짝 할 수가 없었는데 유탄지의 덕택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실이 강호에 퍼지게 된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따라서 성숙노괴는 커다란 구렁이와 뱀들이 떠나간 이후 즉시 유탄지를 중독시켜 죽여 입을 봉하고자 그와 같은 수작을 부린 것이다. 그런데 유탄지는 이 몇 달 동안 끊임없이 역근경을 연마한 결과 빙잠의 독이 이미 그의 체질과 하나로 똘똘 뭉쳐지게되어 정춘추가 뭇 거지들의 몸에 묻힌 독소는 그를 해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춘추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손의 살결과 말하는 음성으로 미루어 보아 나이가 무척 젊은 것 같다. 어떤 진짜 실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중팔구 몸에 전문적으로 독물을 제압하는 웅황주(雄黃珠)나 사악한 냄새를 물리치는 기이한 향기와 같은 종류의 보물을 숨기고 있든지, 아니면 미리 효과가 좋은 해독약을 먹었기 때문에 기이한 독의 침입을 받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한 그는 물었다.

유 형제, 이리 오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이 있네.

유탄지는 그가 매우 간곡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으나 그가 잇따라 거지들을 죽이는 잔인하고 매서운 수법을 친히 본 터였고 또 그들 사제간끼리 방금 아첨을 했다가 방금 욕을 하는 것을 친히 목격했는지라 이와 같은 사람들과는 역시 멀리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답했다.

소인에게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모실 수가 없군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포권을 해 보이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가 몇 걸음을 걸어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그의 곁으로 일진의 미풍이 스쳐갔다.

그 순간 두 손목이 바짝 조여지면서 어느덧 누구에게 잡히고 말았다. 유탄지는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그를 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성숙파 제자 가운데 한 명의 대한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의 온 얼굴에 흉칙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깜짝 놀란 그는 부르짖었다.

빨리 나를 놓으시오!

그는 힘주어 뿌리쳤다.

그 순간 머리 위로 휙, 하는 바람 소리가 이는 가운데 한 우람한 체구가 그의 머리 위를 지나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심하게 맞은 편 산 벽에 부딪쳤다.

대뜸 두 개골이 박살나게 되었고 그 머리통은 죽을 쑤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변하고 말았다.

유탄지는 그 사람이 산벽에 부딪치는 힘이 그토록 맹렬한 것을 보고 믿기가 어려워 일시 어리둥절했다.

잠시 후에야 그는 머리가 박살난 사람이 바로 자기를 잡았던 그 대한임을 알아 보고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사람은 왜 무단히 머리를 벽에 박고 자결하는 것일까? 혹시 정신이 돈 게 아닐까?"

그는 자기가 손을 뿌리치는 바람에 엄청난 힘이 그 대한을 산벽으로 내던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성숙파의 뭇 제자들은 모두 아, 하는 소리를 내었고 그만 안색마저 변하고 말았다.

정춘추는 그가 자기의 제자를 팽개쳐 죽이는 수법이 하잘 것 없으며 상승의 무공이 아니라 그저 팔 힘이 기이하도록 뛰어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따라서 유탄지가 천부적인 신력을 타고 나긴 했으나 무공은 평범하다고 생각했고 즉시 몸을 훌쩍 날려 유탄지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리고 손을 뻗쳐 유탄지의 무쇠탈을 쓴 머리를 내리 눌렀다.

유탄지는 느닷없이 머리를 내리 누르는 힘에 그만 땅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몸을 버티며 재차 바로 서려고 했으나 머리 위에 만 근이나 되는 바위를 얹어 놓은 듯 꼼짝할 수가 없어서 즉시 애걸했다.

노선생,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정춘추는 그가 용서를 비는 말을 하자 더욱 마음이 놓였다.

너의 사부는 누구냐? 너는 정말 당돌하구나! 어째서 나의 제자를 죽였지?

유탄지는 대답했다.

저..... 제게는 사부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저는 감히 노 선생의 제자를 죽이지 못합니다.

정춘추는 그와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 없이 죽여 입을 봉하려 했다. 정춘추는 손의 힘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유탄지가 몸을 일으켰을 때 일 장을 휘둘러 유탄지의 가슴팍을 후려쳐 갔다.

유탄지는 깜짝 놀라 재빨리 오른손을 뻗쳐 정춘추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유탄지가 오른손을 내밀게 되자 유탄지의 손바닥과 정춘추의 손바닥이 마주치게 되었다. 정춘추는 유탄지가 그렇게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손바닥에 축적돼 있는 독소를 내력에 실어 곧장 앞으로 밀어 보냈다.

이것은 바로 그가 수십 년 전부터 명성을 떨쳤던 화공대법이었다.

그의 독장에 적중된 사람은 독에 중독되거나 혹은 내력을 삽시간에 상실하게 되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거나 참담한 비명을 수 개월 동안 울부짖다가 죽는다.

정춘추는 한평생 이와 같은 수법으로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림에서는 화공대법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면 모두가 혐오하고 증오할 뿐 아니라 극시 무서워했다.

단예의 북명신공은 내력을 흡수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으로서 화공대법이 상대방의 내공을 없애는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화공대법에 당한 자의 내력이 신속하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 비슷했다.

단예는 그래서 종종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정춘추는 무쇠탈을 쓴 녀석이 십여 명의 중독되어 죽은 거지의 시체를 만지고도 중독되지 않는 것을 보고 즉시 자랑하는 재간을 펼쳐 낸 것이다.

두 손이 맞닿게 되었을 때 유탄지의 몸은 흔들렸다. 그리고 뒤뚱거리며 잇따라 예닐곱 걸음이나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으려 했으나 끝내 털썩 주저않고 말았다. 그러나 상대방이 밀어내는 힘은 아직 남아서 유탄지의 엉덩이가 땅에 닿게 되었을 때 등골도 땅에 닿게 되었고, 잇따라 무쇠탈을 쓴 머리도 땅에 닿게되었다. 그리하여 연거푸 세 번 곤두박질을 친 이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유탄지는 황망히 큰절을 하며 부르짖었다.

노 선생,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노 선생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정춘추는 그의 손과 자기의 손이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그의 내력이 지극히 강하고 그 기운에 음한한 기운이 실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괴이하기 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탄지의 손에도 극독이 갈무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어 속으로 크게 놀랐다.

물론 유탄지가 자기의 일 장을 얻어맞고 매우 낭패한 꼴을 보이기는 했지만 유탄지가 지니고 있는 내력과 그 내력에 실린 독 기운을 두고 말할 때 결코 자기의 것에 못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큰소리로 목숨을 살려달라고 비는 것일까?

설마하니 일부러 자기를 희롱하자는 것일까?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서 물었다.

너는 나보고 목숨을 살려 달라고 하는데 그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냐, 아니면 거짓으로 그러는 것이냐?

유탄지는 그저 큰절을 하면서 말했다.

소인은 그저 성심성의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노 선생께서는 소인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정춘추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무슨 방법을 사용했으며 또 어떤 기연을 만나게 되어 몸안에 나보다 더 많은 독을 축적하게 되었을까? 실로 이 녀석은 기이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나는 반드시 이 녀석으로부터 그가 무공을 연마하게 된 요령을 알아내고 다시 그의 몸에 잠재해 있는 독을 흡수한 이후에 죽여야겠다. 그를 이 자리에서 간단히 처치한다는 것은 너무 애석하다."

그는 다시 손을 뻗쳐 유탄지의 무쇠탈을 내리누르며 내력을 몰래 돌리고 말했다.

네가 나를 사부로 모시겠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을 때는 죽여버리겠다.

유탄지는 자기 머리의 무쇠탈이 불에 달구어진 듯 뜨거워 왔으며 그 바람에 자기의 머리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아자로부터 온갖 괴로움을 당한 이후 모든 역경을 순순히 받아넘겼으며 시비와 선악에 대한 분간이라든가 굳건하고 뼈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들을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저 목숨을 보존하고 싶어서 재빨리 말했다.

사부님, 제자 유탄지는 사부님의 문하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사부님께서는 거두어 주십시오.

정춘추는 크게 기뻐 엄숙히 말했다.

네가 나를 사부로 모시겠다면 안 될 것도 없다. 그러나 본문의 규칙은 무척 많은데 모조리 지킬 수 있겠느냐? 만약 이 사부가 너에게 어떤 명령을 내린다면 너는 성심성의로 복종하되 결코 어기거나 반항하지 않겠느냐?

유탄지는 말했다.

제자는 규칙을 준수하며 사부의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정춘추는 말했다.

이 사부가 너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더라도 너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느냐?

유탄지는 말했다.

그건..... 그건.....

정춘추는 다그치듯 말했다.

너는 잘 생각하여야 한다. 기꺼이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 죽겠다고 말하고, 기꺼이 죽고 싶지 않다면 그렇다고 말해라.

유탄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나의 목숨을 빼앗고자 하면 물론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지.

만약 반드시 그렇게 나온다면 그때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을 치는 것이고 도망칠 수 없을 때는 설사 달갑지 않더라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대답했다.

제자는 기꺼이 사부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정춘추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좋아, 좋아! 너는 한평생 겪은 일들을 자세히 나에게 이야기하여라.

유탄지는 자기의 신세와 이 며칠 동안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농사꾼의 아들인데 요나라 군사의 노략질에 사로잡혀 가게 되어 머리에 무쇠탈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춘추는 그의 몸에 있는 독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유탄지는 어떻게 하다가 빙잠과 혜정 화상을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빙잠을 훔치게 되었으나 조심하지 않은 끝에 호로 안의 빙잠에게 손가락을 물리게 되어 전신이 얼어 붙게 되었고 빙잠도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아자가 독장을 수련하게 된 모든 상황은 슬쩍 넘겨 버리고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춘추는 자세히 그에게 빙잠의 모양과 증상을 물었다. 이때 정춘추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유탄지는 생각했다.

"내가 만약 물에 젖게 되면 그림이 나타나는 괴이한 책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반드시 빼앗아 내주지 않을 것이다."

이때 정춘추는 거듭 그가 괴이한 무공을 연마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유탄지는 시종 딱 잡아떼며 실토하지 않았다.

정춘추는 원래 역근경의 무공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의 무공이 매우 형편없는 것임을 보고 유탄지가 음한한 내력을 연성하게 된 것은 순전히 빙잠의 탁월한 효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와 같은 신물(神物)을 공교롭게도 이 녀석이 몸안으로 흡수해 가다니 정말 아까운 노릇이다."

그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물었다.

그 빙잠을 잡았다는 뚱보 화상에게 혜정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지? 그리고 소림사의 화상인데 남경 민충사에 묵고 있다고 했지?

유탄지는 대답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정춘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혜정 화상이 빙잠을 곤륜산 위에서 얻었다고 했겠다? 좋아 그 곳에서 한 마리가 나타났다면 당연히 두 마리, 세 마리도 나타날 것이다. 다만 곤륜산의 둘레가 수 천 리가 되니 만약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안내하지 않는다면 빙잠을 잡기는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그는 빙잠의 효과가 신목왕정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은 혜정을 사로잡아 앞장을 세운 후 곤륜산으로 달려가 빙잠을 잡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 화상이 소림사의 승려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으나 다행히 남경에 있다니 처리하기 쉬울 것 같았다.

그는 즉시 유탄지에게 절을 하고 사문으로 들어오는 예의를 갖추도록 했다.

성숙파의 뭇 제자들은 사부가 그를 달리 대하는 것을 보고 유탄지 앞에서 아첨을 떨었으며 마구 추켜 세우는가 하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칭송하는 말을 떠들어댔다.

조금 전 뭇 제자들은 사부를 크게 욕했고 사문을 배반하여 적에게 투항코저했다.

그런데 정춘추는 이때 사람이 필요한 때라 모든 것을 잊어 버린 척하고 있었다.

사실 그와 같은 일은 정춘추로서도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라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일행은 방향을 꺽어 동북쪽으로 나아갔다. 유탄지는 정춘추의 뒤를 따랐다.

정춘추가 커다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발걸음도 가볍게 옮기는 것이 마치 신선같은 느낌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마음이 일었다.

"내가 이와 같이 뛰어나신 분을 사부로 모시게 된 것은 그야말로 전생에 타고난 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성숙파의 사람들은 사흘을 가게 되었다. 이 날 오후 일행은 커다란 길 옆에 있는 한 채의 정자 안으로 들어가 물을 마시며 쉬었다.

갑자기 등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네 필의 말이 그들이 왔던 길로부터 질풍과 같이 달려 왔다. 네 필의 말은 정자 가까이 다가오게 되었는데 앞장을 선 말 탄 사람이 부르짖었다.

큰 형, 둘째 형, 정자 안에 물이 있으니 우리 몇 모금 마시도록 하고 타고 있는 말들을 쉬도록 합시다.

그들은 말에서 뛰어 내려 정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 네 사람은 정춘추등 일행을 보고 약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후 물 항아리 옆으로 가서 사발을 들고 물을 떠서 마셨다.

바로 이때 맞은 편 길에서 한 승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정자밖에 이르더니 두 손을 합장하고 공손히 말했다.

여러 시주님들, 소승이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르게 되었습니다. 정자 안에서 쉬면서 물을 한 그릇 마셔야겠습니다.

그 흑의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스님께서는 예의에 지나치게 밝으시구려. 모두 길을 가는 사람이외다. 이 정자는 우리가 지은 것도 아니니 그런 말씀 마시고 들어와 물을 마시도록 하시구려.

그 승려가 대답했다.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그는 정자 안으로 들어왔다.

이 승려는 나이가 스물 대 여섯 살 정도였으며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을 지니고 있었으나 커다란 코는 납작해서 용모가 추악한 편이었다.

승포 자락 뒤에는 기운 곳이 많이 있었는데 기우기는 했지만 무척 깨끗했다.

그는 세 사람이 마시기를 기다려 물독 옆으로 다가가 사발로 한 그릇의 물을 떠서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두 눈을 내려 뜬 채 공손히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한 그릇의 물에 팔만 사천 마리의 벌레가 있는 것을 보셨으며 만약에 주문을 외우지 않는다면 중생의 살을 뜯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고 하셨소.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암박실파라마니사가(唵縛悉波羅摩尼 ) 주문을 외우고 그릇을 들어 물을 마시려고 했다.

그 흑의인은 매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여보 젊은 스님, 입 속으로 무엇이라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는 것이오?

그 승려는 말했다.

소승이 외운 것은 물을 마실 때 외우는 주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사발의 물 속에 팔만 사천 마리의 작은 벌레가 있으니 출가인은 마땅히 살생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에 물을 마실 적에는 주문을 외운 후에야 마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흑의인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 물은 매우 깨끗하여 한 마리의 벌레도 없소. 젊은 스님은 정말 우스개 소리를 잘도 하시는구려.

그 승려는 말했다.

시주는 잘 모르십니다. 우리와 같은 한갓 평범한 사람이 볼 때 물속에는 자연 벌레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처님의 천안(天眼)으로 물을 볼 때는 물 속에 벌레가 수천 수만 마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답니다.

흑의인은 웃으면서 물었다.

그대가 물을 마실 때 주문을 읊은 후에 팔만 사천 마리나 되는 작은 벌레를 물과 함께 뱃속으로 마시게 된다면 그 벌레들이 죽지 않는단 말이오?

그 승려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건..... 그건..... 사부님께서 가르친 바 없습니다. 십중팔구 작은 벌레들은 죽지 않겠죠.

이때 황의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작은 벌레는 그래도 죽기 마련이로소이다. 다만 젊은 스님이 주문을 외운 이후 팔만 사천 마리의 작은 벌레들은 모조리 서쪽의 극락세계로 왕생하게 되는 것이로소이다. 젊은 스님께서 한 사발의 물을 마시고 팔만 사천 명의 중생을 극락세계로 보내시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공덕이 무량하외다.

그 승려는 그가 말하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이해할 수 없는 듯 두 손으로 그 한 사발의 물을 받쳐 든 채 멍하니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한꺼번에 팔만 사천의 중생을 극락세계로 보낸다? 소승에게는 결코 그와 같이 큰 법력이 없소이다.

황의인은 그의 곁으로 가서 그의 손에서 사발을 받아들더니 사발 안을 한참 들여다 본 후 헤아렸다.

하나, 줄, 셋, 넷, 다섯, 여섯..... 일천, 이천, ..... 일만, 이만.....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젊은 스님, 이 사발에는 모두 팔만 삼천 구백 구십 구마리의 작은 벌레가 있는데 그대는 한 마리를 잘못 헤아렸소이다.

그 승려는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시주께서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시주 역시 평범한 분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천안을 가지고 신통력이 있겠습니까?

황의인은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천안을 가지는 신통력이 있소?

그 승려는 대답했다.

소승에게는 물론 없소이다.

황의인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내가 보기에 그대에게는 천안이 있소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대가 나를 한 번 바라보고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과 부처님께서 속세로 하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소이까?

그 승려는 황의인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얼굴에 의혹의 빛을 떠올랐다.

몸에 대추 빛 붉은 장포를 걸친 대한이 다가가더니 그 물 그릇을 받아 그 승려의 손에 넘겨 주며 웃었다.

스님께서는 물을 마시도록 하시구려. 나의 이 형제는 그대에게 농담을 하는 것이니 곧이들을 필요가 없소이다.

그 승려는 사발을 받아들고 공손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작정을 하지 못 했는지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 대한은 다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젊은 스님은 발걸음이 힘차면서도 차분한 것으로 미루어 몸에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겠소이다. 그런데 칭호가 어떻게 되시며 어느 보찰에 출가하셨소이까?

그 승려는 물 사발을 물독 뚜껑 위에 놓고 약간 허리를 구부려 인사한 후 대답했다.

소승은 허죽(虛竹)이라고 하며 소림사에 출가했습니다.

그 흑의의 사내는 부르짖었다.

이거 정말 묘하게 됐군! 알고 보니 그대는 소림사의 고수였군. 자 자, 이리 오시오.

그대와 내가 한 번 겨루어 봅시다.

허죽은 연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소승의 무공은 형편 없습니다. 어찌 감히 시주와 손을 쓸 수 있겠습니까.

흑의인은 웃었다.

며칠 동안 싸움을 하지 않았더니 손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구려. 우리 그저 초식이나 겨루어 보도록 합시다. 정말로 싸우는 것이 아닌데 뭐가 두렵소?

허죽은 두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소승은 몇 년 간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나 몸을 건강하게 하려고 무공을 익혔을 뿐이므로 싸움은 못 한답니다.

흑의인은 말했다.

소림사의 화상들은 한결같이 무공에 고강하오. 처음으로 무공을 배운 화상은 절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젊은 스님이 산을 내려 온 것을 보면 틀림없이 일류의 고수이외다. 자자자, 우리는 그저 일백 초만 겨루어 보도록 합시다.

누가 이기고 지든 전혀 상관없는 걸로 합시다.

허죽은 다시 두 걸음 물러서더니 말했다.

시주께서는 잘 모르십니다. 소승이 이 번에 산을 내려온 것은 무공을 어느정도 터득해서가 아니라 절에서 제자를 많이 내보내 각처로 서찰을 띠우도록 되어 있는데 사람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소승을 억지로 그 수에 채운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이 열 장의 영웅첩을 건네 준 후에 즉시 산으로 돌아오되 남과 절대로 싸워서는 아니 된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이제 네 장을 건네어 주고 나머지 여섯 장이 남아 있습니다. 시주의 무공이 뛰어나니 이 영웅첩 한 장을 받도록 하십시오.

그는 품속에서 기름을 먹인 베 보따리를 꺼내 펼치고 한 장의 커다란 붉은 첩자(帖子)를 꺼내 공손하게 내밀며 말했다.

시주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소승이 절로 돌아가 사부님께 말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흑의 사내는 첩자를 받아들지 않고 말했다.

그대는 나와 겨루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영웅인지 망나니인지 아신단 말씀이오? 내가 먼저 몇 수 겨루어 본 후 그대를 이길 수 있어야만이 영웅첩을 거두어들일 체면이 생기지 않겠소?

그러면서 두 걸음 다가가더니 왼쪽 주먹을 살짝 흔들어 보이고 오른쪽의 주먹을 들어 허죽을 향해 뻗쳐 갔다. 그러나 주먹이 허죽의 얼굴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 즉시 거두어들이며 부르짖었다.

빨리 반격하도록 하시오!

그 우람한 체구의 사내는 허죽이 영웅첩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 했었는데 이때 나서며 입을 열었다.

네째 아우, 무공을 겨루는 것은 서두를 것 없네. 먼저 영웅첩에 뭐라고 씌어 있는지 보세.

그는 허죽의 손에서 첩자를 받아들었다. 그 첩자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소림사의 주지 현자(玄慈)는 삼가 합장하고 천하 영웅들을 모시고자 합니다. 오는 구월 초 아흐레 중양절(重陽節)에 숭산 소림사로 놀러 오시어 널리 올바른 인연을 맺도록 하시고, 고소 모용씨의 "상대방의 수법을 상대방의 몸에 펼친다"는 광경을 아울러 구경하도록 하십시오. 그 우람한 체격의 사내는 아, 하더니 첩자를 옆에 있는 유생에게 건네주고 허죽에게 말했다.

소림파에서 영웅대회를 여는 것은 알고 보니 고소 모용씨를 난처하게 하려는 것이었구려.....

흑의의 사내가 불쑥 부르짖었다.

정말 묘하군! 정말 묘해! 나는 강남일진풍 풍파악이라는 사람으로서 바로 고소 모용씨의 수하이외다. 소림파에서 고소 모용씨를 난처하게 하려면 무슨 영웅대회를 열 것도 없습니다. 내 지금 곧 소림파 고수의 솜씨를 가르침받도록 하겠소이다.

허죽은 다시 두 걸음 물러섰다. 그의 왼발은 어느덧 정자 밖을 디디게 되었다.

알고 보니 풍 시주였군요? 저의 사부님께서는 폐사에서 공손히 고소 모용시주를 모시고자 하는 것이지 결코 감히 어떤 죄를 지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소이다. 하지만 강호에서는 근년에 이르러 무림의 적지 않은 영웅 호걸들이 고소 모용씨의 "그대의 수법을 그대의 몸에 펼친다"는 신공 아래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리고 소승의 사백조이신 현비 대사께서는 대리국 신계사에서 원적하셨는데 고소 모용씨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폐사에서는 위로 방장 대사로부터 아래로 모든 승려에 이르기까지 모두 어느 정도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흑의 사내는 말을 가로챘다.

그 일은 우리 고소 모용씨와 손톱만큼도 관계가 없소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대가 믿으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설명이 되지 않은 이상 손으로 해결을 짓는 수밖에 없소이다. 이렇게 합시다. 우리 두 사람은 오늘 먼저 한바탕 겨루어 보도록 합시다. 이것은 연극을 하기 전에 한바탕 징과 북을 치는 것과 같고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서두를 꺼내는 것처럼 흥미를 돋우려는 것이외다. 그리하여 구월 구일 중양절이 되면 이 풍모는 재차 소림사로 달려가 아래 쪽에서부터 싸우면서 위로 올라가도록 하겠소이다. 아, 통쾌하다! 통쾌해! 하지만 기껏해야 십 칠팔 명을 상대로 싸우고 나면 이 풍모 역시 온몸에 상처를 입게 되어 다시는 싸울 수 없게 될 것이외다. 그러니 현자 노방장과 싸울 수 있는 인연은 절대 맺을 수 없을 것이 애석하군! 애석해!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펴면서 앞으로 나와 손을 쓰려고 하였다.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네째 아우, 잠깐 ! 해명을 한 후에 싸워도 늦지 않네.

황의인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해명을 한 후에는 싸울 필요가 없어진답니다. 넷째아우, 좋은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게. 싸우려면 해명을 해선 안 되네.

그 우람한 체구의 사내는 허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불초는 등백천(鄧百川)이라고 하며 이 분은 나의 둘째 아우인 공야건(公冶乾) 이외다.

그는 유생을 손가락질하고 다시 황의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나의 셋째 아우인 포부동이외다. 우리 모두 고소 모용 공자의 아랫 사람이외다.

허죽은 네 사람에게 일일이 합장을 하고 절을 하며 말했다.

등 시주, 공 시주.....

포부동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우리 둘째 형은 복성으로 공야라고 하오. 그대가 그를 공씨라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잘못이외다.

허죽은 재빨리 말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소승은 전혀 학문이 없답니다. 공야 시주께서는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포 시주.....

포부동은 다시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또 잘못했소. 내 성이 포씨이기는 하지만 한평생 화상이나 여승들에게 시주를 해 본 적이 없소. 그렇기 때문에 나를 시주라고 부를 수는 없다오.

허죽은 그 말을 받았다.

예, 예, 포 셋째 나리, 그리고 풍 넷째 나리.....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는 또 잘못을 저질렀소. 우리 풍 넷째 아우로 말하면 잠시 후 그대와 싸우게 될 것이오. 누가 이기고 지든 간에 그대는 그야말로 한 번 더 경험을 쌓게되고 무공에 반드시 진보가 있게 될 것이니 그야말로 그대에게 시주를 한 셈이 아니겠소?

허죽은 고분고분 그 말을 시인했다.

예, 그렇습니다. 풍 시주, 하지만 소승은 결코 싸움을 할 수 없답니다. 출가인은 수양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무공을 배우는 것을 가장 하찮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공이 증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별 관계가 없습니다.

풍파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무학에 대해서 그토록 가볍게 여기니 무공이 십중팔구 형편없는 것같군. 이 싸움은 그만 두기로 합시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흥미를 잃었다는 표정을 했다.

허죽은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 얼굴에 기쁜 빛을 띠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죠.

등백천은 입을 열었다.

허죽 스님, 이 영웅첩은 우리가 모용 공자를 대신하여 받아 두기로 하겠소. 우리 공자께서는 수 개월 전에 귀사로 방문을 간다고 하셨는데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단 말이오?

허죽은 말했다.

오시지 않았습니다. 방장 대사께서는 모용 공자께서 오시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두 번이나 사람을 귀댁으로 보냈으나 모용 노시주는 이미 돌아가시고 소시주는 외출을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방장 대사께서는 이번에 달마원수좌(達摩院首座)를 보내 귀댁으로 서찰을 전하려고 하시다가 아무래도 모용 소시주가 여전히 집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부득이 강호에 널리 영웅첩을 뿌려 초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실례된 점에 있어서는 네 분께서 대신 모용 공자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그리고 모용 시주께서 폐사에 왕림하신다면 방장 대사는 친히 사죄를 할 것입니다.

등백천은 말했다.

젊은 스님께서는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시오. 약속 날짜까지는 아직도 반년이나 남아 있소. 그때 우리 공자는 반드시 귀사로 찾아가 방장 대사를 배알하게 될 것이오.

허죽은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모용 공자와 여러분들이 소림사로 왕림하신다면 우리 방장 대사께서는 매우 환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배알이라는 말씀을 진정 감당할 수 없습니다.

풍파악은 그가 진부하기 이를데 없으며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호방한 기질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또 화상은 화상이지만 전혀 천하에서 이름이 높은 소림화상과 같지 않은지라 속으로 답답한 느낌을 받고 다시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풍파악은 정춘추 일행을 살펴보았다. 성숙파의 제자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으므로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는지라 이 사람들 가운데서 몇 사람 상대를 찾아 한바탕 싸움을 벌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유탄지는 풍파악 등 네 사람이 정자 안으로 걸어 오자 사부의 등뒤에 몸을 움추리고 있었다.

정춘추는 몸이 우람하기 때문에 그를 가려 주어 등백천 등 네 사람이 그의 무쇠탈을 쓴 괴이한 모습을 바라볼 수 없게 했다.

풍파악은 정춘추가 동안학발에 선풍도골의 풍채를 하고 있어서 세외고인 같이 보이는지라 마음속으로 은연 중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왔다. 그리하여 감히 경솔하게 앞으로 나서서 도전을 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노선배님, 실례지만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정춘추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의 성은 정(丁)씨외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허죽이 아, 하더니 부르짖었다.

사숙조 어르신께서도 오셨군요.

풍파악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큰길 쪽에서 칠 팔 명의 화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장을 선 사람은 수 명의 노승이었다. 그리고 두 명의 화상은 한 개의 들 것을 들고 있었는데 들 것 위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허죽은 재빠른 걸음으로 정자에서 나아가 두 노승에게 절을 하고 등백천 일행의 내력을 알렸다.

오른쪽의 그 노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자 안으로 걸어 들어와 등백천 등 네 사람에게 합장하여 예를 한 후 말했다.

노납(老衲)은 현난(玄難)이라고 하오.

그는 다른 한 노승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은 나의 사제인 현통(玄痛)이외다. 고소 모용가의 네 분 대형을 만나뵙게 되니 정말 반갑소이다.

등백천 등은 오래 전부터 현난의 이름을 들어 온 바였다. 그의 온 얼굴에 주름살이 잡혀 있으나 두 눈에는 신광이 형형한 것을 보고 재빨리 답례했다.

풍파악은 입을 열었다.

대스님께서는 소림사의 달마원 수좌로서 신공이 뛰어나다는 말씀을 들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었으니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현난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납과 현통 사제는 방장의 법유(法諭)를 받들고 강남 연자오(燕子塢) 모용시주 댁으로 초청장을 드리러 가는 길이외다. 이것은 폐사에서 연자오로 세 번째 사람을 보내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곳에서 네 분과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인연이 적지 않은가 봅니다.

그는 품속에서 한 장의 커다란 붉은 첩자를 꺼냈다.

등백천은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겉에 쓴 글을 보니 다음과 같았다. 삼가 고소 연자오 모용 시주에게 드림. 아무래도 첩자의 내용은 허죽이 준 그 첩자와 같으리라 생각되었다.

두 분 스님께서는 소림의 고승으로서 무림에 덕망이 높으신데도 불구하고 친히 나서서 저희 장원으로 찾아 가신다니 고소 모용씨의 체면이 크게 서게 되었습니다. 방금 이 분 허죽 젊은 스님이 돌리는 영웅첩을 저희들은 이미 받았습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저희 장주에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월 구일 중양절에 저희 모용 공자께서는 반드시 귀사로 찾아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소림의 여러 고승들에게 사의를 표할 것이며 천하 영웅들 앞에서 그 가운데의 여러 가지 오해를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현난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러 가지 오해라고 말하는 것은 현비 사형을 너희들 모용씨가 해쳐 죽인 것이 아니라는 뜻인가?"

바로 이때 등뒤에서 그 누가 부르짖었다.

아, 사부님, 바로 저 사람입니다.

현난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손으로 소림사의 화상들이 떠메고 온 들 것을 가리키며 한 백발 노인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속삭이고 있었다.

유탄지가 정춘추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는 것이었다.

들것에 실린 저 뚱보 화상이 바로 빙잠을 잡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소림파의 사람들에게 떠메져 오는군요.

정춘추는 그 뚱보 화상이 바로 빙잠의 주인이라는 말을 듣자 기쁨을 금할 수 없어 나직이 물었다.

잘못 안 것은 아니겠지?

유탄지는 말했다.

그럴리 없습니다. 그는 혜정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사부님, 보십시오. 그의 둥글고 불룩한 배가 얼마나 높다랗게 솟아 있습니까?

정춘추는 혜정의 배가 그야말로 애를 밴 지 열 달 되는 여자의 배보다 더 큰 것을 보고 그와 같이 배가 큰 화상이라면 그 누구라도 한 번 본 이후에는 영원히 분별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현난에게 말했다.

대사, 저 혜정 화상은 나의 친구인데 병이 난 것이오이까?

현난은 합장했다.

시주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며 어떻게 노납의 사질을 알고 계시는지요?

정춘추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혜정이 소림사의 화상들과 함께 있으니 그야말로 귀찮게 되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났으니 길을 막고 그를 빼앗아야겠다. 소림사로 달려가 잡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한 일이지."

그는 빙잠의 영묘한 효과를 생각하게 되자 가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대답했다.

불초는 정춘추라고 하오.

정춘추라는 이름이 떨어지자 현난, 현통, 등백천, 공야건, 포부동, 풍파악 등 여러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성숙노괴 정춘추의 악명은 그야말로 널리 알려진 바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와 같이 풍모가 의젓하고 근엄하게 생겼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갑자기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여러 사람은 즉시 마음속으로 크게 경계를 했다.

현난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 앉히고 말했다.

알고 보니 성숙해의 정 노선생이셨군요. 대명은 들은 지 오래이며 그야말로 귀가 따갑도록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나게 되어 기쁘다느니 다행이라느니 하는 인사치레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구든지 당신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세에 덕을 쌓지 못한 탓이지"

정춘추는 인사치레의 말을 하였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소림 달마원 수좌의 수리건곤(袖裏乾坤)의 신공은 천하에 명성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노부 역시 그 명성을 들은 지 오래되었소이다. 저 혜정 스님을 내가 여러 곳으로 찾고 있던 중인데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정말 잘 되었소이다, 잘 되었소이다.

현난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말씀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노납의 이 혜정 사질은 폐사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많은 규칙과 계율을 어겼고 일 년 전에는 허락을 받지 않고 폐사에서 뛰쳐나가 적지 않은 악한 짓을 했습니다. 폐사의 방장 사형께서는 사람을 내보내 곳곳으로 찾던 중 간신히 그를 찾아 절로 데려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정노선생은 그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정춘추는 말했다.

알고 보니 그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대사들에게 맞아 상처를 입었구려? 상처가 심합니까?

현난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방장의 법유를 받들지 않고 오히려 손을 써서 사람을 해쳤소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당신과 같은 사마외도와 사귄 것은 또 하나의 커다란 계율을 깨뜨리는 셈이지."

정춘추는 매우 의젓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곤륜산 속에서 모든 힘을 다해서 한 마리의 빙잠을 잡았소이다.

그것은 매우 쓸모있는 물건인데 바로 그대의 저 혜정 사질이 훔쳐 갔소이다. 내가 만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성숙해에서 이곳 중원까지 달려온 것은 바로 빙잠을 되찾기 위한 것으로서.....

그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혜정은 부르짖었다.

나의 빙잠은 어디있소? 이것 보시오! 당신은 나의 빙잠을 보았소? 이 빙잠은 내가 고생고생해서 곤륜산에서 찾아낸 것이외다..... 그대..... 그대가 나의 것을 훔쳐갔소?

유탄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소리친 이후 풍파악의 시선은 바로 유탄지의 무쇠탈에 집중되어 있었다.

풍파악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유탄지의 무쇠탈을 쓴 모습을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으며 현난, 정춘추, 혜정 세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유탄지를 가운데 두고 그 주위를 몇 바퀴 돌았다.

그 면구는 정말 딱 달라붙게끔 만들어져 있었고 머리 위에 꼭 알맞게 씌워져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벗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쳐 한 번 두들겨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다시 한 번 살핀 후 그는 끝내 입을 열었다.

이봐 친구, 안녕하시오?

유탄지는 대답했다.

저는..... 저는 괜찮은 편입니다.

그는 풍파악이 매우 기운차 보였고 또 금방이라도 자기와 무공 솜씨를 겨루어 볼 것 같은 태도임을 보고 속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풍파악은 물었다.

친구, 그대의 이 면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이 풍가는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와 같은 얼굴 모습을 한 사람은 본 적이 없소이다.

유탄지는 매우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그렇죠, 저는..... 부득이 하여..... 어쩔 수 없었답니다.

풍파악은 그의 가련한 음성을 듣고 노기가 끓어 오르는 듯 물었다.

어떤 놈이 이토록 짖궂은 장난을 했단 말이오? 이 풍가가 그 못된 놈을 만나 봐야겠군!

그러면서 곁눈질로 정춘추를 째려보았다. 그는 정춘추라는 늙은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유탄지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 저의 사부가 아닙니다.

풍파악은 다시 유탄지를 자세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멀쩡한 사람이 그와 같은 무쇠탈을 쓰고 있으니 무슨 재미가 있겠소?자, 내가 그대를 위해서 벗겨 드리리다.

그는 발목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뽑아 들었다. 푸른 빛이 번쩍번쩍 빛나는 것으로 미루어 날카롭기 이를데 없을 것 같았다. 풍파악은 그 비수를 들고 무쇠탈을 벗겨 내려고 했다.

유탄지는 무쇠탈과 자기의 얼굴 및 뒤통수의 피와 살이 모두 얽혀 있어서 억지로 벗겨 내게 된다면 생명마저 잃을 우려가 잇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풍파악은 말했다.

그대는 두려워할 것 없소. 이 비수는 무쇠를 무 자르듯 한다오. 내가 그대의 무쇠탈을 잘라 낼 때 결코 그대의 살결에 상처를 입히지 않을 것이오.

유탄지는 부르짖었다.

아, 안됩니다!

풍파악은 말했다.

그대는 그대에게 이 무쇠탈을 씌워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다음에 그를 만나게 되었을 때 바로 이 일진풍이 억지로 벗겨 주었다고 말하시오. 그리고 그대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몸이라면 그 악인에게 나를 찾아와 따지라고 하시오.

그는 유탄지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유탄지는 상대방의 손에 들린 비수에서 싸늘한 광채가 무섭게 빛나는 것을 보고 속으로 깜작 놀라 부르짖었다.

사부님, 사부님!

그는 고개를 돌려 정춘추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춘추는 들 것 옆에 서서는 매우 흥미있는 듯한 눈길로 혜정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유탄지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풍파악은 비수를 쳐들고 무쇠탈을 벗겨내려고 달려들었다.

유탄지는 그만 당황하고 다급한 끝에 오른손에 힘을 주어 휙 뿌리쳤다.

상대방을 밀친다는 것이 그만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풍파악의 왼쪽 어깨를 후려치게 되었다.

풍파악은 온 정신을 돋우고 그의 무쇠탈을 떼어내려 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손을 잘못 썼다가는 그의 얼굴을 찢어 놓게 되리라고 걱정을 했을 뿐이지 갑자기 그가 손을 써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 장의 기세와 실린 공력은 엄청나도록 대단했다.

풍파악은 한소리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내지르며 그만 뒤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왼손으로 땅바닥을 딛고 벌떡 몸을 일으켰으나 왁, 하니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등백천과 공야건, 포부동 세 사람은 유탄지가 갑자기 독수(毒手)를 써서 의형제가 크게 당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다가 풍파악의 안색마저 창백한 것을 보고 세 사람을 더욱 걱정했다.

공야건은 즉시 풍파악의 완맥을 짚어 보았다. 그의 맥박은 매우 급하고 빠르게 뛰고 있었는데 분명히 중독된 증상이었다.

그는 유탄지를 손가락질 하며 꾸짖었다.

이 녀석 봐라! 성숙노괴의 제자라고 해서 봐 주었더니, 덕을 원한으로 갚으려 하다니! 대뜸 악랄한 수단으로 사람을 해쳐!

그는 재빨리 품속에서 한 조그만 병을 꺼내더니 마개를 빼고 한 알의 해독약을 꺼내 풍파악의 입에 넣어 주었다.

등백천과 포부동 두 사람은 몸을 흔들하면서 정춘추와 유탄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포부동은 왼손에 암암리에 장력을 돋구고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 처럼 만들어 유탄지의 가슴팍을 움켜 잡으려 들었다.

등백천이 말했다.

세째 아우, 손을 멈추게!

포부동은 자세를 취한 채 손을 삐지 않고 고개를 돌려 큰 형을 바라보았다.

등백천은 말했다.

우리 고소 모용씨는 성숙파와는 아무런 원한이 없네. 넷째 아우가 호의로서 그의 면구를 제거해 주려고 하는데 어째서 성숙의 사람이 손을 써서 상처를 입히는지 정 노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세.

정춘추는 갓 거두어들인 제자가 단 일 장에 고소 모용씨의 고수를 격패시켜 성숙파의 위풍을 크게 떨치게 되자 속으로 우쭐해졌다. 그리고 더욱 빙잠의 기이한 효과에 대해서 부러운 생각이 치밀었다. 그는 얼른 상대방의 말에 응수했다.

저 풍 넷째 나리는 정말 싸우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며 그야말로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을 잘 하는구려. 우리 성숙파의 제자가 머리에 구리로 만들어진 모자를 쓰고 있든 무쇠로 만들어진 모자를 쓰고 있든 고소 모용씨에게 방해가 되는 일이 있단 말이오?

이때 공야건은 풍파악을 부축하여 땅바닥에 앉혔다. 그런데 풍파악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며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얼음 구덩이에 처박힌 것처럼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입술마저 파래졌고 안색마저 점차 창백한 푸른 빛을 띠우게 되었다.

공야건의 해독약은 지극히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는데도 풍파악은 그 약을 먹었으나 바다에 돌을 던지듯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공야건은 다급한 나머지 손을 뻗쳐 그가 숨쉬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별안간 한 줄기의 차가운 바람이 손바닥으로 와 닿는데 그야말로 뼈를 에이는 듯한 한기가 아닌가?

공야건은 급히 손을 움추리며 부르짖었다.

야단났소! 어찌 이토록 무섭게 차갑단 말이오?

입에서 토해내는 숨이 그토록 차가울 정도라면 그의 몸에 중독된 한기는 엄청나리라 생각했다.

정세가 이렇게 위급해지자 그로서는 시비를 따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려 정춘추에게 말했다.

나의 의형제는 그대 제자의 독수에 중독되었으니 해약을 주시기 바라오.

풍파악이 중독된 독은 바로 유탄지가 역근경으로 쌓은 내공의 힘을 빌어서 돋구어 낸 빙잠의 극독이었다. 그러니 정춘추에게 그와 같은 해약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사 해약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어찌 주려고 하겠는가?

그는 고개를 쳐들고 앙천대소하더니 부르짖었다.

하하하, 아오육로공( 烏陸魯共)! 아오육로공!

똑같은 말을 두 번 하더니 소맷자락을 떨쳐 한 가닥 매서운 바람을 일으켜 뻗쳐냈다.

성숙파의 제자들은 그와 때를 같이하여 일제히 정자에서 달려나와 질풍과 같이 떠나갔다.

등백천 등과 소림파의 승려들은 정춘추가 떨쳐낸 소맷자락 바람이 눈을 따갑게 하는 것을 느끼고 눈물을 마구 주룩주룩 흘렸으며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정춘추는 소맷자락에 독가루를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소맷자락이 바람을 일으키며 떨치자 그 독기가 뿌려진 것이었다.

등백천, 공야건, 포부동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풍파악의 앞을 가로 막았다.

상대방에서 풍파악에게 더욱 무서운 독기를 쓸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현난은 눈을 감고 일 장을 밀어내었다. 그 일 장은 바로 정자의 한 기둥을 후려치게 되었다.

정자의 기둥이 즉시 부서지면서 반쪽의 정자가 무너져 내렸고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지붕 위의 기왓장과 흙모래 등이 쏟아져 내렸다.

뭇 사람들이 눈을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되었을 때 정춘추와 유탄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몇 명의 소림 승려가 부르짖었다.

혜정은? 혜정은?

원래 이 혼란 가운데 혜정은 이미 정춘추에게 잡혀가고 말았고 들 것은 한 명의 소림 승려의 머리 위에 씌어져 있었다.

현통은 노해 부르짖었다.

쫓아라!

그리고 나는 듯 정자 밖으로 달려나갔다.

등백천과 포부동도 뒤이어 쫓아나갔다.

현난은 왼손을 들어 한 번 저었다.

그리고 뭇 제자들을 데리고 응원차 달려갔다.

공야건은 반쯤 허물어진 정자 안에서 풍파악을 돌보아야 했는데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아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풍파악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삽시간에 서리로 화했다. 공야건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공야건은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 등백천이 포부동을 안고 재빠른 걸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공야건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등 형님, 셋째 아우 역시 상처를 입었나요?

등백천은 말했다.

또 그 무쇠머리를 한 자의 독수에 맞게 되었네.

곧이어 현난이 소림사의 뭇 승려들을 이끌고 정자로 돌아왔다. 현통은 허죽의 등에 엎혀 있었으며 매우 추운 듯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떨고 있었다.

현난과 등백천, 그리고 공야건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등백천은 말했다.

무쇠탈을 쓴 자는 셋째 아우와 일 장을 맞받아치게 되었고 곧이어 다시 현통 대사와 일 장을 마주쳤네. 그런데 뜻밖에도..... 성숙파의 한독장(寒毒掌)이 이토록 무서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현난은 품속에서 조그만 나무상자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폐사의 육양정기단(六陽正氣丹)은 한독을 제압하는 효과가 있소이다.

그는 상자의 뚜껑을 열더니 세 알의 새빨간 알약을 꺼냈다. 그는 두 알은 등백천에게 건네주고 세 번째 알약을 현통에게 먹였다.

밥 한끼 먹을 시간이 흐르게 되자 현통 등 세 사람이 벌벌 떨던 것이 차츰 멈추어지게 되었다.

포부동은 크게 역정을 냈다.

그 무쇠탈을 쓴 사람..... 제기랄 그게 무슨 장력이지?

등백천이 달랬다.

세째 아우, 욕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으니 먼저 앉아서 운기행공부터 하게나.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지금 욕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목숨을 잃게된 후에는 욕을 할래야 욕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등백천은 미소했다.

걱정 말게. 죽지 않을테니까.

그는 손을 뻗쳐 포부동의 등에 있는 지양혈(至陽穴)에 갖다대었다. 그리고 내력으로 그의 몸에 스며 든 한독을 몰아내려고 했다.

공야건과 현난 역시 나누어 내력으로 풍파악과 현통을 도와 독을 몰아내려고 했다.

현난과 현통 두 사람의 내력은 심후했다. 한참 후에 현통은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괜찮소.

그는 몸을 일으키고 다시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현난은 포부동과 풍파악을 도와 한독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부탁을 하지 않는지라 자기 스스로 도와 주겠다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상대방의 내공이 약하다고 얕본다는 비난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별안간 현통은 몸을 휘청하더니 다시 앉아 운기행공하며 말했다.

사..... 사형, 이 한독..... 무척 이상하군요.....

현난은 다시 바로 운기행공하여 그를 도와야 했다. 세 사람이 끊임없이 운기행공을 하여 도와주었으나 몸에 스며든 한독은 잠시 나아졌다가 곧이어 도지곤했다.

그들은 해질 무렵까지 수선을 피워야 했으며 한 사람마다 각기 세 알의 육양정기단을 먹었는데도 한기를 조금도 몰아낼 수가 없었다.

현난이 가지고 온 열 알의 알약은 이제 겨우 한 알밖에 남지 않았다. 즉시 한알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 세 사람에게 복용시켰다.

포부동은 한사코 먹지 않으려고 하면서 말했다.

아마 다시 백 알을 먹는다 하더라도.....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현난은 속수무책이었다.

포 시주의 말씀이 옳소. 이 육양정기단은 그와 같은 한독에는 맞지 않는 것같소. 우리의 내공으로도 그 음독(陰毒)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려. 노납은 설신의에게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네 분의 뜻은 어떠하오?

등백천은 기뻐했다.

설신의는 염왕적이라고 일컫는 분으로서 어떠한 어려운 병이라도 손을 쓰기만 한다면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사께서는 그 신의가 어디에 살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

현난은 말했다.

설신의는 낙양의 서쪽 유종진(柳宗鎭)에 살고 있는데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오.

그는 노납과 몇 번 만난 인연이 있소이다. 만약 가서 치료해 달라고 부탁을 드린다면 아마도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되오.

그는 말을 다시 이었다.

고소 모용씨는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설신의는 평소부터 당신네들을 흠모해 왔지요. 네 분의 영웅과 친구로 사귀게 될 인연을 가지게 되면 그는 반드시 기뻐할 것이외다.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설신의께서는 우리가 찾아거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지는 않을 것 같소이다. 무림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 공자의 "그 사람의 수법을 그 사람의 몸에 펼친다"는 수법에 대해서 싫어하고 증오하지만 오로지 설신의만은 두려워하지 않지요. 이후 그에게 무슨..... 무슨 변고라도 생기게 되었을 때 그저 우리 공자에게 "그대의 수법을 그대의 몸에 펼치는" 방법을 써달라고 한다면 그는..... 그는.....

늙은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소 뭇 사람들은 큰소리로 웃었다. 그들은 즉시 정자에서 걸어 나갔다. 그들은 곧 일행이 되어 앞쪽에 있는 고을로 들어가 세 대의 커다란 수레를 빌어 상처입은 세 사람으로 하여금 누워서 조섭토록 했다.

일행은 두 세 시진을 가고 나면 반드시 걸음을 멈추고 현통 등 세 사람을 도와 한독에 항거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나중에 현난은 더 꺼리지 않고 소림의 신공으로 포부동과 풍파악을 도와주었다.

이곳에서 유종진은 수백 리에 불과했으나 산길이 험하고 또 도중에 많이 지체해야 했던 관계로 나흘째 되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었다.

설신의의 집은 유종진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에 있었다.

다행히 설신의는 취현장에서 현난 대사에게 자기 집을 찾아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었다.

뭇 사람들은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길을 찾아 어떤 집 문앞에 넓은 약초밭이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설신의의 거처임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보니 문앞에는 두 개의 하얀 종이로 만든 등롱이 걸려 있었다.

그들은 약간 이상하게 생각했다.

"설씨 집안에 치료할 수 없는 병자가 있었던가?"

그들은 다시 몇 장 앞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고 보니 문틀 위에는 몇 조각의 삼베가 걸려 있고 문 옆에는 혼을 부른다는 한 폭의 종이 깃발이 꽂혀 있었다.

정말 설씨 집안에 초상이 난 것이다.

이때 종이의 등롱 위에는 두 줄의 검은 글자가 씌어 있었다. 설공모화지상(薛公慕華之喪), 향년 오십오 세(享年五十五歲) 현난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설신의가 스스로 병을 고치지 못하고 세상을 뜨다니 그렇다면 야단이 아닌가?"

지인이 이미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처연해지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등백천과 공야건 역시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오더니 일제히 부르짖었다.

어이구!

갑자기 때문 안쪽에서 곡성이 울려퍼졌다. 그것은 부인의 울음 소리였다.

나리, 그대의 의술은 귀신 같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병이 들어 우리를 버리고 가실 줄이야 누가 알았어요? 나리, 그대는 염왕적이라고 일컬었으나 결국 염라대왕을 이길 수는 없었구려! 아무래도 그대가 저승에 가게 된다면 염라대왕은 그대에게 옛빚을 청산하려고 할 것이니 나리께서 크게 당하지 않겠어요?

세 대의 수레와 여섯 명의 소림 승려들이 곧 다가왔다. 등백천은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낭랑히 외쳤다.

소림사 현난 대사께서 친구들을 데리고 설신의에게 특별히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소이다!

그의 말하는 음성은 그야말로 종 소리처럼 우렁차 대문 안에서 들려오던 곡성이 대뜸 멈추었다.

잠시 후 한 노인이 나왔다. 그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하인 같았다. 그런데 그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으며 여전히 슬픔을 이길 수 없는 듯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찾아온 것을 보더니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나리께서는 어제 오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여러분들은 그를 보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난은 합장하고 물었다.

설 선생께서는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소이까?

그 노복은 흐느끼면서 대답했다.

무슨 병인지도 모른답니다.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나으리께서는 평소 몸이 건강한 편이며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아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그 어르신께서는 남의 병을 치료해 주실 때 약만 써도 병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은.....

선생님의 집안에는 또 어떤 분이 계십니까?

그 노복은 말했다.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공야건과 등백천은 서로 한 번 쳐다보았다. 노복이 두 마디의 말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어조를 듣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군다나 조금 전만 하더라도 부인의 곡성이 들려오지 않았던가?

현난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사는 운명이라 하지 않소? 기왕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옛친구 영전으로 나아가 절이라도 올리도록 합시다.

그 노복은 말했다.

그..... 그..... 그렇게 하도록 하시죠.

그는 뭇 사람들을 이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공야건은 한 걸음 뒤로 걸음을 늦추며 나직이 등백천에게 말했다.

큰 형님, 내가 보건대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노복은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등백천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들은 노복을 따라 영당으로 들어섰다.

영당은 간소하게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의 물건들이 골고루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영패에는 "설공모화지영위(薛公慕華之靈位)"라 씌어 있었다. 그 몇 자의 글씨는 매우 힘이 있어서 학문이 높은 선비의 필적이지 결코 노복이 쓸 수 있는 글씨체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공야건은 그와 같은 사실을 눈여겨 보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는 영패 앞에서 절을 했다.

공야건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뜨락의 대나무 뒤에 열 몇 벌의 옷이 걸려있었다.

여인네의 적삼도 있었고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조그만 옷도 있었다.

"설신의에게는 분명히 가족이 있는데 어째서 이 노복은 아무도 없다는 것일까?"

현난은 그 노복에게 말했다.

우리는 먼 길을 달려와 설 선생에게 병을 치료해 달라고 청을 드리려던 참이었소.

그런데 뜻밖에도 선생이 이미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정말 서글픈 마음 금할 수 없구려.

날도 이미 저물고 했으니 오늘 밤 댁에서 하룻밤을 묶어야겠소이다.

노복은 크게 난처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그건..... 그건..... 좋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대청에서 앉아 계십시오. 소인은 가서 밥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현난은 말했다.

너무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저 밥과 소채를 주시면 됩니다.

노복은 말했다.

예, 예, 여러분들께서는 잠시 앉아 계십시오.

그는 뭇 사람들을 바깥 대청으로 안내하여 앉도록 한 후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그 노복은 나타나지 않았다.

현난은 생각했다.

"이 노복은 주인이 막 돌아가신 탓으로 정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아, 현통 사제의 중독된 한독을 어떻게 하면 좋지?"

뭇 사람들은 거의 반 시진 동안을 기다렸으나 그 노복은 시종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포부동은 초조해서 말했다.

내 가서 물을 좀 얻어 마셔야겠소.

허죽은 몸을 일으켰다.

포 선생께서는 앉아서 쉬도록 하십시오. 제가 그 노복을 도와 물을 끓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공야건은 설씨 집안의 동정을 엿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내 그대와 함께 가겠소.

두 사람은 뒤쪽으로 걸어갔다. 설씨의 집은 매우 넓었다. 앞과 뒤에 모두 다섯 채가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부엌이 있을 만한 곳으로 찾아갔으나 그 노복마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공야건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청에 되돌아과 입을 열었다.

이 집안의 형세로 보건대 뭔가 잘못됐소. 설신의가 죽은 것은 아무래도 거짓인 것 같구려.

현난은 몸을 이르키며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아니 그럴 리가 있겠소?

공야건은 말했다.

대사, 저는 저 관속을 한 번 들여다보아야겠습니다.

그는 영당으로 달려가 손을 뻗쳐 관을 들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음속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두 손을 움츠리고 뜨락의 대나무에서 한 기다란 옷을 내려 손을 칭칭 감았다.

현난은 물었다.

관에 독이 있소?

공야건은 말했다.

사람의 일이란 예측하기 힘드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소.

그는 운기행공한 후 관을 들었다. 그런데 매우 무거웠다.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은 결코 사람이 죽은 시체가 아닌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설신의는 죽은 것이 아니외다.

풍파악은 비수를 뽑아 들고 말했다.

관 뚜껑을 활짝 열어 보도록 합시다.

공야건은 말했다.

그 사람이 신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만큼 반드시 독약을 잘 쓸 것이네. 넷째 아우는 조심하게.

풍파악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비수의 끝을 관과 뚜껑 사이에 집어넣고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끼익, 하는 소리가 나면서 관 뚜껑이 서서히 들려졌다.

풍파악은 혹시 관 속에서 독가루가 날아올까봐 숨을 막았다.

포부동은 뜨락으로 달려나가 계수나무 아래에서 벌레를 쪼아 먹고 있던 두 마리의 암닭을 잡아 영당으로 되돌아 왔다. 그는 손을 쳐들어 두 마리의 암닭을 던졌다.

두 마리의 암닭은 관 위를 비스듬히 가로지르게 되었다. 암닭은 꼬꼬댁, 하고 울며 영위 앞에 떨어졌다가 다시 뜨락으로 달려나갔다. 그런데 뜨락으로 나서서 몇 걸음 옮기기도 전데 갑자기 몸을 뒤집고 푸드득거렸다. 곧이어 두 발을 몇 번 뻗는가 했더니 그만 움직이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이때 낭하에서 싸늘한 바람이 휙, 불어왔다. 두 마리의 멀쩡하던 암닭의 깃털이 우수수 떨어져 바람에 날리어 허공으로 올라가 춤을 추었다. 뭇 사람들은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두 마리의 암닭이 막 중독되어 죽자마자 몸에 있는 깃털이 빠지는 것을 보면 그 독성의 지독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시 그 누구도 감히 관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현난은 말했다.

이게 무슨 까닭이죠? 설신의는 어째서 죽은 척했어야 할까요?

그는 몸을 날리더니 왼손으로 대들보를 붙잡고 관 안을 들여다보았다.

관 안에는 돌들이 잔뜩 담겨 있었고 그 돌들 한복판에 한 개의 커다란 대접이 놓여 있었는데 그 대접에는 맑은 물이 잔뜩 담겨 있었다. 이 한 대접의 맑은 물이 바로 독수(毒水) 같았다.

현난은 고개를 가로젓고 내려서며 말했다.

설신의가 설사 상처를 치료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악랄한 독을 설치하여 우리들을 함정에 빠뜨려서 해칠 것까지야 없지 않겠소? 소림파는 그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이와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은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일이오. 설마..... 설마.....

그는 잇따라 두 번이나 설마라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혹시 그와 고소 모용씨간에 어떤 깊은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말이었는데 고소 모용씨 사람들 앞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할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포부동은 말했다.

대사께서는 쓸데없는 짐작을 하지 마시오. 모용 공자와 설신의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어떤 알력이 있었다면 우리의 몸으로 받는 고통이 십 배 더 심하다고 하더라도 고개를 숙인 채 원수에게 치료를 부탁하지는 않았을 것이외다. 이 포가와 풍가가 그토록 못난 놈으로 보였습니까?

현난은 합장했다.

포 시주의 말씀이 옳소이다. 이 노승이 함부로 짐작을 한 모양입니다.

그는 득도한 고승이었다. 입으로 비록 말을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인지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등백천은 말했다.

독기가 심하게 번지고 있을 터이니 너무 오래 지체해선 안 됩니다. 우리 앞쪽 대청으로 갑시다.

사람들은 다시 앞 대청으로 갔다. 그들은 각기 의견을 말했으나 설신의가 죽은 척 가장하고 이와 같은 함정을 만들어 놓은 원인을 짐작해 낼 수 없었다.

포부동은 말했다.

이 설신의가 이토록 고약한 짓을 하니 우리는 아예 불을 질러 그의 집을 태워 버리도록 합시다.

등백천은 말했다.

그래서는 안 되네. 어찌됐든 설 선생은 소림파의 친구가 아닌가. 현난 대사의 얼굴을 보더라도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네.

이때 날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다. 대청에는 불도 밝히지 않은 상태였고 여러 사람들은 굶주리고 목이 말랐다. 그러나 감히 집안의 차나 물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난이 제의했다.

우리들은 역시 밖으로 나가 부근 농가로 가서 물과 밥을 얻어 먹도록 합시다. 등 시주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등백천은 말했다.

옳습니다. 하지만 삼십 리 안에서는 물이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설 선생이라는 분은 심계에 매우 뛰어난 분이므로 결코 한 구의 관을 설치한 것으로 일을 끝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 대사님들께서 어떤 변고를 당하게 된다면 우리로서는 미안한 노릇이 아닐 수 없소이다.

그는 그러나 모용씨 집안의 그대의 수법을 그대의 몸에 펼친다는 소문이 쫘악 퍼져 있는 만큼 강호에서 많은 원한을 맺게 된 것이 사실이므로 따라서 십중팔구 설신의의 어떤 친구나 가까운 사람이 해를 입게 되면 그 빚을 바로 고소모용씨의 앞으로 달아 놓을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했다. 뭇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키게 되었고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서북쪽의 하늘이 반짝하고 빛났다. 곧이어 한 줄기 붉은 화염이 흩어지더니 파란 빛으로 변했다.

그 모양은 마치 하늘 가득히 꽃비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았으며 아름답고 변화가 많아 정말 보기가 좋았다.

풍파악은 말했다.

그 누가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것일까?

이때는 정월 보름도 아니었고 중추가절도 아닌데, 어째서 폭죽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겠는가?

얼마 후 다시 노란 빛의 폭죽이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더니 수백 수천 개의 유성으로 화해 서로 부딪쳤다.

공야건은 속으로 짐작하는 바가 있어 말했다.

저것은 폭죽이 아니고 적이 대거 침입해 온다는 신호일세!

풍파악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정말 좋소! 정말 좋아! 우리 한바탕 신나게 싸워 봅시다.

등백천은 말했다.

세째와 넷째, 그대들은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게 내가 앞을 맡고 둘째 아우는 뒤를 맡도록 하게. 현난 대사, 이 일은 소림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 여러분들은 구경이나 하시구려. 그저 양쪽 다 도우지 않는다면 모용씨 쪽에서는 크게 고맙게 생각할 것이외다.

현난은 말했다.

등 시주는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공격을 해오는 적이 만약 여러분들과 어떤 원한이 있다면 이 가운데의 시비곡절은 우리가 공평하게 논해야 할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남의 위험을 틈타거나 많은 사람의 수로 승리를 하도록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만약에 설신의와 한 패거리라면 그 사람들은 암암리에 함정을 설치하여 독으로 우리를 해치려고 했으니 그대와 우리는 그야말로 똑같은 적개심을 품고 있을 터인데 어찌 구경만 할 수 있겠소? 어서 비구들은 적을 맞을 준비를 하라.

마지막 한 마디는 소림 승려에게 하는 명령이었다. 따라서 혜방(慧方), 허죽 등 소림승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예.

현통은 말했다.

등 시주, 나와 그대 두 분 사제는 동병상련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자연 손을 맞잡고 적에 대항해야 할 것이오.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다시 두 개의 폭죽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번에는 더욱 더 가까워졌다.

잠시 후 다시 두 개의 폭죽이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모두 합친다면 여섯 개의 폭죽이 터진 셈이었다. 그런데 모든 폭죽의 빛깔이나 형상은 제각기 달랐다.

어떤 것은 커다란 붓처럼 길었고 어떤 것은 네모 반듯한 것이 바둑판 같았고, 어떤 것은 한 자루의 도끼처럼 생겼고, 어떤 것은 한 송이의 지극히 커다란 국화꽃 같았다.

폭죽이 터진 후 하늘은 다시 칠흑과 같은 어둠에 휩싸이고 말았다.

현난은 명령을 내려 여섯 명의 소림 제자로 하여금 집 주위를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동정을 들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정신을 가다듬고 기다렸다. 다시 밥 한끼 먹을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동쪽에서 한 여인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버들 같은 두 눈썹을 오랫 동안 다듬지 않았더니, 남은 화장기와 눈물로 붉은 비단 수건을 적시는구나.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았으니 화장할 필요가 없는데, 어찌 진주(眞珠)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으랴?

노래 소리는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웠고 또한 호소하는 듯 처량했다.

그 여인이 한 곡을 부르고 나자 즉시 남자의 노래 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 그대여! 과인(寡人)이 오랫 동안 그대를 만나지 못해 무척 그리웠나니, 그래서 그대에게 열 말의 진주를 내리노니 그대는 거두어 들일지어다.

그 사람의 말이 끝나자 다시 여자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에겐 양귀비가 있어 아침의 조례에도 나가시지 않는다던데 언제 이 복 없는 여인을 생각하실 겨를이 있겠사옵니까? 아 아.....!

여인은 서러운지 울음을 터뜨렸다.

허죽을 비롯한 소림의 승려들은 세상 일을 잘 몰랐다. 갑자기 한 사람이 여자의 음성을 냈다가 남자의 음성을 내며 홀로 노래를 부르니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노래 속의 사연이 무척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백천 등은 그 사람이 바로 당 명황(唐明皇)과 매비(梅妃)의 고사를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사람은 갑자기 매비의 행세를 했다가 갑자기 당 명황의 행세를 하는데 그 음성과 말투가 정말 그럴싸했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에 갑자기 연극배우가 나타나다니 모든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또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연극배우의 노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비자(妃子)는 울 필요가 없다. 빨리 주연이나 차리도록 하라. 비자가 피리를 불고 과인이 그대를 위해 친히 노래를 한 곡조 불러 비자의 번뇌를 풀어 주겠노라.

그 사람은 다시 여자 배우가 되어 노래를 불렀다.

천첩은 밤낮 눈물로 얼굴을 씻고 있는 형편이었으며 폐하를 한 번 더 보기를 원했는데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천첩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흑흑흑..... !

포부동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난 안록산(安祿山)이다! 너 당 태종 이융기(李隆基)는 내 말을 들어라! 너 멍청한 황제는 빨리 양귀비를 내놓도록 해라!

울고 있던 배우는 즉시 울음을 멈추고 아, 하는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사방은 다시 조용해지고 말았다.

30. 영웅들이 크게 모이다.

(英雄大會) 잠시 후 여러 사람들은 갑자기 담담한 꽃향기가 코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현난 대사가 부르짖었다.

적이 독을 뿌렸으니 빨리 숨을 멈추고 해약의 냄새를 맡도록 하시오!

그러나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무 일이 없었고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보니 꽃향기에는 독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때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곱째 누님, 다섯째 형님, 집안에 어떤 괴인이 있는데 자칭 안록산이라고 하는구려.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큰 오라버니, 여섯째 오라버니, 여덟째 아우들은 모두 모습을 드러내도록 해요.

그녀의 한 마디가 떨어지자 정문 밖이 갑자기 크게 밝아졌다. 한 무더기의 빛이 다섯 남자와 한 여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 환한 빛 속에서 검은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다섯째, 빨리 기어나오지 못할까?

그의 오른손에는 네모난 나무 판대기가 들려 있었다. 여자는 중년의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나머지 네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서생 차림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목수인 듯 손에 짧은 도끼를 들고 등에 커다란 톱을 메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푸른 얼굴에 뻐드렁니를 가졌으며 붉은 머리카락에 파란 수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지극히 무시무시하여 꼭 요괴 같았다. 그는 몸에 빛이 번쩍번쩍 나는 은포(銀袍)를 걸치고 있었다.

등백천은 살펴보는 즉시 그 사람의 얼굴 위에 유채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결코 진짜 얼굴이 그처럼 생긴 것이 아니고 연극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배우처럼 꾸미고 있었다.

조금 전 당 명황과 매비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등백천은 즉시 입을 열고 낭랑히 외쳤다.

여러분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불초는 고소 모용씨 문하의 등백천이외다.

상대방이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이쪽에서 한 무더기의 검은 그림자가 달려 나왔다. 칼빛이 번쩍이며 그 배우를 향해 잇따라 일곱 번 칼로 내려찍는 것이아닌가?

바로 일진풍 풍파악이었다. 그 배우는 느닷없이 공격을 당하자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느라고 매우 낭패한 꼴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힘은 산(山)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뒤엎는도다. 시세 불리하고 말은 달리지 않으니.....

그러나 풍파악의 공세가 너무 급격한지라 그는 세 번째 구절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검은 수염의 노인은 풍파악에게 욕을 했다.

저 사내는 정말 사리도 분간 못하는 작자군! 대뜸 미친 듯 칼을 휘둘러 대는데 나의 대철망(大鐵網)을 받아 보아라!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무 판자를 흔들더니 풍파악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풍파악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 한평생 크고 작은 싸움을 수백 번 치렀어도 이와 같이 네모난 나무판대기로 무기를 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칼을 휘둘러 나무 팔대기를 쪼개려 들었다. 텅, 하는 소리가 나면서 칼은 판대기 가장자리를 후려치게 되었으나 그 판대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원래 네모난 판대기는 강철로 만든 것이었다. 그 바깥 쪽에 나무무늬를 칠해 놓았을 뿐이었다.

풍파악은 즉시 칼을 거둬들였다가 다시 내려치려고 했다. 그런데 칼을 잡아 당겼으나 칼이 떨어져나오지 않고 그 강철판에 꼭 붙어 있었다.

풍파악은 깜짝 놀라 운기행공하여서는 와락 잡아채었다. 그제서야 칼은 강철판과 떨어졌다.

풍파악은 호통을 내질렀다.

요상하기 이를데 없군! 당신의 이 철판은 흡철석(吸鐵石)으로 만든 것이오?

그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 이것은 노부가 밥을 먹는 그릇이라오.

풍파악은 흘깃 바라보았다. 그 강철판 위에는 가로로 직선이 마구 그어져 있었다.

바둑을 둘 때 사용하는 바둑판이 틀림없었다. 포부동은 호기심이 생겨 크게 소리쳤다.

정말 희한한 노릇이군! 내 당신과 싸워 보겠소!

그는 칼을 질풍과 같이 휘둘렀는데 그 속도가 갈수록 빨라졌다. 그러나 칼이 흡철석으로 만들어진 바둑판과 마주치게 하지는 못했다.

이때 그 배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거친 숨결로 노래를 불렀다.

말이 떠나지 않으니 어떻게 할까? 우(虞)야, 우야, 어이할꼬?

그 사람은 갑자기 여자 음성을 꾸며내어 간들어진 어조로 말했다.

대왕께서는 번뇌하지 마십시오. 오늘 해하지전(垓下之戰)에서는 불리하기는 했으나 천첩이 대왕을 위해 첩첩이 에워싸인 포위망을 뚫도록 하겠사와요.

포부동은 호통을 내질렀다.

이 도적 같은 초패왕과 우희(虞姬)야! 빨리 자결을 하도록 해라! 나는 바로 한신(韓信)이다!

그가 손을 뻗쳐 공격을 하자 그 배우는 어깨를 쑥 내려뜨려 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큰 바람이 이니 구름이 모여드네! 어찌..... 어이쿠! 이 한 고조가 너 한신을 죽이겠다!

그는 왼손으로 허리를 더듬더니 한 자루 연편을 떨쳐냈다. 그리고 쉭하니 포부동을 내리쳤다.

여러분들은 잠시 손을 멈추고 먼저 해명부터 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풍파악으로 하여금 싸움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실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었다.

풍파악은 사실 자기가 심히 한독에 중독된 이후 체력이 평소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독이 언제라도 재발하게 된다면 무척 위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칼을 바람처럼 휘둘러 일찍이 상대방을 이겨야 되겠다는 듯 공세를 취했다.

네 사람이 한참 싸우고 있는데 대청에서 한 사람이 나와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계도(戒刀)를 서로 맞부딪히게 했다. 위풍이 늠름한 그 사람은 바로 현통대사였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독을 써서 사람을 해치려 하는 간악한 자들아! 노화상은 오늘 크게 살계를 범해야겠다!

그는 며칠간 한독에 당한 끝이었고 또한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화를 누를길 없는 참이라 더 따져 묻지도 않고 계도를 휘두르며 곧장 서생 차림의 두 사람을 향해 공격해 갔다.

한 서생은 몸을 날려 피했고 다른 한 명은 손을 품속에 가져가더니 한 자루 판관필같이 생긴 무기를 뽑아들고 이리저리 몸을 날리는 잔재주를 부리며 현통과 싸우기 시작했다.

다른 한 서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거 정말 이상하고 야릇하다! 출가인이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지? 도대체 어떤 불경에 출가인이 저렇게 날뛰라는 대목이 있지?

그는 손으로 품속을 더듬더니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디로 갔지?

그는 왼쪽 주머니를 더듬어 보더니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뒤집어 봤다.

그런가 하면 소맷자락을 떨쳐 보고 가슴팍을 쳐 봤으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허죽은 호기심이 일어나 물었다.

시주는 무엇을 찾고 있소?

그 서생은 대답했다.

이분 대화상은 무공이 무척 고강하오이다. 우리 형제가 그를 이길 수 없어 나는 무기를 뽑아들고 이제 싸움을 하려는 것이외다. 어? 이상하다, 이상해! 나의 무기를 어디다 두었을까?

그는 자기 이마를 툭툭 치면서 애써 생각하는 눈치였다.

허죽은 그만 참을 수 없어 훗, 하고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싸움을 할 참인데 무기를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니 정말 재미있게 되었군!"

그는 물었다.

시주, 그대는 무슨 무기를 사용하시오?

그 서생은 말했다.

군자는 먼저 예의를 차린 연후에 손을 쓰는 법인데 바로 나의 첫 번째 무기는 한 권의 책이외다.

허죽은 물었다.

무슨 책이요, 무공비결이오?

그 서생은 대답했다.

아니오, 아니오. 그 책은 한 권의 논어(論語)외다. 나는 성인의 말씀으로 상대방을 감화시키려고 하는 것이오.

포부동이 불쑥 끼어들었다.

당신은 글을 좋아하는 선비인데 논어조차도 외우지 못하면서 어찌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소?

그 서생은 대답했다.

노형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구려. 사실 논어, 맹자, 춘추, 시경 등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그야말로 좔좔 외우고 있소. 그러나 상대방이 불문의 제자이고 또한 불경만 읽었기 때문에 유가의 책은 읽어 보지 못했을 것이란 말이오. 그런데 내가 외운다 한들 그가 못 알아듣는다면 쓸모없는 일이 아니겠소? 반드시 책을 펼쳐서 보아야만 그는 잡아떼지 못할 것이고 또 억지로 변명을 하기도 어려울 터이니 반드시 책을 보아야만 효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면서 몸 이곳저곳을 더듬거려 뒤지고 있었다.

포부동은 부르짖었다.

젊은 스님, 빨리 그를 공격하시오!

허죽이 말했다.

이 시주가 책을 찾은 다음에 손을 써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 서생은 말했다.

송(宋)나라와 초(楚)나라가 홍(泓)이란 강가에서 싸움을 치르게 되었는데 초나라 사람들은 강을 건너지 못했고 또한 진을 미처 치지도 못한 상태라 송나라에서는 바로 공격할 수 있었소. 그러나 송 양공(宋襄公)은 그러한 때 공격하면 군자가 아니라고 했소. 젊은 스님의 그 같은 말은 바로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이때 목수 차림을 한 사람은 현통의 한 쌍의 계도가 춤을 추듯 휘둘러지는 가운데 초식이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것을 보고, 다시 더 몇 수를 싸운다면 판관필을 쓰는 서생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짧은 도끼를 휘두르며 앞으로 나가 도우려고 했다. 그런데 공야건이 갑자기 그에게 일 장을 후려쳤다.

공야건의 외양은 매우 점잖았으나 장력은 웅후하기 이를데 없어 강남에서 둘째 간다고 일컬어졌다. 그는 그 날 살구나무 숲속에서 소봉과 장력을 겨루기도 했다.

물론 공야건이 졌지만 소봉은 이에 대하여 대단히 흠모했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그의 내력 조예가 크게 비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목수는 몸을 옆으로 돌려 공야건의 일 장을 피하더니 도끼를 옆으로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그 서생은 그의 논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동료의 한 자루 판관필은 수법이 어지러워지고 있었으며 현통의 계도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는 형편인지라 즉시 현통을 향해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대화상, 공자께서는 군자라면 한평생 인(仁)을 어기지 않는다고 했소이다. 잘못되는 것도 바로 인을 행하지 못함이고 흔들리는 것도 반드시 인을 어기기 때문이라고 했소. 그런데 그대는 내 넷째 아우를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불인(不仁)이오. 안연(顔淵)이 인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께서 말하시기를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이라 했으며 하루라도 극기복례하게 된다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어질게 된다고 했소. 그리고 공자께서 가라사대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했소. 그런데 당신은 두 칼을 마구 휘둘러 매섭게 사람을 죽이려고만 하니 이와 같은 행동이야말로 전혀 극기(克己)라고 볼 수 없으니 그야말로 비례(非禮)가 아니겠소?

허죽은 나직이 소리를 내어 소림승 혜방(慧方)에게 물었다.

사숙, 저 사람은 바보인 척하는 것이 아닙니까?

혜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네. 이번에 절을 나서게 되었을 적에 사부님께서 모든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네. 강호의 사람들은 간사하고 교활하여 별의별 수작을 다 부린다고 하셨네.

이때 그 서생은 다시 현통에게 말했다.

대화상, 공자께서는 "인자(仁者)는 반드시 용기가 있고 용기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인(仁)이 있다"고 했소. 당신이 영악하기는 하나 결코 인자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참된 군자라고는 할 수 없소. 또 공자께서는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고 했소. 다른 사람이 만약 당신을 죽인다면 당신은 매우 싫어할 것이 아니겠소? 당신 스스로 매우 싫어하면서 왜 사람을 죽이려고 하시오?

현통은 싸우고 있는 서생과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칼을 휘두르고 격렬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서생은 현통을 따라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때로는 현통에게로 몸을 옮기고 때로는 오른쪽으로 몸을 옮겼다.

시종 현통과 석 자 밖으로 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근공을 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무공이 약하지 않았다.

현통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이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은 바로 나의 마음을 흐트러 놓자는 수작이다. 그리하여 나의 초식 가운데 빈틈을 발견하여 즉시 그 빈틈을 타고 공격해 들어오겠다는 것이겠지. 이 자의 무공은 판관필을 쓰는 사람보다 뛰어나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이렇게 되자 그는 육 푼 정도의 신경을 그 서생에게 썼고 사 푼 정도의 신경을 그 판관필을 쓰는 서생에게 기울였다. 이렇게 되자 그 판관필을 쓰는 서생의 형세가 대뜸 호전되었다.

다시 십육 초를 겨루게 되었을 때 현통은 초조해져 부르짖었다.

비켜나시오!

그는 계도를 거꾸로 돌려 칼자루로 그 책벌레 같은 서생의 가슴팍을 찔러갔다.

그 서생은 몸을 날려 피하면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 대사의 무공은 고강한 것 같소. 나와 넷째 아우 두 사람이 이 대 일로 싸운다 하더라고 그대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구려. 그렇기 때문에 권고하는데 역시 쌍방이 싸움을 멈추는 것이 좋겠소. 공자께서 가라사대 "참(參)아, 나의 도(道)는 언제나 일관되어 있다."라고 말했소. 그리고 증자께서 가라사대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소. 우리가 사람 노릇을 하려면 남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할 것인즉 너무 지나치게 거친 행동을 할 필요가 없소이다.

현통은 크게 노해 휙, 하니 한 칼을 옆으로 비스듬히 돌려쳐가며 외쳤다.

뭐가 충서지도(忠恕之道)이며 인의도덕인가? 당신네들은 어째서 관 안에 독약을 넣어 사람들을 해치려고 했지? 내가 만약 조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벌써 원적하여 서천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자기가 싫은 바를 남에게 하지 말랬다고 씨부렁거려? 당신은 중독되어 죽고 싶은가?

그 책벌레 같은 서생은 두 걸음 물러나더니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 누구의 관 안에 독약을 넣었단 말이오? 관이라는 것은 죽은 시체를 넣는 물건이 아니오? 공자 가라사대 "리가 죽었을 때도 관은 있었지만 곽(槨)은 없었다"라고 하셨소. 또 관에다가 독약을 넣어 둔다면 그거야말로 시체마저 독살하는 것이 아니오? 아니지, 아니야! 죽은 사람은 이미 죽어 있는 것이지. 어찌 또 다시 죽을 수 있겠는가?

포부동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당신네들은 관 안에 시체를 놔 둔 것이 아니고 독약을 넣어 두었소. 그저 우리 살아 있는 사람을 독살하려고 했단 말이외다.

그 책벌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귀하는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는구려. 이곳에는 관도 없고 독약도 없소.

포부동은 말했다.

공자 가라사대 "여자와 소인은 상대하기 힘든 법이다."라고 했소. 당신이야 말로 소인이오.

그는 맞은 편의 중년의 아름다움 부인을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여자요. 당신 두 사람은 무척 상대하기가 어렵소. 공자의 말씀에 틀린 데가 있습니까?

그 책벌레는 어리둥절해져서 말했다.

"왕이 좌우로 돌아보며 그 사람을 빗대어 말하더라"는 말이 있는데 당신네들의 그런 말을 나는 상대하기 싫을 뿐만 아니라 대답할 필요도 느끼지 않소.

이 책벌레가 포부동과 서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자 현통은 거리낄 바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다시 쌍도를 바짝 조이며 공세를 취했다. 그러자 판관필을 쓰는 서생은 대뜸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 책벌레 같은 서생은 훌쩍 몸을 날려 현통의 곁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 가라사대 "사람이 되어 불인(不仁)하면 어찌 예의가 되겠는가, 사람으로서 불인하면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소. 대화상은 사람이 되어 불인하니 정말 형편 없구려.

현통은 노해 부르짖었다.

나는 불가의 제자이다! 당신과 같은 진부한 책벌레가 시서예약(詩書禮藥)을 논하는 말 따위로는 나의 마음을 흔들지 못할 것이다!

그 책벌레는 손가락을 고쳐잡고 이마를 툭툭치며 말했다.

지극히 옳은 말씀이오. 지극히 옳은 말씀이외다. 이 사람은 책을 읽다가 약간 멍청해지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진짜 책벌레가 되었소이다. 대화상은 분명히 불문의 제자인데 그대에게 내가 공자 맹자의 인의도덕을 말했으니 걸맞지 않을게 뻔한 노릇이 아니겠소?

이때 풍파악은 오랫동안 쇠로 만든 바둑판을 들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싸웠으나 좀처럼 승리하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길어지자 아랫배가 은연 중 한독의 침입을 받게 된 듯 아파옴을 느낄 수 있었다.

포부동은 이때 그 배우와 싸우고 있었는데 상대방의 무공은 높지는 않았지만 초식의 변화가 지극히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일서 서시(西施)가 되어 개구리의 소리 같은 음성을 토해내며,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가슴을 얼싸안은 채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절세가인의 모습으로 변하는가 하면, 삽시간에 다시 시와 술에 있어서 뛰어난 풍류 시인 이태백의 모습을 흉내내어 취한 듯이 걸음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옮겨놓기도 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가 여러 가지의 인물로 변신을 하면서도 하나같이 거기에 맞는 무공을 이끌어내어 교묘히 배합을 이룬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손에 들린 연편(軟鞭)은 때로는 미인의 기다란 소맷자락이 되는가 하면 때로는 선비의 붓이 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포부동으로서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고 그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이때 책벌레같이 생긴 서생은 스스로를 원망하는 듯한 말을 한동안 씨부렁거리더니 갑자기 길게 소리내어 읊었다.

즐거움을 떨쳐 버린다고 해서 마음이 착하게 다듬어질 수 있을까? 만약에 떨쳐 버릴 수 없다면 어찌 실상(實相)으로 깊이 들어가랴?

현난과 현통은 똑같이 놀라고 말았다.

"저 책벌레는 정말 학문이 넓구나! 동진(東晉)의 고승 구마라즙(鳩摩羅什)의 구절까지도 외울 줄 아는구나!"

이때 책벌레는 다시 계속해서 읊었다.

공상(空相) 가운데서는 마음이 즐거울 수가 없다. 그리고 만약 선(禪)과 지혜를 깊게 하려면 법성(法性)이 비추지 않아야 한다. 말은 무실(無實)하니 역시 마음이 머물 곳이 아니로다. 대화상, 그 다음의 두 구절은 무엇이오? 나는 그만 잊어 버렸구려.

현통은 말했다.

"인자가 법(法)을 얻어 다행히 그 요지를 들어내고자 하도다."

그 책벌레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것 보시오! 불가(佛家)의 대사께서도 인자를 말하고 있지 않소? 천하의 도리는 같은 것이외다. 나는 역시 그대에게 권하노니 고해(苦海)는 끝이 없으나 고개를 돌리면 언덕이오. 어서 사람 잡는 칼을 내려놓도록 하시오.

현통은 속으로 깜짝 놀라게 되었고 별안간 대철대오(大徹大悟)해서 말했다.

선재(善載), 선재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챙그랑, 하는 소리가 두 번 들리는 가운데 두 자루의 계도를 땅바닥에 던졌다.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눈을 감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서생은 신나게 싸우던 판인데 갑자기 그가 그 같은 모양을 취하자 역시 깜짝 놀라 판관필을 손에 든 채 공격을 멈추었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건드리지 말아라!

그리고 손을 현통의 코 끝에 가져갔다. 그러고 보니 이미 숨은 멎어 있었다.바로 원적한 것이 아닌가? 현난은 두 손을 합장하며 왕생주(往生呪)를 외웠다.뭇 소림 승들은 현통이 원적한 것을 보고 일제히 대성통곡을 하며 선장과 계도를 집어들고 두 서생과 사생결단을 내려고 했다.

현난은 말했다.

손을 멈추어라! 현통 사제는 진여(眞如)를 깨닫고 왕생극락한 것이니 이는 바로 정과(正果)를 이룬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이다.

뭇 사람들은 갑자기 이 같은 변고를 당하게 되자 일제히 손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책벌레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다섯째, 설(薛) 다섯째, 빨리 빨리 나서게! 그가 나의 한 마디에 자극을 받고 죽었네! 빨리 나서서 목숨을 구해 주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나네.

등백천은 입을 열었다.

설신의는 집에 없소. 그 선생께서는 이미.....

그 책벌레는 여전히 목청을 돋구어 소리질렀다.

설모화(薛慕華)! 설 다섯째! 염왕적! 설신의! 빨리 기어 나와서 사람을 구하란 말이다! 너희 셋째형이 사람에게 무안을 줘서 죽였단 말이다! 상대방에서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려고 한단 말이다!

포부동은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이 해쳐 죽이고는 무슨 인정이 있는 것처럼 주접을 떨고 있는 것이오?

그는 휙, 하니 그에게 일 장을 후려치면서 곧이어 왼손을 오른손 밑으로 뻗쳐내며 노룡탐주(老龍探珠)라는 일 초를 펼쳐 곧장 상대방의 수염을 낚아채려 들었다. 그 책벌레는 몸을 옆으로 피했다.

풍파악과 공야건 등도 한창 신이 나서 싸우던 참에 이대로 손을 멈추고 싶지 않아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등백천은 호통을 내질렀다.

쓰러져라!

그는 왼손을 뻗쳐 그 배우의 등을 움켜잡았다. 등백천은 고소 연자오 모용씨 집안의 아랫사람들 가운데 첫째 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무공에 정통했으며 내력이 웅후한 편이었다.

강호에서 혁혁한 위명을 떨치지는 못했으나 무릇 그를 알고 있는 살마들 가운데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손을 뻗쳐 그 배우의 등을 움켜잡는 즉시 땅으로 내던졌다.

그 배우의 솜씨도 매우 민첩했다. 왼쪽 어깨로 땅을 짚으며 몸을 빙글돌려 반원을 그렸다. 그리고 오른 다리를 옆으로 쓸 듯 등백천의 다리를 슬쩍 걷어차왔다.

이번의 동작은 기이하도록 빨랐다. 등백천은 몸이 뚱뚱한 편이라 몸놀림에 있어서 그렇게 민첩한 편이 못 되었다.

그는 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진기를 하반신으로 내려보내 억지로 그 발길질을 받았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다리 중 어느 한쪽 다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배우는 잇따라 몇 번 데굴데굴 굴러 수 장 밖으로 굴러나가더니 호통을 내질렀다.

나는 너 모연수(毛延壽)와 같은 간악한 도적이 충성스럽고도 선량한 신하들을 모함하여 해쳤노라고 욕을 할테다! 아이구! 내 다리야!

원래 다리에 모였던 두 가닥의 기운이 부딪히게 되자 그 배우는 당해내지 못하고 그의 다리가 분질러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중년의 미부인은 조용히 한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배우의 다리가 부러지게 되고 나머지의 몇 동료들도 위기를 잇따라 맞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은 무슨 까닭으로 우리 다섯째 오라버니의 집을 강제로 차지하고 있으며 다짜고짜 사연도 묻지 않고 손을 써서 사람을 해치는 거예요?

그녀는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부드럽고 얌전했다.

그 배우는 땅바닥에 쓰러져 벌렁 드러눕게 되었는데 이때서야 대문 앞에 걸려 있는 두 개의 등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뭐라고? 뭐라고? 설공모화지상이라고? 우리 다섯째 사형이 세상을 떠났단 말인가?

바둑판을 사용하던 두 서생, 도끼를 쓰는 목수, 미부인 등은 그가 손가락질을 하는 곳으로 일제히 눈길을 돌렸으며 마침내 등롱을 발견하게 되었다.

두 개의 등롱에 켜져 있던 촛불은 이미 꺼져 어두침침했다. 뭇 사람들은 달려오는 즉시 크게 싸우던 터라 두 개의 등롱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 배우가 땅바닥에 나가떨어지게 되었을 때 고개를 쳐들다가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그 배우는 대성통곡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아! 아! 나의 형님아! 나와 그대는 도원결의하여 고성(古城)에서 만났으며 그대는 다섯 개의 관문을 지나면서 여섯 장수를 베었으니 얼마나 위풍당당했던가!

처음 그가 부른 것은 곡관우(哭關羽)라는 노래였다. 그런데 나중에 정말 감정이 복받치게 된 듯 제대로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그러자 나머지 다섯 사람도 다투어 부르짖었다.

그 누가 다섯째 아우를 살해했는가?

다섯째 형아, 다섯째 형아! 어느 죽일 흉수가 형을 해쳤소?

오늘 너희들과 반드시 사생결단을 내고 말터다!

현난과 등백천은 서로 마주 쳐다보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설신의와 결의 형제를 맺은 사이였구나!"

등백천은 입을 열었다.

우리의 동료가 상처를 입었으므로 설신의를 찾아와 치료를 받을까 했소이다. 그런데.....

그 부인은 말했다.

그런데 그가 치료를 해 주려고 하지 않자 당신네들은 그를 죽였다는 말이겠지요?

등백천은 말했다.

아니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중년 부인은 소맷자락을 떨쳤다. 별안간 등백천은 코에 짙은 향기가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대뜸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눈이 가물가물해졌을 뿐만 아니라 두 발이 두둥실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아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미부인은 부르짖었다.

쓰러져라! 쓰러져라!

등백천은 대노하여 호통을 내질렀다.

이 요부야!

공력을 돋우고 그는 일 장을 휙 하니 후려쳤다. 미부인은 등백천의 몸이 휘청거리는 것으로 보아 이미 자기의 술수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손을 써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몸을 날려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고 말았다.

그 순간 그녀는 한 가닥 세찬 기운이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을 것 같은 기세로 밀어닥치는 것을 느꼈다.

대뜸 숨이 콱 막히면서 몸뚱이가 자기도 모르게 바깥쪽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팍의 늑골이 몇 개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몸이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때 등백천 역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고 쓰러졌다.

쌍방에서 각기 한 사람씩 쓰러지자 나머지 사람들은 다투어 손을 썼다.

현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속에는 어떤 커다란 내막이 있는게 틀림없다. 먼저 상대방을 모조리 사로잡아야 쌍방의 살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한 그는 말했다.

나의 선장(禪杖)을 가져 오너라.

혜경(蕙鏡)이라는 승려가 문가에 세워져 잇던 선장을 집어 현난에게 바쳤다. 그러자 판관필을 쓰는 서생이 몸을 날려 들이닥치면서 오른손의 판관필로 혜경의 가슴을 찌르려고 했다.

현난은 왼손으로 일 장을 후려쳤다. 그의 손이 도달하기도 전에 장력이 어느새 그 서생의 등을 후려치고 있었다.

이 서생은 대뜸 그 장력을 맞고 쓰러졌다.

현난은 길게 소리내어 웃으며 선장을 비켜들고 옆으로 두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선장을 휘둘러 바둑판을 사용하는 사람을 내려쳤다.

그 사람은 선장이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선장에서 나오는 바람이 이미 온몸 주위를 뒤덮는 것을 보자 즉시 팔에 힘을 주어 두 손으로 바둑판을 쳐들고 맞받았다. 탕, 하는 음향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손과 팔이 시큰거리고 두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현난은 다시 선장을 쳐들었다. 그 바둑판은 흡입력이 지극히 강해서 전적으로 적의 무기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오늘은 적이 강하고 자기가 약해서 오히려 현난의 선장에 끌려가고 만 셈이었다. 현난은 선장을 쳐들었다가 다시 그 사람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려고 했다.

그 사람은 부르짖었다.

이번에 진신두(鎭神頭)와 의개(倚蓋)를 한꺼번에 펼치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구나!

그는 질풍같이 달아났다.

현난은 선장을 거꾸로 들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책벌레야! 나의 일 장을 받아 보아라!

그는 뛰어들어 비스듬히 후려치는데 그 위세는 정말 감당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서생은 부르짖었다.

공부자께서는 그 당시 거룩한 사람인데도 시세가 불리하게 되었을 때는 몸을 굽혔소. 엎드리라면 엎드리지 뭐 안될 게 있겠소?

몇 마디 말이 끝나기 전에 그는 땅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몇 명의 승려들이 대뜸 다가가 그를 내리눌렀다.

소림사 달마원 수좌는 역시 비범한 데가 있었다. 대뜸 손을 쓰자마자 상대방 세 명의 고수를 쓰러뜨린 것이다.

도끼를 쓰는 목수는 포부동과 풍파악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왼쪽을 막으면 오른쪽을 막지 못했고 오른쪽을 방비하려고 하면 왼쪽에 빈틈이 생겨서 곧 지게 될 형편이었다.

이때 바둑판을 쓰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만 두자, 그만 둬. 여섯째 아우, 우리가 졌다는 것을 시인하세. 이 한판의 바둑은 더 겨룰 필요가 없네. 대화상, 내 그대에게 묻겠는데 우리 다섯째 아우가 그대들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대들이 그를 헤쳐 죽였소?

현난은 말했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갑자기 쩡쩡, 하는 두 마디의 거문고 타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그런데 두 번의 소리가 고막으로 전해지자 뭇 사람들은 대뜸 마음이 격렬하게 쿵쿵 뛰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현난이 일시 어리둥절하게 되었을 때 다시 거문고 튕기는 소리가 쩡쩡, 하니 두 번 울려퍼졌다.

그 거문고 소리는 더욱 가까워졌고 갑자기 심장이 뛰는 것은 더욱 세차지게 되었다.

풍파악은 그 순간 가슴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오른손에 힘이 빠져 탕 하니 칼을 땅에 떨어뜨렸다.

만약에 포부동이 급히 손을 뻗쳐 보호하지 않았다면 내려찍는 도끼에어깻죽지를 얻어맞았을 것이다. 이때 그 책벌레가 부르짖었다.

큰 형님, 빨리 오시오! 큰 형님 빨리 오시오! 야단났소! 어째서 느릿느릿 그 허깨비 같은 거문고를 퉁기고만 있단 말이오! 공자께서도 임금이 부르시면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거문고 튕기는 소리는 잇따라 울려퍼졌다. 한 노인이 커다란 소맷자락을 펄럭이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높다란 이마에 광대뼈가 툭 불거진 모습의 괴상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싱글벙글 웃는 얼굴은 지극히 온화해 보였다.

그 노인의 손에는 한 개의 요금(瑤琴:거문고)이 들려 있었다.

책벌레 등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큰 형님!

그 사람은 가까이 다가와 현난에게 포권의 예를 해 보였다.

소림 고승이시오? 이 늙은이가 실례가 많았소이다.

현난은 합장했다.

노납은 현난이라고 하오.

그 사람은 말했다.

아, 현난 사형이셨군요? 귀파의 현고 대사는 대사의 사형제이시죠? 이 늙은이는 그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소이다. 의기투합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요. 그의 몸은 건강하신지요?

현난은 말했다.

사형은 근래 나쁜 자의 암수에 걸려 이미 원적하여 세상을 떠났소이다.

그 사람은 그만 멍해졌다. 별안간 위로 번쩍 뛰어오르는데 그 높이가 일 장이나 되었다. 그리고 몸이 미처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허공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현난과 공야건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사람이 그토록 어린애 같은 울음을 터뜨릴 줄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노인은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땅바닥에 주저앉아 힘주어 수염을 잡아당기고 두 발로는 마치 북을 치듯 땅바닥을 차며 통곡했다.

현고, 그대는 어찌하여 나에게 한 마디 알려 주지도 않고 그대로 죽었단 말이오? 그럴 수가 있는 것이오? 나의 범음보안주(梵音普安奏)라는 곡을 많은 사람이 듣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대는 그 곡에 선(禪)의 뜻이 들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대의 현난 사제는 그대와 같이 고명한 이해력이 있는 것 같지 않구려! 내가 만약 그에게 튕겨서 그 곡을 들려 준다면 십중팔구 소 귀에 대고 거문고를 튕기는 듯 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 아! 아! 내 운명이 고달프게 되었구나!

현난은 처음 그가 통곡하는 것을 보고 지극히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 현고 사형의 죽음에 슬픔을 금하지 못하여 대성통곡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그게 아니었다.

그는 세상에 자기의 곡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기에게 거문고를 튕기는 것은 소 귀에 거문고를 튕기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나 현난은 득도한 고승이라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횡설수설하는구나. 이 사람도 그의 형제들과 같으며, 초록은 동색이라고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구나."

이때 그 사람은 다시 울부짖었다.

현고, 현고야, 나는 지기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다시 그대를 위해 새로운 곡을 만들어냈는데 그 한 곡의 이름은 일위음(一葦吟)이라고 한다네. 그야말로 그대 소림사의 시조인 달마노조가 갈대로 강을 걷던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는 것이라네. 그런데 어찌하여 자네는 듣지 않는단 말인가?

갑자기 그는 고개를 돌리고 현난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현고 사형의 무덤까지 나를 안내해주시오. 빨리, 빨리!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나는 그의 무덤 앞으로 가서 이 새로운 곡을 튕기겠소! 그러면 그가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맑아져서 어쩌면 되살아날지도 모르겠소.

현난은 말했다.

시주는 함부로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 사형은 원적한 이후에 이미 불에 태워 재가 되었소이다.

그 사람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즉시 말했다.

그거 참 잘 되었소. 그대는 그 재를 나에게 주시오. 나는 소가죽에서 짜낸 아교로 그의 재를 나의 요금 안에다 붙여 두겠소. 그렇게 되면 매번 한 곡을 튕길 때마다 그는 모조리 들을 수 있게 될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멋진 일이 아니겠소? 하하하! 나의 이 생각이 좋지 않느냔 말이오!

그는 말을 하면 할수록 기뻐 나중에는 손뼉까지 치며 웃었다. 그러자 갑자기 미부인이 옆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물었다.

어! 일곱째 누이가 왜 저러고 있지? 누가 그녀를 해쳤지?

현난은 말했다.

이 가운데는 약간의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하던 참이었오.

그 사람은 말했다.

어떤 오해란 말이오? 누가 오해를 했단 말이오? 어쨌든 일곱째 누이를 해친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오. 어이구! 여덟째 아우도 상처를 입었구나! 여덟째 아우를 해친 사람도 좋은 사람은 아니야. 저 몇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아닌 모양이군.

그러자 그 배우가 부르짖었다.

큰 형님! 그들이 다섯째 형을 죽였으니 큰 형님은 빨리 다섯째 형의 원한을 갚아 주시오!

그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은 안색이 싹 변하여 부르짖었다.

그럴 리가 있느냐? 다섯째는 염왕적이다. 염라대왕이 그를 어떻게 할 수 있더란 말이냐?

현난은 말했다.

설신의는 가장해서 죽은 척한 것이고 관 안에는 독약만 있었지 시체는 없었소이다.

거문고를 튕기는 노인과 그 형제들은 하나같이 크게 기쁜 빛을 띠우며 다투어 말했다.

다섯째가 죽음을 가장했단 말이오.

시체는 어디로 갔소?

그가 죽지 않았는데 어찌 시체가 있겠는가?

별안간 멀리서 가느다란 음성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설모화, 설모화, 사숙 어르신께서 오셨다. 빨리 마중을 나오너라.

그 음성은 끊어질 듯 말 듯 하며 이어졌다. 거리가 무척 멀었으나 귀에 들려오는 것을 보면 소리치는 사람의 내공이 매우 심후함을 알 수 있었다.

배우와 책벌레, 공인 등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놀라 소리를 내질렀다. 거문고를 튕기는 노인은 부르짖었다.

커다란 화가 머리에 떨어지게 되었다. 아! 커다란 화가 머리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그 표정은 공포에 차 있었다.

도망갈 겨를이 없다! 빨리 빨리 집안으로 들어가자!

포부동은 큰소리로 말했다.

무슨 큰 화가 머리에 떨어지게 되었단 말이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답디까?

그 노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빨리 빨리 들어가세. 하늘이 무너진다면 별 상관이 없으나 이것은.....

포부동은 그 말을 가로챘다.

노 선생께서는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들어가지 않겠소.

그 노인은 오른손을 별안간 떨쳐냈다. 그는 대뜸 포부동의 가슴팍 혈도를 움켜잡았다. 이번에 손을 쓴 것은 너무나 빨라 포부동은 느닷없이 당하게 되어 방비할 수가 없어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그 순간 그 노인은 그의 몸을 높이 들어올렸다. 포부동은 자기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꼈고 노인에게 들려 대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현난과 공야건은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히 입을 열어 이야기 하려고 했을 때 바둑판을 쓰던 사람이 다시 말했다.

대사, 모두들 빨리 빨리 집안으로 들어갑시다. 지극히 무서운 대마두(大摩頭)가 눈 깜짝할 사이에 도달할 것이오.

현난은 일신에 신공을 지니고 있어서 무림에서는 거의 적수가 없는 형편이라 대마두고 소마두고 간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물었다.

소마두란 말이오? 대마두라는 말이오? 교봉이란 말이오?

그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교봉보다 더욱 무섭고 악독하다오. 바로 성숙노괴외다.

현난은 웃었다.

성숙노괴라면 그야말로 잘 되었소. 노납은 그를 찾고 있던 참이오.

그 사람은 말했다.

대사의 무공이 고강하시니 물론 두렵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고통을 당하고 죽을 것이오. 그런데 그대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하다니, 당신은 한없이 자비롭구려!

이 몇 마디 말은 그를 풍자한 것이었다. 그 말은 정말 효과가 있었다. 현난은 일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모두 집안으로 들어갑시다.

바로 이때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은 포부동을 내려놓고 다시 문안에서 달려나오더니 재촉했다.

빨리! 빨리! 무엇을 기다리고 있소?

풍파악은 호통치며 물었다.

우리 셋째 형님은 어디 있소?

그 노인은 왼손을 들어 냅다 풍파악의 오른쪽 뺨을 후려치려고 했다. 풍파악은 몸안의 한독이 이미 재발하여 감당하기 어려웠던 참인지라 그가 손을 들어 후려쳐 오는 것을 보고 급히 고개를 숙여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노인은 왼손의 일장을 끝까지 다 뻗지 않고 별안간 힘을 바꾸어 아래쪽으로 쓱 내리더니 풍파악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말했다.

빨리! 빨리! 빨리 들어가세!

그는 풍파악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야건은 그 노인에게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두 형제를 일 초만에 제압해서 잡아 들어가는 것을 보고 즉시 큰소리로 호통을 내지르며 앞으로 나가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그 노인의 신법은 질풍같아 어느덧 대문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러자 그 서생은 배우를 안아들고 공인은 미부인을 부축하여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현난은 속으로 오늘 이 일은 괴상하기 이를데 없으니 역시 사고가 나지 않도록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공야 시주, 모두들 들어가서 천천히 계획을 세우도록 합시다.

즉시 허죽과 혜방이 현통의 시체를 떠멨고 공야건은 등백천을 떠멘 채 일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노인은 다시 재촉을 하려고 나왔으나 이미 뭇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는 급히 대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이때 바둑판을 휘두르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큰 형님, 이 대문은 활짝 열어 놓는게 좋습니다. 이것이 허허실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경솔하게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드는 거죠.

그 노인이 되물었다.

그래? 좋아. 자네의 말을 듣기로 하세. 이러면..... 이러면 되었는가?

그 말에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

현난과 공야건은 서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 늙은이는 무공이 고강한데 이처럼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모를까? 이같은 한 짝의 대문으론 어떤 도적도 막을 수 없다. 더군다나 성숙노괴라면 열어 두든 닫아 두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아무래도 이 사람은 성숙노괴의 손 아래 한 번 크게 당한 바 있기 때문에 활을 보고 놀란 새처럼 그가 부근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는 혼비백산한 모양이구나."

이때 노인은 말했다.

여섯째 아우, 좋은 방법이 없을까? 빨리 좋은 방법을 생각해 봐.

현난은 그가 그토록 당황해하자 신경질이 나서 외쳤다.

노인장, 군사가 쳐들어오면 장수를 내세워 막고 물이 덮쳐오면 흙으로 덮으라고 하는 말이 있지 않소? 성숙노괴의 무공이 아무리 악랄하고 무서워도 우리 모두 손을 합쳐 막는다면 반드시 그에게 진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오. 그런데 왜 이 모양으로.....

이 모양으로..... 허..... 어찌할 바를 모르시오?

이때 대청에는 이미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가 흘끗 보니 노인은 얼굴에 당황과 공포의 빛을 띄우고 있을 뿐 아니라 바둑판을 휘두르는 사람이나 책벌레, 공인, 팔관필을 쓰던 사람들도 벌벌 떠는 것이 아닌가?

현난은 친히 그들의 무공이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목격한 터였다. 더군다나 그들은 횡설수설하며 어떤 일에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이 인간 세상을 희롱하며 사는 소탈한 사람들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쓸모없는 비겁자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실로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다.

공야건은 포부동과 풍파악이 아무일 없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독이 재발한 듯 연신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즉시 등백천을 부축하여 의자에 앉혔다. 다행히 그의 맥박은 고르게 뛰고 있었다. 술에 흠뻑 취한 듯 곤히 잠든 상태와 같이 결코 위험한 증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러자 그 단부(短斧)를 든 목수가 품속에서 굽은 자를 꺼내더니 대청 한 모퉁이를 재어 보았다. 곧 고개를 흔들며 촛대를 들더니 뒤청으로 갔다.

모두들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그는 사방을 훑어보고 자기 몸을 날려 대들보 위에 올라 다시 한 번 재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재차 뒤쪽으로 걸어가 설신의의 가짜 관 앞에 이르러서 몇 번 눈여겨 보더니 역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애석하군! 애석해!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이 말했다.

쓸모가 없는 것 같다고?

단부를 사용하던 공인이 말했다.

안 됩니다. 사숙은 반드시 알아차릴 것입니다.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은 노해 부르짖었다.

자네..... 자네는 여전히 그를 사숙이라고 부르는가?

목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뒤쪽으로 나갔다.

공야건은 생각했다.

"저 사람은 그저 고개만 저을 뿐 다른 일을 다시 하지 않을 것 같군."

목수는 담장을 재어 보더니 걸음을 옮기며 걸음 수를 손으로 헤아려 보았다. 마치 집을 짓는 목공처럼 길을 걸으면서 걸음을 헤아렸다. 그리고 후원에 도달하자 촛대를 들고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낭하에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다섯 개의 돌절구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생각해 보더니 촛대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왼쪽에서 두 번째의 커다란 돌절구통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몇 웅큼의 겨와 흙을 절구통에 집어 넣더니 옆에 세워둔 커다란 절구 방망이로 찧기 시작했다. 쿵하고 다시 찧었다. 절구가 떨어지는 데 매우 힘차 보였다.

공야건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재수 옴붙었군, 한 떼의 미친 자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를 어쩐담! 하필 이럴 때 쌀을 찧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다니, 알다가도 모르겠군! 만약 진짜 쌀을 찧는다면 모르되 절구통 안에 분명 겨와 흙을 넣고 찧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포부동과 풍파악은 몸의 한독이 잠시 멈추자 역시 후원으로 달려왔다.

쿵, 쿵, 쿵, 절구를 찧는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포무동은 말했다.

노형, 쌀을 찧어 밥을 짓자는 것이오? 그러나 찧는 것이 쌀이 아니잖소? 내가 보기에 우리들은 역시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싹이 나오기를 기다려.....

별안간 화원 동남쪽 칠팔 장쯤 되는 곳에서 몇 번 찌릉찌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매우 경미했으나 퍽 특이했다.

현난과 공야건 등은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는 네 그루의 계수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다.

목수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절구질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수장 밖 동쪽으로부터 두 번째 되는 계수나무가 갑자기 나뭇가지를 흔들어 대더니 천천히 바깥쪽으로 움직였다. 다시 잠시 후 뭇 사람들은 목수가 한 번 찧을 때마다 계수나무가 한 치나 반 치 정도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문고를 튕기는 노인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계수 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나직이 말했다.

맞았어. 맞았어.

뭇 사람들은 그를 따라 달려갔다. 계수나무가 움직이는 곳에 한 커다란 석판이 드러났는데 위에는 하나의 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공야건은 한편 감탄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입을 열었다.

이 지하 장치는 정말 교묘하게 안배했구려.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오. 이 노형은 삽시간에 이 장치가 되어 있는 곳을 발견하다니, 총명과 재질은 실로 이 장치를 만든 사람에 못지 않다고 할 수 있소.

포부동이 그 말을 받았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그대가 어찌 이 장치가 바로 그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말이오?

공야건은 웃었다.

나는 그의 재치가 장치를 만든 사람 못지 않다고 했네. 만약 장치를 그 자신이 만든 것이라면 그의 재치는 자연 그 자신의 아래일 수가 없지 않은가?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그 아래가 아니면 그 위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소?

재치가 어찌 그 자신의 위가 될 수 있단 말이오!

목수는 다시 십여 번을 찧었다. 커다란 석판이 모조리 들어나게 되었다.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은 쇠고리를 잡고 위로 잡아당겼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힘주어 끌어당기려고 했을 때 목수는 부르짖었다.

큰 형님, 손을 멈추시오!

그는 몸을 날려 옆의 절구통 위로 올라서더니 바지가랭이를 내리고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르짖었다.

모두들 빨리 오시오! 일제히 오줌을 쌉시다!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은 재빨리 다가갔다. 삽시간에 바둑판을 휘두르던 사람, 책벌레, 팔관필을 쓰는 사람, 거기다가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과 목수는 일제히 절구통에 오줌을 쌌다.

공야건 등은 그 다섯 사람이 미친 듯 오줌을 갈겨대자 배꼽이 빠져라 하고 웃어댔다.

그때 코 끝에 화약 냄새가 풍기는 것이 아닌가?

목수는 말했다.

되었소이다. 이제 위험은 없어졌어요.

그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은 오줌을 누는 시간이 매우 길었다. 그는 여전히 오줌을 누며 중얼거렸다.

여섯째 아우, 만약 자네가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우리 모두가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일세.

공야건 등은 속으로 흠칫했다. 순식간에 불과했지만 그들 자신이 이미 지옥문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 온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틀림없이 이 쇠고리 아래에는 화약과 화약선이 이어져 있었고 고리를 잡아당기면 화약선에 불이 붙게 되어 화약이 즉시 터지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목수가 매우 기민하여 그 같은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모두 오줌을 싸서 화약선을 젖게 만들어 모두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목수는 오른쪽에서 첫 번째의 절구통 옆으로 다가가더니 힘을 주어 절구통을 오른쪽으로 세 번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입으로 뭐라고 나직이 중얼대며 잠시 헤아려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절구통을 왼쪽으로 여섯 번 반을 돌렸다. 그러자 한 차례 끼룩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커다란 석판이 옆으로 움직였고 하나의 동굴이 나타났다.

이번에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은 감히 경솔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목수에게 손짓을 했다. 앞장을 서라는 뜻이었다. 목수는 땅바닥에 엎드리고 왼쪽으로 첫 번째의 절구통을 살폈다.

갑자기 지하에서 그 누가 욕을 했다.

성숙노괴, 이 빌어먹을 후레자식아! 좋아! 좋아! 끝내 나를 찾아냈으니 네가 무섭다고 해두자! 네가 온갖 못된 짓을 다하니 끝내 언젠가는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오너라! 와! 와서 나를 죽이란 말이다!

서생과 공인 배우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섯째는 정말 죽지 않았다!

거문고를 튕겼던 노인이 부르짖었다.

다섯째 아우, 우리 모두 도착했네.

그러자 안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멈춰지고 곧이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큰 형님이시오?

그 소리에는 기쁜 빛이 가득했다.

곧이어 그 동굴로 한 사람이 기어나왔는데 바로 염왕적 설신의였다.

그는 거문고를 튕겼던 노인의 의형제들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 하더니 현난에게 말을 했다.

대사, 그대 역시 와 주셨구려. 그 몇 분은 친구이시오?

현난은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그렇소. 모두 친구들이오.

본래 소림사는 현비 대사가 고소 모용씨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여기고 모용씨를 큰 원수로 여겼다. 그러나 등백천 등과 함께 설신의에게 치료를 받으러 오면서 등백천과 공야건으로부터 현비 대사는 결코 모용 공자가 해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을 누누이 들었다. 따라서 현난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는데 이번에 같이 위험을 겪고 고난을 함께 하게 되자 고소 모용씨 문하 사람들을 친구로 인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공야건 역시 현난 대사가 그와 같이 인정하고 나오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설신의는 말했다.

모두 친구라니 정말 잘 되었소이다. 모두 함께 내려갑시다. 현난 대사께서 먼저 내려가시죠.

말은 그렇게 했으나 여전히 앞장을 서서 아래로 내려갔다. 이와 같이 어두침침한 지하실은 매우 위험한 곳임에 틀림이 없었다. 거기다 강호의 사람들의 마음은 이상야릇하여 헤아리기가 어려워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처지였다. 자기가 먼저 들어간 것이야말로 손님을 안내하는 도리였다.

설신의가 들어가고 현난이 뒤따라 내려갔다. 사람들은 상처입은 사람들을 부축하여 안고 뒤를 따라 들어갔다.

현통의 시체도 떼메고 들어갔다. 설신의는 기관장치를 움직였다. 그러자 커다란 석판이 저절로 닫혀지게 되었고 다시 그가 기관장치를 움직이자 은연중 끼륵끼륵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계수나무를 원위치로 옮겨 놓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래는 돌로 깍아서 만든 지하도였다. 사람들은 허리를 굽히고 나가야 했다.

잠시 걸어가자 지하도는 점차 높아졌다. 그리하여 천연적으로 생겨난 지하도에 이르게 되었다.

다시 십여 장을 나가게 되자 한 넓다란 동굴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동굴 한 모퉁이의 횃불 주변에는 이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남녀노소가 모여 있었다.

이 사람들은 발걸음 소리를 듣고 일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설신의는 말했다.

이 사람들은 우리 집안 사람들이외다. 사태가 긴박해서 인사를 시키지도 못했소이다. 심히 실례된 점 너무 탓하지 마시구려. 큰 형님, 그리고 둘째 형. 그대들은 어떻게 오셨소?

그는 큰 형의 대답을 듣지 않고 즉시 여러 사람들의 상처를 살폈다. 첫 번째로 본 사람은 현통이었다.

설신의는 현통을 보고 말했다.

이 분 대사께서도 도를 깨닫고 원적하셨으니 그야말로 기쁘고도 축하해야 될 일이외다.

그리고 등백천을 보더니 미소했다.

나의 일곱째 누이의 꽃가루는 그저 사람을 취해서 쓰러뜨리게 할 뿐이니 잠시 후면 깨어날 것이오. 결코 중독된 것은 아니외다.

그 중년 미부인과 배우가 입은 것은 외상이었다. 물론 가볍지 않았으나 설신의에게 있어서는 조그만 일에 불과했다.

그는 포부동과 풍파악의 맥박을 짚어보더니 고개를 쳐든 채 한참 동안 생각했다.

잠시 후 설신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하군, 이상해! 이 두 분의 형제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

공야건은 말했다.

옷을 매우 이상야릇하게 입은 젊은이였소.

설신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젊은이라고? 이 사람의 무공은 정사(正邪) 두 파의 장점을 겸비하고 있소. 내공이 심후하여 적어도 삼십 년의 수위를 쌓았다고 할 수 있는데 어째서 아직은 젊은이란 말이오? 현난은 말했다.

틀림없는 젊은이외다. 그러나 장력이 웅후했소. 나의 현통 사제는 그와 일장을 마주치게 되었는데 역시 한독에 상처를 입고 말았지요. 그는 성숙노괴의 제자이기도 하답니다.

설신의는 놀라 말했다.

성숙노괴의 제자가 그토록 무섭다니, 대단하군! 대단해!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정말 부끄러운 노릇이외다. 이 두 분 형씨의 한독을 저로서는 어찌해 볼 수가 없구려. 신의라는 두 글자로 다시는 불려질 염치가 없게 되었소.

그러자 갑자기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설 선생, 우리는 여기서 머물러야 하오?

입을 연 사람은 바로 등백천이었다. 그는 꽃가루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나 이때 정신을 차리게 되었던 것이며, 그리하여 설신의가 최후로 한 한 마디의 말을 듣게 되었다.

포부동은 말했다.

이 지하실에 숨어서 뭘 하겠다는 것이오? 사내 대장부의 생사는 운명에 달린 것, 어찌 두더지의 흉내를 내서 지하동굴에 숨는단 말이오?

설신의는 냉소했다.

시주는 매우 큰소리를 치는구려. 그대는 밖에 누가 온 줄 아시오?

풍파악도 말했다.

당신네들은 성숙노괴를 두려워하나 나는 그렇지 않소. 그대들은 무공이 고강한데도 성숙노괴의 이름만 듣고서 그토록 혼비백산하니 정말 무공이 고강하다는 말이 무색하구려.

그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이 말했다.

그대는 나를 이겨내지 못하는 형편이 아니오? 성숙노괴는 바로 나의 사숙이란 말이외다. 그러니 그가 무섭지 않다고 할 수 있겠소?

현난은 화제를 돌렸다.

노납은 오늘 듣고 본 바가 많은데 여러 점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어서 가르침을 받고 싶소이다.

설신의가 말했다.

우리 사형제 여덟 명은 함곡팔우(函谷八友)라고 일컫죠.

그는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우리 대사형이시고 저는 다섯째이지요. 나머지 일들은 말을 하자면 길어지고 남에게 알릴 바도 못 되오.

바로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갑자기 가느다란 음성이 들렸다.

설모화, 너는 어째서 나오지 않느냐?

그 소리는 모기 소리처럼 가늘었으나 동굴의 뭇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그 소리는 마치 한 가닥 한 가닥 누에실로 만든 가느다란 끈이 십여 장의 두터운 땅바닥을 뚫고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꾸불꾸불한 지하도를 따라서 흘러들어와 여러 사람의 고막으로 파고든 것 같기도 했다.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은 아, 하고 벌떡 일어서며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성.... 성숙노괴!

풍파악은 큰소리로 말했다.

큰 형님, 둘째 형님, 셋째 형님, 우리들은 나가서 결사일전을 벌이도록 합시다.

거문고를 튕겼던 노인이 말했다.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당신네들이 나갔다가는 헛되이 죽음을 당할 뿐이오. 이 정도로 끝난다면 또 모르되 이 지하 동굴의 거처를 발설하게 된다면 이 곳의 십여 명의 목숨도 당신의 헛된 만용 때문에 모조리 잃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

포부동은 말했다.

그의 말소리가 이곳 지하실까지 들리는 것을 보면 그가 어찌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모르겠소? 그대가 자라처럼 웅크리고 있으려고 하지만 그도 역시 그대를 끌어낼 터이니 피하려 한다 해도 피할 수 없는 노릇이외다.

그러자 판관필을 쓰던 서생이 입을 열었다.

즉시 그가 들어온다고는 볼 수 없소. 그러니 모두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이때 목수는 줄곧 아무 소리 않다가 이때서야 입을 열고 말했다.

정 사숙의 제자가 무공은 고강하지만 이 지하 동굴을 알아내는 데는 적어도 두 시진은 걸려야 할 것이외다. 거기다가 쳐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려면 다시 두 시진을 걸리게 될 것이외다.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이 말했다.

정말 잘 되었군. 그럼 우리에게는 네 시진의 시간이 있으니 찬찬히 의논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목수가 말했다.

네 시진 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이 말햇다.

어째서 다시 더 반 시진이 많아지지?

목수가 말했다.

이 네 시진 동안 나는 또 세 곳의 기관을 안배하여 그를 반 시진 동안 저지할 수 있습니다.

거문고를 튕기며 노인은 입을 열었다.

매우 좋다, 현난 대사. 그 대마두가 이곳에 도달하게 된다면 우리 사형제 여덟 사람은 결코 그의 독수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오. 그대들은 외부의 사람이오. 그 대마두가 달려들게 된다면 오로지 한 마음으로 우리 이 한 떼의 사질들을 상대하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될 것인즉 그때 여러분들은 도망칠 여유가 있을 것이오. 여러분들은 결코 영웅호걸이라 뽐내면서 그와 맞서서 싸울 생각을 하지 마시오. 그 누구든지 성숙노괴의 손 아래서 목숨을 건진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대단한 영웅호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오.

포부동은 말했다.

구린내가 심해! 구린내가 심해!

여러 사람들은 냄새를 맡아 보았으나 구린내를 맡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모두 눈에 의문의 빛을 띠우고 포부동을 바라보았다.

포부동은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 사람이 개방귀 같은 소리를 마구 내지르니 그야말로 그 구린내를 참을 수가 없구려.

그는 조금 전 그 거문고를 튀기던 노인에게 제압을 당하게 되자 마음속으로 여간 울화가 치밀지 않았다. 물론 그때는 마침 한독이 재발한 터이라 손과 팔에 힘이 없었지만 자기의 무공이 그 노인에게 훨씬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상대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욕을 하는 성질이었다.

이때 그 바둑판을 휘둘렀던 사내가 포부동을 한 번 내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우리 대사형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더군다나 우리 사숙의 무공은 대사형보다 십 배나 더 뛰어나단 말이오. 그런데 그 누가 개방귀를 뀐다는 말이오?

포부동은 그 말에 불복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무공이 고강한 것과 개방귀를 뀌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외다. 무공이 고강하다고 해서 설마하니 개방귀를 뀌지 않는단 말이오?

개방귀를 뀌지 않는 사람이 설마하니 무공이 반드시 고강하단 말이오? 공부자께서는 무공을 모르시니 그 어르신들께는 개방귀를 뀔 수 없....

등백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닌데 또 셋째 아우가 그들에게 쓸데없는 잔소리를 함으로써 시간만 낭비하고 있구나."

그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가르침을 받지 못했소이다. 조금 전에 많은 오해가 있어서 잘못하여 저 낭자에게 상처를 입힌 점, 불초는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오. 오늘은 함께 요사한 무리를 대적해야 하니 모두 한 집안 사람이라 할 수 있소. 나중에 강적이 공격을 해오게 되었을 때 우리 고소 모용 공자의 아래 사람들은 못난 편이지만 결코 도망은 치지 않겠소이다. 그리고 만약에 적을 감당할 수 없다면 모두 함께 이곳에서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는 노릇이외다.

현난은 말했다.

혜경과 허죽, 너희들에게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방법을 강구하여 도망쳐 절로 돌아가 방장에게 알리도록 해라. 모두 요사한 무리들에게 일망타진 당하여 소식마저도 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는.....

육인의 소림 승려들은 합장했다.

삼가 법지를 받들겠습니다.

설모화와 등백천 등은 현난이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듣자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생사를 같이 할 결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현난 역시 성숙노괴를 상대할 수 있는지 마음속으로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내다 볼 수 있었다.

거문고를 튕기던 노인은 어리둥절해 하더니 갑자기 손뼉을 치며 웃었다.

모두들 죽게 되는구나! 현고 사형이 지금 설사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후는 그야말로 나의 절묘하기 이를데 없는 일위음이라는 곡을 들을 수 없을 것이네. 내 그가 죽었다고 해서 슬퍼할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아! 아! 그대라는 사람이 이 강광릉(康廣陵)을 커다란 바보라고 말했을 때 나는 결코 승복할 수 없었네. 그러나 이렇게 되니 설사 큰 바보가 아니라도 작은 멍청이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네.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야말로 진짜 커다란 바보이며 커다란 멍청이외다.

거문고를 튕겼던 노인인 강광릉은 말했다.

그렇지만 그대보다 더 바보는 아니야.

포부동은 말했다.

나보다도 십 배나 바보이외다.

강광릉은 말했다.

그대는 나보다 백 배는 더 바보일세.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는 나보다 천 배는 더 바보예요.

강광릉은 말했다.

그대는 나보다 만 배는 더 바보일세.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는 나보다 십만 배 천만 배 만만배로 바보요.

설모화는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막상막하이니 누가 누구보다 바보인지 겨룰 필요는 없소이다. 여러 사람과 이 스님들이 절로 돌아가고 방장 대사께서 원인과 결과를 묻게 되었을 때 아마 그대들은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오. 이 일은 본래 폐파의 부끄러운 일이라 남에게 알리기를 꺼려 했소. 그러나 이 천하의 커다란 화근을 없애기 위해서는 소림의 고승이 대국을 이끌어 나가지 않는다면 성공하기가 실로 어렵소. 불초는 여러분에게 마땅히 자세한 말씀을 올려야 하겠으나 여러분들은 아무쪼록 폐사 방장에게 전하는 외에는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말아 주시기 바라오.

혜경과 허죽 등은 일제히 말했다.

설신의께서 하시는 말씀을 소승은 본사의 방장에게 품하는 외에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설모화는 광릉에게 물었다.

대사형, 소제는 이 와중에 까닭을 말해야 되겠습니다.

강광릉은 뭇 사형제들 가운데 우두머리였으며 무공도 또한 사제들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었으나 위인됨은 매우 유치했다.

설모화가 그같이 묻는 것은 남들 앞에서 그의 안면을 세워주려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강광릉의 대답은 뚱단지같지 않은가?

그거 이상하군! 이건 자네 생각에 달려 있는데 말하고 싶으면 자네가 말할 것이지, 나에게 물어서 무엇하겠다는 것인가?

설모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난 대사, 그리고 등 장사. 우리의 은사는 무림에서 총변 선생이라 불립니다.

현난과 등백천 등은 모두 어리둥절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뭐라고요?

총변 선생은 바로 농아 노인이었다. 이 사람은 그야말로 귀머거리와 벙어리인데도 총변 선생이라는 호를 지어서는 부르게 했으며 그 문중의 제자들도 그에게 귀를 찔리고 혓바닥을 잘려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데 강광릉 등은 귀도 밝고 혓바닥도 똑바로 박혀 있었으니 그야말로 퍽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설모화는 입을 열었다.

가사의 문하 제자들이 모두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된 것은 수십 년 동안의 일입니다. 예전에는 가사께서도 귀머거리도 아니셨고 벙어리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제인 성숙노괴 정춘추에게 다그침을 받고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현난 등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설모화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사조께서는 모두 두 사람의 제자를 거느렸으며 큰 제자는 소씨이며 이름은 성하라 하셨는데 바로 가사이십니다. 그리고 둘째 제자로 정춘추였지요. 그 두 사람의 무공은 원래 백중지세였으나 나중에 높고 낮은 것이 드러나게 되었지요.....

포부동은 불쑥 입을 열었다.

허허허. 그대의 사숙 정춘추가 그대의 사부를 이겼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외다.

설모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외다. 우리 사조께서는 그야말로 학문이 뛰어나신 분으로 가슴에 품고 있는 학문은 그야말로 삼라만상을 꿰뚫고 있는 셈이지요.

포부동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을걸? 그렇지 않을걸?

설모화는 이 사람이 남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처음 우리 사부님께서는 정춘추와 함께 무공만을 배웠지요. 그런데 우리 사부님께서는 딴데 정신을 쏟게 되었는데 바로 사조께서 거문고를 튕기고 음률을 튕기는 학문을 배우게 되었지요.

포부동은 강광릉을 가르키며 말했다.

하하하! 그대의 거문고를 튕기는 재주도 그리해서 배운 것이구려?

강광릉은 눈을 부릅떴다.

나의 재간이 사부께 배운 것이 아니라면 그대에게 배운 줄 아는가?

설모화는 말했다.

만약 저의 사부님께서 그저 거문고를 튕기는 한 가지 학문만 배웠더라면 별로 커다란 장애를 받지 않았을 것이나 사조께서 배우신 학문이 너무나 넓었죠. 금기서화(琴棋書畵), 의복성상(醫卜星相), 공예잡학(工藝雜學), 무천종식(貿遷種植) 가운데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소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부님께서는 처음 거문고를 튕기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바둑을 배우게 되었으며 다시 서예와 그림을 배우게 되었지요. 여러분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 학문들 가운데 한 가지만 하더라도 심혈을 모두 기울여야 하고 많은 시일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 정춘추도 처음 똑같이 따라서 배우는 척 했으나열흘인가 반 개월 정도 배운 이후 자기의 자질이 우둔하여 배우기 어렵다고 하면서 오로지 무공에만 전념하게 되었죠. 그리하여 팔 년이나 십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그들 사형제 두 사람의 무공은 높고 낮은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현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거문고를 튕기거나 바둑을 배우는 등 한 가지만 해도 한 사람의 반생의 정력을 소모하게 되는데 총변 선생은 놀랍게도 여러 가지 학문에 정통했으니 실로 뛰어난 재주를 타고 나신 분이 아니라 할 수 없소. 그런데 정춘추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무공을 익혔으니 무공에 있어서 사형을 이기는 것은 별로 대수로울 게 없소이다.

강광릉은 말했다.

다섯째 더욱 중요한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왜 말하지 않지? 빨리 말해! 빨리 말해!

설모화는 말했다.

그 정춘추는 전문적으로 무학만 배웠는데 이것 또한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 실로 이 일을 말하자니 우리 사문의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하였든간에 정춘추는 여러 가지 비열한 수단을 쓰게 되었고 또 어디서 배워 왔는지 몇 가지 지극히 무서운 무공을 써서 갑작스럽게 공격을 해 우리 사조님에게 중상을 입혔지만 사조께서는 그래도 몸에 절학을 지닌 분이라 느닷없이 암산을 당하게 되었어도 여전히 애쓰며 저의 사부님이 달려와 구원을 할 때까지 버티어 냈습니다. 저의 사부님의 무공은 그 악적에 비해 약한 관계로 한바탕 암수를 당한 사부님마저도 재차 상처를 입게 되고 사조께서는 골짜기로 떨어져 생사를 모르게 되었지요. 우리 사부님께서도 잡다한 학문을 배우느라고 무공을 그르치게 되었지만 그러한 잡다한 학문도 역시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매우 위급하게 되었을 때 저희 사부님께서는 오행팔쾌(五行八快)와 기문둔갑(奇門遁甲)을 펼쳐 정춘추의 이목을 어지럽게 하여 그와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정춘추는 일시에 진을 깨뜨리고 저의 사부님을 죽일 수가 없었지요. 거기다가 그는 본문의 적지 않은 오묘한 신공이 있지만 사조께서는 시종 그들 사형제 두 사람에게 전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사조께서 돌아가실 때 반드시 그 신공의 비급이 있는 위치를 사부님에게 알렸으리라 짐작했죠.

따라서 천천히 사부님을 다그쳐서 털어 놓도록 하려고 결국 약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약정이라는 것은 저희 사부님이 그때부터 입을 열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정춘추가 다시는 저희 사부님을 찾아와 시비를 걸지 않겠다는 것이었소. 저희 사부님의 문하에는 우리 여덟 명의 못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저희 사부님께서는 편지를 써서 우리들을 모조리 흩어지라고 하셨으며 다시는 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니나 다를까 벙어리와 귀머거리처럼 행세했으며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거둬들인 제자들의 고막을 찌르고 혓바닥을 잘라 농아문(聾啞門)이라는 문파를 세우게 되었죠. 저희 사부님의 뜻을 미루어 보건데 아마도 마음을 나누어서 잡다한 학문을 배우게 되어 무공에서 정춘추에게 뒤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후회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게 된 이후에는 갖가지의 잡다한 학문을 배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우리 사형제 여덟 사람도 사부에게 무학을 배운 이외에도 각기 한 가지의 학문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춘추가 사문을 배반하기 전의 일이지요. 그때 가사께서는 마음을 나누어서 다른 학문을 연구한다는 것이 커다란 해가 된다는 사실을 아직 깊이 깨닫지 못한 관계로 그와 같이 다른 학문을 배우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했으며 열심히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 대사형 광릉께서는 거문고를 튕기는 것을 배우게 되었죠.

포부동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재주야말로 자기에게 거문고를 튕겨도 그 소리가 자기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니 가소롭군, 가소로워!

강광릉은 노해 부르짖었다.

내 그대에게 거문고를 튕겨 드리지!

그는 거문고를 무릎 위에 비스듬히 놓았다.

설모화는 손을 휘둘러 저지하고 바둑판을 사용하던 사람을 가리켜 말했다.

범(范) 둘째 사형 백령(百齡)은 배운 것이 바둑인데 당금 천하에 적수가 별로 없는 편이죠.

포부동은 범백령을 한 번 바라보고 말했다.

그래서 바둑판으로 무기를 삼았군! 바둑판을 자철(磁鐵)로 만들어 남의 무기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잔재주를 피우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성인군자의 할 짓이 못되지.

범백령은 말했다.

바둑의 수는 정정당당하게 진법을 펼치기도 하고 공격도 하지만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묘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소이다.

설모화가 말했다.

우리 범 둘째 사형의 바둑판을 자철로 만들게 된 것은 바둑을 연구하자는 데에 있었소이다. 그는 언제나 앉아 있던 누워 있던 간에 언제나 갑자기 묘수가 떠오르면 검은 돌과 하얀 돌을 한바탕 나열하게 되지요. 그의 바둑판은 자철로 만든 것이라 쇠로 만든 알을 위에 올려 놓게 되었을 때 수레 안이나 말 위에 바둑판을 펼쳐 놓더라도 바둑알이 떨어져 나갈 염려가 없기 때문이죠. 그 후 편리한 점을 동원하여 바둑판을 무기로 삼게 되었고 바둑알을 암기로 삼게 된 것으로서 결코 자철로 만든 바둑판으로 득을 보자는 것은 아니었소.

포부동은 속으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입으로 엉뚱하게 지껄였다.

이유가 닿지 않소! 크게 이유가 닿지 않는 말이외다! 범 둘째가 그와 같은 무공으로 만약 한 조각의 나무로 만든 바둑판을 사용하고 무쇠로 된 바둑알을 놓게 되었을 때, 바둑알이 이 바둑판에 박히도록 한다면 어찌 바둑알이 떨어지겠소?

설모화는 그 말을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철로 만든 바둑판보다는 불편한 것은 사실이 아니겠소? 우리 구(苟) 셋째 사형은 이름이 외자로 독(讀)인데 독서를 좋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는 분으로서 지극히 학문이 깊은 선비라고 할 수 있죠. 아마 여러분들도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포부동은 말했다.

그는 소인이야! 더 이상 말할 건덕지도 없어!

구독은 노해 부르짖었다.

뭐라고? 그대가 나를 소인이라고 한다면 그대는 군자란 말인가?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설모화는 두 사람이 따지기 시작하게 된다면 사흘 밤낮으로 입씨름을 벌여도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판관필을 사용했던 서생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저희 넷째 사형이신데 단청(丹靑)에 정통하고 산수(山水)나 인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새의 깃털이나 꽃들을 매우 정교하게 그려 낸답니다. 이 넷째 사형의 성씨는 오(吳)씨이며 사문에 들어오기 전 대송나라 조정에서 영군(領軍)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그를 오영군이라 부르기도 하죠.

포부동은 말했다.

아마도 이 영군씨는 전문적으로 패전만 당했을 것이고 그림을 그려 놓으면 사람들이 도깨비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구만!

오영군은 그 말을 받았다.

아마 귀하의 존귀하신 모습을 그리게 한다면 정말 사람인지 도깨비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될 것이오.

포부동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노형이 언제라도 여가가 있을 때에 이 포 셋째의 모습을 참고하여 한 폭의 귀취도(鬼趣圖)를 그려 본다면, 퍽이나 재미있을 것 같소.

설모화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포 형은 준수하고 훤칠한 모습인데 너무 겸손하시구려. 불초는 서열이 다섯번째로서 배운 것은 의술이었죠. 그리하여 강호에서는 명의란 말을 듣게 되었고 사부님의 무공도 아직 잊지 않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포부동은 말했다.

감기나 기침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소만 일단 한독에 당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속수무책이 아니겠소? 이야말로 큰 병은 치료할 수 없고 작은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과 다를 게 뭐가 있겠소? 신의라는 칭호는 과연 명불허전이구려!

강광릉은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곁눈질로 포부동을 노려보더니 말했다.

노형의 성질이 괴팍한 것이 정말 남과는 다른 데가 있구려.

포부동은 말했다.

하하하! 내 성은 포씨고 이름은 부동이외다. 그러니 뭇 사람과 다를 수 밖에 더 있겠소?

강광릉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대는 정말 성이 포씨이고 이름이 부동이오?

포부동은 말했다.

설마하니 거짓이겠소? 이 분 기관을 만드는 노형은 반드시 토목공예의 학문에 정통하겠군?

설모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소. 여섯째 사제는 풍아삼(馮阿三)이라고 하오. 본래 목수 출신이외다. 그는 사문에 들어오기 전부터 솜씨가 좋은 장인이었소. 그후 가사께서 무공과 토목공예를 가르치게 됨에 따라 더욱 솜씨가 탁월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일곱째 사매의 성은 석(石)씨로서 꽃을 가꾸는데 정통하답니다. 천하의 귀한 화초들이 그녀의 손에 의해 심어지고 키워지게 된다면 모두 잘 자라게 되죠.

등백천은 말했다.

석 사제가 나의 정신을 흐리게 한 약물은 아마도 꽃에서 취한 것으로 결코 독약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 석가라는 미부인의 이름은 청로(淸露)라고 했다.

그녀는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는 정말 실례가 많았어요. 등 협사께서는 용서해 주세요.

등백천은 말했다.

불초가 너무 경솔하여 너무 심하게 손을 쓴 점, 소저께서는 양해해 주십시오.

설모화는 입을 뻥긋하기만 하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덟째 아우는 이괴뢰(李傀儡)라고 하오. 한평생 그저 창극에만 빠져서 횡설수설하기 때문에 무학에 대해서는 소홀한 바를 면치 못하지요. 아! 어찌 그 한 사람 뿐이겠소? 우리 동문 여덟 사람은 하나같이 똑같소이다. 기실 저의 사부님이 전수하신 무공을 내 한평생 연마한다 하더라도 다 연성할 수 없을 형편인데도 욕심을 내어 도처에서 남의 절초를 배웠으니 끝내는..... 아.....

이때 이괴뢰는 땅바닥에 누워서 부르짖었다.

나는 바로 이존욱(李存旭)이외다! 강산을 사랑하지 않고 창극을 좋아하는 사람이외다! 아! 정말 재미있다! 재미있어!

포부동은 말했다.

나는 바로 이사원(李嗣源)이라는 사람이로다! 너의 강산을 빼앗고 너의 목을 잘랐도다.

책벌레 구독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존욱은 데리고 있던 배우 곽종겸(郭從謙)에게 시해를 당한 것이지. 결코 이사원에게 죽은 것은 아니오!

포부동은 역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아무리 우기려 해 보았자 책벌레인 구독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부르짖었다.

나는 바로 곽종겸이시다. 아하! 나는 바로 진시황이로다! 책을 태우고 선비들을 구덩이에 파묻되 전문적으로 소인인 선비만 구덩이에 파묻었도다.

설모화는 그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 계속하여 입을 열었다.

우리 사형제 여덟 사람은 사문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나 결코 사부님이 가르쳐 주신 은덕을 잊을 수 없어 스스로 함곡팔우(函谷八友)라고 일컫게 되었소이다. 이것은 과거 사부님께서 바로 함곡관 부근에서 무예를 전수해 준 은혜를 기리기 위한 것이외다. 그리고 남들은 그저 우리가 서로 구린내 나는 취미를 가지고서 의기투합하여.....

포부동은 코를 벌름거리더니 말했다.

냄새 난다! 냄새 나!

구독은 말했다.

역경(易經)의 계사(繫辭)에서 가로되 "같은 마음으로 하는 말은 난초꽃 같은 냄새가 난다"고 했소. 그러니 냄새라는 것은 바로 향기라는 말이 되는 것이오. 노형은 그야말로 전혀 학문이 없는 사람이외다.

포부동은 냉소했다.

노형의 말씀에서는 방귀 냄새가 나는구려?

설모화는 미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누구도 우리가 동문의 사형제들이라는 사실을 몰랐소. 우리들은 그 성숙노괴가 다시 중원으로 들어오게 되어 우리를 일망타진할 것을 경계해서 매 이년마다 한 번씩 모임을 갖고 평소에는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었죠.

현난과 등백천 등은 설신의가 말하는 그들 여덟 사람의 내력을 듣고 마음속으로 품고 있던 의문을 태반은 씻게 되었다.

공야건은 물었다.

그렇다면 설 선생이 일부러 돌아가신 척하고 관 안에 독약을 넣어 둔 것은 바로 성숙노괴를 상대하려는 것이었구려. 그런데 설 선생은 어떻게 그가 여기로 온다는 것을 알았소?

설모화는 말했다.

이틀 전 내가 집에서 할 일이 없어 앉아 있을 때 내 집에 네 사람이 찾아와 치료를 해 달라고 했소. 그중 한 사람은 화상이었는데 가슴팍 늑골이 여덟 대나 부러져 있었소. 그것은 소림파의 장력에 상처를 입은 것이지만 이미 부러진 늑골을 이어놨기 때문에 이후 자연히 치유될 것이라 결코 위험하지는 않았소. 그러나 그의 오장육부에 은연 중 도사리고 있는 한독을 만약 치료해 주지 않는다면 얼마 후 독이 퍼져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더구려.

현난은 말했다.

정말 그렇소이다. 그는 우리 소림 문하의 혜정 화상이라 합니다. 그 승려는 계율을 지키지 않고 절에서 도망쳐 나와 못된 짓을 마구 했기 때문에 저의 파에서는 사람을 내보내 그를 잡아다가 계율에 따라 벌을 내리고자 했던 것인데 그가 오히려 손을 먼저 써 사람을 해쳤기 때문에 이 노납의 사제들에게 얻어맞고 상처를 입게 된 것이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의 몸에 한독까지 겹쳤다는 그것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누가 데리고 와서 치료를 해 달라고 하던가요?

설신의는 대답했다.

그와 함께 온 한 병자는 정말 괴상하기 짝이 없어서 머리에는 하나의 무쇠탈을 쓰고 있었소이다.....

포부동과 풍파악은 동시에 펄쩍 뛰어 일어나며 부르짖었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자가 바로 무쇠탈을 쓴 자이외다.

설모화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젊은이에게 그토록 심후한 공력이 있단 말이오? 애석하게도 그 당시 그가 총총히 왔다가 가는 바람에 그의 맥을 짚어 보지 못했소.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증세를 어느 정도는 반드시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오.

포부동은 물었다.

그 녀석도 무슨 괴이한 병이 있었던가요?

설신의는 대답했다.

나에게 자기에게 씌워진 무쇠탈을 벗겨 달라고 했소. 그러나 내가 살펴 보니 그의 무쇠탈은 바로 그의 머리와 함께 붙어 있어서 제거할 수 없었소.

포부동은 고개를 갸웃했다.

기이한 일이로군! 기이한 일이야! 설마하니 그 무쇠탈을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쓰고 있었단 말인가!

설신의는 말했다.

그것은 그렇지 않소. 그 무쇠탈을 그의 머리에 씌울 때 그 무쇠탈은 뜨거운 것이었소. 그리하여 그의 살갗이 터지고 살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 상처가 며칠이 지나 딱지가 앉게 되었을 때 그의 얼굴과 뒷통수가 서로 붙어 버리고 말았소. 따라서 만약에 억지로 벗겨 낸다면 반드시 그의 눈꺼풀과 입술, 코를 찢어서는 이상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 틀림없소.

포부동은 그야말로 고소하다는 듯 냉소했다.

그의 얼굴이 망가질수록 좋을 것이오. 왜 무쇠탈을 벗겨내 흉칙한 몰골로 만들지 않았소? 애석하군, 애석해!

설신의가 말했다.

내가 그의 무쇠탈을 어떻게 벗겨 줄까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온 동료가 갑자기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지르며 나에게 빨리 손을 쓰도록 명하는 것이었소. 이 설가에게는 한평생 한 가지 나쁜 버릇이 있는데 감히 나에게 병을 치료해 달라고 할 때 좋은 말로 부탁을 하면 모르나 만약 상대방이 애써 자기의 세력을 믿고 억압해 올 때 이 설모는 차라리 그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그 사람을 치료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오. 생각컨데 지난번 취현장 영웅대회에서 교봉이 생사의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나이 어린 소저를 보내 나에게 치료해 달라고 부탁을 했소. 교봉이란 녀석은 그야말로 야만스럽고 악독하기 이를데 없는 자이지만 나에게 부탁을 함에 있어서는 감히 조금도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소.

거기까지 말하게 되었을 때 그는 아주에게 당한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그는 아주에게 혈도를 짚히고 수염마저 뽑히지 않았던가? 이는 실로 한평생 일찍이 없었던 커다란 치욕이었다.

그는 더 말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포부동은 그 말끝을 붙잡고 늘어지듯 입을 열었다.

그대는 무슨 큰소리를 치는거요? 이 포가에게도 한평생 나쁜 버릇이 있소. 그것은 상대방에서 만약 나에게 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좋은 말로 부탁한다면 모르나 만약 자기의 세력을 믿고 억압해 온다면 이 포모는 차라리 병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그 사람에게 병을 치료받지 않는다는 것이외다.

강광릉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대가 무슨 대단한 보배라고 상대방에서 그대의 병을 치료하겠다고 그대에게 애걸복걸한단 말이오? 혹시..... 혹시.....

일시 그는 혹시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생각이 나지 않아 말끝을 흐렸다.

포부동은 그 말을 받았다.

혹시 그대가 나의 아들이면 모를 일이지.

강광릉은 어리둥절해져서 속으로 그 말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만약 자기의 부친이 병이 나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자신은 반드시 그에게 애걸복걸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는 사리를 따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포부동의 그와 같은 말이 바로 그에게 덕을 보려는 수작임을 알지 못하고 대답했다.

맞아. 하지만 나는 그대의 아들이 아니지!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가 내 아들인지 아닌지는 그대의 어머니만이 알고 있는 일이지! 그대가 어찌 알 수 있단 말이오?

강광릉은 어리둥절해졌으나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틀리지는 않는구만!

포부동은 껄껄 웃으며 생각했다.

"저 사람은 그야말로 바보 멍청이다. 입으로 그를 놀려 준다고 해도 별로 영광스러울 것이 없다."

공야건은 물었다.

설 선생, 그 두 사람이 불칙한 언행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치료를 거절하게 되셨소?

설모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나는 불초의 의술에 한계가 있어 제대로 치료할 수 없으니 다른 고명한 사람을 찾아가 보라고 했소이다. 그런데 무쇠탈을 쓴 사람은 나에게 무척 공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소. "설 선생, 설 선생의 의술은 천하에 무쌍입니다. 강호에서 모두들 염왕적이라 하지 않습니까? 무림에서 그 누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소인은 설 선생을 언제나 존경하고 탄복해 왔으며 저의 가친께서도 어르신과는 옛 친구이십니다. 아무쪼록 자비를 베푸시어 고인의 아들인 저를 한 번만 구해 주십시오."

뭇 사람들은 그 무쇠탈을 쓴 사람에 대하여 무척 관심이 많았던지라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그의 부친은 누구인가요?

이괴뢰가 갑자기 말했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는 그의 어머니 혼자만이 알 수 있을 뿐이오. 그가 어찌 알 수 있겠소?

그것은 바로 포부동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낸 것이었다.

포부동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묘하군! 그대가 나의 말을 완벽하게 흉내내는군. 아무래도 내가 뿌린 씨 같아!

이괴뢰는 그 말에 응수했다.

나는 바로 한민족의 조상이신 황제(黃帝)로다! 무릇 중국의 백성들은 나의 자손이외다!

그는 옛날 사람으로 분장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자신이 어떤 인물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런 인물로 분장하여 그 사람의 말을 토해내곤 했다. 따라서 포부동이 그에게 득을 보고자 한 데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설신의는 계속해서 말했다.

난 그때 그 무쇠탈을 쓴 사람이 나의 옛 친구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즉시 그에게 그의 부친이 누구냐고 물었소. 그런데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더구려.

"소인은 불행을 당하게 되어 선조를 욕되게 했으니 부친의 이름을 감히 들먹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친이 살아 생전에 항시 선생과는 절친한 사이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소인은 결코 선친을 들먹여서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의 말하는 소리가 매우 성의에 차 있고 간곡한 것을 보고 결코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소이다. 하지만 불초는 널리 친구 사귀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친구들이 있었소이다.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말만을 듣고는 일시에 그의 부친이 누구인지 짐작해낼 수 없었소이다. 따라서 나는 그의 무쇠탈을 벗겨낸 이후에 그의 얼굴 모습을 들여다 보게 된다면 그의 부친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그러나 그의 무쇠탈을 벗기되 그의 얼굴에 될 수 있는 한 손상을 입히지 않기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었소이다. 그리하여 한참 망설이고 있을 때 그의 한 동료가 말했소이다.

"사부님의 명령 가운데 가장 긴요한 것은 이 혜정 화상을 치료를 하는 것이지, 무쇠탈을 쓴 사람의 무쇠탈을 벗기고 벗기지 못하는 것은 별 상관이 없는일이오."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울화가 치밀어 말했소.

"존사는 누구이시오? 그대 사부의 명령은 그대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나를 간섭할 수는 없는 것이외다."

그러자 그는 크게 소리쳤소.

"우리 사부님의 이름을 듣게 된다면 아마 당신은 간담이 서늘해져 죽게 될 것이오.

그 어르신네께서는 빨리 이 뚱보 화상의 상처를 치료하라고 했소."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극도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의 말투가 분명하지 못했고 어느 정도 서역 오랑캐의 말씨 같은지라 자세히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더니 역시 머리카락이 꼬불꼬불하고 두 눈이 움푹 들어가 있는게 우리 중원 사람들과 크게 다른 점이 있었소.

"그대는 혹시 성숙해에서 오지 않았소?"

그 사람은 그 말을 듣자 즉시 안색이 변했소.

"당신의 눈썰미가 매우 날카롭군! 맞았소. 나는 성숙해에서 왔소. 그대가 이미 짐작을 했다면 빨리 애를 써서 치료를 하시오."

나는 그가 성숙노괴의 제자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소.

"사문의 깊은 원한을 내 어찌 갚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나는 즉시 황송하다는 태도를 짓고 물었다.

"오래 전부터 성숙해 정 노신선의 법술이 심묘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 제자는 우러러보았소이다. 그러나 인연이 없어 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노신선인 그 어르신네께서도 중원 땅에 오셨습니까?"

포부동은 불쑥 뛰어들어 말했다.

퉤, 퉤, 퉤! 성숙노괴라고 해도 좋고 성숙노파라고 해도 좋을 것을 어찌하여 스스로 못난 꼴을 보이면서까지 그를 노신선이라고 한단 말이오? 그야말로 부끄러운 일이오! 부끄러운 일이야!

등백천은 말을 가로챘다.

세째 아우, 설 선생은 일부러 알아보려고 한 것이야. 어찌 진심으로 그를 노 신선이라고 했겠는가?

포부동은 말했다.

그거야 나도 물론 알고 있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귀(老鬼)나 노요(老妖), 노적(老賊)이라고 불러서 그의 요사한 제자들이 펄쩍 뛰도록 하는 것도 사실을 실토케 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외다.

설모화는 그 말을 받았다.

포 선생의 말씀에는 일리가 있소. 노부는 거짓 표정을 제대로 내지 못하여 입으로는 그를 노신선이라고 칭했으나 얼굴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의 빛을 드러내게 되었소. 그 요사한 인물은 손을 뻗쳐 나의 완맥을 움켜 잡으려 하면서 호통쳐 물었소.

"그대가 나의 사부님의 행적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이오?"

나는 일이 탄로난 것을 보고 성숙노괴의 문하를 상대로 조금도 사정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소. 그리하여 즉시 일지를 뻗쳐 그의 사혈을 짚어 버리고 말았소. 그러자 두 번째의 요사한 인물이 독을 묻힌 비수를 꺼내 나를 찌르려고 했소. 나는 손에 무기가 없었고 그리고 또 요사한 인물의 무공이 뛰어났기 때문에 위급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소. 그러자 무쇠탈을 쓴 사람이 갑자기 손을 뻗쳐 그 자의 비수를 빼앗으며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보고 치료를 받도록 하라고 했지 우리보고 사람을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소."

그러자 그 요사한 인물은 노해 부르짖었다.

"열두째 사제가 그에게 살해당한 것을 그대는 보지 못했소? 그대는..... 그대는..... 감히 남을 편들다니"

무쇠탈을 쓴 사람은 말했다.

"당신이 반드시 이 설신의를 죽이려고 한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이 뚱보 화상을 치료하지 못해 목숨을 건질 수 없게 되어 빙잠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사부는 당신을 호되게 다스릴걸."

나는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무기를 찾아 손에 들었소. 그 요사한 인물은 나를 죽이기가 쉽지 않게 된 것을 보고 또 무쇠탈을 쓴 사람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였소.

"그렇다면 저 귀신 같은 의원을 사로잡아 사부에게로 끌고 갑시다."

그러자 무쇠탈을 쓴 사람은 좋다고 말했소.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손을 뻗쳐 비수를 그 사람의 가슴팍에 찔러 그를 죽여 버리고 말았소.

뭇 사람들은 모두 아, 하고 소리를 내며 놀랍고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포부동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것도 이상할 것이 없소. 그 무쇠탈을 쓴 사람은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니까 손을 써서 그의 동문을 죽이고 그대의 호의를 사려고 한 것이오.

설모화도 한숨을 내쉬었다.

일시 나로서는 그의 참뜻이 어디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소. 그의 부친이 바로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는지, 아니면 나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 보답을 받고자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소. 그리하여 내가 막 질문을 던지려고 했을 때 갑자기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소. 그러자 그 무쇠탈을 쓴 사람은 안색이 변해서는 말했소.

"저의 사부님이 저에게 돌아오라고 재촉하십니다. 설 백부님, 이 뚱보 화상을 치료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속으로 기뻐하시어 어쩌면 자기 제자를 죽인 원한을 따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소.

"성숙노괴로 말하면 나와는 바다같이 깊은 원한이 있소. 무릇 그와 조금이라도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면 나는 결코 치료를 해줄 수가 없소. 그에게 그만한 재간이 있다면 나를 죽이도록 하시오."

그러자 그 무쇠탈을 쓴 사람은 말했소.

"설 백부님, 저는 결코 설 백부님에게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무슨 변명을 하려고 했는데 성숙노괴의 휘파람 소리가 다시 이어지는 바람에 그는 뚱보 화상을 데리고 총총히 떠나갔소.

성숙노괴가 중원땅에 들어오고 그의 두 명의 제자가 우리 집안에서 죽게 되었으니 조만간 나를 찾아오리라 생각했소. 설사 그 무쇠탈을 쓴 사람이 나를 위해 감춘다 하더라도 얼마 못 가 들통이 나고 말 것이 틀림없었소. 그리하여 나는 죽은 것처럼 가장하고 관 속에 극독을 몰래 숨기고 그가 미끼에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나는 전가족 남녀노소를 이 지하동굴에 숨겼는데 마침 여러분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게 되었소. 불초의 노복은 충성심은 있으나 매우 우둔하여 그만 여러분들을 내가 두려워하는 원수로 잘못 알게 된 모양이외다.

포부동은 그 말을 받았다.

아하, 그는 현난 대사를 성숙노괴라고 생각하고, 우리 이 한 패의 사람들이 모두 성숙노괴의 제자인 줄 알았군! 이 포모와 몇 명의 동료들은 생긴 것이 이상야릇하여 성숙파의 요사한 마두들이라고 말한다 하더라고 몇 푼 정도 비슷한 데가 없지 않아 있지만 현난 대사는 우아하고 자상하시며 의젓한 풍모가 완연하거늘 성숙노괴로 오인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례한 짓이 아니겠소?

뭇 사람들은 그만 모두 웃고 말았다.

설모화는 미소했다.

그렇소. 이 일은 정말 그 노복에게 벌 주어야 할 일이오. 그러나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지금이 바로 우리 사형제 여덟 명이 이 년마다 모이는 기간이었소. 그리하여 그 노복은 정세가 긴박한 것을 보고 나의 분부를 기다리지 않고서 동문들에게 신호를 하는 유성화포(流星火胞)라는 폭죽을 터뜨리고 말았소. 이 유성화포로 말하면 우리 여섯째 사제가 교묘히 만든 것으로서 하늘로 날려올려 터뜨리면 그 빛이 수 마장을 비추게 되는데 우리 동문 여덟 사람이 제각기 다른 유성화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가 던진 것인 줄 단번에 알게 돼 있소. 그런데 이 일이야말로 정말 다행스럽다면 다행스럽고 불행스럽다면 불행스러운 노릇이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함곡팔우가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한 자리에 모두 모이게 되어 손을 맞잡고 적에 대항할 수 있었다는 점이외다. 그러나 만약 성숙노괴에게 일망타진된다면 그야말로 불행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외다.

포부동은 입을 열었다.

성숙노괴의 재간이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반드시 소림의 고승이신 현난대사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거기다 우리와 같은 많은 조무래기들이 옆에서 고함을 지르고 당신들을 도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면..... 누가 누구의 손에 죽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외다. 따라서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그는 그렇게 까지라는 말을 세 번이나 했으나 이빨만 딱딱 마주칠 뿐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몸 속의 한독이 다시 재발한 것이다.

이괴뢰는 소리높여 노래를 불렀다.

나로 말하면 바로 진시황을 찔러 죽이려던 형가(荊軻)로다! 바람이 소슬하게 부니 몸이 추워오는구나! 장사가 몸을 떨게 되니 입을 벌리기 어렵구나!

별안간 땅바닥에서 한 사람이 몸을 솟구치더니 머리로 이괴뢰의 가슴팍을 들이 박았다.

이괴뢰는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휙, 하니 팔을 휘둘러 그 사람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괴뢰를 붙잡고 마구 주먹질을 해댔고 이괴뢰도 가만 있지 않고 반격을 했다. 알고 보니 달려들었던 사람은 풍파악이었다.

등백천은 재빨리 말했다.

네째 아우, 너무 거칠게 굴 것 없네.

그는 손을 뻗쳐 풍파악을 떼어 놓았다.

바로 이때 가느다란 음성이 동굴 안으로 들려왔다.

소성하의 제자들아, 빨리 나와서 투항을 한다면 목숨이라도 보전할지 모르지만 주저하게 된다면 이 어르신께서 동문의 의리를 돌보지 않는다고 원망하게 될 것이다.

강광릉은 노해 부르짖었다.

저 사람은 정말 염치가 없군! 그 꼴에 동문의 의리를 찾는다니 가관이야!

풍아삼은 설모화에게 말했다.

다섯째 형, 이 지하동굴에 들어올 때 그 나무무늬와 석재(石材)를 유심히 보니 삼백여 년 전에 세운 것이라 여겨지더구려. 그런데 어느 일파의 장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오?

설모화는 대답했다.

이것은 우리 조상께서 내려 주신 가산의 일부일세.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고 그저 이와 같이 피난할 장소가 있다는 것만 알게 되었을 뿐 누가 세웠는지는 모르고 있다네.

강광릉은 말했다.

좋아, 자네에게 이와 같이 몸을 숨길 수 있는 동굴이 있는데도 여지껏 그런 기색을 한 번도 비치지 않았다니 섭섭하구만!

설모화는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우고 말했다.

큰 형님. 이해하십시오. 이와 같이 몸을 숨길 수 있는 동굴이 있다는 것은 결코 영광스러운 일이 못 되어서 들먹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꽝, 하는 커다란 음성이 울려퍼졌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동굴 안의 사람들은 발 밑의 땅바닥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제대로 서 있을 수 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풍아삼은 아연실색해서 말했다.

야단났소! 정 노괴가 화약을 터뜨려 쳐들어 올 모양이외다!

강광릉은 노해 부르짖었다.

비열하기 그지 없고 염치없기 짝이 없구나! 우리의 사조와 사부님께서는 토목지학과 기관 변화에 정통하시며 그야말로 그와 같은 학문을 자랑할 만한 재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성숙노괴는 머리를 써서 기관을 깨뜨릴 생각은 하지 않고 화약을 마구 터뜨려서 깨뜨릴 작정이니 어떻게 본문의 제자라고 불리울 자격이 있느냔 말이다!

포부동은 말했다.

그는 사부를 죽이고 사형을 해쳤는데도 그대는 여전히 그를 사숙이라고 생각하시오?강광릉은 말했다.

그건.....

별안간 꽝, 하는 소리가 다시 크게 울려퍼지면서 동굴 안은 흙먼지가 가득 피어올라 여러 사람들은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굴 안은 바람이 통하지 않았는데 충격을 받고 세찬 기류가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이번에는 모든 사람들은 고막이 따가운 것을 느낄 정도였다.

현난은 입을 열었다.

그가 이 지하 동굴을 폭파하여 공격해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우리들이 달려나가는 것이 좋겠소이다.

등백천, 공야건, 포부동, 풍파악 네 사람은 일제히 좋다고 말했다.

범백령은 현난 대사가 소림의 고승이니 지하 동굴에 몸을 숨기고 적을 피한다는 것은 실로 소림의 위명을 떨구는 일이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쨌든 생사는 이 일전에 달려 있으니 피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모두 함께 나가서 그 노괴와 목숨을 걸고 싸우도록 합시다.

현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원 무림의 일이라면 소림파에서는 언제나 간섭을 해왔으므로, 이 점에 있어서 여러분들은 양해하십시오. 더군다나 우리 현통 사제가 원적하게 된 것은 바로 성숙파 제자의 독수에 적중되었기 때문인즉 소림파가 성숙노괴와 아무런 원한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소.

풍아삼은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 의리로 도와주시겠다니 우리 사형제들은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역시 원래 들어왔던 길로 나가 그 노괴로 하여금 깜짝 놀라도록 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뭇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풍아삼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섯째 형의 가족과 포 형과 풍 형 두 분도 이곳에 남아 있도록 하시구려. 아마 그 노괴는 이곳까지 수색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외다.

포부동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역시 그대가 남아 있는 것이 좋겠소.

풍아삼이 재빨리 말했다.

불초는 결코 두 분을 얕보아서 하는 말씀이 아니오. 다만 두 분은 몸에 중상을 입고 있기 때문에 다시 손을 쓴다는 것은 크게 거북하리라 생각하고 말씀드린 것이외다.

포부동은 말했다.

상처가 심하면 심할수록 싸우게 되면 더욱 기운이 나는 법이오.

범백령 등은 모두 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야말로 포부동이란 사람은 말릴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즉시 풍아삼은 기관장치를 움직이고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끼기긱, 하는 소리가 그치게 되자 입구 쪽에 조그만 틈이 드러났다. 그 순간 풍아삼은 세 개의 유성화포를 바깥 쪽으로 집어 던졌다.

펑펑펑, 하는 음향이 세 번 크게 울려퍼지면서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세 번의 유성화포를 터뜨린 후 석판은 좀 더 이동되어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게 되었다. 풍아삼은 다시 세 개의 화포를 던지며 뛰어나갔다.

풍아삼은 두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하얀 연기 가운데 한 그림자가 옆에서 달려나오더니 바깥의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며 부르짖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누가 성숙노괴인가? 이 풍가가 너와 한 번 겨루어 보겠다.

바로 강남일진풍 풍파악이었다.

그는 앞에 갈포단삼을 입은 사내가 서 있는 것을 보고 호통을 내질렀다.

나의 주먹을 받아라!

그러고 펑, 하니 한 주먹으로 그 사람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그 사람은 성숙파의 아홉 번째 제자였다.

몸을 흔들하는 순간 풍파악은 다시 그의 어깻죽지를 때렸다. 곧이어 퍽퍽,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일었다.

풍파악의 손 씀씀이는 지극히 빨라 한 대의 주먹마다 그리고 일 장마다 상대방의 몸에 적중되었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입은 이후 힘이 없어 그 성숙파의 제자를 쳐서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현난, 등백천, 강광릉, 설모화 등은 모두 동굴 안에서 뛰어나왔다.

이때 체구가 우람한 노인이 서남쪽 모서리에 서 있었다. 그의 앞과 좌우에는 두 줄의 키가 크고 작은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 무쇠탈을 쓴 사람도 바로 그 가운데 있었다.

강광릉은 부르짖었다.

정 노적아! 너는 아직 죽지 않았더냐?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겠지?

그 노인이 바로 성숙노괴 정춘추였다. 그는 한눈에 이쪽의 여러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우선(羽扇)을 몇 번 흔든 후 입을 열었다.

마화 현질, 자네가 만약 뚱뚱한 소림승을 치료해 준다면 나는 자네를 죽이지 않고 용서하겠다. 그러나 자네는 반드시 나를 사부로 모시어 성숙 문하로 들어와야 한다.

그는 그저 한 마음 한 뜻으로 설모화가 혜정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 그를 곤륜산 위로 데리고 가 빙잠을 잡을 계획이었다.

설모화는 성숙노괴의 말을 듣고 실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의 말투로 미루어 보아 앞에 있는 사람들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생사존망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설모화는 용기 있게 입을 열었다.

정 노적, 이 세상에서 나는 한 사람의 말만 들을 뿐이다. 오로지 그 어르신께서 나에게 누구를 구하라고 하신다면 나는 그 누구를 구할 뿐이다. 당신이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병자를 치료하게 하려면 당신이 반드시 그 어르신에게 청을 드려야 할 것이다.

정춘추는 맹랭히 그 말을 받았다.

너는 소성하의 말만 듣겠다는 것이겠지?

설모화는 대답했다.

오직 금수만도 못한 악당만이 사문을 기만하고 사조를 멸하려는 마음을 감히 갖게 되는 법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강광릉, 범백령, 이괴로 등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정춘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무척 좋다. 너희들은 모두 다 소성하의 착한 제자들이지. 그러나 소성하가 사람을 나에게 보내면서, 너희들 여덟 사람을 쫓아내었으니 그의 문하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설마하니 그 소가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고 여전히 몰래 너희들과 사제지간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더란 말이냐?

범백령은 말했다.

하루라도 사부를 모시게 되면 한평생 어버이처럼 받드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은 확실히 우리 여덟 사람을 쫓아내었다. 그리고 이 몇 년 동안 우리들은 시종 그 어르신을 한 번도 뵈올 수 없었으며 찾아 배알을 하려고 해도 그 어르신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사부님을 받들어 모시는 마음은 반 푼어치도 엷어지지 않았다. 정가야, 우리 여덟 사람이 떠돌이 신세가 되어 사문에 의지할 수 없는 몸이 된 것도 바로 너 늙은 도적 때문이다.

정춘추는 미소했다.

그 말은 무척 옳다. 소성하는 내가 너희들에게 너무 악랄한 수단을 써서 너희들을 모조리 죽이게 될까봐 두려워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너희들을 그의 문하에서 쫓아낸 것이며, 그것은 바로 너희들 몇 명의 작은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차마 너희들의 고막을 찌르고 너희들의 혓바닥을 잘라내지 못한 것을 보면 너희들에 대한 정이 매우 깊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우물쭈물하면서 큰일을 어떻게 이룬단 말인가? 허허허, 좋다. 매우 좋다. 너희들 스스로 말해 보아라. 도대체 소성하는 아직도 너희 사부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강광릉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소성하의 제자라는 명분을 저버리지 않으면 정춘추가 즉시 자기들에게 살수를 뻗쳐오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문의 은혜는 깊고도 무거웠다. 어찌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사문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여러 명의 동문들 가운데 석청로는 몸에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지하동굴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나머지 일곱 명은 일제히 말했다.

우리들은 사부에게 쫓겨나기는 했지만 사제지간의 정분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이괴뢰는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바로 성숙노괴의 늙은 어미이다. 나는 과거 이랑신(二郞神)이었는데 효천견(哮天犬)과 사통하여 나와 같은 짐승을 낳게 되었느니라! 나는 너의 개같은 다리를 분질러 놓겠다!

그는 노부인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하고 이어 멍멍멍, 세 번 개가 짖는 소리를 냈다.

강광릉과 포부동 등은 모두 미친 듯이 소리내어 웃어 제꼈다.

정춘추는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노기가 치밀어오른 듯했다. 별안간 그의 눈에 기이한 광채가 번뜩였다.

다음 순간 왼손을 한 번 떨쳤다.

그러자 한 점의 파란 인광과 같은 불길이 일어나 날아갔다. 그 빠름은 유성보다 더한 것 같았다.

이괴뢰는 이미 한쪽 다리가 분질러져 한 손에 나무막대기를 짚고 몸을 지탱하여야 할 형편이었다.

파란 불길을 피하고자 했으나 때가 늦고 말았다. 칙, 하는 소리가 나면서 전신에 걸치고 있던 옷에 불이 붙었다. 그는 급히 땅바닥에 몸을 뒹굴었다. 그러나 뒹굴면 뒹굴수록 인화(燐火)는 더욱 왕성해졌다.

범백령은 급히 땅바닥에서 흙모래를 움켜잡아 그의 몸에 뿌렸다.

정춘추는 잇따라 소맷자락을 떨치며 다섯 점의 불꽃을 강광릉 등 다섯 사람에게 나누어 쏘아 보냈다. 다만 설모화 한 사람에게만 인화를 보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강광릉은 두 손을 일제히 뻗쳐 그 불꽃을 밀어제쳤다.

현난은 두 손을 흔들어 두 점의 불꽃을 후려쳐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풍아삼과 범백령 두 사람은 몸에 불이 붙었다. 삽시간에 이괴뢰 등 세 사람은 그 불길에 휩싸여 버럭버럭 소리내어 부르짖었다.

정춘추의 뭇 제자들은 크게 칭송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사부님께서 잔재주를 약간 펼치니 너희들을 마치 돼지를 굽는 것처럼 태우게 되었구나! 빨리 꿇어 엎드려 투항하지 못할까!

사부님께서는 하늘에 통하고 땅에 통하는 능력을 지니고 계시다. 그야말로 전에 찾아 볼 수 없었고 이후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인물이시다. 오늘에야말로 너희들 중원의 돼지들이 우리 성숙파의 수단이 어떤 것인가 하는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사부 어르신께서는 싸움마다 이기지 않는 법이 없고 공격하여 때려 부수지 않는 법이 없다. 고금에 유명했던 영웅 호걸들도 모두 사부 어르신 앞에서는 추풍낙엽이다.

포부동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개방귀 같은 소리 지르지 마라! 아이쿠! 그야말로 소름이 끼쳐 죽을 지경이다. 정 노적, 너의 얼굴 가죽은 정말 두껍구나.

포부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점의 불꽃이 어느새 그에게 질풍같이 쏟아져왔다.

등백천과 공야건 등이 각기 일 장을 뻗쳐 두 점의 불꽃을 밀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시에 가슴팍에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고 나직이 신음소리를 내며 뒤뚱뒤뚱 세 걸음을 물러서야 했다.

원래 정춘추는 지극히 고강한 내력을 불꽃에 실어 내보냈던 것이다.

현난의 내력은 정춘추의 내력과 비슷해서 장력으로 불꽃을 밀어낸 이후에도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있었으나 등백천과 공야건은 견뎌 내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이때 현난은 이괴뢰 앞에 다가서더니 일 장을 후려쳤다. 그의 장력은 평범하게 그의 몸 위를 스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장력은 그의 옷자락을 크게 뜯어내게 되었고 한창 타 오르던 인화는 즉시 현난의 장풍에 꺼지고 말았다.

한 명의 성숙파 제자가 부르짖었다.

저 땡초의 장력이 약하지 않구나! 우리 사부님의 십분지 일은 되겠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의 제자가 말했다.

쳇, 우리 사부님의 백분지 일밖에 되지 못해!

현난은 곧이어 이 장을 후려쳐 범백령과 풍아삼의 몸에 붙었던 인화를 꺼뜨렸다.

이때 등백천과 공야건 그리고 강광릉 등은 일제히 몸을 날려 성숙파의 제자들에게 공격해 갔다.

정춘추는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더니 부르짖었다.

소림의 고승이라 역시 공력이 비범하구나! 노부가 오늘 가르침을 받도록 하지.

그러더니 성큼성큼 다가들었으며 동시에 왼손을 날렵하게 들어서 현난에게 일장을 후려쳐 왔다.

현난은 정 노괴의 온몸에 극독이 묻어 있다는 사실과 또 화공대법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벼락같이 두 손을 휘둘러 즉시 정춘추에게 십팔 장을 격출했다.

이 십팔 장은 연이어진 것으로 왼손을 미처 거둬들이기 전에 오른손이 어느새 뻗쳐 나가는 형편이라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에 정춘추는 독을 쓸 여가가 조금도 없어 황망히 피하기에 급급했다. 소림파의 쾌장(快掌)은 정말 위력이 지극히 강해서 정춘추로 하여금 끊임없이 물러서도록 만들었다.

현난이 십팔 장을 격출하는 바람에 정춘추는 열 여덟 걸음을 물러서야 했다. 그런데 현난은 십팔 장을 다 후려치고 나서 신속무비하게 서른 여덟 번의 발길질을 정춘추에게 가하는 것이 아닌가?

다리의 그림자가 번쩍번쩍 움직이는 것만이 볼 수 있었지 그 걷어차는 발이 왼발인지 오른발인지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정춘추는 즉시 신형을 날려 재빨리 피했다. 그러나 서른 여덟 번의 발길질을 간신히 피하기는 했는데 바로 이때 퍽퍽, 하는 소리와 더불어 어깨에 두 번의 주먹질을 당하게 되었다.

현난은 최후의 발길질을 하면서 동시에 주먹을 휘둘러 격출해 내었다. 정춘추는 발길질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끝내 주먹질은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정춘추는 부르짖었다.

정말 대단하시군!

그의 몸이 한두 번 흔들거렸다.

현난은 이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대뜸 정신이 흐릿하니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속으로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정춘추의 옷자락에는 극독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조금 전 그의 어깨에 두 번 주먹질을 하게 되자 오히려 중독되고 만 것이다.

즉시 그는 숨을 내쉬며 체내의 진기를 회전시키는 동시에 왼손의 주먹으로 정춘추를 때리려고 했다.

정춘추는 오른손으로 그의 주먹을 막고 이어 왼손을 맹렬히 후려쳤다. 현난은 중독된 후 몸놀림이 영민하지 못해 피하기가 어려웠다.

급히 그는 오른손을 뻗쳐내야 했다. 이렇게 되자 이미 고수끼리 내력을 겨루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현난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와 내력을 겨루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주먹의 내력을 돋우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내력에 충격을 받게 되어 즉시 오장육부가 갈기갈기 찢어지게 될 것이 뻔했다. 따라서 상대방의 술수에 넘어간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내력을 돋우어 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운기행공하게 되었을 때 그의 내력은 끊임없이 바깥으로 흩어지며 달아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다시는 그의 내력을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지 않아 정춘추는 소리내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현난은 땅바닥에 엎어지게 되었고 온몸의 힘을 상실하고 말았다.

정춘추는 현난을 쓰러뜨리자 고개를 돌려 사방을 돌아보았다. 공야건과 범백령 두 사람이 땅바닥에 쓰러져 벌벌 떨고 있었는데 바로 유탄지의 한독장에 적중된 모양이었다.

등백천과 설모화 등은 여전히 뭇 제자들과 악전고투하고 있었는데 성숙파의 문하들 가운데 일곱 명이 죽거나 상처를 입고 있었다.

정춘추는 길게 소리내어 웃으며 넓다란 소맷자락을 마구 휘두르듯 하면서 등백천의 등뒤로 달려가 그와 일 장을 맞바꾸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한 발을 들어 포부동을 차서 쓰러뜨렸다.

등백천은 오른손으로 정춘추와 일 장을 맞바꾸게 되었을 때 가슴팍이 대뜸 텅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진기를 돋우고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할 때 정춘추는 다시 일 장을 후려쳐 왔다.

등백천은 어찌할 수 없어서 재차 손을 내밀어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손바닥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전신이 축 늘어지며 기운을 쓸 수 없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몽롱한 허연 안개뿐이었다.

한 명의 성숙파 제자가 다가와 팔을 뻗어 밀치자 등백천은 퍽, 하니 쓰러지고 말았다.

삽시간에 모용씨 손아랫 사람들과 현난이 거느린 소림파의 뭇 승려들 그리고 강광릉 등 함곡팔우는 모조리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유탄지는 본래 심후한 내력만 지니고 있었을 뿐 무공은 평범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가르치게 되자 칠팔 초의 장법을 배워 익히게 되었다.

무공으로 따질 때는 흔한 무사들보다 여전히 훨씬 뒤떨어졌지만 몸안에 스며있는 빙잠의 한독을 쏟아내자 그 위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공야건 등은 손을 써서 그의 몸에 일 권을 적중시켰으나 유탄지 몸안에 있는 한독의 반탄력에 오히려 상처를 입게 되었고 다시 유탄지의 일 장을 얻어맞게 되자 더욱 감당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때 설모화 한 사람만이 상처를 입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몇 번 들려들어 손을 쓰려 했으나 성숙파의 문하제자들은 피하기만 했을 뿐 반격을 하지 않았다.

정춘추는 입을 열었다.

설 현질, 자네가 자네의 사형제들보다 무공이 훨씬 높구만! 대단해.

설모화는 동문 사형제들이 모조리 땅바닥에 쓰러져 있고 자기 혼자만 무사한 것을 보고 정춘추가 손에 사정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노적아, 너의 그 뚱보 화상이 입은 외상은 치료하기 쉽지만 안에 입은 상처는 치료하기 어려워 며칠 살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구하도록 강요하려는 생각을 가졌겠지만 그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정춘추는 손짓을 했다.

설 현질, 이리 다가오게.

설모화는 대답했다.

죽일테면 죽여라! 무슨 말을 하든지 듣지 않겠다.

이괴뢰는 부르짖었다.

설 다섯째, 그대는 정말 늠름하구려. 그대야말로 한나라 시절의 소무(蘇武)로소이다. 오랑캐 땅에 십구 년 동안 잡혀 있었지만 한나라에 대한 지조를 욕되게 하지 않았소!

정춘추는 빙그레 웃으며 설모화 앞으로 세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왼손을 가볍게 들어 그의 어깻죽지에 얹고 미소를 띠며 물었다.

설 현질, 자네가 무공을 연마한 지 몇 년이 되었지?

설모화는 대답했다.

사십 오년.

정춘추는 말했다.

사십 오 년이란 세월 동안 들인 공은 그야말로 적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소문에 들으니 자네가 의술로 상대방의 무학과 맞바꾸었기 때문에 각문 각파의 영묘한 초식을 적지 않게 배웠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설모화는 대답했다.

내가 그와 같은 초식을 배운 원래의 뜻은 당신을 죽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어떠한 절묘한 초식이라도 당신의 그 사악한 수법에 부딪히게 되면 전혀 쓸모가 없게 되니..... 아.....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을 연발했다.

정춘추는 그 말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 내력이 근본이고 초식은 가지와 잎으로서, 근본이 튼튼하게 된다면 가지와 잎이 자연 무성한 법이야. 초식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닐세. 자네가 만약 나의 문하로 들어오게 된다면 나는 자네에게 천하무쌍의 절묘한 내력을 전수해 주지. 이후 자네가 중원을 주름잡는 일은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기보다 수월한 노릇이 될 것일세.

설모화는 노해 부르짖었다.

나에게는 사부가 있어! 이 설모화는 당신의 문하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머리를 바위에 부딪혀 죽겠다.

정춘추는 미소했다.

정말 머리를 바위에 부딪혀 죽는다고 하더라도 힘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만약에 자네의 내력이 없어지고 만다면 한 걸음을 옮기기조차 어려울텐데 어떻게 한 번 머리를 박아 죽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사십 오 년 동안 애써 쌓은 공이 아깝지, 아까워! 허허허!

설모화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이마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의 어깻죽지 위에 살짝 얹혀져 있는 손바닥에서 미미하게 따뜻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서 마음이 움직였다 하면 화공대법을 펼쳐 사십 오 년 간 부지런히 쌓고 애써 연마한 공력을 없애 버릴 것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너는 모진 마음으로 자기의 사부와 사형을 죽이고 해쳤으니 우리 여덟 사람을 죽이는 것이 뭐가 대수롭겠느냐? 내가 사십 오년간 쌓아올린 공력을 하루 밤에 없애는 것은 물론 애석한 노릇이지만 목숨도 보전할 수 없는 주제에 고되게 쌓아올린 공력을 따져서 무엇하겠는가?

포부동은 갈채를 보냈다.

그 몇 마디 말은 정말 굳건한 면모를 보이는군! 성숙파의 문하에 어떻게 저와 같은 인물이 있었을까?

정춘추는 말했다.

설 현질, 나는 잠시 동안 자네를 죽이지 않겠네. 그러나 다만 자네에게 한마디 묻겠네. 자네는 저 뚱보 화상을 치료하겠는가, 못하겠는가? 처음 자네가 치료하지 않겠다고 대답한다면 자네의 대사형인 강광릉을 죽이겠네. 그리고 두 번째의 대답에 치료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나는 다시 자네의 둘째 사형인 범백령을 죽이겠네. 그리고 그 꽃을 잘 심는 자네의 사매는 어디로 몸을 숨겼지? 나는 끝내 그녀를 찾아내고 말걸? 그리하여 여섯 번째로 자네 대답 역시 치료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나는 바로 자네의 그 아름다운 사매를 죽이고 말겠네. 그리고 일곱째의 대답 역시 그러하다면 자네의 여덟째 사제인 이괴뢰를 죽이겠네. 그리고 여덟 번째에 이르러 묻게 되었을 때 자네가 여전히 치료하지 않겠다고 대답한다면 누구를 죽일지 자네는 짐작할 수 있겠나?

설모화는 그가 참혹한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말을 듣고 안색이 창백해져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설사 당신이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대수로운 일은 못 되오. 어찌 되었든 우리 여덟 명은 함께 죽는 것인데, 또 무슨 여한이 있겠소?

정춘추는 미소했다.

나는 자네를 서둘러 죽이지 않겠네. 여덟 번째로 물어 자네의 대답이 여전히 치료하지 않겠다면 나는 자칭 총변 선생이라는 소성하를 죽이겠네.

설모화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정 노적! 네가 감히 우리 사부님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정춘추는 빙긋이 웃었다.

어째서 감히 못한다고 생각하지? 이 성숙노선은 언제나 일을 혼자서 해치웠다. 나는 소성하에게 그가 다시 입을 열지 않는다면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그러나 자네가 만약 나를 노하게 한다면 제자의 빚은 자연히 사부에게 따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야. 내가 그를 죽인다 해도 천하에 누가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설모화의 마음은 어지럽기만 했다. 그는 정춘추라는 늙은 도적이 자기에게 혜정을 치료하도록 강요하는 의도를 알고 있었다.

자기가 만약에 손을 써서 치료해 준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악한 자를 도와 나쁜 일을 저지르는 셈이었다. 그러나 만약 자기가 지조를 꺾지 않고 혜정을 치료해주지 않는다면 일곱 명 사형제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부인 총변 선생마저 반드시 그의 손 아래 죽게 될 것이 뻔했다.

좋소. 내가 그대에게 굴복하지. 그러나 내가 이 뚱보 화상을 치료한 후에 그대는 이곳에 있는 여러 친구들과 나의 사부, 그리고 사형제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시오.

정춘추는 크게 기뻐 재빨리 말했다.

좋지 좋아! 내 그들의 개 같은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지.

등백천은 말했다.

사내 대장부가 오늘 잘못하여 간사한 자의 독수에 걸려들게 된 이상 죽으면 죽었지 누가 당신에게 목숨을 빌겠다고 하는가?

그는 본래 음성이 매우 우렁찬 편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정기가 소모되어 어조는 여전히 호방하였으나 음성엔 힘이 없었다.

포부동은 부르짖었다.

설모화!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오!

정춘추는 말했다.

설 현질, 나는 자네에게 첫 번째 한 마디를 묻겠네. 자네는 저 뚱보 화상을 치료하겠는가, 못하겠는가?

그는 오른발을 가만히 내밀어 발끝을 강광릉의 태양혈에 살짝 갖다대었다.

설모화가 입에서 치료하지 못하겠다는 말만 나온다면 오른발에 힘을 주어 걷어차 강광릉을 죽일 것이 뻔했다.

뭇 사람들은 그만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한 사람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치료하지 않겠소! 치료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은 설모화가 아니라 바로 강광릉이었다.

정춘추는 냉소했다.

자네는 내가 이 발길질로 자네의 목숨을 빼앗도록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렇게 쉽게 죽이지는 않을걸?

그는 고개를 돌리고 설모화에게 물었다.

자네는 나의 손을 빌어서 먼저 자네의 대사형을 죽이겠는가?

설모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둡시다. 그만 둬! 내 저 뚱보 화상을 치료하겠다는 것을 약속하겠소.

강광릉은 욕을 퍼부었다.

설 다섯째, 어째서 그토록 못났는가? 정 노적은 우리 사문의 커다란 원수인데 자네는 어찌하여 삶을 탐하고 죽음이 두려워 그의 핍박에 굴복하는가?

설모화는 대답했다.

그가 우리 사형제 여덟 명을 죽이는 것은 대단한 것은 못 되오. 그러나 대사형은 이 노적이 우리 사부님을 괴롭히겠다고 하는 것을 못 들으셨소?

사부의 안위를 생각하자 강광릉 등은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포부동은 입을 열었다.

겁.....

그는 본래 겁쟁이라고 욕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한 마디를 입밖에 내게 되었을 때에 등백천은 손을 뻗쳐 그의 입을 틀어 막고 말았다.

설모화는 정춘추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 그대에게 굴복하여 저 뚱보 화상을 치료하겠지만 그대는 뭇 친구들에게 예를 차리도록 하시오.

정춘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점에 있어서 자네의 의견을 참작하기로 하지.

그 즉시 정춘추는 제자에게 혜정을 떠메고 오도록 했다. 설모화는 혜정에게 물었다.

그대는 일 년 열 두 달 무서운 곤충들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한독이 오장육부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소. 그런데 그 곤충이 어떤 것이지?

혜정은 대답했다.

곤륜산의 빙잠이외다.

설모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즉시 더 묻지 않고 혜정에게 침을 놓더니 다시 두 알의 커다란 붉은 알약을 그에게 복용시켰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뼈를 이어 줄 것은 이어 주고 상처를 치료할 것은 상처를 치료했다. 그리하여 날이 밝을 때까지 바쁘게 돌아가게 되었고 어느 정도 모든 사람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나누어 침대 위나 문짝 위에 눕혀 쉬게 하였다. 설씨 집안의 가족들은 국수를 끓여 뭇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정춘추는 두 그릇의 국수를 먹고 설모화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자네는 역시 분수를 알고 이 국수에다 독을 쓰지 않았군.

설모화는 대답했다.

독을 사용함에 있어서 당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오. 내 비록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 어찌 그대 앞에서 얄팍한 술수를 쓸수 있겠소?

정춘추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좋아, 자네는 집안 사람을 시켜서 열 대의 노새가 끄는 수레를 빌어 오도록 하게.

설모화는 물었다.

열 대의 노새가 끄는 수레를 어디에 사용하려는 것이오?

정춘추는 두 눈을 부릅뜨고 냉랭히 말했다.

내가 하는 일에 자네가 상관할 필요가 있나? 설신의는 이곳에서 인정이 많은편이라고 평판이 나 있으니 열 대의 노새가 끄는 수레쯤 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거야.

설모화는 어쩔 수 없이 집안 사람을 시켜 수레를 빌어오도록 했다.

점심 때가 되었을 때 열 대의 수레가 차례로 도착하였다.

정춘추는 말했다.

마부들을 모조리 죽여라!

설모화는 깜짝 놀라 물었다.

뭐라고요.

그런데 성숙파의 제자들은 대뜸 손을 써서 퍽퍽,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열 명의 마부들이 시체가 되어 쓰러지도록 만들었다.

설모화는 노해 부르짖었다.

정 노적! 이 마부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당신..... 당신..... 이와 같은 독수를 쓰다니!

정춘추는 태연자약했다.

성숙파에서 몇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 해서 설마하니 시비를 논하고 도리를 따지리라고 생각하는가? 자네들은 모두 수레 안으로 들어가게. 한 사람도 남아서는 안 돼. 설 현질, 자네에게 의서나 약재가 있다면 몸에 지니도록 하게. 나는 집에다 불을 질러야 하겠네.

설모화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그러나 정춘추라는 사람은 나쁜짓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는지라 말려 봤자 소용없는 일이라고 느꼈다.

갖가지의 의서는 이미 외울 정도로 읽었으니 몸에 지니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만들어 놓은 많은 알약이나 가루약, 그리고 고약 같은 것은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는 입으로 투덜거리며 약물을 살펴가며 챙겼다. 그가 물건을 다 챙기기도 전에 성숙파의 뭇제자들은 이미 집 뒤에 불을 놓기 시작했다.

소림 승려 가운데 혜경과 허죽 등 여섯 승려는 본래 현난의 당부를 받고 소림사로 도망쳐 전갈을 하게 되었으나 정춘추의 은밀한 경계에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모두 잡혀오고 말았다.

소림사의 현난 등 일곱 승려, 고소 모용장의 등백천 외의 네 사람, 함곡팔우 가운데 강광릉 등 여덟 사람, 이렇게 열 아홉 명 가운데 설모화 한 사람만 빼놓고는 온몸에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들은 혹은 내력이 해소되었거나 정춘추의 장력에 상처를 입었거나 또는 유탄지의 빙잠의 한독에 중독되었거나 성숙파 제자들의 극독에 중독되어 하나같이 움직이지 못했다. 거기다가 설모화의 집안 사람을 합해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누어 열 대의 수레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성숙파의 뭇 제자들이 어떤 자는 마부가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말을 타고 옆에서 호송을 했다.

수레의 휘장을 내리고 밧줄로 꽁꽁 묶었기 때문에 수레 안은 전혀 빛을 찾아 볼 수 없었고 바깥의 정경을 살필 수 없었다.

현난 등은 속으로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저 노적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지?"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입을 열고 물어 보았자 성숙파의 제자들에게 수모만 당하게 될 뿐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그저 속으로 생각했다.

"잠시 동안 참아야지.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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