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무협소설 천룡팔부5 김용

一字師 2023.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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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천룡팔부5 김용

 

                                                             图片来源 | 天龙八部电视剧大结局-西瓜视频搜索

 

천룡팔부 22장 두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다.

 

1. 교봉과 아주

[한나라 언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소. '봉아가 돐을 맞게 되어서 나는 처와함께 처가집으로 다려갔다. 처가집에서 돐잔치를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중에 갑자기 남조(南朝:송나라)의 강도들을 만나게 되었다.]

소봉은 거기까지 듣자 마음이 쓰라려왔다. 지광선사는 말을 계속했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처와 봉아가 갇오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나는 사랑하는 처자를 잃고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욕이 없다. 나에게 무예를가르쳐 준 은사는 한나라 사람이며, 나는 그 분 앞에서 한나라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늘 단번에 십여 명을 죽이고 말았으니 죄송스럽고 가슴이 아프다. 죽어서도 은사를 대할 면목이 없구나. 소원상 절필(絶筆).']

소봉은 지광의 설명이 끝나자 공손히 커다란 베조각의 탁본을 접어서 갈무리 하며 말했다.

[이것은 이 소모의 선친께서 남긴 것이니 대사께서는 불처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지광은 말했다.

[마땅히 되돌려 줘야 할 물건이었소.]

소봉의 머리속은 착잡하기만 했다. 당시 부친의 가슴아파하는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벼랑 아래로 몸을 던져 자결한 것은 처자가 처참한 죽 음을 당했다는 사실에 의한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스스로 맹세를 저버리고 많 은 한나라 사람을 죽인데 대하여 사부님께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사실 도 깨닫게 되었다. 지광선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우린 처음에 영존(令尊)께서 거란의 무사를 거느리고 소림으로 달려가 경전을 약탈하려고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소. 그러나 이 석벽에 남긴 글을 보고오해란 것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 소. 영존께서는 이미 자결할 뜻을 품게 되었으니 결코 죽기 직전에 거짓말을남겨 세상사람을 속일 이유가 없을것이 아니겠소? 그가 만약 소림사로 달려가 경전을 빼앗으려 했다면 어찌 전혀 무공을 모르는 부인과 겨우 돐을 맞게된 간난아기를 함께 데려 갔겠느냐 말이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들은 거란사람들이 소림사의 경전을 빼앗아 가려고 했다는 소문의 근원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바로 한 경망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소. 그 사람은 바로 통솔자 형님을 희롱하고 그로 하여금 천 리 먼길을 왔다갔다하게 함으로써 조롱거리로 삼자는 데 그 의도가 있었소.]

소봉은 말햇다.

[알고보니 장난을 친 것이군요. 그 경망한 사람은 어떻게 되었죠?]

지광은 말했다.

[통솔자 형님이 진상을 알게 되었을 때 지극히 분노하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없지요. 그러나 그 경망한 사람은 어디로 도망을 쳤는지 그 후 종적을 감추고 말았소. 이제 벌써 삼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아마도 이 세상에 살아있지는 않을 것이오.]

소봉은 말했다.

[대사께서 이 일의 인과관계를 알려주시고 소봉으로 하여금 다시 사람 노릇을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에 깊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 소모는 또 한가지 묻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지광은 말했다.

[소시주는 어떤 일을 묻고자 하오?]

소봉은 말했다.

[그 통솔자 형님이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지광선사는 말했다.

[노납은 소시주가 이미 그 일을 알아내기 위해서 개방의 서장로, 담공, 담파,조존손 네 분을 죽였을 뿐 아니라 또 철면판관 선정의 온 가족을 몰살하고 선가장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소. 따라서 시주가 조만간 이곳으로 달려오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소. 시주는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노납은 시주에게 보여 드릴 물건이 한 가지 있 소.]

지광대사는 몸을 일으켰다. 소봉은 서장로 등을 자기가 죽인 것이아니라고 변 명하려고 했으나 지광은 어느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후당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에 박자화상이 객당으로 나오더니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두 분이 선방으로 오셔서 말씀을 나누자고 하십니다.]

소봉과 아주는 그를 따라 대나무가 우거져 있는 숲 사이로 난 소로를 가로질 러 한 채의 조그만 집 앞에 이르게 되었다. 박자화상은 판자대기로 된 문을 열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소봉과 아주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때 지광은 방석 위에 단정히 앉아 있 다가 소봉을 향해 웃더니 손가락을 뻗혀서는 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집의 바닥은 오랫 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탓에 먼지가 두텁게 깔려 있었는데 그가 그 먼지 위에 쓴 글은 다음과 같았다.

<만물은 똑같으며 중생(衆生)은 평등하다. 성현과 축생(畜生)을 똑같이 봐야할지니라. 한나라 사람이나 거란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도 없느니라. 은원과영욕(榮辱)은 모두 다 먼지 속에 있느니라.> 글을 다 쓰고 나자 그는 빙그레 웃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봉은 바닥에 쓴 그 여덟 구절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부처림께서는 인자(仁者)나 악인은 모조리 똑같으며 축생이나 아귀(餓鬼)는제황장상과 차별이 없다고 하셨다. 내가 한나라 사람인지 아니면 거란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실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로구나. 하지만 나는 불문의 제자가 아니니 어찌 그와 같이 소탈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대사, 도대체 그 통솔자 형님이 누구인지 부디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소봉이 잇따라 몇번 물었으나 지광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대답하지 않았다.

소봉은 정신을 가다듬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광의 얼굴에 웃음빛이 떠돌긴 했으나 그 웃음은 이미굳어져 있는 것이 아닌 가! 소봉은 잇따라 두 번이나 '지광대사! 지광대사!'하고 불렀다. 그러나 그 는 여전히 동정이 없었다. 손을 뻗혀 그의 코끝에 갖다 대었다. 숨이 끊어져 있는 것이 이미 원적(圓寂)한 것 같았다. 소봉은 처연해져 말없이 꿇어 엎드 려서는 몇 번 절을 했다. 그리고는 아주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갑시다.]

두 사람은 조용히 지관사에서 물러나왓다. 그리고 맥이 빠져 고개를 푹 떨군 채 천태현 거리로 되돌아왔다. 십여 리를 걷게 되었을 때 소봉은 입을 열었 다.

[아주, 나는 지광대사를 해칠 마음은 조금도 없었어... 그... 그... 그는 어째서 그랬을까?]

아주는 말했다.

[그 분 고승은 홍진(紅塵:번거롭고 속된 세상)을 간파하시고 대철대오(大徹大悟)하셨으니 생과 사에 집착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소봉은 말햇다.

[그대의 짐작으로는 그 분이 어떻게 우리가 지관사로 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 같소?]

아주는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제 생각으로는 역시 그 대악당이 한 짓 같아요.]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렇게 추측하고 있소. 그 대악당은 먼저 가서 지광대사에게 내가 그를 찾아 원한을 갚으려 한다고 알려 주었을 것이오. 지광대사는 나의 독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나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한 후 독을 먹고 자결한 것이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한참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소 나리, 제가 몇 마디 분수를 모르는 말을 드리고자 하는데 너무 탓하지 마세요.]

소봉은 말했다.

[왜 갑자기 이토록 겸손해지셨소? 물론 나는 탓하지 않을 것이오.]

아주는 말했다.

[저는 지광대사가 바닥에 쓴 몇 마디의 말이 퍽이나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나라 사람이나 거란 사람이나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은원과 영욕은 모두다 재로 화할 것이라는 한 마디는 정말 옳아요. 기실 그대가 한나라 사람이래도 좋고 거란 사람이라도 상관없는 일이에요. 거기에 무슨 차별이 있겠어요? 강호의 칼끝에서 보내야 하는 생활에 대해서 그대 역시 혐오감을 느꼈을거에요. 그러나 차라리 안문관 밖으로 나가 사냥이나 하고 소나 양을 기르면서 중원무림의 은원과 영욕을 이제부터 상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소봉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와 같이 칼끝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생활에 나는 정말 혐오감을 느끼게되었소. 새외의 초원에서 말을 달리며 독수리를 풀어 사냥을 한다든가 개를시켜 토끼를 쫓게 하든가 하면서 아무 근심걱정 없이 지내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소. 아주, 내가 새외에서 살게 된다면 그대는 나를 보러 오겠소?]

아주는 얼굴을 붉히고 나직이 말하였다.

[저는 같이 소나 양을 기르자고는 하지 않았어요. 그대가 말을 달리며 사냥을하게 된다면 저는 소나 양을 기르는 일을 맡겠어요.]

거기까지 말하고는 그녀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소봉은 거칠고 호방한 사내였 지만 그녀의 이 몇 마디의 말 속에 숨에 있는 뜻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 다. 그녀는 바로 자기와 한평생 새외에서 세월을 보내며 다시는 중원으로 되 돌아 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소봉이 처음 그녀를 구하게 되었을 때는 그 저 일시의 의협심에서 그녀를 구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녀가 안문관 밖 까지 쫓아오게 되고 그와 함께 위휘, 태안, 천태등 천리길을 함께 와 조석으 로 가까이 대하게 되니 여러 모로 그녀의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느낄 수 있었 다. 그러다가 이제 더욱더 그녀가 솔직히 마음에 품고 잇는 사실을 토로하는 지라 소봉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느끼고 그 커다란 손을 내 밀어그녀의 조그만 손을 쥐었다.

[아주, 그대는 정말 나에게 잘 대해 주는구려. 내가 거란의 천박한 사람이라고 해서 나를 버리지는 않겠지?]

아주는 말했다.

[한나라 사람도 사람이고 거란 사람도 역시 사람인데 무슨 귀천의 차이가 있겠어요. 저는... 거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것은 정말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며 조금 억지를 부리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은 차츰 모기소리처럼 작아지고 가늘어져서 들을래 야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소봉은 크게 기뻐 갑자기 손을 뻗어서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뚱아리를 허공으로 집어던졌다가 그녀 가 다시 아래로 떨어지자 가볍게 받아 안아서는 땅에 내려 놓은 후 싱글싱글 웃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아주, 그대는 아예 나를 따라 말을 타고 사냥을 하며 소와 양을 기르겠다고했는데 영원히 후회하지 않겠소?]

아주는 정색하고 말했다.

[그대를 따라 살인방화를 하고 남의 집을 턴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거에요. 그대를 따라 온갖 고초를 겪고 만 가지 괴로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저는 즐겁게 받아들이겠어요.]

소봉은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소모에게 오늘과 같은 날이 있다니 이제는 다시 개방의 방주가 되라고 하는 것은 물론 설사 나보고 대 송나라의 황제가 되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만두겠소. 아주, 우리는 이제 신양(信陽)으로 마부인을 찾아 가도록 합시다. 그녀가 말을 하든 말을 하지 않든 이것은 우리가 최후로 찾고자 하는 한 사람이니 한 마디만 불어 본 이후 우리는 새외로 나가 사냥이나 하며 양들을 키우도록 합시다.]

아주는 말했다.

[소나리....]

소봉은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는 다시 나를 큰 나리니 둘째 나리니 하고 부르지마시오. 그대는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도록 하시오.]

아주는 온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나직이 말했다.

[제게 어찌 그런 자격이 있겠어요.]

소봉은 말했다.

[그대는 그렇게 부르는게 싫소?]

아주는 미소지었다.

[천 번 만 번 그렇게 부르고 싶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는거예요.]

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어디 우선 시험 삼아 한번 불러 보시오.]

아주는 갸날픈 음성으로 말했다.

[오.... 오라버니!]

소봉은 껄껄 소리내며 웃었다.

[하하하핫! 그렇소. 이제부터 이 소모는 결코 외로운 사람이 아니고 결코 남에게 경멸과 없신여김을 당하는 오랑캐의 천한 사람도 아니오. 이 세상에는적어도 한 사람이 있어... 한 사람이 있어...]

잠시 그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주가 그 말을 받았다.

[한 사람이 있어 그대를 우러러보고 그대를 흠모하며 그대를 사모하고 기꺼이영원토록, 그리고 이승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그대를 곁에서 모시고 그대와 더불어 환난과 굴욕을 감수하며 어려움과 고달픔을 겪어 나아갈거예요.]

그 말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봉은 소리내어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사방의 산골짜기에서 그 소리가 메아리쳐 되돌아왔다. 그는 아주가 함께 환난과 굴욕을 겪고 외로움과 고달픔을 함께 견디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그 말에는 그녀가 앞길이 가시밭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 서도 이를 즐겁게 받아들이며 후회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마음속으로 여간 감격하지 않았고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우고 있 었으나 그의 두 뺨위로는 두 줄기의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임 개방 부방주 마대원의 집은 하남성 신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소봉은 아주와 함께 강남 천태산에서 신양으로 향했다. 천리의 멀고 먼 길이 라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두 사람은 천태산에서 마음을 털어 놓게 된 후에 더욱 친밀해졌다. 그리고 이번은 지난번과는 달리 길을 가는 동안 말을 천천 히 몰아 산천구경을 마음껏 할 수가 있었는데 둘은 산천풍경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아주는 본래 술을 잘 마시지 못했으나 소봉의 흥을 돋구기 위해서 억지로 그를 따라 몇 잔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술을 마시게 되면 그 녀의 고운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온화하게 되었다. 소봉은 본래 가슴 가득히 분노를 품고 있었으나 아주가 웃으면서 달래고 또 많은 재미있는 말들로 울적 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기 때문에 비분해 하던 마음이 태반이나 가셔지게 되었 다. 이번 강남에서 북으로 중주(中州)에 이르는 동안의 여정에서 느끼는 감흥 은 안문관 밖에서 곧장 산동으로 달려가던 때와는 크게 달랐다. 소봉은 때때 로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았다. 대장부의 큰 뜻을 품고 천하제일의 문파를 이 끌며 위풍당당히 대륙을 질타하던 때가 마치 꿈만 같이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 다. 그리고 근래에 겪었던 악몽 같은 사건들이 생각날 때에는 저절로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만약 이 아리땁고 사람을즐겁게 해주는 아주가 곁에 없었더라 면 자기는 아직도 악몽 속에서 시달리고 있을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날 그들은 광주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신양과도 불과 이틀의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아주는 말했다.

[오라버니, 우리는 어떻게 마부인에게 물어야 하죠?]

그 날 은행나무 숲에서, 그리고 취현장 안에서 보았던 마부인의 언행은 소봉 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소봉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나 천천히 되새겨 보니 그녀가 남편을 잃게 되고 남편이 자기에게 해침을 받았다고 인정 하는 이상 자기를 지극히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만약 미워하지 않는다 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몸에 무공을 지니지 못한 과부라는 것을 생까할 때 그녀를 위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신분을 크게 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때 아주의 그 같은 질문을 받게 되자 대답하기가 어려워져서 한동안 멍하니 생각해 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 다.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들이 그저 좋은 말로 부탁을 하여, 그녀가 사리를 깨닫고 다시는 내가 그녀의 남편을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오. 아주, 차라리 그대가 그녀에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대는언변이 뛰어나고 또 똑같은 여자이니 말하기가 좋은 것이오. 만약 그녀가 나를 보게 된다면 가슴 가득히 끓어 오르는 원한에 즉시 일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 것이오.]

아주는 미소했다.

[나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는데 그대가 좋지 않게 생각할까봐 염려되는 군 요.]

소봉은 재빨리 물었다.

[어쩐 계책이오?]

아주는 말했다.

[그대는 사내대장부이니까 그녀에게 다그칠 수 없어요. 그러니 제가 나서서 그녀를 달래는 것이 어떨까요?]

소봉은 기뻐서 말했다.

[만약 그녀를 달래서 진상을 토로하게 할 수만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오.

아주, 그대도 알고 있다시피 내가 밤낮 생각하고 잇는 것은 다만 부친을 죽인 원수를 친히 처리하려는 것 뿐이오. 나는 거란인이니 원수가 나의 정체를폭로한 것은 당연한 일일수도 있소. 그리하여 나를 하여금 자신의 조상이 어떤 사람인지 알도록 했으니 나는 원래 그에게 고맙단 인사를 해야 할 것이 오. 그러나 그가 어째서 우리 부모님을 죽였고 나의 은사마저 죽였으며 나를핍박하여 친구들을 해치게 하고 악명을 짊어진 채 천하의 영웅들과 원수가 되도록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구려. 내가 만약에 그를 기필코 죽이지않는다면 내 어찌 마음이 편하겠으며, 내 어찌 그대와 새외에서 말을 타고 사냥을하며 소나 양을 기를 심정이 되겠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음성은 차츰 격앙되어 갔다. 최근에 이르러 그의 표정은 과거처럼 우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악당이라고 할 원수에 대한 적개심은 조금도 수그러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주는 말했다.

[그 대악당이 그토록 음흉하고 악랄하게 그대를 해쳤으니 저역시 먼저 그에게몇 번 칼질이라도 해서 그대의 화풀이를 해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를 잡은 이후에 잔치를 크게 벌여서는 천하영웅들을 모두 초청해다가 그들 앞에서 그대가 억울하게 뒤집어 쓴 누명을 벗기고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아야 해요.]

소봉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오. 나는 취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천하영웅들과 이미 깊은 원한을 맺게 되었으니 남들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소. 이 소봉은 다만 이 일을 해결짓고 마음의 편안을 찾을 수만 있다 면, 그대와 함께 말을 나란히 하고, 그리고 소나 양떼를 벗삼아 세월을 보내며 다시는 중원의 영웅들과 만나지 않겠소.]

 

2. 마부인(馬夫人)

아주는 기뻐서 말햇다.

[그거야 진정 천지신명에게 감사드려야 할 일이고 저로서도 바라마지 않던 일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저는 어떤 사람으로 변장하고 마부인을 달래 그 대악당의 성명을알아내고자 해요.]

소봉은 무릎을 치며 부르짖었다.

[그렇소 그래, 내가 어째서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대의 변장술은 이일에 사용하게 된다면 더 이상 좋은 일이 없을 것이오. 그대는 어떤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자 하오?]

아주는 말했다.

[그거야 그대에게 물어야겠죠. 마부방주가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개방에서그 누구와 가장 사이가 좋았어요? 내가 그 사람으로 변장하게 된다면 마부 인은 남편과는 절친한 친구이니까 아마도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소봉은 말했다.

[개방 중에 마대원 형제와 사이가 가장 좋았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왕타주이고 또 한 사람은 전관청이며 또 한 사람은 진장로이오. 그리고 집법장로 백세경도 그와 교분이 깊은 편이지.]

아주는 음 하는 소리를 내며 그 몇 사람의 모습과 행동거지를 상상해 봤다.

소봉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마형제는 위인됨이 침착하고 얌전해서 나처럼 술을 좋아하거나 크게 떠드는성미가 아니었다오. 그렇기 때문에 평소 그와 나는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한 적이 별로 없었소. 전관청과 백세경 등은 그의 성격과 비슷해서 종종함께 무공을 연마하기도 했소.]

아주는 말했다.

[왕타주가 누군지 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 진장로는 푸대자락 안에 독사와 전갈을 잔뜩 집어 넣고 있어서 저는 생각만 해도 몸에 소름이 끼쳐요. 그러니 도저히 그로 변장할 수는 없어요. 전관청은 체구도 우람하거니와 키가너무 커서 그를 잠시 동안만 가장하는 것은 그럴싸할지 모르나 마부인 집에서 오래 지체하면서 천천히 그녀를 유도해가며 사연을 알아 내려면 아무래도마각을 드러낼 것 같아요. 저는 역시 백장로로 변장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는 취현장에서 저에게 몇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니 그를 흉내내는 것이 가장 쉬워요.]

소봉은 미소했다.

[백장로는 그대에게 무척 잘 대해 주었으며 설신의에게 그대를 치료해 달라고간곡히 부탁을 하지 않았소? 그런데 그대가 그의 모습으로 변장하고서 사람을 속인다는 것은 그에게 약간 미안한 노릇이 아니겠소?]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백장로로 분장한 이후 좋은 일만 하고 나쁜일은 하지 않으면 그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하여 그들은 조그만 객점에서 변장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는 소봉을 개방 의 다섯 푸대를 매는 제자로 변장시켰다. 즉 백장로의 시중을 드는 부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소봉은 말을 하지 않도록 했다. 그것은 마부인 이 똑똑하므로 그가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어떤 허점을 발견할 수 있을것 같았 기 때문이다. 소봉은 아주가 백장로로 변장을 하자 그 얼굴에서 서릿발이 내 리는 듯한 엄한 자태와 더불어 절로 위엄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개방남북의 수만이나 되는 제자들이 우러러보면서도 두려워하는 집법장 로의 모습이 아닌가? 비단 모습만이 닮은게 아니라 말하는 소리와 행동거지도 판에 박은 듯했다. 소봉은 백장로와 사귄지 근 십 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주의 변장에서 어떤 헛점도 찾아 낼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신양에 거의 도달하게 되었을 떠 소봉은 길에서 개방의 많은 제자들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개방의 은어로 개방의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개방의 수뇌 인물들의 동정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런 연후에 백장로가 신양으로 온다는 말을 전하여 마부인으로 하여금 먼저 그 소식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마대원의 집은 신양 의 서쪽 교외에 있었는데 성안과는 삼십 여리나 떨어져 있었다. 소봉은 그 지 방의 개방 제자에게 길을 알아 본 이후 아주와 함게 말을 몰아 그 집으로 달 려갔다. 두 사람은 일부러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일부러 시간이 흐르도록 하면 서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도달하도록 했다. 대낮에는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 기 때문에 변장이 쉽게 탄로날 수 있지만 밤이 되었을 때 모든것이 불분명 하니까 쉽게 속일 수가 있는 것이다. 마씨 집 문밖에 이르자 그들은 한 조그 만 개울이 세 칸의 조그만 기와집 주위를 빙글 돌려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 었다. 또한 문앞에는 마당이 있었는데 아마도 농사철에 곡식을 말리는 마당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마당의 사방에는 각기 깊은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소봉은 마대원의 무공수법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네 개의 구덩이는 평 소 그가 무공을 연마할 때 사용하던 것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마대원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는 생각이 들자 불현듯 심사가 처량해졌다. 그 가 막 앞으로 나아가 문을 두드리려고 했을 때였다. 별안간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문이 열리면서 전신에 소복을 한 부인이 걸어 나왔다. 바로 마부인 이었다. 마부인은 소봉을 힐끗 쳐다보더니 허리를 굽히고 아주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백장로께서 저희 집을 찾아 오시니 정말 뜻밖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셔서 차를 드시지요.]

아주는 말했다.

[불초는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제수씨와 상의하고자 당돌하게 찾아왔으니 용서하시요.]

마부인은 얼굴에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한 가닥 원망스러 운 빛을 띠었다. 그야말로 온몸에 소복을 한 그녀의 자태와 어울린다고나 할 까. 이때 석양은 서산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였고 그 엷은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쳐주었다. 소봉은 두 번째 그녀와 만나게 되었으므로 지난 번처럼 심신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가에 연중 주름살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약 삼 십 오륙세 정도의 나이는 되었을텐데 얼굴에 분을 바르지 않았어도 살결이 희 고 부드러운 것이 아주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마부인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대청은 매우 협소했다. 두 사람은 마부인을 따라 집안으 로 들어갔다. 대청은 매우 협소했다. 중간에 하나의 탁자가 놓여 있고 양쪽에 네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곧이어 한 늙은 시녀가 차를 가져왔다. 마부인 은 소봉의 이름을 물었다. 아주는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어 대답했다. 마부인 은 물었다.

[백장로께서 이와 같이 저희 집을 찾아오신 것은 무슨 일 때문이신가요?]

아주는 말했다.

[서장로가 위휘에서 세상을 떠났소. 제수씨도 소문을 들었으리라 생각하오.]

마부인은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눈에 의아한 빛을 띠우고 말했다.

[저는 물론 알고 있죠.]

아주는 말했다.

[우리는 모두 교봉이 쓴 독수라고 의심하고 있소. 그런데 그 후 담공과 담파,조전손 세 선배님도 위휘성 밖에서 어떤 사람의 해침을 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곧이어 산동 태안의 철면판관 선씨 집안도 몰살당해 불살라졌소. 그리고얼마 전에 내가 강남으로 내려가 한 명의 제자가 방규를 어긴 사실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소문을 듣게 되었소. 그 소문은 천태산 지관사의 지광대사가 갑자기 입적하셨다는 것이오.]

마부인은 몸을 흠칫 하더니 안색이 변해서는 말했다.

[그건... 그건 또 교봉이 한 짓인가요?]

아주는 말했다.

[나는 친히 지관사로 가서 살펴보았는데 어떤 결과를 얻지 못했소. 그러나 생각컨대 십중팔구 교봉이 한 짓이 틀림없을 것 같아 급히 달려와 제수씨에게다른 곳으로 옮겨가 잠시 동안 일 년이나 반 년동안만 은거토록 하여 교뵨이란 녀석의 해침을 받지 않도록 당부하러 왔습니다.]

마부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 양반이 불행히 세상을 떠나신 이후 제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도 본래부질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가가 나를 해치고자 한다면 그야말로 저는 바라던 일인데 어찌 다른 곳으로 옮겨 화를 피하겠어요.]

아주는 말했다.

[제수씨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마형제의 원한을 갚지 못하고 원흉을 아직 사로잡지 못한 이때 그대는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외다. 아, 마형제의 영당은 어디에 마련해 놓았소? 내 영당으로가서 술이라도 한 잔 올려야겠소.]

마부인은 말했다.

[감당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두 사람을 데리고 후당으로 갔다. 아주는 먼저 절을 했다.

소봉은 공손히 마대원의 신위 앞에서 절을 하며 속으로 빌었다.

(마형, 죽어서도 영이 있다면 오늘 반드시 그대 부인으로 하여금 감응케 하여진범의 성명을 말씀하도록 해 주구려. 그러면 내가 그대 대신 원한을 갚아 드리리다.)

마부인은 옆에 엎드려서 반례를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 렸다. 소봉은 절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영당에는 몇 폭의 만련(輓聯)이 걸 려 있었다. 서장로와 백장로의 것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교봉이 보 낸 만련은 걸어 놓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영당의 하얀 휘장 위에는 먼지가 약간 앉아 있어서 더욱 소슬한 감을 불러 일으켰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부인에게는 아들과 딸이 없다. 온종일 노비만을 벗하며 지내고 있으니 이와 같이 외로운 세월을 보내기는 정말 괴로울 것이다.)

이때 아주가 마부인을 위로했다.

[제수씨는 몸을 보호해야 하오. 마형제의 원한은 우리 모두의 원한이 아니겠소. 그대에게 만약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 주시구려. 내 알아서 처리해 드리리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늙은이가 거드름을 피우는 모양이 아닌가? 소봉은 속으로 찬탄해 마지 않았다.

(저 여인은 정말 잘도 흉내를 내는구나! 개방 방주는 쫓겨나고 부방주는 세상을 떠났으며 서장로 역시 피살되었고 전공잘로는 나에게 피살되어 이제 남은사람이라고는 백장로 한 사람분이니 백장로의 지위가 가장 높은 셈이다. 마치 방주처럼 말을 하니 그야말로 신분에 정말 어울린다고 할 수 있겠다.)

마부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했으나 그 말투는 지극히 냉담했다. 소봉은 속으로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생활이 정말 쓸쓸해 보였고 표정 또한 외로움에 젖어 있는 얼굴이 아닌가. 따라서 그녀의 남편이 세상을 등진 이후에는 이 세 상에 살아 남아서 즐겨야 할 일이 없는 것 같으니 어쩌면 남편을 따라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부인이라는 여자는 성격이 꿋꿋하여 무슨 일이든지 해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부인은 다시 두 사람을 객청 으로 모셨다. 얼마 후 노비가 저녁밥을 올렸다. 나무탁자 위에 네 가지의 찬 이 놓였는데 배추와 무우, 두부, 오이 같은 소채였다. 그리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세그릇의 하얀 쌀밥뿐이었으며 술 종류도 내놓지 않았다. 아주는 소봉을 한번 쳐다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밤만큼은 마실 술이 없겠네요.)

소봉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밥그릇을 들고서 먹기 시작했다. 마부인은 말했다.

[저희 바깥 양반이 세상을 등진 이후 홀로 사는 미망인인지라 줄곧 소채만 억어 왔어요. 산속에 살자니 술을 준비할 수 없었던 점 두 분은 양해하여 주세요.]

아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형제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다시 살아 올 수가 없지 않겠소? 제수씨도 너무 자기 자신을 학대하지 마시오.]

소봉은 죽은 남편에 대해 그토록 절개와 지조를 지키는 그녀가 속으로 여간 대견스럽지 않았다. 저녁밥을 먹은 후 마부인은 말하였다.

[백장로께서 먼 길을 오셨으니 응당 저의 집에 모셔야겠지만 홀로 사는 몸이라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장로께서는 달리 무슨 분부라도 계신가요?]

그 말은 이제 가 주었으면 하는 뜻이었다. 아누는 말했다.

[내가 이번 신양으로 온 것은 제수씨가 집을 떠나 화를 피해야 한다고 권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제수씨께서는 어떤 계획이 있소?]

마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교봉은 이미 마나리를 해쳐 죽이지 않았나요? 그가 다시 나를 해쳐 죽인다는것은 저에게 저승에서나마 마나리를 모시도록 하자는 것이겠죠. 제가 비록 약한 여자이기는 하나 솔직히 백장로에게 말씀드리면 죽음이 두렵지 않아 요.]

아주는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수씨는 딴 곳으로 옮겨 화를 피하지 않겠다는 것이 오?]

마부인은 말했다.

[백장로의 두터우신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저는 마나리가 어릴적부터 살아 온이 옛집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아주는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제수씨를 보호해야겠소. 물론 이 백모는 그교봉이란 녀석의 적수가 되지 못하나 다급할 때는 그래도 한 팔의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도중에 또 하나의 중대하면서도 은밀한 소문을 듣게 되었소.]

마부인은 말했다.

[아마도 무척 중대한 일인가 보죠?]

본래 여자들은 호기심이 지극히 강한 편이었다. 무슨 중대하고도 은밀한 소문 을 들었다고 하면 자기에 관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반드시 알아야만 속이 시원하고 설사 입으로 묻지 않는다 하더라도 얼굴에는 급히 알고 싶어하는 표 정을 띠우기 마련이다. 그런데 마부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마치 '그대가 말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내 남편이 죽은 이상 이 세상에서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일이란 없다.'는 표정이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과부의 마음을 불이 꺼진 재에 비유하는데 그 비유를 마부인에게 사용한다면 그야말로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되겠구나!)

아주는 소봉에게 손을 내저었다.

[자네는 밖에 가서 나를 기다리게. 내 몇 마디 은밀한 말을 마부인에게 할 것이 있네.]

소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속으로 아주가 총명하다고 칭찬했다. 사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기밀을 누설케 하려면 종종 이쪽에서 먼저 기밀에 속하는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들려 주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먼저 이쪽을 믿는 마음이 생기도록 유도해야 했다. 아주가 소봉을 물리친 것은 바 로 마부인에게 믿음을 얻기 위한 것이고 그것은 또한 심복마저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였다. 그만큼 이 일이 은밀한 일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기 도 했다. 소봉은 대문을 걸어나갔다. 어둠속에 파묻혀 있는 문 밖은 조용하기 만 했다. 그런데 부엌쪽에서 은연중 챙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럿은 노 비가 그릇을 씻는 소리인 듯했다. 그는 즉시 담장을 끼고 돌아갔다. 그리고 객방 창밖에 이르러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마부인이 설사 그 사람의 성 명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저 조그만 단서를 따라 차근차근 캐어나가게 된다면 지금처럼 오리무중에 빠져 있는 듯한 상태에서는 벗어 날 수 있으리라 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가짜 백장로가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위험이 들이닥 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해준 것은 그야말로 먼저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가지 중대하고도 은밀한 일이 있다고 했고 또한 백세 경은 지방의 수뇌인물이라 마부인은 십중팔구 백장로에 대해서 속이지 않으리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후에야 마부인이 나직히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 렸고 탄식하며 하는 말이 들렸다.

[그대... 그대는 또 무엇하러 왔죠?]

소봉은 큰일을 그르치게 될까봐 경솔하게 창문 틈으로 객청의 전경을 엿볼 생 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이 한 마디 말은 무슨 뜻일까?)

이때 아주가 말했다.

[나는 확실히 소식을 듣게 되었소. 교봉이라는 녀석이 그대에게 해를 기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특별히 달려와 전갈을 하는 것이오.]

마부인은 말했다.

[음, 백장로의 호의는 고마워요.]

아주는 음성을 낮추고 말했다.

[제수씨, 마형제가 불행히 세상을 떠난 이후 본방에서는 몇 분의 장로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는 뜻에서 그대로 하여금 본방에서 장로직을 맡도록 하고자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소.]

소봉은 그녀가 아주 정중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우스꽝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역시 그와 같은 계책이 무척 고명하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마부인이 응낙하게 된다면 백장로는 즉시 그녀의 윗사람이 될 것이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도 그녀는 대답을 거절할 수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녀가 개방의 장로에 취임하지 않겠다 하더라도 개방에서 그 토록 그녀를 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적어도 잠시 동안은 그녀의 환심을 살 수가 있는 일이었다. 이때 마부인은 말했다.

[제가 무슨 덕과 능력이 있어 방의 장로가 되겠어요. 저는 개방의 제자도 아니에요. 장로의 직분은 지극히 높은 것이라 저같은 사람과는 그야말로 십만팔천 리나 간격이 있다고 봐요.]

아주는 말했다.

[나는 오장로 등과 애써 그대를 추대했오. 그리고 모두들 마부인이 함게 계책을 생각해 낸다면 교봉이란 녀석을 잡거나 죽이는 것이 훨씬 쉬우리라고 말하고 있소. 그리고 또한 가지 중대하기 이를데 없는 소식을 들은 것은 마형제가 피살된 사건과 지극한 관계가 있는 일이외다.]

마부인은 말했다.

[그런가요?]

그 음성은 퍽이나 냉담했다. 아주는 말했다.

[그 날 위휘성에서 서장로의 빈소에 술잔을 올리게 되었을 때 나는 조전손을만나게 되었소. 그런데 그는 나에게 누가 마형제를 죽인 진범인지 그가 알고있다는 말을 했소.]

별안간 챙그랑 하는 소리가 나면서 찻잔이 깨졌다. 마부인은 놀람에 찬 소리 를 내지르며 곧이어 말했다.

[그대... 그대는 무슨 농담을 하자는 거예요?]

그 소리는 지극히 분노에 차 있었고 또한 어느 정도 놀람과 당황해 하는 빛이 서려 있었다. 아주는 말했다.

[이것은 중대한 일인데 내 어찌 그대와 농담을 하겠소? 조전손은 정말 나에게마대원 형제를 죽인 진범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말했소. 그는 그게 결코 교봉이 아니며 고소땅의 모용씨도 아니라고 말했소. 그리고 그는 따로 다른흉수가 있다고 확신한다고 했소.]

 

마부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어떻게 안단 말이에요? 그가 어떻게 알아요?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이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니예요.]

아주는 말했다.

[정말이오. 그대는 너무다급해할 것 없소. 내 천천히 그대에게 이야기하리다.

그 조전손은 작년 팔월 달에...]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마부인은 '아'하는 놀람에 찬 외마디를 내지르고 는 그만 정신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아주는 재바릴 부르짖었다.

[제수씨? 제수씨!]

그리고 힘 주어 마부인의 코 아래 입술 위의 인중혈(人中穴)을 눌렀다. 마부 인은 정신을 차리며 원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대는... 그대는 어째서 나에게 겁을 주는 거예요?]

아주는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니오. 조전손은 확실히 그와 같은 말을 했으나 이상하게도 그는 이미 죽어 버리고 말았소.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를불러다 대질을 시킬 수 있었을 것이오. 그는 작년 팔월 중추절에 담공과 담파, 그리고 마형제를 해쳐 죽인 흉수와 함께 그 통솔자 형님의 집에서 명절을 지냈다는구려.]

마부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을 하였다.

[그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아주는 말했다.

[그렇소. 그래서 내가 그 진범이 누구냐고 물었으나 그는 그사람의 이름을 자기 입으로 말하기는 거북하다고 말했소. 그리하여 나는 담공에게 물었소. 담공은 씩씩거리며 나를 한번 돌아볼 뿐 더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담파는 틀림없는 일이라 했으며 바로 그녀 자신이 조전손에게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하더구려. 따라서 나는 담공이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반드시 그의 부인이 무슨 일이든 조전손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나를노려본 것이라고 판단했소. 그러고 보니 조전손이 그 흉수의 이름을들먹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옛날 정인인 담파에게 누를 끼치게 될까봐 두려워했던 것임을 알 수 있었소.]

마부인은 말했다.

[음. 그게 또 어쨌다는 것이죠?]

아주는 말했다.

[조전손은 모두들 교봉과 모용복이 마형제를 해쳐 죽였으리라고 의심을 하면서 진범으로 하여금 죄값을 받도록 하지 않고 이세상을 활보하게 만드니 마형제가 지하에서 알게 된다면 역시 한을 품고 원망할 것이라고 말을 하더군요.]

마부인은 말했다.

[그래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미 조전선을 죽었어요. 담공과 담파 역시 그대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죠?]

아주는 말했다.

[하지 않았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나는 통솔자 형님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소.]

마부인은 말했다.

[좋아요. 응당 그에게 물어보아야겠지요.]

아주는 말했다.

[그런데 말하기 우스꽝스럽지마는 통솔자 형님이 도대체 누구인지 집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르고 있다오.]

마부인은 말했다.

[음, 그대가 말을 빙 돌린 것은 원래 그 통솔자 형님의 성명을 알아내자는 것이었군요.]

아주는 말했다.

[만약 거북하다면 제수씨는 나에게 말할 필요없소. 그리고 그대 스스로 방법을 강구해서 조사를 해보도록 하시오. 그런 이후 우리는 다시 그 원흉을 찾아 원한을 갚도록 합시다.]

소봉은 아주가 아주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언행을 함으로써 마부인 의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짐작할 수 있었으나 마음속이 초조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이때 마부인은 담담히 말했다.

[그 통솔자의 성명을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속여야 하겠지요. 교봉이 알게 된다면 그를 찾아가서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겠어요? 백장로는 한 집은 사람과 다름 없으니 제가 어찌 속일 필요를 느끼겠어요. 그는 바로...]

그런데 교봉은 그 다음 말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소봉은 자기의 심장이 뛰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종 마부인이 통솔자 형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마부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 쉬더니 말을 하였다.

[하늘의 달은 저토록 둥글고 또 희군요.]

소봉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가득 끼어 있고 또 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서도 역시 고개를 쳐들고 한번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초이틀이니 설사 달이 있다고 하더라도 둥글 수 없다. 도대체 그녀가이같이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때 아주는 말했다.

[보름이 되면 달은 자연 둥글고 밝게 되겠지요. 아,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형제는 다시 그와 같은 달을 볼 수 없을거외다.]

마부인은 말했다.

[그대는 짭잘한 월병을 좋아하나요. 아니면 달콤한 월병을 좋아하나요?]

소봉은 더욱더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부인은 남편이 죽은 이후 정신이 약간 흐려진 것이 아닐까?)

아주는 말했다.

[우리 거렁뱅이들이 월병을 먹는 데 있어서 이것저것 따지게 되었소? 진범을찾아내지 못해 마형제의 원한을 갚지 못한다면 월병은 고사하고 산해진미라하더라도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이오.]

마부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백장로께서 성심성의로 진범을 찾아내어 대원 형제의 원한을 갚고자 하는 데대해서 저는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아주는 말했다.

[그거야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개방의 수많은 형제들 가운데그 어느 누가 그 원수를 갚고자 하지 않겠소?]

마부인은 말했다.

[그 통솔자의 지위는 지극히 높고 세력이 엄청나서, 한 마디의 호령으로 수 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지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친구들을비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대가 그에게 진범이 누구냐고 묻는다 하더라도그는 절대로 말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봉은 속으로 기뻐하며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이번에 허탕을 친 것이 아니다. 마부인이 그 사람의 성명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위가 지극히 높고 세력이 엄청나며 한 마디의 말로 수 만이나 되는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이 한마디로도 나는 언젠가 비밀을 캐어낼 수 있을것이다. 사실 무림에서 그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가 정히 그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요모조모 생각하고 있을 떠 아주가 말했 다.

[무림에서 단 한 마디로 수만이나 되는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옛날의개방 방주가 있었죠. 그리고 소림의 제자가 천하에 깔려 있으니 소림사의 장문방장의 한 마디라면 역시 수 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고...]

마부인은 그 말을 가로채듯 말했다.

[그대는 쓸데없이 추측할 것 없어요. 내가 조금 더 단서를 제공해 드리죠. 그대는 서남방쪽의 인물을 주의하시면 될거뮈.]

아주는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서남쪽이라고? 서남쪽에 무슨 내력이 있는 인물이 있소? 그런 사람은 없는것같은데?]

마부인은 손가락을 뻗혀 내더니 팍 하고 창호지에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은 바로 소봉의 머리 위에 뚫린 것이었다. 곧이어 그녀가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무공을 모르지만 백장로께서는 천하에서 그 누가 이와같은 무공에 가장 뛰어난가를 알고 계실거예요.]

아주는 말했다.

[음, 그것은 점혈무공이 아니겠소? 소림파의 금강지와 하북 창주 정가(鄭家)의 탈백지(奪魄指) 등이 모두 매우 무섭다고 할 수 있지요.]

소봉은 속으로 크게 부르짖고 있었다.

(틀렸다. 틀렸어. 점혈재간에 있어서 천하에서는 대리 단씨의 일양지를 제일로 치고 있다. 더군다나 그녀는 서남방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니나 다를까? 마부인은 말했다.

[백장로께서는 견문이 넓으신데 어찌 이 일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시나요. 아마도 길을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셔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명성이 쟁쟁한 일양지를 잊고 계셨나 보군요.]

그녀의 말속에는 비웃는 듯한 빛이 가득 서려 있었다. 아주는 말했다.

[단씨 집안의 일양지는 물론 알고 있소. 그러나 단씨는 대리에서 황제 노릇을하고 있으며 중원 무림과는 일찍부터 왕래를 하지를 않았소. 만약 그 통솔자형님과 단씨 집안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면 아마도 헛소문일 것이오.]

마부인은 말했다.

[단씨는 대리에서 황제 노릇을 하고 있지만 단씨 집안은 결코 한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황제 노릇을 하지 않는 사람은 종종 중원으로 들어오기도하죠. 그 통솔자로 말하면 바로 대리국 당금 황제의 친아우로써 성은 단가이고 이름은 정순이며 진남왕으로 봉해진 자예요.]

소봉은 마부인이 단정순이라는 이름을 들먹이자 자기도 모르게 전신을 흠칫했 다. 수개월동안 수천 리 길을 왔다갔다 하면서 애써 찾던 사람을 끝내 알아내 고야 만 것이다. 이때 아주는 말했다.

[그 단왕야의 권세와 지위는 매우 당당하고 숭고한 편인데 어찌 강호의 서로죽고 죽이는 사건에 참여할 수 있단 말이오?]

마부인은 말했다.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은원관계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라면 단왕야께서는 자연 끼어들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대리국의 생사존망이나 국운의 성쇠와 상관이 있는 큰일이라면 그가 어찌 간섭을 알 할 수 있겠어요?]

아주는 말했다.

[그것도 그렇군!]

마부인은 말했다.

[저는 서장로에게서 들었는데 대송나라가 바로 대리국 북쪽의 담장이 된다고했어요. 거란이 일단 대송나라를 멸망시킨다면 다음 단계로 가서는 반드시 대리국을 집어삼키고 말것이래요. 그렇기 때문에 대송나라와 대리국은 결코대송나라가 요나라의 손에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거예요.]

아주는 말했다.

[그렇소. 그 말은 틀림이 없소.]

마부인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서장로께서는 그 해 단왕야라는 분이 개방 총타에서 손님이 되어 왕방주와 술을 마시며 검술을 노하게 되었을때 갑자기 거란 무사가 대거 소림사로 가서는 경전을 탈취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래서단왕야는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시고 뭇사람들을 이끌고서 안문관 밖으로 나아가 그 사람들을 막으려고 했던 거예요. 그의 그와 같은 행동은 대송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기실은 대리국을 위한 것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단왕야는 그 당시 나이가 젊었지만 무공이 고강했고 위인됨이 또한 어질고도 의리가 있었대요. 그는 대리국에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신분으로서 돈을 물쓰듯 하여 남이 말하기도 전에 수 천 수 백 냥의 은자를 언제나 꺼내어서 친구에게 준다는 거예요. 그러니생각해 보세요. 중원의 무림 인사들을 그가 영도하지 않고 그 누가 영도할 수 있겠어요? 그는 이후에 대리국의 황제가 될 신분이니 얼마나 존귀한 신분이겠어요? 다른 사람은 모두 초야의 사내들이니 어찌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있겠느냔 말이예요.]

아주는 말했다.

[통솔자 형님이 바로 대리국의 진남왕이었군. 모두 다 죽을지언정 말하지 않는 것은 그를 두둔하기 위해서였구려.]

마부인은 말했다.

[백장로, 이 비밀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되요. 단왕야와 본방의 교분은 매우 두터은 편이예요. 만약 누설하게 된다면 커다란 화를 초래하게 될거예요. 대리 단씨는 서남쪽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정말 무서운 상대예요. 만약 그 교봉이 원한을 갚고자 벼르면 팔 년이고 십 년을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단정순을 쉽게 이길 수는 없을거예요.]

아주는 말했다.

[제수씨의 말씀이 옳소.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입을 봉할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누설하지 않겠소.]

마부인은 말했다.

[백장로, 제가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맹세를 하는 것이 가장 좋겠네요.]

아주는 [좋소, 단정순이 바로 통솔자 형님이란 사실을 이 백세경이 다른 사람에게 누설한다면 백세경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 죽는 화를 당하고 패가망신하여서는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것이오.]

아주의 이 같은 맹세는 지극히 진지하게 보였다. 그러나 또한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맹세이기도 했다. 말끝마다 모든 것을 백세경에게 미루게 된 셈이니 천 갈래 만 갈래 찢기더라도 백세경이 찢길 것이고 패가망신을 당하더라도 백 세경이 당할것이라 그녀 아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부인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무척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되었어요.]

아주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대리로 가서 진남왕을 찾아보아야겠소. 그리고 빙 둘러서 작년 중추절에 그의 집에서 손님이 된 사람이 누구누구 있었느냐고 물어보겠 소. 그렇게 된다면 마형제를 죽인 진범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지금 나는 여전히 교봉의 짓이라고 생각하오. 조전손과 담공, 그리고 담파 세사람은 언행이 실성한 것 같은 사람들이라 그들이 하는 말은 크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오.]

마부인은 말했다.

[어쨋든 흉수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은 백장로에게 부탁을 드리겠어요.]

아주는 말했다.

[마형제는 나의 친형제나 다름이 없소. 당연히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리다.]

마부인은 울먹이며 말했다.

[백장로께서는 정이 깊고 의가 바르시니 돌아가신 부군께서 지하에서라도 알게 된다면 반드시 고마워할 거예요.]

아주는 말했다.

[제수씨는 몸조심하시오. 불초는 이만 가보겠소.]

그리고 그는 작별하고 나왔다. 마부인은 말했다.

[저는 홀로 사는 몸이라 야밤에 멀리 나가지는 못하겠어요. 백장로께서는 이해해 주세요.]

아주는 말했다.

[원 별 말씀을 다 하시오. 제수시는 너무 신경쓸 것 없소.]

아주가 문밖에 이르게 되었을 떠 소봉은 이미 멀리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 람은 서로 한번 쳐다보고 아무말도 하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실날 같 은 초생달이 비스듬히 신양의 고도를 비춰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 란히 하고 곧장 십여 리를 나아갔다. 그제서야 소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 했다.

[아주, 정말 고마웠소.]

아주는 담담하게 웃으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으며 백세경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빛을 본 소봉은 그녀가 마음속으로 무척 걱정을 하며 초조하게 여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소봉은 물었다.

[오늘 크게 공을 세웠는데 그대는 어째서 기뻐하지 않으시오?]

아주는 말했다.

[대리 단씨는 아래 사람도 많고 세력이 커요. 그대 홀로 원한을 갚으러 간다 는 것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예요.]

소봉은 말했다.

[아, 그대는 나를 위해 걱정하고 있구려. 안심하시오.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그들은 밝은 곳에 있는 셈이오. 삼 년이나 오 년에 걸쳐 원한을 갚지 못한다면 마부인이 말한 것처럼 팔 년이고 십년이고 기다리겠소. 그러면 언젠가는단정순을 산산조각을 내어 개의 먹이로 삼을 수 있을 것이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이를 갈았다. 가슴 가득히 끓어 오르는 원한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주는 말했다.

[오라버니,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소봉은 말했다.

[그건 물론이오. 내 목숨을 잃는 것은 작은 일에 불과하며 부모님의 피맺힌 원한을 갚지 않고서는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소]

그리고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만약 단정순의 손에 죽게 된다면 그 누가 그대와 함께 안문관 밖에서 소와 양을 기르게 될 것인가!]

아주는 말했다.

[아, 저는 자꾸만 겁이나요. 이 일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마부인... 마부인은 그토록 곱고 순결하게 보이는 데도 그녀를 대하고 있으면 자꾸만 그녀가 무섭고 증오스러우며 가증스럽게도 느껴져요.]

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그 여인은 매우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서 그녀가 그대의 변장을 알아차리게 될까봐 자연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오.]

두 사람은 신양성의 객점으로 돌아왔다. 소봉은 즉시 열 근의 술을 시켜서는 마음 놓고 마셔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으로 어떻게 하면 원한을 갚을 수 있 을까를 생각했다. 그런데 대리 단씨를 생각하자 새로이 의형제를 맺게 된 단 예가 자연히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만 속으로 흠칫했다.

그리고는 멍하니 술잔을 들고서 술을 마시지 못했다. 그의 표정은 창백하였고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주는 그가 무엇을 발견이라도 했는가 싶어서 사방을 한번 두리번겨렸으나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나직히 물었 다.

[오라버니, 어떻게 된거예요?]

소봉은 흠칫하더니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리고 술잔을 들어서는 단숨에 들이켰다. 헌데 술이 목구멍에 채 넘어가기도 전에 갑자기 크게 재채기를 했다. 그 바람에 가슴팍의 앞섭자락이 모두 술에 젖고 말았다. 그의 주량은 그야말로 이세상에서 보기 드물정도였고 내공 또한 심후했다. 그런데도 술을 마실 때 술이 목에 걸리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으 며 일찌기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아주는 속으로 걱정이 되었으나 묻기가 거북하여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그녀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을 소봉은 걱정하고 있었다. 소봉은 술을 마실 때 갑자기 그 날 무석에서 단예와 술내기를 하던 광경이 떠오른 것이다.

 

3. 호숫가의 기인(奇人)

그때 상대방은 육맥신검의 상승기공으로 술을 손가락으로 쏟아내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무공은 소봉으로서도 미칠 수 없었다. 단예는 분명히 무공을 할 줄 모르는데도 내공이 그토록 뛰어나다면 원수인 단정순은 대리 단씨의 수뇌인물 가운데 하나이니 단예보다 몇 배나 무서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부모의 원한 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단예가 우 연히 신공을 얻게 되어 남의 내력을 흡입하기까지 여러 가지의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내력만 가지고 논할 때 단예는 단정순 보다도 몇 배나 더 심후했으며 또 육맥신검이라는 무공에 있어서도 당대 천하 에서 단예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완전하게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소봉 과 아주는 똑같이 단예와 잘 아는 처지였다. 그러나 단씨는 대리국의 국성(國 姓)이었다. 그것은 대송나라의 국성이 조씨이고 서하의 국성이 이(李)씨이며 요국의 국성이 야율인 것처럼 국성을 가진 사람은 그야말로 수천 수만에 이를 것이 아니겠는가? 거기다가 단예는 한번도 자기가 대리국의 왕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소봉과 아주는 그가 바로 단정순의 아들이라라 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는 말했다.

[오라버니, 원한을 갚고자 하는 일은 큰 일이에요. 일조일석에 해치우려고 해서는 안 될 거예요. 계책을 세운 이후 움직여야 할 거예요. 적이 수가 많고우리는 수가 적어 힘으로 이길 수 없다면 지략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소봉은 속으로 기뻐했다. 아주의 기민함과 교활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앞으로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한 대접의 술을 따 라서는 단숨에 마시고 말했다.

[부모의 원한은 불공대천이라고 했소. 이 원한을 갚는데 있어서는 강호의 어떤 규율이나 도의도 돌볼 필요가 없으며 아무리 지독한 수단이라 하더라도 사용할 수 있소. 맞소! 힘으로 이길 수 없다면 우리는 그를 지략으로 상대하면 될 것이오.]

아주는 말했다.

[오라버니, 그대 친무보의 원한 말고도 그대를 키워 주시고 보살펴 주신 양부모인 교선생과 할머니의 피맺힌 원한, 그리고 그대 사부이셨던 현고대사의 원한도 있어요.]

소봉은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이 원한이야말로 여러 겹으로 얽힌 것이오!]

아주는 말했다.

[그대는 옛날 현고대사에게 무공을 배울 때 아마도 나이가 어려 소림사의 정통한 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리라 생각돼요. 대리 단씨의 일양지가 제아무리 ゼ럽 하더라도 소림파 달마대사의 역근경(易筋經)을 당해 낼 수는없을 거예요. 저는 돌아가신 모용 나리께서 천하의 무공을 논하실 때 대리단씨의 가장 무서운 무공은 일양지가 아니고 육맥신검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소봉은 눈쌀을 찌푸렸다.

[그렇소. 모용선생은 무림의 기인이라 지극히 이치에 맞는 말씀만 하시는군.

내가 방금 걱정한 것도 일양지가 아니라 바로 육맥신검이었소.]

아주는 말했다.

[그 날 모용 큰 나리께서는 모용공자와 천하무공을 논하셨는데 저는 옆에서 차를 따르며 서 있다가 몇 마디 말을 들었어요. 모용 큰 나리께서는 다음과같이 말씀하셨어요. '소림파의 일흔 두 가지 절기는 물론 갖가지 정묘한 점이 있지만 적을 제압하고 이기는 데는 한가지 절기만으로도 충분하다. 칠십이 가지를 익힐 필요는 없는 것이니라.']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 선배님의 말씀이 옳소.]

아주는 다시 말했다.

[그때 모용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그렇습니다. 왕씨 외숙모님과 외사촌 누이도 천하의 무공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랑을 하는데 많이 알고 있기는하지만 어느 하나도 완전히 정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모용 큰 나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사실 정통한다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니다. 기실 소림파의 진정한 절학은 바로 한권의 역근경이라는 책이다. 이 역근경에 기록된 무공을 연마하는 데 성공한다면 아무리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무공이라 하더라도 그의 손에서 펼쳐지게 되면 그야말고 썩고 평범한 것이 하늘을 무너뜨리는 절기로 변하고 마는것이다.'라고.]

기틀을 잘 닦게 되면 내력이 웅후하고 강해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리고 그렇게 된다면 어떤 평범한 초식을 펼쳤을지라도 지극히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기 마련이었다. 이 점은 소봉도 깊히 깨닫고 있었다. 바로 그 날 취현 장에서 군웅들을 상대로 힘써 싸우게 되었을 때 그는 뭇사람들이 다알고 있는 태조장권으로 천하의 영웅호걸들과 싸웠으며 어떤 일류고수라도 하나같이 굴 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아주가 모용선생이 한 말 을 전하는 것을 듣고 잇따라 두 대접의 술을 마시며 말했다.

[그야말로 내 마음과 깊이 통하는 한 마디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모용선생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구려. 그렇지 않다면 이 소봉이 반드시 戮 장원으로 찾아가 그분 같은 천하의 기인을 한번 만나 뵈었을 것이오.]

아주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모용 큰 나리께서는 살아 계실때 외부의 손님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대가 방문했다면 문제가 달라졌겠죠.]

소봉은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그는 그녀가 문제가 달라진다고 한 한 마디에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뜻은 그대가 나의 사랑하는 연인이니 모용선생께서는 자연히 달리 생각하고 대접해 주셨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 런데 아주는 그와 같은 소봉의 눈길을 대하자 그만 얼굴을 숙이며 두 뺨을 붉 혔다. 소봉은 한 대접의 술을 마시고 물었다.

[모용선생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을 때 그렇게 늙으신 것은 아니었겠 지?]

아주는 말했다.

[오십여 세 되었으니 늙은 편이 아니었죠.]

소봉은 말했다.

[그는 내공이 심후하며 오십여 세라면 바로 무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인데 어쩌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소?]

아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 나리께서 어떤 병으로 돌아가셨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어요. 그분은 너무나 갑자기 돌아가셨죠. 아침에 병을 얻게 되었는데 밤이 되어 공자께서 대성통곡을 하시며 뭇사람들에게 나리가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소봉은 말했다.

[음, 어떠한 급성병의 증세로 돌아가셨는지 모르겠군. 애성하군, 애석해! 설신의가 만약 옆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모용선생의 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텐데... 너무나 애석한 노릇이오.]

그는 모용씨 부자를 대면한 적이 없었으나 다른 사람이 그 부자의 언행과 성격에 대해서 논하는 말들을 듣고서는 흠모하는 마음이 우러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아주와의 관계도 있고 해서 더욱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아주는 말했다.

[그 날 모용 큰 나리께서는 공자와 그 역근경을 논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죠. '달마대사의 역근경을 나는 보지 못했지만 무한의 도리로 추측해 볼때 소림사가 그토록 커다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바로 그 역근경에서 연유했다고 본다. 그 칠십 이가지의 절기가 무섭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일흔 두가지 무공으로 뭇 영웅호걸들을 이끌고 천하무학의 으뜸이 될 수는없다.' 그리고 큰 나리께서는 공자에게 조상대대로 전해져 오는 무공을 믿고소림제자를 얕봐서는 안 되며 소림사의 역근경이 있는 이상 어쩌면 자질이 뛰어난 승려가 있어서 역근경에 통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타이르셨죠.]

소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고소의 모용씨는 천하의 명성을 떨치면서도 오만무례하게 우쭐대지 않는구 나! 실로 보기 드문 일이다.)

아주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리께서 다시 말씀하셨죠. 그 분은 한평생 천하 무학이라면 모조리보았는데 애석하게도 대리 단씨의 육맥신검 검보와 소림파의 역근경만을 보지 못해서 그야말로 한평생 가장 유감스런 일이라고요. 오라버니, 모용 큰나리께서 그 두가지의 무공을 함께 나란히 놓고 논한 것으로 미루어 볼때 대리 단씨의 육맥신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소림의 역근경부터 착수해야 될 것 같아요. 만약 역근경을 소림사의 보리원에서 훔쳐내와 몇년 동안역근경의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육맥신검이든 칠맥귀도이든간에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녀는 입가에 한가닥 실날같은 웃음을 드러냈다. 소봉 은 펄쩍 뛰어 일어나면서 웃었다.

[하하하! 이런 영악한 사람 같으니라구! 그대... 그대는 원래...]

 

아주는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오라버니, 제가 그 역근경을 훔쳐 내온 것은 모용공자에게 드리려고 했던 거예요. 즉 그것을 한번 본 이후에 나리의 무덤 앞에서 태워 그 어르신의 살아생전에 가지고 있던 소원을 풀어 드리자는 것이었죠. 그러나 이제는 물론 그대에게 드려야죠.]

그러면서 그녀는 품속에서 기름을 묻힌 한 조그만 보따리를 꺼내 소봉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날 밤 소봉은 그녀가 지청화상으로 가장을 하고 보리원의 구리 거울 뒤에서 경서를 훔쳐 내던 광경을 보았으나 그 경서가 바로 소림파 최고 의 내공비결이 담긴 역근겨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리고 아주가 취현장 에서 군호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으나 뭇사람들은 그녀가 여자인지라 그녀의 몸 을 수색하지도 않았으며 현적과 현난 등 소림의 고승들은 자기들의 절에서 잃 어버린 경서가 그녀의 몸에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소 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대가 위험을 무릅쓰고 구사일생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소림사에서 그와 같은 경서를 훔쳐낸 것이 아니었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가로챌 수 있단 말이오?]

아주는 말했다.

[오라버니,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소봉은 의아하여 물었다.

[어째서 나의 잘못이라는 것이오?]

아주는 말했다.

[그 경서는 내 자신의 뜻으로 훔친 것이지 모용공자의 명을 받은 것은 아니예요. 그러니 제가 그 누구에게 주고 싶으면 줄 수 있는 것이에요. 더구나 그대가 본 이후 다시 모용공자에게 준다 하더라도 늦지는 않을겅에요. 부모의원한은 불공대천이라고 했으니 원한을 갚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음흉하고도 악랄하며 비열하고 더러운 짓이라도 해야 될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한 권의책을 빌려보는 데 있어서 어찌 우물쭈물할 수 있단 말이에요.]

아주의 그와 같은 말에 소봉은 섬칫해짐을 느끼고 그녀에게 깊히 읖을 했다.

[정말 어진 누이의 꾸지람이 옳소. 큰 일을 위하는 자가 어찌 조그만 일에 구애를 받을 수 있겠소.]

아주는 방긋 웃었다.

[그대는 본래 소림사의 제자예요. 소림파의 무공으로 은사이신 현고대사의 원한을 갚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당한 일이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소봉은 계속 그녀의 말이 옳다고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여간 고마워하지 않았고 또한 기뻐해 마지 않았다. 즉시 그는 기름먹인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그러자 한 권의 누런 책자가 나왔다. 겉장에는 구불구불한 기형문자(奇形文 字)가 씌어 있었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그리고 첫장을 펼쳤다. 그리고 보니 그 위에 글자가 잔뜩 씌어 있는데 그 글 자들은 삐뚤삐뚤했으며 어떤 것은 둥글고 어떤 것은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 는 것이 한 자도 알아볼 수 없었다. 아주는 '어마'하고 말했다.

[원래 모두 범문(梵文)이었군요. 이거 야단이네요. 저는 본래 이 책을 큰 나리의 무덤 앞에서 불태워 없애리라고 생각했고 또 시녀의 도리로 먼저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경서를 손에 넣은 이후 줄곧 펼쳐 본 적이없었어요 아, 그 화상들이 무공비법을 도적질당하고서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군요. 원래 그 누가 봐도 이와 같은 글을 이해할 수 없을테니까 말이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봉은 그녀를 달랬다.

[얻고 잃은 일에 그토록 신경을 쓸 필요는 없소.]

그는 역근경을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아주에게 건네 주었다. 아주는 말했다.

[그대의 몸에 지니고 있다해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설마 하니 우리끼리네 것 내 것을 나눈단 말이에요?]

소봉은 웃으면서 조그만 보따리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대접에 술을 따 르고 다시 마시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리며 그 누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봉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큰 길가에서 한 명의 대한이 온몸에 피칠을 하고 손에 들고 있 는 두 자루의 판부(板斧)를 마구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그 대한의 온 얼굴에 는 구렛나루가 무성했으며 위맹해 보였다. 그러나 눈초리가 흐트러졌고 행동 이 이상한 걸로 미루어 볼대 실성한 사람 같았다. 소봉은 그의 손에 들린 한 자루의 커다란 도끼가 순전히 강철로 만들어져 매우 묵직한 데도 그와 같은 도끼를 지푸라기처럼 휘두르는 것을 보고 무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소봉 은 중원 무림의 인물에 대해서 아는 바가 무척 많았다. 그러나 그 대한이 누 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대한의 도끼를 휘두르는 수법은 무척 뛰어나다. 그런데 나는 어찌하여 이와 같은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을까?)

이때 그 사내는 판부를 더욱더 빨리 휘두르며 연신 부르짖었따.

[빨리, 빨리, 빨리 원수가 찾아왔다고 주군에게 알려라!]

그는 사방으로 통하는 네 거리에 서서 두 자루의 시퍼런 판부를 옆으로치고 내려찍는 등 마구 휘드르고 있었는데 행인들은 멀찌감치 서서 구경을 하고 있 을 뿐 그 누구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대한은 몹시 황급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도끼를 마구 휘두르고 있었으나 점점 기운이 쇠 진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억지로 버티며 부르짖고 있는 것이었다.

[부형제, 그대는 빨리 물러서게! 나는 상관하지 말고 주공에게 가서 알리는 것이 중요하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충성과 의리로 주군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영웅호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토록 정력을 소모하게 된다면 반드시 지극히 심한 내상을 입고 말 것이다.)

그는 즉시 그 대한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노형, 내가 그대에게 술을 한 잔 사겠소. 어떻소?]

그 대한은 그를 노려 보더니 별안간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대악당! 나의 주군을 해칠 생각을 말아라!]

그러면서 도끼를 들더니 다짜고짜 내려찍으려고 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뭇사람들은 형세가 매우 위급한 것을 보고 모두 앗!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소봉은 대악당이란 말을 듣자 섬짓한 생각이 들었다.

(나와 아주는 바로 그 대악당을 찾아 원한을 갚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너의 원수도 알고 보니 대악당이었구나. 물론 그가 입으로 말하는 대악인을아주와 내가 대악당이라고 볼 수 없으나 어찌 됐든간에 그를 구해 놓고 보

 

자.)

그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 손을 뻗어서 그의 허리께에 있는 혈도를 짚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사내는 정신이 혼미했지만 무공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오른 손의 도끼를 훽 뒤짚더니 곧장 소봉의 아랫배를 찍으려 들었다. 이 일초는 매 우 정교하고 날렵했다. 소봉이 만약 무공에 있어서 그보다 훨씬 뛰어나지 못 했더라면 허리가 동강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즉시 왼손을 질풍과 같이 뻗 어 내어 도끼자루를 와락 잡아챘다. 그 대한은 워낙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데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는 전신을 흠칫하더니 즉시 소봉 쪽으로 몸을 날 리며 덤벼들었다. 그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원수와 함께 죽겠다는 작정 을 한 모양이었다. 소봉은 재빨리 오른 팔을 둥글게 하여 그 사내를 안았으며 안는 즉시 살짝 힘을 주어 그를 꼼작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거리에서 구 경을 하고 있던 뭇사람들은 소봉이 그 실성한 사람을 제압하게 되자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소봉은 그 대한을 반쯤 안고 반쯤 끌면서 객점의 대청으로 끌 고들어가 그를 자리에 앉히고 말했다.

[노형, 먼저 술을 한 대접 마신 후 이야기합시다.]

그리고는 주보(酒保)에게 술을 올리도록 명했다. 그 대한은 두 눈을 깜박이 지도 않고 소봉을 노려보더니 한참 후에 물었다.

[그대는... 그대는 좋은 사람이오? 나쁜 사람이오?]

소봉은 어리둥절해져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물론 좋은 사람이에요. 나 역시 좋은 사람이고 그대 역시 좋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친구예요. 그러니 우리들은 함께 가서 그 대악당을 물리치도록해요.]

그 대한은 그녀를 한번 노려보았다가 다시 소봉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웃는 듯했으나 또 한편으론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말했다.

[그...그 대악당은 어디로 갔소?]

아주는 다시 말했다.

[우리는 친구예요. 함께 그 대악당을 무찌르도록 해요.]

그 대한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대악인은 굉장히 무섭소. 빨리 가서 주군에게 알리시오! 그리고 주군에게 급히 몸을 피하라고 전하시오. 내가 그 대악당을 막을 터이니그대는 전갈하시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서둘러 판부를 휘두르려고 했다. 소봉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노형, 대악당은 아직 도달하지도 않았소. 그대의 주군은 누구이며 그는 어디에 있소?]

대한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대악당아, 이리 오너라! 나와 삼백여 초만 겨루어 보자. 우리 주군을 해칠 생각은 하지 말아라!]

갑자기 아주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쿠! 야단났구나! 우리들은 빨리 주군에게 전갈을 해야 한다. 주군께서는어디계시오? 그는 어디로 갔죠? 대악당이 그를 찾지 못하도록 해야 돼요!]

그 대한은 말했다.

[맞소. 맞소. 그대는 빨리 가서 전갈을 하시오. 주군은 소경호(小鏡湖) 방죽림(方竹林) 쪽으로 가셨소. 그대는... 그대는 빨리 소경호의 방죽림으로 가서 주군에게 보고하시오. 빨리 가시오. 빨리 가.]

그러면서 그는 연신 재촉을 하는데 지극히 초조한 듯했다. 소봉과 아주는 어 찌할 바를 몰랐다. 바로 이때 갑자기 그 주보가 말했다.

[소경호로 가는 길을 말합니까? 그 길은 가깝지 않습니다.]

소봉은 소경호란 곳이 지명이란 것을 알게 되자 재빨리 물었다.

[그곳이 어디요? 이곳에서 얼마나 되오?]

그 주보는 재빨리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라면 정말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나에게물었으니 제대로 물은 셈이죠. 저야말로 소경호 부근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천하의 일이란 정말 공교로울 때는 공교로운 것으로서 그렇기 때문에공교롭지 않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죠.]

소봉은 그가 횡설수살하며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있자 손으로 탁자를 두들 기며 큰소리로 말했다.

[발리 말하시오. 빨리 말해!]

그 주보는 본래 몇 푼의 술값이나 뜯어내자는 생각이었는데 소봉이 그와 같이 겁을 주자 감히 더 이상 끌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이 나리께서는 성질이 매우 급하시군요. 헤헤헤, 만약에 공교롭게도 나를 만난 것이 아니라면 성질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 까?]

그는 반드시 몇 마디의 쓸데없는 말을 늘어 놓아야만 속이 시원한 모양이었 다. 그러나 소봉의 안색이 곱지 못한 것을 보고는 급히 말했다.

[소경호는 이곳에서 서북쪽에 있습니다. 먼저 서쪽으로 칠 마장쯤 가게 되면십 여 그루의 버드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답니다. 네 그루가 한 줄로되어 있는데 모두 네 줄로 나누어져 있죠. 일 사는 사 이 사는 팔, 삼 사는십 이, 사 사는 십 육이라고 모두 열 여섯 그루의 커다란 버드나무가 서있답니다. 그곳에서 나리께서는 재빨리 북쪽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아홉마장쯤 나아가게 된다면 커다란 청석판(靑石板)으로 만들어진 커다란다리가 있는 것을 볼 수 잇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다리를 넘어서는 안됩니다. 그 다리를 넘게 된다면 잘못되는 겁니다. 다리를 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다리를 넘어야 하는데 그것은 왼쪽의 청석판으로 된 큰 다리를넘지 말고 오른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다리를 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작은 다리를 넘은 다음에는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북쪽으로 향하고 그랬다가 또 다시 서쪽으로 향하고는 하는데 어찌됐든간에 그 소로 (小路)를 따라 걷게 된다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이십여리하고도 일마장 반을 가게 된다면 거울과 같은 큰 호숫물을 볼 수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소경호입니다. 이곳에서 가자면 대략 사십 리 정도는 되지요. 그러나 사실은 삼십 리 하고도 팔 마장 반으로서 사십 리가 못 되죠.]

소봉은 성질을 참고서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때 아주는 입을 열었 다.

[이분 형씨께서는 정말 자세하게 알아 듣도록 말씀을 해 주시는군요. 한 마장의 길을 일 문어란 돈으로 칠 때 본래 그대에게 사십 분이란 돈을 줘야 하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숫자가 틀리게 되고 주지 않고자 하니 또 아니 줄 수가없군요. 따라서 일 팔은 팔이고 이 팔은 십 육, 삼 팔은 이삽 사에, 사 팔은삼 십이, 오 팔은 사십이라고 사십 리에서 다시 한 마장 반을 빼게 된다면 삼삽팔 문 반이 되겠군요.]

그리고 그녀는 서른 아홉 개의 동전을 헤아려 꺼냈다. 그리고는 마지막 한 개 를 예리한 도끼날에 자국이 나도록 한번 갈더니 두 손가락으로 툭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게 쪼갰다. 그리고 주보에게 삼십 팔 문과 반쪽의 동전을 내밀었다.

소봉은 우스꽝스럽게 여기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인은 기회만 있으면 언제나 한번씩 장난을 하는군!)

이때 도끼를 휘두르던 대한은 두 눈으로 곧장 앞만 쳐다보며 여전히 재촉을 해댔다.

[빨리 가 전갈을 하시오. 늦었다가는 전갈을 할 수 없게 될 것이오. 대악당은무섭단 말이오.]

소봉은 물었다.

[그대의 주군은 누구시오?]

그 대한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 주군은... 우리 주군은... 그는... 그는... 그가 간 곳을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되오. 그러니 그대 역시 가지 않는 것이 좋겠소.]

소봉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성씨가 뭐요?]

그 대한은 대답했다.

[나의 성은 고(古)씨요. 아이쿠, 나의 성은 고씨가 아니오.]

소봉은 속으로 의심이 생겼다.

(혹시 이 사람은 간교한 계책을 꾸며서 일부러 나를 소경호로 가도록 유인하는 것이 아닐까? 어째서 고씨라고 말해 놓고는 다시 고씨가 아니라고하지?)

그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만약 적이 그를 보내 나를 속여 그곳으로 가게 만든다면 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바로 적을 찾고 있었으니 소경호가 용담호혈이라하더라도 이 소봉이 어찌 두려워하랴.)

그는 아주에게 말했다.

[우리는 소경호로 가서 살펴봅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 형씨의 주인이 만약 그곳에 있다면 아마도 능히 찾아 낼 수 있을 것이오.]

이때 주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소경호의 사방은 황량한 들판에 불과하며 볼 만한 것이 없답니다. 두 분이 풍경을 구경하시고 견문을 넓히시자면 이곳에 대가집 화원이 있읍죠. 그 화원에는 정자와 누각이 세워져 있어 볼 만한 구경거리를...]

소봉은 손을 저어 그가 더 이상 잔소리를 늘어 놓지 못하도록 하고는 그 대한 에게 물었다.

[고형은 지쳤을 테니 이곳에서 잠시 쉬도록 하시오. 나는 대신 그대의 주군에게 대악당이 곧 들이닥친다고 전갈을 하겠소.]

그 대한은 말했다.

[정말 고맙소. 정말 고마워. 이 고모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소. 나는그 대악당을 막아서 이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손을 뻗혀서는 판부를 들려고 했다. 그러 나 그는 기운이 소모될 대로 소모되었고 두 팔이 시큰거려 도끼 자루를 꽉 쥐 긴 했으나 이미 들어올릴 힘은 하나도 없었다. 소봉은 말했다.

[노형은 역시 쉬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는 방값과 술값을 치루고 아주와 함게 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주보 가 말한 대로 큰 길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갔다. 칠팔 마장을 나가게 되자 아 니나 다를까. 큰 길 옆에 네 그루의 버드나무가 한 줄로 서 있었는데 모두 네 줄로 열 여섯 그루의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었다.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 주보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지만 그 가은 잔소리에도 좋은 점은 있군 요. 이곳이 틀림없을 것 같아요. 그렇죠? 아, 그런데 저것은 무얼까요?]

그녀는 손을 뻗어 한 그루의 버드나무를 가리켰다. 나무 아래에 한 농부가 나 무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두 발을 흙탕물 속에 집어 넣고 있었다. 본 래 이 같은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그 농부의 한쪽 뺨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고 어깨죽지에는 광채가 번쩍번쩍 나는 한 자루의 숙 동곤(熟銅棍)을 매고 있었다. 보기에도 그 무게는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 소 봉은 그 농부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크게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한 내상을 입은 듯했다. 소봉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씨, 우리는 판부를 쓰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소경호 쪽으로 전갈을 하러 가는 길이오. 그런데 소경호로 가는 길은 이쪽이 맞소?]

그 농부는 고개를 쳐들더니 물었다.

[판부를 쓰는 친구는 죽었소, 살았소?]

소봉은 말했다.

[그는 그저 기력을 소모했을 뿐 큰 탈은 없소.]

그 농부는 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천지신명에게 감사드립니다. 두 분은 북쪽으로 나가도록 하시오. 전갈을 해준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

소봉은 그의 말씨가 결코 흔히 보는 시골 농사꾼의 말씨가 아닌 것을 보고 물 었다.

[노형의 존성은 어떻게 되시오? 그 판부를 쓰는 사람과는 친구인가요?]

그 농부는 말했다.

[이 몸의 성은 부(孵)씨라오. 귀하는 빨리 소경호 쪽으로 달려 가시오. 그 대악당은 이미 그쪽으로 갔쏘.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 소.]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몸이 다친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만약 적이 나를 끌어들이려고 파놓은 함정이라면 들인 밑천이 정말 적지 않구나.)

그런데 그의 모습을 보니 매우 성실하고 소박해 보였다. 마음속으로 애석하게 여기며 말했다.

[부형, 그대가 입은 상처는 가볍지 않구려. 대악당은 무슨 무기를 써서 그대를 해쳤소?]

그 사람이 말했다.

[한 자루의 철봉(鐵棒)이었소.]

소봉은 그의 가슴팍 쪽에서 끊임없이 선혈이 스며나오는 것을 보고 그의 앞섶 자락을 풀어헤치고 살펴보았다. 그리고 보니 그의 가슴팍은 구멍이 뚫려 있었 다. 그 구멍은 손가락 크기 정도였으나 꽤 깊은 편이었다. 소봉은 손가락을 뻗어 잇따라 그 상처 사방의 몇 곳 대혈을 짚어 피가 멎고 통증이 줄어들도록 해 주었다. 아주는 그의 옷자락을 찢어서 그의 상처를 싸메 주었다. 그 부가 라는 사내는 말했다.

[두 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바이오. 저는 두 분이 한시 바삐 소경호로 가서 저의 주군에게 전갈을 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소봉은 물었다.

[귀하의 주군이란 분은 성이 어떻게 되고 이름이 어떻게 되시며 모습은 어떠하신지.]

그 사람은 말했다.

[소경호에 가면 호수 서쪽에 대나무밭이 있으며 대나무숲 속에 몇 칸의 대나무로 만든 집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오. 귀하는 그 집으로 가서 천하제일이라는 대악당이 왔으니 빨리 피하라고 하시오. 몇 번 크게 부르짖기만 하면 되오. 그리고 그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우리 주군의 이름은 그리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천하제일의 대악당이란 말인가? 설마하니 사대악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단연경을 가리키는 것이란 말인가? 이 사내의 말투로 볼 때 더 말하고 싶지않은 모양이니 더 물어 볼 것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대뜸 경계하던 마음을 풀게 되었다.

(만약 적이 나를 유인해 가는 것이라면 자연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말을 이치에 맞도록 꾸며대어 결코 나로 하여근 의심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우물쭈물하면서 사실대로 말하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결코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좋소. 귀하의 분부대로 하리다.]

그 대한은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꿇어엎드려서는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 다. 소봉은 말했다.

[부형은 너무 예의를 차릴 필요 없소.]

그리고 그는 오른손으로 그 사람을 부축해 일으키며 왼손으로는 자기의 얼굴 을 문질러 화장한 것을 지워 버리고는 본래의 모습으로 그와 마주보며 말하였 다.

[불초는 거란아니 소봉이라 하오. 다음에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아주의 손을 잡고서는 재빨리 그 자 리를 떠났다. 아주는 말했다.

[이제 우리는 변장할 필요가 없어졌나요?]

소봉은 말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 거친 대한이 무척 마음에 드는구려. 그와 사귀고 싶다는 마음이 든 이상 가짜 얼굴로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소.]

아주는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저 역시 여자의 옷차림으로 되돌아가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개울가로 가서는 총총히 얼굴에 변장한 것을 씻어 내고 모자를 벗어 삼단 같은 머리채를 드러냈다. 그리고 넓다란 장포를 벗자 안에 입고 있 는 여자의 옷차림이 드러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단숨에 아홉 마장 반을 달려 갔다. 멀리서 보니 높다랗게 솟아 있는 청석교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 니 다리위에 한 사람의 서생이 엎드려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리 위에 한 장의 커다란 백지를 펼쳐 놓고 다리의 청석을 벼루로 삼아 먹물을 갈고 있었다. 그 런데 그 서생은 손에 붓을 쥐고는 바로 백지 위에다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봉과 아주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종이와 먹, 그리고 붓을 가 지고 황야에 놓여 있는 다리 위에 와서 글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제서야 그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은 바로 사방의 풍경이 었다. 조그만 다리에 냇물이 흐르고 있고 오래된 나무와 멀리 보이는 산이 모 두 그림 속에 담겨 있었다. 그가 다리 위에 엎드려 있는 자세는 결코 소봉과 아주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림 속의 풍경은 분 명히 두 사람이 보는 방향으로 되어 있었다. 상반된 방향에서 그림을 그려가 고 있는 것이었다. 소봉은 서화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아주는 오랫동안 고소 모용씨 집안에서 지내왔기 때무닝 뛰어난 서화를 본 적이 많았 다. 따라서 그 서생이 그리는 것이 거꾸로 된 그림으로서 결코 단청의 조예가 깊다고는 할 수 없으나, 거꾸로 그리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고 아 픗로 나가 그에게 몇 마디 묻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헌데 갑자기 소봉은 가 볍게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오른쪽의 나 무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그 서생이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내가 거꾸로 그리는 그림을 보고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구려. 설마하니 불초의 이 얄팍한 재간이 두 분의 뛰어난 눈을 더럽히기라도 했단 말 이오?]

아주는 말했다.

[공자게서는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고 떳떳한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았소. 성인군자는 거꾸로 된 그림을 보고자 하니 않는 법이오.]

그 서생은 껄껄 웃으며 백지를 거두더니 말했다.

[그 말에는 이치가 있구려. 다리를 건너도록 하시오.]

소봉은 그의 의도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백지를 다리위에 놓고서 남 의 이목을 끌고 있는 것은 첫째로 주의를 끌려는 것이고, 둘째는 허허실실의 농간을 부려 일부러 상대방으로 하여금 청석교 다리 위를 지나도록 하자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우리는 소경호 쪽으로 가려 하오. 청석교를 지나게 된다면 길을 잘못 들게 되는 것이오.]

그 서생은 말했다.

[청석교로 가게 되면 그저 빙 돌게 되어 오륙 십 리를 돌게 되는 것이지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마찬가지요. 그러니 두 분은 역시 청석교를 지나는 것이 좋겠소.]

소봉은 말했다.

[왜 가까운 것을 내버려 두고 오륙 십 리나 되는 먼 길을 돌아 가야된단 말이오?]

그 서생은 웃으며 말했다.

[바쁜 길은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설마 하니 그 유명한 속담도 모른단 말이오?]

아주 역시 그 서생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즉시 나무다리위로 올라섰다. 소봉도 따라 올 라갔다. 두 사람이 나무다리 한복판에 이르게 되었을 때였다. 갑자기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게 나무의 판대기들이 모조리 분질러져서는 냇물 속으로 떨어 지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들의 몸뚱아리도 별수없이 냇물쪽으로 떨어지게 되 었다. 헌데 소봉은 왼손을 뻗쳐 아주의 허리를 얼싸안더니 오른쪽 발로 다리 의 나무 판대기를 한번 차고서는 그 힘을 빌어서 앞으로 달려나가 맞은 편 언 덕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리고 곧 일장을 되돌려서는 적이 등 뒤에서 암습 해오는 것을 방비했다. 그 서생은 껄껄 소리내어 웃더리 입을 열었다.

[하하하! 훌륭한 무공이오. 훌륭한 재간이구려. 두 분이 급히 소경호로 가는이유는 무엇인가요?]

소봉은 그의 웃음소리에 놀람과 당황한 빛이 서려 있는 것을 느끼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의 얼굴은 청수하고 우아한 편인데도 대악당과 한패로구나!)

그리하여 그는 그를 상대조차 하지 않고 아주와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수마 장도 가지 못했을때 등 뒤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바 라보았다. 바로 그 서생이 뒤따라 오고 있었다. 소봉은 몸을 돌리고 준엄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귀하는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시오?]

그 서생은 말했다.

[불초 역시 소경호 쪽으로 가는 길이니 두 분과 동행을 하게 되었구려.]

소봉은 말했다.

[그렇다면 매우 잘 되었소.]

그리고 그는 왼손으로 아주의 허리를 안고 진기를 끌어모아서는 몸을 날렸다.

그야말로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가는데 전혀 기척이 들리지 않았고 또한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 서생은 죽어라 하고 달려오는데도 소봉과 아주와는 점차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그의 무공이 평범한 것을 보고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여전히 진기를 돋구어 표연히 몸을 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주를 안고 있었으나 여전히 서생보다는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리하여 밥 한 그릇 먹을 시진도 되지 않아서 서생의 종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록 떨쳐 버렸다.

작은 나무다리를 지나고 나자 길은 무척 협소해졌다. 그리고 기다란 풀들이 허리까지 올라와 길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만약 그 주보가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길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 약 반 시진을 나아가자 맑은 호수가 나타났다. 소봉은 발걸음을 늦추고 호수 앞으로 다가섰 다. 호숫물은 파란 옥과 같았으며 물결은 잔잔하여 거울과 같아 정말 소경호 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가 대나무숲을 찾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호수 왼쪽의 꽃밭 속에서 그 누가 깔깔거리며 가볍게 두 번 웃는 소리가 들렸 다. 그리고 한 개의 돌이 날아갔다. 소봉은 그 돌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았 다. 그러고 보니 호숫가에 한 어부가 머리에 삿갓을 쓰고 낚시를 드리우고 있 었다. 헌데 그 낚시 끝에는 막 한 마리의 청어(靑魚)가 낚아져 올라가는 참이 었는데 그 한 개의 돌은 정확하게 낚시줄에 맞았다. 그리고 '삭'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게 낚시줄이 두 토막으로 끊어지면서 청어는 다시 호수 속으로 달아 나고 말았다. 소봉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저 사람의 손목 힘은 매우 기괴(奇怪)하다. 낚시줄은 부드러워 힘이 실리지않는데 만약 비도나 수전(袖箭) 따위로 낚시줄을 자른다면 하등 이상할 것이없다. 그런데 둥그런 한 개의 돌이 낚시줄을 잘라 놓다니, 이 사람이 사용하는 수법은 결코 중원땅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돌을 던진 사람의 무공에 사악한 기운이 대단하고 순전히 방문좌도의 수법에 속한다고 느끼며 속으로 다시 생각했다.

(십중팔구 대악당의 제자나 부하겠지. 그리고 그 웃음소리로 보아 젊은 여자인 것 같다.)

이때 그 어부 차림의 사람은 낚시줄이 끊어지자 역시 깜짝 놀란듯 낭랑히 말 했다.

[그 누가 이 저(猪)가를 희롱하는 것이오? 어디 한번 모습을 드러내 보시오.]

그러자 삭삭 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꽃나무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한 소 녀가 걸어나왔다. 온 몸에 자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열 대여섯 살 되는 나이 로 아주보다는 한두 살 아래로 보였다. 한 쌍의 커다란 눈망울이 또르륵 구르 는데 얼굴 가득 장난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흘낏 아주를 쳐다보더니 그 어부를 아랑곳하지 않고 훌쩍 뛰어서는 아주 앞으로 다가오며 그녀의 손을 잡 고 웃으며 말했다.

[이 언니는 정말 예쁘게 생겼군요. 저는 언니가 무척 좋아요.]

그 말하는 소리는 약간 혀가 감기는 듯 발음이 정확하지 못했다. 흡사 외국사 람이 처음 중원땅의 말을 배울 때 내는 음성과 같았다. 아주는 소녀가 활발하 고 처진한 것을 보고 웃었다.

[그대야말로 예쁘게 생겼는걸. 나는 더욱더 그대가 좋아.]

아주는 오랫 동안 고소땅에 살아 왔으므로 이때 중원의 관화(官話.표준말이라 는 뜻)로 말했는데 음이 부드럽기는 하나 그렇게 정확한 발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어부는 화를 내려다가 상대방이 활발하고 귀여운 소녀인 것을 보 자 그만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누르는 듯이 말했다.

[이 아가씨는 정말 짓궂은걸? 하지만 낚시줄을 자르는 재간은 대단하더구만!]

소녀는 말했다.

[낚시질이 뭐가 재미있어요? 답답하지 않나요? 당신이 고기를 먹고 싶다면 이낚시대로 고기를 찔러 잡는 것이 더 쉽지 않겠어요?]

그러더니 그녀는 어부의 손에서 낚시대를 받아들고는 아무렇게나 물을 향해 찔렀다. 그 낚시대의 끝은 한 마리 백어(白魚)의 배를 꿰뚫었다. 낚시대를 들 자 그 고기는 여전히 몸을 뒤채고 있었다. 그런데 상처에서 한 방울의 선혈이 파란 물 위로 떨어졌다. 붉고 파란 빛이 서로 대조를 이루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영롱한 아름다움 때문에 잔인한 느낌이 두드러져 보이기도 했다. 소봉은 그녀가 아무렇게나 찌르는 것 같았지만 오른손을 먼저 왼쪽으로 살짝 기울여서는 조그만 원을 그린 이후 다시 오른쪽 방향 아래로 찔러 내는 것을 보고 그 수법이 퍽이나 교묘하고 자세가 아름답기는 하나 적 을 상대로 해서 공격과 방어의 수법으로 사용하기에는 역시 한걸음 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집안, 어느 문파의 무공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녀는 잇따라 낚시대를 쳐들며 여섯 마리의 청어와 백어를 찔러댔 다. 그러자 하나의 낚시대에 몇 마리의 고기가 꿰이게 되었다. 다음 순간 그 녀는 아무렇게나 다시 한번 낚시대를 떨쳐서는 그 낚시대에 꿰어져 있던 고기 들을 모조리 호숫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어부는 얼굴에 불쾌한 빛 을 띠우고 말했다.

[나이 어린 아가씨가 하는 일이 어찌 그토록 악랄하단 말인가. 그대가 고기를잡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고기를 찔러 죽이고서 먹지도 않으니 그야말로 무고한 살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소녀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나는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살생하는 것이 좋아요. 당신이 어쩔테예요?]

그리고 손에 힘을 주어서는 그의 낚시대를 분질러 버리려고 했다. 헌데 그 낚 시대는 매우 견고하였다. 소녀가 분질러 버리려고 힘을 주었으나 분질러지지 않았다. 그 어부는 냉소했다.

[그대가 나의 낚시대를 분지르려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되진 않을껄?]

소녀는 어부의 등 뒤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뒤에 오는 사람은 참 무섭게 생겼네요.]

그 어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사람이 보이지 않자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재빨리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때 그의 낚시대는 십여 장 밖으로 날아가더니 삭 하는 소리와 함게 호수 한복판으로 떨어져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부는 대노하여 호통을 내질렀 다.

[어디서 온 말괄량이냐?]

그리고 손을 뻗어서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으려 들었다. 그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그리고는 소봉의 등 뒤로 가서 숨었다. 그 어부는 몸을 훌쩍 날려 잡으려 들 었는데 그 신법이 매우 민첩했다. 그런데 소봉이 흘낏 쳐다보는 순간 그 소녀 의 손에는 한 가지의 물건이 들려 있었다. 마치 한 조각 투명한 삼베조각 같 았는데 도대체 무슨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어부가 그녀에게로 덮쳐들 자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는 발밑이 미끄러지면서 털썩 하고 쓰러지고 말았 다. 곧이어 그의 몸뚱아리는 한 덩이리로 움츠러들었다. 소봉은 그제서야 그 소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지극히 가느다란 실날을 얽어서 만든 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실날 같은 어망은 마치 머리카락처럼 가늘었으며 또 한 투명하고 질기기 이를 데 없었다. 거기다가 어떤 물건에 부딪히게 되면 오 그라드는 성질이 있었다. 따라서 그 어부가 그 그물 속에 들어가서 몸을 바둥 거리면 바둥거릴수록 그물은 더욱더 조여 들었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어부는 하나의 커다란 종자(棕子:대게 오월 단오 때 대나무잎 따위로 찹쌀을 싼 다음 다시 끈으로 묶어서는 쪄서 먹는 음식-역자)처럼 어망 속에 얽혀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어부는 날카로운 어조로 욕을 했다.

[이 계집애야!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이처럼 요사한 수법으로 나를 암습하다니!]

소봉은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그 소녀는 결코 요사한 수법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그물은 확실히 요사한 데가 있었다. 그 어부가 끊임없이 욕을 하자 그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다시 한 마디의 욕이라도 하면 나는 당신의 볼기짝을 때려 주겠어 요.]

그 어부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즉시 입을 다물었다. 바로 이때였다. 호수 서쪽 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형제, 무슨 일인가?]

그리고 호숫가의 소롯길로 한 사람이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그 사람은 얼굴이 네모났으며 사십여 세에서 오십여 세가 안돼 보이는 나이로, 매우 위 풍당당한 풍채라고 소봉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산뜻한 적삼에 푸른 띠를 느슨하게 두르고 있었는데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퍽이나 소탈한 사람 인 것 같았다. 이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더니 어부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의아한 듯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어부는 말했다.

[저 소녀가 요사한 수법을 써서...]

그 중년인은 고개를 돌려 아주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소녀가 웃으며 말했 다.

[그녀가 아니고 나예요.]

그 중년인은 '아'하더니 허리를 굽혀서는 그 어부의 커다란 몸뚱이를 손으로 받쳐들고는 그물을 벗겨 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그물은 매우 이산한 재료로 만들어진 듯 그가 힘주어 잡아당기면 잡아당길수록 더욱더 오므라들어쓰며 아 무리 애써도 풀어지지 않았다.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가 세 번만 저에게 '항복했소'라고 말한다면 그를 놔 주겠어요.]

그 중년인은 말했다.

[그대가 우리 저형제에게 죄를 짓게 된다면 좋은 결과는 없을걸?]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나는 좋은 결과를 바라지도 않아요. 결과란 나쁘면 나쁠수록 재밌는걸요.]

그 중년인은 왼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들었다. 그 소녀는 별안간 뒤 로 물러섰다. 그리고 몸을 날려 피하려고 했으나 그녀의 동작도 빨랐지만 중 년인의 손은 더욱 빨랐다. 손을 쑥 내려뜨리더니 어느덧 그녀의 어깨죽지를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그 소녀는 어깨를 비스듬히 기울여서 상대방의 손에 실린 힘을 해소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 중년인의 왼손은 이미 찰떡처럼 그 녀의 어깨죽지에 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 소녀는 간드러진 어조로 소리 를 내질렀다.

[빨리 손을 놔요!]

그리고 왼손으로 주먹을 쥐어 때리려 했다. 그러나 그 주먹을 겨우 한 자 정 도 뻗는 순간 팔에서 힘이 빠지며 팔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깜짝 놀 라 부르짖었다.

[당신은 무슨 요사한 수법을 펼치는거예요? 빨리 나를 놔 주세요!]

중년인은 미소했다.

[그대가 잇따라 세 번 저선생에게 '항복했어요'하고 말하고 다시 우리 형제의몸에 뒤덮힌 그물을 풀어 준다면 그대를 놔 주지.]

소녀는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이 나의 비위를 거르시게 된다면 좋은 결과는 없을거예요.]

중년인은 미소했다.

[결과란 나쁘면 나쁠수록 더욱 재미있지.]

그 소녀는 다시 힘을 주고 바둥거렸다. 그러나 좀처럼 몸을 뺄수가 없었다.

오히려 전신이 시큰거려 왔고 맥이 풀렸으며 다리에서도 힘이 빠졌다. 그리하 여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염치가 없군요. 남의 말을 흉내내다니. 좋아요, 내가 말하겠어요. 내가 말하겠어요. 저는 선생에게 항복했어요. 저는 선생에게 항복했어요.]

그런데 그녀가 선생이라 말할 때의 '선'자 발음이 똑똑하지 않았다. 마치 선 생이 아니라 차생(此生)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며 따라서 그 한 마디는 저는 축생(畜生:차자나 축자는 원래 중국음에 있어서는 비슷함-역자)에게 항복했어 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중년인은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손을 그녀의 어깨죽지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빨리 그물을 풀어다오.]

그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쉬운 일이예요.]

그녀는 어부의 곁으로 가더니 몸을 굽혀 어부의 몸을 얽고 있는 그물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왼손을 소맷자락 안에서 가볍게 쳐들었다.

순간 한 무더기의 파란 빛이 중년인에게로 번개같이 쏟아졌다. 아주는 아! 하 는 소리를 터뜨렸다. 소녀가 암기를 던지는 수법은 지극히 악랄했고 중년인은 소녀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적중되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봉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는 이 중년인이 대뜸 손을 뻗쳐서는 그 소녀를 꼼작 못하도록 제압하는 것을 보고 내공이 심후하며 무공이 고강하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 조그만 암기가 중년인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하리라고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중년인은 소맷자락을 한번 떨쳐 한 줄기의 내경을 쏟아내더니 그 한 무더기의 파랗고 가는 바늘을 모조리 호숫가의 진흙 속으로 튕겨나가 박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가느다란 바늘의 끝을 보고 그 바늘에 묻힌 독이 심히 무서운 것으로 서 조금만 스쳐 피가 나오기만 해도 목숨을 빼앗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와 그 소녀가 처음으로 만난 사이이고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째서 이와 같은 독수를 쓴 것일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울 화가 치밀어 조그만 계집애의 버릇을 고쳐 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 다. 따라서 오른손 소맷자락을 잇따라 휘둘렀다. 소맷자락에 실린 힘에는 내 공이 실려 있어 휙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 소녀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휙 날아서는 첨벙하고 호수속으로 떨어졌다. 중년인은 즉시 발끝으로 땅바닥 을 차며 버드나무 아래에 매어 있는 조그만 배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노를 몇 번 저어 그 소녀가 떨어진 곳으로 배를 저어갔다. 그녀가 물 위로 솟아오 르게 되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 들어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소녀는 물에 떨어질 때 어마! 하는 소리를 냈을 뿐 호수 속으로 떨어진 이후에 종적 이 사라지고 말았다. 본래 사람이 물에 빠지면 반드시 솟아오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시 가라 앉게 되는데 그와 같아 몇 번을 거듭하다가 잔뜩 물을 마시 게 된 이후에야 떠오르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그 소녀는 일종의 돌처럼 그대 로 물 속으로 떨어져서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 중년인은 그만 초조해지고 말 았다. 본래 그는 그녀를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린 나이에 행동 이 그토록 악독한것을 보고 벌을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 던 소봉과 아주도 자맥질에는 그야말로 먹통이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 중년인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성(阿星), 빨리 나오시오.]

멀리 대나무밭 쪽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예요? 난 나가지 않겠어요!]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의 음성은 간드러지면서도 어느 정도 뻣뻣한 데가 있는 것으로 보아아무래도 짓궂은 인물인 것 같다. 아주나 물에 빠진 소녀와 비슷한 사람일 것이다.)

이때 중년인은 부르짖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어! 빨리 나와 사람을 구하도록 하시오!]

그 여인은 다시 소리쳤다.

[혹시 그대가 빠져 죽게 된 것이 아닌가요?]

그 중년인은 부르짖었다.

[농담하지 마시오! 내가 빠져 죽게 되었다면 어떻게 말을 하겠소? 빨리 사람을 구하도록 합시다.]

그 여자는 소리쳤다.

[그대가 빠져 죽게 되었다면 제가 구하러 가죠. 그러나 다른 사람이 빠져 죽게 되었다면 저는 그저 구경만 하겠어요.]

중년인은 말했다.

[정말 안 오겠소?]

그러면서 그는 뱃머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지극히 초조한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말했다.

[만약 남자라면 제가 구하겠어요. 그러나 여자라면 백 명이 물에 빠져 죽는다하더라도 나는 그저 박수를 보낼 뿐 결코 구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삽시간에 호숫가에 이르고 있었 다. 소봉과 아주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에 찰싹 다라붙은 녹색의 잠 수복을 입고 있어 더욱더 허리가 잘룩해 보였다. 그리고 한 쌍의 새까맣고 커 다란 눈동자는 매우 밝아 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았으며 눈망울을 굴려 이리저리 쳐다보는 모습은 영민하기 이를데 없었다. 마치 그 두 눈으로도 말 을 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리고 용모는 퍽이나 아름다웠으며 입가에는 한 가 닥의 엷은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나이는 약 사십 오륙 세 정도 되어 보였 다. 소봉은 그녀의 음성과 말투를 들었을 때 기껏 해 봐야 스물 한 두 살 밖에 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결코 젊지 않은 부인인 것을 보고는 약 간 놀랐다. 그녀가 잠수복을 완전히 차려 입고 나온 것을 보면 그 중년인이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부르짖자 곧바로 옷을 갈아입은 것 같았다. 그 중년인 을 놀리려고 딴전을 피운 것 같았으나 사실은 재빠른 솜씨로 옷을 갈아 입는 동안에 농담을 주고받은 것이었다. 그 중년인은 그녀가 와준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부르짖었다.

[아성, 빨리 빨리... 내가 실수하여 그녀를 호수에 빠뜨렸어! 그런데 뜻밖에도 물 위로 떠오르지 않는구려.]

아성이란 부인은 말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어요. 남자라면 나는 구하겠고 만약 여자라면 더 말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소봉과 아주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부도(婦道)를 지키는 여인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남자를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속에서 남자들이 허둥대며 자기를 구하려는 사람을 끌어안으려고 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아녀자의 신분에 어긋나는 짓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인은 어찌하여 남자는 구하겠다고 하면서 여자는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중년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아! 이제 열 너댓 살밖에 되지 않는 소녀이니 쓸데없는 의심은 하지 마오.]

그 부인은 말했다.

[나이 어린 소녀이면 어때요? 당신은 그저 열 너댓 살의 소녀이고 칠팔 십 세의 늙은 할머니고 모조리 건드려...]

본래 그녀는 건드려 보지 않았느냐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흘낏 보니 소봉과 아주가 옆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손을 뻗혀서 자기의 입술을 틀어막으며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그 중년인은 뱃머리에서 읍을 하더니 말 했다.

[아성, 빨리 그녀를 구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그대가 무슨 말을 하든 내 듣기로 하겠소.]

그 아름다운 부인은 말했다.

[정말 내 말대로 하겠어요?]

중년인은 급히 말했다.

[그렇소. 아, 이 소녀가 아직도 떠오르지 않는데 정말 그 소녀의 목숨을 빼앗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면...]

그 아름다운 부인은 말했다.

[당신더러 영원히 이곳에서 살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내 말에 따르겠어요?]

중년인은 얼굴에 겸연쩍은 빛을 띠었다.

[그건... 그건...]

그 부인은 말했다.

[당신은 자기가 한 말에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군요? 그저 입발린 소리나 달콤한 말만으로라도 나를 기쁘게 해 주는 것도 좋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은그것마저도 마다하는군요.]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만 눈가를 붉혔다. 음성 역시 목이 메이는 듯했다. 소봉 과 아주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남녀는 나이가 젊지 않았으나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마치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젊은 연인 같았으며 그 모양으로 보아 부부 사이 같지도 않았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이 있는데도 전혀 거리낌없이 아무 말이든 가리지 않고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생사가 달려 있는 촉급한 이때에도 그녀는 전혀 급할 것도 없는 일을 두고 이 러쿵저러쿵하고 있지 않는가? 중년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배를 저어 돌아오며 말했다.

[그만 두지 그만 둬. 구할 필요가 없어. 그 소녀는 악독한 암기로 나를 암살하려고 했소. 죽었으면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우리 돌아갑시다.]

그 부인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째서 구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꼭 구해야 겠어요.

그녀가 암기로 당신을 쏘았다고요? 그거 참 잘 되었군요. 어째서 당신을 죽이지 못 했을까? 애석하군! 애석해!"

그녀는 히히 웃으며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자맥질은 정말 훌륭했다. 쏴악, 하는 가벼운 음향만 낼 뿐 물방울 하나 튀는 것 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덧 물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곧이어 철썩, 하는 소리가 나면서 호숫물이 갈라졌고 그 미부인은 두 손으로 자색 옷의 소녀를 안고 머리를 물밖으로 내밀었다. 그 중년인은 크게 기뻐서 재빨리 조그만 배를 저어 아름다운 부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중년인은 부인 곁으로 다가가자 손을 뻗어 그 자색 옷의 소녀를 안아 들려고 했다.

그녀는 두 눈이 꼭 감겨져 있어 이미 숨이 끊어진 듯하자 그의 얼굴에 안타 까운 빛이 떠올랐다. 그의 표정을 본 부인은 호통을 내질렀다.

"이 소녀의 몸에 손대지 말아요! 당신과 같은 사람은 너무나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어요."

중년인은 짐짓 화가 난 듯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나는 한평생 여색을 밝힌 적이 없소."

그 미부인은 쳇, 하고 웃으면서 그 소녀를 안은 채 배 위로 몸을 솟구쳐 뛰어 오르며 말했다.

"그래요, 그래. 언제나 색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암퇘지 같은 못난 계집애 들만 좋아하더라. 어마......"

그녀는 소녀의 심장이 있는 부위를 더듬어 보고 심장이 멎은 것을 알고 놀라 부르짖었다. 호흡이 이미 멎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배가 불룩 하게 솟아 오르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물은 얼마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이 미부인은 자맥질에 뛰어났고 또 물의 성질을 잘 알았다. 잠시 동안에 사람이 익사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소녀는 체질이 약해서 그만 죽고 만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얼굴에 미안한 빛을 띠우면서 소녀를 안고 뭍으로 뛰어 오르더니 말했다.

"빨리, 빨리, 방법을 강구해서 이 소녀를 구하도록 해요."

그녀는 그 소녀를 안은 채 대나무밭 쪽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중년인은 몸을 굽혀 어부를 들어올리더니 소봉에게 말했다.

"형씨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그리고 이곳까지 왕림한 것은 무슨 볼일이 있어서인가요?"

소봉은 그의 풍모가 의젓하고 그 소녀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는데도 여전히 침착한 것을 보고 속으로 탄복하며 말했다.

"불초는 거란 사람으로 소봉이라 합니다. 두 분 친구의 부탁을 받고 이곳에 전갈하러 왔소이다."

교봉의 이름은 본래 강호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본명을 알게 된 이후 소봉이라 자칭했으며 거기다가 거란 사람이라는 사실도 숨기지 않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중년인은 소봉이란 이름에 대해 매우 낯선 듯했다. 그는 거란 사람이란 말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물었다.

"소 형에게 부탁을 한두 분 친구는 어떤 분이죠? 그리고 무슨 전갈을 하라고 했습니까?"

소봉은 말했다.

"한 분은 한쌍의 판부를 쓴는 사람이었고 한 분은 한 자루의 숙동곤을 쓰는 사람인데 스스로 부씨라고 했소이다. 두 사람 모두 다 상처를 입고 있었소이다."

중년인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 두 사람의 상처는 어떠합니까? 두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소 형, 그 두 사람은 이 형제와 절친한 사이이니 수고스럽지만 가르쳐 주시오. 내가....

내가... 즉시 달려가 구해야겠소이다."

그 어부는 말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소봉은 그들 두 사람이 의리를 매우 중시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우러러 보는 마음이 생겨서 말했다.

"그 두 사람은 상처가 심한 편이나 목숨을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바로 저 쪽 고을에 있습니다...."

그 중년인은 깊이 읍을 하더니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어부를 들어올린 채 발걸음을 빨리하여 소봉이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가려고 했다.

바로 이때였다. 대나무밭 쪽에서 아름다운 그 부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빨리 와요. 빨리 와요. 빨리 와서 보세요.... 이것이 뭐죠?"

그때 갑자기 저쪽 길에서 나는 듯이 한 사람이 달려오며 부르짖었다.

"주군, 그 누가 와서 시비를 일으키지 않던가요?"

그는 바로 청석교 위에서 먹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 서생이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저 서생이 내가 전갈하는 것을 막으려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관부를 쓰는 사람이랑 숙동곤을 쓰는 사람과 한 패였군! 그들이 말하는 주군은 바로 이 중년인이겠군!"

이때 그 서생 역시 소봉과 아주를 발견했다. 그는 소봉과 아주가 중년인의 곁에 서 있는 것을 알고 어리둥절해 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어부가 그물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놀람과 분노에 차서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것이죠?"

이때 대나무밭 쪽에서 그 미부인의 음성이 더욱 황급하게 들려왔다.

"아직도 안 오시는 거예요? 어마마.... 나는.... 나는......"

중년인은 말했다.

"내 가보고 오겠다."

그는 어부를 든 채 대나무밭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扁쩜 비범한 것이 즉시 드러났다. 발걸음이 날렵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또한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소봉은 한 손으로 아주의 허리춤을 잡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갔다. 그 중년인은 그를 흘낏 쳐다보더니 탄복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대나무 밭에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나무밭 속으로 몇 장 정도 걸어 들어가자 세 칸의 대나무로 만들어진 조그만 집이 서 있었는데 매우 아담했다.

그 미부인은 발걸음 소리를 듣고 서둘러 달려나오며 부르짖었다.

"빨리..... 빨리 와 보세요! 이게 무엇이죠?"

그녀의 손에는 한 조각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에 다는 조각품이 들려 있었다.

소봉은 그  금 조각이 여자들이 흔히 지니고 다니는 장식물일 분 별로 특이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날 아주가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소봉은 그녀의 품속에서 상처약을 꺼내게 되었는데 그때도 소봉은 아주에게서 모양이 비슷한 금 조각이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 중년인은 그 금조각을 몇 번 바라보더니 대뜸 안색이 크게 변해서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어디서... 어디서 난 것이오?"

그 미부인은 목메인 음성으로 말했다.

"바로 그 소녀의 목에서 벗겨낸 것이에요. 나는 그 애들의 왼쪽 어깨 위에 표시를 해준 적이 있었어요. 당신...... 직접 당신이 보세요."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중년인은 재빠른 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는 몸을 날려 역시 서둘러 달려 들어갔다. 소봉은 그 부인의 뒤를 따라 곧장 내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여자의 침실이었는데 매우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소봉은 자세히 방안을 둘러 볼 여유가 없었다.

그 자색 옷의 소녀는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는데 뻣뻣한 것이 이미 죽은 것 같았다.

그 중년인은 소녀의 소맷자락을 들어올리고 그녀의 어깻죽지를 살폈다. 그는 한번 보고 즉시 소맷자락을 끌어내렸다.

소봉은 그의 등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소녀의 어깻죽지에 어떤 표시가 되어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중년인의 온몸이 끊임없이 부르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매우 심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부인은 중년인의 오자락을 움켜잡더니 울면서 부르짖었다.

"당신의 딸이에요! 당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다니! 당신은 딸을 키우지도 못했으면서 해쳐 죽이다니..... 당신...... 당신이야말로 정말 마음이 악독한 애비예요!"

소봉은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니, 이 소녀가 바로 이 사람들의 친딸이란 말인가? 아, 그렇군! 아마도 이 소녀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곳에서 키우도록 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 금 조각과 어깨의 무슨 표시를 해두어 그녀 부모가 알아 볼 수 있도록 남겼을테지.'

그런데 별안간 아주가 눈물을 흘리며 그만 침대 위로 비스듬히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깜작 놀라 손을 뻗쳐 그녀를 부축했다. 그가 허리를 굽히는 순간 그 침대 위에 누워있던 소녀의 눈망울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눈은 이미 감겨져 있었으나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눈꺼풀을 사이에 두고서도 알아 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소봉은 아주에게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오?"

아주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억지로 웃었다.

"나는 이.... 이 아가씨가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슬픔을 느낀 거예요."

소봉은 손을 뻗어 소녀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 미부인은 울면서 말했다.

"심장이 뛰는 것도 멎었으니 살릴 수가 없어요."

소봉은 약간 내력을 일으키면서 女敾 완맥에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즉시 내력을 풀었다. 그러자 그 소녀의 체내에서 한 줄기의 내력이 오히려 이쪽으로 뻗쳐오는 거시 아닌가? 그녀는 운기 행공을 하여서 항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봉은 소리내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이렇게 짓굿은 아가씨는 정말 천하에서 보기 드물 것 같군."

미부인은 노해 말했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에요? 빨리 나가 주세요! 내 딸이 죽었는데 당신은 이곳에서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예요?"

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죽은 딸을 내가 치료하여 살려 놓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는 손을 뻗쳐서는 그 소녀의 허리께에 있는 혈도를 짚었다.

이 일지는 바로 소녀의 허리께에 있는 경문혈(京門穴)을 짚은 것이었다. 이곳은 가장 밑에 있는 늑골의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봉이 내력을 그 혈도로 투입하자 즉시 그 내력이 소녀를 간지럽게 했다.

그 소녀는 그만 견딜 수가 없어 침대 위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깔깔거리고 간드러진 웃음 소리를 냈다. 그녀는 왼손을 뻗어서는 소봉의 어깻죽지를 때리려고 했다.

그 소녀가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난 것을 보고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만 놀람과 기쁨에 휩싸였다.

그 중년인은 웃으며 말했다.

"원래 나를 놀려 주려고 한 짓이었군!"

그 미부인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말했다.

"아, 고생만 시킨 내 아이!"

그녀는 두 팔을 벌리고는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

그때 소봉은 냅다 일장을 들어 후려쳤다. 그 바람에 소녀는 곧장 침대 저쪽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소봉은 곧 한 손을 뻗쳐 그녀의 왼쪽 손목을 잡더니 냉소했다.

"어린 나이에 이토록 안랄하다니!"

그 미부인은 부르짖었다.

"그대는 어째서 우리 애를 때리는 거죠?"

만약 소봉이 자기 딸을 살려낸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즉시 손을 썼을 것 같았다.

소봉은 그 소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그녀의 손을 뒤집으며 말했다.

"보시오!"

뭇사람들은 소녀의 손가락 사이에 파란 빛이 감도는 가느다란 바늘이 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극약이 묻어 있는 바늘이 분명했다. 그 녀는 일부러 소봉의 어깻죽지를 붙잡고 매달리는 듯 하면서 그 가는 바늘을 그의 몸에다가 꽂으려고 했던 것이다.

소봉의 눈이 밝고 손이 빨라 그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으나 그 순간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 소녀는 소봉의 일장에 얼굴 반쪽이 크게 부어올랐다. 그녀는 손목을 움켜 잡히자 독침을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왼쪽 반신이 마비되고 힘이 빠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입술을 삐죽이더니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나를 업신여기는군요! 당신은 나를 업신여기는군요!"

중년인은 말했다.

"좋아,좋아, 울지 마라. 상대방이 가볍게 너를 한 대 쳤다고 해서 무슨 탈이 난다더냐? 너는 걸핏하면 극약을 묻힌 암기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자 하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소봉은 냉랭히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무형분(無形粉), 소요산, 극락자, 천심정을 사용하지 않았지?"

(음.. 한문을 이제 쓰지 않겠음....)

소녀는 울음을 멈추더니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띠우고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 그대가 어떻게 알죠?"

소봉은 말했다.

"나는 그대의 사부가 성숙노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네게 그와 같은 많은 악독한 암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뭇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성숙노괴 정춘추는 무림 의 인물들이 그 이름을 들으면 눈살을 찌푸리는 사파의 고수였다. 이 사람은 못된 짓을 도맡아 했으며 사람을 파리 죽이듯 했다. 더군다나 그의

화공대법은 전문적으로 사람의 내력을 해소시키는 수법으로서 무공을 배운 사람들이 무척이나 꺼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무공이 지극히 고강하여 그 누구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어찌됐든 그는 중원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지극히 드물어 어떤 큰 화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중년인은 얼굴에 측은하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띠우고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자, 너는 어떠헥 하여 성숙 노인을 사부로 모시게 되었느냐?"

그 소녀는 둥글고 커다란 눈을 또르르 굴리며 그 중년인을 뜯어보더니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아시나요?"

중년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방금 우리들이 한 말을 너는 듣지 못했느냐?"

그 소녀는 고개를 흔들어 미소했다.

"나는 죽은 척하면 심장이 멎고 이목이 다 막히게 돼요. 아무것도 볼수 없고 들을 수가 없게 되죠."

소봉은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말했따.

"성숙노괴의 귀식공이군!"

소녀 아자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이 말을 하네요. 쳇!"

그녀는 그에게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이며 우스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때 그 미부인은 아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중년인은 미소했다.

"너는 왜 죽은 척했는냐? 우리는 정말 깜짝 놀랐다."

아자는 매우 의기양양해서 말햇다.

"누가 당신보고 나를 호수에 던지라고 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예요."

중년인은 소봉을 한 번 쳐다보았다. 얼굴에 겸연쩍은 표정을 띠고 쓰디쓰게 웃더니 말했다.

"못된 말괄량이로구나, 말괄량이야!"

소봉은 그들 부녀가 처음 만나게 되었으니 반드시 남에게 들려 주고 싶지 않은 많은 말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집밖의 대나무 숲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아주는 눈가를 붉히며 연신 몸을 떨고 있었다.

소봉은 의아하여 물었다.

"아주, 그대는 어디가 편치 않소?"

그는 그녀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녀의 맥박이 심히 빠르게 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음속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주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다시 말했다.

"오라번니, 먼저 가도록 하세요. 저는...... 저는 소변을 봐야겠어요."

소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나무숲에서 나오고 말았다.

소봉은 호숫가에 가서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아주는 대나무 밭에서 나오지 않았다. 별안간 발걸음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급히 달려오는 기척이 들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대악인이 도달한 것이 아닐까?'

멀리서 보니 세 사람이 호숫가의 소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은 등에 사람을 업고 있었고 한 사람은 체구가 왜소한데 발걸음이 나는듯 가벼워 달릴 때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왜소한 사람은 한 동안 달리다가 걸음을 멈추고 뒤에서 달려오는 동료를 기다리곤 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차분하면서도 무거운 것으로 보아 무공이 몹시 뛰어난 것 같았다.

세사람이 가까이 이르게 되었을 때 소봉은 업혀 잇는 두 사람이 바로 도중에서 만났던 판부를 쓰던 실성한 사람과 부씨성을 가진 대한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때 왜소한 체구의 사내가 부르짖었다.

"주군, 주군, 대악인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빨리 달아나지요!"

이때 중년인은 한 손을 내밀어 미부인을 잡고 한 손은 아자의 손을 잡은 채 대나무숲에서 걸어 왔다.

중년인과 미부인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 않았는데 아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아주 역시 대나무밭에서 걸어 나오더니 소봉의 곁으로 왔다.

이때 중년인은 두 여자의 손을 놓고는 서둘러 상처입은 두 사람 곁으로 다가 가더니 두 사람의 맥박을 짚었다. 목숨을 잃을 우려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는 대뜸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며 말했다.

"세 분은 수고했소. 고, 부 두 형제는 목숨에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 구려."

그러자 그들 세 사람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데 그 태도는 매우 공손하였다.

소봉은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 세 사람의 무공과 풍모는 보아하니 비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한 지방을 주름잡는 신분이 아니라면 일문 일파의 우두머리는 될 것 같은데 이 중년 사내에게 그토록 공손하게 대하다니 도대체 이 중년인은 어떤 내력을 지닌 사람일까?'

그때 왜소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구군, 주군에게 알립니다. 소신은 청석교 옆에 일부러 진을 치고 그 대악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진의 급소를 알아보고 그 기관을 즉시 깨뜨린 것 같으니 주군께서는 즉시 자리를 옮기셔야 하겠습니다."

그 중년인은 말했다.

"우리 집안이 불운을 당해 그와 같은 악인이 생겨나게 되었소. 이곳에서 만나게 된 이상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을 거요. 부득이 그들과 끝까지 상대해 줄 수밖에 없소."

짙은 눈썹에 큰 눈망울을 한 사내가 말했다.

"적을 물리치고 악을 제거하는 일은 소신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입니다.

그러나 주군께서는 종묘사직을 이어야 할 몸이시니 황상께서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빨리 대리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보통 체격의 한 사내가 말했다.

"주군, 오늘의 이 일은 일시적인 감정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군께서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게 된다면 저희들이 무슨 명목으로 대리로 돌아가 황상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모두 자결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소봉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흠칫했다.

'소신이라 칭하고 또 황상이라 칭하며 하루 빨리 대리로 돌아가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말들인가? 설마하니 이 사람들이 바로 대리 단씨 집안의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 것을 느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돌보셔서 단정순이란 도적을 오늘 만난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

그때 갑자기 멀리서 길다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솥을 긁어대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단가 후레자식아! 너는 도망칠 수가 없다! 순순히 포박을 받도록 해라. 나는 너의 아들의 얼굴을 보아서 어쩌면 너의 목숨을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따.

"그의 목숨을 용서하고 안 하고는 그대 악노삼이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니야.

설마하니 첫째가 처리하지 못할까봐?"

또 뾰족한 음성이 말했다.

"단가라는 녀석이 분수를 안다면 분수를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이 사람은 억지로 공력을 돋구어서 말 소리를 먼 곳까지 전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아무래도 몸에 상처를 입었는지 힘이 없었다.

소봉은 그 사람들이 말끝마다 단가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자 더욱 의심이 짙어 지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한 조그만 손이 뻗어와 그의 손을 잡았다. 소봉은 곁눈질로 옆에 서 있는 아주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고 그녀의 손바닥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며 식은땀으로 홍건히 젖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나직히 물었다."

"몸이 편찮으시오?"

 

팁獵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무척 무서워요."

소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오라비가 곁에 있는데 무엇이 두렵소?"

그는 입으로 중년인을 가리키며 나직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사람이 아마도 대리 단씨 집안의 사람인 것 같소."

아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가볍게 바르르 떨 뿐이었다.

그 중년인은 바로 대리국의 황태제인 단정순이엇다. 그는 젊었을 적에 중원 땅을 두루 구경하게 되었는데 풍류남아라고 자부하던 그는 이르는 곳 마다 정을 남기게 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부자집이나 귀족들은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것이 보통潔駭.

단정순은 그야말로 황자라는 존귀한 신분이어서 처첩을 많이 거느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단씨 집안은 본래 주우언의 무림세가였다. 비록 대리에서 황제라 일컬 어지고 있으나 모든 기구와 음식에 있어서 시종 조상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근 본을 잊지 않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단정순의 본처인 도백봉으로 말하면 운남 파이족의 대추장의 딸이었다. 단씨 집안에서 그녀를 맞아들이게 된 데에는 파이족을 포섭하여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겠다는 뜻이 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운남에는 한인의 수가 적었다. 만약 파이족의 옹호를 받지 못한다면 단씨 집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황제의 자리도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파이족은 자고로 일부일처의 제도를 지키고 있었다.

도백봉은 어릴 적부터 귀하게 자라 단정순으로 하여금 한 사람의 첩도 거느리지 못하게 했는데 단정순이 곳곳에서 여러 여인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자 화가 나서 출가하여 도사가 되었다.

그러니까 단정순이 목완청의 어머니인 진홍면과 종만구의 처인 감보보, 그리고 아자의 어머니인 원성죽과 같은 여자들과 지난날 정을 주고 받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단정순은 황제인 형의 명을 받들어 육양주 신계사로 달려가 소림사 현비 대사가 살해당한 사정을 조사하기에 이르렀는데 많은 의문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소 모용씨가 쓴 독수로 현비 대사가 죽음을 당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보름 남짓 기다렸으나 소림사에서 고승이 오지 않자 삼공인 범화와 화혁간, 파천석, 그리고 사대 호위를 데리고 중원으로 나아가 진상을 알아 보게 되었는데, 이 기회에 소경호 근처에 은거하고 있는 원성죽을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며칠 동안 두 사람은 즐거운 한 때를 보낼수 있었다.

단정순이 소경호 부근에서 옛 정인과 옛정을 되새기며 지내는 동안 그를 호위한 삼공과 사위는 사방에 흩어져 그를 지키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원수가 찾아 온 것이었다.

단연경은 무공이 뛰어난 고수였다. 그래서 사대 호위 가운데 고득성과 부사귀가 차례로 상처를 입게 되었다.

주단신은 소봉을 적으로 알고 청석교에서 막으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저만리는 아자의 그물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사마 범화와 사도 화혁간, 사공 파천석 세 사람은 고득성과 부사귀 두 사람을 구한 후 단정순의 곁 으로 달려와 그를 보호하는 한편, 강적을 맞아 싸우려고 한 것이다.

이때 주단신은 줄곧 저만리를 위해 그의 몸에 얽혀 있는 그물을 풀어 버리려고 했으나 그 그 그물은 칼로 잘라도 끊어지지 않았고 손으로 풀려고 해도 풀어지지 않았다.

단정순은 아자를 향하여 말했다.

"빨리 저 아저씨를 풀어 드려라. 대적을 눈앞에 두게 된 지금 장난을 치면 못쓴다."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무슨 상을 제게 내리시겠어요?"

 

단정순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너의 어머니를 시켜 너의 손바닥을 때리라고 할테다.

아자야, 저 아저씨에게 빨리 사과 드리지 못하겠느냐?"

아자는 말했다.

"아버지는 저를 호수 속으로 던져 반 나절 동안 저를 죽게 만들었어요. 그런 아버지는 저에게 사과를 했어요? 저 역시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아버지의 손바닥을 때리게 할 테예요."

범화와 파천석 등은 진남왕에게 갑자기 또 한 사람의 딸이 생긴 것을 보고 암암리에 경계심을 품었다. 더군다나 그 딸이 버릇없고 장난이 심해 부친에 대 해서도 전혀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소저는 적출이라고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진남왕의 따님임에는 틀림없다.

만약 그녀가 우리를 골탕먹인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따질 수도 없고 하니 그야말로 재수없게 생겼구나! 저만리는 그녀에게 저 모양으로 묶여 있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단정순은 노해 부르짖었다.

"너는 이 애비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이후 내가 너를 귀여워 할 줄 아느냐?"

아자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버지는 본래 저를 귀여워하지 않았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십여 년 동안 왜 버려둔 채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어요?"

단정순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침울하게 탄식했다.

이때 원성죽이라는 부인이 말했다.

"아자, 착하지? 이 어머니가 너에게 좋은 선물을 주만. 빨리 저 아저씨를 풀어 드려라."

아자는 손부터 내밀고 말했다.

"먼저 주세요. 선물이 좋은지 나쁜지 봐야겠어요."

소봉은 그 소녀가 너무 말괄량이 짓을 할 뿐 아니라 무례한 것을 옆에서 보고 있너라니 울화(?)가 치말었다.

'저 형이라는 사람은 단씨 집안의 신하이니까 화를 내지 못하겠지만 나야 그런 예의 같은 것을 치릴 필요가 없다."

소봉은 몸을 굽혀 저만리의 몸을 들고 말했다.

"저 형, 이 부드러운 실은 물에 닿으면 풀어질 것 같구려. 내가 그대를 물속에 잠기도록 해 보겠소."

아자는 대노하여 부르짖었다.

"누가 당신보고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라 했어요?"

그러나 그녀는 소봉에게 다귀를 한 대 얻어맞은 적이 있는지라 소봉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끼는 듯 감히 손을 뻗어 막으려 하지 못했다.

소봉은 저만리를 들고 몇 걸음 옮기지 않아 호숫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를 물속 에 담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부드러운 그물은 물에 적시자 즉시 느슨해졌다.

소봉은 손을 뻗어 그물을 풀었다.

저만리는 나직히 말했다.

"소 형, 도와 주셔서 정말 고맙소이다."

소봉은 미소했다.

"저 짓궃은 계집애는 정말 상대하기가 어렵소. 나는 이미 그녀에게 심하게 따귀를 갈겨서는 저 형의 화풀이를 해 드렸소."

저만리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 매우 의기소침한 얼굴 빛을 했다. 소봉은 부드러운 그물을 거두어들이고는 다시 감았다. 그리고 보니 겨우 주먹만한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은 것이 정말 희한했다.

아자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돌려줘요."

손봉은 손을 휘둘러 때리는 시늉을 했다. 아자가 깜짝 놀라 몇 걸음 물러섰다.

소봉은 그녀를 놀라게 한 다음 그대로 그물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는 눈앞의 이 중년인이 십중팔구 자기의 원수라고 생각했다. 아자가 그의 딸이라면 이 그물은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으므로 그녀에게 돌려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자는 단정순의 곁으로 다가가 단정순의 옷자락을 잡아 흔들며 애걸했다.

 

"아버지, 저 사람이 저의 그물을 훔쳤어요! 저의 그물을 빼앗아 갔단 말이에요!"

단정순은 소봉의 행동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봉이 아자를 단순히 벌주 려고 그랬거니 하고 여겼을 뿐이다.

별안간 파천석이 낭랑하게 외쳤다.

"운 형? 그동안 안녕하셨소. 다른 사람은 재간을 연마하면 연마할수록 강해지는데 운 형은 어째서 재간을 연마할수록 퇴보를 하는 것이오. 내려오시구려."

그러면서 손을 휘둘러 나무 위를 후려쳤다. 우직끈, 求 소리와 함게 한대의 나뭇가지가 그 손짓에 따라 떨어졌고 동신에 한 살마이 떨어져 내렸다.

이 사람은 비쩍 마르면서 키가 큰 것이 바로 궁흉극악 운중학이었다. 그는 취현장에서 소봉에게 일장을 얻어맞고 중상을 입어 한마터면 목숨을 잃은 뻔했으나 간신히 상처를 치료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무공은 아직 회복되지 못한상태였다.

그날 대리에서 파천석과 경신법을 겨루었을 때 두 사람의 경신법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파천석은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그의 경신법이 옛날보다 크게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운중학은 흘낏 소봉이 와 잇는 것을 보고는 깜작 놀라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돌아서더니 호숫가의 소로를 따라 다가오고 있는 세 사람을 마주 향해 달려갔다.

그 셋 사람 가운데 외쪽에 서 있는 사람은 봉두난발에 짤막한 옷을 걸치고 있는 남해악신이었고, 오른쪽은 어린애를 안고 잇는 무악부작 섭이랑이었다. 한복판에 선 사람은 청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두 자루의 가느다란 무쇠 지팡이로 몸을 지탱 하고 있었으며 얼굴은 시체와 같았다. 바로 사대 악인의 우두머리이며 악관만영이 라 일컬어지는 단연경이었다.

단연경은 중원 땅에서 활약을 한 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소봉은 이 천하제일 대악인 이라는 단연경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단정순 등은 대리에서 그에게 쓴맛을 톡톡히 본 적이 있었다.

섭이랑, 악노삼 같은 인물들이 무섭다고 하지만 상대하기가 결코 어렵지 않으나 단연경은 실로 감당하기 힘든 고수였다.

단연경으로 말하면 정사의 무공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단씨 집안의 일양지 같은 무공에도 정통할 뿐만 아니라 한 몸에 사파의 무공까지 연성한 그는 정사의 절기를 한 몸에 지닌 사람이었다. 그렇기 대문에 황미 노승 같은 고수도 그를 이겨 내지 못했으니 단정순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범화는 큰 소리로 말했다.

"전하, 저 단연경은 호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사직을 중시 해서 급히 달려가 천룡사의 여러 고승들을 모셔오도록 하십시오."

천룡사는 멀리 대리에 있으니 어찌 그 사람들을 모셔올 수 있겠는가. 지금 대리의 군신이 생사의 갈림길에 이른 마당에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바로 단정순으로 하여금 즉시 대리로 도마응 치라는 말이었고 동시에 허장성세를 보여 단연경막 하여금 천룡사의 뭇 고승들이 바로 부근에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함으로써 어느 정도 꺼리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단연경은 대리 단씨 집안의 직계이니 물론 천룡사 뭇 승려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단정순은 정세가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뭇 사람 들을 버리고 물러선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영웅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정인과 딸이 있는데 어찌 체면이 깎이는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단씨 집안의 일을 대송나라 경내로 와서 처리하게 되었다니... 허허허, 가소롭군, 사소로워!"

섭이랑은 웃으며 말했다.

"단정순, 당신을 매번 볼 때마다 당신은 언제나 아름다운 여자들과 함께 있군요. 정말 당신은 여복도 많군요!"

단정순은 미소했다.

"섭이랑, 그대 역시 몹시 아름다워 구미가 당기는구려."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저 후레자식은 복을 누릴 만큼 누렸어! 아들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 아들이 나를 사부로 모시려고 하지 않는다구! 그야말로 애비가 아들의 버릇을 망가뜨린 거지! 이 늙은이가 그에게 가위질을 한 번 해 주어야겠다."

그는 몸에서 악치전을 뽑아들더니 단정순에게 달려들었다.

소봉은 섭이랑이 그 중년인을 단정순이라 불렀고 또 중년인이 부인하지 않는지라 과연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음을 깨달았다. 소봉은 고개를 돌려 나직이 아주에게 말했다.

"정말 당전수이었군!"

아주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 그대는 옆에서 협공으로 상대방이 위기에 처한 틈을 타고 공격할 셈인가요?"

소봉은 마음이 무척 격해졌다. 한편으로 분노가 치밀었고 또 한편으론 기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냉랭히 말했다.

"부모의 원수, 은사의 원수, 의부,의조의 원수, 그리고 내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원한, 흥! 이처럼 피맺힌 원한을 갚는 마당에, 흥, 설마하니 인의도덕을 지키고 강호의 규율을 지켜야 한단 말이오?"

그의 이 몇마디의 말은 무척 나직했으나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원한과 독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범화는 남해악신이 달려들자 나직이 말했다.

"화 형, 그리고 주 아우, 저 경망한 녀석을 협공하도록 하시오. 급히 공격하고 맹렬한 타격전을 벌여 빨리 처치하는 것이 가장 좋소이다. 먼저 졸개들을 제거한 후 모두 힘을 합쳐 다시 상대방의 우두머리를 상대하도록 합시다."

화혁간과 주단신은 대답하고 나섰다. 두 사람은 한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繭箚 느꼈다. 더군다나 화혁간의 무공은 남해악신에 못지

 

않는지라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범화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연경은 너무나 무서운 상대였다. 일 대 일로 싸워서는 그 누구도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오로지 여러 사람이 함께 협공한다면 어쩌면 자기편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화혁간은 즉시 강산을 들고 주단신은 판관필을 휘두르며 양쪽에서 남해악신에게 공격을 펼쳐갔다.

범화는 다시 말했다.

"파 형제는 그대의 옛친구를 쫓아 보내도록 하시오. 나와 저 형제는 여자를 맡도록 하겠소."

파천석은 대답하고 운중학에게 달려들었다. 범화와 저만리 역시 일제히 앞으로 나아갔다. 저만리의 무기는 바로 한 자루의 무쇠로 된 낚싯대인데 아자가 호수로 던져 버린 뒤라 부사귀의 제미숙동곤을 들고 큰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범화는 곧 섭이랑을 공격했다. 섭이랑은 방긋 웃었다. 그녀는 범화의 신법을 보고는 강적임을 알아채고 안고 잇던 어린애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팔을 뻗치는데 그녀의 손에는 어느 새 한 자루의 넓고 엷은 판도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그 판도를 어디에 숨기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저만리는 미친 듯 소리를 부르짖더니 단연경에게로 달려들었다. 범화는 깜작 놀라 부르짖었다.(<== 요글.. 부르짖었다... 정말 많이 나옵니다.. ^.^;)

"저 형제, 저 형제, 이쪽으로 오시오!"

저만리는 마치 못 들은 듯 제미숙동곤을 들고 맹렬히 단연경을 빛자루로 쓸듯이 후려치려고 했다.

단연경은 냉소를 띤 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왼손의 무쇠 지팡이로 그의 안면을 찔러갔다. 이 지팡이는 아무 힘이 실리지 않은 것 같았으나 시간과 각도가 정확杉. 즉 저만리의 제미숙동곤이 후려쳐오는 것보다 약간 빨랐다. 그 기세는 날카롭기 이를데 없었다.

지팡이는 상대방의 공격을 해소시키는 동시에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저만리는 피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고 이로 인해 단연경은 단 한 수에 수세에서 공격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저만리는 무쇠 지팡이가 찔러오는 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힘을 주어 숙동곤으로 단연경의 허리께를 후려치려고 하지 않느가? 단연경은 속으로 깜짝 놀라 생각했다.

'혹시 미친 놈이 아닐까?'

그는 저만리와 함께 상처를 입고 싶지 않았다. 설사 그의 지팡이로 저만리를 당장에 찔러 죽일수 있다 하더라도 그 자신의 허리가 숙동곤에 맞게 된다면 반드시(<== 반듯이 아닌가요.. 반드시 인가.. 쩝.. 헷갈리네... 아직 한글을 다 못깨우쳐서..... 흐흐...^^;) 상처를 입어야 할 판이었다. 그는 급히 오른쪽 지팡이로 땅을 치며 몸을 날려 피했다.

저만리는 숙동곤을 질풍처럼 뻗쳐내어 단연경의 아랫배를 찌르려고 했다. 부사귀의 숙동곤은 크고 무거웠다. 따라서 이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힘이 세고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저만리의 무공은 날렵함을 특기를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 숙동곤을 휘두르는 것은 사실 그의 무공수법과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구 휘둘렀고 매 일초는 단연경의 습소만 노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목숨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흔히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덤비면 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곤들 한다.

단연경의 무공이 고강하기는 하나 이와 같이 실성한 사람처럼 마구잡이로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사람을 만나자 부득이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소경호 가의 푸른 풀밭 위로 방울방울 선혈이 떨어졌다. 원래 단연경은 뒤로 물러서면서 잇따라 초식을 펼쳐내었으나 매번 지팡이로 저만리의 몸을 찔렀던 것이다. 따라서 지팡이가 닿는 곳마다 상처가 나곤 했다. 그러나 저만리는 아픈 줄도 모르는 듯 더욱 맹렬하게 숙동곤을 휘둘러댔다.

단정순은 부르짖었다.

"저 형제, 물러서게! 내가 그 악인을 상대하겠네!"

그는 원성죽의 손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받아들고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 단연경을 공격했다.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이 단연경을 상대로 협공을 펼치는 셈이었다.

저만리는 부르짖었다.

"전하께서는 물러서십시오!"

단정순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손을 뻗쳐서 단연경을 찔러갔다. 단연경은 오른 쪽 지팡이로 땅을 짚고 왼쪽 지팡이로 먼저 저만리의 숙동곤을 막아내더니 곧이어 빈틈을 노려 단정순의 미간의 찔러왔다. 단정순의 비스듬히 한 걸음 물렀다.

저만리는 갑자기 호통 소리를 내질렀다. 마치 상처입은 맹수가 포효하는 것 같았다. 그는 별안간 달려들었는데 두 손으로는 숙동군의 양쪽 끝을 잡고 마구 휘둘러댔다. 그는 단연경이 땅을 딛고 있는 무쇠 지팡이를 노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타법은 그야말로 무공초식을 펼치는 것이라 할 수 없었다.

범화와 화혁간, 주단신 등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서 형제, 저 형, 빨리 물러나시오!"

저만리는 헉헉거리는 소리를 크게 내며 별안간 몸을 날리더니 숙동곤을 펼쳐 단연경을 마구 찔러대려고 하였다. 이때 범화와 섭이랑, 남해악신까지도 저만리의 행동이 이상한 것을 보고 각기 싸움을 멈추고 눈을 가다듬어 그를 지켜보았다.

주단신은 부르짖었다.

"저 형, 물러서시오."

그는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 그를 잡아당기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가 팔뒤꿈치로 후려치는 바람에 그만 얼굴을 맞고 대뜸 코와 입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부어 올랐다.

이때 단연경은 저만리와 삼십여 초를 겨루게 되었으며 저만리의 몸에 십여군데의 깊은 구멍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저만리는 여전히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공격을 해왔다.

단연경과 구경하던 뭇 사람들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일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데 된 것이다. 주단신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도와 주려고 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었을 때였다. 별안간 휙, 하는 소리가 났다. 저만리가 숙동곤을 적에게 힘주어 내던진 것이다. 그 기세는 세차기 이를데 없었다. 단연경은 쇠 지팡이를 내밀었다. 정확하게 숙동공의 가운데 부분을 찌른 것이다. 그리고 가볍게 한 번 걷어올리자 숙동곤은 곧장 그의 머리 위를 지나서 날아갔다. 그런데 숙동곤이 저쪽으로 날아가 땅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저만리는 열 손가락을 칼날처럼 펼쳐 단연경에게로 달려들었다.

단연경은 냉소하며 일직선으로 지팡이를 찔러내었다. 단정순,범화,화혁간,주단신 등 네 사람은 일제히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동시에 앞으로 달려나가 저만리를 구 하려고 했다.

그러나 단연경의 지팡이는 너무나 빨랐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곧장 저만리의 가슴팍을 내찌르게 되었고 앞가슴 쪽에서 곧장 뒷등으로 지팡이가 관통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단연경은 오른 지팡이를 찌른 후 왼쪽 지팡이로 땅을 치며 몸을 어느덧 수장 밖으로 날려버렸다.

저만리는 앞가슴과 뒷등의 상처에서 선혈을 내뿜으면서도 여전히 단연경을  아 갈려 했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딛자 더 이상 걸음을 옮길 힘이 없었다. 그는 몸을 돌리더니 단정순에게 말했다.

"전하, 저만리는 죽으면 죽었지 욕됨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평생 대리 단씨 집안에 미안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정순은 오른쪽 무릅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 형제, 내가 딸을 잘못 가르쳐 형제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했으니 정말 부끄 럽기 짝이 없네."

저만리는 주단신에게 미소를 보냈다.

"형제, 이 형이 먼저 가네. 그대는..... 그대는......"

두 마디 그대라는 말을 하더니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는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몸뚱이는 여전히 선 채 쓰러지지 않았다.

뭇 사람들은 그가 죽을 때 '죽으면 죽었지 욕됨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그가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단연경과 마구잡이로 싸운 것이 바로 아자의 그물에 꼼짝하지 못하고 당했던 치욕을 견디지 못해 이미 죽을 결심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강한 자 위에 강한 자 있고 산위에 더 높은 산이 있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무공에 있어서 남에게 패배하는 것을 결코 커다란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다시 십 년간 무공을 고되게 연마한다면 장래에 원한을 갚지 못한다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만리는 단씨 집안의 가신이었고 아자는 단정순의 딸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그가 받은 치욕은 한평생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기꺼이 싸움터에서 자기의 목숨을 내던진 것이다.

주단신은 대성통곡을 했고 부사귀와 고득성은 중상을 입은 몸이었지만 허둥대며 몸을 일으켜 단연경과 사생결단을 내려고 했다.

별안간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저 사람은 무공이 휠씬 떨이지는데도 그렇게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걸 보면 그야말로 바보 멍청이가 아니에요?"

말하는 사람은 바로 아자였다.

단정순은 그렇지 않아도 슬픔에 잠겨 있었는데 그녀의 그와 같이 경박하고 비웃음에 찬 말을 듣게 되자 속으로 크게 화가 치밀었다.

범화 등은 노기를 띤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그녀가 주군의 딸이라는 점 때문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단정순은 그만 끓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여 손등으로 그녀의 따귀를 냅다 후려치려고 햇따.

원성죽이 손을 들어 막으며 뾰로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십 년간 버려두고 생사까지 모르던 친딸을 오늘에야 만나게 되었는데 때릴 수 있었요?" (<== 그어머니에 그딸이군.. 나같으면 그냥.. 확... 흠.. 참자..)

단정순은 원성죽에게 줄곧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가책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녀의 뜻에 따르려고 했다. 더군다나 아랫 사람들 앞에서 다투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자기의 일 장이 원성죽의 팔을 치자 급히 손을 거두며 아자에게 노한 어조로 말했다.

"저 아저씨는 너 때문에 죽었다. 너는 그것을 모른단 말이냐?"

아자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상대방은 아버지를 전하라고 불렀어요. 그렇다면 나는 바로 그의 작은 주인이 돼요. 한두 사람의 종을 죽인다고 해서 뭐가 대수로워요?"

그녀의 표정은 경멸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군신간의 구부은 상당히 엄격했다. 소위 군이 신하에게 죽으라고 한다면 신하는 죽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저만리 등은 대리국 조정에서 신하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 단씨 집안의 인물들을 지극히 공경했다. 그러나 단씨 집안은 원래 중원 무림의 출신이었고 줄곧 강호의 규율을 지켜왔다. 그리고 화혁간, 저만리 등은 신하이기는 했지만 단정명과 단정순은 그들을 언제나 친형제처럼 대해 왔다.

단정순은 젊었을 적부터 중원 강호에서 떠돌아다니기를 즐겨했으며 저만리는 그를 따라 생사를 같이 했고 적잖은 위험을 격기도 햇으니 어찌 흔히 말하는 종과 같을 수 있겠는가?

아자의 그와 같은 몇 마디 말에 범화를 비롯한 대리국의 신하들은 내심 불괘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조정에서 대사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면 보정제조차도 그들에 대해서 언제나 형제箚 칭했다. 더군다나 단정순은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은 몸이고 아자는 그저 단정순의 사생아에 불과하지 않은가?

단정순은 저만리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와 같은 악독한 심보를 둔 딸을 가진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는 단검으로 단연경을 가르키며 말했다.

"그대가 나를 죽이겠다면 얼마든지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도록 하시오. 우리 단씨의 인의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소.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면 설사 나라를 얻는다 하더라도 나라를 오랫동안 이끌 수 없을 것이오."

소봉은 속으로 냉소했다.

'입으론 그럴싸한 말을 하고 있군! 이 순간에도 위선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군!"

단연경은 쇠 지팡이를 가볍게 짚더니 어느덧 단정순의 앞으로 날아오며 말했다.

"나와 일대 일로 싸우자는 것이겠지?"

단정순은 말했다.

"그렇소. 그대는 나 한 사람을 죽이고 다시 대리로 가서 나의 황형을 시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소? 따라서 이 일은 그대와 나 사이의 일로 부하들과 가족은 아무런 상관이 없소."

그는 단연경의 무공이 실로 너무 고강하기 때문에 자기는 오늘 십중팔구 상대방 에게 목숨을 빼앗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단연경이 원성죽이나 아자, 그리고 범화 등 다른 사람들으 괴롭히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단연경은 말했다.

"너의 가족은 죽이되 부하들은 살려 주기로 하지. 과거 부황께서는 일시 인정어린 생각에 너희들 형제 두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황제 자리를 찬탈 당하는 화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단정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단정순은 정정당당하게 죽음으로써 남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다.'

단정순은 저만리의 시체를 향해 공수의 예를 하며 말했다.

"저형제, 단정순은 오늘 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저승까지 다정하게 가고자 하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범화에게 말했다.

"범 사마, 내가 죽은 후 저 형제와 나란히 묻어 주시오. 그리고 임금과 신하 의 차이가 없도록 해 주구려."

단연경은 냉소했다.

"흐흐흐! 거짓된 인자함으로 사람의 마음을 수습하겠다는 것이지? 그리하여 남들이 너를 위해 생명을 바치게 하려는 것인가?"

단정순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왼손으로 검결을 짚으며 오른손으로 장검을 내밀었다. 이 일초는 기리단금 이라고 하며 단가검을 펼치기 직전에 쓰는 수법 이었다. 단연경은 이 검법의 변화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평범 하면서도 정정당당하게 지팡이로 반격했다. 두 사람은 쌍방이 똑같이 단씨 집안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무공을 펼쳐냈다.

단연경은 지팡이를 검 삼아서는 단가검의 검법으로 단정순을 죽이려고 했다.

그가 단정순과 적이 된 것은 결코 어떤 사사로운 원한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대리의 황제 자리를 다투기 때문이었다. 지금 대리의 삼공이 모두 이자리에 있으니 만약 그가 사파의 무공으로 단정순을 죽이게 된다면 대리의 신하들은 반드시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단씨 집안의 무예인 단가검으로 단정순을 제압하고 승리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명분이 서는 일로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단씨 형제들끼리의 권력 다툼이므로 신하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처럼 보이려고 했다.

단정순은 그가 지팡이로 펼치는 무공이 집안의 무공임을 할고 마음이 약간 안정 되었다. 그는 호흡을 조절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검초를 될 수 있는 한 온건하게 펼쳐 발걸음은 무겁게 옮겼고 검은 날렵하게 휘둘렀다. 그리고 매 일 초의 공격과 수비에 있어서도 법도를 잃지 않았다. 단연경은 쇠 지팡이로 단가검을 펼치게 되었는데 그 검법은 크게 치고 베는 수법으로 안정되면서도 무게가 있었다.

지극히 날렵하면서도 표연한 검초를 펼치는 가운데서도 왕자다운 기백을 잃지 않았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 얻기 어려운 좋은 기회다. 나는 단씨 집안의 일양지와 육맥신검이 뛰어나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단정순이란 도적에게 강적이 찾아 왔고 또한 그 강적이 그와 한 집안 사람이니 단씨 집안의 그 두 가지 절기의 위력이 도대체 어떠한지 한거번에 알 수가 있겠 되었구나.'

그런데 이십여 초를 싸웠을 때 단연경의 손에 들린 쇠 지팡이는 차츰차츰 무거워 지는 것 같았으며 휘두를 때마다 도중에 정체되는 흔적이 엿보였다. 그런가하면 단정순의 장검은 매번 그 지팡이와 부딪힐 때마다 퉁겨서 되돌아가는 폭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소봉은 그같은 광경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실력을 펼치는구나. 저 한 자루 날렵하기 이를데 없는 무쇠 지팡이를 마치 한 자루에 칠십 근이나 되는 강철선장처럼 휘두르니 정말 조예가 크게 비범 하다고 할 수 있다.'

무공이 고강한 사람들은 종종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처럼 들어오렸으며 무거운 무기를 아무런 무게도 없는 것처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가벼운 것을 무겁게 드는 것은 더욱 진일보한 무공이라 할 수 있다.

무거워 보인다는 것은 결코 진짜로 무겁다는 것이 아니고 무거운 무기의 위 맹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벼운 무기의 날렵함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이때 단연경이 가느다란 무쇠 지팡이를 마치 강철 선장처럼 휘두르며 갈수록 무겁게 펼쳐내는 것을 보고 소봉은 속으로 단연경의 내력이 뛰어난 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정순은 애써 상대방의 초식을 받아내고 있었는데 점차 적의 무쇠지팡이가 더욱 무겁게 압박해 옴에 따라 내공이 순조롭게 운행되지 않는 것을 느꼈다. 단 씨 집안의 무공은 내공을 중시했다. 내식이 창통하지 않으면 바로 상대방에게 지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단정순은 결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본래 그는 이 싸움에서 자신이 이기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한평생 복을 누리며 살아온 몸인 만큼 오늘 목숨을 이 소경호에서 버린다 하더라도 유감이  벗다 생각했다. 더군다나 원성죽이 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으니 죽어도 떳떳하고 의젓한 못브으로 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는 한평생 곳곳에서 정을 뿌렸다. 원성죽에 대한 사람은 자기의 본처인 도백봉이 나 다른 여자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애틋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연인이라도 함께 잇으면 언제나 성심성의를 다했다. 심지어 상대방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시늉까지 하곤했다.(이러니.. 여자들이.. 따르지... 쩝...)

단연경은 무쇠 지팡이에 내력을 끊임없이 가중시켰다. 육십여 초를 주고받게 되자 단씨 집안의 검법을 거의 다 펼치게 되었다. 이때 단정순의 코끝에 몇 방울의 땀이 맺혔는데도 숨쉬는 소리는 여전히 길고 고른 것을 보고 단연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자는 색을 좋아하고 총애하는 여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내력이 이토록 심후하고 강하다니 결코 얕봐서는 안 되겠구나!'

그는 무쇠 지팡이에 극한까지 내력을 주입시켰다. 따라서 무쇠 지팡이를 휘둘러 댈 때마다 휙휙, 하는 소리가 일었다. 단정순은 검을 들어 한 번 맞받을 때 마다 몸이 흔들거렸다.

두 사람이 펼치는 초식은 그들이 열 대여섯 살 때 익힌 검법(책에는 검범이라고 나왔있군요.. 검범이 뭔지... 쩝...)이었다. 범화와 파천석만 하더라도 수십 년 동안 그 무공을 보아 왔기 때문에 쌍방의 싸움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쌍방의 대결은 결코 초식을 겨루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내력을 겨루는 것이었다.

범화 등은 이미 당전순이 더 이상 견딜수 없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들은 각기 눈짓을 하며 무기를 움켜쥐었다. 즉시 일제히 달려들어 단정순을 도울 생각이었다.

갑자기 한 소녀가 깔깔 거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호호... 가소롭군, 가소로워! 대리 단씨 집안 사람들은 영웅호걸이라 자칭하면 서도 지금은 모두 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많은 숫자로 이기려고 하니 이야말로 몰염치한 소인의 행실이 아니겠어요?"

뭇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그 말이 아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알고 모두들 의아했던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위기를 당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부친이 아닌가? 어찌하여 그처럼 비웃는 말을 하는 것일까?

원성죽은 노해 부르짖었다.

"아자야,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느냐? 너의 아버지는 대리국의 진남왕이고 그와 싸우고 있는 자는 바로 단씨 집안의 반역도이다. 또한 네 아버지의 친구들로 말하면 모두 대리국의 신하들이다. 포악한 자를 무찌르고 역적을 토벌하는 것은 사람이 마당히 행해야 하는 도리가 아니냐?"

그녀는 자맥질에는 뛰어난 편이나 무공은 평범하기 이를데 없었다. 따라서 연인이 계속 위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초조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모두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맞서서 흉악한 반역도를 상대해요. 이 마당에 강호의 체면을 따져서 무엇해요?"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의 말은 너무 우스꽝스럽고 전혀 도리를 무시한 억지예요. 우리 아버지가 영웅호걸이라면 아버지로 인정하겠어요. 그러나 만약 몰염치한 자로서 싸움에 임하여 남의 도움이나 바라는 몰염치한 아버지라면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겠어요.

인정해서 무엇하겠어요?"

이 몇 마디의 말은 앙칼졌다. 범화와 파천석, 화혁간 등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 돕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손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단정순은 호색한이었지만 영웅이란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종종 이러헥 말하곤 했었다.

"영웅은 본래 미인관을 지나기가 어려운 법이지. 그러니까 미인관을 제대로 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영웅은 영웅이야. 초 패왕에게도 우희가 있었고, 한 고조에게는 척 부인이 있었고, 이세민에게는 무측천이 있지 않았던가?"

그는 비겁하고 몰염치한 짓은 결코하지 않았다. 격렬한 싸움을 하는 와중에 서도 그는 아자의 말을 듣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생사와 승패가 뭐가 대단한 것이겠소? 어느 누구라도 나서서 돕는다면 이 단정순을 모독하는 것이외다!"

그는 입을 벌려 말햇으므로 내력을 돋우는 데 지장이 생겼다.

그러나 단연경은 그 기회를 틈타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나서는 두 지팡이로 땅바닥을 짚고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단정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공격하시지!"

그의 왼손 소맷자락을 떨쳤다. 동시에 장검을 그 소매 바람을 빌어서 내밀었다.

이때 원성죽은 말했다.

"아자야, 네 아버지의 검법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보아라. 그가 저 시체처럼 생긴 사람을 처지한다는 것은 수월한 노릇이다. 그는 왕의 신분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부하들에게 내맡기고 친히 나서지 않아도 된단 말이다."

아자는 말했다.

"아버님이 그를 없앤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가 입으로는 큰소리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 아버지가 죽을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이 몇 마디의 말은 그야말로 어머니 원성죽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원성죽은 노기 어린 눈으로 땅을 쏘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애는 정말 옳고 그름을 모르는구나! 말求 것도 전혀 분수가 없군!'

이때 단정순은 장검으로 잇따라 세 번이나 재빠른 초식을 펼쳐내엇다. 이렇게 되자 단연경은 지팡이에 내력을 다시 주입시켜 일일이 단정순의 검을 퉁겨 나가도록 만들었다.

이때 단정순이 제사 검인 금마등공이라는 일 초를 비스듬히 뻗쳐내밀었다.

단연경은 지팡이에 내력을 다시 주입시켜 일일이 단정순의 검을 퉁겨 나가도록 만들었다.

이때 단정순이 제사 검인 금마등공이라는 일 초를 비스듬히 뻗쳐 내었다.

단연경은 왼손의 지팡이로 벽계보효라는 일 초를 펼쳐 내찔렀다. 지팡이와 검은 부딪치는 순간 즉시 자석처럼 달라붙고 말았다. 순간 단연경의 목구멍에서 꺽꺽, 하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그는 벼락같이 오른쪽 지팡이를 땅바닥에 갖다대더니 몸을 솟구쳐 올렸다. 그러나 왼손 지팡이의 끝은 여진히 단정순의 검끝에 찰삭 붙어 있는 상태였다.

한 사람은 두 발로 땅위에 서서 태산처럼 움직일 줄 모르게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전신을 허공에 떠올려 놓고 있었는데 그는 마치 버들가지가 바람에 나부끼듯 흔 들거렸다.

구경하던 뭇 사람들은 모두 다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드디어 두 사람의 내력이 판가름나는 중대한 순간이 온 것이다.

단연경은 위에서 아래로 압박을 가하고 있어 전신의 무게가 상대방의 장검을 내리눌렀기 때문에 내력에 자기의 몸무게를 실어 상대방을 압박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장검이 점차 구부러지면서 천천히 호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느다란 무쇠 지팡이는 여전히 화살처럼 꼿꼿했다.

소봉은 단정순의 손에 든 장검이 점차 구부러져서 이제 조금 더 구부러졌다가는 두 토막으로 부질러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시종 가장 고강하다는 육맥신검을 펼쳐 내지 않았따. 혹시 단정순은 그 무공에 잇어서는 상대방에 미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아예숨긴 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그가 내력을 돋우는 태도를 보아 잠력이 거의 다한 듯하며 결코 자기가 믿고 있는 재간을 펼치지 않고 남겨 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

단정순은 손에 들린 장검이 곧 부러질 것 같자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오른손 손가락을 찔러냈다. 이것은 바로 일양지의 수법이었다. 그가 지럭을 쌓은 조예는 그의 형 단정명만 못햇으며 쏟아내는 지력이 석 자 밖까지도 미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지팡이와 검이 서로 부딪혀 있고 두 자루의 무기를 합하면 그 길이는 여덟 자가 되기 때문에 그 일지는 물론 상대방을 해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지력은 결코 단연경에게 내쏜 것이 아니고 바로 단연경의 지팡이를 향해 내쏜 것이었다.

소봉은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은 육맥신검을 모르는 것 같지 않은가? 나의 의동생보다도 못한 것 같다.

저 일지는 기껏해야 지극히 고명한 점혈 수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대수로울게 없지 않은가?'

그의 손가락에서 내뻗는 지풍이 이르는 곳의 단연경의 무쇠 지팡이가 흔들거렸다.

그 순간 단정순의 장검이 몇 푼 정도 펴지게 되었다. 잇따라 단정순은 세 번 일양지를 펼쳤고 손에 들린 장검은 세 번이나 뻗쳐 나가게 되자 점차 원상태로 돌아갈 기미를 보였다.

이때 아자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손가락과 검을 쓰면서도 상대방의 한 자루 가느다란 지팡이를 겨우 막아낼 뿐이군요! 만약 상대방이 다른 한 자루의 지팡이를 휘둘러 공격을 해 온다면 아버지에게 세 개의 손이 있어도 상대할 수 없겠군요? 내 생각엔 차라리 땅바닥에 드러누워 발길질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물론 그 모양 이야 흉하겠지만 상대방의 지팡이에 찔려 죽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게 아니겠어요?"

원성죽은 그렇지 않아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딸은 옆에 듣기 싫은 말만 늘어 놓고 있었다. 그녀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단연경이 오른손의 지팡이를 쳐들더니 칙,하는 소리를 내면서, 과연 단정순의 왼손 식지를 질러오는 것이 아닌가?

단연경이 지팡이를 통해서 내공을 쏟아낸 것은 일양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그는 지팡이로 손가락을 대신했고 또 지팡이가 길어서 좀더 멀리 뻗쳐 나갈 수 잇다는 점이 달랐다. 단정순은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지력이 단연경의 지팡이 힘과 맞부딪히게 되자 단정순은 손과 팔이 한 차례 시큰해짐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재빨리 손가락을 거두고 다시 내공을 돋우어서는 제이지를 잇따라 질러내려고 했다. 그 순간 지팡이가 번쩍 하는 가운데 단연경이 두번째로 지팡이를 찔러왔다.

단정순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내식을 이토록 빨리 조절하다니, 그야말로 마음먹은 대로 운기할 수 있는 것 같구나! 일양지의 조예는 그야말로 나보다 훨씬 심후하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 역시 일지를 들어 반격했다. 그러나 그가 찰나적으로 늦었기 때문에 몸이 한 번 흔들했다.

단연경은 단정순을 상대로 오랫동안 싸우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밤이 길면 꿈이 많은 법이라고 만약 단정순의 뭇 신하들이 일제히 달려들게 된다면 역시 난감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지팡이를 질풍처럼 휘둘러 삽시간에 이따라 아홉번을 찔러내었다.

단정순은 힘써 막으려고 했으나 아홉번째의 지팡이가 찔러오게 되었는을 때는 진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팍,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무쇠 지팡이의 끝은 그의 왼쪽 어깻죽지에 꽂혔다. 그의 몸이 흔들하자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장검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단연경은 목구멍으로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오른손의 무쇠 지팡이로 곧장 단정순의 정수리를 찔러갔다. 그 지팡이로 단정순의 목숨을 빼앗자고 결심한 듯 손에 전력을 쏟아 무쇠 지팡이가 뻗쳐 나가면서 휙, 하는 소름끼치는 파공성을 울렸다.

범화와 화혁간, 차천석 등 세 사람은 동시에 몸을 날리며 단연경의 양쪽을 나누어 공격했다. 대리의 삼공은 정세가 매우 위험한 것을 보고 단정순을 구하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는지라 하나같이 곧장 단연경의 급소를 공격하여 그로 하여금 지팡이를 회수하여 자신을 지키도록 하려고 했다.

단연경은 외손의 무쇠 지팡이를 내려뜨려 땅바닥을 짚으므로써 자기의 몸을 지탱했다.

오른손의 무쇠 지팡이를 비스듬히 휘둘러 단 한 번에 상대방의 세 가지 무기를 모조리 퉁겨나도록 만들었다. 그는 곧이어 단정순의 정수리를 노리고 신속히 찍어 갔다.

원성죽은 악,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질풍처럼 덮쳐갔다. 연인이 죽음에 처하자 그녀 역시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단연경의 무쇠 지팡이가 단정순의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과 세 치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별안간 단정순의 몸이 옆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단연경의 지팡이는 그만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단연경은 자기의 지팡이가 상대방을 찍으려는 순간 한 대한이 손을 뻗쳐 단정순의 뒷달미를 잡아당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한 수의 신공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단연경은 자기의 무공이 매우 고강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느나 그 정의 실력은 없다고 느꼈다.

손을 써서 단정순을 구한 사람은 바로 소봉이었다. 두 단씨가 서로 격투를 벌이게 되었을때 그는 한쪽에서 서서 눈길을 떼지 않고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단정순이 상대방에게 살해를 당하게 될 찰나, 단연경의 지팡이가 단정순의 정수리를 찍게 된다면 자기의 피맺힌 원한을 갚을 수가 없게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며칠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이 빌고 빌었으며 또한 맹세를 했던 가? 어떻게 하더라도 그 원한을 갚아야겠다고 맹세하고 있었는데 원수가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죽는 것을 어찌 방치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몸을 날려 앞으로 나아가서는 단정순을 잡아당겼다.

단연경은 소봉이 단정순을 내려놓기도 전에 오른손의 무쇠 지팡이를 광풍폭우처럼 찔러대며 한 지팡이에 이어 다시 한 지팡이를 무조건 단정순의 급소만 노리고 찍어댔다.

그는 자신이 황위에 오르는 데 카다란 방해가 되는 단정순을 제거해야겟다고 결심 한 것이다. 소봉을 어떻게 상대하든 그것은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봉은 단정순을 붙잡은 채 왼쪽으로 피하고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으며 그자의 자팡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일일이 상대방의 공격을 해소시켰다. 단연경은 잇따라 스물 일곱 번이나 지팡이를 휘둘렀으나 시종 단정순의 옷자락 한 번 건드릴 수가 없었다.

아연해진 단연경은 자기가 소봉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별안간 그는 기이한 휘파람 소리를 내지르며 몇 장 밖으로 물러나서는 물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어째서 남의 일을 방해하시오?"

소봉이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운중학이 부르짖었다.

"그는 바로 개방의 전임 방주인 교봉이외다! 노대의 제자 추혼장 담청은 바로 저 악당(?)의 손에 죽음을 당했소이다!"

이 말이 떨어지자 단연경은 속으로 흠칫 놀랐을 뿐만 아니라 대리에서 온 군호들도 얼굴 빛이 변했다.

교봉의 이름은 천하에 울려퍼진 지 오래되었다. '북교봉 남모용'이라면 무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부사귀와 단정순에게 성명을 말할 때 스스로 거란 사람 소봉이라고 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은 그가 바로 명성이 쟁쟁한 교봉인 줄을 몰랐던 것이다.

운중학의 말을 듣자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원래 그였군! 의협심이 뛰어나고 무용이 절륜하다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 구나!'

단연경은 운중학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자랑하는 제자 담청이 어떠헥 하여 취현장에서 남을 해아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교봉에게 죽음을 당했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사내가 바로 제자를 죽인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속으로 분노가 끓어오르는 한편 또한 의구심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무쇠 지팡이로 땅바닥 청석판 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귀하는 나와 무슨 원한이 있어 나의 제자를 죽이고 또 나의 큰일을 방해한 단 말이오?'

찍, 찍, 직, 하는 소리가 잇따라 일명서 청석판에다 대고 글을 쓰는 것이 마치 모래에다 글을 쓰는 것 같았다. 그 글자들은 획 하나 하나가 깊이 새겨졌다.

그의 복화술과 상승내력을 결합시킨 재간은 사람의 심맥을 흐려 놓고 사람의 정신과 지혜를 어지럽게 만드는 지극히 무서우면서도 사악한 수법이었다.

그러나 이 무공은 순전히 심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해야 했다. 따라서 만약 적의 내력 조예가 자기보다 뛰어날 때는 오히려 스스로 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는 담청이 죽게 된 원인을 알고 있었고 또한 소봉이 단정순을 구하는 솜씨를 보았는지라 경솔하게 복화술로 그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봉은 그가 글을 다 쓰고 나자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더니 발을 뻗어 땅바닥에 몇 번 분질렀다. 그러자 석판에 새겨진 글자들이 모조리 깨 끗이 지워졌다.

사람이 무쇠 지팡이로 청석판에다 글을 쓴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교봉이 발로 보연준 재간은 지팡이 끝에 내력을 집중하는 것에 비해 더욱 어려운 무예였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쓰고 한 사람은 지우게 되었으니 그 청석판으로 이루어진 호숫가의 소로는 마치 모래바닥처럼 변하고 말았다.

단연경은 그가 자기가 쓴 글을 지우는 것을 보고, 상대방이 자신의 솜씨를 보이며 자기와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과거에는 우연히 저지르게 된 과실이니 만약 따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으면 서로 따지지 말자고 하는 뜻임을 알았다.

따라서 단연경은 자기 자신이 상대방의 적수가 될 수 없으니 일찌감치 물러서 서 손해를 보지 않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오른손 지팡이를 위에서 부터 아래로 긋고 다시 위로 한 번 쳐들어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뜻을 표했다. 곧이어 그는 무쇠 지팡이로 땅을 짚고는 뒤로 몸을 날렸고 곧이어 몸을 돌리더니 표연히 떠나갔다.

남해악신은 둥그런 눈을 치뜨고 소봉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욕설을 퍼부었다.

"제기랄, 이 잡종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나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그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그는 호수 한 복판으로 날아가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을 사방으로 퉁기면서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소봉은 다른 사람이 그를 잡종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증오했다. 그리하여 왼손에는 여전히 단정순을 쳐든 채 달려가 오른손으로 남해약신을 잡아서는 호수 속으로 내던져 버린 것이다. 이 손 놀림은 실로 신속하기 이를데 없어 남해악신은 도저히 항거할 수가 없었다.

남해 악신은 오래전부터 남해에서 살아왔고 또한 자칭 악신이라 일컫는 만큼 자맥질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는 두 발로 호수 밑바닥을 차고 호수 위로 뛰어오르더니 부르짖었다.

"네 놈은 비겁하게....."

그러나 이 한 마디를 하자마자 그의 몸은 다시 호수 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다시 호수 밑을 차면서 전신을 물밖으로 떠올리며 부르짖었다.

"나를 암습했다!"

그 한 마디 말이 끝나기 전에 그는 다시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세번째로 솟아오르게 되었을 때 다시 부르짖었다.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그는 성질이 매우 급했다. 미처 언덕으로 오르기도 전에 소봉에게 욕을 퍼붓는 바람에 다시 물속으로 떨어지곤했다..(쯧쯧.. 불쌍한 남해악신...)

아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저걸 보세요. 저 사람은 물속에서 기어나왔다 기어들어갔다 하는 것이 꼭 커다란 한 마리의 자라 같죠?"

마침 남해 악신은 이때 수면 위로 솟아오르면서 자연 그녀가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자라는 후레자식이란 욕이다.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너야말로 한 마리의 작은 자라다!"

아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한 개의 비추를 남해악신에게 날려보냈다. 그런데 비추가 이르렀을때는 이미 남해악신은 다시 호수 속으로 빠진 뒤였다.

남해악신은 언덕 위로 헤엄쳐 와서 흠뻑 젖은 몸으로 기어 올라왔다. 그는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어 뚱딴지 처럼 소봉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소봉을 노려보고 말했다.

"당신이 나를 호수 속으로 던진 수법은 어떤 것이지? 그 재간은 내가 모르는 것인 데?"

섭이랑은 칠팔 장 밖에 서 있다가 불렀다.

"노삼, 그곳에서 못난 꼴을 보이지 말고 빨리 가요."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내가 상대방에게 던져져 호수 속으로 떨어지게 되었는데도 상대방이 어떤 수법을 썼는지 모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치욕이 아니겠소? 그러니 마땅히 물어 보아야지!"

그때 아자가 옆에 있다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내가 그대에게 말해 드리지. 그 재간은 척구공(자라를 던지는 수법)

이라고 해요."

남해악신은 말했다.

"음, 원래 척구공이란 말이지! 재간의 이름을 알게 된 이상 방어법을 열심히 연마하면 앞으로 이런 꼴을 당하지 않겠지."

그는 재빨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나갔다. 이때 섭이랑과 운중학은 이미 멀리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23장 새외에서 양을 기르다는 약속이 헛되고 말다.

소봉은 가볍게 단정순을 땅 위에 내려놓고 몇 걸음 물러섰다. 원성죽은 허리를 굽히며 인사말을 했다. "교방주, 먼저 저희 딸을 구해 주시더니 이번에는 이...... 이 양반을 구해 주셨군요. 정말 무어라고 고마운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범화와 주단신 등도 다가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소봉은 싸늘히 말했다.

"소봉이 그를 구한 것은 순전히 사사로운 욕심에 의한 것이니 여러분들은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고. 단왕야, 내 그대에게 한 마디 묻겠는데 솔직이 대답해 주시오. 과거 그대는 한 가지 양심에 가책을 느낄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소, 없소? 물론 그 일은 그대 본심에서 저지른 것이 아니겠지만, 그대는 한 어린애를 해쳐 한 평생 외롭고 고달프게 자라도록 했으며 그 애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게 했소. 그런 일이 있소, 없소?"

안문관 밖에서 어떤 한 쌍의 남녀가 모두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만 해도 그는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는 뭇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단정순은 온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곧 창백해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틀림없소. 이 단모는 한평생 그 일로 마음이괴로웠던 것이오. 그리고 매번 생각할 때마다 불안하게 여겼소. 그러나 이미 큰 잘못은 저지른 셈이니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그런데 하늘이 불쌍히 여기시어 오늘 나로 하여금 다시 그 피해자를 만나 보게 하셨구려. 다만...... 다만......

아, 어쨌든 나는 당신에게 죄를 지었소."

소봉은 날카로운 어조로 다그쳤다.

"그대는 이미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으며 남을 해쳐 고달프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어째서 지금까지 있따라 두번 세번 끈ㅎ임없이 나쁜일을 저지른단 말이오?"

단정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이 말했다.

"이 단모의 행동이 단정치 못하고 덕이 모자라 잘못을 저질렀소. 그리고 한평생 황당무계한 일을 너무 많이 저질러 생각만 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소."

소봉은 신양에서 마부인으로부터 단정순이란 이름을 듣게 된 이 후 밤낮으로 단정순을 찾아내어 어떻게 죽일까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단정순으로 하여금 온갖 고통을 당하게 한 이후 목숨을 빼앗아야겠다고 결심했엇다. 그러나 조금 전 그가 친구에게 어질게 대하고 적을 상대함에 있어서도 호탕한것이 결코 나쁜 짓을 일삼는 비열하고도 간악한 도배같지는 않아 속으로 의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가 안문관 밖에서 나의 부모를 죽이게 된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 같은 잘못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의 의부인 교삼괴 부부를 죽이고 나의 은사 현고대사를 해친 것은 결코 용서할수 없는 악행이다. 설마하니 이 가운데 다른 사정이 있었더란 말인가?)

그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결코 경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정면으로 질문을 던져 단정순으로 하여금 친히 대답하도록 하여 그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리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단정순은 얼굴에 매우 부끄러운 빛을 띠우고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 한평생 불안스럽게 여겨왔으며 또 오늘 다시 과거에 자신으로 인해 고아가 된 애를 만나게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교삼괴 부부를 죽이고 현고대사를 죽인 사실에 대해서 단정순은 스스로 행위가 단정치 못하고 덕행에 있어 올바르지 못했다는 점을 스스로 시인하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제서야 모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소봉은 얼굴을 서릿발처럼 싸늘히 하고 코웃음쳤다.

원성죽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 이 분은 언제나 이 모양이예요. 나는 별로...... 그를 탓하지 않았어요."

소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있었고 초롱초롱한 두 눈에는 흠뻑 정을 담고서 단정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봉은 더욱더 노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좋소. 원래 그는 언제나 이 모양이었군!"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단정순에게 물었다.

"오늘 밤 삼경, 나는 청석교 위에서 기다리겠소. 귀하와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소."

단정순은 말했다.

"그 시간에 반드시 그곳으로 가리다. 큰 은혜는 감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하는 법이나 멀리 오시느라고 수고를 했으니 저쪽 초라한 집에 들어가셔서 술이라도 드시는 게 어떻겠소?"

소봉은 말했다.

"귀하의 상처는 어떠시오?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겠소?"

그는 술을 함께 마시자는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정순은 약간 이상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교형이 걱정을 해 주어서 고맙소이다. 이까짓 가벼운 상처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외다."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소. 아주, 우리는 갑시다."

그리고 그는 두 걸음을 옮기고 고개를 돌려서는 다시 단정순에게 말했다.

"그대 손 아래의 저 친구들은 그때 데리고 오지 않도록 하시오."

그는 범화, 화혁량 등이 모두 충성심이 강한 호한인 것을 보고 아끼는 마음이 생겼었다. 사실 단정순과 함께 청석교로 나오게 된다면 그들 모두 일일이 자기의 손에 죽게 될 판이라 인재가 아까운 생각이 들어 그같이 미리 못을 박아둔 것이다.

단정순은 소봉의 언행에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인을 건드리고 사생아를 낳은 죄는 단정명마저 그냥 씩 웃고 넘어갔는데 소봉은 뭇사람들 앞에서 엄히 꾸짖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소봉이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하고 순순히 응낙을 한 것이다.

"삼가 형씨의 분부를 따르리다."

소봉은 아주의 손을 잡고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곧장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소봉과 아주는 한 농가를 찾아들어가 쌀을 사서 밥을 끓이고, 두 마리의 닭을 사서는 국을 끓여 밥을 먹었다. 밥은 맛있었지만 술이 없어서 약간 서운했다. 그는 아주가 가슴 가득히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줄곧 입을 열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물었다.

"내가 원수를 찾게 된데 대해서 그대는 마땅히 나를 위해 기뻐해야 할것이 아니겠소?"

아주는 미미하게 웃고 말했다.

"그래요. 저는 마땅히 기뻐해야 해요."

소봉은 그녀가 억지로 웃는 것을 보고 말했다.

"오늘밤 우리는 그 사람을 죽인 후 즉시 북쪽으로 올라갑시다. 그리고 안문관 밖에서 말을 달리고 사냥이나 하면서 소와 양을 치며 삽시다. 그리고 다시는 관내에 한 걸음도 들여 놓지 맙시다. 아주, 나는 단정순을 만나기 전에는 그의 집안의 닭이나 개를 막론하고 한마리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키겠다고 맹세를 했었소. 그러나 그 사람이 무척 의리가 있고, 한 사람이 한 짓은 한 사람이 책임을 질 뿐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의 가족은 다시 찾지 않기로 했소."

아주는 말했다.

"그대의 그와 같은 생각은 정말 덕을 쌓는 것이라 반드시 후에 복을 누리게 될거예요."

소봉은 소리내어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나는 이 두 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르는데 무슨 덕을 쌓고 무슨 복을 누린단 말이오?"

그러다가 그는 아주가 아리따운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물었다.

"아주 그대는 어째서 기뻐하지 않소? 내가 사람을 다시 죽이는 것이  ㄹㅎ소?"

아주는 말했다.

"기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예요. 어떻게 된 노릇인지 배가 몹시 아파요."

소봉은 손을 뻗어 그녀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맥박은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마음이 번거롭고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길을 오면서 고생이 많아 감기 기운이 있는것 같구려.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여 생강탕을 한 그릇 다려서 가져 오라고 하겠소."

그런데 생강탕이 다려지기도 전에 아주는 몸을 벌벌 떨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추워요. 아주 추워요"

소봉은 무척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기가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는 그녀의 ㅁㅁ에 걸쳐 주었다.

아주는 말하였다.

"오라버니, 오늘 밤 원한을 갚게 되어 그토록 바라던 소원을 풀게 되었으니 제가 마땅히 오라버니와 함께 가야 하지 않겠어요?"

소봉은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그대는 이곳에서 쉬도록 하시오. 한숨 자고 났을 때 나는 이미 단정순의 머리를 들고 오게 될 것이오."

아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매우 난처하군요. 정말 다른 방법이 없군요. 저는 함께 갈 수가 없어요.

저는 정말 오라버니와 함께 갔으면 헀고, 또한 함께 있고 싶어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오라버니는...... 오라버니 혼자 이토록 적막함과 외로움을 달래야 할테니 죄송하게 되었네요."

소봉은 그녀가 부드럽기 이를데 없는 정을 보여 주자 무척 감동되어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는 단지 잠시 동안 헤어지는 것인데 무슨 큰 상관이 있겠소? 아주, 그대는 나에게 정말 잘 대해 주는 구려. 그대의 사랑에 나는 어떻게 보답해야 될지 모르겠구려."

아주는 말했다.

"잠시 동안 헤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저는 마치 오랫동안 헤어질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오라버니, 제가 오라버니를 떠나게 된다면 오라버니도 외롭게 되고 저 역시 외롭게 될거옝. 그러니 오라버니가 저를 데리고 즉시 안문관 밖으로 달려가 소나 양을 치면서 사는 것이 가장 좋겠어요. 단정순에 대한 원한은 몇년이 지난 후에 갚아도 되지 않겠어요? 먼저 저로 하여금 오라버니를 일 년 동안 모시도록 해 주세요."

소봉은 가만히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겨우 그를 만나게 되지 않았소? 오늘밤 원한을 갚게 되면 우리는 다시 중원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될 것이오. 단정순의 무공은 나보다 뒤떨어지고 있소. 그는 또한 육맥신검도 펼칠 줄 모르오. 그러나 만약 일 년 후에 다시 오게 된다면 대리로 가야 하오. 대리 단씨의 집안에는 고수들이 무척 많소.

만약에 육맥신검에 정통한 고수를 만나게 된다면 그대의 오라버니는 십중팔구 지게 될것이오. 내가 그대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실로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다오."

아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직이 말했다.

"맞아요. 나는 그대에게 일 년 후 다시 대리로 찾아가 원한을 갚도록 하자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대 홀로 호랑이 굴 속으로 깊히 뛰어든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소봉은 큰 소리로 웃으며 술 사발을 들고 한 잔 쭉 들이키는 시늉을 했다.

그는 커다란 대접이나 사발에 술을 마셔 온 버릇이 있는지라 지금 사발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와 같은 시늉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는 말했다.

"만약 이 소봉 혼자 몸이라면 대리 단씨 집안이 용담호혈이라 할지라도 나는 뛰어들게 될 것이오. 생사와 위난은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소. 그러나 지금 그대 아주가 내 옆에 있소. 나는 그대를 한평생 돌봐야 하기 때문에 이 소봉의 목숨은 귀중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오."

아주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이 가볍게 오므라 들었다. 소봉은 가볍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마음속은 차분하고 따스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 같은 처를 얻게 된다면 또 무슨 한이 있겠는가?)

삽시간에 그의 마음은 새외로 달려갔다. 한 달 후가 되면 아주와 대초원에서 말을 나란히 하고 달리며 소와 양을 키우면서 사냥을 하는 생활을 누리게 되고 다시는 적이 침해할 것을 경계할 필요도 없는, 걱정없는 세월을 보내게 된다면, 그 얼마나 자유스럽고 멋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날 취현장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준 흑의인의 은혜를 갚지 못해 약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 같은 대영웅은 은혜를 베풀 때 결코 보답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한평생 그에게 은혜를 입고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주는 소봉의 품속에 안겨 이미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소봉은 은자 삼전을 꺼내서 그 농사꾼에게 주고 방을 하나 비워 주도록 했다. 그리고 아주를 안아다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준 후 모기장을 내렸다.

이어 그는 그 농가의 대청에 앉아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그는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초생달이 나뭇가지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고 서북 쪽에서는 검은 구름이 점차 모여들고 있었다. 아마도 이 날 밤 뇌성벽력과 함께 큰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소봉은 장포를 걸치고 청석교 쪽으로 걸어갔다. 오 마장 쯤 나아가자 냇가에 이르게 되었다. 달이 냇물에 거구로 비친 것을 볼 수 있었다. 서쪽 하늘은 이미 검은 구름으로 뒤덮혀 있었고, 간혹 검은 구름 사이로 한두 번 번개불이 번쩍하며 사방을 훤히 밝혀 주곤 하였다. 그리고 번갯불이 지나간 후에는 오히려 더욱더 온누리가 어둠에 휩싸이곤 했다. 멀리 묘지에서는 도깨비불이라고 하는 인광이 흔들거리며 풀 사이로 흘러갔다 흘러오곤 하였다.

소봉은 점차 걸음을 빨리 했다. 얼마 후 그는 청석교 다리에 이를 수 있었다. 그는 북두칠성의 위치를 살폈다. 아직 시간은 이른 편이어서 겨우 이경 남짓한 시진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수를 갚기 위해 이토록 성질을 누그르지 못하고 한 시간이나 일찍 오다니.)

그는 한평생 남과 목숨을 걸고 싸우기로 약속한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무공이나 명성이 단정순보다 더욱 뛰어난 자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밤은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고 옛날 거침없이 앞으로만 나아가 결사일전을 벌이던 호기가 없어진 것 같았다.

그는 다리에 서서 냇물이 다리 밑을 유유히 흘러가는 것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과거 나는 혼자 왔다갔다 했으며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었었다.

그러나 오늘밤 나의 마음속에는 아주가 자리잡고 있지 않는가? 아, 이것이야말로 남녀의 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영웅기개가 줄어든다는 이치겠지.)

이와 같은 생각과 더불어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아주에 대한 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입가에 한 가닥 미소를 띠우며 다시 생각했다.

(만약 아주가 나와 함께 이곳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단정순의 무공이 자기보다 훨씬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밤의 사움에서 승부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약속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는 것을 보고 다릿가의 나무 아래에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고 운기조식을 했다. 점차 정신이 맑아지면서 모든 잡념이 사라져 갔다.

별안간 번개불이 번쩍하더니 우르릉 쾅쾅 하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번개가 구름 사이로 빠져 나와 온누리를 순간적으로 밝혀 주고 사라졌다. 소봉은 눈을 뜨고 속으로 생각했다.

( 곧 큰 비가 오게 될텐데, 이제 삼경이 다 됐겠지.)

바로 이때 소경호 쪽으로 통하는 길에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오고 있었다.

넓다란 장포에 띠를 느슨하게 매고 있었다. 바로 단정순이 아닌가?그는 소봉 앞에 이르더니 깊히 읍을 하고는 말했다.

"교방주께서 부르신 것은 어인 일인지 모르겠구려?"

소봉은 약간 고개를 기웃하고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가닥 노기가 별안간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단왕야, 내가 그대를 이곳으로 나오게 한 뜻을 그대는 정녕 모른단 말이오?"

단정순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대는 과거 안문관 밖의 사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소? 나는 그야말로 간악한 자의 말을 잘못 듣고 희롱을 당한 끝에 자당의 목숨을 해치게 되었고 그 바람에 영존마저 자결하게 만들었으니 실로 큰 잘못이라 할 수 있소.

"

소봉은 싸늘히 말했다.

"헌데 당신은 어째서 나의 의부인 교삼괴 부부를 해쳤으며 나의 은사인 현고대사를 죽도록 만들었소?"

단정순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저 이 일을 숨길 수 있었으면 해서 그랬던 것이오. 그런데 점차 더욱더 깊히 빠져들게 되고 끝내는 헤어날 수가 없었소."

소봉은 말했다.

"당신은 그래도 솔직한 사내대장부이구려. 그대 스스로 자결을 하겠소, 아니면 내가 손을 써야 하겠소?"

단정순은 말했다.

"만약 교방주가 손을 써서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낮에 이 단모는 소경호 가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을 것이외다. 반 나절 더 살아남게 된 것은 귀하의 은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소. 교방주가 불초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손을 쓰시오."

이때 우르릉 하는 뇌성벽력과 함께 콩알 같은 빗방울이 쏴악하며 퍼붓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봉은 그의 말이 호탕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그는 평소 영웅호걸과 사귀기를 좋아헀다. 그런데 단정순을 만나고 보니 그의 풍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시원시원한 태도 때문에 아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흔히 있는 감정상의 문제나 충돌이었다면, 설사 그 자신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라할지라도 벌써 웃고 말았을 것이며 함께 어울려 수십 대접의 독한 술을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원수는 불공대천인데 어찌 그를 놓아 줄 수 있겠는가. 그는 말했다.

"나는 자식과 제자된 도리로서 부모와 사부님의 원한을 갚지 않을 수가 없소. 당신은 나의 부친을 죽이고 어머니를 죽였으며 의부모까지 죽였을 뿐만 아니라 무공을 전수해 준 은사마저 해쳤소. 모두 다섯사람이나 되니 나는 당신을 다섯 번 때리겠소. 당신이 나에게 다섯 번을 맞은 후에 죽든지 살든지 과거의 원한은 일체 없었던 것으로 하겠소."

단정순은 쓸쓸히 웃었다.

"그 배려에 깊이 감사하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의 대리 단씨의 무공이 탁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소봉의 장력을 너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

교봉은 말했다.

"그렇다면 일장을 받으시오!"

소봉은 왼손으로 원을 그리며 오른손으로 휙!하니 후려쳤다.

온하늘이 번쩍하니 밝아지면서 하늘에서는 다시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벼락치는 소리가 떨어지면서 교봉의 기세를 돋구는 것 같았다. 소봉이 전개한 일장의 위세는 그야말로 풍우와 뇌성이 함께 몰아치는 듯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일장은 곧장 단정순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그 순간 단정순은 그대로 서 있지 못하고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으며 퍽!하는 소리와 함께 청석고 난간에 부딪히더니 맥없이 늘어져서 꼼작도 하지 않았다.

소봉은 어리둥절해졌다.

(어째서 그는 손을 들어 맞받아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토록 형편없이 나가떨어진단 말인가?)

그는 몸을 날려 앞으로 나아가 그의 뒷덜미를 들었다. 그 순간 그는 흠칫했다.

(어째서 그가 이토록 가벼워졌을까?)

이 날 낮에 그가 손을 써서 단정순을 구하게 되었을 때 그의 몸을 들고 있었던 시간은 꽤나 길었었다. 무공이 고강은 사람은 손에 전해지는 무게에 대하여 한 근이나 반근의 차이라도 즉시 알아치리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때 소봉은 단정순의 몸뚱아리가 갑자기 수십근이나 더 가벼워진 것을 느끼고 속으로 뭐라고 말 할수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전신에서는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바로 이때였다. 번개불이 다시 번쩍하니 빛났다. 소봉은 손을 뻗쳐 단정순의 얼굴을 할퀴듯 문질렀다. 그런데 손에 잡히는 것은 한 무더기의 부드러운 진흙이 아닌가? 진흙은 한번 부비자마자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번갯불이 번쩍 했으므로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애통하게 부르직었다.

"아주! 아주!"

이때 그는 사지백해에 다시 반 점의 기운도 쓸 수 없는 것을 느끼고 그만 무릎을 털썩 꿇고 말았다. 그리고 아주의 두 다리를 얼싸안았다. 그는 방금 자기가 일장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일등가는 고수라고 하더라도 만약 손을 뻗어 막지 않는다면 견뎌낼 수 없을 터인데 이 연약하기만 한 아주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일장에 그녀는 늑골이 모조리 부러지고 오장이 충격을 받아 갈기갈기 찢어져서는 설사 설신의가 옆에서 피료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는 틀린 노릇이었다.

아주의 비스듬히 난간에 기댔던 몸이 천천히 미끄러져서 소봉의 몸 위로 쓰러졌다.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오라버니, 저는..... 저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저에게 화가 나시겠죠?"

소봉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화를 내지 않소! 나는 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소! 내 자신이 밉소!"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맹렬히 자기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아주의 왼손이 움찔했다. 아마도 그가 스스로 때리는 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팔을 쳐들지 못하고 말했다.

"오라버니, 약속해 주세요. 영원히......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겠다고 말이에요."

소봉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그랬소?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아주는 나직이 말했다.

"오라버니, 저의 옷을 벗기고 저의 왼쪽 어깨죽지를 보세요."

소봉은 그녀의 천리길 만리길을 함께 오면서 한 방에서 같이 자기도 했으나 시종 예의로서 그녀를 대해 왔다. 이때 그녀가 자기의 옷자락을 풀고 자기의 어깨죽지를 보라는 말에 그는 어리둥절해 졌다.

아주는 말했다.

"저는 이미 그대의 사람이었어요. 저는...... 저는...... 온몸이 그대의 것이었어요. 한번 보세요. 왼쪽 어깨죽지를 보기만 하면 알 수 있을거예요."

소봉은 두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가 말할 때 정신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보고는 속으로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잖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왼손을 그녀의 등에 갖다 대고 급히 진기를 돋우어서 천천히 그녀의 몸안으로 주입시켰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천천히 그녀의 옷자락을 풀어헤치고 그녀의 왼쪽 어깨죽지가 드러나도록 했다.

하늘에 기다란 한 줄기의 번갯불이 번적 하고 지나가며 소봉의 눈 앞을 비췄다. 이때 그녀의 백설같이 고운 어개죽지에는 새빨간 핏빛의 붉은 글자가 문신이 되어 있었는데 그 글자는 바로 단(段)자였다.

소봉은 놀람과 의아함을 느끼는 한편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감히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재빨리 그녀의 옷자락을 끌어올려서 그녀의 어깨죽지를 덮어주고 그녀를 가볍게 품속에 안고 물었다.

"어깨에 단자가 문신이 되어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오?"

아주는 말했다.

"저희 아버지 어머니가 저를 다른 사람에게 내주게 되었을 때 저의 어깨죽지에 문신을 한 것이에요. 그것은 나중에...... 나중에 자식을 알아 보자는 것이죠."

소봉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단자는......"

아주는 말했다.

"오늘 낮에 그들이 아자의 어깨죽지에서 표시를 발견하고 그들의 딸인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대는..... 그대는...... 그 표시를 보았나오?"

소봉은 말했다.

"보지 않았소. 나는 보기 거북했소."

아주는 말했다.

"그녀...... 그녀의 어깨죽지에도 역시 새겨진 문신은 붉은 글자 단자예요.

저의 것과...... 모양이 똑같죠."

소봉은 대뜸 깨닫는 바가 있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 그대 역시 그들의 딸이었소?"

아주는 말했다.

"본래 나는 몰랐어요. 그러나 여자의 어깨죽지에 문신이 되어 있는 글자를 보고서야 알았어요. 그녀에게는 또 목걸이 끝에 다는 금조각이 있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금조각과 모양이 똑같았어요. 그리고 그 위에는 역시 열 두 자가 새겨져 있었어요. 그녀의 금조각에 새겨진 글자는 호변죽, 영영록, 보평안, 다희락 이었어요. 저는...... 저는 옛날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었어요. 그저 복을 비는 말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저의 어머님의 이름을 따서 문신을 한 것이었어요. 저의 어머님은 바로 그 원성죽이라는 여자예요. 그리고 그 한쌍의 금조각은 바로 저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선물한 것이에요. 어머니는 우리 자매 두 사람을 낳고 우리 한 사람에게 하나씩 목에 걸어 주었던 거예요."

소봉은 말했다.

"이제 알겠소. 내 즉시 방법을 강구해서 그대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리다.

그러한 일들은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해도 늦지 않소."

아주는 말했다.

"아니, 아니예요. 나는 그대에게 분명히 말해야겠어요. 좀더 늦었다가는 때를 놓치고 말거예요. 오라버니, 그대는 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주세요."

소봉은 그녀의 뜻을 거역하고 싶지 않았다.

"좋소, 내 그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도록 하지."

아주는 빙그레 웃고 말했다.

"오라버니, 그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무슨 일을 하시든지 먼저 나를 생각해 주시니까요. 그토록 저를 사랑해 주시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소봉은 말했다.

"이후 나는 더욱더 그대를 백 배 천 배 사랑해 주겠소."

아주는 미소했다.

"됐어요. 됐어요. 저는 그대가 나에게 너무 잘 대해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제가 세상물정을 모르고 날뛰게 되면 그때 저를 간섭할 사람이 없게 되니까 말이예요. 오라버니, 저는...... 저는 대나무집 뒷쪽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자 누이가 하는 말을 엿들었어요. 원래 저의 아버지에게는 달리 또 처자가 있어요. 그와 어머니는 정식 부부관계가 아니었어요. 처음에 나를 낳고 그 이듬해 다시 누이를 낳게 된거예요. 그 후 아버님은 대리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어머니가 그를 놔 주지 않으려고 함게 따라 두 사람은 크게 언쟁을 벌이게 됐고 어머니는 그를 때리기까지 했으나 아버님은 반격을 하지 않았대요. 그 후...... 그 후......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었대요. 저의 외가집에서는 가정교육이 매우 엄해 만약 이일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어머니를 죽였을 것이라더군요. 그리하여 저의 어머니는 감히 우리 자매를 잡으로 데려 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죠. 그러나 이후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 자매의 어깨죽지에 단자라는 문신을 새긴거예요.

저를 거두어 기른 사람은 그저 저의 어머니의 성이 원씨인줄만 알았다는 군요. 기실 저의 성은 단씨였어요....."

소봉은 속으로 더욱더 연민의 정을 느끼며 나직이 말했다.

"아, 너무나 고달픈 운명의 소녀였군."

휴...생각보다 힘들군요....

제가 내일부터 시험이라서 당분간 올리기 힘들것 같지만꾸준히 올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6월 21일에 시험끝나고 방학이니 그때부턴 열심히 올리지요.

그럼.... 천룡팔부 재밌게 보세요.....

아...검토를 안해서 오타가 많을지도...

그리고 이책은 중원문화사에서 나온 옛날책 '대륙의별'을 배낀겁니다.

내용은 같으니 상관 없겠죠?그럼....새로 회원이 된 ..... Star Light가...

아주는 말했다.

"저의 어머니가 저를 남에게 내주게 되었을 때 저는 한살이 조금 넘었을 뿐 이었어요. 그러니 저는 아버지를 알아볼 수도 없고 어머니의 얼굴을 봐도 알아볼 수가 없었죠. 오라버니, 그대 역시 저와 마찬가지겠죠. 그날 밤 은행나무 숲속에서 남이 그대의 신세를 말하는 겄을 들었어요. 그때 나는 속으로 매우 괴로워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두 사람은 똑같은 운명에 시달려 온 사람들이니까요."

번개불이 잇따라 번쩍 하는 가운데 천둥이 연이어 우르릉! 꽝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별안간 냇가의 한 그루 커다란 나무가 벼락을 맞아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은 그들 이외의 어떤 것에 대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주위에 이 같은 난리가 벌어졌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대의 부모님을 해쳐 죽인 사람은 놀랍게도 저의 아버지였어요. 아, 하늘은 우리가 정말 너무나 커다란 고통을 당하도록 우리의 운명을 안배하였는가 봐요. 그리고...... 마부인의 입으로부터 저의 아버지 이름을 유도해 실토하도록 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어요. 내가 만약에 그때 백세경으로 변장하여 그녀를 속이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결코 저의 아버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을거예요. 사람들은 모르는 가운데 자연히 하늘의 이치가 들어있다고 한 것을 저는 한 번도 믿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러나 그대는 말해보세요 그말을 믿을수 있을 것 같아요?"

소봉은 고개를 쳐들었다.

온 하늘의 검은 구름은 어느덧 달을 삼켜 버렸고, 한 점의 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따금 기다란 번갯불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사방을 밝게 비춰 줄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이 갑자기 눈을 뜨는 것 같았다.

그는 맥없이 고개를 숙이며 마음이 텅빈 듯 허전해지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그대는 단정순을 그대의 아버지로 알고 있는데 그게 틀림없는 사실이오?"

아주는 말했다.

"틀림 없어요.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의 누이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 자매 두 사람을 버리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어요.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다 살아 생전에 어떻게 하든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어요. 그들은 그들의 친딸이 바로 창밖에서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오라버니, 아까 내가 거짓으로 병이 났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대의 모양으로 변장을 하고 저의 아버지에게 가서 말했어요. 오늘밤 청석교의 약속은 그만두기로 하고 과거의 원한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다시 저의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그대를 만나러 나왔던 거예요....... 그리하여 그대로 하여금...... 그대로 하여금......"

거기까지 말하게 되었을 때 이미 그녀는 숨이 한 가닥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소봉은 손바닥에 더욱더 내력을 돋우어 아주가 완전히 허탈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대는 어째서 나에게 말하지 않았소? 만약에 내가 그대의 아버지가 바로 그 사람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다음의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런 사실을 미리 알게 되었고 단정순이 바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부친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했을는지 자기 자신으로서도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주는 말했다.

"저는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았어요. 오라버니, 제가 얼마나 그대를 한평생 모시고 싶었는지 아세요? 그러나 그게 될 수 있는 일이겠어요? 그리고 제가 그대에게 다섯 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원한을 갚지 말라고 요구할 수 있겠어요? 설사 내가 멍청하게스리 그대에게 부탁을 해서 그대가 응낙한다 하더라도 그건 그건......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녀의 음성도 갈수록 낮아졌다. 우뢰소리는 여전히 우르릉! 우르릉!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봉의 귀에는 아주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뢰소리보다 더욱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옷자락을 잡아뜯으며 말했다.

"그대는, 그대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도망쳐서 이 만날 장소에 나오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었잖소! 혹은 그대의 아버지가 영웅 호걸이라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대는 내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그대 아버지와 약속을 하되 이곳에서 아주 먼 곳에 그리고 아주 까마득한 훗날에 다시 만나도록 했으면 되었을 것이 아니겠소. 어째서...... 어째서...... 이토록 스스로 고통을 자초한단 말이오?"

아주는 말했다.

"저는 그대에게 한 사람이 실수하여 다른 사람을 해쳐 죽이게 된 것은 결코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란 것을 알려 드리고자 했던 거예요. 그대는 물론 저를 해치고 싶지 않았겠지만 그대는 나에게 일장을 가했어요. 저의 아버지가 그대의 부모를 해쳐 돌아가시게 한 것은 우연히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일 뿐이예요."

소봉은 줄곧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번갯불이 몇 번 번쩍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무한한 온정이 어려 있었다. 별안간 그는 아주의 자기에 대한 사랑이 자기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갑자기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정순은 그녀의 친아버지이지만 그녀에게 결코 은혜를 베풀지 못했다. 따라서 그녀는 나로 하여금 모르고 저지른 잘못을 용서할 줄 알도록 깨우치게 한 것이고, 실수로 자기의 생명을 헛되이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을 전하려고 했구나!)

그리하여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주, 아주, 그대에겐 달리 이유가 있었구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안고 몸을 일으켰다.

아주는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소봉이 마침내 자기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기뻤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목숨이 이미 다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정인이 자기의 마음속 깊히 숨겨둔 뜻을 알아차리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끝내 그는 알게 된 것이다......

소봉은 말했다.

"그대는 완전히 나를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오? 아주, 그렇지 ㅇ낳소?"

아주는 나직이 말했다.

"그래요."

소봉은 큰 소리로 말했다.

"무엇 때문이오? 무엇 때문이오?"

아주는 말했다.

"대리 단씨 집안에는 육맥신검이 있어요. 그대가 그들 진남왕을 때려 죽이게 된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오라버니, 그 역근경의 문자를 우리들은 또 알아 볼 수가 없으니......"

소봉은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만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

아주는 말했다.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오라버니, 응낙해 주시겠어요?"

소봉은 말했다.

"한가지가 아니라 백 가지 천 가지라도 응낙하리다."

아주는 말했다.

"제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누이가 있어요. 우리 두 사람은 어릴적부터 함께 자라지 못했어요. 그러니 그대는 그녀를 돌보아 주세요. 나는 그녀가 잘못된 길로 갈까 두려워요."

소봉은 억지로 웃었다.

"그대의 몸이 완전히 쾌유되었을 때 그녀를 찾아서 모두 함께 지내도록 합시다."

아주는 나직이 말했다.

"제가 완전히 낫는다고요......? 오라버니,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대와 안문관 밖으로 나아가 말을 타고 사냥을 하면서 소와 양을 기르겠어요.

그런데 저의 누이가 따라올까요?"

소봉은 말했다.

"그녀도 물론 갈 것이오. 친언니와 친형부가 그녀를 초청하는데 어찌 가지 않겠소?"

별안간 첨벙하는 물소리가 나면서 청석교 다리 아래의 물속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부르짖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봐? 뭐가 친언니고 친형부야! 나는 가지 않겠어!"

그의 몸매는 매우 갸냘프고 적었다. 그리고 몸에는 물옷을 거치고 있었는데 바로 아자가 아닌가?소봉은 실수하여 아주에게 일장을 가한 이후에 모든 정신을 그녀에게 쏟고 있었다. 그의 무공으로 볼 때 다리 밑 물 속에 사람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으나 뇌성이 우르릉거렸고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으며 그의 심신이 크게 어지러워 있어 아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에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약간 놀라며 부르짖었다.

"아자! 아자! 빨리 와서 그대의 언니를 뵈어라!"

아자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말했다.

"나는 다리 밑에 숨어서 본래 그대와 저의 아버지가 싸우는 구경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대는 우리 언니를 때린 것이 아니예요? 그리고 두 사람이 끊임없이 정담을 나누고 있어서 저는 듣기 싫었어요. 그런데 그대들은 서로 정담을 나눴으면 그뿐이지 왜 나까지 끌어들이느냐 말이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가까이 다가왔다.

아주는 말했다.

"누이, 착한 누이야, 이후 소 오라버니는 너를 돌봐 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너 역시 소 오라버니를 잘 보살펴야 한다."

아자는 팔팔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 거칠고 보기 흉한 사내를 나는 아랑곳하고 싶지 않아요."

소봉은 별안간 품 속의 아주의 몸이 흠칫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머리를 축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그의 어깨 위에 걸쳐졌으며 다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봉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주! 아주!"

그리고 맥박을 짚어 보았으나 이미 멎어 있었다. 소봉은 자신의 심장도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손바닥을 그녀의 코 끝에 갖다 대었다. 이미 숨도 멎어 있었다. 그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주! 아주!"

그러나 아무리 그가 천 번 만 번 불러도 아주는 다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급히 진력을 돋우어 그녀의 체내로 주입시켰으나 아주는 시종 움직이지 않았다.

아자는 아주가 숨을 거둔 것을 보고 역시 깜짝 놀라 다시 히히덕거리는 얼굴을 하지 못하고 노해 부르짖었다.

"그대는 우리 언니를 때려 죽였군요! 그대는...... 그대는 우리 언니를 때려 죽였군요!"

소봉은 말했다.

"맞다. 내가 너의 언니를 때려 죽였다. 너는 응당 너의 언니를 위해 원수를 갚아야 한다. 빨리, 빨리 나를 죽여라."

그리고 그는 두 손을 내려뜨리고 아주의 몸을 아래로 내리뜨리며 가슴을 펴고 부르짖었다.

"너는 빨리 나를 죽여라!"

그는 진정 아자가 칼을 뽑아서 자기의 가슴팍을 찔러 주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고 그 자신의 무궁무진한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자는 그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고 표정이 무섭게 변한 것을 보고는 매우 겁이 나는 듯 두 걸음을 물러서며 부르짖었다.

"그대는...... 그대는 나를 죽이지 말아요."

소봉은 따라서 두 걸음을 다가가며 한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팍의 옷자락을 쫘악 찢었다. 그리고 피부를 드러내며 말했다.

"너에게 독침과 독자, 그리고 독추가 있지 않느냐? 빨리 빨리 나를 찔러 죽여라!"

아자는 번갯불이 번쩍할 때마다 그의 가슴팍에 문신이 되어 있는 그 푸르죽죽한 이리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이리의 모습은 흉악하기 짝이 없어 아자는 더욱더 무서움을 느꼈다. 별안간 그녀는 한소리를 크게 부르짖고는 몸을 돌려서 나는 듯 달려갔다.

소봉은 멍하니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무한한 슬픔과 끝없는 회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서는 퍽! 하니 돌난간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돌가루가 마구 휘날렸다. 그는 일장을 후려 치고 다시 일장을 후려쳤다. 갑자기 와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돌난간이 냇물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대성통곡을 하고 싶었으나 울음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다시 번개가 번쩍였다. 그 번갯불에 아주의 얼굴이 똑똑히 드러났다. 그녀의 깊은 정과 관심어린 미소는 여전히 그녀의 눈가와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6. 초원의 꿈소봉은 애절하게 부르짖었다.

"아주!"

그리고 그녀의 몸을 안고 황야를 향해 곧장 내달렸다.

우뢰소리가 우르릉거렸고 소나기는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에 산봉우리 위로 달려 올라갔다가 다시 산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머리속은 텅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히 허탈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우뢰 소리가 점차 멎었다. 그러나 굵은 빗줄기는 여전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동녘 하늘이 뿌옇게 밝아왔다. 날이 점점 밝아오는 것이다.

소봉은 이미 두 시진 남짓하게 미친 듯 줄달음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피곤한 줄 몰랐다. 그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싶었다. 그리고 죽고 싶었다. 그는 목메여 부르짖으며 미친 듯 마구 달렸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그는 다시 청석교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는 다시 청석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건너편을 바라 보았다.

"나는 단정순을 찾아가자. 단정순을 찾아가 그에게 나를 죽여 딸의 원한을 갚으라고 해야겠다."

그는 성큼성큼 소경호가로 달려갔다.

얼마 후 그는 호숫가에 이르렀다. 소봉은 큰 소리로 외쳤다.

"단정순! 나를 죽이시오! 나는 결코 반격하지 않겠소! 그대는 빨리 나와서 나를 죽이시오!"

그는 아주를 안아 들고 대나무밭 앞에 서서 잠시 기다렸다. 대나무 숲속은 조용하였고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대나무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대나무 집앞에 이르러 발길로 판자문을 걷어차고 뛰어들어가며 부르짖었다.

"단정순! 그대는 빨리 나를 죽이시오!"

그러나 집안은 텅비어 있었으며 한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방이고 부엌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뒤졌다. 단정순과 그의 부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집주인인 원성죽과 아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의 가구는 그대로 놓여있었다. 마치 여러 사람이 총총히 이곳을 떠나게 되었으며 창졸간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것 같아h.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군. 아자가 소식을 전하자 그들은 내가 그녀의 부친을 죽여 원수를 갚을 줄 알고 있었던가 보다. 단정순이 설사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원가라는 여인과 그의 부하들은 반드시 그에게 멀리 떠나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허허허, 나는 그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그에게 나를 죽여 달라고 부탁하러 왔는데......)

그는 다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단정순! 단정순!"

그 소리는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나 바람이 대나무 가지를 흔드는 소리만이 우수수 들려왔을 뿐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수 없었다.

소경호가의 대나무 숲속은 조용하여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소봉은 마치 하늘과 땅 사이에 자기 혼자만이 남아 있는 듯한 외로움에 휩싸였다. 아주가 숨을 거둔 이후 그는 잠시도 그녀의 몸을 내려 놓은 적이 없엇다. 그리고 몇 번이나 내력을 그녀의 체내에 주입했는지 모른다. 그저 하늘이 불쌍하게 여기시고 지난 번 그녀가 현자방장에게 일장을 맞았으나 중상을 입고도 죽지 않았던 것처럼 되살려 놓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아주를 안은 채 멍하니 대청에 앉아 있었다. 아침 나절부터 점심 때까지 그리고 점심 때부터 저녁 무렵까지 앉아 있었다. 이때 비는 이미 그쳐있었고 하늘은 맑아졌으며 진홍빛 석양이 그와 아주의 몸을 비쳐 주고 있었다.

그는 취현장에서 뭇 영웅호걸들의 포위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모든 가까운 사람들이, 형제같이 여기던 사람들이 그르르 배반하고 떠났어도, 정세가 위험하기 그지 없을 때에도 그는 조금도 의기소침해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의 교봉은 외롭고 처량하기만 했다.

(아주는 그녀의 부친을 대신해 죽었다. 나 또한 단정순을 찾아가 원한을 갚을 생각은 없다. 그러니 이제 나에게 또 무슨 할 일이 남아 있겠는가? 개방이 해치워야 할 큰일, 그리고 과거의 웅장한 포부와 야망은 지금의 나에겐 일고의 가치도 없다. 나는 거란 사람이다. 그러니 무슨 커다란 일을 성취할것이며 무슨 웅지를 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후원으로 갔다. 담장가에 화초를 가꾸는 곡괭이가 한 자루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영원히 이곳에서 아주와 함께 있고 싶다!)

그는 왼손으로 아주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잠시라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곡괭이를 쳐들고 대나무숲으로 가서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다시 또 하나의 구덩이를 팠다. 두 구덩이는 나란히 파여지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부모가 돌아오게 된다면 십중팔구 무덤을 파고 어떻게 된 노릇인지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무덤 앞에 한 조각 푯말이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 토막의 대나무를 분질러서는 두 조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주방에서 쓰는 칼을 가지고 와 대나무짝을 평평하게 깍아서는 서쪽에 있는 사랑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탁자위에는 지필묵과 벼루가 있었다. 그는 아주를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자세로 먹을 간 다음 붓을 들고 한 조각의 대나무에 다음과 같이 썼다.

<거란망부소봉지묘>그리고 다른 한조각을 들고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무어라고 써야 할까? 소문단부인지묘라고 쓸까? 그녀는 나와 언약이 있었으나 결코 혼례를 올린 적도 없으며 죽을 때까지 여전히 옥과 같은 순결한 처녀의 몸이었는데 그녀를 부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녀를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마음속으로 일시에 결정을 내릴수가 없었다. 그라하여 고개를 쳐들고 생각해 보았다. 시선이 이르는 벽에 한 폭의 서화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대단히 잘 쓴 글씨라 그는 그 글귀를 읽어보았다.

사랑을 읊은 싯귀인 것을 알아볼수 있었다. 마치 술에 취한후 부끄러움을 띠고 노래를 부르게 되어 이렇게 어떻게 되었으며 또한 만날 때는 적고 헤어질 때는 많아 마음속으로 근심에 잠기게 된다는 그런 뜻이었다. 그는 그저 멍하니 쳐다보았으며 그 글귀속에서 말하고 있는 뜻을 이해하고 싶은 심정은 없었다.

술을 마시고도 여전히 부끄러워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섬섬옥수를 들어 옷자락을 만질 뿐입니다.

촛불은 꽃잎처럼 흔들리며 마음 속의 그윽한 정을 나 대신 이야기해주고술은 억제할수 없는 그리움을 느끼게 합니다.

내 마음은 기쁨과 쓸쓸함으로 뒤엉키고 때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때로는 근심에 아미를 찌푸리기도합니다.

함께 있는 날은 적고 헤어져 있을 때가 많군요올 봄이 다시 지나가면 내 시름은 어이 할까요?소봉은 망연히 그 시를 읽어 내려갔다. 그 아래엔 다시 두 줄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소년은 죽매와 놀면서 그대의 아름다움을 글로서 기리고자 하노라별같이 ㎉나는 눈동자와 대나무 잎처럼 가느다란 허리를 지닌 그대와 함께 있으니세상일을 잊고 세월 가는 줄 모르겠구나!대리국의 단씨 둘째가 술에 취해 흥에 겨워 썼노라소봉은 중얼거렸다.

"꽤나 즐겁구나! 별같은 눈동자와 대나무 같은 허리와 함께 있으니 세월 가는 줄 모른다고? 대리의 단씨 둘째가 술에 취한 이후 정신 없이 쓴 글이라구? 대리 단씨 둘째라면 이는 단정순이다. 그가 연인인 성죽에게 써 준 것이겠지. 앞의 시는 아마도 그녀가 쓴 것 같구나. 아주의 보모님은 모두 풍류를 아시는 분이 었어. 그런데 어찌하여 남 보라는 듯 이곳에 걸어 놓았을까? 못난 꼴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아! 그렇군! 이 방안은 단정순의 부하들도 들어서지 못하는 곳이로구나!"

그는 더 이상 그 서화폭을 아랑곳하지 않고 슬픔에 잠겼다.

(나는 아주의 묘비에 어떻게 써야 하지?)

그는 자기의 글공부가 너무나 천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생각이 날 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주지묘 넉자를 쓰고서는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대나무로 만든 푯말을 구덩이 앞에 꽂으러 가려고 했다. 그는 먼저 아주를 묻은 후 자기의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켜세우고 아주의 몸을 꼬옥 끌어안고서 방밖으로 나가려 할 때 눈길이 우연히 벽 쪽의 단정순이 쓴 글귀로 가게 되었다. 별안간 그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아니다! 아니다! 이건 잘못된 것이다!"

그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서화의 글을 바라보았다. 그 글자는 둥글둥글하고 매끄러웠으며 의젓하면서도 소탈한 데가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그는 들었다.

(그 편지가 문제다! 통솔자란 자가 왕방주에게 써 준 편지의 글자는 이와 같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필체이다!)

이 화폭의 글자는 수려하면서도 둥글둥글했고 사이 사이의 간격이 일정했다. 그런데 그 문제의 편지 위에 적혀 있던 글은 삐뚤삐뚤했으며 획이 매우 가늘어 쭉쭉 그어 놓은 듯한 감을 주었었다. 한 눈에 강호무사의 손에 의해 쓴 글임을 알 수가 있었다. 두 필체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그 누구라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소봉은 두 눈을 크게 뜨고는 그 서화폭의 글귀를 노려보았다. 그는 마치 그 몇줄의 글귀에서 이 중간에 숨겨진 커다란 비밀과 커다란 음모를 캐내려는 것 같았다.

그의 뇌리에는 끊임없이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날 밤 무석성 밖의 은행나무 숲에서 본 그 편지, 즉 통솔자 형님이 왕방주에게 써주었다는 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광대사는 그 편지 말미에 있는 서명을 찢어서는 뱃속으로 삼켜 그로 하여금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도록 했다.

그러나 편지의 필적은 이미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편지를 쓴사람과 이 서화폭을 쓴 대리 단씨 둘째는 결코 동일인이 아니라는 것은 읫미할 여지가 없었따.

그러나 그 편지는 혹시 통솔자가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쓰게 한 것이 아닐까? 그는 다시 생각해 본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단정순이 이처럼 필적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언제는 붓을 잡는 사람으로 봐야했다. 그런 사람이 왕방주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와 같이 커다란 일을 논할 때 어찌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시킬 까닭이 있겠는가. 그리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한 수의 풍류시를 써서 자기의 연인에게 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시킬 까닭이 없었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혹이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통솔자란 사람이 단정순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 한 폭의 글을 단정순이 쓴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다. 단정순 이외에 어찌 제2의 대리 단씨 둘째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누가 있어 이와 았은 풍류시를 써서 이곳에다 걸어 놓았겠는가. 그렇다면 마부인이 말한 것이 거짓말일까?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그녀와 단정순은 서로 모르는 처지일 것이다. 한 사람은 북쪽에 있고 한 사람은 남쪽에 살고 있으며 한 사람은 초야에 묻힌 한 무사의 부인이고 한 사람은 왕공귀족인데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일부러 거짓말을 날조하여 나를 속이겠는가?)

그는 통솔자 형님이 단정순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그저 어떻게 원수를 갚는가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그와 같은 서화폭을 대하게 되자 갖가지의 의문이 다시 머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편지를 만약 단정순이 쓴 것이 아니라면 통솔자 형님은 단정순일 수가 없다. 만약 단정순이 아니라면 또 누구란 말인가? 마부인은 어째서 거짓말로 사람을 속인 것일까? 이 가운데는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일까? 내가 아주를 죽이게 된 것은 본래 잘못알고 죽인 것이었으나 아주는 나를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죽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녀의 억울한 죽음은 다시 또다른 하나의 의문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째서 진작 이 화폭을 보지 못했을까? 그러나 이 화폭은 상방에 걸려 있었으니 내 어찌 볼수 있었겠는가? 만약 시종 볼 수 없었다면 내가 아주를 따라 죽게 됨으로써 모든 것은 끝장이 났을 것이다. 헌데 어째서 하필 일찍 발견한 것도 아니고 늦게 발견한 것도 아닌, 내가 바로 죽기 직전에 보게 되었을까?)

석양은 서산마루를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후의 햇살은 점차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소경호가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아직도 상당한 간격을 두고 있었는데 교봉이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귀울이니 나타난 사람이 두 여자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십중팔구 아자와 그녀의 어머니가 오는 것이겠지. 나는 단부인에게 이 서화폭이 단정순이 쓴 것인지 아닌지를 똑똑히 물어봐야겠다. 그녀는 물론 내가 아주를 죽인 것을 극도로 증오하여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나는...... 나는......)

그는 본래 절대로 반격하지 않을 작정이었으나 즉시 생각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아주가 확실히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대악인의 목에 또 다른 하나의 죄의 부채가 늘어나게 되고 한 사람의 목숨을 더 죽인 셈이 된다. 아주는 바로 그가 죽였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 말이다. 내가 이 원한을 갚지 않고 어찌 가볍게 죽을 수 있겠는가?)

이때 두 여인은 점차 가까이 다가와 대나무밭으로 들어서게 되어h. 그리고 잠시 후 두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해, 그 계집년은 무공이 고강하지 않지만 간계가 많아."

다른 나이 어린 한 여인이 말을 받았다.

"그녀는 혼자이니까 우리 모녀 두 사람이면 충분히 처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나이가 비교적 많은 여인이 말했다.

"말하지 말아라. 나서는 즉시 주저하지 말고 살수를 써야 한다."

소녀는 말했다.

"만약 아버님께서 아신다면......?"

그 나이 많은 여자는 말했다.

"너는 아직도 너의 아버지를 생각하느냐?"

그 다음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발걸음을 죽이고 다가오는 기척을 들을 수가 있었다. 한 사람은 대문쪽을 향해 걸어 들어왔고 다른 한사람은 집뒤로 돌아갔다. 아마도 전후에서 협공을 가할 심산인 것 같았다.

소봉은 퍽이나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두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원성죽과 아자는 아니다. 두사람은 모녀로서 외로운 여인을 죽이러 온 것이 분명하다. 음, 십중팔구 원성죽을 죽이려는 것일텐데, 그 소녀의 부친이 이 일을 찬성하지 않는가 보다.)

이 일은 그의 뇌리에서 번쩍하니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멍하니 앉아서 넋을 잃고 있었다.

잠시 후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 누가 판자문을 밀고 들어섰다. 소봉은 고개를 쳐들지 않았다. 검은 신발을 신은 조그만 발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약 넉자의 간격을 남겨두고 그 발이 멈춰섰다.

곧이어 옆의 창문이 열어 젖혀지며 또 한사람이 뛰어들어와 그의 곁에 섰다.

그는 그 사람이 뛰어 들어오는 기척을 듣고 그의 무공이 별로 고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가슴에 아주를 안은 채 그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통솔자 형님은 단정순인가, 아닌가? 지광대사의 말속에 어떤 이상한 점이 있었던가? 그리고 서장로에게 어떤 음모가 있었던가? 마부인의 말속에 어떤 어긋나는 점이 없었던가?)

그야말로 오만가지의 생각이 오락가락해서 마음은 어지럽기만 했다.

이때 나이 어린 여인이 말했다.

"이봐요. 당신은 누구요? 그 원가라는 계집년은 어디 갔죠?"

그녀의 말소리는 차갑기 이를데 없었으며 어조 또한 매우 무례했다. 소봉은 알아곳하지 않고 그저 갖가지 떠오르는 의문에만 매달렸다.

나이 든 여인이 말했다.

"귀하와 원성죽이라는 계집년과는 무슨 관계가 있소? 그리고 죽은 여자는 누구인지 빨리빨리 말을 해요?"

소봉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린 여인이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귀머거리예요, 아니면 벙어리예요? 어째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가요?"

그 음성은 노기로 가득차 있었다. 소봉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석상처럼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젊은 여인은 발을 동동 구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허공에다 몇번 휘둘렀다. 칼날이 진동하면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이어 그녀는 칼끝을 비스듬히 소봉의 태양혈에 갖다대었다. 그 여인은 호통을 내질렀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다면 간단히 쓴 맛을 보여 줄테예요."

소봉은 자기 자신이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풀래야 풀 수 없는 모든 의문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소녀는 팔을 앞으로 뻗치며 장검을 앞으로 찔렀다. 아니 곧바로 찌르는 것이 아니라 소봉의 목덜미와 열 한치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지나가도록 만들었다.

소봉은 검세가 찔러 들어오는 방향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모르는 척 앉아 있었다. 두 여인은 서로 쳐다보며 놀랍고 의아하다는 듯한 눈빛을 주고 받았다.

그 나이 어린 여인이 말했다.

"어머니, 이사람은 혹시 백치가 아닐까요? 그가 안고 있는 소녀는 죽은 시체가 아니겠어요?"

부인은 말했다.

"그는 십중팔구 바보로 가장하고 있을거야. 이 계집년의 집에 무슨 좋은 사람이 있겠느냐? 먼저 그에게 한 칼을 내려친 후 다시 고문을 가하여 캐물어보자."

말이 끝나자마자 왼손에 칼을 들고서는 소봉의 어깨죽지를 내리찍으려 들었다.

소봉은 칼날이 자신의 어PR죽지와 아직도 반 자의 간격을 남겨두게 되었을 때 오른손을 홱 뒤짚어 질풍과 같이 앞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두 손가락으로 칼 등을 잡았다. 그러자 그 칼은 그만 허공에서 멈추게 되었고 아래로 내려칠래야 내려칠 수가 없게 되었다. 소봉은 손가락을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칼자루가 그 부인의 어깨 아래에 있는 요혈을 찍게 되어 대뜸 그녀로 하여금 꼼짝 할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소봉은 그 위세를 빌어 손을 떨쳤다. 내력을 돋구었는지라 뚝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칼은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칼을 내던지고는 시종 고개를 떨구고 그 부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 젊은 여인은 어머니가 그에게 제압당하자 깜짝 놀라서는 뒤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찍!찍!찍! 하는 소리가 잇따라 나는 가운데 일곱 개의 단전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소봉은 토막난 칼을 집어들고 날아오는 단정A을 일일이 쳐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휘둘러 그 토막난 칼을 거꾸로 날려 보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칼자루가 그녀의 허리를 때렸다. 그 젊은 여인은 아!하고 부르짖었다. 혈도에 바로 적중되었는지라 그녀 역시 몸을 꼼짝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 부인은 놀라 물었다.

"너는 상처를 입었느냐?"

소녀는 말했다.

"허리가 매우 아프나 상처는 입지 않았어요. 나는 경문혈을 제압당했어요."

부인은 말했다.

"나는 중부혈을 짚히게 되었다. 이...... 이 사람의 무공은 무섭기 이를데 없구나!"

그 소녀는 말했다.

"어머니,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죠? 어떻게 그는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우리 두사람을 제압했을까요?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요사한 술법을 쓸 줄 아는가 봐요."

그 부인은 감히 더 흉악한 말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드러운 음성으로 소봉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모녀와 귀하는 아무런 원한이 없소이다. 조금 전 함부로 손을 쓰게 되어 귀하에게 죄를 짓게 된 것은 우리 두사람의 잘못이에요. 아무쪼록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녀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우리가 졌으면 진 것이지 용서를 빌 것 까지는 없어요. 그대가 사내라면 저를 한 칼에 죽여요. 나는 결코 대수롭게 여기지 않겠어요."

소봉은 생각에 잠겨 있어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지 못했다.

제목 : [김용] 천룡팔부 5권 제 6장 (2)

이때 집안은 이미 컴컴한 어둠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잠시 후에 날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말았다. 소봉은 시종 아주를 안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줄곧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평소 머리가 지극히 영민한 편이었다. 어떤 의문이나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언제나 재빠른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만약 즉시에 알 도리가 없을 때는 한켠으로 제쳐 두고 잠시 동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코 주저하고 망설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실수하여 아주를 죽이게 된 것을 너무나 비통하게 여긴 나머지 그저 멍하니 제 정신을 잃어버린 듯한 사람으로-변하고 말았다.

이때 그 부인은 말했다.

"너는 운기하여 환도혈을 풀어 보도록 해라. 그러면 경맥을 건드리게 되어서 짚힌 혈도를 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소녀는 말했다.

"이미 시험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갑자기 그 부인은 입을 열었다.

"누가 오고 있다."

이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그 누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역시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삭삭 하는 소리를 내더니 화도와 화석을 마찰하여 불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등잔불에 불을 켜고는 몸을 돌렸다. 갑자기 소봉, 아주 그리고 두 여인을 발견하고 아! 하고 놀라는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집안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별안간 네 사람이 앉아 있거나 선 채로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게 된 것이다. 놀란 그녀는 화도와 화석을 챙그랑! 하니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먼저 온 부인이 갑자기 날카로운 어조로 부르짖었다.

"원성죽, 너였구나!"

막 집안으로 들어온 그 여인은 원성죽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았다. 말을 한 사람은 중년 여인이었다. 그리고 중년 여인 옆에는 또 다른 전신을 흑의에 감싸인 소녀가 있었는데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운 편이었고 그 소녀는 더욱 수려한 편이었으나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원성죽은 말했다.

"맞아요. 저의 성은 원이예요. 두 분은 누구시죠?"

그 중년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얼굴 가득히 노기를 띄울 뿐이었다.

원성죽은 고개를 돌리고 소봉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교방주, 그대는 이미 저의 딸을 때려 죽였는데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죠? 나는...... 나는...... 아, 불쌍한 나의 아가!"

그리고는 대성통곡을 터뜨리며 아주의 시체 위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소봉은 여전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단부인, 나는 무거운 죄를 지었소. 그대가 칼을 뽑아 나를 죽이도록 하시오."

원성죽은 흐느끼며 말했다.

"단 한칼로 그대를 죽인다 하더라도 내 불쌍한 딸을 구할 수는 없어요. 교방주, 저와 아주의 아버지가 양심에 가책이 되는 큰 잘못을 저질러 딸들을 한평생 외롭게 만들었고 자기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 말은 틀림이 없어요. 하지만...... 그대가 그와 같은 사실을 나쁘게 보고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면 단왕야나 저를 죽여야 했지 어째서 우리 아주를 죽였어요?"

이때 소봉의 머리는 퍽이나 둔해져 있었다. 잠시 후에야 그는 흠칫해서 물었다.

"양심에 가책 받을 큰 잘못이란 것은 무엇이요?"

원성죽은 울면서 말했다.

"분명히 알면서도 왜 나에게 묻는 거예요? 아주...... 아주와 아자는 모두 나의 딸이에요. 나는 감히 집으로 데려갈 수가 없어서 남에게 준거예요."

소봉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제 내가 단정순에게 양심에 가책 받을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곧 시인을 한 것이 바로 아주와 아자를 남에게 내준 사실을 의미했단 말이오?"

원성죽은 노해 말했다.

"그처럼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했는데도 부족하단 말이에요? 그대는 나를 무슨 나쁜 여인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저 양심에 어긋나는 일만을 골라 가며 이것저것 하는 줄 아세요?"

소봉은 말했다.

"단정순은 어제 '하늘이 불쌍히 여겨서 오늘 다시 하나의...... 하나의 옛날부터 부모가 없어진 아이를 만나 보게 되었구나'하고 말했었소. 그런데 그가 오늘 다시 부모님을 잃어버린 아이를 다시 만났다고 한 그 아기는 아자를 가리킨 것이고...... 나 교봉을 가리킨 것이 아니란 말이오?"

원성죽은 노해 부르짖었다.

"그가 언제 그대를 낳았단 말이에요? 그대 역시 그가 남에게 주어 버린 아이란 말이에요? 그대는...... 그대는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네요. 내 어찌 짐승 같은 그대를 낳았단 말이에요?"

그녀는 소봉이 극도로 미웠다. 그러나 그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겁나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그저 욕만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소봉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번 세 번 나쁜 짓만 일삼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기의 행동이 단정치 못했으며 덕행에 있어서 비난받을 짓을 했다고 시인했소. 그 말은 무슨 뜻이오?"

원성죽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일말의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그는 원래부터 이 여자 저 여자를 상대했어요. 그는 한 여자를 수중에 두게 되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잇따라 몹쓸 짓을...... 그러나 누가 그대보고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라고 했어요?"

소봉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틀렸다. 틀렸어! 완전히 틀렸어!"

그리고 한참 넋을 잃고 있다가 갑자기 손을 뻗쳐 철썩! 철썩! 하며 자기의 따귀를 때렸다. 원성죽은 깜짝 놀라 후다닥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 보니 소봉은 끊임없이 힘을 써서 자기 자신을 때리고 있는데 일장마다 지극히 힘을 주고 때리는지라 삽시간에 두 뺨이 높다랗게 부어 올랐다.

이때 삐꺽하고 가벼운 음향이 들리면서 다시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말했다.

"어머니, 그 화폭을 손에 넣었어요......."

바로 아자였다. 그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안에 사람이 있고 또 소봉이 왼손으로 아주를 앉고서 오른손으로 끊임없이 자기의 뺨을 때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만 놀라 멍해지고 말았다.

소봉의 뺨은 부어 올랐다가 급기야 터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온 얼굴과 오른손은 선혈로 물들게 되었고 곧이어 선혈이 끊임없이 사방으로 튀게 되었다. 그 바람에 벽이나 탁자나 의자 모두가 핏방울에 얼룩지게 되었고 아주의 몸과 벽에 걸려 있는 그 서화 폭에도 방울진 진홍색의 피가 떨어지게 되었다.

원성죽은 차마 그처럼 잔인한 정경을 볼 수 없다는 듯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귀에는 여전히 철썩! 철썩! 하는 소리가 들려 오는지라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만둬요! 그만 때리란 말이에요!"

아자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이봐요! 그대는 우리 아버지가 쓴 글을 더럽혔어요. 물어내요!"

그리고 탁자 위로 뛰어오르더니 손을 뻗쳐서는 벽에 걸린 그 서화 폭을 떼어 내었다. 원래 그녀들 모녀가 되돌아 온 것은 바로 그 서화 폭을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소봉은 어리둥절해져서는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물었다.

"대리 단씨의 둘째라는 사람은 바로 단정순을 가리키는 것이오?"

원성죽은 말했다.

"그 외에 또 누가 있겠어요."

단정순이란 이름을 들먹이게 되었을 때 그녀는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자랑스럽다는 빛을 드러냈다.

그 두 마디의 말에 소봉은 다시 하나의 의문을 풀 수가 있었다.

그 서화 폭이 틀림없이 단정순이 쓴 것이라면 왕방주에게 준 그 편지는 단정순이 쓴 것이 아니다. 따라서 통솔자란 자는 십중팔구 단정순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으로 즉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마부인이 단정순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은 반드시 남모르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나는 먼저 이 수수께끼부터 풀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일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즉시 자결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방금 그는 한 차례 자기 자신의 따귀를 마구 쳐서는 얼굴이 터져 피가 흐르게 되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속에 가득찬 회한과 슬픔을 어느 정도 삭힐 수가 있었다. 이윽고 그는 아주의 시체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아자는 이미 탁자 위에 그가 써 놓은 두 조각의 대나무로 만들어진 푯말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헤헤헤, 밖에다가 두 개의 구덩이를 파놓았길래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했지. 알고 보니 그대는 언니와 함께 죽어 묻히려고 했었군요. 쯧쯧, 당신은 정말 다정하기 이를 데 없네요."

소봉은 말했다.

"나는 간악한 자의 독계에 걸려 아주를 죽이게 되었소. 이제 나는 그 간악한 자를 찾아가서 아주의 원한을 갚은 이후 다시 그녀를 따라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오."

아자는 물었다.

"그 간악한 자는 누구예요?"

소봉은 말했다.

"지금은 아직 단서가 없소. 조사를 해 봐야 아오."

그리고 아주를 안은 채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아자는 웃으며 물었다.

"그대는 우리 언니를 안은 채 그 간악한 자를 찾아가겠다는 거예요?"

소봉은 어리둥절해졌다. 일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주의 시체를 안고 천리 먼길을 달려간다는 것은 역시 적절한 조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내려놓자니 실로 아쉬웠다. 그리하여 그는 멍하니 아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그의 필로 얼룩진 얼굴을 타고서 곧장 아래로 흘러내렸고 피와 섞여서는 엷은 홍색의 물방울이 되어 아주의 창백한 얼굴에 떨어졌다. 그야말로 피눈물로 얼룩지게 된 것이었다.

원성죽은 그가 슬퍼하는 광경을 보고 그를 미워하던 마음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말했다.

"교방주, 커다란 잘못은 이미 저질러진 것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에요.

그대는...... 그대는......."

그녀는 본래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권고의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 자신이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리고 울부짖었다.

"모두 내 잘못이야! 모두가 내 잘못이야...... 멀쩡한 딸을 어째서 남에게 주었느냔 말이야!"

소봉에게 혈도를 짚혀 꼼짝 못하던 소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물론 모두가 당신의 잘못이에요. 남의 사이좋은 부부를 어째서 당신이 헤어지게 만들었느냔 말이에요!"

원성죽은 고개를 쳐들고 그 소녀에게 물었다.

"소저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하지? 그대는 누구이지?"

소녀는 말했다.

"이 여우, 당신은 우리 어머니를 얼마나 고달프게 했으며 나를...... 나를 해쳐서는......"

이때 아자가 손을 뻗쳐 그녀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 소녀는 꼼짝 할 수 없는 형편이라 그 일장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원성죽이 재빨리 손을 뻗쳐 아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자, 손을 쓰면 안된다."

그리고 중년의 미부인을 몇 번이나 바라보더니 다시 그녀의 오른 손에 들린 한 자루의 강철칼과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두 토막이 난 칼을 보더니 갑자기 부르짖었다.

"그렇군! 그대는 쌍도를 쓰는군! 그대는...... 그대는 수라도 진...... 진홍면......진언니로군요!"

이 중년의 미부인은 바로 단정순의 또 다른 정인인 수라도 진홍면이었다.

흑의 소녀는 바로 그녀의 딸인 목완청이었다.

진홍면은 단정순이 이곳 저곳에서 여인들을 건드리고 또한 곳곳에다 정을남기자 단정순을 탓하지 않고 다른 여인이 여우 같이 요염한 태도로 그녀 자신의 정인을 가로채 갔다고 생각하고 그녀들을 미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매 감보보가 전해 준 소식을 듣고 딸 목완청과 함께 단정순의 처 도백봉과 그의 또 다른 정인을 죽이려고 했으나 결과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단정순에게 또 다른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이 원성죽이라고 하며 소경호의 대나무숲 속에 은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재차 딸을 데리고 원성죽을 죽이러 달려온 것이었다.

진홍면은 원성죽이 자기를 알아보자 호통을 내질렀다.

"맞다! 내가 바로 진홍면이다! 누가 너 같은 천한 계집에게 나더러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더냐?"

원성죽은 진홍면이 이곳에 무엇 하러 왔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렇군요.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그대는 나보다 훨씬 젊고 용모 또한 이토록 아름다우니 단랑이 그대에게 푹 빠지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그대는 나의 누이이지 언니는 아니지. 진씨 누이, 단랑은 매일같이 그대를 생각하며 그리워하더군. 나는 정말 그대의 타고난 복을 오히려 부러워했어."

진홍면은 원성죽이 자기를 젊고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말을 하자 가슴속으로 끓어오르던 노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거기다가 다시 단정순이 매일같이 자기를 그리워했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자 노기가 다시 많이 사그라지게 되었다.

진홍면은 말했다.

"달콤한 말로 남의 환심을 잘 사는 그대와 어찌 비교할 수 있겠어?"

원성죽은 목완청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소저는 바로 영애이시오? 쯧쯧쯧, 이토록 예쁘게 생겼다니, 그대는 진씨 누이이니까 이 같은 딸을 낳은 것도 무리는 아니지......."

소봉은 그녀들 두 사람이 재잘거리며 옛날의 묵은 정을 들추는 소리를 듣고 듣기에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는 호방한 사내였다. 한때는 창자가 끊어지고 마음이 산산 조각나는 슬픔을 맛보았으나 그 슬픔을 맛보게 된 후에는 이후의 큰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아주의 시체를 안고 구덩이 옆으로 가서 그녀를 구덩이 안에 눕혔다.

그리고 커다란 두 손으로 흙을 집어서는 천천히 그녀의 몸에 뿌렸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시종 흙을 뿌릴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아주를 바라보았다. 이제 몇 번만 흙을 더 뿌리게 되면 그녀를 다시 대할 수 없게 되리라. 귓가에 어렴풋이 그녀의 말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안문관 밖으로 나아가 말을 타며 사냥을 하고 소와 양을 기르며 한평생 그를 모시겠다는 언약이었다.

하루 전만 하더라도 그녀는 그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때로는 깊은 정을 보였고 때로는 짖ㄱ은 면을 보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얌전을 빼기도 했고 때로는 장난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는 그녀의 말을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새외로 나아가 소나 양을 치겠다는 맹세는 이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소봉은 구덩이 가에 한참 동안 꿇어앉아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흙을 아주의 얼굴 위에 뿌리지 못했다.

별안간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더니 다시는 아주를 바라보지 않고 두 손을 일제히 밀어젖혀 구덩이 가의 흙을 그녀의 몸과 얼굴 위로 퍼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서는 다시 상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원성죽과 진홍면은 여전히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성죽은 슬픈 일을 당한 끝이나 여전히 언변이 좋아서 진홍면을 달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두 여인은 이미 적대감을 버린 후였다. 원성죽은 말했다.

"교방주, 이 누이가 그대에게 죄를 지은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니 그대가 이 두사람의 혈도를 풀어 주도록 하세요."

원성죽은 아주의 어머니였다. 그녀가 한 말을 소봉은 물론 어느 정도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본래 두 사람을 놓아줄 생각이었다. 그 즉시 그는 가까이 다가가 진홍면과 목완청의 어깨 죽지를 한 번씩 후려쳤다. 두사람은 그 순간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어깨 죽지에서 짚힌 혈도 쪽으로 뻗어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사지가 대뜸 회복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모녀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았다. 소봉의 심후한 공력에 마음속으로 여간 탄복해 마지않았다.

소봉은 아자에게 말했다.

"아자 누이, 그대 아버지의 서화 폭을 나에게 잠시만 보여 주구려."

아자는 말했다.

"나는 그대가 나에게 누이 어쩌구, 누이 저쩌구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는지 두루루 말았던 서화 폭을 그에게 내밀었다.

소봉은 서화 폭을 펼쳐 보았다. 다시 단정순의 글을 자세히 살폈다. 원성죽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겸연쩍어 하며 말했다.

"그까짓 것이 뭐가 보기 좋아요?"

소봉은 물었다.

"단왕야께서는 지금 어디 있소?"

원성죽은 안색이 크게 변하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서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안돼요...... 안돼요...... 그대는 그를 다시 찾아가지 말아요."

소봉은 말했다.

"나는 그를 괴롭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몇 가지 일을 물어 볼 생각이오."

원성죽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대가 실수하여 이미 아주를 때려죽인 이상 그를 다시 찾아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소봉은 그녀가 결코 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화폭을 똘똘 말아 다시 아자에게 건네주었다.

"아주는 나에게 자기의 누이동생을 돌보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소. 단부인, 이후 아자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 소봉이 도울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분부하도록 하시오. 결코 사양하지 않겠소이다."

원성죽은 크게 기뻐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자에게 이와 같이 재간이 큰 배경이 있게 되었으니 한평생 어떤 흉악한 일을 만난다 하더라도 좋게 풀릴 것이고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상서로운 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고맙군요. 아자, 빨리 교오라버니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드려라."

그녀는 이제 교방주라는 칭호를 교오라버니로 바꾸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자와 교봉의 관계를 더욱더 다정하게 만들자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아자는 입술을 삐죽하더니 얼굴에 비웃음마저 띄우고 말했다.

"그가 도와야 할 어려운 일이 나에게 무엇이 있겠어요? 나에게는 천하무적의 사부님이 계시고 또 많은 사형들이 있는데 그 누가 나를 괴롭히겠어요?

그는 흙으로 빚은 보살이 강을 건너게 된 것처럼 그 자신도 지키기 어렵고 자기의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엉망진창이 된 형편인데 어떻게 나를 도와요? 흥! 그거야말로 도우면 도울수록 나를 더 바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자는 재잘거리듯 그와 같이 말하는데 그 음성을 여간 간드러진 것이 아니었다. 원성죽은 몇 번이나 눈짓으로 그만두라고 했으나 아자는 못 본 척했다. 원성죽은 발을 구르며 말했다.

"아, 이애는 정말 어른도 몰라보고 함부로 말을 하는구나! 교방주, 그대는 아주의 얼굴을 보아 너무 개의치 마시구려."

소봉은 말했다.

"불초의 성은 소씨이지 교씨가 아니외다."

아자는 말했다.

"어머니, 저 사람은 자기의 성씨가 무엇인지도 파악하지 못하니 그야말로 지독한 멍청이에요......"

원성죽은 호통을 내질렀다.

"아자!"

소봉은 공수를 하고 읍을 하며 말했다.

"그럼 이만 작별하겠소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는 목완청에게 말했다.

"단소저, 그대가 그와 같이 악독한 암기를 남용하면 결과가 좋지 않소. 재간이 그대보다 뛰어난 적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는 그대가 오히려 그 해를 입게 될 것이오."

목완청이 미처 뭐라고 말하기 전에 아자가 말했다.

"언니, 그의 터무니없는 말을 듣지 말아요. 이 암기들이야 기껏해야 상대방에게 적중하지 않았을 뿐인데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해를 가져다주겠어요?"

소봉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서는 문을 나섰다. 그런데 왼발이 문밖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오른손의 소맷자락을 한 번 떨쳤다. 휙하는 세찬 바람이 일더니 얼마전 목완청이 소봉을 향해 쏘았으나 소봉이 쳐서 떨어뜨렸던 일곱 개의 단전이 동시에 날아올라 맹렬한 기세로 아자를 향해 쏘아졌는데 그 날아가는 기세가 번개와 같았다. 아자는 아앗! 하는 비명을 질렀으며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일곱 대의 조그만 화살은 그녀의 머리 위, 목 부근과 몸곁을 지나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등뒤의 벽에 깃이 있는 곳까지 푹 꽂혀 버렸다.

원성죽은 급히 달려들어 아자를 끌어안으며 놀라 부르짖었다.

"진씨 누이, 빨리 해약을 꺼내요!"

진홍면은 말했다.

"상처는 어때요? 상처는 어디 에요?"

목완청은 재빨리 품속에서 해약을 꺼내서는 아자의 상처를 살폈다.

잠시 후 아자는 가까스로 놀란 가슴을 진정한 듯 겨우 말했다.

"나는...... 적중되지 않았어요."

네 여인은 일제히 벽에 꽂힌 일곱 개의 단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하나같이 아연실색하여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원래 소봉은 아주의 유언을 기억하고 아자를 돌봐 주려고 했다. 그런데 아자는 자기에게 천하무적의 사부가 있고 많은 사형이 있으니 그 누가 자기를 못 살게 굴겠느냐는 말을 하였으므로 소봉은 소맷바람을 일으켜 화살을 날려보내 그녀를 놀려 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가 어린 나이에 하늘이 얼마나 높고 딸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고 믿는 데가 있다는 듯 날뛰며 천하 영웅호걸들을 얕보다가 장래에 크게 쓴맛을 보는 일이 없도록 했던 것이다.

제목 : [김용] 천룡팔부 5권 제 6장 (3)

소봉은 대나무 밭에서 나와 소경호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길 옆에 있는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를 골라 몸을 날려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는 단정순을 찾아 어째서 마부인이 일부러 그를 모함했는지 똑똑히 물어봐야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러나 원성죽이 단정순이 있는 곳을 말할 것 같지 않자 몰래 뒤를 따르리라고 작정하고 나뭇가지에 몸을 숨긴 것이었다.

얼마후 몇 사람이 걸어 나왔다. 진홍면 모녀가 앞장을 서고 원성죽 모녀가 뒤에서 따르는 걸로 보아 아마도 원성죽이 손님을 전송하러 나오는 모양이었다.

네사람은 호숫가에 이르렀다.

진홍면이 말했다.

"원언니, 그대와 나는 일견여고하여 이전의 감정을 모조리 씻을 수 있었으며 내 가슴속에 맺힌 한을 풀 수 있었어요. 이제 나는 강가라는 계집년을 찾아가려고 해요. 그런데 언니는 그녀의 소재지를 알고 있나요?"

원성죽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누이, 그대는 무엇 때문에 그녀를 찾아가려는거예요?"

진홍면은 한맺힌 어조로 말했다.

"나와 단랑은 본래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계집년이 여우같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원성죽은 잠시 생각해 본 다음 말했다.

"그 강...... 강민이라는 천한 계집이 지금쯤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누이가 그녀를 찾게 된다면 나를 대신해서 그녀의 몸을 몇 번 더 칼로 찌르도록 해."

진홍면은 말했다.

"그거야 더 말할 나위가 있나요. 그런데 찾기가 힘들 것 같군요. 어쨌든 됐어요. 그럼 다시 만나요. 음, 만약 그대가 단랑을 만나게 된다면......."

원성죽은 흠칫해서는 물었다.

"왜 그러죠?"

진홍면은 말했다.

"그대는 나를 대신해서 매섭게 그에게 두 대의 따귀를 갈겨 주도록 해요.

한 대의 따귀는 나의 앞으로 달아 두도록하고 다른 한 대의 따귀는 우리 딸 앞으로 달아 두도록 해요."

원성죽은 나직이 소리내어 웃더니 말했다.

"내 어찌 그와 같이 양심이 없는 사람을 만나겠어요? 누이가 언젠가 그를 만나게 되면 나를 대신해서 두 대의 따귀를 갈겨줘요. 한 대는 나를 대신해서 때리는 것이고, 한 대는 아자를 대신해서 때리는 거예요. 아니, 따귀를 때리는 것만으론 부족해요. 다시 두 번 발길질을 해 줘요. 딸을 낳고도 보살피지 않고 우리 모녀 세 사람이 외로운 세월을 보내게 하더니 딸 하나를 죽......"

그러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진홍면은 그녀를 위로했다.

"언니, 슬퍼 말아요. 우리가 그 강가라는 계집년을 죽인 연후에 돌아와 언니와 함께 살겠어요."

소봉은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두 여인이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단정순의 무공이 약하지 않고 친구들에게도 퍽이나 의리를 지키는데 여색을 좋아하는 것이 그야말로 흠이라면 흠이어서 영웅호걸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때 진홍면은 목완청의 손을 잡고 원성죽 모녀에게 절을 하더니 떠나갔다. 그리고 원성죽은 아자의 손을 잡고 다시 대나무밭 안으로 들어갔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성죽은 반드시 단정순을 찾아갈 것이다. 다만 진홍면이 따라올까봐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다. 조금 전 그녀가 돌아와서 그 화폭을 가져가려고 한 것을 보면 단정순은 반드시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다. 나는 우선 이곳을 지키면서 두고 보기로 하자.)

이때 나무들이 서 있는 곳에서 미미한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두 검은 그림자가 살그머니 다가왔다. 바로 진홍면 모녀가 되돌아온 것이었다. 진홍면은 나직이 말했다.

"완아, 너는 어째서 그토록 소홀하게 생각하며 가볍게 상대방의 술수에 넘어가느냐? 원씨집 언니의 방안 침대 아래에 한 켤레의 남자 신발이 있었다. 신발 끝에는 노란 실로 두 글자를 수놓아 있었다. 왼쪽 신발에는 산을 수놓았고 오른쪽 신발에는 하를 수놓았으니 그것이야말로 너의 아버지 신발이 아니겠느냐? 신발이 매우 새 것이었고 신발 바닥의 진흙이 아직 마르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너의 아버지가 바로 부근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목완청은 말했다.

"아, 그렇다면 그 원가라는 여인은 우리를 속였군요."

진홍면은 말했다.

"그렇다. 그녀가 어찌 그 박정한 사내로 하여금 우리를 만나게 하겠느냐!"

목완청은 말했다.

"아버님은 양심이 없어요. 어머니, 다시 그를 만날 필요도 없어요."

진홍면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저 그를 한 번 보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그가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면 된다. 이 며칠 사이에 그도 늙었고 너의 어머니도 늙었단다."

이 몇 마디의 말은 매우 평범했으나말속에는 깊은 정이 단겨 있었다. 목완청은 말했다.

"좋아요."

그런데 그 음성은 매우 처량하게 들렸다. 그녀는 단예와 헤어진 이후 그리워하는 정이 날로 더해갔다. 그러나 그녀는 단예와의 관계가 결국 해결되지 않는 그리움으로 끝나게 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어머니 앞에서는 조금도 그와 같은 심사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진홍면은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지키고 있으면 아마 너의 아버지는 얼마 후 이곳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기다랗게 자란 풀을 헤치고 그 속에 몸을 숨겼다. 목완청은 한 그루의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담담한 별빛아래 소봉은 진홍면의 창백한 얼굴에 미미하게 붉은 빛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심히 격동하고 있는 표정이 아닌가? (정이라는 것은 원래 사람을 영원히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로구나!)

그는 아주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가슴속이 불현 듯 쓰라려왔다. 얼마 되지 않아 저쪽 길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발자욱소리가 들렸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사람은 단정순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단정순의 부하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위에서 그림을 거꾸로 그리던 주단신이었다.

원성죽은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크게 부르짖었다.

"단랑!"

그러면서 재빠른 걸음으로 마중을 나왔다. 이어 아자도 뒤따라 나왔다.

주단신은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주군께서는 속하에게 이곳으로 달려와 알리라고 했습니다. 주군께서는 급한 볼 일이 있어서 오늘 돌아올 수 없답니다."

원성죽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무슨 급한 일인가요? 언제 돌아오나요?"

주단신은 말했다.

"이 일은 고소 모용씨 집안과 관계가있습니다. 아마도 모용공자의 행적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주군께서 만리 북쪽으로 달려 오신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지요. 주군께서는 큰 일이 해결되는 대로 소경호를 달려올 터이니 부인께서는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성죽은 눈물을 글썽이며 목메인 어조로 말했다.

"그는 언제나 즉시 돌아온다고 말하죠. 그러나 매번 삼 년이나 오 년이 지나도록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없었어요. 이제 겨우 그가 나타난 것을 보게 되었는데 또......."

주단신은 저만리로 하여금 화가 나 죽도록 만든 아자에 대해서 지극히 분개하고 있었다. 단정순의 말을 이미 전하였는지라 더 머물고 싶지 않아 약간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그 자리를 떠났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아자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원성죽은 그가 멀리 사라지자 아자에게 말했다.

"너의 경신법이 나보다 뛰어나니 빨리 살그머니 그의 뒤를 따라가도록 해라. 그리고 길에다가 표시를 해 두어라. 내 곧 뒤따라 가마."

아자는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어머니는 나보고 아버님을 뒤쫓자는 거예요? 무슨 상을 주겠어요?"

원성죽은 말했다.

"이 에미에게 있는 물건이 모두 너의 것인데 무슨 상을 주라는 것이냐?"

아자는 말했다.

"좋아요. 저는 담벽에 단자라는 글을 쓰고 그 옆에 화살촉을 그려놓겠어요. 그렇게 하면 어머니는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원성죽은 그녀의 어깨를 얼싸안고 기뻐서 말했다.

"우리 아기, 정말 착하구나!"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너무 순진하셔!"

그리고 몸을 날리더니 주단신의 뒤를 쫓아갔다.

원성죽은 소경호가에서 잠시 서 있더니 소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멀리 가게 되자 진홍면 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손짓을 하더니 발걸음을 죽이고 원성죽의 뒤를 미행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자가 길가에 표시를 해둔다면 단정순을 찾기처럼 쉬운 일도 없을게다.)

그리고 그는 걸음을 옮겼다. 별안간 달빛 아래 자기의 모습이 호수 속에 거꾸로 서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처량하면서도 매우 외로워 보였다. 그는 마음이 서글퍼 졌다. 그는 대나무밭으로 되돌아가 아주의 무덤 앞에 잠시 동안 더 앉았다가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갑자기 노기가 크게 끓어올랐다. 그는 손을 뻗쳐서는 호수를 내려쳤다. 세찬 장풍이 이르는 곳에 호숫물이 사방으로 튀었으며 호수 속의 그림자도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길게 휘파람을 내불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후 며칠 동안 낮에는 걷고 밤에는 자면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술을 많이 마셨고 밥은 적게 먹었다. 한 고을에 이를 적마다 그는 담장가에 아자가 남긴 단 자라는 기호와 화살촉이 있어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때로 원성죽이 보고 난 이후 지워버린 곳도 있었지만 그 흔적은 완연하여 찾아볼 수 있었다.

줄곧 북을 향해 걸음을 옮겼기 때문에 날씨는 점점 차가워졌다. 며칠이 지나자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다. 소봉은 점심 때가 되어 한 칸의 주점에서 열 두세사발의 독한 술을 시켜 마셨다. 그런데 채 술을 마셨다는 기분도 내기 전에 주점의 술이 떨어졌다는 것이 아닌가. 그는 크게 흥이 깨어져서는 주점을 나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한 커다란 성에 이르게 되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고 속으로 흠칙했다. 그는 이미 신양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는 아자가 남긴 표식을 따라 쫓아오면서도 자기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주위의 인물이나 경치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기 때문에 신양으로 되돌아온 사실을 이때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가 정말 단정순을 만나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미 쫓아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발걸음을 빨리해서 하루, 혹은 반 나절을 달리게 된다면 반드시 뒤쫓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주가 죽은 후 그의 마음은 언제나 공허했다. 그리고 어ㄷ게 하면 이 세월을 보낼수 있을가 하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소봉은 언제나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단정순을 쫓아가서 어떻게 한다지? 진자 원흉을 찾아서 원한을 갚고 난 이후에는 또 어떻게 하지? 나 혼자 안문관 밖으로 나가 모래 바람이 크게 부는 사막에서 사냥이나 하고 양을 친다고 해서 어쩌겠다는거지?"

그래서 그는 줄곧 급히 길을 달려가지 않았다.

신양성에 들어가자 성벽 아랫쪽에 숯으로 단자라는 글씨가 씌여있고 글자 옆의 화살촉은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 날 아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신양성 서쪽에 살고 있는 마부인의 집으로 가서 마부인을 유도하여 사실을 알아내고자 했던 광경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오늘 되돌이켜 볼 때 당시 한걸음 한 걸음 옮긴 것이 바로 아주를 저승으로 한 걸음씩 떠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시 오륙 마장을 나가게 되었을 때 북풍이 세차지면서 눈이 더욱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자가 남긴 표식을 따라 곧장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 표식은 모두 새로 남긴 것이었으며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다. 어떤 것은 나무껍질을 벗기고 나무에다 표시를 한것도 있었다. 그리고 나무 껍질을 볏겨낸 곳의 송진이 아직도 응결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표지가 가르키고 있는 방향은 바로 마대원의 집이 아닌가. 소봉은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혹시 단정순은 마부인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따지러 간 것이 아닐까? 그렇다. 아주가 죽을 때에 청석교에서 나에게 말을 하며 마부인을 들먹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사실을 아자가 들었으니 반드시 그녀의 아버지에게 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마부인이라고만 말했는데 그가 어떻게 이 마부인임을 알게 되었을까?)

그는 길을 오면서 마음이 우울하여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다시 괴이한 일을 만나게 되자 번뜩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옛날 강적과 만나게 되었을 때의 경각심을 되찾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이때 길옆에 서 있는 황량한 절간이 한 채 보였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닫아걸고는 한숨 푹 잤다. 세시진을 자고 나니 저녁 무렵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절간에서 나와 마대원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대원의 집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을 때 그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주위의 형세를 살폈다. 잠시 살핀 결과 그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씨집 동북쪽으로 두 사람이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 모습으로 보아 원성죽과 아자 같았다. 그리고 곧이어 진홍면 모녀가 마대원의 집 동남쪽에서 웅크리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때 눈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네 여인의 몸은 모두 하얀 눈으로 덮혀 있었다. 마대원의 집 동쪽 상방의 창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조용하니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소봉은 나뭇가지를 한 대 꺾어서 동쪽으로 던졌다. 그것은 팍!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원성죽 등 네사람은 일제히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소봉은 그 틈을 타 가볍게 몸을 날려 동쪽 상방의 창문 아래에 이르렀다.

날씨가 추워 땅보 얼어붙을 지경이라 마씨집 창문 밖에는 나무 판대기를 달아놓고 있었다. 소봉은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일진의 삭풍이 북쪽에서 쉬익하니 몰아쳐와서 그 일진의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지나갈 때를 기다려 그는 가볍게 일장을 밀었다. 장력과 그 일진의 바람이 동시에 창밖의 나무판대기를 살짝 후려쳤다. 우직끈!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판대기가 갈라지면서 안쪽의 창호지마저 약간 찢어지더니 엷은 틈이 생기게 되었다. 진홍면과 원성죽 등은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장풍과 북풍이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방안에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알아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소봉은 그 갈라진 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 그는 그만 멍해져서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7. 질투가 몰고 온 참사 단정순은 작은 모자를 쓰고 등불 옆에 정좌하고 앉아 있었는데 손에는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탁자 옆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한 부인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 부인은 몸에 소복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 약간의 분을 바르고 있었는데 눈썹과 눈끝에는 봄빛이 무르익고 있었다. 그리고 한쌍의 물기어린 눈동자에서는 영롱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웃는 듯 마는 듯 화가 난 듯 안 난 듯한 표정으로 단정순을 곁눈질하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마대원의 미망인인 마부인이었다.

이때 방안의 정경을 소봉이 만약 친히 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무석성 밖 은행나무 숲속에서 처음으로 마부인을 만나게 된 이후 다시 취현장에서 같이 절교의 술을 마셨던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차갑게 서리가 앉은 듯한 얼굴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기상을 보여 주었으며 웃음이라곤 눈꼽만큼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이와 같은 모습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 이상한 것은 그녀가 단정순을 모함했던 사실 때문에 반드시 단정순과어떤 깊은 원한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던 소봉이었다. 그러나 방안의 광경을 보건대 술기운이 무르익는 가운데 두 사람은 네 눈으로 연연한 정을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서로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전혀 원한이 맺힌 사이 같지가 않았다.

탁자 위의 커다란 화병에는 붉은 매화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리고 방안에는 숯불을 활활 피워 놓고 있었다. 마부인은 목에 달린 단추를 풀어제쳐 희디흰 목이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젖가슴의 가리개를 살짝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런데 방 한쪽에 켜져있는 두 자루의 초는 하얀 색이었고 붉게 타오르는 초심지는 그녀의 발그레 상기된 뺨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창밖엔 삭풍과 더불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으나 방안은 그야말로 포근한 봄빛에 젓어 있었다.

단정순이 말했다.

"자자자, 다시 나와 더불어 한 잔 하지. 잔뜩 마신 이후 한 몸이 되자구."

마부인은 싸늘히 코웃음치더니 코먹은 소리로 말했다.

"무슨 한몸? 이곳에서 제가 외롭고도 쓸쓸하게 밤낮으로 생각하며 기다린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런데...... 그대는...... 이미 나를 깡그리 잊어 버린 채 한 번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진홍면이나 원성죽과 거의 비슷한 처지이지 않은가? 그녀...... 그녀 역시 단정순의 옛 정인이란 말인가?)

단정순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대리에 있을 때 하루라도 나의 귀여운 강씨를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있는 줄 아시오? 그야말로 날개가 달렸으면 당장 날아와 그대를 품에 안고서 곱게 쓰다듬어 주고 애무해 주었을 것이오. 그런데 그 날 그대와 마부방주가 혼례를 올렸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잇따라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한 숟가락의 밥도 먹을 수가 없었소. 그대는 이미 의지할 사람이 생겼는데 내가 다시 그대를 찾는다면 그대에게 누를 끼치게 되리라 생각했다오. 마부방주는 개방에서도 크게 신분이 높은 영웅호걸인데 내가 다시 그대와 정을 주고받는다면 그에게 너무나 미안한 노릇이 아니겠소? 이것...... 이것이야말로 비열한 소인의 행위가 아니냔 말이오."

마부인은 말했다.

"누가 그대보고 저에게 은근한 수작을 붙이라고 했어요? 나는 그저 그대를 생각하며 몸이 편안한지 그리고 마음이 유쾌한지 그리고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순조로운지를 걱정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대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저는 기뻤으며 사람 노릇을 하는데도 흥미를 느꼈을 거예요. 더군다나 그대는 멀리 대리에 있으니 내가 그대의 소문을 얻어듣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노릇이었어요. 저의 몸은 신양에 있었으나 마음은 언제 어느 때든 그대의 곁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그녀가 말을 하면 할수록음성은 가라앉고 있었다. 소봉은 그녀의 말하는 소리에 코먹은 가운데 씁쓸한 맛이 감도는가 하면 은근히 달콤하여 말할 수 없는 정을 담고 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설레게 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혼백이 날아가게 만드는 마력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말하는 소리는 순전히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지 결코 일부러 요염한 교태를 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소봉은 그야말로 한평생 적지 않은 사람을 대해 본 터 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토록 뼈에 사무칠 정도로 요염한 여인이 있으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소봉은 단정순의 다른 두 정부를 바라본 적이 있었다. 진홍면은 명랑하고 시원시원한 편이며 원성죽은 간드러지면서도 애교가 있었다. 그런데 이 마부인으로 말하면 부드럽기 이를 데 없었고 요염하기 짝이 없어 항거하기 어려운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단정순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마부인은 '아'하고 짐짓 놀람에 찬 비명을 지르더니 손을 뿌리치며 항거하는 시늉을 했다.

소봉은 눈쌀을 찌푸렸다. 이때 쌓인 눈을 밟는 소리가 사박사박 들려왔다.

소봉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두 시샘 많은 여인들이 나의 큰 일을 그르치게 되겠구나!)

다음 순간 그는 질풍과 같이 몸을 날려서 진홍면 등 네 사람의 등뒤로 돌아가서는 일일이 네 사람의 등뒤에 있는 혈도를 짚어버리고 말았다.

네 사람은 누가 부린 수작인지도 모르고 그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번에 소봉이 짚은 곳은 어혈로서 그들로 하여금 말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진홍면과 원성죽은 정인과 다른 여자가 그토록 애정이 담긴 말을 주고받는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질투심이 복받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며 단정순이 놀아나는 꼴을 참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봉은 다시 창호지 틈으로 안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마부인은 단정순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데 뼈가 없는 듯 온몸이 흐물거리고 있었다. 삼단 같은 머리채가 흘러내려와 단정순의 얼굴을 반쯤 덮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듯 마는 듯하고 말했다.

"저의 바깥 양반이 남에게 해를 입었다는 소문을 그대는 들었을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즉시 달려와 저를 위로해 주지 않았죠? 저의 바깥 양반이 죽었으니 그대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잖아요?"

그 어조는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단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오지 않았소.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밤을 도와 출발하였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몰라 대리에서 달려온 것이오. 그야말로 한 걸음이라도 늦게 도착할까봐 걱정했었소."

마부인은 말했다.

"조금 늦는 것이 뭐가 두렵다는거예요?"

단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외로움을 달래지 못하고 다시 시집을 가게 될까봐 두려웠단 말이오. 이 대리의 단 둘째가 어찌 달려오는 헛수고를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내가 십 년 동안 그리워한 정이 물거품이 된다면 그야말로 아쉽지 않겠소?"

마부인은 코웃음치며 말했다.

"흥! 좋은 말은 하지 않고 외로움을 달래지 못해 시집이나 가게 된다고 헐뜯기예요? 그대는 언제 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어요? 뭐 십년 동안 그리워했다구요? 거짓말을 하다가 혀를 깨물게 될까봐 겁이 나지도 않으세요?"

단정순은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허리를 더욱더 세게 끌어 안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대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어째서 먼 대리에서 이곳까지 달려왔겠소?"

마부인은 미소했다.

"좋아요. 그대 역시 저를 그리워한 걸로 치겠어요. 그런데 단랑, 이후 그대는 나를 어떻게 하실 작정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두 팔을 뻗어서는 단정순의 목을 끌어안고 뺨을 단정순의 얼굴에 가볍게 비볐다. 그렇게 되자 구름 같은 머리채가 마치 물결처럼 요동쳤다.

단정순은 말했다.

"오늘 술이 있으면 오늘 취하는 것, 이후의 일을 들먹여서 무엇 하겠소?

자, 한 번 알아봅시다. 십 년 동안 헤어져 있는 사이에 그대가 가벼워졌는지 아니면 무거워졌는지 보아야겠소."

그러면서 그는 마부인을 안았다.

마부인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끝내 저를 대리로 데리고 가지 않겠다는거죠?"

단정순은 눈쌀을 약간 찌푸리고 말했다.

"대리에 가서 좋을 것이 뭐가 있소? 날씨는 덥고 습기차고 또한 장기가 많아요. 그대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물이 몸에 맞지 않아 병이 나게 될것이오."

마부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나직이 말했다.

"음, 그대는 또 한차례 저를 헛되이 기쁘게 하려 했군요."

단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헛되이 기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오? 즉시 그대로 하여금 진정한 기쁨을 느끼도록 해주겠소."

마부인은 살짝 몸을 빼고 내려서더니 술을 한 잔 따르며 말했다.

"단랑, 한잔 더 마셔요."

단정순은 말했다.

"더 마시지 않겠소. 이제 술은 충분하오."

마부인은 왼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싫어요. 저는 더 마시도록 해야겠어요. 그대가 술을 마셔 얼큰해지도록 만들어야겠어요."

단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얼큰해지는 것이 뭐가 좋소?"

그러면서 그는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소봉은 두 사람이 그저 정담만 주고받자 짜증이 났다. 거기다가 단정순이 술마시는 것을 보자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치밀어올라 그만 가볍게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이때 단정순은 하품을 하더니 매우 피곤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부인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단랑, 제가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까요?"

소봉은 순간 정신이 들어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옛이야기에 어쩌면 찾아볼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

단정순은 말했다.

"바쁠건 없소. 자, 내가 그대의 옷을 벗겨 드리지. 그대는 이베게를 베고서 귓속말로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구려."

마부인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서두를 것 없어요. 단랑, 저는 어릴 적에 집안이 무척 가난했어요. 새옷을 입고 싶어도 아버지는 저의 새옷을 지어 줄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옆집 강씨집 언니처럼 꽃무늬가 있는 옷에 다꽃신발을 신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단정순은 말했다.

"그대는 어렸을 적에도 반드시 예쁘게 생겼을 것이요. 그토록 귀여운 아가씨는 온몸에 다 떨어진 옷을 걸친다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은 조금도 손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오."

마부인은 말했다.

"아니예요. 나는 그저 꽃무늬가 있는 옷이 좋았어요."

단정순은 말했다.

"그대가 이 상복을 입고 있으니 하얗고 부드러우며 음, 어느 정도 간드러진 매력마저 있구려. 꽃무늬 옷이 뭐가 보기 좋다고 그러시오?"

마부인은 방긋 웃더니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는 어렸을 적에 말이에요. 밤낮 생각하고 생각한 나머지 꽃 무늬 옷을 입고 싶어 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단정순은 말했다.

"그럼 십칠 세 되었을 적에는?"

마부인의 두 눈에서 영롱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단랑, 나는 바로 그대 때문에 상사병이 걸린 거예요. 이 병의 뿌리는 잘라지지 않았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나를 해치기만 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요. 살아 생전에 단랑을 그리워하는 상사병을 치료할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단정순은 그 같은 말을 듣자 크게 가슴이 설레이는 듯 손을 뻗쳐 다시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술을 너무나 많이마신 터이라 손발에 맥이 풀려 팔을 들려다가 다시 낼놓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가 나에게 그토록 많은 술을 마시도록 권했기에 나는 몸을 가눌 수가 없군. 그러니...... 어떻게...... 하하하, 소강 그후 그대는 몇 살 적에야 꽃무늬 옷에 꽃신발을 신게 되었소?"

마부인은 말했다.

"그대는 어릴 적부터 부귀영화를 누리는 몸이었으니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겪는 괴로움을 자연 이해할 수 없을거예요. 그 당시에 말이에요. 나는 한 켤레의 새 신발을 신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내가 일곱 살 되던 그해 아버지는 석 달후에 우리집에서 기르던 세 마리의 양과 열 네 마리의 닭을 시장에 내다 팔고 설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꽃무늬의 베를 사다가 저에게 한 벌의 새옷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팔월달부터 아버님의 그 같은 말씀을 듣고 기대에 부풀어서 닭을 키우고 양을 먹였어요......."

소봉은 양을 먹였다는 말을 듣고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글썽해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마부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하여 간신히 석 달째에 접어들게 되자 저는 매일같이 아버지에게 양을 팔고 닭을 팔자고 재촉을 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너무 서두를 것 없다. 그믐이 다 돼야 닭값과 양값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큰 눈이 내렸는데 잇따라 며칠 밤을 두고 계속 퍼붓겠죠. 그리고 어느 날 해질 무렵 갑자기 와르르 하는 소리가 났어요. 양을 기르는 외양간이 그만 커다란 눈에 쌓여 무너지고 만 것이에요. 다행히 양은 흙더미에 깔려 죽지 않았죠. 아버님은 양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는 '이제는 별수없이 양을 팔아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 날 야밤에 갑자기 양이 부르짖고 늑대가 울부짖는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야단났다!이리떼다!'하고 외치며 창을 들고 늑대를 쫓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세 마리의 양은 모조리 굶주린 늑대에게 물려가고 말았으며 십여마리나 되는 닭들도 반은 잡아먹히고 말았어요. 아버님은 큰 소리를 내지르며 늑대를 쫓아갔으며 양을 빼앗아 오려고 했어요. 아버지가 산속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을 보고 저는 매우 초조해 하면서 아버님이 정말 양을 빼앗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오랫 동안 기다리고 나서야 아버님이 다리를 절룩이면서 돌아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산벼랑의 눈길에 미끄러져 다리를 삐게 되었으며 창도 그만 벼랑 아래로 떨어뜨렸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양은 물론 찾지 못하게 된 셈이죠. 저는 매우 실망했어요. 그만 눈바닥에 앉아서 대성통곡을 했죠. 내가 매일같이 양을 기른 것은 바로 꽃무늬의 새옷을 입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에요. 저는 울면서 부르짖었죠. '아버지, 빨리 양을 되찾아와요! 나는 새옷을 입어야 하겠어요!' "

소봉은거기까지 듣게 되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저여인이 저토록 인정머리가 없다니! 그녀의 아버지는 쓰러져 다치게 되었는데 아버지의 상처를 걱정하지 않고 자기의 꽃무늬옷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더군다나 눈내리는 밤에 늑대를 쫓는 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노릇인가 말이다. 당시 그녀가 어려서 철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때 그녀는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저의 아버지는 저를 달랬죠. '아가, 우리 내년에 다시 몇마리의 양을 길러 판 이후에 너의 꽃무늬옷을 사도록 하자꾸나.' 그러나 나는 그저 울면서 싫다고 했어요. 하지만 싫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보름도 되지 않아서 설을 쇠게 되었으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옆집 강씨집 언니는 노란 바탕에 붉은 꽃이 수놓인 새 솜저고리와 초록색에 노란 꽃이 있는 바지를 입었더군요. 저는 그 모양을 보고 그만 미칠 듯했으며 울화가 치밀어서는 밥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아버님은 연신 나를 달랬으나 나는 아버님을 상대조차 하지 않았어요."

단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그때 만약 내가 알았더라면 반드시 열 벌이고 스무 벌이고 새옷을 그대에게 선사했을거야."

그러면서 그는 기지개를 켰다. 흔들거리는 촛불아래 그의 눈빛은 얼큰해진 술기운과 짙은 욕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부인은 말했다.

"열벌이나 스무벌이 된다면 신기할게 없어요. 그 날은 마침 그믐이었어요.

밤이 되자 저는 침대 위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잠을 이룰수가 없었어요. 그리하여 저는 가만히 일어나 옆집 강씨 백부님 댁으로 숨어들어갔어요. 어른들은 밤을 세우느라고 아직 자지 않고 있었으며 촛불을 환히 밝혀놓았어요. 그런데 강씨집 언니는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그녀의 새옷과 새 바지는 그녀의 몸위에 놓여있었어요. 붉그스름한 촛불의 빛을 받아 그 새옷들은 더욱더 보기 좋았어요. 저는 멍하니 한참 동안을 바라보고 있다가 슬그머니 방안으로 들어가 그 새 저고리와 바지를 들었어요."

단정순은 웃으며 물었다.

"새옷을 훔치자는 것이오? 어이쿠, 나는 우리 소강이 사내만 훔칠 줄 알았는데 원래 옷까지 훔칠 줄 알았었군."

마부인은 별빛 같은 눈동자를 깜박이며 방긋 웃고 말했다.

"나는 결코 새옷과 새바지를 훔친 것이 아니에요. 나는 탁자 위의 반지그릇에 놓여있는 가위를 들고 그 새옷을 마구 가위질해버렸어요. 그리고 바지까지도 이리 자르고 저리 잘라 영원히 꿰멜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어요. 나는 그 새 저고리와 바지를 가위로 못 쓰게 만든 이후 마음속으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랐어요. 그야말로 내가 새옷을 입는 것보다도 통쾌했어요."

단정순은 얼굴에 줄곧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자 차츰 안색이 변하더니 매우 불쾌한 빛을 띠었다.

"소강, 그와 같은 옛일은 그만 이야기하고 자도록 합시다."

마부인이 말했다.

"아니예요. 그대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도 이 며칠뿐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후네는 아마 우리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을거예요. 그러니 저는 그대에게 많은 말을 하고 싶어요. 단랑, 그대는 내가 어째서 그대에게 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나요? 저는 그대에게 나의 성질을 알려드리는 것이에요. 어릴적부터 나는 그모양이었어요. 만약에 어느 한가지 물건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으려고 했지만 손에 넣지 못하게 되고 하필 다른 사람이 운수가 좋아 그것을 손에 넣게 되면 나는 그야말로 어떻게 하든 그 물건을 망가뜨려 버리고야 말았어요.어릴 적에 사용한 것은 약간 우둔한 방법이지만 나이가 점차 들어 자랄수록 머리도 총명하게 되었고 따라서 약간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죠."

단정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말하지 마시오. 그와같이 살풍경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면 나의 불쾌함을 사게 될 것이오. 나중에 나를 탓하지 마시오."

마부인은 빙그레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카락을 매고 있던 하얀 끈을 풀었다. 그러자 긴 머리카락은 허리께까지 내려왔다. 그야말로 삼단같은 머리채였다.

그녀는 노란 양목으로 만들어진 빗을 들어 천천히 기다란 머리카락을 빗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돌아 보더니 방긋 웃는데 그 얼굴은 요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랑, 나를 안아줘요."

그녀의 음성은 부드럽기 이를데 없었다.

소봉은 마부인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나 촛불 아래 그녀가 추파를 던지는 모습을 보게 되고 나를 안아달라는 그녀의 교태어린 음성을 듣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단정순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몸을 일으키고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술을 너무나 많이 마신 관계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저 예닐곱 잔의 술을 마셨을 뿐인데 이토록 무섭게 취하다니, 소강, 그대의 화용월태를 보고 내가 이렇게 흠뻑 취했나 보오. 정말 세 근의 독한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하군! 허허허."

소봉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예닐곱 잔의 술을 먹고 어찌 저토록 취할 수 있단 말인가? 단정순의 내력은 범상하지 않다. 설사 주량이 아무리 약하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힘을 못 쓸 까닭이 없다. 이 가운데는 이상한 점이 있다.)

이때 마부인은 깔깔거리며 간드러지게 웃더니 코막힌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단랑, 이리와요. 저는 전혀 힘이 없어요. 그대는...... 그대는...... 빨리 나를 안아줘요."

진홍면과 원성죽은 창밖에 엎드려진 채 마부인이 그와 같이 어리광을 부리며 요염하게 유혹하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을 귀로 듣고 있었다. 한결같이 질투의 불길이 치솟아올라 그야말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으나 소봉에게 혈도를 짚힌 관계로 손을 들어 귀를 막을래도 막을 수가 없었다.

단정순은 왼손으로 방바닥을 집고 힘주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몸을 막 일으키려는 순간 두 무릎에 맥이 빠지면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전혀 기운이 없군. 정말 이상한걸? 그대를 대하니 쥐가 고양이를 만난 듯 전신에 맥이 어디론가 모조리 빠져 버린 것 같소."

마부인은 나직이 웃었다.

"그 말을 믿을 수가 없군요. 술을 조금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취한 척 사람을 속이기에요? 운기행공을 하여 내력을 돋구어 보면 될것이 아니에요?"

단정순은 운기조식을 했다. 그리고 한 가닥 진기를 끌어올리려고 했다. 헌데 단전은 텅비어 있는 듯했으며 진기를 돋울래야 돋울 수가 없었따. 그는 잇따라 세 번이나 진기를 돋우려고 했으나 수십년간 닦아 온 심후한 내력이 삼시간에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언제 자기의 몸에서 떠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오랫 동안 강호의 풍상을 겪은 몸이라 얼굴에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겨우 일양지와 육맥신검의 내공진기만이 남아있군. 이 정도로 취했으면 사람을 죽일 수는 있으되 사람을 안을 수는 없겠는 걸."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사람은 색을 즐기는 편이지만 결코 멍청한 인물은 아니구나. 그는 이미 자신이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사람을 죽일 수는 있으되 사람을 안을수는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실 그는 일양지는 알지만 육맥신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틀림없이 위협을 하는 소리일게다. 그가 만약 내력이 없어졌다면 일양지도 펼칠 수가 없을 것이다.)

마부인은 몸이 노근한 듯 말했다.

"어마, 저는 머리가 어지럽네요. 단랑, 혹시...... 혹시 술속에다 그대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니에요?"

단정순은 본래 그녀가 술에다가 약을 탄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헌데 그녀의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그녀에 대한 의심이 대뜸 사그러지게 되었고 손짓을 하며 말했따.

"소강, 그대는 이리 다가오시오. 내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

마부인은 걸음을 옮겨 그의 곁으로 가려고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몸을 일으킬 수 없다는 듯 탁자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얼굴을 도화빛으로 물들이며 가쁜 숨만 몰아쉬더니 간드러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단랑, 저는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어요. 그대는 내가 그대와 사이좋게 지내지 않을까봐 술속에 춘약을 탄 것이 아니에요? 그대는 정말 점잖치 못하군요."

단정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가락을 술에 적셔서는 탁자위에 썼다.

<이미 적의 독계에 빠졌소. 애써 진정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사 나는 내력을 돋울 수 있게 되었군. 이 몇 잔의 독주로는 나의 정신을 빼앗을 수 없어."

마부인도 탁자 위에 글을 썼다.

<정말이에요? 거짓이에요?> 단정순은 다시 썼다.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소강, 그대에게 무슨 원수가 있어서 이 같은 독수를 써 나를 해치는 것이오?"

소봉은 창밖에서 그가 약함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글을 쓰는 것을 보고 속으로 잘못됐다고 느꼈다.

(아무리 단정순이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끝내는 여인의 손에 거꾸러지게 되었구나. 이 독약은 분명히 마부인이 쓴 것이다. 그녀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뿐 사람을 안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단정순의 무공이 뛰어난 것을 꺼려 자기마저 중독된 것처럼 가장하고 그대의 허실을 알아보고자 하는 수작인데 어찌 그토록 속임수에 쉽게 넘어간단 말인가?)

이때 마부인은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띠우고 탁자 위에다 다시 썼다.

<내력이 깡그리 사라졌다는 것이 사실이에요, 거짓이에요?> 그러는 한편 입으로는 말했다.

"단랑, 만약 어떤 비열한 간적이 우리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그거야말로 잘 됐다고 할 수 있어요. 그냥 앉아있기에 무료하니 그를 죽이면서 즐기도록 해요. 그대는 그저 앉아서 아랑곳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가 감히 손을 쓸 용기가 있는지 두고 보기로 하는 거예요."

단정순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저 약기운이 일찍 물러가고 적이 늦게 오기만을 바랄뿐이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그렇소. 그 누가 있어서 우리들이 장난칠 대상이 되어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라마지 않던 일이지. 소강, 그대는 내가 허공을 사이에 두고 혈도를 짚는 수단을 보겠소?"

마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대가 내력을 잃지 않았다면 일양지를 펼처 저 창호지에다가 구멍을 한 번 내보세요."

단정순은 눈쌀을 살짝 찌푸리며 연신 눈짓을 했다. 그 뜻은 자기에게는 내력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허공을 격하고 혈도를 짚을수 있는가. 그 자신은 그저 적을 겁주려고 하는 것인데 마부인이 어째서 그 의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헌데 마부인은 연신 재촉을 했다.

"빨리 손을 써요. 그대는 창호지에다가 조그만 구멍만 내면 적을 놀라게 해서 물리칠 수 있어요. 그렇지 않게 되면 큰일나요. 적으로 하여금 우리의 헛된 수작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세요."

단정순은 다시 한 번 흠칫했다.

(그녀는 언제나 총명하고 눈치가 빨랐는데 지금은 어째서 저토록 멍청할까?)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부인은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단랑, 그대는 십향미혼산이라는 무서운 독약에 중독되었어요. 아무리 무공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내력을 반드시 상실하게 되지요. 만약 그대에게 아직도 허공을 사이에 두고 혈도를 짚을 수 있어 내력진기로 창호지에다 구멍을 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노릇이죠."

단정순은 놀라 물었다.

"내가...... 내가 십향미혼산이란 악독한 독약에 중독되었단 말이오? 그대가 어떻게...... 어떻게 알았소?"

마부인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술을 따라 주게 되었을 때, 호호호...... 아마 잘못하여 독약 한 봉지를 술 주전자 속에 빠뜨린 것 같아요. 아, 나는 그대를 보자마자 그만 혼이 반쯤 달아나 몸둘 바를 모르게 되었죠. 단랑, 너무 탓하지 마세요."

단정순은 억지로 웃었다.

"음, 알고 보니 그랬었군. 그렇다면 별로 탓할 수가 없지."

이때 그는 속으로 자기가 마부인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미친 듯 노하여 욕을 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얼굴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띠우며 애써 심신을 가다듬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까를 곰곰히 생각했다.

(그녀는 나에 대해서 언제나 정이 깊은 편이었으니 결코 나의 목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은 아닐게다. 아마도 나에게 영원히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그녀와 함께 한평생을 살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거나 아니면 나에게 자기를 데리고 대리로 돌아가 명분이 올바른 부부가 되도록 함께 살자는 승낙을 받아내려고 하는 짓일게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니 방법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더라도 결코 악의를 가진 것은 아닐게다.)

이와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마음이 놓였다.

아니나 다를까, 마부인은 물었다.

"단랑, 그대는 저와 오랫동안 부부가 되고 싶지 않으세요?"

단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무섭군. 좋아 내가 투항을 하지. 내일 그대는 나와 함께 대리로 갑시다. 나는 그대를 진남왕의 측비로 맞아들이겠소."

진홍면과 원성죽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또 한 번 질투심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계집년이 뭐가 좋다고 나에게는 응락하지 않더니만 그녀에게는 응락을 하는구나.)

마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단랑, 조금 전에 내가 그대에게 이후 나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대는 대리라는 곳이 습기가 많고 장기가 많아 내가 가게 되면 병이 날거라고 했어요. 그러니 지금은 강요당하여 응락을 한 것이지 결코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닐거예요."

단정순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강, 내 그대에게 말하지. 나는 대리국의 황태제이오. 나의 형님에게는 아들이 없소. 따라서 황위를 나에게 전하게 될 것이오. 나는 중원에서는 일개 무부에 지나지 않으나 대리로 돌아가면 함부로 행동할 수 없소. 그렇지 않겠소?"

마부인은 말했다.

"그래요.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단정순은 말했다.

"이 일을 성사시키려면 본래 퍽이나 어려운 점이 많이 따를 것이오. 그러나 그대가 나에 대한 정이 이토록 절박하여 독을 쓰는 수단까지 사양하지 않은 것을 보고 나는 자연 마음을 돌리게 되었소. 더군다나 그대처 같은 좋은 사람이 옆에 함께 있어 주기를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었소.

따라서 내가 그대를 데리고 대리로 가겠다고 응락을 한 이상 결코 그 약속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오."

마부인은 나직이 아! 하더니 말했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그럼 이후 그대가 황상이 된다면 저를 황후마마로 봉할 수 있나요?"

단정순은 망설이며 말했다.

"나는 이미 조강지처가 있는 몸이라 황후는 안 되오."

마부인은 말했다.

"그래요. 나는 재수없는 과부인데 어찌 황후마마가 될 수 있겠어요? 그거야말로 대리국의 수천 수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입이 비틀어지도록 웃을 일이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빗을 들어 머리를 빗으며 웃었다.

"단랑, 조금 전 내가 한 이야기를 듣고 나의 뜻을 알았겠죠?"

단정순의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애써 심신을 가다듬으려고 했다. 그러나 수십 년간 부지런히 연마하여 얻은 내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도 없었다. 그야말로 그는 물속에 빠진 사람이 죽어라 하고 아무것이나 잡으려고 발버둥쳤으나 지푸라기 하나 거머쥘 수 없는 것 같은 형편에 놓여 있었다.

마부인은 물었다.

"단랑, 그대는 몹시 덥죠? 제가 그대를 위해 땀을 닦아 드리죠."

그녀는 품속에서 한 장의 하얀 손수건을 꺼내더니 그의 앞으로 다가와서가볍게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단랑, 그대는 몸을 소중히 하셔야 돼요. 술을 마신 이후에는 감기가 들기 쉽죠. 만약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이 있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저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이 아니겠어요?"

방 안의 단정순이나 창밖의 소봉은 그 말을 듣고 하나같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단정순은 억지로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그날 밤 그대가 땀을 흠뻑 흘리게 되었을 때 나 역시 그대의 땀을 닦아 준 적이 있소. 그런데 그 손수건을 나는 십여 년 동안 줄곧 몸에 간직해 왔소."

머뷰안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요? 십여 년 전의 옛일을 멋적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어요? 어디 꺼내서 제게 보여주시겠어요."

단정순이 십여 년 동안 그 손수건을 몸에 줄곧 지니고 다녔다는 말은 정말이라고는 볼 수 가 없었다. 허나 지금 자기의 품속에 그 손수건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여자의 환심을 쉽게 샀다. 이와 같은 재간도 여자들과 많이 사귀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와 같이 환심을 삼으로써 그와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된 여자들은 모두 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다만 여러 가지 항거할 수 없는 운명과 병고로 인해서 아름다운 인연을 영원히 맺게 되지 못했을 뿐이라고 여기게 마련이었다. 단정순은 그 손수건을 품속에서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손가락을 가볍게 한 번 움직이자 온몸이 찌릿하니 마비되지 않는가. 십향미혼산의 독성은 정말 무서워서 손수건을 꺼낼 힘조차 없었다.

마부인은 말했다.

"빨리 꺼내서 나에게 보여 줘요. 흥, 그대는 또 사람을 속였군요?"

단정순은 쓴 웃음을 지었다.

"하하, 너무 취해서 손을 움직일 수가 없구려. 그대가 나를 대신해서 꺼내 주구려."

마부인은 말했다.

"나는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겠어요. 그대는 나를 속여 다가가도록 만든 이후 일양지로 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죠?"

단정순은 미소했다.

"당신과 같이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절세미인이라면 설사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흉칙한 자라고 하더라도 결코 그대의 얼굴에 가벼운 손가락 자국 하나라도 남기기를 아까워할 것이오."

마부인은 웃으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단랑, 나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네요. 나는 끈으로 그대의 두 손을 묶어야겠어요. 그리고...... 그리고 다시 한가닥 부드러운 실로 그대의 마음을 꽁꽁 묶어 두어야겠어요."

단정순은 말했다.

"그대는 이미 나의 마음을 묶어 두고 있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찌 순순히 이곳까지 찾아왔겠소."

마부인은 쳇!하고 웃으며 말했다.

"본래 그대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대를 사모하게 되었고 영원히 치료할 수 없는 상사병을 얻게 된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침대가에 있는 설합을 열더니 우근을 섞어서 엮은 끈을 꺼냈다.

단정순은 속으로 더욱 놀라워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정순아! 단정순아! 오늘 네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느냐?)

마부인은 말했다.

"나는 먼저 그대의 손을 묶겠어요. 단랑, 나는 그야말로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은 저에게 화를 내시지 않겠죠?"

단정순은 마부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여자라고는 하나 흔히 볼 수 있는 남자들보다 더욱 의지가 굳었다. 악독한 욕을 해서 그녀로 하여금 화를 내게 할 수도 없었으며 애써 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마음이 돌이켜질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간을 끌 수 있으면 끌다가 기회를 보아서는 위험에서 빠져나갈 방도를 취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의 물기 많은 눈동자를 보기만 하면 아무리 큰 노기라 할지라도 사라지고 만다오. 소강, 그대는 이리 다기오시오. 그대의 머리에 꽂혀있는 그 한 송이 말리화에 향기가 있는지 없는지 맡아 봐야겠소."

십 몇 년 전 단정순은 바로 이 한 마디로 마부인과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옛일을 다시 들먹이게 되자 마부인은 몸을 기울여 맥없이 그의 품속에 쓰러졌다. 그러한 그녀의 정은 무한한 것 같았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손을 뻗쳐 가볍게 단정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코막힌 음성으로 말했다.

"단랑, 단랑, 그날 밤 내가 몸을 그대에게 바치면서 훗날 그대가 다른 마음을 품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다고 했죠?"

단정순은 눈앞에 불똥이 마구 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이마에서는 콩알 같은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마부인은 말했다.

"양심이 없는 낭군이시여......, 다정한 낭군이시여......, 그대가 한 맹세를 눈깜짝할 사이에 잊으셨나요?"

단정순은 쓰디쓰게 웃었다.

"나는 그대로 하여금 내 몸의 살을 한 입 물어뜯도록 하겠다고 했소."

본래 그와 같은 맹세는 순전히 장난기어린 말이었고 남녀가 서로 얽혀서 즐길 때에 희롱하는 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단정순은 지금 이 순간 그와 같은 말을 하게 되자 전신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마부인은 요염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한 말을 많은 세월이 흘러갔는데도 아직 잊지 않았군요.

나의 단랑은 정말 양심이 있어요. 단랑, 나는 그대의 손을 물어뜯고 그대와 신선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요. 괜찮겠죠? 괜찮다면 물어뜯겠어요. 싫다면 물어뜯지 않겠어요. 저는 언제나 그대에게 순종했으며 그저 그대의 환심을 사려고만 했어요."

단정순은 그녀에게 자기의 두 손을 없애지 말라고 애걸하면 그녀는 반드시 다른 이상야릇한 방법으로 자기를 다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쓰디쓴 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대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나는 그야말로 노란꽃 아래서 죽으면 죽더라도 풍류귀신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그대 손에 죽게 되니 그야말로 즐겁기 이를 데 없구려."

소봉은 창밖에서 그와 같은 말을 듣고 그의 놀라운 ㅇ니내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위급한 순간에도 그와 같이 희희덕거리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마부인은 그의 두 손을 등뒤로 돌리더니 우근을 섞어서 짠 줄로 꽁꽁 묶었다. 그리고는 잇따라 일곱 번 여덟 번이나 매듭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단정순이 무공을 모조리 상실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삽시간에 그 끈을 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마부인은 다시 간드러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의 이 한 쌍의 다리가 가장 미워요. 한 번 갔다 하면 종적이 사라지거든요."

그러면서 그의 다리를 가볍게 꼬집었다.

단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그 해 내가 그대를 만나게 된 것도 바로 이 한 쌍의 다리가 나를 끌고 왔기 때문이 아니겠소. 이 한 쌍의 다리는 죄를 크게 짓기도 했지만 공도 또한 적지 않소."

마부인은 말했다.

"좋아요. 저는 그 다리도 묶어야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다른 끈으로 그의 두 발을 묶었다.

그녀는 다시 한 자루의 가위를 들더니 천천히 단정순의 오른쪽 어깨의 몇 겹이나 되는 옷자락을 찢어서는 하얀 살결이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단정순의 나이는 젊다고는 할수 없었다. 그러나 귀하게 자랐고 몸을 잘 보호하면서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렸고 내공이 심후한 덕택으로 어깨죽지의 살은 여전히 매끄러우면서도 탄탄했다.

마부인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앵두 같은 작은 입술을 그의 입으로 가져가서는 입을 맞추더니 점차 그 입을 목에서 어깨죽지로 얾겨갔다. 그리고 입으로 '응응'하는 콧소리를 나직이 내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단정순은 '악'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으며 그 소리는 어두운 밤의 정적을 깨뜨리고 말았다.

이때 마부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입은 선혈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단정순의 어깨죽지의 살을 한 조각 물어뜯어 입에 물고 있었다.

마부인은 뜯어낸 한 조각의 살을 땅바닥에 뱉고는 간드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때리는 것은 정이며, 욕은 사랑이라고 했어요. 나는 그대를 죽어라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깨문거예요. 단랑, 이것은 그대 자신이 한 말이에요.

그대가 만약 마음이 변하게 된다면 나로 하여금 그 몸의 살을 한 입 두 입 물어뜯게 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단정순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그렇소. 소강, 내가 한 말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소? 가끔 나는 장래 내가 어떻게 죽으면 좋을까 하고 생각했소. 침대 위에서 병으로 죽게 된다면 너무나 평범하오. 전장에서 나라를 지키다가 전사를 하게 되어도 물론 좋긴 하지만 용감하되 풍류가 없어 단정순의 평소 위인과 닮지 않는 다는 것이 탈이오. 소강, 오늘 그대가 생각해 낸 방법이 썩 훌륭하구려. 단정순이 당대 제일의 미녀의 앵두 같은 입술과 진주 같은 이빨에 물려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내 평생의 소원을 풀어준 셈이오. 그대도 생각해 보시오. 만약 이 단정순이 그대와 뼈를 삭이는 듯한 사랑의 정을 나누지 않았던 다른 남자였더라면 설사 그대에게 수레에 가득 보석을 준다 하더라도 그대는 결코 그의 몸을 물어뜯지 않았을 것이오. 소강, 말해 보시오. 그렇지 않소?"

진홍면과 원성죽은 이미 놀라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단랑의 명이 이미 경각에 달려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소봉은 여전히 창문 아래에 웅크린 채 동정을 살피고 있었으며 손을 써서 구원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녀를 욕하고 있었다.

소봉은 아직 마부인의 참뜻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단정순을 해쳐 죽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를 놀라게 해서 그로 하여금 풍류의 죄값을 듬뿍 받도록 한 이후 용서를 받고 그로 하여금 이후 영원히 그녀의 치마 폭에서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충신이 되도록 하려는 것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의 이와 같은 행동이 그저 연인들끼리의 사랑싸움에 불과한 것이라면 자기가 경솔하게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게 된다면 진상을 엿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될 뿐이니까.

그는 여전히 성질을 누르고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기만 했다.

마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설사 대송나라의 천자나 거란의 황제라 하더라도 나를 죽이기는 쉬워요. 하지만 나로 하여금 그들을 한 입 물어뜯도록 하지는 못할거예요. 단랑, 나는 본래 그대를 천천히 물어 죽이려고 했으며 그대를 천 번 만 번 물어뜯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그대의 부하가 달려와 구할까봐 겁이 나는군요. 이렇게 하지요. 나는 이 칼을 그대의 심장에 꽂겠어요. 하지만 반 치 정도만 찌르되 그대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겠어요. 그리고 만약 그 누가 구하러 온다면 나는 칼자루를 밀어버리겠어요. 그러면 그대는 물어뜯기는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될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한 자루의 시퍼런 비수를 꺼내더니 단정순의 가슴팍 옷자락을 찢어서 헤치고 비수의 끝으로 그의 가슴팍을 겨누더니 섬섬옥수로 살짝 밀었다. 비수는 그의 가슴팍에 꽂히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 조금밖에는 찔러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에도 단정순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는 가슴팍에서 선혈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말했다.

"소강, 그대의 열 손가락은 그대가 열 입곱 살 소녀였을 때보다 더 희고 부드러워졌구려."

소봉은 마부인이 비수로 단정순의 가슴팍을 찌를 때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녀의 손을 지켜보았다. 만약 그녀가 힘을 크게 주어 단정순의 목숨을 빼앗을 우려가 있을 때는 즉시 일장을 후려쳐서 그녀의 몸뚱아리를 퉁겨내듯 물리칠 작정이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단정순의 가슴에 비수를 그저 가볍게 꽂는 것을 보고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열 입곱 살 나던 해에는 늘 빨래를 하고 밥을 짓느라 손가락과 손이 자연 거칠어졌지요. 그러나 이 몇 년 동안 거칠은 일을 하지 않아 살결이 오히려 더욱 고아진 것은 사실이에요. 단랑, 두 번째로 그대의 어디를 물어뜯으면 좋겠어요? 그대가 물어 뜯으라고 하는 곳을 저는 물어뜯겠어요. 저는 언제나 그대의 말을 들어 왔잖아요?"

단정순은 웃으며 말했다.

"소강, 그대가 나를 물어 죽인다 해도 나는 그대의 곁을 떠나지 않겠소."

마부인은 말했다.

"그것은 왜죠?"

단정순은 말했다.

"무릇 처가 남편을 모살하여 죽이게 되면 죽은 남편은 언제나 음혼이 거두어지지 않고 항상 그녀의 신변을 맴돌면서 두 번째 남자가 자기의 처와 사이가 좋아지는 것을 막게 되는 법이라오."

단정순의 이 몇마디 말은 그녀를 놀라게하여 그녀로 하여금 너무 악독한 짓은 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부인은 그 말을 들은 후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뒤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단정순은 이 기회에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 그대 등 뒤의 저 사람은 누구요?"

마부인은 깜짝 놀라 말했다.

"나의 등 뒤에 무슨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터무니 없는 소리."

단정순은 말했다.

"음, 남자인데 입을 헤벌쭉 벌리고 그대를 향해 웃고있군. 그리고 자기의 목구멍을 드러내며 마치 매우 아프다는 듯한 시늉을 하는군. 저 사람이 누구이지? 옷자락은 다 떨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리는데......."

마부인은 급히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대는...... 거짓말을 하는군요."

단정순은 처음에는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너무나 놀라와하는 것을 보고 대뜸 마음속에 어떤 의혹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어렴풋이 마대원의 죽음에는 어떤 내막이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마대원이 쇄후금나수라는 수법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러 그 사람이 마치 속이 매우 아픈 듯하다고 했으며 눈에는 눈물을 흘리고 옷자락은 다 떨어졌다고 말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부인은 크게 놀라와했다. 단정순은 더욱 심증을 굳히고 말했다.

"아, 이상하다. 어째서 그 남자는 눈 깜박할 사이에 다시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는 누구이지?"

마부인의 안색은 더욱더 놀라움과 당황함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삽시간에 냉정을 되찾고는 말했다.

"단랑, 오늘 이 지경에 이른 이상 그대가 나를 겁주려고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대 역시 자기가 한 맹세를 받아들여야 할거예요.

우리 두 사람이 인연을 맺게 된 정을 생각해서 나는 그대에게 시원스러운 죽음을 안겨 드리고 싶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뻗쳐서는 비수의 자루를 밀려고 했다.

단정순은 더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두 눈을 부릅뜨고는 그녀의 등 뒤를 노려보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마대원! 마대원! 빨리 그대의 아내를 목졸라 죽이게!"

마부인은 그의 얼굴이 갑자기 무섭기 이를데 없이 변하고 또 마대원이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 되자 그만 전신을 흠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단정순은 바로 이때 머리에 힘을 주고는 그녀의 아랫턱을 들이받았다. 마부인은 대뜸 뒤로 쓰러지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단정순이 머리로 받은 것은 결코 내력에 의한 것이 아니어서 마부인은 잠시 혼절을 했으나 금방 정신을 차리고 사뿐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기의 아랫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단랑, 그대는 사랑한다는 표시가 이토록 거칠군요. 사정없이 받는 바람에 여간 아프지 않네요. 그러나 그와 같은 거짓말로 나를 놀라게 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아요."

단정순은 한 번 들이받았을 때 이미 반 나절이나 모아둔 힘을 다 써버린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명이 이럴진대 말을 더 한들 무엇하랴?)

그러나 다시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슬쩍 입을 열었다.

"소강, 그대는 이대로 나를 죽일 작정이오? 만약 그렇게 되어 개방의 사람들이 와서 그대에게 친남편을 모살했다는 죄명을 씌운다면 그 누가 있어 그대를 돕겠소?"

마부인은 키득키득 웃었다.

"내가 친남편을 모살했다고 누가 말하던가요? 그대는 나의 친남편이 아니잖아요? 만약 그대가 나의 남편이라면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에도 부족할 판인데 어찌 그대를 해치겠어요? 나는 그대를 죽인 이후에 멀리 떠날 생각이며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하지 않을 거예요. 그대 대리국의 신하들이 찾아오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단랑, 나는 실로 그대를 매우 그리워했고 그대를 사랑했어요. 그리고 하루 종일 그대를 가슴에 안고 입맞춤하며 애무해 주고 싶었어요. 다만 내가 그대를 내것으로 할 수 없으니 부득히 그대를 없애는 거예요. 이것은 나의 타고난 성질이니 어찌 할 수 없는거예요."

단정순은 말했다.

"음, 그렇구려. 그날 그대가 일부러 소녀를 속여서 교봉의 손을 빌어 나를 죽이려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구려."

마부인은 말했다.

"그래요. 교봉이란 녀석은 정말 쓸모가 없어요. 그대를 죽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하여금 도망쳐 나오게 하다니 말이에요."

소봉은 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했다.

(아주가 백세경으로 분장을 한 것은 그야말로 깜쪽같아서 나까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마부인과 백세경은 서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닐텐데 어떻게 아주가 변장한 것을 간파했을까?)

이때 마부인은 입을 열었다.

"단랑, 나는 다시 한 번 그대를 물어뜯고 싶어요."

단정순은 미소했다.

"와서 물어뜯도록 하시오. 나로서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외다."

소봉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주먹을 앞으로 뻗어내어 단정순의 등뒤의 흙벽에 갖다대고 암암리에 공력을 돋구었다.

흙으로 쌓아올린 벽이라 결코 견고하다 할 수 없었다. 그의 주먹은 서서히 꺼져 들어갔다. 그리고 끝내 기척도 없이 뻥하니 구멍을 내게 되었고 그의 손바닥을 단정순의 등심에 갖다 댈 수가 있었다.

이때 마부인은 다시 단정순의 어깨죽지의 살을 한 조각 물어 뜯었다. 단정순은 큰 소리로 절규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자기의 두 손을 이미 자유스럽게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손목을 감고 있던 우근을 섞어 만든 끈이 소봉의 손가락에 의해 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한 줄기 웅후하기 이를데 없는 내력이 물밀 듯 그의 경맥으로 흘러들어왔다.

단정순은 어리둥절해졌으나 바깥에 무공이 고강한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곧이어 그는 운기하여 자기의 몸에 주입해 들어오는 내력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내력은 등심에서 손과 팔로 흐르게 되었고 다시 손가락 쪽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자 그는 가볍게 손을 쳐들고 손가락을 뻗쳐내었다. 찍!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일양지의 신공이 펼쳐졌다.

마부인은 옆구리 아랫쪽을 손가락에 찔리게 되었고 그만 어머하고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방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봉은 이미 단정순이 마부인을 제압한 것을 보자 즉시 손을 움츠렸다.

단정순이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문 휘장이 걷혀지면서 한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그 사람은 말했다.

"소강, 그대는 저 사람에 대한 옛정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지? 어찌하여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깨끗이 처리를 하지 못하느냐 말이오?"

소봉은 창문을 격하고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되자 흠칫했다. 놀람과 분노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삽시간에 뇌리에 남아있던 많은 의문이 일제히 풀렸다. 마부인은 그 날 무석성의 은행나무 숲속에서 자기가 사용하던 섭선을 꺼내 들고서는 소봉이 마씨 집안으로 들어와 편지를 훔치려고 하다가 떨어뜨린 것처럼 모함을 했는데 그녀가 그 섭선을 어디서 구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항시 소봉의 뇌리에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가 훔쳐갔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자기와 지극히 가까운 사람인데 그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궁금히 여겼었다.

자기가 거란 사람이라는 커다란 비밀을 이십여 년 남짓 숨기고 있다가 왜 갑자기 들춰내게 되었을까? 아주가 백세경으로 변장한 사실은 그야말로 전혀 빈틈이 없는 일이었는데 마부인은 어떻게 간파하게 되었을까? 이와 같은 의문이 꼬리를 물었었는데 방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는 순간 그는 확연히 깨닫게 된 것이다.

방안으로 걸어 들어온 사람은 바로 개방의 집법장로 백세경이었다.

마부인은 놀람에 찬 어조로 말하였다.

"그는...... 그는...... 무공을 상실하지 않았어요! 나의...... 나의 혈도를 짚었어요!"

백세경은 단숨에 달려들더니 단정순의 손을 잡고 우두둑!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면서 그의 완맥의 뼈를 비틀어 버렸다. 단정순은 전혀 항거할 힘이 없었다. 소봉이 그의 체내에 주입해 준 진기와 내력은 겨우 잠시 동안만 지탱할 수 있게 했을 뿐이었고 소봉이 손을 움츠리게 되자 그는 다시 폐인으로 화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봉은 백세경을 발견하게 되자 일시 많은 생각이 조수처럼 밀려와 재차 손을 써서 단정순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단정순의 두 손목은 이미 비틀어진 후였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사람은 풍류적이고 색을 좋아하니 오늘 쓴맛을 단단히 보도록 하는 것도 좋으리라. 다만 아주의 얼굴을 봐서라도 최후에 가서는 내가 그의 목숨을 구해 주어야겠다.)

백세경은 말했다.

"단가야, 재간이 그토록 뛰어나다니 생각 밖이다. 십향미혼산을 먹고도 삼성의 공력이 남아 있었구나!"

단정순은 담장 밖에서 손을 뻗쳐 자기를 도와 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랐으나 무공이 탁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눈앞에 강적이 나타났지만 구원자가 바로 등 뒤에 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조금도 당황해 하거나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세경의 말로 미루어 자기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이 슬쩍 물었다.

"귀하는 개방의 장로시오? 불초와 귀하는 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어째서 갑자기 독수를 쓰는 것이오?"

백세경은 마부인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허리께를 몇 번 주물렀다.

그러나 단씨 일양지의 점혈 수법은 매우 신묘했다. 백세경의 무공이 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녀의 혈도를 풀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눈쌀을 찌푸리며 마부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떠시오?"

그 어조는 매우 관심이 어려 있었다. 마부인은 말했다.

"저는 그저 손과 발이 시큰거리며 기운이 없어 꼼짝할 수가 없어요. 세경, 그대가 손을 써서 저자를 처리하고 우리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해요.

이 집은...... 이 집에서는 나는 더 머물고 싶지 않아요."

단정순은 갑자기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소강, 그대는 ......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철이 덜 들었소. 하하하!"

마부인은 미소했다.

"단랑,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토록 즐겁게 웃을 수 있다니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백세경은 노해 부르짖었다.

"그를 아직도 단랑이라고 불러? 이 계집년이......."

그러면서 그는 냅다 손을 쳐들더니 힘주어 그녀의 따귀를 갈겼다. 마부인의 하얀 오른뺨은 대뜸 붉게 부어올랐고 그녀는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

단정순은 노해 부르짖었다.

"손을 멈추어라...... 어째서 그녀를 때리느냐?"

백세경은 미소했다.

"너는 간섭할 자격이 없다. 그녀는 나의 사람이니 내가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을 하고 싶으면 욕을 하는 것이야."

단정순은 말했다.

"저처럼 꽃과 같이 아름다운 미인에게 어찌 손찌검을 한단 말이냐? 설사 그대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대는 마땅히 고분고분하게 그녀의 환심을 사야 하며 그녀가 기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마부인은 백세경을 곱게 흘겨보더니 말했다.

"상대방에서 나를 어떻게 대해 주었는지 어디 한 번 들어보세요. 그런데 당신은 나를 어떻게 대하죠? 그대는 부끄럽지도 않나요?"

그러는 그녀의 말투와 눈은 여전히 요염한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음탕한 계집 같으니. 내가 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지 않는가 두고 보라구. 그런데 단가야! 나는 너의 그와 같은 수작을 보고 싶지 않다.

그대는 여인의 환심을 살줄 안다면서 어찌하여 그녀에게 해침을 당하였단 말이냐. 자, 이제 각오를 하실까? 내년 오늘이 바로 너의 첫 재사날이 될것이야."

그러면서 그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는 손을 뻗쳐 단정순의 가슴팍에 꽂혀 있는 그 비수를 밀어 깊이 박으려고 했다.

소봉은 오른손을 다시 흙담의 구멍 안으로 밀어넣었다. 백세경이 다시 한 걸음 다가오게 된다면 즉시 장풍을 격출할 생각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문 입구의 휘장이 한 줄기 바람에 의해 펄럭였다.

그리고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찬 바람이 일더니 켜져 있던 두 개의 촛불이 일제히 꺼지고 말았다. 방안은 대뜸 칠흑과 같은 어둠에 휩사이게 되었다.

마부인은 아! 하고 놀람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백세경은 적이라는 것을 알았고 단정순을 죽일래야 죽일 여가가 없었다. 그는 적을 맞아 상대해야 했다. 따라서 호통을 내질렀다.

"게 누구요?"

그리고 두 손으로 가슴팍을 보호한 채 몸을 돌렸다.

8.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 촛불을 꺼뜨리는 일진의 세찬 바람을 일으킨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분명히 무공이 지극히 고강한 사람이 장력을 펼쳐낸 것이었다. 그러나 촛불이 꺼진 이후에도 아무런 동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백세경, 단정순, 마부인, 소봉 네 사람은 정신을 가다듬고 살폈다. 그리고 보니 어렴풋이 방안에 한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부인이 먼저 참지 못하고 날카로운 어조로 부르짖었다.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문 앞을 막고 서서 두 손을 내려뜨리고 있었다. 얼굴은 똑똑히 살펴볼 수가 없었는데 그는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백세경은 호통쳐 물었다.

"누구요?"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 사람은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백세경은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불초는 가만 두지 않겠소!"

헌데 그 사람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고 어둠속에서 귀기를 풍겨 주고 있었다.

단정순과 소봉은 나타난 사람의 모양을 보고 하나같이 생각했다.

(저 사람은 무공이 뛰어난데 도대체 누구일까?)

마부인은 날카로운 어조로 부르짖었다.

"촛불을 켜요! 저는 무서워요! 무서워!"

백세경은 호통을 내질렀다.

"이 음탕한 여인아!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지금 이 순간 그가 몸을 돌려 촛불을 켠다면 즉시 등을 적에게 내미는 꼴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두 손으로 가슴팍을 보호한 채 상대방이 먼저 움직여 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사람은 시종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와 같이 서로 대치한 채 거의 차 한 잔 마실 시진을 흘려 보내게 되었다.

소봉은 물론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고 단정순 역시 입을 열고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사방은 그야말로 쥐죽은 듯 조용하여 문밖에서 눈송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백세경은 끝내 성질을 누를 수 없는 듯 부르짖었다.

"귀하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는 실례를 무릅쓰겠소!"

그리고 그는 잠시 기다렸다. 상대방이 여전히 아무런 동정을 보이지 않자 그는 즉시 손을 홱 뒤집어서는 품속에서 한 자루의 파갑강추를 꺼내며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어둠속에서 푸른 광채를 번뜩이는 강추를 들어 그 사람의 가슴팍을 향해 질풍과 같이 찔러 갔다.

그 사람은 비스듬히 몸을 날려 피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백세경은 일진의 찬 바람이 곧장 밀어닥치면서 상대방의 손가락이 어느 틈엔가 자기의 목을 움켜쥐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일초는 너무나 빨라 백세경이 미처 강추를 거두어들이기도 전에 적의 손가락 끝이 목에 와 닿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혼비백산한 백세경은 급히 뒤로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 그대는......"

그가 진정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상대방의 무공이 기이하고 고강한 때문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펼친 초식이 바로 쇄후금나수였기 때문이었다.

이 무공은 마대원의 가전절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씨 집안의 자제 이외에는 누구도 펼칠 줄을 몰랐다. 백세경은 마대원과 오랫 동안 사귀어 온 사이라 그의 무공수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백세경은 등골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가다듬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키가 훌쩍 커서 마대원과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어둠속이라 그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말도 하지 않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몸에서는 음산한 귀기가 감돌고 있었다. 백세경은 자기의 목줄기가 은근히 아파오는 것을 느꼈는데 아마도 그의 손가락에 할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

"귀하는 혹시 성이 마씨가 아니오?"

그러나 그 사람은 마치 귀머거리인 듯 그의 말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세경은 말했다.

"이 음탕한 계집아, 뭘 꾸물거리느냐? 양초에 불을 켜라!"

마부인은 말했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으니 그대가 켜요."

백세경은 함부로 행동해서 상대방에게 빈틈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생각했다.

(저 사람의 무공은 분명히 나보다 고강하다. 그가 단정순을 구하려고 한다면 남이 달려와 돕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찌 일 초 이후에 다시 출격을 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상태에서 다시 오랫 동안 정적이 흘렀다. 백세경은 갑자기 한 가지의 괴이한 점을 알아채게 되었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았으나 숨쉬는 소리 만은 내고 있었다. 마부인이 숨쉬는 소리, 단정순의 숨쉬는 소리, 자신의 숨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편의 그 사람은 숨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백세경은 자기의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의 내력 수위로 말한다면 방안의 어떠한 사람이 내쉬는 숨소리라 할지라도 들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서는 숨소리가 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숨쉬는 소리를 내지않았다. 만약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숨을 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백세경은 자기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 그는 자기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자기의 가슴팍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통하여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일성을 대갈하며 그 사람에게 덮쳐갔다. 그리고 파갑강추를 연신 휘둘러 그 사람의 안면을 찌르려고 들었다.

그 사람은 왼손을 휘둘러 백세경의 오른팔을 바깥 쪽으로 밀어내고 오른손을 질풍과 같이 뻗쳐서는 그의 목을 움켜잡으려 했다. 백세경은 이미 그가 재차 쇄후금나수를 써 오리란 것을 알고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겨드랑 밑으로 몸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사람은 뒤쫓아오지 않고 그저 조용히 문 입구에 서 있었다.

백세경은 강추를 들고 다시 그의 다리를 찌르려고 했다. 그 사람은 뻣뻣이 선 채 위로 몸을 날려 피했다.

마부인은 그 사람의 몸이 굳어진 상태에서 몸을 위로 날릴 때 무릎을 구부리지 않는 것을 보고 그만 부르짖었다.

"강시다. 강시!"

이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은 무겁게 내려섰다.

백세경은 마음속으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만약 무학의 고수라면 몸을 날리고 뛰어내릴 때의 솜씨가 어찌 그토록 둔할 수 있겠는가? 설마하니 이 세상에는 정말 강시가 있는 것일까?)

백세경은 잠시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그리고 찍찍찍 하는 소리를 세 번 일으키며 파갑강추로 그 사람의 하반신을 향하여 찔러갔다. 그 사람의 무릎은 정말 구부러지지 않았다. 그저 뻣뻣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피할 뿐이었다. 아마도 그는 걸음을 옮길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백세경이 왼쪽으로 찌르면 그는 오른쪽으로 피했고 오른쪽으로 찌르면 그는 왼쪽으로 피했다. 백세경은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게 되자 마음속의 두려움이 약간 가셔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몇 번 강추를 휘둘러 찔렀으나 상대방의 신법이 졸렬하긴 했지만 시종 그의 몇 수의 변화가 정묘한 강추의 수법으로서는 시종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별안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리고 어름같이 차가운 커다란 손이 더듬어 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백세경은 그만 경악하여 강추를 맹렬히 휘둘러 뒤를 찔렀다.

그러나 휙!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허공을 찔렀을 뿐이고 그 사람의 커다란 손은 어느덧 백세경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백세경은 전신의 기운이 쑥 빠지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 꼼짝하지 못했다.

마부인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세경! 세경! 어떻게 된거예요?"

백세경은 대답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저 몸안의 내력이 뒷덜미를 잡은 큰 손에 의해서 한 가닥 한 가닥 쥐어자이듯 흘러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별안간 얼음과 같이 차갑고 무쇠와 같이 커다란 손이 그의 얼굴을 더듬어 왔다.

이 손은 정말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따뜻한 기운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백세경은 참을 수 없어 부르짖었다.

"시체다! 시체!"

그 소리는 처절했으며 공포에 젖어 있었다. 그 커다란 손은 그의 이마족에서 서서히 아래로 더듬어 내려갔다. 그의 눈동자를 만지게 되었을 때 그 손가락은 그의 눈동자 위에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 보는 것이었다. 백세경은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상대방의 손가락이 그저 조금만 힘을 주게 된다면 자기의 한쌍의 눈동자는 상대방에 의해 튀어나오고 말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 차가운 손은 재차 아래쪽으로 움직이더니 그의 코를 만졌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입을 만졌으며 한치 한치 아래로 옮겨졌다. 그리고 끝내 그의 목을 움켜쥐고 말았다. 그리고 얼음과 같이 차가운 손가락이 그의 목젖을 누르며 점점 힘을 가해왔다.

백세경은 그만 경악해 마지 않으며 부르짖었다.

"대원 형제, 목수만 살려 주게! 목숨만 살려 주게!"

마부인은 날카로운 어조로 크게 부르짖었다.

"그대는......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백세경은 부르짖었다.

"대원 형제, 모두 이 천박하고 음탕한 계집이 생각해 낸 계책이라네! 그녀가 나에게 한몸이 되자고 유혹했네! 나는...... 나는 그대를 죽이지 않았네!"

마부인은 노해 부르짖었다.

"내가 생각해 낸 것이라면 또 어쨌다는거예요? 마대원, 당신은 살아 생전에도 밥통이었어요! 죽은 후에라도 무슨 수작을 부릴수 있겠어요? 나는 당신이 겁나지 않아요!"

백세경은 자기가 조금 전 입을 열고 지은 죄를 부인에게 전가하자 목젖을 조이고 있던 손가락이 약간 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다물자 얼음과 같은 손가락은 다시 점점 조여왔다. 그만 크게 당황해진 그는 마부인이 상대방을 마대원이라고 부르는지라 더욱더 이 괴물이 마대원의 시체라고 생각하고 부르짖었다.

"대원 형제, 목숨만 살려 주게! 자네의 마누라가 왕방주의 유서를 훔쳐보고 재삼 교봉의 신세에 얽힌 비밀을 자네보고 폭로하도록 권고했으나 자네가 한사코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는 자네를 해칠 마음을 품게 된 것이라네......."

소봉은 속으로 흠칫했다. 그는 이 세상에 어떤 귀신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은 반드시 무학의 명가로서 일부러 귀신처럼 꾸미고서 백세경과 마부인으로 하여금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어 두 사람의 자백을 받아내려고 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백세경은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서는 그 비밀을 토로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을 들어 볼 때 마대원은 바로 그들 두 사람에게 죽음을 당한 것 같았으며주모자는 바로 마부인 같았다. 마부인이 자기의 남편을 모살하게 된 원인은 바로교봉의 신세에 얽힌 비밀을 폭로하자고 했는데도 마대원이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나를 이토록 미워하는 것일까? 어째서 나를 반드시 걸고 넘어지려고 했을까? 그녀가 만약 남편을 개방의 방주로 만들고자 했더라면 남편을 죽이지 말았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마부인은 이때 날카로운 어조로 부르짖었다.

"마대원, 나를 목졸라 죽여요! 나는 그저 당신의 밥통 같은 모양을 두고 볼 수 없었어요. 당신이야말로 조그만 일도 감히 할 수 없는 비겁자예요!"

이때 우드득! 하는 가벼운 소리가 일었다. 백세경의 목젖이 어느덧 부숴지고 말았던 것이다. 백세경은 죽어라 하고 발버둥 쳤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사람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곧이어 다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목뼈가 완전히 부러지고 말았다. 그는 큰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였고 그리고 죽어라 하고 숨을 들이키려고 했으나 그 숨은 가슴팍 안으로 빨려들어오지 않았다. 곧이어 그는 손과 발에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곧장 숨지고 말았다.

그 사람은 백세경의 목을 조르고 뼈를 부러뜨려 그를 죽이고는 몸을 돌려 문을 나서더니 종적을 감춰 버렸다.

소봉은 속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반드시 뒤쫓아가 알아 봐야겠다.)

그리하여 그는 표연히 몸을 날려 앞문 쪽으로 갔다. 허옇게 덮힌 눈속에서 엷은 한 사람의 그림자가 동북쪽을 향해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만약에 그의 시력이 뛰어나도록 훌륭하지 않았다면 정말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의 신법은 매우 재빠르구나)

그리고 몸을 구부려서는 발 아래쪽에 누워 있는 아자의 어깨죽지를 툭 쳤다. 내력이 닿은 곳에 그녀의 혈도가 풀어졌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부인은 무공을 모르니 이 소저만 하더라도 충분히 그녀의 부친을 구할 수 있을것이다.)

그는 원성죽 등의 혈도를 풀지 못하고 급히 그 앞서 간 사람을 뒤쫓았다.

한 차례 질풍과 같이 달린 끝에 상대방과 겨우 십여 장 정도의 간격으로 좁힐 수있었다. 이때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정말 무학의 고수였다. 지금 그 사람은 다리를 뻣뻣하게 세워서 껑충껑충 뛰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굴신하여 빠르게 달리고 있었는데 눈위를 미끄러지는 듯했다.

소봉의 경신법은 원래 소림에서 전수받았고 또한 개방의 왕방주의 의해 지도를 받았는데 순전히 양강한 경신법에 속했다. 그리하여 한번 크게 발을 내딛으면 그 폭이 일장 남짓하게 되었는데 몸이 허공에 떠올랐을 때도 크게 한걸음 내딛을 수 있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자세는 그렇게 우아하고 날렵하지 못했지만 장거리를 달려갈 때는 매우 실용적이었다. 다시 어느 정도 뒤쫓아가게 되자 그 사람과는 일장 남짓한 간격으로 좁혀 들었다.

그들은 약 한대의 향이 탈 시진을 두고 달리게 되었다. 앞선 그 사람의 발걸음은 갑자기 빨라졌다. 마치 배가 잔뜩 바람을 등지고 급한 물살을 따라 쏜살같이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삽시간에 소봉과 간격을 다시 어느 정도 벌려 놓았다. 소봉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은 정말 뛰어나다. 실로 무림에서 첫번째나 두번째로 꼽히는 고수일 것이다. 만약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손을 한번 써서 백세경을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소봉은 천품을 타고난 무학의 기재였다. 그에게 무공을 전수한 사부인 현고대사와 왕방주의 무공도 무척 고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소봉은 청출어람으로 두 분 사부보다 훨씬 뛰어났다. 어떤 한 초의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초식이라도 그의 손에서 펼쳐지게 되면 자연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무학의 천품은 타고나는 것이며 고된 훈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들 했다. 소봉 자신도 어인 까닭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어떤 초식이든 한번 배우면 알 수 있었고 또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적을 상대하게 되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갖가지 교묘한 변화를 가할 수 있었다.

그는 한평생 적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내력에 있어서 그보다도 심후한 많은 강적들을 만나볼 수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초식은 그보다 교묘했지만 일단 손을 쓰게 되었을 때는 언제나 가장 요긴한 고비에 이르러 일초나 반식의 차이로 패하여 물러나곤 했으며 또한 지더라도 입으로나 마음속으로 승복하곤 했다. 따라서 하나같이 소봉을 상대로 해서는 자기가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소봉에게 진 사람 가운데 그를 다시 찾아가 원한을 갚겠다거나 당한 치욕을 씻겠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소봉은 경신법에 있어서 그토록 고강한 적수를 만나게 되자 불현듯 웅심이 크게 치솟아 발걸음을 빨리 해서는 재차 간격을 좁혀갔다. 두 사람은 이와 같이 좁히거니 넓히거니 하면서 동북족으로 질풍과 같이 내달았다. 소봉은 시종 뒤따라 잡을 수 없었고 그 사람도 시종 그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한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이미 백여 리를 달렸으나 그와 같은 상태로 더 멀어지지도 않고 더 가까워지지도 않은 간격을 유지한 채 달리고 있었다.

다시 반 시진 남짓 달리게 되자 날이 점점 밝아왔으며 눈도 어느덧 멎게 되었다. 소봉은 멀리 산등성이 아래 고을이 있고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을 뿐만 아니라 새벽을 알리는 닭들의 울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것을 듣고는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일어 크게 부르짖었다.

"앞서 가는 형씨! 내가 그대에게 스무 대접의 술을 대접하고 싶소! 술을 마신 연후에 다시 우리 두 사람은 발걸음을 견주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똑같은 기세로 앞으로 내닫고 있었다. 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백세경과 같은 간악한 자를 주살한 것은 실로 영웅다운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이 소봉은 경신법에 있어서도 그대에게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겠소.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은 술이나 마시고 더 겨루지 말도록 합시다."

그는 말을 하면서 달렸으며 발걸음은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 사람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교봉의 위세가 강호를 진동한다고 하는 소문을 들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오.

그대가 입으로 말을 하면서도 진기를 여전히 자유롭게 돋굴 수 있으니 진짜 영웅이며 참된 호걸이외다."

소봉은 그의 음성이 늙수구레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나이가 자기보다 훨씬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말투를 바꾸어 입을 열었다.

"선배님의 과찬이십니다. 외람되지만 이 후배가 선배님과 친구로 사귀고 싶습니다. 그러나 선배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 사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늙어서 쓸모가 없게 됐소. 그대는 뒤쫓아 오지 마시오. 다시 한 시진을 뒤쫓아 온다면 나는 그대에게 지고 말 것이오."

그리고 나서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소봉은 뒤쫓아가서 다시 그와 말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한걸음 내딛게 되었을 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나보고 쫓아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중원의 군호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따라서 저 사람 역시 거란 사람을 천시하고 증오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그 사람이 점차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 탄식해 마지 않았다.

(저 사람의 경신법은 저토록 훌륭하고 내력 또한 웅후하구나. 그와 한번 대면을 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이어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가 자기의 음성마저 나에게 똑똑히 들려 주려고 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어찌 대면을 하고자 하겠는가?)

그는 이와 같이 한참 동안 서서 생각하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고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그만 주점으로 들어가 술을 시켜 마셨다. 두 대접을 마실 때마다 그는 탁자를 두드리며 노래부르듯 찬탄했다.

"정말 훌륭한 사내며 훌륭한 대장부였다! 아, 애석하다. 애석해!"

그가 훌륭한 사내이며 훌륭한 대장부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무공히 뛰어나고 또 백세경을 죽인 일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잇따라 애석하다고 부르짖게 된 것은 그와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사귀지 못한 데 대한 감개였다. 그는 평소 친구를 목숨처럼 사랑했었다. 이번에 개방에서 축출당함으로서 중원의 군호들과는 깊은 원한을 맺게 되었고 옛날의 친구들이 모두 그와 관계를 끊어버렸기 빼문에 마음이 여간 울적하고 답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한 사람, 무공에 있어서 자기와 필적할 수 있는 영웅을 만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서로 사귈 수 있는 인연이 없자 그저 술로 자기의 우울함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오랫 동안 품고 있던 한 가지 의문이 사라져 마음은 예전보다 시원한 것도 사실이었다.

스무 대접의 술을 마신 그는 술값을 치루고 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단정순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원성죽과 진홍면등은 나에게 혈도를 짚혀 있으니 돌아가 그녀들을 구해 주어야지.)

그리하여 그는 성큼 성큼 걸음을 옮기며 다시 마씨 집으로 향했다.

돌아갈 때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걸음은 훨씬 느렸다. 마씨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정오가 넘어 있었다. 그런데 집밖의 눈바닥 위에는 한 사람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원성죽 등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자가 그녀들을 집안으로 안아 옮겼으리라고 짐작했다.

교봉은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백세경의 시신은 여전히 문가에 쓰러져 있었고 단정순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방 가운데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는데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바로 마부인이었다.

그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나직이 말했다.

"적선하는 셈치고 그대는 나를 빨리 죽여 주세요."

소봉은 그녀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이 삼십년이나 늙어 버렸고 또한 매우 추악하게 변해 있었다.

소봉은 물었다.

"단정순은?"

마부인은 말했다.

"그를 구해 갔어요. 그...... 그 악인! 아악!"

별안간 그녀는 크게 한 소리로 부르짖었는데 그 소리는 날카롭기 이를 데 없어 마치 고막을 찌르는 것처럼 들렸다.

소봉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깜짝놀라서 한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

"무슨 짓이오?"

마부인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말하였다.

"당신은...... 당신은 교...... 방주?"

소봉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이미 개방의 방주가 아니오. 설마 하니 당신이 그걸 모른단 말이오?"

마부인은 말했다.

"그래요. 그대는 교방주이군요. 교방주, 제발 적선하는 셈치고 저를 빨리 죽여 주세요."

소봉은 눈쌀을 찌푸렸다.

"나는 그대를 죽이고 싶지 않소. 그대가 친남편을 모살했으니 개방의 사람들이 당신을 처리하게 될 것이오."

마부인은 애걸했다.

"나는...... 나는 정말 견딜 수가 없어요. 그 나이어린 계집의 수단이 이토록 악랄하다니. 나는...... 나는 귀신이 되어도 그녀를 놔주지 않을 거예요. 당신...

...당신은 나의 몸을 한번 보세요."

그녀는 어두컴컴한 곳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소봉은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소봉은 창문을 열어 밝은 빛이 방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힐끗 보는 순간 그는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부인의 어깨죽지 , 손과 팔, 가슴팍, 허벅지 등 곳곳에 칼로 난자당한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상처에서는 좁쌀만한 크기의 조그만 개미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소봉은 그녀의 상처를 보고 그녀의 사지와 허리 및 관절이 있는 곳의 근육이 모조리 그 누구에 의해서 잘려져 있는지라 다시는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이는 점혈수법과 달랐다. 혈도는 풀 수가 있고 다시 행동할 수 있지만 근맥이 잘라지게 됨다면 치료할 수도 없고 이후에는 그야말로 전신이 마비된 폐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상처에 이토록 많은 개미가 달라붙은 것일까? 이때 마부인은 다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어린 계집애는 나의 손과 발의 근육을 자르고 온몸에 상처를 냈어요. 거기다가...... 거기다가 상처에 꿀물을 발랐어요. 꿀물을 붓고서는 개미로 하여금 나의 전신을 물어뜯게 한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며칠 밤 며칠 낮을 두고 아픔과 간지러움을 겪는 등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 살래야 살 수도 없고 죽......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도록 했어요."

소봉은 그녀의 상처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자 구역질을 금치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결코 마음이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살인이나 방화를 할때도 평소 시원시원하게 해치웠으나 악독한 수법으로 적을 괴롭히는 짓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부엌으로 가서 큰 물통에 물을 떠와 그녀의 몸에 끼얹었다. 그녀로 하여금 개미들이 몸을 물어뜯는 고통을 면하게 해 주자는 생각이었다.

마부인은 말했다.

"고마워요. 당신은 양심이 있군요. 저는 이제 살지 못해요. 적선하는 셈치고 나를 한칼에 죽여줘요."

소봉은 물었다.

"누구요......? 누가 그대에게 상처를 입혔소?"

마부인은 이를 갈았다.

"바로 그 젊은 계집애예요. 나이는 어려서 열 대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심보와 수단이 이토록 악랄할 줄이야......."

소봉은 놀라 물었다.

"아자가 한 짓이오?"

마부인은 말했다.

"맞았어요. 나는 그 계집년이 아자에게 그렇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 계집은 아자에게 빨리 나를 죽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아자라는 나이어린 계집애는 느릿느릿하니 나를 괴롭히는거였어요. 그녀의 부친의 원수를 갚고 그녀 어머니 대신 화풀이를 해야겠다며 나로 하여금 무궁무진한 고통을 당하도록 했어요...

...."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진홍면이나 원성죽이 질투심에서 단숨에 마부인을 죽여버림으로써 다시는 마부인에게 어떤 사연도 캐물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자라는 계집애는 이토록 잔인하고 악독하구나.)

그는 눈쌀을 찌푸렸다.

"단정순은 과거 그대와 서로 정을 통한 사이가 아니오? 물론 그대가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가 자기의 딸리 이토록 잔혹하게 그대를 괴롭히는 것을 보고도 저지하지 않더란 말이오?"

마부인은 말했다.

"그때 그는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서 인사불성이었어요. 그것은...... 그것은 십향미혼산 때문이었죠."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생각컨데 그는 역시 시비를 가릴 줄 아는 호한이오. 어찌 딸로 하여금 이토록 못된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겠소. 그런데 그 여자들은 어디로 갔소?"

마부인은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더 묻지 마세요. 더 묻지 마세요. 빨리 나를 죽여 주세요."

소봉은 코웃음을 쳤다.

"그대가 순순히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그대의 상처에다가 꿀물을 뿌리고 그대 스스로 살아 남든 죽든 내버려 두고 떠나겠소."

마부인은 말했다.

"당신들 남자들은 ...... 모두 다 심보가 악독하군요."

소봉은 되물었다.

"당신이 마형을 모살한 수단은 악독하지 않소?"

마부인은 의아하여 물었다.

"그대는...... 그대는 어떻게 모든 것을 알고 있죠? 그 누가 그대에게 말한 것이죠?"

소봉은 냉랭히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묻는 것이오, 아니면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오? 그리고 그대가 나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오, 아니면 내가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빨리 말하시오."

마부인은 말했다.

"좋아요. 무엇이든 이야기 하겠어요. 아자라는 계집애가 이토록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자 그녀 모친은 끊임없이 그만 두라고 호통을 쳤어요. 하지만 그 계집애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녀의 모친은 혈도를 짚혀서 꼼짝하지 못했어요. 얼마후 단정순의 대여섯 명이나 되는 부하들이 달려왔죠. 아자라는 계집애는 그녀의 부친과 어머니, 그리고 진홍면 모녀 두 사람을 하나하나 안고 바깥으로 나갔으며 다른 사람들이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죠.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도록 한 것이죠. 단정순의 부하들은 타고 온 말이 있어서 그녀들을 데리고 떠났어요."

소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속으로 생각했다.

(단정순의 부하들이 모시고 갔으니 원성죽 등 세 사람은 혈도가 짚혀져 있으나 몇 시진이 지나게 되면 자연히 풀려질 것이니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신경쓸 필요가 없다.)

이때 마부인은 말했다.

"이제 모두 털어 놨어요. 당신은...... 당신은 빨리 나를 죽여 주세요."

소봉은 말했다.

"모두 말했다고? 그렇지 않을걸? 죽는 것이야 수월한 일이 아니겠소? 하지만 산다는 것은 어렵지. 그대는 어째서 마형을 죽이게 되었소?"

마부인은 두 눈에 흉칙한 안광을 빛내며 증오에 찬 어조로 되물었다.

"반드시 알아야 하나요?"

소봉은 말했다.

"그렇소. 반드시 알아내야 하겠소. 나는 마음이 독한 남자라 당신을 가엾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마부인은 쳇! 하더니 말했다.

"물론 당신은 마음이 독하죠. 말하지 않는다고 내가 모를줄 알아요? 내가 오늘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 당신 때문이에요. 자굴망대하며 상대방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짐승같으니, 아니 개돼지만도 못한 거란의 오랑캐인 당신은 죽어서 십 팔 층 지옥에서 떨어질 것이고 매일같이 악귀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될거예요. 다시 꿀물을 나의 상처에 끼얹어요! 어째서 그렇게 하지 못하죠? 이 개잡종! 후레자식.....

.."

그녀는 욕을 하면 할수록 악랄하게 나왔다. 그야말로 가슴속 가득히 끓어오르는 원망과 분노를 발산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나중에 하는 욕은 그야말로 더럽기 이를 데 없는 욕으로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봉은 어릴 적부터 뭇거지들과 어울려 지냈기 때문에 어떤 거친 욕설이라도 귀에 익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술이 얼큰해졌을 때 종종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거친 말로 욕을 하기도 했다.

마부인은 언제나 얌전하고 우아했다. 그러한 그녀가 이토록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욕을 하는 것을 듣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마부인이 내뱉는 많은 욕들은 그가 일찌기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것도 많았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욕을 시원하게 다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의 본래 창백하던 안색은 욕을 하느라고 흥분되었는지 새빨갛게 상기되었고 두 눈에서는 희열의 빛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한참동안 욕을 한 이후에야 차츰 음성을 낮추었다. 이윽고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봉, 이 개 같은 도적아! 바로 네가 오늘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이후 어떤 좋은 꼴을 당하게 될런지 두고 보자!"

소봉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욕 다했소?"

마부인은 말했다.

"잠시 멈추었을 뿐이다. 좀 쉰뒤에 다시 욕을 할 것이다. 이애비와 애미도 없는 개잡종아! 나에게 숨이 붙어 있는 이상 욕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소봉은 말했다.

"좋소. 실컷 욕을 하시오. 내가 처음 그대와 만난 것은 바로 무석성 밖의 은행나무 숲속에서이오. 그때 마형은 이미 그대에게 해침을 당해 죽었고 그 이전에 나는 그대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는데, 어찌하여 내가 그대를 해쳐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시오?"

마부인은 이를 갈며 말했다.

"하, 무석성 밖에서 나와 처음으로 만났다구? 바로 그 한 마디, 바로 그 한 마디 때문이야! 이 자부심이 강하고 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뽐내는 오만한 녀석아! 이 도적놈!"

마부인은 다시 잇따라 욕을 퍼부었으며 한참 동안 멈추지를 않았다.

소봉은 그녀가 욕을 실컷 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그녀의 목이 거의 쉬게 되고 기운이 다하기를 기다려 물었다.

"이제 욕을 실컷 했소?"

바우인은 증오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다. 너...... 눈만 높은 네 녀석이 설사 황제라 하더라도 대단할 것은 없다."

소봉은 말했다.

"맞소. 설사 황제라 하더라도 대단할 것이 무엇이겠소? 나는 한번도 내 자신을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소. 조금 전...... 조금 전 그 사람의 무공은 나보다 높았소."

마부인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욕을 해댔다.

한동안 욕을 한 이후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너는 무석성 밖에서 처음 나를 만났다고? 흥? 낙양성 안의 백화회에서는 나를 보지 못했더란 말이냐?"

소봉은 어리둥절해졌다. 낙양성에서 백화회라는 모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이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개방의 뭇형제들과 함께 잔치에 참가하였고 술을 마시며 신나게 논 적이 있었으나 그 모임에서 그녀를 본 기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아 물었다.

"그때 마형도 갔었소. 그러나 그는 그대를 나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았소."

마부인은 욕을 했다.

"네까짓 것이 무엇인데! 너는 그저 한떼의 거렁뱅이들의 괴수에 불과한데 뭐가 대단하다고? 그 날 백화회에서 나는 빨간 작약 꽃 옆에 서 있었다. 모임에 참가한 영웅호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를 멍하니 쳐다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느냔 말이다. 그야말로 어느 누구 한 사람 넋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었느냐 말이다. 그런데도 유독 네 녀석만은 영웅호걸이고 여색을 탐하지 않는답시고 나를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정말 나를 보지 못했다면 그만이며 나 또한 너를 탓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분명히 나를 보고도 못 본 척 눈길을 슬쩍 내 얼굴에 던졌을 뿐 잠시도 멈추지 않았단 말이다. 그 모양은 나를 그저 평범하고 용렬한 여인과 다름 없이 여기는 태또엿다. 이 위선에 찬 군자이며 수치를 모르는 작자야."

제목 : [김용] 천룡팔부 5권 제8장 2/2 소봉은 점차 어느 정도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렇군! 기억이 나는군! 그 날 작약꽃 옆에 확실히 몇 사람의 여인이 있었지. 그때 나는 그저 술을 마시느라고 모란인지 작약인지 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소. 만약 선배가 되는 여자 호걸이었다면 물론 앞으로 나가 인사를 드렸을 것이오. 그러나 그대는 따지고 보면 나의 제수씨일 뿐인데 내가 쳐다보지 않았다고 해서 무슨 큰 실례를 했다는 것이오? 어찌하여 그토록 한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오?"

마부인은 이를 갈며 말했다.

"아니, 너는 설마 하니 눈깔도 없더란 말이냐? 제 아무리 이름난 영웅이라 하더라도 모두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나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어떤 덕망이 높은 사람들도 감히 날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어도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사이를 틈타서 몰래 나를 몇 번 곁눈질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너만은...... 흥, 백화회에 참석한 일 천 명이 넘는 남자들 가운데 오로지 너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너는 개방의 우두머리이고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영웅호걸이었다. 낙양 백화회에서 남자들은 너를 으뜸으로 삼았으며 여자들 가운데에서는 물론 나를 제일로 여겼다. 그런데 너는 나를 향해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내 아무리 아름답다고 자부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느냐? 그 일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아무리 나 때문에 혼이 나갔다손치더라도 내 마음속이 어찌 편할 리 있었겠느냐?"

소봉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여인과 함께 노는 것을 싫어했소. 나이가 든 이후에는 더욱더 여자를 쳐다볼 여가가 없었소. 그대뿐만 아니고 그대보다 백 배 더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으나 나는 관심을 갖지 않았었소. 그러고 나중에 이르러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으나 그때는 이미 늦고 말았지만......."

마부인은 날카로운 어조로 다그치듯 물었다.

"뭐라고? 나보다 백 배 더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고? 그게 누구지? 그게 누구지?"

소봉은 말했다.

"단정순의 딸로서 아자의 언니되는 사람이오."

마부인은 침을 탁 뱉으며 말했다.

"음! 그와 같이 천박한 계집애를 감히 입에 담다니......."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봉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쳐들었다가는 힘주어 땅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감히 다시 그녀에 대하여 불경스러운 말을 지껄인다면, 흥! 나의 수단이 악랄하다고 원망하지 말아라!"

그녀는 갑자기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 원래...... 원래 우리의 대영웅이시며 방주이신 교영웅께서는 그 계집애에게 빠졌었구나! 호호호! 정말 우스워 죽겠군! 개방의 방주 노릇을 할 수 없으니까 대리국 공주의 부마가 되시겠다는 심산이렸다. 교봉, 나는 네가 어떠한 여인도 쳐다볼 줄 모르는 사내다장부인 줄 알았다."

소봉은 무릎에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저 그녀를 다시 한 번 더 봤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그러나......

그러나...... 다시 볼 수가 없구나!"

마부인은 냉소했다.

"어째서? 그녀를 수중에 넣겠다면 너의 그 일신에 지닌 무공으로도 충분히 빼앗을 수 있었을텐데......."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하늘만큼 높은 재간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빼앗아 올 수는 없데 되었소."

마부인은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그것은 어째서이지? 호호호!"

소봉은 나직이 대답했다.

"그녀는 죽었소."

마부인은 갑자기 웃음을 멈추었다. 마음속으로 약간 미안한 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교방주가 가여운 생각이 들기도 했는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소봉은 그녀의 웃음을 보고 그녀가 바로 자기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대는 남편을 모살하였으니 죽을 죄를 짓고도 남음이 있소. 이제 더 할말이 없겠지?"

마부인은 그가 손을 써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 더럭 겁에 질렸다. 그녀는 애걸했다.

"당신은...... 당신은 나를 용서해 주세요. 나를 죽이지 말아요."

소봉은 말했다.

"좋아. 본래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었소."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았다.

마부인은 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방안에서 나가는 것을 보자 다시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어 크게 외쳤다.

"교봉, 이 개도적아! 과거 나는 네가 똑바로 나를 쳐다보지 않는데 대해서 화가 났었다. 그리하여 마대원을 시켜 너의 약점을 폭로하라고 했다! 그런데 마대원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 때문에 나는 백세경으로 하여금 마대원을 죽이도록 한 것이다. 너는...... 너는 오늘날에 와서도 나라는 존재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구나!"

소봉은 숨을 돌리고 냉랭히 말했따.

"내가 그대를 한 번 쳐다보지 않았다고 남편을 모살하다니. 흥, 그와 같은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누가 믿을까?"

마부인은 말했다.

"나는 금방 죽게 될 몸인데 어째서 너를 속이겠느냐? 네가 나를 업수이 여기는데 내가 무슨 방법이 있었겠느냐? 사실 그저 마음속으로 한평생 너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개방의 그 거지들은 너를 신처럼 받들어 모셨고 또 천하에서 감히 누가 너의 비위를 건드릴 수 있었겠느냐? 그런데 하늘의 돌보심이 있어서 그날 나는 마대원의 무쇠상자 안에서 왕방주가 남긴 유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편지를 훔쳐보고 그 안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너는 아느냐? 호호호! 이거야말로 나의 가슴속에 가득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발산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로 하여금 패가망신케 하고 다시는 영웅호걸이라고 뽐내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마대원에게 모든 사람에게 폭로하여 천하 영웅호걸들로 하여금 네가 거란의 오랑캐란 사실을 알도록 하고 너로 하여금 개방의 방주는커녕 중원땅에서 제대로 발을 딛고 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도 제대로 지키기 어렵도록 만들고자 했다."

소봉은 그녀가 전신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다시는 사람을 해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가 그와 같은 악독한 말을 하자 등골이 오싹해 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싸늘히 코웃음치며 입을 열었다.

"흥, 마형이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죽였단 말인가?"

마부인은 말했따.

"그렇다. 그는 나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나를 크게 꾸짖었으며 이후 다시는 바깥 출입을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내가 만약에 알게 된 비밀을 남에게 누설한다면 나를 갈기 갈기 찢어죽이겠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 나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들었으며 그토록 날카로운 어조로 다그친 적이 없었따.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를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안중에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가 나의 비위를 거슬렸으니 물론 나는 그에게 쓴맛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따. 한 달이 지나게 되었을 때 백세경이 손님으로 찾아와 우리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 날이 바로 팔월 열나흘 이었다. 그는 우리집에서 중추절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자꾸 쳐다보곤 했따. 정말 늙은 새끼였지. 나는 내 자신의 몸을 버리면서까지 그 늙은 새끼로 하여금 나에게 흠뻑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늙은 새끼로 하여금 마대원과 같은 밥통을 죽여 없애라고 했는데 그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간하려 했다는 소문을 내겠다는 투로 위협했다. 그 늙은 도적은 다른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한없이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 앞에서는 온갖 못난 꼴을 보였지. 따라서 나는 그에게 당부했다. '그대가 마대원을 죽이면 나는 한평생 그대를 따르게 될 것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시원스럽게 일장으로 나를 쳐 죽이도록 하세요.' 하고. 그는 나를 차마 죽이지 못했으며 부득이 마대원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소봉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백세경같은 꿋꿋한 사내가 그렇게 해서 그대의 손아귀에서 파멸을 당했군. 그대...... 그대는 또 십향미혼산을 마형제에게 먹이고 백세경으로 하여금 그의 목뼈를 졸라 바순이후에 고소 모용씨가 쇄후금나수로 그를 죽인 것처럼 만들었겠군! 그렇지 않소."

마부인은 말했다.

"그래요. 호호호호! 어찌 아니겠어? 하지만 고소 모용씨 어쩌구 하는 말을 나는 몰랐고 늙은 새끼가 생각해 낸 것이지."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늙은 새끼에게 너의 신세 비밀을 폭로하도록 종용했지. 쳇! 그 늙은 새끼는 너와의 의리를 존중한답시고 거절했으며 내가 무섭게 다그치자 칼을 들고 자결하겠다고 나오더군. 별수없이 나는 그를 젖혀두고 전관청이라는 거드름을 피우는 녀석을 찾았지. 내가 그와 사흘밤을 함께 자게 되니까 그는 나의 말을 완전히 듣게 되었고, 가슴팍을 소리나도록 치면서 반드시 성공할 터이니 자기에게 맡기라고 큰 소리를 치더군! 그러나 생각해 볼 때 전관청이라는 녀석 혼자서는 너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재차 서장로를 찾아가 나의 육체로 그 늙은이를 유혹했다. 이후의 일은 너도 다 아는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소봉은 끝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의문까지도 풀 수 있었다. 전관청이 주모자가 되어 자기를 배반하게 되었고 백세경이 오히려 반역자들에게 사로잡히게 된 이유를 알아낸 것이다.

그는 물었다.

"그럼 나의 그 섭선은 백세경이 훔친 것이오?"

마부인은 말했다.

"그렇지는 않지. 늙은 새끼는 막무가내로 너에게 미안한 짓을 하려고 하지 않더군. 전관청이 진장로를 설득하여 네가 외출을 하게 되었을 때 너의 방에서 훔쳐낸 것이지."

소봉은 말했다.

"단소저가 백세경으로 가장한 것은 전혀 빈틈이 없다고 할 수 있었으나 바로 그러한 연유로 그녀가 백세경으로 변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군!"

마부인은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그 계집애가 바로 단정순의 딸이었던가? 그대가 좋아하는 사람? 정말 그녀가 그토록 예쁜가?"

소봉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먼 하늘가를 쳐다보았다.

마부인은 말했다.

"그 계...... 계집애는 정말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지. 그리고 팔월 보름 어쩌구 말을 하게 되었을 때는 바로 마대원의 제삿날이라 가슴이 철렁했지. 그러나 후에 내가 정을 통하면서 나누게 된 두 마디의 말을 했지.

나는 백세경과 함께 옷을 벗고 뒹굴 때 하늘의 달이 둥글고 환하다고 했더니 그 늙은 새끼는 내 몸의 어떤 물건이 하늘의 달보다도 더욱 둥글고 더욱 희다고 말했었지. 그리고 내가 그에게 짠 월병을 좋아하느냐 하고 물으니까 그 날 그 늙은 새끼는 내 몸에 있는 월병이 벌꿀보다도 달다고 했지. 그런데 너의 그 단소저는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기에 나는 즉시 변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야."

소봉은 그날 밤 마부인이 어째서 갑자기 달과 월병을 들먹이게 되었는지를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작년 팔월 초 나흘 날 저녁에 그녀와 백세경이 사사로이 정을 통할 때 서로 주고받은 몰염치한 말이었던 것이다.

마부인은 깔깔 소리내어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호호호! 교봉. 너의 변장은 정말 형편없었다. 나는 그 계집애가 가짜란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한 번 너의 모습과 말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호호호호...... 네가 바로 교봉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단정순을 죽이려고 하던 참이라 마침 너의 손을 빌리기로 했지."

소봉은 이를 갈며 말했다.

"단소저는 네 년이 해쳐 죽인 것이야. 이 빚은 네 년에게 달아두기로 하지."

마부인은 말했다.

"그녀가 먼저 나를 속인 것이지 내가 그녀를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지.

나는 그저 상대방의 계책을 역이용했을 뿐이야. 만약 그녀가 나를 찾아오지 않고 백세경이 개방의 방주가 된다면 나는 개방과 대리 단씨 사이에 원한을 맺도록 하는 방법을 썼겠지. 그 단정순으로 말하면, 호호호! 조만간 나의 손아귀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지."

소봉은 말했다.

"너는 정말 악랄하구나. 자기의 남편을 죽였고 너와 사사로이 정을 나눴던 남자마저 죽이려고 했으며 너를 바라보지 않았다고하여 그 남자마저 죽이려고 하다니. 엄청나군!"

마부인은 말했다.

"미녀를 앞에 두고서도 어째서 쳐다보지 않았지? 나의 아름다움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세상에 너와 같은 가짜 도학자이며 위선에 찬 군자가 어디 있겠어?"

그녀는 자기의 득의에 찬 일을 이야기 하느라고 무척 흥분된 듯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끝내 체력을 점차 감당할 수 없게 되었는지 하는 말도 띠엄띠엄 느려지게 되고 다음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소봉은 말했다.

"내가 최후로 너에게 한 마디 묻겠다. 왕방주에게 편지를 써준 통솔자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냐? 너는 그 편지를 보았으니 편지 끝에 있는 서명도 보았을 것이다."

마부인은 냉소했다.

"호호호! 교봉, 끝내 가서는 네가 나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너에게 부탁을 하는 것인가? 마대원도 죽고 서장로도 죽었으며 조전손도 죽었고 철면판관 선정도 죽었으며 담공과 담파까지도 죽었고 천태산의 지광대사도 죽었어. 세상에는 이제 나와 그 통솔자 자신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을 뿐이야."

소봉의 가슴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소봉은 말투를 존대말로 바꾸었다.

"맞았소. 역시 이 교봉이 그대에게 부탁을 하는 바이니 아무쪼록 그대는 그 사람의 성명을 알려주시오."

마부인은 물었다.

"내 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그대는 나에게 무슨 좋은 일을 베풀 수 있지?"

소봉은 말했다.

"이 소모의 힘이 닿는 한, 부인의 어떠한 분부라도 받들기로 하겠소."

마부인은 미소했다.

"내가 또 무엇을 바라겠어? 교봉, 나는 그대가 나를 자세히 쳐다볼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듯한 태도가 미웠어. 그리하여 오늘과 같은 화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지. 나에게 그 통솔자 형님의 이름을 말해 달라고 하는데 그것도 어렵지 않아. 네가 나를 품에 안고서 반 나절 동안 나를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면 알려주겠어."

소봉은 눈쌀을 찌푸렸다. 실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정말 그녀만이 그 커다란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자기의 피맺힌 원한은 그녀의 입으로 뱉아내는 몇 마디의 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의 목숨이 겨우 실날처럼 가늘게 붙어 있는 이때라 언제라도 숨을 거둘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위협하거나 어떤 이득으로 유인한다고 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게 되고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다면 나의 부모를 죽인 원수가 도대체 누구인지 다시는 알 수가 없게 된다. 내가 그녀를 안고서 몇 번 쳐다본다고 한들 무슨 큰 탈이 생기겠는가?)

그는 말했다.

"좋소. 내 응락하도록 하지."

그리고 허리를 굽히고 그녀를 품속에 안았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빛나는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때 마부인의 온 얼굴은 피와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더구나 흙까지 묻었을 뿐 아니라 어제밤 온갖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얼굴은 초췌할 대로 초췌해져 무척 보기에 흉칙했다. 소봉은 그녀를 안는 그 자체가 마지못해 행한 일이었다. 그런데다가 그녀의 그와 같은 얼굴모습을 대하게 되자 그만 자기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리게 되었다.

마부인은 노해서 말했다.

"왜 그러지? 나 보기가 그토록 역겨운가?"

소봉은 부득히 고개를 가로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오."

그러나 그 한 마디는 실로 마음에 없는 소리였다. 평소였다면 설사 그가 아무리 커다란 위험에 처했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없는 말을 결코 내뱉지는 않았을 것이나 지금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부인은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혐오하지 않는다면 나의 얼굴에 입맞춤을 해주려므나."

소봉은 정색했다.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소. 그대는 우리 마형의 아내이오! 소모는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오. 내 어찌 친구의 과수댁을 희롱할 수 있겠소?"

마부인은 감미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가 의리를 존중한다면 어째서 나를 품에 안고 있지?"

바로 이때였다. 창밖에서 누가 훗!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교봉, 너무나 염치가 없군요. 저의 언니를 해쳐 죽이고 다시 우리 아버지의 연인을 품에 안고 입맞추려고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바로 아자의 음성이었다.

소봉은 양심에 물어 거리낌이 전혀 없는지라 그와 같이 철없는 어린애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고 마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빨리 말하시오? 그 통솔자는 누구요?"

마부인은 코막힌 소리로 말했다.

"나를 보라고 했는데 어째서 고개를 돌리지?"

그 음성은 정말 간지러울 정도로 정이 뚝뚝 떨어지는 말이었다.

이때 아자가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어째서 아직도 죽지 않았을까?그토록 못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당신을 보려고 하겠어?"

마부인은 물었다.

"뭐라구? 너는...... 내가 추악한 모양을 하고 있다고? 거울, 거울...... 나에게 거울을 다오."

그 어조는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봉은 재촉했다.

"빨리 말하시오? 빨리 말해! 그대가 말을 하면 내가 그대에게 거울을 주지."

아자는 대뜸 탁자 위에서 거울을 집어들더니 얼굴 앞에 대고 흔들며 웃었다.

"당신 자신이 보시지? 아름답나요, 아름답지 않나요?"

마부인은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쳐다보았따. 얼굴은 온통 더러운 물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으며 황급함과 흉악함, 악독함, 원한 고통, 분노, 온갖 추악한 표정이 모조리 눈썹과 눈, 그리고 입과 코 사이에 드러나 있었다.

옛날처럼 아리땁고 수줍은 듯하며 남자들로 하여금 측은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아름다운 미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따.

그녀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는 한평생 자기의 아름다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 죽게 된 이 마당에서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었다.

소봉은 외쳤다.

"아자, 거울을 치워라! 그녀로 하여금 화가 나지 않도록 해!"

아자는 깔깔 웃었다.

"호호호, 나는 그녀에게 그녀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못났는가를 보여 주고 싶어요."

소봉은 외치듯 말했다.

"네가 그녀를 화나게하여 죽게 만든다면 큰일이야."

이때 그는 마부인의 몸이 꼼짝도 하지 않으며 숨을 쉬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재빨리 그녀의 코 끝에 손을 가져갔다. 이미 숨진 것이 아닌가! 소봉은 깜짝놀라 부르짖었다.

"어이쿠, 야단났다! 그녀의 숨이 끊어졌어!"

그는 마치 큰 화가 머리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자는 입술을 삐죽했다.

"그내는 정말 그녀를 무척 좋아하나보군요? 이같이 못난 여인이 죽은 것에 불과한데 뭘 그토록 놀라서 야단이에요?"

소봉은 발을 굴렀다.

"아, 너 같은 어린애가 무엇을 아느냐?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 혼자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만약 네가 방해를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말했을 것이다."

아자는 말했다.

"어머나! 내가 또 잘못했군요? 내가 그대의 큰 일을 그릇쳤군요? 그렇죠?"

소봉은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죽은 이상 다시 되살아날 수 도 없는 일이니 성줄을 부려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 아자란 계집애는 너무 버릇없이 생겨 먹어서 그녀의 부모까지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아주의 얼굴을 봐서라도 아자에게 더 이상 다그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마부인을 침대에 눕히고 말했다.

"우리 가자."

그리고 사방을 살폈으나 집안에는 달리 다른 사람이 없었다. 노비는 이미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불씨를 찾아내어 나무를 쌓아둔 헛간에 불을 질렀다. 삽시간에 불길은 무섭게 치솟아 올랐다.

두사람은 집 옆에 서서 불길이 창문으로 번져나오는 것을 보고있었다.

소봉은 아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아직까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지?"

아자는 말했다.

"싫어요.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의 수하들은 나를 보기만 하면 눈을 부릅뜨고 야단이에요. 나는 아버지에게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처구니없게도 응하지 않았어요."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저만리를 해쳐 죽게 만들었으니 그의 절친한 형제들이 너를 미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단정순이 어찌 너를 위해 충성심이 강한 부하들을 죽이겠느냐? 네 자신이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면서 아버지보고 오히려 어처구니 없다고 하다니, 정말 철딱서니가 없어서 터무니없는 말을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며 소봉은 말했다.

"좋다. 나는 가겠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북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이봐요, 이봐요. 잠깐만 나를 기다려요."

소봉은 즉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대는 어디로 갈거지? 사부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갈테냐?"

"아니요. 지금은 사부님이 계신 곳으로 가지 않을거예요. 감히 갈 수도 없어요."

소봉은 의아했다.

"어째서 감히 갈 수도 없다는 것이냐?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보구나."

아자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내가 사부님의 책을 한 권 가져왔어요. 돌아가면 사부님이 빼앗아 갈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내가 연성한 이후에 돌아가면 그때는 사부님이 가져가도 상관이 없어요."

소봉은 물었다.

"그렇다면 무공을 연마하는 책이냐? 너의 사부님 것이라면 응당 네가 사부님에게 보여달라고 청을 드려야 옳았을 것이다. 청을 드린다면 사부님이 응낙하지 않겠느냐? 더군다나 너 혼자서 연마를 하게 되면 반드시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인데 너의 사부가 옆에서 지도를 한다면 좋지 않느냐?"

아자는 작은 입술을 삐죽이더니 말했다.

"사부님은 한 번 주지 않는다고 하면 주지 않아요. 아무리 부탁드려 봐도 소용이 없는걸요."

소봉은 이 버릇없이 자란 나이 어린 소녀가 정말 한 군데도 달가운 곳이 없었다.

9. 안문관을 넘어 거란 땅으로 더군다나 그녀의 사부 성숙해의 노괴물인 정춘추는 악명이 드높은 사람이니 그 같은 사람과 귀찮은 일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좋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아자는 말했다.

"그대는 어디로 가죠?"

소봉은 거세게 불길이 치솟고 있는 마씨의 집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따.

"나는 원래 원수를 갚으러 가야하는데 원수가 누구인지 몰라 살아 생전 원수를 갚을 수 없게 되었다."

아자는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알았어요. 마부인이 알고 있었는데 내가 화를 돋구는 바람에 애석하게도 그녀가 죽고 말았군요? 그래서 그대는 원수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단 말이죠? 정말 재미있다. 재미있어! 교방주께서는 위명이 혁혁하신데도 나의 행동 때문에 꼼짝을 할 수 없게 되었군요."

소봉은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 가득히 떠오른 것은 남의 불행을 즐거움으로 삼는 희열에 찬 표정이었다. 그런데 거세게 치솟는 불길이 그녀의 얼굴을 비춤에 따라 그녀의 얼굴은 마치 사과처럼 새빨간 것이 귀엽기 이를 데 없었다. 이처럼 천진무구한 얼굴 아래 무궁무진한 악의가 가득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소봉은 삽시간에 노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뜸 그녀에게 따귀를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아주가 죽을 때 바로 자기에게 부탁한 것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누이동생인 아자를 돌봐 달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주가 나에게 부탁한 것이라고는 이 일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나이 어린 소녀가 설사 크게 간악한 자라 할지라도 나는 마땅히 힘을 다해 그녀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그저 나이도 어리고 철이 없어서 어처구니 없는 짓과 짓궂은 장난을 좋아할 뿐이 아닌가?)

이때 아자는 고개를 쳐들더니 입을 열었다.

"왜 그러죠? 그대는 나를 때려 죽일 작정인가요? 그런데 어째서 또 때리지 않지요? 저희 언니는 이미 그대에게 맞아 죽었어요. 그러니 나를 때려 죽인다 하더라도 별로 대수로운 일은 아닌거예요."

이 몇 마디의 말은 그야말로 날카로운 비수처럼 소봉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가슴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고 대답할 바를 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눈이 쌓인 땅 위로 걸음을 옮겼다.

아자는 웃으며 말했따.

"이봐요. 잠깐, 어디로 가는거죠?"

소봉은 말했다.

"중원은 이미 내가 머물 곳이 못 된다. 부모를 죽인 피맺힌 원한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북쪽 변방으로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다."

아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길로 가시죠?"

소봉은 대답했다.

"나는 먼저 안문관으로 갈 생각이다."

아자는 손뼉을 쳤다.

"그럼 잘 되었어요. 나는 진양으로 가는 길이니 동행을 하기에 안성맞춤이군요."

소봉은 물었다.

"너는 진양으로 가서 무얼 하려는 것이지? 나이 어린 소녀가 어찌 홀몸으로 천 리나 되는 먼길을 간단 말이냐?"

아자는 웃으며 말했따.

"후후! 천 리 먼 길이 뭐가 무서워요? 나는 성숙해에서 이곳까지 왔어요. 이 거리야말로 먼길이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그대와 같은 짝이 있는데 어찌 홀몸이라고 하세요?"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너와 같이 가지 않겠다."

아자는 물었다.

"무엇 때문에요?"

소봉은 대답했다.

"나는 남자이고 너는 나이는 어리나 여자가 아니냐? 함께 길을 가다가 숙박을 하게 되면 불편한 점이 많다."

아자가 코를 찡긋했다.

"그거야말로 정말 우스꽝스럽고 희안한 말씀이네요. 내가 불편하다고 하지 않는데 그대가 왜 불편하다는 거예요? 그대는 나의 언니와 함께 낮에는 길을 가고 밤에는 잠을 자는 등 먼 길을 여행하지 않았나요?"

소봉은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너의 언니와는 이미 혼약을 했으니 보통 관계가 아니었지."

아자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어머나, 정말 몰랐네요. 나는 언니가 퍽 얌전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대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일가친척도 모르게 이미 사이좋은 한쌍이 되었다니 정말 뜻밖이군요."

소봉은 노해 부르짖었다.

"터무니 없는 소리 마라! 너의 언니는 죽을 때까지 시종 순결하고 고결하기 짝이 없는 소저였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깍듯히 예의를 지켰으며 무척 공경해 주었다."

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큰 소리로 겁을 준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어쨌든 언니는 그대에게 맞아죽은 것이 아니예요? 우리 가기나 해요."

소봉은 그녀의 언니가 어찌 되었던 간에 자기에게 맞아죽었다는 한 마디 말에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너는 역시 소경호가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조용한 곳을 찾아 그 책에 기록된 무공을 연성한 이후 다시 사부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도록 해. 진양으로 간다고 해서 놀기 좋을 게 무엇이냐?"

아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놀러가는 것이 아니고 요긴한 볼 일이 있어서 가는 것이에요."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너를 데리고 가지 않겠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자는 경신법을 써서 뒤따르며 소리쳤다.

"나좀 기다려 줘요! 나 좀 기다려 줘요!"

소봉은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북품이 차츰 거세어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눈이 내렸다. 소봉은 세찬 바람과 눈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원한과 자기가 뒤집어 쓴 억울한 누명이 그야말로 바다속에 빠진 듯 원한을 갚을 수도 없고 누명을 벗을 수도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척 우울해졌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심사를 떨쳐 버리려 했다.

소봉은 십여 리를 나아갔다.

그러자 길가에 조그만 절간이 나타났고, 소봉은 안으로 들어가 대전에서 벽을 기댄 채 한 두 시진동안 잠을 잤다. 잠을 자고 나니 피곤함이 많이 가셨다.

그는 북쪽을 향해 걸었다. 재차 사삽여 리를 나가게 되었을 때 북쪽의 요충지인 장대관에 이르게 되었다.

첫 번째 일은 주점을 찾는 일이었다. 그는 주점으로 들어가 열근의 백주를 시키고 두 근의 쇠고기와 한 마리의 통닭을 시켜 스스로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열 근의 술을 다 마신 후 다시 다섯 근의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 마시고 있는데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바로 아자였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소녀는 나의 흥을 깨뜨리려고 작정했구나!)

그는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했다.

아자는 빙그레 웃더니 그의 맞은 편 탁자 옆에 앉아서 주보를 불렀다.

"주보, 주보, 술을 가져와요."

주보는 다가와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저도 술을 마실건가요?"

아자는 호통을 내질렀다.

"나라고 해서 술을 마시지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먼저 열 근의 백주를 갖다 줘요. 그리고 다시 다섯 근을 준비해 두도록 해요., 그리고 두근의 쇠고기와 한 마리의 통닭을 빨리 갖다 줘요."

주보를 혀를 내두르며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큰 소리를 부르짖었다.

"어이쿠! 맙소사! 소저는 정말로 하시는 말씀이오, 아니면 장난으로 우스개 말씀을 하시는거요? 조그만 사람이 어찌 그토록 많이 잡수실 수 있단 말이오?"

그러면서 그는 곁눈질로 소봉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상대방은 그야말로 당신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마신다면 그녀 역시 무엇을 마시게 되고 당신이 무엇을 먹게 되면 그녀 역시 무엇을 먹게 될 것이다.)

아자는 말했다.

"누가 나보고 작다고 그래요? 당신은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요? 당신은 내가 먹고 줄 돈이 없을까봐 겁이 나나요?"

그러면서 그녀는 품속에서 한 덩이의 은자를 꺼내더니 탕!하는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에 던지며 말했따.

"내가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면 개에게 먹일 수도 있잖아요? 당신이 무슨 걱정이에요!"

주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봉을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상대방 소저는 그야말로 당신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거야. 이야기를 빙 돌려서 욕을 하고 있지 않느냐구!)

잠시 후 술과 고기가 나왔다. 주보는 한 커다란 대접을 그녀의 앞에 놓으면서 웃었다.

"소저, 제가 술을 따라 드리죠."

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주보는 그녀에게 한 대접 가득히 술을 따라 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대가 만약 이 한 대접의 술을 마시고 쓰러져서 땅바닥에 뒹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희안한 노릇이지.)

아자는 두 손으로 대접을 들더니 입가에 갖다대고 한 번 맛을 보고는 눈쌀을 찌푸렸다.

"매우 독하군! 매우 독해! 이처럼 독한 술은 정말 마시기가 어려워! 세상에 그저 몇 명 되지 않는 바보 같은 녀석들이 있어서 이 같은 술을 마시려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네들이 어떻게 술을 팔아 먹을 수 있겠어."

주보는 다시 소봉을 곁눈질했다. 그러나 소봉이 시종 본 체 만 체 하고 있는지라 주보는 우습게 생각했다.

아자는 닭다리를 뜯더니 한 입 깨물고 말했다.

"쳇! 구린내가 나는군!"

주보는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이것은 구수하기 이를 데 없는 통닭이외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꼬꼬댁 하고 울던 닭이외다. 신선하고 뜨끈뜨끈할텐데 어째서 구린내가 난다는 것이오?"

아자는 말했다.

"음, 어쩌면 당신의 몸에서 구린내가 나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으면 바로 당신네 주점에 있는 다른 손니므이 몸에서 나는 냄새 인지도 모르지."

이때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어서 여행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 주점에는 소봉과 그녀 두 사람만이 손님으로 술과 음식을 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보는 웃으며 말했따.

"물론 내 몸에서 나는 구린내일 것이오. 소저, 그대는 말을 조심하시오. 괜히 다른 나으리들의 반감을 사지 않도록 하시구려."

아자는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요?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일장에 때려 죽일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는 젓가락을 들고 한 조각의 쇠고기를 집어 한 번 씹더니 즉시 뱉어내며 부르짖었다.

"아이쿠, 이 쇠고기는 시큰시큰하네! 쇠고기가 아니라 사람고기로군! 당신네들은 인육을 팔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람잡는 술집이었군! 사람잡는 주점이야!"

주보는 그만 손발을 황망히 흔들며 재빨리 말했다.

"어이쿠! 소저, 제발 적선은 못할망정 훼방을 놓지는 마십시오. 이같이 신선한 황소고기를 어째서 인육이라고 합니까? 인육이라 한다면 어찌 이토록 거친 근육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렇게 이토록 붉그레한 빛을 띠우고 있겠습니까?"

아자는 말했다.

"좋아요. 당신은 인육의 빛깔을 알고 있군요. 내가 묻겠는데 당신네 주점에서 몇 사람이나 죽였죠?"

주보는 웃으며 말했다.

"소저는 정말 농담을 잘 하시는군요. 신양부 장대관은 꽤나 큰 고을입니다. 우리 가게는 육십여 년이나 경영해 온 전통이 있는데 어찌 사람을 죽여 고기를 팔 까닭이 있겠습니까?"

아자는 말했다.

"좋아요. 설사 인육이 아니라 하더라도 냄새가 지독히 나니 바보만이 먹을 수 있을거예요. 어이쿠, 내 신발이 눈바닥에서 그만 매우 더러워졌군!"

그리고 그녀는 쟁반에서 한 조각 커다랗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홍소육을 들어 왼발의 가죽신에다 문지르기 시작했다. 본래 신발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는데 그렇게 문지르자 왼쪽 신발에 묻은 흙이 모조리 떨어지게 되고 쇠고기 기름을 바르자 대뜸 광채가 났다.

주보는 그녀가 주방의 이름있는 요리사가 만들어 낸 쇠고기로 신발을 닦는 것을 보고 크게 마음이 아파 한쪽에 서서 하염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자는 물었다.

"당신은 왜 한숨을 내쉬죠?"

주보는 말했다.

"저희 가게의 홍소육으로 말하면 언제나 장태진에서 일미라 불리우고 있으며 부근 일백 리 안에서는 이름을 들먹이기만 하더라도 누구나 다 엄지손가락을 빨며 목구멍으로 꿀껏꿀껏 침을 삼킨 답니다. 그런데 소저는 그걸로 신발을 닦다니 이건...... 이건......"

아자는 그를 한 번 노려보더니 다그쳤다.

"이건 어쨌다는거예요?"

주보는 말했다.

"너무 헤프게 사용한 것 같습니다."

아자는 물었다.

"당신은 내가 신발을 헤프게 했다는 건가요? 쇠고기는 소에서 온 것이고 신발 역시 소가죽으로 만든 것이니 헤프게 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죠. 이봐요, 당신네 가게는 또 무슨 자랑할 만한 음식이 있어요? 이야기해 봐요."

주보는 말했다.

"자랑할 만한 음식이야 물론 있죠. 하지만 가격이 그렇게 싼편이 아니랍니다."

아자는 품속에서 다시 한 덩이의 은자를 꺼내서는 탕! 하니 탁자위에 던지고는 물었따.

"이거면 되겠어요?"

주보는 그 한 덩이의 은자가 적어도 다섯 냥 무게가 나가며 두 탁자의 술과 음식을 장만하는 데 충분한 것인지라 재빨리 웃으며 입을 열었다.

"충분합니다. 충분합니다. 어찌 부족하겠습니까? 저희 가게에서 자랑할 만한 음식은 주조리어, 백절양고, 장저육......"

아자는 그의 말을 끊었다.

"매우 좋아요. 한 가지마다 세 쟁반씩 가져오도록 해요."

주보는 말했다.

"소저께서 맛을 보고 싶어 하신다면 한 가지에 한 쟁반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자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내가 세 쟁반이라면 세 쟁반이에요.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주보는 허리를 굽신거렸다.

"예, 예, 그렇습니다."

그는 길게 목청을 돋구어 부르짖었다.

"주조리어 세 쟁반, 백절양고 세 쟁반......."

소봉은 한 옆에서 차가운 눈으로 그 같은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나이어린 소저가 겉으로는 주보의 약을 올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입을 열도록 유도하는 수작임을 알아보았다. 따라서 그는 더욱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술을 마시고 안주를 들면서 눈이 내리는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백절양고가 먼저 나왔따.

아자는 말했다.

"한 쟁반은 이곳에 놔두고 한 쟁반은 저 손님에게 갖다 드려요. 그리고 한 쟁반은 저 탁자 위에 놓도록 해요. 그리고 그쪽에도 젓가락과 대접을 놓고 술을 따르도록해요."

주보는 말했다.

"또 오실 손님이 있으십니까?"

아자는 그를 한 번 노려보더니 말하였다.

"쓸데 없이 입을 자주 놀리게 되면 내가 당신의 혓바닥을 잘라버릴지도 모르니 조심해요."

주보는 혀를 내밀며 웃었다.

"나의 혀를 자른다구요? 아마도 소저는 그만한 재간이 없을걸요?"

소봉은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서 그를 흘겨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의 그 같은 말은 그야말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감히 소마두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함부로 하다니.)

주보는 백절양고를 소봉의 탁자 위로 갖다 놨다. 소봉은 말도 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어서는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주조리어와 장저육이 차례로 나왔다.

모두 다 각기 세 쟁반씩이었다. 한 쟁반은 소봉에게 주고 한 쟁반은 아자에게 주었으며 한 쟁반은 다른 탁자 위에 놓여졌다. 소봉은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일일이 먹어치웠다. 아자는 쟁반 마다 젓가락으로 한 번 맛을 보더니 말했다.

"구린내 나고 썩어서 개, 돼지나 먹을 수 있겠는걸?"

말을 마친 그녀는 백절양고와 주조리어, 그리고 장저육을 집어서는 가죽신을 닦았다. 주보는 마음이 아팠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소봉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소마두는 정말 귀찮은 존재이군. 그녀에게 붙잡히게 된다면 그야말로 후환이 끝이 없겠다. 아주는 나에게 그녀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지만 저 나이어린 소녀는 그야말로 암상스럽기 그지 없어 충분히 자기 자신을 지키고도 남음이 있겠으니 내가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나는 역시 그녀를 피하는 것이 좋겠고 그녀의 꼴을 보지 않는 것이 깨끗하겠다.)

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멀리서 한 사람이 눈을 밟으며 다가왔다.

추운 겨울인데도 그 사람은 몸에 노란 갈포단삼을 입고 있었으며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삽시간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는데 그는 나이가 사십 세 정도 돼 보였으며 양쪽 귀에는 각기 빛이 반짝이는 황금으로 만든 고리가 달려 있었고 사자코에 입은 메기처럼 컸다.

모습이 퍽이나 흉악하고 야릇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중원 땅의 사람같지 않았다.

이 사람은 주점 문 앞으로 오더니 휘장을 들추고 들어왔다. 아자를 발견하자 약간 어리둥절해 하였으나 곧 얼굴에 기쁜 빛을 띠우고 입을 열려고 하다가 참는 듯했다. 그리고는 한 탁자의 옆에 주저앉았다.

이때 아자가 입을 열었다.

"술과 고기가 있는데 왜 먹지 않아요?"

그 사람은 손님이 없는 탁자에 술과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나에게 주는 것이오? 사매, 고맙구려."

그리고 다가가더니 품속에서 자루가 금으로 된 한 자루의 칼을 끄집어 내더니 소고기를 잘라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몇 조각의 고기를 먹고 한 대접의 술을 비우는 것으로 보아 주량이 대단한 사람 같았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저 사람은 성숙해 정춘추 노괴의 제자였구나.)

아자는 그가 한 주전자의 술을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주보를 향해 말했다.

"이 술을 가져가 저 분 나리에게 드리도록 해요."

그리고 그녀는 두 손을 앞에 놓인 술대접에 넣어 휘저었다. 그리고 손에 묻은 기름기를 씻더니 술대접을 밀었다.

주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같은 술을 누가 마시려 하겠느냐?)

아자는 주보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으며 술대접을 들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고 재촉했다.

"빨리 가져가요. 상대방에서는 마시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어요."

주보는 웃으며 말했다.

"소저는 또 시작이군요? 이 한 대접의 술을 누가 어떻게 마신답니까?"

아자는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누가 못 마신다 그래요? 당신은 내 손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그렇다면 당신이 한 모금 마셔요. 그러면 내가 한 냥의 은자를 당신에게 드리지."

그리고 그녀는 품속에서 한 냥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한 덩이의 은덩이를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주보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술을 한 모금만 마시면 한 냥의 은자가 생기다니 정말 좋소이다! 소저께서 손 씻는 것은 고사하고 발을 씻은 물이라도 나는 마시겠소이다!"

그리고 그는 술대접을 들고 한 모금 크게 마셨다.

한데 술이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마치 붉게 달구어 놓은 쇳덩어리가 혓바닥을 찍는 것 같은 격렬한 아픔을 느끼며 주보는 왁! 입을 벌리고 술을 마구 토해냈다. 그리고 아파서 펄쩍펄쩍 뛰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이쿠! 아이쿠!"

소봉은 이 같은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따. 그런데 그의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점점 희미해 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혓바닥이 부어오른 모양이었다.

주점의 주인은 물론이고 요리사, 불 지피는 사람, 그리고 다른 주보들이 그의 신음소리를 듣고는 우루루 몰려나왔다. 그리고 다투어 물었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

그 주보는 두 손으로 자기의 뺨을 얼싸안은 채 말을 하지 못하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혓바닥은 평소의 혓바닥보다 세 배나 커져 있었으며 혓바닥 전체가 시커멓게 타 있었다. 소봉은 다시 한 번 놀라지 ㅇ낳을 수 없었따.

(저것은 극약에 중독된 것이다. 저 소마두가 손가락을 그저 술속에 한 번 담갔다가 꺼낸 것에 불과한데 저 한 대접의 술이 그토록 무서운 독기를 드러내다니.)

뭇사람들은 그 주보의 혓바닥이 이상한 것을 보고 모두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중구난방으로 지껄여댔다.

"무슨 독물을 먹은 것이냐?"

"전갈에게 쏘였느냐?"

"어이쿠, 야단났구나! 의원을 불러와야겠다."

그 주보는 손을 뻗쳐 아자를 가리키더니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서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했다.

아자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쿠, 이거야말로 감당할 수 없네요. 나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거죠?"

주보는 고개를 쳐들고 자기의 혓바닥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큰 절을 해댔다.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혓바닥을 치료해 달라는 거예요?"

주보는 아파서 온몸에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두 손으로 몸 이곳저곳을 마구 할퀴고 움켜잡더니 다시 큰 절을 하며 두 손을 맞잡고 흔들어댔다.

아자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금으로 된 칼집에서 한 자루의 조그만 칼을 꺼냈다. 그 칼은 사자코를 가진 중년사내가 꺼냈던 칼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였다.

그녀는 왼손으로 그 주보의 뒷덜미를 잡고 오른손의 금도를 휘둘렀다. 싹!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주보의 혓바닥 끝을 살짝 잘라내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크게 소리쳤다. 그런데 혓바닥이 갈라진 곳에서 피가 샘솟듯 흘러나왔다. 그 주보는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선혈리 흘러나오는 즉시 독이 해소되고 혓바닥의 아픔이 대뜸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부은 것도 가라앉았다.

아자는 품속에서 조그만 병을 하나 꺼내더니 병마개를 뽑고 새끼손가락의 손톱으로 황색의 약가루를 찍어서 주보의 혓바닥 끝을 향해 퉁겼다. 그러자 상처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즉시 멈추어 졌다.

그 주보는 노기가 끓어 올랐으나 노기를 터뜨릴 수도 없었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는 일이라 그저 매우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서는 중얼거렸다.

"그대는...... 그대는......"

혓바닥이 한 토막 짤려 나갔기 때문에 말하는 소리는 분명하지 않았다.

아자는 그 조그만 은자를 손에 들더니 웃었다.

"나는 당신이 한 모금의 술을 마신다면 한 냥의 은자를 준다고 했는데 방금 술을 당신이 도로 뱉어냈으니 한 냥의 은자를 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 다시 마시도록 해요."

주보는 두 손을 마구 흔들며 애매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나는 싫소이다. 나는...... 나는 마시지 않겠소이다."

아자는 은자를 품속에 갈무리하며 웃었다.

"조금 전 당신은 뭐라고 말했죠? 당신은 나에게 다른 사람의 혓바닥을 자를 재간이 없다고 했죠? 그런데 이번에 당신은 나에게 혓바닥을 짤라 달라고 절을 하며 빌었어요. 따라서 내가 당신에게 묻겠는데 이 소저에게 그만한 재간이 있나요, 없나요?"

그 주보는 그제서야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원래 이 일은 완전히 자기가 조금 전 한 마디의 말을 잘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야말로 울화가 극도로 치밀어 대뜸 앞으로 나아가 손을 써서 실컷 그녀를 패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두 탁자에 각기 앉아 있는 우람한 체구의 두 사내들이 아무래도 그녀와 한 패거리 같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때 아자는 다시 말했다.

"마시겠어요, 마시지 않겠어요?"

주보는 노해 부르짖었다.

"나는...... 나는 안......"

그는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욕지거리를 했다가 그녀의 수작에 다시 넘어가게 된다면 큰일 날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놀람과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몸을 돌려 안쪽으로 달려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소봉은 크게 울화가 치밀었다.

(그 주보는 그저 한 마디의 농담을 한 것에 불과한데 그렇다고 한평생 똑똑히 말을 할 수 없는 병신으로 만들다니, 어린 나이에 정말 악독하구나!)

이때 아자가 입을 열었다.

"주보, 이 대접의 술을 저 나으리께 갖다 드리도록 해요."

그리고 그녀는 사자코의 중년사내를 손가락질 했다. 새로 온 주보는 그녀가 술대접을 손가락질 하는 것을 보자 전신을 흠칫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그 술을 다른사람에게 먹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놀람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군! 당신은 이 술을 손님에게 갖다 주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자신이 마시고 싶은 모양이군. 그것도 좋아요. 그렇다면 한 번 마셔보도록 해요."

그 주보는 그만 안색이 창백해지며 재빨리 말했다.

"아, 아닙니다. 소인...... 소인은 마실 수 없습니다."

아자는 재촉했다.

"그렇다면 빨리 갖다 드리세요."

그 주보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그리고 두 손으로 술대접을 받쳐 들고서는 전전긍긍하면서 그 사자코의 중년인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 갖다 놓았다.

그는 조금이라도 잘못하여 술을 쏟게 될까봐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바람에 술대접을 탁자에 놓을 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그 사자코의 사내는 두 손으로 술대접을 쳐들더니 자세히 대접 안의 술을 들여다보았다. 입에서 약 한 자 정도의 간격을 두고 술그릇을 내리거나 들어올리지도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자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둘째 사형, 왜 그러죠? 이 소매가 사형에게 술을 사는데도 사형은 저의 성의를 무시할 작정이세요?"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한 대접의 술은 그야말로 지독한 독이 들어 있으니 저 사람은 물론 그와 같은 충동질에 자극을 받고 헛되이 목숨을 잃을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게다. 내공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마 저 술 속에 들어있는 극독을 감당할 수는 없을 걸?)

헌데 그 사자코의 중년인은 다시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대접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더니 곧이어 꿀꺽! 꿀꺽! 하며 곧장 마시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흠칫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저 사람에게 심후하기 짝이 없는 내력이 있어 술 속의 극독을 해소시킬 수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정히 놀람과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 그 사자코의 사내는 한 대접의 술을 다 비운 후 대접을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두 엄지 손가락에 묻은 술방울을 아무렇게나 옷자락에 쓱 문질러 닦았다.

소봉은 잠시 생각해 본 후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군. 그가 술을 마시기 전에 두 엄지 손가락을 술 속에 집어 넣은 채 한참 동안 대접을 들고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그의 엄지 손가락에 독을 해소 시킬 수 있는 약물이 있어서 술 속의 극독을 없애 버린 것이 틀림없다.)

이때 아자는 그가 독주를 다 비우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놀람과 당황한 빛을 띠우고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둘째 사형, 독을 해소시키는 재간이 크게 발전했군요. 축하해요."

사자코의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앞에 놓인 음식을 마구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탁자 위의 음식을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 치우자 배를 두들긴 다음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가자."

아자는 말했다.

"가 보세요. 우리 다음에 만나기로 해요."

사자코의 사내는 야릇하게 생긴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자니 무슨 소리야? 너는 날 따라 가야 돼."

아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가지 않을래요."

그리고 그녀는 소봉의 앞으로 가서 말했다.

"나는 이 오라버니와 먼저 약속을 한걸요. 강남땅으로 놀러 가기로 돼 있어요."

사자코의 사내는 소봉을 한 번 노려보더니 물었다.

"이 녀석은 누구지?"

아자는 말했다.

"왜 이 녀석 저 녀석이에요? 말조심하세요. 이분은 저의 형부란 말이에요. 그리고 저는 이분의 처제이고요. 우리 두사람은 가까운 친척이에요."

사자코는 말했다.

"그대가 문제를 내놓았을 때 나는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니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그대는 감히 본문의 문규를 어길 참인가?"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아자가 그에게 독주를 마시게 한 것은 어려운 문제를 내놓은 것이로구나. 그런데 뜻밖에도 이 사람이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셈이었군.)

아자는 되물었다.

"내가 문제를 냈다고 누가 그래요? 이 한 대접의 술을 마신 것을 두고 말하는 거예요? 호호호! 정말 우스워 죽겠네. 이 한 대접의 술은 내가 주보에게 마시도록 한거예요. 그런데 뜻바ㄸ에도 둘째 사형은 당당한 성숙파의 제자로서 주보가 마시다 만 찌꺼기술을 마신 거예요. 못난 주보도 마시고 죽지 않는 술을 둘째 사형이 마셨다고 뭐가 대단해요?

내가 묻건대 그 못난 주보가 죽었어요? 그 같은 사람도 마실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어째서 그처럼 쉬운 문제를 둘째 사형에게 내놓겠어요?"

이 말은 확실히 억지를 쓰는 것이 분명했으나 그녀의 말을 반박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았다.

10. 성숙파의 대사형 아자는 놀란 어조로 말했다.

"둘째 사형이 상처를 입었어요? 누가 상처를 입힌 것인가요? 상처가 심한가요?"

제일 뒤에 서 있던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왜 시치미를 떼는거야? 둘째는 네가 사람을 시켜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했어."

그 사람은 키가 작았다. 그야말로 난장이였는데 가장 뒤에 서있었기 때문에 온몸이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에게 가려져 있어 소봉은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성질이 꽤나 급한 사람인가보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들고 있는 강철지팡이는 유독 가장 길었다. 아마도 팔힘이 약하지 않은 모양인데 그저 키가 작은 탓으로 다른점에서 남보다 뛰어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강철지팡이를 길고 크게 만든 모양이었다.

이때 아자가 물었다.

"여덟째 사형, 무슨 말씀이죠? 둘째 사형이 '그대가 사람을 시켜 자기를 해치게 했다'고 했어요? 어마, 그대가 어찌 그와 같은 독수를 쓸 수 있어요? 사부께서 아시면 그대를 어찌 가만 놔두겠어요? 그대는 두렵지 않나요?"

그 난장이는 노발대발하며 강철지팡이를 들어 산의 바위를 탕탕 내리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해친 것이지, 내가 해친 것이 아니야!"

아자가 말했다.

"뭐라구요? 그대가 해친 것이고 내가 해친 것이 아니라구요? 좋아요.

그대는 실토를 하는군요. 셋째 사형, 넷째 사형, 그리고 일곱째 사형, 세분은 분명히 들었겠죠? 여덟째 사형은 자기가 둘째 사형을 해쳐 죽였다고 했어요. 그렇군요. 그는 틀림없이 삼음오공조라는 무예를 써서 둘째 사형을 해쳐 죽였을 거예요."

그 난장이는 부르짖었다.

"누가 둘째 사형을 해쳐 죽였다고 했어? 그는 죽지 않았어! 입은 상처 또한 삼음오공조에 의한 것이 아니야......."

아자는 그 말을 가로챘다.

"삼음오공조가 아니라구요? 그렇다면 반드시 추수장이겠군요? 그것이야말로 그대가 자랑하는 무공이 아니겠어요? 둘째 사형은 조심하지 않아 그대의 암수에 걸리게 되었을 거예요. 그대는...... 정말 무섭군요."

그 난장이는 화가 나서 펄펄 뛰며 부르짖었다.

"셋째 사형, 빨리 손을 써서 저 계집애를 잡아 갑시다! 잡아가서 사부님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합시다. 그녀는...... 그녀는 터무니없는소리를 지껄이고 있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의 음성은 볼래 듣기에 매우 거북스러웠다. 그런데 다급한 나머지 더욱더 말을 빨리 하는지라 뭐라고 하는지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 뚱보는 말했다.

"손을 쓸 것까지는 없어. 소사매는 언제나 탁하고 말을 잘듣지. 소사매, 그대는 우리를 따라가도록 해."

이 뚱보는 말을 매우 느릿느릿하게 했다. 아마도 성질이 매우 느긋한 모양이었다.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셋째 사형이 뭐라고 말씀하시면 나는 그대로 따라야지요. 저는 언제나 셋째 사형의 말을 잘 들었으니까요."

그 뚱보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것 참 잘됐군! 그렇다면 우리 이대로 떠나도록 하지."

아자는 그 말을 받았다.

"좋아요. 그대들은 가 보도록 하세요."

뒤에선 그 난장이는 다시 부르짖었다.

"이봐, 이봐! 뭐가 그대들은 떠나도록 하라는거야? 우리들은 그대에게 함께 가자고 했어."

아자는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대들이 한 걸음 먼저 가면 나는 뒤따라 가겠다는 말이에요."

그 뚱보는 말했다.

"안돼, 안돼. 우리와 함께 가야 한다."

아자는 말했다.

"좋긴 좋은데요, 애석하게도 저의 형부가 좋아하지 않을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소봉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군! 이 한 토막의 연극은 정말 그럴싸하구나!)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온몸이 노곤한 듯 산벽에 기댄 채 두 손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 난장이는 물었다.

"누가 그대의 형부이지? 어째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키가 너무 커서 우리 형부 역시 그대를 볼 수가 없어요."

그러자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난장이는 강철지팡이로 땅을 한 번 치더니 그냥 몸을 붕 떠올려서는 지팡이와 함께 앞에 선 채 사람의 머리 위를 가로질러 아자 앞에 내려섰다.

그리고 크게 부르짖었다.

"빨리 우리를 따라가도록 해!"

그리고는 아자의 어깨죽지를 잡으려고 했다. 이 사람은 키는 매우 작았으나 허리가 굵고 어깨도 넓직했다. 꽤 건장해 보였으며 동작 또한 심히 민첩했다. 헌데 그 난장이는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달락말락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손을 멈추고 물었다.

"그대는 이미 사용했어?"

아자는 되물었다.

"무엇을 사용해요?"

그 난장이는 불쑥 말했다.

"물론 신목왕정이지......."

그의 입에서 신목왕정이라는 한 마디가 나오자 다른 세 사람은 일제히 호통을 내질렀다.

"여덟째 사제,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그 소리는 매우 준엄했다. 난장이는 대뜸 한 걸음 물러서며 얼굴에 황송하고 두려운 빛을 띠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신목왕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이 네 사람의 안색이 매우 진지한 것으로 보아 연극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이곳에 매복해 있었다면 어째서 손을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설마하니 나를 이기지 못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앞서서 도움을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이때 그 난장이가 손을 뻗치면서 말했다.

"가져와."

아자는 물었다.

"무엇을 가져와요?"

그 난장이는 말했다.

"바로 신...... 신...... 그 물건 말이야."

아자는 소봉을 손가락질했다.

"저는 우리 형부에게 주었어요."

그녀의 그 한 마디가 떨어지자 네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소봉에게로 쏟아졌고 얼굴에 하나 같이 노기를 띠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보기가 역겹다. 나는 그들을 상대하기도 귀찮게 느껴지는구나.)

그리고 그는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갑자기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벼락같이 몸을 솟구쳐 네 사람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이 찰나의 동작은 기이하도록 빨랐다. 더군다나 앞에 선 네 사람은 그가 몸을 도약할 때 무릎을 꿇고 뛸 자세를 취하는 것도 보지 못했고 그저 눈앞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을 때에야 머리 위에서 바람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봉은 이미 네 사람의 등뒤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네 사람은 큰 소리로 부르짖더니 곧 몸을 돌려 뒤쫓아 왔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소봉은 이미 수 장 밖에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별안간 휙! 하는 소리가 맹렬히 이는 가운데 한 가지 무거운 무기가 그의 등을 노리고 날아왔다. 소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 사람이 강철지팡이를 던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왼손을 뒤로 돌려 강철지팡이를 잡았다. 네 사람은 큰소리로 노성을 터뜨리며 다시 두 자루의 강철지팡이를 던졌다.

소봉은 다시 손을 뒤로 돌려 날라온 강철지팡이를 받았다. 한 자루의 지팡이마다 각기 오십여근은 되었다. 따라서 세 자루의 강철지팡이를 손에 들고보니 이미 백 오십여 근이 되는 셈이었으나 소봉의 발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쉭!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강철지팡이가 날라왔다.

이 한 자루의 지팡이가 날아올 때의 소리가 무척 묵중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가장 무거운 강철지팡이임에 틀림없었고 또한 그 난장이가던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오랑캐들은 분수를 모르니 그들에게 무서움을 알려주어야겠다.)

이때 그 강철지팡이가 뒷통수로 날아들었는데 그 간격은 불과 두 자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즉시 휙! 왼손을 뒤로 돌려서는 가볍게 박아들었다.

그들 네 사람이 강철지팡이를 던지게 된 이유는 소봉이 피하려고 해도 좀처럼 피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네 자루의 지팡이 가운데 반드시 한 두 자루는 상대방에게 적중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내던졌지 그렇지 않았으면 가볍게 무기를 손에서 던져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소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일이 손으로 모조리 받아 넘기지 않는가? 이렇게 되자 그들은 놀람과 분노에 휩싸여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며 급히 쫓아왔다.

소봉은 그들이 한동안 뒤쫓아 오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네 사람은 한참 힘을 쏟아 뒤를 쫓던 참이라 미처 발걸음을 멈추지 못해 하마터면 그의 몸에 부딪힐 뻔했으나 가까스로 자세를 가다듬고는 씩씩 숨을 내쉬었다.

소봉은 그들이 강철지팡이를 던지고 달려오는 자세로 미루어 네 사람이 자기의 적수가 도저히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불초의 뒤를 쫓아온 것은 무엇 때문이오?"

그 난장이는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요? 당신...... 당신의 무공은 정말 굉장하군!"

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뭐 대단할 것도 없소."

그러면서 그는 손에 공력을 돋우고 한 자루의 강철지팡이를 눈에 덮힌 땅바닥에 푹 꽂았다. 그 산길은 매우 단단한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강철지팡이는 점점 땅속으로 빠져들 듯 파고 들었다. 그리하여 땅바닥과 두자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소봉은 손을 놓더니 오른 발을 들어 땅에 꽂힌 지팡이를 밟았다. 그러자 강철 지팡이는 다시 쑥 들어가게 되었고 땅바닥에 끝이 닿을 정도를 깊숙히 박히고 말았다. 그들 네 사람은 두 눈을 부릅 떴으며 어떤 자는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소봉은 한 자루에 이어 또 한 자루를 꽂았다. 그러니까 두 자루의 강철지팡이를 땅바닥에 밟아 꽂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의 강철지팡이를 꽂으려 했을 때 그난장이가 몸을 날려오면서 호통을 질렀다.

"나의 무기를 건드리지 마시오!"

소봉은 웃었다.

"좋아 되돌려 드리지."

그리고 오른손으로 강철지팡이를 들고 산 암벽을 향해 힘주어 내던졌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지팡이는 산 암벽에 푹 꽂혔다. 헌데 여덟자 길이나 되는 강철 지팡이가 다섯자 깊이로 암벽에 꽂힌 것이었다.

이 강철 지팡이가 꽂혀진 곳은 지극히 단단한 흑암이었다.

소봉은 운기행공을하여 던진 강철지팡이가 바위에 그토록 깊히 박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이 몇 달 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고 고생을 했지만 무공연마를 그래도 게을리 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진보가 있었구나! 반년 전에는 아마도 저토록 깊히 강철지팡이를 박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그 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크게 소리치며 얼굴에 존경과 두려움의 빛을 드러냈다.

아자가 뒤에서 달려오더니 부르짖었다.

"형부, 그 한 수의 재간은 매우 훌륭하군요! 빨리 나에게도 가르쳐 주세요!"

그 난장이가 노해 부르짖었다.

"그대는 성숙파의 문하제자인데 어찌 남보고 무예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이지?"

아자는 말했다.

"그는 나의 형부인데 어째서 남이라고 하는거죠?"

그 난장이는 급히 자기의 무기를 거두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훌쩍 날려서는 손을 뻗쳐 강철지팡이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소봉은 이미 그의 경신법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 보았는지라 강철지팡이를 성벽에 꽂을 때 땅바닥과 약 일장하고도 다섯자 정도의 높은 곳에 꽂았던 것이다. 따라서 난장이는 힘껏 몸을 도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자 정도의 차이로 강철지팡이를 잡을 수 없었다. 사실 강철지팡이나 다른 힘을 보조할 물건이 있어서 땅바닥을 치면서 몸을 솟구친다면 그 정도 높이는 난장이도 뛰어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으므로 조금 전에 세 사람을 뛰어넘듯 높이 뛰어오를 수가 없었다.

아자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잘 됐어요! 여덟째 사형, 저 무기를 손에 넣기만 한다면 저는 사형을 따라 사부님을 뵈러 가죠. 그렇지 않으면 아예 생각도 마세요."

그 난장이는 조금 전에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다한 것이었다. 이는 그의 경신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었기 때문에 한 치 더 높이 뛰기란 무척 어려웠고 말하자면 불가능에 가까웠다. 헌데 아자가 그와 같은 말로 화를 돋구자 울화가 치밀어올라 재차 힘을 주어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그의 중지 끝에 강철지팡이가 닿게 되었다.

아자는 그 광경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닿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어요. 뽑아야 해요!"

그 난장이는 극도로 치미는 울화를 이기지 못하는 듯 다시 힘주어 몸을 도약했다.

그의 땅딸막한 몸이 곧장 치솟아 오르는가 했는데 두 손을 급히 낚아채는 순간 그는 강철지팡이를 붙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몸뚱아리는 허공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는 힘주어 강철지팡이를 흔들었다. 그러나 여덟자 길이의 강철지팡이가 다섯자 정도나 단단한 암석에 박혀 있는지라 그 같이 흔들기를 사흘 낮 사흘 밤을 계속한다고 하더라도 뽑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모양은 무척 우스꽝스러웠다.

이때 소봉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모는 이제 그만 실례해야겠소이다."

그리고 느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 난장이는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무공이 어느 정도의 실력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 강철지팡이를 붙잡게 된 것은 실로 요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일단 손을 놓고 뛰어내리게 되면 두 번 다시 몸을 솟구친다고 하더라도 십중팔구 강철지팡이를 거머쥘 수는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이 강철지팡이는 그가 매우 아끼는 무기였다. 그 무기만큼 자기 손에 맞는 무기를 만들기란 어려웠다. 그리하여 그는 재차 힘주어 몇 번 흔들어대며 뽑으려고 했으나 강철지팡이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급한 어조로 소봉을 향해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당신은 그 신목왕정을 남겨두고 가시오! 그렇지 않을 땐 후환이 뒤따를 것이오."

걸음을 옮기던 소봉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신목왕정이라니, 그게 어떤 물건이오?"

성숙파 문하의 세 제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귀하의 무공은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도달했구려. 우리들은 모두 탄복했소이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향로는 본문에서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지만 외부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이니 귀하께서 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반드시 보답을 하겠소이다."

소봉은 그들의 모습을 보아 거짓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매복하였다가 자기를 습격하려 했던 것 같지도 않은지라 아자를 향해 말했다.

"아자, 그 신목왕정을 내놓아라. 도대체 어떤 물건인지 봐야겠다."

아자는 말했다.

"어마, 제가 형부에게 드렸잖아요? 내놓고 안 내놓는 것은 형부의 뜻에 달린거예요. 형부의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좋을 거예요."

소봉은 그 말을 듣자 그녀가 사문의 보물을 훔치고는 자기에게 주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자기에게 그녀 자신이 당해야 할 재난을 대신 막아 달라고 하는 수작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장계취계(저편의 계략을 미리 알고 이를 이용하는 계교)로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나에게 준 물건은 너무나 많아서 어떤 것이 신목왕정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그 난장이는 허공에 매달려 그 말을 받았다.

"그것은 여섯 치 높이의 조그만 나무로 만든 향로인데 짙은 노란색을 띠우고 있소이다."

소봉은 그 말을 받아 생각하는 듯한 눈치를 보였다.

"음, 그 물건으로 말하면 본 적이 있지. 헌데 그까짓 조그만 장난감을 어디에 쓴다는 말이오?"

그 난장이는 말했다.

"그대가 어찌 알겠소? 어째서 조그만 장난감이라고 하시오? 그 목정으로 말하면......."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가려고 했을 때 뚱보가 호통을 치며 말을 가로챘다.

"사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소봉에게 말했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장난감이지만 가사...... 가사의 부친께서 내리신 것이라 잃어 버리면 안 되니 아무쪼록 귀하께서는 되돌려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매우 고맙게 여기겠소이다."

소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는데 어디다 던져 버렸는지 기억이 없구려. 만약 정말 중요한 물건이라면 나는 신양으로 돌아가 찾아보도록 하겠소. 하지만 길이 너무 멀어 되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귀찮은 노릇이군요."

그 난장이가 서둘러 말했다.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물건이오. 어찌 중요하지 않겠소? 우리들은 빨리...... 빨리...... 신양으로 되돌아가 찾도록 합시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자기의 손에 맞는 무기도 포기했는지 강철지팡이를 놓고 훌쩍 땅 위로 뛰어내렸다.

소봉은 손가락으로 자기의 이마를 가볍게 툭툭 쳤다.

"아, 이 며칠 동안 충분히 술을 마시지 못해 기억력이 좋지 않군. 그 조그만 목정으로 말하면 신양에 두었는지, 대리에 두었는지, 또는 어디에 두었는지......."

그 난장이가 큰 소리로 그 말을 가로챘다.

"이봐요? 이봐요? 도대체 대리에 있는 것이오, 아니면 신양에 있는 것이오? 그 두 곳은 그야말로 남과 북으로 수천리 떨어져 있는데 결코 농담을 해서는 안 되요."

그러나 그 뚱보는 소봉이 일부러 그 같은 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알고 말했다.

"귀하는 장난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소이다. 어쨌든 그 향로를 아무 탈없이 되돌려 준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큰 사례를 하겠으며 결코 식언하지 않을 것이외다."

소봉은 갑자기 놀란 듯 부르짖었다.

"아이쿠, 야단났군!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 네 사람은 일제히 놀라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소봉은 말했다.

"그 목정은 마부인의 집에 있었는데 내가 떠나올 때 불을 질러 그 집을 모조리 태워 버렸소. 그러니 그 목정도 큰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을 터이니 타지 않았을까 모르겠구려."

그 난장이는 큰 소리로 말했다.

"어찌 탈이 나지 않겠소? 그건...... 그건...... 셋째 사형, 넷째 사형, 어떻게 하지요? 나는 모르겠소. 사부님께서 꾸지람을 하셔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소사매, 그대가 사부님에게 가서말해. 나는 상관하지 않겠어."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저의 기억으로는 마부인의 집에 놓아둔 것 같지는 않아요. 사형들께서는 우리 형부와 잘 따져 보도록 하세요. 소매는 이만 실례하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몸을 비스듬히 날리더니 소봉을 앞질러 나아갔다.

소봉은 일부러 네 사람의 앞을 가로막듯 하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이 만약 그 신목왕정의 용도와 내력을 설명한다면 내가 당신네들을 도와서 찾아볼 수도 있소. 그렇지 않을 때는 불초도 여러분과 노닥거릴 여유가 없소이다."

그 난장이가 연신 손을 부비더니 입을 열었다.

"셋째 사형, 방법이 없잖소? 그에게 말해 줍시다."

그 뚱보는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귀하에게 말씀드리지......"

별안간 소봉은 몸을 흔들하더니 그 난장이 곁으로 다가와 손을 뻗어 그의 겨드랑이를 부축하며 말했다.

"우리는 위로 올라가도록 합시다. 나는 당신의 말을 듣고 싶지 저 사람의 말은 듣고 싶지 않소."

그는 그 뚱보의 모습이 꽤 중후한 것 같지만 기실 매우 교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 마디도 참말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난장이는 마음이 곱고 입이 바른 것으로 보아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난장이의 몸을 받들 듯하고 경신법을 펼쳐서는 산벽을 타고 올라갔다. 산벽은 가파르기 이를 데 없어서 도저히 기어오를 수 없었으나 소봉이 진기를 돋우고 곧장 뛰어오르니 단숨에 십여 장을 날아오르게 되었다. 올라가다 보니 불쑥 불거진 바위가 있는지라 그 난장이를 바위 위에 내려놓고 자기는 한 발로 그 바위를 밟고 한 발은 허공에 둔채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에게 이야기해 주시오."

그 난장이는 십여 장이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그만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말했다.

"빨리...... 빨리 나를 내려놔 주시오."

소봉은 웃었다.

"그리 급하다면 당신 스스로 뛰어 내리도록 하시오."

난장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오? 뛰어 내렸다가는 박살이 나지 않겠소?"

소봉은 그의 성격이 솔직하다는 사실을 알고 약간 호감이 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라 하오?"

난장이는 대답했다.

"출진자라고 하오."

소봉은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 이름은 꽤 의젓하구나. 하지만 자신의 몸매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

그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정중히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만 실례하겠소. 다음에 만납시다."

출진자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안 되오! 안 되오! 아이쿠, 어이쿠! 나는 떨어져 죽게 되었소!"

그러면서 두 손으로 산벽을 꽉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바위를 움켜 잡으려 해도 바위들은 매끄럽기만 해서 움켜잡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의 무공은 약하지 않았으나 삼면이 허공인 높은 곳에 붕 떠 있는 듯한 처지인지라 그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소봉은 다그쳤다.

"빨리 말하시오? 신목왕정은 어디에 쓰는 것이오? 당신이 만약 말하지 않겠다면 나는 내려가겠소."

출진자는 급히 말했다.

"내가...... 반드시 말해야 하오?"

소봉은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소. 그러면 다시 만납시다.

출진자는 대뜸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내 말하리다! 말하리라! 그 신목왕정은 본문의 삼보 즉 세가지 보물 가운데 하나로서 화공대법을 연마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오. 사부님께서는 중원 무림의 사람들이 우리의 화공대법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만 놀라 혼비백산한다고 했소. 따라서 그와 같은 신목왕정을 보게 된다면 반드시 박살을 낼 것이라고 했소. 이거...... 이거야말로 희세기진으로서 엄청난 물건이라 할수 있소이다......."

소봉은 오래 ㅓ부터 화공대법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그것이 일종의 더럽고 음독한 사술을 부리는 무공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신목왕정의 용도가 그것을 익히는 데 있다는 얘기를 듣자 더 묻고 싶지 않아 손을 뻗쳐 출진자의 겨드랑이를 잡고 산벽을 타고 곧장 아래로 내려왔다.

이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산벽을 타고 질풍과 같이 내닫는 것은 절벽을 타고 오를 때 보다 더욱 빠르고 위험했다.

출진자는 그만 놀라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는데 그 한 소리를 다 지르기도 전에 두 발은 어느 새 땅에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놀라서 얼굴이 흙빛이 되었고 두 무릎을달달 떨고 있었다.

그 뚱보가 물었다.

"여덟째 사제, 이야기했는가?"

출진자는 이빨을 딱딱 마주칠 뿐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소봉은 아자에게 말했다.

"가져와."

아자는 물었다.

"뭘 가져와요?"

소봉은 말했다.

"신목왕정!"

아자는 여전히 딴전을 피웠다.

"형부는 마부인의 집에 놔두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나에게 달라고 하시는거예요?"

소봉은 그녀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가냘픈 몸매에 입은 옷도 매우 엷었다. 몸에 여섯 치 높이나 되는 목정을 숨기고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이 어린 아가씨는 교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녀의 문파에서 일어난 일이니 본래 나는 상관할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이 사마외도의 인물들은 조그만 일이 있어도 감고 돌며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를터이니 여간 귀찮은 노릇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입을 열고 말했다.

"그와 같은 물건은 이 소모가 얻어도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결코 가지고 있으면서 안 돌려 주는 것이 아니외다. 당신들이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소. 이 소모는 이만 실례하겠소이다."

그리고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몇 번 몸을 날리지 않아 그는 다섯 사람을 멀찌감치 떼놓을 수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은 그의 신위에 놀라 쫓아야 하는지 쫓지 말아야 하는지 의논을 하다 보니 소봉은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봉은 단숨에 칠십여 리를 달렸다. 그런 연후에야 음식점으로 찾아들어가 술과 음식을 먹었다.

그 날 밤 그는 주왕점에서 묵게 되었다. 한동안 운기행공을 한 후 즉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밤이 야심하게 되었을 때 잠결에 갑자기 몇 번 날카로운 피리소리가 들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났다. 잠시 후 서남쪽에서도 몇 번의 피리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동남쪽에서도 몇 번의 피리소리가 호응하듯 들려왔다. 피리소리는 날카롭고 처절한 것이 바로 성숙해 일파의 제자들이 불어대는 옥피리 소리였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한 떼의 사람들이 부근까지 달려왔구나. 그러나 아랑곳할 필요 없다.)

그런데 별안간 두 번 삑삑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는데 바로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즉 그가 묵고 있는 조그만 객점에서 울려퍼진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일어나게! 대사형이 도달했네! 십중팔구 소사매를 잡은 것 같아!"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잡았다면 그녀가 살아날 수 있을까?"

"그 누가 알겠는가? 빨리 가기나 하세."

곧이어 두 사람이 창문을 열어젖히더니 방에서 달려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또 성숙파의 두 문하제자이군. 이 조그만 객점에 그 같은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마도 나보다 먼저 왔으나 객점에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기때문에 내가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은 아자가 목숨을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소녀는 악랄하지만 내가 그녀가 비명에 죽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지하에서 아주를 대할 수 있겠는가?)

그는 즉시 방에서 달려나갔다.

그런데 피리소리는 끊임없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점차 서남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는 그 소리를 쫓아 달려갔다. 삽시간에 객점에서 먼저 나온 두 사람의 뒤를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십여 장의간격을 두고 뒤따랐다.

산봉우리를 두 개 넘자 앞쪽 산골짜기에 커다랗게 한 무더기의 불을 놓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불꽃은 높이가 약 다섯자 정도 되었고 순전히 파란 빛이어서 귀기가 서려 있어 여늬 불꽃과는 크게 달랐다.

앞서 가던 그들 두 사람은 곧장 그 불꽃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불꽃 앞에 이르더니 넙죽 큰절을 했다.

소봉은 살그머니 다가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살폈다. 그 불꽃 옆에는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갈포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파란 불빛에 비추어진 그들의 얼굴은 모두 처참해 보였다. 그리고 그 파란 불꽃의 왼쪽에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몸에는 자색의상을 걸치고 있는 것이 바로 아자가 아닌가? 그녀의 두 손은 이미 쇠고랑에 묶여 있었다. 희디 흰 얼굴이 불길에 비추어지자 괴상야릇하게 보였다.

뭇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불꽃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왼손을 가슴에 대고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소봉은 이들 사마외도의 인물들에게 괴이한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조금 전 두 명의 성숙해 제자가 대사형이 도착했으며 십중팔구 소사매를 잡은 모양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는 늙은 사람도 있었고 젊은 사람도 있었으나 복장은 똑같았다. 그리고 동작이나 표정으로 미루어 특별히 뛰어나게 사람을 통솔하고 지휘할 품위를 갖춘 사람을 차자 볼 수 없었다.

갑자기 삘리리! 하는 몇 번의 부드러운 피리소리가 동북쪽에서 들려왔다. 뭇사람들은 몸을 돌려 일제히 피리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다. 아자는 조그만 입술을 삐죽였을 뿐 몸을 돌리지 않았다. 소봉은 피리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 백의인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오고 있었는데 발걸음이 무척 빨랐다.

삽시간에 그는 불꽃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두 자 길이가 되는한 자루의 옥피리 끝을 입가에 갖다대고 불꽃을 향해 휙 하니 힘주어 불었다. 그러자 그 불꽃은 갑자기 꺼지는 것 같았으나 곧 크게 밝아지면서 펑! 하는 소리를 내는 동시에 불꽃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는데 그 높이가 약 일 장 정도 되었다. 그러고 난 후에야 서서히 불꽃이 다시 낮아졌다.

성숙해 사람들은 소리 높이 외쳤다.

"대사형의 법력이 신기하여 저희들로 하여금 크게 시야를 넓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제목 : [김용] 천룡팔부 5권 10장 2/2 소봉은 그 대사형이라는 사람을 바라보고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뭇사람의 대사형이라면 오륙 십세 정도 되는 늙은 이일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이십 칠팔세의 젊은이였다. 키는 크고 삐쩍 말랐으며 안색은 푸른 빛과 누런 빛을 함께 띠우고 있었으나 얼굴은 꽤 준수한 편이었다. 소봉은 조금 전 그가 두둥실 떠서 달려오는 듯한 경신법과 불꽃을 불어서 크게 하는 재간을 보고 그의 내력이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와 같이 힘주어 파란 불꽃을 꺼뜨리고 다시 크게 하는 것은 결코 내공의 힘이 아니라 피리에 어떤 인화물질과 같은 특이한 약가루를 숨기고 하는 짓이라 판단했다. 이때 대사형은 아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소사매, 이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소사매 때문에 성숙해에서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중원까지 달려온 것을 보면 소사매의 위풍이 대단해."

아자는 말했다.

"대사형까지도 오셨으니 이 사매의 얼굴이 자연 빛나는군요. 하지만 저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세력자들을 아마도 사형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을거예요."

그 대사형은 말했다.

"사매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인물이 있었던가? 그런데 누구인지 모르겠군."

아자는 말했다.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인물로 말하면 물론 저의 아버지, 백부님, 어머니, 형부와 같은 사람들이죠."

그 대사형은 코웃음쳤다.

"흥, 사매는 어릴 적부터 우리 사부님 밑에서 자라난 몸이고 부모가 없었는데 갑자기 어디에서 그와 같이 많은 친척들이 기어 나오게 되었지?"

아자는 정색했다.

"어머,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설마하니 바위에서 튀어나왔겠어요? 하지만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함은 큰 비밀이라 남에게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그 대사형은 말했다.

"그렇다면 사매의 부모님은 누구시지?"

아자는 조건을 내걸었다.

"말씀을 드리면 대사형도 깜짝 놀랄거예요. 듣고 싶다면 먼저 나의 쇠고랑을 풀어주세요."

그 대사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사매의 쇠고랑을 푸는 것은 어렵지 않아. 하지만 먼저 신목왕정을 내놓아야 한다."

아자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왕정은 저의 형부에게 있어요. 셋째 사형과 넷째 사형, 그리고 일곱째 사형과 여덟째 사형들이 저의 형부에게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으니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잖아요?"

그 대사형이란 자는 소봉이 낮에 만났던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부드러웠다. 그런데 그 네 사람은 안색이 크게 변했으며 지극히 두려운 빛을 나타냈다.

출진자는 말을 더듬으며 변명했다.

"대...... 대...... 대사형, 이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외다. 그녀...... 그녀...... 형부의 재간이 너무나 뛰어나서 우리...... 우리들은 뒤쫓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사형은 간단하게 말했다.

"세째 사제, 사네가 말해보게."

그 뚱보가 응했다.

"예, 예."

그리고 그는 어떻게하여 소봉을 만나게 되었으며 소봉이 어떻게 네 사람의 강철지팡이를 거두어 갔고 또 출진자를 어떻게 산 절벽 위로 데리고 올라가 신목왕정에 대해 캐물었는가를 일일이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본래 그는 일을 하거나 말을 할 때 느릿느릿했으며 또한 태연자약했는데 이때 대사형에 대해서만은 마치 큰 화를 당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음성마저 떨리고 있었다.

대사형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돌리더니 출진자에게 물었다.

"자네는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지?"

출진자는 말했다.

"저는...... 저는......"

그 대사형은 재촉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나에게 이야기를 해 보게나."

출진자는 말했다.

"말씀 드리죠...... 말씀 드리죠...... 그 신목왕정은 본문의 삼보가운데 하나라고 했죠...... 그리고...... 그리고...... 그 대법을 연마하는 것이라고 했죠...... 그리고 사부님께서 중원의 무림인들이 우리의 화공대법을 듣기만 한다면 그만 놀라 혼비백산하여 신목왕정을 발견하게 되면 반드시 박살을 낼 것이라는 말도 전했죠. 그리고 그것은 희세기진으로서 엄청난 보물이니...... 반드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대사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는 뭐라고 하던가?"

출진자는 말했다.

"그는......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를 내려 주었습니다."

대사형은 말했다.

"자네는 잘했군. 자네는 그 사람에게 신목왕정이 바로 우리 화공대법을 연마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며 그가 혹시나 화공대법이 어떤 것인가를 모를까봐 특별히 중원 무림인들이 그이름만 듣고도 혼비백산한다고 설명까지 했는가? 잘했네, 잘했어! 그는 중원 무림인이 아닌가?"

출진자는 쩔쩔맸다.

"저는...... 모릅니다."

대사형은 말했다.

"도대체 알고 있다는거야, 모르고 있다는 거야?"

그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으나 출진자처럼 성질이 열화같은 사람도 그만 놀라 혼이 나간 듯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변명했다.

"저는...... 드드득...... 저는...... 드드득...... 모릅니...... 드드득......

모릅니다."

드드득하는 소리는 바로 그의 윗이빨과 아래 이빨이 마주치는 소리였다. 그자신으로서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사형은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라던가, 아니면 두려워 하지 않던가?"

출진자는 말했다.

"아마도 그는...... 드드득......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드드득...... 않는 것 같았습니다."

대사형은 물었다.

"그가 왜 두려워하지 않았는지 자네는 짐작할 수 있겠는가?"

출진자는 대답했다.

"저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대...... 사형께서 알려 주십시오."

대사형은 말했다.

"중원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은 우리의 화공대법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런데 이 화공대법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목왕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신목왕정이 그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으니 우리가 화공대법을 연성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출진자는 고개를 숙였다.

"예, 대사형께서는 눈이 밝아 만리를 내다보시는군요. 이 사제...... 이 사제는 도저히 미칠 수가 없습니다."

소봉은 낮에 성숙해의 뭇제자들과 만나게 되었을 때 뭇사람들 가운데 이 출진자가 그래도 솔직한 면이 있다고 느꼈으며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진 바 있었다. 그런데 그가 대사형을 보고 그토록 무서워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써서 구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갈수록 못난 소리만 늘어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난장이는 비굴하기 이를 데 없는 말로 죽어라 하고 대사형을 추켜올리고 있었다.

소봉은 생각했다.

(저 사람은 호걸이라 할 수가 없다. 죽든 살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때사형은 아자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소사매, 그대 형부는 도대체 누구이지?"

아자는 말했다.

"형부 말인가요? 말씀을 드리면 깜짝 놀랄걸요?"

대사형은 말했다.

"상관없으니 말해라. 정말 명성이 굉장한 영웅인물이라면 이 적성자가 마음에 새겨두기로 하지."

소봉은 그가 스스로 자기의 별호를 밝히는 것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적성자라고? 꽤 거만한 이름이군! 그가 조금 전 몸을 날려 달려오는 신법이나 경신법은 절묘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결코 대리국의 파천석이나 사대악인 가운데의 한 사람인 운중학을 따를 수가 없었다.)

이때 아자는 입을 열었다.

"형부는 말이에요. 대사형, 중원무림에서 그 누가 으뜸으로 손꼽히죠?"

대사형이라는 적성자는 대답했다.

"모든 사람들은 '북교봉, 남모용'이라고 하던데 설마하니 그들 두 사람이 모두 그대의 형부는 아니겠지? 소봉은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저 녀석이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이는구나. 나중에 분수를 알도록 해주마.)

이때 아자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대사형, 정말 재미있는 말씀을 잘도 하시네요. 저에게는 한 사람의 언니밖에 없는데 어찌 두명의 형부가 있겠어요?"

적성자는 미소했다.

"나는 그대에게 한 분의 언니만 있는 줄을 몰랐어. 음, 설사 한분의 언니가 있다 하더라도 두 명의 형부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어?"

아자는 말했다.

"저의 형부는 성질이 대단해요. 다음에 제가 형부를 만나게 되었을 때 대사형의 그 말을 전해 드리면 대사형은 쓴맛을 보게 될거예요. 대사형에게만 말하는 것이지만 저의 형부는 바로 개방의 방주이며 중원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북교봉이라는 바로 그 사람이에요."

이 말이 떨어지자 성숙파에서 소봉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고 참을 수없어 일제히 아! 하고 부르짖었다.

더구나 둘째 사형이라는 사자코의 사내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그의 손에 졌다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불쾌히 여기지 않겠다."

적성자는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

"신목왕정이 개방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그야말로 일을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워졌군."

출진자는 두렵기는 했으나 말이 많은 자신의 성질을 조금도 억제하지 못하고 그 말을 받았다.

"대사형, 교봉은 이미 개방의 방주가 아닙니다. 대사형은 막 서쪽에서 오셨기 때문에 중원 무림에서 최근에 일어난 큰 사건을 듣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교봉으로 말하면 이미 개방의 제자들에 의해 방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일이라 좀더 수월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적성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잔뜩 팽팽해졌던 얼굴을 풀며 물었다.

"교봉이 개방에서 쫓겨났어? 그게 사실인가?"

그 뚱뚱한 셋째 제자가 그 말을 받았다.

"강호에서는 모두들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또한 그는 한나라 사람이 아니라 거란 사람이라고 하며 중원의 영웅호걸들은 하나같이 그를 죽여야만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부친을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사부님을 죽이고 친구를 죽이는 등 비열하기 짝이 없으며 못된 짓을 마구 저질렀다고 합니다."

소봉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이 몇 달 동안 겪은 일들을 듣게 되자 그만 가슴속이 쓰리고 아팠다. 아무리 무공이 절세적이고 담력과 견식에 있어서 뛰어난 면이 있다고 해도 강호에서의 명성이 그토록 나쁘고 천하영웅들의 비웃음을 산다는 것에 결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때 적성자는 아자에게 물었다.

"그대 언니는 어찌하여 그 같은 사람에게 시집을 갔지? 설마 하니 천하의 남자들이 모조리 죽었는가? 아니면 그에게 강간을 당하여 할 수 없이 처가 되었는가?"

아자는 나직이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 그에게 시집을 갔는지 잘 모르지만 언니 역시 그에게 일장을 얻어맞고 죽었어요."

뭇사람들은 다시 한 번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일을 행하는 것도 악독했다. 그러나 교봉이 부모와 사부, 그리고 친구를 죽인 끝에 처마저 살해했다는 말을 듣자 그 악랄함은 그야말로 천하에 보기 드물다고 생각했으며 그들 자신도 소봉에게는 미칠수 없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성자는 말했다.

"개방은 사람이 많고 세력이 크기 때문에 확실히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교봉이 방에서 축출당했다면 우리가 거리낄게 무엇이 있겠는가? 흐흐흐......"

그는 두어 번 냉소를 날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북교봉, 남모용'이라는 말은 별 것 아니야. 그것은 중원 무림인들이 서로 추켜 내세우는 말들에 불과하다. 나는 그 두 녀석이 우리 성숙파의 신공묘술을 감당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뚱보가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사제들도 모두 그같이 생각합니다. 대사형의 무공은 초범입성의 경지에 들어서 있으니 이번 중원에 오신 김에 북교봉과 남모용을 한꺼번에 죽여서 중원 무림인들의 예기를 꺾어 놓아 그들로 하여금 우리 성숙파의 위력을 알아 보도록 하십시오."

적성자는 물었다.

"그런데 그 교봉은 어디로 갔지?"

아자는 대답했다.

"그는 안문관 밖으로 간다고 했어요. 우리는 뒤쫓아가 어떻게 하든 그를 찾아내애 할꺼예요."

적성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데 둘째, 셋째, 넷째, 일곱째, 여덟째 이 다섯 명의 사제들은 이번에 적을 상대하다가 물러서게 되었으니 어떤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다섯 명은 허리를 굽혔다.

"삼가 대사형이 내리시는 벌을 받겠습니다!"

적성자는 말했다.

"우리는 중원땅에 와서 할 일이 많다 그런데 죄에 따라 벌을 내린다면 우리의 사람 수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니 내가 볼 때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말은 끝나지도 않은 채 그는 왼손을 훌쩍 쳐들었다. 그러자 소맷자락에서 다섯 점의 파란 불꽃이 튀어나왔다. 그 다섯 점의 파란 불꽃은 마치 다섯 마리의 개똥벌레처럼 날아가 각기 다섯 사람의 어깨죽지 위에 떨어졌고 곧이어 찍찍! 하는 소리를 냈다.

소봉은 그 속에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가 풍기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생각했다.

(대단한 녀석이군!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태우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불꽃은 얼마후 곧 꺼졌다. 그러나 다섯 명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졌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표정은더욱더 처참하게 변해갔다.

소봉은 계속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이 던진 것은 유황이나 초산과 같은 화탄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독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불꽃이 꺼진 연후에는 독성이 갈갗을 파고 들게 되므로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가보다.)

이때 적성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은 별로 대단찮은 연심탄이라는 것이다. 자네들이 한참동안 고통을 겪으면 참을성이 더욱 증가되어 다시 강적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단 한 번 싸위 굴복하여 우리 성숙파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을거야."

그 사자코의 사내와 뚱보는 말했다.

"예, 예. 대사형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나머지의 세 사람은 내력을 돋우어 고통에 항거하느라고 입을 벌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대의 향을 피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섯사람이 나직이 내뿜는 신음소리와 팔딱이는 숨소리가 점차 멎게 되었다. 그 동안 성숙자의 뭇제자들은 다섯 사람이 이를 갈며 고통을 억지로 참는 표정을 보고 하나같이 간담이 서늘해져서 몸을 벌벌 떨었다.

적성자는 시선을 서서히 출진자에게로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여덟째 사제, 자네는 본파의 중대한 기밀을 누설하여 본파의 중요한 보물이 폐손될 위험에 처하도록 만들었으니 어떤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출진자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별안간 그는 두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대사.... 대사형, 저는...... 저는 그때 정신이 나가 제멋대로 지껄인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는 나의 한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이후......

이후 그대의 소와 말이 되더라도 감히 한 마디의 원망하는 말도 하지 않겠으며......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손톱만큼도 갖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연신 큰 절을 해댔다.

적성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덟째 사제, 그대와 나는 그래도 동문사형제 사이가 아닌가. 만약 나의 힘이 닿는 대로 그대를 용서해 주고 싶네. 하지만...... 아, 만약 이번에 자네를 용서하게 된다면 이후 그 누가 사부님의 규율과 명령을 받들려고 하겠는가? 자네가 손을 쓰도록하게. 본문의 규칙은 자네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가 집법존자를 이길수만 있다면 어떠한 책벌도 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자, 일어나서 손을 쓰도록 하게나."

출진자는 감히 그와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땅 바닥에 쿵쿵 소리가 나도록 모리를 찧으며 절을 했다.

적성자는 말했다.

"자네가 먼저 손을 쓰기 싫다면 나의 일초를 받도록 하게."

출진자는 크게 한 소리를 부르짖더니 땅바닥에서 두 개의 돌맹이를 들어 힘주어서는 적성자에게 던지며 부르짖었다.

"대사형,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는 다시 두 개의 돌을 집어서 던지더니 몸을 동북쪽으로 날렸다. 그리고 휙휙하니 다시 두 개의 돌을 던지면서 그 땅딸한 살로 빚어진 공과 같은 몸을 날려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는 자기의 무공이 적성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섯 개의 돌맹이를 던져 잠시 동안 그가 막는 사이에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리고 이후 이름을 감추고 산다면 성숙파의 제자들이 다시 찾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때 적성자는 오른쪽 소맷자락을 휘둘러 가장 먼저 날아온 돌맹이를 슬쩍 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날아들던 돌맹이는 오히려 날아왔던 곳으로 되돌아갔으며 곧장 출진자의 등으로 향하는 것이아닌가.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이 힘을 빌어서 때리는 재간은 꽤 대단하구나! 이것은 진짜 실력으로서 결코 요사한 수법이 아니다.)

출진자는 등뒤에서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이는 것을 듣고 비스듬히 몸을 날려 왼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적성자가 떨쳐낸 두 번째의 돌맹이가 잇따라 들이닥쳤으며 그에게 숨돌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출진자는 왼발로 땅바닥을 한 번 찍었을 때 세찬 바람이 등을 노리고 밀어닥치는 것을 느꼈다. 세 번째의 돌맹이가 다시 날아든 것이다. 이렇게 되자 돌맹이가 한 번씩 날아올 때마다 그는 부득이 왼쪽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딛어야 했는데 여섯 번째 크게 왼쪽으로 내딛은 결과 다시 불꽃이 있는 옆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퍽! 하는 소리가 크게 일면서 여섯 번째의 돌맹이가 먼곳에서 떨어졌다.

출진자는 그만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손을 홱 뒤집더니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 자기의 가슴팍을 찌르려고 했다.

적성자는 때를 놓치지 않고 소맷자락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한 송이의 파란 불꽃이 출진자의 손목으로 쏟아지며 달라붙었다. 그러면서 칙칙!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목에 있는 혈도를 태우기 시작했다.

출진자는 그만 비수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대사형, 자비를 베푸소서! 대사형, 자비를 베푸소서!"

적성자는 다시 소맷자락을 휘둘러ㅆ. 그러자 한 줄기의 세찬 바람이 뻗쳐 와서 그 한 무더기의 파란 불꽃에 적중되었다. 그러자 그 불꽃 중에서 한 가닥 가느다란 파란 불꽃이 따로 떨어져나와 출진자의 몸으로 날아갔으며 몸에 닿는 즉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의복과 머리카락이 먼저 불붙기 시작했는데 출신자는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처절하고 참혹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일시에 죽지도 않았으며 살타는 냄새를 사방으로 풍기는 것이었다. 정말 가공할 만한 장면이었다.

성숙파의 문인 제자들은 그만 놀라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적성자는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들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음, 그대들은 나의 방법이 너무 악랄하고 출진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뭇사람들은 서둘러 대답했다.

"출진자는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대사형이 그를 도와 연체화골 시킨 것은 그에게 그야말로 인정과 의리를 베푼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사형은 총명하시고 과단성이 있어서 적합한 조처를 취하셨습니다.

결코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았고 또 지나치게 벌을 주지도 않아 우리들은 매우 탄복하고 있습니다."

"저 녀석은 본파의 기밀을 누설하여 사조께서 무공을 연마할 때 사용하시는 지보가 위험에 처하도록 했으니 응당 능지처참하여 그로 하여금 이레 낮 이레 밤 동안 고통을 당하게 한 후에 죽여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대사형께서는 동문의 우애를 존중하시어 그리하지 않았으니 저 녀석은 죽어 귀신이 되어도 대사형의 은혜를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죄가 있으니 대사형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비열하고 몰염치한 말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왔다. 거기다가 출진자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소봉은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몸을 슬쩍 돌려 오른발로 가볍게 땅을 차며 기척도 없이 이장 밖으로 물러났다.

적성자의 그토록 뛰어난 무공으로도 그가 움직이는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소봉은 즉시 그 자리를 떠나고자 했다.

"소사매, 그대가 본문의 보물을 훔쳐서 남에게 주었으니 어떤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소봉은 속으로 놀라며 생각했다.

(아맘도 아자가 받게 될 형벌은 출진자도다도 십 배나 더 참혹할 것이다. 내가 모른 척하고 떠난다고 해서 마음이 편할리 있겠는가?)

그는 즉시 몸을 돌려 다시 기척도 없이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와 몸을 숨겼다.

이때 아자는 입을 열었다.

"제가 사부님의 규칙을 어긴 것은 틀림없어요. 그러나 대사형께서는 그 보물을 되찾고 싶지 않나요?"

적성자는 말했다.

"그것은 본문의 삼보 가운데 하나이니 물론 거두어들여야 하지. 어찌 외부 사람 손에 들어간 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

아자는 말했다.

"저의 형부의 성질은 결코 좋은 편이 못 돼요. 그 보물은 내가 그에게 내준 것이니 내가 그에게 달라면 그는 반드시 고스란히 저에게 되돌려 줄 것이에요. 그러나 만약 다른 사람이 그에게 달라고 한다면 그가 내주리라고 생각하나요?"

적성자는 음하더니 말했다.

"그건 말하기 어렵지. 만약 보물인 목정에 어떤 조그만 훼손이 생긴다면 너의 죄는 더욱더 커지게 될 것이다."

아자는 천천히 말했다.

"사형들이 그에게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놓지 않을거예요. 대사형의 무공이 고강하나 기껏해야 그를 죽일 수 있을 뿐 그 보물을 되찾는다는 것은 아마 매우 어려운 노릇일거예요."

적성자는 생가해 보더니 물었다.

"그럼 그대의 말대로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아자는 말했다.

"사형들은 나를 놔주세요. 저로 하여금 혼자 안문관 밖으로 나가 형부에게서 그 보물을 되찾도록 해주세요. 이것이야말로 공을 세워 속죄라는 것이죠. 하지만 대사형께서는 이후에 다시 저에게 어떤 형벌도 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셔야 돼요."

적성자는 음침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은 듣기에 퍽 그럴싸하다. 하지만 소사매, 그렇게 된다면 이 대사형의 얼굴은 너 때문에 깍여질 대로 깍여지고 말 것이며 차후에는 내가 디시 성숙파의 대사형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대를 놓아 주었는데도 네가 멀리 그대의 형부와 도망쳐 버린다면 나는 또 어디 가서 그대를 찾지? 그 보물로 말하면 우리들은 반드시 찾아야 하겠지만 그 소문을 누설하지 않는 이상 그 교가라는 자도 경솔하게 보물을 망가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소사매, 그대가 손을 쓰도록 해라. 그대가 나를 이기기만 한다면 그대는 바로 성숙파의 대사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나는 그대의 호령을 듣고 그대의 처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소봉은 이때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 그들의 서열은 무공의 강약으로 정하는 것이지 입문의 빠르고 늦음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이가 젊으면서도 대사형이고 그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많이 있으나 오히려 사제가 되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서로 종종 다투거나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였을 것이니 무슨 동문의 정과 형제의 우애를 느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는 이 규칙이 바로 성숙파의 무공이 이대가 일대보다 더욱 뛰어나게 되고 강해지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성숙파 문인들 가운데서 대사형의 권력은 매우 컸다. 만약 사제되는 사람이 승복할 수 없다면 언제든지 무력으로 반항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는 무공의 고저로 대사형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대사형이 이기게 된다면 사제 되는 사람은 자연히 죽음을 당하든 얻어맞든 대사형에게 결코 반항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사제가 이기게 된다면 그가 즉시 껑충 뛰어 대사형으로 올라서게 되며 오히려 원래의 대사형을 죽일 수 있었다.

사부가 되는 사람은 눈을 멀거니 뜨고 구경만 할 뿐 간섭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규칙 아래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무공을 정진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여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했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고 그저 무공이 낮은 양 행동함으로써 대사형의 의심이나 시기를 받지 않도록 했다.

출진자는 본래 팔힘이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만든 강철지팡이는 다른사람들의 지팡이보다 길고 굵었으며 매우 무거웠다.

따라서 서열에 있어서는 여덟째이지만 벌써부터 적성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번에 대사형인 적성자는 바로 그러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구실을 붙여 그를 제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파의 문인 제자들은 종종 무공을 연마하다가 어떤 일정한 조예에 이르게 되면 그만 정체되며 무공의 발전이 정지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숙파의 문인제자들은 반 나절도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했으며 언제나 부지런히 무공을 연마했다. 따라서 대사형이 되는 사람은 매일같이 가슴을 조이며 어떤 사제가 언제 자기에게 도전할지 몰라 두려워했다. 그리고 사제 되는 사람은 언제나 대사형이 자기에게 어떤 시비를 걸지 않나 해서 걱정을 했다. 그러나 무공을 뛰어나도록 연성하게 되었을 때도 대사형을 반드시 이길수 있다는 자신이 없으면 쉽게 시비를 걸거나 도전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자는 본래 적성자가 성숙파의 보물인 목정을 보아서 자기를 해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그와 같은 속임수에 넘어 가지 않고 즉시 손을 쓰라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되자 그녀는 그만 놀라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출진자는 아직까지도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출진자의 운명이 바로 곧 자기의 운명이 되리라 생각하니 온몸이 떨려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의 손과 발이 모두 다 쇠고랑에 묶여 있는데 어찌 대사형과 손을 쓸 수 있다는 말이에요? 대사형이 나를 헤치려고 한다면 광명정대하게 할 것이지 이와 같은 음모와 간계를 쓸수 있느냔 말이에요? 적성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먼저 풀어 주지."

그리고 그는 소맷자락을 한 번 떨쳤다. 한 줄기의 세찬 기운이 곧장 불꽃 쪽으로 쏟아졌다. 그러자 불꽃에서 다시 한 가닥 가느다랗고 파란 불꽃이 떨어져 나오더니 마치 한 가닥 가는 물줄기처럼 아자의 두 손 사이의 쇠고랑이 있는 쪽으로 쏘아졌다.

소봉은 그 파란 불꽃이 아자의 몸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는것을 정확히 내다보고 있었다. 찍찍 하는 가벼운 음향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자의 두 손은 바깥 쪽으로 쳐들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손을 묶었던 쇠고랑이 이미 가운데서 잘라지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두 개의 무쇠 고리는 여전히 그녀의 손목에 걸려 있었다.

이때 갑자기 그 파란 불꽃은 벼락같이 움츠러 들더니 재차 앞으로 쏘아졌다. 이번에는 그녀의 발목에 채워둔 쇠고랑 쪽으로 쏘아진 것이다.

그리고 삽시간에 쇠고랑은 그 파란 불꽃에 의해 잘렸다.

소봉은 처음으로 파란 불꽃이 쇠고랑을 태워 녹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적성자의 내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몰래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그 파란 불꽃이 발에 채인 쇠고랑을 태우게 되었을 때 파란 불꽃이 이르자 쇠고랑의 빛깔이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역시 그 불꽃에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이지 결코 순전히 내력에 의하여 쇠고랑이 잘라진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이때 성숙파의 뭇제자들은 끊임없이 칭찬의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대사형의 내공은 정말 초범입성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야말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당금 천하에서 사존을 제외하면 대사형이 천하무적입니다!"

"북교봉과 남모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대사형의 신발을 들 자격조차 없습니다!"

"소사매, 이제야 무서움을 알았겠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미 후회해 봤자 늦었어!"

11. 대설원 너나할 것 없이 한 마디씩 다투어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적성자는 그와 같은 아첨의 말을 듣더니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았다.

아자는 머리가 몹시 영리한 편이었으나 눈앞의 위기에서 벗어날 묘책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함으로써 적성자가 좀더 늦게 손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뜻있는 말을 주워섬길 수가 없게 되자 그 떠들어대는 소리들이 차츰 낮아지게 되었다.

적성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사매, 이제 손을 쓰시지?"

아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손을 쓰지 않겠어요."

적성자는 물었다.

"어째서? 내가 보기에는 역시 손을 쓰는 것이 좋아."

아자는 말했다.

"나는 대사형과 싸우지 않겠어요. 대사형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쓸데없이 왜 힘을 소비해요? 대사형이 나를 죽일려면 얼마든지 죽이도록 하세요."

적성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결코 그대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그대와 같이 아름다운 소녀를 죽인다는 것은 실로 애석한 노릇이건든.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소사매, 그대가 초식을 펼치도록 해. 그대가 나를 죽이게 된다면 그대는 대사저가 되는거야. 성숙파의 사람들은 사부님 이외에 모두가 그대의 호령을 듣게 될 것이란 말이야."

아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나이어린 여자에 불과해요. 살아 생전에 영원히 무공으로 대사형을 이길 수 없으니 대사형은 저를 거리낄 필요가 전혀 없어요."

적성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만약 이토록 커다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나는 물론 영원히 그대를 괴롭히지 않았을거야. 그러나 지금...... 나야말로 도와주고 싶지만 도울 수가 없구나. 소사매, 나의 공격을 받도록 해라."

그리고 그는 소맷자락을 한 번 휘둘렀다. 한줄기의 세찬 바람이 불꽃이 있는 곳으로 덮쳐갔다. 그러자 한 가닥 가느다란 파란 화선이 곧장 아자에게로 서서히 쏟아졌다.

적성자는 대뜸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은 듯 그 불꽃이 날아가는 기세를 무척 느리게 만들었다.

아자는 놀라 한 소리 부르짖으며 오른쪽으로 두 걸음을 옮겼다. 한가닥 파란 불꽃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아자는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렇게 되자 그녀의 등은 어느덧 소봉이 몸을 숨기고 있는 커다란 바위 앞쪽에 기대는 꼴이 되었다.

적성자는 내력을 돋우어서 서서히 그 불꽃을 앞으로 밀어붙였다.

아자는 이제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옆으로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런데 적성자가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두 줄기의 세찬 바람을 좌우 양쪽으로 나누어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그녀는 옆으로 피할수도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명에는 그 파란 불꽃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봉은 그 파란 불꽃이 그녀의 얼굴과 두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러 한치씩 한치씩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직이 말했다.

"겁내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 주겠다."

그리고 그는 큰 바위 뒤에서 손을 뻗쳐 손바닥을 그녀의 등에 갖다대고 다시 말했다.

"장력을 돋우고서 파란 불꽃을 후려쳐라."

아자는 혼비백산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소봉의 음성을 듣게 되자 그야말로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생각도 해 보지 않고 그녀는 일장을 후려쳤다. 이때 소봉의 내력은 이미 그녀의 몸안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에 그녀의 알장의 장력은 웅후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한 줄기의 파란 불꽃은 벼락같이 두 자나 움츠러 들었다.

적성자는 깜짝 놀랐다.

아자가 이미 도마 위의 고기 신세에 불과한 것을 보고 그는 자기 자신의 무공을 자랑할 겸 파란 불꽃을 그녀의 얼굴 좌우 양쪽으로 맴돌도록 만들어서는 그녀가 놀라 큰 소리로 부르짖도록 만들참이었다. 그리하여 뭇동문들 앞에서 자기의 위세를 잔뜩 떨친 이후에야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이 어린 그녀는 놀랍게도 무서운 내력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적성자로서는 실로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 성숙파의 무공은 사부가 전수한 이후에 각자가 스스로 수련을 하기 때문에 도대체 조예가 어떠한지 동문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자가 일장을 후려쳐서 파란 불꽃을 두 자 정도 물러나게 만드는 것을 보고 뭇사람들은 모두 다 놀라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물론 하나같이 놀라고 의아스럽게 생각했지만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이 뒤에서 몰래 돕고있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아자의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암암리에 지극히 조예가 깊을 정도로 연마한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적성자는 다시 공력을 돋우고 파란 불꽃을 앞으로 밀어보냈다.

파란 불꽃은 재차 아자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갔다. 이번에는 지극히 강맹한 힘을 썼기 때문에 파란 불꽃이 날아가는 기세는 매우 빨랐다.

아자는 음!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어떻게 막아야 할지를 몰랐다.

그녀는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다행히 이번에 적성자는 그녀의 좌우 양쪽으로 펼쳐낸 장력을 이미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그녀는 무사히 파란 불꽃을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불꽃은 바로 그 커다란 바위에 적중하게 되었으며 칙! 하는 소리를 내었다.

소봉은 나직이 말했다.

"왼손을 휘둘러 파란 불꽃의 줄기를 끊어 버리도록 해라."

아자는 왼손을 쳐들어서는 한 줄기 장력을 파란 불꽃의 가운데를 향해 후려쳤다. 그렇게 되자 파란 불꽃은 대뜸 두 토막으로 나누어졌다.

앞쪽 반 토막의 불꽃은 뒤에 이어지는 불길을 이어받지 못하게 되자 바위 위에서 한동안 타오르더니 점차 사그라졌다.

적성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한가락 불꽃이 만약 꺼지게 된다면 뭇동문들 앞에서 나는 또 한차례 지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같은 창피를 내가 어찌 당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즉시 장력을 돋우어서는 파란 불꽃을 바위 있는 곳으로 쏘아보냈다. 그 한 줄기 잘라져 나간 파란 불꽃을 이어 줄 생각이었다.

아자는 이때 등에 갖다댄 손에서 내력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고 만약 장력을 내쏟지 않는다면 자기의 몸뚱아리마저 터져나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즉시 오른손을 급히 휘둘러 내려쳤다. 소봉의 내력은 웅후하기 짝이 없었다. 그와 같이 웅후한 내력이 아자의 몸안으로 주입된 이후에 위력이 조금 약화되기는 했지만 만약 그녀가 운용을 잘하여 적성자에게 의표를 찌르는 공격을 가한다면 단번에 승리를 거둘 가능성도 지극히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운 나머지 그 일장을 아무렇게나 후려치게 되었다.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 가느다란 불꽃은 그만 꺼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싸움에서 한 번 이긴 셈은 되지만 적성자으 털끝 하나 손상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되자 성숙파의 뭇동문들은 그만 서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일곱째 사제는 때를 가리지 않고 대사형을 추켜 세우며 말했다.

"대사형, 대사형의 공력은 정말 강하오. 소사매가 일장을 후려쳤으나 기껏해야 그 신화를 약간 꺼뜨렸을 뿐 대사형을 어찌하지는 못했잖소?"

이 몇 마디의 말로 그는 대사형에게 아첨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적성자가 들을 때는 자신을 마치 비웃는 것 같이 들렸다.

별안간 적성자는 옷자락을 한 번 휘둘렀다. 파란 불꽃이 비스듬히 쏘아지면서 칙! 하는 소리와 더불어 한 대의 화살처럼 일곱째 사제의 얼굴로 쏘아졌다.

파란 불꽃은 잠시 동안 탔을 뿐 곧 움츠러 들었으나 그 일곱째 사제는 어느덧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적성자는 일곱째 사제의 버릇을 톡톡히 가르친 후 곧 왼손을 비스듬히 후려쳤다. 그러자 한 줄기 파란 불꽃이 재차 아자에게로 쏘아졌다.

이번의 불꽃은 지난 번 것보다 훨씬 굵었고 기세등등했으며, 그 불빛을 받은 아자의 머리와 얼굴은 모두 파랗게 물들게 되었다.

아자는 장력을 내쏘아 불꽃이 앞으로 가까이 다가들지 못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그 불꽃은 대뜸 허공에서 정체하게 되었으며 앞쪽의 불꽃이 앞으로 한두 치 나아가게 되었다가는 다시 뒤로 한두 치 물러서곤 했다.

어둠속에 마치 한 마디의 까맣고 기다란 뱀이 허공에 가로누워서는 가볍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빛깔은 화려한 데다가 이상야릇했으며 광채가 번쩍번쩍 끊임없이 빛나고 있었다.

적성자는 잇따라 세 번이나 장력을 돋우고 밀어붙였으나 아자는 이를 모두 막아냈다. 이렇게 되자 적성자는 그만 초조해지고 또 한편으로는 분노가 끓어오르게 되었다. 그는 다시 장력을 돋우어서 앞으로 밀어냈으나 여전히 조금도 불꽃을 앞으로 내보낼 수가 없었다.

별안간 그는 한줄기 차가운 기운이 등줄기에서 위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녀...... 그녀...... 그녀는 아직 다 쏟아내지 않은 기운이 남아있다. 원래 줄곧 나를 희롱하고 있었구나. 설마하니 사부님께서는 그녀를 편들어 몰래 본문의 최상승 무공을 그녀에게 전수한 것이란 말인가? 나는......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됐구나.)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그만 두려움이 앞서게 되어 손에 돋우었던 장력이 즉시 약화되었다. 따라서 그 파란 뱀과 같은 불꽃은 번개와 같이 한 무더기의 불꽃 있는 쪽으로 밀려갔다.

그러나 적성자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장력을 더욱더 끌어올려 밀어보냈다. 파란 불꽃은 갑자기 동이만한 불덩이로 화해 아자에게 질풍과 같이 쏘아졌다.

아자는 오른손을 들어 급히 후려쳤으나 그 불덩이의 달려드는 기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재차 왼손마저 뻗쳐냈다. 두 손으로 함께 힘을 쏟아내서야 겨우 그 불덩이를 막을 수 있었다.

이때 파란 불덩이는 허공에서 뒤룩뒤룩 신속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뭇제자들은 갈채를 보내며 하나같이 말했따.

"대사형의 공력이 신묘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저 계집애는 야단나게 되었습니다."

"소사매, 너는 무엇을 믿고 강한 척하느냐? 일찌감치 졌음을 시인해라! 그러면 대사형께서 너에게 살 기회를 열어 주실지도 모른다."

아자는 끊임없이 장력을 돋우었으나 소봉이 밀어 주는 장력이 강하기는 하나 역시 외부에서 빌어온 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제대로 그 힘을 응용하지 못했다.

적성자는 그녀와 잠시 동안 대치 상태를 이룬 연후에 그녀의 내력이 지니고 있는 약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별안간 그는 두 눈썹을 곤두세우며 오른손의 식지를 들어서는 불꽃더미 쪽을 향해 두어 번 찔렀다. 그러자 불꽃더미에서 칙칙!하는 가벼운 음향이 일면서 몇 송이의 불꽃이 터져나왔다. 그러더니 그 불꽃은 유성처럼 좌우 양쪽으로 나뉘어져서는 아자에게로 쏘아져오는데 그 기세가 실로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자는 그만 놀라 부르짖었다.

"어머나!"

그녀의 장력은 이미 앞쪽에서 육박해 오고 있는 불덩이를 막아 내고있는 상태여서 좌우 양쪽으로 날아드는 불꽃을 막느라고 어느 한 손도 뺄수가 없는 상태였다. 어찌 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그녀는 그저 몸을 옆으로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좌우 양쪽으로 날아드는 불꽃은 적성자가 내력을 밀어붙이는 데 따라 즉시 뒤쫓아왔다.

소봉은 아자가 이미 항거할 힘이 없는 것을 보고 즉시 왼손을 살짝 쳐들었다. 그리고 한 줄기의 장력을 가만히 밀어냈다. 따라서 아자의 몸이 번쩍 움직이게 되었을 때 양쪽의 허리띠가 날아오르도록 만들었다.

그 양쪽의 허리띠는 두둥실 떠올라 한 번 떨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두 송이의 좌우 양쪽으로 날아들던 불꽃은 신속하기 이를데 없이 오히려 적성자에게로 되쏘아져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적성자는 그만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두 송이의 불꽃은 그의 발밑을 스칠 듯하며 지나가게 되었다. 두 명의 사제는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재간이외다! 대사형은 정말 대단하오!"

그런데 그 갈채소리가 미처 멎기도 전에 두 번째 불꽃이 적성자의 아랫배 쪽으로 날아들었다.

적성자의 몸은 허공에 떠있는지라 다시 몸을 위로 솟구쳐 올릴 수 없었다. 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불꽃은 그만 그의 아랫배에 맞아 불타기 시작했다.

적성자는 아! 하는 절규와 함께 땅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불덩이도 즉시 불꽃더미 쪽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뭇제자들은 일제히 아자를 바라보았으며 얼굴에 존경과 두려워하는 빛을 드러냈다.

그리고 하나같이 생각했다.

(보기에 소사매의 공력은 약하지 않은 것 같다. 대사형이 반드시 이긴다고 할 수 없으니 설사 갈채를 보내더라도 너무 큰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겠다.)

적성자의 안색은 매우 참담해졌다.

그는 손을 뻗쳐 틀어올린 머리를 풀어 머리카락을 길게 내려뜨렸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는 혀끝을 물어 한 모금의 선혈을 불꽃더미 쪽으로 내뿜었다. 그러자 그 불꽃더미는 갑자기 어두워지는가 했는데 곧 크게 밝아졌으며 뭇사람들은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뭇제자들은 역시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대사형은 정말 뛰어난 공력을 지니고 있구려! 오늘 우리의 시야를 크게 넓혀 주었소이다!"

적성자는 이때 벼락같이 몸을 회전시켰다. 그는 마치 팽이처럼 잇따라 열 몇 번을 돌더니 커다란 소맷자락을 떨쳤다. 그러자 전체의 불꽃더미가 벼락같이 솟구쳐 오르더니 마치 불로 만든 담장처럼 아자에게로 덮쳐가게 되었다.

소봉은 적성자가 지극히 무서운 사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적성자가 한평생 쌓은 공력이 모조리 그 일격에 모아졌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소봉은 적성자가 간악한 사람이기는 하나 자기와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그와 크게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즉시 그는 펼쳤던 손바닥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아자의 등을 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겨서는 그 자리에서 떠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자가 부르짖었다.

"아주언니, 아주언니! 그대의 친누이 동생이 남에게 이토록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언니는 저를 위해 화풀이를 해 주지 않나요?"

소봉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아주를 부르고 있다. 내...... 내가...... 어찌 이대로 떠날 수 있겠는가?)

소봉이 잠시 주저하는 사이에 그 파란 불담장과 같은 화염은 신속무비하게 아자의 몸 위로 떨어지려고 했다.

부득이 소봉은 두 손을 일제히 내밀었다. 두 줄기 세찬 장풍을 아주의 소맷자락 속으로 밀어 보낸 것이다.

파란 화염이 비쳐지는 가운데 아자의 두 자색 소맷자락이 바람을 받고 불룩해지면서 바깥쪽으로 휘날렸다. 일순간 소봉의 무서운 장력이 어느덧 그 담장과 같은 화염더미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 파란 화염더미는 허공에서 일순 정체하더니 천천히 적성자 쪽으로 물러갔다. 적성자는 대경실색해서 다시 혀끝을 깨물어 한 모금의 선혈을 화염더미 속으로 내뿜었다. 화염이 불빛을 내쏟으며 되돌아 갔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두자 정도 나가게 되었을 뿐 소봉의 내력에 다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뭇제자들은 아자의 옷 소맷자락이 잔뜩 부풀어 오른 것이 바로 바람을 가득 맞게 된 범선처럼 보이는지라 모두들 이 소사매의 내력이 지극히 고강한 줄만 알았지 그녀 등 뒤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돕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적성자의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한모금 한모금의 선혈을 끊임없이 화염더미 쪽으로 내뱉었다.

그가 한 모금의 선혈을 내뿜을 때마다 공력은 한 푼씩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호랑이 등에 탄 격으로 끝까지 버텨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자를 불태워 죽인 후 즉시 이 자리를 떠나 천천히 다시 수련을 해서 공력을 회복시킬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제들이 그의 바닥난 것을 공력이 알아차리고 어쩌면 이 기회에 이미 다 만들어진 득을 보려고 그에게 도전을 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는 끊임없이 선혈을 내뿜게 되었으나 소봉의 웅후한 내력 앞에 파란 불꽃더미는 반 자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소봉은 상대방의 내력에서 그의 진기가 갈수록 약해져서는 이제 기름이 다한 등불처럼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자에게 말했다.

"너는 그에게 졌음을 인정하도록 해라. 더 싸울 필요가 없다."

아자는 부르짖었다.

"대사형, 그대는 나를 이길 수가 없어요! 그대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면 내 그대를 죽이지 않도록 하죠. 졌음을 시인해요."

적성자는 당황하고 다급해서 어쩔줄을 몰라 했다.

그는 자기의 명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고 있었던지라 아자의 말을 듣고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자는 다시 물었다.

"왜 입을 열지 않죠? 그대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졌음을 시인하지 않는거예요?"

적성자는 다시 연신 고개를 끄덕였으나 시종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전력을 돋우어서 소봉과 상대하고 있었다. 입을 열기만 하면 진기를 돋울 수가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파란 불꽃더미가 되돌아와서는 자신을 덮치게 되니 그는 그저 불타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때 뭇동문들은 다투어 욕을 퍼부었다.

"적성자, 너는 졌다! 어째서 빨리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지 않는가?"

"저와 같은 밥통이 나서서 못난 꼴을 보이다니, 우리 성숙파의 체면을 깡그리 뭉게 버리게 되었다!"

"소사매가 넓은 아량을 베풀어 너의 목숨을 용서하겠다고 했는데 너는 무엇을 믿고 억지로 버텨 내려고 하느냐? 빨리 입을 열고 말을 해라, 말을 해!"

"적성자, 나는 십 년 전에 이미 네가 성숙파에서 가장 못된 자인 줄을 알고 있었다! 소사매가 오늘 문호를 정리하여 그야말로 커다란 공적을 세운 셈이니 소사매야말로 진정 우리 성숙파를 다시 일으키게 된 대공신이다!"

"너는 음모로 사존을 암살했으며 소림파에 붙으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소사매가 너의 간계를 알아차렸다! 너와 같은 후례자식은 정말 염치라는 염자도 모르는 작자이다!"

"소사매의 신공이 기묘하여 사존을 제외하고서는 이 천하에 그녀가 가장 무섭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아 보았었다!"

"적성자, 네 스스로 신목왕정을 훔치고서 되려 소사매에게 누명을 씌웠으니 그야말로 살기 귀찮아진 것이다!"

소봉은 이 한 떼의 사람들이 바람을 보고 배를 돌리 듯 강한 자를 추켜세우고 약한 자를 압박하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더군다나 적성자가 열세에 몰리게 되자 즉시 안면을 바꾸고 욕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사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대사형을 이 세상에서 다시없는 대영웅으로 칭찬했는데 이제는 마구 욕지거리를 퍼부어 개, 돼지만도 못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성숙노괴가 거둔 제자들의 인품이 이토록 형편이 없구나! 아자가 어릴 적부터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으니 행동거지가 단정하지 못하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로군!)

그리고 적성자가 어쩔줄 모르는 것을 보고 너무 심하게 대하고싶지 않아 즉시 내력을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되자 아자의 부풀어 올랐던 한 장의 소맷자락도 즉시 꺼져버리게 되었다.

적성자는 지칠 대로 지친 듯 몸을 휘청거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두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아자는 입을 열었다.

"대사형, 어떻게 된거예요? 이제 나에게 승복했어요?"

적성자는 나직이 말했다.

"졌음을 시인하겠소. 그대는...... 그대는...... 나를 대사형이라 부르지 마시오. 그대가 우리의 대사저이외다."

뭇제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말 잘 됐다! 잘 됐어! 대사저는 무공이 절세적이다! 성숙파에서는 이와 같은 한 분의 전인이 생기게 되었으니 우리 성숙파는 더욱더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대사저, 빨리 가서 북교봉과 남모용이라는 자들을 죽여서 우리 성숙파로 하여금 중원에서 유아독존격인 문파로 만듭시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북교봉은 대사저의 형부인데어찌 죽일수 있느냐?"

"왜 죽일 수 없어? 그가 우리 성숙파의 문하로 들어와 졌음을 즐거이 시인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죽여야 마땅하지!"

아자는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들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거예요? 모두들 조용히해요."

뭇제자들은 대뜸 조용해졌다.

아자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적성자에게 말했다.

"본문의 규칙에 따르면 전인을 바꾸게 된 이후 옛날 전인은 마땅히 어떤 조치를 당하게 되죠?"

적성자는 이마에서 식은 땀을 줄곧 흘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 대사저, 제발...... 제발......."

아자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나는 정말 그대를 용서하고 싶어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본문의 규칙을 내 손에서 그르칠 수는 없어요. 그대는 손을 써요. 무슨 재간이 있든 힘을 다해 나에게 펼쳐 보란 말이에요."

적성자는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었음을 알고 더 애걸하지 않았다.

진기를 두 손에 돋우고는 화염더미가 있는 쪽으로 두 손을 밀어냈다.

그러나 그의 내력이 이미 고갈되어 두 손을 밀어내었으나 그 화염더미는 그저 미미하게 두어 번 흔들거렸을 뿐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아자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재미있군요! 재미있어요! 대사형, 그대의 법술이 어째서 갑자기 듣지 않게 되었죠?"

그리고 그녀는 두 걸음 나서더니 두 손을 들어 후려쳤다. 그러자 한 줄기 파란 불꽃이 화염더미에서 뻗쳐나와 적성자의 몸으로 쏘아졌다.

아자의 내력은 평범해서 그 파란 불꽃이 달려가는 기세는 지극히 느릿했고 똘똘 뭉쳐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성자는 이때 손톱만큼도 반격할 힘을 갖지 못하고 있었고 몸을 일으켜서 달아날 기운조차 없었다.

파란 불꽃이 그의 몸에 쏘아지는 순간 삽시간에 그의 모리카락과 옷자락에 불이 붙게 되었고 미친 듯 울부짖음을 토해 내는 가운데 그의 전신은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뭇제자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크게 있었다. 일제히 대사저의 공력이 출신입화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칭찬을 했으며 성숙파를 위해 오랫 동안 화근이 된 망나니를 없앰으로써 사존의 뜻을 받들게 되었고 큰 공을 세웠다고 했다.

소봉은 강호에서 참혹하고 흉폭한 일들을 적지 않게 보아 왔으나 아자같이 아름답고 의젓하며 천진하면서도 귀여운 소녀가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이토록 지독하게 악랄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그 자리에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때 아자가 소리쳤다.

"형부, 형부, 가지말고 나를 좀 기다려요!"

성숙파의 뭇제자들은 커다란 바위 뒤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모두 의아해 했다. 더군다나 둘째 제자와 셋째 제자등은 바로 소봉인 것을 알아 보고는 모두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아자는 다시 부르짖었다.

"형부, 나좀 기다려 줘요!"

그리고 서둘러 소봉의 곁으로 달려왔다.

이때 적성자의 처참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뾰족한데다가 산골짜기에 메아리쳐서 되돌아오는 소리가 있어 더욱 듣기에 소름이 끼쳤다.

소봉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는 왜 나를 따라오느냐? 너는 성숙파의 전인이 되었고 저 한 떼의 사람들의 대사저가 되었으니 이제는 만족해야 할 것이 아니냐?"

아자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요."

그리고 나직이 음성을 낮추어서 말했다.

"나의 이 대사저는 그저 얻은 것이니희안할 게 뭐 있어요? 형부, 우리 함께 안문관 밖으로 가요."

소봉은 적성자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이곳에 더 머물로 싶지 않아 재빠른 걸음으로 북쪽으로 향했다.

아자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고개를 돌리고 소리 쳤다.

"둘째 사제, 나는 볼일이 있어 북쪽으로 가요! 그대들은 이 부근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되 그 누구도 함부로 떠나지 않도록 하세요. 알았어요?"

뭇제자들은 일제히 몇 걸음 달려나가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삼가 사저의 법지를 받들겠으며 뭇사제들은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투어 칭송했다.

"삼가 대사저께서 길을 가시는 동안 편안하시기를 빕니다."

"삼가 대사저께서 만사여의 하기를 빕니다."

"삼가 대사저께서 하는 일마다 순조로워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대사저께서는 몸에 그와 같은 신공을 지니고 있으니 천하에 무슨 일을 해결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비는 것도 아마 쓸데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아자는 손을 돌려 몇 번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 얼굴에 득의에 찬 웃음을 띠었다.

소봉은 벌판에 쌓인 하얀 눈의 광채를 빌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천진하고 귀여운 미소가 가득 떠오른 것을 볼수 있었다. 그 얼굴빛은 그야말로 재미있는 장난감이나 맛있는 사탕과자를 얻은 어린애 같았다.

만약에 조금 전 친히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바로 방금 대사형을 죽이고 천하제일 대사파의 전인이라는 위치를 차지했으리라고 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봉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삭막하기만 하고 재미없게 느껴졌다.

아자는 물었다.

"형부, 왜 한숨을 쉬시죠? 제가 너무 짓궂은가요?"

소봉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너는 짓궂은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잔혹하고 흉악하다. 우리 나이가 든 남자들이 그와 같은 짓을 한다면 몰라도 너는 어린 소녀에 불과한데 어찌하여 손을 씀에 있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는단 말이냐?"

"형부는 알면서 묻는거예요, 아니면 정말 모르는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봉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엔 호기심이 잔뜩 어려 있었다.

소봉은 되물었다.

"내가 어찌 해서 알면서 묻는다는거지?"

아자는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네요. 어째서 형부가 모른단 말이에요? 나의 이 대사저는 가짜로서, 형부가 싸워서 얻어 준 것이 아니겠어요? 다만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만약 내가 그를 죽이지 않고 어느 날엔가 그와 같은 사실을 그가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형부가 꼭 내 곁에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 나의 목숨은 자연 그의 손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죽여야 했단 말이에요."

소봉은 말했다.

"좋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네가 나를 따라 안문관으로 가겠다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이지?"

아자는 소봉을 쳐다보며 야무진 어조로 말했다.

"형부, 제가 형부에게 솔직히 말씀드릴께요. 좋죠? 들으시겠어요?"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잘 한다. 본래 너는 줄곧 나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았구나. 이제서야 말을 하겠다니 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말했다.

"물론 좋다. 그러나 나는 네가 솔직한 말을 하지 않을까봐 두렵다."

아자는 깔깔거리고 몇 번 웃더니 손을 들어 그와 팔장을 끼며 말했다.

"형부도 제가 겁날 때가 있어요?"

소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를 겁내는 일이 많단다. 무엇을 겁내느냐면 일부러 화를 일으키거나 함부로 사람을 해치게 될까봐 겁이 날뿐만 아니라 또한 이상야릇한 짓을 할까봐 겁이 난다."

아자는 그 말을 가로챘다.

"그러면 형부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못살게 압박을 당하게 되고, 남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겁나지 않아요?"

소봉은 대답했다.

"내가 너의 언니의 진지한 부탁을 받았으니 물론 너를 돌봐야 하겠지."

아자는 물었다.

"만약 저의 언니가 부탁을 하지 않았다면요? 만약 제가 아주의 여동생이 아니라면요?"

소봉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그렇다면 내가 왜 너를 아랑곳하겠느냐?"

아자는 다시 말했다.

"저의 언니가 그렇게도 좋으세요? 그리고 형부는 마음속으로 저를 전혀 개의치 않지요?"

소봉은 말했다.

"너의 언니는 너보다 천 배 만 배 났다. 아자, 너는 한평생 영원히 그녀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눈가를 은근히 붉혔다. 음성마저 목이 메였다.

아자는 조그만 입술을 뾰로통해 가지고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아주가 모든 면에 있어서 나보다 좋다면 그녀를 불러 벗삼도록 하세요. 나는 이만 실례하겠어요."

그리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놨다.

소봉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걸음만 내딛고 있었다. 그는 서글픈 감회에 젖었다.

(만약 아주가 나와 함께 이 눈길을 밟고 가다가 만약에 그녀가 갑자기 화를 내서 몸을 돌려 떠나간다면 나는 물론 즉시 쫓아가 사과를 할 것이다. 아니 나는 애당초부터 그녀에게 화를 내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든 일에 있어서 그녀의 뜻에 따랐을 것이다. 아, 아주는 나에게 온순하기 그지 없었으니 또 어찌 나에게 화를 내겠는가?)

11. 대설원 너나할 것 없이 한 마디씩 다투어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적성자는 그와 같은 아첨의 말을 듣더니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았다.

아자는 머리가 몹시 영리한 편이었으나 눈앞의 위기에서 벗어날 묘책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함으로써 적성자가 좀더 늦게 손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뜻있는 말을 주워섬길 수가 없게 되자 그 떠들어대는 소리들이 차츰 낮아지게 되었다.

적성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사매, 이제 손을 쓰시지?"

아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손을 쓰지 않겠어요."

적성자는 물었다.

"어째서? 내가 보기에는 역시 손을 쓰는 것이 좋아."

아자는 말했다.

"나는 대사형과 싸우지 않겠어요. 대사형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쓸데없이 왜 힘을 소비해요? 대사형이 나를 죽일려면 얼마든지 죽이도록 하세요."

적성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결코 그대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그대와 같이 아름다운 소녀를 죽인다는 것은 실로 애석한 노릇이건든.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소사매, 그대가 초식을 펼치도록 해. 그대가 나를 죽이게 된다면 그대는 대사저가 되는거야. 성숙파의 사람들은 사부님 이외에 모두가 그대의 호령을 듣게 될 것이란 말이야."

아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나이어린 여자에 불과해요. 살아 생전에 영원히 무공으로 대사형을 이길 수 없으니 대사형은 저를 거리낄 필요가 전혀 없어요."

적성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만약 이토록 커다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나는 물론 영원히 그대를 괴롭히지 않았을거야. 그러나 지금...... 나야말로 도와주고 싶지만 도울 수가 없구나. 소사매, 나의 공격을 받도록 해라."

그리고 그는 소맷자락을 한 번 휘둘렀다. 한줄기의 세찬 바람이 불꽃이 있는 곳으로 덮쳐갔다. 그러자 한 가닥 가느다란 파란 화선이 곧장 아자에게로 서서히 쏟아졌다.

적성자는 대뜸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은 듯 그 불꽃이 날아가는 기세를 무척 느리게 만들었다.

아자는 놀라 한 소리 부르짖으며 오른쪽으로 두 걸음을 옮겼다. 한가닥 파란 불꽃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아자는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렇게 되자 그녀의 등은 어느덧 소봉이 몸을 숨기고 있는 커다란 바위 앞쪽에 기대는 꼴이 되었다.

적성자는 내력을 돋우어서 서서히 그 불꽃을 앞으로 밀어붙였다.

아자는 이제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옆으로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런데 적성자가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두 줄기의 세찬 바람을 좌우 양쪽으로 나누어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그녀는 옆으로 피할수도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명에는 그 파란 불꽃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봉은 그 파란 불꽃이 그녀의 얼굴과 두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러 한치씩 한치씩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직이 말했다.

"겁내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 주겠다."

그리고 그는 큰 바위 뒤에서 손을 뻗쳐 손바닥을 그녀의 등에 갖다대고 다시 말했다.

"장력을 돋우고서 파란 불꽃을 후려쳐라."

아자는 혼비백산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소봉의 음성을 듣게 되자 그야말로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생각도 해 보지 않고 그녀는 일장을 후려쳤다. 이때 소봉의 내력은 이미 그녀의 몸안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에 그녀의 알장의 장력은 웅후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한 줄기의 파란 불꽃은 벼락같이 두 자나 움츠러 들었다.

적성자는 깜짝 놀랐다.

아자가 이미 도마 위의 고기 신세에 불과한 것을 보고 그는 자기 자신의 무공을 자랑할 겸 파란 불꽃을 그녀의 얼굴 좌우 양쪽으로 맴돌도록 만들어서는 그녀가 놀라 큰 소리로 부르짖도록 만들참이었다. 그리하여 뭇동문들 앞에서 자기의 위세를 잔뜩 떨친 이후에야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이 어린 그녀는 놀랍게도 무서운 내력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적성자로서는 실로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 성숙파의 무공은 사부가 전수한 이후에 각자가 스스로 수련을 하기 때문에 도대체 조예가 어떠한지 동문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자가 일장을 후려쳐서 파란 불꽃을 두 자 정도 물러나게 만드는 것을 보고 뭇사람들은 모두 다 놀라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물론 하나같이 놀라고 의아스럽게 생각했지만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이 뒤에서 몰래 돕고있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아자의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암암리에 지극히 조예가 깊을 정도로 연마한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적성자는 다시 공력을 돋우고 파란 불꽃을 앞으로 밀어보냈다.

파란 불꽃은 재차 아자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갔다. 이번에는 지극히 강맹한 힘을 썼기 때문에 파란 불꽃이 날아가는 기세는 매우 빨랐다.

아자는 음!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어떻게 막아야 할지를 몰랐다.

그녀는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다행히 이번에 적성자는 그녀의 좌우 양쪽으로 펼쳐낸 장력을 이미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그녀는 무사히 파란 불꽃을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불꽃은 바로 그 커다란 바위에 적중하게 되었으며 칙! 하는 소리를 내었다.

소봉은 나직이 말했다.

"왼손을 휘둘러 파란 불꽃의 줄기를 끊어 버리도록 해라."

아자는 왼손을 쳐들어서는 한 줄기 장력을 파란 불꽃의 가운데를 향해 후려쳤다. 그렇게 되자 파란 불꽃은 대뜸 두 토막으로 나누어졌다.

앞쪽 반 토막의 불꽃은 뒤에 이어지는 불길을 이어받지 못하게 되자 바위 위에서 한동안 타오르더니 점차 사그라졌다.

적성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한가락 불꽃이 만약 꺼지게 된다면 뭇동문들 앞에서 나는 또 한차례 지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같은 창피를 내가 어찌 당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즉시 장력을 돋우어서는 파란 불꽃을 바위 있는 곳으로 쏘아보냈다. 그 한 줄기 잘라져 나간 파란 불꽃을 이어 줄 생각이었다.

아자는 이때 등에 갖다댄 손에서 내력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고 만약 장력을 내쏟지 않는다면 자기의 몸뚱아리마저 터져나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즉시 오른손을 급히 휘둘러 내려쳤다. 소봉의 내력은 웅후하기 짝이 없었다. 그와 같이 웅후한 내력이 아자의 몸안으로 주입된 이후에 위력이 조금 약화되기는 했지만 만약 그녀가 운용을 잘하여 적성자에게 의표를 찌르는 공격을 가한다면 단번에 승리를 거둘 가능성도 지극히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운 나머지 그 일장을 아무렇게나 후려치게 되었다.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 가느다란 불꽃은 그만 꺼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싸움에서 한 번 이긴 셈은 되지만 적성자으 털끝 하나 손상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되자 성숙파의 뭇동문들은 그만 서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일곱째 사제는 때를 가리지 않고 대사형을 추켜 세우며 말했다.

"대사형, 대사형의 공력은 정말 강하오. 소사매가 일장을 후려쳤으나 기껏해야 그 신화를 약간 꺼뜨렸을 뿐 대사형을 어찌하지는 못했잖소?"

이 몇 마디의 말로 그는 대사형에게 아첨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적성자가 들을 때는 자신을 마치 비웃는 것 같이 들렸다.

별안간 적성자는 옷자락을 한 번 휘둘렀다. 파란 불꽃이 비스듬히 쏘아지면서 칙! 하는 소리와 더불어 한 대의 화살처럼 일곱째 사제의 얼굴로 쏘아졌다.

파란 불꽃은 잠시 동안 탔을 뿐 곧 움츠러 들었으나 그 일곱째 사제는 어느덧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적성자는 일곱째 사제의 버릇을 톡톡히 가르친 후 곧 왼손을 비스듬히 후려쳤다. 그러자 한 줄기 파란 불꽃이 재차 아자에게로 쏘아졌다.

이번의 불꽃은 지난 번 것보다 훨씬 굵었고 기세등등했으며, 그 불빛을 받은 아자의 머리와 얼굴은 모두 파랗게 물들게 되었다.

아자는 장력을 내쏘아 불꽃이 앞으로 가까이 다가들지 못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그 불꽃은 대뜸 허공에서 정체하게 되었으며 앞쪽의 불꽃이 앞으로 한두 치 나아가게 되었다가는 다시 뒤로 한두 치 물러서곤 했다.

어둠속에 마치 한 마디의 까맣고 기다란 뱀이 허공에 가로누워서는 가볍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빛깔은 화려한 데다가 이상야릇했으며 광채가 번쩍번쩍 끊임없이 빛나고 있었다.

적성자는 잇따라 세 번이나 장력을 돋우고 밀어붙였으나 아자는 이를 모두 막아냈다. 이렇게 되자 적성자는 그만 초조해지고 또 한편으로는 분노가 끓어오르게 되었다. 그는 다시 장력을 돋우어서 앞으로 밀어냈으나 여전히 조금도 불꽃을 앞으로 내보낼 수가 없었다.

별안간 그는 한줄기 차가운 기운이 등줄기에서 위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녀...... 그녀...... 그녀는 아직 다 쏟아내지 않은 기운이 남아있다. 원래 줄곧 나를 희롱하고 있었구나. 설마하니 사부님께서는 그녀를 편들어 몰래 본문의 최상승 무공을 그녀에게 전수한 것이란 말인가? 나는......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됐구나.)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그만 두려움이 앞서게 되어 손에 돋우었던 장력이 즉시 약화되었다. 따라서 그 파란 뱀과 같은 불꽃은 번개와 같이 한 무더기의 불꽃 있는 쪽으로 밀려갔다.

그러나 적성자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장력을 더욱더 끌어올려 밀어보냈다. 파란 불꽃은 갑자기 동이만한 불덩이로 화해 아자에게 질풍과 같이 쏘아졌다.

아자는 오른손을 들어 급히 후려쳤으나 그 불덩이의 달려드는 기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재차 왼손마저 뻗쳐냈다. 두 손으로 함께 힘을 쏟아내서야 겨우 그 불덩이를 막을 수 있었다.

이때 파란 불덩이는 허공에서 뒤룩뒤룩 신속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뭇제자들은 갈채를 보내며 하나같이 말했따.

"대사형의 공력이 신묘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저 계집애는 야단나게 되었습니다."

"소사매, 너는 무엇을 믿고 강한 척하느냐? 일찌감치 졌음을 시인해라! 그러면 대사형께서 너에게 살 기회를 열어 주실지도 모른다."

아자는 끊임없이 장력을 돋우었으나 소봉이 밀어 주는 장력이 강하기는 하나 역시 외부에서 빌어온 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제대로 그 힘을 응용하지 못했다.

적성자는 그녀와 잠시 동안 대치 상태를 이룬 연후에 그녀의 내력이 지니고 있는 약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별안간 그는 두 눈썹을 곤두세우며 오른손의 식지를 들어서는 불꽃더미 쪽을 향해 두어 번 찔렀다. 그러자 불꽃더미에서 칙칙!하는 가벼운 음향이 일면서 몇 송이의 불꽃이 터져나왔다. 그러더니 그 불꽃은 유성처럼 좌우 양쪽으로 나뉘어져서는 아자에게로 쏘아져오는데 그 기세가 실로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자는 그만 놀라 부르짖었다.

"어머나!"

그녀의 장력은 이미 앞쪽에서 육박해 오고 있는 불덩이를 막아 내고있는 상태여서 좌우 양쪽으로 날아드는 불꽃을 막느라고 어느 한 손도 뺄수가 없는 상태였다. 어찌 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그녀는 그저 몸을 옆으로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좌우 양쪽으로 날아드는 불꽃은 적성자가 내력을 밀어붙이는 데 따라 즉시 뒤쫓아왔다.

소봉은 아자가 이미 항거할 힘이 없는 것을 보고 즉시 왼손을 살짝 쳐들었다. 그리고 한 줄기의 장력을 가만히 밀어냈다. 따라서 아자의 몸이 번쩍 움직이게 되었을 때 양쪽의 허리띠가 날아오르도록 만들었다.

그 양쪽의 허리띠는 두둥실 떠올라 한 번 떨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두 송이의 좌우 양쪽으로 날아들던 불꽃은 신속하기 이를데 없이 오히려 적성자에게로 되쏘아져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적성자는 그만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두 송이의 불꽃은 그의 발밑을 스칠 듯하며 지나가게 되었다. 두 명의 사제는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재간이외다! 대사형은 정말 대단하오!"

그런데 그 갈채소리가 미처 멎기도 전에 두 번째 불꽃이 적성자의 아랫배 쪽으로 날아들었다.

적성자의 몸은 허공에 떠있는지라 다시 몸을 위로 솟구쳐 올릴 수 없었다. 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불꽃은 그만 그의 아랫배에 맞아 불타기 시작했다.

적성자는 아! 하는 절규와 함께 땅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불덩이도 즉시 불꽃더미 쪽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뭇제자들은 일제히 아자를 바라보았으며 얼굴에 존경과 두려워하는 빛을 드러냈다.

그리고 하나같이 생각했다.

(보기에 소사매의 공력은 약하지 않은 것 같다. 대사형이 반드시 이긴다고 할 수 없으니 설사 갈채를 보내더라도 너무 큰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겠다.)

적성자의 안색은 매우 참담해졌다.

그는 손을 뻗쳐 틀어올린 머리를 풀어 머리카락을 길게 내려뜨렸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는 혀끝을 물어 한 모금의 선혈을 불꽃더미 쪽으로 내뿜었다. 그러자 그 불꽃더미는 갑자기 어두워지는가 했는데 곧 크게 밝아졌으며 뭇사람들은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뭇제자들은 역시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대사형은 정말 뛰어난 공력을 지니고 있구려! 오늘 우리의 시야를 크게 넓혀 주었소이다!"

적성자는 이때 벼락같이 몸을 회전시켰다. 그는 마치 팽이처럼 잇따라 열 몇 번을 돌더니 커다란 소맷자락을 떨쳤다. 그러자 전체의 불꽃더미가 벼락같이 솟구쳐 오르더니 마치 불로 만든 담장처럼 아자에게로 덮쳐가게 되었다.

소봉은 적성자가 지극히 무서운 사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적성자가 한평생 쌓은 공력이 모조리 그 일격에 모아졌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소봉은 적성자가 간악한 사람이기는 하나 자기와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그와 크게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즉시 그는 펼쳤던 손바닥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아자의 등을 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겨서는 그 자리에서 떠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자가 부르짖었다.

"아주언니, 아주언니! 그대의 친누이 동생이 남에게 이토록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언니는 저를 위해 화풀이를 해 주지 않나요?"

소봉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아주를 부르고 있다. 내...... 내가...... 어찌 이대로 떠날 수 있겠는가?)

소봉이 잠시 주저하는 사이에 그 파란 불담장과 같은 화염은 신속무비하게 아자의 몸 위로 떨어지려고 했다.

부득이 소봉은 두 손을 일제히 내밀었다. 두 줄기 세찬 장풍을 아주의 소맷자락 속으로 밀어 보낸 것이다.

파란 화염이 비쳐지는 가운데 아자의 두 자색 소맷자락이 바람을 받고 불룩해지면서 바깥쪽으로 휘날렸다. 일순간 소봉의 무서운 장력이 어느덧 그 담장과 같은 화염더미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 파란 화염더미는 허공에서 일순 정체하더니 천천히 적성자 쪽으로 물러갔다. 적성자는 대경실색해서 다시 혀끝을 깨물어 한 모금의 선혈을 화염더미 속으로 내뿜었다. 화염이 불빛을 내쏟으며 되돌아 갔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두자 정도 나가게 되었을 뿐 소봉의 내력에 다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뭇제자들은 아자의 옷 소맷자락이 잔뜩 부풀어 오른 것이 바로 바람을 가득 맞게 된 범선처럼 보이는지라 모두들 이 소사매의 내력이 지극히 고강한 줄만 알았지 그녀 등 뒤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돕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적성자의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한모금 한모금의 선혈을 끊임없이 화염더미 쪽으로 내뱉었다.

그가 한 모금의 선혈을 내뿜을 때마다 공력은 한 푼씩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호랑이 등에 탄 격으로 끝까지 버텨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자를 불태워 죽인 후 즉시 이 자리를 떠나 천천히 다시 수련을 해서 공력을 회복시킬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제들이 그의 바닥난 것을 공력이 알아차리고 어쩌면 이 기회에 이미 다 만들어진 득을 보려고 그에게 도전을 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는 끊임없이 선혈을 내뿜게 되었으나 소봉의 웅후한 내력 앞에 파란 불꽃더미는 반 자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소봉은 상대방의 내력에서 그의 진기가 갈수록 약해져서는 이제 기름이 다한 등불처럼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자에게 말했다.

"너는 그에게 졌음을 인정하도록 해라. 더 싸울 필요가 없다."

아자는 부르짖었다.

"대사형, 그대는 나를 이길 수가 없어요! 그대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면 내 그대를 죽이지 않도록 하죠. 졌음을 시인해요."

적성자는 당황하고 다급해서 어쩔줄을 몰라 했다.

그는 자기의 명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고 있었던지라 아자의 말을 듣고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자는 다시 물었다.

"왜 입을 열지 않죠? 그대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졌음을 시인하지 않는거예요?"

적성자는 다시 연신 고개를 끄덕였으나 시종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전력을 돋우어서 소봉과 상대하고 있었다. 입을 열기만 하면 진기를 돋울 수가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파란 불꽃더미가 되돌아와서는 자신을 덮치게 되니 그는 그저 불타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때 뭇동문들은 다투어 욕을 퍼부었다.

"적성자, 너는 졌다! 어째서 빨리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지 않는가?"

"저와 같은 밥통이 나서서 못난 꼴을 보이다니, 우리 성숙파의 체면을 깡그리 뭉게 버리게 되었다!"

"소사매가 넓은 아량을 베풀어 너의 목숨을 용서하겠다고 했는데 너는 무엇을 믿고 억지로 버텨 내려고 하느냐? 빨리 입을 열고 말을 해라, 말을 해!"

"적성자, 나는 십 년 전에 이미 네가 성숙파에서 가장 못된 자인 줄을 알고 있었다! 소사매가 오늘 문호를 정리하여 그야말로 커다란 공적을 세운 셈이니 소사매야말로 진정 우리 성숙파를 다시 일으키게 된 대공신이다!"

"너는 음모로 사존을 암살했으며 소림파에 붙으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소사매가 너의 간계를 알아차렸다! 너와 같은 후례자식은 정말 염치라는 염자도 모르는 작자이다!"

"소사매의 신공이 기묘하여 사존을 제외하고서는 이 천하에 그녀가 가장 무섭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아 보았었다!"

"적성자, 네 스스로 신목왕정을 훔치고서 되려 소사매에게 누명을 씌웠으니 그야말로 살기 귀찮아진 것이다!"

소봉은 이 한 떼의 사람들이 바람을 보고 배를 돌리 듯 강한 자를 추켜세우고 약한 자를 압박하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더군다나 적성자가 열세에 몰리게 되자 즉시 안면을 바꾸고 욕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사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대사형을 이 세상에서 다시없는 대영웅으로 칭찬했는데 이제는 마구 욕지거리를 퍼부어 개, 돼지만도 못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성숙노괴가 거둔 제자들의 인품이 이토록 형편이 없구나! 아자가 어릴 적부터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으니 행동거지가 단정하지 못하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로군!)

그리고 적성자가 어쩔줄 모르는 것을 보고 너무 심하게 대하고싶지 않아 즉시 내력을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되자 아자의 부풀어 올랐던 한 장의 소맷자락도 즉시 꺼져버리게 되었다.

적성자는 지칠 대로 지친 듯 몸을 휘청거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두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아자는 입을 열었다.

"대사형, 어떻게 된거예요? 이제 나에게 승복했어요?"

적성자는 나직이 말했다.

"졌음을 시인하겠소. 그대는...... 그대는...... 나를 대사형이라 부르지 마시오. 그대가 우리의 대사저이외다."

뭇제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말 잘 됐다! 잘 됐어! 대사저는 무공이 절세적이다! 성숙파에서는 이와 같은 한 분의 전인이 생기게 되었으니 우리 성숙파는 더욱더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대사저, 빨리 가서 북교봉과 남모용이라는 자들을 죽여서 우리 성숙파로 하여금 중원에서 유아독존격인 문파로 만듭시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북교봉은 대사저의 형부인데어찌 죽일수 있느냐?"

"왜 죽일 수 없어? 그가 우리 성숙파의 문하로 들어와 졌음을 즐거이 시인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죽여야 마땅하지!"

아자는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들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거예요? 모두들 조용히해요."

뭇제자들은 대뜸 조용해졌다.

아자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적성자에게 말했다.

"본문의 규칙에 따르면 전인을 바꾸게 된 이후 옛날 전인은 마땅히 어떤 조치를 당하게 되죠?"

적성자는 이마에서 식은 땀을 줄곧 흘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 대사저, 제발...... 제발......."

아자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나는 정말 그대를 용서하고 싶어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본문의 규칙을 내 손에서 그르칠 수는 없어요. 그대는 손을 써요. 무슨 재간이 있든 힘을 다해 나에게 펼쳐 보란 말이에요."

적성자는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었음을 알고 더 애걸하지 않았다.

진기를 두 손에 돋우고는 화염더미가 있는 쪽으로 두 손을 밀어냈다.

그러나 그의 내력이 이미 고갈되어 두 손을 밀어내었으나 그 화염더미는 그저 미미하게 두어 번 흔들거렸을 뿐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아자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재미있군요! 재미있어요! 대사형, 그대의 법술이 어째서 갑자기 듣지 않게 되었죠?"

그리고 그녀는 두 걸음 나서더니 두 손을 들어 후려쳤다. 그러자 한 줄기 파란 불꽃이 화염더미에서 뻗쳐나와 적성자의 몸으로 쏘아졌다.

아자의 내력은 평범해서 그 파란 불꽃이 달려가는 기세는 지극히 느릿했고 똘똘 뭉쳐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성자는 이때 손톱만큼도 반격할 힘을 갖지 못하고 있었고 몸을 일으켜서 달아날 기운조차 없었다.

파란 불꽃이 그의 몸에 쏘아지는 순간 삽시간에 그의 모리카락과 옷자락에 불이 붙게 되었고 미친 듯 울부짖음을 토해 내는 가운데 그의 전신은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뭇제자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크게 있었다. 일제히 대사저의 공력이 출신입화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칭찬을 했으며 성숙파를 위해 오랫 동안 화근이 된 망나니를 없앰으로써 사존의 뜻을 받들게 되었고 큰 공을 세웠다고 했다.

소봉은 강호에서 참혹하고 흉폭한 일들을 적지 않게 보아 왔으나 아자같이 아름답고 의젓하며 천진하면서도 귀여운 소녀가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이토록 지독하게 악랄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그 자리에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때 아자가 소리쳤다.

"형부, 형부, 가지말고 나를 좀 기다려요!"

성숙파의 뭇제자들은 커다란 바위 뒤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모두 의아해 했다. 더군다나 둘째 제자와 셋째 제자등은 바로 소봉인 것을 알아 보고는 모두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아자는 다시 부르짖었다.

"형부, 나좀 기다려 줘요!"

그리고 서둘러 소봉의 곁으로 달려왔다.

이때 적성자의 처참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뾰족한데다가 산골짜기에 메아리쳐서 되돌아오는 소리가 있어 더욱 듣기에 소름이 끼쳤다.

소봉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는 왜 나를 따라오느냐? 너는 성숙파의 전인이 되었고 저 한 떼의 사람들의 대사저가 되었으니 이제는 만족해야 할 것이 아니냐?"

아자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요."

그리고 나직이 음성을 낮추어서 말했다.

"나의 이 대사저는 그저 얻은 것이니희안할 게 뭐 있어요? 형부, 우리 함께 안문관 밖으로 가요."

소봉은 적성자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이곳에 더 머물로 싶지 않아 재빠른 걸음으로 북쪽으로 향했다.

아자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고개를 돌리고 소리 쳤다.

"둘째 사제, 나는 볼일이 있어 북쪽으로 가요! 그대들은 이 부근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되 그 누구도 함부로 떠나지 않도록 하세요. 알았어요?"

뭇제자들은 일제히 몇 걸음 달려나가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삼가 사저의 법지를 받들겠으며 뭇사제들은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투어 칭송했다.

"삼가 대사저께서 길을 가시는 동안 편안하시기를 빕니다."

"삼가 대사저께서 만사여의 하기를 빕니다."

"삼가 대사저께서 하는 일마다 순조로워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대사저께서는 몸에 그와 같은 신공을 지니고 있으니 천하에 무슨 일을 해결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비는 것도 아마 쓸데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아자는 손을 돌려 몇 번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 얼굴에 득의에 찬 웃음을 띠었다.

소봉은 벌판에 쌓인 하얀 눈의 광채를 빌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천진하고 귀여운 미소가 가득 떠오른 것을 볼수 있었다. 그 얼굴빛은 그야말로 재미있는 장난감이나 맛있는 사탕과자를 얻은 어린애 같았다.

만약에 조금 전 친히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바로 방금 대사형을 죽이고 천하제일 대사파의 전인이라는 위치를 차지했으리라고 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봉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삭막하기만 하고 재미없게 느껴졌다.

아자는 물었다.

"형부, 왜 한숨을 쉬시죠? 제가 너무 짓궂은가요?"

소봉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너는 짓궂은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잔혹하고 흉악하다. 우리 나이가 든 남자들이 그와 같은 짓을 한다면 몰라도 너는 어린 소녀에 불과한데 어찌하여 손을 씀에 있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는단 말이냐?"

"형부는 알면서 묻는거예요, 아니면 정말 모르는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봉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엔 호기심이 잔뜩 어려 있었다.

소봉은 되물었다.

"내가 어찌 해서 알면서 묻는다는거지?"

아자는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네요. 어째서 형부가 모른단 말이에요? 나의 이 대사저는 가짜로서, 형부가 싸워서 얻어 준 것이 아니겠어요? 다만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만약 내가 그를 죽이지 않고 어느 날엔가 그와 같은 사실을 그가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형부가 꼭 내 곁에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 나의 목숨은 자연 그의 손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죽여야 했단 말이에요."

소봉은 말했다.

"좋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네가 나를 따라 안문관으로 가겠다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이지?"

아자는 소봉을 쳐다보며 야무진 어조로 말했다.

"형부, 제가 형부에게 솔직히 말씀드릴께요. 좋죠? 들으시겠어요?"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잘 한다. 본래 너는 줄곧 나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았구나. 이제서야 말을 하겠다니 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말했다.

"물론 좋다. 그러나 나는 네가 솔직한 말을 하지 않을까봐 두렵다."

아자는 깔깔거리고 몇 번 웃더니 손을 들어 그와 팔장을 끼며 말했다.

"형부도 제가 겁날 때가 있어요?"

소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를 겁내는 일이 많단다. 무엇을 겁내느냐면 일부러 화를 일으키거나 함부로 사람을 해치게 될까봐 겁이 날뿐만 아니라 또한 이상야릇한 짓을 할까봐 겁이 난다."

아자는 그 말을 가로챘다.

"그러면 형부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못살게 압박을 당하게 되고, 남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겁나지 않아요?"

소봉은 대답했다.

"내가 너의 언니의 진지한 부탁을 받았으니 물론 너를 돌봐야 하겠지."

아자는 물었다.

"만약 저의 언니가 부탁을 하지 않았다면요? 만약 제가 아주의 여동생이 아니라면요?"

소봉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그렇다면 내가 왜 너를 아랑곳하겠느냐?"

아자는 다시 말했다.

"저의 언니가 그렇게도 좋으세요? 그리고 형부는 마음속으로 저를 전혀 개의치 않지요?"

소봉은 말했다.

"너의 언니는 너보다 천 배 만 배 났다. 아자, 너는 한평생 영원히 그녀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눈가를 은근히 붉혔다. 음성마저 목이 메였다.

아자는 조그만 입술을 뾰로통해 가지고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아주가 모든 면에 있어서 나보다 좋다면 그녀를 불러 벗삼도록 하세요. 나는 이만 실례하겠어요."

그리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놨다.

소봉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걸음만 내딛고 있었다. 그는 서글픈 감회에 젖었다.

(만약 아주가 나와 함께 이 눈길을 밟고 가다가 만약에 그녀가 갑자기 화를 내서 몸을 돌려 떠나간다면 나는 물론 즉시 쫓아가 사과를 할 것이다. 아니 나는 애당초부터 그녀에게 화를 내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든 일에 있어서 그녀의 뜻에 따랐을 것이다. 아, 아주는 나에게 온순하기 그지 없었으니 또 어찌 나에게 화를 내겠는가?)

12. 장백산맥을 넘어 만주벌판으로 소봉은 위기일발의 순간을 가까스로넘기고 나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정말 부끄러운 노릇이다!)

그리고 퍼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저 요녀의 심보가 정말 악독하구나. 그와 같이 악랄한 수법으로 나를 암산하다니!)

성숙파의 암기는 무섭기 이를 데 없고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만약에 이번 그 독침에 적중되었더라면 살아날 가망성은 지극히 적었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잠시 동안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자가 자기의 일ㅈ아을 맞아 십여 장 밖르로 튕겨 나간 사실을 발견하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어이쿠, 이 일장을 그녀가 어찌 견뎌낼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나의 일장에 맞아 죽었겠구나!)

그는 몸을 흔들더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리고 두 가닥의 선혈이 입가를 흘러 내렸다. 그리고 안색은 눈보다 희게 변해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숨이 멎었던 것이다.

소봉은 그만 멍해졌다.

(내가 또 이 소녀를 때려 죽였구나. 아주의 누이동생까지 때려 죽였구나. 그녀......그녀는 죽을 때에 나보고 그녀의 누이동생을 돌봐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이 소녀를 또 쳐서 죽인 것이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재빨리 손을 뻗쳐 아자의 등에 갖다대고 진기를 돋우어 내력을 그녀의 몸 안으로 주입했다. 한참 후 아자의 몸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소봉은 크게 기뻐서 부르짖었다.

"아자ㅡ 아자ㅡ 죽지 마라! 내 어떻게 하든 너를 살려 주겠다."

그러나 아자는 그저 한 번 꿈틀했을뿐 더 움직이지 않았다.

소봉은 매우 초조해졌다. 그는 즉시 눈 위에 단정히 앉아 아자를 가볍게 부축해 일으켜 자기의 몸 앞에 놓고, 두 손을 그녀의 등에 갖다 대고, 내력을 천천히 그녀의 몸 안으로 주입했다. 그는 아자가 매우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한 가닥의 목숨만이라도 부지하게 만들어 잠시 동안 죽지 않도록 만든 후에 천천히 방법을 강구해서 살릴 작정이었다. 밥 한 끼 먹을 시진이 지나게 되자 그의 머리 위에서는 허연 김과 같은 것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덧 그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약 반시진 이후에 아자의 몸이 미미하게 움직이더니 그녀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형부."

소봉은 크게 기뻐서 계속 운기析幣像립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뚱아리가 점점 따뜻해져 왔고 코에서는 갸냘프나마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소봉은 여지껏 쌓아올린 공이 허사가 될까 두려워 조금도 멈추지 않고 내력을 주입했다. 정오 무렵에 이르러서야 아자의 기식이 析 고르게 되었다. 그제서야 그는 그녀를 가슴에 안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으나 걸음은 빠르면서도 차분했다. 그리고 왼손을 여전히 아자의 등에 갖다 대고 끊임없이 진기를 주입해주고 있었다. 한 시잔 가량 걷게 되자 어느 조그만 고을에 이르게 되었으며 고을에는 초라한 객점이 있었다.

이 객점에는 점소이도 없었다. 바로 객점 주인이 스스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소봉은 객점 주인에게 한 그릇의 뜨거운 국물을 끓여 달라고 해서는 숟가락으로 천천히 아자의 입속에 흘려 넣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세 모금을 마신 다음 모조리 토해내고 말았다. 뜨거운 국물에는 자주색의 파가 섞여 있었다.

소봉은 여간 걱정되지 않았다. 아자가 이번에 상처를 입은 모양으로 보아 십중팔구 치료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염왕적 설신의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설사 설신의가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살려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는 설사 아자의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결코 이대로 손을 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설사 지칠대로 지쳐서 쓰러지게 되고 진기와 내력이 모조리 소모된다 하더라도 끝까지 버텨 봐야 한다. 나는 그녀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주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는 물론 아자가 먼저 손을 써서 그를 암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아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부득이한 노릇으로 설사아주가 그곳에 있었다 하더라도 결코 그를 원망하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가 그와 같은 사실을 알턱이 없기 때문에 소봉은 더욱 아주에 대해 미안한 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날 밤 그는 시종 눈 한 번 붙이지를 못했다. 이튿날이 될 때까지 그는 끊임없이 진기를 주입하여 아자의 목숨을 이어가도록 했다. 그날 아주가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소봉은 그저 그녀의 기식이 점차 미약해지게 되었을 때만 손을 썼었다. 그런데 아자를 상대로 해서는 잠시도 손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아자의 기식이 즉시 끊어지고 말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밤도 마찬가지 였다.

소봉의 공력이 고강하다 하나 이틀 낮 이틀 밤을 지새우며 정성을 다하게 되자 역시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조그만 객점에 저장하고 있던 두 항아리의 술도 이미 다 그가 마셔 버리고 말았으며 늑 주인으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가서 술을 사오려고 시킬려고 해도 몸에 지닌 돈이 없었다. 그는 하루밤 더 묵지 않는 것은 상관이 없었으나 하루라도 술을 먹지 않고는 못 견디는 형편이었다.

(아자가 몸에 금전을 지니고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녀의 옷 보따리를 끌자 아니나 다를까 세 개의 조그만 황금 덩어리가 있었고 열 덩이의 은과 자질구레한 여인의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그는 한 덩이의 은자를 집어낸 다음 옷주머니를 다시 쌌다. 그런데 옷주머니는 자색의 실로 이어져 있었고 다른 한쪽 끝은 그녀의 허리에 묶여 있었다.

소봉은 속으로생각했다.

(이 나이 어린 소녀가 조심성도 많군. 옷 보따리를 잃게 될까봐 끈으로 허리께에 매어 놓았군. 그러나 이와 같은 쇠붙이를 몸에 달고 다니면 불편할텐데.)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손을 뻗쳐 그녀의 허리띠를 묶고 있는 한쪽 실띠의 매듭을 풀려고 했다. 그런데 그 매듭은 매우 단단하게 매어 있었다.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풀 수 있었다. 풀고서 잡아 당기는데 그 실띠의 다른 한쪽 끝에 또 다른 물건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 물건은 바로 그녀의 치마 안에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손을 놓자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한 가지의 물건이 방바닥에 떨어졌는데 바로 노란색의 조그마한 나무 향로였다.

소봉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눕혀 그 조그마한 목정을 집어 탁자 위에 놓았다. 그 목정의 조각은 매우 정교했고 나무의 질은 옥처럼 단단하면서도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무늬 가운데 어렴풋이 붉은 실날 같은 흔적이 떠올라 있었다.

소봉은 이것이 바로 성숙파에서 화공대법을 익힐 때 사용하는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혐오감을 느낀 그는 두어 번 쳐다보았을 뿐 더아랑곳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나이 어린 소녀는 정말 교활하기 이를 데 없다. 말끝마다 이 신목왕정을 나에게 주었다고 하더니 알고 보니 바로 자기의 치마 안쪽에 매달고 있었구나. 따라서 그녀의 동무들은 첫째 이 물건이 내 수중에 있다고 믿었고 둘째로는 그녀의 치마 안까지 조사 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시종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구나. 아, 오늘 이 소녀의 목숨도 제대로 부지하기 어려운 판인데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는 즉시 가게 주인을 불렀다. 그리고 은자를 가져가서 술과 고기를 사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다시 내력을 아자의 몸 안에 주입하여 목숨을 이어가게 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눈마저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고, 끝내 눈을 감고 옅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나 아자의 생사가 염려스러워 잠시 잠이 들었을 뿐 그는 곧 깨어났다. 다행이 그가 잠든 동안에도 진기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이와 같이하여 다시 이틀을 보내게 되었다. 아자는 겨우 한가닥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으나 상처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소봉은 애써 생각했으나 좋은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안고 길을 가면서 알아볼 수밖에 없다. 운수가 좋으면 어떤 방법이 생기겠지. 이 조그만 객점에서 지체해야 시간만 허비할 뿐이다.)

그는 즉시 왼손으로 아자를 안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옷주머니를 집어 들어 그녀의 품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탁자 위의 목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와 같이 사람이 해치는 물건은 깨뜨려 없애야겠지?)

그리고 일장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돌렸다.

(아자는 천신만고 끝에 저 물건을 훔쳤다. 그의 상처가 나아질 수 없는 형편이니 죽게 되었을 때는 반짝 제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정신을 차리게 된다면 반드시 이 목정에 관해서 묻게 될 것이다.

그때 내가 꺼내어 그녀에게 보여 준다면 그녀는 안심하고 죽을 수 있을 것이니 한을 품은 채 죽는 것보다 났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목정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목정을 집어 들고 보니 그 목정 안에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그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세히 목정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목정의 옆으로 동전만한 크기의 둥근 구멍이 다섯 개 나 있었다. 그리고 목저으이 목이 되는 부분에 한가닥 실날 같은 틈이 있었다. 아마도 두 개로 나누어질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새끼 손가락과 무명지의 목정의 아랫부분을 잡고 엄지 손가락과 중지로 목정의 윗부분을 잡은 채 왼쪽으로 틀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번 돌리게 되자 뚜껑이 열렸다. 목정 안을 들여다 보는 순간 그는 놀람과 함께 구역질이 나는 것을 느꼈다. 목정 안에서는 두 마리의 독충이 서로 물어뜯고 있었다. 한 마리는 전갈이고 한 마리는 지네인데 이리 꿈틀 저리 꿈틀 하며 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수일 전 목정을 탁자 위에 놓았을 때 목정안에는 독충이 없었다. 지네와 전갈은 얼마 전에 스스로 목정 안으로 기어든 모양이었다. 소봉은 이 목정이 성숙파에서 독충과 독물을 수집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목정을 기울여 지네와 전갈이 땅바닥에 떨어지도록 했다. 그리고는 발로 밟아 죽여 버리고는 뚜껑을 닫고 옷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방값을 치루고 아자를 안은채 눈보라를 뚫고 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중원 호걸들과 이미 깊은 원한을 맺고 있었으나 변장을 하거나 역용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줄곧 북을 향해 가다보니 대송나라의 서울인 변량에 가까워졌다. 이렇게 된다면 반드시 중원 땅의 무림 인물과 마주칠 것이었다. 첫째 그는 다시 사람을 죽여 원한을 맺고 싶지 않았고, 둘째로 이와 같이 아자를 안고 있기 때문에 남고 손을 쓰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큰 길을 피하고 황량한 산길이나 들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날 그는 커다란 고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약재를 취급하는 가게밖에 세전유의왕통치증진이라고 씌여져 있는 나무팻말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조그만 지방에 명의가 있을 수 없겠지만 밑져야 본전이 아니겠는가?)

그는 아자를 안고 안으로 들어가 진맥을 부탁했다.

왕통치는 아자의 손을 짚어보고 소봉을 쳐다보더니 다시 아자의 맥박을 짚어 보고 재차 소봉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그 얼굴빛이 매우 야릇했다. 그는 갑자기 소봉의 손가락을 짚는 것이었다.

소봉은 성이 나서 말했다.

"의원, 내 누이 동생의 병을 봐 달라고 했지 불초를 치료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소이다."

왕통치는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내가 볼 때 그대에게는 병이 있소. 정신이 맑지 못하고 착란을 일으키니 잘 치료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소."

소봉은 물었다.

"내가 어째서 정신이 맑지 못하단 말이오."

왕통치는 말했다.

"이 소저의 맥박은 정지된 것과 다름이 없으니 벌써 죽은 몸이오. 다만 몸이 아직도 굳지 않았을 뿐이오. 그런데 그대는 그녀를 안고 의원에게 진찰을 해달라고 찾아왔으니 심신이 착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노,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 날 수 없는 법이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급히 달려가 매장하도록 하시오. 사람은 땅에 들어가야 편해지는 법이외다."

소봉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이 의원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아자는 이미 죽었다고 할 수 있었다. 순전히 자기의 진기에 의해서 한 가닥 목숨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니 일반 의원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그는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바로 이때 한 청지기 차림을 한 남자가 약방 안으로 달려 들어오더니 부르짖었다.

"빨리, 빨리 가장 좋은 인삼을 주시오! 우리집 큰 나으리께서 갑자기 중풍이 드시고 숨이 넘어갈 판이오.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소."

약방 주인은 재빨리 말했다.

"예, 예. 오래된 인삼이 있읍니다요."

소봉은 인삼으로 잠시 동안이나마 목숨을 부지한다는 말을 듣고 대뜸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벼이 심해 숨을 거두려고 할 때는 몇 모금의 먹게 끓인 삼탕을 먹여 종종 잠시나마 기식을부지하여 조금 더 살게 만들어서는 몇 마디의 유언을 듣는 일들이 더러 있었다.

그는 그 주인이 붉은 나무 상자를 꺼내 매우 진귀한 물건을 다루듯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상자 안에는 세 뿌리의 손가락 굵기 정도의 인삼이 들어 있었다.

소봉은 사람들로부터 인삼이란 굵으면 굵을수록 좋고 겉의 껍질의 주름이 많고 깊을수록 귀한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만약 인삼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고 머리와 손발을 갖춘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아주 오래된 극상품이라고 하는 소리도 들은 바가 있었다. 이 세 뿌리의 인삼은 보기에 평범한 인삼이지 대단한 인삼 같지가 않았다.

그 청지기는 한 뿌리를 집어 들더니 총총히 약방 문을 나섰다.

소봉은 한 덩이의 금을 꺼내 나머지 두 뿌리를 샀다. 약방에는 그렇지 않아도 손님을 대신해서 약을 다려 주는 기구가 있었다. 그리하여 즉시 삼탕을 끓여 주었다.

소봉은 끓여 주는 삼탕을 천천히 아자에게 몇 모금 먹였다. 그녀는 이번에는 토해내지 않았다. 다시 몇 모금을 먹인 후 소봉은 그녀의 맥박이 뛰는 것이 약간 증강되고 숨쉬는 것도 좀 순조롭게 되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기뻐했다. 왕통치는 옆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형, 인삼은 얻기가 쉽지 않소. 그냥 낭비한다는 것은 정말 아까운 노릇이오. 그렇다고 인삼이 영지선초는 아니오. 만약에 죽은 사람마저 구할 수 있다면 돈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외다."

소봉은 이 며칠간 잠시도 아자의 곁을 떠나지 못했던 터라 마음속으로 여간 울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통치의 옆에서 하는 잔소리를 듣게 되자 그만 울화가 치밀어 올라일장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러나 손을 약간 쳐들게 되었을 때 그는 참았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때린다는 것은 영웅호걸의 짓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즉시 손을 멈추고 아자를 안고 약방을 나섰다. 등 뒤로 왕통치의 냉소가 들려 왔다.

"저 사내는 정말 멍청하군! 죽은 사람을 안고 왔다갔다 하다니! 아마도 그 자신의 병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군."

그런데 이 의원은 자기 자신이 조금전 지옥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실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소봉이 만약 노해서 그 일장을 후려쳤더라면 열 명의 왕통치라도 한꺼번에 극락세계로 보냈을 것이다.

소봉은 약방에서 나온 후 생각했다.

(소문에 들으니까 진짜 산삼은 장백산 일대의 추운곳에서 자란다고 한다. 그러니 한 번 부딪쳐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자를 구하기란 정말 어려운 노릇이나 그녀가 이 인간 세상에서 하루라도 더 머물게 된다면 아주의 하늘에 있는 영이라도 마음속으로 기뻐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즉시 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리고 장백산을 향해 동북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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