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무협소설 천룡팔부3 김용

一字師 2023.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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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천룡팔부3 김용

 

                                              图片来源 | 天龙八部幻饰武器怎么获得_天龙八部幻饰武器获得方法

 

1. 연뿌리 색 적삼을 입은 소녀

아주와 아벽이 내놓은 음식은 담백한 가운데 운치가 있었고 운검루의 음식은 호화스럽고 진귀했다.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운검루의 음식을 맛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단예는 달랐다. 그는 어릴때부터 왕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늘상 먹는 음식이 왕부인이 내놓은 음식이라 할 수 있었다.

왕부인은 물었다.

[대리 단씨는 무림의 세가인데 공자는 어째서 무예를 익히지 않았지?]

단예는 말했다.

[대리국에는 단씨가 많죠. 단씨 성 가운데서도 황족만이 무예를 익혔고 나머지 백성들은 무예와는 거리가 멀어요.]

왕부인은 단예를 뜯어보다가 다시 물었다.

[공자는 일반 백성인가?]

[그렇습니다.]

왕부인은 급히 물었다.

[공자는 황실의 종친을 알고 있는가?]

단예는 단호한 어조로 부인했다.

[한 사람도 알지 못합니다.]

왕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말했다.

[이번에 얻은 네 개의 화분 가운데 하나는 홍장소과라 부르고 또 하나는 조파미인검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또 어떤 구별이 있지?]

단예는 말했다.

[그 커다란 백화에 약간 검은 얼룩점이 있는 것이 만월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 얼룩은 바로 달 속의 계수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얀 꽃잎에 두 개의 감씨만한 검은 반점이 있는 것은 안아미라고 하는 것지요.]

왕부인은 기뻐서 말했다.

[그 이름은 정말 잘 지었군.]

단예는 말했다.

[하얀 꽃잎에 붉은 점이 얼룩져 있는 것을 홍장소과라 합니다. 그리고 하얀 꽃잎에 한 가닥 파란 무늬가 있고 한 가닥 붉은 줄이 있는 것을 조파미인검이라고 그러죠. 그러나 붉은줄이 많으면 또 조파미인검이 아니고 기란교라고 합니다. 부인, 생각해 보십시요. 무릇 미인은 얌전하고 온순해야 합니다. 얼굴에 간혹 상처를 낼 때가 있지만 그것은 결코 자기가 머리를 빗을때 잘못하여 자국을 낸 것이지 그 누구에게 할퀴어서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닙니다. 앵무새를 가지고 놀다가 새에게 상처를 입은 것이 상리에 맞는 것이지요. 그래서 꽃잎의 파란 무늬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파란 털의 앵무새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만약에 온 얼굴이 상처 투성이라면 그 미인은 언제나 남하고 싸우고 다투었다고 할 수 있으니 아름답다는 말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왕부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고 있었다. 무척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색이 굳어지더니 소리를 질렀다.

[당돌하군! 그대는 나를 풍자하고 있는 것인가?]

단예는 깜짝 놀라 말했다.

[원,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어떤 점에서 부인의 위엄을 거슬리게 했는지 모르겠군요.]

왕부인은 노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의 말을 듣고 그와 같은 예를 들어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해서 나를 모욕하는거지? 한 사람의 여자가 무공을 안다고 해서 아름답지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지? 얌전하고 온순해야 좋은 것은 또 뭐지?]

단예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 후배가 말씀 드리는 것은 상리로 따져 짐작하여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무공을 알고 있는 여자 가운데에도 본래 매우 아름답고 단정한 여자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단정하지 못하다는 것인가?]

단예는 말했다.

[단정하고 단정하지 못하고는 부인께서 스스로 잘 아실 것인데 제가 어찌 감히 망언을 하겠습니까? 다만 사람을 다그쳐서 처를 죽이게 하고 새로이 아내를 맞아들이게 하는 행동은 결코 단정한 사람의 소행이라고는 볼수 없습니다.]

왕부인은 왼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네 명의 시녀가 일제히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읍했다.

[저 사람을 데리고 가서 다화를 돌보게 하라.]

[예.]

왕부인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

[단예, 너는 대리 사람이니 일찍 죽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잠시 죽이지는 않고 우선 안팎에 있는 다화들을 돌보는 벌을 내리겠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네 개의 백화 중 만약 하나라도 죽으면 너의 한 손을 자르게 될 것이고 두그루가 죽게 되면 두 손을 자를 것이고 네 그루 모두 죽게 된다면 너의 사지를 모두 잘라 버리겠다.]

단예는 말했다.

[만약 네 그루가 모두 산다면 어떻게 됩니까?]

[네 그루가 모두 살게 된다면 그대는 나를 위해 다른 품종의 다화를 키워야 한다. 우선 십팔학사, 십삼태보, 팔선과해, 칠선녀, 풍진삼협,이교, 이런 유명한 품종들을 나는 한 품종마다 몇 그루씩 키워야 하겠다. 만약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네 두 눈을 뽑아 버리고 말겠다.]

단예는 큰소리로 항의했다.

[그와 같은 진귀한 품종들은 대리에서도 보기 드물답니다. 하물며 이 강남땅에서 어떻게 손쉽게 구할 수 있게습니까? 거기다가 한 품종마다 몇 그루씩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어찌 진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예 일찌감치 나를 죽이는 것이 낫겠소. 오늘 손을 자르고 내일 눈을 베는 그런 고통을 나는 참을 수가 없소.]

왕부인은 호통을 쳤다.

[내 앞에서 감히 방자하게 굴다니 살기가 싫어진 모양이로구나! 데려가라.]

네 명의 시녀들은 그에게 다가와 두 사람은 그의 옷자락을 잡았고 한 사람은 옷의 앞섶을 잡아당기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등 뒤에서 그를 밀었다. 그리하여 다섯 사람은 끌고 끌리면서 일제히 운검루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 네 명은 하나같이 무공을 익힌 터라 단예는 꼼짝을 할수가 없었다. 다만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수 더럽게 걸렸다!)

네 명의 시녀는 그를 끌고 밀고 하며 어떤 화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한 시녀가 삽 한 자루를 손에 쥐어 주었다. 또 한 시녀는 꽃에 물을 주는 나무통을 갖다 주며 말했다.

[부인의 명에 따라 순순히 꽃을 심는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어요. 당신과 같이 부인에게 반박하고 나선다면 당장 산 채로 매장을 당해요.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보살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시녀가 말했다.

[꽃을 심고 물을 주는 것 이외는 이 장원에서 함부로 다니지 말아요. 만약 금지구역을 돌아다니다가 들킨다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니 그 누구도 당신을 구할 수 없을거예요.]

이 시녀는 매우 정중하게 그에게 한 차례 당부를 하더니 떠나갔다. 단예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대리국에서의 그의 지위는 그의 백부 보정제와 그의 부친 진남왕 다음이었다. 장래에 부친이 황위를 계승한다면 그는 바로 황태자가 될 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강남땅에 잡혀와 어떤 사람은 그를 태워 죽이려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산 채로 매장하려 하기도 하고 팔다리를 자르고 두 눈을 뽑겠다고 위협하더니 이제는 강제로 원예사가 되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기가 막혔다. 비록 그의 성격이 소탈한 편이고 황궁와 왕궁에서 원예사들이 꽃을 다듬고 풀을 깎으며 괭이로 땅을 파서 비료를 주는것을 보아 왔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역시 왕자의 신분으로서 원예사는 비천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낙천적이었다. 역경에 처해도 잠시 의기소침해 있을 뿐 곧 기분을 전환해서 자기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았다.

(나는 무량산 옥동에서 이미 신선 누나를 사부님으로 모셨다. 이 왕부인으로 말하면 모습이 신선 누나와 비슷하다. 다만 나이가 더 많을 뿐. 그러니, 나는 그녀를 나의 사백쯤으로 알고 있으면 그뿐 아닌가. 웃 어른이 있으면 제자는 그 수고를 덜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더군다나 꽃을 가꾸는 것은 선비들의 운치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찌됐든간에 칼이나 창을 써야 하는 무공을 배우는 것보다도 고아한 일이다. 그리고 구마지에게 잡혀 모용 선생의 무덤앞에서 산 채로 불태워져 죽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꽃을 심는 것이 천 배 만 배 더 유쾌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애석하게도 너무 떨어지는 이런 품종들을 대리국의 왕자인 내가 친히 시중들어야 하는 것은 큰 인재를 조그마한 일에 쓰는 것이고 그야 말로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 아니겠는가. 하하하! 내가 소잡는 칼이냐? 화초 심는 것도 무슨 재주라고 큰 소리 치는 것이냐?)

단예는 다시 생각했다.

(이 만다산장에서 며칠만 더 묵게 된다면 그 어느 때라도 연뿌리 색 적삼을 입은 소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게 될 기회가 있을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꽃을 심는 것이 내게는 복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잎의 풀을 뜯어서 속으로 묵도를 올렸다.

(어디 내가 언제쯤 그 소저를 만나 보게 될지 점쳐봐야 되겠다.)

그는 풀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기고 다시 오른 쪽으로 옮기면서 기다렸다. 태상감하의 곤괘가 나왔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곤우주목 입우유곡 삼세불관이다. 삼 년 동안 불 수 없다니 이야말로 딱하기 한이 없는 일이로구나!)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돌렸다.

(삼 년 동안 볼 수 없다면 사 년째에는 만날 수 있다는 뜻인데 딱하기는 뭐가 딱하단 말인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는 더 자신을 다그치지 않았다. 콧노래를 흥얼대며 괭이를 어깨에 메고는 내키는 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왕부인은 나에게 네 화분의 백다화를 심으라 했다. 네 개의 꽃은 정말 뛰어난 품종이니 매우 우아한 곳에 심어야 어울리겠지?)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사방의 경치를 살폈다. 그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면서 껄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왕부인은 다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곳에 다화를 심고서는 이곳을 만다 산장이라 이름을 붙여 놓았군. 그러면서도 다화가 그늘을 좋아하고 햇볕을 싫어한다는 것도 모르고 햇살이 비치는 곳에 다화를 심어 놓았으니 다화가 죽지는 않더라도 활짝 피기는 어려운 노릇이지. 거기다가 비료만 잔뜩 주었으니 아무리 좋은 품종이더라도 모조리 시들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정말 애석한 일이군. 우스꽝스럽다. 우스꽝스러워.]

그는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이 짙은 곳으로 찾아들었다. 조그만 산을 돌자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졸 났다. 그리고 왼쪽에는 한 줄의 파란 대나무가 서있었는데 사방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이곳은 사방이 산등성이로 에워싸인 곳이라 햇살이 비쳐들지 않았다. 왕부인은 이런 곳에는 다화를 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한 그루의 다화도 보이지 않았다.

단예는 크게 기뻐하며 중얼 거렸다.

[이곳이 가장 적절할 것 같군.]

그는 다시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가서 네 개의 다화를 파란 대나무밭으로 하나씩 옮겨갔다. 그리고 화분을 깨뜨리고 화분의 흙과 함께 땅에 심었다. 그는 한 번도 친히 다화를 심어 보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많이 보아 왔으므로 그대로 흉내를 낸 것이다. 반씩 나누어 네 개의 백합화는 대나무 밭 옆에 심어졌다. 왼쪽에는 조파미인검을 심었고 오른쪽에는 홍장소과와 만월을 심었다. 그리고 안아미는 비스듬히 개울 한쪽으로 서 있는 바위 뒤에다 심어놓았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 거렸다.

[이것이 소위 천 번 만 번 불러서야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비파로 몸을 반쯤 가리고 나타나는 형상이 아니겠는가. 반쯤 가리는 듯한 형상이야 말로 더욱 미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중국은 역대로 꽃을 미인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그러므로 꽃을 가꾸는 도리도 미인을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단예는 황실 출신이고 어릴 적부터 시설을 몸에 익혀 왔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재간은 남보다 뛰어났다.

그는 개울물에다 손을 담그고 두 손의 흙을 깨끗이 씻어냈다. 그리고 바위에 걸터앉아 안아미라는 다화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뒷모습도 바라보며 속으로 우쭐했다. 바로 이 때 발자욱 소리가 들리면서 두 여인이 다가왔다. 그러자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이곳이 가장 아늑하고 올 사람도 없겠군.]

그 목소리를 듣고 단예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 목소리는 낮에 연뿌리 색의 비단 적삼을 입고 있던 소녀의 음성이 아닌가? 단예는 숨을 죽이고 기척도 내지 않은 채 생각했다.

(그녀는 상관이 없는 남자는 만나 보지 않겠다고 했다. 나 단예는 그녀와는 상관이 없는 남자가 아닌가? 나는 그녀의 몇 마디말을 듣고 그녀의 선악과 같은 음성만 듣고도 무한한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녀의 음성만 듣고 있어야지 절대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서는 안 된다.)

그의 머리는 원래 비스듬히 기울인 상태였는데 그 상황에서 그는 감히 머리를 똑바로 들지 못했다. 머리를 그렇게 비스듬히 놔두는 것은 머리를 돌리려 하다가 목뼈에서 무슨 소리라도 나서 그녀를 놀라게 할까봐서였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소명, 너는 무슨 소식을 들었느냐? 그 이에 관한 소식 말이다.]

단예는 그 소리에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가 말하는 그이는 단예 자신이 아니라 모용 공자이기 때문이었다. 그 모용 공자는 외자이름으로 복을 쓰는 것 같았다. 소녀의 묻는 음성에는 관심의 빛이 가득 서려 있고 부드러운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단예는 불현듯 모용 공자가 부러웠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이 때 소명이라고 불리우는 소녀는 한참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대로 털어 놓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대로 말해야 돼. 그대의 호의는 잊지 않을께.]

소명은 말했다.

[저는 두려워요. 부인이 꾸지람하실까봐 두려운거예요.]

[바보 같은 계집애. 네가 나에게 말한 것을 어찌 부인에게 말하겠니?]

소명은 말했다.

[만약 아가씨에게 묻는다면?]

[그래도 나는 말하지 않지.]

소명은 한참 주저하다 말했다.

[고모댁 도련님은 소림사로 갔어요.]

[아주와 아벽의 말로는 개방으로 찾아갔다고 하던데?]

단예는 생각했다.

(고모댁 도련님이라니? 그러면 모용 공자는 소녀의 고종 오라비인가보다. 그러면 두 사람은 친척이 아닌가.)

소명은 다시 말을 이었다.

[부인이 이번에 외출하게 되었을 때 도중에서 공야 둘째 나리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개방의 수뇌급 인물들이 모두 강남땅으로 온 것을 알았어요. 그들은 바로 고모댁 도련님에게 크게 따지겠다는 것이었어요. 공야 둘째 나리는 고모댁 도련님의 편지를 받았는데 낙양에 갔던 고모댁 도련님은 개방의 수뇌급 인물들을 만나지 못해 곧장 숭산 소림사로 간다고 씌어 있더래요.]

소녀는 물었다.

[왜 소림사로 갔지?]

소명은 말했다.

[공야 둘째 나리의 말로는, 낙양에서 들은 소식인데, 소림사의 한 늙은 화상이 대리에서 죽었대요. 그런데 그들은 또 고소 모용씨가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나요. 그래서 고모님댁 도련님은 매우 화가 나시었대요. 그런데 다행히 소림사는 낙양과 그리 멀지 않아 고모님댁 도련님은 바로 소림사의 화상들에게 따지러 갔대나 봐요.]

그 소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만약 제대로 해명이 되지 않을 때는 손을 쓸 것이 아닌가? 어머님께서는 그와 같은 소식을 듣고도 왜 그냥 돌아오셨지? 소림사로 달려가 고모님댁 도련님을 도와 주지 않고?]

[그건...... 쇤네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부인은 고모님댁 도련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소녀는 분연히 말했다.

[흥! 설사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어쨌든 한 편이 아니니? 고소 모용씨가 밖에서 창피를 당한다면 우리 왕씨에게 무슨 영광이 돌아온단 말이냐?]

소명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 소녀는 대나무밭 옆에서 오락가락하다가 갑자기 세 그루의 백다화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주변에 깨어져 널려 있는 화분 조각들을 바라보며 '어머'하고 놀랐다.

[누가 이곳에 다화를 심었지?]

단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위 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길게 읍한 뒤 말했다.

[소생이 부인의 명을 받고 이곳에다 다화를 심었습니다. 소저의 비위를 거슬렸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는 길게 읍을 했으나 눈만은 앞을 보고 있었다. 혹시 소녀가 '나는 나와 상관없는 남자는 만나보지 않아'하며 몸을 돌려 떠나버리면 다시 만나 볼 기회를 놓쳐버릴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소저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머리가 윙 하니 울렸다. 눈앞이 침침해졌으며 두 무릎에 기운이 빠져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신선 누님, 저는 얼마나 신선 누님을 생각했는지 모른답니다. 단예가 사부님에게 인사드리죠.]

지금 단예의 눈 앞에 서있는 소녀의 모습은 무량산의 옥녀상과 모습이 똑같았다. 왕부인은 옥녀상과 모습이 비슷하나 역시 나이가 들어 용모도 옥녀상만큼 아름답지 못했다. 그러나 이 소녀는 복장이 다르다는 점 이외에는 얼굴형이나 눈, 코, 입술, 귀살결, 몸매, 손발, 어느 곳 하나 닮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치 옥녀상이 부활한 것 같았다. 그는 꿈속에서도 옥녀상을 수천 수만번이나 상상하곤 했다.그런데 눈앞에 살아 있는 옥녀상을 친히 대하게 되니 그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이 세상인지 저 세상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 소녀는 그가 미친 사람인 줄 알고 '흑'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대는...... 그대는......]

단예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길은 여전히 그 소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때서야 그는 더욱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끝내 그는 눈 앞의 소녀가 동굴의 옥녀상과는 역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옥녀상은 요염하여 사람의 혼백을 앗아가버리는 자태가 엿보였다. 그러나 눈앞의 소녀는 단정한 가운데 치기가 엿보였다. 비교해 볼 때 옥녀상이 이 소녀보다 더욱더 활발해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그 날 석동에서 신선 누님의 소녀와 같은 모습을 보고 저 자신이 정말 복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직접 누님의 모습을 뵙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선녀가 있다는 것이 헛말은 아니로군요.]

소녀는 소명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뭐라고 하지? 저 사람은......저 사람은 누구이지?]

소명은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아주와 아벽이 데리고 온 그 책벌레여요. 그는 다화를 심을 줄 안다고 했어요. 부인은 그의 터무니없는 말을 믿었기 때문에......]

소녀는 단예에게 물었다.

[이것 봐요, 책벌레. 조금 전에 그녀와 내가 하는 얘기를 모두 들었나요?]

단예는 웃었다.

[소생의 성은 단이고 이름은 예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리국 사람이지 책벌레가 아닙니다. 신선 누님과 소명 누나가 주고 받는 말을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점은 결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절대로 누설하지 않을테니까요.]

소녀의 안색이 굳어졌다.

[왜 누님이니 누나니 함부러 불러요. 그대가 책벌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언제 또 나를 보았다는 거예요? 언제 보았다는 거예요?]

단예는 물었다.

[내가 그대를 신선 누님이라 부르지 않는 다면 달리 무어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소녀는 대답했다.

[나는 성이 왕씨에요. 그러니 그대 역시 나를 왕소저라 부르면 돼요.]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안돼. 천하에 왕씨 성을 가진 소저가 수천 수만에 그치겠어요? 그대 같이 하늘의 선녀 같은 인물을 어찌 왕소저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그러니 그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퍽이나 난처한 일이군요. 왕선녀라 부르자니 너무 속되니 안되겠고 공주라 부르자니 송나라, 대리국, 요나라, 토번국, 서하 등 어느 나라에라도 공주가 없겠습니까? 그리고 그녀들을 어찌 그대와 비길 수 있겠습니까?]

소녀는 그가 연신 책을 읽듯 읊조리는 말을 들으며 정말 책벌레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 홀딱 반해서 되새기는 듯이 자기를 칭찬해 주는 말을 듣자 역시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라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되었든 그대는 운수가 좋아서 우리 어머님께 두 발을 잘리지 않았군요.]

단예는 말했다.

[자당되시는 부인께서는 신선누님과 같은 용모를 지니셨더군요. 거기다 좀 특별한 성격을 지니셨더군요. 함부로 사람을 죽이니 누님의 그 신선과 같은 자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어요.]

소녀는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서 가서 다화나 심어요. 우리는 또 요긴하게 할 말이 있어요.]

그녀의 태도는 그를 보통 있는 집안의 정원사처럼 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단예는 그녀의 그와 같은 태도를 조금도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얘기하고 싶었고 몇 번이라도 더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기꺼히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하려면 그녀와 모용 공자의 일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 그녀는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단예는 입을 열었다.

[소림사는 무림에서 태산북두 같은 존재입니다. 절 안의 고승과 고수들은 천 명은 되지 않아도 팔백은 됨 직하죠. 그들은 대개 칠십 이 가지 절기에 정통합니다. 이번 소림파의 현비대사가 대리의 신계사에세 어떤 자의 독수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고승들은 모용씨가 손을 쓴 것이라고들 여기고 있죠. 모용 공자가 혼자 위험한 곳에 뛰어든 것은 실로 크게 잘못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소녀는 아니나 다를까 몸을 흠칫했다. 단예는 감히 그녀의 안색을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속으로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모용복이라는 자를 위해서 이처럼 관심을 가지고 걱정을 하는구나. 내가 그녀의 안색을 쳐다보면 어쩌면 화가 나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러한 그의 눈에 그녀의 연뿌리 색 의상의 아랫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퉁소 소리보다 더 부드러운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림사의 화상들은 어찌하여 모용씨에게 그 죄명을 씌우고 있나요? 이유를 그대는 알고 있나요? 그렇다면 빨리 말해 주세요.]

단예는 그녀의 나즈막히 속삭이는 말을 듣고 그만 맘이 누그러졌다. 즉시 알고 있는 바를 모조리 털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실 내가 알고 있는 바는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현비대사가 몸에 위타저를 맞고 죽었다는 것과, 모두들 그대의 수법으로 그대의 몸에 펼친다라고 하는 방법이라는 것만 들었을 뿐이다. 그 방법을 천하에서 고소 모용씨 집안에서만이 펼칠 수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한 두 마디의 말로 설명이 끝나고 이 말이 끝나면 그녀는 또 나를 재촉해서 다화를 심으라고 할 것이며 또다시 그녀와 대화를 나눌 실마리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짧은 말을 길게 늘여 매일같이 조금씩 살을 붙여 이야기를 해 주면 그녀는 나를 매일 찾을 것이고 만일 나를 찾을 수 없다면 마음이 근질거려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나 자신도 무공을 모릅니다. 무슨 금계독립, 흑호투심 같은 가장 쉬운 초식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리 집에는 한 친구가 있는데 성은 주씨이고 이름은 단신이라고 합니다. 필연생이라고도 하지요. 그는 보기에 문약해 보이고 나처럼 책만 파고드는 선비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그의 무공은 대단하답니다. 어느 날 나는 그가 부채를 오므리다가 꺼꾸로 들고 '딱'하니 그 부채의 자루를 한 덩치 큰 사나이의 어깨죽지에 이렇게 찍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한 덩어리로 움츠러들었는데 그모습은 마치 한 무더기의 진흙 덩어리 같았습니다.]

그 소녀는 말했다.

[그것은 청량선법의 타혈공부이어요. 제38조인 투골선의 초식은 자루를 꺼꾸로 쥐고 비스듬히 어깨죽지를 찌르게 되는 것이죠. 그 필연생은 곤륜파의 삼인관 문하의 제자인 것이 틀림없어요. 이 파의 무공은 판관필을 잘 쓰는데 판관필을 쓰게 된다면 부채를 쓰는 것보다 무섭죠. 그대는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요. 나에게 무공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어요.]

만약 그녀의 그런 말을 주단신이 들었다면 정말 탄복해 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소녀는 비단 그 일초의 수법과 명칭을 말했을 뿐 아니라 주단신의 사문 내력과 무공까지도 똑똑히 말해 주었던 것이다. 만약 다른 무학의 명수가 있어서 그와 같은 말을 들었다면 그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단예의 백부 단정명이나 그의 부친 단정순이 그 말을 들었다면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찌하여 나이 어린 소녀가 무학에 대해서 이토록 견식이 넓을까?)

그러나 단예는 무공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소녀가 수월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었을 뿐이다.

 

2. 유혹하는 마음

단예는 소녀가 한 말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몰랐다. 다만 두 눈으로 그녀의 눈썹이 이렇게 꿈틀거리고 그녀의 입술이 저렇게 삐죽하는 것을 정신없이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소녀는 다시 물었다.

[그 분 주선생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단예는 대나무 옆에 있는 하나의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일을 이야기 하자면 길어지니 소저는 자리를 저쪽으로 옮겨 편안히 앉아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천천히 들으시지요.]

소녀는 말했다.

[당신은 꽤 말이 많군요.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을 여가가 없단 말이예요.]

단예는 말했다.

[소저가 여가가 없다면 내일 저를 찾아와도 됩니다. 내일 시간이 없다면 며칠 후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부인이 나의 혓바닥을 잘라버리지만 않으신다면 내가 알고 있는 일은 모두 소저께 말씀드리지요.]

그 소저는 왼발을 가볍게 구르더니 다시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저는 소명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머님께서 또 뭐라고 하셨지?]

소명은 말했다.

[부인께서는 '흥, 점점 더 소란이 크게 이는구나. 개방을 원수로 삼고 또 소림파를 원수로 삼았으니 너희들 고소 모용씨 집안 사람들은 죽어도...... 죽어도 묻힐 곳이 없겠구나.'라고 하시더군요.]

소녀는 다급해져 말했다.

[어머니는 고모댁 오라버니의 처지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도 어째서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지?]

소명은 말했다.

[정말 그래요. 소저. 그런데 부인이 저를 찾을지 모르니 그만 가봐야겠어요. 소저는 조금 전 제가 한 말을 부인께 절대 이야기 하면 안 되어요. 쇤네는 소저를 몇 년 더 모시고 싶어요.]

소녀는 말했다.

[안심해도 좋아. 내가 어찌 너에게 해를 끼치겠니?]

소명은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떴다.

단예는 소명이라는 소녀의 눈에 떠올라 있는 두려운 빛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왕부인이 정말 사람을 초개와 같이 죽이니 넋이 나갈 정도로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구나.)

이 때 소녀는 천천히 청석으로 된 바위를 향해 걸어가더니 그 곳에 앉았다. 그러나 단예에게는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단예는 경솔하게 그녀의 곁에 가서 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그루의 백다화는 그녀와 무척 가까운 곳에 있었고 두 그루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미인과 명화가 정말 잘도 어울려 그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명화경국양상환이라고 하더니 역시 미치지 못하는군. 과거의 이태백은 작약의 아름다움을 양귀비에 비교했다. 그런데 그가 만약 이 소저를 만나 보았다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꽃송이가 아름답지만 꽃송이에서는 뾰로통해진 모습, 부드러운 음성, 방긋 웃는 모습 그리고 근심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결코 미녀에 비할 바가 아니지.)

소녀는 나직히 말했다.

[그대는 끊임없이 나보고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것이 진실인지 모르겠군요.]

단예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자도는 아름다움을 모르는 자는 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남자에게도 그러하건대 소저 같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미녀에게는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소저는 한평생 찬미하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듣기가 역겨워졌을 것입니다.]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한번도 어떤 사람이 나를 아름답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말한 사람이 없어요. 이 만다산장에는 저의 어머니만 빼놓고는 거의가 시녀이거나 하인, 하녀들이어요. 그녀들은 다만 내가 소저인 것만 생각했지 내가 예쁘든 그렇지 않든 상관하지 않았어요.]

단예는 말했다.

[그렇다면 바깥 사람들은 어떠했소?]

소녀는 되물었다.

[바깥 사람이라니요?]

단예는 대답했다.

[바깥으로 나갔을 때 사람들이 소녀의 선녀와 같은 모습을 보고 놀라고 찬탄하며 고개를 숙여 절을 하지 않던가요?]

소녀는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바깥에 나가 본 적이 없어요. 바깥에 나가서 무얼 하나요? 어머니도 저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요. 제가 고모댁의 '환시수각'으로 가서 책을 보았을 때에도 바깥 사람은 하나도 보지 못했어요. 다만 그의 몇몇 친구인 등 큰오라버니, 공야 둘째 오라버니, 포 세째 오라버니, 풍 네째 오라버니 등등......, 그들은 그대처럼 그렇게 멍청하진 않아요.]

그리고는 방그레 웃었다.

단예는 물었다.

[그렇다면 모용 공자...... 그도 그대가 이처럼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까?]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몇 방울의 눈물이 땅바닥의 푸른 풀 위로 떨어졌다. 수정과 같이 맑고 고운 그 눈물은 마치 아침 나절의 이슬방울 같았다.

단예는 감히 더 묻지 못했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는 매우 바빠요. 일년 내내 그리고 아침 부터 저녁까지 여가라고는 없어요. 그리고 그가 나와 함께 있을 때도 무공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국가 대사를 말하지요. 나는...... 나는 무공이 싫어요.]

단예는 무릎을 '탁'치며 부르짖었다.

[맞아요! 맞아! 나 역시 무공이 싫어요. 그런데 백부님과 아버님은 나에게 무공을 배우라고 했지요.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겠다고 했으며 차라리 도망을 치겠다고 했습니다.]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그를 때때로 만나 보기 위해 무공은 싫어했지만[권경도보]를 보게 되었을 때 모조리 머리속에 외워두었죠. 그리고 그가 어떤 곳을 모른다고 하면 내가 그것을 설명해 주곤 해요. 하지만 나 자신은 배우지 않았어요. 계집애가 칼을 쓴다는 것은 우아하지 못한......]

단예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맞소, 맞아요! 그대와 같이 천하무상의 미녀가 어찌 남과 손짓 발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말이 되질 않아요. 어이쿠!]

그는 갑자기 그 한 마디 말은 그의 어머니를 비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소녀는 그의 그러한 말에는 별로 주의하지 않고 말하였다.

[역대의 제왕과 장상들은 '오늘 네가 날 죽이면 내일은 내가 널 죽인다'는 일들을 저지르곤 했는데 나는 실로 그러한 일들이 싫어요. 그러나 그는 그러한 일들을 가장 즐겨 이야기하죠. 그래서 부득이 그러한 책들을 읽고 그에게 이야기해 주지요.]

단예는 의아하게 여겨 물어보았다.

[어째서 그대가 그러한 이야기들을 보고 그에게 설명을 해야 하오. 그 자신은 볼 줄을 모릅니까?]

소녀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뾰로통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했다.

[아무려면 그가 장님인 줄 아나요? 글자를 모르는 줄 알아요?]

단예는 민망해서 말했다.

[아니, 아니요. 나는 그가 천하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해 두겠소. 그러면 됐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쓰라렸다.

소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나의 고종 오빠예요. 이 장원은 고모님과 고모부, 고종 오빠 이외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고모부가 세상을 떠나신 후 고모님과 저의 어머님이 싸우셨어요. 그래서 저의 어머니는 고종 오라버니도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했지요. 나 역시 그가 천하에서 제일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몰라요. 천하에서 제일 좋은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거든요.]

단예는 말했다.

[어째서 그대의 아버지에게 물어 보지 않소?]

그녀는 말했다.

[저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에 그 분은 세상을 떠났는걸요. 저는...... 한 번도 아버님의 얼굴을 뵌적이 없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단예는 말했다.

[음, 그러면 그대의 고모는 아버님의 누이가 되겠고 고모부는 고모의 남편이 되겠군. 그리고 그는...... 그는...... 그는 고모님의 아들이겠구료.]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왜 그리 멍청한 말을 하셔요? 나는 우리 어머니의 딸이고 그는 나의 고종 오라버니예요.]

단예는 그녀를 웃길 수 있다고 생각하자 무척 기뻐서 말했다.

[아,알았소.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는 무척 바빠서 책을 읽을 여가가 없는 모양이구료. 그래서 그대가 대신 책을 보는 모양이구려.]

소녀는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죠.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어요. 그런데 소림사의 화상들은 어째서 우리 오라버니가 그들 소림파의 사람을 죽였다고 억울한 누명을 씌우나요?]

단예는 그녀의 기다란 눈썹 끝에 매달려 있는 한 방울의 눈물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옛날 사람들은 '이화일지춘대우'라는 한 마디로 미인의 눈물을 비유했다. 하지만 배꽃이 아름답기는 하나 배나무는 너무 비대하다. 게다가 비 온뒤에 배꽃은 송이송이마다 이슬이 맺혀 있으니 너무나 슬퍼 보인다. 오로지 왕소저처럼 이렇게 산다화에 이슬이 맺혀 있는 것 같아야 그것이야말로 정말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 소녀는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그가 대답을 않자 한 손가락을 뻗쳐 그의 손등을 가볍게 밀며 말했다.

[어떻게 된거예요?]

단예는 전신을 떨며 흠칫 놀라 낮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어이쿠!]

그 소녀는 그 바람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왜 그래요?]

단예는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다.

[그대의 손가락이 내 손등에 닿으니 마치 혈도를 짚힌 것 같았소이다.]

그 소녀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가 농담을 하는 줄 모르고 말했다.

[이 손등에는 혈도가 없어요. 액문, 중저, 양지, 세 혈도는 손바닥 끝에 있고 전할, 양로는 손목 가까이에 있지만 그건 더 멀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손등을 내밀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단예는 그녀의 왼손 식지가 한 뿌리 파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하얗디 하얀 오른손 식지로 그의 손등을 찍자 갑자기 목이 말라오면서 머리가 띵해져서 물었다.

[소저, 그대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나요?]

소녀는 미소했다.

[그대라는 사람은 정말 괴상하군요. 좋아요. 그대에게 알려 주어도 상관이 없어요. 어차피 내가 얘기하지 않는다면 아주와 아벽 두 계집애가 알려 주겠지요 뭐.]

그녀는 손가락을 내밀어 자기의 손등에다 이름 석 자를 썼다.

[왕어언.]

단예는 부르짖었다.

[정말 묘하군요, 묘해! 말이 끝나고 방긋 웃는다니 정말 부드럽고 친근한 감이 드는군요!]

왕어언은 방그레 웃었다.

[이름은 언제나 듣기 좋게 만들죠. 역사상의 아무리 간악한 자라도 이름자만은 퍽이나 아름답지요. 조조는 그렇다고 해서 어떤 덕을 엿볼 수 없었구요. 주전충은 더욱더 불충한 사람이었어요. 그대는 단예라고 부르는데 명예가 그토록 휘날릴까요? 아마도 악명......]

단예는 그 말을 받았다.

[......악명을 떨치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두 사람은 소리내어 웃었다.

왕어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볼래 없는 듯 한가닥 우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소리내어 웃으며 기뻐하자 그 모습은 더욱더 아리

따왔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만약 한 평생 그녀가 웃을 수 있도록 할 수만 있다면 이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녀의 기뻐하는 모습은 잠깐이었고 또 다시 그녀의 얼굴에는

몽롱하고 우울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그는...... 그는 언제나 점잖아요. 한 번도 나에게 무례한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아! 연나라, 연나라,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건가요?]

'연나라'라는 말을 듣게 되자 단예는 별안간 많은 이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많은 이름들이 하나의 성을 갖고 이어졌다.

'모용씨', '연자오', '삼합장', '연나라'...... 그리하여 그는 불쑥 말

했다.

[그럼 모용 공자는 오호지란의 선비 모용씨의 사람이란 말인가요?

그는 오랑캐 출신으로 중국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요?]

왕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는 연나라 모용씨의 구왕손이예요. 그러나 이미 수백 년

이 지난 일이니 옛 선조들의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으면 무얼해요

? 그는 오랑캐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중국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아요

. 그리고 중국 역사도 알려고 하지 않고 중국책도 읽으려 하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볼 때 중국 책에 뭔가 나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예요. 그

래서 언제인가 내가 한 번 말한 적도 있어요. '고종 오라버니, 오라버니

는 중국책이 나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선비글자로 된 책이 있으면 좀 보

여주어요'라고 했더니 그는 매우 화를 내었어요. 왜냐하면 선비 글자로

된 책은 아예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 후 그녀는 고개를 살짝 쳐들고 멀리 두둥실 떠가는 하얀 구름을 쳐

다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는...... 그는 나보다 열 살이 많아요. 그래서 그는 언제나 나를 어린 아이 취급을 하죠. 그리고 내가 독서할 때 책에 써있는 무공을 기억하는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줄곧 모르고 있어요. 내가 책을 읽는 것은 그를 위해서이고 책 속의 무공을 기억하는 것도 다 그를 위해서죠.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차라리 병아리나 키우면서 비파를 퉁기거나 글씨를 쓰며 지내는 것이 더 나을거예요.]

단예는 놀라서 물었다.

[그는 정말 그대가...... 그대가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모르나요?]

왕어언은 말했다.

[내가 그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지요. 그리고 그 사람도 나에게 퍽 잘 대해 주지요. 그러나......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친남매와 같아요. 꼭 해야 할 일 이외에는 한 번도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마음을 나에게 털어 놓은 적도 없고 나에게 무슨 심사가 있는지를 물어본 적도 없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의 뺨에 엷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리고 약간 겸연쩍어하는 눈치였으며 두 눈에는 부끄러운 빛이 떠올랐다. 단예는 내심 그녀와 농담을 하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무슨 심사가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걸 보자 그녀를 당황하게 하고 싶지 않아 말했다.

[그대 역시 언제나 역사나 무학을 논할 필요는 없소. 시사중에는 밤에 부르는 노래와 진정을 토로하는 시같은 것이 있지 않소?]

그러나 그 말을 한 그는 즉시 크게 후회했다.

(그녀가 정을 담뿍 머금은 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게 옳지 않느냐? 내가 왜 그녀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는가. 나는 정말 바보다.)

왕어언은 더욱더 부끄러워하며 재빨리 말했다.

[그...... 그래서 쓰겠어요? 저는 얌전한 규수예요. 어찌 그런...... 그런 시사를 써서 고종 오라버니에게 얕보일 수가 있겠어요?]

단예는 '휴'하고 길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옳아요. 마땅히 그래야 하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자기 자신을 나무랬다.

(단예야, 네 녀석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왕어언은 그러한 심사를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되새기고만 있었다. 그러나 오늘 단예와 같이 성격이 소탈한 사람을 만나자 어떻게 된 일인지 그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속 깊이 숨겨 두었던 정을 토로하게 된 것이다. 기실 그녀가 몰래 고종 오라버니를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아벽 그리고 소명, 소채, 위초 같은 시녀들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다만 누구도 입밖에 내지 않을 뿐이었다.

그녀는 한참 이야기하자 마음속의 우울한 빛이 약간 가시는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와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을 쓸데없이 많이 지껄이고 있군요. 소림사에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 고종 오라버니를 괴롭히는거죠?]

단예는 이제 더 이상 질질 끌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소림사의 방장은 현자대사라고 하지요. 그에게 한 분의 사제가 있는데 현비라고 한답니다. 현비대사의 가장 뛰어난 무공은 바로 '위타저'이지요.]

왕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소림 칠십 이절기 가운데, 48번째에 속하는 무공이어요. 모두 19초인데 그것을 펼치면 지극히 위맹하죠.]

단예가 말했다.

[그 현비대사가 우리 대리국에 오게 되어 육량주의 신계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누구에겐가 살해되었소. 그리고 그가 당한 방법이 그가 가장 장기로 삼고 있는 위타저였소. 세상 사람들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을 해치는 무리는 고소 모용씨밖에 없다고 생각한거죠. '그대의 수법을 그대에게 펼친다'라는 것이죠.]

왕어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단예는 말했다.

[소림파 이외에도 또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모용씨에게 원한을 갚으려 한다오.]

왕어언은 말했다.

[또 어떤 사람들인가요?]

단예는 말했다.

[복우파의 가백세라는 사람의 특이한 무공을 '천령천쇄'라고 하지요.]

왕어언은 말했다.

[그것은 복우파의 백승연편 제 29초 중의 네 번재 변화 초식이죠. 그 초식은 매우 기이하지만 상승무학이라고는 할수 없어요. 다만 그 힘이 매우 강맹할 뿐이죠.]

단예는 말했다.

[그 사람 역시 '천령천쇄'라는 수법에 의해 죽게 되었소. 그래서 그의 사제와 제자가 모용씨를 찾아 원한을 갚으려고 하는거지요.]

왕어언은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 가백세는 어쩌면 저희 고종 오라버니가 살해했는지 모르지요. 하지만 현비화상은 절대로 아니예요. 우리 고종 오라버니는 위타저라는 무공을 몰라요. 그 무공을 연마하기는 퍽 어려워요. 하지만 그대가 우리 고종 오라버니를 만나게 되더라도 그가 그 무공을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리고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것도요.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낼거예요.]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두 사람이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소명과 위초였다.

위초는 얼굴에 무척 당황한 빛을 띠우고 다급하게 말했다.

[소저, 큰일...... 큰일이 났어요. 부인께서 아주와 아벽에게 분부를 내렸어요. 아주와 아벽 두 사람을......]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목이 꽉 메이는지 다음 말을 잊지 못했다. 소명이 뒤를 이어 말했다.

[그녀 두 사람의 오른손을 잘라서 그녀들이 함부로 만다산장에 뛰어든 죄를 벌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두 계집애가 다시 부인의 눈에 띈다면 목을 자르겠다고 했어요. 이 일을...... 이 일을 어떻하면 좋죠?]

단예는 다급히 말했다.

[왕소저, 그대, 그대가 빨리 방법을 찾아서 그녀들을 구해 주는 것이 좋겠소.]

왕어언 역시 초조해져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와 아벽 두 소녀는 바로 고종 오라버니의 심복이면서 시녀들인데 바로 그녀들의 손을 잘라 보린다면 내 어찌 고종 오라버니의 낯을 대할 수 있겠어요. 위초야, 그녀들이 어디 있지?]

위초는 아주, 아벽과 가장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왕소저가 어떻게라도 해 보려는 기미를 보이자 한가닥 희망을 품고 재빠르게 대답했다.

[부인께서는 두 사람을 화비방으로 보냈어요. 그래서 저는 엄씨 아주머니에게 반 시간만 기다렸다가 손을 써 달라고 부탁해 놓았어요. 지금이라도 부인에게 달려가 빈다면 늦지는 않을거예요.]

왕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부탁을 한다 해도 십중팔구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방법밖에는 달리 좋은 방법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초와 소명을 데리고 급히 달려갔다.

단예는 날렵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 그녀를 쫓아가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한 걸음 내딛었을 때 어떤 할말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멍하니 넋을 잃은 듯 서서 그녀와 조금 전에 주고받았던 이야기들을 되새겨 보았다.

 

왕어언은 재빠른 걸음으로 상방으로 뛰어들었다. 왕부인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서 벽에 걸린 한 폭의 다화도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왕어언은 들어서면서 즉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왕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 표정은 매우 엄했다.

[너는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만약 모용씨 집안의 일이라면 나는 듣지 않겠다.]

왕어언은 말했다.

[어머니, 아주와 아벽은 이번에는 일부러 온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왕부인은 말했다.

[네가 그 애들이 일부러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니? 내가 그녀들의 손을 잘라 버리면 너의 고종 오라버니가 그후부터 너를 못 본 척할까봐 겁이 나서 그러는거지?]

왕어언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는 어머니의 생질이 아니예요? 그런데 어째서 그를 그토록 미워하죠? 설사 고모님이 어머니에게 잘못을 했더라도 오라버니를 미워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아요.]

그녀로서는 용기를 내어 몇 마디를 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기로서도 이와 같이 어머니의 말을 당돌하게 반박하고 나선 것이 놀라왔다.

왕부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딸의 얼굴을 몇 번 훑어 보더니 눈을 돌려 한참 동안 잠자코 있었다.

왕어언은 크게 숨 한 번 쉬지 못했다. 도대체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너는 네 고모가 나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무슨 잘못을 했지?]

왕어언은 어머니의 어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자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잠시 망설였다.

왕부인은 말했다.

[어서 말해봐. 어찌됐든 너도 이제 컸다고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말이다.]

왕어언은 다급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께서 고모 집안 사람들을 그토록 미워하는 것은 자연 고모님이 어머님께 잘못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과연 고모님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어머니가 제게 한 번도 이야기해 주신 적 없어요. 이제 고모님도 세상을 떠나시고 했으니 이젠 어머니...... 어머니께서 고모님을 미워할 필요조차 없어진 것 아니겠어요?]

왕부인은 날카롭게 말했다.

[너는 누구에게 들은 말이 있느냐?]

왕어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인했다.

[어머니는 저에게 한 번도 외출을 허락한 적이 없으며 외부 사람이 들어온 적도 없어요. 그런데 제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듣겠어요?]

왕부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팽팽해졌던 표정을 풀자 어조마저 누그러졌다.

[나는 너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너무나 많아. 죽여도 다 죽일 수가 없단다. 너는 여자이고 아직 나이도 어리지 않느냐? 역시 나쁜 사람은 안 만나는 것이 좋아.]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는 듯 말했다.

[단가라는 원예사는 달콤한 소리를 잘하는 자로서 역시 좋은 사람이 아니다. 만약 그가 너에게 한 마디 말이라도 한다면 시녀들에게 일러 그를 즉시 죽여서 두 마디 말을 못 하도록 하겠다. 알겠느냐?]

왕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첫 마디 두 마디는 커녕 백 마디 이백 마디도 더 했을걸?)

왕부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왜 그러느냐? 너처럼 마음이 약해 가지고는 한평생 얼마나 손해를 볼지 모른단다.]

그리고 그녀는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소명이 다가왔다.

왕부인은 말했다.

[네가 모든 사람에게 알려라. 그 누구라도 단가라는 원예사와 한 마디 말이라도 나눈다면 두 사람 다 혓바닥을 잘라 버린다고.]

소명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왕부인이 말한 것이 닭이라도 잡고 개라도 잡으라는 말같이 들리는 듯 대답도 담담하기만 했다.

[녜.]

그리고 한편으로 물러섰다.

왕부인은 딸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도 가봐라.]

왕어언은 대답했다.

[녜.]

그리고 문가로 걸어가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말했다.

[어머니, 아주와 아벽을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라고엄하게 타이르시면 될거예요.]

왕부인은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한 말을 거두어들인 적이 있드냐? 네가 더 이상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다.]

왕어언은 그 말을 듣고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나직히 말을했다.

[나는 어머니가 왜 고모님을 미워하고 고종 오라버니를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어요.]

그리고는 맨발로 바닥을 가볍게 구르며 그 방에서 나왔다.

왕부인은 소리쳤다.

[들어와!]

그 한 마디는 비록 우렁차지는 않을지라도 위엄으로 가득차 있었다. 왕어언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부인은 탁자 위의 향로 위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파란 연기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언아! 네가 무엇을 알고 있니? 나에게 속이지 말고 무엇이든 말해 보아라.]

왕어언은 아랫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고모님은 어머니가 함부로 사람을 죽여 관가에 죄를 짓고, 모르는 여러 사람들과 원한을 갖게 된 것을 탓한 것이 아니겠어요?]

왕부인은 말했다.

[그렇다. 그것은 우리 왕씨 집안의 일인데 모용씨 집안과 무슨 상관이 있다더냐? 그녀는 네 아버지의 누나에 지나지 않는데 왜 나를 간섭해? 흥, 모용씨 집안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연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꿈을 꾸고 있으며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총망라해서 모용씨 집안을 위해서 힘을 쓰게 하고 있단다. 그리고 영웅호걸들과 연락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아첨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개방과 소림파들에게 죄를 짓게 되었으니 야단이 났지.]

왕어언은 말했다.

[어머니, 소림파의 현비화상을 죽인 것은 결코 고종 오라버니가 아니예요. 그는......]

왕소저는 막 '위타저'라는 한 마디를 하려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가 '위타저'란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를 캐어 묻는다면 단예의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말머리를 돌렸다.

[...... 그의 무공이 그를 죽이기에는 아직 부족해요.]

왕부인은 말했다.

[그렇지, 이번에 그는 소림사로 갔지. 그 말 많은 계집애들이 당연히 이리로 달려와서 네게 이야기를 했겠군. '남모용, 북교봉'이라는 말이 있다. 명성은 자자하지만 한 사람의 모용복과 거기다 등백천을 더 보탠다고 해서 소림사로 가면 득이 될 것 같으냐? 그야말로 분수를 모르는 짓이지.]

왕어언은 몇 걸음 어머니에게 다가가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어떻게 좀 구해 주셔요. 사람을 보내어서 접응을 하시면 어때요? 그는...... 그는 모용씨 집안의 외동 아들이예요. 만약 어떤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고소 모용씨 집안은 후손이 끊어지게 되어요.]

왕부인은 냉소했다.

[모용씨 집안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너의 고모는 그녀의 집에 있는 '환시수각'의 장서가 우리 집의 '낭환옥동'의 장서보다 훨씬 많다고 자랑을 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귀여운 아들인 모용복이 소림사로 가서 위풍을 떨쳐 보라고하시지.]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나가라, 나가!]

왕어언은 말했다.

[어머니, 고종 오라버니는......]

왕부인은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너는 점점 더 방자해지는구나!]

왕어언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숙인 채 걸어나왔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 낭하에서 누군가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소저, 어떻게 되었어요?]

그녀는 놀라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바로 단예가 아닌가.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말도 걸지 말아요.]

 

원래 그녀가 그 자리를 떠나자 단예는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다가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녀를 뒤따라 오게 되었다. 그리고 멀리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어언이 왕부인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게 된 것이다. 그리고 왕어언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왕부인이 응낙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왕부인께서 응낙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것이 좋겠군요.]

왕어언은 대답했다.

[어머님이 허락을 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어떤 좋은 방법을 강구할 수 있겠어요 어머님은...... 저의 고종 오라버니가 위험속에 빠져 있는데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그러셨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상하는지 다시 눈물을 흘리려고 했다.

단예는 말했다.

[음, 모용 공자가 위험에 빠져 있다구요?]

단예는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 왕어언에게 물었다.

[소저, 소저는 그처럼 많은 무공을 알면서 어째서 스스로 달려가 그를 구하려 하지 않소?]

왕어언은 새까만 눈동자를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의 한 마디가 천하에서 다시 없이 기이한 말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무공을 알고 있을 뿐 펼치지는 못해요. 거기다 제가 어떻게 갈 수 있겠어요? 어머니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거예요.]

단예는 미소했다.

[그대 어머니는 물론 허락하지 않을 것이요. 하지만 그대는 혼자서 도망칠 수도 있지 않소? 나도 한때 집에서 몰래 도망쳐 나온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 후 집에 돌아가니 어머니 아버지는 그렇게 꾸짖지 않더군요.]

왕어언은 그 몇 마디의 말을 듣자 크게 깨달은 듯이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도 몰래 도망쳐 가서 고종 오라버니를 도와 드릴 수 있다. 그리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심한 꾸지람을 듣는다 해서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정말 어머니가 날 죽인다 하더라도 이미 난 고종 오라버니에게 도움이 되어 드린 후가 아니냔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고종 오라버니를 위해 고난을 달게 받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이 쓰리고 아프면서도 한편으로 달콤해지면서 흐뭇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이 사람도 몰래 도망친 일이 있다고 했다. 내가 왜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단예는 몰래 그녀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어 즉시 부추기고 나섰다.

[언제나 만다산장에 살면서 한번도 바깥 세상 구경은 하지 않을 셈이요?]

왕어언은 대답했다.

[바깥에 무엇이 볼 게 있어요? 나는 다만 고종 오라버니가 걱정될 뿐이예요.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무공을 연마한 적이 없어요. 진정으로 그가 위험에 부딪히게 된다면 나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할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어째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세요? 도움이 되고도 남아요.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가 남과 싸울 때 옆에서 몇 마디 말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이예요. 이걸 옆에서 구경하는 자가 더 환히 내다본다고 하는 것이죠. 그 누가 바둑에서 지게 되었을 때 내가 옆에서 훈수를 두게 된다면 그 사람은 즉시 열세에서 우세로 전환되지요. 그 일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랍니다.]

왕어언은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이 장원에서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요. 소림사가 동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도 모른답니다.]

단예는 즉시 자청하고 나섰다.

[그것은 걱정 마시오. 거기까지는 내가 모시고 가리다. 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모두 처리하기로 하죠.]

왕어언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생각했지만 여전히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단예는 또 물었다.

[아주와 아벽은 어떻게 되었지요?]

왕어언이 말했다.

[어머니는 역시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겠대요.]

단예는 즉시 대답했다.

[내친 김에 그녀들도 빨리 구합시다. 아주와 아벽이 한 팔을 잘리게 된다면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는 반드시 그대를 탓하게 될게요. 차라리 그녀들을 구해서 우리 넷이서 떠나도록 합시다.]

왕어언은 놀랍다는 듯 혀를 쑥 내밀어 보였다.

[그와 같이 대역 무도한 짓을 우리 어머니가 어디 당하고만 계시겠어요. 당신은 정말 담이 크네요.]

단예는 이때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 이외에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사람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슬쩍 물러서는 듯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수작을 부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빨리 떠나도록 합시다. 아주와 아벽은 그대의 어머니로부터 한 팔이 잘린대도 할 수 없죠. 그 이후에 그대의 오라버니가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묻는다면 그대는 그저 몰랐다고만 하면 되어요. 나는 결코 이 일을 누설하지 않겠소이다.]

왕어언은 급히 말했다.

[그럴 수가 있나요? 그것은 고종 오라버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지 않아요?]

그러면서 크게 망설이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아주와 아벽 두 시녀는 그이의 심복이어요. 어릴 적부터 그의 시중을 들어 왔어요. 만약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마도 모용씨 집안과 우리 왕씨 집안의 원한은 점점 더 커지고 깊어질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왼 발을 한번 구르더니 말했다.

[나를 따라 오세요.]

 

3. 사랑을 찾아서

단예는 그 한마디가 여간 반갑지 않았다. 한평생 그와 같이 듣기 좋은 말은 일찌기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녀가 서북쪽을 향해 나아갈 때 단예는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삽시간에 왕어언은 어느 커다란 석옥앞에 이르더니 입을 열었다.

[엄씨 아주머니, 나와 보세요. 할 말이 있어요.]

그러자 석옥 안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더불어 바짝 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소저, 그대는 이 엄 아줌마가 꽃의 비료를 만드는 것을 보러 왔어요?]

단예는 이미 위초와 소명에게 아주와 아벽을 이 화비방에 보냈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당시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음산한 음성을 듣자 화비방이라는 석자가 무슨 뜻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가슴 속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화비방이라니, 꽃의 비료라는 말인가? 어이쿠! 그렇다. 왕부인은 잔인하기 이를데 없다. 이미 산 사람을 산다화 밑에 생매장하여 꽃의 비료로 삼지 않았는가? 만약 우리가 한걸음 늦어 이미 아주와 아벽의 손을 잘라 꽃의 비료로 만들었으면 어떻게 하지?)

그러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의 핏기마저 가시는 것 같았다.

왕어언은 말했다.

[아주머니, 어머니께서 볼 일이 있으시대요. 오시래요.]

석옥 안에서 그 여자는 말했다.

[나는 지금 한참 바쁜데 안채에서 무슨 요긴한 일이 있다고 아씨께서 친히 나를 불러 오라고 시키셨지?]

왕어언은 말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요, 음...... 그녀들도 왔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석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보니 아주와 아벽은 두 철주에 묶여 있었다. 입에는 무엇인가 잔뜩 쳐넣어진 상태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데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주와 아벽의 옆에는 추악한 몰골의 노파가 있었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등이 굽은 노파의 손에는 한 자루의 번쩍이는 기다란 칼이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노파의 옆에는 커다란 솥에 하나 가득 물이 선고 있었는데 한참 김이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왕어언은 들어가더니 그녀에게 말하였다.

[아주머니, 어머니게서는 아주머니께 그녀들을 놓아 주라고 했어요. 어머니에게 급한 일이 있어서 그녀들에게 물어 보시겠대요.]

이때 엄씨 아주머니라는 노파가 고개를 돌렸다. 단예는 그녀의 얼굴이 추악하고 두 눈에는 살기마저 어려 있는 것을 보고는 혐오감을 느꼈다. 더군다나 두 개의 뾰족한 앞니가 입 밖으로 삐죽나와 금방이라도 사람들을 물어 뜯을 것 같아 구역질마저 나오려했다.

엄씨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 물어 보시고 난 후 되돌려 보냈을 때 손을 자르기로 하지.]

그리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 엄씨 아줌마는 아름다운 소저를 보는 것이 가장 싫어. 이 두 계집애는 반드시 한팔씩을 잘라내어야지만 보기가 좋아질거야. 나는 부인에게 요즈음 꽃의 비료가 크게 부족하니 이 계집애들의 두 손을 다 잘라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겠다.]

단예는 속으로 크게 노했다.

(이 노파는 정말로 사악하구나!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닭 잡을 힘도 없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따귀라도 실컷 때려 두 세 개의 이빨을 더 부러뜨려 놓은 뒤 아주와 아벽을 풀어 놓겠는데......)

엄씨 아줌마는 나이가 많았지만 귀가 밝았다. 단예가 문 밖에서 씩씩거리며 숨을 쉬자 대뜸 그 기척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밖으로 돌리며 물었다.

[밖에 누구지?]

그리고 고개를 밖으로 쑥 내밀더니 단예는 발견하고는 매서운 어조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부인의 명을 받고 다화를 심는 원예사입니다. 엄씨 아주머니, 신선한 비료가 있나요?]

엄씨 아주머니는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리게. 조금 후면 반드시 생길거야.]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더니 왕어언에게 말했다.

[소저, 고모댁 도련님은 이 두 계집애를 무척 귀여워하지요?]

왕어언은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 아주머니는 그 두 애들을 해치지 않는 것이 좋을거예요.]

엄씨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저, 부인은 두 계집애의 오른손을 자르고 장원 밖으로 내쫓으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녀들에게 이후 다시 부딪히게 된다면 목을 자르겠다고 했죠?]

왕어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나 그 한 마디의 대답을 하고 난 그녀는 '아차'했다. 재빨리 손을 입으로 가져가 입을 막았다.

단예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아, 저 소저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구나!)

다행히 엄씨 아주머니는 늙어서 머리가 둔해진 듯 그와 같은 빈틈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소저, 밧줄이 꼭 묶여 있어서 풀기가 어려우니 나를 좀 도와줘요.]

왕어언은 대답했다.

[좋아요.]

그리고 그녀는 아주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려고 했다. 별안간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철주에서 하나의 호형(弧形)으로된 강철조각이 불쑥 튀어 나오더니 그녀의 섬세한 허리를 휘어감았다.

왕어언은 '아!'하고 놀라 부르짖었다. 그 강철조각은 그녀의 허리를 감게 되었는데 그래도 몇 치의 빈틈은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절대로 빠져 나올수가 없었다.

단예는 깜짝 놀라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내질렀다.

엄씨 아주머니는 낄낄낄 소리를 내며 괴소를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다시 이 두 계집애를 만난다면 목을 자른다고 했는데 어찌 두 계집애를 다시 불러 말을 묻겠어? 그리고 부인에게도 많은 시녀들이 있는데 왜 하필 소저를 친히 보냈겠어? 이 가운데는 수상한 점이 많단 말이야. 소저,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가서 친히 알아보고 온 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왕어언이 노해 부르짖었다.

[윗사람도 몰라보고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나를 빨리 놓아주어요.]

엄씨 아주머니는 말했다.

[소저, 나는 부인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해요. 잘못된 일은 하나도 저지를 수 없어요. 모용씨 집안의 고모님은 실제로 부인에게 잘못했단 말이오. 많은 말을 하면서 부인의 청백과 명성을 비방했단 말이요. 그래서 부인이 화를 내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 아랫사람들도 그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해요. 어느 날엔가 부인께서 고개만 끄덕인다면 우리들은 즉시 달려가 모용씨 고모님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녀의 시신을 이 화비방으로 끌고와 똑같이 꽃의 비료로 만들고 말거예요. 소저, 모용씨 집안에는 한 사람도 좋은 사람이 없어요. 이 계집애들만 하더라도 부인께서는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거예요. 그러나 소저가 그렇게 분부한 이상 제가 다시 부인게 물어본 이후 처리하기로 하죠. 만약 확실히 그렇다면 이 할멈이 소저에게 큰절을 하고 사과를 올리지요. 그때 소저가 이 할멈의 등줄기를 방망이로 때려도 좋아요.]

왕어언은 매우 초조해졌다.

[이것 봐요. 이것 봐요. 우리 어머님께 가서 물어보지 말아요. 어머니께서 화를 내실거예요.]

엄씨 아주머니는 더욱더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소저가 반드시 어머니 몰래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소저가 고종 오라버니의 시녀를 보호하려고 거짓으로 그런 분부를 내린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번 기회에 공을 세우고 싶어서 말했다.

[좋아요, 좋아. 소저는 잠시만 기다리셔요. 이 할멈이 곧 갔다 오겠어요.]

왕어언은 부르짖었다.

[가지 말아요. 나를 풀어 놓은 이후에 다시 이야기해요.]

엄씨 아주머니는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옥석에서 나가려고 했다.

단예는 사태가 화급하게 되자 손을 활짝 벌려 그녀를 막고 웃으면서 말했다.

[소저를 풀어 놓은 이후 다시 부인에게 가서 물어보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소? 그대는 하인인데 소저에게 잘못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못한 일이오.]

엄씨 아주머니는 실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네 녀석은 아무래도 좀 수상한 데가 있어.]

그리고 갑자기 손을 홱 뒤집더니 단예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를 쇠기둥 쪽으로 끌고 가더니 장치를 눌렀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기둥에서 쇠고리가 나오더니 역시 그의 허리마저 감아 버리고 말았다.

단예는 다급해진 나머지 그의 왼손을 뻗쳐 그녀의 오른 손목을 잡고는 죽어라고 놓지 않았다. 엄씨 아주머니는 그에게 손목을 잡히자마자 체내의 내력이 끝없이 그에게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며 노한듯 소리쳤다.

[빨리 손을 놓아라!]

그녀가 그토록 호통을 지르자 내력은 더욱 빨리 쏟아져 나갔다.

아무리 힘을 주어 뿌리치려 해도 단예에게서 손목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부르짖었다.

[이 못난 녀석...... 지금 무엇을 하자는거야? 빨리 나를 놓아!]

단예는 그녀의 추악한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 간격은 몇치도 안 되었다. 그리고 그의 중심은 쇠기둥에 떠받히고 있어서 머리를 뒤로 젖힐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녀의 누렇고 더러운 날카로운 이빨이 금방이라도 자기의 목을 물어 뜯을 것 같아 더럽기도 하고 구역질도 났다.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에 그녀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왕어언이 중벌을 면치 못하는 것은 물론 자기와 아주, 아벽은 목숨을 보존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고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엄씨 아주머니는 부르짖었다.

[나를...... 나를 놓아 주지 않겠어?]

그러나 그녀는 힘이 없었다.

그는 처음에 무량파 칠제자의 내력을 흡취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후 적지 않은 고수들의 부분 내력을 얻게 되어 그의 내력은 더욱 강해지게 되었고 북명신공의 흡인력 역시 커지게 되었다. 그가 엄씨 아주머니의 내력을 흡취하게 된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하여 차 한 잔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아 그녀는 기운이 쭉 빠져서 숨을 할딱이며 말했다.

[나를...... 놔줘. 손...... 손을...... 놔줘.]

단예는 말했다.

[먼저 기관 장치를 풀어 나를 풀어 주시오.]

엄씨 아주머니는 말했다.

[그, 그래요.]

그리고는 손을 뻗쳐 탁자 아래에 있는 장치를 움직였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단예의 허리를 감고 있던 강철 고리가 움츠러 들었다. 단예는 왕어언과 아주, 아벽을 가리키며 즉시 풀어 놓도록 명했다. 엄씨 아주머니는 손가락을 뻗혀 왕어언을 감고 있는 강철고리를 풀려고 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예는 노해 부르짖었다.

[그래도 소저를 풀어 놓지 못하겠소?]

엄씨 아주머니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나에게는 반푼의 힘도 남아 있지 않다오.]

단예는 손을 탁자 아래로 뻗쳐 장치를 더듬거렸다. 그리고 힘껏 잡아당기자 '탁' 하는 소리와 함게 왕어언의 허리를 감고 있는 쇠고리가 풀리더니 천천히 강철기둥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단예는 크게 기뻐했다. 그래도 그는오른쪽의 엄씨 아주머니 손목을 놓아 주지 않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긴 칼을 집어 들어 아벽을 묶고 있는 밧줄을 끊었다.

그러자 아벽은 풀려난 즉시 그 칼을 받아들고 아주를 묶고 있는 그 밧줄을 잘라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입에 물린 복숭아씨를 뱉아냈다. 그들은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왕어언은 단예를 노려보더니 얼굴에 멸시의 빛을 띠우고는 물었다.

[그대가 어떻게 '화공대법'을 아시지요? 그와 같이 더러운 재간을 왜 배웠어요?]

단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것은 화공대법이 아니고.]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다 해주려 했으나 첫째로 이야기가 너무 길게 될 것이고 둘째로는 그녀가 믿을 것 같지가 않아 아예 권법의 이름을 날조하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이것은 우리 단씨 가전의, '육양융설공(六陽融雪功)으로서 일양지와 육맥신검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이라오. 화공대법과 견준다면 하나는 정당한 무공인 데 반해서 하나는 사악한 무공이고 또 하나는 선한 무공이라면 하나는 악한 무공이라 동등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왕어언은 그 말을 듣고 믿는 듯 방긋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해요. 내 견문이 좁았어요. 대리 단씨의 일양지와 육맥신검은 내가 오래전부터 우러러보던 권법이에요. 그런데 '육양융설공'이라는 말은 오늘 처음 들어보는거예요. 이후 좀 가르쳐 주세요.]

단예는 미인에게 가르침을 바란다는 말을 듣자 그야말로 원하던 바이므로 재빨리 대답했다.

[소저께서 묻고 싶은 곳이 있다면 모든 것을 아는 대로 숨김없이 털어놓죠.]

아주와 아벽은 단예가 이와 같은 요긴한 때 달려와 자기들을 구해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거기다가 단예와 왕소저가 거리낌없이 친한 듯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더욱 의아했다. 아주는 인사를 했다.

[소저, 단공자, 우리들을 위험에서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마와요. 그런데 우리들은 비밀이 누설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이 엄씨 아줌마를 데리고 가야겠어요.]

엄씨 아주머니는 매우 다급해졌다. 그들 두 계집애에게 끌려간다면 십중팔구는 생명을 건질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부르짖었다.

[소저, 소저, 모용씨 집의 고모님은 부인에게 서방질을 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대에게......]

아주는 왼손으로 그녀의 뺨을 꼭 붙들고는 입에서 뱉어낸 복숭아 씨를 그녀의 입에다 집어 넣었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묘하군! 이것이야 말로 모용씨 집안의 그 사람의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펼친다는 그 집의 가풍이로군!]

왕어언은 말했다.

[나는 그대들을 따라서 그이를 만나보러 가야겠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나직히 말했다.

[그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만나 보아야겠다.]

그녀는 줄곧 결심을 할 수 없었는데 조금 전의 사건으로 인해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아주는 기뻐했다.

[소저께서 달려가 도움을 주신다면 그야말로 더없이 좋은 일이죠. 그렇다면 이 엄씨 아줌마는 데리고 갈 필요가 없어요.]

아주와 아벽은 엄씨 아주머니를 쇠기둥으로 밀어 붙였다. 그리고 기관장치를 움직여 강철고리로 그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네 사람은 가볍게 석옥의 문을 닫고는 재빠른 걸음으로 호숫가로 달려갔다. 다행히 장원의 시녀나 하인을 하나도 만나지 않았다. 네 사람은 아주와 아벽이 타고온 조그만 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노를 저어서 호수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아주와 아벽 그리고 단예 세 사람은 일제히 노를 저었다. 만다산장의 꽃나무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배를 저어서야 그들은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혹시 왕부인이 쾌선을 몰아 뒤를 쫓아올까봐 여전히 노를 저었다.

한나절 가량 배를 젓자 날이 어둑어둑해졌으며 호수 위에는 안개가 짙어져 갔다. 아주는 말했다.

[소저, 이곳은 제가 있는 곳과 비교적 가까운 편이니 오늘은 불편하시겠지만 하룻밤 묵어가시죠. 그러면서 공자님을 어떻게 찾아갈 것인지 상의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왕어언은 대답했다.

[그렇게 하자.]

그녀는 만다산장과 멀어질수록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단예는 호수 위로 불어오는 청풍이 그녀의 옷자락을 스치는 것을 보았다. 황혼 무렵이되자 날씨가 싸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동안 배를 젓게 되자 서로의 눈과 코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때 동쪽의 하늘가에 등불이 반작이는 것이 보였다. 아벽이 말했다.

[저 등불이 반짝이는 곳이 아주 언니의 청향수사예요.]

그리고 조그만 배를 그 불빛이 있는 곳으로 곧장 저어갔다.

단예는 생각했다.

(이제 한평생 오늘밤과 같은 광경은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호수에 배를 띄운 채 영원히 불빛이 있는 곳에 닿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바로 이때 눈앞이 번쩍하며 밝아졌다. 하나의 커다란 유성이 하늘가에서 '휙' 하니 길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왕어언은 나직이 무어라고 한마디 중얼거렸다. 단예는 무슨 말인지 듣지 못하였다. 왕어언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벽은 그녀를 부드러운 어조로 위로했다.

[소저, 안심하셔요. 공자께서는 위험한 일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더라도 언제나 전화위복이 되었어요. 한번도 위험에 빠진 적이 없었어요.]

왕어언은 말했다.

[소림사는 몇 백년 동안 명성을 누리고 있는 문파라서 다른 파와는 달라. 아무쪼록 절의 고승들이 도리를 알고 고종 오라버니의 변명을 들어주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고종 오라버니의 성질이 좋지 못해 소림사의 화상들과 언쟁을 일으킬 것 같구나, 아......]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나직이 말을 이었다.

[하늘에 유성이 흐를 때마다 나는 소원을 빌고는 했지만 언제나 소원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강남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유성이 떨어질때 유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면서 아직 하늘에 있는 동안 그것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소원을 말한다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 소원을 풀게 된다는 그런 내용의 전설이었다. 그러나 유성은 언제나 '번쩍'하면서 사라진다. 그러니 그 유성을 바라보며 소원을 말하려 해도 몇 마디 말하기도 전에 유성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강남의 젊은이와 소녀들은 그와 같은 전설을 믿고 얼마나 많은 공상을 하고 얼마나 많이 실망을 안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왕어언은 무학에 대해 아는 바가 지극히 많았으나 그녀의 정감은 일반의 농가집 소녀나 호수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의 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단예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다시 한번 괴로움을 느꼈다. 그녀의 소원은 틀림없이 모용공자와 관계가 있을 것이며 또한 모용공자의 평안무사를 비는 것이고 모용공자의 만사가 순조롭게 되기를 비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별안간 그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세상에 어느 소녀가 있어 나를 위해 기원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완누이는 그전에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그녀의 오라버니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또다른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구나. 혹시 또 좋은 낭군을 만났는지도 모르지. 종영은 어떨까? 그녀는 내가 친오라비인 것을 알고 있을까? 설사 모른다 하더라도 그저 우연히 생각하게 된다면 마음속이 움직이게 되겠지만 그것도 잠시뿐 금방 다시 잊어 버리게 될 것이고, 결코 왕소저처럼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4. 천왕보심침(天王補心針)

조그만 배는 등불이 켜져 있는 곳과 점점 더 가까와졌다.

아주는 갑자기 나직하게 말했다.

[아벽, 저길 보아라.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아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어째서 저렇게 많은 등불이 켜져 있을까?]

단예가 멀리서 바라보니 한 조그마한 성에 여덟 아홉 칸의 조그마한 집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두 채는 누각이었다. 그리고 방마다 창문으로 등불 빛이 새어나왔다.

(아주가 머물고 있는 곳은 청향수사라고 했다. 아마도 아벽이 머물고 있는 금운소축과 비슷할 것이다. 청향수사의 꽃에다가 붉은 촛불을 켜놓은 것은 아마도 아주 누나가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조그만 배가 청향수사와는 약 일 마장 정도 거리를 두었을 때 아주는노젓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왕소저, 저희 집에 적이 나타났나 봐요.]

왕어언은 깜짝 놀라 말했다.

[뭐라고 적이 왔다고? 그걸 어떻게 알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누구지?]

아주는 말했다.

[어떤 적인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맡아 보셔요. 술냄새가 코를 찌르지 않아요? 틀림없이 많은 자들이 소란을 피운 탓일거예요.]

왕어언과 아벽은 신경을 써 냄새를 맡아 보았으나 뭐가 뭔지 알수가 없었다. 단예 역시 냄새를 맡아 보았으나 단지 소녀의 체취만 코에 스밀 뿐 다른 냄새는 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야단났다! 야단났어! 그들은 나의 말리화로(茉莉花露), 매괴화로(枚塊花露)를 모조리 뒤엎어 놓았군! 아차, 야단났다. 나의 한매화로(寒梅花露)까지도 그들은 마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군......]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거의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단예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그대의 눈이 그토록 밝아서 모든 것이 보이는 것이요?]

아주는 흐느끼듯 말했다.

[아니예요.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나는 매우 심혈을 기울여 그와 같은 화로를 담가 놓았던 것인데 저 망할 사람들이 술로 알고 마신 것 같아요.]

아주는 말했다.

[우리 뭍으로 올라가 살펴 보기로 해요. 하지만 모두 다 옷을 바꿔입고 고기 잡는 사람으로 꾸며야 할거예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동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살고 있는어부들은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어요. 그러니 그쪽으로 가서 옷을 빌려 입도록 해요.]

단예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정말 묘하군, 묘해!]

아주는 노를 들고 동쪽으로 저어갔다. 이제 옷을 바꿔입고 변장을 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아주는 먼저 왕어언과 아벽을 데리고 어부들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옷을 빌려서는 바꾸어 입혔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고기잡는 늙은 할머니로 변장을 했고 왕어언과 아벽은 중년의 고기잡이의 부인으로 변장을 시켰다. 그런 연후에 단예를불러 다시 사십 세쯤 되는 중년의 어부로 변장을 시켰다.

아주의 변장술은 교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밀가루와 흙을 갖고는 네 사람의 얼굴에다 이곳에다 한번 바르고 저곳에다 조금 붙이고 하자 삽시간에 여러 사람의 나이와 용모가 모두 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다시 고기잡이용 배를 몰고는 다시 청향수사 쪽으로 갔다.

단예와 왕어언은 모습이 변하기는 했지만 음성이나 행동은 가장할래야 가장할 수가 없었다. 아주가 가장하는 재간을 그들은 십분의 일도 배울 수가 없었다.

왕어언은 웃으며 말했다.

[아주, 무슨 일이든 그대가 나서서 처리하고 우리는 그냥 벙어리마냥 가만히 있을께.]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결코 발각되지 않도록 입을 다물고 있으세요.]

고기잡이 배는 천천히 청향수사 뒤쪽에 닿았다. 단예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전후좌우에는 모두가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거칠게 부르짖는 소리가 집안에서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이와 같은 호통소리는 정교하고 우아한 주위의 집과 꽃나무들과는 실로 어울리지 않았다.

아주는 한숨을 내쉬며 매우 불쾌히 여기는 듯했다. 아벽은 아주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아주 언니, 적을 쫓아 낸 다음 내가 언니를 도와 청소를 해 줄께요.]

아주는 그녀의 손을 잡아 보였다. 고맙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단예 등 세 사람을 데리고 집 뒤로 해서는 주방으로 갔다. 그런데 주방의 요리사 고(顧)노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끊임없이 음식을 만드는 남비에다 침을 뱉고 손을 비벼서는 때를 냄비 속에다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주는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부르짖었다.

[고씨, 뭣하는 거예요?]

고노인은 깜짝 놀라 후딱 돌아보더니 말했다.

[그대는...... 그대는......]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주예요.]

고노인은 기뻐서 말했다.

[아주 소저, 많은 나쁜 사람이 와서는 나에게 밥을 지어 달라, 차를 끓여 달라 하지 않겠소? 이것 보십시요.]

그러더니 그는 코를 풀어서는 찬속에다 넣고서 '낄낄' 웃었다. 아주는 눈쌀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더러운 찬을 만들고 있는 거에요.]

[소저가 먹는 차를 만들 때는 나는 항상 손을 깨끗이 씻지요. 그러나 나쁜 자들이 먹을 때는 얼마든지 더 더럽게 할 수 있어요.]

아주는 말했다.

[다음에 내가 당신이 만든 음식을 대하게 되면 그 때마다 이런 생각이 나서 구역질을 하게 되지 않겠어요?]

고씨는 말했다.

[전혀 다릅니다.]

아주는 모용 공자의 시녀이지만 청향수사에서는 주인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시녀와 요리사, 사공, 원예사 등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아주는 말했다.

[적이 얼마나 되죠?]

고씨는 말했다.

[먼저 온 사람은 십 팔구 명 되고 나중에 온 사람은 스무 명 정도 되나봐요.]

아주는 말했다.

[두 패거린가요? 어떤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차림은 어떻던가요? 말투를 들어 보니 어디 사람들이던가요?]

고씨는 욕을 했다.

[빌어먹을 것들......]

사람을 욕하는 소리가 입에서 들리자 그는 급히 자기의 입을 가로 막으며 매우 당황해 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주 소저, 이 늙은이가 망령이 들었나 보구려...... 화가 나서 멍청해졌나 봐요. 이 두 나쁜 패거리 중 한 패거리는 북방에서 온자들로서 보기에 강도들 같아 보여요. 그리고 한 패거리들은 사천성에서 왔나 본데 하나같이 백포(白袍)를 걸치고들 있는데 무엇하는 자들인지는 모르겠어요.]

아주는 물었다.

[그들은 누굴 찾아 온 것이죠? 누구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나요?]

고씨는 말했다.

[첫번째 강도 같은 자들은 나으리를 찾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온 패거리 괴인들도 공자 나으리를 찾더군요. 우리는 나으리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공자 나으리도 외출하셔서 집에 안 계시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아요. 앞뒤로 마구 한바탕 뒤지더군요. 그래서 장원의 여자 아이들은 모두 피해 버렸습니다. 나는 하도 화딱지가 나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몹시 화가 나는 듯 다시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러나 그는 거친 욕을 하다 흠칫 하더니 재빨리 입을 닫았다.

아주는 그의 눈가가 시커멓게 변했고 얼굴의 반쪽이 많이 부어 오른 것을 보고 몇 대 심하게 맞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가 만드는 음식에다가 침을 뱉고 코를 풀어 분을 풀려고 한 것이다.

아주는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우리 가서 봐요. 고씨의 말만 듣고는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는 단예와 왕어언, 아벽을 데리고 부엌의 옆문으로 나갔다.

한 곳의 화원을지나고 두 곳의 월동문을 경과하여 화청(花廳)밖에 이르렀다.

화청 뒤의 문과 창문과는 수장이 남았는데 대청안에서의 떠들석한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주는 살금 살금 다가가더니 손가락을 뻗혀 창호지에 구멍을 냈다.

그리고는 눈을 가까이 갖다 대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대청에는 등불이 휘황하게 켜 있었다. 그러나 동쪽 한 군데만 등불이 켜 있었는데 십 팔구 명의 거칠게 생긴 대한들이 한껏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잔이나 쟁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바닥에는 의자들이 이리 엎어지고 저리엎어진 가운데 아예 몇 사람은 탁자 위에 올라앉아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닭다리를 손에 들고 뜯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돼지 발을 뜯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자는 긴 칼을 휘둘러 쟁반에 있는 쇠고기에 등 위를 찍어 입으로 가져 가기도 했다.

아주는 다시 서쪽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으나 몇 번 더 바라보자 속으로 섬짓한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쪽은 이십여 명이 앉아 있었으나 한결같이 하얀 옷을 뒤집어쓰고 숙연히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오로지 한개의 촛불만 켜 놓았을 뿐이었고 촛불이 미치는 밝기는 불과 몇 자 둘레에 지나지 않았다. 그 불빛이 비치는 둘레의 예닐곱 사람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기뻐하는 빛도 없었고 노기를 띤 표정도 없어서 정말 시체와 같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사

람들은 시종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만약 몇사람의 눈동자가 간혹 깜박이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면 정말 모두 죽은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 때 그녀의 눈동자는 마침 싯누런 얼굴을 한 사람의 눈동자와 마주치게되었다. 그런데 그 반쯤 죽어서 살아 있지 않은 듯한 사내는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는 것이 아닌가. 아벽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앗' 하는 소리를 나직히 내질렀다. 그순간.....

'펑펑'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부서져 달아났다. 그리고 네 사람이 동시에 달려 나왔다. 두 사람은 북방에서 온 대한들이었고 두 사람은 사천성에서 온 괴객들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호통치며 물었다.

[게 누구냐?]

아주는 말했다.

[우리는 몇 마리의 신선한 고기를 잡아서 고씨에게 사려는지 물어 보려고 온거예요. 오늘 아침에 잡은 새우도 싱싱해요.]

그녀는 소주 땅의 토박이 말로 이야기 했다. 원래 그 네 사람은 그녀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 네 사람이 모두 고기잡는 어부들의 옷차림을 했고 손에 들고 있는 고기나 새우들이 연신 뛰놀고 있기 때문에 그 시늉만 보고도 알만 했다. 그래서 한 사내가 아주의 손에 든 고기를 빼앗듯 낚아채더니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요리사, 요리사! 이걸 가지고 가서 술깨는 성주탕(醒酒湯)을 만들어오게!]

그리고 다른 한 대한은 단예의 손에 들린 싱싱한 고기를 받으려 했다. 두 사천성에서 온 괴객은 고기를 팔러 온 사람인 것을 알자 더 이상 아랑곳하지 않고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아벽은 그들 두 사람이 자기의 곁을 지나갈 때 짙은 남자의 체취가 풍기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손을 들어 자기의 코를 막았다. 한 사천에서 온 괴객은 흘낏 그녀의 옷자락 밖으로 드러난 팔의 살결이 남보다 희고 고운 것을 보고는 크게 의심을 하게 되었다.

(중년의 고기잡이 부인의 살결이 어찌 저토록 희고 고울 수가 있을까?)

그리고는 냅다 손을 뻗혀서는 아벽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이것 봐, 당신 몇 살이지?]

아벽은 깜짝 놀라 잽싸게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왜 그래요? 왜 손을 잡고 야단이예요!]

그녀가 말하는 소리는 매우 부드럽고 맑았다. 그리고 손을 뿌리치는 솜씨 역시 민첨하기 그지 없었다.

그 사천성에서 온 괴객은 그 순간 손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휘청해져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렇게 되자 그만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대청 밖에서 십여 명이 달려 나와 순식간에 단예 등을 에워쌌다. 한 대한이 손을 뻗혀 단예의 수염을 잡아 당겼다. 그러자 가짜 수염은 떨어졌다. 또한 다른 한 사내가 아벽을 붙잡으려 들었다. 그러나 아벽이 비스듬히 재빠르게 피하며 냅다 밀쳤기 때문에 그 괴한은 뒤로 나가떨어지게 되었다.

뭇사내들은 더욱더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첩자로구나! 첩자야!]

[고기잡이로 가장한 도적들이다!]

[빨리 잡아서 고문을 하자!]

그리고 그들은 네 사람을 밀듯이 하며 대청 안쪽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동쪽에 앉아 있는 한 노인에게 보고를 했다.

[요채주(姚寨主), 굉장한 첩자를 잡았습니다.]

그 노인의 체구는 매우 우람했다. 반백의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들을 보자 호통쳐 물었다.

[어디서 온 첩자냐? 왜 슬금슬금 남을 살피는거지? 무슨 나쁜 짓을 하려는거냐?]

왕어언은 말했다.

[어부로 분장하는 것은 조금도 재미가 없어요. 아주, 난 그만 둘래요.]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혀서는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그러자 흙과 밀가루를 붙여 만든 주름살이 당장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뭇사내들은 한 중년의 고기잡이 부인이 금방 아름다운 소녀로 변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만 입이 딱 벌어지게 되었다. 삽시간에 대청 안은 조용해졌다. 서쪽에 앉아 있던 사천 사람들도 일제히 그녀에게 시선을 모았다.

왕어언은 말했다.

[그대들도 이제 뜯어 버려요.]

아벽은 웃으면서 말했다.

[모두 나의 잘못이예요. 들통이 나게 했으니.]

동시에 아주와 아벽, 단예 세 사람은 얼굴의 화장을 지웠다. 뭇 사람들은 왕어언을 바라보다가 다시 아주, 아벽을 바라보곤 했다. 그들로서는 세상에 이처럼 옥으로 깎아 놓은 듯한 소저가 있었는가 하는 눈치였다.

한참 후에야 그 체구가 우람한 노인이 말했다.

[그대들은 누군가? 여기는 무엇하러 왔지?]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곳의 주인이예요. 그런데 남이 나에게 이곳에 무엇하러 왔느냐고 묻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당신들은 누구죠? 이곳에 무엇하러 왔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대가 이곳의 주인이군. 잘 되었소. 그대는 모용씨 집안의 소저? 그리고 모용박은 그대의 부친이오?]

아주는 미소했다.

[나는 시녀에 불과해요. 나으리의 딸이 될 만한 복을 타고 났어야지요. 그대는 누구시죠? 어인 일로 이곳에 왔어요?]

노인은 스스로 그녀가 시녀임을 자청하고 나서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대가 먼저 주인을 모시고 나오시요. 그러면 찾아 온 뜻을 밝히리다.]

아주는 말했다.

[우리 노(老)주인께서는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리고 젊은 주인은 외출을 하셨구요. 귀하께서 무슨 볼 일이 있으신지 제게 말해도 상관 없어요. 귀하의 성명을 설마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노인은 말했다.

[음, 나는 운주(雲州), 진가채(秦家寨)의 채주로서 요백당(姚伯當)이라 하오.]

아주는 말했다.

[오래 전부터 명성은 익히 들었어요.]

요백당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와 같은 새파란 젊은 아가씨가 언제 나의 이름을 들었다는게지?]

왕어언이 말했다.

[운주 진가채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 무공은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가 아니겠어요? 과거 진공망(秦公望) 선배님이 이 단문도를 창안하실 때는 64초였으나 그 후 후손들이 5초를 잊어 먹었다죠. 그래서 지금은 59초 밖에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요채주 그대가 배운 것은 몇 초인가요?]

요백당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우리 진가채의 오호단문도가 원래 64초였다는 것을 그대가 어떻게 알았소?]

왕어언은 말했다.

[책에 그렇게 써 있었으니 틀림없이 그렇겠죠. 없어진 5초는 '백호도간'(白虎跳澗) '일소풍생'(一嘯風生) '전박자여'(剪撲自如) '웅패군산'(雄覇群山) 그리고 제 5초로 말하면 복상승사(伏象勝獅)아니예요? 맞나요?]

요백당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진가채의 도법 가운데 가장 절묘한 5초가 실전되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5초가 어떤 것인지 진가채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 때 도도하게 지껄이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의심도 났다. 그러므로 그녀가 묻는 말에는 대답할래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서쪽의 백포객 가운데 30여세 되는 사내가 괴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가채 가운데 5초가 되는 오호단문도는 요채주가 바쁜 몸이라 잊었을 것이오. 그런데 소저는 모용박, 모용 선생과는 어떻게 되시오?]

왕어언은 대답했다.

[모용나으리는 저의 고모부예요.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나요?]

그 사내는 응수했다.

[소저 집안의 학문이 깊으니 요채주의 무공을 잘 아시는 구료. 불초의 내력도 소저가 한번 알아 맞추어 보시오.]

왕어언은 미소했다.

[그렇다면 어디 솜씨를 보여 주셔야겠어요. 몇 마디 말만 갖고 어디 짐작할 수 있나요?]

그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리고 그는 왼손을 오른손의 소매자락 안으로 집어넣고 오른손을 왼손의 소매자락 안으로 집어 넣었다. 마치 팔장을 끼듯 했다. 그리고 두 손을 동시에 뺐는데 그 양손에는 이미 한 자루씩의 기이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 자의 왼손에는 이미 한 자루씩의 기이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 자의 왼손에 들린 것은 자루가 예닐곱 치 되는 철추(鐵錐)였고 그 철추는 그 끝이 한 두 번 구부러진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팔각소추(八角小鎚)를 들고 있었는데 그 소추의 길이는 겨우 한 자 길이였다. 그리고 망치 끝은 보통 사람의 주먹보다 좀 작았는데 두 가지의 무기는 크기가 작으면서 아담해서 어린애들이 가지고 노는 완구 같았다. 그와같은 무기로 적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동쪽에 앉아 있던 북방의 대한들은 그와 같은 무기를 보자 웃음 소리를 킥킥 냈다.

그리고 한 대한은 웃으며 말을 했다.

[사천성의 어린애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을 못나게스리 내보이다니!]

그러자 서쪽에 있던 무사들은 일제히 그를 노려 보았다.

왕어언은 말했다.

[음, 그것은 '뇌공갱(雷公羹)이군요. 아마도 귀하는 경신법과 암기에 뛰어나겠군요. 책에서는 '뇌공법'은 사천성의 청성산 청성파(靑城派)의 독특한 무기라고 했어요. 청(靑)에는 구타(九打)가 있고 성(城)에는 십팔파(十八破)가 있어 기묘하기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고 했어요. 귀하는 아마 복성(複性)으로 사마(司馬)씨이겠지요?]

그 사내는 줄곧 음침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소녀의 몇 마디 말을 듣자 얼굴 표정이 변하였다. 그리고 곁에 있는 세 명의 고수들과 얼굴을 서로 쳐다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고소 모용씨 집안 사람들은 무학에 대해서 정말 박식하기 그를 데 없구료. 과연 명불허전이오. 불초는 사마림(司馬林)이오. 그런데 소저, '靑'자에는 정말 9타가 있고 '城'타에는 정말 18파가 있소?]

왕어언은 말했다.

[그 문제는 정말 잘 끄집어 냈어요. 저는 '靑'자에 10타가 있다고 해야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철보리(鐵菩璃)와 철연자(鐵蓮子)는 내용상으로 비슷하지만 용법에 있어서는 크게 틀려서 한가지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城'의 18파 가운데 '파갑'(破甲)' '파순'(破盾) '파패'(破牌) 3종 초식은 특별한게 없어요. 그러니 3초는 취소를 하거나 합병을 할 수 있어요. 따라서 15파나 16파라고 해야만이 오히려 더 적절하다고 할거예요.]

사마림은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그의 무공은 '靑'자의 7타밖에 배우지 못했으며 철연자와 철보리의 구별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파갑, 파순, 파패의 세 가지 재간에 대해서 원래 그는 자기가 여지껏 쌓아온 재간으로서 가장 득의에 찬 무학이라고 생각했으며 줄곧 청성파의 진산절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녀는 모조리 취소해도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처음에는 놀랐으나 곧 화가 치밀었다.

(나의 무공과 성명을 모용씨 집안에서는 일찌기 연구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모욕하기 위해서 그런 말도 안되는 말을 날조해서 한 소녀로 하여금 큰 소리를 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즉시 화를 터뜨리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소저의 가르침으로 깨달은 바가 많았소. 고맙소.]

그리고는 잠시 생각을 한 후 그의 왼쪽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제(諸)사제, 자네가 저 소녀에게 한번 가르침을 받아 보게.]

그 제사제라고 불리운 사내는 제보곤(諸保昆)이라는 자로서 온 얼굴이 곰보자국으로 얽혀 있는 추악한 사내였다. 그는 사마림보다 몇 살 더 들어 보였으며 몸에다 백포를 걸친 이외에도 머리에다 하얀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그러니까 온몸에 상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어슴프레 촛불 빛을 받으니 더욱 음랭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손을 양쪽 소매자락 속에 집어넣었다가는 역시 한 자루의 짧은 강추(鋼錐)와 한 자루의 조그만 망치를 꺼내었다. 사마림이 꺼냈던 한벌의 '뇌공갱'과 똑같았다.

[소저의 지도를 바랍니다.]

곁에서 구경하던 뭇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너의 무기와 사마림의 무기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소저가 사마림의 무기를 알아보는 데 어찌 너의 무기를 모르겠는가?)

왕어언은 말했다.

[귀하가 그 뇌공갱을 쓰는 것으로 보아 역시 청성 일파이겠지요?]

사마림은 말했다.

[나의 이 사제는 원래 무예를 지닌 채 우리의 문하로 드러온 사람이요. 본래 어느 문파의 사람인지 소저의 혜안으로 고증해 주시기 바라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제의 원래의 무공 문파는 나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알아낸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신기한 일이지.)

왕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정말 어려운 일이로구나!)

그녀가 미처 말문을 열기 전에 동쪽에 있던 진가채의 요백당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사마 장문인(掌門人;한 문파의 우두머리), 당신이 남의 소저에게 당신 사제의 본래 모습을 들어내도록 하라는게 무슨 뜻이오? 그거야말로 지극히 재미없는 일 아니오?]

사마 장문인은 아연해서 물었다.

[뭐가 지극히 재미없다는 얘기요?]

요백당은 웃으며 말했다.

[영(令)사제는 지금 얼굴에 곰보자국으로 얽어 있는 꼴을 하고 있소. 그러니 그의 본래 내력을 캐내려 한다 해도 얼굴 모습처럼 분명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소?]

그러자 동쪽에 있던 대한들은 '와'하는 큰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제보곤은 한평생 자기의 곰보자국을 비웃는 사람을 가장 미워했다. 그런데 요백당이 공공연히 자신의 곰보자국을 비웃고 나서자 그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요백당이 북방의 대 호걸이며 한 채(寨)의 주인이라는 사실도 상관하지 않고 왼손의 강추 끝을 그의 가슴팍에 겨냥하고 오른손의 망치로 강추의 끝을 탁 때렸다. 그러자 '척'하는 소리가 급히 울려퍼졌다. 화공석은 날카롭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암기로 요백당의 가슴팍으로 질풍같이 쏟아져 갔다.

다급해진 요백당은 미처 칼을 뽑아 막을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왼손으로 앞에 놓인 촛대를 잡아 날아드는 암기를 후려쳤다.

'창' 하며 무엇인가 윗쪽으로 날아가 대들보에 '팍' 하고 꽂혔다. 알고보니 세 치 정도 길이의 강침(鋼針)이었다. 강침의 길이는 짧았으나 그힘은 아주 강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서 요백당은 왼손의 손아귀가 저려옴을 느끼고 촛대를 그만 땅바닥에 떨어뜨리게 되어 '쨍그랑 창창'하는 소리가 곧장 울려 퍼지게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진가채의 뭇사람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큰 소리롤 외쳤다.

[암기로 사람을 해치기냐?]

[그런 비열한 수를 쓰면서 무슨 영웅호걸이라고 뽐내느냐?]

[염치없다, 빌어먹을 것들!]

한 뚱보는 온갖 욕을 다 했다. 상대방의 선조 18대까지도 마구 함께 욕을 해댄 것이다. 그런데 청성파의 사람들은 시종 기이하게도 잠자코 있었다. 진가채의 뭇사람들이 욕지거리를 하는 것도 못 들은 척했다. 요백당은 생각했다.

(상대방의 무공은 약간 이상한 데가 있다. 저 소저의 말을 듣건데 청, 성 두 파가 있다지 않은가. 그리고 모두 암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손을 내저어 부하들을 말리고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제 형제의 그 일초 재간은 정말 뛰어나고 또 음흉하기 짝이 없는 것이군. 그 일초의 이름은 무어라 하오?]

제보곤은 싸늘히 냉소를 흘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진가채의 뚱보가 입을 열었다.

[십중 팔구는 낯가죽이 두꺼운 암전상인(暗箭傷人)이라고 하겠죠.]

그러자 한 중년의 사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대방은 원래 얼굴이 얽었으니 가죽이 그만큼 두터울 것이 아닌가? 그 일초의 명칭은 정말 잘 지었는데, 잘 지었어!]

그와 같은 말은 역시 상대방의 곰보 얼굴을 비웃는 것이었다.

왕어언은 고개를 가로젓고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요채주, 이것은 그대의 잘못이예요.]

요백당은 말했다.

[어째서 그렇소?]

왕어언은 말했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 아픈 병이 있거나 온전하지 못한 데가 있을 수 있어요. 어릴 때 잘못하여 넘어졌다가는 다리를 분질러 절룩일 수도 있는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남과 싸울 때 잠깐 잘못하여 한 손과 한 눈을 잃어 버릴 때도 있는 거예요. 따라서 무림의 친구들 간에 몸에 어떤 손상이 있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것 아니겠어요?]

요백당은 부득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왕어언은 말했다.

[저 제 나으리는 어렸을 때 악질을 앓게 되어 몸에 상처가 남게 된 것인데 그것이 어째서 가소롭다는 거예요. 사내 대장부는 첫째, 인품과 용기를 논하는 것이고, 둘째는 재간과 사업을 논 하는 것이며, 셋째는 학문과 무공을 논하는 것이예요. 얼굴이 잘 생기고 못생긴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요백당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얼버무리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소저의 말에는 일리가 있구료. 그렇다면 노부가 제 형제를 비웃는 것은 잘못이었군! 인정하오.]

왕어언은 방긋 웃었다.

[어르신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것은 족히 솔직하신 성격을 나타내신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제보곤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어요. 그것은 소용 없어요.]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표정은 매우 부드러웠고 또한 동정에 차 있었다. 마치 누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고 권고하는 듯했으며 어조 역시 매우 친밀했다.

제보곤은 그녀가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은 몸에 어떠한 상처든 흔히 갖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또한 사내 대장부는 응당 품격과 사업으로 먼저 논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그는 한 평생 자신의 곰보 얼굴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었으며 한번도 그와 같이 성실함과 진지한 마음으로 해 주는 그와 같은 말을 들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그녀가 '안 돼요, 그것은 소용 없어요' 하는 말을 듣고 질문을 던졌다.

[소저는 무어라고 말씀하신 것이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나의 이 '천왕보심침'(天王補心針)을 안된다고 한 것일까? 쓸모없다는 것일까? 그녀는 나의 이 강추 안에 열 두 대의 강침이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만약 뜸을 두지 않고 망치로 잇따라 쳤다면 벌써 저 늙은이의 목숨을 빼앗았을 것이다. 다만 사마림 앞에서 그와 같은 비밀을 누설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때 왕어언은 말했다.

[그대의 '천왕보심침'은 정말 지극히 무서운 암기예요.]

제보곤은 그 말에 몸을 흠칫하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사마림과 그 옆에 앉아 있던 두 청성 고수도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뭐라고?]

제보곤은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소저는 잘못 알고 있소. 이것은 천왕보심침이 아니오. 이것은 청성파의 암기로서 '靑'자의 제 4타에 해당하는 재간으로 '청봉정'(靑蜂釘)이라고 하오.]

왕어언은 미소했다.

[청봉정의 겉모양은 그렇지요. 그대가 그 청왕보심침을 발사할 때 사용한 기구나 수법은 확실히 청봉정을 쏘아 낼 때와 똑같아요. 그러나 그 본질은 외형과 발사의 자세에 있는 게 아니고 암기에 실린 기운과 날아가는 기세에 있어요. 모두들 한 알의 강표(鋼標)를 던짐에 있어서도 소림파는 소림파의 손짓이 있는 것이고 곤륜파는 곤륜파의 손짓이 달리 있는 것으로서, 억지로 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대의 수법은......]

제보곤의 두 눈에는 갑자기 크게 살기가 돌았다. 왼손에 들고 있던 강추를 갑자기 가슴팍 앞으로 들어올렸다. 망치로 강추의 꼬리를 때리기만 한다면 그 즉시 강침이 쏘아져서는 왕어언의 가슴으로 날아갈 판이었다. 구경하고 있던 뭇사람들 가운데 반은 놀람에 찬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 그가 요백당을 향해 일격을 가했을 때 그 기세의 재빠름과 세찬 힘은 당대에서 그 짝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틀림없이 그 강추 안에는 용수철 장치가 되어 있음이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사람의 힘으로 그와 같이 강한 암기를 쏘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강추의 고리가 구부러져 있어서 그와 같이 구부러진 강추로서는 암기를 발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강추의 중간에 있는 빈 관은 똑바른 것이었다.

다행히 요백당은 눈이 빠르고 손이 잽싸서 그 암기를 촛대로 쳐서 떨어뜨릴 수 있었지만 다시 제보곤이 그 암기를 왕어언을 향해 쏘아댄다면 그와 같이 연약해 보이는 미녀가 어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제보곤은 그녀의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을 대할 때 역시 살수를 쓰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전 그녀가 자기를 위해 변명해주던 말이 고마워서도 쏠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따라서 그는 호통만 내질렀다.

[소저, 화를 자초하지 않도록 쓸데 없는 말은 하지 마시구려!]

바로 이 때 한 사람이 비스듬히 달려들어서는 왕어언의 앞을 가로막고섰다. 바로 단예였다.

왕어언은 방긋이 웃었다.

[단공자, 고마워요. 제대협,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는 것도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설사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별로 소용이 없을거예요. 청성파와 봉래파(蓬來派)는 오래 전부터 원수지간이었어요. 그대가 도모하고 있는 일은 80여년 전 귀파 제 7 대 장로였던 해풍자(海風子)도장이 시험해 본 적이 있어요. 그의 재간이나 무공은 아마 그대 못지 않을거예요.]

청성파의 뭇사람들은 그녀의 그러한 말을 듣자 모두 고개를 돌려 제보곤을 노려 보았으며 하나같이 의심의 빛을 띠었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의 원수인 봉래파의 제자인데 우리 파의 문하로 들어 온 첩자일까?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사천성의 말씨만 쓰고 산동말을 쓰는 것을 전혀 볼 수 없었는가?)

 

원래 산동반도에 있는 봉래파는 동해 쪽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사천 청성파와는 동서로 갈라져 있었으나 백여 년 전 두 파의 고수가 원수지간이 되고 그 이후부터 대대로 복수극을 벌리느라고 참담한 유혈극을 연출하기 이르렀다.

거기에다 두 파의 무공은 서로 제압하는 면이 있었다. 과거 쌍방이 서로 싸우게 된 것도 무공을 논의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수십 번이나 큰 싸움과 유혈극을 치루게 되자, 나중에는 봉래파에서도 청성파를 이길 수 없게 되었지만 청성파에서도 봉래파를 이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는 매번 싸움을 일으킬 때마다 쌍방의 고수들이 서로 살상을 당하거나 중상을 입게 되었다.

왕어언이 말한 해풍자는 바로 봉래파의 걸출한 인재였다.

그는 자세히 두 파의 우열과 장단을 연구한 결과 자기의 조예로서 자기 대에서는 청성을 누르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자기가 세상을 떠난 이후 청성파에서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난 인사가 배출되게 된다면 봉래파가 눌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번으로 영원히 청성파를 제압할수 있도록 자기가 가장 자랑하는 제자를 청성파로 잠입시켜 무공을 훔쳐 배우도록 했다. 그리하여 지피지기(知彼知己) 함으로서 백전백승하자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 제자는 무공을 다 배우기도 전에 청성파의 사람들에게 발각당하게 되어 그만 피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상대방의 원한은 더 깊어지게 되었고 상대방이 자기들 문파의 무공을 훔쳐 배우지 않나 하는 경계심은 더욱더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성파는 이 수십 년 동안 북방 사람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계율이 정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북방의 말씨를 쓰게 된다면 산동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하북, 하남, 산서, 협서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제자로 거두어들이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규칙은 더욱더 엄해지게 되어서 사천성 사람이 아니면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조항까지 만들게 되었다. '청봉정'은 청성파의 독문암기(獨門暗器)였다. '천왕보심침'은 봉래파의 재간이었다. 제보곤이 쏘아낸 것은 '청봉정'인데 왕어언은 '천왕보심침'이라 했다.

이렇게 되자 청성파의 뭇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실 봉래파는 청성파와 똑같은 규칙을 만들고 있어 역시 산동성 사람이 아니면 문하에 누구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에도 산동성 동쪽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았으며 산동 사람이라도 서쪽 사람이나 남쪽 사람들이 봉래파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한 사람이 옷차림을 바꾸고 행색을 바꾼다는 것은 좀처럼 발각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는 말만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천 마디 가운데 한 마디 쯤은 은연중에 고향말이 섞이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제보곤은 사천성 서쪽의 관현(灌縣) 제씨 집안의 사람이었다.

제씨 집안은 사천성 서쪽에서 제법 큰소리치는 큰 집안이었다. 그러데 어찌하여 봉래파의 제자가 되었을까? 여러 사람으로서는 정말 꿈에도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사마림이 처음 왕어언에게 제보곤의 사문 내력을 알아 맞춰 보라고 한 것은 무공 문제로 왕어언을 난처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지 결코 제보곤을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결과 실로 놀라운 대답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가운데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제보곤이었다. 원래 그의 사부는 도령도인(都靈道人)이라고 했다. 젊었을 적 한 때 그는 청성파의 사람들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심혈을 기울여 보복을 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사천성 각지에서 그 기회를 엿보았으며 청성파에게 어떤 빈 틈이 없는가 하고 찾았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관현에서 제보곤을 발견했다. 그때 제보곤은 아직 어린아이였으나 근골이 뛰어나도록 지극히 훌륭했으며 실로 무공을 배우는 데는 더할 나위없는 인재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 가지 계책을 꾸미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시켜 강도로 분장을 한 후 제가로 잠입, 제가의 주인을 묶고서는 대량 약탈을 감행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칼을 빼어들고 전 가족을 몰살하도록 하고 제씨 집안의 두 처녀를 강간하려 하도록 연극을 꾸미게 했다. 그리고는 막바지에 이르러 미리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령도인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나서서는 한 떼의 가짜 도적들을 물리치고 노략질 당한 전 재산을 도로 찾게 해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씨 집안의 주인은 그에게 천 번 만 번 감사하다는 말을 했고 감정이 격한 나머지 눈물마저 흘리며 은헤에 보답하고자 했다.

이 때 도령도인은 좋은 말로 그를 위로했다.

[만약 상승의 무공이 없다면 집안에 만관의 재물이 있다 하더라도 나쁜 자들의 괴롭힘을 면할 수 없소이다. 이 한 떼의 무리들은 무공이 약하지 않으니 이번에 실패 했다 하더라도 다시 오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오.]

제씨 집안은 그야말로 그 지방에서는 재산이나 명성으로서는 으뜸 가는 집안이었다. 더군다나 집안에 초청한 호원무사들도 도적의 세 주먹과 두 발길질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터였는데, 이제 도적이 얼마 후 다시 오리라는 소리에 그만 혼비백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령도인에게 아무쪼록 남아 주십사하고 간절한 애걸을 하게 되었다. 도령도인은 짐짓 사양하다가 간신히 그 청을 뿌리칠수 없다는 듯이 응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제보곤의 스승이 되었다.

도령도인은 청성파에게 원한을 갚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그의 사람됨은 나쁘지 않았고 그의 무공 또한 대단했다. 그는 제씨 집안의 사람들에게 비밀을 지키도록 은밀히 당부했으며 제보곤에게는 몰래 무공을 가르쳤다. 십 년 후 제보곤은 봉래파에서도 첫째 둘째를 헤아리는 인물이 되었다.

이 도령도인이란 사람은 정말 참을성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제씨 집에서 살게 된 이후 벙어리 처럼 행세했으며 시종 그 누구와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제보곤에게 무공을 가르칠 때에도 손짓과 발짓을 해보였으며 모든 점에 있어서 설명을 할 필요가 있으면 붓으로 써서 보여 주었을 뿐 결코 산동말을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보곤은 그와 십여 년을 함께 살았어도 그의 입에서 산동말을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제보곤의 무공이 대성하게 되었을 때 도령도인은 봉래파와 청성파가 원한을 맺게 된 그 원인과 결과를 이야기하고 제보곤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물론 가짜 도적들을 시켜 제씨 집안을 약탈하도록 했던 이야기는 들먹이지 않았다.

제보곤의 마음 속에 사부에 대한 존재는 비단 집안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지난 십여 년간 그 자신에게 베푼 은덕은 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봉래파의 모든 무공을 모두 전수해 주어서 일찍부터 제보곤은 사부에게 감격해 마지 않던 터였다. 사부의 뜻을 알게 되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청성파 장문인 사마위(司馬衛)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사마위는 바로 사마림의 부친이었다.

이 때 제보곤은 나이가 이미 적지 않았다. 거기다가 스스로 자기 집호원무사에게 한 두어 수 무공을 배웠다고 했다. 이에 사마위는 그를 제자로 거두어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제씨 집안은 사천성 서쪽에서 대지주였고 돈도 많을 뿐 아니라 권세도 대단한 편이었다. 청성파는 무림의 일파였지만 역시 사천성 서쪽에 뿌리를 박고 있었고 그리하여 본 고장의 대지주와 불화를 가져오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했다.

거기다 제씨 집안의 자제를 제자로 받아들인다면 청성파의 위세를 떨치는 데 보탬이 되므로 제보곤을 끝내 문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후 무예를 전수하게 되었을 때 제보곤의 무공이 상당히 훌륭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몇 번 물어보았으나 제보곤은 언제나 도령도인이 사전에 지시한 대로 거짓말로 대답하곤 했다.

이렇게 칠팔 년이 흐르게 되자 이미 제보곤은 청성의 절기를 모두 익히게 되었다.

도령도인은 3,4년 전 이미 그에게 집을 떠나 산천구경을 나서도록 명한 적이 있었다. 즉, 산동 봉래파에게로 가서 청성파의 무공을 털어 놓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봉래파에서는 적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되고 그렇게 된 이상 청성파를 일거에 멸망 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보곤은 청성 문하에서 몇 년 지나는 동안 사마위가 자기에게 퍽이나 잘 대해 준다는 것을 느꼈다.

무공의 전수에 있어서도 모든 가까운 제자들과 다름없이 가르쳐 준 것이다. 그리하여 제보곤은 자기의 손으로 청성파를 몰살 시키고 사마위의 가족을 멸족 시키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속으로 암암리에 작정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던 사마위 사부께서 세상을 등진 후에나 손을 쓸 수 있다. 사마림 사형은 나에게 잘 대해 준 것도 아니니 그를 죽인다는 것은 별로 상관이 없다.)

그래서 그는 다시 몇 년을 끌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작년 겨울 사마위는 사천성 동쪽에 있는 백제성(白帝城)부근에서 누구에겐지 성자 12파 가운데 파월추(破月錐)라는 재간에 의해 귀 있는 곳을 관통당해 내력이 뇌수 있는 곳까지 파고드는 중상을 입고 절명한 것이다. '파월추'의 재간은 명칭에 있어서 '추'자가 들어가지만 기실 강추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다섯 손가락을 모아 뾰족하게 한 이후 찌르는 수법이었던 것이다. 사마람과 제보곤은 성도(成都)에서 그 소식을 듣고 밤을 도와 달려와 사마위의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슬픔과 비통함을 느꼈다. 본파에서 '파월추'의 재간을 익힌 사람은 사마위 이외에 사마림과 제보곤 그리고 두 사람의 청성파 명수였다. 그러나 사건이 터졌을 때 마침 네 사람이 모두 성도에 있었으며 네 사람 다 한 자리에 모여 있었으므로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마위를 살해 한 흉수는 '그 사람의 수법으로 그 사람에게 펼친다'라고 일컬어지는 고소 모용씨밖에는 달리 있을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청성파에서는 모든 고수들이 파견되어 고소땅으로 모용씨를 찾아 원한을 갚으러 나서게 된 것이었다.

제보곤은 떠나올 때 몰래 도령도인에게 혹시 봉래파에서 그런 것이 아닌가를 물어 보았다. 그러나 도령도인은 붓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마위의 무공은 나와 백중지간이다. 내가 만약 그를 암살하려 한다면 '천왕보심침'으로만이 가능하다. 만약에 많은 사람이 포위 공격해야 한다면 반드시 본파의 철괴진(鐵拐陣)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보곤은 속으로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때 두 분 사부의 무공 조예가 결코 상대방을 서로 어찌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도령도인이 '파월추'로서 사마위를 죽이려 해도 도령도인은 그러한 무공을 몰랐고 설사 안다고 해도 사마위의 공력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의심하지 않고 사마림을 따라 강남으로 원한을 갚으러 온 것이다.

소주에 이르러 일행은 사방에 수소문을 한 결과 겨우 청향수사에 이르렀는데 이 때는 이미 진가채의 운주땅 뭇도적들이 한 걸음 먼저 와 있는 형편이었다.

청성파의 문규는 매우 엄해서 장문인의 호령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하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진가채의 뭇도적들이 형편없이 노는 것을 보고 상당히 업수히 여겼다. 그래서 쌍방의 오가는 언어에는 조금도 예의가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청성파는 여기에 온 뜻이 원한을 갚는 데 있었기 때문에 청향수사의 풀 한 포기 나무조각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먹는 것도자기들이 스스로 가져온 건량(乾糧)이었다.

그런데 왕어언과 아주 등 네 사람이 돌연 나타남으로써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제보곤이 청성파의 수법으로 '청봉정'이라는 암기를 쏜 데 대해서도 사마위는 생전에 한번도 의심을 하지 않았는데 왕어언이 한번에 간파를 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미처 방어하지 못한 제보곤은 그녀를 죽여 입을 봉하려 했으나 일시 차마 죽일 수 없다는생각에 손 쓰는 것이 늦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때를 놓치게 된 것이었다. 더군다나 '천왕보심침'이라는 한 마디를 이미 사마림 등이 들은 이후니까 왕어언을 죽인다 하더라도 이 일에 보탬이 될 리는 없고 오히려 더 의심만 사게 될 판국이었다.

 

5. 만 가지 무예에 통달하다

이 때 제보곤은 머리 속이 온통 혼란스러웠고 온몸은 식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사마림 등은 각자 두 손을 소매자락 속에 집어 넣은 채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사마림은 냉랭히 입을 열었다.

[제나으리, 원래 그대는 봉래파의 사람이었소?]

그는 이제 제보곤을 사제라 칭하지 않고 제나으리라 칭했다. 틀림없이 동문으로 여기지 않는 말투였다.

제보곤은 인정을 할 수도 없었고 인정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매우 겸연쩍어하는 표정이었다.

사마림은 두 눈을 부릅뜨고 노해 부르짖었다.

[청성파에 잠입하여 '파월추'라는 절초를 익힌 후 우리 아버님을 해치다니 이 개만도 못한 작자야. 그토록 악랄할 수가 있느냐?]

그리고는 두 팔을 바깥 쪽으로 벌렸다. 손에는 어느 새 뇌공갱이라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아마도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게 될 모양인데 청성파의 사람은 수가 많았다. 게다가 사마림과 청성파 고수 두 사람은 무공이 결코 제보곤 못지 않았다. 따라서 제보곤은 오늘 자기의 목숨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사문을 배반할 마음을 갖고 있었으니 청성파 사람들에게 죽는다 하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대답했다.

[사부는 결코 나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외다.]

사마림은 호통을 쳤다.

[물론 네가 친히 손을 쓴 것이 아니지. 그러나 그 재간은 네가 전해준 것이니 네가 친히 손을 써 죽인 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리고 그는 옆의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두 노인에게 말했다.

[강(姜)사숙, 맹(孟)사숙, 저와 같은 반역도를 상대함에 있어서 일대일이라는 규칙을 지킬 필요는 없소. 모조리 한꺼번에 달려들도록 합시다.]

두 명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소매자락에서 일제히 양손을 빼내었다. 역시 한 손에는 강추를 들고 있었고 한 손에는 작은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좌우 양쪽에서 제보곤에게 다가왔다.

제보곤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등을 대청의 커다란 기둥에 기대고 섰다. 전후에서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할 속셈이었다.

사마림은 소리쳤다.

[저 반역도를 죽여 아버님의 원수를 갚자.]

그리고는 앞으로 달려나와 망치를 들어서는 제보곤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했다. 제보곤은 몸을 기울여 피하고 왼손에 있는 강추를 들어 반격을 했다.

강씨라는 노인이 호통을 쳤다.

[이 반역도 같으니! 그러고도 무슨 얼굴로 본파의 무공을 사용하려 하느냐?]

그러면서 왼손의 강추를 들어 그의 목을 찔렀고 오른손의 망치로는 봉점두(鳳點頭)라는 수법을 펼쳐 잇따라 세 번을 내려쳤다.

진가채의 뭇도적들은 강씨 노인이 망치를 그토록 능란하게 쓰고, 펼치는 초식이 지극히 절묘한 것을 보고는 크게 호기심이 생겼다. 요백당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청성파가 사천성 서쪽에서 크게 명성을 떨친 것도 결코 요행이 아니로구나!)

사마림은 부친의 원한을 갚고 싶은 마음에 초식을 쓰는 것도 약간 저돌적인 데가 있었다. 따라서 제보곤은 사마림을 여유있게 상대해 낼수 있었다.

그러나 강,맹 두 노인이 청성파의 사대요결이라고 불리우는 '온건하고악랄하며, 음흉하며, 악독하게' 강추를 찌르고 망치로 때려 오는데, 하나같이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초식이 아닌가.

제보곤은 왼쪽을 막자니 오른쪽이 비게 되고 오른쪽을 막자니 왼쪽이 비게 되는 등 삽시간에 위험을 몇 차례나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 사람의 강추와 망치의 초식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일초를 보게 된다면 이후 3, 4초의 변화를 미리 예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대 삼의 싸움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다.

다시 십여 초를 겨루었다. 동시에 그는 가슴이 쓰라린 것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마 사부는 정말 나에게 잘 대해 주셨다. 사마림과 맹, 강 사숙이 사용하는 초식을 내가 모조리 알 수 있구나. 무공을 연마하기 위해서 대련할 때라면 일부러 절묘한 초식은 드러내지 않겠지만 지금은 생사를 건 싸움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 모든 힘을 기울이게 되질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들 세 사람의 초식을 보아서도 청성파의 무공은 나에게 모두 전수된 것이다.)

그는 사부에 대한 은혜를 절감했고, 참을 수 없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부님은 결코 내가 해친 것이 아니오!]

그러나 그와 같이 말하는 데 정신을 팔게 되자, 사마림은 어느새 그의 앞 한 자쯤 되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청성파가 사용하는 무기는 지극히 짧고 또 작은 것이었다. 그래서 무서운 것은 바로 접근전을 펼친다는 것이었다. 사마림이 이와 같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가 만일 다른 파의 고수였다면 사마림이 이미 거의 이긴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보곤의 무공은 그와 똑같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득은 쌍방이 똑같이 얻는 셈이었다. 촛불 아래 구경하는 뭇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이 어질어질했다.

사마림과 제보곤의 손 씀씀이는 빠르기 이를 데 없었다. 두 사람의 손놀림은 두 손을 마구 휘둘러대는 것과 같았다. 두 눈을 한번 깜박이는 찰나에 그들 두 사람은 벌써 칠팔 초를 교환했다.

강추로는 아래 위를 찌르고 망치로는 아래 위를 때려왔다. 두 사람은 다 같이 미친듯 두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초식은 서로 잘 아는 터여서 상대방이 공격을 하면 자연스럽게 수법을 써서 반격을 했다.

두 사람은 한 사부에게 무공을 전수받은 셈이었고 초식의 요결까지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다르다면 사마림은 나이가 젊고 힘이 좋았으며 제보곤은 경험이 풍부했다. 삽시간에 수십 초를 싸웠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창, 창', '쨍,쨍', 하는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두 사람이 어떻게 공격하고 어떻게 수비를 하는지 이미 볼래야 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맹씨와 강씨 두 사람은 사마림이 오랫 동안 싸워도 제보곤을 이기지 못하자 갑자기 일제히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러더니 땅바닥에 몸을 뒹굴고서는 제보곤의 양쪽에서 하반신을 공격했다. 무릇 짧은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여자를 제외하고는 땅바닥에 몸을 슬쩍 뒹굴어서는 훌쩍 일어나며 공격을 하여 적으로 하여금 여유를 주지 않는 수법을 잘 썼다.

제보곤은 이'뇌공착지갱'(雷公着地羹)이라는 재간을 원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 손으로는 사마림의 강추와 망치를 상대해야 했으므로 강씨와 맹씨 노인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몸을 날려 훌쩍훌쩍 뛰면서 피하는 길밖에 없었다.

강노인의 철추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후려쳐 왔고 맹씨의 강추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찔러 들어왔다.

제보곤은 왼발을 날려 맹노인의 아랫턱을 걷어차려고 했다.

맹노인은 호통을 내질렀다.

[후레자식, 목숨을 걸고 덤빌 참이냐?]

그리고는 한쪽으로 물러섰다.

강노인은 그 바람에 곧장 들어와 망치를 쓸어치듯 휘둘렀다. 바로 이때 사마림의 조그만 망치가 역시 그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제보곤은 이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거운가를 가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망치를 들어 사마림의 조그만 망치를 받아 내었고 왼발은 그대로 강노인의 일격을 막지 않을 수 없었다.

망치는 적었지만 내려치는 힘은 정말 대단했다. 제보곤은 그야말로 뼈속까지 스미는 고통을 느꼈다.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게 두 망치가 서로 부딪치며 불똥을 튀겼다. '아'하는 절규와 더불어 제보곤의 왼발은 또 다시 강노인의 강추에 찔리고 말았다.

이 강추의 일격을 본래 그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 일격을 피한다면 강씨와 맹씨의 '뇌공착지갱'은 '지모뇌망'(地母雷網)을 이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도저히 방어할 수 없는 형세에 놓이고 마는 것이었다. 어쨌든 왼쪽 다리는 이미 부러졌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라서 아예 강추가 찌르는 것을 고스란히 다리로 맞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수초가 지나지 않아 그의 다리에서는 선혈이 낭자하게 되었고 흘러내린 피는 바닥을 질펀하게 만들었다.

 

왕어언은 이 때 아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눈썹을 삐죽이 내미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왕어언은 그녀가 곧 이 사람들이 서로 싸움을 벌임으로써 자기의 깨끗한 방을 더럽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왕어언은 방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봐요, 당신네들은 그만 싸우세요.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하지 어째서 그토록 무공을 쓰시는 거예요.]

사마림등 세 사람은 한 마음으로 사부를 해친 자를 주살하려고 했고 제보곤은 싸움을 그냥 둘 마음이 있었지만 상대방이 그만두게끔 놔주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왕어언은 네 사람이 악전고투를 계속할 뿐 자기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자 싸움을 계속하려는 주요 대상은 사마림 등 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모두다 내가 '천왕보심침'이라는 한 마디로 제대협의 사문 내력을 노출시킨 탓이예요. 사마장문, 당신들은 빨리 손을 멈추세요.]

사마림은 호통을 내쳤다.

[부친의 원한은 불공대천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소? 여러 말 마시오.]

왕어언은 말했다.

[사마 장문인이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도와 주겠어요.]

사마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아름다운 소저의 식견은 매우 뛰어나다. 그러므로 그녀의 무공 역시 매우 고강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상대를 돕는다면 매우 좋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했다.

(우리 청성파의 고수들이 모두 다 여기 있다. 만약 우리 모두가 달려든다면 저같이 나약한 소저 하나쯤 상대하지 못하겠는가?)

따라서 그는 더욱더 손에 힘을 주어서는 광풍폭우처럼 제보곤에게 공격을 가했다.

왕어언은 큰 소리로 말했다.

[제대협, '이존효타호세'(李存孝打虎勢)를 펼치고 다시 '장과로도기로'(張果老倒騎瀘)를 펼치도록 하세요.]

제보곤은 어리둥절 했다.

(앞은 청성파의 일초이고 뒤의 일초는 봉래파의 일초이다. 이 두가지를 결코 섞을 수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잇따라 펼치라는 것일까?)

하나 정세가 매우 다급하여 자세히 검토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즉시 '이존효타호세'라는 수를 펼쳤다.

'창, 창'하는 소리와 함께 때 맞추어 사마림과 강노인이 휘두르는 두 망치를 막아낼 수 있었다.

곧이어 몸을 돌려서는 비틀비틀 비스듬히 세 걸음을 물러서자 알맞게 강노인이 세 번 아래서 공격해 오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강노인의 이 일초는 강추와 망치를 병용해서 공격하는 것으로 잇따라 세 번의 공격을 가해 온 것이었다. 지극히 음독하고 악랄한 수법이라 할 수 있었다.

제보곤이 세 걸음을 물러서는 데 매 걸음걸이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고 걷는 모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결같이 간발의 빈틈으로 상대방의 매서운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두 사람이 미리 짜고서 연습을 많이 하여서는 자기의 재간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이 세 번의 아래에서 위로 가한 공격은 매우 정교하다 하겠으나 피하는 것은 더욱 절묘했다.

진가채의 뭇 도적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매우 통쾌하게 생각했다. 제보곤이 일격을 피할 때마다 매번 갈채를 보냈는데 잇따라 세 번 공격을 피하는 것을 보고 세 번이나 갈채를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청성파의 사람들 표정은 매우 음침했는데 분위기가 이러해지자 그들의 얼굴은 더욱더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정말 묘하군, 묘해. 제형, 왕소저가 어떤 분부를 하든지 그대로 따라 하시요, 결코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요.]

제보곤이 '장과로도기로'라는 세 걸음을 옮겨 섰을 때 그는 그뒤의 결과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그야말로 머리가 어지러울대로 어지러워져 있었고 무엇하나 똑똑하게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그저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자기의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그 말을 쫓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청성파와 봉래파의 전혀 다른 무공은 놀랍게도 이어서 함께 쓸 수 있었고 또한 이로 인해 세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마음 속으로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 때 왕어언은 다시 부르짖었다.

[한상자설옹남관(韓湘子雪擁藍關)을 펼치시고 다시 곡경통유(曲徑通幽)의 일초를 펼치세요!]

이번에는 먼저 봉래파의 무공을 쓰고 다시 청성파의 무공을 쓰라는 것이었다. 제보곤은 다시 생각도 해보지 않고 망치와 강추를 들어 몸 앞을 막았다. 바로 이 때 사마림과 맹씨 노인의 강추가 일제히 찔러 들어왔다.

원래 세 사람은 동시에 손을 쓴것인데도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보곤이 먼저 손을 써서 문호를 막은 것 같았고 사마림과 맹노인은 여전히 지극히 쓸데없는 큰 힘을 펼쳐서는 두 자루의 강추로 제보곤의 망치를 때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강추는 동시에 퉁겨져 나갔다. 제보곤은 더욱더 생각하지 않고 몸을 낮추어 강추를 빼어 내어 비스듬히 찔러내렸다.

바로 이 때 강노인은 서둘러 그의 뒷길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강추가 바로 이러한 때 그런 방향에서 찔러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곡경통유'란 원래 청성파의 초식이었고 강노인도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초식이었다. 그와 같이 찌른 것은 청성파의 기본무공에 어긋나는 것이라 제보곤이 만약 평소 연마할 때 그와 같이 펼쳤더라면 강노인은 아마 소리내어 웃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그와 같이 무리한 일격인데도 강노인은 마치 자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재빨리 자기의 몸을 제보곤의 강추에 내미는 꼴이 되고 말았다. 물론 강노인은 속으로 '아차'했으나 미처 공세를 거루어들일수 없는 형편이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강추는 어느 새 그의 허리께를 찌르고 있었다. 그는 몸을 흔들하더니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청성파에서 두 사람이 달려 나오더니 그를 부축해 들어갔다.

사마림은 욕을 했다.

[제보곤, 너 이 후레자식 같으니! 이제 감히 강사숙에게 상해를 입혔어!]

왕어언은 말했다.

[그 강어르신은 나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거예요. 그러니 그대들은 손을 멈추어요.]

사마림은 노해 부르짖었다.

[그대에게 재간이 있다면 그에게 나를 죽이도록 해보시요.]

왕어언은 미소지었다.

[제대협, '철괴이월하과동정'(鐵拐李月下過洞庭)일초를 펼치고 다시 '철괴이옥동론도'(鐵拐李玉洞論道)라는 일초를 펼치세요!]

제보곤은 대답했다.

[그러죠.]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봉래파의 무공 가운데는 '여순량월하과동정'(呂純陽月下過洞庭)이라는 일초가 있을 뿐이고 또 '한종리옥동론도'(漢鍾籬玉洞論道)라는 일초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 소저는 '철괴리'라는 말로 바꾸었을까? 아마도 그녀는 본파의 무공을 다 알지 못해 아무렇게나 말하다가 잘못된 것이리라.)

그러나 이와 같이 다급할 때 사마림과 맹노인은 그에게 질문할 여유를 줄 리가 없었다. 따라서 자세히 연구해 볼 여유 없이 제보곤은 평소에 연마하던 것 같이 '여순량월화과동정'이라는 일초를 펼쳤다.

이 일초 '월화과동정'은 원래 성큼 앞으로 내딛는 것으로서 자세가 표일하여 마치 허공을 가로지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 그는 왼쪽다리의 두 곳에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성큼 내딛는다는 것이 발을 절룩이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여순량'이 날렵하게 내딛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철괴리'가 절름발이의 다리로 성큼 한 걸음을 내딛는 것과 똑같았다.

그런데 그와 같이 절룩이며 한 걸음 내딛는 데는 또한 한가지 커다란 잇점이 있었다. 사마림은 잇따라 두 번 강추를 찔렀으나 모두 다 허공을 치게 된 것이었다. 곧이어 제보곤은 '한종리옥동론도'라는 초식을 펼쳤다.

역시 왼쪽 다리를 한번 절룩이면서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오른손에 들고 있던 망치는 부채처럼 허공을 쓸어치게 되었는데 맹노인이 그러한 망치에 자기의 머리를 갖다대는 꼴이 되고 말았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 강추는 공교롭게도 맹노인의 입을 후려치게 되었다. 십여 개의 이빨이 부러져서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아픔을 견디지 못한 맹노인은 펄쩍 펄쩍 뛰게 되었다. 그리고 무기를 내던지고는 두 손으로 아래턱을 받쳐들 듯하고는 풀썩 주저 않는 게 아닌가?

사마림은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계속 싸워야 할 것인지 아니면 손을 늦추었다가 이후 다시 복수를 해야 할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왕어언이 가르쳐 준 이 이초는 실로 너무나 교묘했다. 사전에 이미 맹노인이 삼초 후에는 반드시 제보곤의 오른쪽으로 달려들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내다본 수였다. 그리고 제보곤은 바로 그 때 망치를 쓸어치듯 해서는 맹노인의 입을 적중시키고 만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제보곤의 왼쪽 다리가 절룩이게 되었고 '한종리옥동론도'는 그만 '철괴리옥동론도'라는 초식으로 변하게 되었고 망치가 비스듬히 나가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 똑바로 쳐나가게 되었다면 수 치정도 차이가 나게 되어 맹노인을 후려치는 데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이 가운데 계산의 정밀함과 적을 미리 내다본 정확함은 실로 놀라울 지경이 아닐 수 없었다.

사마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제보곤이라는 이 후레자식을 죽일려면 먼저 저 계집을 제지하여야겠다. 따라서 그녀로 하여금 무공을 말하지 못하도록 하여야한다.)

어떻게 하면 왕어언을 먼저 해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을 때 왕어언이 입을 열었다.

[제대협, 그대는 봉래파의 제자인데 청성파로 몰래 잠입하여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크게 옳지 못한 일이예요. 나는 그대가 사마위 노사부를 결코 죽이지 않았다고 믿어요. 그리고 그대가 배운 것으로써는 다른 고수들에게 가르쳐 주었다하더라도 그 고수가 절대로 '파월추'라는 초식을 써서 사마위를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예요. 그러나 무공을 훔쳐 배운다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니 그대가 사마 장문에게 사과를 드리세요.]

제보곤은 속으로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는 은덕을 베풀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그가 지금까지 무사하게 된 것은 그녀가 몇 초 가르쳐준 덕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분부를 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 즉시 사마림에게 읍을 했다.

[장문 사형, 소제의 잘못입니다.]

사마림은 옆으로 비껴서며 매섭게 욕을 했다.

[먼저 잘못을 저질러 놓고 무슨 낯으로 나를 장문 사형이라고 부르지?]

이 때 왕어언이 부르짖었다.

[빨리 '오유동해'(傲遊東海)!]

제보곤은 속으로 흠칫했다가 급히 몸을 뽑아 올려서는 일장쯤 뛰어 올랐다.

그 순간 '칫칫칫'하는 소리가 잇따라 일어났다. 십여 발이나 되는 청봉정이 그의 발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깨우쳐 주지 않았고 그녀가 '오유동해'라는 일초를 들려주지 않고 '암기를 조심하세요'라고 말을 했다면 그는 반드시 정신을 가다듬고 적을 주시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사마림이 옷소매속에서 청봉정을 발사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소리를 듣고 피하려 한다면 이미 때가 늦고 말았을 것이다.

사마림의 이 재간은 '수리건곤'(袖裏乾坤)이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사마림의 집안에서 아들에게만 전해 주고 제자에게도 전해주지 않는 가전절기(家傳絶技)였다.

이는 사마씨 집안의 규칙이었으며 맹씨와 강씨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사마위가 그와 같은 수법을 제보곤에게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그가 조상들의 가르침을 지킨 것이지 사마위가 일부러 제보곤에게 어떤 재간을 숨기려고 전수해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마림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은 채 암암리에 소매 속에 설치해 놓은 '청봉정'을 펼친 것이었다.

따라서 왕어언이 간파하고 또 그 암기를 피하는 일초의 재간을 가르쳐 준 것인데 그것이 바로 봉래파의 '오유동해'였다.

사마림은 반드시 일격에 성공하리라고 믿었던 것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자 왕어언을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대는 사람이 아니야! 그대는 귀신이야, 귀신!]

맹노인은 망치에 얻어맞아 이빨이 다 부러졌을 때 당황한 나머지 세 개의 이빨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뱃속으로 삼켜버리고 말았다. 맹노인은 빈 입으로 바람소리를 '씩씩'내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저 계집을 잡아라! 저 계집을 잡아!]

청성파의 문규는 매우 엄했다.

맹노인은 지위가 높기는 했지마 모든 사무는 반드시 장문인이 지시를 내려야만 했다. 따라서 뭇제자들은 모두 다 사마림을 쳐다보았다. 사마림의 명령만 떨어지면 모두 다 우르르 왕어언에게 달려들 참이었다.

사마림은 냉랭히 물었다.

[왕소저, 본파의 무공에 대해서 어찌 그토록 잘 아시오?]

왕어언은 말했다.

[나는 책에서 본 것이예요. 청성파의 무공은 괴이한 변화와 위험하면서도 악랄한 수법을 장점으로 삼고 있지요. 그러나 변화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서 기억하기는 어렵지 않아요.]

사마림은 물었다.

[그것이 어떤 책이오?]

왕어언은 대답했다.

[음, 그렇게 대단한 책도 못되어요. 청성파의 무공을 싣고 있는 책은 두 권인데 한 권은 '청자구타'(靑字九打)이고 또 한 권은 '성자십팔파'(城字十八破)예요. 그대는 청성파의 장문이니 다 보았겠지요?]

사마림은 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가 어릴 적 무예를 배울 때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본문의 무공은 '청자구타'와 '성자십팔파'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실전되어 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래에 와서는 시종 봉래파와는 막상막하로 싸우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있어 그 완전한 무공을 되찾게된다면 봉래파를 일거에 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천하에서 제일 자랑할 문파라고 뽐내어도 될 것이다.]

이 때 그는 왕어언이 그와 같은 책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그 책을 불초에게 빌려 주실 수 없겠소? 본파에서 배운 것과 어떤 점 이 다른지 보고 싶구려.]

왕어언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요백당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소저는 저 사람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오. 지금 청성파의 무공은 간단하기 이를 데 없소. 청자는 기껏해야 3,4타에 불과하고 성자는 11,12파에 불과하다오. 그는 그대를 속여서 무학기서를 손에 넣으려 하는 것이니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되는 것이오.]

사마림은 요백당에게 심사를 드러내게 되자 푸르죽죽한 얼굴에 그만 검은 기운마저 서리게 되었다.

[내가 왕소저에게 책을 빌리는 것이 진가채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요백당은 웃으며 말했다.

[물론 우리 진가채와 관계가 있지. 왕소저라는 이 사람은 마음 속으로 많고 희귀한 무공을 많이 기억하고 있소. 그러니 누구건 그녀를 손에 넣으면 천하무적이 될 수 있는 것이오. 이요가는 금은보화나 준수한 동자 또는 예쁜 미녀를 발견하게 되면 그냥 손을 뻗어 가로채는 버릇이 있소이다. 그런데 왕소저와 같이 천하재일우의 귀인을 어찌 내가 손을 쓰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겠소? 사마 형제, 그대 청성파에서 책을 빌리겠다면 내가 허락할 것인지 나에게 물어 보시오. 하하하...... 내가 허락할 것인지 허락하지 않을 것인지 어디 한번 알아 맞혀 보시지.]

요백당의 이러한 말은 무례하고 오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사마림과 강씨와 맹씨 노인이 듣기에는 크게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소녀가 무학에 대해 아는 바는 정말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바람도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이 연약한 몸매이니 그 스스로 손을 써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본 무학의 기서는 지극히 많을 것이다. 모든 무학에 통달해 있다. 그러니 우리가 만약 그녀를 청성파로 데리고 간다면 '청'자 9타와 '성'자 18파를 모조리 다 배우는 데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가채에서 불칙한 마음을 품고 있는 모양이니 오늘은 큰 싸움을 부득이 벌여야 되겠구나.)

이 때 요백당은 다시 입을 열었다.

[왕소저, 우리는 본래 모용씨 집안 사람에게 따질 일이 있어 온것이오. 그러데 보아하니 그대는 모용씨 집안 사람 같구료.]

왕어언은 자기가 모용씨 집안 사람 같다는 말에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서 가볍게 입을 삐죽이며 말을 했다.

[모용 공자는 저의 고종 오빠예요. 무슨 일로 그를 찾지요? 또 그가 그대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요백당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대가 모용복의 외사촌 누이라면 더욱 잘 됐소. 고소 모용씨의 조상들은 우리 요씨 집안에 황금 일백 냥과 은자 일천 냥을 빚진 것이 있소. 지금까지 이미 수백 년이 되었는데 그 기간동안의 이자를 붙인다면 그 수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겠소?]

왕어언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우리 고모님 댁은 수대를 걸쳐 대단한 부자인데 어떤 일로 당신 집에다 빚을 지게 되었다는 것인가요?]

요백당은 말했다.

[빚을 졌는지 안 졌는지 나이 어린 소저가 어떻게 알겠소? 내가 모용박을 만나 빚을 갚으라고 하자 그는 순순히 주겠다고 했소. 그러나 여태까지 한 푼도 되돌려 받지 못했는데 그는 두 다리를 뻗고 죽어 버린 것이오. 애비가 죽었으니 부득이 아들에게 그 빚을 받아내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모용복은 빚쟁이들이 나서자 몸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으니 나는 별도리 없이 저당잡힐 만한 물건을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되게 생겼소.]

왕어언은 말했다.

[우리 고종 오라버니는 매우 시원하고 고강한 분이예요. 만약 그대에게 빚을 졌다면 일찌기 갚았을 것이고 설사 빚을 진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대가 그에게 금은을 달라고 한다면 거절할 사람이 아니예요. 그런데 어찌 그대가 두려워 피하겠어요?]

요백당은 눈쌀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이런 일은 일시에 설명할 수도 없고 하니 왕소저는 잠깐 우리를 따라 북쪽의 진가채로 가서 일 년이고 반 년이고 머물도록 하시오. 그런다 해도 진가채 사람들은 소저의 털 한가닥도 건드리지 않겠소. 이 요백당의 마누라로 말하면 하삭(河朔)일대에서 유명한 암호랑이요. 따라서 이 늙은이는 여성에게 있어서는 항상 올바른 처사를 하니 소저는 마음을 놓아도 될 것이오. 또 그리고 그대는 챙길것도 없소이다. 우리는 그저 훌쩍 떠나면 그만이니 말이오. 그리고는 그대의 오라비가 금은을 모두 갖추어서는 오래 묵은 빚을 갚게 된다면 나는 물론 소저를 고소땅으로 되돌려 보내어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와 혼례를 치르도록 해주겠소. 게다가 진가채에서는 또한 예물을 선물할 것이며 이 요백당이 다시 찾아와서 그대의 국수를 들도록 하겠소.]

그리고는 헤벌쭉 웃다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몇 마디는 나오는 대로 씨부렁거린 것이며 왕어언을 희롱한 것이기도 햇다. 그러나 왕어언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여간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미소했다.

[그대라는 사람은 터무니 없는 말을 잘 지껄이기도 하는군요. 내가 왜 그대를 따라 진가채로 가지요? 저희 고모댁에서 정말 그대 집안의 은전을 빌렸다면 그건 십중팔구 오래 된 것일 거예요. 따라서 우리 고종 오라버니도 모르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쌍방에서 확실히 따지고 들어 돈을 빌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저희 고종 오라버니는 분명히 돈을 돌려 드릴거에요.]

요백당의 본뜻은 왕어언을 사로잡아 가서는 무공을 토로하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백 냥 황금이고 일천 냥 은전 따위의 이야기는 모두 다 그가 지어낸 말들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하는 소리가 천진하고 자기가 함부로 지어낸 이야기를 정말 믿는 듯하자 다시 말하였다.

[그대는 역시 나를 따라가도록 합시다. 진가채는 매우 놀기가 좋다오. 우리집에서는 사냥용으로 검은 표범과 독수리도 키우고 있으며 여러가지 동물들도 키우고 있다오. 그러니 일 년이나 반 년동안은 싫증이 나지 않도록 놀 수 있으며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가 그 소식을 듣는다면 즉시 데리러 올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모용복이 설사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얼렁뚱땅 넘겨 버리고 그대가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와 함께 이 고소땅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를 하겠소. 어떠시요?]

이 몇 마디의 말은 그야말로 왕어언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사마림은 왕어언의 눈빛이 반짝거리고 얼굴빛이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운주의 진가채로 간다고 응낙을 한다면 내가 다시 말을 하여 제지를 한다고 해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운주는 추운 땅으로 왕소저 같이 연약한 강남의 아가씨가 그런 추운 곳에서 고통을 당할 수 있단 말이오. 우리 성도부(成都府)로 말하면 금관성(錦官城)이라 일컬어지는 만큼 거기서 만들어 지는 비단은 천하에 일품이외다. 더구나 풍경이 아름답고 놀만한 곳들이 운주 같은 곳보다 10배는 될 것이오. 왕소저 같은 분은 성도 같은 곳으로 가서 많은 비단옷을 사서 입어야만이 그야말로 붉은 꽃과 파란 잎으로 치장을 한듯 더욱 아름다와질 것이오. 모용 공자는 재주와 인품이 뛰어난 사람이니 자연히 아가씨의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 모습을 좋아할 것이외다.]

그는 부친이 봉래파에게 해침을 당했다고 믿은 나머지 고소 모용씨에 대한 원한은 없어지게 되었다.

요백당은 호통을 내질렀다.

[개방구 같은 소리 집어 치우시오! 이 고소성에는 비단옷이 없는 줄 아시오? 눈을 크게 뜨고 보시오. 눈 앞의 아름다운 소녀들 가운데 누가 옷을 못 입고 있소?]

사마림은 싸늘이 코웃음쳤다.

[정말 냄새 고약하군. 고약해.]

요백당은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은 나를 두고 하는 소리요?]

사마림은 대답했다.

[천만에, 나는 그 개방귀 같은 소리가 매우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에 하는 소리요.]

요백당은 '싹'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에서 칼을 뽑아 들면서 부르짖었다.

[사마림, 우리 진가채에서 청성파를 상대한다면 막상막하가 되겠지만 만약 진가채에서 봉래파와 손을 잡는다면 십중팔구 그대 청성파들을 멸할 수 있겠지?]

사마림은 안색이 변했다.

(정말 그 말이 틀리지 않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우리 청성파의 실력은 예전만 못하다. 거기다 이 제보곤이라는 도적이 본파의 무공을 훔쳐 배웠으니 만약 다시 진가채와 적이 된다면 그 결과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흔히들 먼저 선수를 쓰는 사람이 이기게 되고 후수를 쓰는 사람이 당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빌어먹을, 오늘의 일은 먼저 그들이 방어하기 전에 손을 쓰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겠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요백당은 사마림이 두 손을 옷소매 속으로 집어 넣고 있는 것을 보고 언제라도 음독한 암기를 소매자락 속에서 쏘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잔뜩 경계를 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모용 공자가 그녀를 찾아 운주로 올 때까지 그녀를 우리의 손님으로 모실 참이오. 그런데 당신이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하고 나서며 찬성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소?]

사마림은 말했다.

[당신네 운주라는 곳은 너무나 후미진 곳이라서 오히려 그녀를 당신의 손님으로 모시고 가는 것이 그녀에게는 폐가 된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우리는 왕소저를 우리 성도로 모시고 가 놀게 할 작정이오.]

요백당은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우리 무기로 승부를 겨루도록 합시다. 누구든 이긴 사람이 바로 왕소저의 주인이 되도록 합시다.]

사마림도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어쨌든지 진 사람은 왕소저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해도 어쩔수 없이 챙겨 데리고 가지 못할테니 말이요.]

그 뜻은 이번 싸움이 결코 무공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실로 생사존망을 판가름하는 결투가 된다는 말이었다.

사마림은 다시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견줄 작정이오?]

[내가 당신과 일대일로 견줄까요. 아니면 우리 모두 한꺼번에 싸우는 게 좋겠소?]

요백당은 말했다.

[노부가 사마 장문을 상대해서 한번 놀아 드리지......]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사마림은 고개를 돌려 왼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굴에는 깜작 놀란 빚을 띠었다. 마치 매우 특이한 변고라도 일어난 표정이 아닌가?

요백당은 줄곧 눈길 한번 떼지 않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마림이 갑자기 암기를 써 기습을 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사마림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치지직'하는 세 번의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요백당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을 때 암기는 이미 그의 가슴팍과 석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는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요행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바로 이 때 하나의 물건이 자신의 가슴을 치고 지니갔다. '탁탁탁'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지던 몇 개의 독전은 모조리 떨어지고 말았다. 독전은 본래 지극히 빨랐다. 요백당과 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강호의 경험을 쌓은 사람도 피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물건은 수배나 빨라 나중에 쏘았는데도 먼저 쏜 그 독전을 맞추어 떨어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물건은 어떠한 것인지 요백당과 사마림도 미처 볼 사이가 없었다.

바로 이때 왕어언이 기쁨에 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포(包)숙부께서 도착하셨나요?]

그러자 한 기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로소이다. 포숙부께서 도착한 것이 아니외다.]

왕어언은 웃으며 말했다.

[포숙부가 아니면 누구예요?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아니로소이다'가 먼저 도착했는걸요.]

그러자 그 소리는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나는 포숙부가 아니외다.]

왕어언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니로소이다'라고 하시는 분은 누구시지요?]

그러자 그 소리는 말했다.

[모용형제는 나를 세째 형이라고 부르는데 그대는 나를 숙부라 부르고 있소. 그러니 아니로소이다. 그대가 잘못 들은 것이오.]

왕어언은 더욱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웃었다.

[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세요?]

그러나 그 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후 아무런 기척이 없자 왕어언은 소리내어 불렀다.

[이것 보세요, 빨리 나 오세요. 빨리 나오셔서 우리를 도와 이 험상궂은 사람들을 쫓아내 주세요.]

그러나 사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마도 포씨 성을 가진 그 사람은 멀리 떠난 것 같았다.

왕어언은 약간 실망한 듯 나직이 물었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갔지?]

아주는 빙그레 웃었다.

[포 세째 오라버니는 언제든지 그런 성격이예요. 소저가 왜 얼른 나서지 않느냐고 하자 원래는 나서려고 했었지만 나서지 않고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는 게 아마 오늘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 같군요.]

이 때 요백당은 자기의 목숨을 십중팔구 잃을 뻔했을 때 포씨성을 가진 사람에게서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 마음 속으로 여간 고맙지가 않았다. 그는 청성파와 본래 아무런 원한이 없었으나 이 때만은 사마림을 죽이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하여 칼을 세우며 호통을 내질렀다.

[몰염치한 같으니! 몰래 암기를 쓰다니 그런다고 노부를 해칠것 같으냐?]

그리고는 칼을 세우고 사마림을 노리며 내려쳐 갔다.

사마림은 옷소매 속에서 두 손을 뽑아 들었다. 역시 오른손에 조그만 망치를 들고 왼손에는 강추를 들고 요백당의 칼날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요백당은 팔힘이 좋았다. 따라서 그가 칼을 쓰는 수법은 매우 무서웠다. 반면에 사마림은 매우 날렵하고 몸놀림이 경쾌한 것이 특징이었다. 청성파와 진가채는 오늘 처음으로 대결을 벌인 것인데 그것도 두 파의 수뇌급이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이다.

승패는 비단 생사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양파의 흥망성쇠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어느 한 쪽도 이 승부를 소홀히 여기지 못했다.

칠십여 초를 싸우고 있을 때 왕어언은 갑자기 아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것 봐, 진가채의 오호단문도에서 상실한 것은 5초만이 아닌것 같아. '부자도하'(負子渡河)와 '중절수의'(重節守義)등을 요채주게서는 어째서 사용하지 않는지 모르겠군.]

아주는 진가채의 '오호단문도'의 무공법을 모르는 까닭에 그저 '그렇군요.'라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요백당은 한참 싸우면서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다시 한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6. 포삼선생(包三先生)

(저 소저의 눈은 어찌 저토록 뛰어날까? '오호단문도'의 64초도법은 수 십년 동안 전해 내려 오는 것이 59초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우리 사부의 대에 이르러서 자질과 이해력이 뒤떨어져서 '부자도하'와 '중절수의' 2초를 배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2초가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57초밖에는 남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진가채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두 변화의 초식을 조금 보태고 다듬어서 59초의 수로 보완을 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녀가 알아 보는구나.)

본래 천하 녹림산(綠林山) 산채는 오합지졸들이 모여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갖가지 문파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약탈을 일삼는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오로지 운주 진가채의 뭇 두령들만이 '오호단문도'의 문인제자들이었다. 다른 문파의 고수들은 진가채에서 자기 편이라고 생각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진가채에 참가하거나 투신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요백당의 사부는 진씨였다. 바로 진가채의 맨 상석에 앉은 대두령이었고 또한 '오호단문도'의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의 친 아들인 진백기(秦伯起)는 무공이나 재간이 평범했다. 그리하여 그의 자리를 제자인 요백당에게 전해 주게 된 것이었다. 한데 수개월 전 진백기는 협서성(挾西城)에서 일초에 옆으로 세번 꺽고 수직으로 한 번 내려치는 '왕자사도'(王字四刀)를 얼굴에 맞고 죽어 버린 것이다.

그 일초는 바로 '오호단문도'에서 가장 강한 절초였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고소 모용씨가 손을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백당은 사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진가채의 고수들을 모조리 끌고 고소땅으로 와서는 사제의 원한을 갚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장본인은 발견하지 못하고 하마터면 청성파의 독저에 목숨을 잃을 뻔하였을 때 오히려 모용복의 친구에게 자신의 생명을 구원받게 된 것이다.

그는 사마림의 음흉한 암상이 가증스러웠다. 그리고 왕어언이 자신의 무공의 허점을 간파했는지라 마음 속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급히 사마림을 패배시켜서는 진가채의 위엄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가 다급히 이기려고 들자 그만 마음이 들뜨게 되었다. 그는 잇따라 비장의 수법을 썼으나 사마림이 모조리 피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요백당은 일성대갈하며 칼을 비스듬히 내려쳤다. 그리하여 사마림이 왼쪽으로 몸을 날렸을 때 오른 다리를 갑자기 내밀어서는 걷어차려고 했다. 사마림은 몸이 허공에 떠있던 참인지라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왼손에 들고 있던 강추를 내리쳐 발등을 맹렬히 찌르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요백당은 오른 발을 스스로 거두어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요백당은 그 순간 왼쪽 다리를 들어서는 그의 오른쪽 허리께를 질풍과 같이 걷어차려 했다.

이 때 사마림은 조그만 망치를 비스듬히 휘둘렀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요백당의 콧날에 망치가 명중했다. 즉시 선혈이 낭자하게 되었다. 바로 이 때 요백당의 왼쪽 발이 사마림의 오른쪽 옆구리를 걷어차게 되었다. 그러나 요백당이 얼굴에 먼저 일격을 당하면서 흠칫 놀란 나머지 그가 한 발길질의 힘이 평소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마림은 걷어차이기는 했으나 약간 아픈 점 이외에는 달리 상처를 입지 않았다. 바로 이와 같이 찰나의 차이에 의해 승패는 판가름나게 되었다.

다음 순간 울화가 치민 요백당이 호통을 치며 칼을 들고 공격을 하려했으나 갑자기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이 아파왔다. 대뜸 발걸음을 휘청거리며 제대로 서지를 못했다.

사마림의 이 일초는 이기기는 이겼으나 퍽이나 요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상대방의 목숨을 남겨 놓는다면 차후 무한한 화근을 남겨 놓는 것이 되니 즉시 죽여 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른쪽의 조그만 망치를 급히 휘둘러서 요백당이 칼로 내려치려는 순간 그의 심장을 노려서 찔러갔다.

진가채의 부채주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갑자기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리고 손에 뽑아 들고 있던 칼을 번개같이 사마림을 향해 내던졌다. 순식간에 대청 안에는 바람소리가 휙휙 나는 가운데 십여 자루의 칼이 사마림을 향해 날아 들었다.

원래 진가채의 무공 가운데는 이와 같이 칼을 던져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절기가 있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칼은 대개 7~8근 내지 십여 근이나 되는 무게였다. 힘주어 던진다면 그 기세가 대단히 강맹한 편이었다. 그런데 십여 자루의 칼이 동시에 날아드니 사마림으로서는 도저히 막을래야 막을수가 없었고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그가 바로 난도질당해 죽지 않을까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촛불이 일렁이는 가운데 한 사람이 나는 듯 사마림 곁으로 오더니 손을 뻗쳐서는 날아드는 칼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동쪽으로 향해 칼 하나를 막고 서쪽으로 향해 칼 하나를 막는 등 삽시간에 십여 자루의 칼을 받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왼팔로 십여 자루나 되는 칼을 가슴에 안고는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그렇게 웃던 사람은 어느덧 대청 한복판에 있는 의자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뎅그랑'하는 소리가 나도록 십여 자루의 칼을 그의 발 끝에 내던졌다. 뭇 사람들은 아연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내는 용모가 수척한 중년의 사나이였다. 그러나 키는 매우 커 보였으며 온몸에 잿빛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매우 고집스럽게 생긴 편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가 조금 전에 강철로 만든 칼을 받아내던 광경을 보았던 참이라 모두 감탄한 나머지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고 말을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단예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형씨께서는 손 솜시가 무척 빠르군요. 무공 역시 지극히 고강하신 것 같은데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 비쩍 마른 사람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왕어언이 그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포삼(包三)오라버니, 나는 다시 오시지 않을 줄 알고 걱정하던 참이예요. 그런데 또 오셨군요. 잘 하셨어요. 잘하셨어요.]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포삼(包三)선생이시군.]

그 포삼 선생은 그를 눈으로 흘기더니 냉랭히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누구인데 감히 나에게 잔소리를 늘어 놓느냐?]

단예는 말했다.

[불초 소생의 성은 단이고 이름은 예라고 하오. 지상에 태어날 때부터 주먹 힘도 없었고 용기도 없어 강호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는데 다행히 아직까지 죽지 않아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여기고 있소.]

포삼 선생은 일시적으로 그를 노려 보았으나 어떤 말로 그를 상대해야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사마림은 앞으로 나아가 길게 읍을 했다.

[청성파의 사마림이 도움의 손길을 받았습니다. 큰 은덕을 영원히 잊을수 없을 것입니다. 포삼 선생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 불초로 하여금 언제나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포삼 선생은 두 눈을 부릅뜨고 왼발을 번개 같이 차 올렸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사마림을 곤두박질치게 하고는 호통을 내질렀다.

[네까짓 것도 나에게 이름을 물을 자격이 있어? 나는 너를 구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다만 이곳 아주 누이의 장원에서 상대방의 칼에 네 녀석이 난도질을 당해 죽게 된다면 이 청향수사의 바닥이 더렵혀지게 될까봐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너를 구한 것이야. 빨리 꺼지기나 해!]

사마림은 그가 발길을 내지르는 순간 급히 피하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야말로 진정 낭패한 꼴을 당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대단히 업수히 여기는 말에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강호의 원칙으로 따진다면 즉시 목숨을 걸고 싸우거나 아니면 훗날을 도모하기 마련이며, 결코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러한 모욕을 당하고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체면불구하고 입을 열었다.

[포삼 선생, 소인은 오늘 여기서 여러 사람의 포위를 받아 하마터면 중과부적으로 목숨을 잃어 버릴 뻔했는데 그대가 구해 준 덕택으로 무사할 수 있었소. 사마림은 은원(恩怨)이 분명한 사람이오. 은혜가 있으면 보답하고 원한이 있으면 갚는 것이요. 자, 이만 실례하겠소.]

그는 한 평생 무공을 연마해도 포삼 선생의 무공을 따라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은혜가 있으면 보답하고 원한이 있으면 갚겠다는 말로 얼렁뚱땅 넘긴 것이다.

포삼선생은 그가 무어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왕어언에게 물었다.

[왕소저, 왕부인께서 어찌하여 그대를 이곳까지 보내시었소?]

왕어언은 웃으며 말했다.

[어디 한 번 어떠한 이유인지 알아 맞춰 보세요.]

포삼 선생은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거, 짐작하기 어려운걸.]

사마림은 포삼 선생이 왕어언과 대화할 뿐 자신의 체면 치레를 위한 말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자기가 당했던 그의 발길질 보다 더욱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따라서 그는 마음속으로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으며 조금 전 포삼 선생이 그를 구해준 은덕은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로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왼손을 흔들었다. 청성파의 무리를 데리고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포삼 선생이 입을 열었다.

[잠깐, 당신은 거기 서서 나의 분부를 듣도록 하시오.]

사마림은 몸을 돌리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포삼 선생이 말했다.

[당신이 고소 땅으로 온 것은 그대 부친의 원한을 갚으려 했던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을 잘못 찾아왔소. 당신의 부친을 죽인 것은 모용공자가 아니오.]

사마림은 말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포삼 선생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아시지요?]

포삼 선생은 노해 말했다.

[내가 모용 공자가 죽인 것이 아니라고 했으면 정말 그가 죽인 것이 아니야! 설가 그가 진정 죽였다 해도 내가 아니라면 아닌것이란 말이야. 설마 하니 내가 한 말은 말이 아니란 것인가?]

사마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억지를 쓰는군!)

그러면서도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부친의 원수는 불공대천이오. 사마림은 비록 무공이 낮으나 이 원한은 꼭 갚고야 말겠소. 이 몸이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말이요. 그런데 혹 선생께서 저의 부친이 누구에게 해를 입었는지 알고 있다면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포삼 선생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너의 부친은 내 아들이 아닌데 누구에게 죽든 내가 상관할 바가 무어란 말이냐? 너의 부친은 모용 공자가 죽인 것이 아니라 했는데도 믿으려 들지 않는군! 좋아! 그렇다면 내가 죽인 걸로 하지. 그래, 네가 원한을 갚고자 한다면 나에게 달려들어 보라구!]

사마림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부친의 원한은 장난이 아니요. 포삼 선생. 나는 결코 당신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나를 죽이려면 죽이시오. 나를 이토록 모욕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포삼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모욕을 주겠다. 그리하여 네가 어떻게 하는지를 두고 볼 참이다.]

사마림은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매우 화난 김에 그대로 달려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었지만 끝내 그러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선 채 어찌할 바를 모르며 난처해 할 수 밖에 없었다.

포삼 선생은 웃으며 말했다.

[너의 부친 사마위의 그까짓 미천한 재간으로는 우리 모용 형제가 마음을 쓸 것도 없어. 모용 공자는 나보다 무공이 십배는 더 고강해. 그러니 잘 생각해 보라고. 모용 형제가 친히 사마위 따위를 상대로 손을 쓸 것 같애?]

사마림이 미처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제보곤이 무기를 뽑아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포삼 선생, 사마위 노(老)선생은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은사요. 나는 그대가 돌아가신 그 분의 이름에 누가 되는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소.]

포삼 선생은 웃으며 말했다.

[너는 청성파에 몰래 잠입하여 청성파의 무공을 훔쳐 배운 첩자 아닌가? 그런데 웬 간섭이지?]

제보곤은 큰 소리로 외쳤다.

[사마 선생은 나에게 모든 인정과 의리를 베푼 사람이오. 그렇지 않아도 이 제보곤은 그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어 부끄러워하던 참이오. 그러니 오늘 선사의 명성을 얻기 위해 죽겠으며 이로써 그 분을 속인 죄를 조금이라도 갚으려 하오. 사마 장문께 잘못했다고 사과하시오.]

포삼 선생은 웃었다.

[포삼 선생은 한 평생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사과라는 것도 해본 적이 없지. 따라서 자기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입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거든. 사마선생은 살았을 때도 명성이 없었지만 죽고 나서 더욱더 명성이 나빠졌어. 그러니 그런 사람은 일찌기 죽어야 해. 그야말로 잘 죽은 셈이지.]

제보곤은 노해 부르짖었다.

[빨리 무기를 뽑으시오!]

포삼 선생은 웃으며 말했다.

[사마위의 아들이나 제자들은 모두 밥통같은 작자들이야. 몰래 사람들이나 죽일 줄 알지 무엇을 알아?]

제보곤은 입을 열었다.

[받으시오!]

그리고는 왼손에 조그만 망치를 들고 오른손은 강철로 만든 강추를 들고서는 포삼 선생에게 공격해 갔다.

포삼 선생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앉은 채 왼손 소매자락을 휘둘렀다. 세찬 바람이 제보곤의 얼굴로 몰아 닥쳤다.

제보곤은 그만 숨이 꽉 막혀왔다. 그래서 그는 옆으로 조금 피하려고 몸을 기울였다. 그때 포삼 선생은 오른 발을 슬쩍 내밀어 제보곤의 다리를 걸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제보곤이 옆으로 넘어졌다. 그 순간 포삼 선생은 오른 발로 걷어찼다. 바로 제보곤의 엉덩이를 걷어차서는 곧장 문 밖까지 날아가게 하지 않는가?

제보곤은 공중에서 몸을 빙그르 돌려 어깨죽지가 땅에 닿는 순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리를 절룩이며 대청으로 뛰어들어와 다시 강추를 들고는 포삼 선생의 가슴팍을 겨누려고 했다.

포삼 선생은 손을 뻗쳐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홱'높이 던져 올렸다. '팍'하는 소리와 함게 그는 대들보에 부딪혔다가는 떨어졌다. 제보곤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세번째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포삼 선생은 눈쌀을 찌푸렸다.

[너란 녀석은 정말 분수를 모르는구나. 설마하니 내가 너를 못 죽일 것 같애?]

제보곤은 부르짖었다.

[당신이 나를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오!]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포삼 선생은 두 팔을 뻗쳤다. 그리고 그의 앞으로 내민 두 팔을 붙잡더니 그대로 앞으로 밀어젖혔다. '우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제보곤의 두 팔의 뼈가 그대로 분질러지고 말았다. 곧이어 강추는 제보곤의 어깨를 찌르게 되었고 조그마한 망치는 그의 오른쪽 어깨를 후려치게 되었다. 두 어깨죽지에서는 대뜸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렸다.

그는 여전히 목숨을 걸고 싸우려 들었으나 이번에야말로 너무나 크게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마음만 있었을 뿐 행동이 잘 따라주질 않았다. 청성파의 뭇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앞으로 나아가 그를 구해야 할지 어떨지를 그들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선사의 명성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태도가 거짓인 것 같지는 않아서 제보곤에 대한 증오심이 태반은 사그러들었다.

아주는 줄곧 옆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이 때 불쑥 입을 열었다.

[사마 장문인, 그리고 제대협, 우리 모용씨가 정말 사마 노장문인을 죽였더라면 당신네들의 목숨을 남겨 둘 것 같아요? 포삼 오라버니가 그대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거예요. 적어도 그는 사마 장문의 목숨을 구하지를 않았을거예요. 따라서 왕소저도 두 번 세 번 제대협을 구하지는 않았을거예요. 도대체 누가 손을 써서 사마 노선생을 해쳤는지 여러분은 돌아가서 잘 생각하고 조사해 주기 바래요.]

사마림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리하여 체면치레의 말을 한 마디 더 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포삼 선생이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 아주 누이의 장원이야. 주인은 이미 축객령(逐客令)을 내렸어. 그런데도 분수를 모르고 날뛰겠다는 것이냐?]

사마림은 말했다.

[좋소,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하지요.]

그리고 고개를 약간 끄덕이고는 걸어 나갔다. 제보곤 등도 따라 나갔다.

요백당은 포삼 선생이 무공도 뛰어나고 일처리 하는 것이 괴팍하자 이 강호의 기인과 사귀어 두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왕어언의 무학에 대한 지식을 엿보고 싶은 마음을 좀처럼 단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몸을 일으킨 후 입을 열려고 했다. 포삼 선생은 요백당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요백당, 내가 그대에게 말해 줄 것이 있는데 당신의 그 바보같은 사제 진백기가 다시 30년간을 두고 무공을 연마한다 해도 모용 공자의 한 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 아니 백 년 아니 백이십 년 을 더 연마한다 하더라도 모용 공자는 그에게 네 번 칼질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야. 나는 그대가 한 마디도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빨리 꺼져 주려므나!]

요백당은 어리둥절했으나 금시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칼자루를 잡았다.

포삼 선생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같이 미천한 재간으로 내 앞에서 수작을 부리지 말아라. 내가 빨리 꺼지라면 꺼지는 게 좋아. 두 번 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진가채의 군도들은 조금 전 칼을 날려 사마림을 죽이려 했다.

그런데 그 결과 그들의 무기는 모조리 포삼 선생이 받아서는 그의 발밑에 쌓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포삼 선생이 요백당에 대해 커다란 모욕을 가하자 모두 다 하나같이 목숨을 걸고 싸울 마음이 우러났다. 그러나 적수공권이라 그야말로 호랑이에게서 발톱과 이빨이 빠진 격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데 포삼 선생은 껄껄 웃더니 오른 발을 들어 잇따라 차냈다. 그 발길은 모조리 칼자루를 차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십여 자루의 칼이 다투어 날아 진가채의 군도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그칼의 날아드는 기세는 무턱 완만했다.

군도들은 대뜸 자기의 칼을 받아들었다. 받아들면서 그들은 약간 어리둥절했다. 너무나 받기가 쉽게 날아오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일부러 자기들에게 던져 준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곧이어 그들은 포삼 선생이 자기들에게 이토록 칼을 받기 쉽게 해줄 수 있다면 자기들에게 칼을 받기가 매우 어렵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니 심지어는 칼끝을 꺼꾸로 하여서는 그들의 몸 어디엔가 한 구석에 박히게 하는 일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칼자루를 쥔 채 모두 낭패한 꼴로 우두커니 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포삼 선생은 말했다.

[요백당, 굴러서 꺼지지 않겠어?]

요백당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포삼 선생이 요백당의 목숨을 구해 주는 은혜를 베풀었소. 이 목숨마저도 귀하가 내리신 것인데 귀하의 명을 어찌 받들지 않겠소. 그 명을 받들어 그만 작별을 하겠소.]

그리고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한 후 왼손을 흔들었다.

[모두들 가세.]

포삼 선생은 외쳤다.

[나는 너에게 굴러서 나가라고 했지 걸어서 가라고는 하지 않았어.]

요백당은 어리둥절해졌다.

[불초는 포삼 선생의 뜻을 모르겠구료.]

포삼 선생은 말했다.

[구르는 것이 구르는 것이지 뭘 몰라! 도대체 못 굴러 나가겠다는 것인가?]

요백당은 이 사람이 정말 성격이 괴팍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여겨져 도리를 따져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더는 말하지 않고 출입문 쪽으로 곧장 걸어갔다.

포삼 선생은 호통을 쳤다.

[그게 아니야. 그것은 그냥 가는 것이야. 즉 달려가는 것이고, 걸어가는 것이며, 쫓아가는 것이지, 굴러가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는 몸을 흔들 하더니 어느 새 요백당의 뒤를 쫓아가 왼손을 뻗쳐서는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요백당은 그 순간 오른손 팔꿈치를 내질렀으나 포삼 선생이 왼손을 위로 번쩍 치켜드는 바람에 요백당의 몸뚱아리가 땅에서 위로 솟아오르게 되었고 그래서 그의 오른쪽 팔꿈치는 자연 허공을 치게 되었다.

포삼선생은 오른 손으로 그의 엉덩이 쪽을 잡아 들어올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아주 누이의 장원을 네 멋대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은가? 굴러가란 말이야!]

그리고는 두 손으로 홱 밀었다.

그러자 요백당의 커다란 몸둥이가 데굴데굴 굴러서는 문 밖으로 나갔다.

요백당은 그에게 잡히는 순간 이미 혈도를 잡히게 되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치 커다란 나무토막처럼 굴러서 문까지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 대청문은 매우 넓은 편이어서 머리와 다리를 부딪히지 않고도 데굴데굴 굴러 나갈 수 있었다. 진가채의 군도들은 모두 큰 고함소리를 내고는 재빨리 요백당을 쫓아 나갔다. 그리고 그를 안아 일으켰다.

요백당은 급히 말했다.

[빨리 가자! 빨리 가!]

뭇 도적들은 벌떼처럼 우르르 몰려가고 말았다.

 

포삼 선생은 단예의 아래 위를 훑어 보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어언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어떤 내력을 지닌 사람이요? 그 역시 굴러서 나가게 만들까?]

왕어언은 말했다.

[저와 아주, 아벽이 모두 엄씨 아주머니에게 잡혀 처지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을 때 다행히 여기 이 단 공자가 구해 주었어요. 게다가 현비화상이 위타저에 맞아 죽은 사연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 그에게 물어보도록 해요.]

포삼 선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를 여기 놓아 두자는 얘기요?]

왕어언은 말했다.

[맞아요.]

포삼 선생은 미소했다.

[그대는 모용 형제가 질투를 하리라고 생각지 않으시요?]

왕어언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왜 질투를 한다는 거죠?]

포삼 선생은 단예를 가리켰다.

[이 사람은 말쑥하게 생겼고 풍채도 그럴 듯하게 생겼소. 그러니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시오.]

왕어언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그의 무슨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건가요? 그가 소림파에 관한 소식을 날조했다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을걸요.]

포삼 선생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말을 듣자 더 이야기하기가 거북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단예를 향하여 싸늘하게 냉소를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말을 듣자니까 소림사의 현비화상은 대리국에서 위타저라는 수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더군. 그런데 한 떼의 멍청한 사람들이 또 우리 모용씨 집안 사람의 짓이라고 한다던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대로 털어 놓아 보시지.]

단예는 속으로 슬그머니 울화가 치밀어 냉소를 지었다.

[당신은 죄인을 심문하는 것이오? 당신은 만약 내가 말을 않는다면 심문을 가해 실토를 하도록 할겁니까?]

포삼 선생은 어리둥절해지더니 노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중얼 거렸다.

[대담한 녀석이군. 대담한 녀석이야!]

그는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냉큼 단예의 왼팔을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살짝 힘을 주었다.

단예는 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무엇을 하자는 것이오!]

포삼 선생은 말했다.

[나는 죄인을 심문하는 것이며 고문을 가하는 것이다.]

단예는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팔이 아닌 듯 미소마저 띠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해 보시요. 나는 당신을 상대하지 않겠소.]

포삼 선생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단예의 팔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의 팔이 부러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단예는 고통을 더욱 참으며 내색하지 않았다.

아벽은 재빨리 말했다.

[세째 오라버니, 이 단 공자의 성격은 고고하면서도 오만하기 짝이 없어요. 이 분은 우리의 목숨을 구한 분이니 해치지 않도록 해주세요.]

포삼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좋아. 성격이 고고하고 오만하다면 내 '아니로소이다'의 비위에 맞는군]

그러면서 천천히 단예의 팔을 놓았다.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비위를 말하자니 모두들 배가 고파지는군. 고씨! 고씨!]

그녀는 요리사를 찾아 언성을 높여 몇 번 부르자 고씨 영감이 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주는 말했다.

[먼저 가서 두 번 이를 닦고 두 번 세수를 하고 세번 손을 닦고는 우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좀 만들어 주어요. 조금이라도 깨끗하지 못하다면 포삼 나으리가 고씨를 그냥 두지 않을거예요.]

[정말 깨끗하게 만들겠습니다.]

청향수사의 시녀들이 곧 한 칸의 화청에다가 연회석을 마련했다. 아주는 포삼 선생을 가장 상석에 앉게 하고 단예는 그 다음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리고 왕어언은 세 번째 자리에 앉게 하고 아벽과 그녀 자신은 그 아랫자리에 앉았다.

왕어언은 잔에 술을 따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세째 오라버니, 그는...... 그는......]

포삼 선생은 단예를 한번 흘겨보더니 입을 열었다.

[왕소저, 이곳에는 외부사람이 있어서 어떤 일도 말할 수가 없소. 더군다나 멀쑥하게 생긴 이 녀석을 나는 더욱 믿을 수가 없구료.]

단예는 그 말을 듣고 울화가 치밀어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아벽은 재빨리 말했다.

[단 공자, 화내지 마세요. 우리 포삼 오라버니의 성격은 언제나 이래요. 그의 호는 포부동(包不同)으로 언제나 남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떠올라 올거예요.]

단예는 왕어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 표정 역시 그에게 앉아 있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는 그녀와 함께 하는 자리에서 떠날 수가 없어서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포삼 선생은 나를 멀쑥하게 생겼고 또한 믿을 수 없다고 했는데 그대들의 모용공자는 어떠십니까? 그의 모습은 포삼 선생과 비슷합니까?]

포부동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 말 한 번 잘 물었다. 우리 공자로 말할 것 같으면 네 녀석보다도 훨씬 준수하지!]

왕어언은 그 말을 듣자 대뜸 얼굴빛이 환해졌다. 마치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을 금방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포부동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공자 나으리의 모습은 그야 말로 영기 발랄하지. 물론 준수하기는 한데 단형의 밥통 같은 준수함과는 크게 다르지. 크게 달라. 그리고 이 어르신네로 말할 것 같으면 영기발랄하지만은 준수하지는 못하지. 일반적으로 영기발랄하다 함은 바로 추하기 이를데 없다는 말이거든!]

그 말에 단예 등은 모두 웃음소리를 내었다.

포부동은 술 한잔을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는 나를 복건성으로 보내 한 가지 일을 하게 했어. 그것은 은밀히 소림파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일이야.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는 이 단형이 떠난 다음에나 이야기하도록 하겠어. 따라서 우리가 소림파와 친구로 사귀고자 한 이상 결코 아무렇게나 소림사의 화상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야. 더군다나 공자 나으리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번도 대리로 가 본 적이 없지. 모용의 무공이 고강하지만 만리 밖에서 위타저를 던지거나 주먹의 힘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재간은 아직도 연마하는데 성공하지 못했거든!]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형의 그 말씀에는 일리가 있는 것 같군요.]

포부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로소이다!]

단예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당신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데 당신이 오히려 그 말이 맞지 않다고 하다니......)

포부동은 말했다.

[나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게 아니라 실제 상황이 그렇다는 말이야. 네 녀석은 다만 나의 말에는 일리가 있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투로 말하는 것 같았어. 그러니까 내가 말을 잘한 연유로 해서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는 듯한 표정이란 말이야. 따라서 너의 그와 같은 말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지.]

단예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속으로 쓸데없이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포부동은 다시 말을 했다.

[나는 어제 소주로 돌아와 풍(風) 네째 아우와 만나게 되었다. 우리 형제 두 사람이 의논한 끝에 어떤 후레자식이 우리 고소 모용씨 집안에 적대감을 품고는 사람들을 해쳐서 다른 사람들의 빚을 모두 고소 모용씨 집안 앞으로 달아 놓도록 했다는 결론을 얻었어. 본래 그 역시 꽤나 재미있는 일이지. 싸움을 할 수 있는 기회인데 어찌 즐거워 하지 않겠어?]

 

7. 가슴 아픈 이별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네째 오라버니는 반드시 기뻐하겠군요. 그것이야말로 정말 바라던 일이 아니겠어요?]

포부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로소이다. 네째가 싸우는 것을 바랬다는 것이 아니로소이다. 바라지는 않지만 천하를 떠돌아 다니게 되면 언젠가는 싸우게 된다는 말이로소이다.]

단예는 그가 아주의 말에 대해서도 반박을 하는 것을 보고 아벽이 아까 한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포부동이라는 사람은 정말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왕어언이 입을 열었다.

[세째 오라버니는 풍(風)네째 오라버니와 의논하여 어떤 답을 얻었나요? 도대체 누가 우리를 괴롭히는거지요?]

포부동이 말했다.

[첫째로, 소림파도 아니고, 둘째로, 개방도 아니란 말이야. 왜냐하면 그들의 부방주인 마대원(馬大元)이 어떤 사람이 쓴 '쇄후공'(鎖喉功)에 살해가 되었기 때문이야. 쇄후공은 바로 마대원이 명성을 떨치던 절기였지. 마대원을 죽인 것은 결코 큰 문제가 안되지만 '쇄후공'으로 마대원을 죽인 것은 전적으로 고소 모용씨에게 화를 뒤집어 씌우기 위한 것이거든.]

단예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포부동은 곧 단예를 보고 말을 이었다.

[이봐, 그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단예는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첫째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 연신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소. 그리고 둘째, 그것은 실제가 그런 것이지 포형의 말에 일리가 있기 때문은 아니외다.]

포부동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네 녀석의 이 수법이야말로 '그대의 수법을 그대에게 펼친다'는 그 수법이구만! 너는 우리 고소 모용씨 집안의 휘하로 들어오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의도는 어디 있지? 혹시 우리 아벽 작은 누이에게 반한 것이 아닌가?]

아벽은 대뜸 얼굴이 새빨개져서 뾰로통한 어조로 말했다.

[세째 오라버니는 왜 터무니없는 말을 하세요? 난 세째 오라버니에게 잘못한 일이 없어요.]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상대방이 그대에게 반했다는 것은 그대가 온순하고 귀엽기 때문이며, 내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그대가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로소이다. 만약 그대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상대방의 예쁘장한 얼굴에 반했지만은 상대방 미남자는 너에게 반하지 않았다고 말했을 것이야.]

아벽은 더욱더 난처해 했다.

아주는 말했다.

[세째 오라버니, 우리 아벽누이를 괴롭히지 말아요. 다시 또 아벽을 놀리신다면 내가 그대의 정정(精精)을 못 살게 굴겠어요.]

포부동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내 딸의 아명은 포부정(包不精)이지. 그대가 그 애를 정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죽여 주는 것이지 결코 그를 못 살게 구는 것은 아니야. 아벽 누이, 내 더 이상 그대를 괴롭히지 않겠어.]

상대방에게서 그의 딸을 못살게 굴겠다는 위협하는 말을 그는 퍽이나 꺼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곧이어 왕어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어느 후레자식이 우리를 괴롭히는건지는 곧 알아내게 될 것이야. 풍(風) 역시 이제 막 강서성(江西城)에서 돌아왔는데 자세한 것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야. 우리 형제 둘은 청운장(靑雲莊)으로 갔었지. 그런데 등(鄧)아주머니께서도 소식을 들었다며 개방의 고수들이 떼를 지어 강남으로 오고 있는데 십중팔구 우리를 상대하려고 오는 것 같더라고 말씀하시더군. 그래서 네째가 즉시 나서서 싸우려고 하는 것을 등 아주머니가 말렸어.]

아주는 미소했다.

[역시 아주머니의 재간이 대단하군요. 놀랍게도 네째 오라버니가 싸우려는 것을 말렸다니 말이예요.]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주머니에게 재간이 있는게 아니라 그의 말씀에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지. 아주머니는 공자 나으리가 앞으로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기 때문이야.]

그가 이 한 마디를 했을 때 왕어언, 아주, 아벽, 세 사람은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단예는 별로 주의해 듣지 않은 듯 가장하고는 젓가락으로 제체초계편(薺涕炒鷄片)이라는 음식을 한 점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고씨 노인의 솜씨가 괜찮군. 하지만 아주 누나와 아벽 누나에 비해서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아벽은 미소했다.

[고씨 노인의 음식 만드는 솜씨는 아주 언니보다는 떨어지지만 저보다는 낫지요.]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너희 두 사람은 제각기 좋은 점이 있어.]

아주는 웃으며 말했다.

[세째 오라버니, 오늘은 이 누이가 친히 부엌으로 내려가서 음식을 만들어 드리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셔요. 다음에 찾아오실 때는 반드시 보충해 드리겠어요......]

그 말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갑자기 허공에서 '쨍그랑, 쨍그랑'하는 두 마디의 맑고 고운 은방울 소리가 들렸다.

포부동은 말했다.

[둘째 형이 소식을 전해 왔군.]

아주와 아벽도 동시에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가 소식을 전해 오셨군!]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나 처마끝에 나아가 고개를 쳐들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허공을 맴돌다가 휙내려와 아주의 손등에 앉았다. 아벽은 손을 뻗혀 그 비둘기의 다리에 묶여 있는 조그만 대나무통을 풀었다. 그리고는 한 장의 종이 쪽지를 꺼내 놓았다.

포부동은 재빨리 그 쪽지를 집어들고 읽어 보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빨리 가봐야겠군.]

그리고는 왕어언에게 말했다.

[소저, 소저도 가겠소?]

왕어언은 말했다.

[어디로 가는가요? 무슨 볼일인가요?]

포부동은 쪽지를 쳐들었다.

[둘째 형 집에서 소식이 왔소. 서하국(西夏國) '일품당'(一品堂)의 고수들이 한 떼 강남으로 왔다는데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구료. 그래서 나더러 아주와 아벽 두 누이를 데리고 조사해 보라는 것이요.]

왕어언은 말했다.

[저야 물론 그대들을 따라가야죠. 서하국의 일품당들까지 우리를 괴롭힌단 말이예요? 적들이 자꾸 늘어나네요.]

그러면서 그녀는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포부동은 말했다.

[반드시 우리들의 적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들이 강남으로 온 것은 산천구경이나 부처님께 예불하려고 오지는 않았을거요. 오랫 동안 고수를 만나지 못했었는데, 개방의 고수들도 오고 일품당의 고수들도 들이닥치다니, 허허허...... 이번에야말로 신이 나겠군!]

그러면서 싱글벙글 하는 것이 크게 싸우게 된 것이 매우 기쁜 것 같아 보였다.

왕어언은 옆으로 다가가 그 쪽지에 씌어진 글이 무엇인가 보려고 했다. 그러자 포부동은 그 쪽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왕어언은 곧 그 쪽지에 여덟 줄의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필적은 매우 날렵했으며 힘차 보였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모두 알아볼 수 있었으나 전체 문장을 연결시켜 볼 때 문맥이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많은 책을 읽어 보았지만 이와 같은 문맥은 처음 보는지라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무어죠?]

아주는 미소했다.

[이것은 공야(公冶)둘째 오라버니가 생각해 낸 괴상한 놀이예요. 즉 시운(詩韻)과 절음(切音)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인데 평성(平聲)의 자를 입성(立聲)으로 읽고 입성의 자를 상성(上聲)으로 읽는거예요. 다시 말하자면 일동(一東)을 삼강(三江)으로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예요. 이와 같이 글자를 바꾸어 놓는 것인데 우리는 습관이 되어 편지의 내용을 금방 알아 보는데 외부의 사람이 보면 전혀 모르지요.]

아벽은 왕어언이 외부의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얼굴에 약간 불쾌한 빛을 띠우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했다.

[왕소저는 외부의 사람이 아니예요. 왕소저, 알고 싶다면 제가 나중에 가르쳐 드릴께요.]

왕어언은 대뜸 기쁜 빛을 띠었다.

포부동은 말했다.

[일찌기 듣건대 서하 일품당에서 많은 고수들을 망라했다고 합디다. 중원이나 서역 어느 곳 사람이나 골고루 들어가 있다고 하더군요. 왕소저가 함께 간다면 몇 번 보지 않아서 그들의 내력을 곧 알게 될 것이오. 이 일이 끝난 후 우리들은 곧바로 하남(河南)으로 가서 공자 나리와 합하도록 합시다.]

왕어언은 기뻐서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좋아요! 매우 좋아요! 역시 따라 가겠어요!]

아벽은 말했다.

[그럼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이곳의 일을 빨리 처리하고 하남으로 따라가도록 해요. 그래야 공자 나리가 돌아올 때 길이 어긋나지 않아요. 그리고 그 토번국의 화상이 우리 집에서 어떤 소란을 피웠는지 모르겠어요.]

포부동은 말했다.

[공야 둘째 아주머니께서 이미 사람을 보내 조사를 해봤소. 그 화상은 이미 떠나고 없어요. 그러니 안심해요. 다음에는 이 세째 오라비가 그대를 도와 그 화상을 패주도록 하지.]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포삼 선생은 결코 그 화상을 이겨낼 수 없을걸. 오히려 포삼 선생이 그 화상에게 맞지 않는다면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포부동은 말했다.

[그런데 왕소저가 나를 따라 간다면 나중에 왕부인이 나를 굉장히 꾸짖으실텐데......]

그러더니 갑자기 그는 고개를 단예에게 돌리며 말했다.

[네가 언제나 옆에서 듣고 있어서 내가 시원스럽게 말을 할 수 없어. 이 단씨 양반아, 이제 좀 떠나 주시지. 우리가 우리 일을 논의하는데 그대가 한 쌍의 귀와 하나의 입으로 참가할 필요는 없어. 우리가 곧 가서 남과 무공을 겨룬다 해도 그대가 옆에서 싸움 구경을 하며 갈채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단예는 이곳에서 그들 곁에 더 붙어 있는다면 그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포부동이 공공연히 축객령을 내렸고 또한 그 언어가 매우 무례한지라 왕어언에 대한 미련이 대단했지마는 체면불구하고 남겠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모질게 마음을 가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소저, 아주와 아벽, 불초는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이다. 다시 만납시다.]

왕어언은 말했다.

[반야 삼경에 어디로 가시겠다는 거예요? 태호의 수로를 잘 알지도 못하니 차라리 오늘밤은 여기서 묵고 내일 떠나시도록 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단예는 그녀가 좋은 말로 붙잡기는 했지만 보아하니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즉, 모용 공자의 곁에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단예는 불현듯 화가 나기도 했고 재미도 없었다. 사실 그는 황실의 세자로서 어릴 때부터 자기 멋대로 자라났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위험과 시련들을 겪었지만 그래도 이와 같은 냉대와 농락을 당해 보지는 않았는지라 즉시 입을 열고 말했다.

[내일 가나 오늘 가나 마찬가지니 이만 실례하겠소이다.]

아주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사람을 보내 이 태호에서 나가게 해 드리지요.]

단예는 아주가 붙잡지 않는 것을 보자 더욱더 불쾌해졌다.

(모용 공자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데 모두들 저토록 하늘의 봉황처럼 떠받을까? 소림파니 개방이니 서하의 일품당들을 저들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다만 재빨리 모용 공자와 만나기만을 바라는 것 같구나.)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소. 다만 나에게 한 척의 배와 노 하나만을 빌려 주면 내가 스스로 저어 나가겠소.]

아벽은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고소의 수로를 오르는데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겠어요? 그 화상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셔야 해요.]

단예는 화가 나서 말했다.

[그대들은 역시 빨리 가서 모용 공자나 만나도록 하시오. 내가 그 화상을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그 화상에게 불태워 죽는 것밖에 또 있겠소? 나는 그대들의 사촌 형제도 아니고 공자 나으리도 아니니 새삼스럽게 신경 쓸 것 없소이다.]

그리고는 그는 성큼성큼 화청문을 나섰다.

이 때 포부동은 말했다.

[그 토번국의 화상이 어떠한 내력을 갖고 있는지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군.]

왕어언이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가 십중팔구 알고 있을 거에요. 그를 만나기만 하면......]

아주와 아벽은 단예를 전송해 주었다.

아벽은 말했다.

[단공자, 훗날 그대와 우리 공자 나으리가 만나게 된다면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우리 공자 나으리는 친구 사귀기를 좋아해요.]

단예는 냉소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고, 나는 그와 친구가 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소.]

아벽은 그 어조가 퍽이나 울분에 차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무슨 일로 불쾌하게 여기고 있어요? 혹시 우리의 대접이 너무나 소홀했나요?]

아주는 말했다.

[우리 포 세째 오라버니는 언제나 성격이 그와 같으니 단공자께서는 너무 개의치 마세요. 저와 아벽 누이가 대신 그대에게 사과를 드리지요.]

그러면서 싱글싱글 웃으며 단예에게 절을 했다. 아벽도 따라했다.단예는 읍을 하며 답례하고는 걸음을 옮겨 놓았다. 재빠른 걸음으로 물가까지 가서는 한 척의 조그만 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노를 저어 배를 기슭에서 밀어내었다. 그리고 배를 호수 쪽으로 저었다. 그런데 가슴이 답답하기 이를데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런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더 지체하게 된다면 어떤 실례되는 행동을 보이게 될 것 같았다. 심지어 눈물을 왈칵 쏟아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 어렴풋이 아벽이 하는 말이 들렸다.

[아주언니, 공자께서 바꾸어 입을 내의가 부족하지 않겠어요? 오늘밤에 우리 둘이 한 사람이 한 벌씩 만드는 게 어때요?]

아주는 말했다.

[좋아. 너는 역시 세심한 데가 있고 생각이 치밀해.]

 

단예는 무량검과 신농방의 업신여김을 당했고, 남해악신에게 핍박을 당했으며, 연경태자에게 감금을 당하고 또한 구마지에게는 포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만다산장에서는 원예사로서 꽃까지 심어야했다. 그야말로 그가 겪은 여러 가지 고초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번도 이처럼 누군가가 원망스럽고 화가 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기실 청향수사에서 어느 누구도 그로 하여금 난처하게 만들지를 않았다.

포부동은 그를 떠나도록 했지만 어느 정도 여지가 있었으며 제보곤을 상대할 때처럼 팔을 분지르고 어깨에 상처를 입히지도 않았고 요백당을 대하듯 발길로 걷어차 굴러가도록 하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왕어언은 하룻밤 더 묵다가 떠나라고 했고 아주와 아벽은 은근하면서도 예의있게 전송까지 해주었다. 따라서 그는 마음 속으로 자기가 우울해 있는 이유를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호상에는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었다. 그 밤바람에는 능각에서 풍겨오는 맑은 향기가 실려 있었다. 단예는 힘주어 노를 저었다. 그는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며 실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화가 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껏 목완청, 남해악신, 연경태자, 구마지, 왕부인 등이 그 에게 준 모욕은 정말 무서울 정도였으나 그는 태연히 받아들였으며 그토록 그 누구가 원망스러운 것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내심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왕어언을 깊이 사모하고 있기 때문인것이다. 그러나 그 소저의 마음 속에는 단예에 호의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심지어 아주와 아벽도 그를 대단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사실 그는 어릴 때부터 귀여운 왕세자로 태어나 모든 이들의 관심과 귀여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대리국 황제에서부터 황후 이하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가 대단한 존재라고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설사 적이라 하더라도 남해악신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를 제자로 삼으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구마지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대리에서 강남까지 잡아온 것만 하더라도 그를 퍽이나 중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종영과 목완청과 같은 소녀는 더 더욱 그를 한 번 보자마자 마음을 끓이지 않았던가.

그는 한평생 오늘처럼 남에게 경시당한 적은 없었다. 물론 상대방에서는 예의를 갖추기는 했으나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예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서 모용 공자라는 존재는 대단한 것으로 부각되어 있었지만 그는 아주 하찮고 보잘것 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이 며칠 동안 그 누구라도 모용 공자를 입에 담기만 하면 금새 사람들이 표정이 달라졌고 하나 같이 귀를 기울이지 않던가?

왕어언은 물론 아주, 아벽, 포부동 그리고 심지어는 등, 첫째 라는 사람, 공야, 둘째라는 사람 그리고 풍 네째라는 사람도 하나같이 모용 공자를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단예는 단 한 번도 이처럼 남을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감정을 느껴 보지 못한 터였다. 홀로 배를 저어 호수 위를 가로지르게 되자 마치 모용 공자가 하늘에서 그를 향해 냉소하는 것 같았고 마치 모용 공자가 다음과 같이 그를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단예야, 단예야, 네가 어찌 나의 몸에 난 털 하나에라도 비교되겠는가? 너는 나의 외사촌 누이에게 뜻이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너 자신은 몰염치하고 가소롭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는 화가 난 만큼 노를 힘주어 저어댔다. 그리하여 한 시진 가량을 노를 젓자 그의 몸 안에 내력이 천천히 발동되기 시작됐다. 그리하여 배를 저으면 저을수록 정신이 맑아 왔고 가슴 속이 답답하고 우울하던 것도 점점 사라져갔다.

다시 한 시진 가량 노를 젓자 날이 조금씩 밝아왔다. 그러자 북쪽의 운무 속에 쌓여 있는 한 조그만 산봉우리가 보였다.

그는 대략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청향수사와 금운소축은 모두 동쪽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북쪽으로만 배를 저으면 청향수사나 금운소축으로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매번 노를 저을 때 마다 마음 속으로 한 가닥 연연한 정을 느낄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배가 북쪽으로 한 자 나아가면 왕어언과 그 만큼씩 더 멀어지는 것 같아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오시쯤 되어서야 그는 자신이 보았던 그 조그만 산 아래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언덕에 오르자마자 그 지방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 산은 바로 마적산(馬跡山)이었다. 마적산에서는 무석(無錫)이 무척 가까웠다. 그는 책에서 무석이라는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그곳은 춘추전국 시대에 유명한 한 채의 대성(大城)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배로 다시 돌아가 북쪽으로 저어갔다.

배는 신시쯤 되어서 무석성 뱃터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 안으로 들어가자 행인들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매우 번화해보였다. 그리고 대리와는 또 다른 풍물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발걸음 내키는 대로 걸었다. 별안간 그는 그윽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바로 초당(焦糖)에 간장을 섞어서 살코기를 익히는 냄새였다. 그는 반나절 동안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고 거기다 힘을 다해 노를 저어왔기 때문에 배가 무척 고팠다. 그는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한 커다란 주루가 거리 한쪽에 있었다.

금자로 된 편반 위에는 '송학루'(松鶴樓)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간판은 오랜 세월 바람에 시달렸는지 시커먼 연기에 찌들어 있었으나 금(金)자만은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요리사들이 음식을 다지는 소리와 사환들이 음식을 나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있었다.

그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환이 즉시 접대를 했다.

단예는 한 되의 술과 네 가지의 안주를 갖추어서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위층 난간에 기대어서 스스로 술을 따라 마셨다. 별안간 처량하고 외로운 감이 들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때 서쪽에 앉아 있던 한 덩치 큰 사나이가 고개를 돌리더니 냉전과 같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재빠르게 두어 번 훑어 보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그 사람의 체구가 매우 우람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삼십여 세의 나이로 몸에는 잿빛 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약간 헤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을 하고 있었고 높이 솟은 코에 커다란 입을 가졌으며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꽤나 풍상을 겪은 듯이 보였다. 그 사내의 시선은 만인을 굴복시키는 위엄이 있었다.

단예는 마음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정말 훌륭한 대한(大漢)이군! 이런 사람이야말로 연나라나 조나라 등북쪽에 있는 나라에서 슬픈 노래를 주르며 비분강개하던 지사가 아닌가? 강남땅이나 혹은 대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인물이다. 포부동은 자칭 자기가 영기발랄하다고 하였지만 정작은 이런 대한이야말로 영기발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한의 탁자 위에는 한 접시의 익힌 소고기와 한 그릇에 국, 그리고 두 주전자의 술이 놓여 있을 뿐 다른 음식은 없었다. 이로 미루어 그가 먹고 마시는 데에도 매우 호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대한은 단예를 한두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혼자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단예는 그렇지 않아도 적막하고 무료한 때라 그러한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환을 불러 그 대한의 뒷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의 술값과 안주값은 나한테 받도록 하게.]

그 대한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단예는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눔으로써 마음 속의 외로움을 떨쳐 보려고 했으나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를 몰랐다.

다시 술을 석 잔 마셨을 때 이층 계단으로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다른 두 사람이 올라왔다.

앞에 선 사람은 한쪽 발을 들고 있었는데 거의 지팡이에다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놀림은 매우 신속하고 민첩하였다. 두 번째 사람은 울상을 짓고 있는 노인이었다. 두 사람은 대한의 탁자 앞으로 가더니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다.

그 대한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 몸을 일으키거나 답례하지 않았다.

다리를 절룩이는 사내가 나직히 말했다.

[큰 형님께 알립니다. 상대방이 약정한 시간은 내일 이른 아침입니다. 바로 혜산량정(惠山凉亭)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시간이 좀 촉박하군.]

노인도 말했다.

[형제는 그들에게 본래 약속을 삼일 후로 미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우리의 사람 수가 부족한 것을 알고 있는 듯 자신감에 넘친 목소리로 '감히 그 장소에 나설 용기가 없다면 내일 아침 그 장소에 오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대한은 말했다.

[그렇군, 그러면 모두들에게 이렇게 전하도록 하게. '오늘 밤 3경에 혜산에 모이도록 하자'고 말일세. 우리가 먼저 가서 상대방을 기다리세.]

 

그들 세 사람의 말하는 소리는 지극히 낮았다. 그래서 윗층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단예는 내력이 고강해진 까닭에 귀가 남달리 밝아 들려오는 말들을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그 대한은 이 때 우연인지 고의인지 다시 고개를 돌려 단예를 쳐다보았다.

단예가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틀림없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판단했는지 두 눈에 정광을 폭사하면서 차갑게 코웃음쳤다.

단예는 그 코웃음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면서 왼손을 흠칫했다. 그 바람에 '탁'하니 술잔이 떨어지면서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 대한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씨는 어인 일로 그토록 놀라워하고 당황해 하시오? 이쪽으로 와서 같이 한 잔 하는게 어떠하오?]

단예는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리고 단예는 사환에게 장과 젓가락을 다시 대한이 앉아 있는 자리로 갖다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대한의 맞은 편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성명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형제는 알면서 물을 필요가 어디 있소? 모두들 예의에 구애됨이 없이 몇 잔의 술을 마시는것이 좋지 않겠소? 나중에 적아(敵我)가 분명하게 된다면 술맛이 없게 되는 것이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형씨께서는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이오. 나를 적으로 아는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는 말에는 소제도 그야말로 찬성하는 바입니다. 자, 어서 드시지요.]

그리고선 한 잔의 술을 따라서는 쭉 들이켰다.

그 대한은 미소지었다.

[형씨도 꽤 시원시원하구료. 하지만 술잔이 너무 적소.]

그리고 그는 사환을 불렀다.

[사환, 대접 둘을 갖다 주고 열 근의 고량주를 내어 오게.]

그 사환과 단예는 열 근의 고량주라는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환은 웃으며 말했다.

[나리, 열 근의 고량주를 다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 대한은 단예를 가리켰다.

[이 공자께서 내게 한 턱을 내시겠다는데 왜 자네가 이 공자의 돈을 아끼려고 하는가? 열 근이 부족하다면 스무 근을 갖다 주게나.]

사환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대접 두개와 한 항아리의 술을 통째로 탁자 위에 갖다 놓았다.

대한은 말했다.

[두 대접에 잔뜩 따라라.]

사환은 그 말에 따라 술을 따랐다.

대접에 가득 차도록 술을 따르자 단예는 대뜸 술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야말로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대리에 있을 때 간혹 두어 잔 술을 마셨을 뿐 이처럼 큰 대접으로 술을 마신 적은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리게 되었다.

그 대한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먼저 함께 열 대접의 술을 마셔봄이 어떻겠소.]

단예는 그의 눈에 비웃음의 빛이 서리는 것을 보았다. 만약 평소였다면 그는 삼가 거절을 했을 것이며 도저히 주량이 따라 낼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 청향수사에서 냉대를 받을 대로 받은 후이므로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이 대한은 아마도 십중팔구 모용 공자와 한 패거리인 것 같다. 등첫째와 공야 둘째가 아니라면 바로 풍 넷째일 것이다. 그가 이미 남과 혜산에서 싸움을 겨루겠다고 한 것을 보면 상대는 개방이 아니면 서하의 '일품당'일 것이다. 흠, 모용공자라면 도대체 어떻다는 것인가? 나는 결코 그의 수하인들에게 멸시받을 짓은 하지 않겠다. 기껏해야 취해서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가슴팍을 내밀고 큰 소리를 쳤다.

[불초는 목숨을 걸고 그대를 상대해 드리지요. 나중에 술을 마신후 어떤 행동을 저지르더라도 행실은 탓하지 마시요.]

그리고 나서 그는 한 대접의 술을 들고는 꿀꺽꿀꺽 마셨다. 그가 이 한 대접의 술을 마신 것은 홧김에 무엇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왕어언은 곁에 없었으나 그로서는 바로 그녀에게 보란듯이 술을 마신 것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용복과 대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 앞에서 결점을 시인하지 않으려는 심리와 같았다. 따라서 한 대접의 독한 술은커녕 독약이라도 아마 주저하지 않고 마셨을 것이었다.

그 대한은 단예가 이처럼 호방하게 나오자 뜻밖이라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참 시원하오!]

그리고는 그 대한은 마치 목이 마르기라도 하였던 듯 대접을 들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두 대접을 더 마시는게 아닌가!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맛좋은 술이군! 맛좋은 술이야!]

그리고는 후 하니 숨을 내쉬었다. 그런 후 다시 한 대접의 술을 마셨다. 그 대한 역시 한 대접을 마시고 두 대접에 술을 따랐다. 이 한 대접의 술은 거의 반 근은 되었다.

 

8. 대륙의 별, 교봉(喬峯)

단예는 한 근의 술을 마시자 배 속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생각했다.

(모용복이 어떻다는거야? 대단하다는거야? 내가 어떻게 그의 부하에게 질 수 있겠어?)

그는 다시 세 번째 대접을 들고 술을 마셨다.

그 사내는 삽시간에 그가 취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그는 단예가 세 번째 대접만 들이킨다면 더 이상 못 견디게 취해 쓰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예는 세 번째 술을 들이마시기 전에 이미 가슴이 답답해지고 구역질이 났다. 그런데 다시 독한 술 한 대접을 들이키게 되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배 속의 술이 넘어오는 것을 막았다. 별안간 단전에서 여러 가닥의 진기(津氣;우러나오는 속 기운)가 끓어올랐다. 그러자 여러 가닥의 진기가 마구 요동치는게 아닌가?

바로 천룡사에서 진기를 거두어들이지 못했을 때의 상태와 흡사했다. 그는 즉시 백부님이 전수해준 요령으로 그 진기를 대추혈(大椎穴)로 모아들였다.

그러자 끓어오르던 술기운이 놀랍게도 진기와 섞이는 게 아닌가?

술이나 물은 형태가 있는 사물로서 진기나 내력처럼 혈도에 모아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술과 섞인 진기가 천종혈과 견정혈에서 시작하여 왼팔을 타고 소해(小海), 지정(支正), 양로(養老)등의 혈도를 지나 손바닥에 있는 양곡(陽谷), 후할(後轄), 전곡(前谷)등의 혈도를 통하여 새끼 손가락의 소택혈(小澤穴)로 쏟아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 때 그가 움직인 진기의 운행방법은 바로 육맥신검의 '소택검'이었다. 소택검은 본래 힘은 있으나 형체가 없는 검기였다.

그러자 이때 그의 새끼 손가락에서는 한 줄기의 술이 천천히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단예는 처음에는 이런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얼마후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새끼 손가락에서 술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거 정말 절묘하기 이를 데 없군!)

그는 왼손을 바닥 쪽으로 향해 내려뜨렸다. 그 대한은 그러한 단예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단예가 본래 취해서 눈빛이 몽롱해지더니 조금 지나자 다시 맑아지는 것을 보고 내심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형씨의 주량은 정말 약하지 않구료. 진정 그럴싸하오.]

그리고는 다시 두 대접에 술을 따랐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나의 주량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답니다. 흔히들 지기를 만나게 되면 천 잔의 술도 부족하다고 하지 않던가요. 이 한 대접의 술은 내가 볼 때 이십여 잔의 술밖에 되질 않습니다. 따라서 천잔이 되려면 약 50개의 대접이 있어야만 담을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이 형제는 아마도 50대접의 술을 마시진 못할겁니다.]

그러면서 다시 자기 앞에 놓인 대접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운기행공을 했다. 그는 이번에는 왼손을 창가의 난간에 걸쳤다. 손톱 사이로 흘러 나오는 술이 난간을 타고 아래층 담장 밑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정말 귀신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감쪽 같았다.

삽시간에 그가 마신 네 대접의 술을 모조리 쏟아낼 수 있었다. 그 대한은 단예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독한 술을 네 대접이나 따라 마시는 것을 보고는 무척 기뻐했다.

[좋소, 좋아. 지기를 만나게 된다면 천 잔의 술도 모자란다고? 내가 먼저 잔을 비워 경의를 포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는 두대접에 술을 가득 따르더니 잇 따라 두 대접에 가득찬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다시 단예에게 두 대접의 술을 부어 주었다.

단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그 술을 모두 마셨다. 그 독한 술을 마시는데도 맹물이나 찬물을 마시는 것보다 시원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의 이와 같은 술내기는 송학루의 윗층이나 아랫층에 있던 손님들을 감동시키게(?)되었고 부엌에서 일하던 요리사와 조수들까지도 이층으로 올라와서는 두 사람을 에워싸고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 대한은 다시 말했다.

[사환, 다시 이십 근의 술을 더 갖다 주게나.]

사환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도 재미가 나서 더 만류하지 않고 다시 커다란 술항아리를 가져왔다.

단예와 대한은 나 한 대접, 너 한 대접하는 식으로 마셔댔다. 그야말로 호적수였다. 밥 한 끼 먹을 동안에 두 사람은 이미 서른 대접의 술을 마시게 되었다.

단예는 그 독한 술이 자기의 체내를 한 바퀴 돌 뿐 즉시 쏟아져 나오므로 주량이 무궁무진할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한은 진짜 실력이었다.

따라서 단예는 그가 잇따라 삼십여 대접이나 비우고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속으로 여간 탄복하지 않았다.

처음 그는 그 대한이 모용 공자와 한 패거리라고 생각하고 적대감을 갖고 있었으나 그의 태도가 호방하고 영기발랄한 것을 보고 불현듯 그 대한을 아끼는 마음이 생겼다.

그는 생각했다.

(이와 같이 겨룬다면 나는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내는 너무나 많은 술을 마신 결과 몸을 해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십여 대접을 마시게 되었을 때 입을 열었다.

[형씨,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사십여 대접을 마셨겠지요?]

그 대한은 웃으며 말했다.

[형씨 그대는 정신이 맑구려. 대접의 수까지 다 헤아리고 있으니 말이요.]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형씨와 나는 정말 호적수로서 임자를 만난 것이외다. 그러니 승부를 가리자면 쉽지 않겠구려. 이렇게 마셔대다간 이 형제의 주머니에 있는 술값이 모자라겠소.]

그리고는 품속에서 꽃을 수놓은 주머니를 꺼내어서 탁자 위에 던졌다.

'탈칵'하는 가벼운 소리로 보아 그 주머니에는 금은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단예는 사실 구마지에게 잡혀오느라고 몸에 지닌 돈이 별로 없었다.

이 꽃을 수놓은 주머니는 금실과 은실로 장식했기 때문에 첫눈에 귀한 물건임을 알 수가 있었으나 주머니 안은 부끄럽게도 돈이 얼마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한은 이를 보고 크게 웃더니 몸에서 한 덩이의 은자를 꺼내 탁자 위에 놓고 단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갑시다.]

 

단예는 기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대리에 있을 때 황제의 아들로서 진심으로 사귄 친구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술내기로 이 사내를 사귀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대한은 더욱 더 걸음을 빨리 했다. 서너 발 앞서자 더욱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았는데 그야말로 길을 따라 질풍같이 나아가는 것이었다.

단예는 한 가닥 진기를 끌어올려 그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그는 무공은 모르지만 내력이 충만하기 이를 데 없어 그처럼 빠른 걸음으로 급히 따라가도 조금도 가슴이 뛰거나 숨이 차지 않았다.

그 대한은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좋소, 누구의 걸음이 빠른지 시험해 봅시다.]

그리고는 힘껏 달려갔다.

단예는 몇 걸음 급히 내달렸다. 그런데 너무 급히 서두른 나머지 그만 휘청하니 쓰러질 뻔했다. 그 기세를 빌어 그는 왼편으로 반 걸음 비스듬히 내딛었다.

그제서야 그는 바로 설 수 있었다. 이번에 그는 공교롭게도 능파미보(凌波微步)를 펼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우연히 밟게 된 이 능파미보로 인해서 평소 걸음걸이보다 빨리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속으로 대단히 기뻐하였다. 두 번재 걸음도 능파미보의 걸음걸이 요령으로 내딛었다. 그렇게 되자 대번에 그 대한을 따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바람소리가 '휙휙휙'나며 길가에 서있는 나무들이 다투어 그들의 뒤로 밀려나갔다.

단예는 능파미보를 배울 때는 다른 사람과 그 발걸음을 시험해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대한은 크게 발걸음을 떼어 놓으며 더욱더 빨리 나아갔다. 삽시간에 그는 단예를 떼어 놓고 훨씬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늦추고 숨을 돌릴 양이면 단예는 또 뒤 쫓아 따라왔다.

대한은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단예의 몸놀림은 날렵하기 이를데 없었다. 마치 정원에서 산보를 하는 사람처럼 걸음걸이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대한은 속으로 탄복해 마지 않으며 다시 발걸음을 몇 번 재촉해 보았다. 그러면 단예는 또 조금 뒤쳐졌다.

그러나 얼마 후면 금방 다시 뒤따라 왔다.

이와 같이 몇 번 시험을 하게 된 후 그 대한은 단예의 내력이 자기보다 훨씬 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십여리 안팎에서 단예를 이기는 것은 쉽지만 만약 삼사십 리의 먼 길을 간다면 승부를 판가름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육십여 리 이상을 가게 된다면 자기가 반드시 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모용 공자, 오늘 이 교봉(喬峯)은 그대에게 승복하겠소. 고소모용씨는 정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름이 헛되이 전하여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구료.]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소제의 성은 단이고 이름은 예라고 합니다. 형씨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요.]

대한은 의아한 빛으로 말했다.

[뭐라고? 그대가 모용 공자가 아니시라고?]

단예는 미소했다.

[소제가 이 강남땅에 온 이후 매일같이 모용공자의 대명을 귀로 들었습니다. 따라서 매우 우러러 보는 마음 크오나 아직까지 만날 수 있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내가 나를 모용복으로 오해했다면 적어도 이 사내는 모용복의 일파는 아니겠구나!)

따라서 그는 그 사내에게 더욱더 호감을 갖고 물었다.

[형씨께서는 스스로 성이 교이고 이름이 봉이라고 했지요?]

그 대한은 놀람과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불초가 교봉이오.]

단예가 말했다.

[불초는 대리 사람으로 강남땅에 처음 와 실로 형씨와 같은 영웅적인 인물을 사귀게 되니 실로 영광이 아닌가 합니다.]

교봉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음, 형씨는 대리 사람 단씨의 자제였구료. 그대의 무공이 뛰어난 것도 무리는 아니군! 단형, 그대는 어인 일로 이 강남땅까지 왔소?]

단예는 말했다.

[말하자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소제는 실로 어떤 사람에게 잡혀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구마지에게 잡혀 왔으며 어떻게 모용복의 시녀들과 만났는가 하는 사연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교봉도 그 말을 듣고 놀람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단형,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솔직하구려. 내 한평생 그대와 같은 사람은 만나 본 적이 없소. 그대와 나는 한 번 보고 마음이 통했으니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음이 어떻겠소?]

단예는 기뻐했다.

[소제로서도 바라던 바입니다.]

두 사람은 나이를 따져 보았다.

단예는 교봉보다 11살이 적었다. 자연히 교봉이 형이 되었다.

그둘은 흙을 모아서 향을 삼고 하늘을 향해 여덟 번의 큰 절을 올렸다. 한 사람은 '아우님'하고 부르고 다른 하 사람은 '형님,형님'하면서 연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단예는 말했다.

[소제는 형님께서 오늘밤 송학루에서 적을 만날 약속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제는 무공은 모르나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데 형님께서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교봉은 그에게 몇 마디의 말을 물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무공을 모르는 게 아닌가.

교봉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아우님의 그와 같은 내공으로 상승무공을 배우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네. 아우님이 오늘밤 우리들이 싸우는 광경을 보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적의 손 씀씀이가 악랄할지 모르니 아우님은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게나.]

단예는 기뻐서 말했다.

[그거야 형님의 당부에 따르지요.]

교봉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우리 형제들은 함께 무석성 안으로 들어가 다시 술을 몇 잔 마신 후에 싸울 장소로 가도 늦지 않을 것이네.]

단예는 그가 다시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 전 마흔 대접이나 술을 마셨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술을 마시자고 하는구나!)

생각을 마친 단예는 입을 열었다.

[형님, 소제가 형님과 술내기를 한 것은 사실로 말하면 형님을 속인 것입니다. 형님께서는 양해해 주십시요.]

그리고 그는 즉시 어떻게 하여 술을 새끼 손가락 끝으로 흘러 내보냈는지에 대해 설명하였다.

교봉은 놀라 말했다.

[아우님, 그대의 그 수법은 혹시 육맥신검이라는 기이한 무공이 아니오?]

단예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소제가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많이 서툴답니다.]

교봉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있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선사에게서 대리 단씨 집안에 '육맥신검'이라는 재간이 있어 무형의 기운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정말이라고 믿지 않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정말 그런 신공이 있었구려.]

단예는 말했다.

[기실 이 재간은 형님과 술내기를 할 때 요령을 피우는 것 이외에는 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구마지란 그 화상에게 잡혔을때 전혀 반격할 여지가 없었거든요. 세상 사람들은 육맥신검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형님, 그런데 술은 몸을 해치니 적당히 마셔야만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더 이상은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합시다.]

교봉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아우님의 충고도 옳은 말씀이야. 그러나 이 못난 형은 몸이 황소처럼 건장하고 어릴 때부터 워낙 술을 좋아해서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이 더 난다네. 오늘밤 대적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좀더 독한 술을 많이 마신후에 그들과 한바탕 해 볼 생각이라네.]

 

두 사람은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무석성으로 되돌아 왔다. 이번에는 걷기 시합을 하지 않고 천천히 어깨를 마주하고 걸어 왔다. 단예는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어 마음이 흐뭇했다.

그러나 좀체로 모용복과 왕어언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몇 마디의 말을 나눈 이후 그는 참을 수 없어 교봉에게 물었다.

[형님, 조금 전에 소제를 모용 공자로 오해하셨는데 혹시 그 모용 공

자의 생김새가 소제와 비슷한 데가 있습니까?]

교봉은 말했다.

[나는 평소 고소 모용씨의 대명을 들어 왔다네. 이번에 강남땅으로 온 것도 바로 그 사람 때문이지. 소문을 듣자하니 그 사람은 점잖고 준수하다고 하더군. 나이는 약 스물 가량되었으니 아우님보다는 두 세 살 위이지. 그러나 나는 모용복 이외에 강남에 무공이 고강하고 용모가 우아하면서 준수한 젊은 공자가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그래서 사람을 잘못 알아 본게야. 정말 부끄러우이.]

단예는 그가 모용복을 대해 말할 때 무공이 고강하고 용모가 우아하고 준수하다고 표현하자 그만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을 금 할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형님이 멀리서 그를 찾아 온 것은 그를 친구로 사귀기 위해서 였습니까?]

교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본래 그를 친구로 사귀었으면 하고 바랬었지만 아마도 이 바램은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네.]

단예는 물었다.

[그것은 어째서죠?]

교봉은 말했다.

[나에게 절친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는데 두 달 전에 비명에 갔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용복의 흉수에 의해 죽었다고 하네.]

단예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의 수법을 상대에게 펼친다는 방법을 썼군요?]

교봉은 말했다.

[맞아, 이 친구의 치명상은 바로 그 친구가 명성을 떨치던 절기에 의한 것이었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러나 강호에는 기이하고 괴상한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판이라 좀처럼 사리를 판단하기 어렵지. 그러니 소문으로 들은 말만으로 경솔하게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는 없다네. 이형이 강남으로 온 이유는 바로 그 진상을 조사하는 데 있네.]

단예는 물었다.

[진상은 밝혀졌습니까?]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직은 어떻다고 말하기 어렵군. 그런데 나의 그 친구로 말하면 명성을 떨친 지도 오래 되었고 위인됨도 단정하며 성격도 온화한 호인이지. 그리고 언제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지극히 신중을 기한다네. 이유없이 모용 공자에게 죄를 지을 일을 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어째서 그가 남에게 암살을 당하게 되었는지 실로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네.]

단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형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이 굵은 것 같은데 속마음은 매우 자상하고도 세심하구나. 곽선생이나 과언지, 사마림, 구마지 등처럼 자세히 조사해 보지도 않고 모용 공자가 흉수라고 무조건 단정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생각을 마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형님과 내일 아침 만나기로 한 강적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입니까?]

교봉은 말했다.

[그들은......]

 

그때였다. 큰길로부터 의상이 남루하고 마치 거지 같은 두 사내가 질풍과 같이 다가왔다. 교봉은 하던 말을 그쳤다. 두 사람은 교봉 앞에 이르더니 일제히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방주님에게 알립니다. 네 사람이 '대의분타'(大義分舵)로 뛰어 들었습니다. 장타주는 그들의 솜씨가 매우 뛰어난 것을 보고 결코 선의로 찾아 온 것이 아니라고 직감하고 만약 당해 내지 못할까 하여 속하로 하여금 '대인분타'(大仁分舵)의 사람들을 부르러 가라고 했습니다.]

단예는 그들 두 사람이 교봉을 보고 방주라고 부르며 태도가 지극히 공손한 것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보니 형님은 어떤 방(幇)의 두목인 모양이구나.)

교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어떤 자들이지?]

한 사내가 대답했다.

[그들 중 세 명은 여자이고 한 명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중년 사내로서 태도가 매우 무례했습니다.]

교봉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말했다.

[흠, 장타주도 마음이 많이 약해졌군. 상대방은 단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도 상대를 할 수 없다는 것인가?]

사내는 말했다.

[방주님, 그 세여자도 무공을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교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내가 가보도록 하지.]

두 명의 사내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대답했다.

[네.]

그리고는 손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교봉의 뒤로 가서 섰다.

교봉은 단예에게 물었다.

[형제, 나와 함께 가겠는가?]

단예는 말했다.

[그거야 물론이죠.]

두 명의 사내가 앞장을 섰다.

일 마장쯤 나가서는 왼쪽으로 돌았다. 그리고는 꾸불꾸불한 시골의 밭고랑을 따라 걸었다.

이 곳의 토양은 매우 비옥하였고 도처에 냇물과 도랑물이 교차하고 있었다.

수 마장쯤 나아가서는 행자나무 숲을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한 사람의 음성이 행자나무 숲속에서 들려왔다.

[우리 모용 형제가 낙양으로 가서 너희 방주를 만나려고 하는데 왜 너희들은 모두 무석으로 왔지? 이것이야말로 고의로 만나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이 아닌가? 너희들이 담이 없어 두려움을 느꼈다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우리 모용 형제가 수고스럽게도 헛걸음을 하게 되지 않는가 말이야. 이럴 수가 있는가? 정말 이럴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 소리를 듣게 되자 단예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음성은 바로 '아니로소이다.'의 주인공인 포삼선생의 목소리였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왕소저도 그를 따라 함께 왔을까? 세 사람의 여자가 함께 왔다지 않은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개방은 천하 제일의 방파이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개방의 방주와 의형제를 맺었단 말인가?)

이때 북방 말씨를 쓰는 사람이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모용 공자는 방주님과 사전에 약속이라도 했소?]

포삼선생은 말했다.

[약속을 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지. 모용 공자가 낙양으로 가셨다면 개방의 방주가 자리를 떠서 모용 공자가 허탕을 치게 하면 안 되지. 그럴 수가 없단 말일세......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그 사람은 다시 물었다.

[모용 공자는 편지나 쪽지로 개방에 그러한 사실을 알렸습니까?]

포삼 선생이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모용 공자도 아니고 개방의 방주도 아닌데 어떻게 안단 말이야? 당신의 그러한 말은 너무나 사리에 닿지 않아. 어처구니가 없군. 어처구니가 없어!]

교봉은 얼굴빛을 굳히더니 성큼성큼 숲속으로 들어갔다. 단예는 그 뒤를 따랐다.

행자 숲에는 두 패의 사람들이 나뉘어 마주보고 서 있었다. 포삼선생의 등 뒤에는 세 소녀가 서있었다. 단예의 시선은 그 세소녀 중 하나에게 못박히자 다시는 떨어질 줄 몰랐다.

그 소저는 물론 왕어언이었다.

왕어언은 나직하게 '어'하더니 말했다.

[그대도 왔군요?]

단예는 말했다.

[나도 왔소.]

그리고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왕어언은 두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고 생각했다.

(저 사람이 저런 눈으로 날 쳐다보다니 정말 무례하군!)

그러나 그녀는 단예가 자신의 용모를 우러러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마음 속으로는 기뻐했지 결코 화를 내지는 않았다.

행자나무 숲속에서 포부동과 맞은 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의상이 남루한 거지들이었다.

앞에 서있던 사람은 교봉이 온 것을 보자 얼굴에 기쁜 빛을 띠고 즉시 마중 나왔다. 그리고 그 등 뒤에 있던 개방의 무리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혀 예를 하며 부르짖었다.

[속하 등이 방주에게 인사드립니다.]

교봉은 포권의 예를 했다.

[여러 형제들도 안녕하셨소?]

포삼 선생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응, 그대가 개방의 교방주이시요? 형제는 포부동이라 하오. 그대는 반드시 나의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오.]

교봉은 말했다.

[알고 보니 포삼선생이시군. 불초는 오래 전부터 영명을 들어왔소이다. 오늘 이렇게 귀하를 만나게 되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나에게 무슨 영명이 있소이까? 그러나 강호에 악명이 있긴 좀 있죠. 세상 사람들은 이 포부동이 시비만 일으키고 입만 벙긋하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하지요. 헤헤헤...... 교방주, 그대가 마음대로 강남땅에 온 것은 그대의 잘못인가 하오.]

개방은 천하 제일의 대방이었다. 방주의 신분은 존귀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방의 무리들은 방주에 대하여 그야말로 신처럼 받들었다. 뭇 사람들은 포부동이 자기들의 방주에게 대뜸 꾸짖는 말을 하자 모두들 크게 분개했다.

장타주 등 뒤에 섰던 일흔 일곱 사람 가운데 거의가 칼자루를 움켜잡거나 주먹을 불끈 쥐면서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다.

교봉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째서 불초가 잘못했는지 선생은 깨우쳐 주시구려.]

포부동은 말했다.

[우리 모용 형제는 그대 교방주가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개방에는 영웅호걸이 많다는 사실을 듣고 특별히 귀하를 만나려고 낙양으로 달려갔소. 그런데 그대는 어째서 멋대로 이 강남땅으로 왔소? 허허허, 이럴 수가 있소? 이럴 수가 있느냐 말이오.]

교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모용 공자가 낙양의 개방으로 떠나셨다니...... 불초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공손히 맞아들였을 것이오. 미처 나아가 맞아들이지 못한 점 사과드리리다.]

그리고는 포권을 하고 예를 했다.

단예는 속으로 감탄했다.

(형님의 이 말들은 정말 적절하구나. 정말 개방 방주의 풍모로다. 만약 그가 포삼선생에게 성질을 부렸다면 그것이야말로 방주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포부동은 교봉의 사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마중을 나오지 못한 죄는 확실히 사과를 해야 하지요. 물론 흔히들 모르고 지은 죄는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만은 벌을 내릴 권리는 상대방에게 없지요.]

그는 의기양양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행자숲 뒤에서 몇 사람이 일제히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행자숲을 쩌렁하게 흔들어 놓을 정도였다.

커다란 웃음 소리 가운데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강남의 포부동이 개방귀를 잘 뀐다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포부동은 말했다.

[소리나는 방귀는 냄새가 없고 소리를 내지 않는 방귀가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하던데 조금 전의 개방귀는 소리도 크고 냄새도 대단하군. 혹시 개방육로가 뀐 것이 아니오?]

그러나 숲 속의 그 사람은 말했다.

[포부동은 개방육로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여기서 터무니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는거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숲 뒤쪽에서 네 명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어떤 사람은 수염이 허옇고 어떤 사람은 붉은 얼굴을 했는데 제각기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네 귀퉁이로 각각 서더니 왕어언과 포부동 등 네 사람을 각각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포부동은 개방이 강호에서 제일 가는 큰 방파이며 방에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개방육로는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고수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거만하고 어릴 적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개방의 육로 가운데 사로(四老)가 나타나자 속으로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단났군. 야단났어! 아무래도 오늘 이 포삼선생의 영명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겠군!)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말했다.

[네 분 늙은이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소? 아니면 이 포삼선생과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일 셈이요? 어째서 다른 두 늙은이는 나서지 않는 것이오? 한편에 매복해 있다가 이 포삼선성에게 기습이라도 하겠단 말이요? 좋소, 좋소, 매우 좋소! 이 포삼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싸움이라오!]

돌연 허공에서 한 사람이 뚝 떨어져 내리며 소리쳤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싸움을 좋아하는 자는 누구인가? 포삼선생 인가? 아니지, 아니야! 그는 바로 강남의 일진풍파악(一陳風波惡)이지!]

단예는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한 그루의 탱자나무 가지 위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그 나뭇가지가 연신 흔들거리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나뭇가지를 따라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몸매는 매우 수척하고 왜소한 편이었다.

나이는 약 서른 두셋 정도로 보였으며 두 뺨은 움푹 꺼져 있었다. 그리고 입술 위에 두 가닥 쥐꼬리 모양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눈썹도 아래로 처져 있는 형편이어서 용모가 추하기 이를데 없었다.

 

9. 강남일진풍(江南一陳風)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이 사람이 바로 아주와 아벽이 말하던 네째 오라비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벽은 그를 불렀다.

[풍 네째 오라버니, 공자의 소문을 들었나요?]

풍파악은 말했다.

[좋아. 오늘 호적수를 만나게 되었으니 신나게 싸우고 보자. 공자님의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재주를 한 번 넘더니 북쪽의 키가 작고 땅딸한 노인에게 덮쳐갔다.

그 노인은 손에 들었던 강철 지팡이를 재빨리 앞으로 휘둘러 풍파악의 가슴을 찔러왔다. 이 지팡이는 거위알만한 굵기였으며 밀어낼 때 생기는 바람은 위맹하기 그지 없었다. 풍파악은 몸을 날려 곧장 덮쳐들며, 손을 뻗어 그 강철 지팡이를 낚아채려고 했다. 그 노인은 손목을 한 번 떨치더니 강철 지팡이를 쳐들고 그의 가슴을 재차 찔러왔다.

풍파악은 부르짖었다.

[정말 위험한걸?]

그리고 갑자기 몸을 낮추고 상대방의 허리를 때리려 했다. 그 키가 작고 땅딸한 노인의 강철 지팡이는 이미 바깥쪽으로 기울여진 상태였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지팡이를 거두어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호통을 치며 즉시 발을 날려 풍파악의 배를 걷어찼다.

풍파악은 몸을 비스듬히 날려 피하더니 곧장 동쪽의 붉은 얼굴을 한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하얀 광채가 눈부시게 번쩍이는 가운데 어느덧 그의 손엔 한 자루의 칼이 들려 있었고 그 칼은 비스듬히 내려쳐갔다. 붉은 얼굴을 한 노인의 손에 들린 것은 한자루의 괴두도(愧頭刀)였다. 칼등이 두텁고 날이 얇은 것인데 칼날이 긴 편이었다. 풍파악이 칼을 휘두르며 베어오자 괴두도를 세우고 풍파악의 칼날과 맞부디쳐 왔다. 풍파악이 부르짖었다.

[그대의 무기는 매섭군! 그대의 칼과 부딪히면 크게 손해를 보겠어!]

그리고 뒤로 훌쩍 몸을 날려 물러났다. 그러면서 냅다 뒤로 칼을 휘둘러 남쪽의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을 치려고 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은 오른손에 한자루의 철간(鐵磵)을 들고 있었다. 철간 위에는 무쇠로 만든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는데 바로 적의 무기를 낚아채는 데 필요한 가시였다. 그는 붉은 얼굴의 노인의 괴두도가 아직도 공세를 거두어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상대방의 초식을 받는다면 붉은 얼굴의 노인과 더불어 협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신분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런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피했다.

풍파악은 싸움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나게 싸우면 싸울수록 재미있어 했고 누가 이기고 지는지에 대하여는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싸울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을 한 번도 지킨 적이 없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이 몸을 날려 물러선 것은 누가 보아도 일부러 싸움을 회피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되는 일이건만 풍파악은 무림의 예의나 규칙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피하느라고 생긴 빈틈을 노리고 연이어 네 번이나 후려쳤다. 모두 다 공격하는 초식이있으며 그 기세는 질풍처럼 신속무비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은 그가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재빨리 철간을 휘둘러 맞받으며 잇따라 네 걸음을 물러서서야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등은 한 그루 탱자나무 위에 닿게 되어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철간을 비스듬히 쳐들고 '휙'하는 음향을 내며 일초를 공격했다. 이것은 그가 수세에서 공세로 바꿀 때 쓰는 특기의 하나였다.

풍파악은 호통을 내질렀다.

[다시 한 사람 더 공격해야지?]

그는 하얀 수염의 노인이 휘두르는 철간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물러서면서 칼을 휘둘러 커다란 원을 그리는 듯하더니 개방 장로 가운데 네번째 장로를 베어갔다.

네번째 장로는 두 팔이 무척 긴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왼손에 한가지 부드러운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풍파악이 공격하는 것을 보자 팔을 쳐들고 무기를 뻗쳐냈다. 그가 휘두른 것은 쌀을 담을 때 쓰는 푸대였다.

푸대는 바람을 맞게 되자 불룩해졌고 주동이를 벌리게 되었는데 그는 그 푸대를 휘둘러서 풍파악의 머리 위를 덮쳐씌우려고 했다.

풍파악은 놀라면서도 기뻐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정말 묘하군, 정말 묘해! 내가 그대와 싸우기로 하지!]

그가 한평생 좋아하는 것은 싸움이었다. 상대방이 몸에 이상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거나 희귀한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더욱 좋아했다. 마치 유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기이한 형태의 산천을 구경하는 심정과 같았고 또 미식가가 새롭고 맛좋은 음식을 먹게 되었을때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이었다. 풍파악은 한번도 이와 같은 무기를 가진 사람과 손을 써보지도 못했고 또한 들어보지도 못했기에 크게 기뻐하면서도 암암리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칼끝으로 찔러보았다. 칼끝으로 푸대를 찢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본 것이었다. 그런데 긴 팔의 노인은 별안간 푸대를 오른손으로 옮기더니 왼판을 빙글 돌리며 풍파악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하지 않는가?

풍파악은 고개를 쳐들고 피했다. 그리고 칼을 아래에서부터 그어올려 상대방의 사타구니를 노리고 냅다 베어나갔다. 그런데 긴팔의 노인은 통비권(通臂拳)이라는 교묘한 재간에 능통해 있었다. 그 한 대의 주먹은 힘이 다 뻗쳐나온 듯이 보였으나 재차 주먹이 앞으로 반 자 정도 더 뻗어나오는 게 아닌가? 다행히 풍파악은 한평생 싸움하기를 좋아하여 크고 작은 싸움은 수천 번 겨룬 경험이 있어 임기응변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 상대방의 주먹을 깨물려고 했다. 긴 팔의 노인은 이 한 대의 주먹으로 그의 이빨을 몇 대 부러뜨리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주먹이 그의 입가에 닿으려는 순간 풍파악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물려고 하지 않는가? 긴팔의 노인은 손을 움츠렸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으며, '아'하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손가락 끝에서는 어느덧 이빨에 물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크게 욕을 했고 어떤 사람은 껄껄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포부동은 의젓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풍사제, 그대의 여동빈교구(呂洞賓郊狗)라는 일초는 정말 명불허전이로구만! 정말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10여년 동안 고된 연마를 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군! 천 팔백 마리나 되는 하얀 개와 검은 개, 얼룩무늬의 개들을 물어 죽인 끝에 오늘의 놀라운 조예를 쌓은 것이 아닌가?]

왕어언과 아주는 소리내어 웃었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왕소저, 천하의 무학에 대해 그대는 모르는 것이 없는데 저 사람의 깨무는 재간은 어느 문파에 속하나요?]

왕어언은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풍 네째 오라버니의 독문무공이예요. 저는 모른답니다.]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가 몰라? 허허허 견문이 좁은 탓이지! 여동빈교구대구식(呂洞賓郊狗大九式)은 매 일식에 각기 정반(正反) 여덟 가지 무는 방법이 있는데, 팔 구는 칠십 이, 모두 합쳐 일흔 두 가지의 깨무는 방법이 있지. 이것은 심후하기 짝이 없는 무공이지.]

단예는 왕어언이 포부동의 터무니없는 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역시 몇 마디의 우스갯 소리를 하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저 긴 팔의 노인은 교형님의 부하이다. 내 어찌 그를 비웃을수 있으랴?)

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싸움터에서 이상한 바람소리가 크게 일었다. 긴 팔의 노인은 푸대를 마귀 휘두르고 있었는데 푸대 자체는보이지 않고 한 무더기의 누런 그림자만 어른 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풍파악을 푸대자루의 기세 속에 가둔 것 같았다. 풍파악의 도법은 정묘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리 막고 저리 막으며 틈틈히 공격을 하는데 여전히 여유있게 상대방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푸대의 초식을 그는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통비권의 무서운 방법은 이미 가르침 받은 바 있었고 여동빈교구라는 그 일초를 펼쳐 요행스럽게 성공한 셈이었지만 그같이 깨무는 방법을 두번씩 쓸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금도 소홀히 하거나 적을 얕볼 수가 없었다.

교봉은 풍파악이 개방의 사로 가운데 한 사람인 장비수(長臂手)와 백여 초를 싸웠어도 지지 않는 것을 보고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모용공자에 대해 한층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이때 개방의 세 장로는 뒤로 물러서서 정신을 가다듬고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벽은 풍파악이 싸워 이기지 못하자 근심이 되는듯 왕어언에게 물었다.

[왕소저, 저 긴 팔의 노인이 푸대로 펼치는 무공은 어떤 것인가요?]

왕어언은 눈쌀을 찌푸렸다.

[그 같은 무공을 난 책에서 본 적이 없어. 그의 권각법은 통비권의 일종인데 푸대를 펼치는 수법은 대별산(大別山)회타연편십삼식(廻打軟鞭十三式)의 기운을 싣고 있으며 호북 원(阮)씨 집안의 팔십일로(八十一路)의 삼절곤(三節棍)수법을 섞고 있는데 아무래도 푸대를 휘두르는 재간은 그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가봐.]

그녀의 말은 큰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별산 회타연편십삼식과 호북 원씨집안 팔십일로 삼절곤이라는 소리를 장비수가 듣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몸놀림이 둔해졌다. 그는 본래 호북 원씨 집안의 자제였다. 삼절곤은 가전의 무공인데 어쩌다 집안의 윗어른을 살해하는 큰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후 그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삼절곤도 버린 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본래 모습을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어려서 배운 무공을 아무리 애써 버릴려고 해도 격렬한 싸움을 하게 될 때는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곤 했다. 그는 왕어언의 말을 듣고 속으로 크게 놀라고 말았다.

(저 어린 소녀가 어떻게 나의 내력을 알고 있을까?)

그는 자기가 수십 년이나 속여 온 옛 일을 그녀가 알고 있다고 짐작하고 지레 겁을 집어먹어다. 그가 정신이 헛갈리게 되자 풍파악의 계속되는 도법의 공세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잇따라 세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풍파악이 칼을 휘두르며 계속 공격해오자 즉시 왼발을 들어 풍파악의 오른쪽 손목을 차려고 했다.

풍파악은 칼을 비스듬히 휘둘러 곧장 그의 왼발을 절단하려고 했다.

장비수는 두 발을 잇따라 걷어찼다. 원앙연환(鴛鴦連環)이라는 두발차기의 수법으로 그의 몸은 이 순간 허공에 뜨게 되었다. 풍파악은 그의 나이가 꽤 많은데도 솜씨가 민첩한 것이 젊은이 못지 않는지라 자기도 모르게 갈채를 보냈다.

[훌륭하오!]

그리고 휙 하고 왼주먹을 내질러 상대방의 무릎을 쳐갔다. 장비수는 몸이 허공에 떠있는 만큼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그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게 된다면 무릎이 박살나지는 않는다 해도 다리뼈가 반드시 부러질 형편이었다.

풍파악은 자기의 팔이 그의 무릎과 가까워졌는데도 상대방이 초식을 변화시키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별안간 세찬 바람이 일며 상대방의 손에 들린 부대자루의 주둥이가 활짝펼쳐지면서 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는게 아닌가? 그가 주먹으로 장비수의 다리뼈를 부숴놓는 순간 그 자신의 머리가 부대자루 안으로 들어갈 형편이었다. 그는 곧장 내지른 주먹을 급히 비스듬히 쓸어내는 수법으로 바꾸어 푸대를 밀어내려고 했다. 이때 장비수는 오른손을 살짝 기울이더니 푸대의 주동이를 빙글 돌려 그의 주먹을 향해 덮쳐왔다.

푸대의 주둥이 안으로 풍파악의 주먹이 들어가게 되었다. 풍파악은 즉시 손을 움츠려 부대 안으로 들어간 손을 빼냈다. 별안간 손등이 따금거리며 아팠다. 마치 가느다란 침으로 찌른것 같았다. 그는 내려다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조그만 전갈이 손등에 앉아서 꼬리로 자기 손등을 연신 찌르는 것이 아닌가? 이 전갈은 보통 전갈보다 작았으나 오색영롱한 빛으로 얼룩진 것이 매우 흉칙했다. 풍파악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애써 그 전갈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전갈의 꼬리가 그의 손에 꼭 달라붙어 있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풍파악은 급히 왼손을 들어올려 손등을 칼등으로 내려쳤다. '쫙'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오색의 전갈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개방의 평범한 제자들이라도 사용하는 독물은 매우 무서웠다. 그런데 육대장로 중 한 장로가 사용한 그 전갈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풍파악은 즉시 일 장 밖으로 물러나 품 속에서 한 알의 해독알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장비수는 추격하지 않고 푸대를 거두어들이고 끊임없이 왕어언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생각했다.

(저 처녀가 어떻게 내가 호북 원씨 집안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포부동이 관심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네째 좀 어떤가?]

풍파악은 왼손을 한 두번 흔들었으나 별로 이상한 점이 없어 의아해졌다.

[별일없소.......]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앞으로 푹 쓰러졌다.

포부동은 그를 부축이며 잇따라 물었다.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된거야?]

풍파악은 얼굴 피부가 뻣뻣해졌으며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포부동은 깜짝놀라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손목과 팔굽, 어깨의 세 관절 가운데 여섯 군데의 혈도를 짚어 독기가 위로 오르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그 오색 전갈의 독성은 매우 신속하게 퍼지는 모양이었다. 전갈의 독성이 생각보다도 빨리 퍼지는듯 풍파악은 입을 벌려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저 '어'하는 소리만 낼 뿐 말을 못했다. 포부동은 독성이 무서워 아무래도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크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큰소리로 호통을 내지르더니 곧장 장비수에게 덮쳐갔다.

이때 강철 지팡이를 들고 있던 땅딸한 노인이 말했다.

[차륜전(車輪戰)을 펼치려고 하는가? 이 왜동과(矮冬瓜)가 고소땅의 영웅호걸들을 상대해 주지!]

그는 강철 지팡이를 내밀며 포부동을 찍으려고 했다. 이 무기는 지극히 무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가벼운 것을 들고 휘두르는 듯 날랬으며 초식을 펼치는 데 있어서도 장검을 쓰는 것처럼 질풍 같았다. 포부동은 분노와 근심에 휩싸이게 되었으나 상대방이 강적인지라 조금도 소홀하지 못했다. 그는 땅딸한 장로를 사로잡아 장비수에게 해약을 내놓도록 위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금나수법을 펼쳐 강철 지팡이의 빈 틈을 뚫고 공격해 들어갔다.

아주와 아벽은 풍파악의 좌우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며 불렀다.

[네째 오라버니, 네째 오라버니!]

왕어언은 독을 사용하거나 치료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크게 후회했다.

(내가 본 무학서적 가운데에는 독을 치료하는 방법이 적지 않게 실려 있었는데 나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 당시 몇 번 쳐다보기만 했어도 어느 정도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눈을 뜨고 네째 오라버니가 비명횡사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텐데......)

교봉은 포부동이 땅딸한 장로와 막상 막하의 싸움을 벌이고 있고 삽시간에 승부가 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장비수에게 말했다.

[진(陣)장로, 저 네째 나으리에게 해독약을 주시구려.]

장비수 진장로는 어리둥절해 했다.

[방주, 저 사람은 너무 무례합니다. 무공 또한 약하지 않습니다. 살려 놓으면 후환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교봉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우린 아직 모용복과는 만나 보지도 못한 처지인데 먼저 그의 부하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수이 여겼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오. 우리는 비난받지 않도록 일을 처리하도록 합시다.]

진장로는 울화가 치미는듯 말했다.

[마(馬)부방주는 분명히 모용이라는 녀석에게 당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원한을 갚아야 하는 마당에 그들을 상대로 인의와 도리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교봉은 얼굴에 불쾌한 빛을 띠우며 말했다.

[먼저 그에게 해독약을 주시오. 나머지 일은 천천히 해결해도 늦지 않소이다.]

진장로는 내키지 않았으나 방주의 명을 거절할 수 없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즉시 품 속에서 조그만 병을 꺼내 몇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와 아벽에게 말했다.

[우리 방주는 인의(仁義)를 중히 여기는 분이라오. 이것이 해약이니 가져가시오.]

아벽은 크게 기뻐 재빨리 다가가 먼저 교봉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진장로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후 말했다.

[교방주, 정말 감사합니다. 진정으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병을 보며 말했다.

[장로님, 이 해약은 어떻게 쓰는 것인가요?]

진장로는 말했다.

[상처의 독액을 모조리 빨아낸 이후 해약을 바르면 되는 것이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독액을 완전히 빼지 않고 해약을 바르면 해는 있을지언정 이익은 없으니 알아 두시오.]

아벽은 말했다.

[네.]

그리고 몸을 돌려 풍파악의 손을 들어 입을 벌리고 그의 손등에 나있는 상처로부터 독액을 빨아내려고 했다.

진장로는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

아벽은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진장로는 말했다.

[여자는 독액을 빨아낼 수 없소.]

아벽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여자가 어쨌다는거죠?]

진장로는 말했다.

[그 전갈의 독은 음한(陰寒)한 독이외다. 여자는 음에 속하는데 음에 다시 음을 가하면 독성이 더욱 증가하게 되오.]

아주와 아벽, 왕어언은 반신반의 했다. 그 말이 이상야릇했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독에 독을 더하면 큰일날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 쪽 남자라곤 포부동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포부동은 땅딸한 늙은이와 한창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지팡이 그림자가 점점이 수놓아지는가 하면 장세가 표표히 허공을 가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시에 손을 거둘 것 같지 않았다. 아주는 부르짖었다.

[세째 오라버니! 잠시 싸움을 멈추세요! 네째 오라버니를 먼저 구한 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그러나 포부동의 무공과 땅딸한 노인의 무공은 백중지간이었다. 한번 어울리게 되자 싸움 테두리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고수들이 무공을 겨루는 데 있어 일초가 생사를 판가름할 때가 많았다. 만약 그 누구라도 마음대로 공격했다 물러날 수만 있다며 가볍게 상대방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고강한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포부동과 땅딸한 노인은 막상막하인지라 물러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포부동은 아주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풍파악의 상처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초조해져 서둘러 몇 초를 공격했다. 그것은 땅딸한 노인이 귀찮게 달라붙는 것을 떨쳐 버리자는 것이었다.

땅딸한 노인은 이미 포부동과 백 초를 넘게 싸웠다. 개방의 네 장로는 하나같이 무공에 있어 독특한 조예를 갖고 있었다. 청성파의 제보곤이나 사마림, 진가채의 요백당 등은 포부동이 웃고 이야기하면서 수월하게 쫓아버릴 수 있는 형편이었으나 이 땅딸한 늙은이는 정말 수월하게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교봉은 왕어언 등 세 소녀가 얼굴에 놀람과 당황한 빛을 띠우고 있는 것을 보고 진장로가 키우고 있는 얼룩진 전갈의 독성이 지극히 무섭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내가 풍 네째 나으리의 독을 뽑아 주지.]

그리고 그는 풍파악 곁으로 다가갔다.

단예는 왕어언의 근심스런 표정을 보고 풍파악의 손끝에 퍼지는 독액을 직접 빨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교봉과 그는 의리로 맺어진 사이가 아닌가? 그가 교봉의 적을 도와 준다면 금란지의(金蘭之義)에 금이 갈 것이 뻔했다. 교봉이 진장로에게 해약을 꺼내 놓으라고 했지만 정말로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없었다. 교봉이 풍파악 곁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서야 정말 해독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고 재빨리 말했다.

[형님, 소제가 빨아 주죠.]

그리고한 걸음 성큼 내딛어 능파미보의 보법을 펼쳤다. 그의 몸은 기울어지는 듯 교봉을 앞질러 풍파악의 손을 거머쥐었다. 그는 즉시 입을 대고 빨기 시작했다.

풍파악의 한 손은 모두 검은 빛으로 물들었다. 또한 커다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었는데 얼굴의 근육은 뻣뻣해져 눈도 감지 못했다. 단예는 한 모금의 독혈을 빨아서 땅바닥에 뱉었다. 그 독혈은 먹물처럼 검었다. 뭇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같이 놀라마지 않았다. 단예는 다시 입을 가져가 독액을 빨려고 했다. 그런데 상처에서 검은 피가 쉴새없이 흘렀다. 단예는 어리둥절해 생각했다.

(이 검은 피가 흘러나온 이후 빨아야 유효할 것 같구나.)

그는 사실 자기가 만독의 왕, 망고주합을 먹었기 때문에 어떠한 독물도 제압할 수 있으며 오색영롱한 전갈의 독도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빨고 나자 독액은 그 즉시 흘러나오게 된 것이었다. 별안간 풍파악은 몸을 꿈틀하더니 말했다.

[정말 고맙소.]

아주 등은 모두 기뻐했다. 아벽은 말했다.

[네째 오라버니, 이제 말을 할 수 있군요.]

그의 검은 피가 점점 엷어지더니 자색으로 변했다. 피가 좀더 흐르게 되자 자색의 피가 선홍색으로 변했다.

아벽은 재빨리 그에게 해약을 발라 주고 포부동이 봉쇄했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삽시간에 풍파악은 커다랗게 부어오르던 손등이 회복되었고 말과 행동도 처음과 다름없게 되었다.

풍파악은 단예에게 깊이 읍을 했다.

[공자께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단예는 급히 반례했다.

[그까짓 일로 뭘 그러십니까?]

풍파악은 말했다.

[나의 목숨은 공자에게 있어서는 적은 것이지만 나에게 있어선 큰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아벽의 손에서 조그만 병을 받아들더니 진장로에게 던졌다.

[그대의 해약을 되돌려 드리지.]

이어 교봉에게 포권의 예를 했다.

[교방주께선 인의가 뛰어난 분이십니다. 무림에서 제일 큰 방파의 수령으로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 풍파악은 매우 탄복했습니다.]

교봉 역시 포권을 하고 반례하며 말했다.

[과찬이시오.]

풍파악은 자기 칼을 집어들더니 왼손으로 진장로를 가리켰다.

[오늘 나는 그대에게 졌소. 이 풍파악은 졌음을 기꺼이 시인하되 다음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 다시 싸우기로 합시다. 그러나 오늘은 싸우지 맙시다.]

진장로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든지 상대해 드리겠소.]

풍파악은 몸을 비스듬히 돌리더니 손에 철간을 들고 있는 장로에게 말했다.

[나는 귀하와 싸우겠소.]

아주와 아벽은 깜짝 놀라 일제히 부르짖었다.

[네째 오라버니, 안 돼요! 체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요!]

풍파악은 말했다.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싸우지 않는다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거야!]

그는 칼을 휙휙 휘두르며 공격해 갔다. 어느덧 철간을 들고 있는 장로에게 바짝 접근해 있었다.

철간을 사용하는 노인은 하얀 눈썹에 하얀 수염을 하고 있었는데 수십년 전부터 강호에 명성을 떨쳐온 사람이었고 또 많은 인물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풍파악처럼 방금 죽음에서 살아났으면서 흉악하게 공격하는 모습은 일찌기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일이라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교봉은 눈쌀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저 풍씨란 친구는 너무 분수를 모르는구나! 우리 단 아우님이 호의로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어찌하여 불문곡직하고 다시 싸움을 거는 거지?)

이때 단예는 갑자기 동쪽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곧이어 북쪽에서도 사람들이 다가오는데 그 수가 더욱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예는 교봉에게 나직이 말했다.

[형님,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교봉 역시 알고 있는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십중팔구 모용공자가 매복해 놓은 사람들이겠지. 포가와 풍가 두 사람이 우리들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 놓은 이후 한떼의 사람들을 시켜 일제히 공격하도록 한 것이었구나.)

그는 명령을 내려 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서쪽과 남쪽으로나누어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서장로 그리고 장타주가 길을 뚫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쪽과 남쪽에서 삽시간에 잡다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사방팔방에서 적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었다.

교봉은 나직이 말했다.

[장타주, 남쪽의 힘이 가장 약하오. 나중에 나의 손짓에 따라 즉시 형제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물러가도록 하시오.]

장타주는 말했다.

[네.]

바로 이때 동쪽 행자나무 뒤에서 오륙 십 명의 사람들이 달려나왔다. 모두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머리칼은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무기를 들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깨어진 밥그릇에 죽장을 들고 있었다. 모두 개방의 무리였다. 곧이어 북쪽에서도 개방의 제자들이 걸어나왔다. 각기 표정이 엄숙했으며 교봉을 보고도 절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연중 적대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포부동과 풍파악은 별안간 많은 개방의 무리들이 나타나자 속으로 놀라 생각했다.

(어떻게 왕소저와 아주와 아벽 세 사람을 구해서 이곳을 벗어나지?)

이때 가장 놀라움과 의아함을 느낀 사람은 바로 교봉이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개방의 제자들로서 평소 교봉에 대해 지극히 우러러 보았었다. 멀리서 교봉을 발견하기만 해도 달려와 절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갑작스럽게 나타났으면서도 어째서 방주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일까? 그가 의혹을 느끼고 있을 때 서쪽과 남쪽에서도 수십 명의 개방제자들이 달려왔다. 잠시 후에는 행자 숲 속의 빈터를 꽉 메우게 되었다. 그런데 방 중의 수뇌인물은 먼저 도달한 사대 장로와 장타주 외에는그 속에 섞여 있지 않았다. 교봉은 갈수록 놀람을 금할 수 없었고 손아귀에는 식은 땀이 고였다. 그는 일찌기 가장 강하고 고약한 적을 만났을 때도 지금처럼 놀라워한 적이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개방에 내란이 생긴 것일까? 전공(傳功), 집법(執法), 두 분 장로와 분타의 타주들이 살해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포부동과 풍파악은 두 장로와 여전히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왕어언 등은 한켠에 서서 침묵을 지키기만 했다.

이때 진장로가 큰소리로 외쳤다.

[타구진(打狗陣)을 펼쳐라!]

그러자 동서남북 사면의 개방 제자들 가운데서 이십여 명씩 달려나왔다. 각기 무기를 들고 포부동과 땅딸한 장로 등 네 사람을 에워쌌다. 포부동은 개방에서 삽시간에 진세를 펼쳐 오는 것을 보고 자기는 간신히 도망친다고 할 수 있어도 풍파악은 중독된 후 원기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니 중상을 입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왕어언등 세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같은 정세에 놓이게 되자 손을 멈추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부동은 고집스럽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보통 사람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을 그는 꼭 꺼꾸로 행하는 때가 많았다. 거기다 풍파악 역시 싸움을 자기 목숨보다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싸울 기회만 있다면 이기고 지던 따지지 않고 생사마저 도외시하는 사람이었다.

강약의 형세가 이미 분명해졌는데도 포와 풍 두 사람은 여전히 큰소리를 내지르며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조금도 굴하려 하지 않았다.

왕어언은 부르짖었다.

[포 세째 오라버니! 풍 네째 오라버니! 안 되겠어요! 개방의 타구진을 두 분은 깨뜨릴 수 없을 것이니 역시 일찍 손을 멈추세요!]

풍파악은 말했다.

[좀더 싸우고 지지 않을 때 손을 멈추는 게 좋아!]

그는 말을 하느라고 정신이 헛갈리게 되자 쫙 하는 소리와 함게 어깨를 하얀 수염의 장로가 휘두른 철간에 얻어맞고 말았다. 더군다나 철간에는 가시 같은 것들이 잔득 꽂혀 있어서 그의 어깨에선 대뜸 선혈이 흘러내렸다.

풍파악은 욕을 했다.

[빌어먹을! 이 일초는 꽤 무섭군!]

그리고 휙휙 하며 삼 초를 잇따라 공격했다. 바로 상대방과 함께 죽자는 수법이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은 생각했다.

(나는 이 자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찌 이토록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날뛰는 것일까?)

그 같은 생각을 하며 자기자신을 지킬 뿐 더 공격하지 않았다.

진장로는 이때 길게 소리를 내며 노래 부르듯 소리쳤다.

[남쪽의 형제들이 와서 밥을 구걸하네! 아이구 아야야....!]

그가 부르는 것은 거지들이 밥을 빌어먹을 때 부르는 타령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 공격하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남쪽의 수십 명의 거지들은 각기 무기를 쳐들었다. 이제 진장로의 타령이 끝나기만 하면 달려들 참이었다.

교봉은 개방의 타구진이 공세를 펼친다면 사방의 제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반드시 적을 죽이거나 상처를 내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진상을 알아보기 전에 고소의 모용씨와 공연히 원한을 맺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왼손을 쳐들고 호통쳤다.

[잠깐!]

그리고 그는 몸을 날려 풍파악 곁으로 다가가서 왼손으로 그의 안면을 움켜쥐려고 했다. 풍파악은 급히 오른쪽으로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교봉의 오른손이 아래로 떨어지자 어느덧 풍파악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다른 한손으론 그의 칼을 빼앗는 것이 아닌가?

왕어언이 부르짖었다.

[훌륭한 용조수(龍爪手)와 창주삼식(滄珠三式)이네요! 포 세째 오라버니, 그는 왼쪽 팔굽으로 그대의 가슴을 내지를 것이며 오른손으로는 그대의 허리께를 치려고 할 것이오. 그리고 왼손으론 그대의 기호혈을 짚을 것인데 이것은 용조수 가운데 패연유우(沛然有雨)라는 수법이예요!]

그녀가 왼쪽 팔굽으로 그대의 가슴을 내리친다는 말을 하게 되었을 때 교봉은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따르려는 듯 왼쪽 팔굽으로 포부동의 가슴을 내질렀다. 그리고 왕어언이 오른손으로 그대의 허리께를 내려치려 한다고 했을 때 교봉의 오른손은 포부동의 허리를 내려쳤다. 한 사람은 말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행동으로써 보여주는데 평소 그 같은 훈련을 쌓았다 해도 이토록 척척 맞아떨어질 것 같지 않는 광경이었다. 왕어언이 세번째의 한마디를 말하게 되었을 때 교봉의 오른 다섯손가락은 어느덧 갈고리처럼 화해 포부동의 기호혈(氣戶穴)을 움켜 잡고 있었다.

포부동은 전신이 시큰거리며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화가 치미는 듯 말했다.

[정말 훌륭한 패연유우이군! 누이, 그대는 왜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하는거지? 그래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진작 말을 했더라면 나는 준비라도 했을 것이 아니야!]

왕어언은 겸연쩍게 말했다.

[그의 무공이 너무 고강해서 손을 쓰게 되었을 때 전혀 조짐을 보이지 않아 미처 알아볼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포부동은 말했다.

[뭐 미안해 할 것은 없어. 어찌 되었든 오늘 우리는 참패를 당하게 되고 연자오의 체면이 손상되고 말았군!]

그리고 고개를 돌려 보니 풍파악은 뻣뻣한 채 서있었다. 아마도 교봉이 그의 칼을 빼앗으면서 그의 혈도를 짚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순순히 손을 멈추고 싸우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진장로는 방주가 풍, 포 두 사람을 제압하는 광경을 보고 한마디 노래를 다 부르기 전에 멈추어야 했다. 개방 사장로와 제자들은 교봉이 적수를 제압함은 물론 그 수법의 교묘함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을 보고 진심으로 탄복해마지 않았다.

[두 분은 이제 가 보시오.]

포부동의 성격이 아무리 괴짜라고는 하지만 그는 자기 무공이 상대방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자기가 한 마디 더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한번 더 얼굴을 깎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왕어언의 곁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풍파악이 입을 열었다.

[교방주, 나의 무공은 그대만 못하오. 하지만 조금전 일초에 진것은 승복할 수가 없소이다. 그대는 내가 방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준비하지 않은 나를 공격한 것이외다.]

[맞았소. 나는 확실히 그대의 의표를 찔러 그대가 방비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공격했소. 그러면 우리 다시 몇 수를 시험해 봅시다. 내 그대의 도법(刀法)을 받아 보겠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허공을 격하고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한 줄기 기운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휩싸는 것 같았다. 그 칼은 튀어오르듯 교봉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교봉은 손가락으로 살짝 튕기듯 하며 칼을 돌려 칼자루를 앞으로 하고 풍파악에게 내밀었다.

풍파악은 어리둥절해져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건...... 이건 금룡공(擒龍功)이 아니오? 세상에 정말...... 정말 그같은 신기한 무공을 펼치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오?]

교봉은 미소했다.

[불초는 아직 조금밖에 알지 못하오. 웃지나 마시오.]

그리고 눈을 들어 왕어언을 바라보았다. 조금전 왕어언이 그가 펼쳐낸 패연유우라는 일초를 미리 알아차린 듯이 말했던 사실에 대해서 그는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그는 모든 종류의 무예에 정통한 이 소녀가 자기의 금룡공에 대해 어떤 평을 하는지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어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으며 교봉의 놀라운 무공을 못 본 척했다. 그녀는 넋을 잃은 것이었다.

[교방주의 무공이 저토록 뛰어나다니...... 우리 외사촌 오라버니가 그와 똑같이 명성을 날리고 있는 강호에서 '북교봉 남모용'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외사촌 오라버니의 무공이 어찌...... 어찌......]

이때 풍파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를 이길 수 없소. 강약의 차이가 너무나 많이 나니 싸워도 재미가 없을 것 같소. 교방주, 다음에 만납시다.]

그는 싸움에 져도 조금도 의기소침해 하지 않았다. 이기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지는 일도 기쁘다는 듯이 여기는 모양이었다. 다만 싸울 수 있는 싸움만 있어 팽팽한 싸움을 격렬하게 벌일 수 만 있다면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교봉과 작별을 고하고 포부동에게 말했다.

[세째형, 공자는 소림사로 갔다는 소문이 있소. 그곳에 사람이 많으니 반드시 싸우게 될 것 같소. 나는 빨리 달려갈테니 그대들은 천천히 뒤따라 오시오.]

그는 싸울 수 있는 기회를 한번이라도 놓칠까봐 두려운듯 포부동의 대답도 듣지 않고 즉시 달려갔다.

포부동은 말했다.

[갑시다! 가! 재주가 남만 못하니 얼굴에 광채가 없구나! 다시 십 년을 연마했겄만 재차 지고 말았노라! 차라리 진작 그만두었다면 체면이나 세울 것을!]

그렇게 말을 하며 훌쩍 뛰었다. 그는 패배한 데 대하여 허무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왕어언은 아주와 아벽에게 말했다.

[세째 오라버니와 네째 오라버니가 떠났는데 우리는 또 어디로 가서...... 그를 찾지?]

아주는 고개를 숙였다.

[이곳의 개방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상의할 모양이니 우리는 먼저 무석성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그리고 고개를 돌려 교봉에게 말했다.

[교방주, 우리 세 사람은 가겠어요.]

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분은 마음대로 하시구료.]

동쪽의 거지들 가운데 모습이 젊잖은 거지가 걸어나왔다. 그리고 얼굴빛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교방주, 마(馬)부방주가 참혹하게 죽은 원수를 갚지도 못한터에 방주께선 어찌 함부로 적을 봐주는 것이오?]

이 몇 마디는 겸손한 것 같았으나 그 표정은 사람을 다그치는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 조금도 부하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교봉은 말했다.

[우리가 강남땅으로 온 것은 바로 마 둘째형의 원한을 갚으려는 것이오. 그러나 이 며칠간 내가 여러 모로 살펴본 결과 마 둘째형을 죽인 흉수가 반드시 모용공자라고 생각되지 않았소.]

그 중년 거지의 이름은 전관청(全冠淸)이었으며 호는 십방수재(十方秀才)라고 했다. 위인됨이 꾀가 많고 무공이 고강해서 개방에서의 지위는 육대장로의 다음 가는 사람이고 여덟개의 푸대를 메고 다니는 타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지분타(大智分舵)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교봉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방주는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시오?]

왕어언과 아주, 아벽은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개방의 사람이 모용복을 들먹이자 세 사람은 모용복에 대해 지극히 관심이 많은 터라 즉시 한켠으로 물러나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교봉은 말했다.

[나의 짐작에 그렇다 할 뿐 어떤 증거를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외다.]

전관청은 말했다.

[방주께서 어떻게 그런 짐작을 하셨는지 속하 등은 알고 싶소이다.]

교봉은 말했다.

[내가 낙양에 있을 때 마 둘째형이 소후금나수(소후금나수)의 재간 아래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고소 모용씨의 '그 사람의 수법으로 그 사람 몸에 되돌려 펼친다'는 한 마디를 상기하게 되었고, 마 둘째 형의 소후금나수는 천하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으니만큼 모용씨 일가 외에는 능히 마 둘째형을 그 분 자신의 절기로써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오.]

전관청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교봉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며칠 동안 깊이 알아보면 볼수록 우리가 먼저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며 이 가운데에는 어떤 말 못할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소.]

전관청은 말했다.

[제자들은 모두 상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방주께선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교봉은 그의 말투가 곱지 못하고 또 여러 제자들의 표정이나 태도가 평소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방 안에 이미 중대한 변고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었다.

[전공(傳功), 집법(執法), 두 장로는 어디 있소?]

전관청은 말했다.

[속하는 오늘 두 분 장로를 뵙지 못했습니다.]

교봉은 다시 물었다.

[대인(大人) 대신(大信) 대용(大勇) 대례(大禮) 네 타주는 또 어디 있소?]

전관청은 고개를 돌려 서북쪽에 서있는 일곱 개의 푸대를 메고 있는 한 명의 제자에게 말했다.

[장전상(張全祥), 그대들 타주는 왜 오시지 않았는가?]

그 제자는 말했다.

[음...... 음...... 음, 저는 모릅니다.]

교봉은 평소 대지분타 타주인 전관청이 심계에 뛰어나 일을 잘 처리하는 똑똑한 사람으로서 지극히 도움이 되는 부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을 도모코자 하는 이 마당에 있어서는 지극히 무서운 적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일곱개의 푸대를 멘 제자 장전상은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우고 우물쭈물할 뿐만 아니라 감히 자기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을 보자 크게 호통을 쳤다.

[장전상, 너는 본타의 방(方)타주를 살해했지? 그렇지?]

장전상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닙니다. 방타주는 무사히 그곳에 계십니다. 죽지않았습니다. 죽지 않았습니다. 이건...... 이건 저와 관계없는 일이고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교봉은 날카롭게 외쳤다.

[그렇다면 누가 한 짓이지?]

그 말은 우렁차지는 않았지만 위엄으로 가득차 있었다. 장전상은 몸을 벌벌 떨며 전관청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교봉은 변란이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공과 집법등 뭇 장로들이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중대한 위험에 처해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즉시 몸을 돌려 사대장로에게 물었다.

[네 분 장로,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사대 장로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하나같이 다른 사람이 먼저 입을 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교봉은 그같은 광경을 보고 네장로 역시 그 일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

[본방은 나로부터 아래의 모든 제자에 이르기까지 의리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거기까지 말하고 뒤로 잇따라 두 걸음을 물러났다. 그런데 한 걸음이 모두 일 장 남짓했다. 천하의 누구라 해도 앞쪽으로 몸을 날린다 해도 그토록 신속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보폭이 그토록 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두 번 물러서게 되었을 때는 전관청과는 석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몸을 돌리지 않고 왼손을 뒤로 돌려 뻗어내고 오른손으로는 금나수를 펼쳐내 전관청의 가슴에 있는 중정(中庭)과 구미(鳩尾) 두 혈도를 움켜 잡았다.

전관청의 무공은 사대장로에 못지 않았다. 그런데 일초도 반격 할 사이 없이 그만 움켜잡히고 말았다. 교봉은 손에 진기를 돋우어 내력을 전관청의 두 곳 혈도로 밀어 보냈다. 그리고 경맥을 따라 그의 무릎관절에있는 중위(中委)와 양대(陽坮)라는 두 혈도에 밀어 보냈다.

이렇게 되자 전관청은 무릎이 시큰해지고 힘이 빠져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에 꿇어 앉게 되었다. 개방의 모든 제자들 가운데 아연 실색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하나같이 경악하고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원래 교봉은 말투와 얼굴빛을 보고는 이번 변란에서 반드시 전관청이 주모자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그리고 만약 그를 일거에 제압하지 않는다면 큰 화근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설사 반도들을 무찌른다 하더라도 서로 죽고 죽이는 형세를 면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개방은 그야말로 강적을 앞에 두고 있는 이때에 어찌 스스로 원기를 상할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몸을 돌려서 사장로에게 말을 묻는 척하면서 전관청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는 뒤로 나아가 그의 경맥을 움켜 잡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의 재빠른 움직임은 단숨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겉으로 보기에 전혀 힘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가 한평생 배운바를 모조리 펼쳐낸 형세였다. 만약 뒤로 움켜잡아 노리는 부위가 반치라도 차이가 나게 되었을 때는 전관청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내력으로 그의 무릎 관절에 있는 혈도에 충격을 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와 공모를 한 사람들이 구하려고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쌍방의 사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전관청을 제압하고 무릎을 꿇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전관청 스스로 투항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누구도 감히 이상한 거동은 보일 수가 없다고 내다보았다. 교봉은 몸을 돌리고 왼손으로 그의 어깨쭉지를 가볍게 두 번 쳤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가 이미 잘못을 알았다면 이렇게 무릎을 꿇을 것까지는 없소. 그러나 웃 사람을 거역한 죄는 결코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것, 천천히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외다.]

그리고 그는 오른쪽 팔굽을 가볍게 뻗쳐서 그의 아혈을 짚어버리고 말았다.

교봉은 평소 전관청의 언변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말을 하게 되었을 때에 개방의 제자들을 선동하게 된다면 화를 면할 수 없게 되는 형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위기가 사방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임시방편이라도 확고한 수단을 써서 일을 처리해야만 되었다.

교봉은 전관청을 제압하고 그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도록 만든다음 큰소리로 장전상에게 말했다.

[네가 먼저, 대의분타 장(장)타주와 함께 가서 전광과 집법 두 장로 등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모셔 오도록 해라. 너는 순순히 이일을 행해야만 너의 죄를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제히 땅바닥에 앉아서는 함부로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장전상은 놀람과 기쁨에 휩싸여서는 잇따라 대답했다.

[예, 예.]

대의분타 장타주는 반란 음모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그는 전관청이 감히 윗사람을 거역하는 변란의 태도를 보이자 아까부터 울화가 치밀어서는 얼굴이 시뻘개졌고 또한 숨을 씩씩거리며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교봉이 그에게 분부하여 장전상을 따라가 사람을 구하라는 말을 하자 겨우 심신을 가다듬고는 자기가 통솔하고 있는 분타의 이십여 명의 무리들에게 말했다.

[본방에서는 불행히도 변란이 발생했다. 모두들 생명을 걸고 방주의 은덕에 보답할 때이다. 모두들 힘을 써서 방주를 구할 것이며 무조건 방주의 호령에 따르도록 해라.]

그는 사대장로 들이 떼를 지어 공격을 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물론 대지분타의 사람이 모두 반역을 도모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방주 혼자 외톨이가 되어 공격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교봉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장형제, 그대는 분타의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가게. 사람 을 구하는 일은 큰 일이니 어떤 차질도 있어서는 안된다네.]

장타주는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방주님 아무쪼록 조심하십시오. 저는 될 수 있으면 빨리 갔다가 빨리 달려 오겠습니다.]

교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곳에 있는 사람은 다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형제들이 아닌가? 다만 잠시 의견을 달리 했을 뿐 큰 일은 없을테니 그대는 안심하고 가보게나.]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는 다시 사람을 파견해서 서하(서하)의 일품당(일품당)에 통지하여 혜산(혜산)의 약속을 이레 뒤로 미루도록 하게.]

장타주는 허리를 구부리고 읍을 한 후 자기 분타의 무리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교봉은 입으로는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여간 긴장하지 않았다. 대지분타의 이십여 명의 무리들이 떠나자 행자나무 숲 속에는 단예, 왕어언, 아주, 아벽의 네 명의 관계없는 사람들외에 나머지 이백여명은 음모에 참여한 패거리들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나서서 한번 부르짖기만 한다면 뭇 제자의 감정은 즉시 폭발하게 되어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실로 상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게 될 처지였다. 그는 사방의 제자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표정은 하나같이 어색했다. 어떤 사람은 억지로 진정하는 듯이 보이고 어떤 사람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고 어떤 사람은 전관청같이 자기의 용기를 한번 시험해 보려는 것 같았으며 위험을 무릎쓸 각오가 되어 있는 제자도 보였다. 그리고 사방의 이백여 명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만약에 그 누가 있어 한 마디만 하게 될 것 같으면 금방이라도 변란이 일어날것 같았다.

이 무렵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별빛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행자나무 숲가에는 엷은 안개가 서서히 피어 오르고 있었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오로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될 수 있으면 여러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다른 데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전공, 집법 장로 등이 돌아오게 된다면 변란은 평정될 것이다.)

그는 힐끗 단예는 바라보며 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 형제들, 오늘 나는 무척 기꺼운 마음으로 새로이 한 분의 친구를 사귀게 되엇는데 바로 이분 단예라는 분이시오. 그는 대리 단씨의 후예라오. 우리 두 사람은 의기 투합하여 이미 형제가 되었소.]

왕어언과 아주, 아벽은 책벌레 같은 단예가 놀랍게도 개방의 교방주와 의형제를 맺엇다는 사실에 똑같이 의아한 얼굴빛을 띠웠다. 교봉은 계속해서 말했다.

[형제, 내가 그대를 위해서 우리 개방의 주요인물들을 소개해 드리지.]

 

10. 개방의 내분

교봉은 단예의 손을 잡고 허연 수염에 허연 머리카락을 기르고 손에 도치철간을 든 장로를 가리켰다.

[이 분은 송(宋)장로일세. 본방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우러러 모시는 원로이시고 이 도치철간은 과거 강호를 주름잡은 적이 있었다네.]

단예는 말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포권의 예를 했다. 송장로는 억지로 답례를 했다. 교봉은 다시 단예를 강철 지팡이를 쓰는 땅딸한 노인에게 소개했다.

[이 분은 해(奚)장로인데 본방의 외가(外家)고수라네. 그대의 형은 바로 십여 년 전 종종 이분에게 무공을 가르침 받았다네. 따라서 해장로는 나에게 있어서 반은 스승이고 반은 친구이며 서로의 정은 말할 수 없이 깊다네.]

단예는 말했다.

[조금 전 저는 해장로와 그 두 분 나으리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무공이 뛰어나셔서 탄복했습니다.]

해장로는 성격이 직선적이었다. 교봉이 말끝마다 옛정을 되풀이 하면서도 특별히 옛날 자기가 무공을 가르쳐준 사실을 들먹이자 자기가 멍청하게 전관청의 말을 믿었던 사실이 크게 부끄러웠다.

교봉은 푸대자루를 무기로 쓰던 장로를 소개한 이후 다시 귀두도를 쓰는 붉은 얼굴의 장로를 소개하려고 했다. 그때 별안간 발걸음 소리가 나면서 동북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달려왔으며 떠들썩하는 소리와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주는 어디 계시지? 반도들은 어디 있지?]

어떤 사람들은 말했다.

[그들에게 속아 여지껏 갇혀 있었다니 정말 울화가 치미는 노릇이군!]

어지럽게 계속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봉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오장로의 신분과 명망을 단예에게 이야기해 준 이후 몸을 돌렸다. 이때 전공장로, 집법장로, 대인, 대용, 대례, 대신의 각 타주가 한 패의 개방제자들과 일시에 들이닥쳤다. 모두들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으나 방주 앞이라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들 제각기 자리에 앉도록 하시오. 내가 할 말이 있소.]

뭇 사람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예.]

어떤 사람들은 동쪽으로 어떤 사람들은 서쪽으로 자기 직분과 배분에 따라 혹은 전후로 혹은 좌우로앉았다. 단예가 볼 때 개방의 제자들은 무질서하게 사방에 흩어져 앉는 것 같았으나 기실 어떤 사람은 앞에 있고 어떤 사람은 뒤에 있는 등 각기 서열이 있었다.

교봉은 뭇 사람들이 모두 규칙을 지키자 조금 마음이 놓여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개방은 강호의 친구들로부터 높이 받들어져 왔고 백여년간 무림에서 제일 큰 방파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소. 그러나 사람이 많다 보니 자연 모두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게 되었소. 그러니 모든 것을 명확히 밝히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상의한다면 여전히 다정하고 아껴주는 형제가 될것이외다. 여러분들은 일시적인 감정으로 생긴 분쟁을 너무 심각하게 보지 마시기 바라오.]

그의 어조는 지극히 부드럽고 차분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팽팽하던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이때 교봉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얼굴이 싯누런 늙은 거지가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송, 해, 진, 오, 네 분 장로에게 묻겠소. 당신들이 우리들을 태호의 조그만 배에 감금한 것은 무슨 까닭이오?]

이 사람은 개방의 집법장로였다. 이름은 백세경(白世鏡)이라고 하며 언제나 준엄하게 법을 따졌으며 사사로운 정으로 봐주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방의 모든 인물들은 설사 방규를 어기지 않았다 해도 그를 만나게 되면 어느 정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네 장로 가운데 송장로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는 네 장로의 수뇌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건...... 우리는 다년간 어려움을 같이하고 생사를 함께 한 형제들이 아니겠소? 자연 악의는 없었소이다...... 백...... 백집법은 이 늙은이의 얼굴을 봐서라도 마음에 두지 않기를 바라오.]

뭇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가 너무 늙어서 망녕이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방회에서 윗사람을 거스르고 반란을 도모했다면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의 늙은 얼굴을 봐서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게 아닌가. 백세경은 말했다.

[송장로는 악의가 없었다고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소. 나와 전공장로 등은 모두 세 척의 배에 갇히게 되었고 그배는 태호에 띄워져 있었는데 배에는 잡초와 나무 유황으로 가득차 있었소. 그리고 우리가 만약 도망친다면 즉시 불을 질러 배를 태우겠다고 했소. 송장로 설마 그같은 짓이 악의가 없다고 할 수 있겠소?]

송장로는 말했다.

[그건...... 그건...... 그건 확실히 지나치기는 했소. 모두들 한 집안 사람이고 언제나 형제와 다름 없이 지내는 터에 어찌 그토록 거칠게 나올 수 있단 말이오? 이것을 따지고 든다면...... 서로 거북해지지 않겠소?]

백세경은 한 사내를 가리키며 날카롭게 말했다.

[너는 우리를 속여 배 위에 오르게 했고 방주께서 부르신다고 했다. 거짓으로 받은 방주의 명을 전한다면 그 죄는 어느 죄목에 해당하지?]

그 사내는 놀라 온몸을 벌벌 떨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자는 직분이 낮은데 어찌 윗사람을 범하고 방주를 기만하는 일을 하겠습니까. 모두가...... 모두가......]

거기까지 말하더니 전관청을 바라보았다.

백세경은 말했다.

[그대는 전타주의 분부를 받은 것인가?]

그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말하지 않았다. 감히 그렇다고 말도 못하고 그렇지 않다고 하지도 못했다.

백세경은 말했다.

[전타주가 너에게 방주의 명을 거짓으로 전하고 우리들을 속여 배에 오르게 했을 때 너는 당시 그 명령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

그 사내는 얼굴에서 핏기를 잃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백세경은 냉소했다.

[이춘래(李春來), 너는 언제나 자기가 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사내였지 않은가? 사내 대장부가 되어 일을 할 용기가 있었다면 책임을 질 용기도 있지 않겠는가?]

이춘래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는 갑자기 가슴을 펴며 낭랑히 말했다.

[백장로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 이춘래는 잘못했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처분 하십시오. 제가 백장로에게 방주의 명을 전달할 때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백세경은 말했다.

[그렇다면 방주께서 자네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가? 또는 내가 자네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가?]

이춘래는 말했다.

[모두 아닙니다. 방주께선 속하에게 태산 같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백장로께선 공정하시고 엄격하십니다. 이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백세경은 날카롭게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무슨 까닭으로 그와 같은 일을 자행했지?]

이춘래는 땅바닥에 엎드린 전관청을 한번 바라보고 교봉을 한 번 쳐다본 후 큰소리로 말했다.

[속하는 방규를 어겼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그 가운데의 원인은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더니 손목을 훽 뒤집었다. 하얀 광채가 번쩍하는 곳에 퍽 하는 소리와 함게 한 자루의 칼이 어느덧 그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이 한 칼은 너무 빨랐고 심장을 정확히 꿰뚫은지라 칼끝이 심장을 통과하는 순간 이춘래는 즉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개방의 무리들은 '와'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놀라서 내지른 소리였다. 그러나 각기 원위치에 그대로 앉아 있었으며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백세경은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명령이 가짜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방주께 알리지도 않고 오히려 나를 속였으니 마땅히 죽어야 했다.]

그리고는 전공장로에게 말했다.

[항(項)형, 그대를 속여 배 위에 오르게 한 사람은 누구요?]

별안간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키더니 숲 밖을 향해 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등에 다섯 개의 자루를 메고 있었다. 개방의 오대(五袋) 제자였다. 그는 허겁지겁 도망을 치고 있었다. 전공 장로와 집법 장로는 마주보고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한 사람이 달려나가 그 오대 제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람은 손에 귀두도를 들고 있었는데 바로 사대 장로 가운데 오 장로였다.

오 장로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유죽장(劉竹莊), 너는 왜 도망을 치지?]

그 오대 제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저는......]

그는 잇따라 예닐곱 번 뒷걸음질을 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오 장로는 말했다.

[우리들은 개방의 제자로서 반드시 선조께서 내리신 법을 지켜야 한다. 사내대장부가 일을 행함에 있어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것이다. 한번 저지른 일에는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냐?]

그는 몸을 돌려 교봉에게 말했다.

[방주님, 우리들은 모두 그대를 방주의 직위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상의했지요. 이번의 일에 있어서 송,해,진,오, 네장로가 모두 참여했습니다. 우리들은 전공과 집법 두 장로가 응낙하지 않을까봐 방법을 강구해 그들을 감금한 것입니다. 이것은 본방의 대업(大業)을 위한 것이라 부득이 모험을 하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시세가 불리하여 그대에 의해 열세에 몰리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별수없이 그대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이 오장풍(吳長風)은 개방에 삼십 년이나 몸을 담아 왔소. 방주님은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는 쩡, 하니 귀두도를 멀리 내던졌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우뚝 버티고 섰다. 그가 서슴지 않고 방주를 몰아내겠다는 음모를 토로하게 되자 방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집법 장로 백세경은 낭랑히 말했다.

[송, 해, 진, 오, 네장로가 방주를 배반했으니 이는 방규(幇規) 제 일조를 위반한 것이오. 집법 제자(執法弟子)는 네 장로를 묶도록 하라.]

그의 휘하에서 형을 집행하는 제자가 우근(牛筋)으로 만들어진 줄로 먼저 오장풍을 묶었다. 오장풍은 웃음을 띠고 서 있을 뿐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곧이어 송, 해 두 장로 역시 무기를 내던지고 순순히 포박을 받았다.

진 장로는 안색이 매우 이그러져서 말했다.

[비겁한 자들이로다! 단결하여 싸운다면 꼭 진다고 할 수 없거늘 모두 교봉을 두려워하는구나!]

그의 이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전관청이 제압을 당할 즈음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즉시 공격했더라면 교봉은 중과부적으로 당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전공, 집법 두 장로와 대인, 대의, 대신, 대용, 대례의 다섯 타주가 일제히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역모를 꾸몄던 사람의 수가 많았다. 그러나 교봉이 뭇 사람앞에 서자 그 늠름한 위엄에 그 누구도 감히 손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하나같이 포박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송, 해, 오, 세 장로가 모조리 결박을 당한 이후 진 장로는 일전을 벌이려고 했지만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고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탄식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삼베로 만들어진 푸대를 던졌다. 그러자 두 명의 집법제자가 그의 손목과 발목을 묶었다. 이때 날은 완전히 저물고 어둠이 대지를 덮고 있었다. 백세경은 제자들에게 모닥불을 피우도록 했다. 불빛이 묶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드러난 얼굴은 모두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세경은 유죽장에게 말했다.

[네가 다시 개방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 스스로 처단하겠느냐? 아니면 남이 너를 처치해야 되겠는냐?]

유죽장은 벌벌 떨며 말했다.

[저...... 저는.....]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는 몸에 지니고 있던 칼을 꺼내 목을 스스로 찔러 자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손과 팔이 무섭게 떨리고 있어 자기의 목을 제대로 찌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 명의 집법 제자가 소리쳤다.

[개방에서 그토록 오래 몸 담고 있던 사람이 이토록 쓸모없이 굴다니!]

말과 함께 그의 오른팔에 있던 칼을 빼앗아 한 번 휘둘러 목을 잘라 버렸다. 유죽장의 목에서 뿜어진 선혈이 모닥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보였다. 방의 제자들은 숨을 죽이고 유죽장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개방의 규칙에 의하면 방규를 범하여 처형을 받게 된 제자가 만약 스스로 자결을 하게 된다면 방의 제자들은 그를 형제로 여겼고 그가 죽음으로써 모든 죄업을 씻어낸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집법 제자에 의해 죽게 된다면 그 죄는 영원히 씻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 집법 제자는 유죽장이 확실히 자결할 뜻이 있으나 힘이 부족한 것을 보고 손을 써 도와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죽장의 죄는 씻어진 것이다.

 

단예, 왕어언, 아주, 아벽, 네 사람은 우연히 개방의 커다란 내분을 목격하게 되자 자기들은 제삼자로서 남의 사사로운 일을 엿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 물러간다면 개방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십상이었다. 부득이 그들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관심이 없는 척했다.

 

이때 교봉은 멍하니 한쪽에 서있었다. 반도들을 잡기는 했으나 마음속으로 승리했다는 느낌이나 기쁜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옛일을 돌이켜 보았다. 그가 왕(汪) 방주의 지위를 이어받은 이후 개방을 이끌어 온 지 이미 팔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커다란 풍파를 헤쳐왔으며 안으로 분쟁을 해결하고 밖으로 강적을 물리쳤다. 그 자신으로 말하면 시종 온 힘을 다해 임했으며 조금도 사사로운 마음을 갖지 않고 개방이 크게 세력을 펼치고 강호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도록 있는 힘을 다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공이 있으면 있었지 잘못을 범한 경우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음모를 꾸며 배반을 하려고 했을까? 만약 전관청이 마음에 야심을 품고 개방을 차지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찌하여 송 장로와 해 장로, 오장풍과 갚은 강직한 사내들이 모두 참여했을까? 혹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뭇 제자들에게 잘못한 일을 저지르고도 그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같은 생각을 하

고 있을 때 백세경은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 형제들! 교 방주가 왕 방주의 지위를 얻어 본방의 수령이 된 것은 결코 교묘한 술책으로 자리를 차지하거나 힘으로 빼앗는 등 정당치 못한 수단을 써서 방주가 된 것이 아니외다. 과거 왕 방주는 그에게 세 가지 어려운 문제를내놓고 시험했으며 그가 본방을 위해 일곱 가지 커다란 공로를 세우게 한 이후에야 타구봉법을 전수하게 된 것이외다. 그 해 태산대회 때 본방이 포위 공격을 당하여 처지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을 때 교 방주가 아홉 명의 강적을 잇따라 제거함으로써 본방은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소. 그 일은 이곳의 많은 형제들이 모두 목격한 것이외다. 이 팔 년 동안 본방은 명성이 날로 높아지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교 방주가 잘 이끌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교 방주께선 사람에게 인의로 대했으며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우리 모두가 충성을 다해도 방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터에 어찌하여 감히 배반을 한단 말이오? 전관청, 모든 사람 앞에서 자초지종을 털어놓도록 하게.]

전관청은 교봉에게 아혈을 짚혀서 백세경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으나 입을 열고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교봉은 앞으로 나아가 그의 등을 가볍게 두 번을 쳐 그의 혈도를 풀어 주며 말했다.

[전 타주, 이 교봉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대가 여러 사람 앞에서 지적하시오. 두려워할 것도 없고 꺼리낄 것도 없소.]

전관청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리가 아직도 시큰거려 오른쪽 다리를 천천히 펴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아직 뭇 형제들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이후에 저지르게 될 것이오.]

그 말을 하고서야 겨우 몸을 똑바로 세웠다.

백세경은 날카롭게 다그쳤다.

[터무니없는 소리! 교 방주께서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언제나 공명정대했다. 과거에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으며 장래에도 나쁜 짓을 할 분이 아니시다. 그대가 증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말로 제자들을 충동질하고 방주를 배반하다니!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솔직히 말해 그 같은 이야기는 나의 귀에도 들려온 바 있지만 나는 그저 그러한 말을 개방귀 같은 소리라고 여기고 한 주먹으로 그 말을 한 녀석을 때려 세 대의 늑골을 부러뜨렸다! 그런데 개방에 멍청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그대의 터무니없는 말을 믿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대도 기껏해 봐야 그 몇 마디 말밖에 할 수 없을테니 스스로 자결하도록 하게.]

교봉은 생각했다.

(원래 내 등뒤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불리한 말을 하고 다녔고 또한 모두들 들어 왔구나! 다만 나에게 들먹이기가 거북해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말은 결코 듣기 좋은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남에게 말 못할 짓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숨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백 장로,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지 마시고 전 타주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도록 하시오. 송 장로와 해 장로들까지도 나를 반대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교봉에게 반드시 잘못된 점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오.]

백세경은 말했다.

[방주께서 분부하신 일을 전관청은 따르도록 해라.]

전관청은 자기와 함께 공모한 송, 해, 진, 오 네장로가 모두 붙잡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이번 싸움은 자기쪽이 졌다고 직감했다. 그는 최후의 발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馬) 부방주는 교봉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나는 생각하오!]

교봉은 옴몸을 흠칫하며 놀라 부르짖었다.

[뭐라고!]

전관청은 말했다.

[그대는 줄곧 마 부방주를 증오하며 그를 눈의 가시로 여겨오지 않았소?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그대의 방주 자리가 안전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오.]

교봉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마 부방주와 나와의 교분은 돈독한 사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번도 그를 해치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네. 이것은 하늘이 내려다 보시는 일이야. 교봉이 만약 마대원(馬大元)을 해칠 뜻이 있었다면 나는 패가망신을 당한 뿐 아니라 천번 만번 칼에 찔리는 화를 당하여 천하영웅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일세.]

이 몇 마디 말은 진실로 가득했다. 그리고 늠름하기 그지없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숙연해졌다.

전관청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고소 땅으로 가서 모용복을 찾아 원한을 갚으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그대는 두 번 세 번 적을 놓아 주는 것이오?]

그는 왕어언 등 세 소녀를 가리키고 말했다.

[저 세 사람은 모용복의 가족이오. 그런데 그대는 그녀들을 비호하고 있소...]

그리고 단예까지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모용복의 친구인데 그대는 그와 의형제의 의리를 맺지 않았소...?]

단예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나는 모용복의 친구가 아니외다. 나는 한 번도 모용 공자를 본 적도 없소이다.]

그는 왕어언이 모용복의 친척이기 때문에 어떤 해를 입지나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아니로소이다'를 연발하게 되었다.

전관청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포부동은 모용복 아래의 금풍장(金風莊) 장주이며 일진풍(一陣風) 풍파악은 모용복 아래의 현상장(玄霜莊) 장주이외다. 그들 두 사람이 그대 교봉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한 사람은 일찌감치 난도질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고 한 사람은 중독되어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이 같은 사실은 모두가 친히 목격한 바인데 그대는 그래도 억지를 쓰겠다는 것이오?]

교봉은 천천히 말했다.

[우리 개방이 창립된 지 수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강호에서 존경을 받게 된 이유는 결코 무리가 많기 때문도 아니고 무공이 고강하기 때문도 아니외다. 그것은 의협의 길을 택하고 매사에 정의를 지켰기 때문이오. 전 타주, 그대는 내가 저 세 소녀를 비호하려 했다고 비난하는데, 맞았소. 나는 확실히 그녀들을 비호하고 있소. 왜냐하면, 나는 본방 수백 년동안 내려온 명성을 아끼며 천하영웅들로 하여금 개방의 뭇 장로가 힘을 합하여 세 연약한 여자를 괴롭혔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려 했기 때문이오. 송, 해, 진, 오, 네장로 가운데 어느 분이라도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선배가 아닌 분이 있소? 개방과 네 분 장로의 명성을 그대는 중요하게 생각치 않을지 모르지만 방 중의 형제들은 모두 아끼고 사랑하는 바이오.]

뭇 사람들은 그 몇 마디 말을 듣고 왕어언 등 세 소저를 몇 번 쳐다보았다. 하나같이 그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세 소저를 괴롭혔다고 소문이 난다면 개방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세경은 말했다.

[전관청, 그대는 또 할 말이 있소?]

백세경은 고개를 돌리고 교봉에게 말했다.

[방주, 이같이 분수를 모르는 악질과 쓸데없는 입씨름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반역의 죄를 범했으니 방규에 따라 처형하도록 해야 합니다.]

교봉은 생각했다.

(백 장로가 전관청을 빨리 처형하자고 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나에게 불리한 말을 토로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다.)

그는 낭랑히 말했다.

[전 타주가 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음모를 꾸미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을 보면 반드시 중요한 원인이 있을 것이오. 사내 대장부가 일을 행함에 있어 옳다고 생각했으면 그대로 행하는게 당연한 것이오! 뭇형제들, 교봉의 어떤 점이 잘못 되었는지 분명히 말씀해 보시오.]

오장풍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주, 나는 그대가 어쩌면 시치미를 떼고 허세를 부리는 대간웅(大奸雄)인지 또는 정직한 호걸인지 분간할 수가 없구려. 그대는 일찍 나를 죽이도록 하시오.]

교봉은 속으로 크게 의아하여 물었다.

[오 장로, 그대는 어째서 내가 사람을 속이는 위선자라고 말하는 것이오? 그대... 그대... 그대는 어떤 점에서 나를 의심하는 것이오?]

오장풍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 일을 이야기하자면 너무나 많은 일이 연관되고 소문이 나면 개방은 강호에서 다시 고개를 쳐들지 못할 것이오. 모든 사람이 우리를 업수이 여길 것이오. 우리는 본래 그대를 한 칼에 죽이고 끝낼 생각이었소.]

교봉은 더욱 오리무중에 빠져들었다.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째서일까? 어째서일까?]

그러다가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내가 모용복 휘하의 두 고수를 구한 것을 보고 그대들은 내가 모용복과 어떤 결탁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는 모양이구려. 그러나 그대들이 음모를 먼저 꾀한 것이고 나는 그후에 사람을 구한 것이니 이 두 가지 일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외다. 더군다나 그들을 구한 일이 옳은지 그른지 지금으로썬 아직 단정할 수 없는 것이오. 하지만 나로서는 마 부방주가 결코 모용복에게 해를 입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전관청은 물었다.

[그것은 어째서요?]

교봉은 말했다.

[나는 모용복이 영웅호걸이라 여기고 있소. 결코 손을 써서 마 둘째형을 살해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왕어언은 교봉이 모용복을 영웅호걸이라고 하자 매우 흐뭇해 했다.

(이 교 방주는 역시 영웅호걸이로구나!)

그러나 단예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렇지 않을걸? 그렇지 않을걸? 모용복은 영웅호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이때 전관청이 말했다.

[이 두 달 동안 강호에서 해를 입은 고수들이 적지 않은데 모두 각자 그 자신이 명성을 떨치게 된 절기로 목숨을 잃었소이다. 모든 사람들은 모두 모용씨가 쓴 독수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같이 악랄한 수단으로 무림의 친구를 살해하는 사람을 어찌 영웅호걸이라고 할수 있단 말이오?]

교봉은 섰던 자리에서 천천히 걸음을 몇 번 옮겨 서성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러 형제들, 어젯밤 나는 장강(長江)의 망강루(望江樓)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한 명의 청년 협사를 만나게 되었소. 그는 단숨에 독한 술을 열 사발이나 들이키고도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는 호걸이었소.]

 

11. 처형을 멈추어라

단예는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생각했다.

(알고 보니 형님은 어제 저녁에도 남과 함께 술내기를 했구나. 상대방의 주량이 크고 시원스럽게 술을 마시기만 하면 그저 좋아 하면서, 상대방을 호걸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모두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이때 교봉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와 세 사발의 술을 대작하게 되었으며 강남의 무림 인물에 대해 논하게 되었소. 그런데 그는 자기의 장법이 강남에서 둘째 가며 첫째 가는 사람은 모용복 모용 공자라고 했소. 나는 그와 석 잔을 교환하며 내공을 겨루게 되었소. 그는 첫잔 둘째 잔은 받아낼 수 있었지만 세번째 잔에는 그의 왼손에 들고 있던 술사발이 그만 박살이 났으며, 깨어진 옹기조각이 그의 얼굴에 튕기는 바람에 얼굴 가득히 피를 흘리게 되었소. 그런데도 그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말했소.

`애석하다. 애석해, 이 한 사발의 술이 애석하구나.'

나는 그의 호기에 커다란 감동을 받고 네번째 잔부터는 손을 쓰지 않고 말했소.

`귀하의 내공은 정말 교묘하구료. 정말 강남에서 둘째가기에 부끄럽지 않는 솜씨외다.'

그러자 그는 말했소.

`강남에서는 둘째가지만 천하에서는 꼴찌외다.'

나는 말했소.

`형씨는 너무 겸손해 할 필요 없소. 나와 내공을 겨룰 때 보니 귀하는 그야말로 일류 고수라 할 수 있소.'

그러자 그는 말했소.

`이제보니 개방의 교 방주께서 왕림하셨군요. 그렇다면 이 형제는 속시원하게 승복할 수 있소. 손에 사정을 두고서 나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은 점을 고맙게 생각하오. 나는 한 잔의 술로써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세 사발의 술을 나누었소. 그리고 헤어질 때에 나는 그에게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그의 성은 복성으로서 공야(公冶)라고 하며 이름은 외자로서 건(乾)이라 했소. 그는 모용 공자의 부하이며 적하장(赤霞莊)의 장주라고 신분을 밝히는 동시에 자기의 장원으로 가서 사흘간 술을 퍼마시자고 초청을 하기도 했소. 이와 같은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정말 훌륭한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소?]

오장풍은 큰소리로 말했다.

[그 공야건은 훌륭한 사내이고 훌륭한 친구외다. 언제든지 나에게 소개를 좀 해주시구려.]

그는 자기가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이미 포로가 된 몸이고 곧바로 처형을 받게 될 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영웅호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자 크게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었다.

교봉은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탄식해마지 않았다.

(오장풍은 호방하고 시원스런 사람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모에 연루되었다니 정말 뜻밖이군.)

 

이 때 송 장로가 물었다.

[방주, 그 뒤에 어떻게 되었소이까?]

교봉은 말했다.

[나와 공야건이 작별을 한 후 나는 곧장 무석으로 오게 되었는데, 이경 무렵 한 조그만 다리 위에서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이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소. 이 때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언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 있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소. 조그만 다리는 외나무 다리였는데, 한 쪽 다리 끝에는 흑의 사내가 서 있고 다른 한 쪽 끝에는 시골 농사꾼인듯 어깨에 거름통을 둘러멘 사람이 서 있었소. 원래 두 사람은 서로 외나무 다리를 자기가 먼저 지나겠다고 싸우는 것이었소. 흑의사내는 시골 농사꾼에게 물러가라고 하면서 자기가 먼저 다리목에 와 닿았다고 했소. 그런데 그 시골 농사꾼은 자기가 거름통을 지고 있어 물러갈 수 없으니 흑의 사내가 물러가야 한다고 우겼소. 그러자 흑의 사내가 입을 열었소.

`우리는 이미 초경에서 이경까지 싸움을 했소. 그러나 재차 이경부터 날이 샐 때까지 싸운다 하더라도 나는 물러설 수 없소.'

그러자 그 시골 농사꾼은 말했소.

`당신이 나의 거름통에서 나는 구린내가 두렵지 않다면 어디 한 번 겨루어 보도록 합시다.'

흑의 사내는 말했소.

`그대가 어깨에 거름통을 메고 있으면서도 지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끝까지 버텨보도록 합시다.'

나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소.

(저 흑의 사내의 성격은 매우 이상야릇하구나. 몇 걸음 물러서서 양보를 한다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거름통을 멘 시골 농사꾼과 얼굴을 맞대고서 싸움을 해 보아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두 사람의 말을 듣자 하니 한 시진 정도나 이미 싸우고 있지 않았겠소. 그래서 나는 크게 호기심을 느끼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소. 흑의 사내가 구린내가 두려워 항복을 할 것인지 아니면 시골 농사꾼이 지쳐서 졌음을 시인하게 될 것인지 알고 싶었소.

그러나 나는 구린내는 맡고 싶지 않아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서 멀리 떨어져 서 있었소. 이때 그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투가 모두 강남의 지방 사투리라 나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소. 어찌 되었든 그들은 자기가 옳다고 떠드는 것이었소. 그 시골 농사꾼은 참으로 모진 데가 있었소. 그는 오른쪽어깨에 메고 있던 거름통을 왼쪽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위치를 교환하면서 한걸음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소.]

단예는 왕어언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아주와 아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세 소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재미있어 하는 눈치가 아닌가. 따라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방에서 대반역자를 처결하는 이 마당이야말로 정세가 얼마나 긴급한가? 그런데 교 형님은 한가하게 그와 같이 조그마한 일을 이야기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왕 소저 등은 매우 재미있어 하는 눈치이니 정말 모를 일이로군. 그런데 교 형님은 그토록 영웅호걸다운데도 여전히 동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개방의 수백 명이나 되는 무리들은 하나 같이 정숙한 태도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그 어느 한 사람도 교봉의 말을 무료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교봉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잠시 두고 보게 되었는데 점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 왜냐하면 나는 그 흑의 사내가 외나무 다리 위에서 몸을 꼼짝도 하지 않고 우뚝 버티고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몸에 상승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 거름통을 멘 시골 농사꾼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며 건강하기는 했으나 전혀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었소. 나는 보면 볼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었소.

(저 흑의 사내의 무공이 저토록 뛰어나니 손가락 하나만 내민다 하더라도 시골 농사꾼을 거름통과 함께 강물로 떨어뜨릴 수 있는데도 전혀 무공을 사용하려 하지 않는구나. 이와 같은 고수라면 응당 수양이 깊을 터이니 상대방에게 양보하기 싫다면 슬쩍 몸을 날려서 시골 농사꾼의 머리 위로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토록 쉬운 일인데 어찌하여 시골 농사꾼을 상대로 겨루고 있단 말인가? 정말 우습기 짝이 없구나!)

이때 그 흑의 사내는 큰소리로 외쳤소.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비켜나지 않으면 나는 욕을 하겠소.'

그러자 시골 농사꾼은 말했소.

'욕을 할테면 하라지. 당신만 욕을 할 줄 알고 나는 못할 줄 아시오.'

그리고 그는 먼저 욕을 하기 시작했소. 흑의 사내 또한 그를 상대로 욕을 하게 되었소. 그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갖가지 비열하고 더러운 욕을 마구 퍼부어 댔소. 이 강남 사람들의 말은 열 마디 가운데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었소. 그런데 약 반 시진이 지나자 그 시골 농사꾼은 지칠대로 지쳐 버렸으나 흑의 사내는 내력이 충만한 듯 했으며 여전히 신기가 늠름한 편이었소. 그리고 나는 그 시골 농사꾼의 몸이 휘청거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지 않아 강물 속으로 떨어지게 될것이라고 짐작했소.

그런데 별안간 그 시골 농사꾼은 손을 거름통에 집어넣어서는 한 웅큼의 똥물을 집어서는 흑의 사내의 얼굴에다 냅다 던지는 것이었소. 그 흑의 사나이는 시골 농사꾼이 이토록 악착스럽게 나오리라고는 생가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그만 이크,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과 입에 똥물이 가득 튕겨지게 되었소. 나는 속으로 생각했소

(야단났다. 저 시골 농사꾼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니 그 누구를 원망하랴.)

이때 나는 그 흑의사내가 크게 노한 나머지 손을 쳐들고 그 시골 농사꾼의 정수리를 내리치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되었소.]

단예는 귀로는 교봉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나 눈은 왕어언의 반쯤 벌어진 앵두 같은 입술로 향해져 있었다.

이때 교봉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변고가 너무나 빨랐고 나는 구린내를 피해서 십여 장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시골 농사꾼을 구하려 했어도 이미 때는 늦고 말았을 것이오. 그런데 그 흑의 사내는 그 시골 농사꾼의 정수리를 내려치려다가 갑자기 중도에서 손을 멈추며 껄껄 웃으면서 입을 열지 않겠소?

`하하하, 우리는 참을성을 겨루고 있었는데 대체 누가 이긴 것이오?'

그 시골 농사꾼 역시 정말 어거지를 잘 쓰는 사람이었소. 분명히 그가 졌는데도 인정을 하지 않고 우기는 것이었소.

`나는 거름통을 어깨에 메고 있으니 당신이 덕을 본 것이 아니겠소. 믿을 수 없다면 당신이 거름통을 짊어지도록 하고 나는 빈몸으로 서 있도록 합시다. 누가 이기는가 말이오.'

그러자 그 흑의 사내는 응낙을 했소.

`그 말이 옳소.'

그러더니 그는 시골 농사꾼에게서 거름통을 받아 왼팔을 뻗어서는 손바닥 위에 거름통을 얹고 어깨 높이로 반듯하게 뻗은 채로 꼼짝하지 않는 것이었소. 그 시골 농사꾼은 그가 한 손을 뻗쳐 거름통을 들고 있는데 팔을 어깨 높이로 수평으로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말을 잃었소. 그 흑의 사내는 웃으며 말했소.

`나는 이렇게 받들고 서서 손을 바꾸지도 않겠소. 그리고 끝까지 겨루어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진 사람이 이 거름통의 똥물을 모조리 마시도록 합시다.'

그러나 그 시골 농사꾼은 그와 같은 모습을 보자 다시 논쟁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지 재빨리 뒤로 물러섰소. 그런데 뜻밖에도 당황한 나머지 그만 헛발을 짚어 강물 속으로 떨어지려고 했소. 흑의 사내는 오른손을 뻗쳐서는 그의 뒷덜미를 잡았는데,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그 시골 농사꾼을 수평으로 쳐들었소. 이렇듯 한 손으로는 거름통을,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한 사람을 든 채 껄껄 웃으면서 말했소.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러면서 몸을 번쩍 날려 가볍게 건너편 언덕에 도달하더니 그 시골 농사꾼과 거름통을 함께 땅에 내려 놓고는 경신법을 펼쳐서 살구나무 숲으로 모습을 감추었소.

그 흑의 사내가 얼굴에 똥물이 뿌려졌을 때 만약 그 시골 농사꾼을 죽이려 했다면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했을 것이며 설사 사람을 함부로 죽이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몇 대의 주먹질을 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라 하겠으나, 그는 자신의 재간을 믿고 함부로 완력을 쓰려고 하지 않았소. 이 사람의 성격은 확실히 약간 특별한 데가 있으며 무림에서도 정말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라 할 수 있소. 여러 형제들, 이는 내가 친히 목격한 것이외다. 그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나의 행적을 발견하고 그와 같이 행동했다고는 믿지 않소. 이와 같은 사람은 훌륭한 친구이며 훌륭한 사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오 장로와 진 장로, 그리고 백 장로 등은 일제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는 정말 훌륭한 사내입니다.]

진 장로는 말했다.

[애석하게도 방주께서는 그의 성명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도 강남의 무림 가운데 그와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교봉은 천천히 말했다.

[그 친구는 바로 조금 전 진 장로에게 손을 썼다가 진 장로의 독전갈에 의해 상처를 입었던 사람이오.]

진 장로는 말했다.

[바로 강남 일진풍(江南 一陳風) 풍파악이었군.]

교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았소.]

단예는 이제서야 교봉이 왜 그와 같은 이야기를 그렇게 상세하게 설명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목적은 풍파악의 성격을 묘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풍파악이 얼굴은 험악하고 싸움을 좋아하나 원래의 천성은 지극히 선량한 편으로서 그야말로 그 사람의 외형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교봉은 다시 말했다.

[진장로, 우리 개방은 강호의 제일 큰 방파로 자부하고 있으며 그대는 본방의 수뇌 인물이라고할 수 있소. 따라서 신분과 명성은 강남의 일개무인인 풍파악과 결코 함께 논할 수 없는 것이오. 풍파악이 모욕을 당하고도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데, 어찌 우리 개방의 고수가 그보다 못한 짓을 해야 한단 말이오.]

진장로는 얼굴을 귀밑까지 붉히며 말했다.

[방주님의 가르치심이 옳습니다. 방주께서 나에게 해약을 주라고 하신 것은 원래 나의 명성과 신분을 생각했기 때문이었군요. 이 진고안(진고안)은 방주의 호의를 모르고 원망했으니 정말 나무로 만든 소처럼 멍청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봉은 말했다.

[본방의 명성과 진장로의 신분을 돌보는 것은 둘째고 우리 무공을 배우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하오. 진장로가 설사 우리 본방의 수뇌인물이 아니고 무림에서 명성이 혁혁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불문곡직하고 남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오.]

진장로는 고개를 숙였다.

[이 진고안의 잘못을 알겠습니다.]

교봉은 한마디 말로써 4대장로 가운데 가장 오만하고 고집이 센 진고안을 설득하자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그는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공야건은 뛰어나게 호탕한 사람이었고 풍파악은 시비를 분명히 가릴 줄 알았으며, 포부동은 소탈한 사람이었소. 그런가 하면 저 세 분 소저 역시 선량하고 온순한 아가씨들이었소. 이 사람들은 모용공자의 부하가 아니면 바로 그의 친척이나 친구였소. 흔히들 사물은 동색끼리 만나게 되고 사람은 떼를 지어서 분별된다고 했소. 여러 형제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시오 모용 공자가 사귀거나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러한데 그 자신이 크게 간악하고 몰염치한 사람일리가 있겠소?]

개방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의리를 크게 중시하고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옳다'고 외치기도했다.

이때 전관청이 물었다.

[방주, 방주의 의견대로 한다면 마 부방주를 살해한 사람은 결코 모용복이 아니란 말인가요? 나는 모용복이 반드시 마 부방주를 죽인 흉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반드시 흉수가 아니라는 말도 할 수가 없소. 원수를 갚는 일은 급히 서둘 필요가 없는 것이오. 우리들은 반드시 자세히 알아보고 모용복이 흉수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는 물론 그를 잡아와 마 부방주의 원한을 갚아 드려야 할 것이오. 그리고 만약 그가 흉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진짜 흉수를 잡을 때까지 반드시 조사해서 밝혀내야 할 것이오. 그러나 만약 짐작으로 좋은 사람을 죽이게 된다면, 진짜 흉수는 멋대로 놀아나면서 속으로 개방이 멍청하고 무능하다고 비웃을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마 부방주에게도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우리 개방의 쟁쟁한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게 되는 것이오. 뭇 형제들이 강호에 나서게 되었을 때 남에게서 비웃음과 조롱을 받게 된다면 그 기분이 어떠하겠소.]

개방의 군웅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다 얼굴빛이 움직였다. 전공장로는 줄곧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 손을 뻗쳐 턱아래의 드문드문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말은 정말 옳습니다. 과거 나는 좋은 사람을 한번 잘못 죽인 일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정말입니다.]

 

오장풍(吳長風)은 큰 소리로 말했다.

[방주, 우리는 그대와 마 부방주의 사이가 좋지 못하므로 그대가 암암리에 고소의 모용공자와 결탁하여 손을 써서 그를 해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소한 일들을 함께 모아 볼 때에 남의 말을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가 없었소이다. 그러나 이제보니 우리들은 실로 너무나 멍청했소이다. 백장로, 법도(法刀)를 꺼내도록 하시오. 방규에 따라 우리 스스로 자결을 하겠소.]

백세경(白世鏡)은 서릿발 같은 얼굴을 하고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집법제자(執法弟子)는 본방의 법도를 꺼내도록 하라.]

그의 속하인 9명의 제자가 일제히 응답했다.

[네.]

각기 등 뒤의 부대에서 하나의 노란 보따리를 꺼내더니 한자루의 단도(短刀)를 꺼냈다. 아홉 자루의 한광(寒光)이 찬연한 단도를 나란히 놓자 똑같은 길이와 크기였다. 불빛 아래의 칼날은 새파란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한 명의 집법제자가 한 토막의 나무를 가져다 놓자 9명의 제자는 동시에 아홉 자루의 단도를 그 나무에다 꽂았다. 푹 꽂히는 대로 쑥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아홉 자루의 단도가 매우 예리한 모양이었다. 9명의 제자가 일제히 부르짖었다.

[법도가 모조리 갖추어졌습니다. 틀림이 없는지 검토해 주십시요.]

백세경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송, 해, 진, 오, 네 사람의 장로는 사람의 말을 잘못 믿고 반란을 기도했으며 본방의 대업에 커다란 손실을 줄 뻔했으니 그죄는 마땅히 한 칼에 처형을 해야 옳다. 그리고 대지분타(大智分舵)타주인 전관청은 헛소문을 퍼뜨려 무리를 선동하고 내란을 부추겼으니, 그 죄 마땅히 처형을 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반란에 참여하게 된 각 타의 제자들은 이후 상세히 알아본 이후에 제각기 받아야 할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각자의 죄와 형벌을 선포하게 되자 뭇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강호의 어느 방회(幇會)라 하더라도 자기의 방을 배반하고 방주를 해치려 한다면 마땅히 처형을 받기 마련이었으니 그 어느 누구도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장풍은 성큼성큼 나서더니 교봉에게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방주, 이 오장풍은 그대에게 미안하게 생각하오. 따라서 자결을 하겠으니 아무쪼록 이 몸이 죽은 뒤 용서를 해주기 바라오.]

그리고 그는 법도 앞으로 가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오장풍은 스스로 내 자신을 처단하겠다. 집법제자는 묶은 것을 풀도록 해라.]

한 명의 집법제자가 말했다.

[네.]

그리고는 앞으로 나아가 포박한 줄을 풀려고 했다. 그러자 교봉이 호통을 내질렀다.

[잠깐!]

오장풍은 대뜸안색이 사색이 되어서 나직이 말했다.

[방주, 저의 죄가 너무 커서 자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개방의 규칙에 의하면 방규를 어긴 사람이 만약 스스로 자기자신을 처단하게 되면 죽은 후에 그의 명성이 더럽혀지지 않고 그의 죄와 나쁜 행적도 밖으로 소문을 내지 않았다.

무림의 호한들은 그 누구라도 자신의 명성을 귀중하게 여겼으며 자기가 죽은 이후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오장풍은 교봉이 그 스스로 자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줄 알고 그만 부끄러움과 당황함으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교봉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법도 앞으로 나서더니 입을 열었다.

[십 오년 전, 거란민족이 안문관(雁門關)을 쳐들어 오게 되었을때, 송장로는 그와 같은 소식을 듣고 사흘간 음식을 먹지 않고 나흘 동안을 잠을 자지 않으며 달려와 긴급한 군정(軍情)을 알렸으며, 달려오는 도중에 잇따라 아홉 필의 준마를 죽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자신마저도 내상을 입고 입으로는 선혈을 토해냈었소. 그리하여 끝내 우리 대송(大宋)의 안문관을 지키는 군사들이 준비를 할 수 있었고 거란의 오랑캐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섰소. 이것은 나라에 공을 세운 큰 일이오. 강호의 영웅호걸들은 그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고 있지만 우리 개방은 잘 알고 있소. 집법장로, 송장로의 공로는 무척 크오. 아무쪼록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 속죄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백세경은 말했다.

[방주께서 송장로를 위해 사정을 하시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본방의 방규에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가 있습니다. '방을 배반한 큰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아무리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속죄받을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공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믿고 교만방자하게 굴 것이고. 본방의 백대대업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방주, 그대는 방규에 어긋나는 부탁을 하고 있소이다. 우리는 역대 방주께서 지켜 내려온 방규를 그르칠 수는 없소이다.]

송장로는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집법장로의 말씀에는 조금도 그릇됨이 없소. 우리가 장로의 지위에 있는 신분이니만큼 모두 하나같이 적지 않은 공로를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옛 공을 따져서 논하게 된다면 어떤 죄를 짓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겠소? 방주, 이 몸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결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곧이어 '우두둑'하는 소리가 두어번 있었다. 그의 손목을 묵었던 우근(牛筋)이 맥없이 끊어지고 말았다.

뭇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크게 변했다. 그 우근으로 말하면 견고하고 질기기 이를데 없어서 강철칼이나 예리한 비수로써도 한참동안 힘을 들여야 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송장로는 손을 쳐드는 사이에 힘을 주어 잘라 버리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개방 대장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솜씨라고 할 수 있었다.

손장로는 두 손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자 앞에 있는 법도를 쥐고는 자결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한 가닥 부드러운 내경(內勁)이 덮쳐왔다. 따라서 그는 손가락이 법도 앞에 한 치 정도 되었을 때 더 뻗칠수가 없었다.

이는 바로 교봉이 그로 하여금 칼을 쥐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손장로는 참담하게 안색이 변해서는 부르짖었다.

[방주, 그대는......]

교봉은 손을 뻗치더니 첫번째 법도를 뽑았다. 송장로는 이를 보고 말했다.

[그만 두지 그만 두어. 내가 그대를 죽일 마음을 품었으니 마땅히 받아야 할 죄라고 할 수 있소. 그대는 빨리 손을 쓰시구려.]

그런데 그 순간 칼빛이 번쩍하면서 '퍽'하는 가벼운 소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교봉이 법도를 자기 어깨죽지에 꽂는 것이 아닌가?

뭇 개방의 사람들은 '아'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단예는 놀라 부르짖었다.

[형님!]

왕어언과 같은 제 삼자까지도 이와 같은 변고에 그만 놀라 안색이 변해서는 부르짖었다.

[교방주, 그렇게까지......]

교봉은말했다.

[백장로, 본방의 방규에는 다음과 같은 한 조목이 있소. '본방의 제자가 방규를 어겨 가볍게 용서할 수 없을 때, 방주가 용서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스스로 피를 흘려서 그 피를 씻어야 한다!' 그렇지 않소?]

백세경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기가 돌과 같았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방규에는 그와 같은 조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주께서는 스스로의 피를 흘려 피를 씻음에 있어서 반드시 그만한 보람이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봉은 말했다.

[조상들게서 내리신 법을 그르치지만 않으면 될 것이오.]

그러면서 몸을 돌려 해장로를 향해 말했다.

[해장로는 과거 나에게 무공을 가르쳤소. 비록 사부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실제 사부와 다름이 없었소. 그리고 이 점은 사사로운 은덕이라 할 수 있소. 그러나 과거 왕방주가 거란의 5대 고수의 매복을 당해 사로잡혀서 기련산(祁連山) 흑풍동(黑風洞)에 감금되고 우리 개방이 거란에 항복하도록 위협과 협박을 받게 되었을 때, 왕방주의 체구가 당당한 편이고 해장로는 왕방주와 삼분쯤 비슷한 데가 있어서 해장로는 왕방주로 변장을 하고 기꺼이 대신 죽고자 했으며, 그 왕방주로 하여금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하려고 했소. 이것은 그야말로 국가와 문파에 크게 공을 세운 일이라 하겠으므로, 본인은 그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고 그는 두번째의 법도를 뽑아서는 가볍게 휘둘러 해장로를 묶고 있는 우근을 잘랐다. 그리고는 팔을 돌려서는 자신의 어깨죽지에 법도를 꽂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천천히 진장로에게 돌렸다. 진장로는 성격이 약간 포악한 편이었다. 과거 집안에서 잘못한 일이 있었기에 이름을 고치고 집에서 뛰쳐나오게 된 이후,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이 일을 캐어내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며 마음속으로 교봉이 총명한 사람이니만큼 자기의 내력을 알아낼까봐 크게 꺼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교봉과 간격을 두고 깊이 사귀려 들지 않았다.

이때 교봉이 자기를 바라보자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12. 기인(寄人) 조전손(趙錢孫)

[교방주, 나는 그대와 아무런 교분도 없소. 평소 그대에게 잘못한 것도 많았소. 감히 그대에게 피를 흘리게 해서 죄를 사해 달라고 할 수도 없구료.]

그리고 그는 두 팔을 홱 뒤집더니 갑자기 뒤로 묶여진 그의 손을 앞쪽으로 옮겨 놓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손목은 우근에 의해 여전히 꽁꽁 묶여 있었다. 원래 그의 통비권공(通臂拳功)은 이미 출신입화의 경지에까지 연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 쌍의 손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몸을 웅크린 채 손을 번개같이 내뻗어 어느덧 하나의 법도를 낚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교봉의 반응은 눈부실 정도였다. 손으로 금나수법을 펼쳐 그의 손에 이미 쥐어진 법도를 어느 사이엔가 낚아채고는 낭랑히 외쳤다.

[진장로, 이 교봉은 거친 사나이외다. 그래서 조심성이 많은 사람들과 자질구레한 것을 따지는 친구들을 사귀려 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소이다. 이것은 나의 타고난 성격이니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대와 성격이 맞지 않아서 평소 좋은 말을 주고받을 때도 드물었지요. 그리고 나는 또한 마 부방주의 위인됨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 종종 피하면서 차라리 일 대나 이대쯤 급이 낮은 제자들과 독한 술을 마시거나 개고기를 먹기를 좋아했소이다. 이와 같은 성격을 모두들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그대가 만약 내가 그대와 마 부방주를 제거하려고 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외다. 마 부방주는 점잖아서 한 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장점이기도 하며, 이 교봉이 따를 수 없는 장점이기도 합니다.]

교봉은 그 법도를 자기에 어깨죽지에 꽂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거란의 좌로부원수(左路副元帥) 야율불로(耶律不魯)를 찔러 죽인 공로를 다른 사람은 모르고 있을지 모르나 내 어찌 모를 리 있겠소.]

개방의 제자들 가운데서는 대뜸 나직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에는 놀람과 탄복, 그리고 감탄해 하는 말들이 섞여 있었다. 원래 거란이 대송으로 침입해 왔을 때 수십 명이나 되는 거란의 장수들이 연이어 죽음을 당하게 되어, 싸움에서 불리하게 되고, 결국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엇던 일이 있었다.

그처럼 갑자기 죽음을 당한 장수들 가운데는 바로 좌로부원수 야율불로도 있었다. 개방에서는 전대(前代)의 수뇌 인물들 몇 사람만 알고 있었을 뿐, 그 누구도 그와 같은 공을 진장로가 세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진장로는 교봉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공로를 치하하자 감격하고 말았다.

[이 진고안이 무슨 공로를 세웠겠습니까? 모두 방주님의 은덕이 아니겠습니까?]

개방은 줄곧 송나라를 암암리에 도와 외적을 막아 왔으며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적으로 하여금 주의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개방을 공략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도, 결코 외부에 누설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그와 같은 사정을 몰랐고 개방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고 좀처럼 그와 같은 비밀을 알 수가 없었다.

진고안은 언제나 오만무례해서 자기의 나이가 교봉보다 많고 개방에서의 경력이 교봉보다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평소 교봉에 대해 겸손하거나 공경하지 않았던 사정을 개방의 제자들은 다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이때 방주가 이와 같은 사실을 조금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그를 대신해서 자기의 피로 죄를 씻어 주는 데 대해 어느 한 사람도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교봉은 오장로의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오장로, 과거 그대는 홀로 응수협(鷹愁峽)을 지키며, 서하 일품당(一品堂)의 고수들과 싸우지 않았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양가장(楊家將)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실행할 수 없도록 했소. 양원수가 그대에게 준 기공금패(記功金牌)만 하더라도 그대가 오늘 지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이외다. 그대가 기공금패를 꺼내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도록 하시오.]

오장풍은 감격해 마지 않았다.

[방주님의 너그러운 처사에 소인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봉은 말했다.

[우린 다 같은 형제가 아니겠소? 오장로는 무슨 애로 사항이 있는지 말씀해 보시구료.]

오장로는 말했다.

[나의 그 기공금패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건...... 그건...... 사라지고 없소이다.]

교봉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사라졌다는 말이오?]

오장로는 말했다.

[잃어 버렸소이다. 음......]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결심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술을 살 돈이 없었소. 그래서 그 금패를 금방에 팔았소.]

교봉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시원시원하구료! 하지만 양원수에게 미안하게 되었구료.]

그리고는 한 자루의 법도를 나무토막에서 뽑아 오장로의 손목을 묶어 놓은 우근을 자르더니 자기의 왼쪽 어깨죽지에 꽂았다. 오장풍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교방주, 그대야말로 인정과 의리가 가장 깊은 사나이외다. 이 오장풍의 한 목숨은 이제부터 방주님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방주님에 대해 어떻게 말하더라도 나는 방주님만 따를 것입니다.]

교봉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그레 웃었다.

[우리 거지들은 먹을 밥이 없거나 마실 술이 없으면 남에게 빌어 먹어야지 금패를 팔 것까지는 없지 않겠소?]

오장풍은 웃으며 말했다.

[밥을 빌어 먹기는 쉬워도 술을 빌어 먹기는 어렵지요. 술을 빌어 먹으려면 모두들 이렇게 말하죠. '빌어 먹을 놈의 거러지가 배가 부르니 술까지 마시려 드는구나! 술은 못 주겠다! 못 줘!']

개방의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와'하니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술을 빌어 먹으려고 하다가 거절당한 경험을 많은 개방의 제자들은 겪은 바 있었다. 그리고 교봉이 사대장로의 죄를 사하여 줌에 따라 모두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하여 웃음을 터뜨리게 된 것이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전관청에게 쏠리게 되었다. 그리고 모두들 전관청이 이번 반란을 선동한 죄수이니만큼 교봉이 아무리 아량이 넓다고 해도 그를 좀처럼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교봉은 전관청이 앞으로 다가들자 입을 열었다.

[전타주, 그대는 또 무슨 할 말이 있소?]

전관청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를 배반한 것은 송나라의 강산을 위한 것이고, 우리 개방의 백대의 위업을 위한 것이외다. 그러나 그대의 내력과 진상을 나에게 말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힐 수가 없구료. 그대는 나를 한 칼로 죽여주시구료.]

교봉은 잠시 생각해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몸에게 어떤 잘못된 점이 있는지 얼마든지 얘기해 보시오.]

전관청은 머리를 저었다.

[이제는 아무도 나의 말은 믿지 않을 것이외다. 그러니 그대가 나를 죽이는 것이 좋겠소.]

교봉은 의문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사내 대장부가 할 말이 있으면 하는 것이지 왜 우물쭈물 하오? 말하고 싶으면서도 말하지 않다니...... 전관청, 그대가 사내이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솔직히 털어놓아야 할 것이오.]

전관청은 응수했다.

[맞았소.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더 무슨 일을 두려워 하겠소. 교씨성을 갖은 양반, 나를 한 칼로 통쾌하게 죽이도록 하시오. 그러면 나는 개방이 오랑캐의 손에 떨어지고, 송나라의 금수강산이 오랑캐의 말굽 아래 멸망당하는 것을 보지 않게 될 것이오.]

교봉은 말했다.

[우리 개방이 어찌햐여 오랑캐의 손에 들어 간다는 말이오? 분명히 말해 보시오.]

전관청은 말했다.

[내가 지금 말한다 해도 믿을 사람이 없소. 오히려 이 전관청이 죽음이 두려워서 함부로 입을 놀린다고 할 것이외다. 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소이다. 그런데 왜 죽으면서까지 욕을 얻어 먹어야 하겠느냐 말이외다.]

백세경이 말했다.

[방주, 이 자는 간계가 많으며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소이다. 그리고 방주께서 그의 목숨마저 살려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외다. 집법 제자는 법도를 들고 형을 집행하도록 하라.]

한 명의 집법 제자가 대답했다.

[예.]

그리고 앞으로 성큼 나서더니 한 자루의 법도를 뽑아 들고 전관청의 앞으로 다가갔다. 교봉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전관청의 얼굴을 살폈다. 전관청의 얼굴에는 분노와 공평하지 못하다는 빛이 역력했을 뿐, 간사하다거나 교활한 빛은 없었고, 또 두려워 하거나 당황해 하는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교봉은 속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집법 제자에게 말했다.

[그 법도를 이리 주게.]

집법 제자는 두 손으로 칼을 받들어서는 허리를 굽히며 칼을 바쳤다.

교봉은 법도를 받아들고 말했다.

[전타주, 그대는 나의 신분에 관한 진상을 알고 있으며 또한 이 일은 본방의 안위와 관계가 있다고 말했는데, 진상이 어떠한 것인지 어째서 실토를 하지 못하는 것이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법도를 보자기에 싸서는 자기 품속에 다시 넣고 말했다.

[그대가 반란을 선동했으니 죽음은 면하기 어렵소. 그러나, 오늘은 잠시 보류해 두었다가 진상이 밝혀진 후에 내 친히 그대를 죽이리다. 교봉이란 사람은 결코 우물쭈물하며 그저 남들에게 은혜나 베풀고 호의를 사려고만 하는 사람은 아니오. 그대를 죽이려고 결심한 이상 아마 그대는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그대는 등 뒤의 부대를 벗고 이곳을 떠나시오. 오늘부터 그대는 개방의 인물이 아니오.]

등에 메고 있는 부대를 벗어 놓으라는 것은 바로 개방에서 쫓아낸다는 뜻이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처음 제자가 되고 전혀 직책이 없을 적에도 등에 부대를 짊어지게 마련이었다. 어떤 사람은 아홉 개의 부대를 짊어졌고 또 어떤 이는 하나의 부대를 짊어졌는데 부대의 적고 많음으로 등급과 직위의 고하를 나타냈던 것이다.

전관청은 교봉이 등에 있는 푸대를 내려놓으라고 하자 갑자기 눈에 살기를 띠우며 몸을 홱 돌리더니 서둘러 한 자루의 법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손목을 홱 뒤집더니 칼끝으로 자기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강호의 문파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문파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실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치이며 모욕이었다. 그야말로 당장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도 더욱더 사람으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교봉은 냉랭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정말로 그 칼로 자신을 찌를 것인지 두고 보자는 것이었다.

전관청은 차분한 자세로 법도를 들고 있었다. 손과 팔을 떨거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는 교봉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았다. 잠깐 행자나무 숲속은 조용해졌다. 전관청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교봉, 매우 태연자약하구려. 설마 하니 그대가 정말 모른다는 것이오?]

교봉은 물었다.

[무엇을 모른다는 것이지?]

전관청은 입술을 달싹 했으나 끝내 말하지 않고, 천천히 법도를 통나무에 꽂았다. 그리고 푸대를 하나하나 땅 위에 풀어 놓았다. 그런데, 전관청이 다섯 번째의 푸대를 끌러놓는 순간,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북방에서 세 필의 말이 급히 달려왔고, 이어 한 두 마디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개방의 제자중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어 대답했다. 그 말들은 점점 빨리 달려왔으며 점차 가까워졌다. 오장풍은 중얼거렸다.

[무슨 급한 변고라도 생긴 것일까?]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동쪽에서도 또 한필의 말이 달려오는 기척이 들렸다. 그러나 아직도 거리가 멀어 말발굽 소리만 들려올 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북쪽에서 달려온 그 말은 어느덧 숲 밖에 당도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말을 몰아 숲 속으로 들어오더니, 훌쩍 말에서 내려섰다. 그 사람은 넓다란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옷은 매우 화려했다. 그 사람은 신속하게 겉옷을 벗었다. 그러자 여러 곳을 더덕더덕 기운 개방의 옷차림이 드러났다.

단예는 잠시 생각해 보고 즉시 그 뜻을 알아차렸다. 개방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리게 되면 지극히 남의 이목을 끌기가 쉬웠다. 따라서 관가의 사람들은 종종 말을 세우고 묻거나 간섭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긴급한 소식을 전하려는 사람은 말을 타야 했기 때문에, 돈 많은 장사치나 부자처럼 행색을 꾸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안에는 더덕더덕 기운 옷을 입음으로써 그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대신분타의 타주 앞으로 나가더니 하나의 조그만 보를 내밀며 말했다.

[긴급한 군정(軍情), 군정......]

그는 미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갑자기 그가 타고 온말이 길게 소리를 지르더니 땅바닥에 쓰러졌다. 힘이 다해 죽은 것이었다. 그 전령 역시 몸을 흔들흔들 하더니 풀썩 쓰러졌다. 이로 미루어 보아 한 사람과 한 마리의 말이 먼 길을 달려 오느라고 지칠 대로 지쳤음을 알 수 있었다. 대신분타의 타주는 이 전령이 대신분타에서 서하로 보내 염탐을 하게 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서하국(西夏國)은 이때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고 땅을 차지했으며 백성을 괴롭혔는데, 해악이 거란만큼 크지는 않았다. 따라서 개방은 종종 염탐군을 서하로 보내 정탐을 하게 한 것이다. 그는 이 사람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소식을 전해 온 것을 보면 지극히 중요하고 긴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펼쳐 보지 않고 보에 싼 것을 교봉에게 바치며 말했다.

[서하에서 온 긴급한 소식입니다.]

교봉은 그 조그만 보를 받아 펼쳐 보았다. 안에는 납으로 싼 것이 들어 있었다. 그는 납을 깨트리고 하나의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막 펼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급히 울려퍼지면서 동쪽에서 한 필의 말이 숲속으로 들어섰다. 말이 숲속에 들어서자마자 말 위에 탔던 사람은 땅 위에 내려서면서 말했다.

[교봉, 그 밀랍 속에 든 전갈은 군(軍)의 기밀에 속하는 큰 비밀이니 그대는 볼 수가 없소.]

뭇사람들은 깜작 놀라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흰 수염을 나부끼고 있었고 몸에는 이곳저곳을 기운 헌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나이가 지극히 많아 보였다. 전공장로와 집법장로는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서장로, 웬 일로 이곳까지 왕림하셨습니까?]

개방의 제자들은 서장로(徐長老)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안색이 변했다. 이 서장로는 개방에서 배분이 가장 높았고 나이는 이미 87살이나 되었으며, 전임 왕방주도 그를 사백(師伯)이라 부를 정도였다. 따라서 개방에서는 그의 후배가 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은퇴한 지 오래 되었으며 일찌기 세상일을 돌보지 않았다. 교봉이 서하의 군정을 보려는 것을 제지하자, 뭇사람들은 모두 놀라는 한편 크게 의아했다.

교봉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서장로께서는 안녕하셨습니까?]

그리고 그는 손바닥을 펼쳐서는 종이뭉치를 서장로 앞으로 가져갔다. 교봉은 개방의 방주였다. 항렬은 서방주보다 낮았지만 큰 일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는 역시 그가 명령을 내려야 했다. 서장로는 어디까지나 선배에 지나지 않았으며, 설사 전대의 방주직을 역임했던 사람이 살아난다 하더라도 신임 방주보다는 아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서장로는 교봉에게 서하로부터 온 군정의 급한 전갈을 보지 못하도록 했으며, 교봉 또한 이에 대하여 조금도 항거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서장로는 입을 열었다.

[실례하오.]

그리고는 교봉의 손에서 그 종이뭉치를 받아 왼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개방의 제자들을 둘러보고 낭랑히 말했다.

[마대원(馬大元)의 처 마부인이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 하오. 그러니 모두들 그녀를 잠시 기다리도록 하시오.]

개방의 제자들은 일제히 교봉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교봉은 가슴 가득히 끓어 오르는 의문을 품은 채 말했다.

[만약에 어떤 중대한 일을 알리는 일이라면 모두들 그 자리에 있어야 하겠지요.]

서장로는 말했다.

[이 일은 중대하오.]

그는 다만 그 한 마디만 했을 뿐 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교봉에게 방주에 대한 예를 갖추고 즉시 한 켠에 앉았다. 단예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왕어언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그녀에게 나직이 말했다.

[왕소저, 개방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정말로 많은 것 같소이다. 우리는 이 자리를 피해야 할까요, 아니면 옆에서 구경을 해야 할까요?]

왕어언은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는 외부의 사람이니 다른 사람의 기밀대사에 참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예요. 하지만...... 하지만...... 그들이 의논하려는 일은 저의 고종 오라버니와 관계가 있으니 조금 더 듣고 싶군요.]

단예는 그 말에 찬성했다.

[그 마 부방주는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가 죽였다고 하며 의지할데 없는 과부만을 남겼다고 하니 아마 그녀는 아주 가련할 것 같구료.]

왕어언은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아니예요. 마 부방주는 우리 고종 오라버니가 죽인 것이 아니예요. 교방주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이때 말발굽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리고 두필의 말이 행자나무 숲으로 달려왔다.

뭇사람들은 두 필의 말 중 한 필에는 마대원의 처가 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에 타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노파였다. 남자는 체구가 왜소했으나 노파는 체 구가 매우 우람했으므로 같이 옆에 서게 되자 대조가 되어 우스꽝스러웠다.

교봉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태행산(太行山) 충소동(沖宵洞)의 담공(譚公), 담파(譚婆) 두 부부께서 왕림하신 줄을 모르고 미리 마중 나가지 못한 점에 대해 이 교봉이 먼저 사과를 드립니다.]

서장로와 집법 등 육대장로들도 일제히 나가 인사를 했다.

단예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담공과 담파가 무리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는 인물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때 담파가 입을 열었다.

[교방주, 그대의 어깨쭉지에 꽂혀 있는 것이 무엇이요?]

그리고 손을 뻗치더니 대뜸 그의 어깨쭉지에 꽂혀 있는 네 자루의 법도를 뽑아냈다. 그 동작은 매우 빨랐다. 그녀가 그와 같이 칼을 뽑자 담공은 즉시 품 속에서 하나의 조그만 상자를 꺼내들더니 상자 속에 있던 가루약을 교봉의 어깨에 발랐다. 금창약을 바르자마자 상처에서 쏟아지던 피가 즉시 멎엇다. 모든 사람들은 금창약이 대뜸 피를 멈추게 하는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더욱더 불가사의하게 생각했다. 그야말로 약이 이르기가 무섭게 피가 멈추는 것이었다.

담파가 물었다.

[교방주, 누가 이토록 대담하게 그대에게 상처를 입혔단 말이오?]

교봉은 웃으며 말했다.

[내 스스로 찌른 것입니다.]

담파는 의아하여 물었다.

[어찌 해서 스스로 찔렀단 말이오. 살기가 귀찮아졌소?]

교봉은 미소했다.

[제 스스로 찔러 장난을 친 것이죠. 이 어깨죽지는 가죽이 두껍고 살이 많아서 뼈와 근육을 해치지는 않습니다.]

송, 해, 진, 오 네 장로는 자기들이 지은 죄를 교봉이 얼버무리자 고맙고도 부끄러웠다. 담파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지? 아, 이제 알겠소. 그대는 영악하게도 담공이 극북한옥(極北寒玉)과 현빙섬여(玄氷蟾艅)를 새로얻어 영험하기 짝이 없는 상처약을 만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약을 실험해 보려고 했군!]

교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때 다시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마리의 노새가 숲속으로 들어왔다. 노새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은 노새를 거꾸로 타고 있었다.

담파는 다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부르짖었다.

[사형, 또 이상야릇한 수작을 부리는거요? 나는 그대의 엉덩이를 때려 주겠어요!]

뭇 사람들이 그 노새 등에 탄 사람을 바라보니 그 사람은 잔뜩 웅크리고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7~8세의 어린애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담파는 정말 손을 뻗치더니 그 사람의 엉덩이를 내려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은 주르륵 땅위에 내려섰다. 그리고 갑자기 손과 발을 뻗쳤는데, 그 순간 키도 크고 건강하게 생긴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담공은 얼굴에 불안한 빛을 띠우고, '흥'하니 코웃음치더니, 노새를 타고 온 사람을 흘겨보며 말했다.

[난 누군가 했지. 알고 보니 그대였군!]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담파를 바라보았다.

노새를 거꾸로 타고 온 사람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으나 30세에서 60세 사이로 보였으며 모습은 추악하다고도 할 수 없었으나 준수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줄곧 담파를 바라보고있었는데 그 표정에는 격정이 서려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소연(少娟), 요즈음 재미있게 지냈소?]

이 담파는 그야말로 키도 크고 건장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백발은 모조리 은빛을 띠고 있었으며 얼굴은 주름투성이었다. 그런데도, 소연이라는 간드러진 이름으로 불리워지자 그녀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지라 뭇사람들은 속으로 웃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노파에게도 젊은 시절은 있지 않았겠는가? 나이 어린 소저였을 때 소연이라고 불렀던 것을 나이가 들었다고 노연(老娟)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다시 몇 필의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봉은 이때 그 노새를 타고온 사람을 훑어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담파의 사형이고 노새 등 위에서 보여준 한 수의 '축골공'(縮骨功)이 그토록 고명한 것으로 보아 범상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이 때 숲속으로 몇 필의 말이 들어왔다. 선두에 있는 몇 사람의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가 제일 들어보이는 사람은 30여세 정도로 보였고, 가장 어린 사람은 20여세쯤 되어 보였다. 아마도 형제인듯 생김새가 비슷했다.

오장풍은 큰 소리로 말했다.

[태산오웅(泰山五雄)이 도달하셨군! 좋아, 좋아!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 그대들 다섯 형제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

태산오웅 가운데 세째는 선숙산(單叔山)이라고 했으며 오장풍과는 익히 아는 처지였다. 그는 서둘러 대답했다.

[오사숙(吳四叔), 안녕하십니까. 아버님도 오셨습니다.]

오장풍의 얼굴이 약간 변했다.

[정말, 그대의 아버님도 오셨단 말이오?]

그는 방규를 어겼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가슴을 졸이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태산의 철면판관(鐵面判官), 선정(單正)이 갑자기 이곳으로 찾아온다고 하자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철면판관 선정은 한평생 악을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강호에서 어떤 불공평한 일이 있었다 하면 반드시 나서서 간섭을 했다.

그의 무공이 무척 고강할 뿐 아니라 친아들 다섯 형제와 많은 제자들을 거두어들여 제자와 사손들만 하여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태산 선씨 집안의 명성은 혁혁한 터였다. 곧 이어 한 필의 말이 숲속으로 달려 들어왔다. 태산오웅은 일제히 달려나가 말머리를 잡았다. 비단으로 만든 장포를 몸에 두른 노인이 표연히 말에서 내려섰다. 그리고는 교봉에게 공손히 예를 했다.

[교방주, 이 선정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와서 폐를 끼치는구료.]

교봉은 오래 전부터 선정이라는 이름을 들러왔다. 그러나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선정의 얼굴은 어린애처럼 주름살 하나 없었으나 머리칼은 백발이었다. 그의 표정은 온화한 편이어서 강호에서 나도는 소문처럼 무정한 사람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교봉은 즉시 포권하며 말했다.

[선 노선배님께서 이 곳에 왕림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나가 마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 노새를 타고온 사람이 뾰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잘 한다! 철면판관이 올 때는 멀리 마중을 나가면서 이 쇠엉덩이 판관이 오실 때는 멀리 마중을 안 나가도 된다는 말씀이지?]

뭇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왕어언, 아주, 아벽 세 소녀도 소리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방긋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태산오공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그 말이 자기의 아버지를 모욕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대뜸 발끈했다. 그러나 선씨 집안의 가정교육은 지극히 엄했다. 선정이 무어라고 말하기 전에 그 아들들은 감히 말하지 못했다.

선정은 수양이 무척 깊었으며 내공의 조예도 무척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낭랑히 외쳤다.

[마부인께서는 나오셔서 말씀을 하시구료!]

그러자 숲 뒷쪽에서 한 채의 조그만 가마가 나타났다.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떼메고 나는 듯 달려오더니 숲속 한복판에 가마를 내려놓고 가마의 휘장을 걷었다. 그러자 가마에서 소복을 입은 젊은 부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젊은 부인은 고개를 숙인채 교봉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미망인, 온(溫)씨가 인사드립니다.]

교봉은 답례를 하고 말했다.

[아주머니, 인사는 그만 두십시오.]

마부인은 말했다.

[선부(先夫)께서 불행히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방주와 여러 백부님, 숙부님들이 돌보아 주시고, 장례를 치러 주신 데 대해 이 미망인은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소리는 지극히 간드러졌고 듣기에 나이가 매우 어린듯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 땅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용모를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교봉은 마부인이 반드시 남편이 죽게 된 중대한 단서를 발견했기 때문에 친히 나오게 된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방의 일을 먼저 방주에게 알리지 않고 서장로와 철면판관을 찾아가 일을 상의한 것으로 보아 필시 공교로운 점이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돌려 집법장로 백세경을 바라보았다. 백세경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모두 의아한 빛으로 충만해 있었다.

교봉은 먼저 외부 손님을 받아들인 후 개방의 일을 논하리라고 마음먹고 선정에게 말했다.

[선 노선배님, 태행산 충소동 담씨 부부를 혹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오래 전부터 담씨 부부의 영명(英名)을 들어왔소이다. 정말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소이다.]

교봉은 말했다.

[담 나으리, 이 선배님에게 실례되지 않도록 불초를 소개시켜 주십시오.]

담공이 미처 말하기 전에 노새를 타고온 사람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내 성은 쌍(雙)씨이고, 이름은 왜(歪)이며, 별호는 쇠엉덩이 판관이라 하오.]

철면판관 선정의 수양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노기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성이 선씨인 것은, 홀로라는 뜻의 단(單)자도 되니까, 저자는 자기의 성을 쌍이라고 하고, 나의 이름이 정(正)이니까 자기의 이름을 왜(歪)라 칭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그는 상대방을 다그치려 했다. 그런데 담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 나으리, 이 조전손(趙錢孫)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실성한 사람과 같아서 개의할 필요가 없답니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조전손이란 말인가? 아마도 진짜 이름은 아닌 것 같다.)

생각을 마친 그는 말했다.

[여러분, 이곳에는 자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땅바닥에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양해하십시요.]

그는 사람들이 나누어 앉게 되자 입을 열었다.

[하루 사이에 이처럼 많은 선배고인을 대하게 되니 정말 영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로 이곳까지 왕림하시게 되셨습니까?]

선정은 말했다.

[교방주, 귀방은 강호의 제일 큰 방파이며, 수백 년 동안 영명을 천하에 떨쳐 왔소. 무림에서 개방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면 그 누구라도 우러러 본다오. 그래서 이 늙은이 역시 언제나 개방을 흠모해 왔다오.]

교봉은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조전손이 말했다.

[교방주, 귀방은 강호에서 가장 큰 방파이외다. 수백 년 동안 위명을 떨쳐 왔으며, 개방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면 누구나 우러러 본답니다. 이 쌍모 역시 지극히 흠모해 왔답니다.]

이 말은 선정이 말한 것과 꼭 같았다. 그저 선모를 쌍모로 고친 것 뿐이었다.

교봉은 무림의 선배고인들 가운데 성질이 이상야릇한 사람이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조전손이 말끝마다 선정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몰라도 쌍방에게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마디를 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선정은 빙그레 웃고 큰 아들인 선백산(單伯山)에게 말했다.

[백산아, 나머지 말은 네가 교방주에게 해드려라. 다른 사람이 내 아들의 말투를 흉내 내려고 한다면 충분히 배우도록 해야지.]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들 껄껄 웃었다. 처음에는 선정이 점잖게 보였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예리한 데도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조전손이 그대로 선백산의 말투를 흉내 내게 된다면 그야말로 선정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조전손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산아, 나머지 말은 네가 교방주에게 해 드려라. 다른 사람이 나의 아들의 말을 흉내 내려고 한다면 충분히 배우도록 해야지.]

이렇게 되자 오히려 그가 선백산의 애비가 되는 것이었다.

선정의 막내 아들 선소산(單小山)은 성질이 무척 급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제기랄! 이것이야말로 살기 귀찮아진 말버릇이 아닌가!]

조전손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처럼 변변치 못한 아들 네 사람이면 충분할 텐데 다섯째 아들은 뭐 하러 낳았담! 허허허. 진짜 친아들인지 아닌지 모르겠구나!]

이와 같은 공공연한 도전에는 선정도 성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전손이라 불리우는 자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우리는 개방의 손님이오. 우리가 서로 다툰다면 주인의 체면을 깎는 일이니, 이곳의 일이 끝난 후에 마땅히 그대와 싸우겠소. 백산아, 너는 할 말을 해라.]

선백산은 그야말로 칼을 뽑아들고 조전손을 몇 번 찔러야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끝내 참고 교봉에게 말했다.

[교방주, 지나간 일에 관해 우리 부자는 감히 간섭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군자는 덕으로서 사랑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백산은 여기까지 말하고 눈을 들어 조전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자신을 흉내 내는지. 만약 흉내를 낸다면, 다음과 같은 한마디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의 아버님은 말씀하셨죠. '군자는 덕으로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렇게 되면 선정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꼴이다.

그런데 조전손은 여전히 그 말을 흉내 내어 말했다.

[교방주, 지나간 일에 관해 우리 부자는 감히 간섭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은 말했다오. '군자는 덕으로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그는 아버지라는 한 마디를 아들이라고 바꾸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선정을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뭇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눈쌀을 찌푸렸다. 조전손이 너무나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아마도 당장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정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귀하는 자꾸만 나에게 시비를 걸려고 하는구료.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어떤 점에서 제가 잘못을 했는지 분명히 밝혀주기 바라오. 만약 제가 잘못했다면 즉시 귀하에게 사과를 드리리다.]

뭇사람들은 선정이 중원에서 커다란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전손은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죄를 짓지 않았지만 소연에게 죄를 지었소. 이것은 나에게 죄를 짓는 것보다 몇십 배 더 고약한 일이오.]

선정은 의아하여 물었다.

[누가 소연이요? 내가 언제 그녀에게 죄를 지었단 말이오?]

조전손은 담파를 가리켰다.

[이 분이 바로 소연이오. 소연은 그녀의 처녀 때의 이름이오. 그리고 그 이름은 나 이외에는 천하에 아무도 부를 수 없소.]

선정은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스꽝스럼기도 해서 말했다.

[원래 그것은 담파의 처녀 때 이름이었구료. 불초가 모르고 당돌하게 불렀으니 아무쪼록 용서해 주시구료.]

조전손은 아주 의젓한 어투로 말했다.

[모르고 한 것은 죄가 아니고, 처음 저지른 죄는 용서받는 법이니 이번만은 내 용서해 주지.]

선정은 말했다.

[불초는 오래전부터 태행산 충소동 담씨 부부의 대명(大名)을 들어왔으나 인사를 드릴 인연이 없었소. 그리고 불초는 남의 등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여 담파에게 죄를 지었다는 것인지요?]

조전손은 화가 난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조금 전 소연에게 '최근에 재미있게 지냈냐'고 물었소. 그런데 그녀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당신의 그 못난 다섯 아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어와 중단시켜 버렸고, 아직까지 나의 말에 대답을 못한 상태이외다. 선 노형, 소연이 어떤 사람인지 한 번 알아나 보시오. 조전손이(趙錢孫李), 주오정왕(周吳鄭王)은 모두 양반의 성씨가 아니겠소? 설마하니 우리 양반들이 말을 할 때 당신네들이 아무렇게나 말을 잘라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시오?]

선정은 말도 되지 않는 말에 속으로 이 사람이 약간 어떻게 된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말했다.

[이 몸은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어 가르침을 받고 싶소이다.]

조전손은 말했다.

[무슨 일이오? 그대에게 밝은 길을 가르쳐 주어도 상관 없겠지.]

선정은 말했다.

[정말 고맙소. 고마워. 귀하는 담파의 처녀 때 이름을 천하에서 귀하 혼자만이 부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조전손은 말했다.

[바로 그렇소. 믿을 수 없다면 그대가 다시 한번 불러 보시오. 이 조전손이(趙錢孫李), 주오정왕(周吳鄭王), 풍진저위(馮陳躇衛), 장심한양(狀沈韓楊)이라는 사람이 그대와 무섭게 한 바탕 싸움을 벌이지 않는지.]

선정은 말했다.

[나는 물론 감히 부를 수가 없소. 하지만 담공 역시 부를 수가 없단 말이오?]

조전손은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한참 동안 말을 못 했다. 뭇사람들은 선정의 그와 같은 한 마디에 조전손이 할 말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전손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눈물 콧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광경에 모두들 어리둥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조전손이라고 일컫는 이 사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당당히 철면판관과 입씨름을 벌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겨우 한 마디의 가벼운 질문에 대성통곡하며 울음을 그칠 줄 모르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정은 그가 슬피 우는 것을 보고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끓어올랐던 노기가 가슴 속에서 사라지게 되엇다. 그리하여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조형(趙兄), 이것은 이 동생의 잘못인가 보오.]

그런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조전손은 흑흑 흐느끼면서 말했다.

[나의 성은 조가가 아니라오.]

선정은 의아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의 존성은 무엇이오?]

조전손은 말했다.

[나에게는 성씨가 없다오. 더 묻지 마시오. 더 묻지 말아.]

사람들은 이 조전손이 반드시 상심되는, 말하기 어려운 고충이나 비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으로서는 더 물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그가 흑흑 흐느껴 우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이때 담파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또 실성을 했나 보군! 뭇 형제들 앞에서 체면도 차리지 않을 작정이오?]

조전손은 말했다.

[그대가 나를 버리고 저 늙지 않는 담공에게 시집을 갔으니 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나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창자마저 끊어질 지경이라오. 이 따위 체면쯤이야 남겼다 무엇에 쓰겠소?]

뭇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알고 보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조전손과 담파는 과거 한 때는 서로 사랑하는 처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3. 늙은이의 열애(熱愛)

그 후 담파가 담공에게 시집을 가게 됨으로써 너무나 슬퍼 성명마저도 버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 모양이었다.

담파의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었으며 백발이 성성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 키가 크고 장대한 노파가 젊었을 때는 얼마나 매력이 있어서 조전손으로 하여금 늙어서도 정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는지 실감할 수가 없었다. 이때 담파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형, 옛일을 자꾸만 들먹여서 뭐 하자는거죠? 개방에서는 오늘 반드시 상의할 큰 일이 있으니 그대는 순순히 듣기만 하세요.]

매우 온화한 말로 달래는 듯하여 조전손은 흐뭇해졌다.

[그렇다면, 그대가 나에게 방긋 웃어 주구료. 그러면 내 그대의 말을 따르리라.]

담파가 미처 웃기도 전에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이 먼저 웃음소리를 냈다. 담파는 전혀 개의치 않고 조전손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조전손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그야말로 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눈이 어지러우며, 혼백이 두둥실 그의 몸에서 떠나가는 듯한 표정이 아닌가? 담공은 옆에서 이와 같은 광경을 보자 온 얼굴에 노기를 띠웠으나,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단예는 속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세 사람의 정은 세상 사람들을 도외시 할 정도로 깊구나. 나의...... 왕소저에 대한 정이 조전손과 같은 결과로 되는 게 아닐까? 아...... 담파는 그녀의 사형에 대해서 퍽이나 깊은 정을 갖고 있지만 왕소저는 그녀의 고종 오라비에게 정을 주고 있다. 조전손에 비하면 나는 크게 불리하다. 아...... 정말 큰일이군!)

교봉은 이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전손은 정말 성이 조씨가 아니었군! 소문에 의하면, 태행산 충소동 담공과 담파는 태행파의 절기로 명성을 날렸다고 했다. 이 세 사람의 말로 미루어 보아 이 세 사람은 같은 사문의 출신이 아닌 것 같다. 도대체 담공이 태행파인가 담파가 태행파인가? 만약 담공이 태행파라면 저 조전손과 담파가 사남매(師男妹)인데, 또 어떤 문파의 사람이란 말인가?)

이때 조전손이 다시 말했다.

[말을 들으니 고소에는 '상대방의 수법을 상대방에게 펼친다'는 모용복이가 있다는데, 대담하고도 당돌하게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인다고 들었소. 이 늙은이는 그를 만나 보고 그 녀석에게 무슨 재간이 있어 이 조전손이 주오정왕의 몸에 펼치는지 두고 보아야겠소. 소연, 그대가 나에게 강남땅으로 오라고 했기에 나는 오지 않을 수 없었소. 더군다나 나는......]

그런데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슬픈 울음소리를 내는데, 그 울음소리는 바로 조금 전에 조전손이 내었던 울음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뭇사람들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 사람은 울면서 하소연했다.

[나의 훌륭한 사매야, 이 늙은이가 어떤 점에서 잘못을 했더란 말이냐! 어째서 너는 담가라는 쭈그렁 영감에게 시집을 갔더란 말이냐? 나는 주야로 그대를 생각한 나머지 창자가 에이는 듯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대 소연 사매만을 기억해 왔노라! 사부님이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친자녀처럼 대해 주었거늘 그대는 나에게 시집을 오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우리 사부님을 볼 면목이 없구나!]

말하는 음성이나 어투는 조전손과 똑같았다. 뭇사람들은 조전손이 입을 딱 벌리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조전손 자신이 한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소리는 몸에 담홍색 의상을 걸치고 있는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바로 아주였다. 단예와 아벽 그리고 왕어언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행동거지, 그리고 말하는 표정까지도 곧잘 흉내 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이하고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조전손이 이와 같은 말을 들었으니 미친 듯이 분노를 터뜨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의 이와같은 말은 오히려 조전손의 슬픈 마음에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울음을 멈추고 있던 조전손의 눈가가 붉어지고 입술이 삐죽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고, 아주와 합창이라도 하는 듯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선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냉랭히 말했다.

[이 선모는 홀로 단(單)자와 같은 성씨를 쓰고 있건만 1처 4첩을 거느리고 있는 몸이고, 아들 손자들을 많이두고 있소. 그런데 그대 쌍(雙)모라는 사람은 외롭고 쓸쓸한 처지이구료. 우리가 개방의 서장로와 마부인의 초청을 받아 강남으로 온 것은 귀하의 혼인 대사를 상의하기 위해서이오?]

조전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선정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시 개방의 중요한 일을 상의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조전손은 발끈해서 말했다.

[뭐라고? 개방의 큰 일은 올바른 일이고 나와 소연의 일은 올바른 일이 아니란 말이오?]

담공은 여기까지 듣고 나서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혜(阿慧), 그가 실성한 것 같은 언행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나는 가만 있지 않겠소.]

담파는 발을 구르며 말했다.

[그는 실성한 게 아니예요! 그대가 그로 하여금 이 꼴이 되도록 만들어 놓고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담공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내가..... 언제 그랬단 말이오?]

담파는 말했다.

[내가 당신 같은 쭈그렁 바가지에게 시집을 가게 되자 우리 사형은 자연 마음 속으로 불만스럽게 생각하게 되었고......]

담공은 말했다.

[그대나 나에게 시집을 올 때 나는 쭈그렁 바가지도 아니었고 늙은이도 아니었잖아?]

담파는 노해 부르짖었다.

[이 양반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그 당시 당신이 꽤나 준수하고 훤칠했던 줄 아시나 봐?]

서장로와 선정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똑같이 이 세 괴물 같은 사람이 늙어도 점잖치 못하게 늙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세 사람은 무림에서는 신분이 대단한 선배명숙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묵은 애정문제를 가지고 다투고 있으니 실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서장로는 기침을 한 번 한 다음 입을 열었다.

[태산의 선씨 부자, 태행산의 단씨 부부, 그리고 여러 형씨들, 오늘 이렇게 왕림해 주시니 개방에서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마부인, 그대가 먼저 처음부터 말하시구료.]

 

그 마 부인은 줄곧 머리를 푹 숙인 채 한 쪽에 사람들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녀는 서장로가 하는 말을 듣고서야 천천히 돌아서서 나직이 말했다.

[선부께서 불행히 세상을 등지게 된 데 대해서 저로서는 그저 스스로의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선부께서는 아들이나 딸 하나도 남기지 못하여 마씨의 대를 이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슬프기만 합니다.]

그녀는 나직이 말하고 있었으나, 음성이 맑고 고와서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고 듣기도 좋았다. 그런데 그녀가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약간 흐느끼는 듯한 음성이 섞이게 되었고 다소 울음을 참으려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이런 광경을 보고 숲속의 뭇 영웅호걸들은 똑같이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똑같은 울음이라고 하더라도 조전손이 우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아주의 울음은 놀라운 것인데 비해 마부인의 울음은 마음이 쓰라렸다. 마부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선부의 장례를 치루고 난 후 유물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권경(拳經)을 갈무리했던 곳에서 밀봉한 편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겉봉에는 다음과같이 씌어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수명을 다하여 죽었을 때는 이 편지를 즉시 불태워 없애도록 하라. 그러나 만약 내가 비명에 죽는다면 이 편지는 즉시 본방의 여러 장로들에게 주어 함께 뜯어보도록 하라. 일이 중대한 만큼 결코 그르치지 말기 바란다>라고.]

마부인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숲속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야말로 바늘 떨어뜨리는 소리라도들릴 듯했다. 그녀는 잠시 쉬고 계속 해서 말했다.

[저는 선부가 그토록 정중하게 쓴 글을 보고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방주를 뵙고 유서를 바치려고 했으나, 방주께서는 여러 장로들을 데리고 선부의 원한을 갚으러 강남땅으로 떠난 이후라 보여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행히 방주께서는 이 편지를 볼수가 없었던 것이죠.]

사람들은 그녀의 말투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다행히'라는 소리에 모두 교봉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교봉은 오늘밤 여러 가지의 사정을 보아 중대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이 자기를 대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전관청과 네 장로의 역모는 이미 다스린 셈이지만 일이 결코 끝난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마부인의 그 같은 말을 듣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너희들에게 어떤 음모가 있는지 펼쳐 보아라. 이 교봉은 한 평생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없다. 어떤 모함을 하더라도 이 교봉은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다.)

마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이 편지가 개방의 중대한 사건에 관련되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방주와 여러 장로들께서 낙양에 계시지 않자, 혹시 때를 놓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서게 되었어요. 그래서 정주(鄭州)로 가서 서장로님을 만나 뵙고 편지를 올렸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서장로님께서 말씀해 주실 거예요.]

서장로는 몇 번 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일을 말하자면 은혜와 원한이 서로 얽혀 있어서 이 늙은이로서도 말하기가 난처하기 이를 데 없구료.]

끝의 음성은 잠겨 있었고 처량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는 등뒤에서 삼베로 만든 보따리를 풀어서 펼치더니 베로 만든 주머니를 꺼냈다. 그러더니 다시 그 속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냈다.

[이것이 바로 마대원의 유서입니다. 나는 대원이 어렸을 적부터 커가는 모습을 보아 왔으며 그의 필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이 편지의 글은 확실히 대원이 쓴 것이외다. 마부인이 이 편지를 나의 손에 전해 주었을 때, 이 편지의 밀봉 상태는 완전했고 그 누구도 뜯어 본 흔적이 없었소. 나 역시 시간을 지체하면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었기에 여러 장로들과 자리를 함께 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편지를 뜯어 보게 되었소. 마침 편지를 뜯게 되었을 때, 태산 철면판관 선정도 자리에 있었으니 증명을 해 주실 것이오.]

선정은 말했다.

[맞소이다. 그 때 불초 역시 서장로 댁에 머물고 있다가 친히 그 편지를 뜯는 것을 보았소.]

서장로는 편지 봉투를 열더니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놓고 말했다.

[나는 이 편지를 보게 되었을 때 이 편지의 글자나 필적이 매우 힘찬 것을 보고 마대원이 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소.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보았더니 서두에 씌어진 것은 검통오형(劒通吾兄)이라는 네 글자였소. 즉'검통형 보시오'라는 문귀를 보고 더욱더 이상한 생각이 들었소. 여러분들도 검통이라는 두 글자가 바로 개방의 전임 왕방주의 별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오. 그런데 왕방주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그 누가 그 분에게 편지를 썼을까 이상하게 생각했소. 그리하여 나는 먼저 편지의 내용을 보지 않고 우선 말미에 서명을 한 사람의 이름을 찾아 보았소. 그 순간 나는 놀람을 금할 수 없었소.]

선정은 말했다.

[저도 말미의 성명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소이다.]

이때 조전손이 불쑥 입을 열었다.

[선형, 그것은 그대의 잘못이오. 이것은 개방의 기밀에 속하는 편지이고 그대는 개방의 일대나 이대의 제자도 아니며 그야말로 뱀을 가지고 놀면서 밥이나 빌어 먹는 사람 측에 들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어찌 남의 중대한 편지를 넘보았단 말이오?]

그는 줄곧 실성한 사람처럼 흐리멍텅한 면을 보였었는데, 이 몇 마디의 말은 진정 이치에 맞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정은 얽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했다.

[나는 그저 말미의 서명을 보았을 뿐 편지의 내용은 보지 않았소.]

조전손은 말했다.

[일천 냥의 황금을 훔치는 것도 도적이고 한 푼의 엽전을 훔치는 것도 역시 도적이외다. 남의 서신을 훔쳐 보는사람은 군자가 아니고 소인이오. 소인이란 비열한 후레자식으로서 마땅히 죽여야 하지!]

선정은 속으로 울화가 치밀지 않는 바 아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치가 맞는 이야기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만나자마자 나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려고 한다. 혹시 나와 어떤 묵은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닐까? 강호에서 태산선씨 집안을 안중에 두지 않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뭇 사람들은 서장로가 편지 말미에 있는 서명자의 이름을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고 또 어찌 하여 선정이 그렇게 놀라와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전손이 자꾸만 끼어들어서 방해를 놓자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조전손을 노기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담파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은 왜 저 분을 노려보는거죠? 우리 사형의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어요.]

조전손은 담파가 자기를 돕자 흐뭇해져서 말했다.

[그대들도 보시오. 소연이마저 이와 같이 말하는 이상 어찌 틀릴 턱이 있겠소. 소연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언제나 틀림이 없소.]

갑자기 한 사람이 그와 똑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소. 소연이 한 말과 한 일은 언제나 틀림이 없소. 그녀가 담공에게 시집을 가고 그대에게 가지 않은 것은 절대 시집을 잘못 간것이 아니었소.]

말을 한 사람은 물론 아주였다. 그녀는 조전손이 조금전 모용공자를 모욕하는 말을 하자 화가 나서 자꾸만 그와 맞서게 된 것이었다.

조전손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주는 그야말로 상대방의 창으로 상대방의 방패를 공격하는 격이었다. 그러니까 바로 모용씨의 자랑하는 수법인 '그 사람의 수법으로 그사람에게 펼친다'는 형국이기도 했다.

그러자 매우 고마와하는 눈빛이 좌우 양쪽에서 아주에게로 쏟아졌다. 왼쪽의 눈길은 담공의 것이었고 오른쪽의 눈길은 바로 선정의 것이었다. 바로 이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했다. 담파가 어느덧 아주의 곁으로 와서는 그녀의 뺨을 후려치려고 하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내가 시집을 잘못 갔든 가지 않았든 네 계집과 무슨 상관이있어!]

그녀의 손 놀림은 너무나 재빨랐다. 아주가 피하려고 했으나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아주의 곱고 부드러운 뺨에는 금방 시뻘건 손자국이 나고 말았다.

조전손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너 이 계집애야, 톡톡히 맛을 보았겠지? 누가 너더러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라고 하던?]

아주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때 담공이 다가와 품 속에서 조그만 백옥으로 된 상자를 꺼내 열더니 고약을 찍어서는 아주의 얼굴에 발라 주었다.

담파가 그녀에게 따귀를 때린 수법도 빠른 것이었으나 따지고 보면 손을 뻗쳤다가 다시 거두어들인 데에 불과했다. 그런데 담공이 약을 바르는 일은 심히 복잡하고 세밀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아주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고약은 이미 그녀의 얼굴에 발라지고 말았다. 아주는 화끈거리고 부풀어 오르던 뺨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그녀의 손에는 하나의 조그마나한 물건이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고 바라보았다. 맑고 윤기 어린 백옥으로 만든 상자였다.

이것은 담공이 준 것으로서 바로 효과가 탁월하기 이를 데 없는 상처를 치료하는 묘약이었다. 그녀는 울려고 하던 얼굴에 웃음을 띠우지 않을 수 없었다.

 

서장로는 담파가 담공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는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나직하고 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 형제들, 도대체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를 명백히 밝히기 전에 할 말이 있소. 이 서모는 개방에서 70여년이란 세월동안 몸을 담아왔으며 근래에는 산천에 은거하여 강호에 돌아다니지 않고 남과 다투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남과 원한을 맺은일도 없소. 나는 이 세상에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자손도 없고 제자도 없소이다. 내 양심에 물어 사사로운 감정은 반 푼어치도 없소. 내가 몇 마디 하는 말을 당신들은 믿을 수 있겠소?]

개방의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서장로님의 말씀을 누가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서장로는 교봉을 향해 말했다.

[방주의 뜻은 어떠하오?]

교봉은 말했다.

[교모는 서장로님을 평소부터 우러러보아 왔습니다. 그 사실은 선배님도 아실 것입니다.]

서장로는 말했다.

[나는 이 편지를 본 이후 오랫동안 생각했으며 마음 속으로 우러나는 의혹을 누를 길이 없었소.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어떤 차질이 생기게 될까봐 즉시 이 편지를 선형에게 주어 읽도록 했소. 선형은 편지를 쓴 사람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라 그의 필적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오. 이 일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선형에게 이 편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밝히게 한 것이오.]

선정은 조전손을 한번 노려보았다. 그것은 그래도 당신이 할말이 있는가 하는 뜻이었다. 조전손은 즉시 입을 열었다.

[서장로가 그대에게 편지를 보여 주었으니 그대는 물론 보았겠지. 하지만 처음에 본 것은 역시 훔쳐본 것이 아니겠소? 그야말로 어떤 사람이 도적질을 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옛날 도적 출신인 사실은 씻을래야 씻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서장로는 조전손이 말을 가로채는 것에 개의치 않고 말했다.

[선형, 선형이 여러분들에게 이 편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밝혀 주시오.]

선정은 말했다.

[불초는 이 편지를 쓴 사람과는 오랜 세월을 두고 사귀어 왔으며, 집에 그 사람의 많은 편지를 보관하고 있소이다. 그래서 서장로와 마부인을 모시고 급히 저희 집으로 가서 옛날 편지를 찾아내어 대조를 하였소. 필적이 같았을 뿐 아니라 편지봉투와 종이까지도 똑같은 것이었소. 따라서 그것은 틀림없는 진짜임이 드러나게 되었소.]

서장로는 말했다.

[이 늙은이는 남들보다 나이를 몇 살이라도 더 먹었기 때문에 아무쪼록 일을 함에 있어서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하려고 했소. 더구나 이 일은 본방의 흥망성쇠와 한 분 영웅의 명예와 생명에 관계된 일인데 어찌 경솔하게 다룰 수 있었겠소?]

뭇사람들은 그와 같은말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교봉을 쳐다보았다.

그가 말하는 한 분의 영웅은 바로 교봉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감히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교봉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즉시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서장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태행산 담씨 부부께서 이 편지를 쓴 사람과는 퍽이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 담씨부부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했소. 담공과 담파는 그 동안의 우여곡절을 일일이 불초에게 설명하는 것이었소. 아...... 불초는 실로 차마 밝힐 수 없는 심정이오. 가련하고도 애석한 노릇이고 슬프고도 처량한 노릇이외다!]

사람들은 서장로가 담시 부부와 선정을 이곳 개방에 초청한 것은 그들을 증인으로 내세우기 위해서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서장로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담파는 그녀에게 한 분의 사형이 있는데, 이 일에 대해서 친히 겪고 목격한 바가 있으니 그에게 친히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일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소. 그녀의 그 사형은 바로 조전손 선생이외다. 어찌 되었든 담파의 공로가 크다고 할까? 한 장의 편지를 띄우자 선생은 곧장 달려와 주셨소.]

담공은 갑자기 얼굴 가득히 노기를 띠고 담파에게 말했다.

[아니, 당신은 그를 불러온 사실을 진작 나에게 말하지 않았소? 나를 속이고 몰래 그런 짓을 하다는 것은 못된 짓이지.]

담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냅다 손을 들더니 '철썩'하고 남편의 따귀를 한대 갈겼다. 담공의 무공은 분명히 담파보다는 고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처가 일장을 후려치자 막을 생각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의 일장을 얻어 맞았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약 상자를 꺼내 고약을 얼굴에 발랐다.

그러자 대뜸 시퍼렇게 멍이 들어 부어오른 얼굴이 가라앉았다. 한 사람은 굉장히 빠르게 때렸고 또 한 사람은 굉장히 빠르게 치료를 한 셈이였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의 끓어올랐던 노기가 누그러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전손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는 슬프면서도 애절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그랬었군! 그랬었군! 아...... 진작 그런 줄 알았더라면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았을텐데...... 그녀에게 몇 번 얻어맞는 일이 어려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조는 회한으로 가득차 있었다. 담파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과거 그대는 나에게 한번 얻어 맞으면 언제나 다시 나를 때려 그 빚을 갚으려고 했으며 한번도 양보한 적이 없었어요.]

조전손은 넋을 잃고 멍하니 서서는 지난 일을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의 소사매(小師妹)인 담파는 성질이 열화와 같았다. 그리고 성질을 잘 부렸으며 걸핏 하면 다른 사람에게 손찌검을 하곤 했다.

그 자신은 이유 없이 얻어맞을 때마다 그녀와 다투지 않았던가. 그로 인하여 두 사람의 아름다와야 할 인연이 맷어지지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담공은 담파에게 얻어맞고는 앙갚음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자 그제서야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느끼는 회한은 그로 하여금 슬픔을 금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수십 년간 그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소사매 같은 사람을 맞아들인 담공에게 반드시 커다란 장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은 그저 얻어맞고도 반격을 하지 않는다는 좋은 좀이 있을 뿐이었다. 조전손은 중얼 거렸다.

[아! 지금 그녀에게 얼굴을 몇 대 때려 달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응하지 않을 것이다!]

서장로는 말했다.

[조전손 선생, 아무쪼록 그 편지에 씌어진 사항을 모든 사람에게 말해주시구려. 그 편지에 씌어진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 밝혀 주시기 바라오.]

조전손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멍텅구리가 어째서 그 당시에 깨닫지 못했을까? 무공을 배우는 것은 적을 때리고 악인을 때리고 비열한 소인을 때리자는 것인데 어찌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때리는 데 사용했단 말인가? 때리는 것은 정이요, 맞는 것은 사랑이라...... 몇 대의 따귀를 얻어맞는 것이 뭐가 대단하단 말이냐?]

뭇사람들은 그가 우스꽝스럽기도 했고 그의 순정이 가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개방에서는 그야말로 큰 일을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넋을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서장로가 그를 청하여 천 리 먼 길을 달려오게 한 것은 한 가지 큰 일을 증명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넋을 빠뜨리고 있으니, 그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가 없게 되고 말았다.

서장로는 다시 말했다.

[조전손 선생, 우리가 당신을 이 자리에 모신 것은 편지의 내용을 이야기해 달라는 의도였소.]

조전손은 말했다.

[맞았소, 맞아! 그대가 나에게 편지에 관한 일을 물으니 말하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짧았지만 많은 여운을 남기고 있었소. 사십 년 전 한 지붕 밑에서 무예를 연마하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벌써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사형의 귀밑머리도 서리처럼 희어졌겠지요. 그러나 풍채와 웃는 모습은 옛날과 다름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서장로가 물은 것은 마대원의 유서에 관한 일이었는데 그는 담파가 그에게 보내 준 편지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담부인, 역시 담부인께서 그에게 말하도록 하십시요.]

이때 담파는 조전손이 자기의 평범한 한 통의 편지를 그토록 익숙하게 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아마도 그가 자기의 편지를 몇번이라도 읽었을 것이라 생각되어 크게 감동한 나머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형, 그대는 그 당시의 광경을 이야기하도록 하세요.]

조전손은 말했다.

[당시의광경을 나는 모두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그대는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내렸고, 땋은 머리카락 끝에는 붉은 댕기를 달지 않았소?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투룡전봉(偸龍轉鳳)이라는 일초를 가르치시며......]

담파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사형, 우리들의 옛날 일은 말할 것 없어요. 서장로께서는 그대에게 과거 안문관(雁門關) 밖의 난석곡(亂石谷)에서 벌어졌던 혈전을 묻는 것이어요. 그대는 친히 참여하지 않았어요?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해 드리도록 하세요.]

조전손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안문관 밖 난석곡이라고...... 나는...... 나는」

별안간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홱 몸을 돌리더니 서남쪽의 사람이 없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곧장 행자나무 숲속으로 달려들어 갈 판이었다. 뭇사람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이것 봐요! 가지 마시오! 빨리 돌아오시오. 빨리 돌아와!]

조전손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걸음을 빨리했다.

별안간 한 냉랭한 음성이 소리쳤다.

[사형의 귀밑머리는 이미 서리처럼 희게 변하였을 뿐 아니라 풍채나 웃는 모습은 더욱 옛날과 달라졌구려!]

조전손은 별안간 고개를 돌리고 뒤를 돌아 보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누가 말한 것이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을 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조공께서는 어찌 열등감에 빠져 그냥 도망치려고 하십니까?]

뭇사람들은 소리친 사람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그는 바로 전관청이었다.

조전손은 노해 부르짖었다.

[누가 열등감에 빠졌다는거냐? 그는 그저 얻어맞을 뿐 반격 할 줄 모르는 한 가지 재간밖에 모르는데,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는것이지?]

별안간 행자나무 숲속에서 한 늙그수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얻어맞고 반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천하에서 일등가는 재간이외다. 어찌 대수롭지 않은 재간이라고 할 수 있겠소?]

 

14. 아...! 안문관(雁門關)

모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행자나무 뒤에서 몸에 잿빛 승포를 걸친 노승이 걸어 나왔다. 각진 얼굴에 훤칠한 키를 가지고 있었으며 위엄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서장로는 부르짖었다.

[천태산(天台山)의 지광(智光)께서 오셨구료! 삼십여 년 동안 못 뵈었는데 대사의 모습은 여전하시고 건강하시군요!]

교봉과 육장로 등은 모두 일어서서 경의를 표했다. 지광화상은 과거 바다 건너 멀리 해외의 오랑캐 땅까지 가서 희귀한 나무 껍질을 채집해다가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일대의 장독에 걸린 수많은 백성들을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일을 하느라고 과로하여 두 번이나 큰 병을 앓게 되었으며 그 결과 무공을 깡그리 잃게 되었다. 그가 백성들에게 입힌 은혜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다투어 앞으로 나아가 절을 했다.

지광대사는 조전손에게 웃으며 말했다.

[무공이 상대방만 못할 때 얻어맞고 반격하지 않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무공이 상대방보다 나은데도 얻어 맞고 반격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전손은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서장로는 입을 열었다.

[지광대사의 은덕은 널리 퍼져 있으며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천하에 없소이다. 그러나 근 십여 년간 강호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셨는데 오늘 개방에 왕림하셨으니 이는 정말 우리의 복이 아닐 수 없소이다. 불초는 참으로 감사히 생각하는 바입니다.]

지광대사는 말했다.

[개방의 서장로와 태행산의 철면판관의 이름으로 첩지를 보내부르는데 이 늙은 것이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소. 더우기 두 분은 편지에서 이 일이 천하 창생의 운명과 관계된다고 했습니다. 마땅히 부르심에 응해야지요.]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대 역시 서장로와 선정이 초청해서 왔군!)

그리고 그는 다시 생각했다.

(평소 지광대사는 덕망이 매우 높다고 들었다. 따라서 결코 나를 모함하는 음모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어르신이 이곳까지 온 것은 실로 좋은 일이라 할 만하다.)

조전손은 갑자기 말했다.

[안문관 밖 난석곡 앞의 대전(大戰)에 지광대사도 참가했지요? 그러니 그대가 말하시구려.]

지광은 '안문관 밖 난석곡 앞의 대전'이라는 한마디를 듣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흥분과 두려움을 참으며 차마 못볼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으며 나중에 가서는 자비와 연민의 빛을 띠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살기가 너무 지나쳤소! 살기가 너무 지나쳤어! 그 일을 이야기 하려면 너무 부끄럽소. 여러 시주들, 난석곡의 대전은...... 이미 삼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왜 오늘 들먹이시오?]

서장로는 말했다.

[왜냐하면 지금 본방에서는 중대한 변고가 생겼기 때문이오. 이 일에 관계되는 편지가 여기 있소이다.]

그러면서 그 서신을 내밀었다. 지광은 편지를 받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서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원한이란 맺기는 쉬워도 풀기는 어려운 법, 어째서 옛 일을 다시 들먹이는 것이오? 이 늙은이의 생각에는 편지를 찢어 없애는 것이 좋을 것 같구료.]

서장로는 말했다.

[본방의 부방주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소이다. 만약 이 일의 자초지종을 밝히지 않는다면 마 부방주의 원한은 결코 씻기지 않을것이고 개방은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지광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옳은 말씀이오. 그것도 옳은 말씀이외다.]

그리고는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가에는 미인의 눈썹같은 상현달이 떠 있었다. 싸늘한 달빛이 행자나무 밑을 골고루 비추어 주고 있었다.

지광은 조전손을 한번 바라보더니 말했다.

[좋소, 이 늙은이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거짓없이 낱낱이 털어 놓겠소.]

조전손은 말했다.

[우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랬던 것이니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지광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오. 왜 스스로 자신을 기만하려 하시오?]

그는 뭇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30년 전 중원의 호걸들은 거란족의 무사들이 소림사(少林寺)에 습격해 온다는 소문을 들었소. 중원 호걸들은 소림사가 수백 년간 비장해 오던 무공책자를 일거에 탈취하려는 모양이라고 단정하게 되었소.]

뭇 사람들은 나직이 놀람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소림사의 무공 절기는 중원 무예의 진수라고 일컬어지고 있었으며, 거란국과 송나라는 수십 년 간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소림사의 무공비급을 탈취해 가서 그 무공을 군사들에게 익히게 한다면 전장에서 송 나라의 관병들이 어찌 당해 낼 수 있겠는가?

지광화상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 일은 정말 큰일이었소. 만약 거란이 그 일에 성공하게 된다면 대송나라는 망국의 화를 입게 될 것이고 우리 황제(黃帝)의 자손들은 모두 원나라 군사들의 창과 칼날 아래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소. 우리들은 일이 너무 다급한지라 상세히 알아볼 여유조차 없었소. 그저 거란의 무사들이 안문관 앞을 지나가게 되리라는 말만 듣고 한편으로 소림사에 통지하여 은밀히 경계하도록 하고 각자 나름대로 걸음을 재촉하여 안문관 밖으로 달려갔소. 그러니까 안문관 밖에서 적들을 맞아 공격하여 그들의 간악한 계략이 성공하지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소.]

여러 사람들은 거란과 싸움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자 뜨거운 피가 끓어 올랐다.

다른 한편으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송나라는 수차 거란의 침입을 받아 왔었다. 그리고 매번 싸울 때마다 땅을 조금씩 빼앗기고 있었다.

지광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교봉을 응시하며 말했다.

[교방주, 만약 그대가 이 소식을 접했다면 그대는 과연 어떻게 하셨겠소?]

교봉은 낭랑히 말했다.

[지광대사, 이 교모는 견식이 얕고 재주와 덕이 부족하여 문도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결과 방의 형제들에게 역심을 품도록 했습니다.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하지만 교모는 피가 끓고 용기가 있는 남자입니다. 그와 같은 큰일에 대하여 결코 시비를 판가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우리 대 송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요나라의 침범을 당해 왔었습니다. 나라의 원수를 누군들 갚으려 화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소식을 들었다면 형제들을 끌고 안문관으로 달려가 적을 저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매우 비분강개 했으며 장부의 기개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뭇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으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사내 대장부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지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안문관 밖으로 나아가 매복해 있다가 요나라 군사들을 습격한 것은 교방주가 볼 때 잘못이 아니란 말이지요?]

교봉은 재차 다짐하듯 묻는 말에 입을 열었다.

[여러 선배님들의 영명하신 공덕은 이 교모로서도 우러러마지 않는 바입니다. 그야말로 일찌기 삼십년 전에 태어나 선배님들을 따라 그와 같은 의거에 참여하여 오랑캐들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지광은 그윽한 시선으로 교봉을 바라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몇 조로 나누어서 안문관으로 달려가게 되었소. 나와 이 형씨는......]

그러면서 조전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제 1조에 속했었소. 우리 둘은 모두 제 1조에 속했었고 통솔자는 나이가 많지 않았소. 나보다 몇 살 아래였지만 무공이 탁월하고 또한 무림에서의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였고 일체의 권한을 그에게 위임하고 그의 명령대로 따르려고 하였소. 2조에는 개방의 왕방주,만승도(萬勝刀), 왕유의(王維義), 지절검(地絶劍), 황산(黃山)의 학운도장(鶴雲道長)등이 속해 있었소. 모두가 당시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는 일류 고수였소. 그 당시 이 늙은이는 아직 출가하지 않은 상태로 군웅들틈에 끼게 되었지요. 따지고 보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적을 죽여 나라에 보답하고자 애썼으며, 힘이 있으면 있는대로 적과 싸우려 했소. 그런데 저 분 형씨는 그 당시에도 이 늙은이보다 무공이 훨씬 고강했으니 지금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조전손이 말했다.

[그렇지, 당시 그대의 무공은 나와 차이가 많았지. 그 차이는 이 정도였지.]

조전손은 말을 하며 두 손바닥을 마주 보게 하고 아래 위로 벌렸는데 그 간격은 한 자 정도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간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지 다시 두 손의 간격을 조금 더 벌려 놓아 그 차이가 한 자 반 정도 되게 만들었다.

지광은 계속해서 말했다.

[안문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황혼녘이었소. 우리는 관을 벗어나서 십여 리를 더 앞으로 달렸소. 그리고 조심스레 경계를 했소. 그러자 별안간 서북쪽에서 마필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는데 소리로 미루어 보아 마필의 수는 십여 기 쯤 되는 듯했소. 1조의 통솔자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고, 우린 모두 제자리에 멈춰서게 되었소. 각자의 심정은 기쁘면서도 긴장되었지요. 기쁜 것은 소식이 정말 틀림없었다는 점과 다행히 우리가 시기를 놓치지 않고 달려와 그들을 미리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소. 그러나 모두들 내습해온 거란의 무사들이 대단히 무서운 고수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소. 그들은 선의를 가지고 오지 않는 사람들이고 중원 무학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에 도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진대 그들은 필시 거란인들 가운데서도 만 명 가운데 한 명씩 뽑횐 대단한 고수들이 아니겠소? 더군다나 송나라는 거란족과 싸워 실로 이긴 적보다는 진 적이 더 많았소. 그러므로 그 날 싸움에서 우리가 이긴다는 보장을 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던 것이고 그래서 긴장하게 되었지요. 통솔자는 손을 흔들었소. 그리하여 우리 스물 한 명은 나누어 길 옆의 커다란 바위 뒤로 숨었소. 길 왼쪽은 깊은 골짜기였소. 내려다 보기만 해도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소.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와져 오고 칠팔 명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소. 노래는 바로 요나라의 노래였는데 노래소리는 길고 드높았으며 끝이 없었어요. 나는 줄곧 칼을 쥐고 있었는데 손바닥에 땀이 나서 게속 잡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무릎에 손바닥을 닥았지만 얼마 후면 다시 손이 젖곤 했소. 통솔자는 내곁에 몸을 엎드리고 있었는데 내가 불안해 하는 것을 보고는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려 주었소. 그리곤 나에게 웃어 보였소. 그리고 다시 왼손을 뻗쳐서는 일초를 내리치는 시늉을 하였소. 곧 오랑캐를 무찌르자는 자세를 취한 것이었소. 나 역시 그에게 웃어 보였으며 그러고 나니 훨씬 마음이 안정되었소.

요나라 무사들이 약 50여 장 밖에 이르게 되었을 때 나는 커다란 바위 뒤에서 내다 보았소. 그런데 그 거란 무사들은 모두 옷을 걸치고 있었고 어떤 자는 손에 기다란 창을 들고 어떤 자는 구부러진 칼을 들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활시위에 화살을 먹인 채 들고 있었으며 또 어떤 자의 어깨 위에는 커다랗고 흉맹한 사냥하는 독수리가 앉아 있었소. 그러한 모습으로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으며 우리가 매복해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이 보였소.

순식간에 나는 앞장선 몇 사람의 거란 무사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하나같이 짧은 머리에 짙은 수염 등 그 표정이 흉악하기 그지 없었소. 그들이 점점 다가오자 나의 가슴은 점점 더 두근거렸으며 심장이 금방이라도 입을 통해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았소.]

뭇 사람들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게 되자 이미 삼십여 년 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쿵쿵 뛰며 흥분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지광은 교봉에게 물었다.

[교방주, 이 일의 승패는 대 송나라의 국운과도 연관되며 중원땅의 수천만 백성들의 생사와도 직결되어 있었소. 그런데 우리들은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이 서지 않았고 유리한 점이라면 우리들은 어두운 곳에 있고 적은 밝은 곳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뿐이었소. 그때는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했다고 생각하오?]

교봉은 말했다.

[병법에서는 속임수를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는 데 있어서 강호의 도의와 무림의 규칙을 따질 순 없지요. 요나라 군사들이 우리 송나라 백성들을 살육할 때 사정을 둔 적이 있습니까? 불초의 의견으로는 마땅히 암기를 사용했어야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암기에는 극독을 묻혀야 하겠지요.]

지광은 손을 뻗어 무릎을 '탁' 쳤다.

[바로 그렇소. 교방주의 의견은 당시 우리가 생각한 것과 같구료. 통솔자는 요나라 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길게 휘파람을 불었소. 그리하여 매복해 있던 우리 군사들은 저마다 다투어 암기를 쏘거나 던지기 시작했소. 강표(鋼?), 수전(袖箭), 비도(飛刀), 철추(鐵錐)...... 모두 하나같이 극독을 묻힌 것들이었소.

그러자 뭇 요나라 군사들은 '악, 악'하는 비명을 질렀고 그들중 대 부분이 말에서 떨어졌소.

그러자 개방의 어떤 제자들은 박수와 갈채를 보내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지광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때 나는 똑똑히 헤아릴 수 있었는데 거란의 말은 모두 열 아홉 필이었고 우리는 암기로 열 두 사람을 해치웠소. 나머지는 모두 일곱 명에 불과했소. 우리는 일시에 달려들어 병기를 휘둘러 그 일곱 사람을 삽시간에 모조리 죽여 버렸고 한 사람도 살려 보내지 않았소.]

개방의 사람들은 큰 소리로 환호했다.

그러나 교봉과 단예는 생각했다.

(그 거란 무사들은 만 명에서 한 명씩 뽑은 일류의 무사들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토록 맥을 못 추고 삽시간에 참변을 당했을까?)

이때 지광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일거에 19명의 거란 군사를 해치웠소. 기쁘기는 했지만 크게 의심이 갔소. 그들은 결코 고수들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소식이 정확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혹시 요나라 사람들이 고의로 우리를 유인하려는 계책으로 우리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몇 마디의 말을 상의하기도 전에 다시 말굽 소리가 서북쪽에서 들려 왔으며 두 필의 말이 달려왔소. 이번에 우리들은 매복하지 않고 곧장 달려 나가 그들을 맞았소.

그런데 말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일남일녀였소. 남자는 체구가 우람했고 모습도 당당한 편이었으며 복장 역시 조금전 19명의 무사들의 옷보다 화려했소. 또 여인은 젊은 부인이었는데 손에는 한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소. 그들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서는 웃으면서 다가왔소. 그들의 태도로 보아 매우 정다운 것이 틀림없는 한 쌍의 젊은 부부였소.

이 두 명의 거란 남녀는 우리들을 발견하자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띠웠소. 그러나 19명의 무사들이 죽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 남자의 얼굴 표정은 매우 험악해졌으며 즉시 우리에게 큰소리로 호통을 치는 것이었소. 거란말로 한참 지껄이는데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소. 산서대동부(山西大同府)의 철탑(鐵塔) 방대웅(方大雄) 대협이 한 자루의 빈철곤을 쳐들고 호통을 내질렀소.

'요나라 개새끼야, 목숨을 바쳐라!'

그리고는 빈철곤을 휘둘러 거란 남자를 후려치려 했소. 그때 통솔자는 어떤 의심이 나는지 큰 소리로 말했소.

'방 세째형, 경거망동하지 마시요! 그의 목숨을 해치지 말고 사로 잡아 똑똑히 물어 봅시다'

통솔자의 그 한 마디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말 위에 탄 거란인 남자는 손을 뻗쳐 방대웅의 손에 들린 빈철곤을 붙잡아 바깥 쪽으로 비틀었소.

그러자 '우드득'하는 음향과 함께 방대웅의 오른쪽 팔의 관절이 어긋나게 되었소. 그런데 그 요나라 사내는 빈철곤을 빼앗아 허공에 내려치는 것이 아니겠소? 우리들은 큰소리로 외쳤으나 달려들어 방대웅을 구하기는 이미 늦었으므로 즉시 칠 팔 명이 암기를 들어 그에게 쏘았소. 그런데 그 요나라 사내가 왼쪽의 소매자락을 휘두르자 한 줄기의 강한 바람이 일어 일거에 그 8개의 암기를 모조리 한편으로 날아가도록 만들었소.

'방대웅이 이제는 살아 남지를 못하겠구나'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 요나라 사내는 빈철곤과 방대웅의 몸뚱이를 함께 들어 올리더니 길 옆으로 던졌소. 그리고는 무어라고 지껄이는 것이었소.

그 사람이 사용한 재간을 목격하게 되자 우리 모두는 경악하게 되었소. 그자의 무공은 실로 보기 힘들 정도로 고강했으며 먼저 번 전해 온 소식이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소. 따라서 계속해서 몰려올 고수들은 더욱더 고강하리라고 판단하였소. 그리하여 우리들은 많은 수의 사람이 함께 달려들어 한 사람이라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소.

그리하여 6,7명이나 되는 사람이 일제히 그에게 공격해 들어갔으며 다른 너댓 명의 사람은 그 젊은 부인에게 공격해 들어갔소. 그런데 그 젊은 부인은 무공을 전혀 모르고 있었소. 그 누군가가 일검(一劍)으로 그녀의 한쪽 팔을 잘랐소. 그러자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갓난 아이가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고 곧이어 다른 사람이 한 칼로 그녀의 머리를 내려쳐 죽였소. 그 요나라 사람의 무공은 무척 고강했으나 7,8명의 고수들이 일제히 달려 들어 칼과 검을 펼쳐서는 꼼짝 못하게 하는 바람에 자기의 처와 자식을 구할 수가 없었소. 처음에 그는 잇따라 몇 초를 펼쳐 우리 형제들의 무기를 빼앗았을 뿐 결코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소. 그러다가 처자가 죽자 대뜸 눈이 붉어지고 얼굴마저도 무섭게 이그러지게 되었소. 그때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되자 그만 간담이 서늘해져서는 앞으로 나서질 못하게 되었소.]

조전손은 말했다.

[그것은 그대를 탓할 수 없지! 그건 그대를 탓할 수 없어!]

본래 그는 담파와 이야기할 때를 빼놓고는 언제나 비웃음이 섞인 어조로 말하곤 했다.

그런데 그 한 마디의 말은 침통하기 그지 없었다.

지광은 말했다.

[그 한바탕의 악전고투는 이미 삼십 년 전의 일이었지만 그 삼십 년 동안 나는 수백 번이나 꿈속에서 그 광경을 보곤 했소. 그당시 악전고투를 하던 광경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나의 마음 속에 새겨지게 되었소. 그 요나라 사내는 두 팔을 비스듬히 휘둘렀소. 그리고 어떠한 금나수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우리 형제 두 사람의 무기를 탈취해 가지고 한자루로는 찌르고 한자루로는 내리쳐서 당장에 그 두 형제를 죽여 버리는 것이었소. 그는 때로는 말등에서 훌쩍 뛰어 내려왔고 때로는 나는 듯 말등으로 뛰어 올랐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마치 유령의 움직임 같았소. 맞았소. 그는 진정 마귀(魔鬼)의 화신(化身)이라고 할 수 있었소. 동쪽에서 달려들어 한 쌍을 죽이는가 하면 서쪽으로 돌아가 다시 한 쌍을 죽이곤 했소. 그리하여 삽시간에 우리 스물 한 명의 형제들 가운데 아홉명이 그의 손에 죽음을 당했소. 이렇게 되자 모두들 눈시울을 붉히게 되었소. 통솔자와 왕방주 등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그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그 사람의 무공은 실로 놀라웠으며 일거수 일투족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위에서 펼쳐지곤 했소. 이때 석양은 핏빛을 뿌리며 기울고 있었고 안문관 밖은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었소 거기다가 한마디, 한마디 영웅호걸들이 죽을때 마다 부르짖는 단말마의 비명이 섞이게 되었고 두개골과 사지 그리고 선혈에 물든 무기들이 공중에서 난무하게 되었소. 그때의 상황은 무예가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그 누구를 도와 생명을 건져줄 만한 겨를조차 없었소. 나는 그와 같은 정세를 살피게 되자 놀라기에 앞서 두려움을 느꼈소. 그렇지만 뭇형제들이 하나하나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되자 불현듯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게 되고 용기를 내게 되었소. 그리하여 말을 탄 채로 그에게 곧장 달려들게 되었소. 나는 두 손으로 칼을 쳐들고 그의 머리를 내려치려 했소. 만약 이 한 칼이 그의 머리에 적중되지 않는다면 나의 목숨이 오히려 그의 손에 끊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런데 나의 커다란 칼날이 그의 머리 위 한 자도 못 되는 곳에 이르자 그는 한 사람을 잡아 그 잡힌 이의 머리통을 내 칼날 아래에 들이미는 것이 아니겠소. 내가 흘낏 보니 그 잡힌 사람은 강서성 두씨삼웅(杜氏三雄)가운데 둘째였소. 깜짝 놀란 나는 촉망중 그 칼을 거두어들이게 되었소. 그 큰 칼을 급히 거두어들이기란 불가능했소. 나는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만 내가 타고 있는 말의 머리를 내려치게 되었소. 그러자 그 말은 처량히 울부짖으며 펄쩍 뛰었소. 이때 요나라 사내는 일장을 나에게 후려쳐 왔소. 다행이 그때 내가 타고 있던 말이 때 맞추어서 펄쩍 뛰는 바람에 내 말이 대신 고스란히 그 일장을 받게 되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내 근골이 일제히 끊어져 목숨을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오. 그 일장의 힘은 대단히 웅후했소. 나와 말은 함께 날아떨어지게 되었고 내 몸은 붕 떠서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 위에 걸쳐지게 되었소. 그때 나는 이미 정신이 흐리멍텅 해졌으며 나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또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소. 그런데 허공에서 내려다 보니 그 자의 주위에 싸우고 있는 형제들이 갈수록 점차 줄어들었으며 겨우 대여섯명만이 남게 되었소. 곧이어 나는 이 형씨가......]

그러면서 그는 조전손을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 몸을 흔들 하더니 피바다 속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았소. 그때 나는 이 형제도 목숨을 잃은 줄 알았소.]

조전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따위 못난 일을 말하려니 정말 부끄럽소. 나는 상처를 입은것이 아니라 놀라 기절했다오. 그때 나는 거란의 사내가 두씨 집안의 둘째를 번쩍 들더니 그만 바위에 내려쳐 그가 소리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죽어 버린 광경을 목격했지요. 그리하여 둘째형의 몸에서는 피가 낭자하게 흘러 내렸소. 그 순간 갑자기 나는 심장이 뛰지 않는 다는 사실을 느꼈으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버렸다오. 맞아! 나는 담이 적은 사람이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놀라 기절을 해 버렸으니 말이오.]

지광은 말했다.

[그 요나라 사내가 마귀처럼 여러 형제들을 죽이는 광경을 보고도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오.]

그리고 그는 하늘에 걸쳐 있는 상현달을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그 요나라 사람과 싸우는 사람은 불과 4명에 불과했고 통솔자는 그 자신 역시 무사히 살아 남지 못하고 끝내 그 자의 손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던지 잇따라 호통쳐 물었소.

'그대는 누구요? 그대는 누구요?'

요나라 사람은 말하지 않았소. 대뜸 두 수를 펼쳐 재차 두 사람을 죽였소. 그리고 발을 들더니 왕방주 등에 있는 혈도를 걷어차 버렸고 잇따라 왼발을 원앙연환(鴛鴦蓮環)식으로 걷어차 통솔자의 옆구리를 내질렀소. 그 사람의 발길질하는 수법은 정말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교묘했소. 만약 화를 당한 사람들이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나도 모르게 갈채를 보낼 뻔했소. 그 요나라 사내는 강적을 모두 섬멸하게되자 그 젊은 부인의 곁으로 가서 시체를 안고 통곡하기 시작했소. 그 울음소리는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소. 나는 그 울음소리를 듣자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소. 그리고 저 마귀와 같은 요나라 사람에게도 인정은 있으며 애통하게 생각하는 정은 결코 우리 한(漢)나라 사람 못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소.]

조전손은 냉랭히 그 말을 받았다.

[그게 뭐가 이상하오? 야수에게도 부부에 대한 정과 자식에 대한 애착이 있는 법이오. 요나라 사람 역시 사람인데 어찌 한인보다 못하겠소?]

개방의 몇몇 사람이 부르짖었다.

[요나라 새끼들은 흉폭하기 그지 없소! 독사나 맹수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는 않소이다! 결코 우리 한나라 사람과 같을 수가 없소!]

조전손은 냉소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지광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요나라 사람은 한동안 울더니 그들의 시체를 들고 한참 들여다 보았소. 그러더니 그 갓난아기의 시체를 그 어미의 품 속에 안겨 주었소.

그러더니 통솔자의 앞으로 다가가서는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하는 것이었소. 통솔자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았소. 그러나 통솔자는 옆구리 혈도를 집혀 있었기 때문에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소.

요나라 사내는 갑자기 한 줄기 긴 휘파람 소리를 내불었소. 그리고는 땅바닥에서 한 자루의 칼을 집어들자 석벽에다 무언가를 새기기 시작하였소. 이때 날이 어두워졌고 나는 그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그가 무어라고 쓰는 지는 알 수 없었소.]

조전손은 말했다.

[그가 새긴 것은 거란의 문자(文字)로서 그대가 보았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오.]

지광은 말했다.

[그렇소. 나는 보았다 하더라도 몰랐을 것이오. 그때 사방은 조용하고 어두웠으며 다만 '쫙쫙'하고 석벽에 글을 새기는 소리와 돌가루 떨어지는 소리밖에 들리는 것이 없었소. 나는 숨도 한번 크게 쉬지 못했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칼을 내버렸소. 그리고 몸을 구부리더니 그의 아내와 자식의 시체를 안고 벼랑가로 가더니 바로 왼쪽에 있는 그 깊은 골짜기로 몸을 던지는 것이었소.]

군중들은 거기까지 듣자 모두 '아'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와 같은 결말을 맞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지광대사는 말했다.

[여러 분둘은 내 말을 듣고 의아하게 여길 것이오. 그 당시 나는 친히 그 광경을 목격했는데도 믿어지지 않았소이다. 나는 본래 그와 같이 무공이 고강한 사람이라면 요나라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을 것이며 이번에 중원으로 들어와 소림사를 습격함에 있어서 설사 그가 우두머리는 아닐 지라도 많은 무사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요.]

 

15. 영웅의 길

지광대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가 우리의 통솔자와 왕방주를 사로잡았으니 그 여세를 몰아 더욱 무서운 기세로 소림사로 쳐들어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가 벼랑에서 떨어져 자결을 하리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소. 벼랑은 너무나 깊어 안개와 구름에 가려져 있어 밑바닥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소. 거기에서 뛰어내린다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더라도 피와 살로 만들어진 몸뚱아리로서 어찌 목숨이 붙어 있을 수가 있겠소? 나는 그만 놀란 나머지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를 내어지르게 되었소.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가운데 더욱 기이한 일이 일어났소.

바로 내가 놀람에 찬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게 되었을때 '응애, 응애'하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바로 난석곡의 골짜기 아래서 들려 오는게 아니겠소? 그리고는 곧이어 시커먼 물건이 골짜기에서 날아올라와 '탁'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왕방주의 몸 위에 떨어졌소. 왕방주의 몸 위에 떨어진 것이 갓난아기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왕방주의 옆으로 달려가 보았소. 그 갓난아기는 그의 배 위에 놓여진 채 계속하여 울어대고 있었소. 나는 생각해 보고 모든 걸 알 수 있었소. 원래 그 거란의 부인이 피살될 때 아기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그때 일시 이 갓난 아기는 기절을 했을뿐 죽지 않았던 것이오. 그 요나라 사람은 애통한 나머지 그 아기의 숨이 멈춘 줄 알고 시체로 생각하여 시체를 안고 벼랑 아래로 뛰어 내렸던 것이오. 그런데 그 아기가 충격을 받자 깨어나 울었던 것이지요.

그 사내의 솜씨는 정말 훌륭했소. 아들이 산 채로 골짜기에 떨어져 죽지 않도록 즉시 아기를 위로 던졌던 것이오. 그런데 그는 그 위치와 떨어진 거리를 정확히 계산하여 절묘하게 왕방주의 배 위에 아기를 던져 아기로 하여금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한 것이었소. 그가 허공에서 아래로 떨어질 때서야 그 아들이 죽지 않은 것을 알고 아기를 위로 던진 것인데 그는 참으로 생각이 재빨랐을 뿐 아니라 힘을 주는 것도 털끝하나 틀리지 않을 만큼 정확했소. 이와 같은 기지와 이와 같은 무공은 실로 놀랍고 무섭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소.

나는 뭇형제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자 비통한 나머지 그 갓난아기를 벼랑 아래로 던져 죽이려고 했소. 그런데 던지려고 했을 때 갓난아기가 다시 큰 소리로 울부짖는 것이었소.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았소. 그 조그만 얼굴은 새빨갰으며 까만 눈동자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소. 내가 그 눈동자를 쳐다보지 않고 그냥 벼랑에 던져 버렸다면 모든 것은 끝났을 것이오. 그러나 아기의 얼굴을 보자 도저히 그와 같은 독수를 쓸수가 없었소. 그래서 생각했소.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갓난아기를 죽인다면 어찌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으랴.']

그러자 개방 중의 어떤 사람이 입을 열었다.

[지광대사. 요나라 자식들은 우리 한나라 사람들을 부지기수로 죽였소. 나는 친히 요나라 놈이 우리 한나라 아기를 산채로 장대에 꿰어들고 말을 탄 채 거리를 누비며 의기양양해 하는 꼴을 본적이 있소. 그들은 죽이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그들을 죽일 수 없단 말이오?]

지광대사는 한숨을 쉬었다.

[말은 그렇지만 흔히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갖고 있다고 하지 않소? 그 날 나는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갓난아기를 죽일 수 없었소. 그대들이 나를 잘못했다고 해도 좋고 나의 마음이 너무 약하다고 해도 좋소. 어쨌든 나는 그 갓난아기의 목숨을 살려 두기로 했소.

곧이어 나는 통솔자와 왕방주의 혈도를 풀어 주려고 했소. 그런데 첫째, 나의 재간이 부족했고, 둘째, 거란인의 발길로 차서 혈도를 짚는 재간이 너무나 고명하여 내가 아무리 두드리고 누르고 추혈과궁(推血過宮)의 수법을 써서 근력과 살을 풀어 주려고 허지만 통솔자와 왕방주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입을 열어 말을 하지도 못했소. 나는 별 방법이 없었고 또한 거란인의 후원군이 다시 들이닥칠가봐 세 필의 말을 데려다가는 통솔자와 왕방주를 안아다 말들에 태웠소. 그리고 내 스스로 한 필의 말을 타고 그 아기를 안은 채 두 필의 말을 끌고 밤을 도와 안문관으로 들어가게 되었소. 요행히 그 이튿날 밤 두 분의 봉해졌던 혈도가 시간이 흐르자 저절로 풀어지게 되었소.

통솔자와 왕방주는 거란의 무사들이 소림사를 습격할 일을 여전히 염려하고 있었소. 그리하여 혈도가 풀어지는 즉시 나가 살펴보았소. 그런데 곳곳에 시체가 널려 있는 것이 어제 저녁 무렵 우리가 떠나 올 때와 똑같았소. 나는 고개를 내밀어 난석곡 아래를 내려다 보았소. 어떠한 것도 볼 수가 없었소. 우리 세 사람은 무참히 죽음을 당한 우리 형제들의 시체를 매장했소. 그런데 사람의 수를 헤아려 보니 시체는 열 일곱 구밖에 되지 않았소. 본래 순사한 사람의 수는 열 여덟이었는데 어째서 한 구의 시체가 모자랐을까요?]

그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조전손을 바라보았다.

조전손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중 한 구의 시체는 살아서 돌아갔지. 그리하여 지금도 산송장 노릇을 하고 있다오. 그 사람이 바로 조전손이 주오정왕이라는 사람이라오.]

지광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우리 세 사람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혼전 가운데 그 사람이 아마 난석곡 아래로 떨어졌나 보다고 생각했소. 그와 같은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뭇형제들을 모조리 묻고 나서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거란인들의 시체를 들어서는 모조리 난석곡 아래로 던져 버렸소. 이때 통솔자가 갑자기 왕방주에게 말했소.

'검통형, 그 거란인이 만약 우리 두 사람을 죽이려면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을텐데, 어째서 우리의 혈도만 짚고 목숨은 살려 주었을까요?'

왕방주는 말했소.

'그 일은 나도 알 수가 없구료. 우리 두 사람은 통솔자이고 또 한 그의 처자를 죽였으니 이치대로 따져 말한다면 그는 우리들을 죽였어야 옳았소.'

세 사람은 상의를 해보았으나 어떠한 결과도 얻을 수 없었소. 통솔자가 말했소.

'그가 석벽에 새겨 놓은 글은 어떤 깊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구려'

그러나 우리 세 사람은 모두 거란의 문자를 몰랐소. 통솔자는 계곡의 물을 길어와 땅바닥에 굳어 있는 피를 녹여서는 석벽에다 발랐지요. 그리고는 하얀 옷자락을 찢어 내어 석벽의 문자를 뜨게 되었소. 그 거란의 문자는 바위 속에 거의 두 치나 파여져 있었는데 그 거란의 사내가 한자루의 칼로 아무렇게나 새긴 것이 이정도니 팔힘만 하더라도 천하에 독보적이며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생각했소. 우리 세 사람은 그 문자를 떠내면서도 암암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 그리고는 하루 전날의 광경을 돌이켜 보면서 여전히 떨려오는 것을 금할 수 없었소. 그후 우리는 안문관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왕방주는 한 명의 소장수와 말장수를 찾아내게 되었소. 그 사람은 종종 요나라의 성안으로 들어가 소를 팔았기 때문에 거란의 문자를 알고 있었소. 그리하여 우리는 그 백포로 떠온 글자를 그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는 한문으로 그것을 번역해서는 종이에다 써 주었소.]

거기까지 말한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그 말장수의 번역문을 읽어본 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믿어지지 않는 얼굴을 했소. 그러나 그 거란인은 그때 이미 자결을 결심한 터였는데 어찌 거짓말을 하였겠소? 우리는 다시 거란문자를 아는 사람을 찾게 되었고 그에게 역시 그 백포의 어구를 번역해 달라고 했었는데 그 뜻은 역시 똑같았소. 자, 만약 진상이 확실히 그러하다면 비단 나라를 위해 순사한 십칠 명의 죽음이 억울할 뿐만 아니라 이들 거란의 사람들 역시 무고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고 그 거란인 부부에 대해서 결코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이었소.]

사람들은 그 석벽에 씌어진 문구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지광이 주저주저하며 말을 하지 않자 몇몇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질문을 던졌다.

[그 글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어째서 그들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 하시는지요?]

[그 거란인 부부가 어찌해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지요?]

지광은 말했다.

[여러 형제들, 내가 여러분들의 궁금증을 자극하느라 그 내용을 밝히지 않는 것이 아니오. 석벽의 문자가 사실 그대로라면 통솔자와 왕방주, 그리고 우리 모두의 행위는 크게 잘못된 것이었고 사람들을 대할 면목이 없기 때문이오. 이 지광은 무림에서 무명소졸이니 상관이 없습니다만 우리의 통솔자와 왕방주는 무림에서 어떤 지위와 신분을 누리고 있었겠소? 더구나 왕방주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니 나는 함부로 두 분의 명성을 훼손시킬 수 없소. 그러니 내가 말 못하는 점을 용서하시오.]

개방의 왕방주 왕검통(王劍通)의 명성은 이미 세상에 혁혁하게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교봉과 장로들, 모든 제자들은 왕검통을 지극히 존경하고 있었다. 따라서 뭇 사람들은 호기심이 무척 일었으나 왕방주의 명성에 누가 된다는 말에 감히 입을 열어 물으려 하지 않았다.

지광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은 논의를 한 끝에 정말 사실이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우리는 잠시 거란인 갓난아기의 목숨을 끊지 않고 소림사로 달려가 동정을 엿보기로 했소. 만약 거란인의 무사들이 정말 대거 침입한다면 그때 갓난아기를 죽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오. 그리하여 말을 몰아 밤을 새워 소림사로 달려가게 되었소. 그런데 소림사에는 각처의 많은 영웅들이 응원차 와 있었소. 사실 이 일은 우리 송나라 수천만 백성의 안위와 관계되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소식을 듣기만 했다면 그 어떤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고 했던 것이지요.]

지광은 눈길을 들어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소림사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모임에 대해서는 이곳에 있는 비교적 나이 많은 영웅들은 대개 참여했으니 상세한 사정을 내가 누누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각처에서 응원차 오는 영웅들은 점차 그 수를 더해갔소. 그런데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전후해서 섣달까지 3개월 동안 아무런 별다른 조짐이 보이지 않았소. 그리하여 그런 전갈을 해온 사람을 찾아 자세히 알아 봤으나 그 사람도 찾을 수가 없었소. 우리들은 그제서야 그 소식이 허위였음을 깨달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우롱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런데 안문관 밖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으니 그야말로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겠소?

통솔자와 왕방주, 나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은 안문관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많은 가책을 받게 되었소. 그리하여 안문관 대전에 참가했던 형제들의 가족들에게 비보를 전해주는 이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그리고 그 거란의 갓난아기를 소실산 아래의 농가에 맡겨 키우도록 했소. 그리고 그 거란의 갓난아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퍽이나 난처했다오. 우리는 그의 부모에 대해 잘못했으니 재차 그의 생명을 해칠 수가 없었소. 그러나 그대로 내버려 두자니 호랑이 새끼를 키워 후환을 남기는 격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었소.

그 후 통솔자는 백 냥의 은자를 어느 농가에 주고 그들로 하여금 아기를 키우게 했으며 그 농사꾼 부부가 스스로 그 거란 갓난아기의 부모처럼 행세하라고 당부했소. 그리고 그 갓난 아기가 큰 이후에도 얻어서 키웠다는 사실을 그 아이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소. 그 농사꾼 부부는 원래 자식이 없었으므로 '고맙다'며 응낙을 했소. 그들은 그 갓난 아기가 거란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소. 우리가 그 아이를 소실산으로 데리고 가는 도중에 이미 우리 한나라 아기들이 입는 옷으로 바꾸어 입혔기 때문이외다. 대송 사람들은 거란인을 한에 사무치도록 증오하니 만약 그 아기가 거란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 아이에게 해를 입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교봉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지광대사, 그...... 소실산 아래의 농사꾼인 그 분의 성씨가 무엇입니까?]

지광은 대답했다.

[이미 짐작했을테지요. 그 농사꾼의 성씨는 교(喬)씨이고 이름은 삼괴(三槐)라고 하오.]

교봉은 눈가를 붉히며 부르짖었다.

[아니오! 아니오! 당신은 터무니 없는 말을 날조하여 나를 모함하고 있구려! 나는 당당한 한나라 사람이오! 어찌하여 거란의 오랑캐란 말이오? 그 분은...... 그 분은...... 나의 친 아버님이란 말이오! 다시 한번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면......]

그리고 갑자기 그는 두 팔을 벌리더니 지광의 앞으로 다가가 왼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움켜 잡았다.

선정과 세 장로는 동시에 부르짖었다.

[안 되오!]

그리고는 앞으로 나와 사람을 그의 손아귀에서 빼앗으려 했다.

교봉의 솜씨는 눈부셨다. 지광의 몸을 붙잡은 채로 세 걸음 비켜섰다. 선정의 아들인 선중산, 선숙산, 선계산 세 사람이 일제히 그의 등뒤로 달려들었다.

교봉은 손으로 선숙산을 잡더니 멀찌감치 내던졌다. 곧이어 선중산도 내던졌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로 선계산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두 발을 들어 그의 머리를 밟았다.

'선씨오호'는 산동성 일대에서 위명을 떨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교봉은 왼손으로 지광대사를 잡고 있는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을 내던진 것이다. 그야말로 서씨 집안의 세 대한을 허수아비처럼 던져 버렸으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전혀 방어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아연해 지고 말았다. 선정과 선백산 세 사람은 아들과 형제 사이인지라 세 사람이 달려나와 구원하려 했지만 교봉이 한 발을 들어 선계산의 머리를 꽉 밟고 있는지라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교봉의 공력이 무서운 만치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선계산의 두개골이 박살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들 세 사람은 몇 걸음 나서다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선정은 부르짖었다.

[교방주, 좋게 말로 합시다! 결코 야만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되오. 우리 선씨 집안은 그대와 아무 원한이 없으니 나의 아들을 놓아 주시오!]

철면판관이 이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교봉에게 애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서장로가 말했다.

[교방주, 지광대사는 강호의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이오. 그대는 그의 목숨을 해지지 않도록 하시오.]

교봉은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소! 나는 평소 선씨 집안과 아무런 원한도 없소. 그리고 지광대사의 인간됨을 나는 평소 존경해 마지 않았소! 그런데 당신들은...... 당신들은...... 나로부터 방주의 지위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소. 그것도 좋소. 내 기꺼이 양보하겠소! 그런데 어찌하여 그러한 말을 날조해서는 나를 오랑캐라고 모함하는 것이오! 나...... 이 교모가 도대체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이토록 핍박하는 것이오!]

최후의 몇 마디 말을 할 때의 그는 목이 메이는 듯했다. 뭇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하나같이 동정을 금하지 못했다.

이때 지광대사의 몸에서 우드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모두들 그의 생명이 촉각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야말로 생사의 차이는 교봉의 생각에 달려있을 뿐이었다. 그 소리 말고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벌레들이 풀숲에서 우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급히 몰아쉬는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 조전손이 갑자기 냉소했다.

[헤헤헤, 가소롭군! 가소로워! 한나라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한 계단 높은가? 그리고 거란인은 개, 돼지만도 못하단 말인가? 분명히 거란 사람이거늘 한나라 사람으로 행세하고 싶어하다니! 그건 또 무슨 재미로 그러누? 자기의 친부모마저도 인정하려 들지 않다니, 그러면서도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을까?]

교봉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 역시 나를 거란 사람이라고 하는거요?]

[나는 모르오. 하지만 그 날 안문관 밖에서 일전을 치루게 되었을 때의 그 무사의 용모와 체격이 당신과 똑같이 닮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소. 그 한바탕 싸움에서 나는 놀라 혼비백산 했으며 간담이 다 찢어져 나갈 정도였소. 그래서 상대방의 용모를 백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할지라도 잊지 못하오. 지광대사가 그 거란의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던 것도 내 친히 목격했소. 이 조전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산 송장과 다를 바 없으며 이 세상에는 소연 한 사람 이외에는 내가 근심할 일도 근신할 사람도 없소이다. 그대가 개방의 방주가 되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소?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모함하겠소. 또한 나 스스로가 과거에 당신의 부모를 살해한 일에 가담했었다는 것을 인정해서 또 무슨 득이 있겠소? 교방주, 이 조전손의 무공은 그대보다 훨씬 떨어지오. 내가 살기 싫어서 자살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줄 아시오?]

교봉은 지광대사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른쪽 발을 들어 선계산의 우람한 체구를 가볍게 걷어찼다. 그러자 선계산의 몸은 저만큼 나가 '퍽'하고 떨어졌다.

그러자 선계산은 벌떡 일어났는데 아무데도 상처를 입은 곳은 없었다.

교봉은 지광을 바라보았다. 지광대사의 표정은 태연했다. 전혀 거짓된 표정이나 교활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교봉이 물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소?]

지광은 말했다.

[그 후는 그대 자신이 알 것이오. 그대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소실산에서 밤을 줍다가 이리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 한 분의 소림사 승려가 이리를 죽이고 그대의 상처를 치료했소 . 그 이후부터 매일같이 그대에게 무공을 전수한 것이 아니겠소?]

교봉은 말했다.

[그렇소, 그 일은 그대도 알고 있구려.]

그 소림승 현고(玄苦)대사는 그에게 무공을 건네줄 때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호에서는 교봉이 개방 방주의 직계 제자인줄로만 알았지 그가 소림사와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지광은 말했다.

[그 소림사의 승려는 바로 우리 통솔자의 신중한 부탁을 받은 것이오. 즉, 그에게 그대가 어릴 적부터 무공을 가르치도록 요 했으며 그리하여 그대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오. 그 일을 위해서 나와 통솔자가 그리고 왕방주 세 사람은 언쟁까지 벌인 적이 있소. 나는 그대가 평범하게 농사를 지으며 한 평생을 보내되 무공을 배우면 안 되고 더더욱 강호의 은헤나 시비에 말려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소. 그러나 통솔자는 우리가 그대의 부모에게 죄를 지었으니 응당 그대를 영웅적인 인물로 키워 놓아야 한다고 했소.]

교봉은 물었다.

[당신들......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잘못을 지절렀소? 한나라와 거란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죽음을 당해 왔소. 도대체 무슨 일인데 미안하다느니 미안하지 않다느니 하는 것이요?]

지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문관 밖 석벽에 새겨 있는 글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훗날 그대 스스로 보도록 하시오. 통솔자가 그와 같은 주장을 하니 왕방주도 어느 정도 그의 편을 들게 되었소. 따라서 나는 그들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소. 그리하여 그대가 16세가 되던 해에 왕방주를 만나게 되었고 왕방주는 그대를 제자로 삼게 되었소. 그 이후 그대의 천재적 자질과 애써 노력했던 탓에 보통 사람이 따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오. 하지만 만약 통솔자와 왕방주가 여러모로 돌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토록 쉽게 오늘날 같은 경지와 지위에 도달할 수는 없었을 것이오.]

교봉은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 그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만약 지광대사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거란 사람이지 한나라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왕방주는 나의 은사가 아니고 바로 나의 부친을 죽인 원수가 된다. 그리고 몰래 나를 도운 그 영웅은 역시 호의로 나를 도운 것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받은 나머지 속죄의 한 방법으로 나를 도운 것뿐이다. 아니다! 아니다! 거란 사람들은 흉폭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우리 한나라 사람들의 원수가 아닌가? 내가 어찌 거란 사람이 될수 있단 말인가?)

지광은 계속해서 말했다.

[왕방주는 그대를 매우 경계했소. 그러나 뒤에 그대가 무공을 배우는 데 있어서 그 진도가 매우 빠르고 위인됨이 호방하고 의로운데다가 사람들을 어질게 대하고 또한 왕방주에게 공손히 대할 뿐 아니라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왕방주의 마음에 꼭 들게 되자 점차 진심으로 그대를 좋아하게 되었소. 그후 그대는 더욱 많은 공을 세우게 되었고 크게 위명을 떨치게 되었는바 개방의 아래, 윗사람들의 인심이 모두 그대에게 돌아갔으며 방외의 사람들도 개방의 장래 방주는 그대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여기게 되었소. 그러나 왕방주는 시종 결심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그대가 거란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소. 그리하여 그는 그대에게 세 가지 커다란 문제를 내놓았는데 그대는 그것을 일일이 처리했소.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대가 일곱 가지 공로를 세운 후에야 타구봉법을 그대에게 전수해 주었소. 그리고 그 해 태산 대회 때 그대는 아홉 명의 강적에게 상처를 입혀 개방의 위세가 천하를 뒤흔들게 만들어 놓았소. 왕방주는 더욱 주저할 이유가 없게 되었고 그대를 방주로 세우게 된 것이오. 이 늙은이가 아는 바로 개방은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데 그대처럼 그토록 어렵게 방주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소.]

교봉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은사이신 왕방주께서 나를 단련시키고 나로 하여금 많은 어려움을 겪게 함으로써 후에 큰일을 시키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알고 보니......]

지광은 다시 말했다.

[내가 아는 바는 여기까지외다. 그대가 개방의 방주가 된 이후 나는 강호를 떠도는 소문을 많이 들었소. 그 말들은 그대가 모두 정의롭게 일을 처리하고 백성들에게 복이 돌아가도록 했으며 모든 처사에 있어서 매우 공정하다는 것이었소. 그리하여 개방이 크게 흥하도록 했다고 소문이 났더군요. 나는 그런 말들을 들으며 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르오. 거기다가 그대가 수차례에 걸쳐 거란인의 간특한 계책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거란의 영웅들 몇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소.

그리하여 우리들이 호랑이를 키워 후한을 남기지 않을까 하는 꺼리낌은 쓸데없는 걱정이 되어 버렸소. 사실 이 일은 영원히 들먹일 필요가 없는데 어떤 사람이 어째서 이 일을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구료. 이것은 개방이나 교방주 자신을 위하여서도 하나도 좋은 일은 되지 못하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번민의 빛이 어려 있었다.

서장로는 말했다.

[지광대사가 옛일을 우리가 친히 겪은 것처럼 이야기 해주어서 정말 고마왔소. 그리고 이 한 통의 서신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그 편지를 흔들며 말했다.

[그 통솔자라는 대협이 왕방주에게 써 준 것이오. 이 편지는 방주의 지위를 교방주에게 넘기면 안 된다고 강력히말리는 내용을 담고 있소. 교방주! 그대 자신이 한번 보시오!]

그러면서 그는 그 서신을 내밀었다.

지광대사는 말했다.

[나에게 먼저 보여 주시오. 진짜 원래의 편지인지 보아야겠소.]

그리고 그는 그 편지를 손에 받아 들고 한번 보더니 말했다.

[맞소. 정말 통솔자의 필적이오!]

그리고 왼손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어 편지 끝에 서명날인을 찢어내더니 삼키는 게 아닌가?

지광이 편지 말미의 이름을 찢어낼 때 모닥불 곁으로 몇 발자욱 나아가 교봉과 좀더 간격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는 편지를 자기의 눈 앞으로 가져갔다. 마치 빛이 흐려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리하여 그 말미의 이름자를 찢어서는 입에 넣는 순간 편지와 입술 사이의 간격은 그야말로 한치 정도에 불과했다.

교봉은 덕망이 높은 노승이 그와 같은 교활한 수법을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 마디의 노성을 터뜨리며 왼손을 뻗쳐서는 허공을 가르며 그의 혈도를 치고 왼손으로 동시에 그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챘지만 끝내 한 걸음 늦고 말았다. 편지 말미의 이름 석자는 이미 그의 목으로 넘어간 이후였다.

교봉은 다시 일장으로 그의 혈도를 풀어 주고는 노하여 부르짖었다.

[도대체 무엇하는 짓이요?]

지광은 빙그레 웃었다.

[교방주, 그대가 신분을 알았으니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소? 왕방주는 이미 세상을 떠났소. 통솔자의 성명을 그대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구료. 이 늙은이가 과거 영존과 자당을 습격한 일에 가담한 사실이 있으니 모든 죄는 이 늙은이가 기꺼이 짊어지도록 하겠소. 나를 죽이든 살리든 그대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하시오.]

교봉은 그가 눈을 내리감는 것을 보았다. 그 기세는 인자하면서도 비장했다.

교봉은 비분강개 했으나 그에 대한 존경심은 남아 있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직 나는 명백히 알지 못하오. 그리고 그대를 죽이다 해도 지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교봉은 조전손을 한번 노려 보았다. 조전손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말했다.

[맞소. 나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소. 나도 한 사람 몫을 했으니 언제든지 필요하다면 손을 쓰도록 하시오.]

담공은 큰 소리로 외쳤다.

[교방주, 무릇 일은 세 번 생각해서 행하되 함부로 저지르지 않도록 하시오. 만약 거란과 한 나라의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면 중원 호걸들 모두가 그대의 적이 될 것이오.]

조전손은 그의 정적이었지만 이때 그는 오히려 조전손을 감싸고 들었다.

교봉은 냉소했다. 그러나 마음은 어지럽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불빛에 그 편지를 비추어 보았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검통형, 몇 날 밤을 두고 생각했지만 형이 방주의 직위를 교봉에게 물려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봉으로 말하면 무공이 나 재간이 탁월하며 많은 공적을 쌓았고 정의 감이 강하오. 따라서 귀방에서 뛰어난 인물일 뿐 아니라 우리 중원 무림천하에서 그를 따라갈 인물이 없소. 이와 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 형의 지위를 이어받는다면 훗날 개방의 이름을 크게 빛낼것은 명약 관화한 일이외다.>

 

교봉은 여기까지 읽게 되자 자신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하는지라 무척 고맙게 생각했다. 그는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다행히 안문관 밖의 처절한 혈전은 아직까지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소. 교봉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그의 부모는 우리의 손에 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오. 훗날 까지 교봉이 자신의 출신 내력을 모르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알게 된다면 개방은 그의 손 아래 멸망될 것이고 중원 무림 역시 막대한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때 가서는 지략이나 무공에서 교봉을 따를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오. 개방의 일을 원래 이방인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실례가 되는 일인 줄 아오만 그대와 나와는 교분이 돈독하고 이 일에 관련되는 인물이 많으니 신중히 생각하시기를 바라오.>

 

그러나 아래의 서명은 이미 지광에 의해 찢겨져 나가고 없었다.

서장로는 교봉이 그 편지를 읽고서는 멍하니 서있자 다시 한 장의 편지를 내어놓으며 말했다.

[이것은 왕방주가 친히 쓴 글이요. 그대도 그의 필적을 알아볼 것이외다.]

교봉은 그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개방의 마 부방주, 전공장로, 집법장로, 그 밖의 장로에게 말하노라. 교봉이 만약 요나라를 가까이 하고 한나라를 배반하는 기미가 있고 거란을 돕고 송나라를 핍박하는 거동이 보이면 개방의 모든 제자들은 협력하여 그를 격살하되 틀림이 없도록 하라. 독을 쓰거나 자객을 보내 죽여도 무방하다. 하수자는 오직 공만 있을 뿐 죄가 없을 것이다. 왕검통 친필(親筆).>

 

그리고 아래의 날짜는 '대송 원풍 6 년 5월 초칠일, (大宋元豊六年五月初七日)이었다.

교봉은 그 날이 바로 자신이 개방의 방주로 오른 날임을 명백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봉은 이 몇 줄의 글이 확실히 은사인 왕검통의 친필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내력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은사는 늘 자신에게 인자한 부친처럼 대해 왔으며 가르침도 엄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기가 개방의 방주가 되는 날 아무도 몰래 이와 같은 유언을 남기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다. 그는 마음이 쓰라린 것을 느끼게 되었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리하여 눈물 방울이 왕방주가 직접 쓴 그 편지 위에 떨어졌다.

서장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방주는 우리의 무례함을 탓하지 마시오. 이 편지는 원래 마부방주가 은밀히 감추고 있었으며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었소. 이 몇 년간 방주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했을 뿐 아니라 추호도 요나라와 통하고 송나라를 배반하거나 거란을 돕고 한나라 사람을 핍박하는 일이 없었소. 그러던 중 마부방주가 갑자기 횡사하자 마부인께서 이 편지를 찾아내게 되었소. 본래는 모든 사람들이 마 부방주가 고소 모용공자에게 해침을 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소. 따라서 만약 방주가 마대원 형제를 위해서 원한을 갚았더라면 방주의 내력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오. 이 늙은이는 세 번 생각하고 또한 대국을 위해서 본래 이 편지와 왕방주의 유언을 없애 버리려고 했소. 그러나......]

거기까지 말한 그는 마부인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첫째, 마부인은 부군의 원한을 갚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으며 대원 형제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지 못한다면 대원 형제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 해서 나선 것이오. 그리고 둘째, 교방주는 오랑캐사람을 변호했소. 그러한 행동은 실로 본방의 위기를 조성하는지라......]

교봉은 그 말을 가로챘다.

[내가 오랑캐 사람을 변호하다니 무슨 소리요?]

서장로는 말했다.

[모용이란 두글자는 바로 오랑캐의 성이요. 모용씨는 선비(鮮卑)의 후예로서 거란과 마찬가지로 오랑캐 족속이오.]

교봉은 입을 열었다.

[음, 알고 보니 그랬었구료! 나는 몰랐었소.]

서장로는 다시 말했다.

[세째는 방주가 거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방중의 많은 제자들 사이에 이미 변란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숨겨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소.]

교봉은 하늘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서야 그는 하루의 반나절동안 가슴을 답답하게 하던 의문이 풀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전관청에게 말했다.

[전관청, 그대는 내가 거란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배반한 것이오?]

전관청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교봉은 다시 물었다.

[송.해.진.오 사대장로가 그대의 말을 듣고 나를 죽이려 한 것도 그것 때문이오?]

전관청은 말했다.

[맞습니다. 다만 그들은 반신반의하여 결정을 못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대를 대하게 되자 겁을 집어먹더군요.]

교봉은 물었다.

[나의 내력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 되었소?]

전관청은 말했다.

[이 일은 다른 사람과 연관이 되니 불초가 말씀 드릴 수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종이로는 불을 감쌀 수 없습니다. 아무리 비밀을 지키려고 하더라고 끝내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되지요. 집법장로만 하더라도 벌써 알고 있습니다.]

삽시간에 교봉의 뇌리에는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는 생각했다.

(그들은 질투심이 생겨 많은 거짓말들을 날조하여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 교봉이 아무리 외롭더라도 끝까지 싸워야지 굴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은사께서 친히 남긴 편지는 절대 틀림없는 진짜이다. 더구나 지광대사는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나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그와 같은 간계를 꾸미겠는가? 서장로는 우리 방의 원로중신(元老重臣)이다. 그러니 본방을 뒤집으려고 할 까닭이 없다. 철면판관 선정, 담공, 담파 등은 무림에서도 명망이 높은 선배들이다. 조전손은 실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뭇사람들이 한결같이 그와 같은 말을 하는데 어찌 거짓말일수가 있겠는가?)

개방의 제자들은 지광과 서장로의 말을 듣게 되자 마음이 매우 혼란스럽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교봉이 거란의 후예라는 말을 듣고 시종 반신반의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제서야 겨우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교봉마저도 믿는 것처럼 보이질 않는가.

요나라와 송나라의 원한은 매우 깊었다. 개방의 제자 가운데에도 요나라 사람에게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의 거란인이 개방의 방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교봉을 개방에서 축출하자는 말을 그 누구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시 행자나무 숲은 조용하기만 하였고 들리는건 사람들이 무겁게 내쉬는 한숨 소리뿐이었다.

별안간 한 맺힌 여인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여러 백부님과 숙부님들, 저의 부군은 불행하게 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도대체 누가 쓴 독수인지 아직까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부군으로 말하면 한평생 성실하고 착실한 분으로 강호에서 원한을 맺은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 분의 목숨을 해쳤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흔히들 숨기는 것이 있으면 도적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혹시 돌아가신 부군의 수중에 중요한 물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그 물건을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다른 사람은 혹시 부군이 비밀을 누설하여 큰일을 그르치게 될까봐 그를 죽여 입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마대원의 처 마부인이었다. 몇 마디의 뜻은 명백했다.

마대원을 죽인 독수가 바로 교봉이며 그 이유는 마대원을 죽여 그가 거란인이라는 증거를 없애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교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전신에 상복을 하고 있으며 연약하고 예쁘며 아담하기까지 한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내가 마 부방주를 해쳤다고 생각하시오?]

마부인은 줄곧 등을 돌리고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교봉을 쳐다보았다.

한 쌍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으며 어두운 밤중인데도 반짝반짝 빛났다.

교봉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부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무지한 여인네라 바깥에 얼굴을 내미는 것조차 무례한 일입니다. 어찌 죄를 남에게 함부로 씌울 수 있겠습니까? 다만 돌아가신 부군이 너무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기에 그저 백부님과 숙부님들에게 옛정을 돌이켜 진상을 조사하고 돌아가신 부군의 원한을 갚아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붓이 교봉에게 큰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교봉이 독수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교봉을 겨누고 있었다. 교봉은 그녀가 자기를 향해 절을 하는 것을 보자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어서 역시 무릎을 꿇고 반례했다.

[아주머니, 일어나십시요.]

그러자 행자 숲 왼편에서 갑자기 한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부인,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여쭈어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엷은 홍색의 적삼을 걸친 아주였다.

마부인은 물었다.

[소저는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나요?]

아주는 말했다.

[부인께서는 마 선배님이 가지고 있던 그 유서가 밀봉되어 있었다고 했으며 서장로가 뜯어 볼 때에도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서장로가 그 편지를 뜯기 전에 누구도 그 편지의 내용을 본 적이 없습니까?]

마부인은 대답했다.

[맞습니다.]

아주는 말했다.

[그렇다면 통솔자의 편지와 왕방주의 유언은 마선생 이외에는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숨길 물건이 있으면 도적을 부른다느니 누군가가 입을 봉하기 위해 마선배님을 죽였다느니 하는 말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부인은 물었다.

[소저는 누구인데 감히 우리 방의 큰 일을 논하는거죠?]

아주는 말했다.

[귀방의 큰 일을 일개 아녀자가 어찌 관여할 수 있겠어요? 다만 당신네들이 우리 공자 나으리를 모함하려 드니 나로서는 나서서 변명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마부인은 물었다.

[소저의 공자 나으리는 누구인가요? 교방주인가요?]

아주는 고개를 흔들고 미소했다.

[아니예요, 모용 공자예요.]

마부인은 말했다.

[음, 알고 보니 그랬었군요.]

그녀는 더 이상 아주를 상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집법장로를 보며 말 했다.

[백장로, 본방의 방규는 매우 엄합니다. 만약 장로가 방규를 어겼다면 어떻게 되는거죠?]

집법장로 백세경은 늠름하게 입을 열었다.

[방규를 알고도 어겼다면 그 죄는 일등(一等)에 해당됩니다.]

마부인은 말했다.

[만약 그대 백장로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어떻게 되지요?]

백세경은 그녀가 가리키는 뜻을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교봉을 한번 쳐다보고 말했다.

[본방의 방규는 옛 선조들이 만든 것으로 배분의 고하나 지위의 고하는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받들어야 합니다. 똑같이 공을 세우면 상을 받고 죄를 짓게 되면 벌을 받지요.]

마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숨을 죽이고 마부인을 주시 하고 있었다.

마부인은 말했다.

[저 소저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군요. 처음,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나 제가 돌아가신 부군의 비보를 듣기 전날 밤 갑자기 집에 도적이 들었었습니다.]

뭇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물었다.

[도적이라고? 무엇을 훔쳐갔나요? 사람은 해치지 않았나요?]

마부인은 말했다.

[사람은 해치지 않았어요 도적은 비열한 훈향(薰香)을 사용하여 저와 두 시녀를 쓰러지게 만들었어요. 그리고는 상자를 엎어놓는 등 크게 소란을 피운 후 십여 냥의 은자를 훔쳐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 부군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도적이 은자를 훔쳐간 일을 마음에 두어둘 여유가 없었죠. 다행히 돌아가신 부군께서는 이 한 통의 유서를 깊이 은밀한 곳에 숨겨 두었기 때문에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몇 마디의 뜻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교봉 자신이나 혹은 그가 하수인을 시켜 마대원 집에 보내 편지를 훔치게 했다가 실패하자 마대원을 살해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었다.

교봉이 편지를 훔쳐가려고 한 것은 이미 유서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되고 이렇게 된다면 부득이 마 부방주를 죽여 사람의 입을 봉하려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까? 어쩌면 통솔자나 왕방주, 마부방주가 무심결에 누설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었다. 아주는 한 마음으로 모용복의 혐의를 벗겨 내고, 교봉이 관련되지 않았음을 밝혀 보려고 입을 열었다.

[좀도둑이 십여 냥의 은전을 훔쳐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예요. 아마도 공교롭게 그 사건과 일치된 모양이죠?]

마부인은 말했다.

[소저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후 좀도둑이 드나들었던 창문 아래서 한 가지 물건을 줏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도둑이 황망히 왔다가며 떨어뜨린 것이었어요. 저는 그 물건을 보고 속으로 놀라고 당황했으며 그제서야 이 일이 심상치 않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송장로는 물었다.

[그게 무슨 물건이오? 어찌하여 심상치 않다는 것이오?]

마부인은 천천히 등 뒤의 보따리에서 아홉 치 정도 되는 물건을 꺼내어 서장로에게 내밀었다.

[여러 백부님과 숙부님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십시요.]

서장로가 그 물건을 받아 들자 땅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는게 아닌가? 사람들은 서장로를 바라 보았다. 서장로는 그 물건을 펼쳐 보았다. 한 자루의 섭선이었다. 서장로는 무거운 목소리로 섭선 위에 쓰인 한 수의 시를 읽어 나갔다.

[눈보라는 거침없이 안문관에 날리고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은 그칠 줄을 모르누나 쌓아올린 공로는 부끄러울 뿐이로다. 다만 누각의 난초를 꺾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 하네.]

교봉은 시를 읊는 소리를 듣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선을 가다듬어서 섭선을 바라보았다. 그 부채의 뒤쪽에는 무사가 새외에 나가서 적을 무찌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 폭의 장사출새살적도였다. 바로 교봉의 것이었다. 그 시로 말할 것 같으면 은사인 왕검통이 쓴 것이고 그 그림은 바로 서장로가 그려 준 것이었다. 필법이 그다지 절묘하지는 않았으나 그림 속에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더불어 강개하고 호방한 기상이 드러나 있었다. 이 섭선은 교봉이 25세 되던 생일날 은사인 왕방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를 매우 아끼고 잘 감추어 두었는데 어찌하여 마대원의 집에서 발견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성격이 소탈해서 그와 같은 섭선 나부랑이를 좀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았던 것이다. 서장로는 섭선을 돌렸다. 그 그림은 바로 자신이 그린 것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동포가 아니면 마음도 반드시 다르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구나! 왕방주 왕방주, 당신이 이 일만은 크게 잘못했구려!]

교봉은 갑자기 자신의 내력을 알게 되고 자기가 거란의 자손임을 알게 되자 마음이 착잡한 상태였다. 사실 그가 십 년 동안 세운 계책은 어떻게 하면 요나라를 멸하고 거란의 오랑캐들을 많이 죽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고 보니 아무리 한평생 풍랑과 시련을 많이 겪어온 그였건만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부인이 한사코 그가 마대원을 죽인 독수라고 지적하게 되자 자기의 습성이 나타나게 되어 그의 마음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게 되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 누가 나의 섭선을 훔쳐서는 화를 나에게 전가시켰구나! 이러한 일이 이 교봉을 난처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 그는 서장로에게 말했다.

[서장로, 그 섭선은 나의 것이오.]

개방에서 배분이 비교적 높고 지위가 비교적 존귀한 사람들은 서장로가 그 글귀를 읽었을 때 이미 그 섭선이 교봉의 것임을 알아 차렸다. 그러나 나머지의 무리들은 모르고 있었는데 교봉이 스스로 인정을 하자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서장로 역시 마음 속으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왕방주는 어찌 되었던 나를 심복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이 유서에 얽힌 사연을 알려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마부인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서장로님, 왕방주께서 서장로님께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서장로님을 위해서 그러셨을거에요.]

서장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건 어째서요?]

마부인은 초연히 말했다.

[그것은 개방에서 대원만이 그 일을 알고 있었는데 불행을 당하지 않았어요?...사전에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예요.]

교봉은 낭랑히 외쳤다.

[여러분들은 더 할 말이 없소?]

그는 시선을 마부인에게서 서장로에게로 옮겼다가 백세경, 전공장로등 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뭇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교봉은 잠시 기다렸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다시 말했다.

[교모의 내력은 내 자신이 아직 확인하지 못했소. 그러나 이토록 많은 선배들께서 이야기하는 것이니 이 교모는 응당 있는 힘을 다해서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개방 방주의 직분은 응당 다른 사람에게 물려 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오.]

그리고 손을 뻗쳐 오른쪽 바지가랑이의 기다린 주머니에서 한개의 수정 같이 맑고 파란 죽장(竹杖)을 꺼냈다.

바로 개방 방주의 신표인 타구봉(打狗捧)이었다. 그는 타구봉을 두 손으로 높이 쳐들고 말했다.

[이 봉은 왕방주께서 내린 것이외다! 이 교모가 개방을 통솔하고 있는 동안 큰 공은 세우지 못했으나 다행히 큰 잘못도 없었소이다. 오늘 이 자리를 물러가니 어느 분이 이 직분을 맡으시겠는지 이리 나와서 이 봉을 받도록 하시오!]

개방의 역대에 걸쳐 내려져 오는 규칙에 의하면 방주가 바뀔 때에 신방주에게는 반드시 전의 방주가 타구봉을 전해 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 타구봉을 전해 주기 이전에 먼저 타구봉법을 전수해 주어야했다. 설사 구방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해도 미리 후계자를 지목하여 타구봉법을 전해 왔던 터이므로 지위는 언제나 분쟁 없이 전해지곤 했다.

이때 개방의 제자들은 그가 손에 죽장을 들고 꿋꿋하게 뭇 사람들 앞에 서자 감히 타구봉을 받으러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교봉은 잇따라 세 번 소리쳐 물었으나 개방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시종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교봉은 말했다.

[교봉의 신세와 내력이 밝혀지지 않는 한 이 방주의 지위를 맡을 수가 없소이다. 서장로, 그리고 전공장로 및 집법장로 세 분에게 본방의 진방지보(鎭幇之寶)인 이 타구봉을 맡길테니 세 분이 함께 보관하도록 하십시요. 후에 방주가 정해진다면 그때 세 분이 전해 주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서장로는 말했다.

[그 말도 옳소이다. 타구봉법의 일은 차후에 다시 논하기로 합시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아가 그 죽봉을 받아들려고 했다.

송장로는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서장로는 아연해져서 걸음을 멈추었다.

[송형제는 무슨 할 말이 있소?]

송장로는 말했다.

[내가 보기에 교방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외다.]

서장로는 물었다.

[무슨 말이오?]

송장로는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닮지 않았습니다.]

서장로는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요?]

송장로가 말했다.

[거란 사람들은 지극히 흉악하며 잔인하고 악랄합니다. 교방주는 매우 인정이 많으시고 의협심이 강한 영웅호걸입니다. 조금 전 우리가 그를 배반하여 모반을 일으켰을 때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칼로 그의 몸을 찔러 피를 흘리면서까지 우리가 그를 배반한 대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마약 거란인이라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서장로는 말했다.

[그는 어릴 때 이미 소림사의 고승과 왕방주의 가르침을 받아 거란의 흉폭한 습성을 고치게 된 것이오.]

송장로는 말했다.

[그 습성을 고쳤다면 나쁜 사람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방주가 된다 한들 무엇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 본방 가운데는 그 누구도 교방주 같은 영웅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개방의 방주가 된다면 이 송가는 결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개방의 제자들 가운데는 송장로와 같이 생각 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교봉은 평소 개방의 제자들에게 많은 은덕을 베풀어 인심을 얻고 있었다. 그러니 몇 사람의 말과 편지 두 통으로 그를 방주 자리에서 몰아낸다는 것은 그에게 충성을 바치던 많은 제자들에게는 승복할 수 없는 처사였다. 송장로가 그러한 말을 하자 대뜸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부르짖었다.

[그 누가 음모를 꾸며 교방주를 헤치려 하고 있소! 우리들은 경솔하게 다른 사람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되오!]

[수십 년 전의 얘기를 당신네들이 터무니없이 지껄인다 해서 진짜인지 거짓인지 누가 알겠소?]

[방주의 지위는 그토록 가볍게 바꿀 수가 없소!]

[나는 한 마음 한 뜻으로 교방주를 따르겠소! 억지로 방주를 바꾼다면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소!]

해장로는 큰 소리로 말했다.

[교방주를 따르고 싶은 자가 있으면 우리 쪽으로 서시오!]

그는 오른손으로 송장로를 붙잡고 왼손으로는 오장로를 붙잡고는 동쪽으로 걸어가 섰다. 곧이어 대인분타, 대신분타, 대의분타의 세 타주들도 동쪽으로 걸어가 섰다. 세 분타의 타주가 동(東)쪽으로 가서 서자 그들의 부하들도 다투어 뒤를 따랐다. 전관청, 진장로, 전공장로, 그리고 대지, 대용, 분타의 타주는 원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개방의 사람들은 대듬 두 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동쪽에 위치한 사람들은 약 반가량 되었고 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대략 3할 정도 되었다. 그 이외의 방의 제자들은 망설이며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집법장로 백세경은 평소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매우 단호한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매우 주저하며 망설이는 듯했다.

전관청은 말했다.

[여러 형제들, 교방주의 지략은 뛰어나오. 그의 영웅됨에 누구인들 탄복하지 않을수 있겠소? 그러나 우리들은 송나라 백성이오! 어찌 거란인의 호령을 들을 수 있단 말이오? 교봉의 재주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더 위험해지는 거라오!]

해장로는 부르짖었다.

[개방구 같은 소리는 지껄이지도 말아라! 내가 네 모양을 보건데 십중팔구는 거란인 같다!]

전관청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가 진충보국의 호걸들인데 설마하니 기꺼이 이민족(異民族)의 노예나 주구(走狗)가 되겠다는 것이오?]

이 몇 마디 말은 퍽이나 설득력이 있었다. 동쪽으로 가 서있던 사람 가운데 십여 명이 다시 서쪽으로 되돌아와 섰다. 그러자 동쪽에 서있던 제자들 가운데 욕을 하는 사람, 야유를 하는 사람 등이 있어 대뜸 소란이 일어났다.

삽시간에 주먹을 쓰거나 무기를 뽑아 들더니 삼십여명이 혼전을 벌이는 것이 아닌가?

여러 장로들이 큰 소리로 말렸으나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인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거기다가 오장로와 진장로까지 손가락질을 하며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금방이라도 손을 써서 싸울 것 같았다.

교봉은 호통을 쳤다.

[여러 형제들은 손을 멈추고 나의 말을 들으시오!]

그의 음성은 위엄으로 가득차 있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대뜸 소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주시했다.

교봉은 낭랑히 외쳤다.

[개방의 방주 자리를 나는 무조건 내놓겠소!]

송장로가 입을 열었다.

[방주님,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교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낙심한 것이 아니오. 다른 일들은 음모나 모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은사 왕방주의 필적은 틀림이 없으며 어느 누가 흉내를 낸 것도 아니었소!]

그리고 그는 음성을 높였다.

[개방은 강호에서 제일 큰 방으로 위명이 혁혁하오. 따라서 무림에서 그 누가 앙모하지 않겠느냐 말이오! 그런데 만약 스스로 싸운다면 다른 사람들이 입이 찢어지도록 웃지 않겠소? 이 교모가 떠나는 마당에 한 마디 하겠소 만약 누구라도 한 주먹 한 발길질 이라도 본방의 형제들에게 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본방의 커다란 죄인이 될 것이오!]

개방의 제자들은 원래 의리를 중요시했다. 그리하여 그의 한 마디를 듣게 되자 모두들 내심 부끄러워했다.

갑자기 한 여인이 외쳤다.

[만약에 그 누가 있어 본방의 형제를 죽인다면 어떻게되나요?]

마부인이었다.

교봉은 입을 열었다.

[살인자는 목숨을 바쳐야 하며 형제를 박해한 사람은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을 것이오!]

마부인은 말했다.

[그러면 됐어요.]

교봉은 말했다.

[마 부방주가 도대체 그 누구에게 살해당했으며 누가 나의 섭선을 훔쳐가서 이 교모를 모함하게 됐는지 끝내 밝혀질 것이오. 마부인, 이 교모가 만약 그대의 집으로 가서 무언가를 훔치려 했다면 결코 빈 손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한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지도 않았을 것이오. 두 세 사사람의 여자들만 있었던 댁은 고사하고 황궁 안이나 재상의 집, 대장군의 천막 안이라도 나는 내 집 안방 드나들 때와 같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소이다. 천군만마(千軍萬馬)가운데서도 이 교모가 어떤 물건을 취하려고 마음 먹는다면 이미 내 것이 된 것과 다름

이 없을 것이외다.]

 

16. 떠나는 사람, 남는 사람들

이 몇 마디의 말은 매우 호방했다. 개방의 제자들은 평소 그의 무예가 천하무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허세를 부리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더 말하지 않았다.

교봉은 뭇사람들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청산(靑山)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녹수(綠水)는 언제나 흐르는 법, 형제들, 우리 다시 만납시다. 이 교모가 한인이래도 좋고 거란인이라도 좋소. 살아 생전 결코 단 한 사람의 한인(漢人)의 목숨도 빼앗지 않겠소. 만약 이 맹세를 깨뜨리게 된다면 저 칼처럼 될 것이오.]

그는 왼손을 펼쳐 허공을 격하고 선정(單正)을 향해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선정은 자기의 손과 팔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으며 손가락의 힘이 풀려 칼을 놓치고 말았다. 칼은 교봉 쪽으로 날아갔다. 교봉은 왼손으로 칼을 거머쥐더니 오른손의 중지를 엄지에 갖다대고 구부렸다가 칼등을 향해 퉁겼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그 칼은 두 동강이 나고 칼 끝이 몇 자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칼자루는 여전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선정에게 말했다.

[미안하오.]

그는 칼자루를 들고 그 자리를 성큼성큼 떠나갔다.

뭇사람들은 아연해졌다. 곧이어 개방의 몇몇 사람들이 크게 부르짖었다.

[방주님, 가지 마십이오!]

[개방은 전적으로 방주님이 이끌어가야 합니다!]

[방주님, 빨리 돌아오십시오!]

갑자기 '휙'하는 소리가 일었다. 허공에서 한 자루의 죽봉(竹棒)이 던져져 날아왔다. 바로 교봉이 손을 뒤로 하여 타구봉을 던진 것이었다.

서장로는 손을 들어 받으려고 했다. 오른손으로 그 죽봉을 받으려고 할 때 갑자기 손에서 전신에 이르기까지 마치 벼락에 맞은 듯 흠칫해지는게 아닌가? 그가 급히 손을 놓자 그 죽봉은 날아든 모습 그대로 날아가 땅바닥에 푹 꽂혔다. 개방의 제자들은 일제히 놀라 부르짖었다. '봉을 볼 때는 마치 방주를 대하듯 하라' 는 개방의 타구봉을 바라보며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해가 떠 오르며 이리저리 금빛 햇살이 행자나무 사이로 비추어 들었다.

햇빛이 타구봉을 비추어 파란 빛이 눈을 아리게 했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형님, 형님! 저는 형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는 교봉을 뒤쫓으려고 했다. 그러나 겨우 세 걸음을 나가게 되었을 때 그는 좀처럼 왕어언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한번 바라본 순간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마음 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부드러운 정이 그의 발길을 멈추게 만든 것이었다.

[왕소저, 그대들은 어디로 갈 참이오?]

왕어언은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는 누명을 쓰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거예요. 가서 그 사실을 알려줘야겠어요.]

단예는 마름이 쓰라렸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음...... 세 분 나이 젊은 소저들이 길을 가려면 불편할테니 제가 그대들을 보호해 드리죠.]

그리고 다시 쓰게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모용공자의 영명을 많이 듣고 보니 나도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군요.]

이때 서장로가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마 부방주의 원한을 어떻게 갚을 것인지 여러분들은 시일을 두고 계획을 세우도록 하시오. 그러나 본방은 하루라도 우두머리가 없으면 안되오. 교...... 교봉이 떠난 후 방주의 지위는 어느 분이 계승해야 할런지 급히 정해야 할 대사이오. 그러니 여러분들이 모두 이곳에 있는 기회에 즉시 논의하여 정하도록 합시다.]

송장로는 말했다.

[저의 의견으로는 교방주를 찾아와 그의 마음을 돌리고 방주직을 사양하지 않도록......]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서쪽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부르짖었다.

[교봉은 거란의 오랑캐요! 어찌 그를 우리들의 수령으로 삼는단 말이오? 오늘은 모두 옛날 정을 생각해서 그러하겠지만 다음에 만나면 원수지간이 되어 반드시 생사를 걸고 싸우게 될 것이오!]

오장로는 냉소했다.

[그대와 교방주가 생사를 걸고 싸운다는 말씀이렸다? 허허허... 그대에게 그럴 재간이 있을까?]

그 사람은 노해 말했다.

[나 혼자서는 물론 그를 이길 수 없소. 그렇지만 열 명이면 어떻소? 아니 백 명이면 또 어떻소? 개방의 무사들은 진정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보답코자 하는 사람들이외다. 적을 보고 물러설 것 같습니까?]

이 말은 매우 호방했다. 서쪽에 있던 개방의 제자들 가운데 갈채를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갈채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서북쪽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방의 사람들은 우리와 혜산(惠山)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해놓고 오지않아 웬일인가 했더니 모두 이곳에 숨어 있었군! 헤헤헤...... 가소롭군,가소로와!]

그 소리는 날카로왔다. 거기다 발음이 일정하지 않고 코막힌 음성이어서 듣기가 매우 거북했다.

대의분타 장(將)타주와 대용분타 방(方)타주는 거의 동시에 '아차'하고 말했다.

[서장로, 우리는 약속을 어겼습니다. 상대방이 우리를 찾아온 모양입니다.]

단예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낮에 주루에서 교봉을 만나게 되었을 때 개방 사람들이 내일 아침 일찍 만나게 되었다고 교봉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 상대방 사람들은 서하의 일품당에 속한 고수들로서 혜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 당시 교봉은 너무 촉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약속을 응낙한 바 있었다. 지금은 이미 묘시가 지난 때였다. 개방의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약속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는 사람들도 개방에 커다란 일이 발생했는지라 오로지 그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약속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상대방의 비웃는 말을 듣고서야 생각이 났던 것이다.

서장로는 잇따라 물었다.

[어떤 약속이오? 상대방은 누구요?]

그는 강호와 개방의 일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본 것이다. 집법장로가 장타주에게 물었다.

[교방주는 이 약속에 응하셨소?]

장타주는 말했다.

[예, 하지만 속하는 이미 교방주의 명을 받들고 혜산으로 사람을 보내 약속을 칠 일 후로 미루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그 음산한 어조로 말하던 사람은 귀가 퍽이나 예민한듯 장타주의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이미 약속을 정했는데 칠 일이고 여드레고 뒤로 미룰게 어디 있소? 반시진을 미룬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소.]

박세경은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개방이 당신에 서하 오랑캐들을 두려워하겠소? 다만 본방의 중요한 일이 있어 당신네 같이 못난 사람들과 상대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오! 약속 시간을 미루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인데 왠 잔말이 그리 많소?]

그때에 폭발 소리가 들리면서 행자나무 뒤쪽으로부터 한 사람이 날아왔다. 그리고는 쭉 사지를 뻗은 채 땅바닥에 떨어져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목구멍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뚤려 있었으며 숨을 거둔 지 오래된 것 같았다. 개방의 제자들은 그 사람이 바로 개방의 대의분타 사(謝) 부타주임을 알아보았다.

장타주는 분노했다.

[사형제는 바로 기일을 늦추라는 말을 전하러 갔었는데...... 죽고 말았군!]

집법장로는 말했다.

[서장로, 방주가 이곳에 계시지 않으니 서장로께서 잠시 방주직을 대행토록 하십시오.]

그는 방에 분열이 생겼다는 인상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서장로는 그 뜻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그는 지금 자기가 나서지 않는다면 대국을 이끌어갈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두 나라가 서로 싸울 때 사자(使者)는 참하지 않는다고 했소. 개방이 사람을 보내 날짜를 미루자고 한 것인데 어찌하여 그 사람의 목숨을 해쳤소?]

그는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그 자의 태도가 거만하고 말씨가 무례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장군을 보고서 큰절을 하지 않았소. 그러니 어떻게 그를 살려 둘 수 있겠소?]

그 말을 듣자 개방 사람들은 다투어 욕설을 퍼부었다.

서장로는 이때까지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박세경의 말을 들으니 서하의 오랑캐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놈들아! 숨어 있지만 말고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그리고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이지 말아라!]

그러자 멀리서 호각 소리가 '우우'하고 울려 퍼졌다. 곧이어 은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서장로는 백세경에 다가가 입을 귓가로 가져가며 물었다.

[저 사람들은 또 누구요?]

백세경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서하국에는 무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습니다. 이름을 일품당(一品堂)이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그 일품당은 해국(該國)의 국왕이 세운 것으로서 무공이 고강한 자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면서 양성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서하국의 군사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게 한답니다.]

서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국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무공을 가르친다는 것은 우리 송나라 강산을 치겠다는 수작이 아니겠소?]

[바로 그렇습니다. 무릇 일품당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소위'무공에 있어서 천하일품(天下一品)'이라고 일컫는 자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일품당을 통솔하는 사람은 왕자인데 관직이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봉해져 있으며 혁련철수(赫連鐵樹)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하로 파견한 역대표(易大彪)형제의 보고에 의하면 최근 혁련철수는 일품당의 용사들을 이끌고 변랑으로 출사(出使) 하면서 대 송나라의 태후와 황상을 대면했다고 합니다. 사자로 온 목적은 바로 우리 송나라의 허실을 탐지하는데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본방이 중원무림의 일대지주(一大之柱)라는 사실을 알고 일거에 본방을 괴멸시켜 먼저 위세를 과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다시 군사를 출동시켜 국경을 넘어 곧장 쳐들어오자는 수작이지요.]

서장로는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그 계책은 정말 악랄하군!]

백세경은 말했다.

[이 혁련철수는 변랑을 떠나자마자 낙양의 개방 총타를 찾았다고 하더이다. 그런데 마침 그때 교방주가 우리들을 데리고 강남으로 마 부방주의 흉수를 잡으러 왔었지요. 그 바람에 서하 사람들은 허탕을 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내친 김에 강남까지 달려와 끝내는 교방주와 약속을 하게 된 것이랍니다.]

[그들이 그 같은 게획을 세운 것을 볼 때 먼저 일거에 우리 개방을 없앤 후 어쩌면 소림사를 공격할지도 모를 일이군. 그런 다음 중원의 명대 문파(名大門派)를 산산조각 내겠다는 것이겠지?]

백세경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서하 병사들이 그토록 뛰어날까요? 무슨 자신이 있기에 이토록 날뛰는 것일까요? 교방주는 어느 정도 허실을 알고 있는 듯한데 애석하게도 이 요긴한 때에......]

그러다가 그는 자기 말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호각소리가 급히 세 번 울려퍼졌다. 그리고 여덟 필의 말들이 두 줄로 나누어 숲속으로 달려 들어왔다. 여덟 필의 말에 탄 자들은 모두 손에 긴 창을 들고 있었고 창끝에는 한 폭의 조그만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창날은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왼쪽의 조그만 깃발 네 개에는 서하(西夏)라는 두 글자가 흰색으로 수놓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른쪽 네 폭의 깃발에는 혁련(赫連)이라는 하얀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말에 탄 자 중 네 사람은 호각을 부는 자이고 네 사람은 북을 치는 사람이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암암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와 같은 기세는 싸움을 하는 군사들의 움직임과 같고 우리 무림의 고수들이 모인것 같지가 않구나.)

그런데 호각소리와 북을 치는 고수들 뒤로 여덟 명의 서하 무사들이 따라 들어왔다. 서장로는 같은 여덟 사람의 위맹스런 모습을 보고 하나같이 상승(上乘)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챘다. 따라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저자들이 일품당의 고수인 모양이다.)

여덟 명의 무사는 좌우로 들어섰다.

그러자 한 필의 말이 천천히 행자나무 숲속으로 들어왔다. 마상에 높이 앉은 그 사람은 대홍금포(大紅錦袍)에 약 서른 다섯으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메부리코에 여덟 자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는 키가 아주 크고 코가 큼지막한 사내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는 숲속으로 들어오자마자 호통을 내질렀다.

[서하국 정동대장군께서 왕림하셨다! 개방의 방주는 앞으로 나와서 큰절을 올려라!]

그 소리는 몹시 듣기가 역겨웠다. 바로 조금 전에 말하던 그 사람이었다. 서장로는 말했다.

[본방의 방주는 이곳에 없소. 이 늙은이가 대신 일을 처리하고 있소. 개방의 형제들은 무림의 고수들이오. 서하의 장군이 만약 관직을 가진 사람으로서 만나자고 한다면 우리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고 관직에 있는 사람과는 사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오. 따라서 장군은 우리 대송나라의 왕궁이나 벼슬아치들을 찾아보시되 우리 같이 밥을 빌어 먹는 거지를 만나려고 하지 마시오. 만약에 무림고수의 신분으로 만나겠다면 장군은 멀리서 온 손님이니 아무쪼록 말에서 내려 서로 인사를 나누도록 해야 마땅할 것이오.]

이 몇 마디 말은 거만하지도 않았고 비굴하지도 않았으며 상대방을 깎아내리지도 않았고 자기의 신분을 깎아 내리지도 않았다. 개방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생강은 오래 된 것이 맵다더니 역시 서장로는 대단하군!)

커다란 코를 가진 사내가 말했다.

[귀 방주가 이곳에 없는데 우리의 장군께서는 친히 그대들과 인사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러다가 그는 타구봉이 땅바닥에 꽂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저 죽봉은 정형벽록(晶瑩碧綠)으로 만들었군! 빗자루를 만들면 괜찮겠군!]

그리고는 말 채찍을 휘둘러 그 타구봉을 감으려고 했다.

개방의 제자들은 일제히 호통을 내질렀다.

[멈춰라!]

[빌어먹을 녀석!]

[오랑캐가 감히!]

그가 채찍으로 타구봉을 감으려고 했을 때 별안간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한 사람이 번개처럼 달려나와 타구봉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는 팔을 뻗어 말 채찍이 자신의 팔을 휘감도록 만들었다. 그러더니 팔을 확 끌어당겼다. 큰 코의 사내는 그렇게 되자 말 안장 위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코 큰 사람이 동시에 힘을 주자 '쫙'하며 채찍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나타난 사람은 휙하니 타구봉을 낚아채더니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물러갔다.

뭇사람들이 그 사람을 바라보니 그는 허리가 구부러지고 등이 굽어진 개방의 전공장로였다. 그는 무공이 무척 고강했으며 평소 과묵했다. 그러나 개방의 타구봉이 남에게 빼앗길려는 위기의 순간에 나서서 진방지보(鎭幇之寶)를 지킨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이 일초만 하더라도 큰 코의 사내가 말등에서 떨어졌고 채찍이 두 동강이 났으니 코가 큰 사내가 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데 그 큰 코의 사내는 그와 같은 처지를 당했어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밥을 빌어 먹는 거러지들의 기세가 과연 대단하군! 한 자루 대나무가 구걸하는 데 무슨 소용이 있다는걸까?]

서장로가 물었다.

[서하국의 사람들이 개방과 약속을 정한 이유는 무엇이오?]

그 자는 말했다.

[우리 장군께서는 개방에 두 가지 절기가 있다는 말을 들었소. 타묘봉법(打猫棒法)과 강사십팔장(降蛇十八掌)이라고 하더구만! 그래서 구경을 하시고 싶어하시지.]

개방의 방도들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 사람이 일부러 타구봉법을 타묘봉법이라 하고 강룡십팔장을 강사십팔장이라고 비꼬아 말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 이 만남은 생사를 걸고 악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장로, 전공장로, 집법장로 등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은 원래부터 방주만이 쓸 줄 안다. 상대방이 이 두 가지 이름을 알고서도 믿는 데가 있는 듯 도전해오는 것을 보면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겠구나.)

서장로가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이 개방의 타묘봉법과 강사십팔장을 구경하겠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지. 고양이와 뱀을 상대하는 이 무공들을 구경시켜 드려야지. 귀하는 고양이가 되겠소, 아니면 뱀이 되겠소?]

큰 코의 사내는 입씨름에서도 지게 된 꼴이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그의 등 뒤에서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고양이를 잡아도 좋고 뱀을 항복받아도 좋아! 자! 자! 자! 그러면 누가 먼저 나와 싸워 보겠소?]

말과 함께 한 사람이 걸어 나와 양손을 허리에 걸고 떡 버티고 섰다. 개방의 제자들은 그 사람의 모습이 매우 추악하고 태도가 매우 흉폭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단예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제자! 그대도 왔군! 사부를 보고도 왜 절을 하지 않지?]

원래 그 추악한 사내는 남해악신 악노삼이었다.

남해악신은 단예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는...... 너는......]

단예는 말했다.

[이봐, 제자. 개방 방주로 말하면 나와는 결의 형제를 맺은 형님이시오. 이 사람들은 모두가 그대의 사백과 사숙님이 되셔. 무례한 행동 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나 해.]

남해악신은 호통을 내질렀다. 그 호통 소리에 사면의 행자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남해악신은 욕을 했다.

[후레자식! 개잡종!]

단예는 물었다.

[누굴 보고 후레자식 또는 개잡종이라고 그러는거야?]

남해악신은 흉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자기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책임을 지려고 했다. 그가 단예를 사부로 모신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욕을 하고 싶어서 하는 데 그대가 상관할 게 뭐야? 나는 그대를 욕한 것이 아니었다구.]

단예는 말했다.

[사부를 뵙고도 어째서 절을 하면서 문안을 드리지 않지? 그럴 수야 없지. 예를 지켜야 한단 말씀이야.]

남해악신은 끓어 오르는 화를 참으면서 앞으로 나오더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사부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듯 벼락같이 몸을 일으키더니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그리고 높이 휘파람을 불었다. 사람들은 그 휘파람 소리가 조수처럼 빠르게 멀어지고 있건만 파도가 너실거리는 것처럼 그 여운이 계속하여 천지에 메아리치자 놀람을 금치 못했다. 휘파람 소리만 들어도 남해악신의 무공이 얼마나 고강한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개방 중 아마도 서장로와 전공장로 두 사람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예와 같이 문약한 서생이 그의 사부라니 정말 이상한 노릇이 아닌가? 왕어언, 아주, 아벽 세 사람은 단예가 무공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의아했다.

서하국의 무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의 몸은 대쪽 같았다. 펄쩍펄쩍 뛰는데 얼머나 민첩한지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손에 한 자루의 기이하게 생긴 무기를 들고 있었다. 자루의 길이가 석 자나 되고 끝부분은 다섯손가락 형상의 강철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예는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천하사악(天下四惡)가운데 네쩨인 궁흉극악 운중학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저 네 사람의 악인들이 모두 서하국에 투신했나?)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서하의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악부작 섭이랑이 한 조그만 어린애를 안은 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다만 그 사대악인 가운데 첫째인 악관만영 단연경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연경태자가 이곳에 없다면 둘째와 네째 정도는 개방에서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천하사악은 대리국에서 쓴맛을 보고 북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서하국 일품당에서 무학의 고수들을 초청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사대악인은 칭송을 받자 좋아서 서하 일품당에 투신하기로 했던 것이다. 네 사람의 무공은 대단히 고강한 편이었다. 약간의 솜씨를 보이자 즉시 환대를 받게 되었다. 이번에 변랑에 오게 되었을 때 혁련철수는 그들 네 사람을 모두 데리고 왔으며 퍽 중요시 했다. 그러나 단연경만은 자기의 신분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내세워 일품당에 귀의했지만 혼자 행동하기를 바랬으며 속박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뭇사람들과 동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운중학이 말했다.

[우리 장군께서 개방의 두 가지 절기를 보자 하신다. 도대체 거지들에게 그런 실력이 있는지 아니면 큰 소리만 치는지 빨리 나와서 실력을 보여라.]

해장로가 말했다.

[내가 한번 그와 상대해 보죠.]

서장로는 말했다.

[좋소. 저 사람의 경신법이 무척 뛰어나니 해형제는 조심하시오.]

해장로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강철지팡이를 꺼꾸로 쥐고 운중학에게 일 장쯤 되는 곳까지 나가며 말했다.

[본방의 절기는 사람에 따라 펼치는 법도 다르오. 귀하 같은 무명소졸을 상대함에 있어서 타구봉법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오. 자, 받으시오!]

그리고는 강철지팡이를 휘둘렀다.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운중학의 어깨를 내리쳤다. 해장로는 땅딸한 편이었으나 손에 든 강철지팡이는 그 길이가 일 장 남짓했다. 그것을 휘두르게 되자 운중학같이 키가 큰 사람을 상대하건만 그 강철지팡이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칠 수 있었다. 운중학은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강철지팡이가 땅바닥을 후려친 것이었고 지팡이의 끝은 한 자 정도 땅을 파고 들어갔다. 운중학은 자기의 내공이 그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동쪽에서 흔들 서쪽에서 흔들 하면서 경신법을 펼치며 지구전을 펼치려고 했다.

해장로는 강철지팡이로 한 무리의 하얀 그림자를 그리는 듯했으나 시종 운중학을 건드릴 수 없었다.

단예는 그 싸움을 보느라고 눈이 부셨다. 그때 갑자기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단공자, 우리는 누구를 도와주는 게 좋죠?]

단예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왕어언이었다.

그는 황홀해진 나머지 되물었다.

[뭐라고요? 뭐가 누굴 도와요?]

왕어언은 말했다.

[저 키가 큰 사람은 그대 제자의 친구이고 땅딸한 거러지는 그대 의형의 부하가 아니에요? 그들 두 사람은 더욱더 치열하게 싸우는데 우리가 누굴 도와야 하느냔 말이예요.]

단예는 말했다.

[내 제자는 악인이오. 그리고 저 비쩍 마른 자는 더 악질이죠. 그를 도와줄 필요는 없어요.]

왕어언은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개방 사람들은 그대의 의형을 쫓아내 방주자리에서 떠나게 했고 또한 우리 고종 오라버니에게 누명을 씌웠어요. 난 그들이 싫어요.]

이 소녀에게는 자기의 고종 오빠에게 잘못하면 바로 그 사람이 천하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왕어언은 다시 말했다.

[저 땅딸한 노인이 쓰는 것은 오대산파의 이십사로(二十四路) 복마장(伏魔杖)이예요. 그의 키가 너무 작기 때문에 진왕편석(秦王鞭石) 대붕전시의 두 초식을 제대로 못 펼치는군요. 그의 오른쪽 하반신을 공격하면 그는 감당해 낼 수 없을텐데도 저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사내는 이것을 모르고 땅딸한 노인의 하반신이 굉장히 착실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그녀의 말은 나직했다. 그러나 내공에 정통한 그곳의 고수들은 모조리 들을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해장로가 진왕편석과 대붕전시라는 이초를 쓸 때 확실회 위맹하긴 했지만 웅후함이 부족했고 하반신도 약점을 보였었다.

운중학은 왕어언을 곁눈질해 보고 칭찬의 말을 던졌다.

[계집애가 정말 이쁘게 생겼구나! 더욱더 귀여운 사실은 견식이 있다는 것이다. 내 마누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는 말을 하며 손에 들고 있던 강조로 해장로의 하반신을 향해 질풍 같은 3초를 펼쳤다. 세 번째의 초식을 해장로는 미처 막아내지 못했다.

'쩍'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허벅지가 운중학의 강조에 긁혀 기다란 상처가 나게 되고 대뜸 피가 흘러내렸다.

왕어언은 운중학이 자기의 얼굴이 예쁘다고 칭찬할 때 무척 기뻐했다. 그 다음의 경박한 말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지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못난 것도 모르나봐. 당신이 무엇이 잘났어? 당신과 같은 사람에게 누가 시집을 가려고 하겠어요?]

운중학은 싸우면서 말했다.

[어째서 시집을 오지 않겠다는 것이지? 달리 미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네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을 죽여 버려야겠군. 어디 그대가 나에게 시집을 오나 안 오나 보자!]

이 말은 왕어언의 울화통을 건드린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삐죽이며 더 이상 운중학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운중학은 한 마디 더 희롱의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개방의 오장로가 달려나오지 않는가? 그러더니 대뜸 귀두도를 들고 왼쪽으로 네 번 치고 오른쪽으로 네 번 치면서 위로 네 번 베었으며 아래로 네 번을 그었다. 사사십육도(四四十六刀)를 운중학에게 가한것이데 그 기세는 위맹하기 짝이 없었다. 운중학은 그 도법의 수법을 몰랐다. 동쪽으로 피하고 서쪽으로 피하며 몸을 움츠리고 발을 쳐들기도 했다. 그제서야 가까스로 공격을 피할 수가 있었다.

왕어언은 웃으며 말했다.

[오장로의 이 사상육합도법(四象六合刀法)에는 여덟 종류나 되는 생극의 변화가 포함되어 있어요. 저 키 큰 사람이 몰라보는 모양이군요. 그가 학사팔타(鶴蛇八打)를 펼칠 줄 안다면 사상육합도법을 단번에 깨뜨릴 수 있을텐데.]

개방의 사람들은 그녀가 소리내어 다시 운중학을 도우려 하자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그때 운중학이 초식을 급변시키더니 기다란 다리를 멀리 내뻗었다. 그리고 강조를 마구 휘둘러댔다. 그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학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왕어언은 단예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저 키 큰 사내는 나의 꾀에 넘어 갔어요. 어쩌면 그의 왼팔이 잘릴지도 몰라요.]

단예는 기뻐서 '어'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정말이오?]

오장로의 도법은 매우 무거워 보였다. 그 검이 내려치는가 하면 옆으로 베기도 하는 등 그 수법은 매우 어지러웠다.아래로 내려쳤다가 별안간 재빠르게 세 번 칼질을 했다. 하얀 섬광이 번쩐이는 가운데 운중학은 '악'하는 비명을 내질렀다. 운중학의 왼쪽 손등을 칼날이 번쩍 긋고 지나간 것이었다.

그는 왼손에 들고 있던 강조를 들고 있지 못하고 '창'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재빨리 물러서야 오장로가 잇따라 펼쳐내는 삼도를 피할 수 있었다.

곧이어 오장로는 왕어언의 앞으로 다가와 칼을 세우더니 말했다.

[소저 고맙소.]

왕어언은 웃으며 말했다.

[오장로께선 정말 기문삼재도(奇門三才刀)에 정통하시군요.]

오장로는 깜짝 놀라 생각했다.

(아니...... 나의 도법을 알고 있었구나!)

원래 왕어언은 일부러 오장로의 도법을 사상육합도라고 했던 것이다. 운중학의 초식에서 그가 반드시 학사팔타를 펼칠 것을 알고 운중학으로 하여금 학사팔타를 펼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 순간 운중학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 의해 제압을 당하게 되고 하마터면 왼손이 잘릴 뻔했다.

혁련철수의 옆에 서서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던 큰 코의 사내의 이름은 노아해(努兒海)라고 했다. 그는 왕어언이 몇 마디 말로 운중학을 도와 해장로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하더니 다시 몇 마디 말로 오장로가 운중학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보고 혁련철수에게 말했다.

[장군, 저 한나라 소저는 매우 이상하군요. 우리 일품당으로 잡아가서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토로하도록 한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혁련철수는 말했다.

[좋아. 자네가 그녀를 사로잡도록 하게.]

노아해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장군의 성격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매번 내가 어떤 계책을 말하면 그는 언제나 '좋아, 네가 해라'하거든? 계책을 짜는 것은 좋지만 처리하기는 힘이 든단 말이야. 저 소저의 무공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한 것 같은데 사람들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이면 어떡하지? 오늘은 어쨋든 한 무리의 거지들을 섬멸해야 하니 차라리 선수를 쓰는 것이 좋겠다.)

그가 왼손으로 손짓하자 네 명의 부하가 즉시 그의 곁을 떠나갔다.

노아해는 몇 걸음 앞으로 나가 말했다.

[세 장로, 우리 장군은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보려는 것이오. 그 무공을 모른다면 우리가 상대할 여가가 없으니 실례해야겠소.]

서장로는 냉소했다.

[귀국의 일품당의 무공이 일품이라고 큰 소리 치더니 알고 보니 모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작자들이었군! 그런 자격으로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견식하기에는 아직 모자라오.]

노아해는 물었다.

[어떻게 해야 자격이 생기지?]

서장로는 말했다.

[먼저 우리 소용없는 거러지들을 모조리 패퇴시킨다면 그때 개방의 두령

들이 나서게 될 것이고......]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기침이 나와 기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이어 두 눈이 격렬하게 아파서 참을 수 없었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깜짝 놀라 번쩍 몸을 날리는 동시에 숨을 막고 잇따라 세 번 걷어찼다. 노아해는 하얀 수염을 기른 늙은이가 다짜고짜 덤비게 될 지도 짐작하지 못했고 또 그처럼 빠를지도 내다보지 못한 터여서 황급히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의 급소는 피할 수 있었지만 어깨죽지는 이미 걷어차이게 되어 몸이 휘청거렸다. 서장로는 두 번째 몸을 날려 공격하려고 할 때 몸은 허공에 떠있는데 손발이 저려왔다. 그는 '쿵'하며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개방의 무리들은다투어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오랑캐들이 수작을 부렸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

[나는 눈을 뜰수가 없구나!]

그들은 눈이 따가와 눈물을 마구 흘렸다. 왕어언과 아주, 아벽도 똑같이 눈을 뜨지 못했다.

원래 서하국의 사람들은 이 순간에 행자나무 숲속에다 비소청풍(悲소淸風)이라는 것을 마구 뿌렸던 것이다. 이것은 무색무미의 독이었다. 이는 서하 대설산 환희곡(歡喜谷)에 있는 독물들을 채집해서 액체로 만든 것이었다. 평소엔 병에 담아두었다가 사용할 때 자기편 사람의 코를 먼저 해약으로 틀어막은 후 병마개를 뽑는다. 그러면 그 독액이 김이 되어 나와 바람에 실려 몸에 닿게 되는데 아무리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도 알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이 따가울 때면 독기가 이미 두뇌까지 스며든 이후였다. 중독된 후 눈물을 마구 흘리기 때문에 그 이름 자에데 비(悲)자를 놓고 전신을 꼼짝할 수 없다하여 소(소)자를 놓았으며 독기가 무색무미 하다고 해서 청풍(淸風)이라 이름지었던 것이다.

곧이어 '털썩! 쿵!' '아이구'하는 소리가 잇따라 일어나는 가운데 개방의 제자들이 다투어 쓰러졌다.

단예는 망고주합을 복용한 이후 독기가 침범할 수 없었다. 이 비소청풍도 들이마시게 되었으나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전신을 꼼짝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는 뭇거지들과 왕어언, 아주, 아벽까지도 낭패해 하자 일시 그 이치를 알지 못해 속으로 몹시 놀라고 당황해했다.

노아해는 큰 소리로 호통을 질러 무사들을 지휘해서 개방의 제자들을 묶기 시작했다. 그 자신은 왕어언의 곁으로 다가와 손목을 잡으려고 했다. 단예는 호통을 쳤다.

[뭘 하자는 것이오?]

다급한 그는 오른손 식지를 번개같이 뻗어냈다. 한 가닥 진기가 그의 손끝에서 격사되었다. '찍찍'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대리 단씨의 육맥신검이 펼쳐진 것이었다. 노아해는 이 서생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왕어언의 팔목을 잡으려고 손을 뻗고 있었다. 별안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오른손과 팔이 아래로 축처지고 말았다. 노아해는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단예는 몸을 구부리고 왕어언의 허리를 얼싸안고 능파미보를 펼쳐 비스듬히 세 걸음 나갔다가 옆으로 두 걸음 내딛었다. 그는 행자나무 숲에서 빠져나갔다.

섭이랑은 오른손을 휘둘러 한 대의 독침을 단예의 등을 향해 쏘았다. 이 독침의 겨냥은 정확하고 또 그 기세가 빨라 피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독침이 날아들었을 때 그의 몸은 이미 있던 곳에서 석 자 밖에 있었다.

서하 무사중 세 명의 고수가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큰 소리를 치면서 쫓아왔다. 단예는 능파미보를 펼쳐 그중 한 사람이 타고온 말 곁으로 다가가 왕어언을 말안장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말에 올라 말을 재촉해 달아났다.

서하무사들은 이미 행자나무 숲 사방의 요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단예가 한 필의 말로 급히 달려오자 즉시 화살을 쏘아댔다. 그러나 행자나무 숲은 나무가지들이 엉켜 있어 십여 개의 낭아우전(狼牙羽箭)은 모조리 행자나무에 박히게 되었다.

단예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말아, 착하지?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좋다. 나중에 너에게 닭고기며 돼지고기를 사주마. 그리고 불고기도 먹게 하고 양고기도 먹게 하마.]

그는 말이 비린내나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겨를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달렸다. 뽕나무 밭이 나왔다. 단예는 뽕밭을 가로질렀다. 얼마 후에는 서하의 무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단예는 물었다.

[왕소저 어떻게 되었소?]

왕어언은 말했다.

[중독되었어요.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요.]

단예는 그 말을 듣고 깜짝놀랐다.

[상관없겠소? 어떻게 해야 해약을 찾죠?]

왕어언은 말했다.

[나도 몰라요. 빨리 말이나 재촉하세요. 편안한 곳에 가서 얘기하도록 해요.]

단예는 물었다.

[어떤 곳이 편하겠소?]

왕어언은 말했다.

[나도 몰라요.]

단예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를 보호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던가? 이제 도리어 그녀에게 묻다니 이 무슨 체면인가?)

별수 없이 그는 말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말은 밥 한끼 먹을 시간을 달렸다. 이제 추격하는 소리도 끊겼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단예는 얼마 후 다시 물었다.

[지금은 어떠시오?]

왕어언은 대답했다.

[기운이 더 없어졌어요.]

단예는 미녀와 동행을 하게 되자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녀가 중독된 독이 맹렬할까봐 잠시 웃다가 곧 근심에 싸이곤 했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단예는 장포를 벗어 왕어언의 몸을 덮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얼마 후에 두 사람은 흠뻑 젖어 버렸다.

단예는 다시 물었다.

[왕소저 지금은 어떠시오?]

왕어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몹시 추워요. 어디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봐요.]

왕어언이 무슨 말을 하던 단예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려가 비 피할 곳을 찾자 단예는 아직도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신'좋다'고 대답했다. 그는 속으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왕소저가 한사코 잊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 모용복이다. 그런데 내가 위험에서 심혈을 기울여 그녀를 보호하다가 그녀를 위해 죽게 된다면 그녀는 한평생 살면서 어쩌다 한번 쯤은 이 단예를 생각할 것이다. 장래 그녀가 모용복과 결혼한 이후 아들 딸을 낳게 되고 또 여름철 차일 안에서 자손들과 옛날 얘기를 할 때 그녀는 어쩌면 오늘의 일을 들려 줄지도 모른다. 그녀가 백발이 성성하게 되었을 때 단공자에 대해 말할 때는 눈물을 방울방울 흘릴 것이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게 되었다.

왕어언은 그가 슬편 표정을 하고 비를 피할 곳을 찾지 않는지라 물었다.

[왜 그러죠?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없나요?]

단예는 말했다.

[그때 그대는 그대의 아들딸들에게 말하겠지......]

왕어언은 의아한듯 물었다.

[나의 아들딸이라니? 무슨 말이예요?]

단예는 깜짝 놀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소.]

그리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동북방에 한 채의 방앗간이 보였다. 조그만 개울물로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는데 한창 쌀을 찧고 있는것 같았다. 그는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비를 피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말을 달려 물레방앗간 쪽으로 다가가갔다. 이때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물보라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말에서 내리는 순간 왕어언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 측은해져서 물었다.

[배가 아프오? 머리가 아프오? 아니면 열이 나오?]

왕어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했다.

[모두 아니예요.]

단예는 말했다.

[서하 사람들은 어떤 독을 쓰는지 모르겠군. 내가 해약을 얻었으면 좋으련만.]

왕어언은 말했다.

[이 비를 보세요. 저를 어서 말에서 내려 주세요. 안으로 들어가 다시 애기해야 되겠어요.]

단예는 말을 받았다.

[그렇소. 그렇소. 정말 내가 멍청하구려.]

왕어언은 웃으며 생각했다.

(본래 그대는 멍청한 데가 있잖아요?)

단예는 그녀가 방긋 웃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하마터면 다시 방앗간의 문을 여는 것을 잊을 뻔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손을 들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왕어언에게 가서 말에서 내리도록 부축하려고 했다. 그는 왕어언에게 다가가는 도중에도 한 쌍의 눈동자를 시종 그녀의 예쁜 얼굴에서 떼지 못했다. 그는 방앗간 앞에 도랑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왼발을 내딛은 것이 도랑의 허공을 내딛었다.

왕어언은 급히 부르짖었다.

[조심하세요!]

그러나 때는 늦어서 단예는 '아'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진흙바닥에 엎어진 것이었다. 단예는 몸을 일으켰다. 얼굴과 손등을 비롯해서 온몸은 흙투성이였다. 그는 사과를 했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그대는..... 그대는 별일 없죠?]

왕어언은 말했다.

[나는 별일 없어요. 그대 자신은 괜찮은가요? 혹시 쓰러질 때 어디가 다치지는 않았나요?]

단예는 그녀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 주자 너무 기뻐 혼이 반쯤은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설사 엎어져 아프다 해도 상관없소.]

그리고 손을 들어 왕어언을 말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자기의 손바닥은 진흙투성이인지라 급히 손을 움츠리고 말했다.

[안 되지. 내가 손을 씻은 후에 그대를 부축하겠소.]

왕어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정말 우유부단하군요. 온몸이 젖었는데 흙이 좀 묻었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하는 짓은 원래 이토록 엉망이랍니다. 제대로 소저를 모시지 못하는군요.]

그는 개울물에다 손을 씻고서야 왕어언을 부축해 말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 방앗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쌀을 찧는 방망이가 아래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절구통의 쌀을 끊임없이 찧고 있었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단예는 불렀다.

[게 아무도 없소?]

그러자 갑자기 모퉁이에 쌓아둔 볏짚 더미에서 두 사람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어머나!]

그리고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켰다. 한 남자와 한 여자였다. 모두 십팔구 세 되는 농가의 젊은이들이었다. 두 사람의 옷차림은 단정하지 못했다. 여인의 머리칼에는 지푸라기까지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얼굴을 붉히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매우 쑥쓰러워하는 것 같았다. 원래 두사람은 한 쌍의 연인이었다. 그 처녀는 바로 이곳에서 방아를 찧고 있었는데 그 젊은이가 와서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게 된 것이었다. 굵은비가 내리고 있는지라 올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전혀 거리낌없이 사랑을 나누느라고 단예와 왕어언이 밖에서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단예는 포권을 하고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비를 피하려고 온 것뿐이니 두 분께서는 어서 볼 일을 보시고 우리를 상관하지 마십시오.]

왕어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책벌레는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우리들이 있는데 어떻게 볼 일을 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는 그와 같은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런데 단예는 오로지 온 마음이 왕어언에게만 쏠려 있었다. 따라서 그 농사꾼 젊은이와 소녀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왕어언을 부축해서는 걸상에 앉게 하고 말했다.

[옷이 다 젖었는데 어떻게 하지요?]

왕어언은 얼굴에 다시 홍조를 띠우며 잠간 생각하는 듯하더니 머릿가에 꽂아 두었던 곱다란 구슬이 두 개 박힌 금차(金차;금비녀)한 자루를 뽑아 들고 그 농가의 소녀에게 말했다.

[언니, 이 금비녀를 줄테니 수고스럽더라도 내게 한 벌의 옷을 갖다 주어 바꿔 입게 해주세요.]

그 농가의 소녀는 박혀 있는 두 알의 진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랐지만 금이 귀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믿어지지가 않는 듯 말했다.

[내가 옷을 한 벌 갖다 드리죠. 하지만 이...... 이 금차는 그만 두세요.]

그리고 그녀는 옆에 있는 나무 사닥다리를 따라 올라갔다.

왕어언은 말했다.

[언니, 이리 좀오세요.]

그 농가 소녀는 이미 너덧 개의 사닥다리를 올라갔었으나 다시 내려와 그녀의 앞에 섰다.

왕어언은 금차를 그녀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이 금차는 진짜로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 나를 데리고 가서 옷을 바꿔 입게 해 주세요. 이곳에서 옷을 갈아 입는다면......]

그 농가의 소녀는 왕어언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차까지 얻게 되었으므로 속으로 여간 기쁘지 않았으나 몇 번 사양을 했다. 그러다가 못이기는 체 하고 받았다.

단에와 왕어언은 우선 급한 것 한 가지를 해결한 셈이었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서 서하의 무사들이 뒤쫓아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 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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