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에 나오는 관직제도官職制度에 관한 간략한 설
횡문감黌門監 :
‘가진賈珍은 가용賈蓉이 횡문감에 불과한 것에 생각이 미쳤다.’ (제 13회) 고대에는 학교를 “횡문黌門”이라고 불렀다. “감監”은 즉 “감생監生”인데, 본래 국자감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는데, 나중에는 역시 돈을 기부하고 얻을 수 있었다.
친왕親王, 군왕郡王 :
‘원래 의충친왕義忠親王께서 쓰시려고 하던 것입니다.’ (제 13회) ‘충순친왕부忠順親王府에 있는 사람이 방금 왔는데, 나리를 뵈려고 합니다.’ (제 13회) ‘방금 전에 남안군왕南安郡王, 동평군왕東平郡王, 동녕군왕東寧郡王, 북정군왕北靜郡王은 사가四家 왕야王爺로 .....’ (제 11회) “친왕”의 이름은 남조南朝의 진陳대에서 시작하고, 당나라 때는 황제의 백부, 숙부, 형, 동생과 황자皇子를 친왕으로 삼았다. 당대는 황제의 형제와 황자를 친왕으로 삼았다. 송·명대에서는 그대로 답습하여 고치지 않았다. 청대 종실의 봉작 제일등第一等을 “화석친왕和碩親王”이라 불렀는데, 주로 황자에게 봉했다. “군왕郡王”이란 이름은 서진西晉과 당대의 제왕諸王의 장자長子를 군왕에 봉하고, 송대 이후에는 생략했다가, 청대 종실은 제이등第二等을 “다라군왕多羅郡王”이라고 불렀다.
흠천감음양사欽天監陰陽司 :
‘가진은 ........ 흠천감음양사欽天監陰陽司를 청해 택일을 하라고 분부했다.’ (제 13회) 당대에 “사천대司天臺”를 설치했는데, 송나라와 원나라는 “사천감司天監”이라고 불렀다가, 청대에 와서 “흠천감欽天監”으로 이름을 바꿨다. 천상天象을 관찰하는 직무를 관장하여, 절기와 역법을 추산했다. 흠천감은 “음양사”에 속하지 않고, 각 부府, 주州, 현縣에 모두 “음양학陰陽學”을 설치하고, 점후占候, 성복星卜, 상택相宅과 택일擇日 등등을 관장했다. “음양사”는 작가가 꾸며낸 것이다.
장군將軍 :
‘증조曾祖께서 원래 경영절도사세습일등신위장군京營節度使世襲一等神威將軍 가대화賈代化이시고; ......., 부친은 세습삼품작위열장군世襲三品爵威烈將軍 가진賈珍이다.’ (제 13회) 춘추春秋에 “장군將軍”이란 칭호가 있었고, 전국戰國 시기와 진秦 때에는 “장군”은 무관의 고급 관직명이고, 한 대 이후는 “장군” 명칭 앞에 호칭을 덧붙였다. 청대 종실의 봉작에 “진국장군鎭國將軍”, “보국장군輔國將軍”, “봉은장군奉恩將軍” 등의 명칭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일등 작위를 물려받은 것에서 점점 내려간다. 소설에서의 “장군”은 작위의 명칭으로 작가가 꾸며낸 것이다.
당관堂官 :
‘돌아 와서 호부戶部 당관堂官 조趙 씨에게 보냈다.’ (제 13회) “당관”은 명·청대의 중앙의 각부各部 및 독립된 부서 장관에 대한 호칭이다. 관공서의 법정에서 공무를 처리했으므로 부친 이름이다.
방호내정자금도어전시위용금위防護內廷紫禁道御前侍衛龍禁尉 :
‘가진은 가용에게 분부하기를, 다음 날 길복吉服으로 갈아입고, 증서를 수령하고 와서, 영전에 오품오품 직위에 의거하여 물품을 구비하라고 했다. ....... 증서에는 “방호내정자금도어전시위용금위”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제 13회) 청나라 제도에서 시위侍衛의 가장 고위직이 “어전시위”인데, 팔기八旗 자제로 선발을 많이 했다. 소설에서의 직함은 작가가 허위로 만든 것이다.
승록사僧錄司, 도록사道錄司 :
‘승려와 도사들이 도열하여 서있고, 제단의 방문榜文에 써 있기를: (제 13회) 명·청 시대에 도성에 설치한 승려와 도사를 관할하는 관서로, “승록사”, “도록사”라고 했는데, 전국의 승도僧道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다.
장부관長府官, 장사관長史官 :
‘(북정군왕北靜郡王)께서 장부관에게 대신 제사 드리는 것을 주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제 14회) ‘“충순왕부忠順王府의 장사관”’이라는 말이 제 33회에 보인다. 왕부王府에서 장사長史를 설치한 것은 남조南朝에서 시작되었는데, 대대로 그렇게 했다. 명대에는 정오품이고, 청대에는 정삼품으로, 부府의 사무를 총괄했다. “장부관”은 작가가 허위로 꾸민 관직명인데, 그 직무는 “장사관”과 동일하다.
홍루몽에 나오는 관직제도官職制度에 관한 간략한 설명 ②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
‘가정賈政은 지금은 원외랑으로 이미 승진했다.’ (제 2회) ‘둘째 형의 이름은 정政인데, 자는 존주存周이고, 현재 공부원외랑을 맡고 있다.’ (제 3회) 수나라와 당나라 때 공부工部를 처음 설치했는데, 육부六部의 중심 기구 중의 하나로, 각 항項의 중대한 공정工程, 공장工匠, 둔전屯田, 수리水利, 교통交通 등의 일을 관장하여 대대로 답습하여 바꾸지 않았다. “원외랑”은 사司의 일급一級의 부장관副長官으로 명·청 시기에는 종오품이다.
금릉성체인원총재金陵省體仁院總裁 :
‘흠차금릉성체인원총재 견甄 씨 댁’ (제 2회) 역대의 관제에서 이 관직명은 전혀 없는데, 작자가 가상으로 만든 것이다.
여사女史 :
‘....... 원춘元春은 현명하고 효성스럽고 재주와 덕이 있어서 궁중의 여사女史로 선발되어 들어갔다.’ (제 2회) “여사”는 고대의 궁중의 여관女官의 이름으로, 왕후의 예복을 관장하는 관직이다. 청대에서의 “여사”는 내직內職으로 육국六局의 문서를 담당했다.
연적동지捐的同知 :
‘이 사람 연璉 나리는 현재 돈을 내고 산 동지同知라는 관직을 갖고 있습니다.’ (제 2회) 돈을 내고 취한 관직을 “연관捐官”이라고 한다. “동지同知”는 지부나 지주知州의 좌이관佐貳官이다. 명·청 시기의 부동지府同知는 정오품이고 주동지州同知는 종육품이다.
국자감제주國子監祭酒 :
‘아버지 이름은 이수중李守中인데 국자감제주를 지냈다.’ (제 4회) “국자감”은 간칭簡称으로 “국학國學”인데, 서진西晉에서 시작하여 “국자학國子學”으로 부르다가, 수당隋唐에서는 “국자감”으로 바꿔 부르고, 후대에는 최고의 학부學府가 되었다. 수당 이후로 국자감을 주관하는 장관의 호칭을 “국자감제주”라고 했다.
문자門子 :
‘바로 서명을 하려 하는데, 탁자 옆에 서 있던 문지기 하나가 눈짓을 하는 것이었다.’(제 4회) 관아에서 차를 대접하고 옷시중을 드는 업무를 맡은 사람을 “문자”라고 부른다.
절도사節度使 :
‘이 사건에 결정을 내린 우촌은 가정賈政과 경영절도사京營節度使 왕자등王子騰에게 급히 서신 두 통을 작성했다.’ (제 4회) ‘영흥절도사永興節度使 풍반자馮胖子’ (제 13회) ‘지금 장안절도사로 있는 운雲 나리에게 서신 한 통을 보내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제 15회) “절도사”는 당나라 때에 시작한 관직명으로 그 관직을 받을 때, 조정에서 깃발을 내렸기 때문에, 관할 지구의 군정軍政과 재정을 지휘 통솔할 수 있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높은 직위이다. 송宋, 요遙와 금金나라도 모두 이 관직을 설치했지만, 실권이 없어 원나라 때에는 폐지했다.
황상皇商 :
‘설반薛蟠은 비록 황상이지만, 경제와 세상사를 일체 알지 못했다.’ (제 4회) 궁정 안의 곳간으로부터 은자를 수령하여 조정의 상업을 전담하는 사람으로, 민간에서 “황상”이라고 불렀다.
재인才人, 찬선贊善 :
‘공주를 위해 선발되어, 입학한 군주郡主를 곁에서 시중드는 재인才人을 맡거나 찬선贊善의 직분이다.’ (제 4회) “재인”은 황제의 비빈의 하나이다.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처음 설치하여 후세에 계속 사용했다. 당나라 초에 궁관宮官의 정오품으로 정해졌다가, 나중에 정사품으로 승격했다. “찬선”은 당나라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찬선대부贊善大夫”로 부르고, 주요 직무는 태자에 관한 시종侍從, 시강侍講과 전령傳令 등의 일을 맡았다. 원·명·청 때에 “찬선”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작자는 궁중의 여관으로 이용했다.
구성통제九省統制 :
‘또 외숙 왕자등王子騰이 구성통제로 영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 4회) “통제統制”의 이름은 북송北宋 때 시작했는데, 남송南宋 때에 정식으로 외지 주둔하는 금군장관禁軍將官의 직함이다. 여기의 “구성통제”는 작자가 관명을 빌린 것으로 추측된다.
숙장塾掌 :
‘특별히 함께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사람을 숙장으로 천거했다.’ (제 9회) “숙塾”은 즉 사숙私塾인데, 예전의 사립학교이다. 사숙을 주관하는 사람을 “숙장”이라고 부른다.
홍루몽에 나오는 관직제도官職制度에 관한 간략한 설명 ①
『홍루몽』에서 중점적으로 서술한 가부賈府의 모습은 부귀영화가 얼마 남지 않은 부유한 가정의 모습이다. 왕래를 하던 사람 대부분도 고관대작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이 때문에, 작품 안에는 견식이 있는 사람이 꽤 많이 들어 있다. 그러나 작자는 왕조와 연대를 고려하지 않고, 장소와 나라도 언급하지 않는 예술적인 취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인 관직이 아닌, 때로는 직분을 만들어내기까지 하여 진짜를 가짜로 가짜를 진짜로 하여 모호하게 만드는 효과를 냈다.
예를 들면, “체인원총재體仁院總裁”, “란태사대부蘭台寺大夫”, “용금위龍禁衛” 등 말하자면 허위에 속한다.
설사 실제의 명칭이 있다고 해도, 왕왕 “고사古事”, “시사時事”를 참조하여 사용하여, 한 왕조나 한 시대의 정해진 방법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 예를 들자면, “절도사節度使”를 당제唐制로 하고, “통제統制”를 송나라에 두고, “도검점都檢點”은 오대五代에 설치한 것으로 속하게 하고, “군기軍機”는 청대에만 있는 것 등등이다.
그밖에, “흠천감음양사欽天監陰陽司”는 아예 “흠천감”과 “음양학陰陽學”의 두 부문으로 허구의 관아로 만들어냈다.
고대의 생활에 대해서는 현대 사람들은 그리 잘 알지 못하는데, 그 때문에 『홍루몽』에 나오는 직관전제職官典制를 골라 간단하게 해석해 본다.
대비大比, 춘위春闈
“내년이 마침 대비大比가 있는 해이니 존형께서는 속히 짐을 꾸려 도성에 올라가십시오. 내년 춘위春闈에 응시하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이 나타날 것입니다.”(제 1회)
명청 대의 과거시험은 원시院試, 향시鄕試, 회시會試 삼급三級으로 나눈다. 향시는 또 “대비大比”라고도 부르고, “비比”는 심사한다는 의미이다.
대비는 즉 향시鄕試를 말하는데, 과거의 제 1 차 시험으로 명·청대에 3 년에 한 번 각 성省에서 실시되는 과거 시험이고, 합격자는 거인擧人의 칭호를 받는다.
대비에 합격한 남자는 그 다음 과거시험인 회시를 보기 위해 속히 도성으로 가는데, 이듬해 봄에 거행되므로 회시를 “춘위春闈”라고도 부른다.
회시會試는 명·청대에 도성 북경에서 3 년에 한 번씩 치르던 과거의 하나로, 향시에 합격한 거인들이 응시하고, 합격자는 공사貢士라고 부르고, 공사가 된 뒤에는 전시殿試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위闈”는 시험장이라는 뜻이다.
진사進士
‘진사進士가 된 우촌雨村은 지방의 외지에 근무했다.’(제 2회) 또 제 13회에는 ‘가경賈敬은 을묘과乙卯科로 진사가 되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과거시험에서 회시를 거친 거인이 전시에서 합격하면, “진사급제進士及第”, “진사출신” 또는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이라고 말하는데, 통칭 “진사”라고 한다.
지부知府 :
‘우촌은 현재 본부本府 지부知府로 승진했다’(제 2회) 지방 행정 중에서 “부府”는 일급一級의 장관長官으로, 당대唐代에는 “윤尹”으로 부르고, 송대宋代에는 “지모부사知某府事”로, 약칭으로 “지부知府”라고 했다. 명대明代에 비로소 정식으로 “지부”라고 칭했는데, 정사품正四品이다. 청대에는 바꾸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여, 처음에는 그대로 정사품이었다가, 건륭 18년에 종사품從四品으로 바꿨다.
차정鹺政, 염과鹽課, 순염어사巡鹽御史 :
‘올해 차정鹺政에 임여해林如海가 임명되었다던데, ......황제가 직접 순염어사로 보냈다고 한다.’(제 2회) ‘염과鹽課 임林 나리’(제 19회) 청대에 양회兩淮(회남淮南과 회북淮北 두 시市의 합칭임), 강절江浙(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 지역)과 장로長蘆 등 중요한 소금 생산 지구에 “도전염운사사都轉鹽運使司”를 각각 설치하고, 그 장관長官을 “염운사鹽運使”를 삼았는데, “염정鹽政”이라고도 불렀다. 늘상 도찰원都察院의 염과어사의 직함을 지녔기 때문에, “순염어사”라고도 불렀다.
장원狀元, 방안榜眼, 탐화探花 :
‘그 임여해는 지난 번 과거에서 탐화가 된 사람이다.’ (제 2회) ‘당신은 장원壯元 방안榜眼 탐화探花에 속하는 고금의 제일가는 재자才子입니다’ (제 74회) 명·청 시대의 과거의 마지막인 전시殿試는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데, 합격자는 진사進士라고 한다. 이 전시를 삼갑三甲으로 나누어 채용하는데, 제1갑은 진사급제, 제2갑은 진사출신, 제3갑은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을 내렸다. 제1갑에서 채용하는 3 명은 일등은 “장원壯元”, 이등은 “방안榜眼”이고 삼등을 “탐화探花”라고 부르고, 합쳐서 삼정갑三正甲으로 불렀다.
난태사대부蘭台寺大夫 :
‘임여해가 금번에 난태사대부로 승진했다.’ (제 2회) 한대漢代에 궁정의 장서藏書를 두는 곳을 “난태蘭台”라고 했는데, 주관자 어사중승御史中丞은 규찰과 탄핵을 겸하여 관장했다. 나중에 어사부御史府를 “난태사蘭台寺”라고 불렀다. 역대 모두에 “난태사대부”라는 관직명이 없는데, 이것은 작자가 일부러 가상으로 지은 것이다.
국공國公 :
‘녕국공寧國公과 영국공榮國公은 어머니가 같은 친형제이다.’ (제 2회) “공公”은 고대의 작위명으로 다섯 봉작封爵의 첫 번째로 지위가 군왕郡王 밑이다. 수隋나라 때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고군국古郡國의 이름은 공작봉호자公爵封號者의 호칭이 바로 그 국공의 이름이 되었다. 예로, 수나라의 양소楊素는 월국공越國公에 봉하고, 명나라의 서달徐達은 위국공魏國公에 봉하였다. 청대에는 고군국명을 미칭美稱으로 바꿨는데, 예를 들면, 진국공鎭國公과 보국공輔國公 등이 있다.
주사主事 :
‘황상께서 ....... 별도로 정政 나리에게 주사主事라는 직함을 내렸어요.’ (제 2회) 명·청 시대의 사인士人 중에 진사에 합격한 뒤에 먼저 주사의 직무를 반드시 거쳐서 점차 원외랑으로 진급했다. “주사”는 각부 사관司官의 가장 낮은 일급인데, 명나라는 종육품從六品이고, 청나라는 정육품正六品이다.
홍루몽의 인물보 : 기타 인물 (2)
북정군왕北靜郡王 :
이름이 수용水溶이다. 동평군왕東平郡王, 남안군왕南安郡王과 서녕군왕西寧郡王과 함께 “사왕四王”으로 불리는데, 당시에 유일하게 북정왕의 공이 가장 높고, 자손들은 여전히 왕의 작위를 세습 받는다. 수용은 생김새가 수려하고, 성정이 품위가 있었고, 가부와는 교분이 두터워 진가경의 장례 출상 때 노제路祭를 지낼 때, 가보옥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데 황제가 친히 하사한 향염주香念珠를 선물한다. 후 40회 속서에서 가부가 가산을 몰수당할 때, 그는 곧바로 달려와 비호하며 가부를 위로한다.
유상련柳湘蓮 :
보옥, 가련 등의 친구이다. 우삼저와 정혼했다가, 나중에 후회하자, 우삼저가 자살하고 만다.
장옥함蔣玉菡 :
예명이 기관琪官이다. 원래 충순왕부忠順王府의 전통극 배우로 보옥과 친구이다. 나중에 습인을 처로 맞는다.
견사은甄士隱 :
이름이 비費, 자는 사은士隱으로, 소주蘇州의 관리였다. 향릉香菱(영련英蓮)의 부친이다. 나중에 절름발이 도사를 따라 출가한다.
문자門子 :
원래 호로묘의 사미승이었는데, 절에 불이 나서 있을 곳이 없게 되자, 머리를 기르고 문지기가 된다.
정허靜虛 :
수월암水月庵(즉 만두암饅頭庵)의 늙은 비구니로 자주 가부에 왕래한다.
예이倪二 :
별명이 취금강醉金剛이다. 의협義俠이라고 이름난 고리대금을 하는 무뢰한으로 가운의 집 바로 이웃에 산다.
홍루몽의 인물보 : 기타 인물(1)
묘옥妙玉 :
자칭 함외인檻外人이다. 머리를 기르며 수행하는 비구니로, 대관원 안의 농취암櫳翠庵에 거주한다. 본적은 소주蘇州 사람으로 부모가 다 세상을 떠나고 어려서부터 병이 잦아 머리를 기르며 수행하고 있는데, 대관원을 완공하였을 때 가부의 초청으로 와서 거주하게 되었다. 난초처럼 아름다운 품격을 지니고, 재능은 신선보다 풍부한 그녀는 부귀하나 저속한 가부를 대단히 경멸하고, 금은보화를 일개 속물에 비하했다. 묘옥은 자신을 고결한 인격자라고 여기며 스스로 만족해한다. 오만하고 청아하며, 또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 가모가 흥이 나서 유노노, 가보옥, 임대옥 등과 같이 농취암에 들러 잠시 앉아 있었다. 그들이 가고나자,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녀는 유노노가 사용하고 난 진귀한 도자기 오채소개충五彩小盖盅(다섯 가지 색깔의 손잡이가 없는 작은 잔)을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정공자多情公子인 가보옥에게는 도리어 자기 자신이 늘 차를 마시던 녹색 옥잔을 내준다. 보옥의 생일까지도 마음속에 단단히 기억하고, 또한 생일축하카드까지 특별히 보내왔는데, 그녀가 비록 속세의 밖에 있다고는 하나 사모하는 마음은 없어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나중에 묘옥은 가부가 쇠락함에 따라 실의에 빠져 타향을 떠돌며 전전하다가 남쪽에 있는 과주瓜州 나루터에 이른다. 이처럼 “깨끗함”과 “하잘것없는 것”을 자랑하던 미모의 고고한 여자 묘옥은 결국은 인간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에 떨어져 가장 굴욕적인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후40회속서에서 내면이 텅 비고 외면을 추구하던 묘옥은 속세의 인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 도적에게 잡혀가 모욕을 당하고 죽고 마는데, 원래의 조설근의 의도와는 맞지 않는다.
유모모劉姥姥 :
촌의 아녀자로 그녀의 사위 왕구아王狗兒의 조부가 일찍이 왕부인의 부친과 인연이 있었다. 젊어서 과부가 되어 슬하에 아들이 없어 사위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사위의 생활이 힘든 것을 보고, 전에 본 적이 있는 왕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 즉 가부의 왕부인을 생각해내고, 안면에 의지해 외손자 판아板兒를 데리고 가부에 도움을 청하러 간다. 작가는 이 인물의 관찰과 느낌을 통하여, 영국부의 일상생활을 통해 그 부귀영화와 쇠락의 과정을 많은 용량을 할애해 보여준다. 처음으로 영국부를 찾아온 그녀는 몇 번의 곡절을 거치며 봉저에게서 20냥의 은자를 얻는다. 그 다음에 그녀는 과일과 소채를 가지고 두 번째로 가부를 방문하는데, 가모의 만류로 며칠을 머물면서, ‘예전부터 지금가지 본적이 없고, 먹어 본 적도 없는 것, 들어 본 적도 없는 것들을 모두 듣고 보는’ 등의 묘사를 통해서, 농촌의 빈곤한 농가 생활과 부패한 호화 귀족의 생활을 대비해 보여준다. 가부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에 유노노는 몇 번의 놀림을 당하지만, 가부의 젊은 그들이 노마님의 환심을 살려고 하는 것을 알고, 그녀 역시 기쁜 마음으로 이 역할을 연출해낸다. 돌아갈 때에, 봉저는 유노노에게 자기 딸이 길하고 이롭도록 이름을 지어주기를 청한다. 그녀는 교아巧兒라고 이름을 지어주는데, ‘교巧’자는 흉凶한 것을 만나도 길吉로 바뀐다는 의미이다.
제 5 회의 교저巧姐의 판사는 이러하다:
세패휴운귀勢敗携云貴(가세가 기울면 귀한 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망막논친家亡莫論親 (집안이 망하면 친척도 찾지 말라)
우인제유씨偶因濟劉氏 (우연히 유씨 할멈 도와준 인연으로)
교득우은인巧得遇恩人 (요행히 은인을 만날 수 있었구나)
가부의 권세가 망한 뒤, 골육이 서로 싸워, 교저는 흉악한 삼촌과 간악한 오빠에 의해 팔렸다가, 가부가 흥성했을 때 도움을 입은 유노노에게 구출된 것이다.
가우촌賈雨村 :
이름은 화化, 자는 시비時飛이고, 호는 우촌雨村으로, “가어촌假語村”으로 발음한다. 본래 호로묘葫蘆廟에 기거하던 가난한 선비로 출세를 구하려 하고 있었는데, 가부와 성이 같았기 때문에 자칭 “종질宗侄”이라 했다. 일찍이 견사은의 도움으로 서울로 들어가 진사에 합격해 지방에 근무하다가 지부知府로 승진되었는데 탐욕이 심해 파직되어, 잠시 임대옥의 훈장을 지낸다. 임여해와 가정의 도움을 받아 복직하여 응천부應天府에 부임한다. 나중에 대사마大司馬로 승진하여 군기軍機의 일을 맡아 조정에 참여하여 단번에 높은 지위에 올랐다. 후40회속서에서는 가부가 몰락하자 그는 가부의 어려움을 틈타 해를 가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후에 부윤府尹로 강등되는데, 가부에서는 “흥륭가興隆街”의 나리라고 부른다. [출처] |작성자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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