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천룡팔부8 김용
36. 꿈꾸듯 황홀한 정사 (夢裏眞眞語眞幻)
한 줄기의 찬 기운이 바로 그 문 안쪽에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이즈음은 날이 점차 따뜻해지고 있었다. 높은 봉우리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으나 평지의 얼음이나 눈은 이미 모두 녹아 없어졌으므로 봄꽃이 만발한 때였다.
그런데 이 안쪽 문에는 한 겹의 엷은 하얀 서리가 앉아 있었다. 동모는 말했다.
안으로 밀어라.
허죽은 밀었다. 그러자 그 문은 서서히 열렸다. 그런데 한 자 정도 틈이 벌어지게 되자 한 줄기 한기가 얼굴로 덮쳐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에는 쌀이나 밀을 담은 푸대가 집 천정 위까지 맞닿도록 높이 쌓여 있었다.
양식을 저장해 두는 창고 같았다. 그 왼쪽으로는 좁은 통로가 나 있었다.
그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나직이 물었다.
이 양식 창고는 어찌하여 이토록 춥지요?
동모는 웃었다.
문을 닫아라. 우리는 얼음 창고로 들어섰으니 아마도 별일 없을 것이다.
허죽은 의아하여 물었다.
얼음 창고라니요? 이것은 양식이 아닙니까?
그는 두 개의 문을 모조리 닫았다. 동모는 기분이 무척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두 곳의 문을 닫게 되자 창고 안은 칠흑과 같이 어두워서 손을 뻗어도 다섯 손가락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허죽은 더듬거리며 왼쪽의 통로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한기는 더욱 심해졌다. 왼손을 뻗쳐 보자 차갑고도 딱딱하며 습기찬 물건이 만져졌다.
틀림없이 한 조각 커다란 얼음 덩어리였다. 정히 이상하게 생각할 때 동모는 어느덧 화섭자에 불을 켰다. 삽시간에 허죽의 눈앞에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전후좌우가 모조리 커다랗게 잘라놓은 네모진 얼음 조각인데 불빛이 그 얼음 조각에 비추게 되자 그 얼음 조각은 갑자기 청색이 되었다가 갑자기 남색이 되었다 하는 것이 무척 환상적인 광경을 이루는 것이었다.
동모는 말했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자.
그녀는 얼음 조각을 더듬어 가면서 오른 다리를 펄쩍펄쩍 뛰어 앞장서서 걸었다. 그리고 얼음 조각 사이를 몇 번 돌더니 한 모퉁이에 있는 커다란 구멍으로 내려갔다. 허죽은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동굴 안에는 한 줄의 돌 계단이 있었고 돌 계단을 다 걸어 내려가게 되자 아랫쪽은 또 커다란 실내에 얼음 조각이 잔뜩 쌓여 있었다.
동모는 입을 열었다.
이 얼음 창고에는 또 하나의 아래층이 있을 것 같다.
과연 아래쪽에 다시 한 칸의 커다란 석실이 있었는데 역시 얼음 조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동모는 화섭자에 불을 끄고 앉아서 말했다.
우리는 이제 깊은 땅 밑 제 삼 층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계집년이 아무리 귀신 같고 영악하다 할지라도 이곳으로 동모를 찾아 오지는 못할 게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며칠간 그녀는 얼굴에 침착한 빛을 띄우고 있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여간 초조해하지 않았다. 서하국 고수들의 이목을 피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기민하게 움직이고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가까스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허죽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이상해.
동모는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냐.
허죽은 대답했다.
이 서하국의 황궁에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얼음 조각을 지하 창고에다가 숨겨 놓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죠?
동모는 웃었다.
이 얼음 조각은 지금은 한 푼의 가치도 없지만 뜨거운 여름철에는 진귀하기 이를데 없는 것으로 변한단다. 너도 어디 생각해 봐라. 한창 더위가 심할 때 그야말로 태양은 숯불을 잔뜩 피어 놓은 듯 사람으로 하여금 비지땀을 흘리게 하지 않느냐? 만약 그때 옆에 두 조각의 얼음이 있어서 연자녹두탕(蓮子錄豆湯)혹은 박하백합탕(薄荷百合湯)에다가 몇 알의 얼음 구슬이라도 타게 된다면 그 맛이 어떻겠느냐?
허죽은 그제서야 확연히 깨달은 듯 말했다.
정말 묘하군요. 묘해! 그러나 이 많은 얼음 조각을 안으로 옮겨 저장하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 것이니 그야말로 너무나 번거로운 짓이 아니겠습니까?
동모는 더욱 더 우습다는 듯 말했다.
황제가 한 번 부르면 백 사람이 대답을 하고 나서며, 무엇을 요구하든 대령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그가 어찌 번거로운 것을 두려워 하겠느냐? 너는 설마하니 황제 늙은이가 스스로 손을 써서 이 커다란 얼음 조각들을 얼음 창고 안으로 쌓아둔 줄 아느냐?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정말 크게 복을 누리는 셈이로군요. 하지만 이승에서 너무 복을 많이 누리게 되어 복이 다하게 된다면 내세에서는 반드시 복이 없을 것입니다. 선배님은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습니까? 어찌하여 그들 어전 시위들이 어느 때 어느 곳을 순찰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죠?
동모는 말했다.
이 황궁을 물론 나는 와 본 적이 있지. 나는 그야말로 그 계집에게 화풀이를 하고자 했으니 어찌 한 번만 왔겠는가? 그들 어전 시위들의 숨쉬는 소리가 너무나 거칠어서 십 장 밖에서도 나는 들을 수가 있는데 그게 뭐가 대수로우냐?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랬었군요. 선배님은 타고난 귀신과 같은 귀를 가지고 계시니 정말 다른 사람은 흉내조차 낼 수가 없는 일입니다.
동모는 말했다.
뭐가 타고난 귀신 같은 귀냐? 그것은 무공을 연마한 덕택이다.
허죽은 무공을 연마한 덕택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번쩍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얼음 창고 안에는 날아다니는 새나 걸어다니는 짐승이 없으니 뜨거운 피를 구하기 어려울 터인에 동모가 어떻게 무공을 연마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창고에 양식은 꽤 많이 있으나 얼음 창고 안에서 불을 지필 수가 없으니 생쌀과 생밀로써 음식을 삼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동모는 그가 오랫동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자 물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허죽은 자기의 생각을 밝혔다. 동모는 웃었다.
너는 그 푸대자루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양식인 줄 아느냐? 그것은 모두 다 솜이다. 바깥의 열기가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얼음을 녹이게 되기 때문에 녹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솜을 쌓은 것이다. 너는 솜을 먹을 수 있느냐?
허죽은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바깥으로 가서 양식을 구해야 겠군요?
동모는 말했다.
황궁의 주방에 살아 있는 닭이나 오리들이 없을 리 있겠느냐? 하지만 닭이나 오리, 돼지, 양 같이 사람이 키우는 짐승의 피는 영기가 눈 덮인 봉우리 위의 매화록이나 영양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우리는 어화원(御花園)으로 가서 학이나 공작, 원앙, 앵무새 같은 것들을 잡아와서 나는 피를 마시고 너는 고기를 먹으면 될 것이 아니겠느냐.
허죽은 재빨리 말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소승이 어찌 살생을 하고 비린 것을 먹는단 말씀입니까?
그는 동모가 이미 안전한 곳에 이르렀으니 자기가 모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말했다.
소승은 불문의 제자이니 선배님이 중생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저는......저는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습니다.
동모는 물었다.
너는 어디로 갈 생각이냐?
허죽은 대답했다.
소승은 소림사로 돌아가렵니다.
동모는 대소하여 말했다.
너는 갈 수 없다. 반드시 이곳에서 나를 모시고 있으면서 내가 신공을 연성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계집년의 목숨을 빼앗게 되었을 때야 나는 너를 놓아 줄 수가 있다.
허죽은 그녀가 신공을 연성한 뒤에 이추수를 죽이겠다는 말을 듣고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죄를 짓고 싶지 않아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노 선배님, 소승이 권한다 하더라도 노 선배님께서는 반드시 듣지 않으실것입니다. 더군다나 소승은 아는 것이 없고 또 말주변머리도 없어 무슨 말로 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원한은 풀어야지 맺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용서할 때는 용서해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돌 계단 쪽으로 나아갔다. 동모는 호통을 내질렀다.
게 섰거라. 나는 네가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가야겠습니다.
그는 아무쪼록 신공을 연성할 수 있도록 빌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신공을 연성하게 된다면 비단 이추수의 목숨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오노대를 위시한 삼십육 동의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 그리고 모용복, 단예 등등이 비명횡사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말을 하지 않고 돌 계단 위로 올라섰다.
그는 별안간 두 무릎이 마비되어 그만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곧이어 허리께가 다시 시큰했다. 전신을 꼼짝할 수 없었다. 동모에게 혈도를 짚힌 것이다. 어둠속에서 그녀는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허공을 격하고 허죽의 요혈을 봉쇄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 고수 앞에서 자기로서는 처분대로 따라야지 전혀 반항할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이 가라앉게 되자 염불을 하듯 경을 읊조렸다.
도를 닦자면 많은 고통을 당하는 법, 근본을 버리고 하찮은 것을 쫓게 되면 십중팔구 애증과 증오를 일으키게 되기 쉽다. 오늘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옛날 내가 한 바가 있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며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문에 이르되 고통을 만나고도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달관하는 것이라 했다.
동모는 북쑥 입을 열었다.
네가 읊고 있는 것은 어떤 경문이냐?
허죽은 대답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이것은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입도사행경(入道四行經)입니다.
동모는 말했다.
달마는 너희 소림사의 창시자가 아니냐? 나는 그에게 정말 하늘을 무너뜨리고 땅을 뒤집는 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물쭈물하니 뼈대가 없는 못난 화상에 지나지 않는구나.
허죽은 말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선배님께서는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동모는 말했다.
너의 그 경문 중에는 도를 닦게 될 때 어려움과 고달픔에 부딪치게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것은 옛날 지은 죄 때문이니 기꺼이 받아들이되 원망하거나 호소하지 않아야 된다고 하지 않더냐?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어떠한 무서운 고통을 안겨준다 하더라도 너는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원망을 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느냐?
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도를 닦는 수위가 얕아서 외마(外魔)가 침입하고 내마(內魔)가 우러나게 될 때에는 아무래도 항거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동모는 말했다.
너는 소림파의 공력은 거의 사라졌고 소요파의 재간만 남아 있다. 너는 내 말을 듣도록 해라. 나는 소요파의 신공을 모조리 너에게 전수해 주겠다. 그때 너는 천하 무적이 될 것이니 그 아니 영광스럽겠느냐?
허죽은 두 손을 합장하고 다시 경을 외웠다.
고달픔과 즐거움은 인연에 의한 것입니다. 설사 영예로운 일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비롯되었기에 오늘날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연이 다하게 되면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기쁘겠습니까? 얻음과 잃음은 인연에 따르는 법이고 함부로 보태지거나 감소되지 않는 법입니다.
동모는 호통을 내질렀다.
퉤, 퉤! 터무니없는 소리! 너의 무공은 얄팍해서 언제나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지 않느냐? 바로 지금 너는 나에게 혈도를 봉쇄당하게 되어 내가 너를 때리고 욕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너는 반항할 수 없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고 또 내가 신공을 연성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숨어서 이추수라는 그 계집년이 바깥에서 날뛰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의 사부가 너에게 그와 같은 그림을 준 것은 역시 남에게 부탁하여 무공을 전수받은 후 정춘추라는 녀석을 처치하라는 데 있지 않느냐? 이 세상에서는 강한 자는 남을 업신여기고 약한 자는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는 법이다. 네가 평안무사하고 즐거운 세상을 보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천하 제일의 강자가 되어야 하느리라.
허죽은 여전히 경문을 읊었다.
세상 사람들은 오랫동안 깨우치지 못하고 언제나 욕심을 부리니 이름하여 구(救)라고 하도다. 선사(禪師)가 터득한 진실은 그 도리가 속세의 도리와는 상반되더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바램이 없다면 형체는 운(運)을 따라 돌아 가게 되느니라. 삼계(三界)가 모두 고달픔이니 그 누가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을까? 구하는 것은 모두 고달픔이니 구하는 바가 없어야만 즐거워지리라.
허죽은 말주변이 없었으나 이 경문은 매우 익숙하게 외우고 있었다. 이 입도사행경(入道四行經)은 담림(曇琳)이 기록한 것이었다. 담림은 달마 대사가 남천축에서 중원 땅으로 온 뒤 거두어들인 제자였다. 그리고 경문 중에 기재된 내용은 달마 대사의 미언법어(微言法語)로서 겨우 수백 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경문은 소림사의 뭇 승려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경문이었다. 그런데 허죽이 입에서 나오는대로 읊고 보니 동모의 말을 모조리 반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모는 호승심이 무척 강했다. 수십 년 동안 그녀가 한 마디하는 말을 그 누구든 받들어야 했다. 그녀 아래의 시녀나 하녀들 가운데 감히 그녀의 말 한 마디를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고 삼십육 동이나 칠십이 도의 동주와 도주같은, 그야말로 오만하고 거칠기 이를데 없는 기인이사들도 역시 그녀를 마치 천신처럼 받들어 왔다. 그런데 오늘 이 젊은 화상에게 반박을 당하여 아무 말도 못 하게 될 처지에 빠져 버리자 그녀는 크게 노하여 오른손을 쳐들고 허죽의 정수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그런데 손이 막 그의 정수리에 있는 바로 백회혈에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이 소화상을 일 장으로 격살하게 된다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 느끼지도 못할 것이며 여전히 그의 그와 같은 왜곡된 도리가 옳고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믿으며 죽을 게 아닌가? 흥! 흥! 이토록 수월하게 이 녀석을 죽일 수야 없지."
그녀는 즉시 손을 거두고 스스로 운기 조식에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는 돌 계단으로 뛰어올라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주워 몸을 지탱하며 곧장 어화원(御花園)쪽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녀의 공력은 상당히 고강해져 있었다. 한 다리가 잘라졌으나 몸은 여전히 낙엽처럼 가벼워 어전 시위들은 그녀의 기척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녀는 어화원에서 두 마리의 백학과 두 마리의 공작을 잡아서는 얼음 창고로 되돌아왔다. 허죽은 그녀가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새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몇 번 "아미타불" 하고 불호를 외웠을 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되는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오시가 될 무렵이었다.
동모는 체내의 진기가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고 무공을 연마할 시간이 도래한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즉시 한 마리 백학의 목을 깨물어 그 피를 마셨다.
그녀는 무공을 연마하고 난 이후 다시 한 마리 백학의 목을 입으로 물어 뜯으려고 했다.
허죽은 그 기척을 듣고 말했다.
선배님, 그 새는 남겨 두었다가 내일 다시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쓸데없이 한 목숨을 더 죽여서 무엇합니까?
동모는 웃었다.
나는 호의로 자네에게 먹여 주려고 하는 것일세.
허죽은 깜짝 놀라 말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소승은 절대 먹을 수 없습니다.
동모는 왼손을 뻗쳐 그의 아래턱을 잡았다. 허죽은 반항할래야 할 수가 없어서 그만 입을 벌리게 되었다. 동모는 백학을 거꾸로 잡고는 학의 피를 모조리 그의 입안으로 흘러 넣었다.
허죽은 한 줄기의 뜨거운 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어라 하고 입을 다물려고 했으나 혈도가 동모에게 제압당한 이상 자기 스스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속으로 화도 나고 다급해진 나머지 그만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아 내었다.
동모는 학의 피를 모조리 먹이고는 오른손을 그의 등에 있는 영대혈에 가져가 그를 도와 진기가 운행되도록 했다. 이어서 다시 그의 관원(關元)과 천돌(天突)의 두 혈도를 짚어 그로 하여금 학의 피를 토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녀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화상, 너의 불가 계율에는 비린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되어 있는데 이제 그 계율은 깨졌겠지? 하나의 계율이 깨지게 되면 두 번째의 계율을 깨뜨린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흥, 이세상에 그 누가 감히 나와 맞선다면 나는 그와 끝까지 겨루어 보겠다. 어찌됐든 나는 네가 화상이 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
허죽은 무척 화가 났고 또 마음이 여간 괴롭지 않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모는 웃으며 말했다.
경문에 "구하는 바가 있으면 모두가 고달프고 구하는 바가 없으면 즐거우리라"고 했다. 네가 한마음 한뜻으로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은 바로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구해도 얻지 못하게 될 때 마음만 괴롭게 될 것이다. 반드시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려고 한다면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고 형체는 운을 따라 돌게 될 것이니 부처님의 계율을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지키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구하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하하.
이와 같이 이 개월을 보내게 되자 동모는 이미 팔십여 세 때의 공력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얼음 창고에서 어화원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데 그 모습이 그야말로 형체가 없는 유령과 같게 되었다. 만약 이추수를 꺼리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황궁에서 떠나고 말았으리라.
그녀는 매일같이 피를 마시고 무공을 연마하게 된 뒤 언제나 허죽의 혈도를 짚고 짐승의 피와 생살을 그의 뱃속으로 처넣었다 그리고는 두 시진이 지나기를 기다려서 허죽의 뱃속에 든 음식물이 모조리 소화되어 토해낼 수 없을 때라야 그의 혈도를 풀어 주곤 했다. 허죽은 얼음 창고에서 그야말로 강제로 생피를 마시며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 했으니 실로 고뇌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동모는 허죽이 도를 닦게 될 때 고통을 겪게 될 것인즉 마땅히 지나간 억겁을 생각하라는 경문을 읽는가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원망하거나 하소연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경문을 읊는 소리를 듣고는 냉소했다.
너는 토끼나 노루, 그리고 학, 또는 공작 등 비린 것을 모조리 맛보았는데 어떻게 화상이 된다는 것이며 경문을 외워서 무엇한다는 것이냐?
허죽은 대답했다.
소승은 노 선배님에게 핍박을 받아서 마시게 된 것이지 결코 제 스스로 원해서 마신 것은 아니니 파계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동모는 냉소했다.
만약 핍박하는 사람이 없다면 너 자신은 결코 파계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자기 몸을 아낄 줄 아는지라 결코 불문의 규칙을 감히 깨뜨릴 수 없습니다.
동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우리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하자.
이 날 그녀는 허죽에게 피를 마시거나 생살을 먹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허죽은 무척 기뻐서 잇따라 무척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튿날 동모는 여전히 그에게 생살이나 피를 먹고 마시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허죽은 배가 고파서 배에서 쪼르륵 거리는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입을 열었다.
선배님, 노 선배님의 신공은 이제 다 연성하게 되었으니 소승이 시중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소승은 이만 작별을 고하고자 합니다.
동모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배가 몹시 고픕니다. 그렇다면 수고스럽지만 노 선배님께서 야채와 백반으로 배를 채우도록 해주십시오.
동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게 해줄 수 있지.
그녀는 그의 혈도를 짚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이후 스스로 걸어나갔다. 얼마 후에 그녀는 얼음 창고로 되돌아왔다.
허죽은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끼고 대뜸 입안 가득히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똑, 똑, 똑, 하는 쇠 소리와 함께 동모는 세 그릇의 대접을 그의 앞에다 놓으며 말했다.
한 그릇은 홍소육(紅燒肉)이고 한 그릇은 청증비계(淸蒸肥鷄), 한 그릇은 당작리어(糖작鯉魚)인데 빨리 먹어라.
허죽은 놀라 말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죽어도 먹지 않겠습니다.
세 그릇의 닭고기와 어육의 향기는 끊임없이 그의 코에 스며 들었다.
그는 억지로 참으면서 그저 경문만 외웠다. 동모는 젓가락으로 그릇의 닭고기를 떠서는 맛있게 먹었으며 연신 맛이 좋다고 소리를 질렀다. 허죽은 그저 염불만 외웠다.
사흘째 되는 날 동모는 다시 황궁 주방으로 가서는 몇 그릇의 고기 음식을 가져왔다. 화퇴(火腿), 해삼, 웅장, 구운 오리고기 등으로써 향기는 더욱더 짙었다. 허죽은 배가 고파서 기력이 없을 지경이었으나 시종 먹지 않고 참았다.
동모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앞에서는 버티느라고 먹지 않으려 하겠지."
그녀는 얼음 창고 밖으로 나가서 반나절 동안 돌아가지 않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네가 훔쳐 먹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돌아와 그 몇 그릇의 음식을 다른 곳으로 가져가 살펴 보니 국물 한 방울 건드린 흔적이 없었다.
아흐레째 되는 날 허죽은 이제 염불을 할 기운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그저 얼음 조각을 깨물며 해갈을 할 정도였으나 손을 뻗쳐 앞에 놓은 비린 음식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동모는 대노해서 손을 뻗쳐서는 그의 가슴을 잡고 한 그릇의 홍소주자(紅燒주子)를 한 조각 찢어서는 그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억지로 허죽에게 비린 것을 먹이긴 했으나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치미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철썩 철썩, 하니 잇따라 허죽에게 삼사십 대의 따귀를 때리고 호통을 내질렀다.
죽일 놈의 화상아. 네가 이 모모에게 맞서다니 이 모모의 무서움을 맛보여 주겠다.
허죽은 화를 내지 않고 성질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염불만 외웠다.
이후 며칠 동안 동모는 불고기와 육류를 가져다가 그에게 마구 먹였다. 허죽은 그저 그와 같은 곤경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염불을 하며 잠만 잘 뿐 모든 것을 동모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 날 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허죽은 갑자기 그윽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이 향기는 결코 불상 앞에 피워 놓는 단향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불고기나 육류와 같은 음식의 향기도 아니었다. 그저 온몸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몽롱한 의식 속에 한 가지 부드러운 물체가 자기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며 손을 뻗쳐 더듬었다. 만져지는 것은 부드럽고 따뜻한 것인데 바로 옷을 입지 않은 알몸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물었다.
선배님, 어......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사람은 말했다.
나는......나는......어디에 있죠? 어째서 이토록 춥죠?
그 음성은 부드러운 것이 소녀의 음성이었지 동모의 음성은 아니었다. 허죽은 더욱더 놀라 어리둥절해져서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는......그대는......누구시오?
그 소녀는 대답했다.
저는......저는......정말 춥군요. 그대는 누구시죠?
그러면서 그녀는 허죽에게 몸을 가까이 가져왔다.
허죽은 몸을 일으켜서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손을 뻗친다는 것이 왼손으로 그 소녀의 어깻죽지를 잡게 되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부드럽고 섬세한 허리를 끌어 안게 되었다. 허죽은 스물네 살이며 한평생 아자와 동모 그리고 이추수 세 여인과 말을 해보았을 뿐이었고 이십사 년 동안 그저 소림사에서 경문만 읽고 참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색을 좋아하고 소녀를 사모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천성이 아닌가?
허죽은 엄히 계율을 지켰지만 매년 따뜻한 봄날이 되어 꽃이 피게 되면 역시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금할 수 없었고 남녀의 일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여인의 몸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상상이라는 것도 그저 이상야릇하고 일치되지 않는 환상에 불과했다. 그는 한 번도 사형제들에게 그와 같은 생각을 털어 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처지였다.
이때 두 손이 소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을 만지게 되자 심장이 금방이라도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았다.
그 소녀는 음,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손을 뻗쳐서는 그의 목을 꼭 안았다. 허죽은 그 소녀의 입김이 난초 향기와 같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입술 연지의 향기가 자꾸만 엄습해 오자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았고 전신이 벌벌 떨려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는......그대는......그대는......
그 소녀는 말했다.
저는 무척 추워요. 그러나 가슴속은 몹시 화끈거려요.
허죽은 주체할 수 없어 두 손에다가 힘을 주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소녀는 아아, 하더니 입을 가져와 두 사람은 입맞춤을 했다.
허죽은 지니고 있던 소림파의 신공이 이미 모조리 무애자에 의해 해소되어 정력(定力)을 깡그리 상실한 상태였다. 그는 아직 이 세상의 일에 경험이 없는 건장한 남자였다. 이와 같은 천지간의 가장 큰 유혹을 받게 되었을 때 조금도 저항할 수가 없어서 그 소녀를 더욱더 끌어 안았다.
삽시간에 그의 생각은 그의 몸에서 빠져나오게 되고 그 자신은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 소녀는 더욱더 불과 같은 열정을 보였으며 허죽을 마치 사랑하는 사람처럼 대했다.
허죽은 결국 그녀와 한몸이 되었다. 이윽고 허죽은 욕념이 차츰 사그러지는 것을 느끼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이쿠!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여전히 꼭 껴안고 코막힌 소리로 말했다.
제 곁을......떠나지 마세요.
허죽이 정신을 차린 것은 불과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소녀를 품에 안고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으며 멈출 줄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반 시진 동안 운우지락을 맛보았다.
이때 소녀는 물었다.
오라버니, 그대는 누구신가요?
이 한 마디는 매우 부드럽고 완곡했으나 허죽이 들을 때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아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하였다.
나는......나는......크게 잘못했구려.
그 소녀는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크게 잘못했다는 것인가요?
허죽은 더듬거리며 대답할 바를 몰라 그저 말했다.
나는......나는......
별안간 옆구리가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 누구에게 혈도를 집힌 것이다.
곧이어 담요가 덮혀지게 되었고 그 벌거숭이 소녀는 그의 품에서 떠나게 되었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그대는......가지 마시오! 가지 마시오!
어둠속에서 싸늘한 냉소 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동모의 음성이었다.허죽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기절을 할 뻔했다. 맥을 빠뜨리고 쓰러졌으며 머리속이 텅빈 느낌이 들었다. 그의 귀에 동모가 그 소녀를 안고 얼음 창고에서 걸아가는 기척이 들렸다.
얼마 후 동모는 즉시 돌아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소화상, 나는 너로 하여금 인간 세상의 쾌락을 마음껏 누리도록 했다. 너는 어떻게 사의를 표하려 하느냐?
허죽은 말을 더듬었다.
저는......저는......
그는 마음이 아직도 흐리멍텅해서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또한 말을 하지도 못했다. 동모는 그의 혈도를 풀어 주고 웃으며 말했다.
불문의 제자는 음계를 지켜야 하느냐, 안 지켜도 되느냐? 이것은 네 스스로 계율을 어긴 것이냐, 아니면 이 모모의 협박에 의해 어기게 된 것이야? 이 말만 번지르르 하고 호색한 소화상아, 어디 네가 한 번 말해 보아라. 이 모모가 이겼느냐, 아니면 네가 이겼느냐? 하하하!
그 웃음 소리는 갈수록 우렁찼으며 매우 득의에 차 있었다.
허죽은 그제서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동모는 그가 죽어라 하고 비린 것을 먹지 않는 것을 보고 꾀를 내어 한 소녀를 사로잡아와 그를 유혹하여 음계를 깨뜨리도록 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회한과 수치심을 느꼈다. 별안간 몸을 일으키더니 딱딱한 얼음에 머리를 부딪쳐 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동모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화상의 성질이 이토록 굳건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남녀간의 쾌락을 맛본 지금 자결을 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해서 재빨리 손을 뻗쳐서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고 만져 보았다. 다행히 아직도 숨은 쉬고 있었으나 정수리에 구멍이 뚫려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동모는 재빨리 그의 상처를 싸매 주고 한 알의 구전웅사환을 먹인 후 꾸짖었다.
너는 미친거냐? 만약 너의 몸안에 북명진기가 없었더라면 그와 같이 한 번 부딪침으로써 너의 목숨은 잃게 되었을 것이다.
허죽은 눈물을 흘렸다.
소승은 이미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남을 해쳤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해쳤으니 다시는 사람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모는 싸늘히 냉소했다.
흐흐흣, 만약 모든 화상이 계율을 어겼다고 해서 자결할 것 같으면 천하에 살아 있는 화상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허죽은 어리둥절해졌다. 자결을 하는 것도 불문의 커다란 계율을 어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분노한 끝에 다시 한 번 계율을 범하고 만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꾸짖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소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조금 전의 갖가지 부드럽고 감미롭던 일들이 끊임없이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는 질문을 던졌다.
그......그 소저는 누구죠?
동모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 소저는 금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서 매우 아름답고 우아한 용모를 가지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예쁜 아가씨란다.
조금 전 어둠속이라서 허죽은 그 소녀의 용모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살과 살을 맞대게 되고 부드러운 살결과 고운 음성을 돌이켜 상상해 볼 때 반드시 자색이 뛰어나 미녀일 것 같았다.
동모가 아름답고 우아하며 이 세상에서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라는 말을 하자 불현듯 길게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동모는 웃었다.
너는 그녀를 생각하느냐?
허죽은 거짓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일을 솔직히 시인하기도 뭐해서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이 후 몇 시진 동안 그는 그저 어리벙벙한 가운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동모는 다시 닭과 오리 같은 비린내 나는 음식을 그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허죽은 이제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 되어 생각했다.
"나는 이미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문파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살계, 음계를 범했으니 어찌 불문의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는 닭고기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먹어도 제 맛을 알 수 없었다. 먹으면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동모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행동해야 참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야 착한 녀석이라 할 수 있지.
다시 두 시진이 흐르게 되었을 때 동모는 재차 그 나체의 소녀를 담요에 안아다가 허죽의 품에 안겨 주고 그녀 자신은 이층의 지하실 얼음 창고로 올라갔다. 그녀는 허죽과 그 소녀 두 사람만이 삼층의 지하실 얼음 창고에 남아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 소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또 이상한 꿈을 꾸고 있군요. 정말 두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또 한편으로는......
허죽은 물었다.
또 한편으로는 어떻다는 것이오?
그 소녀는 그의 머리를 얼싸 안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한편으로는 기뻐요.
그녀는 오른 뺨을 그의 왼쪽 뺨에다 대었다. 허죽은 그녀의 얼굴이 따뜻한 것을 느끼고 애정이 솟아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손을 뻗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소녀는 말했다.
오라버니, 도대체 저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요? 꿈이라면 어째서 그대가 나를 안고 있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을까요? 저는 그대의 얼굴을 만질 수 있고 그대의 가슴과 팔을 만질 수 있으며 그대의 손과 발을 만질 수 있어요.
그녀는 한편으로 가볍게 허죽의 얼굴과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꿈이 아니라면 어째서 침대 위에서 누워 자고 있었는데 별안간......몸의 옷자락이 벗겨지고 이 춥고 어두운 곳에 와 있는 것일까요. 이곳은 어둡고 춥지만 그대가 있어서 저를 기다려 주고 또 저를 아껴 주며 어루만져 주고 있어요.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보니 이 여인 역시 동모에게 사로잡혀와 모든 것이 몽롱한 상태에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로구나."
이때 그 소녀는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평소 저는 낯선 남자의 소리만 들어도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어째서 이곳에 오자 저는 그저......가슴이 설레이며 제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될까요? 아, 꿈이라고 한다면 꿈이 아닌 것 같고 꿈 같지 않다고 한다면 마치 꿈만 같네요. 어제 밤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오늘 밤 또 꿈을 꾸게 되다니 설마......저는 정말로 그대와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오라버니, 그대는 도대체 누구시죠?
허죽은 거의 혼이 나간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나는......나는......
그는 자기가 화상이란 사실을 밝히려고 했으나 한 마디의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소녀는 갑자기 손을 뻗어 그의 입을 틀어막고 나직이 말했다.
나에게 말하지 마세요. 저는......두려워요.
허죽은 그녀의 몸을 두 손으로 꼭 껴안고 물었다.
뭐가 두렵소?
그 소녀는 말했다.
그대가 입을 벌리고 말을 하게 된다면 이 꿈이 깰까봐 두려워요. 그대는 나는 꿈속의 정랑(情郞)이니 저는 그대를 몽랑(夢郞)이라고 부르겠어요. 몽랑, 몽랑, 몽랑, 그대는 이 이름이 좋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녀는 허죽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움직여 그의 눈과 코를 어루만졌다.
어떻게 보면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손길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손으로 눈을 대신하여 그의 얼굴 모습을 알아 보려는 것 같았다. 그 부드러둔 손길은 그의 눈썹을 더듬었고 다시 그의 이마를 더듬더니 그의 머리 위를 더듬게 되었다.
허죽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야단났다. 그녀는 나의 중대가리를 만지게 되었다."
그 소녀가 만진 것은 짧은 머리카락이었다. 원래 허죽은 얼음 창고에서 이 개월을 보내는 사이에 세 치 길이의 머리카락이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그 소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몽랑, 그대의 심장은 어째서 이토록 무섭게 뛰고 있나요? 어째서 말씀을 하시지 않나요?
허죽은 말했다.
나는......나는 그대와 마찬가지로 역시 즐겁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오. 내가 그대의 고결한 몸을 더렵혔으니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그대에게 사죄할 길이 없을 것이오.
그 소녀는 말했다.
결코 그런 말씀은 마세요. 우리는 꿈을 꾸고 있으니 두려워 할 것 없어요. 그대는 저를 뭐라고 부르겠어요?
허죽은 대답했다.
그대는 내가 꿈속에서 본 아가씨이외다. 따라서 나는 그대를 몽고(夢姑)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겠소?
그 소녀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좋아요. 그대는 나의 몽랑이고 나는 그대의 몽고예요. 이와 같은 달콤한 꿈을 우리 두 사람은 영원히 꾸면서 깨어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애정이 무르익는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다시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정말 생시인지 꿈인지 알 수 없었고 하늘 나라에 있는지 아니면 인간 세상에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몇 시진이 지나자 동모는 다시 담요로 그 소녀를 덮어 싸더니 데리고 나갔다.
이튿날 동모는 재차 그 소녀를 데리고 와 허죽과 즐기도록 했다. 두 사람은 사흘째 만나게 되자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점점 엷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더욱더 짙은 사랑을 나누었고 마음껏 즐겼다.
허죽은 시종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는가 하는 진상을 감히 토로하지 못했으며 그 소녀 역시 그저 자기가 어떤 환상적인 경지에 놓여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고 꿈속으로 들어가기 전의 정경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흘간 주고받은 정은 허죽으로 하여금 이 어두운 얼음 창고가 마치 극락 세계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부처님에게 귀의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또 해탈을 바라지도 않게 되었다.
나흘째 되는 날 허죽은 동모가 가져온 노루 고기 등의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먹은 후에 다시 동모가 그 소녀를 데리고 와 자기와 사랑을 나누게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동모는 시종 가만히 앉아서는 꼼짝하지 않았다.
허죽은 그야말로 뜨거운 부뚜막 위의 개미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나 입을 열어 물어보려 했지만 부끄러워 말을 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두 시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동모는 그가 초조해 어쩔 줄을 몰라하는 여러 행동거지를 일일이 귀로 들었을텐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죽은 더 참을 수 없어 물었다.
선배님, 그 소저는......그 소저는 황궁의 궁녀입니까?
동모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칠 뿐 대답하지 않았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묻지 않는 것이 낫겠군."
그 소녀의 따뜻한 정을 생각하니 설레이는 가슴을 겉잡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참다가 그는 다시 부탁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좋은 일을 하시는 셈치고 저에게 말해 주세요.
동모는 말했다.
오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내일 다시 묻도록 해라.
허죽은 그야말로 초조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감히 다시 들먹이지 못했다.
간신히 다음 날이 되고 식사를 다 해치울 때까지 참고 견디던 허죽은 입을 열었다.
선배님......
동모는 그 말을 끊고 말했다.
너는 그 소저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모양인데 그것은 어렵지 않아. 네가 매일 밤낮으로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하고 다시 헤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탓할 일은 아니야......
허죽은 기뻐서 마음속이 다 근질근질할 정도였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동모는 다시 물었다.
그녀를 데려다 줄까?
허죽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후배는 어떻게 보답을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동모는 말했다.
나는 뭐 너에게 보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팔황육합유아독존공을 며칠 후면 연성할 수 있게 되는데 이 며칠 동안이 중요한 고비가 되기 때문에 조금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음식물도 밖으로 나가 가져올 수가 없어서 모든 살아 있는 짐승들과 익은 음식들을 내가 갖다 놓았다. 네가 그 아름다운 소저를 만나고 싶다면 반드시 내가 무공을 크게 완성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허죽은 실망했으나 동모가 말하는 것이 사실임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며칠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 며칠 동안 그리운 정을 억지로 참기로 했다. 그는 즉시 대답했다.
예, 모든 점에 있어서 선배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동모는 다시 말했다.
"나는 신공을 연성하게 되었을 때 즉시 이추수라는 계집년을 찾아서 빚을 갚게 될 것이다. 본래 그 계집년은 결코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그 계집년에게 나의 한 다리를 잘려 진기(眞氣)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 커다란 원한을 갚을 수 있을런지 자신이 없구나. 만일 내가 그녀의 손에 죽게 되어 그 소저를 너에게 데려다 주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그러나......
허죽은 가슴이 두근거려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어떻다는 것입니까?
동모는 말했다.
그러나 네가 나를 도와준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허죽은 말했다.
후배의 무공이 얕은데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동모는 말했다.
내가 그 계집년과 결투를 벌이게 된다면 승패는 실날같은 차이에 달렸다. 그녀가 나를 이긴다는 것도 무척 어렵지만 내가 그녀를 죽인다는 것도 쉬운 노릇이 아니다. 오늘부터 나는 너에게 천산육양장(天山六陽掌)이라는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 나중에 네가 그 계집년의 몸을 한 번 눌러 주기만 하면 그녀는 즉시 진기가 밖으로 쏟아져 반드시 지고 말 것이다.
허죽은 속으로 매우 난처하게 생각했다.
"나는 이미 계율울 어겨서 불문의 제자가 될 수는 없지만 그녀를 도와 사람을 죽이는 악한 일은 그야말로 양심에 크게 어긋나므로 결코 저지를 수 없다."
그는 말했다.
선배님께서 저에게 한 팔의 힘이 되어 달라고 하시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배님이 만약 이로 인해서 그녀를 죽이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 후배는 너무나 무거운 죄를 짓게 되며 이후 영영 지옥에 떨어져 환생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흥! 죽일 놈의 화상, 너는 화상이 될 수 없는데 여전히 화상의 심보를 가지고 있구나! 그게 무슨 꼴이냐? 이추수와 같은 나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무슨 죄가 된다는 것이냐?
허죽은 말했다.
아무리 간악한 자라 하다라도 마땅히 가르치고 감화를 시켜야지 함부로 살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동모는 더욱 노발대발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네가 나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다시 그 소저를 볼 생각을 하지 말아라. 잘 생각해서 결정해라.
허죽은 침울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속으로 염불을 외웠다.
동모는 그가 한참 동안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기뻐서 말했다.
너는 그 나이 어린 미녀를 만나기 위해서 응낙하겠지?
허죽은 말했다.
이 후배는 제 한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서 인명을 해칠 수 없습니다. 설사 살아 생전에 다시 그 소저를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전생에 정해진 인과가 아니겠습니까? 옛날의 인연이 다하게 된다면 억지로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쁜 짓을 해서 구하다니 그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렇게 말한 후 그는 불경을 암송했다.
옛날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은 인연이 다하면 다 없어지고 만다. 득과 실은 인연에 따르는 것이지 마음대로 보태지고 적어지는 것이 아니로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이제 다시 그 소녀와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여간 침울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동모는 다짐을 하듯 물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묻겠다. 너는 천산육양장을 연마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
허죽은 대답했다.
실로 명을 받들기 어렵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꺼져라. 멀리 꺼질수록 좋다.
허죽은 몸을 일으킨 다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선배님께서는 몸을 보중하십시오.
그는 동모와 함께 보낸 나날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동모는 그로 하여금 파계하도록 하여 화상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으나 그로 인해 몽고를 만날 수 있지 않았던가?
마음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그는 동모가 자기에게 베푼 은혜가 많고 끼친 해는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막상 헤어지려니 웬지 마음이 울적했다.
선배님, 몸 조심하십시오. 이 후배는 다시 노 선배님의 시중을 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돌 계단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는 동모가 재차 자기의 혈도를 짚어서 자기가 떠나는 것을 막게 될가 봐 돌 계단 위로 걸음을 옮겨 놓자마자 즉시 몸을 위로 날렸다. 가슴팍으로 북명진기를 끌어올려서는 삽시간에 이층 지하실로 올라섰다. 그는 곧 잇따라 지하 일층으로 올라가서는 손을 뻗쳐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오른손이 막 문고리를 잡았을 때 무릎과 등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아이쿠!
그는 또 다시 동모의 암수에 격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흔들했다. 그러고 보니 양쪽 어깨 뒷쪽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전해져서 대뜸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동모의 음산한 음성이 들렸다.
너는 이미 내가 던진 암기에 적중되었다. 알겠느냐?
허죽은 상처를 입은 곳이 마비되고 근질거리며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개미가 물어뜯는 것 같았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동모는 냉소했다.
너는 이것이 무슨 암기인 줄 아느냐? 바로 생사부이다.
허죽의 귀 안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 대뜸 오노대 등 몇 명의 사람들이 생사부를 들먹이기만 하면 그만 혼비백산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런데 허죽은 이 생사부(生死符)라는 것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서류뭉치인 줄로만 알고 있었지 일종의 암기라는 사실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었다. 오노대와 같이 흉폭하고 악랄한 자들이 생사부에 의해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보면 이 암기의 무서움을 가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때 동모는 다시 말했다.
생사부가 몸안으로 들어간 후에는 영원히 해약이 없다. 오노대와 같은 짐승들이 표묘봉을 배반하게 된 이유는 생사부에 의해서 제압받게 되는 것이 싫어서 영취궁으로 달려가 생사부를 깨뜨리고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을 훔쳐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한 떼의 개도적들은 그야말로 헛된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며 진정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이 모모의 생사부를 깨뜨리고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을 어찌 훔쳐낼 수 있단 말이냐?
허죽은 상처가 갈수록 근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근지러운 증세는 점차 깊이 파고들었다.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아 오장육부가 마치 모두 다 근질근질해지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단번에 머리를 담벼락에 박고 죽고 싶었다.
죽는 것이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참을 수 없어진 그는 크게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동모는 말했다.
너는 생사부와 생사라는 두 글자가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지?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있소, 알고 있어요. 그것은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는 신음 소리를 내뱉을 뿐 더 말할 기력도 없었다. 동모는 다시 말했다.
조금 전 네가 떠났을 때 두 번이나 나에게 몸조심하라고 했다. 그 말 가운데 관심의 빛이 어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네 녀석은 결코 양심이 없는 놈은 아니다. 더군다나 너는 이 모모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천산동모는 은원이 분명한 사람이며 상을 내릴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고 벌을 줄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
너는 역시 오노대 등과 같은 망나니들과 크게 다르다. 모모가 너의 몸에 생사부를 심게 된 것은 벌이지만 그것을 제거해 주는 것은 상을 내리는 것이다.
허죽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우리 먼저 분명히 말을 해 두기로 하죠. 노 선배님이 만약 생사부로 나를 협박하여 나에게 그......천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라고 한다면......저는......저는......죽었으면 죽었지...하지, 하지......
죽었으면 죽었지 하지 않겠다는 한 마디를 그는 완전하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동모는 냉소했다.
흥, 보기보다 너는 꽤 굳굳한 사내로구나. 그런데 너는 어째서 끙끙거리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 너는 안 동주가 어째서 말을 더듬는지 알고 있느냐?
허죽은 놀라 물었다.
그가 과거 노 선배님의 생......부에 적중되어 아파서는 그만......그만......
동모는 말했다.
네가 알았다면 됐다. 이 생사부가 일단 발작을 일으킨다면 날이 갈수록 무서워지고 매우 근지럽고 격렬한 통증은 점차 구구 팔십일 일까지 증가되기 마련이다. 그런 연후에 점차 감퇴되었다가 팔십일 일이 지난 뒤 다시 증가된다.
이와같이 끝없이 되풀이 될 뿐 영원히 멈추지 않는 것이다. 매년 나는 사람을 보내 각 동과 각 도를 순행하여 진통과 근지러움을 멎게 하는 약을 내려서 생사부가 일 년 안으로 발작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왔다. 허죽은 이때서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뭇 동주와 도주들이 동모를 신명처럼 받들고 기꺼운 마음으로 얻어맞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이 일 년 동안 편안히 보낼 수 있는 약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한평생 소나 말처럼 그녀에 의해 혹사를 당하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동모는 그와 근 삼 개월간 함께 세월을 보내면서 어느 정도 그의 성질을 알 수 있었다. 허죽의 위인됨이 겉으로는 매우 부드러우나 안으로는 굳굳한 성격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서 지극히 겸손하고 온화하지만 속 마음은 매우 고집스럽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사람은 결코 남의 위협을 받고 굴복하지 않는다.
동모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말했다.
네가 오노대 같은 짐승들과 다르다고 나는 이미 말했다. 이 모모는 매 년 너에게 한 번 약을 복용시켜 진통이나 근지러움을 멈추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너는 온종일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게 될 것이고 잠을 자도 편안한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너의 몸에는 모두 아홉 장의 생사부가 심어져 있는데 나는 단번에 제거해 주겠다. 그야말로 풀을 자르되 뿌리를 뽑듯 후환을 영원히 없애 주도록 하겠다.
허죽은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정말......정말......
그러나 감사하다는 말은 시종 입밖으로 뱉어 내지 못했다.
즉시 동모는 그에게 한 알의 알약을 주었다. 먹자마자 허죽은 고통과 근지러움을 잊어 버릴 수 있었다.
동모는 설명했다.
이 생사부와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손바닥의 내력을 이용해야 한다. 나는 이 며칠 간 신공을 연성할 단계에 와 있기 때문에 너를 위해서 원기를 소모할 수가 없다. 나는 너에게 운기행공하여 손을 쓰는 요령을 알려줄 것이니 너는 스스로 해소시키도록 해라.
허죽은 대답했다.
예.
동모는 즉시 그에게 북명진기를 단전에서 끌어올려 천추(天樞), 태을(太乙), 양문(梁門), 신봉(神封), 신장(神藏)의 뭇 혈도를 지나 곡지(曲池), 대릉(大陵), 양활(陽활)을 통과하여 손바닥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 이 방법은 진기를 족경맥(足經脈)으로부터 손바닥에 이르도록 하는 요령으로서 소요파의 독특한 기공이기도 했다. 그런 후에 그녀는 다시 그에게 진기를 삼키고 내뱉거나, 맴돌게 하고, 떨쳐내고, 조종하는 여러 가지의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허죽은 이틀간을 연마하여 어느덧 익숙해지게 되었다.
동모는 허죽이 익숙해진 것을 보고 설명했다.
오노대와 같은 짐승들은 인품이 뒤떨어지기는 하나 무공은 꽤 대단한 편이다. 그들이 사귀고 있는 패거리들 가운데는 내력이 심후한 녀석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 사람도 내력으로 나의 생사부를 해소시킬 사람은 없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너는 알겠느냐?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허죽이 대답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설명했다.
다만 내가 그들의 몸안에 심은 생사부의 종류가 제각기 다르고 쓴 수법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에 양강(陽剛)한 수법으로 한 장의 생사부를 해소시킨다면, 해소시키지 못한 생사부가 만약에 태양, 소양, 양명(陽明)등에 심어져 있게 된다면 그 생사부는 양기를 감지하게 되어 심히 급격하게 성장하고 크게 뿌리를 뻗치면서 오장육부로 깊이 들어가 수습할 수 없게 된다.
그가 만약 음유한 힘으로 해소를 하려고 하면 태음(太陰) 소음, 궐음(厥陰)의 경맥 가운데 심어진 생사부가 또 크게 자극을 받게 되어 요동을 치게 된다. 더군다나 매 한 장의 생사부에 분량이 다른 음양의 기운을 포함시켜 놓았으니 다른 사람이 어찌 해소시킬 수 있겠느냐? 너의 몸에 심어진 이 아홉 장의 생사부는 아홉 가지 다른 수법으로 해소시켜야 한다.
그녀는 그에게 한 가지 수법을 전수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가 익숙해지게 된 이후 그와 대련을 갖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음독하고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수법으로 공격하여 허죽으로 하여금 배운 수법이 능숙해지도록 했다.
동모는 다시 말했다.
나의 이 생사부는 천번 만번 변화를 하고 있으니 네가 손을 써서 뽑게 되었을 때도 반드시 임기응변의 조처를 취해야지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즉시 진기가 멈추어지면서 목숨을 잃거나 전신이 마비되고 만다. 반드시 생사부를 큰 적처럼 여기고 전력을 다해 임하되 조금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허죽은 가르침을 받고 고된 연마를 했다. 그는 동모가 가르치는 방법이 교묘하기 이를데 없다고 생각했다. 진기는 자기의 뜻을 따라 움직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악랄한 수법으로 공격해 와도 똑같이 그 방법으로 해소시킬 수 있었으며 그 해소시키는 방법 가운데는 반드시 날카로운 초식도 숨겨져 있었다.
그는 연마하면 연마할수록 탄복하게 되었고 그제서야 그는 생사부가 삼십육동의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들로 하여금 혼비백산 하게 한 것은 확실히 생사부가 무궁한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만약 동모가 친히 입으로 전수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천하에 이토록 신묘한 해소법이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나흘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그 아홉 가지 방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동모는 무척 기뻐했다.
네......네 녀석은 정말 우둔하지 않구나! 병법에 가로되 지피지기하면 백전불패라고 했다. 네가 생사부를 제압하려면 반드시 이 생사부를 심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너는 이 생사부가 어떤 물질인지 아느냐?
허죽은 어리둥절해졌다.
그것은 일종의 암기입니다.
동모는 말했다.
맞다, 암기이다. 그러나 어떠한 암기냐? 수전 같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강표와 같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염주와 같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금침과 같다고 생각하느냐?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미 아홉 대의 암기에 맞아 아프고 근지럽지만 할 뿐 만져볼 때 아무런 종적도 없으니 실로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구나."
일시 그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동모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생사부이다. 네가 가져가서 자세히 만져 보도록 해라.
천하 제일의 무서운 암기라고 생각하니 허죽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뻗쳐 받아들었다. 손바닥에 놓고 보니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러나 그 암기는 매우 가벼웠다. 둥굴둥굴한 것이 조그만 조각인데 겨우 새끼 손가락 끝마디 크기였다.
그러나 가장자리가 매우 날카롭고 그 얇기는 종잇장 같았다. 허죽은 다시 자세히 만져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손바닥에서 갑자기 싸늘한 촉감이 느껴졌고 얼마 후에 그 생사부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깜짝 놀랐다. 동모가 손을 펼쳐 빼앗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 암기가 절로 사라지게 된 것일까? 진정 신출귀몰하며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부르짖었다.
아이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단났다. 야단났다! 이 생사부는 다시 내 손바닥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동모는 물었다.
이제 알았느냐?
허죽은 말을 더듬었다.
저는......저는......
동모는 설명했다.
나의 이 생사부는 바로 한 조각 엷은 얼음 조각에 불과하다.
허죽은 그제서야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대뜸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서야 그는 이 ㅇ은 얼음 조각이 손바닥의 열기에 의해 김으로 화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삽시간에 사라진 것인데 그의 손바닥에 스며 있는 내력이 화롯불 못지 않게 뜨겁기 때문에 그 얼음이 김으로 화해서 물방울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동모는 다시 설명했다.
이 생사부를 깨뜨리고 해소시키는 방법은 반드시 어떻게 내쏘느냐 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어떻게 내쏘는가를 배우려면 물론 먼저 만드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보기에 아주 조그만 얼음 조각에 불과하지만 엷은 종잇장처럼 얇게 만들고 구멍이 나지 않고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너는 손바닥에다가 약간의 물을 떨구고 거꾸로 내력을 돋우어 손바닥에서 솟아나는 진기가 차가운 얼음보다도 몇 배나 더 차갑도록 한다면 그 맑은 물은 자연 얼음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즉시 그녀는 허죽에게 어떻게 내력을 거꾸로 돋우며 또 어떻게 양강한 진기를 음유한 진기로 전환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무애자가 허죽에게 전수해 준 북명진기는 원래 음양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허죽은 예전에는 그저 양강한 내력만을 연마했는데 내력이 어느 정도 기틀을 닦게 되자 그저 모든 점에 있어서 그 방법을 반대로만 행하면 되었기에 결코 어려운 일이 될 수 없었다.
생사부를 만들게 된 이후 동모는 다시 그에게 생사부를 내쏘게 될 때의 힘과 혈도를 정확하게 겨누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엷은 얼음 조각에 어떻게 양강한 내력을 싣게 되는가, 또 어떻게 음유한 내력을 싣게 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가 하면 삼 푼쯤 음유한 기운을, 사 푼 정도 양강한 기운을 싣게 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물론 음과 양의 두 가지 내력에 불과하지만 선후의 차례에 따라서 달라지고, 많고 적음에 따라서 또 달라지는 등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천변만화의 변화를 구사할 수가 있었다.
허죽은 그리하여 다시 사흘이란 시간을 보내며 그 요령을 모조리 배워 알게 되었다.
동모는 기뻐서 말했다.
네 녀석은 정말 우둔하지 않구나. 빨리도 배웠다. 이 생사부의 기본 재간을 너는 이미 배워 알게 되었다. 정교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고 혈도를 틀림없이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장래의 일이다.
나흘째 되는 날 동모는 그에게 내식을 조절하도록 이르고 두 손에 진기를 끌어 올리게 한 뒤 설명했다.
한 장의 생사부는 너의 오른쪽 무릎 안쪽에 있는 음릉천(陰陵泉)이라는 혈도 뒤에 박혀 있다. 그러나 너는 오른손으로 양강한 기운을 돋우어 제 이종(二種)의 법문(法門)을 응용해서 급히 후려치고 왼손으로 음유한 기운을 돋우어서는 제 칠종의 법문을 응용하여 천천히 뽑아내도록 해라. 잇따라 세 번을 뽑게 되면 이 생사부에 실려 있던 열독(熱毒)과 한독(寒毒)이 일제히 해소될 것이다.
허죽은 그 말대로 시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음릉천 혈도의 정체된 듯한 느낌이 갑자기 풀어지며 관절이 민활해졌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해졌다.
동모는 일일이 지적을 하였고 허죽은 일일이 해소시켰다. 끝내 아홉 장의 생사부를 모조리 해소시킬 수 있게 되자 허죽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동모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일 오시가 되면 나는 신공을 연성할 수 있게 된다. 신공을 갈무리하게 될 때는 천 갈래 생각이 떠오르게 되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오늘 나는 반드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조용히 생각을 해야겠다. 너는 나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도록 다시는 나에게 말을 걸지 말아라.
허죽은 대답했다.
예.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날짜가 빨리도 지나가는구나. 어느덧 꼬박 삼 개월이 지나갔군."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모기 소리처럼 가냘픈 음성이 귀로 스며들었다.
사저, 사저! 그대는 어디 숨어 있나요? 소매는 사저가 몹시 보고 싶어요. 사저는 어찌 이 누이의 집에 와서 대면을 하지 않으려고 하세요?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섭섭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 소리는 매우 나직하고 가늘었으나 한 마디 한 마디 또렷이 들을 수 있었는데 바로 이추수의 음성이었다. 37 함께 웃으며 죽으니 만사가 허망하다 (同一笑, 到頭萬事俱空) )
허죽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어이쿠, 야단났습니다. 그녀가......그녀가......
동모는 눈짓을 했다.
조용해 해!
허죽은 나직이 말했다.
그녀가.......그녀가......찾아 왔습니다.
동모는 말했다.
그녀는 내가 황궁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황궁에는 집들이 수천 수백 칸이나 되는데 그녀가 한 칸 한 칸씩 찾는다 하더라도 열흘이고 보름이 지나도 이곳까지 찾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허죽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일 오시만 넘기면 우리들은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과연 이추수의 음성은 점점 멀어져 갔고 끝내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반 시진도 채 못 되어 이추수의 그 가느다란 부르짖음이 다시 얼음 창고까지 들려왔다.
사저, 무애자 사형을 기억하세요? 그는 지금 소매의 궁 안에서 그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몇 마디의 중요한 말을 사저에게 하겠답니다.
허죽은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무애자 선배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선배님은......선배님은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동모는 말했다.
설사 우리가 바로 이곳에서 큰소리를 친다 하더라도 그녀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바로 전음수혼대법(傳音搜魂大法)을 써서 나를 끌어내려고 한다. 그녀가 무애자를 들먹인 것은 그저 나의 심신을 어지럽게 하자는 것인데 내 어찌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가겠느냐?
그러나 이추수의 말하는 소리는 끝날 줄을 몰랐다. 한 시진이 흐르고 또 한 시진이 흘러갔으나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잠시 동안은 옛날 사문의 한 동문으로서 무예를 배울 때의 정경을 이야기했고 그러다가 잠시 동안은 무애자와 그녀가 어떻게 뼈에 사무치는 듯한 사랑을 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런가 하면 곧이어 마구 욕을 하면서 동모를 천하에서 가장 음탕하고도 악독하며, 고약하고도 몰염치하며 천박한 여인으로 만둘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무애자가 등뒤에서 그녀에게 한 말이라고 했다.
허죽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려고 했으나 그 소리는 손바닥을 뚫고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리 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허죽은 그와 같은 말에 마음이 매우 번거로워지는 것을 느끼고 소리쳤다.
모두 가짜다! 모두 거짓이다!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는 옷자락을 찢어서는 두 귀를 막으려고 했다.
동모는 말했다.
그 소리는 막을래야 막을 수 없다. 그 계집년의 고심한 내력으로 보내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하 삼층의 얼음 창고에 있는데도 그 소리가 여전히 전달되지 않느냐? 그러니 삼베 조각으로 막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는 반드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듣고도 못 들은 척해야 하며 그 계집년의 말을 노새 울음이나 개가 짖는 소리로 여기도록 해야 한다.
허죽은 대답했다.
예.
그러나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정력에 있어서 소요파의 무공은 소림파의 선공에 비해 훨씬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허죽은 소림파의 무공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추수의 말을 듣지 않을래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동모를 헐뜯는 말들을 듣게 되자 그만 반신반의하게 되었고 정말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잠시 후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말했다.
선배님, 무공을 연마할 시간이 가까워졌죠? 이것은 선배님께서 공력을 되찾는 최후의 무공 연마이니 매우 중대한 고비라 할 수 있습니다. 한데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았습니까?
동모는 쓰디 쓰게 웃었다.
너는 이제서야 깨달았느냐? 그 계집년은 시각을 정확히 헤아리고서 내가 신공을 일단 연성하면 그녀가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온 힘을 기울여 저지하고 방해하려는 것이다.
허죽은 물었다.
그렇다면 선배님은 기다리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같이 무서운 외마의 침입과 훼방 아래서 무공을 연마한다는 것은 아무래도......아무래도 위험합니다.
동모는 되물었다.
너는 죽음을 무릅쓰고 나를 도와 그 계집년을 상대하려고는 하지 않았으면서 어째서 나의 안위에 대해서는 이토록 관심을 갖지?
허죽은 어리둥절해졌으나 곧 대답했다.
제가 선배님을 도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선배님을 해치는 것도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
동모는 말했다.
너는 마음씨가 매우 곱구나. 이 일은 내가 이미 수백 수천번 생각해 보았다. 저 계집년은 전음수혼대법을 써서 나의 심신을 어지럽히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시켜 영민한 사냥개들을 데리고 와 나의 종적을 찾도록 할 것이다. 따라서 이 황궁의 사방은 철통같이 포위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도 없다. 아, 다행히 우리가 은신처를 찾아 바로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개월 전에 이미 그녀에게 발각되고 말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나의 공력이 얕아 전혀 반격할 힘이 없어 그녀의 전음수혼대법을 듣기만 하고도 순순히 걸어나가 포박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바보 녀석아, 오 시가 이미 되었다. 모모는 이제 무공을 연마해야겠구나.
그녀는 백학의 목을 깨물어 학의 피를 빨아마시더니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허죽은 이추수의 음성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오늘 오시가 바로 그녀의 사자매 두 사람의 생사존망이 걸린 커다란 고비라는 것을 헤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안간 이추수의 음성이 부드럽기 이를데 없이 변했다.
아......, 사형, 나를 안아 주세요. 음, 아, 아, 좀더 세게 안아 주세요. 이곳에 입맞춤해 주세요. 이곳에다 말이에요.
허죽은 어리둥절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어째서 이와 같은 말을 할까?
이때 갑자기 동모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욕을 했다.
음탕하고 천한 계집!
허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동모가 이때 무공을 연마하려는 중요한 고비에 놓여 있으니만큼 갑자기 마음이 헛갈려서 욕을 하게 된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 빠져 잘못하면 주화입마가 되어 전신의 경맥이 모조리 터지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추수의 부드러운 음성과 코먹은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모두가 무애자와 즐기는 말들이었다. 허죽은 참을 수 없어 며칠 전 그 소녀와 즐기던 정경을 상기하게 되었고 욕념이 크게 일어 전신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살갗이 후끈후끈 달아 올랐다.
이때 동모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욕을 했다.
천한 계집년 같으니, 사제는 진심으로 너를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 그런데 너는 뻔뻔스럽게도 그를 유혹하다니, 정말 염치가 없구나.
허죽은 놀라 부르짖었다.
선배님, 그녀는......그녀는 일부러 선배님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정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동모는 다시 욕을 했다.
몰염치한 계집년 같으니, 그이가 만약 너에게 진심을 가졌더라면 어째서 죽기 전에 표묘봉으로 달려와 칠보 반지를 나에게 주었겠느냐? 그리고 십팔 세 되던 해의 나의 모습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을 나에게 보여 주었겠느냐? 그것은 그가 친히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육십여 년간 그 화폭을 조석으로 몸에 지니고 있었으며 한 걸음도 떼어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흥, 너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매우 괴롭겠지......
그녀는 도도히 지껄여댔다. 허죽은 그 말을 듣고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녀가 어째서 이와 같은 거짓말을 하게 되었을까? 설마하니 주화입마하여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별안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 창고의 문이 활짝 열어 제쳐졌다. 곧 이어서 안쪽 문이 열어 제쳐지는 소리와 더불어 대문이 닫히고 안쪽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이추수의 목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형은, 그이는......그이는......그저 나 한 사람만을 사랑할 뿐이다. 그는 결코 너의 초상을 그리지 않았다. 이 난장이야! 그이가 어찌 너를 사랑했겠느냐? 너는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여서 사람을 속이고 있다.....
곧이어 펑, 펑, 펑, 하며 잇따라 몇 번인가 굉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천둥치는 소리와도 같았는데 바로 지하 일층의 얼음 창고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허죽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이때 동모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소리쳤다.
호호호! 이 천한 계집년아! 너는 사제가 너 한 사람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냐? 너야말로 정말 정신이 돈 모양이구나. 나는 난장이다. 맞아, 너의 그 아리따운 몸매와는 비교할 수가 없지만 사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한평생 준수하고 풍채가 헌칠한 젊은이를 유혹하기를 좋아했지. 사제는 내가 늙으막에도 여전히 처녀의 몸이고 또 그에 대한 정이 시종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너 스스로 생각해 보아라. 너에게는 얼마나 많은 정인이 있었느냐?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도 지하 일층의 얼음 창고로 올라갔는지 허죽으로서는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동모가 다시 웃으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사자매가 수십 년간을 대면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다정하게 불러야 할 것이다. 얼음 창고의 대문은 봉쇄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와 방해할 수 없다. 네가 만일 많은 수의 사람을 이용해서 이기는 것을 좋아한다면, 사람들을 불려 들여도 좋다. 하지만 그럴려면 네가 스스로 얼음덩어리를 치우고 소리를 질러야 할 것이다.
순간 허죽의 마음속에는 무수한 생각이 떠올랐다.
"동모가 이추수를 격노시켜 얼음 창고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커다란 얼음 조각을 던져 대문을 봉쇄하고서 이추수와 생사를 겨루려나 보다. 만일 그렇다면 이추수가 아무리 서하국의 황궁에서 큰 세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사람을 불러들여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얼음 조각을 치우려고 하지 않을까? 어째서 동모가 말한 것처럼 큰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불러들이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얼음 조각을 대문에서 밀어내거나, 전음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정신을 헛갈리게 하고 기운을 써야 하기 때문이겠지. 동모는 공격하기 좋은 기회를 포착하려고 노리고 있다가 이추수가 소리를 지르거나 얼음 조각을 치우는 순간 즉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것이다. 이추수의 성격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남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정적과 맞서 결단을 내려고 할 것이다."
허죽은 다시 생각했다.
"옛날 동모는 무공을 연마할 때 말을 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바깥 사물에 대해서는 전혀 지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큰소리로 이추수와 언쟁을 벌이는 것일까? 신공을 완성하려면 아직도 하루가 남았는데, 이추수와 싸움을 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공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오늘 이 싸움에서는 누가 이기고 누가 지게 될 것인가? 만약에 동모가 이기게 된다면 무사히 궁에서 탈출하여 내일 다시 무공을 연성할 수 있을까?"
이때, 일층에서 펑, 펑,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동모와 이추수가 서로 커다란 얼음 조각을 던지면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모양이었다.
허죽은 동모와 함께 삼 개월을 보내면서 동모의 성격이 괴팍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모는 일하는 것도 제멋대로이고, 감정도 수시로 변하여 허죽으로 하여금 적지 않은 쓴맛을 보게 했지만, 밤낮으로 같이 지내다 보니 허죽은 그녀에게 정을 느꼈다. 그래서 혹시나 그녀가 이추수에게 살해당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단숨에 이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가 막 이층으로 올라가자 아추수의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게 누구냐?
그러자 펑, 펑, 하는 소리가 즉시 멎었다. 허죽은 숨을 죽이고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이때 동모가 말했다.
저 사람은 중원 무림의 천하 제일 풍류 남아(風流男兒)로 모두들 그를 분면랑군(粉面郞君) 무반안(武潘安)이라고 한다. 너는 그를 만나보고 싶지 않느냐?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의 이와 같은 추악한 용모에 어찌하여 분면랑군 무반안이라는 말이 어울릴 수 있겠는가? 아! 선배님께서는 나를 조롱하고 계시는구나!"
이때 이추수가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나는 나이 많은 할망구인데 아직도 나이어린 사람을 좋아하는 줄 알았느냐? 분면랑군 무반안이 누구지? 십중팔구 너를 업고 동분서주하던 그 추악한 소화상이겠지.
그녀는 언성을 높여 부르짖었다.
소화상! 그대인가?
허죽의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고 이추수의 말에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동모가 물었다.
몽랑! 그대는 원래 소화상인가? 호호호! 몽랑, 이추수는 너의 그 풍류적이고도 준수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을 보지 못해 소화상이라고 하니 정말 우습구나!
몽랑이라는 두 글자의 이름이 귀에 전해지자 허죽은 그만 얼굴이 새빨개져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죽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야단났다. 야단났어. 그 소녀가 나에게 한 말을 동모가 모조리 들었나 보다. 그와 같은 말을 어찌 남에게 들려 줄 수 있단 말인가? 어이쿠, 내가 그 소저와 주고받던 말들을.......아무래도.....모조리 동모가 엿들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이때 동모가 다시 말했다.
몽랑, 빨리 대답해라. 그대가 정말로 소화상인가?
허죽이 나직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의 이 한마디는 매우 나직했으나, 동모와 이추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동모가 소리내어 깔깔 웃으며 말했다.
호호! 몽랑, 너는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얼마 후면 너는 몽고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요즈음 너에 대한 사랑으로 상사병이 날 지경이다.
몽고는 이 며칠간 차도 마시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으며 좌불안석으로 그저 너만을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 솔직하게 말해 보아라. 너는 그녀를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
사실 허죽은 그 소녀에 대해서 깊은 정을 느끼고 있었다. 며칠간 애써 생사부를 내쏘고 깨뜨리거나 해소하는 방법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줄곧 그녀와의 즐거웠던 사연들을 머리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동모로부터 그와 같은 질문을 받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추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몽랑? 몽랑이라. 알고 보니 너는 정말 다정한 젊은이었군! 이리 올라 오너라. 어디 중원 무림의 천하 제일 풍류 남아가 어떤 풍채와 용모를 지녔는지 한 번 보고 싶구나!
이추수는 동모나 무애자보다도 나이를 덜 먹었으나 역시 칠팔십 세의 노파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한 마디의 말은 부드럽고 완고해서 허죽이 들을 때 쿵하며 가슴이 뛰어놀게 만들었다. 자기가 정말로 중원 무림의 천하 제일 풍류 남아인 듯한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속으로 픽 웃으며 생각했다.
"나는 추악하기 이를데 없는 화상인데 어찌하여 나를 풍류 남아라고 한단 말인가? 이야말로 사람의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동모는 대적을 눈 앞에 두고 어째서 한가하게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필시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 날 무애자 선배님께서는 나에게 소요파 장문인을 이어 받도록 하라고 하셨을 때 몇 번이나 내 얼굴이 못났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후 소성하 선배님께서도 정춘수를 제압하려면 반드시 두뇌가 기이하도록 뛰어나고, 준수하고 헌칠한 미소년이어야 한다고 하셨다. 당시 나는 크게 의혹을 품고도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것은 이추수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무애자 선배님께서 나에게 한 사람을 찾아가 무공을 가르침 받도록 하라고 하셨는데, 혹시 그녀를 찾아가라고 한 것이 아닐까? 소성하 선배님께서도 그 사람은 준수한 젊은이만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빛이 번쩍했다. 일층의 얼음 창고에서 별빛과 같은 광채가 뻗어 나왔다. 곧이어 휙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죽은 서둘러 돌 계단 위로 올라가 보았다. 희끄무레하게 하나의 잿빛 그림자와 흰 그림자가 움직이는 광경이 보였다. 그림자들은 벼락같이 엉겼다가 어느샌가 떨어지곤 하면 푹죽을 터뜨릴 때 나는 소리처럼 팍팍, 하는 음향을 발출하고 있었다.
동모와 이추수가 한참 격렬하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얼음 위에 하나의 화섭자가 타고 있었고 거기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와 싸우는 두 사람을 어렴풋이 비춰 주고 있었다.
허죽은 두 사람이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유령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으로는 누가 동모이고 누가 이추수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화섭자는 빠른 속도로 타들어갔다. 삽시간에 타들어가 마침내 칙, 하며 꺼지고 말았으며 얼음 창고는 다시 칠흑과 같은 어둠에 뒤덮혀 버렸다. 그러나 장풍소리는 여전히 휙휙, 들려왔다.
허죽은 몹시 초조했다.
"동모는 한쪽 다리가 없으니, 오랜 시간 싸움을 하면 반드시 불리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을까? 하지만 동모는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니 이기게 되었을 때는 반드시 그녀의 사매를 죽일 것이다. 이것도 좋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이 두 사람의 무공이 이토록 고강하니 내 어찌 감히 끼어들 수 있겠는가?"
이때 팍,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동모가 상처를 입었는지 길게 부르짖는 소리를 냈다.
이추수가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사저, 나의 이 일 초가 어떤가요? 부족한 점이 있다면 지적해 주세요,
그러다가 갑자기 날카롭게 외쳤다.
어디를 도망쳐!
순간 허죽은 한 줄기의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것을 느꼈고, 곧이어 그의 곁에서 동모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두 번째 수법으로 손을 써라!
허죽은 동모가 말하는 뜻을 알 수가 없어서 "뭐라구요"하고 물으려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싸늘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리는 것이었다. 한 줄기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장력이 그를 향해 날아온 것이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동모가 생사부를 깨뜨리고 해소시킬 때 사용하라고 가르쳐 준 두 번째 수법으로 날아오던 장력을 후려쳤다. 어둠속에서 장력이 서로 맞부딪치게 되자, 허죽은 몸이 격렬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고, 가슴의 기혈이 마구 끓어올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다시 일곱 번째 수법으로 상대방의 나머지 여력도 해소시켜야 했다.
이추수는 어, 하더니 호통을 치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어째서 네가 천산육양장을 펼칠 줄 아느냐? 누가 너에게 가르쳐 주었느냐?
허죽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무엇이 천산육양장이란 말이오?
이추수가 말했다.
너는 그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제 이초 양춘백설(陽春白雪)과 제 칠초 양관삼첩(陽關三疊)은 남에게 전수하지 않은 본문의 비법인데 너는 어디서 그것을 배웠느냔 말이다?
허죽은 되물었다.
양춘백설? 양관삼첩?
허죽으로서는 모든 것이 막연하고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렴풋이 동모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모는 그의 등뒤에 서서 냉소를 터뜨렸다.
이 몽랑으로 말하면 중원 무림의 제일 풍류 남아란 이름을 듣고 있으니만큼, 자연 금기서화(禁棋書畵), 의복성상(醫卜星相), 투주창곡(鬪酒唱曲), 행령시미(行令猜謎)의 여러 가지 초식을 모조리 알고 있으며, 또한 정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애자 사제의 마음에 들게 되어 그의 관문 제자로 거두어졌고 그에게 정춘추를 주살하여 문호를 정리하라는 분부를 받게 된 것이다.
이추수는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몽랑, 동모가 한 말이 정말인가? 아니면 나를 놀리기 위한 거짓말인가?
허죽은 두 사람이 다 자기를 몽랑이라고 부르자 얼굴을 붉혔다. 사실 동모가 한 말 중 앞의 말은 거짓이지만 뒤의 말은 정말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고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 몇 가지의 수법은 분명히 동모가 내게 생사부를 해소시킬 때 쓰라고 가르쳐 준 것인데 뜻밖에도 이추수는 그 수법을 천산육양장이라고 하지 않는가? 동모가 자기에게 천산육양장을 배워 자기의 사매를 상대하라고 했을 때, 내가 배우지 않겠다고 버텼기 때문에 속임수를 써서 배우도록 한 것이란 말인가? 정말 이 몇 가지 수법은 천산육양장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추수가 날카롭게 외쳤다.
내가 너에게 물었는데, 너는 어째서 대답하지 않느냐?
그녀는 손을 뻔쳐서 허죽의 어깻죽지를 잡으려고 했다. 허죽은 동모와 초식으로 대련해 왔기 때문에 매우 익숙하게 피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어둠속에서만 대련을 했기 때문에 바람 소리만 듣고서도 형체를 분간할 수 있었고, 때에 알맞은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었다. 이추수의 손가락이 그의 어깻죽지에 닿으려고 하는 순간, 허죽은 즉시 어깨를 늘어뜨리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면서 오히려 그녀의 손등을 내리누르려 했다.
좋다! 이 양가천구(陽歌天鉤) 초식은 내력이 웅후하고 펼치는 것도 무척 익숙하구나! 무애자 사형이 일신의 재간을 모두 너에게 전수해 준 모양이지?
허죽이 말했다.
그분께서는 공력을 모조리 저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는 무애자가 자기에게 공력을 전해 주었다고 말했을 뿐, 무공을 전해 준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공력과 무공은 한 글자의 차이지만, 내포되어 있는 뜻은 크게 달랐는데 이추수는 흥분되어 있어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분간할 수 없었다.
이추수가 다시 물었다.
나의 사형이 너를 제자로 겨두어들였다면 너는 어째서 나를 사숙이라 부르지 않느냐?
허죽은 말했다.
사백님! 그리고 사숙님! 두 분께서는 무슨 큰 원한이 있어 죽기를 각오하면서까지 싸워야 합니까? 과거의 일은 모두 덮어두고 지나간 것으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추수가 말했다.
몽랑!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 그렇기 때문에 이 늙은 도적 같은 할망구의 간악한 마음을 모른다. 너는 한쪽 옆에 비켜 서 있거라!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가 아, 하고 소리 질렀다. 동모가 허죽의 등뒤에서 암습으로 그녀에게 일 장을 가한 것이었다.
이 일 장은 소리도 기척도 없는 순전히 음유한 힘이었고, 두 사람의 간격 또한 가까워서 이추수가 암습을 알아차리고 손을 쓰려 했을 때는 이미 동모의 장력이 그녀의 가슴으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이추수는 그것을 피해 표연하게 몸을 뒤로 날렸으나, 한 걸음 늦고 말았다. 그 순간 그녀는 기식이 폐쇄되는 것을 느꼈고 경맥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동모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사매! 사저의 이 일 초는 어떤가? 지도를 좀 해 주게나.
이추수는 급히 내력을 돋우어서 숨을 고르게 했으나 감히 반격을 할 수 없었다.
동모는 암습이 성공하자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한쪽 다리로 이리저리 날뛰며 공격했다. 장풍을 휙휙, 날리면서 이추수에게 공격을 마구 퍼부었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선배님! 독수를 쓰지 마십시오!
허죽은 동모가 전수해 준 수법으로 그녀가 이추수에게 후려친 삼 장을 막았다. 동모는 대노해서 욕을 했다.
이런 도적놈을 보았나? 너는 어떤 무공을 사용하여 나를 상대했느냐?
원래 허죽은 천산육양장을 한사코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동모는 앞으로 닥칠 커다란 난관을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다급할 때를 위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의 조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죽에게 생사부를 깨뜨리고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때 천산육양장을 전수해 주었고 허죽과 많은 시간을 갖고 대련을 하면서 정묘한 변화나 교묘한 요령 같은 것을 모조리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크게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마당에 허죽은 오히려 이추수를 도와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모는 그런 허죽이 괘씸하게 여겨졌다.
허죽은 동모의 말에 대답했다.
노 선배님! 저는 노 선배님께 동문의 정의를 살리시어 손에 사정을 둘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비켜라, 저리 비켜!
이추수는 허죽의 도움으로 동모의 급격한 공세를 피할 수 있었고 이미 내력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몽랑! 나는 이제 괜찮으니 비켜나게.
그녀는 왼손으로 후려치고 오른손으로 이끌어 왼손에서 뻗어나온 장력이 허죽의 몸을 돌아서 동모에게 뻗쳐 가도록 했다.
동모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계집년은 놀랍게도 백홍장력(白虹掌力)을 연성하여 구부리거나 똑바로 치는 등 제마음대로 할 수 있구나. 정말 대단하다!"
동모는 즉시 손을 들어 마주쳐 나갔다.
허죽은 그 가운데 서 있었으나 자기의 재간에 한계를 느껴 두 사람의 싸움을 더이상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그저 길게 탄식을 하며 한쪽 옆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싸웠다. 세찬 바람이 허죽의 얼굴에 덮쳐 올 때가 많았는데 그 예리함은 칼날과 같았다. 허죽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지하 이층에 있는 돌 계단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런데 별안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동모가 나직한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그녀는 이추수에게 밀려서 그만 딱딱한 얼음 덩어리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손을 멈추시오! 손을 멈추시오!
그는 달려들어 잇따라 육양장을 이 초나 펼쳐 이추수의 공세를 저지시켰다.
동모는 그 기세를 빌어 뒤로 몸을 날렸다. 이때 별안간 동모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동모가 돌 계단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이었다. 동모의 몸은 얼음 창고의 이층과 삼층 사이의 돌 계단까지 굴러떨어져서야 비로소 멈추었다.
허죽은 놀라 물었다.
선배님! 선배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급히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허죽은 어둠속을 더듬거리며 겨우 동모의 상반신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런데 그녀의 두 손은 얼음과 같이 차가웠으므로 허죽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녀의 코앞에 손을 가져가 보니 그녀는 이미 숨이 멎어 있는 것이 아닌가?
허죽은 놀람과 당황함을 금할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여 부르짖었다.
사숙! 그대는......그대는......사백을 때려 죽였어요! 너무나 잔인하시군요.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추수가 말했다.
그 사람은 간사하기 이를데 없다. 그 일 장으로 그녀를 때려 죽일 수는 없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어.
허죽이 울부짖었다.
아직도 죽지 않았다구요? 그녀는 숨도 쉬지 않아요. 노 선배님! 사백님! 제가 당부하는데 결코 원한을 마음속에 두시지 마시고......
이때 이추수가 품속에서 하나의 화섭자를 꺼내 불을 켜서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돌 계단 위에는 몇 무더기나 되는 핏덩이가 마구 뿌려져 있었고 동모의 입가와 가슴에도 선혈이 낭자하였다.
팔황육합유아독존공을 수련하려면 매일같이 반드시 생피를 마셔야 했다. 그러나 만약에 기가 역류하게 되어 맥이 끊어지게 되면 오히려 선혈을 토해 내게 되는데 선혈을 조그만 술잔의 반만 토해 내더라도 즉시 숨을 거두게 된다. 이때 돌 계단 위에 뿌려진 피는 그야말로 몇 그릇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많은 양이었다. 이추수는 자기가 수십 년간 통한스럽게 여겼던 사저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외롭고 처연한 생각이 들었다.
약 일각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손에 화섭자를 들고 천천히 돌 계단을 내려오더니 나직이 말했다.
사저! 정말 죽었나요? 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군요.
동모와 다섯 자 정도 되는 곳까지 다가가 들고 있던 화섭자에서 비쳐지는 미약한 빛으로 동모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동모의 얼굴은 잔뜩 주름이 잡혀져 있었고 입가의 주름도 선혈로 더러워져 있었는데 그 표정은 실로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이추수는 나직이 말했다. 사저! 나는 한평생 그대에게 많은 고통을 당해 왔어요. 죽은 척 가장하여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말아요.
그녀는 왼손을 휘둘러 동모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우지끈, 뚝, 하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그것은 이미 숨을 거둔 시체에서 몇 개의 늑골이 부러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허죽은 크게 노해 부르짖었다.
그녀는 이미 당신의 손에 죽었는데 당신은 어째서 그녀의 유해를 또 해친단 말이오?
그러다가 이추수가 죽은 동모의 몸으로 장력을 다시 뻗쳐 가는 것을 보자 허죽은 즉시 자기의 손을 휘둘러 막았다. 이추수는 흘낏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중원 무림 제일의 풍류 남아라는 허죽은 눈이 크고 코와 귀도 컸으며 입도 컸을 뿐만 아니라 넓다란 이마에 짙은 눈썹을 하고 있어 그의 생김새는 너무 촌스럽고 천하게 보였다. 도저히 준수하고 헌칠하다는 용모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닌가!
일순 어리둥절해진 이추수는 그가 바로 설봉에서 동모를 업고 도망친 소화상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른손을 뻗쳐 허죽의 어깻죽지를 잡으려고 하였다. 허죽은 몸으로 옆으로 기울여 피하면서 말했다.
나는 그대와 싸우지 않겠소. 다만 그대에게 그대 사저의 유해를 건드리지 않도록 부탁하는 바이오.
이추수는 잇따라 사 초를 펼쳤다. 허죽은 천산육양장을 매우 익숙하게 연성 하였기 때문에 놀랍게도 일일이 이추수의 초식을 막아낼 수 있었다. 오히려 막아내는 가운데 은연 중 견실하고도 웅후한 반격을 펼쳐내기도 했다. 이추수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 그대 등뒤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지?
허죽은 전혀 적과 싸운 경험이 없었던 터라 그 말에 속아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가슴이 아팠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 이추수에게 혈도를 짚히게 된 것이다. 곧이어 두 어깨와 두 다리의 혈도마저 그녀에게 짚히고 말았다. 대뜸 전신이 마비되어 동모의 곁에 쓰러지고 말았다.
허죽은 놀람과 분노로 부르짖었다.
당신은 어른이 되어서 간사한 수단으로 사람을 속이는군요?
이추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병법에 속임수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오늘 네 녀석의 버릇을 톡톡히 고쳐 놓겠다.
그녀는 허죽을 손가락질하며 다시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 너는......너는......정말 추악하기 이를데 없는 화상인데 놀랍게도 중원 제일의 풍류 남아라고 하다니 우습구나, 우스워.
이때 별안간 퍽, 하는 소리가 얼음 창고 안에 울려퍼졌다. 아추수가 길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등의 지양혈(至陽穴)을 일 장의 공격에 의해 격타당한 것이었다. 손을 쓴 사람은 동모였다. 동모는 곧이어 왼쪽 주먹을 맹렬하게 내질러 이추수의 가슴팍에 있는 전중혈을 적중시켰다. 이 일 장과 일 권은 서로의 몸을 붙이다시피 하여 내리친 것이라 이추수는 감당할래야 감당할 수 없었고, 몸을 피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라 이추수의 몸뚱어리는 한 대의 주먹에 날려서 돌 계단 위에 떨어져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동모는 잔뜩 벼르고 있었던 터라 그 한 대의 주먹의 기세는 날카롭기 이를데 없었다. 그 바람에 화섭자는 삼층의 얼음 창고에서 이층의 얼음 창고를 가로질러 곧장 일층으로 날아가 떨어지게 되었다. 순식간에 삼층의 얼음 창고는 다시 칠흑과 같은 어둠에 휩싸이고 말았다.
동모는 흐흐흐 냉소를 흘리고 있었다. 허죽은 놀라고 기뻐 부르짖었다.
선배님! 돌아가시지 않았군요! 정말......정말 잘 됐습니다!
원래 동모는 하루를 남겨 두고서 끝내 신공을 연성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설봉 위에서 이추수에게 한 다리를 짤리게 된 이후 공력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번에 생사의 결투를 벌이기는 하였으나, 이백 초를 싸우게 되었을 때 동모는 자기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모가 이추수에게 일 장을 얻어 맞았을 때 동모의 열세가 더욱더 두드러지게 되었는데도 허죽은 도울 생각도 않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 물론 허죽은 이추수가 선기를 잡아 추격을 하려는 것을 막기는 했지만 동모의 간계를 성공시키려는 데 도움이 되어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동모는 다시 싸우게 되었다가는 반드시 참혹하기 이를데 없는 대패를 당하리라 생각하고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일 장을 맞받아 숨이 끊어져 죽은 척 가장을 했던 것이다.
돌 계단 위의 피와 그녀의 가슴팍, 그리고 입가의 선혈은 그녀가 미리 준비 해 두었던 노루의 피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적을 유인해서 끌어들이려는 미끼였다. 그러나 이추수는 매우 영리해서 그것에 속지 않았다. 분명히 그녀의 숨이 끊어진 것을 보고도 그녀의 가슴팍에 일 장을 가했다. 동모는 내친 김에 그저 그 일 장을 몸으로 맞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허죽이 옆에서 막지 않았더라면, 이추수는 잇따라 손을 썼을 것이고 동모의 몸뚱이는 그야말로 핏떡이 되었을 형편이었다.
다행히 허죽이 인자한 마음으로 이추수의 손길을 막아 주었고, 이추수는 중원 제일 풍류 남아의 참모습을 보고 실망과 함께 우스운 생각이 들어 그만 경각심을 늦추고 말았다. 이추수는 동모가 교활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동모가 참을성 있게 좋은 기회를 기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추수는 가슴과 등에 중상을 입게 되자, 내력은 그녀의 제약에서 벗어나 마치 홍수가 범람하듯, 둑을 무너뜨리고 쏟아져나올 기세였다. 소요파의 무공은 본래 천하에서 제일가는 무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내력을 제압하는데 실패하게 되면 온몸의 사지백해에 내력이 멋대로 맴돌아 서로 충돌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바깥으로 흘러나갈 구멍도 없는지라 그저 몸안에서만 좌충우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력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의 고통이란 실로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이추수는 전신에 있는 혈도가 동시에 마비되고 근지러워 오는 것을 느꼈다.
놀람과 당황한 끝에 그녀는 부르짖었다.
몽랑! 제발 적선하는 셈치고 빨리 나의 백회혈을 힘주어 후려쳐 죽여 주게.
이때 어디선가 희미한 불빛이 비쳐들었다. 이추수는 전신을 벌벌 떨면서 손을 얼굴로 가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하얀 망사를 뜯어내고 손톱으로 자기의 얼굴을 마구 긁어댔다. 할퀸 자국이 나면서 피가 뚝뚝 흘러나왔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그녀는 부르짖었다.
몽랑! 그대는......빨리 한 대의 주먹으로 나를 죽여 주게.
동모는 냉소했다.
네가 그의 혈도를 짚어 놓고 이제 와선 그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흐흐흐! 너야말로 네가 한 짓의 댓가를 받는 것이다. 너에게 내린 보답은 빠르기도 하구나.
이추수는 몸을 일으켜 허죽의 혈도를 풀어 주려고 했으나, 전신이 시큰거리고 맥이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허죽은 번갈아 이추수와 동모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동모 역시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그녀는 돌 계단 위에 엎드려서 끊임없이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허죽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빛은 일층 얼음 창고에서 흘러 들어왔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어이쿠, 사람이 왔다!
동모는 깜짝 놀라 생각했다.
"사람이 들어오게 된다면 나는 끝내 저 계집년의 손에서 죽고 마는 셈이 아닌가?"
그녀는 억지로 진기를 돋우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다리에 맥이 빠져서 다시 털썩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이추수를 향해 천천히 기어갔다. 이추수의 구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그녀를 목졸라 죽일 생각이었다.
순간 동모의 귀에 가느다랗게 똑 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물방울이 돌 계단 위로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이추수와 허죽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듣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돌 계단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았었다. 세 사람은 똑같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물방을은 어디서 흘러내려오는 것일까?"
얼음 창고 안은 점점 더 밝아져 갔고, 물 소리가 졸졸졸 들려왔다. 물방울은 이제 한 가닥 물 줄기를 이루어 돌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일층의 얼음 창고에는 한쪽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나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추수는 말했다.
푸대자루 안의......솜에.......불이 붙었군!
원래 얼음 창고 문앞에는 푸대자루가 쌓여 있었다. 그 푸대자루 안은 솜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는 밖으로부터 열기가 침입하는 것을 막아 얼음이 녹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추수가 동모의 일 장으로 쓰러졌을 때 화섭자가 그녀의 손에서 떨어져 솜이 들어 있는 푸대자루 위로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이내 그것은 푸대자루 안의 솜으로 옮겨져서 솜에 불이 붙어서 타기 시작했고 얼음은 녹아서 물 줄기를 이루어 졸졸졸 흘러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불길은 갈수록 거세졌고, 녹아 흘러내리는 얼음 물은 점점 불어났다. 졸졸거리던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삼층 얼음 창고에는 이미 한 자 남짓한 물이 고였다. 그런데도 돌 계단 위의 얼음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음 창고안의 물은 점점 불어나 세 사람의 허리 정도까지 차올랐다.
이추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저! 그대와 나는 다 패해서 상처를 입은 꼴이 되었으니 둘다 살아날 수 없을 것이오. 그대는...... 그대는 몽랑의 혈도를 풀어 그를 이곳에서 나가도록 해 주세요.
세 사람은 얼음 창고에 물이 가득 차 오르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동모는 냉소했다.
내 자신의 일을 네가 왜 쓸데없이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느냐! 나도 그의 혈도를 풀어 주려고 생각했었는데 너의 말을 듣고 나니 그럴 생각이 없어졌다. 너의 말대로 한다면 네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겠어? 나는 그의 혈도를 풀어 주지 않겠다. 소화상! 너는 그녀의 한 마디 때문에 죽게 되었다. 알겠느냐?
그녀는 몸을 돌리더니 천천히 돌 계단 쪽으로 기어갔다. 동모는 몇 개의 돌 계단만 기어올라가면 친히 이추수가 빠져 죽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기 자신도 죽음을 면할 수 없겠지만, 직접 이추수가 목숨을 잃게 되는 광경을 보아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추수는 동모가 한 계단 한 계단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뼈를 에이는 듯한 차가운 얼음물이 자기 가슴까지 올라왔음을 알아챘다. 동시에 그녀는 체내의 진기가 소용돌이치고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얼음물이 입 근처까지 불어나 빨리 익사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렇게 되는 것이 만 마리의 벌레가 물어 뜯고 수천 개의 바늘이 쑤시는 듯한 공력이 흩어질 때의 고통보다는 몇 배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별안간 동모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곤두박질치면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을 사방으로 튀기며 물이 고여 있는 곳에 떨어졌다. 그녀는 중상을 입은 나머지 손과 발에 힘이 없어 칠팔 개의 계단을 기어서 올라갔을 때, 마침 한 조각의 주먹만한 얼음이 물결을 따라 떠내려 오면서 그녀의 무릎팍을 세차게 때렸다. 그 바람에 동모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뒤로 벌렁 넘어지면서 아래로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동모가 떨어진 곳은 바로 허죽의 몸 위였고, 그녀의 몸은 다시 퉁기듯 허죽의 오른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추수가 허죽의 왼쪽에 있었으니 이추수와는 반대되는 방향이었다. 물이 고여 있는 한가운데에서 세 사람은 그만 한 덩어리가 되었다.
동모의 몸은 허죽과 이추수보다는 훨씬 왜소한 편이었다. 이때 얼음물은 이추수의 가슴까지밖에 차오르지 않았으나, 동모에게는 목까지 차오랐다. 동모 역시 공력이 흩어지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터라 속으로 생각했다.
"어찌했든간에 저 계집년이 나보다 먼저 죽도록 해야겠다."
그녀는 손을 써서 이추수를 해치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허죽이 놓여 있었고, 지금 손과 팔을 한 치나 두 치 정도 움직인다는 것도 그녀에게는 힘든 노릇이었다. 마침 허죽과 이추수의 어깻죽지가 서로 맞붙어 있었다.
동모는 떠오른 생각이 있어 입을 열었다.
소화상! 너는 절대 운기행공해서 방어하면 안 된다. 만일 그렇지 않을 때는 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허죽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내력을 돋우어 허죽에게 공격을 하였다.
동모는 이와 같은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의 죽음을 가속화시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내력이 조금이라도 더 소모되면 소모될수록 빨리 숨을 거두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물이 불어오르게 되었을 때 세 사람 가운데 반드시 자기가 먼저 죽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추수는 몸을 흠칫했다. 동모가 내력을 공격해 오는 것을 알고는 이추수도 즉시 내력을 운기하여 반격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허죽은 동모의 몸에 닿아 있는 자기의 팔뚝에서 한 가닥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곧이어 이추수의 어깻죽지에 맞닿은 어깻죽지에서도 한 줄기의 열기가 침입하는 것이 느껴졌다. 삽시간에 두 가닥의 열기가 그의 체내에서 소용돌이치며 충돌을 일으켰고 맹렬한 기세로 맞부딪히며 몸안을 돌았다. 동모와 이추수의 공력은 비슷했다. 둘 다 중상을 입고 있었으나 여전히 막상막하의 실력이라 우열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두 사람의 내력이 서로 부딪히게 되자 즉시 대치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내력은 모두 허죽의 몸에 옮겨지게 된 상태가 되어서 그 누구도 상대방의 몸으로 밀어붙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되자 고통을 당하게 된 사람은 허죽이었다. 그는 좌우에서 협공을 받게 되는 액운을 당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그가 무애자로부터 칠십여 년간 쌓아 올린 공력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세 동문의 내력이 막상막하여서 그저 서로 대치 사태를 이루고 있을 뿐 그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죽은 이 두 고수의 협공 아래서도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얼음물이 점차 불어나 동모의 목덜미와 아랫턱에 이르게 되었다. 다시 아랫턱에서 아랫 입술까지 불어났다. 그녀는 끊임없이 내력을 밀어내고 있었고, 이추수의 내력도 금방 소모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동모의 입으로 차가운 기운과 함께 한 줄기 얼음물이 흘러 들어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목을 위로 쳐들었다. 그러자 한 발이 없는지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떠오르기가 수월했다. 이렇게 되자 죽음에서 목숨을 건진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는 아예 물 위에 누워서 뒤통수를 물속에 잠기게 하고 입과 코를 물 밖으로 내밀어 숨을 쉬었다. 그녀는 마음이 크게 안정되자 다리 하나가 없는 자신이 오히려 물속에서는 득을 보게 된 셈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손으로 내력을 끊임없이 흘려 보냈다.
허죽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었다.
"아! 사백님, 그리고 사숙님, 다시 싸운다 하더라도 끝내 고하를 판가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두 분은 싸움을 그만 두십시오. 소질은 그저 산 채로 두 분에 의해 해침을 당해 죽게 될 형편입니다.
그러나 동모와 이추수는 고수가 무공을 겨룸에 있어서 가장 위험하다는 내력을 겨루는 처지가 되었는지라 그만둘 수가 없었다. 먼저 손을 멈추게 되는 사람이 먼저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이 겨룸에 있어서 승패가 어떠하든지간에 끝내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의 관심은 누가 한 걸음 먼저 상대방의 숨을 거두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존심이 강했고 수십 년간 사무친 원한이 쌓이고 쌓여 그 어느 누구도 먼저 손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내력이 자신들의 몸에서 흘러 나가게 되고 정력이 갈수록 쇠퇴해지자 공력이 흩어지는 고통은 오히려 해소되었다.
얼음물은 이추수의 입 근처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자맥질을 할 줄 몰라 동모처럼 물 위에 둥둥 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숨쉬기를 멈추고 귀식공(龜息功)으로 대적하였다. 그리하여 얼음물이 눈, 눈썹, 이마까지 차올랐을 때도 웅후한 내력을 조금도 쉬지 않고 뻗쳐 내고 있었다.
허죽은 꿀꺽꿀꺽 잇따라 세 모금의 얼음물을 들이마신 후 크게 부르짖었다.
어이구, 나는......나는......꿀꺽......꿀꺽...나는....꿀꺽...
정히 놀라고 당황하게 되었을 때 허죽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져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급히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쉬었다. 그러나 숨을 들이마셨는데도 가슴은 답답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 얼음 창고는 바람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깥에서 새로운 바람이 들어오지 않자 불은 그만 꺼지고 만 것이다. 허죽과 동모는 숨쉬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으나, 이추수는 귀식공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지각도 없었다.
불길이 꺼지긴 했으나 얼음물은 여전히 흘러내렸다. 허죽은 얼음물이 자기의 입술을 지나 인중, 콧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생각했다.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죽었어."
동모와 이추수의 내력은 여전히 좌우 양쪽에서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허죽은 그저 답답하기 이를데 없었다. 내식이 마구 소용돌이쳤다. 마치 오장육부가 모두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얼음물은 콧구멍과 겨우 실 한 가닥 정도의 차이였고 물이 조금만 더 불어나면 숨을 쉴 수도 없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혈도가 봉쇄되어 있어서 머리를 뒤로 젖히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참이 지나도 얼음물은 더 이상 불어나지 않았다. 그는 솜에 붙었던 불이 바람이 통하지 않아 꺼지게 되어 얼음이 더 녹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잠시 후 인중이 찌르는 듯 아파왔다. 그 아픔은 점차 아래턱까지 전해지더니 다시 목 있는 곳까지 내려갔다. 원래 삼층의 얼음 창고에는 얼음 조각이 가득 쌓여 있어서 대단히 추운 곳이었다. 얼음 창고 안에 불이 꺼지자, 다시 얼음이 얼었고 세 사람은 모조리 그 얼음속에 파묻히고 만 것이다. 딱딱한 얼음이 얼어붙게 되자 동모와 이추수의 내력은 단절되었고 허죽의 몸으로 전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태반의 내력은 허죽의 체내로 스며들어 마구 소용돌이쳤다.
허죽은 온몸이 터져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안에 숯불처럼 뜨거운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갑자기 허죽은 온몸을 흠칫했다. 두 가닥 진기가 놀랍게도 그의 체내에 머물러 있던 진기와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 아닌가? 그 진기는 스스로 몸안의 정맥과 혈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동모와 이추수의 진기가 서로 대치하여 흘러나갈 곳이 없게 되자 무애자가 허죽에게 주입한 내력과 한 덩어리가 되고 만 것이다. 세 사람의 내력은 원래 한 문파에서 나온 것이라 성질이 같은 것이어서 쉽게 융합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세 개의 엄청난 진기가 하나로 뭉쳐지자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 되었고, 그 힘이 융합되자마자 봉쇄되었던 혈도는 즉시 뚫리고 말았다.
순간 허죽은 온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두 손을 가볍게 털자, 우지직 뚝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몸에 얼어붙었던 딱딱한 얼음덩어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백과 사숙의 목숨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우선 그녀들을 구하고 보자."
허죽은 손을 뻗쳐 그들의 몸을 만져 보았다. 손에 닿는 감촉은 얼음과 같이 딱딱하고 차가왔다. 두 사람은 어느 사이인가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서 자세히 생각해 보기도 전에 한 손에 한 사람씩 들었다. 두 사람은 함께 쳐들고 일층의 얼음 창고 위로 올라갔다. 이중으로 된 나무문을 밀어제쳤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허죽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길게 한 모금 숨을 들여마시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쾌적함을 느꼈다.
때는 이미 깊은 밤이어서 밖에는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었고 꽃 그림자들이 땅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어두운 밤중에 황궁에서 벗어나가는 쉬운 노릇이다."
그는 얼음 조각으로 변한 두 사람은 들고 담장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진기를 돋우어 몸을 날렸다. 별안간 몸뚱아리가 두둥실 위로 떠올랐고 일 장 남짓한 담벼락 위로 올라가서도 여전히 그 기세는 멈추어지지 않았다. 허죽은 체내의 진기가 이토록 소용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깜짝 놀라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때 이 일대를 순찰하던 네 명의 어전 호위가 허죽이 내지르는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왔다. 그들은 두 개의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잿빛 그림자를 가운데 끼고 담장을 넘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어떤 괴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 사람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괴물은 그들이 멍해져 있는 사이에 담장 밖의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네 사람은 고함을 지르며 뒤를 쫓아갔으나 종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네 사람은 혹시 자기들이 귀신을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산의 요정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꽃의 요정이라 했다.
허죽은 황궁에서 벗어나게 되자, 성큼성큼 크게 걸음을 옮겨 놓았다. 발 아래는 청석판을 깐 큰길이었고 양쪽은 겹겹으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서쪽으로 한참을 달려가 어느 성벽 아래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진기를 돋우어 성벽을 넘어갔다. 성을 지키던 병졸들은 눈앞에 뭔가 번쩍하고 지나가는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자기네들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허죽은 성에서 십여 리 떨어진 황량한 들로 나서게 되었다. 사방에 집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두 무더기의 얼음 조각을 내려 놓고 속으로 생각했다.
"한시바삐 이 두 사람의 몸에 얼어 붙은 얼음 조각을 떼내야겠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조그만 개울이 눈에 띄었다. 그는 두 무더기의 얼음 조각을 개울물 속에 처박았다. 달빛 아래로 동모의 코와 입이 얼음 조각 밖으로 삐죽이 나온 것이 보였다. 두 눈을 감고 있어서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몸에 붙어 있던 얼음들이 개울물을 따라 흘러내려가기 시작했다. 허죽은 얼음들을 떼어내거나 깨뜨리기도 하면서 두 사람의 몸에 얼어붙은 얼음을 제거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을 만져 보았다.
놀랍게도 약간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만일 그녀들이 깨어나게 된다면 또다시 싸우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어느덧 날이 밝아왔다. 그는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동녘 하늘에 해가 떠오르고 나무 위의 새들이 재잘거리게 되었을 때 북쪽 나무 아래에 놓여 있던 동모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남쪽 나무 아래에 있던 이추수도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허죽은 매우 기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서서 연신 합장을 하며 절을 했다.
사백님! 사숙님! 우리 세 사람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싸움은 그만 두십시오.
동모가 말했다.
안돼, 저 계집년이 죽지 않았는데 내 어찌 손을 멈출 수 있겠느냐?
이추수는 말했다.
원한은 바다와 같이 깊으니 죽을 때까지 그만 두지 않겠다.
허죽은 두 손을 마구 흔들며 말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추수는 손을 뻗어 땅바닥을 짚더니 몸을 날려 동모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동모는 두 손으로 원으로 그리듯 하면서 공력을 돋우고 반격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이추수는 허리를 펴려고 했으나 자기 몸을 주체할 수 없는 듯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동모 또한 두 팔로 원을 그리려고 했으나 원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숨만 헐떡거렸다.
허죽은 두 사람에게 싸울 만한 힘이 없음을 알고 속으로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오히려 더 잘 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두 분은 잠시 쉬도록 하십시오. 제가 가서 두 분께서 드실 음식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때 동모와 이추수는 각기 가부좌를 하고 손바닥과 발바닥을 하늘로 향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자세를 보아 전력을 기울여 운기행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일 둘 중 하나가 먼저 약간의 힘이라도 끌어모을 수 있게 된다면 먼저 일격을 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상대방은 항거할 여지없이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자 허죽은 감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는 동모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이추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쭈글쭈글한 할머니로 변해 있었다.
"사백님은 이미 금년 구십육 세라고 했고 사숙님 역시 적어도 팔십여 세는 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이토록 많은 나이에도 질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그는 젖어 있는 옷의 물기를 짜냈다. 그런데 갑자기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한 가지 물건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무애자가 그에게 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비단에 그려진 것이라 물에 적셔진 후에도 파손되지 않았다. 허죽은 그 그림을 바위 위에 펼쳐놓았다. 햇볕에 잘 마르도록 했으나 그림의 단청이 이미 물에 젖어 약간 얼룩진 곳이 있어서 그는 애석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이추수는 눈을 뜨더니 그 화폭의 그림을 보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보여 줘. 나는 사형이 저 계집의 초상을 그렸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 가 없다.
동모 역시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 보여 주지 말아라. 나는 친히 그녀를 처리할테다. 만약 저 계집년이 화가 나서 죽게 된다면 너무나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니냐?
이추수는 소리내어 웃었다.
호호호! 나는 보지 않겠다. 너는 내가 그림을 보고 그림 속의 사람이 네가 아닌 것을 알게 될까봐 두려운거지? 사형은 단청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어찌 그림 속에 너처럼 사람 같지도 않은 난장이를 그린단 말이냐? 그가 부적을 그려서 귀신을 쫓자는 것도 아닐텐데 어찌 너를 그리겠느냔 말이다.
동모가 한평생 가장 한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무공을 연마하다가 잘못하여 평생 키가 자라지 못한 일이었다.
동모의 키가 자라지 못한 것은 순전히 이추수 때문이었다. 동모가 한창 무공을 연마하던 중요한 때에 이추수는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 크게 소리를 질러 그녀로 하여금 주화입마하게 만들었고 진기를 흐트려뜨렸다. 그 이후로 동모는 키가 자라지 않게 되었다.
동모는 이추수가 한평생 자기가 한스럽게 생각하는 일을 들먹이자 크게 노기가 북받쳐올라 부르짖었다.
이 계집년아! 나는......나는......나는......
동모는 억지로 진기를 끌어올리려고 하다가 왝,하며 한 모금 선혈을 토해냈다. 그녀는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ㅃ했다.
이추수가 비웃으며 말했다.
네가 졌다는 것을 인정하겠지? 이제 손을 써서 싸워도......
그녀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기침을 했다.
허죽은 두 사람이 지칠 대로 지쳐 있고 눈깜짝할 사이에 허탈 상태로 빠지게 될 것 같아 그들에게 권고했다.
사백과 사숙께서는 역시 잠시 동안 쉬도록 하시고 신경을 쓰지 않는 곳이 좋겠습니다.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안돼.
바로 이때였다. 서남쪽에게 갑자기 쨍그랑 쨍그랑, 하는 낙타 방울 소리가 들렸다. 동모는 그 소리를 듣자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품속에서 검은 색의 짤막한 피리 같은 것을 꺼내더니 허죽에게 말했다.
너는 이 관(管)을 하늘로 튕겨 올리도록 해라.
이추수의 기침 소리는 갈수록 심해지고 다급해졌다. 허죽은 이유도 모르면서 그 검은 관을 중지에 끼우고 위로 튕겨 올렸다. 그 순간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피리 소리가 조그만 관에서 흘러나왔다. 그 조그만 관은 하늘로 곧장 치솟아올라 거의 눈으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여전히 우우, 하는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허죽의 내공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큰일났다. 사백의 이 조그만 관은 사람을 부르는 신호로구나. 그녀는 사람을 불려 사숙을 상대하려나보다."
그는 재빨리 이추수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고 말했다.
사숙! 사백을 도와 줄 사람이 곧 들이닥칠 모양입니다. 제가 사숙을 업고 도망치겠습니다.
그런데 이추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침도 하지 않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허죽은 깜짝 놀라 손을 뻗어 그녀의 코 앞으로 가져갔다.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허죽은 놀라 부르짖었다.
사숙! 사숙!
허죽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 보았다. 그러자 이추수는 앞으로 퍽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동모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좋다, 좋아. 저 계집년이 놀라 죽고 말았구나! 호호호, 나는 이제 큰 원한을 갚은 셈이다. 저 계집년이 나보다 먼저 죽었구나! 호호호......
그녀는 격동한 나머지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이때 우우, 하는 소리가 높다란 곳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왔다. 검은 색의 조그만 관이 떨어지고 있었다. 허죽은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았다. 이때 짐승의 발굽 소리가 들리면서 딸랑딸랑, 하는 방울 소리가 울려퍼졌다.
허죽은 고개를 돌려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달려오던 수십 필의 낙타 등에는 모두 엷은 청색의 바람막이를 걸친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이 달려오는 모습은 마치 한 조각의 푸른 구름 같았다.
그들 중 몇 명의 여인이 동모를 향해 소리쳤다.
존주(尊主)! 속하가 너무 늦게 달려왔습니다. 정말 천 번 만 번 죽을 죄를 졌습니다.
수십 필의 낙타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낙타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고 그들이 입고 있는 바람막이와 가슴팍에는 한 마리의 검은 독수리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그 독수리는 매우 흉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인들은 동모를 발견하자 즉시 낙타에서 내려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동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한 무리의 여자들 가운데 앞장 선 사람은 나이 많은 노파로서 이미 오륙십 세는 됨직해 보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나이든 사람도 있었고 젊은 사람도 있었다. 사십여 세의 중년 여자와 십 칠팔 세의 소녀들도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동모에 대해 지극히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듯 땅바닥에 엎드려 감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동모는 싸늘하게 코웃음치더니 노해 부르짖었다.
너희들은 모두 내가 죽은 줄 알았겠지? 어느 누구도 이 할망구를 마음속에 두지 않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너희들을 다스릴 생각이 없으니까 모두들 제멋대로 놀아난 것이구나!
그녀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그 여자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하면서 말했다.
어찌 감히 저희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동모가 다그쳤다.
뭐가 감히 할 수 없다는 것이냐? 너희들이 정말 이 동모를 생각했다면 어째서 겨우......이 정도의 사람밖에 오지 않았느냐?
앞장 섰던 노파가 말했다.
존주께 알립니다. 그날 밤 존주께서 궁을 떠나신 이후 속하들은 초조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동모는 버럭 소리쳤다.
개방귀 같은 소리하지 마라!
그 노파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네, 네.
동모는 더욱더 화가 나는 듯 호통을 쳤다.
너는 개방귀 같은 줄 알면서 어찌 감히......감히 내 앞에서 함부로 지껄일 수 있단 말이냐?
그 노파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큰절만 올렸다.
동모는 마음이 약간 수그러지는듯 말했다.
너희들이 초조하게 여겼다면 어째서 빨리 산을 내려와 나를 찾지 않았지?
그 노파는 말했다.
예, 속하 구천구부(九天九部)는 즉시 산에서 내려와 길을 나누어 존주를 받들어 모시려고 했습니다. 속하 호천부(昊天部)는 동쪽으로 삼가 존주를 맞으로 나갔고, 양천부(陽天部)는 동남쪽으로 나갔으며, 적천부(赤天部)는 남쪽으로 나갔습니다. 또한 주천부(朱天部)는 서남쪽으로, 성천부(成天部)는 서쪽으로 나갔고, 유천부(幽天部)는 서북쪽으로, 현천부(玄天部)는 동북쪽으로 향했고 균천부(鈞天部)는 본궁을 지키고 있습니다. 속하가 무능하여 늦게 달려온 점 정말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녀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동모는 말했다.
너희들의 옷자락이 모두 다 찢어지고 헤어진 것을 보니 삼 개월 동안 길에서 많은 고생을 한 것 같구나.
그 노파는 대뜸 얼굴에 기쁜 빛을 띄우고 말했다.
존주를 위해서라면 꿇는 물 속이나 타는 불길 속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즐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까짓 약간의 수고는 속하들이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동모는 말했다.
나는 무공을 연성하기도 전에 갑자기 저 계집년을 만나게 되어 그녀에 의해 한 다리를 날리게 되었다. 하마터면 목숨도 건질 수 없었는데 다행히 나의 사질 허죽이 구해 주었다. 그 동안의 어렵고 위험했던 일들은 한 마디로 말하기가 어렵다.
청삼의 여인들은 몸을 돌리더니 일제히 허죽에게 인사를 했다.
선생의 커다란 은덕은 시녀들의 몸이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보답할 것입니다.
별안간 많은 여인들이 동시에 허죽에게 절을 하자 허죽은 크게 당황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그러면서 재빨리 무릎을 꿇고 반례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동모가 호통을 쳤다.
허죽아! 몸을 일으켜라. 그녀들은 모두 나의 노비이다. 네 어찌 신분을 돌보지 않는단 말이냐?
허죽은 다시 몇 마디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동모가 허죽에게 말했다.
우리의 그 보석 반지를 저 계집년에게 빼앗겼으니 가져오도록 해라.
허죽은 말했다.
예.
그는 이추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중지 손가락에서 보석 반지를 빼냈다.
동모는 말했다.
너는 이제 소요파의 장문인이다. 나는 이미 생사부, 천산절매수, 천산육양장 등 약간의 무공을 너에게 전수했으니 오늘부터 너는 표묘봉 영취궁의 주인이다. 영취궁......구천구부의 노비와 그녀들의 생사는 모두 네 뜻에 맡기기로 하겠다.
허죽이 깜짝 놀라 말했다.
사백님, 사백님,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동모는 노해 부르짖었다.
뭐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냐? 이 구천구부의 노비들은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고 때를 맞춰 나를 맞아 궁으로 돌아가지 못해서 나로 하여금 푸대자루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오노대 등과 같은 개도적들에게 모욕을 당하게 했다. 그리고 끝내는 다리를 잘리고 목숨마저 잃게 만들었다......
그 여자들은 동모의 말에 깜짝 놀라 정신을 바들바들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빌었다.
노비들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존주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동모는 허죽에게 말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 호천부의 노비들은 나를 찾아냈다. 그녀들의 형벌을 가볍게 하도록 해라. 나머지 팔부의 노비들은 팔을 자르거나 다리를 자르든간에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그 여자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존주님, 감사합니다.
동모는 그녀들에게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어째서 새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느냐?
여인들은 재빨리 허죽에게 사의를 표했다. 허죽은 두 손을 마구 내저으며 말했다.
모두들 그만 두시오. 내 어찌 그대들의 주인이 될 수 있겠소?
동모는 말했다.
나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다. 그러나 저 계집년이 나보다 먼저 죽은 것을 보았고 또 한평생 쌓은 무학을 전수할 전인을 얻게 되었으니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는데도 너는 그래도 응낙할 수 없다는 것이냐?
허죽은 말했다.
그건......저로서는 응낙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동모는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그 꿈속의 소저 몽고를 너는 만나고 싶지 않느냐? 그래도 너는 나의 영취궁의 주인이 될 것을 허락하지 않겠느냐?
허죽은 동모가 꿈속의 소저를 들먹이자 전신을 흠칫하게 되었고 다시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모는 기뻐하며 말했다.
좋다. 너는 그 한 폭의 그림을 가져 오너라. 내 친히 갈기갈기 찢어 놔야겠다. 마음에 거리끼는 일을 없애 버린 다음 즉시 너에게 그 꿈속의 소저를 찾는 방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마.
허죽은 그림을 가져와 동모에게 내밀었다. 동모는 그것을 받아 햇살을 비쳐 보더니 어, 하고 놀랐다. 그녀의 얼굴에 놀람과 기쁜 빛이 나타났다. 다시 자세히 살피더니 갑자기 껄껄거리고 웃었다.
호호호, 그녀가 아니다. 그녀가 아니다. 그녀가 아니다. 호호호호호!
커다란 웃음 소리와 함께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곧이어 목을 맥없이 떨어뜨리면서 고개를 푹 숙이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죽은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으나 그녀의 전신 뼈마디는 마치 솜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미 죽은 것이다.
청삼의 여자들은 동모를 에워싸고 크게 통곡했다. 그 울음 소리는 매우 애절했다. 이 여자들은 하나같이 어렵고 위험한 경우에 처했을 때 동모에게 구원을 받아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모가 엄하게 그녀들을 다루었으나 동모에게 충성을 다했다.
허죽은 삼 개월 동안 동모와 하루도 떨어지지 않고 생활해 왔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면서 그녀로부터 적지 않은 무공을 전수받은 것을 생각했다. 그녀는 비록 괴팍했으나 허죽에 대해서는 잘 대해 주었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웃으면서 죽는 것을 보자 마음속으로 여간 괴롭지 않아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그때 별안간 등뒤에서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호호, 사저! 끝내 그대가 한 걸음 먼저 갔군요? 그대가 이겼나요, 아니면 내가 이겼나요?
허죽은 이추수의 음성임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지?"
그는 몸을 일으켜 이추수를 바라보았다. 이추수는 등을 나무에 기대고 앉아 입을 열었다.
현질, 자네는 그 화폭의 그림을 나에게 보여 주게, 어째서 사저가 웃으면서 극락 세계로 왕생했는지 모르겠군.
허죽은 가볍게 동모의 손가락을 벌리고 그림을 뽑아냈다. 흘깃 보니 그 그림에 묻었던 물기는 벌써 말라 있었다. 그림의 필과 획 순이 약간 희미해졌지만 그림 속의 왕어언을 닮은 궁장의 미녀는 여전히 눈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허죽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미녀의 얼굴은 사숙과 닮은 데가 많이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추수에게 다가가 그 그림을 건네 주었다.
이추수는 그림을 받아들더니 동모의 노비들인 청삼의 여인들을 흘겨보며 말했다.
너희들의 주인은 나와 악전고투 끝에 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죽었다. 너희들과 같은 개똥벌레가 어찌 감히 햇빛 밝음을 겨룰 수 있겠느냐?
허죽은 고개를 돌려 청삼의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들은 모두 다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고 얼굴 빛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와락 달려들어서 이추수를 죽여 동모의 원한을 갚고 싶었지만, 새 주인의 명령을 받지 않아 감히 경솔하게 손을 쓰지 못하는 눈치였다.
허죽은 말했다.
사숙, 그대는......그대는......
이추수는 말했다.
네 사백의 무공은 매우 훌륭한 편이다. 그러나 세밀한 데가 없는 흠이다. 그녀의 구원병이 도착하게 된다면 내 어찌 혼자서 방어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죽은 척했을 뿐이다. 호호호, 끝내 그녀는 나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 그녀는 전신 뼈마디가 산산조각이 나고 근이 잘려지면서 진기를 토해내고 공력이 흐트러진 상태로 죽었다. 이런 모양은 꾸밀래야 꾸며 낼 수 없는 노릇이지.
허죽은 말했다.
그 얼음 창고에서 악전고투를 벌일 때 사백님 역시 거짓으로 죽은 척해서 사숙을 속인 적이 있습니다. 이젠 서로 빚을 갚은 셈이니 고하를 가릴 수 없다 하겠습니다.
이추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마음속으로 사백을 편들고 있구나.
그녀는 화폭을 펼쳤다.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변했고 두 손이 벌벌 떨렸다. 그 바람에 그 화폭도 덩달아 와들와들 떨었다. 아추수는 나직이 말했다.
그녀였구나, 그녀였구나, 그녀였구나, 호호호호!
그 웃음 소리는 서글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허죽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이추수에게 물었다.
사숙!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는 생각했다.
"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고 말했고 한 사람은 그녀라고 말했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일까?"
이추수는 그림 속의 미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자 보아라. 이 사람의 입가에는 보조개가 있지? 그리고 오른쪽 눈가에는 검은 사마귀가 있지 않느냐.
허죽은 그림 속의 미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추수는 침울하게 말했다.
이 여인은 나의 누이동생이다.
사숙의 누이동생이라구요?
이추수는 말했다.
누이동생의 용모는 나와 매우 닮았지. 틀린 점이라고는 그녀에게는 보조개가 있으나 나에게는 없고 그녀의 오른 눈가에 조그만 검은 사마귀가 있으나 나에게는 없는 것이지.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추수는 다시 말했다.
사형이 사저의 초상화를 그려 조석으로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고 하더군. 나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 보니 사저가 아니고 내 누이동생을 그렸구나. 도대체......도대체......이 한 폭의 그림을 너는 어디서 구했느냐?
허죽은 무애자가 임종시에 한 폭의 그림을 자기에게 건네주었으며 자기에게 대리의 무량산으로 가서 그 사람을 찾아 무공을 전수받도록 하라고 시킨 일과 동모가 이 그림을 보고 난 뒤 얼마나 화를 냈는가 등을 이야기했다.
이추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사저는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이 그림 속의 인물이 나인줄로 알았겠지. 모습이 너무나 비슷했고, 사형은 나와 무척 사이가 좋았으니까. 더구나......더구나......사저가 나와 다투게 되었을 때 나의 누이동생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더군다나 그림에 그려진 인물의 보조개와 검은 사마귀를 주의해 보지 않은 것이야. 그런데 사저는 죽을 때에야 비로소 그림 속의 인물이 나의 누이동생이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잇따라 "그녀가 아니었구나, 그녀가 아니었구나"를 연발하게 되었다. 아, 누이야! 너는 좋겠구나! 너는 좋겠어!
이추수는 눈물을 흘렸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백과 사숙은 나의 사부님에 대해 깊은 정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런데 이 사숙의 여동생은 아직도 세상에 있을까? 사부님은 나에게 이 그림을 가지고 가서 무공을 가르침 받도록 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사숙의 여동생이 대리 무량산에 살고 있다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물었다.
사숙, 그대의 그 누이동생은 무량산에 살고 있나요?
이추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두 눈을 먼 하늘가로 던졌다. 마치 옛일을 돌이켜보며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 나와 너의 사부는 대리 무량산 검호궁의 석동(石洞)에서 정말 자유스럽고 즐거운 나날을 보냈지. 그때는 신선보다 더 나은 생활이었다. 그리고 나는 귀여운 딸을 낳았다. 우리 두 사람은 천하 각문 각파의 무공 비급을 모아 모든 무예를 포괄하는 한 문파를 창립하려고 했지.
그런데 어느날 그가 동굴에서 하나의 아름다운 커다란 빛이 나는 옥을 발견하고는 그 즉시 나의 모양에 따라 옥상(玉像)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조각이 다 된 이후에 그는 온종일 앉아 옥상만 넋을 잃고 바라보며 나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말을 걸더라도 그는 종종 뚱단지 같은 대답을 했고 심지어는 듣고는 못 들은 척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옥상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너의 사부의 솜씨는 정말 교묘했고 그 옥상은 정말 아름다웠지. 그러나 그 옥상은 역시 죽은 생명이 없는 한갓 돌에 불과한 것이었지. 그 옥상은 나를 본따 조각한 것이었고 내가 분명 그의 곁에 있는데도 그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정신없이 옥상만을 바라보며 두 눈에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옆에 있는 허죽도 잊어 버린 듯 혼자서 중얼거렸다.
잠시 후 이추수는 다시 나직하게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사형! 그대는 총명하기 이를데 없고 또한 순진하기 이를데 없어요. 어째서 그대가 손으로 조각해 낸 옥상을 사랑하게 되었으면서도 말을 할 줄 알고 웃을 줄 알고 움직일 줄 아는 그대의 사매를 사랑하지 않았나요? 그대는 마음속으로 그 옥상을 저의 누이동생처럼 여겼겠죠? 그래서 저는 그 옥상에게 질투를 느꼈고 그대와 싸운 후 나가서 많은 준수한 젊은 사람들을 끌어와 그대가 보는 앞에서 그들과 음란한 짓을 일삼았죠. 그러자 그대는 화를 내면서 제 곁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죠. 사형, 그대는 사실 화를 낼 필요가 없어요. 그들 미소년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목숨을 빼앗겨 호수물 속에 깊숙이 파묻히고 말았어요.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녀는 다시 그 그림을 들고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사형! 이 한 폭의 그 그림은 그대가 언제 그린 것인가요? 그대는 저를 그린 줄 알고 그대의 제자에게 이 그림을 갖고서 무량산으로 나를 찾아오도록 했겠지요? 그러나 그대는 부지불식간에 저의 누이동생을 그리고 말았어요. 그러한 사실은 사형 자신도 몰랐겠지요? 그대는 줄곧 이 그림 속의 인물이 나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사형, 그대 마음속으로 진정 사랑했던 사람은 나의 누이동생이 아니었던가요? 그대가 그토록 정신을 빠뜨리면서 그 옥상을 바라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요? 무엇 때문인가요? 이제야 나는 알게 되었어요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살아 생전 정에 빠지고 화를 내고 욕심을 내는 세 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백과 사부 그리고 사숙은 모두가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그와 같은 세 가지 정에 얽매여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아무리 무공이 탁월하다 하더라도 마음속의 번뇌와 고통은 이 세상의 속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구나?
이때 이추수가 고개를 돌리고 허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현질, 나에게 딸이 하나 있네. 그대 사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데 소주 왕씨 집으로 시집을 갔지. 언제 자네에게 여가가 있으면......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 그녀가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모두들 스스로의 문제도 제대로 처신 못하는 형편인데......
그녀는 갑자기 날카로운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사저, 그대와 나는 모두 불쌍한 사람이에요. 모두......모두 양심없는 사형에게 속임을 당했어요. 호호호호......호호......
그녀는 크게 세 번 소리를 내더니 몸을 뒤로 벌렁 제치는가 했는데 그만 땅바닥에 폭 고꾸라졌다.
허죽은 몸을 구부리고 살펴보았다. 그녀의 입밖으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이번에는 가짜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호천부의 우두머리가 되는 노파가 허죽에게 말했다.
존주, 우리들은 노존주의 유해를 영취궁으로 운구하여 정중하게 안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쪼록 존주께서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허죽은 대답했다.
마땅히 그래야 될 것이오.
허죽은 이추수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이분은 그대들 존주의 동문 사매이외다. 그녀와 존주는 살아 생전에 원한이 있었지만......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으니 원한도 풀어져 없어졌으리라 생각되오......내가 보기에......내가 보기에는 함께 운구하여 안장을 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그 노파는 허리를 굽혔다.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허죽은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다. 그는 본래 이 청삼의 여인들이 이추수를 적대시하고 미워하여 그녀의 시체를 운구해서 안장하기는 커녕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분을 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이의를 나타내지 않으니 그로서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사실 그는 동모가 여인들에게 주인을 두려워하도록 다스려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그 여인들이 동모에 대해서 손톱만큼도 뜻에 그슬리는 일을 하지 않았고, 이제 허죽이 그들의 새 주인이 되고 보니 자연 허죽의 말에 따라 행동하고 그의 말을 마치 명령처럼 받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노파는 여인들을 지휘하여 담요로 두 구의 시체를 싸서 낙타 위에 싣게 했다. 그리고 허죽에게 낙타 위로 오르도록 했다. 허죽은 몇 마디 겸손의 말을 하였으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 사람의 시체가 땅에 묻히는 것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연후에 소림사로 돌아가서 죄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허죽은 노파에게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그 노파는 대답했다.
노비의 남편은 여(余)씨랍니다. 그래서 노존주께서는 저를 소여(小余)라고 불렀지요. 존주께서는 아무렇게나 부르도록 하십시오.
동모는 구십여 세이니 물론 그녀에게 소여라고 부를 수 있었지만 허죽은 나이가 어려 그렇게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여파파, 나의 법호는 허죽이라고 하오. 모두들 서로 같은 항렬로 부르도록 합시다. 존주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몸둘 바를 모르게 하는 노릇이외다.
허죽의 말을 들은 여파파는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존주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존주께서 저를 때리고 죽이신다 하더라도 이노비는 감수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존주께서는 노비를 영취궁에서 쫓아 내지만 말아 주십시오.
허죽은 놀라 말했다.
빨리 일어나시오. 내 어찌 그대를 때리고 죽인단 말이오?
그는 재빨리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나머지 여인들도 무릎을 꿇고 빌었다.
존주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허죽은 동모가 극도로 노했을 때 입으로 종종 반대되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당황해 했다.
동모가 남에게 특별히 겸손하게 말을 하면 그 상대방은 반드시 참화를 겪게 되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오노대 등 동주와 도주들이 동모가 보낸 사람으로부터 얻어맞거나 욕을 먹게 되었을 때 오히려 잔치를 벌려서 경하하며 다시 다른 화가 없으리라고 여기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었다.
허죽은 낙타 위에 올라탔다. 여인들은 허죽이 아무리 말해도 낙타를 타지 않으려고 했으며 그저 낙타를 끌고 허죽의 뒤를 따라올 뿐이었다.
허죽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반드시 영취궁으로 빨리 돌아가야 하오. 날씨가 따뜻해졌으니 아무래도......아무래도 존주의 유해에 어떤 변고가 생길지 모르오.
그제서야 여인들은 허죽의 말에 따랐으나, 각자 허죽이 타고 있는 낙타 뒤에서 수행했다. 허죽은 영취궁 안의 사정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곁으로 다가오는 여인이 없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일행은 곧장 동쪽으로 나아갔다. 오 일째 되었을 때 주천부의 전초 부대와 만나게 되었다. 여파파는 신호를 발했다. 얼마 후에 주천부의 여자들이 나는듯 달려왔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고 먼저 동모의 시체에 울면서 절을 하고 새 주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주천부의 수령은 석(石)씨였다. 삼십여 세 되는 나이라서 허죽은 그녀를 석수(石嫂)라고 불렀다.
허죽은 여인들이 의심을 하게 될까봐 말을 할 때 그저 담담히 몇 마디의 말로 고생했다고 위로만 했다. 자색 장삼의 여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일제히 사의를 표했다. 허죽은 감히 모두들 서로 같은 항렬로서 호칭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남들이 자기를 "존주, 존주"하고 부르는 것이 듣기 싫으니 주인으로 부르면 된다고 했다. 그러자 여러 여인들은 그 말에 허리를 굽히고 삼가 받들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얼마간을 계속 동쪽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호천부, 주천부에서 파견한 연락인들이 적천, 양천, 현천, 유천, 성천, 오부의 여인들을 모두 다 불러모았다. 다만 난천부는 서쪽 깊숙한 곳으로 동모를 찾아갔기 때문에 미처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영취궁에는 한 명의 남자도 없었다. 허죽은 수백 명이나 되는 여자들 사이에 끼게 되자 겸연쩍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여인들은 그에 대해서 매우 공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허죽이 질문을 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감히 그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여 그로 하여금 많은 어려운 입장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다.
이날 한참 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한 명의 녹의를 걸친 여인이 나는듯 달려왔다. 바로 양천부에서 앞길을 염탐하는 전초였다. 그녀는 파란 기를 흔들어 앞길에 변고가 발생한 것을 알렸다. 그녀는 양천부의 수령 앞으로 나가서 급히 보고했다.
양천부의 수령은 이십여 세 되는 소저로 이름은 부민의(符敏儀)였다. 그녀는 보고를 듣더니 즉시 낙타에게 내려 재빠른 걸음으로 허죽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주인께 알립니다. 속하의 전초병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본궁의 옛부하인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의 노비들이 노존주께 어려움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당돌하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영취궁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균천부에서 봉우리 위로 오르는 것을 엄히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 요사한 인물들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나 균천부에서 구원을 청하려 봉우리 아래로 내려 보낸 자매들은 그들에게 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동주와 도주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사실을 허죽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동모를 잡지 못하고 불평도인이 자기의 손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오노대마저 중상을 입은 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어려움을 알고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갔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 개월이 지났어도 그들은 여전히 함께 모여 표묘봉을 공격하고 있다지 않는가?
그는 어릴 적부터 소림사에서 자랐고 한 번도 산문 밖으로 나선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 그가 이와 같은 큰일을 당하게 되자 어떻게 대응해야 될지 몰라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이건......이건......
이때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날쌘 두 필의 말이 달려왔다. 앞에 선 자는 양천부의 다른 전초병이었고 뒤의, 말등에는 한 황삼의 여인이 엎드려 있었는데 그녀의 몸은 전체가 피투성이였고 왼팔마저 잘려져나가고 없었다. 부민의는 비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주인, 저 사람은 균천부의 부수령인 정(程)언니입니다. 아마도 목숨을 건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정가라는 여인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여인들은 재빨리 그녀를 말에서 끌어내려 피를 멈추게 하고 치료를 했으나 그녀의 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허죽은 그런 그녀의 상처를 보고 총변 선생 소성하가 자기에게 가르쳐 준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이 생각나 즉시 낙타를 재촉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왼손의 중지를 잇따라 튕겨 그 여자의 혈도를 봉쇄했다. 그러자 피가 흐르다 즉시 멈추었다. 여섯 번째 손가락을 튕기면서 동모가 가르쳐 준 일 초 성환도척(星丸跳擲)을 펼쳤다. 한 줄기의 북명진기가 그녀의 팔에 있는 중부혈(中府穴)로 주입되었다. 그 여인은 아, 하고 크게 부르짖더니 정신을 차린 후 외쳤다.
언니들 빨리 표묘봉으로 가도록 하세요. 우리는......그들을 당해낼 수 없어요.
허죽은 허공을 격하고 지풍을 튕기는 초식은 일부러 솜씨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상대방이 한창 때의 여인이고, 이제 그 자신도 화상이라 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불문 제자라 여인네들을 멀리 피한다는 계율을 지켜 감히 손을 뻗어 그녀의 몸에 대지 못했으므로 그렇게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몇 번 튕기지 않았는데 크게 효험이 있었다. 지금 허죽의 몸에는 동모, 무애자, 그리고 이추수의 내력이 한 몸에 모여 있어 그 위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여러 부의 많은 여인들은 동모의 명을 받들어 허죽을 새 주인으로 섬기긴 했으나 그의 나이가 어리고 또 언행이 약간 멍청한 데가 있는지라 마음속으로는 우러러보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영취궁의 여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남자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는 몸이었고,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몸이 아니면 원수에게 해를 입어 집안이 망하여 가족들이 모두 죽음을 당한 여인들이었다. 거기다가 동모의 괴팍하고 음침한 성격을 닮아 그녀들은 남자를 독사나 맹수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허죽이 펼친 초식은 바로 영취궁의 독문무공이었고 공력의 준수함은 노존주 이상인 것 같았다. 여인들은 놀란 나머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약속이나 한듯 땅바닥에 엎드렸다.
허죽은 그런 그들의 행동에 당황해서 말했다.
이게 무슨 짓들이오? 빨리 일어나시오. 빨리 일어나시오.
그러자 그 누가 전갈해 온 여인에게 알려 주었다. 존주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저 젊은이가 바로 존주의 은인이며 또한 존주의 전인이라고 본궁의 새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 여인의 이름은 정청상(程靑霜)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힘겹게 말에서 내리더니 허죽에게 큰절을 하며 인사를 올렸다.
존주께서 저의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존주께서는 봉우리 위로 올라가 많은 자매들을 구해 주십시오! 모두들 사 개월 동안 지탱하였지만 중과부적이라 실로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땅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허죽은 급히 말했다.
석수, 그대는 빨리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도록 하시오. 여파파, 그대는......그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여파파는 이 새 주인과 십여 일 동안 동행을 하는 사이에 허죽이 중후하고 성실한 사람이지만 세상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하여 그녀는 말했다.
주인님께 알립니다. 지금 이곳에서 표묘봉까지는 이틀을 더가야 합니다. 주인께서는 노비에게 우리 부의 사람들을 이끌고 즉시 달려가 응원하도록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주인 어른께서는 뒤에서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천천히 오도록 하십시오. 주인께서 표묘봉에 도착하실 때면 그 요사한 무리들은 흩어져 있을 것입니다.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파파는 고개를 돌리고 부민의에게 말했다.
부 누이, 주인께서 처음으로 솜씨를 발휘하여 요사한 인물들을 압도하려 함에 있어서 몸에 걸치고 있는 법의가 웅장하게 보이지 않는구나. 그대는 본궁에서 재봉일을 맡고 있으니 주인에게 한 벌의 법의를 빨리 마련해 드리도록 해라.
부민의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법의를 지어 올리겠습니다.
허죽은 그들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중요한 때에 뭐 하려고 옷을 만드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부인네들의 의견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인들은 모두 허죽을 바라보며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허죽은 고개를 숙이고 자기의 옷을 살펴보았다. 사실 그의 몸에 걸치고 있는 승포는 다 떨어지고 더러워져서 걸레 조각 같았다. 사 개월 동안 한 번도 빨지 않았으니 시큼한 냄새가 났다.
허죽은 여파파가 허죽의 옷이 더러움을 들먹이고 또한 속하인 많은 여인들의 옷차림이 화려한 것을 보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자기 자신은 이미 화상이 아닌데도 여전히 승복을 입고 있으니 그야말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기실 여러 여인들은 그를 이미 주인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그의 옷차림이 더럽고 추하다고 해서 그를 비웃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쳐다본 것은 결코 그의 옷차림을 보는 것이 아니었지만 허죽은 그만 창피한 생각이 들어 겸연쩍어 했다.
여파파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주인 노비들이 먼저 앞서 가는 것이 어떨까요?
허죽은 말했다.
우리 함께 가도록 합시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외다. 나의 이 옷은 너무나 더러워서 나중에 내가......내가 빨도록 하겠소. 그러면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오.
그는 낙타를 재촉해서 앞장을 서서 달려갔다. 많은 여인들은 적개심을 품고 있던 터이라 즉시 타고 있던 낙타와 말을 몰아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낙타는 가장 지구력이 강한 동물이었다. 빨리 달리게 되었을 때에는 말보다도 빨랐다. 사람들은 곧장 수십 리를 달려가서야 적당한 장소를 찾아 휴식을 취하며 불을 피우고 밥을 지었다.
여파파는 구름에 가려 있는 서북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르키며 허죽에게 말하였다.
주인, 저곳이 바로 표묘봉입니다. 저 산봉우리는 일년 내내 구름에 가려 있어서 멀리서 볼 때는 있는 듯 마는 듯 하죠. 그렇기 때문에 표묘봉이라 한답니다.
허죽이 말했다.
보기에 아지도 꽤 먼 것 같구려. 우리들은 일각이라도 빨리 도착할수록 좋소.
여인들은 모두 말했다.
예, 주인께서 균천부의 노비들을 생각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 일행은 밥을 먹은 이후 낙타를 타고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길을 재촉하였는지라 도중에 적잖은 낙타들이 쓰러져 죽게 되었다. 그들이 표묘봉 아래 도달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이튿날 새벽 무렵이었다.
부민의는 양손에 오색찬란한 물건을 들고 허죽 앞으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노비의 재간이 졸렬하지만 주인께서 어여삐 여기시고 입어 주십시오.
허죽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그것을 받아서 펼쳐 보니 바로 장포(長袍)였다. 그런데 이 장포는 한 조각 비단을 맞추어서 만든 것으로 그 빛깔에는 붉은 것도 있고 푸른 것도 있었으며, 녹색, 자색, 흑색, 노란색, 등의 비단 조각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야말로 가지각색의 비단 무늬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화사하면서도 멋이 있어 보였다. 이것은 부민의가 길을 오던 도중에 여인들의 바람막이에서 천을 잘라내어 허죽에게 입힐 장포를 지은 것이었다.
허죽은 놀람과 기쁨을 금할 수 없어 말했다.
부 소저는 정말 침신(針神)이라고 일컫기에 부끄럽지 않구려. 낙타가 급히 달리는 도중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옷을 만들 수 있다니 정말 감탄했소.
그는 즉시 장포를 몸에 걸쳤다. 길이와 넓이가 맞았고 소맷자락과 깃에는 잿빛의 담비가죽을 대어 더욱더 값지게 보였다. 물론 이 담비 가죽은 여인들의 가죽옷에서 잘라 낸 것이었다.
허죽의 얼굴은 추악했으나 장포를 입으니 한결 늠름해 보였다. 여인들은 모두 허죽에게 추파를 보냈다.
이때 그들은 이미 산봉우리로 오르는 길목에 도달했다. 정청상은 그녀가 봉우리 아래로 내려왔을 때 적은 이미 단혼애(斷魂崖)까지 공격해 들어갔으며 표묘봉의 열 여덟 곳 천험(天險)가운데 이미 열 한 곳을 잃게 되었으니, 균천부의 여러 여인들은 태반이 살상을 당하여 매우 위급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 봉우리 아래는 조용하여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저 하얀 눈만 쌓여 있는 사이사이에 파란 새싹들이 돋아나 있을 뿐이었다. 만약 미리 알지 못했더라면 이와 같이 평화스럽고 아늑한 곳에 무서운 살기가 숨겨져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여인들은 모두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띠우고 균천부 자매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석수는 칼을 뽑아 손에 들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표묘 구천 가운데 팔천부의 아래 봉우리는 그저 일부만 남아서 지키고 있었을 뿐인데 도적들이 그 도적들이 그 빈틈을 노리고 공격해 왔으니 그야말로 몰염치하기 이를데 없는 일입니다. 주인께서는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들 모두는 산봉우리로 달려올라가 도적들과 결전을 벌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 격앙되어 있었다.
여파파가 말했다.
석씨 누이, 너무 성급히 서둘지 마시게. 적의 세력이 크다네. 균천부에서는 봉우리 위의 열 여덟 곳 천험적인 지리의 잇점을 이용하여 겨우 이 많은 시일을 지탱할 수 있었네. 이제 우리는 봉우리 아래에 있고 적은 높은 곳에서 우리들을 공격하게 되었으니 주객이 전도된 형세가 아닌가......
석수가 그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파파가 말했다.
우리들은 내색을 하지 않고 살그머니 봉우리 위로 올라가도록 하세. 적이 늦게 알아차리면 늦게 알아차릴수록 우리 쪽이 더 유리해 질 것이네.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파파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말하자 그 누구도 달리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구천 구부 가운데 팔부의 사람들이 대오를 지어 기척도 없이 산위로 올라갔다. 산봉우리 위로 오르게 되자 각자 경신법의 강약이 즉시 드러나게 되었다.
허죽은 여파파, 석수, 부민의 등 몇 명의 수령들은 여자의 몸이었지만 발걸음이 무척 가볍고 빠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강한 장수 아래에 약졸이 없다더니 정말 사백의 부하들은 대단하구나."
한 곳 한 곳의 천연적인 요지를 지났는데 곳곳마다 부러진 칼이나 검이 있는가 하면 나무가 잘려지고 바위들이 깨진 흔적이 보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적이 통과할 때마다 한바탕 참혹한 싸움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단혼애, 실족암(失足巖), 백장간(百丈澗)을 지나 접천교(接天橋)에 이르러 바라보니 양쪽 절벽 사이의 쇠밧줄로 된 다리는 이미 토막으로 끊어져 있었다.
두 곳의 절벽은 거의 오장의 간격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건너뛰기란 불가능했다.
여인들은 아연해져서 서로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설마하니 균천부의 자매들이 모두 죽음을 당한 것일까?"
여인들은 접천교가 백장간과 선수문(仙愁門) 두 곳의 험난한 계곡 사이에 있으며 반드시 지나야 할 요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리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쇠사슬로 두 절벽 사이를 이어 놓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절벽의 아래쪽은 뾰족뾰족한 바위들이 어지럽게 솟아 있는 깊은 골짜기였다.
영취궁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공이 고절한 자들이라, 쇠사슬을 밟고 절벽을 지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 정청상 일행이 봉우리 아래로 내려왔을 때 적은 단혼애를 공격하고 있을 때였고, 접천교와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균천부의 사람들은 이미 준비를 하여 이 접천교를 은밀히 지키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적이 공격해 온다면 즉시 쇠사슬 가운데 있는 무쇠 고리를 풀어 놓아 쇠사슬이 두 토막이 나도록 할 참이었다. 이 오 장이나 되는 골짜기를 단번에 뛰어넘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떠한 경신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인들은 쇠사슬이 날카로운 무기에 끊어진 것을 보고 적이 갑자기 공격해 와서, 균천부의 여인들이 미처 고리를 풀고 쇠사슬을 둘로 나누지 못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석수는 유엽도를 쉭, 쉭, 쉭, 하니 바람이 일도록 휘두르며 부르짖었다.
여파파! 어떻게 건너가야 할 것인지 빨리 방법을 강구해 보세요.
여파파는 말했다.
음, 어떻게 건너가지?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맞은편 산 뒤에서 악, 악, 하는 두 마디의 처참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여인들은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균천부의 자매들이 적의 독수에 쓰러지면서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였다. 그들은 모두 날개가 달렸다면 깊은 골짜기를 가로질러 날아가 적과 결사일전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험악한 깊은 골짜기를 가로지를 수는 없었다.38. 그리운 정 가눌 길 없어 정신없이 술에 취하다 (胡p醉,情長計短)
허죽은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그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여인들이 초조해 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들은 나를 주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이 주인이 어쩔 도리가 없다면 도대체 말이나 될까? 불경 속에도 어떤 사람들이 손과 발, 코와 귀, 머리와 눈, 살과 피, 골수와 몸뚱이를 구하고 있었는데, 보살 마하살(摩하薩)이 그를 보고 모두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시주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보살의 육도(六度) 가운데 첫째가 바로 시주가 아니겠는가? 내 무엇을 또 두려워하랴."
이어 곧 그는 부민의가 만들어 준 그 장포를 벗으며 말했다.
석수, 병기를 잠시 빌려 주시오.
석수가 대답했다.
예.
그녀는 유엽도를 거꾸로 돌려서는 허리를 굽히고 칼자루를 내밀었다.
허죽은 칼을 받아들고 북명진기를 칼날에 돋우었다. 그리고 손목을 살짝 떨치면서 삭,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절벽의 동굴 안으로 연결되어 있는 반 토막의 쇠사슬을 잘라냈다. 유엽도는 얇고 가늘었는데 그저 예리 할 뿐이지 보도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진기를 모아 쇠사슬을 대나무 자르듯 자른 것이다. 이 쇠사슬의 길이는 이 장하고도 두너서 자가 되었다. 허죽은 그 쇠사슬을 잡고는 칼을 석수에게 돌려준 다음, 진기를 돋우어 번쩍 몸을 날려 맞은편 언덕 쪽으로 건너뛰었다.
여인들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주인, 모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와 같은 부르짖음과 동시에 이미 허죽은 골짜기의 한복판에 이르러 있었다. 그의 몸은 두둥실 앞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진기가 흩어지면서 몸뚱이가 아래로 떨어지려고 했다. 그는 즉시 쇠사슬을 뻗쳐서는 맞은편 언덕 아래로 드리우고는 쇠사슬을 휘감았다. 이와 같이 하여 힘을 빌리자 아래로 약간 떨어지던 그의 몸은 재차 솟아오르며 가볍게 맞은편 언덕 위로 뛰어내릴 수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말했다.
모두들 잠시 쉬도록 하시오. 내가 가서 살펴보고 오리다.
여자들은 놀람과 함께 감탄해마지 않았다. 또한 감격해서 일제히 부르짖었다.
주인, 조심하십시오!
허죽은 처참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 산 뒷쪽으로 달려갔다. 바위로 된 좁은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두 여인의 시체가 가로놓여 있었다. 머리와 몸뚱이가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선혈이 여전히 목구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죽은 합장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죄과로다, 죄과로다.
그는 두 구의 시체를 향하여 급히 왕생주(往生呪)를 한 번 읊었다. 그리고는 소로를 따라 봉우리 윗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갈수록 산세가 험해져갔다. 몸 주위에는 하얀 안개가 더욱더 짙어졌다. 한 시진도 채 안 되어 그는 표묘봉의 정상에 도달하게 되었다.
운무 속에 보이는 것은 소나무뿐,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하니 균천부의 모든 여인들이 모조리 살해된 것은 아니겠지? 이야말로 큰 죄악이로구나."
그는 바로 몇 알의 솔방울을 따서 품속에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솔방울도 힘껏 던지면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 반드시 약하게 던져서 그저 적이 놀라 떠나도록 만들어야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이때 땅바닥에 청석판으로 깔아 놓은 큰길이 나타났다. 그 청석판은 길이가 약 여덟 자이고 폭이 약 석 자였는데 무척 깨끗했다. 이와 같이 큰길에 그런 큰 청석판을 깐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엄청난 공사여서 동모 수하의 많은 여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청석이 깔린 큰길은 길이가 약 이 마장 정도였다. 청석판으로 된 길이 끝나는 곳에 한 채의 커다란 돌로 된 보루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보루의 문 양쪽에는 각기 돌로 조각된 독수리가 하나씩 세워져 있었는데, 그 높이는 삼 장 남짓했고 뾰족한 주둥이와 커다란 발톱을 드러낸 그야말로 웅장한 모습이었다.
보루의 문은 반쯤 닫혀져 있었는데 사방에는 여전히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허죽은 몸을 날려 문안으로 들어갔다. 두 곳의 정원을 가로지를 때에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할망구의 보물을 숨겨둔 곳이 어디냐? 도대체 어디냔 말이다. 너희들은 말하겠느냐 말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한 여인이 욕을 해댔다.
나쁜 놈들 같으니.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너희들이 아직도 살아날 수 있을 성싶으냐? 너야말로 헛된 망상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자 다른 한 남자가 말했다.
운(雲) 도주, 좋은 말로 해야지 거칠게 손을 쓸 것까지는 없잖소? 그렇게 부녀자를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 무례한 게 아니겠소?
허죽은 그 말리는 사람의 음성이 바로 대리 단 공자의 음성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노대가 뭇 사람들에게 동모를 해치자고 할 때도 역시 단 공자만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허죽은 생각했다.
"이 공자는 무공은 모르는 것 같지만 영웅적이고 의협에 찬 마음씨는 무학의 고수들보다 훨씬 뛰어나니 실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구나."
이때 그 운 도주라고 불리운 사내가 말했다.
흥, 흥, 너희들 이 못 난 계집들아. 죽고 싶어 환장해도 그렇게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 어찌 그토록 수월한 일이 있겠느냐? 우리 벽석도(碧石島)에는 열 일곱 가지의 기이한 형벌이 있다. 나중에 한 가지 한 가지씩 너희들 계집의 몸에 시험삼아 해보여 주겠다. 소문에 들으니 흑석동(黑石洞)과 복사도(伏사島)의 기이하고 야릇한 형벌은 우리 벽석도보다 더 무섭다고들 하던데, 역시 나중에 뭇 형제들로 하여금 시야를 한 번 넓히도록 해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좋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이었다.
모두들 재량껏 겨루어 봅시다. 그리하여 어느 동, 어느 도의 형제들이 가장 먼저 효과를 거두는지 두고 보기로 합시다.
그 외치는 소리로 미루어 보면 대청 안에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대청에서 울리는 소리까지 합해 몹시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웠다.
허죽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대청의 벽과 문은 모두 커다란 바위를 잘라 만들어 놓은 것이어서 빈틈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해 본 이후 손을 뻗쳐 땅바닥의 흙을 손에 비벼서는 얼굴에다 문질렀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 안의 탁자와 의자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태반의 사람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서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몇 명의 사람들은 오락가락하면서 그저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청 한복판의 땅바닥에는 이십여 명이나 되는 황삼을 걸친 여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혈도를 짚힌 듯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들 가운데 태반은 모두 몸에 피칠을 하고 있었고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물론 균천부의 여인들이었다.
대청 안은 무척 시끌벅적했다. 허죽이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 몇 사람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여자가 아닌 것을 보고는 영취궁의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어느 동주나 도주가 데리고 온 문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기는 듯, 별로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다.
허죽은 문턱에 앉아서 눈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오노대는 왼쪽에 있는 한 채의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안색이 매우 초조해 보였으나 다부지고 포악한 기상은 여전히 그의 눈초리에 서려 있었다.
또 한 명의 체구가 우람한 사내가 손에 가죽 채찍을 들고 균천부의 여인들의 옆에 서서 연신 호통을 지르거나 욕을 해대며 그녀들에게 동모가 어디에 보물을 숨겨 두었는지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들은 죽어도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오노대가 말했다.
너희 계집년은 정말 독종들이로구나. 내 너희들에게 말하겠는데 동모는 이미 그녀의 사매인 이추수에게 살해되었다. 내가 친히 목격하였는데 어찌 거짓일 리가 있겠느냐? 너희들은 한시 바삐 항복을 해라. 그렇게 하면 우리들은 결코 너희들을 괴롭히지 않겠다.
그러자 중년의 황삼 여인이 날카로운 어조로 부르짖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존주의 무공은 절세적이고 이미 금강불괴의 몸을 연성하셨는데 그 누가 그 어르신을 해칠 수 있단 말이냐? 너희들은 생사부를 깨뜨리고 해소시킬 수 있는 요결을 빼앗고자 헛된 망상을 하고 있으나 일찌감치 그런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존주께서는 평안무사 하실 뿐만 아니라 곧 봉우리로 올라와 온갖 죄악을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너희 반역도들을 처치해 줄 것이다. 설사 그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너희들 생사부가 해소되지 않는 한 일 년 안으로 모두 애절한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온갖 고통을 겪은 뒤 죽게 될 것이다.
오노대는 냉랭히 말했다.
좋다. 믿을 수 없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한 가지 물건을 보여주지.
그는 등뒤에서 보따리 하나를 꺼내더니 펼쳤다. 놀랍게도 그 보따리에는 다리 한쪽이 들어 있었다. 허죽과 뭇 여인들은 그 다리에 걸려 있는 바지 가랑이와 버선이 바로 동모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불현듯 그녀들은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오노대는 다시 말했다.
이추수는 동모를 여덟 조각으로 내서는 산골짜기에 던져 버렸다. 나는 그저 그 중의 한 조각을 집어온 것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해라.
균천부의 여인들은 동모의 왼쪽 다리임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오노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그들은 그만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반명에 동주들과 도주들은 큰 환호성을 질렀다.
도적 같은 할망구가 죽었으니 정말 잘 됐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경하하고, 함께 즐거움을 누릴 경사로군요!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오노대, 당신은 정말 참을성도 많구려. 그와 같은 좋은 소식을 여지껏 숨기다니요. 마땅히 벌주를 석 잔 드려야 하겠소.
그러자 또 한 사람이 말했다.
도적 같은 할망구가 죽었다면 우리 몸에 들어 있는 생사부를 이 세상에서 깨뜨리고 해소시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별아간 사람들 틈에서 우, 하는 소리가 몇 번 울려퍼졌다. 마치 이리가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고, 개가 짖는 소리 같기도 한 무척 가증스러운 소리였다.
뭇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일제히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삽시간에 대청 안에는 상처를 입은 맹수를 토해내는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가득 찼다. 그러고보니 한 뚱보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할퀴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의 옷을 찢고 힘주어 자기의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마치 자기의 심장과 허파라도 끄집어낼 것 같은 몸짓이었다.
삽시간에 그의 손은 피로 물들었다. 얼굴과 가슴팍 역시 선혈이 낭자했으며 울부짖는 소리는 더욱더 참담해지고 날카로워졌다. 뭇 사람들은 마치 유령을 보듯 끊임없이 뒤로 물러섰다.
몇 사람이 나직이 중얼거렀다.
생사부가 목숨을 재촉하는구나.
허죽은 생사부에 적중된 적이 있으나 곧 해약을 먹었고 동모로부터 생사부를 해소시키는 방법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참혹한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눈으로 직접 그 뚱보가 그토록 끔찍한 꼴을 보이자 뭇 사람들이 어째서 그토록 동모를 두려워했던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뭇 사람들은 생사부의 독성이 전염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그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아가 그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삽시간에 그 뚱보는 자신의 옷자락을 마구 갈기갈기 찢었다. 온몸이 손으로 긁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이때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다급해져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형님, 조용히 하십시요. 당황해 하지 마십시오.
그는 달려나오며 다시 부르짖었다.
형님의 혈도를 짚은 이후, 우리가 방법을 강구해서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뚱보와 얼굴 모습이 비슷한 데가 있었으나, 나이는 비교적 젊은 편이었고 몸도 그처럼 뚱뚱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 핏줄의 형제인 것 같았다.
뚱보는 눈빛이 멍해져 있었으며 그 소리를 못 들은 듯했다. 동생되는 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기는 했으나 그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뚱보와 석 자쯤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일지를 들어서 뚱보의 면정혈을 질풍과 같이 짚으려 했다. 그 뚱보는 몸을 슬쩍 비키더니 그의 손가락의 일지를 피하고 오히려 팔을 뻗쳐서는 그를 꼭 끌어나았다. 그리고는 입을 벌리고 동생의 얼굴을 물려고 했다. 동생은 부르짖었다.
형님, 손을 놓으세요. 나예요.
그 뚱보는 그저 마구잡이로 물어뜯는데 그 모양은 정말 미친 개와 같았다.
동생은 힘써 바둥거렸으나 도저히 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얼굴을 형에게 물려 한 조각의 살이 떨어져 나갔다. 얼굴이 선혈로 물들었는데, 그는 너무나 아픈 나머지 큰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단예는 왕어언에게 말했다.
왕 소저, 어떻게 방법을 강구해서 그들을 구할 수 없겠소?
왕어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사람은 미쳤어요. 힘이 엄청나지만 그렇다고 어떤 무공을 쓰는 것이 아니니 저로서는 방법이 없네요.
단예는 고개를 돌리고 모용복에게 말했다.
모용 형, 모용 형 집안의 상대의 수법을 상대의 몸에 펼친다는 재주를 사용할 수 없겠습니까?
모용복은 대답하지 않고 다만 얼굴에 불쾌한 빛을 띠었다. 포부동이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그대는 우리집 공자에게 미친 개를 흉내내어 그를 한 번 물기라도 하라는 것이오?
단예는 겸연쩍어하면서 말했다.
내가 말을 잘못했구려. 포 형, 탓하지 마시오. 그리고 모용 형도 양해하시오.
그리고 그는 뚱보의 곁으로 가서 말했다.
형씨, 이 사람은 당신의 동생이니 빨리 그를 놔 주시오.
그 뚱보는 두 팔에 더욱어 힘을 주어 동생을 얼싸안고 입으로는 여전히 야수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운 도주는 황삼 여인을 하나 잡아 일으키더니 호통을 내질렀다.
이곳 대청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태반은 도적 같은 할망구의 생사부에 적중된 몸이다. 지금 함께 모여 있으니 서로 감응을 받게 되어 얼마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발작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너의 전신을 마구 물어뜯게 될 것인데 그래도 너는 두렵지 않다는 것이냐?
그 여자는 뚱보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얼굴에 매우 두려운 빛을 띠었다.
운 도주는 말했다.
어쨌든 동모는 이미 죽은 몸이다. 네가 그녀가 어디에 보물을 숨겼는지 이야기하여 뭇 사람들을 치료받게 한다면 모두들 고맙게 여길 것이고 그 누구도 너희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는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실로 그 누구도 몰라요. 존주께서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우리들......우리들 노비가 보게 하지 않는답니다.
모용복이 뭇 사람들을 따라 산 위로 올라온 이유는 그들에게 한 팔의 힘이 되어 은헤를 베푼 이후에 이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제 동모는 죽었지만, 그녀가 여러 사람의 몸에 심어놓은 생사부는 깨뜨리거나 해소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 생사부는 일종의 극독으로서 무공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독이 퍼져 목숨을 잃게 된다면 자기가 이번에 도모한 일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 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등백천과 공야건 등과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같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운 도주는 황삼의 여인이 말하는 것이 십중팔구 사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으나 자기의 몸에 적중된 생사부의 혈도가 은연 중 시큰거려 오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곧 발작할 모양이었다.
그는 다급해져 화가 나서는 호통을 내질렀다.
좋다.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내 너희 계집년들을 마저 죽인 이후에 다시 알아보겠다.
그는 기다란 채찍을 들어서는 그 여자를 머리고 뒤통수고 할것없이 마구잡이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채찍질에 실린 힘은 엄청난 것이다. 그 여자는 그야말로 머리가 산산조각날 판이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찍, 하는 소리가 나면서 하나의 암기가 문쪽에서 날아와 그 여자의 허리께에 적중했다. 그 여자는 그 충격에 일 장 밖으로 미끄러졌고 척, 하는 소리와 함께 기다란 채찍은 땅바닥의 석판을 내려쳤고 돌가루가 사방에 흩날리게 되었다. 땅바닥에는 황갈색의 둥근 것이 데구르르 구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한 알의 솔방울이 아닌가.
뭇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 알의 조그만 솔방울을 이용하여 사람을 일 장 밖으로 밀어 낸다는 것은 엄청난 내력이다. 도대체 누구일까?"
오노대는 벼락같이 떠오르는 일이 있어서 소리내어 부르짖었다.
동모, 동모다!
그 날 그는 암석 뒤에 숨어서 이추수가 동모의 왼쪽 다리를 자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 잘라진 다리를 기름칠한 베에 싸서 몸에 지니게 되었다. 그는 동모가 십중팔구 이추수에게 붙잡혀 살해되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그녀의 죽은 모습을 목격하지 못한 터이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리고 그 날 허죽이 솔방울로 자기 배에 구멍을 냈는데 그 수법은 바로 동모가 전수한 것이었다.
오노대는 크게 고통을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솔방울이 다시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되자, 우선 떠올리게 된 것은 바로 동모가 도살당하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만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뭇 사람들도 오노대가 큰소리로 부르짖는 동모라는 소리를 듣자 일제히 몸을 바깥 쪽으로 돌렸다. 대청 안에서는 삭삭, 휙휙, 쨍그랑, 창창, 하는 무기를 뽑는 소리가 잇따라 울려퍼졌다. 각자 무기를 뽑아 들고서는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모용복은 오히려 대문 쪽을 향해 두 걸음을 옮겼다. 동모가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보고자 했다. 기실 그날 그는 두전성이의 수법으로 허죽과 동모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세를 해소시켰고 동모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었으나 그 나이가 십팔구 세 정도 되어 보이고 얼굴이 도화꽃처럼 고운 소저가 바로 사람들이 생각만 해도 간이 부들부들 떨린다는 천산동모의 얼굴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때 단예는 왕어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혹시나 그녀가 남에게 상해를 입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왕어언이 부르짖었다.
오라버니 조심하세요.
뭇 사람들은 일제히 대문 쪽을 주시했다. 그러나 한참 동안 기다려도 대문 쪽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포부동은 부르짖었다.
동모, 우리 한 떼의 불청객이 그대를 화나게 만들었다면 안으로 들어와 한바탕 싸우도록 합시다.
잠시 기다렸으나 문밖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풍파악도 질세라 역시 부르짖었다.
좋소, 이 풍모가 제일 먼저 동모의 절초를 가르침받도록 하겠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 싸워보겠다는 것이오. 이것은 이 풍모가 죽어도 고칠 수 없는 못난 버릇이외다.
그는 칼을 휘둘러 얼굴을 보호한 상태에서 문 바깥 쪽으로 달려나갔다.
등백천과 공야건, 포부동 세 사람은 그와는 그야말로 친형제와 다름없는 사이인지라 그가 동모와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일제히 뒤따라 나섰다.
뭇 동주와 도주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들의 용감한 태도에 탄복하고 있었으나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너희들은 동모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헛되이 호걸 노릇을 하려 드는구나. 나중에 쓴맛을 보고 후회하여도 이미 때는 늦을 것이다."
이때 풍파악과 포부동 두 사람은 대청 밖에서 하나는 뾰족한 음성으로 하나는 나직한 음성으로 동모에게 도전하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러나 시종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전 황삼 여인을 구해낸 솔방울은 바로 허죽이 던진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놀람과 의혹을 가지게 한 것에 대하여 정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나의 잘못이오. 동모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여러분들은 놀라거나 당황해 할 것 없소.
그는 그 뚱보가 여전히 그의 동생을 마구 물어 뜯으려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다시 물어뜯었다간 두 사람 다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는 다가가서 손을 뻗쳐 그 뚱보의 등을 한 번 쳤다. 이 일 장은 천산육양장이라는 무공을 펼친 것으로서 한 줄기의 양강한 내력이 그 뚱보의 몸안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그러자 그 뚱보의 체내에 심어졌던 생사부의 한독이 제압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뚱보의 체내에 심어졌던 생사부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그 생사부를 제거할 수 없었다. 이때 그 뚱보는 두 팔을 맥없이 내려뜨리더니 땅바닥에 주저앉아서는 씩씩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는데 그 표정은 허탈해 보였다.
그는 입을 열었다.
아우야, 어떻게 된 것이냐? 누가 너를 이와 같은 꼴로 상처를 입혔느냐?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 이 형이 너의 원수를 갚아 주마.
그의 아우는 형이 정신을 회복한 것을 보고 크게 기뻐서 얼굴에 입은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형님, 괜찮아요. 형님, 되었어요.
허죽은 손을 뻗쳐 모든 황삼 여인들의 어깻죽지에 이 장씩을 가볍게 후려치고 말했다.
여러분은 균천부의 사람이지? 그대들의 양천과 주천, 그리고 호천 등 각부의 자매들이 이미 접천교에 도달했소. 다만 쇠사슬이 끊어져 있어서 건너오지 못하고 있소. 그대들, 이곳에는 쇠사슬니나 밧줄이 없소? 우리들은 그녀들이 건너올 수 있도록 해야 하오.
그의 손바닥에는 북명진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균천부의 여인들은 봉쇄되었던 혈도가 풀리고 말았다.
뭇 여인들은 놀람과 기쁨에 다투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귀하께서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돌하지만 존성대명은 어찌되시는지요?
몇 명의 젊은 여자들은 성질이 급한 듯 그냥 대문 쪽으로 달려가며 부르짖었다.
빨리 팔부의 자매들이 건너오도록 도와주자. 그리고 다시 반역도들과 결전을 벌이자!
그들은 고개를 돌리고 손을 흔들어 허죽에게 사의를 표했다.
허죽은 두 손을 맞잡고 답례하며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 불초에게 무슨 덕과 재주가 있다고 여러분들에게 인사를 받는단 말이오? 여러분들을 구한 사람은 따로 있소이다. 다만 나는 그 사람에게 손을 빌려 준 것뿐이외다.
그 뜻은 그의 무공과 내력이 동모 등 세 분의 어르신들에게 전수받은 것이니 동모 등이 손을 써서 뭇 여인들을 구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었다. 군호들은 그가 아무렇게나 치는 일 장에 황삼 여인들의 혈도가 즉시 풀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이와 같은 수법을 그들은 일찍이 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들은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허죽의 모습은 평범할 뿐만 아니라 나이가 젊은 것으로 보아 결코 그와 같은 공력이 있으리라고는 보여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가 남에게 빌려 준 것뿐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자 모두 동모가 영취궁에 도달했다고 믿게 되었다.
오노대는 허죽과 설봉에서 며칠을 함께 보낸 처지였다. 허죽의 머리카락이 자랐고 얼굴은 흙을 문질러 더럽혀져 있었으나 입을 열고 말하는 소리를 듣자 오노대는 대뜸 기억이 되살아나 곧 허죽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훌쩍 몸을 날려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는 허죽의 오른쪽 완맥을 움켜잡고는 호통을 내질렀다.
소화상, 동......동모가 이미 이곳에 도달했는가?
허죽은 말했다.
오 선생, 그대 뱃가죽의 상처는 다 나았나요? 나는......나는......나는 이제 불문의 제자라고 할 수 없소. 아, 말을 하면 정말 부끄럽소......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그만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얼굴에 잔뜩 흙칠을 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오노대는 손을 쓰자마자 그의 완맥을 움켜잡았으니 그가 반항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즉시 더욱 내력을 돋우어서 그가 아파서 용서를 빌도록 하려고 했다. 그는 동모가 이 소화상에게는 무척 잘 대해 주는지라, 자기가 단번에 손을 써서 허죽을 인질로 사로잡고 있으면 동모가 자기를 해치려고 하더라도 꺼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잇따라 내력을 돋우었으나 허죽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쏟아낸 내력을 그야말로 흙으로 빚은 만두가 물 속으로 떨어진 듯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오노대는 속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감히 더 내력을 쏟아내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이대로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
군호들은 오노대가 움켜잡은 부위를 보고 허죽은 이미 오노대의 손아귀에 잡힌 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허죽의 무공이 오노대보다 고강하다 하더라도 이제는 항거할 수 없으며 오로지 오노대가 처리하는 대로 몸을 내맡기는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저 녀석이 정말 진짜 고수라면 요혈을 결코 그토록 쉽게 남에게 제압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 사람들은 다투어 호통을 치며 물었다.
이 녀석아, 너는 누구냐? 어떻게 왔지?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너의 윗어른은 어떻게 되느냐?
누가 너를 보냈느냐? 동모냐? 그녀는 도대체 살았느냐, 죽었느냐?
허죽은 매우 겸손하고도 공경하는 태도로 일일이 대답했다.
불초의 도호......는 허죽자(虛竹子)라고 합니다. 동모는 확실히 세상을 떠났으며 그 어르신의 유체는 이미 접천교까지 운구되었습니다. 우리 사문의 연원을 말하자면, 아, 말씀드리기도 부끄럽습니다. 진정......진정......불초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기가 거북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믿을 수 없다면 나중에 모두들 함께 그 어르신의 모습을 뵈옵도록 하십시오. 불초가 이곳까지 온 것은 동모를 위해 후사를 처리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이 그 어르신의 영전 앞에서 절을 하여 모든 원한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군호들은 이 녀석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느꼈고 약간 머리가 돈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허죽자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점차 가셔지면서 오만한 태도가 즉시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들은 다투어 호통을 내질렀다.
네 녀석은 누구길래 감히 우리에게 죽은 노파의 영전에 절을 하라는 것이냐?
빌어먹을, 도적 같은 할망구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죽은 것이냐?
혹시 그녀의 사매 이추수의 손 아래 죽은 것이 아니냐? 이 다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냐?
허죽은 말했다.
여러분들은 설사 정말로 동모와 깊은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이미 세상을 등진 지금 더 이상 원한을 품을 필요가 없소이다. 그리고 말끝마다 도적같은 할망구니 할멈이니 하는데 너무나 듣기에 거북합니다. 오 선생의 말씀이 옳소이다. 동모는 확실히 그녀의 사매인 이추수의 손 아래 죽임을 당했으며 이 다리로 말할 것 같으면 확실히 그 어르신의 유체이외다. 아, 인생이란 본래 꿈과 같고 물거품과도 같은 것이며 이슬 같기도 하고 번갯불 같기도 하지 않겠소? 동모 어르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공이 심오하지만 끝내 공력이 흐트러지게 되어 숨을 거두었고 이제는 한줌의 황토로 화하게 된 처지이외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아무쪼록 동모를 서방 극락 세계인 연지정토(蓮池정土)로 왕생하시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군호들은 그가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듣고서 동모가 죽은 것은 이미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모두들 크게 마음을 놓았다.
곧이어 누군가가 물었다.
동모가 죽을 때에 그대는 그녀의 곁에 있었는가?
허죽은 대답했다.
그렇죠. 최근 이 몇 달 동안 저는 줄곧 그 어르신을 돌봐 왔답니다.
군호들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생사부를 깨뜨리고 해소시키는 요결을 어쩌면 바로 이 녀석에게 달려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이때 푸른 그림자가 번쩍였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다가들었다. 곧이어 오노대는 뒷덜미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한 가지의 예리한 무기가 그의 목에 겨누어진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곧이어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오노대, 그를 놓아 주시오. 놓지 않는다면 이 일 검으로 당신의 머리를 잘라 버리겠소.
오노대는 허죽의 손목을 놓고 앞으로 몇 걸음 달려나간 후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주애쌍괴(珠崖雙怪), 이 오가는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다.
검을 사용하여 그를 협박한 사람은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사내인데 흉칙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노대, 어떠한 문제를 꺼내든간에 주애쌍괴는 모조리 받기로 하겠소이다.
곧이어 대괴가 허죽의 완맥을 움켜잡았고 이 괴가 허죽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네들이 뒤져볼 테면 얼마든지 뒤져 보시오. 어쨋든간에 내 몸에는 남에게 보일 수 없는 물건은 없을 터이니까."
이괴는 그의 품속의 물건을 한 가지 한 가지 더듬어 꺼냈다. 첫번째로 꺼낸 물건은 무애자가 그에게 준 그림이었다. 그는 즉시 두루마리를 펼쳤다.
대청의 수백 쌍이나 되는 시선이 일제히 그 그림에 집중되었다. 그 그림은 얼음 창고에서 물에 적셔진 적도 있었었으나 그림 속의 미녀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넘쳐 흘렀고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걸어나올 것 같았다. 그야말로 단청의 솜씨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었다.
뭇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돌려 왕어언을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은 어, 하고 의아함을 나타냈고 어떤 사람은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퉤, 하고 침을 뱉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물론 어, 한 사람은 뜻밖의 일을 당했다는 느낌을 나타낸 것이었고, 아, 한 사람은 확연히 깨달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퉤, 하고 침을 뱉은 사람은 무척 분노했다는 뜻이고, 코웃음을 친 사람은 경멸의 뜻을 갖고 그런 것이었다.
군호들은 본래 그 두루마리에 그려진 것이 지도이거나 산수화일 거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림에 의거해서 생사부를 깨뜨리고 해소시킬 수 있는 영약이나 비결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어언의 그림이 아닌가? 어, 아, 흥, 퉤, 하게 된 것은 하나같이 실망을 하고 말았다는 증거였다. 다만 단예와 모용복, 그리고 왕어언은 동시에 아, 하는 소리를 내지르게 되었는데 그들이 내지른 이 "아"의 뜻은 세 사람 다 제각기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왕어언은 허죽의 몸에 자기의 초상이 숨겨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람과 의아한 나머지 두 뺨을 붉히며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설마 저 사람은 그날 진롱의 바둑판 곁에서 나를 본 후 단 공자처럼 나를......나를 마음속에 두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나의 모습을 그려서 몸에 지니고 있었을까?"
단예의 생각은 달랐다.
"왕 소저는 그야말로 선녀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절세적인 자색과 용모를 지녔으니 이 젊은 스님이 그녀에게 넋을 잃듯 사모하게 된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아, 애석하게도 나의 그림 그리는 재주가 이 젊은 스님의 만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니......그렇지 않았으면 나 역시 왕 소저의 초상을 그려서는 이후 그녀와 헤어지더라도 조석으로 그림을 대할 수 있었을텐데. 그러면 상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모용복은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젊은 화상 역시 그야말로 못난 두꺼비가 하늘의 거위 고기를 잡수어 보겠다는 욕심을 품고 있구나."
이때 이괴는 그 그림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다시 허죽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다시 꺼낸 것은 허죽이 소림사에서 삭발을 했다는 내용의 도첩(道牒)이었고 몇 냥의 은자와 몇 조각의 건조 식량, 그리고 한 켤레의 양말이었다. 아무리 봐도 생사부와 관계있는 것은 없었다.
주애쌍괴가 허죽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을 때 군호들은 호시탐탐 옆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저 어떤 특이한 물건을 보게 된다면 즉시 달려들어 빼앗을 참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
주애대괴는 욕을 했다.
이 못난 도적아. 도적 같은 할망구가 죽을 때 너에게 뭐라고 했느냐?
허죽은 대답했다.
그대는 동모께서 임종시에 한 말을 묻는 것이오? 음, 그 어르신께서는 그녀가 아니다, 그녀가 아니다, 호호호, 하고 세 번 크게 웃은 후 숨을 거두셨소.
군호들은 그만 멍해졌다. 생각이 치밀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다"라는 한 마디와 "크게 세 번 웃었다"는 말에 어떤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가 하면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마구 욕을 해댔다.
주애대괴는 호통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뭐가 그녀가 아니란 말이냐? 호호호는 또 뭐냐? 도대체 그 도적 같은 할망구는 또 무슨 말을 했지?
허죽은 대답했다.
선배 선생, 그대가 동모 어르신을 들먹이게 될 때는 조금이라도 경의를 표 해 주는 게 좋을 것이오. 함부로 욕을 하지 마시오.
주애대괴는 대노해서 왼손을 들고 그의 정수리를 내려치려고 하면서 욕을 했다.
이 못난 도적, 나는 그 도적 같은 늙은 할망구를 욕하겠다. 네가 어쩔테냐? 별안간 싸늘한 광채가 번쩍 하더니 한 자루의 장검의 뻗쳐와 허죽의 머리 위에 가로로 놓여지게 되었다. 칼날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주애대괴가 만약 일 장을 내려치게 된다면 허죽의 머리에 자기의 손이 닿기 전에 먼저 검에 의해 자기의 손이 절단되고 말 형편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급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너무나 급히 거두어들이는 바람에 목을 뒤로 제쳐야 했고 세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는데 물러서게 되었을 때 허죽은 잡아가려고 왈칵 잡아 당겼으나 허죽을 잡아당길 수가 없었다. 그 바람에 그는 허죽의 손목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왼손 손바닥이 은근히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한 줄기의 지극히 가느다란 칼의 상처 자국이 손바닥에 가로로 나 있었고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만 놀람과 분노를 느끼는 한편 속으로 생각했다.
"손을 반 푼이라도 늦게 거두어들였더라면 이 손바닥은 그야말로 병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노기를 띤 눈으로 검을 뻗쳐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몸에 청삼을 걸치고 있었고 오십여 세나 되어 보이는데 기다란 수염을 나부끼고 있었다. 얼굴 모습은 꽤 청수한 편이었다. 바로 검신(劍神) 탁불범이 아닌가.
방금 그 일검을 뻗쳐내는 신속함과 정확하게 겨눈 점을 미루어 볼 때 탁불범의 검술 조예는 실로 절정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었다. 주애대괴는 성질이 열화와 같았으나 감히 함부로 이와 같이 무서운 고수를 적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좋은 말로 물었다.
귀하가 손을 써서 나의 손에 상처를 입힌 것은 무슨 뜻이오?
탁불범은 빙그레 웃었다.
모두들 이 사람의 입으로 생사부를 깨뜨리고 해소시키는 방법을 알아내어야 하오. 노형이 갑자기 성질을 부려 이사람을 죽여 버리게 되면 뭇 형제들의 몸에 심어진 생사부가 명을 재촉해 목숨을 잃고 만다면 노형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주애대괴는 그만 말문이 막혀 말을 더듬었다.
그건......그건.......
탁불범은 칼을 칼집에 꽂고는 살짝 몸을 기울여서 이괴의 어깻죽지를 가볍게 내질렀다. 이괴는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뒤뚱거리며 뒤로 네 걸음이나 물러섰다. 가슴팍에서 기혈이 끓어올라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자세를 가다듬고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상대방에게 욕을 하지 못했다.
탁불범은 허죽에게 말했다.
소형제, 동모는 죽을 당시 그녀가 아니다라는 말과 세 번 크게 웃은 것 이외에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소?
허죽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그는 동모가 죽으면서 한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네가 그 그림을 가져와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면 꿈속의 소저 몽고를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그런데 뜻밖에도 동모는 그림을 보더니 그림 속의 인물이 이추수가 아닌 것을 발견하고는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나머지 그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던 것이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동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 꿈속의 소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아마도 나는 다시 그녀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침울해져서 좌절감에 빠지고 말았다.
탁불범은 그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그의 마음속에 어떤 중대한 비밀이라도 숨기고 있는 줄로 생각했다.
소형제, 동모가 도대체 그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나에게 말해 주게나. 이 탁가는 결코 그대를 괴롭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대가 커다란 이득을 보도록 해 주겠네.
허죽은 귀뿌리까지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일은 절대로......절대로 말씀드릴 수 없소이다.
탁불범은 말했다.
어째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인가?
허죽은 말했다.
그 일은 말하자면......말하자면......아, 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대가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나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탁불범은 다그치듯 물었다.
정말 말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허죽은 말했다.
말하지 않겠소이다.
탁불범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허죽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별안간 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장검을 뽑아들었다.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며 사삭삭, 하는 소리가 몇 번 울려퍼졌다.
장검은 하나의 탁자에 몇 번 선을 그었다. 곧 이어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는 아홉 조각으로 나뉘어져서 땅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이 눈깜짝할 사이에 탁불범은 가로로 이 검, 세로로 이 검, 즉 잇따라 사 검을 뻗쳐내어 탁자 위에 우물 정(井)자를 그린 것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아홉 조각의 목판은 하나같이 네모꼴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크기와 적기는 고사하고 폭의 넓음 좁음도 전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똑같았다. 그야말로 자로 잰 뒤에 천천히 쪼개 놓은 것 같았다. 이렇게 되자 대청 안에는 대뜸 우뢰와 같은 갈채 소리가 진동하게 되었다.
왕어언은 나직이 말했다.
그 한 수의 주공검(周公劍)은 복건성 건양(建陽)의 일자혜검문(一字慧劍門)이라는 문파의 절기예요. 저분 탁 노선생께서는 아마도 일자혜검문의 고수이며 명숙인 것 같군요.
탁불범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저 소저는 정말 뛰어난 안식을 가지고 있구려. 이 늙은이의 문파와 검초의 이름을 알아내다니 정말 훌륭한 일이오. 훌륭한 일이오.
뭇 사람들은 똑같이 생각했다.
"복건성에 일자혜검문이 있다는 소리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 저 늙은이의 검술이 저토록 무서운 것을 보면 그 문파는 마땅히 강호에 위세를 떨쳐야 할 텐데 어째서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때 탁불범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우리의 문파 가운데는 노부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오. 일자혜검문의 육십 이 명은 삼십삼 년 전 천산동모에게 모두 살해당하고 말았소.
사람들은 속으로 흠칫했다.
"이 사람이 영취궁으로 달려오게 된 것은 원래 사문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였구나."
이때 탁불범은 장검을 한 번 떨치더니 허죽을 향해 말했다.
소형제, 나의 이 몇 수 검법을 그대에게 전수해 주면 어떨까?
그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부러워하는 빛을 드러냈다. 그러나 또한 적지않은 사람들은 대뜸 적의를 드러냈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이 만약 고인의 일 초 일 식이라도 전수받게 된다면 한평생 다 쓸래야 쓸 수 없는 은덕을 받은 것이고 천하에 명성을 떨치거나 출세하게 된다. 그러나 악랄한 제자가 절초를 전수받은 뒤 오히려 은사를 해치는 일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무학의 고수들은 제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대단히 엄했다. 탁불범이 아무 이유도 없이 상승의 검술을 허죽에게 전수해 준다는 것은 물론 동모의 유언을 알아내어 생사부를 손에 넣겠다는 속셈이었다.
허죽이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사람들 가운데 한 여인이 냉랭히 질문을 던져왔다.
탁 선생, 그대 역시 생사부에 적중되었나요?
탁불범은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말한 사람은 중년의 도고(道姑)였다.
선고(仙姑)는 어째서 그와 같은 질문을 하시오?
단예는 그 도고가 바로 대리의 무량동 동주 신쌍청이란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본래 무량검 서종의 장문인인데 동모의 부하들에게 항복한 뒤 무량동 동주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 며칠 동안 단예는 줄곧 신쌍청을 정면으로 마주쳐 다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감히 그녀의 부하격인 좌자목에게도 가까이 다가서지를 못했다. 혹시나 그들이 옛 빚을 따지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때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듣고는 단예는 급히 포부동의 등 뒤로 가 몸을 숨겼다.
신쌍청은 말했다.
탁 선생께서 만약 몸에 생사부의 해독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온갖 방법을 다해서 생사부를 깨뜨리고 해소시킬 방법을 강구하지요? 만약 탁 선생이 그리하여 우리들을 꼼짝 못하게 묶어 놓고자 한다면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의 뭇 형제들은 사자의 입에서 방금 빠져 나왔으나, 다시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꼴이 될 것이니 아마도 좋아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탁 선생의 검법이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나, 만약 우리로 하여금 나갈 길이 없도록 핍박한다면 뭇 형제들도 부득이 죽고 사는 것을 돌보지 않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일이죠.
이 말은 오만하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한 마디 말로 탁불범의 의도를 폭로한 셈이었고 그 말투는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 못하도록 다그치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군호들 가운데 대뜸 십여 명이 그 소리에 맞장구를 쳤다.
신 동주의 말이 지극히 옳소이다.
이 녀석아, 동모는 도대체 무슨 유언을 남겼는지 빨리 여러 사람들에게 말해라. 그렇지 않을 땐 모두들 너를 난도질하여 죽이게 될 것이니 그 맛은 좋지 않을 것이다.
탁불검은 장검을 휘둘러 웅웅거리는 소리를 낸 이후 입을 열었다.
소형제, 두려워 할 것 없네. 내가 그대의 곁에 있는 이상 그 누구도 그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이네. 동모의 유언은 그대가 나에게만 말하도록 하게. 만약에 제삼자가 알게 된다면 나의 검법을 그대에게 전수하지 않겠네.
허죽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동모의 유언은 다만 나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만 관계가 있을 뿐이지 여러분과는 아무 관계가 없소이다. 나는 결코 말씀드릴 수가 없소이다. 그대의 검법이 훌륭하기는 하나 나는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없소이다.
군호들은 우렁찬 음성으로 잘 한다고 소리쳤다.
맞다. 맞았어! 네 녀석은 제법 뼈대가 있구나. 그의 검법을 배워서 어디에 쓰겠느냐?
한 아리따운 젊은 소저가 일목에 그의 검초의 내력을 갈파했다. 따라서 그의 검법은 별로 희귀할 것이 없다.
그 소저가 검법의 내력을 알아보는 것을 보면 그 검법을 깨뜨리는 재간도 있을 것이다. 소형제, 만약 사부를 모시고 싶으면 저 소저를 사부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 더군다나 그대의 품에는 그녀의 초상화가 들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자연 그녀를 사부로 모셔야 마땅한 일이다.
탁불범은 여러 사람들의 비웃는 말을 듣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곁눈질로 왕어언을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녀가 시종 아무 소리도 하지 않자, 탁불범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네가 나의 검법을 깨뜨릴 수 있다고 했는데 너는 즉시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는 나의 검법을 깨뜨릴 수 있다고 시인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왕어언은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종 오라버니는 어째서 불쾌한 빛을 띄우고 있을까?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일까? 내가 어떤 점에서 그에게 잘못했을까? 혹시......혹시 저 젊은 스님이 나의 초상화를 그려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고종 오라버니가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하나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탁불범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 한 폭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았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녀석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서 품속에 간직한 것을 보면 그녀에 대하여 많은 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내가 그로 하여금 동모의 유언을 토로케 하려면 반드시 저 계집애의 몸에 손을 써야 할 것이다. 됐다."
그는 그림을 주워서 허죽의 품속에 넣어 주며 말했다.
소형제, 그대의 심사는 내 모두 다 알고 있네. 하하핫, 신랑은 재주가 있고 신부는 아름다우니 그야말로 하늘이 맺어 준 한 쌍이라고 할 수 있군. 하지만 가운데서 훼방을 놓는 사람이 있으니 그대가 소원풀이를 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거야. 이렇게 하지. 내 혼자의 힘으로 저 소저를 그대의 처로 삼아서는 즉시 이 자리에서 천지신명께 절을 하고 오늘 밤 바로 영취궁에 신방을 차려 주도록 하겠네. 어떤가?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왕어언을 손가락질했다.
일자혜검문의 삼대에 걸친 스승과 제자들이 동모에게 모조리 떼죽음을 당할 당시 탁불검은 복건성에 있지 않았으므로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후 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장백산의 황량하고 지극히 추운 곳으로 도망쳐 검법을 연마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선배 고수가 남겨 놓은 한 권의 검경(劍經)을 발견하여 삼심 년간 부지런히 연마하게 된 이후 크게 대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천하무적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이번에 하산하여 하북에서 쟁쟁한 명성을 누리고 있던 고수를 죽이게 되자 더욱더 오만해졌다.
따라서 그는 자기 손에 들린 장검을 이 세상에서 감히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판단하고 자기의 말이 한 번 떨어지면 그 누구든 항거하지 못하고 따르게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때 허죽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탁 선생께서는 오해하지 마십시오.
탁불범은 말했다.
남자가 크면 장가를 가고 여자가 크면 시집을 가며, 나이를 먹으면 여자를 사모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어째서 그토록 송구해 하는가?
허죽은 낭패해서 잇따라 말했다.
이건......이건......아닙니다......
탁불검은 장검을 휘둘렀다. 일 초 천여궁려(天如穹廬)를 펼치고 잇따라 백무망망(白霧茫茫)이라는 초식을 펼쳤다. 탁불범은 그녀를 검광 속으로 끌어들인 뒤 그녀를 인질로 삼아 허죽이 알고 있는 비밀과 교환하려는 생각이었다. 즉 허죽이 비밀을 토로하는데 왕어언을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왕어언은 이 초식을 보자 속으로 생각했다.
"천여궁려와 백무망망은 모두가 구허일실(九虛一實)이다. 그저 중궁으로 곧장 나가 그의 가슴과 배를 공격하면 그는 초식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와 같은 방법을 알고 있지만 손으로 펼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눈앞에 검광이 번쩍이는 가운데 자기 머리 위를 덮어씌울 듯 검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 놀라고 당황하여 그만 아, 하는 소리를 발했다.
모용복은 탁불범의 초식에 왕어언을 해치겠다는 뜻이 없음을 알고 생각했다.
"내가 바삐 손을 쓸 필요가 없다. 저 탁가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두고 보자. 그리고 저 소화상이 외사촌 누이를 위해서 정말 비밀을 토로할 것인지 두고 보기로 할까?"
그러나 단예는 탁불범의 검초가 왕어언에게로 펼쳐지는 것을 보자 검초의 허실을 알 수 없어 그만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다급한 김에 그는 즉시 능파미보를 펼쳐 질풍 같이 달려가 왕어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탁불범의 검초가 빠르긴 했으나 단예가 역시 한 걸음 앞서서 왕어언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검의 싸늘한 광채가 번쩍이는 가운데 찍, 하는 가벼운 음향이 들렸다. 검의 끝은 단예의 가슴에다가 길게 선을 긋게 되었다. 목 있는 곳에서부터 아랫배까지 선을 긋게 되어 옷자락은 모조리 둘로 나누어 지게 되었고 살갗에도 상처를 입게 되었다. 어찌했던 탁불범은 허죽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비밀을 실토케 하자는 데 뜻이 있었을 뿐 사람을 죽여 강적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라 그 일 검의 손에 실린 힘은 매우 약했다.
그리하여 검의 흔적으로 남은 상처는 무척 경미했다. 단예는 그만 깜짝 놀랐다. 고개를 숙이고 자기의 가슴과 배에 생긴 기다란 검상에서 피가 스며나오는 것을 보고 가슴팍이 모조리 갈라져서 즉시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르짖었다.
왕 소저, 그대......그대는 빨리 피하시오. 내가 그를 막겠소!
탁불범은 냉소했다.
흙으로 빚은 보살이 강을 건너듯 자기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 판인데, 분수를 모르고 미녀를 보호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다 있구나.
그는 고개를 돌려 허죽에게 말했다.
소형제, 이 소저에게 마음을 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군. 내 먼저 그대를 위해 한 사람의 정적을 제거해 줄까?
그리고 장검의 끝으로 단예의 가슴을 겨누었다. 그 간격은 한 치 정도에 불과했는데 검의 끝이 가볍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앞으로 내밀게 된다면 그 검은 단예의 가슴을 찌르게 될 형편이었다.
허죽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는 탁불범이 단예를 살해할까 봐 왼손을 뻗쳤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으로 그의 오른쪽 손목에 있는 태연혈(太淵穴)을 가볍게 스치듯 후려쳤다. 탁불범은 그만 손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고 검자루를 쥐고 있던 다섯 손가락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허죽은 그 기세로 검을 손 안에 넣었다. 이 검을 빼앗은 절초는 바로 천산절매수였다. 보기에 평범하고 기이할 것이 없었으나 기실 그의 새끼 손가락으로 한 번 스칠 듯 떨치는 지법에는 최상승의 소무상공(小無相功)이 실려 있었다. 따라서 탁불범의 공력이 삼사십 년 더 높다 하더라도 장검은 마찬가지로 그에게 빼앗기로 말았을 것이다.
곧이어 허죽은 입을 열었다.
탁 선생! 이 단 공자는 훌륭한 사람이니 그의 목숨을 해쳐서는 안 되오.
그는 장검을 탁불범의 손에 쥐어 주고 고개를 숙인 채 단예의 상처를 살폈다.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왕 소저, 나는......나는 죽게 되었소, 아무쪼록 그대와 모용 형이 백년해로 해 주기를 바라오. 아버지......어머니......저는.......저는......
그의 상처는 기실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자신이 자기의 가슴팍이 상대방에 의해 갈라지게 되었으니 반드시 죽으리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맥이 빠져 뒤로 벌렁 쓰러졌다.
왕어언이 재빨리 달려와 그를 부축하며 눈물을 흘렸다.
단 공자, 그대는 나 때문에.......
허죽은 질풍같이 손을 움직여 단예의 가슴팍 상처 부근의 혈도를 짚었다. 그런 이후 그의 상처를 살펴본 이후 대뜸 안심이 되어 웃으며 말했다.
단 공자, 그대의 검상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이오. 사나흘이면 나을 것이외다.
단예는 왕어언의 부축을 받게 되고 또 그녀가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자 혼백이 두둥실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듯한 기분이어서 무척 흐뭇해서 물었다.
왕 소저, 그대는......그대는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오?
왕어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단예는 말했다.
이 단예를 위해 그대가 눈물을 흘려만 준다면 저 사람에게 다시 수십 검을 찔리게 되고, 수백 번 죽는다 하더라도 마음이 즐거울 것이오.
왕어언은 속으로 감격해서 그녀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편 단예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의 눈물을 보게 되고 또 그 눈물이 바로 자기를 위해 흘리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생사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겨를이 없는 형편이었다.
허죽이 검을 빼앗고 다시 되돌려 준 것은 그저 일순간에 일어난 일에 불과했다. 모용복만이 똑똑히 보았고 탁불범이 속으로 알아차렸을 뿐 다른 사람들은 탁불범이 손에 사정을 두어 일부러 단예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탁불범은 속으로 놀랐다. 분노가 끓어올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장백산에서 우연히 선배가 남긴 검경을 얻게 되어 삼십 년간 고된 수련을 쌓았는데 이 세상에 아직도 적수가 있더란 말이냐? 그렇다면 아마도 이 녀석은 공교롭게 내 손목에 있는 태연혈(太淵穴)을 건드리게 되었을 것이다. 천하에는 매우 공교로운 일들이 많지 않은가? 만약 그가 정말 나의 손에 들린 무기를 빼앗을 뜻이 있었다면 빼앗은 이후 어찌 나에게 되돌려 주었겠는가? 이 녀석의 나이를 볼 때 공력이 높다면 얼마나 높겠는가. 이 탁모의 손에 들린 장검을 빼앗을 수 있는 정도는 아무리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이 들자 그는 호기가 끓어올라 말했다.
이 녀석 너는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는구나!
그는 장검을 디밀었다. 검의 끝은 허죽의 등에 있는 옷자락을 겨누고 있었다. 손에 가볍게 힘을 주어 밀었다. 허죽의 옷자락을 찢고 단예를 상대한 것처럼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안겨 주려는 심산이었다.
허죽은 이때 체내의 북명진기가 충만하여 있었다. 탁불범의 장검이 찔러오게 되자 그의 체내의 진기와 부딪치게 되었고 그러자 그만 검의 끝이 비틀어져서 칼날이 그의 몸 옆으로 미끌어지게 되었다. 탁불범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의 초식 변화도 역시 신속했다.
탁불범은 즉시 검을 옆으로 돌려서 허죽의 옆구리를 베려고 하였다.
이는 옥대위요(玉帶圍腰)라는 일 초로서 일 검에 연달아 허죽의 앞쪽과 오른쪽, 그리고 뒤쪽 세 부위를 공격했는데 세 곳 모두 다 치명적인 급소였다. 이 일검의 공세는 날카롭고 매섭기 이를데 없었다. 이때 탁불범은 이미 허죽의 무공의 고강함이 자기가 상상한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 초에 모든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허죽은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로서는 탁불범이 조금전까지 매우 좋게 나오다가 왜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살수를 펼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쫙,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은 그의 겨드랑이 아래쪽을 관통하게 되었고 그의 헌 승포 자락에 기다란 구멍을 내고 말았다.
탁불범은 제 이 검도 상대방의 몸을 적중시키지 못하자, 반은 놀람과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반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몸을 빙글 돌려 반원을 그리듯 하면서 장검을 뻗쳤다. 그러자 검의 끝에서 갑자기 반 자 정도 되는 푸른 광채가 뻗쳐 나왔다.
군호들 가운데 십여 명이 놀라 부르짖었다.
검망(劍芒)이다! 검망이다!
그 검망은 마치 기다란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 같았다. 탁불범은 얼굴에 흉칙한 미소를 띄우고 단전에서 한 가닥 진기를 끌어 올려 푸른 광채를 벼락같이 크게 일으키며 허죽의 가슴팍을 찔러왔다.
허죽은 무기에서 그와 같은 푸른 광채가 돋아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군호들이 호통치는 소리를 듣고 아마도 매우 무서운 무공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로서는 아마도 상대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하고 발걸음을 미끄러뜨리며 옆으로 피했다. 이 일 검은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터라 중도에서 초식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은 커다란 돌 기둥에 박히게 되었는데 그 깊이가 한 자나 되었다.
이 돌 기둥은 바로 지극히 딱딱한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장검으로 한 자 남짓하게 찔러넣는다는 것은 그의 검날에 실린 진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따라서 군호들은 또 한 번 갈채를 보냈다.
탁불범은 손에 공력을 돋우어 장검을 돌 기둥에서 뽑아 허죽을 쫓아가며 호통을 내질렀다.
소형제, 그대가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는가?
왼쪽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호호호, 소화상, 누워 계시지?
여인의 음성이었다. 동시에 두 줄기 하얀 광채가 번쩍이며 두 자루의 비도가 허죽의 얼굴 앞을 스칠 듯하며 지나갔다. 허죽은 처음 동모를 업게 되었을 때 동모로부터 경신법에 대하여 약간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내력이 심후하기 이를데 없어 손짓발짓 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날렵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의 몸은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고 비도가 날아드는 것이 재빠르기는 했으나 역시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몸에 엷은 홍색의 의상을 걸친 중년의 미부인이 두 손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자 두 자루의 비도가 그녀의 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마치 한 줄기의 지극히 강한 흡인력이 있는듯 비도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탁불범은 칭찬했다.
부용 선자의 비도를 날리는 신기는 그야말로 나의 시야를 넓혀 주는군!
허죽은 별안간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날 밤 뭇 사람들이 공모하여 표묘봉으로 쳐들어 가자고 했을 때 탁불범과 부용 선자 두 사람은 바로 불평도인과 한패거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불평도인이 설봉 위에서 자기의 솔방울에 맞아 죽었으니 나머지의 두 사람은 자기를 죽여서 자기의 동료의 원수를 갚으려고 할 것이 아닌가.
허죽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걸음을 멈춘 후 탁불범과 부용 선자에게 읍을 하면서 말했다.
나는 확실히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소이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으나 당시 나는 결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외다. 어찌됐든간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소이다. 두 분이 때리든 욕을 하든 나는.......나는 이제......다시 더 피하지 않겠소이다.
탁불범과 부용 선자 최록화(崔綠華)는 서로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끝내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구나."
기실 그들은 불평도인이 허죽의 손 아래 죽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허죽을 죽여서 불평도인의 원수를 갚으려고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허죽에게로 달려들어 한 사람은 왼쪽에서 한 사람은 오른쪽에서 허죽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허죽은 불평도인이 죽을 때의 참상을 상기하고 미안한 생각에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
내가 잘못했소이다. 정말 후회막급입니다. 두 분이 마음대로 중벌을 내려 주십시오. 내 즐거이 그 벌을 받도록 하겠소이다. 설사 내 목숨을 빼앗는다 하더라도 감히 반항하지 않겠소이다.
탁불범은 말했다.
너의 목숨을 빼앗으라고 한다면 그거야 말로 쉬운 노릇이다. 그대가 동모가 죽을 때에 한 말을 나에게 들려 주기만 한다면 그대를 용서하마.
최록화는 미소했다.
탁 선생, 이 소매는 들으면 안 될까요?
탁불범은 말했다.
우리가 생사부를 파괴시키는 방법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이곳의 모든 친구들이 모두 다 그 혜택을 입게 될 것이 아니겠소. 결코 나 혼자 이득을 얻을 생각은 없소.
최록화는 미소했다.
소매는 그대처럼 훌륭한 양심을 지니지 못했어요. 저는 이 녀석이 그저 눈에 거슬리기만 하는군요.
그녀는 왼손으로 허죽의 손목을 움켜잡고 오른손을 쳐들어 두 자루의 비도로 허죽의 가슴을 찌르려고 했다.
동모가 죽게 되자 탁불범은 사문의 커다란 원수를 갚을 상대가 없어졌다. 그래서 생사부를 파괴시키는 방법을 알아낸 후 군호들을 마음대로 조종하여 거드름을 피우며 한껏 복된 삶을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최록화의 저의는 전혀 달랐다.
그녀의 오라버니가 삼십육 동의 세 동주가 손을 합해 공격하는 바람에 죽음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그저 허죽을 죽임으로써 동모의 유언을 아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게 되면 그 세 동주의 몸에 심어진 생사부는 영원히 풀 수가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갑자기 살수를 펼친 것이다.
그녀의 손 씀씀이는 너무나 빨랐다. 탁불범은 이미 장검을 검집에 꽂아 두었던 터라 재빨리 검을 뽑아든다 하더라도 이미 한 걸음 늦은 상태였다.
허죽은 깜짝 놀라 미처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자연스럽게 두 손을 한 번 떨쳤다. 그리하여 탁불범과 최록화가 동시에 몇 걸음 밀려나도록 만들었다.
최록화는 그 순간 호통을 내지르며 비도를 내던졌다. 비도는 곧장 허죽에게로 날아갔다. 그녀는 몇 걸음 밀려나기는 했으나 암기를 던지는 거리에 있어서는 여전히 상당히 가까운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이때 탁불범은 허죽이 살해당하게 될까봐 검을 들어 비도를 쳐내려고 했다.
최록화는 이미 탁불범이 반드시 검을 뽑아 허죽을 구원할 거라고 생각하고 첫 비도를 내던진 뒤 잇따라 열 자루의 비도를 내던졌는데 그 가운데 세 자루는 탁불범 쪽으로 던졌다.
그것은 탁불범을 잠시 저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의 일곱 비도는 모두 허죽에게로 날아갔으며 허죽의 얼굴과 목, 가슴, 아랫배는 모두 비도에 맞게 될 형편이었다.
허죽은 두 손으로 잡아채는 시늉을 했다. 바로 천산절매수를 펼쳐 아무렇게나 잡고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챙그랑, 챙그랑, 하는 소리가 잇따라 울렸고 삽시간에 열 세 자루의 비도가 그의 발밑에 떨어지고 말았다. 열 두 자루는 최록화의 비도였고 열 세번 째의 무기는 물론 탁불범의 장검이었다.
사실 그는 천산절매수를 펼치게 되자 당황하고 다급한 나머지 적수가 누구인지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에 들어오는 대로 무기를 잡다보니 탁불범의 장검마저도 빼앗게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가 열 세 가지의 무기를 빼앗고 내던진 후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니 탁불범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지 않은가.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최록화를 바라보았다.
최록화는 얼굴에 놀람과 두려운 빛을 띄우고 있었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야단났구나, 야단났어, 내가 또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구나."
허죽은 재빨리 말했다.
두 분께서는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불초는 원래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곤 한답니다.
그는 땅바닥의 열 세 자루의 무기를 집어들어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탁불범과 최록화 두 사람 앞으로 가져갔다.
최록화는 일부러 그가 자기에게 모욕을 준다고 생각하고 두 손에다가 공력을 돋우고 허죽의 가슴팍을 맹렬히 내려쳤다. 그 순간 팍, 하는 소리가 일었고 한 줄기의 맹렬하기 이를데 없는 힘이 반탄되었다. 최록화는 그만 아, 하는 놀람에 찬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날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석벽에 부딪혀 두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탁불범이 이번에 불평도인과 최록화와 손을 잡기 전에, 세 사람은 함께 서로의 무공과 내력을 겨루어 본 적이 있었다. 두 사람보다는 약간 강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저 한 수 정도 앞서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때 허죽이 두 손으로 무기를 받쳐들고 있었고 그저 체내의 한 줄기 진기로서 최록화에게 충격을 주어 몸에 중상을 입히는 것을 보고 자기는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늘 결코 득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손을 들어 허죽에게 맞잡아 보이고 말했다.
탄복했소, 탄복했어!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허죽은 재빨리 말했다.
선배님, 검을 가져 가십시오. 제가 그만 위엄을 거슬리게 되었으나 선배님께서는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선배님께서 때리든 욕을 하시든 그리고 불평도인을 위해 화풀이를 하신다 하더라도 저는......저는 결코 반항하지 않겠소이다.
탁불범의 귀에는 허죽의 그와 같은 몇 마디 말이 비웃음으로 들렸다. 그는 얼굴에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져서 성큼성큼 대청 밖으로 걸어나갔다.
갑자기 날카로운 호통 소리와 더불어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게 섰거라! 영취궁이 어떤 곳인데 네가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가도록 내버려 둘 것 같으냐?
탁불범은 흠칫했다. 그리고는 손을 뻗쳐 검자루를 쥐려고 했다. 그런데 허공만 붙잡게 되었다. 그제서야 장검을 허죽에게 빼앗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 대문 밖에는 한 조각 거대한 바위가 세워져 있었다. 높이는 이 장이고 폭은 일 장이나 되는데 대문을 바람 한 점 들어올 틈없이 막아 버린 것이었다.
이 커다란 바위가 언제 기척도 없이 옮겨졌는지 탁불범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군호들은 이와 같은 광경을 대하게 되자 모두가 자기네들이 영취궁의 기관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뭇 사람들은 공격을 해오게 되었을 때 약간의 황삼 여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깨끗이 소탕한 이후 대청으로 들어섰던 것이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또 다른 복병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몸에 심어진 생사부가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모두들 놀라게 되었다. 똑간은 입장이고 거기다가 잇따라 변고가 발생하자 자기네들이 위험한 곳에 와 있으며 사방에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커다란 바위가 대문을 꽉 막아 버리자 속으로 하나같이 흠칫하게 되었다.
"오늘 살아서 영취궁을 나간다는 것은 크게 어렵겠구나."
별안간 머리 위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동모 좌하의 네 시비가 허죽 선생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허죽은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대청 천정과 가까운 곳에 아홉 조각의 커다란 바위가 돌출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만 평대와 같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네 조각의 바위 위에 각기 십 팔구 세의 소녀들이 서서 넓죽이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네 소녀는 절을 하자마자 즉시 몸을 날려 뛰어내렸는데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순간을 이용해 각기 한 자루의 장검을 뽑아들고 표연히 내려섰다.
네 소녀 가운데 한 사람은 엷은 홍색의 옷을 입고 있었고, 한 사람은 하얀 옷을, 한 사람은 엷은 푸른 빛의 옷을, 또 한 사람은 엷은 황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동시에 내려서더니 함께 무릎을 꿇어 허죽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시비들이 일찍 영접하지 못한 점 주인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
허죽은 재빨리 읍을 하고 반기며 말했다.
네 분 누님들은 너무 예의를 차릴 것 없소이다.
네 소녀는 고개를 쳐 들었다. 뭇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네 소녀는 키와 몸매가 똑같을 뿐만 아니라 얼굴 모습마저도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똑같이 갸름한 얼굴에 새까만 눈동자를 하고 있었는데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용모였다. 다른것은 옷의 색깔뿐이었다.
엷은 홍색의 옷을 입은 소녀가 말했다.
저희 네 자매는 쌍동이랍니다. 동모께서는 시비에게 매검(梅劍)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 누이동생에게는 난검(蘭劍), 죽검(竹劍), 국검(菊劍)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지요. 조금 전 호천, 주천 여러 부의 자매들을 만나 모든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시비들은 독존청(獨尊廳) 대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대담하게 반역을 도모한 종놈들을 어떻게 처치하실 것인지 주인께서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군호들은 그녀들 네 자매가 쌍동이 자매라는 말을 듣고서야 확연히 깨달았으며 네 사람의 모습이 똑같은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 사람의 얼굴은 수려하며 음성은 맑고 부드러워 각자 마음속으로 하나같이 호감을 느꼈다. 그런데 나중의 말에 이르러 매검은 대담하게 반역을 꾀한 종놈들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가.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투라 두 사내가 앞으로 달려나왔다. 한 사람은 손에 칼을 들고 있었고 한 사람은 한 쌍의 판관필을 들고 뛰어나오며 일제히 호통을 내질렀다.
이 계집들이 주둥이가 깨끗하지 못하고......
별안간 푸른 빛이 잇따라 번쩍이는 가운데 난검과 죽검 자매가 장검을 휘둘렀다. 곧이어 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내의 손목이 잘려져 나가고 말았다.
손에 들려 있던 무기도 땅바닥에 함께 떨어졌다.
이 일 초는 신속하기 이를데 없어서 두 사람의 손목이 잘려졌는데도 입으로는 여전히 부르짖고 있었다.
......방귀 뀌는 소리를 하고 있어......어이쿠!
그리고 일제히 소리내어 부르짖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땅바닥에는 선혈이 낭자하게 되었다.
두 소녀가 한 번 손을 쓰자마자 두 사람의 손목이 잘려 버리는 것을 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두 대한보다 자신의 무공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잖이 있었지만 감히 대담하게 나서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대청의 사면벽은 모두 두껍고 견실하기 이를데 없는 화강암이었다. 거기다가 대청 안에 어떤 다른 무슨 기관이 장치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여러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그 누구도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사람들 틈에서 그 누군가가 헉헉, 하는 야수의 포효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뭇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의 몸에 심어진 생사부가 발작을 일으킨 것임을 깨달았다.
군호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자 철탑과 같은 대한이 껑충껑충 뛰어나왔다.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그는 가슴팍의 옷자락을 마구 찢어냈다.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었다.
철오도(鐵鰲島) 도주인 합대패(哈大覇)다!
그 합대패는 마치 상처입은 맹호처럼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솥뚜껑 같은 주먹을 들어 펑, 하며 한 개의 차탁자를 박살냈다. 그는 국검에게 달려들었다.
국검은 그의 흉칙한 얼굴 표정을 보고 자기의 검법이 고강하다는 사실을 잊고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대뜸 머리를 허죽의 품속으로 처박았다. 합대패는 솥뚜껑 같은 큰 손을 벌리더니 매검을 잡으려 들었다.
네 명의 쌍동이 자매들은 마음이 통하는지라 국검이 놀라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자 매검은 이미 감응을 받아 합대패가 달려드는 것을 보고는 아, 하며 놀란 소리를 내지르고는 허죽의 등뒤로 가 숨었다.
합대패는 허공을 거머쥐게 되자 두 손을 들더니 자기의 두 눈알을 뽑으려 들었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안돼!
그는 옷자락을 떨쳐 그의 팔을 슬쩍 쳤다. 합대패의 두 손이 즉시 아래로 처지게 되었다.
허죽은 말했다.
이 형씨의 체내에 심어진 생사부가 발작을 일으킨 모양이군. 불초가 방법을 강구해서 해소시켜 드리겠소.
그는 즉시 천산육양장 가운데 양가천균이라는 일 초를 펼쳐 합대패의 등에 있는 영대혈을 후려쳤다. 합대패는 몇 번 몸을 흠칫했다. 그의 전신은 허탈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바로 이때 푸른 광채가 번쩍이는 가운데 두 자루의 장검이 제각기 합대패를 향해 찔러갔다. 바로 난검과 죽검의 두 자매가 그 기회를 빌어 손을 쓴 것이었다.
허죽은 재빨리 말했다.
안 되오!
그는 손을 뻗쳐 두 자루의 장검을 재빨리 낚아채고 중얼거렸다.
야단났군. 야단났어! 그의 생사부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있나.
그는 생사부를 파괴시키는 방법을 배우기는 했으나 역시 견문이 짧아서 합대패의 몸 어느 곳에 생사부가 박혀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거기다가 양가천균이라는 일 초에 너무나 많은 힘이 실려 있어 합대패는 견뎌내지를 못한 것이다.
이때 합대패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바로......바로......현추(懸樞)......기......기해(氣海)......사......사공죽(絲空竹)......
방금 허죽에게 양가천균이라는 일 초를 얻어맞게 되자 그는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허죽은 기뻐 말했다.
그대 스스로 알고 있다면 잘 됐소이다.
그는 즉시 동모가 가르쳐 준 방법대로 천산육양장의 순수히 양강한 기운만을 써서 그의 혈도에 심어진 차가운 얼음을 녹여 주었다.
합대패는 몸을 일으키더니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며 미친 듯이 기뻐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땅바닥에 털썩 꿇어 엎드리더니, 쿵쿵, 소리가 나도록 허죽에게 큰절을 했다.
은공(恩公)께서는 절을 받으십시오. 합대패의 목숨을 구하신 분은 바로 어르신입니다. 이후 은공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이 합대패는 꿇는 물 속이고 타는 불길 속이고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겠습니다.
허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언제나 공손했다. 합대패가 그와 같이 말하며 절을 하자 재빨리 꿇어 엎드려 반례하며 역시 쿵쿵쿵, 소리가 나도록 큰절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불초로서는 감히 그와 같은 무서운 예를 받을 수가 없소이다. 그대가 나에게 절을 한다면 나 역시 그대에게 절을 하는 수밖에 없소이다.
합대패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은공께서는 빨리 몸을 일으키십시오. 은공이 제게 큰절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인의 수명을 감소시키는 일입니다.
그는 감격해마지 않는 뜻을 표시하기 위해서 또 몇 번의 절을 했다. 허죽은 그가 또 절을 하는 것을 보고 허죽 역시 또 절을 하여 반례했다.
두 사람이 땅바닥에 엎드려서는 연신 절만 해대고 있는 판국이었다. 별안간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나의 생사부를 해소시켜 주시오! 나의 생사부를 해소시켜 주시오!
몸에 생사부가 적중된 군호들은 벌떼처럼 앞으로 나와 두 사람을 에워쌌다.
한 명의 노인이 합대패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절할 필요가 없네. 모두들 은공에게 독을 치료받고 목숨을 건지도록 해야겠네.
허죽은 합대패가 몸을 일으키자 그제서야 자기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여러분은 서두를 것 없이 나의 말을 들어 주시오.
삽시간에 대청 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게 되었다. 허죽은 말을 이었다.
생사부를 해소시키려면 반드시 심어진 부위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알고 있는지요?
삽시간에 뭇 사람들이 왁자하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나는 위중혈(委中穴)과 내정혈(內庭穴)에 심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전신이 아프답니다. 빌어먹을, 그렇기 때문에 어느 혈도에 있는지 모른답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저의 온몸은 마비되고 근지러우며 아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매 달마다 틀리답니다. 나의 생사부는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별안간 그 누가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들 조용히 하시오. 이와 같이 떠들썩하게 지껄인다면 허죽 선생께서 어찌 들을 수 있단 말이오?
소리를 친 사람은 바로 군호의 우두머리격인 오노대였다. 뭇 사람들은 즉시 조용해졌다.
허죽은 말했다.
불초는 동모로부터 생사부를 해소시키는 방법을 전수받긴 했습니다......
칠팔 명의 사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르짖었다.
그것 참 잘 됐습니다! 그것 참 잘 되엇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허죽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혈도를 구분하고 병을 알아보는 재간은 지극히 얕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는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자신이 생사부가 심어진 부위를 알고 있는 분이라면 불초는 여러분들을 위해 생사부를 해소시켜 하나 하나 치료하여 드리겠소이다. 설사 모른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함께 천천히 연구해 보고, 다시 몇 분의 의술에 정통한 분을 모시고 함께 연구하여 어쨌든 다 치료할 때까지 노력을 해보기로 합시다.
군호들은 큰소리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바람에 온 대청 안이 웅웅거렸다.
한참 후에야 환호성이 점차 멎었다.
이때 매검이 냉랭히 입을 열었다.
주인께서 생사부를 뽑아 주신다고 허락하신 것은 그 어르신이 자비스러워서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대담하게 난을 일으켜 동모로 하여금 표묘봉에서 내려가시도록 해서는 밖에서 돌아가시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너희들은 또 표묘봉을 공격해 와서 균천부의 자매들을 적지 않게 죽였는데, 이 빚은 어떻게 갚을 셈이란 말이냐?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군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기대에 부풀었던 마음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움츠러 들었다. 사실 매검이 한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죽은 동모의 전인이니, 뭇 사람들이 지은 죄를 아랑곳하지 않고 덮어 둘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간곡히 부탁해서 목숨을 빌어 볼 작정을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동모를 해쳐 죽게 만들고 영취궁에 반기를 든 죄는 그야말로 너무나 깊고 커서 몇마디의 말로 애걸을 한다고 하여 뜻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목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키고 말았다.
이때 오노대가 말했다.
이분 소저의 주장함이 무척 옳습니다. 우리들은 정말 큰 죄를 지었습니다. 기꺼이 허죽 선생의 책벌을 받도록 하겠소이다.
그는 허죽의 성질을 어느 정도 파악하였다. 허죽은 중후하고 얌전한 사람으로서 결코 음흉하고 악랄한 동모와 견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만약 허죽이 손을 써서 벌을 내리게 된다면 매란국죽 네 시비가 내리는 벌보다 훨씬 가벼울 것 같아, 허죽에게 벌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군호들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잇따라 부르짖었다.
맞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깊고 큰 죄를 지었습니다. 허죽자 선생께서 어떻게 책벌하시든 모두들 기꺼운 마음으로 벌을 받도록 하겠소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사부가 목숨을 빼앗게 되었을 때의 고통을 생각하고 두 무릎을 털썩 꿇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허죽은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 매검에게 물었다.
매검 누이, 그대가 보기에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매검은 대답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균천부의 많은 자매들을 해쳐 죽였으니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바치도록 해야 해요.
무량동의 좌자목이 매검에게 깊이 읍을 하고는 말했다.
소저, 우리는 몸에 생사부가 심어지게 된 이후 실로 참담한 고통을 겪어 왔소이다. 그러다가 동모 어른께서 봉우리 위에 계시지 않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그만 조급해진 나머지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소. 실로 지금 와서는 후회막급이외다. 아무쪼록 소저께서는 대인의 큰 아량으로 허죽자 선생에게 몇 마디 좋은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매검은 얼굴 빛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빨리 자신의 오른팔을 자르시오. 이것이야말로 가장 가벼운 벌이 될 것이오.
그녀는 말을 내놓고 보니, 자기가 명령을 내린다는 것이 정리에 합당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허죽에게 물었다.
주인, 그렇지 않습니까?
허죽은 그와 같은 큰 벌을 내린다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검의 비위를 거슬리고 싶지 않아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그건......음......그건......음......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바로 대리국의 왕자 단예였다.
그는 쓸데없는 일에 뛰어들어 옳고 그름을 가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즉시 허죽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인형(仁兄), 이 친구들이 표묘봉을 공격한다는 사실에 소제는 줄곧 찬성하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입이 마르도록 말했지만 그들이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소이다. 오늘 이제 모두들 커다란 화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니 인형이 그들에게 벌을 가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소제는 인형에게 한가지 제의를 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소제가 이 친구들을 한바탕 꾸짖고, 벌을 내리자는 것인데 인형의 뜻은 어떻습니까?
그날 군호들이 동모를 죽이고 피로써 맹세를 하려는 것을 단예가 애써 말렸다. 그 사실을 허죽도 친히 듣고 보았으므로, 이 공자가 인정이 많고 의협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단예를 매우 우러러보는 터였다. 더군다나 자기가 동모를 업은 채 이추수에 의해서 천 장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 단예가 구원해 주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아도 자기로서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있는데, 단예가 그와 같이 말하자 재빨리 두 손을 모아잡고 말했다.
불초는 견문이 좁고 얕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합니다. 단 공자께서 나서서 처리해 준다면 불초는 정말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군호들은 처음 단예가 나서서 그들을 벌하겠다는 말을 하자 승복할 수가 없었다.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크게 욕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허죽이 대뜸 응락하자,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던 욕을 그대로 삼키고 말았다.
단예는 기뻐하며 말했다.
그럼 잘 되었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군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지은 죄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불초가 정한 징벌의 방법도 가볍지는 않소이다. 허죽자 선생께서 불초에게 처리하도록 일임했으니 여러분들이 만약 반항한다면 허죽자 노형께서는 그대들 몸에 심어진 생사부를 뽑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외다. 흠, 흠, 우선 책벌의 제 일조로 말하면 모두들 동모의 영전에 공손히 여덟 번 큰절을 하고 엄숙하게 묵념을 올려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절을 할 때 만약 마음속으로 동모를 몰래 욕하는 자가 있다면 그 죄는 더욱더 깊어질 것입니다.
허죽은 기뻐서 말했다.
무척 옳은 말씀입니다. 무척 옳은 말씀입니다. 이 제 일조의 벌은 정말 훌륭하기 그지없습니다.
군호들은 이 책벌레가 이상야릇하기 짝이 없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동모의 영전에서 절을 해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하나같이 생각했다.
"사람에게 있어 죽는 일이 제일 큰일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영전에 몇 번 큰절을 한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더군다나 우리가 마음속으로 도적 같은 노파를 몰래 욕한다고 해서 그가 또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겉으로는 절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도적 같은 노파에게 욕을 하면 되지."
이와 같이 생각하며 모두들 일제히 응락했다.
단예는 자기가 꺼낸 제 일조를 뭇 사람들이 기꺼이 동의하자 기운이 나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이조로 말하면 모두들 균천부의 죽은 누님들의 영전에 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은 반드시 큰절을 하고 참회하는 묵념을 올려야 될 뿐만 아니라 몸에 삼베옷을 걸쳐 애도의 뜻을 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자는 길게 읍을 하여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허죽자 형은 곧바로 그대들의 병을 치료하여 그대들을 장려하게 될 것입니다.
군호들 가운데 표묘봉 위에서 피를 묻히지 않는 태반의 사람들이 먼저 응락을 하고 나섰다. 균천부의 뭇 여인들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들은 그저 절을 하고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단예의 벌이, 그들의 오른팔을 짜르겠다는 매검의 방법보다는 만 배나 더 가벼운 벌인지라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단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제 삼조로 말하면 모두 영원히 영취궁의 신하라는 사실을 숭복해야 하며 다시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것이외다. 허죽자 선생께서 말씀이 있으시면 모두들 그 명령을 받들어야 합니다. 비단 허죽자 선생을 공경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매란국죽의 네 자매들에게도 겸손하게 대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는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어서 칼을 겨누어서 창을 휘두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외다. 만약 어느 분이라도 승복할 수 없다면 앞으로 나서서 허죽자 선생과 삼초나 이 식을 겨루어 보도록 하십시오. 어디 그가 고명한지 아니면 그대가 무서운지 두고 보기로 합시다.
군호들은 단예의 그와 같은 말에 모두 다 즐겁게 호응했다.
당연합니다. 당연해요.
어떤 사람은 말했다.
공자께서 정한 벌은 너무나 우리들에게 덕을 입히는 일입니다. 또 다른 분부는 없습니까?
단예는 손을 툭툭 털고 웃었다.
이제 없소이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허죽에게 말했다.
소제의 이 세 가지 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죽은 공수를 하며 말했다.
정말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옳은 벌이외다.
그는 매검 들을 한 번 슬쩍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약간 미안해하는 빛이 서려 있었다.
난검은 그 눈치를 알아차린듯 입을 열었다.
주인은 영취궁의 주인이십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시비들은 받들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께서 아량이 넓으시어 이 종놈들을 용서하신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허죽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과분하신 말씀이외다. 음음, 그건......내 마음속에 몇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야 할지......안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오노대가 그 말을 받았다.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는 언제나 표묘봉의 부하였습니다. 존주께서 어떤 분부를 내리신다 하더라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단 공자께서 정한 세 가지의 책벌은 실로 관대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존주께서 달리 책벌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모두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허죽은 말했다.
나는 나이가 젊고 견문이 좁으며 그저 동모에게 몇 수의 무공을 가르침받았을 뿐입니다. 따라서 존주니 뭐니 하는 칭호는 정말 부끄러워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나에게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이건......이건......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그저 대담하게 말씀드리겠소이다. 이것을 여러분 선배들께서는 잘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줄곧 남의 지시만 받아온 몸이었고 언제나 남의 아랫사람 노릇을 해온 터이라 한 번도 자기의 생각을 피력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뭇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자니 더욱더 어색했다. 따라서 그처럼 몇 마디 우물쭈물하는 그의 어조와 표정은 겸손하고 온화하기 이를데 없었다.
매란국죽 네 소녀는 하나같이 생각했다.
"주인이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종놈들에 대해서 어째서 이토록 겸손해 하실까?
오노대는 말했다.
존주께서는 커다란 아량을 베푸시어 우리들의 무거운 죄를 사면해 주셨는데 우리들에게 이토록 겸손해 하시니 뭇 형제들은 간과 뇌수를 땅바닥에 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은덕의 만에 하나도 보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존주께서 명령을 내리실 일이 있으시면 서슴치 마시고 분부하도록 하십시오.
허죽은 말했다.
네, 네, 내가 만약 잘못 말하더라도 여러분들께서는...... 여러분들께서는 웃지 마십시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일은 두 가지이외다. 첫번째 일은 약간 사심(私心)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불초는......불초는 소림사 출신으로 본래...... 본래는 화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는 이후 강호에서 활약하실 때라도 소림파의 승려나 속가제자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을 드리는 것이고 결코 명령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노대는 큰소리로 말했다.
존주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금후 뭇 형제들을 강호해서 활약을 할 때 소림파의 대스님과 속가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반드시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야하며 절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군호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허죽은 뭇 사람들이 대답하는 것을 보자 담이 조금 커져서 두 손을 맞잡아 보이고 말했다.
정말 고맙소. 고맙소이다. 두 번째 일은 여러분들이 하늘의 호생지덕과 부처님의 자비를 염두에 두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죽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개미도 자기의 목숨을 아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비린 것을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내 자신마저도 파계하여 비린 것을 먹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이건......살인은 어찌됐든간에 좋지 못한 일이니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나 역시 사람을 죽인 적이 있죠. 그렇기 때문에......
오노대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존주께서 명을 내리셨다. 영취궁의 속하인 뭇 형제들은 금후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 것이며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지어다. 그렇지 않을 때는 무거운 책벌이 있으리라.
군호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소이다.
허죽은 연신 두 손을 잡고 흔들어 보였다.
"나는......나는 정말 감격해 마지않는 바이외다. 다시 말하는 바이나 여러분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또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더욱더 여러분들 자신의 공덕을 쌓게 되고 착한 업보를 받게 되어 반드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보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오노대를 향해 웃으며서 말했다.
오 선생, 그대는 몇 마디 말을 정말 분명하게 말씀을 하시는데 하나는 되지 않는군요. 그대......그대 생사부는 어디에 적중되었습니까? 나는 그대의 것부터 뽑아 드리겠소이다.
오노대가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듯 뭇 사람들을 이끌고 반역을 꾀하게 된 것은 바로 체내의 생사부를 제거하자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허죽이 그의 생사부를 제거해 주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그야말로 무궁한 화근이 되어온, 뼈에 붙어 있는 구더기와 같은 생사부를 이제 제거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기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대단히 감격한 그는 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허죽은 재빨리 엎드려서 반례하고 말했다.
오 선생, 솔방울을 얻어맞아 생긴 배의 상처는 다 치유되었습니까? 그대는 동모의 단근부골환이라는 것을 먹었는데 우리들은 역시 방법을 강구해서 그 독성을 풀도록 합시다.
매검 등 네 자매는 기관을 움직여 대문을 꽉 막고 있던 커다란 바위를 치웠다. 그리고 주천, 균천, 현천 등 구부의 뭇 여인들을 대청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풍파악과 포부등 역시 소리소리 지르며 등백천, 공야건 등과 함께 일제히 들어왔다. 그들 네 사람은 문을 나서서 동모를 찾아 싸우려고 했으나 팔부의 뭇 여인들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포부동은 본래 언사가 불손한 면이 있고 풍파악은 싸우기를 좋아하는지라 두 세 마디를 나누기도 전에 그들은 여인들과 손을 쓰게 되었다. 얼마 후 등백천과 공야건이 개입하여 그들을 도왔다.
네 사람의 무공이 고강하기는 했으나 중과부적이어서 끝내 뒤로 밀려나야만 했고 모두 다 몸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만약 대문이 조금이라도 늦게 열리고 매란국죽 네 시비가 소리쳐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들 네 사람들은 사로잡히거나 목숨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모용복은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등백천 등을 데리고 산을 내려가겠다고 했다. 탁불범과 부용 선자 최록화는 먼저 인사도 하지 않고 가 버리고 말았다. 허죽은 모용복 등이 가려는 것을 보고 정말 사심없는 마음으로 만류하고자 했다.
모용복은 말했다.
불초는 표묘봉에 죄를 지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소. 형씨가 그 죄를 따지지 않는데 대해서 나는 이미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오. 그런데 또 어찌 폐를 끼칠 수 있겠소?
허죽은 말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오. 두 분 공자는 문무를 겸비하신 뛰어난 영웅이시라, 불초는 흠모해 마지않던 차입니다. 다만......다만......두 분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저는......실로 우둔하기......짝이 없답니다.
포부동은 조금 전 뭇 여인들과 싸울 때 중과부적으로 그만 몇 곳에 검상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화가 나있던 판인데 허죽이 너스레를 떨며 붙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자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모용복으로부터 허죽이 가슴속에 왕어언의 그림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직이 전해 들었던터라 더욱더 허죽을 밉게 보았다.
"이 땡초는 거짓 인의를 내세우고 있구나. 불문의 제자이면서도 우리 집안 왕 소저에게 불순한 마음을 몰래 품다니, 그야말로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음탕한 승려가 아닌가?
이와 같이 생각에 그는 입을 열었다.
스님이 영웅을 붙잡아 두겠다는 말은 거짓이고 미인을 붙잡아 두겠다는 말을 해야 진실일 것이오. 어째서 단도직입적으로 왕 소저를 표묘봉에 붙잡아 두어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소?
허죽은 아연해졌다.
그대는.......그대는 무슨 말씀을 하시오? 내가 무슨 미인을 붙잡아 둔다는 것이오?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는 마음에 불칙한 뜻을 품고 있소. 설마하니 고소 모용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백치인 줄로 아시는 것 아니오? 흐흐흐, 너무 가소롭소.
허죽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는 선생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없소. 그리고 무엇이 가소로운지도 알 수 없구려.
포부동이 화가 나 소리쳤다.
이 젊은 땡초야! 너는 소림사의 화상이었다. 즉 명문 제자란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사악한 문파로 바꾸어 처신했느냐 말이다. 거기다가 한 떼의 요마와 도깨비 같은 자들과 결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를 보기만 해도 나는 화가 난다. 일개 화상인 주제에 수백 명이나 되는 아녀자들을 너의 처첩과 정부로 만드는 것도 부족하여 우리 왕 소저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수작을 부려? 내 너에게 말하지만 왕 소저는 우리 집안 모용 공자의 사람이다. 못난 두꺼비야, 하늘의 거위 고기를 먹을 생각일랑 하지 말고 일찌감치 못된 마음을 버리는 것이 네게 좋을 것이다.
노기가 끓어오르게 되자 그는 손을 휘두르고 발을 구르며 허죽의 코를 손가락질하면서 크게 욕을 했다.
허죽은 아리송하기만 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나는......나는......
갑자기 획획,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오노대가 녹파향로귀두도를 휘두르자, 합대패도 한 자루 대철추를 들어올려서는 대결 자세를 취하며 포부동에게로 달려들었다.
모용복은 허죽이 이 사람들의 생사부를 해소시켜 주겠다고 응락을 한 이상 군호들은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혼전을 벌이게 되면 자기 쪽이 크게 위험하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때 오노대와 합대패가 동시에 달려드는 것을 보고 몸을 흔들하더니 앞으로 달려나가 두전성이의 재간을 펼쳐 이끌었다. 이렇게 되자 귀두도는 합대패에게 떨어지게 되었고, 커다란 철추는 오노대에게 떨어지게 되었다. 창, 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두 자루의 무기가 서로 맞부딪혀 불똥을 사방으로 튀겼다.
모용복은 그 즉시 손을 뒤로 돌려 포부동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 일 장 밖으로 물러서도록 만들었다.
그는 허죽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미안하오. 이만 실례하겠소.
그리고 몸을 흔들하더니 대청 문앞에 이르렀다. 그는 조금 전 문 입구의 기관장치를 본 적이 있었다. 만약 그 커다란 바위가 다시 옮겨지게 되어 대문을 가로막게 된다면 그야말로 그들은 여러 사람들에게 도살을 당할 판이라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죽은 재빨리 말했다.
공자님, 잠깐만, 결코......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나는......
모용복은 두 눈썹을 곤두세우고 몸을 돌리며 낭랑히 외쳤다.
귀하는 천하 무적이라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몇 수 가르침을 베풀겠다는 것이오?
허죽은 연신 두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닙니다.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소......
모용복은 말했다.
불초는 외람되게 찾아온 점을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렇다고 정말 우리들을 붙잡아 둘 생각이오?
허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아니외다......나......
모용복은 문 입구에 서서 오만한 태도로 허죽과 삼십육 동 및 칠십이 도의 군호들, 그리고 매란국죽의 사검은 물론 구천 구부의 뭇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군호들과 여러 대인들은 그의 기세에 압도되어 일시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모용복은 소맷자락을 떨치며 입을 열었다.
가세.
그는 가슴을 편 채 대문을 나섰다. 왕어언, 등백천 등 다섯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오노대는 분연히 말했다.
존주, 만약 그로 하여금 살아서 표묘봉 아래로 내려가도록 만든다면 모두들 어떻게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존주께서는 명령을 내리셔서 그들을 막도록 하십시오.
허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둡시다. 나는.......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려. 어째서 그가 그토록 갑자기 큰 화를 내는지. 후! 정말 알 수가 없구려......
오노대는 말했다.
그렇다면 속하가 가서 그 왕 소저를 잡아오리다.
허죽은 재빨리 말했다.
안 되오. 안 되오.
이때 왕어언은 단예가 대청에서 나서지 않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단 공자, 다시 만나요.
단예는 흠칫했다. 가슴속이 대뜸 쓰라리며 목구멍이 꽉 막혀왔다. 그리하여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다시......다시 만납시다. 나는.......나는 역시 그대와 함께 있는 것이......
그녀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단예의 뇌리에 포부동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왕 소저가 모용 공자의 사람이라고 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일찌감치 단념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거기다가 못난 두꺼비가 하늘의 거위 고기를 먹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모용 공자가 대청문을 나서게 되었을 때 그의 위세는 실로 늠름하였으며 영웅의 기개가 흘러 넘쳤다. 그는 단숨에 두 강적의 초식을 해소시켰으니 또한 얼만 심후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가? 나처럼 손에 닭 잡을 힘조차 없는 사람은 곳곳에서 못난 꼴을 보일 뿐이니 어찌 그녀의 눈에 차겠는가? 왕 소저가 그때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를 쳐다보는 눈초리와 안색은 그야말로 깊은 정이 잔뜩 담겨져 있었다. 흠모하고 또한 사랑스럽다는 빛으로 가득했지. 나는.......이 단예는 그야말로 한 마리의 못난 두꺼비에 불과할 뿐이다."
허죽은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의문을 풀 길이 없어 머리를 긁적이며 서성거리고 있었고 단예는 마음이 허전해서 넋을 잃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저 멍하니 서로 쳐다보고만 았었다.
한참 후에야 허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예 역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인형, 그대와 나는 동병상련이외다. 이 마음과 뼈에 새겨진 듯한 그리운 정을 어찌 떨쳐 버릴 수 있느냔 말이외다.
허죽은 그 말을 듣고 그만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았다. 그는 단예가 몽고와 정을 통했고 그 자신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단......단 공자. 그대는 또 어떻게......어떻게 알고 계시오?
단예는 말했다.
자도(子都)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자는 눈이 없는 자로소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로소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갖고 있는 법, 인형, 그대와 나는 똑같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몸으로 가슴에 맺힌 한은 영원히 풀 길이 없을 것이외다.
그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허죽이 품속에 왕어언의 초상을 감추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와 똑같이 왕어언에게 홀딱 반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모용복과 허죽이 충돌하게 된 것도 바로 왕어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인형의 무공은 절정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정이라는 것은 그저 연분에 따르는 것이외다. 글 재주나 무예가 어떻든간에 인연이 없으면 어떻게 하더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허죽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소이다. 부처님께서는 만 가지 법이 인연으로 생겨나며 모든 것은 그저 연분을 따른다고 했소이다......맞소이다. 그 연분은......그야말로 우연히 만나야지, 구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외다......그렇지만 한 번 헤어지게 된 이후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또 어디로 가서 찾아낸단 말이오니까?
그가 말하는 것은 꿈속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단예는 그가 말하는 것이 바로 왕어언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멍청한 구석이 있어서,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영취궁의 여인들은 연회석을 차렸다. 허죽과 단예는 손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여러 동과 도의 군호들은 영취궁의 부하들이라 그 누구도 감히 허죽과 동석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허죽은 손님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는지라 다른 사람이 다가오지 않자 역시 인사말로 "이리 오시오" 하는 법도 없이 그저 단예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단예의 마음은 오로지 왕어언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감정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저 칭찬의 말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이 어떻게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자색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한지 모르겠다는 등의 말이었다.
허죽은 그저 단예가 자기의 꿈속에서 만난 여인을 칭찬하는 말로만 알고서 그에게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감히 묻지도 못했다. 더구나 그 여인의 내력을 알아볼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고 그저 가슴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동모가 돌아기시게 되면 천하에서 그 소저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하늘이 불쌍히 여기시어, 놀랍게도 단 공자께서 알고 계시는구나. 그러나 그의 말로 미루어 보면 그 소저에 대해서 역시 사랑하는 정으로 가득차 있고 그리워하는 뜻으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내가 그녀와 얼음 창고에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슬쩍 들추기만 해도 단 공자는 반드시 크게 화를 내고 이 자리를 떠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는 그녀의 행방을 알아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는 단예가 한없이 그 소저를 칭찬하자, 자기의 마음도 그런지라 덩달아서 칭찬의 말을 했다. 덩달아 하는 말이었지만 사실은 매우 진실된 말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각기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얘기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을 하나로 얽어 놓고 있었다. 다만 그 누구도 두 소저의 이름을 들먹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고받는 말이 척척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허죽은 말했다.
단 공자, 불가에서도 만 가지 법이 모두 다 하나의 인연에서 온다고 했소. 경문에 이르되 "모든 법은 인연에서 생기며 모든 법은 인연에서 멸한다"고 했소이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소이다. 그리고 달마 대사께서도 중생의 고락은 인연에 따르는 것이라고 했소이다. 그리고 어떤 기쁜 일이 있거나 즐거운 일이 있는 것도, 옛날에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오늘에사 얻게 된 것이라고 했소. 인연이 다하게 되면 모두 없어지는 것이니 기뻐할 까닭이 없다고 말씀하셨소이다.
단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이다. 득과 실은 인연에 따르는 것이고, 마음에는 보태지거나 감해지는 법이 없는 것이죠. 말은 그렇게들 하지만, 우리들은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으니, 어떻게 득과 실을 인연에 따르도록 하고 마음에 보태거나 감소되는 것이 없도록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도록 도를 닦을 수 있겠소이까?
대리국에서는 본래 불교가 크게 성행했다. 따라서 단예는 어릴 적부터 불경을 통독하였다. 두 사람은 하나가 한 마디 금강경(金剛經)을 인용하면, 하나는 한 마디 법화경(法華經)을 인용하면서 스스로 위로하며 또 스스로 서글픔에 젖어 탄식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똑같은 처지임을 동정했다. 매란국죽 네 소녀는 끊임없이 술을 권했다. 단예가 한 잔의 술을 마시면 허죽 역시 한 잔의 술을 마셨다. 그리고 야밤이 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군호들이 일어나 작별을 고하자 뭇 여인들은 그들이 머물 곳을 안내했다.
허죽과 단예는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으나 여전히 서로 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날 단예가 소봉과 무석성 밖에서 만나 술내기를 하게 되었을 때 내공으로 술을 손톱 사이로 뽑아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술을 빌어 근심을 달래는 격이라 정말로 마시고 있었다. 그리하여 흐리멍텅한 생각 속에서도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입을 열었다.
인형, 나에게는 의형제를 맺은 형님이 한 분 있소이다. 성은 교이고 이름은 봉이라 하는데 이 사람을 그야말로 대영웅이시고 대호걸이외다. 무공과 주량에 있어서 그야말로 상대가 되는 사람은 없죠. 인형이 만약 그를 만나게 된다면 역시 흠모하고 좋아하게 될 것이외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계시지 않으니 퍽이나 애석하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세 사람이 의형제의 의를 맺고 함께 의리를 맺게 된 즐거움을 누리게 될텐데......그러면 한평생 좀처럼 얻기 힘든 통쾌한 일이 되지 않겠소이까?
허죽은 한 번도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그저 내공의 정순한 힘으로 말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라 있었고, 혀 꼬부라진 목소리를 냈다. 본래 조심스럽고 담이 적은 그였는데 갑자기 호기가 크게 이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단 공자, 만약에...... 만약에......나를 업수히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 두 사람이 먼저 결의형제를 맺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후 교 큰형님을 만나서 다시 한번 더 절을 하면 될 것이 아니겠소?
단예는 크게 기뻐했다.
그것 참 좋소이다. 잘 됐소이다. 형은 몇 살이나 되셨소?
두 사람은 나이를 따져 보았다. 허죽이 세 살 더 위였다.
둘째 형님, 소제의 절을 받으십시오.
그는 의자를 밀어제치고 무릎을 꿇었다. 허죽은 급히 반례한답시고 절을 했는데 그만 발에 기운이 없어서 앞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단예는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손을 뻗쳐 부축했다. 바로 이때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진기가 서로 맞닥뜨리게 되었고 쌍방이 다 상대방의 몸안에 내력이 충만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급히 스스로 진기내력을 거두어들이고 억제했다.
이때 단예는 이미 취할 대로 취해 있었고 발걸음을 휘청거리면서 제대로 서 있지 못했다. 두 사람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서로 껴안은 채 땅바닥에 뒹굴었다.
단예는 말했다.
둘째 형, 소제는 아직 취하지 않았소이다. 우리 두 사람이 다시 백 잔의 술을 더 마시도록 합시다.
허죽은 말했다.
물론 세째 아우를 상대로 통쾌하게 마셔 주지.
단예는 말했다.
인생에서 득의하게 되었을 때에는 마음껏 즐기되 결코 빈 술잔이 헛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소. 하하하, 우리 즉시 삼백 잔을 들도록 합시다.
두 사람은 갈수록 정신이 흐릿해져 끝내는 모두 취해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39. 외국의 고승들이 몰려와 욕심을 부리나 그 잔꾀를 간파하기 어렵다
이튿날 허죽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부드러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눈을 떠 휘장 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지극히 커다란 방안이었다. 주위는 널찍한 게 마치 소림사의 선방과 같았다. 방안은 매우 고아하게 꾸며져 있었고 구리로 만들어진 향로와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때 한 소녀가 자기 쟁반을 들고 침대 가에 이르렀다. 바로 난검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주인님, 깨어나셨군요. 입가심을 하세요.
허죽은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말랐다. 대접 안에는 노란 찻물이 담겨 있었다. 그는 즉시 받아 마셨는데 입안에 들어가자 달콤하면서도 씁쓸하여 차의 맛과 많이 달랐다. 그러나 그는 꿀걱 꿀꺽 깨끗하게 다 마셨다. 그는 여지껏 인삼탕을 맛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차맛이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누님, 고맙습니다. 나는 이제 몸을 일으켜야겠으니 누님은 밖으로 나가시오.
난검이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방문 밖에서 다시 한 소녀가 들어왔다.
바로 국검이었다.
그녀는 미소하며 말했다.
저희 자매 두사람이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 드리죠.
그녀는 침대 옆의 의자에 있던 한 벌의 담청색 내의를 허죽이 덮고 있는 이불속으로 넣어 주었다.
허죽은 얼굴을 붉혔다.
아니오, 아니오......누님들이 수중들 필요가 없소이다. 나는 상하거나 병이난 것도 아니고 그저 술에 취했을 뿐이 아니겠소? 아, 이렇게 되면 주계(酒戒)마저도 범하게 된 셈이구려. 경문에는 술을 마시면 서른 여섯 가지의 과실을 저지르게 된다고 했으니 이후에는 마시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군. 한데 세째 아우는? 단 공자는? 그는 어디 있소?
난검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단 공자께서는 이미 하산하셨어요. 떠나실 때 영취궁의 모든 일을 처리한 이후 주인께서 중원으로 나오시면 만나자는 말을 전해달라고 제게 말씀하였습니다.
허죽은 어이쿠, 하고 부르짖으며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있었는데 어째서 인사도 없이 떠나고 말았지?
다급한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단예를 뒤쫓아 갈 셈이었다. 뒤쫓아가서 꿈속에서 본 여인의 성명과 거처를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깨끗한 월백(月白)의 내의를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하는 소리를 지르며 그는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 자기의 몸을 덮고 놀라 물었다.
내가 어떻게 옷을 바꾸어 입었소?
그가 소림사에서 입고 나온 옷은 거친 베로 만든 내의와 바지였다. 반 년 동안 입었기 때문에 이미 다 떨어지고 더럽혀져서 거의 걸레가 되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은 촉감이 몹시 부드러웠다. 능라인지 아니면 비단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비싼 옷감임에는 틀림없었다.
국검은 웃으며 대답했다.
주인께서는 어제 밤 대취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네 자매가 주인께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도록 시중을 들었죠. 주인께서는 기억이 없나요.
허죽은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난검과 국검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옥과 같이 아름다웠는데 방긋 웃고 있는 모습은 꽃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여전히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내키지 않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취해서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구려. 그래도 스스로 목욕을 할 줄 알았으니 천만다행이오.
난검은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 밤 주인께서는 꼼짝도 못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네 자매가 주인을 씻어드렸다구요.
허죽은 아, 하고 크게 부르짖었다. 그는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를 덮었다.
야단났군! 야단났어!
난검과 국검 역시 그가 하는 짓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주인님, 무슨 일이 잘못되었습니까?
나는 남자인데 네 분 누님들 앞에서 ......그야말로 벌거숭이 몸을 드러냈으니......이야말로......큰일이 아니겠소? 더군다나 나는 온몸이 때 투성인데다가 냄새가 나고 더러웠을 터인데, 그와 같이 더러운 몸을 씻는 일에 어찌 누나들에게 수고를 끼쳤을까요?
난검은 말했다.
우리 네 자매는 주인의 시비입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몸이 가루가 된다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들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주인께서는 책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녀는 국검과 함께 땅바닥에 엎드렸다. 허죽은 고개를 이불 밖으로 내밀었다.
그녀들 두 사람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여파파와 석수 등도 자기가 그들에게 예의로써 대하자 모두 놀라 전신을 벌벌 떨지 않았던가. 생각컨대 난검이나 국검 역시 동모의 안색이나 말투에 젖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동모의 인사가 조금이라도 부드럽고 안색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면 즉시 살수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죽은 말했다.
두 분 누나......음, 그대들은 빨리 일어나서 나가도록 하시오. 내 스스로 옷을 입겠소. 그대들이 시중들 필요는 없소이다.
난검과 국검 두 소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뒷걸음질쳐서 걸어나갔다.
허죽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녀들에게 물었다.
내......내가 그대들에게 죄를 지었소? 그대들은 어째서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이오? 아마도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군요. 그건......
국검은 말했다.
주인께서 저희 자매들에게 나가라고 하고, 저희들로 하여금 주인이 옷을 입고 세수하는 것을 시중들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를 싫어하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허죽은 연신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니외다. 아, 나는 말을 할 줄 몰라 무슨 일이든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는군. 나는 남자이고 그대들은 여자들이니 그 점......그 점 때문에 서로 거북하단 말이외다. 정말 다른 뜻은 없소이다....... 부처님이 굽어 보시고 계신데 출가인이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내 결코 그대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오.
난검과 국검은 그가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 다급히 말하는데 그 표정이 매우 진지한지라 눈물을 흘리던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일제히 입을 열었다.
주인께서는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영취궁에는 한 번도 남자들이 거주한 적이 없습니다. 주인님은 하늘이고 시비들은 땅입니다. 어찌 남녀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두 소녀는 사뿐사뿐 다가와 허죽에게 옷을 입혀 주고 신발을 신겨 주었다.
얼마 후 매검과 국검도 걸어들어와 한 사람은 그의 머리를 빗겨 주었고 한 사람은 그의 얼굴을 씻겨 주었다.
허죽은 놀라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다만 얼굴을 붉힌 채 가슴만 두근거릴 뿐이었다.
그는 단예가 이미 멀리 갔을 터이니 뒤쫓아간다 하더라도 잡을 수 없을 것이고, 또한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의 군호들 몸에 박힌 생사부도 제거하지 못한 터라 당장 이곳을 떠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침밥을 먹은 후 대청으로 나아가 군호들을 만났다. 그리고 가장 아파하는 두 사람의 생사부를 뽑아 주었다.
주인, 영취궁의 후전에는 수백 년 전의 옛 주인이 남겨 놓은 석벽의 그림이 있습니다. 시비들이 모모에게 들은 말씀에 따르면 그 그림들은 생사부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주인께서 한 번 가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허죽은 기뻐했다.
그것 참 잘 되었소.
그는 즉시 매란국죽 네 시비의 인도를 받아 화원으로 갔다. 한 채의 가산에 장치되어 있는 문을 열자 지하도 입구가 나타났다. 매검은 횃불을 높이 들고 앞장서서 걸어 들어갔다. 다섯 사람은 차례로 뒤를 이었다.
길을 가면서 매검은 은밀한 곳에 있는 기관 장치들을 눌렀다. 미리 숨겨놓은 암기와 함정들이 작동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 지하도는 구불구불하게 맴돌듯 아래로 향해 나 있었다. 때로는 넓어지기도 했다.
죽검은 말했다.
그 종놈들이 궁을 공격해 들어오고 균천부의 자매들이 모조리 잡히게 되었을 때 우리 네 자매는 적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 곳으로 도망을 쳤어요. 그리고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방법을 강구하여 사람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약 이 마장 정도 나아갔을 때였다. 매검은 손을 뻗쳐 왼쪽에 있는 한 조각의 커다란 바위를 한쪽으로 밀어제치고 말했다.
주인께서 안으로 드십시오. 안은 바로 석실인데 시비들은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답니다.
허죽은 물었다.
어째서 감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오? 안에 어떤 위험이라도 있소?
매검은 말했다.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본궁의 중지(重地)로서 시비들은 감히 함부로 들어설 자격이 없습니다.
허죽은 말했다.
함께 들어간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소? 바깥의 지하도가 이토록 좁으니 서 있기 불편할 것이오.
네 자매는 서로 쳐다보면 기쁜 빛을 띄웠다.
매검은 말했다.
주인님, 모모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들 자매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만약 우리 네 자매가 충성을 다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애써 무공을 연마한다면, 우리 자매들이 사십 세 되는 해에 매년 이 석실에 와서 하루를 묵으며 석벽에 새겨진 무공을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하겠노라고요. 설사 주인께서 커다란 은혜를 베푸시어 모모가 하신 약속을 지키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십이 년 후의 일이 될 거예요.
허죽은 말했다.
다시 이십 이 년을 기다린다면 그건 너무나 답답한 노릇이 아니겠소? 그렇게 되면 그대들 역시 늙어 버리고 말 것이니 무슨 무공을 배우겠소? 함께 들어 갑시다.
네 소녀는 크게 기뻐 즉시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허죽은 말했다.
일어나시오. 일어나시오. 이곳은 협소하니 내가 꿇어 엎드려 반례를 하면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밀고 밀리게 될 것이오.
다섯 사람은 함께 석실로 들어갔다. 사면 벽의 암석은 갈고 닦아 광채가 나고 매끄러웠다. 그리고 석벽에는 한 자 정도의 원이 무수히 그려져 있었다. 그 원안에는 각양각색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것은 사람의 모습이었고, 어떤 것은 짐승의 모습이었으며 또 어떤 것은 완전하지 못한 문자였다. 그리고 어떤 것은 다만 기호와 선뿐이기도 했다.
그리고 둥근 원 곁에는 갑일(甲一), 갑이(甲二), 자일(子一), 자이(子二) 등 숫자가 표시돼 있었다. 둥근 원의 수는 천(千)은 안 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팔구 백은 될 것 같았다.
죽검은 말했다.
저희들은 먼저 갑일의 그림을 보기로 하죠. 주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사람은 횃불을 들고 갑일이라고 표시된 둥근 원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허죽은 대뜸 그 테두리 안에 그려진 것이 바로 천산절매수의 제 일초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천산절매수로군.
갑이를 바라보았다. 과연 천산절매수의 제 이초였다. 천산절매수가 끝난 이후에는 바로 천산육양장의 도해가 새겨져 있었다. 동모가 서하 황궁에서 전수해 준 각종 요결과 심오한 뜻은 모두 다 둥근 원 안에 설명되어 있었다.
석벽의 천산육양장 이후의 무공 초식은 허죽이 배우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그림에 제시된 대로 진기를 돋우었다. 몇 수를 배우자 몸이 날렵하게 허공으로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어딘가 미흡한 점이 있는 듯 몸을 위로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운기조식을 했다. 갑자기 아아, 하는 두 마디의 놀람에 찬 소리가 들렸다. 허죽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난검과 죽검, 두 소녀가 몸을 흔들하더니 잇따라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매검과 국검, 두 소녀도 석벽에 손을 댄 채 안색이 크게 변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몸을 휘청거렸다.
허죽은 재빨리 난검과 죽검 두 소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놀라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오.
죽검은 말했다.
주......주인, 저희들은 공력이 얕아서 이곳의......이곳의 도형을......볼 수 없답니다. 저희......저희들은 밖에서 시중을 들겠습니다.
네 소녀는 석벽을 짚으며 천천히 석실에서 나갔다.
허죽은 한동안 멍해졌다. 그러나 곧 뒤따라 나갔다. 그러고 보니 네 소녀는 통로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고통의 빛이 가득했다.
허죽은 그녀들이 이미 심한 내상을 입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천산육양장을 펼쳐 소녀들의 등에 있는 혈도를 가볍게 몇 번 쳤다. 한 가닥 따뜻하고 웅후한 기운이 각 소녀의 몸안으로 스며들었다.
네 소녀의 안색은 대뜸 평온하게 변했다. 얼마 안 되어 각자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하더니 차례로 눈을 뜨고 부르짖었다.
주인께서 공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시비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네 소녀는 넙죽 절을 했다.
허죽은 재빨리 그녀들을 부축하며 말했다.
어째서 멀쩡하던 사람이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게 되었나요?
매검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주인님, 과거 모모께서 우리에게 사십 살이 된 이후에야 매년 이 석실에 와서 하루 동안 그림을 볼 수 있다고 한 것에는 깊은 뜻이 있었나봐요. 이 도형에 새겨져 있는 무공은 너무나 심오합니다. 시비들이 분수를 모르고, 갑일이라고 적혀 있는 도형에 따라 무공을 연마하자 진기가 부족하여 그만 진기가 경맥의 다른 갈랫길로 흘러 들어갔던 것입니다. 만약 주인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희 네 자매는 아마 영원히 병신이 되거나 죽고 말았을 거예요.
난검은 말했다.
모모께서는 저희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계셨어요. 저희 자매들이 사십 세가 되면 이 상승무공을 연마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나봐요. 하지만......하지만 시비들의 자질이 너무나 용렬하여 설사 이십 이 년을 더 연마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석실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할 거예요.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랬었구려. 그렇다면 나의 잘못이외다. 내가 그대들에게 들어가도록 권하지 않았어야 했나 보군요.
네 소녀는 다시 땅바닥에 엎드렸다.
주인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것이야말로 주인의 은덕이십니다. 다만 시비들이 너무 건방져서 함부로 행동을 한 탓이지요.
매검은 말했다.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의 그 종놈들이 균천부의 자매들에게 모모께서 보물을 감추어 둔 장소를 대라고 다그쳤지만 여러 언니들은 죽더라도 굴하지 않았어요. 저희 네 자매는 본래 그들을 이 지하도로 끌어들여 기관을 발동시켜 모조리 지하실 안에서 섬멸할 생각이었으나. 그 종놈들 가운데 기관을 깨뜨리는 데 능한 자가 있어서 만약 석실로 들어가 석벽의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야말로 무궁한 화를 남기게 될까봐 두려웠어요. 그런데 이와 같은 사정을 진작 알았더라면 그들이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을 뻔했어요.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소. 이 도해를 공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그야말로 어떤 독약이나 예리한 무기보다도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될 것이오. 그들이 들어오지 않아 다행이었소.
난검은 미소했다.
주인은 정말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허죽은 화제를 돌렸다.
나는 몇 수를 연마하게 되자 크게 정신이 드는 것을 느꼈고 내력이 충만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이제 그들에게 가서 생사부를 뽑아 주어야겠소. 그대들은 잠시 돌아가 쉬도록 하시오.
다섯 사람은 지하도에서 걸어나왔다. 허죽은 대청으로 돌아가 세 사람의 생사부를 제거해 주었다.
이후 허죽은 매일 같이 군호들의 생사부를 제거했다. 그러다가 정신적으로 피로함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석실로 가서 상승의 무공을 연마했다. 네 소녀는 석실 밖에서 기다릴 뿐 다시는 석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이십여 일이라는 시일이 지나게 되었을 때, 군호들은 몸에 박힌 생사부를 모조리 뽑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허죽은 매일 같이 석벽의 도형을 보고 차분히 연구하고 익힌 결과 무공이 크게 진보하게 되었다. 그가 처음 표묘봉으로 올라왔을 때와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군호들이 과거 동모에게 신하로서 복종해 온 것은 생사부에 제압당해 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영취궁의 주인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허죽이 성실하게 그들을 대해 줄 뿐만 아니라 깍듯이 예의를 지키자, 군호들은 오만하고 난폭한 인물이긴 하지만, 역시 은혜를 느끼고 허죽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일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각 동주와 각 도주가 나누어서 산을 내려간 이후 봉우리 위에는 허죽이라는 단 한 사람의 남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아였으며 절의 사부님들께서 키워 주셨다. 만약에 소림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배은망덕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소림사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방장과 사부님에게 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즉시 네 시비와 뭇 여인들에게 연유를 설명하고 그 날로 산을 내려갔다. 영취궁의 모든 일은 구부의 우두머리인 여파파, 석수, 부민의 등이 상의해서 처리하라고 했다.
네 시비는 허죽을 시종들고자 했으나 허죽은 거절했다.
내가 소림사로 돌아가는 것은 다시 화상이 되려는 거랍니다. 화상에게 시녀가 따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는 재삼 재사 설명을 했으나, 네 시비는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허죽은 아예 삭발을 하는 칼을 들어 머리카락을 모조리 싹싹 밀어 버리고 이마에 받은 계(戒)를 드러냈다. 그제서야 네 시비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눈물을 뿌리며 작별을 했다.
허죽은 옛날에 입던 승포를 걸치고 성큼성큼 숭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성격상 길을 가면서 남에게 시비를 걸 사람도 아니었고, 또 그와 같이 옷차림이 남루한 젊은 화상에게 도적들이나 나쁜 사람들이 시비를 걸 이유도 없었다. 그리하여 편안무사하게 소림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시 소림사 지붕 위의 누런 기왓장을 대하게 되자, 그는 감개가 무량했고 더불어 부끄러움을 느꼈다. 떠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기는 그야말로 계율을 어겨도 너무나 많이 어긴 것이 아닌가. 살계(殺戒), 음계(淫戒), 훈계(훈계), 주계(酒戒)는 말할 것도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파라이대게(波羅荑大戒) 등 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방장과 사부님께서 용서를 하시어 자기가 다시 불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실지 걱정이었다.
그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즉시 사부 혜륜(慧輪)을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혜륜은 그가 돌아온 것을 보고 놀람과 기쁨에 차 물었다.
방장께서 너에게 산을 내려가 영웅첩을 돌리도록 시켰는데 어째서 오늘에야 돌아오는 것이냐?
허죽은 땅바닥에 엎드려 과거의 일을 크게 뉘우치며 소리 내어 울었다.
사부님, 제자......제자는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산을 내려간 이후 참지 못하고......사부님......사부님의 가르침을......모두......저버리게 되었습니다.
혜륜의 안색이 변해 물었다.
뭐......뭐라구? 너는 비린 것을 먹었느냐?
허죽은 말했다.
예, 비린 것만 먹었겠어요?
혜륜은 꾸짖었다.
이런 고약한......너는......술도 마셨느냐?
허죽은 말했다.
제자는 술을 곤드레만드레 취하도록 마셨습니다.
헤륜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줄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네가 어릴 적부터 중후하고 얌전하다고 보아왔다. 어찌하여 화려한 세상으로 나가자마자 그토록 타락했단 말이냐? 아, 아......
허죽은 사부가 상심해 하는 것을 보고 더욱 황송해서 말했다.
사부님, 제자가 범한 계율은 그러한 점보다 더욱 많습니다. 더구나......더구나......
그가 살계와 음계까지도 범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종 소리가 꽝 꽝, 울려퍼졌다. 원래 두 번 짧게 울려퍼지는 종소리인데 급히 두 번을 치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두 번을 치는 소리가 났다. 이것은 혜 자 항렬의 뭇 승려들을 소집하는 신호였다.
혜륜은 즉시 몸을 일으키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너는 너무나 많은 계율을 어겨 나 역시 너를 감싸줄 수 없구나. 너는......너는......스스로 계율원으로 가서 벌을 받도록 해라. 이번 일은 나에게도 커다란 잘못이 있다. 아, 이걸.......이걸......
그는 총총히 달려나갔다.
허죽은 계율원으로 나아가 허리를 굽히고 품했다.
제자 허죽은 불문의 계율을 어겼습니다. 삼가 계율을 관장하시는 장로께서 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가 두 번 말하자 계율원 안에서 한 명의 중년 승려가 나오더니 냉랭히 물었다.
수좌와 계율을 관장하시는 사숙께서는 볼 일이 있어서 너의 말을 들을 여가가 없다. 너는 여기서 꿇어 앉은 채 기다리도록 해라.
허죽은 말했다.
예.
그는 정오에서 해질 무렵까지 꿇어앉아 있었다.
저녁을 알리는 종 소리가 울려퍼졌다. 소림사의 저녁 공부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허죽은 나직이 염불을 하며 잘못을 참회했다. 그 중년 승려가 오더니 말했다.
허죽, 이 며칠간 절 안에는 큰일이 있다. 장로들께서는 너의 일을 처리할 여가가 없다. 네가 꿇어앉은 채 염불을 하는 것을 보니 정말 경건하고도 성실하게 참회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구나. 이렇게 하자. 너는 먼저 채소밭으로 가서 똥을 퍼서 채소에 거름을 주면서 때를 기다리도록 해라. 그리하여 장로들께서 여가가 있으실 때 다시 너를 불러서 자세한 사정을 알아볼 터이니 그 사정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벌을 받도록 하여라.
허죽은 공손이 대답했다.
예,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합장을 하고 절을 한 후 몸을 일으키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를 즉시 산문 밖으로 쫓아내지 않는 것을 보면 희망이 없지는 않구나."
그는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그는 채소밭으로 가서 채소밭을 관리하는 승려에게 말했다.
사형, 소승 허죽은 본문의 계율을 어겼소이다. 계율원의 사숙께서는 나에게 똥을 져다가 채소밭에 뿌리는 벌을 내렸습니다.
그 승려의 이름은 연근(緣根)으로서 소림사에 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 혜, 허, 공 등의 배분에 따른 자를 사용하지 않고 연근이라는 법호로 불려지고 있었다. 이 연근이라는 승려는 자질이 평범하고 용렬하여 참선의 뜻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무공을 연마함에 있어서도 별 진보가 없었다. 이 채소밭은 약 이백 마지기가 되어 삼사 십 명의 일꾼들이 딸려 있었다. 연근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게 되자 퍽이나 거드름을 피웠다. 더군다나 계율원에서 벌을 받고 이 채소밭으로 나와 벌을 받는 승려를 만나게 되었을 때는 더욱더 위풍을 떨치곤 했다.
그는 허죽의 말을 듣자 속으로 무척 기뻐하며 물었다.
자네는 무슨 계율을 어겼는가?
허죽은 대답했다.
계율을 어긴 것이 너무 많아 한 마디로 다 말할 수가 없답니다.
연근은 노여운 듯 부르짖었다.
뭐가 한 마디로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냐? 너는 솔직히 나에게 설명해 보도록 해라. 너는 직책이 없는 젊은 화상에 불과하니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설사 달마원 나한당의 수좌가 계율을 어겨 이 채소밭으로 오게 된다 해도 나는 그가 지은 잘못을 알아내고야 만다. 누가 감히 대답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내가 너를 볼 때 얼굴이 불그레하고 허여멀쑥한 것이 틀림없이 비린 것을 훔쳐 먹은 것 같구나. 그렇지 않느냐?
허죽은 대답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연근은 말했다.
흥, 그것봐라, 나는 대번에 알아맞추지 않느냐? 어쩌면 또 몰래 술을 훔쳐 먹었을지도 모르지. 잡아뗄 것 없다. 나를 속이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
허죽은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소승은 어느 날 곤드레만드레 되도록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연근은 웃었다.
쯧쯧쯧, 정말 대담하구나. 흐흐흐흐, 술을 잔뜩 퍼마시다니. 그렇게 되면 마음이 이상야릇하게 설레이게 되고 색이 바로 공이고 공이 바로 색이라는 한마디도 저 멀리 사라져버리게 되지. 그러니까 너는 그때 마음속으로 여자들을 생각했겠지, 그렇지? 한 번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칠 팔 번은 생각했을 것이다. 네가 감히 부인하지는 못하겠지.
허죽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승이 어찌 감히 사형의 면전에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음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연근은 허죽을 손가락질하며 욕을 했다.
젊은 녀석이 너무나 당돌하구나. 감히 우리 소림사의 명성을 떨어뜨리다니, 음계 외에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물건을 훔친 적은 없느냐? 다른 사람의 재물을 가로챈 적은 없느냐? 다른 사람과 싸우거나 입씨름을 벌인 적이 없느냐?
허죽은 고개를 숙였다.
소승은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닙니다.
연근은 그만 깜짝 놀라 안색이 대변해서 세 걸음쯤 물러섰다. 허죽이 사람을 죽인 적이 있고, 그것도 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말을 하자 그만 간담이 서늘해지고 만 것이다. 혹시나 그가 성질을 터뜨려 자기에게 손을 쓰게 된다면 자기는 십중팔구 적수가 되지 못하니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온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고 말했다.
본사의 무공은 천하 제일이지. 무공을 연마한 사람이면 누구나 실수하여 사람을 해칠 수도 있 는 법, 사제의 무공이 정말 뛰어났던 게로군.
허죽은 말했다.
정말 부끄럽십니다. 소승이 배운 본문의 무공은 모두다 제거되어 지금은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연근은 크게 기뻐 잇따라 부르짖었다.
아주 좋다. 아주 좋다. 무척 잘 되었다. 무척 잘 되고 말고.
그는 본문의 무공을 깡그리 상실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많은 계율을 어겼기 때문에 본사의 장로에 의해 무공이 제거된 줄로 알았다. 그는 대뜸 얼굴 빛을 바꾸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무공이 이미 제거되었다고는 하나 만약에 몇 푼 정도라도 남아 있다면 내가 쉽게 상대할 수는 없지."
그는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제, 자네가 채소원으로 와서 노동을 하여 참회를 한다는 것이야말로 잘된일일세. 그러나 우리 이곳의 규칙에 따르면 무릇 계율을 어기고 손에 피비린내를 묻히게 된 승려는 일을 할 때 반드시 손과 발에 쇠고랑을 차야 한다네. 이것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규칙이라네. 사제도 쇠고랑을 차야 되지 않을까? 만약 싫다면 나는 계율원에 알려야 한다네.
허죽은 말했다.
규칙이 그러하다면 소승은 마땅히 받들어야지요.
연근은 속으로 기뻐했다. 즉시 강철로 만든 쇠고랑을 꺼내 그의 손과 발에 채웠다.
소림사는 수백 년간 무공을 전수하고 익혀 오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자연 그 가운데 좋지 못한 승려가 있어 나쁜 짓을 할 경우도 있었다. 더군다나 계율을 어긴 승려는 종종 무공이 지극히 높고 강해 쉽게 제압할 수 없었다. 그렇게 때문에 계율원, 참회당(懺悔堂), 채소밭 각 처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쇠고랑이 준비되어 있었다. 연근은 허죽이 쇠고랑을 차게 되자 크게 마음이 놓였다. 그는 즉시 욕을 했다.
이 도적같은 녀석아. 너와 같이 어린 나이에 감히 그와 같이 당돌하고 험악한 행동을 하다니.......모든 계율을 남기지 않고 어기다니, 오늘 너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내 어찌 가슴속에 꿇어오르는 의분을 누를 수 있겠느냐?
그는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머리고 정수리고 가리지 않고 허죽에게 매질을 가했다.
허죽은 진기를 거두어들였다. 감히 내력으로 반항하지 못한 채 그가 때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삽시간에 온 얼굴과 옴 머리에 피가 낭자하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염불을 할 뿐 얼굴에 조금도 불쾌한 빛을 띄우지 않았다.
연근은 그가 피하지도 않고 항변도 하지 않는지라 속으로 생각했다.
"이 화상은 정말 무공을 잃은 것이로구나. 나는 크게 그를 짓밟아도 되겠다."
그는 허죽이 생선이나 육류를 마음껏 먹고 또 술을 취하도록 처마신 후 음탕한 즐거움을 누렸다는 사실에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자기는 헛되이 사십여 세를 살았을 뿐 한 번도 그와 같은 맛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시기하는 마음이 복받쳐 오르자 그는 더욱더 무섭게 매질을 가했다. 그리하여 세 대의 나뭇가지가 부러진 이후에야 겨우 매질을 멈추고 명령했다.
너는 매일 같이 백 통의 똥을 떠메어 채소밭에 뿌려야 한다. 한 지게라도 모자란다면 나는 바로 그 딱딱한 지렛대나 쇠막대기로 너의 두 다리를 분질러 놓겠다.
허죽은 무지막지하게 매질을 당하는 고통을 받게 되자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져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많은 계율을 어겼으니 응당 중벌을 받아 마땅하다. 내가 중벌을 받으면 받을수록 지은 죄는 훨씬 많이 용서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허죽은 연근의 말에 공손히 대답했다.
예.
그는 낭하로 가서 똥통을 들고 똥을 져다가 밭에 뿌렸다. 밭에 똥물을 뿌리는 것은 매우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허죽은 조금도 얼렁뚱땅 넘기지 않고 고르고 충분하게 뿌려갔다. 깊은 밤까지 백 통을 다 뿌린 후에야 나뭇간으로 들어가 벌렁 누워 잠을 잤다.
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에 연근은 달려와 주먹질을 하고 발로 차며 그를 깨우고는 욕을 했다.
이 도적 같은 화상아. 게으름을 피우느냐?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이곳에서 자빠져 자느냐? 일어나 나무를 패라.
그는 항의하지 않고 나무를 패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레가 흘렀다.
팔일째 되는 아침 허죽이 나무를 패고 있을 때 연근이 다가오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사형, 고생이 많구려.
그는 열쇠를 꺼내 그의 손과 발에 채웠던 쇠고랑을 풀었다. 허죽은 대답했다.
뭐 수고랄 것도 없죠.
그는 도끼를 들고 다시 나무를 패려고 했다.
연근은 말했다.
사형, 나무를 패지 마십시오. 사형은 집안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십시오. 소승은 이 며칠간 그야말로 많은 죄를 지었으나 아무쪼록 사형께서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허죽은 그의 말투가 크게 변한 것을 보고 매우 의아했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연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그의 코는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눈가는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마도 그 누구에게 한바탕 매질을 크게 당한 모양이었다. 그는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연근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소승은 그야말로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형에게 죄를 지었소이다. 사형이 만약 용서하지 않는다면, 나는......나는......그야말로 큰 화를 당하게 된답니다.
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스스로 계율을 어겼으니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따라서 사형이 내린 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근은 안색이 변하더니 손을 들고 철썩, 철썩, 자신의 양쪽 뺨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좌우 뺨을 힘주어 네 번 친 다음 빌었다.
사형, 사형, 제발 부탁이니 적선 좀 해주구려. 대인은 소인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소. 나는......나는......
그는 다시 철썩, 철썩, 두 대의 뺨을 갈겼다. 허죽은 크게 의아하여 물었다.
사형은 어째서 이러십니까?
연근은 두 무릎을 꿇더니 땅바닥에 꿇어앉아 허죽의 옷자락을 잡고 말했다.
사형께서 만약 용서하시지 않는다면 나의......나의 이 한 쌍 눈동자를 보존할 수 없게 됩니다.
허죽은 말했다.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연근은 말했다.
그저 사형이 나를 용서하고 나의 두 눈을 뽑지 않겠다고 하시면 소승은 내세에 소와 말이 되어서라도 사형의 대은대덕에 보답하겠소이다.
허죽은 말했다.
사형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내가 언제 그대의 눈을 뽑는다고 했습니까?
연근은 얼굴 빛이 흑색이 되어 말했다.
사형께서 반드시 용서해 주지 않으려고 한다면 부득이 내 스스로 빼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오른손의 두 손가락을 뻗치더니 자기의 눈을 찌르려고 했다. 허죽은 손을 뻗쳐 그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누가 그대에게 눈을 뽑으라고 했소?
연근은 땀을 뻘뻘 흘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릴 수 없소이다. 만약 말씀드린다면 그......그들은 즉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갈 것이외다......
허죽은 물었다.
방장 스님이오?
연근은 대답했다.
아닙니다.
허죽은 다시 물었다.
달마원 수좌이오? 아니면 나한당 수좌? 계율원 수좌?
연근은 모두 아니라고 말하고 설명했다.
사형, 저는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없소이다. 그저 날 용서해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들은 날더러 이 두 눈을 보존하고 싶으면 그대에게 직접 용서받는 수밖에 없다 하였소이다.
연근은 두려운 눈빛으로 슬쩍 옆을 바라보곤 했다.
허죽은 그의 눈길이 가는 곳을 바라보았다. 낭하에 네 명의 승려가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회색이 감돌고 있는 승복에 승모를 걸치고 있었다. 안쪽으로 몸을 돌린 채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허죽은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네 분 사형은 아니겠지? 아마도 절안의 유력자가 보내서 온 사람들이겠지? 연근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계율을 어긴 승려를 함부로 매질한 데 대해서 벌을 내리려 하는가 보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말했다.
나는 사형을 탓하지 않소이다. 이미 그대를 용서했소이다.
연근은 그제서야 살았다는 듯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는 무릎을 꿇더니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큰절을 했다. 허죽은 재빠리 같이 엎드려 반례하며 말했다.
사형 먼저 몸을 일으키시지요.
연근은 몸을 일으키더니 공손하게 허죽을 밥을 먹는 반당(飯堂)으로 안내했다. 반당에 모신 뒤 친히 차를 따라 주고 밥을 떠 주는 등 정성껏 시중을 들었다. 허죽은 연근의 시중을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나 연근은 허죽을 시중들지 못하면 마치 커다란 죄라도 짓게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눈치라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연근은 나직이 말했다.
사형! 술을 마시겠습니까? 개고기를 드시겠어요? 제가 사형을 위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허죽은 놀라 물었다.
아미타불, 죄과로소이다. 죄과로소이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연근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모든 죄는 이 소승이 혼자 감당하겠습니다. 저는 다만 사형께서 음식을 드실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 보려는 것뿐입니다.
허죽은 손을 내저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연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형께서 만약 절에서 즐거움을 누리기가 꺼림칙하시다면 산 아래로 내려 가셔도 괜찮습니다. 계율원에서 물으면 소승이 사형을 산 아래로 내려 보내 채소를 구입하도록 했다고 변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결코 위험은 없을 것입니다.
허죽은 그가 갈수록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소승은 성심성의껏 옛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있습니다. 계율에 따라 행동할 뿐 다시는 어길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형은 아까와 같은 말씀을 들먹이지 마십시오.
연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나 얼굴 가득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죽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시중을 든 후 연근은 허죽을 자신의 선방에 가서 쉬라고 했다. 그 뒤 며칠 동안 연근은 매우 공손하게 정성을 다해 허죽의 시중을 들었는데 그 태도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진했다.
사흘이 흘렀다. 허죽이 점심을 먹고 나자 연근은 주전자에 차를 끓여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사형, 차를 드십시오.
허죽은 말했다.
소승은 벌을 받고 있는 몸인데 사형께서 이토록 공손하게 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얼른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찻주전자를 받았다. 그 순간 종 소리가 연이어 크게 울려퍼졌다. 소림사에 있는 모든 승려들을 소집하는 신호였다. 매년 불탄일이나 달마 대사의 탄신일과 같은 날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전체 승려들을 모으는 일이 없었다.
연근은 말했다.
방장께서 종을 울려 모든 승려들을 불러들이시니 우리 함께 대웅전으로 갑시다.
허죽은 말했다.
그러지요.
이어 그는 채소원에서 일하고 있던 십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총총히 대웅전으로 달려갔다.
이때 대전에는 이미 이백여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승려들도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삽시간에 소림사에 기거하는 천여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모두 대전에 모였다. 그들은 모두 대웅보전에 들어 와서 나뉘어 열을 짓고 앉았다. 사람 수는 많았지만 매우 조용하여 바늘 하나가 떨어진다 해도 들릴 정도였다.
허죽은 허 자 대열에 앉았다.
허죽은 나이 많은 승려들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혹시 내가 어긴 계율이 너무나 크고 많아서 방장께서 전 승려들을 모아 놓고 무거운 벌을 내리시려는 것이 아닐까?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 봐서는 날 파문시킨 뒤 절에서 쫓아낼 것 같은데......만약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허죽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 매고 있었는데 그때 다시 종 소리가 세 번 울렸다. 그러자 모든 승려들은 일제히 불호를 외쳤다.
나무석가여래불!
방장인 현자와 현 자 항렬의 고승 세 명의 일곱 명의 승려를 대동한 채 구전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대전에 있던 승려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현자와 그 일곱 승려들은 먼저 대전에 모셔 놓은 불상에 참배한 후 각각 따로 자리를 정해 앉았다.
허죽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현자와 함께 나온 일곱 명의 승려는 모두 나이가 든 편이었다. 옷차림이 소림사와 다른 것으로 봐서 다른 절에서 온 객승 같았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승려는 코가 우뚝 솟아 오른 데다가 파란 눈에 곱슬머리였다. 키 또한 매우 큰 편이었는데 이 모든 걸로 미루어 보아 오랑캐 중 같았다. 일곱 명 중에 약 칠십여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승려가 한 명 상석에 앉아 있었다.
체구는 왜소하지만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리저리 쳐다 보는 그의 모습은 매우 위엄이 있어 보였다.
현자는 그 스승을 가리키며 낭랑히 말했다.
이 분은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의 방장이신 신산 상인(神山上人)이십니다. 모두들 인사 드리도록 하십시오.
이곳에 모여 있던 뭇 승려들은 이 말을 듣자 매우 놀랐다. 대부분의 승려들은 신산 상인이 무림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현자 대사와 함께 강룡(降龍), 복호(伏虎) 두 나한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항간에는 무공에 있어 신산 상인이 현자 방장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말이 있었다. 다만 청량사의 규모가 비교적 적은 데다가 무림에서의 지위가 소림사에 훨씬 못 미쳤기 때문에 명망에 있어서 현자보다 못한 것뿐이었다. 따라서 모두들 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소문에 들으니 신상 상인은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했다. 게다가 그는 승려들이 무림의 속된 일에 간섭하는 것은 천한 행동으로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소림사와 어떤 교분을 맺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친히 온 것을 보면 무슨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모두들 허리를 굽혀 신산 상인에게 절을 하였다.
현자는 손을 들어 나머지 여섯 명의 승려를 일일이 소개했다.
이분은 개봉부(開封府)에 있는 대상국사(大相國寺)의 관심 대사(觀心大寺)이시고, 이분은 강남에 있는 보도사(普渡寺)의 도청 대사(道請大寺)이십니다. 이분은 여산(廬山)에 있는 동림사(東林寺)의 각현 대사(覺賢大寺)이시고, 이분은 장안(長安)에 있는 정영사(淨影寺)의 융지 대사(融智大寺), 이분은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의 신음 대사이며 신상 상인의 사제가 되는 분이외다.
관심 대사 등 네 사람은 모두가 명산대찰에서 온 승려들이었다. 그런데 대상국사와 보도사 등의 절은 불법을 중시하고 무공을 가볍게 여기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 네명의 승려는 무림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나 그들이 있는 절의 지위는 결코 높다고 할 수 없었다.
소림사의 많은 승려들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자 관심 대사 등 여섯 명의 승려 역시 허리를 굽혀 반례했다.
현자 방장은 그 오랑캐 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대사님께서는 부처님이 탄생하신 천축에서 오신 분으로 법명을 철라성(哲羅星)이라고 합니다.
승려들은 모두 다시 절을 했다. 그 철라성은 반례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소림은 과연 대단하오. 이토록 많은 노화상, 중화상, 소화상들이 모여 있으니 말이요.
그의 중원 억양은 바르지 못했다.
현자는 설명했다.
일곱 분의 대사는 모두 불문에서 득도하시고 큰 덕망을 쌓으신 분들이외다. 오늘 모두 이곳으로 왕림하셨으니 실로 본사의 영광이 아닐 수 없소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소집하여 뵈옵도록 한 것이오. 또한 일곱 분의 대사께서 설법을 통해 부처님의 뜻을 널리 펴 본사의 승려들이 모두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오.
이에 신산 상인은 겸손히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
그는 체구가 왜소한데 비해 음성이 기이할 정도로 커서 뭇 승려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소승은 오랫동안 소림의 장엄한 보찰에 대해 흠모해 왔습니다. 소승은 육십년 전 이곳에 와 계를 받고 부처님에게 귀의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해 산문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소이다. 그런데 육십 년이 지난 오늘 다시 와보니 담장과 기왓장들은 옛모습 그대로인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바뀌고 말았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승려들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의 말투에는 심한 적대감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바로 자기가 쫓겨난 사실에 대해서 원한을 품고 시비를 걸러 온 것일까?
현자는 말했다.
원래 사형은 옛날 소림사에 와서 출가하려 했었구려. 허나 천하의 절간은 모두 한 집안이 아니오이까. 사형은 오늘날 청량사를 이끌어 가고 있으며 불문의 제자들은 사형을 존경해 마지않습니다. 소림사에서 사형을 받아들이지 않은 죄 소승이 삼가 사과드리겠소이다.
그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소승이 과거 이 보찰에 찾아와 계를 받고자 했던 것은 소림사가 수백 년 간 무림을 영도해 왔고 무학의 연원히 깊다는 사실을 깊이 흠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나 더욱 중요한 점은 소림사의 계율이 엄하여 매사를 처리함에 있어서도 공정하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형형한 눈길로 석가모니상을 바라보며 냉랭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명실상부하지 못한 이들이 무척이나 많더군요. 진작 알았었더라면 그때 소승은 소림사로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소림사의 천여 명이나 되는 승려들의 얼굴 빛이 변했다.
그러나 소림사는 계율이 엄했다. 그러므로 모두들 속으로만 분노했지 분노를 겉으로 표시하지는 않았다.
현자 방장은 말했다.
사형은 어찌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지요? 소림사가 일을 행함에 있어 잘못한 점이 있다면 사형께서 분명히 말씀해 주기 바라오. 죄가 있으면 당연히 벌을 줘야 할 것이고 잘못된 점이 있다면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외다. 사형이 단 한마디의 말로 소림사가 쌓아온 수백 년 간의 명예를 더럽힌다면 그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신산 상인은 말했다.
방장 사형에게 묻겠소. 불문의 사찰이 관부나 도적의 소굴이 될 수 있소이까?
현자는 말했다.
소승은 사형의 말씀 속에 숨어 있는 뜻을 이해할 수 없구려. 아무쪼록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라오.
신산 상인은 말했다.
관부에서 사람을 잡아 감금한다거나 도적들이 사람을 인질로 잡아 몸값을 받아가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오. 그러나 소림사는 관부도 아니고 도적의 소굴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함부로 외부 사람들을 잡아 두고 떠나지 못하게 합니까? 사형에게 묻겠소. 소림사가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다면 과연 불문의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겠소?
현자는 천축의 호승(胡僧) 철라성을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어렴풋이 일곱 명의 승려가 일제히 소림사로 달려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인께서는 폐사를 도적의 소굴에 비유하셨는데 그 말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오.
신산 상인은 여래불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처님이 바로 위에 계시오. 망언을 한다는 것은 불문의 계율을 크게 어기는 것이외다.
이어 그는 그대로 다시 시선을 현자 방장에게 돌리더니 물었다.
귀사에서는 혹시 천축 고승 한 분을 감금해 놓고 있지 않소? 이 철라성 사형의 사제인 파라성(波羅星) 대사가 바로 이 소림사에 감금되어 수 년 동안 떠나지 못하고 있지 않소?
그렇게 말하고 있는 태도는 매우 무엄했으며 어조 또한 죄인을 다루는 듯하였다.
현자는 계율원의 수좌 현적 대사(玄寂大寺)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적 사제, 그대가 일곱 분의 고승들에게 설명해 드리게.
현적은 대답했다.
예.
이어 그는 앞으로 두 걸음 나섰다. 현적은 소림사에게 계율원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평소에도 준엄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사사로운 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따라서 소림사의 승려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허죽도 고개를 쳐들고 감히 그를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현적 대사는 낭랑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 천축의 고승인 파라성 사형이 폐사에 왕림하셨소. 그때 본사의 모든 승려들은 크게 기뻐했으며 공손하게 접대했소. 파라성 사형은 수백 년 간 천축국에서 갖가지 사교가 성행하여 불법이 쇠퇴하고 태반의 불경이 흩어지거나 없어지게 되었다고 말했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형인 철라성 대사가 그를 중화로 보내 경전을 구해 오도록 했다고 했소. 폐사의 방장 사형께서는 우리 나라의 불경은 원래 천축국에서 가져온 것이고 이제 상국에서 중원땅으로 경문을 구하고자 왔으니 이야말로 커다란 인연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은헤에 보답하게 되었으니 소림사로서는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씀하셨소. 방장 사형은 친히 파라성 사형을 대동하고 장경루로 가셨지요. 천축의 경(經), 율(律), 론(論)을 삼장법사께서 한문으로 옮긴 것 이외에도 중원의 덕망 높은 고승들께서 저술한 불경이 칠천여 권이나 장경루에 있었지요. 만약 그 가운데 사본이 있으면 파라성 사형에게 한 권을 드리고 단 한 권밖에 없는 것이라면 본사에서 삼십 육 명의 승려를 동원하여 사본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어 방장 사형께서는 천축으로 가는 길이 먼데 경문은 많으니 도중에 잃어버릴 염려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파라서 사형이 경문을 무사히 천축으로 갖고 돌아가시도록 폐사에서 열 명의 승려를 파견하여 부처님의 나라로 무사히 호송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시었소.
보도사의 도청 대사가 합장하였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방장 사형의 이와같은 배려는 그야말로 큰 공덕이며. 구마라즙(鳩摩羅什) 대사와 현장 대사(玄奬大寺)와 함께 길이 빛날 일이외다.
현자는 허리를 굽혀 같이 합장하여 말했다.
폐사에서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사형께서 그토록 칭찬하시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현적은 계속해서 말했다.
파라성 사형은 장경루에서 경본을 뒤적이며 읽고 있었죠. 본사의 현참(玄慙) 사형이 방장 사형의 명을 받아 승려들로 하여금 경문을 베끼도록 하였소이다. 그런데 사 개월 가량이 지났을 무렵 파라성 사형이 매일 갚은 밤만 되면 장경루의 비각(秘閣)에 잠입해 본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무공 비급을 훔쳐본다는 것을 현참 사형은 발견하게 되었소이다.
관심, 도청, 각현, 융지 네 승려는 약속이나 한듯 모두 놀라와 하는 소리를 냈다.
현적은 계속해서 말했다.
현참 사형은 방장 사형에게 이를 알렸지요. 방장 사형은 즉시 파라성 사형에게 말했습니다. 그 무공 비급들은 본사의 역대 고승들이 기술한 것이며 결코 천축에서 전해진 것이 아닐 뿐더러 불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외부 사람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하셨죠. 그러나 파라성 사형이 이미 일부분을 보았으니 그것은 그냥 덮어 두기로 하고 이후는 다시 비각으로 가지 말라고 당부했소이다. 이에 파라성 사형은 사과의 말을 했죠. 소림사의 규칙을 몰랐다며 차후로는 결코 무공 비급을 훔쳐보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몇 달이 지나자 파라성 사형은 몰래 지하 땅굴을 팠습니다. 그는 다시 비각으로 잠입하여 무공 비급을 훔쳐보게 되었지요. 현참 사형이 이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수년이 지난 이후였습니다. 그때는 이미 파라성 사형이 적지 않은 본사의 무학 경전을 훔쳐 본 이후였지요. 현참 사형은 즉시 이를 저지하였고 파라성 사형도 이에 맞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파라성 사형은 본사 칠십이 절기 가운데 세 가지의 무공을 이미 익히고 있었습니다.
관심 등 네 승려는 모두 철라성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비난의 빛이 역력히 서려 있었다.
현적은 신산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말했다.
방장 사형께서는 즉시 현 자 항렬의 여러 사형제들을 소집하여 상의하게 되었소. 모두들 아무리 우리 소림파의 무공이 평범하며 특이한 점 또한 없다 할지라도 본사의 제자가 아니면 전수하지 않는 것이 오랜 규칙이었다고 했소이다. 다른 문파의 무공을 훔쳐 배운다는 것은 실로 있을 수도 없는 커다란 잘못이라고 주장했지요. 더군다나 우리 중원의 무공이 천축으로 전해지게 되면 무궁한 후환이 생긴다고 했소. 그리고 파라성 사형의 소행으로 미루어 볼 때 결코 불문 제자가 할 일이 아니었지요. 아니 어쩌면 불가의 비구가 아니라 방문좌도에 속한 사악한 도배인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그와 같은 행동은 비단 우리 소림파에만 해를 주는 일일 뿐만 아니라 중원 무림 전체에 해가 되는 일이었지요. 또한 천축 불문에도 불리한 일이라는 주장도 있었지요. 이처럼 의견이 분분한 터에 방장 사형께서는 우리 부처님께서 자비를 근본으로 하라고 하신 말씀을 하시면서 비록 그가 사악한 도배라 할지라도 너그러이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소이다. 그리하여 그를 본사에 머물게 하면서 뉘우칠 기회를 주자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본사에서는 파라성 사형을 잘 대접하면서 절 밖으로 나가지 않게 했습니다.
신산 상인은 말했다.
소림사의 말만 듣고는 진상을 알기 어렵소. 또한 천축의 고승을 칠 년씩이나 억류한 것은 사실이 아니겠소?
현자 방장은 말했다.
파라성 사형은 이미 소림사의 무공을 훔쳐 배운 사람인데 어떻게 밖으로 내 보내 소림사의 무공을 드러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산 상인은 엄숙히 말했다.
그 말씀에도 일리가 있소이다. 하지만 철라성 사형이 만리를 멀다 않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그들 사형제가 한 번 만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시렵니까?
현자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파라성 사형을 모셔오도록 하게.
집사 네 명이 총총히 밖으로 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파라성이 들어왔다. 그는 체구가 왜소했으며 얼굴이 검은 편이었다. 그와 철라성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천축말로 회포를 푸는 모양이었다. 철라성은 한참 파라성과 이야기하다가 중원어로 말했다.
소림사에서는 거짓말을 하였소. 사제는 무학 비급을 본 적이 없다고 하지 않소?
현자는 말했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오. 우리 소림사의 대금강경(大金剛經)을 그대는 보지 않았단 말이오?
파라성은 말했다.
아니오. 나는 다만 한 권의 금강경을 보았을 뿐이오.
우리 소림사의 반야장경(盤若掌經)을 훔쳐 보지 않았소?
아니오. 나는 소품반야경(小品盤若經)을 빌려 보았을 뿐이오.
그렇다면 마하지결(摩하指訣)도 훔쳐보지 않았다고 우길 셈이오?
갈수록 태산이구려. 나는 처음 듣는 책 이름이오.
아미타불......
현자 방장은 어이가 없는지 불호를 흘릴 뿐이었다. 별안간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노란 가사를 걸친 승려가 파라성의 등을 향해 한 주먹을 후려쳤다. 파라성은 두 손을 뒤로 돌리더니 장풍을 쏟아 이에 맞섰다.
그러자 노란 가사의 승려는 주먹이 나가는 방향을 신속히 바꾸더니 파라성의 목덜미를 때려갔다. 파라성이 몸을 옆으로 한 걸음 내딛어 피하는 순간 노란 가사의 승려의 일곱 손가락이 활짝 펼쳐지며 지력(指力)이 뿜어져 나갔다.
파라성은 피할 겨를이 없어 연이어 일곱 번 주먹을 휘둘러 일곱 줄기의 지력을 일일이 해소시켰다.
노란 가사를 걸친 승려는 뒤로 껑충 뛰어 물러서더니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합장하며 말했다.
소승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현자 방장은 말했다.
아무쪼록 공정한 판결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일시 대청 안은 조용해졌다.
신상 상인이 소림사에게 천축승 파라성을 붙잡아 둔 일에 대해 들먹이는 걸 들은 허죽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임을 알고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잠시 얘기가 오고가는 듯하더니 느닷없이 사숙 한 분이 파라성을 공격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파라성은 이를 하나같이 다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은 서로 초식을 주고받은 뒤 물러섰다. 그런데 허죽이 보기에 그들이 펼친 공격과 수비는 별로 대단한 것이 못 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째서 초식이 끝나자 본사의 방장들은 득의에 찬 표정을 짓는 반면 신상 상인과 철라성 사형제들은 떫은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허죽은 그저 파라성이 그 짧은 순간 동안 손해 보지는 않은 것 같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관심 대사는 기침을 하더니 물었다.
세 분 뜻은 어떠하오?
그러자 도청 대사가 대답했다.
조금 전 파라성 사형이 펼쳤던 삼초 가운데 제 일초는 반야장법에 있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인 것 같습니다. 제 이초는 마하지(摩하指)의 이일대노(以逸待勞)인 것 같고 제 삼초는 대금강권법 가운데에 있는 칠성취회(七星聚會)인 것 같습니다.
신산 상인은 말했다.
하하하, 중원의 불문이 천축 부처님 나라로부터 적지 않은 은혜를 입은 게 분명하구려. 과거 달마 대사께서는 천축의 무공을 중원에 있는 소림사로 가져 오셔서 전수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축의 무공이 오늘날까지도 소림사에게 계속 전해지고 있소. 소림사 고승의 무공이 천축 고승의 무공과 잘 부합되는 것을 보니 실로 축하하지 않을 수 없구려. 반야와 마하는 범어(梵語)이고 금강은 범신(梵神)이죠. 한 마디로 말해 만법은 근원이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소림사 승려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노기를 띄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라성은 소림사의 무공 비급을 훔쳐보지 않았다고 부인했으며 그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어려울 듯했다.
그러나 소림사에 있는 중년의 승려 한 분이 갑자기 나서서 공격을 가하여 사태가 급변했다. 그 분은 법명이 현생(玄生)이고, 현 자 방장의 사제였다. 무공이 매우 고강한 데다가 성품 또한 강맹한 분이었다. 그런 분이 파라성을 느닷없이 공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파라성이 위의 세 가지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면 달리 그 자신 사문의 무공으로 대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 배운데다가 며칠 동안 계속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했기 때문에 창졸간에 공격을 당하게 되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만 소림파의 무공을 쓰고 말았다. 그는 그냥 단순히 가장 편리한 초식으로 공격을 물리칠 생각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산은 이를 억지를 써서 천축의 무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소림파의 무공이 원래 달마 대사에서부터 비롯된 것은 사실이었다. 달마는 천축의 승려였다. 양(梁)나라 때 중원으로 와서 양(梁) 무제(武帝)에게 불법을 강론했다. 그러나 양 무제와 의견이 벌어지자 그를 떠나 소림사에 오게 되어 그 후 선종심법(禪宗心法)과 절세 무공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산 상인은 임기웅변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소림파의 무공인 반야장과 마하지 그리고 대금강경에 있는 권법을 보고도 천축에서 전해진 것이니 파라성이 이를 구사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둘러댈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사의 불법과 무공이 모두 다 달마 조사로부터 전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외다. 그리고 이를 천축에 되돌려 줘야 한다는 주장도 이치에 합당한 일이라 할 수 있소이다. 그러므로 파라성 사형이 이를 분명히 밝힌 후 부탁해 왔다면 기꺼이 달마 조사께서 남기신 무공경전을 베껴 선물했을 것이외다. 그러나 반야장은 본사 제 팔대 방장이셨던 원원 대사(元元大寺)께서 창안하신 것이고 마하지는 칠지 두타(七指頭陀)께서 소림사에 사십 년간 머무르시면서 창안한 것이외다. 그리고 마지막 대금강권법은 본사 제 십일 대 여섯 분 고승이 삼십육 년간 연구하여 만들어 낸 것이외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무공은 모두 중원 땅의 무공이지요. 천축의 무공은 뜻으로 힘을 조정하고 힘으로 기운을 내뻗치는 것이므로 중원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외다. 여러 사형들께서는 모두 무학의 고수이시니 이 둘의 차이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 노납(老衲)이 쓸데없이 더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관심 대사, 융지 대사 등은 현자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신산 상인에게 물었다.
사형의 뜻은 어떠하오?
신산 상인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림 방장의 말씀이 몰론 옳소. 하지만 일부러 중원과 천축간의 차이를 두려는 것 같군요. 기실 우리 부처님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중생은 차별이 없는 것이외다. 중화나 천축이란 구별은 그저 허황된 것에 불과하지요. 일전에 철라성 사형이 소승과 천축과 중원 무공에 대해 논하면서 반야장과 마하지, 그리고 대금강권의 초식을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그는 첫수를 아벌기야(阿伐豈耶)라고 했소. 물론 천축 말이죠. 이 첫수는 오른손 장력이 가볍고 착실한 반면 왼손 장력은 무거우면서 공허한 것인데 이를 함께 사용하면 허허실실을 속일 수 있다고 했소이다. 방장 사형, 철라성 사형의 말이 옳지 않습니까?
현자는 말했다.
사형의 눈은 날카롭기 이를데 없구려. 정말 탄복했소이다. 탄복했소이다.
신상 상인은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무학에 있어서도 견식이 높았다. 파라성과 현생이 일 장을 주고 받는 걸 보고 천의무봉의 뜻이 무엇인지를 짐작해 알아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철라성에게 들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천축의 무학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파라성과 현생이 주고 받은 무공이 매우 뛰어남을 보고 소림의 무공에 대해 흠모하는 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림사의 이 화상들은 모두가 밥통들이다. 윗대에서 이토록 고명한 무학을 전해 주었는데도 이를 터득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다니 말이다. 내가 이를 잘 연구한 뒤 다시 변화를 가한다면 수 년 안으로 소림사를 누를 수 있겠구나. 그럼 소림사는 다시는 고개를 쳐들지 못할 것이다."
현자는 신산이 조금 전 파라성의 초식을 보고 눈치 빠르게 알아낸 것이지 철라성이 그에게 말을 해줘서 안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신산이 단 한 번만 보고 그 무공 속에 들어 있는 심오한 이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신산이 지닌 뛰어난 천분(天分)과 날카로운 안력(眼力)은 정말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현생 사제! 수고스럽지만 장경루로 가서 그 세 가지 무공이 실려 있는 경전을 가져와 여기 계신 사형들에게 보여 주도록 하시게.
현생은 대답했다.
예.
그 즉시로 그는 몸을 돌려 대웅보전에서 나갔다. 얼마 후 다시 돌아와 세 권의 책을 현자에게 건네 주었다.
대웅보전과 장경루와의 거리는 거의 삼 마장이나 되었다. 현생이 삽시간에 경서를 가져 온 것은 그의 솜씨가 민첩하기 이를데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외부 사람들은 속사정을 모르니까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소림사 여러 승려들은 하나 같이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경서 세 권은 오래되어 누렇다 못해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어서 이 경서들이 매우 오래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현자는 경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말했다.
여러 사형들께서는 보시오. 그 경서들을 살펴보면 그속에 각각의 무공을 창안하게 된 내력이 서술되어 있을 것이오. 사형들이 노납의 말은 못 믿는다 하더라도 소림사 윗대의 방장 대사와 같은 고승들께서 쓰신 기록까지 못 믿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분들은 오늘과 같은 일이 있으리라 미리 내다보시고 수백 년 전에 글로 밝혀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셨으니 이를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신산 상인은 현자의 말을 못 들은 척 반야장법을 들고 한 장 한 장 펼쳐보기 시작했다. 관심 대사는 마하지비요(摩하指秘要)라는 책을 살펴보았고 도청 대사는 대금강권신공(大金剛券神功)을 펼쳐보았다. 관심과 도청, 두 사람은 그저 서문과 후기만을 보고 각현, 융지 두 사람에게 건네 주었다.
현자 대사는 일대의 고승인데 그 같은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네 명의 고승은 생각했다. 만약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의 말을 의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 되므로 매우 불경스럽게 보일 염려가 있어 일찍 책을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신산 상인은 한 장 한 장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그 가운에 빈 틈이나 의심나는 점을 찾으려는 거 같았다. 한동안 대전에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신상 상인은 반야장법을 다 펼쳐보더니 이어 마하지비요를 펼쳐보았고 다시 대금강권신공을 펼쳐보았다.
소림사의 여러 승려들은 신산 상인의 안색을 열심히 살폈다. 신산 상인이 어디서 트집을 잡아 억지를 쓸지 매우 궁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여 기뻐하는 빛이나 실망하는 빛을 엿볼 수 없었다. 그는 한 장 한 장 천천히 들여다 볼 뿐이었다. 마지막 책인 대금강권신공을 덮더니 두 손으로 들어 현자 방장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신상 상인은 눈을 뜨더니 철라성에게 말했다.
사형, 그 날 그대는 반야장의 요결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범어는 다음과 같았소. 인고내라사(因苦乃羅斯), 부이감아성(不爾甘兒星), 가라파기사탄(柯羅波其斯坦), 병나사니(兵那斯尼), 벌이부탄라(伐爾不坦羅)...... 이를 원말로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소. "만약 긴긴 밤에 마음이 불안하거나 생각이 어지러울 때 어떻게 이를 가다듬을 것이냐? 그것은 바로 반야장내공 제일요의(第一要義)를 연마하면 된다. "자! 내 말이 맞소?
철라성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잘 몰랐기 때문에 그저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그렇소. 사형께서 올바로 옮기셨구려.
소림의 여러 고승들은 아연실색하여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서열이 비교적 낮은 승려들은 모두 귀를 기울인 채 듣고 있었다.
신산 상인은 다시 무어라 범어로 한참 지껄이더니 다시 중원 말로 옮겼다.
이 한 토막의 범문을 중원 말로 옮겨 놓으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뜻이 될 것이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그 이유를 따져 보면 그 근원이 어디론지 날아가버리고마니 그 같은 마음을 두어 무엇하랴. 어지러운 마음을 따진다고 해서 그 마음이 달라지겠는가. 능히 비출 수 있는 지혜란 본래 공허한 것이고 인연이 닿는 경지는 조용함에 있으니 조용하고 조용하지 못한 것은 모두가 사람이 제 스스로 하기에 달린 일이더라. 그런 경지에 이르면 마음은 편안해지는 법이다. 밖에서 먼지를 찾지 않고 안으로 안주하지 않으면 두 가지가 사라지고 말므로 한 가지 성(性)만 밝히려 하니 이게 바로 반야장 내공의 요결이니라.
철라성은 이때 어느 정도 그의 의도를 짐작하고는 기뻐서 말했다.
그렇소이다. 바로 그렇소이다. 그 날 소승의 사형과 오대산 청량사에서 불법과 무공에 대해 논했을 때 우리 천축 불문에 있는 반야장의 내공 요결을 바로 그렇게 설명했소이다.
신상 상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날 사형이 말씀하신 대금강경의 요지와 마하지의 요결도 소승은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도도한 말투와 태도로 범어 한 구절을 지꺼이더니 뒤이어 중원 말로 무학경전의 경문 한 구절을 외웠다.
현자 및 소림의 여러 고승들은 신산이 외운 경문을 듣고 깜짝 놀라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신산이 외운 경문 내용이 완전히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충은 맞아들어갔다. 소림의 여러 승려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로서는 신산이 이토록 뛰어난 귀재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신산은 조금 전 책장을 천천히 넘겨 보는 사이에 무학 요결 세 권을 어느새 외웠던 것이다. 게다가 범어에 정통했기 때문에 먼저 경전의 요결을 범어로 번역한 후 다시 중원의 말로 읊을 수 있었다. 파라성이 경서를 훔쳐 읽은 게 아니라 원원 대사나 칠지 두타 등의 옛 소림승들이 남의 것을 베껴 세상을 속이고 남의 위업을 도용한 것처럼 되고 말았다. 만약 이 일을 이치를 따지고 들어 확인한다손 치더라도 신산의 능수능란한 언변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현자는 매우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에 대처할 방안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현생이 다시 여러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철라성에게 말했다.
대사, 대사께서는 이 반야장과 마하지, 그리고 대금강경이 모두 천축에서 전해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대사께선 이 세 가지 무공에 대해 자연 정통 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이 일의 진위는 아주 쉽게 밝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소승에게 그 세 가지 무공의 뜻을 좀 가르쳐 주시지요. 그리고 소승 또한 대사의 가르침에 대해 이 세 가지 무공 이외는 쓴지 않겠소이다. 그러니 대사께서도 가르치실 때 그 세 가지 무공에 한하여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철라성 앞에 가 섰다.
이를 지켜본 현자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부끄럽구나! 이 얼마나 간단한 방법인가! 그저 저 번승이 한 번 무공을 펼쳐 보이기만 하면 진위는 즉시 드러나는 것인데 그 생각을 왜 진작에 하지 못했던가!"
신산 상인 역시 흠칫했다.
"이 자는 매우 날카롭구나! 철라성은 물론 반야장이나 마하지, 대금강경에 대해 모를텐데 그가 어떻게 그를 상대할 수 있을까?"
철라성은 매우 계면쩍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축의 무공은 이름 있는 것만 쳐도 대략 삼백 육십 가지 정도 됩니다. 그러므로 소승은 대략 그 큰 뜻을 알고 있긴 하나 모든 무공에 정통할 수는 없지요. 소림사에서도 칠십이 가지의 절기가 있다고 하는데 실례하지만 사형께서는 칠십이 절기 모두에 정통하십니까? 만약 소승이 칠십이 가지 절기 중 세 가지를 임의로 지적하여 사형에게 펼쳐 보이라 하면 사형은 펼칠 수 있겠소이까?
이 말이 떨어지자 현생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소림사의 절기로 말할 것 같으면 제아무리 고승이라 할지라도 기껏해야 대여섯 가지밖에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만약 누가 임의로 세 가지 무공을 지적하여 어떤 고승으로 하여금 시범을 보이라한들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현생이 아무리 무학에 대해 아는 바가 많다 해도 그 역시 알고 있는 것은 대여섯 가지 절기에 불과했다.
그때 별안간 바깥에서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천축의 고승들과 중원의 고승들이 소림사에 모여 무공을 논한다 하니 그야말로 보기드문 진귀한 광경이 아니겠소? 소승은 불청객이 되어 옆에서 쌍방의 고견을 듣고자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구려.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똑똑히 여러 사람들의 귀로 전달되었다. 그 소리는 산문 밖에서 나는 소리였는데도 그처럼 똑똑하게 들렸다. 음성이 차분하고 부드러우면서 낮은 것으로 봐서 말하는 사람의 내공의 고강함과 순수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대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다 알고 있는 듯하니 이 또한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현자는 처음에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듯하더니 곧 내력을 돋우고 말했다.
불문의 동도라면 아무쪼록 왕림해 주시기 바라오.
그는 곁에 있던 사제에게 말했다.
현명(玄鳴), 현석(玄石), 두 분 사제는 나를 대신해서 귀빈을 응접토록 하게나.
현명과 현석 두 사람은 허리를 굽히며 이에 대답했다.
예.
두 사제가 막 몸을 돌려 대전에서 나가려 하는데 문밖에 있던 그 사람이 다시 말했다.
영접이라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늘 덕망 높으신 분들을 만나게 된 것만해도 기쁨을 억누르기 힘들 지경이오이다.
그가 처음 한 마디를 했을 때에 비해 그의 목소리는 수 장 정도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날 때 쯤 되자 어느덧 위엄 있어 보이는 중년의 승려가 대전 문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두 손을 합장하고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토번국의 화상 구마지가 소림사 방장 스님께 인사 드리오.
여러 승려들은 그의 솜씨를 보고 놀라움과 감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그의 이름을 들은 뭇 승려들은 탄성을 발할 수밖에 없었다.
토번국의 국사 대륜명왕이 오셨군요.
현자는 몸을 일으켜 앞으로 몇 걸음 나가더니 합장하고 그에게 절을 했다.
국사께서 멀리 중원 땅까지 오시다니 실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소이다. 폐사에서는 오늘 어떤 문제에 부딪혀 곤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국사께서 공평하게 옳고 그름을 가려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이어 고개를 들어 구마지에게 신산, 철라성 사형제, 관심 등을 소개시켰다.
여러 승려들의 인사가 끝나자 현자는 가운데에 자리를 마련해 구마지를 거기에 앉도록 했다. 구마지는 잠시 사양하는 듯하더니 가서 앉았다. 이렇게 되자 구마지가 바로 신산이 앉았던 자리에 앉게 된 셈이었다. 다른 사람은 이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신산은 속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번승, 너는 지금 대단한 인물인 척하고 있다마는 그렇다고 내가 너를 실제로 실력이 있다고 믿을 줄 아느냐? 나중에 한 번 시험해 봐야겠다."
구마지는 말했다.
소승더러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 달라고 부탁하심은 과분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소승이 산문 밖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현생 대사와 철라성 대사가 주고받은 말 가운데 그릇된 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승려들은 생각했다.
"이 사람의 말투가 꽤 건방지구나!"
현생이 말했다.
아무쪼록 국사께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구마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철라성 사형께서 좀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소림파에는 칠십이 절기가 있지만 이 모든 절기에 정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구요. 그런데 소승이 보기에 그 말씀이 틀린 것 같습니다. 한편 현자 대사께서는 마하지, 반야장, 대금강경 등과 같은 소림사의 비전지예는 귀파의 직계 제자들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 하셨지요. 혹 이를 아는 자가 있다면 이는 필시 귀파에서 훔쳐 배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그 말씀 역시 잘못되었소이다.
구마지가 이처럼 양편에 모두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자 여러 승려들은 어리둥절하여 그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그가 무슨 뜻으로 그 같은 지적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현생이 물었다.
그렇다면 국사께서는 폐사의 칠십이 절기에 두루 정통한 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구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현생은 물었다.
그럼 감히 다시 국사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처럼 두루 정통한 대영웅은 대체 누구입니까?
구마지는 대답했다.
대영웅이라니 너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순간 현생의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바로 국사 자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구마지는 고개를 끄덕인 채 합장하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승려들이 안색이 모두 변했다.
"아니! 큰 소리를 쳐도 유만부동이지! 혹시 머리가 돈 게 아닐까?"
소림의 칠십이 절기 가운데에는 전문적으로 하반신만을 연마하여 사용하는 것도 있었다. 또 어떤 것은 경신법을 또 다른 어떤 것은 권장법을 특기로 삼는것도 있었다. 그외에도 암기를 써서 이기는 법, 칼이나 봉을 특기로 삼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무공에는 제나름의 특성에 있어 어느 한 가지 권법에 능하면 다른 권법에 능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검을 쓰는 자는 선장을 익히지 못했고 대력신권(大力神券)에 정통한 사람은 암기에 능통할 수 없었다.
물론 대여섯 가지의 절기에 정통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서로 저촉되지 않는 한에서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현생과 파라성이 펼친 세 가지의 무공은 서로 저촉되지 않는 절기들로서 모두가 손을 이용한 무공들이었다.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로는 윗대 고승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만이 열 세 가지의 절기에 정통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를 십팔절신승(十八絶神僧)이라고 일컬었다 한다. 소림사가 세워진 지 수백 년이 흘렀지만 그처럼 절기에 정통했던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은 소림의 고승들은 물론이려니와 신산, 도청 등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칠십이 가지의 절기에 정통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사람을 기만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특히 소림사의 칠십이 절기 가운데 열 서너 가지의 무공은 연마하기가 어렵기 이를데 없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천부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지녔다 할지라도 한평생 오로지 무공만을 고되게 수련한다 하더라도 이를 달성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림사에 있는 승려는 모두 합쳐 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 천여 명의 승려들이 알고 있는 절기를 모조리 합한다 하더라도 칠십이 절기가 되지 못하였다. 하물며 겨우 사십 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구마지가 어찌 모두 연성했겠는가? 매년 절기를 한 가지씩 익힌다 해도 칠십이 년이 걸릴 일이었다.
현생은 말했다.
소림파의 사람은 아니시지만 혹 대사께선 마하지, 반야장, 대금강권 등의 무공에 정통하십니까?
구마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현생 대사께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기 바라오.
그리고 몸을 약간 기울이더니 왼손을 수평으로 들어 올리고 오른쪽 주먹을 휙, 하니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여래불상 앞에 놓여 있던 구리 향로가 그의 권풍을 받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 올랐다. 이는 바로 대금강권법 가운데의한 수법이었다.
주먹이 향로에 닿지 않았는데도 향로에서 소리가 나도록 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무공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 주먹을 앞으로 뻗었는데 구리 향로가 위로 튕겨오른 것은 그만큼 주먹의 힘이 교묘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는 대금강경의 비밀을 깊이 터득하지 않은 자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마지는 그 구리 향로가 채 떨어지기 전데 왼손으로 일 장을 날렸다. 그 자세는 반야장 가운데 일초인 섭복외도(攝伏外道)였다. 그러자 다시 구리 향로가 반원을 그리면서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물건이 떨어졌다. 향로 안의 많은 재들이 잇따라 피어올라 주위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물건이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일 초의 기운이 다하게 되자 구리 향로는 급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구마지는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앞쪽으로 한 번 누르는 시늉을 했다. 이와 더불어 그의 날카로운 지력이 구리 향로에 가해지게 되었다.
그러자 구리 향로는 별안간 왼쪽으로 반 자 정도 옮겨갔다. 이어 구마지가 계속 세 번을 엄지손가락으로 앞을 향해 누르는 시늉을 하자 구리 향로는 어느덧 한 자 반 정도 옆으로 옮겨지더니 그제서야 땅 위로 떨어졌다.
소림사의 고승들은 속으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 그가 세 번 누르는 듯 손가락을 찌른 수법은 평범하게 보이고 특이한 구석이 전혀 없어 보였지만 거기에 실린 공력은 실로 초범입성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이를 마하지의 정통 초식인 삼입지옥(三入地獄)이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향로의 재가 점점 흩어짐에 따라 땅바닥에 떨어졌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크기는 손바닥만했다.
승려들은 그 물건을 보고 모두 놀라 부르짖었다. 그 물건을 자세히 보니 노란 구리로 만들어진 손이었는데 다섯 손가락이 찍혀진 자국이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또한 손바닥 가장자리나 손가락 가장자리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어 황금과 같이 찬란해 보이는 반면 손등 부분은 희끄무레한 녹색이었다.
구마지는 소맷자락을 털더니 웃었다.
가사복마공(袈裟伏魔功)을 정통할 만큼 연마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방장 사형께서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로부터 일곱 자 정도 떨어져 있던 그 향로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갑자기 빙글빙글 돌았다. 다시 향로가 멈추게 되었을 때는 이쪽으로 향해 있던 쪽이 저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향로의 한복판에는 손바닥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뚫린 곳 역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배분이 비교적 낮은 승려들은 그제서야 구마지가 조금 전에 반야장의 섭복외도라는 일 초를 떨쳤을 때 장력이 마치 보검이나 예리한 비수처럼 향로에서 손바닥 형태로 도려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생은 그가 손을 세 번 움직여 보여 준 무공이 하나같이 자기보다 뛰어난 것을 보고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 신승의 말이 맞는가 보다. 소림파의 칠십이 절기는 천축에서 전해진 게 분명한 모양이다. 그가 천축에서 그 비밀과 오묘한 뜻을 터득했기 때문에 중원 땅에서 펼치는 수법보다 더 고명한가 보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 그는 즉시 합장하고 절을 하며 말했다.
소승은 국사의 신기를 보고 크게 시야가 넓어진 듯합니다. 정말 탄복했습니다. 정말 탄복했습니다.
구마지가 최후로 펼쳤던 가사복마공은 현자 방장이 한평생 연마해 온 무예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 가사복마공을 익히느라고 선학의 진기를 크게 그르치기도 하였었다.
이 수공(袖功) 가사복마공에 있어서 현자는 자기가 천하에서 제일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구마지는 자기보다 더욱 뛰어나지 않은가?
삽시간에 대전 안은 조용해졌다. 모두들 구마지의 절세 신공에 압도당한 것 같았다.
현자는 긴 탄식을 발했다.
노납은 오늘에서야 하늘 밖에 하늘이 있고,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소이다. 노납이 수십 년 동안 고달프게 익힌 솜씨는 국사에겐 애들 장난처럼 보일 것입니다. 파라성 사형, 소림사는 물이 얕은 곳이라 이무기나 용과 같은 것은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므로 귀빈을 붙잡아 둘 자격 또한 없지요. 그대 마음대로 떠나도록 하시오.
현자의 그 같은 말이 떨어지자 철라성과 파라성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
구마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합장한 채로 말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방장 사형께선 너무 겸손하십니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의기소침해 있었다. 방장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바로 소림파의 무공이 남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림파는 수백 년 동안 천하에서 명성을 떨쳐 왔고 중원의 무학에서 우두머리 자리를 잡아 차지하고 있었다. 한데 사태가 이렇게까지 되었다는 것은 이 일이 비단 소림사만 일패도지했을 뿐 아니라 중원의 모든 무인들이 변방의 오랑캐들 앞에 크게 체면을 잃은 셈이 된 것이다. 관심, 도청, 각현, 융지 등 뭇 승려들 역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소림사에서 파라성을 억류하고 있는 이유는 소림사의 무공 절기가 외부 사람에게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구마지의 신공을 보니 그는 소림사의 칠십이 절기에 거의 정통한 것 같았다. 그러므로 파라성을 더 붙잡아 둘 이유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 대륜명왕의 무공은 그야말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소림사의 승려들 가운데 그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만약에 소림사의 여러 고수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와 겨룬다면 가능할지 모르나 그것이야말로 비열한 것으로 소림파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파라성이 오늘 살아 돌아가게 된다면 한 달도 되지 않아 강호에 소문이 퍼져 천하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소림사는 더 이상 무림을 영도할 수 없게 되고 현자 자신도 소림사의 방장으로 남아 있을 면목이 없어지고 만다.
이런 사실들을 현자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죽은 대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을 일일이 보고 있었다. 방장께서 말한 이후 소림사의 선배들이 하나같이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곁눈으로 힐끔 혜륜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몇 분 사숙은 심지어 연신 가슴을 치고 있었다.
허죽은 이런 광경들을 지켜보면서도 자세한 내막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구마지가 조금 전 펼쳤던 무공으로 미루어 보아 소림사에 그와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는 듯했고 그렇기 때문에 방장은 파라성을 데려가도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떨쳐 버릴 수 없는 커다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구마지가 펼칠 때 사용한 내공(內功)이 소무상공(少無相功)이라는 사실이었다.
원래 소무상공은 그가 무애자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그 후 천산동모가 그에게 천산절매수의 요결을 전수하다가 허죽이 소무상공을 익혔다고 크게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이 소무상공은 원래 천산동모의 사부가 이추수 한 사람에게만 전해 주었는데 여러 사람이 알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허죽이 무애자로부터 소무상공을 전수 받았다 함은 이추수가 무애자에게 이를 전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므로 이들의 관계는 확인해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후에 천산동모 역시 화를 가라앉힌 뒤 그에게 소무상공을 응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었다. 그러나 동모가 아는데에는 한도가 있었다. 그후 허죽은 영취궁에 있는 지하 석실의 석벽에 그려져 있는 원을 통해 소무상공의 심오한 뜻을 체득할 수 있었다.
소무상공은 도가의 무학으로 맑고 조용한 가운데 아무것도 행하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신(神)이 태허(太虛)에서 거닐게 하도록 하는 것이 최고 경지였다.
불가 무공 가운데 있는 무색무상(無色無相)과 비교할 만한 무예였다. 그러나 이름만 비슷했지만 실제로는 크게 달랐다.
허죽은 구마지가 산문 밖에서 내공을 사용해 말을 전하는 걸 듣고 속으로 흠칫 놀랐다. 소무상공의 수준이 무척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 그가 펼친 권법, 장법, 그리고 지법 및 수법(袖法) 또한 모두가 소무상공을 이용해 펼쳐내는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현생, 사숙조 및 파라성이 펼친 천의무봉 등의 초식은 바로 안에서부터 바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불문의 무공이었다. 반야장에는 반야장의 내공이 있고 마하지에는 마하지의 내공이 있으며 대금강권에는 대금강권의 내공이 있는데 각각의 것들은 전혀 섞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허죽도 구마지가 스스로 소림파의 칠십이 절기에 정통하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반야장과 마하지 그리고 대금강권 등의 초식을 펼칠 때 소무상공을 응용하고 있었다. 다만 소무상공의 위력이 너무나 강해서 일단 펼쳐지게 되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압도당하고마는 것이었다. 이 내공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구마지가 정말로 소림파의 여러 가지 절기에 정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물고기의 눈알을 구슬이라고 속이는 수작은 아니지만 역시 노루를 가리켜 말이라고 하듯 옳고 그름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림사의 방장을 위시한 천여 명의 승려들 가운데 한 사람도 그 그릇됨을 꾸짖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허죽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대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문의 제자인만큼 무공이 제 아무리 고강하다 하더라도 도가(道家)의 내공까지 연마한 사람은 없었다. 또한 이 소무상공은 무상이라는 두 글자를 요결로 삼고 있기 때문에 형상을 드러내지 않는 무공이었다. 그러므로 소무상공에 조예가 깊은 고수가 아니면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현자와 현생 역시 구마지의 내공이 소림의 내공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천축과 중원 땅에서 전수하고 있는 내공은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리적으로 만 리는 떨어져 있는 데다가 수백 년이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림의 절기는 많은 역대의 고승들에 의해서 새롭게 창안되고 다듬어지면서 변화를 겪어왔기 때문에 양쪽의 내공이 차이가 나는 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구마지가 소무상공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허죽은 처음에 선배님들에게 달리 깊은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이 어린 화상에 불과한 자신이 어찌 감히 함부로 나설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형세가 급진전하여 사문의 어른들이 모두 다 비통해하거나 분노하던가 아니면 의기소침해진 것을 보자 도저히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림사가 중대한 국면에 처하게 된 마당에 구마지가 펼친 무공이 소림파의 절기가 아님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십 년 동안 그는 절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 나가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대전의 삼엄하고도 엄숙한 분위기 아래서는 더욱 말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할 말은 있지만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하고 싶은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구마지가 입을 열었다.
방장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바로 귀사의 칠십이 절기는 귀파가 독자적으로 창안한 것이 아님을 자인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절기의 절(絶) 자는 반드시 바꿔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자는 마음이 아팠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 자 항렬에 있는 체구가 우람한 노승이 날카롭게 외쳤다.
국사께서는 이미 우세를 차지하고 있고 본사 방장께서도 천축의 번승이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하셨소. 그런데 어째서 그토록 사람은 다그치며 조금도 돌아설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오
구마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승은 그저 방장에게 한 마디의 대답만 더 듣고 가서 천하의 무림 동도들에게 알리려 했을 뿐이외다. 소승의 의견으로는 소림사는 이제부터 흩어져 청량사나 보도사 등 여러 사원으로 가서 몸을 의지한 채 장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래야 헛된 명성만 얻은 소림사가 지금까지 편안한 나날을 보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사죄를 할 수 있지 않겠소?
그 말을 들은 소림의 여러 승려들은 오랜 수양을 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두 다투어 큰소리로 꾸짖으며 나섰다. 승려들은 그제서야 구마지가 소실봉으로 올라 온 것이 혼자 힘으로 소림사를 뒤엎어 보자는 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자신이 누대에 걸쳐 계속 이름을 남가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중원 무림은 이로써 한 무리의 중진(重鎭)들이 사라지는 셈이 되니 토번국으로서는 크게 이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그는 낭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소승이 홀몸으로 중원 땅에 온 본래의 뜻은 소림사의 풍모를 한 번 보고 알 자는 것이었소.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곳이 얼마나 장엄하고 웅장한 기상을 지니고 있는지 보려고 온 것이외다. 그러나 여러 고승들의 말과 행동거지를 살펴보니, 흐흐흐, 아무래도 저 남쪽 외진 곳에 있는 대리국의 천룡사보다도 훨씬 못한 것 같구려. 아! 소승은 크게 실망했소이다.
이에 분을 이기지 못한 현 자 항렬 중의 어떤 자가 입을 열었다.
대리국의 천룡사에 계신 고영 대사와 본인 방장은 불법이 매우 깊소이다. 무릇 우리 불가 제자라면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이 없는 분들이오. 게다가 출가외인이라면 남과 다투거나 이기겠다는 마음을 버린 지 오래일 터인데 어찌 국사께서는 소림사가 천룡사보다도 못하다는 따위의 말씀을 하시는게요?
그러면서 그 사람은 천천히 걸어나왔다. 얼굴이 불그레한 소승이었다. 그는 오른손 식지와 중지를 가볍게 펴고서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는데 그 얼굴 빛은 온화하기 이를데 없었다.
구마지 역시 얼굴에 웃음을 띄운 채 말했다.
오래 전부터 현도(玄渡) 대사의 점화지(점花指) 절기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흠모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여기서 만나뵙게 되니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외다.
이어 그는 오른손의 식지와 중지를 가볍게 함께 모우더니 꽃을 따는 그런 시늉을 했다. 두 승려는 왼손을 동시에 천천히 내밀어 상대방을 향해 세 번 튕겼다.
그러자 팍팍팍, 하는 세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지력이 맞부딪쳤다. 갑자기 현도 대사의 몸이 흔들하더니 가슴팍에서 세 가닥 피줄기가 몇 자 앞까지 뿜어나왔다.
두 사람의 지력이 부딪혔지만 현도가 그를 이겨내지 못해 구마지의 세 가닥 지력이 그만 가슴팍에 모조리 적중되고 말았던 것이다. 현도 대사의 가슴팍은 마치 예리한 칼에 상처를 입은 것처럼 되었다.
원래 현도 대사는 위인됨이 인자하고 부드러워 절 안의 젊은 승려들로부터 지극히 사랑을 받아왔다. 허죽은 열 여섯 살 나던 해 팔 개월간 현도의 선방에서 청소하고 차 끓이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현도는 그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나한권의 권법에 대해서도 가르친 바가 있었다.
그 이후 현도는 폐관하고 참선을 하게 되어 허죽은 다시 그를 만나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지나간 정은 언제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갑자기 구마지의 지력에 상처를 입은 것을 보니 조금만 더 지체하면 곧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농아 노인 소성하로부터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을 전수받았었고 그 외에도 생사부를 해소시키는 비결을 배웠었다. 그러므로 상처입은 사람을 치료하거나 죽을 것 같은 사람을 살려내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다. 그리하여 현도의 가슴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는 순간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현도 앞으로 달려나가 한 손으로 무언가를 받들듯 들어올렸다.
허죽의 행동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한 일이었다. 따라서 세 가닥의 선혈이 미처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장력으로 인해 현도의 가슴팍으로 되돌아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 다음 허죽은 왼손으로 마치 비파를 튕기듯 연달아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허공을 향해 튕겼다. 순식간에 현도의 몸에 난 열한 군데의 상처에서 선혈이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영취궁의 지상영약인 구전웅사환을 한 알 입속에 넣어 주었다.
언젠가 허죽이 단연경의 가르침을 받아 무애자가 펼쳐 놓은 진롱 바둑판을 깼을 때 구마지는 허죽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갑자기 그가 여러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나더니 현도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보자 그 수법의 교묘함과 공력의 심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혜방 등 여섯 명의 승려는 그 전에 허죽이 한편으로 현난을 쳐 죽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 다른 문파의 장문인이 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상한 점들이 많았는데 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즉시 현난의 시체를 업고 소림사로 돌아왔었다. 그리하여 현자 방장과 뭇 고승들은 자세히 알아본 결과 현난의 죽음은 정춘추의 삼소도요산이라는 독에 의한 것임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허죽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가 돌아오질 않자 십여 명의 승려들을 내보내 찾았으나 종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다시 허죽이 절로 돌아온 날에도 마침 소림사에서는 커다란 변고가 일어났다. 그것은 개방의 방주 장취현이 놀랍게도 사람을 시켜 명첩을 보냈다. 장취현을 무림 맹주로 모셔 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현자는 연일 현 자 항렬의 고승과 혜 자 항렬의 승려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강구했으나 장취현이란 사람이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개방은 강호에서 제일 큰 방파라 할 수 있었다. 실력이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스스로를 정의파로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림파와 서로 도와가며 강호의 정기를 이끌었고 무림의 공도(公道)를 지켜 왔다. 그런데 갑자기 소림파 위에 올라서겠다고 나서니 고승들로서는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허죽의 사부 혜륜은 방장과 여러 사부, 사숙들이 중대한 일로 연일 토의하고 있는 것을 연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허죽이 절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감히 품하지 못했고 계율을 어긴 일도 들먹이지 못했다. 따라서 허죽이 채소원에서 똥을 져다 채소 밭에 뿌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나타나 오묘한 수법으로 훌러나온 피를 현도의 몸안으로 되돌려 놓자 자연 모두 놀라고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죽은 이때 현도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 있었다.
사백조님, 운기행공을 하면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흘러나오니 하지 마십시오.
그는 이어 자신의 승포를 찢어서 가슴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현도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대륜명왕의......점화지공이......그토록.......그토록뛰어나다니...노납은......승복했소.
허죽은 말했다.
사백조님! 그가 펼친 것은 점화지도 아니고 불문의 무공도 아닙니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승려들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구마지의 지법이 현도의 지법과 자세에 있어서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부드럽게 미소를 띤 얼굴 표정 또한 전혀 다를 바가 없으니 소림의 칠십이 절기 가운데 하나인 점화지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생각했다.
고승들은 구마지가 토번국의 국사이며 왕으로부터 대륜명왕으로 봉함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 년마다 대설산 대륜사에서 법회를 열어 경문을 강의하고 불법을 설명하는데 그때 사방에서 고승들과 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의 강의와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질문을 했고 또한 그 대답에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불문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고승이었다. 그런데 그가 펼치는 무공이 불문의 무공이 아니라니 어찌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구마지는 속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저 젊은 화상은 어떻게 해서 내가 펼친 것이 점화지도 불문 무공도 아니란 걸 알았을까?"
다시 생각해 보니 확연히 와닿는 바가 있었다.
"그렇구나. 점화지는 본래 매우 왕도(王道)적이며 평화로운 무공이므로 그저 남의 혈도를 짚는 수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까 적을 제압하되 상처를 입히지 않는 무공이다. 그런데 난 급히 승리를 구하느라고 너무 날카로운 지력을 쏟아내 그만 노승의 가슴팍에 조그만 구멍까지 내고 말았구나. 이렇게 가섭존자(迦葉尊者)가 꽃을 주고서 미소했던 본래의 뜻과 어긋나고 만다. 저 젊은 화상은 아마도 그런 연유로 짐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천부적으로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여러 기연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한평생 남에게 져 본 적이 없었다. 토번국에서 떠난 이후 그는 대리국에 있는 천룡사에서 고영, 본인, 본상 등의 고수를 잇따라 이겼었다.
이번에 수림사로 온 것도 혼자 힘으로 천년 고찰을 상대해 패배시키겠다는 웅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허죽이 보여준 윤지봉혈(輪指封穴)의 재간은 불과 나이가 이십여 세밖에 안 되는 자가 한 것치곤 현묘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그런 어린 자는 대수로울 게 없으리라고 생각하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젊은 스님께서는 나의 점화지가 불문의 무학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럼 소림 절기의 점화지는 어떤 것이오?
허죽은 말주변이 없는 터라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의 현도 대사부께서 펼친 점화지는 물론 불문의 무학이죠. 그러나 그대......그대 대사께서 펼친......것은......불문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왼손을 들어 현도의 수법을 따라 역시 세 번 튕겨 보였다. 물론 이 지력에도 소무상공을 통해 구사했다.
허죽은 워낙 공손한 사람이어서 차마 구마지를 향해 튕기지는 못하고 사람이 없는 쪽으로 튕겼다. 그러자 탕탕탕, 하는 소리가 세 번 울려퍼졌다. 대전에 있던 구리 종이 커다란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는 마치 종을 치는 방망이로 힘껏 종을 친 것과 같았다.
구마지는 이를 보고 감탄하면서 소리쳤다.
훌륭한 재간이군. 어디 다시 나의 반야장 일 초를 막아 보시지요.
그리고는 이어 두 손을 세우더니 마치 점을 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두 손바닥을 한데 합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손바닥 사이에서 장력을 질풍같이 뻗어내 허죽을 공격했다. 이것은 반야장의 협곡천풍(峽谷天風)이었다.
이에 맞선 허죽은 그의 장세가 흉맹한 것을 보고 즉시 천산육양장 가운데 일 초를 펼쳐 그의 장력을 막았다.
구마지는 그의 일 장 가운데 흡인력이 실려 있음을 느꼈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이 펼쳐냈던 일 초의 장력을 제압한 공력이 소무상공을 기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 흠칫했으나 겉으로는 웃으며 말했다.
젊은 스님, 그대가 펼치는 것이 불문의 재간이오? 내가 오늘 귀보찰에 온 것은 소림파의 신기를 가르침 받고자 해서였소. 그런데 그대는 어째서 방문좌도의 재간으로 날 상대하는 것이오? 소림 무공은 대송나라에서 언제나 첫 손가락 내지 둘째 손가락에 꼽히는 것인데 설마하니 이름뿐이고 이국의 무공을 대항할 능력조차 없는 게 아니오?
그는 허죽의 내공이 특이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자기가 반드시 그를 이길 것이라는 자신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술책을 써 그로 하여금 소림파의 무공만 사용하도록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허죽이 어찌 그의 계략을 알아차리겠는가. 그만 솔직히 대답하고 말았다.
소승은 워낙 자질이 우둔하여 본파의 무공에 대해서는 거저 나한권과 위타장(韋陀掌)을 배웠을 뿐입니다. 그것은 단지 본파에서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해 가르치는 입문일 뿐인데 어찌 국사와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구마지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구려. 그렇게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면 물러서도록 하시오.
허죽은 대답했다.
네, 소승은 이만 물러서겠습니다.
그는 합장하고 절을 한 후 허(虛) 자 항렬의 여러 승려들의 대열 속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현자 방장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허죽의 무공이 어디서 온 것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조금 전 허죽이 펼친 몇 수는 초식이 자못 정교하고 기이할 뿐 아니라 내공이 심후하여 구마지와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흥망성쇠의 큰 고비길에 놓인 소림사로서는 차라리 그를 내보내 구마지와 싸우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가 한동안 구마지를 막게 되면 설사 허죽이 지더라도 그 동안 어떤 전기가 마련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있는 것보다 그렇게 하는 게 확실히 나을 것 같다.
그는 즉시 말했다.
국사께서는 자칭 소림파 칠십이 문의 절기에 정통하다 하셨는데 국사의 고명함과 박학함에는 탄복해 마지않는 바이외다. 그러므로 소림파의 입문 무공정도는 조잡하고 천박하여 국사의 눈에 차지도 않을 것입니다. 허죽아! 불사의 승려들은 모두 현, 혜, 허, 공의 항렬로 나뉘어질 수 있다. 너는 본파의 제 삼대 제자이다. 그러므로 토번국에서 제일 고수이신 국사와 대결을 할 자격이 없는 몸이나 국사께서 단지 먼 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찾아 오셨으니 그야말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라 할 수 있다. 자! 너는 나한권과 위타장의 무공으로 국사에게 몇 수 가르침을 받도록 해라.
그는 일부러 미리 허죽이 소림사 제 삼대 허 자 행렬이 나이 어린 승려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혔다. 그렇게 되면 설사 구마지에게 지는 한이 있더라도 소림사의 위명은 별로 손상될 게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요령으로라도 한두대의 향을 피울 만한 시간까지 벼텨내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때 자기가 호통쳐서 쌍방의 싸움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구마지로서는 더 이상 귀찮게 설명할 명분이 없어지고 말리라는 점을 계산한 것이었다.
허죽은 방장이 명령을 내리자 감히 어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몇걸음 앞으로 나아가 구마지를 향해 합장하고 말했다.
국사께서는 사정을 참작하여 대적해 주십시오.
그는 속으로 상대방이 선배 고인이니 결코 먼저 공격을 해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유있게 두 손으로 절을 하는 시늉을 했다. 이것이 바로 위타장의 기수식인 영산예불(靈山禮佛)이었다.
그는 소림사에 있으면서 반 나절은 경을 읽었고 반 나절은 무공을 익혔다.
십 몇 년간을 나한권과 위타장만 가지고 익혔기 때문에 그야말로 매우 그것에 익숙해 있었다. 이 영산예불이라는 일 초는 적수에게 깍득한 예의를 차리면서 한편으로 불문의 제자로서 예의상 먼저 양보를 하겠다는 뜻을 지닌 것이었다.
결코 즐겨 싸움이나 하는 자가 아님을 보여 주는 인사치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소요파 삼대 고수의 심후한 내력을 몸에 익히고 있었던 터였다. 거기다 동모가 정성을 다해서 깨우쳐 주었고 영취궁 지하 석실에서 몇 달간 면벽하면서 터득한 바도 있었다. 그러므로 무공에 있어서 많은 경력을 쌓은 셈이었다.
두 손으로 절을 하는 척하면서 영산예불이라는 일 초를 펼치자 그의 승포자락이 미미하게 부풀어 오르고 전신에 진기가 흘러 몸을 보호해 주었다.
구마지는 이 소승과 대적하여 이긴다 하더라도 별로 자랑스러울 것도 없었다. 더구나 그에게 지기라도 한다면 비웃음거리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되자 부득이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시 그는 손을 휘둘러 일 장을 격출했다. 장풍에서는 픽픽, 폭폭, 하는 정미한 소리가 일었다. 자세와 수법으로 봐서는 바로 반야장의 상승무공이었다.
위타장은 소림파의 근기를 튼튼히 하는 무공이었다. 소림의 제자가 사문에 입문하여 첫번째로 배우는 것이 나한권이고 두번째로 배우는 것이 바로 이 위타장이었다. 반야장이 워낙 정묘한 장법이어서 반야장까지 배우려면 대개 삼사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야 했다. 반야장은 바로 소림 칠십이 절기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연마를 하면 할수록 영원히 끝이 없는 것이 소림 칠십이 절기의 특징이었다.
장력은 연마하면 할수록 강해지게 되고 초식은 또한 더욱더 순수해졌다. 그야말로 배움에 있어서는 끝이 없다는 말과 같았다. 그리고 소림사가 세워진 이래 위타장과 반야장으로 대결을 가진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두 장법의 깊이와 얕음, 정묘함과 조야함은 소림 무공의 두 극단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반야장을 펼칠 수 있는 선배 승인이 결코 한 번도 위타장만 알고있는 본문의 제자를 상대로 해서 손을 쓴 적이 없었다. 설사 사제지간으로서 상대를 해준다거나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할 때도 사부가 반야장을 쓰면 제자는 적어도 달마장이나 복호장(伏虎掌), 혹은 여래천수법(如來千手法) 정도의 장법으로 응수해야 했다.
이때 허죽은 상대방이 손을 뻗치는 것을 보고 얼른 몸을 기울여 피했다. 이어 두 손을 앞으로 밀어내는 위타장의 일 초인 산문호법(山門護法)을 펼쳤다.
초식은 평범했으나 그 초식에 실린 힘은 무척 웅후했다.
구마지는 몸을 이리저리 물 흐르듯 움직이며 수리건곤(袖裏乾坤), 무상겁지(無相劫指)로 상대방을 찌르려 했다. 허죽은 이에 맞서 몸을 기울여 피하려 했다. 그러나 구마지는 이미 그가 피하는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던 차라 대뜸 대금강권의 초식을 뻗쳐내었다. 순간 그의 어깻죽지에 적중되면서 뻑, 하는 소리를 냈다.
허죽은 휘청하더니 두 걸음 물러섰다. 구마지는 소리내어 웃더니 입을 열었다.
젊은 스님, 이제 승복하셨겠지?
그는 자신의 이 일 장이 커다란 바위조차 산산조각 낼 정도로 위력이 대단한 것인 만큼 허죽의 어깨뼈가 박살났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허죽은 북명진기가 몸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허죽은 그저 어깻죽지에 잠시 통증을 느꼈을 뿐이었다. 즉시 그는 몸을 움직여 재차 달려들게 되었고 두 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공격했다. 이 일 초는 항하입해(恒河入海)라는 초식이었다. 그의 쌍장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진가가 실려 있어 마치 홍수가 도도히 동쪽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40. 질문을 던져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다
구마지는 그가 자기 주먹을 한 대 맞고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두 손으로 반격해 왔고 그 힘 또한 매우 웅후하여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죽의 공격을 막아낸 구마지는 발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순간 허죽의 가슴을 향해 여섯 번의 발길질을 해댔다. 바로 소림의 칠십이 절기 가운데 하나인 여영수형퇴(如影隨形腿)였다. 첫번째 발길질을 하고 나면 두 번째 발길질이 마치 그림자처럼 뒤따르고 두 번째 발길질을 하면 세 번째 발길질이 또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그런 무공이었다. 그러나 허죽은 여섯 번째 발길질을 가했을 때에서야 구마지를 물러서게 하고 간신히 허리를 뒤로 제쳐 피할 수 있었다.
구마지는 숨쉴 겨를도 주지 않고 잇따라 이 지를 내뻗었다. 이와 동시에 찍찍, 하는 소리가 났는데 바로 이것이 다라지법(多羅指法)이었다.
허죽은 말을 탄 채 화살을 잡아당기는 것과 같은 자세로 반격했다. 이것은 나한권 가운데 일 초인 흑호투심(黑虎偸心)이었다. 원래 이 권법은 조잡하고 천박한 것이었지만 소무상공이 실리게 되자 금과 돌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다라지법을 중도에서 막아낼 수 있는 위력을 보였다.
구마지는 다라지법에 이어 즉각적으로 초식을 변화시켜 한 팔을 들어 베는 시늉을 하였다.
그는 몹시도 자신의 무공을 여러 사람에게 자랑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이 같은 권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사용한 손은 왼손이었지만 펼쳐 보인 것은 바로 연목도법(燃木刀法)이었다. 이와 같은 도법을 연마하게 되면 마른 나무에 여든 한 번의 칼질을 해서 나무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칼에서 나오는 뜨거운 기운을 이용하여 그 나무에 불까지 붙일 수 있어야 하는 무공이었다. 과거에는 소봉의 사부인 현고 대사가 이 절기에 정통했었다. 그러나 그가 입적한 이후 소림사에서는 더 이상 연목도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연목도법은 칼로 펼치는 도법인만큼 구마지가 천룡사에서 펼친 적이 있던 화염도법(火炎刀法)의 능허장력(凌虛掌力)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손바닥을 계도로 삼아 매섭게 치고 찍는 도법은 모두가 소림파의 무공 수법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가 한 번 내리칠 때마다 퍽, 하는 소리가 났고 그 일격은 어김없이 허죽의 오른팔에 적중되었다.
허죽은 속으로 외쳤다.
"정말 빠르다."
그는 주먹을 내밀었지만 계속해서 오른팔을 공격당했다. 구마지는 전력을 손 가장자리에 잔뜩 모으고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이 한 번 내려치는 힘의 위력은 강철 칼에 못지 않게 대단한 것이었다. 강철 칼과 똑같이 목을 자르고 팔을 ㄲ을 수 있었다. 그러나 허죽의 오른팔은 잇따른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구마지가 내려치는 충격에 자신의 손 가장자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구마지는 사태를 즉각 파악하고 재빨리 대책을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화상이 금종조(金鐘조)나 철포삼(鐵布杉)의 무공을 연마했다 하더라도 나의 중수법을 감당할 수 없을텐데 어째서 그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걸까? 아, 그렇군, 이 자는 분명 승포 속에 몸을 보호하는 연갑을 입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이제 허죽의 안면만 노려 공격했다. 대지무정지(大智無定指), 거번뇌지(去煩惱指), 적멸조(寂滅爪), 인타라조(因陀羅爪) 등의 소림신공을 통해 허죽의 눈과 목을 공격했다.
구마지가 워낙 신속하게 공격해대는 바람에 허죽은 이를 일일이 받아칠 수가 없어 잠시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은 위타장마저도 펼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저 주먹에 다시 주먹을 내뻗었는데 모두가 흑호투심이라고 하는 일 초였다. 그리하여 주먹을 한 대 내뻗을 때마다 구마지가 반 자씩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거리상 불과 반 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구마지를 떼어 놓음으로써 여러 가지 신묘하고 변화무쌍한 그의 초식을 허죽에게 퍼부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었다.
다시 구마지는 잇따라 열 여섯 가지의 소림 절기를 펼쳤다. 소림의 모든 승려들은 모두 그야말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저 사람이 아까 본파의 칠십이 절기에 능통하다고 자부하더니만 정말 큰 소리칠만 하군.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어."
반면에 허죽이 응수하며 사용한 권법은 그저 나한권에 해당하는 것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워낙 신속하게 공격해 들어오므로 자신이 사용하는 초식에 변화를 가져올 엄두조차 내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흑호투심 일 초를 펼칠 뿐이었다.
허죽이 사용한 권법의 졸렬함은 시정의 무사라 하더라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흑호투심에 실려 있는 세찬 기운은 계속 증강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점차 멀어지게 되어, 구마지가 허죽의 안면을 공격을 하더라도 그의 얼굴에 닿지 않게 되었다.
구마지는 허죽의 공격 가운데에는 소무상공이 내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위력이 자신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했다. 다만 허죽이 그를 제대로 펼치지 못해 위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허죽이 다시 일 초의 흑호투심을 펼치자 구마지가 두 손을 벼락 같이 뻗쳐 덥썩 허죽의 주먹을 잡았다. 이는 바로 소림 절기 가운데 하나인 용조공(龍爪功)이라는 일 초였다. 이어 왼손으로는 허죽의 새끼손가락을 잡고 오른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움켜잡았다. 이어 힘을 위로 급히 틀었다. 이렇게 하면 허죽이 두 손가락이 부러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허죽은 구마지에게 두 손가락을 잡히자 더이상 흑호투심을 펼칠 수 없었다.
손가락이 격렬하게 아파왔다. 따라서 자기도 모르게 천산절매수를 펼치게 되었다. 오른쪽 손목을 원을 그리며 홱 뒤집어 되려 구마지의 왼쪽 손목을 움켜잡게 되었다.
구마지는 처음엔 자신의 권법이 잘 먹혀 들어가자 무척 기뻐했다. 그런데 뜻밖으로 상대방이 손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게 아닌가! 그뿐 아니라 되려 자신의 손목을 움켜잡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학에 대해서 매우 박식하다고 자부해 온 터였다. 그러나 천산절매수에 대해서는 전혀 그 내력을 알 수가 없었다. 매우 놀란 구마지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잡아빼려 했지만 마치 무쇠로 된 쇠집게 속에 들어 있는 듯 도저히 뽑아낼 수 없었다. 반면 허죽은 그저 자신의 손가락이 그에게 잡히자 놀라고 당황하여 다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 권법을 사용했을 뿐 더 이상의 반격은 가하지 않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허죽의 공격 부위가 약간 빗나가 있었기 때문에 구마지는 내력을 돌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밖에 내력을 돋우지 못했으나 이어 강하게 내력을 돋우었다.
그렇게 공격함으로써 허죽의 손에 공력을 주어 자신의 손을 뽑자는 것이었다.
허죽은 그 순간 손이 마비되는 듯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손을 뽑는 순간 다시 무서운 수법을 구사할 것 같아 재빨리 다시 힘을 돋우었다. 따라서 그의 체내의 북명진기가 마치 조수처럼 밀려나왔다.
허죽과 단예가 연마한 무공은 원래 서로 같은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허죽은 단예처럼 상대방의 내력까지 흡수하는 요령을 연마한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저 구마지의 손목을 잡고 있을 뿐 그의 내력까지 흡수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구마지는 허죽의 손을 떨쳐 버리려 세 번이나 시도했으나 다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계속 실패하자 구마지는 하는 수 없이 오른손을 들어 비스듬히 허죽의 목을 내리쳤다. 그는 매우 다급해져서 소림파의 무공을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만 토번의 본문 무학을 펼쳐 내리친 것이었다. 이에 허죽은 왼손으로 재빨리 천산육양장을 펼쳐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구마지는 다시 손을 들어 후려쳤다. 이번에도 역시 허죽은 육양장으로 맞서 상대방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때 두 사람은 거의 육박전을 벌이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상대방의 숨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또 손을 쓸 때면 손을 구부린 채 팔굽을 돌려야만 했다. 두 사람 간의 거리는 불과 일곱 여덟 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 간격이 가깝긴 했으나 여전히 강맹했다. 구마지가 장풍을 일으키는 소리가 휙휙 들렸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여러 승려들은 그 장력이 칼날처럼 얼굴에 와닿아 싸늘한 한기를 느끼도록 하는데 매우 놀라고 있었다.
이는 마치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갔을 때 사면에서 광풍이 불어와 몸이 떨리는 것과도 같은 느낌었다. 소림사에서 배분이 비교적 낮은 승려들은 한기를 견뎌내지 못해 하나씩 하나씩 몸을 움추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한 발씩 물러서다 보니 끝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게끔 되었다. 현 자 항렬의 고승들만이 장력이 뻗쳐오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내력을 돋우어서는 이에 항거해야 했다.
허죽은 삼십육 동과 칠십이 도 군호들의 생사부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서 천산육양장에 많은 정성을 쏟았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가지 정묘하고도 미세한 변화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영취궁의 지하 석벽에 그려진 도형을 통해 더욱더 많은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이를 사용해 남과 싸워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연습이 부족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처음 사용하고 있는 지금의 상대방은 바로 당금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였다. 허죽은 생사를 걸고 싸울 뿐만 아니라 장법이 고명하고 내력이 고강하다고는 하지만 펼쳐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원래 실력의 삼분의 일 내지 이에 지나지 않았다.
구마지의 장력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반면 허죽은 오직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일념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일 초가 모두 수세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상대방의 무공이 자기보다 십 배쯤 더 강하므로 두 손으로 공격받는 것보다는 그나마도 한손만으로 그가 공격하도록 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에 죽어라 하고 상대방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허죽의 이 같은 생각은 우둔하긴 하지만 크게 쓸모가 있었다. 구마지는 왼손이 잡히는 바람에 두 손을 함께 사용하여 펼치는 여러가지 묘수를 전혀 펼칠 수가 없었다.
허죽은 장법에 익숙한 편이 못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손으로 펼치는 것이 두 손으로 펼치는 것보다 편리했다. 이로 인해 한 사람은 오히려 장법 가운데 그저 오성의 장법만 펼칠 수 었게 되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이삼 성의 무공을 사오 성 정도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싸움이 전개되어 향을 한 개 피울 만한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 무렵은 이미 두 사람이 모두 수백초씩을 겨룬 뒤였다.
현자, 현도, 신산, 관심, 철라성 등 여러 고승들은 구마지가 왼손을 제압당해 빼지 못하고 있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허죽은 왼손이 완전히 열세에 몰려 있어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할 뿐 전혀 반격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각각 한쪽이 상대방에 비해 열세와 우세를 공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와 같이 싸움은 제아무리 많은 견문을 쌓은 고승이라해도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소림의 여러 승려들은 한편으로 경이로움과 한편은 또 다른 근심을 금할 수 없었다. 허죽은 어릴 적부터 소림사에서 커왔다. 그런데 중간에 산을 반 년쯤 내려가 있다 돌아오더니 어디서 배워왔는지는 모르지만 일신에 놀라운 무공을 지닌 채 돌아온 것이었다. 구마지라는 적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제압하지 못하고 있지만 매 일 장마다 커다란 위력이 담겨 있는 무공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가 혹 잘못하여 구마지의 일 장이라도 얻어맞게 된다면 허죽은 그야말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될 판국이었다. 그러니 여러 승려들이 근심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허죽이 구마지를 붙들고 있는 동안 소림사에 있는 고승 중 어느 아무나 나서서 가볍게 일 초를 가하기만 하면 구마지의 목숨 정도는 쉽게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상대방을 죽이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림 일파의 명성을 지키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 앞으로 나아가 구마지를 죽이기라도 하게 되면 소림사의 명예는 크게 실추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었다.
따라서 승려들은 하나같이 가슴을 두근거리며 손에 땀을 쥔 채 두 사람의 격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백여 초를 싸우게 되었다. 싸움이 진행됨에 따라 허죽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산육양장의 정묘한 묘수를 갈수록 잘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십 초 가운데 구 초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 사용하고 남은 일 초로는 반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와 같이 일 초를 공격하면 구마지는 반드시 방어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고 보니 공격은 자연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차이는 금방 표가 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점점 싸움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허죽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어 나아갔다.
다시 밥 한 끼 먹을 만한 시간이 흐르자 허죽은 이제 십 초 가운데 이삼 초를 공격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소림의 여러 승려들은 그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보고 기뻐해 마지 않았다.
신산 상인은 구마지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 계속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즉, 한편으로는 구마지가 소림사의 위풍을 꺾어 놓았으면 하고 바랬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오랑캐 승려가 중원에서 함부로 날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은 상대방을 제압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후자 쪽으로 마음이 더욱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사태가 구마지와 허죽이 대치하는 상태로 지속되자 이제 신산은 두 사람 중 하나가 싸우다가 다치거나 죽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자신은 설사 파라성에게서 다른 소림의 절기를 전수받을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반야장과 마하지, 대금강권 세 가지 절기는 이미 그 비결을 마음속에 외워 두고 있으니 별로 염려할게 없었다. 자기 절로 돌아가 자세히 연구해 본다면 자신의 총명함과 지혜로 충분히 그 세 가지 무공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요결은 물론 같겠지만 초식과 겉으로 드러나는 자세가 크게 다르게 될 것이므로 그때 그 세 가지 무공은 청량사의 세 가지 절기가 될 것이었다. 게다가 그 자신은 바로 그 세 가지 절기를 창안한 비조(鼻祖)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한편 파라성은 또 파라성대로 다른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는 요즘 며칠 동안 반야장과 마하지, 대금강권의 세 가지의 무공을 연마하고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공에는 오묘한 점이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허죽과 구마지가 싸우는 것을 보게 되자 두 사람 내력의 고강함과 초식의 기이함이 자신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는 허죽이 펼치는 게 소림 무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소림사의 한낱 젊은 승려에 불과한 자가 그토록 무공이 뛰어난 것에 놀랄 뿐이었다.
만리 먼 길을 달려와 그야말로 간신히 장경각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는데 겨우 몇 권의 무학경전만을 기억한 채 그냥 돌아가고 만다는 것은 불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산에 들어가 아무것도 갖지 않고 그냥 빈 손으로 나온 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얻은 것이 가장 긴요하고 귀중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한평생 끝없이 후회하고 한스러워할 것만 같았다.
무학의 도(道)는 바로 금기서화 및 불학, 역리 등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어려웠다. 그러므로 오묘한 학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만약 자기가 배운 것보다 한층 높은 무공이나 학문을 지닌 사람이 있는 걸 알게 되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구경하거나 상대해 보고 싶었다.
파라성은 천축 고승 가운데 크게 재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 소림사에 왔을 때는 오로지 소림사의 무공 비급을 훔쳐 보겠다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소림사의 무학을 접하게 되고 그 넓고 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파라성이 이제 와서 이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때 허죽은 어느덧 사성의 공세를 펼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여전히 수비에 치중하고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점점 내력이 솟아오름에 따라 소요파 무학의 다양한 초식들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점점 간담이 서늘해졌다.
"만약 내가 저 자와 싸운다면 까딱하다가 참혹하기 이를데 없는 죽음을 당하게 되리라!"
소림파의 승려나 속가제가들은 백 수 년을 지내는 동안 여제자를 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역대의 사조들이 창안한 무공은 모두가 양강한 성격을 지닌 것들이었다.
또한 소림사의 무공은 불문의 무공이므로 그 의도가 한결같이 적을 제압하는 데 있을 뿐 살인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동모나 이추수가 펼쳤던 초식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현자를 비롯하여 소림의 여러 고승들은 점점 허죽이 음험하고 각독(刻毒)한 초식을 펼치는 걸 보고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
구마지는 세 번이나 힘을 모아 허죽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그리하여 화염도라는 절기를 펼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이 힘을 가한 만큼 그 역시 강하게 대적해 들어왔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구마지는 매우 다급한 나머지 살기까지 생기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없이 그는 완손으로 삼 장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허죽이 이를 제거했다.
이에 다시 구마지는 허리를 굽혀서 버선 속에 숨겨둔 비수 한 자루를 꺼내 번개같이 허죽의 어깻죽지를 찌르려 했다. 그런데 허죽이 지금까지 배운 무공은 모두 맨손으로만 대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갑자기 하얀 광채가 번뜩이면서 비수가 자신의 어깨를 향해 달려드는 광경을 보고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는 서둘러 구마지의 오른쪽 손목마저도 잡으려 했다. 그 수법은 바로 천산절매수의 금나수법으로서 빠르면서도 정확한 것이 특징이었다. 손가락 세 개가 상대의 손목을 잡는 순간 나머지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잇따라 함께 움켜 쥐었다. 그 순간 구마지는 손가락에서 세찬 기운을 쏟아냈다. 그리하여 비수는 즉시 그의 손아귀를 떠나 날아갔다. 허죽이 상대방의 손목을 움켜잡았을 때는 이미 삭, 하는 소리와 함께 비수가 그의 어깻죽지에 깊이 꽂히고 만 때였다.
이를 구경하고 있던 승려들은 놀라 일제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관심 등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구마지와 같은 고승이 소림사의 일개 젊은 승려를 이기지 못한 것도 이미 자신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린 꼴인데, 거기다가 무기까지 써서 암습을 가한다는 것은 정말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로다."
별안간 사람들 틈에서 승려 네 명이 달려나왔다. 그들은 각각 푸른 광채가 번뜩이는 장검을 들고 나와 동시에 구미지의 목에다 갖다대었다. 그런데 그 장검 네 자루은 한결같이 같은 부위를 겨누고 있는 데다가 검법 또한 기이할 정도로 빠르고 매서웠다.
구마지는 두 발에 힘을 주고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허죽이 자신의 손목을 잡은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기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목이 따끔해 왔다. 네 자루의 검끝이 어느덧 그의 살갗을 찔렀던 것이다.
검을 겨눈 네 승려는 일제히 호통을 질렀다.
염치없는 것 같으니라구. 목숨을 바쳐라!
허죽이 호통치는 그 목소리를 들어 보니 어린 소녀의 음성이었다.
허죽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네 승려는 놀랍게도 매란국죽 사검이었다. 다만 머리 위에 승모를 써서 머리채를 감추고 몸에는 소림사의 승복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허죽은 소리쳤다.
그의 목숨을 해치지 마시오!
사검은 일제히 대답했다.
예.
하지만 칼끝은 여전히 구마지의 목을 겨눈 채였다.
구마지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소림사에서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이기려 했을 뿐만 아니라 몰래 여자들까지도 숨겨 두고 있으니 수백 년간 쌓아온 명예가 어떤건지 잘 알겠소이다. 오늘에야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소이다.
허죽은 당황하여 구마지의 손을 놓고 말았다.
국검이 그의 어깻죽지에 박혀 있는 비수를 뽑았다. 피가 용솟음치듯 흘러나 오자 국검(菊劍)은 재빨리 장검을 내던지고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매란죽 세 소녀의 장검은 여전히 구마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허죽이 물었다.
그대......그대들이 어떻게 이곳으로 왔소?
바로 그 순간 구마지는 오른손을 한 번 휘저어 화염도의 신공을 펼쳤다.
창,창, 하는 쇳소리와 함께 장검 세 자루는 그만 가운데가 부러지고 말았다. 세 소녀는 깜짝 놀라 뒤로 일장 남짓 물러섰는데 손에 든 장검을 쳐다보니 겨우 반토막 정도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구마지는 앙천대소하더니 현자에게 말했다.
방장 대사께서는 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소?
현자는 새파랗게 안색이 변한 채 말했다.
어찌된 연유인지 노납은 실로 모르고 있는 일이외다. 즉시 모든 사실을 알아보고 본사의 계율에 따라 처리하겠소이다. 국사와 사형들은 멀리서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으니 객사로 가셔서 잿밥을 드시지요.
구마지는 말했다.
그렇다면 폐를 끼치겠소.
이어 합장하며 절을 했다. 이에 현자도 반례했다.
구마지는 두 손을 모았다가 떼는 순간 살짝 화염도의 신공을 펼쳤다. 팍팍팍팍, 하는 소리가 나더니 매란국죽, 네 소녀는 일제히 외마디의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머리 위에 씌워져 있던 승모가 바람도 없는데 날려 떨어졌고 이어 머리채가 다 드러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잘려진 머리카락과 승모가 땅에 우수수 떨어지면서 여기저기 흩어졌다.
구마지가 이 한 수를 펼쳐 보인 데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숨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여자라는 걸 만인 앞에 드러냄으로써 소림사가 나중에 잡아떼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했다.
현자의 얼굴에는 더욱더 불쾌한 빛이 드러났다.
여러 사형들께서는 안으로 드시지요.
신산, 관심, 도청, 융지 등 고승들은 갑자기 소림사에 승복을 입은 여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고 의아해했다. 소림사가 워낙 명성이 자자한 명산고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 아무리 작은 절이라 할지라도 어겨서는 안 될 계율이 있는 법이다.
현자 방장이 안으로 드시라는 말에 모두 몸을 일으켰다. 지객승들은 그들을 나누어 객실로 모셨으며, 이어 잿밥을 올렸다.
한 무리의 손님들이 몸을 돌려 대전을 채 나서기도 전에 매검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희 자매는 스스로 산에서 내려와 주인에게 시중을 들려고 이렇게 찾아왔어요. 너무 꾸짖지 마세요.
난검은 말했다.
그 연근이란 화상이 주인께 무례한 행동을 하길래 저희 사매가 혼내 주었습니다. 아! 그런데 서역 화상이 주인께 상처를 입히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허죽은 그제서야 연근의 태도가 공손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네 자매의 협박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네 소녀가 승려로 변장한 채 절 안에 잠복해 들어온 지도 이미 며칠이 된 모양이었다. 허죽은 발을 동동 구르며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쓸데없는 짓을 했어.
그는 현자 대사 앞에 꿇어 엎드리더니 말했다.
제자는 전생에 많은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승에 와서까지 계율을 어겨 본사에 엄청난 해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삼가 방장께서 제게 무거운 책벌을 내리시도록 해 주시길 바랍니다.
국검은 말했다.
주인님, 이 얄궂은 화상 노릇을 더 이상 할 것 없어요. 우리 모두 표묘봉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이곳에는 먹을 거라곤 채소와 두부밖에 없고 기름기 있는 음식은 조금도 없지요. 거기다가 남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데 뭐가 좋아요?
죽검은 현자에게 말했다.
노화상, 그대의 말투 가운데 혹 우리 주인께 실례되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 네 자매는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오.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허죽은 아연실색하며 호통쳤다.
그대들은 더 이상 무례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무엇 때문에 절에 와서 터무니 없는 짓을 하는 것이오? 빨리 입을 다물도록 하시오.
네 자매는 너나할것 없이 한 마디씩 쫑알거렸다. 마치 현자와 같은 고승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자라고 여기는 것 같은 태도였다.
이 같은 광경을 지켜본 여러 승려들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네 자매의 모습은 하나같이 똑같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천진하며 활발했다. 또한 무법자처럼 행동했다. 실로 이들의 내력이 어떤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원래 네 자매는 대설산 아래의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녀를 일곱 명이나 이미 두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아이를 낳고 보니 네 쌍둥이 딸이었다.
그들은 양육할 힘이 없자 낳자마자 눈바닥에 갖다 버렸다. 이때 마침 동모가 설산에서 약을 캐다가 아기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 보니 얼굴 모습이 똑같은 네 명의 갓난 여자아기가 눈바닥 위에서 울고 있었다.
동모는 이를 매우 재미있게 생각하고 그녀들을 영취궁으로 데려가 무공도 가르치고 잘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네 소녀는 여지껏 한 번도 표묘봉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세상의 인정과 예의 같은 것들을 알겠는가. 그녀들은 지금까지 동모 한 사람의 분부만을 받아 왔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허죽이 영취궁의 주인이 되자, 그녀들은 죽어라 하고 그를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다만 허죽은 동모에 비해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이어서 허죽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에 대한 충성심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이와 같은 무턱대고 하는 행동이 뭐가 잘못 됐는지 잘 알지 못할 뿐이었다.
현자는 정중히 말했다.
현 자 항렬의 사형제들만 빼고 나머지의 모든 형제들은 각기 선방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혜륜은 남아 있도록 하라.
승려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배분에 따라 차례로 대웅전에서 나갔다. 삽시간에 대웅보전에는 삼십 육 명의 현자 항렬의 노승들과 허죽의 사부인 혜륜, 그리고 허죽, 영취궁의 네 소녀들만이 남게 되었다.
혜륜 역시 허죽과 마찬가지로 현자 방장 앞에 엎드려 말했다.
제자가 올바로 가르치지 못해서 이와 같은 못난 제자가 나왔으니 방장께서는 큰 벌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죽검은 흥, 하며 비웃더니 말했다.
당신과 같이 얄팍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 어찌 우리 주인의 사부가 될 자격이 있어요? 그저께 밤 소나무 숲속에서 당신을 여덟 번이나 넘어뜨린 자가 바로 우리 둘째 언니예요. 내가 보기에 당신의 무공은 실로 평범하기 짝이 없어요.
허죽은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이것 정말 큰일났구나. 그녀들은 나의 사부마저도 희롱했구나!"
난검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연근의 말을 들어 보니 당신이 우리 주인의 사부라 합니다. 그래서 바로 당신을 시험해 보았던 거예요. 세째 누이가 오늘 말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당신은 그저께 밤에 왜 여덟 번이나 곤두박질치게 되었는지를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거예요. 호호호호, 정말 재미있다. 재미있어.
현자는 말했다.
현참(玄참), 현괴(玄愧), 현념(玄念), 현정(玄淨) 네 분 사제는 네 분의 여시주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네 명의 노승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예.
그들은 몸을 돌려 네 소녀에게 말했다.
방장께서 명령을 내리셨소. 네 분은 함부로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마시오.
매검은 웃었다.
우리들은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움직이겠어요. 당신이 감히 우리를 겁주려고 해요?
네 승려는 일제히 말했다.
그렇다면 실례하오.
그들은 두 손을 소맷자락 속에 감춘 채 네 소녀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다. 현참이 사용한 것은 용조공(龍爪功)이었고, 현괴가 사용한 것은 호조수(虎爪手)였으며, 현념이 사용한 것은 응조공(應爪功)이었고, 현정이 사용한 것은 소림금나십팔타(少林擒拿十八打)였다.
초식은 서로 달랐지만 하나같이 소림파의 정묘한 무공들이었다. 네 소녀 가운데 국검 외에 세 소녀는 이미 구마지에 의해 장검이 부러진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국검은 자신의 장검을 휘둘러 세 언니를 보호하려 했다. 매 란 죽 세 소녀 또한 각기 부러진 검을 휘두르면서 국검을 도와 함께 공격하려 했다.
허죽이 나서서 외쳤다.
검을 버려라! 검을 버려! 손을 쓰면 안 돼!
네 소녀는 주인의 호통 소리를 듣자 모두 다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므로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사용하여 전력을 다해 무공을 펼칠 수가 없었다. 네 소녀의 무공은 본래 네 분의 현 자 항렬의 고승에 비해 훨씬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거기다가 허죽으로 인해 승기를 상실해 버리자 즉시 네 승려에게 잡히고 말았다.
매검은 힘주어 상대방의 손길을 뿌리치려 했으나 뿌리칠 수 없자 뾰로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들이 주인의 말씀을 듣고 당신들한테 겸손하게 대하는 거예요. 아야야, 아파 죽겠네! 뭣 때문에 이렇게 힘주어 잡아요?
이에 난검이 다시 부르짖었다.
이 소화상아! 빨리 나를 놔라!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사람은 현괴 대사로 수염과 눈썹이 모두 허옇게 센 노승이었다. 나이도 칠십여 세나 된 사람을 그녀는 소화상이라 불렀다. 다시 죽검이 말을 이었다.
당신 만약에 내 손을 놓지 않는다면 당신의 마누라를 욕하겠어요.
국검이 말했다.
나는 그에게 침을 뱉어야지.
그녀는 정말 침을 현정에게 내뱉었다. 현정은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피하는 한편 손가락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국검은 아파서 아이고, 아이고, 하며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원래 대웅보전은 매우 장엄한 곳으로서 불문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삽시간에 여자들이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차게 되었다.
현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분 여시주는 조용히 하도록 하시오. 만약 또 소리를 내면 네 분 사제는 그녀들의 아혈을 짚도록 하시오.
네 소녀는 아혈을 짚는다는 소리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현자가 허죽에게 물었다.
허죽, 너는 지금까지 지내온 사연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숨김없이 털어 놓도록 해라.
허죽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예! 제자는 성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즉시 방장의 명을 받들어서 영웅첩을 돌리러 산을 내려가게 되었고 현난과 혜방 등의 승려를 만나게 되어 어떻게 진롱 바둑판을 풀게 되었으며 그리하다가 소요파의 장문인이 되었는가를 설명했다. 현난이 또 어떻게 하여 정춘추의 극독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으며, 아자의 희롱을 받아 그만 비린 것을 먹고 말았다는 것등도 낱낱이 고하였다. 이어 천산동모를 어떻게 하여 만나게되어 서하 황궁의 얼음 창고까지 들어가게 되었으며, 끝내 영취궁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의 내력을 소상하게 말했다. 이와 같은 경위와 과정은 실로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워낙 말주변이 없는 터라 사실들을 그냥 단순히 나열하여 말하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을 허비하여아 했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한 것도 많았다.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말하느라고 얼음 창고 안에서 꿈속의 여인과 음계를 저지르게 된 일까지 더듬거리며 다 토로하였다.
고승들은 그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놀랐다.
나이 어린 제자가 부딪히고 경험한 일치고는 너무도 기이하고 공교로웠다.
그런 얘기는 무림에서는 실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승려들은 조금 전 그가 구마지를 상대로 해서 싸우면서 보여 준 그의 솜씨를 보았던 터라 그의 얘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소요파 삼대 고수의 신공을 연마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영취궁 석벽을 통해 상승의 무공을 터득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토번 국사의 절세 신공에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허죽은 말을 끝마치자 불상 앞에 넙죽이 엎드려 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제자는 너무나 우둔한데다가 속세의 때를 벗지 못해 일단 외마(外魔)를 만나게 되면 그만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계 살계 음계들을 범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본문의 무공을 저버리면서 방문좌도의 무공을 익혔습니다. 거기다가 다시 네 분 소저까지 절안에 들어와 본사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벌을 받는다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저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방장께서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괴로워 그만 소리내어 통곡했다.
매검과 국검은 이와 달리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허죽에게 무슨 화상인지 뭔지를 그만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현참과 현정 두 승려가 즉시 손을 뻗쳐 두 소녀의 맥문을 움켜잡았다. 두 소녀는 할 수 없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되삼켜야 했다.
현자는 한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여러 사형과 사제! 허죽이 겪었던 일들은 실로 심상치 않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태가 본사 천년의 명예와 관계되는 일인만큼 본좌 한 사람으로서 함부로 어떤 주장을 내세우기도 힘든 일이구려. 그러니 여러분들께 들어 보기로 하겠소!
현생이 큰소리로 말했다.
방장께 알립니다. 허죽의 과오가 크긴 하나 공로 역시 적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위급한 때에 나서서 그 번승을 막지 않았더라면 본사는 무림에서 발 딛을 곳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번승은 우리더러 각각 흩어져서 청량사와 보도사 등에 몸을 의탁하여 비호를 받으라고 하였소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커다란 수모를 허죽 한 사람이 만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죄를 전적으로 사하여 주어 그로 하여금 달마원에서 무공을 연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후 절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바깥 일도 묻지 못하도록 하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달마원으로 들어가 무공을 연구한다는 것은 소림승에게 있어서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무공이 지고의 경지에까지 도달하지 않은 자에게는 결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현 자 항렬의 삼십 육 명이나 되는 고승들 가운데에서도 달마원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여덟 명에 불과했으며 현생 자신도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계율원의 수좌 현적이 입을 열었다.
그의 무공 조예로 미루어 보아 달마원으로 들어갈 만하다 할 수 있소.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바로 방문좌도의 무공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달마원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바로 소림 달마원에 방문좌도의 고수를 받아들이는 일이 됩니다. 현생 사제께선 이 점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보았소이까?
그렇다면 사형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이까?
현적이 대답했다.
음. 나도 이 일을 어떻게 결정내려야 할지 잘 모르겠소. 허죽은 공을 세우기도 했고 과오를 저지르기도했소. 공이 있으면 상을 내려야 하고 잘못이 있으면 벌을 내려야 하오. 게다가 네 소저가 본사로 들어와 승려로 변장을 한 일은 허죽의 뜻에 따라 행해진 것도 아니오. 그러니 우리가 솔직하게 구마지와 여러 고승들에게 진상을 설명해 주면 그것으로 될 것 같소. 그들이 믿든 믿지 않든 별로 양심에 거리낄 게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한들 아랑곳할 필요가 없소. 그러나 허죽이 본분을 저버리고 방문좌도의 무공을 따로 배웠으니 소림사에서 그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결국 허죽을 소림사에서 쫓아내겠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었다.
파문출교(破門出敎)는 불교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현적은 다시 말을 이었다.
허죽은 무공을 빙자하여 여러 계율을 어겼으니 마땅히 그의 무공을 제거한 이후 산문 밖으로 쫓아내야 되겠지만 그가 원래 익혔던 무공은 이미 다른 사람에 의해 해소되었소. 게다가 지금 그의 몸에 실린 무공은 본문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 무공을 제거할 권리도 없는 형편이오!
허죽은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방장! 여러 사백조와 사숙조님들께서 저희 부처님의 얼굴을 보아 자비로운 은혜를 베풀도록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제자로 하여금 전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해 주십시오. 어떠한 벌을 내리시든 기꺼이 받겠습니다. 다만 제자를 절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십시오.
여러 노승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거기다가 허죽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자 그의 태도로 보아 뉘우치고 있음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매우 진지하게 느껴졌다.
소위 사람을 잡을 칼을 내려 놓게 되면 그 자리에서 부처님이 된다는 말이 있고 고해는 무변이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언덕이란 말도 있다. 그야말로 불문은 방대하며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그 근본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극악무도하고 잘못된 일에 빠져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수천 수백 가지의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감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불도자의 올바른 도리였다. 더군다나 자신이 길을 잘못든 것을 알고 참회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 어릴 적부터 출가한 본사의 제자가 착한 길로 들어서는 길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소림사는 본래 선종(禪宗)에 속한 것이어서 언제나 깨우침을 따졌다. 부처님이나 조상에 대해 비난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 터였고, 율종(律宗) 같은 종파와는 달리 자질구레한 계율을 엄히 지키도록 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 만약에 외부의 사람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는 것을 본 뭇 승려들은 결코 그를 파문하여 축출하는 조처를 취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은, 비단 구마지와 철라성 등 오랑캐 나라의 번승과 관계 있을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중원 땅의 청량사와 보도사 등 커다란 절의 고승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만약 허죽에게 엄한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림파는 자기의 문파 제자를 감싸고 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즉 문호를 중시하고, 시비를 가리지 않으며, 그저 무공만 따질 뿐 계율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틀림없이 받을 것이었다. 그와 같은 말이 밖으로 흘러나가게 된다면, 소림사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게 될 형편이었다.
바로 이때 한 분의 노승이 두 명의 제자로부터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후전에서 걸어나왔다. 바로 현도였다.
그는 구마지의 지력에 상처를 입고 승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전에서 쌍방이 싸운 결과에 대해 관심이 깊어 제자를 보내 끊임없이 통보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구마지 등이 잠시 물러나고 뭇 승려들이 허죽에게 질문을 하는데, 벌을 크게 내리려고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즉시 상처를 돌보지 않고 다시 대웅보전으로 달려나온 것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방장, 이 늙은 목숨은 허죽이 구한 것이외다. 내가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도 괜찮겠습니까?
현도는 나이가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품덕에 있어서도 평소 모든 승려들의 존경을 받는 몸이었다. 현자 방장은 황망히 말했다.
사형,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하십시오. 상처를 건드려서는 아니 됩니다.
현도는 말했다.
나의 한 목숨을 구한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외다. 그러나 아직 눈앞에 여섯가지 큰 일을 해결하지 못한 터가 아닙니까. 만약에 허죽을 절에 남겨 둔다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를 축출한다면 그건......그건......훨씬 어려워지게 되죠.
현적은 물었다.
사형이 말하는 여섯 가지 큰 일이란, 첫째, 구마지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 파라성이 본사의 무공비급을 훔쳤다는 것, 세째, 개방의 신임 방주 장취현이 무림 맹주가 되고자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다른 세 가지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현도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현비, 현고, 현통, 현난 네 분 사제의 목숨을 가리키는 것이라오.
그가 네 승려의 이름을 들먹이자 뭇 승려들은 일제히 합장하여 염불을 했다.
아미타불!
뭇 승려들은 현고가 교봉의 손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통과 현난은 정춘추에게 해를 입었다는 것은 단정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두 명의 원수만 하더라도 너무나 강해 지금까지 원한을 갚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더구나 현비 대사를 살해한 흉수는 도대체 누구인지 아직도 알 수 조차 없는 상태였다. 다만 현비가 가슴팍에 위타저를 맞고 죽었다는 사실만 모두들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위타저는 바로 소림 칠십이 문(少林七十二門) 절기 가운데 하나로서 현비가 수십 년 동안 고되게 연마해 온 무공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모두가 고소 모용씨 집안에서, 상대의 수법을 상대의 몸에 펼친다는 수법으로 독수를 쓴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후에 혜방과 혜경 등이 들려 주는 이야기와 그들이 등백천이나 공야건 등과 사귀게 된 경과를 듣게 되자 모용씨는 무림의 사람과 적이 되고자 하는 뜻이 없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 모용씨 문하의 뭇 사람들은 결코 간사하거나 음흉한 도배들이 아니란 것도 짐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금 전 구마지의 솜씨를 보게 되자, 그가 소림절기를 고루 펼치는 것을 보건대 현비 대사를 죽게 만든 위타저 일 초를 그가 펼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또 그러니까 네 분 고승이 각기 세 사람의 적으로부터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현도는 세 가지 큰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현자는 입을 열었다.
노납은 본사의 방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이 여섯 가지의 큰일에 대해서 한 가지도 제대로 처리를 못했으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그러나 허죽의 몸에 지닌 무공은 모두가 소요파의 무학이외다. 설마하니......설마하니......소림사의 큰일을......
거기까지 말한 그는 다음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뭇 승려들은 그의 뜻을 알 수가 있었다. 허죽의 무공이 고강하기는 하나 다른 문파 즉 방문좌도의 무공이었다. 그러니까 설사 그가 나서서 이 여섯 가지의 큰 일을 모조리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견식있는 사람들은 소림파에서는 허죽 때문에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고 또 소요파의 무공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소림파는 크게 수모를 당하는 격이 된다. 그리고 설사 모두들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은폐하여,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게 한다 하더라도, 득도한 고승들이 어찌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현도가 입을 열었다.
방장의 의견으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이까?
현자는 말했다.
아미타불! 우리들은 역대 조사들의 의발을 받들어 이어온 몸이외다. 오늘 지극히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기는 했으나 노납의 의견으로는 마땅히 정도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옥쇄를 당할지언정 구차한 생명을 부지할 마음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모두들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소림사의 명예를 보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부처님의 자비이시고 역대 조상들의 은덕이 아니겠소이까. 만약 마도가 성하고 정도가 쇠하여, 노납과 여러 사형제들이 목숨으로 교를 지키려고 한다면 절을 위해 한 몸을 바친다 하더라도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고 또한 우리 불교의 정리(正理)를 어기는 일이 아니외다. 소림사는 천 년 동안 천하의 창생을 위해 적지 않은 복을 베풀어 왔으며, 선한 인연을 매우 많이 맺기도 했소이다. 그러니 설사 일시 좌절을 당한다 하더라도 결코 일패도지하여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외다.
이 몇 마디의 말은 평범하기는 했으나 정기가 서린 말이기도 했다.
뭇 승려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방장의 고견이십니다. 삼가 법지(法旨)를 받들겠습니다.
현자는 현적에게 말했다.
사제, 자네는 본사의 계율을 집행해 주시게나.
현적은 대답했다.
예.
그는 고개를 돌려 지객승에게 말했다.
토번 국사와 고승들을 모셔 오도록 하게.
지객승들은 허리를 굽혀 대답하고 나누어 토번 국사와 뭇 고승들을 청하러 갔다.
현도와 현생 등은 몰래 탄식해 마지않았다. 허죽을 감싸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방장의 말은 대의(大義)를 중시하고 있으며 일시적인 방편과 이해득실로 소림사의 계율과 명예를 훼손시킬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허죽의 죄과를 사면하게 된다면 그것은 비록 이긴다 하더라도 패하는 것이지만 공평하게 법을 행하게 된다면 비록 패하더라도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방장은 이미 목숨으로 교를 지키고 법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이것이야말로 끝까지 버텨 보자는 것이며 어떤 요행도 바라지 않는다는 생각을 표명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허죽이 어떻게 벌을 받는가 하는 것은 이제 별로 중요한 일이 못 되었다.
얼마 후 구마지, 신산, 철라성 등 여러 사람들이 대웅전으로 왔다. 그런 연후 종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혜 자 항렬과 허 자 항렬, 그리고 공 자 항렬의 뭇 승려들이 대오를 지어 안으로 들어와 양쪽으로 나누어 섰다.
현자는 합장하고 말했다.
토번국 국사와 여러 사형들은 들으시오. 소림사 허 자 항렬의 제자인 허죽은 살계, 음계, 훈계, 주계 등의 사대 계율을 범했으며 사사로이 방문좌도의 다른 문파의 무공을 배웠고 또 함부로 다른 문파의 장문인이 되었소. 소림사 계율원 수좌 현적은 즉시 계율에 의거하여 벌을 내릴 것이며 용서하지 않을 것이외다.
구마지와 신산 등은 그 이야기를 듣고 매우 뜻밖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란죽검 네 소녀가 승려로 변장한 것을 본 그들은 허죽이 당돌하게 사사로이 절안에 소녀들을 감춘 것으로써, 그가 음계만을 범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방장이 선포한는 죄상은 음계뿐이 아니었다.
보도사의 도청 대사는 나이가 들어 출가한 몸으로 세상의 인정과 물정에 매우 통달한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성격이 자상한 편으로 평소 남의 일에 끼어들어 일을 좋게 매듭짓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입을 열었다.
방장 사형, 그 네 분 소저는 눈썹이 살결에 달라붙어 있을 뿐 아니라 허리가 똑바르고 목이 가늘며 뒷등이 똑바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몸을 옥과 같이 지킨 처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국사에게 손을 쓴 것을 보면 바로 동정공검공(童貞功劍功)이었습니다. 허죽 소사형의 행동에 있어서 부실한 점이 있을지 모르나 음계를 범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현자는 말했다.
사형께서 지적해 주셔서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들이 음계를 범했다고 한 것은 저 네 소녀들 때문이 아닙니다. 허죽은 다른 문파로 투신해서는 천산표묘봉 영취궁의 중인이 되었습니다. 저 네 분 소녀는 영취궁 옛주인의 시비로서 사사로이 본사로 들어와 새 주인을 시중들고자 했던 것인데 그러한 사정을 허죽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소림사에서는 이를 제대로 경계하지 못하고 소홀히 한 점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는지라 그러한 점 때문에 그에게 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동모는 무공이 고강했으나 한 번도 중원 땅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다만 변경이나 해외의 여러 동, 여러 섬의 방문좌도 인사들과 내왕했을 따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취궁이란 이름은 군승들이 귀에 매우 낯설었다. 다만 구마지만이 토번국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바가 있지만, 그 내력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도청 대사는 말했다.
그렇다면 외부 사람은 더 말할 필요가 없구려.
구마지와 철라성 그리고 신산 상인 등은 소림사에 대해서 본래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현자가 일을 매우 공평하고도 엄하게 처리하여 조금도 자기 문하의 제자를 감싸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허죽이 범한 계율 가운데는 외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탄복을 금치 못했다.
현적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낭랑한 어조로 물었다.
허죽, 방장께서 열거한 죄를 모두 승인하느냐? 무슨 변명할 말이 없느냐?
허죽이 말했다.
제자는 승인합니다. 죄가 무겁고 크니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기꺼이 사숙 조의 책벌을 받겠습니다.
군승들은 마음속으로 불안한 감을 느끼며 현적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떠한 처벌을 하겠다고 선포할 것인지 귀를 기울였다.
현적은 낭랑히 말했다.
허죽은 함부로 살계와 음계, 훈계, 주계 등 사대 계율을 어겼으나 마따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백 대의 곤장을 받아야 할 것이다. 허죽, 승복할 수 있겠느냐?
허죽은 그저 백 대의 곤장만 때린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가 범한 사대 계율에 비해 볼 때 실로 조금도 무거운 것이 아님을 느끼고 재빨리 말했다.
사숙조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니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허죽은 승복하는 바입니다.
현적은 다시 말했다.
너는 장문 방장과 무공을 전수하신 사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방문좌도의 무공을 함부로 배웠다. 따라서 너의 몸에 지닌 소림파의 무공을 모조리 제거하는 벌을 내리니 이후에는 소림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승복하느냐?
허죽은 마음이 쓰라린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만회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대답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사숙조께서 내리시는 벌은 무척 공정합니다.
다른 파의 승려들은 조금 전 허죽이 구마지와 격투를 벌였을 때 위타장과 나한권의 소림 무공으로 크게 위세를 떨쳤던 것을 보고, 그 누구도 허죽의 참된 무공이 소림파의 무공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구마지는 자칭 자기가 소림 칠십이 문의 절기를 모두 지니고 있다고 했지만 실제 알고 있는 것은 불과 초보적인 초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참된 소림파의 내공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지극히 적었다. 허죽이 그와 싸울 때 펼친 소무상공에 대해서 그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북명진가, 천산육양장, 천산절매수 등 고심한 무공을 그는 소림파의 무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적이 허죽에게서 소림파 무공을 제거하겠다는 말을 듣자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너희들은 스스로 너희들이 쌓아올린 탑을 무너뜨리는 격이다. 나의 심복지환을 제거해 주는구나. 이것이야말로 더 바랄 나위가 없는 일이다."
각현과 도청 등 고승들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애석하다. 애석해."
현적은 다시 말했다.
너는 소요파의 장문인이고 표묘봉 영취궁의 주인이다. 마땅히 불문의 제자로 있을 수 없으니 환속하도록 해라. 이후부터 너는 소림사의 승려가 아니다. 이러한 조치에 너는 승복하느냐?
허죽은 부모도 모르는 처지였다. 갓난아기 때 절로 들어와 어릴 때부터 소림사에서 커 왔다. 불법의 요지에 대해서 터득한 것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소림사는 그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가 삶을 누릴 수 있는 보금자리이기도 했었다.
일단 절에서 쫓겨난다고 생각하니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그는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땅바닥에 엎드려 울며 말했다.
소림사 방장 대사를 위시해서 여러 사백조님과 사숙조님, 그리고 여러 사백부와 사숙부 및 은사께서는 이 제자에게 깊고 무거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제자가 못나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저버리게 되니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도청 대사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다시 사정을 했다.
방장 사형, 그리고 현적 사형, 노납이 볼 때 저 소사형은 잘못을 깨닫고 크게 후회하는 빛을 보이는 것 같구려. 어째서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지 않으시오?
현자는 말했다.
사형의 지적이 매우 옳습니다. 그러나 불문이 광대하니 어느 곳인들 몸을 기탁할 곳이 없겠습니까? 허죽, 우리가 너에게 벌을 주어 절에서 쫓아내는 것은 결코 너에 대해서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네가 부처님에게 의지하는 길을 단절하는 것도 아니다. 천하에는 수천수만에 달하는 보찰이 있다. 만약 네가 삼보에 귀의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환속한 후에 다시 삭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너는 다른 유명한 절로 찾아가 고승을 사부로 삼아 다시 깊은 소원을 품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일찌기 올바른 깨달음을 얻기 바란다. 설사 다시 출가하여 승려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집안에 부처님을 모시는 거사가 되어 부지런히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는다면 똑같이 증도할 수 있으며 대보살을 위한 부처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뒷말을 할 때 현자의 말은 매우 인자하고 간절한 면이 있었다. 심지어는 은근히 권고하는 뜻도 서려 있었다.
허죽은 더욱더 슬픔이 복바치는 것을 느끼며 절을 하고 말했다.
방장 사백조의 가르침을 제자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현적은 다시 말했다.
혜륜은 듣거라.
혜륜은 앞으로 나아가 합장하고 엎드렸다.
현적은 말했다.
혜륜, 너는 허죽의 사부로서 평소 가르침을 게을리했다. 삼독육근(三毒六根)의 해를 너는 상세히 지도하지 못하여 오늘의 화를 불러일으킨 셈이다. 따라서 너는 삼십 대의 곤장을 맞고 계율원으로 들어가 면벽하며 삼 년 동안 참회하도록 해라. 너는 승복하느냐?
혜륜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자는......제자는 승복하는 바입니다.
허죽은 말했다.
사백조님, 제자가 사부님을 대신해서 기꺼히 삼십 대의 곤장을 맞도록 하겠습니다.
현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허죽은 모두 일백 삼십 대의 곤장을 얻어맞게 된다. 형벌을 집행하는 제자들은 곤장을 가지고 와서 준비하도록 해라. 허죽은 아직은 소림사의 승려이니 형을 가함에 있어 조금도 가벼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절을 나간 이후 허죽은 바로 다른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본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본파 상하의 사람들은 모두가 예의를 다해 존경해야 할 것이다.
네 명의 형벌을 집행하는 제자들은 명을 받고 나가더니 얼마 후 대웅보전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각기 한 자루씩 단목으로 만든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현적이 막 명을 내려 형을 가하라고 했을 때 갑자기 한 명의 승려가 총총히 대웅보전으로 달려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한 웅큼의 명첩이 들려 있었는데 두 손으로 높이 쳐들어 현자에게 바치며 말했다.
방장에게 알립니다. 여러 영웅들이 찾아왔습니다.
현자가 명첩을 보니 모두 삼십여 장이나 되었다. 적혀 있는 이름을 보니 모두 북방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영웅호걸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이 동시에 달려온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절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호들은 어느덧 대웅보전이 문앞에 이르렀다.
현자는 입을 열었다.
현생 사제, 문밖으로 나가 영접하도록 하게.
그는 다시 말했다.
여러 사형, 귀빈이 왕림하셨으니 본파의 문호를 정리하는 일은 잠시 한 걸음 늦추도록 하겠소이다. 멀리서 오신 손님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한 조치이니 널리 양해하십시오.
그는 즉시 몸을 일으켜 대웅보전의 처마 아래로 가 섰다.
얼마 후 수십 명이나 되는 호걸들이 현생과 지객승의 안내를 받으려 대웅전 앞으로 다가왔다.
현자와 현적, 현생 등은 불법을 부지런히 닦은 고승이지만 역시 무학의 고수이기도 한지라 무림의 동도를 만나게 되니 하나같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이 많은 유명한 호걸들이 찾아온 것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림사의 군승들은 밖에서 도를 행할 때 많은 속세의 친구들을 사귀기 좋아했다. 지금 찾아온 군웅들 중에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서로 손을 잡고 반갑고 인사를 나누며 즐거워했으며 하나같이 친구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대전 안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그리고 구마지와 철라성 등에게 소개를 시켜 주기도 했다.
현자가 그들에게 찾아온 뜻을 물으려고 했을 때 지객승이 다시 돌아와 보고를 했다. 산동과 회남에서 수십 명이나 되는 무림의 인물들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현참이 나가 그들을 맞아 대웅보전으로 안내했다.
이때 한 명의 흑의를 걸친 사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개방의 장 방주가 우리들을 초청해 놓고 그 자신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단 말이오?
그러자 한 음침하고 가느다란 음성이 대꾸했다.
노형, 급히 서두를 것이 뭐가 있소? 기왕 왔으니 기다려 봅시다. 구경거리가 어디로 사라지겠소? 당연히 우리와 같은 작은 인물들이 먼저 도착하는 것이 당연하지. 주인공들은 천천히 나서는 게 아니겠소?
현자는 낭랑히 말했다.
여러분들이 약속이나 한 듯 폐사에 왕림한 데 대하여 소림사는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접대가 소홀한 점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군호들이 일제히 말했다.
원 별말씀을 하십니다. 방장께서는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십시오.
이때 소림 승려와 친분이 있는 무림 호걸들이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모두들 개방 방주 장취현의 영웅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영웅첩에 의하면 소림파와 개방은 언제나 중원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제 장취현이라는 신임 개방 방주는 중원 무림의 맹주를 세워 약간의 규칙을 정해 동도들이 일제히 준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 월 십오 일에 소림사로 친히 와서는 현자 방장과 상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설명과 더불어 각자는 영웅첩을 내 보였다.
영웅첩에 적힌 언어는 매우 겸손하였으나, 자기가 아니면 그 누가 무림 맹주가 되겠느냐는 교만함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장취현이 소림사로 오겠다는 것은 무공으로 소림사의 군승들으로 격퇴시켜 소림파가 수백 년간 무림에서 누려온 위풍을 꺽어 압도하겠다는 뜻이 분명하였다.
영웅첩에는 군웅들을 소림사로 초청한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무림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움직이길 좋아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했다. 개방과 소림파가 자웅을 겨룬다고 하자 그 어느 누구도 친히 그 성대한 모임에 참여코자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서로 약속이나 한듯 달려오게 된 것이었다.
이때 대전의 뭇 사람들은 장취현이 누구인지 알아맞추려고 소란스러웠다. 현자 방장과 사형제들은 며칠 동안 회의를 열었다. 모두들 장취현이 바로 교봉의 가명이라고 추측했다.
교봉의 무공과 지모를 추측하건대. 개방 안에 그의 적이 되는 장로들을 죽이고 방주의 자리를 되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개방과 소림사는 평소 우호적인 관계인데 갑자기 그와 같은 행동으로 나올 리가 없는 것이었다.
교봉이 취현장에서 크게 싸운 것은 천하가 알고 있었다. 그가 장취현으로 가명을 쓴 것은 기실 자기의 내력을 밝힌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얼마 후 호남성과 호북성, 그리고 강남 각처의 영웅들이 도달하게 되었다. 사천성과 협서성의 영웅들도 달려왔으며 광서성과 광동성의 영웅들도 도착하였다.
군웅들은 남북으로 수천 리를 격하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모두 이 날 잇따라 도달한 것을 보면, 개방은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한두달 전에 영웅첩을 보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현자와 뭇 승려들은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커다란 분노를 느꼈다.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겨우 수 일 전에 자칭 개방 방주라는 장취현이 서찰을 보내 와서는 무림 맹주를 뽑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며칠 안으로 친히 소림사로 찾아와 삼가 현자 방장의 가르침을 받들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편지에는 언제 찾아온다는 날짜나 천하 영웅들을 초청했다는 말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군웅들이 모여들게 되니 소림사는 그만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개방이 이미 오래 전부터 그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는데도, 소림파는 강호에서 대단히 큰 연락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전혀 아무런 소문도 듣지 못했으니, 이야말로 무공을 겨루기 전에 이미 한 수 진 셈이었다.
개방의 이와 같은 행동은 자기네들이 승산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소림의 승려들은 생각했다.
"개방에서 우리들을 자기네들의 총타로 초청하지 않는 것은 체면상 우리에게 예의를 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 방주가 친히 이쪽으로 온다는 것은,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공격해 오겠다는 수작이 아니겠는가."
이때 현생은 그의 절친한 친구인 하북 신탄자(神彈子) 제갈중(諸葛中)에게 말했다.
잘 한다. 제갈 늙은이야, 소문을 들었으면 나에게 전갈이나 할 것이지, 이게 뭐냔 말이다. 우리가 삼십 년간 사귄 교분은 오늘로 끝났네.
제갈중은 주름진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연신 변명을 했다.
나는......나는 사흘 전에야 겨우 영웅첩을 받았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밤낮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라네. 거기다가 도중에 두 필의 좋은 말을 지쳐 죽게 만들었다네. 그거야 물론 날짜를 놓치게 되면 자네와 같은 땡초 중에게 한 팔의 힘조차 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현생은 흥, 하고 코웃음쳤다.
그렇다면 자네는 오히려 호의를 가지고 있었군. 제갈중은 말했다.
어찌 호의가 아니겠는가? 자네 소림파의 무공이 제아무리 고강하다 하더라도 이 늙은 형이 와서 함성을 지르고 위세를 돋우는 것이 해롭지는 않을 게 아닌가? 자네들 방장께서는 본래 영웅첩을 돌려 구 월 초나흗 날 소림사로 와서 고소 모용씨를 만나 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 이 형이 몇 달 일찍 달려온 셈이니 그야말로 자네에게 미안한 점은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네.
현생은 그제서야 마음이 풀렸다. 다른 영웅호걸들에게 물어 보니 길이 먼 사람들은 영웅첩을 일찍 받았고 길이 가까운 사람들은 영웅첩을 늦게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달려와야 때 늦지않게 도달할 수 있는 여유밖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많은 친구들 가운데 소림사에 전갈하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게 아니라 개방에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 각자가 소림사에 도달할 일정을 정확히 계산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루라도 일찍 소림사로 달려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한 셈이었다.
군승들은 이와 같은 점을 미루어 개방에서 오래 전부터 계획을 짜고서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주와 방의 무리들이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먼저 기세를 올리고 있는 형편이니 아마도 앞으로 무서운 수단이 적지않게 뒤따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은 바로 유 월 보름이라 날씨가 매우 무더웠다. 소림의 뭇 승려들은 먼저 신산 상인과 철라성 등 한 무리의 고승들을 상대해야 했고 곧이어 구마지와 싸워야 했으며 그 뒤에는 허죽에게 모든 사실을 캐내어야 했다.
그들은 적지 않은 기력을 소모했다. 그런데 별안간 사면팔방에서 각처의 영웅 호걸들이 다투어 달려왔으니 절안의 승려들이 많다고는 하나 너무나 창졸간에 일어난 일들이라 모두 손발이 어지러울 따름이었다. 다행히 지객원 수좌 현정(玄淨)대사는 경리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인물이었다. 거기다가 절에서 생산되는 소채도 풍부하고 곡식도 미리 준비해 둔 것이 많았다.
뭇 승려들은 현정의 지휘 아래 군호들을 접대하게 되었는데 조금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현자 등은 손님들을 영접하느라고 남들과 상의할 여가도 없었다. 다만 마음속으로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객승이 다시 보고를 했다.
대리국의 진남왕 단 전하께서 왕림하셨습니다.
소림사 현비 대사가 몸에 위타저를 맞고 죽은 일에 대해서 단정순은 황제인 형의 명령을 받들어 현자 방장을 친히 만나러 온 적이 있었다. 대리 단씨는 소림사의 친구하고 할 수 있는데 이때에 또 와 주니 실로 크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얻게 된 셈이라 현자는 속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대리 단 왕야께서는 아직도 중원에 계셨던가?
그는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갔다.
현자와 단정순 및 그의 시종들인 범화와 화혁간, 파천석, 주단신 등은 이미 두 차례 만나는 셈이었다.
서로 몇 마디의 인사말을 나누고는 곧 대전으로 들어와 군웅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제일 먼저 소개된 사람은 바로 토번국의 국사 구마지였다.
단정순은 대뜸 안색이 변하여 포권을 했다.
저희 못난 자식인 단예가 명왕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못난 자식의 말을 들으니 길을 오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단모 역시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구마지는 미소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단 공자는 어째서 전하를 따라서 함께 오시지 않았소이까?
단정순은 말했다.
못난 자식놈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간악한 승려의 손에 잡혀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 그렇지 않아도 국사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던 참입니다.
구마지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단 공자의 행방에 대해서 소승은 알고 있습니다. 아, 애석합니다, 애석해.
단정순은 가슴이 쿵 하니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단예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지나 않았는가 싶어서 재빨리 물었다.
국사께서는 어찌하여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그는 많는 변고를 겪은 사람이었지만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자기도 모르게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수 개월 전 그들 부자는 모여서 함께 지내는 즐거움을 누린 바 있었다. 그 후 단예는 농아 선생의 바둑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돌아오는 도중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후 수개월이 지났는데도 단정순은 소식을 들을 수 없어 혹시나 단연경, 구마지 혹은 정춘추 등의 독수를 입지 않았는가 싶어 줄곧 걱정해오던 터였다.
그러다가 이 날 개방의 신임 방주 장취현이 소림파와 무림의 맹주 자리를 놓고 싸운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즉시 총총히 소림사로 달려오게 되었는데 바로 아들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단씨 집안은 무림의 세가(世家)였다. 그러니 개방과 소림사에서 중원 맹주를 다투는 일에 자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구마지가 입을 열었다.
소승은 천룡 보찰에서 고영 대사와 본인 방장, 그리고 왕야의 형님 되시는 분을 만나 뵈었소이다. 하나같이 정신이 맑아 보이고 여유가 있으며 장엄하면서도 차분하여 진정 득도한 인사라고 할 수 있었소이다. 그런데 진남왕께서는 위명을 천하에 떨치고 있는데 어찌하여 자식을 사랑함에 있어서 속된 범인의 태도를 보이십니까?
단정순은 정신을 가다듬고 속으로 생각했다.
"예아가 만약 이미 불행한 일을 당했다면 놀라거나 당황해 하더라도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이 번승에게 얕보일 뿐이다."
그는 입을 열었다.
아들딸을 사랑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오. 세상 사람들이 만약 아들과 딸들을 낳고 키우며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온세상에는 사람을 다시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외다. 우리와 같은 범인들이 어찌 자비와 덕을 갖춘 고승과 견줄 수 있겠소이까.
구마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승이 처음 단 공자를 대하게 대었을 때 그가 매우 헌칠하고 준수한 인물로 반드시 단씨 가문을 빛내게 되고 이 후의 대리국 명군(名君)이 되어 저 남쪽의 백만 창생에게 복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보았소이다.
단정순이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땡초 중은 매우 고약하구나. 일부러 말을 빙빙 돌리는구나."
구마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아, 정말 애석한 노릇이오. 그 단 공자로 말하면 결코 복 많은 사람이 아니었소이다.
그는 다시 단정순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그는 중원에 와서 한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소.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치마자락에서 맴돌고 있으며 영웅심이고 큰 뜻이고 모조리 팽개쳐버린 상태라오. 그 소저가 동쪽으로 가면 그도 덩달아 동쪽으로 가고, 그 소저가 서쪽으로 가면 그도 서쪽으로 간다오. 누가 봐도 그는 할일 없고 경박한 청년에 불과하니 그것이야말로 애석한 일이 아니겠소?
이때 헤헤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여자의 웃음 소리였다. 뭇 사람들은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웃음 소리를 낸 사람은 초라한 중년 여자가 절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남자로 변장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주의 어머니답게 변장의 재간이 있었다. 지금은 남자로 분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정말 남자처럼 보였으며 결코 영취궁의 네 소녀처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변장과는 달랐다. 다만 그녀의 음성이 부드럽고 간드러져서 여자임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뭇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게 되자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단씨 집안의 소황자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몸이고 장수 문중의 호랑이 아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 대단하죠, 대단해.
단정순이 곳곳에 정을 남긴 사실은 강호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군웅들이 단예가 왕어언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두고 그녀가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은 장수 문중의 아들이라고 평한 사실에 빙그레 웃으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단정순 역시 껄껄 소리내 웃으며 구마지에게 말했다.
그 못난 자식놈이......
구마지가 그 말을 가로챘다.
결코, 못난 것이 아니외다. 매우 잘났지요, 잘났어요.
단정순은 그가 자기의 풍류적이면서 방탕한 생활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대수럽게 여기지 않고 계속해 말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국사께서 알고 계신다면 알려 주십시오.
구마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공자는 정에 얽매어 온종일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소승이 그를 만났을 때는 피골이 상접해 있었으며 얼굴마저 싯누렇게 변해 있었지요. 지금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그것도 매우 말하기 어려운 일이외다.
갑자기 한 젊은 스님이 단정순 앞으로 다가와 공손히 절을 하며 말했다.
왕야께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세째 아우는 정신력도 강하고 몸도 지극히 건강하답니다.
단정순은 반례를 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모습으로 보아선 소림사의 승려와 비슷한데 어째서 단예를 세째 아우라 하는지 몰라서 물었다.
젊은 스님께선 최근 나의 자식놈을 본 적이 있소?
그 젊은 스님은 바로 허죽이었다.
네, 그 날 저와 세째 아우는 영취궁에서 흠뻑 취하도록 술을 마셨지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별안간 단예의 목소리가 대전 밖에서 울려퍼졌다.
아버님, 소자 여기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한 사람이 번개같이 대문 안으로 달려들어와 단정순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단예였다. 그는 내공이 심후하고 귀가 기이하도록 밝아 사문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 부친과 허죽이 주고받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급히 능파미보를 펼쳐 안으로 뛰어들어온 것이었다.
부자는 몇 달만에 만나니 물론 반가웠다. 단정순은 아들을 자세히 살폈다.
단예의 얼굴은 풍상을 겪어 피곤한 빛을 보였으나 눈빛은 더욱 맑아 강해 보였다. 결코 구마지가 말한 것처럼 피골이 상접하고 얼굴이 싯누런 상태는 아니었다.
단예는 고개를 돌리고 허죽에게 말했다.
둘째 형, 다시 화상이 되었군요?
허죽은 이미 반 나절 동안을 불상 앞에 엎드려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예를 보자 꿈속의 그 소저가 머리에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러니 어떻게 꿈속의 그 소저에 대해 단예에게 물어볼 용기가 나겠는가?
구마지는 왕어언이 반드시 소림사 부근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림사에서 아무리 큰 변고가 있다 해도 이 단예라는 순정을 품은 공자가 소실산 위로 올라오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왕어언은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에 대해 정이 깊으니 결코 모용복과 헤어졌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진기를 돋우고 낭랑히 말했다.
모용 공자, 소실산으로 온 이상 어찌 절 안으로 들어와 부처님께 절을 하지 않으시오?
고소 모용은 엄청난 명성을 얻고 있는지라 군웅들은 어리둥절해져 생각했다.
"원래 고소 모용 공자도 도달했구나. 아마도 저 번승과 사전에 약속을 한 모양인데 함께 와서 소림사를 괴롭히려는 것일까?"
그러나 사문 밖에선 전혀 기척이 없었다. 잠시 후 멀리 산골짜기에서 메아리 치는 소리가 들어왔다.
모용 공자......소실산으로 올라왔으면......절 안으로 들어와 부처님께 절을 하지 않으시오?
구마지는 말했다.
"이번엔 나의 짐작이 틀린 모양이구나, 모용복은 소실산에 올라오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지 않다면 대답을 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는 즉시 하늘 향해 껄껄 웃고서 몇 마디 얼버무리는 말을 하려고 했다.
갑자기 문밖에서 음산한 어조가 들려왔다.
모용 공자는 정 노괴와 한참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소이다! 정 노괴를 죽인 이후 소림사의 여래에게 절을 하러 올 것이오!
단정순과 단예 부자는 그 소리를 듣고는 안색이 굳어졌다. 그 소리는 바로 악관만영 단영경의 음성이었다.
바로 이때 몸에 청포를 걸치고 손에 철장을 짚은 단연경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고, 그의 등뒤에는 무악부작 섭이랑과 흉신악살 남해악신, 궁흉극악 운중학 세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사대 악인이 일시에 도달한 것이었다.
현자 방장은 손님이 착하고 악하고간에 상관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예로써 대접했다.
소림사의 규칙으로는 여자 손님을 접대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현자 방장은 섭이랑을 보았을 때 일순 어리둥절해 했을 뿐 아랑곳하지 않았다.
승려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오늘은 적이 너무 많구나. 이럴 때는 여자 손님을 접대하지 않겠다는 것은 쓸데없는 분규만 일으킬 뿐이다."
남해악신은 단예를 보자 금방 얼굴이 시뻘개져서 몸을 돌리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착한 제자, 그 동안 잘 있었느냐?
남해악산은 그가 착한 제자라고 부르자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무섭게 쏘아붙였다.
제기랄! 못난 사부, 넌 아직도 안 죽었구나!
대전의 군웅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흉신악살과 같은 사람에게 의젓하고 헌칠한 단예가 놀랍게도 제자라고 부른 데 대해서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흉신악살이 단예를 사부라 칭하면서도 그 언사가 무례함을 보고 더욱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섭이랑은 미소하며 말했다.
정춘추가 신통력을 발휘해 모용 공자를 막아낼 수 없도록 우리가 만들었어요. 모두들 달려가 구경하지 않으시겠어요?
단예가 크게 부르짖었다.
아이쿠!
그는 먼저 대웅전에서 달려나갔다.
그 날 모용복, 등백천, 공야건, 포부동, 풍파악, 왕어언 이 여섯 사람은 표묘봉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다. 모용복 등은 쓸데없이 영취궁의 내분에 뛰어든 데 대해 자책하고 있었다.
꾀하던 일을 이루지 못했고 체면도 세우지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왕어언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녀는 고종 오라버니만 옆에 있으면 그저 즐거웠다.
여섯 사람은 중원으로 되돌아왔다. 이 날 오후 그들은 커다란 숲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풍파악이 갑자기 부르짖었다.
피비린내가 나는군!
그는 칼을 뽑아 냄새나는 쪽으로 달려가며 생각했다.
"피비린내가 나는 곳이라면 십중팔구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려갈수록 피비린내는 진하게 풍겨왔다. 별안간 눈앞에 어지럽게 십여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무기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흘린 선혈들은 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이 사람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바탕 큰 싸움은 이미 끝난 것 같았다.
풍파악은 발을 굴렀다.
제기랄! 한 걸음 늦었군!
모용복도 잇따라 도달했다. 이 시체들은 의상이 남루하고 등에 푸대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 모두 개방의 사람들이었다.
공야건이 말했다.
이 자는 네 개의 푸대를 달고 다니는 제자이고 어떤 사람은 다섯 개의 푸대를 달고 다니는 제자들이군. 그런데 어째서 독수를 당하게 되었을까?
등백천이 말했다.
우리는 시체나 묻어 주세.
공야건은 말했다.
그러죠. 공자, 왕 소저, 두 분은 잠시 저쪽으로 가서 잠시 쉬도록 하시오. 우리 네 사람이 처리를 하리다.
그는 땅바닥에서 한 개의 쇠막대기를 집어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체 속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왕어언은 깜짝 놀라 모용복의 손을 잡았다.
풍파악이 달려가며 말했다.
노형, 그대는 아직도 죽지 않았소?
시체더미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아직 죽지 않았소. 하지만......거의 다 됐소......거의 다 됐어.
이 사람은 오십여 세 되는 늙은 거지였다. 머리는 반백이었고 얼굴과 가슴은 모두 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표정이 매우 끔찍했다. 풍파악은 재빨리 품속에서 한 알의 약을 꺼내 그의 입속에 물려 주었다.
쓸......쓸모가 없을 것이오. 나는 배에 두 번의 칼질을 당했으니 말야.....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풍파악은 물었다.
누가 당신들을 해쳤소?
그 늙은 거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기 부끄럽소. 우리......우리 개방의 내분으로......
풍파악과 포부동이 놀랄 때 그 늙은 거지는 말했다.
이 일은......이 일은 본래 남에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외다. 그러나......그러나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더 속일 수가 없구려. 여러분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구원해 주어서 정말 고맙소이다. 아, 개방의 제자는 서로 죽이고 죽는 형편이니 오히려 서로 모르는 무림의 동도보다도 못 하게 되었소이다. 조금 전......조금 전 여러분들이 우리들의 시체를 묻어 준다는 말을 듣고 그 같은 인정을 품고 있는 여러분들에 대하여 이 늙은이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그대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시체라 할 수 없고 또 우리가 그대를 묻어 주지 않았으니 고마워할 것이 없소이다.
그 늙은 거지는 말했다.
개방은 우리와 한 형제지만 우리를 죽인 이후 시체......마저 묻어 주려 하지 않았소. 그런데......무슨 형제라고 할 수 있겠소? 그야말로 금수보다도 못하오.
포부동은 그 늙은 거지의 말에 변명을 하려고 했다. 금수는 시체를 묻을 줄 모른다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때 모용복이 눈짓으로 제지하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 늙은 거지는 말했다.
이 늙은이는 여러분들에게 개방......개방의 오 장로에게 한 가지 전갈을 해달라고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우리 신임 방주 장취현이라는 녀석은 괴인에 불과하며 전......전관청이라는......간적의 말만 듣고 있소이다. 우리는 그 장가가 방주가 된 데 대하여 승복할 수 없었소. 이에 대해 전관청은......사람을 보내......우리를 죽인 것이외다. 그들은 오 장로를 상대하고자 할 것이니 그 어르신께 절대......조심하도록 일러 주시오.
모용복을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노형, 안심하시오. 그 소식은 우리들이 방법을 강구해서 전해 드리도록 하겠소. 그런데 귀방의 오 장로는 지금쯤 어디에 계시오?
그 늙은 거지는 눈초리가 희미해지더니 모용복을 보며 말했다.
나......나도 모르오.
모용복은 말했다.
그것은 괜찮소. 우리가 이 소식을 널리 강호에 퍼뜨리기만 하면 자연 오 장로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오. 어쩌면 전관청 등은 그런 소리를 듣고 오 장로에게 감히 손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르오.
그 늙은 거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소이다. 정말 고맙소.
모용복은 물었다.
귀방의 신임 방주인 장취현은 도대체 어떤 내력을 지닌 사람이오? 우리들은 견문이 좁아 오늘 처음 그 이름을 듣게 되는구려.
그 늙은 거지는 신이 나서 말했다.
그 무쇠탈을 쓴 녀석은......
모용복 등은 깜짝 놀라 일제히 물었다.
바로 무쇠머리를 한 그 괴인 말이오?
그 늙은 거지는 말했다.
나는 서하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소. 그래서 그 녀석을 직접 보지는 못했소. 그러나 방의 친구들에게 들으니 그 녀석은 본래......본래 머리에 무쇠탈을 쓰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후 전관청이 방법을 강구하여 그 무쇠탈을 제거했는데 그 얼굴은......아, 도깨비보다 더 흉칙하게 보인다는구려. 그건 그렇고, 그 녀석의 무공은 매우 무서워 몇 달 전 개방 군산 대회에서 모두 방주를 추대하여 뽑기로 했으나 다투기만 했을 뿐 결정을 내릴 수 없었소. 그러다 끝내 무공으로 정하기로 했소. 그런데 그 무쇠탈을 쓴 녀석이 방의 열 두명이나 되는 고수를 때려 죽이고 방주......방주가 되었소. 많은 형제들은 승복할 수 없었소. 전관청이라는 간적은......전관청이라는 이 간적은......
그의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금방이라도 숨어 끊어질 것 같았다.
등백천은 말했다.
노형, 이 형제가 그대의 상처를 살펴보고 상처를 치료한 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그 늙은 거지는 말했다.
배에 구멍이 뚫려 창자가 흘러나왔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소? 뜻은 고맙지만......
그는 손을 뻗어 품속을 더듬었다. 무엇을 꺼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
수고......수고스럽지만......
공야건은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물었다.
귀하는 무슨 물건을 꺼내려는 것이오?
그 늙은 거지는 고갤ㄹ 끄덕였다. 공야건은 그의 품속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꺼내어 손바닥 위에 놓았다. 건량, 약물, 은자 따위가 적지 않게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띠에 붙들어 매어져 있었다.
늙은 거지는 말했다.
나는......틀렸소. 이......이 한 장의 방문은 매우 중요하오. 아무쪼록 은공께선 강호 일맥임을 감안하시어 개방......개방의 어느 장로라도 좋으니 장로 손에 전해 주도록 하시오......그 무쇠탈의 녀석과......전관청이라는 간적에게만은 건네 줄 수 없소이다. 그러면 이 늙은이는 구천지하에서라도 고마워할 것이외다.
그는 심하게 떨리는 오른손을 뻗더니 공야건의 손에서 접혀진 노란 종이를 집어들었다.
모용복은 말했다.
귀하는 안심하시오. 그대는 상처가 정말 낫기 어렵다면 그 한 장의 물건을 우리는 귀방의 장로에게 전해 줄 것을 약속하겠소.
그는 노란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 늙은 거지는 나직이 말했다.
불초의 성은 역씨외다. 이름은 대표라고 하지요. 수고스럽지만......수고스럽지만 귀하가 전갈을 해주시오. 나는 서하 나라에서 왔으며 이것은 서하국의 국왕이 사위를 고른다는 방문이외다. 이 일은......이 일은 엄청난 일이외다. 그야말로 대송나라의 안위에 관계되는 일이외다. 그러나 나는 중원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안의 이 같은 모략에 부딪히게 되었소이다. 그저 오 장로를 만나야만 그에게......그에게 말을 할 수 있을 터인데......말을 할 수 있을 터인데, 뜻밖에도 ......뜻밖에도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게 되었구려. 아무쪼록 귀하는 수천만의 창생을 보아서라도......창생을 보아서라도......창생......
그는 잇따라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더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더욱 초조해져 말을 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입속에서 한 모금의 선혈을 뿜어냈다. 그리고 모용복의 준수하고 의젓한 모습을 대하자 한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는 듯 물었다.
귀하......귀하는 누구시오? 고소......고소......
모용복은 말했다.
그렇소이다. 불초가 고소 모용복이외다.
그 늙은 거지는 놀라며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본방의 큰 원수요......
그는 손을 뻗어 모용복의 손에 잡힌 누런 종이를 힘주어 빼앗으려고 했다.
모용복은 그가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 두며 생각했다.
"개방에선 지금껏 내가 개방의 부방주 마대원을 해쳐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구나. 그 여운은 사그러들기는 했으나 이 사람은 내가 그들의 큰 원수라고 인정하고 있는가 보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인 이 사람과는 그것을 가지고 따지지 말도록 하자."
그 늙은 거지는 그 노란 종이를 가져가 힘주어 찢으려고 했다. 그러나 두 발을 뻗더니 선혈을 미친 듯 뿜어내며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닌가?
풍파악은 늙은 거지의 손가락을 제치고 그 노란 종이를 취했다. 그러고 보니 그 종이 위에는 붉은 글씨로 구불구불한 외국 문자가 씌어 있었다. 그리고 글씨의 말미에는 한 커다란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
공야건은 여러 나라의 문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고 나서 입을 열었다.
과연 서하 국왕이 부마를 뽑는다는 방문이외다. 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서하국의 문의공주(文儀公主)는 이제 나이가 갓 스물로서 국왕께서는 한 사람의 문무를 겸비하고 준수하며 영기발랄한 미혼 남자를 부마로 얻고자 하며 금년 팔월 중추절에 선발키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스스로 인재라고 자신한다면 그 전에 문서를 써내 배알을 청한다면 국왕은 모조리 접견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설사 부마에 뽑히지 않는 인사가 있다고 해도 그 인재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벼슬을 내린답니다. 더욱 두 번째가 되어 아깝게 떨어진 사람에게는 상금으로 금은......
공야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풍파악이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이 개방의 형씨는 정말 우스꽝스럽구려. 그가 서하국으로부터 이 방문을 가지고 달려온 것을 보아 하니 개방의 어느 장로로 하여금 서하로 달려가 부마를 뽑는 데 참가하라고 말하려는 것이군요. 그래서 서하국의 부마가 되도록 하려는 것일까요?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네째 아우는 모르는 것이 있소이다. 개방 중의 몇 장로는 늙고 못났지만 방 안의 젊은 제자들 가운데는 문무를 겸비하고 영민하며 총명한 사람들이 물론 적지 않게 있소이다. 만약 개방의 제자가 서하 나라의 부마가 된다면 개방은 크게 출세를 하지 않겠소이까?
등백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개방의 호걸들은 공명부귀를 구하지 않는다고 들었네. 그런데 어찌 이 역대표는 그토록 이 요구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을까?
공야건은 말했다.
큰 형, 그 사람은 이 일이 엄청난 일로서 대송나라의 안위에 연관된다고 말하지 않았소? 천하창생을 위한다는 말로 미루어 보아 개방에서 공명부귀를 구하자는 것은 아닐 것 같소.
포부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공야건은 말했다.
세째 아우는 또 무슨 고견이라도 있소?
포부동은 말했다.
둘째 형, 그대는 또 무슨 고견이 있느냐고 묻는데 이 "또"라는 의미는 내가 이미 고견을 토했다는 뜻이 아니겠소? 그러나 나는 어떤 고견을 말한 적이 없으니 나에게 어떤 고견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믿지 않고 있을 것이오. 그런데 그대가 나에게 또 무슨 고견이 있느냐고 묻는 참된 의도는 포 세째가 또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려고 하는구나 하는 말로밖에 볼 수 없소이다. 그렇지 않소?
풍파악은 남과 싸우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자기 형제와는 결코 싸우지 않았다. 포부동은 남과 시비를 걸기를 좋아했는데 시비를 거는 상대는 친구든 가까운 사람이든 위든 아래든 전혀 가리지 않았다. 한 마디라도 맞지 않으면 걸고 넘어져 끝까지 겨루는 사람이었다.
공야건은 그의 성질을 잘 아는 터라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째 아우는 과거 적지 않은 고견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내가 "또"라는 말을 쓴 것은 진정으로 그대가 다시 고견을 말하기를 기대한 것이었소.
포부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내가 볼 때 말을 하는 당시에 그대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소이다. 따라서......
그가 다시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등백천이 그의 말을 낚아챘다.
세째 아우, 이 역대표가 서하국에서 부마를 뽑겠다는 방문을 가져와 우리에게 개방 장로의 손에 전해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했는데, 그대의 의견에는 어떤 의도 같은가?
포부동은 말했다.
내가 역대표가 아닌데 그의 의도를 어찌 알겠소이까?
모용복은 공야건을 바라보았다. 그의 의견을 듣고자 한 것이다.
공야건은 미소했다.
나의 생각은 세째 아우와 크게 다르답니다.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던지 포부동이 반드시 반대하고 나설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미리 말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 같은 전제를 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포부동은 입을 열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이번에 그대는 잘못 짐작했소이다. 나의 생각은 그대와 똑같으며 전혀 다르지 않소이다.
공야건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 참 묘하기 이를데 없군.
모용복은 말했다.
둘째 형, 그대는 어찌 생각하시오?
공야건은 말했다.
당금 세상에는 대요나라, 대송나라, 토번, 서하, 대리 다섯 나라가 함께 서 있는 형편인데, 대리국은 남쪽에 위치하여 세상과 다투지 않소. 그래서 그 나라는 별문제가 안 되지만 나머지 네 나라는 모두 이 세상을 하나로 통일하고 천하를 병합하려는 뜻을 갖고 있소이다.
포부동은 말했다.
둘째 형, 이것은 그대의 잘못이외다. 우리 대연(大燕) 나라는 국토가 없지만 공자께서 시시각각 연나라를 일으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시오. 그러니 우리 대연이 이후 옛 조상의 위풍을 다시 펼쳐 연나라를 중흥시킬 줄 그 누가 알겠소이까?
모용복, 등백천, 공야건 등은 일제히 엄숙하게 서서 긴장된 얼굴 빛을 하고 말했다.
나라를 되찾자는 뜻은 어느 때고 잊은 적이 없소.
다섯 사람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거나 혹은 장검을 뽑아 가슴 앞에 세웠다.
모용복의 조상인 모용씨는 바로 선비족(鮮卑族)이었다. 과거 오호(五胡)가 중원 땅을 어지럽히게 되었을 때, 선비 모용씨는 중원으로 들어와 크게 위풍을 떨친 적이 있으며 한때는 전연(前燕), 후연(後燕), 남연(南燕), 서연(西燕) 등의 나라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 후 모용씨는 북위(北魏)에 멸망당해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전해 주고 아버지에서 아들에게 전해 주듯 세세대대로 시종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섰다가 망하는 동안 모용씨도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대연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웅지는 여전히 자손들의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기는 했으나 갈수록 희망이 없어 보였다.
오대(五代) 말년에 이르게 되었을 때 모용씨 집안에서는 한 명의 무학귀재 모용룡성(慕容龍城)이라는 사람이 배출되었다. 그는 두전성이(斗轉星移)라는 무공을 창안하게 되어 천하무적으로 천하에 명성을 날렸다.
그는 조상이 남긴 가르침을 잊지 않고 호걸들을 결합하여 나라를 세우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는 나누어진 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해지는 법으로서 조광윤이 대송나라를 세워 사해가 평화를 되찾게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평화와 훌륭한 정치를 바라게 되었다. 따라서 모용룡성은 무공이 고강하기는 했으나 끝내 뜻을 펴지 못하고 우울한 일생을 마쳤다.
수대 후 모용복의 손에 이르게 되었을 때 모용룡성의 무공과 웅지가 모조리 모용복의 몸에 옮겨지게 되었다. 대연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도모하는 것은 송나라로 볼 때는 대역무도한 짓이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모용씨는 암암리에 사람들을 규합하고 재물과 양식을 모으는 듯했으나 조금도 소문이 나지 않도록 했다.
무림에선 고소 모용씨라 하면 그저 그 집안의 무공은 지극히 고강하나 행동은 이상야릇해서 요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용씨가 마음속에 커다란 뜻을 품고 있으니만큼 강호의 일반인들이 행하는 행동과는 크게 달랐고, 일반 무인들이 볼 때 그와 같은 행동은 지극히 눈에 거슬렸다. 거기다가 상대의 수법을 상대의 몸에 펼친다라는 수법으로 명성이 자자해지자 더욱 뭇 사람들의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때 포부동이 연나라를 중흥시키겠다는 큰 뜻을 들먹이자, 각자 자기들도 모르게 검을 뽑아들고 몸을 일으켜 강경한 어조로 가슴속에 품고 있던 뜻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왕어언은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놓았다. 여러 사람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모용씨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반대해 왔었다. 그리고 왕이나 황제로 칭하고자 하는 것은 모용씨 집안에서 수 백 년간 품어온 헛된 공상이며 망상이고, 나라를 되찾는 것은 가망이 없을뿐 아니라 멸족을 당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왔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는 줄곧 모용복이 자기를 찾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 스스로 능호(菱湖) 깊숙한 곳에 은거해 모용씨 집안과 내왕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공야건은 왕어언의 뒷모습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요나라와 송나라가 해마다 싸워 요나라가 우세를 차지하고 있지만 송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구려. 서하와 토번은 서쪽 변경에 웅크리고 있는 꼴이며 이 두 나라에서는 각기 정병 수십 만을 거느리고 있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하든 토번이든 요나라를 도운다면 대송나라가 크게 위험하게 되고 송나라를 돕게 된다면 대요나라는 언제 망할지 모르게 될 판이죠.
풍파악은 큰소리로 말했다.
둘째 형의 그 말씀에는 일리가 있소이다. 개방은 송나라에 대해서는 충성심이 강하오. 역대표가 방문을 가지고 돌아온 것을 보면, 대송나라에 젊은 영웅이 있어서 서하국이 부마를 뽑는 데 응했으면 하고 바라는 모양입니다. 만약 송나라와 서하국이 혼인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 되지 않겠소?
공야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정으로 천하무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네. 다만 대송나라는 재물이나 양식이 풍족하고 서하는 군사가 강하니 이 두 나라가 연합을 하게 된다면 요나라나 토번은 결코 적수가 될 수 없고 조그만 대리국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 내 추측엔 송나라와 서하가 손을 잡게 된 이후 제 일 단계는 대리국을 병합하는 것이고 제 이 단계는 요나라로 진군하는 것일게야.
등백천은 말했다.
역대표의 생각은 바로 그것인지도 모르겠구만. 그러나 송나라와 서하국이 혼인을 하려면 결코 순조롭지 않을 것이네. 요나라와 토번, 대리국에서 그 소문을 듣게 된다면 반드시 그 대책을 강구해서 깨뜨리고 말 것일세.
공야건은 말했다.
방법을 강구해 깨뜨릴 뿐 아니라 각국에서 하나같이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려고 할 것이외다.
등백천은 말했다.
그런데 서하 공주가 아름다운지 추악한지, 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사람인지 아니면 교만방자하고 악랄한지 알 수가 없구만.
포부동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허허허. 큰형은 어찌 그리 관심이 많소? 설마 큰형이 서하국으로 가서 모집에 응해 보겠다는 것이오? 그래서 부마 나리가 되어 거드름을 피워보겠다는 것이오?
등백천이 웃었다.
만약 그대의 등 큰형이 이십 년 정도 젊고 무공이 십 배 정도 고강하며 인품이 백 배 정도 더 준수하다면 나는 즉시 서하국으로 달려가겠네.
그는 곧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들이 대연나라를 찾자고 도모한 지 수백 년이 되었으나 시종 거울 속의 꽃이요. 물 속의 달처럼 성공하지 못했네. 그 이유를 따지고 캐보면, 역시 세력이 있는 사람이 밀어 주지 않았기 때문일세. 만약 서하가 우리 대연나라 모용씨 집안과 인척 관계라면 모용씨는 중원에서 의거의 깃발을 들어올리자마자 서하에서는 구원병을 보낼 것이니 대사를 어찌 성공시킬 수 없겠는가?
공야건은 말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과거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진(晉), 진(秦) 두 나라는 대대로 혼인을 해왔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진나라의 공자 중이(重耳)가 나라를 잃어 나라에서 쫓겨나자 진목공(秦穆公)이 군사를 출동시켜 공자 중이를 다시 진(晉)나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진문공(秦文公)이 일대의 패업을 이룩하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포부동은 본래 무슨 일이든 끝에는 억지를 부려 반박하기 일수였는데 이때는 등백천과 공야건의 말을 얌전히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소이다. 이 일이 우리 대연나라를 중흥시키고 나라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서하 공주가 아름답든가 추악하든가, 좋든가 나쁘든가 상관할 것 없소이다. 그저 그녀가 포 세째에게 시집을 오겠다고 한다면 설사 그녀가 늙은 암퇘지처럼 생겼다 해도 이 포 세째는 체면불구하고 맞아들이겠소이다.
뭇 사람들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고개를 들고 모용복을 쳐다 보았다.
모용복은 이 사람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들 네 사람은 바로 모용복에게 서하국으로 달려가 부마의 선발에 응해보라는 뜻이었다. 사실 나이나 무공 인품에 있어서 당금 세상에선 아마도 어느 젊은이도 그를 능가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만약 서하국으로 가서 장가를 들고자 한다면 칠팔 할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만약 서하국의 국왕이 집안과 문벌을 따지고 든다면 자기는 대연나라의 왕손 귀족이기는 하나 역시 패망한 지 오래된 집안이고 대송나라에서는 일개 초야지사에 불과하니 불리할 수도 있었다.
송나라나 대리국, 토번국 등이 각기 왕이나 공자, 후작을 보내서 혼사를 도모한다면 그나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그 사람들과는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모용복은 다시 한 번 그 방문을 쳐다보았다.
공야건은 그를 따른 지 오래되어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어 입을 열었다.
방문에는 분명히 말하고 있었습니다. 선발에 응하는 자는 작위와 문벌을 따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품과 재간은 크게 따진다고 했습니다. 부마가 된다면 작위와 문벌은 따라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인품과 재간은 결코 제왕이 승리를 내린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자, 모용씨 집안에서 수백 년간 품어 온 웅심은 이제......이제 그대의 몸에 달려 있습니다......
그는 심신이 크게 흔들리는지 긴 말을 하지 못하고 더듬기까지 했다.
포부동은 말했다.
공자께서 진문공이 되신다면 우리 네 형제는 바로 개자추(介子推)......
그러자 그는 갑자기 개자추가 진문공에 의해 불에 타 죽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러한 생각은 크게 불길한 생각이라 생각하고 즉시 웃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모용복은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손가락을 미미하게 떨었다. 그 역시 이번이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주가 혼인을 하려면 언제나 군주의 명에 의해 대신들이 중매를 하게 되는데, 대개 보면 공신인 집안의 자제를 선택하여 부마로 봉했으며 결코 이같이 방문을 돌리고 천하에 알려 공개적으로 부마를 뽑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왕어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그루의 버드나무 아래 서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한 가지 축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냇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옷차림은 매우 엷어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모용복은 물론 외사촌 누이가 어려서부터 자기에게 정을 두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외숙모와 자기의 부모들이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면으로 그녀가 자기와 만나는 것을 저지했지만 그녀가 무공을 지니지도 못한 연약한 몸으로 의연히 집을 나서 강호를 떠돌아다님을 마다하지 않고 자기를 찾아온 것은 실로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모용복은 사방을 쫓아다니며 오로지 나라를 중흥시키고 되찾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무공의 연마마저도 정성을 기울이지 않을 정도니 남녀의 정에 대해선 더욱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사촌 누이가 자기에 대해 이토록 큰 정을 보이고 있는데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그녀를 버리고 달리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공주에게 구혼을 한다는 것은 역시 그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야건은 나직이 기침을 하고 말했다.
공자, 큰일을 도모할 때는 적은 예의에 구애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대 영웅 호걸은 반드시 정(情)이라는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포부동은 말했다.
대연나라가 만약 나라를 되찾게 된다면 공자께서는 중원의 중흥지주(中興之主)가 되시니 삼궁육원(三宮六院) 쯤 거느리는 것이 뭐가 대단하겠습니까? 서하 공주는 정궁낭랑(正宮娘娘)이 되시고 저 외사촌 되는 왕씨 소저는 서궁낭랑(西宮娘娘)으로 봉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공자께서 마음속으로 그녀를 좀더 편들고 총애한다고 해서 그 누가 간섭하겠습니까?
그는 평소 남과 시비를 거는 말만 전문적으로 해왔는데 이때 큰일을 상의하는 데는 매우 도리있는 말을 하고 있었다.
모용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부친이 생전에 그에게 당부하던 말을 생각했다.
그 말들은 대연나라를 중흥하는 일 외에는 큰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대의대업을 일으키는 일이라면 부형이라도 살해할 수 있고 자제라도 죽일 수 있으며, 아무리 친한 친척이나 친구라도 희생할 수 있으며 더욱 남녀의 애정은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왕어언은 자기에 대해 깊은 정을 갖고 있으나 그 자신은 평소 그녀를 누이처럼 여겼지 특별히 정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일찍부터 훗날 반드시 외사촌 누이를 처로 삼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그 같은 일에 대해서는 생각할 때가 적었으며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더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대사를 이룰 수만 있다면 포부동의 말처럼 장래 외사촌 누이를 비로 삼든 빈으로 삼든 자기는 총애만 해주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다시 생각해 본 후 다시는 왕어언을 개의치 않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의 말씀이 옳소이다. 이것은 대연나라가 중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올시다. 그러나 대장부는 자기가 한 말에 신의를 지켜야 하니 이 방문을 우리들은 반드시 개방의 손에 넘겨 주도록 합시다.
등백천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개방에서는 공자와 견줄 인재가 없다고 생각되오만 우리들은 이 일을 감추거나 덮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풍파악은 말했다.
그것이야 물론이오. 큰형 그리고 둘째 형께서는 공자를 모시고서 서하로 가시어 부마 간택에 응해 보십시오. 세째와 저는 이 방문을 개방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팔월 중추절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일이 남아 있으니 개방이 사람을 선택하더라도 얼마든지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득을 봤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모용복은 말했다.
우리들은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공명정대해야 하오. 나는 친히 개방 장로의 손에 넘겨 주겠소. 그러고 난 후 서하로 가도록 하겠소.
등백천은 손뼉을 쳤다.
공자의 그 말씀은 지극히 옳습니다. 우리들은 절대 남들이 등뒤에서 하는 쓸데없는 말을 얻어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공야건과 포부동, 풍파악 세 사람은 일제히 옳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복은 왕어언을 불러서 말했다.
누이, 이 개방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살해를 당했는데 이것은 강호에 큰일과 연관되어 있고 그래서 나는 반드시 개방 총타로 가 봐야겠구려. 나는 그대를 먼저 만다산장으로 데려 가고자 하오.
왕어언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저는......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어머님은 저를 보면 반드시 저를 죽이려고 할 거예요.
모용복은 웃으며 말했다.
외숙모님은 성격이 조급하시지만 그녀에겐 그대밖에는 딸이 없는데 어찌 죽일 수 있겠소. 몇 마디 꾸짖고 끝낼 것이오.
왕어언은 말했다.
아니에요......아니에요. 저는 집으로 가지 않겠어요. 저는 함께 개방으로 가겠어요.
모용복은 서하국으로 가서 부마간택에 응하기로 한 만큼 그녀에 대해 퍽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잠시 동안 그녀의 뜻을 받들도록 하자. 후에 다시 말하기로 하지."
그는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그대는 여자의 몸이니 우리를 따라 강호를 떠다닌다는 것은 매우 힘드오. 그러니 그대는 개방의 총타로 갈 필요가 없소. 그대가 만다산장으로 가고 싶지 않다면 연자오 우리 집으로 가서 잠시 거처하도록 하시오. 내가 일이 끝나는 대로 그대를 보러 가겠소.
왕어언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마음이 여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소원이 있다면 바로 고종 오라버니에게 시집을 가서 연자오에서 거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용복이 연자오로 가서 살라고 하지 않는가? 이것은 물론 정식으로 청혼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정은 명백하게 된 것과 같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기쁨의 빛이 넘쳐 흘렀다.
등백천과 공야건은 서로 쳐다보았다. 이같이 천진난만한 소녀를 기만한다는 것에 가슴 깊이 가책을 받았다.
별안간 철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풍파악이 자기의 뺨을 때린 것이다.
왕어언은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풍 네째 오라버니, 왜 그려셔요?
풍파악은 말했다.
한 마리 모기가 나를 물었기 때문이오.
그들 네 사람은 동쪽을 향했다. 이틀을 채 가지 못했을 때 단예가 싱글싱글거리며 뒤에서 쫓아와서 말했다.
아이쿠! 정말 공교롭군. 모용 공자, 등 나리, 공야 둘째 나리, 포 세째 나리, 풍 네째 나리, 왕소저, 다시 그대들과 부딪히게 되었구려. 모두들 동쪽으로 가는 길이니 우리 함께 가도록 합시다.
포부동은 그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단예는 풍파악, 모용복, 왕어언의 생명을 구해 준 적이 있는 터라 공공연히 그를 떨쳐 보릴 수도 없고 동행하자는 것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길을 가는 동안 시큰둥하고 비웃음의 말을 해댔으나 단예는 듣는 둥 마는 둥 상관하지 않고 그저 평소처럼 편안히 마음을 갖고 있었다. 포부동이 무슨 말을 하면 그는 엉뚱한 말을 하곤 했다.
일행은 도중에서 개방과 소림파가 무림 맹주를 다투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모용복과 등백천 등은 살그머니 상의를 했다. 개방과 소림파에서 싸워 쌍방이 손해를 입게 된다면 모용씨는 어부지리로 이득을 얻게 되고 무림 맹주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림 맹주가 된다면 강호의 호걸들을 호령할 수 있을 것이고 깃발을 세우고 의거를 일으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포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소림사로 달려갔다. 그런데 소실산 아래 도달하게 되었을 때 성숙노괴 정춘추와 부딪히게 되었다.
이 몇 달 동안 정춘추는 문호를 크게 열고 제자들을 마구 거두어들였다. 제자들이 흑도이고 농민이고 방문좌도이고 더구나 요사한 무리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자기의 문하로 들어와 자기의 호령을 듣는다고 하면 누구든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 짧은 수 개월 동안 중원 강호의 나쁜 자들은 마치 파리가 비린내 나는 곳에 달라붙듯 정춘추의 제자가 되겠다고 달려오는 자들이 길을 메웠다.
모용복은 바로 소성하의 모임에서 하마터면 정춘추에게 죽을 뻔했고 두 번째는 객점에서 크게 싸우다가 다행히 빠져 나올 수 있었는데 이번에 상봉하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의 무리들이 벌떼처럼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여간 꺼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풍파악은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두세 마디가 오고가기도 전에 즉시 적진으로 뛰어들어 성숙파의 제자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단예는 왕어언을 데리고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왕어언은 고종 오라버니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성숙파의 무리들은 조수처럼 달려들었고 모용복 등을 가운데 두고 그들을 둘러쌌다.
단예는 능파미보를 펼쳐 성숙과 제자들을 피하게 되었는데 곧이어 부친의 음성을 듣고 절로 달려가 만나게 된 것이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빨리 가서 왕 소저를 업고 이 위험한 곳을 벗어나야지."
그는 나는 듯 달려나갔다.
41 연운십팔기가 비호처럼 밀어닥치다
(燕雲十八飛騎,奔騰如虎風烟擧)
정춘추는 현통과 현난 두 승려를 살해한 소림파의 큰 원수였다. 군웅들은 그가 소실산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대뜸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현생 대사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오늘날 반드시 용감하게 나서 정 노괴를 사로잡아 현난과 현통 두 분 사형의 원수를 갚아야 될 것이오.
손님들이 멀리서 오셨으니 우리는 먼저 예를 갖춘 후 다시 싸워도 늦지 않을 것일세.
군승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예.
현자는 다시 말했다.
여러 사형과 친구분들께서도 나가시어 성숙파와 모용씨가 어떤 고초를 주고받는지 구경하시는 것이 어떠하오?
그렇지 않아도 군승들은 속이 근질거리던 터라 그 말아 떨어지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배분이 얕은 젊은 호걸들은 벌떼처럼 우르르 달려나갔다.
곧이어 사대 악인과 각 처의 영웅 호걸, 대리국 단씨, 뭇 사찰에서 온 고승등이 다투어 빠른 걸음으로 나섰다. 곧이어 챙그랑, 쨍쨍, 하는 소리가 잇따라 울려퍼졌다.
혜 자 항렬의 소림 승려들이 사부와 사백 그리고 사숙의 무기들을 날라온 것이었다.
현, 혜, 허, 공, 사대(四代) 소림승은 각기 무기를 들고 절을 떠났다.
막 대문 입구에 이르게 되었을 때 산허리에서 한 승려가 달려와 전갈을 했다.
성숙파의 제자들은 칠백 명이나 됩니다. 산허리의 정자 안에서 모용 공자 등을 겹겹이 에워싸고 심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석판으로 된 길을 따라 산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시커멓게 보이는 것은 모두 사람들 머리인데 아무래도 천 명은 넘을 것 같았다.
이때 부르짖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산 위에까지 들려왔다.
성숙노선께서 오늘 친히 독전하시게 되었으니 백전백승하는 것이 당연하다!
너희들 조무래기들이 감히 노선에게 완강하게 저항하다니 정말 당돌하구나!
빨리빨리 무기를 던지고 성숙노선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라!
성숙노선께서 소림사로 왕림하셨으니 새끼손가락으로 한 번 찔러도 소림사는 즉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새로 성숙파에 들어간 사람들은 재간을 배우기도 전에 먼저 사부에게 아부하는 요령부터 배우는 모양이었다.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칭송하는 소리는 귀가 따가울 정도였고 소실산 위는 공덕을 칭송하는 노래로 뒤덮인 것 같았다.
소림사는 절을 세운 지 천 년이나 되는데 역대의 군승들이 읊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소리를 모두 합친다 해도 지금 성숙파의 제자들이 사부에 대해 칭송하는 소리에 비한다면, 크게 뒤질 것 같았다.
정춘추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실눈을 가늘게 뜨고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모습을 술에 잔뜩 취한 모습과 비슷했다.
현생은 단전에 진기를 돋우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나한대진(羅漢大陣)을 펼쳐라!
그러자 붉은 옷자락을 펄럭이는 가운데 그림자가 마구 구르는 듯했다.
오백 명의 승려가 동쪽에서 한 무더기를 이루고 서쪽에서 한 떼를 지었다. 그리고 온 산과 들을 덮을 듯 흩어졌다.
군웅들은 오래 전부터 소림파의 나한대진에 대해 듣고 있었다. 그러나 백 여년동안 소림파에서는 한 번도 외부인 앞에서 펼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본사의 승려 외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이때 뭇 승려들의 모자와 옷은 각기 다른 색을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홍색을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회색을 하고 있었으며, 혹은 황색 혹은 흑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기도 다들 달랐는데 어떤 승려는 칼을 들었고 어떤 승려는 검을 들고 있었으며 어떤 승려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어떤 승려는 방편산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나는 듯 달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그들은 성숙파의 제자들을 가운데 두고 에워쌌다.
성숙파의 사람수는 소림파의 수보다 많았다. 그러나 대다수가 새로 거두어들인 오합지졸이었다. 단독으로 싸움을 하게 된다면 어느 정도 제각기 재간은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진을 치고 싸우는 패싸움을 그들은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만 손과 발이 어지러워졌고 성숙노선을 칭송하는 소리도 약해졌다.
대부분의 성숙파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제는 소림승들을 칭송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현자 방장은 말했다.
성숙파의 정 선생이 소실산에 왕림하신 것은 소림파의 적이 되자는 것이외다. 그러니 각 처의 영웅들은 위에서 구경만 하시고 소림사에서 서쪽에서 온 고인에 대하여 항거하고 공격하는 모양을 지켜보는 것이 어떻겠소?
강남 사천과 협서성, 호남, 호북은 말할 것도 없고 광동성과 광서성 등의 영웅들은 다투어 부르짖었다.
성숙노괴는 무림의 해충이외다! 모두들 같은 적개심을 가지고 저 마두(魔頭)를 주살해야 할 것이오.
그들은 각자 무기를 뽑아들고 소림사를 도와 싸우려고 했다.
이때 모용복과 등백천 등은 이미 스무 명 남짓한 성숙파의 제자들을 살상한 뒤였다. 그리고 많은 구원병이 도달한 것을 보고 즉시 수장 밖으로 물러나 잠시 싸움을 멈추고 형세를 관망했다.
성숙파의 제자들 역시 속으로 불안한 감을 떨칠 수 없어서 감히 앞으로 나서 공격하지 못했다.
단예는 동쪽으로 몸을 날리고 서쪽으로 흔들하며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어가서 왕어언의 곁으로 달려갔다.
왕 소저, 나중에 형세가 위험해지면 내가 그대를 업고 나가도록 하겠소.
왕어언은 얼굴을 붉혔다.
저는 상처를 입지도 않았고 남에게 혈도를 짚히지 않았어요. 저는......저 스스로 갈 수 있어요......
그녀는 모용복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말했다.
저의 고종 오라버니는 무공이 고강하여 충분히 저를 보호하실 수 있어요. 단 공자께선 나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에게 무슨 재간이 있어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와 견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같은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겸연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그건......아, 왕 소저, 우리 아버님도 오셨소. 바로 바깥 쪽에 계십니다.
그는 왕어언과 몇 차례 환난을 겪기도 하고 먼 길을 동행하기도 해서 자리를 함께 한 시일이 짧지 않았다. 그러나 단예는 한 번도 자기의 신분을 들먹인 적이 없었다.
단예의 마음속에는 왕어언이 바로 하늘의 선녀였고 자기는 속세의 천한 인간에 불과했다. 따라서 자기가 본래 왕자라는 신분에 대해서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고 있었으며 하늘의 선녀 눈에 왕자와 서민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왕어언은 단예가 몇 차례나 스스로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자기를 구하고자한 사실에 마음속으로 감동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이 단예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단예는 한 가지 이상한 보법을 배운 책벌레이고 때로는 말을 잘 듣나 때로는 말을 잘 듣지 않는 무예를 펼치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녀가 고종 오라버니가 쓸데없는 의심을 할까봐 단예가 멀리 서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때 그녀는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왔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일어 말했다.
그대의 부친께선 대리에서 오셨나요? 그대 부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겠지요?
단예는 기뻐서 말했다.
그렇소. 왕 소저, 내 그대를 우리 아버님께 소개시키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 아버님은 당신 같은 여자를 보시면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오?
왕어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뵙지 않겠어요.
단예는 물었다.
어째서 뵙지 않으려 하오?
그는 왕어언이 응낙하지 않자 오직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시 말했다.
왕 소저, 나의 의형인 허죽도 이곳에 있소. 그는 다시 화상이 되었더군요. 그리고 나의 제자도 왔소. 정말 재미있게 되었소이다.
왕어언은 그의 제자가 바로 남해악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째서 천하에서 세 번째 가는 악인인 흉신악살을 제자로 삼았는지 그 이유를 그에게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남해악신의 괴상한 모양을 떠올리자 미소가 떠올랐다.
단예는 그녀가 미소를 짓자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지금 성숙파의 제자들에게 겹겹이 에워싸인 처지이지만 왕어언의 부드러운 말과 웃음짓는 모습을 대할 수만 있다면 하늘같이 큰일이라도 도외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림사의 승려들이 나한대진을 펼친 형상은 좌우는 나래처럼 뒤를 지키고 전후는 서로 호응하고 있는 양상이었다.
몇 명의 성숙파 제자들이 서쪽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맞닥뜨리게 되자마자 그들은 다투어 부상을 입었다.
정춘추는 말했다.
모두들 움직이지 않도록 해라.
그는 낭랑히 외쳤다.
현자 방장, 그대 소림사는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스스로 일컫고 있는데 내가 볼 때는 실로 우리의 공격을 한 번 받아낼 만한 형편이 못 되는 것 같소이다.
뭇 제자들은 다투어 부르짖었다.
그렇소! 성숙노선께서 왕림하시게 되면 소림사의 화상들은 하나하나 죽어 뼈를 묻을 곳이 없게 될 것이오!
천하 무림은 모두 다 본래 우리 성숙 일파에서 비롯된 것이오! 오로지 성숙파의 무공만이 진정으로 정통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밖의 모든 것은 모두 사마외도이외다!
돌연 그 누가 목청을 돋우어서는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성숙노선께서는 덕망이 천지를 지배하시며 위세는 온누리에 떨치니 고금에 비할 자가 없더라!
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징이나, 북, 퉁소, 피리를 꺼내서는 두둘기거나 부는 사람이 있어서 매우 시끌시끌했다.
군웅들은 대부분 성숙파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터라 모두 아연해지고 말았다.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소리 가운데 갑자기 산허리께에서 말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는 더욱 요란해지게 되었고 얼마 후 네 폭의 누런 깃발이 불쑥 솟구쳐 올랐으며 잇따라 네 필의 말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는데 말을 탄 사람의 손에는 각기 깃발이 들려 있었고 바람을 맞은 깃발은 펄럭이고 있었다. 네 폭의 누런 깃발에는 모두가 다섯 자의 커다란 검은 글씨가 씌어 있었다.
"개방 방주 장"
네 필의 말은 산 벼랑가에 서더니 말을 탄 사람이 다투어 말에서 내렸고 네 폭의 누런 깃발을 벼랑의 가장 높은 곳에 꽂았다.
네 사람은 모두 다 개방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등에는 푸대를 짊어지고 있었으며 손에는 깃발을 잡은 채 말 한 마디 내뱉지 않았다.
군웅들은 수군거렸다.
개방의 방주 장취현이 도달한 모양이군.
그 네 폭의 누런 깃발은 천하를 굽어보는 기세를 과시하는 듯했다. 기를 든 사람은 민첩하고 다부진 솜씨를 보였는데 성숙파의 자화자찬을 하는 꼴과 대조되어 훨씬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한 감을 느끼게 했다.
누런 깃발이 막 세워지자 일백 수십 필이나 되는 말들이 질풍과 같이 산 위로 올라왔다. 가장 앞쪽에 말을 탄 사람들은 백여 명이나 되는, 여섯 개의 푸대자루를 멘 육대 제자였고, 그 뒤에는 삼사십 명의 일곱 푸대를 멘 제자였으며, 십여 명은 여덟 개의 푸대를 멘 제자였다.
잠시 후 아홉 개의 푸대를 멘 네 명의 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말에서 내리더니 두 줄로 늘어섰다.
개방의 사람들은 중요한 임무를 띠는 사람들 이외에는 언제나 말을 타지 않았고 또 수레를 타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와 같은 기세를 보게 되자 이미 강호의 일반 호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많은 무림의 명숙들은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는 몰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이어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두 필의 청총 준마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 올라왔다.
왼쪽의 말 위에는 몸에 자색 장삼을 걸친 소녀가 타고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웠지만 두 눈동자에는 빛이 없었다.
원성죽은 이를 보자 부르짖었다.
아자!
그녀는 자기가 남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어 버리고 본래의 여자 음성으로 부르짖은 것이었다.
오른쪽 마상에 몸을 싣고 있는 사람은 백 군데를 기운 금포(錦袍)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 표정은 딱딱했으며 그 모습은 마치 시체와 같았다. 군웅들 가운데는 견문이 넓은 사람들이 있어 이를 보고 대뜸 그가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으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사람은 아마도 바로 개방의 방주 장취현인 모양이구나. 그는 소림사와 무림의 맹주를 쟁탈하고자 하면서 어째서 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또 어떤 사람은 생각했다.
"아마도 저 사람은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 같다. 장취현이란 이름은 그저 빌려온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개방의 방주가 된 것을 보건대 어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번 일전에 그는 별로 큰 자신을 갖고 있지 않는 모양이다. 만약 소림 승려에게 지게 된다면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물러섬으로써 체면을 잃게 되는 것을 면해 보려는 것이겠지."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혹시 저 사람은 바로 개방의 전임 방주 교봉이 아닐까?"
물론 이들 가운데 장취현이란 이름 때문에 취현장을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그저 취현장 하면 교봉을 생각했을 뿐이었지 취현장의 유씨 형제가 둘 다 교봉의 손 아래 목숨을 잃게 되고 그 후 장원마저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로 화한 터라 그 누구라도 이 개방의 신임 방주가 취현장의 소장주였던 유탄지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때 아자는 어머니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어머니와 만나서 이러쿵저러쿵 그 동안의 지난 이야기를 주고받을 여가가 없는지라 그저 못 들은 척하고 입을 열었다.
현 오라버니, 이곳엔 사람이 매우 많군요. 나는 조금 전에 그 누가 크게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어요. "성숙노선은 덕망이 있어서 천지와 짝을 짓고 위세는 온누리에 떨쳤으며 고금에 비할 바가 없더라." 정춘추와 그 졸개들은 모두 왔나요?
유탄지는 말했다.
그렇소. 그 문하의 사람 수는 적지 않은 편이외다.
아자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것 참 잘 되었군요. 먼길을 가는 수고를 덜게 되었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천 리 먼길을 멀다 하지 않고 성숙해로 찾아가서 그에게 빚진 것을 갚아야 되지 않겠어요?
이때 걸어서온 개방의 무리들은 끊임없이 산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모두가 다섯 푸대나 네 푸대, 그리고 세 푸대를 짊어진 제자들이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대오를 지어 유탄자와 아자의 등뒤에 늘어섰다.
아자가 등뒤를 향해서 손짓을 했다. 그러자 두 명의 개방의 제자가 각기 품송에서 한 무더기의 자색 빛 도는 물건을 나무 막대기에 매달고는 높이 펼쳤다.
그것은 두 폭의 자색 비단으로 만든 큰 깃발이었다. 허공에서 평탄하게 펼쳐진 것을 보니 깃발에는 여섯 자의 핏빛과 같은 글자가 씌어 있었다.
"성숙파 장문 단(星宿派掌門段)"
이 두 폭의 자색 깃발이 펼쳐지자 성숙파의 제자들은 대뜸 소란을 피웠으며 즉시 그 누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성숙파의 장문인은 바로 정노선인 것을 세상이 모두 알고 있다. 단가라는 사람이 언제 장문인이 되었다는 것이냐?
함부로 사칭하더니, 얼굴 가죽이 두껍다!
장문인 자리를 설마하니 스스로 봉하는 것이더냐?
어느 나이 어린 요괴가 스스로 본파의 장문인이라고 일컫는지 빨리 나서라! 내가 너를 박살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희한한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말을 한 사람들은 모두 다 성숙파에 새로 입문한 제자들이었다. 사후자, 청랑자 등 옛날의 제자들은 모두가 아자의 내력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등뒤에 소봉이란 사람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모두가 두려운 빛을 드러냈다.
뭇 승려들과 속가의 영웅들은 갑자기 성숙파의 장문인이 한 사람 더 불어난 것을 보고 속으로 아연해졌으며 또 한편으로는 통쾌한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이야말로 한 떼의 사마외도들이 스스로 내분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그것 참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때 아자는 두 손으로 세 번 손뼉을 치더니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성숙파의 문하 제자들은 듣거라. 본파에서는 영원히 변치 않는 규칙이 있는데 장문인의 자리는 힘있는 자가 차지한다는 것이다. 본파 가운데 그 누구의 무공이 가장 강하다면 바로 장문인이 되는 것이다. 반 년 전 정춘추와 나는 일전을 벌여 그는 나에게 얻어맞아 일패도지한 바 있으며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서는 나에게 열 여덟 번 큰절을 하고 나를 사부로 모시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파 장문인의 자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설마하니 그가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냐? 정춘추 너는 너무나 대담하구나. 너는 본파의 대제자이니 응당히 뭇 사제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인데 어찌 사조를 기만하고 뭇 사제들을 속이는 짓을 하느냐!?
그녀의 음성은 맑고 또렷또렷해서 한 자, 한 마디가 똑똑하게 울려퍼졌다.
뭇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가 놀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불과 십 육칠 세 되는 어린 소녀이고 또 두 눈마저 멀었는데 어찌하여 장문인이 되었는가 하는 생각들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단정순과 원성죽은 서로를 쳐다보며 아연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자기의 딸이 정춘추의 문하이며 짓궂은 말괄량이로서 그야말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공은 평범한데 감히 사부를 제자라고 칭하니 그야말로 정춘추의 호랑이 수염을 뽑으려는 격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지금 소실산 위에 있는 대리국의 몇몇 되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성숙파의 사람과 대항하기가 어려웠고 또한 그녀를 위험해서 구해낸다는 것도 불가능 한 일이었다.
정춘추는 군웅들이 모여있고,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자가 감히 성숙파의 장문인이라는 깃발을 세우자 그야말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의 가슴속에 미친 듯한 노기가 끓어 올랐으나 얼굴은 여전히 싱글벙글 온화하고도 인자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아자, 본파 장문인의 자리는 오로지 힘 있는 자만이 차지한다는 그 말은 정말 맞았다. 네가 장문인 자리를 노리는 것을 보면 아마도 진짜 실력이 있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나의 삼 초를 받아 보는 것이 어떠냐?
돌연 눈앞이 번쩍하더니 그의 앞 석 자 되는 곳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유탄지였다.
이번에는 너무나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어서 정춘추의 날카로운 시력으로도 그가 어떻게 모습을 드러냈는지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깜짝 놀라 그만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한 걸음이라고 말했지만 경신법을 썼기 때문에 다섯 자쯤 물러서게 되었다.
그런데 유탄지는 여전히 자기 몸앞 석 자 되는 곳에 서 있었다. 이로 미루어 자기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설 때 상대방도 동시에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자기가 물러서는 것을 보고서야 걸음을 옮겨 딛은 것인데도 뒤로 몸을 움직이면서 동시에 그 위치에 선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사람의 무공의 고강함은 정말 무서울 지경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춘추는 죽은 사람의 얼굴과 같은 싯누런 얼굴 가죽을 보고 그 얼굴이 손을 뻗치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 다음과 같을 질문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내가 아자와 무공을 겨루고자 하는데 그대가 왜 나서서 간섭을 하는 것이야?"
그는 즉시 몸을 날려 잡히는 대로 냅다 한 명의 문하 제자를 잡아서는 유탄지에게 던졌다.
유탄지의 임기응변도 신속했다. 즉시 일 장 정도 물러서더니 뒤로 손을 뻗쳐 세 개의 푸대를 짊어진 개방 제자를 잡고 공력을 돋우어 밀어댔다.
이 세 푸대의 자루를 멘 제자는 마치 한 커다란 암기처럼 정춘추에게로 덮쳐들게 되었고 그 성숙파의 문하 제자와 허공에서 쿵, 하며 부딪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와 같이 세차게 부딪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두 명의 제자는 아마도 부딪혀서 근골이 부러져서 박살나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부딪히게 되었을 때 그저 찍찍, 하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여러 사람의 코에는 살이 타는 듯한 냄새가 풍겨 그 냄새를 마신 사람으로 하여금 구역질나게 하였다.
군웅들간에 어떤 사람은 숨을 멈추고 어떤 사람은 뒤로 물러섰으며 어떤 사람은 손을 뻗쳐서는 코로 가져갔으며 어떤 사람들은 즉시 해약을 먹었다. 모두다 정춘추와 장취현이 음흉하고 악독한 내공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부딪히는 순간 두 사람은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져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절명한 것이었다.
정춘추와 유탄지는 일 초를 서로 교환하였으나 고하를 판가름할 수 없게 되자 속으로 모두 상대방을 꺼려하면서 동시에 몇 자 밖으로 물러섰다. 곧이어 뒤로 손을 돌려 한 명의 제자를 잡아서 앞으로 내던졌다.
두 명의 제자는 다시 허공에서 부딪히게 되고 살타는 냄새를 풍기며 일제히 죽고 말았다.
두 사람이 펼친 것은 모두 성숙파의 음흉하고 악독한 무공인 부시독(腐屍毒)이라는 것으로서 살아 있는 사람을 잡아서 적에게 던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실 한번 잡은 사이에 이미 사람을 죽이고 손톱에 묻힌 극독을 핏속으로 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그 사람의 온몸에 모두 시독(屍毒)이 퍼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적이 만약 손을 써서 그 사람을 밀쳐낸다면 반드시 시독을 묻히게 마련이었다. 설사 무기를 가지고 떨쳐 버린다 하더라도 시독은 무기를 따라 손에 옮겨가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몸을 날려 피하거나 혹은 벽공장 같은 무공으로 쳐낸다 하더라도 역시 독기의 침입을 면할 수가 없었다.
유탄지는 그 날 전관청과 짝을 지어 동행을 하게 되면서 전관청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해 주었다. 전관청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내력이 강맹하기 이를데 없으나 무공은 평범하기 짝이 없어 역시 큰 소용이 되지 않겠다."
그 후 아자가 성숙노괴 정춘추의 문하 제자인 것을 알고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 유탄지로 하여금 아자에게 성숙파의 무공을 익히도록 종용하는 한편 아자에게는 유탄지의 무공이 이 세상에서 좀처럼 없는 것이라고 추켜세워 아자로 하여금 일일이 배운 무공을 펼쳐 보여 유탄지에게 지도를 받도록 하라고 부추겼다.
유탄지와 아자는 나이가 모두 젊은 편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그저 아자에게 빠져 있었고 한 사람은 그야말로 눈이 먼 상태라 두 사람은 즉시 그 계책에 빠지게 되었다.
아자는 성숙파의 무공을 한 가지 한 가지 펼쳐 보이게 되었으며 또한 상세히 갈고 닦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유탄지의 부시독 무공은 바로 이와 같은 연유로 배우게 된 것이었다. 부시독 무공의 요결은 극독을 지닌 심후한 내력을 연성한 뒤 대뜸 사람을 한 번 움켜쥐면 죽일 수 있고 또 그 시체에 자기가 묻히고 있는 독을 옮겨 가도록 하는 것이며 무공 자체에 있어서는 별로 특별히 교묘한 것은 없었다.
이와 같은 이치는 성숙파의 문인들이 모두 다 알고 있었으나 그와 같은 내력을 연성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아자는 남경성 밖에서 독사와 독충들을 잡아서 연마를 했지만 독장(毒掌)을 펼칠 수 있는 무공도 연성하지 못한 터이라 부시독을 펼칠 수 없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자는 총명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눈이 멀었다. 그리하여 유탄지의 얼굴 표정을 볼 수 없었고 자기의 목숨도 확실히 장 공자가 정춘추의 손 아래에서 구출한 것이 틀림없는 일일 뿐 아니라 전관청이 교묘한 언변으로 유탄지를 극구 칭찬하게 되자 총명하기 이를데 없는 그녀라 하더라도 무공이 절세적인 장 공자가 자기의 무학을 훔쳐 배우리라고는 결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자가 매 일 초를 말하면 유탄지는 그대로 연습을 했다. 그의 몸에는 빙잠한독이 있었고 또 역근경의 상승내공이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정사(正邪) 두 파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내력이 엄청나 똑같은 일 초라도 그의 손에서 펼쳐지게 되면 나무를 자르게 하고 바위를 갈라지게 하는 등 위력이 무궁했다.
아자는 그와 같은 위력이 엄청난 소리만 듣고 그저 흠모했을 뿐 다른 점은 의심하지 못했다.
유탄지는 그녀에게 역근경에 실린 내공을 연마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자는 유탄지가 연마시키는 대로 내공을 익히게 되자 큰 진전은 없었으나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근골이 민활해지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시일이 흘러가게 되면 탁월한 효과가 있으리라고 내다보았다.
이때 유탄지도 자기가 그와 같은 신공을 갖추게 된 것이 그 괴상한 책의 벌거벗은 승려의 그림과 크게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따라서 아자의 앞에서 자기의 능력을 뽐내기 위해서 그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매일 부지런히 역근경의 무공을 하루도 빠짐없이 익히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창 그림의 선을 따라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휙, 바람이 불어와 그의 괴이한 책이 흩날리면서 수장 밖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유탄지는 한창 몸을 거꾸로 하고 내식을 몇 곳 경맥 중에서 급히 움직이도록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쳐들고 보니 그 괴서는 이미 한 중년 승려의 손에 들어가 있어 유탄지는 그만 크게 다급해진 나머지 부르짖었다.
내 것이오, 빨리 되돌려 주시오.......
별안간 놀람과 분노에 얽히게 된 그는 내식이 대뜸 헛갈리게 되어 그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화상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몸을 돌려 떠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게 되었고 더욱더 초조해진 나머지 사지백해가 더욱더 뻣뻣해져서는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역근경을 빼앗아 간 사람은 바로 구마지였다. 그는 범문(梵文)에 정통하고 또 총명하기 이를데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이긴 했지만 유탄지가 우연히 그 책을 젖게 만들어 그 책의 비밀을 알아낸 행운을 가질 수 없었다.
유탄지는 여섯 시진이 흘러간 이후에야 혈도가 풀어지게 되었다. 혈도는 풀어지게 되었지만 많은 선혈을 뿜어내어 큰 병을 앓고 난 사람처럼 되었다. 다행히 그는 이 책의 그림에서 이미 십 중 육칠은 연마를 한 셈이었고 연마한 지도 오래되어 대다수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로 계속 연마를 하게 됨에 따라 내공은 여전히 날로 불어가게 되었다.
그 후 전관청은 방법을 강구해서 유탄지의 머리에 씌운 무쇠탈을 제거하려고 했다. 무쇠탈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자 인피면구를 씌워서는 뜨거운 무쇠탈을 쓰게 되었을 때 타 버려 뒤죽박죽 울퉁불퉁 하게 된 얼굴 모양을 감추게 만들었다. 그런 연후에 그를 데리고 동정호 군산의 개방 대회에 참여했다. 유탄지의 그토록 심후한 내력과 괴이한 무공에 맞서 개방의 사람들 가운데 그와 대항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유탄지는 쉽게 방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전관청도 정식으로 개방에 복귀하여 아홉 푸대의 장로로 승진하게 되었다. 유탄지는 방주가 되긴 했으나 방중의 사무는 모두 다 전관청이 분부하고 안배하는 대로 따랐다.
전관청은 유탄지에게 승복하지 않는 장로와 제자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걱정했다. 어쨌든 간에 모조리 승복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림파와 중원 무림의 맹주 자리를 놓고 겨루자는 계책을 올리게 되었고 개방의 방주 장취현으로 하여금 천하 무림 제일 인자가 되게 함으로써 그와 같은 공적과 명성으로 방의 불평분자들을 내리누르려는 속셈을 품었던 것이다.
아자는 본래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고 또 호기심이 강했다. 눈이 멀었으나 그와 같은 성격은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전관청의 그와 같은 계책은 아자의 마음에 꼭맞는 일이기도 했다.
유탄지는 본래 무림 맹주가 되고 싶지 않았으나 아자가 힘써 찬성하고 나서게 되자 전관청의 계책대로 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전관청은 애써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치밀히 부서를 짜게 되었다.
각처의 영웅 호걸들이 동시에 유월 보름 소림사에 모이도록 한 것은 바로 그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자는 무공이 천하 제일인 장취현이 뒤에서 자기를 밀어주고 있는 이상 그까짓 성숙노괴 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스스로 성숙파 장문인으로 자처하여 나서게 되었고 사람을 시켜 자색 깃발을 만들어서는 소실산 위로 가지고 올라와 위세를 한껏 펼쳐 볼 작정을 했던 것이었다.
개방 일행이 소실산 위에 오르니 산 위에는 성숙파의 문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이 한 수는 전관청이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유탄지에게 말하여 정춘추가 손을 써 아자가 난처한 지경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만든 것이다.
정춘추는 상대방이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가장 음흉하고 악랄한 부시독 무공을 펼치게 되었다.
이 무공은 매 일 초를 쓸 때마다 한 문인 제자를 희생시켜야 했다. 상대방이 그 일 초를 받아내려고 하면 그 독에 해를 입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고명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절정의 경신법을 펼쳐 십장 밖으로 물러나야만이 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손을 쓰자마자 도망을 쳐 버리면 이 싸움은 물론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탄지는 아자에게서 이 무공을 배우게 되었고 정춘추가 손을 쓰는 즉시 자기 역시 개방 제자의 목숨을 희생하면서 정춘추의 공격을 막았다.
그들 두 사람은 한 명의 제자를 던지고 또다시 다른 한 명의 제자를 던지게 되었다. 쿵쿵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가운데 삽시간에 쌍방은 이미 각기 아홉 명의 제자를 던져 십팔 구의 시체가 땅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는데 하나같이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으며 그 표정이 흉칙해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다.
성숙파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을 품고 죽어라고 뒤로 피하기에 급급했다. 사부에게 잡히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따라서 입으로 칭송하는 소리는 여전히 끊임없이 들렸으나 그 소리는 떨리고 있어 도저히 고무적이고 즐거워하는 뜻이 실려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방주가 갑자기 그와 같이 음흉하고도 악랄한 무공을 펼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본방에서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평소 인의(仁義)를 앞세우는데 방주께서는 어찌하여 천하 영웅들 앞에서 이와 같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무공을 펼치는 것일까? 이렇게 된다면 바로 성숙파와 똑같이 방문좌도의 사람으로 타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만약 교 방주가 여전히 우리의 방주였다면 반드시 정당한 방법으로 성숙노괴의 사악한 수법에 대항했을 것이다."
정춘추는 뒤로 손을 돌려 열 번째의 제자를 움켜 잡으러 들었다. 그런데 그만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뭇 제자들은 이미 멀찌감치 피해 있었다. 그 순간 획, 하는 소리와 함께 유탄지는 열 번째의 사람을 던졌다.
정춘추는 놀람과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다. 다급한 김에 그는 몸을 날려서는 문인 제자들 틈으로 끼어 들었다.
개방 제자의 시체는 질풍같이 날아들게 되었고 성숙파 제자들은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칠팔 명이 큰소리로 "아이쿠, 어머니!"하고 부르짖는 동안에 이미 시체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한 구의 시체는 독이 지독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라 칠팔 명의 사람들은 대뜸 얼굴이 시꺼먼 빛으로 물들게 되면서 땅바닥에 쓰러지더니 몇 번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즉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자는 옆에 있는 전관청으로부터 그와 같은 상황을 전해 듣고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기쁜 음성으로 소리쳤다.
정춘추, 장 방주는 우리 성숙파 장문인의 호법이시다! 네가 그를 패배시킨 이후에 다시 그대의 장문인과 손을 써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이겼는가, 아니면 졌는가?
정춘추는 극도로 울화가 치밀었다. 방금 이 일전에서 결코 자기의 무공이 유탄지보다 못해서 진 것이 아니었다. 장취현이 시체를 던지고 그 힘에 실린 힘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내력이 고강하기는 했으나 매 번 사용된 수법이 똑같았다. 그는 그저 아자에게서 약간의 성숙파의 하찮은 무공을 배운 것에 불과했으며, 그 가운데의 여러 가지 정묘한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이 일전에서 성숙파의 문인 제자들은 개방의 제자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하나같이 멀리 피할 뿐 개방의 제자처럼 의연하게 죽음에 임하여 위기에 처해도 피하지 않는 태도에 못 미치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떠오르는 계책이 있어서 앙천대소했다.
아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웃어? 그래도 웃음이 나오는가? 뭐가 그리 우습지?
정춘추는 여전히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휙휙, 하는 큰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팔구 명의 성숙파 문인들을 잡아서는 닥치는 대로 내던졌다. 하나에 이어 하나를 잇달아 던지는데 신속하기 이를데 없이 모두 다 유탄지에게로 던졌다. 이는 마치 여러 대의 화살을 활시위에 당겼다가 하나하나 쏴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탄지는 이와 같은 연주부지독(連珠腐지毒)이라는 재간을 몰랐다. 그리하여 세 명의 개방 제자를 잡아 내던지게 되었고 네 번째에 이르러서는 미처 손을 쓸 사이가 없어서 다급한 김에 훌쩍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와 같이 하여 날아온 독 묻은 시체를 피한 것이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으니 초식에 있어서 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정춘추는 바로 그가 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왼손을 한 번 슬쩍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아자는 놀라 한소리를 부르짖으며 정춘추에게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를 보고는 그만 실색하고 말았다. 금룡공(擒龍功), 공학공(控鶴功) 같은 무공을 상승의 경지에까지 연마하면 허공을 격하고 물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껏해야 너댓 자 간격의 적을 사로잡거나 무기를 빼앗을 뿐이었다.
무술에서 소위 격산타우(隔山打牛)라고 하는 것도 원래 고수의 벽공장이나 무형신권(無形神拳)이 내경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설사 절정의 고수라 하더라도 내력을 이 장 밖에까지 돋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정춘추는 이때 아자와 육칠 장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구경하는 군웅들 가운데는 적잖은 고수들이 있었지만 정춘추의 이와 같은 일들과 스스로를 비교해 볼 때 좀처럼 흉내낼 수 없는 수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춘추가 아자를 잡는 데 쓴 무공은 진짜 실력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바로 성숙삼보(星宿三-寶)의 하나인 유사색(柔絲索)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이 유사색은 성숙해 부근의 설잠(雪蠶)의 실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설잠은 설상(雪桑)이라는 추운 지방에서 나는 뽕나무 위에 야생하는 것으로서 형체는 빙잠보다 훨씬 작았으며 독성도 없었다. 그러나 뱉어내는 누에실은 질기기 이를데 없어서 단 그 한 가닥 실만 하더라도 좀처럼 잡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설잠은 고치를 만들 줄 몰랐으며 토해내는 실도 지극히 한도가 있어 구하기가 무척 힘든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그 날 아자가 투명한 그물로 저만리를 사로잡아 저만리로 하여금 수치와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결하다시피 하게 만든 바로 그 그물에는 소량의 설잠사(雪蠶絲)가 섞여 있었다. 정춘추의 이 유사색은 모두가 설잠사로 얽어서 만든 것인데 매우 가늘고 투명하여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힘들었다.
그는 아홉 명의 문인 제자들을 내던지면서 동시에 유사색을 내던졌다. 그가 아홉 구의 독시(毒屍)를 던져낸 것은 첫째로 유탄지를 물리치자는 것이고 둘째로는 사람들의 눈을 속여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다 그의 연주부시독을 주시하게 되었을 때 유사색을 던져낸다면 그 누구도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자가 유사색에 자기의 몸이 감겼다는 사실을 알아 차리게 되었을 때는 이미 정춘추에게 끌려간 후였다. 물론 정춘추가 어떤 물건의 힘을 빌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늘어 거의 없다시피 한 유사색을 육칠 장 밖으로 던져서 뭇 고수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대뜸 사람을 잡아채는 이 공력은 역시 비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왼손으로 아자의 등을 잡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혈도를 짚게 되었을 때 유사색은 이미 그의 커다란 소맷자락으로 들어간 이후였다. 그는 시체를 던지고 유사색을 뻗쳐서 손짓을 하여 사람을 잡아쥘 때까지 줄곧 껄껄 웃고 있었다.
아자를 손에 잡을 때까지 그 웃음 소리는 그의 입에서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웃음 소리 역시 사람들의 눈길을 흐트러뜨리는 속임수의 하나이기도 했다.
유탄지는 허공에 몸이 떠 있을 때 이미 아자가 사로잡힌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람과 당황함에 그는 앞으로 급히 달려들었다. 그리하여 여섯 구의 독시가 그의 발 밑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왼발로 땅을 딛는 동시에 오른손을 맹렬히 휘둘러 정춘추를 후려치려고 했다.
정춘추는 왼손을 앞으로 뻗쳐서는 아자의 몸뚱아리로 그의 장력을 받아내려고 했다.
유탄지의 무공은 고강했으나 임기응변의 경험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자기의 일 장이 아자의 근골을 분지르게 될까봐 즉시 내공을 거두어 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력을 쏟아낼 때 전력을 다 기울인 나머지 급히 장력을 거두어 들이려고 하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와 같이 엄청난 장력을 모조리 끌어들이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엄청난 장력으로 자기의 가슴팍을 후려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음 순간 유탄지는 몸을 비틀거리며 왁, 하고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유탄지가 막 한 가닥 숨을 돌리게 되었을 때 정춘추는 그에게 숨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휙휙휙, 잇따라 사 장을 후려쳤다.
유탄지는 단전의 내공을 제대로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부득이 주먹을 휘둘러서 후려쳐야 했는데 일 장을 맞받을 때마다 한 모금씩 피를 토해냈고 잇따라 사 장을 받는 바람에 네 모금의 검은 피를 토해내야 했다.
정춘추는 자기가 우세를 점하자 조금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잇따라 다섯 번째의 일 장을 후려쳐서는 이 기회를 틈타 장취현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때 옆에서 구경하던 몇 사람이 일제히 호통을 내질렀다.
정 노괴, 어디서 살인을 하려고 하느냐!
손을 멈추어라!
나의 일 초를 받아랏!
호통 소리와 더불어 현자, 관심, 도청 등의 고승과 각처의 영웅 호걸들이 개방의 방주가 그와 같이 정춘추의 손 아래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호통을 내지르며 다투어 달려나와 구하려고 했다.
한데 정춘추가 다섯 번째의 일 장을 후려쳤을 때 유탄지도 일 장을 맞받아치게 되었다. 바로 이 순간 정춘추는 몸을 약간 휘청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뭇 고수들은 이를 보자 이 일 초에 정춘추가 약간의 손해를 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즉시 걸음을 멈춘 채 더 나서서 응원하지 않았다.
원래 유탄지는 네 모금의 응어리진 피를 토해낸 이후 내식이 유통하여 제 오장에는 이미 빙잠의 한독과 역근경의 내력을 한꺼번에 쏟아낼 수가 있었다. 정춘추는 장력으로 맞받아치는 데 있어서는 유탄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만약 정춘추가 우세를 차지하여 유탄지에게 상처를 입혀 그의 내력을 크게 약화시키지 않았더라면 방금 이 일 장을 교환함에 있어서 정춘추는 아마 잇따라 다섯 걸음쯤은 물러서야 했을 것이다.
정춘추는 피가 거꾸로 도는 것을 느꼈으나 승복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십성의 공력을 돋우고는 일성을 대갈하며 수염과 머리카락을 모조리 곤두세우면서 획, 하니 다시 일 장을 앞으로 밀어내었다.
유탄지는 한 걸음 다가가서 그 일 장을 맞받아 내며 부르짖었다.
빨리 단 소저를 내려 놓으시오!
그리고 획획, 하니 잇따라 사 장을 후려쳤다. 매번 일 장을 후려칠 때마다 한 걸음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다섯 걸음째 내디디게 되었을 때엔 정춘추와는 얼굴과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다시 손을 뻗치기만 하면 아자를 빼앗아 올 수 있었다.
정춘추는 장력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고, 또 그의 시체같은 딱딱한 얼굴을 대하자 속으로 두려운 마음이 치솟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부시독이라는 무공을 펼칠테니 그대는 조심하게.
그는 왼손으로 아자의 몸을 들고서 몇 번 흔들어 보였다.
유탄지는 급히 부르짖었다.
아니오! 아니오! 절대로......절대로 안 되오!
그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정춘추가 부시독이란 재간을 펼치기만 한다면 아자는 즉시 한 구의 시체로 화하고 말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정춘추는 그의 매우 다급해 하는 음성을 듣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네 녀석은 이 못난 계집애에게 넋을 빼앗겼구나. 하하하, 정말 잘했다. 정말 잘된 일이다."
그는 본래 아자를 사로잡아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가 앞으로 성숙파 장문인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그런데 유탄지의 그와 같은 행동을 보고는 아자를 인질로 삼아 무공이 자기보다 고강한 개방의 방주 장취현을 조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슬쩍 물었다.
그대는 이 계집애를 죽이고 싶은가?
유탄지는 부르짖었다.
그대는......그대는......그대는 빨리 그녀를 내려 놓으시오. 이건......너무나 위험하오.
정춘추는 낄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내가 그녀를 죽이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노릇인데 어째서 내가 그녀를 내려놔야 하지? 그녀는 본파의 반도이다. 이와 같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누구를 죽이라는 것인가?
유탄지는 말했다.
그건......그녀는 아자 소저이외다. 그러니 그대는 어찌하던 간에 그녀를 해 칠 수 없소. 그대는 이미 그녀의 두 눈동자를 멀게 만들었소. 그러니 제발 부탁이오. 빨리 그녀를 내려놓으시오. 나는......그만한 보상을 하겠소이다.
그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마도 아자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모양이었다. 그에게서는 전혀 개방 방주의 풍모를 엿볼 수가 없었다.
정춘추는 그의 내력이 음험하고 강맹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소리를 들어볼 때 그 무쇠탈을 쓴 사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의 머리 위에는 무쇠탈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 무쇠탈을 쓴 사람이 어떻게 개방의 방주가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즉시 더 생각해 볼 여지없이 말했다.
이 계집애의 조그만 목숨쯤을 용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반드시 나에게 몇 가지 일을 해주어야 한다.
유탄지는 말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백 가지가 아니라 천 가지라도 듣기로 하죠.
정춘추는 그가 그와 같이 나오자 속으로 더욱 기뻐했다.
좋아 첫번째 일은 그대가 즉시 나를 사부로 삼고 이제부터 성숙파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유탄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두 무릎을 꿇고서는 말했다.
사부님, 절 받으십시오. 제자......제자 장취현이 큰절을 올립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본래 바로 당신의 제자였고 큰절을 한 바 있으니 한 번쯤 더 큰절을 한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느가."
그가 이와 같이 꿇어 엎드리게 되자 군웅들은 크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방의 장로 이하 모든 제자들은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분노를 느끼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우리 개방은 천하 제일의 방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평소에 의협에 찬 행동을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주는 악명이 자자한 성숙노괴를 사부로 삼으려 하니 우리들은 결코 저 사람을 방주로 모실 수 없다."
갑자기 징 소리와 피리를 부는 소리가 함께 울려퍼졌다. 성숙파의 문인 제자들이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성숙노선을 칭송하는 소리가 드높이 울려펴졌다.
칭송하는 내용은 달이나 해도 성숙노선만큼 밝지가 못하며 하늘과 땅도 성숙노선만큼 크지 못하여 반고(盤古)가 천지를 개벽한 이후에 성숙노선만큼 위세와 덕망이 높은 사람은 다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공(周公), 공자, 석가모니, 태상로군(太上-老君), 옥황상제(玉皇上帝), 십전염왕(十殿閻王)등도 모두 다 성숙노선의 밑이라는 것이었다.
아자가 정춘추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단정순과 원성죽은 그만 서로 쳐다보며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재간으로서는 도저히 성숙노괴의 적수가 되지 못해 그의 손에서 딸을 구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장취현이 딸을 위해 무릎을 꿇는 것을 보자 뜻밖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원성죽은 놀라는 한편 기뻤다.
저것 봐요. 저 사람은 얼마나 의리가 깊고 정이 깊어요? 그대는......그대는......저 사람의 발 끝에도 못 미쳐요.
단예는 비스듬히 왕어언을 한 번 쳐다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왕 소저에 대한 나의 정은 장취현보다 못하다. 나는 어떠한 수모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녀에 대한 정을 물리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장 방주에 비하면 크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구나. 장 방주야말로 사랑에 있어서 성현(聖賢)이라 할 수 있다. 만약에 왕 소저가 성숙노괴에게 사로잡히게 된다면 내가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무릎을 꿇을 수가 있을까?"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왕어언을 위해서라면 설사 만 번 죽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고 기꺼운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까짓 사람들 앞에서 모욕쯤 당하는 일은 대수로울 게 없다고 생각하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불쑥 부르짖었다.
그렇고 말고! 물론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왕어언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가 그럴 수 있는 일이에요?
단예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음, 그건......
이때 유탄지는 몇 번의 큰절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자는 얼굴 근육이 일그러져서 크게 고통스러운 빛을 띠우고 있었다.
유탄지는 재빨리 말했다.
사부님, 어른께서는 그녀를 빨리 놓아 주십시오.
정춘추는 냉소했다.
이 계집애는 대담하면서도 못된 행동을 함부로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쉽게 그녀를 놓아 줄 수 있단 말이냐? 네가 공을 세워서 죄를 사하도록 해라. 나를 위해 몇 가지 일을 해준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놓아 줄 수 없다.
유탄지는 말했다.
그럼 공을 세워 죄를 사하지요. 사부님께서는 제자에게 무슨 공을 세우라는 것입니까?
정춘추는 말했다.
너는 소림사의 방장인 현자에게 도전해서 그를 죽여라.
유탄지는 망설였다.
제자는 소림 방장과 아무런 원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개방은 소림사와 자웅을 다투려고 하고 있지만 사람을 죽여 피를 볼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정춘추는 안색을 굳히며 노해 부르짖었다.
네가 사부의 명을 어기려 하다니, 이로 미루어 볼 때 네가 나를 사부로 모신다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탄지는 그저 아자가 편안무사하기만을 바랬고 강호의 도의니 시비니 하는 여론을 마음에 전혀 두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말했다.
네, 하지만 소림사의 무공은 무척 고강합니다. 제자는 전력을 다해 싸워 보겠습니다. 사부님......그대는......그대는......아자 소저를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을 해주십시오.
정춘추는 담담히 말했다.
현자를 죽이고 안 죽이는 것은 너에게 달렸다. 그러나 아자를 죽이고 살리는 권리는 나에게 있다.
유탄지는 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려 큰 소리로 말했다.
소림사 현자 방장! 소림파는 무림 각 문파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으며 개방은 강호의 제일 큰 방파라고 할 수 있소. 언제나 중원에서 쌍벽을 이루어 그 누구도 누구에게 통솔을 받지 않았소.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고하를 겨루어 승자는 무림 맹주가 되고 패자는 무림 맹주의 호령에 복종하되 어기지 않도록 합시다.
그는 군호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천하의 영웅 호걸들은 오늘 모두 소실산 아래 모여 있다 하겠소. 어느 분이 곧 승부할 수 있다면 무림 맹주에게 도전을 하도록 하시오.
그 말은 자신이 무림의 맹주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정춘추와 유탄지가 주고받는 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내력이 심후한 사람들은 한 자 한 구를 모조리 귀에 담을 수 있었다.
소림사의 뭇 사람들은 정춘추가 공공연히 장취현에게 현자 방장을 죽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모두 다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조금 전 두 사람이 드러낸 무공을 볼 때 장취현의 공력은 고강하면서도 사악한 데가 있었다.
현자는 실로 그와 손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공연히 그가 군웅들 앞에서 자기에게 도전을 하는데 뒤로 물러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합장하고 말했다.
개방은 수백 년 동안 중원 무림의 협의방파로 군림해 왔으며 천하 영웅들은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소이다. 귀방의 전임 방주인 왕검통 방주는 폐파와의 교분이 정말 두터운 편이었소. 장 시주가 새로이 방주에 올랐다는 사실을 폐파에서는 소식을 늦게 들어 미처 사자를 보내 축하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소홀히 한 죄 삼가 사과를 드리는 바이오. 폐파의 승려나 속가의 제자들은 수백년간의 교분을 나누고 있는 셈으로 한 번도 서로 감정을 상한 적이 없었소이다. 그런데 어째서 장 방주는 오늘 갑자기 개방의 제자들을 이끌고 죄를 따지려고 드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라오. 천하 영웅들이 모두 이 자리에 있으니 시비곡직은 자연히 가려질 것이외다.
유탄지는 나이가 젊고 견문이 좁은 데다가 머리에 든 학문이 없으니 어찌 현자와 맞서서 변론을 펼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소림사에 오기 전에 전관청으로부터 한바탕 해야 할 말을 가르침받은 적이 있는지라 그는 즉시 입을 열었다.
우리 대송나라는 남쪽으로 요나라가 있고 서쪽으로는 서하와 토번이 있으며 북으로는 대리가 있으니 그야말로 네 오랑캐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하겠소이다. 이건......이건......
그는 북에 요나라가 있고 남에 대리가 있다는 말을 잘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뭇 사람들 가운데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헛기침을 하거나 비웃음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탄지는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그만 크게 겸연쩍어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피면구를 쓰고있어 다른 사람은 그의 얼굴 빛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몇 번 망설이다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 대송나라로 말하면 군사가 적고 장수가 거의 없어 나라의 세력은 날로 약해져 가고 있소이다. 따라서 전적으로 우리 무림의사들과 강호의 동도들에게 의지하는 바가 큰 데 모두들 함께 대송나라를 도와 주어야만이 밖으로 강적을 대항할 수 있으며 안으로는 간악한 자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외다.
군웅들은 그 몇 마디의 말이 무척 사리가 닿는다고 느꼈는지 모두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소이다. 그렇소이다.
유탄지는 제정신이 들어서 계속하여 말했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외부의 침입이 날로 심해짐에 따라 모두들 어깨의 짐이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져가고 있소이다. 본래 협심합력하여 어려운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만 각문 각파와 각 방회에서는 서로 다투기만 하고 심지어는 자기편 사람끼리 싸움을 하고 있소이다. 어찌 되었든 모두들 한마음 한 뜻으로 뭉쳐지지 못한 것은 사실이외다. 거란인 교봉이 단창필마로 한 번 소란을 피우자 중원의 호걸들은 크게 패배를 당했소이다. 거기다가 서역 성숙해의 성숙노......성숙노......성숙노......그 성숙노......음 그 분은 잇따라 소림의 고승......음 이건......이건......
전관청이 본래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서역 성숙노괴가 소림사로 와서는 두 명의 고승을 잇따라 죽였는데도 소림파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는 말이었다. 본래 유탄지는 이와 같은 말을 매우 익숙하게 외울 수 있었는데 갑자기 입에 담고자 했을 때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잇따라 성숙노괴라고 할 뿐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한 것이다.
군웅들 가운데 그 누가 부르짖었다.
그는 성숙노괴이고 그대는 성숙해의 작은 요물이지!
사람들 가운데서 왁, 하니 웃음 소리가 들렸다.
성숙파의 문인 제자들이 일제히 노래를 불렀다.
성숙노선은 덕망에 있어서 천지와 짝을 이루며 온누리에 위세를 떨치니 고금에 비할 바가 없더라!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자 대뜸 군호들의 웃음 소리를 내리누를 수 있었다.
그 노래 소리가 막 끝나자 사람들 틈에서 목이 쉬어 매우 듣기 거북한 음성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성숙노선은 덕망이 천지와 짝을 짓고 위세를 온누리에 떨치더라......
그 곡조는 성숙파의 제자들이 부르는 것과 똑같았다. 성숙파의 문인들은 다른 문파의 사람들 가운데 본파의 노선을 칭송하는 말이 있자 매우 갸륵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본파의 제자들이 자화자찬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모두들 크게 기뻐한 나머지 징을 쳐들었던 사람은 징을 치게 되었고 퉁소를 들고 있던 사람들은 퉁소를 불어 반주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네째 마디에 이르러서는 급전직하여 갑자기 부르는 내용이 달라지게 되었다.
......성숙노선은 개방귀 같은 소리를 내지르더라.
이렇게 되자 성숙파의 문인 제자들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따라서 개방귀 같은 소리를 내지르더라는 한 마디와 반주 소리는 조화를 이루어 그 소리가 매우 듣기 좋은 음악 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군웅들은 그만 배꼽이 빠져라 하고 웃으면서 허리를 펴지 못하게 되었고 성숙파의 문인들은 크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왕어언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포 세째 오라버니, 듣고 보니 그대의 목소리는 꽤 아름답네요?
포부동은 말했다.
못난 꼴을 보였소이다. 못난 꼴을 보였소이다.
바로 네 번째 한 마디의 노래는 포부동의 걸작이었던 것이다.
유탄지는 뭇 사람들이 소란을 피울 때 전관청과 나직이 상의했다. 그리고 그는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대송나라로 말하면 나라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소. 따라서 강호의 동포들도 또한 힘과 마음을 하나로 합치지 못하니 수시로 오랑캐의 억압을 받게 되었소. 그래서 개방에서는 한 분의 무림 맹주를 세워 모두들 그의 명령을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외다. 그리하면 어떠한 큰일이 발생했을 때 모두 어지러워 우왕좌왕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오. 현자 방장은 이에 찬성이시오?
현자는 천천히 말했다.
장 방주의 말씀에는 일리가 있소. 그러나 노납에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유탄자는 물었다.
무슨 일이오?
현자는 말했다.
장 방주는 이미 정 선생을 사부로 모셨으니 성숙파의 문인 제자라 할 수 있지 않겠소?
유탄지는 말했다.
그건......그건......내 자신의 일이고 그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오.
현자는 말했다.
성숙파는 서역의 문파이고 우리 대송나라의 무림동도는 아니외다. 그리고 우리 대송나라에서 무림 맹주를 세우고 안 세우고는 성숙파와 아무런 관계가 없소. 설사 중원 무림동도에서 한 분의 맹주를 추대하고 동의를 꾀한다고 하더라도 귀하는 성숙파의 문인이니 이번 일엔는 참여하기 거북하리라고 여겨지오.
뭇 영웅들은 다투어 말했다.
옳소이다.!
소림 방장의 말씀이 무척 옳소이다.
너는 오랑캐 문파의 주구이고 앞잡이인데 어찌 헛되이 우리 중원 무림의 맹주가 되려고 하는가?
유탄지는 대답할 말이 없게 되어 정춘추를 바라보다가 다시 전관청을 바라보곤 했다. 그저 그들이 한 마디 해주어 자기가 곤경에서 빠져나오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였다.
정춘추는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소림 방장의 그와 같은 말씀은 틀렸소이다. 노부로 말하면 산동 곡부(曲阜)의 사람으로서 그야말로 송나라에서 태어난 몸이외다. 그리고 성숙파로 말하면 노부가 한 손으로 창건한 것인데 어째서 서역 오랑캐의 문파라고 하시오? 성숙에 지나지 않소. 그대가 성숙파를 오랑캐의 문파라고 한다면 공자 역시 오랑캐 사람이 아니겠소? 가소롭군. 가소로워! 서역의 오랑캐라고 말한다면 소림의 무공 역시 천축 달마 조사에게서 비롯되었으니 불교도 서역의 오랑캐 물건이라고 할 수 있소. 따라서 내가 보기에 소림파야말로 서역의 문파라고 할 수밖에 없을것 같구려.
그 말이 떨어지자 현자와 군웅들은 모두 항변하기 어려운 것을 느꼈다.
전관청은 낭랑히 외쳤다.- 천하의 무공에 있어 그 근본을 찾기란 쉽지 않소이다. 서역의 무공이 중원으로 전해진 것도 있고 중원의 무공이 서역으로 전해진 것도 있소이다. 우리 방의 장 방주로 말하면 바로 중원 땅의 사람이고 개방은 언제나 중원 문파로 알려져 있소이다. 따라서 장 방주는 자연히 중원 무림의 영도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소이다. 현자 방장, 오늘의 일은 무공의 강약으로 승부를 결정하자는 것이지 언변으로 이기고 지는 것을 정하자는 것은 아니외다. 개방과 소림파가 도대체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그대 두분 우두머리가 나서서 겨루어 보게 된다면 고하가 즉시 판가름나게 될 것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고 반 나절 동안 입씨름을 벌인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소? 만약 그대가 자기 자신을 잘 알아 폐방 방주를 무림 맹주로 추대하겠다면 손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외다.
이 몇 마디의 말은 현자가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두려워서 구실만 찾아 내세운다는 뜻이었다.
현자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장 방주, 그대가 반드시 노납에게 손을 쓰려 할 때 노납이 귀방과 폐파와의 수백 년간의 교분을 생각하고 손을 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귀방에 대한 실례가 될 것 같구려.
그는 군웅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낭랑히 말했다.
천하의 영웅들, 오늘 모두 다 친히 목격했을 것이오. 우리 소림파는 결코 개방과 싸워 이기고 지는 것을 판가름 낼 뜻은 없으나, 개방의 방주가 이토록 다그치니 노납으로서는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도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외다.
군웅들은 다투어 말했다.
맞소이다! 우리들이 모두 증인이외다. 소림파는 결코 사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소이다.
유탄지는 그저 아자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한시바삐 현자를 죽이고 정춘추가 그에게 내린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책임을 다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큰소리로 외쳤다.
무공을 겨루게 된다면 강자는 살아 남게 되고 약자는 죽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오! 따라서 그 어느 쪽이 사리에 닿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외다. 빨리 나와서 손을 쓰도록 하시오!
그는 어릴 적에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으며 본성 역시 착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시 소박한 젊은이였다.
그의 부친이 죽은 이후 강호로 떠돌아 다니게 되었고 많은 업신여김과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년에 이르러 아자와 밤낮으로 함께 지냄으로써, 붉은 것을 가까이 하면 붉게 되고 검은 것을 가까이 하면 검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그가 오로지 아자를 존경하고 짝사랑을 하기 때문에 시비와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많이 잃어 버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성숙파의 무공은 어느 한 가지 음흉하고 독랄하게 승리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또 전관청이 용의주도하게 그를 도와 개방의 방주 자리를 빼앗게 한 것도 그야말로 사람을 해치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수단을 펼치도록 가르쳤다고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나날을 보내게 되니 자연 원래는 중원 협사명문의 자제출신이었으나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로지 힘만 높이 사는 폭한(暴漢)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현자는 낭랑히 외치듯 말했다.
장 방주의 말은 개방의 수백 년간 쌓은 의협의 명성과는 그야말로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외다.
유탄지는 몸을 흔들하더니 삽시간에 일 장 정도 다가가며 말했다.
싸우려면 싸우고 않으려면 물러서도록 하시오.
그는 다시 정춘추와 아자를 한 번 바라보았는데 그 마음이 매우 초조한 듯했다.
현자는 말했다.
좋소. 노납은 오늘 장 방주의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의 절기를 가르침 받아 천하 영웅 호걸들로 하여금 개방 방주가 수백 년간 직계로 전수받은 무공이 어떠한지 살펴보도록 하겠소이다.
유탄지는 그 말에 어리둥절해져서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는 개방의 방주 자리를 이어받기는 하였으나 이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의 두 가지 절기에 관해서는 일 초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는 방의 장로들로부터 비웃음에 찬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두 가지의 절기가 바로 개방의 진방신공(鎭幇神功)이었다. 강룡십팔장은 간혹 방주가 아닌 사람에게 전수되긴 했지만 타구봉법만은 반드시 개방의 방주에게만 전해졌으며 수백 년 동안 이 두 가지의 진방신공을 모르는 개방 방주는 한 사람도 없었다.
현자는 다시 말했다.
노납은 응당 본파의 대금강장(大金剛掌)으로 방주의 강룡십팔장을 받기로 하고 항마선장(降魔禪杖)으로 방주의 타구봉법을 받기로 하겠소. 아, 소림파와 귀방은 대대로 교분이 두터웠소. 이 몇 가지 무공은 언제나 대련을 한 적이 있지만 한 번도 이 초식을 사용하여 대결한 적은 없소이다. 노납이 덕이 없어 이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그야말로 개방의 역대 방주와 소림파의 역대 장문들에게 부끄러울 뿐이외다.
그는 두 손을 합했다. 바로 대금강장의 기수식인 예경여래(禮敬如來)였다.
얼굴 표정은 부드럽고 친절해 보였으나 승포자락의 띠는 좌우로 곧장 뻗쳐갔다. 이로 미루어 볼때 이 일 초에는 지극히 심후한 내력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탄지는 더 말하지 않고 왼손을 들어 허공을 격하고 일 장을 후려쳤다. 그리고 오른손을 잇따라 쳐들어서는 신속하기 이를데 없이 다시 일 장을 후려쳤는데 왼손의 장력이 앞에 뻗쳐 갔지만 뒤에 도달하게 되었고 오른손의 장력이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 두 사람의 장력은 허공에서 맞부딪치게 되었다.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장풍은 서로 해소되었는데 바로 이때 찍찍,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자의 숭포자락 허리에 둘러멘 허리띠의 양쪽 끝이 잘려져서 나뉘어 좌우로 일 장 남짓 날아갔다. 유탄지의 이 이 장의 장력이 뻗쳐간 범위는 무척 넓었다.
현자의 몸으로 향한 공력은 예경여래라는 수세로 해소되었으나 현자의 옆으로 뻗쳐나간 허리띠는 그의 장력에 그만 잘려지게 된 것이었다.
소림사의 승려와 군웅들은 이를 보자 대뜸 다투어 호통을 내질렀다.
이것은 성숙파의 사악한 무공이다!
강룡십팔장이 아니다!
개방의 무공이 아니다!
개방의 제자들 가운데도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소림파와 무공을 겨루는 데 있어서 사파의 무공을 사용 할 수는 없다!
방주, 그대는 강룡십팔장을 써야 옳소!
사파의 무공을 펼치다니 그야말로 개방의 얼굴에 완전히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오!
유탄지는 뭇 사람들이 호통치는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을 듣고는 그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고 제 이 초를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성숙파의 문인 제자들은 다투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성숙파의 신공은 개방의 강룡십팔장보다 훨씬 낫다! 어째서 강한 것을 사용하지 않고 되려 약한 것을 써야 한단 말이냐?
장 사형, 다시 공격하시오! 물론 은사 성숙노선께서 그대에게 전수하신 신공을 펼쳐 저 화상을 쳐 죽이시오!
성숙 신공은 천하 제일이외다. 싸워서 이기지 않은 적이 없고 공격해서 무너뜨리지 못하는 법이 없소이다. 강룡십팔장이라는 냄새나는 무공은 개방귀보다 가치가 없소이다.
이와 같이 떠들썩한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갑자기 산 아래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성숙파의 무공이 개방의 강룡십팔장보다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
그 음성은 똑똑히 여러 사람의 귀에 들려왔다. 뭇 사람들은 그만 어리둥절해져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말발굽 소리가 우뢰와 같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십여 필의 말들이 질풍노도처럼 산위로 달려 올라왔다. 말을 탄 사람들은 검은 색 바람막이를 걸치고 있었고 안에는 검은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호 같았고 말은 용과 같았다.
사람들은 민첩하기 이를데 없었고 말 역시 건장하기 이를데 없었다.
말은 모두가 목이 길었고 다리가 길었으며 전체가 검은 털로 덮혀 있었다.
그런데 그 말들이 가까이 다가오게 되었을 때 군웅들은 눈앞이 훤해지는 것을 느꼈다. 금빛이 번쩍번쩍하는 것이 모든 말 발굽은 놀랍게도 황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모두가 열 아홉 필의 말로서 사람 수는 별로 많다고 할 수 없는데, 그 기세의 웅장함은 천군만마를 연상케 했다. 앞에서 달려온 열 여덟 필의 말 그 가운데를 뚫고 한 필의 말이 달려왔다.
개방의 제자들 가운데 한 떼의 사람들이 그 말에 탄 사람을 보자 별안간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교 방주님! 교 방주님!
수백 명이나 되는 방의 제자들이 사람들 틈에서 질풍같이 달려나와 그 사람의 말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은 바로 소봉이었다. 그는 개방에서 축출당한 이후 방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원수처럼 여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인지 한 집안 사람인지 이미 판가름이 난 이때에도 여전히 그 많은 옛날의 형제들이 이토록 열성스럽게 다가와 인사를 하자 그만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눈에 눈물을 머금고 말에서 내려 즉시 포권을 하고 반례했다.
거란 사람 소봉은 방에서 축출되어 개방과는 이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되었소.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째서 아직도 옛날의 칭호를 그대로 쓰시오? 여러 형제들, 그 동안 모두 안녕하셨소?
최후의 한 마디를 할 때는 옛정이 되살아나 자기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달려와 인사를 한 사람은 대부분의 방의 세 푸대 아니면 네 푸대를 메는 제자들이었다. 한 푸대나 두 푸대를 메는 제자들은 배분이 낮고 또 새로이 들어온 사람이 많아 평소에 소봉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섯, 여섯 푸대 이상의 제자들은 오랑캐와 중원인이라는 경계선을 분명히 긋고 있었고 또한 나이가 많고 위치가 존귀한 사람들이라 젊고 혈기에 찬 사내들처럼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살피기 때문에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백 명이나 되는 제자들은 소봉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서야 자기네들이 너무나 충동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 방주로 말하면 바로 대원수인 거란 사람이 아닌가. 방의 아래위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일인데 자기네들은 갑자기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랑하고 옹호하는 정이 솟구쳐 깜박 잊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물러갔으나 꽤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사말을 했다.
교......교......어르신 안녕하셨습니까? 헤어진 이후 우리들은 그야말로 하루라도......어르신을 생각하지 않은 나날이 없었습니다.
그 날 아자가 돌연 외출하고 돌아오지 않고 잇따라 며칠간 소식이 없게 되자 소봉은 매우 초조하게 생각했으며 한 무리의 염탐꾼들을 사방으로 보내어 찾도록 했다. 그리고 수 개월이 지난 후에야 겨우 소식을 얻어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가 개방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무쇠탈을 쓴 사람도 그녀와 함께 있다는 소식이었다. 소봉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무척 놀라워 했다.
개방에서는 자기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는데 이번에 아자를 사로잡았으나 반드시 그녀를 인질로 하여 자기에게 협박을 해올 것이니 반드시 그녀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요나라 황제에게 그 사실을 상주하고 이 개월간 휴가를 얻어 남원의 군정사무를 남원추밀사 야율막가에게 대행토록 한 후 곧장 남쪽으로 달려오게 되었다.
이번에 소봉이 중원으로 재차 들어오게 되었을 때는 어느 정도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소위 그가 뽑은 연운십팔기(燕雲十八騎)는 하나같이 거란족에서 일류가는 고수들이었다.
지난번 취현장에서 홀로 군웅들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을 때 만약 한 분의 대영웅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사람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시체가 갈갈이 찢기는 액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더라도 혼자서 백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번에 그는 연운십팔기를 데리고 왔는데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거기다가 타고온 말들은 모두가 천리준마로서 위급할 때에 빠져나온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 아니었다.
일행은 하남성에 도달하게 되었다. 소봉은 한 명의 개방 제자를 잡아서 물었다. 그제서야 그는 아자가 두 눈이 멀게 되었으며 매일 신임 방주와 행동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신임 방주를 따라 소림사로 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소봉은 더욱더 놀람과 분노를 느꼈다. 아자의 두 눈의 남에게 멀 정도가 된 걸 보면 개방에서 온갖 참혹한 학대와 고문을 받았으리라는 것쯤은 가히 상상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소림사로 달려갔으며 그저 중도에서 개방의 사람을 만나 아자를 되찾을 수 있기만을 바랬다. 그렇게 된다면 재차 소림사의 뭇 고승들과 만나는 것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실산 위로 오르게 되자 성숙파의 제자들이 큰소리 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성숙파의 무공이 강룡십팔장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만 크게 노기가 끓어올랐다. 그는 비록 개방의 방주가 아니었지만 강룡십팔장으로 말하면 은사 왕검통이 그에게 친히 전수한 것인데 어찌 남이 함부로 무시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말을 재촉해 산 위로 올라와서 개방의 세 부대, 네 부대를 짊어진 뭇제자들과 인사를 나누게 된 후 흘낏 보니 정춘추의 손에 잡혀 있는 소녀가 바로 아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두 눈이 이미 초점이 흐려져 있는 것을 보고 동자가 이미 망가져서 장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소봉은 속으로 아픔과 함께 애석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 왼손을 획, 하니 옆으로 뻗고 오른손을 획, 하니 정춘추를 향해 격타해 갔다.
이것은 바로 강룡십팔장의 일 초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일 초였다. 그가 손을 쓰게 되었을 때 정춘추와 간격은 십 오륙 장이나 되었다. 그러나 손을 쓰는 즉시 앞으로 내달을 수 있었고 그의 손에서 장력이 솟아나는 그 순간 두 사람의 간격은 불과 칠팔 장으로 좁혀졌다.
천하의 무술 가운데 제아무리 장력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결코 일 장으로 오장밖의 사람을 격타할 수 없었다. 정춘추는 평소 "북교봉, 남모용" 이라는 이름을 들어왔는지라 그에 대해서 조금도 얕보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소봉이 십 오륙 장 밖에서 손을 쓰는 것을 보았을 뿐 그 일 장이 바로 자기에게 뻗쳐진 것이라는 것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봉은 일 장을 펼쳐내는 그 순간 이미 정춘추와 삼사 장 되는 곳에 이르렀고 다시 일 초 항룡유회라는 초식을 펼치자 뒤의 장력이 앞의 장력을 밀어 쌍장의 힘이 함께 어울려져서는 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로 압박해 오는 것이 아닌가?
이 순간 정춘추는 자기의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고 상대방의 장력이 광풍노도와 같이 감당할 수 없는 기세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한 높다란 무형의 기운이 자기의 앞으로 질풍같이 내닫는 것을 느꼈다.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야말로 어떻게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인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만약 한 손으로 그 일 초를 맞받으려 했다가는 반드시 팔이 부러지거나 손목이 부러지는 액운을 당하게 될 것은 물론이고 잘못하면 일신의 근골이 모조리 짓이겨질 것이다. 총망 중에 그는 아자를 위로 급히 던지고는 두 손으로 잇따라 세 개의 원을 그려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발끝에 힘을 주어 표연히 뒤로 물러섰다.
소봉은 다시 일 초의 항룡유회를 펼쳤다. 앞의 일 초 장력이 해소되기 전에 잇따라 장력이 뻗쳐온 것이었다. 정춘추는 감히 정면으로 그 예봉에 맞설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오른손을 비스듬히 튕겨 내어 소봉의 장력을 한 옆으로 기울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오른팔이 시큰거렸고 가슴팍에 기혈이 꿇어올랐다. 그는 즉시 삼 장 밖으로 물러났으며 혹시나 또 적이 재차 추격을 해올까봐 손을 가슴팍 앞에 세우고 암암리에 독기를 손바닥 끝에 모았다.
소봉은 가볍게 팔을 뻗쳐 공중에서 떨어지는 아자를 잡아서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아자는 눈이 멀어 사물을 살필 수가 없었고 정춘추에 제압당한 이후 입으로 말을 못하게 된 처지였지만 주위의 변고에 대해서는 똑똑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혈도가 풀리자마자 기뻐하며 말했다.
형부, 저를 구해 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소봉은 마음속으로 괴로움을 느끼며 부드로운 어조로 말했다.
아자, 그 동안에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모두 이 형부가 너에게 누를 끼친탓이다.
그는 그저 개방의 수뇌 인물들이 그를 극도로 증오하였으나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자 아자가 이 세상에서 그와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남경으로 들어와 그녀를 사로잡아가서 온갖 고통을 다 안겨 주어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지 결코 아자의 눈이 멀게 된 것이 그녀 자신이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임을 모르고 있었다.
소봉이 산 위에 오르는 순간 군웅들은 즉시 동요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날 취현장의 일전에서 소봉은 홀몸으로 잇따라 수십 명의 고수를 죽였으며 그야말로 위세를 천하에 떨친 바 있었다. 중원의 군웅들은 그에 대해 이를 갈았지만 그야말로 그 이름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다시 그가 갑자기 소실산으로 올라오게 되자, 모두 다 한바탕 치열한 싸움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날 취현장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당시 장원의 대청에서 피와 살이 튕기는 참상을 떠올리며 여전히 몸이 떨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그가 단 일초 항룡유회를 펼쳐 불세출의 고수 성숙노괴를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을 보고 더욱더 마음속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일시 산 위의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숙연해져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성숙파의 문인 제자들은 그래도 십여 명이 그 자리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대고 있었다.
이 교가야, 너의 몸이 성숙노선의 선술(仙術)에 적중되었으니 열흘을 넘기지 못해 전신이 피고름이 되어 죽게 될 것이다!
성숙노선은 네가 후배인 것을 보고 먼저 삼 초를 양보한 것이다!
성숙노선이 어떤 신분인데 너와 같은 놈을 상대로 싸우겠느냐? 네가 즉시 성숙노선의 앞에 꿇어 엎드려서 빌지 않는다면 아후 반드시 죽어도 뼈를 묻을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띄엄띄엄 들려왔고 결코 조금 전의 기고만장하던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유탄지는 소봉을 보자 속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팔을 뻗쳐서 아자를 품에 안는 것을 보고 또 아자가 얼굴에 기쁜 빛을 띠고 소봉에 대해서 친근한 태도를 보이자 더 참을 수 없어져 몸을 앞으로 날리며 말했다.
당신은 빨리......빨리......아자 소저를 내려놓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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