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眼---名作評論

무협소설 천룡팔부9 김용

一字師 2023.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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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천룡팔부9 김용

 

                                         图片来源 | 天龙八部单机版下载-天龙八部单机游戏(附秘籍)下载中文硬...

 

42. 늙은 마두와 젊은 못난이가 어찌 일격을 감당하랴

(老魔小醜, 豈堪一擊, 勝之不武)

소봉은 아자를 땅바닥에 니려놓으며 물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유탄지는 그의 늠름하면서도 위엄이 솟아나는 시선을 접하자 그만 기가 죽어 말을 더듬거렸다. “불초는......불초는......개방의 방주......장 방주라는 사람이외다.”

개방의 사람들은 부르짖었다. “너는 이미 성숙파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째서 또 다시 개방의 방주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

소봉은 노하여 부르짖었다. “너는 어째서 아자 소저의 눈을 멀게 했지?”

유탄지는 그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아니오.....아니오.나는.....정말 아니오......”

아자는 말했다. “형부, 나의 눈을 멀게 한 사람은 정춘추 노적이에요. 빨리 정 노적의 눈알을 뽑아서 저의 원수를 갚아 주세요. 꼭 저의 원수를 갚아주세요.

소봉은 일시 그간의 진상을 알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사방을 한 번 훑어보니 사람들 틈에 단정순과 원성죽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쓰라린 것을 느끼며 말했다.

“대리 단 왕야, 영애가 이곳에 있습니다. 그대는 이 여인을 잘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자의 손을 붙잡고 단정순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가볍게 단정순에게로 내밀었다.

원성죽은 이미 눈물로 소맷자락을 적시고 있는 터였다. 이때는 더욱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서 아자를 끌어안고 말했다.

“아가, 너의 ......너의 눈은 어떻게 되었느냐?”

단예는 소봉이 갑자기 나타나자 크게 기뻐하며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소봉은 정춘추를 치고 아자를 구해낸 후 유탄지와 말을 나누는 등 조금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원성죽이 아자를 안고 크게 우는 것을 보고는 단예는 속으로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하여 교 형님은 저 눈먼 소녀가 내 아버지의 딸이라고 하는걸까?’

그는 평소 아버지가 곳곳에 정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터라, 잠시 궁리를 해 보고는 어는 정도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나오며 부르짖었다. “형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소제는 그야말로 보고 싶어 죽을 뻔했습니다!

소봉은 그와 무석의 주루에서 술내기를 한 후 결의형제를 맺었다. 비록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정을 온통 다 쏟았고 또 마음이 통하고 의기투합했던 터라 즉시 앞으로 나가 그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형제, 그 동안 정말 일이 많아 한마디로 다 할 수 없구먼. 그러나 저러나 그대나 나나 모두 이렇게 무사하니 다행이야.”

갑자기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크게 부르짖었다. “이 교가야, 너는 우리 형을 죽였다.! 그 원한을 갚지 못했는데 오늘 내 너와 사생결단을 내겠다.”

곧이어 또 한 사람이 호통을 내질렀다. “교봉은 거란의 오랑캐이외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죽여야만 속이 시원할 사람이니 오늘은 재차 그가 살아서 소실산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외다.!”

호통치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와 큰 소란을 빚었다. 어떤 사람은 소봉이 그의 아들을 죽였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소봉이 그의 부친을 죽였다고 욕했다.

소봉이 그 날 취현장의 일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상처를 입힌 것은 사실이었다. 이때 소실산 위에 모여 있는 각처의 영웅들 간에 적잖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과 친척 관계이거나 혹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렇기 깨문에 소봉에 대해서 매우 꺼리고 두려워했으나 친척이나 친구의 피맺힌 원한을 생각하자 참을 수 없어 그를 힐난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호통 소리는 점점 드높이 울려 펴져 갔다.

뭇 사람들은 소봉을 따라온 사람들이 십 팔 명에 불과할 뿐인데 소봉이 개방과 소림파에 하나같이 원한이 있고 또 조금 전 몇 장으로 정춘추를 연신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으니 더욱더 성숙파의 대적이 된 터이라 손을 쓰게 된다면 설사 개방에서 양쪽 다 협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각처의 영웅이나 소림의 승려, 거기다가 성숙파의 문인 제자들까지 합치게 된다면 설령 소봉에게 하늘로 통하는 재간이 있다 하더라도 겹겹이 에워싸인 이 마당에서는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연 그 기세가 솟구치게 되고 여러 사람들의 용기도 더욱더 커지게 되었다.

군웅들은 사람이 많다 보니 그 중에는 거친 사람도 있었고 급히 원한을 갚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더러운 욕을 마구 해댔고 그 욕하는 소리는 심히 악독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다투어 무기를 뽑아들고는 칼을 휘두르거나 검을 앞으로 찌르며 금방이라도 우르르 떼를 지어 달려들어 소봉을 난도질해 죽일 것 같은 기세를 보였다.

소봉의 일행 십구 명이 빠른 말을 타고 중원까지 오게 된 것은 그저 갑자기 암습을 가해 아자를 구해 남경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했을 뿐이지 이곳에서 많은 적들과 만나 싸우려는 게 아니었다.

소봉은 이 사람들 모두가 의협(義俠)을 행하는 사람들인데 자기와 원한을 맺게 된 것은, 첫째로 자기가 거란 사람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 누가 가운데서 이간질을 하여 오해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취현장의 일전은 결코 그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다시 또 한바탕 크게 싸움을 벌이게 된다면 쓸데없이 사람들을 마구 해치게 되어 부질없이 양심의 가책만 더 커지게 될 뿐 아니라 설사 자기가 무사히 물러선다 하더라도 데리고 온 연운 십팔기 가운데는 적잖은 사람이 살상을 입게 되리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아자는 이미 구출해 그녀의 부모에게 안겨 주었다. 아주의 소원은 이미 들어 준 셈이니 나는 이 사람들과 부질없이 싸움을 할 필요없이 이곳에서 급히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소봉은 고개를 돌리고 단예에게 말했다. “형제, 지금 사태가 매우 나쁘네. 따라서 우리 형제들끼리 더 말을 주고 받기가 어려울 것 같군. 우선 자네는 잠시 물러서도록 하게. 청산은 언제나 푸르고 녹수는 영원히 흐르는 법,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네.”

그는 단예가 한편으로 피해 서기를 바랐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산을 달려 내려가게 될 때 다른 사람이 손을 써서 잘못하여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했다.

단예는 각처의 영웅이 수천 명이 넘는데 모두가 의형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고 불현듯 의협심이 솟구쳐 큰소리로 외쳤다. “형님, 이 형제가 형님과 의리로 맺어지게 되었을 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우리 두 사람은 복이 있으면 같이 누리고 어려움이 있으면 같이 당하자고 하지 않았숩니까? 그리고 동년 동월 동일 생은 아니지만 동년 동월 동일에 죽자고 했습니다. 오늘 형님에게 어려운 일이 있는데 이 형제가 어찌 구차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예전에 몇 번이나 위기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모두가 능파미보라는 교묘한 보법을 펼쳐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오곤 했다. 이때 정세가 매우 위험한 것을 보고 가슴에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봉과 함께 죽어 의리로 맺어진 정을 돌보리라 결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도망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뭇 호걸들은 대부분이 단예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자칭 소봉의 결의형제라고 하며 소봉과 손을 합쳐 뭇 사람과 대적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았지만 빈약하게 생겼고 젊은 나이인 것을 보고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소봉은 말했다. “형제, 그대의 호의는 이 형이 무척 고맙게 생각하네. 그들은 나를 죽이려고 하나 그렇게 쉽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네. 그대는 빨리 물러서게.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손을 나누어 그대마저 보호하여야 하니 오히려 적을 막는 데 불편하게 된다네.”

단예는 말했다. “형님은 저를 돌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나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찌 나를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소봉은 얼굴에 쓰디쓴 웃음을 띄웠는데 속으로는 서글픈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금치 못했다.

"만약 아무런 원한이 없다고 해서 해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원한은 어디서 비롯되었겠는가?’

이때 단정순은 나직이 범화, 화혁간, 파천석 등에게 말했다. “저 소 대협은 나의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베풀었네. 나중에 위급하게 될 때 우리들은 사람들 틈으로 달려들어가 그가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도록 하세.”

범화는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는 무기를 뽑아들고 수천 명의 호걸들을 몇 번 돌아본 후 말했다. “상대방은 사람이 많은데 주군께서는 어떤 묘책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단정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장부는 은원을 분명히 하고, 전력을 다해 죽음으로써 보답하는 수밖에 없다네.”

대리의 신하들은 일제히 대답하였다. “응당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때 고소 연자오의 사람들도 역시 나직이 상의를 하고 있었다. 공야건은 무석에서 소봉과 일 장을 맞바꾸고 또 술내기를 한 후 그의 인품에 대해서 지극히 경모하는 터라 힘써 그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부동과 풍파악 역시 소봉에 대하여 탄복하고 있었던 터라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기세를 보였다.

모용복의 의견은 달랐다. “여러 형제들, 우리들은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 급선무외다. 그런데 소봉 한 사람으로 인해서 천하 영웅에게 죄를 지어서야 쓰겠소이까?”

등백천은 말했다. “공자의 말씀이 무척 옳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모용복은 말했다. “인심을 끌어들여 우리 편으로 만들도록 해야 할 것이요.”

그는 길게 휘파람을 내불더니 낭랑히 소리쳤다. “소형, 그대는 거란의 영웅으로 우리 중원 호걸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데 불초 고소 모용복은 오늘 귀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불초가 소형의 손 아래 죽는다 하더라도 중원 호걸을 위해 한 팔의 약한 힘이나마 다한 것이니 죽는다 하더라도 영광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외다.”

이 몇 마디의 말은 기실 중원 호걸들에게 들려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승부를 막론하고 중원 호걸들은 고소 모용씨를 생사를 같이 하는 친구로 여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군웅들은 싸울 맘이 있었으나 그 누구도 감히 앞장서서 도전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처음 앞선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모용복이 나서는 것을 보자 모두들 크게 위로를 받은 듯했으며 새삼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북교봉, 남모용’이라고 두 사람은 언제나 명성을 같이 떨쳐 왔다. 따라서 모용복이 먼저 손을 쓰게 된다면 최후에 가서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기세를 크게 꺾어 놓고 적잖은 내력을 소모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삽시간에 환호하는 소리가 온 산을 취흔들었다.

소봉은 갑자기 모용복이 나서서 도전을 해오는지라 깜짝 놀라 두 손을 합하여 포권을 한 후 인사말을 했다.

“오래 전부터 공자께서 영명하다는 말을 들어왔소이다. 오늘 이와 같이 만나게 되니 실로 영광이외다.”

단예는 급히 말했다. “모용 형, 이것은 그대의 잘못이라 할 수 있소. 우리 형님은 처음 그대와 만났고 또 평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그대는 하필 우리 형님이 위급한 때를 노리는 것이오? 더군다나 모두들 그대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을 때 우리 형님은 그대를 위해 변명까지 하지 않았소?”

모용복은 냉랭히 웃었다.

“단 형이 불공평한 일을 보고 나서는 영웅 호걸이 되고자 한다면 함께 나서서 가르침을 베풀도록 하시오.”

그는 단예가 왕어언을 귀찮게 구는 것을 성가시게 생각해 왔으면 또 오랫동안 참아온 터였다. 그리하여 이 기회에 단예를 없애야겄다는 생각이 있었다.

단예는 말했다.

“내 무슨 재간이 있어 그대에게 가르침을 베푼단 말이오? 그저 공평한 말을 한마디 했을 뿐이외다.”

이때 정춘추는 뒤로 물러서서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을 느꼈다. 더군다나 자기의 여러 가지 절기를 펼쳐 볼 여가도 없지 않던가? 그는 즉시 몸을 날려 앞으로 나서면서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이 소가야, 노부는 네가 젊은 것을 보고 조금 전 삼 초를 양보했지만 제 사 초는 양보하지 않겠다.”

유탄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 장가는 그대가 아자 소저를 구해 준 데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오. 그러나 부친을 죽인 원수는 불구대천이외다. 소씨 양반, 오늘 우리는 끝장을 내도록 합시다.

소림파의 현생 대사는 암암리에 명령을 전했다.

“산을 내려가는 각처 길목에 나한대진을 펼쳐라. 저 고약한 자는 현고 사형을 죽였으니 이번만큼은 결코 그가 살아서 소실산을 내려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소봉은 삼대 고수가 세 방면으로 나누어 서서 자기를 에워싸고 소림의 뭇 승려들이 동쪽에 한 무더기 서쪽에 한 무더기씩 어지럽게 서 있는 것을 보고, 암암리에 진법을 펼쳐놓은 것임을 알고 이때의 상황은 그야말로 취현장에서 싸울때보다 더욱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말들이 슬피 울부짖는 가운데 열아홉 필이나 되는 거란의 군마들이 하나같이 땅에 자빠져서 입으로 흰 거품을 내뿜으며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이 잇따라 호통을 내지르며 칼을 뽑거나 손을 쳐서 삽시간에 칠팔 명이나 되는 성숙파의 제자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원래 정춘추가 앞으로 나와 도전을 하게 되자, 그의 몇몇 제자들은 나누어 독을 써서 거란 사람들이 타고 온 말을 모조리 독살시킨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봉이 준마의 힘을 빌어 이 겹겹이 에워싸인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어렵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소봉이 홀깃 보니 사랑하는 말이 죽기 전에 자기를 쳐다보는데 주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처량한 빛을 띄우고 있지 않은가. 그 말을 탄 지 오래 되었고 또 천리 길이나 되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조석으로 떨어지지 않았었다.

소봉은 뜨거운 피가 끓어 올랐다.

사랑하는 말이 이곳에서 간악한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을 보자 더욱더 분노가 치밀게 되었고 영웅의 기개가 북받쳐서 길게 휘파람을 내분 후 크게 부르짖었다. “모용 공자! 장 방주! 정 노괴! 당신들 세 사람이 일제히 덤벼든다고 해서 이 소모가 두려워할 줄 아시오?”

그는 성숙파의 수단이 음흉하고 악독하다는 사실에 더욱더 분노가 치밀어 휙, 하니 일 장을 들어서는 정춘추를 맹렬히 후려쳤다.

정춘추는 그의 장력이 무섭다는 것을 이미 가르침 받은 터라 두 손을 일제히 내밀어 전력을 다해 방어했다. 소봉은 그 자세 그대로 장세를 이끌어 자기와 상대방의 장력을 비스듬히 모용복에게로 후려쳐 보냈다. 모용복이 가장 특기로 삼은 재간은 바로 두전성이라는 무공이었다.

즉, 상대방이 뻗쳐낸 초식의 방향을 바꾸게 함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을 후려치도록 만드는 수법이었다. 그러나 소봉의 일 초에는 두 사람의 장력이 실려 있었고 그 힘도 너무나 웅후했을 뿐만 아니라 장력이 급격히 선회하고 있어서 도대체 어느 쪽을 후려쳐 오는지 알 수가 없어 실로 그 장력을 되받아 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용복은 즉시 공력을 돋우고 두 손을 뻗쳐내는 동시에 뒤로 삼 장이나 물러 서고 말았다.

모용복은 즉시 공력을 돋우고 두 손을 뻗쳐내는 동시에 뒤로 삼 장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소봉은 몸을 약간 기울이더니 모용복의 장력을 피했다. 그리고 일성대갈했다. 그 소리는 마치 허공에서 벽력이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는 오른쪽 주먹으로 유탄지를 격타했다.

그의 체구는 우람했고 유탄지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편이었다. 그리고 이 한 대의 주먹은 바로 유탄지의 안면을 겨냥하고 있었다. 유탄지는 본래 소봉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잇었다. 거기다가 소봉의 벽력과 같은 고함 소리를 듣게 되자 더욱 놀라게 되었다.

소봉의 그 한 대의 주먹은 너무나 빨라 손으로 정춘추를 격파하고 비스듬히 모용복을 내려친 이후 유탄지를 주먹으로 내질렀는데 말로 할 때는 선후의 차례가 분명했으나 삼 초가 거의 동시에 펼쳐졌기 때문에 그 재빠름은 진정 전광 석화 같았다.

유탄지가 이를 피하려고 했을 때는 권풍은 이미 안면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난 그는 역근경을 부지런하게 연마한 이후 자연히 반응을 나타나게 되어 머리를 뒤로 급히 젖히는 동시에 두 번 허공에서 재주를 넘어 물러났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천근과 같은 일격을 피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유탄지는 얼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고 군웅들은 엇,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한 조각 한 조각 산산조각이 난 베조각들이 나비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유탄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구가 소봉의 그 한 대의 주먹에 박살이 나서 허공으로 날려 올라간 것이다. 뭇 사람들은 개방 방주의 얼굴이 울퉁불퉁하며 한 쪽은 붉은가 하면 한 쪽은 검은 것이 곳곳이 상처투성이이고 오관은 그야말로 거의 썩어 문드러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두들 그 추악하기 이를데 없고 보기에 끔찍할 정도의 얼굴에 아연해지고 말았다.

소봉은 삼 초를 뻗쳐내는 사이에 당금 지상의 삼대 고수라 할 수 있는 세 사람을 물리칠 수 있게 되자 크게 호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큰소리로 외쳤다.

“술을 가져 오너라!”

한 명의 거란 무사가 주군의 말 등에서 한 자루의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풀어 들더니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두 손으로 바쳤다.

소봉은 그 가죽 주머니의 마개를 뽑더니 가죽 주머니를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살짝 기울이자 한 줄기의 고량주가 폭포수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는 꿀꺽꿀꺽 그 술을 마셔댔다. 가죽 주머니에 담긴 술은 적어도 이십여 근이나 되었다. 그런데 소봉은 멈추지 않고 단숨에 한 주머니의 술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채 마셔 버렸다.

그의 배가 약간 부풀어오르게 되었으나 얼굴은 거무튀튀한 것이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군웅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아연실색했다.

소봉이 다시 오른손을 휘두르자 나머지 십팔 명이나 되는 거란 무사들이 각기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들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소봉은 십팔 명의 무사들에게 분부했다.

“여러 형제. 이 대리의 단 공자로 말하면 나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라네. 오늘 우리는 겹겹이 포위망에 갇혔으니 중과부적으로 무사히 빠져나가기 힘들게 되었네.”

그는 조금 전 모용복 등과 일 초를 겨루어 우세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삼대 고수가 하나같이 몸에 절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세 사람이 손을 합하게 된다면 자기는 그들의 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밖에도 호시탐탐 주위에 늘어서서 노리고 있는 사람들은 수천 명에 달하는 호걸들이 아닌가?

그는 단예의 손을 잡고 말했다.

“형제, 그대가 나와 생사를 같이 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의형제를 맺게 된 정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으니 우리 먼저 통쾌하게 한바탕 마시고 보세.”

단예는 그의 호기에 자극을 받아 가죽 주머니를 들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님과 한바탕 술을 마시려고 하던 참입니다.”

소림의 뭇 승려들 가운데 갑자기 한 명의 회의 승포를 걸친 승려가 나서며 낭랑히 외쳤다.

“형님, 셋째 아우, 그대들은 술을 마시면서 어찌 나를 부르지 않는단 말이오?”

그는 바로 허죽이었다. 그는 사람들 틈에서 소봉이 산 위로 오르게 되자 죽시 소봉의 몸에서 뻗쳐 나오는 영기가 사람들을 압도하게 되고, 군웅들은 그만 빛을 잃고 마는 것을 보게 된자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거기다가 단예가 의형제를 맺게 된 정을 돌보고 기꺼이 함께 죽으려 하는 것을 보게 외쳤다.

그 날 표묘봉 위에서 단예와 의형제를 맺게 되었을 때 소봉도 함께 넣지 않았던가?

사내 대장부가 한 마디 약속을 한 이상 죽기 살기로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단예와 크게 취해서 나가떨어지게 된 영취궁에서의 그 호기롭던 기개를 떠올리자 대뜸 안위와 생사를 저버리고 소림사의 계율조차 모조리 내동댕이치게 된 것이다.

소봉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허죽이 갑자기 자기를 형님이라 부르자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단예가 앞으로 달려나가 혀죽의 손을 잡고는 몸을 돌려 소봉에게 말했다.

“형님, 이 분도 저와 의형제를 맺은 형제입니다. 그가 출가시에는 법명을 허죽이라 하고 환속한 후에는 허죽자로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결의형제를 맺게 되었을 때 형님도 그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둘째 형, 빨리 큰형님에게 인사를 드리십시오.”

허죽은 즉시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큰형님, 소제의 절을 받으십시오,”

소봉은 빙그레 웃으며 생각햇다.

‘단 형제는 일을 하는 데 약간 멍청한 데가 있구만. 그가 남과 결의형제를 맺게 되었을 때 나까지 포함시키다니. 그러나 내가 곧 죽게 될 몸이고 정세가 다급한 이때에 이 사람이 위기를 돌보지 않고 나서는 것을 보면 얼마나 의리를 중시하고 삶을 가벼히 여기는 사내 대장부인지를 알 수가 있군. 소봉이 이와 같은 사람과 형제의 의를 맺게 된 것은 그야말로 보람있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죽시 꿇어 엎드리고 말했다.

“형제, 이 소봉은 그대와 같은 영웅 호걸을 형제로 맞아들이게 된 데 대해 무척 기쁘게 생각하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 채 여덟 번 절을 했다. 그들은 놀랍게도 천하 영웅들 앞에서 형제의 의를 맺은 것이었다.

소봉은 허죽이 몸에 절정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소림사의 배분이 낮은 한 명의 승려인 것을 보고 무공이라 해봐야 한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호기롭게 나서는데 만약 그를 한켠에 물러서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를 얕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의 가죽 주머니를 들고 말했다.

“두 형제, 이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로 말하면 이 형님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으며 평소에는 친형제처럼 여기는 처지라네. 모두 다 실컷 마시고 마음 놓고 싸움을 벌여보세.”

그는 가죽 주머니의 마개를 뽑고 크게 한 모금 마시고 가죽 주머니를 허죽에게 넘겼다.

허죽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으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부처님의 오계이고 육계이고, 또는 칠계이고 팔계이고 돌보지 않은 채 가죽 주머니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신 이후 그 가죽 주머니를 단예에게 내밀었다.

단예는 한 모금 마신 이후 한 명의 거란 무사에게 내밀었다. 뭇 무사들도 일제히 주머니를 들고 독한 술을 마셨다.

허죽은 소봉에게 말했다. “형님, 저 성숙노괴로 말하면 내가 뒤에 모시게 된 문파의 사부와 사형을 죽였으며 또한 제 먼젓번의 문파인 소림사의 사숙조 현난 대사와 현통 대사를 죽인 사람입니다. 이 형제는 원수를 갚아야 하겠습니다.”

소봉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대.......”

그런데 그 말이 미처 나오기도 전에 허죽은 두 손을 휘두르며 어느덧 정춘추에게로 공격해 갔다.

소봉은 그의 장법이 정묘하고 내력이 웅후한 것을 보고 놀람과 기쁨을 함께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둘째 아우의 무공은 저토록 뛰어났구나. 그야말로 정말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이어 소봉은 호통을 내질렀다.

“주먹을 받아랏!”

휙휙, 하니 두 대의 주먹을 나누어 모용복과 유탄지에게 후려쳤다. 유탄지와 모용복은 다투어 초식을 펼쳐 막았다.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은 이미 주공(主公)의 뜻을 아는 듯 단예의 앞뒤를 에워싸듯 하고 호위했다.

허죽이 펼치는 것은 천산육양장이었다. 맴돌듯 춤추듯 하면서 착실히 앞으로 공격해 나가고 있었다.

정춘추는 그 날 통나무집 안으로 잠입해 들어가 소성하와 허죽에게 암암리에 소요삼소산이란 독수를 썼다. 그 결과 소성하는 중독되어 목숨을 잃었으나 허죽은 무사했다. 따라서 정춘춘는 그를 매우 꺼리게 되었고 이제는 감히 독공을 그에게 펼치지 못했다. 혹시나 허죽의 독공이 자기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을 해치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당한다고 생각하고 그는 즉시 소요파의 장법으로 허죽의 공격을 맞받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나이 어린 땡초는 진롱 바둑판을 풀고 늙은 도적의 전수를 받아 우리 소요파의 장문인이 되었다. 늙은 도적은 간계가 많은 사람이니 나를 상대코자 하는 독계를 암암리에 안배해 놓고 있을지도 모르니 이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절대 소홀하게 생각할 수 없다."

소요파의 무공은 날렵하고 표일했다. 정춘추와 허죽이 손을 쓰게 되자 한 사람은 동안 백발의 신선과 같았고 한 사람은 승포자락을 휘두르는 것이 마치 바람을 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한 번 부딪치자마자 즉시 떨어지는 것이 마치 한 쌍의 꽃 사이로 나비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나는 것 같았다.

정녕 소요(逍遙)라는 두 글자가 무엇인가를 보여 준 셈이었다. 구경하고 있던 군웅들은 소요파의 무공을 일찍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지라 하나같이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은 초식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급소를 공격하고 있는데도 자세는 어찌하여 저토록 우아하고 멋드러지더란 말이냐? 그야말로 춤을 추는 것 같구나. 이와 같이 멋드러진 방법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느 문파의 무공인지 그리고 이름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구나.’

저쪽에서는 소봉이 혼자서 모용복과 유탄지 두 사람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처음 십 초에는 퍽이나 우세를 차지하게 외었으나 십여 초가 지나게 된 이후 유탄지가 한 대의 주먹을 내지르고 일 장을 후려칠 때마다 음한한 기운이 가득 실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봉이 전력을 다해 모용복과 싸우고 있었을 때 유탄자는 재차 그에게 초식을 펼치게 되었고 그렇게 되면서 불현듯 한기가 엄습해 오는지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때 유탄지의 체내의 빙잠한독은 역근경 내공의 배양을 받아 불과 불이 서로 어우어져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서운 내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모용복이 두전성이의 재간을 오묘하기 짝이 없게 펼침에 따라 소봉은 그러한 두 고수를 상대로 힘써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날 취현장에서 수백 명의 무림 고수들과 대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형세에 놓이게 외었다. 그러나 소봉은 천생신무(天生神武)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처지가 불리하면 불리해질수록 체내에 잠재해 있는 힘은 더욱 더 극도로 발휘되었고 천하에서 양강(陽剛)하기 으뜸인 강룡십팔장을 일일이 펼쳐냄으로써 모용복과 유탄지로 하여금 가까이 다가들 수 없도록 만들었으며 유탄지의 빙잠한독이 그의 몸에까지 엄습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소봉이 이와같이 장력을 내쏟는 것은 내력의 소모가 컸다. 시간이 흐를수록 장력은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탄지는 이 가운데의 내막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모용복은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와같이 싸워서 자기와 이 장 방주가 반 시간 정도만 견뎌낼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자기들이 우세를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북교봉, 남모용’은 평소 함께 이름을 드날려 왔다. 오늘 처음으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싸우게 되었는데 자기가 개방 방주의 도움으로 설사 소봉을 쳐죽인다고 하더라도 남모용은 북교봉에 미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모용복은 속으로 이 궁리 저 궁리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를 세우는 일이 크고 명성을 얻는 일은 적은 일이다. 내가 만약 천하의 영웅들을 위해 중원 무림의 커다란 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봉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무림 맹주의 자리는 내가 반드시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때 내가 한 번 팔을 떨치고 부르짖기만 한다면 대연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때 교봉은 이미 죽고 없을 터이니 설사 남모용이 북교봉보다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나간 일에 불과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가 하면 다른 생각도 들었다.

‘교봉을 죽이게 되었을 때 장취현은 나의 큰 적이 될 것이다. 만약 무림의 맹주 자리를 끝내 그에게 빼앗긴다음 오히려 나는 그의 명령을 들어야 할 것이니 이는 크게 적절하지 못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손을 쓰게 되었을 때 암암리에 몇 푼의 내력을 보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는 전력을 다해 공격하며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는 것처럼 행동 했다. 따라서 소봉의 강룡십팔장의 위력은 태반을 유탄지가 몸으로 받게 되었다. 모용복의 이와 같은 수작은 그의 신법이 정묘해서 다른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순식간에 세 사람은 흙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백여 초를 싸우게 되었다. 소봉은 잇따라 교묘한 공력을 써서 유탄지로 하여금 속임수에 넘어가도록 유인했다. 그러나 유탄지는 경험이 없어 몇 번이나 그의 술수에 말려들 뻔했는데도 모용복이 옆에서 돌보기 때문에 즉시 해소시키고는 했다. 소봉이 격출한,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장력은 유탄지가 심후한 내력으로 힘써 받아내고 했다.

단예는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이 에워싼 테두리 안에서 둘째 형 허죽이 한 걸음 두 걸음 공세를 펼쳐내는 것이 조금도 열세에 놓일 우려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큰형인 소봉은 일 대 이의 싸움을 펼치고 있는데 지금은 위세가 늠름했으나 그가 뻗쳐내는 매 일장에 광풍이 휙휙거리며 흙모래, 먼지가 흩날리게 되는 것을 보고 오래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끝마다 두 분의 형님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겠다고 했다. 한데 그런 사태에 임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 틈에 숨어서 남의 보호를 받아야 하니 무슨 의리를 지킨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또 어찌 생사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우리 곁의 삼형제 가운데 이 셋째가 못난 꼴을 보일 수는 없다. 나에게는 전혀 무공이 없으나 능파미보를 펼쳐 모용복을 귀찮게 만든다면 큰형님은 여유를 내어 먼저 저 추악한 얼굴의 장 방주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그 또한 도움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몸을 날려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 무리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낭랑히 소리쳤다.

“모용 공자, 그대가 우리 큰형님과 명성을 함께 드날린 사람이라면 마땅히 우리 큰형님과 일 대 일의 싸움을 벌여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어찌 남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애써 버티려고 한단 말이오? 설사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인다 하더라도 천하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 아니겠소? 자, 자, 자, 그대에게 재간이 있다면 나에게 한 주먹을 때려 보시오,

그는 몸을 흔들면서 모용복의 등뒤로 돌아가 손을 뻗쳐 그의 뒷덜미를 잡으려 했다.

모용복은 그가 기이하도록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잽다 손을 뒤로 돌려서는 철썩, 하니 그에게 일 장을 후려쳤다.

그 일 장은 바로 단예의 얼굴을 때리게 되었다. 단예의 오른뺨은 대뜸 터져 피가 흘렸고 아픔에 눈물마저 흘러내리게 되었다.

그의 능파미보는 본래 신묘하기 이를데 없었다. 펼치게 된다면 상대방이 그의 몸을 때린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자기가 손을 써서 남을 공격하려던 참이었다. 아무렇게나 뻗쳐낸 손길에 어찌 무공의 절정에 오른 고소 모용복이 잡히겠는가? 오히려 그가 일 장을 후려쳐 오자 단예는 피할 줄을 몰라 그만 얻어 맞아 살갗이 터지는 곤욕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모용복은 손바닥이 단예의 뺨과 지극히 빠른 순간에 부딪히는 찰나 즉시 자신의 내력이 급속도로 바깥으로 빠져나가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손과 팔이 마비되어 왔다.

그는 그만 깜짝 놀라게 되었다.

"성숙파의 요술은 천하에 해를 끼치고 있는데 이 녀석은 놀랍게도 성숙파로부터 한 수 배운 모양이로구나. 조심해야겠다."

그는 욕을 했다.

이 단가 녀석아, 너는 언제 성숙파의 문하로 들어갔더냐?

단예는 되물었다.

그대는 무슨 말을.....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모용복이 걷어차 발길질에 그만 차이고 말았고 단예는 곤두박질을 치며 쓰러지고 말았다.

모용복은 이번의 암습이 이토록 쉽게 성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속으로 기뻐하면서 즉시 달려들어 오른발로 그의 가슴팍을 밟고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죽고 싶으냐, 아니면 살고 싶으냐?

단예는 고개를 올려 바라보았다. 소봉은 여전히 장취현과 한창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단예는 자기가 만약 상대방을 반박하는 말을 하게 된다면 즉시 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용복은 다시 장취현을 도울 여유를 갖게 되니, 그렇게 된다면 큰형님에게 불리하니 역시 그와 시간을 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죽는 것이 뭐가 좋겠소? 물론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비교적 낫지 않겠소?

모용복은 단예가 이와 같은 순간에도 장난기 어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얼굴을 굳히며 호통을 내질렀다.

네가 만약 살고 싶다면 바로......

그는 단예에게 백 번의 절을 자기에게 하도록 하여 뭇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단예의 보법이 교묘하여 이번에 놔 주게 된다면 언제 다시 그를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나에게 백 번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단예는 웃었다.

그대는 나보다 많아 봐야 몇 살 위인데 어찌 나의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이오. 부끄럽지도 않으시오!

모용복은 휙, 하니 일 장을 후려쳐 단예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대뜸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 으르면서 땅바닥에는 한 구덩이가 패여지게 되었다. 이 일 장이 몇 치 정도만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면 단예는 당장 그 자리에서 골통이 빠개졌을 것이다.

모용복도 호통을 내질렀다.

부르겠느냐, 부르지 못하겠느냐?

단예는 고개를 돌렸다. 땅바닥에서 뿌옇게 피어 오르는 흙먼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멀리 왕어언이 포부동과 풍파악 곁에 서서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자기 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얼굴에는 전혀 관심이나 초조한 빛이 없었다. 만약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가 단 공자를 죽이게 된다해도 왕 소저는 물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예는 왕어언의 그와 같은 얼굴을 대하게 되자 그만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끼게 되었고 그저 즉시 모용복의 손 아래 죽어서 그리운 정으로 매일 같이 받는 고통을 면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처연히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나보고 백 번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으시오?

모용복은 크게 노해서 오른손을 쳐들고는 단예의 안면을 곧장 내려찍으려고 했다. 그 순간 벼락같이 두 사람이 달려 나왔다.

한 사람이 부르짖었다.

나의 아들을 해치지 마라!

다른 한 사람도 부르짖었다.

나의 사부를 해치지 마라!

두 사람의 몸놀림은 지극히 빨랐으나 기실 그들의 기세로써는 좀처럼 모용복이 단예를 후려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단정순과 남해악신은 모두 무공이 지극히 높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그곳에 도달하기 전에 뻗쳐낸 두 줄기의 장럭이 하나는 앞에서 하나는 뒤에서 나누어 모용복의 급소를 노리고 들어가게 되었다.

모용복이 때늦지 않게 자기 자신을 구하려고 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때는 단예를 쳐 죽일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 역시 중상을 입어야 했다. 그는 즉시 오른손을 거두어 들여 단정순이 후려쳐온 쌍장을 맞받아치고 왼손은 등뒤로 반원을 그려 남해악신의 공세를 해소 시켰다.

세 사람의 장력이 서로 부딪치면서 소용들이를 일으키게 되었을 때 각자 속으로 흠칫했으며 하나같이 상대방의 무공이 정말 뛰어나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정순은 급히 사랑하는 아들을 구원하고 싶은 마음에 오른손의 식지를 들어 일양지의 일 초를 찍어 내었는데 그 일 초의 지법은 광명정대했으며 내력은 웅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왕어언은 부르짖었다.

고종 오라버니, 조심하세요. 그것은 대리 단씨의 일양지이니 얕보아서는 안돼요,

남해악신은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제기랄! 우리 사부님은 비록 꼴같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악노이의 사부임에는 틀림없다. 네가 우리 사부를 치는 것은 이 악노이를 치려는 것과 같다. 나의 사부님이 죽음을 두려워 하고 삶을 탐내어 너를 할아버지라고 한 마디 부르게 된다면 이 악노이가 이후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한단 말이냐? 그리고 너에 대해 어떻게 호칭하란 말이냐? 너는 그야말로 이 악노이보다는 삼 대나 윗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된다면 나는 너의 증손자가 될 것이 아니냔 말이다. 실로 너무나 사람을 업수이 여기니 오늘 너와 사생결단을 내겠다.

그는 한편으로는 부르짖으면서 한편으로는 악치전을 꺼내어 왼쪽에 한 번 가위질을 하고 오른쪽에서 한 번 가위질을 하는 등 끊임없이 모용복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가 한평생 가장 두여워하는 것은 배분이나 서열에 있어서 남보다 낮아지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대 악인 가운데 둘째와 세째의 서열에 있어 섭이랑과 다투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단예가 만약 모용복을 할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남해악신은 그야말로 모용복의 증손자뻘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차라리 머리가 땅에 떨어졌으면 땅에 떨어졌지 남의 증손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이 남해악신의 생각이었다.

모용복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오른발로 단예를 밟고 두 손을 나누어 두 사람의 적과 맞섰다. 십여 초를 겨루게 되었을 때 그는 남해학신에게 무서운 무기가 들려 있긴 하나 상대하기가 쉽지만 단정순의 일양지는 절대로 얕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정면으로 단정순과 맞서서 정신을 가다듬고 대결을 벌이는 한편 남해악신의 악치전에 대해서는 나머지의 여력으로 해소시키며 촉망 중에 한두어 수 펼쳐내어 남해악신으로 하여금 수장 밖으로 물러나도록 만들곤 했다.

단예는 그에게 밟히자 애써 버둥거리며 뭄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단정순은 사랑하는 아들이 제압을 당한 것을 보고 모용복이 발에 조금만 힘을 가하게 되면 아들은 그의 발에 밟혀 피를 토하고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형세로서는 속전속결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먼저 아들을 위험에서 구해 내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일양지를 휙휙, 바람이 일도록 펼쳐내며 공세를 취했다. 그런데 갑자기 음침한 소리가 들렸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는 기상이 삼엄하면서도 의젓하여 위맹한 가운데 왕자 풍도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너와 같이 죽자사자하고 싸우는 것은 그야말로 개방의 푸대자루를 하나도 지지 못한 제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무슨 일양지란 말이냐? 그야말로 이는 대리 단씨의 체면을 깎는 짓이 아니겠느냐?

단정순은 그 말하는 사람이 바로 대적 단연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실 그의 말은 옳았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관심을 쏟기 마련이었고 관심을 쏟게 된다면 자연 마음이 어지러워 기상을 찾고 무슨 풍도를 찾을 겨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별안간 일지를 찍어내게 외었을 때 모용복은 그 기세를 빌어 슬쩍 그 일지를 비틀어지게 했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일지는 남해악신의 어깻죽지를 적중시켰다.

남해악신은 버럭 버럭 악을 쓰듯 고함을 질렀다.

제에미......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악치전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악치전의 반토막은 그의 발등을 내려찍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는 고통과 분노에 얽혀 욕을 하려고 하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는 사부의 애비다. 내가 만약 욕을 한다면 그야말로 배분이 어지러워지게 된다. 저 사람을 죽였으면 죽였지 욕은 할 수가 없다. 이후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나는 슬그머니 그의 머리통을 잘라내면 될 것이다......"

바로 이때 모용복은 단정순이 잘못하여 남해악신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 결과 그만 심신이 약간 흐트러지게 된 틈을 타서 왼손의 중지를 몰래 뻗쳐 전광석화 같이 단정순의 가슴팍에 있는 중정혈(中庭穴)을 짚어 버리고 말았다. 이 중정혈은 전중혈 아래 한 치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정중혈은 사람 몸의 기해(氣海)로서 모든 내공이 이곳에 모이는 곳이라 가장 중요한 급소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적중당하게 된다면 즉시 내공이 봉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모용복은 상대방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총망 중에 그저 상대방의 혈도를 짚으려고만 했지 전중혈을 짚을 수 있는지 없는지 돌볼 여유가 없었다. 단정순은 가슴팍에 격렬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고 내공을 좀처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왕어언은 고종 오라버니가 손가락을 써서 적의 혈도를 제압하는 것을 보고 갈채를 보냈다.

고종 오라버니, 정말 훌륭한 야차탐해(夜叉探海)예요!

본래 상대방의 전중혈을 찔러야만이 야차탐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약간 너그럽게 점수를 매긴 것이었다. 모용복의 일지가 한 치 육 푼 정도 빗나가게 되었지만 그런데로 야차탐해라고 칭찬의 말을 해준 것이었다.

모용복은 그 일지가 상대방의 급소에 적중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초를 더 보충하려 했다. 오른손을 뻗쳐내어 곧장 단정순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단정순은 한 가닥 숨도 제대로 돌리지 않은 상태라 반항할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만 모용복의 일 장에 맹렬히 격타당하여 한 모금의 선혈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급히 운기행공을 하려고 하는데 모용복의 제 삼 초가 다시 뻗쳐왔다.

단예는 모용복의 발 아래에 놓여 있는 몸이었으나 부친이 입으로 선혈을 곧장 뿜어내고 모용복이 다시 제 삼 장을 뻗쳐내는 것을 보게 되자 마음속으로 크게 초조해진 나머지 오른손의 식지를 모용복에게로 겨루면서 부르짖었다.

그대가 감히 우리 아버지를 때려?

다급한 김에 그의 내공을 자연히 식지에서 뻗쳐나오게 되었다. 바로 육맥신검 가운데 삼양검(三陽劍)의 일 초였다. 찍, 하는 소리와 함게 모용복의 한쪽 소맷자락이 무형검에 잘려나가게 되었다. 곧이어 검기는 모용복의 장력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모용복은 그 순간 자기의 손과 팔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그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단예는 자유로운 몸이 되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뻗쳐내어 일 초의 소택검을 펼쳐 다시 그를 찔렀다. 모용복은 재빨리 소맷자락을 휘둘러 막았다. 찍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왼손 소맷자락이 다시 그의 검기에 잘려나가고 말았다.

동백천은 부르짖었다.

공자, 조심하시오! 그것은 무형의 검기(劍氣)이니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면서 검을 뽑아 검자루를 거꾸로 돌린 채 모용복에게로 던졌다.

단예는 왕어언이 자기 부친을 쳐서 쓰려뜨리려는 모용복에게 큰소리로 갈채를 보내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치미는 울화를 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내력이 끊임없이 솟아나오게 되었는데, 일시 소상, 상양, 중충, 관충, 소충, 소택 등 육맥의 검법이 종횡으로 난무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단예로서는 마음대로 육맥신검을 펼쳐내게 되는 것이 마치 신의 도움을 받은 것 같았다.

모용복은 등백천이 던진 장검을 받자 정신이 번쩍 났다. 그리하여 모용씨의 가전검법을 펼쳐 일 초 일 초를 끊임없이 펼쳐냈다. 그야말로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순식간에 자기의 전신을 한 줄기 검의 광막 아래 뒤덮히게 만들었다.

무림의 인사들은 그저 고소 모용씨가 무공에 박학하고 각파 각문의 무공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라는 것만 알았지 검법에 있어서도 그토록 정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복이 아무리 날카롭고 매서운 일 초를 펼쳐도 단예의 몸 주위 일 장 안으로는 그 일 초를 찔러넣을 수가 없었다.

단예는 두 손을 마구 찍고 찌르고 하는데 모용복은 이리저리 몸을 날리면서 피하기에 바쁠 뿐이었다. 별안간 뚝, 하는 소리와 함게 모용복의 손에 들렸던 장검이 단예의 무형검기에 토막이 나고 말았다. 그저 한 치 정도의 크기로 이삼십 토막이 나서 허공으로 날았고 햇살을 받아 점점이 하얀 광채를 뿜어냈다.

모용복은 깜짝 놀랐으나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았다. 왼손을 급히 휘둘러 이 삼 십 토막이나 되는 검의 조각들을 암기로 만들어 만천화우(萬天花雨)의 수법으로 단예에게 홱 뿌렸다.

단예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이쿠!

그는 손발을 어떻게 놀릴 줄을 몰라 황급히 움츠리고는 급히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러자 수십 개의 토막난 검의 조각들은 그의 머리 위를 지나쳐 가게 되었다. 고수들끼리의 무공 대결에 있어서 개가 똥을 먹는 듯한 창피한 초식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말로 실로 보기 흉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용복은 장검이 토막나게 되었으나 패한 가운데에서도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날렵하고 멋들어진 솜씨는 오히려 단예보다도 더 빛이 났다.

풍파악은 부르짖었다.

공자, 칼을 받으시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던졌다. 모용복은 칼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단예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단 형의 개가 똥을 먹는 일 초는 대리 단씨의 가전절기요?

단예는 어리둥절해졌다.

아니올시다.

그는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휘둘러서는 일 초의 소충검을 뻗쳐 찔러 갔다.

모용복은 칼을 휘둘러 막았다. 그는 갑자기 오호단문(五虎斷門刀)를 펼치다가 갑자기 팔괘도법(八卦刀法)을 펼쳤다. 그런가 하면 몇 초 되지 않아 다시 육합도(六合刀)를 펼쳐내곤 했다. 삽시간에 여덟, 아홉 가지의 도법을 펼쳐내는데 한 가지 도법을 펼쳐낼 때마다 그 요령을 깊이 터득하고 있는 듯 오묘한 변화가 생겨나곤 했다.

따라서 구경을 하던 칼을 쓰는 명숙(名宿)들은 모두가 탄복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도법은 정묘했으나 시종 단예의 곁으로 다가들 수가 없었다. 단예가 일 초의 소충검을 왼쪽에서 빙 돌려 뻗치자 모용복은 칼을 들어 막았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예리한 칼은 다섯 토막이 나고 말았다.

공야건은 손을 들어 두 자루의 판관필을 내던졌다. 두 자루의 판관필은 곧장 모용복에게로 날아갔다. 모용복은 부러진 칼을 내던지고는 판관필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대뜸 초식마다 상대방의 혈도를 찌르는 수법을 펼였다. 그의 판관필 끝에서 찍찍, 하는 소리가 났으며 은연중 역시 한 가닥 내력이 쏟아지고 있었다.

단예는 백여 초를 싸우자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던 생각이 점점 가시게 되었다. 그는 백부와 천룡사의 고용 대사가 전수한 내공심법을 떠올리면서 점차 육맥신검을 마음먹은 대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소봉이 입을 열었다.

세째 아우, 그대의 그 육맥신검은 아직 익숙해지지 못해서 여섯 가지의 검법을 일제히 쓸 때는 반드시 빈틈을 남기게 되어 상대방은 그 기회에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차라리 한 가지 검법만 가지고 시험해 보아라!

단예는 말했다.

예. 형님의 가르침,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곁눈질해 보았다. 소봉은 뒷짐을 진 채 한구석에 서 있었는데 매우 여유있어 보였다. 그런데 장취현은 땅바닥에 쓰러져 두 다리가 부러진 채 크게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래 소봉은 모용복이라는 한 강적이 사라지자 유탄지와 일 대 일로 싸우게 되었고 즉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몇 초 맞서 교환을 하게 되자 매번 두 손을 맞부딪히게 될 때마다 부르르 몸을 떨어야 했으며 한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는데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즉시 그는 휙휙, 하니 수장을 맹공격했다. 그리하여 유탄지가 손을 들어 전력으로 막으려 했을 때 벼락같이 다리를 옆으로 쓸어 찼다.

유탄지가 장기로 삼은 것은 바로 빙잠한독과 역근경의 내공이었고 권각법에 있어서는 아자와 함께 배운 것이 다여서 형편이 없었다.

순간 그는 다리에 격렬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고 우직끈,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다리뼈가 동시에 분질러져서는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봉은 낭랑히 외쳤다.

개방에서는 언제나 인의를 앞세우고 있다! 그런데로 그대는 일방의 우두머리이면서 어찌 성숙파의 요사한 사람들과 타락된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야말로 개방의 수백여 년의 명성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유탄지가 개방의 방주가 된 것은 뛰어난 무공 때문이었고 견식이나 풍도에 있어서는 좀처럼 무리들을 승복시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 날 잇따라 개방의 제자들을 잡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뭇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춘추에게 절을 하며 문하에 귀의하게 되자 뭇 개방의 제자들은 더욱더 그를 방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소봉이 그의 두 다리를 부러뜨려 버리자 뭇 개방의 제자들은 오히려 속으로 좋아했고 한 사람도 나서서 도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전관청 등 소수의 골수분자들만이 앞으로 달려와 구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소봉의 늠름한 태도와 표정을 보고 감히 나서지 못했다.

소봉은 유탄지를 쓰러뜨린 후 허죽과 정춘추가 싸우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허죽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 단예는 육맥신검을 펼칠 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정교하고 때로는 우둔하기 짝이 없어 많이 생기는 이길 기회를 아리송하게 놓쳐 버리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쳐 지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단예는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소봉과 유탄지를 바라보느라 심신이 약간 흐트러지게 되었고 육맥신검은 대뜸 빈틈을 보이게 되었다. 모용복은 눈치가 빠르기 이를데 없었다. 왼손을 휘둘러 한 자루의 판관필을 내던졌다. 한 자루의 판관필은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단예의 가슴팍으로 쏘야졌고 금방이라도 단예의 가슴팍을 뚫고 지나갈 것 같았다.

단예는 판관필이 놀라운 기세로 달려드는 것을 보고 그만 손발이 어지러워져서 급히 부르짖었다.

큰형님, 야단났습니다!

이를 본 소봉은 견룡재전(見龍在田)이라는 일 초를 펼쳐 옆에서 후려쳤다. 판관필은 그 장풍에 충격을 받아 허리께로부터 두 동강이 나서 단예의 뒤통수로 돌아가게 되었고 다시 방향을 틀더니 모용복에게로 다시 쏘아져 갔다.

모용복은 오른손의 판관필을 들어 날아드는 판관필을 후려쳤다. 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자루의 판관필이 얽히게 되자 모용복은 그 순간 자기의 오른팔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동강난 판관필이 땅바닥에 닿기 전에 왼손으로 슬쩍 낚아챘다.

군웅들은 소봉의 장력의 고강함에 놀랐고 다시 모용복의 임기응변에 갈채를 보냈다. 하나같이 오늘 당금의 기재들이 전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큰 구경거리로 여겼으며 이번 소실산으로 찾아든 것이 결코 헛걸음을 한 셈은 아니라고 위로하게 되었다.

단예는 판관필이 가슴팍을 뚫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자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는 엄지손가락을 밀어내 소상검법을 펼쳤다. 이 검법은 크게 치고 내리찍는 수법으로 기세가 웅장했다. 매 일검을 찔러낼 때마다 그야말로 돌을 깨뜨리고 하늘을 놀라게 하며 풍우가 몰아치는 기세를 엿보이게 했다. 모용복은 두 자루의 판관필을 재빨리 휘둘렀으나 점차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단예는 소봉의 가르침을 받아 전문적으로 소상검법만을 펼쳤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한 가지의 검법은 엄밀하게 이리저리 얽혀 있어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본래 육맥신검의 여섯 가지 검법을 펼치는 것보다 훨씬 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단예는 그 가운데의 요결을 몰라 그저 한 가지의 검법만을 쓰는 것이 오히려 원숙한 경지를 보였다.

십여 번 검을 내지르게 되자 모용복은 어느덧 이마에 땀을 흘리며 연신 뒤로 물러서게 되었고 한 그루 커다란 느티나무 앞으로 가서 나무를 의지하고 방어하는 꼴이 되었다. 단예는 한 가지의 소상검법을 모조리 쓰게 되자 엄지손가락을 구부려서는 식지를 찔러 내었는데 이번에는 바로 상양검법을 펼친 것이었다.

이 상양검법의 검세는 소상검법보다 웅위하지는 못했으나 날렵함과 신속함에 있어서는 훨씬 뛰어났다. 그가 잇따라 식지를 움직이며 일검 또 일검을 찔러가는 기세는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검법을 펼침에 있어서는 손목의 힘이 민활해야 하고 검을 뻗치거나 검을 거두는 데 있어서 아무리 신속하다 하더라도 몇 자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식지로써 무형의 검기를 움직이기 때문에 결국 손가락을 몇 치 범위 안에서 움직이게 되는 꼴이라 그저 한 번 찌르거나 한 번 찍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편리하기 이를데 없었다.

더군다나 모용복은 그의 공세에 몰려서 일 장 밖으로 물러나 전혀 반격할 여지가 없게 된 셈이 아닌가? 단예가 만약에 일 초 일 식으로 대결을 했더라면 제 이 초를 쓰기 전에 모용복에 의해 목숨을 빼앗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는 공격만 하고 수비를 하지 않아 천룡사에서 배운 상양검법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었기 때문에 크게 유리했다.

왕어언은 고종 오라버니의 형세가 다급해지자 마음속으로 매우 초조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천하 각문 각파의 무공 초식을 알고 있었으나 이 육맥신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따라서 소리를 내어 지도를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안타깝게 생각할 뿐이었다.

소봉은 단예의 무형검기가 더욱더 신묘해지는 것을 보고 기쁘면서도 탄복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리고 별안간 마음속이 쓰라려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아주를 생각한 것이다.

"아주가 그 날 기꺼이 자기의 부친을 대신해서 죽은 것은 내가 그녀의 부친을 죽이게 되면 대리 단씨가 반드시 나를 찾아 원한을 갚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그들의 육맥신검을 당해내지 못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세째 아우의 검법이 이토록 신비한 것을 보면 내가 모용복의 처지가 된다 하더라고 확실히 감당하기가 어렵겠다. 아주는 그녀의 목숨으로 내 한 목숨을 구했는데 나는...... 거란의 일개 무부(武夫)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녀의 깊은 정과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겠는가?"

군웅들은 모용복이 단예에게 핍박을 받아 매우 난처한 처지에 빠진 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나가서 돕고자 하는 사람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남쪽에서 무수한 여인네들의 고함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성숙노괴! 당신이 어찌 감히 우리 표모봉 영취궁의 주인과 손을 쓴단 말이냐? 빨리 엎드려서 절을 하도록 해라!

뭇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산기슭에 수백 명의 여자들이 서 있었는데 여덟 줄로 대오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대오마다 각기 다른 옷차림을 하고 눈부신 바가 있었다. 여덟 대오를 짓고 있는 여자들의 옆에는 또 수백 명의 강호 호걸들이 있었는데 옷차림이 여느 사람들과 달랐다. 이 호걸들 역시 다투어 부르짖었다.

주인, 그에게 몇 조각의 생사부를 심어 주도록 하십시오!

성숙노괴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생사부가 가장 탁월한 효과를 낼 것입니다.

허죽의 무공과 내력을 모두가 정춘추보다 못할 것이 없었다. 본래는 일찍이 승리할 수 있었으나 첫째로 적을 상대한 경험이 너무나 적어 자신의 공격을 육칠 할 정도 밖에 발휘할 수 없었고 둘째로 마음 속에 자비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무서운 살수들을 종종 반쯤 펼쳤다가는 거두어들여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세째로 정춘추의 온몸에 극독이 묻혀 있어 허죽은 이를 꺼려한 까닭으로 가볍게 그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그 자신의 심후한 내력은 정춘추의 주독으로써는 해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싸워도 대치 상태를 지속할 뿐 쉽게 판가름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뭇 남녀들이 일제히 소리내어 부르짖으며 자기의 위세를 돋우어 주자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놀람과 기쁨을 함께 느꼈다.

영취궁의 구천구로(九天九路)의 뭇 여인들 가운데 팔부의 여인들이 모조리 도달한 것이었다. 나머지 일부는 아마도 영취궁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남자들로 말하면 바로 삼십육 동의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 및 그 부하들이었는데 사람의 수가 적지 않았다. 물론 각 동주와 도주 가운데는 도달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팔구 할은 이미 도달한 셈이었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여 파파! 오 선생! 그대들은 어떻게 오셨소?

여 파파는 말했다.

주인에게 알립니다. 속하 등은 매란국죽 네 분 소저의 전갈을 받고 소림사의 중들이 주인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보고받았기에 각 동 각 도의 부하들에게 알려 밤낮을 달려온 것입니다. 다행히 주인께서 무사하시니 속하들은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허죽은 말했다.

소림파는 우리의 사부이외다. 그대는 함부로 무례한 언사를 쓰면 안 됩니다. 빨리 소림사의 방장에게 사죄하도록 하시오.

그는 입으로는 말하고 있었으나 천산절매수와 천산육양장을 여전히 절묘하게 펼쳐내고 있었다.

여 파파는 얼굴에 황송한 빛을 띄우고 허리를 구부렸다.

예, 이 할멈의 죄를 알겠습니다.

그녀는 현자 방장의 앞으로 다가가서 두 무릎을 꿇고 공손히 네 번 큰절을 한 후 말했다.

영취궁 호천부(昊天部)의 여 파파라고 합니다. 무례한 언사를 써서 소림사 뭇 고승들의 위엄을 거슬린 점, 방장에게 절을 하고 사죄를 올립니다. 삼가 방장 대사의 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그와 같은 말은 매우 성의에 찼고 간곡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또렷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내력이 충만한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미 일류 고수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자는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여시주께서는 일어나시구려.

그는 한 번 소맷자락을 떨치는데 오할의 내공을 사용했다. 본래 그는 여 파파를 떠받쳐 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 파파는 그저 몸을 미미미하게 흠칫했을 뿐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이때 그녀는 다시 큰절을 하며 말했다.

이 노파가 주인의 사문을 모독했으니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자기의 본대(本隊)로 되돌아갔다.

현 자 항렬의 뭇 노승들은 허죽으로부터 영취궁으로 들어가 주인이 된 경과를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된 사연인가를 짐작했다. 그러나 나머지의 소림 뭇 승려들과 구경하던 군웅들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노파의 내력 수위는 정말 뛰어나다. 그러고 보면 나머지의 뭇 남녀들도 보기에 약한 것 같지 않은데 어째서 모두 소림파 소화상의 부하란 말인가? 정말 희한한 일이 다 있구나!"

어떤 사람들은 허죽이 소봉을 돕고 또 허죽에게 한떼의 남녀 부하들이 달려온 것으로 보고 소봉의 세력이 크게 증강되었는지라 이제 소봉을 죽이기는 퍽이나 어렵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걱정했다.

성숙파의 문인들은 영취궁 팔부의 여인들 가운데 아름다운 부인이나 소녀가 적지않게 있는 것을 보고 내뱉는 말들 가운데 곱지 못한 말들이 섞이게 되었다.

뭇 동주와 도주들은 모두 거친 사내들이라 즉시 반박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산머리에는 서로 호통치고 욕하는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뭇 동주들과 도주들은 다투어 칼을 뽑거나 검을 뽑아 도전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성숙파의 문인들은 사부의 분부를 받기 전이라 감히 나서서 싸움에 응하지 못했다.

입으로 부르짖고 욕하는 소리는 더욱 더러워지게 되었다. 성숙파의 어떤 제자들 가운데는 사부가 오랫동안 싸워도 유리하게 정세를 이끌지 못하고 점점 국면이 나빠질 것 같은 조짐을 보이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산길 아래로 도망칠 길부터 찾았다.

단예는 오로지 검법을 펼치는 데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영취궁의 뭇 사람들이 산 위로 오르는 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고 상양검법을 펼쳐 한 수 한 수 모용복에게 공격해 갔다.

모용복은 이때 무형검기가 뻗쳐오는 방향을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한 자루의 판관필과 이제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또 하나의 판관필을 휘둘러 바람 한 점 빗방울조차 스며들어오지 못하도록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별안간 찍, 하는 소리와 함게 단예의 검기가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가더니 모용복의 모자가 반쯤 잘라져 날아갔다. 대뜸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흐트러지는 낭패한 꼴을 보이게 되었다.

왕어언은 놀라 부르짖었다.

단 공자, 손에 사정을 두세요!

단예는 속으로 흠칫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제 이 검을 다시 펼치지 않고 손을 돌려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녀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오직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 한 사람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에 내가 실수하여 모용복을 죽이게 된다면 그대는 비통해마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단모는 그대를 존경하고 사랑하니 결코 그대가 지나친 슬픔에 잠기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다."

한편 모용복은 얼굴이 잿빛이 되고 말았다. 오늘 소실산 위에서 싸우다 패한 것만 하더라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인데 다시 한 여자가 사정하는 말을 하여 상대방이 자기의 한 목숨을 용서해 주었으니 금후 강호에서 자기가 설 곳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그는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사내 대장부가 죽으면 죽는 것이지 누가 그대보고 사정을 봐서 초식을 양보하라고 하던가?

그는 강철로 된 판관필을 휘두르며 곧장 단예를 향해 휘둘렀다.

단예는 두 손을 마구 휘두르며 말하였다.

우리는 서로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다시 싸울 필요가 어디 있소? 그만둡시다. 그만둬!

모용복은 평소 자만심이 대단한 사람이었고 또한 천하의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는 터였다. 오늘 당금 호걸들 앞에서 단예에게 핍박을 받아 전혀 반격할 여지가 없게 된 터에 왕어언의 한 마디로 상대방의 양보를 받게 되자 치미는 울화를 가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하나의 판관필을 단예의 얼굴 쪽으로 휘두르고 다른 판관필로는 단예의 가슴팍을 내지르며 생각했다.

"너는 무형검기로 나를 죽여라.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죽기로 하자. 그러는 것이 차라리 이 세상에서 구차한 삶을 사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그와 같이 달려드는 순간 그 자신은 이미 생사를 도외시하고 있었다.

단예는 모용복이 달려드는 기세가 흉악한 것으로 보고 육맥신검으로 그의 급소를 찌르게 된다면 그의 목숨을 해칠 것 같아 두려워 일시에 어찌할 바를 몰라 멍청해지고 말았으며 능파미보를 펼쳐 피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용복이 몸을 날린 것을 죽음을 각오한 터였으니 달려오는 기세가 얼마나 빠르겠는가.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하게 되었을 때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의 판관필은 이미 단예의 몸뚱이에 박히게 되었다. 단예는 위급한 가운데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가슴팍의 급소를 피할 수 있었으나 판관필은 그만 그의 오른쪽 어깨를 깊이 꿰뚫고 말았다. 단예는 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모용복은 왼손의 구부러진 판관필로 질풍과 같이 그의 뒤통수를 낚아채려 들었다. 이 한 수는 대해노침(大海노針)이라는 일 초로 바로 북해(北海)의 척발씨(拓跋氏)의 어수구법(漁수구法)가운데의 무서운 일 초로서 깊은 바다에서 갈고리로 고기를 낚아채는 갈구리 수법에서 변화한 것이라 정확하고도 매서웠다.

단정순과 남해악신은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자 또다시 일제히 달려들려고 했다. 거기다가 파천석과 최백천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이번에 모용복은 단예를 죽일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몸이 중상을 입을지언정 전혀 그 기세나 손씀씀이를 늦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단정순 등 네 사람의 공격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철 갈고리의 끝이 단예의 뒤통수에 닿으려고 했을 때 별안간 그는 등뒤의 신도혈(神道穴)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고 몸뚱이는 어떤 사람에게 들려 허공으로 붕 떠오르게 되었다. 신도혈이란 요혈에 붙잡히게 되자 대뜸 두 손이 마비되어 다시는 판관필과 강철 갈고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소봉의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에서는 너의 목숨을 살려 주려고 하는데 너는 오히려 독수를 썼다! 그래 가지고 무슨 영웅 호걸이라 할 수 있느냐!

원래 소봉은 모용복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게 되자 가슴팍을 완전히 드러낸 상태여서 그야발로 빈틈을 완전히 노출시킨 상태라 단예의 무형검기가 펼쳐지기만 한다면 일 초에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었다. 한데 뜻밖에도 단예는 그 순간 손을 멈추었다.

모용복의 기세가 너무나 빨라 소봉의 손씀씀이가 빠르기는 했어도 결국에는 판관필에 단예가 상처를 입는 액운을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용복이 곧이어 대해노침이라는 일 초를 펼치게 되었을 때 소봉은 즉시 손을 써 대뜸 그의 등에 있는 신도혈을 움켜잡았다. 본래 모용복의 무공은 소봉에 비해 약간 약한편으로 단 일 초에 사로잡힐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다만 분노가 가슴 가득히 차 올라 있었고 한마음 한뜻으로 단예를 죽이겠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전혀 자신을 돌보지 않은 탓이었다. 거기다가 소봉이 이번에 쓴 것은 정묘하기 이를데 없는 금나수법으로, 그의 요혈을 움켜잡자 모용복으로서는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봉은 체구가 우람한데다가 손과 발이 유난히 길었다. 그리하여 모용복을 허공에 들어올리자 그 기세는 그야말로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는 것 같았다.

등백천, 공야견, 포부동, 풍파악 네 사람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우리 공자를 해치지 마시오!

그들은 일제히 달려들었다. 왕어언 역시 사람들 틈에서 달려나오며 부르짖었다.

모용 오라버니, 모용 오라버니!

모용복은 이와 같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

소봉은 냉소했다.

이 소모는 사내 대장부인데 너와 같은 사람과 함께 명성을 떨치다니 유감이다!

그는 팔을 떨쳐 그를 던져 버렸다.

모용복은 곧장 칠팔 장 밖으로 날아갔다. 허리를 뻗으며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소봉이 그의 신도혈을 움켜잡게 되었을 때 내력이 곧장 그의 경맥으로 스며들어 그로서는 순식간에 손발이 저려오는 것을 풀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등백천 등은 황망히 몸을 돌려 모용복 쪽으로 달려갔다. 모용복은 내공을 돋우어 등백천 등이 달려오기 전에 벌떡 몸을 일으겼다. 그러나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곧 손을 뻗쳐 포부동의 허리에 찬 검집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원을 그려 등백천 등을 몇 자 밖으로 물리친 이후 모두 손목을 홱 뒤집어 검을 비껴 들고 자기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왕어언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고종 오라버니, 안 돼요!

바로 이때 파공성이 크게 일었다. 한 가지의 암기가 수십여 장 밖에서 날아들어 광장을 가로지르더니 모용복의 손에 들린 장검을 때렸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모용복의 장검은 그만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고 손바닥은 피로 가득 물들게 되었다. 손아귀가 충격에 찢어지고 만 것이다.

모용복은 그만 경악해서 고개를 쳐들고 암기가 날아든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산비탈 위에 한 잿빛 옷을 입은 승려가 잿빛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다.

그 승려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모용복의 곁에 이르러 물었다.

그대에게는 아들이 있는가?

그 음성은 퍽이나 늙수그레했다.

모용복은 말했다.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는데 어디서 자식이 생겨난단 말이요?

그 잿빛 옷의 승려는 싸늘하게 말했다.

네게는 조상이 있느냐?

모용복은 매우 울화가 치밀어 큰소리로 말했다.

물론 있소이다. 그러나 내 스스로 죽고자 원하는데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선비는 죽으면 죽었지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소. 모용복은 당당한 사내 대장부이니 당신의 그와 같은 무례한 언사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없소.

잿빛 승려는 말했다.

그대의 고조할아버지는 아들이 있고 그대의 증조부, 조부, 부친에게도 아들이 있으나 그대만 아들이 없다. 흐흐흐, 대연나라의 모용황(慕容황), 모용락(慕容락), 모용수(慕容垂), 모용덕(慕容德)은 얼마나 뛰어난 영웅이냐? 그런데 이제 손이 끊어진 사람이 되고 마는구나.

모용황, 모용락, 모용수, 모용덕은 모두 과거 연나라의 영명한 구주로서 천하에 위세를 떨쳤고 커다란 일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바로 모용복의 조상들이 아닌가.

모용복은 머리가 어리벙벙하고 그야말로 미친 듯한 분노에 휩싸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네 분 선조의 이름을 듣게 되자 그야말로 머리에 한 통의 냉수를 뒤집어 쓴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신 부친께서는 옛날 나에게 타일러 대연나라를 세우는 것을 한평생의 뜻으로 삼으라고 하셨다. 나는 오늘 일시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스스로 자결하려고 했으니 그렇게 된다면 우리 선비(鮮卑)모용씨는 이대로 자손이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는 아들마저 없는데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조상을 영광스럽게 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것인가?

그만 등줄기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모용복은 땅바닥에 꿇어 앉아서 말했다.

이 모용복은 식견이 좁았습니다. 고승의 가르침을 받은 은혜는 한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잿빛 옷의 승려는 가슴을 편 채 그가 큰절 하는 것을 그대로 서서 받더니 말했다.

옛부터 큰일을 성공시킨 자 가운데 온갖 고생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가? 한 고조께서는 백등(白登)에서 화친을 구걸하는 곤욕을 당했고, 당나라 고조는 돌궐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당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모두 그대와 같이 모두 검을 들어 자결을 했더라면 그저 마음이 좁은 사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나라를 세우고 기틀을 바로잡는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게다. 너는 구전(句戰)이나 한신(韓信)보다도 못하니 정말 무지하고 견식이 좁기 이를데 없다.

모용복은 땅에 엎드린 채 그 가르침을 받고는 흠칫 하니 놀라 생각했다.

"이 신승이 한 고조니 당 고조 등 나라를 세운 군주를 들어 비교하는 것을 보면 내가 마음속에 갖고 있는 포부를 알고 있는것 같구나."

이와 같은 생각과 더불어 그는 머리를 숙였다.

모용복이 잘못을 알았습니다.

잿빛 옷의 승려는 말했다.

일어나거라.

모용복은 공손하게 세 번 절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잿빛 옷의 승려는 말했다.

고소 모용씨의 가전무공은 신기하고 정묘하기 이를데 없으며 이 세상을 통털어도 버금가는 무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다. 설마하니 정말 대리국 단씨의 육맥신검에 비해 못 할 줄 아느냐? 자, 자세히 보아라.

그는 식지를 뻗쳐내더니 허공을 격하고 세 번을 찔렀다.

이때 단정순과 파천석 두 사람은 단예의 곁에 서 있었다. 단정순은 일양지로 단예의 상처 사방의 혈도를 짚고 파천석은 판관필을 그의 어깻죽지에서 뽑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잿빛 옷의 승려의 지풍이 이르자 두 사람은 가슴팍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고 쓰러지고 말았다. 곧이어 그 판관필이 단예의 어깻죽지에서 되튕기듯 뽑혀져 퍽, 하니 땅바닥에 떨어져 꽂혔다.

단정순과 파천석은 쓰러졌으나 즉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들은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 잿빛 옷의 승려가 손에 사정을 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그가 허공을 격하고 찍는 수법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이때 그 잿빛 옷의 승려는 낭랑히 외쳤다.

이것이 곧 너희 모용씨 집안의 삼합지(參合指)이다. 과거 노납은 너의 윗어른들로부터 배워둔 것인데 그저 반쯤 알고 있을 뿐이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웠을 뿐이다. 이밖에도 모용씨의 신묘한 무공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흐흐흐, 설마하니 젊은 나이에 그까짓 하찮은 재간으로 고소 모용씨의 상대의 수법을 상대의 몸에 펼친다는 대명을 세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단 말이냐?

군웅들은 본래 고소 모용씨의 위명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모용복이 단예에게 패하고 또다시 소봉에게 패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직접 대하고 보면 소문에 듣던 것보다 못하다고 하더니 헛되이 명성을 얻은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결코 이 세상을 놀라게 하고 당금 세상에서 으뜸가는 무공이라 할 수는 없구나."

그렇게 생각했으나 잿빛 옷의 승려가 보여 준 그 한 수의 신공과 또 그가 그저 모용씨의 삼합지를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웠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자, 다시 고소 모용에 대한 경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속으로 이상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저 잿빛 옷의 승려는 누구일까? 그와 모용씨는 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잿빛 옷의 승려는 몸을 돌리더니 소봉을 향해 합장하고 말했다.

교 대협의 무공은 정말 탁월하여 과연 명불허전이로소이다. 노납이 몇 수 가르침을 받을까 하오.

소봉은 이미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합장하고 절을 하게 되었을 때 즉시 포권하여 반례하며 말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두 가닥 내력이 서로 부딪히게 되었고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미미하게 휘청거렸다.

바로 이때였다. 허공에서 갑자기 한 흑의 인형이 독수리처럼 덮쳐들었고 그는 잿빛 옷의 승려와 소봉의 중간에 알맞게 내려섰다.

이 사람이 갑자기 허공에서 뚝 떨어지듯 모습을 느닷없이 드러내자 뭇 사람들은 깜짝놀라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그의 두발이 땅에 닿는 것을 보고서야 그의 손에 한 자루의 기다란 밧줄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란 밧줄의 한쪽 끝은 바로 십여장 밖의 한 그루 커다란 나무 위에 매여 있었다.

이 사람의 머리는 민숭민숭했고 흑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역시 승려였다. 검은 베조각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그저 한 쌍의 냉전(冷電)과 같은 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흑의와 회의(灰衣)의 두 승려는 서로 마주보고 선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군웅들은 그 두 승려의 체구가 무척 큰 편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다만 흑의 승려는 비교적 우람한 편이었고 회의 승려는 비쩍 마른 편이었다.

이때 소봉은 기쁨과 함께 감격을 맛보았다. 그는 이 흑의 승려가 기다란 밧줄을 이용하여 땅에 내려선 신법을 보고 이미 그 날 취현장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 준 흑의 대한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당시 그 흑의 대한은 머리에 털모자를 쓰고 있었고 몸에 속세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승려의 복장으로 바꾼 상태였다. 이때 소실산에 모여 있는 군웅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날 취현장의 싸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 흑의 대한은 눈깜짝할 사이에 나타났다가 사라져서 그 누구도 그의 신법을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라 이때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시 한참 동안 시간이 흘렀다. 흑의와 회의의 두 승려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대......

그러나 그대라는 한 마디가 툭 튀어나오자 두 승려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그제서야 그 회의 승려는 입을 열고 물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흑의승은 말했다.

그대는 누구시지?

군웅들은 흑의승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화상의 음성도 늙수그레한 것을 보니 역시 노승이구나!"

이때 소봉은 그 음성이 바로 그 날 그 대한이 황량한 산속에서 그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던 음성과 같다는 것을 알아채고 마음이 급격하게 뛰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나아가 인사를 하고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사의를 표하려고 했다.

이때 그 회의승이 말했다.

그대는 소림사에서 꼬박 수십 년 동안 숨어 지냈는데 무엇 때문이오?

흑의승은 말했다.

나 역시 그대에게 묻고 싶었소. 그대는 소림사에서 꼬박 수십 년을 숨어 지냈는데 그건 무엇 때문이오?

두 승려의 이와 같은 몇 마디가 입에서 터져나오자 소림의 뭇 승려들은 현자방장을 위시해서 모두가 크게 의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각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두 노승이 어찌하여 본사에 있은 지 수십 년이나 되는데 나는 전혀 몰랐을까? 정말 그와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때 회의승이 말했다.

내가 소림사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은 하나의 물건을 찾기 위해서이외다.

흑의승은 말했다.

내가 소림사에 몸을 숨긴 것도 역시 어떤 물건을 찾기 위해서이외다. 내가 찾는 물건은 이미 찾았소. 그대가 찾는 물건도 아마 다 찾은 것 같구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세 번 겨루는 동안 마땅히 승부가 났을것이 아니겠소?

회의승은 말했다.

맞소. 귀하의 무공은 뛰어나 실로 불초가 한평생 보기 드문 상대였소. 오늘 다시 겨루겠소?

흑의승은 말했다.

형제 역시 귀하의 무공에 대해서는 매우 탄복하는 바이오. 더 겨루어 보았자 승부가 쉽게 날 것 같지 않구려.

뭇 사람들은 갑자기 두 승려가 귀하니 형제니 하는 말투로 서로 칭하는 것을 보고 출가인의 말소리가 아닌지라 더욱 아리송한 생각이 들었다.

회의승은 말했다.

무척 잘 되었소.

두 승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로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 아래로 다가가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더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치 승려가 입정(立定)한 듯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모용복은 부끄럽기도 하고 또한 고맙기도 했다.

"저 고승은 나의 선친을 알고 계신 모양이다. 그런데 사귀던 분은 나의 할아버지일까, 아니면 나의 아버지 일까? 금후 연나라를 되찾는 큰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저 고승에게 상세히 지도를 받아야겠다. 그러니 오늘 결코 그와 사귀게 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구나."

그는 한옆으로 물러서서 될 수 있으면 회의승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했다. 그 회의승이 몸을 일으키기만 한다면 즉시 앞으로 나아가 가르침을 받을 작정이었다.

왕어언은 조금 전 그가 하마터면 자결할 뻔한 것을 생각하고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모용복은 매우 귀찮았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에게 보여 주는 태도는 호의인지라 소맷자락을 떨쳐 그녀를 나가떨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회의와 흑의 두 승려가 잇따라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함께 나무 아래에 앉게 될 때까지 허죽과 정춘추는 시종 격렬한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군웅들의 시선은 자연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영취궁의 네 자매 가운데 국검이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십팔명의 거란 무사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우리 주인은 지금 한창 남과 싸우고 있느데 반드시 술을 좀 마셔야만이 기운을 크게 낼 수 있어요.

한 명의 거란 무사가 말했다.

술은 무척 많소이다. 소저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가져가 사용하십시오.

그는 두 개의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국검은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우리 주인께서는 주량이 그리 큰 편이 못 되시니 한 주머니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녀는 한 주머니의 독한 술을 들고 병마개를 뽑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허죽과 정춘추가 싸우는 곳으로 다가가 말했다.

주인께서 성숙노괴에게 생사부를 심어 주려면 약간의 술이나 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가죽 주머니를 옆으로 돌리고 힘주어 앞으로 내미는 척했다. 그러자 가죽 주머니 안의 독한 술이 한 줄기의 술 화살로 화해서 허죽에게 쏟아졌다. 매란죽 세 자매는 손뼉을 치며 부르짖었다.

국 누이, 정말 묘하군!

갑자기 산비탈 뒤에서 한 여자가 간드러진 음성으로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한 그루의 꽃에 영롱한 이슬이 맺혀 양기를 머금었구나. 운우(雲雨)에 휩싸인 무산(巫山)은 헛되이 사람을 슬프게 하더라. 나는 바로 양귀비다. 정말 좋은 술이군. 정말 좋은 술이야! 나는 술에 취해 정자 옆에 쓰러지도다!

허죽은 정춘추와 한참 동안 싸우면서 그를 제압할 방법이 없어 야단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취궁 부하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가 생사부를 심으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국검은 술을 쏘아 왔기에 손을 벌려 한 움큼 손에 낚아챘다.

그런데 산 뒷쪽에서 여덟 명의 사람이 걸어나오는데 바로 금전(琴顚)강광릉, 기마(棋魔)범백령, 서애(書애) 구독, 화광(畵狂) 오령군, 신의(神醫) 설모화, 교장(巧匠) 풍아삼, 화치(花치) 석청로, 희미(희迷) 이괴뢰 등 함곡팔우였다.

이 여덟 명은 허죽이 정춘추와 한창 신나게 싸우는 것을 보고 일제히 위세를 돋우었다.

장문 사숙, 오늘 크게 신통력을 떨쳐서 정춘추를 빨리 죽여 우리 사조부님과 사부님의 원한을 갚도록 하십시오!

이때 국검의 손에 들린 독한 술은 연신 허죽에게로 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무공은 평범해서 일부분의 술은 정춘추에게로 쏘아질 때도 있었다. 성숙노괴는 허죽을 상대로 악전고투 했으며 어느덧 반 시진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묘수를 끊임없이 펼쳐 그의 손발을 묶듯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사악한 수법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술이 날아들자 불현듯 마음속에 움직이는 바가 있어서 왼쪽 소매로 떨치며 날아드는 술방울이 빗방울처럼 허죽에게 뿌려지도록 만들었다.

이때 허죽은 전신의 공을 돋우고 있는 상태라서 수천 수만 가닥의 술비가 그의 몸 위로 떨어졌으나 그의 옷자락에 닿기도 전에 그의 내공에 부딪혀 되튕겨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어이쿠, 하는 두 마디가 들리는 가운데 국검이 벌렁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정춘추가 술을 비로 화하게 만들어 떨쳐내게 되었을 때 그 술에는 이미 극독이 묻혀 있는 상태였다.

국검은 가까이 다가가 있다가 그만 독비를 몸에 맞게 되었고 그 즉시 땅바닥에 쓰러진 것이었다.

허죽은 국검에 대해서 관심이 무척 많아 크게 당황했으나 어떻게 그녀를 구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때 설모화가 놀라 부르짖었다.

사숙, 이 독약은 매우 무섭습니다. 빨리 도적을 제압하여 그로 하여금 해약을 내놓아 치료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알았소.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끊임없이 정춘추를 공격하고 왼손의 손바닥에 암암리에 내공을 돋우어 북명지기를 역으로 끌어올렸다. 얼마 후에는 손바닥의 술이 일곱, 여덟 편의 차가운 얼음 조각이 되었다.

그는 왼손으로 휙휙, 하니 잇따라 삼 장을 후려쳤다.

정춘추는 갑자기 싸늘한 바람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이 나이 어린 땡초의 내력이 어째서 갑자기 음유하게 변했지?"

그는 재빨리 전력을 다해 그 삼 초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별안간 어깻죽지의 결분혈(缺盆穴)이 미미하게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한 송이 눈 이 그 살 위에 떨어진 듯한 촉감을 느낀 것이다. 곧이어 아랫배의 천추혈(天樞穴), 등에 있는 신도혈(神道穴), 허리 뒤에 있는 지실혈(志室穴) 세 곳 역시 섬뜩해지는 것이 아닌가? 정춘추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장력이 음랭하긴 하나 결코 빙 돌아가 등뒤로 습격해 올 수는 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서늘한 곳은 모두 다 혈도가 있는 부위이다. 도대체 저 나이 어린 땡초 중은 무슨 이상하고 요사한 수법을 쓰는 것일까? 조심해야겠다."

그는 소맷자락을 휘두르고 소맷자락으로 상대방의 눈을 현혹시키면서 맹렬히 허죽을 향해 발길질을 해댔다.

그런데 오른발을 중간까지 걷어차게 되었을 때 별안간 복토혈과 양교혈이 동시에 근지러워져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오른쪽의 발끝은 분명히 허죽의 승포자락에 닿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두 곳의 혈도가 동시에 근지러워 오자 오른발을 자연히 내려뜨리고 말았다. 그는 어이쿠, 하고 부르짖은 뒤에 곧이어 어이쿠, 어이쿠, 하며 두번 더 신음 소리를 내질렀다. 뭇 문인들은 소리 높여 칭송의 말을 하고 있었다.

성숙노선의 신통력은 광대하다! 두 소맷자락을 살짝 펼치게 되자 계집애는 그만 법술에 걸려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구나!

어르신께서 한 번 발을 내딛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으며, 한 번 손을 흔들자 달과 해가 빛을 잃었도다!

성숙노선이 큰 소맷자락을 휘두르고 입으로 진언(眞言)을 외우게 된다면 너희 방문좌도의 우귀사신들은 하나 같이 죽어 뼈를 묻힐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칭송하는 노래 소리 중에 성숙노괴의 어이쿠, 어이쿠, 하는 소리가 섞이자 실로 우스꽝스러웠다. 뭇 제자들 가운데 눈치 빠른 자는 아연해져서 입을 다물었으나 대다수는 여전히 목청껏 소리높여 외치고 있었다.

정춘추는 삽시간에 결분, 천추, 복토, 천천, 천주, 신도, 지실의 일곱 혈도가 동시에 마비되고 근지러워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가 동시에 물어뜯는것 같았다.

이 술로 된 얼음 조각에는 허죽의 내력이 실려 있었고 그 차가운 얼음 조각은 몸 안으로 스며들자마자 즉시 사라지고 말았지만 내공은 그의 혈도 경맥 사이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정춘추는 그야말로 손과 발을 어지럽게 놀려 끊임없이 품속에서 한 움큼씩 칠팔 가지의 해약을 꺼내 입 속에 털어 넣었고 대여섯 번이나 내공을 끌어올려 유통시켰지만 혈도의 간지럽고 찌릿해지는 감각은 더욱 심해졌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땅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굴러야 했겠지만 정춘추의 신공은 놀라울 정도여서 억지로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자니 자연 발걸음이 휘청거렸고 마치 술을 먹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얼굴은 한 차례 붉어지는가 하면 또 한 차례 하얗게 변하곤 했느데 두 손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대고 있어 그 모습은 가공스럽기 짝이 없었다.

허죽의 이 일곱 조각의 생사부는 바로 독한 술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여느 차가운 얼음 조각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성숙파의 문인들은 사부의 그와 같이 낭패한 꼴을 보게 되자 하나하나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멍청한 몇 사람은 죽어라 하고 부르짖고 있었다.

성숙노선께서는 대라금선(大羅金仙)의 무도공(舞蹈功)을 끌어올려 펼치시고 있다. 소화상은 쓴맛을 보고 말 것이다!

성숙노선이 한 번 어이쿠 하고 부르짖을 때마다 소화상의 삼혼육백(三魂六魄)가운데 한 푼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괴뢰는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다섯 필의 얼룩말과 천금이 나가는 가죽 옷을 벗어서 맛좋은 술과 바꾸어 그대와 함께 만고의 수심을 달래리라. 하하하, 나로 말하면 바로 이태백이로다. 음중팔선(飮中八仙) 가운데 첫째가는 사람이 바로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이며 두 번째가 바로 성숙노선 정춘추이더라!

군웅들은 정춘추의 술에 취한 듯한 낭패한 모습을 보고 또 이괴뢰가 하는 말을 듣고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얼마 후 정춘추는 끝내 지탱하지 못하고 손을 뻗쳐서는 마구 자기의 수염을 잡아뜯었다. 그리하여 한 무더기의 은빛처럼 아름다운 수염을 모조리 뽑아 날려 버렸다.

그는 곧이어 옷자락을 찢기 시작하며 희디흰 살결을 드러냈다. 나이는 이미 늙었지만 몸뚱이는 여전히 젊은이 못지 않게 건장한 편이었다. 손가락이 가는 곳에 살가죽이 터져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는 연신 쥐어뜯듯 할퀴며 끊임없이 울부짖었다.

근지러워 죽겠다! 근지러워 죽겠다!

다시 일각의 시간이 흐르게 되자 왼쪽 무릎을 꿇고 더욱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허죽은 퍽이나 안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이 사람은 죽어 마땅하나 그가 받는 고통이 이토록 무섭다니, 진작 이럴 줄 알았어라면 나는 그저 그에게 한두 조각의 생사부를 심어 주었으면 충분했을 뻔했구나."

군웅들은 이 동안학발의 신선과 같은 무림 고인이 삽시간에 도깨비와 같은 모습을 하고서 야수와 같이 울부짖음을 토해내는 것을 보고 그만 아연해져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이괴뢰마저도 놀라 입을 다물 지경이었다. 다만 커다란 나무 아래의 흑의와 회의 두 승려만이 여전히 눈을 감고 정좌하고 있었는데 마치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현자 방장은 말했다.

선재로다!선재로다! 허죽, 그대는 정 시주의 몸의 고통을 풀어 주도록 해라.

허죽은 대답했다.

예, 삼가 방장의 법지를 받들겠습니다.

현적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 방장 사형, 정춘추는 너무나 악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현난, 현통 두 분 사형은 그에게 목숨을 잃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 가볍게 그를 용서한단 말씀입니까?

강광릉은 말했다.

장문 사숙, 그대는 본파의 장문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우리 사조부와 사부의 큰 원한을 갚지 않을 수 있습니까?

허죽은 일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설모화가 말했다.

사숙, 먼저 그에게 해약을 내놓으라고 하십시오.

허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매검 소저, 그대는 진양환(鎭양丸)을 그에게 반 알만 먹이도록 하시오.

매검은 대답했다.

예.

그녀는 품속에서 녹색의 조그만 병을 꺼내더니 콩알만한 알약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정춘추의 미친 듯한 태도를 보고는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를 못했다.

허죽은 알약을 받아 들고 두 쪽으로 나눈 이후 말했다.

정 선생, 입을 벌리시오. 내 그대에게 진양환을 먹여 드리리다.

정춘추는 헉헉 하는 숨을 내쉬며 입을 크게 벌렸다. 허죽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반 알의 알약은 날아가더니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약 기운이 일시에 퍼지지 않아 정춘추는 여전히 근지러워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밥 한 끼 먹을 시진이 지난 이후에야 그토록 근지럽던 것이 잠깐 멎게 되고 그제서야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시종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다시 더 반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허죽이 입을 열기도 전에 스스로 해약을 꺼내 순순히 설모화에게 내밀며 말했다.

붉은 것은 밖으로 바르고 하얀 것은 안으로 복용하는 것일세.

그는 반 나절 동안 울부짖었는지라 말하는 소리마저도 목이 쉬어 있었다. 설모화는 그가 감히 장난질을 못하리라 생각하고 그가 알려 준 대로 국검에게 안으로 복용하고 겉으로 약을 바르도록 했다.

매검은 황망히 외쳤다.

성숙노괴, 그 반 알의 약은 근지러움을 그저 삼 일 동안만 멈추게 할 뿐이에요! 삼 일 후에 그 근지럽기 이를데 없는 것이 다시 발작을 일으키게 될 텐데 그때에 우리 주인이 재차 영약을 내릴지 안 내릴지는 그대가 고분고분하게 말을 따르느냐에 달려 있어요!

정춘추는 전신을 벌벌 떨고 말을 하지 못했다.

성숙파의 제자들 가운데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투어 앞으로 달려나오더니 허죽의 앞에 꿇어 덮드리고 거두어 주기를 간청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천하의 무림 맹주 자리는 주인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주인께서 손을 쓰라고 명령만 내리신다면 소인은 끓는 물 속이 아니라 타는 불길 속이라 하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진정으로 충성심을 가지겠다고 했으며 정춘추를 손가락질하며 매도했다. 즉 정춘추는 촛불과 같은 불빛으로 감히 해와 달과 빛을 다투려고 했다는 둥, 아니면 흉칙한 야심을 품은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라는 둥 떠벌였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속히 정춘추를 죽여 이 세상의 해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북 치는 소리, 피리 부는 소리가 다시 울려퍼지면서 제자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취의 주인은 덕망이 천지를 지배하고 위세는 온누리에 떨치니 고금에 따를 자가 없더라!

그들은 그저 성숙노선이라는 네 글자를 영취 주인으로 바꿨을 뿐 그 나머지의 가사는 성숙노선을 칭송할 때와 똑같았다.

허죽은 소박한 사람이었으나 성숙파의 문인들이 이토록 칭송을 하게 되자 그만 두둥실 자기 몸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난검이 호통을 내질렀다.

너희들같이 비열한 소인들이 어찌하여 성숙노괴를 칭찬하던 그 막 돼먹은 말을 또다시 우리 주인에게 사용하여 칭송하느냐?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성숙의 문인들은 무척 황송해 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예예, 소인들은 역시 달리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선녀로 하여금 만족하도록 하겠소이다.

네 분의 선녀는 정말 꽃과 같은 용모를 하고 있어 서시보다 아름답고 양귀비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성숙파의 제자들은 허죽에게 큰절을 한 후 스스로 뭇 동도들과 도주들의 등 뒤로 돌아가 서서 하나같이 의기양양해했다. 그저 자기의 체면이 크게 돋보이게 되는 양 기고만장하였으며 중원 호걸들과 개방의 무리, 그리고 소림의 승려들을 안중에 두지 않는 듯했다.

현자는 말했다.

허죽, 그대 스스로 문호를 세운다 할지라도 이후 마땅히 협의도의 올바른 길을 걸으며 제자들을 단속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해서 강호에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크게 덕을 쌓는 것이며 갖가지 선한 원인을 뿌리게 되는 것이다. 출가하나 집에 있으나 마찬가지이다.

허죽은 목메인 어조로 말했다.

예, 허죽은 삼가 방장의 가르침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현자는 다시 말했다.

파문하여 소림사에서 쫓아내지 않을 수는 없으나 곤장으로 매를 맞는 것은 면하도록 하겠다.

갑자기 한 사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나는 소림사에서 계율을 중시하고 법을 태산같이 엄숙하게 집행하는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모두 다 세력에 아부하는 알량한 도배들에 불과한 것 같군. 흐흐흐, 영취 주인은 덕망이 있어서 천지와 짝을 짓고 위세는 온누리에 떨치니 고금에 비할 바가 없더라!

뭇 사람들은 말하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바로 토번국의 국사인 구마지였다.

현자는 그만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국사가 대의로써 나무라시니 노납은 잘못을 알겠소이다. 현적 사제, 매질을 하도록 해라.

현적은 대답했다.

그는 몸을 돌려 말했다.

매질을 시행토록 하라.

이어 허죽에게 말했다.

허죽, 그대는 아직도 소림사의 제자이니 몸을 엎드려서는 매를 맞도록 해라.

허죽은 허리를 굽혔다.

그는 꿇어 앉아서 현자와 현적에게 절을 하고 말했다.

제자 허죽은 본사의 큰 계율을 어겼으니 삼가 방장과 계율원 수좌의 매질로써 가하는 책벌을 받도록 하겠나이다.

성숙파의 뭇 문인 제자들은 갑자기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너희들 소림승 무리가 어찌 어르신의 귀체를 침범한단 말인가?

그대들이 만약에 그 어르신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한다면 나는 너희들과 죽자 사자 싸울 것이다. 나는 어르신을 위해서는 몸이 박살이 나 죽는다 하더라도 영광스러운 일로 여길 것이다.

충성을 다하겠다는 이 마당에 이 한 몸의 피와 살은 모두 영취궁 주인에게 바치도록 하겠다.

여 파파가 호통을 내지렀다.

우리 주인이라는 소리를 어찌 너희들과 같은 요사한 무리들이 함부로 부르짖는단 말이냐? 입 닥치고 가만 있지 못해?

성숙파의 뭇 사람들은 그녀의 호통을 듣고 쥐죽은듯 잠잠해지게 되었고 크게 숨 한 번 쉬지 못했다.

소림사의 계율원 집법승이 허죽에게 승포자락을 들어올리고 그의 등뒤의 살갗을 드러내도록 했다. 다른 한 명의 승려는 수계곤(守戒棍)을 들어올렸다. 허죽은 생각했다.

"내가 벌로써 매를 맞게 된 것은 계율을 어긴 탓이다. 그러니까 만약 운기행공하여 방어하고 내 자신이 조금도 아픔을 모른다면 매질하는 것도 헛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 갑자기 한 여인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잠깐, 잠깐! 그대의...... 그대의 등에 있는 것은 무엇이지?

뭇 사람들은 일제히 허죽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과 허리 사이에는 아홉 점의 흉터가 있었다.

승려는 계를 받을 때 정수리 위에다 흉터를 내게 되는데 이를 계를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허죽은 정수리에 계를 받은 흉터 이외에 등에도 역시 흉터가 있었다.

등의 흉터는 구리 동전 만한 크기인데 이로 미루어 그가 어릴 때부터 받은 것으로서 몸이 커짐에 따라 흉터도 점점 커진 것 같았다. 따라서 지금 볼 때 결코 둥글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이때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한 중년 여인이 달려 나왔다. 몸에는 담청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었고 좌우의 뺨에는 각기 세 가닥의 흉터가 있었는데 바로 사대 악인 가운데의 한 사람인 무악부작 섭이랑이었다.

그녀는 질풍과 같이 달려 나오더니 두 손을 나누어 소림사 계율원의 두 명의 집법승을 떠밀었다. 그녀는 손을 뻗쳐 허죽의 바짓가랑이를 내리려고 하였다. 그야말로 여러 사람들 앞에서 허죽의 바지를 벗기려는 것이 아닌가?

허죽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려 뒤로 표연히 몇 자 물러서며 물었다.

그대는...... 무엇하는 짓이요?

섭이랑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부르짖었다.

내...... 내 아들아!

그녀는 두 팔을 벌리고 허죽을 안으려고 했다. 허죽이 몸을 날려 피하자 섭이랑은 그만 허공을 안게 되었다.

뭇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는 미쳤구나!"

섭이랑은 잇따라 몇 번을 안으려고 했으나 허죽이 가볍게 피해버렸다. 그녀는 미친듯 부르짖었다.

아들아, 네 어찌 이 에미를 몰라본단 말이냐?

허죽은 속으로 흠칫했다. 그야말로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가...... 그대가 나의 어머니라고요?

섭이랑은 부르짖었다.

아들아, 나는 너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너의 등과 양쪽 볼기짝에 각기 아홉 개의 계점(戒點)이라는 흉터를 내었다. 너의 볼기짝 양쪽으로 각기 아홉 개의 흉터가 있지 않느냐?

허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볼기짝에는 확실히 각기 아홉 개의 흉터가 있었다.

그 흉터는 어릴 때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 내력을 알지 못했으며 또한 동료들에게도 말하기가 부끄러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때로 목욕하면서 보게 되면 자기와 불문이 인연이 있어 선천적으로 그렇게 생겨난 모양이라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그로 인해서 더욱 불법에 정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돌연 섭이랑의 말을 듣자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예예. 저의...... 이 볼기짝에는 각기 아홉개의 계점이 있습니다. 그대가...... 어머니가...... 저를 위해 만든 계점인가요?

섭이랑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부르짖었다.

그렇다! 그렇다! 만약 내가 너를 위해 낸 것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나는......아들을 찾았다. 내가 친히 낳은 착한 아들을 찾았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울면서 한편으로는 손을 뻗쳐 허죽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허죽은 더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안는 대로 맡겨 두었다. 그는 어릴 적 부터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었다. 그저 절 안의 승려가 키운 고아라고만 생각했었다.

그의 등과 볼기짝에 흉터가 있는 것도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섭이랑이 알고 있으니 어찌 가짜일리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안간 그는 한평생 느껴 보지 못했던 인자한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게 되어 그만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다.

어머니......어머니, 당신은 저의 어머니로군요!

이 일은 너무나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흐느끼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한 사람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고 한 사람은 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섭이랑은 말했다.

얘야, 너는 금년 스물네 살이다. 이 이십사 년간 나는 낮에도 너를 생각했고 어두운 밤에도 너를 생각했다. 나는 남에게 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울화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내 아들은 천벌을 받을 도적에게 도적질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나는 남의 아들을 훔치게 되었다. 하지만...... 하지만......남의 아들이 어찌 자기가 친히 낳은 아들만 하겠느냐?

남해악신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세쌔 누이. 그대는 언제나 남의 토실토실한 아기들을 훔쳐와 가지고 놀다가 실컷 가지고 논 뒤에는 죽여 버리곤 하더니, 원래 자기 아들을 남에게 도적질 당했었군! 악노이가 무슨 까닭이냐고 물어도 언제나 그대는 대답을 하지 않더니, 좋아. 정말 묘하군! 허죽이란 녀석아, 너의 어머니는 나의 누이이다. 빨리 나를 악 둘째 백부님이라 불러라.

남해악신은 자기가 배분과 무공이 기이하도록 높은 영취궁의 주인보다 위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몹시 흐뭇해져서 어쩔 줄 몰라했다.

운중학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잘못 되었소. 잘못 되었소. 허죽자는 그대 사부의 의형이니 그대는 그를 사백부님이라고 불러야 해. 나는 그의 어머님의 의동생이니까 배분에 있어서 그대보다는 이대나 더 높은 셈이지. 그러니까 그대는 빨리 나를 사숙부라고 불러요.

남해악신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짙은 가래를 내뱉으며 욕을 했다.

빌어먹을, 나는 부르지 않겠다!

섭이랑은 허죽의 뒷덜미를 놓고 그의 어깻죽지를 잡더니 이쪽 저쪽을 살펴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현적에게 말했다.

그는 나의 아들이니 그대가 그를 때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어요.

곡이어 허죽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어느 천벌을 받을 개도적이 나의 아들을 훔쳐가 우리 모자로 하여금 이십 사년이나 헤어져 살도록 만들었느냐? 얘야, 얘야! 우리 세상 끝까지 가더라도 그 개도적을 잡아서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박살을 내자꾸나. 너의 에미가 그를 이기지 못할 때는 너의 무공이 고강하니 이 에미의 원수를 갚아 주면 된다.

그 동안 나무 아래 앉아 줄곧 입을 열지 않고 움직이지 않던 흑의 승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의 아들은 훔쳐 간 것이 아니고 빼앗아 간 것이오. 그대의 얼굴에 여섯 가락의 흉터는 어떻게 생긴 것이지?

섭이랑은 안색이 변하며 날카로운 어조로 부르짖었다.

아! 그대였군! 바로 그대였군!

그녀는 몸을 날려 그에게 달려가 일 장쯤 되는 곳에서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손을 뻗쳐 손가락질을 하며 이를 갈았다. 분노가 극에 달했으나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는 듯했다.

흑의 승려는 말했다.

맞았소. 그대의 아들을 빼앗아 간 사람은 바로 나이고 그대의 얼굴에 여섯 가락의 흉터를 낸 사람도 나외다.

섭이랑은 부르짖었다.

어째서? 그대는 어째서 나의 아들을 빼앗아 갔나요? 그대와 나는 서로 모르는 사이이고 아무런 원한도 없었는데 그대는...... 그대는...... 그대는 나를 이십 사 년 동안 밤낮으로 고통에 시달리게 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이에요? 무엇...... 무엇 때문에?

흑의 승려는 허죽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이 애의 부친이 누구지?

섭이랑은 전신을 흠칫하더니 말했다.

그는...... 그는...... 나는 말할 수 없어요.

허죽은 속으로 큭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고 섭이랑의 곁으로 다가가 부르짖었다.

어머니, 저에게 말하세요. 아버님은 누구시죠?

섭이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말할 수 없다.

흑의 승려는 천천히 말했다.

섭이랑, 본래 그대는 얌전한 소저였으며 부드럽고 단정하고 현숙했다. 그러나 그대가 십팔 세 되던 그 해 무공이 고강하고 크게 신분이 있는 어느 남자에게 유혹을 받아 몸을 빼앗기고 이 애를 낳았다. 그렇지 않은가?

섭이랑은 한참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그래요. 하지만 그가 나를 유혹한 것이 아니고 내가 그를 유혹한 것이에요.

흑의 승려는 말했다.

그 남자는 자기의 명성과 앞날만을 생각하고, 나이 어린 소저로서 시집도 가지 못한 몸으로 아이를 낳는 처지가 얼마나 참담하고 딱한지를 돌보지 않았지.

섭이랑은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는 나를 돌봐 주었어요. 그는 나에게 많은 은자를 주었으며 내가 반평생을 잘 지내도록 보살펴 주었어요.

흑의 승려는 물었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그대로 하여금 외롭게 강호를 떠돌아 다니도록 만들었지?

섭이랑은 말했다.

나는 그에게 시집갈 수 없었어요.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는 언제나 나에게 잘 대해 주었어요. 내가 그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그는......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는 그녀를 저버린 정인에 대한 따뜻한 정과 그리운 정이 아직도 충만해 있었다. 옛날의 정 때문에 자기가 심한 고초를 겪었고, 또 오랜 세월이 흘러갔으나 그 사랑은 조금도 감퇴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섭이랑은 악명이 자자한 여자이다. 그러나 옛날 정인에 대해서는 정말 정이 깊고 의리가 깊구나. 그런데 그 남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단예, 원성죽, 범화, 화혁간, 파천석 등 대리에서 온 사람들은 두 사람의 옛날 일을 듣고 그만 자신들도 몰래 단정순을 곁눈질해 보았다.

모두가 섭이랑이 말하는 그 정인의 신분이나 성격, 일을 처리하는 태도, 나이가 모두 단정순과 흡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 날 사대 악인이 대리로 찾아왔던 것은 십중팔구 진남왕에게 옛날 그 빚을 찾기 위해서였나 보구나."

단정순마저도 크게 의심했다.

"내가 아는 여자들은 적지 않다. 설마하니 그녀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데 어째서 전혀 생각이 나지 않을까? 만약 정말 내가 그녀에게 누를 끼쳐 오늘날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면 설사 오늘 천하 영웅들 앞에서 나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단모는 결코 그녀에게 섭섭하게 대하지 않겠다.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 전혀 나는 기억할 수 없을까?"

흑의 승려는 낭랑히 외쳤다.

이 애의 아버지는 지금 바로 이곳에 있는데 그대는 어째서 그를 지적하지 않지?

섭이랑은 놀라 부르짖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는 말할 수 없어요!

흑의 승려는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애의 등과 볼기짝에 모두 스물 일곱 군데나 계점이라는 흉터를 냈지?

섭이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나는 몰라요! 나는 몰라요! 제발 부탁이니 더 묻지 말아요!

흑의승이 말했다.

그대는 애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순간 그로 하여금 화상이 되도록 할 작정이었나?

섭이랑은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흑의 승려는 냉랭히 말했다.

그대는 말하려고 하지 않지만 나는 알고 있지. 왜냐하면 이 애의 부친은 불문의 제자이며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득도한 고승이기 때문이지.

섭이랑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더 견디지 못하고 그만 땅 위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군웅들은 대뜸 소란스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섭이랑의 그와 같은 태도를 보고 흑의 승려가 말하는 것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그녀와 사통을 한 사람은 놀랍게도 화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명한 고승이었다.

뭇 사람들은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허죽은 섭이랑을 부축해 일으키며 부르짖었다.

어머니, 어머니, 정신을 차리세요!

잠시 후 섭이랑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나직이 말했다.

얘야, 빨리 나를 부축해서 산을 내려가자. 저...... 저 사람은 요괴다. 그는...... 뭐든지 알고 있다. 나는 그를 더 만나고 싶지 않다. 이 원한도...... 더 갚을 필요가 없다.

허죽은 말했다.

예, 그래요. 어머니, 우리 이대로 떠나도록 해요.

흑의승은 말했다.

잠깐, 내 아직 할 말이 끝나지 않았소. 그대는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으나 나는 원수를 갚아야겠소. 섭이랑, 내가 어째서 그대의 아들을 빼앗았는지 그대는 알고 있소?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 누가 나의 아들을 빼앗아 가 나의 집안이 망하도록 하고 부부는 물론 부자가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오. 나는 바로 이 원한을 갚기 위해 그런 짓을 한 것이오.

섭이랑은 물었다.

그대의 아이를 빼앗아 간 사람이 있었나요. 그대는 원한을 갚기 위해서 그런 짓을 했다구요?

흑의 승려는 말했다.

그렇소. 내가 그대의 아들을 빼앗아 소림사의 채원에 갖다 놓아 소림 승려들로 하여금 그를 키우고 일신의 무예를 가르치도록 했소. 그것은 내 친아들 역시 누군가가 잡아가 키웠으며 소림 승려가 그에게 무공을 전수했기 때문이지. 그대는 나의 참모습을 보고 싶지 않소?

그는 섭이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얼굴을 가린 베조각을 걷어냈다.

군웅들은 아, 하는 놀라는 소리를 질렀다. 그는 네모진 얼굴에 큰 귀를 가졌으며 구레나룻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매우 위풍당당했다. 나이는 약 육십 세 정도였다.

소봉은 놀람과 기쁨에 얽혀 앞으로 달려나가 땅바닥에 엎드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저의 아버님이셨군요......

그 사람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장하다 내 아들아! 내가 바로 너의 애비다. 우리 부자 두 사람의 모습과 풍채는 서로 닮았다. 그 누구도 내가 너의 애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손을 뻗더니 가슴팍의 옷자락을 들추며 문신을 한 이리의 머리를 드러냈다. 그리고 왼손으로 소봉을 잡아일으켰다.

소봉 역시 자기의 앞섭자락을 풀어헤치고 그 이빨을 드러낸 푸르죽죽한 이리의 머리를 드러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별안간 동시에 하늘을 우러러 길게 휘파람을 내불었다. 그 소리는 멀리까지 울려퍼졌으며 산골짜기에 메아리쳐 그 소리가 되돌아 왔는데 수천 명이나 되는 호걸들은 그 소리에 모두 다 가슴속이 서늘해 지는 것을 느꼈다.

연운십팔기는 기다란 칼을 뽑아들고 서로 호응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모두 이십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기세의 웅장함은 그야말로 천군만마가 질타하는 것 같았다.

소봉은 품속에서 기름을 먹인 베보따리를 꺼내 펼쳤다. 그리고는 여러 군데 기워서 만든 커다란 베조각을 드러내 펼쳤다.

바로 지광 노화상이 그에게 준 석벽에 남긴 글을 탁본한 글이었다. 그 위에는 거란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구레나룻의 노인은 최후의 몇 자를 가리키더니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소원산 절필, 소원산 절필이라! 하하하, 얘야, 그 날 나는 슬픈 나머지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자결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명이 다하지 않아서 골짜기 밑에 있는 한 그루 커다란 나뭇가지에 걸려 죽지를 못했구나. 이렇게 되자 이 애비는 죽을 마음이 사라지게 되었고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날 안문관 밖에서 중원 호걸들은 불문곡직하고 무공을 모르는 너의 어머니를 죽였다. 얘야, 이 원한을 갚아야 하겠느냐, 갚지 말아야 하겠느냐?

소봉은 말했다.

부모의 원한은 불구대천이라 했습니다.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원산은 말했다.

그 날 너의 어머니를 해친 사람들 중 태반은 이미 나에게 격살되었다. 지광화상과 조전손이란 녀석은 이미 죽었다. 그리고 개방의 전임 방주 왕검통으로 말하면 병으로 작고했는데 그야말로 그에게는 덕을 베푼 셈이지. 다만 그 통솔자라고 하는 대악인만은 아직도 건재하다. 얘야, 너는 우리가 그를 잡아서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소봉은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소원산은 길게 휘파람을 내불더니 호통쳐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냐?

그는 두 눈을 횃불처럼 뜨고는 군웅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 보았다.

군웅들은 그의 시선과 마주칠 때마다 모두 전전긍긍했다. 이 사람들은 과거 안문관 밖의 일과는 전혀 무관했다. 그러나 소씨 부자의 표정을 보고는 그 누구도 감히 똑바로 마주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혹시나 화를 불러일으키게 될까봐 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소원산은 말했다.

얘야, 그날 나는 너를 데리고 너의 어머니와 함께 너의 외갓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안문관 밖을 지나게 되었을 때 수십 명이나 되는 중원 무사들이 갑자기 달려나와 너의 어머니와 나의 시종들을 죽였다. 대송나라와 거란은 원한이 있으니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은 별것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 중원의 무사들은 먼저 산 위에 매복을 하고 있었던 걸로 미루어 보아 미리 음모를 꾸민 것이 분명했다. 얘야, 너는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와 같은 음모를 꾸몄는지 아느냐?

소봉은 말했다.

저는 지광대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그들은 거란 무사가 소림사로 달려와 무학전적(武學典籍)을 강탈하려 한다는 소문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훗날 요나라가 대송나라의 강산을 집어삼키려고 그런 것이라 듣고 갑자기 습격을 가해 어머니를 죽였다고 하더군요.

소원산은 참담한 미소를 흘렸다.

과거 너의 애비는 소림사의 무학전적을 강탈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누명을 씌웠다. 좋아, 좋아. 소원산은 내친 김이라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에게 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이상 나는 그들에게 그대로 해보여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리하여 삼십여 년 간 이 소원산은 소림사에 숨어서 그들의 무학전적을 실컷 보았다. 소림사의 뭇 고승들! 그대들에게 재간이 있다면 이 소원산을 죽이시오. 그렇지 않으면 소림의 무공은 반드시 요 나라로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오. 그대들이 재차 안문관 밖에서 매복을 한다 하더라도 이미 때는 늦고 말 것이외다.

소림의 뭇 승려들은 그 말을 듣고 그만 아연해져서 안색마저 변했다. 그 사람의 말이 십중팔구 틀리지 않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소림파의 무공이 만약 요나라로 흘러나간다면 거란 사람들로 하여금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꼴이니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되었다. 무림의 군웅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어떻게 하더라도 저 사람이 살아서 산을 내려가도록 만들어서는 안되겠구나."

소봉은 말했다.

아버지, 그 대악인이 과거 저의 어머니를 죽였으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솔하기는 했지만 일부러 그런 나쁜 짓을 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의 의부와 의모인 교씨 부부를 죽이고 이 아들로 하여금 크게 누명을 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버님께서는 지적해 주십시요.

소원산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얘야, 그것은 네가 잘못 알고 있다.

소봉은 아연해졌다.

제가 잘못 알다니요?

소원산은 고개를 끄덕었다.

잘못 알고 있다. 교씨 부부는 내가 죽인 것이다.

소봉은 깜짝 놀라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버님이 죽였다구요? 그것은......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너는 나의 친아들이다. 본래 우리 부자와 부부가 한 가족으로 단란하게 살게 되었더라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였겠느냐? 그러나 송나라 무사들은 우리 거란 사람들을 개돼지만큼도 여기지 않았으며 걸핏하면 때려 죽이곤 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을 빼앗아 가서는 남에게 주어서 그들의 아들인 것처럼 만들었다. 교씨 부부는 너의 부모로 사칭하고 내가 즐겨야 할 가정의 행복을 빼앗아 갔으면서도 너에게 그 진상을 말하지 않았으니 죽어 마땅하다.

소봉은 가슴이 쓰라린 것을 느끼고 말했다.

저의 의부모님은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두 분 어르신으로 말하면 실로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가장을 불태우고 담공과 담파등을 죽인 사람도 역시......

소원산은 말했다.

그렇다. 모두 너의 아버지가 한 짓이다. 과거 통솔자가 되어 안문관 밖에서 너의 어머니를 죽이도록 지휘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들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감싸고 돌았으니 죽어 마땅하지 않느냐?

소봉은 그만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애써 찾던 대악인이 알고 보니 나의 아버지였구나. 이것......이것을 어떻게 해야만 좋지?"

소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림사의 현고 대사로 말하면 저에게 친히 무공을 전수했으며 십 년 동안 날씨가 차가우나 뜨거우나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오늘이 있기까지는 완전히 은사이신 현고 대사의 덕분으로.....

거기까지 말한 그는 그만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글썽였다.

소원산은 말했다.

이 송나라 무사들은 음흉하고 간사하다. 그들 가운데 무슨 좋은 사람이 있겠느냐? 현고는 내가 일 장으로 쳐 죽였다.

소림사의 뭇 승려들은 일제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일시에 감히 그 누가 나서서 소원산에게 도전을 하지는 않았지만 뭇 승려들이 그와 같이 불호를 외치는 소리에는 침통한 빛이 서려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지극히 커다란 결심을 하고 있으며 결코 흑의승을 곱게 돌려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군웅들은 각기 생각에 잠겼다.

"지난 날에는 확실히 소봉을 흉수로 잘못 보았구나. 그러나 부자는 한 몸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그의 애비가 한 짓을 아들에게 탓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원산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의 처를 죽이고 나의 외동 아들을 빼앗은 원수들 가운데 개방의 방주도 있었고 소림파의 고수들도 있었다. 흐흐흐, 그들은 영원히 이 피비린대 나는 사건을 덮어두고 내 아들을 한나라 사람으로 만들어 내 아들로 하여금 원수를 사부로 삼고 개방의 방주가 되도록 했다. 흐흐흐, 얘야, 그날 밤 나는 현고에게 일 장을 가한 이후 한옆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얼마 후 네가 다시 그 화상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 현고는 우리 부자의 용모가 비슷한 것을 보고는 네가 손을 쓴 줄로 알더구나. 그리고 그 소사미만 하더라도 우리 부자의 모습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다. 얘야, 우리 거란 사람들이 그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고 업신여김을 당한 일이 어디 적은 줄 아느냐?

소봉은 그제서야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어째서 현고 대사가 그 날 자기를 대하게 되었을 때 그토록 의아해하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소사미가 어째서 자기가 바로 손을 써서 현고를 쳐 죽인 사람임을 증명하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봉은 말했다.

그 사람들을 아버님이 죽였으면 제가 죽인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줄곧 그 누명을 쓰고 있었지만 결코 헛된 누명은 아니군요. 그런데 중원 무사들을 이끌고 안문관 밖에서 매복을 한 통솔자를 아버님은 알아내셨습니까?

소원산은 말했다.

흐흐흐! 내 어찌 알아내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그 사람은 우리 집안을 망하게 만들었다. 내가 만약 일 장으로 그를 쳐죽인다면 너무나 그에게 덕을 베푸는 것이 아니겠느냐? 섭이랑, 잠깐!

그는 섭이랑이 허죽의 부축을 받으며 한 걸음 두 걸음 걸음을 옮겨 놓는 것을 보고 즉시 호통을 쳐 멈춰 세우더니 말을 이었다.

그대와 더불어 그 애를 낳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대가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말하겠소. 내가 소림사에 몸을 숨긴 지 삼십 년, 그 무슨 일이든 어찌 나의 눈을 속일 수 있었겠소? 그대들은 자운동(紫雲洞)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고 그는 교 파파에게 그대가 아이를 낳는 것을 받도록 했소. 여러 가지 일들을 내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털어놓아야 하겠소?

섭이랑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소원산에게 몇 걸음 다가서더니 땅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소 노영웅, 그대는 인정도 많고 의리도 깊은 분이시니 제발 그를 용서해 주세요. 저의 자식놈과 그대의 공자는 의형제지간이 아닙니까? 그는......그는......무림에서 그토록 명성이 자자하고 또 그토록 높은 지위에 있으며......나이도 또 그토록 많아졌습니다. 그대는 나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되 아무쪼록......그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군웅들은 먼저 허죽의 부친이 바로 득도한 고승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섭이랑은 그가 무림에서 명성이 대단하고 지위가 무척 높다고 했다.

몇 가지 여건을 맞추어 볼 때 그 사람은 혹시 소림사에서 배분이 지극이 높은 승려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소림사의 몇 명 안되는 백발이 성성한 노승들에게로 쏠려지게 되었다.

갑자기 현자 방장이 입을 열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씨를 심으면 열매를 맺게 되는 법이로다. 허죽아, 너 이리 다가오너라.

허죽은 방장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현자는 그를 한참 동안 살피더니 손을 뻗쳐 천천히 그의 옆구리를 어루만졌는데 그 얼굴은 인자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가득했다.

네가 절 안에서 이십사 년 동안 머물렀으나 나는 시종 네가 바로 내 아들인 줄은 몰랐구나.

이 말이 떨어지자 뭇 승려들과 뭇 호걸들은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각자의 얼굴에는 의아함, 경악, 멸시, 분노, 공포, 연민 등 갖가지의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현자 방장으로 말하면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고 무림에서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누가 바로 그와 같은 일을 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한참 후에야 시끌벅적하던 소리가 멈춰졌다.

현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는데 그 음성은 여전히 차분하며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소 노시주, 그대와 자제분은 삼십여 년 간 헤어져 있었으며 서로 만나지 못했으나 이미 그의 무공이 증진되고 명성을 크게 떨쳐 강호에서 으뜸 가는 영웅 호걸이 된 것을 들었을 터이니 마음속으로도 반드시 위안을 받았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매일같이 아들을 만나 보면서도 그 아들을 어떤 자에게 빼앗겨서 생사를 모른 터라 오히려 밤낮으로 근심 걱정을 했다오.

섭이랑은 울부짖었다.

그대는......그대는 말할 것 없어요. 이를......이를 어쩌면 좋아......이를 어쩌면 좋지?

현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미 악의 씨를 뿌린 이상 후회해도 소용없고 속이려 해도 소용없는 일이외다. 이 몇 년 동안 그대는 정말 괴로웠을 것이오.

섭이랑은 울부짖었다.

나는 괴롭지 않아요! 괴로워도 말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괴로운 거예요!

현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원산에게 말했다.

소 노시주, 안문관 밖에서 노납은 큰 잘못을 저질렀소. 또 뭇 형제들은 노납을 위해 그 일을 감싸고 돌다가 하나 하나 목숨을 잃었소. 노납이 오늘에야 죽는다는 것은 실로 이미 때늦은 감이 있소.

그는 갑자기 언성을 높여서 말했다.

모용박(慕容博)모용 노시주, 그 날 그대는 거짓으로 전갈을 하여 거란의 무사가 대거 소림사로 쳐들어와 무학서적을 탈취한다고 했소. 그리하여 그와 같은 크게 잘못된 일을 저지르도록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고서도 그대는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단 말이오?

뭇 사람들은 갑자기 그가 모용박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들먹이자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군웅들은 대부분 모용 공자의 부친이 이름이 외자로서 박(博)임을 알고 있었고 그 사람은 이미 세상을 등졌는데 현자는 어째서 갑자기 그 이름을 부른 것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설마하니 거짓으로 전갈을 보낸 사람이 바로 모용박이라는 사람이었던가? 따라서 뭇 사람들은 그의 눈길을 따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현자의 시선은 바로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잿빛 옷을 입은 승려, 즉 회의승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회의승은 길게 웃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하, 방장 대사, 눈초리가 매우 무섭구려. 놀랍게도 나를 알아보았구려.

그는 얼굴을 가린 베조각을 벗고서 준수하고 혀연 눈썹이 길게 드리워진 얼굴을 드러냈다.

모용복은 놀람과 기쁨에 휩싸여 부르짖었다.

아버님, 아버님은......아직......돌아가시지 않았던가요?

그는 마음속으로 무수한 의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날 부친이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자기는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그의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한 후에야 친히 관 안에 넣어 안장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을까? 그렇다면 그는 신공으로 숨을 죽여 거짓으로 죽은 척했을 것이다. 그가 어째서 거짓으로 죽은 척했을까? 어째서 친아들에게까지도 속이게 되었을까?

현자는 말했다.

모용 노시주, 나는 그대와 오랫동안 사귀었고 또 평소 그대의 위인됨을 우러러 보았소이다. 그 날 그대가 나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이야기 했을 때 노납은 자연 믿어 의심치 않았소. 그 후 좋은 사람을 잘못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노납은 다시 그대를 볼 수가 없었소. 그 후에 그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노납은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소. 그 당시 그대도 노납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잘못 믿어 우연히 저지른 과실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다가 그만 일찍이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했소. 그런데......아!

길게 터뜨리는 장탄식에는 무궁한 회한과 가책이 서려 있었다.

소원산과 소봉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 이때서야 그들 부자도 이 가짜 소식을 전하고 화를 일으키도록 이간질을 한 사람이 바로 모용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봉의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과거 안문관 밖의 참혹한 사건은 현자 방장이 영도해서 이끌었다고 하지만 그는 소림사의 방장이니 자연 대송나라의 강산과 소림사의 무학경전에 대한 관심이 높으니만큼 온 힘을 다 기울였을 것이고 앞장서서 그 일을 해내려고 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 후 잘못을 알고 애써 보상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진정한 흉수는 바로 모용박이지 현자가 아니다."

모용복은 현자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 즉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아버지가 거짓 전갈을 한 것은 송나라와 요나라 무사들이 서로 싸움을 크게 일으키게 만든 이후 우리 대연나라가 어부지리를 얻고자 한 것이었구나. 사후 현자가 아버지에게 질문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는 대답할 말이 없기 때문에 그의 대영웅이며 대호걸인 신분으로서 또 그 잘못을 시인하여 일세의 영명을 망가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리하여 그는 현자 방장의 성격을 짐작하고 자기가 죽으면 현자가 이미 죽은 자의 명예를 훼손하지는 않으리라 판단을 하셨구나."

모용복은 다시 깊이 생각했다.

"그렇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된다면 모용씨 집안의 명성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게 되고 나는 여전히 계속해서 대업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중원의 영웅 호걸들은 모두 다 모용씨 집안 사람과 적이 될 것이고 스스로 무림에 한 발을 딛기도 난처한데 어는 겨를에 무리들을 규합하여 나라를 되찾을 수 있겠는가? 그때 내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만약 아버님이 거짓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각을 드러내게 될까봐 아예 나에게도 속인 것이로구나."

이때 현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용 노시주, 노납은 오늘 그대가 자제분에게 전하는 말을 듣고서야 고소모용씨는 바로 제왕의 후예로서 구하는 일이 크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렇다면 그대가 거짓된 소문을 알려준 의도도 명백하게 되었소이다. 그러나 그대가 도모하는 큰일은 끝내 이루기 어려우며 그저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헛되이 쳐죽일 뿐이외다.

모용박는 말했다.

노력하여 꾀하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고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소이다.

현자는 얼굴에 연민의 빛을 띄우고 말했다.

우리 현비 사제가 나의 명을 받들어 고소로 가 그대에게 일을 따지게 되었을 때 아마도 그대의 비밀을 말해서 그대의 비위를 건드린 것 같구려. 그리고 그가 댁에서 그대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의도를 약간이라도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대는 그를 죽여 입을 봉한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 어째서 그대는 그 동안 잠자코 있다가 그가 대리로 갔을 때에서야 손을 썼단 말이오? 음,음, 그대는 대리 단씨와 소림파의 분쟁을 일으키려고 했구려. 그러고 보니 그대가 우리 현비 사제에게 암습을 가하게 되었을 때 사용한 것은 단씨 집안의 일양지였겠구려. 다만 그대는 일양지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를 어찌할 수 없자 끝내는 모용씨의 그대의 수법을 그대의 몸에 펼친다는 가전수법을 펼쳐 우리 현비 사제를 해쳐 죽인 모양이구려.

묘용박은 껄껄 웃으며 몸을 약간 기울이더니 주먹을 들어 옆에 있는 커다란나무를 후려쳤다. 와지끈 뚝, 하는 소리가 들렸고 두 개의 굵은 나뭇가지가 땅위로 떨어졌다.

그가 친 것은 나무통인데 그의 주먹질이 가해진 곳과 일 장이 넘는 곳에 있는 나뭇가지가 떨어진 것을 보면 실로 비범하기 이를데 없는 신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림사의 십여 명 노승들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위타저다!

그 소리는 놀람과 경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우리 절에 있는 몇 년 동안 소림 칠십이 절기 가운데 위타저의 신공도 연습을 했구려. 그러나 하남 복우파의 그 천령천역(千靈千裂)이라는 일 초는 그대의 신분과 무공으로 볼 때 시간을 내어서까지 연마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려. 그대가 가백세 가 시주를 죽이게 되었을 때 펼친 것은 가전의 무공일 듯 한데......

모용박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 방장께서는 총명하기 그지 없구려. 산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호의 모든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아는구려. 정말 탄복했소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대가 한 번 알아맞추어 보시기 바라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이 일제히 노호를 내지르며 그에게 급히 덮쳐갔다.

바로 금산반 최백천과 그의 사질인 과언지였다.

모용박은 소맷자락을 한 번 떨쳤다. 최백천과 과언지는 수 장 밖으로 나가떨어져 땅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바로 이 눈깜짝 할 사이에 그들은 나뉘어 그의 수중지(袖中指)에 혈도를 찔리고 말았던 것이다.

현자는 말했다.

그 가 시주로 말하면 재산이 만관에 달한다고 들었소이다. 그리고 일을 행함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럽다고 하더구려. 음, 그러니까 그대는 군사를 모집하고 말을 사들이는 한편으로 재물을 쌓아 양식을 저축하려니까 자연 가 시주의 재산에 눈독을 들였겠구려. 그리하여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이용하고자 했으나 가 시주가 응낙하지 않았고 어쩌면 관가에 고발한다고 했을지도 모르겠구려.

모용박은 소리내어 껄껄 웃더니 엄지손가락을 내세우며 말했다.

노 방주께서는 대단하십니다. 대단하셔.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대는 그야말로 털끝 하나 틀리지 않고 살펴보는 예리한 눈을 가졌으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불초와 이 소씨 형제는 귀사에서 이 몇 십 년간 숨어 지냈는데도 그대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소이다.

현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을 알기는 쉬워도 자기 자신을 알기는 무척 어렵다고 하지 않았소? 즉 적을 제압하는 것은 어럽지 않으나 자기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탐(貪),진(瞋), 치(癡)의 삼독(三毒)이라는 대적을 극복하는 것은 비할 데 없이 어렵다오.

모용박은 말했다.

노 방장, 그대와 내가 오랫동안 사귄 옛친구라는 정분을 생각해서 나는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했소. 그대는 또 무슨 물어 볼 말이 있소?

현자는 대답했다.

소봉이라는 소 시주의 위인됨으로 보아 개방의 마 대원 부방주, 마부인, 백세경 장로 세 분은 생각컨대 그가 살해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모용 노시주가 손을 쓴 것이 아니면 소 노시주가 손을 썼겠구려?

소원산는 말했다.

마대원은 그의 처와 백세경이 공모를 해서 해쳐 죽였소. 그러나 백세경은 내가 죽였소. 그간의 사정은 대리의 단 왕야가 친히 목격하고 들은 바 있소이다. 방장께서 상세한 사정을 알고자 한다면 나중에 단 왕야에게 들어 보도록 하시구려.

소봉은 두 걸음 다가서며 모용박을 손가락질하며 호통을 내질렀다.

모용 노적, 그대야말로 원흉이요! 앞으로 나와서 죽음을 받도록 하시오!

모용박은 길게 소리내어 웃더니 몸을 날려 질풍과 같이 산 위로 달려 올라갔다 소원산과 소봉은 일제히 호통을 내질렀다.

서랏!

잡으셔야 합니다.

두 사람은 번개처럼 산 위로 달려 올라갔다. 모용박과 소원산, 소봉 등 세 사람은 그야말로 절정의 경지에 이른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이미 멀찌감치 사라졌다.

모용복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아버님! 아버님!

그역시 뒤를 ㅉ아 산 위로 올라갔다. 그의 경신법 역시 뛰어났으나 앞선 세 사람과 비교한다면 훨씬 뒤처졌다.

모용박, 소원산, 소봉,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앞서고 두 사람은 뒤에 선 채 쫓고 쫓기고 있었다. 세 사람은 곧장 소림사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한 잿빛 그림자와 두 검은 그림자가 삽시간에 소림사의 누런 담장과 파란 누각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군웅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모용박과 소원산의 무공은 누가 낫고 못 하다고 분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거기에 두 사람의 아들들을 보태게 된다면 모용씨는 결코 소씨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모용박은 산 아래로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소림사로 달려 들어간 것일까?"

등백천, 공야건, 포부동, 풍파악, 그리고 십 팔 명의 거란 무사들은 일제히 산 위로 올라가 다투어 자기네 주인들을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막 발걸음을 옮겨 놓았을 때 현적이 호통을 내질렀다.

진을 펼쳐 막아라!

백여 명의 소림 승려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줄줄이 늘어서서 앞길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는 선장을 비껴들거나 계도를 치켜들었다.

현적은 날카롭게 외쳤다.

우리 소림사는 불문의 성지이외다! 결코 사사로운 정으로 서로 싸우는 장소가 아니니 여러 시주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오!

등백천 등은 소림의 이와 같은 기세를 보고 도저히 뚫고 소림사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주인이 걱정되었으나 역시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포부동은 말했다.

맞소이다. 맞소이다. 소림사는 바로 불문의 성지로소이다.

그는 언제나 대뜸 한다는 소리가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였는데 이번에는 맞소이다 맞소이다라고 하니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의아한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 그런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 것이었다.

......바로 전문적으로 사생아를 키우는 성지이외다.

그 말이 떨어지자 수백 가닥의 분노에 찬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쏟아졌다. 포부동은 그야말로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소림의 승려들 가운데 무공이 지극히 높은 승려들이 많으며 어느 현 자 항렬의 고승이 나선다 하더라도 자기는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하는데 있어서는 평소부터 거리낌없는 성격이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소림의 승려들이 노기띤 눈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자 그 역시 노기를 띤 눈으로 마주 쳐다보며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현자는 안랑히 외쳤다.

노납은 불문의 대계를 어겨서 소림의 명예를 더렵혔소. 현적 사제, 본사의 계율에 의하면 어떤 벌을 받아야 마땅하오?

현적은 말했다.

그건......사형......

현자는 말했다.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집안에는 가훈이라는 것이 있소. 그리고 자고로 어떤 문파나 방회는 말할 것도 없고 종족이나 사찰에도 못난 제자가 있기 마련이오. 명예를 보존한다는 것은 영원히 규칙이나 계율을 어기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있어서 계율에 따라 벌을 내리며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는 것이외다. 집법승은 허죽에게 일백 삼십 대의 매질을 하라. 일백 대는 잘못을 저지른 데 대한 것이고 삼십 대는 그가 즐거이 무공을 전수해 주신 사부님을 대신하여 받겠다고 한 것이다.

집법승은 현적을 바라보았다. 현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죽은 어느덧 무릎을 꿇었다.

집법승은 즉시 매를 들고는 한 대 한 대 허죽의 등과 엉덩이 쪽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매를 내려치게 되자 살이 터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섭이랑은 마음속으로 아픔을 느꼈으나 평소 현자의 위엄을 두려워하던 그녀인지라 감히 앞으로 나가 사정을 하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걸려 백 삼십 대의 매를 다 맞게 되었는데 허죽은 내력을 돋우어서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현자는 말했다.

지금부터 너는 파문되어 환속했으니 다시는 소림사의 승려가 아니니라.

허죽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예.

현자는 다시 말했다.

현자가 음계(淫戒)를 범했으니 허죽과 똑같은 죄를 지었다. 방장의 신분이니 죄는 더욱 배가되어야 할 것이오. 집법승은 현자에게 사정없이 이백 대의 매질을 하도록 해라. 소림사의 명예와 관계되는 일이니 결코 사사로운 정을 두거나 요령을 피워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리고는 멀리 소림사 대웅보전의 불상을 향해 꿇어 앉았다. 그리고는 스스로 승포자락을 걷어 올려 등을 드러내었다.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림사의 방장이 뭇 사람들 앞에서 형벌을 받다니 이것이야말로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현적은 말했다.

사형, 그대는......

현자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 소림사는 천 년간 명예를 지켜왔는데 어찌 내 손에 이르러서 그르칠 수 있단 말이오?

현적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예. 집법승, 매질을 하도록 하여라.

두 명의 집법승이 합장하고 허리를 구부렸다.

방장, 죄송합니다.

그리고 매를 들어 현자의 등을 치기 시작했다. 두 승려는 방망이 형벌을 받는 데 있어서 가장 괴로운 것은 뭇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당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고 결코 살가죽의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만약 손에 사정을 두게 되어 남들이 이를 알아차리게 된다면 남의 비웃음거리밖에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장이 이번에 욕을 당하고 또 남의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아무런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에 한 대 한 대의 매질을 가하되 철썩, 철썩, 하고 큰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삽시간에 현자의 등과 엉덩이는 매 맞은 흔적을 드러내게 되었고 피는 승포자락을 낭자하게 물들여 놓았다.

뭇 승려들은 집법승이 하나 둘 하며 매질 하는 수를 헤아리는 소리를 들으며 모두 눈을 내려 감고 묵묵히 염불을 외웠다.

보도사의 도청 대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현적 사형, 귀사에서는 불문의 계율을 존중하여 방장까지도 형벌을 받는 데 대해서 빈승은 매우 감탄하는 바외다. 그러나 현자 사형은 연세가 놓은 분이시고 거기다가 운기행공을 해서 몸을 보호하지도 않으시니 이백 대의 매질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오. 빈승이 당돌하게 사정을 하겠소이다. 이제 이미 팔십대를 때렸으니 나머지 수는 잠시 덮어 두었다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시구려.

군웅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었다.

바로 그렇소이다! 바로 그렇소이다. 우리도 사정 좀 합시다.

현적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현자는 낭랑히 외쳤다.

여러분의 뜻은 고맙게 생각하오. 그러나 계율은 태산처럼 무거우며 조금도 너그러워서는 아니 되오. 집법승, 빨리 매질을 하여라.

두 명의 집법승은 매질하던 것을 멈추고 있었다. 그런데 방장의 어조가 매우 굳건한 것을 보고 다시 하나 둘 셋 헤아리며 후려치기 시작했다.

거의 사십여 대의 매질을 더 가하게 되었을 때 현자는 그만 이기지 못하고 몸을 지탱하던 두 손에 맥이 풀리게 되어 얼굴이 흙바닥에 닿게 되었다. 섭이랑은 울부짖었다.

이 일은 방장을 탓할 수만은 없어요! 모두가 내 잘못이에요! 내가 남의 속임수에 넘어가 일부러 방장을 유혹했던 것이에요! 이......이......나머지의 매질은 나에게 가하도록 하세요!

한편으로 울부짖으며 한편으로는 달려가 현자의 등 위에 엎드려 대신 매를 맞으려 했다.

현자는 왼손의 일지를 찍었다. 찍,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어느덧 그녀의 혈도를 봉쇄해 버리고 말았다.

현자는 미소했다.

순진한 사람. 그대는 불문의 여승이 아니니 애욕을 깨뜨리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섭이랑은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주루룩 흘릴 뿐이었다.

현자는 호통을 내질렀다.

매질을 해라!

간신히 이백 대를 모조리 때리게 되었다. 선혈이 온 땅바닥에 흐르게 되었고 매를 다 맞은 후에야 현자는 진기를 돋우어 심장을 보호했다. 그 자신이 기절할까봐 손을 쓴 것이었다.

두 명의 집법승은 형벌을 다하게 되자 매를 들고 현적에게 말했다.

수좌에게 알립니다. 현자 방장의 매질은 끝났습니다.

현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자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섭이랑에게 허공을 격하고 일지를 찔러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나머지 진기가 제대로 모아지지 않아 그 일지는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허죽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재빨리 어머니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현자는 두 사람에게 손짓을 했다. 섭이랑과 허죽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허죽은 마음속으로 망설이며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방장이라고 불러야 할지 작정을 할 수가 없었다.

현자는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으로 섭이랑의 손목을 잡고 왼손으로 허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과거 이십사 년 동안 나는 밤낮으로 그대들 모자 두 사람을 생각했소. 내 자신이 대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히 뭇 승려들 앞에서 참회를 하지 못했소. 오늘 일거에 해탈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두려움을 갖지 않아 마음이 편안해지게 되었소이다.

이어 그는 계어(戒語)를 말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욕심도 있고 애정도 생기기 마련이며 번뇌와 고통이 더 많으나, 해탈을 얻으면 곧 즐거움이니라.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얼굴에 상서롭고도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섭이랑과 허죽은 감히 꼼짝하지 못했다. 또 그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싶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손이 갈수록 차가워졌다. 섭이랑은 깜짝 놀라 손을 그의 코 앞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이미 그의 숨은 멈추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섭이랑은 그만 안색이 변하여 부르짖었다.

그대는......그대는......어찌 나를 버리고 간단 말이오?

돌연 그녀는 펄쩍 일 장 남짓 솟구쳐 오르더니 허공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쿵, 하니 현자의 발 밑에 떨어져 몸을 몇 번 비틀거리다 이윽고 움직이지 않았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어머니, 어머니! 그대는......그대는......어째서......

그리고 손을 뻗쳐 어머니를 부축했다. 그러고 보니 이미 한 자루의 비수가 그녀의 심장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칼자루만 남아 있는 정도라 이미 회생할 수 없었다. 허죽은 급히 그녀의 상처 둘레에 혈도를 짚었다.

그는 진기를 현자 방장의 체내로 옮기는 등 손발을 어지럽게 움직여 두 사람을 살리고자 했다.

설모화가 앞으로 달려가 도와 주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심장이 이미 멎었고 숨결도 멎은 것을 보고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 말했다.

사숙, 슬퍼하지 마십시오. 두 분 어르신네께서는 이제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소이다.

그래도 허죽은 단념하지 않았다. 한동안 북명진기를 끌어올려 부모의 체내에 주입시키려고 했으나 부모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죽은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만 대성통곡을 했다.

이십사 년 동안 그는 줄곧 자기가 부모 없는 고아라고 생각했으며 한 번도 따뜻한 부모의 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친부모를 만나게 되었는데 한 시진도 되지 않아서 부모는 자결을 하고 만 것이 아닌가?

군웅들은 처음 허죽의 부친이 소림사 방장 현자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하나같이 현자가 계율을 어겼음에 대해서 멸시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가 현자가 태연히 뭇 사람들 앞에서 형벌을 받아 소림의 명예를 지키려고 하는 태도를 보고 감탄했다.

이와 같이 용감한 행위는 결코 여느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그가 이와 같은 무거운 형벌을 받은 것으로 그가 저지른 일시적인 과오에 대한 보상은 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그는 형벌을 받은 후 스스로 경맥을 끊어 버린 것이다. 본래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 나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죽을 결심을 했으니 이백 대의 매를 맞는 치욕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고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벌을 받아 소림사의 명예를 지킨 후 다시 죽음을 택한 것이니 실로 영웅호걸의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웅들은 그의 위인됨을 우러러보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자의 시체 앞으로 나아가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다.

남해악신은 말했다.

둘째 누님, 그대는 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악노삼은 이제 부터 그대와 서열을 다투지 않겠소이다. 그대가 둘째라고 해둡시다.

이 몇 년 동안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섭이랑과 자웅을 겨루려고 했었다. 그는 무공에서 그녀를 이겨 천하 제이 악인(天下第二惡人)의 지위에 오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섭이랑의 죽음을 보고 그녀의 의지와 정절에 탄복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제의를 하게 된 것이다.

오노대! 빨리 가서 노루를 잡아오게! [2142] 제목 : [김용] 천룡팔부(天龍八部) 43장 올린이 : 멀티피씨(김효범 ) 96/09/01 02:47 읽음 : 154 관련자료 없음 ------------------------------------------------------------------------------43 제왕이 되려는 야심도 피맺힌 원한도 모두 한 줌의 흙 속에 묻히다

(王覇雄圖, 血海深恨, 盡歸塵土)

개방의 뭇 제자들은 야심을 품고 소림사로 달려왔다. 이번에야말로 방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공으로 맹주 자리를 차지하고 이로써 소림파를 압도해서는 중원 무림의 영도자가 되겠다는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장 방주는 먼저 정춘추를 사부로 모시게 되었고 나중에는 소봉에게 발길에 채여 두 다리가 부러졌다.

이렇게 되자 모든 제자들은 그만 흥미를 잃고 말았으며 체면도 서지 않게 되었다.

오 장로는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 형제들, 우리들은 여기서 무엇하는 것이오? 설마하니 이 곳에서 식은 밥이나 빌어 먹자는 것이요? 산을 내려 갑시다.

개방의 뭇 제자들은 우렁차게 대답하고 다투어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포부동은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잠깐! 이 포모가 개방에 알려 드릴 말이 있소이다.

진 장로는 그 날 무석에서 그와 풍파악을 상대로 싸운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좋은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오른발로 땅바닥을 차며 날카롭게 외쳤다.

포가야, 할 말이 있으면 말하되 개방귀 같은 소리는 작작 지껄이도록 해라.

포부동은 손을 뻗쳐 코를 잡고 부르짖었다.

냄새가 고약하군, 냄새가 너무 고약해! 이봐, 방귀 뀐 거지 양반, 그대의 방안에는 이름이 역대표라는 거지가 있소?

진 장로는 그가 역대표에 관해서 말하자 대뜸 주의를 하면서 물었다.

있으면 어떻고 없다면 또 어쩔 것이오?

포부동은 말했다.

나는 방귀 뀐 거지에게 말한 것인데 그대가 대답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스스로 개방귀를 뀐 것을 시인하는 것이오?

진 장로는 자기 방의 큰일을 염려하던 차라 이와 같이 쓸데없는 언쟁에 대해 서는 그저 귀찮을 따름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역대표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는 것이외다. 그는 본방의 제자이외다. 서하로 보냈는데 귀하는 혹시 그의 소식을 안단 말이오?

포부동은 말했다.

나는 그렇잖아도 그대에게 한 가지 서하국의 큰일을 이야기 하려고 했소. 하지만 역대표는 이미 염라대왕 앞으로 불려가게 되었소.

진 장로는 말했다.

그게 사실이오? 실례지만 서하국에 무슨 큰일이 있다는 것이오?

진 장로는 울화가 치밀어서 허연 수염이 저절로 움직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큰일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에 즉시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한 말이 귀하의 비위를 거슬렸군요. 노부가 사과를 드리리다.

포부동은 말했다.

사과할 것까지는 없소. 이후 그대는 개방귀를 작작 뀌고 말을 적게 하면 될 것이 아니겠소?

어서 말씀해 보시구려?

진 장로는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지라 쓸데없는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빙그레 웃으며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포부동은 갑자기 말했다.

냄새 한번 고약하군 냄새 한번 고약해! 그대는 그야말로 너무나 꼴사납구려.

진 장로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말 상대하기가 어렵군. 내가 한 마디 무례한 말을 했더니 그는 이러쿵저러쿵 한없이 잡고 늘어지는구나. 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겠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시종 말 같지도 않은 말만 늘어 놓게 될 것이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포부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그대가 나에게 시비를 걸겠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대의 큰 잘못이외다.

진 장로는 미소했다.

불초는 입을 열지 않았는데 어찌 귀하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하는 것이오?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는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구린 방귀만 뀌어댈 테니 자연 입을 열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겠소?

진 장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포부동은 그가 줄곧 양보만 할 뿐이고 자기가 은연중 우세를 차지하게 되자 말했다.

그대가 입을 열고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는 바로 나에게 감히 시비를 걸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내 그대에게 말하리다. 몇 달 전 나는 우리 공자와 등 큰형님, 공야건 둘째 형님 등과 함께 감숙성으로 오는 길목의 어느 숲속에서 한 떼의 거지들을 만나게 되었소. 그런데 그 거지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어떤 시체들은 몸과 머리가 따로 놓여 있었고 어떤 시체들은 배가 터져서는 창자를 흘려 내고 있었소. 불쌍하더군요. 불쌍해요.! 이 사람들은 모두 다 푸대를 세 개나 네 개, 혹은 다섯 개 또는 여섯 개를 짊어지고 있었소.

진 장로는 말했다.

아마도 모두 개방의 형제이겠죠?

포부동이 말을 이었다.

내가 그 노형들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 되었소. 그러니 그때 그들이 맹파탕(孟婆湯)을 먹었는지 망향대(望鄕臺)에 올랐는지 그리고 어느 십전염왕(十殿閻王)의 전에서 심문을 받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소. 그들이 말을 하고 있지 않으니 나 역시도 그들의 존성이 어떻게 되며 고향이 어디고 어느 방파의 사람이며 어떻게 하다가 죽었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소. 그들이 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내 말이 틀렸소?

진 장로는 개방의 형제들이 다수가 죽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되자 자연 매우 관심을 표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때 잠자코 있을수도 없고 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포 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포부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이 포가는 한평생 아무렇게나 남에게 아부하는 사람을 가장 업수히 여긴다오. 그대는 입으로는 포 형의 말씀이 옳소이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좀도둑이니 후레자식이니 하면서 나를 욕할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복비(復誹)라는 것으로서 즉 뱃속으로 욕을 하는 것이 아니겠소? 이것은 성숙 일파의 몰염치한 작자들의 행위보다 고약하오. 그리고 사내 대장부라면 아니면 아닌 것으로서,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 견해가 있고 자기에게는 자기의 주장이 있는 것이외다. 따라서 자기 의사와 반대되면 위축되지 말고 수천 만의 사람 앞에서라도 해야 할 말은 해야 하며 독특한 자기 의견을 내세울 줄 아는 사람이어야만 영웅 호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외다.

그는 다시 진 장로에게 훈계한 후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분의 노형은 상처를 입었으나 죽지 않았소. 그때 죽지는 않았지만 죽을 시간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있었소. 그는 자기 스스로 역대표라고 했으며 서하국에서 왔다고 했소. 그리고 한 장의 서하국 국왕이 내건 방문(榜文)을 갖고 있었는데 사태가 중대한지라 우리들에게 건네 주며 우리들로 하여금 귀방의 장로에게 건네 주라는 부탁을 하더구려.

송 장로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진 형제는 이 사람의 비위를 거슬렸으니 역시 내가 나서는 것이 비교적 나을 것이다."

그는 즉시 앞으로 나아가 깊이 읍을 하고 말했다.

포 선생께서 의리를 내세워 전갈을 해주신 데 대해 폐방의 사람은 하나같이 그 큰 은덕을 잊지 않을 것이외다.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귀방의 아래 윗 사람 할 것 없이 나의 큰 은덕을 고맙게 생각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외다.

송 장로는 어리둥절해졌다.

포 선생은 어째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오?

포부동은 유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귀방의 방주는 고맙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마음속으로 오히려 나를 극도로 미워할 것이외다.

송 장로와 진 장로는 일제히 말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지요? 포 선생께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포부동은 말했다.

그 역대표가 죽기 전에 말했소이다. 그들은 모두 귀방주가 사람을 보내 해쳐 죽인 것이라고 말이외다. 다만 그들은 그 장가라는 녀석이 방주가 된 데 대해서 승복하지 않으므로 저 녀석이 사람을 보내 주살했다고 했소. 아, 정말 가련한지고, 가련한지고! 그리고 역대표는 우리에게 전갈을 했소이다. 오 장로와 여러 장로들에게 아무쪼록 조심하고 경계하도록 전해 달라고 말이외다.

포부동의 그 한 마디가 떨어지자 개방의 제자들은 대뜸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오 장로는 빠른 걸음으로 유탄지 앞으로 다가가 날카로운 어조로 호통쳐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오, 거짓이오?

유탄지는 소봉에게 걷어 차여 두 발이 분질러진 이후 줄곧 땅바닥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암암리에 내력을 돋우어 고통을 멈추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포부동이 그 당시의 비밀을 들추자 그만 당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다시 오 장로의 날카로운 다그침을 받게 되자 더듬거렸다.

모두 전......전관청이 나로 하여금 명령을 내리게 한 것으로서 이는 나와......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외다.

송 장로는 군웅들 앞에서 자기 방의 추악한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매섭게 전관청을 노려본 후 속으로 생각했다.

"방안의 일은 나중에 천천히 따져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포부동을 향해 말했다.

역대표 형제가 선생에게 내준 방문을 선생께서는 아직도 몸에 지니고 계신지요?

포부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송 장로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반 나절 동안 잔소리를 늘어 놓고 방문을 내 놓지 않으니 사람을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따라서 그는 포부동에게 깊이 읍을 한 후 말했다.

푸른 산은 언제나 변함이 없고 녹수는 언제나 흐르는 법이니 우리 다시 만나도록 하죠.

그는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오 장로는 급히 말했다.

역대표가 건네 준 그 서하국의 방문을 귀하는 어째서 건네 주지 않으시오?

포부동은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한 노릇이군. 그대는 역대표가 그 방문을 나의 손에 건네 주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오? 어째서 건네 주었다는 말을 쓰시오? 설마하니 그 날 그대는 친히 목격이라도 했단 말이오?

송 장로는 억지로 노기를 누르며 말했다.

포 형은 조금 전 분명히 본방의 역대표 형제가 서하국에서 왔으며 서하국 국왕의 방문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포 형에게 폐방의 장로들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하지 않았소? 이 말은 이곳에 있는 많은 영웅 호걸들이 모두 들었소이다. 한데 포형은 어째서 갑자기 말을 바꾸시오?

포부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이다.

그는 송 장로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평소에 듣기로 개방의 여러 장로들은 모두 무쇠처럼 굳굳한 사내들이라고 들었소. 그런데 어째서 천하 영웅들 앞에서는 흑백을 전도하며 시비를 얼버무리려고 하는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여러 장로들께서는 일세의 영명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소?

송, 오, 진 세 장로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두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은 일시 포부동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야 하는지 아니면 좀더 참아야 하는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진 장로는 말했다.

귀하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들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소이다. 다행히 시비는 공론이 있기 마련이오. 단지 입을 놀려서 억지를 쓴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소용없게 되는 법이오.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아니로소이다. 입만 나불나불 놀린다는 것이 끝내 쓸모없는 일이라면 이째서 과거 소진(蘇秦)은 예리한 입안을 놀려서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되었겠소? 그리고 어째서 장의(張儀)는 날카로운 언변으로 연횡지계(蓮橫之計)라는 계책을 펼쳐 끝내 진나라를 도와 다른 여섯 나라를 정복하도록 만들었겠소?

송 장로는 그가 갈수록 관계없는 말만 자꾸 늘어놓는 것을 보고 그저 쓰디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포 선생께서 만약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태어났더라면 소진과 장의를 뛰어넘어 몸에 일곱 나라나 여덟 나라 재상의 도장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외다.

포부동은 되물었다.

그대는 내가 제때에 태어나지 못해 재수가 없다고 비웃는 것이오? 좋소. 이 포가는 어쩐 변고를 당하게 된다 해도, 즉 골치가 아프고 몸에 열이 나거나 허리가 아프고 발이 시큰거리거나 기침을 하거나 재채기를 하더라도 오로지 그대에게 물어 보도록 하겠소이다.

진 장로는 분연히 말했다.

포형의 의도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좀 시원시원하게 말씀하시오!

포부동은 말했다.

음, 그대는 꽤나 성질이 급하구려. 그 날 무석의 살구나무 숲속에서 그대는 나의 풍 네째와 무공을 겨루었소. 그때 그대는 손에 커다란 전갈이 있었소. 커다란 전갈의 꼬리에는 또 커다란 독가시가 있어 그 커다란 독가시로 사람을 찌르게 된다면 커다란 독으로 인해 수포가 생기게 되고 그 지독한 독은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겠소?

진 장로는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히 한 마디면 될 수 있는 것을 그는 쓸데없이 크고 작은 것을 찾으며 끈질기게 늘어놓고 있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대답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그것 잘 되었소이다. 내 그대와 내기를 하겠소이다. 그대가 이기게 된다면 나는 즉시 이 늙은 거지가 서하국에서 가져 왔다는 소식을 그대에게 전해 주겠소. 만약 내가 이기게 된다면 그대는 그 푸대자루와 푸대자루 안의 전갈은 물론이고 전갈의 독을 해소시킬 수 있는 약이 들어 있는 조그만 병까지도 나에게 건네어 주도록 합시다. 그대는 내기를 걸겠소?

포형은 어떤 내기를 하고자 하오?

귀방의 송 장로는 나에게, 내가 그 물건을 감추고 있다고 모함을 했으며 귀방의 역대표가 서하 국왕의 방문을 나에게 건네 주고서는 귀방의 장로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다고 우겨댔소.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소.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이 내기를 합시다. 만약 내가 확실히 그렇게 말했다면 그대가 이기는 것이오. 그러나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기는 것이외다.

진 장로는 송 장로와 오 장로를 한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뜻은 다음과 같았다.

"이곳에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증인이니 그가 아무리 교활한 변명을 한다 하더라도 억지를 쓰지 못할 것인즉 내기에 응하시오."

진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불초는 포 형과 내기를 하겠소. 그러나 포 형은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소? 혹시 덕망이 놓은 분을 몇 분 내세워 공평하게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니겠소?

포부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그대는 몇 분 덕망이 높은 증인을 내세워 공평하게 판단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느데 설사 여덟 분이나 열 분을 추대케 된다면 그 여덟 분이나 열 분이외의 나머지 수천 수백 명이나 되는 영웅 호걸들은 덕망이 높지 않다는 말이오? 덕망이 높지 않다면 그야말로 비열하고 몰염치한 무명소졸이 되지 않겠소? 이와 같이 당금 영웅 호걸들을 모멸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례한 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진 장로는 말했다.

포 형은 농담을 잘 하시는구려. 불초는 결코 그런 뜻이 없소이다. 그렇다면 포 형의 견해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이까?

포부동은 말했다.

시비곡직은 한 마디로 결정될 것이오. 불초는 그대에게 분석해 보이겠소. 자자, 가져 오시오.

"가져 오시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진 장로는 물었다.

무엇을 말이오?

포부동은 말했다.

푸대와 전갈, 그리고 해약말이외다.

포형은 아직도 증명을 안 했는데 어찌 이겼다고 할 수 있겠소?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가 진 후 억지를 쓰고 주지 않을까봐 두려워서 그러오.

진 장로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까짓 조그만 독물을 가지고 무얼 그러시오? 포 형이 요구한다면 불초는 즉시 올리겠소이다. 내기를 걸어 이기고 지는 것을 따져 뭣하겠소?

그는 등의 푸대자루를 하나 들고 품속에서 또 하나의 자기로 된 병을 꺼내 함께 내밀었다.

포부동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 들더니 푸대자루를 펼치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는 칠팔 마리의 알록달록한 커다란 전갈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재빨리 푸대자루의 아가리를 조이며 말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어째서 내가 이기고 그대가 졌는가 증거를 보여 주도록 하겠소.

그는 장포자락의 띠를 풀더니 소맷자락을 펼쳐 보이고 앞섭자락을 들추어 보었다. 뭇 사람들은 그의 몸에 지니고 있는 몇 조각의 은자와 화도, 화석 외에는 별다른 물건이 없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송, 오, 진 세 장로는 그래도 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을 띠었다.

포부동은 말했다.

둘째형, 그대는 방문을 손에 들고 그들에게 한 번 보여 주도록 하시오.

공야건은 줄곧 모용박 부자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림 군승의 나한대진을 뚫고 뛰어들 수가 없어 그저 초조하게 여기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형편에 포부동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는 방문을 꺼내 손에 들어 보였다. 군웅들은 그 방문을 바라보았다.

한 장의 커다란 싯누런 종이에 붉은 도장이 꽉 찍혀 있고 빽빽한 외국의 글자가 씌어져 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으나 그 모양으로 보아 결코 가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포부동은 말했다.

나는 먼저 귀방의 역대포가 한 장의 방문을 우리에게 주면서 귀방의 장로에게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 말했죠?

송 장로와 진 장로, 오 장로 세 사람은 갑자기 그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자 기뻐서 말했다.

그렇소이다.

포부동은 말했다.

그러나 송 장로는 나를 가리키며 귀방의 역대표가 한 장의 방문을 나에게 건네 주면서 귀방의 장로에게 전달해 달랬다고 우겼소. 그렇지 않소?

세 장로는 일제히 대답했다.

그렇소. 그게 또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오?

포부동은 고개를 흔들었다.

잘못되고 말구요. 잘못되고 말구요. 그야말로 소머리를 꼬리라고 한 것처럼 잘못되었소이다. 털끝 하나가 잘못되면 나중에 천리 길이나 크게 틀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말한 것은 우리들이었고 송 장로가 말하는 것은 나였소. 우리들이란 우리 고소 모용씨의 이 한 패거리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가운데는 모용 공자, 등 큰형님, 공야 둘째 형, 풍 네째, 그리고 포부동 및 왕 소저 까지 포함한 것이오. 그리고 나라고 하는 사람은 그저 포부동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를 즐겨 말하는 홀아비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외다. 여러 영웅들은 한 번 보시오. 왕 소저야말로 화용월태를 지니고 있는 규수이외다. 이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의 포부동 세째와는 크게 다른데 어찌 한 사람으로 논할 수 있겠소?

송, 오, 진 세 장로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가 이리 둘러대고 저리 둘러대며 나와 우리들 간의 차이를 가지고 크게 구실을 만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포부동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방문은 역대표가 우리 공야 둘째 형에게 건네 준 것이외다. 내가 귀방에게 전갈을 한 것은 모용 공자의 결정이외다. 내가 우리라고 말한 것은 틀림이 없소이다. 만약에 내가 나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진상과는 맞지 않는 말이 될 것이외다. 불초는 서하의 문자를 모르는데 그 방문을 받아 어쩌겠소? 불초는 무석성 밖에서 귀방의 손에 크게 패한 적이 있소이다. 설사 귀방을 찾아 원한을 갚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어찌되었든 간에 방문을 건네받고 귀방에게 전갈하는 것은 모두 우리 고소 모용씨 한 패거리가 한 것이지 결코 이 포부동 혼자 한 짓이 아니란 말이외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공야건에게 말했다.

둘째 형, 그들이 졌소이다. 그 방문을 거두어 들이구려.

진 장로는 속으로 생각했다.

빙 둘러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그날 무석성 밖에서 당한 참패의 치욕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었구나.

그는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그 날 포 형은 맨손으로 폐방의 해 장로가 든 육십 근이나 되는 강철 지팡이를 상대로 싸웠는데 포 형은 크게 우세를 점하지 않았소? 폐방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그제서야 그야말로 타......타......뭐라는 진법을 펼쳤지만 역시 포 형을 어떻게 하지는 못했소. 당시의 폐방 방주인 교봉이라는 전혀 기운을 소모하지 않았던 양반이 앞으로 나가 포 형과 한참 싸운 후에야 겨우 포 형에게 반 초 정도를 이기게 된 것이외다. 당시 포형은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표연히 그곳을 떠났소이다. 싸움에 있어서 그야말로 고명하고 떠날 때도 역시 비범하기 짝이 없어서 폐방의 아래위의 사람들은 그 후 그 일을 두고 즐겨 이야기거리로 삼았으며 속으로 흠모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했소이다. 그런데 어째서 포 형은 그토록 겸손해 하시며, 오히려 폐방의 손에 졌다고 하시오이까? 결코 그런 일은 었었소이다. 결코 그런 일은 없었소이다. 그 교봉과 폐방은 이미 아무런 관계가 없소이다. 심지어 우리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형편이외다.

그런데 사실 그는 포부동이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것은 그가 최후에 한 한마디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즉 그날 무석의 살구나무 숲속에서 패한 치욕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포부동은 바로 그가 말한, "할 말이 있으면 하고 개방귀 같은 소리를 작작 뀌라"고 한 한 마디에 화가 난 것이었다.

그런데 진 장로가 그렇게 나오자 포부동은 슬쩍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더 말할 나위없이 잘 되었소이다. 그대는 귀방의 형제를 거느리고 갑시다. 그야말로 우리와는 똑같은 적개심을 품고 있으니 함께 가서 교봉이라는 그 녀석을 사로잡읍시다. 그때 우리는 절친한 친구라는 점을 생각하고 자연 그 방문을 두 손으로 바치게 될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노형이 만약 방문 중의 이상야릇한 문자를 모른다면 우리 공야 둘째 형께서 아예 끝까지 인정을 베풀어 처음부터 끝까지 자자구구를 옮겨서는 명백한 설명을 해 드리겠소이다. 자, 어떠시오?

진 장로는 송 장로를 바라보고 오 장로를 바라보면서 일시에 작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누가 소리 높이 외쳤다.

응당 그래야 마땅하지요. 무엇을 더 주저합니까?

뭇 사람들은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말을 한 사람은 십방수재(十方秀才)전관청이었다. 그는 이때 이미 아홉 푸대를 짊어지는 장로가 되어 있었다.

그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요나라는 우리 대송나라와는 철천지 원수지간이외다. 소봉의 부친인 소원산은 스스로 소림에서 삼십 년간 숨어 살아오면서 소림의 무학전적을 모조리 읽었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오늘 모두들 합심협력하여 그를 제거하지 않고 그가 요나라로 되돌아가 중원 땅에서 얻은 상승의 무공을 널리 퍼뜨리게 된다면 거란 사람들은 그야말로 호랑이에 날개를 단 꼴이 될 것이외다. 그렇게 하여 재차 대송나라를 공격해 온다면 우리 황제의 자손들은 모두 다 망국노(亡國奴)가 되지 않겠소이까?

군웅들은 모두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자가 원적을 하게 되고 장취현의 두 다리가 부러졌으니 소림파와 개방이라는 이 중원 무림의 이 대 지주에게는 우두머리가 없어진 꼴이라 대국을 이끌어 나갈 사람이 없었다.

전관청은 말했다.

그래서 소림사 현 자 항렬의 세 분 고승과 개방의 송, 진, 오의 세 분 장로가 함께 호령을 하게 된다면 모두들 일제히 명령을 받들게 될 것입니다. 먼저 소림사로 가 소봉 부자를 죽여 우리 대송나라의 심복지환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뒷일을 처리하는 것은 천천히 계획을 세워가면서 해도 될 것입니다.

그는 유탄지가 싸움에서 패했을 뿐만 아니라 명성마저 땅에 떨어진 것을 보고 자기가 방에서 의자할 사람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거기다가 역대표 등을 죽인 사실이 다시 드러나게 되자 마음속으로 여간 두렵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급히 다른 풍파를 일으켜 자기의 죄를 다그침 받는 입장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된 것이었다.

군웅들은 다투어 부르짖었다.

그 말씀이 옳소이다. 세 분 고승과 세 분 장로께서 호령을 내려 주십시오.

이 일은 천하의 안위와 관계되는 일이니 여섯 분 선배들께서 앞장을 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 명령을 받들어 두 마리 오랑캐의 개를 때려 잡도록 합시다.

삽시간에 수천 명이 챙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여 파파는 부르짖었다.

여러 거란 형제들은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은 여 파파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각기 칼을 뽑아들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섰다. 중과부적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결사일전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 파파는 부르짖었다.

영취팔부는 열여덟 분의 친구들을 보호하도록 하라.

팔부의 뭇 여인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 앞을 막아섰다. 그렇게 되자 뭇 동주와 도주들도 옆에 서서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을 지키고자 했다. 성숙파의 문인들은 새 주인 앞에서 공을 세우고자 기를 흔들고 고함을 지르는 등 기세를 돋우었다.

여 파파는 허리를 구부리고 허죽에게 말했다.

주인, 이 십팔 명의 무사들은 주인의 의형 되시는 분의 부하들이십니다. 만약 주인 앞에서 사람들에게 난도질당하여 죽게 된다면 그야말로 영취궁의 위풍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먼저 그들을 보살폈다가 나중에 주인의 처리대로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허죽은 부모를 졸지에 잃게 된 직후라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영취궁은 소림사와는 친구이지 결코 적은 아니오. 그러니 모두 서로 충돌을 하지 않도록 하고 더욱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오.

현적은 말했다.

십팔 명의 거란 무사를 죽이고 죽이지 않는 것은 대국에 아무런 관계가 없소이다. 허죽 선생의 얼굴을 봐서 잠시 덮어 두기로 하죠. 허죽 선생, 우리가 소봉을 사로잡아 죽이는 데 대해서 그대는 어느 쪽을 도우시겠소이까?

허죽은 망설였다.

소림파는 내가 몸을 담았던 곳이고 소봉은 나의 의형이외다. 한쪽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한쪽에게는 지켜야 할 의리가 있소이다. 나는......나......그저 양쪽 다 돕지 않는 것이 좋겠소이다. 하지만......하지만......사숙조, 내 그대에게 권고하는데 소 큰형님을 놓아 주도록 하십시오. 내 그에게 권하여 결코 대송나라를 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겠소이다.

현적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헛되이 무공만 고강하고, 또한 일파의 지주가 되었으면서도 말하는 것은 세살 먹은 어린애와 다름없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말했다.

사숙조란 말을 앞으로 허죽 선생께서 다시 들먹이지 않도록 하시오.

허죽은 대답했다.

예, 예, 제가 깜박 잊었소이다.

현적은 말했다.

영취궁에서 양쪽 다 협조하지 않는다면 소림파는 귀파와 친구이니 적이 아니외다. 그러니 쌍방은 서로 감정의 충돌이 없도록 합시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개방의 세 장로에게 말했다.

세 분 장로, 우리들은 일제히 폐사로 들어가 동정을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소?

송, 진, 오 세 장로는 일제히 대답했다.

무척 좋소이다. 무척 좋소이다. 개방의 뭇 형제들은 함께 소림사로 들어가세.

즉시 소림사의 승려들이 앞장을 서게 되고 개방과 중원의 군웅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산 위로 치달았다.

등백천은 기뻐서 말했다.

세째, 정말 자네가 대단하군. 그렇게 한바탕 말을 함으로써 주군과 공자에게 이토록 많은 협조자를 끌어들였으니 말일세.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지체하게 되었으니 주군과 공자에게는 화가 될지 복이 될지 또 승부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소이다.

왕어언은 급히 말했다.

빨리 가요.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는 그만해요.

그녀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보니 단예가 옆에서 따라 오고 있지 않은가.

왕어언은 물었다.

단 공자, 그대는 또 그대의 의형을 도와 저의 고종 오라버니를 괴롭히려 하는건가요?

그 어조에는 불만의 빛이 서려 있었다. 조금 전 모용복이 검을 들어 자결을 하려고 했었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 하지 않았던가. 따지고 보면 그 모든 원인은 단예와 소봉 두 사람에게 패한 나머지 수치와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왕어언은 그와 같은 일을 상기하게 되자 자연 단예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단예는 어리둥절해져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왕어언과 알게 된 이래 그녀의 뜻이라면 무작정 따랐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위험을 돌보지 않았으며 자기 한 사람의 생사엔 전혀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껏 한 번도 그녀가 자기에 대해서 이토록 곱지 못한 얼굴을 한 적이 없는지라 그만 놀람과 당황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고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는 한참 후에야 겨우 말했다.

나는.....결코 모용 공자를 괴롭히려는 생각은 없었소이다.......

고개를 쳐들어 보니 앞에 군웅들이 다투어 달려가고 있었다. 왕어언과 등백천 등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해져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왕 소저가 나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한다면 내 스스로 올라가 핀잔 받을 짓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볼 때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수백 수천 명이 벌떼처럼 달려가 소 큰형님을 포위 공격하려고 하니 그의 처지는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 허죽 둘째 형도 양쪽 다 돕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내가 만약 힘써 도우지 않는다면 의형제를 맺은 정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설사 왕 소저가 탓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저것 돌볼 겨를이 없다."

그는 군호들을 따라 산 위로 달려 올라갔다.

이때 단정순은 단연경의 시선이 차갑게 자기에게로 쏟아지는 것을 보고 즉시 검자루를 쥐며 진기를 돋우어 대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리의 군호들 역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했다. 그러느라고 단예가 총총히 떠나가는 것을 주의깊게 보지 않았다.

단예는 소림사 앞에 이르게 되자 곧장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소림사가 잡고 있는 터는 무척 넓었다. 앞 쪽에는 전각이 서 있고 뒤에는 사당이 서 있는데 수백 수천 칸이 되어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뭇 승려들과 중원의 군웅들은 각처의 대전과 법당을 오락가락하며 호통을 내지르면서 소원산 부자와 모용박 부자의 소재를 찾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높은 곳에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사방이 시끌시끌해졌으며 그야말로 큰 소란이 일게 되었다.뭇 사람들은 집을 가로지르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등 분주히 오락가락하며 하나같이 묻고 있었다.

어디에 있지? 보았소?

소림사의 장엄한 보찰은 삽시간에 저자거리처럼 시끄러운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단예는 그저 발걸음 닫는 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러고 보니 두 명의 오랑캐 승려가 재빠른 걸음으로 측문에서 나와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몸을 움츠린 채 재빨리 앞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단예는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저 두 오랑캐 중은 소림사의 승려가 아니다. 그들은 왜 슬금슬금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일까? 무엇하려는 것일까?"

호기심이 일어나자 그는 즉시 능파미보의 경신법을 펼쳐 기척도 없이 두 명 오랑캐 중의 뒤를 따라 절의 옆 숲속으로 달려들었다.

숲속으로 난 한 소로를 따라 곧장 서북으로 나갔으며 몇 번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눈앞이 탁 트였다. 그리고 물 소리가 졸졸졸 들려왔고 산개울의 옆에는 한 채의 누각이 서 있었다. 누각 앞쪽에는 한 조각의 편액이 결려 있었는데 장경각이라는 석 자가 씌어져 있었다.

단예는 생각했다.

"소림사의 장경각은 천하에서 이름이 난 곳인데 알고 보니 바로 이곳에 세워져 있었구나. 그렇군. 이 누각을 물가에다 세우고, 또 다른 집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바로 절에 불이 나서 진기하기 이를데 없는 경전을 태울까봐 조심을 한 것이렸다?"

두 명의 오랑캐 중이 몸을 꾸부정하게 하고 서서히 장경각 쪽으로 다가갔다. 단예 역시 그들을 따라 나아갔다. 별안간 두 명의 중년 승려가 번개처럼 달려 나오더니 일제히 기침을 하며 말했다.

두 분은 무슨 볼일로 이곳까지 오셨소이까?

한 명의 오랑캐 중이 말했다.

우리 사형은 오래 전부터 소림사 장경각의 명성을 듣고 흠모하던 차에 특별히 구경하고자 왔소이다.

말하는 사람은 바로 파라성이었다. 그와 사형인 철라성은 절 안이 크게 시끄러워지는 것을 보자 이 기회에 장경각으로 가 경전을 훔치려고 했던 것이다.

한 명의 소림 승려가 막아섰다.

대사는 걸음을 멈추시오. 본사의 장경각이란 곳은 외부의 인사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말하는 사이 다시 네 명의 승려들이 손에 선장을 들고 문입구를 막아섰다. 철라성과 파라성은 서로 한 번 쳐다보고는 자기들이 도모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맥없이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단예도 따라서 몸을 돌려 소봉을 찾으려고 했다. 갑자기 한 늙수그레한 음성이 장경각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너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보았느냐?

그것은 바로 현적의 음성이었다. 다른 한 사람이 대답했다.

우리 네 사람은 이곳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의승이 달려 들어와 대뜸 우리들의 혼수혈을 찍었습니다. 사백부께서 저희들을 깨우게 되었을 때 그 회의승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늙수그레한 음성이 말했다.

이곳의 창문이 파손된 것을 보니 아마도 뒷산으로 달려간 것이 틀림없을 것 같구나.

현적은 말했다.

그렇군요.

노승은 말했다.

그런데 그들이 장경각의 경서를 훔쳤는지 안 훔쳤는지 모르겠군.

현적은 말했다.

그 두 사람이 본사에 잠복한 지 수십 년이 되지 않았소? 우리 아래위의 뭇 승려들은 그야말로 멍청하게도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무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만약 그들이 경서를 훔치려고 했다면 왜 수십 년 동안 훔치지 못했겠으며 오늘까지 기다렸겠소?

그 노승은 말했다.

사형의 말씀이 옳소이다.

두 승려는 일제히 장탄식을 불어댔다.

단예는 속으로 그들 소림사 승려가 소림사의 창피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엿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기실 현적 등이 말하는 소리는 무척 낮았다. 다만 단예의 내력이 심후하기 때문에 귀에 들렸을 뿐이었다.

"그들은 소 형님이 뒷산으로 갔다고 했다. 가 보기로 하자."

소실산 뒷산은 기세가 매우 험했다. 그리고 울창한 숲이 가로막고 있었고 나 있는 길이라고 해도 매우 가파랐다. 단예는 수 마장을 나갔다. 그렇게 되자 이미 아래 절안의 시끌벅쩍한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산은 조용하기만 했으며 오로지 나뭇가지 사이로 새들의 노래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숲속으로 햇살이 비춰지지 않아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단예는 생각했다.

"소 형님 부자가 이곳에 도달했다면 이곳에서 벗어나기는 무척 쉽겠다. 군웅들은 다시 포위공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매우 유쾌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왕어언의 원망에 차고 노기 띤 얼굴이 떠오르자 속으로 흠칫했다.

"만약 큰형님이 모용 공자를 때려 죽였다면, 그렇다면......어떻게 하면 좋지?"

그만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만약 모용 공자가 죽었다면 왕 소저는 슬퍼서 어찌할 줄 모르며 한평생 우울하게 세상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울창한 숲속을 발걸음 내키는 대로 걸었다. 모용복을 생각했다가 잠시 뒤에는 소 형님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다시 아버지와 어머니, 백부님을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역시 왕어언이었다. 더우기 그녀가 조금전 보여 준 원망스럽고 노기 띤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얼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게 되었는지를 모른다. 갑자기 왼쪽에서 바람결에 염불을 하는 소리가 몇 마디 들려왔다.

마음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즉 마음이다. 마음이 맑으면 부처를 알아보게 되고 부처를 알아보게 되면 바로 맑은 마음이로다. 마음이 떠나게 된다면 부처님이 아니고 부처님을 떠나게 된다면 마음이 아니로다......

그 음성은 매우 상서롭고도 부드러우며 웅후했는데 일찌기 들어본 적이 없는 음성이었다.

단예는 생각했다.

"원래 이곳에 어느 화상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어디 그에게 소 형님을 보았는지 물어 봐야지."

그는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대나무숲을 돌게 되자 갑자기 숲속의 한 잔디밭 위에 적지 않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오래된 청포를 입은 승려가 이쪽을 등진 채 바위 위에 앉아 있었는데 불경을 설명하는 듯한 음성은 바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소원산, 소봉 부자, 모용박, 모용복 부자, 그리고 얼마 전 장경각에서 본 오랑캐 중 철라성과 파라성, 그리고 다른 절에서 온 몇 분의 고승, 소림사의 몇 분 현 자 항렬의 고승마저도 땅바닥에 앉아서는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숙인 채 눈을 내리뜨고 공손히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사오 장 밖에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바로 토번국의 국사인 구마지였다.

그는 얼굴에 비웃음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단예는 부처님을 숭상하는 나라의 출신인지라 어릴 적부터 고승이 설법하는 것을 보고 들었다. 따라서 불경의 뜻에 대해서 퍽이나 터득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대리국의 불교는 남쪽 지방에서 전해진 것이라 소승 불교에 가깝다고 하겠으며 소림사의 선종 일파와는 달랐다. 그런데 그 노승이 계어를 설명하는 것은 매우 알아 듣기 쉬우면서도 매우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저 고승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소림의 승려이나 직책이 낮아 그저 찻물이나 끓이고 땅바닥이나 닦는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 소림의 고승들과 소 형님 등이 모두 그가 설법하는 것을 듣고 있을까?"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분이 어떤 용모를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으며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 승려의 얼굴을 보려면 반드시 사람들의 등뒤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죽여 멀리 빙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비스듬히 옆으로 발걸음을 놓아야 했다.

이렇게 되자 구마지 곁을 돌아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구마지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단예 역시 웃음 띤 얼굴로 답했다.

별안간 한 줄기의 날카롭기 이를데 없는 세찬 기운이 가슴팍으로 쏟아져왔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어이쿠!

급히 육맥신검을 펼쳐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그저 가슴팍에 찌르는 듯한 아픔이 와 닿는 것을 느끼고 어렴풋이 그 누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미타불!

그는 그만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모용박은 소씨 부자가 자기를 죽여야만 시원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중원 군웅들에게도 용납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소림사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소림사에는 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지만 그는 지형에 익숙한지라 어디로 가서 몸을 숨기든 간에 소씨 부자는 좀처럼 쉽게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소원산과 소봉 두 사람은 그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마치 그림자 처럼 따라왔다.

소원산은 그와 나이가 비슷했고 공력도 비슷한지라 모용박이 잠시 동안 앞서 달린 결과 소원산은 제대로 뒤쫓아오지를 못했다.

그러나 소봉은 장년이고 무공과 정력에 있어서 모두 절정의 경지에 도달했는지라 힘주어 쫓게 되자 그 간격은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모용박이 소림사 산문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소봉이 수장 밖에서 일 장을 후려쳤는데 그 장력이 이미 뒷등에 와 닿을 지경이었다.

모용박이 별수없이 일 장을 들어 그를 받게 되었는데 전신이 흠칫했고 손과 팔이 요요하게 저려왔다.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 거란 개새끼의 공력이 이토록 높구나."

그는 몸을 옆으로 돌려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소봉은 그가 도망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서둘러서 쫓아갔다.

이때 모용박은 절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곳곳에 낭하와 대전, 그리고 법당들이 서 있었다.

세 사람은 가운데 한 사람이 앞서게 되고 두 사람이 뒤를 쫓는 가운데 삽시간에 그들은 장경각으로 달려들어가게 되었다.

모용박은 창문을 꿰뚫고 들어가 대뜸 장경각을 지키던 네 승려의 혼수혈을 찍고 몸을 돌리더니 냉소하며 말했다.

소원산, 그대 부자 두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겠소? 아니면 우리 늙은이는 우리 늙은이끼리 일 대 일로 싸우겠소?

소원산은 장경각의 문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얘야, 너는 창문을 막고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해라.

소봉은 말했다.

예.

그는 몸을 날려 창가에 가서 손을 가슴팍 앞으로 비껴 들었다. 모용박을 소부자 두 사람이 포위를 한 꼴이었다.

이렇게 되니 모용박은 벗어나기가 힘들게 되었다.

소원산은 말했다.

그대와 나 사이의 깊은 원한은 죽어도 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무예를 겨루는 것이 아니니 자연 우리 부자가 손을 합쳐 일제히 달려들어서는 너의 목숨을 빼앗게 될 것이다.

모용박은 껄껄 소리 내어 웃으며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위로 발자국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한 사람이 올라왔다. 바로 구마지였다.

그는 모용박에게 합장하더니 말했다.

모용 선생, 옛날 헤어진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선생이 서거했다는 소문을 듣고 소승은 매우 통탄스럽게 여겼소이다. 원래 선생께서 은거하시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따로 깊은 뜻이 있었구려.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소승은 기쁨을 금할 수 없소이다.

모용박은 포권으로 반례하고 웃으며 말했다.

불초는 연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일념에 죽은 척했소이다. 대사께서 염려해 주시니 실로 부끄럽소이다.

구마지는 말했다.

원, 별말씀을 다하시오. 그 날 소승은 선생과 해후하여 무공과 권법을 논하게 되고 선생에게 지도를 며칠간 받게 되어 평생의 의문을 일단 모조리 풀게 되었소이다. 거기다가 선생께서는 소림사 칠십이 절기의 요지를 가르쳐 주셔서 더욱더 마음속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모용박은 웃었다.

그까짓 작은 일을 입에 담으실 필요는 없지 않소이까?

그리고 소씨 부자에게 말했다.

소 노형, 소대형, 이 분 구마지 신선은 바로 토번국의 대륜명왕이외다. 불법에 대한 조예가 깊으며 무공은 불초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야말로 당금 천하에서 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죠.

소원산과 소봉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이 오랑캐 중이 모용박보다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반드시 뛰어난 고수임에 틀림없다. 그와 모용박의 관계가 이토록 깊다니, 물론 모용박을 돕겠지. 이번 싸움의 승부는 정말 말하기 어렵게 되었구나."

구마지는 말했다.

모용 선생의 과찬이십니다. 그때 소승은 선생께서 검법에 대해 논하시는 말을 듣고 대리국 천룡사의 육맥신검을 천하의 검법 가운데서 제일로 치는 말씀을 듣고 보지 못해 한스럽게 생각했으며 한평생 유감스러운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까? 소승은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대리의 천룡사로 달려가 육맥신검이라는 검보를 얻어 선생의 무덤 앞에 태워, 지기에 대한 보답을 하려고 했소이다. 그런데 천룡사의 고영 노승은 교활하기 짝이 없어서 요긴한 고비에 검보를 내력으로 불살라 버렸습니다. 소승은 그 소원을 풀지 못한 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모용박은 말했다.

대사께서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셨다니 불초는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더욱 단씨의 욱맥신검이 이 세상에 아직도 남아 있고 조금 전 대리의 단 공자가 못난 저의 자식 놈과 싸울 때 검기가 종횡하는 것을 보지 않으셨소이까? 그러니 천하제일검이란 말은 결코 헛되게 전해진 것이 아니로소이다.

바로 이때였다.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장경각에 또 한 사람이 들어섰다.

바로 모용복이었다.

모용박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곳 소씨 부자는 나를 죽여야만 속이 시원하다고 들먹인 정도인데 대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구마지는 말했다.

지기의 한 사람으로서 어찌 가만 있을 수 있겠소이까?

소봉은 모용복이 달려오게 되자 오히려 상대방은 세 사람이 되고 자기 쪽은 두 사람밖에 안 되는 것을 알았다. 모용복이 조금 약한 편이긴 했으나 역시 얕볼 수 없는 상대였다.

모용박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들 부자가 장경각에서 목숨을 잃을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담이 컸거니와 용감하기로 이름이 나 있어서 역경에 처한 것을 조금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큰소리로 호통쳤다.

오늘의 일은 생사를 판가름하기 전에는 결코 손을 멈출 수 없는 일이외다. 자, 일 초를 받으시오!

그리고 휙, 하니 일 장을 들어 모용박을 향해 급히 후려쳤다. 모용박은 왼손을 펼쳐 암암리에 공력을 돋우고 그의 장력을 해소시키려 했다. 우지끈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서가의 나무쪽들이 다투어 날아올랐고 몇 토막으로 분질러졌다. 서가에 놓여 있던 불경들이 쏟아졌다. 소봉의 일 장에 실린 힘은 너무나 웅후해서 모용박은 완전히 해소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장력을 틀어 서가를 후려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모용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남모용 북교봉이라 하더니 정말 명불허전이로군! 소 형, 나에게 한 마디 할 말이 있는데 듣겠소, 듣지 않겠소?

소원산은 말했다.

그대가 아무리 능수능란한 언변을 토해낸다 하더라도 내 처를 죽인 원한을 갚지 않을 수 없소.

모용박은 말했다.

그대가 나를 죽여 원한을 갚고자 하나 오늘의 형세로 미루어 볼 때 그 뜻을 이루기는 힘들 것이외다. 우리 쪽은 세 사람이고 그대 부자는 두 사람이니 도대체 누가 유리한지 묻고 싶소이다.

소원산은 말했다.

물론 그대가 유리하오 그러나 사내 대장부가 적은 사람의 수로 많은 사람을 상대한다고 해서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모용박은 말했다.

소씨 부자의 영명은 절대적인데 한평생 누구를 두려워했겠소? 그러나 오늘 나를 죽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일거외다. 나는 그대와 한 가지 거래를 하고 싶소. 나는 그대로 하여금 원한을 갚도록 해주겠소. 그러나 그대 부자는 한 가지 약속을 해주어야겠소이다.

소원산과 소봉은 하나같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 노적에게 또 어떤 간계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모용박은 다시 말했다.

그대 부자가 이 일을 응낙하기만 한다면 나를 죽여 원한을 갚아도 좋소이다. 불초는 순순히 죽임을 당할 것이며 결코 항거하지 않겠소. 그리고 구마지 사형도 손을 써서 구원할 생각은 하지 않을 거외다.

그 말이 떨어지자 소봉 부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구마지와 모용복은 더욱 더 경악해 마지 않았다.

모용복은 부르짖었다.

아버님, 우리 쪽이 많고 적은 적은데......

구마지 역시 말했다.

모용 선생은 어째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오? 이 소승에게 한 가닥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생에게 손가락 하나 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소이다.

모용복은 말했다.

대사와 같이 의리가 높은 분을 친구로 모시게 되었으니 죽는다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소? 소 형, 불초에게 한 가지 가르침을 받을 일이 있소. 과거 불초가 거짓 소문을 퍼뜨려 그와 같은 커다란 화를 불러일으키도록 했는데 소 형은 불초의 의도가 어디 있었다고 생각하시오?

소원산은 노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를 손가락질 하면서 힐난했다.

그대는 본래 비열한 소인으로서 나쁜 짓을 일삼고 남의 재난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무슨 다른 뜻이 있겠소?

그리고 한 걸음 다가서며 휙, 하니 주먹을 내질렀다.

구마지가 비스듬히 달려나오면서 두 손으로 막았다. 일 장과 주먹이 교환하게 되었으나 고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모두 다 상대방의 깊은 공력에 감탄했다.

모용박은 말했다.

소 형은 잠시 노기를 누르시고 불초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주시오. 모용박이 못났으나 강호에서 그래도 약간의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오. 그리고 소 형과는 평소 모르고 지낸 터이니 무슨 원한이 있겠소? 더군다나 소림사의 현자 방장으로 말하면 불초와는 오랜 친구이외다. 내가 온갖 심혈을 다 기울여 이간질을 시키고 쌍방으로 하여금 서로 죽고 죽이도록 획책한 것은, 일반적인 도리로 생각할 때, 당연히 중대한 까닭이 있지 않겠소?

소원산은 두 눈에 불을 내뿜 듯하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무슨 중대한 까닭이 있다는 것이오? 그대는 말하시오. 말해보시오!

모용박은 말했다.

소 형, 그대는 거란 사람이고 대륜명왕은 토번국의 사람이외다. 중원의 무사들은 모두 다 그대들을 오랑캐라고 했소이다. 영랑(令郞)으로 말하면 분명히 개방의 방주이고 재주와 지략, 그리고 무공에 있어서는 당금 천하를 진동시켰소. 그야말로 개방에서는 고금에 드문 영웅 호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러나 뭇 거지들은 그가 거란인임을 알자 즉시 안면을 바꾸고 지금까지 지내온 정분을 생각하지 않았소. 비단 그를 방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두들 그를 죽이려고만 들었소. 소 형, 그대는 이 일이 공평한지 말해 보시오.

소원산은 말했다.

송나라와 요나라는 세세대대로 원한이 있는 사이이고 두 나라는 서로 공격을 일삼은 지 이미 백여 년이 지났소. 그리고 변경에서는 송나라 사람이나 요나라 사람이 만나게 되면 서로 죽여왔소. 개방의 사람들이 내 아들 소봉이 거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어찌 원수를 우두머리로 삼겠소? 이야말로 당연한 일로서 불공평할 것도 없소.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현자 방장이나 왕검통 등의 나의 처를 죽이고 부하를 죽인 것은 본래의 뜻이 아니었소. 설사 그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역시 송나라와 요나라사이의 다툼이니 이상할 것도 없소. 다만 그대가 그와 같은 계책을 꾸며서 우리들을 함정에 빠뜨린 데 대해서는 용납할 수가 없소.

모용박은 물었다.

소형의 의견은 두 나라가 서로 싸우고 공격하며 죽고 죽이는 것은 그저 적을 깨뜨리고 승리하고서 대공을 세우려는 것이니 인의도덕을 따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오?

소원산은 말했다.

군사를 움직임에 있어서 속임수를 쓰는 것은 자고로 있던 일이외다. 이와 같이 상관없는 말을 해서 무엇하겠다는 것이오?

모용박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소 형, 그대는 이 모용박이 어느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소원산은 약간 흠칫했다.

그대 고소 모용씨로 말하면 물론 한나라 사람이 아니겠소? 설마하니 외국 사람이란 말이오?

현자 방장은 학식이 깊어서 얼마 전에 모용박이 자기 아들 모용복에게 자결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말을 듣고 그의 출신 내력을 알아챘다.

그러나 소원사는 일개 거란의 무부에 지나지 않아 옛날의 역사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의 사연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용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 형의 짐작은 틀렸소이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모용복에게 말했다.

얘야,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지?

모용복은 말했다.

우리 모용씨는 바로 선비족입니다. 옛날에 연나라는 하삭(河朔) 일대에서 위세를 떨치고 금수강산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적이 흉악하여 우리나라를 무너뜨렸죠.

모용박은 말했다.

이 애비가 너에게 복 자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은 무슨 뜻이지?

모용복은 말했다.

아버님은 저에게 시시각각 역대 조상들의 유훈을 잊지 말고 대연나라를 다시 세워 빼앗겼던 강산을 되찾도록 하라고 그와 같은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모용박은 말했다.

너는 대연나라의 대대손손 물려 주는 옥새를 꺼내 소 영웅에게 보여 드리도록 해라.

모용복은 대답했다.

예.

그는 손을 품속으로 가져가더니 검은 옥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도장을 꺼냈다. 그 옥도장의 윗쪽에는 한 마리 생동감 넘치는 표범이 새겨져 있었다.

모용복은 그 도장을 뒤집었는데 그렇게 하자 도장에 새겨진 글이 드러나게 되었다.

구마지는 그 새겨진 글이 바로 대연황제지보(大燕皇帝之寶)라는 여섯 글자임을 알 수 있었다.

소씨 부자는 전자체의 글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옥새의 조각이 정교하고 모서리 윗쪽이 크게 파손된 것을 보아 오래된 물건이며 환난을 많이 겪은 옥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용박은 말을 이었다.

너는 대연나라 황제의 계보(系譜)를 꺼내 소 영웅에게 보여 드리도록 해라.

모용복은 말했다.

예.

그리고 그는 옥새를 품속에 갈무리하더니 기름이 묻은 보따리를 꺼내 풀고 한 폭의 누런 비단을 펼쳐 두 손으로 쳐들었다.

소원산은 누런 비단에 붉은 글씨로 두 가지의 문자가 적혀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른쪽에는 꾸불꾸불 모르는 글씨체인데 아마도 선비나라의 문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왼쪽은 한자(漢字)였는데 제일 윗쪽에는 태조문명제위황(太祖文明帝위황)이라 씌어져 있고, 아래쪽에는 열조경소제위준(烈祖景昭帝위儁)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아래쪽에는 유제위위(幽帝위위)라고 씌어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세조무성제위수(世祖武成帝위垂)라고 씌어 있었고, 그 윗쪽에는 열종혜민제위보(烈宗惠愍帝위寶)라고 씌어 있었으며, 그 아랫쪽에는 개봉공위상(開封公위詳), 조왕위린(趙王위麟)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리고 누런 비단의 뒤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중종소무제위성(中宗昭武帝위盛), 소문제위희(昭文帝위熙)"

황제의 이름은 곳곳에 씌어져 있었다. 그 계보 최후에 씌어진 한 사람의 이름은 모용복이었고 그 위에는 모용박이었다.

구마지는 말했다.

원래 모용 선생은 대연나라의 왕손이었구려. 실례했소이다. 실례했소이다.

모용박은 한숨을 내쉬었다.

망국의 유민이 목숨을 건진 것만 하더라도 불행 중의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러나 역대 조상들의 유훈은 하나같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있소이다. 모용박은 무능하여 강호에서 반평생을 떠돌아 다녔으나 시종 한 가지 일도 성사시킬 수가 없었소이다. 소 형, 우리 선비의 모용씨 집안에서 연나라를 다시 일으키려 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소원산은 말했다.

성공하면 임금이 되는 것이고 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이오. 군웅들이 중원을 차지하려고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인데 당연이고 뭐고 말할 건덕지가 어디 있소?

모용박은 말했다.

옳은 말씀이요. 모용씨가 만약 대연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모든 기회를 노려야 하오. 우리 모용씨 집안은 사람 수가 많지 않고 세력이 미약한데 연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어찌 쉬운 노릇이겠소?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곳곳에서 싸움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아야 기회가 생기는 것이지요.

소원산은 싸늘히 말했다.

그대가 소문을 날조하여 이간질을 한 것은 바로 송나라와 요나라가 크게 싸움을 벌이도록 만들자는 것이었소?

모용박은 말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만약에 송나라와 요나라가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면 대연나라는 그 기회에 움직일 수 있을 것이오. 과거 동진(東晉) 때에는 팔왕지란(八王之亂)이 있어서 사마씨(司馬氏)가 서로 죽고 죽이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우리 오호(五胡)는 중원의 땅을 서로 쪼개 차지할 수 있었소. 오늘의 형세 역시 그와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구마지는 고개를 끄덕었다.

그렇죠. 만약 송나라의 외부에 환란이 일어나게 되고 또한 내란이 일어나게 된다면 모용 선생이 나라를 되세우는 희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토번국 역시 국물 한 방울쯤 얻어 마시게 되지 않겠소?

소원산은 코웃음치며 두 사람을 곁눈질했다.

모용박은 말했다.

영랑의 벼슬은 요나라의 남원대왕에까지 이르러 손에 병권을 쥐고 연경에 자리잡고 있소이다. 만약에 군사를 일으켜 남쪽으로 내려와 송나라 황하 이북땅을 모조리 차지하게 된다면 혁혁한 공로를 세우게 되고 나아가 스스로 왕이 될 수도 있으며 한 걸음 물러선다고 하더라도 부귀영화를 오랫동안 누릴 수 있을 것이외다. 그때 그 기회를 빌어 중원의 군호들을 일망타진하기는 그야말로 개미떼를 밟아죽이는 것과 같소이다. 따라서 옛날 개방에서 축출당한 원한을 단숨에 갚을 수 있지 않겠소이까?

소원산은 말했다.

그대는 우리 아들로 하여금 그대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도록 하여 그대는 어부지리를 얻어 연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는 야심을 이루겠다는 것이오?

모용박은 말했다.

그렇소이다. 그때 우리 모용씨가 의거의 깃발을 세우고 산동으로 출병을 하여 대요나라와 호응을 하게 되고 동시에 토번, 서하, 대리의 삼국이 함께 일어난다면 우리 다섯 나라가 대송나라를 쪼개 먹기란 쉬운 일이외다. 우리 연나라는 결코 대요나라의 땅을 차지하지 않겠소이다. 나라를 세운다 하더라도 남쪽 송나라의 땅을 차지하겠소이다. 이 일은 대요나라에 크게 유리한 일인데 소 형은 어째서 즐겁게 응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거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오른손을 홱 뒤집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그의 손바닥에는 한 자루의 수정같이 밝은 빛이 찬연히 감도는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 비수를 번쩍 들어서는 옆의 탁자 위에 꽂으며 말했다.

소 형이 불초의 건의를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즉시 불초의 목숨을 빼앗아가 부인의 원수를 갚도록 하시오. 불초는 결코 항의하지 않겠소이다.

그는 쫙, 하며 자기의 앞섭자락을 찢어 가슴팍의 살을 드러냈다.

이 한 마디의 말은 소씨 부자에게는 뜻밖이었다.

구마지는 말했다.

모용 선생, 흔히들 같은 종족이 아니면 그 마음이 반드시 다르다고 하지 않았소? 더구나 군국대사는 속임수를 쓰기 마련이 아니겠소? 만약에 모용 선생이 기꺼이 죽음에 임하더라도 소씨 부자가 일이 끝난 이후 선생의 말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이것이야말로.....값없는 죽음을 하는 것이 아니겠소?

모용박은 말했다.

소 노형은 수십 년간 은거하여 좀처럼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소. 하지만 소 대협은 영명을 천하에 떨치고 있으며 한 마디의 말을 천금보다 더 어렵게 여기는 사람인데 어찌 약속을 깨뜨릴 수 있겠소? 소 대협은 아무 관계도 없는 소녀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위험을 무릅쓰기조차 하면서 홀몸으로 취현장으로 뛰어들어가 치료를 부탁한 사람이외다. 그런데 어찌 이 늙은 것을 죽인 이후 자기의 약속을 저버리겠소? 불초는 이미 수명을 다한 몸, 이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닌가 생각하오. 이 늙은이가 한 목숨을 바쳐 만세(萬世)의 기틀을 닦게 된다면 이 거래를 어찌 마다하겠소.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소봉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저 그가 빨리 손을 쓰기만을 기다렸다.

소원산은 말했다.

얘야, 이 사람의 뜻은 거짓 같지 않다.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소봉은 말했다.

안 됩니다.

갑자기 그는 일 장을 들어 나무탁자를 후려쳤다. 우지끈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탁자는 박살이 났고 비수는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곧이어 그는 늠름한 어조로 말했다.

어머님을 죽인 원한으로 어찌 거래를 한다는 말입니까? 이 원한을 갚을 수 있으면 갚는 것이고 갚을 수 없을 때 저희 부자는 이곳에서 목숨을 버리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더러운 일은 소씨 부자가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용박은 양천대소하더니 낭랑히 외쳤다.

하하하!나는 평소 소봉, 소 대협의 재주나 지략이 절세적이고 식견이 탁월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 보니 대의를 모르고 그저 감정에 치우치는 필부에 불과하구려? 하하하, 가소롭구나, 가소로워!

소봉은 그가 말로 충동질한다는 것을 알고 냉랭히 응수했다.

소봉이 영웅 호걸이든 속세의 범부에 지나지 않든 간에 그대의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겠소.

모용박은 말했다.

인군의 녹을 먹게 된다면 인군에게 충성을 다해야 되지 않소? 그대는 대요나라의 대신이데 그저 부모의 사사로운 원한만 갖고 진충보국할 생각은 하지 않으니 어떻게 대요나라를 대할 수 있단 말이오?

소봉은 한 걸음 다가서며 늠름히 말했다.

그대는 변경에서 송나라와 요나라가 서로 죽이는 참상을 본 적이 있소? 그리고 송나라 사람과 요나라 사람들이 처자와 체어지고 잡안이 망하는 정경을 본 적이 있소? 송나라와 요나라는 간신히 수십 년 동안 싸움을 하지 않고 있는 편이외다. 만약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거란의 기마가 송나라를 침입해 들어오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송나라 사람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될지 알고 있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요나라 사람이 비명에 죽음을 당할지 알고 있느냔 말이오?

거기까지 말한 그는 그 날 안문관 밖에서 송나라 병사와 요나라 병사가 서로 노략질을 하던 잔혹한 정경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더욱더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서로 군사를 일으켜 싸움을 하게 되면 서로가 위태로워지는 것이오. 대송나라는 군사가 많고 재물이 풍족하오. 용감히 싸우게 된다면 대요나라나 토번이 손을 합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긴다고 보장할 수 없을 것이오. 우리들은 피를 흘려 핏물을 이루게 하고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도록 싸워 그대 모용씨 집안이 그 기회를 빌어 연나라를 다시 세우도록 해야 된단 말이오? 대요나라에 진충보국하는 것은 바로 땅을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히 하는 것이오. 결코 내 한사람의 부귀영화를 노려 사람을 죽이고 공을 세우겠다는 뜻은 없소이다.

갑자기 기다란 창밖에서 한 늙수그레한 음성이 말했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소 거사는 정말 심지가 인자하고 착하구려. 그와 같이 천하창생을 염두에 두시니 그야말로 보살의 마음을 지니셨구려.

다섯 사람은 그 말을 듣자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창문 밖에 사람이 있는 데도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 사람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창밖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된 듯하지 않는가?

모용복은 호통을 내질렀다.

게 누구냐?

그는 상대방이 대답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펑, 하니 일 장을 후려쳤다. 그러자 두 쪽의 기다란 창문이 장경각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창문 밖 낭하에는 몸에 청포를 걸친 앙상하고도 비쩍 마른 승려가 한 자루의 빗자루를 들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땅바닥을 쓸고 있었다. 그 승려의 나이는 적지 않았다. 희끗희끗한 몇 올의 기다란 수염은 이미 하얗게 세었고 행동은 느릿느릿하고 기운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공을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모용복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 숨은 지 얼마나 오래 되었소?

그 노승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시주는 나에게 이곳에 숨은 지......얼마나......오래 되었느냐고 묻는 것이오?

다섯 사람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초리는 망연하기만 했으며 전혀 정신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는 소리는 바로 조금 전 소봉을 칭찬하던 그 음성임에 틀림이 없었다.

모용복은 말했다.

그렇소. 나는 당신에게 이곳에서 숨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오.

노승은 손가락을 헤아려 한참 계산을 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얼굴에 겸연쩍은 빛을 띠우고 말했다.

나는.....나는 똑똑히 기억할 수 가 없구려. 사십이 년이 되는지 아니면 사십삼년이 되는지 잘 모르겠소이다. 드러나 이 소 시주께서 처음 장경각으로 와 경서를 보던 때보다......이미 십여 년 전에 이곳에 왔소이다. 그후......그후 모용 시주가 왔고 몇 년 후에 천축의 승려인 파라성 역시 경서를 훔치려고 왔지요. 아, 네가 한 번 뒤집고 내가 한 번 뒤집는 바람에 장경각의 경서들은 그만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엉망이 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연고인지 알 수가 없구려.

소원산은 놀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자기가 소림사로 와서 무공을 훔쳐 연마하게 된 것은 전 소림사의 승려들 가운데 한 사람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이 노승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십중팔구 조금 전부터 장경각 밖에서 자기네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이곳에서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라 생각하고 말했다.

어째서 나는 그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노승은 말했다.

거사는 온갖 정신을 무학전적에만 쏟고 있었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노승을 볼 수 없었소이다. 거사가 첫날 밤 이 장경각으로 와서 빌려 본 것은 한 권의 무상겁지보(無相겁指譜)가 아니오? 아, 그날 밤부터 거사는 그만 마도(魔道)에 들어서게 되었으니 애석하구려!

소원산은 깜짝 놀랐다. 자기가 첫날 밤 장경각으로 들어와 한 권의 무상겁지보를 찾아낸 것은 사실이 아닌가? 무상겁지보로 말하면 소림파 칠십이 절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그는 기쁨을 누르지 못하며 그 일은 자기외에 알고 있는 사람이 다시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노승은 그 당시 확실히 옆에서 그 일을 친히 목격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대는......그대는......그대는......

노승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거사가 두 번째로 빌려본 것은 한 권의 반야장법(般若掌法)이었지요. 당시 소승은 그것을 거사가 읽고 암암리에 마도에 들어서 더욱더 깊이 빠지게 되자 탄식해마지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안 됐다는 생각에 거사가 종종 책을 꺼내는 곳에다가 한 권의 법화경(法華經)과 한 권이 잡아함경(雜阿含經)을 놓아 거사가 볼 수 있도록 했소. 그러니까 그 불경을 연구하고 참된 뜻을 깨닫기 바랐던 것이오. 그런데 거사는 무공에만 빠져 정통 불법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두 권의 경서를 한곳으로 밀어 붙이고 한 권의 복마장법(伏魔杖法)을 찾아 내었소. 고해(苦海)에 빠져들게 되었으니 어느 날에 고개를 되돌릴 수 있으랴!

소원산은 그가 삼십 년 전 자기가 장경각에서 밤중에 한 수작을 조금도 틀리지 않게 말하는 것을 듣자 점차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노승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모용박을 쳐다보았다. 모용박은 그의 눈초리가 둔하고 사물을 곧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듯하면서도 자기 마음속에 숨겨진 비밀을 모조리 그리고 똑똑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그만 마음속으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금할 수 없었고 온몸이 크게 부자연스러워졌다.

이때 노승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모용 거사는 선비족이라 하지만 강남에서 수 대에 걸쳐 살아 왔소이다. 노승은 처음 거사가 남쪽 송나라의 문채풍류(文采風流)에 접하게 되어 물이 들었으리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거사는 장경각으로 와서 우리 조사의 미언법어(微言法語)와 역대 고승들의 어록심득(語錄心得)을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한 권의 점화지법(점花指法)을 뽑았소. 옛날 사람 가운데 구슬로 관을 짜서 천년 동안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소이다. 두 분의 거사는 당금 세상의 고인인데도 그와 같이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다니, 아, 자기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다 해만 입힐 뿐 유익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소이다.

모용박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자기가 처음 장경각으로 뛰어들어 처음 본 무공비급은 확실히 점화지법이었다. 당시 그는 사방을 자세히 살폈으며 장경각에 달리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도 있는데 이 노승은 어째서 친히 목격한 양 말하는 것일까?

이때 노승은 다시 말했다.

거사는 소 거사보다도 더욱 욕심이 많았소이다. 소 거사가 익힌 것은 그저 소림파가 지금 지니고 있는 무공을 어떻게 하면 제압할 수 있을까 하는 데에 그쳤지만 모용 거사는 본사의 칠십이 절기를 모조리 들고 가 사본을 만들지 않았소? 사본을 만든 이후에야 다시 장경각으로 들어와서는 원서를 되돌려 놓았소. 아마 그 동안 거사께서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칠십이 절기를 융회관통(融會貫通)시키고자 했으니 어쩌면 이미 영랑에게 전수했는지도 모르겠구려.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는 시선을 모용복에게로 던졌다. 그런데 한 번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가 구마지를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영랑은 나이가 아직도 어리기 때문에 공력이 부족하여 소림 칠십이 절기를 연마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알고 보니 다른 한 분의 친족 고승에게 전수해 줬구려. 대륜명왕, 그대는 틀렸소. 모조리 틀렸소. 순서를 바꾸었기 때문에 조만간 큰 화를 당하게 되었소이다.

구마지는 한 번도 장경각으로 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노승에 대해서 공경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무엇이 순서가 잘못되었고 조만간 큰 화를 당한단 말이오? 대사의 말은 남에게 겁을 주자는 게 아니겠소?

그 노승은 말했다.

겁을 주자는 것이 아니외다. 명왕, 그대는 아무쪼록 그 한 권의 역근경을 나에게 되돌려 주시오.

구마지는 이때서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철두인으로부터 빼앗은 역근경을 알고 있을까? 그런데 되돌려 달라니 어찌 이토록 쉬운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그는 입으로는 강경하게 나왔다.

뭐가 역근경이란 말이오? 대사의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구려.

노승은 말했다.

본파의 무공은 달마 조사로 부터 전해진 것이외다. 불문의 제자가 무공을 익히는 것은 그 목적이 바로 몸을 건강하게 하는 데 있고 법을 지키고 마(魔)를 제압하자는 데 있소이다. 어떤 무공을 연마하든 간에 마음속으로 자비롭고도 어질고 착한 생각을 품어야 하오. 만약 불교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지 않고 무공을 연마한다면 반드시 자기의 몸을 해치게 될 것이오. 무공을 연마하면 연마할 수록 그 상처는 깊어진다오. 만약 연마하는 것이 그저 주먹질, 발길질이나 하고 무기나 암기를 쓰는 외문(外門)의 무공이라면 대수롭지 않아 그 자에게도 해가 미미하오. 그리하여 몸만 강건하다면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소이다......

바로 이때 아랫층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이층으로 걸어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팔구 명의 승려들이 장경각 위로 올라왔다. 앞장을 선 소림파의 두 분 고승은 바로 현 자 항렬의 현생(玄生)과 현멸(玄滅)이었다.

그 뒤로는 바로 신산 상인, 도청 대사, 관심 대사 등 외부에서 온 고승들이었다. 곧이어 천축의 철라성과 파라성 사형제, 현 자 항렬의 현구(玄垢), 현정(玄淨) 두 분의 승려가 따르고 있었다.

뭇 승려들은 소원산 부자와 모용복 부자, 구마지 등 다섯 사람이 장경각에서 얼굴이 낯선 노승의 말에 조용히 귀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고 모두 다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승려들은 하나같이 수양이 깊은 사람들이라 그 즉시 앞으로 나와 방해를 하지 않고 한 옆에 서서 노승이 뭐라고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그 노승은 뭇 승려들이 올라오는 것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만약 본파의 상승무공들, 예를 들자면 점화지, 다라엽지(多羅葉指), 반야장 따위를 연마하되 매일같이 자비로운 불법으로 보강시켜 주지 않는다면 포악한 기상이 심장으로 들어가 더욱더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이고 어떤 외부에서 들어오는 독보다 백 배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될 것이오. 대륜명왕은 원래 우리 불문의 제자로서 불법을 깊이 연마했다고 할 수 있으며 제대로 기억하고 암송할 뿐만 아니라 그 뜻을 명확히 분별하는 데 있어 당금 세상에서 무상(無上)이라 할 수 있소이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된다면 아무리 불교의 전적에 통달하고 능변을 토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그 상승무공을 연마할 때 심어진 포악한 기상을 시종 해소시킬 수 없을 것이외다.

뭇 승려들은 몇 마디를 듣고 이 노승의 말에 커다란 뜻이 담겨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몇 사람이 합장하고 탄식을 불어냈다.

아미타불, 선재로다. 선재로다.

노승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소림사가 세워진 지 천 년이 되었으나 오로지 달마 조사 한 분만이 여러 가지 절기를 겸비했을 뿐 그 이후 어느 한 분의 고승도 여러 가지의 무공에 통달할 수 없었는데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칠십이 절기의 전적은 줄곧 이 장경각에 놓아 두고 있었으면서 문인 제자들이 뒤적이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소? 명왕은 그 이유를 아시오?

구마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것은 귀찰의 일인데 외부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소?

현생, 현멸, 현구, 현정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이 노승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바로 본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승려인데 어찌하여 이토록 깊은 견식과 수양을 쌓게 되었을까?"

일을 하는 승려들은 소림사의 승려이기는 했으나 머리만 깎았다 뿐이지 사부를 모시지도 않았고 무공도 전수받지 않았으며 참선을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현, 혜, 허, 공의 배분에 따른 법명을 얻을 수도 없었다.

그저 불경을 외우고 부처님에게 절을 하는 이외에는 불이나 지피고 밭을 갈고 청소나 하고 흙일이나 목공의 거치른 일들을 했다. 그런데 그 노승의 언변이 고아하고 식견이 탁월하여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노승은 계속해서 말했다.

본사 칠십이 종의 절기 가운데 어느 한 가지의 무공도, 모두 사람을 해치고 급소를 찌를 수 있으며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절기는 그에 상대되는 자비로운 불법으로 해소시켜야 하오. 이 도리는 본사의 승려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알고 있지는 못하외다. 다만 한 사람이 너댓 가지의 절기를 익히게 된 이후에는 선리(禪理)의 터득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장애를 받게 되오. 우리 소림파에서는 이를 무학장(武學障)이라고 하는데 다른 종파의 지견장(知見障)의 도리와 똑같소. 불법은 세상 사람들을 건지는 데 그 목적이 있지만 무공은 살생에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하오. 따라서 두 가지는 서로 어긋나는 길을 걷고 있소. 오로지 불법이 고명하면 고명할수록 자비로운 생각이 더욱더 왕성해지게 되고, 따라서 무공 절기도 더 많이 연마할 수 있게 되는 것이외다. 그러나 수위가 그토록 높아진 경지의 고승은 그와 같이 갖가지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요령을 배우려고 하지 않소이다.

도청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노사부의 말씀을 듣고 보니 소승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소이다.

노승은 합장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노납이 잘못 말한 점은 여러분들께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오.

뭇 승려들은 일제히 합장했다.

사부님께서는 더욱더 불법을 설명해 주십시오.

구마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림사 칠십이 종 절기는 모용 선생에 의해 절취되어 밖으로 누설되었다. 소림사의 뭇 승려들은 속으로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나 어쩔 수 없기 때문에 한 노승을 보내 이와 같은 수작을 벌여 외부 인사들로 하여금 가히 그들 문중의 무공을 익히지 못하도록 속임수를 쓰는 것이겠지. 흐흐흐. 이 구마지가 그토록 쉽게 넘어갈 것 같으나?"

그 노승은 다시 말했다.

본사 가운데는 물론 불법 수위가 부족하면서도 억지로 상승무공을 더 많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소이다. 그러나 주화입마(走火入魔)하여 내상을 입었소. 본사의 현징 대사는 초범입성의 무공에서 으뜸가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했소. 그러나 그는 하루 밤 사이에 갑자기 근맥이 모조리 절단되어 폐인이 되다시피 했는데 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외다.

현생과 현멸 두 사람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말했다.

대사, 현징 사형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소이까?

노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늦어서 구할 수가 없소이다. 과거 현징 대사가 장경각에서 무학전적을 취하게 되었을 때 노납은 세 번이나 그를 깨우쳐 주려고 했소이다. 그러나 그는 시종 깨닫지 못했소이다. 이제 근맥이 모두 절단되고 말았으니 어떻게 다시 이을 수 있겠소? 기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며 색 그 자체가 상처를 입게 하는 바이외다. 무공을 연마하지 않고 불법을 열심히 닦아 크게 깨우칠 수 있다면 전화위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따라서 두 분 대사의 소견은 현징 대사보다도 못하다고 할 수 있소이다.

현생과 현멸은 일제히 말했다.

예, 알려 주셔서 정말 고맙소이다.

별안간 찍찍찍, 하는 세 번의 가벼운 음향이 울려퍼졌다. 음향이 울려퍼졌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현생 등은 바로 본문의 무상겁지의 무공이라는 것을 알고 일제히 구마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구마지는 얼굴 빛이 달라져 있었으나 억지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구마지는 들으면 들을수록 승복할 수 없어서 생각했다.

"당신은 소림 칠십이 종의 절기를 일제히 배울 수 없다고 했는데 나는 이미 모조리 배우지 않았소? 그런데 어째서 근맥이 일제히 동강이 나는 변이 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는 두 손을 소맷자락 안에 숙기고서는 암암리에 무상겁지를 펼쳤다. 그리고 귀신도 모르게 노승에게 퉁겨 보냈던 것이다.

한데 지력이 그 노승 앞 석 자 되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마치 한겹의 부드럽기 그지없고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장벽에 부딪힌 듯 찍찍, 하는 몇 번의 소리가 나며 지력은 그만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며 퉁기듯 되돌아 오는 법도 없었다.

구마지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저 노승은 정말 약간의 재주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지? 결코 괜히 큰소리를 쳐서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은 아니구먼."

이때 그 노승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계속 말했다.

두 분은 일어나시오. 노납은 소림사에서 여러 대사들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몸인데 두 분이 이와 같이 대례를 하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소?

이때 현생과 현멸 두 고승은 한 가닥의 부드러운 기운이 자기네들의 손과 팔을 가볍게 받들어 올리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노승은 손을 뻗치거나 소맷자락을 떨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두 사람은 모두 놀람과 의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노승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본사 칠십이 절기는 모두 다 체(體)와 용(用)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소이다. 체는 내력의 본체이고 용은 응용하는 요령이외다. 소 거사, 모용 거사, 대륜명왕, 천축 파라성 사형은 이미 상승의 내공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본사에 와서 익힌 것은 칠십이 절기의 응용 요령을 익히고자 한 데 불과한 것이니 해를 입었다하더라도 일시에 드러나지 않소이다. 명왕이 연마한 것은 본래 소요파의 소무상공이 아니오?

구마지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가 소요파 소무상공을 훔쳐 배운 것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이 노승은 어떻게 알아보는 것일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그는 모든 것을 환히 깨달을 수 있었다.

"허죽이 조금 전에 나와 싸울 적에 사용한 것은 바로 소무상공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말했다.

소무상공은 원래 도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최근에 이르러 불문의 제자들도 습득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자꾸 변하므로 이미 불가와 도가 두 집안의 특장을 한 몸에 집대성하게 되었죠. 귀사에도 이 무공에 대하여 깊은 조예를 쌓은 고수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노승은 약간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소림사에도 소무상공을 아는 사람이 있소? 노납은 오늘 처음으로 그와 같은 말을 듣는구려.

구마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이 꽤 그럴싸하군."

그는 빙그레 웃었다. 노승은 계속하여 말했다.

소무상공으로 말하면 정묘하고 또한 미묘하다고 할 수 있으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소이다. 이를 기틀로 삼게 된다면 본사의 칠십이 절기를 모두 응용할 수 있소. 그러나 비슷하게 펼칠 수 있을 뿐 꼭 그대로 펼칠 수는 없을 것이외다.

현생은 고개를 돌리고 구마지에게 말했다.

명왕은 스스로 폐파 칠십이 절기를 겸비했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식으로 겸비했구려.

그 어조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그 노승은 다시 말했다.

명왕이 만약 소림파 칠십이 절기의 사용법을 연마한다면 그 상처는 잠복하게 되어 나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일시지간에 본래의 원기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을 것이외다. 그러나 명왕의 승읍혈(承泣穴)에 주홍 빛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고 문향혈(聞香穴)에는 은연중 자기(紫氣)가 감돌게 될 것이며 협거혈(頰車穴)의 근맥이 경련을 일으키게 되었을 것이오. 이 여러 가지의 증상은 명왕이 바로 소림 칠십이 종의 절기를 훔친 이후에 억지로 본사의 내공 비급인 역근경을 연마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외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마지는 수개월 전 철두인으로부터 역근경을 빼앗은 이후 그것이 무학의 지보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조용한 곳을 찾아 연마를 하게 되었다.

그는 경서에 씌어져 있는 법문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뜻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연마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연마해도 시종 진도가 없었다. 아마도 상승의 내공이라 조석지간에 효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인가 보다고만 생각했었다.

소림사의 역근경은 천룡사의 육맥신검과 함께 명성을 날리는 무공이었다. 그리고 모용박은 이 두가지의 무공을 무학 가운데서 지고무상의 두 커다란 보물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칠 년이고 십년이고 연마를 해야만이 깨닫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역근경을 연마할 때 마음이 번거로워지고 초조해지며 두서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노승의 말은 거짓이 아니라 정말 순서를 잘못 바꾸었기 때문에 조석지간에 큰 화를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마지는 생각했다.

"내공을 연마하다가 잘못하여 주화입마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내외의 무학에 오묘한 정도를 정통해 있는데 어찌 일반 문인들과 견줄 수 있으랴? 이 노승은 큰소리를 치고 있는데 내가 만약 그의 간계에 넘어간다면 구마지의 영명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노승은 구마지가 얼굴에 처음에는 근심의 빛을 띄웠으나 곧 눈썹을 곤두세우고 온 얼굴 가득히 자만에 빠지는 모양을 보았다. 그리하여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소원산에게 말했다.

소 거사, 그대는 근래 아랫배의 양문(梁門)과 태을(太乙)의 두 혈도가 은근히 아파오는 것을 느낄 수 없었소?

소원산은 전신을 흠칫 했다.

신승께서는 잘 보셨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노승은 말했다.

그대의 관원혈(關元穴)이 쩌릿한 감은 최근에 이르러 어떻게 되었소?

소원산은 더욱더 놀람과 의아함을 금할 수 없다는 듯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찌릿한 감은 십년 전 손가락 크기 정도였는데 지금은......지금은 찻잔만큼 크게 번지게 되었소이다.

소봉은 그 말을 듣고 부친의 세 곳 요혈에 그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바로 소림사의 절기를 억지로 연마한 까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부친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그 증상은 이미 다년간 그를 곤혹스럽게 했으나 시종 제거할 수 없어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가 노승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말했다.

신승께서 가친의 변고를 아셨으니 아무쪼록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해 주십시오.

노승은 합장을 하며 반례하고 말했다.

시주는 일어나시오. 시주는 정말 어질고 착한 분이외다. 천하창생을 마음속에 두고 있으며 사사로운 원한으로 송나라와 요나라의 군사와 백성들을 해치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커다란 인의를 지키려고 하는 분이라면 어떠한 분부라 하더라도 노납은 받들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러니 너무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소이다.

소봉은 크게 기뻐서 다시 두 번 절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노승은 소원산에게 말했다.

노납은 노 시주에게 잘못을 뉘우치라고는 할 수 없소. 그러나 노 시주의 상처는 소림파의 무공을 연마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니 이를 해소하려면 반드시 불법에서 찾아야 할 것이오.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 노승은 고개를 돌리고 모용박에게 말했다.

모용 노 시주는 죽음을 초개와 같이 여기니 노납이 쓸데없는 말을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노납이 방법을 일러 주어 노 시주로 하여금 양백(陽白), 염천(廉泉), 풍부(風府) 세 곳의 혈도가 매일 세 번씩 바늘로 찌르듯 전해지는 고통을 없애 준다면 어찌 하시겠소?

모용박의 안색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그와 같이 무공이 고심한 사람은 귓가에 갑자기 들려오는 천둥치는 소리라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고 심지어 잇따라 천둥 소리가 열 번 터진다 하더라도 그저 하느님이 방귀를 뀌는 것 같다고 하며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노승의 평범한 몇 마디의 말에 그의 간담은 서늘해지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두 번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양백, 염천, 풍부 세곳의 혈도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다시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본래 이 시각은 아파야 할 시각이 아닌데 심신이 크게 충격을 받게 되자 그 아픔이 갑자기 찾아들었던 것이다. 즉시 그는 이빨을 악물며 참았다. 그러나 이빨을 악무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이빨이 서로 맞부딪히며 나는 소리는 그야말로 그를 낭패한 경지로 몰아 세웠다.

모용복은 평소 부친이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욕이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그는 죽었으면 죽었지 남 앞에서 모욕을 당하거나 창피한 꼴을 당하려고 하지 않는 성질이었다.

모용복은 즉시 소봉 부자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청산은 언제나 푸르고 녹수는 언제나 흐르는 법, 오늘은 잠시 헤어지도록 합시다. 두 분이 우리 부자를 찾아 원한을 갚겠다면 우리는 고소 연자오에 있는 삼합장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소이다.

그리고 손을 뻗어 모용박의 오른손을 잡고 말했다.

아버님, 우리는 가죠.

노승이 외쳤다.

그대는 영존이 그와 같이 뼈를 에이는 듯한 고통을 당하는데도 참을 수 있단 말인가?

모용복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급히 모용박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겨 놓으려 했다.

소봉은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로 떠나겠다는 것이오? 이 세상에 이토록 수월한 일이 어디 있소? 그대 부친의 몸에 병이 있으니, 대장부는 남이 위급한 처지를 타지 않는다고, 그는 놓아줄 수 있지만 그대는 아무런 병이나 통증이 없지 않소.

모용복은 울화가 치밀어 호통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나는 소 형의 절초를 가르침받겠소.

소봉은 더 말하지 않고 휙, 하니 일 장을 후려쳤다. 강룡십팔장 가운데의 일초를 펼쳐서 모용복을 맹렬히 격파했다.

그는 장경각의 지세가 협소하고 고수들이 많이 모여 있는 터라 오래 싸우기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십성의 공력을 돋우고 단 몇 장에 적의 목숨을 빼앗을 결심이었다. 모용복은 그의 장세가 흉악한 것을 보고 즉시 한평생 쌓은 공력을 돋우어 두전성이의 수법으로 해소시키려 했다.

노승은 두 손을 합장하고 말했다.

아미타불, 불문의 성지이니 두 분 시주는 함부로 쓸데없는 망동을 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가 두 손을 그와 같이 합장하게 되자 한 줄기의 세찬 힘이 무형의 높다란 담장을 쌓아 놓는 듯 소봉과 모용복 사이를 막아 버리고 말았다.

소봉의 산이라도 무너뜨리고 바다라도 뒤엎어 놓을 듯한 장력은 그 담장에 부딪히게 되자 대뜸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소봉은 속으로 흠칫했다. 그는 평생 적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노승의 공력은 자기보다 훨씬 강한 것이 아닌가. 노승이 손을 쓰려 하는 이상 오늘 이 원수를 갚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친의 내상을 생각하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불초는 오랑캐 땅의 필부에 지나지 않으며 한 야인에 불과하여 예의를 모릅니다. 신승의 위엄을 거슬린 점, 용서해 주십시오.

노승은 미소했다.

별말씀을 다 하시오. 노승은 소 시주를 무척 존경하오.

소봉은 말했다.

아무쪼록 신승께서는 가친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시오. 여러 가지 벌은 불초가 모두 받겠으며 만 번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 노승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노납은 이미 말하지 않았소? 소 노시주의 내상을 해소시키려 하면 반드시 불법에서 찾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바로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부처님은 바로 깨달음이외다. 다른 사람은 그저 지도를 할 수 있을 뿐 대신 수고를 할 수는 없는 일이외다. 내 노시주께 한 마디 묻겠소. 만약 그대에게 상처를 치료할 능력이 있다면 모용 노시주의 내상을 그대는 대신 치료해 줄 수 있겠소?

소원산은 어리둥절해졌다.

내가......내가 모용 늙은......노필부의 상처를 치료한다구요?

모용복은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는 말조심하시오!

소원산은 이를 갈았다.

모용 노필부는 나의 사랑하는 처를 죽였고 나의 일생을 망쳐 놓았소.

노승은 말했다.

그대는 모용 노시주가 비명횡사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면 마음속의 원한을 해소시킬 수 없겠소?

소원산은 말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노부가 삼십 년 동안 밤낮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그 피맺힌 원한을 갚는 것이었소이다.

노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쉬운 노릇이오.

그는 한 걸음 다가서더니 손을 뻗쳐 모용박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모용박은 처음 노승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가 손을 뻗쳐 자기의 정수리를 치려는 것을 보고 왼손을 들어 막으려고 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무공이 너무나 두려워 손을 쳐든 이후 잇따라 몸을 뒤로 날렸다.

고소 모용씨 집안의 가전무학은 그야말로 비범한 데가 있었다. 거기다가 다시 소림사의 칠십이 절기를 익혔으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꼴이었다.

손을 쳐들고 몸을 뒤로 날리는 것은 평범하게 보였지만 기실 그 일 장으로 천하의 온갖 공격을 막을 수 있었으며, 그 한 번 물러섬으로써 세상의 어떠한 추격도 피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수세의 엄밀함과 표일함은 극치에 도달하여 더 보탤래야 더 보탤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장경각의 뭇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학의 고수였다. 그와 같은 이 초를 펼치는 것을 보고 모두 암암리에 갈채를 보냈다.

소원산 부자도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노승이 가볍게 후려치는 순간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정확히 모용박의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을 격타했다. 모용박이 막으면서 물러선 이 초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백회혈은 사람의 몸에서도 가장 요긴한 곳이었으므로 전혀 무공을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얻어맞게 된다면 상처를 입을 우려가 있었다.

노승이 일격에 적중시키자 모용박은 전신을 흠칫하더니 대뜸 기절해서는 뒤로 벌렁 쓰러졌다.

모용복은 깜짝 놀라 달려들어 부축하며 부르짖었다.

아버님, 아버님!

그러나 그의 부친은 입과 눈을 꽉 다물고 있었고 코에서 숨을 내쉬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손을 뻗쳐 심장 쪽을 만져 보았다. 심장도 멎어 있었다. 모용복은 울부짖었다.

그대......그대......이 늙은 도적 같은 화상아!

그는 부친의 시체를 기둥에 기대어 놓고는 몸을 날려 두 손을 일제히 뻗쳐 노승을 맹렬히 후려치려고 했다.

노승은 듣지도 보지도 않은 듯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용복의 두 손이 노승의 몸 앞 두 자쯤 되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별안간 다시 한 가닥 무형의 담장에 부딪힌듯,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기체로 이루어진 담장에 되퉁기듯 밀려나 그만 등덜미를 한채의 서가에 부딪히고 말았다.

본래 그의 공격하는 기세가 맹렬했으므로 반탄력 또한 매우 날카로우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장력은 그 무형의 담장에 모조리 해소된 듯했으며 그런 연후에 그를 가볍게 밀어젖힌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등줄기가 서가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서가도 무너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가 위에 잔뜩 꽂혀 있는 경서들도 한 권도 떨어지지 않았다.

모용복은 무척 기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친이 돌아가신 데 대해서 마음 아파했지만, 노승의 무공이 자기보다 십 배 더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미친 듯 공격을 해보았자 끝내는 그를 어찌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즉시 서가에 몸을 기댄 채 짐짓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으로 어떻게 하면 의표를 찌른 암습을 가해 성공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 노승은 소원산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소 노시주는 친히 모용 소시주가 비명에 돌아가시는 것을 봐야 그 동안 쌓아 원한을 가라앉힐 수 있다고 했소. 이제 모용 노시주는 죽었소. 소 노시주의 그 원한은 가라않았소?

소원산은 노승이 일 장으로 모용박을 격살하는 것을 보고 의아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입을 벌린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삼십여 년간 그는 온갖 생각을 다 짜내어 처를 죽인 원한, 자식을 빼앗긴 원한을 갚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 일년 사이에 모든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는 과거 안문관의 사건에 참여했던 중원의 호걸들을 일일이 죽였으며, 현고 대사와 교삼괴 부부 마저도 그의 손에 죽고 말았다.

그 후 통솔자가 바로 소림사 방장 현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천하 영웅들앞에서 현자와 섭이랑과의 간통 사실을 폭로해 현자로 하여금 명성이 땅에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하여 현자는 자결하고 말았으니 이 원한은 거의 다 갚은 셈이 되었다. 그러나 현자는 죽을 때도 광명정대함을 잃지 않고 영웅 기개를 보여 주어 소원산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은연중 일이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거짓 소식을 전하고 참변을 일으킨 간악한 자가 바로 자기와 함께 소림사에 잠복하여 자기와 세 번이나 싸웠으나 결국 승부를 낼 수 없었던 회의승 모용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노기를 모조리 그 사람에게 기울여 그야말로 그의 살을 뜯어먹고 그의 가죽을 벗겨 이부자리로 삼고 싶었으며 그의 근을 뽑고 뼈를 불살라야 속이 시원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무명의 노승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 장으로 자기의 원수를 쳐죽여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는 삽시간에 자기가 구름 위에 떠 있는듯, 두둥실 허공을 헤매는 듯한 감을 느꼈으며 이 세상에는 이제 발을 딛을래야 발을 딛을 만한 곳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소원산은 처와 어릴 적부터 소꼽친구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혼례를 올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아들까지 두게 되어 더욱 사람됨이 시원시원해지게 되었고 의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안문관 밖에서 참사를 당하였고 골짜기 아래로 떨어졌으나 죽지 않게 되자 사람됨이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공명이나 지위, 그리고 재물은 그의 눈에서는 티끌과 같이 보였을 뿐이고 밤 낮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원수를 친히 갚아 쌓이고 쌓인 한을 푸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본래 호탕하고 성실하면서도 소박했으며 아무것도 거리낄 바 없는 새외의 호걸이었다. 그러나 가슴속에 원한이 충만하게 되자 성격은 포악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소림사에서 잠복한 지 수십 년이나 되고 낮으로는 웅크린 채, 숨어 살며 밤에 나와 무공을 열심히 연마하게 되었는데 일 년 동안에 다른 사람과 한 두 마디 말도 나누지 않는 터라 그의 성격은 더욱 크게 변하게 되었다.

별안간 수십 년 동안 이를 갈아온 원수들이 하나하나 자기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해야 하겠으나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처량함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없어지고 말았으니 살아 있어도 헛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때 그는 곁눈질로 기둥에 기대어 세워져 있는 모용박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화스러웠으며 입가에는 미소마저 띄우고 있어 마치 죽은 것이 살아 있는 것보다 더욱 즐거운 듯했다.

소원산은 마음속으로 오히려 그가 더 복을 받고 태어났다고 부러워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떠났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이 죽은 이후 무엇을 따지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원수들은 모조리 죽었다. 나의 원한도 완전히 갚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대요나라로 돌아가야 하는가? 돌아가서 무엇을 한다는 것인가? 봉이를 데리고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떠돌이 신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그것은 또 무엇 때문이지?"

이때 노승은 말했다.

소 노시주, 이제 어디로 가실 것인지 마음대로 가시구려.

소원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나는 어디로 가야 할런지......나는 갈 곳이 없구려.

노승은 말했다.

아니외다. 설사 그대가 그를 때려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도 그를 때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소이다.

노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러나 이 모용 소협은 부친이 돌아가신 데 대해 슬픔을 느끼고 노납과 그대를 찾아 원한을 갚고자 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소원산은 모든 일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대화상은 나를 대신하여 손을 쓴 것이외다. 모용 소협이 만약 부친의 원한을 갚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나를 죽이도록 하시오.

곧이어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그가 나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이 오히려 좋겠군. 봉아, 너는 대요나라로 돌아가거라. 우리들의 일은 끝났다. 이제 끝까지 온 셈이 되었구나.

소봉은 부르짖었다.

아버님, 아버님은......

노승은 말했다.

모용 소협이 만약 그대를 죽이게 된다면 그대 아들은 또 반드시 모용 소협을 죽여 그대의 원한을 갚고자 할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서로 원한만 깊어질 것이며 언제 끝이 나겠소? 차라리 천하의 모든 죄를 나의 탓으로 돌리도록 합시다.

그는 한 걸음 나가 손을 들고는 소원산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소봉은 깜짝 놀랐다. 노승이 일 장으로 모용박을 죽일 수 있었으니 부친마저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큰소리로 호통쳤다.

손을 멈추시오!

소봉은 두 손을 일제히 뻗쳐 내어 그 노승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그는 이 노승에 대해서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친을 구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승은 왼손을 뻗쳐 소봉이 두 손으로 밀어붙힌 힘을 막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여전히 소원산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소원산은 전혀 방어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노승의 오른손이 그의 정수리를 때리려고 하는 그 순간 노승은 갑자기 일성을 대갈하며 오른손을 바꾸어 소봉을 후려쳤다.

소봉은 급히 막으며 부르짖었다.

아버님, 빨리 떠나십시오! 빨리 떠나십시오!

그런데 그 노승의 오른손 일 초는 중도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순전히 허초로서 그저 소봉의 두 손에 실린 힘 가운데 일 장의 힘을 끌어냄으로써 자기에게 밀려오는 힘을 감소시키자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소봉이 왼손을 휘두르자마자 그 노승의 오른손은 즉시 안으로 원을 그리게 되었고 팍,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어느덧 소원산의 정수리를 내려치고 말았다.

바로 이때 소봉의 오른손이 곧이어 뻗쳐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노승의 가슴팍을 모질게 내지르게 되었다. 곧이어 우지끈 뚝, 하는 소리와 더불어 근골이 몇 개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승은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매우 뛰어난 무공이군, 강룡십팔장은 과연 천하제일이외다.

그러나 그 "다"자라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입으로부터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소봉은 일순 멍청해졌으나 재빨리 다가가서 부친을 부축했다. 그런데 그의 호흡은 이미 멎어 있었고 심장도 다시 뛰놀지 않았다.

이미 숨을 거둔 것이 아닌가? 그는 일시 슬픔과 아픔에 복받치게 되었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노승은 말했다.

때가 되었으니 이제 가야지.

그리고 오른손으로 소원산 시체의 뒷덜미를 잡고 왼손으로 모용박 시체의 뒷덜미를 잡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놓는데 마치 허공을 날아서 걸어가듯 몇 걸음 걷더니 곧장 창문 밖으로 나갔다.

소봉과 모용복은 일제히 호통을 내질렀다.

무엇......무엇하러 가는 것이오?

동시에 장력을 쏟아 노승의 등을 후려쳤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 두 사람은 세불양립으로서 너 죽고 나는 살아야겠다는 식으로 싸우려고 들었다.

이때 두 사람의 부친이 쌍쌍이 피해를 입게 되자 똑같이 적개심을 품게 되고 손을 합해서 노승을 죽이려 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장력이 합해지게 되자 그 힘은 더욱 엄청났다. 그 노승은 두 사람의 장풍이 밀어내는 힘에 따라 마치 종이 연처럼 앞쪽으로 두둥실 수 장이나 날아갔다.

그런데도 그 노승은 두 손으로 여전히 두 구의 시체를 잡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세 사람의 몸뚱이는 두둥실 허공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소봉은 급히 몸을 날려 창밖으로 쫓아나갔다. 이때 노승은 손에 두 구의 시체를 들고서는 곧장 산 위로 올라갔다.

소봉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저 두세 번 발걸음을 빨리 할 수 있으면 노승을 뒤쫓아 잡을 것 같았다.

그런데 노승의 경신법은 기이하여 그가 한평생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으며 마치 요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소봉이 힘을 써서 달리면 달릴수록 얼굴에 와 닿는 산바람이 칼날같이 거세졌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기이하기 이를데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노승의 등뒤로 시종 이삼 장 정도 떨어져서 좀처럼 그 간격을 좁힐 수가 없었으며 잇따라 장력을 쏟아내었으나 여전히 허공을 후려치는 꼴이 되곤 했다.

노승은 황량한 산속에서 이리 돌고 저리 돌아 어느덧 숲속의 어느 평탄한 곳에 이르더니 두 구의 시체를 한 그루의 나무 아래에 놓았다. 그런데 그냥 놓는 것이 아니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자세로 놓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두 구의 시체 뒤에 앉아 두 손을 두 구 시체의 등에 각기 나누어 갖다댔다. 그가 막 자리에 앉자 소봉 역시 도달했다.

소봉은 그 노승의 행동거지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더 앞으로 나아가 손을 쓰지 않았다.

이때 노승이 말했다.

내가 그들을 들고 한동안 달린 것은 그들의 피를 돌게 하자는 것이었소.

소봉은 자기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죽은 사람의 피를 돌게 하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그리하여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되받았다.

피가 돌게 하다니요?

노승은 말했다.

그들은 내상을 심하게 입었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그들로 하여금 잠을 자도록 한 이후에야 다시 손을 써서 구할 수 있단 말이오.

소봉은 속으로 흠칫했다.

"설마하니 우리 아버님이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분은...... 이 분은 아버님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일까? 천하에 사람을 먼저 때려 죽이고 다시 상처를 치료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얼마 후 모용복, 구마지, 현생, 현멸 이외에 신산 상인 등이 차례로 도달했다. 그런데 이때 두구의 시체의 머리 위에서는 갑자기 한 가닥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노승은 두 구의 시체의 몸을 돌려서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도록 앉혔다. 그리고 그들의 네 손이 서로 상대방의 손을 잡아 쥐도록 만들었다.

모용복은 부르짖었다.

그대는......무엇 하자는 것이오?

노승은 대답하지 않고 두 구의 시체를 가운데 두고 천천히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면서 손을 뻗쳐 후려치곤 했는데 때로는 소원산의 대추혈을 후려치고 때로는 모용박의 옥침혈을 쳤다. 그렇게 되자 두 구의 시체 머리 위의 흰 김은 더욱 더 짙어져 갔다.

다시 한 잔의 차를 마실 시간이 흐르게 되자 소원산과 모용박의 몸뚱이가 미미하게 떨렸다.

소봉과 모용복은 놀람과 기쁨에 얽혀서 일제히 부르짖었다.

아버님!

소원산과 모용박은 천천히 눈을 떠 상대방을 한 번 쳐다보고 즉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소원산의 얼굴은 가득히 붉은 빛으로 덮혀 있었고 모용박의 얼굴은 은연중 푸르죽죽한 기운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닌가.

뭇 사람들은 이때서야 노승이 조금 전 장경각에서 두 사람을 후려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잠시 숨쉬는 것을 멈추게 하고 심장이 뛰지 않도록 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중대한 내상을 고치는 한 가지의 방법이기도 했다. 많은 내공이 고심한 인사들은 모두 다 귀식법이라는 것을 연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일 장을 가해 호흡을 멈추도록 하면서도 죽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노승이 온갖 정신을 기울여서 돌아가며 손을 쓰는 것을 보고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점차 소원산과 모용박 두 사람의 숨소리가 커져갔고 점점 갈수록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소원산의 얼굴 빛이 더욱 붉어지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금방이라도 빨간 핏방울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런 반면 모용박의 얼굴은 더욱더 시퍼렇게 변해가 파란 빛을 띠게 되어 무척 무섭게 보였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양기가 지나쳐 허열이 치솟아 오르기 때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음기가 너무 성해서 풍한(風寒)이 체내에 가득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별안간 그 노승은 호통을 내질렀다.

듣거라! 손을 서로 잡고 내식을 통하게 하여서는 음으로 양을 도우고 양기로서 음기를 해소하도록 해라. 천하를 주름잡겠다는 야심과 피맺힌 원한은 모두 다 흙으로 돌아갈 것이며 형체 없이 해소될 것이니라!

소원산과 모용박의 네 손은 본래 서로 쥐어져 있었다. 그런데 노승의 호통소리를 듣게 되자 불현듯 손에 힘을 주게 되었다. 각기 체내의 내식이 상대방쪽으로 몰려가게 되었고 서로 이를 알고 상대방의 양기와 음기를 서로 이끌어 자기의 부족함을 메우게 되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점차 붉은 빛이 가셔졌고 푸른 빛이 엷어졌다.

어느덧 안색은 창백해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뜨고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소봉과 모용복은 각기 부친이 눈을 뜨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이때 소원산과 모용박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더니 일제히 그 노승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승은 말했다.

그대들 두 사람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또 죽음에서 태어나기까지 한 번씩 오락가락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마음속에 무슨 미련이 남는가? 만약 이대로 죽게 된다면 대연나라를 또다시 세우고 처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는가?

소원산은 말했다.

제자는 헛되이 소림사에서 삼십 년간 화상 노릇을 했으나 그것은 전부 가짜로서 불문 제자의 자비로운 마음을 조금도 갖지 못했습니다. 아무쪼록 사부님께서 거두어 주십시오.

노승은 물었다.

그대는 처를 죽인 원한을 갚지 않으려고 하는가?

소원산 말했다.

제자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만약 나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가족이 모조리 한을 갚겠다고 목숨을 내놓으라 한다면 제자는 백 번 죽어도 모자랄 형편입니다.

노승은 모용박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모용박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서민이 흙과 같다면 제왕 역시 흙과 같습니다. 대연나라를 되세우지 못해도 헛것이고 나라를 세운다 하더라도 헛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노승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 대철대오했으니 선재로다!선재로다!

모용박은 말했다.

사부님께서 제자로 거두어 주시고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노승은 말했다.

그대들이 출가하여 중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소림사 대사들에게 직접 머리를 깍도록 해야 하네. 나에게 몇 마디 할 말이 있는데 그대들에게 들려 주도록 하지.

그는 단정히 앉아 설법을 시작했다.

소봉과 모용복은 부친이 꿇어앉는 것을 보고 덩달아 꿇어앉았다. 현생, 현멸, 신산, 도청, 파라성 등 노승들은 정묘한 점에 이르러 모두 흐뭇하게 되었고 존경하는 마음이 불현듯 치솟게 되어 하나같이 무릎을 꿇었다.

 

단예가 달려왔을 때 그 노승은 바로 뭇 사람들을 위해 불경의 뜻을 설파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노승의 맞은편으로 가서 노승의 얼굴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구마지가 갑자기 독수를 써서 그에게 해를 입히게 되었고 그는 그만 가슴에 그의 일초 화염도(火염刀)를 맞게 된 것이다.

현자는 말했다. [2143] 제목 : [김용] 천룡팔부(天龍八部) 44장 올린이 : 멀티피씨(김효범 ) 96/09/01 02:49 읽음 : 156 관련자료 없음 ------------------------------------------------------------------------------44. 미인을 구하건만 좋은 인연은 어디에 있는가?

(念枉求美春, 良綠安在)

단예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는데 얼마나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까? 다시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서 눈을 떴다.

먼저 보게 된 것은 천정 쪽에 매달려 있는 모기장이었다. 곧이어 자기가 침대 위 이불 속에 드러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일시 정신을 모두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애써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구마지의 암수에 당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어떻게 해서 침대 위에 눕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척 갈증을 느껴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곧 움직이자마자 가슴팍이 격렬하게 아파와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바깥 쪽에서 소녀의 음성이 들렸다.

"단 공자, 깨어나셨나요? 단 공자, 깨어나셨어요?"

그 어조는 기뻐하는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단예는 그 소녀의 음성이 퍽이나 귀에 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인지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곧이어 한 푸른 옷의 소녀가 급히 방으로 달려들어 왔다.

둥그런 얼굴에 입가에는 조그만 보조개가 폭 파여 있었다. 전에 무량궁에서 만났던 종영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보는 사람마다 죽인다는 종만구로서 단예의 부친인 단정순과는 깊은 원한을 맺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 계책을 펼쳐 단예를 해치려고 했었다. 그런데 단예가 석옥에서 걸어 나오게 되었을 때 옷자락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종영을 품에 안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사람을 해치려다가 자기를 해치게 된 종만구는 반쯤 울화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만겁곡 지하도에서 여러 사람이 잡아당기고 하는 바람에 단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적지 않은 사람들의 내력을 흡수하게 되었었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구마지에게 잡혀서 중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 헤어지고 나서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종영은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대는 벌써 나를 잊었겠지요? 저의 성이 무엇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지요?"

단예는 그녀의 그와 같은 표정을 보자 뇌리에 갑자기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무량궁 대청의 대들보 위에 앉아서 두 발을 까닥까닥 하며 입으로 씨앗을 깨물어 먹던 광경이었다.

그때 그녀는 초록색의 신발에 몇 송이 노란색의 조그만 꽃을 수놓은 신을 신고 있었다. 그와 같은 광경이 눈에 선하게 떠올라 단예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부르짖었다.

"그대의 노란 꽃을 수놓았던 초록색 신발은 어떻게 되었소."

종영은 얼굴을 다시 한 번 붉혔다. 그리고 무척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벌써 헤어졌는데도 아직도 기억하고 있군요. 그대는......그대는 역시 나를 잊지는 않았군요."

단예는 웃었다.

"한데 왜 씨앗을 먹지 않소?"

종영은 말했다.

"좋아요. 이 며칠 동안 그대가 조섭하는데 시중드느라고 정신없이 사람을 초조하게 해놓고서는 무슨 딴소리예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무슨 정신적인 여유가 있어 씨앗을 먹겠어요?"

그 한 마디를 하고 나니 자기가 너무나 자기의 감정을 드러낸 듯하여서 그만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단예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본래는 자기의 처라고 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녀 또한 자기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와 같은 생각을 떠올리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이, 그대가 어찌 이곳에 오게 되었지?"

중원 땅의 사람들은 누이동생을 누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나이 어린 여인을 향해서도 누이라고 했다.

종영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두 눈에 기쁨의 빛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그대가 만겁곡에서 나간 이후 다시 나를 보러 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로 원망스러웠어요."

단예는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나를 원망한다는 말이오?"

종영은 그를 곁눈질하면서 말했다.

"그대가 저를 잊었나 하고 원망한 거죠."

단예는 그녀의 눈에 정이 담뿍 담겨져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서 말했다.

"착한 누이군."

종영은 화를 내는 듯 또는 웃는 듯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토록 다정하게 구시면서 왜 한 번도 저를 보러 오지 않았어요? 저는......저는 초조해져서 당장 달려나와 그대를 찾아 나섰던 거예요."

단예는 물었다.

"우리 아버지와 그대 어머니 사이의 일을 그대의 어머니는 그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소?"

종영은 말했다.

"무슨 일 말이에요? 그날 밤 그대가 그대의 아버지를 따라 떠나신 이후 저희 어머님은 기절을 해 버렸어요. 그 후 줄곧 몸이 편찮아서는 괴로워했으며 저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더군요. 제가 어머니에게 말을 하도록 달래봤지만 어머님은 한 마디도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단예는 말했다.

"물론 그대가 모르는 것은 그대가 바로 나의......나의......"

종영은 대뜸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말했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날 석옥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그대는 나를 안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많은 사람을 대하게 되자 저는 죽고 싶도록 두려웠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어요. 그래서 눈을 감았죠. 그런데 그때 그대의 아버님의 말씀을 저는......저는 똑똑히 기억할 수 있어요."

그녀는 단예와 함께 그날 석옥 밖에서 단정순이 종만구에게 한 말을 기억할 수 있었다.

'영애는 이 석옥에서 내 아들인 단예를 시중들고 있었구려. 이토록 오랜 시일이 흐르도록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벌거숭이가 되어 한 칸의 방에 숨어서 무슨 좋은 일을 할 수 있었겠소? 내 아들은 진남왕의 세자이니 영애를 세자의 정비로 맞아들인다고는 할 수 없소. 하지만 삼처 사첩을 거느린다고 해서 안 될 것이 뭐가 있겠소? 이렇게 된다면 그대와 나는 사돈간이 되겠구려. 하하, 하하, 껄껄껄껄!'

단예는 그녀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지는 것을 보고 더듬거렸다.

"누이, 원래 그대는......아직도......이 중간의 까닭을 모르고 있었구려.....누이, 그거......안 될 일이야."

종영은 급히 말했다.

"목 언니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목언니는 어디 갔죠?"

단예는 말했다.

"그렇지 않소. 그녀......역시 나의......."

종영은 미소했다.

"그대 아버님은 삼처 사첩이라는 말을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에게 양보를 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그녀가 그토록 흉악하게 나오는데 내가 그녀와 다툴 수 있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단예는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고 또 가슴이 아파오는지라 지금으로서는 그녀에게 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물었다.

"그대는 어쩌다가 이곳으로 왔소?"

종영은 말했다.

"나는 줄곧 그대를 찾아 나섰던 거예요. 중원에서 이리저리 찾았지만 전혀 소식을 들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공교롭게도 그대의 제자인 악노삼을 만나게 되었죠. 그러나 그는 물론 알고 있지 못했어요.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상의를 하더군요. 각 처의 영웅 호걸들이 모두 소림사에 오게 되었으니 한 바탕 구경거리가 났다고 하면서 그들 역시 오겠다는 것이었어요. 그 악인 운중학은 그를 조롱하면서 십중팔구 악노삼의 사부를 만나게 될 거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악노삼은 크게 성질을 부리며 그대를 만나기만 하면 그대의 목을 비틀어 놓겠다고 했어요. 저는 기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해서는 살그머니 뒤따라 갔죠. 그러나 저는 악노삼과 운중학에게 발견될까봐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를 못했어요. 그저 산 아래에서 마구 걸음을 옮겨놓으며 보는 사람마다 그대의 행방을 물었어요. 그리고 그대에게 조심하라는 전갈과 함께 그대의 제자가 그대의 목을 비틀어 놓겠다고 하던 말을 전하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이곳에 한 채의 빈 집이 있는 것을 보고 들어와 머물게 된 거예요."

단예는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에는 풍상을 겪은 빛이 완연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 그녀의 얼굴은 그때 무량궁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전혀 근심걱정이 없는 그런 빛이 아니었다.

단예는 그녀가 어린 나이에 자기를 찾기 위해서 홀몸으로 강호에 떠돌아다니느라고 그 동안 많은 고통을 당했으리라는 생각과 더불어 자기에 대한 정은 실로 애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참을 수 없어진 그는 손을 뻗쳐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직이 말했다.

"착한 누이, 어쨌든 하늘이 불쌍히 여기시어 나로 하여금 그대를 또다시 만나게 해 주었구려."

종영은 미소했다.

"어찌 되었든 하늘이 불쌍히 여겨 저로 하여금 다시 그대를 만나게 해주었어요. 히히히, 이것이야말로 쓸데없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대가 나를 볼 수 있으면 자연히 그대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녀는 창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그대는 어쩌다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죠?"

단예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내 그렇지 않아도 그대에게 묻고자 하던 참이오. 내가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나는 그저 나쁜 화상이 갑자기 나에게 암산을 쓴 것을 기억할 수 있을 뿐이오. 나는 그의 형체없는 화염도에 맞아 무척 심한 상처를 입고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던 것이오."

종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 정말 이상하군요. 어제 황혼 무렵 제가 채소밭에 나가 야채를 뽑아서는 부엌에서 깨끗이 씻고 칼질을 한 후 삶으려고 했을 때였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방안에서 신음 소리가 났어요. 저는 깜짝 놀라 채소 자르던 칼을 들고 방안으로 달려들어 갔어요. 그러고 보니 침대 위에 어떤 사람이 자고 있지 않겠어요? 저는 잇따라 몇 번 물었어요. '누구예요? 누구예요?' 그러나 대답을 들을 수 없었어요. 나는 반드시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고는 칼을 들고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을 내려치려고 했어요. 다행히......다행히 그대는 하늘을 보고 누워 있었기 때문에 칼은 그대의 몸에 닿지 않았어요. 나는 이미 먼저 그대의 얼굴을 보았거든요...... 그때 나는......정말 하마터면 정신을 잃어버릴 뻔했으며 칼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것도 모르고 었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손을 ㅃ쳐 가만가만 자기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아마도 당시 정세가 매우 위험스러워 지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인 것 같았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곳은 소림사에서 멀지 않다. 아마도 내가 상처를 입게 된 이후 그 누가 나를 이곳으로 옮겨온 모양이구나.'

종영은 다시 자기의 말을 계속했다.

"저는 그대를 몇 번 불렀으나 그대는 신음 소리를 내뱉고서 나를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대의 이마를 만져 보니 몹시 열이 나더군요. 그리고 그제서야 그대의 옷자락에 많은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는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옷자락을 풀고 상처를 살펴보려고 했는데 상처는 잘 싸매져 있더군요. 저는 상처를 건드리게 될까봐 붕대를 감히 풀 수 없었어요. 한참 동안 기다려도 그대는 역시 깨어나지 않는 거예요. 저는 기쁘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단예는 말했다.

"그대에게 걱정을 끼쳐드려 정말 미안하구려."

종영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말을 했다.

"그대는 좋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대가 이토록 양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는 진작부터 그대를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제 나는 그대를 아랑곳하지 않겠어요. 그대가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아요. 어쨌든 나는 그대를 상대하지 않겠어요."

단예는 물었다.

"왜 그러오? 갑자기 화를 내시오?"

종영은 싸늘히 코웃음을 치더니 조그만 입을 삐죽이고 말했다.

"그대 자신이 잘 알고 있을텐데 묻기는 왜 물어요?"

단예는 급히 말했다.

"나는......정말 모르오. 착한 누이, 그대가 말해 보구려."

종영은 뾰로통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체, 누가 그대의 착한 누이란 말이에요? 그대는 꿈속에서 무슨 말을 했죠? 그대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 왜 나에게 묻는 거예요? 정말 뚱딴지 같구만."

단예는 급히 말했다.

"내가 꿈속에서 무슨 말을 했다는 겨요? 멍청한 상태에서 한 말은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것이오. 아, 생각났오. 나는 아마도 꿈속에서 그대를 보고 너무나 기뻐서 분수 없는 말을 해서는 그대의 비위를 거슬린 모양이구려."

종영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를 속이려는 거예요? 도대체 꿈속에서 어떤 사람을 만난 거예요?"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상처를 입은 이후 줄곧 인사불성이었소. 그래서 정말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구려."

종영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누가 왕 소저예요? 왕 소저는 누구예요? 어째서 그대는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그저 그 이름만 부르는 것이요?"

단예는 가슴이 쓰라려 오는것을 느끼며 물었다.

"내가 왕 소저의 이름을 불렀소?"

종영은 말했다.

"왜 부르지 않았겠어요?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도 불렀다니, 흥, 이번에 낫게 되었으니 또 다시 그녀를 생각하겠군요. 좋아요. 나는 가서 그대의 왕 소저로 하여금 그대의 시중을 들도록 하겠어오. 나는 상관하지 않겠어오."

단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왕 소저의 마음속에는 나와 같은 사람은 존재도 없소.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은 헛된 일에 불과하오."

종영은 말했다.

"그녀는 자기의 고종 오라버니를 좋아한다오. 그리고 나에게 대해서는 언제나 아랑곳하지 않는다오."

종영은 뾰로통한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말했다.

"천지신명에게 감사해야겠군요. 악인에게 어쨌든 악인이 있어서 괴롭히는군요."

단예는 말했다.

"내가 악인이요?"

종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한쪽의 아름다운 머리채를 흐트리며 웃었다.

"그대의 제자 악노삼은 대악인이 아니에요? 제자까지도 그토록 악한 것을 보면 사부도 당연히 더욱 악할 것이 아니겠어요."

단예는 웃었다.

"그럼 사모님은 어떻게 되오? 악노삼은 그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소?"

말이 나온 즉시 그는 속으로 크게 후회했다.

'내가 어째서 나의 친누이에게 이와 같은 못된 말을 하는 것일까.'

종영은 얼굴을 붉히며 쳇, 했으나 속으로는 흐뭇해져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가서는 한 그릇의 닭을 삶은 국물을 들고 와서 말했다.

"이 한 솥의 닭 삶은 국물을 반 나절이나 끓였어요. 그대가 깨어날 때까지 끓이느라고 줄곧 끓였단 말이에요."

단예는 말했다.

"정말 어떻게 사의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그는 종영이 닭 삶은 국물을 들고 오자 애써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그 바람에 가슴팍의 상처를 건드리게 되어 자기도 모르게 나직이 신음 소리를 냈다.

종영은 재빨리 말했다.

"일어나지 말아요. 내가 악인의 작은 사부님에게 먹여 드리도록 하지요."

단예는 말했다.

"악인의 작은 사부님이라고?"

종영은 말했다.

"그대는 대악인의 사부이니 그렇게 불러야 하지 않겠어요?"

단예는 웃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종영은 숟가락으로 뜨거운 김이 나는 국물을 떠서 그의 얼굴을 겨냥하며 짐짓 노한 듯 말했다.

"다시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내가 이 뜨거운 국물을 그대의 얼굴에 끼얹겠어요."

단예는 혀를 낼름 하고 말했다.

"하지 않겠소, 하지 않겠소. 악인의 큰 소저이시고 악인의 처녀 고모님이라 대단히 무섭다고 해둡시다."

종영은 훗, 하고 웃었다. 그러느라고 하마터면 국물을 단예의 몸에다 끼얹을 뻔했다.

그녀는 급히 정신을 가다듬고는 숟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국물이 아직도 뜨거운지를 알아본 연후에야 숟가락을 단예의 입쪽으로 내밀었다.

단예는 몇 숟가락의 국물을 받아 마셨다. 그녀의 얼굴이 노을 빛처럼 물들어 있고 입술 위에 가느다란 몇 방울의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때는 한창 유월의 더울 때라 그녀는 팔을 소맷자락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팔이 옥과 같이 고와 단예는 마음속으로 쏠리는 것을 금할 수가 없어 다부지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나의 친누이이다. 그녀는 나의 친누이이니까 별 상관이 없다마는......아, 만약 이때 나에게 국물을 먹이는 사람이 왕 소저라면 그녀가 먹이는 것이 창자를 썩게 만드는 짐독이라 하더라도 나는 즐겁게 받아 마실텐데.'

종영은 그가 멍하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이때 그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터라 미소를 떠올렸다.

"뭐가 그리 좋아서 보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끽, 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그리고 한 소녀의 음성이 들렸다.

"우선 우리 이 안에서 쉬도록 해요."

그러자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좋소. 정말 폐를 끼치는구려. 나는......그야말로 미안하기 짝이 없소."

그 소녀는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단예는 그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바로 아자와 개방의 방주 장취현인 것을 알았다.

그는 아직까지도 아자와 대면을 한 적이 없고 말을 한 적도 없으나, 주단신등이 알려 주었기 때문에 그 소녀가 바로 부친의 사생녀이고 또한 자기에게는 또 다른 누이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행히 그녀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을 두고 천지신명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 누이동생으로 말하면 어릴 적부터 성숙노인 문하로 들어가 사악한 버릇에 물들게 되어 일을 제멋대로 처리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진남왕부의 사대 호위 가운데 하나인 저만리도 그녀가 돋우는 화를 이기지 못해서 자살하다시피 했다고 하지 않던가.

단예는 어릴 적부터 저만리 등 사대 호위와는 무척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저만리의 죽음을 생각핼 때 그 우악스럽기만한 누이동생과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제 자기는 소봉을 도와 장취현의 적이 되었으니 지금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목숨을 건지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재빨리 손가락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서는 쉿, 하는 손짓을 했다.

종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닭국물을 든 채 소리가 조금이라도 날까봐 감히 탁자 위에 올려 놓지도 못했다.

이때 아자가 부르짖었다.

"이봐요! 사람이 있나요? 사람이 있어요?"

종영은 단예를 한 번 바라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이 아마도 십중팔구 왕 소저인 모양이다. 그녀는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와 함께 있기 때문에 단랑(段郞)은 그녀와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그녀는 왕 소저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척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기에 단랑이 그토록 넋을 빼앗겼는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감히 걸음을 떼어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단랑이 만약 그녀와 만나게 된다면 십중팔구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부르는 것을 내버려 두게 된다면 그녀는 자연히 고종 오빠와 떠나리라고 생각했다.

아자는 다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집안에서는 어찌 죽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아요?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이 아가씨는 그대의 집을 불태워 버리겠어요."

종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왕 소저는 거칠기 이를데 없구나.'

유탄지는 나직이 말했다.

"아무 소리 하지 마시오. 그 누가 오고 있소."

아자는 물었다.

"누구예요. 개방의 사람인가요?"

유탄지는 말했다.

"모르겠소. 하지만 너댓 사람은 되니 어쩌면 개방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소. 그들은 이쪽으로 오고 있소."

아자는 말했다.

"개방의 그 못난 장로들 가운데 전 장로를 제외하고는 반쪽도 좋은 사람이라고는 없어요. 그들은 이제 그대에게 반기를 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만약 그들에게 발견된다면 우리 두 사람은 야단나게 될 거예요."

유탄지는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아자는 말했다.

"방안으로 들어가 일시 피하도록 해요. 그대의 상처가 심하기 때문에 손을 쓸 수가 없어요."

단예는 암암리에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재빨리 종영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로 하여금 방법을 강구해서 피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산속의 농가는 초라했고 안쪽 방은 매우 협소했다.

들어오기만 한다면 발견될 것이고 실로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종영은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어디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발걸음 소리가 났다.

"아궁이 안으로 숨도록 해요."

그녀는 국그릇을 내려놓더니 단예의 좋다는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를 안고서는 아궁이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소실산 위는 가을이 되거나 겨울이 오면 무척 추웠다. 그래서 산속에 사는 사람들은 방 한쪽으로 침대 겸 방을 만들어 놓고 바로 그 아래쪽에다가 아궁이를 만들어 불을 지펴서는 방구들을 따끈따끈하게 데워 겨울철을 보내곤 했다.

이때는 한 여름철이라 물론 불을 지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궁이에는 재와 숯덩이로 가득차 있었다. 단예가 뛰어들자 얼굴과 코에는 먼지가 잔뜩 묻게 되었고 그만 재채기가 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참았다.

종영은 아궁이에 숨어서는 바깥 쪽을 내다보았다. 한 쌍의 자색 비단 신발을 신은 조그만 발이 방안으로 걸어들어 왔다.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아, 내가 그대의 등에 업혀서 왔다갔다 하다니, 너무나 소저를 모독하는 것이 되었소이다."

소녀는 말했다.

"우리 두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눈이 멀었고 한 사람은 절름발이가 되었으니 서로 돌볼 수 밖에 더 있겠어요?"

종영은 크게 이상하게생각했다.

'원래 왕 소저는 장님이었구나. 그녀는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를 등에 업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 남자의 발을 발견할 수가 없는가 보다.'

아자는 유탄지를 침대 위에 내려놓더니 말했다.

"어, 조금 전 누가 이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돗자리가 아직도 따뜻하네요."

이때 쿵, 하니 대문이 그 누구의 발길질에 걷어차여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몇 사람이 안으로 달려들어왔다.

한 사람이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장 방주, 방의 대사를 아직도 해결짓지 못했는데 그대는 이렇게 상관하지 않고 떠나가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그는 바로 송 장로였다.

그는 두 명의 일곱 푸대를 메는 제자와 두 명의 여섯 푸대를 메는 제자를 데리고서 이때 유탄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소씨 부자, 모용 부자 및 소림의 군웅들, 거기다가 중원의 군웅들이 다투어 소림사로 들어간 이후 개방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오늘이야말로 체면을 깡그리 잃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만일 급히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중원에서 제일 큰 방파라고 하는 개방이 무림에 서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소씨 부자와 모용박의 원한은 얽힐 대로 얽혀 있었고 또한 개방의 제자들은 또 자기들과 상관이 없는 일인지라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포부동에게도 똑같은 적개감을 품고 있기 때문에 소봉을 찾아 옛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개방이 금후 어떻게 명맥을 이어가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따라서 모두들 한 가지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반드시 새로이 영명한 방주를 모셔 방의 무리들을 이끌도록 해야 하며 지난날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찾아 개방의 상실한 명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장취현을 찾게 되었을 때 그는 혼란 중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개방의 제자들은 그의 두 발이 분질러졌으니 멀리 가지 못했으리라 생각하고 즉시 길을 나누어 찾게 되었다. 그런데 찾아낸 이후 장취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개방의 제자들은 아직 미처 정하지 못한 처지였고 또한 그를 사로 잡아서는 어떻게 하겠다는 문제를 생각도 해보지 못한 터였다.

다만 그 사람을 다시는 개방의 방주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이 뭇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이었고 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성숙노괴를 사부로 모셨다는 점이 바로 개방의 체면을 완전히 깎게 한 일이라고 불평을 토로했으며 어떤 사람은 그가 사람을 보내 개방의 형제들을 살해했으니 반드시 그에게 따져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전관청은 이미 송 장로와 오 장로가 힘을 합해 사로잡아 묶어 놓았으며 장취현을 잡게 되었을 때 함께 처리하기로 했다.

송 장로는 네 명의 제자를 이끌고 소실산 동남쪽을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멀리서 보니 숲속에 자색의 그림자가 번쩍 하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누가 한 칸의 농가로 들어가는데 바로 아자인 것 같았다.

그녀가 등에 업고 있는 사람이 어렴풋이 장취현 같다고 생각한 그는 즉시 뒤따라 쫓아와서는 농가 안방으로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아니다 다를까, 장취현과 아자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침대를 겸한 아궁이 뒷쪽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때 아자가 냉랭히 입을 열었다.

"송 장로, 그대는 그를 방주라 칭하면서 웬 호통을 내지르는 거예요? 조금도 방주를 대하는 예의가 없군요."

송 장로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속으로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방주, 우리 수천 명이나 되는 형제들은 지금 모두 다 소실산 뒤에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신지 방주께서 말씀을 해주십시오."

유탄지는 말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나를 방주라 생각하고 있소? 당신들이 나에게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그저 나를 죽여 화풀이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가지 않겠소."

송 장로는 네 명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방주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빨리 전하도록 하게."

네 명의 제자는 대답했다.

"네."

그리고 몸을 돌려 나오려고 했다.

이때 아자가 호통을 내질렀다.

"손을 써요."

유탄지는 대답 소리와 함께 일 장을 후려쳤다.

아궁이 안의 종영과 단예는 갑자기 방안에 뼈를 에이는 듯한 한냉한 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 명의 개방 제자들이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시체가 되어서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송 장로는 놀람과 분노에 휩싸여서 손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리고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너는......감히 방의 형제들에게 이와 같은 독수를 쓰다니!"

아자는 말했다.

"저 사람마저 죽여요."

유탄지는 다시 일 장을 쳐들어 후려쳤다. 송 장로는 손을 들어 막았다. 그 순간 송 장로는 아, 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대문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아자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호호호, 저 사람도 살아남기 힘들게 되었군, 배고프지 않아요? 우리 빨리 먹을 것을 찾도록 해요."

그리고 유탄지를 업고서 두 사람은 함께 부엌으로 가더니 종영이 만들어 놓은 밥과 찬을 객당으록 가지고 나와서는 먹기 시작했다.

종영은 단예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저 두 사람은 매우 염치가 없군요. 내가 그대에게 먹이려고 한 닭국물을 마시고 있어요."

단예가 나직이 말했다.

"그들은 심보가 악랄하고 수단이 매섭기 이를데 없는 자들이라 걸핏하면 사람을 죽인다오. 나중에 반드시 방안으로 다시 들어올 것이오. 우리들은 빨리 뒷문으로 나가도록 합시다."

종영은 실로 그와 왕 소저가 만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단예가 그와 같은 말을 하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죽이고 아궁이 안에서 기어나왔다. 종영은 단예가 온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우스운 듯 손을 뻗쳐 입을 막았다. 방문을 나서서는 부엌을 가로질러 뒷 문을 막 열게 되었을 때 단예는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재채기를 더 참을 수가 없어 그만 에취, 하는 소리와 더불어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이때 유탄지가 부르짖었다.

"사람이 있다!"

종영은 사방에 피할 곳을 찾더니 부엌 뒷쪽에 나뭇간이 있는 것을 보고는 단예를 끌고서 나무와 풀더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때 아자가 소리쳤다.

"게 누구요? 왜 개꼬리 감추듯 하지? 빨리 나와욧!"

유탄지는 말했다.

"십중팔구 시골 농사꾼인 것 같소. 내가 보기에 상관할 것 없을 것 같구려."

아자는 말했다.

"뭐가 상관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토록 소홀하게 생각했다가는 장래 반드시 큰 화를 당하게 될 거예요. 아무 소리도 하지 말아요."

그녀는 눈이 멀게 된 이후 귀가 유별나게 예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렴풋이 풀이 삭삭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나뭇간의 건초더미 아래에 사람이 있어요."

종영은 속으로 놀람과 당황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물방울이 얼굴에 떨어졌다.

손으로 만져 보니 끈적끈적했고 또 피비린내가 풍겼다. 깜짝 놀란 그녀는 나직이 물었다.

"그대......그대의 상처가 어떻게 되었어요?"

단예는 말했다.

"아무 소리 하지 마시오."

아자는 나뭇간을 가리키며 부르짖었다.

"저쪽에 있어요."

유탄지는 휙, 하니 나뭇간 쪽으로 일 장을 후려쳤다. 와직끈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문짝이 산산조각 나게 되었고 나뭇조각과 숯더미들이 어지럽게 날았다.

종영이 부르짖었다.

"때리지 말아오. 때리지 말아요. 우리는 나가겠어요."

그녀는 단예를 부축하고서는 숯더미 안에서 기어나왔다. 단예는 구마지의 화염도라는 한 칼에 찔리게 되었을 때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었었다. 거기다가 침대 위에서 아궁이 안으로 기어들어가 다시 아궁이 안에서 나뭇간으로 숨게 되었는데 이렇게 몇 번 이동을 하는 사이에 상처가 터져 선혈이 마구 흘러내렸다.

그는 이와 같이 상처를 입게 되자 투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여전히 내력은 충만해 있었으나 자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생각하니 육맥신검을 펼쳐내어 적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자는 물었다.

"어째서 소녀의 음성이 들리지?"

유탄지는 말했다.

"한 남자가 소녀를 데리고 숯더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온 몸에 피칠을 하고 있군. 이 소저는 뒤룩뒤룩 눈을 굴려서는 그대만 바라보고 있구려."

아자는 눈이 먼 이후부터 다른 사람이 눈을 들먹이는 데 대해서 고깝게 여겼다.

유탄지는 눈을 들먹였을 뿐만 아니라 소녀가 눈을 굴려서는 자기 쪽만을 바라본다는 말을 듣게 되자 더욱더 비위가 틀어져서 물었다.

"어떻게 눈을 굴린다는 거예요? 그녀의 눈은 예쁘가요?"

유탄지는 아직도 그녀가 매우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말했다.

"그녀의 몸은 매우 더럽소. 아마도 농사 짓는 집의 여자애 같구려. 그런데 한 쌍의 눈동자는 칠흑과 같은 것이 정말 민활하게 움직이는구려."

종영은 아궁이 안에서 온 얼굴과 머리카락에 검정을 뒤집어쓰게 되었으나, 한 쌍의 눈동자만은 여전히 칠흑과 같이 새카맣고 가을의 호수처럼 맑다고 할 수 있었다.

아자는 지극히 분노에 차서 말했다.

"좋아요. 장 공자, 그대는 빨리 그녀의 눈동자를 파내도록 해요."

유탄지는 깜짝 놀라 말했다.

"멀쩡한 사람의 눈을 왜 판단 말이오?"

아자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나의 눈동자는 정 노괴에 의해 멀게 되었어요. 그대는 저 소녀의 눈동자를 파서는 나의 눈동자와 바꿔 넣도록 해요. 그리하여 내가 다시 햇살을 보게 된다면 좋지 않겠어요?"

유탄지는 속으로 놀라서는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다시 사물을 보게 된다면 나의 추악한 꼴을 보고는 당장 상대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나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바로 내가 그 무쇠탈을 쓴 어릿광대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야단이 나게 된다. 이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그는 말했다.

"만약 내가 그대의 두 눈을 치료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잘 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소이다......하지만 그대의 그 방법은 아마도......아마도 통하지 않을 것 같구려."

아자는 다른 사람의 눈동자로 자기의 멀어 버린 두 눈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이 먼 이후부터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원한을 품게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없다면 기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말했다.

"그대는 시험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안 된다는 것을 알아요? 빨리 손을 써서 그녀의 눈동자를 파내도록 해요."

그녀는 유탄지를 등에업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걸음을 성큼성큼 옮겨 단예와 종영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

종영은 그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속으로 잔뜩 겁이 나서는 그만 미친 듯 도망을 쳐 삽시간에 십여 장 밖으로 달아났다.

아자는 두 눈이 멀기도 했고 또 유탄지를 업고 있었기 때문에 쫓아가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유탄지는 종영을 뒤쫓아가고 싶지 않아 방향을 가리킬 때 이리저리 틀리게 가리켰고 말하는 것도 우물쭈물해서는 그녀를 붙잡을 기회를 놓치도록 만들었다.

아자는 종영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뒤쫓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고개를 돌리며 부르짖었다.

"계집애가 도망갔다면 그 남자를 죽이도록 해요."

종영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는 즉시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단예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의 곁에는 피가 흘러 흥건하지 않은가. 그녀는 되돌아 달려오면서 부르짖었다.

"이 눈먼 장님, 이 눈먼 장님, 그대는 그를 해칠 수 없어요."

이때 그녀는 아자와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방의 얼굴은 정말 아름다워서 미녀라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운 얼굴을 가진 소녀가 그토록 심성이 악랄한 데는 천만뜻밖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자는 호통을 내질렀다.

"그녀의 혈도를 짚어요."

유탄지는 내키지 않았으나 언제나 그녀의 분부라면 조금도 거슬리려고 하지 않았다.

대요나라 남경 남원대왕이 왕부에 있을 때도 그러했고 개방의 방주가 된 이후에도 그러했다.

아자의 호통이 떨어지자 그는 즉시 몸을 구부리고 손가락을 뻗쳐 종영의 혈도를 짚어 땅바닥에 쓰러지도록 했다.

종영은 부르짖었다.

"왕 소저, 절대 그를 해쳐서는 안 돼요. 그는......꿈속에서도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그대에게는 실로 진심을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아자는 의아하여 되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게지? 누가 왕소저이지?"

종영은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왕 소저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대체 누구죠?"

아자는 빙그레 웃었다.

"흥, 너는 나를 눈먼 장님이라고 욕을 했지? 이제 네 자신이 눈먼 장님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쿵 저러쿵해서 무엇 하겠느냐? 아직도 두 눈이 똑바로 박혀 있을 때 몇 번 더 눈여겨 봐두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녀는 유탄지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이 소녀의 눈동자를 뽑아내도록 해요."

유탄지는 말했다.

"예."

그는 왼손을 뻗쳐서는 종영의 뒷덜미를 잡았다.

종영은 놀라 부르짖었다.

"나의 눈을 뽑지 말아요, 나의 눈을 뽑지 말아요."

단예는 흐릿한 상태에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종영의 눈동자를 뽑아 아자의 눈에 박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종영이 이미 도망칠 수 있었으나 자기를 구하고자 스스로 그들에게 잡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한가닥 진기를 끌어올리고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역시 나의 눈을 뽑도록 하지. 우리는 한 집안 사람이니......더 쓰기에 합당할 것이오......"

아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유탄지만을 재촉했다.

"왜 아직도 손을 쓰지 않는 거예요?"

유탄지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대답했다.

"예."

그는 종영을 자기 몸 쪽으로 끌어당기고서는 오른손의 식지를 뻗쳐 그녀의 오른쪽 눈을 파내려고 했다.

갑자기 한 여인이 소리쳤다.

"이 봐요, 당신네들은 그곳에서 무엇하죠?"

유탄지는 고개를 쳐들었다. 대뜸 안색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산개울가의 버드나무 아래 두 사람의 남자와 네 소녀가 서 있었다.

두 남자는 소봉과 허죽이었고 네 소녀는 바로 허죽의 시녀인 매란국죽 사검이었다.

소봉은 홀낏 보는 순간 단예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와 단예를 안아 일으켰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가 또 터졌군. 이토록 많은 피를 흘리다니.'

그리고 왼쪽 다리를 구부려 그의 몸을 자기의 사지에 의지하도록 한 후 그의 상처를 살폈다.

허죽도 가까이 다가와서는 단예의 상처를 살피더니 말했다.

"큰형님, 당황할 것 없습니다. 우리 구전웅사환은 상처를 치료하는데 크게 영험이 있습니다."

그는 단예의 상처 주위의 혈도를 짚어 피가 흐르는 것을 막고는 구전웅사환을 주었다.

단예는 부르짖듯 말했다.

"큰형님, 둘째 형님, ......빨리......빨리......사람을 구해 주십시오......그에게 종 소저의 눈동자를 뽑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종 소저는 나의......나의......누이 입니다."

소봉과 허죽은 동시에 유탄지를 바라보았다. 유탄지는 그렇지 않아도 놀라워 당황해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본래부터 종영의 눈동자를 파내고 싶지 않았던 참이라 즉시 그녀를 놓아 주었다.

아자가 말했다.

"형부, 언니가 죽을 때 뭐라고 말씀하셨죠? 그대가 그녀를 때려 죽인 이후 그녀가 당부한 말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단 말이에요?"

소봉은 그녀가 다시 아주를 들먹이자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는 한편 또한 울화가 치밀어 싸늘이 코웃음쳤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형부가 나를 잘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 노괴는 나의 눈을 멀게 했어요. 그런데도 형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있군요. 형부, 남들은 모두 형부가 당금지상에서 제일가는 대영웅이라고 했어요. 그런데도 형부는 처제 한 사람을 보호하지 못했어요. 설마 하니 형부에게 그만한 재간이 없다는 거예요? 흥, 정노괴는 분명히 형부를 이길 수 없어요. 그저 형부는 나를 돌보지 않고 또한 보호하지 않으려는 것뿐이에요."

소봉은 침울히 말했다.

"네가 개방에 사로잡혀가 두 눈이 멀게 된 것은 내가 보호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다. 확실히 내가 잘못했구나."

처음 그는 아자가 또 못된 짓을 하며 종영의 눈동자를 파내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여간 울화가 치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망연하고 촛점이 없는 눈동자를 대하게 되자 즉시 아주가 죽을 때 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 날 뇌성벽력과 더불어 비가 쏟아지던 날 밤 청석으로 쌓아올린 조그만 다리 밑에서 아주는 그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받은 이후 그의 품속에서 말했다.

"나에게는 같은 부모를 모신 친누이동생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함께 살지 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그녀를 돌봐 주세요. 저는 그녀가 잘못된 길로 들어가게 될까봐 걱정되어요."

그때 자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지 않았던가.

"한 가지는 말할 것도 없고 백 가지 천 가지라도 그대에게 응낙하겠소."

그러나 아자는 끝내 두 눈마저 멀게 되었다. 어쨌든 간에 그녀가 옳지 않다하더라도 자기가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던 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만 그는 가슴이 쓰라려 눈초리에 자기도 모르게 부드러운 빛을 띄우게 되었다.

아자는 그와 오랫동안 같이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소봉의 성질을 깊이 이해 하고 있었다.

자기가 아주를 들먹이기만 하면 그야말로 백발백중의 효과를 거두었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소봉은 이에 응낙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녀는 종영이 자기를 눈먼 장님이라고 욕한 사실에 대해서 여간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너에게 눈면 장님의 맛이 어떤지를 보여 주고 말겠다.'

그녀는 즉시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소봉에게 말했다.

"형부, 나는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어요."

소봉은 물었다.

"나는 이미 너를 너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맡겼는데 너는 어쩌다가 또 장 방주와 함께 있게 되었지?"

이때 그는 아자가 장 방주와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으며 장취현이 매우 그녀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나서 그는 다시 말했다.

"너는 역시 너의 부친을 따라 대리로 돌아가도록 해라. 너의 눈이 멀기는 했지만 대리 왕부에는 많은 하인들과 하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으니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자는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진짜 왕비도 아니잖아요. 내가 대리로 가게 된다면 왕부에는 서로 드러내 놓지는 않더라도 싸우는 일들이 많아질 거예요. 거기다가 그 아버님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나를 죽도록 미워해요. 거기다가 내 눈이 멀었으니 반드시 남의 해를 입게 될 거예요."

소봉은 속으로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넌 나를 따라 남경으로 가자. 그리고는 차분히 살아 가는 것이 강호에서 모험을 일삼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아자는 말했다.

"또 다시 그대의 왕부로 가요? 아이구, 나는 이전에 눈이 멀지 않았을 때도 병이 날 정도로 답답했는데 또 다시 그곳으로 어떻게 가란 말이에요? 형부는 이 장 방주처럼 언제나 저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 주려고 하지 않았잖아요. 저는 차라리 강호에서 떠돌아다니는 것이 좀더 생활이 즐거울 것이 같아요."

소봉은 유탄지를 한 번 바라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아자는 이 개방의 방주를 좋아하게 된 것 같구나.'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이 장 방주가 도대체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 너는 그에게 물어 본 적이 있느나?"

아자는 말했다.

"전 물론 물어 보았죠. 하지만 한 사람이 말하는 자기의 내력이란 믿을 수가 없어요. 형부는 옛날 개방의 방주일 때에 다른 사람에게 거란 사람이라는 것을 밝힌 적이 있나요?"

소봉은 그녀의 말에 가시가 돋힌 것을 느끼고 흥, 했을 뿐 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 그녀가 인품이 비열한 장 방주를 따라가는 것을 내버려 두어야 할 것인지 일시 작정할 수가 없었다.

아자는 말했다.

"형부, 이제 형부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으려는 거예요?"

소봉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아자는 말했다.

"저는요, 형부가 이 소녀의 눈동자를 파서는 저의 눈에 담아 주기를 바래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장 방주는 본래 저에게 그 일을 해주려던 참이었어요. 형부가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일을 끝냈을 거예요. 음, 그러니 형부가 저에게 해주세요. 형부, 저는 도대체 형부가 저에게 더 잘 대해 주는지 아니면 장 방주가 나에게 더 잘 대해 주는지 알고 싶어요. 옛날 형부가 나를 안고서 관동으로 상처를 치료하러 가게 되었을 때 형부는 저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 주었으며 제가 무엇을 하고자 하든 형부는 그 일을 해주었잖아요. 우리 두 사람은 한 천막 안에서 살았으며 그때 형부는 밤낮을 돌보지 않고 저를 안은 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어요. 형부, 형부는 어찌하여 그 일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는가요?"

유탄지는 눈에 흉악하고 악독한 빛을 띄우고 소봉을 쳐다보는데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았다.

'아자 소저는 내 사람이다. 이후부터 너는 그녀에 대해 손가락 하나라도 댈 생각하지 말아라.'

소봉은 그에게 별로 주의를 하지 않고 말했다.

"그때 너는 몸에 중상을 입은 몸으로 나는 진기로써 너의 목숨을 이어가야했기 때문에 너의 뜻을 될 수 있는 한 받들도록 했다. 그러나 이 소저로 말하면 우리형제의 친구인데 내 어찌 그녀의 눈을 파서 네가 시력을 되찾도록 도와 줄 수 있겠느냐? 더군다나 세상에는 그와 같은 의술이란 있을 수가 없다. 너의 그와 같은 생각은 그야말로 정말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허죽이 갑자기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보기에 단 소저의 두 눈은 바깥 한 겹이 잘못되고 망가졌으므로 만약 한 쌍의 살아 있는 사람의 눈으로 바꾼다면 밝음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소요파의 고수들은 의술에 능했다. 염왕적 설신의는 바로 허죽의 사질이었다.

허죽은 의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많지 않았지만 천산동모를 몇 개월 따라다닌 나머지 부러진 다리를 잇고 팔이 빠진 것을 박는 등 여러 요령에 대해서 그녀에게 많이 들은 바가 있었다.

아자는 아, 하더니 기뻐서 소리쳤다.

"허죽 선생, 그대의 그 말은 설마 속이는 것은 아니겠지요?"

허죽은 말했다.

"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그러다가 자기가 출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물론 나는 그대를 속이지 않소. 하지만......하지만......"

아자는 말했다.

"하지만 무엇인가요? 허죽 선생, 그대는 우리 형부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이니 우리 두 사람은 한 집안 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조금 전 우리 형부가 하시는 말씀을 들었겠지요? 형부는 저를 제일 귀여워해요. 형부, 형부, 어찌하든 간에 형부는 의형제에게 부탁해서 나의 눈을 치료하도록 부탁해 주세요."

허죽은 말했다.

"제가 사부님께 들은 말씀에 의하면 눈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을 때 다른 한 쌍의 살아 있는 사람의 눈동자를 바꾸게 된다면 때로는 밝음을 되ㅊ을 수도 있소이다. 그러나 눈을 바꾸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오."

아다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사백부 어르신께서는 반드시 그 방법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그대가 저 대신 그 어르신에게 부탁해 보세요."

허죽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사백부님은 불행히도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아자는 발을 구르며 부르짖었다.

"알고보니 그런 말을 만들어서는 나를 희롱하려 했군요."

허죽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외다. 아니외다. 우리 표묘봉 영취궁에 소장된 의약 서적이나 처방은 무척 많소이다. 아마도 눈을 바꾸는 방법도 그 궁 안에 수장되어 있을 것이외다. 그러나......그러나......."

아자는 잠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대는 커다란 사내 대장부가 되어서는 어찌 말하는 것이 항상 우물쭈물하세요? 또 뭐가 그러나 그러나예요?"

허죽은 말했다.

"그러나......그러나......눈동자는 얼마나 고귀한 것이오? 그 누가 그대에게 바꾸어 주겠소?"

아자는 헤벌죽 웃었다.

"호호호, 나는 또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살아 있는 눈동자라면 그거야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이죠. 그대는 저 소녀의 눈동자를 파내면 될 거예요.."

종영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안 돼요. 안 돼요. 그대들은 나의 눈동자를 뽑을 수 없어요."

허죽은 말했다.

"그렇소. 그 누구라도 눈이 먼 입장을 생각해 볼 때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그대가 두 눈이 먼 것이 싫다면 종 소저도 눈을 잃어 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오. 석가모니께서는 살아 생전 부처님이 되시고자 할 때 머리, 눈, 피와 살, 발은 말할 것도 없고 뇌수마저도 사람들에게 보시(布施)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종 소저를 어찌 석가모니와 비교할 수 있겠소? 더군다나 종 소저는 우리 세째의 절친한 친구인데......"

갑자기 그는 마음속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흠칫 했다.

'어이쿠, 아단났다. 그날 영취궁에서 나와 세째 아우 두 사람은 술을 마신 후 진정을 토로하지 않았던가. 원래 그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사람도 나의 몽고(夢姑) 즉 꿈속의 소저였다. 지금 볼 때 세쩨 아우는 이 종 소저에 대해서 무척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조금 전 그가 아자에게 하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차라리 자기의 눈동자를 파냈으면 파냈지 아자 소저가 종 소저를 해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세째 아우가 종 소저를 위해서 두 눈을 희생하겠다는 것을 보면 그대에 대한 정이 얼마나 깊은지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하니 이 종 소저가 바로 얼음창고에 나와 사흘 밤을 함께 보냈던 꿈속의 소저란 말인가?'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자 그만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고 몰래 종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검정이 묻어 있었으나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허죽이 꿈속의 소저와 함께 있던 시간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햇살을 볼 수 없는 어둠속의 얼음 창고인지라 그 꿈속의 소저의 모습이 어떠한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져 본다면 어렴풋이 어느 정도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에 그녀의 가는 허리를 한 번 안아 본다면 삼 푼 정도 더 자신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대낮에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가 어찌 손을 뻗쳐 종영의 얼굴을 만질 수 있단 말인가? 안아 본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꿈속의 소저를 안아 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자 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종영의 음성은 꿈속의 소저와 퍽이나 다른 바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한 사람의 말은 얼음 창고에서와 사방이 탁 트인 들이나 산속에서는 각각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았다.

더군다나 꿈속의 소저는 그와 말할 때 부드러운 어조였고 모든 정을 듬뿍 담고 있지 않았던가.

지금 종영은 놀람과 두려움에 휩싸여서는 날카로운 어조로 부르짖고 있는 상태이고, 그렇듯 상황이 다른지라 음성이 달라지는 것도 대수롭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허죽은 종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마음 같으면 한 손을 뻗쳐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져 보고 싶었다. 물론 그녀가 자기가 그리워하고 있는 꿈속의 소저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꿈속의 소저에 대한 정이 크게 복받쳐올라 얼굴을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빛을 듬뿍 드러내게 되었다.

종영은 그의 표정이 부드럽고 친절한 것을 보고 자기의 눈동자를 파낼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약간 마음을 놓게 되었다.

아자는 말했다.

"허죽 선생, 저는 그대의 세째 아우의 친누이동생이에요. 종 소저는 그저 그의 친구에 불과해요. 누이 동생과 친구 사이의 차이는 엄청나게 큰 것이에요."

단예는 영취궁의 구전응사환을 복용한 이후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멎게 되었고 정신도 말똥말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눈을 바꾼다는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자가 한 마지막 몇 마디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참을 수 없어 코웃음치며 말했다.

"흥, 원래 너는 내가 바로 너의 오라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어째서 다른 사람을 시켜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지?"

아자는 웃었다.

"나는 한 번도 그대와 말을 해본 적이 없는데 어찌 그대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어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야 형부와 허죽선생이 의형제를 맺고 모용 공자로 하여금 참패하도록 한 대영웅이 바로 오라버니인 것을 알았어요. 이것 참 묘하게 되었군요. 저희 형부도 대영웅이고 저의 친오라버니도 대영웅이니 대단하네요."

단예는 손을 흔들었다.

"무슨 대영웅이야. 남 앞에서 창피한 꼴을 당해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이지."

아자는 웃었다.

"어마, 겸손해 하지 말아요. 오라버니, 그대가 나뭇간 안에 숨어 있을 때 제가 어찌 그대인줄알았겠어요? 또 눈으로 볼 수도 없잖아요? 그러다가 그대가 저의 형부를 큰형님이라고 부를 때에서야 겨우 그대인 줄 알았어요."

단예는 속으로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둘째 형님께서 눈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그는 어쨌든 방법을 강구해서 너의 눈을 치료할 것이다. 그러나 종 소저의 눈을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 그녀는......그녀......역시 나의 친누이동생이다."

아자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조금 전 저쪽 산 위에서 나는 그대가 죽어라 하고 왕 소저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런데 눈 깜짝 할 사이에 또 종 소저를 감싸고 있군요. 그리고 친누이라는 말까지 하다니, 오라버니는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단예는 그녀의 그와 같은 말에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아자는 말했다.

"이 종 소저가 만약 나의 올케라면 물론 그녀의 눈동자를 건드릴 수 없어요. 그러나 나의 올케가 아니라면 어째서 건드릴 수 없다는 거예요? 오라버니, 그녀는 도대체 저의 올케예요, 아니예요?"

허죽은 곁눈질로 단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리고 종영이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꿈속의 소저인지 아닌지 실로 짐작하기가 어려워 초조한 마음은 더했다. 만약 아니라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정말 꿈속의 소저인데 단예가 그녀를 처로 맞아들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온 얼굴 가득히 근심의 빛을 띄우고 단예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그야말로 이 순간만큼 몇 시진처럼 길게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종영 역시 단예가 대답하는 말을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원래 눈 먼 소저는 그대의 누이였군. 그녀까지도 그대가 왕소저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고 말하다니, 그대가 마음속으로 왕 소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거짓이 아니구나. 그런데 그대는 어째서 조금 전 내가 악노삼의 사모님이라는 말을 했지? 그리고 어째서 그대는 그대의 눈동자로 나의 눈과 바꾸려고 했지? 그리고 어째서 그대는 뭇 사람들 앞에서 나를 친누이라 부르는거지?'

이때 단예는 말했다.

"어쨌든 간에 네가 종 소저를 해치는 것을 하락할 수 없다. 너는 어린 나이에 언제나 좋지 못한 일만 하고 있구나. 우리 대리의 저만리 저 큰형님만 하더라도 너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 죽은 것이 아니더냐. 네가 재차 나쁜 마음을 품게 된다면 우리 둘째 형님께서는 너의 눈을 고쳐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자는 입을 삐죽했다.

"흥, 오라비의 부드러움을 피울 줄 아는군. 처음부터 나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좀 다정하게 굴지 않고 버릇부터 가르쳐 주시는군."

소봉은 단예의 정신이 매우 위축되어 있기는 하나 말을 하는데 더듬거리지 않고 점차 진기가 왕성해지는 듯한 기미를 보고는 영취궁의 구전웅사환이 기이한 효과를 나타내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말했다.

"세째 아우, 우리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잠시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상의하도록 하지."

단예는 말했다.

"무척 좋습니다."

그는 허리를 세우고는 몸을 일으켰다.

종영이 부르짖었다.

"어마,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또 상처가 터져요."

그 얼굴에는 근심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봉은 기뻐서 말했다.

"둘째 아우, 그대의 상처를 치료하는 영약은 정말 영험하기 이를데 없구나."

허죽은 음, 하고 건성을 대답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종영이 그 몇 마디 정이 담뿍 담긴 말을 생각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 잃어버린듯 마음속이 허전하기만 했다.

뭇 사람들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단예는 여전히 그 방 겸 침대로 되어 있는 곳에 가서 눕고 소봉 등은 바로 그 앞에 앉게 되었다. 이때 이미 날은 저물어 있었다.

매란국죽 사검은 등불에 불을 붙이고 나누어서 차를 끓이는가 하면 밥을 지었다. 그리고는 차례로 소봉, 단예, 허죽 및 종영에게 바쳤다. 그러나 유탄지와 아자와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자는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의 평소의 성격대로 한다면 영취궁의 사검에 대해서 암암리에 독을 써서는 해쳤으리라, 그러나 그녀가 두 눈을 회복하려면 허죽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수밖에 없는지라 억지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제했다.

소봉은 아자가 신경질을 부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한 쪽 구석에 놓인 탁자의 한 쪽 서랍을 열었다. 그러다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단예와 허죽은 그의 표정이 이상해진 것을 보고 그 서랍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는 어린애의 장난감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무로 깎은 호랑이도 있었고 흙으로 빚은 조그만 강아지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짚으로 벌레의 집을 만들어 놓은 것도 있었고 또 귀뚜라미를 잡아넣는 대나무 통도 있었다.

그 외에 몇 자루 녹이 슨 조그만 칼이 들어 있었다. 이 장난감들은 농가에서 흔히 보는 물건이었고 이상한 점이라고는 전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봉은 그 나무로 만든 호랑이를 들더니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아자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몰라 속으로 울화가 치밀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는 손을 뻗쳐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퍽, 하니 팔굽으로 무엇인가를 건드리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곁에는 명주실을 감는 물레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나는 판이라 허리에서 검을 뽑아서는 휙, 하니 그 물레를 토막내고 말았다.

소봉은 그만 안색이 변해서는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너는......무슨 짓이냐?"

아자는 말했다.

"물레가 나에게 부딪혀 나를 아프게 했기 때문에 쪼개 버렸어요. 그렇다고 형부에게 무엇을 잘못했어요?"

소봉은 노해 부르짖었다.

"너는 나가! 이 집안의 물건들을 네가 감히 어떻게 함부로 망가뜨린단 말이냐?"

아자는 뾰루퉁해져서 소리쳤다.

"나가라면 나가죠."

그녀는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는 미친 듯 화가 나서는 발걸음을 빨리 옮기느라고 그만 쿵, 하니 이마를 문설주에 박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더듬어서는 여전히 급히 걸어나갔다.

소봉은 그만 마음이 누그러졌다. 달려가서는 그녀의 오른팔을 잡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자, 부딪혀서 아프지 않았느냐?"

아자는 고개를 돌리고 그의 품속에 뛰어들어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소봉은 가볍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나직이 말했다.

"아자, 내가 나빴다. 너에게 거칠게 소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아자는 울었다.

"형부는 변했어요. 형부는 변했어요. 예전처럼 저를 잘 대해 주지 않는군요."

소봉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앉아서 좀 쉬어라. 그리고 차를 마시는 게 어떠냐?"

그는 자기의 찻잔을 들어서는 아자의 입가로 갖다 주었다. 그렇게 되자 자연 왼손으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들어 안게 되었다.

과거 아자가 소봉에게 맞아 근 골을 부러뜨리게 되었을 때 소봉은 일 년 남짓 그녀의 시중을 들어 주었었다.

차를 끓여 바치고 밥을 먹여 주는가 하면 옷을 바꿔 입히고 머리카락을 빗겨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소변 등의 가장 친밀한 사람만이 해야 할 일도 그녀를 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아자는 근골이 부서진 이후라 제대로 앉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소봉은 약을 먹이고 꿀물을 먹일 때 반드시 왼손으로 그녀의 몸을 얼싸안아야 했었다.

그와 같은 버릇이 오래 되다 보니 이때 그녀에게 차를 마시게 하는 데도 자연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아자는 그의 손에서 몇 모금의 차를 마시게 되자 마음이 풀어진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형부, 그래도 저를 내쫓으시겠어요?"

소봉은 그녀의 몸을 놓고는 고개를 돌려 찻잔을 탁자 위에 놓았다. 음침하고 어슴프레한 빛 속에서 갑자기 두 줄기 야수와 같은 흉폭한 시선이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빛을 띄우고는 자기에게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소봉은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그러고 보니 유탄지는 바로 한모통이의 땅바닥에 앉아서는 입술을 깨물며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자기를 깨물 것 같았다.

소봉은 생각했다.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야말로 기괴하기 이를데 없군.'

이때 아자는 다시 말했다.

"형부, 내가 한 채의 물레를 쪼갰을 뿐이데 왜 그토록 형부가 큰 화를 내셨죠?"

소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나의 의부모의 집이다. 네가 쪼개 버린 것은 우리 의어머님의 물레란다."

뭇 사람들은 그만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봉은 손에 그 조그만 나무 호랑이를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등불이 침침했으며 그의 엄청나게 큰 그림자가 흙벽에 비쳤다.

그는 손가락을 오무려 중지와 식지로 나무로 깍아 만든 조그만 호랑이의 등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얼굴에 애잔한 빛을 띄우고 말했다.

"이것은 나의 의아버지께서 나에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 해 나는 다섯 살이었지. 의아버님은......그때 나는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바로 이 등불 옆에서 나를 위해 이 조그만 호랑이를 깎아 주셨지. 어머님은 물레를 돌리고 계셨다. 나는 아버님의 발 밑에 앉아서는 조그만 호랑이의 귀가 생기게 되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단예는 물었다.

"큰형님, 그렇다면 큰형님이 저를 이곳에 끌어다 눕힌 것이었군요."

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원래 그 무명의 노승이 뭇 사람들을 위해서 설법을 하게 되었을 때 구마지가 돌연 독수를 펼쳐서는 단예를 해치게 되었다. 무명의 노승은 소맷자락을 휘둘러 구마지를 수 장 밖으로 날려 버렸다.

구마지는 감히 그곳에서 더 머물 수 없어 몸을 돌려서는 나는 듯 산을 내려 가고 말았다.

소봉은 단예가 몸에 중상을 입은 것을 보자 재빨리 치료를 해주었다. 현생이 상처를 치료하는 영약을 권해 단예에게 발라 주었다.

구마지의 이 일 초 화염도는 날카롭기 이를데 없었다. 만약 단예의 내력이 심후하고, 화염도의 일 초가 가슴팍에 미치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암경(暗勁)이 생겨나 방어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을 형편이었다.

소봉은 산바람이 심하게 이는 것을 보고 단예가 중상을 입은 나머지 바람을 오래 맞게 둔다면 좋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단예를 안고서 자기의 옛날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단예를 침대 위에 눕히고 즉시 몸을 돌려 부친과 다시 만나고자 했다. 그리고 또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을 안배해야 했다.

뜻밖에도 그의 의부모가 죽은 후 남아 있는 빈 집에 이 며칠 동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고 또한 머물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단예가 옛날부터 잘 알고 있는 종영이라는 것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소림사로 올라가게 되었을 때 소림사의 소란은 이미 끝나 있었다. 소원산과 모용박은 이미 무명 노승의 불법으로 깨우침을 받게 되어 삼보(三寶)에 귀의하게 되었으며 소림사에서 출가한 몸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비단 옛날 원한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사형제가 되어 있었다.

소원산이 배운 소림파의 무공이 요나라에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중원의 군웅들도 모두 마음을 놓게 되었다.

소봉의 종적이 보이지 않자 십팔 명의 거란 무사들은 영취궁의 보호 하에 있었으므로 해칠 수도 없었다.

각 처의 영웅들은 큰일이 끝나자마자 다투어 작별을 고하고서는 산 아래로 내려갔다.

소봉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 다시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즉시 절 앞에 있는 어느 동굴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서야 산문 앞으로 나가 부친을 뵈러 왔다고 말했다.

소림사의 지객승은 안으로 들어가 통보를 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나와서는 말했다.

"소 시주, 영존은 이미 본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소. 그 분은 나에게 시주에게 전해 달라고 했소. 그는 이미 속세의 인연이 다했으니 마음의 해탈을 얻어 지극히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소. 금후로는 오로지 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뵙고 참선을 하고자 하니 시주께서는 걱정하지 말라시는 분부이외다. 그리고 소 시수가 대요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으니만치 송나라와 요나라가 영원히 전쟁이 없게 하길 바라신다고 말씀하셨소이다. 요나라 황제에게 만약 송나라를 칠 뜻이 있다면 시주께서 자비심을 베풀어 아무쪼록 두 나라의 수천 만 생령(生靈)들을 돌보시도록 하시라는 말씀이셨소이다."

소봉은 합장을 했다.

"예."

그는 마음속으로 치미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어 생각했다.

'아버님은 이제 연세가 많으시다. 오늘 나와 만나기를 마다하시니 이후 다시는 만날 날이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대요나라의 남원대왕이고 몸에는 요나라 남쪽 지방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대송나라가 만약 요나라를 침입해 온다면 나는 물론 군사들과 장수들을 지휘해서 송나라가 북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저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황상께서 만약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정벌하시겠다고 한다 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극력으로 건의하여 저지하여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뜰에서 칠팔 명의 노승들이 걸어 나왔다.

바로 신산 상인, 철라성 등 외부에서 온 고승들이었다.

현생과 현적 등이 절을 하며 전송했다.

파라성은 현적의 등뒤에 서 있었으며 똑같이 합장하고 손님들을 전송하고 있었다.

철라성은 물었다.

"사제, 나는 이제 서쪽의 천축으로 가네. 오늘 이와 같이 헤어지게 된다면 서로 만리를 격하게 되는 만큼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네. 그대는 정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결심을 했으며 이 중원 땅에서 늙어 즉을 참인가?"

그는 소림사의 승려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자기의 사제에게 중원의 말로 말하고 있었다.

파라성은 미소했다.

"사형은 어째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오? 천축이 곧 중원이고 중원이 곧 천축이외다. 이것이 곧 달마 조사께서 동쪽으로 떠나오신 뜻이 아니겠소?"

철라성은 속으로 흠칫 해서 말했다.

"사제의 그 한마디에 깨우침이 많네. 자네는 나의 사제가 아니라 나의 사부일세."

파라성은 웃었다.

"입문에는 선후가 있기 마련이고 도를 터득하는 데 있어서도 늦고 빠름이 있습니다. 늦어도 좋고 빨라도 좋고 터득을 하게 된다면 더욱더 좋은 노릇이지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소봉은 한켠에 물러서 있었다. 그러다가 신산, 도청, 철라성 등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산을 내려간 이후에야 천천히 그들 뒤를 따랐다. 그런데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절에서 다시 한 사람이 나왔는데 바로 허죽이었다. 그는 소봉을 보자 크게 기뻐서는 서둘러 다가오며 말했다.

"형님, 그렇잖아도 찾고 있던 중입니다. 세째 아우가 중상을 입었다는데 상태는 어떻습니까?"

소봉은 말했다.

"내가 구해서 산으로 내려가 한 농삿꾼 집에 머물도록 했다네."

허죽은 말했다.

"우리 함께 가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봉은 흔쾌히 응낙했다.

"좋지, 좋아."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아갔다. 십여 장 쯤 나아가게 되었을 때 매란국죽 사검이 숲속에서 걸어 나와 허죽의 뒤를 따랐다.

허죽은 영취궁의 뭇 여인들과 칠십이 도, 삼십육 동의 군호들이 모두 다 산을 내려갔는데 거란의 십팔 명 무사들도 뭇 사람들과 동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중원의 군웅들이 감히 가볍게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말했다.

소봉은 즉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의 이 의형제는 정말 기이한 때 나타났군, 세째 아우가 나를 대신해서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이지만 어려울 때 그렇게 큰 도움을 받게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는걸.'

허죽은 또 이미 정춘추를 소림사의 계율원에서 돌보도록 맡겼다는 사실도 말했다.

매년 단오절과 중양절 때 두 번씩 소림사의 승려가 그에게 영취궁의 알약을 먹여 생사부가 발작을 일으킬 때의 고통을 해소시켜 주도록 했는데, 정춘추는 자기의 생사가 남의 손에 달려 있는 만큼 이제 나쁜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본다는 그간의 경과를 쭉 이야기했다.

소봉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둘째 아우, 그대는 무림의 커다란 해충을 제거한 셈일세. 이렇게 되면 정춘추는 불법의 도야를 받고 장래 차츰차츰 그의 포악한 기상을 해소시켜 나갈지도 모르겠네그려."

허죽은 자못 서글픈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는 소림사에서 출가를 하려고 했습니다만 사조부님들과 사부님께서 나를 쫓아내셨습니다. 정춘추와 같이 천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한자는 소림사에서 도를 닦을 수 있는데 저는 어째서 그럴 수 없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요. 어째서 나와 그라는 두 사람이 받는 업보가 이토록 다를까요?"

소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둘째 아우, 그대는 정 노괴를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정 노괴는 그대를 몇 천배 몇 만배 부러워할 것이네, 자네는 영취궁의 주인으로서 삼십육 동의 동주와 칠십이 도의 도주를 거느리게 되어 위세를 천하에 떨치게 되었으니 그 또한 멋있지 않은가."

허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취궁은 모두 다 여인들입니다. 나 혼자 나이 젊은 화상으로서 그 가운데 박혀 있다는 것은 실로 거북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소봉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대가 아직도 나이 어린 화상인 줄 아는가 보지?"

허죽은 다시 말했다.

"성숙파의 그 아첨꾼들이 나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으니 어떻게 그들을 처리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소봉은 말했다.

"그 사람들은 본래 이 세상에 태어날 적부터 그런 것은 아닐세. 다만 성숙노괴의 문하이니까 흰소리를 하고 아첨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네. 둘째 아우가 이후에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게. 그래도 그들이 고치지 않는다면 모두 한 사람씩 쫓아내도록 하게나."

허죽은 부친과 모친을 이 하루 동안에 서로 만나보게 되었으나 양친이 또 자결해 버린 사실을 상기하고 그만 슬픔에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소봉은 그를 위로했다.

"둘째 아우, 세상에 여의치 못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네. 과거 내가 개방에서 쫓겨날 때 천하의 영웅 호걸들은 모두가 나를 죽여야만 속시원하다고들 했다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모르다네. 그러나 시일이 흐르고 나니 차츰 좋아지더군."

허죽은 갑자기 말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여래께서는 과거 왕사성(王舍城)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영취라는 그 두 글자는 본래 불법과 인연이 있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저는 영취궁을 영취사로 만들어 그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 그리고 소저들을 모두 여승으로 만들어 놓아야겠습니다."

소봉은 앙천대소했다.

"화상이 머물러야 하는 절이 여승들로 가득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천하의 기문이 될 것이네."

두 사람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교삼계의 집 뒤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마침 유탄지가 종영의 눈알을 뽑으려는 것을 보고 다행히 때늦지 않게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예는 물었다.

"큰형님, 둘째 형님, 저희 아버님을 못 보셨나요?"

소봉은 말했다.

"나중에는 다시 뵙지 못했다네."

허죽은 말했다.

"혼란 중 군웅들이 왁자히 떠들며 흩어지는 바람에 작은 형도 숙부님에게 인사를 올리지 못했다네. 무척 실례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네."

단예는 말했다.

"둘째 형님,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십시오. 그 단연경은 우리 집안의 큰 원수입니다. 저는 그저 그가 아버님을 괴롭히지 않았나 걱정할 뿐입니다."

소봉은 말했다.

"그 일은 걱정되지 않을 수 없군. 내가 숙부님을 찾아 접응을 해야겠다."

아자는 말했다.

"형부는 왜 말끝마다 백부님이니 숙부님이니만 하시고 어째서 빙장 어른이라고 부르지 않으세요?"

소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내가 한평생 한스럽게 여기는 일인데 무슨 또 할 말이 있겠느냐?"

그는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려고 했다.

이때 매검이 닭 삶은 국그릇을 들고 들어와 단예에게 먹이려고 하다가 여러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소 대협 수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시녀들이 주인의 명령을 내려 영취궁의 수하들로 하여금 사방을 순라토록 하게 하여 그녀들에게 단연경이 만약 흉악한 일을 저지를 빛을 보인다면 연화(烟花)를 터뜨려 신호를 하도록 하면 됩니다. 그때 우리가 응원차 달려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소봉은 기뻐하며 말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외다. 영취궁의 속하들은 천여 명이나 되니 헤어져 살핀다면 우리 몇 사람이 찾는 것보다 휠씬 낫겠소."

그 즉시 매검은 명령을 전달했다.

영취궁의 팔부 사람들은 서로 연락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방법이 지극히 신속했다.

허죽이 교삼계의 집에 이르게 되자 현천부의 뭇 여인들이 이미 소식을 듣고 부민의의 통솔 하에 가까운 곳에 달려와서는 암암리에 보고를 하고 있었다.

단예는 마음을 놓자 곧이어 왕어언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나를 무척 미워하고 있다. 이후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다시는 나를 본 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종영은 무척 관심이 있는 듯 물었다.

"상처가 아프세요?"

단예는 말했다.

"별로 아프지 않소."

아자는 말했다.

"종 소저, 그대는 우리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모양이지만 그의 마음을 모르고 있군요. 내가 보기에 그대의 그 정을 장래에 풀 희망은 아득하게 보여요."

종영은 말했다.

"나는 그대와 말하고자 하지 않는데 누가 그대보고 입을 열라고 했어요?"

아자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나는 그저 그대보다 십 배나 더 아름답고 십 배나 더 부드럽고 십 배나 더 알뜰한 소저가 끼어들게 된다면 우리 오라버니가 그대를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거예요. 우리 오라버니가 어째서 한숨을 쉬는지를 그대는 아세요? 한숨을 쉰다는 것은 바로 마음속으로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이에요. 그대는 우리 오라버니를 모시고 있으니 마음속으로는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어 한숨을 쉴 필요가 없겠지요. 따라서 우리 오라버니가 길고 짧은 한숨을 연신 내뿜게 되는 것은 물론 다른 소저를 위해서 그런 거라구요."

아자는 종영의 눈알을 파내지 못하게 되자 가시 돋힌 말을 마구 해대어 어떻게 하더라도 그녀가 크게 슬퍼하고 괴로워해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종영은 아자의 말을 듣고 무척 화가 났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서 치밀던 울화를 삭히고 번민했다.

다행히 그녀는 아직도 나이가 어린 편이었고 언제나 천진난만했다. 단예에 대해서 깊은 정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뼈를 에이는 듯한 정도로 사모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그와 함께 있으면 즐거운 정도였다.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종......종......종영 누이, 그대는 아자의 터무니없는 말을 듣지 마시오."

종영은 단예가 자기를 누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종 소저라고 부르지 않자 더욱더 친근감을 표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가시 돋힌 말을 하죠. 그걸 알고 있기에 나는 마음에 두지 않아요."

아자는 속으로 크게 분노가 치밀었다.

"오라버니, 도대체 오라버니는 왕 소저를 더 좋아하세요, 아니면 종 소저를 더 좋아하세요? 나는 왕 소저와 내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요. 오라버니가 지금 한 말을 나는 그녀에게 직접 말해 주겠어요."

단예는 그 말을 듣자 즉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왕 소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고? 어디서 만나기로 했지? 그리고 언제이지? 또 무슨 일을 상의하려고 그러는거지?"

그의 다급해 하는 모양을 보고 종영은 그의 마음속에는 왕 소저가 자기보다 얼마나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은 원래 시원시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별로 마음 아파하지는 않았다.

만약 왕어언이 그녀와 입장이 바뀌어져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너무 상심한 나머지 죽으려고 했을 것이다.

목완청이라면 십중팔구 한 대의 화살을 단예에게 쏘았을 것이고, 아자라면 방법을 강구해서 상대방 여인을 해쳐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종영은 그녀들과 또 달라 단예가 일어나자 말했다.

"몸을 움직이지 마세요. 상처가 터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피가 흐르지 않게 말이에요."

허죽은 옆에서 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속으로 생각했다.

'종 소저는 세째 아우에 대해서 이토록 정이 깊구나. 십중팔구 몽고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나의 음성을 듣고 어찌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때 단예는 여전히 아자에게 다그쳐 묻고 있었다. 그녀가 내일 왕어언과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아자는 그가 그와 같이 다급해 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어떻게 하면 그를 한바탕 골려 줄 수 있을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이때 난검이 들어와 보고를 했다. 현천부의 여인들이 명령을 전달했으니 단예보고 안심하라는 말이었다.

단예는 말했다.

"누님이 그처럼 걱정을 해주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난검은 그가 대리국의 왕자와 같은 존귀한 신분인데도 언행에 있어서 조금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것을 보고 퍽이나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아자에게 내일 약속 운운하며 묻는 말을 듣고 불쑥 입을 열었다.

"단 공자, 그대의 누이동생은 그대에게 장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대는 정말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단예는 물었다.

"누나가 어떻게 우리 누이 동생이 나에게 장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난검은 웃으면서 그 말을 받았다.

"내가 말하게 된다면 단 소저는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렸다고 반드시 탓할 거예요. 그리고 또 주인이 허락하실지 안 하실지 모르겠네요."

단예는 재빨리 허죽에게 말했다.

"둘째 형이 그녀에게 말하도록 하시구려."

허죽은 고개를 끄덕이고 난검에게 말했다.

"세째 아우는 나와 서로 비밀이 없이 지내고 있는 터이니 그대들은 무슨 일이고 간에 속일 필요가 없소."

난검은 말했다.

"조금 전 저는 모용 공자 일행이 소실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사하국으로 가겠다고 상의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왕 소저는 그녀의 고종 오라버니와 동행을 하고 있는데 지금쯤은 수십 리 밖에서 걸어가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내일 어떻게 단 소저와 만날 수 있겠어요?"

아자는 퇘, 하고 침을 뱉았다.

"못난 계집야, 나쁜 계집애!"

별안간 창밖에서 한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단 소저, 그대는 어째서 우리 언니를 욕하는거죠? 영취궁 신농각(神農閣)의 열쇠는 내가 관리하고 있어요. 그대는 모르시나요? 주인이 그대의 눈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신농각으로 가서 책을 찾아야 하고 약을 찾아야 해요."

말하는 사람을 바로 죽검이었다.

아자는 속으로 흠칫했다.

'이 못난 계집애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이 허죽이라는 화상이 나의 눈동자를 치료하기 전에는 그의 시녀들에게 죄를 지을 수가 없겠구나. 그녀들이 훼방을 놓아 약물을 암암리에 몇 가지 바꾸어 놓게 된다면 나의 눈동자는 영영시력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흥! 내가 눈을 다 치료하고 난 이후 너희들에게 나의 수단이 얼마나 매운지 보여 주마.'

이와 같이 생각한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단예는 난검에게 물었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서하로 갔죠?"

난검은 말했다.

"저 역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서하로 갔는지 몰라요."

허죽은 말했다.

"세째 아우, 그 관게는 내가 알고 있다네. 나는 공야 선생이 개방의 뭇 장로들에게 하는 소리를 들었다네. 서하국의 공주가 혼인을 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팔월 중추가절에 사위를 뽑는다더군, 서하는 화살과 기마술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영웅 호걸들을 초청해서는 함께 무공 솜씨를 보이라고 초청을 했다네. 그리하여 서하 국왕은 재주나 풍모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을 부마로 삼으려고 한다네."

매검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주인께서는 어째서 서하국으로 가서 시험해 보시지 않으세요? 소 대협과 단 공자께서 주인과 다투시지만 않는다면 주인께서 서하국의 부마가 되는 것을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노릇이에요."

매란국죽 사검은 천성이 순진했다.

허죽은 온화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었고, 평소 그녀들과 함께 있을 때 주인이 위엄을 과시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절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들에 대해서 공경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네 자매는 머리에 떠오르는 일이 있으면 조금도 꺼리지 않고 말하곤 했다.

허죽은 그 말을 듣고 연신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 가겠소. 안 가겠소. 나는 출가......"

그는 출가인(出家人)이라는 한 마디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인(人)자를 말하지 못하고 다시 집어삼켜야 했다.

방안의 매검과 난검, 방밖의 죽검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국검까지도 동시에 웃음소리를 냈다.

허죽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종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종영은 멍하니 단예만 바라보고 있었고 전혀 자기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갑자기 허죽의 마음이 움직였다.

'서하국으로 찾아간다? 나와 꿈속의 소저는 바로 서하 영주(靈州)황궁의 얼음 창고에서 만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꿈속의 소저는 아직도 영주에 있을지 모른다. 세째 아우가 그녀가 살고있는 곳이 어디란 것을 말해 주지 않는 이상 내가 서하국으로 가서 수소문을 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이때 단예가 입을 열었다.

"둘째 형, 그대의 영취궁과 서하국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서하국으로 한 번 가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분 무슨 검이라는 누나......미안합니다. 네 분의 모습이 너무 똑같아 나는 누가 누구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군요......이분 누나께서 형님보고 부마가 되라고 하는 것은 농담 삼아 한 말이겠지만, 생각해 볼 때 팔월 중추절에는 사방의 호걸들이 모두 영주로 모여들게 되어 영주는 매우 시끌벅적 재미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큰형님도 급히 서둘러 남경으로 돌아갈 것 없습니다. 우리 함께 서하로 놀러 가죠. 그런 연후에 재차 영취궁으로 가서 천산동모가 빚어 놓은 백년 묵은 미주를 맛본다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날 저는 영취궁에서 둘째 형님과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퍼마셨는데 그때는 정말 즐거웠지요."

소봉이 소실산으로 달려왔을 때는 십팔 명의 거란 무사가 커다란 가죽 주머니에 독한 술을 담고 수행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무사들이 곁에 없어 그는 한동안 술을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거기에다가 단예로부터 영취궁으로 가 천산동모가 빚어 놓은 백년 묵은 술을 마시자는 제의를 받자 그만 입안에 침이 고였다.

아자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가요. 가요. 형부, 우리 모두 가기로 해요."

그녀는 자기의 눈이 먼 것을 치료하려면 반드시 허죽을 따라 영취궁으로 가야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소봉이 뒤따라 가지 않는다면 허죽이 설사 치료를 해주려 한다고 해도 네 계집애들이 한사코 방해를 놓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며, 그렇게 된다면 밤이 길면 꿈이 많다는 말이 있듯이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즉시 몸을 일으키고 소봉의 소맷자락을 가볍게 몇 번 잡아당기며 부탁의 말을 했다.

"형부, 형부가 만약 저를 데리고 영취궁으로 가지 않는다면 저는......저는 한평생 눈을 뜰 수 없게 될 거예요."

소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대요나라에서 지극히 높은 지위에 앉아 있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다. 중원의 호걸들도 모두 나와는 원수가 된 터에 간신히 두 호방한 형제를 사귀게 되었지 않았는가? 만약 이 형제들과 며칠 더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입을 열었다.

"좋아. 둘째 아우, 그리고 세째 아우, 우리 함께 서하로 한번 가 보세. 그런 연후 다시 둘째 아우의 영취궁으로 가서 며칠간 술을 퍼마시도록 해보세. 그러나 아무쪼록 둘째 아우는 단 소저의 눈을 치료해 주어야겠네."

이 날, 뭇 사람들은 함께 출발했다. 허죽은 다시 소림사 산문 앞으로 가서 절을 올리고 중얼중얼 뭐라고 빌었다.

첫째로 부처님의 은덕에 사의를 표하자는 것이고, 둘째로는 절안의 사조부들과 사부, 그리고 사백숙들이 이십여 년간 키워 주고 가르쳐 준 은덕에 사의를 표하자는 것이었고, 세째로는 부친인 현자와 모친인 섭이랑의 영령에게 고별인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산 아래에 이르니 영취궁의 뭇 여인들은 이미 노새가 끄는 수레를 마련해 놓고 단예와 유탄지가 수레 안에서 조섭하도록 준비해 놓고 있었다.

유탄지는 그야말로 도저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수모와 욕됨을 당했으면 당했지 아자와 헤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따라서 아자가 간혹 가다가 수레의 휘장을 들치고 그에게 한두 마디 말을 해줄 때마다 그는 반나절간 좋아서 흥분에 몸을 떨곤 했다.

그런데 아자는 말 위에 올라타 언제나 소봉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유탄지는 마음이 여간 괴롭지 않았으나 감히 그와 같은 심정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다시 이틀을 가게 되었다. 영취궁의 뭇 영니들도 점차 불어났다. 난천부의 수령은 허죽과 단예에게 그녀들이 이미 진남왕을 찾아가 단예의 상처가 장차 치유되어 가기 때문에 커다란 지장이 없다는 말을 알려 주었다고 전했다.

난전부의 여인들은 다시 말했다.

"진남왕 일행은 동북쪽으로 갔어요. 그러나 단연경과 남해악신, 운중학은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더군요. 쌍방은 결코 마주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단예는 무척 기뻐하며 난천부의 여인들에게 사의를 표했다.

종영은 단예에게 물었다.

"영존께서는 대리로 한시 바삐 돌아가야 할 몸인데 어째서 동북쪽으로 가시는 거죠?"

아자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버님은 아마도 우리 어머님에게 붙잡힌 몸일 거예요. 어머니가 아버님에게 대리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겠죠. 종 소저. 그대가 우리 오라버니의 마음을 붙잡고 늘어지려면 우리 어머니한테 배워야 할 거예요."

종영은 단예가 서하로 가려고 한 것은 순전히 왕 소저와 만나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단예와 지내게 된 것만으로도 마음속으로 매우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단예와 왕 소저가 만나게 된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아자는 빈정거리는 투로 그녀를 조롱했지만 그녀는 아자의 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름철이라 한낮의 햇살은 불처럼 뜨거웠다. 그러나 중추절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시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뭇 사람들은 아침 나절과 저녁 무렵에만 길을 재촉했다.

그렇기 때문데 매일같이 육칠십 리만 나아가고 쉬곤 했다. 이제 여행을 떠난지도 꽤 되었고 단예의 상처도 점점 좋아지게 되었다.

허죽은 유탄지의 분질러진 뼈를 이어 주었고 나무 판대기를 대어 꽉 묶어 주었기 때문에 회복될 가망성이 퍽이나 많아 보였다.

그러나 유탄지는 그 누구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허죽이 그의 다리를 치료해 주자 그저 얼굴에 못마땅한 빛을 띄웠을 뿐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이 날 일행은 함양(咸陽)의 고도에 도달하게 되었다. 단예는 여러 사람에게 과거 유방과 항우가 싸웠던 전쟁터를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었다.

소봉과 허죽은 책을 읽어 본 적이 별로 없는지라 단예가 채찍을 들어 가리키며 옛날의 영웅 호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을 듣고 흥미를 크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돌연 말발굽 소리와 더불어 뒤에서 두 필의 말이 재빨리 달려왔다. 일행은 타고 있는 말을 길 옆으로 끌어서는 뒤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들이 먼저 가도록 했다. 그러나 아자는 여전히 길을 막고 서 있다가 그 두 필의 말이 그녀의 등뒤로 가까이 다가들게 되었을 때 채찍을 들어 냅다 등뒤의 말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러나 말을 타고 달려오던 사람은 말채찍을 들어 아자의 채찍을 막으면서 크게 부르짖었다.

"단 공자, 소 대협!"

단예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앞장을 선 사람은 파천석이고 뒤에서 달려오는 사람은 주단신이었다.

파천석은 채찍을 휘둘러 아자가 후려친 말채찍을 밀어붙인 후 주단신과 함게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단예에게 절을 했다.

단예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와 반례하고 물었다.

"저희 아버님은 편안하신가요?"

이때 휙, 한 소리가 나면서 아자가 재차 채찍을 들어서는 파천석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했다.

파천석은 아직 몸을 일으키지 않은 상태라 살짝 왼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여전히 꿇어앉은 자세였다. 척, 하는 소리와 함께 아자의 채찍은 길바닥을 후려치게 되었다.

파천석은 오른쪽 무릎으로 슬쩍 채찍을 눌렀다.

아자가 힘주어 뽑으려고 했으나 채찍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의 내력이 상대방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의 자루를 파천석에게 던졌다.

파천석은 그녀가 저만리에게 수치심을 주어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던 터라 아자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눈이 멀기는 했으나 행동은 여전히 민첩하기 짝이 없었다.

채찍 자루가 매우 신속하게 날아드는 것을 느꼈을 때 파천석은 급히 고개를 기울여 피한다고 피했으나 얼굴 부분은 피할 수 있었지만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채찍의 자루는 그의 어깻죽지를 후려치고 말았다.

단예는 호통을 내질렀다.

"아자 누이, 또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아자는 말했다.

"내가 왜 쓸데없는 짓을 해요? 그가 나의 채찍을 달라기에 그에게 주었을 뿐이에요."

파천석은 헤벌죽 웃으며 열었다.

"흐흐흐, 소저께서 채찍을 내려 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두 손으로 단예에게 바쳤다.

단예가 받아 보니 겉봉에는 '얘아 보아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바로 부친의 글씨인지라 재빨리 옷깃을 가다듬고 공손히 뜯어 보았다.

그 내용은 단예가 서하로 가게 돼 좋은 기회가 있고 인연이 닿게 된다면 방법을 강구해서 서하 공주를 처로 맞아들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단예는 이 편지를 모두 읽고나자 그만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이건......이건......"

파천석은 다시 한장의 커다란 서찰을 꺼냈다. 위에는 대리국황태제진남왕보국대장군(大理國皇太弟鎭南王保國大將軍)이라는 주홍빛의 커다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파천석은 말했다.

"이것은 황태제께서 서하 황제에게 사돈을 맺자고 청을 드리는 친필 서찰입니다. 공자께서는 영주로 가신 이후 서하의 황제에게 드리도록 하십시요."

주단신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공자,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꽃과 같이 예쁜 공주를 맞아들여서는 대리로 돌아와 우리의 강산을 반석처럼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단예는 더욱 겸연쩍어 하며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내가 서하로 떠나는 것을 아셨죠?"

파천석은 말했다.

"황태제께서는 모용 공자가 서하로 부마가 되기 위해 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자께서도......역시 구경을 가리라 짐작을 하신 것입니다. 황태제께서는 공자께서 반드시 나라의 대사를 중요시 하되 남녀의 사사로운 정은 가볍게 여기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아자는 키득거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호호, 이것이야말로 자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다는 격이로군, 아버님은 모용복이 서하국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왕 소저가 반드시 뒤따라 가리라고 여긴 것이지. 따라서 자기의 보배와 같은 아들이 뒤따라 갈 것을 짐작하셨던게야. 흥! 윗물이 맑지 못하면 아랫물로 맑지 못하다고, 그 자신은 어째서 국가 대사를 중요시하지는 않고 남녀의 사사로운 정에 집착한단 말이야? 어찌하여 나라를 떠나온 지 이토록 오래 되었는데도 돌아가시지 않지?"

파천석과 주 단신, 그리고 단예 세 사람은 아자가 부친에 대해 그토록 불경한 언사를 마구 뱉어내자 깜짝 놀라 안색이 변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딸 된 도리로 어찌 부친의 잘못을 들어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아자는 다시 말했다.

"오라버니, 아버님의 편지에는 뭐라구 씌어 있나요? 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나요?"

단예는 말했다.

"음, 아버님은 너와 내가 함께 있는 줄 모르고 계시는 모양이구나."

아자는 말했다.

"그럴 거예요. 그 분은 모르실 거예요. 아버님은 오라버니에게 저를 찾으라고 당부하시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오라버니에게 이 눈 먼 동생을 잘 돌보도록 하라는 말이 없었나요?"

단정순의 편지에는 그와 같은 당부는 없었다. 그러나 단예는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누이동생의 마음을 해치게 된다고 생각하고 파천석과 주단신 두 사람에게 연신 눈짓을 했다.

주단신이 말했다.

"황태제께서는 저희 두 사람에게 공자를 돌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무쪼록 공자를 도와 주어 반드시 서하국의 공주를 맞아드리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지요."

그 말뜻은 단정순이 그들 두 사람으로 하여름 단예를 감시토록 해서 반드시 서하국의 부마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단예는 겸연쩍게 웃었다.

"나는 본래 무공을 모르며 또한 중상을 입고 치유되지 못한 몸이라 진기도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 주제인데 어떻게 천하의 영웅들과 겨룰 수 있단 말이오?"

파천석은 고개를 돌려 소봉과 허죽에게 허리를 굽혔다.

"황태제께서는 소인에게 소 대협과 허죽 선생을 찾아 뽑고 두 분이 의형제를 맺은 의리를 보아 우리 공자에게 한 팔의 도움을 베풀도록 청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황태제께서는 또 소실산에서 총총이 헤어지게 되어 두 분과 좀더 다정하게 지내지 못한 점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며 특별히 소인에게 명해서 약소하나마 예물을 올리셨습니다."

그는 한 마리의 백옥으로 조각된 사자를 두 손으로 소봉에게 바쳤다. 주단신은 품속으로 상아로 살을 만든 부채 한 자루를 꺼냈다. 그 부채에는 단정순의 글씨가 씌어 있었는데 그 부채를 허죽에게 바쳤다.

두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받았다.

소봉은 말했다.

"세째 아우의 일은 우리가 물론 전력으로 도울 것이니 단 숙부께서는 당부하실 것도 없지요."

아자는 힝, 하니 코웃음쳤다.

"형부는 아버님이 호의로 그러시는 줄 아세요? 아버님은 그대를 두 사람에게 저희 오라버니와 부마 자리를 놓고 다투지 말라고 한 거예요. 저희 아버지는 자기의 보배 같은 아들이 두 분을 이겨내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두 분이 그렇게 약속을 하신다면 그야말로 우리 아버지의 술수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고 뭐겠어요?"

소봉은 미미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너희 언니가 죽었는데 내가 다시 그 누구를 맞아들인단 일이냐?"

아자는 말했다.

"형부는 입으로는 물론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누가 알겠어요? 허죽 선생은 중후하고 얌전하여 저희 오라버니처럼 풍류적이면서도 호색적이지 못하므로 곳곳에 정을 남기거나 하지 않아요. 그리고 허죽 선생도 한 번도 여인과 인연을 맺어보지 못했을 것이니 서하의 공주를 맞아들인다면 좋지 않겠어요?"

허죽은 그만 온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연신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내......내 자신은 결코 그럴 수 없소. 내 마땅히 큰형님과 세째 아우를 도와 이 일을 성사시키도록 하겠소."

파천석과 주단신은 서로 한 번 처다보았다.

그리고 소봉과 허죽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두 분께서 허락해 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소봉과 허죽이 동시에 도울 것을 응락하니 파천석과 주단신 두 사람은 한 번 더 다짐을 하고 못을 박아 두었는데 이는 물론 소봉과 허죽 두 사람이 약속을 저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단예가 좀더 사양하지 못하도록 해 두자는 것이었다.

뭇 사람들은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점차 영주에 가까워지게 되었고 길에서 만나는 무림의 인사들이 더욱더 늘어나게 되었다.

서하의 땅은 요나라나 송나라보다 협소한 편이었으나 서쪽 지방에서는 그래도 대국이었다. 이때 서하의 국왕은 이미 황제라 칭하고 있었다.

당금 황제 이건순(李乾順)은 역사에서 숭종(崇宗) 성문제(聖文帝)라고 일컫고 있으며 연호는 천우민안(天祐民安)이었다.

이때 조종은 태평했으며 백성들 역시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만약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게 된다면 부귀영화를 손에 검쥐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한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무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미 처를 맞아들여 자식까지 두고 있었다.

나이 많은 적잖은 영웅들이 자제들을 데리고 시험 삼아 영주로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많은 강호의 대도족들이나 방회의 호걸들은 홀몸으로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약간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천리 밖에 있더라도 청실홍실의 인연이 닿을 수 있는 법이거늘 내가 서하 공주와 혼인을 할 팔자라면 나의 무공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다 하더라도 공주는 나를 점찍게 될 것이다. 나는 부마가 될 가망이 있지 않겠는가?'

길을 가는 동안 적지 않은 젊은 영웅 호걸들이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영주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기와 사용하는 기구들은 하나같이 매우 값어치 있는 물건이었으며 그들의 옷차림은 새신랑처럼 말쑥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노려보기 마련이었고 마치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날 소봉 일행은 말발걸음을 느리게 해서는 천천히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쪽으로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필의 말이 달려왔다. 말위에는 오른팔을 하얀 베로 감싼 다음 목에 걸고 있는 지극히 낭패한 모습을 한 사내가 타고 있었다.

소봉은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세 필의 말이 달려왔다. 말 위에 탄 사람들 역시 중상을 입고 있었는데 팔이 부러지지 않았으면 다리가 분질러져 있었다.

그 세 사람의 얼굴은 창백했으며 크게 부끄러운 빛을 띄우고 고개를 숙인 채 총총이 지나갔다.

매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앞에 누가 싸우고 있는 모양이지? 어째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 되었을까?"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시 두 사람이 맞은 편에서 달려왔다. 두 사람은 말을 타지 않았는데 온 얼굴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머리에 푸른색 베를 두르고 있었는데 핏물이 그 푸른 베조각 밖으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죽검은 물었다.

"이봐요, 상처약을 드릴까요? 어떻게 하다가 상처를 입었죠?"

이 사람은 매섭게 그녀를 한 번 노려보더니 침을 뱉고는 고개를 돌려 가 버렸다. 국검은 대노해서 장검을 뽑아들고 그 사람을 베려고 하였다.

허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두시오. 그 사람은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 아니겠소? 우리가 이해를 해야죠."

난검은 말했다.

"죽 누이가 호의로 상처약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저 사람은 그토록 무례하게 나왔으니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바로 이때 앞쪽에서 네 필의 말이 질풍같이 달려왔다. 왼쪽에 두 필, 오른쪽에 두 필이었다. 그런데 말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상대방을 힐난하고 있었다.

"모두 너희 두꺼비가 하늘의 거위 고기를 먹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나 영주로 가서 부마가 되려고 해야지. 분수를 알아야지. 사람이라면 분수를 알아야 한단 말씀이야."

다른 편 사람이 욕을 했다.

"너에게 재간이 있었다면 어째서 뚫고 지나가지 못했느냐? 창피하니까 괜히 나에게 화풀이를 하는군."

"만약 네가 뒤에서 비겁하게 암습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패했겠느냐?"

이들 네 사람은 말을 달리면서 대화를 주고 받았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다투고 있는지 똑똑히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삽시간에 그들 앞에 도달했다.

네 사람은 소봉 일행을 보더니 감히 길을 다투지 못하고 말고삐를 잡아서는 양쪽으로 돌아서 달려갔다. 그러면서도 서로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듣기에 그 네 사람은 영주로 가서 부마가 되고자 했는데 앞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패배당해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단예는 말했다.

"형님, 제가 보기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에서 다시 몇 사람이 걸어왔는데 모두 상처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있었고 한 사람은 다리를 절룩이고 있었다.

종영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 듯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가며 물었다.

"이봐요. 길목을 지키는 사람이 무서운가요?"

한 중년의 사내가 말했다.

"흥, 그대는 소저이니 지나가더라도 막는 사람이 없을 것이외다. 그러나 남자라면 일찌감치 뒤돌아서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가 이와 같이 말을 하자 허죽과 소봉마저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말했다.

"앞으로 나가 보세."

그들은 질풍같이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일행이 팔 마장을 달려가게 되었을 때 가파른 산길이 나타났다. 길은 협소해 한 필의 말만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으며 몹시 구불구불 했다. 그런데 몇 번 돌지 않자 앞쪽에 시꺼멓게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소봉 등이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산길 중간에 두 명의 대한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모두 키가 육 척이나 되는 매우 우람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손에 커다란 쇠방망이를 들고 있었고 한 사람은 두 손에 각기 한 자루의 동추를 들고서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한 앞에 모여 있는 사람은 적어도 십 칠팔 명은 되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말했다.

"실례 좀 합시다. 우리는 영주로 가는 길이니 두 분은 길을 좀 비켜 주시오."

이것은 예의를 다해 깍듯이 말한 것이었다.

"두 분은 길을 지나가는 통행세를 받으려는 것이오? 그러면 은자 한 냥에 한 사람인지 두 냥에 한 삶인지 가르쳐 주시오. 두 분이 액수를 이야기한다면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는 볼 수 없죠."

이것은 금전으로 유혹하는 말이었다.

"당신네들이 비켜서지 않고 나를 화나게 만든다면 당신네들 두 사람을 박살내고 말겠소. 그렇게 된다면 당신네들은 온전한 몸을 지닐 수 없게 될 것이오. 몸이 박살날 사람이 온전할 수는 없지 않겠소? 어서 물러서서 불구가 되거나 죽는 불상사를 피하도록 하시오."

이것은 위협을 하는 말이었다.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 분은 풍모가 당당하고 위풍이 늠름한데 어째서 영주로 가서 부마가 되려고 하지 않으시오? 그 꽃같이 어여쁜 공주를 남에게 빼앗긴다면 애석한 노릇이 아니겠소?"

이것은 색으로 유혹하는 말이었다. 뭇 사람들은 중구난방 떠벌였지만 두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소봉과 단예 일행은 가까이 다가가 구경을 했다. 돌연 사람들 틈에서 그 누가 호통을 내질렀다.

"비키시오!"

그리고 싸늘한 광채를 번뜩이며 검을 든 채 앞으로 나가 왼쪽에 있는 대한을 찌르려고 했다. 나타난 대한은 체구가 몹시 우람했으며 무기 또한 꽤 무거워 보였는데 행동은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왼쪽에 있던 대한은 양손에 들고 있던 동추(銅鎚)를 가지고 상대방의 장검을 두 동추 속에 끼었다. 이 한 쌍의 팔각동추(八角銅鎚)는 한 자루의 무게만 해도 사십여 근이나 되었다. 탕, 하는 소리가 나면서 장검은 대뜸 십어 토막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대한은 그 다음 순간 발을 들어 그 자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그 사람은 한소리 크게 부르짖더니 칠팔 장 밖으로 나가떨어져서는 일어나지도 못했다.

이때 또 다른 한 사람이 손에 쌍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쌍도를 휘둘러 한 무더기의 싸늘한 광채로 전신을 보호했다.

두 대한의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한소리 호통을 내지르더니 갑자기 지당도법(地堂刀法)으로 변화시켜서는 땅바닥을 구르듯 하며 공격해 가면서 쌍칼로 두 명의 대한의 다리를 찍어 갔다. 그 팔각동추를 든 대한은 칼을 휘두르는 자의 공세를 아랑곳하지도 않고 동추를 들더니 그대로 내리쳤다.

그 순간 악, 하는 비명 소리가 났으며 지당도법을 펼치던 자의 쌍칼은 쇠방망이에 산산이 부숴져 몇 조각의 칼날이 그의 가슴팍에 꽂히게 되었다. 그는 데굴데굴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가고 말았다.

두 명의 대한이 잇따라 두 사람을 해치우자 다른 사람이 감히 앞으로 더 나가지 못했다. 별안간 말발굽소리가 급촉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산길 위로 한필의 노새가 달려 올라왔다.

노새의 등에는 한 명의 젊은 서생이 타고 있었는데 나이는 십 팔구 세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느슨한 장포에 허리띠 또한 느슨하게 매고 있는 그 태도는 무척이나 의젓해 보였고 용모 또한 지극히 준수했다.

단예는 별안간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부르짖었다.

"그대는......그대는......그대는......"

그 서생은 그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여러 사람들이 타고 있는 말 곁을 지나 앞쪽으로 나아갔다.

종영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대는 저 상공을 아시나요?"

단예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니오. 내가 잘못 보았소. 그는......그는......남자인데 내가 어찌 알겠소?"

그의 말은 정말 이치에 닿지 않아 아자는 대뜸 킥, 하고 웃으며 한마디 했다.

"오라버니, 원래 그대는 여자만 알아보고 남자들을 알아 보지는 못하는군요?"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물었다.

"조금 전에 지나간 사람이 남자라고요? 아니예요. 분명히 여자였어요."

단예는 말했다.

"정말 여자인가?"

아자는 말했다.

"물론이에요. 그녀의 몸에서 향기도 나더군요. 바로 여자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란 말이에요."

단예는 그 향기란 말을 듣게 되자 두근거려 말했다.

"혹시......혹시 정말 그녀가 아닐까?"

이때 그 서생은 노새를 타고 이미 그 두 대한의 앞에 이르러서 호통을 내질렀다.

"비켜라!"

그 한마디는 매우 카랑카랑 했다. 과연 여자의 음성이었다.

단예는 더욱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부르짖었다.

"목 소저, 완청 누이, 그대.....그대......그대......나는......나는......나는......"

입으로는 말을 마구 더듬거리면서 말을 몰아 쫓아가려고 했다.

허죽이 부르짖었다.

"세째 아우, 상처를 조심하게!"

그는 파천석, 주단신과 더불어 단예를 뒤쫓아갔다.

그 젊은 서생은 노새 등에 탄 채 두명의 대한을 노려볼 뿐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파천석과 주단신은 옆에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매우 준수했는데 과연 옛날 단예를 따라 함께 대리국 진남왕부에 들어온 적이 있던 목완청이었다.

아자는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없었으나 청각이나 후각은 다른 사람보다 예민한 편이었다.

목완청의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대뜸 그 냄새를 맡고 목완청이 여자란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단예는 말을 몰아 목완청의 곁으로 가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붙잡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누이, 이 며칠 동안 그대는 어디 있었지? 나는 정말 그대가 보고 싶었어."

목완청은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손을 피하더니 고개를 돌리고 냉랭히 말하였다.

"보고 싶었다구요? 어째서 나를 보고 싶어 했나요? 정말 나를 생각했나요?"

맞은편의 쇠지팡이를 든 거한이 껄껄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좋아! 알고 보니 계집애였구나! 그렇다면 보내주지."

그러자 동추를 든 대한이 부르짖었다.

"여자들은 지나갈 수 있으나 냄새나는 남자들은 안 돼. 이봐 그대는 굴러가! 굴러가란 말이야!"

단예는 말했다.

"형씨의 말은 틀렸소이다.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통행하도록 되어 있는 길이오. 형씨가 어째서 나를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듣고 싶소."

그 대한은 말했다.

"토번국의 종찬 왕자(宗贊王子)께서는 영을 내렸다. 이 관문은 열흘간 폐쇄하며 팔월 중추절이 지난 이후에야 다시 사람이 지나가도록 말이다. 중추절 이전에는 여자는 지나갈 수 있지만 남자는 지나갈 수 없고, 승려는 지나갈 수 있지만 속인은 지나갈 수 없으며, 늙은 사람은 지나갈 수 있어도 젊은 사람은 지나갈 수 없으며, 죽은 사람은 지나갈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지나갈 수 없다. 이것은 바로 네 가지 지나갈 수 있는 사람과 네 가지 지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잘 알아 들었느냐?"

단예는 물었다.

"어인 연유로 그와 같이 사람을 분류하게 되었나요?"

대한은 큰소리로 말했다.

"왜냐고? 우리의 동추와 무쇠 방망이가 바로 그 연유이지. 너는 남자이고 화상도 아니며 늙은이도 아니니 이 관문을 지나려면 반드시 죽은 사람이 되어야 가능하단 말이다."

목완청은 노해 부르짖었다.

"쳇, 언제 그토록 복잡한 규칙이 만들어졌지?"

그러면서 오른손을 번쩍 쳐들더니 찍, 하니 두 대의 조그만 화살을 두명의 대한에게 나누어 쏘았다. 팍팍,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그 조그만 화살은 두 명의 대한의 가슴팍 옷자락을 꿰뚫고 가슴팍에 박히는 듯했으나 두 사람은 끄덕도 없이 서 있었다. 팔각동추를 든 대한은 노해 부르짖었다.

"이런 분수를 모르는 계집 같으니라구! 암기를 쓰겠다는 것이냐?"

목완청은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저들 두 사람은 십중팔구 몸에 연갑(軟甲)을 두르고 있을 것이다. 나의 독화살로서는 그들을 쏘아 죽일 수가 없구나.'

이때 동추를 든 대한이 커다란 손을 뻗쳐 목완청을 움켜쥐려고 했다. 그 사람의 몸은 엄청나게 우람해서 목완청이 노새 등에 타고 있는데도 그가 손을 한번 뻗자 그녀의 가슴팍까지 닿을 지경이었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형씨, 무례한 행동은 하지 마시오."

그러면서 왼손을 재빨리 뻗쳐 막았다. 다른 대한은 손목을 홱 뒤짚더니 단예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무쇠 방망이를 든 대한이 큰소리로 말했다.

"그것 참 잘 됐다! 우리 형제 두 사람이 이 멀쑥하게 생긴 녀석을 두 쪽으로 나누도록 하자!"

그들은 두 개의 동추를 왼손에 모아 쥐더니 오른손을 뻗쳐 단예의 왼쪽 손목을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목완청은 다급히 부르짖었다.

"나의 오라버니를 해치지 말아요!"

그녀는 찍찍, 하니 몇 대의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두 명의 대한의 몸에 맞았건만 여전히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 대한의 얼굴이나 눈알을 쏘려고 했지만 단예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혹시나 단예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까봐 그럴 수도 없었다.

양쪽은 산봉우리와 벽이 가파르게 서 있어서 허죽, 파천석, 주단신 세 사람은 단예와 목완청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말과 노새에 막혀서 앞으로 나아가 구원을 할 수가 없었다.

허죽은 별수없이 안장에서 몸을 날려 쇠망치를 들고 있는 대한의 곁으로 다가가서는 손가락을 뻗쳐 그 대한의 옆구리를 찌르려고 했다. 그런데 단예가 급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둘째 형님, 당황해할 것 없소이다. 그들은 나를 해칠 수 없소이다!"

이때 두 명의 철탑과 같이 우람한 대한은 점점 힘이 빠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단예의 북명신공은 전문적으로 적의 공력을 빨아들이는지라 두 명의 대한은 내력이 모조리 빠지게 되어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단예는 말했다.

"당신네들은 많은 사람들을 때려 죽이거나 상처를 입혔으니 이와 같은 형벌을 받아 마땅하오.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시오."

이때 종영이 달려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들은 다음에 다시 사람을 칠 능력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목완청에게 말했다.

"목 언니, 정말 그대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목완청은 냉랭히 말했다.

"너는 내 친누이동생이니 그저 언니라고 부르면 된다. 뭐 하필 목이란 말을 보태야 하니?"

"목 언니,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내가 어째서 그대의 친누이동생이란 말이에요?"

목완청은 단예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게 물어 보렴."

종영은 단예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단예의 설명을 기다렸다.

단예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래, 그래......이건......정말 자세히 말하기가 거북하군......"

이때 두 명의 대한에게 저지를 당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곁을 지나 곧장 영주 쪽으로 달려갔다.

아자는 소리내어 부르짖었다.

"오라버니, 그 향기로운 소저 역시 그대와 옛날 정분이 있었던 사이인가요? 어째서 나에게 소개해 주지 않는가요?"

단예는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마라. 이 분은......너의......너의 친언니이니 인사를 드리도록 해라."

목완청은 노해 부르짖었다.

"나는 그런 인사를 받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노새의 엉덩이를 가볍게 채찍질을 가해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단예는 말을 달려 뒤쫓아가며 물었다.

"그 동안 어디에 가 있었지? 누이, 그대는......그대는 많이 수척해졌구려."

목완청은 자존심이 강한 여인이었다. 걸핏하면 손을 써서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부드러운 한마디를 듣게 되자 그만 가슴속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일년 동안 그녀가 방황하며 온갖 괴로움을 느껴야 한 것도 어찌할 수 없는 정 때문이었다.

삽시간에 설움이 복받쳐오른 그녀는 그만 참을 수 없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단예는 말했다.

"누이, 우리 쪽으로 사람이 많소. 서로 도움이 될 것이니 그대는 우리와 함께 행동하도록 하시오."

목완청은 말했다.

"누가 그대보고 돌봐 달라고 했어요? 그대가 없더라고 나 혼자서 이렇게 많은 세월을 지내 왔잖아요."

단예는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할 말이 너무 많다오. 누이,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응낙하구려."

목완청은 말했다.

"그대는 또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러세요? 십중팔구 터무니없는 말들이겠지."

입으로는 응락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말투는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단예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누이, 수척해지긴 했지만 갈수록 더 예뻐지는 것 같군."

목완청은 얼굴빛을 굳혔다.

"그대는 나의 오라버니예요. 나에게 그 같은 말을 해선 안 돼요."

그녀는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단예가 자기와 같은 부친을 둔 남매 사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상사의 정은 그 동안 조금도 감퇴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날로 불어만 갔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갈수록 그대의 모습이 예뻐진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니오. 누이, 어째서 남장을 하고 영주로 가는거지? 부마가 되겠다는 것이오? 그대처럼 준수한 젊은 서생이라면 서하 공주가 보자마자 반하지 않고는 못 베길거야."

목완청은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영주로 가고 있죠?"

단예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나는 그저 구경하러 가는 것이지 별다른 볼 일은 없소."

목완청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나를 속이려 하지 말아요. 아버님은 그대에게 서하로 가서 부마가 한번 되어 보라고 저 파가와 주가에게 편지를 보냈잖아요? 제가 모르는 줄 아세요?"

단예는 의아하게 물었다.

"어! 그대가 어떻게 알고 있지?"

목완청은 말했다.

"나의 어머니가 우리의 훌륭하신 아버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거예요. 그리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구요. 그러니 아버님의 일을 내가 자연히 알게 되었죠."

"원래 그랬었군. 그대는 내가 영주로 간다는 것을 알고 따라와 나를 만나보고자 한 것이겠지?"

목완청은 얼굴을 붉혔다. 단예의 그 말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맞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으로는 뻣뻣하게 나왔다.

"흥, 내가 왜 그대를 만나보고자 했겠어요. 나는 그저 서하 공주가 도대체 얼마나 어여쁘길래 천하의 남자들이 이토록 법석을 떨고 시끄럽게 구는지 궁금하여 그 서하 공주를 한 번 구경하려고 했던 거예요."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그대의 반 정도만 예쁘다 하더라도 대단한 미인일거야.'

목완청은 말했다.

"그리고 또 나는 우리 대리국의 단 왕자께서 이 혼사를 성공시킬 재간이 있는지 없는지 보려고 온 거예요."

단예는 나직이 말했다.

"나는 결코 서하의 부마가 되지 않겠소. 누이, 그대는 지금 내가 한 말을 남에게 하지 않도록 하시오. 아버님이 정말 나를 결박한다면 나는 다시 도망을 쳐야 한단 말이오."

목완청음 말했다.

"아버님의 명령에 그대는 반항할 생각인가요?"

단예는 말했다.

"나는 반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도망을 친단 말이오?"

목완청은 웃었다.

"도망치는 것과 명령에 항거하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어요? 상대방은 금지옥엽의 공주인데 그대는 왜 마다하지요?"

그녀는 처음으로 웃음띤 얼굴을 보였다.

단예는 속으로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대는 내가 아버지와 똑같은 줄 아나 보군? 만나는 족족 사랑하고 그리하여 나중에는 제대로 수습을 못하고 말이야."

목완청은 코웃음쳤다.

"흥! 내가 보기에 오라버니와 아버님은 별 차이가 없어요. 정말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에요. 하지만 그대는 아버지와 같은 복을 타고 나지 못했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저희 어머님은 등뒤에서 아버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매우 증오하는 듯하지만 일단 아버님을 대하게 되면 그만 싱글벙글 웃게 되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죠. 요즘의 나이 젊은 아가씨들이야 어디 저희 어머니처럼 고분고분 하나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라버니는 복이 없다고요." [2144] 제목 : [김용] 천룡팔부(天龍八部) 45장 올린이 : 멀티피씨(김효범 ) 96/09/01 02:51 읽음 : 155 관련자료 없음 ------------------------------------------------------------------------------45 마른 우물 밑, 더러운 시궁창

(井底, 汚處)

파천석과 주단신은 목완청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녀를 소봉과 허죽 등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일행은 다시 수 마장을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에서 놀람에 찬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그 누가 큰소리로 부르짖었는데 들어보니 남해악신의 음성이었다. 뭔가 위험한 일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단예는 부르짖었다.

나의 제자로군!

종영도 부르짖었다.

빨리 가 보도록 해요. 그대의 제자의 위인됨은 별로 나쁘지 않아요.

허죽 역시 말했다.

그렇지.

그는 어머니 섭이랑이 남해악신과 동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남해악신을 남이라고 생각지 않고 있었다.

뭇 사람들은 말을 모아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갔다 몇 번 산모퉁이를 돌게 되자 저쪽의 벼랑가에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불쑥 튀어나온 벼랑 아래는 깊은 골짜기였다. 그런데 그 벼랑 위에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었느데 그 형상이 매우 오래된 듯했다.

그 소나무에는 나뭇가지 하나가 허공으로 뻗어 있었는데 몸에 청포를 걸친 한 사람이 한 개의 강철봉을 나무둥지에 박고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바로 단연경이었다. 그는 왼손으로 나무에 박힌 강철봉을 잡고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또 다른 한 자루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 지팡이 한쪽을 또 다른 사람이 잡고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바로 남해악신이었다.

남해악신의 다른 한 손은 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있었는데 그 기다란 머리카락을 움켜잡힌 사람은 바로 궁흉극악 운중학이었다.

운중학은 허공에서 두 손으로 한 소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 네 사람은 마치 기다란 새끼줄처럼 허공에 드리워져 흔들거리고 있었다. 정말 보기에도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실수하게 된다면 아래 사람들은 즉시 골짜기 아래의 수십 장이나 되는 바닥에 떨어질 판이었다. 그런데 골짜기의 바닥에는 삐죽삐죽 한 바위들이 칼날처럼 어지럽게 난립해 있었다.

칼날을 위쪽으로 세우고 있는 꼴이라 사람이 떨어지게 된다면 목숨을 건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때 바람이 불어와 남해악신과 운중학, 그리고 그 소녀 세 사람의 몸뚱이가 흔들거렸다.

그 소녀는 본래 등을 뭇 사람들 쪽으로 돌리고 있었는데 바람을 맞아 틀어지면서 얼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단예는 큰소리로 어이쿠, 했다.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 소녀는 바로 그가 아침 저녁으로 생각하고 한시도 잊지 못하는 왕어언이 아닌가?

단예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벼랑 주변은 너무나 위험해서 말을 몰아 달려갈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말에서 내려서는 급히 뛰어갔다. 그런데 소나무 앞에 이르러 보니 머리가 크고 키가 작은 뚱보가 손에 커다란 도끼를 들고 그 나무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단예는 더욱더 놀라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이것 보시오! 도대체 무엇하는 것이오?

그 땅딸한 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도끼로 나무를 힘껏 찍고 있었는데 쿵쿵, 하는 소리가 연신 크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단예는 손가락을 뻗쳐 진기를 끌어올려 육맥신검으로 그를 해치우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육맥신검은 요구할 때 반드시 응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잇따라 몇 번 손가락을 뻗쳐 보았으나 모두 허사가 되었다.

다급해진 그는 크게 부르짖었다.

큰형님! 둘째형님! 두 누이! 네 분 소저! 빨리빨리 와서 사람을 구해 주시오?

고함 소리와 더불어 소봉과 허죽 일행이 달려왔다.

원래 그 뚱보는 커다란 바위에 가려져 아래 쪽에서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 커다란 소나무는 무척 굵어 일시에 찍어 넘어뜨릴 수는 없었다.

허죽은 부르짖었다.

뚱보형, 빨리 손을 멈추시오! 그 나무를 찍어 넘어뜨리면 사람이 다쳐요.

그 뚱보는 말했다.

내가 심은 나무를 내가 찍어 집으로 가져가 관을 만들겠다는데 왜 간섭을 하지? 나무를 찍는데 왜 사람이 다친다고 하지?

말을 하면서도 그는 손을 늦추지 않았다.

단예는 말했다.

둘째 형님, 그 사람에게 이치를 깨우쳐 줄 여유가 없소이다.

좋아.

허죽이 달려갔다.

갑자기 한 사람이 두 자루의 나무 지팡이에 의지한 채 사람들 곁을 후딱 지나쳐서는 그 땅딸보 앞을 막아섰다. 바로 유탄지였다. 그는 어느새 노새가 모는 수레 안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유탄지는 한쪽 지팡이로 땅을 짚고 한쪽 지팡이를 쳐들더니 싸늘히 말했다.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지 마시오.

목완청은 이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그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을 대하자 그만 아연해져서는 아, 하고 나직이 부르짖었다.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장 방주, 빨리 그 뚱보 형씨를 저지하도록 하시오. 그로 하여금 다시 나무를 찍지 못하도록 하시오.

유탄지는 냉랭히 말했다.

내가 어째서 그를 저지한단 말이오? 나에게 무슨 이득이 돌아오기라도 한단 말이오?

단예는 말했다.

소나무가 쓰러지게 된다면 아래 쪽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되오.

허죽은 형세가 위험한 것을 보고는 몸을 날렸다. 설사 그 뚱보를 제압할 수 없다 하더라도 단연경이나 남해악신을 들어올릴 참이었다.

그가 그날 진롱 바둑판을 풀게 된 것은 단연경의 지도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 일신에 고강한 무공을 지니게 된 것은 바로 그 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일이 도대체 그에게 화가 될 것인지 복이 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말하기 어려웠지만 하여튼 단연경이 그에게 호의를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유탄지는 오른손의 나무 지팡이를 땅바닥에 꽂더니 오른손으로 즉시 후려쳤다.

한 줄기의 음한한 기운이 장풍을 따라 몰아쳐왔다. 허죽은 그의 음한한 독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장력에 실린 공력이 심후하여 얕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일 장을 반격했다.

유탄지는 제 이 장을 들어서는 소나무의 몸통을 후려쳤다.

이렇게 되자 소나무가 크게 울리면서 매달린 네 사람의 몸이 허공에서 춤을 추듯 흔들렸다.

단예는 급히 부르짖었다.

둘째 형님, 더 다가가지 마시오! 모두들 말을 하고 손을 쓰지 않도록 합시다! 장 방주, 그대는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저 사람들을 해치려고 하시오?

유탄지는 말했다.

단 공자, 그대가 나에게 이 뚱보를 제압하라면 어렵지는 않소. 그러나 그대는 나에게 무슨 이득을 주시겠소?

단예는 말했다.

무슨......무슨 이득이든지 모두 주겠소......그대가......그대가 무슨 요구를 하든지 나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겠소. 빨리! 빨리! 더 늦었다가는 때를 놓치고 말 것이오!

유탄지는 말했다.

난 이 뚱보를 제압한 후 즉시 아자 소저와 이곳을 떠나겠소. 그대와 소봉, 허죽 등 몇몇 사람은 그 누구도 저지하지 마시오. 이 일을 응낙할 수 있소?

단예는 말했다.

아자? 그녀......그녀는 나의 둘째 형님에게 치료를 받아 시력을 회복하려 하고 있소. 그대를 따라가게 된다면 그녀의 눈은 어떻게 한단 말이오?

유탄지는 말했다.

허죽 선생이 치료를 하여 그녀의 시력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면 나 역시 그녀의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거요.

단예는 말했다.

그건......그건......

이때 그 뚱보는 여전히 도끼로 소나무를 끊임없이 찍어내고 있었다.

단예는 이때 이미 위기일발이니 우선 사람의 목숨을 구해 놓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응낙하리다.....그대에게 응낙하도록 하지. 그대는......빨리......

유탄지는 오른손을 휘둘러 그 뚱보를 후려쳤다.

그 뚱보는 냉소를 흘리며 도끼를 던지더니 자세를 가다듬고 크게 호통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어 유탄지의 장력을 맞받았다.

별안간 그 뚱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원래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던 얼굴표정이 매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을 보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곧이어 그의 입가로는 두 가닥의 선혈이 흘러내렸고 그의 몸뚱이는 차츰차츰 웅크러지더니 천천히 썩은 나무토막처럼 벼랑 아래의 깊은 골짜기로 떨어지고 말았다.

한참 후에야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의 몸뚱이가 골짜기 바닥의 바위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그 땅딸보의 골수가 깨어지고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오는 참상을 떠올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죽은 몸을 날려 소나무의 가지 위로 올라갔다.

허죽은 손을 뻗쳐 왼손으로 강철 지팡이를 붙잡고 단연경을 끌어 올렸다.

남해악신은 밑에서 딸려 올라오며 칭찬의 말을 늘어놓았다.

소화상, 나는 이미 그대가 훌륭한 화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대는 우리 둘째 누님의 아들이니까, 이 악노이의 조카이기도 하다. 이 악노이의 조카라면 재간이 물론 뛰어나게 마련이지. 만약 그대가 와서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이곳에서 사흘 밤 사흘 낮 동안 매달려 있게 될 것이고 그 고통은 그야말로 견디기 어려웠을거야.

운중학은 말했다.

여전히 큰소리를 치는군! 어떻게 사흘 밤 사흘 낮 동안 매달려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내가 견디지 못할 때 오른손에 잡고 있는 너의 머리카락을 놓으면 되지 않겠느냐? 시험해 볼까?

그들 두 사람은 위험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삽시간에 허죽은 단연경을 끌어올렸다. 곧이어 남해악신과 운중학도 일일이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고 호흡이 미미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버린 듯했다.

단예는 매우 기뻐하는 한편 매우 애처롭게 생각했다. 그녀의 두 손목은 이미 시퍼렇고 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운중학의 손가락 자국이 깊게 나 있었다.

운중학의 흉폭하고 호색적인 성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목완청과 종영에 대해서도 나쁜 짓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마다 매번 남해악신이 구원해 주었는데 오늘도 옛날과 다름없이 나쁜 짓이 벌어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만 울화통이 터지고 말았다.

큰형님, 둘째 형님, 저 운중학은 간악하기 이를데 없는 자입니다. 그를 처치해 버립시다.

남해악신은 부르짖었다.

아니아, 아니야! 단......사부......그것은 사부......, 오늘을 모두 운 네째가 그대의......그대의 마누라를......우리의, 나의 사모님을......구한 것이야......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대의 마누라는 벌써 저승으로 떠났을거야!

이 몇 마디의 말은 조리가 정연하지 않았지만 뭇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조금 전 단예가 왕어언을 위해 초조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모양을 보고 목완청은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끌어올려진 왕어언의 얼굴과 몸매가 정말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다.

이때 왕어언은 두 눈을 천천이 뜨더니 음, 하는 신음을 내뱉고 나직이 말했다.

이곳은 저승의 염라대전인가요? 저는 이미 죽었나요?

남해악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이 계집애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고 있군! 이곳이 저승이라면 우리들은 모두 다 죽은 귀신이게? 그는 아직 우리 사부의 마누라가 되지 않았으니 내 몇마디 거슬리는 말을 한다 하더라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욕했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거다. 따라서 기회를 잃지 말랬다고, 나는 역시 일찌감치 그대를 몇 번 더 계집애라고 불러야만 손해를 보지 않을 것 같군! 이봐, 이 계집애야!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고 그래! 그대가 죽는다는 것은 그대 스스로 원한 바이지만 하마터면 우리 의형제인 운중학의 목숨마저도 잃을 뻔하지 않았어? 운중학이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우리 단 첫째가 죽게 된단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거든. 설사 단 첫째가 죽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겠지만 이 악노이가 그대를 따라 죽게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단예는 부드러운 어조로 위로했다.

왕 소저, 놀랐죠? 우선 나무에 기대어 좀 쉬도록 하십시오.

왕어언은 왁, 하니 울음을 터뜨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직이 말했다.

당신들은 상관하지 말아요! 나는......나는.....살고 싶지 않아요!

단예는 깜짝 놀라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 자살을 하려고 한 것일까? 무엇 때문일까? 설마.....설마......"

그는 곁눈질로 운중학을 바라보았다. 그의 음흉한 얼굴 표정을 보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어이쿠! 혹시 왕 소저가 이 사람에게 욕을 당해서 스스로 자결을 하려고 한것이 아닐까?"

종영이 한 걸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악노삼, 안녕하셨어요?

남해악신은 그녀를 보자 크게 기쁜 듯 큰소리로 말했다.

작은 사모님, 그대도 안녕하셨소? 나는 악노이이지 악노삼이 아니라오.

종영은 말했다.

나보고 작은......작은.....이라고 하지 말아요. 악노이, 그대에게 묻겠는데 이 소저는 어째서 자결하려고 했나요? 역시 이 대나무쪽 같은 양반이 일으킨 화인가요? 그렇다면 내가 그이 겨드랑이를 간질러 주겠어요.

그녀는 두 손의 열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서는 후후 몇 번 불었다. 운중학은 그만 안색이 크게 변해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남해악신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하늘과 땅, 그리고 양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운 네째는 성격이 많이 변했는가 봐. 갑자기 좋은 일을 하게 되었어. 우리 세 사람은 섭이랑이라는 동료를 잃게 되어 모두 우울해져 있었거든. 그래서 산책을 한답시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마침 이 계집애가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자결을 하려 하더군. 그녀가 뛰쳐나간 힘이 너무나 억세기 때문에 운 네째는 미처 제대로 잡지 못했지. 본래 그는 궁흉극악한 녀석이었지만 갑자기 좋은 일을 하게 되었단 말이야. 약간 자기 분수를 모르는 점이 없지 않아 있었지.....

운중학은 노해 부르짖었다.

제기랄! 내가 언제 크게 선심을 발휘해서는 좋은 일을 했다는거야? 이 운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저라구! 이 왕소저가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자결을 하려는 것을 보자 나는 아깝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그래서 그녀를 잡아다가는 며칠 동안 내 마누라로 삼고자 했단 말이야.

남해악신은 펄쩍 뛸듯이 성을 내고 운중학에게 욕을 퍼부었다.

제기랄! 악노이는 네가 성질이 변해 사람을 구하는 줄 알았어. 우리는 천하에서 악명이 높은 사내들이라는 정이 있었기 때문에 손을 뻗쳐 너의 머리카락을 잡은 것이야......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네가 저 골짜기에 떨어져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나을 뻔했구나.

종영은 웃으며 말했다.

악노이, 그대는 본래 별호가 흉신악살이라고 하며 전문적으로 나쁜 짓만 했지 좋은 일은 하나도 않는 성미였잖아요? 그런데 언제 성격을 바꿨나요? 그대 사부에게 배운 것인가요?

남해악신은 머리를 긁적긁적 하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결코 성질을 바꾼 것이 아니야. 결코 아니라구. 그저 사대악인 가운데 한 사람이 없어지고 나니까 약간 맥이 빠진거야. 나는 운 네째의 머리카락을 붙잡게 되었는데 그가 떨어지는 바람에 나 자신도 그만 골짜기로 떨어지게 되었어. 다행히 단 첫째의 무공이 뛰어나 강철 지팡이를 뻗쳐 주었기에 내가 잡을 수 있었어. 그러나 우리 세사람의 사백여 근이나 되는 무게에 이끌려 단 첫째마저도 끌려오게 되었지. 그런데 토번국의 땅딸보가 나타나서는 도끼로 그 소나무를 찍지 않겠어?

종영은 물었다.

그 땅딸보는 토번국의 사람인가요? 그는 어째서 그대들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죠?

남해악신은 땅바닥에 침을 탁 뱉더니 말했다.

우리 사대 악인은 서하국 일품당의 첫째와 두 번째, 아니, 아니 아니, 세번째 네 번째 가는 고수들이거든? 그러니까 그대들 모두 다 우리 이름을 들은 지 오래 되었겠지. 이번에 황상께서 공주를 위해 부마를 뽑게 되었는데 일품당의 고수들을 시켜 사방으로 순시를 돌며 손님을 영접하라고 하셨지. 그런데 토번국의 왕자는 억지를 써서 감히 사람들을 내보내 서하국의 사방에 있는 길목을 막고서 다른 사람들이 부마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단 말이야. 그저 그 왕자 혼자만이 응시하도록 하겠다는 속셈이었지. 물론 우리로서는 허락할 수 없었고 그들과 싸움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만 십여 명의 토번무사들을 죽이게 되었지. 그래서 이렇게 된 거라구. 우리 삼대 악인과 토번국의 무사들은 이제부터는 좋은 친구 사이가 되긴 틀렸어.

그가 이와 같이 설명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어느 정도 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왕어언이 어째서 자결을 하려고 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해악신은 다시 말했다.

왕 소저, 나의 사부가 왔어. 그대들은 역시 부부가 되는 것이 어울려요. 그러니까 자결하지 않도록 해요.

왕어언은 고개를 쳐들고 흐느끼면서 말했다.

그대가 다시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여 나를 업수이 여긴다면 나는......나는 이곳에다 머리를 박고 죽어 버리겠어요.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그러면 안 되오! 그러면 안 되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남해악신에게 말했다.

악노삼, 그대는......

남해악신은 그 말을 가로막았다.

악노이!

단예는 말했다.

좋아. 악노이. 그대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지 마시오. 하지만 그대가 사람을 구하느라고 공을 세웠으니 이 사부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오. 다음에 나는 그대에게 쓸모있는 무공 재간을 가르쳐 주도록 하지.

남해악신은 괴상하게 생긴 눈을 부릅뜨고 왕어언을 곁눈질을 하더니 말하였다.

그대가 우리 사모님이 되기 싫어한다구? 되고자 하는 사람이 적은 줄 아시오? 이 분은 큰 사모님, 이분은 작은 사모님, 모두 우리 사모님이란 말이야.

그는 목완청을 가리키고 또 종영을 가리켰다.

목완청은 얼굴을 붉히고 침을 퇘 하고 뱉으며 말했다.

어, 그 추악한 녀석은 어디로 갔지?

사람들은 조금전 온 정신을 가다듬고 허죽이 사람을 구하는 것을 지켜보느라고 다른 데 신경을 쓸 여지가 없었다.

이때서야 유탄지와 아자가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예는 물었다.

큰형님, 그들은 갔습니까?

소봉은 말했다.

그들은 갔네. 그대가 그들에게 약속을 한 이상 나로선 더 저지할래야 저지할 수가 없더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 자기가 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망연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아자가 유탄지를 따라간 이후 장래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남해악신은 부르짖었다.

첫째, 네째, 같이 갑시다.

단연경과 운중학은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남해악신은 고개를 돌려 단예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가겠소.

그는 걸음을 옮겨서는 단연경과 운중학 쪽으로 달려갔다.

종영은 말했다.

왕 소저, 우리 수레를 타고 가요.

그녀는 왕어언을 부축해서는 아자가 원래 탔던 노새가 끄는 수레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은 영주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하여 해질 무렵이 되어 영주성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이때는 서하국의 세력이 흥성하던 때였다. 서하에 속한 땅은 이십이주(二十二州)나 되었다. 황하의 남쪽으로는 영주, 홍주(洪州), 은주(銀州), 하주(夏州)등의 주가 있었다. 황하 서쪽으로는 홍주(興州), 양주(凉州), 감주(甘州), 숙주(肅州)등 여러 주가 있었는데 바로 오늘날의 감숙성과 영하성, 그리고 수원성일대였다.

이곳은 황하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오곡이 풍성했다. 그야말로 황하 부근은 언제나 강물이 범람하여 해를 입곤 했지만 이 일대만은 좀처럼 그런 일이 없었는데 서하국은 바로 이 고장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군사는 강했고 말은 튼튼했으며 군사의 수가 오십 만이나 되었다. 서하의 군사들은 용감했고 싸움에 능했다.

송사(宋史)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용병을 할 때 곳곳에다가 바위를 세워 두고 매복하는 군사를 두어 적을 포위하기를 잘했다. 그리고 철기(鐵騎)를 전군(前軍), 즉 선봉으로 세웠으며, 말타기를 좋아하고 철갑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창이나 칼로 찌르고 찍어도 좀처럼 해칠 수 없었다. 밧줄을 이어 달아 자기 몸을 말 안장에 꼭 붙들어 매어 마상에서 죽어도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싸움을 하게 될 때는 먼저 철기군을 내보내 적진을 뚫고 적진이 어지럽게 되었을 때 돌격전을 감행했는데 보병과 기마병들은 함께 공격을 했다."

서하의 황제는 이(李)씨 성을 표명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오랑캐의 성씨인 척발(拓跋)이었다.

당 태종이 이씨 성을 내린 것이다. 서하의 사람들은 사방으로 싸움을 벌여 영토를 넓히거나 옮기곤 했기 때문에 서울도 수시로 옮겨야 했다.

이때는 영주가 서하에서 가장 큰 성이었으나 중원의 이름난 도성과 비교해서는 미칠 수가 없었다.

영주는 본래 번화하지 않은 데다가 중추가절을 만나게 되어 사방에서 몰려온 호걸들로 붐볐기 때문에 커다란 객점은 이미 만원 사례를 이루고 있었다.

소봉 일행은 다시 성을 나서서 간신히 한 채의 절간을 찾아 숙박할 장소를 삼게 되었다. 따라서 남자들은 동쪽 상방에 모였고 여자들은 서쪽 상방에 거처하게 되었다.

단예는 왕어언을 만나게 된 이후 기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이날 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왕 소저는 어째서 자결하려고 했을까? 내가 방법을 강구해서 그녀를 달래주어야겠다. 아, 나는 그녀가 어째서 자결하려고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달래 줄 수가 있단 말인가?"

달빛이 창틈으로 새어 들어와 희뿌연 은가루를 바닥에 뿌려 놓는 것 같았다.

그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어 살그머니 일어나 정원으로 나갔다.

담모퉁이가에 두 그루의 오동나무가 서 있었는데 둥근 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와 단예의 옷자락을 몇 번 흔들고 지나갔다.

단예는 오동나무 아래서 몇 번 서성거렸다.

은연중 가슴의 상처가 아파왔다. 아마도 낮에 너무 다급하게 굴었기 때무네 상처가 도진 모양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어째서 자결을 하려고 했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그는 걸음 닫는 대로 절간을 나서게 되었다. 달빛 아래 멀찍이 떨어진 연못가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백의를 걸친 여자였다. 어렴풋이 왕어언의 모습 같았다.

단예는 깜짝 놀라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다!그녀는 또 자결하려고 하는구나!"

그는 즉시 경신법을 써서 달려갔다. 삽시간에 백의인의 등뒤로 다가갔다. 연못에는 파란 물이 거울처럼 맑았고 그 백의인의 모습을 비춰 주고 있었는데 과연 왕어언이었다.

단예는 함부로 앞으로 나갈 수 없어 생각했다.

"그녀는 소실산 위에서 나에게 화를 냈다. 이번에 다시 만났어도 그녀는 여전히 조금도 좋은 얼굴 빛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가 자결을 하려고 한 것은 어쩌면 나에게 화를 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 단예야, 네가 가인의 감정을 손상케 해서 그녀는 처연해진 나머지 죽으려고까지 하지 않느냐? 그야말로 너는 백 번 죽어도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

그는 한 그루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서는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의 죄가 너무나 큰 것처럼 느껴졌다.

이때 거울처럼 맑은 호숫물에 갑자기 조그마한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파문은 점차 바깥으로 퍼져갔다.

단예는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몇 방울의 물방울이 수면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왕어언의 눈물이었다.

단예는 더욱더 그녀가 안스럽게 느껴졌다. 이때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나는.....나는 이 무궁무진한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단예는 더 참을 수 없어서 나무 뒤에서 걸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왕 소저, 따지고 보면 모두 이 단예의 잘못이외다. 아무쪼록 그대가 양해해주시구려. 그대가......그대가 만약 아직도 화를 내고 계신다면 나는 그대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소이다.

그는 정말 자기가 한 말대로 두 무릎을 그녀 앞에서 꿇었다.

왕어언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재빨리 말했다.

그대는......무엇하는 거예요? 빨리 일어나세요. 그 누가 본다면 무슨 꼴이 되겠어요.

단예는 말했다.

소저가 나를 용서하고 다시 탓하지 않는다고 해야만이 나는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어언은 의아하여 물었다.

내가 그대의 무엇을 용서하란 말이에요? 또 무엇을 탓한다는 것이에요? 또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단예는 말했다.

나는 소저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내가 모용 공자에게 죄를 지어 그로 하여금 불쾌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소저가 번뇌하고 있다고 생각했소.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가 나를 때리든 죽이든 말든 나는 그저 도망만 칠 뿐 결코 반격하지 않겠소이다.

왕어언은 발을 한 번 구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대는......정말 멍청하네요. 내 스스로 슬퍼하는 것이지 그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단예는 말했다.

그렇다면 소저는 나를 탓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 탓하지 않죠.

그렇다면 안심했소.

말과 함께 단예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갑자기 마음속은 크게 언짢아졌다. 만약에 왕어언이 단예 자기 때문에 슬퍼서 죽으려 했고 그리하여 그를 때리고 욕을 하고 심지어는 검을 뽑아 그를 찌르거나 칼을 들어 그를 내리찍는다 하더라도 단예는 매우 즐겁고 기꺼운 심정으로 달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 스스로 슬퍼할 뿐이지 단예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단예는 무엇을 잃어버린 듯 마음속이 허전해져옴을 느꼈다.

이때 왕어언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 한 방울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가슴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녀가 입고 있는 비단옷은 물을 빨아 들이지 않아 눈물 방울은 옷자락을 타고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단예는 덩달아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소저, 도대체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지 빨리 나에게 말해 주시오. 내 모든 힘을 다해 처리해 드리겠소. 반드시 강구해서 그대가 기뻐하도록 만들어 드리겠소.

왕어언은 천천히 고개를 처들었다. 달빛이 그녀의 눈물을 머금고 있는 눈동자를 비추어 주었다.

한 쌍의 눈동자는 마치 수정처럼 맑고 고왔다. 그리고 애잔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단 공자, 그대는 줄곧 저에게 잘 대해 주었어요. 저는 마음 속으로......마음 속으로 물론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이번 일은 그대로서는 어찌할 수 없으며 저를 도울래야 도울 수 없는 일이에요.

단예는 말했다.

난 확실히 아무런 재간도 없소. 그러나 우리 소 형님과 허죽 둘째 형님은 으뜸가는 무공을 지니고 있소. 그분들도 이곳에 계시오. 나는 그들 두 분과는 결의 형제를 맺은 사이이지만 골육 이상으로 다정하다오. 내가 그들에게 어떤 일을 부탁드린다면 결코 마다하실 분들이 아니외다. 소저, 도대체 무슨 일로 상심하고 있는지 나에게 말씀을 해주시오. 설사 아무리 어렵고 만회할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마음속의 슬픈 일을 털어놓고 나면 한결 개운해지지 않겠소?

왕어언의 창백한 얼굴에 갑자기 붉은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외면하고 감히 단예와 눈을 마주치지를 못하고 있다.

그녀는 나직이 말했는데 그 소리는 모기 소리처럼 가늘었다.

그는......그는......서하의 부마가 되겠대요. 대연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남녀의 사사로운 정을 돌볼 수 없다고 했어요.

그녀는 그 몇 마디 말을 하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단예의 품속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단예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깜짝 놀라야 했다.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어서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즐거워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괴로워해야 할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원래 왕어언이 슬퍼하는 것은 모용복이 서하의 부마가 된다는 데 있지 않는가?

모용복이 서하의 공주를 맞아들이게 된다면 자연히 왕어언을 돌보지 않게 될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단예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만약 자기의 고종 오라버니에게 시집을 가지 못하게 된다면 어쩌면 나에게 좀더 좋은 안색으로 대해 줄지도 모른다. 나는 감히 그녀가 나와 같은 사람에게 시집을 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때때로 그녀를 볼 수만 있어도 나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그가 조용한 것을 원한다면 나는 그녀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황량한 산속이나 외딴 섬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조석으로 마주 대할 수만 있다면 그 즐거움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모르게 손짓발짓을 하며 춤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왕어언은 몸을 흠칫하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단예가 온 얼굴가득히 기쁜 빛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 뾰로통해져서는 말했다.

그대가......그대가......좋은 사람인 줄 알고 말을 했더니 뜻밖에도 그대는 남의 불운을 좋아하며 오히려 나를 비웃고 있군요.

단예는 급히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왕 소저, 천지신명에게 맹세를 하겠소. 이 단예가 반푼어치라도 그대에 대해서 잘 되었다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벼락을 맞거나 만 대의 화살이 내 몸에 꿰이게 되는 신세가 될 것이오.

왕어언은 말했다.

나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으면 됐어요. 누가 맹세까지 하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그대는 왜 기뻐하지요?

그녀는 그 한마디를 내뱉고 난 후 즉시 스스로 그 답을 깨닫게 되었다. 단예가 기쁜 빛을 띄우게 된 것은 모용복이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게 된다면 단예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연적이 사라지게 되고 자기와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희망을 가져도 좋지 않겠는가?

단예가 그녀에 대해서 은근한 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왕어언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단예가 좋아하는 원인을 알게 되자 그만 놀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두 볼을 붉힌 채 뾰로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는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좋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군요. 나는......나는......

단예는 속으로 놀라 생각했다.

"단예야. 단예야. 너는 어째서 갑자기 비열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느냐? 이것은 그야말로 남의 집이 불타게 되었을 때 그 집의 재물을 노략질하려는 심보와 다름없지 않느냐? 이것이야말로 정말 몰염치한 소인의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는 그녀의 측은한 모습을 대하게 되자 그녀로 하여금 한평생 즐거워 하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자기가 설사 만 번 죽더라도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가슴속으로부터 호기가 치밀어 올랐다.

"조금 전 나는 그녀와 황량한 산속이나 외딴 섬에서 세월을 보내며 조석으로 그녀와 얼굴을 맞댈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은 더 비할 데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비할 데 없는 즐거움이야말로 이 단예만의 즐거움이지 왕 소저의 즐거움은 아니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구나. 이 단예의 즐거움은 기실에 있어서는 바로 왕 소저의 슬픔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저 자기의 즐거움만 원했다. 이것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지 무슨 다른 뜻이 있겠느냐? 오로지 방법을 강구해서 그녀가 마음속으로 즐거워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녀를 위하는 길이 아니겠느냐?"

이때 왕어언은 나직이 물었다.

제가 말을 잘못했나요? 그대는 저에게 화를 내고 있나요?

단예가 급히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내 어찌 그대에게 화를 내겠소?

왕어언은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나요?

나는 한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오.

그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헤아리고 있었다.

"나는 모용공자와 비교할 때 글 재주나 무예에 있어서도 뒤떨어지고 인품이나 풍채에 있어서도 뒤떨어지며 헌칠한 자세나 위세, 그리고 명성에 있어서도 떨어지니 모든 면에서 그에게 미칠 수가 없다. 더군다나 그들 두 사람으로 말하면 가까운 친척지간인데다가 어릴 적부터 소꼽친구였으며 서로 정을 주고받은지 오래되었지 않았는가? 그러나 한 가지 일만은 나는 모용공자보다 낫다. 나는 왕 소저로 하여금 진심으로 그녀를 위하는 데 있어서는 모용 공자가 나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십여 년이 지난 이후 왕 소저와 모용 공자 사이에 아들과 손자가 생겨나게 된 후 그녀가 마음속 깊숙이 여전히 이 단예를 생각해 주고,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그녀를 위해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한 사람도 나를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어 그는 말했다.

왕 소저, 슬퍼할 것 없소. 나는 모용 공자에게 가서 권해 보겠소. 그에게 서하의 부마가 되지 말고 일찌감치 그대와 혼례를 치루도록 하라고 하겠소이다.

왕어언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예요. 그럴 수는 없잖아요? 저희 고종 오라버니는 그대를 죽어라고 미워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는 그대의 권고를 듣지 않을 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나는 대의를 들어 그를 깨우쳐 주겠소.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요긴한 것은 부부간의 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겠소이다. 그와 서하 공주는 서로 모르는 처지요. 더군다나 그녀가 아름다운지 추악한지 아니면 착한지 악한지도 모르는 상태요. 그리고 만난 지 하루도 되지 못한 사이에 부부로 맺어진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소. 또 나는 그에게 왕 소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청초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며 부드럽고도 현숙한 사람으로서 천하에서 다시 찾아 볼 수 없는 현모양처감이란 말도 해주겠소. 그대가 앞으로도 없었고 다시 천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여전히 찾아 볼 수 없는 자색을 겸비한 미녀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겠소. 더군다나 왕 소저는 모용 공자에 대해서 정이 깊은데 모용공자가 어찌 박정한 낭군이 되어 천하의 여인들로 부터 욕을 얻어 먹으며 강호의 영웅 호걸로부터 비겁하다는 비웃음을 사겠느냐고 깨우쳐 주어야겠소이다.

왕어언은 그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무척 감동한듯 나직이 말했다.

단 공자, 그대가 저를 그토록 훌륭하다고 하시는 이유는 내가 그대를 좋아할까 해서......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말을 해 놓고 보니 포부동에게 감염을 받아 그만 그를 흉내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씩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성심성의로서 드리는 말씀이며 구구절절 폐부에서 우러나온 말이외다.

왕어언 역시 그의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라는 말에 눈물진 얼굴에 환히 웃음을 띄우고 말했다.

그대는 좋은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왜 하필 우리 포 세째 숙부의 버릇을 배우려고 하세요?

단예는 그녀가 환히 웃는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서 말했다.

어쨌든 나는 여러모로 권하여 모용 공자로 하여금 서하의 부마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게 하고 한시 바삐 소저와 혼례를 올리도록 해보겠소.

왕어언이 말했다.

그대가 꼭 그와 같이 하려는 것은 왜죠? 그대에게 무슨 이득이 있죠?

단예가 진지하게 말했다.

소저가 말할 때나 웃을 때 웃음짓는 것을 보면 나는 무척 즐겁다오. 따라서 그 즐거움이야말로 나에게는 지극히 큰 이득이 되는 것이외다.

왕어언은 속으로 흠칫했다. 그 한마디 평범한 말속에서 자기에 대한 정이 얼마나 깊은가를 엿볼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온통 모용복에 쏠려 있는 형편이었다. 일시적으로 감동을 받기는 했으나 곧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대는 우리 고종 오라버니의 마음을 몰라요. 그의 마음속에는 대연나라를 회복하겠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일로 자리잡고 있어요. 공야 둘째 숙부님도 고종 오라버니가 한 말을 저에게 했어요. 사내 대장부는 마땅히 대업을 중시해야지 남녀의 정에 이끌리게 되어 영웅의 기개가 사그러들면 영웅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는 또 말했어요. 서하 공주가 암퇘지처럼 못 생겨도 좋고 악독한 계집애라도 마음에 두지 않겠대요. 중요한 것은 대연나라를 세우는데 있다고 했어요.

단예는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오. 그의 모용씨 집안은 한마음 한뜻으로 황제가 되고자 하오. 서하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를 도와 나라를 되찾게 해야 하니......이 일은......이 일은......정말 나에게 어렵구려.

이때 왕어언은 다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그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갈산이나 기름솥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그대는 마음을 푹 놓으시오. 내가 가서 서하 부마가 되리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는 부마가 되지 못할 것이니 반드시 그대와 혼례를 올리게 될 것이오.

왕어언은 놀람과 기쁨에 얽혀서 되물었다.

뭐라구요?

단예가 말했다.

내가 그 부마 자리를 빼앗겠소이다.

왕어언은 소실산 위에서 단예가 육맥신검으로 모용복을 공격하여 반격할 수 조차 없게 만드는 광경을 친히 보았는지라 그의 무공이 확실히 자기의 고종 오라버니보다 고강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부마 자리를 빼앗아가게 된다면 고종 오라버니는 정말 부마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을 것 같아 나직이 말했다.

단 공자, 그대는 정말 저에게 잘 대해 주는 군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저의 고종 오라버니는 그대를 죽어라 하고 미워할 거예요.

단예는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겠소? 그는 이미 나를 미워하고 있지 않소?

왕어언은 말했다.

조금 전 그대는 서하 공주가 아름다운지 추악한지, 또는 착한지 악한지 모른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대는 저를 위해서 그녀와 혼례를 올리겠다니 이것이야말로.......이것이야말로......너무나 그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겠어요?

단예가 말했다.

나는 그대를 위해서 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외다. 아버님이 나에게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그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소이다. 나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드는 것이지 그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노릇이외다.

왕어언은 총명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었다.

단예가 그녀에 대해서 깊은 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느끼지 못하겠는가.

단예가 자기에 대해서 이토록 깊이 빠져 있는데 어찌 즐겁게 생판 모르는 여자를 즐거운 심정으로 맞을 수 있겠는가?

그가 자기를 위해 자기의 의사와는 크게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도 공로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데 대해 더욱더 고맙게 느껴졌다.

단 공자, 저는......저는......이 세상에서는 보답하기가 어렵군요. 아무쪼록 내세에......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그만 목이 메이는 듯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살며시 손을 뻗어 단예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수 차례나 환난을 겪었으며 서로 등에 업히거나 부축하는 등 살과 살이 맞닿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부득이 해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왕어언이 마음속으로 감동해서 스스로 손을 뻗쳐 단예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단예는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손길이 살며시 자기의 손을 잡자 삽시간에 하늘이 무너져도 돌볼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기쁜 마음은 그야말로 가슴 가득 차오르게 되었고 속으로 그녀가 이렇게 나를 대해 준다면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는것은 물론이고 대송나라의 공주, 요나라의 공주, 토번의 공주, 고려의 공주를 함께 맞아들인다 하더라도 대수로울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중상을 입고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게 되자 그만 정신적으로 견딜 수가 없게 되어 갑자기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땅이 흔들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몸을 몇 번 휘청거리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연못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왕어언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단 공자, 단 공자!

그녀는 손을 뻗쳐 그를 잡으려고 했다.

다행히 연못 물은 깊지 않았고 단에는 차가운 물속에 빠지자 머리도 맑아졌다.

그는 후줄근히 젖은 모습으로 뭍으로 기어올랐다.

왕어언이 그와 같이 부르짖자 절간의 많은 사람들은 깨어 일어나게 되었다. 소봉, 허죽, 파천석, 주단신 등이 달려나왔다. 그러고 보니 단예가 그토록 낭패한 꼴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왕어언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한편에 서 있으며 매우 겸연쩍어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들 두 사람이 깊은 밤 연못가에서 몰래 만나다가 실수하여 물에 빠진 것이라 생각했다.

단예는 뭐라고 해명을 하려고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튿날은 팔월 열 이틀이었다. 중추절은 아직도 사흘이 남은 셈이었다. 파천석은 이른 아침 영주성 안으로 달려가 청혼 문서를 제출했다. 그리하여 사시가 될 무렵 총총히 절로 돌아와 단예에게 설명을 했다.

공자, 황태제께서 서하 공주에게 청혼을 드리는 서신을 예부(禮部)에 올렸습니다. 예부상서는 친히 나와서 나를 만났고 매우 겸손하게 공자가 청혼하러온 것은 서하국의 커다란 영광이라고 말하더군요. 아마도 공자의 소원대로 될 것 같습니다.

얼마 후 절간 문밖에서 사람들과 말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나팔을 불고 치는 소리도 들렸다.

파천석과 주단신이 나아갔다. 서하 예부의 도시랑(陶侍郞)의 관원들이 단예를 영접하려 온 것이었다.

그들은 단예를 빈관(賓館)으로 옮기게 하고 환대를 하려고 온 것이었다.

일행은 빈관으로 옮겨갔다.

뭇 사람들이 빈관으로 들어가 막 자리를 잡았을 무렵 갑자기 후원에서 누군가 거친 음성으로 비난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네까짓 것이 무엇이길래 감히 서하 공주를 맞아들일 생각을 하지? 서하의 부마는 우리의 소왕자께서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 내 그대에게 권하지만 한시 바삐 개꼬릴 감추듯 하고 떠나도록 해라.

파천석 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두 노기가 끓어올랐다.

문을 열고 바라보니 칠팔 명의 거칠고 건장하게 생긴 대한들이 마당에 서서는 마구 소리내어 욕을 퍼붓고 있었다.

파천석과 주단신은 대리의 여러 신하들가운데서 똑똑한 사람이었다. 다만 주단신은 몇 푼 정도 의젓한 선비다운 기질이 있었고 파천석은 무관답게 용맹한 기상이 넘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문앞에 섰다. 그러자 몇 명의 대한들은 더욱더 거친 말로 욕을 했다.

거기다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오랑캐의 말을 섞어 가면서 말끝마다 자기네 소왕자 어쩌구 저쩌구 하는것이 아마도 토번국 왕자의 부하들인 듯했다.

별안간 왼쪽의 한쪽 문이 펑, 하니 열리면서 두 사람이 달려나왔다. 한 사람은 황의를 걸치고 있었고 한 사람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마당으로 뛰어나가더니 욕하고 있는 사람들을 마구 두드려 팼다. 삽시간에 세 명의 대한이 땅바닥에 쓰러져서는 신음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나머지의 몇 사람들도 그 두 사람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채여 모두 문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흑의의 사내는 말했다.

통쾌하다. 통쾌해!

그 황의인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아직 통쾌하기에는 부족하오이다!

한 사람은 바로 풍파악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포부동이었다.

그런데 문밖으로 도망친 토번의 무사들은 여전히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 모용이라는 작자야, 내 그대에게 권하지만 일찌감치 고소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가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려 하다가 우리 소왕자의 화를 내게 만든다면 소왕자님은 그대의 수법을 그대의 몸에 펼친다는 수법을 써서는 그대의 누이를 작은 마누라로 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꼴보기 좋을걸?

풍파악은 바람처럼 달려갔다. 이어 아야야, 어이쿠, 하는 몇 마디의 비명이 들렸다. 몇 명의 토번 무사들은 멀리 도망을 쳤으며 욕하는 소리도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왕어언은 방안에 앉아 있었다. 포부동과 풍파악 두 사람이 무사들과 다투는 소리를 들었으나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눈물을 글썽이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나와서 포부동과 풍파악을 만나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포부동은 파천석과 주단신을 향해 포권의 예를 하며 말했다.

파형, 주형, 서하로 구경을 오신 모양이구려. 그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가요?

파천석은 웃으며 말했다.

포형과 풍형, 두 분과 우리 두 사람의 입장이 비슷할 것이외다.

포부동은 안색이 변했다.

그럼 대리 단 공자도 청혼하러 온 것이오?

파천석은 말했다.

그렇소이다. 우리 공자로 말하면 대리국 황태제의 세자로서 이후 제위에 오를 분이고, 또 대리국으로 말하면 남쪽의 큰 나라가 아니겠소? 따라서 서하와 친척이 되면 그야말로 가문으로 볼 때 적당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모용 공자는 일개 서생에 지나지 않으니 인품은 뛰어나다 할 수 있지만 가문으로 볼 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겠소이다.

포부동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그대는 한 가지만 알았지 둘은 모르는구려. 우리집 공자로 말하면 사람들 가운데서 용이나 봉황에 견줄 수 있소이다. 그대의 단 멍청이와 어찌 비교하겠소이까?

풍파악이 문안으로 달려 들어오면서 말했다.

세째 형, 쓸데없이 언쟁을 벌일 필요가 뭐 있겠소? 내일 금전(金殿)에서 시합을 겨루게 되었을 때 모두에게 쓴맛을 보여 주면 될 것이아니겠소?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금전에서 시합을 가지는 것은 공자 나리들의 일이 아니겠소?

파천석은 주단신을 이끌고 방안으로 돌아와 말했다.

주 아우님, 포부동의 말을 들어 볼 때 금전인가 하는 곳에서 시합을 가지는 모양이오. 공자는 중상을 입은 몸으로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그의 무공 또한 때로는 영험하다가도 때로는 드러나지 않으니 자신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만약 시합을 가지게 되었을 때 육맥신검을 펼치지 못하게 된다면 부마가 되기는커녕 목숨을 잃을 우려마저 있으니 어떻게하면 좋겠소?

주단신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두 사람은 소봉과 허죽을 찾아가 상의를 하였다.

이 금전의 시합은 어떻게 겨루는지 모르겠구려. 일 대 일의 싸움이오. 아니면 부하들이 나서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오? 만약 다른 사람도 싸움에 참여할 수 있다면 걱정할 것 없소이다.

파천석은 말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주 아우, 우리들은 조정으로 찾아가 부마를 선택함에 있어서 시합을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의 규칙을 알아 본 이후 다시 계획을 세우도록 합시다.

두 사람은 즉시 그 길로 서하국의 예부로 찾아갔다.

소봉과 허죽, 단예 세 사람은 한자리에 둘러앉아 술을 마셨다. 너 한잔, 나 한잔 매우 흥취가 도도했다.

소봉은 단예에게 육맥신검을 익히게 된 경과를 물었다. 그는 단예에게 운기행공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서는 임의로 진기를 돋을 수 있도록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단예는 먹통인데 조석지간에 그 요령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소봉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큰 대접을 들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허죽과 단예의 주량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대여섯 대접의 독한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 단예는 그만 맥없이 쓰러져 곧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단예가 몽롱한 의식 속에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 창호지에는 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달빛은 환히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흠칫했다.

"어제 밤 나는 왕 소저와 이야기를 다 나누지도 못한 채 조심하지 못해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니 그녀에게 아직도 나에게 무슨 할 말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구나. 혹시 문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어이쿠, 야단났다. 만약 그녀가 반나절동안 기다리다가 귀찮아져서 다시 돌라가게 되었다면 큰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급히 일어나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대문의 빗장을 잠그려고 했을 때 갑자기 등뒤에서 그 누가 나직이 불렀다.

단 공자, 이리 오시오. 내 그대에게 할말이 있소.

단예는 느닷없이 들려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 어조가 싸늘한 것으로 보아 호의를 품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등이 바짝 조여졌고 어느덧 한 사람에게 움켜잡히고 말았다.

단예는 어렴풋이 그 음성을 분간하고는 물었다.

모용 공자가 아니시오?

그 사람은 말했다.

바로 불초이외다. 단 형과 장소를 옮겨 이야기를 하고 싶소이다.

단예는 말했다.

모용 공자께서 명령을 내리신다면 내 어찌 상대를 해 드리지 않겠소? 그러니 손을 놓으시구려.

모용복은 말했다.

손을 놓을 필요가 없소이다.

단예는 갑자기 자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구름을 타듯 날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 모용복에게 뒷등을 잡혀 지붕 위로 올라간것이었다.

단예는 소리를 지르게 된다면 소봉과 허죽 등이 놀라 깨어나 달려 나와 지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다.

"내가 부르짖게 된다면 왕 소저마저 듣게 될 것이다. 그녀는 우리 두 사람이 싸움을 다시 벌이는 것을 보고는 반드시 크게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그의 고종 오라버니를 탓하지 않고 나의 잘못이라고 탓할 테니 내가 그녀에게 화를 내게 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는 즉시 입을 다물고 모용복이 그를 든 채 바깥으로 달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깊은 밤중이었지만 내일 모레가 중추절인지라 달빛이 무척 밝았다. 그러고 보니 모용복은 청석판을 깐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황토로 뒤덮힌 소로를 달려갔다. 소로 양쪽은 모두 다 반쯤은 푸르고 반쯤은 누렇게 변한 기다란 풀밭이었다.

모용복은 한참 동안 달려가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단예를 땅바닥에 팽겨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단예의 어깻죽지가 먼저 땅바닥에 닿게 되었으며 팽개처진 끝이라 심하게 아파왔다.

"이 사람은 생긴 것은 점잖게 생겼지만 행동은 야만스럽기 짝이 없구나."

그는 낑낑대며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모용 형, 할말이 있으면 말로 해야지 어찌 손찌검을 하시오?

모용복은 화난 어조로 물었다.

어제 밤 그대는 나의 외사촌 누이에게 무슨 짓을 했소?

단예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뭐......뭐 별것이 아니외다. 그저 우연히 만나게 되어 몇 마디의 환담을 나누었을 뿐이외다.

모용복은 말했다.

그대는 사내 대장부요. 사내 대장부라면 남모르는 짓은 하지 않아야 하오. 자기가 한 말과 한 짓을 잡아떼고 속일 작정이오?

단예는 그와 같은 비난을 받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물론 그대를 속일 필요가 없소. 나는 왕 소저에게 그대에게 몇 마디의 말을 하겠다고 약속하였소.

모용복은 미소했다.

그대는 나에게 사람이 살아 생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간의 정이라고 하려는 게 아니겠소? 그리고 나와 서하 공주가 서로 모르는 처지이고 또 그녀가 예쁜지 추악한지, 또는 착한지 악한지 모르는데 아침에 만나 저녁에 부부로 맺어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일이라고 말하려는 것이겠지. 그리고 내가 만약 우리 외사촌 누이의 뜻을 저버리게 된다면 천하 여인들로부터 욕을 얻어 먹게 될 것이고 강호의 영웅 호걸들부터 비열하다는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오?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단예는 한 번씩 놀랐다. 그리하여 그의 말이 끝나게 되었을 때 단에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왕......왕 소저가 그대에게 모두 이야기했소?

모용복이 말했다.

그녀가 어찌 나에게 말하겠소?

단예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제 밤 한곁에 숨어서 엿들었단 말이오?

모용복은 냉소했다.

그대는 세상일을 잘 모르는 소저를 속일 수 있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소.

단예는 의아하여 물었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속였다는 것이오?

모용복은 말했다.

모든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명약관화하오. 그대 자신이 서하의 부마가 되고 싶은터라 구실을 세워 나를 속여 경쟁자를 하나 없애려는 것이 아니오? 흐흐흐, 모용복은 세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닌데 어찌 그대의 함정에 빠질 수 있겠소? 그대는......그대는 그야말로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것이외다.

단예가 급히 말했다.

나는 호의로 그런 말을 한 것이오. 그저 왕 소저와 그대가 혼례를 이루어 신선 같은 가족이 되고 백년해로 하기를 바랄 뿐이외다.

모용복이 냉소했다.

그와 같이 바라다니 정말 고맙구려. 대리 단씨와 고소 모용씨는 아무런 연고 관계가 없으며 평소 교분도 없는 터인데 그대는 어째서 그토록 축수하는 것이오? 내가 나의 외사촌 누이에게 붙잡혀서 꼼짝못하게 된다면 그대는 그 틈을 노려 서하의 부마가 되겠다는 수작 아니겠소?

단예는 화를 냈다.

그대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지 마시오! 나는 대리국의 왕자이외다. 대리는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나 부마 자리에 별로 관심이 없소. 모용 공자, 내 그대에게 충고하겠소. 영화부귀는 눈깜짝 사이에 지나가고 마오. 설사 그대가 서하의 부마가 된다 하더라도 대연나라의 황제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할지 모를 일이오. 설사 그대가 중원 사람들을 죽여 피가 흘러 강물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룬다 하더라도 대연나라 황제 자리에 앉게 된다는 보장은 없지 않겠소?

모용복은 냉랭히 말했다.

그대는 말끝마다 인의 도덕을 부르짖고 있지만 뱃속은 그야말로 시커멓기 그지없군!

단예는 급히 말했다.

그대가 내 호의를 믿고 안 믿고는 그대 자신에게 달렸소. 어쨌든 나는 그대가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도록 할 수 없소. 나는 왕 소저가 그대 때문에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에 자결하는 것을 볼 수 없단 말이외다.

모용복은 되물었다.

내가 서하 공주를 받아들이는 것을 그대가 허락치 않겠다구? 하하하, 그대에게 정말 그와 같은 능력이 있을까? 나는 반드시 맞아들이겠소. 그대가 감히 나를 어찌하겠소?

단예는 말했다.

나는 물론 온 힘을 기울여서 그대가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는 것을 저지하겠소. 내 혼자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만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소.

모용복은 속으로 흠칫했다.

소봉과 허죽 두 사람의 무공이 어떠한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단예 본인도 육맥신검을 펼칠 때는 도저히 그 모용복 자신이 적수가 되지 못하지 않았던가.

모용복은 즉시 고개를 쳐들고 소리 높이 외쳤다.

외사촌 누이! 내 그대에게 할 말이 있으니 이리 다가오시오.

단예는 놀람과 기쁨에 얽혀서는 재빨리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온누리에 달빛만 교교할 뿐 왕어언의 그림자도 보이지 ㅇ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맞은편 숲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듯했다.

이때 별안간 등뒤가 바짝 조여져 왔다. 다시 모용복에게 혈도를 움켜잡히게 된 것이었고 그의 몸뚱아리는 다시 들리게 되었다. 그제서야 그는 속은 것을 알고 쓰디쓰게 웃었다.

그대는 또 손을 쓰려는구려. 거기다가 거짓말 속임수를 쓰다니, 실로 군자의 행위라고는 할 수가 없소이다.

모용복은 냉소했다.

그대와 같은 소인을 상대로 군자의 수단을 쓸 필요가 있겠소?

모용복은 단예를 들고 한쪽으로 갔다. 구덩이를 찾아낸 다음 일 장으로 그를 격살하고 묻어 줄 참이었다.

몇 장 정도 나가게 되었을 때 물이 마른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대쯤 단예를 들어 우물 안에 던졌다.

단예는 크게 부르짖었다.

어이쿠!

그 순간 그는 우물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모용복은 커다란 바위를 찾아서는 우물 구덩이를 막아 단예가 안에서 굶어 죽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종 오라버니, 저를 부르셨나요? 저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예요? 어마, 단 공자를 어떻게 했죠?

바로 왕어언이었다.

모용복은 어리둥절해졌으나 곧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단예의 등뒤를 향하여 소리 높여 말을 한 것은 단예로 하여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게 한 다음 그의 등에 있는 요혈을 움켜잡자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어언은 정말 부근에 있었던 모양이 아닌가?

원래 왕어언은 이날 밤 근심 걱정이 되어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창가에 기대어 멍하니 달을 쳐다보고 있다가 모용복이 단예를 잡아가는 광경을 모조리 보게 되었다.

그녀는 혹시나 두 사람이 다시 싸움을 벌이게 되고 모용복이 단예의 육맥신검을 당해내지 못하게 될까봐 즉시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언쟁을 모조리 듣게 되었다.

그녀로서는 단예가 모용복에게 권고하는 말이 정말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복은 그저 단예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용복이 거짓말로 단예를 속이게 되었을 때 왕어언은 모용복이 정말 자기를 발견할 줄 알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왕어언은 우물가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불렀다.

단 공자, 단 공자! 상처를 입지 않았나요?

단예는 남에 의해 떨어지게 되었을 때 머리를 먼저 박게 되어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왕어언은 몇 번 불렀으나 그의 대답 소리를 들을 수 없자 단예가 이미 떨어져 죽은 줄 알았다.

평소 그가 자기에게 온갖 호의를 보여 주던 것을 생각하고 또 이번에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잃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그만 참을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며 불렀다.

단 공자, 그대는.......그대는 어쩌다가......어쩌다가 이 모양으로 죽어야 했나요?

모용 공자는 냉랭히 말했다.

그대는 정말 그에게 정이 깊군!

왕어언은 흐느끼는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그를 죽여야 했나요?

그 사람은 나의 큰 적이야. 그대는 그가 온힘을 다해 내 일을 방해하겠다고 한 말을 듣지 못했소? 그날 소실산 위에서 그는 나로 하여금 얼굴에 흙칠을 하여 강호에서 제대로 행세를 못하도록 만들었으니 나로서는 물론 그를 용서할 수 없지.

왕어언은 말했다.

소실산의 일은 확실히 그의 잘못이에요. 나는 벌써 그를 꾸짖어 주었으며 그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어요.

모용복이 냉소했다.

흥,흥! 스스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구? 그와 같이 간단한 한 마디로 그 시비를 덮어 버리자는 것인가? 이 모용복이 강호에 떠돌아다니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등뒤에서 나를 손가락질할 것이며 내가 대리 단씨의 육맥신검에 졌다고 말할 것이야. 그대도 생각해 보구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금후에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한단 말이오.

왕어언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 일시적인 승부를 마음에 항상 두고 있을 필요는 없어요. 그날 소실산에서 싸우게 된 일에 대해서 고모부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셨잖아요? 지나간 일을 더 들추어서 무엇하겠느냐고 말이에요.

그녀는 단예가 정말 죽었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우물 안으로 들이밀며 다시 불렀다.

단 공자! 단 공자!

여전히 대답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모용복은 말했다.

그대가 그토록 그를 염려한다면 그에게 시집을 가면 될 것이 아니오? 왜 거짓으로 정이 있는 척 나를 따르는 것이오?

왕어언은 가슴이 쓰라린 것을 느끼며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 그대에 대한 저의 마음은 진정이에요. 설마하니......설마하니 그대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요?

모용복은 냉소했다.

나에 대한 정이 진정이라고? 흐흐, 그 날 태호가의 물레방앗간 안에서 그대는 벌거숭이의 몸으로 이 단가와 함께 무슨 짓을 했지? 내가 친히 목격한 일인 데도 거짓이란 말이오? 그때 나는 한 칼에 이 단가라는 녀석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대는 그를 지도하여 나를 괴롭혔지. 그대의 마음은 도대체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이지? 하하하!

그는 껄껄 웃을 뿐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왕어언은 그만 놀라 어리벙벙해졌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태호가의 물레방앗간 안에서 그......그 복면의......복면의 서하 무사는......

모용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 서하 무사 이연종으로 가장한 사람은 바로 나였지.

왕어언은 나직이 말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줄곧 의심이 갔었어요. 그날 그대는 내가 황제가 되는날 어쩌구 했었지요. 그......그는 원래 그대의 말투임을 내가 진작 알았어야 했어요.

모용복은 냉소했다.

진작에 알았어야 했지만 지금 알았어도 늦진 않았소.

왕어언은 다급히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 그날 저는 서하인이 쏟아낸 독기에 중독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단 공자에게 구원을 받게 되었고 중도에 비를 만나 옷이 젖었기 때문에 물레방앗간 안에서 비를 피하게 된 거예요. 그대는......그대는......그대는 쓸데 없는 의심을 하지 마세요.

모용복은 냉소했다.

물레방앗간에서 비를 피한다구? 구실은 좋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그대들 두 사람은 여전히 남몰래 수작을 벌이고 있었잖소? 이 단가 녀석은 손을 뻗쳐 그대의 얼굴을 만졌는데 그대는 조금도 피하지 않았소. 그 당시 내가 무엇이라 했는지 그대는 기억하시오? 아마도 그대는 한마음으로 이 단가 녀석에게만 관심이 쏠려 나의 말은 전혀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이오.

왕어언은 속으로 흠칫했다. 그리고 그 날 방앗간에서 일어난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 당시 복면을 한 서하의 무사 이연종의 말이 똑똑히 뇌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그때......그대는 지금처럼 흐흐흐 냉소를 흘리며 말했죠. 그대는 말하기를......그대는 말하기를......나는 그대에게 무공을 배워 나를 죽이라고 했지, 결코 그대 두 사람이..... 그대 두사람이.....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 모용복은 "그대들 두 사람이 사랑을 속삭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어언은 차마 그와 같은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모용복은 다시 말했다.

그 날 그대는 또 말했었지. 만약 내가 이 단가 녀석을 죽인다면 그대가 나를 죽여서는 반드시 그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이야. 왕 소저, 나는 그대의 그 한 마디를 듣고서야 그의 목숨을 살려 주었소. 그런데 호랑이를 키워 후환을 남긴다고 나는 소실산에서 영웅 호걸들 앞에서 그에게 창피를 당하고 말았소.

왕어언은 그가 갑자기 자기를 외사촌 누이라 부르지 않고 왕 소저라고 칭호를 바꾸어 부른 데 대해서 더욱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 그날 만약 제가 그대인 줄 알았더라면 그와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고종 오라버니, 제가 만약 알았더라면.....결코......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대는 제가 언제나 그대에 대해......진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모용복은 말했다.

내가 복면을 써서 그대가 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고 또 내가 일부러 목쉰 소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음성을 알아 듣지 못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설마하니 나의 무공도 그대는 알아 보지 못했단 말이오? 흐흐흐, 그대는 무학에 대해서 매우 박식하지 않소? 그 누가 일 초 일 식을 펼친다면 그대는 그의 문파 내력을 알아내지 않소? 그런데 나는 저 녀석과 백여 초를 싸웠는데도 그대는 나를 알아 보지 못했단 말이오?

왕어언은 나직이 말했다.

나는 물론 의심을 가졌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고종 오라버니, 우리들은 오랫동안 얼굴을 맞대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대의 무공에 대해서 별로 이해하는 바가 없었어요.

모용복이 말했다.

그날 그대는 다음과 같이 말했소. "내가 처음 그대의 도법이 복잡한 것을 보고 속으로 놀라워했으나 오십 초가 지나게 되었을 때 대단치 않다고 느꼈어요. 그야말로 밑천이 모조리 드러났다고 말한다면 너무나 인정머리가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대가 알고 있는 바는 훨씬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게 사실이에요." 라고. 왕소저, 나는 확실히 그대에게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대는......그대는 왜 내 곁을 그런데도 따라다녀야 했단 말이오? 그대는 마음속으로 나를 업수이 여겼소. 그렇소. 그러나 이 모용복은 당당한 사내 대장부로서 소저들의 업신여김을 받고 싶지는 않소.

왕어언은 몇 걸음 다가서며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고종 오라버니, 그 날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여기서 제가 사과를 드릴게요.

그녀는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다시 말했다.

저는 실로 그대인 줄 몰랐어요.....그대는 넓은 아량으로 마음에 두지 않도록 하세요. 저는 어릴 적부터 그대를 우러러 보았으며 어릴 적에 함께 놀 때부터 그대가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왔으며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어요. 그날 제가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인 것을 그대는 옛날의 정분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 용서해 주세요.

그날 왕어언이 물레방앗간 안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한 데 대해서 자존심이 강한 모용복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또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 후부터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댈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꺼림칙한 것을 떨쳐 버릴수 없었고 매사에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이 융화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그녀가 부드러운 말로 부탁하는 말을 듣고, 달빛 아래 이와 같이 청초하고 아리따운 소저가 이토록 자기에게 정을 쏟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친히 느끼게 되자 그녀와 단예와의 사이에 확실히 애매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 날 자기의 비위를 거슬리게 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말을 한 것이지 결코 자기에게 모욕을 주자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이 누그러지게 된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불렀다.

외사촌 누이!

왕어언은 크게 기뻤다.

고종 오라버니가 자기를 용서한 줄로 알고 몸을 그의 품속으로 던지듯 하며 머리를 그의 어깻죽지에 갖다대고는 나직이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 저에 대해 화가 나시면 저를 때리거나 욕을 하세요. 절대로 마음속에 접어 두지 마세요.

모용복은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얼싸안게 되고 그녀의 나직이 부탁하는 말을 듣게 되자 그만 가슴이 크게 설레였다.

그리하여 그는 손을 뻗쳐서 가볍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 어찌 그대를 때리고 욕을 할 수 있겠소. 이전에 그대에게 화를 냈던 것은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소.

왕어언은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 그대는 서하의 부마가 되지 않겠지요?

모용복은 별안간 전신을 흠칫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야단났다. 야단났어! 모용복아, 너는 남녀의 사랑에 미련을 너무 많이 두어 영웅의 기개가 없어졌구나! 하마터면 큰일을 그르칠 뻔하지 않았는가? 만약 이까짓 사사로운 정마저도 떨쳐 버리지 못한다면 어찌 천하를 노리는 대업을 성취시킬 수 있느냔 말이다."

그는 즉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모질게 마음을 먹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사촌 누이, 그대와 나의 연분은 이미 다했소.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언제나 한스럽게 생각했던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소. 그대가 한 말, 그리고 한 일을 나는 언제나 잊지 못할 거요.

왕어언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는......방금 저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모용복은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그러나 우리는 끝내 외사촌 남매라는 인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소.

왕어언은 놀라 말했다.

그대는 저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모용복은 속으로 사사로운 정과 대업을 두고 갈팡질팡했다. 잠시 주저하다가 끝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어언이 다시 물었다.

그대는 반드시 서하 공주를 맞아들여야 하고 다시는 저를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모용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어언은 먼젓번에 고종 오라버니가 서하의 공주를 맞아들이려 한다는 사실을 공야건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 당시 그녀는 죽을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구실을 내세워 일행과 떨어져서 등백천 등의 시선을 피해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자결하려고 했는데 그만 운중학에게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친히 거절당하게 되자 미칠 것 같은 슬픔이 복받쳐올랐고 거의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단 공자는 나에게 그야말로 순수하기 이를데 없는 정을 보여주었으나 나는 한 번도 그에게 좋은 태도나 좋은 말로 상대해 준 적이 없다. 이번에 그는 나를 위해 죽었으니 실로 미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나는 살고 싶지 않다. 이 깊은 우물 안으로 단 공자가 떨어져 죽게 된 것을 보면 아마도 무척 뾰족한 바위나 돌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차라리 그와 함께 죽어서 그가 나에게 보여 준 깊은 정에 보답하겠다."

그녀는 천천히 우물가로 가서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 서하 공주를 맞아들이게 되고 또 대연나라의 황제가 되시기를 바래요.

모용복은 그녀가 죽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 걸음 다가서서는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이후 외사춘 누이의 부드러운 정에 얽매여 빠져나올 수 있을런지 실로 의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사촌 누이로 말하면 온순하고 또 그아름다움도 세상에 보기 드문 지경이다. 그와 같은 여자를 처로 맞아들인다면 이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녀는 어릴 적부터 자기에 대해서 깊은 정을 바쳐 왔지 않은가. 만약 자기가 자기 자신을 제압하지 못하고 어떤 좋지 못한 인연을 맺게 된다면 연나라를 세울 커다란 계획은 크게 좌절을 당하게 되리라.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손을 반쯤 내밀다가 슬그머니 거두어들였다.

왕어언은 그의 표정을 보자 그의 심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가 죽으려 하는 마당에 조금도 저지하지 않는 모용복이 궁흉극악 운중학 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이토록 박정할진대 더 무슨 바랄 일이 있겠느냐 하는 생각에 그녀는 부르짖었다.

단 공자, 내 그대와 함께 죽겠어요!

그녀는 몸을 날려 우물 안으로 거꾸로 떨어졌다.

모용복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다가섰다. 손을 뻗쳐 그녀의 발을 잡으려고 했다.

그의 무공으로 그녀를 붙잡는다는 것은 쉬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끝내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해 그녀가 뛰어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누이, 그대는 역시 마음속으로 단 공자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구려. 그대들 두 사람은 살아 생전에 부부가 되지 못했으나 한 구덩이에서 죽게 되었으니 어쨌든 그대들의 소원을 풀게 되었소.

갑자기 그의 등뒤에서 그 누가 입을 열었다.

위선자로군!

모용복은 깜짝 놀랐다.

"사람이 내 곁에 도달했는데 내가 어찌 모르고 있었을까?"

그와 같은 생각에 그는 뒤로 일 장을 후려친 이후에야 몸을 돌렸다.

한 담담한 그림자가 그의 장풍을 피하는데 신법이 날렵한 것이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정도였다.

모용복은 몸을 날려 앞으로 다가서며 그의 몸이 떨어지기 전에 다시 일 장을 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그 사람은 허공에서 일 장을 후려쳐 모용복과 일 장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다시 두둥실 하니 일 장 남짓 밀려나간 다음 땅 위에 내려섰다. 그러고 보니 토번국의 국사 구마지가 아닌가?

이때 구마지가 말했다.

분명히 그대가 왕 소저로 하여금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토록 하고서는 그녀가 소원을 풀게 되었다고 하다니! 모용 공자, 이와 같은 행동은 너무 음흉하고 악랄한 짓이 아니겠소?

모용복은 노해 부르짖었다.

이것은 나의 사사로운 일인데 누가 당신 보고 쓸데없는 간섭을 하라고 했소?

구마지는 말했다.

그대가 천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니 이 화상은 간섭을 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더군다나 그대가 서하의 부마가 되고자 한다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잖소?

모용복은 되물었다.

아니, 그대는 화상으로서 부마가 되겠다는 것이오?

구마지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화상이 부마가 된다구? 그럴 리가 있겠소?

모용복이 말했다.

나는 이미 토번국에서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그렇다면 그대는 그대들의 소왕자를 위해 나선 것이군!

구마지가 냉소했다.

뭐가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오? 만약 서하의 공주를 맞아들이고자 하는 것을 두고 좋지 않은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면 귀하의 마음은?

모용복이 말했다.

내가 서하의 공주를 맞아들인다는 것은 내 자신의 능력에 의거하여 부마가 되자는 것이었소. 결코 부하를 시켜서 소란을 피우거나 영주로 오는 길목에서 영웅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호걸들로 하여금 비웃음을 던지도록 하는 일은 하지 않았소.

구마지는 웃었다.

우리들은 분수를 모르는 녀석들을 내쫓아 이 서하의 서울 온 거리에 멀쑥하게 생긴 녀석들이 소란을 피우는 꼴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 막으려는 것뿐이었소. 그야말로 귀하를 위해 청소를 해준 셈인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오?

모용복이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그거야 무척 훌륭한 일이지요. 토번국의 소왕자는 정말 자기 자신의 실력으로 남과 겨루겠다는 것이오?

구마지가 말했다.

바로 그렇소.

모용복이 물었다.

귀국의 소왕자는 무공이 고강하여 대적할 영웅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오?

구마지는 대답했다.

소왕자 전하로 말하면 바로 나의 제자이외다. 무공은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천하의 영웅 호걸들이 대적할 수 없다고는 볼 수 없소. 하지만 반드시 이긴다는 승산은 있소.

모용복은 이상하게 여겼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게 된다면 그는 대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슬쩍 떠 봐야지."

그는 입을 열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귀국의 소왕자도 반드시 이길 승산이 있고 나 또한 반드시 이길 승산이 있으니 그 누가 진짜로 반드시 이길 승산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려.

구마지가 말했다.

우리 소왕자에게 도대체 어떤 필승의 승산이 있는지 그대는 무척 알고 싶다. 이것이 아니겠소? 그럼 먼저 그대가 그대의 방법을 이야기해 보시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말하리다. 우리가 서로 누구의 방법이 더 고강한지 연구해 보도록 합시다.

모용복이 믿는 것은 자기의 무공이 고강하고 얼굴 생김새가 준수한 점이었다. 사실 필승이 승산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모용복은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그대는 간계가 많은 사람이고 말에도 신용이 없는 분이오. 내가 그대에게 먼저 말을 하고 그대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겠소?

구마지는 껄껄 웃었다.

모용 공자, 나는 영존과 오래 전부터 사귀어 왔으며 서로 존경하는 터이오. 내가 좀 건방지게 군다해도 어쨌든 그대의 웃어른이 아니겠소? 그런데 그대가 나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소?

모용복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말했다.

명왕의 꾸지람이 옳습니다. 그 점 용서해 주십시오.

구마지가 답했다.

공자는 정말 총명하구려. 그대가 스스로 후배인 것을 인정한다면 내 그대 부친의 체면을 보아 먼저 말해 주지. 토번국의 소왕자가 필승의 승산이 있다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 어느 누가 우리 소왕자와 더불어 부마 자리를 다투고자 하면 우리들은 미리 하나하나 그들을 처리한다는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다툴 사람이 없게 되니 소왕자가 선택되지 않을 리가 있겠소? 하하하하!

모용복은 그만 안색이 싹 변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를......

구마지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나와 영존은 교분이 두터운 터이니 물론 그대의 목숨을 앗아 갈 수는 없지. 내 간곡히 공자에게 권하는데 빨리빨리 서하에서 떠나가는 것이 상책일 것이오.

모용복이 화가 나 말했다.

만약 내가 떠나가지 않겠다면?

구마지가 말했다.

그래도 그대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겠소. 그저 공자의 두 눈을 파내고 한 다리나 한 팔을 불구로 만들겠소. 서하의 공주는 오관을 다 갖추지 못하거나 손발이 완전하지 못한 영웅 호걸에게 시집을 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 아니오?

그는 영웅 호걸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모용복은 속으로 크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구마지의 무공이 두려워 경솔하게 그와 손을 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방법을 강구했다.

구마지는 말했다.

공자, 그대가 그대의 외사촌 누이로 하여금 자결하도록 만든 것은 실로 음흉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소. 그대가 만약 한시 바삐 서하에서 떠나 준다면 그대가 왕 소저를 다그쳐 죽게 한 사실에 대해서 나는 입을 다물고 있겠소.

모용복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그것은 그녀 스스로 우물로 몸을 던져 연인을 따라간 것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그러고 보니 구마지의 바지 가랑이와 옷자락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별안간 모용복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 날 소림사의 장경각에서 무명의 노승은 구마지가 소림파의 칠십이 종의 절기를 익힌 이후 다시 억지로 역근경을 연마했기 때문에 서열이 전도되어 조석지간에 큰 화를 당하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소림의 여러 가지 절기를 연마하는 사람이 만약 마음속에 자비를 품지 않는다면 엄청난 화를 당하게 된다고 했다. 그분 노승이 나의 아버지와 소원산의 질환을 이야기했을 때 영험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렇다면 구마지에 대해서 한 말도 결국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대뜸 크게 기뻐서 속으로 생각했다.

"흐흐, 이 화상은 자기가 큰 화를 당하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감추려 하고 있구나. 뭐? 나의 두 눈을 파내고 팔이나 다리를 자르겠다고?"

그러나 역시 단정할 수 없는 일이라 그는 시험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 그대는 커다란 화를 조석지간에 당하게 되었구려. 이와 같이 상승무공을 연마하다가 잘못되면 그야말로 무섭기 그지없는 화를 당하게 되죠.

구마지는 갑자기 소리내어 크게 부르짖었다.

그 소리는 마치 늑대가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고 소가 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손을 뻗쳐 모용복을 잡으려 하며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뭐라구 했지? 너는......너는 누구보고 말하는 것이지?

모용복은 몸을 옆으로 날려 피했다. 구마지는 잇따라 손을 휘둘렀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썹은 곤두서 있었으며 온 얼굴 가득 포악한 기색을 띠고 있지 않은가?

그의 표정이 흉악하기는 했어도 얼굴에 드러난 당황함과 공포를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모용복은 더욱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내 간곡하게 드릴 충고가 한마디 있소. 그대는 속히 서하에서 떠나 토번으로 돌아가시오. 운기행공을 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으며 손을 쓰지 않으면 무사히 고국 땅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 소림 신승의 말대로 될 것이외다.

구마지는 흑흑 하는 숨소리를 냈다. 평소의 의젓하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네가......네가 무엇을 아느냐? 네가 무엇을 안단 말이냐?

모용복은 그의 얼굴이 흉칙하게 변했으며 평소 보상이 장엄하던 성승의 모양과는 전혀 다른지라 그만 겁이 더럭 나 즉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구마지는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무엇을 알고 있느냐? 빨리빨리 말해라!

모용복은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명왕의 내공이 갈래길로 흘러들어가 위험하기 짝이 없게 되었소. 만약 즉시 토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소림사로 달려가 그 신승의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외다.

구마지는 흉칙한 미소를 떠올렸다.

나의 내공이 갈래길로 흘러들어가게 됐다고?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그는 왼손을 뻗쳐 모용복의 얼굴을 낚아채려고 했다.

모용복은 그의 다섯 손가락이 미미하게 떨리고는 있으나 낚아채는 수법이 침착하면서도 노련하며 매섭기 이를데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도 내공이 부족한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놀랐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그는 즉시 내력을 돋우고 정신을 가다듬고 적을 맞았다. 구마지는 호통을 내질렀다.

너의 부친의 얼굴을 보아 십 초 안으로는 살수를 쓰지 않겠다!

그는 휙, 하니 한 대의 주먹을 내질러 모용복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후려치려고 했다.

모용복이 결연히 몸을 날려 피하자 구마지의 제 이 초가 잇따라 펼쳐져 왔다. 중간에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모용복은 두전성이라는 상대방의 힘을 빌어 상대방을 치는 요령에 뛰어났으나 상대방의 초식이 너무나 정묘했고 매 일 초마다 그저 반쯤 펼쳤다가는 벼락같이 변화시켰기 때문에 상대방의 힘을 빌리려고 하더라도 어떻게 빌릴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급소를 엄히 지키고 적의 빈틈을 노렸다. 하지만 구마지의 초식은 기이하고 어지러웠다.

한 대의 주먹이 중도까지 뻗쳐졌다가 어느덧 지법으로 바뀌어졌고 또한 손을 갈구리처럼 뻗쳤다가는 자기 몸 가까이 이르게 되었을 때는 어느덧 장법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근근이 십 초를 교환하게 되었을 때 구마지는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십 초가 이미 끝났으니 너는 체념해라!

사면팔방이 모두 구마지의 그림자로 덮혔다. 왼쪽에서 발길질을 해오고 오른쪽에서 한 대의 주먹을 내질러 왔다. 그런가 하면 앞에서 일 장을 후려쳐 왔고 뒤에서 일지를 찍어 왔다.

여러 가지의 초식들이 일시에 뻗쳐져 와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모용복은 그저 두 손을 마구 휘둘러 공력을 돋우고 수비하기에 급급했다.

갑자기 구마지는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모용복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화상의 내공은 이미 어지러워져서 거의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다. 내가 좀더 노력하여 그에게 맞아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땅바닥에 쓰러져 저절로 죽게 될 것이다."

별안간 구마지가 일성을 대갈하자 모용복은 그 순간 허리께에 있는 척중혈(脊中穴)과 가슴에 있는 상곡혈(商曲穴)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자 손발에 맥이 빠져 다시는 움직일 수 없었다.

구마지는 냉소를 한 번 흘리더니 끊임없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내가 좋게 꺼지라고 했을 때 너는 꺼지지 않았다. 이제 나를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나는......너를 어떻게든 처치해 버리고 말겠다.

그는 입술을 모으고 휘파람을 길게 내불었다. 숲속에서 네 명의 토번국 무사가 달려나오더니 허리를 굽혔다.

구마지는 말했다.

이 녀석을 데려가서 목을 잘라라.

네 명의 무사는 대답했다.

예.

모용복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나 귀로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모용복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내가 만약 외사촌 누이와 마음이 맞게 되어서 서하의 부마가 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더라면 지금쯤 목을 잘리는 비운을 당하지 않았을텐데......내가 죽고 만다면 연나라를 일으키려는 희망도 사라질 것이 아닌가?"

네 명의 토번 무사들은 모용복을 땅바닥에 눕혔다. 한 사람이 칼을 뽑아들고 모용복의 목을 내리치려고 했다.

구마지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 나와 이 녀석의 부친은 옛날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 그의 시체나마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게 해주자. 너희들은 그를 이 우물 안으로 던져라. 그리고 빨리 바위를 옮겨다가 우물 입구를 막도록 해라. 그렇게 하면 그는 우물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예.

토번 무사들은 모용복을 우물 안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즉시 산위로 우물을 막을 큰 바위를 찾으러 갔다.

구마지는 우물가에 서서 끊임없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구마지는 자기의 가슴을 살펴보았다. 가슴팍은 평소와 다름없었고 조금도 팽창한 듯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몸뚱이는 하나의 커다란 공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고 내공은 끊임없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구마지는 놀라고 당황하여 오른손을 뻗쳐서는 왼쪽 어깻죽지와 왼쪽 다리, 그리고 왼쪽 허벅지 세 곳을 손가락으로 찔러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러나 세개의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새빨간 피였다. 내공은 몸안에서 소용돌이칠 뿐 흘러나오지 않았다.

소림사 장경각의 그 노승이 한 말이 끊임없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자기가 너무나 욕심을 내어 소림파 칠십이 절기와 역근경을 연마하게 되었을 때 순서가 전도되었기 때문에 이미 화를 입게 되었나 보다고 생각되었다.

별안간 그의 뇌리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그 자신은 어째서 함께 연마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몇 가지만 연마하고 칠십이 종의 절기에 관한 비결을 나에게 선물했을까? 나는 그와 우연히 만난 사이이다. 설사 말로써 의기투합하게 되고 일견여고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귀중한 비급을 모조리 내어 줄 수 있더란 말이냐?"

구마지는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마당에 들더서자 모용박이 나쁜 속셈을 품고 무공 비급을 자기에게 건네주었다는 의심이 생겼다.

"그는 소림사에서 수십 년간 잠복해 오면서 암암리에 소림 승려들이 소림사의 절기를 모조리 익히면 안 된다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나의 무공와 지략에 대해서 어느 정도 꺼렸기 때문에 그 절기의 비결들을 모조리 나에게 전해 주었을 것이다. 첫째는, 나를 통하여 칠십이 가지의 절기를 모조리 연마하게 된다면 어떤 화근이 생기는가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고, 둘째는, 나와 소림사가 서로 원한을 맺게 됨으러써 토번국과 대송나라가 서로 싸우도록 하자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모용씨는 어부지리를 노려서는 연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그만 노발대발해서는 몸을 구부리고 우물 안을 향해 삼 장을 후려쳤다. 삼 장을 후려쳤으나 우물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이 우물은 지극히 깊어 장력이 맡바닥까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구마지는 미친 듯 노해서는 맹렬히 다시 한 대의 주먹을 내질렀다. 한 대의 주먹을 내지르자 내식이 더욱더 소용돌이치면서 부풀어 올라 마치 전신 십만 팔천 개나 되는 모공(毛孔)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발버둥쳤다. 그런데도 곳곳에서 벽에 부딪쳐 튀어나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정히 놀람과 분노에 휩싸여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앞섶자락에서 물건이 툭 하고 우물 아래로 떨어졌다.

구마지는 손을 뻗쳐 낚아채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물건은 우물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구마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그는 품속을 더듬어 보았다.

우물 안에 떨어진 것은 역근경이었다. 그는 물론 자기의 내공이 잘못된 원인이 역근경을 잘못 연마한 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화근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역근경을 연구해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야말로 생사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물건인데 어찌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즉시 몸을 훌쩍 날려서는 우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혹시나 우물 밑바닥에 뾰족한 바위가 있거나 딱딱한 나뭇가지 같은 것이 있어서 발바닥을 쑤시게 되거나 또는 모용복이 스스로 혈도를 풀고서 숨어있다가 암습을 해올까 봐 두 발이 미처 바닥에 닿기도 전에 오른손을 쳐들어 아래쪽을 향해 이 장을 후려쳐서는 떨어지는 기세를 늦추려고 했다.

그러나 떨어지는 기세는 늦추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몸뚱이가 한쪽으로 기우뚱하고 말았다. 퉁, 하니 그는 머리통을 우물 밑바닥 안쪽의 가장자리에 쌓아 놓은 벽돌에 부딪히게 되었다.

눈앞에 불똥이 튀면서 우물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우물은 버려둔 지 오래 되어 낙엽이나 잡초들이 쌓여 있었다.

구마지가 이와 같이 쓰러지게 되자 코와 입이 대뜸 그 썩은 나뭇잎에 파묻히게 되었고 몸뚱이는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바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손발에는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히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위쪽에서 그 누가 불렀다.

국사! 국사!

바로 네 명의 토번 무사였다.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입을 벌리자마자 진흙이 즉시 입안으로 흘러들어와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우물 주위에서 네 명의 토번 무사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이 말했다.

국사께서 이곳에 계시지 않는데 어디로 가셨을까?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국사께서는 기다리기 귀찮아서 우리에게 우물 입구를 막도록 분부한 이후 아마도 우리가 그대로 처리할 줄 알고 가셨나봐.

바로 그럴거야,

구마지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는 이곳에 있으니 빨리 나를 구해 내도록 하라.

그러나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진흙은 입안으로 마구 흘러들어올 뿐이었다. 그런데 쿵, 우르릉, 하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네 명의 토번 무사들이 커다란 바위로 우물 입구를 막고 있었다. 삽시간에 우물 입구는 돌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고 말았으며 백여 근이나 되는 커다란 바위들이 십여 개나 쌓여 입구를 틀어막게 되었다.

곧이어 네 명의 무사들은 서로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갔다.

그만 울화가 치밀어 오른 구마지는 손을 마구 휘둘렀다.

그런데 오른손에 갑자기 뭔가 만져지는 것이 있었다. 잡고 보니 바로 역근경이 아닌가?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경서는 찾게 되었지만 지금 이 역근경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갑자기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 봐요. 토번의 무사들이 커다란 바위로 우물 입구를 막았군요. 우리는 어떻게 나가죠?

바로 왕어언이었다. 구마지는 사람의 소리를 듣게 되자 정신이 번쩍 들어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죽지 않았구나. 그런데 누구와 말하고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있다면 몇 사람이 힘을 합하여 바위를 밀어체치고 이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와 함께라면 나가지 못해도 상관없죠. 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 이 진흙바닥이 바로 극락이외다. 동방의 유리 세계(琉璃世界)나 서방의 극락 세계 또는 도솔천(도率天)이나, 야마천(夜摩天)같은 천상의 극락도 이곳에 비할 바가 못 되오.

구마지는 약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단가 녀석이 아직도 죽지 않았구나! 저 녀석이 나의 화염도에 상처를 입었으니 나와는 그야말로 원한이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력을 돋울 수 없으니 그가 만약 이 기회에 보복을 한다면 어떻게 하지?"

말하는 사람은 바로 단예였다. 그는 모용복에게 던져져 우물 안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는 혼절을 해서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 흙바닥에 떨어졌지만 구마지보다 그렇게 낭패한 꼴을 보이지 않았다.

왕어언이 우물 안으로 뛰어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녀의 머리가 떨어진 곳은 바로 단예 가슴팍의 전충혈이었다.

이 전충혈에 충격을 받게 되어 단예는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왕어언은 그의 품속에 떨어져서 조그마한 상처도 입지 않았고 진흙도 별로 묻히지 않을 수 있었다.

단예는 갑자기 품속에 한 사람이 안겨 있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때 모용복이 우물가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외사촌 누이, 역시 그대는 마음속으로 깊이 단 공자를 사랑하고 있었구려. 그대들 두 사람 살아 생전에 서로 부부가 될 수는 없었으나 죽어서는 한 구덩이에 묻혔으니 그대의 소원을 풀었다 하겠구려.

이 몇 마디의 말은 똑똑히 우물 밑바닥까지 전해졌다. 단예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그만 멍해져서는 중얼거렸다.

뭐라구? 아니야, 아니야. 나......나......나 단예에게 어떻게 그런 복이 있겠는가?

별안간 품속의 그 사람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단 공자 저는 정말 멍청해요. 그대는 줄곧 저에게 그토록 잘 대해 주셨는데도 저는 한사코.....

단예는 그만 놀라 멍청해져서는 물었다.

그대는 왕 소저이오?

왕어언은 말했다.

그래요.

단예는 그녀에 대해서 평소 매우 공경하고 있는 터라 조금도 그녀를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자기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람과 기쁨에 급히 몸을 일으켜서는 그녀를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단예가 몸을 세우자마자 두 발은 썩은 나뭇잎 속으로 빠져 들들었다.

그 진흙은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왕어언을 진흙 속에 내려놓는다는 것은 실로 몹쓸 짓이라 생각되어 부득이 그녀의 몸을 비스듬히 안은 채 연신 사과를 했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왕 소저, 우리가 진흙바닥에 놓이게 되었으니 부득불 형편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구려.

왕어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모용복의 마음을 이제서야 똑똑히 알게 되었다.

단예의 자기에 대한 진정은 모용복의 마음씨와 비교해 볼 때 더욱 진정이 어려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가 우물가에서 우물 안으로 뛰어든 것은 찰나지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마음속은 크게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자기의 신세를 슬퍼하고 죽음으로써 단예에게 보답할 결심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단예와 자기 자신은 모두 죽지 않았으니 정말 뜻밖의 사태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정녕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희열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는 평소 얌전하고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소녀였으며 또 단정하면서도 자제심이 강했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커다란 변고를 겪게 된 나머지 격동한 그녀는 단예에게 자기의 심사를 토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단 공자, 나는 그대가 이미 세상을 떠나신 줄 알았어요. 그대가 나에게 베푼 호의를 생각해 볼 때 실로 서글프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더군요. 하느님께서 보살피시어 그대가 무사했으니 천만다행이에요. 제가 위에서 한 그 한마디의 말을 그대는 모두 들었겠죠?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그만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얼굴을 단예의 가슴에 파묻었다.

단예는 삽시간에 전신이 두둥실 구름을 탄듯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때까지 아침 저녁으로 품고 있던 소원이 갑자기 현실로 화하게 되자 그는 크게 기쁜 나머지 두 발에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대뜸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등을 우물 밑바닥 난간에 기대게 되었는데 두 손으로는 여전히 왕어언의 몸뚱이를 얼싸안고 있었다. 그런데 왕어언의 몇 가닥 머리카락이 그의 콧구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단예는 그만 잇따라 재채기를 하게 되었다.

엣취, 엣취!

왕어언은 물었다.

그......그대는 어떻게 된 거예요? 상처를 입었나요?

아......아니오......엣취! 엣취! ......나는......상처를 입지 않았소. 엣취...... 감기가 든 것도 아니외다. 그저 너무나 좋아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외다. 왕 소저......엣취......나는 기뻐서 기절할 것만 같소이다.

우물 안은 어둠속에 휩싸여 있어서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볼수가 없었다.

왕어언은 빙그레 웃는 가운데 그녀 역시 가슴 가득히 부드러운 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고종 오라버니를 사랑했으나 고종 오라버니는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때서야 그녀는 서로 사랑하는 맛이 어떤 것인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단예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왕 소저, 조금 전 위에서 무슨 말을 했소? 나는 듣지 못했소이다.

왕어언이 나직이 말했다.

나는 그대가 성실한 군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약한 짓을 할 줄 아는군요. 분명히 듣고서는 어찌하여 제가 친히 말을 한번 더 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 말을 한단 말이에요?

단예는 다급히 말했다.

나는.....나는 확실히 듣지 못했소. 내가 만약 들었다면 하느님은 나에게 벌을 내리시어......

그가 맹세를 하려고 할 때 갑자기 입가가 따뜻해졌다. 어느새 왕어언이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이어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못 들었으면 못 들었지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단예는 크게 기뻤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 그녀는 한 번도 자기에게 이토록 호의를 베푼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그럼 그대는 위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이오?

왕어언은 말했다.

이후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요.

"세월은 얼마든지 있으니 하필 이때에 급히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라는 말은 단예에겐 그야말로 신선의 음악처럼 들렸다. 완전히 서방 극락 세계의 가릉조(伽陵鳥)가 일제히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이토록 아름답게 들릴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녀의 뜻은 이 두 사람이 오래 함께 지낼 수 있을 터인데 지금 서두를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말이 아니겠는가?

단예는 갑자기 그 같은 말을 듣자 여전히 의심스러워 물었다.

그대는 이제 우리들이 언제까지나 함께 있게 되리라는 것이오?

왕어언은 팔을 삐쳐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말했다.

낭군님, 그대가 나를 초라하다고 여기지 않고 제가 옛날에 냉정하게 대한 점에 대해 성을 내지 않는다면 저는 한평생 그대의 뒤를 따르며 다시는......다시는 그대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단예는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는 어떻게 하시겠소? 그대는 줄곧......줄곧 모용 공자를 좋아하지 않았소?

왕어언은 말했다.

그는 한 번도 나를 자기의 마음속에 둔 적이 없어요. 저는 이제서야 이 세상에서 누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 주고 측은하게 여기는지, 그리고 누가 자기의 생명보다 더욱 나를 중요하게 보는 지를 알게 됐어요.

단예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는 나를 두고 말하는 것이오?

왕어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맞았어요. 우리 고종 오라버니는 한평생 그저 대연나라의 황제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을 뿐이었어요. 본래 그것을 탓할 그것을 탓할 수는 없지요. 모용씨는 대대로 그와 같은 꿈을 꾸었으니 말이에요. 그의 선조 수십 대가 꿈을 꾸었으니 그에 이르러 어찌 깨뜨릴 수 있겠어요. 고종 오라버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대연나라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다른 일들을 모두 제쳐 둔 것뿐이에요.

단예는 그녀가 모용복을 위해 크게 변명하는 듯한 기미를 보이자 마음속이 다시 초조해져서는 말했다.

왕 소저, 만약 그대의 고종 오라버니가 일단 뉘우치고 그대에게 좋게 대한다면 그대는......그대는......어떻게 할 작정이오?

왕어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낭군님, 저는 우둔한 여자이긴 하지만 결코 행실이 나쁜 여자는 아니에요. 오늘 그대와 평생을 언약하고 만약 두 가지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야말로 절개 없는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그대의 깊은 정에 보답할 수 있겠어요.

단예는 크게 기뻐서 그녀의 몸을 안은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철썩, 하며 다시 진흙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입을 내밀어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려고 했다.

왕어언 역시 다소곳이 그 입술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네 쪽의 입술이 뜨겁게 밀착되었다. 단예는 두둥실 구름을 타고 날으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때 갑자기 뭔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재빨리 난간 쪽으로 바짝 붙어 섰다. 그러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우물 안으로 떨어졌다.

단예는 물었다.

게 누구요?

그 사람은 흥, 하더니 대답했다.

나외다.

그는 모용복이었다.

원래 단예는 정신을 차린 이후 왕어언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정신을 상대방에게 쏟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다 하더라도 아랑곳할 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구마지가 모용복과 싸우는 기척도 들을 수가 없었다.

별안간 모용복이 우물 안으로 떨어지자 두 사람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어언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고종 오라버니, 그대는......그대는 또 무엇하러 왔죠? 이 몸은 이미 단 공자에게 속한 몸이에요. 그대가 이 분을 죽이려 한다면 나먼저 죽이도록 하세요.

단예는 크게 기뻤다.

그는 모용복이 자기를 해치고 해치지 않고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있었다. 다만 왕어언이 고종 오라버니를 만나게 된 이후 옛정이 되살아나 다시 고종 오라버니 곁으로 달아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대뜸 마음이 놓였다.

이때 왕어언은 다시 손을 뻗쳐서 단예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더욱더 자신을 얻은 단예는 말했다.

모용 공자, 그대는 서하의 부마 노릇이나 하도록 하시오. 나는 결코 그대를 제지하지 않겠소. 그대의 외사촌 누이는 이제 나의 것이외다. 그대는 다시는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오. 어언, 그대는 그렇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왕어언은 미소했다.

맞았어요. 단랑, 죽든 살든 나는 이제 그대만을 따를 것이에요.

모용복은 구마지에게 혈도를 짚혔으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였다. 다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들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 두 사람은 내가 크게 패배를 당하고 남에게 제압당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오히려 나를 꺼리면서 내가 손을 쓰게 될까봐 두려워하는구나. 그것 참 잘 되었다. 나는 시간을 끌도록 하자."

모용복이 말했다.

외사촌 누이, 그대가 단 공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한집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오? 단 공자는 이미 나의 외사촌 매부가 되는데 내가 어찌 그를 해친단 말이오?

단예는 본래 중후한 사람이었고 왕어언은 천진난만하여 세상일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단예가 말했다.

모용 형, 감사합니다.

왕어언이 말했다.

고종 오라버니, 고마워요.

모용복은 말했다.

단 형제, 우리가 한집안 사람이 되었으니 내가 서하의 부마가 되고자 할 때 그대는 가운데서 방해를 놓지 않겠지요?

단예가 말했다.

그거야 물론이요. 나는 이제 그대의 외사촌 누이와 한 쌍이 되었으니 다른 소원은 없소. 설사 신선이 되거나 나한이 되라고 하더라도 나는 마다할 것이오.

왕어언은 가볍게 단예의 가슴에 자기의 몸을 기대었다. 이때 그녀는 무한히 즐거워하고 있는 듯했다.

모용복은 암암리에 진기를 돋우어서는 구마지에게 짚힌 혈도를 풀려고 했다. 그러나 일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단예에게 도움을 청하기는 싫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더니 정말 틀림이 없구나. 만약 평소였다면 외사촌 누이는 이미 나의 ㄱ으로 다가와 나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을텐데 지금은 본 척도 하지 않는구나."

이 우물 밑바닥의 넓이는 일 장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 사람의 간격은 무척 가까운 셈이었다.

이윽고 왕어언은 모용복이 진흙바닥 위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는 기척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한 걸음만 내딛게 된다면 모용복의 곁으로 달려가 부축해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용복이 달리 계책을 써서 단예를 해치지 않을까 두려웠고 또 한편으로는 단예가 의심을 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한 걸음도 떼어놓지 않았다.

모용복은 마음이 어지러워 혈도를 좀처럼 풀 수가 없었다. 간신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운기행공한 한참 후에야 혈도를 풀게 되었다. 그리고 손으로 우물 밑바닥을 누르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툭, 하니 한 가지 물건이 옆에 떨어졌다.

바로 구마지가 지녔던 역근경이었는데 어둠속이라 무슨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용복은 그저 자연스럽게 한편으로 비켜서고 말았다.

구마지가 갑자기 경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우물안은 매우 협소해서 웃음 소리는 원통과 같은 우물 안에서 메아리치게 되었다. 그 바람에 단예 등 세 사람의 고막이 웅웅거려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구마지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내식이 소용돌이침에 따라 정신이 가물가물해진 듯 마구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 한대의 주먹과 발길질은 모두 다 우물 밑바닥에 옆에 하나하나 쌓아 놓은 벽돌을 후려쳤다.

어떤 때는 엄청난 힘을 드러내 벽돌이 박살났고 어떤 때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았다.

왕어언은 무척 무서운 듯 단예의 품안으로 파고 들었다.

그는 미쳤어요. 그는 미쳤어요.

단예는 말했다.

그는 정말 미쳤군.

모용복은 이때 벽호유장공(壁虎遊牆功)을 펼치서는 우물 벽에 몸을 기댄 채 위로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구마지는 소리내어 웃을 뿐 아니라 또 끊임없이 숨을 헐떡이면서 더욱 빨리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왕어언은 용기를 내어 권했다.

대사, 앉아 있는게 좋을 거예요. 그러면 반드시 정신을 차리게 될 거예요.

구마지는 여전히 웃으면서 응수했다.

나보고......앉으라고? 정신을 차리라고?

그느 돌연 손을 뻗쳐서는 그녀를 낚아채려고 했다. 우물 안이라 옆으로 피할 공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뜸 그는 왕어언의 어깻죽지를 잡게 되었다. 왕어언은 놀라 부르짖으며 급히 피했다.

단에는 서둘러 다가가서 그녀의 앞을 막아 서며 부르짖었다.

그대는 빨리 내 뒤에 서시오!

바로 이때 구마지는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고 힘주어 조르기 시작했다. 단예는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왕어언은 깜짝 놀라 손을 뻗쳐 구마지의 팔을 떼내려고 했다. 이때 구마지는 실성한 나머지 내식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힘은 더욱 크게 용솟음 치고 있었다.

왕어언이 그의 손을 떼내려고 했지만 그것은 잠자리가 돌 기둥을 잡고 흔드는 격이었다.

왕어언은 놀람과 당황함이 극도에 달했다. 구마지가 단예를 목졸라 죽이지나 않을까 두려워 급히 부르짖었다.

고종 오라버니, 고종 오라버니, 빨리 좀 도와 주세요! 이 화상이 단 공자를 목졸라 죽이려고 해요.

모용복은 속으로 생각했다.

"단예라는 저 녀석은 소실산 위에서 나의 체면을 깡그리 잃게 해서는 다시는 강호에서 위세를 떨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죽으라면 죽으라지. 내가 왜 나서서 그를 구해야 하냔 말이다. 더군다나 저 흉악한 승려의 무공이 지극히 고강하여 나는 그의 적수가 도저히 될 수 없다. 우선 두 사람이 서로 싸워 쌍방이 다 상처를 입거나 죽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좋다. 내가 지금 끼어든다는 것은 정말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그는 손가락을 벽돌 사이에 끼우고는 우물 벽에 몸을 붙인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왕어언은 목이 터져라고 부르짖었으나 모용복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왕어언은 주먹을 쥐고 구마지의 머리와 등을 마구 두들겨 팼다.

구마지는 숨을 헐떡이며 크게 소리내어 웃더니 부쩍 힘을 써서 단예의 목을 졸랐다.

예. 집법승, 매질을 하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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