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1 김용(金庸)
图片来源 | 《射雕英雄传》
小說 英雄門 第 1 部 蒙古의 별 第 一 卷
저자 : 김 용
역자 : 김일강
발행 : (주)고려원
1993년 11월 20일 2판 1쇄 발행본
타자 : 정진호(SAMSONES),이주현(Joohyun),이신우(17856)
타자,편집 : Zazeung
---사조 영웅문 프롤로그---
소설 영웅문 연재 전에....
소설 영웅문은 김용(金庸)의 작품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유명한 작품입니다. 무협지의 초보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원제는 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이라고 합니다. 일명 대막영웅전(大漠英雄傳)이라고도 합니다. 대만에서 드라마로 방영되기까지 했던 이 작품은 전에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해설>
신필(神筆)의 경지와 <소설 영웅문> 成 宜 濟(檀國大 中文科 敎授)
Ⅰ 원저자 김용(金庸)은 원명이 사량용(査良鏞)으로 중국 절강성(浙江省) 해령(海寧) 사람으로 1924년에 태어났다. 상해(上海) 동오 법과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으며 현재 홍콩에서 발행되고 있는 일간, 주간, 월간 명보(明報)의 주필이며 사장이다. 그는 역사학자요, 수집가요, 논설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더 높다는 점이다.
수십 년 동안 그는 중국 문단의 기인(寄人)으로 각광을 받아 왔다.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학문 연구로 중국 통사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방대한 유가(儒家)의 군경(群經)에 통달하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철학은 물론 불경(佛經)에까지 심취하여 자신의 학문의 영역을 넓히고 깊게 했다.
김용은 이와 같은 해박한 학식을 바탕으로 해서, 독특하면서도 흡인력이 강한 문장과 소설의 체계에 대한 깊은 연구 및 비할 수 없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의 작품을 써 나갔다. 그의 작품에 심취한 독자, 그래서 그를 신앙의 대상처럼 존경하는 독자가 천만 명이 넘는다는 사계(斯界)의 통계인데, 이는 저자가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의 통수만도 그렇다는 것이다.
김용의 작품에 매료된 사람은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 대만은 물론 중국 대륙, 심지어는 구미까지 널리 그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어서 중국인이 있는 곳에 김용의 작품이 있고 중국인이 모인 곳의 화제는 김용의 작품에 대한 것이라는 말까지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들의 화제가 일단 그의 작품에 미치면 그들은 금방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김용의 이야기만 나오면 신바람이 난다고 한다.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도 있고 우울했던 표정이 활짝 밝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손발을 휘저으며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학교의 수업에 빠지거나, 잠을 자지 않으며, 여자 친구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있지만 김용의 소설을 읽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김용의 소설은 어째서 이렇게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는가?
첫째,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다. 문학 작품에서 묘사되는 것은 보편적인 인성(人性)이다. 김용은 이 인성에 대한 이해가 깊다. 그의 붓 끝에서 창조되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살아 움직이고 있다. 중국 문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수호전(水滸傳>)의 인물 묘사가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수호전에 등장하는 인물과 김용의 작품 가운데 나오는 인물을 비교한다면 후자가 더 나은 편이다. 현실 생활 가운데 억압되고 노출되지 않은 인성을 김용은 소설 가운데서 생생하고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를 통쾌하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둘째, 정절(情節)이 다채롭다. 김용의 작품은 스케일이 크고 기세가 힘차며 세련되고 원숙하다. 구조·순서·배치·전절(轉折)등이 큰 강에 바람이 일지 않는데도 물결이 출렁이듯 하고, 파란 하늘에 무심한 흰 구름이 생겼다가는 어느덧 사라지듯 신출귀몰하여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셋째, 문장이 아름답다. 김용의 문필은 사람을 끌어 잡아당기는 자력이 풍부하다. 부드럽고 우아한 가운데 행운 유수와 같은 재미가 넘쳐흐른다. 한번 그의 작품을 손에 잡기만 하면 놓을 줄을 모른다.
요컨대 김용의 소설은 서사나 사경(寫景)은 물론 인물의 묘사에도 정감이 넘쳐 표현할 수 없는 마력으로 독자를 작품 속의 분위기로 끌어들여 몰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그가 쓴 작품의 재미는 영원히 무궁 무진할 뿐만 아니라. 영원 불멸의 문화적 가치를 구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중국 문학사상 찬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소설사의 금자탑인 홍루몽(紅樓夢)을 연구하는 학문을 홍학(紅學)이라 하듯이, 김용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을 김학(金學)이라고까지 부르게끔 만들었다. 지금 대만에서 발간 되 김학 연구 총서만도 18권에 이르고 있다. 김용의 작품은 모두 14부(部) 36권으로 되어 있다. 이 14부의 소설(그 중 단편 소설이 2편 있다)은 각 부마다 나름대로의 품격과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번역 소개되는 <소설영웅문(小設英雄門)>은 원명이 <사조영웅전(射鳥+周英雄傳)>, 일명 <대막영웅전(大漠英雄傳)>이라고 하는데 김용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이다. 이 소설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 누구도 김용이 소설의 거장이라는 사실에 회의를 품는 사람은 없다. 이 소설은 짜임새가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여 그 어떤 결점도 찾아낼 수 없는 완벽한 작품으로, 김용의 성숙을 입증하는 상징적 대표작이다. 이 <소설영웅문>이 김용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걸작이라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Ⅱ 《소설영웅문》 가운데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과 허구의 인물의 조화는 새로운 발전으로 나타난다. 허구의 인물이 단역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 동등한 자격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주인공인 곽정(郭靖)은 어려서부더 징기스칸과 함께 생활하며 마침내는 몽고의 대병을 통솔하여 서정(西征)에 나선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김용의 붓 끝에서 창조되는 인물의 처리는 자유 자재로 표현되며 어떤 때는 심지어 역사적 인물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배치는 김용이 그의 작품 가운데 서술해 내는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작자 자신이 깊은 연구와 소감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독자들이 김용의 작품을 읽는 동안 역사적 사실과 창작의 조화 가운데 감정이나 이론이 잘 융합되어 전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설영웅문》이 가장 성공한 점은 인물의 창조에 있다. 이 작품의 문체는 얼핏 보아 별로 수식이 없고 직접적으로 간단하게 표현했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지만 줄거리 중의 다채로운 부분은 모두가 작가가 창조해 낸 부분으로서 그때그때 생생하게 독자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김용의 훌륭한 인물 묘사는 《소설영웅문》에서 시작되었고 이 작품 이후 더욱 원숙해졌다.
《소설영웅문》은 김용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일반화, 보편화, 대중화된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 가운데 등장하는 동사(東邪), 서독(西毒), 남제(南帝), 북개(北 ), 중신통(中神通)은 전통적인 중국 소설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지만 많은 소설이 경쟁적으로 모방할 만한 창작적 기교가 풍부하기에 중국 소설사상 가장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영웅문》 가운데 김용은 개인의 역량보다는 집단의 역량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념은 군산(君山)외 모임에서 곽정과 황용(黃蓉)이 개방( 幇)의 역량에 의해 일패도지의 위기에 빠지는 사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이 재강조되는 과정 가운데 실제적으로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 정말 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지만 작자는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다시 곽정과 황용이 개방을 패퇴시키는 장면으로 사태를 전환시키고 만다. 영웅이란 결국은 개체요 독립된 것이다. 군중의 맹목성과 충동성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집단 역량의 붕괴 조짐은 이 소설에서 시작되지만 그의 후기의 다른 작품에서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래서 그의 후기의 다른 작품 가운데서는 시종 개체의 관념이 위주가 된다.
애정에 대한 관념도 그의 이전의 소설에서 《소설영웅문》에 이르기까지는 「일남일녀」의 연애관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관념이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점차적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소설영웅문》 가운데서 곽정은 몽고외 공주와 혼약을 한 처지이면서도 일단 황용을 만난 후부터는 양자택일의 고뇌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물론 감정적인 좌절은 소설의 정절(情節)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중국에서 가장 저명한 베스트 셀러의 작가인 예광(倪匡)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용 소설의 훌륭함은 내가 그의 전집을 스물 일곱 번 읽은 후에 내린 8자의 총평으로 대변된다. <고금중외 공전절후(古今中外 空前紹後)>이다.」
고금 동서를 막론하고 비교할 만한 소설이 이전에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만에서 출판된 김학 연구 총서 18권 가운데 5권의 연구 저서를 집필 발행하였으며 다시 《중국소설사》를 집필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또한 인기 작가인 여류 소설가 삼모(三毛)는 「다른 사람의 소설을 별로 읽지 않지만 김용의 소설은 읽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대만 대학의 당문표(唐文標) 교수는 김용의 소설을 읽으면 마음속의 심지(心智)가 정화되고 웅지를 품게 되며 정의롭고 완미한 세계를 위해 자기의 역량을 공헌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같은 대학의 오굉일(吳宏一) 교수는 중국 문학을 전공하면서 김용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니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그 밖에 소설가인 백선용(白先勇)·왕정화(王禎和)·진영진(陳映眞), 시인인 대천(戴天), 과학자인 진지번(陳之藩)·심군산(沈君山), 문학 비평가인 하지청(夏志淸)....등이 김용을 당대의 전기적인 인물이요 신필(神筆)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작품을 추천하고 있다.
미국의 버클리 대학 동아과(東亞科) 학과장을 역임하고 경도(京都) 대학 중문과 교환 교수로 있었던 진세양(陳世釀)에 의해 버클리 대학과 스탠포드 대학에서는 김용의 직품을 중국 문학의 부교재로 채택한 지 오래되며 김용의 작품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중인 젊은 문학도도 여러 명이 있다.
김용은 이제 작품을 쓰지 않겠다고 단언을 했지만, 세계 각국의 많은 독자들은 그가 작가로서외 한계를 극복하고 다시 한 번 참신한 충격을 안겨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조 영웅전 <소설 영웅문 1부>
第 一 章. 한밤의 추적자들
8백여 년 전, 당시 송(宋)나라의 휘·흠(徽·欽) 두 황제는 금(金)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강왕(康王)은 남쪽으로 내려와 임안(臨安, 지금의 杭州)에서 황제의 위를 계승, 고종(高宗)이라 칭하고 소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강한 적들은 국경을 공략하여 국토의 반 이상이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고종은 금나라를 호랑이 무서워하듯 하고, 또 휘·흠 두 황제가 돌아오면 자기가 황제 노릇을 못할까 두려워하여, 간신 진회(秦檜)의 말만 듣고 금나라와 대항하여 싸우던 악비(岳飛)장군을 처형하고 금나라에 화의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때 금나라 군사들은 악비에 의해 연전연패하여 사기가 크게 저하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북쪽의 중국 의병들이 도처에서 일어나 반항하는 바람에 속수 무책으로 있던 참에 화의를 요청 받고 크게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소흥(紹興) 12년 정월, 화의에 성공, 송·금 두 나라는 회수(淮水)의 중류를 경계로 삼게 되고, 고종인 조구(趙構)는 신하임을 자인하여 세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송나라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회수 이북의 백성들은 강토의 수복이 희망 없음을 알자 더욱 상심하였다. 그런데도 고종은 오히려 진회의 큰 공로라고 생각했으니 어이없는 일이다.
원래 진회는 소보좌복사(少保左僕射)로 임명되었다가 추밀사(樞密使)로 특진함과 동시 노국공(魯國公)으로 봉함을 받았고 이때 다시 태사(太師)로 봉함을 받아 황제의 총애가 비할 수 없이 컸다.
이때부터 금나라 군사들은 회수 이북의 중국 영토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소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강남(江南)의 조정은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부패 일로였다. 황제와 백관들은 매일 가무 음주와 주지 육림 속에서 지내고 있었으니 강토의 수복 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그 동안 비록 몇 명의 우윤문(虞允文)과 같은 명장과 어진 재상이 있기는 했지만 기둥 하나가 큰 집을 지탱할 수 없듯이, 마침내 아무 업적도 이루지 못하고 우울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고종은 효종(孝宗)에게, 효종은 광종(光宗)에게, 광종은 다시 영종(寧宗)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영종 경원(寧宗 慶元) 5년 동짓달. 이틀이나 계속해서 큰 눈이 내렸는데 조정의 군신들은 따뜻한 화로에 둘러앉아 눈 구경을 하면서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항주(杭州)성 밖에 동쪽에 자리잡은 우가촌(牛家村)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의 호걸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곽소천(廓嘯天)이요, 다른 하나의 이름은 양철심(楊鐵心)이라고 했다. 이 곽소천으로 말하자면 수박 양산(水泊 梁山)의 108호한 가운데 지우성(地佑星) 새인귀(塞仁貴) 곽성(廓盛)의 후예로서, 그의 집안에는 대대로 갈래진 창 쓰는 법이 전해 내려오다가 그만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긴 창이 짧게, 단창이 쌍창으로 변하였지만, 그의 갈래진 쌍창은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온 비법이라 할 수 있다.
양철심은 명장 양재흥(楊再興)의 후손으로 당시 양재홍이 악비 악소보(岳少保)의 휘하에 있을 때 주선진(朱仙鎭)의 일전에서 금나라 군사의 간담을 서늘하도록 섬멸시킨 바 있는데 뒤에 길을 잘못 들어 소상하(小商河)에 갔다가 타고 있던 말이 진흙 속에 빠지는 바람에 금나라 군사들이 쏘아 대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양철심이 배운 것도 역시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양가창법(揚家槍法)이었다. 두 사람이 강호에서 서로 알게 된 후 무예를 논하다가 서로 존경하게 되어 결의 형제를 맺게 되었고 뒤에는 우가촌으로 이사까지 하여 이 집에 살게 되었는데 매일 창 쓰는 법이나 몽둥이 쓰는 법을 연습하면서 고금의 얘기들을 나누며 지내는데, 친형제보다 더 친밀했다.
이날 두 사람이 양씨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소복소복 쌓이는 창 밖의 눈을 바라다보다가 문득 북국이 오랑캐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일에 생각이 미치자 화가 치밀어 올라 양철심이 주먹으로 식탁을 꽝하고 내려치는 순간 홀연 문의 주렴이 걷히며 안으로부터 절세의 미인이 하나 걸어 나왔다.
이 여인은 손에 접시를 들고 있었는데 접시 위에는 쇠고기와 통닭 한 마리가 담겨 있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두 분이 화가 나 계셔요?]
[우린 지금 조정에 있는 우둔한 녀석들의 미련한 행동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인데, 자! 아주머니 한 잔 하시지요!]
곽소천이 술을 권했다.
이 여자는 양철심의 처 포(包)씨로서, 그녀는 임안(臨安) 일대에서는 이름난 미인이며, 성격이 온순하여 누구든지 한 번 보기만 해도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그런 미인이었다. 이 여인은 양철심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부가 곽소천과 함께 허물없이 술도 마시고 세상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 왔다. 그 여자는 쇠고기와 통닭을 식탁에 내려놓고 자기 스스로 술잔을 집어 술을 따라 한 모퉁이에 단정히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
[어제 내가 중안교(衆安橋)에 있는 동남다루(東南茶樓)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한탁주(韓托鑄)라는 도둑놈 같은 재상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의 말에 따르면 어떤 관원이든지 상서를 올릴 때 그 공문 위에 아울러 이러이러한 예물을 올립니다 라는 말이 없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나요.]
양철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못난 황제 밑에 못난 재상이 있기 마련이오. 또 이 따위 재상이 있으니까 백관들도 다 마찬가지지. 한탁주가 백관을 거느리고 야유회를 할 때 여기 대나무 울타리에 초가집들이 정말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는 하나 유감스럽게 닭이나 개 짖는 소리가 없단 말야 하고 말을 하자마자 갑자기 풀 속에서 왕왕 개 짖는 소리가 들렸는데 한참만에 기어 나온 개가 우리 임안부윤인 조대인(趙大人) 바로 그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포씨는 꽃나무가지가 흔들리듯 허리를 못 펴고 웃었다. 세 사람이 술을 마시다 보니 밖에는 점점 더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제가 가서 아주머니도 오시라고 해야겠어요.]
포씨가 말을 꺼내자,
[불러오지 마세요. 요 며칠 동안 몸이 좀 불편한 모양입니다.]
곽소천이 만류했다.
포씨는 미소를 담뿍 머금은 채 술을 따라 남편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 술 드시고 형님께 축하를 드리세요.]
[무슨 일인데?]
[곽선생님께서 말씀하세요.]
포씨가 재촉을 하니 곽소천이 입을 열었다.
[우리 집 사람, 요 몇 달째 늘 허리가 시다느니 등이 쑤신다느니 해서 어제 읍내에 들어가 의사 장씨에게 보였더니 아기가 석달째라더군요.]
[형님 이거 축하드립니다. 정말!]
양철심이 큰 소리로 축하를 하고 세 사람이 함께 술 석 잔씩을 비웠다.
주기가 얼근히 올라오는데 동쪽으로부터 도사 한 사람이 눈길을 밟으며 이리로 향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도사는 머리에 삿갓을 쓰고 몸에는 도롱이를 입고 있었으나 온몸에 눈이 가득 묻었으며 걸음이 몹시 민첩했고, 등에는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는데 칼자루에 달려 있는 금빛 수술이 바람을 받아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우님, 저 도사 보아하니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한데,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저 사람과 더불어 친구로 사귄다 해도 과히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은데.]
[좋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서 술이나 나누며 어디 사귀어 봅시다.]
두 사람은 원래 손님을 좋아하는 성질이라 곧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가 보니 도사는 어찌나 걸음걸이가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수십 장(仗)밖에 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다보며 마음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여보시오. 도사님, 잠깐만!]
양철심이 큰 소리로 부르자, 도사는 재빨리 이쪽으로 몸을 돌리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날씨가 몹시 추운데 술이나 드시며 몸을 녹여 가시지 않으시려오?]
도사는 나는 듯 다가왔다. 두 사람은 그의 걸음걸이에 또 한 번 놀랐다. 도사는 냉랭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당신들은 꽤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양철심은 나이가 젊고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라 이쪽은 호의로 청해 술을 대접하려고 하는데 어째 이리도 방자한가 생각되어 거들떠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곽소천이 그래도 연상이라고 해서 공손히 읍을 했다.
[저희 형제가 방금 불을 쬐면서 술을 마시다 눈이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도사님께서 혼자 가시는 것을 외람되게도 이렇게 모셨사오니 무례하다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사는 눈알을 괴상하게 돌리더니 명랑하게 응했다.
[좋소! 술을 마시자면 마시지요.]
큰 걸음으로 집안에 들어섰다. 양철심은 더욱 화가 치밀어 손을 뻗치자마자 도사의 왼팔을 잡아 밖으로 끌어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도사의 이름도 아직 묻지 못했소.]
그러자 갑자기 도사의 손이 뱀장어처럼 미끄러져 나가더니 그의 팔을 죄어 왔다. 그것은 마치 쇠고랑으로 죄는 듯 아프고 화끈했다. 양철심이 풀려 나오려고 힘을 쓸수록 온 팔의 맥이 빠지고 뱃속까지 아파 왔다.
함부로 손을 댈 계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곽소천이,
[자! 도사님, 이리 앉으세요.]
하고 권하자 도사는 냉소를 띠며 양철심의 팔을 놓아주었다.
양철심은 화가 났지만 어찌할 수도 없어 내실로 들어가 이 도사와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알렸다.
[이 도사가 괴상하니 우선 그와 더불어 술이나 드시다가 기회를 보되 절대로 먼저 손을 써서는 안 되요.]
그는 부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운 술과 두어 가지 안주를 챙긴 쟁반을 받아 든 그가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부인은 한 자루의 비수를 남편의 품 속에 찔러 주었다. 그는 밖으로 나와 술 석 잔을 도사에게 따라 주고 자기도 한 잔을 따라 마신 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도사는 창밖에 내리는 눈만 멍하니 바라다볼 뿐 술도 마실 생각을 않고 가벼운 냉소만 띠고 있었다.
곽소천은 도사가 만면에 적의를 품은 채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술에 무슨 독약이라도 탔나 의심하는 것 같아 도사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자기가 먼저 마셔 버리고,
[술이 쉬 식습니다. 도사님께 따뜻한 술을 새로 따라 올리겠습니다.]
하고 다시 한 잔을 따라 놓자 도사는 비로소 잔을 비우고,
[술 속에 마취제나 독약이 있어도 나는 괜찮소.]
태연하게 말했다. 양철심은 더 참을 수 없어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우린 호의로 당신에게 술을 권했는데 그래 당신을 해칠까 봐 의심하는 거요? 무슨 도사가 말도 말 같지 않게 하고 그래. 빨리 나가시오. 여기 술이 시어 터지는 것도 아니고, 안주를 썩혀 내버리는 것도 아니오.]
도사는 흥 콧방귀를 뀌더니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주전자를 들어다가 자기 잔에 따라 석 잔을 거듭 마시더니 갑자기 삿갓과 도롱이를 벗어 버렸다.
나이는 30세 안팎, 두 눈썹이 검고 얼굴 색은 불그레하며 둥근 얼굴에 큰 귀가 보통 사람과 다른 풍채였다. 등에 지고 있던 가죽 배낭을 끌러 책상 위에 쏟아 놓는 쿵하는 소리와 함께 굴러 나온 것은 피와 살이 엉겨 붙은 사람의 머리가 아닌가?
양철심은 손을 뻗어 품안의 비수를 더듬었다. 그 도사는 다시 가죽 배낭을 털어 두 덩어리의 피인지 살덩이인지 모를 것을 쏟아 놓았다. 그것은 사람의 염통과 간이었다.
[이 도둑 같은 놈아!]
양철심이 소리를 지르며 비수로 도사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잘한다. 내 마침 이 칼이 필요했는데.]
도사가 외손을 들어 그의 팔을 치니 비수는 어느덧 그의 손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한쪽에 서서 이 광경을 보고는 곽소천은 깜짝 놀랐다. 의동생은 명장의 후예이며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무예를 지니고 있어, 평소 자기와 비교를 해 보아도 손색이 없었는데, 맨손으로 비수를 뺏는 그 솜씨는 틀림없이 강호에 전해진다는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의 솜씨일 것이었다. 그는 처음 보는 묘기에 놀라며 의자를 집어들고 도사가 비수로 찔러 오면 대항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사는 오불관언, 비수로 염통과 간을 토막내어 눈 깜짝할 사이에 술과 함께 깨끗이 먹어 치워 버리고 말았다.
양,곽 두 사람은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사는 다시 오른손을 번쩍 들어 책상을 내리쳤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식탁 위의 술잔이며 찻잔, 접시 등이 번쩍 들리며 놓여 있던 사람의 머리가 으스러지고 식탁이 쩍 갈라지고 말았다. 도사는 그러고 나서 하늘을 보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보며 통곡하는 도사를 바라보던 곽소천이 의동생의 옷소매를 잡아끌면서 속삭였다.
[미친 사람인가보다. 하지만 무술이 대단하니 상대하지 말게.]
그러나 양철심은 도사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안에서 다시 뜨거운 국을 가져다가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도사님, 이 국물 좀 마시지요.]
[쥐새끼 같은 놈들, 내가 모두 죽여 버리겠다.]
가져다 놓은 그릇들을 차 버리는 도사의 행동에 양철심은 더 화를 참지 못하고 집안 모퉁이에 세워 두었던 철창을 뽑아 들고 문 밖으로 뛰쳐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어디 이놈 덤벼 봐라. 양가창법의 맛이 어떤지 보여 줄 테다.]
도사는 히죽 웃으며 몸을 날려 밖으로 나왔다.
[쥐새끼가 양가창법을 써?]
일이 다급해지자 곽소천도 집으로 달려가 갈래진 쌍창을 들고 나왔다. 도사는 칼도 뽑아 들지 않고 도포자락을 삭풍에 날리며 서 있었다.
[칼을 뽑아 들고 덤벼라.]
양철심이 소리쳤다.
[두 놈들이 함께 대들거라. 내가 맨주먹으로 상대해 주겠다.]
양철심이 먼저 독룡출동(毒龍出洞)의 솜씨로 번개같이 도사의 앞가슴을 찔렀다.
[잘한다!]
도사는 슬쩍 한쪽으로 돌며 손바닥으로 창 끝을 잡아 버렸다.
3백여 명의 송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4만여 금나라 대군과 대전했던 양재흥의 비법을 이어 일가를 이룬 양철심이다. 함박눈이 춤을 추는 가운데 양철심은 도사의 손바닥에서 창을 빼내어 다시 휘둘렀다. 그러나 양철심이 더욱 힘을 다할수록 도사는 창을 따라 그림자처럼 몸을 움직였다. 72로(七十二路)의 양가창법을 다 써버리자 양철심은 초조한 나머지 철창을 거꾸로 들고 물러났다. 도사는 손바닥을 들고 쫓아왔다.
[야압!]
양철심이 큰 소리와 함께 도사의 얼굴을 향해 비장의 창법을 날렸다. 최벽파견(催壁破堅).... 이 술법이야말로 양가창법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공격술이다. 양재흥이 송나라 악비(岳飛)와 싸울 때 악비의 동생 악번(岳飜)을 찔러 죽여 유명해진 바로 그 창법인 것이다.
(솜씨가 쓸 만하군....)
도사는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탁하는 소리와 함께 창 끝을 손바닥으로 잡아 버렸다. 양철심은 안간힘을 다해 창을 빼려 했으나 도사는 못으로 박아 놓은 듯 끄덕도 하지 않았다.
[핫하하....]
도사는 큰 소리로 웃고 나서 번갯불같이 손으로 창을 내리쳤다.
양철심의 철창은 두 토막으로 분질러지고 말았다.
[선생의 솜씨는 틀림없는 양가창법이로군요. 이거 정말 실례했습니다. 존함을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도사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양철심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저의 성은 양이요, 이름은 철심이라 합니다.]
[양재홍 장군은 선생의 조상이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자 도사는 공손히 일어나 머리를 숙여 절을 하고 나서 곽소천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는 방금 두 분이 좋지 않은 분들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정말 큰 죄를 지었군요. 원래 충신의 후손이신데 실례했습니다. 이분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저의 성은 곽이요, 이름은 소천이라 합니다.]
양철심이 말을 거들었다.
[이분은 제 의형으로서 양산호한(梁山好漢) 새인귀(賽仁貴) 곽성(郭盛) 곽두령(郭頭領)의 후손이 됩니다.]
[제가 어쩌다 이렇게 결례를 했습니다. 이렇게 사죄를 드립니다.]
도사는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절을 했다.
[도사님, 다시 안으로 들어가 술을 드십시다.]
[좋습니다. 두 분을 모시고 통쾌하게 한잔하고 싶습니다.]
남편이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을 문턱에 서서 근심스럽게 바라다보던 포씨는 화해하는 것을 보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술잔과 안주 접시를 챙겼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아, 양,곽 두 사람은 도사의 이름을 물었다.
[제 성은 구(丘)요, 이름은 처기(處機)라 하는데....]
곽소천은 깜짝 놀랐다.
[그러면 장춘진인(長春眞人)이 아니십니까?]
[네. 그것은 저희 도가(道家)에서 지어 준 별명이죠.]
[여보 아우님, 이분이 바로 무공으로 당대에 유명한 협객(俠客)이오. 오늘 이렇게 뵙게 되는 정말 큰 영광이오.]
곽,양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켜 땅에 꿇어 엎드려 절을 했다.
구처기는 급히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 제가 간신 한 명을 죽였는데 관가에서 계속 추적을 당하고있는 중이었소. 그런데 두 분이 돌연 저에게 술대접을 하시려고 했고 또 이곳은 황제의 도읍인데다 보아하니 두 분이 보통 농부 같지는 않아서 의심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 의동생의 성질이 괄괄해 도사님께서 문에 들어오실 때 시비를 걸어 더욱 의심을 품게 되셨군요.]
곽소천이 말했다.
[평범한 농부에게 어찌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두 분이 관가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사람들인 줄 알고 그만....]
세 사람은 크게 웃었다. 셋이서 한참 동안이나 술을 마시다가 구처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 고향은 원래 북방인데 금나라 군사들이 제 집 식구를 살해하고 쑥밭을 만들어 버렸는데도 조정에서는 오히려 원수 놈들에게 아첨이나 떨고 있는 데다 중원(中原)의 수복은 희망이 없어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도사는 땅바닥에 부서져 뒹구는 사람의 머리를 가리켰다.
[이 사람 성은 왕(王)이요, 이름은 도건(道乾)이라 하는데 아주 거물급 간신이오. 작년에 황제가 금나라 황제의 생신에 특사로 파견했는데 그래 금나라 사람과 결탁해 가지고 강남(江南)을 침범하려고 했소. 내가 십여 일이나 쫓아다니다가 조금 전에 죽일 수 있었지요. 그리고는 또 집안 일과 나라의 고통에 생각이 미치자 슬퍼진 나머지 이렇게 실례를 하게 된 것이었소.]
양,곽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강호의 호걸들로부터 장춘자(長春子) 구처기의 무공이 뛰어나 상대가 없다는 얘기를 들어 왔는데 오늘 그의 애국 애족의 열정을 보고는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양가창법이 병가(兵家)의 절기(絶技)이기는 하지만 구처기는 내외의 무공을 겸비하여 극치에 이르고 있는데 어찌 양철심이 그와 대적하여 한참 동안이나마 싸울 수 있었겠는가? 원래 구처기는 양철심의 솜씨가 비범한 것을 보자 내심으로 놀라며, 고의로 그로 하여금 72로의 창법을 모두 쓰게 함으로써 그가 정말 양씨의 직계 후손인가를 확인하려고 했을 뿐이지 정말 대적하기로 한다면 한두 번 손을 써서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었다.
세 사람은 술이 얼근히 취해 오자 더욱 의기 투합했다.
[우리 형제가 도사님을 뵙게 된 것은 평생의 행운입니다. 도사께서는 누추한 집이나마 며칠 더 머물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양철심이 말을 꺼내고 대답을 기다리는데 구처기의 얼굴 표정이 금새 변했다.
[누가 나를 찾으러 오는 것 같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밖에 나오지 마시오. 아시겠습니까?]
양,곽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처기는 몸을 숙여 사람의 머리를 주워 들고 문을 열고 나서더니 돌연 한 마리의 새처럼 나무 위로 올라가 숨어 버렸다.
양,곽 두 사람은 도사의 행동이 이상한 것을 보고 도시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은 고요한데 문 밖으로는 삭풍이 지나는 쏴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한참 뒤에 서쪽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도사의 귀는 놀랍군....'
양철심이 마음속으로 놀라고 있는데 말발굽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더니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사람들 10여명이 문 앞에 말을 멈추고 소리쳤다.
[발자국이 여기까지 와서 없어졌다.]
뒤쫓아오던 몇 명이 말에서 뛰어내려 구처기가 남긴 눈 위의 발자국을 살펴보았다. 양,곽 두 사람이 문 안에서 몰래 숨어 보니 말에서 내리는 폼들이 보통 무공을 지닌 사람들 같지 않았다. 앞장섰던 사람이,
[집안에 들어가 뒤져봐!]
명령을 내리자 다시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양씨 집 대문을 두드리는데 돌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물건이 날아와 문을 두드리던 사람의 머리를 때렸다. 뇌골이 터져 나오며 그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몇 사람이 우르르 나무를 둘러쌌고, 한 사람이 날아온 물건을 주워 보고는 기절할 듯 놀랐다.
[왕대인(王大人)의 머리다.]
앞장섰던 그자가 장검을 빼어 들고 명령을 내리자 겹겹이 나무를 둘러싸고 있던 졸개 중 다섯 명이 구처기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창을 비껴 들고 구처기를 도우러 나가려는 양철심을 곽소천이 말렸다.
[우리들 보고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만일 저 도사가 중과부적이거든 그때 나가 도와도 늦지 않네.]
말을 마치고 보니 구처기는 네 개의 화살을 번개같이 피하고 마지막 화살을 잡아 다시 던지며 나무에서 뛰어내리자 번개처럼 칼을 휘둘렀다. 번쩍 하는 곳에 두 명의 졸개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앞장섰던 자가,
[이 도둑놈아! 바로 네놈이었구나!]
세 개의 쇠뇌(釗牢)를 쏘며 장검을 들고 대들었다. 구처기의 검광이 다시 번쩍거렸다. 말 위의 두 놈과 장검을 든 녀석이 쓰러졌다. 양철심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자기도 10여년 동안이나 무예를 익혀 왔지만 이 도사와 같은 솜씨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가 사정을 보아 주지 않았다면 그와 맞섰을 때 벌써 비명에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구처기는 말을 타고 칼을 쓰는 놈과 대결하고 있었다. 그자의 솜씨도 만만치는 않았다. 구처기는 한동안 고의로 허공을 치거나 주먹으로 내리치는 시늉만을 하고 있었다. 칼을 쓰는 자는 적수가 못 됨을 알자 말머리를 돌려 줄행랑을 치려고 했다. 구처기는 돌아서는 말의 꼬리를 잡는가 싶더니 몸을 날려 한 칼에 그의 등을 찔렀다. 칼 끝이 앞가슴까지 꿰뚫었다.
말은 구처기를 태운 채 급히 달려나갔다. 구처기는 말고삐를 잡고 사방으로 내달리면서 닥치는 대로 칼을 번쩍거렸다. 칼이 한 번 번쩍할 때마다 아이쿠 소리와 함께 적들의 목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한 필의 빈 말만이 먼 곳을 향해 달리고 있을 뿐 한 놈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구처기는 허허 웃고 나서 곽,양 두 사람을 향해 손짓을 했다. 곽,양 두 사람은 문을 닫고 나와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곽소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사님,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몸을 뒤져보시오.]
칼을 가지고 있던 자의 몸에서 한 장의 문서가 나왔다. 그 문서는 바로 개 짖는 소리를 했던 임안부(臨安府)의 지부(知府)인 조대인(趙大人)이 발송한 밀서로서, 대금국(大金國)에 사신으로 갔던 왕도건(王道乾)을 살해한 범인을 금나라 사람들과 희롱(? 혹시 협조)하여 즉각 체포, 기일 내에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곽소천이 이를 들여다보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는데 저쪽에 있던 양철심이 소리를 질렀다. 그의 손에는 금나라 문자가 씌어진 허리에 차는 패(牌)가 있었다. 원래 구처기가 살해한 사람들 중에는 몇 명의 금나라 군사도 섞여 있었던 것이다. 곽소천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적병이 우리 영토 안에서 사람을 마음대로 체포하고 죽이려고 하는데 중화(中華)의 백관(百官)은 모두 금나라의 명령만 듣나.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 모양이야!]
[출가(出家)한 사람이야 원래 자비스러운 마음을 지녀야 하지만 백성을 괴롭히는 간신배들이나 적국의 원수들은 보기만 해도 인정 사정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려.]
구처기가 웃으며 말하자 곽,양 두 사람은 잘 죽인 것이라고 말했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는 사는 사람이 원래 적을 뿐 아니라 날씨는 춥고 눈은 이렇게나 많이 내리는 외출할 사람도 없었다. 양철심은 삽과 괭이를 찾아왔다. 세 사람은 10여 구의 시체를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포(包)씨는 비를 들고 눈 위에 흘린 핏자국을 쓸다가 갑자기 피비린내를 맡고 어지러워 소리를 지르면 쓰러졌다. 양철심이 급히 달려가 부축해 일으키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포씨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양철심은 아내의 얼굴이 백짓장 같고 손발이 차디찬 것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구처기가 다가와서 포씨의 오른 손목을 잡고 진맥을 보더니 웃으며,
[축하합니다. 경사가 났군요!]
하고 말한다.
양철심이 영문을 몰라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이때 포씨는 끙 소리를 내며 깨어 일어나 자기 모양이 말이 아니고 또 세명의 남자가 주위에 서 있는 것을 보자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경사가 생겼습니다.]
구처기가 다시 말을 하자 양철심이 정말이냐고 물었다.
[제가 평생 배운 것 가운데 세 가지 일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첫째는 의술이요, 둘째는 시(詩)요, 셋째가 서투른 대로 무예입니다.]
[도사님과 같은 절세의 무공을 가지고서도 서투른 무예라 하시면 저희들 재주는 무예라고 할 수도 없겠군요.]
곽소천이 되받자 세 사람이 함께 웃으며 시체를 묻었다.
양,곽 두 사람은 구처기가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도 옷에 피한 방울 묻지 않고 이마에도 땀 한 방울 맺히지 않은 것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두터워졌다.
시체를 다 묻어 버리자 두 사람은 다시 그를 안으로 들라 해서 술상을 차렸다.
양철심은 아내가 애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곽형댁 아주머니도 아기를 잉태했으니 도사님께서는 번거로우시겠지만 두 아이를 위해 이름을 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음, 그러면 곽형의 아기는 장래 곽정(郭靖)이라고 하고 양형의 아기는 양강(楊康)이라고 하되 남녀를 불문하고 이 이름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도사님의 뜻은 그들로 하여금 정강의 치욕(靖康之恥)을 잊지 말고 늘 두 성인(聖人)이 포로가 되었던 일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곽소천이 말하자 구처기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손을 품안에 넣어 두 자루의 단검(短劍)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한 쌍의 단검은 길이나 모양이 완전히 같은 것으로 파란 가죽의 칼집과 금으로 테를 두른 칼날받침, 칼자루는 오목(烏木)으로 만든 것이었다. 도사는 양철심의 비수를 들어 한 자루의 칼자루 위에 <곽정(郭靖)>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 넣고, 다른 한 자루에는 <양강(楊康)>이란 글자를 새겨 넣었다.
양,곽 두 사람은 그가 비수를 놀리는 것이 나는 듯하여 보통 사람이 글씨를 쓰는 것보다 몇 배나 빠른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구처기는 네 개의 글자를 새겨 놓고 웃었다.
[길손이라 뭐 가진 것이 없어 이 칼을 두고 가니 아기들에게 나누어주시오.]
양,곽 두 사람은 멋도 모르고 우선 고맙게 받았다.
두 사람이 단검을 뽑아 보니 한 줄기 차디찬 바람이 쌩 뻗치며 냉기가 오싹 돈다. 양철심은 날카롭기 그지없는 보검이라고 생각했다. 칼날은 마치 종잇장처럼 얇고 칼날 주위에선 파르스름한 빛이 번쩍번쩍하여 마치 안개가 서린 듯했다.
구처기가 비수를 들어 단검에 대니 비수는 소리도 없이 두 동강이 나버렸다. 마치 쇠를 흙처럼 썰고 금과 옥을 자를 수 있는 신기한 보검임에 틀림없었다.
[도사님의 고마운 뜻은 정말 백골 난망이올시다만 너무나 귀중한 물건인 것 같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양 마시오, 이 한 쌍의 단검은 나도 우연히 얻은 것인데 장차 아이들이 자라 나라를 위해 크게 쓸 데가 있을 것이오.]
양,곽 두 사람이 재삼 사양하자 구처기는 벌컥 화를 냈다.
[나는 두 분이 영웅의 후예인 줄 아는데 어째 이리도 째째하오?]
두 사람은 더 사양할 수 없어 절을 하고 단검을 받아 들었다.
[이 단검은 수백 년 된 것이오. 많은 사람이 이 단검으로 죽었고 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르오. 무예를 배운 사람 치고 이 단검에 침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소. 만일 아이들이 무예를 철저히 익히지 않으면 설사 보검을 지닌다 해도 적을 제압하지 못할 것이요, 오히려 몸을 망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오. 두 분은 이 점을 각별히 조심하기 바라오.]
양,곽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10년 뒤 만일 내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이곳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무예를 가르쳤으면 하는데 어떻겠소?]
양,곽 두 사람은 크게 기뻐 연방 허리를 굽혔다.
구처기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꾸욱 들이키더니 문득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양,곽 두 사람이 잡으려 했지만 이미 구처기는 내리는 눈 속으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협객이라 역시 거취도 표연하구먼. 오늘 다행히 만나 무예나 몇 가지 배우려 했더니 역시 인연이 없는 모양이구려.]
[형님,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양철심은 두 자루 단검의 칼자루에 새겨진 <양강>이란 두 글자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만약 우리 둘의 아이가 둘 다 남자라면 결의 형제를 하고 또 둘 다 여자면 역시 자매 결연을 하게 하고....]
[만약 하나가 남자고 하나가 여식이면 혼인을 시키자 이거지?]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고 큰 소리로 웃었다.
포씨가 안에서 나오다 이 얘기를 듣더니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역시 웃는 얼굴이 됐다.
[만약 우리 아이가 사내고 아우의 아이가 여식이라면 이 단검은 두 자루 모두 우리 집 것이 되겠군.]
곽소천이 이렇게 농담을 건네자,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겠어요?]
하며 이번에 포씨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각각 단검 한 자루씩 나누어 가진 후 곽소천은 희희낙락 집으로 돌아갔다.
이날 밤, 양철심은 흥겨운 마음을 이길 수 없어 마구 술을 마신 끝에 취해 잠에 곯아떨어졌다. 포씨는 취한 남편의 잠자리를 보아주고 마당에 나가 닭을 닭장에 몰아 넣고 돌아오다 보니 눈 위에 검은 핏방울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 있었군. 관가 사람들 눈에 띄면 말썽이 될 테니 어서 쓸어 버려야지.]
포씨는 빗자루로 핏방울 얼룩진 눈을 쓸기 시작했다. 핏자국은 뒷마당을 돌아 집 뒤의 수풀 속까지 이어졌다. 눈 위엔 사람이 기어간 흔적까지 보였다. 포씨는 부쩍 의심이 나고 더럭 겁도 났으나 취한 남편을 깨울 수도 없어 굳게 마음먹고 핏자국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 안에는 조그마한 무덤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 무덤 뒤에 검은 물체가 엎어져 있는 게 아닌가?
포씨가 두려운 중에도 더 바싹 다가가 살펴본즉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분명 아까 구처기를 잡으러 왔던 사람 중의 하나가 부상을 입고 예까지 피신해 온 것이 틀림없다. 그때 문득 검은 물체는 몸을 뒤틀며 끙 신음 소리를 냈다. 포씨는 기겁을 하여 달아나려 했지만 두 발이 못으로 박아 놓은 듯 오금이 저려 꼼짝을 못했다. 잠시 후 그 물체는 다시 조용해졌다. 포씨가 용기를 내어 빗자루로 슬쩍 건드리니 역시 가냘픈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第 二 章. 수려한 젊은이 완안열(完顔烈)
포씨는 그 사람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고 자세히 살펴보니 등에 화살이 꽂혀 있는 게 아닌가. 포씨의 처녀 때 이름은 석약(惜弱)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마음이 착하고 어질어 다친 참새나 개구리만 보아도 꼭 약을 발라 주곤 했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석약. 양씨 집에 시집온 뒤에도 이런 천성은 여전하여 뒤 정원은 자연히 새나 짐승들로 가득했다. 또 양씨 집 닭장에는 다른 집과 달리 유난히도 늙은 닭이 많았는데, 이것은 집에서 기르는 닭은 포씨가 한 마리도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양철심이 닭을 잡아먹자고 하면 포씨는 시장에 나가 잡은 닭을 사다 고아 주곤 했다. 이런 포씨인지라 무덤 뒤에 숨은 물체가 다친 사람인 것을 알고 나자 측은한 마음이 문득 솟구쳤다. 비록 좋은 사람이 아닌 것은 알고 있지만 죽어 가는 사람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포씨는 잠시 생각하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 양철심을 깨우려 했다. 그러나 깊이 곯아떨어진 양철심은 꼼짝도 않는다. 포씨는 우선 사람부터 살려 놓고 볼 일이라 생각했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지혈산(止血散)과 금창약(金創藥)을 찾아 들고 손칼과 헝겊 조각을 들고 또 한 손엔 뜨거운 술이 든 주전자를 들고 아까의 무덤으로 되돌아갔다. 그 사람은 꼼짝도 않고 전과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포석약은 그를 부축해 머리를 들게 하고 입에 술을 부어 넣었다. 술이 조금 들어가자 그 사람의 몸엔 점점 혈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포씨는 우선 등에 박힌 화살부터 뽑아 주어야겠다 생각하고 날카로운 손칼로 화살촉이 박힌 부근의 살을 도려냈다. 사내는 신음 소리를 냈으나 포씨는 얼른 화살촉을 뽑아 버렸다. 사내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다시 까무러쳐 버렸다. 화살촉을 뽑을 때 피가 솟구쳐 포씨의 웃옷을 빨갛게 물들였다. 포씨는 당황 속에서도 재빨리 지혈산을 상처에 바르고 헝겊으로 단단히 동였다.
조금 지나자 사내는 조금 깨어나긴 했지만 움직일 기력은 없었다. 포석약은 무거운 사내의 몸을 부축할 수 없어 잠시 생각했다. 마침 헛간에 있는 못 쓰는 문짝 생각이 났다. 포석약은 재빨리 그 문짝을 가져다 사내를 그 위에 누이고 문짝을 잡아당기니 문짝은 눈 위를 썰매처럼 미끄러졌다. 포씨는 사내를 집안으로 끌어들여다 나뭇간에 뉘였다. 포씨도 기진 맥진했는지라 잠시 숨을 돌린 뒤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손과 얼굴을 씻었다.
포석약은 부엌에 남아 있는 고깃국물을 데워 나뭇간으로 들고 갔다. 사내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게 다행스러웠다. 포석약은 사내에게 고깃국물을 반 그릇쯤 먹였다. 그러자 사내는 심한 기침을 시작했다. 포석약이 깜짝 놀라 촛불을 치켜들고 보니 사내의 얼굴은 이목이 준수하고 코가 오뚝한 젊은 미남자가 아닌가.
포석약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어지며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이 바람에 촛물이 두어 방울 사내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 순간 사내가 눈을 떴다.
눈앞에는 연꽃같이 아름답고 두 볼이 붉으며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동자의 여인이 담뿍 동정과 부끄러움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사내 역시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멍하니 있었다.
[좀 어떠신지? 이 국을 마저 드세요.]
그러나 사내는 국을 받아 마실 기력이 없었다. 포석약은 얼른 국 사발을 사내의 입에 대어 주었다. 사내는 국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다 마시고 나자 눈에 생기가 살아났다. 사내는 무한히 감사한 표정으로 포석약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포석약은 조금 어색해져 고개를 돌렸다. 얼른 볏짚 몇 단을 집어다 사내의 몸에 덮어 주곤 곧 방으로 돌아왔다.
포석약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녘에 조금 눈을 붙였다. 꿈속에서 남편이, 창으로 나뭇간에 있는 그 사람을 대번에 찔러 죽이는가 하면 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자기를 향해 달려드는데, 자기가 선 자리는 천야 만야한 절벽 위이기도 했다. 이런 사나운 꿈으로 놀라 깨기를 몇 차례. 어느덧 날이 밝아 눈을 떠 보니 남편은 벌써 일어나 숫돌에 창을 갈고 있었다. 포씨는 문득 꿈 생각이 나 허둥지둥 나뭇간에 달려가 보니 문은 열린 채 어젯밤의 사내는 간 곳이 없다.
후원으로 돌아가보니 문의 빗장이 열려 있고 눈 위에 엎어지고 거꾸러진 사람의 흔적만 있었다. 포석약은 눈 위에 남은 흔적만 한동안 바라보다 찬 바람이 불어오자 갑자기 허리가 시큰, 뼈마디가 쑤시는 것 같아 앞마당으로 돌아오니 남편은 벌써 흰죽을 다 끓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내 죽 끓이는 솜씨가 어때?]
포석약은 자기가 아기를 가진 다음부터 남편이 알뜰히 자기를 위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포씨는 남편이 떠다 주는 흰죽을 행복한 마음으로 받아먹었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남편에게 어젯밤에 사내를 구해 준 얘길 하면 어떻게 나올까 생각했다. 남편은 틀림없이 사내의 뒤를 쫓아가 죽이고 올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그 사내를 구해준 것은 몽당 허사가 되고 마는 게 아닌가. 결국 어젯밤의 일은 남편에겐 없었던 것으로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포씨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 끝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어느덧 섣달이 지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봄이 왔다. 포석약은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피곤해져 사내를 구래 준 일 같은 건 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런 어느 봄날.... 양씨 부부는 곽씨네 집에 가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포석약은 잠결에 남편이 일어나 앉는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어디선가 멀리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어지러웠다. 서쪽에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동쪽에서도 들려오고 이어, 남쪽, 북쪽에서도 말발굽 소리가 어지러웠다.
포석약은 놀라 몸을 일으키며 남편에게 물었다.
[웬일이죠? 사방에서 인마(人馬)소리가 어지러우니?]
양철심은 대답 없이 황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인마 소리는 더욱 가까이 들리고 동네 개들이 짖어 대기 시작했다.
[우리가 완전히 포위 당한 모양이오!]
[무슨 일로요?]
양철심은 구처기가 주고 간 단검을 부인에게 넘겨주었다.
[위급한 일이 생기만 쓰시오.]
양철심이 창문을 슬쩍 들치고 바라다보니 여러 무리의 병마(兵馬)가 겹겹으로 촌락을 둘러싸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병졸들은 횃불을 밝혀 들고, 7,8명의 무장(武將)들이 말에 탄 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역적을 잡아라. 도망치지 못하도록 해라.]
여러 병졸들이 소리를 질렀다. 이때였다. 문득 한 명의 무장이 앞으로 나서며 크게 소리 질렀다.
[역적 곽소천, 양철심은 듣거라. 어서 나와 오랏줄을 받지 못할까?]
이 말을 듣고 양철심과 포석약은 깜짝 놀랐다.
[관가에서 무슨 일로 양민을 해치려 하나. 어쨌든 우선 밖으로 나갑시다. 당황하지 마오. 설사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온다 하더라도 이 창 한 자루면 이쯤의 포위망은 뚫고 나갈 수 있소.]
양철심은 영웅의 후손답게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며 벽에 걸려 있는 활통을 내려 메고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짐이나 챙기고요.]
[무슨 짐을 챙겨? 아무것도 필요 없소.]
포석약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럼 이 집은 어떻게 해요?]
[살기만 하면 되오. 다른 곳에 가서 또 다시 시작하지 뭘.]
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밖에서는 병졸들이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양철심은 화가 치밀어 문을 여고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바로 양철심이다. 네놈들, 왜 이러느냐?]
송나라 병사들이 깜짝 놀라 달아났다. 불빛 속에 한 명의 무관(武官)이 말을 달려 앞으로 나섰다.
[네놈이 양철심이냐? 우리와 같이 관가로 가자. 이놈을 묶어라!]
4,5명의 병정들이 한꺼번에 대들자 양철심은 창을 옆으로 돌려 오룡패미(烏龍擺尾)의 솜씨로 단번에 세 놈을 거꾸러뜨리고, 다시 춘뢰진노(春雷震怒)의 솜씨로 창자루에 한 놈을 찍어 병정들 쪽으로 던지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사람을 잡아가려거든 우선 죄명이나 밝혀라!]
[대담한 놈이로구나. 감히 대들다니!]
한 무관이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양철심의 무술에 겁을 먹고 대들지는 못했다.
[얌전하게 나하고 같이 관가로 가자. 앙탈하면 공연히 죄만 더 무거워진다. 자 여기 공문이 있다.]
[좀 보여다우!]
[또 그 곽가란 놈은 어디 있느냐?]
곽소천은 화살을 활에 메기며 창 앞에 서 있다가 나섰다.
[곽소천은 여기 계시다.]
화살을 겨냥하면서 나서자 무관은 머리끝이 쭈뼛하고 등골이 싸늘해졌다.
[그 활을 치워라. 내가 공문을 읽어 주마.]
[빨리 읽어!]
활줄을 더욱 당기며 곽소천이 재촉했다. 그 무관은 어쩔 수 없이 공문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임안부(臨安府) 우가촌(牛家村) 촌민 곽소천,양철심 두 사람은 역적과 야합하여 대역을 도모했으니, 잡아 법으로 엄히 다스릴지라.]
[이건 어느 관가의 공문이냐?]
곽소천이 묻자 그 무관이 대답했다.
[한승상(韓承相)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이다.]
양,곽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이렇게 대단하기에 한탁주(韓托鑄) 직접 명령을 내렸을까? 설마 구도장(丘道長)이 관가 사람들을 살해한 일이 탄로난 것은 아니겠지?]
[그래 도대체 무슨 일로 우리가 역적이랍디까?]
곽소천이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오. 잡아가기만 하면 우리 일은 끝나오. 당신들이 관가에 가서 직접 시비를 가리시오.]
한 무관이 대답하자 이번에는 양철심이 나섰다.
[한승상이라는 자가 무고한 양민을 괴롭힌다는 것은 삼척 동자도 잘 아는데, 그래 우리가 속을 것 같소?]
[항명하면 죄가 더 무거워지오.]
대장인 듯한 자가 또 한 번 겁을 주었다. 양철심이 자기의 처를 향해 속삭였다.
[여보, 빨리 옷 하나라도 더 껴입어요. 내 저놈의 말을 뺏아 줄 테니. 저 무관 놈을 죽이면 병졸들이야 자연 흩어질걸.]
화살을 당기는 소리와 함께 그 무관이 아얐! 소리를 지르며 말에서 떨어지고 병정들이 일제히 공격해 왔다.
양철심이 대갈 일성, 철창을 휘두를 때마다 관병들이 분분히 쓰러졌다. 양철심은 백마를 타고 있는 무관의 옆으로 뛰어내리며 한 창에 찔러 그 무관의 다리에 꽂았나 싶더니 양철심이 창을 다시 번쩍 드니 무관은 물구나무를 선 채 말 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양철심이 창자루를 땅 위에 꽂으며 그 힘을 이용하여 몸을 날려 말 등에 올라타고 말의 배를 차자 말은 큰 소리를 지르며 집 쪽을 향해 달렷다. 양철심은 문 옆에 서 있던 송나라 군사를 한 창에 찔러 쓰러뜨리고 몸을 굽혀 포석약을 안아 말 위에 태우고는 소리 질렀다.
[형님, 제 뒤를 따라오시오.]
곽소천은 갈래진 창을 휘둘러 아내 이평(李萍)을 보호하면서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관병들은 이 두 사람의 무예가 뛰어나 막을 수 없자 활을 소아대기 시작했다. 양철심은 말을 달려 이평의 옆으로 다가갔다.
[형수님, 빨리 말을 타세요.]
하고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탈 수가 없네요.]
양철심은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이평의 허리를 덥석 껴안아 말 등에 올려 태웠다. 두 의형제는 말 뒤를 따라 싸우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나가다 보니 문득 앞에서 큰 소리가 나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왔다. 양,곽 두 사람이 큰일이로구나 생각하며 말머리를 돌리려 하는데 벌써 화살이 쉭쉭 날아오기 시작했다. 말이 화살을 맞고 땅에 쓰러지자 두 사람의 여인이 동시에 떨어지고 말았다.
[형님, 아주머니들을 보살펴 주십시요. 제가 다시 말을 뺏아 오겠습니다.]
양철심은 말을 마치자 창을 비껴 들고 다시 병졸들의 포위망 속을 뚫고 들어가려 했다. 곽소천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암담하기만 했다. 남자 두 명만 달아나기로 한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아녀자를 보살펴야 하는 입장이니 난처했다. 또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니 헛되이 죽느니 차라리 임안부(臨安府)에 가서 해명을 하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이봐요 아우, 사람을 죽이지 말아요. 우리 그 사람들을 따라가 보기로 합시다.]
병졸들을 인솔하는 군관이 활 쏘기를 멈추고 포위하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무기를 버리면 살려 주마.]
[형님, 녀석들의 잔꾀에 속으면 안 됩니다.]
곽소천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갈래진 쌍창을 땅 위에 던졌다. 양철심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긴 탄식을 하면서 철창과 활을 땅에 버리고 말았다. 양,곽 두 사람이 무기를 버리자 곧 10여 개의 긴 창끝이 네 사람을 향해 찔러 오고 8명의 병사들이 다가와 오랏줄로 손을 뒤로 돌려 묶었다.
양철심은 비웃음을 입가에 띤 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군관이 말채찍을 번쩍 들어 양철심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대담한 역적놈.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양철심의 이마에서부터 고개까지 기다란 핏발이 섰다.
[좋다 이놈. 네놈의 이름은 무어냐?]
양철심이 이렇게 묻자 군관은 노기 충천, 채찍을 마구 날렸다.
[건방진 놈. 이 나으리의 성은 단(段)가요 이름은 천덕(天德)이다. 하늘에서 덕을 내리신다는 바로 그 천덕이다. 알겠느냐? 네 놈이 염라대왕한테 가거든 아뢰어라.]
양철심이 조금도 굽힘 없이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그를 응시하자 단천덕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이 나으리의 이마에 흉터가 있고 얼굴에도 파란 흠집이 있는걸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이놈!]
그러면서 또다시 채찍으로 후려갈겼다. 포석약은 남편이 얻어맞고 있는 것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양철심이 단천덕의 얼굴을 향해 카악 가래침을 뱉었다. 단천덕은 크게 노하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네놈부터 처치해 버려야겠다!]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어 내려칠 때 양철심이 살짝 몸을 옆으로 피하니 옆에 섰던 두 명의 송나라 병사가 긴 창을 들어 그를 양쪽에서 막고 단천덕이 다시 한 번 칼을 내리치는데 양철심은 피할 수도 없어 몸을 뒤로 움츠렸다.
단천덕의 무공도 보통의 솜씨는 넘었다. 두 번이나 실패하자 이번에는 앞으로 나서며 또 내리쳤다. 그가 쓰는 칼은 톱니처럼 만들어진 칼로 이번의 공격은 바로 양철심의 왼쪽 어깨에 떨어져 깊은 상처를 냈다.
곽소천은 자기 동생의 생명이 경각에 놓여 있음을 보자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발을 날려 단천덕의 얼굴을 차 버렸다. 단천덕이 놀라 칼을 거두고 막으려 했다.
비록 두 팔은 묶여 있었지만 곽소천이 발을 쓰는 솜씨는 대단한 것이어서 몸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왼발을 움츠리며 오른발로 단천덕의 허리를 차버렸다. 단천덕이 화를 누를 길 없어 <죽이라>고 소리치자 많은 병정들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곽소천이 재빨리 두 놈을 차 버리기는 했지만 두 팔이 묶인 놈이라 아무래도 몸놀림이 부자유스러웠다. 그 동안 뒤로 대든 단천덕의 칼에 곽소천의 오른쪽 어깨가 떨어져 나갔다.
양철심은 의형이 부상을 입고 땅에 쓰러지는 순간 힘이 불끈 솟아나 큰 소리를 지르자 묶여 있던 줄이 끊겨 단 한 주먹에 병사 하나를 때려 뉘고 긴 창을 뺏어 양가창법(楊家槍法)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 마리의 호랑이가 미쳐 날뛰듯, 단천덕은 그 기세에 눌려 슬그머니 물러서고 말았다. 양철심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닥치는 대로 해치우자 병졸들은 놀라 맞서지도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양철심은 쫓으려 하지 않고 의형을 일으켜 세웠다. 곽소천은 이를 악물고 재촉했다.
[아우, 나는 놔두고 빨리 달아나오!]
[말을 뺏어 올 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곽소천이 정신을 잃고 졸도해 버리자 양철심은 옷을 벗어 그의 상처를 싸 주려고 했지만 상처가 어찌나 크고 긴지 다 싸줄 수가 없었다. 다시 곽소천이 힘없이 눈을 떴다.
[아우님, 아주머니와 우리 집 사람이나 구해 주오, 나....나는 이제 틀렸소....]
하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양철심은 친형제보다 더 깊은 정이 들었던 그가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을 보자 왈칵 슬픔이 솟구쳐 일어났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자기 아내와 아주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형님! 내 이 원수는 꼭 갚고야 말겠소!]
창을 흔들며 관병 속으로 뛰어들었다.
관병들은 단천덕의 명령에 따라 비오듯 화살을 쏘아 댔다. 양철심이 털끝만큼도 개의함이 없이 질풍같이 돌격해 들어가자 무관 한 명이 큰칼을 휘두르며 맞서 왔다. 양철심은 몸을 굽혀 재빨리 말의 배 밑으로 들어가고 무관의 칼은 허공을 쳤다.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어느새 양철심의 창은 그 무관의 등을 찔렀다. 양철심이 말 위에서 시체를 끌어내리고 올라타자 관병들이 다시 분분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가 한동안 관병들 뒤를 쫓다 보니 무관 한 명이 한 명의 여인을 끼고 말을 달리고 있지 않은가. 양철심은 몸을 날려 한 주먹에 사병 하나를 때려 누이고 활을 뺏어 그 무관을 향해 화살을 당기니 쉭 소리와 함께 말이 무릎을 꿇자 말 위에 탔던 두 사람이 굴러 떨어졌다. 양철심은 다시 활을 당겨 무관을 쏴 죽이고 달려가 보니 그 여자는 바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였다.
포석약은 남편을 발견하자 놀람과 기쁨에 남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형수님은 어찌되었소?]
[저 앞에 적병이 잡아갔어요.]
[여기서 좀 기다리오. 내가 구해 올 테니.]
[뒤에서도 적병이 쫓아오고 있는데요.]
양철심이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한 떼의 관병들이 손에 횃불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형님은 이미 돌아가셨소. 내 어쨌든 형수님을 구해 곽씨집 혈통을 이어야 하오. 하늘이 만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당신과 나는 장래 또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포석약은 남편의 목을 껴안은 채 죽어도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영원히 떨어질 수 없어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함께 살자고 늘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포석약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양철심은 심기가 어수선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시 아내에게 입을 맞추며 어루만지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아내를 뿌리치고 일어나 앞으로 내달렸다. 수십 보나 뛰어가 뒤돌아보니 아내는 흙 위에서 엎드린 채 슬피 울고 있고 관병들이 벌써 아내 곁에 거의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양철심은 옷소매로 눈물과 땀을 훔쳤다. 어쨌든 형수를 구출하여, 형님의 원수를 갚고 또 그 대를 이어 주는 것만이 오직 자기가 할 일이라는 일념뿐이었다. 다시 또 한참이나 말 한 필을 뺏어 타고 가다가 한 명의 관병을 붙잡고 물으니 형수 이씨는 앞에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가 질풍처럼 달리는데 갑자기 길 옆 수풀 속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말머리를 급히 돌려 창끝으로 수풀 속을 헤쳐보니 2명의 병사가 이씨를 붙들고 욕을 보이려는 참이었다. 양철심은 순식간에 두 놈을 해치우고 말았다. 이씨는 머리가 흩어지고 온몸은 먼지 투성이었다. 양철심은 그를 부축하여 말 위에 태우고 아내와 헤어졌던 곳에 와보니 사방은 고요할 뿐 아내의 그림자는 흔적조차 없었다. 날이 희미하게 밝기 시작하여 살펴보니 땅에는 말발굽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사람을 질질 끌고 간 자국이 나 있었다.
양철심이 말에 뛰어올라 두 발로 말 배를 사정없이 차자 말은 힘차게 앞으로 내달렸다. 이때 갑자기 길 옆에서 호각 소리가 나더니 검은 옷을 입은 10여 명의 무사들이 대들고 앞장을 선 자가 이리의 이빨 같은 낭아봉을 높이 치켜들고 양철심의 머리를 내리쳤다. 낭아봉은 워낙 무거워 힘이 센 금(金)나라 병사들이 즐겨 쓰는 무기다. 양철심은 낭아봉을 칼 휘두르듯 쓰는 괴한과 수합 싸웠지만 마음속엔 의심만 짙어 갔다.
'저 사람의 솜씨로 보아 틀림없는 금(金)나라 장수일 텐데 어째서 여기 나타났을까?'
양철심은 다시 또 수합을 겨루다 큰 소리 한 번에 녀석을 창끝으로 찔러 말 아래로 떨어뜨리자 남은 졸개들은 놀라 달아났다. 양철심이 고개를 돌려 말에 탄 형수 이씨를 바라보니 다행스럽게 아무 부상도 입지 않았다.
이때였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서 화살이 하나 날아와 피할 겨를도 없이 양철심의 등에 꽂히고 말았다. 이씨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주버님, 이게 웬 일이오?]
양철심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아무래도 내가 오늘 여기서 죽고 마는가보다. 죽기 전에 여기 있는 적병을 모조리 한 놈도 남기지 않고 해치워 형수님이나 달아나시도록 해야겠구나.'
생각하고 창을 치켜 들었지만 상처가 아프다 못해 폐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이 화살 좀 뽑아 주세요!]
그러나 이씨는 겁이 나서 벌벌 떨기만 할 뿐. 하는 수 없이 양철심은 고개를 숙이고 말 안장에 엎드린 채 왼손을 등뒤로 돌려 화살대를 잡고 힘껏 잡아당기니 화살은 뽑혔다. 화살 끝 세 치 가량은 피에 젖어 있었고 화살대는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깃털이 보통 것과 다르고 화살 가운데 완안열(完顔烈)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완안은 금나라 황족의 성이다. 금나라의 황제로부터 군대를 통솔하는 대장에 이르기까지 거의가 다 완안씨가 아니던가.
[과연 놈들이 외국 오랑캐와 야합하여 백성을 못 살게 굴고 있군요.]
구리로 된 화살을 이씨에게 건네주며 양철심은 이렇게 말했다.
[이 이름을 기억해 두셨다가 이 다음 아들이 태어나거든 원수나 갚아 달라고 해주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창을 휘두르며 미친 듯 숲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등뒤에서 솟구치는 피로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더 버티지 못하고 땅 위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한편 포석약은 남편이 자기를 떠나 버리자 마음은 칼로 에어내는 듯했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관병들이 뒤쫓아와 한 필의 말에 그녀를 태워 버렸다.
[그 두 놈의 얼빠진 역적 놈들 때문에 적지 않은 부하들만 잃고 말았는걸.]
한 무관이 말문을 열자 또 다른 무관이 말을 받았다.
[이제 일이 어지간히 끝난 것 같소. 종(鍾)형, 이번에 고생했으니 아무래도 삼사십 냥의 상금이 내려지지 않겠소?]
[모를 일이지. 또 웃놈들이 좀 떼어먹고 주지나 않을는지.]
그는 고개를 돌려 호각을 부는 병졸을 바라다보았다.
[부대를 거두라!]
포석약은 울음을 삼키며 남편을 걱정하고 있었다. 날은 벌써 활짝 밝아 길에는 행인들의 모습이 띄엄띄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관병의 대오를 보자 멀찌감치 피해서 길을 갔다. 포석약이 처음에는 관병들이 자기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을까 겁을 먹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상할 정도로 정중하게 대하는 것을 보자 그런 대로 안심이 되었다. 몇 리를 못 가 돌연 앞 쪽에서 북소리가 울리더니 검은 옷을 입은 10여 명의 장사들이 손에 병기를 든 채 길 양쪽에서 대들었다. 그 중 앞장선 사람이 나섰다.
[염치도 모르는 관병들이 양민을 괴롭히는구나. 모두들 말에서 내려 명령을 듣거라.]
부대를 인솔하던 무관이 노해 소리 질렀다.
[어디서 굴러먹던 비적들이 감히 경기(京畿) 지방에서 소란을 피우고 야단들이냐? 썩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검은 옷을 입은 괴한들이 일제히 관병을 향해 대들자 순식간에 혼전이 벌어졌다. 관병들이 수적으로는 많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괴한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어서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포석약은 마음속으로 슬그머니 기뻐했다.
'혹시 남편의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닐까?'
혼전 중에 화살 하나가 날아와 포석약이 타고 있는 말의 엉덩이를 맞히자 말은 벌에 쏘인 듯 북쪽을 향해 질풍처럼 달렸다. 포석약은 깜짝 놀라 양 팔로 말갈기를 꽉 잡았다. 몇 리나 달리고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 이때 뒤쪽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검은 말 한 필이 자기 옆을 스쳐 지나갔다.
말 위에 탄 사람이 손에 든 긴 줄을 허공을 향해 몇 바퀴 빙빙 돌리자 휙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밧줄은 포석약이 탄 말의 목에 걸리고 두 필의 말은 어깨를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 말에 탄 사람이 줄을 잡아당기자 달리던 두 필의 말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몇십 보를 더 달리고 나서 괴한이 타고 있던 검은 말이 멈추자 포석약이 타고 있던 말도 앞 발을 하늘로 향해 들고 투레질을 하더니 멈춰 섰다.
포석약은 밤새 놀라고 또 상심이 되었다가 이제는 기진맥진하고 두 팔에 힘이 빠져 말에서 굴러 덜어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포석약이 번쩍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파란 꽃무늬가 있는 장막이 보였다. 웬일인가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자기는 침대 위에 따뜻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니 침대 앞 탁자에는 등잔불이 켜져 있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남자는 포석약이 깨어나자 몸을 일으켜 장막을 걷었다.
[깨어나셨군요?]
조용히 묻는 남자의 모습은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다.
그 사람은 손을 뻗어 포석약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이 많이 나십니다. 밖에 의원 있거든 들라 해라.]
포석약은 몽롱한 가운데 다시 정신을 잃고 잠에 떨어졌다. 얼마 동안 시간이 흘렀는지, 포석약은 의원이 맥을 짚고, 또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약을 먹여 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포석약이 몽롱한 가운데서도 깜짝 놀라 일어나,
[여보, 여보!]
남편을 찾자 누군가 한 남자가 가볍게 자기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이듯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포석약이 다시 정신이 들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대낮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앉으니 한 사람이 다가와 장막밖에 섰다.
[죽 좀 드시지요.]
포석약이 신음 소리를 내니 그 사람은 장막을 걷었다.
밝은 햇빛 아래 그 사람의 얼굴을 보자 포석약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사람, 이목이 그림 같이 수려하고 미소를 머금은 얼굴. 바로 몇 달 전 눈 속에 스러져 있는 것을 구해 주었던 그 미모의 청년이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남편은 어찌 되었나요?]
남자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말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제가 친구들과 함께 마침 이곳을 지나다 관병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보고 공교롭게도 은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했다.
[지금 관병들이 우리를 쫓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잠시 농가를 빌어 쉬고 있는 중인데 외람 되게도 제가 은인의 남편이라고 속일 테니 절대로 탄로가 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포석약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남편은 어찌되었나요?]
[지금 몸이 쇠약하시니 가만히 계십시오. 좀 쉬시고 몸이 회복되면 제가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포석약은 그의 말을 듣고 걱정이 됐다. 아무래도 남편 양철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그....그이가.... 어찌 되었나요?]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급해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몸을 돌보셔야 할 때입니다.]
[제 남편이 죽었나요?]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병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포석약은 이 말을 듣자 눈앞이 캄캄, 다시 정신을 잃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 사람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포석약은 계속 흐느꼈다.
[어떻게 죽었습니까?]
[부군의 나이는 이십여 세. 키가 크고 어깨가 우람하며 손에는 긴 창을 들고 있습니까?]
[네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내가 때마침 세 명의 관병과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보니 한 명의 관병이 슬그머니 그의 등뒤로 돌아가 한 창에 찔러 버리고 말았습니다.]
포석약은 남편에 생각이 미치자 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날 온종일 포석약은 물 한 모금, 죽 한 술 뜨지 않고 남편을 따라 굶어 죽으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문제의 젊은이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종일 옆에 붙어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려고 했다. 포석약도 자기 태도가 지나치다고 생각되었다.
[존함을 여쭈어 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제가 곤궁에 빠진 것을 알고 구해 주셨나요?]
그 사람은 잠시 머뭇거렸다.
[제 성은 완안(完顔)이요. 이름은 열(烈)이라 합니다. 부인과 이렇게 만난 것도 천생 연분인가 합니다.]
포석약은 <천생 연분>이라는 말을 듣자 얼굴을 붉히고 돌아누워 버렸다.
그러나 마음속에 왈칵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원래 관병들과 한 패가 아닌가요?]
[아....아닙니다.]
완안열은 당황해 했다.
[당신이 관병들과 함께 도사를 잡으러 왔다가 부상을 입지 않았나요?]
[그날 저는 정말 재수가 없었죠. 나는 임안부로 가려고 그 마을을 지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그만.... 만약 부인이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귀신도 모르게 죽고 말았을 겁니다. 그날 그래 무슨 도사 때문에 그랬나요?]
[아, 길을 가다가 그런 일을 당하셨군요. 저는 도사를 잡으러 온 일행인 줄 알고 구해 드리지 말까 했었는데....]
그러면서 포석약은 그날 관병들이 구처기(丘處機)를 어떻게 잡으려 했고, 어찌 어찌 하다가 참패를 당한 경과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완안열은 그녀가 말하는 동안 멍하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넋을 잃고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포석약은 뒤에야 그의 그러한 태도를 눈치챘다.
[아니 도대체 제 말씀을 듣고 계신 거예요?]
[예 예, 나는 지금 우리가 어디로 달아나야 관병들에게 잡히지 않을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포석약은 눈물을 흘렸다.
[난... 남편이 저 세상으로 가 버렸으니 나 혼자 살아 무얼 하겠습니까? 혼자 가세요.]
완안열은 정색을 했다.
[부인! 남편께서 관병들에게 살해되셨는데 원수 갚을 일은 생각도 않고 죽을 길만 찾으신다면 남편이 지하에서 눈을 감으실 수 있겠습니까?]
[약하디 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어떻게 원수를 갚는단 말입니까?]
[제가 재주는 없사오나 부인을 도와 원수를 갚아 드리겠습니다만, 원수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나요?]
[관병을 인솔하던 무장은 단천덕(段天德), 얼굴에 파란 흉터가 있는 사람예요.]
[이름을 알고 있으시니,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겠습니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흰죽 한 그릇과 소금에 절인 계란을 가지고 돌아왔다.
[몸을 돌보시지 않고 어찌 원수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포석약은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되어 죽 그릇을 받아 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포석약은 옷을 단정히 입고 침대에서 내려와 머리에 빗질을 하고 한 조각의 흰 천을 찾아 흰 꽃을 만들어 머리에 꽂고 남편의 소복을 대신했다. 이때 완안열이 들어와,
[길에서 관병들이 사라졌으니, 우리도 이제 떠납시다.]
포석약이 그를 따라 집 밖으로 나오니 완안열은 속 주머니에서 몇 닢의 돈을 건네 집주인에게 주자 주인은 말 두 필을 끌어내었다. 포석약이 탔던 말은 화살에 맞았었는데 완안열이 상처를 치료해 준 것이다.
[어디로 갑니까?]
완안열이 눈짓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더 묻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부축, 말에 올려 태우고 2필의 말은 가지런히 북쪽을 향해 떠났다. 10여 리를 지나자 포석약이 물었다.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시나요?]
[우선 조용한 지방을 찾아 지내면서 혼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다 당신 남편의 시체를 찾아 안장하고 서서히 그 단천덕이란 자를 찾아 원수를 갚읍시다.]
포석약은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이라 자기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는 완안열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완안 상공(相公), 나는 어떻게 이 고마운 신세를 갚아야 하나요?]
[내 생명은 부인께서 구해 주신 것이니 내 일생을 부인께 바쳐 분골쇄신함이 마땅히 않겠습니까?]
두 사람은 하루종일 달려 저녁 때 장안진(長安鎭)에 닿아 여인숙에 들었다. 포석약은 마음이 불안하여 슬그머니 구처기가 주고 간 단검(短劍)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결심했다.
(만일 저 사람이 예의 없이 굴면 그땐 이 단검으로 자살할 수밖에 없다.)
완안열은 여인숙의 심부름꾼을 불러 두 다발의 볏집을 가져오라고 한 뒤, 그 심부름이 물러가자 방문을 닫아걸고 볏짚을 방바닥에 깔고 누워 포석약에게 잘 자란 인사를 한 뒤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포석약의 마음은 계속 두근거리기만 했다. 문득 생각이 죽은 남편에 미치자 한숨만 쉴 뿐, 촛불도 끄지 않고 포석약은 단검을 손에 꼭 쥔 채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第 三 章. 모여드는 괴한들
다음날 아침, 포석약이 일어났을 때 완안열은 벌써 일어나 마구를 챙겨 놓고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 놓았다. 밥상에는 닭고기 조림, 돼지고기, 순대, 구운 생선과 참중나무순을 넣고 끓인 향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죽 한 사발이 놓여 있었다.
밥을 다 먹자 여인숙의 하인이 보따리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이때 완안열은 밖에 나가고 없었다.
[이게 뭐에요?]
[상공(相公)이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 사오신 옷입니다. 옷을 갈아입고 길을 떠나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포석약이 보자기를 끌러 보니 그것은 소복 단장할 하얀 상복이었다.
'젊은 남자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세심하고 빈 틈이 없담.'
새 옷을 갈아입으니 정신까지 산뜻해지는 듯했다.
두 사람이 말을 타고 가다가 저녁나절 협석진(峽石鎭)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앞에서 처참한 비명이 들렸다. 포석약은 놀란 새가슴이 되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했다.
[무서워할 것 없소. 우리 건너가 구경이나 합시다.]
완안열이 웃으며 말했다. 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5명의 병사들이 손에 긴 칼을 들고 노인과 장정, 그리고 젊은 여인의 길을 막고 있었다. 그 중 2명의 병사가 노인의 보따리를 뒤져 돈을 자기들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다.
다른 세 놈이 젊은 여자의 가슴을 만지며 희롱하니 여자는 울며 소리 질렀다.
[도적 같은 관병들이 또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고 있군요. 자 우리 빨리 가요.]
포석약이 서두르자 완안열은 웃고만 있다. 이때 그 무리 중의 한 녀석이 포석약과 완안열을 보고는 소리 질렀다.
[무얼 하는 연놈들이야? 게 섰거라!]
완안열은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녀석 앞으로 나섰다.
[네놈들은 누구의 부하들이냐? 내 앞에서 썩 꺼져 버려라!]
송나라 병사들은 외적과의 싸움에선 늘 지기만 하면서도 백성에 대한 횡포는 말이 아니어서 노략질과 부녀자 간음 등에는 누구에게 뒤떨어질세라 날뛰는 판이었다. 그들은 완안열이 혼자요 포석약이 또 보기 드문 미인이라 마침 잘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중 한 녀석이 휘파람을 불자 각기 병기를 들고 대들었다.
포석약이 큰일났구나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쉭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중 한 명이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완안열의 손에는 금빛 찬란한 활이 들려 있고 그가 화살을 당길 때마다 한 놈 한 놈 쓰러져 네 놈이 계속 쓰러졌다. 마지막 남은 한 녀석이 사태가 불리함을 알고 몸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완안열은 빙그레 웃으며 활에 화살을 재우면서도 쏘지 않았다. 그가 5, 60보쯤 달아났을 때 완안열은 고개를 돌려 포석약을 보며 웃었다.
[저놈이 세 발짝만 더 가거든 놈의 목을 맞힐 테니 보시오.]
그놈은 죽어라 달리기만 하는데 화살이 시위를 떠나더니 유성처럼 날아 놈의 목 뒤로 꽂혔다.
[정말 활을 잘 쏘시네요!]
포석약이 칭찬하자 완안열은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렸다. 다섯 명의 병사들 몸에 꽂힌 화살을 뽑아 활통에 다시 챙기며 말에 올라 길을 떠나려고 했다. 이때 돌연 길 왼쪽에서 관병 한 떼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포석약은 또 간담이 싸늘해졌다.
[아이쿠 큰일났구나!]
완안열이 채찍을 들어 말 엉덩이를 후려치자 두 필의 말은 달리고, 뒤에 오던 관병들은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을 보자 소리를 질렀다.
[저놈들을 잡아라!]
말을 달려 쫓기 시작했다.
포석약이 한참 달리다 뒤를 돌아보고 혼비백산했다. 뒤를 쫓는 관병은 줄잡아도 1천여 명. 투구와 철갑으로 무장한 폼이 관병 가운데서도 정예인 듯한데 완안열의 활 솜씨가 제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혼자서야 어찌 당해 낼 수 있으랴. 포석약이 타고 있는 말은 며칠 전 화살을 맞은 일이 있었다.
무리하게 달린 탓으로 상처가 터져 선혈이 흐르며 점점 속도가 느려지는 데 관병들은 바짝 뒤를 쫓아왔다. 완안열이 이를 보고 포석약의 말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팔을 뻗어 포석약을 자기 말에 태우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10여 기의 말이 돌연 지름길로 달려와 길을 막았다. 완안열은 길이 막힌 것을 보자 어쩔 수 없이 말을 멈췄다. 포석약은 놀라는데 완안열은 오히려 태연하다. 한 명의 무관이 손에 큰 칼을 들고 말을 달려 앞으로 나섰다.
[말에서 내려 오랏줄을 받지 않고 무얼 꾸물거리느냐?]
[너희들은 한승상(韓承相)의 친병들이냐?]
완안열이 웃으며 묻자 무관은 어이가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네가 나를 몰라보겠거든, 이 편지를 봐라.]
그 무관이 눈짓을 하니 병사 한 명이 와 편지를 받아 가고 무관이 펼쳐 보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
[소관(小官)이 대인(大人)을 못 알아 뵈었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하오나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소서.]
말을 하면서도 편지를 머리 위로 치켜들며 황송해 어쩔 줄 몰라했다. 포석약은 이번만은 꼼짝없이 죽었구나 했는데 무관이 완안열에 대해 쩔쩔매는 꼴을 보고 이상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완안열이 편지를 되돌려 받았다.
[네 부하들의 군기가 말이 아니구나.]
[소관 돌아가 엄한 벌을 내리겠나이다.]
[우리가 지금 말 한 필이 부족하구나.]
그 무관은 급히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끌어냈다.
[부인께서는 소관의 이 말을 타십시오.]
포석약은 자기를 부인이라 부르는 말을 듣자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지고, 완안열은 싱글벙글, 고개를 끄덕끄덕, 말고삐를 받아 쥐었다.
[돌아가거든 한승상께 인사 올리거라. 내 다른 일이 있어 인사하지 못한다고.]
[네, 네, 잘 알겠나이다.]
무관은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완안열은 더 거들떠보지 않고 포석약을 부축하여 말에 태우고 북쪽을 향해 떠났다. 수십 보를 가다가 포석약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그 무관은 군사를 길 양 옆에 세운 채 공손히 배웅을 하고 있었다. 포석약이 의심스러워 물어 보려 하니 완안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탁주(韓托鑄)도 나를 보면 무서워하는데 제깐놈의 무관이 나를 어쩔 테야?]
[그럼 내 대신 원수를 갚기는 아주 쉽겠군요.]
[그건 좀 다릅니다. 지금 우리의 행적이 벌써 드러났으나 관병 놈들이 준비를 했을게고, 지금 가서 원수를 갚으려 하다가는 일만 망치고 오히려 우리가 개죽음을 당하기 쉽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완안열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부인, 저를 믿으시겠습니까?]
포석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선 북쪽으로 가서 사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내려와 원수를 갚도록 합시다. 부군의 원수는 제가 꼭 갚아 드리고야 말겠습니다.]
포석약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죽고 집안은 망해 버린 데다 친척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약한 여자의 몸으로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 사람은 친척도 아니요 친구도 아닌데 어떻게 젊은 남자와 동행한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앞일이 막막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제 생각이 마땅치 않으시거든 다른 분부라도 내리세요. 무슨 일이든지 부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포석약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알아서 해 주세요.]
[부인의 은혜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습니다. 부인······.]
[앞으론 그런 말 다시 하지 마세요.]
[네! 그러지요.]
두 사람은 길을 재촉했다. 뒤서거니 앞서거니 어떤 때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면서 때는 바야흐로 강남에 봄빛이 무르익는 계절, 길가 수양버들은 파릇파릇 새잎이 돋아나고, 꽃 향기는 사람을 취하게 만들었다. 완안열은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포석약은 아직까지 이렇게 잘생기고 학식이 풍부하며 얘기를 재미있게 하는 사람을 만난 일이 없었다.
3일째 되던 날 점심때 그들은 가흥(嘉興)에 도착했다. 이곳은 비단과 쌀의 집산지로서 예로부터 번화한 곳이었는데 송나라가 남으로 내려온 뒤 서울과 멀지 않은 탓으로 더욱 번창해진 곳이다.
[여인숙을 찾아 쉬기로 합시다.]
완안열이 쉬어 갈 것을 권하자 포석약은 대답했다.
[날이 저물려면 아직 멀었는데 더 가보지요.]
[이곳의 상점들은 대부분이 큽니다. 부인의 의복이 낡았으니 새것으로 사 입도록 합시다.]
[아니 지금 입은 것도 사 주신 지 얼마 안되는 새옷인데 낡았다뇨?]
[길에 먼지가 많아서 의복은 하루 이틀만 입어도 더러워지는 것이에요. 또 부인 같은 미인이 좋은 옷을 입으면 좀 어떻습니까?]
포석약은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 기분이 괜찮았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상중인걸요....]
[그야 저도 잘 아는 일 아닙니까?]
포석약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완안열은 길을 물어 그곳에서 제일 크다는 수수(秀水) 여인숙을 찾아들었다. 세수를 끝내고 요기를 했다.
[부인께서는 편안히 누워 쉬세요. 제가 나가 물건을 사오겠습니다.]
포석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안열이 막 문턱을 나서려는데 길 가운데 중년쯤 되어 보이는 궁때가 흐르는 선비 하나가 신발을 질질 끌고 하품을 하면서 걸어왔다. 온몸이 먼지투성이이고 의관도 바르지 못한데다가 얼굴은 10여 일 세수도 하지 않은 듯했다. 손에는 기름 때가 더덕더덕 묻은 검은 부채를 들고 있었다. 완안열은 원래 깔끔한 성미인데 이 사람은 선비 같으면서도 더럽고 지저분해 혹시 자기와 부딪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걸음을 빨리 했다.
그 사람이 갑자기 허허 웃는데 그 웃음소리가 이상하게도 귀를 찔렀다. 완안열이 막 그의 옆을 지나려는 찰나 돌연 그 사람은 부채를 들어 그의 어깨를 딱 때렸다.
완안열이 비록 무공(武功)을 익힌 사람이기는 하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화가 슬그머니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왜 이래?]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허거리며 신발을 질질 끌며 저쪽으로 가 여인숙 심부름꾼 앞에 섰다.
[야 이 녀석아, 나으리의 모습이 꾀죄죄하다고 업신여기지 말아라.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어떤 녀석들은 겉만 뻔지르르하고 속은 텅텅 비었단 말이다. 하는 짓마다 속여먹기, 유부녀나 유인해 가지고 다니기, 거저 먹고 거저 잠이나 자려는 놈들을 조심해야 해. 마땅히 선불을 받고 재워 주든지 먹여 주든지 하거라.]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버렸다.
완안열이 듣자 하니 자기를 보고 빈정대는 것 같아 더 화가 치밀었다. 심부름꾼은 그 사람이 지껄이는 말을 듣고 나서 완안열을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수상한 모양이다. 그가 완안열의 앞으로 걸어와 아는 체했다.
[나무라지 마세요. 제가 예의를 몰라 그러는 게 아니라····.]
완안열은 코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야! 이 돈을 우선 맡아 두거라.]
그러면서 자기 품안을 뒤져보고 깜짝 놀랐다.
원래 그의 주머니에는 4, 50냥의 은전이 들어 있었는데 지금 보니 텅텅 빈 주머니가 아닌가. 심부름꾼은 그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을 보자 그러면 그렇지 하고 배를 불쑥 내밀고 어깨에 힘을 준 채 내뱉었다.
[왜? 돈이 없나?]
[좀 기다리거라. 내 방에 가서 가지고 오마.]
허둥지둥 방에서 나오느라 주머니를 잊고 왔나 해서 방으로 돌아와 보자기를 풀어 보니 텅텅 비어 있을 뿐 어디서 돈을 잃었는지 알 길이 없다.
심부름꾼은 방문 밖에서 머리를 디밀고 기웃거리다 그가 돈을 못 내놓는 것을 보고 빈정거렸다.
[이 여자는 당신 부인이오? 만일 어디서 꾀어 가지고 데리고 왔다면 공연스레 우리까지 귀찮게 만들지 말란 말야!]
포석약은 부끄럽고 창피하여 얼굴이 붉어졌고, 완안열이 방문 밖으로 쏜살같이 내달으며 심부름꾼의 따귀를 보기 좋게 올려치자 이빨이 몇 개 부러졌다.
심부름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돈도 못 내는 주제에 사람까지 쳐!]
완안열이 발길로 놈의 엉덩이를 지르자 녀석은 떼구르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우리 빨리 나가요.]
[무서워할 것 없소. 돈이 없으면 저놈들보고 가져오라지요.]
완안열은 의자를 들어 방문밖에 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좀 지나서 심부름꾼은 10여 명의 건달들을 데리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마당으로 몰려들었다. 완안열은 큰 소리로 웃었다.
[너희가 시비를 걸려 하는가?]
하더니 땅으로 뛰어내리며 단번에 몽둥이 하나를 빼앗아 휘두르니 눈 깜짝할 사이에 네다섯 명이 쓰러졌다. 형세가 불리함을 보고 건달들은 몽둥이를 버린 채 벌떼처럼 달아나니 땅에 쓰러졌던 녀석들도 곤두박질치면서 달아나 버렸다.
[일을 크게 벌여 관가를 건드려 놓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난 관가에서 오기를 바라고 한 짓이오.]
포석약은 그의 저의가 무언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얼 마 뒤 한 무관이 몇 명의 포졸을 이끌고 여인숙에 나타났다. 분명 조금 전 쫓겨 간 건달들이 불러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인솔자인 듯한 무관이 앞으로 썩 나서며 당당히 외쳤다.
[어디서 굴러온 놈이 행패를 부렸단 말이냐? 썩 나서거라.]
그러자 완안열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되려 호통을 쳤다.
[이 놈! 잔 말 말고 개운총(蓋運聰)을 불러오너라!]
개운총은 가흥부 지부(知府)의 이름이다. 포졸들은 자기 상사의 이름을 듣자 놀랍기도 하고 슬그머니 화도 났다.
[이놈이 미쳤나! 함부로 개(蓋) 나으리의 이름을 부르게.]
완안열은 대꾸 없이 품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 내던지고,
[이것을 갖다 개운총에게 보이거라. 그가 오나 안 오나 보자꾸나!]
무관은 봉투 위에 있는 글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낮은 소리로 당부했다.
[저 녀석을 지켜 봐. 달아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말을 마치자 나는 듯 밖으로 사라졌다.
포석약은 방안에 앉은 채 마음만 조마조마,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좀 지나자 다시 10여 명의 포졸들이 몰려오고 두 명의 관원(官員)이 예복 차림으로 오더니 땅에 꿇어 엎드려 공손히 절을 했다.
[소직(小職) 가흥부 개운총과 수수현의 강문이 대인께 문안드리옵니다. 소직 등이 대인의 왕림을 몰라 뵈었으니 널리 용서하소서.]
완안열은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약간 머리를 굽혀 보일 뿐이다.
[제가 이곳에서 약간의 돈을 잃었는데 좀 찾아 주도록 하시오.]
[네, 네]
두 명의 포졸들이 두 개의 쟁반에 은전과 금전을 가득 담아 들고나섰다.
[소직의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오니 이는 모두 소직의 허물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것이오나 우선 대인께서 받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완안열은 고개를 끄덕이고 개운총은 다시 그 편지를 정중하게 바쳤다.
[소직이 벌써 제 집을 청소시켜 놓았사오니 대인(大人)과 부인께서 왕림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아니 이곳이 그대로 좋소. 내 조용한 곳을 좋아하니 그대로 내버려두기 바라오.]
[네 네, 알겠습니다. 또 무엇이 필요하신지 분부만 내려 주시면 정성을 다해 모시겠나이다.]
완안열이 손을 내저으니 개,강 두 사람은 바삐 포졸을 이끌고 물러갔다.
여인숙 주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생명만은 구해 주시고 곤장은 얼마든지 때려 달라고 애걸했다. 완안열은 접시에서 약간의 은전을 주워 땅에 던졌다.
[네게 상으로 주마. 얼른 물러가거라.]
심부름꾼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고 주인은 완안열의 표정에서 악의 없음을 보자 얼른 주워 넣으며 수없이 절을 했다.
[그 편지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관리들이 보기만 하면 그렇게 쩔쩔매나요?]
포석약이 웃으며 묻자 완안열도 따라 웃었다.
[원래 이 따위 관리들과는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등 소용없는 녀석들이오. 조광(趙壙) 아래에는 맨 썩어빠진 놈들만 있으니 국토(國土)를 잃지 않을 도리가 있나요?]
[조광. 그가 누군데요?]
[바로 지금의 영종 황제(寧宗皇帝)요.]
포석약은 깜짝 놀랐다.
'언제는 한승상(韓承相)의 친구라고 하더니 문관이고 무관이고 이 사람만 보면 모두 쩔쩔매는 꼴이 아무래도 황족이나 종실(宗室) 아니면 조정 대신인가. 그렇지 않고야 감히 천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만일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이 또한 큰 죄가 아닌가?'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도 모를 일이다.
[쉿, 작은 소리로 말하세요. 성상(聖上)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 있어요?]
[내가 부르는 것은 관계없어요. 북방(北方)에서는 조광이라고 부르지 또 무어라 불러요?]
[뭐요? 북방이라니요?]
완안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문 밖에서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가 울리더니 수십 기의 말이 여인숙 문 앞에 섰다. 포석약은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완안열은 이마를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비단옷을 입은 군사들이 마당으로 들어와 완안열을 보더니 땅에 꿇어 엎드려 절을 했다.
[임금님!]
[너희가 마침내 나를 찾아냈구나!]
포석약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들은 모두 호랑이 어깨에 곰의 허리, 당당한 체격에 복장이 중원(中原)의 군사들과는 크게 달랐다.
완안열이 손을 저으며,
[모두들 물러가거라.]
명령을 내리자 군사들은 일제히 <넷> 소리를 지르며 나가는데 아무리 보아도 4, 50여 명, 열을 지어 나가는 폼이 평소에 잘 훈련된 정병(精兵)임에 틀림없었다.
[어때요? 제 부하들이 송나라 군사와는 크게 다르지요?]
[아니, 그럼 저들이 송나라 군사가 아니란 말씀예요?]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이들은 모두 대금국(大金國)의 정병들이랍니다.]
말을 마치자 껄껄 웃으며 득의 만면한 표정이다.
포석약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당신....당신까지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이름 위에 완(完) 자를 하나 더 써야 합니다. 저는 완안열(完顔烈), 대금국 여섯 태자(太子) 중 하나로, 조왕(趙王)에 봉함을 받고 있는 몸입니다.]
포석약은 어려서부터 금나라가 얼마나 송나라를 유린했으며, 대송(大宋) 황제가 그들에게 붙들려 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 북방에 있는 백성들이 금나라 군사들에게 어떻게 짓밟히고 있는지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라났다. 양철심에게 시집을 온 뒤로는 남편이 금나라라면 이를 북북 갈아 온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이 금나라 왕자라니!
완안열은 그의 얼굴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자 웃음을 멈추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남조(南朝)의 문화를 흠모해 왔지요. 그래서 지난 해 부황(父皇)에게 간청, 임안에 사신으로 왔어요. 송왕이 몇십만 냥의 세공을 바치지 않아 그걸 재촉하기 위해서였지요.]
[세공이라니요?]
[송나라 조정은 우리가 진공(進攻)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매년 은과 비단을 바치기로 되어 있죠. 그런데 그들은 늘 변명만 늘어놓고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제가 한탁주(韓托鑄)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한 달 안에 바치지 않으면 내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와서 받아 가겠다구요.]
[그래 한승상이 무어라 하던가요?]
[뭐 할 말이 있겠습니까? 내가 임안부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보냈더군요. 하하.]
포석약은 이마를 찌푸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세공이나 재촉하려면 내가 올 필요도 없지요. 사신만 보내도 충분하니까요. 나로서는 남조(南朝)의 산천 경개며 인물 풍속이나 보려고 했던 것이 뜻밖에도 부인을 뵙게 되었으니 삼생(三生)의 행운인가 합니다.]
포석약은 여전히 묵묵 부답이다.
[제가 나가서 부인의 옷을 사 오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한승상이 개인적으로 내게 돈을 보내 준 게 있습니다. 옷만을 사기로 한다면 부인께서 천 년을 입는다 해도 다 못 입으실 겁니다. 두려워하실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제 친병들이 사방에서 겹겹이 호위를 하고 있으니 누가 감히 부인을 괴롭히겠소?]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포석약은 그가 한 말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여인숙 주위에 그의 부하들이 지키고 있으니 자기가 달아나려 해도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대금국 왕자의 신분으로 보잘것없는 아녀자에게 이렇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완안열은 여기저기 거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성 안에 사는 주민들이 온아(溫雅)해 보이고 비록 장사꾼에 불과하지만 모두 준수해 속되지 않아 보였다. 속으로 부러워하면서 다음 군사를 이끌고 도강(渡江)하게 되면 부황(父皇)에게 간청하여 장진강남(長鎭江南)만 달라 해서 가져도 충분할 것 같았다.
이런 생각 저런 궁리로 득의 양양하기만 한데 갑자기 말발굽 소리 어지럽게 한 필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도 넓지 못한데다 왕래하는 사람은 많고 또 길 양 옆에는 물건을 파는 좌판이 깔려 있는데 어떻게 저리도 빨리 말을 달릴까 생각하며 길 옆으로 살짝 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필의 황마(黃馬)가 사람 속을 뚫고 나왔다. 그 말은 아무리 보아도 보기 드문 준마임에 틀림없었다. 완안열은 속으로 잘생긴 말이로구나 감탄하면서 말에 탄 사람을 보곤 실소했다.
손도 짧고 발도 짧고 목도 없다. 머리만 괴상하게 커 가지고 두 어깨 속에 자라머리처럼 올려 놓여 있을 뿐이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그렇게 빨리 달리면서도 사람 하나 다치지도 않고 물건 하나 엎지 않으면서 번개처럼 날아 옹기점을 지나고 채소더미를 지나는 것이었다.
완안열은 말을 오래 타 본 사람이라 멍하니 정신을 놓고 바라다보다가 <좋구나!>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그 땅딸보는 갈채 소리를 듣고 뒤돌아본다. 완안열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술 찌꺼기가 덕지덕지 묻어 있고 코는 크고 둥글어 꼭 홍시를 올려놓은 듯했다.
[말이 굉장히 좋구나! 비싼 값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내 꼭 사고야 말겠다.]
바로 이때 길가에서 놀던 어린 아이 두 명이 말 앞으로 대들었다. 그 말은 너무나 뜻밖이라 놀라는 듯 말발에 어린이가 막 치이려는 찰나 땅딸보는 말고삐를 번쩍 들며 말 안장에서 몸을 솟구치자 말은 몸이 가벼워진 듯 앞 발을 번쩍, 두 어린이의 머리 위로 미끄럽게 날아가고 땅딸보는 가볍게 말 안장에 앉아 버리는 게 아닌가.
완안열은 입이 딱 벌어졌다. 이 땅딸보의 말 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금국에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사람이 적지는 않지만 이렇게 놀라운 솜씨는 본 일이 없었다. 사람은 얼굴만 보고는 모른다더니 그게 정말이로구나. 이런 사람을 데려다 기병(騎兵)들을 훈련시킨다면 내 휘하의 기사(騎士)들이 천하를 주름잡을 것이 아니겠는가? 한 필의 준마를 사느니보다 몇만 배 낫겠지.
땅딸보의 말 타는 솜씨가 신출귀몰한 것을 본 그는 비싼 돈을 주더라도 연경(燕京)으로 그를 데리고 가 군사를 훈련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결심을 내리자 급히 발길을 재촉, 말 뒤를 쫓는데 갑자기 말이 멈추었다. 완안열은 또 한 번 마음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빨리 달리던 말이 멈추자면 아무래도 발걸음 서서히 느려지다가 멈출 수 있는 것인데 이 말은 어떻게 된 건지 급히 멈출 수 있으니 말이다. 제아무리 무공(武功)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미친 듯 달리던 말을 이렇게까지 가볍게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완안열이 고개를 들고 보니 커다란 나무 간판이 있는데 태백유풍(太白遺風)이란 네 글자가 씌어 있는 것이 술집이 분명했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처마 밑에 금자(金字)로 쓴 간판이 보이는데 이름하여 취선루(醉仙樓), 글씨도 천하 명필이다.
옆에는 또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적은 글씨가 보인다. 틀림없는 소동파(蘇東坡)의 글이다. 완안열이 술집이 그럴듯해 막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땅딸보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손에는 술단지를 든 채 말 앞으로 걸어간다. 완안열은 뭘 하려나 궁금하여 모퉁이에 숨어 지켜보았다.
그 땅딸보가 땅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키가 작달만한 것이 석 자도 안 돼 보이는데 엉덩이는 넓은 것이 석 자라 꼴불견이었다. 그런데 말의 허리는 유달리 높아 땅딸보가 고개를 치켜들어도 말 탈 때 디디고 올라서는 마등(馬橙)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몸놀림은 어찌나 재빠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또 술단지를 말 앞에 놓고 손을 뻗어 단지를 가볍게 내리치니 단지의 한 쪽이 기와 반 장 정도의 길이로 떨어졌다. 완안열은 더욱 놀랐다. 이 사람의 내공(內功)이 보통이 아닌 것이 손바닥으로 술단지를 부수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지만 어쩌면 저렇게 칼로 썬 것처럼 네모 반듯하단 말인가. 기가 막힐 일이다.
땅딸보가 술단지의 진흙마개와 조각들을 내어 던지니 그 술단지는 마치 밑이 깊은 대야처럼 되어 버리고 황마는 한 발짝 다가서며 고개를 숙여 마시기 시작한다. 완안열이 술 냄새를 맡아보니 그 술은 틀림없는 절강(浙江)의 소흥주로 적어도 3, 40년은 묵은 술이다. 자기가 연경에 있을 송나라 사신이 바친 술을 부황(父皇)이 몇 단지 나누어주어서 마셔 본 술 냄새도 이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자기도 늘 아까워하면서 조금씩 맛만 보았는데 말 한 필이 한 단지의 술을 다 마셔 버리다니?
땅딸보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목로에다 탕 하며 내던지는 것을 보니 번쩍번쩍 빛이 나는 금돈이었다.
[술상 아홉만 차리게. 안주는 제일 좋은 것으로 말야. 그런데 여덟 상은 매운 것으로 하고 한 상은 채소로 해야 하네.]
[네 네, 한삼야(韓三爺). 오늘 송강(松江)에서 잡아 온 아가미가 네 개인 농어가 있으니 안주로야 최고입죠. 이 돈은 나으리께서 넣어 두셨다가 천천히 계산해 주십시오.]
주인이 쩔쩔매며 대답하자 땅딸보가 흰 눈자위를 드러내며 소리 지른다.
[뭐야? 술값을 안 받겠다고? 이 녀석아 한삼야가 백수 건달이라더냐? 거저 얻어먹게!]
주인은 웃으며 여전히 굽실거리기만 한다.
[애들아, 어서 한 나으리를 위해 안주를 차려라!]
완안열은 혼자 생각했다.
'이 땅딸보가 옷차림은 형편없는데 그래도 돈은 꽤 많은가 보다. 사람들이 쩔쩔매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이 가흥부에선 이름 깨나 있는 모양이로군. 초청 해다 군사를 훈련시킨다면 꽤 돈을 많이 달라고 하겠는걸. 하여튼 구경이나 하다 기회를 보아야겠다.'
완안열도 구석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술과 안주 몇 가지를 시켰다.
이 취선루 옆 남호(南湖) 위에는 엷은 안개가 깔려 있고 몇 척의 배들이 오락가락, 파릇파릇한 마름꽃이 여기 저기 떠다니고 있었다. 이 가흥은 옛날 월(越)나라의 이름난 성으로, 여기서 나는 오얏(李子, 자두)은 달고 향기로우며 또 유명한 술이 생산되기 때문에 춘추(春秋) 시대에는 이곳을 취리(醉李)라고도 불렀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이곳에서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크게 무찔렀던 일이 있고 오와 월 사이의 교통의 요새이기도 했다. 남호의 특산물로는 파릇파릇한 마름 열매가 유명한데 연하면서도 그 맛이 달아서 사람들이 즐겨 먹었다.
완안열이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벌써 아홉 개의 술상이 차려지기는 했지만 이상한 것은 상마다 술잔 하나와 젓가락 한 쌍씩만 놓여 있는 것이었다.
[아니 아홉 명이 술을 먹는다면 왜 상을 아홉 개나 차렸을까? 그리고 또 사람이 많다면 젓가락은 왜 아홉 쌍 뿐인고? 아니 이게 이쪽 사람들의 습관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땅딸보는 상 하나를 차지하고 서서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완안열이 다시 시선을 호면으로 옮기니 일엽 편주가 쏜살같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배는 무척 긴데 뱃머리에는 고기를 낚는 새들이 두 줄로 앉아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배를 앞지르는 것을 보고 완안열은 그 배의 빠름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가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는 배 안에 두어 사람이 앉아 있고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노를 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가볍게 한 번 젓기만 해도 그 배는 화살처럼 쑥쑥 미끄러진다. 뱃머리가 거의 들려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한 번 젓는 노에 적어도 2, 3백 근 정도의 힘은 들 텐데 여자의 힘이 대단한 것도 이상하거니와 나무로 만들어진 노가 어떻게 저런 힘을 감당해 내고 있는지 도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자가 노를 몇 번 더 젓자 배는 벌써 취선루에 다다랐다. 햇빛이 노에 비쳐 번쩍번쩍 빛나는데 역시 그 노는 보통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구리로 부어 만든 노였다. 그 여자는 배를 말뚝에 매 놓고 언덕으로 올라왔다. 배 안에 타고 있던 남자도 장작을 들쳐 메고 따라 내렸다. 그 여자가 땅딸보를 보더니 반긴다.
[셋째 오빠!]
이렇게 부르고 나서 각기 술상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는다.
[넷째 아우, 일곱째 누이, 일찍 왔구먼.]
땅딸보도 반긴다.
완안열이 그 두 사람의 아래 위를 훑어보니 여자의 나이 17, 8세, 커다란 눈이며, 긴 눈썹, 눈처럼 흰 살갗, 말 그대로의 강남(江南)하고도 수향(水鄕)의 절색이다. 왼손에는 구리로 만든 노를 들고 있고 오른손엔 도롱이를 벗어 들었는데 새까만 머리칼이 유난히 귀여운 모습이다.
[이 여자가 비록 내 포씨만한 미인은 못 되지만 그래도 또 다른 매력을 풍기는걸.]
장작을 짊어진 사람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시골 사람 차림이고 나이는 30세 안팎. 입은 옷이며 새끼줄로 허리를 맨 것하며 손발이 어찌나 큰지 무뚝뚝한 표정이 그대로 참나무다. 그가 짐을 내려놓고 멜대를 상에 비스듬히 기대 놓자 찍 소리와 함께 술상이 밀려났다. 완안열이 그 멜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겉 모양은 별다른 이상이 없으나 거무스름하고 중간이 굽었으며 양쪽 끄트머리가 약간 튀어나와 있는 것이 물건을 짊어졌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멜대를 설령 강철로 만들었다 해도 저렇게까지 무겁지는 않을 텐데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저럴까? 그 사람은 짧은 도끼를 허리에 차고 있는데 그 도끼란 보통 나무꾼이 쓰는 것과 같고 그 도끼 날의 이가 몇 군데 빠져 있을 뿐이었다.
그 두 사람이 막 자리에 앉자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또 두 사람이 올라왔다. 그 여자가 먼저 인사를 했다.
[다섯째 오빠와 여섯째 오빠는 함께 오시는군요.]
앞장선 사람은 키도 크고 우람하여 3백여 근이 넘는 몸집이요, 몸에는 치마 같은 수건을 두르고 있는데 온통 기름투성이다.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털 투성이의 앞 가슴이 드러나고 손등에도 털이 가득한 게 손에 칼만 안 쥐었지 영락없는 백정이다. 뒤에 따라 오는 사람은 작달막한 키에, 머리에는 또 조그만 모자를 올려놓고, 하얀 얼굴에, 손에는 저울과 대바구니를 들고 있는 것이, 장사꾼이 틀림없다. 그 두 사람도 술상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완안열은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먼저 온 세 사람은 모두 각자 절기(絶技)를 지닌 무림(武林)의 인물들인데 어째 뒤에 온 두 사람은 시장의 장사꾼들로 저들과 호형 호제하는 사이냐 말이다.
이때 아래층에서 말울음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의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 왔다. 장사꾼 차림의 그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셋째 형, 또 어느 놈이 형의 말을 훔치려 했나 보군요.]
[놔두게. 모두 자승자박이지.]
완안열이 고개를 밖으로 돌리니 두 명의 남자가 떼굴떼굴 뒹굴며 신음하고 있었다. 취선루의 주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부느냐? 한삼야(韓三爺) 어른이 누구신데 그분의 말을 훔치려고 해? 못된 녀석들. 냉큼 올라가 뵙고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빌어라.]
술집 앞에 모여 선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아 한삼야의 말이야 사람보다 더 영특하지. 발로 걷어채여 마땅하고 말고.]
[아니 그래 가흥부에 와서 훔치려 들어?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말을 훔치려던 두 녀석은 억지로 일어나 연방 신음했다.
그때 갑자기 거리 모퉁이에서 둥둥둥 쇠로 돌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절름발이 하나가 막 거리의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었다. 그는 손에 쇠지팡이를 짚고 돌이 갈린 길 위를 더듬어 짚으며 오는데 두 눈이 먼 장님이었다. 눈도 멀고 또 다리까지 절고 있으니 그의 지팡이는 길 찾아 걷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몸도 지탱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오른쪽 어깨에 사냥할 때 쓰는 작살을 메고 있는데 그 작살 끝에는 또 표범 한 마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완안열은 원 세상에 별 이상한 일도 다 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에 눈멀고 다리 절뚝이는 사람이 사냥을 한다는 얘기는 듣도보도 못 했는데, 저렇게 무서운 표범을 잡다니 원 참.)
그 장님은 여러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술집 앞에 당도하자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를 채였나?]
말을 훔치려던 녀석이 대답했다.
[왼쪽 무릎을 채였습니다.]
그 장님이 코방귀를 뀌며 지팡이를 들어 녀석의 옆구리를 찌르려 하자 녀석은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옆구리가 시큰 아프고 화가 슬그머니 치밀어 올랐다.
(이놈의 거지까지 나를 골탕먹이려고 해.)
그는 말에 채이고 꼼짝할 수 없었는데 지금 무릎이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을 깨닫고 장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구해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소인이 무지하여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돌려 함께 왔던 녀석을 바라다보았다.
[여보게 빨리 이리로 오게, 이 어른께 아픈 곳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드려.]
함께 말을 훔치러 왔던 녀석이 엄금엉금 기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으리, 나으리, 이놈의 짐승이 제 가슴을 찼답니다.]
그 장님이 오른손에 지팡이를 잡고 왼손으로 녀석의 가슴을 몇 번인가 만지고 겨드랑이를 두어 번 긁었다. 그 녀석이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히히거리다가 갑자기 구역질을 하더니 진한가래를 뱉어 내고 가슴이 후련해지자 그대로 땅에 무릎을 꿇고 수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나으리, 참으로 고맙습니다.]
장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계단으로 올라갔다.
완안열은 재수가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뜻하지 않았는데 연거푸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구나.'
장님은 술집으로 들어와 표범을 땅 위에 집어 던졌다.
[여봐라, 이것 갖다가 뼈로 진한 곰탕을 끓여라. 조심해서 가죽을 벗겨야 한다.]
심부름꾼 세 녀석이 대들어 표범을 떠메고 갔다.
장님이 또 완안열을 가리키며 심부름꾼에게 분부를 내렸다.
[이따가 고기 두 근만 썰어다 저 손님 맛보시게 하여라.]
[네, 네, 잘 알겠습니다.]
완안열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을까? 장님이 아니란 말인가?'
이때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다.
[큰 형님]
노를 저어 왔던 처녀가 동쪽에 있는 술상 옆에 다가가 걸상을 두드렸다.
[큰 오라버님, 이쪽이에요.]
[그래. 둘째는 아직 안 왔나?]
백정 차림의 사람이 대답했다.
[둘째 형님이 벌써 가흥에 와 계시니 도착하실 때가 됐습니다.]
장님은 대답을 들으면서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완안열은 방금 그 처녀의 행동으로 보아 그 남자가 틀림없는 장님임을 알게 되었다. 눈으론 볼 수 없지만 귀는 상당히 밝기에 그 처녀가 의자를 두드리는 것을 듣고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여기 앉아 있는 것을 안 것도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움직이는 소리를 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질질 신발 끄는 소리가 계단에서 울렸다. 완안열은 또 한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계단 위에는 기름 때가 덕지덕지 묻은 부채를 흔들면서 방금 여인숙에서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완안열은 생각했다.
'틀림없이 저자가 내 돈을 훔쳐 갔는데....'
화가 치밀어 눈을 곱지 않게 뜨고 건너다보니 그자는 빙그레 웃으며 얼굴을 묘하게 찡그려 아는 체를 해 보이고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데 그들이 말하던 둘째가 바로 이 사람이다.
'저들이 사람마다 절기(絶技)를 지니고 있는데 함부로 대들었다가는 큰일날 게고 어디 동정이나 살펴보자.'
그 궁때가 흐르는 선비는 술을 한 잔 쭉 들이마시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읊조린다.
[부정한 재물은.... 그냥 지나가게 해야 하느니.... 옥황 상제.... 화만 돋우느니라!]
第 四 章. 날아다니는 술항아리
꾀죄죄 궁때가 흐르는 그 사람은 입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품속에서 돈을 한 닢씩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완안열이 돈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틀림없이 자기가 잃어버린 바로 그 돈이다.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고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저 사람이 부채로 내 어깨를 한 번 쳤을 뿐인데 어느 틈에 내 돈을 훔쳐 갔을까? 이런 귀신 곡할 솜씨는 내 일찍 듣도보도 못했는걸.'
노를 젓던 처녀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둘째 오라버님, 오늘 또 돈을 버셨네요. 누가 골탕을 먹었을까?]
[일곱째 누이. 내 이 고약한 성질이야 잘 아는 일 아닌가.]
[그럼 또 금나라 돈이로군요.]
궁때 흐르는 선비는 쉬지 않고 돈을 향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외국 사람 돈은 고약한 냄새가 난단 말야. 그러나 쓸 때는 좋지.]
여럿이 허리를 펴며 웃어댄다. 완안열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꼭 한(漢)나라 사람처럼 차려입었는데 어떻게 내가 금나라 사람임을 알아차렸을까.'
그는 손짓을 해 심부름꾼을 불러 조용히 당부했다.
[여기 여러분들의 술값은 모두 내가 내겠네.]
품안에서 금돈 두 냥을 꺼내 주었다.
[우선 받아 놓고 보아라.]
장님의 귀가 제일 밝은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벌써 알아들은 모양이다.
[형제 여러분. 어느 분이 술값을 낸다니 마음놓고 마십시다!]
꾀죄죄한 선비차림의 그자가 완안열을 바라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여보, 꾀어 가지고 다니던 양가집 부인은 어떻게 됐소?]
완안열은 말다툼할 때가 아니라고 여겨 못 들은 체하고 말았다.
그는 일곱 사람이 일곱 개의 술상을 차지하고 있고, 따로 다른 한 쪽에 두 개의 술상을 차려 놓은 것으로 보아 저들 일곱 사람이 다른 손님들을 대접하려나보다 짐작했다.
'이 일곱 명의 괴짜들이 초대하려는 사람은 또 어떤 괴짜들일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아래층에서 <나무아미타불!>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어찌나 맑게 울려 퍼지는지 마음 속을 꿰뚫을 듯했다.
장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초목대사(焦木大師)께서 오신다.]
몸을 일으키자 다른 여섯 명도 공손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고목처럼 비쩍 마른 중이 계단을 올라오는데 땅을 밟지 않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완안열이 보니 중의 나이는 40여 세, 빨간 장삼을 걸치고 손에는 한 단의 장작을 들고 있는데 장작의 한 끝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어디다 쓰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중이 수인사를 끝내고 빈 술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사람이 나를 찾아오는데 소승은 그의 적수가 아닌지라 여러분의 도움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소승의 뼈가 부러지도록 애를 써 보아도 여러분의 은혜는 갚을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중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초목대사의 지나친 겸손이십니다. 우리 일곱 형제가 늘 대사님의 사랑을 받아 오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 자기 스스로 무예가 뛰어나다고 생각해 까닭도 없이 대사님을 상대하겠다는 처지에 강남 무림(江南武林)쯤이야 안중에도 있을라구요? 대사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더라도 우리 형제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계단이 삐걱대며 아래층 술집 주인과 심부름꾼들이 놀라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그것 가지고는 못 올라가요.]
[층계가 부서져요.]
[못 올라가게 빨리 빨리 막아라. 내려오라고 해.]
그러나 삐거덕 소리는 더욱 크게 울리고 두어 번 삐거덕 큰 소리가 나며 층계가 부러져 나갔다. 완안열이 살펴보니 도사 한 사람이 손에 구리로 만든 큰 항아리를 들고 뛰어 올라왔다. 완안열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사람은 바로 장춘자 구처기였다.
완안열은 원래 야심이 만만한 사람이라 송나라 대관을 매수하여 후일 공격할 때 대응시킬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연경(燕京)에서부터 동행하던 송나라 사신인 왕도건이 물욕에 눈이 어두운 것을 이용하여 매수했고, 임안에 도착한 뒤에도 그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주선을 해 승상 한탁주까지도 손에 넣게 되었다.
완안열이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왕도건이 돌연 무공이 지극히 높은 도사에게 살해되어 염통과 심장, 심지어 수급까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되었다. 완안열과 한탁주는 기밀이 탄로난 것이 아닌가 하여 깜짝 놀랐다. 그때 한탁주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금나라에 대항하자고 앞장을 선 자는 집영전(集英殿)의 수찬(修撰)이며 충우관(沖佑觀)을 주관하는 신기질(辛棄疾)인데 이 사람이 비록 실권은 없지만 문무를 겸비한 데다 충성이 지극하여 천하가 다 중원(中原)의 회복을 그에게 기대하고 있으니 우선 그를 없애는 것이 가장 좋다고 주장했었다. 그때 완안열의 생각은 좀 달랐다. 우선 자객을 잡아 고문을 해보고 도대체 그 막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사한 뒤 손을 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나라 관병들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인지라 임안부의 포졸들을 길잡이로 하여 스스로 자객을 잡기 위해 뒤를 쫓았다. 그래서 마침내 우가촌에 이르러 구처기를 만나게 된 것인데 이 도사가 어찌나 무공이 대단한지 그가 집어 던지 화살에 어깨를 맞았고 데리고 갔던 부하와 포졸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떼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완안열이 만약 그때 먼저 달아나지 않았고 또 포석약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당당한 금나라의 왕자가 조그만 시골에서 헛되이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다 죽은 목숨을 끌고 임안의 한승상 부중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고 있을 때도 오매 불망 생각나느니 포석약의 목소리와 웃는 모습뿐이었다. 상처를 다 치료한 후 한탁주에게 부탁하여 양철심과 곽소천을 잡아오도록 꾸며 놓고 자기는 뒤에 숨어 있다가 그 여자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나와 구해 주는 체한 것이다. 포석약이 어찌 이런 흉계를 알 수 있으랴. 완안열의 모습이나 행동거지가 모두 군자답고 구해 준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그 마음씨가 고마와 아무 의심 없이 마침내 그가 파놓은 함정에 걸리고 만 것이다.
완안열은 뜻밖에도 구처기를 만나게 되어 어찌나 놀랐는지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구처기는 모든 신경을 초목대사와 그 밖의 일곱 사람에게 집중하고 완안열에게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완안열이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전연 자기를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어서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구처기가 손에 받쳐들고 있는 구리 항아리를 보고 놀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구리로 된 항아리는 원래 절에서 향을 피우는 데 쓰던 것으로 능히 그 무게가 3, 4백 근은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 또 술을 부어 들고 있으니 그 무게가 더 할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공기 돌을 들고 있는 것처럼 가뿐해 보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울렸다. 아래층은 벌써 엉망진창이다. 주인이며 심부름꾼, 술 마시던 손님들까지 우를 거리로 도망쳐 나가고 있었다. 혹시 2층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때 초목대사가 차디찬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과연 도사께서 이곳을 찾아오셨군요.]
구처기가 머리를 숙였다.
[제가 방금 보찰(寶刹)로 찾아뵈었더니 대사께서 취선루에서 기다리신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대사께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렇군요. 오래 전부터 강남 칠협(江南七浹)의 명성을 익히 들어 왔는데 오늘 뜻밖에도 여기서 뵈옵게 되어 평생의 영광입니다.]
초목대사가 칠괴(七怪)를 향해 소개를 시작했다.
[이분이 바로 장춘자 구도장이오. 여러분도 익히 존함을 들어 왔을 겁니다.]
[이분이 칠협의 우두머리 비천편복(飛天 , 하늘을 나는 박쥐) 가진악(柯鎭惡)이오.]
이렇게 소개하면서 장님을 가리키자 구처기는 공손히 그를 향해 절을 했다.
완안열은 옆에서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두번째가 자기의 금화(金貨)를 훔쳐 간 꾀죄죄한 바로 그자다. 이름은 묘수서생(妙手書生) 주총(朱聰)이라고 했다.
맨 먼저 말을 달려 술집으로 온 땅딸보는 마왕신(馬王神) 한보구(韓寶駒)로 셋째.
장작을 지고 온 시골 사람은 넷째로 남산초자(南山樵子) 남희인(南希仁).
다섯째는 신체가 건강한 백정 차림의 소미타(笑彌陀) 장아생(張阿生).
장사꾼 차림의 젊은 사람은 성이 전(全)이요, 이름은 금발(金發)이며 별명은 요시협은(요=門+市市俠隱).
구처기는 구리로 된 항아리를 든 채 조금도 피로해 하거나 힘든 눈치가 아니다.
술집 아래 모여 있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음을 알자 슬그머니 계단으로 올라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가진악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 7형제는 오래 전부터 도사님의 무공이 뛰어나시고 권검(拳劍)이 천하 무적이시라는 말을 듣고 흠모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초목대사도 예(禮)를 숭상하시며 불의를 보고는 못 참는 분이십니다. 비록 불가(佛家)와 도가(道家)는 다르다 하지만 모두가 무림(武林)의 일맥(一脈)인데 무슨 일로 도사님께 실례를 범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도사님께서 우리 칠형제를 귀엽게 보아주신다면 저희들이 중간에서 화해하시도록 주선하겠습니다. 함께 술이나 드시며 얘기하심이 어떠하올지?]
[소인과 초목대사는 평소에 아는 처지도 아니오, 원수를 지은 일은 더욱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을 저에게 넘게 주신다면 후일 제가 다시 법화선사(法華禪寺)로 찾아 뵙고 사죄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내놓으시라는 얘기입니까?]
[소인에게 두 명의 친구가 있는데 관가와 금나라 병사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분들의 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 곳도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가(柯)선생,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야 도사님 친구 분의 부인만이 아니라 평소에 모르는 처지라 하더라도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안다면 있는 힘을 다해 도와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초목대사에게 불쌍한 두 분의 여인을 제게 되돌려 주십사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 말을 꺼내자 초목대사뿐만 아니라 강남 칠괴까지도 깜짝 놀랐다.
완안열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저 사람이 말하고 있는 사람이 양,곽 두 사람의 부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초목은 기가 막히다 못해 얼굴이 노래지고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여보. 여....무슨 소리를.... 함부로....]
[그 두 여자를 어떻게 하셨소? 그분들은 소인이 책임지고 보호해야 할 입장이니 제발 돌려주시오.]
구처기는 화가 나서 거듭 소리쳤다.
[당신도 무림에서는 알려진 이름인데 감히 그렇게 나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이오!]
오른손을 번쩍 들자 수백 근이나 되는 구리 항아리가 술이 담긴 채 초목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밀치고 밀리고 아래로 굴
로 떨어졌다. 소미타 장아생은 강남 칠협 가운데서도 기운이 제이 센 자다.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두 어깨에 불끈 힘을 주니 항아리가 날아오고 어깨가 순간적으로 푹 꺼지는 찰나 가까스로 머리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발에 힘을 죽 있었기 때문에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왼발의 마룻장이 떨어져 나가며 구멍이 뻥 뚫렸다. 장아생은 있는 힘을 다해 두 어깨를 살짝 구부리고 퇴창송월(堆 送月)의 솜씨를 써서 다시 항아리를 구처기를 향해 날려보냈다. 구처기는 오른손을 내밀어 가볍게 받아 쥐고 웃었다.
(강남 칠괴의 이름이 헛것은 아니었구나!)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주총이 부채를 옆으로 한 번 흔들고 머리를 끄덕이며 나섰다.
[초목대사는 유명한 고승이신데 어찌 그런 파렴치한 일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도사께서는 어떤 소인배들의 말씀을 잘못 들어 믿으신 게 아닙니까? 허망한 얘기일 테니 믿지 마십시오.]
[아, 내 눈으로 똑똑히 본 일인데 거짓이라니?]
강남 칠괴는 이 말을 듣고 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목이 나섰다.
[당신이 이 강남에 와서 권위를 세우려 했거든 권위나 세울 것이지 무엇 때문에 내 이름까지 더럽히려고 하나? 당신이 가흥부에 가서 직접 한번 물어보구료. 이 초목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아닌지를 말이오.]
[좋소, 나 혼자라고 깔보는 것 같은데 사람들을 끌어다 놓고 내 오늘 당신을 그냥 놓아두지 않겠소.]
가진악이 나서며 말문을 열었다.
[도사께서는 초목대사가 여자 둘을 숨겼다 하시고, 초목대사는 또 그런 일이 없다고 하시니 우리 다 같이 법화사로 가보면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비록 눈먼 장님이지만 다른 사람은 눈멀지 않았으니까요.]
여섯 형제가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했다.
[뭐요? 절을 뒤져보자고? 내가 벌써 안팎으로 샅샅이 뒤져봤는데 분명히 그 두 여자가 들어간 흔적은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초목대사에게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요.]
[아, 그럼 그 두 여자가 사람이 아닌가 보군요.]
주총이 이렇게 말을 받자 구처기는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그 여자들은 선년가 보지요. 그러기에 둔신술을 썼거나 아니면 축지법을 써서 가버린 모양이니까요.]
여러 사람들이 듣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처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좋다, 마음대로 놀려먹는구나. 어쨌든 강남 칠괴는 중을 도우러 온 것이 틀림없으렷다.]
[우리가 큰 재주는 없지만 이 강남에서는 그래도 약간의 명성을 떨치고는 있소.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들을 한답니다. 강남 칠괴가 비록 미친 사람들 같기는 하지만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아니라고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을 용서하지도 않습니다.]
[나와 중과의 일은 나와 중 둘이 해결할 것이오. 제삼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오. 여보, 중, 나하고 갑시다.]
구처기는 말을 마치자 손을 뻗어 초목의 팔을 잡았다.
마왕신 한보구는 성질이 불같아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을 보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보 도대체 사리를 따질 거요? 안 따질 거요?]
[한삼야, 그래 어쨌단 말요?]
[우린 초목대사를 믿소. 그분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오. 강호에서 명성이 쟁쟁한 그분이 누구를 속이겠소?]
[그렇소.]
일곱 사람이 한결같은 소리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우선 제가 일곱 분을 모시고 술 한잔씩 마시겠습니다. 술을 마시고 나서 또 겨루어 보기로 하죠.]
말을 마치고 오른손을 번쩍 들어 구리 항아리 속의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손을 쓰자 그 항아리는 장아생을 향해 날아갔다. 장아생은 순간적으로 생각해 봤다.
'만일 아까처럼 항아리를 머리로 받아 올려놓는다면 어떻게 술을 마신담?'
즉각 뒤로 두어 발짝 물러서며 두 손으로 가슴을 막았다.
항아리가 자기 앞으로 날아오자 두 손을 살짝 떼어 앞 가슴으로 받았다. 그는 원래 뚱뚱한지라 앞 가슴에도 살이 잔뜩 쪄서 부드러운 방석같이 가볍게 받고 두 손으로 항아리를 안은 채 고개를 숙여 쭉 들이마셨다.
[술 맛 참 좋다!]
입맛을 다시며 두 손으로 쌍장이산의 솜씨를 발휘하여 항아리를 밀어 버렸다.
그의 재빠른 동작을 옆에서 지켜보던 완안열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처기가 날아온 항아리를 받아 다시 마신 후 이번엔 가진악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는 가형에께서 마실 차례요.]
항아리를 가진악에게 던졌다. 완안열은 생각했다.
'눈도 멀고 다리도 저는 어떻게 받는담?'
가진악은 강남 칠괴의 우두머리. 무공도 일곱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귀만은 밝기가 이를 데 없는 터에 이 커다란 구리 항아리가 날아오는 소리쯤 식별 못할 위인은 아니었다. 항아리가 머리 위로 날아들자 가진악은 쇠지팡이 끝으로 항아리를 받쳤다. 항아리가 쇠지팡이 끝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곡예사들이 접시를 돌리는 듯했다. 갑자기 쇠지팡이가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자 항아리로 옆으로 따라 기울면서 그의 머리로 떨어져 내릴 것 같다. 만일 떨어져 내리기만 한다면 그의 머리는 박살이 나고 말 것이다. 그런데 항아리가 기울어졌으면서도 떨어져 내리지 않고 오히려 항아리에 담긴 술만 주르르 흘러 떨어진다. 그러자 가진악은 입을 벌려 꿀꺽 꿀꺽 마시는데 기가 막히게도 술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10모금쯤 마시고 나서 쇠지팡이를 살짝 옮겨 다시 항아리의 중앙을 받치고 밀자 항아리는 허공에 떴다. 그가 지팡이로 옆을 치니 땅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항아리는 구처기를 향해 윙윙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구처기는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웃었다.
[가형은 어려서 접시를 가지고 노신 모양이군!]
말을 하면서 항아리를 받았다. 가진악은 차디차게 냉소하며 말했다.
[내 어렸을 때는 집안이 가난하여 접시를 돌리며 구걸하러 다니던 거지였소.]
[영웅은 출신을 따지는 것이 아니오. 이번에는 남형이 한 잔 받으시오.]
항아리를 남산초자 남희인에게 던졌다.
남희인은 원래 말이 적고 무뚝뚝해서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항아리가 자기에게 날아오자 멜대를 들어 허공에서 막았다. 그의 멜대는 오사(텅스텐), 철 및 순강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무겁고 튼튼하기 짝이 없어 땅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가 떨어져 내렸다.
남희인은 항아리가 자기의 면전에 이르렀을 때 손을 오므려 술을 퍼내 마셨다. 그리고 다시 멜대를 들어 옆으로 치며 오른쪽 무릎을 꿇자 항아리가 허공을 날았다. 그가 막 항아리를 쳐 구처기에게 되돌려 보내려 할 때 요시협은 전금발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내 원래 장사꾼으로 공짜를 꽤 좋아하는데 힘 안 들이고 술 좀 마십시다.]
남희인 옆으로 걸어와 항아리가 다시 떨어져 내려올 때 손바닥으로 술을 퍼마시고 갑자기 몸을 날려 두 발로 항아리 주둥이를 살짝 밟고 허공에서 힘을 주며 두 다리를 뻗자 그의 몸은 화살처럼 뒤를 향해 날고 항아리도 번쩍 날았다.
구리 항아리는 구처기를 향해 가고 전금발의 몸은 벽쪽으로 날아 가볍게 미끄러져 내려왔다. 묘수서생 주총은 부채를 흔들며 찬사를 보냈다.
[묘하다! 묘해!]
구처기가 항아리를 받아 들고 다시 술을 마셨다.
[묘합니다. 묘해요! 이번에는 주형이 드실 차례요.]
[아이고, 그만 두시오. 소생은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거니와 술도 잘 마시지 못해요. 깔려 죽지 않으면 취해 죽을 텐데....]
말도 마치기 전에 항아리는 벌써 그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아이구, 이거 사람 깔려 죽어요. 사람 살려요....]
그가 부채를 항아리에 넣다 꺼내 입안으로 옮기고 다시 부채를 거꾸로 돌려 자루로 항아리를 누르며 밖으로 치자 뚝하는 소리와 함께 마룻바닥에 구멍이 뻥 뚫리고 구멍 속으로 몸이 빠져 떨어지고 말았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살려 달라는 비명이 쉬지 않고 구멍 속에서 울려 나왔다.
월녀검 한소영이 항아리가 창 앞으로 나는 것을 보고 오른발을 살짝 짚으며 몸을 제비처럼 날려 갑자기 구리 항아리 위로 날았다. 그가 머리를 숙여 항아리의 술을 빨아 마시고는 사뿐히 반대편 창 앞에 내려서는데 그 자세가 어찌나 아름답고 재빠른지 모르겠다. 한소영의 칼 쓰는 솜씨나 경공은 독창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지만 완력은 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무거운 구리 항아리를 자기에게 던졌을 때 받아 낼 힘도 없거니와 다시 구처기에게 되돌려 생각했기 때문에 이 기회를 이용, 경공을 써서 술을 마셔 버린 것이다.
이때 구리 항아리는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거리로 날아가 버렸으니 만일 그것이 거리에 오고가는 행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면 처참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구처기가 놀라 뛰어내려가 막으려 하는데 초목대사가 먼저 뛰어 내렸다.
그는 성품이 자비로운 스님이라 수십 년 닦은 공력으로 이 항아리의 위세를 막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막 창 밖으로 뛰어내리는 찰나 노란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자기 앞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스쳐 지나갔다.
그가 휘파람을 불자 아래에 있던 그 황마가 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위층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려가 바라보니 허공에서 사람의 몸과 구리 항아리가 부닥치자 순간적으로 항아리가 떨어지는 위력이 약해지는 듯하더니 몸뚱이와 항아리가 말등 위로 내려앉았다. 그 황마는 몇 장이나 달리다가 방향을 바꾸어 2층으로 올라온다. 마왕신 한보구의 몸은 말 배에 찰싹 붙어 있고 왼발은 마등에 꿰어 끼고 두 팔과 오른발로 항아리를 받친 채 말 안장 위에 단정하게 올려놓고 있었다. 말은 빨리 달리면서도 계단을 마치 평지처럼 오르고 있었다.
한보구는 몸을 말안장에 실어 고개를 쑥 뽑고 항아리 속의 술을 마시고 나서 왼쪽 어깨를 흔들어 항아리를 잡아당기니 말은 갑자기 창문을 빠져나가 천마가 하늘을 날듯 거리로 내려앉았다. 한보구가 말 등에서 뛰어내려 주총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초목대사도 거리에서 다시 술집으로 돌아왔다.
구처기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강남 칠협의 명성이 과연 헛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무예가 훌륭하시군요. 제가 다시는 스님을 곤란케 하지 않으렵니다. 다만 불쌍한 두 여인을 제게 되돌려 주시면 이왕지사를 가지고 따지지는 않겠소.]
가진악이 대답을 했다.
[장춘도사, 그것은 도사의 잘못이오. 이 초목대사는 수십 년 동안 도만 닦으신 고명한 고승이시고 법화사도 가흥부에서는 유명한 불문의 대찰인데 양가집 부녀를 숨길 리가 있겠습니까?]
[천하가 넓은데 모두 다 사기꾼들 뿐이로구나!]
한보구도 화가 났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도사께서는 우리 말을 못 믿으시겠다 이거요?]
[차라리 내 눈을 믿겠소!]
[도사는 도대체 어떻게 하실 참이오 그래?]
[이 일이 원래 일곱 분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긴 하나 이미 관여하기로 하시지 않았소? 내 비록 재주는 없지만 일곱 분과 겨루어 보고 만약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때 가서 여러분 마음대로 하시오.]
[정 생각이 그러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말씀해 보시오.]
가진악이 겨룰 방법을 얘기하라고 했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내가 여러분과 원수진 일도 없고 또 강남 칠괴가 영웅이란 말도 익히 들어 왔는데 우리 피차에 병기를 쓴다면 우정을 상할 것이오. 여봐라, 대접 큰 걸로 열네 개만 가져오너라.]
술집의 심부름꾼에게 분부를 내렸다. 심부름꾼들은 아래층에 숨어 있다가 위층에 아무 동정이 없음을 보고는 시키는 대로 큰 대접을 들고 올라왔다.
구처기는 구리 항아리를 마룻바닥 위에 올려놓고 큰 대접에 술을 가득 채워 두 줄로 늘어놓고 강남 칠괴를 향해 이렇게 제안했다.
[제가 여러분과 주량으로 한번 대결해 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일곱 잔을 드시고 나는 혼자 일곱 잔을 마시겠습니다. 누가 많이 마시나 해봅시다.]
한보구나 장아생 등은 술고래라 좋다고 응했다. 그러나 가진악은 반대했다.
[칠대 일로 대결해서 이긴다 해도 떳떳하지 못하니 도사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시오.]
[아니, 어찌 꼭 당신들이 이긴다고만 생각하오?]
완안열은 옆에서 듣고 곰곰 생각해 보았다.
'천하에 무예를 겨루는 것도 많이 보아 왔지만 주량으로 승부를 겨룬다는 것은 듣도보도 못했는걸. 제아무리 도사의 주량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일곱 사람의 주량을 당해 낸단 말인가?'
월녀검 한소영이 비록 여자의 몸이기는 하지만 성격이 원래 쾌활한 탓으로 자기가 먼저 나섰다.
[좋습니다. 우선 주량으로 대결하고 나서 봅시다. 애들 장난 같은 놀음 제가 먼저 해 보지요.]
[한소저는 과연 여자 중의 호걸이시오. 다들 듭시다.]
구처기가 권하자 남은 여섯 사람이 술 대접을 집어들고 자신도 쉬지 않고 일곱 사발을 다 마셔 버렸다.
그가 계속해서 14 대접을 따라 놓자 여덟 사람이 마셨다.
세 번째로 14 대접을 마실 때, 한소영은 아무래도 여자라 술을 이기지 못하는 눈치를 나타내었다. 장아생이 그의 술 대접을 받았다.
[누이, 내가 대신 마시리다.]
[도사님, 이렇게 대신 마셔도 되요?]
한소영이 묻자 구처기가 대답했다.
[아무렴 어떻겠소! 누가 마시나 마찬가지지.]
그가 7대접을 비우고 다시 14 대접을 따라 한 순배 마시자 전금발이 나가 떨어졌다. 구처기는 계속해서 28 대접이나 마시고 나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기만 하다. 전금발은 위인이 총명하고 강인한데다 기지까지 대단한 사람이다. 제 아무리 구처기의 주량이 세다 하더라도 다섯 사람이 아직 남아 서너 대접은 마실 수 있는데 어떻게 20 여 대접의 술을 마실 수 있으랴? 승부는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흐뭇해하다가 보니 구처기의 두 발 아래 마룻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옆에 있는 주총의 귀에다 속삭였다.
[둘째 형. 저 도사의 발 아래 좀 보슈.]
[큰일났구나. 저 사람이 내공으로 술을 발 아래 쏟아 놓는구나.]
[틀림없습니다. 저 사람의 내공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줄은 몰랐군요. 우리 이걸 어떻게 하지요?]
[저 사람의 내공이 이 지경이면 대접으로 백 개를 마셔도 끄떡없을 텐데.]
다시 술이 한 순배 돌아가자 구처기의 발 밑은 샘물처럼 술이 괴었다. 이때는 남희인·한보구 등도 이 도사의 내공에 적이 놀라고 있었다.
한보구가 술 사발을 내려놓으며 이제 우리가 진 것이라고 말하려 하자 주총이 눈짓을 했다. 그는 술 사발에 술을 가득 가득 채우고는 구처기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구도사님의 내공은 정말 훌륭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탄복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다섯 사람이 한 사람과 대결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떳떳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주형 의견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저 혼자 도사님과 겨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섯 사람이 그를 상대로 마시다가 이제 지게 된 판에 혼자 계속 대결하겠다니? 그러나 남은 여섯 사람은 주총이 꾀가 많음을 알고 있는지라 다른 무슨 방법이 있나 해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었다.
[강남 칠협은 정말 훌륭들 하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주형과 제가 항아리의 술을 다 비우면 내가 진 걸로 합시다. 어떻습니까?]
항아리에는 아직도 술이 반이나 남아 있었다. 주총은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내 비록 주량은 약하나 그 전에도 남방에서 주량이 세다는 사람과 대결해 이긴 일이 있으니 어디 마셔 봅시다.]
그는 구처기와 함께 또 한 잔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 언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인도에 갔을 때 인도의 왕자가 물소 한 마리를 끌고 와서 나와 독한 술 마시기를 했죠. 결과는 내가 이겼습니다.]
말을 마치고 주총은 한잔 한잔 마시면서도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렇다고 손바닥이나 발바닥으로 술을 뿜어내는 것도 아니요, 무슨 내공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배가 불쑥 튀어나온 것만 보이니 저놈의 배는 커졌다 작아졌다 자유 자재로 변한단 말인가? 주총의 손이 춤을 추는 듯 눈 깜짝할 사이에 구처기와 두 사람만이 항아리의 술을 바닥내고 말았다.
구처기는 엄지 손가락을 펴 보였다.
[주형은 정말 기인이시오. 탄복했습니다.]
[도사님은 내공으로 술을 드셨지만 자 이걸 보시오.]
하하 큰 소리로 너털웃음을 치며 일어나더니 손에 물긷는 커다란 나무통을 들어 보였다. 그 물통을 흔들자 그윽한 술 냄새가 풍겨 온다. 통 속에 술이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 뿐이다. 눈치가 빨라도 보통 빠른 사람들이 아닌데 그래 물통은 언제 어디서 갖다 놓았다 말인가. 불쑥 튀어나왔을 주총의 배를 바라보니 언제 꺼졌는지 아무렇지도 않다. 강남 칠협은 웃고 구처기의 얼굴 표정은 변해 있었다.
원래 주총은 손버릇이 고약해 좀도둑질 솜씨는 천하에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래서 별명도 묘수 서생이다.
주총이 미친 사람처럼 대들고 부채를 흔들고 한 것도 다 구처기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마술이었다. 구처기가 꿈엔들 이런 생각을 했으랴. 주총은 술을 모두 도포자락에 숨긴 물통 속에 쏟아 버린 것이다.
[흥, 이걸 가지고 어떻게 술을 마셨다구 할 수 있겠소?]
구처기가 빈정대듯 말하자 주총이 웃으며 받아 넘겼다.
[그럼 도사님은 술을 드셨다고 말할 수 있나요? 내 술은 통이 마셨고, 당신 술은 마룻바닥이 마셨는데, 무어 다를 게 있습니까?]
그가 이렇게 지껄이며 왔다갔다 거닐다가 자칫 잘못하여 구처기의 발 밑에 흘린 술을 밟고 미끄러져 구처기를 향해 쓰러지자 구처기가 재빨리 그를 일으켜 세웠다. 주총이 뒤로 펄쩍 뛰어 한 바퀴 맴을 돌고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좋은 시야. 암 좋은 시고 말구. 자고로 한가위는(自古中秋) 달 밝고(月最明), 서늘한 바람이 불 때(凉風居侯)....밤은 맑음이 가득 차고(夜彌淸), 어느날(一天).... 기상이 은하에 기울고(氣象沆銀漢), 사해의 어룡들(四海魚龍)이 물 속에 빛나누나(耀水精)....]
구처기가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내가 지난해 추석에 짓다 만 신(詩)데, 언젠가 마저 지으려고 몸에 지니고 다녔을 뿐 아무에게도 보여 준 일이 없는데 어떻게 저자가 알았을까?'
품안을 뒤져보았지만 정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주총이 시시덕거리며 종이 한 장을 꺼내 상 위에 펼쳐 놓는다.
[도사께서는 무예만 뛰어나신 줄 알았더니 글재주도 비상하십니다 그려.]
그는 고의로 미끄러져 넘어지는 체하며 구처기의 품속에서 이 종이를 훔쳤던 것이다.
[좋소, 과연 솜씨가 대단하오. 한번 배우겠습니다.]
후 하는 장풍 소리가 얼굴을 향해 날아오자 주총은 살짝 옆으로 피했다.
[도사님, 주먹과 발로 겨루자는 것입니까?]
[그렇소.]
계속해서 세 번, 그 기세가 질풍 같다. 장아생은 주총이 당해 내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옆에서 뛰어들었다. 그런데 장아생은 갑자기 어깨가 시큰 뻣뻣해짐을 느끼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 당해 본 일 없는 고수의 솜씨이기 때문이다. 전금발이 나섰다.
[도사, 무례를 나무라지 마시오.]
그가 남희인, 한소영에게 손짓을 하고 셋이서 함께 대들었다.
[너희 여덟 명이 함께 덤벼라.]
[공연히 큰 소리만 칠 것 없다.]
가진악이 아니꼽다는 듯 말했다.
구처기가 왼손의 장풍을 내밀자 남희인은 두 손을 가슴에 댄 채 막고 있었다.
[남형 솜씨가 대단하오.]
그러다가 구처기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바보 같은 녀석들, 사람을 또 끌어넣는구나. 천군만마를 끌어들여도 내 눈 한 번 깜짝할 줄 아느냐?]
장아생이 영문을 몰라 입을 열었다.
[아, 우리 칠형제뿐인데 그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오?]
그래도 가진악의 귀가 제일 밝은 편이다. 수십 명이 이 술집으로 몰려오는 소리에 병기와 활 등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여러분 무기를 잡으시오!]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니 금나라 군사 차림을 한 사람들이 수십 명 보인다.
第 五 章. 바람을 가르는 접전
구처기는 그래도 강남 칠괴의 무공이 뛰어난 것을 보고 그나마 존중하면서도 일시적으로 초목대사에게 속아서 그랬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금나라 군사들까지 끼여드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초목대사, 강남 칠괴 여러분, 금나라 군사를 끌어댄다고 해서 내가 겁먹을 줄 알았소?]
[누가 금나라 군사를 끌어댔단 말이오?]
한보구가 항의를 했다. 그들 금나라 군사들은 완안열의 시종들이다. 그들은 왕자가 외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음을 보고 걱정이 되어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런데 취선루에서 지금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보니 완안열은 얌전하게 한 모퉁이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완안열의 앞으로 달려와 경례를 했다. 바로 이때 술집의 심부름꾼들은 표범 고기를 다 삶아 아홉 개의 그릇에 담아 초목대사만 빼고 술상에 나누어 놓았다.
완안열은 술상에서 일어나 가진악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가선생 정말 고맙습니다.]
이때 구처기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면서 말문을 열었다.
[꼴 좋다. 얼마든지 해보시오. 내 정말 용서하지 않으리다.]
가진악이 성급하게 나섰다.
[구도사, 오해하지 마시오.]
[뭐요? 날 보구 오해하지 말라구? 영웅인 줄 알았더니 그래 금나라 군사들의 도움을 받어?]
[우리는 그런 일 없습니다.]
[그럼 내가 장님이란 말이오?]
가진악은 눈먼 장님이다. 평소에 무엇이든지 다 참을 수 있지만 장님이라 놀리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쇠지팡이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 장님이면 어떻단 말이오?]
구처기는 더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왼손을 번쩍 들어 팍 하는 장풍 소리와 함께 금나라 병사의 천령개를 내리치니 병사는 짹소리도 지를 새 없이 뇌골을 쏟으며 죽어 넘어졌다.
[이것이 본때요!]
소매를 날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금나라 병사들은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소란을 피우며 벌서 그 중 몇 사람이 창을 비껴 들고 구처기의 등을 향해 찔렀다. 그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일일이 막아 버렸다. 마치 등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금나라 군사들이 또 대들려고 하자 완안열이 소리를 질러 멈추게 하고 가진악을 보면서 이렇게 제안했다.
[저놈의 도사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요. 자 우리함께 술이나 드시며 대책을 상의함이 어떠하올지?]
가진악은 그가 금나라 사람이여 금나라 군사의 우두머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리질렀다.
[꺼져!]
[뭐라고요?]
[우리 큰 형님께서 꺼지라신다.]
한보구가 말을 하면서 오른쪽 어깨를 치켜세워 그의 왼다리를 쳤다. 완안열은 넘어질 듯 몇 발짝 뒤로 물러서고, 강남 칠괴와 초목대사는 어울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묘수서생 주총이 맨 뒤를 따라 내려가다가 완안열의 옆을 스칠 때 또 부채로 어깨를 딱 쳤다.
[유인해 온 그 여자를 팔지 그래. 내가 사면 어떨까? 하하.]
완안열이 얼른 품속에 손을 넣어 보니 방금 가지고 나온 황금이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저들이 모두 각기 무예가 뛰어난데 자기와 이 수십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리고 또 포씨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 탄로 나게 되면 일은 더욱 시끄러워질 것만 같다. 생각할수록 겁이 앞선다. 할 수 없이 여인숙으로 돌아와 포씨와 병사들을 데리고 길을 재촉하여 금나라의 도성인 연경(지금의 북경)을 향해 떠났다.
강남 칠괴는 초목대사를 따라 가흥의 서쪽에 있는 법화사로 돌아와 조용한 방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 중이 향내 물씬한 차를 들여놓고 물러갔다.
초목대사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이 오해가 점점 깊어만 지는군.]
한소영이 묻는다.
[대사님, 그 사람이 말하는 두 여자는 누구이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니까?]
[내게 선배 한 분이 계신데 항주의 광효사 주지로 계시지.]
[아 그럼 고목대사 말씀인가요?]
가진악이 아는 체를 했다.
[그렇다오. 며칠 전 편지를 보내 왔지. 두 남자가 그것을 가지고 왔는데 뭐라더라? 그들이 나쁜 녀석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처지이니 내 절에 좀 숨겨 달라는 얘기요. 출가한 사람이야 자비롭게 살아야지. 또 선배님의 편지니 거절할 수도 없어 그러라고 했지. 그런데 그들이 온 지 이틀도 안 돼 장춘자가 찾아오지 않았겠소. 두 여자가 항주에서 이 광효사로 숨었다고 떼를 쓰는 게야. 내 정말 무슨 영문인지 나도 모르겠으니.]
전금발이 나섰다.
[그 사람 태도로 보아 틀림없이 또 찾아올 텐데 우리는 무슨 방비를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래.]
여덟 사람이 구처기에 대항할 방비책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구처기는 우가촌에서 곽소천과 양철심을 사귀어 알게 된 뒤로 항주로 돌아왔다. 매일 서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눈 구경에 취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청하방에 이르니 갑자기 수십 명의 관병들이 거리에서 줄행랑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흩어진 갑옷이며 투구, 부러진 활, 창들이 틀림없는 패잔병들이다.
구처기는 혼자 생각해 보았다.
'금나라와 싸우는 것도 아니요, 또 근처에 도둑이 날뛴다는 말도 듣지 못했는데 관병들이 도대체 어쩌다 저 모양이 되었을꼬?'
거리의 백성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호기심이 일이나 멀찌감치 떨어져 관병을 뒤쫓아가 보니 그들은 위과의 제 6 지휘소 안으로 들어갔다. 밤에 관병을 한 놈 잡아 가지고 골목길로 나와 물어 보았다. 차디찬 보검의 시퍼런 칼날이 자기 목에 걸린 것을 보고 소스라쳐 깨어났으니 일을 사실 그대로 고해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처기는 깜짝 놀랐다. 그 관병의 얘기를 들어보니 곽소천은 죽었고 양철심은 중상을 입고 십중 팔구 죽었을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구처기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졸병이야 상사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 죽여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네놈의 상관이 어느 놈이냐?]
[음, 우리를 지휘하는 그 사람....성은 단가요....이름은 천덕이라 하옵니다.]
구처기는 사병을 풀어 주고 단천덕을 찾기 위해 지휘소 안의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지휘소 앞 높다란 나무 위에 사람의 수급 하나가 걸렸다. 구처기는 까무러칠 뻔했다. 그 수급은 사귄 지 얼마 안되는 곽소천의 머리였기 때문이다.
<구처기야 구처기야 이 두 분의 친구는 호의로 네게 술대접을 했는데 너는 그들을 죽이고 집안을 망쳐 놨구나. 네가 원수를 갚지 않으면 어찌 대장부 남자라 할 수 있겠느냐.>
구처기는 분하고 원통한 나머지 손을 번쩍 들어 장풍으로 지휘소 앞에 있는 기 게양대의 돌 받침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그는 곽소천의 수급을 떼어 가지고 내려와 서호 부근에 칼로 무덤을 파 시체를 묻고는 무덤 앞에 꿇어 통곡했다.
[제가 일찍이 두 분의 후손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겠다고 언약했나이다. 만일 두 분의 후손을 영웅으로 가르치지 못한다면 후일 무슨 면목으로 황천에서 뵈올 수 있겠나이까?]
그는 이틀 동안이나 계속해서 위과의 제 6 지휘소에 뛰어들었지만 단천덕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놈은 안일을 탐해서 군기를 지키지 않고 영내에서 사병들과 동고 동락하지 않는 녀석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3일째 되는 날 새벽 구처기는 지휘소의 정문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단천덕이란 놈 어디 있느냐? 이놈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단천덕은 곽소천의 수급을 잃어버린 일로 마침 영내에서 곽의 부인 이평을 족치고 있었다. 그때 영 밖에서는 관병들과 구처기가 어울려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단천덕이 창 밖으로 내다보니 위풍 당당한 도사 한 사람이 두 명의 관병을 잡고 휘두르고 있었다. 얻어터지는 놈마다 나 죽는다고 아우성이다. 지휘소에 있는 군좌 녀석이 활을 쏘라고 했지만 이 도사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단천덕이 화가 나서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나섰다.
[감히 어느 놈이 거역을 하는 게냐?]
한 칼에 구처기의 허리께를 찔렀다. 구처기는 군관이 나타난 것을 보고 두말할 것도 없이 왼손을 뻗어 단천덕의 팔을 꽉 잡고 소리 질렀다.
[단천덕 그놈 어디에 있느냐?]
단천덕은 팔이 쑤시고 전신이 뻣뻣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꾀가 번쩍 떠올랐다.
[도사님, 단천덕 나리를 찾으시는군요? 그 사람 지금 서호의 배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아마 하오에나 돌아오실 겝니다.]
구처기가 정말로 알아듣고 손을 풀자 단천덕이 두 명의 사병에게 명령을 내린다.
[이 도사님을 모시고 서호에 나가 단나리를 찾아보거라.]
사병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해 있으려니 단천덕의 재촉이 성화같다.
[빨리 빨리 가거라 도사님 화나실라.]
두 놈이 그제야 눈치를 채고 몸을 돌려 앞장을 서니 구처기도 따라 나섰다.
단천덕이 어디 더 머뭇거릴 수 있으랴. 급히 몇 명의 군사와 이평을 데리고 웅절의 제 8 지휘소로 달렸다. 그 지휘소의 책임자와는 가까운 술 친구다.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제 8 지휘소의 책임자는 군사를 데리고 도사를 잡으러 가자고 수선이다. 이때 영 밖이 소란스럽더니 한 병사가 달려와 도사가 왔다고 보고한다. 틀림없이 길잡이를 하던 사병이 견디지 못하고 단천덕의 행방을 알린 모양이다.
단천덕은 놀란 새 가슴이 되어 몇 명의 수종과 이평을 데리고 도망쳤다. 이번에는 성 밖에 진을 친 전첩(全捷)의 제 2 지휘소다. 아마 전첩은 그래도 외딴 곳이라 구처기가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구도사에게 잡혔던 팔이 아프기 시작한다. 부었나 했더니 점점 더 부어 올라온다. 영내에 접골하는 의사가 있어 불러다 보이니 뼈가 부러졌단다. 접골을 한 후에도 무서워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전첩 제 2 지휘소에 서자 버리고 말았다. 깊은 잠에 취해 있는데 영 밖의 군사들이 떠들썩하다. 영문을 지키던 군사가 어디로 달아났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천덕은 깜짝 놀라 잠자리에서 뛰어 일어났다. 그 도사가 잡아갔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어느 군영에 숨든지 그 도사는 자기를 찾아내고 말 것이니 싸울 수도 없고 숨을 수도 없고 장차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그 도사가 자기를 찾는 것은 아마도 곽소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평을 데리고 있다가 위급할 때 쓰면 도사는 함부로 대들지 못하리라. 이평에게 억지로 군복을 입히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빠져 나와 캄캄한 밤중, 엎어지고 고꾸라지며 광화사로 달렸다.
그의 백부는 출가한 중으로 법명은 고목, 광화사의 주지로 있는데 평소 단천덕의 위인을 못마땅하게 여겨 왕래도 없이 지냈는데 이 밤에 달려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단천덕은 무공은 시원치 못하지만 잔꾀만은 대단한 사람이다. 오는 도중 거짓말할 것을 미리 생각해 두었었다. 고목화상은 법화종 남종에 속해 있는데 출가 이전 군대의 군관으로 있을 때부터 무공의 기초를 든든히 닦아 놓고 있었다. 출가 후에도 부지런히 무예를 닦기 20 여 년 그 공력은 더욱 정진을 거듭했다. 그는 출가하기 전 세속에서의 이 조카의 위인이 교활함을 잘 아는 터라 싸늘하게 대했다.
[무엇 하러 왔느냐?]
단천덕은 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지금 억울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백부님께서 구해 주십시오.]
[네놈이 영내의 군관인데 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랴?]
단천덕은 자기가 잘했다고 말하면 백부는 틀림없이 믿지 않을 것을 잘 아는지라 얼굴에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한 나쁜 도사에게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어 갈 곳이 없습니다. 백부님께서 살려 주십시오.]
그가 가련한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듣고 고목은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
[그 도사가 네 뒤를 좇아 어쩌겠다는 거냐?]
단천덕은 다시 한 번 땅 위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죽어 마땅합니다. 그전에 제가 친구 몇 명과 함께 청랭교 서희춘루 아래의 남와자에 놀러 갔다가....]
고목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원래 송나라 기생집을 와사(瓦舍)라 한다. 기왓장처럼 쉽게 모였다 흩어진다는 뜻이다. 와해(瓦解)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말이다. 송나라 조정이 남쪽으로 온 뒤 군심을 달래기 위해 항주 성내와 성 밖 여러 곳에 이 와사를 차렸다.
[제가 평소에 좋아하는 기생이 있어서 그날도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왠 도사가 들어오더니 기어이 내 여자를 데리고 놀겠다고....]
[뭐야? 출가한 사람이 그 따위 장소에 가다니?]
[글쎄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엔 조롱을 하면서 나가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 도사 어지나 사나운지 오히려 저를 보고 욕을 해대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야단을 치지 않겠습니까? 나원 참!]
[뭐야? 죽여 버리겠다고?]
[그 도사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머지 않아 금나라 병사들이 도강해 오면 송나라 관병을 몽땅 죽여 버릴 거라고요.]
[뭐야? 그 따위 말을 지껄여?]
[역시 제 성질이 고약했습니다. 싸움을 했는데 저는 그의 적수가 못 되더군요. 도망을 하는데도 계속 쫓아다녀 피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백부님께서 구해 주여야겠습니다.]
[나는 출가한 사람이라 그 따위 일에 참견할 바 없어.]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고목은 옛날 동생을 생각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구나. 며칠 이곳에 숨어 지내거라. 그러나 절대로 다른 일을 저지르면 안된다.]
단천덕은 고마와 수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군관을 지내는 놈이 이렇게까지 무용지물이니 한심하구나!]
고목은 탄식을 했다. 이평은 단천덕의 협박 때문에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찍 소리도 못했다. 이날 하오 어린 중 하나가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 들어와 고목에게 아뢰었다.
[밖에 도사가 하나 와 있는데 어찌나 무섭게 구는지 모르겠습니다. 단나리를 내놓으라고 야단입니다.]
고목이 단천덕을 불러오도록 했다. 단천덕은 사시나무 떨듯 했다.
[그 사람입니다. 바로 그 도사예요.]
[그래 그 도사가 어느 파에 속한 도사라더냐?]
[모르겠어요. 어느 시골에서 온 도사인 모양이에요. 무공이 얼마쯤인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어깨 힘이 어찌나 센지 저로서는 당해 낼 재간이 없더군요.]
[좋다. 내가 나가 보마.]
가사를 걸쳐 입고 대웅전으로 나갔다.
구처기는 내전으로 뛰어들려 하는 중이었다. 고목이 구처기 앞으로 다가서서 내공을 써 가볍게 한 번 어깨를 밀었다. 구처기를 절 밖으로 내밀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밀고 보니 꼭 목화더미를 미는 것 같다. 아차 이것 잘못되나보다 생각되어 내공을 거두려 했지만 벌써 늦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미끄러져 펑하는 소리와 함께 절 뒤에 있는 신상에 부딪치고 우지끈하며 신상이 반이나 부러졌다.
고목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도사 무공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어깨 힘이 대단한 것도 아닌데.'
두 손을 열 십자로 모으고 물었다.
[도사께서 저희 절을 찾아 주셨는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단모라는 악당을 찾아왔소.]
고목은 자기가 이 도사의 상대가 못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출가한 사람이야 자비심 하나로 사는데 왜 속인처럼 대하십니까?]
구처기는 아랑곳없이 내전을 향해 큰 걸음으로 들어갔다. 단천덕은 이때 벌써 이평을 데리고 밀실에 숨어 버렸다. 광화사는 염불을 드리러 오는 사람이 굉장히 많은 절이다. 때는 봄. 염불을 올리는 계절이라 사방에서 모여든 선남 선녀들이 들끓었다. 구처기는 샅샅이 뒤져 볼 수도 없어 물러났다. 고목은 중을 보고 산문까지 좇아 나가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단천덕이 밀실에서 나오자 고목은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이놈아! 그게 어디 시골 도사냐?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벌써 죽었을 게다.]
단천덕은 할 말이 없었다. 좇아 나갔던 중이 돌아와 도사가 가버렸다고 아뢰었다.
고목이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켰다.
[그래, 도사가 뭐라더냐?]
[아무 말도 없었나이다.]
[그것 참 이상하다 아무 말 없다니. 음, 그가 하산할 때 무슨 이상한 행동을 취하지 않더냐?]
[없었어요. 산모퉁이 돌사자 옆에 가더니 피곤한지 한참 동안 기대서 쉬다가 웃으며 가버리던데요.]
[이거 큰일났구나. 수백 년 된 보물인데.]
느닷없이 단천덕의 따귀를 때린다.
[오늘 네놈 때문에 다 망쳤다. 이놈아!]
단천덕과 중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단천덕의 뺨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단천덕은 볼을 어루만지고 중은 재빠른 걸음으로 물러났다. 고목화상은 산 아래 돌사자를 멍하니 바라다보고 있었다.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백부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게 다 인과 응보야. 이 돌사자는 남북조 시대에 만들어진 거야. 양무제가 당시 유명한 장인을 불러 조각한 것인데 광화사에서 보물로 모셔 왔네.]
연방 한숨만 올려 쉬고 내려 쉰다.
단천덕은 도시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돌사자를 보니 아무 이상도 없는데 백부님은 무엇 때문에 저러실까? 손을 뻗어 돌사자를 만지니 귀와 코가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진다. 단천덕이 깜짝 놀라 손을 움츠리고 고목을 바라다보았다.
[이 돌사자는 벌써 그 도사가 내공을 써서 부숴 버렸다.]
중이 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른 돌사자를 어루만지다 힘을 약간 주니 그대로 수 없는 돌덩이로 부서져 돌무더기만 남았다.
[아니, 이게 웬일일까?]
[이 도사의 내공이 무지무지하구나. 돌 사자야, 돌 사자야, 이 산문을 지키기 수백 년, 수고가 많았구나 잘 가거라 잘 가.]
고목은 서글픈 눈치이다. 고개를 돌려 단천덕을 노려보았다.
[몸에 이렇게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너 같은 망나니와 더불어 계집 때문에 싸움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이놈아!]
단천덕은 무서워 아무 말도 못했다.
[나와 함께 공부한 초목대사의 공력이 나보다 십 배는 나을 거다. 혹시 그 도사와 상대가 될 수 있을지 모르니 그쪽에 가서 좀 피해 보거라.]
단천덕은 구처기의 신공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는 터라 더 할 말이 없었다. 편지를 한 통 받아 쥐고 밤을 낮 삼아 초목대사가 주지로 있는 법화사로 달렸다.
초목은 그가 데리고 온 사람이 여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 또 형님으로 모시던 고목대사의 청탁이니 어쩔 수 없이 절 내에 머무르도록 했다. 그런데 구처기는 신출귀몰 뒤를 밟아 후원에서 이평을 찾아냈다.
그의 눈은 정확했다. 이평을 보자마자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껴 뛰어내려와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을 때 단천덕은 벌써 이평을 끌고 땅굴 속에 숨어버렸다. 구처기는 포석약도 이곳에 함께 숨어 있겠거니 생각되어 초목에게 무조건 사람을 내놓으라 했고, 또 자기 눈으로 분명히 본 사실이니 초목이 제아무리 뭐라고 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초목도 구처기의 무공에는 자기가 적수가 못 됨을 잘 알고 있었고, 강남 칠괴와는 평소 잘 아는 사이라 취선루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것이다. 구처기가 들고 온 구리 항아리는 바로 법화사에서 들고 온 것이었다.
그래서 초목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정을 모두 털어놓았다.
[내가 듣기로는 장춘자 구처기의 무공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그 이름이 헛되지 않더군요. 또 그가 무리하게 날뛸 사람 같지도 않은데 이러는 걸 보면 틀림없이 어떤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초목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전금발이 나섰다.
[그럼 고목대사가 추천해 보낸 그 두 사람을 불러다가 자세히 한번 물어보면 어떨까요?]
[그게 좋겠군. 나도 아직 그들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니.]
사람을 시켜 단천덕을 불러오게 하려는데 가진악이 입을 열었다.
[초목대사. 그 도사 틀림없이 곧 이리로 올 겝니다. 아까 술집에서와는 다를걸요. 우리가 금나라 병사와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이젠 사정 안 볼걸요]
[가형 말씀은 어쨌든 우선 오해를 풀도록 하자는 뜻이지요?]
[만일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면 부득불 무공으로 겨룰 수밖에 없겠는데 일대 일로는 상대도 되지 않고, 이거 골치가 아프군.]
그러자 주총이 나섰다.
[그럼 한꺼번에 대들 수밖에 없지 뭘 그래.]
[여덟 사람이 한 사람을 쳐? 좀 떳떳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보구 못마땅한 눈치다. 그러자 전금발이 그게 아니란다.
[우리가 뭐 그의 생명을 뺏자는 게 아니고 다만 기를 꺽어 초목대사의 얘기를 들어보자는 게지.]
[만일 이 소문이 강호에 퍼진다면 좀 곤란해요. 초목대사와 강남 칠괴가 한 사람을 놓고 여럿이 상대했다더라, 괜스레 이름에 먹칠만 하려고요?]
한소영까지도 반대하는 눈치다.
여덟 사람의 의논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대전 쪽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커다란 종이 서로 부닥치는 듯 귓속이 윙윙거리기만 한다.
가진악이 벌떡 일어서더니 그 도사가 왔다고 소리 지른다. 여덟 사람이 대전을 향해 뛰는데 또 한 번 굉장한 소리가 들리고 쇳조각 부서지는 금속성이 난다. 보니 구처기는 구리 항아리로 대전에 있는 쇠로 만든 종을 치고 있었다. 몇 번 치지 않았는데도 항아리는 벌써 금이 나 있었다.
한보구와 한소영은 사촌간. 일곱 사람 가운데 성질이 제일 급한 편이다.
[누이, 우리 남매가 먼저 나서지.]
쏴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에 차고 있던 금룡편(채찍)을 손에 쥐고 오룡파미의 솜씨로 구처기의 오른팔을 칭칭 감아 버렸다. 이때 한소영도 장검을 뽑아 검광을 물처럼 뿜으며 구처기의 등을 찔렀다. 구처기가 오른손을 돌리니 땅 소리와 함께 금룡편의 끝은 항아리의 중간을 때리고 동시에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뒤의 칼을 살짝 피했다.
옛날 오와 월이 싸울 때 오왕 휘하의 대장 오자서가 있었는데 용병에 능했고 훈련시킨 병사들이 모두 정병이었다. 월왕 구천은 자기 병사들의 무예가 적국에 미치지 못함을 보고 우울해 있는데 어느 날 홀연히 한 미모의 처녀가 나타났다.
검술이 대단함을 본 구천은 크게 기뻤다. 그래서 그녀에게 월나라 병사들에게 검법을 가르쳐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가흥은 오,월의 접경. 두 나라의 용병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월녀 검법은 이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한소영은 이 검법을 배운 뒤 연마에 연마를 거듭하여 원래의 36 육로를 49로로 크게 발전시켰다. 그래서 강호에서는 그녀에게 월녀검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몇 차례의 공격을 받은 구처기는 그녀의 검법이 오묘함을 알아챘다. 그녀의 검법이 빨라지면 구처기의 솜씨도 더욱 빨라졌다. 구리 항아리로는 한보구의 금룡편을 막아내면서 왼팔을 재빨리 놀려 한소영의 보검을 뺏었다. 순식간에 한소영이 불상 옆까지 쫓겼다. 남산초자 남희인과, 소미타 장아생이 각기 멜대와 소 잡는 칼을 들고 끼여들었다. 남희인은 아무 말 없이 멜대만 휙휙 바람을 내며 휘두르고 있고, 장아생은 강남의 사투리가 섞인 속된 말로 지껄이며 대들고 있었지만 구처기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혼전이 벌어진 가운데 구처기의 장풍이 날아 장아생의 면전을 때린다. 장아생이 고개를 뒤로 젖히기는 했지만 구처기의 공격은 가짜였다. 아차 하는 순간 구처기의 발이 번개처럼 날고 장아생의 팔이 찌르르하며 돌고 있던 칼이 떨어졌다. 장아생의 권술은 병기를 들고
있을 때보다 강하다. 칼을 놓치기는 했지만 태연자약 왼발을 꺾으며 오른손의 장풍은 허점을 치고 후 하는 소리와 함께 왼손 주먹으로 공격을 하자 구처기가 찬사를 발했다.
[좋다!]
[아깝구나! 아까워!]
[무엇이 아깝다는 게요?]
[무공은 이렇게 훌륭한데 타락하다 못해 적에게 투항을 하다니.]
장아생은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병신 같은 도사가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휙휙휙 연거푸 세 번이나 주먹으로 공격을 하자 구처기는 몸을 움츠리며 구리 항아리를 돌리니 계속해서 주먹은 항아리만 땅땅 치고 말았다.
묘수서생 주총은 네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로 하는데도 애만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전금발에게 눈짓, 두 사람이 양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전금발이 쓰는 무기는 커다란 쇠저울이다. 그런데 이놈의 저울이 또 걸작이다. 저울대는 몽둥이나 지팡이 역할을 하고 낚시바늘 같은 저울 고리는 날아다니며 사람을 걸어 당기는데, 마치 나는 갈퀴 같고, 저울 추는 구슬처럼 꿴 그런 추다. 그래서 그의 병기는 세 가지 역할을 함께 하고 있다. 주총은 급소를 찌르는 명수이다. 그의 부채는 급소를 찌르는 데 쓰이는 것. 빈틈이나 공간을 찾아 찌른다. 각자의 병기가 춤을 추며 상대의 급소를 찾는다.
구처기는 구리 항아리를 빙빙 돌리고 있는데 꼭 커다란 방패 같다. 몸을 가리고 있으니 여러 사람의 병기가 쑤시고 들어갈 때가 없다. 그러면서 왼손으론 계속 반격이다. 초목은 더욱 맹렬해지는 싸움을 보면서 시간을 끌면 분명히 누군가 부상할 것 같아 걱정이다.
[여러분 손을 멈추고 내 말 한 마디만 들어보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귀에 이 말이 들릴 리가 없다.
혼전이 벌어진 가운데 강한 장풍이 장아생의 어깨를 향해 난다. 어찌나 빠른지 피할 길이 없을 것 같다. 이를 본 초목이 소리를 질렀다.
[도사님 손을 거두시오!]
그러나 구처기는 여섯 사람과 어울려 결사적인 대결을 하면서 상대방이 모두 보통이 아님을 알았다. 시간을 끌다간 자기가 견디지 못할 것 같다. 게다가 아직도 두 사람이 옆에서 호시 탐탐 언제 대들지 모른다. 아무리 자기의 무공이 강하다 하더라도 결국 이 강남의 고찰에서 죽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 이때 천재일우의 빈틈이 발견된 것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있는 힘을 다해 장풍을 날렸다.
장아생은 쇠로 만든 옷을 입은 것처럼 튼튼한 피부의 소유자다. 소를 잡을 때도 늘 옷을 벗은 채 사나운 소와 투우를 즐겼다. 꼭 쇠가죽을 뒤집어쓴 것처럼 단단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구처기의 장풍은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니다.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는 처지다 어깨에 모든 힘을 집중하여 받아 내려 했다. 그런데 우두둑 소리와 함께 어깨가 부러지고 말았다. 주총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채를 들어 구처기의 선기혈을 찔렀다. 이 솜씨는 공격을 막자는 것이다. 혹시 구처기가 이미 부상을 입은 장아생에게 재차 공격을 가할까 봐서다. 구처기는 장아생이 쓰러지는 것을 보자 더욱 힘이 솟았다. 병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한 손의 장풍만으로도 연속 공격이 치열하다.
전금발이 아얏 소리를 지르는데 저울추가 벌써 구처기의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구처기가 잡아당기자 전금발이 역부족으로 끌린다. 구리 항아리를 옆으로 기울여 남희인과 주총의 얼굴을 막으면서 왼손의 장풍으로 전금발의 천령개를 위로부터 내리찍었다.
한보구와 한소영이 깜짝 놀라 자기들 처지를 돌볼 새 없이 날아올라 구처기의 머리 위를 공격했다. 구처기의 한쪽 어깨가 기우는 듯 하자 전금발이 이 틈을 타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구처기의 발길에 채여 고꾸라진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초목은 원래 구처기와 싸움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청해온 친구들이 부상당한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도포의 소매 주머니에서 짧은 나무 토막을 꺼내 구처기의 옆구리를 눌렀다. 구처기는 이놈의 중이 급소를 찌르는 명수임을 아는지라 정신을 바짝 차려 대항했다. 가진악은 눈은 멀지만 벌써 다섯째와 여섯째가 부상당한 것을 알았다. 여러 사람의 병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쇠지팡이를 들고 끼여들었다.
전금발이 입을 열었다.
[큰 형님, 철릉(마름모꼴로 생긴 쇳조각)으로 치세요. 먼저 진(晋) 위치를 치고 다음에 소과(小過)를 쳐요!]
쉭쉭 소리에 두 개의 암기가 앞뒤로 구처기의 이마와 다리를 향해 날았다. 구처기는 깜짝 놀랐다. 눈 먼 장님이 암기를 쓰다니, 그리고 위치가 이렇게 정확할 수 있을까? 듣도보도 못한 희한한 일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복희씨의 64괘의 방위를 알려는 준다지만 이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구리 항아리를 옆으로 숙이자 땅땅 그 철릉은 항아리 속으로 떨어졌다.
이 철릉은 가진악의 비장의 무기이다. 사면이 날카롭고 모양은 호수에서 자라는 마름꽃 잎과 같다. 무겁고 정확하기 이를 데 없다. 전금발이 계속 알려 주고 있다.
[이번에는 중부(中孚)를, 또 리(離) 방위를! 좋아요. 이젠 명이(明夷)를 치세요.]
가진악은 연속해서 철릉을 던지고 구처기는 한쪽으로 몰려 손 쓸 여유도 없다. 그러나 맞히지는 못한다. 가진악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여섯째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미리 방비를 하니까 맞히지 못하는 것이라고.
이때 전금발의 목소리는 모기소리처럼 기어들어가기만 한다. 다친 곳이 몹시 아픈지 신음 소리까지 들린다. 장아생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옴쭉 달싹하지 않는다.
[쳐요 쳐! 이번엔 동인(同人) 방위를....]
전금발이 계속 알려 주었지만 가진악은 그 말을 좇지 않고 있다. 두 손을 번쩍 들어 네 개의 철릉을 일제히 던져 두 개는 동인 오른쪽의 절(節)과 손(損) 방위를 때리고, 다른 두 개는 동인 왼쪽의 풍(豊)과 리(離) 방위를 쳤다. 이때 초목과 한소영은 오른쪽에 있었는데 구처기가 외쪽 다리를 크게 옮겨 동인 방위를 피했다. 그런데 가진악은 꾀를 부린 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구처기는 오른쪽 어깨를 맞았고, 손(損) 방향으로 날아간 철릉은 한소영의 등을 때린 것이다. 가진악은 놀랍고 반가웠다.
[누이. 빨리 이쪽으로 와요.]
한소영은 큰 오빠의 이 무기에 극약이 묻어 있음을 잘 안다. 지금 상처가 아픈 것은 아니지만 이제 독이 온몸에 퍼지면 큰일이다.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는다. 평소에 대범하기로 유명하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더 버틸 수는 없는 일. 재빨리 빠져나갔다. 가진악은 주머니에서 노란 환약을 꺼내 그녀의 입에 넣어준다.
[빨리 후원으로 가서 땅 위에 누워요. 움직이면 큰일나니까. 가만히 있어요. 이따 내 치료해 줄 테니.]
한소영이 뛰어가려고 하자 가진악이 또 소리를 질렀다.
[뛰지 말아. 조용히 걸어요.]
한소영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빨리 뛰면 그만큼 독이 쉽게 전신에 퍼지는 것이다. 일단 독이 퍼지고 나면 치료를 해봐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천천히 걸어 후원으로 갔다. 구처기는 철릉을 맞았으나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혼전을 벌이는 가운데 뛰지 말라는 가진악의 말을 듣고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상처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란 것이다. 분명히 독이 묻은 암기이다. 더 싸울 수가 없어 있는 힘을 다해 남희인의 면상을 주먹으로 갈겼다.
남희인은 공격이 맹렬함을 보고 말뚝처럼 우뚝 선 채 멜대를 휘둘러 면상을 막았다. 구처기는 주먹을 회수할 사이 없이 멜대의 중앙을 치고 말았다. 남희인은 전신이 오돌오돌 떨리며 두 손의 마귀가 찢어지고 선혈을 흘리며 멜대를 놓치고 말았다. 이 주먹은 구처기가 죽을 힘을 다 내어 때린 것이다. 남희인은 내상을 입고 비틀비틀 입으로 피를 토했다.
구처기는 또 한 사람에게 부상을 입히기는 했지만 어깨가 점점 더 아프고 쑤셔서 구리 항아리를 들고 있는 것도 힘에 겨웠다. 큰 소리를 지르며 발길을 옆으로 찼다. 한보구는 펄쩍 뛰어 피했다.
[어딜 달아나느냐!]
소리를 지르며 오른손을 밀자 구리 항아리가 위에서부터 거꾸로 떨어져 내려온다. 한보구는 허공 중에서 힘을 쓸래야 쓸 수도없이 곤두박질쳐 한 바퀴 물구나무를 선 채 떨어지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구리 항아리가 한보구를 덮쳐 씌웠다. 구처기는 손에 장검을 빼 든 채 몸을 솟구쳐 커다란 종이 매달린 줄을 끊어 버리고 왼손의 장풍으로 밀어붙이니 1천여 근이 넘는 무거운 종이 항아리 위로 떨어졌다. 제아무리 한보구의 신력이 대단하더라도 이제 기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구처기는 이때 얼굴이 창백해지고 이마에서는 콩알만한 땀방울이 쉬지 않고 뚝뚝 떨어졌다. 가진악이 소리를 질렀다.
[빨리 칼을 버리고 항복해라. 더 시간을 끌면 생명을 보전치 못하리라.]
구처기는 만일 잘못하다가 큰일나리라 생각이 되어 장검을 휘두르며 밖으로 내달렸다.
강남 칠괴 가운데 부상을 입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은 가진악과 주총뿐이다. 구처기가 달아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어서 가진악은 쇠지팡이를 흔들며 길을 막았다.
第 六 章. 취선루에서의 약속
구처기는 밖으로 뛰어나가다가 손에 쥔 칼로 필사적인 힘을 다해 가진악의 얼굴을 향해 찔렀다. 가진악은 칼소리를 듣고 쇠지팡이를 들어 막았다. 땅 부닥치는 소리와 함께 구처기는 하마터면 칼을 놓칠 뻔했다.
'아니, 이 소경의 내공이 어찌 이리 센가? 공력이 나보다 낫단 말인가?'
다시 한 번 칼을 들어 찔러 보고야 상대의 공력이 센 것이 아니라 독릉을 맞은 뒤 자기 힘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칼을 왼손에 바꾸어 쥐고 아직 적을 맞아 써 본 일이 없는 구상검법(俱傷劍法)의 솜씨를 발휘했다.
검광이 번쩍번쩍하며 가진악,주총,초목 등 세 사람의 급소를 노리고 무방비 상태의 결사적 공격만을 감행했다.
원래 <구상검법>은 너 죽고 나 죽자는 뜻이다. 적을 상대로 할 때 적이 나보다 강해 자기의 생명이 위태로우면 써 보는 검법이다. 이 검법의 모든 공격은 상대의 급소만을 노리는 것. 그 위력은 무섭기 짝이 없고, 자기의 생명을 완전히 내놓은 상태에서 싸우는 것으로 구처기가 산에서 내려온 뒤 아직까지 자기보다 강한 적을 만난 일이 없기에 써본 적이 없었다. 이제 몸은 중독이 되고 또 무림에서는 이름난 고수를,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을 상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앞뒤를 가릴 것 없이 써보는 솜씨다.
10 여 합이나 서로 싸워 겨우 가진악의 다리를 찌를 수 있었다.
[가형. 우리 이 도사를 가도록 내버려둡시다.]
초목이 가진악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는 순간 구처기는 장검으로 그의 오른쪽 늑골을 향해 깊숙이 찔렀다. 초목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때 구처기도 힘이 빠져 비틀비틀 쓰러지려고 했다. 묘수서생은 두 눈이 충혈되 채 욕을 퍼부으며 대들었다. 가진악은 아무래도 눈 먼 장님이라 구처기가 휘둘러 대는 칼 소리의 허허실실에 말려들어 칼에 찔러 엎어지고 말았다.
주총은 계속 구처기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이 개 같은 도사야. 도둑놈 같은 도사야. 네 몸에 독이 퍼질 대로 다 퍼졌다. 몇 발짝이나 가나 어디 두고 보자.]
구처기는 두 눈을 부릅뜨고 왼손에 칼을 든 채 비틀거리며 주총을 쫓았다. 주총의 경공이 또한 볼 만하다. 대전에 있는 불상을 끼고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구처기는 이제 더 쫓아다닐 기력도 잃었다. 한숨을 쉬며 발을 멈췄다. 눈앞이 어질어질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보아도 소용이 없다. 절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보았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었다. 이때 딱하는 소리와 함께 주총이 벗어 던지 신발이 그의 등을 때렸다. 꽤 아프다. 또 한 번 딱하는 소리가 뒤통수에서 났다. 주총이 불상 앞에 놓여 있는 목어를 집어던진 것이다. 구처기이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라면 이렇게 얻어맞고는 죽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제 끝장이로구나. 장춘자가 오늘 이 더러운 녀석들 손아귀에서 죽는구나.'
있는 기력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고 펄쩍 뛰었다가 발에 힘이 빠져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먼저 이놈의 도사를 묶어 놓고 보자.'
주총은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진 구처기의 가슴에 난 혈도를 막았다. 그런데 구처기의 왼손이 번쩍 하자 아이쿠 큰일났구나 싶어 급히 막아 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배 위로 무시무시한 힘이 쏟아져 들어왔다. 몸이 붕 뜨더니 뒤로 난다. 사람이 미쳐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입에서 선혈이 쏟아져 나온다. 구처기가 죽을 힘을 다해 장풍을 날린 것이다. 주총이 막아 낼 재간이 있을 리 없다.
법화사의 중들이 무예를 알 리 없다. 혼비백산하여 모두들 숨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한참이나 지나서도 아무 동정이 없자 비교적 담이 큰 중이 머리를 내밀어 두리번거리다 기겁을 했다. 온 천지가 피투성이요, 시체만 쓰러져 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허겁지겁 단천덕을 찾으러 다녔다.
단천덕은 이때 땅굴 속에 숨어 있다가 다 죽었다는 중들의 말을 듣고도 혹시 구처기가 살아 남지 않았을까 두려워 다시 가서 똑똑히 보고 오라고 했다. 도사도 분명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이평을 끌고 대전으로 나왔다. 단천덕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이 개 같은 도사 때문에 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내 네놈을 깨끗이 염라대왕께 보내 주마.]
뽑아 든 칼로 막 찌르려고 하는데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초목이 이를 보았다.
[그 사람을 해치면 안 되오.]
[뭐라고요?]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오. 성질이 급해서 그렇지.... 오해가, 오해 때문이오.]
[좋은 사람이라고요? 죽여 놓고 보지요.]
초목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말을 안 듣겠단 말인가? 그 칼을 거두지 못해!]
[뭐라고? 날더러 칼을 거두라고! 하하하.]
칼을 번쩍 들어 구처기의 머리를 내리치려는데 이평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또....또 사람을 죽이려 해요?]
초목은 화가 나서 있는 힘을 다해 손에 쥐고 있던 나무 토막을 단천덕을 겨누어 힘껏 던졌다. 단천덕이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겨를이 없었다. 초목이 던진 나무 토막은 단천덕의 입 언저리를 정통을 맞혔고 이빨이 세 대나 부러져 나갔다. 단천덕은 아파 죽을 지경이다. 은인이고 뭐고 생각할 여지도 없다. 한칼에 초목을 박살내려고 칼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옆에 있던 중이 이를 보고 죽을 힘을 다해 단천덕의 엉덩이를 잡아끌고, 다른 중 하나는 단천덕의 팔을 꽉 물었다. 단천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두 중을 찔러 죽이고 말았다.
장춘자, 초목, 강남 칠괴는 모두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모두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다. 눈만 멀거니 뜬 채 이 광경을 바라다보고 있을 뿐, 이평만이 안절부절못하여 소리를 지른다.
[이 도둑놈아. 빨리 손을 멈추지 못해?]
그녀가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단천덕의 부하이거니 생각했다. 가진악은 눈 먼 소경이기는 하지만 귀만은 예민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여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초목대사! 당신이 우리를 죽이려 한 것이나 다름없소. 절에는 여자가 숨어 있었던 게 사실이오.]
초목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깨우쳐지는 바가 있었다. 일시의 불찰로 이 짐승만도 못한 녀석에게 걸려들어 친구를 팔아먹은 걸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화도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두 손을 땅에 버틴 채 일어서며 단천덕을 향해 박치기를 했다. 단천덕이 살짝 몸을 비키자 초목은 그대로 대전의 기둥을 받고 머리가 터져 죽어 넘어졌다. 단천덕은 혼비백산하여 더 머물래야 머물 수도 없어 이평을 끌고 밖으로 내달렸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나는 안 갈래요.]
안타깝게 부르짖는 소리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절에 남아 있던 중들은 주지가 죽자 땅을 치며 대성 통곡 울어댔다. 그리고는 부상당한 사람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업어다 침대에 뉘었다. 그런데 커다란 종 아래에 있는 구리 항아리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도대체 그 안에 무슨 괴물이 들어 있기에 그럴까? 마침내 담이 큰 10 여 명의 중들이 달려들어 튼튼한 밧줄을 구해 종을 다시 매달고 항아리를 들추니 안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온다.
중들이 기겁을 해 사방으로 달아났다.
그것은 마왕신 한보구였다. 그는 구리 항아리에 들 씌워진 채 그 뒤 어떻게 됐는지 알 리가 없다. 초목은 죽었고 자기의 의형제들은 모두 부상을 입은 것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가진악은 두 다리에 칼을 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신은 말짱했다. 품속을 더듬어 해독약을 꺼내 중에게 주며 구처기와 한소영에게 먹이라고 하고는 한보구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한보구는 말을 다 듣고 나더니 단천덕을 잡아죽이겠다며 밖으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가진악이 이를 말렸다.
[그놈이야 서서히 잡아 죽여도 늦을 것 없으니 우선 부상을 입은 형제들이나 구할 생각을 하시구려.]
여러 사람들 가운데 그래도 중상을 입은 것은 주총과 남희인 두 사람뿐이고 장아생은 팔뚝이 부러져 쓰러지기는 했지만 이제 정신은 멀쩡했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은 치료를 할 때까지 절에 있기로 했다. 한편 법화사 내에 있던 중들은 관가에 통보하고 또 사람을 항주에 있는 광화사의 고목대사에게 보내어 사실을 알렸다. 초목대사의 장례를 끝내고 뒷일도 수습했다.
어수선한 뒤치다꺼리로 며칠이 지났다. 구처기와 한소영의 중독도 많이 풀렸다. 구처기는 의술에 능하고 내공이 깊은 사람이라 약 처방을 내어 주총등을 치료해 주었다. 모두들 무공으로 단련된 인물들이라 수일이 못 가 일어나 앉게 되었다.
어느 날 모두 절의 한 방에 모이게 되었다. 지나간 이을 돌이켜 보며 단천덕과 같은 잡놈의 농간에 서로 치고 받고 했고 결국엔 초목대사까지 잃게 된 것을 생각하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말없이 앉아 있었다.
무덤과 같은 침묵이 답답했던지 한소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구도사님은 무림의 거물이시고 저희 칠형제도 어제 오늘 이 강호에 나타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름도 없는 건달의 농간에 걸려들어 농락 당했으니 소문이 퍼져 나간다면 이런 창피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도사님께서 가르쳐 주세요.]
구도사는 할 말이 없었다. 공연스레 지나칠 정도로 설쳤고 또 자신의 성격이 넘나 급했던 탓도 있었다. 서서히 초목과 교섭을 했더라면 일이 이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가진악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형,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가진악은 원래부터 성질이 괴팍했고, 두 눈이 먼 후론 더욱 심했다. 자기 7형제가 구처기 한 사람을 해치우지 못하고 당한 것은 정말 평생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설상 가상으로 원래 절던 다리에 칼을 맞아 놨으니 걸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해 죽을 지경이다. 구처기의 물음이 달가울 리 없다.
[구도사님이야 칼을 믿고 천하를 횡행하시는 처지에 저희 같은 사람들이 안중에나 있으시겠습니까? 하필이면 저희 칠형제에게 물으십니까?]
가진악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을 듣고 보니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아 벌떡 일어나 그들 일곱 사람에게 공손히 읍을 했다.
[소인이 미거하여 여러분에게 크나큰 실례를 범했으니 널리 용서하여 주실 것을 바라나이다.]
주총 등은 답례를 했지만 가진악은 그래도 안 풀리는 눈치다.
[강호에서 일어나는 일, 우리는 이제 아는 척할 면목도 잃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제 고기 잡는 놈은 고기나 잡고, 나무하던 놈은 나무나 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구도사께서 다시 찾아 주시지만 않는다면 우리 남은 생애는 편안히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처기는 가진악의 꼬집는 말투에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못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몸을 일으켰다.
[제가 이번 일을 그르쳤습니다. 다시는 여러분이 계신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렵니다. 초목대사의 원수는 제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이제 그만 떠날까 합니다. 안녕히....]
말을 마치자 공손히 다시 한 번 읍을 하고 몸을 되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잠깐만!]
가진악이 소리를 쳤다.
[가형께서 무슨 분부라도?]
[당신이 우리 형제에게 중상을 입혀 놓고 그래 그 말 한 마디면 일이 끝날 것 같소?]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말씀이신지. 제 힘이 자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야 구도사께서 알아하실 일 아니겠습니까?]
강남 칠협은 이 강호에선 이름을 날리고 있다. 성격도 호방하거니와 무공도 그 누구에게 비겨 손색이 없는 인물들이다. 무림에서 다른 사람과 대결해 져 본 일이 없었다. 옛날 회양방과 싸울 때 장강가에서 회양방의 무리 1백여 명을 해치운 일도 있었는데 그래 이번에는 구처기 한 사람에게 무참히 당하고 말았으니 그들의 심정도 알 만하다.
[제가 가형의 암기에 맞았는데 만일 가형이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제가 잘못하여 여러분에게 부상을 입히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완전히 여러분에게 진 것입니다.]
[진 것을 인정한다면 등에 멘 칼을 여기에 놓고 가시오. 그래야 우리도 가시게 하겠소.]
구처기는 화가 나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자기들 체면을 살리기 위해 사과를 했고 자기들에게 졌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는데 설마 제놈들이 또 어쩌랴.)
[이것은 소인의 호신용이오. 가형의 쇠지팡이나 같은 것입니다.]
[또 눈먼 소경이라고 놀리는 게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가진악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우린 지금 다들 부상을 입었소. 승부를 겨루기가 지금은 곤란하니 내년의 오늘 다시 취선루에서 만나 겨루어 봅시다.]
구처기는 이마를 찌푸렸다.
(이 일곱 사람이 나쁜 사람들은 아닌데 무엇 때문에 실랑이를 벌여야 하나?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내년에 또 대결하자는 데 응해? 일곱 사람과 대결해서 꼭 이긴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들이 일 년 동안에 힘껏 수련을 쌓는다면 아무래도 나 혼자 노력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곰곰이 생각해 보다 문득 묘안이 떠올랐다.
[여러분께서 다시 한 번 저와 승부를 가리시겠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만은 제가 내놓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졌다고 다시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한보구,한소영,장아생 등은 벌떡 일어나고 주총등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들은 몸을 반쯤 일으키며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 강남 칠괴가 다른 사람과 승부를 가릴 때 시간이나 장소 등은 모두 상대에게 맡겨 왔소.]
구처기는 그들이 승부에만 집착하는 것이 우스워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어떤 방법이든 제 말대로 좇으시는 겁니다.]
주총과 전금발의 머리가 그래도 제일 나은 편이다. 무슨 잔꾀를 부리려나 해서 궁금하다.
[어디 말이나 꺼내 보오.]
[군자 일언은....]
구처기가 입을 열자 한소영이 받았다.
[중천금이오.]
[내 제안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시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제가 진 것입니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말이나 해보시오.]
가진악이 재촉했다.
[제가 말씀드릴 방법은 시간적으로는 좀 긴 편입니다. 그러나 그 대결만은 참된 것이오. 칼이나 주먹으로 승부를 겨루는 것쯤 무예를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린 모두 무림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입니다. 후배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도 체면 문제니까요.]
강남 칠괴는 서로 바라보고 있다. 도대체 칼이나 주먹의 대결이 아니면 그래 또 어떤 방법이 있기에 이러는 걸까?
[우리 아주 시합을 합시다. 저 한 사람과 일곱 분이 무공만 겨룰 것이 아니라 인내심과 꾀까지도 어느 편이 많은지를 말입니다. 어느 편이 진짜 영웅이며 호걸인지 한번 철저하게 해봅시다.]
구처기의 이 말을 들은 강남 칠괴는 답답해 견딜 수 없다. 한소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 좀 빨리 하세요. 사람이 답답해서 견딜 수 있나? 어려운 일일수록 더욱 좋으니 빨리 말이나 하세요.]
주총도 웃으며 빈정거리는 말투로 입을 연다.
[무슨 도나 닦고, 연단이나 만들고 부적이나 그리라면 그야 우리가 도사의 적수가 될 수 있나요?]
구처기도 농담으로 이 말을 받았다.
[저도 주형과 더불어 닭이나 훔치고 소나 끌어오는 그런 솜씨를 겨룰 생각은 없습니다.]
한소영이 시시덕거리며 또 재촉을 하자 구처기가 대답했다.
[근원을 따져 보자면 우리가 서로 치고 받고 한 것은 모두 훌륭한 영웅의 후손을 구출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나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소.]
그래서 곽,양 두 사람을 사귀게 된 동기며 단천덕을 쫓아다닌 경과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강남 칠괴는 구처기의 얘기를 들으면서 금나라와 조정의 횡포에 대한 분노가 다시 한 번 치밀어 올랐다. 다시 구처기가 물었다.
[단천덕이 데리고 다니는 그 사람이 바로 곽소천의 부인 이씨인데 가형과 한씨 남매만 보지 못했고 그외 다른 분들은 다 보셨지요?]
그러자 가진악이 대답했다.
[내 그 여자의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삼십 년 뒤라도 내 알아들을 자신이 있습니다.]
[음, 그러면 양철심의 부인 포씨만 행방이 묘연한데 저는 뵌 일이 있지만 여러분께서는 아실 리가 없군요. 제가 여러분과 시합을 하자는 것이 바로 이 일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역시 또 한소영이 나선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씨를 구하고 도사님은 포씨를 구하자 이거지요. 누가 먼저 구하나, 그래 그걸 가지고 승패를 따지자 이 말이죠?]
구처기는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을 테지요. 그렇지만 제 의견은 그보다는 좀더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사람을 찾고도 더 할 일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가진악도 참견하고 나섰다.
[그 두 여자가 모두 지금 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구출하게 되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고, 아기를 낳은 뒤 나는 양가 성을 가진 아이를 가르치고, 여러분께서는 곽가 성을 가진 아이를 가르치자 이겁니다.]
강남 칠괴는 입을 벌린 채 들을수록 이상한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뭐라고요?]
한보구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십팔 년 뒤면 아이들도 열 여덟 살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 때 우리가 다시 가흥부 취선루에서 만나 강호의 영웅 호걸을 청해다 술대접을 하며 두 아이로 하여금 무예를 겨루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가 나은지 아니면 여러분께서 가르친 아이가 이기는가를 보도록 합시다.]
강남 칠괴는 서로 바라다볼 뿐 즉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구처기는 계속 말을 했다.
[만일 일곱 분과 제가 직접 무예를 겨루어 여러분이 이기신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로 했다고 할 테니 별로 떳떳한 일이 못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제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 가르치고 일곱 분은 또 필생의 무공을 한 사람에게 가르치도록 하십시다. 만일 제가 가르친 제자가 또 이긴다면 여러분께서도 더는 하실 말씀이 없으실 테지요.]
가진악이 쇠지팡이로 땅바닥을 꽝 내리치며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그러자 전금발이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가 만일 사람을 구출하지 못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그 이씨가 이미 단천덕에게 살해되었다던가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게 바로 재수라는 게 아니겠소? 하늘이 나에게 승리를 안겨주는데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한보구가 좋다고 했다.
[고아나 과부를 돕는 게 의로운 일이거든, 무어 주저할 게 있겠습니까.]
그러자 구처기가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한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여러분께서 곽씨의 고아를 맡으시겠다니 저는 이미 고인이 된 곽형을 대신하여 여러분께 고마운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정중하게 읍 했다. 주총이 나섰다.
[당신 그 방법이 좀 교활한 데가 있군요. 그래 이 몇 마디 말 때문에 우리 칠형제가 실팔 년이나 고생을 해야 한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구처기는 안색이 변하더니 앙천대소 한다. 한소영이 대들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워서 그래요?]
[나는 오래 전부터 강남 칠협의 명성을 들어 왔는데, 사람마다 모두 의로운 영웅 호걸이라고요. 그런데 오늘 보니, 하하하.]
한보구와 장아생이 이구 동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게 모두 헛소문이란 말이오. 만나 보니 소문과는 딴판이오.]
강남 칠괴는 불꽃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보구가 의자를 땅 치면서 말문을 열려고 하는데 구처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옛날부터 진짜 영웅이나 협객은 친구를 사귈 때 생명까지도 바칠 줄 알았소. 의로운 일 때문이라면 그까짓 생명이 뭐 그리 소중할 게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주총은 부끄러움에 안색이 변했다.
[도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우리 칠형제가 이 일을 맡기로 하겠습니다.]
구처기가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오늘이 삼월 스무 나흘, 십팔 년 뒤 취선루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천하의 영웅들 앞에서 누가 참된 협객인가를 보여 줍시다.]
말을 마치자 소매를 날리며 떠나갔다. 그러자 한보구도 서둘러댄다.
[나도 단천덕을 찾아 나서겠어요. 놈이 흔적도 없이 종적을 감추면 힘만 더 들 테니까요.]
칠괴 중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한보구 하나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황마를 잡아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여보, 아우, 아우는 단천덕을 모르지 않아?]
그러나 한보구는 벌써 멀리 가버린 지 오래다. 단천덕은 이평을 끌고 밖으로 내달리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아무도 자기 뒤를 쫓지 않는다. 그때야 비로소 두근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강가로 달려가 배 한 척이 있는 것을 보고 뛰어 올라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 사공을 위협했다.
사공은 사나운 무관의 위세에 겁을 먹고 시키는 대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단천덕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일이 이렇게 크게 벌어지고 말았으니 돌아가 군관을 지낸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하다. 북쪽으로 가서 잠시 피해 보자. 제일 좋은 방법은 그놈의 도사와 강남 칠괴가 병신이 되거나 죽은 뒤 임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공을 재촉하여 북쪽으로 향해 배를 저어 나갔다. 한보구의 말이 빠르기는 하지만 단천덕의 종적을 수소문하자니 자연 늦어질 수밖에 없다.
단천덕은 몇 차례나 배를 바꾸어 타면서 10 여 일 뒤 양주에 닿아 여인숙을 찾아 들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한보구가 여인숙 주인에게 자기의 종적을 묻고 있는 게 아닌가. 간이 콩알만해져 문틈으로 내다보니 추하게 생긴 땅딸보가 가흥의 사투리로 지껄여 댄다. 단천덕은 이평을 끌고 뒷문으로 빠져 달아나 배를 세내어 다시 길을 떠났다.
운하를 끼고 북상하여 단숨에 산동에 있는 미산호반의 이국역에 도착했다. 반 달도 못 되어 그 땅딸보가 여자 하나를 더 달고 또 찾아왔다. 단천덕은 방안에 숨은 채 넘기려 했지만 이평은 이 눈치를 채고 더욱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단천덕은 재빨리 솜이불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한바탕 두들겨 팼지만 이평은 조금도 굽힘이 없이 틈만 나면 창 밖을 향해 소리 지르려 했다. 한보구나 소영 남매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단천덕은 이 화근 덩어리인 이평을 죽여 없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을 빼들고 한 발짝 한 발짝 이평을 향해 접근했다. 이평은 남편이 죽은 뒤 자기도 더 살고 싶지 않아 기회만 있으면 놈과 끝장을 내고 말겠다고 노리기만 했는데 이때 그의 눈에 살기가 등등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남편의 혼이 있다면 나와 당신이 만나기 전 나를 보우하여 이 원수를 죽일 수 있도록 보살펴 주소서.'
쉭 하는 소리와 함께 구처기가 주고 간 비수를 칼집에서 뽑아 쥐었다.
단천덕은 냉소를 머금고 칼을 들어 내리쳤다. 이평은 무예를 모른다. 그러나 이 순간 죽을 결심을 했기 때문에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있는 힘을 다해 단천덕을 향해 찔렀다. 단천덕은 차디찬 냉기가 자기의 얼굴을 향해 오고 있음을 느끼자 비수를 쳐서 떨어뜨리려고 칼을 빼어 다시 치니 짤그랑 소리와 함께 자기 칼만 부러져 나가고 비수는 벌써 자기 가슴에 와 있었다. 단천덕이 깜짝 놀라 뒤로 벌떡
넘어졌다. 그런데 찍 소리와 함께 옷 앞자락이 찢어지고 가슴에서 배까지 칼자국이 죽 그어졌다. 이평의 힘이 조금만 더 세었더라도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는 이 비수가 이렇게 예리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의자를 들어 막으며 소리 질렀다.
[칼을 거둬요. 내 당신을 죽이지 않으리다.]
이때 이평도 손에 맥이 확 풀리며 뱃속에선 어린 아이가 꿈틀대며 놀았다. 더 버틸 힘도 없어 손에 비수를 쥔 채 의자에 앉아 가쁜 숨을 할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단천덕은 한보구 남매가 다시 찾아올까 봐 더럭 겁이 났다. 혼자 달아나자니 이평이 고자질을 해서 더욱 시끄러워질 터이므로 이평을 다시 배에 태우고 길을 떠났다. 여전히 운하를 끼고 북상하여 임청과 덕주를 거쳐 하북으로 들어섰다. 배에서 내려 쉬려면 아무리 외진 시골 마을이라 하더라도 얼마 되지 않아 기어이 누가 뒤를 쫓아오곤 했다.
이젠 그 땅딸보와 여자 둘만이 아니고 쇠지팡이를 깊은 소경 절름발이까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세 사람 모두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처지여서 그때그때 숨어 버리지만 아슬아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귀찮은 일이 생겼다. 이평이 갑자기 미쳐 버린 것이다. 여관이건 길이건 가릴 것 없이 아무때나 시시덕거리고 울다 웃다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며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다. 단천덕도 처음에는 이 여자가 정말 실성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며칠 뒤 문득 생각이 났다. 이 여자가 고의로 미친 척하면서 뒤를 쫓는 사람들에게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 동안 계속해서 쪽지 같은 것을 떨어뜨렸을 수도 있는 것이다.
때는 무더운 여름이 서서히 물러가고 가을 바람이 살랑거리는 계절이다. 단천덕은 자기를 쫓는 사람들이 무서워 멀리 북국에 와 있었다. 노자는 거의 떨어져 가는데 사람은 계속 뒤를 쫓고 있다. 자기 신세가 생각할수록 원망스럽기만 했다.
'내가 항주에서 군관을 지낼 때는 무엇하나 부러운 것이 없었는데.... 술이며 고기, 돈이며 여자, 내 마음대로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팔자란 말이냐? 모두가 육태자가 남의 부인을 탐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빌어먹을.... 그러나 저러나 연경이 여기서 멀지 않은데 내가 왜 태자를 찾아갈 생각은 못했는고?'
길을 재촉해 연경에 닿자 조왕왕부를 수소문하여 찾아가 육태자를 뵙겠다고 했다.
완안열은 남조의 군관 하나가 뵙겠다는 전갈을 받고 만나보니 바로 단천덕이었다. 깜짝 놀라며 그의 사연을 듣고 이마를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 포씨와의 일도 아직 해결치 못했는데 이 녀석이 주둥이를 놀리면 공연히 일만 그르칠 테고, 살려 뭘 하라?'
그러나 다정한 미소를 보내며 부드러운 말씨로 이렇게 말했다.
[멀리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우선 며칠 푹 쉬구려.]
단천덕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막 물러가려 하는데 다른 군졸이 나서며 이렇게 아뢰었다.
[아뢰나이다. 셋째 태자께서 납십니다.]
셋째 태자의 이름은 완안영제. 금주 완안경의 셋째 아들로 위왕에 봉해 있었다. 그는 여러 형제들 가운데서도 완안열과 특별히 친했다. 완안영제는 위인이 나약하여 사사건건 재주 많은 여섯째의 말만 들었다. 이때 몽고 추장 철목진은 북방에서 자기 세력을 넓히고 금나라에 귀순, 금나라를 도와 탐탐아부를 멸망시켰다. 금주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는 뜻에서 완안영제를 파견, 철목진에게 북강초토사의 관직을 내리려 했다. 그의 아들을 직접 파견하려는 취지는 몽고의 허실을 탐지하자는 것이었다. 위왕은 이 임무를 받고 상의하려고 온 것이다.
[몽고 사람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지내며 성질이 야만스럽고,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합니다. 셋째형이 가시게 되면 정병과 명장을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몽고 사람들에게 대금국의 위엄을 보이시면 앞으로 별 일 없을 거에요.]
완안영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 돌아가려고 했다.
[오늘 남조의 간신 한 녀석이 나를 찾아왔어요.]
[아,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런데 그 녀석이 내게 귀순해 온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우리 금나라의 군사 기밀을 염탐하러 온 거예요.]
[그럼 빨리 그놈을 죽여 버려야지.]
[그건 별로 바람직한 일이 못 돼요. 남쪽 놈들은 교활해서 틀림없이 혼자 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놈을 죽인다 해도 또 다른 방비가 있을 테니까요. 제 생각으로는 형님께서 놈을 이번에 데리고 가시는 게 좋을 듯하군요.]
[뭐, 북쪽으로 데리고 가라고!]
[사막에 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적당히 죄명을 뒤집어씌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세요. 저는 이곳에서 적당히 뒷일을 수습할 테니까요.]
영제는 손뼉을 치면서 좋다고 했다.
[과연 아우는 꾀가 많단 말야. 그럼 좀 있다 내게 보내 주구려.]
그날 저녁, 완안열은 단천덕은 두어 개의 금화를 내려보내며 위왕부에 가보라고 했다. 단천덕은 자기의 비밀이 탄로 날까 두려워 여전히 이평을 데리고 다녔다. 며칠이 못 가 위왕은 몽고로 가게 되었고 단천덕과 이평도 동행하게 되었다. 이평은 배가 점점 더 불러 말을 타기도 힘이 들었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기어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결심 때문에 억지로 견뎌 나갔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이다.
완안영제가 인솔하는 1 천여 명의 정병은 모두 갑옷과 투구로 완전 무장을 했다.
선두에 있던 군사가 철목진이 살고 있는 몽고 천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완안영제는 10 여 명의 군사를 선발대로 보내며 철목진에게 알려 상국의 사자를 영접하러 나오도록 하라고 일렀다.
8 월이라고는 하지만 북국은 추웠다. 저녁이면 눈송이까지 날렸다.
행진을 하고 있는 도중에 돌연 북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완안영제가 놀라 바라보니 전면에 무수한 병마가 이쪽을 향해 돌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군대를 인솔하던 대장 호사호가 아뢰었다.
[위왕님, 빨리 교전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리소서.]
[저들이 어느 군대인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말을 몰아 앞에 나서서 대오를 지휘하는데 적군을 벌써 까맣게 몰려들었다.
호사호는 전쟁에 능한 대장이다. 완안영제가 우물우물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먼저 명령을 내려 포진을 했다. 인마가 산개를 하기도 전에 적병은 도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대방 군마는 금나라 군사를 향해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패전하여 사방으로 달아나는 것 같았다. 호사호가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한 떼의 패잔병이 틀림없는데 활과 창을 버리며 앞을 다투어 달아나는데 사람마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어떤 자는 달리다가 뒤에 오는 말발굽에 짓밟히기도 한다. 호사호는 금나라 병사들에게 명령, 화살을 재우고 칼을 뽑아 든 채 위왕을 둘러싸 호위토록 했다. 패잔병들은 금나라 군사를 피해 달아나려고만 했다.
돌연 왼쪽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며 한 떼의 말이 달려들어 패잔병을 닥치는 대로 해치운다. 놀란 패잔병들이 금나라의 포진 안으로 뛰어든다.
호사호가 활을 쏘라고 명령을 내리자 수십 명의 패잔병들이 쓰러졌다. 그런데도 눈 깜짝할 사이에 1 천여 명의 금나라 군사와 섞여 버리고 말았다. 패잔병의 수는 금나라 군사의 몇 배가 넘는다. 어지러운 혼란 속에서 호사호도 하는 수 없이 10 여 명의 군사들과 더불어 결사적으로 위왕을 호위하면서 남쪽으로 피해 달아났다.
第 七 章. 사막에 살다
이평은 원래 단천덕과 함께 있었는데 패잔병들이 조수처럼 밀려 오면서 이리 부딪고 저리 부딪고 하는 바람에 어디로 갔는지 단천덕의 그림자는 찾을 길이 없다. 이평은 말머리를 돌려 사람이 적은 곳을 향해 달렸다.
한참 달리는데 갑자기 배가 사르르 아프기 시작하더니 더는 견디지 못하고 말 위에서 굴러 떨어지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정신이 드는데 몽롱한 의식 가운데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평은 처음에 꿈인지 생시인지 알 길이 없었다. 자기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의식할 수 없다가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계속해 들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둥근 달이 구름 사이로 밝은 얼굴을 내밀자 그녀는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뱃속의 태아가 이 전란 가운데서 태어난 것이다.
그녀가 급히 일어나 안아 보니 사내 녀석이다. 기쁜 눈물이 뜨겁게 양 볼을 적신다. 이빨로 탯줄을 끊고 가슴에 껴안았다. 달 빛 아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마가 시원하고 눈은 또렷또렷하며 울음소리도 우렁찬 것이 죽은 남편 곽소천의 모습 그대로다.
이평은 손으로 모래 위에 구덩이를 파 모자가 들어가 누웠다. 바람결에 부상한 병사들의 신음소리와 말 울음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이평은 모래 구덩이 속에서 하루 낮 이틀 밤을 꼼짝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사흘째가 되자 더는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 보았지만 죽은 말과 시체만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을 뿐,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다. 모래와 눈 속에 칼과 창, 화살이 보일 뿐 살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평은 죽은 병사의 시체를 뒤져 비상 식량을 찾아내 먹었다. 그리고 또 불을 마련해 놓고, 죽은 말고기를 한 칼 도려내 구워 먹기도 했다. 다행히도 삭풍이 부는 때라 말의 시체가 썩지는 않았다. 그는 말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7, 8일 견디니 이제 점점 정신이 들고 기운도 생겨 아기를 안고 무작정 동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을 이렇게 가니 점점 풀과 나무가 많아진다.
그런데 이때 쉭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머리 위를 스쳐 날아갔다.
이평은 깜짝 놀라며 품속의 아기를 꼭 껴안았다. 눈앞에 두 필의 말이 달려오더니 큰소리로 묻는다. 이평은 양편의 군대가 교전을 한 것과 모래 속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자기 신분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 비치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몽고의 유목민인데 마음도 착했다. 비록 그 여자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는 자기들의 천막으로 데리고 가 잘 먹이고 푹 쉬게 해주었다. 몽고 사람들은 유목만이 생계의 수단이다. 일정한 주거가 있을 수 없다. 초원을 찾아 그때 그때 이동을 해야 한다. 그들이 떠날 때 세 마리의 새끼양을 이평에게 주고 갔다.
이평은 손발이 닳도록 막일을 해가면서 사막 가운데서 살기 시작했다. 그는 물이 있는 곳 옆에 나뭇가지로 움집을 만들고 가축을 기르면서 양털로 천을 짜 놓았다가 지나가는 유목민과 양식을 바꾸어 먹기도 했다. 어느덧 몇 해가 지나고 아이는 이제 여섯 살이 되었다. 이평은 남편의 유언에 따라 아이의 이름을 곽정(郭靖)이라고 했다. 아이는 건강하고 총명해서 나이 여섯에 벌써 소와 양을 기를 줄 알았다. 때는 바야흐로 양춘의 3월, 날싸가 점점 따뜻해졌다. 곽정은 양떼에 풀을 뜯기고 있었다. 점심 때나 되었을까, 갑자기 한 마리의 커다란 매가 날아들어 양떼를 향해 대들었다. 어린 양 한 마리가 놀라 달아났다. 곽정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양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내달리기만 했다. 곽정은 말을 몰아 7, 8리나 쫓아 가서야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어린 양을 끌고 돌아서려는데 먼 곳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 길이 없었다. 혹시 번개치는 소리는 아닐까? 그런데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울리더니 마침내 사람과 말 울음 소리까지 섞여 들렸다.
곽정은 이런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덜컥 겁이 났다. 급히 양을 끌고 조그만 산언덕으로 달려 올라가 나무 숲 사이에 몸을 숨기고 머리를 내밀어 두리번거렸다.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수 많은 군마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지휘관의 호령에 따라 진을 치는데 동에도 한 떼 서에도 한 떼,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병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흰 머리띠를 두르고 있고 오색의 깃털을 꽂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곽정은 무서운 생각은 어디로 사라지고 호기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흥미진진하게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좀 지나서 뒤쪽에서 호루루기 소리가 울리며 몇 떼의 병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장군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인데 몸에는 빨간 외투를 걸치고 손에는 긴 칼을 높이 들고 있었다. 쌍방의 병마가 접근하면서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쪽이 용감하기는 했지만 수적으로 부족하다. 얼마 못 가 무너져 뒤로 물러나고 다시 원병이 오기는 했지만 견디지 못하고 또 무너지려고 한다. 이때 다시 호루루기 소리와 북 치는 소리가 요란히 울리며 함성이 터졌다.
[철목진 대한(鐵木眞 大汗)이 오신다. 대한이 오신다. 와와.]
싸움을 계속하며 동남방을 바라다본다.
곽정은 숨은 채 그들의 눈길을 따라 바라다보았다. 한 떼의 인마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기다란 장대 위에 몇 개의 흰 깃털이 꽂힌 기가 펄럭인다. 무너질 듯하던 병사들이 용기 백배하자 먼저 온 병마가 순간적으로 흩어진다.
흰 깃털이 꽂힌 기가 곽정이 숨어 있는 산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곽정은 자라목처럼 웅크린 채 그 광경을 바라다보았다.
아래턱에 갈색 수염이 더부룩이 자란 장군이 말을 탄 채 산 위로 올라왔다. 그는 말에 탄 채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장을 관전하고 옆에는 10여 명의 수종들이 모시고 서 있다. 좀 지나서 몸에 빨간 외투를 걸친 소년 장군이 말을 타고 산 위로 올라왔다.
[부왕, 적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잠시 퇴각하시지요!]
철목진은 이미 쌍방의 전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너는 만인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퇴각하거라!]
[그리고 목화려, 너는 이왕자와 함께 만인대를 데리고 서쪽으로 퇴각하고, 박이출 너는 적노온과 북쪽으로, 홀필래 너는 속불태와 함께 남으로 퇴각하도록 하라. 이곳의 기가 높이 들리고 호각 소리가 나거든 일제히 되돌려 반격을 하라.]
장군들이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 산에서 내려가 대오를 인솔하고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적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쫓다가 철목진의 기가 산 위에 그대로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철목진을 산 채로 잡아라, 철목진을 산 채로 잡아라!]
달아나는 몽고 병졸들은 놔 둔 채 앞을 다투어 철목진을 사로 잡겠다고 개미떼 같은 병마들이 산 위로 몰려들었다. 철목진은 중앙에 선 채 꼼짝하지 않고 10여명의 호위병들만이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방패로 막고 있었다. 철목진의 의동생인 홀도호와 맹장 자륵미가 5천여 정병을 이끌고 산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번쩍이는 검광 속에서 죽이라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한다. 곽정은 한편 두려운 마음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보고 있었다.
한 시간은 지속되었을까. 5천 정병 가운데 1천여 명이 쓰러지고 적도 수천 명이 살해되거나 부상을 입었다. 동북쪽에 있던 적들의 공격이 더욱 맹렬해지자 이쪽은 견디기 힘들게 되었다. 철목진의 세째 아들인 와활태는 부친의 옆에 서 있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제 기를 들고 호각을 불지요?]
철목진은 매와 같은 두 눈을 번쩍이며 산 아래 적병을 보고 있었다.
[적병이 아직 지치지 않았다.]
이때 동북쪽의 적병들이 대오를 정비하고 재차 공격을 개시해왔다. 세 개의 검은 기가 나부끼는 것으로 보아 세 명의 대장이 독전을 하는 것 같다. 몽고병들이 점점 더 밀린다. 자륵미가 산 위로 뛰어 올라왔다.
[대한! 방어가 어렵습니다.]
[뭐야? 방어가 어렵다구? 그러면서 무슨 놈의 영웅 호걸이라고 큰소리치고 다녔느냐?]
철목진이 노한 소리로 꾸짖자 자륵미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병사의 손에서 큰 칼을 뺏아 쥐고 적진을 뚫어 혈로를 열고 검은 기가 나부끼는 곳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적군의 주장은 이를 보고 말머리를 돌려 뒤로 물러섰다. 자륵미가 칼을 들어 기를 들고 있던 세 녀석의 목을 쳤다. 그리고 나서 칼을 땅에 던지고 두 손으로 검은 기를 들고 돌아와 거꾸로 꽂아 버렸다. 이를 본 적들은 대경 실색하고 몽고병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또다시 한 시간의 격전이 있었다. 서남쪽을 공격하던 적군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장군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띈다. 그의 화살은 백발 백중이다. 계속해서 10여 명의 몽고 병사를 쓰러뜨렸다. 두 명의 몽고 군관이 창을 들고 덤벼 보았지만 화살을 맞고 둘 다 쓰러지고 만다.
[활 잘 쏘는구나!]
철목진이 칭찬을 하는데 검은 옷의 그 장군이 벌써 산 가까이 다가와 활줄을 당기자 바로 철목진의 목을 맞혔다. 계속해서 화살 하나가 철목진의 배를 노리고 날아왔다. 철목진은 활에 맞은 목이 몹시 아프기는 했지만 백전의 용장이라 정신만은 말짱했다. 날아드는 화살을 보고 말고삐를 잡아 채니 말이 허공을 향해 앞 발을 번쩍 든다. 그런데도 화살의 힘이 어찌나 센지 말 가슴에 꽂힌 화살 끝의 깃털도 보이지 않는다. 말이 땅에 쓰러지자 몽고병들은 철목진이 맞아 쓰러진 줄 알고 대경실색이다. 적군은 함성을 지르며 천군 만마가 물밀듯 돌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홀도호는 서쪽에서 대오를 지휘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자륵미가 충혈된 눈알을 굴리며 놀렸다.
[홀도호, 꼭 토끼 새끼처럼 달아나는구나!]
[달아나긴? 화살이 없어서 그런다.]
홀도호는 웃으며 자륵미의 말을 받는다. 철목진이 땅 위에 엎드린 채 비단으로 만든 활통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주먹을 뽑아 주었다. 홀도호가 화살을 당기니 건너편 검은 기 아래의 장군 하나가 스러졌다. 이를 본 홀도호가 달려 내려가 그가 타고 있던 준마를 채어 가지고 돌아왔다.
[과연 훌륭하다.]
철목진이 칭찬을 하는데 홀도호는 온몸이 땀투성이다.
[이젠 깃발을 올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철목진은 손으로 목의 상처를 누르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줄줄 흐른다.
[잠시 더 견뎌 보세, 아직도 적은 지치지 않았어.]
홀도호는 무릎을 꿇었다.
[우린 전사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의 옥체가 더 귀중합니다.]
철목진은 있는 힘을 다해 홀도호가 뺏아 온 말에 올랐다.
[우리는 이 산을 사수한다.]
병사들을 향해 소리 지르며 칼을 들어 돌격해 들어오는 세 명의 적병을 내리쳤다.
적군은 철목진이 화살을 맞고 쓰러진 줄 알았는데 그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혼비 백산하여 공격이 잠시 뜸해졌다. 이 틈을 놓칠 철목진이 아니다.
[깃발을 들어라. 호각을 불어라!]
몽고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흰 깃털의 깃발이 높이 올려지고 호각 소리가 사방에서 울었다. 이곳 저곳에서 몽고병들이 대오를 갖춘 채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적군의 수가 많기는 했지만 모두 산만을 포위하고 모여 있었다. 외곽의 병졸들이 무너지자 밀고 밀치고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검은 옷을 입은 장군이 전세 불리함을 보고 퇴각령을 내렸지만 전의를 잃은 군사들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두 시간도 되지 못해 대군은 괴멸되고, 그 장군만이 흑마를 탄 채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저놈을 잡는 자에게 황금 열 근을 주리라!]
철목진의 말이 떨어지자 수십 명의 몽고병들이 뒤쫓았다. 그러나 그 흑마는 보통 빨리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한참 쫓기고 쫓다가 맟침내 몇 명이 흑마 가까이 접근했다. 이를 본 그 장군이 화살을 당기자 당길 때마다 한 사람씩 말에서 떨어졌다. 그 동안 그는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곽정은 숲속에 숨은 채 멀리 사라져가는 그 장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워했다. 이 싸움에서 철목진은 대승을 거두고 여러 대 동안 숙적인 태역적올부를 반 이상 섬멸하고 개선했다.
곽정은 몽고병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 비로소 수풀에서 빠져 나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곽정의 어머니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곽정은 낮에 본 일을 어머니에게 소상히 아뢰었다. 어머니는 그가 겁도 없이 희희 낙락 손짓 발짓을 해가며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서 한편 대견하기도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서글픈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아비를 닮아 어쩔 수 없는가보다 생각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나절 이평은 손으로 짠 두 장의 담요를 들고 30리 밖에 있는 시장에 양식과 바꾸러 갔다. 곽정은 문 밖에서 혼자 양을 지키다가 며칠 전 산에서 본 전쟁 생각이 났다. 생각할수록 어찌나 재미가 있는지 혼자 양 모는 채찍을 들어 말 엉덩이를 때려도 보고 호령도 해 보면서 양떼를 몰아봤다. 자기가 대장이 되어 군대를 통솔하는 것 같아 몹시 기분이 좋았다. 한창 재미있게 노는데 동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리며 한 필의 말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말등에는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그 말은 곽정의 앞에 오자 서서히 멈추고 말에 타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드는데 곽정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칠 뻔 했다.
그 사람의 얼굴은 진흙과 피투성이로 범벅이 되었지만 틀림없이 그날 바로 그 검은 옷의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왼손에 이미 반 토막이나 부러져 나간 칼 한 자루를 쥐고 있는데 그 칼날에도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그날 쓰던 그 활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도망을 하다 또 적과 부딪쳐 고전을 한 모양이다. 왼쪽 볼에도 큰 상처가 있는데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말 발에서도 역시 피가 흐르고 있다. 장군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눈에는 핏발이 선 채 목쉰 소리로 물을 찾는다.
[물, 물....빨리 물 좀....]
곽정은 항아리에서 물을 한 대접 떠다 주었다. 그는 물을 뺏듯이 두 손으로 채어다가 단숨에 마셨다.
[다시 또 한 사발만....]
곽정이 다시 떠다 주니 반이나 마셨을까, 얼굴에서 흐르던 피가 물 사발에 떨어지고 사발 속에 남아 있던 물이 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그는 하하 웃다가 얼굴 근육을 씰룩거리더니 말에서 고꾸라지며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곽정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기만 한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장군은 다시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배가 몹시 고프구나.]
곽정이 양고기를 가져다 주자 그는 정신 없이 먹고 나서 기운을 차린 듯 벌떡 일어났다.
[고맙다. 고마와.]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팔찌를 팔에서 빼어 곽정에게 건네 준다.
[자 받아라, 네게 주는 거다.]
곽정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어요. 손님을 도와야 한다. 그리구 물건을 받으면 못 쓴다구요.]
그 사람은 빙그레 웃는다.
[착한 아이로구나!]
자기의 옷깃을 찢어 얼굴의 상처와 말 발의 상처를 싸주는데 동쪽에서 은은히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이 동시에 시선을 들리니 먼지를 일으키며 수없는 인마가 이쪽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다.
[얘 착한 아이야, 너희 집에 활은 없니?]
[있어요.]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가고, 그 사람은 희색이 만면하다. 좀 있다 곽정은 자기가 쓰던 활과 화살을 들고 나왔다. 그 사람은 어이가 없는지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다.
[얘, 나는 지금 싸움을 하려고 그래. 좀 큰 건 없니?]
[큰 것은 없어요.]
이때 그들은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부끼는 깃발도 보인다.
[혼자는 당해 내지 못할 테니 숨으세요.]
[어디에 숨어?]
곽정은 집 뒤에 쌓아 놓은 건초더미를 가리켰다.
[내 말 안 할께요.]
그 사람은 이미 결단을 내린 눈치였다. 혼자야 견딜 수도 있지만 말이 부상을 당했는데 사막 가운데 멀리 달아날 수도 없고 숨는다는 것이 위험 천만이지만 지금 그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자. 내 생명을 네게 맡기마. 내 말이나 멀리 쫓아 버려라.]
건초 더미 속을 파고들어가 숨었다. 곽정이 채찍으로 흑마를 멀리 쫓아 버리고 자기는 망아지에 탄 채 풀밭을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곧 일대의 인마가 곽정의 집앞에 이르렀다. 어린 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두 명의 군사가 말을 달려왔다.
[얘야, 흑마 탄 사람을 못 봤니?]
[봤어요.]
[그래 지금 어디 있느냐?]
곽정은 서쪽을 가리켰다.
[간 지 오랜걸요.]
부대를 인솔하는 군사가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몰라 답답했던지 큰 소리를 질렀다.
[끌고 오너라!]
[얘, 대왕자를 뵈러 가자!]
망아지의 고삐를 끈 채 그의 집 앞으로 왔다. 곽정은 이를 악물고 발설하지 않을 결심을 내린 지 오래다. 몽고의 전사들이 몸에 빨간 외투를 걸친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을 에워싸고 있었다. 곽정은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날 몽고병을 통솔하던 그 사람이다. 병사들은 그의 명령이라면 쩔쩔맨다.
[그래, 그 아이가 뭐라고 하더냐?]
두 사람의 군사가 뭐라고 대답을 하자 그 대왕자는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멀리서 풀을 뜯고 있는 그 흑마를 보았다.
[그놈의 말인 듯하다. 어디 끌어 와 봐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10여 명의 몽고 병사가 다섯 패로 갈라져 그 말을 포위하고 대든다. 말이 깜짝 놀라 뛰어 달아나려 했지만 길이 없다.
대왕자는 끌려 오는 말을 보고 코방귀를 뀌었다.
[이게 철별의 말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대왕자는 채찍을 날려 곽정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이놈아 바른대로 말하거라. 그 놈을 어디 숨겼느냐? 조그만 녀석이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해!]
철별은 건초더미에 숨어 칼을 손에 쥔 채 곽정이 얻어맞는 것을 보고 이마에 피가 솟아 올랐다. 철목진의 큰 아들인 출적은 성질이 난폭하고 악독하여 이 아이를 그냥 내버려둘 위인이 아니다. 틀림없이 아이를 위협하여 자백을 받고야 말겠지. 뛰쳐나가 죽기로 싸울 수밖에 없구나.
곽정은 아파서 눈물이 나오려 한다. 이를 악물고 참는다.
[왜 날 때려요? 그가 어디 숨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출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녀석이 그래도....]
또 한 번 쉭 곽정을 때렸다. 곽정은 울음을 터뜨렸다.
[난 몰라요. 몰라.]
이때 여러 병사들이 곽정의 집을 샅샅이 다 뒤지고 두 명의 군사가 창을 들고 건초더미를 여기저기 찌르고 있었다. 곽정은 그들이 철별이 숨어 있는 곳을 찌르는 것을 보고 딴전을 부렸다.
[저기 뭐가 꿈틀거리는 것 같아요.]
먼 곳의 풀 더미를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곽정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한참 동안이나 주시해 보아도 아무 동정이 없자 그 두 명의 군사는 계속해서 건초 더미를 쑤신다. 출적이 또 말문을 열었다.
[말이 여기 있으니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을 게다. 이놈아 말 안할래?]
쉭쉭쉭 채찍을 날려 세 차례나 곽정을 후려 갈겼다. 이때 갑자기 먼 곳에서 호각 소리가 울리자 병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대한께서 오십니다!]
출적은 때리던 손을 멈췄다. 급히 말에서 내리자 많은 군사들이 철목진을 에워싼 채 이쪽으로 달려온다.
[아버지!]
출적이 아버지 철목진을 맞이한다. 원래 철목진은 철별의 화살에 맞았을 때 격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라 억지로 참고 견디기는 했지만 돌아간 뒤에는 몇 차례나 까무러졌다. 대장 자륵미와 철목진의 세째 아들 와할태는 번갈아 상처를 입으로 빨았다. 여러 장수들과 그의 네 아들이 침대 옆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키고 다음날 새벽에야 겨우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몽고 군사들과 네 아들은 철별을 잡아 원수를 갚고 말겠다고 맹세했다.
그 다음날 저녁나절 한 떼의 몽고병들이 철별을 찾아 냈다. 그러나 오히려 철별에게 그 중 몇 명이 살해되고 몇 명은 도망쳤지만 철별도 부상을 입었다. 철목진은 이 소식을 듣고 우선 장남을 시켜 뒤쫓게 하고 자기는 둘째 아들 찰합태와 세째 아들 와할태, 막내 아들 타뢰를 데리고 뒤를 따라온 것이다.
출적은 흑마를 가리키며 자기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아버지, 그 녀석의 흑마를 찾아 냈습니다.]
[내가 언제 말을 찾으랬더냐? 사람을 찾아야 해.]
[네, 알고 있습니다. 꼭 찾아 내고야 말겠습니다.]
곽정의 앞에 이르러 허리에 찬 칼을 빼들고 위협했다.
[너 정말 말 안 할 테냐?]
얻어맞은 곽정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엇다. 그러나 마음은 더욱 굳어만 갔다.
[말 안 할래요. 안 해!]
철목진이 아이의 말을 들어 보니 이상한 데가 있다. <모른다>가 아니라 <말을 안 한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철별이 숨은 곳을 알고 있는 것이다. 세째 와할태를 불러 소곤거렸다.
[저 녀석이 말을 꺼내도록 달래 보아라.]
와할태가 웃으며 곽정의 앞으로 다가서서 자기의 투구에서 금빛 휘화한 공작의 깃털을 뽑아 손에 쥐어 주었다.
[말하면 내가 이걸 네게 줄 테다.]
[말 안 해요!]
철목진의 둘째 아들 찰합태가 명령을 내렸다.
[개를 풀어라!]
그의 수종 군사가 여섯 마리의 사나운 개를 끌어냈다. 몽고 사람들은 사냥을 제일 좋아한다. 장군이건 귀족이건 사냥개나 매를 꼭 기른다. 찰합태는 개라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한다. 그가 사냥을 나갈 때면 꼭 이 여섯 마리의 개를 데리고 다닌다. 우선 개를 끌어 내다가 흑마 주위를 맴돌며 냄새를 맡게 하고 철별이 숨은 곳을 찾아 내자는 수작이다.
곽정과 철별은 아는 사이가 아니다. 다만 며칠 전 싸움터에서 그의 용맹을 본 뒤 흠모하는 마음이 생겼고, 또 이제 출적에게 몇 차례 얻어맞고 난 후라, 죽으면 죽었지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휘파람을 불어 양을 지키는 자기 개를 불렀다. 이때 찰합태의 여섯 마리 개는 냄새를 맡고 건초더미를 맴돈다. 휘파람 소리를 들은 곽정의 개가 쏜살같이 대들어 여섯 마리의 개를 막는다.
찰합태가 소리를 치니 여섯 마리의 사나운 개가 일시에 곽정의 개를 향해 달려들어 왕왕, 멍멍, 끼깅끼깅 물고 뜯는 혼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곽정의 개가 비록 체구는 작지만 여섯 마리에게 이리 물리고 저리 뜯기면서도 용감하게 싸운다. 곽정은 울면서도 계속 자기 개를 응원했다.
출적이 화가 나서 다시 채찍을 들어 몇 차례나 곽정을 후려 갈기니 곽정은 아픔에 못 이겨 떼굴떼굴 구르다가 출적 앞에 이르러 갑자기 일어나 앉으며 그의 오른발을 껴안은 채 죽을 힘을 다하여 꽉 물었다. 출적이 있는 힘을 다해 떨구려 했지만 어찌나 꼭 껴안았는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찰합태, 와할태, 타뢰 3형제는 형의 이 꼴을 보고 큰소리로 웃어댔다.
출적은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칼을 들어 곽정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꼼짝없이 죽게 되고 말았다. 이때 풀더미 속에서 날이 반이나 부러진 칼이 날아와 출적의 칼에 쨍그렁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출적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하마터면 칼을 떨어뜨릴 뻔했다. 철별이 풀더미 속에서 뛰어 나온 것이다. 그는 뛰어 나오자마자 왼손으로 곽정을 잡아 끌어 자기 뒤에 세우고 차디찬 소리로 빈정거리듯 말을 꺼냈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부끄럽지도 않느냐!]
군사들이 칼과 창을 들고 철별을 에워쌌다. 철별을 대항할 수 없음을 알자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버렸다. 출적이 대들어 그의 가슴을 때렸으나 대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를 죽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웅다운 사람의 손에 죽지 못하는 것이 한이로다.]
철목진이 물었다.
[뭐라고 하는 게냐?]
[내 만일 전쟁터에서 싸우다 나보다 우수한 사람의 손에 죽는다면 그야 원통할 바 없지만 날던 매가 떨어져 이제 개미에게 물려 죽는 꼴이 돼서 하는 말이다!]
찰합태의 여섯 마리 개가 곽정의 개를 쓰러뜨리고 물어 뜯으니 개는 이제 더 견디지 못하고 꽁무니를 감춘 채 달아나 버렸다. 철목진의 옆에서 한 사람이 나섰다.
[대한, 제가 저놈의 주둥아리에서 더 말이 나오지 못하게 나서 싸우겠습니다.]
철목진이 보니 자기 손처럼 부리고 있는 대장 박이출이다. 마음이 흐뭇해서 허락을 내렸다.
[좋아, 네가 한번 겨루어 보거라.]
박이출이 몇 발짝 나서서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 너를 죽여 원통함이 없도록 해주마.]
철별이 보니 체격이 우람하고 목소리도 크다.
[너는 누구냐?]
[나는 박이출이다.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철별은 생각했다.
(박이출이 몽고 사람들 사이에 영웅이라는 말을 들어 왔는데 바로 이 사람이었구나.)
이때 철목진이 나서며 말을 꺼냈다.
[너는 활을 잘 쏜다고 해서 사람들이 너를 철별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내 친구와 함께 활로 겨루어 보도록 하거라.]
몽고말로 <철별>이라는 것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철별에게는 본래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워낙 그의 활 솜씨가 귀신 같아 사람들이 철별이라고만 부렀지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없다. 철별은 철목진이 박이출을 자기 친구라고 소개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대한의 친구라면 내 먼저 죽여 주지.]
몽고 병사들이 듣고 하하거리며 웃었다. 박이출의 무예가 뛰어나 천하 무적인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수작 같아서이다. 당초 철목진이 아직 몽고의 수령이 되기 전 숙적인 태역적올부 사람들에게 잡혀 목에 칼을 쓰고 있었다. 태역적올부 사람들은 간탄하가에서 연회를 베풀고 술을 마시면서 철목진을 조롱하다가 뒤에 죽일 작정이었다.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흩어지자 철목진은 목에 찬 칼을 휘둘러 자기를 지키던 녀석을 때려 뉘고 달아나 숲속에 숨었다. 태역적올부 사람들은 그가 달아난 것을 보고 집집마다 뒤지기 시작했다. 이때 적노온이라는 청년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목의 칼을 때려 부수고 그것을 불에 태워 없애 버린 뒤 양털을 실은 커다란 마차 속에 숨겨 주었다. 집집마다 뒤지고 돌아가던 사람이 적노온의 집에 이르러 마차 앞으로 다가가 양털을 내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조마조마, 철목진의 발이 드러나려는 순간 적노온의 아버지가 나섰다.
[여보, 이렇게 더운 날 양털 속에 어떻게 사람이 숨는단 말이오?]
때는 무더운 여름철, 사람마다 땀이 비오듯 흐르는 계절. 뒤지고 있던 사람도 그 말이 그럴 듯해서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철목진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난 후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들쥐를 잡아 먹으며 연명을 해나갔다. 그런데 또 어느날 그가 기르던 여덟 마리의 백마를 도둑맞았다. 철목진이 혼자 도둑의 행바응ㄹ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한 청년을 만나게 되어 도둑의 행방을 물어 보았다. 그 청년이 바로 박이출이다. 박이출은 철목진의 사정 얘기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남자의 고생은 다 마찬가진데 내 당신과 친구가 되어 도와 주겠소.]
그래서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도둑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사흘뒤 도둑들이 사는 마을에 당도하여 활로 수백 명의 적을 죽이고 여덟 필의 말을 되찾아 왔다. 철목진은 찾은 말을 그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몇 필이나 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내 친구를 위해 나선 것이니 한 필도 필요없다.]
고 해서 이때부터 두 사람은 가까와졌고 계속해서 철목진은 그를 친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철목진은 박이출의 무예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허리에 차고 있던 화살을 그에게 주며 말에서 뛰어 내렸다.
[내 말을 타고 내 화살로 놈을 죽이면 내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질세.]
[명령대로 좇겠나이다.]
왼손에는 활을, 오른손엔 화살을 받아 들고 박이출은 철목진의 백마에 올라탔다.
철목진이 와할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말을 철별에게 빌려 주거라.]
[네 네, 그렇게 하겠나이다.]
병사가 말을 끌어다 철별에게 주었다.
철별이 말에 올라 탄 후 철목진을 향해 말을 건넨다.
[내 이미 당신에게 포위되기는 했지만 내게 활만 주오. 화살은 필요 없소.]
박이출은 화가 났다.
[뭐라구? 화살은 필요 없단 말이냐?]
[그렇다. 난 빈 활 하나만으로도 네깐 놈은 죽일 수 있단 말이다.]
몽고 병사들이 이 말을 듣고 <저자식 되게 큰 소리친다>고 소란을 피웠다.
박이출은 지난번 싸움터에서 철별의 활 솜씨를 보아 그의 재주를 잘 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소홀히 생각했다간 큰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두 발꿈치에 힘을 주어 말 배를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 말은 어찌나 잘 달리는지 빠르기가 이를 데 없다. 게다가 전쟁의 경험도 풍부하다. 접전을 할 때 타고 있는 사람이 두 발로 약간의 의사 표시만 해도 즉시 자유 자재로 움직인다. 철목진도 몹시 아끼는 말이라 박이출 같이 사랑을 받는 장군도 처음 타보는 것이다.
철별은 상대의 말이 빠른 것을 보자 말고삐를 채어 반대 방향으로 말을 몰앗다. 박이출이 활줄을 당기자 화살이 쉭 소리를 내며 철별의 목을 향해 날았다.
철별은 날아오는 화살을 재빨리 보고 몸을 옆으로 슬쩍 피하며 손으로 잡아 버렸다. 박이출은 깜짝 놀라며 다시 한 번 쏘았다. 철별이 화살 소리를 들으며 잡기 어려움을 알고 몸을 굽혀 안장에 엎드리니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말을 달리며 몸을 세우자 이번에는 쉭쉭 양쪽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철별은 상대방의 활 솜씨가 이렇게까지 대단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안장에서 미끄러져 왼발을 마등에 끼고 몸은 거의 땅에 닿을 듯했다. 말이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철별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 끌려가는 것 같다. 그는 허리를 비틀면서 몸을 반이나 되돌렸을까 하는 순간에 화살을 당겨 박이출의 배를 향해 쏘면서 몸을 일으켜 말 안장 위로 올라탔다.
박이출이 날아오는 화살을 향해 자기도 쏘았다. 두 개의 화살이 서로 부딪쳐 모래 위에 꽂쳤다. 철목진을 비롯하여 이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갈채를 보냈다. 박이출이 이번에는 속임수로 화살을 날려 철별이 오른쪽으로 살짝 비키는 것을 보면서 왼쪽으로 또 한 번 화살을 날렸다. 철별이 왼손에 들었던 활을 가볍게 퉁기자 화살은 땅에 떨어졌다. 박이출이 세 발을 연거푸 쏘았지만 철별은 용케도 피하기만 했다. 철별이 말을 급히 달리며 갑자기 몸을 숙여 땅에 떨어진 화살 세 개를 주워 들고 그 중 한 발을 쏘았다. 박이출이 말 등에서 일어나면서 날아오는 화살을 발길로 차버리고 선 채로 또 활을 당겼다. 철별도 번개처럼 옆으로 돌면서 활줄을 당기니 탁 소리를 내면서 박이출이 쏜 화살이 부러져 두 토막이 되어 떨어진다.
박이출은 초조해졌다.
(나는 화살이 있고 저자는 화살이 없는데, 이 모양이니 어찌 대한의 원수를 갚는단 말이냐?)
초조하다 못해 미칠 지경이다. 앞 뒤를 가릴 새도 없이 수없이 활줄을 당긴다. 구경꾼들의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살이 날고 철별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번개처럼 피했지만 날아오는 화살은 더욱 많아지고 더욱 빨라졌다. 왼쪽 어깨가 시큰하더니 결국 화살을 맞자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박이출은 몹시 기뼜다. 몇 발 더 쏴 그의 생명을 뺏겠다고 손을 뻗어 활통을 뒤지닌 웬걸 철목진이 자기에게 준 화살이 다 없어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나머지 몸을 숙여 땅에 떨어져 있는 화살을 주우려고 했다.
철별이 이 틈을 노려 쉭 하고 활줄을 당기자 바로 그의 등에 탁 화살이 맞고 말았다. 구경꾼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이상하게도 이 화살의 힘이 굉장했는데도 등에 가 꽂히지 않고 그냥 미끄러져 떨어진다. 박이출이 화살을 집어 보니 활촉이 없다. 철별이 이미 그 활촉을 부러뜨려 쏜 것이다.
[재주 있으면 죽일 것이지 누가 이 따위 수작을 부리라더냐?]
[나는 원래 적을 용서하지 않는 성질이지만 지금 쏜 화살은 네 생명과 목숨을 바꾸자는 것이다.]
철목진은 박이출의 등에 화살이 맞는 것을 보고 가슴이 섬뜩했다가 그가 죽지 않음을 보고 크게 기뻤는데 철별의 이 말을 듣고야 그 까닭을 알았다.
[좋아. 그럼 그만 싸우시오. 목숨을 바꿉시다.]
[내 생명과 바꾸자는 것이 아니오.]
[그게 무슨 말인고?]
철별은 집 문 앞에 서 있는 곽정을 가리켰다.
[저 아이의 생명과 바꾸자는 것이오. 대한은 저 아이를 더는 괴롭히지 말아 주시오. 다만 내가 대한을 쏜 죄는 마땅히 받겠소.]
손을 뻗어 어깨에 꽂힌 화살을 뽑으니 피가 좌르르 흘러 내린다.
이때 박이출의 부하들이 수십 개의 화살을 주워다가 그에게 주었다.
[자, 우리 다시 겨루어 봅시다.]
쉭쉭쉭 계속해서 화살을 다시 날렸다. 철별은 그 기세가 맹렬함을 보고 말의 배 밑에 달라붙어 박이출의 배를 향해 화살을 당겼다. 박이출이 타고 있는 철목진의 백마는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주인이 고삐를 채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왼쪽으로 번개같이 피했다. 그러나 철별이 쏜 화살이 정통으로 그 백마의 머리를 맞히니 말은 그대로 땅 위에 뒹굴었다. 박이출이 땅에 쓰러진 채 철별이 달려들까 두려워 몸을 뒤치며 활을 당기니 철별이 들고 있던 활이 두 토막으로 부러져 나갔다. 철별은 무기를 잃자 빙글빙글 맴을 돌면서 피했다.
목고병들이 함성을 올리며 박이출의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박이출은 생각했다.
(정말 훌륭한 호한이다.)
영웅은 영웅을 아낄 줄 아는 법이다.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화살을 재어 그의 목을 향해 날리면서 옆을 스치게 했다. 화살이 철별의 목을 스치면서 선혈이 길게 흘렀다. 철별은 깜짝 놀랐다.
(오늘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박이출은 화살을 뽑아 활에 재면서 고개를 돌려 철목진을 바라다보았다.
[대한, 이자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철목진도 철별을 죽이기는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투항하지 않겠느냐?]
철별은 철목진의 위풍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철목진은 하하거리며 큰소리로 웃었다.
[앞으론 나와 함께 일하세!]
몽고 사람들은 마음속의 진정을 토로할 때 흔히 노래로 말한다.
철별은 땅에 엎딘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한께서 제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앞으론 대한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죽으라시면 죽고 살라시면 살며, 죽기로 모시겠나이다.]
철목진은 한없이 기쁘기만 했다. 금덩어리 두 개를 꺼내 박이출과 철별에게 상으로 내렸다. 철별은 고맙다며 받아 쥐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대한, 제게 주신 금덩이를 이 어린이에게 주어도 되겠습니까?]
[내 금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준 것이고 자기 금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겠다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마음대로 하거라!]
철별이 금덩이를 곽정에게 주려고 했지만 곽정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받으려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손님을 도와 드리고 그 대가를 받으면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철목진은 이 어린이의 말을 듣고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있다가 이 아이를 데리고 내게로 오거라.]
대오를 인솔하여 온 길로 되돌아서고 병사들은 죽은 철목진의 백마를 두 필의 말에 실어 뒤를 따랐다. 철별은 죽을 목숨이 다시 살아나고 어진 주인을 만난 듯해 마음이 흐뭇했다. 곽정은 풀 위에 누워 쉬다가 이평이 시장에서 돌아오자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이평이 그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곽정에게 양이나 키우게 하다가는 자기 아버지의 원수도 갚기 어려울 것 같으니 차라리 군대에 있다가 기회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두 모자가 철별을 따라 철목진의 진중으로 들어갔다.
第 八 章. 행방 찾기 6년
철목진은 철별이 오자 그를 세째 아들 와활태 휘하의 십부장에 임명했다. 철별은 3왕자에게 사의를 표하고 다시 박이출을 찾아갔다. 둘은 서로 존경하는 처지로 변하여 좋은 친구가 되었다. 철별은 곽정의 은혜에 감사하며 두 모자에 대한 보살핌을 각별히 했다. 곽정이 자라면 자신의 활 솜씨를 전해 줄 생각이었다.
어느날 곽정은 철목진의 진문 밖에서 몇명의 몽고 아이들과 어울려 돌을 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었다. 이때 먼 곳에서 말을 탄 두 명의 몽고병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마도 급히 대한에게 보고할 일이 있는 모양이다. 두 사람이 철목진의 장막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팔수가 나팔을 불어 대고 이곳저곳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하에 대한 철목진의 훈련은 엄격했다. 10명의 몽고병을 1소대로 하고 1명의 십부장이 통솔하며 10대의 십부대는 1명의 백부장이 통솔한다. 10대의 백부대는 1명의 천부장이 통솔하고 10대의 천부대는 1명의 만부장이 통솔하면서 상하가 혼연 일체를 이룬다. 철목진 명령하나에 수만 명이 마치 손발 놀리듯 움직이기 때문에 일찌기 패해 본 일이 없다.
아이들이 한쪽에 물러서서 흥미있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팔 소리를 따라 병정들이 손에 손에 병기를 들고 말 위에 올라탄다. 두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자 사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히 들리며 사람들이 한쪽으로 모였다. 세번째의 나팔 소리가 멎었을 때는 벌써 진문 앞 넓은 초원 위에 다섯 대의 만인대가 질서 정연하게 열을 지어 섰고, 말의 투레질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속삭임 소리나 병기 부딪치는 소리는 들을래야 들을 수 없었다.
철목진은 세 아들이 모시는 가운데 진문 밖에 나와 섰다.
[우리가 많은 적을 무찌른 일은 대금국에서도 아는지라, 지금 대금국 황제는 자기의 태자와 여섯재 태자를 보내 내게 관직을 내리겠다 하오!]
몽고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당시 금나라는 중국의 북방을 차지하고 위세를 떨치고 있었고, 몽고는 겨우 초원과 사막을 차지하고 있는 소부족에 불과하기 때문에 금나라에서 관직을 책봉한다는 것이 철목진에게는 크게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대왕자 출적은 1대의 만인대를 인솔, 금나라 사신을 영접하러 나가고 그 외 4대의 만인대는 초원위에 나뉘어 열을 지었다. 몇 년 전에도 완안영제는 왕한과 철목진 두사람을 관직에 봉하려고 했었다. 그때 철목진은 공교롭게도 전쟁중이어서 그대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 금주는 철목진이 날로 강성해진다는 말을 듣고 혹시 화근거리나 되지 않을까 두려워 다시 완안영제를 보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완안열이 똑똑하고 재간이 좋은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동행시킨 것이다.
곽정과 어린이들은 멀찌기 떨어져 구경을 하고 있었다. 먼 곳으로부터 뿌연 먼지를 날리며 출적이 벌써 완안영제와 완안열을 맞아 달려오고 있었다.
두 형제는 이번에 1만명의 금나라 정병을 이끌고 왔다. 그들은 모두 손에 긴 창을 들고 큰 말을 타고 있어서 그 위세가 당당했다. 완안 형제가 말머리를 가리런히 하고 당도하자 철목진과 여러 장수들이 그들을 맞았다.
완안영제는 어린 아이들이 멀찌기 서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구경하는 모습을 보자 품속에서 금전을 꺼내 어린이들을 향해 던졌다.
[자, 이걸 상으로 주마!]
영제가 비록 무공은 높지 않지만 팔 힘은 센 편이라 멀찌기 던지면 아이들이 몰려 다투어 주울 줄 알았다. 그런데 몽고 사람들은 주객이 처음 만날 때의 예의를 상당히 중시한다. 완안영제의 경박한 행동에 대해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어린이들도 나이는 어리지만 모두 몽고 장병의 자식들이라 예의를 안다. 완안영제가 던진 금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완안영제는 재미가 없자 다시 한 주먹의 금전을 땅에 뿌렸다.
[자들 주워 가거라. 빌어먹을 것들이 왜 주는 것도 못 받아!]
몽고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고 분해 낯빛이 달라졌다. 당시 몽고 사람들은 무식해서 글을 모르고 풍속도 괴상하기는 했지만 신의와 예절만은 중시했고 손님에 대한 예의도 까듯했다. 설령 원수간이나 농담에서라도 욕만은 할 줄 모른다. 손님이 일단 몽고의 장막에 오면 알든 모르든 개의치 않고 정성을 다해 접대를 하지, 그 접대에 만에 하나라도 소홀함이 있으면 그것을 큰 죄로 알았다.
곽정은 평소에 어머니로부터 금나라 사람들의 난폭하고 잔인한 얘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금나라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싹트고 있었는데 이때 금나라 왕자의 무례한 행동을 보자 땅에서 몇 개의 금전을 주워 완안영제의 얼굴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누가 이 더러운 돈을 달라더냐?]
영제가 날아오는 금전을 보고 고개를 돌려 피하기는 했지만 끝내 금전 한 닢이 그의 이마를 때렸다. 아픈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철목진 이하 몽고 사람들은 모두 고소한 생각이 들었다.
완안영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몹쓸 녀석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본국에서는 자기 마음에 조그만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거침없이 사람을 죽이곤 했다. 누가 감히 그를 이 지경으로 모욕할 수 있으랴. 노기 충천하여 옆에 선 시종의 창을 뺏아 곽정의 가슴을 겨누고 내리 던졌다.
완안열이 옆에서 이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형님 잠깐만!]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곽정이 창에 맞아 죽게 되었다. 이때 몽고군의 만인대 속에서 화살이 하나 유성처럼 날아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창 허리에 와 맞았다. 화살의 힘이 어찌나 센지 화살은 가볍고 창은 무거운데 창이 부러졌다. 곽정은 등골에 오싹 식은 땀을 흘리며 달아나 피했다. 몽고병들이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형님 그만 두시오!]
완안열이 속삭이자 완안영제도 몽고 병사들의 기세에 눌려 곽정을 향해 눈만 흘기고 혼자 중얼거리고 말았다.
[버릇없는 녀석이로구나!]
이때 철목진과 장수들이 앞에 나서서 금나라의 이 두 왕자를 장막 안으로 맞아 들였다. 마유주와 쇠고기, 양고기, 말고기로 잔치를 벌였다. 식사가 끝나자 완안영제는 금주의 성지를 낭독하여 철목진을 대 금국 북강초토사로 책봉, 자자손손 물려받도록 했다. 철목진은 무릎을 꿇고 금주의 칙서와 금띠를 받았다.
그날 밤 몽고의 장막 안에서는 큰 잔치를 베풀고 상국의 사신을 깍듯이 모셨다. 술이 반쯤 올랐을까 했을때 완안영제가 입을 열었다.
[내일 우리 형제가 왕한을 책봉하기 위해 가고자 하니 초토사도 우리와 함께 동행합시다.]
철목진은 기뻐서 선뜻 응했다.
왕한은 원래 초원 제부의 우두머리로 그 병세가 강대하고 철목진의 부친과는 의형제간이다. 철목진은 부친이 적에게 독살당하고 의탁할 곳이 없자 왕한을 의부로 삼고 그에게 의탁하여 지냈다. 철목진의 처가 멸이걸인들에게 잡혀가자 왕한과 철목진의 의형제인 찰목합이 출병, 멸이걸인을 섬멸하고 그의 처를 뺏아 온 일도 있었다. 그때 철목진은 막 결혼을 한 때라 장자 출적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다. 어쨋든 철목진은 의부인 왕한도 책봉한다는 말을 듣고 배우 기뻤다.
[저와 왕한 이외에 또 책봉을 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소!]
완안영제가 없다고 하자 완안열이 한 마디 더 보탠다.
[북방에서는 대한과 왕한 두분만이 영웅이요 호걸이지, 그밖에야 어디 쓸 만한 사람이 있겠소?]
그러자 철목진이 입을 열었다.
[여기 또 한분의 인물이 있는데 여섯째 왕자께서는 들어보신 일이 없는 모양이시군요.]
[그래요? 그래 그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제 의형제인 찰목합인데, 위인이 어질고 또 용병에 능합니다. 세째 왕자와 여섯째 왕자께 간청하오니 그에게도 관직을 내려 주소서.]
철목진과 찰목합이 죽마지우로 의형제를 맺을 때 철목진의 나이 겨우 열 한 살. 그들이 의형제를 맺고부터는 친형제보다 더 가까왔다. 장성한 뒤에까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같은 그릇으로 술과 물을 마셨고 한 이불 속에서머 잠을 잤다. 물과 풀을 찾아 양떼를 몰고 서로 헤어져 있으면서도 그들 사이의 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철목진은 자기만이 관직을 받게 되고 의형제는 받지 못하는 것이 섭섭하여 간청을 하게 된 것이다. 완안영제는 술에 취해 있었다.
[여보, 몽고 사람들이 많은데 어디 일일이 관직을 줄수 있겠소? 원, 우리 금나라에는 그렇게 많은 관직은 없소!]
완안열이 눈짓을 했지만 영제는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 말을 들은 철목진은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럼 제 관직을 그에게 주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럼, 당신은 대금국의 관직을 우습게 생각한단 말이오?]
철목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고 완안열이 농담으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다.
이튿날 아침, 철목진은 네 아들과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완안영제와 완안열을 호송,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는 지평선에 불끈 솟아 오르고 철목진은 말에 탄채 5천의 군사로 대오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금나라 군사들은 아직도 어제 저녁의 잔치 때문에 곯아떨어져 단잠을 자고 있었다.
철목진은 그들의 군기가 엉망임을 보자 코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목화려를 바라보았다.
[금나라 군사를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 몽고 병사 천 명이면 오천명은 문제없이 당해 낼 것 같습니다.]
철목진은 기뻤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다가 네째 아들 타뢰가 없는 것을 보자 화를 냈다.
[타뢰는 어디 갔느냐?]
타뢰가 어리기는 하지만 철목진의 가정교육은 심히 엄하다.
그가 큰 소리를 치자 병사들이 쩔쩔맨다.
대장 박이홀은 타뢰의 사부다. 대한의 책망을 듣자 자기가 황송해 했다.
[원래 늦잠을 자는 버릇이 없는데 제가 가서 찾아 보겠습니다.]
바로 그때 두 어린이가 손을 잡고 다가왔다. 하나는 머리에 비단으로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데 나이는 7, 8세, 바로 철목진의 막내 아들 타뢰요, 또 한아이는 곽정이다. 타뢰가 달려들며 아버지를 부른다.
[저 방금 곽정과 냇가에서 놀다가 의형제를 맺었는데 제게 이걸 예물로 주더군요.]
타뢰는 빨간 손수건을 내 보인다. 꽃무늬의 수가 놓여 있다. 이평이 아들에게 만들어 준 것이다. 철목진은 어렸을 때 찰목합과 의형제를 맺은 일이 생각나 한결 마음이 풀어져 천진 난만한 그들을 바라다보며 물었다.
[그래 넌 무얼 주었느냐?]
곽정이 자기 목을 가리킨다.
[이거예요.]
아들이 평소에 목에 걸고 다니던 금목걸이이다. 웃음이 나온다.
[너희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돕고 지내야 한다.]
타뢰와 곽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모두들 말에 타거라. 곽정 너도 함께 가자!]
타뢰와 곽정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말에 탔다.
반 시간이 넘도록 기다리자 그제야 비로소 왕안 형제가 세수를 끝내고 장막 밖으로 나왔다. 완안열은 몽고 병사들의 질서 정연한 대오를 보자 자신도 금나라 군사에게 집합의 명령을 내렸다. 완안영제는 상국의 왕자라고 거드름을 피우며 느릿느릿 술 몇 잔을 비우고 식사를 끝냈다. 그제야 비로소 금나라 병사의 집합이 끝났다.
대대가 북쪽을 향해 행진하기 엿새, 왕한은 아들 상곤과 양아들 찰목합을 먼저 보내 이들을 영접했다. 철목진은 찰목합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앞으로 달려와 서로 얼싸안았다. 철목진의 제장들도 와서 인사를 드렸다. 완안열이 찰목합을 보니 키는 크고 마른 편이며 턱에는 노란 수염이 듬섬듬성 났고 두 눈이 번쩍번쩍하여 강인함과 그 총명함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상곤은 뚱뚱하며 피부가 유난히 흰 것이 이 초원에서 자라난 사람이 아닌 듯한 인상이다.
다시 하루를 걸어 왕한의 거처가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철목진의 부하 가운데 선발대 둘이 달려와 보고했다.
[앞에 내만부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는데 그 수효가 삼만은 될 듯하옵니다.]
완안영제가 깜짝 놀란다.
[그래 왜 그런다더냐?]
[싸움을 걸어 오는 눈치입니다.]
[뭐, 뭐라구! 그들의 수효가....우리보다 많단 말이지....]
철목진은 그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목화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알아 보고 오너라.]
목화려는 10명의 병졸을 데리고 앞서 떠나고 대대는 멈췄다.
좀 지나서 목화려가 돌아왔다.
[내만부 사람들은 대금국 태자께서 우리 대한께 관직을 책봉했단 말을 듣고 자기들도 관직을 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대금국에서 응해 주시지 않으면 두 태자를 억류하겠답니다.]
이 말을 들은 완안영제는 얼굴색이 질리고 완안열은 제장들에게 명령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찰목합이 철목진을 향해 말을 꺼냈다.
[형님, 내만부 사람들이 가끔 우리의 가축을 훔쳐가는 등,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데 오늘은 용서하지 말았으면 합니다만....]
철목진은 지형을 살펴 보고 이미 결심을 내린 눈치다.
[아우, 대금국의 두 태자 앞에서 어디 우리 형제의 솜씨를 보여 드릴까?]
그가 휘파람을 길게 불며 말 채찍을 들어 두 번허공을 치자 5천 몽고병이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와! 와!]
완안 형제는 뜻밖의 일에 겁을 먹었다.
앞쪽에 먼지가 부옇게 일며 적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몽고의 선발대도 본진으로 돌아왔다. 완안영제가 자기 동생에게 이른다.
[우리 애들 보고 공격하라고 해. 이 따위 몽고병이 무슨 소용있냐?]
[좀 잠자코 계세요.]
완안 영제도 깨닫는 바 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몽고병들이 함성만 지르며 움직이지 않는다.
[함성만 지른다고 적들이 물러가나?]
영제는 여전히 빈정거렸다. 박이출이 왼쪽에 서 있다가 타뢰에게 말한다.
[나를 따르세요. 뒤떨어지지 말고 어떻게 적과 싸우나 잘 봐두어요.]
타뢰와 곽정도 병사들의 뒤를 따르며 함께 함성을 지른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적병은 수백보 앞에가지 다가왔다. 몽고 병사들은 여전히 함성만 지르고 있다. 이때 완안열이 명령을 내렸다.
[활을 쏴라!]
금나라 병사들이 열을 지어 화살을 날렸지만 적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도중에서 떨어지고 만다. 완안영제는 접근해 오는 적을 바라다보며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철목진이 채찍을 들어 한 번 허공을 치자 몽고병들이 함성을 멈추고 전광 석화처럼 양쪽 고지를 향해 올라간다.
순식간에 몽고병들은 사방에 있는 중요한 고지들을 점령해 버리고 높은 곳에서 내만부 병사들이 있는 낮은 곳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내만병의 통솔자는 전세가 불리함을 보자 인마를 데리고 고지를 향해 대들었다. 몽고 병사들은 고지의 전면에 두꺼운 담요를 드리우고 적의 화살을 막으면서 담요 뒤에서 화살을 쏙 부근의 고지에 있는 다른 병사들도 화살을 쏘니 내만병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갈팡질팡한다. 철목진은 왼쪽의 고지 위에서 전국을 살피다가 다시 명령을 내린다.
[자륵미, 적의 후미를 쳐라!]
자륵미는 손에 도끼를 들고 천인대를 이끌고, 쏜살처럼 내려가 적의 후로를 친다. 철별도 긴 창을 비껴 든 채 앞장을 섰다. 그는 귀순한 지 얼마 안 되므로 이 기회에 큰 공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간 것이다. 내만부군은 후군이 어지러워지자 전군도 투지를 잃고, 통솔하던 장수가 우물쭈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찰목합과 상곤도 군대를 이끌고 공격에 가담했다. 내만부군은 전후 좌우로 공격을 받자 각각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자륵미는 패해 달아나는 적병의 뒤를 쫓지 않고 기다리다 적의 대대가 반 이상 지나갔을 때 퇴로의 허리를 끊어 버렸다. 2천여명의 내만병들은 독 안에 든 쥐꼴이었다. 모두 말에서 내려 투항했다.
이 싸움에서 1천여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은 것이 2천여명, 몽고병은 1백여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철목진은 내만병의 갑옷을 벗기라고 명령하고 2천여명의 포로와 말을 함께 넷으로 나누어 완안 형제에게 한 몫, 의부인 왕한에게 한 몫, 의형제인 찰목합에게 한 몫, 자기가 한 몫을 차지하고 전사한 병사들의 가정에는 다섯 필의 말과 함께 포로 다섯 명씩을 노예로 주었다.
완안 영제는 이때야 꿈에서 깬 듯 희희 낙락했다. 완안열은 철목진과 찰목합이 소수를 가지고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지금 몽고가 부족간에 서로 싸우기 때문에 그런대로 대금국의 북방이 무사하지, 만일 철목진과 찰목합이 몽고를 통일한다면 화근이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면에 먼지를 날리며 일표 군마가 달려온다.
몽고의 척후병이 아뢴다.
[왕한께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십니다.]
철목진, 찰목합, 상곤 세 사람이 앞서 영접했다.
왕한이 말등에서 내려 두 손으로 철목진과 찰목합을 얼싸안고 걸어 완안형제의 말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예의를 차렸다. 완안열이 보니 몸은 뚱뚱한 편이며 은빛의 백발과 수염에 몸에는 검은 표범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는 황금띠를 둘러 그 위업이 대단하다. 완안열도 급히 말에서 내려 답례를 하는데 완안영제는 여전히 거드름을 피우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소인은 내만인들이 무례한 행동으로 두 왕자를 놀라게 할까 두려워 급히 달려왔는데 세 아들이 물리쳐 천만 다행이옵니다.]
말을 마치고 손수 앞장서 완안 형제를 자기 장막으로 인도했다. 완안열은 왕한의 기세가 철목진보다 더 호방한 것을 보고 그가 북방의 영웅으로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통솔하는 부락도 많고 병력도 더 강함을 알았다.
책봉의 의식이 끝나자 그날 밤 왕한은 완안 형제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여자 노예들이 풍악을 울려 주흥을 돋우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르기 시작하자 완안열이 입을 열었다.
[몽고 사람들 가운데 영웅 호한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왕한이 웃었다.
[제 두 양아들이 바로 몽고 사람들 가운데 영웅 호한이옵니다.]
왕한의 친아들 상곤은 옆에서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언짢은 듯 연거푸 큰잔으로 술을 들어마시고 있었다.
[친아드님은 더욱 훌륭한 영웅이시오. 그런데 왜 왕한께서는 아드님에 대한 얘기는 거내지 않으십니까?]
[그야 제가 죽으면 자연 부중을 통솔하게 되겠지만 어디 두 양아들만 하겠습니까? 찰목합은 지혜가 풍부하고 철목진은 그 용맹을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들은 적수 공권으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몽고 사람들치고 그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없을 겝니다.]
[그럼 왕한의 장수들은 그들의 부하만 못하단 말씁입니까?]
철목진은 그가 하는 말이 의미 심장하고 어딘가 건드려 보려는 듯한 태도에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다보았다. 왕한은 그 말을 못들은 척 잔의 것을 비운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 내만인들이 우리의 가축을 수만마리 훔쳐간 일이 있는데 다행히도 철목진이 자기 부하 가운데 네 영웅을 보내 주어 찾아올 수 있었지요.]
말을 하면서 고개를 내흔든다. 상곤의 얼굴에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며 금으로 된 술잔을 술상에 땅하고 집어 던지듯 내려 놓았다. 철목진이 입을 뗀다.
[저야 무슨 쓸모 있습니까? 내 처를 적이 잡아 갔을 때 의부와 의동생이 저를 도와 찾아준 일이 있는걸요.]
완안열이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네 영웅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좀 만나보고 싶군요.]
왕한이 철목진을 건너다본다.
[네가 그들을 들라 하여라.]
철목진이 가볍게 손뼉을 치자 네 명의 대장이 안으로 들어선다.
첫째는 인상이 온화하고 얼굴이 희며 용병에 능한 목화려다. 두번째가 체격이 우람하고 눈이 독수리 같은 철목진의 친구 박이출이요, 세째는 키가 작고 걸음이 빠른 박이홀. 네번째가 얼굴색이 핏빛 같고 그때 철목진의 생명을 구했던 적노온이다. 이 네 사람은 몽고의 개국공신이요, 철목진이 말한 바로 그 영웅이다.
완안열은 일일이 그들에게 칭찬의 말을 해주고 술 한 잔씩을 내렸다.
[오늘 싸움터에서 보니 검은 옷을 입은 장군이 대단히 용감하던데 그가 누구였소?]
철목진이 대답한다.
[그는 십부장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철별이라 부리지요.]
[그도 좀 들라 하시오. 술이나 한잔 권하게.]
철목진이 전갈을 하자 잠시 후에 철별이 장막안으로 들어오고 완안열은 술을 권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막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상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십부장 주제에 감히 내 금잔에 손을 대? 이놈아!]
철별은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서 술은 마시지 않고 철목진의 눈치를 살폈다. 몽고의 풍속으로는 다른 사람이 술 마시는 것을 막으려 하는 것은 크나큰 모욕이다. 철목진은 생각했다.
(의부의 체면을 봐서라도 내가 참아야 한다.)
[그 잔을 내게 주거라. 목이 마르구나. 내가 마셔야겠다.]
철별의 손에서 잔을 받아 목을 제치고 잔을 비워 버렸다.
철별은 상곤을 향해 눈을 흘기고 장막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이놈 돌아오너라!]
상곤이 소리를 질렀지만 철별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상곤은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철목형에게는 네 영웅이 있지만 내 한 가지 물건만 꺼내 놓으면 아무 소용없게 됩니다.]
말을 마치고 허허거리면 웃는다. 완안영제가 이상한 눈초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물건이오?]
[장막 밖으로 가서 보십시다.]
그러자 왕한이 소리를 지른다.
[잠자코 술이나 마실 일이지. 무슨 쓸데없는 수작이냐?]
완안영제는 구경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이제 술은 그만 하면 많이 마셨으니 구경하는 것도 괜찮겠소!]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니 다른 사람들도 어쩔수 없이 그를 따라 나선다.
철목진은 불빛 가운데 철별이 아직도 화가 풀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봐라, 술 좀 가지고 오너라!]
수종이 큰 주전자를 올리자 그는 주전자를 높이 치켜들고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오늘 우리가 내만인을 통쾌하게 무찔렀다. 여러분의 수고가 너무나 많았구나.]
[왕한, 철목진 대한, 찰목합 대한의 덕분입니다.]
몽고병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다시 철목진이 말을 이었다.
[오늘 내 특별히 용감한 장수를 보았다. 적진에 뛰어들어 용맹을 떨친 장수가 누군이 아느냐?]
몽고병들이 함성을 지른다.
[십부장 철별이오. 철별!]
[뭐 십부장이라고? 아니다 백부장이다!]
순간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다가 금방 알아차렸다.
[철별은 용사다. 백부장에 손색이 없다.]
함성이 초원의 하늘을 찌른다. 철목진이 자륵미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내 투구를 가져 오너라!]
자륵미는 두 손으로 투구를 받쳐 올렸다. 철목진은 그것을 받아 높이 치켜들었다.
[이는 내가 쓰는 투구다. 이제 이것을 용사의 술잔으로 대신한다.]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제치고 한 주전자의 술을 투구에 따라 자기가 한 모금 마신 뒤 철별에게 건네 주었다. 철별은 감격한 나머지 한 쪽 무릎을 꿇고 받아 마시고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귀중한 보석으로 아로새긴 금잔이라 하더라도 대한의 투구만은 못한 줄로 아뢰옵니다.]
철목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투구를 받아 자기 머리에 썼다. 몽고 병사들은 철별이 술을 먹으려다가 수모를 당한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철목진이 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자 감격했다.
완안열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 무시 못할 영웅이로구나. 이렇게 해놓고 철별을 보고 만 번 죽으라 한들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으랴?)
완안영제는 네 영웅을 해치울수 있다는 일에만 생각이 미치고 있었다. 그는 호피 깔린 의자에 앉은 채 상곤에게 물었다.
[그래 무엇으로 네 영웅을 해치울 수 있다고 했는가?]
상곤은 웃으며 자기 부하들을 보며 묻는다.
[철목진 형님의 네 영웅이 어디 있느냐? 이 초원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 네사람 말이다.]
목화려등 네 사람이 걸어 나와 절을 했다. 상곤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자기의 부하에게 몇 마디 소곤거리듯 명령을 내리자 그는 대답을 하고 물러갔다. 잠시 후 짐승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리며 장막 뒤에서 금빛 줄무늬가 아롱진 두 마리의 표범이 슬금슬금 걸어나왔다.
완안영제는 깜짝 놀라 허리에 찬 칼자루를 꼭 쥐었다. 표범이 불빛이 있는 곳에 온 것을 보니 표범의 목은 줄로 묶였고 두명의 장정이 각기 표범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장정들의 손에 긴 장대가 들려 있는 것을 보니 사냥할 때 데리고 다니는 표범임에 틀림없다. 상곤은 철목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님, 형님의 네 영웅이 맨손으로 표범 두마리를 때려 잡을 수 있다면 제가 승복하겠습니다.]
네 사람이 듣다 보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아까는 철별을 모욕하더니 이제 우릴 모욕하려 드는구나. 우리가 산돼지냐? 아니면 이리란 말이냐? 표범과 싸움을 하다니?)
철목진도 아니꼬와 죽을 지경이다.
[내 이 네사람을 내 목숨처럼 아끼고 있는데 어떻게 표범과 싸움을 시킬 수 있나!]
상곤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요? 그러면서 무슨 영웅이니, 호한이니 합니까? 그래, 두 마리의 표범도 해치울 수 없으면서.]
네 사람 가운데 적노온의 성미가 제일 불같다. 앞으로 썩 나서며 철목진을 향해 말했다.
[대한, 다른 사람의 노리개가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대한의 체면이 깎여서는 안됩니다. 제가 표범과 싸우겠습니다.]
완안영제는 기뻤다. 손가락에 끼고 있던 보석 반지를 빼 땅에 던졌다.
[자네가 이기면 이 반지는 자네 것일세.]
적노온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앞으로 나섰다. 목화려가 그를 가로 막았다.
[우리는 이 초원에서 이름을 떨치며 수많은 적을 무찌르지 않았는가? 표범이 군대를 지휘할 수 있나? 그리고 또 매복했다가 적을 포위할 능력이 있나? 그만 두세. 그만 둬!]
이때 철목진이 입을 열었다.
[상곤 아우! 자네가 이겼네.]
몸을 구부려 보석 반지를 집어 상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상곤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웃으면서 사방을 향해 반지 낀 손을 휘둘러 보이자 왕한의 부하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찰목합은 이마를 찌푸린 채 말이 없고 철목진은 태연 자약하고 네 영웅만 분해 못 견딘다는 표정으로 물러선다. 완안영제는 일이 싱겁게 끝나자 하품을 하면서 잠이나 자겠다고 장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 아침. 타뢰와 곽정 두 아이는 함께 뛰놀다가 좀 멀리까지 왔는데 갑자기 흰 토끼 한 마리가 그들의 발 사이로 빠져 달아났다. 타뢰가 활을 꺼내 쐈다. 쉭 소리와 함께 화살응 토끼의 배를 맞혔다. 나이도 어리고 힘도 약한 탓인지 화살을 맞은 토끼는 그대로 달아난다. 둘은 소리를 지르며 계속 뒤를 쫓는다.
한참 동안 달아나던 토끼는 힘이 다했는지 땅에 굴러 쓰러지고 말았다. 둘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어 막 토끼를 집으려 하는데 갑자기 숲속에서 7, 8명의 아이들이 달려들었다. 여남은 살 먹은 아이가 먼저 대들어 토끼를 잡아 화살을 뽑아 버리고 타뢰와 곽정을 노려본 뒤 토끼를 안은 채 돌아서 간다.
타뢰가 먼저 소리를 지른다.
[야. 토끼는 내가 쐈는데 왜 네가 가져가냐?]
[누가 네가 쐈다고 하더냐?]
[그 화살이 바로 내거다.]
그러자 그 아이는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른다.
[이 토끼는 내가 기르는 토끼다. 물어 내라고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 줄 알란 말이다!]
[이 염치없는 녀석, 이 토끼는 틀림없는 산토끼야.]
녀석은 더 사나와진다. 대들어 타뢰의 어깨를 밀쳤다.
[이게 누굴 보고 욕을 해. 우리 할아버지가 왕한이고 우리 아버지는 상곤이시다. 알겠느냐? 그래 토끼를 네가 쐈다고 하자. 그래 내가 가져가면 어쩔테냐?]
타뢰도 지지 않고 대든다.
[우리 아버지는 철목진이다.]
[피, 너의 아버지는 겁장이야. 우리 할아버지도 무서워하고, 우리 아버지도 무서워 쩔쩔맨다.]
여남은 살 먹은 이 아이의 이름은 도사. 상곤의 외아들이다. 상곤은 딸 하나를 낳고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걱정을 하다가 이 아들을 얻은 것이다. 그 뒤엔 또 소식이 없다. 그래서 이 아이를 무척이나 귀여워하다 보니 아이의 버릇이 고약하기 짝이 없다. 철목진과 왕한, 상곤이 헤어져 산 지 오래되기 때문에 이 아이들은 서로 모르는 처지다.
타뢰는 이대 자기 아버지를 모욕하는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견딜수가 없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우리 아버지는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너의 어머니를 누가 흠쳐갔을 때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가서 뺏아 왔는데 그래 그걸 내가 모를 줄 알어. 그런데 내가 토끼 한 마리 가져간다고 야단이야? 야단이.]
타뢰는 이 말을 듣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우리 아버지에게 이른다.]
도사는 하하거리며 웃는다.
[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보면 무서워 쩔쩔매는데 네가 이르면 어쩔테야. 어젯밤 우리 아버지가 표범 두 마리를 끌어내니 네 아버지의 부하들이 꼼짝못하더라.]
네 영웅 중 박이홀은 타뢰의 사부다.
[우리 사부는 호랑이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그까짓 표범을 무서워 할 줄 알구.]
도사가 쫓아가 타뢰의 따귀를 올려쳤다.
[그래도 뻣뻣하게 굴테냐? 내가 안 무서워? 임마.]
타뢰는 져석이 손찌검까지 할 줄은 모르고 있다가 어이없게 한대 얻어맞고 말았다. 곽정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머리로 도사의 배를 받아 버리고 말았다. 도사는 뜻밖에 대든 곽정의 머리에 맞고 벌렁 나자빠졌다. 타뢰가 이꼴을 보고 손뼉을 치고 곽정의 손을 잡은 채 줄행랑을 쳤다. 도사와 함께 왔던 녀석들이 뒤를 쫓아 편싸움이 벌어졌다. 도사도 일어나 끼어들었다. 나이도 위고 사람도 많아 마침내 곽정과 타뢰가 깔리고 말았다.
도사는 곽정의 등을 사정없이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이래도 항복하지 않을 테냐? 항복하면 살려주마.]
곽정은 죽을 힘을 다해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옴죽달싹할 수 없었다. 저쪽에 있는 타뢰도 두 놈과 어울려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이때 개울 쪽에서 낙타의 방울 소리가 울리며 사막의 대상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황마를 타고 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 웃었다.
[싸워야 크느니라.]
가까이 다가와 보니 그게 아니다 7, 8명의 어린이들이 저보다 어린 두 놈을 가지고 야단이다. 두 놈의 얼굴이 얻어맞아 부어 있었다.
[이 녀석들아. 창피하지도 않으냐? 그만 손을 놔라.]
[꺼져. 공연히 시끄럽게 굴지 말고.]
도사가 내뱉는 욕이다. 제 아비가 워낙 버릇 없이 키워서 이 지경이다. 그 누구도 감히 이 녀석의 비위를 건드리지 못한다.
[녀석이 싸가지가 없구나. 이놈아 손을 놔라.]
다른 대상들이 뒤따라 몰려오고 그 중 한 여자가 입을 연다.
[세째 오빠는 공연히 남의 일에 뛰어들구 그래요. 길이나 가요.]
[눈으로 똑똑히 보구 말해. 알지도 못하면서.]
이 대상은 다른 사람 아닌 강남 칠괴들. 그들은 단천덕이 북방으로 간뒤 소식이 끊어지자 이 6년동안사막과 초원을 누비며 단천덕과 이평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이제 몽고말도 배우고 했지만 여전히 오리 무중이고 단과 이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하다. 한소영이 이꼴을 보고 말에서 뛰어내려 타뢰를 깔고 앉아 있는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챘다.
[그래 두놈이 하나를 데리고 이게 무슨 꼴이냐.]
타뢰는 이 틈을 타서 재빨리 일어나 도사가 멍하니 한눈을 파는 사이 곽정도 녀석의 다리 사이를 빠져 나왔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재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놈들 뒤를 쫓아라.]
도사가 여러 아이들을 데리고 뒤쫓는다. 강남 칠괴는 이 광경을 바라다보며 자기들의 어렸을 때를 생각하고 웃었다. 가진악이 길을 재촉한다.
[빨리들 가세, 앞에 있는 장이 파하면 물어 볼 데도 없다네!]
이때 도사 등은 벌써 곽정과 타뢰의 뒤를 쫓아 포위했다.
[항복을 할 테냐? 안 할테냐?]
도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타뢰는 성난 표정으로 고개만을 살레살레 흔든다.
[또 때려 주자.]
도사 등이 대든다. 이때 곽정이 시퍼런 비수를 꺼내 들었다.
[어디 덤빌테면 덤벼라!]
이평은 아들을 사랑하므로 남편이 물려준 이 비수를 아들에게 주었다. 늘 품에 지니고 다니며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게 하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급한 김에 곽정은 이 비수를 빼어 든 것이다. 도사 등이 칼을 보고 감히 대들지 못하고 멈칫한다. 묘수서생 주총이 말을 타고 가다가 비수의 섬광이 번쩍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는 관가나 부호의 물건을 전문적으로 훔쳐 보았기 때문에 눈이 정확했다.
(야. 굉장한 보물이구나. 어디 구경좀 하고 보자.)
말머리를 돌려 곽정등이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주총이 곽정의 손에 쥔 비수를 살펴보니 과연 보통의 물건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 저런 아이가 지니고 다니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이들을 둘러보니 곽정의 옷이 좀 떨어질 뿐 다른 아이들은 모두 값비싼 표범 가죽으로 만든 옷들을 입고 있었고 곽정의 목에는 번쩍이는 황금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것이 틀림없는 몽고 귀족의 자제들이다.
(이 아이가 자기 아버지의 보도를 훔쳐 가지고 다니며 노는가 보다. 그렇다면 왕공의 물건일 테니 실례한들 어떠랴.)
마음을 정하고 웃으며 말에서 내려 다가갔다.
[싸우지들 말고 잘들 놀아야지.]
주총은 전광 석화로 대들어 비수를 손에 넣었다. 그가 상승의 무기를 발휘하여 손에 넣었으니 곽정같은 어린 아이가 아닌 무예에 정통한 무사라 하더라도 이 묘수서생의 솜씨를 당해 낼수는 없는 것이다.
주총은 보물을 손에 넣자 몸을 날려 말등에 올라타 달렸다.
[오늘 재수가 괜찮은 걸. 생각지도 않은 보물이 굴러들어왔으니.]
소미타 장아생이 웃는다.
[둘째 형님, 또 솜씨를 발휘하신 모양이군.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무슨 보물인지 어디 구경 좀 합시다.]
요시협은 전금발의 재촉이다. 주총이 손을 번쩍 들었다.
第 九 章. 동시철시
그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뗀다.
[큰 형님, 양강이란 사람을 아십니까?]
[양강? 들어본 일이 없는걸.]
가진악의 대답이다.
<양강>은 구처기가 포석약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지어 준 이름이다. 양.곽 두사람이 비수를 바꾸어 가졌기 때문에 <양강>이라고 새긴 비수를 이평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강남 칠괴는 과거와 현재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영웅 호걸을 생각해 보았지만 전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진악은 일곱 사람 가운데 나이도 가장 많거니와 경험 또한 풍부하다. 그가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리 없다. 전금발이 그래도 궁리가 많다.
(구도사가 찾고 있는 사람이 양철심의 부인인데 혹시 이 양강과 그 양철심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6년 동안이나 천하를 누비며 천신 만고 찾아 다녔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던 그들이다. 비록 막연하기는 하지만 그냥 흘려 보낼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돌아가 그 아이에게 물어봐요.]
한소영의 제안이다. 한보구가 말을 달려 앞장서 달려가 보니 아이들이 또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한보구가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들이 흩어지지 않자 몇명을 나꿔채 던져 버렸다. 도사는 그의 힘이 굉장히 센 것을 보고 다시 대들지는 않았지만 타뢰를 향해 욕지거리다.
[이 강아지 같은 놈들아. 해보겠으면 내일 다시 여기서 싸우자. 임마.]
[그래 내일 또 싸우자.]
타뢰는 내일 세째형 와할태를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형 셋 중 그래도 세째와 제일 친했고 힘도 제일 세다. 도사도 아이들을 데리고 제 갈 길로 가버렸다.
곽정은 얼굴이 피투성이다. 주총을 보자 두 손을 내밀어 칼을 달란다. 주총은 비수를 손에 쥔채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래 되돌려 주마. 그렇지만 이 비수를 어디서 얻은 것인지 말해 주어야 한다.]
곽정은 흐르는 코피를 소매깃으로 흠친다.
[어머니가 주신 거예요.]
[너희 아버지 이름은 무어냐?]
아버지? 도대체 모르는 일이다.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기만 한다. 칠괴는 이 모양을 바라다보며 실망이 크다.
[네 성이 양가냐?]
곽정은 또 고개를 흔든다. 강남 칠괴는 신의를 생명처럼 지킨다. 꺼낸 말은 꼭 실천에 옮긴다. 비록 어린 아이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총은 그의 손에 비수를 쥐어 준다. 한소영이 손수건을 꺼내 코피를 닦아 준다.
[집에 가. 앞으론 싸우지말구 응.]
일곱 사람은 말머리를 돌리고 짐을 실은 낙타와 함께 떠난다. 곽정은 멍하니 바라다본다.
[곽정, 우리 이제 가자.]
이때 일곱 사람은 그들과 많이 떨어진 채 가고 있었다. 가진악이 눈은 멀었지만 귀만은 예민하여 <곽정>이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전신의 피가 머리로 솟는 듯 말머리를 돌려 달려왔다.
[얘야, 네 이름이 곽정이냐?]
곽정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가진악은 미칠 듯 기뻤다.
[네 어머니 이름은 무어냐?]
[어머니는 어머니지요.]
가진악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얘야, 어머니 계신 곳에 데려다 줄 수 있겠니?]
[우리 어머닌 여기 안 계셔요.]
가진악은 그의 말투에 적의가 있음을 느꼈다.
[여동생, 네가 좀 물어 봐라.]
한소영이 말에서 뛰어 내려 부드러운 말씨로 물었다.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죽였대요. 내가 크면 원수를 갚을거예요.]
[네 아버지 이름이 뭔데?]
한소영은 흥분한 나머지 말 소리조차 떨려 나왔다. 곽정은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너희 아버지를 죽인 사람 이름은 아니?]
가진악이 묻자 곽정은 이를 뽀드득 간다.
[단천덕이래요.]
[뭐라구?]
강남 칠협은 단천덕이란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한소영은 기뻐 어쩔 줄 모르고 소리를 질렀고, 가진악은 하늘에 감사했다. 장아생은 남희인의 목을 얼싸안고 한보구는 말등에서 굴러 떨어졌다. 원래 이평은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만일 자기가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아들이 혹시 원수의 이름조차 모르게 되지 않을까 싶어 단천덕의 인상과 그의 이름을 늘 곽정에게 들려 주었던 것이다.
타뢰와 곽정은 그들이 기뻐 날뛰는 모양을 보자 우습기도 하고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얘야, 우리 앉아서 얘기좀 하자.]
한소영이 곽정의 손을 잡았다. 타뢰는 세째 형 와할태를 만나 내일 일을 상의 하고 싶어 마음이 조급해서 가자고 재촉이다.
[나 갈래요.]
곽정이 말을 마치고 타뢰의 손을 잡은 채 되돌아선다. 한보구는 초조했다.
[얘, 얘, 넌 안돼. 네 친구만 먼저 보내고 너는 여기 좀 있거라.]
두 아이는 이들의 행동이 이상함을 느끼자 와락 겁이 나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보구가 손을 뻗어 곽정의 뒷덜미를 잡았다.
[안돼. 그럴게 거칠게 하면 되나.]
주총이 나서며 한보구의 손을 가볍게 쳤다. 주총이 걸음을 재빨리 놀려 타뢰와 곽정의 앞에 다가가 땅에서 조약돌 세개를 주워 들고 웃었다.
[내가 요술을 부릴 테니 이걸 좀 봐라.]
곽정과 타뢰는 호기심이 생겨 발길을 멈춘다. 주총이 돌 세개를 오른손 바닥에 올려 놓고 소리를 지른다.
[자!]
주먹을 쥐었다 펴 보이니 돌이 금방 없어져 버렸다. 두 아이는 신기한 표정이고 주총은 머리에 쓴 모자를 가리켰다.
[모자 속으로 들어가!]
모자를 벗어 보이니 돌 세 개가 얌전하게 그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닌가? 곽정과 타뢰는 웃으며 손뼉을 친다.
바로 이때 기러기 한 떼가 두 줄로 나뉘어 북쪽 하늘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이번엔 우리 큰 형님 요술을 볼 차례다.]
주총이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타뢰에게 주면서 가진악을 가리킨다.
[자, 이 수건으로 저분의 눈을 가려라.]
타뢰는 그가 시키는 대로 가진악의 눈을 수건으로 가렸다.
[숨바꼭질인가요?]
[아니다, 눈 감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떨어뜨리는 거다.]
말을 하면서 가진악의 손에 활을 쥐어 준다.
[거짓말 말아요.]
타뢰가 하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기러기 떼는 벌써 머리위까지 날아왔다. 주총이 세 개의 돌을 하늘로 던지자 기러기떼가 깜짝 놀라 방향을 바꾸려는 찰나 가진악은 쉭 화살을 날려 맨앞의 기러기를 쏘니 화살이 꽂힌 채 그냥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타뢰와 곽정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 주워다가 가진악에게 주었다.
[방금 보니 칠팔 명이 너희 둘을 때리던데 나한테 조그만 배우면 까짓것 겁날 것 없다.]
주총이 말을 꺼내자 타뢰가 받는다.
[내일 또 싸우기로 했는데 형님 데리고 올래요.]
[형님을 불러와? 흥, 그건 못난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한테 조금만 배우면 내일 이길 수 있다.]
[그래 우리 둘이 칠팔 명을 때려요?]
[그렇다니까.]
[좋아요. 그럼 가르쳐 주세요.]
주총은 곽정이 아무 흥미도 없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물었다.
[그래 넌 배우고 싶지 않니?]
[어머니가 그랬어요. 함부로 다른 사람과 싸우지 말라고요. 재주를 배워 싸우면 어머니가 안 좋아 하세요.]
한보구가 옆에서 혀를 찬다.
[겁장이로구나!]
그러자 주총이 다시 묻는다.
[그럼 아까는 왜 싸웠니?]
[그야 그놈들이 우리를 때린 거지요.]
그러자 가진악이 물었다.
[그럼 너 원수인 단천덕을 만나면 어떻게 할 테냐?]
그 말을 들은 곽정의 눈에 금방 살기가 돈다.
[내 죽이고 말 테예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지요.]
[얘, 너희 아버지 같이 훌륭한 무예를 지닌 사람도 그의 손에 죽었는데 그래 무예를 배우지도 않고 어떻게 원수를 갚겠단 말이냐?]
이 말을 들은 곽정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닭똥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린다. 주총이 왼쪽에 있는 산을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무예를 배워 원수를 갚겠거든 오늘밤 저 황산으로 와서 우리를 찾아라. 혼자 와야 한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 올 수 있겠니?]
곽정은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이고 타뢰만이 흥미진진한 모양이다.
[나를 가르쳐 줘요.]
주총이 갑자기 그의 팔을 잡아 나꿔채면서 살짝 왼발을 걸자 타뢰는 나뒹굴며 쓰러지고 말았다. 땅에서 기어 일어서면서 화를 벌컥 낸다.
[왜 때려요?]
[이게 바로 재주라는 거야. 너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타뢰는 원래 총명하기 때문에 금방 깨달았다. 고개를 끄덕거린다.
[또 가르쳐 주세요.]
주총이 그의 얼굴을 헛치니 타뢰는 왼쪽으로 살짝 피한다. 이틈을 노려 주총의 왼주먹이 벌써 그의 코를 살짝 때렸다. 타뢰는 마냥 기쁜 표정이다.
[재미있어요. 또 가르쳐 주세요.]
주총이 몸을 숙이며 어깨로 허리를 가볍게 받으니 타뢰는 벌렁 나가떨어진다. 전금발이 몸을 날려 타뢰의 몸을 받아 땅 위에 내려 놓았다. 타뢰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아저씨, 또 가르쳐 주세요.]
[지금 배운 세 가지만 잘 쓰도록 해. 어른하고 싸워도 네가 이길지 모른다. 이제 됐다.]
주총이 고개를 돌려 곽정을 향해 묻는다.
[너도 할 수 있겠니?]
곽정은 멍한 채 고개를 옆으로 내흔든다.
칠괴는 타뢰가 지극히 총명한 반면 곽정의 이와 같은 태도가 더욱 어수룩해 보여 실망이 큰데 한소영은 긴 한숨과 함께 눈물까지 보인다.
이를 본 전금발이 입을 뗀다.
[뭐 그리 속상하게 생각할 건 없어. 이들 모자를 강남으로 데리고 가서 구도사에게 인계하고 우리가 졌다고 하면 되는 거지 뭘.]
[내 보기에도 애가 둔한 것 같아. 무예를 배울 재목은 아닌 것 같아.]
주총이 거들자 한보구까지 끼어든다.
[재 보기에도 싹이 틀린 것 같은걸.]
칠괴가 강남 사투리로 의논이 분분한데 한소영은 두 아이를 향해 가라는 손짓을 한다.
[얘들아 가라.]
타뢰가 곽정의 손을 끌고 히히거리며 가버린다.
칠괴가 아직도 서로 상의중인데 남산초자 남희인만이 아무 말도 없다. 가진악이 답답한지 묻는다.
[여보, 네째 아우.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 말 좀 해보게.]
[매우 좋습니다.]
[뭣이 매우 좋단 말인가?]
주총이 묻는 말이다.
[애가 매우 좋습니다.]
한소영이 답답하다는 표정이다.
[네째 오빤 늘 그 모양예요. 영 말 않고 있다가 불쑥 한 마디 꺼내 놓곤 더는 말하지 않으려 하니 말예요.]
남희인이 가벼운 미소를 흘린다.
[내 어렸을 때도 둔했는걸.]
남희인은 원래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다. 말 한 마디 꺼내도 꼭 생각할 것 다 생각해 보고 꺼낸다. 그래서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일단 꺼낸 말은 틀림없다. 그래서 나머지 육괴는 늘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한 줄기 서광이 보이는 것도 같다.
[그럼 우리 그녀석이 이따 밤에 산 위에 오는가 기다려 보자.]
주총이 이렇게 말하자 전금발이 나선다.
[재가 보기에는 십중 팔구 안 올 것 같습니다. 내 우선 그의 집이나 알아 두지요.]
말을 마치고 말에 뛰어 올라 멀어져 간 타뢰와 곽정의 뒤를 쫓으니 그들은 몽고의 장막안으로 들어간다.
그날 밤, 칠괴는 황산 위에서 밤을 지켰다. 해시가 지나고 북두칠성이 자리를 옮겨도 곽정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주총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 탄식을 한다.
[강남 칠괴가 일세를 종횡하다가 끝내 도사에게 지고 마는구나!]
일곱이 기가 죽어 시무룩한데 한보구가 <어>소리를 지르며 수풀 속을 가리킨다.
[저게 뭐야?]
이때 밝은 달이 중천에 얼굴을 내밀자 수풀 속에 하얀 물건이 세개 드러나 보인다. 모양이 괴상하다. 전금발이 다가가 보니 모두 죽은 사람의 해골인데 가지런히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것인가? 사람의 해골을 가지고 놀다니.... 아, 뭐요?....둘째 형, 이리 좀 와요!]
그의 말소리가 떨리는 것 같다. 가진악 외에 다섯 사람이 그 쪽으로 몰린다. 전금발이 해골을 들어 주총에게 주며 보라고 한다. 주총이 받아 보니 해골의 뇌문 위에 다섯 개의 구멍이 있는데 그 모양으로 보아 손가락으로 찍어 뚫어 놓은 것 같다. 다섯 손가락이 기가 막히게 꼭 맞는다. 마치 손가락 다섯 개를 맞추기 위해 조각한 것 같다. 아무래도 아이들 장난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나머지 두 개를 살펴 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의심이 부쩍 들었다.
[아니 그럼 사람이 손가락으로 뚫었단 말인가? 설마 그럴 리가 있을라구.]
이와 같은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세상에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해도 이렇게까지야 될 수 있으랴 싶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아니 여기 사람 잡아먹는 요괴가 있단 말인가?]
한 소영이 말문을 열자 한보구가 맞장구를 친다.
[그래 틀림없이 요괴일 거야.]
[요괴라면 뭣하려 해골을 이렇게 얌전하게 놔 두었을까?]
전금발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한다.
가진악이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다가 달려들었다.
[그래 어떻게 놓여져 있던가?]
[모두 세 무더긴데 품자형으로 놓였고, 한 무더기에 해골이 아홉 개씩이었어요.]
[그래 삼층이 아니던가? 맨 아래 다섯 개, 가운데 세 개, 그리고 맨 위에 하나.]
[그래요, 형님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가진악은 몹시 조급한 눈치다. 묻는 말엔 대답도 않는다.
[빨리 동북방과 서북방으로 나누어 일백 보를 가 봐라! 무엇이 있나 없나?]
여섯 사람은 그가 몹시 긴장을 한 것 같아 머뭇거리지 않고 즉 셋씩 나뉘어 동북과 서북방을 향해 앞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동북방의 한소영과 서북방의 장아생이 동시에 소리를 지른다.
[여기도 해골더미가 있어요.]
가진악은 몸을 날려서 북방으로 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의 고비니 절대로 큰 소리를 내면 안 돼요.]
세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벙벙한데 가진악은 벌써 동북방으로 가 한소영 등에게도 똑같은 당부를 했다. 주총이 낮은 소리로 묻는다.
[귀신이오, 아니면 적이오?]
[내 눈이 먼 것도, 발을 절름거리는 것도 모두가 그들 때문이오.]
이때 서북방에 있던 장아생 등도 달려와 이 말을 듣고는 모두들 깜짝 놀랐다. 원래 그들이 가진악과 더불어 의형제를 맺기는 했지만 그가 평소에 자기의 불구에 대해 말 꺼내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것을 잘 아는 처지라 6형제는 그가 어렸을 때 불행하게도 부상을 당했거니 여기고 입 밖에 내보지 않았는데 이제 그 말을 듣고야 비로소 그것이 적 때문임을 알았다. 그러나 가진악의 무공이 대단하고 내공이나 외공이 상승의 경지에 이르른데다 침착한데도 이 지경으로 참패를 당했다면 상대는 분명히 무섭기 짝이 없는 존재이리라.
가진악이 또 입을 연다.
[여기도 세 무더기의 해골인가?]
[그래요]
한소영의 대답이다.
[한 무더기에 아홉 개의 해골이란 말이지?]
한소영이 세어 보고 나서 대답한다.
[한 무더기는 아홉개, 또 한무더기는 여덟 갠데요.]
[그럼 빨리 저쪽 것도 세어 보고 와요.]
한소영이 날듯 동북방으로 달려가 세어 보고 돌아 왔다.
[저쪽은 무더기마다 일곱 갠데요.]
[그렇다면 그들이 곧 도착할 것이다.]
6형제는 멍한 채 그를 바라다보며,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이것은 동시철시다.]
주총이 깜짝 놀란다.
[동시 철시는 벌써 죽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인간 세상에 있단 말이오?]
[나도 벌써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여기 숨어 구음백골조를 익히고 있는 줄은 몰랐는걸. 여러 형제들 빨리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리오. 절대로 돌아오면 안 되오. 천 리 뒤로 달려가 십 일 동안 나를 기다리다가 오지 않거든 더 기다릴 필요도 없소.]
이 말을 들은 한소영이 울먹이며 입을 연다.
[큰 오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우린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피로 맹세한 처지인데 어찌 우리만 가라구 하시나요?]
가진악이 손을 설레설레 내젓는다.
[빨리들 떠나요, 빨리. 늦으면 큰일이오.]
함보구가 벌컥 화를 낸다.
[아니, 우리를 의리 없는 놈들로 생각하시나요?]
[아니라오. 이 두 사람의 무공은 측량할 길이 없이 깊다오. 이제 또 구음백골조를 익혔는데 비록 완전히 익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십에 팔구는 익힌 듯하오. 우리 일곱 사람의 힘을 합여도 그들의 상대가 못되오. 무어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쓸데없이 생명을 버리겠소?]
여섯 사람은 평소에 그가 자존심이 강해 결코 그 누구의 공력에 위압을 당해 본 일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안다. 심지어 장춘자 구처기도 겁내지 않고 싸웠거든, 이 두 사람에게는 저리도 겁을 내는 걸 보니 거짓말이 아님이 틀림없다.
[그럼 우리 함께 갑시다.]
전금발이 함께 갈 것을 권유하자 가진악이 차디차게 대답한다.
[그들이 내 일생을 이렇게까지 망쳐 놓은 것은 그만 둔다 하더라도 내 형님의 원수는 갚지 않을 수 없소.]
그러마 남희인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복이 있으면 같이 누릴 것이요, 화가 있다면 함께 당합시다.]
가진악은 한참 동안 침묵에 잠긴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려 놓을 수 없음을 잘 아는지라 긴 한숨을 내쉰다.
[할 수 없군요. 여러분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러나 굉장히 조심을 해야 하오 그 동시는 남자요, 철시는 여자인데 둘이 부부요. 자세한 얘기는 할 틈이 없지만 그들의 손에 할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하오. 막내 동생이 남쪽을 향해 백 보만 가서 관이 하나 있나 없나 보고 와요.]
전금발이 발길을 재빨리 놀리며 백 보를 세어 가 보니 그가 말하는 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땅 속에 석판 조각이 드러나 보이는데 돌 위에 흙이 깔리고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가 있는 힘을 다해 뚜껑을 열려고 했지만 석판은 요지 부동이다. 그가 손짓을 하자 몇명이 이쪽으로 왔다. 장아생, 남희인, 한보구와 같이 허리를 굽혀 있는 힘을 다해 당기니 그제야 돌판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보니 돌판 밑에는 과연 관처럼 생긴 돌함이 있고 돌함 안에는 두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가진악이 갑자기 돌함 안으로 뛰어 들면서 입을 열었다.
[적들이 곧 도착하여 시체를 가지고 수련을 시작할텐데 내가 여기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할 테니 여러분은 주위에 매복하여 동정을 살피오. 그러나 절대로 그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되오. 반드시 이렇게 뒤에서 대드는 것이 떳떳하지는 못하지만 워낙 상대가 상대니 만큼 어쩔 수 없소. 그렇지 않으면 우리 칠형제의 생명이 위험하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당부할 일은 워낙 적들이 예민해서 조금만 이상한 눈치가 있어도 그들은 멀리서도 다 안다는 것이오. 자 어서 돌판 뚜껑을 닫으시오. 내 숨쉴 틈만 하나 남겨주면 되니까.]
여섯 사람은 그의 말대로 가볍게 뚜껑을 닫아 주고는 각기 병기를 들고 주위의 숲속에 숨어 버렸다. 한소영은 큰 오빠인 가진악을 안 뒤 이렇게까지 긴장을 한 일은 본 일이 없었다. 걱정도 되고 호기심도 일어나 숨을 때 주총의 옆에 함께 있었다.
[둘째 오빠, 동시 철시란 도대체 뭐예요?]
[그건 바로 강호에서 유명한 흑풍쌍쇄를 말하는 게댜. 그들이 북방에서 횡행하고 있을 때 동생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잘 알 수가 없었지. 이 두 사람은 악랄하고 또 무공이 높아 흑이고 백이고 가릴 것 없이 그들의 말만 들어도 벌벌 떨고 쩔쩔맸는데 아마 그들 손에 죽은 영웅 호걸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걸.]
[그럼 다들 뭉쳐서 그들을 해치우지 않고 뭘 했죠?]
[나도 내 선사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은 건데, 대강남북의 호걸들이 항상에서 세 차례나 모여 이 흑풍쌍쇄를 포위했었다는데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사람이 많은 것을 알면 귀신처럼 숨어 버렸다가 사람들이 흩어지면 또 나타나 못된 짓을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강호에서 그들의 종적이 없어져 버렸대. 몇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사람들은 그들이 죄값을 받아 죽었나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 여기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걸.]
[그들의 이름이 뭐예요?]
[동시는 남잔데 이름은 진현풍. 그의 얼굴색이 꼭 구릿빛인데 하여튼 웃거나 노한 빛을 볼 수가 없고 시체처럼 늘 딱딱한 표정이라 사람들이 동시라고 불렀대.]
[그럼 여자는 쇠처럼 거무스름했나 보죠?]
[그렇대. 그 여자의 이름은 매초풍이라구 한대.]
[큰 오빠가 그들이 구음백골조를 익힌다고 했는데 그건 또 뭐예요?]
[나도 들어본 일 없는 얘기야.]
한소영은 한참동안 침묵에 잠긴다.
[그런데 어째서 큰 오빠는 그 전에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요? 혹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총의 한 손이 그의 입을 막고 산아래를 가리켰다. 한소영이 풀숲 사이로 내려다보니 달빛이 비치는 사이로 멀리 뚱뚱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사막 위로 재빨리 이동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말하느라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도 둘째 오빠는 계속 적이 오나를 살피고 있었구나.)
순식간에 그 검은 그림자는 벌써 근처로 다가왔다. 원래 이 검은 그림자는 두 사람의 것이라 더욱 커 보였던 것이다. 강남 육괴는 숨을 죽이고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총은 혈을 찌를 부채를 움켜쥐고, 한소영은 장검을 땅 속에 꽂아 검광이 반사되지 않도록 해 놓고도 오른손으로는 칼자루를 꼭 잡고 있었다. 산길 위로 싹싹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온다. 육괴는 너무 긴장을 한 탓으로 일각이 여삼추 같이 생각되었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는 멎고 산 위의 공지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하나는 선채 움직이지 않고 머리엔 가죽 모자를 쓴것이 몽고 사람의 복장이며, 다른 하나는 바람에 긴 머리를 날리는 여자가 분명했다. 한소영은 생각했다.
(저들은 틀림없는 동시.철시일 것이다. 수련을 쌓는지 보자.)
그 여자는 남자의 주위를 서서히 빙빙 돌기 시작하는데 뼈마디 움직이는 소리로 박자를 맞춘다. 그가 걸음을 빨리 하니 뼈마디에서 나는 소리도 그만큼 빨라진다.
꼭 장구를 치며 박자를 맞추는 듯하다. 강남 육괴는 그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혀를 찬다.
(저 여자의 내공이 이 지경이니 큰 형님이 신중을 기할 만도 하구나.)
그 여자는 쉬지 않고 두 손을 뻗었다 오므렸다 하는데 손을 놀릴 때마다 찰칵찰칵 소리를 낸다. 긴 머리까지 바람에 날리니 더욱 무시무시해 보인다.
한소영은 비록 무예도 훌륭하고 대담하기도 하지만 온몸이 오싹 진땀이 흐르며 머리끝이 뻣뻣하게 선다. 돌연 그 여자가 오른손을 번쩍 들며 왼손의 장풍으로 남자의 가슴을 친다. 강남 육괴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저 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무시무시한 장풍을 당해 낸단 말인가?)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다보고 있는데 그 여자의 장풍이 이번엔 남자의 배를 친다. 여자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바람 소리가 쉭쉭 계속해서 일곱 번이나 장풍을 날린다. 아홉번째의 장풍을 날리고 여자는 몸을 허공에 날리며 머리는 땅으로 발은 하늘로 향한 자세로 왼손을 뻗어 남자의 모자를 잡아 벗기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으로 남자의 뇌 속을 깊숙이 찔렀다.
한소영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여자는 하하거리며 웃고 선혈과 골이 가득 묻은 손을 달 아래 비쳐 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한소영이 보니 얼굴은 거무스름하고 모양은 날씬한 편이며 나이는 40여세. 이상한 데가 있다면 입에선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흘러 나왔지만 얼굴의 표정은 차디차기만 한 것이다. 강남 육괴는 이때야 비로소 그 남자가 이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다만 수련을 위해 잡아온 사람임을 알았다. 그녀의 잔악함에 온몸이 떨린다.
매초풍의 웃음소리가 멎으며, 두 손을 뻗어 죽은 사람의 옷을 쭉쭉 찢어 벗긴다. 북국의 차디찬 겨울, 사람마다 가죽 옷을 입고 있는 계절인데 이 질긴 가죽옷을 힘도 들이지 않고 찢어 버린다. 옷을 다 벗긴뒤 발가벗은 시체를 공지에 놔둔 채, 자기는 두손을 몸에 찰싹 붙이고 두 발을 가지런히 포갠 채 시체를 한 바퀴 뛰어 도는데 뛰어오를 때 무릎도 굽히지 않고 몸도 굽히지 않는다. 허공을 향해 수척의 높이까지 힘 안들이고 몸을 솟구친다. 육괴는 잔인 무도한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 재주에 혀는 내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한바탕 소란을 피우다가 휘파람을 길게 불며 몸을 날려 허공에서 두번이나 물구나무를 서며 시체 옆에 사뿐히 내려 앉아 두 손으로 시체의 가슴과 배를 쪼개 내장을 하나씩 꺼내 자세히 달빛에 비쳐 보고는 멀리 던져 버린다.
육괴는 그가 집어던지는 간과 허파등을 지켜보다가 비로소 그가 왜 산 사람을 잡아다 쓰는가를 알았다. 비록 그 죽은 사람이 외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방금 집어 던진 아홉개의 장풍에 내장 하나 하나가 벌써 터져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내장을 조사해 보는 것은 자기의 공력이 어느 정도 진보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수작이었던 것이다.
한소영은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 흩어져 있던 그 많은 해골이 모두 수련을 위해 무고하게 잡아다 죽인 것들이 아니냐? 슬그머니 장검을 뽑아 쥐고 기습을 하려는데 주총이 황급하게 잡아 채며 머리를 옆으로 흔든다.
주총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은 철시 혼자만이니 비록 강하다 하더라도 우리 형제가 힘을 합치면 하나야 해치우겠지. 우선 이 여자를 제거해 놓고 동시가 오면 일이 좀 수월하지 않을까? 만일 두 사람을 동시에 해치울 경우는 우리 형제들 힘만으로는 곤란할 테니. 하지만 동시가 어디 숨었다 대들지 알 수가 있나? 어쨌든 큰 형이 저들을 잘 아니 그래도 형의 분부를 따를 수밖에. 좀더 기다려 보는 것이 상책이겠다.)
이때 철시 매초풍은 시체를 다 조사해 보고 만족한 표정으로 땅위에 앉아 달을 바라보며 숨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 주총과 한소영을 등뒤로 지고 있어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한소영은 조용히 이런 행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칼을 쓰면 십중 팔구 찔러 죽일 수 있을 테지만, 칼이 빗나갔다가는 일만 그르칠걸.)
주총도 긴장하고 있는 눈치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매초풍은 호흡을 가라앉히고 일어나 시체를 끌고 가진악이 있는 돌함 앞에 이르러 허리를 굽히고 뚜껑을 열려고 한다. 강남 육괴는 병기를 꼭 잡은 채 뚜껑을 열기만 하면 대들 태세다. 매초풍은 등뒤에서 나는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바람소리같지 않아 고개를 홱 돌려 보니 달빛 아래 사람의 머리 하나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휘파람을 길게 불며 풀숲을 덮쳤다.
원래 풀숲에 숨어있던 사람은 마왕신 한보구였다. 그는 자기 키가 남달리 작기 때문에 들키지 않을 줄 알고 고개를 내밀다가 발각되고 만 것이다. 그는 철시의 기세를 당해 낼 수 없음을 보고 금룡편으로 천룡취수의 솜씨를 발휘, 위로부터 아래로 그 여자의 팔을 공격했다. 매초풍은 피할 수 없음을 알자 손을 내밀어 채찍의 끝을 잡아 버렸다. 한보구는 손이 옥죄는 것을 느끼며 있는 힘을 다해 채찍을 잡아챘지만 매초풍은 벌써 전광 석화처럼 왼손으로 장풍을 날렸다. 장풍이 오기 전 바람의 위세가 너무나 강했다. 한보구는 형세 불리함을 보고 손을 늦추어 채찍을 놓으며 물구나무를 서서 나무 하나를 뛰어 넘었다. 매초풍이 이 틈을 놓칠 리 없다. 다섯 손가락을 벌려 그의 등을 할퀴었다. 한보구는 뒷복이 싸늘해짐을 느끼며 있는 힘을 다해 앞을 향해 훌쩍 뛰는 순간 나무 아래 있던 남희인의 투골추(송곳)와 전금발의 소매 속에 숨긴 화살이 적을 향해 날았다. 매초풍은 왼손을 쇠부채처럼 벌리고 두 개의 병기를 땅에 떨어뜨렸다. 찍하는 소리와 함께 한보구의 등위의 옷자락이 찢기고 말았다. 그가 왼발로 땅을 짚으며 앞을 향해 번쩍 뛰자 매초풍은 벌써 몸을 날려 그의 앞에 떨어져 기다리고 있었다. 철시의 몸놀림이 번개보다 빠르다.
[너는 누구냐? 여기 무엇하러 온 거야?]
두 팔이 벌써 그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다. 한보구는 견딜수 없는 진통이 엄습함을 느꼈다. 적의 열 손가락이 마치 열 개의 쇠송곳이 되어 살 속을 파고드는 것 같다. 놀랍기도 하고 화도 치밀어 발을 날려 힘껏 적의 배를 차버렸다.
그런데 차라리 차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나았을걸. 마치 돌을 찬 듯 우지직 소리와 함께 엄지 발가락이 부러지고 그 아픔에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그래도 강호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인지라 땅을 데굴데굴 굴러 피했다.
매초풍이 몸을 날려 한발로 엉덩이를 차는데 갑자기 옆에서 거무스름한 멜대가 번쩍히며 그의 복사뼈를 대렸다. 바로 남산초자 남희인이 한 짓이다. 매초풍이 한 발 뒤로 물러나 사방을 살펴보고 나서야 자기가 적의 포위망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손에 혈을 찌르는 부채를 든 서생과 칼을 휘두르는 여자는 우측에서, 키가 크고 뚱뚱하며 소 잡는 칼을 든 사람과 삐쩍마른 체구에 괴상한 병기를 든 사람은 좌측에서 공격하며, 멜대를 들고 있는 시골사람 차림의 장정 등 모두들 알지 못하는 생소한 얼굴이기는 하지만 각자 모두 무예가 보통 솜씨가 아니다.
(중과부적이니 우선 몇 놈 죽이고 볼 일이다.)
몸을 날려 한소영의 얼굴을 긁었다.
주총은 그의 공격이 날카로움을 보고 부채를 들어 그녀의 오른팔 곡지혈을 때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철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른손을 뻗으니 한소영은 백로횡강의 솜씨로 적의 팔을 옆으로 찔렀다. 매초풍은 팔을 뒤집어 뻗어 보검을 잡는다. 보아하니 병기도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한소영은 깜짝 놀라 급히 칼을 빼는데 퍽 소리와 함께 주총의 부채가 매초풍의 곡지혈을 정통으로 때렸다. 이는 사람 몸의 급소로 한번 맞으면 온 팔이 즉시 뻣뻣하게 굳어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주총이 기뻐 어쩔 줄 모르는데 적의 팔이 번쩍하더니 벌써 자기의 머리를 긁으려 한다. 주총이 날쌘 몸으로 빠져 나오면서 또 한 번 놀랐다.
(아니 이여자는 급소도 없나?)
이때 한보구는 벌써 땅에서 금룡편을 주워 들고 여섯 사람이 매초풍을 가운데 두고 일제히 공격했다. 매초풍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맨손의 장풍만으로 상대하는데 그 저항이 무섭기 짝이 없다. 그가 두 손을 놀리며 달려드는 무기를 잡아채기도 하고 틈을 보아 상대의 몸을 할퀴고 긁으려 한다. 강남 육괴는 해골위에 있는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을 생각하며 무서운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별호인 철시의 철(鐵)자가 사실인 듯 등뒤는 벌써 전금발의 저울추에 두번이나 맞았고 남희인의 멜대에 다리를 얻어맞았는데도 아무 내색이 없는 것이다.
남희인이나 전금발의 공력에 비추어 본다면 이렇게 얻어맞으면 뼈가 부러졌어도 벌써 여러 번 부러졌을 텐데도 까딱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무예가 상승의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한참 이렇게 싸우는데 전금발이 자칫 잘못하여 왼쪽 어깨를 긁히고 말았다. 깜짝 놀란 오괴가 질풍처럼 대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전금발의 팔뚝의 옷과 살이 함께 한 움큼이나 찢겨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주총은 생각했다.
(이렇게 횡련의 공력이 대단한 사람은 반드시 몸의 한 곳의 빈 연문이 있게 마련이다. 이 연문은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고 연해서 한 번 건드리기만 하면 즉사를 하는 건데 이 독한 여자의 연문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는 몸을 날려 위로부터 아래를 향해 부채를 펄럭이며 계속해서 적의 정수리에 있는 백회, 목에 있는 환결의 두 혈을 치고 또 계속하여 배에 있는 제문과 등뒤의 미룡의 두 혈을 친 다음 순식간에 10여개의 혈도를 치면서 그가 몸의 어느 구석에 대해 특별히 방어를 하는지 보아 그 연문을 찾아내려 해보았지만 매초풍은 벌써 눈치를 알아차리고 소리를 지른다.
[이 바보야, 네 아무리 찾아 보아도 내 몸엔 연문이라곤 없다.]
갑자기 긁어 잡아당기며 그의 손목을 잡아 버렸다. 주총은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눈치가 빠르고 손이 매워 잽싸게 손을 놀려 손바닥을 뒤집어 피하며 부채로 그녀의 손바닥을 찔렀다.
그가 몇 발짝 뛰어 피해 자기의 손을 살펴보니 손등에 벌써 다섯 개의 할퀸 자국에 피가 맺혀 있었다. 전신에 식은땀이 좍 흐르고 아무래도 오래 싸우다가는 이쪽만 피해를 입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벌써 세 사람이나 그녀에게 할퀴었는데 만일 그의 남편 동시까지 온다면 7형제는 이제 끝장을 보고 말 것이다.
사정을 보니 장아생, 한보구, 전금발은 숨을 헐떡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고, 남희인은 공격이 나은 편이요, 한소영은 몸이 빨라 그런대로 버텨 나가고 있는데 적은 싸울수록 그 기세가 맹렬해진다. 차디찬 달빛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세 무더기의 해골을 비춘다. 등골이 싸늘해짐을 느끼며 꾀를 내어 나는 듯 가진악이 숨어 있는 들판 앞에 와 소리를 지른다.
[자, 다들 도망가자!]
오괴가 눈치를 채고 싸우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매초풍이 냉소를 짓는다.
[어디서 굴러먹던 잡종들이 이곳에 와서 소란을 피우려는 게냐? 달아나기는 벌써 틀려먹은 줄 알아라.]
발걸음을 날려 뒤쫓는다. 남희인, 전금발, 한소영이 결사적으로 막는다. 주총, 장아생, 한보구 셋이 힘을 합쳐 돌 뚜껑을 열어 한쪽에 비켜 놓았다.
바로 이 때, 매초풍의 왼팔을 남희인이 멜대로 때리고 다시 오른손을 내밀어 그 여자의 두 눈을 노렸다. 주총이 또 소리를 지른다.
[빨리 내려와 쳐라!]
손으로 위를 가리키며 하늘을 바라다보면서 왼손을 높이 들어 손짓을 한다. 마치 위에 숨어 있는 동료를 부르는 태도다. 매초풍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다보니 밝은 달만 중천에 걸렸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는다. 주총이 계속 소리를 지른다.
[일곱 발짝 앞이다!]
가진악이 두 손을 모아 여섯 개의 독릉(마름쇠)으로 일곱발짝 앞을 겨누고 상,중,하로 쏘았다. 가진악이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석관에서 뛰어 나오고 강남 칠괴가 사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시작했다. 매초풍이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두 개의 마름쇠가 그의 두 눈을 맞힌 것이다. 가슴과 다리를 겨누어 날아간 마름쇠는 그대로 땅에 떨어지고 만다. 매초풍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두손의 장풍으로 석관을 때렸지만 가진악은 벌써 한쪽으로 피했고 쾅쾅 소리와 함께 돌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여자가 미쳐 날뛰듯 한 발을 들어 석관을 짓밟자 두 조각으로 부러지고 만다. 엄청난 힘이다. 칠괴는 옆에서 이를 지켜보다가 아연 실색하여 다시 대들 생각을 잠시 잃는다.
매초풍은 두 눈이 멀어 사방을 볼 수가 없다. 몸을 날리며 좌충 우돌, 닥치는 대로 할퀴고 긁는다. 주총이 형제들에게 피하라는 손짓을 했다. 매초풍이 이르는 곳마다 나무가 부러지고 돌가루가 난다. 칠괴는 숨을 죽이고 멀리 떨어져 숨어 지켜보고만 있다. 좀 지나 매초풍은 눈이 쑤시고 아파 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독이 묻은 병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너희는 누구냐? 빨리 말을 해라! 죽어도 누구에게 죽는지 알고나 죽자.]
주총이 가진악을 향해 손짓을 하여, 말하지 말고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자고 했지만 눈먼 가진악이 알리 없다.
[네 아직도 비천신룡 가벽사, 비천편복 가진악을 알겠느냐?]
매초풍이 앙천 대소를 한다.
[쥐새끼 같은 것, 아직도 죽지 않았구나! 그래 네놈이 비천신룡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게냐?]
[그렇다. 너도 아직 죽지 않았으니 잘됐구나!]
매초풍이 장탄식을 하고 아무 말이 없다. 칠괴는 계속 정신을 집중하여 경계를 했다. 이때 찬바람이 뼈 속을 파고드는 듯 모두가 음산한 냉기를 느꼈다.
갑자기 주총과 전금발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형님 조심하시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가진악은 벌써 한 줄기 강한 바람이 가슴을 향해 엄습함을 느끼며 쇠지팡이에 의지하며 몸을 날려 나무꼭대기에 올라 앉았다.
매초풍도 몸을 날려 가진악이 올라타고 있는 나무의 뒤에 있는 다른 나무를 얼싸안고 두 손의 열 손가락을 깊숙이 나무줄기에 꽂았다. 육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가진악이 조그만 늦었더라도 꼼짝없이 죽었을 게다.
그 여자는 공격에 실패한 것을 알고 창공을 향해 괴상한 소리를 낸다. 마치 기러기가 울듯, 원숭이가 계곡을 향해 울부짖는 듯 날카롭고 긴 소리가 멀리멀리 사라져 간다. 주총이 느끼는 바 있어 소리를 지른다.
[큰일났다. 남편 동시를 부르는 소리다. 빨리 저년을 없애 버리자!]
왼쪽 어깨에 힘을 모아 육중한 수법을 써서 그의 등을 후려 갈겼다. 장아생도 두 손을 번쩍 들고 부러진 반쪽의 돌 뚜껑을 집어들어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매초풍은 방금 눈이 멀었다. 어찌 가진악처럼 그렇게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돌 뚜껑의 육중한 바람을 느끼며 한쪽으로 피하기는 했지만 주총의 장풍은 피할 길이 없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을 얻어맞고 말았다. 천만 다행히도 내공에 익숙한 그이기는 했지만 묘수서생도 보통의 솜씨는 아니다. 주먹으로 얻어맞은 아픔이 뼈 속으로 스민다.
주총은 제대로 때린 것을 알자 재차 또 공격을 퍼부었다. 매초풍이 오른손을 갈퀴처럼 오므리자 주총이 급히 피하며 다시 대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먼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방금 매초풍이 냈던 것과 똑같은 소리다. 모골이 송연해지는데 또 한 번 그 소리가 들린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와진 소리다. 칠괴는 모두 깜짝 놀란다.
(어쩌면 이렇게도 빨리 올 수가 있을까?)
가진악이 소리를 질렀다.
[동시가 온다.]
한소영이 옆으로 비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질풍처럼 달려온다. 이때 매초풍은 공격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어 쉬면서 눈에 든 독이 전신에 퍼지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남편이 오기를 기다려 적을 섬멸할 작정이었다. 주총이 전금발에게 손짓을 하여 두 사람이 풀 속으로 숨어 버렸다.
第 十 章. 폭우 속에서
주총은 전부터 동시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이제 그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철시쯤으로 보았다가는 큰일날 것만 같았다. 정면으로 대들어 보아야 그들 둘의 상대가 아니니 차라리 기습을 감행, 요행이나 바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한소영이 감자기 <이>하는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급시 달려오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 앞에 또 하나의 작은 그림자가 오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걸음걸이도 늦거니와 몸집이 작아 눈에 띄지 않은 것이다. 한소영이 아래를 향해 몇 발짝 달려가 살펴 보니 틀림없는 어린 아이다.
곽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급히 달려가 데리고 올라오려고 했다. 그와 곽정의 거리가 가깝고 또 내리막길이기는 하지만 동시 진현풍의 걸음걸이가 저리도 빠르니 함부로 달려들다가 동시에게 들키기나 한다면 혼자 당해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놔두었다가는 곽정이 화를 당할 테니 이를 어쩌나 싶어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걸음을 재촉하며 소리를 질렀다.
[얘야 빨리 뛰어!]
곽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를 보자 기뻐 어쩔 줄 모른다. 소미타 장아생은 이 몇 해 동안 계속 한소영을 사모하면서도 그것을 밖에 나타내지 않고 있었을 뿐인데, 이때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는 것을 보자 나는 듯 달려 내려가 한소영의 앞을 질러 무사히 곽정을 구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산 위의 남희인, 한보구 등도 매초풍에 대한 공격을 잠시 멈추고 정신을 집중, 무기를 손에 쥔채 한소영과 장아생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눈 깜작할 사이에 한소영이 곽정 앞으로 달려가 손을 잡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 진현풍이 달려들어 곽정을 나꿔 챘다. 한소영은 왼쪽 발로 땅을 짚고 가볍게 날아 봉점두의 솜씨를 발휘, 적의 왼쪽 늑골의 허를 한 번 재빨리 찔러 보고 이어서 몸을 살짝 옆으로 기울이면서 칼날을 번쩍이며 번개처럼 매섭게 적의 눈을 찔렀다. 진현풍은 곽정을 옆구리에 낀채 칼날을 가볍게 밀어붙이고 순수추주 장풍을 날렸다. 한소영은 칼을 휘두르며 요리조리 찔러 보았지만 진현풍의 팔뚝이 갑자기 반 치 이상 자라난 듯 분명 피했는데도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얻어맞고 땅에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진현풍은 평소에 사정을 보아 손을 쓰는 사람이 아니어서 한소영을 잡아 일으키며 그의 천령개를 할퀴려 들었다. 이 구음백골조는 무시무시하여 만약 한 번 할퀴기만 하면 한소영의 생명은 부지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장아생은 약간 떨어져 있었지만 급한 나머지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들어 자기의 몸으로 한소영을 덮쳐 감싸 버렸다. 진현풍이 푹 소리를 내며 다섯 손가락으로 장아생의 등을 찔렀다. 장아생이 비명을 지르며 날카로운 칼로 적의 가슴을 찔렀다. 진현풍이 불끈 힘을 주자 칼끝이 미끄러져 버리고 다시 한 번 장풍을 날리니 장아생이 벌떡 나가 떨어졌다. 주총, 전금발, 한보구가 위급함을 보고 일시에 달려 내려왔다. 진현풍이 큰 소리로 자기 아내를 찾는다.
[여보, 어떻게 된 일이오?]
매초풍이 큰 나무를 부여안은 채 대답한다.
[내 눈이 저놈들 때문에 멀었어요. 저 일곱 놈 중 한 놈이라도 놓치기만 하면 내 용서하지 않을래요.]
[걱정말아요. 한 놈도 달아나지 못하게 할 테니.]
손을 들어 한소영의 머리를 할퀴려 들자 당나귀가 땅에서 구르듯 굴러 수척 밖으로 빠져 달아났다.
[달아나 보려고? 어림없는 수작!]
진현풍의 일갈이다.
장아생은 중상을 입고 땅에 누운 채 몰롱한 가운데도 한소영의 위급함을 보고 있는 힘을 다해 발길로 적의 손가락을 차버렸다. 진현풍은 손가락을 갈퀴처름 벌려 다섯 손가락을 그의 넓적다리에 꽂았다. 장아생은 더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었다.
이 사이 한소영은 손에 칼을 바꾸어 쥐고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상대의 무공이 대단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지는 않고 날쌘 몸으로 진형풍을 가운데 두고 빙빙 돌았다. 두 바퀴를 돌았을까? 남희인과 한보구가 쫓아 왔고 동시에 주총과 전금발이 암기를 쐈다. 진현풍은 적의 무공이 보통이 아님을 보자 놀랍기도 하거니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황량한 벌판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소란일까?)
목소리를 높여 아내에게 묻는다.
[여보, 이놈들이 도대체 누구요?]
[비천신룡의 형제, 비천편복과 그 일당이예요.]
이 말을 들은 진현풍이 코방귀를 뀐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가 대드느냐? 내 오늘은 살려 두지 않으리라.]
그는 아내의 상처가 걱정인 모양이다.
[여보 상처가 어때? 죽을 지경인가?]
[죽을 지경은 아니지만 빨리 그들을 해치워요. 해치우기 전에는 나도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진현풍은 아내가 나무를 부둥켜 안고 있으면서 이쪽으로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상처가 대단한 모양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 주총등 다섯 사람이 그를 포위했고 가진악만이 옆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진현풍은 곽정을 땅바닥에 집어 던지고 왼손으로 전금발을 때렸다. 전금발은 깜짝 놀랐다. 혹시 곽정이 다치지 않을까 해서다. 민첩하게 몸을 수그려 진현풍의 공격을 피하면서 곽정을 잡아 일으키며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멀찌기 뛰어 피했다. 영묘박서의 솜씨로 자기도 피하고 다른 사람도 구출한 것이다. 어찌나 빠르고 묘한지 진현풍까지도 마음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동시는 성격이 잔인하여 강한 적일수록 더 참혹하게 죽이는 버릇이 있다. 흘풍쌍쇄는 열 손가락으로 사람을 할퀴는 구음백골조와 사람의 내장을 다치게 하는 최심장의 수련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눈앞에 위기가 닥친 것을 본 진현풍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왼손의 장풍과 오른손의 손가락으로 상대의 급소를 노리고 대든다. 강남 오괴는 오늘이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놓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온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힘을 다해 방어 했지만 접근하지도 못하니 포위망만 점점 더 넓어진다.
이때 한보구가 용기를 가다듬어 지당편법을 발휘, 땅에 찰싹 붙은 채 굴러 들어가 상대의 하체를 급습했다. 과연 진현풍도 순간적으로 동요를 하고 또 남희인도 때를 놓치지 않고 멜대로 적의 등을 적중시켰다. 동시는 아파서 <와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오른손으로 남희인을 할퀴려 들었다.
남희인이 멜대를 채 걷어들이기 전 적의 손가락이 오는 것을 보고 상체를 뒤로 젖혀 피하며 보니 진현풍의 어깨 관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순간적으로 팔이 수촌이나 길어졌다. 코끝에 비린내가 나며 새파란 손이 벌써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고수와 무예를 겨루며 진퇴유곡의 처지에 놓이게 될 때의 거리란 종이 한장의 두께만도 못 할 때가 있다. 게다가 상대의 팔이 수촌이나 더 늘어나, 공격을 하니 피할래야 피할 도리가 없다. 상대의 다섯 손가락이 벌써 자기의 뇌 속에 꽂히는 찰나다.
남희인이 급한 김에 왼손을 뻗어 적의 팔을 휘어잡고 왼쪽으로 꺽는 순간 주총이 벌써 동시의 등을 덮치고 오른팔로 그의 목을 껴안았다. 이때 자기 가슴을 완전히 적에게 내준 거나 다름없는 위험한 자세다. 무술가들이 제일 꺼려 하는 동작이지만 의동생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순간에 우선 구해 놓고 보자는 속셈 때문에 이렇게 나온 것이다.
쌍방이 결사적인 결전을 벌이고 있는 이때 하늘에서 뇌성 벽력이 일며 검은 구름이 몰려들어 달을 가려 자기 손가락도 볼 수없는 칠흙 같은 어둠이 주위를 감쌌다.
이때 뚝뚝 하는 소리에 이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진현풍은 있는 힘을 다해 남희인의 왼쪽 팔뚝을 부러뜨리고 동시에 왼손 팔꿈치로 주총의 가슴을 내질렀다. 주총이 앞가슴이 뜨끔하여 어쩔 수 없이 적의 목을 죄고 있던 팔을 풀며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진현풍도 죄었던 목이 아파 한쪽으로 비켜서서 숨을 할딱이고 있다. 한보구가 어둠속에서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우리 물러갑시다. 막내 누이 어떤가?]
[소리 지르지 말아요!]
한소영이 말을 하면서 옆으로 몇 발짝 물러섰다. 가진악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
[왜들 그래?]
[칠흙같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전금발이 대답하자 가진악은 크게 기뻤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강남 칠괴 가운데 세 사람이 중상을 입었으니 일패도지다. 이때 돌연 검은 구름이 내려앉으며 소낙기가 퍼 붓는다. 각자 숨을 죽이고 꼼짝 못하고 있다.
가진악의 귀는 예민하기가 귀신 같다. 빗소리 가운데서도 적의 숨소리를 식별할 수 있다. 위치를 확인한 뒤 두 손을 뻗어 여섯개의 마름쇠를 세 방향으로 쐈다.
진현풍은 강한 바람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세방향으로 날아오던 마름쇠 가운데 두개는 허공을 치고 나머지 네 개가 몸에 맞기는 했지만 워낙 내공이 대단한 그인지라 진통을 느끼기는 했지만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다. 그도 상대의 방위 위치를 의식하고 슬그머니 몸을 솟구쳐 두 손의 열 손가락을 펴고 가진악을 향해 맹렬하게 대들었다.
가진악은 옆으로 살짝 피하며 다시 마름쇠를 날렸다. 밤이든 낮이든 가진악에게는 아무 관계 없지만 진현풍은 아무것도 볼수 없으니 힘을 써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결사적으로 어울려 싸운다.
한소영과 한보구, 전금발 세 사람은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돋우는 한편 더듬어 나가 부상한 세 사람을 구해 냈다. 큰 형님의 생사가 경각에 달려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칠흙 같은 암흑속에서 손을 쓸래야 쓸 도리가 없으니 마음만 조급할 뿐이었다. 억수같이 비는 쏟아지는데 진현풍의 장풍 소리와 가진악의 마름쇠 나는 소리가 쉭쉭 들리는 가운데 두 사람만 2, 30초를 싸웠을 뿐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진현풍의 괴상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두 개의 마름쇠가 마침내 그를 맞힌 것이다. 모두들 기뻐하는 찰나 번개가 번쩍 온 산을 대낮처럼 밝혔다.
전금발이 급해서 소리를 지른다.
[형님 조심해요!]
진현풍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착, 어깨에 불끈 힘을 주어 날아오는 마름쇠를 받고는 또 왼손을 밖으로 뻗어 또 하나의 마름쇠를 움켜잡음과 동시에 오른손은 벌써 가진악의 가슴을 할퀴려 대들고 있었다. 가진악은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뛰었다. 진현풍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리 만무하다. 벌써 상대방의 옷을 쥐어뜯으며 갈퀴같은 손을 오므린 주먹으로 바꿨다. 몸도 움직이지 않고 오른편 팔뚝을 길게 뻗어 있는 내공을 총동원, 가진악의 가슴을 힘껏 후려 갈기면서 왼손에 쥐고 있던 마름쇠를 표창처럼 사용하여 찍으려 했다. 이 몇차례의 계속적인 공격은 그의 평생의 절기를 다 발휘한 것이라 그도 득의 양양한지 하늘을 우러러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우뢰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다시 번갯불이 두 번 번쩍번쩍 하는데 진현풍이 마름쇠로 자기 형을 찍으려는 것을 본 한보구는 깜짝 놀라 금룡편을 날려 마름쇠를 휘감아 잡아당겼다. 이를 본 진현풍이 노발 대발이다.
[요놈 땅딸보야. 이제 너의 개 같은 목숨을 뺏을 차례다.]
발을 빼어 덤벼들려고 하는데 발길에 무언가 채인다. 사람의 몸뚱이 같아 몸을 숙여 잡아 일으키니 곽정이다.
[나를 놔 줘요!]
비명을 질렀지만 진현풍은 코방귀만 뀐다. 이때 또 번개가 번쩍 했다. 곽정은 자기를 잡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험상궂은 데 잔뜩 겁을 집어먹고 허리에 차고 있던 비수를 뽑아 그를 향해 푹 찌르고 말았다. 진현풍은 정통으로 배꼽이 찔린 것이다. 팔 촌 길이나 되는 칼이 손잡이까지 들어가 버렸다.
진현풍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원래 동시 진현풍의 연문은 배꼽이었다. 보통 칼로 찔러도 죽을 텐데, 구처기가 준 이 비수는 금과 옥도 자를수 있는 날카로운 보검이다. 진현풍은 고수와의 대결에서 늘 이 연문에 대한 방어만은 철통 같았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에 대해서만은 평소의 그런 경계심을 가질리 없다. 무공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치던 절세의 진현풍이 무예가 무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손에 죽고 만 것이다.
매초풍은 남편의 처참한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몇 바퀴나 나뒹굴고 말았다. 그의 강철 같은 몸이 그렇다고 다칠리 없다. 남편의 옆에 쓰러지면서 소리를 지른다. 매초풍은 남편이 숨을 거두기 전 몸에 있는 내공이 흩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적인 일이지만 그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괴로운 것이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의 천령개를 힘껏 내리쳤다. 죽기 전에 내공이 흩어지는 진통이나 덜어 주자는 속셈에서다.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더듬어 구음진경을 찾았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원래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했다. 둘다 동해 도화도 도주인 황약사의 제자들이다. 이 황약사는 무공으로 일파를 이루고 있는데 그의 무공은 도화도에서 몰래 익혔고, 또 완전히 수련을 쌓은 후에도 도화도를 떠난 일이 없기 때문에 중원의 무림 인사들 사이에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 공력의 심오함이나 기예의 오묘함에 대해 말한다면 관동 관서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전진교나 천남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단씨에 비해 손색이 없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무예를 다 배우기 전 서로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일 이 일이 탄로나는 날에는 생명을 건질 수도 없거니와 비참한 처형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전긍긍 고민하다가 마침내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작은 배를 몰래 훔쳐 타고 남쪽의 횡도를 거쳐 절강의 영파로 몸을 피했다.
진현풍은 달아날 때, 자기가 지닌 무공으로서는 이름을 날리기는 커녕 호신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슬그머니 스승의 밀실에 들어가 스스이 무예를 익힌 구음진경을 훔쳐 내왔었다. 그는 이 구음진경을 손에 넣은 뒤 멀리 달아나 다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다. 황약사는 화가 났지만 도화도를 떠나지 않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나머지 제자들의 손과 발을 꺾고 분질러 병신을 만들어 놓고 도화도 밖으로 내쫓은 뒤 자기만 남아 성질을 부리곤 했다. 흑풍쌍쇄는 동료들을 무참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지만 구음진경의 비법으로 마침내 무림에서 보도 듣도 못한 일가의 공력을 익히게 된 것이다.
그 부부는 두문 불출하여 몇 년 동안 수련을 쌓고 난 후에야 강호에 나타났다. 대적할 만한 상대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보통의 무사는 그만 두더라도 이름이 알려진 고수들도 그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 죽은 무림의 영웅들은 그 수효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 부부는 점점 더 교만해지다가 마침내 대하 이북의 각파 무술 명가들의 감정을 건드리게 되어 항산에서 집단적인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흑풍쌍쇄도 악전고투로 두 차례나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세번째에는 상대방에 고수가 워낙 많아 중과 부적으로 두 사람 다 부상을 입고 종적을 감춰 은거하게 된 것이다. 10여년동안 무림에서 그들의 소식이 끊기자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곳에 숨어 몰래 음독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그음 백골조와 최심장의 공력은 모두 구음진경에 씌여 있는 것으로 진현풍과 매초풍이 부부 사이이기는 하지만 시종 일관 그의 아내에게도 진경의 원본은 보여주지 않고 자기 혼자 배운 뒤 비로소 아내에게 가르쳐 주었지, 아무리 아내가 떼를 써도 막무가내로 보여 주지 않았다. 매초풍이 그 원인을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기 일쑤였다.
[이 경은 원래 상,하 두 권으로 아누어진 것인데 내가 서두르는 바람에 상권은 잊고 하권만 훔쳤소.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모두 상권에 기록되어 있소. 만일 원본을 당신에게 보여 주게 되면 당신을 욕심이 많아서 모두 익히려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무리가 생겨 이미 배운 공력도 위력을 잃게 될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몸을 해치게 된다오. 그래서 보여 주지 않는 게요.]
매초풍이 남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거니와 평소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의 말이라 더 시끄럽게 굴지는 않았다. 이제 남편이 임종하는 마당에 그 말을 꺼내려고 하다가 그만 숨이 끊어진 것이다. 그가 남편의 품을 더듬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당황하여 다시 찾아보려고 하는데 한보구, 한소영, 전금발이 여명의 흐미한 밝음을 타고 재차 공격을 개시했다.
매초풍은 눈이 멀어 손만 허우적거리다가 상대의 공격이 접근했을 때만 무섭게 반격을 시도한다. 삼괴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공격은 가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험한 고비만 몇번 넘겼다. 한보구는 한없이 초조했다.
(우리 세 사람의 힘을 합쳐서도 눈먼 여자 하나를 해치우지 못하니 이제 강남 칠괴의 명성도 헛되겠구나.)
갑자기 금룡편을 마꾸어 쥐고 쉭쉬쉭 세 차례나 매초풍의 등을 공격했다. 이틈을 이용하여 한소영도 재빨리 공격을 시작했고 전금발도 사정없이 덤벼들었다.
이제 막 적의 태세가 흩어지고 승산이 보이려는데 돌연 광풍이 일며 검은 구름이 짙게 내려앉고 눈앞이 칠흑처럼 캄캄해지더니 비가 쏟아지며 주먹만한 돌들이 이리저리 허공을 날아다녔다.
전금발등이 놀라 비키며 땅위에 납작 엎드렸다. 한참 지나 광풍이 멎고 폭우가 뜸해지자 검은 구름 사이로 실오라기 같은 달빛이 비쳤다. 한보구가 벌떡 뛰어 일어나면서 놀라 소리를 지른다. 매초풍의 그림자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진현풍의 시체도 종적이 묘연하다. 가진악, 주총, 남희인, 장아생 등 네 명은 땅에 누운 채로 있고 곽정이 바위 뒤에서 비죽이 머리를 내민다. 모두들 비에 흠뻑 젖었다.
전금발등 세 사람이 부상한 네 사람을 급히 돌본다. 남희인은 팔뚝과 뼈가 부러지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내상은 입지 않았다. 가진악과 주총은 원래 내공이 대단한 사람들이어서 동시의 맹격에 얻어맞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요, 다만 장아생만이 구음백골조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왔다. 강남 칠괴는 의형제를 맺은 뒤 자기보다 형제를 더 소중이 여기는데 장아생의 생명이 위급한 것을 보고 모두들 마음 아파 한다. 한소영의 마음은 간장을 도려내는 듯 더욱 아프다. 이 다섯째 오빠가 자기에게 사모의 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의 성격이 호방하고 무예를 좋아했을 뿐 남녀의 사랑이 중함을 외면하고 지냈고 또 장아생 역시 늘 웃고 시시덕거리기만 했지 둘이 서로 소곤소곤 마음을 주고받지는 못했다. 자기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대들었던 그 용기, 생각만 해도 하늘이 무너지듯 마음이 아파 장아생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이다.
장아생의 표정은 늘 웃는 상이다. 이때도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부채같이 큰 손으로 한소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울지마, 울지마, 나는 아무 일 없는걸.]
[오빠, 내 오빠에게 시집갈래요. 그러면 되지요?]
눈물로 범벅이 되어 말한다. 장아생도 두어번 하하거리며 웃더니 진통이 오는지 그대로 정신을 잃는다. 한소영이 계속 중얼거리듯 울며 속삭인다.
[다섯째 오빠, 안심하세요. 내 이미 장씨집 사람인걸요. 절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을께요. 내 죽더라도 영원히 모시고 지낼께요.]
장아생이 힘없이 두 눈을 뜨고 웃으며 낮은 소리로 말한다.
[내가 늘 잘못해 주었지!]
[아니예요. 즐 잘해 주신걸요. 제가 다 알아요.]
주총도 두 눈에 눈물이 괴었다. 곽정을 바라다본다.
[네가 이곳에 온 것은 우리를 스승으로 모시자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앞으로 우리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곽정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우리 칠형제는 모두 네 스승이다. 이제 다섯째 사부께서 저 세상으로 가시려 하니 먼저 절하고 뵙거라.]
주총의 울음 섞인 말이다. 곽정이 나이는 어리지만 마음만은 착해 즉시 땅에 꿇어 엎디어 장아생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됐다. 이젠 그만해라.]
장아생은 고통을 참느라 찡그린 얼굴에도 미소는 여전히 머금은 채 하는 말이다.
[착한 아이야, 내 재주를 네게 전해 줄수는 없지만...., 사실 내 재주란게 별 것 없구나. 배워 봐야 별로 쓸데도 없구. 나는 원래 둔한 데다가 무예를 배울 때는 늘 게으름만 피웠지. 공연히 뚝심만 믿고 말이다. 그때 좀 열심히 했더라면 오늘 이렇게 죽지도 않을 텐데....]
눈동자가 한 번 돌고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다. 가쁜 숨을 들이마시며 계속 입을 열었다.
[너도 그렇게 영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내 천만 번 당부하거니와 열심히 배워야 한다. 싫증이 날 때면 지금의 내 꼴을 생각해 보도록 해....]
말소리가 점점 가늘어 지자 한소영이 귀를 갖다 댄다.
[애를 잘 가르쳐요. 절대로.... 그....도사에게 지지 않도록....]
[걱정 마세요. 우리 강남 칠괴는 절대로 지지 않을 거예요.]
장아생이 가늘게 웃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남은 육괴는 땅에 끓어 엎디어 대성 통곡을 한 뒤 황산에 무덤을 파고 장아생을 묻었다.
돌로 비석을 만들어 세우니 날이 이제 활짝 밝았다. 전금발과 한보구는 산에서 내려와 철시 매초풍의 종적을 찾아 보았다. 광풍과 폭우 속에 사막위의 박자국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이 괴물의 행방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이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이 다시 산 위로 올라와 알리자 주총이 말문을 연다.
[내가 보기에는 눈도 멀었으니 멀리 달아나지 못했을 거야. 우선 이 애를 되돌려 보내 놓고 부상이나 치료한 뒤 세째, 여섯째, 일곱째가 다시 한 번 찾아보도록 하는 게 좋겠어.]
남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장아생의 무덤 앞에 꿇어 작별을 고하고 눈물을 뿌리며 산을 내려왔다. 얼마 걷지 않아 앞쪽에서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한보구가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고 앞질러 달리는데 얼마 가던 말이 우뚝 선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재촉을 해도 요지 부동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한보구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는 예감이 들어 멀리 앞쪽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둘러싼 가운데 몇 마리의 사냥하는 표범이 무언가를 물어뜯고 야단이다. 그는 말이 표범을 무서워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에서 뛰어내려, 금룡편을 꺼내 움켜 쥐고 달려가 보니 두 마리의 표범이 모래 속에서 한구의 시체를 긁어내고 있었다. 한보구가 몇발짝 더 나가 보니 그 시체는 바로 흑풍쌍쇄 동시 진현풍이다. 그런데 목에서부터 배까지 누가 그 가죽을 벗겨 간 것 같았다.
[아니, 어제 틀림없이 곽정의 비수에 배꼽의 연문이 찔려 죽었는데 어째서 시체가 여기에 와 있을까? 그리고 죽은 시체를 누가 이렇게 비참하게 가죽까지 벗겨 갔을까? 무엇 때문에.]
이때 전금발 등도 달려왔지만 그 까닭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강남 육괴는 진현풍의 시체를 바라다보면서 어제의 일을 생각했다. 만약 곽정이 아니었더라면 꼼짝 없이 진현풍의 손에 죽고 말았을 것에 생각이 미치자 간담이 서늘해지고 식은 땀까지 흐른다.
이때 두 마리의 표범은 시체를 물어뜯어 먹고 있었고, 옆에는 말에 탄 소년이 빨리 표범을 끌고 가라고 호령을 하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곽정을 보고는 욕지거리를 한다.
[하, 네 놈이 여기 숨어 있었구나, 타뢰와 싸우러 가는 길인데 안 갈래? 겁장이로구나.]
원래 이 아이는 상곤의 아들 도사 바로 그놈이다.
[뭐야 또 타뢰하고 싸우려고? 그래 타뢰는 지금 어디 있니?]
도사는 득의 양양 거만을 떤다.
[내 지금 표범을 데리고 가서 잡아먹게 하려고 한다. 항복하지 않으면 너도 함께 잡아먹게 할 테다.]
그는 강남 육괴가 옆에 있는 것을 보자 약간 두려워하는 눈치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곽정을 때렸을 텐데 말이다.
[그래, 타뢰가 어디 있느냐 말이다.]
곽정이 큰 소리로 물어도 도사는 여전 거드름이다.
[지금 표범이 잡아먹으러 간다.]
표범을 끄는 병사를 재촉, 앞으로 향한다. 병사 하나가 말린다.
[공자님, 글쎄 그아이는 철목진 대한의 아들이에요.]
도사가 말채찍을 들어 병사의 머리를 후려 갈긴다.
[무얼 무서워하느냐? 누가 그놈 보구 오늘 먼저 나를 때리랬더냐? 빨리 가자.]
그 병사는 무서워 더 말하지 않고 표범을 끈 채 그의 뒤를 따른다. 다른 병사 하나가 일이 크게 벌어질 것을 걱정하여, 달아나면서 소리를 지른다.
[내 가서 철목진 대한에게 아뢰겠습니다.]
도사가 막으려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벌써 날듯 달려갔다.
[좋아. 우선 타뢰를 잡아먹게 하자. 철목진 아저씨가 어쩔 테야! 흥.]
곽정은 표범이 무서웠지만 타뢰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한소영을 바라다본다.
[사부님, 쟤가 표범을 가지고 타뢰를 잡아먹게 한대요. 빨리 가서 달아나라고 해야겠어요.]
[네가 가? 너까지 잡아먹히면 어쩌려고? 무섭지 않아?]
[무서워요.]
[그럼 갈래? 안 갈래?]
곽정이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그래도 갈래요!]
두 다리를 재빨리 놀려 앞을 향해 달린다. 주총이 상처가 아파 낙타 등에 누워 있다가 곽정의 뒷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 형제들, 애가 둔해 보이기는 하지만 마음에 드는군요.]
[네째 오빠가 사람을 잘봐요! 빨리 가서 구해 줘야겠군요.]
[버릇없이 구는 그 녀석, 집에 표범을 기르는 걸 보니 틀림없는 왕공의 자제일 텐데. 조심해야지, 일이 커지면 큰일이오. 게다가 우린 세 사람이나 부상을 입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전금발의 말이다. 한보구가 경신의 공력을 써서 곽정의 뒤를 바짝 쫓아가 한아름에 안아 자기의 어깨에 올려 놓았다. 키는 작지만 걸음만은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장이나 앞장을 섰다.
곽정은 그의 뚱뚱한 어깨가 마치 한 필의 준마처럼 생각되었다. 빠르고 편했다. 좀 가자니 과연 10여 명의 아이들이 타뢰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도사의 지령을 받아 지키고 있으면서도 대들어 때리지는 않고 빠져 달아나지 못하도록 포위만 하고 있었다.
타뢰는 주총으로부터 세 가지 재주를 배운 뒤, 그날 밤으로 연습을 해 익히고는 다음날 아침 곽정을 찾으니 보이지 않고, 또 세째 형 와활태에게 도움도 청하지 않은 채 혼자 도사와 결투를 하려고 나섰다.
도사가 10여 명의 동료를 데리고 나와 보니 타뢰 혼자다. 이상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싸움을 해보니 타뢰의 솜씨가 그게 아니다. 10여 명이 모두 타뢰에게 얻어맞고 말았다. 주총이 가르쳐준 재주는 간단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공공권 가운데의 묘기이다. 도사는 타뢰 때문에 두 차례나 땅바닥에 나뒹굴었고, 코도 두어 번 얻어맞았다. 화가 나서 집으로 달려가 표범을 끌고 나온 것이다. 타뢰는 혼자 이긴 것만 대견해서 무서움이 없이 태연 자약하게 포위망 속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곽정이 먼 곳에서 소리를 지른다.
[타뢰, 타뢰, 빨리 달아나라. 도사가 표범을 데리고 와서 잡아먹게 한대.]
타뢰는 깜짝 놀라 포위망을 뚫고 빠지려 했다. 아이들이 몰려 들어 몸을 뺄 수가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보구와 말에 탄 도사가 동시에 당도했다.
강남 육괴가 막기로 한다면 손쉽게 막을 수도 있겠지만 우선 일이 크게 벌어지면 골치가 아프기도 하거니와 타뢰와 곽정이 어찌하나 그 동정을 살펴 보기 위하여 가만히 있는 것이다. 돌연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히 울리며 여러 필의 말이 달려왔다. 말에 탄 사람 하나가 고함을 지른다.
[표범을 끌러 놓으면 안된다. 표범을 끄르지 말아라!]
원래, 목화려, 발이홀 등 네 명의 호걸이 이 소식을 듣고 급한 나머지 찰목진에게 미쳐 보고도 하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이때 철목진과 왕한, 찰목합, 상곤 등은 몽고의 장막 안에서 완안 형제와 더불어 한담을 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장막 밖으로 뛰어 나와 말에 올라 탔다. 왕한은 좌우에 있는 호위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빨리 가서 도사에게 일러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호위병들도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렸다.
완안 영제는 어제 저녁 표범과 사람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려다 실패하여 심심하던 차에 이 말을 듣고 덩달아 따라 나섰다.
[우리도 가서 구경하자.]
완안열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일 상곤의 표범이 철목진의 아들을 물어 죽인다면 그들 두 집은 원수가 될 것이고 그렇게만 되면 우리 대금국으로서는 호박이 넝클째 굴러오는 것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수종에게 몇 마디 귀엣말을 하니 그 수종은 재빨리 장막 밖으로 사라졌다. 완안형제가 말을 타고 출발하자 왕한, 상곤, 찰목합 등이 옆에서 호위를 했다. 얼마나 갔을까, 여러 명의 금나라 병사들이 왕한이 먼저 보낸 전령을 막고 시비가 벌어져 싸움질하는 것이 보였다. 완안 형제의 수종들이 소리를 질러 봤다. 그러자 금나라 병사가 이렇게 보고를 한다.
[우리가 얌전하게 이곳에 있는데, 이자들이 눈도 없는지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왕한의 친병은 아무 까닭 없이 금나라 병사들에게 얻어맞은 것이다.
[우리가 앞에 있었고 너희가 뒤에서 우리를 때렸다.]
완안 형제는 그들의 말은 아랑곳없이 말을 재촉하여 앞으로 가기만 한다. 찰목합이 보아하니 틀림없이 완안열 형제가 꾸민 흉계인데 경계하지 않으면 큰일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당도해 보니 표범의 목에 걸려있던 사슬이 끌러지고 네 발을 모은 채 으르릉 거리고 있었으면 표범 앞에 두 어린이가 서 있는데 하나는 타뢰요, 다른 하나는 곽정이다. 철목진과 네 영웅은 활 줄을 당긴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표범을 겨누고 있었다.
철목진은 자기의 어린 아들이 위급한 곤경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서도 두 마리의 표범을 상곤이 워낙 아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들에게 대들지만 않는다면 쏘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도사는 할아버지와 제 아비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몸이라 더욱 오만스럽게 표범을 호령하고 있었다. 왕한이 노하여 말리려는데 등뒤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히 울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일기의 홍마가 내달려오는데 말 위엔 중년 부인이 표범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걸치고 품안에 예쁜 딸을 안은 채 말에서 뛰어내린다. 바로 철목진의 아내, 타뢰의 어머니다.
그는 몽고의 장막안에서 상곤의 부인과 얘기를 나누다가 이 소식을 듣고 딸인 화쟁을 안은 채 달려온 것이다. 그는 아들이 무사함을 발견하자 기쁘고 놀라와 소리를 질렀다.
[빨리 활을 쏴요!]
아들에게 신경을 쓰느라고 딸을 깜빡 잊었다. 이 틈에 네 살먹은 화쟁은 오빠 앞으로 다가서고 손을 뻗어 표범을 어루만지려 했다. 여러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두 마리의 표범은 덮칠 기회만을 노리다가 화쟁이 손을 뻗자 쏜살같이 대들었다.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지른다.
찰목진 등이 활 줄을 당긴 채 표범을 겨누고 있었지만 워낙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잘못 하다가는 딸이 다칠까 두려워 망설이고 있었다. 네 영웅이 활을 버리고 칼을 뽑아 들고 대들었다. 이때 곽정이 땅바닥을 빙그르르 돌아 화쟁을 껴안았다. 동시에 한 마리의 표범이 앞 발로 곽정의 등을 덮쳤다.
네 영웅 가운데 박이홀이 제일 날쌔다. 칼을 부여잡고 달려들었다.
이때 쉬쉭 몇번 가볍고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스친듯 만듯 두 마리의 표범이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배를 하늘로 향한 채 꼼짝못하고 있다. 박이홀이 가까이 가 들여다보니 두 마리의 표범이 모두 좌우의 태양혈에 구멍이 뚫렸고 그 사이로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수의 솜씨가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바라다보니 여섯 명의 한나라 남녀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구경을 하고 있다. 암기는 아무래도 그들이 쏜 것 같은 짐작이 간다.
곽정의 손에서 놀라 울부짖는 화쟁을 급히 철목진의 아내가 뺏아 안고 달래며 동시에 타뢰를 품안에 끌어안고 어루만진다. 상곤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어느 놈이 표범을 쏴 죽였느냐?]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서로 바라다볼 뿐이다. 철목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곤 아우, 내가 돌아가서 더 좋은 놈으로 네마리를 물어 주지. 게다가 여덟 쌍의 검은 매를 더 붙여서 말일세.]
상곤은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말은 안 했다. 왕한은 도사를 혼냈다.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혼을 내자 도사는 땅에 뒹굴며 몸부림을 치고 울어댔다. 왕한이 소리를 질러도 막무가내다.
찰목합은 철목진의 귀에 대고 방금 도중에서 보고 들은 일을 말해 주었다. 그 모두가 완안열 형제의 흉계임을 알자 화가 났다.
(우리가 불화하기를 원한다면 더욱 화목하게 지내며 네 놈을 상대해 주리라.)
땅위에 뒹구는 도사를 웃으며 안아 일으켰다. 도사가 몸부림을 치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철목진이 잡은 팔을 제 마음대로 뿌리칠수가 없는 일이다.
철목진은 왕한을 바라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아이들이 노느라고 한 짓. 이제 그만 하십시오. 제가 보기에는 이 아이가 아주 좋으니 다음에 제 딸이 크면 시집을 보내지요?]
왕한이 화쟁을 보니 두 눈이 호수같이 맑고 피부색은 어린 양과 같이 곱다.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이 다음 자라면 절세 미인감이다. 기분이 유쾌해져서 앙천 대소를한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있을라구? 그렇다면 내 손녀를 자네 큰 아들 출적에게 보냄세.]
철목진도 기뻤다.
[상곤아우. 이제 우리는 또 사돈까지 됐소!]
상곤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부왕의 명령이라 반대할 수 없어 억지로 웃는 척하고 만다. 완안열은 계략이 어그러지자 몹시 불쾌했다. 고개를 휙 돌리다가 보니 주총이 낙타 등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이 괴짜들이 어째 여기에 와 있을까?)
육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멀찌기 선 채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잘못하여 자기를 발견할까 두려워 완안열은 말머리를 돌려 가버렸다.
철목진은 강남 육괴가 자기 딸의 생명을 구해 준 것을 알기에 박이홀을 시켜 가죽과 황금으로 상을 내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도록 했다. 자기자신은 곽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용감함을 칭찬해 주었다.
타뢰는 왕한 등 다른 사람이 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도사와 싸우게 된 까닭과 경위를 아버지께 일렀다. 철모진이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전금발을 향해 말문을 연다.
[여러분께서 이곳에 머무르며 제아들에게 무예를 좀 가르쳐 주셨으면 하는데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전금발도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곽정을 가르치려면 머물곳이 있어야 할텐데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대한께서 머물게 해주신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있겠습니까? 마음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우리가 액수를 가지고 따져서야 되겠습니까?]
시원하게 대답을 하자 철목진은 몹시 기뻤다. 박이홀을 시켜 여섯 분을 돌봐 드리라고 분부하고 자기는 완안열 형제를 전송하기 위해 말머리를 돌려 가버렸다.
강남 육괴는 서서히 그 뒤를 따르며 앞 일을 상의했다.
한보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진현풍의 시체에서 가슴과 뱃가죽을 누가 벗겨 갔는데, 그게 동료의 소행일까? 아니면 적의 소행일까?]
[정말 모를 일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안가니. 그러나 저러나 급한 일은 우선 그 철시의 종적부터 찾고 봐야 할것 같애.]
가진악이 말하자 주총도 동감이다.
[바로 그거야. 그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꼭 후환이 있을 것 같구먼.]
그러자 한소영도 나선다.
[다섯째 오빠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나요?]
그래서 한보구, 한소영, 전금발이 즉시 빠른 말을 골라 타고 이곳저곳 며칠 동안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에 그치고 말았다.
[그놈의 여자가 두 눈에 형님의 마름쇠를 맞았으니 독이 퍼져 심산 유곡에 떨어져 죽었을꺼야.]
한보구의 말에 다른 사람도 동감이다. 가진악만 흑풍쌍쇄의 지독함을 알아 자기 눈으로 직접 그의 시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여러 형제들의 기분을 생각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강남 육괴는 이곳에 머무르면서 곽정과 타뢰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낮에는 활쏘기, 말달리기, 긴 창 쓰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가끔 철별과 박이홀도 와서 도와주고 고쳐 주었다. 밤만 되면 강남 육괴는 곽정을 혼자 불러내 주먹쓰는 법이며 암기쓰는 법, 경신공력등을 하나씩 하나씩 전해 주었다.
곽정의 자질이 비록 둔하기는 했지만 이 수련을 쌓아야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신념만은 강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배웠다. 주총, 전금발, 한소영의 오묘한 재주는 별로 못배웠지만 한보구와 남희인이 가르쳐 주는 기초는 하나 하나 착실하게 배워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10년이 흘러 곽정이 벌써 16세의 당당한 소년이 되었다. 무예를 겨루기로 한 날은 아직 2년이나 남았지만 강남 육괴는 잠시도 쉴새없이 강한 훈련을 시켰다. 잠시 말타기와 활쏘기를 멈추게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권술과 장풍, 칼쓰는 법만을 익히게 했다.
第 十一 章. 그 스승에 그 제자
삭풍이 약해지고 대설이 멎기는 했지만 북국은 아직도 추웠다. 이날은 바로 청명절. 강남 육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소와 양 등 제물을 챙긴후 곽정을 데리고 장아생의 분묘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 몽고 사람들의 거처는 일정할 수가 없다. 이때 그들이 사는 몽고 천막과 소미타 장아생이 잠든 묘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빠른 말로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일곱 사람은 황산에 올라 향을 피우고 무덤 앞에 꿇어 엎드렸다. 한소영은 기도를 드리듯 마음속으로 조용히 소곤거렸다.
[다섯째 오빠, 십 년 동안 우리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이 아이를 가르쳐 왔습니다. 다만 아이의 자질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 다 잘 배우지는 못했습니다만 오빠가 하늘에서 보우하여 후년에 있을 가흥의 시합에서 우리 강남 칠괴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보살펴 주소서!]
육괴가 북방에서 살기 어언 10년. 이제 머리까지 희끗희끗해졌고, 아름다움이 퇴색한 것은 아니지만 한소영도 그전의 소녀다운 아리따움은 찾아볼 수 없이 변해 있었다. 주총은 무덤 옆에 흩어진 몇 무더기의 해골을 바라다보면서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사로잡혀 있었다.
10년 동안 그는 가진악과 더불어 주위 수백리 내의 산골짝과 굴이란 굴은 모두 뒤지며 철시 매초풍의 종적을 샅샅이 찾아 보았던 것이다. 만일 중독이 되어 죽었다면 틀림없이 해골만이라도 남아야 하는 것이다. 죽지 않았다면 눈먼 여자가 이렇게 오랜 세월 은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 매초풍은 유령처럼 사라지고 다만 흩어진 백골만이 잔인한 흑풍쌍쇄의 당시의 흔적을 말없이 남겨 놓고 있을 뿐이다.
가진악은 곽정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한편 틈틈이 자신도 복마장법을 익혔다. 흑풍쌍쇄는 악독하여 만일 아직도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디 복수를 하기 위해 언젠가는 다시 자기들을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년의 고초 끝에 육괴의 공력도 크게 진보하여 왕년 구처기나 쌍쇄와 겨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되어 있었다. 남산초자 남희인은 곽정이 기가 죽어 있는 것을 볼때마다 자기가 어려서 고생하던 생각을 하며 격려하면서 각별히 사랑해 주었다. 이때 곽정이 장아생의 무덤 앞에 꿇어 절을 하고 일어서면서 매끈한 돌멩이를 밟고 자칫 미끄러질 뻔하다가 몸을 가누고 반듯하게 선다. 이를 본 남희인은 곽정의 기초가 어느 정도 다져졌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전금발을 건너다보고 웃으며 곽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자 덤벼라!]
왼손바닥으로 자기 몸을 방어하며 오른손바닥으로 곽정의 어깨를 비스듬히 내리쳤다. 곽정은 멍하고 있다가 본능적으로 손을 어깨까지 올려 막으려다가 다시 내린다. 남희인은 그가 방어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자 미소를 보내며 뻗었던 손바닥을 주먹으로 바꾸어 쉿 소리와 함께 곽정의 가슴을 때리려고 했다. 이를 본 한소영이 입을 열었다.
[어디 사사부와 겨뤄 봐라. 얼마나 늘었나 구경 좀 하자!]
남희인은 때리려던 주먹을 멈추고 왼손으로 정확하고도 매섭게 곽정의 허리를 할퀴려 들었다. 곽정이 뒤로 번쩍 뛰어 피했지만 남희인은 그의 발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오른손으로 재빠르게 그의 어깨를 긁어 잡아당겼다.
곽정이 어깨를 움츠리며 가까스로 피했다.
[너도 공격을 해라, 이 바보야! 왜 당하고만 있어!]
한보구의 재촉이다. 이 말을 들은 곽정이 주먹으로 반격을 한다. 우선은 한보구에게 배운 나한권으로 남희인의 개산장법에 맞서고 있다. 한참 동안 싸우다가 자신도 개산장법으로 바꾼다. 남희인은 그의 재주를 보기 위한 속셈이라
그가 솜씨를 발휘하도록 내버려둔 채 7, 80초나 겨루다가 갑자기 왼손의 장풍을 밖으로 뿌리면서 몸을 돌리고 창응박토의 솜씨로 곽정의 등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곽정은 즉시 자세를 낮추며 추풍소낙엽으로 왼발을 돌리면서 사부의 아랫도리를 휩쓸어 버렸다. 곽정이 발을 오므리고 자세를 바꾸려 하자 남희인이 소리를 지른다.
[똑똑히 기억해 두어라. 이솜씨를!]
손을 아래로 낮추며 곽정의 정강이를 움켜 쥐었다. 곽정이 왼발을 잡힌 채 왼손의 장풍으로 사부의 얼굴을 찍는다. 어찌나 빠르고 이상한지 남희인도 깜짝 놀라며 왼손의 장풍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장풍과 장풍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동시에 남희인의 오른손 장풍이 날았다. 있는 힘을 다한 것도 아닌데 곽정이 비틀비틀 뒤로 넘어졌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며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희인이 자기 공격의 취약점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수풀 속에서 킥킥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주총과 전금발의 낯빛이 달라지며 소리를 지른다.
[누구냐?]
몸을 날려 웃음 소리가 들린 곳을 둘러쌌다. 수풀속에서 계란같은 해맑은 얼굴에 복숭아 빛으로 물든 예쁜 볼을 가진 소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소녀는 웃으면서 곽정을 놀려댄다.
[곽정 오빠, 또 사부님께 때려 주라고 할까요?]
곽정이 얼굴을 붉힌다.
[누가 여기 함부로 오라구 했어?]
[맞는 것좀 보고 싶어서요.]
원래 이 소녀는 철목진의 딸 화쟁공주다. 이 소녀와 타뢰, 곽정은 나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늘 함께 놀며 자랐다. 그는 부모가 워낙 금이야 옥이야 하고 위해 주는 외동딸이라 귀염둥이로서의 버릇도 있거니와 곽정이 워낙 강직하고 둔한 편이라 둘은 싸우기도 잘 했다. 싸우고 나면 또 곧 친해지고 친해졌다가는 또 싸우고, 그래도 늘 화쟁이 먼저 부드러운 얘기를 꺼내와 화해를 하곤 했다. 화쟁의 어머니도 곽정이 일찍 표범의 입에서 자기 딸을 구해 준것이 고마와 남다른 눈으로 곽정을 바라다보며 늘 옷가지며 가축등을 두 모자에게 보내주곤 했다.
이날 화쟁은 곽정이 성묘를 올줄 알고 먼저 말을 달려 이쪽으로 와서 숲속에 숨어 있다가 깜짝 놀래 주자는 심산이었다. 곽정은 그가 자기를 놀리는 말을 듣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녀가 온 것만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럼 나보구 오지 말란 말이에요? 그럼 나 가요.]
화쟁이 뾰루퉁해지자 곽정이 당황한다.
[아냐 아냐, 우리와 함께 돌아가면 되지 않아.]
강남 육괴도 그들의 이런 모습을 바라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가진악이 돌연 화쟁을 향해 물었다.
[함께 온 사람은 어디에 있나?]
화쟁은 어리벙벙한 눈치다.
[누구요? 전 혼자 왔는걸요.]
[그럼 오빠는 어떻게 된 게야?]
[오빤 오지 않았어요. 정말 저 혼자 왔어요.]
[여섯째 아우가 좀 가 봐.]
쇠지팡이로 묘지 뒤의 숲을 가리키자 전금발이 달려가 여기저기 샅샅이 뒤져 보았다.
[여긴 아무도 없는데요.]
[내 틀림없이 두 사람 소리를 들었는데, 거 참 이상하다.]
원래 화쟁이 웃을 때 그는 분명히 묘지 뒤에서 나는 다른 소리도 들었다. 화쟁의 동행이거니 생각했는데 나타나지 않자 묻게 된 것이다. 한참 동안 사색에 파묻혀 있는데 전금발이 놀라 소리를 지른다.
[아니, 어째 해골이 하나 없어졌지?]
여러 사람이 달려가 보니 한 무더기 가운데 맨 위에 있던 해골이 온데간데 없다. 해골 위에는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었다. 맨위에 있던 해골 자국이 아직도 역력하다. 틀림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누가 가져가 버린 것이다. 모두들 얼굴색이 달라졌다. 전금발이 작은 소리로 가진악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자 그는 곧 명령을 내린다.
[사방을 뒤져봐!]
쇠지팡이를 들고 앞장을 선 채 황산을 달려 내려가자 남은 사람들도 일제히 뒤를 따랐다. 전금발이 남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말발굽 자국이 있다. 쫓아라!]
급히 말에 올라 남쪽을 향해 질풍처럼 달린다. 화쟁은 다른 사람들의 긴장한 모습에 자기도 놀란다.
[내가 뭘 잘못했나?]
[화쟁이 알 일 아냐. 아마 무서운 적이 나타났나 봐.]
화쟁이 곽정의 말을 듣고 혀를 내휘두른다.
한참 동안 달리는데 수십기의 말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 몽고 군사들이다. 앞장을 선 백부장이 화쟁을 발견하고 말에서 뛰어내려 경례를 한다.
[공주님, 대한께서 모셔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화쟁이 이마를 찌푸린다.
[무슨 일로요?]
[왕한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화쟁은 더욱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뱉듯 말한다.
[난 안가요.]
백부장은 난처했다.
[공주님이 안 가시면 우리가 벌을 받게 됩니다.]
화쟁이 어렸을 때 그의 부친은 그를 왕한의 손자인 도사에게 시집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자라면서 곽정과 친하게 지냈다.
아직 나이 어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각별한 정을 나누는 처지는 아니지만, 어린 마음에도 곽정과 헤어져 보기 싫은 도사에게 언젠가는 가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 앞에 불쾌한 사념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입을 뾰족하게 내민채 아무 말이 없다.
[곽정아. 네가 공주를 모시고 돌아가거라.]
한소영이 분부를 내리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말고삐를 채고 앞달려 나간다. 화쟁은 아무래도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곽정과 둘이 백부장을 따라 돌아왔다. 왕한과 상곤이 사자를 시켜 예물을 보내 온 것이다.
철목진은 화쟁을 보고 사자를 만나라고 했다.
곽정도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와 기분이 언짢은 듯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앉아 있었다. 어머니 이평이 까닭을 물었지만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이때 밖에서 풍악 소리가 들려 사자를 환영하는 것을 알고서야 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주가 아무리 너와 친하게 지낸다 하더라도 우리는 한나라 사람이야. 공주는 금지옥엽같이 귀한 신분이고 또 왕한의 손자는 장차 대한이 될 터이니 서로 그쪽이 어울린다. 속상하게 생각지 말아라.]
이렇게 아들을 달랬다.
[어머니, 내 생각이 달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 도사가 성질이 난폭해 공주가 이다음 고생을 할까봐 걱정이 돼서 그래요.]
이평은 아들의 착한 마음을 읽고 한숨을 쉰다.
[그렇다고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니.]
모자가 다정하게 이 얘기 저 얘기 주고 받다가 저녁밥을 먹은 후 곽정은 사부들이 있는 장막으로 왔다. 여섯 사부는 곽정을 보자 머리를 살래살래 내 흔든다. 그렇다면 쫓아갔던 일은 허탕이었음이 분명하다. 곽정은 전금발로부터 장권에 대해 약간 배우고 집으로 돌아온뒤 옷을 입은 채 살며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장막을 가볍게 세번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번쩍 눈을 떴다.
무예를 배우는 사람의 청각은 예민하게 마련이다. 슬그머니 일어나 장막의 한 모퉁이를 걷어 밖을 내다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달빛이 비치는 장막의 입구에 해골이 하나 얌전하게 놓여 있는게 아닌가? 그 해골 위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곽정은 차디찬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생각을 해봤다.
(상대가 나를 찾아왔구나! 사부님들이 계시지 않은데 나 혼자 어떻게 감당해 낸담? 그러나 저러나 대들어 어머니가 다치시기나 한다면 이 일을 어쩌지?)
슬그머니 요 밑의 칼을 뽑아 들고 선뜻 장막을 걷어 제치며 쉭쉭 칼을 휘둘러 전신을 호위하면서 나와 왼발로 해골을 걷어차 버리고 사방을 휘둘러보니 앞에 있는 큰 나무 아래 한 사람이 등을 돌려 대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덤빌 테면 이리 오너라.]
이상하게도 몽고어가 아닌 한어다. 달빛 아래 살펴보니 품이 큰 도포에 넓은 소매다.
[무슨 일이오?]
곽정의 반문이다.
[네가 가지고 있는 비수 좀 보자!]
몸을 돌리는가 했더니 벌써 곽정 앞에 대들어 손에 쥐고 있는 칼을 차버리고 장풍으로 가슴을 친다. 곽정은 적의 공격이 맹렬한 것을 보고 몸을 살짝 비키며 오른 손으로 적의 팔을 긁어 잡아당기며 왼손으로 팔꿈치를 잡았다. 이 솜씨는 분근착골수 가운데의 장사단완으로서, 잡히기만 하면 팔꿈치가 부러지거나 관절이 퉁겨 나가게 마련이다. 원래 주총이 놀기 좋아하고 웃기기 잘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생각만은 치밀해서 몇 차례나 매초풍이 죽지 않았으면 십중 팔구 원수를 갚기 위해 올 테니 그 대책을 강구해 놓자고 상의를 했다. 그가 오는 것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준비는 더욱 치밀하고 수단이 악랄할 것임은 불문가지다.
10년 동안 매초풍의 소식이나 행방은 묘연했지만 그들의 경계심은 변함이 없었다. 주총은 황산에서 그와 대결한 후 어떻게 하면 구음백골조에 대항할수 있을까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자기의 손등에 남겨진 다섯 개의 상처, 그것은 바로 매초풍이 준 선물이다. 이렇게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신에 칼 하나 들어갈 수 없는 완전 무결한 상대인 그의 연문이 어디 있는지 알아 낸다 하더라도 접근할 수도 없는 처지인데다, 곽정이 동시를 죽인 것과 같은 요행을 또 바랄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방법은 하나, 오직 이 분근착골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무술은 상대의 생명을 해치는 것도 아니요, 다만 관절이나 뼈를 분지르면 되는 것으로 번개처럼 재빨리 상대방의 관절과 근맥만을 공격하면 되는 것이다. 주총은 당시 중원에 있을 때 좀더 잘 배워 두지 않았음을 후회하면서 혼자 연구를 해봤다. 별명이 묘수서생이라 손재주가 비범하고 급소에 대한 지식이 원래부터 풍부하여 쉽게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이고, 완전히 터득한 후 곽정에게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이때 곽정은 갑자기 뜻밖의 강적을 만나 이 묘기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은 팔과 팔꿈치를 곽정에게 잡히자 깜짝 놀란 나머지 왼손을 번쩍 들어 장풍으로 곽정의 엄굴을 후려 갈겼다. 곽정은 상대의 팔을 꺾어 분지르려고 하다가 매서운 장풍에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놓고 번쩍 뛰어 뒤로 피했다. 장풍이 어찌나 세게 지나갔는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며 견디기 힘든 통증이 왔다.
몸을 돌려 위치를 바꾸자 상대방의 얼굴이 드러났다. 청년 도사다. 긴 눈썹, 맑은 눈동자, 얼굴은 관옥같고 나이는 l8,9세.
[과연 솜씨가 훌륭하군. 강남 육괴의 십 년 동안 수고가 헛되지 않았소!]
곽정은 경계를 하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왜 나를 찾아왔소?]
[우리 또 한 번 겨뤄 봅시다.]
말도 끝내기 전에 장풍이 분다. 곽정은 정신을 차리고 요지부동, 장풍이 앞가슴을 엄습하기를 기다려 몸을 살짝 옆으로 비키면서 왼손으로 적의 어깨를 잡고 오른손을 들어 적의 턱을 비틀려 했다. 비틀기만 하면 아래 턱이 빠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번에는 도사도 걸려들지 않는다. 오른손의 장풍을 거두어 들이면서 그 장풍으로 비스듬하게 갈긴다. 곽정은 여전히 분근착골수로 대결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10여초를 싸웠다. 도사의 몸이 날쌜 뿐만 아니라 장풍도 자유자재, 제비가 물을 차듯, 잠자리가 물을 찍듯 묘하다. 장풍이 오기 전에 벌써 위치를 바꾸어 상대방을 어지럽게 만든다. 도저히 자기의 적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곽정이 무예를 배운 후 처음 맞이하는 상대가 바로 무공이 강한 이 도사다. 게다가 매초풍이 뒤에 숨어 독수를 쓰지 않을까 겁을 먹고 있는데, 상대의 발이 날아 퍽 소리와 함깨 자기 사타구니를 차 버렸다. 다행히도 곽정이 평소 하체에 대한 훈련을 착실히 해 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나가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또 상대도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는 것 같지 않은 눈치다. 곽정도 두 손의 장풍을 이리저리 날리며 전신의 급소를 호위하면서 사력을 다해 방어를 했다. 또 수초를 더 싸웠다. 그 도사가 점점 더 육박해 들어오자 곽정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때 등뒤에서 적의 하체를 공격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세째 사부 한보구의 목소리다.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몸을 꺾어 왼쪽에서부터 공격을 하며 보니 여섯 분의 사부가 언제 왔는지 자기 뒤에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적과의 상대에만 온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마음이 든든해서 계속 상대의 하체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 도사의 하체가 흐트러진다. 과연 하체가 허약한 모양이다. 강남 육괴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그의 취약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도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곽정이 여세를 몰아 파고드니 도사는 쓰러질 듯하더니 두 발이 번쩍 공중에 떴다. 이것은 적을 유인하자는 수작이다. 한보구와 한소영이 동시에 소리를 지른다.
[조심해라!]
역시 곽정은 경험부족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왼발을 잡히고 말았다. 도사는 차려고 대들던 자세 그대로 곽정을 집어 던지니 옴쭉달싹 못하고 허공에서 한 바퀴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꽝 하고 떨어졌다. 곽정도 보통은 아니다.
낙법을 익힌 탓으로 등을 땅에 댄채 떨어지는 찰나 몸을 솟구쳐 일어나면서 돌격하려고 하는데 벌써 여섯명의 사부가 그 도사를 포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도사는 저항도 공격도 멈춘 채 두 손을 공손히 잡고 읍을 한다.
[제자 윤지평은 스승인 장춘자 구도장의 명을 받고 여러 사부님께 문안을 드리는 바입니다.]
공손하게 말을 한 후 땅에 엎디어 머리를 조아린다. 강남 육괴는 구처기가 보냈다는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윤지평이 일어나면서 품속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주총에게 올렸다.
가진악이 몽고의 순라꾼들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장막 안에 들어가 얘기하자고 했다. 윤지평이 육괴를 따라 장막 안으로 들어서자 전금발이 촛불을 밝혔다. 이 장막에는 오괴만이 살고 있고 한소영은 홀로 사는 몽고 부인과 더불어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 윤지평이 장막안의 살펴보니 강남 육괴의 생활이 어려움을 한눈에 발견할 수 있었다.
[여러 사부님께서 수년 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제 스승께서 특별히 저를 보내 고마운 인사를 드려 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가진악은 코방귀를 끼며 이렇게 생각했다.
(네 놈이 만일 호의로 왔다면 어째 곽정을 해치려 들었단 말이냐? 무예를 겨루기 전에 우선 죽여 놓고 우리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흉계임에 틀림없다.)
이때 주총은 벌써 봉투를 찢고 편지를 꺼내 낮은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전진교의 제자인 구처기는 삼가 머리 숙여 강남 육괴에게 문안 올리나이다. 강남에서 헤어진 후 어느덧 1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칠협께서는 약속을 중히 여기시고 갖은 고생을 다 참으시면서 지내 오셨습니다. 칠협을 알든 모르든 이 사실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옛날의 의협심을 오늘 다시 칠협이 보여 주고 있다는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가진악은 여기까지 듣자 찌푸렸던 이마가 펴졌다. 주총이 계속 읽어 내려간다.
<장공 아생이 황산에서 돌아가신 일은 망극하기 이를데 없다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염려해 주시는 덕분으로 다행히도 9년 전에 양씨의 아들을 찾았습니다.>
오협이 이 말을 듣고 <아>하고 감탄을 발한다. 강남 육괴는 구처기가 신출 귀몰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속해 있는 전진교의 문하생들이 천하에 널리 퍼져 있으니 양철심의 아들을 찾기야 하겠지만 행방이 묘연한 한 여자의 유복자를 찾아낸다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 가운데서 아이를 찾았다는 이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쉰 것이다. 그래야만 가흥에서 무예를 겨루기로 한 일이 실현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들 여섯 사람은 아직까지 이 일을 이평이나 곽정에게 알려 주지 않고 있었다. 주총이 흘깃 곽정을 바라다보았지만 아무 표정도 없다.
<2년 뒤, 강남에 꽃이 만발하면 여러분을 모시고 취선루에서 술을 즐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인생이 이슬과 같은데 하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18년. 천하의 호걸들이 우리를 웃겠지요?>
주총은 여기까지 읽고 잠시 멈추었다.
[그 아래는 무어라고 썼습니까?]
한보구의 재촉이다.
[여기서 끝난걸. 확실히 그의 필적이오.]
그 옛날 취선루에서 재주를 겨룰때, 주총은 구처기의 주머니에서 한 수의 시를 훔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필적을 알아 본 것이다. 가진악이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겨 있다가 윤지평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양이라는 사람이 바로 양강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네 후배가 되느냐?]
[아닙니다, 제 선배입니다. 제가 나이는 위이지만 양선배가 저보다 2년 먼저 입문했습니다.]
강남육괴는 방금 윤지평의 재주를 보았는데 곽정은 도저히 그의 적수가 아니다. 후배가 이정도면 선배야 더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구처기는 자기들의 행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장아생이 죽은 일까지도 소상히 알고 있으니 놀랍기도 하거니와 선수를 뺏긴 것 같은 아쉬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가진악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방금 곽정과 겨룬 것은 그 실력을 시험해 보자는 수작이렷다!]
[아, 아닙니다.]
[네가 돌아가 사부님께 분명히 말씀 올리거라. 강남 육괴가 별 것 아니지만 취선루의 약속은 어기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안심하시라고 해. 우린 회답 쓰지 않겠다.]
윤지평이 이말을 듣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쩔쩔맨다.
[그런데 그 해골은 무엇 때문에 가지고 왔느냐?]
윤지평은 원래 사부의 명을 받고 편지를 전하러 왔다. 물론 구처기가 슬그머니 곽정의 위인과 무공을 알아 볼 수 있으면 알아 보고 오라고 한 것도 사실이다.
장춘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또 호의에서 그런 분부를 내린 것인데 윤지평은 젊고 또 호기심도 많아 몽고의 간난하반에 도착한 후 직접 육괴를 찾아보지 않고 몰래 숨어 곽정의 수련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이날 육괴와 곽정이 장아생의 묘지로 가는 것을 보고 뒤를 따라갔다가 수풀 속에 숨어 남희인과 곽정이 대결하는 장면까지 보게 된것이다. 그런데 화쟁이 웃는 바람에 자기도 깜짝 놀라 움직이다가 가진악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빈 몸으로 달아나기만 했더라도 괜찮았을 텐데 한 무더기 한 무더기 쌓여 있는 해골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손에 잡히는 대로 한 개를 주워 갖고 간 것이 그만 육괴를 건드리고 만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가진악은 그가 아무 대답도 없자 이렇게 추궁했다.
[네가 흑풍쌍쇄와 무슨 관계가 있거나 아니면 강남 칠괴 가운데 한 사람이 구음백골조에 죽은 것을 조롱하자는 속셈이렸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게 아닙니다. 저는 그냥 집히는 대로 하나 주워 가지고 온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제자는 정말 흑풍쌍쇄니 구음백골조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가진악이 <흥> 하고 코방귀를 뀌고 더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윤지평은 이렇게 꾸중 아닌 꾸중을 듣고 보니 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제자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가진악이 뭉고의 장막 밖까지 길을 인도해 주니 윤지평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가진악이 소리를 질렀다.
[너도 한번 굼뱅이 재주나 넘어라!]
왼손을 뻗어 윤지평의 옷깃을 틀어 잡았다. 윤지평이 깜짝 놀라 두 손을 위로 뻗어 가진악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차라리 뿌리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대로 나았을 것을 가진악의 화를 돋우고야 말았다. 어깨를 슬쩍 낮추며 윤지평을 번쩍 들어 땅바닥에 내다 메쳤다. 윤지평은 등이 터지는 듯한 아픔에 괴로와하다가 서서히 일어나 절룩거리며 사라졌다.
[그 녀석 무례하더니 형님이 시윈하게 버릇을 고쳐 주셨소.]
한보구가 이렇게 말했지만 가진악은 묵묵 부답이다가 한참이나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쉰다. 이심 전심, 남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에 잠겼다.
[계획은 계획대로 실천할 뿐이다.]
남희인이 말문을 열자 한소영도 동감한다.
[네째 오빠 맡씀이 옳아요. 우리 일곱 사람이 결의 형제를 하고 강호에 뛰어든 뒤 그 많은 고난을 견디면서도 아직까지 물러서 본 일이 없잖아요.]
가진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곽정을 향해 말했다.
[돌아가 자거라. 내일은 암기(晤器) 쓰는 법을 가르쳐 주마.]
주총 등은 모두 큰 형님이 눈이 멀었어도 마름쇠 쓰는 솜씨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안다. 그가 눈먼 뒤에 배운 호신의 절기다. 생사의 고비가 아니면 여간해서 쓰려고 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에게 전수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그가 곽정에게 전수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곽정아. 대사부님께 고맙다고 절해야 한다.]
한소영이 분부를 내리자 곽정이 머리를 조아리고 장막을 나섰다. 가진악이 다시 가벼운 한숨을 쉰다. 곽정이 그 재주를 능히 배울 수 있을까 걱정이 돼서 그러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육괴는 더욱 심혈을 기울여 곽정을 훈련시켰다. 독서와 무예뿐만 아니라 거문고며 바둑까지도 열심히 지도한다. 빨리 좀 배우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 때문이다. 그런데 곽정의 진보는 지지부진, 좀처럼 향상되는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육괴가 조급하게 굴면 굴수록 그만큼 책망을 많이 하게 되니 자연 곽정은 주눅이 들어 실수만 계속할 뿐이다. 윤지평이 다년간지도 석 달, 곽정의 진전은 전연 찾아볼 수가 없다. 강남 육괴가 각자 지니고 있는 무예는 하루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수없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오늘의 성과를 보게 된것이다. 곽정이 이 몇 년 동안에 그 오묘한 재주를 배워 안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일 수는 없는 것이다. 총명한 사람에게도 기대하기 어렵거든 하물며 곽정은 좀 둔한 편인가.
이날 이른 아침. 한소영은 광야에서 곽정에게 월녀검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지격백원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공중에 뛰어올라 허공에서 두 바퀴 맴을 돈 후 칼로 내리찍어야 하는 것이다. 곽정이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가볍게 뛰어오르지도 못하거니와 가까스로 뛰어오른다 하더라도 반 바퀴도 돌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고 만다. 7, 8번을 해봤지만 결국 마찬가지다. 한소영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발끝은 이렇게 허리는 저렇게 몇 차례 가르쳐 주니 겨우 뛰어오르기는 했지만 칼 쓰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대로 떨어지고 만다. 몇 차례 계속해도 결국 그 꼴이다.
한소영은 자기 7형제가 10여 년 동안 낮선 사막에서 고생을 하면서 마침내는 장아생을 잃기까지 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 보았지만 늘 이 모양이라 서글픈 생각이 왈칵 들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보검을 땅 위에 집어던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돌아가 버렸다. 곽정은 몇 발짝 뒤를 좇다가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괴로운 표정이다. 사부들의 은혜가 태산같으니 자기가 조금만 진전이 있어도 위로가 되련만 이 지경이니 생각할수록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부들의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갈수록 자기에 대한 불만이 더해 가는 것만 같다. 하염없이 멍하니 서 있는데 화쟁 공주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곽정 오빠, 빨리 이리 와요. 빨리요.]
뒤를 돌아보니 화쟁이 한 필의 청총마에 올라앉아 있다. 흥분과 초조의 표정이 역력하다.
[왜 그래?]
[빨리 와 봐요. 굉장히 많은 수리들이 싸우고 있어요.]
[지금 무예를 배우는 시간인걸.]
그러자 화쟁이 깔깔대며 웃는다.
[잘못한다구 사부님께 걱정들었지요?]
곽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굉장한 싸움예요. 빨리 가서 구경해요.]
곽정은 어린 마음에 구경 갈 생각이 굴뚝 같다. 하지만 방금 한소영의 표정에 생각이 미치자 기가 죽는다.
[난 안 갈태야.]
[난 구경도 않고 부르러 왔는데 안 간다면 다시는 아는 척하지 않을래요!]
[빨리가 혼자 구경해. 이따가 내게 얘기만 들려주면 마찬가진데 뭘 그래.]
화쟁이 말에서 뛰어내린다. 입은 뾰루퉁한 채이다.
[오빠 안가면 나도 그만둘래. 까짓것 검은 수리가 이기든 흰 수리가 이기든 내가 알게 뭐람.]
[바로 절벽 위에 사는 흰수리가 지금 싸운단 말이지?]
[그래요, 검은 수리가 어찌나 많은지. 그렇지만 벌써 흰 수리가 여섯 일곱 마리의 검은 수리를 쪼아 죽인걸.]
곽정은 여기까지 듣자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화쟁의 손을 잡고 말에 올라탔다. 둘은 한 필의 말에 탄 채 절벽 아래에 당도했다. 과연 17, 8마리의 검은 수리가 흰 수리를 포위한 채 공격을 하고 있다. 서로 할퀴고 쪼고 깃털이 여기저기 흩어져 난다. 흰 수리는 몸집도 크고 사납다. 한 마리의 검은 수리를 향해 흰 수리가 대들어 쪼으니 그 자리에서 죽어 화쟁이 타고 있는 말 앞에 떨어진다.
한참 동안 싸우는데 초원의 몽고 사람들이 다 몰려와 구경한다. 철목진도 소식을 들었는지 와활태와 타뢰를 데리고 와서 흥미진진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곽정과 타롸, 화쟁은 늘 절벽 아래에 와서 놀았다. 이 흰 수리는 거의 날마다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흰 수리가 이기기를 바랐다. 소리를 지르며 흰 수리를 응원한다.
[흰 수리야 이겨라!]
한참이나 어우러져 싸우다가 또 두 마리의 검은 수리가 쓰러뎠다. 두 마리의 흰 수리 몸도 상처 투성이다. 흰 깃털 위에 핏자국이 낭자하다. 몸집이 비교적 큰 검은 수리 한 마리가 몇 번 큰 소리로 울자 10여 마리의 검은 수리들이 날아 올라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서너 마리가 남아 계속 버티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승리를 흰 수리의 것으로 짐작하고 즐거운 환호성을 지른다.
좀 지나 세 마리의 검은 수리도 고개를 돌려 동쪽으로 날아가니 한 마리의 흰 수리가 그 뒤를 쫓았다. 모여 있는 사람들이 싸움이 끝난 줄 알고 알고 막 흩어지려고 하는 순간 공중에서 괴상한 소리가 나며 10여 마리의 검은 수리가 구름을 뚫고 쏜살같이 절벽 위에서 깃을 고르고 있던 흰 수리를 향해 대들었다. 철목진이 갈채를 보낸다.
[그 놈들, 제법 용병을 잘 하는데....]
이때 흰 수리는 혼자 남아 있다가 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10여 마리를 상대할 재간이 없다. 비록 다시 검은 수리 한 마리를 쪼아 죽이기는 했지만 결국 중상을 입고 절벽에서 떨어져 내린다. 검은 수리들이 떨어지는 흰 수리에게 대들어 할퀴고 쪼고 야단들이다. 곽정과 타뢰는 초초해서 발을 구르고 화쟁은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활로 쏴요! 네!]
철목진은 와활태와 타뢰를 건너다 본다.
[검은 수리가 이겼지. 저게 바로 용병이라는 게야. 알겠느냐?]
둘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검은 수리떼가 흰 수리를 쪼아 죽이고 나서 갑자기 절벽 중간에 있는 굴로 대든다. 굴 속에서 두 마리의 새끼 수리가 고개를 내밀고 결사적인 방어를 한다.
[아버지, 아니 저래도 활을 쏘시지 않을래요?]
화쟁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애원한다. 철목진이 자애로운 눈동자로 딸을 바라다보며 활줄을 당겨 쉭 하고 쏘았다. 화살이 전광석화처럼 날아 검은 수리 한 마리를 맞히니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갈채를 보낸다. 철목진이 활과 화살을 와활태에게 건네 주었다.
[너도 쏴 봐라!]
와활태가 다시 한 마리를 쏘아 죽이고 타뢰에게 준다. 타뢰도 또 한 마리를 맞혔다. 검은 수리들이 분분히 흩어져 달아났다. 몽고의 제장들도 각기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수리떼가 고공으로 날아 올라간 뒤라 그리 쉽게 맞히지는 못했다.
[쏴 맞히는 자에게 상을 주리라.]
철목진이 말을 꺼냈다. 신전수 철별이 철목진의 옆에 있다가 곽정에게 다가선다. 어깨에서 자기의 강궁을 빼어 주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무릎을 꿇고 목을 겨누어라.]
곽정은 활을 받고 땅에 무릎을 꿇었다. 왼손으로 태산을 받들듯이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 어린 아이를 껴안듯 2백 근이 넘는 활의 활줄을 잡아당겼다. 그는 강남 육괴와 더불어 10여 년 동안 무예를 익혀 왔다. 상승의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미숙하지만 두 어깨의 힘이며 시력의 정확은 보통이 넘는다. 두 마리의 검은 수리가 왼쪽으로 가지런히 비스듬하게 날아가는 것을 겨눠 오른쪽 어깨를 들썩 하자 활줄이 만월 모양이 되며 화살이 유성처럼 날았다. 화살이 어찌나 빠른지 검은 수리가 피하려 했지만 벌써 목을 뚫고 다시 두번째 수리의 배를 꿰뚫자 두 마리가 한꺼번에 곽정 앞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갈채와 환호성을 울렸다. 다른 수리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며 종적을 감추었다.
화쟁이 다가와 곽정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두 마리의 수리를 아빠께 바쳐요.]
곽정이 그말에 따라 두 마리의 수리를 받쳐 들고 철목진의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바쳤다. 철목진은 평소에 용감한 무사를 제일 아낀다. 곽정이 화살 하나로 두 마리의 수리를 맞힌 것이 너무나 대견했다. 북국의 추운 지방에 사는 수리는 그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두 날개를 펴면 10자가 넘는다. 깃털도 꼭 쇳조각 같다. 한 번 대들면 망아지나 큰 양도 번쩍 채 간다.
철목진의 친병이 두 마리의 수리를 받았다.
[수고했다!]
곽정이 철별의 공을 숨길 위인이 아니다.
[철별 사부가 시키는 대로 쏜걸요.]
[사부가 철별이면 제자도 철별이다.]
몽고어로 <철별>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타뢰도 옆에서 의형제를 위해 한 마디 거든다.
[아버지, 맞히면 상을 내리신다고 하셨는데 곽정은 화살 하나로 두 마리를 맞혔으니 무슨 상을 내리시겠습니까?]
[뭐든지 좋다. 그래 곽정은 무엇이 필요한고?]
타뢰는 기뻐 어쩔 줄 모른다.
[정말 모든지 돼요?]
[아 이 녀석아, 내가 설마 너희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몽고 제장들은 부러운 눈치다.
[대한께서 제게 너무나 잘해 주시고, 또 어머니는 지금 뭐든지 다 가지고 계셔요. 뭘 더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효성이 갸륵하구나. 어머니 생각을 먼저 하니 말이다. 그래 넌 무엇이 필요하냐? 서슴지 말고 말하여라.]
곽정이 잠시 생각하는 듯, 철목진의 말 앞에 두 무릎을 꿇는다.
[저는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만 다른 사람을 위해 한 가지 청을 드리겠나이다.]
[뭐라구?]
[왕한의 손자인 도사는 좋지 않은 사람이오니 화쟁 공주를 시집보내지 마십시오. 일평생 고생을 면치 못할 듯 하옵니다.]
철목진이 듣고는 멍하다가 금새 웃음을 터뜨린다.
[어린 아이의 말이로다.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이냐? 내 한가지 보물을 네게 주마.]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풀어 곽정에게 주었다. 몽고 제장들은 혀를 내두른다. 이 단도는 철목진이 애지중지하는 보검이다.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말을 꺼내 놨기에 주는 것이지 그렇게 쉽게 내놓을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곽정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단도를 받았다. 칼집도 순금이요, 손잡이 끝에는 황금으로 호랑이의 머리가 수놓여져 있었다. 자루위에도 검은 보석으로 아로새겨 넣은 것이다. 그 옥 옆에 조각한 몽고 문자가 보인다.
<철목진 대한 친패>
<살적섬구, 여호도양>
[내 적을 내가 직접 죽일 필요야 없으렷다. 네가 내 대신 죽여다오.]
곽정이 말할 새도 없이 화쟁이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말에 올라 달려가 버렸다. 철목진의 심장이 쇠처럼 단단하기는 하지만 금지옥엽같이 사랑하는 딸이 괴로와하는 것을 보자 자기도 한숨을 쉬며 말머리를 돌렸다. 몽고의 왕자들과 제장들이 멀찌기 그뒤를 따른다.
곽정은 사람들이 사라진 후 혼자 남아 칼집에서 단도를 빼 보았다. 시퍼런 칼날 위에 차디찬 빛이 서린다. 얼마나 많은 적을 죽인 칼이랴.
한참 동안 어루만지다가 허리에 차고, 장검을 뽑아 들고 다시 월녀검법을 연습해 본다. 여전히 그 모양이다. 마음이 조급할수록 더 어려운 생각이 든다. 이마 위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돋아나는데 먼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 온다. 화쟁이 청총마를 타고 달려오는 것이다.
그는 가까이 접근하여 말에서 내려 풀밭에 비스듬히 누운 채 곽정을 바라다본다.
[곽정 오빠, 좀 쉬었다 해요.]
[귀찮게 굴지마. 지금 말할 틈도 없어.]
화쟁은 더 말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다보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두어 번 묶어 가지고 곽정을 향해 던진다.
[땀이나 씻어요.]
곽정은 <응>하고 대답만 하고 여전히 연습에만 몰두한다.
화쟁이 바라다보다가 고개를 쳐드니 절벽위의 두 마리 새끼 수리가 울부짖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먼 곳에서 흰 수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수리는 시력이 예민하다. 먼 곳에서 벌써 죽은 수리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머리 위를 빙빙 맴돌며 슬피 울부짖는다.
[곽정 오빠, 저걸 봐요. 얼마나 불쌍해요.]
[응, 마음이 아플 테지!]
흰 수리가 길게 울다가 나래를 펴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왜 저럴까?]
화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흰 수리는 화살처럼 날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절벽의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죽었다. 곽정도 화쟁도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랐다. 이때 갑자기 등뒤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참 대단하구나, 대단해.]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니 수염이 무성한 도사가 거기 서 있었다. 얼굴이 불그레하며 손에는 털이개를 들고 있다. 복장이 심히 괴상하며 머리위에 세개의 상투가 놓여 있는데 품자형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몸에 걸친 도포는 깨끗한 것이 먼지나 때가 묻은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어쩌면 이 흙과 먼지가 많은 곳에서 저리도 깨끗이 차려 입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한어로 말을 했으니 화쟁이 알아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절벽만 응시하고 있다가 혼자 중얼거린다.
[저 새끼 수리는 에미 애비가 죽었으니 저 위에서 어떻게 살지?]
그 절벽은 높아 구름을 꿰뚫을 듯하다. 사면은 칼날 같은 절벽이고, 도대체 발붙일 곳이 없다 두 마리의 새끼 수리는 아직 날줄도 모르니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된 것이다.
第 十二 章. 삼계도인에게서 내공(內功)을
곽정도 정신을 잃은 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비로소 입을 연다.
[날개 달린 사람이 있어 올라가 구해 오기 전에야 살릴 방법이 없지!]
장검을 집어 들고 다시 수련을 한다. 반나절이나 해봐도 그 꼴이 그 꼴이다. 이때 뒤에서 차디찬 목소리가 울린다.
[원, 그렇게 하다가는 백 년을 해 봐야 소용없겠다.]
곽정이 칼을 거두고 고개를 돌리니 상투가 셋인 바로 그 도인이다. 슬그머니 화가 치민다.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도인은 미소를 띤 채 묵묵 부답이다. 갑자기 두어 발짝 앞으로 다가서는 듯했을 뿐인데 곽정의 팔목이 시큰시큰 뻣뻣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파란 빛이 번쩍 하더니 손에 꼭 쥐고 있던 장검이 벌써 도사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의 솜씨는 둘째 사부로부터 배운 바이다. 비록 숙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대강의 비결은 그런데로 알고 있었는데 이 도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기의 장검을 뺏아 간 것이다. 방어를 할 여지는커녕 상대방의 손놀림도 미처 살펴 볼 겨를이 없었다. 곽정은 펄쩍 뛰어 서너 발짝 뒤로 물러서면서 화쟁의 앞을 막아서고 철목진이 하사한 단도를 뽑아 들었다.
도인은 다시 소리를 지른다.
[똑똑히 보아라!]
몸을 허공에 솟구치며 칙칙칙..., 칼을 들어 공중에서 6,7개의 칼 꽃을 그리고 나서 사뿐히 땅에 떨어져 내렸다. 곽정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정신을 잃고 바라다볼 뿐이다. 도인은 칼을 땅에 집어 던지며 웃는다.
[흰 수리가 꽤 귀엽군. 그 새끼를 구해 주지 않을 수 없지!]
말을 끝내고 숨을 몰아쉬더니 절벽 아래로 달려가 원숭이나 도마뱀처럼 손과 발을 놀리며 절벽을 기어오른다. 절벽의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된다. 그런데다 어떤 곳은 완전한 벽처럼 의지할 곳없이 깎아지른 절벽인데도 도인은 가볍게 움직인다.
반들반들 미끄러운 절벽도 착 달라붙어 올라간다.
곽정과 화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손에 땀을 쥔 채 바라다본다. 만일 한 발이라도 실수하는 날이면 그대로 묵사발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도인의 몸이 까맣게 멀리 보아다가 가물가물 사라진다. 마치 구름 속을 뚫고 들어간 듯하다. 화쟁은 차라리 두 손으로 눈을 감은 채 묻기만 한다.
[어떻게 됐어요?]
[이제 거의 올라갔는데. 이 이제 됐다.]
그제야 화쟁이 두 손을 내리고 바라다보니 도사가 절벽 위에 까맣게 우뚝 서 있다. 도포자락이 열풍을 받아 하늘거리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새와 같다. 도인이 손을 뻗어 굴 속에서 두마리의 새끼 수리를 꺼내 품에 넣고 등을 바위에 기댄 채 눈 깜짝할 사이에 미끄러져 내려왔다. 곽정과 화쟁이 숨을 할딱거리며 달려가니 도사는 품속에서 어린 새끼를 꺼내며 화쟁을 바라다보고 묻는다.
[잘 키울 수 있겠니?]
[그럼요, 키울 수 있구 말구요.]
손을 뻗어 새끼 수리를 받으려고 했다.
[조심해라,새끼 수리지만 할퀴면 큰일이다.]
화쟁이 목에서 비단 수건을 끌려 새끼 수리의 발을 묶어 쥐고는 기뻐 어쩔 줄 모른다.
[고기를 가져다 먹여야지!]
[좀 기다려라. 내 말을 들어야 이 새를 네게 주겠다.]
[무슨 얘기인데요?]
[내가 절벽에 올라가 새를 꺼내 온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그제야 도인은 미소를 머금고 다시 입은 연다.
[이 흰 수리는 자라면 사납단다. 기를 때도 늘 조심을 해야 돼, 알겠지?]
화쟁은 무작정 기쁘기만 했다.
[곽정 오빠, 우리 한 사람이 하나씩 가져요. 우선 내가 가져다가 길러 줄께요. 그렇게 해요. 응!]
곽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쟁은 말에 뛰어올라 쏜살같이 사라졌다.
곽정은 도인의 무공이 대단한 것을 보고 정신을 잃은 눈치다. 도사는 장검을 들어 곽정에게 되돌려 주고 웃으며 몸을 돌린다. 곽정은 도인이 가려고 하자 급히 말린다.
[도....도사님, 가시면 안 돼요.]
[뭐라구?]
곽정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해하다가 갑자기 끓어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얘야. 왜 나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느냐?]
곽정은 마음이 허전한 듯, 도사의 자애로운 모습을 우러러보다며 무슨 말이든지
상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두 줄기의 눈물이 볼 위에 좌르르 흘렀다. 목메인 소리로 말문을 연다.
[도사님, 저는 둔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잘 되지 않습니다. 여섯 분 은사의 속만 상하게 해드려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 어쩔 셈이냐?]
[밤과 낮을 가라지 않고 해 봐도 워낙 둔해서 진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게 길을 열어 달라 이거지?]
[네, 그렇습니다!]
다시 땅에 엎드려 수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보아하니 네 마음이 착해 보이는구나. 그럼 이렇게 하자. 사흘이 지나면 보름이니 그날 명월이 중천에 떴을 때 내가 절벽 위에서 너를 기다리마. 그러나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안 된다.]
말을 하면서 절벽을 가리켜 보이고 표연히 사라졌다. 곽정은 급해서 소리를 지른다.
[전, 저는 올라갈 수 없는걸요.]
도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라져 간다. 땅도 밟지 않는 듯 벌써 까맣게 멀어졌다. 곽정은 생각에 잠긴다.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도인께서 날 이끌어 주시지 않을 모양이다. 공연히 애만 태우려고 그러시는 거겠지. 내게 훌륭한 스승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토록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데도 내가 둔해서 배우지 못하는 걸 어쩐담? 그 도인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내가 배우지도 못할 테니 소용없는 일이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욱 막연해진다. 절벽을 멍하니 바라다보다가 장검을 집어 들고 지격백원(枝擊白猿)을 다시 익혀 본다. 한번 또 한번. 해가 서산에 기울자 배가 고파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흘이 지났다. 이날 하오 한보구는 그에게 금룡편(金龍鞭)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 유연한 병기는 다른 것과 다르다. 잘못 다루면 자신이 다치기 마련이다. 자칫 잘못 다뤄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 머리를 얻어맞아 주먹만한 혹이 하나 생겼다. 한보구는 성질이 사나운 편이라 곽정의 따귀를 보기 좋게 갈긴다. 곽정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채찍을 들어 연습에 열중한다. 한보구도 성질을 부린 것이 미안했던지 몇 번 실수를 했지만 꾸중은 하지 않고 그런대로 다섯 가지 방법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며 몇 마디 부드러운 말로 달래 준 후 혼자 연습하라고 말을 하고 가 버렸다.
이 금룡편을 배울 때는 애를 먹게 되어 있다. 수십 번 연습을 하는 동안 이마며 손등, 발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곽정은 아프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풀밭에 누운 채 자기도 모르고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벌써 달이 산등성이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채찍에 얻어맞은 상처가 아프고 사부에게 얻어맞은 볼이 아직도 화끈거리고 있었다. 그는 절벽을 바라다보며 이를 악문다.
[그가 올라갈 수 있는데 나라고 올라가지 말란 법이야 없을 테지...]
절벽을 향해 달려가 한 발 한 발 오르기 시작했다. 16,7장이나 겨우 올랐을까? 미끈미끈한 바위가 앞을 막았다. 풀 한 포기 없는 것이 한 발도 옮길 수가 없다. 그는 이를 악물고 두어 번 시험을 해 보았지만 한 발짝 올라서면 한 발짝 미끄러진다. 그대로 주르르 미끄러지면 묵사발이 되는 것이다. 곽정은 희망이 없음을 알고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래를 내려다보고 혼비 백산했다. 올라올 때는 한 발 한 발 억지로 옮겼지만 내려가려닌 발붙일 곳이 없다. 그는 진퇴 유곡, 당황해 하다가 네째 사부가 들려준 얘기가 생각났다.
[천하에 어려운 일은 없다. 다만 사람이 마음먹기에 달렸느니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올라가다가 죽자. 마음에 결심을 내리고 단검을 뽑아 암벽에 두 개의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왼발을 들어 구멍에 의지하고 다시 오른발을 옮겨 보았다. 한 만하다. 그래 다시 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한 두어 장 오르기는 했지만. 기진 맥진 힘이 빠지고 손발에 맥이 탁 풀렸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절벽을 붙은 채 숨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정상에 오르려면 얼마나 많은 구멍을 더 뚫어야 할지 모른다. 게다가 단도 끝이라도 무디어진다면 그나마 큰일이 아닌가? 그러나 백절 불굴로 전심 전력을 다해 기어올라야 하는 것이다. 잠시 쉬다가 다시 칼을 잡고 구멍을 파려고 하는데 갑자기 절벽 위로부터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곽정은 몸을 뒤로 젖혀 위를 바라다볼 수가 없었다. 미끈거리는 절벽이 얼굴 앞에 다가서 있기 때문이다. 웃음소리가 멎으며 한 가닥 굵고 질긴 줄이 위로부터 미끄러져 내려왔다. 다시 그날 낮에 만났던 삼계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줄로 허리를 매라. 내가 잡아당기마.]
곽정은 기뻤다. 단도를 집에 꽃고 줄을 허리에 말아 단단히 묶었다.
[다 묶었느냐?]
[네, 다 됐어요.]
그 도인은 못 들었는지 다시 묻는다.
[잘 묶었느냐?]
[네, 묶었습니다.]
도인은 여전히 듣지 못한 모양이다. 한참 지나 다시 도인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 내가 깜빡 잊었구나, 네 내공이 시원치 않아 목소리가 이곳까지 들리지 않는다. 다 묶었거든 줄을 세 번만 잡아당겨라.]
곽정이 말대로 줄을 세 번 잡아당기자 허리가 꽉 죄어지며 몸이 구름 위를 날듯 달려 올라갔다. 그 도인이 잡아 올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사 앞에 서게 되었다.
곽정은 죽을 고비에서 이제 다시 살아난 것이다.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려고 하자 그 도인이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말린다.
[그날 낮에 수백 번 머리를 조아렸으니 그만해도 충분하다. 참 네 뜻이 가상하구나.]
절벽 위는 널따란 마당 바위다. 흰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 도인은 두 개의 북처럼 생긴 돌을 가리켰다.
[앉거라.]
[제자는 선 채로 사부님의 본부를 듣겠나이다.]
도인은 웃었다.
[내 너 사부도 아니요 너 또한 내 제자도 아니다. 그냥 앉거라.]
곽정은 마음속으로 당황해 하면서 그 도인의 말에 따랐다.
[네 여섯 분의 사부는 무림에서는 유명한 인물들이야. 내 그들과 평소 안면은 없다만 존경하고 지낸다. 네가 여섯 분 가운데 어느 한 분의 재주만 익혀도 강호에서 두각을 나타내기에 충분하다. 너 또한 열심히 배우지 않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십 년 동안 배우고도 아무 진전이 없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있겠느냐?]
[그거야 제자가 너무 우둔하기 때문이었지. 사부님들께서 잘 못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 도인은 웃는다.
[꼭 그런 것만도 아냐. 가르치는 방법이 좋지 않으면 그 도를 깨우칠 수 없는 게야.]
[그럼, 그럼 사.... 사부님께서 깨우쳐 주소서.]
[무공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무림 가운데 너만한 인물도 드물 게야. 너와 함께 무예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 도사에게 지고 나서 자신이 우둔해서 그렇다고 생각을 하다니, 하하하, 그건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아니, 그 일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참 이상한 일이다.)
[그 어린 도사가 너를 한 번 곤두박질치기는 했지만 그건 모두 교공(巧功)을 써서 이긴 게야. 무공의 기초만으로 따지면 너만 못할걸. 또 네 여섯 사부의 재주도 결코 내게 뒤떨이지지는 않아. 그래서 무공은 내가 네게 전해 줄 수 없다.]
곽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
[네 일곱 사부가 다른 분과 내기를 걸었다. 만일 내가 네게 무공을 전한다면 그것을 안 네 사부님들은 아주 불쾌하게 여기실걸. 그분들은 신의를 생명처럼 중히 여기시는 분들인데 다른 사람과 내기를 걸고 속임수를 쓸 리가 없으시지?]
[무슨 내기를 걸었는데요?]
[네 사부님들께서 말해 주시지 않았으니 지금 내게 물을 필요도 없다. 이 해 이내에 네게 자세히 들려주실 기회가 있겠지. 어쨌든 네가 착실해 보이고 나와 또한 인연도 있는 듯하니 호흡법, 앉는 법, 걷는 법, 자는 법이나 네게 전해 주기로 하자.]
(아니, 숨 쉬고 앉고 걷고 자는 것이야 태어나면서 다 저절로 아는 것인데 그래 무얼 가르쳐 주겠다고 그러는 걸까?)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 돌 위의 눈을 쓸어 버리고 그 위에 눕거라.]
곽정은 더욱 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도인의 말대로 눈을 치우고 비스듬히 누웠다.
[이렇게 누는다면 내가 뭘하러 너에게 가르쳐 준다고 하겠느냐? 내 네 가지를 말해 줄테니 분명히 기억해 두거라. 마음을 정(定)하면 정(情)을 잊고, 몸이 허(虛)한즉 기운(氣運)을 차리고, 마음(心)이 죽은 즉 신(神)이 살아야 하며, 양(陽)이 성(盛)한 즉 음(陰)이 소멸한다는 말이야.]
곽정이 몇 번 외우고 기억해 두기는 했지만 그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반드시 머리 속을 맑게 비워야지, 잡념을 가지면 안 된다. 연후에 비스듬히 눕고 숨은 부드럽게 혼(魂)이 안으로 스며들게 하지 말고 신(神)이 밖으로 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시 호흡과 운기(運氣)법을 가르쳐 주었다.
곽정이 도인의 말대로 해 보았지만 처음에는 잡념만 떠오르고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인이 가르쳐 준 대로 서서히 숨을 내쉬고 깊이 들이마시며 몇 번 해보니 한참 후에는 마음이 진정되면서 아랫배가 점점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절벽 위에는 차고 매서운 바람이 뼛속을 파고들었지만 이제 한기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용히 한 시간이 지났을까, 손과 발이 뻣벗해진다. 도인은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고요한 눈매로 바라보았다.
[이젠 그만 자거라.]
곽정이 그 말을 좇으니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동쪽이 벌써 부옇게 밝고 있었다. 도인은 다시 곽정을 줄로 묶어 내려 보내며 오늘밤 다시 오라고 했다.
이렇게 밤에 왔다 아침에 돌아가면서 숨쉬는 법과 앉는 연습을 계속했다. 이상하리만큼 아무 무공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곽정이 강남 육괴와 더불어 무공을 익힐 때는 놀라우리만큼 잘 됐다. 몸도 가벼워지고 걸음도 빨라졌다. 반 년이 지났을가. 옛날엔 어림도 없던 일이 이젠 척척 해결이 된다. 죽을 힘을 다내 해 봐도 안 되던 솜씨가 이토록 쉽고 정확할 수가 없다. 강남육괴는 곽정의 진전에 마냥 기쁘기만 했다. 더욱 이상한 일은 곽정이 절벽을 오르면 오를수록 더 빨라지고 더 높이 오르게 된 것이다.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힘든 곳을 이젠 다람쥐처럼 기어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제일 어려운 곳에서나 도인이 줄에 의지할 뿐이다.
다시 1년이 지났다. 무예를 겨루기로 한 날도 이제 몇 개월 남지 않았다. 강남 육괴는 연일 모이기만 하면 그날에 대한 얘기다. 이제 곽정의 기예가 크게 진보했으니 승산은 확실하다. 게다가 강남의 고향에 돌아갈 일을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았다.
이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앉자, 남희인이 말문을 열었다.
[곽정아, 이 몇 달 동안 너는 병기 쓰는 것만을 열심히 배우느라고 권술(券術)을 좀 등한시했다. 우리 오늘은 장법(掌法)을 배우도록 하자.]
곽정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여러 사람들이 늘 무예를 익히는 장소에 나왔다. 남희인이 서서히 나서며 곽정과 대결을 하려는 판에 전방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한떼의 말이 급히 이쪽으로 몰려왔다. 말을 기르는 몽고 사람들이 채찍을 들어 한참이나 애를 먹고야 말떼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서쪽으로부터 깃털이 핏빛보다 붉은 망아지 한 마리가 말떼 속으로 뛰어들어 좌충 우돌 이리 차고 저리 물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한다. 말떼가 우왕좌왕 흩어지자 그 붉은 망아지는 나는 듯 북쪽을 향해 쏜살같이 사라지고 그림자도 남기지 않았다.
얼마가 지나자 먼 곳에서 붉은 빛이 또 한 번 번쩍 하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다시 나타나 말떼를 괴롭힌다. 목동들이 사방으로 쫓으며 잡으려 했지만 어찌나 빠르고 미끄러운지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 멎더닌 길게 운다. 마치 제 재주를 뽐내기라도 하듯이 득의 양양한 태도다.
세번째 대들자 목동들도 화가 났다. 활을 뽑아 재우고 쏠 자세다. 망아지도 눈치를 챘는지 화살이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방향을 확인한 뒤 살짝 비켜 선다. 어찌나 재빠른지 무공을 배운 고수라도 흉내낼 수 없다.
육괴와 곽정도 구경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한보구는 말이라면 죽자사자 하는 성미다. 일평생 이렇게 빠른 말은 본 일도 없다. 자기가 타고 다니는 황마가 세상에 보기 드문 준마지만 이 붉은 망아지에 비기면 어림도 없다. 목동들이 있는 곳으로 와 망아지의 내력을 물어 보았다.
[이 들마가 도대체 어느 심산 유곡에서 뛰어 나왔는지 알 수가 없군요. 며칠 전 우리가 하두 잘 생긴 이놈을 발견하고 포승으로 잡아 묶으려 했다가 잡지도 못하고 성미만 건드려 놓은 모양이에요. 계속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또 나타나 괴롭히고 있군요.]
이 말을 들은 나이 지긋한 다른 목동이 나선다.
[이건 말이 아닐세.]
한보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니, 말이 아니라면 그럼 뭡니까?]
[그건 하늘의 용이 변한 거요. 건드리면 야단나지.]
그러자 다른 또 하나의 목동이 나선다.
[누가 하늘의 용이 말로 변한답디까? 새빨간 거짓말이오.]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그래. 내 수십 년 말을 길러 보았지만 어디 이런 말이 있던가?]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그 망아지가 달려들었다. 마왕신 한보구의 기마술은 해내외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일평생 말들에서 산다는 몽고의 목들도 혀를 내둘렀다.
이때 붉은 망아지가 대드는 것을 본 한보구는 말의 성질을 너무도 잘 안다. 홍마의 퇴로가 어딘가를 파악한 한보구는 옆으로 비스듬히 질러가 말이 접근하기를 기다려 몸을 날렸다. 정말 기막힌 찰나에 벌어진 일이다. 한보구는 한 치의 어김도 없이 말 잔등에 올라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사나운 말을 길들였는지 모른다. 말등에 올라만 탔다면 제아무리 거친 말이라 하더라도 한보구를 떨어뜨릴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홍마는 어찌된 일인지 마치 쏜살처럼 앞을 향해 날아 달렸다. 한보구는 털썩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보구는 형언할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있는 힘을 다해 뒤를 쫓았지만 땅딸보의 잰 걸음이 어찌 뒤쫓을 수 있으랴? 이때 갑자기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옆에서부터 쉭 하고 날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써 홍마 깃털을 잡은 것이다. 홍마는 깜짝 놀라 더욱 빨리 내달리고 그 사람은 깃털에 매달린 채 함께 공중을 날았다. 연이 바람따라 나부끼는 것과 흡사하다. 목동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강남 육괴가 말 깃털을 잡고 날아가는 사람을 보니 곽정이다. 놀랍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아니, 저 녀석이 어디서 저런 경신술(輕身術)을 배웠지?]
주총이 말문을 열자 한소영이 받는다.
[곽정이 이 일 년 동안 두드러지게 발전했는데 혹시 그 애의 돌아가신 부친이나 다섯째 오빠가 보우해 주는 건 아닐까요?]
그들이 어찌 삼계도인이 매일 밤마다 절벽 위에서 그에게 호흡법을 가르치는 줄을 알랴? 그 도인이 비록 무예를 가르친 것을 아니지만, 전수해 준 것은 오히려 상승(上乘)의 오묘한 내공(內功)이었던 것이다. 곽정이 매일 밤 절벽을 오르내린 것은 기실 무림에서 가장 오묘한 경신술인 금안공(金안功)을 익힌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도인이 따뜻이 대해 줄 뿐만 아니라 절벽을 오르면 오를수록 힘도 들지 않고 해서 부지런히 올라다니며 잠을 잤을 뿐이다. 그의 내공은 일취 월장 하루하루 달라져 갔지만 성장 과정에 흔히 있는 보통 일로 생각했을 뿐이요, 심지어 육괴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때 곽정은 홍마가 달리고 세째 사부가 놓친 것을 보고 몸을 날려 깃털을 잡은 것이다.
육괴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사이 곽정은 벌써 말 위에 올라탄 채 달려오고 있었다. 홍마는 앞발을 번쩍 들어도 보고 뒷발을 차면서 몸부림을 쳐 봤지만 곽정은 두 다리를 찰싹 붙인 채 떨어지지 않았다. 한보구가 옆에서 길들이는 방법을 일깨워 주었다. 그 홍마는 미친 듯 날뛰며 초원 위를 이리저리 내달린다. 한 시간이 지나도 지칠 줄 모른다. 목동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나이 지긋한 목동은 땅에 꿇어 엎디어 줄얼중얼 기도를 드리고 있다.
[하느님, 저들이 용마를 건드렸다고 해서 재앙을 내리지는 마소서!]
[곽정아, 너 그만 내리고 세째 사부님이 타시도록 해라.]
한소영이 말을 꺼냈다.
[안 돼. 사람을 바꾸면 일이 더 어려워져!]
준마란 독특한 성미가 있게 마련이어서 한 사람에게 승복을 당하면 일평생 순종을 하지만 여러 사람이 건드려 놓으면 악마(惡馬)가 되고 만다는 것을 한보구는 너무나도 잘 안다.
곽정도 옹고집은 있다. 홍마가 전신에 땀을 흘리면서도 누그러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왼팔을 뻗어 말의 목을 껴안고 죄기 시작했다. 말도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요지 부동이다. 호흡이 가빠지자 할 수 없었던지 고개를 숙이고 이제야 주인을 만났다는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한보구가 기쁨의 소리를 지른다.
[이젠 됐다. 됐어.]
곽정은 말이 달아날까 두려워 내리지는 못한다.
[이제 내려와도 돼, 네가 쫓아도 안 달아난다.]
곽정이 한보구의 말대로 뛰어내리자 홍마는 혀를 내밀어 곽정의 손들을 핥는다. 어찌나 친하게 구는지 구경꾼들은 웃음 터뜨렸다. 목통 하나가 슬금슬금 다가가 들여다보려고 하자 어느틈에 뒷발로 걷어차 저만큼 나가 떨어졌다.
곽정이 말을 끌고 물통이 있는 곳으로 가 시원하게 씻겨 주었다. 곽정이 피곤하리라 여긴 육괴도 더 훈련을 시키지 않고 장막으로 되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후 곽정은 사부들이 있는 장막으로 왔다. 전금발이 곽정을 보고 말을 꺼낸다.
[애야, 네가 배운 개산장(開山掌)을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꾸나.]
[여기서요?]
[그렇다. 여기에서 적을 만나든 할 수 있어야지. 좁은 방이면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을 마치자 왼손을 위로 올리며 오른손을 오그려 쥐었다. 곽정은 예로 세 번을 양보한 뒤에 네뻔째 반격을 한다. 전금발은 사정을 보는 기색도 없이 맹렬하게 공격을 하다가 갑자기 두 주먹으로 심입호법(深入虎穴)의 솜씨를 발휘하여 곽정의 가슴을 내리쳤다. 이번 공격은 연무(練武)를 하는 수법이 아니었다. 상대의 생명을 노린 무시무시한 공격이다. 두 주먹이 오는 것을 재빨리 본 곽정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등이 장막에 닿았다.
그는 깜짝 놀랐다. 위험할 때 방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왼팔로 원을 그리며 전금발의 두 어깨를 잡고 나꿔챘다. 이때 전금발의 두 주먹은 그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되돌릴 겨를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어깨가 빠져 버리고 말았다. 곽정은 놀라 혼비 백산하여 두 무릎을 꿇었다.
[제자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요.]
그는 마음속으로 놀랍고도 두려웠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여섯째 사부께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부었단 말이냐? 가인악 등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일제히 일어나 섰다. 주총이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를 지른다.
[네 이놈, 우리도 모르게 슬그머니 다른 사람에게서 무예를 배워? 여섯째 사부가 시험해 보지 않았더라면 끝끝내 우리를 속이려 했지?]
[아.... 아닙니다. 철별 사부에게 활 쏘는 법과 창 던지는 법을 배우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놈 그래도 거짓말이냐?]
곽정은 급한 나머지 눈물을 좌르르 흘린다.
[은사님들께서 제자 사랑하시기 친부모 같으시거든, 제자가 속일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네 몸에 지니고 있는 내공은 어디서 배웠단 말이냐? 네 누구를 믿고 우리 여섯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니냐 응?]
[내공이라뇨? 제자는 조금도 할 줄 모르는데요!]
주총이 비웃고 손을 뻗어 가슴 아래 현기혈(玄機穴)을 찔렀다. 찔리기만 하면 즉시 졸도를 하는 급소다. 곽정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어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삼계도인과 접촉한 지도 2년, 곽정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신에 내공이 쌓인 것이다. 주총이 찔러 봤지만 그대로 손가락만 꼬부라져 미끄러진다. 혈을 찔러 보아도 소용없이 단단해진 내공이다. 물론 주총이 있는 힘을 다해 찌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럴수는 없다.
[그럼 이놈아, 이건 내공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말을 해라.]
곽정은 번뜩 떠오는 게 있었다.
(혹시 그 도사가 내게 내공을 전수해 준 것이 아닐까?)
[이 이 년 동안 어떤 사람이 매일 저녁마다 제자에게 숨 쉬는 법, 앉는 법, 자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자는 그냥 재미있다고 생각이 돼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해봤을 뿐입니다. 정말 그 사람은 저에게 털끝만한 무예도 가르친 일이 없습니다. 그이가 제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고 또 나쁜 짓 같지도 않아서 말씀드리지 않고 그냥 있었습니다.]
말을 하면서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제가 잘못했음을 알았으니 다시는 놀러 가지 않겠습니다.]
육괴는 서로 건너다본다. 곽정의 말투나 성격으로 보아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럼 그게 내공이라는 걸 넌 정말 몰랐단 말이지?]
한소영이 묻는다.
[전 정말 무얼 보고 내공이라고 하는지도 몰라요. 그저 얌전하게 호흡을 하면서 잡념을 가지지 말라고 했구요 뱃속의 숨을 어떻게 올려 쉬고 내리 쉬라는 말만 했어요. 그전에는 잘 몰랐는데 요즘에 와서 뱃속에 뜨거운 것이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고 생각만 했어요.]
육괴는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이 바보가 여기까지 수련을 쌓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곽정은 마음이 어질고 순해서 잡념이 많은 편이 아니라. 내공을 배울 때 총명해서 머리가 복잡한 사람보다 수월하게 배우는 것이다.
[그래, 너를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냐? 그리고 어디에서 배웠느냐?]
주총이 물었다.
[그 사람은 재게 이름도 알려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게 사부라고도 못 부르게 하구요. 자기의 정체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맹세까지 시켰는걸요.]
육괴는 들을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곽정이 고명한 사람을 만나 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신비에 가려 있다면 무슨 곡절이 틀림없이 있는 것이다. 주총은 손으로 곽정을 보고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제자는 앞으로 그분과는 놀지 않겠습니다.]
[아니다. 그래도 가보도록 해라. 우리가 너를 탓하는 게 아니니까. 네가 말은 안 했지만 우리는 눈치로 짐작을 하고 있었다.]
주총이 하는 말이다. 곽정은 사부들이 더는 나무라지 않는 것을 보고 희희 낙락하여 밖으로 뛰어 나왔다. 화쟁 공주가 장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두 마리의 흰 수리가 서 있었다. 흰 수리도 이젠 자라서 화쟁의 키보다 머리 하나 높이만큼 더 크다.
[빨리 좀 와요.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화쟁이 방긋 웃는다. 흰 수리 한 마리가 날아 곽정의 어깨에 앉는다. 둘이는 손을 맞잡고 초원 위에 말을 달리며 수리와 더불어 즐겁게 논다.
장막 안의 육괴는 소곤소곤 의논이 분분하다.
[그 사람이 곽정에게 내공을 전해 주는 것을 보면 악의는 아닐것 같아요.]
한소영이 말을 꺼내자 전금발이 받는다.
[그럼 어째서 우리 모르게 할까? 그리고 또 곽정에게 그게 바로 내공이란 말도 해주지 않고?]
[내 생각에는 우리가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어.]
주총이 하는 말이다.
[아는 사람이라구요? 그럼 친구가 아니면 틀림없는 적일 텐데요?]
한소영이 말을 하자 전금발이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뗀다.
[우리가 사귄 친구 가운데 그만한 인물이 없단 말야.]
[만약 적이라면 무엇 때문에 곽정을 가르쳤겠어요?]
한소영이 반박 비슷이 말을 꺼내자 가진악의 차디찬 소리가 뒤를 따른다.
[음모가 있음이 분명해!]
[오늘밤 여섯째 아우와 내가 슬그머니 곽정의 뒤를 밟아보도록 하세.]
주총의 말에 오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저물자 주총과 전금발은 곽정 모자가 사는 장막을 지켰다.
[엄마, 나 가요.]
인사를 하고는 나는 듯 사라진다. 두 사람이 멀찍이 그 뒤를 따른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순식간에 멀리 가 버렸다. 다행이도 초원 위라 다른 장애물이 없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잘 보였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재촉하여 뒤쫓는데 곽정은 절벽 아래에 당도하여 여전히 발길을 멎지 않고 단숨에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때 곽정의 경신술은 크게 발전하여 그 도인의 줄도 필요없이 혼자 맨 위에까지
오르내릴 수 있었다. 주총과 전금발은 더욱 놀라 절벽 아래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었다. 좀 지나자 가진악 등 네 사람이 슬그머니 뒤를 따라 당도했다. 그들은 혹시 강한 적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병기며 암기(暗器)를 챙겨 가지고 온 것이다. 주총이 방금 곽정이 절벽을 기어 오른 애기를 하자 한소영이 고개를 치켜들고 바라다 보니 높다란 절벽의 끝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 풀숲에 숨어 내려오기를 기다립시다.]
가진악의 제의에 각기 매복했다. 한소영은 10년 전 흑풍쌍쇄와의 고투에서 자기를 구하려다 대신 죽어간 장아생을 생각했다. 어쩌면 그 밤과 이 밤이 그리도 흡사하냐는 감개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시간, 또 한 시간, 시간은 흐르지만 절벽 위에선 아무 동정도 없었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떠오르며 활짝 밝았다. 그래도 여전히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절벽 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이 잇는 것 같지 않다.
[여섯째 아우, 우리도 올라가 보도록 하세.]
주총이 말을 꺼내자 한보구는 어렵다는 눈치다.
[여길 올라갈 수 있겠어요. ?]
[모르지. 한번 해보기나 한 후 또 상의하게.]
그는 장막으로 되돌아와 긴 줄과 도끼 두 자루, 큰 대못 등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건금발과 함께 구멍을 뚫고 못을 박아 가면서 서로 잡아 끌며 올랐다. 그래도 경신술이 있는 사람들이라 온몸에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마침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 오른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의 큰 돌 옆에 아홉 개의 해골이 얌전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래에 다섯 개, 가운데 세 개, 맨 위에 하나, 당시 황산에서 흑풍쌍쇄를 만났던 그날 그대로다. 해골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과연 다섯 개의 손가락 구멍이 뚫려 있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두근반 세근반이다. 정상 위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지만 다른 이상은 발견할 수 없다. 즉시 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한보구 등은 두 사람의 놀란 표정을 보며 성급히 물었다.
[매초풍이다!]
주총의 대답에 네 사람도 깜짝 놀란다.
[곽정은?]
한소영이 그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다른 길로 내려갔나 봐.]
정상에서 본대로 들려주었다. 가진악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십팔 년 동안 고생하여 호랑이 새끼를 키우다니.]
[곽정은 중후하고 순박해서 결코 배은 망덕할 아이는 아니예요.]
역시 한소영의 말이다. 가진악이 고개를 흔든다.
[그렇다면 그 녀석이 인 년 동아니나 무엇 때문에 그 요부에게 무예를 배우나? 우리에겐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렇다면 그 요부가 자기 눈은 멀었으니 곽정을 이용하여 우리를 해치우려고 한단 말이오?]
한보구의 말에 주총이 고개를 끄덕인다.
[틀림없을 거야.]
[곽정이 그런 마음을 품었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교묘하게 우리를 속일 재주는 없는데요.]
한소영은 아무래도 곽정 편이다.
[혹시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까? 아직 시기가 아니라 그 요부가 음모를 곽정에게 말해 주지 않았는지도...]
전금발의 말을 받아 한보구도 끼어든다.
[곽정의 경신술이 높고 또 내공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무예를 논한다면 아직 우리에겐 멀었는데. 어째 그 요부가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요?]
[그 요부야 곽정의 손을 빌어 우리를 해치자는 욕심뿐이지 곽정에게 호감을 가질 리야 없지. 매초풍의 남편은 곽정의 손에 죽지 않았나?]
가진악의 말에 주총도 동감이다.
[맞았어, 맞아. 곽정의 손을 빌어 우리를 죽여야 보북을 했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일세.]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두들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가진악이 쇠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낮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리 모른 체하고 돌아 갑시다. 곽정이 돌아오면 그놈부터 해치우지요. 그럼 그 요부가 반드시 우리를 찾을 테지요. 아무리 공력이 그때보다 나아졌다 하더라도 우리 여섯이 힘을 합치면 그 하나야 상대 못 할 게 뭡니까?]
[아니, 곽정을 없애 버리자구요? 그럼 무예를 겨루기로 한 일은 어떻게 하구요?]
한소영의 반발이다. 가진악은 계속 주장을 한다.
[우리의 목숨이 중하니 까짓 무예 겨루는 일이 무슨 소용이요?]
다들 묵묵 부답이다.
[안 돼요!]
남희인이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뭐가 안 된단 말이오?]
한보구가 묻는다.
[곽정을 없애면 안 된단 말이오?]
남희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네째 오빠와 같은 의견이에요. 우선 사정을 알아보고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해요.]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오. 만일 우리가 털끝만한 동정에 연연해 있다가 기밀이 탄로되는 날엔 어떻게 처리하지?]
주총이 말을 하자 전금발도 동감이다.
[공연히 일만 그르치고 우리만 해로울걸.]
그러자 가진악이 한보구의 의견을 묻는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한보구는 이리 할까, 저리 할까 망설이다가 한소영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나는 네째 아우와 같은 의견이오.]
여섯 사람 가운데 셋은 없애자는 주장이고 나머지 셋은 신중을 기하자는 것이다.
[만일 다섯째가 여시에 있다면 결판을 낼 수 있으련만.]
주총의 한숨 섞인 말이다. 한소영은 장아생의 일을 주총이 꺼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섯째 오빠의 원수는 꼭 갚아야 해요. 우리 큰 오빠 본부를 따르기로 해요.]
[좋아, 그럼 우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가진악의 제안이다. 여섯 사람이 장막으로 돌아왔지만 편할 리 없다.
[그 녀석이 돌아오거든 둘째와 여섯째가 퇴로를 막아. 내가 해치울 테니.]
가진악이 단호히 말을 했다. 가진악, 주총, 전금발은 경솔한 사람들이 아니다. 곽정의 행동이 이상해진 데다 절벽 위에서 강적 매초풍이 남긴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곽정에게 내공을 가르친 것은 틀림없는 철시 매초풍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엉뚱하다. 그날 밤 곽정은 늘 하는 그대로 절벽 위로 올라섰다. 도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보고 돌 옆의 해골을 가리켰다.
[이게 뭔지 알겠느냐?]
곽정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홉 개의 해골이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흑풍쌍쇄가 놓은 것이 아닙니까?]
[너도 흑풍쌍쇄를 아느냐?]
곽정은 그때 황산에서 벌어진 싸움이며 다섯째 사부가 목숨을 잃은 얘기며 부지 불식간에 진현풍을 찔러 죽이게 된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 악명 높던 동시가 네 손에 죽었구나!]
[그래 철시가 또 나타난 겁니까? 도인께서는 그를 보셨습니까?]
[나도 이제 방금 왔다. 와 보니 이게 쌓여 있더구나. 나는 이것이 동해 도화주의 황약사 문화생들이 저지른 일인 줄로는 생각했지만 누군지는 몰랐다. 그렇다면 그 철시가 틀림없이 네 여섯분의 사부와 너를 노리고 온 거야.]
[우리 큰 사부님에게 맞고 눈이 먼 걸요. 겁날 것 없어요.]
도인은 해골 하나를 주워 들고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흔든다.
[이걸 보니 무공이 측량할 길 없구나, 네 여섯 분의 사부는 그의 적수가 안 된다. 내가 합세한다 해도 이길 것 같지 않구나.]
[십 년 전 싸울 때 눈이 멀지 않았는데도 우리 은사 일곱 분을 당해 내지 못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여덞 사람이고 상대는 누까지 멀었는데요?]
[네가 올라오기 전에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정말 그의 무공은 불가사의다. 그가 원수를 갚겠다고 왔다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겠지.]
[그러나 저러나 무엇 때문에 여기다 해골을 놔 두었을까요? 우리가 보면 방비를 할 텐데 말입니다.]
[이는 구음백골조를 익힐 때의 규칙이야. 아마 그는 이 절벽 위에는 사람이 없을 줄 알고 여기에 놔 두었겠지.]
[그럼 제가 내려가 사부님들께 알려야겠군요.]
[그래라. 친구가 그러더라고, 잠시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말씀 드리려무나.]
곽정이 대답을 하고 막 미끄러져 내려오려고 하는 순간 그 도인이 갑자기 팔을 뻗어 곽정의 허리를 껴안고 몸을 날려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앉고 몸을 움츠렸다. 곽정이 물으려 하자 벌써 입을 막아 버렸다. 둘이 숨을 죽이고 바위를 엎딘 채 살피고 있었다. 얼마 지나자 절벽 뒤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달빛에 비치는 치렁치렁한 머리가 틀림없는 철시 매초풍이다. 절벽의 뒤쪽은 앞쪽보다 더 험준한데 어떻게 올라왔단 말이냐? 그래도 그것은 천만 다행이다. 앞쪽으로 올라오다가 숨어 있는 육괴와 만났더라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육괴가 그의 손에 떼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매초풍이 순간적으로 몸을 휙 돌린다. 곽정은 깜짝 놀라 몸을 숨겼다. 그러나 순간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이 미치자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매초풍은 평소 자기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앉아 자기가 하던 대로 숨을 내쉰다. 곽정은 이때야 깜짝 놀랐다. 이렇게 하는 호흡이 상승의 내공을 익히는 기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도인에 대한 고마움을 형언할 수 없었다.
第 十三 章. 위기 모면
시간이 지나자 매초풍의 온몸에서 우두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서서히, 다음엔 점점 더 급해진다. 마치 뜨거운 솥에 콩 볶는 소리다. 그 소리는 사람의 관절에서 나는 소리다. 그런데도 그는 몸을 움직이지도 않는다.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전신의 관절에서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곽정은 그것이 어떤 기문파(奇門派)의 상승(上承)무공인지는 모르지만 이 여자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여자의 관절에서 나는 소리는 가파른 박자로 울리다가 이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여 마침내 멈추었다. 서서히 일어나 서며 왼손을 허리에 넣었다 빼는데 달빛에 은백색이 찬란히 빛나는 길다란 뱀을 한 마리 꺼내는 게 아닌가? 곽정이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길이를 알 수 없는 은빛의 부드러운 채찍이었다.
세째 사부 한보구의 금룡편 길이가 불과 6척에 지나지 않는데 매초풍의 이 채찍은 10배가 넘어 6장은 뒬 듯하다. 그가 두 손으로 채찍의 허리를 잡으니 한 쪽이 각각 3장은 된다. 가볍게 웃으며 그것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채찍을 쓰는 법이 괴상하기 짝이 없다. 휘두르는 속도가 그리 빠른 것도 아니요,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다. 동쪽이 말렸는가 하는 보니 서쪽 끝이 뒤집어진다. 그 솜씨 하나 하나가 예측할 수 없이 괴상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왼손에서 미끄러져 나가며 끝이 잡는다. 6장이나 되는 채찍이 뻗어 나가며 커다란 돌을 휘감았다. 민첩하고 정확하기 비할 데 없는 찰나의 묘기였다.
곽정은 또 깜짝 놀랐다. 채찍의 끝이 자기의 머리 위로 대들어 휘감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달빛 아래 자세히 보니 채찍 끝에는 10여 개가 넘는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곽정은 아까부터 손에 칼을 쥐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칼을 휘둘러 채찍의 끝을 치려고 하는데 돌연 손등이 시큰하더니 등뒤에서 손 하나가 덮쳐 그의 몸을 쓰러뜨렸다. 눈앞에 은빛이 번쩍 하더니 긴 채찍의 다른 한쪽 끝이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곽정은 식은땀이 좍 흘렀다.
(만일 도인이 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채찍에 맞아 머리가 터져 버렸겠지.)
원래 매초풍은 눈이 먼 뒤로 이 무시무시한 병기를 쓰기 시작했다. 조그만 소리가 들려도 6장의 거리 안에서 그 누구도 이 무서운 채찍의 일격으로부터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곽정은 무서워 더 바라다보지도 못하고 숨을 죽인 채 돌 뒤에 숨어 있었다. 천만 다행인 것은 도인의 손놀림이 민첩하여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것이다. 매초풍은 이렇게 한참 동안이나 연습을 한 뒤 채찍을 거두어 허리에 감고 다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땅 위에 펼쳐 놓고 손으로 더듬어 보고는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나 몇 개의 자세를 취해 본다.
다시 또 앉아 더듬다가 생각하고 생각한 뒤 일어나 자세를 취해 보기 여러 번, 천인지 가죽인지 모를 그 물건을 챙겨 품속에 넣고 절벽의 뒤쪽을 향해 내려갔다.
곽정도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곽정아, 뒤를 밟아 보자. 또 무슨 수작을 부리나 보자.]
도인은 한 손으로 곽정의 허리를 감고 가볍게 절벽의 뒤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절벽의 뒤는 겉으로는 험준해 보였지만 사실은 발붙일 곳이 많고 수월한 편이었다.
두 사람이 절벽에서 내려서니 매초풍은 벌써 북쪽을 향해 멀리가고 있었다. 그 도인이 한 손으로 곽정의 겨드항이를 받쳐 주자 곽정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멀찌감치 떨어져 뒤를 밟았다. 얼마나 멀리 걸어왔는지 알 수도 없었다. 날이 이제 어렴풋이 밝아 오는데 앞에 여러 개의 장막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매초풍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장막 사이로 사라졌다. 두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면서 순라꾼의 눈을 피해 숨어 들어가 중간에 있는 노란 천막 앞에 섰다. 몸을 땅에 엎드리고 천막의 한쪽 끝을 걷어 올리고 안을 엿보니 때마침 한 사람이 날카로운 칼을 들어 몸집이 큰 사람 하나를 내리치는 것이 보였다.
몸집이 큰 그 사람이 칼에 맞고 곽정과 도인이 엎드려 있는 쪽으로 쓰러졌다. 곽정은 쓰러진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철목진의 부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저 사람이 어째 여기서 죽음을 당하지?)
슬그머니 장막을 더 걷어 올리고 안을 들여다보는데 때마침 칼을 든 그자가 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자는 바로 왕한의 아들 상곤이었다. 상곤은 피 묻은 칼을 신발 바닥에 쓱 문지르며 말문을 연다.
[이젠 더 의심하지 않겠죠?]
[철목진 형님은 지(智)와 용(勇)을 겸비하신 분인데 이일이 성공되겠습니까?]
그러자 상곤이 냉소를 한다.
[당신이 의형을 몹시 사랑하니 이제라도 가 이르구료.]
[당신이 또한 내 의형제이며 당신 부친께서도 내게 지나칠 정도로 잘 해주시는데 내가 배반할 리 있겠소?]
곽정은 그 사람이 철목진과 생사를 같이하는 찰목합임을 알았다.
(혹시 저들이 철목진 대한에 대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들린다.
[일만 성공하면 철목진의 가축과 부녀자들이며 재산은 모두 상곤에게 돌아가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찰목합의 부하가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 대금국(大金
國)에선 찰목함을 북진초토사(北縝招討使)로 책봉하리라.]
뒤로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곽정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옆모습을 바라다보았다. 낯이 익은 얼굴이다. 몸에는 담비를 수놓은 노란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한참 생각해 보고야 그가 대금국의 육태자라는 것을 알았다. 찰목합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는 눈치다.
[의부(義父)왕한이 명령만 내리신다면 나야 물론 복종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상곤은 기뻤다.
[아버님의 명령이야 쉽지요. 돌아가 말씀만 올리면 허락하실텐데요.]
[우리 대금국에선 지금 군사를 일으켜 남하(南下)하여 송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하는데 그때 두 분이 각기 이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와 주면 성사한 후 중상(重賞)을 내리리다.]
완안열의 말을 들은 상곤은 침을 흘린다.
[송나라는 호화롭고 온천지에 황금이 가득하고 여자마다 꽃같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 왔는데, 육태자께서 우리 형제에게 구경을 시켜 주신다니 이보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완안열이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그러니 철목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어디 두 분께서 말씀해 보우.]
이때 도인이 곽정이 고개를 돌려 보니 매초풍이 저쪽에서 사람을 잡고 무언가 묻고 있었다.
(저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지 지금 사부님들에게는 지장이 없을 테니 우선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알아본 뒤 움직일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곽정은 다시 땅에 엎드려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상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철목진이 자기 딸을 내 아들에게 주기로 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혼사를 상의하러 온 것이오.]
죽어 넘어진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니 내 즉시 사람을 보내 내일 아침 일찍 와서 우리 아버님을 뵙도록 하겠소. 철목진이 이 말을 들으면 틀림없이 올 겝니다. 그러면 도중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해치우겠습니다. 제 아무리 뛴다 난다 해도 이렇게 되면 독 안에 든 쥐요.]
말을 마치고 껄껄걸 웃어 제쳤다.
곽정은 화도 나고 마음도 조급해졌다. 아니 어쩌면 사람이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명색이 의형제 사인데 저런 음모를 꾸미다니. 더 들어보려고 하는데 도인이 곽정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순간 바람 소리와 함께 매초풍이 그를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어찌나 빠른지 벌써 저만큼 멀리 가 버렸다. 여전히 사람 하나를 잡은 채 말이다.
도인이 곽정의 손을 잡고 장막 밖으로 멀리 끌고 나왔다.
[방금 매초풍이 너희 사부님들 계신 거처를 대라고 하면서 저사람을 잡아갔다. 빨리 가야지 늦으면 큰일이다.]
두 사람은 경신(經身)의 무공을 발휘하여 달렸다. 육괴가 살고 있는 장막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하오가 지났다.
[내 원래 나를 숨기고 지내 왔다만 지금 이것 저것 가릴 때가 아니다. 먼저 들어가 말씀드려라. 단양자 마옥이 강남 육협을 뵙고 싶다고 말이다.]
곽정은 2년 동안 밤마다 같이 지내 오면서도 이제야 그 도인의 이름을 들었다.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는 장막으로 달려가 문을 밀며 소리를 지렀다.
[사부님!]
한 발을 막 안으로 들여 놓자 갑자기 두 손이 꺾이며 무릎이 뜨끔 발에 채여 나가 떨어졌는데 무언가 목중한 것이 머리를 때리려 했다. 곽정이 보니 대사부 가진악이 지팡이를 지켜 들어 때리려고 하는 순간이다. 눈앞이 아찔하고 혼비 백산하여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달릴 수밖에 없는 찰나였다. 땅 하는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자기 몸을 덮쳤다. 눈을 떠 바라다보니 일곱째 사부 한소영이 자기 몸을 감싼 채 소리를 지른다.
[큰 오빠 잠깐만!]
손에 들고 있던 보검이 가진악의 지팡이를 맞고 저만큼 나가 떨어졌다. 가진악은 장탄식을 하며 지팡이를 집어 던진다.
[누이는 아무래도 마음이 약해서....]
곽정은 이제야 자기 두 팔을 잡아 꺾고 있는 사람이 주총과 전금발임을 알았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진악이 차디찬 소리로 묻는다.
[네게 내공을 가르치는 그 사부는?]
[지금 밖에 계신데 여섯 분의 사부님을 뵙겠다구요.]
[뭐라구?]
육괴는 매초풍이 대낮에 자기들을 찾아왔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으로 달려가 보니 햇빛 아래 상투를 튼 도인이 서 있을 뿐 매초풍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 요부는 어디 있느냐?]
주총이 소리를 지른다.
[제자가 어젯밤에 봤는데 혹시 이쪽으로 올지 모르겠습니다.]
육괴는 경악과 의심의 눈초리로 마옥을 바라다보았다.
[여섯 분의 존함을 늘 존경하면서도 오늘에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주총이 곽정의 손을 놓고 인사를 한다.
[죄송하오나 도사의 법호(法號)는?]
[이분은 단양자 마옥, 마도사입니다.]
곽정이 나서며 소개를 하자 육괴는 깜짝 놀란다. 마옥은 전진교의 교주인 왕중양의 수제자다. 왕중양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교주가 되었다. 장춘자 구처기도 그의 후배가 된다. 그는 조용히 숨어 수도에만 열중했다. 강호에 나타나는 일이 없어 무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무예를 본 사람이 없어 그 누구도 그의 실력을 알지 못한다.
[아, 원래 전진교 교주께서 이렇게 찾아오셨는데 실례가 앉습니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시게 됐는지? 혹시 저희가 가르치는 곽정과의 가흥에서의 약속 때문인가요?]
가진악이 인사를 하며 묻자 마옥이 대답한다.
[제 후배인 구처기는 도를 닦는 몸이면서도 남과 내기를 잘 거는데 이는 도에 어그러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 차례나 충고한 일도 있었습니다. 여섯 분과 더불어 무예를 겨루기로 한일에 대해 저로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 년 전 우연히 곽정과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착하고 믿음직하기로 몸을 튼튼히 하는 내공을 가르쳤습니다. 사전에 여섯 분의 허락을 받아야 함이 예의인 줄 알면서도 그만 이렇게 됐으나 너무 허물치 마십시오.]
육괴는 이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라 전금발은 쥐고 있던 곽정의 팔을 슬그머니 놓았다.
[얘 곽정아, 이 도인께서 내게 내공을 가르쳐 주셨느냐? 진작에 말할 일이지. 우린 너만 나무라고 있었구나 원.]
한소영은 기쁨과 감사에 어쩔 줄 몰랐다. 말을 하면서 곽정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도인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제가 정처없이 떠도는 신세라 별로 누구에게 제 행적을 알리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척에 있으면서도 여섯 분을 찾아뵙지 못했으니 널리 용서하십시오.]
마옥이 말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꾸벅 절을 했다.
육괴는 그의 겸손한 태도에 호감이 갔다. 정말 도사다운 기풍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했으면서도 어쩌면 구처기와는 이리도 다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쪽도 공손히 답례를 하고 매초풍의 소식을 묻고자 하는데 갑자기 말 달리는 소리가 울리며 몇 기의 말이 철목진이 살고 있는 장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곽정은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안다. 철목진을 유인하여 죽이기 위한 상곤의 사자들이다. 마음이 조급했다.
[큰 사부님, 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가진악을 향해 입을 뗐다. 가진악은 하마터면 방금 곽정을 죽일 뻔했다. 미안한 생각과 동정이 왈칵 더해진다. 이제라도 매초풍이 나타난다면 누가 그를 돌보랴?
[아니다. 우리 옆에 있어야 한다.]
곽정이 사정을 아뢰려 했지만 가진악은 벌써 마옥과 더불어 황산에서 벌어졌던 쌍쇄와의 악전 고투에 대한 애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곽정은 조급해 안절부절 못한다. 말을 멈추면 곧 사정을 아뢰어야지. 이때 말발굽소리가 울리며 화쟁 공주가 멀리서 달려온다. 좀 떨어진 곳에서 말을 멈추고 곽정을 오라고 손짓한다. 그러나 사부님의 책망이 두려운 곽정은 오히려 화쟁을 보고 이쪽으로 오라는 눈치를 보낸다. 화쟁의 두 눈이 퉁퉁 부어 있다. 한바탕 운 눈치다. 곽정의 옆으로 다가와 억울하다는 말투로 입을 뗀다.
[아빠는 그래 날보구 이제 그 도사에게 시집을 가라구.]
말도 마치기 전에 두 볼에 눈물이 흐른다.
[빨리 돌아가 대한께 알려요. 상곤과 찰목합이 음모를 꾸며 대한을 살해하려 한다구요.]
곽정의 이 말을 들은 화쟁이 깜짝 놀란다.
[정말이에요?]
[정말이구 말구. 내 어젯밤 똑똑히 이 두 귀로 들은걸. 어서 가서 아버님께 알려요.]
화쟁이 대답을 하고 미소를 띤 채 몸을 돌려 말을 타고 달려갔다.
(아니, 사람들이 음모를 꾸며 대한을 살해하겠다는데 뭐가 저리 기쁠까? 음 그렇지. 이렇게 되면 도사에게 시집가지 않았도 된단 말이지.)
그와 화쟁은 친오누이나 다름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화쟁을 위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걱정스럽던 마음이 기쁨으로 바뀌고 미소를 머금은 채 몸을 돌렸다. 이때 마옥의 말소리가 들렸다.
[뭐, 제가 그를 무서워해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매초풍이 동해 도화주의 도주인 황약사의 진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의 구음백골조는 이미 상승의 경지에 도달해 있고 또 은채찍 솜씨는 오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여덟 사람의 힘을 합치면 진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꼭 그를 해치우려면 우리에게도 손상이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고 다섯째 오빠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야 없는 일 아니겠어요?]
한소영의 말이다.
[여러분께서 그의 남편을 해치우셨으니 원수야 갚은 것으로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젠 그 여자는 혼자요. 병신까지 되었으니 생각하면 그 처지도 불쌍합니다.]
육괴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가 이러한 음독의 무공까지 익혀 놨으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해를 입을지 알 수 없습니다. 도사게써도 의협심이 계신 분이니 그대로 방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보구가 입을 떼자 주총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그가 우리를 찾는 게지 우리들이 그를 찾는 게 아닙니다.]
[이번에야 어떻게 피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 여자가 원수를 꼭 갚겠다니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요.]
전금발의 의견이다.
[그럼 제가 한 가지 계략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섯분께서는 관대하게 그의 생명만은 살려 주셔서 새 길을 찾도록 해 주십시오.]
주총등은 잠자코 가진악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 강남 칠괴는 성격이 거칠어 평소에도 무작정 싸움만 할 줄 알았는데 오늘 도사께서 밝은 길을 제시해 주시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도사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마옥의 말투로 보아 매초풍의 무공이 10년 전에 비해 말할 수 없이 진보했음이 확실했다. 마옥은 그의 생명만은 구해 주자고 했지만 사실은 그 가운데 육괴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 매초풍의 독수(毒手)를 피하라는 암시가 있음을 가진악은 살핀 것이다. 한보구등은 큰 형님이 갑자기 선심이 발동했나 외아하게 생각했다. 마옥은 고개를 숙였다.
[가대인이 어지시니 하늘의 보우가 있을 줄 압니다. 그 외에도 한 가지 요긴한 일이 있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이 10년 동안에 그 매초풍은 틀림없이 황약사의 가르침을 받은 듯합니다.]
주총이 놀란다.
[듣기로 흑풍쌍쇄는 도화도를 배반한 무리들이라는데, 황약사가 그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다뇨?]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대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때 황산에서 싸우실 때 당시의 실력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만일 황약사의 전수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혼자 수련했다면 결코 오늘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동시를 없앤다면 혹시 그 황약사가 나서지 않을는지?]
가진악과 주총이 모두 황약사의 무공에 대한 애기를 못 들은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 소문엔 과장도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전신교는 천하 무술의 정종(正宗)이다. 그들의 교주격인 마옥이 이렇게까지 겁을 먹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니다.
[도사님의 고려가 대단히 치밀하십니다. 우리 형제는 정말 탄복 했습니다. 그럼 어떤 묘책이 있을까요?]
주총이 하는 말이다.
[제가 이 말을 하면 혹시 육괴께서 웃으시지나 않으실는지.]
[너무 겸손치 마시오. 중양(重陽) 문하의 입곱 분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시거든, 그 누가 흠모치 않사옵니까?]
[선사의 유덕으로 저희 칠형제가 무림에서는 그런대로 허명(虛名)을 떨치고 있습니다. 매초풍이 동시에 전진 칠자(全眞七子)에게 손을 뻗치지는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저희들의 허명을 이용하여 매초풍을 놀래 달아나게 할까 합니다만.]
하고 계략을 말했다. 육괴는 자기들의 나약함을 너무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진교의 칠자에 대해 함부로 대들 사람은 없을 것 같아 이의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각자가 저녁 식사를 든든히 끝낸 다음 함께 절벽으로 가서 우선 마옥과 곽정이 올라갔다. 육괴는 마옥과 곽정이 거침없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 사람의 무공이 결코 장춘자 구처기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하나는 남북에 그 명성을 날리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아무 명성도 없을 뿐인데 이건 두 사람의 성격 탓이리라.)
마옥과 곽정이 정상에 오른 후 긴 밧줄을 내려 육괴를 끌어 올렸다. 정상에 오른 육괴는 매초풍이 남긴 채찍 흔적을 조사해 보고 나서야 마옥의 계략이 결코 부당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여덟 사람은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둠이 깔리고 사방이 암흑 속에 묻혔다. 또 한참이나 기다려서 시간은 벌써 해말 자초(亥末子初)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보구는 초조했다.
[어째 아직 오지 않을까요?]
[쉬, 온다.]
가진악이 말소리를 낮추며 주의를 시킨다.
여러 사람이 깜짝 놀라서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때 매초풍은 아직 몇 리 밖에 있었다. 가진악의 청각은 예민하기로 소문났다. 그만은 매초풍의 기척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매초풍의 몸놀림이 어찌나 날쌘지 여러 사람들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는 가운데 검은 구름이 날아오듯 아득히 보이던 것이 벌서 절벽 아래에 다다랐다. 매초풍이 손을 뻗어 마치 사다리를 오르듯 힘도 들이지 않고 가볍게 올라온다. 주총이 전금발과 한소영을 건너다보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 몹시 긴장한 표정이다. 자기 얼굴도 마찬가지겠거니 생각했다.
얼마 되지 않아 매초풍이 정상으로 올라서는데 등에 사람을 하나 업고 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연 움직이지 않는다. 곽정이 자세히 살펴보니 흰 여우털 외투가 아무래도 화쟁의 옷같다. 깜짝 놀라 눈을 비비고 보니 이건 틀림없는 화쟁 공주가 아닌가? 막 소리를 지르려는데 어느새 묘수서생 주총의 손이 입을 막아 버리고 매초풍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매초풍, 이 요괴가 오기만 해 봐라. 내 구처기가 용서치 않으리라.]
매초풍은 절벽의 정상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기겁을 했다. 거기에 또 주총이 구처기라고 하며 자기 이름가지 불러 놓았으니 기겁 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위 뒤로 몸을 움츠려 숨기면서 주총이 하는 말을 들었다. 마옥과 강남 육괴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곽정은 화쟁이 걱정되어 초조해 죽을 지경이다.
[매초풍이 해골을 여기 쌓아 두었으니 틀림없이 올 거요. 우리는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기로 합시다.]
한보구가 말을 하자 매초풍은 또 한 번 놀란다. 도대체 몇 명의 고수들이 여기 모여 있단 말인가? 몸을 움츠린 채 돌 뒤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여자가 극악 무도하지만 전진교는 자비롭기도 유명한 바이니 살 길을 남겨 주어야 해요.]
한소영아이 말하자 주총은 웃으며 한 수 더 뜬다.
[청정산인(淸淨散人)은 아무래도 마음씨가 곱단 말야. 그래서 사부께서 늘 쉽게 득도할 거라고 하셨나 봐.]
전진교 교주 중양 문하에는 입곱 제자가 있었다. 무림에서 견문이 조금만 넓어도 다들 그 이름은 안다. 첫째가 단양자 마옥, 둘째는 장진자 담처단, 그 아래는 장생자 유처현이요, 다음이 장춘자 구처기요, 옥양자 왕처일이며, 광녕자 학대통이고, 일곱째는 청정산인 손부이로 마옥이 출가하기 전에 얻은 부인이다.
[담(譚)오빤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남희인이 대답한다.
[그 사람 죄가 많으니 용서할 수 없어요.]
[담형, 최근 당신의 지필공(指筆功)이 크게 발전했으니 그 요부를 상대로 어디 우리 형제들에게 구경 좀 시켜 주구료.]
주총이 맞장구다. 그러나 남희인은 사양하는 체한다.
[그래도 왕 사제(師弟)의 철각(鐵脚)으로 한 발에 서방 극락 세계로 보내 주는게 좋을 거야.]
원래 전진교 칠자 가운데 구처기의 명성이 제일 대단하고 그 다음이 옥양자 왕처일이다. 그가 언젠가 한번 다른 사람과 더불어 무예를 겨루고 승리한 뒤 천야 만야한 바위 끝에 한 발로 서 있었던 일이 있었다.
그때 산동 하북의 수십 명 영웅 호한들이 아슬아슬한 묘기를 바라다본 뒤 혀를 내두르고 그에게 철각선(鐵脚仙)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는 동굴 속에서 9년이나 살면서 단련을 했기 때문에 구처기도 그의 무공에는 감복하고 지냈다.
마옥과 주총등은 네가 한 마디 하면 내가 한 마디 거들면서 주거니 받거니 매초풍이 오기 전에 상의를 하는 체했다. 가진악은 지난번 매초풍과 말을 주고받은 일이 있기 때문에 혹시 탄로나지 않을까 해서 잠자코 있었다.
매초풍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을수록 깜짝 깜짝 놀랐다.
(아니 전진 칠자가 한자리에 모였을 뿐만 아니라 근년에 무공이 크게 진보한 모양인데 잘못하다간 생명도 건지지 못하겠구나.)
이때 밝은 달은 중천에 걸려 사방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아니, 웬 구름이 이렇게 많이 끼었나. 다섯 손가락도 보이질 않으니 다들 조심해요. 어둠을 이용해서 그 요부가 달아가면 아무 소용없소.]
주총이 능청을 떠는데 매초풍은 오히려 기쁘기만 했다.
(그럼 그렇지. 달이 훤하게 떠 있으면 벌써 발각됐게. 하늘이 날 돕는구나. 제발 달이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곽정은 계속 화쟁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때 화쟁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어찌나 반가운지 두 손을 흔들어 아뭇 소리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화쟁은 영문을 몰라 소리를 질렀다.
[곽정 오빠, 빨리 나 좀 구해 줘요!]
곽정도 놀라 소리를 지른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곽정도 놀랐지만 매초풍은 더욱 깜짝 놀랐다. 화쟁이 말을 못하게 재빨리 혈(穴)을 누르기는 했지만 의심이 확 일어났다.
[지평(志平)아,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했니?]
전금발이 딴전을 피우며 곽정을 보자 윤지평의 행세를 하라는 암시를 보낸 것이다.
[제자가 지금 여자 목소리를 들은 것 같군요.]
(전진 칠자가 한자리에 이렇게 공교롭게 모일 수가 있나? 아무래도 그 누가 내 눈 먼 것을 알고 속임수를 쓰는 거겠지.)
마옥은 매초풍이 서서히 머리를 드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만일 그가 눈치를 챘다면 즉시 손을 써야 한다. 자기야 별 관계 없지만 곽정과 화쟁의 생명은 잃은 거나 다름 없고 어쩌면 육괴 중의 몇 명도 희생될지 모르는 일이다. 마음이 심히 초조했다.
주총이 매초풍을 보니 은빛이 번쩍이는 긴 채찍을 손에 든 채 몸을 일으킬까말까 망설이는 중이었다.
[큰 형님이 몇 해 동안 사부님이 전수해 주신 금관 옥쇄(金關玉鎖) 이십사 결(訣)을 열심히 익히셨으니 오늘 어디 우리들에게 솜씨 좀 보여 주세요.]
마옥은 주총이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하는지 얼른 알아차렸다. 매초풍을 겁줄 방법을 써 보라는 뜻이다.
[내 비록 여러분보다 나이야 위지만 워낙 자질이 우둔한 편이라 어디 여러 사제(師弟)들만 하오. 사부께서 전수해 주신 것도 십 중 하나 둘도 못 익혔다오.]
한 자 한 마디를 힘을 주어 또박 또박 말했다. 내공의 힘을 다해 목소리를 멀리 멀리 보낸 것이다. 그 소리는 살골짜기에 울려 퍼지고 마지막 말을 끝내자마자 처음에 한 말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절벽 위의 바람 소리와 어울려 용이 울고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했다. 매초풍이 들어 보니 보통의 내공이 아니다. 감히 손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서서히 바위 뒤로 다시 몸을 움츠렸다. 이를 본 마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듣기로는 그 매초풍이 눈이 멀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 여자 신세도 불쌍하단 말야. 만약에 그가 과거를 뉘우쳐 다시는 무고한 양민을 괴롭히지도 않고 강남 육괴와 또 시비를 걸지 않겠다면 우리도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할 것 같아. 구처기 자네가 아무래도 강남 육괴와는 인연이 있는 편이니 그들에게 말해서 다시 매초풍을 찾아 복수를 하느니 하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주선을 해 봐요.]
[그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매초풍이 과거를 뉘우치느냐 하는 일입니다.]
주총이 구처기를 가장하여 천연스럽게 받아 넘긴다.
이때 바위 뒤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진 칠자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매초풍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사람들은 원래 매초풍을 놀라게 만들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기를 바라서 한 연극인데 대담한 매초풍이 얼굴을 내미자 자기들이 더 놀랐다.
[제가 여자라 다른 분께는 죄송하고 오래 전부터 청정산인의 무술을 존경해 왔으니 오늘 솜씨나 좀 가르쳐 주십시오.]
말을 마치며 채찍을 비껴 들고 몸을 일으키며 한소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때 곽정은 화쟁이 땅을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나 매초풍이 왼손을 오므리 그의 왼팔을 잡아 버리고 말았다.
곽정도 마옥으로부터 2년 동안이나 헌문(玄門)의 정종(正宗) 내공을 배워 전신의 근골을 자유 자재로 놀리게 되었다. 즉시 오른손을 뻗어 화쟁을 한소영에게 던지며 왼손을 비틀어 떼면서 벗어났다. 매초풍의 솜씨도 보통 재빠른 것이 아니다.
자기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자 즉시 앞으로 나서며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혈맥을 잡혀 움쭉달싹할 수도 없었다.
[누구냐?]
매초풍의 날카로운 질문이다. 주총이 급히 눈짓을 해 보인다.
[제자는 구처기 문하의 윤지평이옵니다.]
매초풍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그의 문하의 소년 제자의 내공이 이렇게 대단하여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아무래도 피하는 것이 낫겠구나.)
[흥.]
코방귀를 뀌고 손을 풀었다. 곽정이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 혈관을 보니 다섯 손가락 자국이 살 속 깊이 박혔다. 매초풍이 그래도 반신 반의하면서 사정을 보아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부러져 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식은땀이 쫙 흐른다.
이렇게 되자 매초풍도 또 다시 손부이로 가장한 한소영과의 무예를 겨룰 생각은 못 했다.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마옥을 향해 물었다.
[마도사, 납과 수은(鉛汞:도가에서는 이것을 이겨 불로 장생약을 만듦)을 조심스럽게 수장하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납이 가라앉으면 사람의 정수(精水)에 비길 수 있고 수은 성질이 움직이면 마음을 뜨겁게 한다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사람의 정수를 단단히 하고 마음의 불을 식히고 조용히 공력을 닦아야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오.]
[그럼 차녀영아란 무슨 뜻입니까?]
마옥은 그가 내공을 닦는 비결을 몰라 묻는 것을 알고 호통을 쳤다.
[그 따위 허무맹랑한 것을 가지고 미주알 고주알 까분다고 내가 정말을 가르쳐 줄 성싶은가? 빨리 가게, 가!]
매초풍이 큰 소리로 웃어 댄다.
[도사님 가르쳐 주셔서 정말 고맙군요.]
몸을 돌려 뒤돌아서며 은채찍으로 돌을 말아 쥐고 몸을 날리니 채찍을 따라 허공에 몸을 솟구쳐 눈 깜짝할 사이에 절벽 아래로 내려간다. 어찌나 빠른지 모두들 어리벙벙한 표정이다. 매초풍이 거의 미끄러져 내려간 것을 보고야 다들 한숨을 쉬었다. 마옥은 화쟁의 급소(穴)를 눌러 풀고 쉬게 했다.
주총이 마옥을 향해 고마운 인사를 한다.
[10년 동안 못 본 사이에 철시의 무공이 저렇게까지 진보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만약 도인께서 지원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 사도들은 꼼짝 없이 죽을 뻔했습니다.]
마옥이 몇 마디 사양의 말을 하고는 무슨 걱정이 있는 듯 이마를 찌푸린다.
[도인께서 뭐 걱정되시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희들 재주는 별로 없사오나 아무 것이나 본부만 내리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양치 마시고 분부 내려 주십시오.]
주총의 이와 같은 말을 들은 마옥이 탄식의 한숨을 내쉰다.
[제 불찰로 그 요부에게 속았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라 묻는다.
[왜요? 그의 암기(暗器)에 어디 다치신 데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올시다. 그가 방금 무엇을 제게 묻지 않았습니까? 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대답을 해 버렸는데 그게 후환이 될 것 같아서 그럽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이 철시의 외문(外門) 무공은 지나 여러분을 미치지도 못합니다. 구처기나 왕사제가 여기 있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내공만이 아직 미숙한 단계에 있을 뿐인데 어디서 훔쳐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공을 익히는 비결을 얻어 온 모양입니다. 그러나 혼자 배워서는 소용이 없고 누구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방금 제게 물어 본 것은 자기 혼자 풀다 풀다 못 푼 문제를 물어 본 건데 제가 뒤늦게 알아 채고 두번째 것은 대답을 해 주지 않았지만 첫번째 것만 알아도 내공 수련은 크게 정진할 것입니다.]
[다만 그 여자가 과거를 뉘우치고 다시는 나쁜 짓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요.]
한소영의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내공에 정진하고 다시 소란을 피우기 시작한다면 걷잡을 수 없게 돼요. 에이! 내 어쩌다 이런 실수를 했나!]
이때 화쟁이 <아>소리를 지르며 서서히 깨어 돌 위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곽정 오빠, 아빠가 내 말을 믿지 않고 왕한께 가 버렸어요.]
곽정은 깜짝 놀란다.
[뭐라구?]
[상곤 아저씨, 찰목합 아저씨가 아빠를 모해하려구 한다고 했더니 하하 웃으시며 내가 도사에게 시집가기 싫어서 거짓말을 한다고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곽정 오빠가 두 귀로 분명히 들은 일이라고 했더니 돌아와서 오빠를 벌해야겠다고 하시더군요. 기가 막혀서...., 아빠가 오빠 셋하고 십여 명의 수종만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급히 달려오는데 도중에서 그 눈 먼 할망구에게 잡혔어요. 그가 나를 여기다 데려다 주었나요?]
이 말을 들은 여러 사람이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여기 없었더라면 벌서 다섯 개의 구멍이 머리에 뚫렸을 게다.)
[그래, 대한께서 가신 지 얼마나 됐어요?]
[한참 되는걸요. 빠른 말들을 타고 가셨으니 이제 반나절만 걸리면 왕한에게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정말 상곤 아저씨가 아빠를 해칠까요. 그럼 어떻게
하죠?]
말을 마치자 울기부터 한다. 곽정은 평생 이렇게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 본 일이 없다.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얘 곽정아, 너 빨리 내려가 지난번 잡은 홍마를 타고 대한의 뒤를 쫓거라. 네 말을 믿지 않거든 우선 사람을 보내 염탐해 보시라고 일러라. 화쟁 공주는 타뢰 오빠에게 군사를 집합시켜 아버님을 구해 드리러 가라고 해요.]
주총의 말에 곽정이 앞을 다투어 먼저 내려가고 마옥이 긴 끈을 써서 화쟁을 묶어 매달아 내려가도록 해 주었다. 곽정은 몽고 장막으로 달려가 어린 홍마를 올라타고 채찍을 날렸다.
이때 시간은 새벽, 아직도 희미한 달이 새벽 하늘에 걸려 있었다. 곽정은 몹시 초조했다.
(대한께서 상곤이 매복한 곳에 이르렀다면 쫓아가 본들 아무 소용도 없지.)
어린 홍마는 어찌나 달리기를 좋아하는지 달리면 달릴수록 신이 나는 모양이다. 곽정이 지칠까 봐 고삐를 잡아당기며 쉬게 하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앞을 향해 달리기만 했다.
이렇게 서너 시간 달렸을까. 먼 곳의 초원 위에 세 대의 기병이 열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림으로 쳐 봐도 세 개의 천인대(千人隊)는 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대오 근처에 왔다. 곽정이 기병의 깃발을 보니 아뿔사! 왕한의 부하들이다. 제각기 활에 화살을 쟁이고 칼을 뽑아 든 품이 경비가 삼엄하다.
(대한께서 벌써 지나가셨구나, 후로가 차단된 것을 보니!)
두 뒤꿈치로 홍마의 배를 차니 홍마는 쏜살처럼 쉭 하고 날아 병사들의 대오를 제치고 앞으로 달렸다. 군대를 통솔하던 군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말은 벌써 멀리 사라진 뒤였다.
그렇다고 멈춰 설 곽정도 아니다. 매복하고 있던 복병의 포위망을 계속해서 세 번이나 뚫고 또 한참이나 달리자 철목진의 흰깃털이 달린 깃대가 출렁거리며 10여 기의 인마가 북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곽정은 말을 채찍질해 철목진이 타고 있는말 옆으로 다가왔다.
[대한 빨리 돌아가세요. 전면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철목진은 의아한 눈초리로 건너다보았다.
[왜 그러느냐?]
곽정은 어젯밤 완안열의 영중에서 들고 본 일이며 지금 후로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을 낱낱이 보고했다. 철목진은 반신 반의하며 혹시 곽정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곁눈으로 살펴보면서 생각했다.
(상곤이야 원래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왔지만 왕한 의부는 내게 잘 해 주시고 또 찰목합이야 생사를 같이하는 의형제 사인데 무엇 대문에 나를 모해하려고 든단 말이냐?)
곽정은 그가 반신 반의하면서 머뭇거리자 입을 열었다.
[대한, 먼저 오신 길에 사람을 보내 보시면 틀림없음을 아시게 됩니다.]
철목진은 치밀한 사람이다. 왕한과 찰목합이 자기를 모해할 처지는 아니지만 백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하니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둘째 아들 찰합태와 대장 적노온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 사정을 살펴보게.]
둘은 말을 타고 온 길을 되돌아갔다. 찰목진은 사방의 지형을 살펴보고 다시 명령을 내린다.
[저 토산으로 올라 경계를 펴라]
그의 수중은 10여 명에 불과했지만 벌써 돌을 운반해 오고 구덩이를 파 화살을 막을 엄폐물을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으로부터 먼지를 일으키며 수천 필의 말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먼지 가운데서 찰합태와 적노온이 앞장을 서 달려온다. 철별의 눈이 제일 밝다. 추격해 오는 적병의 기치를 벌써 발견했다.
[정말 왕한의 군마들이다.]
이때 추격해 오는 적병은 몇 개의 백인대로 나뉘어 사방에서 찰합태와 적노온을 포위할 기세다. 찰합태와 적노온은 말 안장대 엎딘 채 계속 채찍을 날린다.
[곽정아, 우리 저분들을 맞으러 가자.]
철별의 말에 두 사람은 산을 내리기 시작했다. 곽정의 홍마는 말떼를 보고 흥분했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찰합태의 면전에 당도했다. 곽정이 쉭쉭 세 개의 화살을 날리자 앞장을 섰던 세 명의 적병이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이때 철별도 도착했다. 철별의 활 솜씨야 세상이 다 아는 일. 쏘는 대로 나가 넘어진다. 그러나 적병의 기세는 밀려오는 조수와 같아 막을래야 막아 낼 수가 없다.
찰합태와 적노온도 말머리를 돌려 화살을 날리며 네 사람이 무사히 토산 위에 올라왔다. 찰목진과 박이출, 출적 등 모두 이름난 명사수들이라 적병도 잠시 멈칫했다.
철목진이 산 위에 서서 사방을 휘둘러보니 동서 남북에서 왕한의 부하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노란 깃발 아래 말에 우뚝 올라앉은 것은 바로 왕한의 아들인 상곤이다. 철목진이 형세를 보니 아무래도 포위망을 뚫을 길이 없어 보인다. 설령 타뢰가 이 소식을 듣고 온다고 해도 부중의 장수들이 어린 타뢰의 말을 믿고 올 리도 없는 일 아닌가?
[상곤 아우는 올라와 말 좀 해 봅시다.]
이때 상곤은 호위병에 둘러싸인 채 의기 양양한 표정이다.
[철목진은 투항하라.]
[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군대를 이끌고 나를 치려 하는가?]
[몽고 사람은 자자 손손 일족(一族) 일족이 나뉘어 살면서 소나말을 공유하고 살았는데 어찌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을 무시하고 여러 부족을 통합시키려 하는가?]
[몽고 사람들은 대금국의 억압을 받고 있으며 해마다 수만 마리의 소나 양을 공납하라고 하는데 그래야 마땅하단 말인가? 우리 몽고 사람들이 서로 물고 뜯고 다투지 않고 뭉쳐 사는데도 금나라를 무서워해야 한단 말인가?]
상곤의 부하들이 철목진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이론이다.
[몽고 사람들은 저마다 재주 있는 용사들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금나라의 금은 보화를 뺏아 오지 못하고 해마다 피땀 흘려 기른 가축을 진상하고 모피를 빼앗겨야만 하는가? 몽고 사람 가운데는 근면하게 가축을 기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불리 먹고 게으름만 피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째서 근면한 사람들이 게으른 사람 때문에 희생을 당하란 말이냐? 부지런한 사람은 그의 가축이 많아야 하는 것이요, 게으른 사람은 굶어 죽어야 하는 것이 진리다.]
당시의 몽고는 씨족 사회다. 가족은 일족의 공유물이었다. 생산력이 날로 향상되고 철제 도구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대다수의 유목민은 사유 재산 제도를 갈망하던 때다. 철목진의 이 말을 들은 전사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곤은 철목진이 자기 부하들을 선동하는 말을 하지 소리를 질렀다.
[즉시 창과 활을 버리고 투항하지 않으려면 목숨을 버려라!]
곽정은 사정이 위급함을 알면서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만 했다. 이때 산 아래에 한 소년 장군이 철갑 위에 이상한 가죽 외투를 입고 큰 칼을 들고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살펴보니 상곤의 아들 도사 바로 그 놈이 아닌가? 어렸을때 다툰 일을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홍마를 몰고 산 아래로 내려 달렸다.
뭇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홍마는 벌써 사람들 틈 속을 뚫고 들어가 도사의 옆에 당도해 있었다. 도사가 칼을 들어 내리쳤지만 곽정은 몸을 살짝 움츠려 피하면서 오른손을 뻗어 도사의 왼팔의 맥문(脈門)을 틀어 잡았다. 주총이 가르쳐 준 솜씨를 발휘해 본 것이다. 도사는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곽정이 나꿔채는 대로 말 위에 끌어올려졌다. 곽정이 등뒤에서 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왼쪽 어깨를 구부리니 양쪽에서 찔러 오던 긴 창이 서로 부딪치고 허공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곽정은 홍마의 고삐를 나꿔챘다. 홍마는 주인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 쏜살같이 산 위로 치달았다.
[활을 쏴라!]
군관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지만 곽정은 도사를 붙들어 올려 방패로 삼았다. 이렇게 되자 상곤의 부하들은 활을 쏠래야 쏠 수 없이 되어 버렸다. 곽정은 산 위에 올라 도사를 집어던졌다. 철목진은 기뻤다. 창을 도사의 가슴에 대고 상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일백 장(丈) 뒤로 물러나라.]
第 十四 章. 가장 귀중한 보물
상곤은 사랑하는 아들을 천군 만마 가운데서 전광 석화처럼 적에게 빼앗기자 화도 나고 조급해지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철목진의 말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 토산을 7, 8겹으로 에워싸도록 했다. 제 아무리 철목진의 말이 빠르다 하더라도 뚫고 나갈 수는 없다.
이쪽 산 위의 철목진은 연방 곽정을 칭찬하면서 도사를 결박하도록 명령 내렸다.
상곤은 세 차례나 계속해서 사자를 보내 도사를 풀어 주고 투항하면 생명만은 구해 주겠다는 전갈을 해왔다. 그때마다 철목진은 사자를 산 아래로 내쫓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해는 초원의 서쪽으로 기울고 어두운 밤이왔다. 철목진은 상곤이 혹시 야음을 틈타 돌격해 오지 않을까 두려워 철통 같은 경계를 하라고 이르며 다녔다. 밤이 깊어지자 산 아래에서 전신에 흰옷을 입은 그림자가 나타나 고함을 쳤다.
[나는 찰목합(札木合)이요, 철목진 의형께 드릴 말씀이 있어 왔소.]
[올라오도록 해라.]
찰목합은 천천히 산 위에 올라 철목진을 발견하고 달려들어 포응하려고 했다. 철목진은 찰칵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느다.
[아직도 나를 의형으로 생각하는가?]
무섭게 호통을 쳤다. 찰목합은 한숨을 쉬더니 무릎을 꿇고 앉는다.
[형님, 형님은 이미 대한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무슨 야망으로 몽고 사람을 결속시키려 합니까?]
[그래 어떻다는 게야?]
[각부의 족장들이 모두, 우린 조상 대대로 이렇게 수백 년이나 살아왔는데 철목진 대한이 무엇 때문에 옛 법을 고치려 하는지 알 수 없다고들 합니다. 하늘도 용서치 않을 게라구요.]
[모르는 소리다. 화살의 비유도 모르느냐? 화살을 나누어 분지르면 쉽게 분지를 수 있지만 묶어서 분지르면 어렵다는 옛말을 말이다. 바로 그거야. 너와 나는 영웅이요, 호걸이라고들 하는데 그래 몽고 사람을 통합시키선 안 된단 말이냐? 서로 헐뜯고 다투지 않고 협동 단결한다면 대금국도 멸망시킬 수 있는걸세.]
[아니 그게 무슨 말씁입니까? 대금국은 군사도 많을 뿐 아니라 온천지가 황금이요, 곡식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건드립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까지나 금나라의 압박을 받아야 옳단 말인가?]
[그들이 우리를 억압하는 건 없지 않습니까? 금나라 황제는 오히려 형을 초토사로까지 책봉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처음엔 호의로 받아들였지만 어디 이런 줄 알았나.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꼴이야. 양을 바쳐라, 말을 바쳐라, 이젠 전쟁에까지 가담하라고 하지 않느냐?]
[왕한과 상곤은 금나라에 배반하지 않으려 해요.]
[배반? 흥! 배반이라고, 그럼 자네는?]
[저야 형에게 화를 내시지 말라고 온 것 아니요? 도사를 상곤에게 되돌려 주시면 내가 책임지고 편안히 돌아가시도록 할께요.]
[상곤도 믿을 수 없고 자네도 못 믿겠네.]
[상곤이 말하기를, 아들이야 죽으면 또 낳아도 되지만 철목진을 죽이면 다시는 이 세상에 철목진은 없을 게 아니냐고 해요. 도사를 되돌려 주지 않으면 내일 해를 보시기 어려울 텐데요.]
철목진은 칼을 허공으로 휘두르고 단호히 말했다.
[싸우다 죽을망정 투항하지 않겠네!]
찰목합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형은 뺏아 온 소와 양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이건 부족의 공유물이 아니라 너희의 사유 재산이라고 했죠? 각 부족의 족장들은 그게 모두 잘못 하는 처사라고 해요. 조상 전래에 도리에 어그러지는 거라구요.]
[그러나 젊은 용사들은 모두들 좋아한다.]
[좋아요. 날 보구 배은 망덕하다고는 말하지 마시오.]
철목진은 품안에서 작은 꾸러미 하나를 꺼내 찰목합의 면전에 집어던졌다.
[이건 우리가 세번째로 결의 형제임을 다짐할 때 자네가 내개준 예물인데 가지고 가게.]
찰목합은 그것을 챙겨 들고 자기도 품속에서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 하나를 꺼내 아무 말 없이 철목진의 발 아래 놓아 두고 가버렸다.
철목진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서글픈 생각에 잠겼다. 어찌면 한 몸이나 다름 없는 의형제가 이렇게도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단 말이냐?
옛날 함께 뛰놀며 즐기던 어린 시절의 광경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긴 숨을 내쉬며 단도를 뽑아 들고 땅 위에 구멍을 파 찰목합이 놓고 간 물건을 묻어 버린다. 곽정은 이를 바라다보면서 자기의 마음도 무거워짐을 느꼈다. 철목진이 묻고 있는것은 그가 마음속에 곱게 간직하고 있던 우정이었기 때문이었
다. 철목진이 허리를 펴고 내려다보니 상곤과 찰목합의 부하들이 횃불을 밝히고 위세를 돋우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응시하고 있다가 옆에 선 곽정을 향해 물었다.
[무서우냐?]
[전 지금 어머니 생각을 하고 있는걸요.]
[그래, 넌 용사다. 훌륭한 용사야.]
철목진은 멀리 번쩍이는 횃불을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저들도 모두 용사들이다. 우리 몽고에는 이렇게 많은 용사들이 있다. 그런데도 늘 서로 다투고만 있다. 우리가 단결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온 세계..., 온 세계를 우리 몽고의 목장으로 만들 수 있다.]
곽정은 철목진의 원대한 포부를 읽고 더욱 흠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대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저 겁 많은 상곤에게 패배할 리 없습니다.]
[네 말이 옳다. 오늘 밤 주고받은 대화를 잊지 말자. 내 앞으로 너를 친자식으로 생각하마.]
말을 마치고 곽정을 껴안는다. 상곤과 찰목합의 대오 가운데서 붕붕 나팔 소리가 울린다. 날이 부옇게 밝아 오기 시작한 것이니. 철목진이 입을 연다.
[구원병이 올 리 없다. 오늘 우리는 이 토산 위에서 용감히 싸우다 최후를 맞는 것이다.]
적군 가운데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 말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곧 공격을 개시할 눈치다. 철목진과 세 아들, 그 밖의 제장들은 화살을 재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좀 지나서 적군 가운데 한 폭의 노란 깃발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였다. 그 황색의 깃발 아래 왼쪽에는 상곤, 오른쪽에는 찰목합, 가운데에는 대금국의 육태자인 조왕 완안열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금투구 금갑옷에 금으로 만든 방패를 들고 서서 이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철목진 너는 대금국을 배반하려는 하는가?]
철목진의 큰아들 출적(朮赤)이 그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완안열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쏜살처럼 대들어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았다. 전광 석화보다 빠르다.
완안열이 명령을 내린다.
[도사를 구출하고 철목진을 사로잡아라.]
네 사람이 동시에 대답하고 산 위로 달려든다. 곽정이 그들이 몸놀림을 보니 모두 경신의 무공을 쓴다. 무림의 고수들이지 평범한 전사들은 아니다. 네 사람이 산중턱에 당도하자 철별과 박이출 등이 비오듯 화살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접근한다. 곽정은 혼자 조바심이 난다.
[우리 여기 그 누가 명장이요, 용사가 아니라. 그러나 무림의 고수들의 상대는 못 된다. 이를 도대체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그 중 검은 옷을 입은 중년 하나를 단숨에 산 위로 뛰어들었다. 와활태가 칼을 들어 막자 그자는 손을 뻗어 소매깃으로 그의 목을 치면서 단도를 뽑아 들어 내려찍으려 했다. 이 순간 흰빛이 번쩍 그의 팔을 겨누고 칼날이 날아들었다. 그자는 깜짝 놀라며 팔을 뒤집고 서너 발짝 뒤로 물러섰다. 눈썹이 유난히 굵고 눈이 큰 소년 하나가 와활태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철목진의 부하 가운데 이토록 검술에 능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너는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나는 곽정이다.]
[들어 본 일 없는 이름인걸! 빨리 투항하거라.]
곽정이 눈을 두리번거리니 나머지 세 사람도 벌써 산 위에 올라 적노온, 박이출 등과 어울려 육박전이 벌어졌다. 상곤의 나머지 부하들도 돌격 태세다. 목화려가 칼을 도사의 목을 대고 소리를 지른다.
[어느 놈이고 대들기만 해라. 한 칼로 도사를 죽이리라!]
상곤이 몹시 불안하여 완안열을 향해 애원을 한다.
[육태자님, 저들을 내려오도록 해 주십시요. 달리 방법을 생각 해야겠습니다. 이러다간 아무래도 제 아이가 다치겠습니다.]
완안열이 미소를 띄운다.
[걱정 마오, 아이는 건드리지 못하고.]
상곤의 부하들은 대들지 못하고 완안열 수하의 네 사람만이 맹렬하게 싸우고 있다.
곽정은 한소영에게 배운 <월녀검법>으로, 단도를 쓰는 그자와 어울려 맞서고 있다. 몇 초(招)를 부딪쳐 봤지만 아무래도 상대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강남 육괴의 무공은 대단히 복잡하다. 견문이 넓고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평소 무림 각자 각자의 술수를 모두 곽정으로 하여금 더득케 했다. 그러나 상대의 술수는 도대체 금시 초문으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솜씨다. 오른쪽으로 공격 해 오나 보다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어느 틈에 칼 끝은 왼쪽을 향해 들어온다.
곽정은 멈칫멈칫 뒤로 물러서며 또 몇 초를 다투었다.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대사부께서는 상대의 맞설 때 상대를 제압해야지 제압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지금 내가 바로 제압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니냐?)
상대의 칼날이 대드는 것을 보면서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른발을 앞을 향해 활처럼 구부리고 왼손을 오므리며 오른손을 뻗어 상대를 겨누고 자기도 찔렀다. 이를 본 상대가 주춤 하는 틈을 타 장검을 번쩍이며 계속 상대의 급소를 향해 돌격했다. 그자는 월녀검법의 급공에 놀라 손발의 자세가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 그의 세 명의 동료는 벌써 철목진 휘하의 장령을 네댓 명 때려 누인 뒤 이 광경을 보고 이쪽으로 대들었다.
[대사형(大師兄), 제가 해치우겠습니다.]
단도를 쓰는 그자는 그래도 무림의 선배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다. 완안열이 많은 황금을 주고 사 온 자이다. 오늘 처음으로 출전을 한 처지요, 게다가 천군 만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명색이 선배가 되어 놓고 후배의 도움을 청할 입장이 아니다. 그들 넷이 동문(同門)의 제자들이기는 하지만 평소 서로 다정하가 지내는 처지는 아니다.
[옆에서 구경이나 해라. 대사형의 솜시를 보여 주고야 말 테다.]
곽정은 그가 말하느라고 한눈을 파는 틈을 타 왼쪽 무릎에 낮추며 팔꿈치를 구부리고 팔뚝을 뻗어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을 휘둘렀다. 그가 급히 뒤로 피하기는 했지만 소맷자락이 북 찢겼다. 꽃창(花槍)을 쓰는 자가 웃었다.
[야, 대사형 솜씨 좀 봐라!]
아직 부상을 입지 않은 철별 등 몇 명의 장령들이 철목진의 주위를 에워싸 호위하고 있었다. 산 위로 달려든 네 사람 가운데 두 사람 중 하나는 쇠로 만든 채찍을 쓰고 있고 또 다른 하나는 한 쌍의 짧은 도끼를 썼다. 긴 창을 비껴 들고 철목진을 호위하며 서 있는 장군의 늘름한 모습에 어떤 위압을 느끼며 함부로 대들지도 못하고 있던 차제에 둘째 사형의 이 말을 듣고 우선 구경이나 하자고 그쪽으로 몰려갔다. 철목진 등이 감히 달아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단도를 쓰는 그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너는 누구의 문하(門下)냐? 무엇 때문에 여기서 죽으려고 하는 게냐?]
[제자는 강남 칠협의 문하, 네 분의 존함을 듣고 싶소.]
단도를 쓰는 그자는 세 명의 후배를 건너다보고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다.
[우리 이름을 밝힌다 해도 너 같은 애송이는 모른다. 이 칼이나 받아라!]
곽정은 그와 싸우는 동안 그가 자기의 공력보다는 상위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소영이 전수해 준 검법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상대도 아는 모양이다. 계속 공세를 취하면서 물러서지 않고 있는데 적의 칼이 오는 것을 느끼고 오른발을 내디디며 적의 하체를 역습했다. 두 사람은 계속 어울려 눈 깜짝할 사이에 또 2, 30초나 싸웠다. 이때 산 아래 수만의 군사와 산 위의 철목진등, 또 함께 온 세 명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고 있었다. 단도를 쓰는 그자는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의 무공을 과시하고 또 완안열의 호감을 사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고 쉭쉭 칼바람을 날리며 정신없이 날뛰었다.
오래 싸우면 자기만 망신을 당하는 것 같아 더욱 초조해졌다. 칼을 비스듬히 하여 곽정의 허리를 내리찍으려 했던 것이다. 곽정은 허리를 돌리며 적의 어깨를 급습했다. 구경꾼들은 곽정이 이 칼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손에 땀을 쥔 채 바라다볼 뿐인데 곽정 또한 옛날의 곽정은 아니다. 곽정의 내공도 상당한 경지에 도달되었다. 하체도 움직이지 않고, 그렇다고 상체를 피하는 것도 아니요, 슬쩍 허리만을 돌린 채 오른손을 내뻗어 적의 가슴을 찔렀다.
그자는 비명을 지르며 칼을 버리고 장풍으로 곽정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다행히 죽을 고비는 면할 수 있었지만 가슴 속에는 반 치쯤 칼을 찔리고 또 손바닥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내려싸. 얼른 달아나 피해 버리고 말았다.
곽정은 원래 상대의 생명을 노리고 공격을 했다. 자기의 경험 부족으로 실패한 것을 생각하니 아쉽기 짝이 없었다. 몸을 숙여 적이 버린 단도를 집어드는 순간 등뒤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뒤를 조심해!]
철별이 알리는 소리다. 곽정은 몸도 돌리지 않은 채 뒷발질로 날아다는 창을 차버린 것이다. 남희인이 가르쳐 준 재주를 써 본 것이다. 뒷발질을 할 때 눈도 보이지 않는데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창에 맞아 쓰러지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창을 쓰는 사람은 곽정이 검법이나 독특하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곽정이 칼을 줍는 순간을 노리고 대든 것인데 그게 아니다. 그러나 그자도 20여 년 동안이나 창을 써 온 위인이요, 그의 사부도 무림에선 꽤 알려진 인물이다. 곽정과 붙어 승패를 분별할 수 없이 계속해서 싸웠다. 곽정이 주워 든 단도와 녀석의 창이 어울려 불꽃을 튀긴다. 손자병법에서도 일렀거니와 싸움은 오래 끄는 것이 아니다. 상대도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네 사람 중 대사형이란 자는 단도의 명수이다. 곽정이 주워 든 자기 칼을 휘두르는 재주를 보면서 자기도 놀랐다.
한참 동안 싸우는 사이에 상대의 창이 곽정의 가슴을 향해 찔러 왔다. 곽정은 왼손의 장풍으로 창을 밀어 제치면서 왼발을 내딛고 창을 잡고 나꿔채 버리고 말았다. 남희인이 가르쳐 준 남산도법(南山刀法)이다. 만일 이러한 경우 상대가 창을 버리지 않으면 열 손가락은 그대로 분질러지고 만다.
그는 창을 뺏기지 않을려고 잡아채 봤지만 요지 부동이다. 깜짝 놀라는 순간 벌써 곽정의 칼이 얼굴로 대든다. 창을 버리고 뒤로 피해 달아났다.
그는 본시 무림의 명수이다. 곽정 같은 철부지가 이겨 낼 재간이 있으랴? 강남 육괴가 자기 독특한 무예를 지니고 있음은 그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양철심은 명장 양재홍의 직계 후손이니 양가창법에는 독특한 조예를 지니고 있을 게다. 구처기가 만일 양철심의 아들을 찾게 되면 기타 다른 무공을 전수해 줌은 물론 조상 대대로 전래되어 온 창법에 대해 특별히 치중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선조에 대한 예의도 되거니와 구처기의 체면도 서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육괴 중의 남희인은 곽정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칠 때 단도를 사용하여 어떻게 창을 깨는가 하는 재주를 특별히 세심하게 일깨워 주었다. 그래야 가흥의 무예 시합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 가흥에서 그 실력을 발휘하기 전 그만 여기서 공을 세우게 되고 만 셈이다.
곽정은 승리를 하자 더욱 의기 왕성하여 오른손을 힘껏 내둘러 단도를 산 아래 멀찌기 던지고 창을 든 채 버티고 섰다. 네 사람 가운데 막내격인 자가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를 치며 쌍도끼를 들고 대들었다. 이를 본 곽정이 창을 쓰기 시작하니 쌍도끼가 뚫고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가 없었다.
무학가들은 말했다. <1촌이 길면 1촌이 강하고 1분이 짧으면 1분이 위험하다>고, 짧은 병기를 쓴다면 반드시 적을 향해 육박하지 않으면 승리하기 어려운 것이다. 강남 육괴는 가흥의 무예를 생각해서 상대가 긴 창을 쓸 테니 곽정에게도 창법을 가르쳐줌은 물론 창법에 대한 세심한 관찰도 게을리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것은 지피지기(知彼知己)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전금발의 저울대의 타법(打法)은 원래 창법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곽정의 장창은 여섯째 사부에게서 배운 것이다.
송나라 군중에서는 창법을 가장 중시했다. 가까이서 예를 찾자면 악가창법(岳家槍法)은 말할 것도 없고, 북송의 명장인 여양업, 호연찬등이 모두 창을 쓰는 영웅들이다. 이때 곽정이 쓰고 있는 것이 군중 무예의 정통인 악가창법이다. 쌍도끼를 쓰는 그자가 도대체 곽정을 향해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곽정이 여유 만만하게 방어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쌍도끼 솜씨도 보통이 아니라 그리 쉽게 공격에 말려들지도 않는다. 다시 수합을 다투는 동안에 곽정이 자칫 잘못하여 허를 보였다. 상대는 이 절호의 기회를 틈타 큰 소리를 지르며 쌍도끼를 상하로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곽정이 창을 비스듬히 들어 막자, 쩡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이 세 토막으로 부러져 나갔다. 그가 다시 도끼를 휘두르며 곽정을 치려 하는데 뜨끔 곽정의 말에 아랫배를 차이고 몸이 허공에 떴다가 자기가 휘두른 도끼에 자기 머리가 얻어맞게 되었다.
네 사람 중의 세째가 달려들어 철채찍을 휘두르자 쩡그렁 소리와 함께 불꽃이 번쩍이며 도끼가 돈에서 떨어져 아슬아슬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말았다.
그 사람은 성격이 거친 듯 와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주워 들고 다시 덤벼들었다. 곽정은 수중에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아 양손으로 맞선다. 세째도 철채찍을 치켜 들고 앞달려 나와 협공을 한다. 산 아래 몽고의 뭇 장병들이 소란을 부리며 그들을 욕했다. 원래 몽고 사람들은 성격이 순진하여 영웅 호걸을 존경한다. 그들은 네 사람이 차륜전법(車輪戰法)을 써서 번갈아가며 곽정 하나를 공격하는 것도 못마땅했는데 이때 두 사람이 빈손인 그에게 대드는 것을 보고 대장부답지 않은 처사라고 떠들어 대기 시작한 것이다. 곽정이 비록 그들의 적의 처지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곽정을 성원하게 된 것이다.
박이홀, 철별 두 사람도 긴 칼을 들고 대들고, 방관하고 있던 두 놈 역시 합세하여 혼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박이홀, 철별은 다 몽고의 명장으로 용맹을 떨치는 장수들이기는 하지만 무공은 모르는 사람들이다. 억지로 신체 건장한 것과 힘이 많은 것만을 믿고 수십 초를 버티기는 했지만 마침내 둘 다 적의 공격에 가졌던 무기를 빼앗기고 말았다.
곽정은 박이홀이 위급함을 보고 그쪽으로 달려가 쉭 소리와 함께 단도를 쓰는 그자의 등을 장풍으로 갈겼다. 그는 고개를 휙 돌리며 칼로 곽정의 팔을 내리친다. 곽정은 어깨를 움츠리며 팔꿈치로 둘째 놈을 후려쳐 철별의 위급함도 막아 주었다.
[우리 사형제가 오늘 이런 애송이 하나를 해치우지 못하고 애를 먹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강호에서 내노라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으며 어떻게 육왕자 부중에서 체면을 세운단 말인가?]
우선 곽정을 죽이고 보자는 조급한 심산에 박이흘, 철별은 안중에 두지도 않고 넷이 곽정 하나만을 공격했다. 산 아래 몽고병의 고함 소리는 더욱 맹렬해졌지만 네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칼과 채찍, 도끼를 들고 일제히 곽정을 향해 무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곽정은 빈손인데 네 명의 고수가 동시에 공격을 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다만 경신의 무공을 발휘하려 그들 네 사람의 무기의 틈을 비집고 요리조리 피하고만 있었다.
이때 박이출이 긴 칼을 빼들고 소리를 지른다.
[이 칼을 받아라!]
곽정을 향해 칼을 던진다. 곽정이 몸을 날려 칼을 받으려 하는데 쇠채찍이 칼을 향해 날아들고 쌍도끼를 쓰는 녀석도 방금 발길로 차인 앙갚음을 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고 대든다. 곽정이 솟구쳐 피하려는 순간 단도가 머리 위로 날아온다. 몸을 살짝 옆으로 하야 칼을 피하면서 왼발을 번쩍 들어 도끼를 쥔 녀석의 골통을 차려고 하는 순간 오른발 넓적다리가 채찍을 맞고 말았다.
통증이 뼛속을 파고든다. 내공에 의지했기 때문에 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눈앞이 캄캄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쌍도끼를 쓰는 자가 도끼를 내동댕이치고 달려들어 두 팔을 벌려 곽정의 두 다리를 꽉 부여잡고 놓지 않는다.
곽정은 쓰러진 채 눈앞에 별이 번쩍이고 머리 위로 칼과 채찍이 동시에 옴을 느꼈다. 이제는 죽었구나. 순간 어머니, 일곱 분의 은사, 의형 타뢰, 귀여운 화쟁의 모습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기도 모르게 도끼 쓰는 녀석의 가슴을 끌어안고 번쩍 들어 자기 몸을 막았다.
나머지 세 사람은 쥐를 잡기 위해 그릇을 깨랴 싶어 칼과 채찍을 거두는데 곽정은 한 손으로 적의 맥문을 눌러 꼼짝못하게 만들어 놓고 다른 한 손으로 적의 맥문을 눌러 꼼짝못하게 만들어 놓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명을 누르고 자기 몸을 움츠려 녀석의 밑으로 몸을 숨겼다.
세 사람이 발길로 곽정의 드러난 어깨와 발을 움츠려 녀석의 밑으로 몸을 숨겼다. 세 사람이 발길로 곽정의 드러난 어깨와 발을 걷어찼지만 곽정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내 죽을망정 한 놈이라도 눌러 죽이리라.]
곽정은 독한 마음을 먹고 도끼를 쓰는 놈의 명을 잡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철별 등이 곽정이 땅에 깔린 것을 보고 병기를 잡고 구하려 대든다. 단도를 쓰는 녀석이 두 명의 후배에게 이른다.
[너희는 저들을 막거라, 내 이 잡종을 죽이마.]
드러난 곽정의 어깨를 향해 몸을 숙이고 칼을 꽂으려 했다. 곽정은 어깨가 뜨끔함을 느끼며 허리에 힘을 주고 당나귀가 뒹굴듯 두어 장 밖으로 떼굴떼굴 굴렀다. 이때 그의 두 발을 잡고 있던 그 녀석은 숨통이 막혀 나가 넘어졌다. 곽정이 벌떡 뛰어 일어나는데 적의 칼이 눈앞에 번뜩인다. 막 피하려고 하는 순간 채찍에 얻어맞은 오른쪽 다리가 쑤셔 다시 또 쓰러졌다.
상대가 칼을 내리치는 순간 곽정은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손을 뻗어 허리에 감고 있던 부드러운 호신용 채찍을 끌러 잡고 하늘을 향해 휘두르며 누운 채 금룡편법(金龍鞭法)의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전신의 급소를 철통 같이 막아 바람이나 비도 뚫고 들어올 수 없도록 했다. 마왕신 한보구는 키가 작은 땅딸보다. 그래서 무학(武學)가운데서도 전문적으로 적의 하체를 공격하는 재주가 비상하게 발달해 있었던 것이다. 곽정이 지금 누운 채 휘두르는 금룡편법이 바로 이것이다. 상대가 대들래야 도저히 뚫고 들어올 여지가 없는 것이다.
20여 초 싸우는 동안 곽정도 정신이 들었지만 다른 두 놈도 사태를 수습해 놓고 다시 합세를 했다. 곽정이 또 불리한 형세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이때 산 아래 몽고군의 대오가 소란스러워지면서 여섯 사람이 이쪽 저쪽으로 빠져 나와 산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상곤과 찰목합의 부하들은 완안열의 무사들이 곽정을 공격하기 위해 가는가 싶어 큰 소리로 욕만 퍼붓고 있을 뿐이다.
산 위에 있던 뭇 사람들이 화살을 당겨 막으려 했는데 철별의 눈이 제일 빨랐다. 곽정의 사부들인 강남 육괴가 아닌가? 반가웠다.
[곽정아, 너의 사부님들이 오신다!]
곽정은 정신없이 대결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주총과 전금발이 앞장서 산에 올라 보니 곽정이 땅에 누운 채 네 사람의 협공을 받고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전금발이 몸을 날려 대들며 저울대를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체면 없는 놈들이로구나!]
네 사람의 손이 뜨끔, 적의 공력이 소년 이상임을 느끼며 급히 물러서고 주총이 곽정을 일으켜 세우는데 가진악 등 일행이 산위에 당도했다.
[부끄러운 것도 모르는 잡것들이구나. 썩 꺼져 버려라.]
단도를 쓰는 대사형이란 자는 난감하게 되어 버렸다. 고수들관 가불어 싸워 본대야 이쪽만 손해를 볼 것은 뻔한 일인데 그렇다고 산 아래로 달아나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무슨 염치로 완안열의 부중에 머무를 수 있단 말인가? 체면이나 유지하겠다는 듯 허세를 부려 돈다.
[혹시 강남 육협들이 아니온지?]
주총이 너털웃음을 웃는다.
[그렇소, 그대들은 누구요?]
[우린 귀문용왕(鬼問龍王) 문하의 네 재자들이올시다.]
가진악과 주총은 그들 넷이 곽정 하나를 상대하는 것을 보고 무명지배(無名之輩)로 생가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무림의 괴물인 귀문용왕의 제자들이란 말을 듣고 이쪽에서 놀랐다. 가진악이 냉랭하게 쏘았다.
[건방지게 함부로 주워 댈 게 아니다. 귀문용왕은 그래도 명성이 있는 인물인데 그 문하가 어찌 너희같이 돼먹지 않는 잡것들이 있단 말이냐?]
쌍도끼를 쓰는 자가 곽정에게 놀려 뻘겋게 멍든 목을 쓰다듬으며 화를 난다는 듯 대든다.
[누가 함부로 주어 댄다는 하는 게요? 저분은 대사형 단혼도 심청강(斷魂刀 沈靑剛)이요, 이분이 둘째인 추명창 오청렬(追命槍 吳靑烈)이며, 저기 저분은 세째인 탈백편 마청웅(奪魄鞭 馬靑雄)이고, 내가 바로 상문부 전청건(喪問符 錢靑健)이요.]
[들어보니 그럴 듯하오. 과연 황하의 사귀인 모양인데, 당신들도 강호에선 무명지배가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타락을 하여 넷이 하나를 상대한단 말이오?]
가진악이 계속 추궁을 했다.
[넷이 하나를 상대하다니 그 무슨 말이오? 여기 허다한 몽고 사람들이 그를 돕고 있었는데?]
오청렬이란 자가 억지를 부린다. 그런데 전청건이 멋도 모르고 가진악의 비위를 건드리게 되었다.
[둘째 형, 따따부따하는 저 절름발이 소경은 도대체 누구요?]
마청웅을 보고 소곤거려 물어 본 말인데 워낙 가진악의 귀가 예민한지라 알아듣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으로 치밀어 올라, 철장에 의지, 몸을 솟구쳐 그의 옆으로 날아가 한 손에 녀석의 덜미를 부여잡고 산 아래로 집어던졌다. 남은 삼귀(三鬼)가 놀라 가진악을 향해 일시에 덤벼들자 가진악은 바람처럼 몸을 날리며 하나씩 하나씩 세 놈 모두들 산 아래로 집어던졌다.
산 아래 위에 있던 몽고병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황하 사귀는 나가 떨어진 채 허리가 시큰시큰하고 등이 뜨끔뜨끔한 가운데도 얼굴을 들 수도 없이 기어 일어나 피했다.
바로 이때 먼 곳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수천의 인마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상곤의 부하들이 깜짝 놀라고 철목진은 원병이 오는가 생각했다. 철목진은 용병에 능하고 상곤은 아버지의 위엄만을 믿고 제멋대로 자라난 위인이다. 철목진은 상곤 부대의 좌익을 바라다보며 명령을 내린다.
[이쪽으로 뚫고 나가자!]
철별, 박이출, 출적, 찰합태 등이 앞장을 서서 달리고 먼 곳의 원병은 소리를 질러 기세를 돋우었다. 목화려는 도사를 껴안은 채 한 칼을 그의 목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길을 비켜라, 길을 비켜!]
상곤이 이를 보고 명령을 내려 막으려 했지만 도사의 목숨이 위태하니 함부로 대들 수도 없어 망설이는데, 철목진이 앞장서 돌격하는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았다. 철별은 상곤의 골통을 향해 쉭 화살을 당졌다. 상곤이 급히 완쪽으로 피했지만 오른쪽 빰에 맞고 말에서 떨어겼다. 군사들이 이를 보고 소란을 피웠다.
철목진이 뚫린 출로를 따다 빠져 나가자 수백 명이 추격을 한다. 철별, 박이출 등이 연신 활줄을 당겨 쫓는다. 남희인은 곽정을 품안에 껴안고 계속 싸우며 달려나갔다.
먼지가 하늘을 찌르는 곳에 철목진의 네째 아들 타뢰가 군대를 이끌고 당도해 있었다. 추격하던 적병이 원병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원래 타뢰는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철목진의 명령서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족장 숙장(族長宿長)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아 겨우 수천 명의 젊은 병사들만 이끌고 달려온 것이다. 타뢰는 꾀가 많아 적병의 위세가 데단함을 보고 직접 공격은 피하고 말꼬리마다 나뭇가지를 매달고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며 먼지를 일으켜 연막 전술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철목진이 군대를 정리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화쟁이 또 일표 군마를 이끌고 오는 것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모두들 무사한 것을 보고 몹시 기뻐했다.
그날 밤 칠목진은 군사들을 위해 위로연을 베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사를 상석에 앉혔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못마땅한 눈치로 불평들을 했다. 그러나 철목진은 오히러 도사에게 3잔의 술까지 권해 놓고 말문을 열었다.
[내 왕한 의부나 상곤 의형과는 아무 감정도 없으니 돌아가거든 내 대신 잘 사과를 드려주게. 내 다음 기회에 귀중한 예물을 드리고 사죄를 할 태니 절대로 이 문제를 가지고 개의하심이 없도록 해 주게.]
도사는 그가 자기를 죽이지 않는 것만도 다행한 일인데 이렇게까지 말이 나오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제장들은 대한이 왕한을 그렇게 무서워하나 해서 불만이고, 기가 찼다. 다음날 아침 철목진은 두 마차에 황금빛 담비 가죽과 10여 명의 군사로 도사를 호송하여 돌아가도록 했다.
그가 간 지 사흘 뒤 칠목진은 제장을 소집했다.
[우리 부중을 집합시키고 즉시 왕한을 치러 가자.]
제장들이 서로 바라다보면서 아연했다.
[왕한은 병사가 많고 우린 적으니 할 수 없다. 정식으로 싸움을 하면 우리가 패한다. 내가 도사를 되돌려 보내고 후한 예물을 보낸 것은 방비를 풀게 하려고 한게야]
제장들은 그제야 철목진의 계략에 감탄하고 다시금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즉시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진을 했다. 왕한과 상곤은 도사가 편안히 돌아온 것을 보고 정말 철목진이 자기들을 무서워하는 줄 알고 연일 완안열, 찰목합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철목진이 귀신 같은 용병으로 캄캄한 밤을 이용 천지 개벽을 하듯 대들 줄은 몰랐다.
왕한,상곤은 당황한 나머지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내만인과 서료인(西遼人)에게 살해되었고 도사도 적군의 말발굽에 깔려 죽고 말았다. 황하사귀는 완안열을 호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아나 중도(中都:지금의 북경)로 돌아갔다.
찰목합은 부하를 잃고 5명의 친병만을 데리고 당노산(唐努山)으로 피했었는데 그가 양고기를 먹고 있는 틈을 타서 그 5명이 그를 배반하여 사로잡아 가지고 철목진의 진중으로 데리고 왔다. 철목진은 대노하여 소리를 지른다.
[친병이 주인을 배반하다니 이런 불의한 놈들을 남겼다 어디에 쓰겠느냐?]
즉시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다섯 놈의 목을 찰목합의 면전에서 베어 버리고 말았다.
[어떤가, 우리 그래도 좋은 친구가 돼 볼까?]
찰목합을 되돌려 바라다본다. 찰목합은 하염없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형이 제 목숨을 살려 주신다 해도 면목없어 살 수 없습니다. 청이 있다면 피 흘리고 죽지나 말게 해 주십시오. 제 영혼이 피 흐르는 육체를 떠나게 하고 싶지는 않군요.]
철목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그 소원이야 들어주지. 우리가 어렸을 때 즐겁게 뛰놀던 그곳에 묻어 주마.]
찰목합은 무릎을 꿇어 절을 하고 장막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철목진은 간탄하원(幹灘河源)에서 각족의 부중대희를 열었다. 이때 그의 명성은 몽고 천하에 진동, 몽고의 여러 유목민과 전사들은 그 누구하나 그를 숭앙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회 가운데 뭇사람들은 철목진을 몽고의 대한에 추대했을뿐 아니라 그를 징기스칸(戊吉思汗)이라 명명했다. 징기스칸이란 말은 대해처럼 넓고 강대하다는 뜻이다.
징기스칸은 공로가 많은 장사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목화려, 박이출, 박이흘, 적노온 등 사걸과 철별, 자륵미, 속불태 등 대장을 천부장으로 임명했다. 곽정도 이번에 공로가 혁혁하여 천부장에 봉해졌는데 10여 세의 소년으로 몽고 개국의 공신 명장들과 같은 서열에 앉게 된 것이다.
축하연이 벌어지고 징기스칸은 제장들이 올리는 술잔을 받고 거나하게 취해 곽정을 바라다보며 입을 열었다.
[착한 놈이다. 내 가장 귀중한 보물을 너에게 주리라.]
곽정은 급히 무릎을 꿇고 감사의 인사를 울린다.
[화쟁 공주를 너에게 주마. 내일부터 넌 내 금도부마(金刀駙馬)다.]
모여든 장수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곽정에게 축하를 보냈다.
[금도부마!]
타뢰는 더욱 기뻐 곽정을 부둥켜 안은 채 놓을 생각을 잊고 있었다. 곽정은 멍한 채 얼빠진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원래 그는 화쟁 공주를 친오누이처림 대해 왔을 뿐, 남녀의 사정(私情)은 느끼지 못하고 지냈었다. 이 몇 년 동안 전심 전력 무공을 익히기에 다른 생각을 지닐 여유도 없었다. 이때 곽겅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던 것인데 다른 사람들은 이 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주연이 끝나자 곽정은 모친에게 달려가 이 일을 고했다. 이평은 한참동안 침묵에 잠겼다가 강남 육괴를 모셔 오게 한 뒤 이 일을 알렸다. 강남 육괴도 사랑하는 제자의 경사를 듣고 이평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이평은 아무 말 없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여섯 사람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육괴는 영문을 몰라 깜짝 놀란다.
[아주머니 이 무슨 일로 이러십니까? 하실 말씀이 계시거든 그냥 하시지 않으시고.]
[제 아이가 여섯 분 사부의 가르침을 받고 오늘 성인이 되었는데 아녀자의 몸으로 아무리 분골쇄신한다 한들 어찌 이 큰 은혜에 보답할 수있겠습니까? 그러나 한가지 어려운 일이 있으니 이것도 여섯 분 사부께서 주장해 주셔야겠습니다.]
즉시 죽은 남편 곽소천과 양철심이 서로 사돈을 맺자고 했던 옛 일을 들려주었다.
곽정의 모친 이평은 말을 이었다.
[대한께서 제 아이릍 부마로 정하신 일이야 십분 영광스러운 일이긴 하오나 양철심 서방님이 유복녀라도 남기셨다면 제가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훗날 구천에 가서 무슨 염치로 남편과 양철심 서방님을 대하겠습니까?]
[그 양철심이 유복자를 남긴 것은 사실이오나 여자가 아니라 남자랍니다.]
주총이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내자 이평이 깜짝 놀란다.
[주사부님께서는 어떻게 아십니까?]
[중원의 한 친구가 편지를 보내 줘서 알았습니다. 우리를 보고 곽정을 강남으로 데리고 와서 그 양가 성을 가진 소년과 만나게 하고 무공도 한번 겨루게 했으면 좋겠다구요.]
이평은 기뻤다. 즉시 육괴와 상의 하여 육괴가 곽정을 데리고 강남에 가서 양철심의 아들과 만나게 하고 또 단천덕을 찾아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뒤 돌아와 화쟁과 성혼하기로 했다. 곽정은 징기스칸에게 가 이 일을 알리고 허락을 구했다.
[좋다. 강남에 가서 구경도 하고 대금국 육태자 완안열의 머리도 내게 갖다 주면 좋겠구나. 이 일을 위해 넌 몇 명의 용사를 데리고 가겠느냐?]
第 十五 章. 핏빛 땀의 야생마
곽정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말을 들어 대금국을 증오해 왔고 또 이번에 자칫했더라면 완안열 수하의 황하사귀의 손에 죽을 뻔까지 했다. 이때 징기스칸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여섯 분 사부의 도움만 있다면 만사는 성공이다. 무예를 모르는 용사들을 제아무리 많이 끌고 간다 하더라도 오히려 귀찮기만 하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사부님들과 동행을 하오니 무사를 데리고 갈 필요는 없겠습니다.]
징기스칸은 기뻤다.
[지금 우린 말도 살찌우지 못했고, 병사도 제대로 훈런시키지 못했으니 아직은 대금국의 적수가 못되네. 절대로 탄로나지 않도록 해야 되네.]
곽정이 머리를 끄덕여 대답하자 징기스칸은 즉석에서 황금 30근을 노자로 쓰라고 주고 또 왕한에게서 뺏아 온 금그릇이며 보물을 강남 육괴의 몫으로 하사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곽정은 어머니에게 눈물로 하직을 고하고 여섯 사부를 따라 장아생의 묘지를 찾아 절한 뒤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10여 리를 걸었을까 머리 위론 두 마리의 흰수리가 맴돌고 있고 타뢰와 화쟁이 말머리를 가지런히 하여 곽정을 전송하고 있었다. 타뢰는 그에게 아주 귀한 담비 가죽으로 만든 겉옷을 주었다. 그것도 역시 왕한의 창고에서 뺏아 온 것이다. 화쟁은 아버지가 자기를 곽정에게 시집보내기로 한 것을 알고 있는 처지라 두 볼을 붉힌 채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타뢰는 빙그레 웃는다.
[누이야, 곽정하고 얘기 좀 나누렴. 내 안 들을 톄니.]
말을 마치고 말을 달려 저만큼 물러선다.
화쟁은 고개를 떨군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인다.
[빨리 돌아오세요.]
곽정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또 무슨 일이 있어요?]
화쟁이 고개를 흔들자 곽정이 그를 가볍게 끌어안았다가 잠시 후 타뢰 옆으로 달려가 그와도 포옹을 한다.
[그만 돌아가. 길을 재촉해야겠어.]
말고삐를 나꿔채 벌써 멀리 가 버린 사부들의 뒤를 쫓는다. 화쟁은 그의 무뚝뚝한 태도가 불만스럽다. 어쩌면 옛날이나 마찬가지람. 속이 상해 채찍을 들어 애꿎은 청총마(靑 馬)를 후려갈겼다.
강남 육괴와 곽정은 낮에는 긷고 밤에는 쉬면서 동남향을 향해 계속 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사막과 초원을 벗어났다. 이날 흑수하(黑水河)에 도착할 무렵이다. 장자구(張子口)가 예서 멀지 않다. 곽정은 사막을 떠나 본 일이 없다. 산천 경개 그 모두가 새롭고 신기하기만 하다. 두 발로 홍마의 배를 차니 바람소리만 쉭쉭 귓가를 스치고 가옥과 수목이 뒤로 달린다. 홍마도 신바람이 나는지 단숨에 흑수하에 당도, 길가 여인숙 앞에 말을 맸다.
곽정이 보니 홍마도 얼마를 달렸는지 땀방울이 솟았다. 마음속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손수건을 꺼내 닦아 주다가 깜짝 놀랐다. 손수건에 불긋불긋 핏방울이 묻었다. 다시 홍마의 오른쪽 어깨 부분을 닦아 주니 역시 마찬가지다. 곽정은 놀라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공연스레 흥을 내다가 이 준마를 해칠뻔하지 않았는가? 후회 막급하여 홍마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데도 말은 여전히 기운이 샘솟는 듯 피곤한 기색도 없이 생기가 넘쳐 흐른다.
곽정은 고개를 길게 빼고 세째 사부 한보구가 오는가를 살핀다. 오시면 애마를 치료해 달래야지. 그런데 이때 길 저쪽에서 길고 은은한 낙타 방울 소리를 울리며 눈처럼 흰 네 마리의 낙타가 달려오고 있는게 보였다. 낙타에는 흰 옷을 입은 남자들이 타고 있었다.
곽정은 이렇게까지 예쁜 낙타들을 본일이 없다. 자기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다보는데 그 네 명은 모두 22, 3세의 나이, 미목이 청수하고, 누구하나 손색 없는 미남자들이다. 넷이 낙타등에서 뛰어내려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허리와 다리의 움직임으로 보아 무공을 익힌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곽정이 보니 그들은 흰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속에는 여우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곽정이 뚫어지게 바라다보자 그 중 한 명은 겸언쩍은지 볼을 붉히며 고개를 떨군다. 다른 하나가 눈을 부라리고 곽정을 쏘아본다.
[야, 바보처럼 무얼 보는 게야?]
곽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넷은 무언가 소곤거리며 시시덕거린다. 곽정은 그들이 자기를 비웃는 줄 알고 얼굴을 붉히며 다른 식당을 찾아 옮기려는데 한보구가 황마를 타고 달려왔다.
곽정은 달러가 흥마가 피를 흘린 얘기를 했다. 한보구도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그래, 그런 일이 있어?]
그는 홍마에게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햇빛에 비추어 본 뒤 하하거리며 웃는다.
[이건 피가 아니라 땀이야.]
[땀이라뇨? 그래, 붉은 땀도 있나요?]
[곽정아, 넌 천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귀한 말을 얻었다.]
곽정은 자기 말이 병든 것이 아님을 알자 안심이 되었다.
[세째 사부, 어깨서 피 같은 땀을 흘리나오?]
[나도 내 선사(先師)께 들은 얘긴데 서역 대완(西域大宛)에 일종의 천마(天馬)가 있다더라. 어깨에서 땀을 흘릴 때 불그레한 것이 꼭 피 같다나. 갈기가 마치 날개 같아 하루에 천 리를 간다는데 그야 어디 전설이지, 본 사람이 있나?]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가진악 등이 모두 도착했다. 주총은 시서(詩書)에 통달한 사람, 고개를 살레살레 흔든다.
[그야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도 분명히 씌어 있는걸. 당시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대완 입구의 이사성(貳師城)에서 피땀을 흘리는 귀한 말을 보고 돌아와 한무제(漢武帝)에게 알렸지. 한무제는 말을 갖고 싶어 사신에게 황금 천 근과 또 정말 말만한 크기로 금을 부어 말을 만들어 대완국에 보내고 그 말 한필 달라고 했것다. 그 대완국 왕은 말하기를, 이사성의 말은 대완국 국보니 한인(漢人)에케 즐 수 없다고 했단 말야. 한나라 사신은 화가 나서 그만 성질을 부리고 말았네. 금으로 만든 말을 부숴 가지고 가겠다고 했것다. 대완국 왕은 그 무례함을 보고 사신을 죽이고 황금 천 근과 금으로 만든 말을 차지해 버린 일이 있다네.]
곽정은 그제야 <아>소리를 냈다. 주총은 찻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래서요?]
그 흰옷을 입은 미남자들도 정신 없이 주총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주총은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세째 아우, 자넨 말 다루기로 유명한 사람이니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나?]
한보구에게 묻는다.
[제가 선사에게 듣기로는 집에서 기르는 말과 들말이 교배해서 생긴 것으로 아는데요.]
[옳아, 책에 씌어 있는 바에 의하면 이사성 부근에 산이 하나 있고 그 산에 들말이 살고 있는데 어찌나 빠른지 사람들이 감히 쫓을 생각을 못 한대. 그래서 대완국 사람들이 꾀를 생각해 냈지. 봄이 오면 밤에 예쁜 암말을 산에 놔둔다나. 그럼 그 들말이 대들고 거기서 태어난 말이 바로 이런 말이래요. 곽정아, 네 말이 바로 대완국에서 만 리나 달려 네게 온 건지도 몰라.]
한소영도 듣다가 참견을 한다.
[그래 한무제가 그냥 그만 두고 말았나요?]
[어디가? 즉시 이광리(李廣利)를 이사 장군(貳師將軍)에 임명해 그 군사를 이끌고 대완국을 치게 했지. 그런데 대완국으로 가려면 사막을 지나야 하는데 군량이 있나 물이 있나, 도중에 죽는 사람이 많아 대완국에 도착했을 때는 군대가 반도 남지 않았어. 한 번 싸워 패하자 돈황(敦煌)으로 물러나 황제에게 원병을 청했는데 천자가 대노하고 사람을 시켜 옥문관(玉門關)을 지키게 하고 이렇게 하교를 내렀다네. <패해 들어오는 자는 모두 참수하리라>. 이광리도 진퇴양난이라 할 수 없이 돈황에 머무르고 말았다네.]
여기까지 말하는데 낙타의 방울 소리가 울리며 또 네 사람이 흰 낙타를 타고 도착했다. 넷이 식당으로 들어서는데 모두 흰 옷을 입은 미남자들이다. 그들 넷은 먼저 와 있던 넷과 합석하여 먹을 것을 시킨다.
주총은 계속 얘기를 잇는다.
[한무제가 생각해 보니 이건 말도 구하지 믓하고 수만 군사만 잃고 말았단 말야. 외국에서 알면 이 무슨 망신인가? 우리 한나라 천자를 우습게 블것 아니냐? 그래서 다시 이십만의 군내를 보내는데 군량이며 식수 등 완전무결한 준비를 했것다. 그래도 혹시 병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해서 전국에 명령하여 죄 지은 관리며 전국의 데릴사위, 상인 등을 모두 종군케 했으니 원 세상이 떠들썩 할 수 밖에. 또 말 길 잘 들이기로 유명한 두 사람의 마사(馬師)에게 큰 벼슬까지 주었다네. 하나는 구마교위(驅馬校尉), 또 하나는 집마교위(執馬校尉), 어쨌든 대완을 치고 말을 얻겠다는 거야. 누이도 그때 태어났더라먼 고생 좀 했을 거고, 세째는 벼슬아치가 될 뻔했네. 하하하.]
[데릴사위도 무슨 죄가 되나요?]
한소영이 묻는다.
[가난한 놈 아니구야 누가 데릴사위로 들어가나. 어쨌든 이광리는 대군을 이끌고 대완성을 사십여 일이나 공격했지. 수많은 용장을 죽이기도 하구 말일세. 대완의 귀인들이 놀라 국왕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와서 투항했네. 물론 말도 바치고 말일세. 이광리가 개선을 하자 천자는 너무나 기뻐서 그를 해서후(海西侯)로 봉하고 참전한 사람마다 모두 승진을 시컸겨든. 그 말 한 필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재산을 탕진했는지 아나? 한무제는 잔치를 베풀고 즉석에서 천마지가(天馬之歌)란 노래까지 읊었다네. 하늘 위의 용이래야 이 말의 친구가 될 수 있느니 어쩌니 하면서 말야.]
흰 옷을 입은 여덟 명은 얘기를 들으면서 그 홍마를 훔쳐 보며 몹시 탐이 나는 눈치다.
[천마가 뛰이난 것은 바로 그 이사성의 들말을 닯아서 그런 건데, 한무제가 그렇게 어렵게 구해 온 말이지만 교배시길 들말을 구할 수 있어야지, 몇 대를 걸쳐 내려오는 동안 이제 뭐 신통할 것도 없고 무슨 피 같은 땀이 흐르는 것도 없이 되어 버렸다네.]
주총이 얘기를 끝내자 모두들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흰 옷을 입은 여덟 명의 소년들이 멀찌기 떨어져 앉은 채 뭔가 소곤거리그 있었다. 비록 멀찌기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가진악의 귀가 밝아 그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들어 말을 뺏아 버려, 올라타기만 하면 쫓아오진 못할 테지?]
한 놈이 얘기하자 다른 놈이 받는다.
[아니 여기 사림들이 많은데 어떻게 뺐는냔 말야.]
[대들면 모조리 죽여 없애지 뭘.]
이건 또 다른 놈이 하는 말이다. 가진악이 듣고 깜작 놀랐다.
[아니 저 여덟 명이 전부 여잔데 어째 저리 독할 수 있을까.]
즉시 아무것도 모르는 체 얼글을 돌려 식당 밖만 내다보고 있으니까 그들은 더욱 열을 낸다.
[우리가 저 말을 뺏아 산주(山主)에게 바치면 그놈을 타고 서울에 가실 게고 그럼 더욱 위신이 설 거야. 장백산(長白山)의 삼선노괴(參仙老怪)나 서장밀종(西藏密宗)의 대수인(大手印) 영지상인(靈智上人)도 더 뽐내지는 못할 테니까.]
가진악은 영지상인이 서장의 고승이란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삼선노괴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그러자 또 다른 녀석이 입을 연다.
[요며칠 노상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가 천수인도(千手人屠) 팽련호(彭連虎)의 수하들이라고 들었는데 그들도 틀림없이 서울로 모일 게야. 만약 이 말이 그놈들 눈에 띈다면 어디 우리 차례나 오나?]
이 말을 들은 가진악은 마음즉으로 또 한 번 놀랐다. 팽련호라면 하북(河北), 산서(山西) 일대를 누비는 포악한 무리의 우두머리다. 사람 죽이기를 개 잡듯 하기 때문에 별명이 친수인도다.
[이렇게 굉장한 우두머리들이 무엇 때문에 서울로 모여들까? 그리고 저 여자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어냐 말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는데 그들은 마을을 벗어나 길을 막고 기다리다가 곽정의 말을 뺐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계속해서 너절한 얘기들을 주고받는다. 뭐 산주가 너를 제일 좋아힌다느니 지금도 산주는 널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등 시시한 얘기들을 가지고 저희들끼리 계속 노닥거린다. 가진악은 그들의 얘기가 역겨워 이마를 찌푸린다. 그러나 다시 화제를 곽정의 말에 들린다.
[우리가 저 귀한 말을 뺏아 산주에게 바치면 무슨 상을 우리에게 줄까?]
[얘, 널 며칠 밤 데티고 잘 톄지 뭘 그래.]
먼저 얘기를 꺼낸 여자가 교태를 부려 허리를 꼬자 저희끼리 시시덕거리며 웃는다.
[얘들아,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들 마라. 그러다 행장이라도 드러나면 어쩌려고들 그래.]
그 중 하나가 주의를 시킨다. 그러자 다른 또 하나가 말문을 연다.
[저기 저 여자 칼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무예를 하는 모양인데 잘 생겼구나. 십 년만 더 젊다면 산주가 보그 홀딱 반했겠다.]
가진악은 그들이 한소영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들 얘기를 들어 보면 그 산주란 작자가 돼먹지 않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산주의 환심만을 사기 위해 쓸데없이 예쁜 여자를 구해다 바치지는 말어.]
그 증 하나가 시시덕거리며 웃을 뿐 아무 말이 없다. 다른 하나가 또 얘기를 꺼낸다.
[우리가 이번 중원(中原)에 온 것은 이름을 날려 천하의 영웅들 앞에 백타산(白駝山)의 위세를 떨치자고 하는 건데 다들 조심해야지 공연히 까불다 황하사귀꼴이 되면 그 무슨 망신이냐. 웃음거리가 되면 큰 일이다.]
가진악은 백타산이 어느 파에 속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황하사귀>란 말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주가 그리던데 황하사귀는 귀문용왕의 수제자들인데 농서중주(瓏西中州)에서는 꽤 명성이 있다나봐. 그런데 이번에 여남은 살 먹은 어린 아이에게 당했다니 그 참 이상하지.]
[누가 그러는데, 그 아이 가 구음백골조를 쓴데나 봐. 황하사귀가 긁혀서 몸에 구멍이 뚫렸다던데.]
[너 조심해라. 잘못하다간 그 아이에게 여기릍 긁힐라.]
또 한바탕 시시덕거리며 웃어 댄다. 가진악은 들으면서 화도 나고 우습기도 했다.
(강호의 소문이 빠르기도 하구나! 그러나 곽정이 구음백골조를 할 수 있다니 그런 엉터리가 있나? 적어도 십 년 이상 해야 성공할지 말지 하는데 여남은 살에 그런 재주를 익힐 수 있나? 천만의 말이지.)
어쨌든 곽정이 처음 나서서 황하 사귀를 해치운 것만은 흐뭇한 일이다. 6형제가 10년 동안 들인 공이 헛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 여자들은 국수와 과자 등을 먹고 서둘러 낙타를 타고 먼저 떠났다. 가진악은 그들이 멀리 가 버리자 입을 열었다.
[들째 아우, 자네 보기엔 여덟 여자의 무공이 어때 보이던가?]
주총이 어리벙벙해서 묻는다.
[여자라뇨?]
[왜 그러나?]
[아, 그들이 남장 여자였군요. 전연 몰랐는걸요. 그들의 몸놀림이 이상해서 어떻게 보면 무예를 아는 것 갈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전연 모르는 것 같기도 하군요.]
[백타산 얘기 들어 본 일 있나?]
주총등이 생각해 본 뒤에 없다는 대답이다. 가진악이 방금 그들이 주고받은 얘기를 들려주자 주총등은 모두 가소롭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가진악은 달리 생각하는 눈치다.
[말 뺏는다는 일이야 작은 일이지만 이름있는 우두머리들이 서울에 모인다는 건 좀 생각해 볼 문재야, 무슨 곡절이 있을 테니까. 그들이 대들면 모르는 체할 수야 없는 일 아니겠나?]
그러자 전금발이 나선다.
[우린 가흥의 무예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체할 수 없습니다.]
잠시 모두들 생각에 잠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곽정을 먼저 보내지!]
남희인이 제안을 하자 한소영이 묻는다.
[네째 오빤 곽정을 먼저 가흥으로 보내고 우린 서울 소식을 알아본 뒤 쫓아가자 이거죠?]
남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곽정도 이제 혼자 다니며 세상 물정도 알고 경험도 해야지.]
주총도 찬성이다. 곽정은 잠시나마 사부님들과 작별을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섭섭했다. 그런 태도를 보고 가진악이 책망을 한다.
[야 이 녀석아, 다 커 가지고 어린애처럼 섭섭해 하다니.]
한소영이 그래도 위로를 한다.
[먼저 가서 기다리면 한달도 못돼 우리가 쫓아갈 텐데 뭘. 무예를 겨루게 되면 우리 여섯이 다 모이진 못해도 한두 명은 먼저 가 뒤를 보아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곽정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그러자 가진악이 주의를 시킨다.
[그 여자들이 네 말을 뺏겠다고 하니 넌 소로로 해서 빠져 나가거라. 내 말이 빨라서 쫓아오진 못할 게다. 증요한 일이 앞에 있으니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한다.]
[만일 그 여자들이 너를 해코자 한다면 강남 칠괴가 용서치 않겠다.]
한보구가 하는 말이다. 소미타 장아생이 죽은지 어언 10여 년, 하지만 육괴는 늘 강남 칠괴라고 말했다.
육괴는 우선 다른 일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곽정을 강호에 뛰어들게 함으로써 세상 물정이나 파악하게 하자는 뜻이 있었다. 경험만은 육괴로서도 가르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각기 몇 마디 서로 당부를 한다. 남희인이 가장 뒤에 입을 열었다.
[이길 수 없거든 달아날 줄도 알아야 해.]
지난번 곽정이 황하사귀와 벌인 혼전은 사실 위험한 일이었다. 상대가 사귀였기 망정이지 그들보다 조금만 더 높은 고수를 만났다면 그냥 죽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지극히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의미 심장한 말을 들려준 것이다.
전금발도 한 마디 거든다.
[무학(武學)이란 끝이 없어 산 뒤엔 또 산이요, 사람 위에 사람있으니 천하 무적일 수 없다. 네째 사부의 말쏨 잊지 말거라.]
곽정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여섯 분 사부께 일일이 절을 한 뒤 말에 올라 남쪽을 향해 떠났다.
2리 정도나 달렸을까? 눈앞에 길림길이 나다났다. 곽정은 가진악이 일러 준 대로 소로를 택했다. 이 소로는 거리가 더 멀고 또 꼬불꼬불한데다 평소 행인까지 적어 길이 엉망이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여기저기 돌이 흩어져 있어 매우 걷기 힘들다. 그러나 홍마는 아랑곳하지않고 계속 잘 달린다. 다시 7, 8리 더 갔을까? 지세가 더욱 험해지고 길가엔 깎아지른 기암 절벽이 하늘을 끼른다. 곽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끝이 쭈삣하여 칼자루를 잡은 채 앞만 보고 가면서 생각한다.
(세째 사부께서 내 이 꼴을 보신다면 또 겁장이라고 꾸짖으실 텐데.)
이때 길은 점점 험헤지고 좁아진다. 산모퉁이를 돝아서자 흰옷을 입은 세 명의 남장 여인들이 낙타를 탄 채 길을 막고 있었다. 이를 본 곽정은 가슴이 두근거려 말고삐를 잡았다.
[실례합니다. 길 좀 비켜 주세요.]
세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고 그 중 하나가 먼저 얘기를 꺼낸다.
[꼬마야, 뭘 무서워해. 와요. 잡아먹지 않을 테니.]
곽정이 얼굴을 붉히고 말로 할까, 아니면 손을 쓸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다른 여자가 말문을 열었다.
[네 말이 근사한데 어디 구경 좀 해보자.]
말투가 꼭 어린아이 다루듯 한다. 그 말을 듣고 화를 안 낼 장사가 없는 것이다. 오른쪽은 깎아지른 절벽의 산이요, 왼쪽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낭떠러지, 손을 쓰자니 겁도 나고 해서 고삐를 나꿔채면서 두 발뒤꿈치로 말배를 찼다. 홍마는 화살처럼 잎을 향해 난다. 곽정은 칼을 비껴 들고 소리를 지른다.
[말이 간다. 길을 비켜라!]
말은 빨리 달려 벌써 세 사람의 면전에 당도했다. 흰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낙타에서 뛰어내리면서 몸을 달려 홍마의 깃털을 잡으려 했다. 홍마는 긴 투레질을 하면서 몸을 허공으로 날려 세 마리의 낙타를 타고 넘어 여자들의 뒤로 가 땅에 떨어진다. 세 여자만 놀라는 것이 아니라 곽정까지도 뜻밖의 일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중 한 여자의 비명 같은 호통 소리에 곽정이 고개를 돌리니 번쩍번쩍 두 개의 암기(暗器)가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인다. 곽정은 처음 당해 보는 일이라 혹시 그 암기에 독이나 묻지 앓았을까 두려워, 쓰고 있던 가죽 모자를 벗어 들고 받았다. 그쪽의 여자들도 이를 보고 혀를 차는 눈치가 역력했다.
곽정이 모자 안을 들여다보니 은으로 정교하게 만든 베 짤 때 쓰는 북이 들어 있었다. 북 끝이 뽀족하고 날카로와 맞기만 하면 그대로 즉게 되어 있는 것이다. 곽정은 피가 치밀어 올랐다.
(저것들이 나와 아무 원한이 없거든 내 말을 담내어 죽이려고까지 덤비다니.)
은으로 만든 북마다 금으로 낙타를 아로새겨 박아 놓았다. 곽정이 그것을 주머니 속에 넣는데 머리 위에 비둘기 울음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쳐드니 두 마리의 흰 비둘기가 북쪽 하늘에서 남쪽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곽정은 혹시 또 다른 적이 앞에 숨어 길을 막고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말을 몰았다. 한 시간도 못 되어 벌써 1백여 리를 달려온 셈이다. 잠시 쉬다가 다시 말을 달려 날이 어둡기 전에 장가구(張家口)에 도착했다. 흰 옷의 여자들이 오려면 사흘은 걸려야 할 거리다.
장가구는 남북 교통의 요로요, 가죽과 털의 집산지라 인구가 많고 교역이 왕성한 곳이다. 곽정이 말을 끌고 두리번 두리번 구경이 한창인데 보는 물건마다 신기하기만 했다. 마침 식당 앞을 지나다가 갑자기 배고픈 생각이 들어 말을 매어 놓고 안으로 들어가 쇠고기 한 접시와 두 근의 밀가루 떡을 시켜 한 입 한 입 먹기 시작했다. 곽정은 몸도 건강하고 또 막 클 때라 어찌나 입맛이 나는지 젓가락을 쓸 새도 없이 몽고 사람 습관 그대로 고기와 떡을 연방 입에 쑤셔 넣으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이때 밖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 걱정이 돼 달려 나와 보니 말은 얌전히 풀을 뜯고 있고 웬 남루한 옷을 입은 소년을 식당 점원들이 혼내고 있었다.
그 소년의 나이 15,6세, 머리엔 찢어진 가죽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 쓰고 얼굴과 손에는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봄이라지만 북국은 아직도 추운데 맨발인 걸 보면 굉장히 가난한 모양이다. 그는 커다란 만두 하나를 손에 든 채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희고 맑은 이가 가지런히 들여다보인다. 얼굴 생김과는 아주 딴판인 고운 이다.
[그 만두 이리 주고 얼른 꺼지지 믓해!]
점원 하나가 소리를 지른다.
[그래 갈 테야]
막 몸을 돌려 가러는데 다른 점원 하나가 또 소리를 지른다.
[만두 내놔라.]
소년은 만두를 내준다. 그러나 하얀 만두 위에는 손때가 묻어있었다. 다시 팔래야 팔 수도 없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점원이 화를 내면서 주먹을 휘두르자 소년이 몸을 숙여 피한다. 곽정은 그가 불쌍해서 중간에 끼어들었다.
[내가 대신 갚아 줄 테니 때리지 말아라.]
땅에 떨어진 만두를 주워 소년에게 건네 준다. 소년은 만두를 받아 들고 가게 앞에 있는 강아지를 향해 던진다.
[불쌍한 너나 먹어라.]
점원 하나가 혀를 찬다.
[아니 고기가 가득 든 만두를, 아깝게 강아지에게 주다니.]
곽정도 깜짝 놀랐다. 배가 고파 그런 줄 알고 사정을 보아 준건데 강아지에게 먹이다니. 곽정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계속 밥을 먹는데 소년이 따라 들어와 물끄러미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곽정은 겸연쩍은 생각이 들어 소년을 불렀다.
[여기 와서 좀 먹을까?]
[그렇지 않아도 혼자 심심했는데 잘 됐군.]
그의 말투는 남방 사투리다. 곽정의 어머니는 절강(浙江)의 임안(臨安) 사람이다. 어러서부터 어머니의 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반가운 생각이 앞섰다.
소년이 식탁으로 대들자 곽정은 점원을 불러 수저를 가져오라고 했다. 점원은 믓마땅한지 한참 뒤에야 겨우 가져왔다. 소년이 화를 벌컥 낸다.
[날 가난하다고 깔보는 모앙이로구나. 너희 집에서 제일 고급이라는 요리를 가져와도 내 입맛 맞추기 어러울 텐데. 건방지게.]
점원은 비웃는다.
[그래? 시키기만 해라. 아무리 고급 요리라도 다 만들어다 바칠 테니. 그러나 돈이 있어야 사먹지?]
소년은 곽정을 바라다본다.
[내가 얼마를 먹든지 돈 낼 수 있겠니?]
[암 물론이지.]
소년은 점원을 다시 바라다본다.
[쇠고기 한 근, 양간 반 근이다.]
[술도 마실래?]
곽정이 소년을 보며 묻는다.
[서두룰 것 없어. 천천히 먹지, 우선 호박씨부터 먹지. 야 이 점원 녀석아, 말린 과일 네 가지, 싱싱한 과일 네 가지, 꿀 바른 떡 좀 가져와라.]
점원이 어리벙벙해서 묻는다.
[마른 과일은 무어며 꿀 바른 떡이라뇨?]
그러자 소년이 한참 주워 섬긴다. 점원은 듣도 보도 못한 요리 이름이 술술 소년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들으며 어안이 벙벙해진다.
[여긴 신선한 새우나 생선은 없을 톄니 안주는 보릉의 것으로 여덟 가지만 해 오너라.]
[어떤 것으로 여덟 가지를 할깝쇼?]
이제 점원은 허리까지 굽실굽실 야단이다.
[볶은 오리 발바닥, 닭의 혀로 만든 국, 사슴 간천엽....]
점원은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아이구 그 값만 해도 굉장한 돈이겠군오.]
[이놈아, 이분이 돈을 내신다는데 네가 걱정할 게 뭐야.]
점원이 곽정을 쳐다보니 진귀한 담비 가죽의 외투를 입고 있는 것이 보통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아 대답을 하고 주방으로 물러갔다.
[도련님들, 술은 어떤 걸로 드실까요? 저희 집에 십 년 묵은 미주가 있는데 그걸 드시겠습니까?]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좀 지나자 호박씨며 꿀 바른 떡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곽정도 처음 먹어 보는 진귀한 것들이다. 소년은 남방의 풍물이며 인정 등, 자기가 아는 얘기를 곽정에게 들려주었다. 곽정은 그의 견식과 학식이 해박함을 보고 흠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곽정은 둘째 사부만 학식이 풍부한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년은 둘째 사부보다 더 아는 것이 많은 듯했다.
(가난뱅이 소년인 줄 알았더니 유식한 군자로구나.)
반시간이나 지났을까? 주문한 음식들이 가득히 식탁위에 쌓인다. 그런데 소년은 술도 약하고 입도 짧은지 얼마 먹지를 못한다. 곽정이 몽고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몽고에 대한 얘기를 이것 저것 묻는다. 곽정은 사부들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 신분이 탄로날 말은 꺼내지 않고 사냥 얘기, 말 타는 얘기, 양 치는 얘기 등만을 재미있개 들려주었다. 소년은 재미있으면 박수를 치거나 웃으며 듣고 있었다. 천진 난만한 소년의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곽정은 사막에서 자란 몸이다. 비록 타뢰나 화쟁의 두 친구가 있기는 했지만 징기스칸은 아들을 사링하여 늘 곁에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타뢰와 함께 놀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화쟁은 또 공주라 함부로 아무곳이나 데리고 다니며 놀 수도 없는 처지거니와 귀염둥이로 자란 응석과 어리광 때문에 함께 잘 놀다가도 늘 다투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 소년과는 어쩐 일인지 아무 격의 없이 사귈 수 있었다. 곽정은 성격이 순진하고 솔직한 편이라 어렸을 때 저지른 바보짓 같은 것들을 숨김 없이 들려주다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소년의 손을 잡고 말았다.
소년의 손은 마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소년은 고개를 숙여 웃고 있었다. 고개를 죽인 소년의 뒷목이 부드럽고 흰 것이 이상했지만 곽정 또한 그런 데는 둔한 편이라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소년이 가볍게 손을 땐다.
[우리가 얘기만 하다 보니 밥도 식고 반찬도 식었네요!]
[정말이군, 다시 데워 오라고 하지.]
[아니 한 번 익힌 음식을 다시 데우면 맛이 없어요.]
그는 식은 음식을 치우게 하고 다시 몇 가지를 더 시킨다. 식당의 주인이나 점원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장사라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곽정 또한 이미 자기가 내겠다고 약속을 한 이상 액수에 신경을 쓸 위인도 아니다.
다시 음식이 상 위에 올랐지만 소년은 몇 젓갈 집어 볼 뿐 배가 부르다고 더는 먹지 않는다. 점원이 곽정을 보면시 너만 어리석게 당하는구나 하는 눈치다. 계산을 해 보니 3백 냥하고도 또 몇 푼이란다. 곽정이 품에서 금을 꺼내 5백 냥만 바꾸어 오라고해서 계산을 치르고도 점원들에게 10냥씩을 주었다. 주인과 점원들이 굽실거리며 그들 둘을 문 밖으로 전송했다.
식당에서 나오니 밖엔 눈발이 회끗회끗 날리고 있었다. 소년이 먼저 입을 연다.
[실례가 많았군요. 자 그럼 다음에 또 만납시다.]
곽정은 마음이 착해 자기의 담비 외투를 밧어 그에게 입혀 준다.
[우리는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친형제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이 옷을 입고 가요.]
곽정에게는 아직도 네 개의 황금이 남아 있었다. 그 중 세 개를 꺼내 외투 주머니에 넣어 준다. 소년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린다.
곽정은 뒷모습을 바라다보면서 그래도 원가 아쉬운 눈치다. 소년이 뒤를 돌아다보니 곽정이 홍마를 잡은 채 자기를 바라다보고 서 있었다. 손을 흔들어 보이자 곽정이 또 달려간다.
[뭐 부족한 게 없나요?]
소년은 빙그레 미소를 보낸다.
[아직 형씨의 존함을 묻지 않았군오.]
[정말 그렇군요. 깜박 잊었는걸. 내 성은 곽이요 이름은 정이라 해요. 아우님은?]
[제 성은 황(黃)이요 이름은 외자로 용(蓉)이라 해요.]
[그래 아우님은 이제 어디르 가시는지? 만일 남방으로 가신다면 우리 동행을 하면 어떨까 해서....]
황용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전 남방으로 가지 않아요.]
이렇게 대답을 해 놓고 또 엉뚱한 수작이다.
[형씨, 또 배가 고프군요.]
[그럼 다시 한턱 냅시다.]
이번엔 황용이 앞장을 서서 장자구에선 제일 크다는 장경루(長慶樓)로 찾아들었다. 아까처럼 요리를 시키는게 아니라 간단한 간식 서너 가지와 한 주전자의 용정차(龍井茶)를 시켜 놓고 또 화제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황용은 곽정이 두 마리의 흰 수리를 기른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바짝 댕기는 눈치다.
[내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였는데 그럼 내일 몽고로 가야겠군요. 가서 흰 수리나 두어 마리 잡아 오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냐.]
[그럼 어떻게 구했어요?]
곽정은 묵묵 부답이다가 한참 지나 다시 입을 연다.
[아우님 집은 어디며 왜 돌아가지 않지?]
황용이 갑자기 눈언저리를 붉힌다.
[아버지가 날 좋아하지 않아요.]
[왜?]
[아버진 나다니며 놀지 말라고. 하시지만 난 놀고만 싶었어요. 그러다가 꾸중을 듣고 밤에 몰래 집을 나와 버렸죠.]
[그래도 지금 아버지는 자식 생각만 하실걸. 그래 어머니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어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없었는걸요.]
[실컷 놀다간 그래도 집으로 가야 해.]
황용은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가 받아 주시지 않는걸요.]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왜 나를 찾지도 않죠?]
[지금 찾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지]
황용은 눈물을 흘리다 해맑게 웃는다.
[그럼 실컷 놀고나선 집으로 돌아가죠. 그러나 우선 흰 수리부터 잡고요.]
둘이 얘기에 팔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는데 계단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리며 두명의 준수하게 생긴 동자가 비단옷을 입은 소년 공자를 모시고 올라왔다. 공자의 풍채가 늠름하고 꼭 옥을 다듬어 놓은 듯 잘생겼는데 나이는 18,9세나 되었을 성싶다. 그가 곽정과 황웅의 초라한 꼴을 보고는 이마를 찌푸리고 그들과 가장 먼 좌석을 가리키자 동자는 찬합에서 준비해 온 그릇과 젓가락 등을 내놓는다.
곽정이 시선만 한 번 주었을 뿐 다시 더 거들떠보지도 않고 황용과 얘기를 주고받는데 아래층에서 홍마의 투레질 소리가 길게 나며 사람들이 소란을 부리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이 창 앞으로 달려가 내려다보니 7,8명의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기의 애마를 둘러싼채 잡으려 하고 말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잡히지 않으려고 날뛰는 것이 보였다. 곽정은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도 났다. 보아하니 낮에 노상에서 길을 막고 있던 그 남장 여인들과 똑같은 복장이다. 이렇게 빨리 쫓아을 수 있을까, 몹시 궁금했다.
[이놈들! 밝은 대낮에 남의 말을 훔치려들어?]
소리를 지르고 계단으로 달려 내러가 보니 여덟 명의 흰 옷을 입은 그자들이 땅에 쓰러진 채 눈을 부릅뜨고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第 十六 章. 무예로 신랑감을 구하다
곽정은 갑자기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자기 손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러 보니 황용이다. 언제 내러왔는지 알 수 없다.
[거들떠볼 필요도 없어요. 우리 다시 올라가요.]
[저들이 내가 타고 온 말을 훔치려 한 모양인데 어떻게 다들 저렇게 쓰러셨는지 알 수 없는 일인걸.]
두 사람이 다시 올라오는데 비단옷을 입은 그 소년 공자가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8명의 남장 여인과 곽정, 황용을 바라다보며 이상하다는 눈치다. 항용은 곽정의 손을 잡은 채 위로 올라와 곽정의 찻잔에 차를 따라 준다.
[형님, 말이 굉장히 좋군오.]
곽정이 막 대답을 하러는데 아래층에서 낙타의 방울 소리가 울린다. 둘이 창 앞으로 가 내려다보니 그 8명이 벌써 낙타에 올라탄 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 중 하나가 곽정을 발견하고 살기등등하게 두 눈을 부라리고 오른손을 뻗어 은으로 만든 베 짤 때 쓰는 북을 두 개 날린다.
곽정이 모자를 벗어 받으려고 하는데 정원에 서 있던 그 공자가 왼손으로 두어 번 뭔가를 퉁긴다. 금빚이 번쩍번쩍 암기(陪器)가 날아 은으로 만든 북에 가 맞고 땅에 떨어졌다. 엎에 모시고 있던 동자가 네 개의 암기를 주워 공자에게 바쳤다. 공자는 그것을 받아 품속에 넣고 위층으로 올라와 곽정 앞에 서서 인사를 한다.
[형씨의 존함은?]
곽정도 답례를 하고 대답한다.
[제 성은 곽이요 이름은 정이라 하는데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지?]
[곽형은 동해(東海) 도화도(桃花島)에서 오시지 않았는지? 흑시 무슨 일이라도....]
[아니오, 전 북방에서 왔습니다. 도화도는 가 보지도 못댔습니다. 공자의 도움이 여간 고맙지 않습니다.]
[신분을 밝히지 않으시려고 하니 그냥 헤어집시다. 다음 기회가 있을 테죠.]
말을 끝내고 절을 한다. 곽정도 급히 답례를 하는데 강한 바람이 얼굴을 향해 날아 온다. 그 공자는 긴 소매를 흔들며 곽정의 눈을 노린다. 곽정은 뜻밖의 급습을 당했다. 피차 절을 하다가 이럴 수가 있을까? 어찌나 센 공격인지 미처 피할 길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여 두 다리 사이에 끼면서 물구나무를 선 채 허공을 한 바퀴 도는데 팍 소리와 함께 등뒤가 아프다. 곽정은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도 치밀어 오른다.
[네 놈이....]
그 공자는 하하거리며 읏는다.
[그저 곽형의 무공을 시험해 봤을 뿐이오. 점혈(點穴) 무공은 훌륭하시고 주먹과 발은 정상이시군. 미안합니다.]
말을 끝내고 다시 절을 한다. 곽정은 또 공격을 해 올까 봐 뒤로 한 발 피했다. 황용도 놀란 듯 몸을 기우뚱 하더니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친다. 젓가락이 공자의 발 앞에 떨어졌다. 공자가 정말 절을 하고 허리를 펴는데 황용이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공자는 황용의 지저분한 꼴을 보고 피하면서 곽정을 향해 미소를 보내고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간다. 황용이 곽정을 항해 속삭인다.
[이걸 주세요.]
곽정이 그의 손바닥을 보니 번쩍번쩍 하는 두 개의 금비녀와 은으로 만든 북이다. 공자가 방금 품안에 넣은 암기가 틀림없는데 어떻게 해서 황용이 가지고 있을까? 곽정은 깜짝 놀랐지만 곧 알아차렸다.
[공자님, 물건을 잊으셨군요.]
공자가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손을 뻗어 매가 병아리를 채듯 다섯 손가락으르 곽정의 손바닥을 할퀸다.
곽정은 깜짝 놀랐다. 솜씨를 보니 이건 틀림없이 여섯째 사부가 늘 말씀하시던 <구음백골조>다. 그러면 그가 철시 매초풍과 한패란 밀이냐? 곽정은 그때 절벽 위에서 매초풍에게 팔을 긁힌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공자의 솜씨가 매초풍처럼 날카롭거나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화살에 놀란 새와 같이 고생을 했던 터라 감히 받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즉시 장심(掌心)을 움직였다. 내력(內力)이 모인 곳에 네 개의 암기가 튀어 올랐다.
초면인 그 공자의 손은 곽정의 장심에서 반 자쯤 떨어져 있었다. 네 개의 암기가 튀어 오른 것을 보니 곽정의 손바닥은 아래로 처지는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위로 뻗는 것도 아닌데 암기만 오히려 뛴 거문고 줄과 같다. 그의 내공이 비범하지 않음을 보고 즉시 암기를 챙겨 들고 곽정을 응시해 보다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선다. 곽정이 자리로 돌아오니 황용이 아무말 없이 웃으며 자기를 건너다본다.
[그게 어째 자네 손에 있었지?]
[그가 인사를 할 때 땅에 떨어뜨렸기에 그냥 주워 버렸지요.]
황용은 계속 웃고 있었고, 곽정은 솔직한 젼이라 그냥 예삿일로 받아들였다.
[형님, 그 여자들이 무엇 때문에 형님의 말을 뺏으려구 그래요?]
황용의 물음에 곽정은 이 희귀힌 말의 내력과 오는 도중 낙타를 타고 있는 이들 여자들과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 누가 내 뒤에서 나를 돌봐 주는지 모르겠단 말야. 그렇지 않았다면 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을 텐데....]
황용은 가법게 미소만 지을 뿐이다.
[내 말이 어찌나 빠른지, 말을 뺏으려고 덤벼들던 여자들이 쫓아오려면 아무래도 사흘은 걸릴 텐데, 반나절도 안 되는데 뒤를 쫓아오다니? 원, 영문을 알 수 없단 말야.]
[내가 보니까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비둘기 한 쌍을 들고 있던데요.]
이 말을 들은 곽정이 책상을 탁 친다.
[옳아 옳아, 내 뒤를 쫓아을 수가 없으니까 비둘기릍 날려 앞에 가는 일행들에게 연락을 했군 그래. 그때도 확실히 머리 위로 비둘기가 날았거든.]
둘은 또 한참 동안 노상에서 겪은 일들을 주고받다가 황용이 다시 홍마로 화제를 돌리고 곽정의 말이 끝나자 몹시 부러운 눈치를 보이다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웃으며 얘기를 꺼낸디.
[형님,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그럼, 들어 주고말고.]
[저도 형의 그 말을 갖고 싶은데요....]
[암! 주지 줘!]
머뭇거리지도 않고 시원시원하게 대답해 버린다. 황용은 입에서 나오는대로 농담삼아 해 본 말이다. 사람 좋은 곽정이 어떻게 거절하나 보려고 한 것인데 뜻밖에 시원스런 대답읕 듣고는 책상에 엎드려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곽정 편이다.
[왜 그래? 어디 몸이라도 불편한가?]
황용이 고개를 쳐든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지만 환하게 웃는다. 두 줄기 눈물이 흐른 자국의 피부가 눈처럼 희고 곱다.
[자 형님, 우리 이제 갑시다!]
곽정이 계산을 끝내고 내려와 홍마를 어루만지며 당부한다.
[내 너를 친구에게 주기로 했으니 말 잘 들어야 해. 못된 성질을 부리면 안 된다. 자 여기 올라타게.]
홍마는 원래 다른 사람이 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주인의 당부가 있었으니 기역할 수 없을 뿐이다. 황용이 말에 오르니 곽정이 가볍게 말엉덩이를 때렸다. 홍마는 바람을 일으기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황용과 홍마의 모습이 모퉁이로 사라진 후에야 곽정은 몸을 돌렸다. 날이 이제 머지 않아 저물 것만 같다. 여관을 찾아 정하고 불을 끈 뒤 잠자리에 들었다. 막 잠이 드는데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친구일세!]
목 쉰 소리가 대답을 했다. 곽정이 문을 열고 내다보니 희미한 촛불 밑에 다섯 사람이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네 사람은 칼과 창을 비껴 들고 서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당시 자기와 악전 고투를 했던 황하 사귀(黃河四鬼)요, 다른 하나의 나이는 50여 세, 깡마른 체구에 파란 얼굴이다. 유난히 긴 볼에 이마 위엔 혹이 세 개나 불끈 솟아나 있는 것이 보기 흉했다.
깡마른 그자가 냉소를 띠면서 거침없이 방으르 들어와 털썩 주저앉으며 비스듬히 곁눈질로 노려본다. 촛불이 이마 위의 혹에 반사되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관골에도 몇 군데 병기에 맞은 상처가 더욱 그를 험상궂게 만들었다. 단혼도 심청강(斷魂刀 沈靑剛)이 입을 열었다.
[이분이 우리 사숙(帥叔)일세. 명성이 쟁쟁한 삼두교(三頭蛟) 후통해(候通海)씨야, 빨리 절하고 뵈어라.]
곽정은 자기가 꼼짝달싹할 수 없이 포위된 것을 알았다. 황하사귀만도 상대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게다가 사숙이라는 자까지 끼워 놨으니 당해 낼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두 주먹을 한데 모아 읍을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
[너희 사부들은 어디 계시냐?]
삼두교 후통해가 퉁명스럽게 받는다.
[제 사부님들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흥 그래. 그럼 내가 널 반나절만 더 살려 주마. 다른 사람들이 이 삼두교를 두고 젖먹이 어린애를 상대했다고 할까 무섭다. 내일 점심때 서쪽 십 리 밖에 있는 흑송(黑松) 숲속에서 기다리마. 네 여섯 분의 사부들과 함께 오거라, 알겠느냐?]
말을 마치고 곽정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가 버린다. 추명창 오청열(追命槍 吳靑烈)이 기다리고 있다가 밖에서 문을 채워 버렸다.
곽정이 촛불을 끄고 다시 자리에 누워서 보니 창 밖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오락오락 망을 보고 있었다. 반 시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지붕 위에서 인기척이 울린다.
[달아날 생각은 아에 꿈도 꾸지 마, 나으리가 여기 지키고 계시단 말야.]
곽정은 달아날 수 없음을 알고 억지로 눈을 붙여 보았지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온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여관의 심부름군이 세수물과 아침상을 들여 놓았다. 전청건(錢靑健)이 쌍도끼를 들고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곽정은 생각했다. 사부들이 멀리 계시니 구하러 오실 수도 없을 테고 또 달아날 수도 없는 입장이니 대장부답게 싸우다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오히려 태연해 졌다. 방안에 앉은 채 마옥(馬鈺)이 가르쳐 준 대로 한참 동안 연습을 하니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믐을 일으켜 세우며 상문부 전청건(喪門斧 錢靑健)에게 말을 꺼냈다.
[자, 우리 갑시다!]
두 사람이 어깨를 가지런히 서쪽을 향해 10여 리를 가니 과연 솔숲이 보였다. 가지가 무성하여 해를 가리니 숲속은 어둠침침하여 10여 보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전청건이 곽정을 제쳐 놓고 먼저 숲 안으로 들어간다. 곽정이 허리에 매고 있던 부드러운 채찍을 풀어 손에 귀고 한 발짝 한 발짝 그 뒤를 따랐다.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얼마를 갔을까? 여전 적의 인기척이 없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헤어질 때 네쩨 사부가 한 말이다.
[이길 수 없거든 달아나거라!]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막 옆으로 숨어들려 하는데 머리 위에서 화가 난 사람의 욕소리가 들렸다.
[아 이 잡종아, 바보야, 이 왕바단(王八蛋)!]
곽정이 서너 발짝 펄쩍 뛰어 피하여 채찍을 들어 방어 태세를 취하고 고개를 드니 이 어인 일인가? 놀랍기도하고 우습기도 했다. 황하 사귀가 모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나무 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 않은가? 넷이 곽정을 발견하고 계속 욕을 퍼붓는다. 곽정은 웃음이 나왔다.
[아니 거기서 그네를 다나? 재미있지? 또 만나세. 나는 이만 실례하네!]
심청강 등은 생각했다. 사숙이란 사람은 적의 뒤를 쫓아간 뒤 아직까지 오지 않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요, 이제 곽정이 가버리면 구해 즐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며칠 매달려 있다간 지쳐 죽지 않으면 굶어 죽을 일이다. 그렇다고 곽정을 보고 살려 달라고 애걸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계속 욕만 퍼부었다.
탈백편 마청웅(奪魄鞭 馬靑雄)은 곽정의 뒷모습이 숲 끝으로 사라져 가자 생사의 고비가 달린 지금 그까짓 체면이 다 뭐냐고 큰소리로 불렀다.
[곽영웅(郭英雄)! 우리가 졌소. 제발 우리를 좀 내려 주오!]
곽정은 생각했다.
(내가 저들과 철천지 원수를 진 일이 없거든 그냥 죽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웃으면시 몸을 돌이켜 세우고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그들을 묶은 끈을 살펴보니 쇠가죽을 찢어 물에 불렸다가 쓴 것이다. 제아무리 사귀의 공력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게 되어었다. 금칼을 빼어 가죽을 끊고 그들을 땅에 내려 놓은 뒤 다시 손을 뻗어 그듣의 완혈(腕穴)을 눌러 꼼짝할 수 없게 했다. 네 사람은 갑자기 두 어깨가 시끈 시끈 옴쭉달싹할 수가 없었다. 곽정은 또 한 번 웃으며 입을 연다.
[열 두 시간 뒤면 혈도(穴道)가 풀릴 게고 통증도 멈출 게요. 그런데 도대체 누가 그렇게 나무에 매달아 놨소?]
전청건의 성질이 제일 난폭하다. 꽥 하고 소리를 지른다.
[딴 수작 부리지 마오. 자기가 묶어 놓고 딴전야!]
곽정은 삼두교 후통해가 어디서 또 대들지 몰라 더 머믓거릴 수 없어 즉시 솔숲에서 빠져 나와 시내로 들어왔다. 좋은 말 한 필을 사 타고 남쪽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슬그머니 나를 구해 준 은인은 도대체 누굴까? 이 황하 사귀의 공력도 보통이 아닌데 그들을 나무 위에 매달아 놓으면서도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 내가 한 줄 알고 있게 했다면 그 솜씨는 정말 보통이 아닌 것이다. 도대체 누군지 종잡을 수도 없구나. 그런데 또 그 삼두교 후통해는 어디로 갔기에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지?)
하루를 꼬박 날려 중도(中都)인 북경에 도착했다. 여기가 대금국의 서울이다. 당시 천하에서 제일 번화한 곳이다. 송나라의 옛서울인 번량(卞梁)이나 임안(臨安)도 여기에 비할 바 아니다. 곽정은 사막에서 자라난 사람이다. 보는 것마다 휘황 찬란하고 신기한 것들이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번쩍번꺽 빛이 나는 술집들이며 찻집들이 즐비했지만 감히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일 허름한 듯한 식당을 찾아가 요기를 하고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구경하며 다녔다. 반나절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전면이 시끌시끌 떠들며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고 보니 사람들이 둘러선 채 무언가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곽정이 사람 틈을 비집고 안을 들여다보니 넓은 공지에 비단 깃발이 꽂혀 있다. 흰 바탕에 빨간 꽃, 비단실로 <비무초친(比武招親. 무예를 겨루어 신랑을 구함)>이라는 네 글자가 금빛으로 수놓여 있고 그 밑에 빨간 옷을 입은 소녀와 건강한 남자가 때마침 주먹을 휘두르며 대결하고 있었다. 곽정이 소녀의 솜씨를 살펴보니 동작마다 법도가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수초를 겨루는 사이 그 소녀가 허를 보이고 말았다. 그 남자는 크게 기뻐하며 쌍교출동(雙蛟出洞)의 솜씨를 발휘, 두 주먹으로 상대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눈 낌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소녀는 피할래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얻어맞기만 하면 중상을 입게 되어 있다. 낭자는 그래도 상대가 여자라 사정을 보아 주는지 두 주먹을 피고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치려고 했다. 소녀는 몸을 움츠리며 물 속에서 노니는 고기처럼 매끄럽게 빠져 나가 왼쪽 어깨를 비틀며 내리치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등에 가 맞는다.
남자는 비틀비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르 고꾸라지고 만다. 비록 두 손을 뻗어 땅바닥에 댄 채 쓰러졌다가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기는 했지만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사람 틈을 비집고 숨어 버렸다. 구경꾼들이 갈채를 보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깃발 아대 가 선다. 곽정이 소녀의 모습을 보니 어딘가 낯 익은 엄굴이다. 비록 햇빛에 그을린 피부이기는 하기만 아름다운 자태가 숨겨져 있고 범하기 어려운 기상이 엿보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기는 처음 중원에 왔는데 설마 아는 얼굴이겠느냐고 체념을 했다. 시골에서 처음 올라온 처지라 무엇이든지 신기해 보이고 보는 여자마다 다 미인으로 비치는 것이겠지 이렇게 생각했다. 이쨌든 호기심이 발동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구경만 했다.
소녀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중년 남자와 몇 마디 소곤거린다. 그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둘러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공손히 절을 한다.
[제 성은 목(穆)이요, 이름은 역(易)이라 하옵니다. 이름을 얻자는 것도 아니요, 또 이(利)를 구하자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제 딸아이 이제 과년하기로 혼처나 구하고자 이렇게 염치 없이 여러분 앞에 나섰습니다. 부자집 도령을 사위로 맞겠다는 것도 아니올시다. 다만 똑똑하고 무예가 뛰어난 분이면 더 바랄 데 없습니다. 나이는 삼십 세 미만, 아직 미혼인 분으로 제 딸과 겨루어 이기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저희 부녀가 동서 남북 십삼 개 성을 두루 돌아다니며 찾았습니다만 이름있는 호걸들은 대부분 가정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그래서인지 소년 영웅을 아직 뵈올 길이 없었을 뿐입니다. 북경은 와호장룡(臥虎藏龍) 천하의 영웅들이 다 모이신 곳으로 알고 이렇게 외람되게 찾아들었습니다.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만 하고 내일 다시 나와 뵙도록 하겠나이다.]
그가 말을 끝내고 막 <비무초친(比武招親)>이라고 쓴 비단 깃발을 거두려고 하는데 군중 틈 동서 양편에서 어떤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를 지른다.
[잠깐만!]
두 사람이 일시에 가운데로 들어왔다. 여러 사람들이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동편에서 나타난 사람은 뚱뚱한 중늙은이인데 얼굴에는 수염이 더부룩하고 그 수염조차 반이상이 하얗게 셌다. 아무리 보아도 50은 넘어 보인다. 서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더욱 괴짜다. 머리를 빡빡 깎은 중이 아닌가? 그러자 뚱뚱보가 군중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웃긴 왜들 웃어요? 저쪽에선 무예로 신랑을 고른다 하고, 난 아직 총각이니 안 된달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중이 빈정거린다.
[영감, 당신이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이 꽂 같은 규수는 과만하오.]
[뭐라구? 무엇 때문에 재수 없이 중이 나서는가?]
[이렇게 예쁜 처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나도 중 그만두고 환속할라오.]
사람들은 히리를 잡고 웃어 댄다.
소녀는 에쁜 얼굴에 노기를 띠고 방금 입었던 외투를 벗고 나서며 상대를 하려고 든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그녀를 잡고 만류한다. 그런데 이쪽의 중과 뚱뚱보는 서로 먼저 소녀와 상대를 하겠다고 말다툼이다. 구경꾼들은 더욱 신이 나서 떠들어 댄다.
[당신들 두 사람이 먼저 겨루어 보고 이긴 사람이 소녀와 상대하면 될 게 아니오.]
[좋소, 우리 그렇게 합시다. 영간, 어디 한 번 솜씨를 구경합시다.]
중이 먼저 대답을 한 뒤 쉭 하고 주먹을 내 휘두르자 뚱뚱보도 주먹으로 맞선다.
곽정이 보니 중이 쓰는 것은 소림나한권(少林羅漢拳)이요, 뚱뚱보가 쓰는 것은 오행권(五行拳)인데 모두가 외문(外門)의 공력이다. 중은 몸을 솟구쳤다 낮췄다 하는 몸놀림이 날렵하고 그 뚱뚱보 역시 주먹질과 발길질에 힘이 솟구치는 것이 나이가 많다고 얕잡아 볼 처지가 아니다. 한참 싸우다가 중은 믐을 부드럽게 꺾고 정면으로 대들어 퍽퍽퍽 뚱뚱보의 허리를 세 번이나 후려쳤다.
뚱뚱보는 코방귀를 뀌고 아픔을 참으며 피하지도 않고 오른손 주먹을 높이 치켜 들고 묵중한 쇠망치로 내리치듯 중의 대머리를 쳤다. 중은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에 엉덩방아릍 찧고 주저앉았다가 순간적으로 장삼의 소매 속에서 칼을 뽑아 들고 뚱뚱보의 발을 찍으려 들었다.
구경꾼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뚱뚱보는 펄쩍 뛰어 칼을 피하면서 허리에 차고있던 쇠채찍을 떼내어 손에 쥐었다. 원래 그들 둘 다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칼과 쇠채찍이 어울려 불꽂을 튀긴다. 사람들이 주춤주춤 뒤로 피했다.
소녀의 아버지인 목역이 두 사람 옆으로 다가서서 만류해 보았지만 그들 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자 목역이 두 사람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중이 들고 있는 칼을 차 버리고 다시 뚱뚱보의 채찍을 잡아챘다. 목역도 화가 났는지 중의 칼을 두 동강으로 분질러 내버리고 채찍마저 꺾어 집어던졌다. 무서운 공력이다. 구경꾼들은 박수 갈채를 보내고 중과 뚱뚱보도 놀라 아무 말 없이 군중 틈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때 곽정이 그 목역을 보니 등이 구부정하고 허리가 굵직한 것이 체격이 우람하고 나이는 40여 세에 불과해 보이지만 귀밑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주름살이 있는 것이 육순은 되어 보인다. 목역이 한숨을 쉬더니 딸을 향해 말을 건다.
[내일 우리 남쪽으로 떠나자.]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구경꾼들이 더 볼 것 없다고 분분히 홑어지는데 이때 갑자기 수레에 달린 방울 소리를 울리며 수십 명의 건강한 하인들이 한 소년 공자를 모시고 이쪽으로 왔다. 곽정이 보니 며칠 전 장자구(張字口)의 술집에서 만났던 바로 그 공자라 얼른 사람들 틈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 공자는 비무초친의 비단 깃발을 보고 다시 그 소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사람 틈을 비집고 소녀 앞에 나서며 입을 열었다.
[무예를 겨루어 신랑을 구한다는 사람이 바로 아가씨입니까?]
소녀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리고 목역이 나선다.
[제 성은 목가이옵니다. 공자께서 무슨 분부라도 있으시온지?]
[비무초친의 규칙이 어떻습니까?]
목역이 한바탕 설명을 끝내자 공자가 말을 한다.
[그럼 어디 나와 한번 겨루어 봅시다.]
[공자께서 무슨 농담의 말씀을....]
[왜 그러오?]
[소인 부녀는 미천한 백성이온데 어찌 감히 공자와 맞설 수 있습니까? 이 일이 그냥 보통 장난삼아 내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제 딸아이의 평생 운명이 달린 일이오니 공자께서는 혜량하시옵소서.]
그 공자는 다시 빨간 옷의 소녀를 전너다본다.
[그래 며칠이나 해왔소?]
[십상 성을 두루 돌아다넜으니 벌써 일 년이 넘는가 봅니다.]
[그럼 한 사람도 이 소녀를 이긴 사람이 없단 말이오? 못믿겠는걸.]
[무예가 뛰어난 분들은 이미 결혼을 했거나 아니면 소녀와 겨룬다는 것이 어색해서 그랬겠지오.]
목역은 황종하다는 듯 두 손을 비빌 뿐이다.
[어디 나와 한번 겨루어 봅시다.]
공자는 말을 마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운데로 나선다.
목역은 그의 인품이 수려하고 풍채 또한 늠름한 것을 보고 마음이 흐믓했으며 소녀 역시 마음이 끌림을 느꼈다.
(십삼 개 성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훌륭하게 생긴 사람을 대해 본 일이 없는데 무예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구나?)
외투를 벗고 공자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했다. 공자도 답례를 하고 빙그레 웃는다.
[자, 아가씨가 먼저....]
목역이 공자를 향해 옷을 벗으라 했지만 공자는 괜찮다고 했다.
구경꾼들은 목씨 부녀의 무예를 보았기 때문에 공자의 거만스런 태도를 보면서 골탕을 먹었으면 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 중에는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목씨 부녀가 강호를 두루 돌아다녀 본 사람들인데 설마 왕손 공자를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을 게고 적당히 체면을 세워 줄걸세.]
소녀가 공자를 향해 먼저 공격하라고 사양을 한다. 그 공자는 가벼운 두루마기 소매 바람을 풀썩 일으키며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왼손의 소매 바람으로 몸 뒤에서부더 소녀의 어깨를 겨누고 쉭 하고 후려친다. 소녀는 그의 솜씨가 비범함을 보면서 가볍게 놀라며 몸을 숙여 소매 밑으르 살짝 미끄러져 빠진다. 그러나 공자의 솜씨도 여간 빠르지 않다. 그가 막 빠져 나가려 하자 오른손 소매 바람으로 얼굴을 후려치려 한다. 앞에도 소매 마람, 머리 위도 소매 바람, 피할 수 없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소녀가 왼발로 살짝 땅을 찍자 몸은 마치 활줄을 떠난 화살처럼 뒤로 뛰어 피했다. 솜씨의 변화가 어찌나 민첩한지 허리와 다리에 보통의 내공을 지니고서는 이림없는 동작이다.
[좋구나!]
공자도 찬사를 보내며 그가 채 땅에 떨어지기 전에 쫓아 들어 다시 한 번 소매바람을 세차게 날린다. 소녀는 몸을 허공에서 꺾으며 상대방 코를 발길로 찬다.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취하는 행동이다. 공자도 어쩔 수 없이 오른쪽으로 번쩍 뛰어 피했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땅에 띨어졌다. 공자의 세 차례에 걸친 공격도 보통이 아니거니와 소녀의 수비 또한 기민하기 이를 데 없다. 둘은 서로 마음속으로 탄복하면서 서로 바라다본다. 소녀가 얼굴을 살짝 붉히고 갑자기 공세를 바꿨다. 두사람이 어울려 숨가뽄 공방전이 벌어진다. 공자의 휘날리는 비단 도포자락이 번쩍이며 소녀의 빨간 옷깃과 어울려 한 송이의 커다란 꽂이 핀다.
곽정은 옆에서 넋을 잃고 지켜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의 나이가 자기와 비슷할 텐데 어쩌면 저토록 훌륭한 무예를 익혔단 말이나?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김탄하면서 부러운 마음까지 생긴다. 그들 둘이 나이도 비슷하고 용모 또한 출중하니 만일 그들이 부부만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으랴? 그는 벌써 그 공자가 술집에서 자기에게 헹한 무례에 대한 미움도 잊고 그가 이기기를 바랐다. 곽정이 입을 벌린 채 흥미진진하게 구경을 하고 있는데 소녀가 공자의 소매깃을 잡아채자 북 하고 찢어졌다. 소녀는 펄쩍 뛰어오르면서 그 옷깃을 허공을 향해 내휘두른다. 이때 목역이 앞으로 나선다.
[잠깐만, 공자께서는 외투를 벗으시고 다시 승부를 가리시지요.]
공자가 잠시 셍각을 해 보더니 비단도포의 옥으로 만든 단추를 끄르자 한 명의 종이 나서서 옷을 벗겨 준다.
속에는 호수처럼 파란 단자의 중의를 입고 허리에는 초록색 수건을 둘렀다. 관옥같이 흰 얼굴과 빨간 입술에 그 옷이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그는 왼손의 장풍을 허공에 날려 온다. 있는 힘을 다 발휘한 모양이다. 한 가닥 장풍에 소녀의 옷깃이 바람을 타고 휘날린다. 곽정과 목역, 소녀가 모두 깜짝 놀란다.
[저토록 수려하게 잘 생긴 귀공자가 어디서 저렇게 무시무시하고 흉흉한 무예를 익혔을까?]
두 사람이 어울려 다시 수초를 겨룬다. 곽정은 생각했다.
[저자의 장법이 언젠가 밤에 나와 다투던 어린 도사 윤지평과 같으니 혹시 그 둘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에 그 공자는 다시 더 양보함이 없이 맹렬한 장풍을 날리며 소녀를 공격했다. 소녀도 방어와 공격을 시도해 보지만 도저히 공자의 적수가 아니었다. 공자의 공력은 윤지평보다도 더 상위에 있는 듯 아무래도 이 혼사는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목역도 쌍방의 우열을 확인한 듯,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말문을 연다.
[염아(念兒)야, 더 겨룰 것 없다. 공자가 너보다 띌씬 우세하구나.]
어울려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 이 말이 들릴 리 없다. 계속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자는 생각했다.
(지금 내가 너를 해친다는 것은 여반장이다. 하지만 어딘가 좀 아까운걸.)
갑자기 왼손바닥을 오므려 소녀의 왼팔을 나꿔챘다. 이렇게 되니 소녀는 몸을 빼려고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밀고 잡아당기다가 소녀는 비틀비틀 막 쓰러지려고 했다. 공자가 오른팔을 돌려 소녀를 뒤로 끌자 그만 그의 품속에 안겨 버리고 말았다. 구경꾼들이 갈채를 보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는 부끄러움에 일굴을 붉힌다.
[놓으세요!]
[날 오빠라구 부르면 내 놓아주지.]
소녀는 그의 경박항이 미웠다. 있는 힘을 다해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빠져 나올 수가 없다. 목역이 앞으로 나섰다.
[공자께서 이기셨습니다. 자 소녀를 풀어 주세요.]
공자는 너털웃음을 더뜨러며 여전히 껴안고 있다. 소녀는 급한 나머지 공자의 태양혈(太陽穴)을 걷어찼다. 공자는 오른쪽 어깨를 풀며 손을 들어 날아오는 소녀의 발을 잡아 버렸다. 소녀는 당황한 나머지 있는 힘을 다해 발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되자 비단신이 밧거지며 겨우 몸만은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하얀 양말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공자는 히히덕거리며 비단신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말는 체 했다. 구경꾼 중의 무뢰배들이 재미있다는 듯 웃어 댄다.
[냄새 좋겠다!]
목역도 따라 웃는다.
[공자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물을 것 없소.]
공자가 웃으며 비단외투를 걸쳐 입으면서 소녀를 한 번 건너다본 후 비단신을 몸안에 쑤셔 넣었다.
[우린 서성대가(西城大街)의 고승(高陞) 여관에 묵고 있는데 함께 가서 얘기나 합시다.]
목역이 말을 꺼냈다.
[시간이 없는데 무슨 얘기를 하자는 게요?]
목역이 정색을 한다.
[소녀를 이겼으니 마땅히 아내로 맞으셔야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공자가 앙천 대소를 한다.
[그냥 장난삼아 해 본 건데 무슨 그런 얘기요. 하하하.]
목역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말을 잃었다.
[그럼 당신은....]
그러자 공자의 수종이 나선다.
[우리 공자님이 어떤 신분이시라구, 강호에 떠도는 당신 같은 미천한 사람과 혼사를 논한단 말오? 할 일 없거든 돌아가 낮잠이나 자구료.]
목역은 화가 치밀어 되는 대로 손바닥으로 녀석을 후려쳤다. 이빨이 반이나 빠지며 나가 떨어진다. 공자도 더 할 말이 없어 다른 종자들에게 녀석을 부축하라고 이르고 말에 타려고 한다. 목역은 정말 화가 났다.
[그래, 당신은 심심풀이로 내 딸을 가지고 논 거요?]
공자는 대답도 하기 않고 말에 올라탔다. 목역은 손을 뻗어 공자의 어깨를 잡았다.
[좋다, 나도 너 같은 경박한 소인에게 딸을 주고싶지 않다. 그러니 신발이나 내놓고 가거라.]
[신발이야 자기가 나 주고 싶어 준 건데 당신과 무슨 상관이오?]
어깨를 흔들어 목역의 손을 떨군다. 목역은 전신을 부들부들 떤다.
[어디 이 놈 너 죽고 나 죽자!]
허공에 뛰어오르며 두 주먹으로 양쪽의 태양혈을 내리친다.
공자는 말안장에서 풀썩 뛰어내리며 웃는다.
[이번에도 내가 이기면 사위 되라는 밀은 못 할 테지.]
구경꾼들은 이 공자가 힘만 믿고 무례한 짓을 함부로 하는 데 대해 분노를 품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목역은 아무 말 없이 허리끈을 졸라매고 제비가 물 차듯 땅에서 솟구쳐 올라오며 공자를 향해 질풍같이 공격해 들어갔다. 공자가 그가 화가 난 터여서 만약 걸려들기만 하면 큰 일이라 싶어 몸을 비틀며 왼손 바닥을 밖으로 뻗으며 상대방의 배를 찌른다. 목역은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피하며 두 손의 손가락을 모아 적의 견정혈(肩井穴)을 찔렀다.
솜씨가 보통이 아님이 역력히 드러나 보인다.
공자도 무공에 정통한 사람이라 왼쪽 어깨를 살짝 낮추며 상대의 손가락을 피함과 동시에 왼손의 장풍을 거두면서 오른손의 장풍을 날렸다. 그러나 상대의 술수에 말려들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목역이 다시 왼쪽 어깨를 숙이며 팔꿈치를 손바닥에 댄 채 오른손 주먹을 옆으로 휘들렀다. 공자가 고개를 숙여 피하려 한다. 이 틈을 타서 두 손바닥을 모아 적의 양쪽 볼을 공격했다.
공자도 상대의 무공을 경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권술(拳術)의 조예가 이토록 신출 귀몰할 줄은 몰랐다. 갑자기 두 손을 날리면서 손가락을 전광 석화처럼 놀려 목역의 손등을 찔러 낚시처럼 구부려 잡아당기며 훌쩍 뛰어 몸을 날리니 열 개의 손가락이 시뻘겋게 물이 들었다. 구경꾼들은 놀라 소리를 지르고 목역의 손등엔 선혈이 낭자했다. 소녀는 화도 나고 조급하기도 했다. 재빨리 대들어 부친을 부축하면서 옷깃을 찢어 상처를 매준다. 목역은 딸을 한쪽으로 밀어붙인다.
[비켜라, 오늘 저놈을 죽이지 못하면 나라도 죽겠다.]
소녀의 고운 얼굴이 순간적으로 처참해지더니 공자를 바라다보고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자기 가슴을 푹 찌르려 했다. 목역이 깜짝 놀라 자기 상처도 들볼 새 없이 손을 뻗어 막는다. 소녀가 미처 손을 거둘 새도 없이 아비지의 손바닥이 또 찔리고 말았다.
구경꾼들은 피투성이가 된 목역 부녀를 바라다보며 고개를 흔들고 한숨을 내쉰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곽정은 더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공자는 다시 말에 올라가려고 했다. 곽정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사람들을 가볍게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여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당신의 잘못이오.]
공자는 곽정을 보더니 순간적으로 당황해 하다가 웃는다.
[뭐가 잘못이오? 그래 어쩌란 말이오?]
그 수하의 종자들이 곽정이 시골뜨기차림인 데다가 말까지 사투리 투성이인데, 공자가 그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을 보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곽정은 그들이 왜 웃는지 몰라 어리벙벙했다. 정색을 하고 다시 말문을 연다.
[마땅히 저 소녀를 아내로 맞이해야 하오!]
공자는 고개를 꼬고 시시덕거리며 웃는다.
[그래 내가 아내로 맞이하지 않으면 어쩌겠소?]
[아내로 맞고 싶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무예를 겨루러 대든 게요? 저 깃발에 분명히 씌어 있지 않소? 무예로 신랑을 구한다고.]
[그래, 도대체 어쩌자는 게요?]
[이 아가씨가 예쁘고 또 무예도 훌륭한데 왜 싫다는 게요? 이렇게 훌륭한 아가씨를 저버리고 어디 가서 또 이만한 색시를 구하겠소?]
[사리를 모르는 사람이군. 당신과 말해야 소용없겠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누구의 문하요? 당신과 도화도 황약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소?]
곽정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내 사부가 누군지 말할 필요도 없소. 그리고 난 황약사란 사람은 알지도 못하오.]
[그럼 도화도의 독특한 비밀인 점혈(點穴)술은 누구한테 배웠단 말이오?]
[점혈술은 내 둘째 사부께 배웠소.]
[둘째 사부가 도대체 누구요?]
[말할 수 없소.]
[하고 안 하고는 제 맘이겠지.]
몸을 돌려 가려고 한다. 곽정이 손을 뻗어 막는다.
[응? 왜 또 가려고 그러오?]
[왜?]
[저 소녀를 아내로 맞으라 하지 않았소?]
공자가 냉소를 머금고 또 가려고 했다. 븍역은 곽정의 의르운 행동을 보면서 자기가 나섰다.
[여보, 젊은이 내버러두시오. 내 목숨이 있는 한 이 치욕의 원수는 꼭 갚으리다.]
목소리를 늪여 공자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이봐, 성명이나 알리고 가라구!]
공자는 여전히 웃는다.
[장인이라고 않겠다는데 이름은 물어 무얼 하오.]
곽정은 대노하여 달려가 소리를 지른다.
[그럼 이 아가씨의 신발이라도 주고 가구료!]
[왜 건방지게 남의 일에 끼어들어? 그 아가씨릍 사랑하는 모양이로구먼.]
곽정이 머리를 흔든다.
[그건 아니오. 도대체 신발을 돌러줄 거요 안 줄 거요?]
갑자기 몸을 날려 왼손을 위와 오른쪽으로, 오른손은 아래와 왼쪽으로 흔들며 동시에 공자의 두 팔의 맥문(脈門)을 잡아버렸다. 공자는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도 치밀어 올라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뿌리칠 수가 없어 소리를 지른다.
[죽고 싶으냐?]
발을 들어 곽정의 사타구니를 걷어찬다. 곽정은 두 손의 힘을 모아 공자를 집어 던졌다. 공자의 경신술 대단하다. 어깨가 땅바닥에 부딪쳐 띨어지는 순간 오른발을 땅에 샅짝 대며 비틀거리고 섰다.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한 번 지고 만 결과다. 그는 비단 외투를 벗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놈이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곽정이 또 머리를 내흔든다.
[내 무엇 때문에 당신과 싸우겠소. 저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겠거든 신발이나 되돌려 주란 말이오.]
구경꾼들은 또 한바탕 신나는 구경을 하게 되나보다 했는데 곽정이 움츠리는 것을 보고 실망의 눈치를 보인다. 그 공자는 아무래도 곽정이 만만찮아 보여 질린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겁을 먹고 신발을 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다시 비단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차디찬 미소와 함께 몸을 돌렸다. 곽정이 외투자락을 잡는다.
[아니 정말 그냥 가려구?]
공자는 순간적으로 꾀가 생졌다. 어깨를 들썩 외투를 벗어 곽정의 머리 위에 씌우고 보이지 않는 틈을 이용해 두 손의 장풍으로 곽정의 갈빗대를 무섭게 후려쳤다.
第 十七 章. 귀에 익은 목소리
곽정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동시에 강한 장풍이 자기의 가슴에 엄습함을 느끼면서 슴을 내쉬고 가슴을 오므렸지만 때는 이미 늦어 퍽퍽 두 번이나 얻어맞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는 단양자 마옥에게 2년 동안이나 현문의 정종인 내공을 익히지 않았던가? 두 번이나 장풍에 얻어맞은 곳이 한없이 아프기는 했지만 부러지거나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니다. 위급한 나머지 두 발로 아홉 번이나 계속하여 상대를 공격했다. 질풍과 같고 전광 석화 같은 재빠른 동작이었다. 이는 마왕신 한보구가 자랑하는 평생의 묘기다. 그의 발길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남북의 호한들이 짓밟히기도 한 바로 그 재주다. 곽정이 비록 사부의 공력에 미칠 바는 아니지만 그 공자도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일곱 번까지는 피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두 개는 결국 그의 좌우의 두 넓적다리에 맞고 말았다.
두 사람은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곽정은 그의 머리에 씌워졌던 비단 외투를 재빨리 집어던졌다. 그가 몽고에 있을 때는 정직과 성실만을 보고 또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 와서 보고 당하는 일마다 이상야릇하기만 하다. 찰목합이 친형제나 다름없는 의형을 배반한 일이며, 황하 사귀가 염치 불구하고 나이 어린 자기와 대결한 일이며, 이 공자가 무예를 져루어 이기고도 신의를 배반하여 한 소녀의 가슴을 멍들게 한 일이 모두 그렇다. 자기가 나서서 옳고 그름을 밝히자는 데도 계략을 써서 독수(毒手)를 뻗다니, 만일 자신이 내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두 번의 장풍에 늑골이 부러지고 내장이 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 공자도 두 번이나 발길에 차이고 파가 났다. 몸을 번쩍 날려 곽정 가까이 접근하여 왼손의 장풍으로 곽정의 어깨를 내리쳤다. 곽정이 손을 들어 막으려 하자 가슴이 뜨끔했다.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는 순간 그 공자가 발을 걸어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공자의 수종들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 공자가 엉덩이의 먼지를 툭툭 털면서 냉소를 머금고 말을 건넨다.
[그따위 무공을 믿고 시건방지게 끼어들어? 집에 돌아가 사부들께 이십 년만 더 배우고 오거라.]
곽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을 어루만져 통증을 가라앉혔다. 공자가 막 가려는 것을 보고 쫓아가 소리를 지른다.
[이 주먹을 받아라!]
팔꿈치를 낮추고 주먹을 높이 들어 그의 뒤동수를 치자 그 공자는 샅짝 머리를 낮춘다. 곽정이 다시 왼손 주먹으로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상대의 뺨을 후려친다. 공자가 어깨를 들썩 하고 막자 두 사람의 어깨와 어깨가 퍽 하고 맞붙는다. 둘은 서로 있는 힘을 다해 상대를 민다. 힘은 곽정이 센 편이요, 무공은 공자 쪽이 깊은 편이라 팽팽하게 맞설 뿐이다. 곽정이 숨을 들이마시고, 어깨에 힘을 주려고 하는 찰나 상대의 어깨 힘이 살짝 빠지며 곽정이 제 힘에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하체를 안정시키려 하는 순간 벌써 등뒤로 상대의 장풍이 날아왔다. 곽정도 되돌아서며 장풍을 날렸지만 힘이 약했다.
그 공자의 손바닥이 떨리는가 싶었는데 곽정이 또 한 번 벌렁 나가 자빠진다. 땅에 띨어지는 순간 팔꿈치로 땅을 짚어 몸을 튕기면서 허공에서 반 바퀴나 원을 그리다가 옆차기로 그 공자의 가슴을 차 버렸다. 구경꾼들이 그의 민첩한 동작에 감탄하여 박수를 쳤다. 공자가 몸을 왼쪽으르 비스듬히 틀면서 두손으로 맞선다. 한쪽으로 적을 교란시키며 동시에 공격을 퍼붓자는 것이다. 곽정도 즉시 분근착골수(分筋錯骨手)를 전개하여 두 손을 춤추듯 움직이며 적의 관절과 혈도를 노리고 대든다. 그 공자도 일찌기 사부로부터 이 분근착골수를 배운 바 있다.
그러나 곽정의 지금 솜씨는 묘수서생 주총이 창안한 것으로 중원의 명사들 사이에 전수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공자는 곽정의 공격이 날카로움을 보고 자기도 장법을 바꾸어 분근착골수로 맞선다. 두 사람의 동작이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수법은 상이하다. 하나는 식지와 중지를 펴서 상대방의 봉미혈(鳳尾穴)을 노리고 다른 하나는 상대의 관절을 잡아 비틀려는 것이다. 치고 받고 7,80초를 다투어 보면서 밥 한 사발 다 먹을 시간을 버텨 보았지만 승부를 가리기 힘들었다. 그 공자는 오래 버티기가 힘들었던지 허를 보여 앞 이마를 드러냈다. 곽정은 이 틈을 노려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현기혈(玄機穴)을 찌르려다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무슨 철천지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살수(殺手)를 쓰랴?)
손가락 끝을 구부려 혈도 근처를 찔렀다.
그 공자는 곽정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오른쪽 어깨로 곽정의 두 어깨를 떠밀면서 왼손 주먹으로 세 번이나 세차게 곽정의 허리께를 내질렀다. 곽정이 급히 허리를 숙여 몸을 움츠리며 장풍을 날려 그 공자의 허리를 반격했다. 공자는 곽정의 반격을 예견한 듯 오른팔로 그의 오른팔을 꺾어 나꿔챔과 동시에 오른발 넓적다리로 곽정의 오른발 넓적다리를 내지르니 곽정은 비틀거리다가 펑 하고 또 한 번 나가 넘어지고 말았다. 목역은 딸이 양손의 상처를 다 싸 주자 깃밭 아래 서서 관전을 하다가 곽정이 세 차례나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공자의 적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달려들어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여보 젊은이, 우리 갑시다. 저 같은 못된 놈과 상대할 필요가 없겠소!]
곽정은 어찌나 세게 넘어졌든지 어질어질 눈앞애 별이 왔다 갔다 하면서 노기가 충천했다. 붙드는 목역의 손을 뿌리치고 주먹과 장풍을 쓰면서 공자를 향해 대든다. 그 공자는 곽정이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뒤로 서너 발짝 물러서서 말문을 연다.
[그래도 계속 대들 셈이냐?]
곽정은 대꾸도 하지 않고 여전히 공격이다.
[계속 귀찮게 굴면 정말 죽여 버릴 테다!]
[좋다. 신발을 내놓을 때까지 어디 해 보자!]
그 공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그 아가씨가 친동생도 아닐 텐데 죽어도 날 매부라고 하고 싶어 그러는 겐가?]
[나는 그 여자 알지도 못하오. 누가 내 친동생이라고 합디까?]
그 공자는 우습기도 하고 화도 나는 모양이다.
[이 바보야, 내 솜씨나 보거라!]
두 사람은 어을려 엎치락 뒤치락 또 싸우기 시작했다.
곽정은 이번만은 정신을 차리고 맞섰다. 여러 차례 그 공자가 흉계를 써 봤지만 말려들지 않는다. 무공으로 따진다면 그 공자 쪽이 약간 우세한 편이다. 그러나 이쪽은 투지가 왕성했다. 거의 또 반 시간 이상이나 싸웠다. 곽정과 그 공자가 싸우기 시작한 것이 오각(午刻)부터인데 지금은 벌써 미말 신초(未末申初)다. 그동안 구경꾼들은 더욱 몰려들어 광장은 인산 인해다.
목역은 강호를 두루 돌아다녀 본 사람이다. 이러다가 관가에서라도 알게 되는 날에는 일만 더욱 커지고 골치를 앓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자기를 두둔해 나선 사람을 두고 자기만 자리를 피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옆에서 구경을 하면서도 몹시 초조했다. 구경꾼들을 휘둘러보니 눈이 부러부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풍채나 기개가 있어 보이는 사람에, 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먼, 보검을 어깨에 짊어진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허다한 무림의 인물들이며 강호의 호걸들까지 그중에 섞여 있었다. 구경꾼들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관전만 하는 사람, 귀엣말로 의논이 분분한 사람, 심지어 <누가 이기느냐>고 내기를 거는 사람까지 있었다.
목역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그 공자의 수종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 보았다. 수종 가운데 인상이 이상한 사람 셋이 눈에 띈다. 그 중 한 사람은 빨간 가사(袈裟)에 금빛이 찬란한 고깔을 쓰고 있었는데 체격이 장대하여 머리도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인다. 두번째 사람은 몸집은 중간인데 흰 머리카락이 은빛처럼 빛나면서도 얼굴엔 주름살 하나 없는 홍안이다. 꼭 전설에 나오는 동안 백발이다. 잘 생긴 풍채가 도대체 몇 살이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게 한다. 세번째 사람은 작달막하고 단단하게 생긴 체격에 눈에 핏발이 서 있으면서도 눈빛은 날카롭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목역이 마음속으로 놀라는데 한 수종의 말소리가 들린다.
[영지상인(靈智上人) 어른께서 저 녀석을 좀 쫓아 보내 주시지요. 더 싸우다 왕자께서 실수라도 해 다치시는 날에는 저희 하인들은 죽습니다.]
영지상인이라고 하는 중은 웃기만 하고 대답도 하지 않는데 그 백발의 노인이 웃으며 입을 뗀다.
[설마하니 볼기나 칠 테지 죽이기야 하겠나?]
이 말을 들은 목역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공자가 원래 왕자였구나. 더 싸우다간 큰 일이 벌어지겠다. 보아하니 이 중들은 모두 왕부에서 초빙한 무림의 고수들인 모양인데 왕자의 수종들이 일이 빌어질까 봐 쫓아가 데려온 모양이로구나.)
다시 또 작달막한 남자의 말소리가 들런다.
[왕자의 무공이 저 녀석보다 뛰어난데 뭘 걱정하고 있어?]
키는 작지만 목소리만은 종을 치듯 맑고 크게 울린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바라다보다가 그의 번쩍이는 눈빛에 놀라 고개를 숙이고 만다.
그러자 백발의 노인이 웃는다.
[왕자가 저토록 흘륭한 무예를 가지고 사람들 많은 데서 한 번 보여 주지 않는다면 십 년 공부 나무아미 타불 되라구? 누가 나서서 도와만 보게. 틀림없이 화낼걸.]
작달막한 남자가 이번엔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린다.
[양공(梁公) 왕자의 장법이 어느 문하의 무공인지 어디 한 번 맞혀 보세요.]
그러자 백발 노인이 하하거리며 웃는다.
[호형(虎兄)께서 이 형님을 한 번 시험해 보시겠다는 건가? 자, 보오. 장법의 날램과 기민함이며 허와 실의 변화무쌍함이 틀림없는 전진교 문하의 솜씨가 아니겠소?]
[그것 참 이상하다. 전진교 도사들이 사람마다 괴짜지만 또 어떻게 해서 왕자에게 무예를 가르치게 되었는고? 알다가도 모를 일인걸.]
[그야 뻔하지, 여섯째 왕자가 신분을 들보지 않고 아무나 사귀는데 그야 어떤 사람에게고 못 배울 리 있겠나? 당신과 같이 산동, 산서를 종횡하는 호걸도 다 이 왕부에 모여 왔는걸.]
땅딸보가 고개를 끄덕인다. 백발 노인은 가운데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곽정의 장법이 바꿔그 초법(招法)을 늦춰 철통 같은 방비만 하고 있었다. 공자가 맹렬한 공격을 몇 차례 퍼부었지만 그의 묵직한 장법에 울려 되돌아오고 만다. 다시 옆에 있는 땅딸보에게 말을 건다.
[호형, 저 어린 녀석의 무공은 어디서 배운 것 같소?]
그러자 잠시 머뭇거린다.
[저 녀석 무공은 매우 복잡한데, 아두래도 한 사람의 사부에게서 배운 것이 아닌 것 같군요.]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말을 받는다.
[팽(彭) 채주(寨主) 말씀이 옳아요. 바로 강남 칠괴의 제자입니다.]
목역이 그를 바라다보니 파란 얼굴에 깡마른 편이요, 게다가 이마에는 혹이 세 개나 있었다.
(이자가 저 사람을 팽채주라고 부르는데, 그렇나면 이 땅딸보가 바로 도둑떼의 괴수란 말인가? 강남 칠괴의 이름은 들은 지 오래 됐는데 아직도 살아 있었더란 말이냐?)
이 생각 저 생각 곰곰 해 보는데 그 파란 얼굴의 깡마른 자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아니 저 쥐새끼 같은 녀석도 여기 있었구나?]
떨그렁 떨그렁 옷보통이에서 갈레진 짤막한 쇠붙이를 꺼내 들고 몸을 날려 가운데로 나섰다.
원래 파란 얼굴의 깡마른 이 사람은 바로 황하사귀의 사숙이라는 삼두교 후통해었다, 구경꾼들은 그가 병기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자 어느 한쪽을 도와 주려고 하는 줄 알고 큰소리로 외쳐댔다. 목역은 그가 팽채주와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왕자 부중에 속한 인물로 알고 두 손을 열십자로 비스듬히 걸친 채 몇 발짝 나섰다. 만일 곽정에게 손만 대면 자기도 대들 생각이다.
그런데 후통해는 곽정에게 대드는 것이 아니라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 틈을 뚫고 들어간다. 얼굴이 검정투성이이고 옷이 남루한 소년 하나가 대드는 그를 보고는 <아이쿠!>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친다. 후통해가 뒤를 쫓고 그의 뒤에 서 있던 황하 사귀도 쫓아갔다.
곽정은 그 공자와 열을 내어 싸우고 있다가 후통해가 쫓고 있는 소년이 새로 사귄 황용과 비슷한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놀랐다. 이 틈을 다서 공자는 곽정의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잠깐만, 내 좀 나갔다가 이따 또 싸우자!]
그 공자는 냉소를 한다.
[곱게 졌다그 할 일이지 잔소리는....]
곽정은 황용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더 싸울 흥미가 없었다. 막 황용이 달아난 길로 쫓아가려고 하는데 황용이 신발을 질질 끌고 시시덕거리며 이쪽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보이고 그 뒤에 후퉁해가 노기 충천하여 따라오고 있었다. 후통해는 갈라진 쇠붙이를 흔들며 황용의 등을 찌르려 한다. 그러나 황용의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빠지며 찔리지도 않고 후통해의 화만 돋운다.
후통해가 들고 있는 쇠붙이는 끝이 세 쪽으로 갈라져 있고 햇빛에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후통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본 구경꾼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그의 앙쪽 볼 위에 황용의 때묻은 손에 얻어맞은 뺨 자국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후통해가 이리저리 사람 틈을 비집고 나오면 황용은 빌써 저만큼 가서 상대를 놀리고 있다.
[내 저 쥐새끼 같은 놈의 가죽을 벗기거나 뼈를 분지르지 못하면 내 성을 갈겠다.]
화가 나서 씨근덕거리며 계속 뒤를 쫓는다. 그러면 황용은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접근해 오면 또 살짝 피한다. 이때 저쪽에서 세 사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황하 삼귀다. 상문부 전청건만 보이지 않는다.
곽정은 황용의 몸놀림을 보고 그제야 번쩍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원래 굉장한 절기(絶技)를 믐에 지니고 있었구나. 며칠 전 장자구의 솔숲에서 후통해를 유인하고 황하 사귀를 나무 위에 매단 것이 모두 황용이 한 짓이구나!)
저쪽의 영지상인 등도 의논이 분분하다. 영지상인은 원래 서장밀종(西藏密宗)의 고수로 대수인(大手印)을 쓰는 법을 수련했다. 동안 백발의 노인은 그 이름이 양자옹(梁子翁). 장백산(長白山) 무학 일파의 종사(宗師)인데 어려서부터 산삼과 여러 가지 약초를 먹고 자라 늙어서도 늘 동안이요 게다가 무공까지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삼선 노괴(參仙老怪)라고 불렀다. 이 삼선 노괴란 별명은 또 두 가지로 나뉜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삼선>이라 하고 그 일파의 제자들이 아닌 사람은 그냥 <노괴>라고만 했다.
눈이 번개처럼 빛나는 남자는 중원에서 더욱 그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인물이다. 이름은 천수인도(千手人屠) 팽련호(彭速虎)다. 어린아이나 부녀자들까지 다 알고 있어서 대강 남북에서는 어린이들이 울기만 하면 <팽호랑이 온다>고 하면 뚝 그친다.
삼선 노괴 양자옹이 먼저 말문을 연다.
[내가 관외(關外)에 있을 때, 귀문용왕은 대단한 고수라고 들어왔는데 그 제자들이 저리도 못났는가? 어린애 하나도 어쩌질 못하고 있다니....]
팽련호는 이마를 찡그린 채 아무 말이 없다. 그는 귀문용왕 사천통(沙天通)과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핀이다. 삼두교 후통해가 놀랄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 오늘 어쩌다 저 모양으로 망신을 당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황용과 후통해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곽정과 공자의 싸움은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 공자도 한 시간 이상이나 다투는 사이에 곽정을 5,6차 때리고 넘어뜨리기는 했지만 자기도 지쳤는지 허리에 차고 있던 수건을 끌러 이마 위의 땀을 씻고 있었다.
목역은 <비무초친>이다고 쓴 깃발을 든 채 곽정의 손을 어루만지며 위로를 하고 여관으로 가 쉬면서 얘기나 하자고 권했다. 이때 또 질질 신발 끄는 소리를 내며 황용과 후퉁해가 쫓고 쫓기며 달려왔다. 황용의 손에는 형겊 조각이 들려 있고 후통해의 옷은 찢어져 하얀 내복이 드러나 보었다. 좀 지나자 오청렬과 마청웅이 각기 창과 채찍을 든 채 헐레벌떡 달려왔지만 이때 황용과 후통해는 벌써 멀리 사라진 뒤다.
구경꾼들은 이상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이배 서쭉에서 시끌시끌 떠드는 소리와 함께 10여 명의 건장한 나졸들이 손에 등나무 채찍을 휘두르며 길을 열고 있는 모습이 보었다. 길모퉁이에서 한 채의 비단으로 수놓은 가마를 6명의 장한이 멘 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공자의 수종들이 왕비께서 오신다고 큰 소리를 지른다. 공자가 양 미간을 찌푸리고 못마땅한 듯 욕을 퍼붓는다.
[어느 놈이 왕비께 알려 오시게 했느냐?]
수종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가마가 당도하자 몰려가 인사를 했다. 그러자 가마 속에서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투고 있느냐? 외투도 입지 않고, 감기 들면 큰일난다.]
목역은 이 말소리를 듣고 머리가 어찔하고 귀가 멍해져서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는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두 발이 후들후들 떨린다.
(말소리가 어쩌면 내 아내와 뜩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잠시 후 그는 혼자 싱겁게 웃는다.
(이분은 대금국의 왕비인데 설마.... , 내 아내를 그리다가 정신이 어떻게 되는가 보다.)
그러나 호기심에 끌려 서서히 가마 가까이 가 보았다. 가마 안에서 섬섬 옥수가 뻗어 나와 공자의 얼굴에 있는 땀과 먼지를 씻어 주며 다정하게 무어라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린다. 반은 걱정하는 말투요 반은 나무라는 투다.
[어머니 아주 재미있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는걸요.]
[빨리 옷을 챙겨 입어라. 함께 집으로 가자꾸나!]
목역은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원 세상에 말투나 목소리가 이처럼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이냐?)
왕비의 수종 하나가 곽정 앞으로 다가가 공자의 비단 옷을 들며 욕부터 한다.
[짐승만도 못한 너석이 왕자의 옷을 이 모양으로 더럽혔구나!]
왕비를 따다온 다른 군관 하나가 등나무로 만든 채찍을 들어 곽정의 머리를 후려친다. 곽정은 몸을 살짝 피하며 채찍을 든 녀석의 팔을 잡아 비틀며 다리를 걸자 그 군관은 땅바닥에 나가 넘어졌다. 곽정이 채찍을 뺏아 들고 쉭쉭쉭 세 번이나 군관의 등을 후려 갈긴다.
[누가 함부로 사람을 때리랬더냐?]
옆에서 구경하던 백성들이 속이 시원하다는 듯 고소한 표정들이다. 남아 있던 10여 명의 군과들이 대들어 쓰러지 동료를 부축해 일으키며 큰소리로 욕을 하자 곽정이 양 손에 하나씩 붙들어 집어 던진다. 왕자가 대노하여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래도 이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고 까부는구나!]
곽정이 집어던진 두 명의 군관을 받아 땅에 내려 놓고 주먹을 날려 곽정의 배를 때린다. 곽정이 번개처럼 몸을 피하고 대들어 또 두 사람이 어우러졌다.
왕비가 소리를 질러 만류했지만 그 공자는 어머니도 무섭지 않다는 눈치다.
[어머니, 내 오늘 이놈에게 본때를 보여 줘아겠어요.]
두 사람이 수십 초를 다퉜다. 공자는 자기 어머니 앞에서 솜씨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몸을 날리며 장법을 날렵하게 놀린다.
곽정이 견디지 못하고 두 번이나 나가 넘어진다.
목역은 이때 싸움엔 아랑곳없이 가마만 뚫어지게 바라다보고 있었다. 가마의 주렴이 살짝 벌어진 곳에 고상한 눈매를 한 공자의 어머니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왕자와 곽정의 싸움을 지켜 보고 있었다. 목역은 그의 눈빛을 바라다보면서 못으로 박아 놓은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곽정은 수세에 몰리면서도 투지는 계속 왕성하다. 왕자도 살수(殺手)를 쓰면서도 다시 덤비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눈치였지만 곽정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뚝심이 있는 데다 내공까지 익혀놨으니 몇 차례 주먹에 얻어맞았다 해서 쓰러질 위인도 아니다. 그러니 싸움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울려 싸우는데 황용과 후통해가 또 한 차례 쫓고 쫓기며 달려온다.
이번의 후통해의 꼴은 더욱 우스꽝스럽다. 머리를 판다는 광고간판까지 꽂혀 있지만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죽어라 황용의 뒤를 쫓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뒤를 쫓던 황하 이괴는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황용에게 맞고 어디 쓰러진 모양이다.
양자옹 등이 황용의 정체를 몰라 몹시 긍금하고 답딥한 눈치다. 가운데의 두 소년, 즉 곽정과 공자도 권풍과 장풍을 날리며 용호 상박으르 얽혀 누가 누군지 분별할 수 없었다. 갑자기 곽정의 어깨가 왕자의 장풍에 얻어맞았는가 하는 찰나 왕자도 곽정의 주먹에 넓적다리를 얻어맞는다.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깝게 밀착되어 피차의 숨소리까지 똑똑히 들을 수 있는 처지다.
곽정은 계속해서 분근착골(分筋錯骨)의 묘기를 발휘하면서 그 바쁜 가운데서도 기회를 노려 혈(穴)을 찌르고 때리기에 여념이 없고, 왕자는 72로(七十二路)의 금나수(檎拿手)를 쓰고 있는데 손을 쓸 때마다 골절이 우두둑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옆에 있는 구경꾼 가운데 무예를 모르는 사람까지도 손에 땀을 쥔 채 숨소리를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고, 무예를 아는 사람까지도 험악해진 싸움에 두려운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어찌나 험악한지 두 사람 중 그 어느 한쪽이 죽어 넘어지거나 중상을 입고 쓰러지기 전에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영지상인과 양자옹도 어느 새 손에 암기를 꺼내 들고, 벌어질 사태에서 왕자를 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력은 아무래도 곽정과 비할 바는 아니나 긴급할 때 그를 제압할 자신은 있었던 것이다.
곽정은 더욱 투지 왕성하다. 그는 거친 사막에서 자라난 소년이요, 왕자는 아무래도 궁중에서 곱게 자란 금지 옥엽이라 곽정보다는 나약한 편이 아닐까? 이렇게 정신없이 공격과 빙어가 계속된다면 아무래도 왕자쪽이 블리하다. 곽정의 장풍이 쪼개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번개처럼 몸을 피하고 주먹으로 반격을 했다. 빠르기 이를데 없는 솜씨다. 곽정은 반격한 주먹이 날아오는 그 빠르고 짧은 틈을 타 오른손을 뻗어 상대의 오른팔꿈치를 뒤집으며 다가서 왼쪽 어깨로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왼손을 갈고리로 삼고 동시에 오른손으로 왕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왕자는 그가 이렇게까지 대담하게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재빨리 왼손의 장풍을 뒤집어 엎으면서 상대방의 팔뚝을 잡고 또 오른손으로 곽정의 덜미를 잡았다.
두 사람의 가슴이 착 달라붙은 채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해 보는 것이다. 하나는 상대의 목에 구멍을 뚫겠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적의 팔을 분지르고 말겠다는 결사적인 순간이오, 자세였다.
구경꾼들이 놀라 울부짖고 왕비도 주렴 밖에 얼굴을 반이나 내민 채 혈색을 잃는다. 목역의 딸은 땅에 앉아 있다가 놀다 뛰어 일어난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곽정이 엄굴에 장풍을 맞았다. 왕자가 자세를 바꾸어 오른손을 틀면서 전광 석화처럼 후려갈긴 것이다. 곽정은 눈앞이 어질어질하여 큰소리를 지르면서 두손으로 왕자의 옷깃을 틀어 쥔 채 번쩍 들어 있는 힘을 다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분근착골의 솜씨도 아니요, 금나단타(檎拿短打)의 수법도 아니다. 몽고 사람들이 잘 하는 씨름 기법으로서 신전수(神箭手) 철별에게 배운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공자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었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허리를 굽히고 곽정의 두 발을 얼싸안은 것이다. 둘이 동시에 땅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위쪽으로 떨어진 왕자가 먼저 몸을 날려 군관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 긴 창을 앗아들고 땅바닥에 누워 있는 곽정의 배를 찔렀다. 곽정이 떼굴떼굴 굴러 피하자 왕자는 계속 쫓아가면서 세 번이나 찔렀다.
곽정은 누운채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의 묘기를 펴, 창을 뺏으려고 손을 뻗어 보았지만 잡히지 않는다. 왕자가 창대를 비틀어 흔들자 창 끝의 빨간 끈이 흔들흔들 둥그런 원을 그린다. 곽정은 눈앞이 어질어질하여 급한 나머지 팔뚝으로 막고 억지로 밀어 내며 목역의 <비무초친>이라고 쓴 깃발을 끌어다가 깃대를 옆으로 휘둘러 막으며 일어선다. 왕자가 다시 창을 높이 쳐들고 내리찍으려 하자 곽정이 깃발을 펄럭여 날리니 깃발이 왕자의 얼굴을 가리고 창끝이 번쩍 차디찬 빛을 발하며 깃발을 뚫고 삐어져 나왔다. 곽정도 힘차게 깃발을 휘둘러 피한다.
이제 두 사람 다 각기 무기를 든 셈이다. 곽정이 쓰는 것은 대사부 가진악이 전수해 준 항마장법(降魔杖法)인데 깃대가 너무 길어 불편하기는 하지만 장법만은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 이 장법은 가진악이 철시 매초풍을 상대하기 위해 애써 익혀 놓은 것으로, 변화무쌍하여 상대가 이쪽의 술수를 예측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왕자가 이 장법의 오묘함을 모르고 긴 창으로 공격을 하면 깃대가 먼저 반격을 해 오기 때문에 만약 재빨리 피하지 않으면 배를 긁히게 되어 있다. 그래 할 수 없이 방어 태세만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목역은 왕자의 창법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동작 하나 하나를 보면 볼수록 틀림없는 양가창법(楊家槍法)의 정통이다. 이 양가창법은 비록 남북이종(南北二宗)으로 나뉘고 또 종파마다 각기 다른 지류로 분류되지만 이 왕자가 쓰고 있는 창법은 양가의 독특한 무공으로 아들에게만 전했지 딸에게도 비밀을 지켜 왔던 것이다. 남방에서도 보기 드물거든 하물며 대금극의 서울에서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목역은 한참동안 바라다보면서 어느덧 두 눈에 하염없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싸움을 지켜 보는 그의 딸도 만 가지 심사가 교차하는 심각한 표정이다. 창 끝의 빨간 구슬이 번쩍번쩍하고 깃대 위의 깃발이 필럭펄럭하며 석양 노을에 반사되어 찬란한 무지개를 수놓고 있었다. 왕비는 이제 날이 저물기 시작한데다 아들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흐르는 것을 보며 마음이 초조했다.
[이제 그만 싸워라!]
팽련호는 왕비의 이 말을 듣고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왼팔을 흔들며 깃대를 잡았다. 곽정이 손에 지독한 통증이 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깃대는 벌써 하늘로 날아가고 깃발은 허공에서 바람에 날려 펄럭이고 있었다.
곽정은 평생 매초풍을 제외하고 이렇게 강한 상대를 만나본 일이 없었다. 깜짝 놀라 미처 상대의 모습도 살펴볼 겨를이 없는데 바람 소리만 쉭 하며 어느 새 적의 장풍이 얼굴을 향해 엄습했다. 곽정이 재빨리 피하기는 했지만 팽련호의 1장이 그의 팔뚝을 때렸다. 곽정이 비틀거리다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팽련호가 왕자를 보고 웃는다.
[왕자님, 제가 처리해 버렸으니 이젠 귀찮게 대들지는 못할 겝니다.]
오른손을 뒤로 움츠리고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을 두어 번 흔들다가 맹렬하게 뻗으며 막 땅에서 일어나려는 곽정의 머리를 내리쳤다. 곽정은 어쩔 수 없이 두 팔뚝에 있는 힘을 다해 물리치려고 했다. 구경꾼 중의 고수들은 곽정의 두 팔이 부러져 나가는 줄 알았다. 천수인도 팽련호의 이 장풍에 견딜 장사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 구경꾼 틈에서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은빛의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며 손에 든 이상한 병기를 허공에 휘두르며 팽련호의 팔을 휘감는다. 팽련호의 무공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오른팔로 잡아당기니 그 사람의 병기가 부러진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장풍을 날린다. 그 사람은 잠시 멍하니 바라다보다가 곽정의 허리를 껴안고 옆으로 뛰어 피한다.
구경꾼들이 보니 곽정을 구하기 위해 대든 사람은 중년의 도인, 몸에는 은빛 도포를 걸치고 손에 쥔 털이개는 자루만 앙상하게 남은 채다. 거기 달려 있던 실들이 아직도 팽련호의 팔에 감긴 채다.
그 도인과 팽련호가 서로를 건너다보다가 도인이 먼저 말을 꺼낸다.
[혹시 팽채주(彭寨主)가 아니신지?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올시다.]
[원 별 말씀을.... 도장의 법호가 누구신지?]
이때 수백의 눈초리가 그 도인에게 쏠렸다. 미목이 수려하고 턱에는 세 무더기의 수염이 근사했다. 흰 버선에 회색빛 신발, 정결한 것이 먼지 한곳 묻은데가 없다. 그 도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왼발을 한 발 내디뎠다 오므린다. 땅바닥에 가볍게 발자국을 남긴다. 북국의 메마른 땅 위에 힘도 들이지 않고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보통의 공력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팽련호가 깜짝 놀란다.
[도장께서는 혹시 사람들이 철각선(鐵脚仙)이라고 부르는 옥양자(玉陽子) 왕진인(王眞人)이 아니십니까?]
[진인이라니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바로 왕처일(王處一)이옵니다.]
도인이 머리를 숙여 겸손해 한다.
팽련호와 삼선노괴, 양자옹, 영지상인 등은 모두 전진교 가운데서 쟁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왕처일을 잘 안다.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은 들어 왔지만 만나 본 일은 없다. 그가 왕처일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아래 위를 자세히게 훑어 본다. 깨끗한 옷차림이 도사의 기풍을 십분 풍기고 있다. 방금 그가 한발을 내디뎌 발자국을 남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이가 바로 천야 만야한 바위 끝에 한 발로 버티고 서서 하북의 영웅 호걸을 놀라게 한 철각선 옥양자라고 믿을 사람이 없는 그런 풍채였다.
왕처일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곽정을 손으로 가리킨다.
[저는 원래 이 소년과는 모르는 처지입니다. 다만 의롭고 용감한 태도를 보고 탄복했을 뿐입니다. 외람된 청이오나 팽채주께서 그의 생명만은 살려 주셨으면 합니다.]
팽련호는 그의 겸손한 부탁을 받고 전진교에 대해 생색을 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원 별 말씀을.... 도장의 말씀에 좇겠습니다.]
왕처일이 머리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머리를 돌려 무섭게 왕자를 노려본다.
[자네 이름이 뭔가? 사부는 누구신고?]
왕자는 왕처일의 거동을 보고 슬그머니 불안해져서 몰래 빠져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다가 엉겁결에 대답을 한다.
[나는 완안강(完顔康)이오. 제 사부의 존함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자네 사부의 왼쪽 볼에 빨간 점이 있지? 응 그렇지?]
완안강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는다. 도인의 눈빛이 번쩍이며 자기의 마음을 궤뚫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 벌써 구사형(丘師兄)의 제자인 줄 알았다. 흥, 그래 네 사부께서 네게 무예를 가르치기 전에 하신 말씀이 없었더냐?]
완안강은 사태가 심각함을 느끼며 당황한 빛을 보인다. 그의 어머니가 가마 안에서 그를 재촉한다.
[얘야, 빨리 돌아가자!]
완안강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오늘 일을 만일 사부께서 아시게 된다면 이긴 보통일이 아니다.)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겸손한 대도로 도인을 디한다.
[도장께서 제 사부님을 아신다니 분명 제 선배가 되시겠군요. 저희 집으로 가셔서 후배에게 가르침을 주소서.]
왕처일이 코방귀만 뀌고 아무 대답도 없자 완안강은 곽정을 향해 읍을 하고 웃는다.
[나와 곽형은 오늘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니오. 곽형의 무예엔 정말 탄복했습니다. 곽형께서도 도장과 함께 저희 집에 가십시다. 우리 이제 서로 친구가 됩시다.]
곽정이 목역 부녀를 가리키며 입을 뗀다.
[그럼 혼사는 어찌하려오?]
완안강은 난처한 표정이다.
[그 일은 서서히 생각해서 합시다.]
목역이 곽정의 옷소매를 잡는다.
[자. 저와 함께 가십시다. 무엇 때문에 저 따위 잡놈을 거들떠 보십니까?]
완안강이 이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고 왕처일을 향해 공손히 읍을 한다.
[도장님. 후배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조왕부(趙王府)가 어디냐고 물으시면 다 알 것입니다.]
수종들이 끌고 온 준마에 올라타며 채찍을 휘두르니 말은 달리고 사람들은 부산하게 양 옆으로 피한다. 왕처일은 그의 거만스런 태도에 화가 치미는 모양이다.
[여보게 나를 따라오게.]
곽정을 향해 말한다.
[전 제 친구를 좀 기다려야겠는데요.]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황용이 어느 새 사람들 틈에서 얼굴을 내밀고 웃는다.
[난 괜찮아요. 좀 있다 내 찾아갈께요.]
말을 마치자마자 또 사람 틈으로 사라진다. 키가 작아 없어지면 그만이다. 삼두교 후통해가 또 멀리서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곽정은 우스운 생각이 들었지만 몸을 돌려 땅에 꿇어 엎드려 왕처일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를 한다. 왕처일이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재빨리 사람 틈을 빠져 교외를 향해 멀어진다. 일각도 되지 않았는데 그는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성 밖이다. 다시 몇 리를 더 가 산등성이를 넘었다. 왕처일은 계속 걸음을 빨리 한다. 곽정을 시험하는 것이다. 곽정도 단양자 마옥에게 경공을 익히지 않았는가? 얼굴도 붉히지 않고 숨도 헐떡거림도 없이 계속 그 뒤를 밟는다. 왕처일은 잡았던 곽정의 손을 놓으며 적이 놀란다.
[기초가 훌륭한데 왜 그 녀석을 이기지 못했지?]
곽정은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웃기만 한다.
[네 사부는 누구냐?]
곽정은 그날 절벽 위에서 윤지평으로 가장, 매초풍을 속인 일이 있어 단양자 마옥의 사제 가운데 왕처일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솔직하게 강남 육괴와 마옥으로부터 무예를 익힌 일을 들려주있다.
[대사형께서 네게 무공을 가르쳤다는데 내 무얼 망설이겠느냐?]
왕처일은 반가운 눈치다. 곽정은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바라다볼 뿐이다.
[너와 다툰 그 왕자라는 완안강은 내 사형인 장춘자 구처기의 제자다. 알았느냐?]
[그래요? 전연 몰랐는걸요.]
원래 단양자 마옥이 그에게 상승의 내공은 전수해 주면서도 권술이나 기타 다른 무공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 비친 일이 없었다. 그래서 곽정은 전진교 무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이제 왕처일의 말을 듣고보니 어느날 밤 다툰 일이 있는 윤지평과 그 완안강의 솜씨는 같은 곳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죄송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제자는 그가 구도장의 제자라는 것도 모르고 함부로 대들었으니 도장께서 용서하여 주십시요.]
[아니다. 네 의협심이 대단하여 내 너를 좋아할 뿐이지 책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하거리며 웃고 나서 다시 정색을 한다.
[우리 전진교 문하는 그 교육이 엄하다. 문하에서 잘못을 범하면 그 벌이 무서우니라. 그녀석 경거 망동하니 내 구사형께 아뢰어 벌을 내릴 생각이다.]
[그가 만약 목역의 따님과 걸혼을 하겠다고 나서면 도장께서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왕처일은 고개만 흔들 뿐 말이 없다. 착하기만 한 곽정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 혼자 중얼거리듯 말한다.
[구사형이 원래 악을 미워하기 원수처럼 하고 금나라 사람이라면 더더욱 증오를 하는데 어째서 금나라 조정의 왕자에게까지 무예를 전수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구나.]
고개를 돌려 곽정을 건너다본다.
[구사형과 내가 연경(燕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며칠 있으면 이리로 오실 게다. 모든 일은 만나서 자세히 물어 봐야겠다. 양(楊)가 성을 가진 제자를 두었다는데 뭐 가흥에서 너와 무예를 겨루기로 되었다고 들었다. 그 양이라는 사람의 무공이 어떤지? 하지만 염려할 것 없다. 내 여기 있으니 네가 지게 버려 두진 않겠다.]
곽정은 여섯 분 사부의 명에 따라 3월 24일 이전에 절강의 가흥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만 알지 가흥에 이르러 무슨 일을 할 것이라는 말은 들어 본 일이 없다.
[도장님, 무슨 무예를 겨룬대요?]
[네 사부들께서 말씀이 없으셨던 모양인데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수야 없는 것이다.]
한숨만 쉴 뿐이다. 그는 구처기로부터 얘기를 들어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강남 육괴가 꼭 이겨야 한다는 집념 때문에 아직까지 18년 전에 있었던 옛일을 곽정에게 들려주지 않았음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우선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무예를 배우는 일이 방해되지 않을까 염려를 해서요, 둘째는 상대편과 세교가 있어 서로 친형제처럼 지내야 할 처지라는 것을 알고 사정을 보다가 이길 수 있는데도 이기지 못하고, 패하지 않을 텐데 혹시 패하지나 않을까 염려를 했기 때문이다. 곽정은 더 물어 볼 수도 없어 잠자코 있었다.
[자, 우리 목역 부녀를 보러 가자. 그 소녀 성격이 강인해 다른 일이나 벌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곽정도 걱정이 되던 일이다. 둘은 서성대가의 고승 여관으로 왔다. 여관 안으로 들어서는데 10여 명의 비단옷을 입은 수종들이 나오는 것과 맞부딪쳤다. 왕처일을 보고 고개 숙여 절을 한다.
[소인배는 왕자님의 명을 받고 도장님과 곽나리를 모시러 왔습니다.]
말을 하면서 빨간색 청첩장을 바친다. 왕처일의 초청장에는 제자 완안강배(弟子 完顔康拜)라고 씌어 있고 곽정의 것에는 교제(敎弟)라고만 되어 있다. 왕처일이 초청장을 받아 들었다.
[좀 있다 가마.]
그 중에 우두머리인 듯한 하인이 다시 입을 연다.
[여기 가져온 과자와 과일은 저의 왕자께서 도장님과 곽정 나리께 드리는 것이온데 두 분께서 어디 머무르시는지 제가 갖다 놓겠습니다.]
12개의 그릇에 과일과 과자가 가득 담겨 있다. 모두가 진품뿐이다. 곽정은 황용이 좋아할 것을 생각하며 기쁜 표정을 짓는다. 왕처일은 완안강의 위인이 못마땅하여 거절하려다 곽정의 표정을 살피고 웃고는 받는다.
<제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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