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2 김용(金庸)
小說 英雄門 第 1 部 蒙古의 별 第 二 卷
저자 : 김 용
역자 : 김일강
발행 : (주)고려원
1993년 11월 20일 2판 1쇄 발행본
타자,편집 : Zazeung
第 十八 章. 향기로운 편지
옥양자 왕처일은 완안강이 보낸 과자 등을 받고 목역이 거처하고 있는 여관을 물어 확인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목역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침대 위에 누워 있고, 그의 딸은 침대곁에 걸터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왕처일과 곽정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왕처일이 목역의 두 손의 상처를 보니 손등에 다섯 손가락 자국이 깊이 팬 것이 뼈가 다 들여다보일 지경이다. 마치 병기에 부상당한 것처럼 퉁퉁 부어 올랐다. 금창약(金創藥)만 발랐지 곪을까 봐 매지는 않았다. 왕처일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완안강의 무술이나 솜씨로 보아 틀림없이 구사형(丘師兄)에게 배운 것인데 그래 우리 전진파 가운데 어디 이렇게 악랄하고 무서운 수법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틀림없이 무슨 곡절이 있을게야.)
고개를 들려 소녀를 건너다보며 입을 연다.
[색시의 이름이 어떻게 되오?]
[저는 목염자(穆念慈)라고 해요.]
[아버님 상처가 가볍지 않으니 잘 치료해 드려야 하오.]
품에서 두어 냥의 은자를 꺼내 책상 위에 을려 놓는다.
[내일 다시 오리다.]
목역과 목염자가 고맙다는 인사도 할 새 없이 곽정의 손을 잡고 여관을 나서니 비단옷을 입은 수명의 수종들이 나서며 인사를 올린다.
[저희들 왕자께서 기다리고 계시오니 도사님과 곽나리께서 함께 가 주십시오.]
왕처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도사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곽정이 말을 마치고 여관으로 달려가 완안강이 보내온 과자 상자를 열고 네댓 개를 골라 손수건에 싸서 품안에 쑤셔 넣고 달려 나왔다. 네 명의 수종과 왕처일의 뒤를 따라 함께 왕부로 왔다. 조왕부의 대문에 당도하니 두개의 깃대가 하늘을 찌를 듯 구름위로 솟아 있고 옥돌을 쪼아 만든 사납게 생긴 돌사자가 빨간 대문의 양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백옥으로 다듬어진 계단이 저끝까지 가지런하다. 대문 가운데에 조왕부(趙工府)란 세 개의 금글자가 뚜렷하다.
조왕(趙王)이라면 바로 대금국의 육대자인 완안열이다. 곽정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떤다.
(설마, 이 왕자라는 사람이 완안열의 아들은 아닐 테지? 완안열은 내 얼굴을 아는데 여기서 만나게 된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막 생각에 잠겼는데 풍악 소리가 울리며 머리엔 금관을, 몸엔 홍포를 입은 완안강이 옥대를 번쩍이며 나와 반긴다. 왕처일은 그의 호화로운 차림이 못마땅한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완안강은 왕처일을 상좌에 앉힌다.
[도사님과 곽형이 이렁게 왕림해 주시니 삼생의 영광이옵니다.]
왕처일은 그가 무릎을 꿇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이마를 조아리는 것도 아니며, 또 자기를 보고 사숙(帥叔)이다고 부르지도 않는 태도에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그래 자넨, 사부님께 몇 해나 무예를 익혔는가?]
[저 같은 게 무슨 무예를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부님께 이 년 동안 배웠을 뿐입니다. 세 발 가진 고양이 같은 서툰 재주를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전진파의 무공이 비록 훌륭하달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세 발 가진 고양이 같은 그런 서투른 재주는 아닐세. 자네 사부께서 일간 여기로 오실텐데 알고 있는가?]
[제 사부께선 지금 여기 계십니다. 만나시렵니까?]
왕처일은 깜짝 놀란다.
[아니 어디에?]
완안강이 가볍게 손바닥을 두 번 두드리고 수종에게 이른다.
[상을 차려라!]
뭇 수종들이 차례로 전갈을 한다. 완안강이 왕처일, 곽정 두 손님을 모시고 안으로 안내를 한다. 회랑을 돌고 돌아 한참이나 걸었다. 곽정이 어디서 이렇게 으리으리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가! 눈이 어지러울 지경으로 호화찬란한 광경에 그만 입이 벌어진다. 게다가 만일 완안열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되어 조바심만 더해진다. 화청(花廳)에 당도하니 그곳엔 6,7명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마에 혹이 세 개나 불끈 솟아 있는 것이 바로 삼두교 후통해가 아닌가? 곽정을 보더니 눈알을 뒤집고 쏘아 본다.
곽정이 가볍게 놀라기는 했지만 왕처일이 옆에 있는데 전들 어쩌랴 싶어 마음을 놓는다. 완안강이 만면에 웃음을 띄고 왕처일을 향해 말문을 연다.
[도사님, 여기 계신 분들이 오래 전부터 도사님의 위명을 흠모하며 뵙고 싶어했습니다. 여기 이 분이 팽채주, 두 분께서는 벌써 만나셨지요.]
둘은 서로 예를 표했다. 완안강이 다시 홍안의 백발 노인을 가리킨다.
[이분은 장백산 삼선인 양자옹 노인이십니다.]
(아니, 이 노괴가 어찌 또 여기에 나타났을까?)
왕처일이 놀라는데 양자옹이 먼저 인사를 한다.
[철각선 왕진인을 뵙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이번 나들이가 헛되지 않군요. 여기 이분은 서장밀종의 대수인 영지상인이올시다. 우리 하나는 동북에서, 또 하나는 서남에서 만 리를 멀다않고 왔는데 이거 참 무슨 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이 삼선노괴 양자옹은 아주 달변이다. 왕처일이 영지상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니 그 장승은 두 손으로 합장을 한다. 이때 걸찍하게 목쉰 소리가 울렸다.
[이제 보니 강남 칠괴를 믿고 그렇게 방자하게 까불고 다녔구만.]
왕처일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번쩍이는 대머리에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이제라도 툭 불거져 나을 것 같은 험상궂은 인상이다.
[아, 혹시 귀문용왕이신 사(沙)선배가 아니신지?]
[그렇소, 전부터 날 알고는 있었구먼.]
벌컥 화를 낸다. 왕처일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우리 강물이 우물물을 긴드릴 수 있나? 뭐 잘못한 일도 없을 텐데?)
온화한 낯빛으로 부드럽게 대했다.
[사선배님의 존함을 늘 존경해 왔습니다.]
그 귀문용왕의 이름은 사통천(沙通天)이다. 무공은 사제(師弟)인 후통해와 비할 처지가 아니다. 후통해보다 수십 배 홀륭하다. 다만 그의 성질이 난폭하여 무예를 전수할 때도 늘 성질만 사납게 부린다. 그래서 일신에 지니고 있는 그 훌륭한 무공도 네 명의 제자가 겨우 열에 두서넛 배웠을까 말까 한 처지다. 황하사귀가 몽고의 일전에서 곽정에게 패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통천은 몹시 성질을 부리고 닥치는 대로 그 넷을 두들겨 패 호통을 치고 사제인 삼두교 후통해에게 명령을 내려 곽정을 잡아 오도록 했지만 웬걸, 황용의 놀림감만 되고 말았다.
그는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져 체면이고 뭐고 살필 겨를도 없이 손을 뻗어 곽정의 멱살을 집으려고 대들었다. 곽정이 뒤로 한 발 물러서자 왕처일이 도포의 소맷자락으로 그 사이를 막았다.
[아니, 정말 저 개만도 못한 녀석을 감싸고 돌겠소?]
벌컥 화를 내며 장풍으로 왕처일의 가슴을 향해 쉭 하고 친다. 왕처일은 공격의 흉악함을 느끼며 자기도 장풍을 날린다. 서로와 손바닥이 마구치는 순간 옆에서 한 사람이 쏜살같이 나서서 왼손으론 사통천의 팔목을 잡고, 오른손으론 왕처일의 팔목을 잡아 가볍게 밖으로 떼 놓았다. 왕처일과 사통천은 들 다 당세 무림에선 가장 유명한 인물들이다. 그들 둘의 장풍이야말로 평생의 절학(絶學)이다. 상대가 상대니만큼 조금이라도 소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전광석화와 같이 순간에 나타나 이렇게 가볍게 이 두 고수를 떼 놓을 수 있다니 놀라운 솜씨다. 왕처일도 깜작 놀라 믈러서고 사통천의 분통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 도내체 누구란 말인가? 둘은 서로 그를 바라다보았다. 하얀 옷에 가벼운 가죽외투, 잘생긴 얼굴에 나이는 35,6세, 두 눈썹이 길고 준수한 풍채가 수재나 재상과 같고 몸에 걸친 복식이 또한 부귀한 왕손 같다. 완안강이 웃으며 소개한다.
[이분은 서성곤룬(西城崑崙) 백타산(白駝山) 산주인 구양공자(歐陽公子)이십니다. 중원(中原)에 와 본 적이 없으시니 여러분께서도 초면일 겁니다.]
아닌 밤둥에 흥두깨격으로 나타난 인물이다. 왕처일과 곽정만 처음 보는 게 아니라 팽련호, 양자옹까지도 서로 모르는 처지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무공을 보고 마음속으로 흠모했지만 백타산이란 이름은 금시 초문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산전수전 다 겪은 무림의 명수들이라 그들은 각각 생각해 보았지만 이 사람의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은 없었다.
그 구양공자가 공손하게 손을 마주 잡고 말문을 열었다.
[제가 벌써 연경(燕京)에 도착했어야 할 텐네 오는 도중 다른 일이 생겨 며칠 지체되었습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곽정은 완안강이 그를 백타산 산주라고 소개하는 말을 듣자 노상에서 자기 말을 뺏으려고 대들었던 흰옷의 여자들이 생각났다.
(혹시, 이 사람이 내 여섯 분 사부님들과 싸운 것은 아닐까?)
엉뚱한 생각까지 든다.
왕처일은 상대방 하나 하나가 모두 쟁쟁한 고수들임을 알자 적이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만일 여기서 싸움이라도 벌어진다면 큰일이다. 1대1로 한대도 승패를 예측할 수 없을텐데, 그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한다면 어떻게 상대를 한단 말인가? 즉시 완안강을 향해 묻는다.
[자네 사부는 어디 계신가? 어째서 여기로 모시지 않지?]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한 수종에게 이른다.
[사부님을 모셔 오너라!]
수종이 대답을 하고 물러나자 왕처일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구사형이 여기 계신다니,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이젠 당해 낼 수 있겠지!)
잠시 후 신발 끄는 소리와 함께 몸집이 뚱뚱하고 비단 옷을 입은 무관이 문 밖에 나타났다. 아래턱에 수염이 텁수룩한 40여 세 정도의 인물로 무인다운 풍채를 하고 있었다. 완안강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며 사부라고 불렀다.
[이 도사께서 사부님을 뵘고 싶다고 벌씨 몇 차례나 물으셨습니다.]
왕처일은 어이가 없었다.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완안강을 항해 벌컥 소리를 질렸다.
[아주 건방진 녀석이로구나, 그래 날 놀릴 셈이냐?]
그러자 그 무관이 나선다.
[도사님, 그래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내 평소 도사니, 스님이니 하는 것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데.]
왕처일도 어이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소. 내 나으리께 시주 좀 하라고 왔소. 천 냥만 시주하구료.]
그 무관은 탕조덕(湯祖德)이라 하는 사람인데 조왕 완안열 수하의 친병대장이다. 완안강이 어렸을 때 무예를 가르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조왕부 안에선 모두 그를 사부라고 부른다. 이제 왕처일이 내뱉듯 천 냥이나 시주하라는 말을 듣고 놀라 책망올 하려고 하는데 완안강이 먼저 도사의 말을 받았다.
[그야 물론 시주를 해야지요.]
수종을 향해 분부를 내린다.
[여봐라, 빨리 나가 천 냥을 준비했다가 도사님 가실 때 드리도록 해라.]
탕조덕이 이 말을 듣고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끝에서 머리 위까지 왕처일을 훑어본다.
[자 이제들 자리에 앉으십시다. 도사께선 처음이시니 이 상석에 앉으세요.]
완안강이 권하자 왕처일은 몇 번 사양하다가 그대로 앉았다. 술이 서너 순배 돌아간 후 왕처일은 서서히 얘기를 꺼내 놓는다.
[오늘 무림의 선배들이 이렇게 다 한자리에 모이셨으니 한번 생각들 해 보시지요. 목가 성을 가진 부녀의 일은 어떻게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까?]
어떻게 대답이 나오는가 궁금하여 뭇 사람들의 시선이 완안강의 얼굴에 쏠린다. 완안강이 잔에 술을 따라 몸을 일으켜 세우며 두 손으로 받쳐 왕처일에게 권한다.
[우선 이 술이나 받으십시오. 그 일은 도사님이 시키시는 대로 따라 하겠습니다.]
왕처일은 이렇게 시원한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쪽에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서 손에 든 잔을 쭉 비웠다.
[좋소! 그럼 그 목씨를 이리로 모셔다가 얘기를 합시다.]
[마땅히 그래야지요. 수고스러우시지만 곽형이 가서 모셔 오도록 함이 어떠하올지?]
완안강의 말에 왕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곽정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왕부를 나왔다. 고승 여관에 도착하여 목역이 묵고 있있던 방으로 들어서니 목역 부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옷보따리 등도 보이지 않아 심부름꾼에게 물어 보니 방금 어떤 사람이 나타나 데리고 나갔는데 방값, 밥값을 치르고 갔으니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까지 들러준다. 곽정은 누가 와서 데리고 나갔느냐고 물었지만 심부름꾼의 얘기만으론 종잡을 수가 없다. 걸음을 재촉하여 조왕부로 돌아오니 완안강이 내려와 반긴다.
[곽형, 주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선생은?]
곽정이 경위를 설명했다. 완안강이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되면 내가 큰실례를 하게 되는데...., 이봐라. 여러 사람이 나가 사방으로 수소문해서 그분을 찾아 모셔오도록 하거라.]
수종들이 대답을 하고 몰러나갔지만 왕처일은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누가 무슨 장난을 치는지는 몰라도 세월이 가면 다 드러날 테지.]
[도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왕처일의 빙소 섞인 말에 완안강도 맞장구를 친다. 그 탕조덕이란 자는 도사가 못마땅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말 한마디에 은자 천 냥을 뺏겼을 뿐만 아니라 왕자를 대하는 태도에도 예의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 도사께서 어느 도문에 속하신 분인 줄은 몰라도 뭘 믿고 여기 와서 큰소리만 치시는 게요?]
[이 장군은 어느 나라 사람인데 무얼 믿고 여기 와서 관리를 지내는 게요?]
왕처일은 그가 틀림없는 한나라 사람인데 금나라에 와서 관리를 지내는 것 같아 조롱을 한 것이다. 탕조덕은 누가 자기를 보고 한나라 사람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자신은 무예도 훌륭하고 또 금나라 일이라면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군대를 통솔하여 업적을 남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원통했었다. 관직이 낮은 편은 아니라 하지만, 20여 년 애쓴 보람이 있어 여전히 조왕부 안에서 한직에만 눌러 앉아 지내고 있었다. 왕처일의 말은 그대로 그의 아픈 곳을 찌르고 말았다. 금방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불끈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양자옹과 구양공자를 가운데 둔 채 주먹으로 왕처일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장군께서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내시곤 왜 또 손찌검까지 하려고 하오?]
웃으며 손을 뻗어 젓가락으로 그의 팔뚝을 집었다. 그러자 탕조덕의 주먹이 허공에서 멎는다. 몇 번이나 힘을 줘 보았지만 요지부동이다. 놀랍기도 하고 분통도 터진다.
[아니, 이놈의 도사가 요술을 부려!]
있는 힘을 다해 손을 움츠리려 해도 여전 그 모양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양자옹이 그의 옆에 앉아 있다가 웃는다.
[장군, 화내지 마시고 앉아 술이나 드십시다.]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눌러 앉힌다. 왕처일은 젓가락의 힘만 가지고도 탕조덕쯤의 팔목을 잡고있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양자옹이 탕조덕을 눌러 앉히는 그 힘을 이겨 내기에는 부족했다. 젓가락을 놓으며 그릇에 있는 닭다리를 집어 얼른 탕조덕의 입에 쑤셔 넣었다. 탕조덕은 막 입을 벌려 욕을 하려다가 닭다리를 가득 입에 문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분하고 부끄러워 일어나 내실로 달아났다. 이 꼴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어 폭소가 한바탕 장내에 터졌다.
잠시 후 사통천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전진교야말로 남북에 그 명성을 날리고 있는데 과연 헛소문이 아닌 줄 믿고 있소. 그런데 도사께 한 가지 여쭈어 봅시다.]
[네, 무슨 말씀이든지 해 보세요]
[내가 전진파와는 아무 원한도 없는 처지인데 도사는 어째서 강남 칠괴를 도와 내 입장을 난처하게 하십니까? 전진파는 사람도 많고 나는 별 재주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서워하는 건 아니오.]
[사선배님, 그건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저도 강남 칠괴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만나 본 일은 없습니다. 제 사형(師兄) 한 분이 그들과 좀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무슨 강남 칠괴를 도와 선배님을 난처하게 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좋소, 저 어린 녀석을 내게 넘겨 주시오.]
벌떡 일어나 곽정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왕처일은 곽정이 피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만약 잡히기만 하면 크게 부상을 입을 것은 당연하다. 먼저 대들어 왼쪽 어깨로 곽정을 슬쩍 밀자 그대로 의자에서 몸이 떴다. 우지직 소리를 내며 의자가 부러져 나갔다. 사통천이 의자를 틀어 잡은 것이다. 그의 외문(外門)의 내공이 벌써 극치의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알 수 있는 솜씨다. 비록 그것이 혹풍쌍쇄의 구음백골조처럼 악랄하고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무림에서 보기 드문 놀라운 재주다. 사통천은 왕처일의 방해에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도 저 녀석을 두둔하고 감쌀 셈이오?]
[아닙니다. 이 아이는 제가 왕부로 데리고 들어왔으니 잘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사선배께서 오늘은 참으시고 다음에 화풀이 하심이 어떠 하올지?]
그러자 구양공자가 나섰다.
[이 소년이 사형께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디 말씀을 해 보시죠. 우리 함께 들어 봅시다.]
사통천은 생각했다. 보아하니 구양공자의 무공이 결코 자기만 못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형제 둘이 이까짓 어린 녀석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도움을 청하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술 한 잔을 비웠다.
[말을 하자면, 나도 이 녀석과 무슨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게 못난 제자가 네뎃 있는데 조왕부를 마라 몽고에 들어가 무슨 일을 하려다가 이제 막 성공을 하러는 순간 저 녀석이 방해하는 바람에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 때문에 조왕부에 대한 면목을 잃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까짓 어린 녀식 하나를 어떻게 해치우지 못하고서야 무슨 큰 일을 해 낼 수 있겠습니까?]
좌중에서 왕처일과 곽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왕부에서 비싼 이물로 초빙해 온 사람들이다. 완안강은 바로 조왕의 세자다. 사통천의 말을 돋고는 모두 그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곽정을 잡아 조왕에게 넘겨 처리케 하러는 눈치들이다. 왕처일은 좌중의 시선이 곽정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초조해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몸을 빼야 한다. 그러나 이 강적들 앞에서 무슨 수를 써야 할지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무예를 익히고 하산한 이래 얼마나 많은 싸움을 보고 겪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많은 강적과 겨룰 방법은 없었다. 지금 와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다만 이 순간을 질질 끌면서 각자의 허실이나 살펴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의 명성은 오래 전부터 흠모해 왔습니다. 오늘 인연이 있어 이렇게 뵙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형언할 수 없습니다.]
말을 멈추고 곽정을 가리킨다.
[이 소년이 하늘 높고 땅 넓은 줄 모르고 조왕께 득죄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소년을 머무르게 하려고 하시는데 저 혼자 반대할 수 없는 입장임을 너무나 잘 압니다. 다만 외람된 요구이오나 여러분의 재주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 이 소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싶은 마음 간질합니다. 제가 힘을 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소년을 도울 마음은 간절하오나 능력이 없어서 그럽니다.]
삼두교 후통해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쪽에 앉아 있다가 왕처일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긴 옷을 어루만지며 나섰다.
[그럼 제가 먼지 도사와 겨루어 보겠소.]
[저 같은 둔한 재주로 어찌 감히 여러분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후형께서 절기(絶技)를 보여 주심으로 해서 저도 좀 배우고 또 이 소년에게 본때를 보여 줌으로 해서 하늘 높은 줄도 알고 사람 위에 사람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하여 다시는 망동함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후통해는 왕처일의 언중유골의 말을 들으면서 화는 나지만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믓거린다. 사통천은 아무래도 전진파의 도사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호동해를 건너다보며 말을 이었다.
[여보 사제. 설리매인(雪裏埋人)의 재주를 왕진인에게 보여 드리고 가르침을 받구료.]
이때도 눈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후통해는 마당으로 내러가 양 팔을 허위적거리며 눈을 쓸어 모아 3자(尺) 정도의 눈무더기를 쌓아 을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발로 다져 놓고는 뒤로 서너 발짝 물러섰다가 몸을 날러 머리는 땅으로, 발은 하늘을 향한 자세로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눈무더기 속으로 처박는다. 흰 눈이 그대도 가슴 높이밖에 차지 않는다. 곽정은 그게 무슨 재주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다만 그가 머리를 눈 속에 거꾸로 박은 채 꼼짝하지 않는 것만이 이상스러울 뿐이다. 사통천이 완안강의 수종들을 향해 부탁을 한다.
[여러분께서 귀찮으시겠지만 저 후형 머리 부분에 있는 눈을 단단하게 다져 주시오.]
뭇 수종들이 재미있다는 듯 시시덕거리며 대들어 사방의 눈을 꼭꼭 다졌다. 원래 이 사통천과 후통해는 황하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수상(水上)의 무공은 훌륭했다. 물의 성질을 잘 알고 있어서 물 속에 잠수를 하면서도 숨을 쉬지 않고 견디는 재주가 남달리 뒤어난 데가 있었다. 그래서 후통해는 눈 속에 머리를 박고도 호흡을 멈춘 채 버티고 있어도 괜찮은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칭찬을 하다가 오랜만에 후통해가 손을 뻗고 머리를 눈 속에서 빼는 것을 보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곽정도 소년이라 박수를 치면서 덩달아 좋아했다. 후통해는 자리로 들아와 술을 마시면서도 계속 곽정을 노려본다.
[제 사제의 재주가 별 것 아니다 공연한 웃음거리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려.]
사통천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뻗어 접시 위에 있는 호박씨를 주워 들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퉁긴다. 호박씨는 선을 그리며 튀어 나간다. 호박씨 하나 하나가 화청 앞에 있는 흰 벽에 가 꽂힌다. 순식간에 벽 위에 요(耀)자가 새겨진다. 그 벽은 좌석에서 서너 장 거리나 떨어져 있었다. 호박씨는 가볍고도 연한 것인데 어떻게 저렇게 날아가 박힐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솜씨다. 왕처일은 생각했다.
(귀문용왕이 황하를 독점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런 비범한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로구나!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벽에는 또 무(武)자가 생겼다. 다음엔 양(揚)자, 보아하니 요무양위(耀武揚威)라는 네 글자를 새길 모양이다. 팽련호는 이를 보면서 몸이 근질근질한 눈치다.
[사형, 사형의 귀신 같은 재주엔 정말 탄복했습니다. 우리 다같이 동업을 합시다그려. 이 도사께서 우리 재주를 끝까지 시험해 보실 눈치니 사형 덕에 어디 나도 체면이나 세웁시다.]
몸을 번쩍 날러 벌써 문쪽에 나가 섰다. 이때 사통천은 마지막 남은 위(威)자를 반이상 새겨 놓고 있었다. 팽련호는 두 손을 오므렸다 펐다 오므렸다 하면서 사통천이 쏜 호박씨를 허공에서 받아 버렸다. 호박씨는 작고 속도도 빨랐는데 한 개도 흘리지 않고 모두 받아 버린 것이다. 그는 받아든 호박씨를 입 안에 털어 넣는다. 곽 깨무는가 하는 순간 벌써 빈 껍질을 뱉아 놓았다. 한 사람은 계속해서 퉁기고 한 사람은 계속 받아 먹고 뱉아 낸다. 어찌나 빠르게 뱉는지 꼭 물 떨어지는 것과 흡사했다. 여러 사람의 환호성 가운데 팽련호가 웃으며 말을 꺼낸다.
[아이구, 난 이제 더 못 먹겠어요.]
펄쩍 뛰어 제자리로 돌아오고 사통천은 남은 위(威)자를 마저 새겨 놓았다. 만일 다른 사람이 중간에 나섰더라면 가만 보고 있을 사통천이 아니었지만 그들 둘은 벌써 2,30년 사귄 우정이라 그냥 웃고 넘긴 것이다. 사통천이 고개를 돌러 구양공자를 건너다본다.
[어디 이번엔 구양공자께서 희한한 재주를 좀 구경시켜 주십시오.]
구양공자는 그의 말투에서 어딘가 가시 돋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때 시중드는 사람이 달콤한 음식을 바꾸어 놓으며 젓가락도 새것으로 갈아 놓았다. 양념한 음식을 먹던 젓가락을 치우는 것이다. 구양공자는 거둔 젓가락을 받아 쥐고 휙 하니 밖으로 뿌린다. 20개의 젓가락이 일시에 눈 속에 꽂힌다. 그런데 그냥 꽂히는 게 아니라 얌전한 네 송이의 매화를 그린 것이다. 젓가락쯤 눈 속에 꽂는 일이야 어린애들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한꺼번에 20개를 뿌려 이런 도형을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솜씨는 정말 오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곽정이나 완안강은 이해하기 어려울 테지만 왕처일이나 사통천 등이 사믓 마음속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왕처일은 계속해서 자리를 피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무림 가운데의 고수라면 평소 단 한 사람을 만나 보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다들 이곳에 모이게 됐을까? 백타산 산주라든가 영지상인, 삼선노괴 등은 이 중원에 잘 나타나는 인물들이 아닌데 어째서 이 연경에 함께 와 모였을까? 여긴 분명 어떤 곡절이나 음모가 있는 것이다.)
이 궁리 저 궁리 몰두하고 있을 때 삼선노괴 양자옹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청 앞에 놓인 돌북(石鼓) 옆으로 다가선다. 허리를 가볍게 숙인 채 오른손을 석고의 허리에 턱 얹고 번쩍 집어 던진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손에 마치 끈끈이가 묻어 있는 것처럼 7,80근이나 되는 무겁고도 미끈미끈한 석고를 살짝 손에 붙여 허공으로 두어 장 높이로 집어 던지니 말이다. 그는 석고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몸을 바람처럼 날리며 양 손을 움직여 또다른 두 개의 석고를 먼저와 같이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이때 맨 먼저 던졌던 석고가 떨어져 내여왔다. 그가 재빨리 대들어 이마로 석고를 반으니 석고가 이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여러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성 속에 두번째 석고가 맨 먼저의 석고 위에 내려앉아 돌고 다시 세번째의 석고도 내려와 돈다. 그는 세 개의 석고를 이마에 인 채 여러 사람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하고 서서히 걸음을 옮겨 마당으로 내려가 풀쩍 뛰며 왼발을 더듬어 구양공자가 눈 속에 꽂아 둔 젓가락 위에 올라타고 회중포월(懷中抱月)이며 납궁식(拉弓式) 등 연청귄(燕靑拳)의 묘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 위엔 200여 근이 넘는 세 개의 석고를 이고도 발길을 사뿐사뿐 옮겨 뾰족한 젓가락 위만 밟고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은으로 된 젓가락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가늘고 약한 물건임엔 틀림없는데도 기울어지거나 구부러지지도 않고 서 있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이 연청권 일로를 다 보여 주었는데도 쓰러진 젓가락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정말 묘기백출이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양자옹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머리를 갸우뚱, 세 개의 석고를 동시에 내려 놓고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다. 왕처일은 강호를 두루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마술을 하는 사람들이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돌리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양자옹과 같은 이런 재주는 본 일이 없었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경신 무공이 어떠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곽정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희한한 재주에 혀만 찰 뿐이다.
이제 주석(酒席)도 거의 끝나는 판이라 심부름꾼들이 금으로 된 대야에 따뜻한 물을 가져다 손님들의 손을 씻게 했다. 왕처일은 마음속으로 또 생각해 본다.
(영지상인만 아직 재주를 보여 주지 않고 있는데 그가 재주를 보이면 함께 대들어 곽정에게 손을 쓰겠지.)
비스듬히 그 장승을 건너다보니 아무 일도 없다는듯 손만 씻고 있었다. 다들 손을 씻은 지 오랜데 그는 아직도 내야에 두 손을 담그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의아한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왕처일과 구양공자는 그가 손을 담고 있는 대야에서 한 가닥 김이 피어오르고 있음을 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대야 속에선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다가 마침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왕처일은 정말 놀랐다.
(내공을 이용하여 체내의 열기로 대야의 물을 끓이다니, 더 기다리다가는 큰일나고 말겠구나. 무슨 수를 써야 한다.)
왕처일은 다급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큰일이다 싶어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왼손을 써서 완안강의 맥문(脈P玗)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여러 사람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을 때에는 왕처일이 벌써 완안강의 혈도를 찌르고 왼손을 그의 등에 얹어 놓고 있었다. 사통천 등 모두가 놉랍기도 하고 화도 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왕처일이 오른손에 술주전자를 들고 말을 꺼냈다.
[방금 여러분의 신기(神技)를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자, 수고하신 여러분에게 술을 따라 올리겠습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지도 않고 주전자를 든 채 일일이 술을 따랐다. 술따르는 것쯤이야 예삿일이지만 저렇게 따르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다. 손만 추켜들면 주전자 입에서 술이 쏟아져 내려와 각자의 술잔에 차는 것이 아닌가? 그 술잔이 멀든 가깝든 똑같은 자세로 따르고 있는데도 공교롭게도 분수처럼 묘하게 술이 떨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술잔은 바닥이 빈 채요, 반만 차있는 술잔도 있는데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히 따르면서 한 방울도 넘치거나 흘리지도 않는다. 영지상인 등 모두가 그의 내공의 심오함을 알았다. 오른손으로 그렇게 술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왼손은 여전히 완안강의 등에 올려놓은 채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완안강의 폐나 내장은 부서지고 만다.
여러 사람들은 눈을 멀거니 뜬 채 속수 무책이다. 왕처일은 마지막으로 곽정과 자기의 잔에 술을 채우고 들이마신다.
[제가 여러분과는 아무 원한이 없습니다. 또 이 곽 소년은 제 제자도 아니오 친척도 아닙니다. 다만 그의 마음이 어질고 착함을 보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간곡히 청하오니 제 체면을 보아 오늘만은 그냥 무사히 나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여러 사람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묵묵 부답이다.
[오늘 여러분께서 이 소년을 용서해 주신다면 저도 이 왕자를 풀어 주겠습니다. 하나는 금지옥엽 같은 왕자요, 하나는 평범한 백성이니 결코 여러분께서 손해를 보시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양자옹이 대답을 한다.
[왕도장께서 시원스럽게 말씀하시니 그냥 그렇게 합시다.]
왕처일은 아무 의심도 없이 팔꿈치로 완안강의 허리를 쳐 혈도를 풀고 자리에 앉게 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명색이 일종 일파(一宗一派)의 우두머리들이다. 마음이 아무리 악독하고 음흉하다 하더라도 기왕 약속을 한 이상 식언할 수 없는 체면들이다. 왕처일은 여러 사람들을 향해 일일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곽정의 손을 잡았다.
[자, 이제 그만 작별하겠습니다. 후일 뵙겠습니다.]
독 안에 든 쥐를 그대로 내보내는 격이다. 분하고 원통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완안강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도사님, 기회 있으시면 또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잘 지도해 주십시오.]
[흥, 무슨 면목으로 또 만난단 말이냐?]
왕처일과 곽정이 화청(花廳) 문어귀에 이르자 영지상인이 다시 입을 연다.
[도사의 공력은 정말 오묘하여 탄복했습니다.]
합장을 하여 인사를 하다가 돌연 쌍장을 뿌리니 맹렬한 바람이 왕처일을 향해 분다. 왕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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