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5 김용(金庸)
图片来源 | 射雕英雄传
小說 英雄門 第 1 部 蒙古의 별 第 五 卷
저자 : 김 용
역자 : 김일강
발행 : (주)고려원
1993년 11월 20일 2판 1쇄 발행본
타자,편집 : Zazeung
第 五 卷. 第 章.(通卷 章). 거지왕이 된 황용.
6,7명의 개방 방중이 전후좌우에서 동시에 대들었다. 곽정은 산처럼 우뚝 선 채 왼팔을 비스듬히 가슴에 대고 있었다. 먼저 달려든 세 명이 일제히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낚아채려 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또 몇 명이 덤벼든 순간 움직거리지도 않던 곽정이 팔을 뻗으며 빙그르르 한바퀴 돌았다. 그러자 곽정에게 달려들었던 개방 사람들이 등이며 허리며 엉덩이를 걷어차여 어이쿠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곽정이 다시 몸을 돌려 세우며 양강을 공격할 태세를 취하는데 달빛에 두 명이 황용을 덮치는 것이 보였다. 그는 황용이 다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쫓아가 봐야 늦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몸에 무슨 암기를 숨기고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곽정은 급한 김에 얼른 신발을 벗어 들어 힘껏 던졌다.
그들은 황용이 곽정처럼 몸을 빼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 병기를 들고 그녀를 죽여 버릴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홍방주를 살해한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 둘은 홍방주에 대한 충성심이 그렇듯 철두철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황용 옆으로 다가서서 미처 병기를 들기도 전에 등뒤에서 강한 바람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살수를 쓰려는 기척이 났다. 그중 무공이 비교적 나은 사람이 급히 몸을 돌리는 순간 곽정이 던진 신발이 그의 앞가슴을 때렸다. 다른 한 명은 미처 몸을 돌리지 못하고 등을 맞았다. 헝겊으로 만든 신이라 가볍고 부드럽기는 했지만 곽정이 내력(內力)을 기울였으니 위력이 이만저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비틀거리다 하나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다른 하나는 뒤로 벌렁 나가떨어져 일어나질 못했다. 팽장로는 그들 옆에 서 있다가 이 광경을 보자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곽정이 손을 휘둘러 황용에게 달려드는 방중을 밀어붙이고 그녀를 묶은 오라를 풀어 주기 시작했다. 그가 막 고리 하나를 풀었는데 개방의 방중이 다시 몰려들었다. 곽정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대로 구처기, 왕처일 등이 천강북두의 진법으로 적을 방어할 때와 마찬가지로 오른손을 뻗어 그들을 상대하면서 왼손으로는 황용을 묶은 오랏줄을 풀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주백통에게 전수받은 쌍수호박의 재주로 일심이용(一心二用)의 기술을 습득했다. 한 손으로는 오랏줄을 풀며 다른 한 손으로는 적을 맞아 싸우면서도 당황하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차 한잔 마실 시간도 못 되어 곽정과 황용 두 사람은 방중 수백 명에게 겹겹이 포위되었다. 그러나 뒤에 있는 사람들은 손을 쓰기는커녕 곽정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곽정은 그들을 유인할 생각으로 시종 한 손으로 맞설 뿐 살수 따윈 쓰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황용의 손발을 묶은 오랏줄을 전부 푼 뒤에 입에 물린 재갈까지 빼냈다.
[용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황용은 그의 무릎에 비스듬히 누운 채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치진 않았어요. 몸이 나른한 게 맥이 없을 뿐이에요.]
[그럼 누워 좀 쉬고 있어. 내가 대신 분풀이를 해줄게.]
하나는 땅바닥에 앉은 채요, 하나는 반듯이 누운 채였지만 두 사람은 사방에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군개들이 떠드는 소리가 요란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디 한번 공격을 해보세요. 그러나 그들에게 부상을 입혀서는 안돼요.]
황용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잘 알아.]
곽정은 왼손으로는 황용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오른손에 힘을 모았다. 그러자 펑 소리와 함께 방중 세 명이 사람들 머리 위로 비스듬히 날아갔다. 군개들이 놀라 우우거리는 사이에 다시 네 명이 곽정의 장력에 날아갔다.
[형제 여러분, 모두들 비켜나시오. 팔대(八袋) 제자가 이 좀도둑과 대결하도록 합시다.]
간장로가 호령하자 군개들은 분분히 흩어졌다. 그리하여 곽정과 황용 옆에는 각자 등에 마대를 짊어지고 있는 왕초 8명만이 남았다. 이들은 사대 장로의 차석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다. 각자 방중 한 무리씩을 통솔하고 있는데 양강을 데려은 뚱뚱보와 홀쭉한 거지도 그 안에 있었다. 팔대 제자는 원래 아흡 사람이었는데 여생이 자살하는 바람에 이제 여덟 사람밖에 남지 않았지만 각기 다 고수들이라 곽정은 일어나 상대하려고 했다.
[앉아서 하세요. 그래도 충분할 것 같아요.]
(여덟 사람이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대항하기 어려울 테니 우선 몇 사람을 먼저 해치워야겠구나.)
곽정은 이런 생각을 하며 우선 우가촌에서 양강을 데리고 온 뚱뚱보와 홀쭉이를 노렸다. 왼손으로 황용의 몸에서 푼 오랏줄을 가지고 단경반타(斷脛盤打)의 솜씨를 발휘해 땅바닥을 쓸었다. 이는 마왕신(馬王神) 한보구에게 금룡편법(金龍鞭法)을 배울 때 익힌 재주로 편법은 같지만 공력이 크게 진보한 뒤라 그 위력이 대단했다.
두 거지는 오랏줄이 땅바닥을 휩쓸자 펄쩍 뛰어 피했다. 곽정은 춤추듯 오랏줄을 흔들며 앞과 뒤, 그리고 왼쪽을 막고 오른쪽만 비워 두었다. 이 빈틈이 공교롭게도 뚱뚱보와 홀쭉이 앞에 있었다. 나머지 여섯 사람은 공격을 하려 해도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두 거지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즉시 달려들었다.
[공격하면 위험해!]
간장로가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곽정의 장풍이 질풍처럼 날아 두 거지의 어깨를 때렸다. 두 거지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 검은 옷을 입은 철장방 무리 쪽으로 날아갔다. 두 사람한테 쏟아진 충격은 같았지만 하나는 뚱뚱하고 다른 하나는 말랐으므로 무거운 사람은 가까운 곳에, 가벼운 사람은 멀리 날아가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받고 함께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구천인은 원래 한쪽 옆에 비켜서서 수수방관하며 두 거지가 허공에 뜨는 것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부하를 받으며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저 어린것이 또 격산타우법으로 쳤으니 내 부하가 죽거나 중상을 입겠구나.)
구천인은 이렇게 생각하고 곧 부하들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날아간 두 거지는 부상을 입지 않은 듯 벌떡 일어섰지만 철장방의 두 방중은 벌써 뼈가 부러져 엉금엉금 땅바닥을 기고 있었다. 구천인이 화가 나 곽정을 향해 머리롤 돌리려고 하는데 또 등뒤에서 바람소리가 일며 팔대 제자 두 명이 곽정의 장력에 밀려 날아왔다. 구천인은 이 격산타우가 원중근경(遠重近輕)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수법은 직접 당하는 사람은 대수로울 것이 없지만 간접적으로 당하는 사람의 피해는 대단했다. 즉시 팔을 들어 그중 한 명은 사람이 없는 데로 밀어 보내고 쌍장을 모아 또 한 거지를 향해 장풍을 날렸다. 이 일격은 그가 평생 명성을 날리던 철장의 무공이었다. 만약 그의 장력이 곽정의 것보다 우세하다면 날아오는 힘을 감퇴시킬뿐만 아니라 여력을 가지고도 그 거지를 구할 수 있을 것이요, 만약 열세라면 자기가 부상을 입거나 수세에 몰리게 될 것이다.
개방 사대 장로와 황용은 구천인이 이 쌍장으로 곽정과 정면 대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승패가 어찌 될지 잔뜩 주시하고 있는데 그의 쌍장이 날자 팔대 제자가 허공에서 잠시 정지 상태로 있다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는 한참 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다시 곽정에게 달려들었다.
이렇게 되자 개방 사대 장로는 구천인의 무공이 곽정과 엇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저토록 어린 곽정이 천하에 명성을 날리고 있는 구천인과 무공이 백중지세라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혀를 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황용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니 저 늙은 사기꾼, 공력이 별것 아닌데 무슨 힘으로 곽정 오빠의 장력과 버틸 수 있었단 말인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구천인은 이 한 번의 대결로 곽정의 실력을 알았다. 이제 여기서 그와 사생결단을 해본다 하더라도 이길 승산은 없었다. 일세의 영웅으로 자부하던 구천인은 이 이름없는 청년에게 대들어 체면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결국 오른손을 휘둘러 철장방 사람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개방 팔대 제자의 무공은 윤지평이나 정요가와 비슷했다. 곽정이 한 번 손을 써 4명을 격퇴한 셈이다. 그중 한 명이 다시 덤벼들기는 했지만 곽정은 항룡십팔장과 천강북두의 진세를 배합하여 맞섰다. 그 진세의 용맹하고 기민한 변화를 남은 다섯 사람이 당해 낼 재간이 있을 리 만무였다. 만약 곽정이 홍칠공의 체면만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그들은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것이다.30여 초를 겨루다 또 두 명이 장력에 쓰러졌다. 남은 세 사람은 더 공격하지 못하고 달아나려고 했다. 곽정이 왼손에 든 오랏줄을 휘둘러 두 사람의 발목을 휘감아 묶었다. 곽정은 그들을 끌어당겨 손을 뒤로 돌려 묶었다.
황용은 그가 대승을 거두자 웬만큼 화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자기를 잡아 온 팽장로가 웃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녀는 강호에 섭심술(攝心術)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섭심술에 걸리면 졸음이 밀려올 뿐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조종을 받으며 반항할 힘도 잃는다는 것이었다. 팽장로가 쓴 것이 바로 이 법술 같았다.
[곽정 오빠, 구음진경 가운데 혹시 섭심법에 대한 이야기가 있던가요?]
[없었는데....]
황용은 실망이 컸다.
[저기 웃고 있는 팽장로를 조심하세요. 서로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말예요.]
[그렇지 않아도 그 영감을 두들겨 패야만 속이 풀리겠어.]
곽정은 이렇게 말하며 황용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양강을 노려보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양강은 곽정이 용맹을 떨치며 군개들과 대결할 때부터 불안에 떨고 있었다. 군개들이 많으니 어떻게 해서든 이길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그런데 곽정은 군개를 하나하나 다 물리치고 마침내 자기를 향해 접근해 오는 것이 아닌가? 양강은 그에게 잡히면 뼈도 추리지 못하겠다 싶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 장로님, 우리 개방에 영웅 호한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렇게 버릇없이 미쳐 날뛰는 자 하나를 감당해 내지 못한단 말이오?]
간장로가 파랗게 질려 있는 양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이렇게 속삭였다.
[방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아무리 무공이 높다 하더라도 중과부적일 것입니다. 저희가 차륜전(車輪戰)으로 꼼짝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여봐라, 팔대 제자는 견벽진(堅壁陣)을 치도록 하라!]
간장로가 큰소리로 호령하자 팔대 제자 중 하나가 성큼 앞으로 나서고 방중 10여 명이 앞뒤로 나란히 줄지어 섰다. 그들은 서로 팔을 껴 두꺼운 담을 친 채 소리를 지르며 곽정과 황용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달려들었다. 황용이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왼쪽으로 뛰어 피하자 곽정이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러자 동서 양편에서 방중이 다섯 줄로 서서는 돌격해 들어왔다.
곽정은 방중이 괴상한 전법으로 다가들자 그들이 접근하기를 기다려 물러서지도 않고 쌍장을 들어 밀어붙였다. 그의 장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이 견벽진은 10여 명이 합세한데다가 밀고 들어오는 여세 때문에 쉽게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견벽진 가운데에 곽정이 내쏜 장력이 미치자 잠시 주춤하는 빛을 보였다. 하나 그도 잠시, 어느 틈에 견벽의 양쪽이 곽정을 에워싼 채 밀려들었다. 곽정은 하마터면 이 거대한 힘에 부딪혀 쓰러질 뻔했다. 급히 땅을 찍으며 몸을 날려 사람들 머리 위로 날아 빠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몸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또 하나의 장벽이 밀려 들어왔다. 급히 숨을 몰아 쉬고 오른발로 땅을 찍으며 또 한 번 사람들 머리 위로 날아 피했다. 그런데 그 벽은 계속해서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처럼, 마치 거대한 바쿼처럼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곽정이 제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황용의 몸놀림은 곽정보다 기민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메뚜기처럼 피해 다녔지만 시간을 끌수록 호흡만 가빠지고 견벽을 치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졌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 피하던 곽청과 황용은 마침내 산모통이로 몰리기 시작했다.
[곽정 오빠, 우리 절벽 쪽으로 물러나요.]
황용은 언뜻 한 가지 꾀를 떠올렸다. 곽정은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말을 좇아 절벽 쏙으로 물러났다. 이제 낭떠러지에서 겨우 대여섯 자쯤 떨어진 위치라 개방의 견벽도 마침내 발길을 멈춘 채 더는 접근하지 못했다. 앞뒤를 살피던 곽정은 그제야 황용의 꾀를 알아차렀다.
(옳지! 아래는 깊은 낭떠러지니 저들이 돌격하다가 멈추지 못하면 떨어져 죽는다는 거로군.)
곽정이 황용을 바라보며 칭찬을 해주려고 하는데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두껍고도 높은 견벽이 다시 자기들을 향해 서서히 접근해 오는 것이었다. 천천히 그들 두 사람을 몰아붙여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겠다는 속셈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수백 명이 한덩어리가 되어 밀려오는 바람에 도대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곽정은 일찍이 몽고에 있을 때 마옥과 함께 밤마다 절벽을 오르내린 일이 있었다. 이 군산 절벽이 몽고에서 오르내렸던 절벽보다 높거나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벽은 점점 더 거리를 좁혀 왔다.
[용아, 빨리 내 등에 업혀. 우리 내려가자구]
[소용없는 일이에요. 저들이 돌을 집어 던질 텐데, 그럼 끝장이에요.]
황용이 절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곽정은 정말 난감했다. 손을 써볼 여지도 없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때 퍼뜩 《구음진경》 상권에 있는 구절 하나가 생각났다.
[용아, 진경 가운데 이혼대법(移魂大法)이란 일편이 있는데 용아가 말하던 섭심법(攝心法)과 비슷할 거야.....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힘을 다해 저들과 함께 떨어지자구.]
[안 돼요, 모두 사부님께서 끔찍이 사랑하시던 형제들인데 우리가 저들을 많이 죽여서 무슨 이로움이 있겠어요?]
곽정은 두 팔을 뻗어 그녀를 얼싸안은 채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빨리 용아나 먼저 달아나!]
곽정은 황용의 볼에 가볍게 입맞춘 뒤 있는 힘을 다 모아 그녀를 멀리 집어 던졌다. 황용은 구름을 타고 나는 듯 수백 명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곽정이 혼자 군개와 대결할 작정으로 황용만을 빠져 달아나게 한 것이다.
황용이 두 다리를 구부려 사뿐히 땅바닥에 내려서며 보니 때마침 양강이 의기양양하게 싸움을 독려하고 있지 않은가. 하늘이 준 기회를 그냥 넘겨 버릴 그녀가 아니었다. 황용은 양강 앞으로 몸을 날리며 왼손으로 녹죽장 끝을 잡았다. 양강은 느닷없이 자기를 덮쳐 오는 황용을 보고 깜짝 놀라 지팡이로 치려 했다. 그러나 황용은 오른손 두 손가락으로 양강의 눈을 노리고 대들며 동시에 왼발을 번쩍 들어 지팡이를 밟아 눌렀다. 양강은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버리고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양강의 무공은 황용에 견주어 보잘것 없었다. 게다가 황용의 이 초술은 홍칠공에게 전수받은 타구봉법 중 맨 마지막인 오구탈장(獒口奪杖)이었다. 이것은 만약 죽장을 다른 고수에게 빼앗겼을 때 즉시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수법으로서 백발백중이었다. 무공이 양강의 몇 배가 넘는 고수라 하더라도 이 초술에 걸리기만 하면 영락없이 뺏기게 마련이다. 황용이 노린 것은 죽장이었지 눈을 찌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손놀림이 빨랐던 탓에 양강은 두 눈을 찔리고 말았다. 그 순간 양강은 지독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황용은 죽장을 높이 치켜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개방 형제들은 즉시 행동을 멈추시오. 홍방주께서는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간사한 무리들이 만들어 낸 낭설입니다.]
군개들은 너무나 뜻밖의 말이라 어리둥절하여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반가운 소식을 듣기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모두들 고개를 돌려 황용을 바라보았다.
[형제 여러분,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홍방주님의 소식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양강은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방주요, 여러분은 내 명령에 좇아야 하오. 우선 그 사내 녀석을 낭떠러지로 몰아 떨어뜨리고 나서 이 미친 여자를 잡으시오.]
개방 방중들은 방주를 신주 모시듯 해야 하며 아무리 큰일이 발생하더라도 방주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금물이었다. 양강의 호령이 떨어지자 즉시 함성을 지르며 다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여러분, 이걸 좀 똑똑히 보십시오. 방주의 타구봉이 내 손에 있으니 내가 바로 개방 방주예요.]
황용도 지지 않고 큰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군개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렸다.
[우리 개방이 천하를 종횡하는 터에 오늘 무뢰배들이 뛰어들어 우리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오. 여생과 여조흥 두 형제를 괴롭혀 죽게 만들었고, 노장로는 중상을 입었으니 이 무슨 기막힌 노릇입니까?]
황용이 계속 부르짖자 군개들도 뒤숭숭해지는지 반 이상이 고개를돌리고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모두가 이 양가 성을 가진 간신과 철장방이 야합해 홍방주가 돌아가셨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까닭입니다. 여러분은 이 양가 성을 가진 작자가 누군지 알기나 하십니까?]
[누군지 빨리 말씀을 하시오!]
군개들 중 한 패가 소리지르며 재촉하자 다른 한 패가 또 이렇게 외쳤다.
[그 도둑 계집 말에 귀기울이지 마시오. 모두가 허튼수작이오!]
황용은 분연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 사람 성은 양가가 아니라 완안으로서 대금국 조왕야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우리 송나라를 멸하려고 온 것입니다.]
군개들은 어리둥절하여 누구 말이 옳은지 몰라 웅성거렸다. 황용은 생각했다.
(이 일을 단번에 믿게 할 수는 없다. 차라리 다른 꾀를 써보는 게 낫겠다.)
황용은 곧 품속을 더듬어 보았다. 다행히 찾는 것이 고스란히 있었다. 황용은 예전에 주총이 구천인에게서 훔쳐낸 철장(鐵掌)을 꺼내 높이 들어올리며 외쳤다.
[이건 내가 양가놈한테서 방금 빼앗은 물건인데 다들 좀 자세히 보십시오. 이게 도대체 뭡니까?]
군개들은 호기심이 발동했으나 황용과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다가 달빛 아래라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르르 몰려와 자세히 살펴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이건 철장이 아니오? 이게 어째서 그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을까?]
[바로 그 점이오. 저자가 철장방의 첩자이니 자연 이것을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양강은 이 말을 듣고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즉시 손을 번쩍 들어 쇠송곳(鍋錐) 두 개를 황용의 가슴을 노리고 던졌다. 비록 거리가 가깝기는 했지만 워낙 손이 빨라 두 줄기 은광이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황용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군개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암기다! 조심하시오!]
[어이쿠, 야단났구나!]
그러나 쇠송곳은 황용이 입은 연위갑에 부딪혀 쩽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황용은 양강을 쏘아보며 앙칼지게 말했다.
[양가야, 네가 양심에 찔리는 바 없다면 무엇 때문에 암기로 나를 살해하려고 덤비느냐?]
군개들은 황용이 암기에 맞았는데도 아무 일이 없자 더욱 괴이하게 생각하며 수군거렸다.
[도대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알 수가 있나!]
[홍방주께서는 정말 살아 계신 것입니까?]
사람들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제히 사대 장로를 바라보며 나서 주기를 바랐다. 군개들에게 에워싸여 있던 곽정이 견벽이 흐트러지고 어수선한 틈을 타 이쪽으로 왔는데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때 노유각은 벌써 정신을 차리고 세 장로와 함께 이마를 맞대고 의논했다. 노유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사정을 잘 알 수 없으니 먼저 양쪽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봅시다. 그러나 무엇보다 급한 일은 홍방주의 생사부터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정의파 세 장로의 의견은 달랐다.
[우리가 이미 방주를 모셨는데 그걸 바꿀 수야 없는 일 아니겠소? 대대로 이어 내려온 우리 방의 규범대로 하면 방주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네 사람은 끝내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정의파 세 장로는 서로 손짓을 하며 양강에게 다가갔다. 간장로가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다만 방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오. 어디서 굴러 왔는지 저 여자가 우리를 현혹하는데 절대로 그 말을 들어서는 아니 되오. 형제 여러분, 우선 저 여자를 잡아 이실직고하도록 만듭시다.]
그때 곽정이 헌원대(軒轅臺)로 올라서며 소리를 질렀다.
[누가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댄단 말이오?]
뭇사람들이 그의 기세에 눌려 감히 대들 생각을 못했다. 구천인은 부하들을 데리고 멀찌감치 서서 개방에 내분이 일어나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홍방주께서는 지금 임안의 대내 금궁에 무사히 계십니다. 어주의 음식이 잡숫고 싶어 그냥 거기 계시는데 나더러 본방의 방주를 대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실컷 잡수시고 나면 여러분을 만나러 오실 것입니다.]
황용의 낭랑한 말소리에 사위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대 장로나 팔대 제자 등은 홍칠공의 식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있으므로 확실히 일리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저 양가 녀석이 철장방을 불러들여 개방을 해치려 들고 또한 방주의 타구봉을 훔쳐 사람들을 속이는데도 여러분은 그걸 모르고 속아넘어간단 말입니까. 게다가 경험도 풍부하고 아는 것도 많은 우리 방의 사대 장로마저 저런 젖비린내 나는 놈의 흉계에 말려들다니 이 무슨 꼴입니까?]
군개들은 황용의 질책에 일제히 시선을 사대 장로에게 돌렸다. 궁지에 몰린 양강은 끝까지 우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홍방주께서 아직까지 살아 계시다면 무엇 때문에 방주 자리를 물려준단 말이오? 또한 그분께서 방주 자리를 계승하라고 하셨다니, 그래 무슨 증거라도 가지고 있단 말이오?]
황용은 죽장을 한 번 휘두르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방주의 타구봉인데 그래 이것이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양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건 분명히 내 법장(法杖)인데 방금 내 수중에서 빼앗아 가는 걸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보았단 말이오.]
[홍방주께서 만약 당신에게 이 타구봉을 물려주셨다면 타구봉법도 함께 전수해 주셨을 텐데 그렇다면 이 타구봉을 어째서 내게 빼앗겼단 말이오?]
양강은 그녀가 계속해서 타구봉(개 때리는 막대기)이라고 부르는 걸 듣고 황용이 경박해서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다.
[이건 우리 방 방주의 법장이오. 무슨 놈의 개 때리는 막대기니 뭐니 떠들어대면서 신성한 보물을 모독하고 깎아 내린단 말이오!]
양강은 이 말을 함으로써 군개의 환심과 지지를 얻을 것으로 믿었다. 그는 이 죽장의 본래 이름이 타구봉임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 만난 두 거지가 이 죽장을 보고 너무나 정중하게 대하기만 했을 뿐 양강과 동행하면서도 타구봉이란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말은 분명히 이 죽장의 본명을 모른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군개들은 즉시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양강은 워낙 눈치 빠른 사람이라 자기가 실언을 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토록 중요한 법장에 그런 천박한 이름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용이 간드러지게 한바탕 웃고 입을 열었다.
[무슨 신성한 보물이 어쩌고저쩌고 야단이에요. 탐나거든 한번 가져가 보시지.]
황용은 죽장을 뻗어 양강에게 내밀었다. 양강은 멋모르고 죽장을 받으려 썩 나섰다. 그러나 옆에 있는 곽정을 보자 오금이 저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팽장로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방주님,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우선 받아 오고 보지요.]
그가 먼저 황용 앞으로 나서고 양강은 장로들과 함께 그 뒤를 따라 황용에게 접근했다. 황용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죽장을 내밀었다. 양강은 혹시 무슨 함정이 있지 않을까 해서 머뭇거리다 갑자기 왼손올 뻗어 죽장을 빼앗듯 받았다. 황용은 자기 손에서 죽장이 빠져 나가자 웃으며 물었다.
[단단히 잡고 있는 거지요?]
양강은 죽장을 단단히 틀어쥔 뒤 화가 나서 내뱉었다.
[그래 어쩌겠단 말이오?]
돌연 황용이 왼손으로 양강을 치면서 왼발을 날리고 동시에 오른손을 뻗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장을 다시 빼앗아 왔다. 양강을 호위하던 장로들이 깜짝 놀라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죽장은 벌써 황용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이 세 장로는 모두 대단한 고수들이다. 그들은 셋이 호위를 했는데도 방어할 틈도 없이 눈을 멀거니 뜬 채 뺏기자 놀랍기도 했지만 창피해 견딜 수가 없었다.
황용이 다시 죽장을 높이 집어 던지며 말을 꺼냈다.
[단단히 잡을 자신이 있거든 다시 가져 가구려.]
양강은 그래도 머뭇거리는데 간장로가 긴 소매를 휘둘러 죽장을 말아 갔다. 보통 솜씨가 아니고서는 어림없는 동작이었다. 군개들이 이를 보고 환호를 보냈다. 간장로가 죽장 손잡이를 들어올려 양강에게 바쳤다.
[홍방주께서 이 죽장을 물려주실 때 꼭 잡으라는 말씀은 해주시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다른 사람에게 뺏기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의 말씀도 없으셨구요?]
황용은 이렇게 빈정거리면서 발끝으로 땅을 찍으며 간,양 두 장로 사이로 비스듬히 날아 양강 앞으로 다가갔다. 간장로는 왼팔을 뒤집어 잡으려고 했지만 그만 허공을 잡고 말았다. 황용의 재주는 바로 홍칠공이 직접 전수해 준 연쌍비(燕雙飛) 신법(身法)으로 기민하고 재빠른 동작이 꼭 물 찬 제비 같았다. 그토록 가까운데도 실수를 하고 말았으니 그로서도 평생 처음 있는 일이라 간담이 서늘해졌다. 황용이 바람을 일으키며 벌써 죽장을 빼앗아 쥐고 되돌아 날아갔다. 간,양 두 장로가 놀라 펄쩍 뛰어 피하자 다시 황용의 간드러진 웃음 소리가 들렸다.
[이게 바로 봉타쌍견(捧打雙大)이란 재주예요.]
황용은 횐 옷깃을 팔랑거리며 헌원대 동쪽 모서리에 올라가 섰다. 그녀의 손에서 죽장이 달빛을 받아 비취와도 같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이번 솜씨는 더욱 재빠르고 날렵해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빼앗았는지 똑똑히 보지도 못했다.
[홍방주께서 타구봉을 도대체 누구에게 물려주셨단 말입니까? 그래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뭘 꾸물거리고들 계신단 말이오!]
보다 못한 곽정이 큰소리로 외치자 헌원대 아래에 있던 군개들은 부쩍 의심이 일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노유각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형제 여러분, 이 아가씨의 솜씨는 틀림없는 홍방주의 무공이오.]
간장로는 팽,양 두 장로를 보더니 말했다.
[그녀가 홍방주의 제자니 그에게 배웠을 건 당연한 일, 그게 뭐 그리 신기하단 말이오?]
[전부더 타구봉법은 개방의 방주가 아니면 전수해 준 적이 없는데 간장로께서는 그래 이 규범을 모르신다는 말입니까?]
노유각이 따져 말해도 간장로는 냉소만 지었다.
[저 아가씨가 어쩌다 한두 가지 공수창백인(空手愴白刃)의 재주를 배웠다 해서 타구봉법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노유각도 반신반의하고 있던 참이라 이렇게 말했다.
[그럼 좋소! 아가씨 어디 한번 타구봉법의 재주를 펴보시오. 만약 홍방주께서 확실히 전수해 주셨다는 확신만 선다면 천하의 개방 형제들이 절대 순종할 것입니다.]
[이 봉법은 우리도 이름만 들었을 뿐 본 사람이 없는데 누가 그 진위를 식별한단 말이오?]
간장로가 다시 우기고 나섰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겠소?]
노유각도 이제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간장로가 쌍장을 탁 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아가씨의 봉법으로 내 육장(肉掌)을 깰 수 있다면 이 간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방주로 모시겠소. 또 내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능지처참을 해도 두말하지 않겠소.]
[흥 아니, 이 아가씨 나이가 몇인지 아시기나 하오? 제아무리 봉술이 출중하기로 당신이 수십 년 익힌 재주를 어떻게 깬단 말이오?]
간장로와 노유각이 입씨름하는 것을 듣고 있던 양장로는 화가 폭발했다, 그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번쩍 치켜 들고 황용에게 덮쳐들었다.
[타구봉법의 진위는 보면 금방 알 수 있으니 우선 이 칼이나 받으오.]
그는 획휙획 세 번이나 칼을 휘둘렀다. 시퍼런 기운이 번뜩이는 날이 여간 재빠른 게 아니었지만 황용의 급소는 찌르지 못했다. 그러나 날렵하고 정확한 솜씨는 과연 개방 고수다웠다. 황용은 죽장을 허리춤에 꽂은 채 발끝도 움직이지 않고 상체만 가볍게 혼들어 피하며 웃음을 날렸다.
[당신에게까지 타구봉법을 쓸 거야 없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부족함이 많아 보이는데.....]
양장로의 명성은 강호에 자자한 터였다. 그런데 이제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계집애한테서 깔보는 말을 듣고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칼을 마구 휘둘러대며 다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간장로는 이제 황용을 먼저처럼 그렇게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양장로가 성급하게 대들다 그녀를 해치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양장로님, 살수를 쓰지는 마시오.]
간장로가 이렇게 당부하는데도 황용은 태연자약했다.
[괜찮아요.]
황용은 바람처럼 몸을 날리며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팔꿈치로 박으며 손가락으로 찌르는 등 순식간에 가지가지 술수를 변화무쌍하게 펼쳤다. 헌원대 아래서 보고 섰는 군개들은 눈이 어질어질했다. 팔대 제자 가운데 깡마른 거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 이건 연화장(連花掌)이로구나!]
그리고 이번엔 뚱뚱보 거지까지 거들었다.
[아니, 저 아가씨 동추수(銅錘手)를 다 쓸 줄 아네.]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황용은 벌써 권법을 바꾸고 있었다. 헌원대 아래 방중의 고수들이 하나하나 권법의 이름을 불렀다.
[아, 이건 방주님의 혼천공(混天功)이다.]
[하하, 철추퇴법(鐵 腿法)을 쓰는구나!]
[이건 수수파적(垂手破敵)이로군.]
원래 홍칠공은 게으른 탓에 제자를 거두어 무공을 전수해 주기를 꺼려 했다. 개방 제자들도 큰 공을 세워야만 어쩌다 한두 가지 재주를 가르쳐 줄 뿐이었다. 여생의 무공이 약하지 않은 것도 홍칠공에게 항룡십팔장 중의 신룡파미(神龍擺尾)를 배웠기 때문이었다. 홍칠공의 또다른 괴벽 하나는 한 가지 재주를 누구에게 전수해 주면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 재주를 다시 가르치는 법이 없었다. 때문에 개방 형제들이 배운 것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오직 황용만이 워낙 영리한데다 요리 솜씨로 그의 환심을 사 장강(長江)가의 강묘진(姜廟鎭)에서 여러 가지 오묘한 무공을 배웠을 뿐이다. 황용은 군개들 앞에서 홍칠공으로부터 배운 재주를 자랑할 겸 갖가지 솜씨를 펼쳐 보였다. 군개들 가운데 홍칠공에게 직접 배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갈채를 보냈다.
양장로의 도법(刀法) 또한 오묘하여 진짜 실력으로 따진다면 황용보다는 우위였다. 그러나 그녀의 변화무쌍한 재주에 눈이 어지러워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어에만 급급했다. 도광(刀光)과 권영(拳影)이 난무하던 중 황용이 갑자기 손을 거두어 들이며 웃었다.
[이제들 아셨나요?]
그러나 양장로는 자기 실력을 다 발훠해 보지 못했으므로 승복하고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비스듬히 황용을 찔렀다. 황용은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그냥 있었다. 군개들이 비명을 지르고 간장로와 노유각이 큰소리로 외쳤다.
[손을 멈추시오!]
그러나 양창로는 미처 그 말을 들을 새도 없이 그만 황용의 왼쪽 어깨를 찌르고 말았다.
[큰일났구나!]
양장로는 아차 하고 손을 거두려 했으나 돌연 팔이 뻣뻣해지며 단도가 쩔그렁 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황용이 연위갑을 입고 있으리라고는, 그래서 제아무리 날카로운 무기로도 해칠 수 없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손을 거두려고 했지만 그럴 겨를도 없었고 후회해도 이미 소용없었다. 황용이 그의 팔에 있는 회종혈(會宗穴)을 가전의 비법인 난화불혈수(蘭花拂穴手)로 눌러 버렸던 것이다. 황용은 떨어진 단도를 밟고는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어때요?]
양장로는 칼로 어깨를 찔렀으니 아마 죽지 않으면 중상을 입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녀가 아무 일 없으니 영문을 몰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펄쩍 뛰어 피했다.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던 구천인이 소리를 질렀다.
[도화도의 보물인 연위갑을 입고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나! 치려면 골통을 쳐야지]
간장로는 고개를 떨군 채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왜? 믿지 못하시겠어요?]
황용이 웃으며 말하자 노유각이 이젠 그만두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는 황용의 초술이 다채롭긴 하지만 공력으로 따진다면 양장로가 우위라 서로 적수가 아닌 것을 알았다. 그러나 황용은 웃기만 할 뿐 노유각의 눈짓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마음이 불안해 뭐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어느새 다가온 구천인이 두 손목을 잡아 비트는 바람에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을 내뱉을 뿐 말을 하지 못했다. 간장로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아가씨, 나와 대결해 봅시다.]
곽정이 간장로를 살펴보니 원기왕성한 것이 역시 황용이 상대하기에 무리일 것 같아 자기가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까 자기를 묶었던 쇠가죽과 쇠사슬로 엮어 만든 오랏졸을 주워 들고 빙빙 돌리다 휙 날렸다. 그러자 오랏줄은 구천인이 간장로에게 빼앗아 집어 던지는 바람에 바위에 꽂혔던 쇠지팡이에 걸렸다. 곽정이 힘을 쓰자 쇠지팡이가 뽑혀 공중으로 튀더니 간장로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곽정이 몸을 솟구쳐 중간에 나서며 시승육룡(時乘六龍) 일 장으로 쇠지팡이 옆을 쪼갰다. 이는 항룡십팔장 중 일 초로 위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쇠지팡이는 힘을 받자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비스듬히 날아갔다. 곽정이 손을 뻗어 쇠지팡이를 받아 쥐며 왼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천확지굴(天 之屈)의 재주를 부리며 오른손으로는 쇠지팡이 끝을 잡은 채 용사지칩(龍蛇之蟄)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는 좌우호박 기술로 동시에 항룡 이장을 사용했다. 그래서 구천인이 둥글게 구부려 놓았던 쇠지팡이는 곽정이 양쪽에서 잡아당겨 똑바로 펴졌다. 그는 쇠지팡이를 세운 채 쌍장을 모으면서 견룡재전(見龍在田)의 솜씨로 쇠지팡이의 허리를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자, 병기를 받으시오.]
쇠지팡이가 똑바로 선 채 간장로를 향해 비스듬히 날아갔다. 공기를 찢는 소리를 듣고 간장로는 쇠지팡이를 그냥 손으로 받다가는 손뼈가 모두 부러져 나갈 것을 알았다. 그는 펄쩍 뛰어 피하며 혹시 헌원대 아래 있는 군개들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되어 피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위험하니 다들 비켜요.]
그런데 황용이 갑자기 죽장을 뻗어 그 끝으로 쇠지팡이 허리를 눌러 얌전하게 내려놓는 것이었다. 무학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넉 냥을 가지고 천 근을 다스릴 수 있다(四兩撥干斤). 쇠지팡이를 누르는 힘이 가볍기는 했지만 힘만 제대로 쓰면 타구봉법 가운데 압편구배(壓扁狗背)라는 오묘한 수법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오빠는 쇠지팡이, 나는 죽장으로 한번 대결해 볼까요?]
간장로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승산이 없으면 굴복하기로 결심을 내렸다. 그는 허리를 숙여 쇠지팡이를 집어 들고 손잡이를 거꾸로 들면서 다시 한 번 황용에게 머리를 숙였다.
[아가씨께서는 사정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손잡이를 아래로 숙이는 것은 무림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대결을 청할 때 취하는 공손한 태도였다. 같은 수준으로는 대결할 수 없으니 지도해 달라는 부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황용이 죽장을 뻗어 발구조천(發狗朝天)의 솜씨로 쇠지팡이 손잡이를 낚아 올리며 웃었다.
[그렇게까지 겸손하실 것 없어요. 어쩌면 제 재주가 장로님에게 미치지 못할는지 모르니까요.]
이 쇠지팡이는 간장로가 수십 년 동안 공력을 기울여 손에 익힌 병기임에도 불구하고 황용이 가볍게 건드리자 손잡이가 위로 들리며 그의 목을 찌르려고 했다. 간장로는 깜짝 놀라 급히 팔꿈치를 뿌리쳐 피했다. 간장로는 다시 후배의 예의를 차리면서 진왕편석(秦王鞭石)이란재주로 공격을 취했다. 이것은 등뒤에서부터 어깨까지를 나란히 내려치는 것인데 양산박(梁山泊) 호한 노지심(魯智深)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마장법( 魔杖法)이다.
황용은 그 일격의 위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연위갑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잘못 맞았다가는 큰 부상을 입을 것 같아 즉시 홍칠공에게 배운 타구봉법으로 맞섰다. 쇠지팡이 끝이 번쩍 황용을 위협하며 달려들었다. 쇠지팡이 무게는 30근이 넘고 죽장은 겨우 10냥 정도. 그러나 개방 방주 대대로 이어 내려온 봉법은 과연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두 병기가 그 무게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수초를 겨루는 사이에 팔뚝처럼 굵은 쇠지팡이가 죽장에 밀려 맥도 못 추었다.
간장로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본방의 보물을 혹시 실수라도 하여 부러뜨리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몹시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러나 황용의 봉법은 날카롭고 매웠다. 간장로는 혈도와 급소를 계속해서 찔리는 바람에 공격은 고사하고 방어만으로도 진땀을 홀렸다. 곽정은 마음속으로 크게 탄복했다.
(은사님의 무공이 정말 대단하구나.)
이때 갑자기 황용의 봉법이 바뀌었다. 한 손으로 죽장 허리를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간장로는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쇠지팡이를 들어 황용의 왼쪽 어깨를 노리며 덤벼들었다. 황용은 죽장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다가 그 힘을 이용해 밖으로 밀었다. 이렇게 하면 십중팔구 상대방의 힘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
간장로는 쇠지팡이가 손에서 빠져 나가는 것 같아 온 힘을 다해 틀어 잡고 있는데 쇠지팡이는 죽장에 달라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그가 쇠지팡이를 안으로 당기니 죽장도 따라왔다. 그는 자기 무공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장법을 바꿔 가며 덤벼들어도 죽장이 떨어지지 않았다.
타구봉법에는 얽고(絆) 쪼개고(劈) 묶고(纏) 찌르고(戮) 돋우고(排) 유인하고(引) 봉쇄하고(封) 굴리는(轉) 팔결(八訣)이 있다. 황용이 지금 쓰는 것은 둘러쳐 묶는 전(纏)이다. 이 죽장은 마치 단단하고 질긴 등나무 줄기처럼 한번 둘러 묶기만 하면 다시는 뺄 재간이 없는 것이다. 다시 또 수초를 겨루는 사이에 간장로는 온 힘을 두 어깨에 모으고 대력금강장법(大力金剛杖法)으로 쇠지팡이를 휘둘러 보았지만 동쪽을 치면 동쪽으로, 서쪽을 치면 서쪽으로 죽장이 계속 붙어 쫓아다니는 것이었다. 황용은 전연 힘을 쓰지 않고 간장로가 휘두르는 쇠지팡이에 끌려 다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치 그림자가 자기 몸을 쫓아다니는 것처럼 무섭기 짝이 없는 솜씨였다. 그것은 기마술이 뛰어 난 사람이 미쳐 날뛰는 말을 타고 그냥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간장로는 대력금강장법을 채 반도 쓰지 못하고 지체 없이 승복하기로 작정했다. 그가 막 쇠지팡이를 놓으려 하는데 팽장로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금나수로 죽장 끝을 낚아채요!]
[좋지요. 어디 한번 낚아채 보시지.]
황용이 이렇게 응수하며 방법을 바꿔 이번엔 죽장을 돌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사용한 전결(纏訣)은 적을 따라다닌 것이지만 이 전결(轉訣)은 오히려 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죽장이 파란 그림자 덩어리를 이루며 간장로 등뒤에 있는 강간(强間) 풍부(風府) 대추(大椎) 영대(靈臺) 현추(懸樞)의 대요혈을 차례로 찍어 갔다. 이 혈도는 모두 등뒤 척추의 중심에 있는 급소들이라 정확히 찍히기만 하면 죽거나 중상을 입는다. 간장로는 그것을 알았지만 쇠지팡이로 막을 수도 없는 형편이라 더욱 황용 앞으로 다가서며 피했다. 그러나 황용의 죽장은 계속 그 요혈을 노리고 어지럽게 난무하고 있었다.
간장로는 이제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앞으로 펄쩍 뛰어 보았지만 죽장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이번에는 발끝에 힘을 주고 몸을 옆으로 빼보았지만 황용은 더욱 빨랐다. 헌원대 아래 군개둘은 간장로가 황용을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데도 황용은 죽장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다시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꾸어 쥐면서 여유만만하게 서있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간장로가 l0여 바쿼 맴을 돈 뒤에 큰소리로 외쳤다.
[황소저, 이제 그만 하세요. 완전히 승복했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무서워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나를 뭐라고 부르시겠어요?]
[참 그렇지요. 소인이 죽어 마땅합니다. 방주께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간장로가 막 몸을 돌리고 인사를 하려는데 죽장이 여전히 따라왔다. 깜짝 놀라 계속 달리다 보니 땀이 흘러 웃옷은 살에 척 달라붙고 땀방울은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러자 황용도 어지간히 화가 풀렸는지 웃음을 지으며 죽장을 거두었다. 간장로는 특사라도 받은 것처럼 쇠지팡이를 놓고 허리를 굽혀 절했다. 헌원대 아래 군개들도 간장로를 따라 일제히 <방주님!>을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간장로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개방 방규에 따라 황용의 얼굴에 침을 뱉으려고 했다. 하지만 백옥 같은 살결에 산호처럼 홍조를 띤 그녀의 얼굴에 차마 침을 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가 망설이며 다시 침을 꿀꺽 삼키는데 머리 위에서 바람소리가 나며 쇠지팡이가 떨어져 내려왔다. 그는 황용이 의심할까 봐 감히 손으로 막을 생각도 못하고 펄쩍 뛰어 피했다. 그 순간 사람 그림자 하나가 헌원대 위로 번쩍 뛰어오르며 쇠지팡이를 받아 쥐었다. 사대 장로 가운데 세 번째인 팽장로였다.
황용은 그의 섭심법에 걸렸었기 때문에 그를 누구보다 증오하고 있었다. 그가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 잘됐다 싶어 말도 꺼내기 전에 우선 그의 앞가슴의 자궁혈(紫宮穴)을 찍고 계속해서 대혈을 노렸다. 방금 간장로와 대결할 때는 그래도 사정을 보아주었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팽장로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 무공이 간장로에게도 뒤지는데 어찌 황용과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는 황용의 죽장이 자기 요혈을 노리는 줄 뻔히 알면서도 막거나 피하지도 않고 두 손을 모으고 제법 공손하게 절을 했다. 황용은 죽장 끝을 그의 자궁혈에 대고 화가 나서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소인 방주님께 인사드리려고 올라왔습니다.]
황용은 눈을 치뜨고 노려보았지만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가슴이 떨려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무서운 줄 알면서도 이상하게 또 한 번 바라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황용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황용은 고개를 돌릴 겨를도 없이 두 눈을 꼭 감았다. 괭장로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문을 열었다.
[방주님, 피곤하실 텐데 그만 쉬도록 하시지요.]
말소리가 부드러워 달콤하게 들렸다.
과연 황용은 전신이 나른한 것이 정말 푹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때 간장로는 벌써 황용을 방주로 섬기기로 작정한 터라 팽장로가 또다시 섭심법을 쓰려고 하자 달려들어 말렸다.
[여보, 팽장로. 그래 감히 방주님을 어찌하려고 그러오?]
팽장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방주님은 편안히 쉬셔야 하오. 조용히 하시오.]
황용은 위급함을 알았지만 전신이 나른한 것이 두 눈이 스르르 감기며 옴짝달싹하기도 싫고 잠이나 푹 자고 싶었다. 그러나 몽롱해지는 가운데서도 갑자기 곽정이 들려준 말이 생각났다.
[곽정 오빠, 진경 가운데 이혼대법이 있다고 그랬지요?]
황용은 마치 잠꼬대마냥 중얼거렸다. 조금 전부터 곽정은 일이 묘하게 되어가자 만약 팽장로가 사술을 쓴다면 일 장에 박살을 내야겠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황용이 묻자마자 그녀의 귀에 입을 가져 가 경문 내용을 들려주었다.
섭심술이나 이혼대법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최면술 같은 것으로, 강인한 정신력으로 상대방의 심령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간한 사람 아니고는 놀랍고 무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용은 곽정이 들려주는 진경의 내용을 즉시 터득했다. 지관법문(止觀法門)에 의해 제심지(制心止)에서 체진지(體眞止)에 이르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황용은 내공의 기초가 튼튼하고 총명한 사람이라 즉시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하며 참선에 들어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의식이 있고 없고 간에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팽장로는 그녀가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 말에 미혹되어 깊은 잠에 빠진 줄 알고 은근히 기뻐했다. 이번엔 술책을 쓰려고 하는데 돌연 황용이 반짝 눈을 뜨더니 미소를 지었다.
팽장로도 무심결에 그녀에게 답례하듯 미소를 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황용의 미소가 어찌나 달콤한지 자기도 모르게 몸이 흘가분해지며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그래서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웃기 시작했다. 황용은 《구음진경》에 기록된 비결이 과연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황용은 자기 웃음이 상대방의 웃음을 완전히 제어했다는 자신감에 또 한 번 빙긋이 웃었다. 팽장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즉시 진정하려고 노력했지만 놀라고 당황하여 마음이 더욱 산만해지기만 했다. 그는 황용의 웃는 얼굴에 자제력을 잃고 벌떡 일어나 배를 움켜잡은 채 미친 사람처럼 옷어댔다. 그의 허허거리는 읏음 소리가 더욱 커지며 온 산으로 퍼져 나갔다. 군개들은 서로 바라볼 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팽장로, 왜 그러시오? 방주님 앞에서 너무 방자하오!]
간장로가 보다못해 책망했지만 팽장로는 오히려 간장로의 코를 가리키며 허리를 비비꼬고 웃었다. 간장로는 자기 얼굴에 뭔가가 붙었나 해서 옷소매로 몇 번 문질러 보기까지 했다. 팽장로는 헌원대 아래로 뛰어내려서는 땅바닥을 뒹굴며 읏어댔다.
군개들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고 팽장로의 심복 두 명이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소매를 휘둘러 물리치고 정신없이 웃기만 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계속 웃어대던 팽장로는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약 보통 사람이 이혼대법에 걸리면 그냥 몽롱해져 잠이 들어 버릴 테지만 팽장로는 정신을 집중해 섭심술로 황용과 버티던 중 황용이 미소로 반격하는 바람에 오히려 자승자박이 되어 다른 사람 10배 이상으로 곤욕을 치르는 것이었다. 간장로는 그가 계속 이렇게 웃다가는 질식해 죽겠다 싶어 황용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방주님께 아뢰나이다. 팽장로의 무례는 중벌을 받아 마땅한 줄로 아오나 방주님께서 이빈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유각과 양장로도 함께 허리를 숙이고 애걸했다. 팽장로는 이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꺽꺽거렸다. 황용이 곽정을 바라보았다.
[곽정 오빠, 이만하면 충분할까요?]
[됐어 됐어. 그만 용서해 줘.]
[세 분 장로님, 장로님들께서 용서해 주라시니 그렇게 하겠어요. 그런데 절대로 내게 침만은 뱉지 말아 주세요.]
간장로는 팽장로의 목숨이 경각에 놓여 있음을 알았다.
[방규는 방주님께서 만드시는 것이니 원하시면 방주님께서 폐(廢)할 수 있습니다. 방중들은 그저 분부대로 따를 뿐입니다.]
[좋아요. 그럼 그의 통곡혈(通谷穴)과 상곡혈(商谷穴)을 눌러 주도록 하세요.]
간장로가 황급히 헌원대 아래로 뛰어 내려가 팽장로의 두 혈을 눌러 주었다. 그는 두 눈을 하얗게 뒤집고 숨을 할딱거리고 있었다.
[이젠 정말 쉬고 싶군요. 으응, 그런데 양강은 어디로 갔어요?]
황용이 웃다가 놀라 이렇게 물었다.
[갔어.]
[아니 왜 그냥 내버려두셨어요? 도대체 어디로 갔어요?]
곽정이 손가락으로 호수를 가리켰다.
[구영감과 함께 가버렸어.]
과연 돛단배 하나가 호수를 건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쫓아가 봐야 소용이 없어 보였다. 증오가 골수에 사무치기는 했지만 곽정의 중후한 덕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 양강은 황용이 간장로와 대결하는 것을 보자 즉시 달아나는 것이 상책임을 알았다. 여기 그냥 버티고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뭇사람들이 구경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슬그머니 철장방 방중으로 들어가 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구천인은 양강이 완안열의 세자라는 말을 듣자 즉시 그러마고 대답했다. 상황을 보건대 황용이 방주가 되는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곽정과 황용의 무공이 월등한데다 개방의 수가 많고 보니 여기 있어 봐야 별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슬그머니 방중을 인솔하고 배에 올랐다. 개방 몇 사람이 보기는 했지만 황용과 간장로의 격투가 너무나 치열한데다 대세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그냥 내버려둔 것이다.
황용이 두 손에 죽장을 잡고 군개들을 보며 말을 꺼냈다.
[홍방주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이 아니니 제가 잠시 서리 자격으로 방의 일을 맡아보겠습니다. 간장로와 양장로는 팔대 제자를 거느리고 홍방주님을 모시러 가고 노장로는 이곳에서 부상을 치료하도록 하시오.]
군개들이 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팽장로는 심술이 많으니 어떻게 처치했으면 좋을지 의견을 제시해 보시오.]
[팽장로의 죄가 크니 중형에 처함이 마땅하오나 방주님께서는 그가 과거에 방을 위해 세운 공로를 보아 죽음만은 면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간장로가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하자 황용은 또 한 번 웃었다.
[내 벌써 간장로가 그렇게 간청할 줄 알았소. 그럼, 방금 웃느라 곤욕도 치르고 했으니 장로직만 면하고 팔대 제자로 있도록 하시오.]
간,노,팽,양 네 장로는 동시에 허리를 굽히며 그 은혜에 감사했다.
[여러 형제들이 모처럼 모였으니 할말이 많을 것이오. 우선 여생과 여조흥 두 분을 안장하시오. 나는 곧 떠날 터이니 모든 일은 노장로 그의 분부에 따르도록 하시오. 그럼, 우리 임안부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황용은 이렇게 훈시를 한 뒤 곽정과 함께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군개들은 군산 아래까지 따라 내려와 배웅했다. 그들이 탄 배가 안개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자 군개들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 방중의 일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第 五 卷. 第 二 章.(通卷 章). 거짓 행세
곽정과 황용이 악양루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동녘이 밝아 오고 있었다. 홍마와 수리, 혈조가 모두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주인을 보고 반겼다. 황용이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때마침 붉은 해가 동정호 수평선을 가르고 불끈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늘과 물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더할 수 없는 장관을 이루었다. 황용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곽정 오빠, 이렇게 아름다운 일출은 처음 봐요. 우리 악양루에 올라가 술이나 마시며 경치를 즐겨요.]
곽정이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누각으로 올라갔다. 어제 함께 술을 마시던 장소다. 아슬아슬했던 간밤의 일을 생각하며 둘은 미소를 지었다.
악양에는 명주(名酒)라 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워낙 산수가 맑아서 그런대로 즐길 만했다. 둘은 마주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황용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곽정 오빠, 오빠는 나빠요!]
곽정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무슨 일인데?]
[그거야 오빠가 알지요.]
곽정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무슨 일인지 도대체 짚이지 않았다.
[용아, 무슨 일인지 어디 말을 해봐.]
[그럼 제가 물어 보겠는데요, 어젯밤 우리가 개방의 진법에 밀려 낭떠러지에 떨어질 뻔했을 때 왜 나를 집어 던졌어요? 그래 오빠는 죽어도 나 혼자 살라고 그랬어요? 아직까지도 제 맘을 그렇게 모르세요?]
황용은 눈물까지 방울방울 떨구며 말했다.
곽정은 황용이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지극한 것을 알자 새삼 놀랍고도 사랑스러웠다. 곽정은 감격해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기만 했다. 황용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꺼내려고 했다.
이때 계단이 울리는 소리가 나며 웬 사람이 누각 위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곽정과 황용이 고개를 돌리다 시선이 마주치자 쌍방이 모두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철장수상표 구천인이었다. 곽정이 벌떡 일어나 황용 앞을 가로막았다. 혹시라도 구영감이 살수를 쓰지 않을까 걱정해서였다. 그런데 구천인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알은체한 뒤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웃는 모습이 교활해 보이기도 했지만 적이 놀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아니 저자가 우리를 두려워하다니 정말 이상하군요. 어디 한번 쫓아가 봐야겠어요!]
황용은 곽정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곽정이 급히 술값을 치르고 나와 보니 구천인과 황용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곽정은 어젯밤 그의 매서운 솜씨가 생각나 흑시 황용이 그의 독수에 걸린 것이 아닌가 조바심이 일었다.
[용아, 용아! 어디 있어?]
황용은 구천인을 미행하여 정체를 파악하고 싶었기 때문에 곽정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대답을 하면 발각될 것이 뻔했다. 이때 두 사람은 한 저택 옆을 지나고 있었다. 황용은 북쪽 담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그가 좀 멀리 가면 뒤를 쫓을 참이었다. 그런데 구천인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곽정이 황용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벌써 눈치를 채고 모퉁이를 살짝 돌아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은 각기 담에 몸을 숨기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방의 동정이 없자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다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거리래야 겨우 반 자 정도, 둘은 모두 깜짝 놀랐다. 황용은 구천인의 장력이 무서웠고 구천인 또한 그녀에게 몇 차례나 골탕을 먹은 일이 있어 은근히 꺼리고 있었다. 서로 가벼운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리기는 했지만 포기할 황용이 아니었다. 저택의 담장을 끼고 반 바퀴나 돌면서도 구천인이 멀리 달아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즉시 경공을 펴 앞으로 가서 동쪽 담 모퉁이에 숨어 동정을 살피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런데 구천인도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한 영감과 한 소녀가 저택 담장을 끼고 한바퀴 돌다가 결국 또 한 번 맞부딪치고 말았다. 이번에 부딪친 장소는 남쪽 벽 뒤였다.
(내가 만약 등을 돌리고 도망간다면 틀림없이 배후를 공격하겠지? 이 영감 철장이 무섭다는데 피할 길이 없겠구나.)
황용은 이런 생각을 하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구영감님, 정말 세상이 좁군요. 이렇게 또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황용은 이렇게 말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려 빠져 나갈 궁리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야지. 곽정 오빠만 오면 무서울 게 없으니까.)
구천인도 웃으며 대꾸했다.
[그날 임안에서 혜어졌는데 뜻밖에 또 여기서 만나게 되었구려. 그래 별고 없이 지내셨나?]
(아니 분명히 어젯밤 군산에서 만나고도 딴전을 부리는구나. 멀뚱멀뚱 두 눈을 뜨고 잠꼬대를 하는 거야, 뭐야? 내 이 타구봉법의 맛이나 한번 보여 줘야지.)
[곽정 오빠! 뒤에서 공격하세요!]
구천인이 깜짝 놀라 뒤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황용은 잽싸게 죽장을 뽑아 들고 그의 아랫도리를 후려갈겼다. 구천인은 고개를 돌려 보고 그제야 흉계에 말려든 줄 알았다. 그러나 미처 머리를 다시 돌릴 겨를도 없이 강한 바람이 아랫도리를 엄습해 왔다. 구천인이 급히 몸을 날려 피하기는 했지만 이 타구봉법은 신출귀몰이요, 변화무쌍했다.
구천인이 펄떡펄떡 재빠르게 뛰어오를수록 죽장의 파란 그림자가 같이 어지럽게 선회하면서 그를 위협했다. 17,8초를 대결하는 사이에 구천인은 정강이를 몇 차례 찔리고 오른쪽 복사뼈까지 얻어맞자 벌렁 넘어지며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만, 내 할말이 있소.]
황용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죽장을 거두자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황용이 그가 미처 자세를 바로잡을 겨를도 주지 않고 또 한 번 공격하자 다시 벌렁 넘어졌다. 황용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차례나 그를 쓰러뜨렸다. 구천인은 여섯 번째 넘어지고는 이제 일어나 봐야 다시 얻어맞겠다고 판단했던지 땅에 엎드려 죽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죽은 체하시는 건가요?]
황용이 웃으며 묻자 구천인이 벌떡 일어서며 두 손으로 바지 허리끈을 풀어 버리고 괴춤을 틀어 잡은 채 소리를 질렀다.
[갈 거요 안 갈 거요? 가지 않으면 이 괴춤을 놓아 버리고 말겠소.]
황용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일방의 우두머리란 작자가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그가 괴춤을 놓으면 어쩌나 해서 고개를 돌리고 물러섰다. 등뒤에서 영감이 껄껄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이어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황용이 돌아다보니 그는 두 손으로 바지를 틀어 잡은 채 나는 듯 자기에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황용은 우습기도 했지만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냥 도망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구천인은 두 사람 사이가 10여 장이나 벌어지자 슬그머니 물러설 채비를 차렸다.
이때 갑자기 곽정이 집 모퉁이를 돌아 나오다 이 광경을 보고 오른손을 가슴에 댄 채 왼손을 넓적다리 사이로 서서히 들어올려 반원을 그리며 가슴을 향해 뻗었다. 구천인도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 그의 쌍장이 원을 그리는 순간 무서운 초술이 나올 것을 알았다. 그는 큰소리로 세 번 웃고는 발길을 멈추고 소리를 질렀다.
[어이구 어이구, 큰일났구나!]
[곽정 오빠, 허튼수작이니 거들떠볼 것 없이 그냥 치세요.]
황용이 소리를 질렀다. 곽정도 어젯밤 군산에서 그의 무시무시한 철장을 분명히 보았다. 날카롭고 오묘한 것이 결코 주백통, 황약사, 구양봉에게 뒤지지 않았다. 어쨌든 마주치고야 말았으니 추호라도 가벼이 대적할 수는 없었다. 곽정은 모든 기를 단전에 모아 만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이를 본 구천인은 두 손으로 허리춤을 잡은 채 울상을 지었다.
[착한 분들이 왜들 그러시오? 이 영감 얘기를 들어 보시오. 요 며칠 식탐을 하다가 그만 배탈이 나 참을 수가 없으니 이만 실례를 해야겠소.]
[곽정 오빠 그냥 치세요.]
황용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오히려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도 두 분 속셈을 잘 알고 있다오. 이 영감이 재주를 보여 한바탕 혼을 내주지 않으면 계속 나를 업신여길 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회가 올 때마다 배탈이 나서 이 모양이니 어쩔 수가 없구먼. 자 그러니 내 말을 잘 들어요. 이레 안에 이 영감이 철장산(鐵掌山)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용기 있거든 그리로 오도록 하오.]
황용은 그가 자기들을 어린애 취급 하며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벌써 강침 한줌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혼자 신이 나서 떠들 때 만천화우척금침(滿天花雨擲金針)의 묘기를 발휘할 참이었다. 몸에 수십 개 침이 박혀도 그렇게 지껄일 수 있나, 어디 구경 좀 해보자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철장산 아래에서 만나자는 말을 듣는 순간 뭔가 머리를 스쳤다. 곡령풍이 죽을 때 남긴 그림 가운데 있던 글 네 구절이었다.
[좋아요. 하늘이든 지옥이든 쫓아가 한번 대결하지요. 그런데 철장산이 어디 있어요? 그리로 가려면 어떻게 가지요?]
황용이 묻자 구천인이 자세히 일러 주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상덕(常德), 진주(辰州)를 지나 소원강(遡沅江) 상류 노계(擄溪)와 진계(辰溪) 사이에 다섯 손가락을 세운 형상으로 하늘을 찌를 것처럼 우뚝 솟은 높은 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철장산이오. 산세가 험악하기 이를 데 없으니 이 영감이 무섭게 느껴지거든 일찌감치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그만두구려.]
황용은 산세가 다섯 손가락이 하늘을 향한 것 같다는 말을 듣자 더욱 반가웠다.
[좋아요. 그럼 이레 안에 우리가 산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어요.]
구천인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울상을 지었다.
[어이구, 어이구!]
그는 허리춤을 움켜잡은 채 서쪽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용아, 내 정말 궁금한 일이 하나 있는데 어디 얘기 좀 들려줘.]
[무슨 일인데요?]
[구선배님의 무공이 일가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기 행각을 하고 다닐까? 어떤 때는 전연 무공을 알지 못하는 체 행세하니 말이야. 그날 귀운장에서 그가 내 앞가슴을 때렸을 때 만약 자기 힘을 다 썼다면 오늘 나는 살아 남지 못했을 거야. 그가 이렇게 미친 체하고 다니는 데는 혹시 어떤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
황용이 자기 손톱을 가볍게 물어뜯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떼었다.
[저도 정말 모르겠어요. 방금 제가 타구봉법으로 몇 차례나 쓰러뜨렸는데도 전연 반격할 힘조차 없는 것 같았어요. 배탈이 났다고 핑계만 대니 말예요. 어젯밤 쇠지팡이를 구부린 재주는 또 무슨 사기극이었는지.....]
[그가 노유각의 두 손을 잡아 비튼 것이라든지 장력으로 내 격산타우의 힘을 받아 낸 것은 진짜 재주지, 거짓으로는 해낼 수 없는 거거든....]
곽정이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황용이 둥근 비녀를 가지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그 영감이 무슨 꿍꿍속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우리가 철장산에 가보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철장산에는 뭐 하러 가? 여기 일이 끝났으니 빨리 사부님이나 찾으러 나서자구. 그 영감 엉터리던데 우리가 진지하게 나설 필요가 있겠어?]
[곽정 오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버지께서 주신 그림이 비에 흠뻑 젖었을 때 무슨 글자가 나타났었지요?]
[그거 글자가 완전치 못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던데.]
곽정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황용은 웃었다.
[그럼 생각도 해보지 않으셨어요?]
곽정은 일단 생각이 막히면 그만이지 더 생각해 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용아, 무슨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로구나, 그렇지? 그럼 빨리 말을 해봐!]
황용이 비녀로 땅바닥에 네 줄의 글을 써놓고 말을 꺼냈다.
[첫째 줄에서 빠진 글자는 틀림없이 무(武)자일 거예요. 그렇다면 바로 무목유서(武穆遺書)라는 네 글자예요. 둘째 줄은 영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영감 말을 듣고 보니 여간 쉬운 게 아니로군요. 산(山)자 아니면 봉(峰)자일 수밖에 없지요.]
[무목유서 재철장산(武穆遺書 在鐵掌山)이라.]
곽정이 한 번 읽어 보곤 무릎을 탁 쳤다.
[잘됐군. 그럼 우리 빨리 가자구. 그 철장방이 금나라 사람들과 결탁해서 틀림없이 귀한 책을 완안열에게 바치게 될 테니까 말야. 아래 줄은 무슨 뜻이지?]
[오빠는 리 쓸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재촉만 하는군요. 그 영감이 철장산의 산세가 다섯 손가락 같다고 했으니 셋째 줄은 중지봉하(中指峰下)가 아니겠어요?]
곽정은 연방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옳아 옳아, 용아는 정말 똑똑하단 말야. 그럼 넷째 줄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네요. 우리 일단 가면서 생각하기로 해요.]
둘은 횐 수리를 앞세워 길을 인도하게 하고 말을 몰아 서쪽으로 떠났다. 상덕을 지나고 도원(桃源)을 거쳐서 어느덧 원강(沅江)을 지나 노계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 사람들에게 철장산이 어디 있는지를 묻고 다녔으나 하나같이 머리만 살래살래 흔들 뿐이었다. 둘은 크게 실망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작은 객점에 들어가 묵기로 했다. 저녁때 황용이 객점 심부름꾼에게 명승고적을 물어 보았지만 줄졸 뱉는 얘기 가운데서도 철장산이란 말은 끝내 들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곳은 평범하기 짝이 없군요. 노계란 곳이 이렇듯 작으니 무슨 대단한 경치가 있을라구요?]
황용이 입을 비쭉 내밀고 하는 말에 심부름꾼은 슬그머니 화가 났다.
[노계가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후조산(喉爪山)의 풍경이야 어찌 다른 곳과 비교가 되나요? 어림없는 얘기지.]
황용은 후조산이란 말을 듣자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그래 그 후조산이 어디 있어요?]
황용이 성급하게 물었지만 심부름꾼은 대답할 생각도 않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방을 나가 버렸다. 황용이 쫓아 나가 그의 등을 낚아 채 안으로 끌어들이며 은자 한 뭉치를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말을 분명히 해주면 이 은자를 주겠어요.]
그 심부름꾼은 마음이 동하는지 손을 뻗어 은자를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많은 돈을요?]
황용이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두 분께서는 절대로 가실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 후조산에는 고약한 패거리들이 살고 있는데 수많은 독충을 기르고 있어 누구든지 산 근처 오 리 정도만 접근해도 생명을 잃게 된답니다.]
곽정과 황용은 서로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후조산은 봉우리 다섯 개로 이루어졌는데 원숭이 손바닥같이 생겼다지요?]
황용의 말에 심부름꾼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아가씨께서는 벌써 알고 계셨군요. 그렇다면 결코 소인이 알려 드린 것이 아닙니다그려. 이 다섯 봉우리가 아주 묘하게 생겼단 말입니다.]
[어떻게 생겼게요?]
곽정이 갑갑하다는 듯 다급하게 물었다.
[그 다섯 봉우리가 사람의 다섯 손가락과 똑같이 생겼답니다. 중간에 있는 것이 가장 높고 그 양쪽으로 점점 낮아지거든요. 그건 뭐 그리 신기할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지만 좀 이상한 것은 다섯 봉우리가 또 두세 마디로 나뉜 것이 영락없이 손가락 마디라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황용이 펄쩍 뛰었다.
[둘째 마디다, 둘째 마디!]
[그래 그래.]
곽정도 반갑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심부름꾼은 어안이벙벙해 두 눈만 멀뚱히 뜨고 서 있었다.
[곽정 오빠, 우리 가요.]
황용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서둘렀다.
[여기서 육십 리밖에 안 되잖아. 홍마를 타고 가면 금방 도착할 수 있을 테니 우리 낮에 가도록 하자구]
[아니, 책 훔치러 가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참 그렇군. 난 머리가 왜 이리 둔하담.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군.]
둘은 객점 안의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첼세라 슬그머니 칭을 넘어심부름꾼이 알려 준 대로 홍마를 끌고 동남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산길은 험하고 우거진 풀이 허리까지 차올랐지만 다행히 홍마를 타고 가서 한 시간도 못 돼 산 밑에 당도할 수 있었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깎아 세운 듯 똑바로 선 것이 확실히 다섯 손가락을 반공에 세워 놓은 것 같았다. 그중 한 봉우리가 유난히 우뚝했다.
[이 산봉우리가 그림과 똑같이 생겼군. 저걸 봐, 봉우리 위에 있는게 모두 소나무 맞지?]
곽정의 말에 황용이 웃으며 대답했다.
[검무를 추는 장군만 빠져 있군요.]
둘은 홍마와 수리를 산 아래 남겨 놓은 채 주봉 뒤로 돌아갔다. 사방을 휘둘러보아도 사람 하나 없었다. 곽정과 황용은 경공을 펴서 산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몇 리를 가자 산길이 서쪽으로 꺾어졌지만 둘은 그냥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나 동쪽으로 꺾어졌다 서쪽으로 꼬부라지는 길이 이상했다. 밥 한끼 먹을 만큼의 시간을 걸으니 소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숲이 보였다.
곽정과 황용이 발길을 멈춘 채 그냥 상봉으로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송림을 따라가 볼 것인가를 상의하며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데 황용의 품속에 있던 혈조가 구 하고 울면서 숲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황용은 이 새를 워낙 좋아해 곽정에게 손짓을 하면서 따라 들어갔다. 혈조는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날아가 보이지 않았다. 황용은 은근히 걱정이 되어 계속 숲 속을 걸었다. 1리쯤 갔을까, 갑자기 소나무들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둘은 서로 손짓을 하고 소리를 죽여 불빛을 향해 접근했다. 몇 발짝 가지도 못했는데 돌연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길가 큰 나무 뒤에서 검은 읏을 입은 장한 두 명이 각기 병기를 든 채 나타나 아무 말 없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만약 싸움을 벌인다면 책을 훔치는 일은 어려워지겠지.)
이렇게 생각한 황용은 즉시 품속에서 구천인의 철장(鐵掌)을 꺼내 손바닥 위에 펼쳐 놓고 그들 앞으로 내밀었다. 두 장한은 철장을 보자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길을 비켜 주었다. 황용은 손을 번개처럼 놀려 죽장으로 그들의 혈도를 찍고 발로 걷어차 숲 속으로 굴려 보낸 뒤에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돌진했다.
가까이 가보니 다섯 칸쯤 되는 석실(石室)이었다. 불빛은 동서 양쪽의 석실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둘은 몸을 숨기고 먼저 서쪽 채로 접근했다. 어디선가 누린 냄새가 물씬 풍겼다. 슬그머니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큰 화로에 숯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그 위에 얹은 솥에서는 뭔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솥 옆에는 검은 옷을 입은 동자 둘이 있는데, 하나는 땀을 삘뻘 홀리며 풀무질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대나무 바구니 속에서 독사를 꺼내 솥 안에 집어 넣고 있었다. 그리고 솥 앞에서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솥 안에서 풍겨 나오는 열기를 마시고 있는 노인은 황갈색 적삼을 입은 구천인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가 심호흡을 한 번 하면 머리 위에서 무럭무럭 열기가 피어 올랐다. 뒤이어 그가 두 손을 높이 들자 열 손가락 끝에서도 가벼운 열기가 솟아올랐다. 그러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두 손을 뜨거운 솥 안에 담갔다. 풀무질을 하는 동자의 이마에는 땀이 비 오듯 홀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구천인은 부글부글 끓는 독사액에 쌍장을 넣고 있다가 참을 수 없이 더우면 손을 빼고 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포대를 한 번 철썩 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치는 소리는 크게 울려 퍼지는데 포대는 까딱하지도 않았다. 곽정은 깜짝 놀랐다.
(저 포대 속에 담긴 철사(鐵砂)는 많아야 한 되밖에 안 될 것이고, 가는 끈으로 허공에 매달았는데 아무리 쳐도 까딱하지 않으니 이자의 무공이 여간 깊은 것이 아니로구나. 정말 내 적수가 아니다.)
그러나 황용은 여전히 얕보고 그가 또 무슨 사기극을 꾸미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만약 책을 훔치는 일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비웃어 주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가 쌍장으로 포대를 한 번 쳤다가 다시 솥 안에 집어넣고, 집어 넣었다가는 다시 빼 포대를 치는 것을 되풀이하는 걸 보고 이번에는 동쪽 채로 갔다. 그들은 동쪽에 있는 석실 문 앞에 이르러 안을 들여다보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그 방안에 앉아 있는 남녀는 바로 양강과 목염자였기 때문이다. 양강은 달큼한 언사로 어서 성혼을 서두르자고 목염자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염자는 우선 완안열을 죽여 부모의 윈수를 갚자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착한 누이, 어째 큰 것은 그리도 생각을 못하지?]
양강이 말했다.
[제가 뭘 모른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렇지 않구. 완안열이 물샐틈없이 경비를 세우고 있는데 나 혼자 힘으로 어떻게 그를 살해하겠다고 경솔하게 덤빈단 말이오. 정말 내 아내가 되고 싶거든 우선 내 말부터 들어요. 내가 누이를 데리고 가서 아버님을 뵙는 체하다가 그때 우리 둘이 함께 손을 쓴다면 만사는 쉽게 끝나지 않을까?]
목염자는 그의 말이 그럴듯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볼이 발그래해져 고개를 숙였다. 양강은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그녀의 희디흰 손을 잡고 어루만졌다. 황용이 더 참을 수 없었던지 소리를 질렀다.
[목언니, 그자의 꾐에 넘어가지 말아요!]
양강이 소스라치게 놀라 쉭 하고 입으로 불부터 끄고는 두 손으로 목염자를 얼싸안은 채 그녀의 귀를 틀어막았다. 황용이 다시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뒤에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과 황용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보니 구천인이 서 있었다. 구천인도 그들 두 젊은이를 보자 가슴이 철렁하는 모양이었다.
[구영감님, 인사드리러 왔어요. 칠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죠?]
황용이 웃으며 말하자 구천인이 왈각 화를 냈다.
[무슨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는 말인가? 쓸데없는 수작 집어치우라구.]
[아니 벌써 잊으셨나 봐. 배탈났던 것은 이제 괜찮으시구요?]
구천인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긴 휘파람을 불며 쌍장으로 황용의 양 어깨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황용은 희희낙락 농담을 하느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기를 치다가 오히려 연위갑 가시에 찔려 손바닥에 구멍이나 뚫리겠거니 했다. 그런데 곽정이 놀라 외치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용아, 빨리 비켜!]
강한 질풍이 귓가로 스쳐 지나갔다. 곽정이 옆에서 적을 향해 반격하는 소리였다. 동시에 황용은 어떤 누린내를 느꼈다. 재빨리 피하려고 했지만 겨를이 없었다. 어깨 위로 두 줄기 강한 힘이 엄습했다. 황용은 비틀비틀하다가 그만 뒤로 넘어지며 몸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다. 구천인도 장심이 그녀의 연위갑 가시에 닿아 중상을 입었다. 양쪽 손에서 검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뒤이어 곽정의 장풍이 엄습하는 것을 보고 비스듬히 반격을 했다. 두 사람의 장력이 교차하는 순간 펑펑 터지는 소리와 함께 쌍방이 각기 뒤로 3보씩 물러섰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막상막하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곽정은 황용이 걱정스러워 더 싸울 마음이 나지 않았다.
급히 몸을 숙이고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가슴에 안았다. 뒤에서 또 바람소리가 일었다. 적이 또 공격을 한 것이었다. 곽정은 왼손으로 황용을 껴안은 채 몸을 돌리지도 않고 오른손으로 신룡파미의 재주를 부렸다. 이는 항룡십팔장 가운데의 구명절초(救命絶招)다. 그가 급한 나머지 이 재주를 부렸으니 위력이 어마어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천인은 그의 장력에 부딪히자 자기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장심의 상처에 통증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혹시 황용의 연위갑 가시에 독약이나 묻어 있지 않았나 걱정이 되었다. 그는 손을 번쩍 들어 달빛에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가 철장공을 수련할 때는 독사의 즙액을 끓여서 거기서 나오는 독기를 씌었다. 그러면 그 독기가 장중으로 스며들고, 손을 쓸 때는 무시무시한 독기가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수장이 만약 다른 독물에 부상을 입을 때는 그 독성이 상극이라 무서운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곽정은 그가 멈칫거리는 틈을 타 황용을 안은 채 산꼭대기로 나는 듯 달려나갔다. 수십 보나 갔을까, 등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니 검은 옷을 입은 장한들이 떼거리로 횃불을 들고 자기를 추적하고 있다. 곽정은 물러설 길이 없는 것 같아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기만 했다. 그 바쁜 가운데서도 황용이 숨을 쉬는가 살폈다. 그러나 전연 숨쉬는 기색이 없었다.
[용아,용아!]
곽정은 울부짖듯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가 이렇게 머뭇거리는 사이에 구천인과 방중 고수 십여 명이 그를 바짝 뒤쫓아왔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산 아래로 뚫고 내려가겠지만 용아가 중상을 입었으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구나!)
곽정은 즉시 발길을 잽싸게 놀리며 산길을 따라가지 않고 산꼭대기로 곧장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막에서 절벽을 오르내리는 경공을 익혀 자신이 있는데다가 길이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는 추적하던 적병들을 멀찍이 때어놓을 수 있었다. 곽정은 다시 황용의 얼굴을 어루만져 보았다. 체온이 따뜻한 것이 느껴지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몇 번 이름을 불러 보아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위를 쳐다보니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은 넓지 않을 것이고 사방에서는 적이 포위망을 좁혀 올 것이었다. 아무래도 쉴 만한 장소를 찾아 우선 황용을 안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사방을 휘둘러보니 왼쪽으로 20여 장 위쪽에 거무스름하니 굴 같은 것이 보였다. 단숨에 달려가 보니 과연 훌륭한 석굴이었다.
곽정으로서는 안에 무엇이 있고 없고를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황용의 등뒤에 있는 영태혈(靈台穴)을 눌러 호흡을 도와주었다. 산허리에는 철장방 무리가 갈수록 더 많이 모여들어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곽정은 그 큰 함성이 들리지도 않았다. 천군만마가 몰려온다 하더라도 황용이 한시 삐비 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일이 급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까, 황용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며 신음하듯 입을 열었다.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네요.]
곽정은 눈물이 나오도록 기뻤다.
[용아 걱정 마, 내가 있잖아. 여기서 잠깐만 쉬고 있어.]
곽정은 쌍장을 가슴에 비스듬히 댄 채 굴 어귀로 나서며 죽기로 싸우더라도 황용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순간 그는 앞을 내다보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허리에 마치 울타리를 친 것처럼 횃불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굴 어귀에서 1리 정도의 거리였다. 사람들의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구천인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두 발을 묶어 놓은 것처럼 꼿꼿이 선 채 함성만 지를 뿐 전연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들 저리 소란만 떨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곽정은 다시 굴 안으로 들어와 몸을 숙이고 황용을 살펴보았다. 이때 등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은 아무래도 발소리인 것 같아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우선 장심을 돌려 등을 방어하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굴 안은 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인지 괴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냐? 빨리 나와라!]
곽정이 소리를 질렀지만 굴 안에서는 메아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잠시 후 기침 소리와 웃음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모골이 송연해 졌다. 아무래도 구천인의 목소리 같았다. 곽정이 부싯돌을 쳐서 굴 안을 밝히자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갈포 적삼을 걸치고 손에는 부들풀로 만든 부채를 든 채 하얀 머리를 나부끼는 것이 바로 철장수상표 구천인이었다. 곽정은 소스라치도록 놀랐다. 그는 방금 산허리에서 방중 무리들을 통솔하며 욕을 퍼붓고 있었는데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이 굴 안에 나타났단 말인가?
[두 아기들이 겁도 없이 이 할아버지를 찾아왔군그래. 잘했어, 잘했어.]
구천인은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린 다음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여긴 철장방의 금지 구역이야. 일단 들어오면 죽음이 있을 뿐 살아나갈 수 없는 곳이야. 이제 너희는 살기가 귀찮은 모양이구나?]
곽정은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금지 구역이라면 영감님은 왜 들어오셨어요?]
옆에 누워 있던 황용이 되물었다. 순간 구천인이 난처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는 다시 표정을 폈다.
[아니, 지금 누가 그런 한가한 얘기를 주고받겠다더냐?]
그는 이렇게 말을 하며 굴 밖으로 나가려 했다. 곽정은 그가 재빠른 걸음으로 자기 옆을 스쳐 지나가며 혹시 독수로 황용을 해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내가 먼저 선수를 쓰는 것이 낫겠구나.)
곽정은 두 손을 번쩍 들어 구천인의 어깨를 내려칠 태세를 취했다. 그러면 그는 틀림없이 반격을 해올 테고 그때 다시 팔꿈치로 앞가슴을 후려치는 것이다. 이 초술은 묘수서생 주총에게서 배운 것이다. 어깨를 치는 동작은 허초요, 팔꿈치로 공격하는 것이 실초라 뒤에 실초를 쓰기 때문에 적이 눈치챌 수가 없다.
그의 어깨를 치려고 손을 드니 예상했던 대로 구천인이 방어를 했다. 곽정이 두 어깨를 치켜 든 채 팔꿈치로 치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막는 힘은 너무나 보잘것 없었다. 아까 수련할 때의 그 무시무시했던 상승의 무공이 아니었다. 곽정의 변초(變招)는 생각을 앞질렀다. 미처 마음속으로 어떻게 할까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두 손이 벌써 그의 양팔을 틀어 잡았다. 구천인이 있는 힘을 다하여 뿌리치려고 했지만 쇠집게 같은 곽정의 완력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차라리 그가 뿌리치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넘어갈 것을 뿌리치는 바람에 무공의 천박함이 금방 드러났다. 곽정은 더 의심할 필요도 없다는 판단과 함께 두 손으로 구천인을 잡아 흔들다 그의 가슴에 있는 음도혈(陰都穴)을 눌렀다. 그러자 구천인은 바닥에 맥없이 쓰러져 꼼짝도 못했다.
[젊은이, 아니 지금이 어느 땐데 그래 나하고 장난을 하자는 게요?]
산허리에 있는 방중 무리들이 지르는 함성이 더욱 요란하게 들렸다. 나머지 네 봉우리에 있던 방중들까지 이곳으로 몰려드는 모양이었다.
[우리를 얌전하게 산 아래까지만 데려다 주시오.]
구천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내 목숨 지키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당신들을 데려다 준다는 말이오?]
[당신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리면 될 것 아니오. 산 아래에 당도하면 내 혈을 풀어 드리리다.]
이 말을 들은 구천인이 울상을 지었다.
[어이구 젊은이도, 왜 늘 나만 괴롭히오? 굴 밖에 나가 보면 금방 알 텐데 말이오!]
곽정은 굴 어귀로 나가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만 입을 딱 벌렸다. 아직도 구천인이 부들부채를 흔들며 굴을 향해 욕을 퍼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곽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뒤로 돌리고 보니 구천인은 얌전하게 바닥에 누운 채 그대로 있었다.
[아니 당신은...., 당신은 어째서 둘이오?]
[오빠는 바보야, 그래도 모르시겠어요? 구천인이 둘인데 하나는 무공이 높고 다른 하나는 거짓말쟁이예요. 그들은 쌍둥이란 말이에요. 여기 있는 분은 입만 가지고 다니는 구천인이구요.]
곽정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게 정말이오?]
[아가씨가 말한 그대로요. 우리는 쌍등이 형제인데 내가 형이라오.]
[그럼 도대체 누가 구천인이란 말이오?]
[이름이 다른 게 무슨 소용이오. 나도 천인(千 ), 그도 천인(千 )이니 마찬가지 아니오? 우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친해서 아예 한이름을 써왔다오]
[아니 그럼 누가 진짜 구천인이란 말이오?]
[그건 물어 무엇 해요. 이 영감이 진짜 구천인 행세를 하고 다닌거죠.]
황용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흥, 이놈의 영감이. 그럼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오?]
구천인은 모든 것을 포기한 눈치였다.
[내 아버님께서 내게 천리(千里)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지만 부르기도 듣기도 거북스러워 별로 쓰지 않았을 뿐이오.]
곽정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당신은 구천리( 千里)로군 그래!]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구려.]
[그런데 왜 저들은 산허리에서 함성만 지르고 올라오지는 않는거요?]
[내 명령이 없는데 누가 감히 올라온단 말이오?]
곽정은 반신반의하며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황용이 나섰다.
[곽정 오빠 믿지 마세요. 이 교활한 영감이 사실대로 실토하려고 하지 않는군요. 그의 천돌혈(天突穴)이나 눌러 버리세요!]
곽정은 황용의 말대로 그의 천돌혈을 눌렀다. 이 천돌혈은 기경(奇經) 팔맥(八脈) 가운데의 음유맥(陰維脈)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후(咽喉)아래 선기혈(璇璣穴) 위 1촌쯤에 있다. 구천인은 천돌혈을 눌리자마자 온몸에 수만 마리 개미가 기어 다니며 마구 물어뜯는 듯 따갑고 가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이구 어이구, 따갑고 가려워 견딜 수 없는데, 그래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오?]
[내 말에 대답을 하면 곧 풀어 드리리다.]
곽정의 말에 구천인은 할 수 없다는 듯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원래 구천인과 구천리는 쌍둥이였다. 어렸을 때는 성격이나 용모가 너무나 닮아 아무도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13살 되던 해 구천인은 우연히 철장방 방주의 생명을 구해 주게 되었다. 방주는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모든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 구천인이 24살이 되었을 때 그의 무공은 독보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방주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철장방 방주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었다. 구천인은 무공이 출중할 뿐 아니라 재략까지 겸비하고 있어 보잘것없던 방회를 몇 년 사이에 크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 철장섬형산(鐵掌殲衡山)의 일역에서 형산파를 여지없이 섬멸한 뒤부터 철장수상표의 명성은 강호를 혼들었다. 예전에 화산에서 논검(論劍)이 벌어졌을 때 왕중양 등이 그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구천인은 오독신장(五毒神掌)의 수련이 미처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스스로 왕중양의 적수가 아님을 알아 거절하고 참가하지 않았다. 10여 년 동안 철장봉 아래에 은거하면서 두문불출하며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2차 논검이 있을 때 무림 천하 제일의 명성을 차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쌍둥이 형제의 처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하나는 무공이 일취월장했고 다른 하나는 거짓말에 사기 행각만 일삼고 다녔다. 하나가 심산에 은거하는 동안 다른 하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 동생의 명성을 등에 업고 강호를 횡행하고 다닌 것이었다. 곽정과 황용이 귀운장이나 임안부에서 만났던 사람은 구천리였고 군산과 철장산에서 부딪힌 사람은 구천인이었다. 두 사람은 용모나 차림새가 너무나 흡사해 황용이 우쭐하다 구천인의 철장에 얻어맞고 부상을 당한 것이었다.
이 철장산 중지봉은 철장방 역대 방주들이 뼈를 묻는 장소였다. 방주가 임종을 할 때는 스스로 이 봉에 올라와 죽기를 기다렸다. 철장방에는 엄한 규율이 하나 있는데 누구를 막론하고 중지봉 제 2지절(第二指節)에 들어갔다가는 살아서 내려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방주가 다른 곳에서 죽었을 때는 방중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업고 이 봉에 올라와 자결하는 순장의 관례가 있었다. 방중 제자들은 이 일을 지극히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곽정이 황용을 업고 허둥지둥하다가 그만 이 철장방의 성지에 들어오고 만 것이다. 방중에서는 그냥 노한 함성만 지를 뿐 감히 이 금기를 어기고 뒤쫓아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럼 구천리는 어떻게 이 석실에 들어와 있었던 것일까? 원래 방중에는 대대로 이 금단의 구역 석실 안에 수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역대 방주가 임종할 때는 반드시 자기가 아끼던 보도(寶刀)나 보검(寶劍) 또는 진귀한 보물이나 골동품을 가지고 올라와야 했다. 이렇게 몇 대에 걸쳐 해왔으니 자연 이 석실에는 보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무예가 남과 같지 못해서지만 구천리는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수모만 당해 온 터라 만약 몇 가지 날카로운 병기라도 입수할 수만 있다면 적을 만나도 겁이 덜 날 것 같았다. 게다가 곽정과 황용이 조만간 철장산으로 자기를 찾아올 텐데 그럼 또 어떻게 그들을 상대해 물리친단 말인가?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석실로 들어왔다가 공교롭게도 그들 둘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곽정은 그의 말을 다 듣고도 잠자코 있었다.
(이곳이 금지 구역이라니 적들이 감히 올라오지는 못할 테지만 이 산봉우리가 구름을 뚫을 만큼 높은데다가 사방에 길조차 없으니 어떻게 여기를 빠져 나갈 수 있단 말이냐?)
[곽정 오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들어가 보세요.]
황용이 띄엄띄엄 말했다.
[우선 용아의 상처가 어떤지 살펴봐야지.]
곽정은 부싯돌을 쳐 마른 나믓가지에 불을 붙이고 그녀의 어깨를 벗겨 보았다. 눈처럼 횐 살결 위에 검은 손가락 자국 다섯 개가 뚜렷이 보였다. 중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그녀가 연위갑을 입지 않았더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보아하니 구양봉과 구천인의 공력이 막상막하다. 전에 사부님께서도 서독의 합마공을 억지로 막다가 중상을 입으셨다. 다행히 용아가 연위갑을 입기는 했지만 무공은 사부님과 비교할 수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 용아가 입은 상처는 사부님이 입으신 것과 비슷할 텐데 도대체 어떻게 치료를 한단 말이냐?)
곽정은 불붙인 나뭇가지를 잡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
[아니 혈도를 풀어 주겠다고 하더니 왜 그냥 있는 게요. 빨리 혈도나 풀어요.]
구천리가 소리를 질렀지만 곽정은 황용의 상처를 걱정하느라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황용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보 같은 오빠,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계셔요? 영감님 혈도나 풀어 드려요.]
곽정은 그제야 꿈에서 깨듯 정신을 차리고 그의 천돌혈을 풀어 주었다. 구천리는 이제 따갑고 가렵지는 않았지만 음도혈은 그냥 눌린 채라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곽정은 두어 자가 넘는 관솔을 찾아 불을 붙여 손에 쥐었다.
[용아, 내가 안으로 들어가 한번 살펴보고 싶은데 혼자 무섭지 않겠어?]
황용은 몸이 뜨거워졌다 추워졌다 하여 견디기 어려웠지만 곽정이 염려할까 봐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영감님이 옆에 있으니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곽정은 관솔불을 높이 치켜 들고 한발 한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퉁이를 2개 돌자 넓은 굴이 나타났다. 이 굴은 천연의 굴이었다.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굴 입구보다 4,5배나 넓었고 안에는 해골 수십 개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어느 것은 앉아 있고 어느 것은 누워있어 각양각색인 해골 옆에는 반드시 병기며 암기, 취사 도구, 진귀한 보물 등이 놓여 있었다. 곽정은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분들이 모두 방주로서 당년에는 일세를 풍미하던 영웅들인데 이제는 모두 해골로 변해 버리고 말았구나.)
그는 원래 욕심이 없는 위인이라 여러 가지 보물도 전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뒤에 남겨 둔 황용이 걱정스러워 몸을 돌려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굴 동쪽에 있는 해골의 손에 꽉 쥐여진 물건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쇠로 만들어진 상자로 상자 위에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몇 발짝 앞으로 다가서서 관솔불을 가까이 대니 상자 위에 <파금요결(破金要訣)>이란 글자가 보였다.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이것이 악무목의 유서가 아닐까?)
왼손을 뻗어 상자를 잡아 빼니 삐거덕 소리를 내며 해골이 자기를 향해 덮치듯 넘어지며 와르르 무너졌다. 이 사람이 힘을 다해 상자를 움켜쥐고 죽어 백골이 된 뒤에도 그냥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곽정이 상자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해골까지 끌려와 무너진 것이다.
곽정은 상자를 들고 석실을 나와 황용에게로 왔다. 그는 관솔불을 바닥 틈 사이에 끼워 놓고 황용을 일으켜 앉히고 상자 뚜껑을 열어 보았다. 과연 상자 안에는 책이 2권 있었다. 하나는 두껍고 하나는 비교적 얇았다. 두께가 얇은 책에는 한세충이 베껴 놓은 악비의 연표(年表)와 주소(奏疏), 서계(書啓), 시사(詩詞) 등이 씌어 있었다. 곽정은 손에 집히는 대로 책장을 넘기다 한 자, 한 구절마다 악비의 충성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자 새삼 존경심이 일어났다.
[한번 읽어 봐주세요.]
황용이 부탁했다. 곽정이 집히는 대로 펼쳐 보니 <오악사맹기(五嶽祠盟記)>라는 문장이었다.
이 짤막한 문장에는 악비의 필생의 포부가 기록되어 있다. 곽정의 문장이 그리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읽어 가노라니 저절로 비분강개하여 격정이 끓어 넘쳤다. 황용도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수십 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도 이 훌륭한 영웅을 직접 만나 뵐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산허리에서는 여전히 철장방 무리들의 함성이 들려 왔다. 곽정은 황용에게 자기 다리를 베개 삼아 눕게 하고 관솔불에 의지하여 다시 책을 읽어 나갔다. 바람소리가 숲을 쓸며 지나자 골짜기가 울었다. 황용은 추운 듯 곽정의 품을 파고들었다.
[용아, 악무목은 백성들의 고통을 언제나 걱정하고 지냈으니 진정한 영웅이고 호걸이구나.]
[그래요. 그런데 다른 책에는 또 무엇이 씌어 있나요?]
곽정이 다른 책을 살펴보다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이것이 바로 무목왕이 직접 쓰신 병법이야. 완안열 그 녀석이 기를 쓰고 손에 넣으려던 바로 그 책 말이야. 하늘이 도와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됐군그래.]
그 책의 맨 첫장에는 커다랗게 18자가 씌어 있었다.
重蒐選, 謹訓習, 公賞罰, 明號令, 嚴紀律, 同甘苦.
선발을 중시하고, 훈련을 부지런히 하고, 상벌을 공평히 하고, 호령을 분명히 하고, 기율을 엄히 하고, 고락을 같이한다는 뜻이었다. 곽정이 그 뒷부분을 마저 읽어 보려고 하는데 산허리에서 들려 오던 함성이 뚝 그치고 바람소리만 욍윙 울릴 뿐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한 시간 넘도록 들리던 욕지거리와 함성이 끊기니 오히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곽정과 황용이 귀를 기울이니 잠시 후 정적 속에서 은은히 질책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구천리는 연방 큰일났다고 중얼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오늘 이 영감의 목숨을 그대들 손에서 잃게 되는 모양이로군.]
그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곽정이 뛰쳐나가 보니 달빛 아래 독사 수천 수만 마리가 고개를 반짝 들고 혀를 날름거리며 몰려오고 있었다.
(자기들은 이 금지 구역에 들어올 수 없으니 독사를 몰아 공격을 하는구나.)
곽정은 급히 되돌아와 황용을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바닥에 누운 채 욕을 퍼붓고 있는 구천리의 옆구리를 발길로 걷어차 막힌 혈도를 풀어 주고 쇠로 만든 상자를 품에 넣고 산정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석실은 증지봉 둘째 마디쯤에 있었지만 그래도 정상까지는 수십 장을 더 가야 했다. 그러나 곽정이 힘과 정신을 모은 탓에 눈 깜짝할 사이에 정상에 당도할 수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뱀 떼가 벌써 석실에까지 이르렀다.
구천리는 철장방 사람이니 그래도 뱀을 쫓는 재주가 있으려니 했다. 어차피 이 마당에 그까지 염려해 줄 여유가 없었다. 자기야 복사의 보혈을 마신 바 있으니 뱀이 무서울 것 없었지만 도대체 황용을 어떻게 보호할까가 걱정이었다. 그는 황용을 바닥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뱀 떼가 금방이라도 몰려올 듯했다.
[우선 빙 둘러 불을 질러요.]
황용이 일깨워 주는 말을 듣자 곽정은 뛸 듯이 기뻤다.
[난 정말 바보야, 그만한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야.]
즉시 주위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황용의 둘레에 불을 피웠다. 두 사람 둘레에 불을 지르자마자 앞장선 뱀 떼가 벌써 덤벼들기시작했다. 곽정은 불을 가지고도 뱀을 물리칠 수 없을 것 같아 급히 황용을 들어올려 어깨에 둘러멨다. 독사는 점점 더 많아져 황용은 보기에도 징그러웠는지 구토증을 일으키며 두 눈을 감았다.
황용은 허리가 더욱 심하게 아파 왔다. 게다가 곽정이 자기를 둘러메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바람에 정신이 더욱 혼미해졌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향기가 코로 스며들며 서서히 정신이 맑아졌다. 눈을 뜨고 보니 한 줄기 붉은 빛과 함께 혈조가 동쪽으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혈조는 뱀 냄새를 맡고 날아와 먹이를 배불리 먹고 난 후 산정의 불이 보이자 목욕을 하려고 나타난 것이었다.
혈조가 이르자 뱀 떼는 즉시 항복이라도 하는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혈조는 뱀 몇 마리의 쓸개를 꺼내 먹고는 불길 속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가 황용의 어깨 위로 날아와 앉았다.
[이제 독사는 무서울 게 없으니 하산할 방법이나 궁리해 보자구.]
곽정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렇게 말을 꺼내자 황용이 꾀를 생각해 냈다.
[혈조가 정상까지 올라왔는데 수리라고 올라오지 말란 법은 없겠지요. 우리 수리를 타고 한번 멋지게 내려가 볼까요?]
곽정은 이 말을 듣자 너무나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정말 재미있겠는데, 그럼 수리를 불러야지.]
곽정은 곧 무릎을 꿇고 앉아 기를 단전에 모으고 휘파람을 멀리멀리 불었다. 이는 마옥이 예전에 가르쳐 준 전진파의 현문내공인데 그가 《구음진경》을 익힌 후로 공력이 더욱 정진되어 있었다. 이 중지봉의 정상에서 산 아래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순식간에 흰 물체가 창공을 뚫고 내려와 두 사람 앞에 멈췄다.
곽정은 황용의 연위갑을 벗겨 준 뒤 암수리 위에 태우고 혹시 부상을 입어 힘이 없을까 봐 그녀의 몸을 수리의 몸에 묶어 주었다. 그리고 자기도 수컷 수리 등에 탔다. 그가 휘파람을 불자 두 마리의 수리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공중에 떴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일단 공중에 뜨자 오히려 편안했다. 황용은 그래도 장난기가 남아 이러한 장관을 구천리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수리의 목을 가볍게 잡아당겨 석실 앞을 날도록 했다. 구천리는 때마침 굴 앞에 선 채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뱀을 쫓고 있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놀랍기도 하거니와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착한 아가씨, 나도 좀 태워 줘요. 내 아우가 내가 여기 있는 걸 보았으니 이제 살기는 다 틀렸소.]
第 五 卷. 第 三 章.(通卷 章). 지혜 대결
황용은 구천리를 약올리며 말했다.
[내 수리에는 두 사람이 타지 못해요. 당신들은 형제 사이니 살려달라고 부탁하면 될 것 아녜요?]
그녀는 수리 목을 살짝 치며 몸을 돌려 날아가려고 했다. 구천리는 그녀가 가려고 하자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착한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아주 재미있겠지요?]
황용은 호기심이 솟구쳐 그게 뭔지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구천리가 갑자기 몸을 솟구쳐 달려들어 그녀의 등을 얼싸안았다. 원래 그는 굴속으로 독사 수천 수만 마리가 몰려들자 굴 밖으로 뛰쳐나가 소리를 지르다가 그만 철장방의 여러 사람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가 제멋대로 금지 구역에 들어갔으니 친형제는 고사하고 방주 본인이라 하더라도 살아서 중지봉을 내려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죽자 하고 수리 등에 올라탄 것이다.
수리가 영리하고 힘이 세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을 태울 수는 없었다. 구천리가 올라타는 바람에 수리는 즉시 깊은 산골짝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리가 두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안간힘을 써서 떨어져 내리는 속도가 느리기는 했지만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구천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황용을 수리 등에서 떨어뜨리려고 그녀의 등을 낚아챘다. 그러나 곽정이 옷가지로 황용을 수리 허리에 묶어놓아 그렇게 쉽게 낚아채 떨굴 수는 없었다. 황용도 수족이 묶여 있으니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이제 금방이라도 두 사람은 깊은 골짜기로 떨어져 콩가루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수컷 수리는 암컷 수리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되돌아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철장방 무리들도 산허리에서 이 희한한 광경을 숨을 죽인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한 줄기 붉은 빛이 산봉우리 뒤에서 번개처럼 대들었다. 황용이 데리고 다니던 혈조가 구천리의 두 눈을 쪼아 버린 것이다. 구천리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손을 들어 두 눈에 댔다. 이렇게 되자 그만 황용을 놓치고 허공에서 몇 바퀴 돌더니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끔찍한 비명을 들었을 때는 이미 뼈가 가루가 된 뒤였다. 수리는 등이 가벼워지자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높이 솟아 올라 수컷 수리와 함께 날개를 나란히 하고 북쪽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곽정은 수리 등에 탄 채 긴 휘파람을 불어 홍마를 찾았다. 홍마도 지상에서 수리가 나는 쪽을 향해 질풍처럼 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리 두 마리는 6,70리를 날았다. 곽정은 황용의 부상이 걱정되어 수리를 땅에 내려앉게 했다. 땅에 내리자마자 황용을 살펴보니 수리 등에서 정신을 잃고 엎어져 있었다. 곽정은 그녀를 묶었던 옷가지를 끄르고 여기저기 주물러 주었다. 한참을 그러자 황용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이때 하늘은 검은 구름이 가득 차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곽정은 두 팔로 황용을 부축해 안았다. 칠흑처럼 캄캄한 밤, 낯선 데서 도대체 어찌해야 좋올지 막막하기만 했다.
곽정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그냥 발길이 내키는 대로 걸었다. 잡목과 잡초만 무성할 뿐 길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시에 찔렸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더욱 캄캄해지기만 할 뿐 아무리 눈을 크게 떠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곽정은 걸음을 더 천천히 내디딨다. 잘못 발을 내딛다가 깊은 골짜기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2마장쫌 걸었을까, 돌연 왼쪽 머리 위에 별이 하나 나타나 깜빡거렸다. 곽정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방향이라도 확실히 알아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런데 앞에 보이던 빛은 하늘의 별이 아니라 등불이었다. 곽정은 등불이라면 인가가 있겠지 싶어 반가워 발길을 재촉했다. 또 1마장쯤 갔을까, 어두컴컴하니 수목뿐인데 그 등불은 바로 숲 속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숲 속으로 들어서자마자 좁다란 오솔길이 나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리 꼬불 저리 꼬불 엉망으로 꼬여 똑바로 걸어갈 수가 없었다.
곽정은 정신없이 달리다 그만 불빛을 놓쳐 버렸다. 급히 나무 위로올라가 살펴보니 등불이 뒤에 있었다. 이렇게 앞의 등불을 보고 한참 쫓다 보면 어느덧 등불이 뒤에 가있는 경우를 몇 번 당하다 보니 머리만 어지러울 뿐 끝내 등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없었다. 세 마리 새와 홍마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무 위로 올라가 뛰어가고 싶었지만 도대체 발 디딜 장소를 알아볼 수도 없거니와 혹시 나뭇가지에 황용이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곽정이 참을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몇 번이러다 보면 대개는 포기하게 마련이지만 곽정은 그래도 실망하는 기색 없이 잠시 멈추어 호흡을 가다듬고는 또다시 찾아 나섰다.
황용은 부상을 입은 뒤 몸은 쇠약해졌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곽정이 자기를 안은 채 우왕좌왕 애먹는 것을 보자 주위 사정은 잘 몰랐지만 뭔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곽정 오빠, 오른쪽 전방으로 비스듬히 가보세요.]
황용은 눈을 감은 채 힘없이 말했다.
[용아,괜찮아?]
[네.]
기력이 없는 가냘픈 목소리였다. 곽정은 그녀의 말대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걸어 나갔다. 황용은 그의 걸음걸이를 가만히 헤아려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왼쪽으로 여덟 발짝 가보세요.]
곽정은 계속 황용의 말에 좇았다.
[다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열세 발짝요.]
이렇게 한 사람은 길을 인도하고 다른 하나는 칠흑 같은 숲 속을 이리 꼬불 저리 꼬불 계속 걸어 나갔다, 방금 곽정이 한바탕 우왕좌왕 할 때 황용은 이 숲 속이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알았다. 황약사가 천하에 독보적인 오행기문술을 딸에게 전수해 준 덕에 그녀는 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숲 속 길을 눈을 감고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어떤 때는 왼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비스듬히 몇 발짝 물러서기도 하면서 계속 등불을 향해 다가들었다. 길은 가면 갈수록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밥 한끼 먹을 정도의 시간을 헤매고 나니 마침내 등불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났다. 곽정은 반가워 냅다 앞을 향해 달렸다.
[함부로 뛰어들면 큰일나요.]
황용이 다급히 외쳤지만 곽정은 어이쿠 소리와 함께 이미 두 발이 진흙 속에 무릎까지 빠졌다. 하지만 곽정의 무공이 워낙 탁윌해 있는 힘을 다해 겨우 두 발을 뽑을 수 있었다. 고약한 진흙 냄새가 코를 찔렀다. 등불에 의지해 앞을 살펴보니 짙은 안개 속에 두 칸짜리 초가집이 나타났다. 불빛은 바로 이 초가집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주인 계십니까? 길 가는 나그네입니다. 중병을 앓는 환자가 있으니 하룻밤 묵어 가게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물이나 한 모금 주시구요.]
곽정이 큰소리로 주인을 찾았지만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다시 큰소리로 외쳐 보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말을 하자 그제야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까지 온 걸 보면 대단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분명한데 누가 나가서까지 반갑게 맞아 주리라 기다리는 거요?]
차디찬 어조로 미루어 외인을 반기지 않음이 분명했다. 곽정은 차라리 길에서 잘망정 반기지 않는 집에 들어가겠다고 우길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황용의 부상을 치료하는 일이 시급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눈앞의 진흙 늪뿐인데 도대체 지금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곽정은 고개를 떨군 채 낮은 소리로 황용과 상의했다. 황용이 감았던 눈을 뜨고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집은 늪 속에 지은 거예요. 두 칸 초가집이 하나는 네모지게, 또 하나는 둥그런 모양으로 지었나 잘 보세요.]
곽정이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말 그런데. 용아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우선 둥그런 집 뒤로 가서 등불을 향해 정면으로 세 발짝, 다시 비스듬히 다섯 발짝, 그리고는 앞으로 세 발짝 가세요. 이렇게만 간다면 틀림없을 거예요.]
곽정은 황용이 시키는 대로 했다. 과연 발 딛는 지점에는 모두 굵은 말뚝이 박혀 있었다. 다만 그 말뚝이 어떤 것은 구부러지고 어떤 것은 비스듬히 보일 듯 말 듯 박혀 있어 경공을 쓰지 않으면 그대로 진흙 속에 빠지게 되어 있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하게 걸어 나갔다. 119보째에야 둥글게 지은 집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펄쩍 뛰어넘으세요. 왼쪽 머리에 떨어지도록 하셔야 해요.]
곽정은 황용을 업은 채 펄쩍 뛰어들어갔다. 황용이 얘기한 대로 왼쪽 머리에 떨어져 내리면서 마음속으로 또 한 번 놀랐다.
(모든 것이 황용이 예측한 그대로구나.)
원래 울타리 안은 마당인데 그 마당은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은 땅이요, 다른 한쪽은 연못이었다. 곽정은 마당을 건너 내당으로 들어섰다. 내당에는 월문(月門)만 있을 뿐 문짝이 달리지 않았다.
[안심하고 들어가세요. 안에는 이상한 것이 없을 거예요.]
황용이 나직이 하는 말을 듣고 곽정이 안으로 들어서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길 가는 나그네가 외람되게 들어섰으니 주인께서는 과히 허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에는 긴 탁자 위에 등잔 7개가 천강북두의 형세로 놓여 있었다. 땅바닥에는 삼베가 있고 그 옷을 걸친 머리가 회끗희끗한 여자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대나무 조각을 펼쳐 놓은 채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지 곽정이 인사를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곽정은 황용을 옆에 있는 의자에 내려놓았다. 등불에 비친 여자의 표정을 살펴보니 측은하게도 초췌하니 핏기 하나 없었다. 곽정은 따뜻한 물이라도 한잔 청하려고 했지만 혹시 여자의 심기를 산만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잠자코 있었다. 황용도 잠시 쉬자 정신이 드는지 그 여자를 살펴보았다. 바닥에 늘어놓은 대나무 쪽은 길이가 4촌, 넓이가 2푼으로 숫자를 따질 때 쓰는 산판(算板)이었다.
그 산판을 늘어놓은 상태를 보니 상(商), 실(實), 법(法), 차(惜)의 사행(四行)으로서 산판의 숫자로 보아 그 여자는 지금 5만 5,225의 평방근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五)! 이백삼십오예요.]
황용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답을 말해 주었다.
그 여자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황용을 쏘아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계산에 열중했다.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드는 순간 곽정과 황용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이는 36,7세로 보였다. 무슨 고민이 많은지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더니 과연 오(五)를 계산해 내고 놀라며 고개를 들어 황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묘령의 소녀가 우연히 알아맞힐 수도 있다는 듯 235라는 숫자를 종이 위에 적어 놓고 또다시 계산에 골몰했다. 이번에는 1,123만 9,424의 입방근을 구하는 계산으로 그녀가 막 6행(六行)으로 산판을 늘어놓고 셈을 하려고 하는데 황용은 벌써 해답을 알아냈다.
[이백이십사예요.]
여자는 홍 하고 코방귀를 뀌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한참 동안이나 쩔쩔매다가 마침내 224의 답을 풀어 놓았다.
마침내 여자가 허리를 펴며 일어서는데, 주름살투성이 이마에다 얼굴의 위는 늙어 보이고 아래는 젊어 보이는 야릇한 인상이었다. 그 여자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황용을 쏘아보다가 갑자기 내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따라 들어오시오.]
그리고 등잔불 하나를 들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곽정이 황용을 부축하고 따라 들어가니 내실 벽은 원형이요, 바닥에는 고운 모래가 깔려 있는데 모래 위에는 가로세로로 된 부호와 원이 태(太), 천원(天元), 지원(地元), 인원(人元), 물원(物元) 등의 글자와 함께 그려져 있었다. 곽정은 왜 그런 것들이 그려져 있는지 몰랐다. 다만 잘못 발을 내딛어 모래 위의 부호를 망가뜨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황용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역수(曆數)를 배워 정통해 있었다. 바닥에 그린 부호를 보자마자 그것이 모두 깨우치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 술수(術數) 가운데의 난제임을 알았다.
황용은 허리춤에서 죽장을 뽑아 들고 곽정에게 기댄 채 모래 위에 그 여자가 몇 달 동안 풀다 풀다 결국 풀지 못했던 난제를 척척 풀어 모래 위에 써주었다.
그 여자는 너무나 놀라 입을 딱 벌린 채 한참 동안이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사람이오, 귀신이오?]
이 말을 들은 황용이 살며시 웃었다.
[천원사원지술(天元四元之術)이 뭐 이상하다고 그러세요? 산경에는 모두 십구 원이 있는데 그것만 풀 줄 알면 나머지는 아주 쉬운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여자는 맥이 빠지는지 몸을 몇 번 흔들흔들하다가 그냥 모래 위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계산하는 방법이 나보다 백배는 흘륭하시군. 그럼 한 가지 물어 봅시다. 일에서 구까지의 아흡 개 숫자를 삼렬로 나열해 종횡으로 계산해도 모두 그 합이 십오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배열하면 될까요?]
황용은 모래 위에 구궁지도(九宮之圖)를 그려 주며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알려 주었다.
여자는 사색이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나만이 아는 독창적인 비법인 줄 알았더니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었군요.]
[구궁뿐만 아니라 사사도(四四圖), 오오도(五五圖)는 물론 백자도(百字圖)도 어려울 것 없어요.]
황용이 이렇게 말하며 사사도의 원리를 설명해 주자 그 여자는 황용의 말대로 모래 위에 그려 보았다. 과연 말한 그대로라 너무 놀라워 입을 떡 벌린 채 일어서며 그제야 물었다.
[그래, 아가씨는 도대체 누구요?]
그런데 황용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배를 움켜쥐고 진통을 참는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품속에서 조그만 병을 꺼내 들고 그 안에서 녹색 환약을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윽고 시간이 한참 흐르자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만두어요, 그만.]
그 여자는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며 두 눈에서 눈물을 좔좔 흘렸다. 곽정과 황용은 그 여자가 하는 행동이 너무나 이상해 서로 바라만 볼 뿐 할말을 잊었다. 다시 그녀가 막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먼 곳에서 철장방이 질러대는 함성이 들려 왔다.
[누구들인가? 적 아니면 친구, 어느편이지?]
[우리를 쫓는 적들입니다.]
그 여자의 물음에 곽정이 대답했다.
[철장방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여자가 한참 동안 귀를 기울여 듣다가 입을 열었다.
[구방주가 직접 인솔하고 추적하는 것 같은데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지극히 엄숙한 말투였다.
곽정은 앞으로 한 발짝 나가 황용을 감싸며 대답했다.
[우리 둘은 구지신개 홍방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이 사매가 철장방 구천인에게 부상을 당해 이곳까지 피해 왔습니다. 선배님께서 만약 철장방과 무슨 긴밀한 관계라도 맺고 계시다면 저회를 받아 주시지 않울 것이니 우린 그만 떠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읍을 하고 황용을 부축해 등에 업으려고 하자 여자가 담담하게 웃었다.
[나이도 어린데 꽤 고집이 세시군. 당신은 버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매는 어렵다는 것을 알기나 하시오? 나는 누군가 했더니 홍칠공의 제자들이군. 어쩐지 재주가 보통이 아니라 했더니.]
그녀는 다시 귀를 기울여 함성을 들었다. 그 소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다.
[그들은 길을 찾지 못해 들어오지 못할 테니 안심하시오. 기왕 이곳에 왔으니 내 손님인데 이 신(神).... 신(神).... 이 어찌 내 집에 오신 손님을 그렇다고 그냥 가게 놔둔단 말이오.]
원래 그녀의 이름은 신산자(神算子) 영고(瑛姑)다. 그러나 황용의 머리가 비상해 자기보다 계산을 월등히 잘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그냥 신(神)자만 어물거리다 그만둔 것이다.
곽정이 다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영고는 황용의 옷깃을 헤치고 상처를 살펴보더니 이마를 찡그렸다. 그녀는 품속에서 작은 병을 찾아 녹색 환약 하나를 꺼내 물에 녹인 다음 황용에게 주며 마시라고 했다. 그러나 황용은 약을 받고도 영고의 정체를 몰라 망설였다. 이를 본 영고가 차갑게 웃었다.
[구천인의 철장에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 그냥 나을 줄 아오? 만약 당신을 해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냥 놔두어도 충분해요. 이 약은 진통을 멈추게 하는 것인데 먹기 싫거든 그만두구려.]
이렇게 말하며 황용의 손에서 약그릇을 잡아채 바닥에 내팽개쳤다.
곽정은 그녀가 황용을 너무 무례하게 대한다 싶어 왈칵 화를 냈다.
[제 사매가 중상을 입어 그러는데 뭐 그렇게까지 화를 내십니까? 용아, 우리 가자.]
[아니, 이 영고의 초가집이 비록 보잘것없기는 해도 아무나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곳은 아닌데 제멋대로 나가겠다니 어림없는 소리요.]
그녀는 손에 죽편 2개를 나누어 쥐고 곽정과 황용 앞을 가로막고 섰다.
곽정은 뭐라고 할말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꿇어 엎드려 있다가 그냥 일어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영고는 옆에 있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엎드려 붓을 들어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쓰더니 그 종이를 헝겊에 싼 뒤 다시 바늘과 실로 박았다. 영고는 이렇게 주머니 세 개를 가지고 원 모양의 방으로 돌아왔다.
[숲 밖으로 나간 뒤 철장방의 추적을 피해 동북방으로 곧바로 가 도원현(桃源縣)에 이르거든 이 흰색 주머니를 끌러 보도록 하시오. 그 뒤에 어떻게 하라는 말도 이 안에 분명히 씌어 있다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끌러 보지 않도록 각별히 당부하오.]
곽정은 너무나 기뻐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주머니를 받으려 했다. 그 순간 영고가 내밀었던 손을 움츠렸다.
[잠깐만. 만일 그 사람이 구해 주려고 하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사매의 생명을 구해 준다면 내 부탁 하나를 들어주어야겠소.]
[생명을 구해 주신 은혜야 당연히 갚아야 마땅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냥 분부만 하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부탁은 다만 이 사매가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일 개월 이내에 이곳으로 와서 나와 함께 일년만 지내 달라는 것이오!]
[그건 무엇 때문입니까?]
곽정이 이상해서 묻자 영고가 신경질을 부리며 쏘아붙였다.
[무엇 때문이든 그건 상관할 일이 아니오. 다만 내 말대로 하겠소, 안 하겠소? 그것만 분명히 대답하시오.]
그러자 이번에는 황용이 나섰다.
[기문술수(奇門術數)를 배우시겠단 말이군요. 어려울 것 없어요. 오겠다고 약속하지요.]
영고가 곽정을 향해 하얗게 눈을 흘겼다.
[사내대장부가 사매의 총명함을 십분지 일도 닮지 못했군 그래.]
이렇게 말하며 즉시 주머니 세 개를 건네 주었다. 곽정이 받아 보니 하나는 흰색이요, 다른 두 개는 빨간색과 노란색 주머니였다. 그것을 품속에 잘 간직해 넣고 다시 고맙다는 절을 했다. 그러나 영고는 비켜서며 절은 받지 않고 말을 꺼냈다.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그런 인사는 받고 싶지도 않아요. 그녀의 생명을 구해 주려고 하는 것도 다 나 자신을 위해서니까요. 밤새 고생을 해 배가 고플 테니 죽이나 들도록 하오.]
그렇게 말하고는 즉시 황용을 긴 의자에 눕게 했다. 곽정은 옆에서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황용을 지켜 보았다. 영고가 한참 뒤에 목판에 따뜻한 죽 두 대접을 담아 내왔다. 닭고기 한 접시와 생선도 있었다.
곽정은 벌써부터 배가 고팠지만 황용이 걱정스러워 시장기조차 못 느꼈었다. 이제 다소 긴장이 풀린데다가 닭고기와 생선을 보니 입에 군침이 가득 고였다.
그는 황용의 손등을 가볍게 몇 번 쳤다.
[용아, 일어나 죽이라도 마셔.]
황용이 가까스로 눈을 뜨고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가슴이 아파서 먹지 못하겠어요.]
[약을 주며 먹으라고 했는데도 공연히 의심하고 먹지 않더니 그게 뭐요.]
영고가 여전히 볼멘소리를 했지만 황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곽정 오빠, 구화옥로환 한 알만 꺼내 주세요. 좀 먹게요.]
그 환약은 육승풍이 귀운장에서 준 것인데 황용은 그걸 계속 품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홍칠공과 곽정이 구양봉에게 맞아 부상을 당했을 때도 몇 알씩 먹은 일이 있었다. 기사회생의 약효는 없다 하더라도 통증을 멎게 하는 효력은 있었다. 곽정이 재빨리 대답하고 주머니 속에서 한 알을 꺼내 주었다.
황용이 구화옥로환을 꺼내 달라고 했을 때 영고는 갑자기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 주홍색 환약을 보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게 구화옥로환인가? 어디 나 좀 보여 줘요.]
곽정은 그녀의 말소리가 너무나 이상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초리가 험악하게 변해 있었다. 곽정은 더욱 이상하게 여기며 환악을 모두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영고가 받아 냄새를 맡아 보니 향기가 물씬 코 속에 스며들고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이건 도화도의 단약(丹藥)인데 어디서 얻었지? 빨리 말을 해요!]
영고의 말소리가 처참하게 떨려 나왔다. 황용은 뭔가 마음속으로 짚이는 게 있었다.
(이 여자가 기문오행을 익히고 있었다는데 혹시 도화도의 어느 제자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제 사제인 황용이 바로 도화도주의 따님이지요.]
곽정의 말에 영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다.
[뭐, 황노사 딸이라구?]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두 눈에 반짝반짝 광채를 발하며 어깨를 폈다 움츠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였다.
[곽정 오빠, 그 주머니 세 개를 그녀에게 되돌려주세요. 우리 아버지에게 원한이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우리도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요.]
곽정은 지금까지 황용이 하는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영고가 시선을 창 밖에 둔 채 혼자 중얼거렸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그러더니 갑자기 다른 방으로 들어가 등을 돌린 채 뭔가를 하는 것이었다.
[오빠, 우리 가요. 저 여자 꼴도 보기 싫어요.]
곽정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영고가 되돌아왔다.
[내가 술수를 배우는 까닭은 도화도에 들어가기 위해서요. 황노사의 딸이 그토록 술수에 통달해 있는데 다시 백년을 더 배워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운명이 그런데 무슨 말을 더 하겠소? 주머니를 그냥 가지고 가시오.]
이렇게 말하며 구화옥로환이 담긴 주머니와 자기가 만든 주머니를 다시 곽정의 손에 쥐여 주며 황용을 바라다보았다.
[이 구화옥로환은 상처에 유해무익할 뿐이니 먹지 않도록 하시오.
상처가 치유된 뒤 일년 동안의 약속은 잊지 않겠지요? 당신의 아버지가 내 일생을 망쳤는데 이 음식은 차라리 개에게 줄망정 당신들에게는 못 주겠소.]
영고도 이렇게 말하며 죽과 닭고기를 창 밖으로 쏟아 버렸다.
황용은 화가 나서 몇 마디 해줄까 하다가 참고 곽정을 붙들고 일어서며 죽장으로 바닥에 깔린 모래 위에 세 가지 산수 문제를 써놓았다. 그리고 곽정의 어깨에 기댄 채 친천히 걸어 나왔다. 곽정이 대문을 벗어나 뒤를 돌아보니 영고는 손에 죽편을 든 채 방금 황용이 써놓은 문제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둘은 숲 속을 벗어나자 곽정이 다시 황용을 등에 업고 그녀가 알려주는 대로 한발 한발 앞을 향해 걸었다. 혹시 걸음을 잘못 내디딜까 봐 말도 꺼내지 못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 묵묵히 걷기만 했다. 곽정은 숲 속을 완전히 벗어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용아, 모래 위에 써준 것이 도대체 뭐지?]
[내가 세 가지 문제를 내놓은 거예요. 홍, 반년 이내에는 풀지 못할걸요.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내버려둬야지. 어쩌면 그렇게 무례할 수가 있어요?]
[그래, 그녀가 용아 아버님에게 무슨 원한이 맺혔을까?]
[난 아버님께 얘기를 들어 본 일이 없는걸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황용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곽정 오빠, 그 여자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인이었겠지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런 짐작을 하고 있었다.
(혹시 아버지와 애정 관계로 원한을 품은 것은 아닐까?)
[미인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할 바 아닌데, 혹시 용아가 내놓은 문제를 생각하다가 후회가 되어 쫓아와 주머니를 되돌려 달라고 하지나 않을지 모르겠어.]
[그런데 그 주머니 속에 뭐가 씌어 있는지 어디 한번 뜯어 볼까요?]
[안 돼, 그럴 수 없어. 그녀의 말대로 도원현에 가서 뜯어 보자구.]
황용은 호기심이 솟구쳐 먼저 뜯어 보고 싶었지만 곽정이 우기는 바람에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밤새 곤욕을 치르는 동안 날이 환하게 밝아 왔다. 곽정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사방을 살펴보았다. 철장방 무리가 눈에 보이지 않자 그런대로 안심이 되어 휘파람을 불어 홍마와 혈조를 찾았다. 머지않아 수리도 날개를 퍼덕거리며 나타났다. 황용과 곽정이 막 말등에 올라타자 숲 속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수십 명의 무리가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원래 그들은 숲 속에 매복한 채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곽정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자, 우리는 이만 실례하오.]
곽정이 웃으며 말하고 다리에 힘을 주자 홍마는 구름을 뚫고 하늘을 날아가듯 달렸다. 바람소리만 귀에 윙웡거릴 뿐 그들을 향해 달려들던 무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멀어졌다. 홍마는 정말 빨랐다. 다음날 점심때에는 벌써 수백 리 밖에 와 있었다. 둘은 길가에 있는 작은 객점을 찾아 들었다. 황용은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간신히 미음만 마셨을 뿐이었다. 곽정은 다른 사람한테 물어 보고야 벌써 도원현 경내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그는 급히 횐 주머니를 꺼내 뜯어 보았다. 주머니 안에는 지도가 있었고 지도 옆에 두 줄이 씌어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대로 끝까지 가면 폭포가 나타나오. 그 옆에는 초가집도 있소. 거기서 빨간색 주머니를 뜯어 보시오.)
곽정은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즉시 말등에 올라 길을 재촉했다.7,80리를 달리자 길이 점점 좁아졌다·다시 l0리쯤 더 갔울까, 길 양쪽에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와 구절양장의 한 사람이 겨우 지날까말까 한 좁은 길이 나타났다. 홍마를 타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었다. 곽정은 어쩔 수 없이 황용을 업고 홍마를 놔둔 채 걷기 시작했다.
第 五 卷. 第 四 章.(通卷 章). 어초경독의 독수
그 길은 험난한 고갯길이었다. 또 한 시간쯤 걸었을까, 길은 더욱 좁아졌다. 어떤 곳은 황용을 옆으로 안고 겨우 빠져 나갈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무더운 7윌. 해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간이었지만 길 옆 깎아지른 산봉우리가 해를 가려 오히려 서늘했다.
다시 또 한참 동안 걸으니 시장기가 몰려왔다. 곽정은 품속에서 마른 음식을 꺼내 들고 걸어가며 먹었다. 마른 떡 세 개를 먹고 나니 이제는 갈증이 났다.
이때 먼 곳에서 은은히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곽정은 발길을 재촉했다. 공산(空山)은 적적하고 물 소리만 산골짝에 울렸다. 물 소리는 갈수록 요란하게 커졌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백룡 같은 큰 폭포 하나가 맞은편에 있는 두 봉우리 사이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고개 위에서 내려다보니 폭포 옆에 과연 초가집 한 채가 보였다. 곽정은 즉시 근처에 있는 돌 위에 앉아 빨간색 주머니를 뜯었다.
<이 여자의 부상은 당세에서 오직 단황야 한 사람만이 치료할 수 있다....>는 내용이 횐 종이에 씌어 있었다.
곽정은 단황야라는 세 글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단황야라면 용아의 아버님과 함께 이름을 날리는 남제(南帝)가 아닌가?]
황용은 너무나 피곤하고 고달파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남제라는 말을 듣자 정신이 바짝 났다.
[남제요? 아버지한테 말씀 들은 일이 있는데 단황야는 운남(雲南) 대리국(大理國)에서 황제 노릇을 하고 있는 분 아니에요?]
운남이라면 이곳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곳이다. 어떻게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있단 말인가? 황용은 눈앞이 아득해 와 억지로 일어나 곽정의 등에 기댔다. 곽정은 그 종이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이 여자의 부상은 당세에서 오직 단황야 한 사람만이 치료할 수 있다. 그는 불의한 일을 많이 저지르고 화를 피해 도원(桃源)에 와 있다. 외인은 만날 수가 없으니 만약 치료를 요청한다면 금기를 범하는 것이다. 미처 그를 만나기도 전에 어초경독(漁樵耕讀)의 독수(毒手)에 살해된다. 그러므로 사존인 홍칠공의 명령을 받고 단황야께 보고할 일이 있어 왔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접 남제를 만났을 때 노란 주머니 속에 있는 지도를 꺼내라. 한 가닥 살길은 오직 이것에 달렸다.
곽정이 다 읽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황용은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용아, 단황야가 어째서 불의한 일을 많이 저질렀을까? 그리고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어째서 금기를 범하는 일이라는 거지? 어초경독의 독수란 뭐야?]
[곽정 오빠, 오빠는 왜 그래요? 내가 뭐든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황용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곽정이 멈칫하다가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래그래. 우리 일단 내려가자구]
곽정은 눈길을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폭포 엎 버드나무 밑에 웬 사람이 삿갓을 쓰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너무 멀어 그가 무엇을 하는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내려가는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얼마 되지 않아 곽정은 황용을 업은 채 폭포 근처에 도착했다. 삿갓 쓴 사람이 도롱이를 걸치고 돌 위에 앉아 낚시질을 하는 것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폭포의 물결이 어찌나 급한지 고기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설사 고기가 있다 하더라도 미끼를 삼킬 틈도 없어 보였다. 그 사람을 살펴보니 나이는 37세쯤 되어 보이고 거무튀퉈한 얼굴은 꼭 솥 밑바닥 같았다. 꼬불꼬불한 수염이 온 얼굴을 덮었는데 눈도 깜박이지 않고 물 속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곽정은 그가 낚시질에만 온 신경을 모으고 있어 감히 뭐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일단 황용을 버드나무에 기대 쉬게 해놓고 도대체 무슨 고기를 낚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으니 물 속에서 금빛이 반짝했다. 순간 어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낚싯대가 휘청거렸다. 곽정이 물 속을 들여다보니 월척이 넘는 놈이 낚싯졸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고기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뱀 같지도 않은데 전신이 금빛이요, 생김새가 이상야릇했다. 곽정은 너무나 이상해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저게 뭐야?]
곽정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물 속에서 갑자기 또 한 마리 금빛 고기가 튀어 오르며 낚싯줄을 물었다. 어부는 놀랍기도 하거니와 반가운 마음에 있는 힘을 다해 낚싯대를 잡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낚싯대가 점점 휘어 이젠 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과연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낚싯대가 두 토막으로 부러져 버렸다. 금빛 괴어 두 마리는 낚싯줄을 토해 놓고 물 속을 유유히 몇 바퀴 맴돌다 물밑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부가 몸을 돌려 세우며 눈알을 부라렸다.
[어디서 굴러 온 녀석이냐? 이 어른이 반나절이나 고생하며 기다린 고기인데 네놈 때문에 놀라 달아났으니 그래 어떻게 할 테냐?]
그는 부채만큼이나 큰 손을 뻗어 금방이라도 때릴 것처럼 하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억지로 분을 삭이느라 씩씩댔다. 두 손을 어찌나 꼭 움켜쥐고 있는지 우두둑우두둑 뼈마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곽정은 자기가 잘못한 줄 알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용서하세요. 제가 참으로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고기가 그렇게 생겼습니까?]
[아니 이놈아, 눈깔이 삐었느냐? 그래, 보고도 몰라! 그래 그게 고기냐 이놈아! 금와와(金娃娃)라고 하는 게다.]
곽정은 욕을 먹고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금와와가 뭐예요?]
어부는 더욱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금와와가 금와와지 뭐야? 어린 놈이 웬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
곽정은 아무래도 그에게 단황야를 찾아가는 길을 물어야 할 형편이라 감히 그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어 공손하게 두 손을 마주잡고 사죄를 했다. 그러자 옆에 있는 황용이 보다못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금와와는 금빛 고기인데 우리 집에도 몇 쌍 기르고 있어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야단일까?]
어부는 황용이 금와와를 아는 척하자 꽤 놀라웠던 모양이다.
[홍, 거짓말도 잘하는구나. 집에서 몇 쌍 기른다니 어디 좀 물어 보자. 그래 금와와는 어디에 쓰는 것이냐?]
[어디에 쓰긴 어디에 써요. 좀 이상하게 생긴데다가 아아아 하고 우니 어린애 같아 그냥 기를 뿐이지 뭐예요.]
어부는 황용이 하는 말이 꼭 들어맞자 한걸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가씨, 정말 집에서 몇 마리 기르고 있다면 내게 한 쌍은 변상해 줘야지.]
[제가 무엇 때문에 번상을 해요?]
어부가 곽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한 마리를 근사하게 낚아 올리려고 하는데 저 소년이 떠드는 바람에 또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 낚싯대가 부러졌단 말야. 이 금와와라는 고기는 너무나 총명해서 한번 실수하면 다시는 낚을 수 없단 말이거든. 그러니 변상하란 말은 당연하지 않은가]
[잡으셨대도 한 마리밖에 더 잡으셨게요? 그래 한 마리 낚아 올렸는데 두 번째도 걸릴 줄 아셨나요?]
황용의 말에 어부는 대답이 궁한지 머리만 긁적거렸다.
[그럼 어쨌든 한 마리라도 변상해 줘야지.]
[암컷이고 수컷이고 사홀도 못 가 다 죽어 버리는걸요.]
어부는 황용의 말이 틀림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자 그들에게 굽실굽실 절까지 했다.
[좋아요, 내가 잘못했으니 그럼 한 쌍만 달라고 부탁하면 안될까?]
[그걸 어디에 쓰려는지 그것부터 말씀을 하셔야지요.]
황용이 웃으며 묻자 어부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말씀을 드리지. 내 사숙님은 천축국(天竺國) 사람이신데 며칠 전 내 사부를 찾아오시던 도중 길에서 금와와 한 쌍을 잡았다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셨지. 천축에는 무서운 독층이 사람과 가축을 해치고 있다는데 해마다 해를 입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대. 그런데 이 금와와가 그 독층의 천적이라는군. 내가 며칠만 잘 길러 주면 우리 사부를 뵌 후 다시 천축국으로 갈 때 가지고 가서 번식시키겠다고 하셨는데 그만.....]
[자칫 잘못해서 그만 놓쳤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 어떻게 그걸 알았지?]
어부가 눈을 동그갛게 뜨자 황용은 입을 비쭉 내밀었다.
[그거야 아주 쉬운 일이지요 뭐. 금와와는 기르기가 참 어려워요. 저희도 처음에는 다섯 쌍을 길렀는데 뒤에 두 쌍이 도망가 버린걸요.]
어부는 두 눈을 반짝이며 희색이 만면했다.
[착한 아가씨, 내게 한 쌍을 주어도 두 쌍이 남겠는걸. 안 준다면 사숙은 나를 나무라실 텐데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하지?]
[한 쌍을 드리는 거야 그리 어려울 것 없지만, 그런데 왜 처음엔 우리를 그렇게 험악하게 대하셨어요?]
어부는 씩 웃고는 대답 대신 말머리를 돌렸다.
[착한 아가씨, 그래 집이 어디야? 여기서 멀지는 않은가?]
황용이 가볍게 한줌을 내쉬었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지만 그래도 몇 천 리는 될걸요.]
어부는 깜짝 놀라 텁석부리 수염이 꼿꼿하게 섰다.
[아니 이 계집애가, 어디서 어른을 놀리고 있는 게야?]
바위만한 주먹을 번쩍 들어 황용의 얼굴을 금방이라도 내려칠 것처럼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황용이 너무 어려 자기 주먹에 맞으면 박살이라도 날 줄 알았는지 주먹만 번쩍 치켜 든 채 차마 내려치지는 못했다. 곽정은 그가 주먹을 내려치면 팔목을 잡아 비틀 생각으로 어부만 노려보았다. 그러나 황용은 태연자약하게 읏고만 있었다.
[서둘 것 없어요. 내 벌써 계획을 짜놓았으니 곽정 오빠는 수리나 부르세요.]
곽정은 황용이 무얼 하려는지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수리를 불렀다. 어부는 그의 휘파람 소리가 산골짝을 울리며 퍼지자 중기(中氣)가 충만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방금 손을 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 녀석한테 크게 당할 뻔했구나.)
잠시 후 수리 두 마리가 나타나자 황용은 옆에 있는 나무껍질을 벗긴 다음에 바늘로 찔러 글씨를 썼다.
<아버지, 금와와 한 쌍이 필요해요. 수리 편에 보내 주세요. 딸 용아.>
곽정은 기뻐하며 즉시 허리띠 한쪽을 잘라 수컷 수리의 발에 나무 껍질을 묶어 주었다.
[도화도에 빨리 갔다 와!]
황용이 수리에게 벌써 말을 했는데도 곽정은 혹시 못 알아들었을까 봐 손으로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화도야 응, 알겠지 ! ]
곽정이 연거푸 세 번이나 말을 하자 수리 두 마리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창공을 한바퀴 돈 뒤 구름 위로 치솟아 동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부는 놀라 입을 딱 벌린 채 닫을 줄을 모르다가 한참 만에야 혼자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도화도, 도화도라! 황약사와는 어떤 관계인가?]
[저의 아버진데 왜요?]
황용이 자랑스럽다는 듯 뻐기며 말했다.
[아 그런가.]
어부는 이렇게 어물쩍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사흘 안에 수리가 금와와 한 쌍을 가지고 올 텐데 늦지는 않겠지요.]
[글쎄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을까.]
곽정과 황용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어부의 눈초리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곽정은 허리롤 굽히고 다시 인사를 했다.
[어른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어부는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여긴 뭣 하러 왔지? 누가 시켜서 왔는가?]
[이 후배 단황야를 뵈올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곽정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영고가 준 주머니에는 홍칠공의 분부로 왔다고 하라 했지만 그는 워낙 거짓말을 못하는 위인이라 둘러대지 못하고 우물우물 넘어가려고 했다.
[내 사부님께서는 외인을 만나지 않으시는데 그래 무잇 때문에 그 분을 찾아왔는가?]
어부가 날카롭게 묻자 곽정은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가 남제를 만나지 못하게 되면 황용의 생명을 잃을까 염려되어 잠시 거짓말을 할까말까 망설였다. 어부는 곽정의 낯빛이 불안하고 황용의 얼굴이 초췌한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을 하는 눈치였다.
[내 사부님께 병을 치료해 달라고 왔지?]
곽정은 그가 자기들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묻는 것 같아 그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내 사부님을 만날 생각은 아예 집어치우게. 공연히 나만 사부님, 사숙님의 책망을 듣게 하려구. 금와와고 은와와고 다 필요 없으니 빨리 이 산을 내려가라구!]
어부의 말투가 어찌나 단호한지 더 이상 부탁할 여지가 없었다. 곽정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이나 멍청하게 서 있다가 다시 한 번 어부에게 꾸벅 절을 했다.
[부상을 입고 치료를 청하러 온 이 사람은 도화도 황도주의 무남독녀 외딸인데 지금 개방의 방주로 있습니다. 어른께서는 황도주와 홍방주 두 분 체면을 보아 저희가 단황야를 뵈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어부는 홍방주란 말을 듣자 안색이 종전보다는 상당히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이 어린 소저가 개방의 방주라고? 못 믿겠는걸.]
그러자 곽정은 황용이 들고 있는 죽장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개방 방주의 타구봉인데 아저씨께서도 보시면 아시겠지요?]
어부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구지신개와는 어떤 관계지?]
[우리 두 사람의 은사십니다.]
[원래 그런 관계였던가? 그럼 내 사부님을 찾아온 것은 구지신개의 분부를 받은 것인가?]
영고의 서신에는 어디까지나 사부의 명을 받았다고 우기라고 했지만 곽정의 품성이 워낙 중후하고 진실해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계속 머뭇머뭇하자 황용이 재빨리 나섰다.
[그래요.]
어부는 고개를 숙인 채 혼자 중얼거렸다.
[구지신개와 내 사부님의 우정은 누구 못지않지.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황용은 어부가 머뭇거리는 틈을 이용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단황야를 뵙고 치료도 청하고 또 다른 중요한 일도 말씀드리라고 하셨어요.]
어부가 고개를 번쩍 들고 황용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구지신개께서 당신들에게 단황야를 만나 뵈라고 하셨다구?]
어부가 날카롭게 추궁했다.
[그래요.]
[정말 단황야라고 말씀하시던가? 다른 사람이 아닌.]
황용은 이렇게 묻는 데는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았지만 당장 말을 바꿀 수도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부가 그들 앞으로 다가서며 큰소리를 질렀다.
[단황야는 벌써 돌아가셨다!]
[돌아가시 다니요?]
곽정과 황용은 깜짝 놀라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단황야께서 세상을 떠날 때 구지신개도 옆에 계셨는데 그래 그 단황야를 찾아뵈라는 분부를 내리셨다구?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고 무슨 흉계를 꾸미러 왔는지 빨리 말을 해라.]
이렇게 말하며 어부는 또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오른손으로 황용의 어깨를 낚아채려고 달려들었다. 곽정은 그가 바짝바짝 다가드는 것을 보고 벌써부터 방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황용의 어깨를 낚아채려는 순간 왼손을 빙 돌리며 오른손을 뻗어 견룡재전의 솜씨로 황용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는 순수한 방어 자세로, 적이 대들면 막고 대들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어부는 곽정이 반격을 하지 않자 의외라고 생각했던지 다섯 손가락을 뻗어 황용의 왼쪽 어깨를 긁어 잡아 당기려고 했다. 그런데 미처 손이 닿기도 전에 곽정이 뻗은 손에 가로 막혔다. 어부는 순간 손이 떨리고 가슴이 화끈거려 손을 재빨리 거두고 생각했다.
(전에 홍칠공과 사부가 무공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들은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분의 항룡십팔장이군. 그렇다면 이들 둘이 그의 제자들이 분명한데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좋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살펴보니 곽정은 두 손을 마주잡은 채 여전히 공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가 상풍(上風)을 잡았는데도 거만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부는 곽정에게 십분 호감이 갔다.
[두 분이 구지신개의 제자라고 하지만 이번 길은 결코 홍칠공의 분부를 받고 오신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요?]
어부가 다시 다그쳐 물었다. 곽정은 그가 어떻게 알아맞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사실은 사실이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부의 표정은 먼저처럼 그렇게 험악하지는 않았다.
[구지신개께서 부상을 입고 오셨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사부님을 뵙게 해드릴 수 없는 입장이니 두 분이 양해를 하시오.]
[정말 저희 사부님이 오셔도 안 되나요?]
황용이 묻자 어부는 살래살래 머리를 흔들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나를 때려 죽인다 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황용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단황야가 자기 사부라면서도 단황야는 벌써 죽었다니? 또 그가 세상을 떠날 때 홍칠공이 옆에 계셨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구나. 어쨌든 그의 사부가 이 산중에 있는 것은 분명하니 그가 단황야든 다른 사람이든 끝까지 올라가 봐야 한다.)
황용은 고개를 들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산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철장산 중지봉보다 훨씬 높아 보였다. 폭포도 마치 하늘 위에서쏟아져 내려오는 듯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태백이 황하의 물은 하늘에서 내려은다더니 정말 이 폭포의 물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구나.)
황용은 폭포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눈길을 돌리면서 묘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물밑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꿈틀거리는 물체가 보였다. 황용은 천천히 물가로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금와와 한 쌍이 꼬리만 내놓은 채 돌 틈을 비집고 들어가고 있었다. 황용은 곽정에게 손짓을 하며 와서 보라고 했다.
[내 내려가 잡아야지,]
[흥! 어림없어요. 물살이 이렇게 센데 어떻게 헤엄치겠어요?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황용이 말렸지만 곽정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만약 위험을 무릅쓰고 어부에게 고기를 잡아 준다면 그의 사부를 만나게 해줄지도 몰라. 눈만 멀뚱멀뚱 뜬 채 황용의 목숨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 )
그는 황용이 말릴 것을 뻔히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입은 그대로 폭포 속으로 뛰어들었다.
[곽정 오빠!]
황용이 놀라 소리를 지르다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어부도 깜짝 놀라 손을 뻗어 황용을 부축해 일으킨 뒤 초가집을 향해 달렸다. 무슨 물건이라도 가지고 와서 곽정을 구할 참이었다. 황용이 정신을 차리고 돌 위에 앉아 가슴을 졸이며 바라보니 그는 거친 물살 속에서도 바위처럼 끄덕하지 않고 태연히 서서 물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금와와를 잡아챘다.
그는 한 손에 한 마리씩 금와와 꼬리를 움켜쥐고 혹시 고기가 다치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런데 금와와의 몸에는 미끈거리는 점액이 묻어 있어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었다. 금와와는 슬쩍 몸부림을 치며 곽정의 손에서 빠져 나가 돌 밑으로 숨어 버렸다.
곽정이 다시 잡으려고 두리번거렸지만 어림도 없었다. 어디로 숨었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황용이 실의에 차 한숨을 쉬는데 등뒤에서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부가 언제 초가집까지 갔다 왔는지 어깨에 작은 배 한 척을 둘러메고 오른손에 노를 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곽정을 구할 태세였다.
곽정은 침착하게 두 발에 힘을 준 채 천근타(千斤墮)의 무공으로 돌 위에 꼿꼿이 서 있었다. 마치 물 속에 돌기둥을 박아 놓은 것처럼 의연한 자세로 숨을 죽이고 손을 뻗어 금와와가 숨어 들어간 바윗돌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큰 돌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곽정은 기쁜 마음에 항룡십팔장 가운데 비룡재천의 재주를 부려 쌍장을 위로 들어 올렸다. 거대한 소리를 내며 그 큰 돌이 올라왔다. 그는 재빨리 변초(變招)를 해 잠룡물용(潛龍勿用)의 재주를 부려 옆으로 밀었다. 그 큰 돌은 수력과 장력을 한꺼번에 받아 그의 옆을 스치며 떼굴때굴 굴러 심연으로 떨어졌다. 굴러 떨어질 때 난 굉음이 메아리가 되어 오랫동안 산골짜기를 울렸다. 잠시 후 곽정이 두 손을 번쩍 들어 금와와 한 마리씩을 움켜쥐고 한발 한발 폭포에서 올라왔다.
폭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 세월이 지남에 따라 암석 사이에 깊은 골이 패었다. 폭포의 길이만 해도 20여 자가 넘어 보였다. 어부는 곽정이 골짜기 바닥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아 즉시 배 젓는 노를 내려 주며 곽정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곽정은 양손에 금와와를 잡고 있어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미끄러워 놓칠 것만 같았다. 그래 바닥에 선 채 온 정신과 힘을 집중하고 오른발을 찍자 몸이 갑자기 폭포 가운데를 뚫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어 왼발을 깊은 골짜기 옆에 비스듬히 댄 채 버티며 그 차력을 이용해 언덕으로 뛰어올랐다.
황용은 그와 오랫동안 함께 지냈지만 공력이 이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바닥에서 돌을 들어올리고 숨을 죽인 채 고기를 잡는데도 폭포의 어마어마한 힘이 그에게 미치지 않음을 보자 너무나 기쁘고 반갑기만 했다. 그러나 사실 곽정은 황용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는 언덕 위로 올라온 뒤에 고개를 돌려 폭포를 바라보곤 눈이 어질어질했다. 스스로도 방금 그 용기와 힘이 어디서 생겼는지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부는 그의 재주에 더욱 탄복해 마지않았다. 만약 기공이나 경공, 외공 등 상승의 무공을 구비하지 않았다면 고기를 잡는 일은 고사하고, 일단 물 속에 뛰어들었다 하면 벌써 급류에 훠말려 심연 속에 빠져 죽었을 것이 뻔했다. 금와와 두 마리는 곽정의 손아귀에 잡힌 채 퍼덕거리며 아아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어린아이가 우는 것 같았다.
[금와와라니, 이름이 그럴듯하군요. 꼭 어린아이 우는 것과 같으니 말입니다.]
곽정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손을 뻗어 어부에게 주려고 했다. 어부는 금와와를 받으려고 노를 내려놓고 손을 내밀다가 멈칫하며 다시 손을 거두었다.
[그걸 다시 물에 넣어 살려 주시오. 나는 받지 않으려오.]
[아니 왜 그러시죠?]
곽정이 의아하게 여기며 되물었다.
[내가 금와와를 받는다 해도 당신들을 데리고 사부님을 뵈러 갈 수는 없소. 그러니 은혜를 입고도 갚지 않으면 천하 영웅들이 웃을 일이 아니오?]
그러자 곽정이 정색하고 말했다.
[어른께서 굳이 마다하시는 걸 보면 정말 어려운 일인 모양인데 어찌 후배가 익지를 부리겠습니까? 별것도 아닌 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무슨 은혜니 뭐니 말할 게 있습니까? 그냥 받아 가세요.]
이렇게 말하며 고기를 어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어부는 손을 뻗어 받으면서도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곽정이 황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용아, 인명은 재천이라 했으니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어? 용아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어 죽는다면 이 곽정 오빠가 동행을 해주지. 자, 우리 그만 가도록 하자구]
황용은 곽정의 말을 듣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있어 어부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저씨,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러나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만약 아저씨가 말씀을 안 해주신다면 저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겠네요.]
[무언데?]
어부가 물었다.
[이 산봉우리, 미끄럽기가 거울 같은데 길조차 없으니 만약 아저씨께서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신다면 어떻게 가시겠어요?]
어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내가 데리고 올라갈 것도 아닌데 얘기를 해준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아주 쉬운 일이지요. 이 쇠로 만든 배를 타고 또 쇠로 만든 노를 저어 폭포를 거꾸로 올라가면 되는데, 한 번에 한 사람씩 두 번만 왕복하면 된다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황용은 상냥하게 인사를 한 뒤 몸을 일으켜 곽정에게 기댔다. 곽정도 묵묵히 목례를 했다. 어부는 그들 두 사람이 산에서 내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행여 금와와를 놓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초가집으로 달려가 고기를 잘 간수해 놓았다.
[곽정 오빠, 빨리 쇠로 만든 배와 노를 빼앗아 타고 산 위로 올라가요.]
황용의 느닷없는 재촉에 곽정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그걸...., 그래도 될까?]
[좋아요. 군자가 되고 싶거든 그냥 군자 노릇만 하세요.]
(용아를 구하는 것이 중하냐? 아니면 군자가 되는 것이 중하냐?)
이런 생각이 퍼뜩 곽정의 뇌리를 스쳤다. 결단을 내리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데 황용은 벌써 쇠로 만든 배를 물 속에 밀어 넣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생각이고 뭐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곽정은 쇠로 만든 배를 번쩍 들어 기합 소리와 함께 폭포 위쪽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곽정은 배를 집어 던지자마자 노를 옆구리에 끼고 오른손으로 황용을 껴안았다. 물 속에 떨어진 배가 물살을 따라 미끄러지는데 순간 등 뒤에서 암기 나는 소리가 들렸다. 우선 머리를 숙여 암기를 피한 다음 몸을 날려 배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부가 뭐라고 부르짖었지만 물 소리가 워낙 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방향을 잃은 배가 돌 옆으로 다가갔다. 만약 그들이 이 돌과 부딪치면 제아무리 신선이라 하더라도 그냥 가루가 될 것만 같았다. 곽정은 왼손의 노를 힘껏 저었다. 쇠로 만든 배가 몇 자나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오른팔로 껴안고 있던 황용을 내려놓고 다시 한 번 노를 저었다. 배는 또다시 및 자나 폭포를 거슬러 올라갔다.
어부가 여전히 물가에 서서 욕을 퍼붓고 있었지만 바람소리, 물 소리에 뒤섞여 나쁜 계집애라고 하는 소리만 어렴풋이 들렸다.
[그래도 오빠는 좋은 사람이라 여기고 있는 모양이에요. 나만 욕을 하니 말이에요.]
황용이 우습다고 말을 했지만 곽정은 온 신경을 노 젓는 데만 기울이고 있어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두 어깨에 힘을 모아 노를 저으며 격류와 싸울 뿐이었다. 쇠로 만든 이 배는 뱃머리가 높고 선미는 가벼웠다. 처음 노를 젓던 곳은 비교적 물살이 세 곽정이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도록 씨근덕거리며 애를 쓰는데도 몇 차례나 급류에 말려 떠내려갈 뻔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물살도 약해진데다가 곽정의 노 젓는 솜씨도 익숙해져 차츰 쉬워졌다. 곽정은 또 좌우호박 기술로 두 손을 나누어 신룡파미(神龍擺尾)의 재주를 부렸다. 노를 젓는 동작 하나하나에 항룡십팔장의 힘이 들어가 쇠로 만든 배가 마치 물결을 따라가듯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나갔다.
[저 어부가 와서 노를 저어도 이렇게 빠르지는 못할 거예요.]
황용이 즐거운 듯 이렇게 칭찬을 했다.
다시 또 급류를 지나 굽이롤 돌아서자 눈앞에 그림 같은 경치가 펼쳐졌다. 시냇물이 고요히 흐르는데 마치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머물러 있는 듯했다. 시내의 넓이는 l⒯+쯤 되어 보이는데 양쪽 언덕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하느적거리며 물살에 씻기고 있었고 파란 버드나무 사이로 빼곡하게 들어선 복숭아나무가 보였다. 만약 봄이라서 복숭아꽃이라도 만개했다면 무릉도원이 여기가 아닌가 착각이라도 할 그런 아름다운 경치였다. 비록 복숭아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물가에는 이름 모를 하얀 꽃이 곱게 피어 짙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곽정과 황용은 경치에 취해 마음이 한없이 즐거워졌다. 이 높은 산위에 이런 별천지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시냇물은 맑다 못해 옥같어 파랗게 보였다. 물이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자 곽정은 노를 아래로 내려 보았다. 그러나 뜻밖의 강한 힘에 하마터면 노를 놓칠 뻔했다. 수면은 거울같이 맑고 잔잔해 보였지만 그 밑에는 격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쇠로 만든 배는 서서히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두 사람 모두 이런 경치가 길게 길게 뻗어 있기를 바랐다.
[제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여기에 묻히고 싶군요.]
황용은 너무나 황홀해서 불쑥 이런 말까지 했다. 곽정이 몇 마디 말로 그녀를 위로하려고 하는데 배가 갑자기 산속에 있는 굴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굴속에는 짙은 향기가 가득 차 있고 물결은 세찬 여울을 이뤘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러나 황용도 머리를 살래살래 혼들었다.
[모르겠는데 요.]
이때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며 배가 굴을 벗어났다. 둘은 악속이나 한 듯이 탄사를 보냈다.
[정말 좋구나!]
굴 밖에는 엄청나게 큰 분천(噴泉)이 있었다. 높이 10여 자 정도의 거대한 물기둥이 돌 틈에서 뿜어 나와 반공에 솟아오르고 있었다. 시냇물은 여기서 멈쉈다. 이 분천이 방금 지나온 시냇물과 폭포의 원류였던 것이다. 곽정이 황용을 부축하고 언덕으로 올라섰다. 타고 온 배도 언덕 위로 끌어올렸다. 고개를 돌리니 물기둥은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어 놓았다. 두 사람은 너무나 아름다운 장관에 감격하여 말을 잊고 있었다. 다만 손을 잡은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돌위에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여기서는 어떤 걱정도 근심도 다 사라지는 듯했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문 채 두 눈만이 무지개를 따라 오르락 내리락하는데 갑자기 무지개 뒤에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며 잠시 후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왼손에는 소나무 장작을 들고 오른손에는 도끼를 든 나무꾼이었다. 황용은 이 사람의 차림새를 본 순간 영고가 써준 글이 생각났다.
만약 치료를 청한다고 말하면 금기를 범하는 것이라 미처 그 장소에 이르기도 전에 어초경독의 독수에 걸리리라는 내용이다. 그때는 어초경독이란 네 글자의 뜻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금와와를 놓쳤다 잡은 사람이 어부였고, 또 지금 이곳에 나타난 사람이 나무꾼이다. 그렇다면 어초경독은 남제의 네 제자가 아니라 그의 신임을 받고 있는 수하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황용은 은근히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어부의 관문을 빠져 나오는데도 그토록 애를 먹었는데 이를 어쩌나? 나무꾼의 노래가 속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경독 두 사람은 또 어떤 인물이란 말이냐.)
그런데 계속해서 홍얼거리는 나무꾼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서서히 걸어 나오다가 곽정과 황용 두 사람을 보고도 못 본체 도끼를 들고 나무를 하는 것이었다. 황용이 그를 보니 용모가 호방하고 비범한 기상에다 태도 또한 대장군다운 위풍이 있어 보였다. 만약 차림새가 나무꾼이 아니요, 이 숲 속에서 땔감을 하지만 않는다면 틀림없이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장수로 보일 것이 틀림없었다.
(사부님께서 남제인 단황야는 운남 대리국의 황제라 하시더니 이 나무꾼이 흑시 조정의 맹장이 아니었을까?)
황용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무슨 황제요, 장군이요, 재상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백성을 괴롭히는 요물이란 말이다. 조정이 바뀌어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황제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백성만 고생하게 되고 마는 게야.)
황용은 마음을 가다듬고 당돌하게 한마디 던졌다.
[정말 노래를 잘 부르시네요!]
그 나무꾼은 고개를 돌리며 도끼를 허리에 꽂았다.
[칭찬해 주어서 고맙소.]
[좋은 노래를 들려주셨으니 어디 제 노래 하나 들어 보시겠어요?]
황용은 애교를 부리듯 그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산파양(山坡羊)>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황용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계속 그의 표정을 살피기에 바빴다. 그녀는 이 나무꾼이 남제를 모시고 다니던 장군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과거에는 천군만마를 호령하며 영화를 누리다가 이제는 이 숲 속에 은거하며 산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달큼한 목소리로 노래를 들려주었다. 역시 황용이 예측한 대로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감상했다. 그 표정이 한없이 흐뭇해 보였다. 노래가 다 끝나자 그는 산 위를 가리켰다.
[올라들 가보시오!]
그가 가리키는 대로 시선을 돌리니 팔뚝만큼 굵고 긴 등나무 줄기가 상봉으로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곽정과 황용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니 봉우리가 구름과 안개에 가려 얼마나 높은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곽정은 혹시 그자의 마음이 변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즉시 황용을 업은 채 등나무를 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양팔을 교대로 바꾸어 쥐면서 잽싸게 올라가 순식간에 지면에서 10여 장이나 떨어졌다. 나무꾼은 계속해서 혼자 홍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전쟁이란 허무한 것, 이겨도 흙으로 돌아가고 져도 흙으로 돌아가느니....> 하는 내용의 가사였다.
[곽정 오빠, 저이가 부르는 노래대로라면 뭐 치료하겠다고 올라갈 필요도 없겠네요.]
[아니, 뭐라고 하는 거야?]
[어쨌든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 아녜요. 치료를 해서 낫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죽어 흙이 될 것이고 또 치료를 못 받고 죽어도 흙이 될테니까요.]
[그런 쓸데없는 말은 들을 것도 없어.]
[살아도 오빠 곁에 있을 테고 죽어도 오빠 등에서 죽을 테니 저는 행복해요.]
그들은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어느 틈에 구름과 안개 속에 들어와 있었다. 더운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자욱한 구름과 안개 속이라 으스스하니 한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으니 치료를 못 받는다 하더라도 억울할 건 없어요.]
[용아, 공연히 죽네 사네 하는 그따위 시시한 말 안 할 수는 없을까?]
황용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뾰족이 내밀어 곽정의 등에 대고 바람을 불었다. 곽정은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장난하지 마. 그러다 손을 놓치면 둘 다 떨어져 죽는단 말야.]
[이번에는 오빠가 그런 말을 하네요.]
곽정은 빙그레 웃을 뿐 아무 대꾸도 없이 더욱 잽싸게 손과 발을 놀렸다. 어느 순간, 그 길던 등나무 줄기의 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벌써 정상에 당도해 있었다. 곽정이 등에 업힌 황용을 막 땅에 내려놓으려고 하는데 우르르 하며 광음이 들렸다. 마치 산이라도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어서 음매음매, 소 우는 소리와 함께 사람 비명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아니 이토록 높은 산 위에 소가 있다니 정말 괴이한 일이다.)
곽정은 의아하게 여기며 황용을 업고 소리난 쪽으로 내달렸다.
[어초경독이라더니, 밭을 갈려면 소가 있어야겠지요.]
황용의 이 말이 막 끝나자마자 산 언덕에서 소 한 마리가 고개를 들고 울부짖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소의 자세나 그 장소가 너무나 이상했다. 소는 하늘을 향해 바위 위에 누운 채 네 발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그 바위는 흔들흔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한 사람이 두 발을 잔뜩 벌린 채 두 손으로 바위를 버티고 있었다. 그 사람이 자칫 손 하나라도 놓게 된다면 소고 바위고 할 것 없이 그냥 단번에 깊은 골짜기 아래로 떨어질 참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이 버티고 서 있는 곳 또한 튀어나온 절벽 끝이라 한 발짝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가 만약 할 수 없이 소를 버린다 하더라도 바위에 눌려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고 말 것이다.
상황으로 보아 언덕에서 풀을 뜯던 소가 실족해서 떨어지다가 바위를 건드리게 되었고 그 사람은 근처에 있다가 돌을 받치고 소를 구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자기가 낭패한 처지에 빠지고 만 것이 분명했다.
산봉우리 위는 평지인데 화전 10여 두둑에 밭벼가 자라고 있었다. 호미 한 자루가 밭두둑에 놓여 있고 돌을 들고 있는 사람이 웃도리를 벗은 것이나 바짓부리에 흙이 묻은 것으로 보아 소가 실족하여 떨어질 때 김을 매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황용은 이런 상황을 살펴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어초경독 가운데 경(耕)일 것이다. 소만 해도 2백 근은 될 것이요, 바위의 무게 또한 족히 그 정도는 될 것이다. 반은 산 언덕에 기대이 있지만 저렇게 버티고 있다면 보통 힘이 아니다.)
곽정이 황용을 내려놓고 그쪽을 향해 달려가자 황용이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서둘 것 없어요.]
그러나 곽정은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쏜살같이 농부 곁으로 달려가 허리를 숙이고 바위 밑으로 들어가 그 바위를 받쳐 들었다.
[내가 들고 있을 테니 당신은 먼저 소부터 끌어내시오.]
농부는 손이 훨씬 홀가분해지기는 했지만 곽정에게 그러한 힘이 있을까 의심스러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는 슬그머니 오른손을 떼면서 왼손은 바위 밑을 받친 채 몸을 옆으로 돌려 단단히 바닥을 밟고 두 팔에 힘을 주었다. 농부는 큰 바위가 한 자 이상 더 들리자 그제야 왼손을 놓았다. 그리고 잠시 바위가 다시 내려오는 것이 아닐까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 정도라면 곽정이 버텨 줄 것 같았다. 농부는 허리를 숙이고 바위 밑을 빠져 나가 언덕 위로 뛰어올라 소를 끌어올리려다가 무의식중에 곽정을 흘낏 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영웅인지 고맙기도 하거니와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곽정을 바라보는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18,9세의 평범한 소년일 뿐 별다른 점은 없는데 바위를 받치고 있으면서도 별로 힘겨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농부는 다른 사람보다 뚝심이 세다고 평소 자부해 오던 터였다. 그런데 이 소년이 자기보다 기운이 좋은 것 같아 부쩍 의심이 일어났다. 다시 시선을 언덕 아래로 옮기니 돌에 기대 선 황용이 보였다. 예쁘기는 하지만 병색이 완연했다.
[여보, 여긴 뭣 하러 오셨소?]
농부가 곽정에게 물었다.
[존사님을 좀 뵈려고요.]
[무슨 일 때문이오?]
곽정이 머뭇거리며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자 황용이 나섰다.
[빨리 소나 끌어올리고 나서 천천히 물어도 될 것 아뎨요? 사형이 실수하면 사람이고 소고 할 것 없이 다 떨어지고 말 텐데요.]
농부는 혼자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은 사부님을 뵈러 왔음에 틀림없다. 만약 호의로 찾아왔다면 아래에 계신 두 분 사형께서 화살을 쏘아 신호를 보내셨을 것이다. 한데 저들이 억지로 사형들을 제치고 들어왔다면 이건 보통 무공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손을 쓸 수 없는 이 기회를 이용해 확실히 물어 봐야지.)
[제 사부를 만나 병을 치료하려고 그러지요?]
(뭐 저 아래서도 그렇게 말했는데 여기서 다시 한다고 큰 탈이야 있겠어.)
이렇게 생각한 곽정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농부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럼 내가 먼저 가서 여쭈어 보리다.]
농부는 소를 끌어내 구할 생각은 않고 펄쩍 뛰어 바닥에 내려섰다.
[여보시오. 우선 이 바위나 함께 처치하고 봅시다.]
곽정이 다급해 소리를 질렀지만 농부는 오히려 웃기만 했다.
[금방 돌아올 텐데요.]
황용은 벌써부터 농부의 속셈을 눈치챘다. 곽정이 기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 두 사람에게 하산하라면 그때 가서는 꼼짝없이 하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용은 자신이 부상을 당해 아무 힘도 못 되는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 곽정을 도와 바위를 처치해야 할 텐데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농부는 저만큼 달려가고 도대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답답하고 기가 막혔다.
[아저씨, 아저씨, 빨리 돌아오세요.]
황용은 이렇게 다급히 소리만 질렀다. 농부가 고개를 돌리고 빙그레 읏으며 말했다.
[기운이 워낙 세니까 두서너 시간 버티는 것은 문제가 아닐 테니 안심하시오.]
황용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호의로 구해 주었는데도 오히려 함정에 빠뜨리다니, 그러고도 두서너 시간쯤은 버딜 수 있다고? 뻔삔스러워라. 한번 골탕을 먹여야겠는데....)
이마를 찡그리는 순간 벌써 계략이 떠올랐다.
[아저씨, 존사님께 여쭈어 보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이 편지까지 좀 전해 주세요. 저의 사부이신 홍칠공께서 존사님께 드리는 글이랍니다.]
농부는 홍칠공이란 이름을 듣자 가볍게 놀랐다.
[아, 원래 아가씨는 구지신개의 제자셨군요.]
농부는 황용 옆으로 되돌아와 편지를 받아 가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황용은 꾸물거리며 천천히 보따리를 풀어놓고 편지를 찾는 체하다가 느닷없이 연위갑을 꺼내 흔들다 곽정을 바라보며 당황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큰일났네. 저분의 수장(手掌)이 지금 썩어 가고 있어요. 아저씨께서 급히 좀 구해 주세요.]
농부는 순간 당황하다가 곧 웃음을 지었다.
[괜잖아요. 편지나 내놓으시오.]
그는 손을 뻗어 편지나 빨리 달라고 재촉했다.
[아저씨는 몰라요. 제 사형은 벽공장(劈空掌)을 익히고 계시는데 어젯밤 두 손을 식초에 담그고 계셨어요. 미처 산공(散功)을 하지 못했는데 오랫동안 저렇게 눌려 있으면 수장을 망치게 돼요.]
황용은 도화도에 있을 때 아버지로부터 벽공장을 배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연장(練掌)의 빕문을 알고 있었다. 농부는 벽공장을 쓸 줄은 몰랐지만 워낙 명가의 제자라 견문이 넓고 박식하여 이와 같은 이치를 알고는 있었다.
(까닭 없이 구지신개의 제자에게 피해를 주면 사부님의 책망을 들음은 물론 나 자신도 괴로울 것이다. 하물며 그는 호의로 나를 구해준 것이 아닌가? 다만 저 처녀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구나. 어쩌면 흉계를 꾸며 나를 골탕먹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황용은 그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연위갑을 들어 혼들어 보였다.
[이건 도화도 보물인 연위갑인데 어떤 칼이나 창도 뚫지를 못해요. 아저씨께서 이걸 제 사형 어깨에 올려 놔주신 뒤에 다시 바위로 눌러놓으신다면 꼼짝못할 것 아니겠어요. 몸도 다치는 것이 아니니 쌍방이 모두 손해볼 것은 없어요.]
농부는 오래 전부터 연위갑에 대한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반신반의하며 받아 들었다. 황용은 그의 표정에서 의심이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 사부님께서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저희를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저씨를 속일 수 있겠어요? 만약 믿지 못하시겠다면 칼로 연위갑을 찔러 보시면 아실 텐데요.]
농부는 천진난만해 보이는 황용의 표정을 주시했다.
(구지신개는 명망이 높으신 고인이요, 선배시라 사부님께서도 늘 그분을 칭찬하셨다. 그런 분의 제자인 이 처녀도 결코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들고 연위갑을 찔러도 보고 찢어도 보았다. 과연 무림의 이보(異寶)가 틀림없었다. 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좋소, 내가 이걸 그의 어깨 위에 깔아 주지.]
농부는 황용의 꾀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즉시 연위갑을 가지고 곽정 옆으로 가서 오른쪽 어깨에 덮어 주며 두 손으로 바위를 대신 떠받쳤다.
[자, 두 손을 풀고 어깨 힘으로 버티시오.]
第 五 卷. 第 五 章.(通卷 章). 모든 것을 버린 헌신
이때 황용은 바위에 기댄 채 두 사람을 보고 있다가 농부가 바위를 떠받치는 것을 보자 큰소리를 질렀다.
[곽정 오빠, 비룡재천이에요.]
곽정은 황용이 깨우쳐 주는 말을 듣고 두 손이 홀가분해지자마자 오른손을 앞으로 잡아 끌며 왼손을 오른팔 밑으로 뻗어 항룡십팔장 가운데 비룡재천의 묘기를 부렸다. 그는 몸을 반공에 솟구치고 오른손을 다시 좌장 앞으로 뒤집으며 몸을 앞으로 숙여 황용 옆에 훌쩍 뛰어 내려왔다. 농부가 뭐라고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두 손을 높이 들어올린 채 꼼짝없이 바위를 떠받치고 서 있었다.
황용은 득의양양했다.
[곽정 오빠, 우리 그만 가요.]
그녀는 다시 농부를 보며 놀려댔다.
[기운이 세니까 한두 시간 떠받치고 있어도 괜잖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계집애가 이 늙은이를 골탕먹이다니! 구지신개가 뭐 신용이 있는 분이라고 하더니 흥, 그 영감님 일대의 명성을 네가 다 망치는구나.]
[망치기는 뭘 망쳐요? 사부님께서는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럴 수도 있대요. 나는 아버지 말씀을 아주 잘 듣는답니다. 그래서 사부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다나요.]
농부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그래 아가씨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아니, 연위갑을 보고도 모르시나 봐.]
[어이쿠 당했구나. 원래 황노사의 딸이었군그래. 원 참 어리석기는.]
[그래요. 내 사부님은 아직까지 사람을 속이신 일이 없으시대요. 하지만 이렇게 실천하기란 어려운 게 아니래요. 제가 윈래 따르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말이에요. 그래도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게 옳았어요.]
황용은 허리를 꼬며 웃다가 곽정의 손을 잡고 잎을 향해 달려나갔다.
둘은 산길을 따라 계속 걸어 나갔다, 곽정은 황용이 어떻게 그 농부를 속여 돌을 떠받치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기쁘기만 했다. 산길은 얼마 안 되어 끝이 나고 이제 앞에는 넓이가 반 자 정도 되는 돌다리가 두 산봉우리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나 안개와 구름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평지라면 반 자 정도 넓이인 소로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돌다리 아래는 깊은 골짜기였다. 건너는 것은 고사하고 내려다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났다. 황용이 탄성을 지르며 중얼거렸다.
[그 단황야란 분은 정말 멋진 곳에 숨어 사는군요. 그 누가 철천지 원한이 있어 여기까지 찾아왔다 하더라도 기가 질리겠어요.]
[그런데 그 어부는 왜 단황야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는지 그게 몹시 궁금하단 말이야.]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에요. 보아하니 거짓말할 사람 같지도 않던데 말이에요. 게다가 또 우리 사부님께서 단황야가 세상을 떠나시는 걸 보셨다니 더욱 이상하잖아요.]
[어쨌든 여기까지 온 이상 끝까지 가볼 수밖에 없지 뭐.]
곽정은 황용을 업고 경공의 제종술(提縱術)로 돌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 돌기둥 다리는 바닥이 울룽불퉁한데다 오랜 세월 동안 구름과 안개 속에 있었기 때문에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당연히 걸음걸이도 늦어지는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곽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재빨리 걸어 7,8장을 전진했는데 황용이 소리를 질렀다.
[조심하세요. 앞에 부서진 곳이 있어요.]
곽정도 이미 돌기둥이 부서져 8,9척(尺) 정도 이가 빠져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래 내친김에 충력(衝力)을 이용해 펄쩍 날아 뛰어넘었다. 황용은 몇 차례나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긴 경험이 있어 생사 같은 것은 치지도외하고 있었다.
[곽정 오빠, 흰 수리만한 재주는 없으시군요.]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우스갯소리를 했다.
이렇게 한참 달리다 보니 또 이가 빠진 곳이 나오곤 했다. 그때마다 훌쩍 뛰어넘으며 아슬아슬한 고비를 예닐곱 번이나 넘겼다. 드디어 맞은편 산 위에 널찍한 평지가 보이며 어디선가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렸다. 이제 돌기둥 다리가 거의 끝나 가는데 마지막 한 곳에 또 이 빠진 절벽이 나타났다. 이번엔 아무리 보아도 10자가 넘을 것 같았다. 그 끝에는 한 서생이 단정하게 앉아 손에 책을 들고 읽고 있었다. 서생이 앉아 있는 뒤에도 또 절벽이 있었다. 곽정은 걱정이 되어 발길을 멈췄다.
(뛰어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서생이 앉아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한다! 저 서생이 앉아 있는 곳말고는 발붙일 데도 없는데.)
곽정은 큰소리로 서생을 불렀다.
[이 후배, 존사님을 뵙고자 하오니 귀찮으시겠지만 길을 안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생은 몸을 앞뒤로 흔들며 더욱 열심히 책만 읽었다. 곽정의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곽정은 큰소리로 다시 한 번 말해 보았지만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용아, 어떻게 할까?]
낮은 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황용은 서생이 앉아 있는 곳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 자도 채 못 되는 돌기둥 위에서 싸움을 벌여 봐야 사생결단이 있을 뿐이다. 설사 이긴다 하더라도 도움을 청하러 왔다가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곽정이 다시 한 번 물었지만 황용은 이마만 찡그린 채 대답이 없었다. 서생이 글 읽는 소리를 들어 보니 논어를 읽는 것 같았다.
[늦은 봄, 봄 옷이 다되어 성인(成人) 오륙 명과 동자 육칠 명이 기수(沂水)에서 몸을 씻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이고 읊조리며 돌아왔다.]
논어의 선진(先進)편이었다. 그는 정말 춘풍 속에서 노래부르며 춤추듯 홍미진진하게 읽어 내려갔다. 황용은 생각했다.
(저 서생이 입을 벌리기만 하면 자극적인 말로 건드려 봐야지.)
황용은 냉소를 머금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논어를 천만 번 읽어도 공부자가 말하는 참뜻을 모르면 소용없는 일이에요.]
서생이 깜짝 놀라 읽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공부자가 말하는 참뜻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황용이 그를 살펴보니 나이는 50여 세, 머리에 소요건을 쓰고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었다. 턱에는 긴 수염이 그럴듯하게 자라 글공부깨나 한 선비 티가 역력했다.
[공자의 제자가 모두 몇 명이나 되는지 알기나 하세요?]
황용은 여전히 빈정거리듯 말했다. 서생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시오? 공자의 제자는 삼천 명이요, 그중 달인(達人)은 칠십이 명이라오]
[칠십이 명 가운데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는데 그중 어른은 몇이고, 소년은 몇인지 아시나요?]
[아니, 논어에는 그런 말이 없거니와 다른 경전에도 기록이 없지 않소?]
[논어를 천만 번 읽어도 참뜻을 모르면 소용없다고 한 내 말이 틀리지는 않았군요. 방금 성인 오륙 명과 동자 육칠 명이라고 읽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그렇다면 오륙은 삼십이니까 성인은 삼십 명이요, 육칠은 사십이이니 소년은 사십이 명, 양쪽을 합하면 칠십이 명이 아닙니까? 그런 것도 모르고 글만 읽으니 소용없는 일이 아니고 뭐예요.]
서생은 황용이 억지 부리는 게 어이가 없어 껄껄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녀의 총명과 기지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처녀가 그만큼 풍부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니 정말 감탄했소. 아마 우리 사부님을 뵈러 오신 듯한데 무슨 일 때문입니까?]
황용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치료를 받으러 왔다면 틀림없이 방해하겠지. 그렇다고 대답을 안할 수는 없고 이를 어쩐다, 옳지! 그가 기왕 논어를 읽고 있으니 논어에 있는 말로 밀고 나가 봐야지.)
[나는 성인(聖人)을 만나 볼 수 없게 될 것이고, 군자다운 사람을 만나 볼 수 있다면 그만해도 괜찮을 것이다. 벗들이 먼 곳에서 오는 것은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서생은 황용이 논어에 있는 말을 술술 읊조리자 앙천대소를 하다가 한참 만에야 웃음을 멈추고 말문을 열었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그럼 제가 세 가지 문제를 낼 테니 어디 한번 맞추어 보세요. 만약 맞춘다면 제가 모시고 올라가 사부님을 뵙게 하려니와 틀린다면 두 분은 어쩔 수 없이 오신 길로 되돌아가셔야 합니다.]
[어이구 큰일났네요. 제가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 너무 어려운 걸 물으시면 대답할 수 없을 텐데 이를 어쩌나?]
황용의 엄살 섞인 호들갑에 서생이 빙긋이 웃었다.
[어려울 것 없습니다. 아주 쉬운 것이니까요. 제가 시 한 수를 읊겠는데 이건 제 출신 내력을 말하는 것이니 어디 한번 알아맞혀 보세요.]
[그래요. 수수께끼라면 저도 꽤 좋아하는 편이니 말씀해 보세요.]
서생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읊조렸다.
[육경온적흉중구(六經蘊籍胸中久), 일검십년마재수(一劍十年磨在手)]
황용이 혀를 날름거리다 잽싸게 추켜세웠다.
[문무 겸비하시니 정말 훌륭하시군요.]
서생이 웃고는 계속 읊어 내려갔다.
[행화두상일지횡(杏花頭上一枝橫).....]
황용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단한 실례를 범했군요. 원래 신미(辛未)년에 장원 급제하신 어른이신 걸 몰라뵈었습니다.]
그러자 서생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딱 벌렸다. 자기가 내놓은 시제가 너무 어려운 것이라 대답을 못하고 물러가려니 했는데 뜻밖에도 쉽게 알아맞혔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어린 처녀가 보기드문 천재라고 감탄을 하면서 또 한 번 난제를 주어 골탕을 먹여 되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산모통이에는 종려나무가 가지런히 자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혼들리고 있었다. 마치 부채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장원 출신이라 그런지 이런 경치를 보자 즉시 시상이 떠올랐다. 손에 든 부채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제가 우선 대련(對聯)의 상련을 지을 데니 아가씨께서 대구(對句)를 맞추어 보시렵니까?]
황용이 또 혀를 날름거렸다.
[그건 수수께끼보다는 재미없겠는데요. 하지만 대답을 못하면 보내주실 것 같지도 않으니 말씀이나 해보세요.]
[풍파종려천수불요섭첩선(風擺棕櫚千手佛搖搖疊扇).]
앞의 말은 경치를 묘사한 것이요, 뒤의 말은 은근히 자기를 치켜세우는 뜻이었다. 황용은 생각했다.
(내가 만약 사물에 대해서만 응답을 한다면 비슷하기는 하겠지만 이기는 것은 아니겠지.)
사방을 휘둘러보니 맞은편 평지에 절 같은 것이 보이고 그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때는 7월 하순이라 연잎이 반 이상 시들어 있었다.
[대구는 있지만 아저씨께 실례가 될 것 같아 말씀드리기 거북하군요.]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화내지 마세요.]
[그야 물론이지요.]
황용은 그가 머리에 쓴 소요건을 가리키며 읊조렸다.
[상조하엽독각귀대소요건(霜凋荷葉獨脚鬼戴逍遙巾)이에요.]
황용의 대구에 서생이 껄껄 웃었다.
[정말 묘한 대련입니다.]
곽정이 시든 연꽃을 보니 말라 비틀어진 연잎을 버티고 있는 연줄기가 마치 다리 하나밖에 없는 귀신이 소요건을 쓴 형상이라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세요. 떨어지기만 하면 우리는 소요건도 쓰지 못한 귀신이 돼요.]
황용도 간드러지게 웃었다. 서생은 골똘히 생각에 잠졌다.
(보통 대련을 가지고는 당해 낼 수가 없으니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내놓아야겠구나.)
돌연 소년 시절 글을 읽을 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수십 년 동안 내려오면서 대구를 맞춘 사람이 없다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또 하나가 있는데 아가씨께서 어디 한번 맞추어 보시겠습니까? 금슬비파(琴瑟琵琶) 팔대왕일반두면(八大王一盤頭面)입니다.]
황용이 듣고는 깜짝 놀랐다.
(금슬비파 네 글자 가운데 임금 왕 자가 여덞 개나 있으니 정말 어려운 문제로구나.)
서생은 그녀가 난색을 짓자 득의만면했다. 혹시 황용이 자기에게 반문이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를 하면서 먼저 쐐기를 박았다.
[정말 어려운 문제라 저도 적당한 대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리 약속한 말이 있으니 대답을 하실 수 없거든 그냥 되돌아 가실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황용은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뭐 말씀드리기 어려울 건 없어요. 하지만 방금도 아저씨께 큰 실례를 범했는데 또 말씀드린다면 어초경독 네 분께 득죄를 하게 될까 봐 그래요.]
서생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아니, 대답을 할 수 있다는 말도 천부당만부당한데 한꺼번에 우리 사형제를 노린다니 어림없는 수작이 틀림없다.)
[괜찮습니다. 올바른 대답만 하시면 되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매망량( 魅 ) 사소귀각자두장(四小鬼各自 腸)이에요.]
서생이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며 황용을 향해 땅에 꿇어 엎드려 절을 했다.
[이 후학 인사드리나이다.]
황용도 답례를 하면서 웃었다.
[만약 네 분께서 저희들이 산에 오르는 것을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하련은 생각지도 못했을 거예요.]
서생은 자리를 비켜 주면서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곽정은 그들 두 사람이 문재(文才)를 가지고 입씨름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만의 하나라도 황용이 대답을 못하면 모든 수고가 헛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서생이 길을 양보하면서 안내하겠다고 나서자 너무나 반가웠다. 즉시 힘을 모아 서생이 앉아 있던 곳을 거쳐 마지막 관문까지 뛰어넘었다. 서생은 그가 황용을 업은 채 그토록 위험한 곳을 평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탄복했다.
(내 문무를 겸비했다고 자부하고 지냈는데 문재도 저 처녀만 못하고 무재 또한 이 청년만 못하니 정말 부끄러운 일이로구나.)
문득 눈길을 돌려 황용을 보니 득의양양한 표정이 역력했다. 장원급제한 자기를 굴복시켰으니 물론 기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 한번 놀려 주어 기를 꺾어 놓을까 보다.)
[아가씨, 비록 문재는 훌륭하나 행실은 어딘지 예를 따르지 않는 듯 싶군요.]
서생의 이 말에 황용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맹자에 남녀가 유별한 것은 예(禮)라고 하는 말이 있지요. 보아하니 아가씨는 양갓집 규수로 이 청년과는 부부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어찌 그의 등에 업혀 다니오? 맹자 가라사대 계수가 물에 빠졌을 때 시아주버니가 손을 잡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가씨가 물에 빠진 것도 아니요, 또 이 청년의 계수나 형수도 아닌데 업고 안고 다니니 이거 너무 예의에 벗어난 일이 아닐까요?]
황용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흥, 곽정 오빠와 내가 아무리 친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가내 남편이 아닌 줄을 안다. 육승풍 사형도 그러더니 장원 급제한 이분도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래서 입을 삐쭉 내밀고 쏘아붙였다.
[맹자는 횡설수설 수다 떨기를 좋아했는데 그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에요?]
[뭐라고? 맹자는 대성대현(大聖大賢)인데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서생이 화를 내며 소리지르자 황용은 깔깔 웃었다.
[거지가 어찌 두 아내를 거느리며, 이웃집엔 닭도 많기도 하다. 당시엔 주천자(周天子)가 아직도 재세했는데, 어찌하여 위제(魏齊)는 분분(紛紛) 했는가?]
서생이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라 한참 동안이나 할말을 잊고 멍하니 있었다.
원래 이 시는 황약사가 지은 것이었다. 그는 탕(湯) 임금과 무(武)임금을 헐뜯고 주공(周公)과 공자를 경시하는 등 성현의 말에 대해 공격하고 비웃으며 적지 않은 시사와 가부를 지어 공자와 맹자를 비난했다.
제(齊)나라 사람 하나가 본처와 첩을 데리고 살았는데 매일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는 술이 얼근히 취해 있었다. 그래 누구와 술을 마셨느냐고 물으면 모두 고관대작과 어울렸다는 대답이었다. 본처와 첩이 의심이 나서 하루는 뒤를 밟아 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공동 묘지로 가서 장사지내고 남은 음식을 구걸해서 먹고 있었다. 본처와 첩은 너무나 실망하여 울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날마다 이웃집 닭을 훔쳐먹는데 누군가가 그것은 군자가 할 짓이 아니라고 말리자 그럼 그 숫자를 줄여 한 달에 닭 한 마리씩만 훔치고 내년에 가서 그만두도록 하겠다고 하니 그것이 옳지않다는 것을 알면 당장 그만둘 일이지 뭣 때문에 내년까지 기다리느냐고 하는 이야기를 맹자가 한 일이 있었다.
황약사는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시의 마지막 두 줄은 이렇다.
전국 시대 주천자가 있었는데도 맹자는 왕실을 보좌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양혜왕(梁惠王)과 제선왕(齊宣王)에게 관직을 구했으니 이는 성현의 도(道)와는 먼 것이 아니냐 하는 뜻이었다.
황용이 자기 아버지가 지은 시를 읊어 대신 대답을 하자 서생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나라 사람 이야기나 닭 훔친 이야기는 원래 비유라 깊이 따질 것은 아니라 하지만 마지막 두 마디는 맹자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변명하기 어렵겠구나.)
서생은 다시 한 번 황용을 훑어보았다.
(어리디어린 나이에 어쩌면 저토록 영리할 수 있을까?)
그래 더 말을 못하고 앞서서 걸어 나갔다. 도중에 연못의 시든 연잎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한 번 황용을 건너다보았다. 황용이 킥 웃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서생이 두 사람을 절 안으로 안내하여 동쪽 채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 어린 사미가 차를 달여 가지고 들어왔다.
[두 분께서는 잠시 기다리고 계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서 사부님께 아뢰고 오겠습니다.]
서생이 정중히 말하자 곽정이 나섰다.
[잠깐만! 그 밭 갈던 분이 지금도 큰 돌을 떠받든 채 몸을 빼지 못하고 있으니 먼저 그분부터 구출하세요.]
서생이 깜짝 놀라 달려나갔다.
[오빠, 그 노란 주머니를 끌러 보세요.]
[아 참! 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잊을 뻔했군.]
곽정이 급히 노란 주머니를 뜯어 보니 백지 위에 글씨는 한 자도 없고 그림만 그려져 있었다. 그림에는 천축국 사람이 황제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칼을 가지고 자기 앞가슴 살가죽을 도려 내는 중이었다. 온몸의 가죽이 거의 다 벗겨지고 유혈이 낭자한 그림이었다. 그의 앞에는 저울이 하나 있는데 그 저울 한쪽에는 흰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고 다른 한쪽에는 벗겨 낸 가죽이 올려져 있었다. 비록 비둘기가 작기는 했지만 벗겨 낸 가죽보다는 무거운 듯 기울어져 있었다. 저울 앞에는 또 사나운 매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황용은 그 그림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해가 안 가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 곽정은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슬그머니 그림을 접어 움켜쥐었다.
잠시 후 복도에 발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농부가 노기충천하여 나타나 서생의 부축을 받고 내실로 들어갔다. 어지간히 기진맥진한 모양이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어린 사미가 나타나 두 사람에게합장배례를 하고 물었다.
[두 분께서 먼 길을 오셨는데 그래 무슨 일이 있으시나요?]
[단황야를 뵈러 왔으니 전갈해 주시기 바랍니다.]
곽정의 공손한 대답에 사미가 또 합장을 했다.
[단황야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이미 오래라 두 분께서는 헛걸음을 하셨습니다. 소찬이나 드신 뒤에 소승이 모시고 갈 터이니 하산하십시오.]
곽정은 크게 실망했다.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결국 이 한마디 말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나 황용은 절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또 어린 사미의 눈치를 보니 짚이는 데가 있었다. 그녀는 곽정의 손에서 그 그림을 건네 받았다.
[이 소녀 몸에 중상을 입고 특별히 존사께 치료를 받으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귀찮으시겠지만 이 그림을 존사께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 사미는 그림을 받자 감히 펴보지도 못하고 합장을 한 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사미가 금방 되돌아와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두 분께서는 안으로 드십시오.]
곽정은 너무나 반가워 황용을 부축하고 어린 사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절 안은 생각보다 상당히 넓었다. 세 사람은 청석을 깐 좁은 길을 지나 다시 대나무숲으로 들어갔다. 조용하고 아늑한 정취가 속세를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나무숲 속엔 3칸짜리 돌집이 숨어 있었다. 어린 사미가 조용히 문을 열어 놓고 한쪽으로 물러나 허리를 숙이며 그들에게 들어가라고 했다.
어린 사미의 태도는 무척 공손해서 호감이 갔다. 곽정은 그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보내고 황용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의 작은 탁자에는 박달나무 향이 피어 오르고 있었고 탁자 옆에 있는 부들풀 방석 위에 두 스님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하나는 검푸른 얼굴에 높은 코, 움푹 팬 눈이 천축 사람이요, 다른 한 명은 빨간 가사에 길고 긴 흰 눈썹이 눈언저리를 덮었는데 자애로운 얼굴이었지만 미간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서생과 밭 갈던 농부가 그 뒤에서 모시고 서 있었다. 황용은 더 의심할 것 없다는 듯 가볍게 곽정의 손을 잡고 눈썹이 긴 스님 앞으로 다가서서 허리를 숙였다.
[제자 곽정과 황용이 사백(師伯)께 인사올리나이다.]
곽정은 황용이 그 스님을 보고 사백이라고 부르는 말을 듣고 즉시 땅에 엎드려 머리를 네 번 조아렸다.
눈썹 긴 스님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일어서더니 그들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웃었다.
[칠형이 정말 훌륭한 제자를 거두셨고 약형도 훌륭한 따님을 두신 것 같군]
이렇게 말하며 농부와 서생을 가리켰다.
[두 분의 문재나 무공이 내 변변찮은 제자들보다 월등하니 반갑고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소.]
곽정은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말솜씨가 틀림없는 단황야신데 황제가 어쩌다 스님이 되셨을까?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계신데 단황야는 세상을 떠나신 지 이미 오래라고 왜 거짓말을 했을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그러나저러나 용아는 어떻게 이분이 단황야라는 것을 알았을까?)
스님이 황용을 보고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아버님께서는 안녕하신가? 당년 화산 정상에서 아가씨 아버님과 더불어 무예를 겨룬 일이 있었지. 그때는 홀아비였는데 서로 만나지 못한 지 이십 년, 그 사이 이렇게 예쁘고 훌륭한 따님을 두다니.... 아가씨는 형제 자매가 또 있는가? 외조부는 어느 선배 영웅이신지?]
황용의 눈언저리가 살짝 붉어졌다.
[제 어머니께서는 저 하나만을 낳으시고 세상을 떠나신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니 외조부가 어떤 분이신지 저도 잘 모릅니다.]
[아, 그런가?]
눈썹 긴 노인은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위로해 주었다.
[내 사흘 밤 사흘 낮을 선정(禪定)에 들어가 있다가 이제 방금 돌아왔는데 두 분 오신 지 아주 오래 됐지?]
(표정을 보아하니 우리가 온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오는 도중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제자들이 제멋대로 그랬단 말인가?)
[제자도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아저씨 몇 분이 막는 바람에 그랬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왔을 거예요. 하지만 사백께서 선정에 들어가 계셨다니 일찍 왔어도 소용없을 뻔했군요.]
황용이 네 제자를 빈정거리며 대답하자 스님이 껄껄 웃었다.
[그들은 내가 외인을 만날까 걱정이 되어 그런 거지.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두 분이 외인인가? 아가씨의 날카로운 구변은 확실히 부전여전이로군. 단황야는 벌써 이 세상에는 없어. 지금은 나를 일등화상(一燈和尙)이라고 부르지. 아가씨 사부께서도 내가 불가에 귀의한 것을 직접 보셨지. 아버님께서도 모르시진 않겠지?]
곽정은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원래 단황야께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니 다른 세상 사람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래서 제자들이 단황야는 벌써 세상에 계시지 않다고 말했구나. 내 사부님께서도 직접 그가 불가에 귀의하는 것을 보셨다고 했다. 만약 우리보고 그분을 찾아뵈라고 했다면 단황야를 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일등대사라고 하셨겠지. 용아는 정말 총명해. 어떻게 대번에 보고 알아맞혔을까.)
[저의 아버님께서는 전연 모르시던데요.]
황용의 말에 일등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럴 거야. 아가씨 사부님의 입에는 들어가는 것은 많아도 나오는 것은 적어. 먹는 것은 많지만 말은 적단 말이지. 이 스님의 일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리가 없지. 그 점만은 안심할 수 있어. 그러나저러나 멀리서 오느라 수고가 많았을 텐데 식사라도 하셨나? 그런데 이건 뭔가?]
그가 갑자기 놀라며 황용의 손을 잡고 문 어귀로 나가 그녀의 얼굴을 햇빛 쪽으로 돌리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점점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곽정은 일등대사가 이미 황용의 중상을 발견한 것을 보고는 갑자기 두 무릎을 꿇고 대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일등이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받쳐들자 곽정은 한 줄기 강한 힘이 자기 몸을 들어올리는 것을 느끼며 그 힘을 따라 서서히 일어서며 말했다.
[대사님, 사매의 목숨을 구해 주옵소서!]
일등이 그를 잡아 일으켜 세운 것은 너무 예의를 차리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반은 그의 공력을 시험해 보자는 데 있었다. 일등의 무공은 이제 지고의 경지에 이르러 수발(收發)이 자유로웠다. 이렇게 잡아 일으키는 것은 우선 힘을 반쯤 주어 보는 경우다. 만약 곽정이 견디지 못할 것 같으면 즉시 힘을 거두어 들이지 그냥 나뒹굴어 넘어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잡아 일으키는데도 꿈쩍하지 않으면 그때 다시 힘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봄으로써 상대방 무공의 심천과 경중을 알아내는 것이다. 무예를 지닌 사람들은 외부에서 어떤 힘을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반응을 일으킨다. 그런데 곽정이 가뿐하게 일어서며 일등의 힘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번 경우는 잡아 일으켜도 꿈쩍하지 않는 겻보다 더 일등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과연 칠형은 훌륭한 제자를 거두었구나. 그러니 내 제자들이 몰릴 수 밖에.)
그가 이렇게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곽정이 다시 말했다.
[대사님, 사매의 목숨을 구해 주옵소서!]
곽정은 이 말을 끝내자마자 갑자기 발 밑이 불안해지며 자기도 모르게 몸이 한 발짝 앞으로 밀리는 것을 느껴 급히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마음이 들뜨고 호흡이 거칠어져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일등대사의 공럭이 이렇게까지 오래 지속되다니! 나는 이미 그의 공력에서 벗어난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 반력(反力)으로 이렇게 밀리다니. 정말 대결이라도 하게 된다면 나 같은 사람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겠구나. 동사, 서독, 남제, 북개라더니 정말 그 명성이 헛되지 않았구나.)
곽정은 저절로 존경심이 솟구쳐 땅에 꿇어 엎드렸다. 그의 성격이 워낙 솔직하고 순진한 편이라 그때그때의 감정이 즉시 표정으로 나타났다. 일등대사는 곽정의 얼굴에서 놀라움과 경외심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자네가 이 경지까지 수련한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이때 그는 아직도 황용의 손을 잡은 채 놓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가 웃음을 거두어 들이고 나직이 말했다.
[아가씨, 두려워 말고 안심해요.]
일등대사는 다정하게 그녀를 부축해 부들풀 방석 위에 앉혔다. 황용은 일생 동안 이토록 자상하고 정다운 대접을 받아 본 일이 없었다. 부친인 황약사가 자기를 지극히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말이나 하는 짓이 모두 괴상하여 꼭 친구나 다름없었고 부녀의 애정은 깊이 감춘 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일등대사의 따뜻한 말을 듣자 아직까지 만나 보지 못했던 어머니를 대하는 듯 부상을 입은 뒤 겪은 가지가지 고초와 서러움이 다시금 떠올라 흑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등대사는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착하지. 울지 말아요. 상처는 이 아저씨가 꼭 치료해 줄게.]
그가 위로해 줄수록 황용은 더 슬프게 울었다. 곽정은 황용의 부상을 치료해 주겠다는 일등대사의 말에 너무나 기뻐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히 서생과 농부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들은 눈을 부릅뜬 채 만면에 노기를 띠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곽정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황용의 약은꾀로 저들을 속였기 때문이니 화를 낼 말도 하지. 일등대사가 이토록 부드럽고 자상하신데 왜 네 제자들은 천방백계로 방해만 했을까? 도대체 까닭을 알 수 없군.)
그런데 일등대사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어쩌다 부상을 당했으며 어찌어찌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는지 이 아저씨께 이야기해 주지 않겠나.]
황용은 구천인과 구천리를 오인했던 일과 어떻게 하다가 어깨에 쌍장을 맞고 부상당했다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일등은 철장방 구천인의 이름이 나오자 약간 미간을 찌푸리다가 다시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황용은 열심히 말을 하면서도 일등대사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는 것까지 황용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흑소(黑沼)의 숲속에서 신산자 영고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가 길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일등대사의 얼굴빛이 일순 어두워졌다. 갑자기 아득한 옛일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황용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일등대사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뒤는 어떻게 되었나?]
황용은 계속해서 어초경독에게 당한 가지가지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무꾼만이 그들을 쉽게 통과시켰기 때문에 한바탕 칭찬해 주었을 뿐 나머지 세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구구하게 엮어 가며 일러바쳤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서생과 농부는 노기충천하여 씨근덕거렸다.
곽정이 몇 번이나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용아, 너무 그러지 마. 그 아저씨들이 그렇게까지 사납게 구시지는 않았어.]
그러나 황용은 아랑곳없이 일등에게 어리광을 섞어 애교를 떨었다. 대사 뒤에 서 있던 두 제자는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할 뿐 사존 앞이라 감히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다. 일등대사는 연방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이 애들이 정말 친구에게 무례하게 굴었군 그래. 좀 있다가 사과를 하라고 하지.]
황용은 서생과 농부를 약올리듯 바라보면서 득의양양해 계속 말을 이어 내려갔다.
[뒤에 그림을 보여 드렸더니 그제야 우리에게 들어오라며 막지 않더군요.]
[아니 그림이라니? 그게 무슨 그림이었는데?]
일등은 의외라는 듯 정색을 했다.
[매와 비둘기가 있고 가죽을 벗기는 장면이 있는 그림 말이에요.]
[아니, 그 그림을 누구에게 주었는데?]
황용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서생이 품속에서 그림을 꺼내 놓았다.
[제자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선정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미처 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등이 손을 뻗어 받으며 황용을 보고 웃었다.
[그것 봐라. 아가씨가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못 볼 뻔했군 그래.]
그는 천천히 그림을 펴보고는 벌써 그 뜻을 알아차리고 웃었다.
[내가 치료해 주지 않을까 봐 이 그림으로 나를 자극하려고 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 중을 너무 깔보았는걸.]
황용이 고개를 돌려 서생과 농부의 표정을 보니 초조해하면서도 어딘가 걱정스러운 표정이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일등대사가 치료해 준다고 말하니까 자기들 생명이라도 빼앗기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치료하는 약이 지극히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 아까워서들 그러는 것인가?)
일등은 그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가져 가 다시 한 번 본 뒤에 탁탁 몇 번 튕겨 보았다. 그의 얼굴에 무언가 미심쩍은 그림자가 스쳐 갔다.
[이 그림은 영고가 그린 것인가?]
[네 그래요.]
일등의 질문에 황용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일등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윽고 입을 뗐다.
[직접 그리는 것을 보았단 말이지?]
황용은 무슨 곡절이 있는 줄 알고 당시의 광경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영고가 그림을 그릴 때 우리 쪽에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쥐고 있는 붓이 움직이는 것만 보았지 직접 그렸는지 어쨌는지는 잘 몰라요.]
[이것말고 또 주머니 두 개가 있다고 했는데 그걸 좀 내게 보여 주게.]
곽정이 주머니를 꺼내 주자 일등이 보고는 표정이 달라졌다.
[과연 그렇구나.]
그는 그림과 글씨를 황용에게 되돌려주었다.
[약형이 서화의 대가시라 아가씨도 집에서 배워 식별이나 감상은 할 수 있을 테니 이 석 장이 어떻게 다른가 한번 보게.]
황용이 그것을 받아 보았다.
[글씨가 적힌 두 장은 보통의 옥판지(王版紙)고, 그림이 있는 종이는 오래 된 상지(桑紙)인데요.]
일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서화에 대해 나는 문외한이지만 이 그림의 필력을 한번 보아라. 어떤가?]
황용이 들여다보다가 슬며서 웃었다.
[아저씨도 공연히 문외한인 척하시네요. 그냥 보아도 영고가 그리지 않은 것이 드러나는데요.]
일등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렇다면 정말 그녀가 그리지 않은 것이 틀림없지? 나는 사리에 비추어 보았을 뿐이지 그림을 보고 알아낸 것은 아니야.]
황용이 그의 팔목을 잡았다.
[이걸 보세요. 이 두 장의 글씨는 약하고 예쁜 반면 그림의 필치는 딱딱하잖아요. 응, 이 그림은 남자가 그린 것이에요. 그래요, 틀림없는 남자 솜씨예요. 그림에 대한 소양이 전연 없는 사람인가 봐요. 간격도 그렇고 원근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필력만은 대단하군요. 그리고 이 먹의 색도 아주 오래 된 것이로군요. 제 나이보다 많은 것 같은데요.]
일등대사는 한숨을 내쉰 뒤 대나무 탁자 위에 있는 경전을 가리키며 서생에게 가져 오라는 시늉을 했다. 서생이 가져다 사부의 손에 쥐여 준 것을 황용이 얼핏 보니 글씨 두 줄이 씌어 있었다.
대장엄론경(大壯嚴論經). 마명보살조(馬嗚菩薩造).
서역구자삼장구마라습역(西域龜玆三藏鳩摩羅什譯).
(경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떡한담.)
황용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일등이 경서를 펼쳐 그림과 나란히 놓았다.
[이걸 봐라.]
황용의 입에서 아 하는 가벼운 비명이 새어 나왔다.
[지질이 똑같군요.]
일등이 고개를 끄덕였다. 곽정은 뭐가 뭔지 몰라 낮은 소리로 물었다.
[무슨 지질이 같단 말야?]
[자세히 비교해 보세요. 이 경서의 지질과 저 그림의 지질이 똑같지 않아요?]
곽정이 손을 뻗어 만져 보았다. 과연 두 장의 종이가 그 두께나 색감, 윤택이 완전히 같았다.
[조금도 다르지 않군.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거야?]
황용은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일등을 바라보며 그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경서는 내 사제가 서역에서 가져다 준 거야.]
두 사람은 줄곧 일등대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바람에 천축국에서 온 스님을 잊고 있다가 그제야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그는 얌전하게부들풀 방석 위에 앉아 있었지만 이들이 주고받는 말을 전연 알아듣지 못했다.
[이 경전도 서역의 종이로 만들었고 이 그림 또한 서역의 종이지. 그런데 아가씨는 서역의 백타산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일등이 묻는 말에 황용이 깜짝 놀랐다.
[서독 구양봉 말입니까?]
[그래. 이 그림은 바로 구양봉이 그린 것이야.]
일등이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듣자 곽정과 황용은 너무나 놀라워 할말을 잊었다. 일등이 미소를 머금고 다시 입을 열었다.
[구양거사 오래 전부터 마음을 가지고 있더니 정말 멀리까지 생각하고 있구나.]
[아저씨, 저는 이 그림을 노독물이 그린 줄은 미처 몰랐어요. 그렇다면 호의를 품고 있지는 않을 텐데요.]
일등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구음진경은 지나치게 평가되고 있단 말야.]
[아저씨, 이 그림과 구음진경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일등은 그녀가 지나치게 놀라 홍분하는 바람에 두 볼이 달아오르는 걸 보았다. 아까부터 황용은 너무나 힘이 들어 내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일등은 그녀의 오른쪽 어깨 위에 손을 올려 놓았다.
[이 일은 천천히 이야기하자. 우선 아가씨 부상을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일등이 막 황용을 부축하고 옆채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서생과 농부가 갑자기 서로 눈짓을 하고는 문 앞을 막아 서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제자들이 이 아가씨의 부상을 치료해 보겠습니다.]
일등이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너희들의 공력이 그만큼 충분하냐? 치료할 자신들이 있느냐 말이다.]
[제자들이 억지로라도 한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일등대사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인명은 귀중한데 함부로 시험해 보겠다니?]
[이 두 사람은 간악한 사람들의 사주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호의를 지니지도 않았는데 자비로우신 사부님이 간악한 무리들의 흉계에 걸려드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서생이 간곡히 말하자 일등대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평소에 너희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더냐? 이 그림을 자세히 보아라.]
이렇게 말하며 그림을 내주었다.
[이 그림은 서독이 그린 것입니다. 사부님, 구양봉의 독계예요.]
농부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곽정과 황용은 더욱 의아하게 생각했다.
(부상을 치료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저러나?)
[그만 일어나거라, 일어나. 손님의 마음을 불안하게 해드려서는 안된다.]
비록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어조는 단호했다. 두 제자는 더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일등은 안으로 들어서며 곽정에게 손짓을 했다.
[자네도 들어오게]
곽정도 따라 들어갔다. 일등은 문 안에 말아 올려 놓았던 대나무 주렴을 내려치고는 향을 살라 대나무 탁자 위에 있는 향로에 꽂았다.
그 방에는 아무것도 없고 대나무 탁자 하나와 바닥에 부들풀로 만든 방석 세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등은 황용을 가운데 있는 방석에 앉게 하고는 곽정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저 향불을 지켜 보고 있다가 다 타거든 내게 알려 주도록 하게]
곽정은 그러마고 대답했다. 일등은 황용 옆에 있는 방석에 단정하게 앉아 대나무 주렴을 바라본 뒤 곽정에게 말했다.
[자네는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문을 잘 지켜 주게. 내 사제나 제자도 들어와서는 안 돼. 알겠나?]
곽정이 알았다고 대답을 하자 일등이 두 눈을 감았다가 갑자기 번쩍 떴다.
[그들이 만약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거든 힘으로라도 막아야 하네. 잘못하면 사매의 생명이 위험하게 되니 각별히 명심하게.]
일등은 곽정에게 거듭 당부하고 이번에는 황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온몸의 힘을 빼. 아프거나 가렵더라도 운기를 해 막으려고 하면 안돼. 알겠지!]
[저는 이미 죽은 걸로 생각하고 있을게요.]
황용이 웃으며 말하자, 일등도 따라 웃었다.
[귀여운 아가씨가 정말 총명하군]
일등은 즉시 눈을 감고 참선에 들어갔다가 향불이 1촌쯤 타들어 가자 벌떡 일어나 왼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지며 오른손 식지를 뻗어 천천히 그녀의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百會穴)을 눌렀다. 황용의 몸이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녀는 한 가닥 강한 열기가 정수리를 뚫고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일등대사는 이렇게 혈을 한 번 찍은 뒤에 즉시 힘을 거두어 들였다. 그의 몸이 흔들리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벌써 두 번째로 그녀의 백회혈 뒤 1촌 5푼 거리에 있는 후정혈(後頂穴)을 누르고 계속해서 강간(强間),뇌호(腦戶),풍부(風府),아문(阜門),대추(大椎),도도(陶道)를 눌러 내려갔다. 항불 하나가 반쯤 타들어 갔는데 벌써 그녀의 독맥(督脈) 삼십육대혈을 순차적으로 누른 것이다.
곽정은 이때 무공이 벌써 예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옆에서 지켜 보면서 일등대사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신출귀몰하게 삼십육대혈을 30여 가지 다른 수법으로 누르는 것을 보았다. 이건 강남 육괴에게도 배운 적이 없고 《구음진경》의 점혈편(點穴篇)에도 기록이 없어, 곽정으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수법이었다. 다만 눈이 어지럽도록 돌아가는 신운(神韻)에 찬 몸짓을 보고 일등대사가 상승의 무공을 드러내는 줄만 알았지, 지금 필생의 공력으로 황용을 위하여 온몸의 기경팔맥이 순조롭게 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일등은 독맥의 점검이 끝나자 잠시 앉아 쉬다가 곽정이 향불을 바꾸어 꽂자 다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임맥(任脈) 이십육대혈을 다시 누르기 시작했다. 어찌나 재빠른 솜씨인지 손등이 가볍게 떨리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마치 잠자리가 물을 찍듯 벌써 임맥의 각 혈을 두루두루 눌렀다. 이 25초는 전광석화처럼 빨랐지만 손끝이 닿는 부분은 한치도 틀림없이 정확했다. 곽정은 혀를 내둘렀다.
(천하에 저런 재주가 다시 또 있을까?)
음유맥(陰維脈) 십사혈을 누를 때는 그 수법이 또 달랐다. 씩씩한 발걸음을 옮겨 딛는 모습이 늠름했다. 비록 몸에는 가사를 입고 있었지만 곽정의 눈에는 스님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억조창생 앞에 우뚝 선 황제 같았다. 일등대사는 음유맥을 다 누르자 쉴 틈도 없이 양유맥(陽維脈) 삼십이혈을 찔러 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멀리 떨어져서 찍었다.
그는 황용으로부터 1장쯤 떨어진 위치에서 갑자기 그녀 옆으로 접근하여 목에 있는 풍지혈(風池穴)을 찍었다. 혈을 정확히 찍자마자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는데 그 동작이 민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곽정은 일등대사의 동작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고수와 대결할 때 접근전이 위험하면 이 수법을 쓰면 되겠구나. 적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호신도 되니 이야말로 천하의 묘술이구나.)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열심히 구경하면서 마음속에 하나하나 새겨 두었다.
곽정은 다시 또 향불 두 개를 바꾸어 꽂았다. 일등대사가 그녀의 음교(陰轎) 양교(陽轎) 두 맥을 다 누르고 어깨 위에 있는 거골혈(巨骨穴)을 누를 때 곽정은 그제야 크게 깨달았다.
(아, 구음진경에 없을 리가 있나? 다만 내가 어리석어 몰랐을 뿐이지.)
마음속으로 경문을 암송해 보았다. 일등대사의 초술 하나하나가 경문의 내용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경문에는 요지만 적혀 있었을 뿐이지만 일등대사의 점혈법은 더욱 오묘하고 변화가 다채로워 곽정으로서는 더욱 기억하기가 좋았다.
일등이 황용의 혈을 찍을 때마다 곽정은 1초(一招) 1식(一式)을 속으로 그대로 흉내내 보았다. 초식은 오묘했지만 아까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문의 내용만 생각해 보면 그 이치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맥(帶脈)이 통하자 이제 치료는 다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기경칠맥이라고 하는 것은 상하로 교류하는 것이요, 대맥은 전신을 일주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일등대사가 황용을 뒤에 두고 물러났다가 손을 돌려 장문혈(章門穴)을 눌렀다. 이 대맥의 혈은 모두 8개다. 일등의 손놀림이 아주 느려졌다. 누르기가 매우 어려운 듯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몸이 흔들흔들하는 것이 서 있기조차 힘든 것 같았다.
곽정이 깜짝 놀라 살펴보니 이마에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서 부축하고 싶었지만 일을 그르칠까 봐 망설여졌다. 황용은 옷이 전부 땀에 흠삑 젖었고 입술을 꽉 깨문 채 롱증을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
이때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등뒤 대나무 주렴이 들리고 몇 사람이 일제히 큰소리로 일등대사를 불렀다.
[사부님!]
그리고는 안으로 뛰어들어오려고 했다. 순간 곽정은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일등대사의 반수점혈법으로 뒤로 네 번 찔렀다. 어이쿠 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이 깜짝 놀라 몸을 돌렸을 때는 서생만이 뒤로 펄쩍 뛰어 피해 있었고 어부와 나무꾼, 농부 세 사람은 그의 반수점혈법에 찔려 이미 땅바닥에 나가자빠져 있었다. 곽정은 본능적으로 그냥 손을 썼을 뿐 그들을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반수점혈법의 위력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줄은 곽정 자신도 몰랐던 것이다. 오히려 곽정 쪽에서 놀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 사람과 노기충천한 서생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다 끝났는데 말려 무엇하오?]
서생의 화난 말소리였다. 이 말을 듣고 곽정이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일등대사는 백지장 같은 얼굴로 가사를 땀으로 온통 적신 채 부들풀 방석에 앉아 있었다. 황용은 꼼짝도 안 하고 누워 있는 모양이 생사를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곽정이 깜짝 놀라 달려가 부축해 일으키니 황용의 코에서 비린내가 확 풍겼다. 얼굴은 창백한 것이 핏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은은히 깔려 있던 흑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코에 귀를 대니 호흡만은 정상이라 우선 안심을 했다.
그 동안 서생은 벌써 어부와 나무꾼, 농부 세 사람의 혈을 풀어 주고 네 사람이 함께 일등대사 옆에 앉아 한마디 말도 없이 근심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곽정은 계속해서 황용을 살펴보았다. 기쁘게도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붉은 기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밝아지다가 두 볼이 타오르는 것처럼 변했다. 급히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니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잠시 후에 이마에 땀방울이 솟아나다가 이번엔 또 하얗게 변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변하며 세 차례 땀을 흠뻑 흘리고 나더니 황용이 끙 하고 깨어나면서 눈을 떴다.
[곽정 오빠, 화로는요? 그리고 또 얼음은 어디 있어요?]
곽정은 그녀가 입을 열자 회색이 만면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화로라니? 그리고 또 얼음은 무슨 얼음이야?]
황용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머리를 혼들며 웃었다.
[아, 제가 악몽을 꿨군요. 꿈속에 구양봉, 구양공자, 구친인이 나타나서 나를 화롯불에 구웠다 얼음에 얼렸다 하는 바람에 무서워 죽을 뻔했어요. 그런데 일등대사님은 어떻게 된 거예요?]
일등이 서서히 두 눈을 뜨고 웃었다.
[이제 아가씨의 부상은 치료가 끝났어. 한 이틀 쉬며 움직이지 않으면 별일은 없을 거야]
[기운이 하나도 없네요. 손끝도 까딱하기 싫어요.]
농부가 눈알을 부라리며 황용을 노려보았지만 황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등에게 말했다.
[사백님, 그렇게 많은 시간 치료해 주시느라고 지치셨을 텐데 제게 아버님의 비방으로 만든 구화옥로환이 있으니 몇 개 잡수어 보시겠어요?]
일등은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거 좋지. 아가씨가 그런 좋은 악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걸. 화산에서 논검을 할 때 모두들 싸우다 기진맥진했을 때 아가씨 부친이 그 약을 나누어 주셔서 먹은 일이 있는데, 과연 훌륭하더군.]
곽정이 급히 황용의 옷보따리 속에서 약을 찾아 일등에게 바쳤다. 나무꾼이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떠오자 서생이 약 한 봉지를 있는 대로 다 쏟아 사부에게 올렸다. 이를 본 일등이 웃었다.
[그 많은 걸 다 먹을 필요가 있나? 이 환약은 만들기 아주 어려운 것이니 반만 달래서 먹지.]
[사부님, 세상에 용하다는 영약을 전부 가져다 자셔도 부족할 텐데 뭘 그러십니까?]
서생이 답답하다는 듯 우기고 나서자 일등대사는 그의 손에서 구화옥로환 수십 개를 가져다 입 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 뒤 곽정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 사매를 부축하고 나가 이틀만 쉬도록 하게. 하산할 때 굳이 나를 찾아올 필요는 없네. 이 점만은 약슥을 지켜 주어야 하네. 알겠나?]
곽정은 땅에 엎드려 네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평소 아버지든 사부든 가리지 않고 늘 까불던 황용도 이때만은 진심으로 공손하게 절을 했다.
[살려 주신 은혜,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일등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좋아. 그래야만 마음이 홀가분하니까.]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곽정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산에 올라왔었다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기 바라네. 사부님 앞에서도 꺼내지 않는 게 좋아.]
곽정은 홍칠공을 모시고 다시 와 치료를 받도록 할까 궁리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어안이벙벙해 말을 못했다.
[앞으로 자네들도 다시 이곳에 올 생각은 말게. 우린 며칠 내에 다른 곳으로 옮겨 갈 테니까.]
[아니 어디로 가시는데요?]
곽정이 다급하게 물었다.
일등은 미소만 보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바보 같은 오빠, 우리에게 이곳이 발각되었기 때문에 다른 데로 가는 것인데 그래 그곳을 알려 줄 리 있을라구.)
황용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등에게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좋을지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일등대사가 자기를 치료해 주려고 최선을 다했고 또 이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형언할 수가 없었다.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못 갚을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그러니 어초경독 네 제자의 처지에서는 자기들의 입산을 결사적으로 막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황용은 이런 생각까지 들자 그들 네 제자를 바라보면서 몇 마디 사과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때 일등대사의 낯빛이 변하며 몸을 흔들다 부들풀 방석에서 그대로 방바닥에 벌렁 나자빠지는 것이었다.
第 五 卷. 第 六 章.(通卷 章). 관계
네 제자와 곽정, 황용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꺼번에 달려들어 일등대사를 부축했다. 그는 얼굴을 씰룩거리며 진통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여섯 사람은 두렵고 초조하여 두 손을 축 내려뜨린 채 입도 벙긋 못하고 서 있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일등의 입가에 다시 가벼운 미소가 흐르며 황용에게 물었다.
[아가씨, 이 구화옥로환은 아버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인가?]
[아니에요, 사형인 육승풍께서 아버지가 써주신 비방에 따라 만드신 거예요.]
[아가씨, 혹시 아버님께서 이 환악을 과용하면 다른 부작용이 생겨 오히려 해롭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나?]
황용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 구화옥로환에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버지께서는 많이 먹을수록 좋다고 하셨는데요. 다만 만들기가 어려워 많이 먹기는 아깝다고 하셨어요.]
일등은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가씨 아버님은 워낙 이상한 분이라 다른 사람들이 그분 속셈을 안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 혹시 그 육사형이라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려고 가짜 비방을 써주신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 육사형이 아가씨에게 감정을 품고 독약을 그 안에 섞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여섯 사람은 <독약>이란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중 서생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사부님, 중독이 되신 겁니까?]
이 말에 일등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네 사숙이 여기 계시니 제아무리 대단한 독약이라도 사람을 해칠 수는 없을 게야. 아주 다행한 일이지.]
제자들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황용에게 대들었다.
[우리 사부님께서 호의로 치료해 주셨는데 어찌 독약을 써서 해치려 든단 말이오?]
네 사람은 곽정과 황용을 둘러싼 채 금방이라도 공격할 기세였다.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곽정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황용은 일등이 한마디 한마디 묻는 말을 듣고 벌써 구화옥로환에 화근이 있음을 깨닫고 귀운장에서 이 악을 받을 때부터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윽고 흑소의 초가집에서 영고가 그 환약을 가지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 살펴본 후 한참 뒤에야 되돌려주었던 데 생각이 미쳤다.
[아저씨 이제 사정을 알겠군요. 바로 영고였어요.]
[또 영고란 말인가?]
황용은 즉시 흑소의 초가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저에게 다시는 이 환약을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그건 자기가 그 안에 독약을 섞어 놓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홍, 그 여자가 아가씨는 꽤 생각해 주었군. 혹시라도 해칠까 걱정을 다 해주었으니 말야!]
농부가 옆에서 이렇게 빈정거리듯 내뱉었다.
황용은 자기 불찰로 일등대사가 이미 독약을 먹었다고 생각되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말대답을 하면서 입씨름할 여유도 없었다.
[제가 죽을까 염려해서가 아니라 제가 먹어 버리면 아저씨를 해칠 수 없을까 봐 그랬겠지요.]
황용이 힘없이 말하자 일등은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운명일 뿐이야.]
일등은 표정이 점점 부드러워지더니 이윽고 곽정과 황용에게 말문을 열었다.
[이는 다 내 운명이니 자네 두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영고만 해도 옛날의 인과일 뿐일세. 자네들은 물러가 며칠 쉬다가 하산하도록 해. 비록 중독은 되었지만 사제가 요독성수(療毒聖手)이니 염려할 것 없네.]
말을 마치자 눈을 감은 채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곽정과 황용이 허리를 숙이고 공손히 절을 하자 일등대사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물러 나왔다. 어린 사미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사람을 후원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해 쉬게 해주었다. 그 작은 방에는 대나무 침상 두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두 스님이 식사를 들여왔다.
[자,드십시오.]
황용은 일등이 염려되어 그들에게 물었다.
[대사님은 어떠십니까?]
[소승은 모릅니다.]
비교적 나이 든 스님이 이렇게 대답한 후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갔다.
[말소리를 들어 보니 아무래도 여자 같은걸.]
[태감(太監)이에요. 옛날엔 틀림없이 황제를 모셨을 거예요.]
황용이 맥없이 대꾸했다. 두 사람은 심란하여 밥상을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선원(禪院)이라 조용하기 이를데 없었다. 어쩌다 미풍이라도 지나면 대나무 잎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한참 이렇게 침묵을 지키다 곽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용아, 일등대사님의 무공이 정말 대단하더라.]
황용은 응 소리만 냈다.
[우리들 사부님, 그리고 용아 아버님, 주대형, 구양봉, 구천인, 이 다섯 분 무공이 높다 하지만 일등대사를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럼 이 여섯 분 가운데 누가 무림에서 천하 제일이겠어요?]
황용이 묻자 곽정은 한참 생각해 보다가 입을 멨다.
[내가 보기에는 각기 독특한 조예를 지니고 있어서 그 우열을 따지기 어려울 것 같아. 이 일문의 무공은 이분이 높고 저 일문의 무공은 또 저분이 높거든.....]
[문무 겸비한 점으로는요.]
[그야 물론 용아 아버님이시지]
황용이 잠깐 기쁜 듯 웃다가 갑자기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이상하다는 거예요.]
[이상하다니 뭐가 이상하단 말이야?]
[생각해 보세요. 대사님이 이렇게 높은 재주를 지니셨고 어초경독 네 분 제자도 평범한 인물이 아닌데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전전긍긍하면서 이 산중에 숨어 사느냐 말이에요. 왜 누가 찾아왔다는 말만 들으면 큰 재앙이라도 만난 듯 무서워 벌벌 떨지요? 천하 육대 고수 가운데 서독이나 구철장이라면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그 두 사람도 각기 나름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처지인데 그래 신분이나 체면도 돌보지 않고 서로 합심해서 일등대사를 치겠다고 찾아오겠어요?]
[용아, 구양봉과 구천인이 합세를 해서 찾아온다 하더라도 이제 우리가 겁낼 필요는 없어.]
[어쩨서요?]
황용이 의아해서 물었다.
곽정의 얼굴에 겸연쩍어하는 빛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말을 꺼내기가 거북한 모양이었다. 이를 본 황용이 웃으며 놀렸다.
[아니 ! 왜 부끄러워하세요?]
[일등대사님의 공력이 결코 서독에 빠지지 않을 테니까 최소한 지지는 않겠지. 내가 보기에 그의 반수점혈법은 바로 합마공을 제어하는 묘법일 것 같아]
[그럼 구천인은요? 어초경독 네 사람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해요.]
[그야 물론이지. 동정의 군산과 철장봉 위에서 내가 잠깐 겨루어 보았는데 정말 대결을 하게 된다면 백 초까지는 그런대로 마주 상대를할 수 있을 테지만 백 초가 넘으면 버티기 어려울 거야. 오늘 일등대사가 용아를 치료하는 점혈수법을 보고는.....]
황용이 반가워 말을 가로채고 나섰다.
[뭘 배우셨군요? 그 빌어먹을 구철장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도 터득하셨나요?]
[용아는 내 자질이 우둔하다는 것을 잘 알지 않아? 이 점혈무공은 오묘하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하루에 다 배울 수가 있나? 그러나 내 생각에 다만 몇 가지 재주만 더 익히면 구천인을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도 마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할 것 같아.]
[그러나 오빠는 한 가지 일을 잊고 계시군요.]
황용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뭘?]
[일등대사님이 중독이 되었는데 언제 좋아지실지 알 수 없는 것 아녜요?]
곽정은 잠자코 있다가 이윽고 원망스럽다는 듯 내뱉었다.
[그 영고가 그토록 못돼먹은 사람일 줄이야.....]
곽정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소리를 질렀다.
[어이쿠 이거 큰일이구나!]
[뭔데요?]
황용이 그가 놀라는 바람에 덩달아 놀라며 물었다.
[영고에게 치료가 되면 일년 동안 그녀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킬 거야 말 거야?]
[오빠 생각은 어떠세요?]
[만약 그녀가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일등대사님을 찾아 올 수도 없었을 게고, 그랬다면 용아의 부상을 치료할 수 없었을 테니까.....]
[뭐 그게 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우물우물하세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씀하시면 될 텐데요. 오빠 생각은 장부일언이 중천금이니 악속은 지켜야 한다고 하실 것이 분명해요.]
황용은 곽정이 화쟁 공주와 맺은 약속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런 여자의 마음을 알 턱 없는 곽정은 황용의 눈에 눈물이 괴어 떨어지려고 하는데도 여전히 눈치 없이 엉뚱한 소리만 지껄였다.
[영고는 용아 아버지의 신기한 꾀와 재주가 자기보다 백배는 뛰어나다고 말했어. 용아가 술수를 가르쳐 준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능가하기란 어림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일년이나 함께 있자고 그러지?]
황용은 얼굴을 가린 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곽정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또 한마디 묻자 결국 황용이 벌컥 화를 냈다.
[오빠는 바보란 말야. 아무것도 몰라!]
곽정은 그녀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몰라 욕을 먹고도 여전히 멍청히 있기만 했다.
[용아, 원래 내가 둔한 걸 잘 알지 않아? 그래서 용아보고 말 좀 하자는 거 아냐?]
황용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쏘아붙이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부드러운 말소리를 듣자 더 참을 수가 없어 그의 품속에 쓰러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곽정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리며 위로해 주었다. 황용은 그의 옷깃을 끌어다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곽정 오빠,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오빠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을게요.]
[내 본래 둔한 걸 가지고 그렇다고 말하는데 뭘.....]
[오빤 좋은 사람이고 나는 못돼먹은 계집애예요. 제가 찬찬히 말할테니 들어 보세요. 영고와 우리 아버지는 원한이 있어 그녀는 술수와 무공을 익혀 도화도로 찾아가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와 만나 술수는 나만도 못하고 무공 또한 오빠만 못한 걸 알게 되었지요.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이번엔 나를 인질로 잡아 놓고 아버지를 끌어들이자는 속셈인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주객이 바뀌어 독계를 써서 아버지를 해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곽정은 그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 그렇군. 틀림없이 그렇다면 이 약속은 지킬 수가 없지.]
[지킬 수가 없다니요? 당연히 지켜야지요.]
[어째서?]
곽정이 의아해서 물었다.
[영고란 여자는 보통 지독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가 구화옥로환에 독약을 섞어 일등대사를 해친 걸 보면 그 나머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이 여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장차 아버지에게 큰 화근이 될 거예요. 그녀가 내게 함께 지내자고 했으니 함께 지내는 거예요. 이제 방비가 있으니 결코 그녀의 수단에 걸려들지는 않을 테니까요. 어떤 음모나 흉계든지 하나하나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호랑이 한 마리를 모시고 지내는 것과 같겠군 그래.]
황용이 막 대답하려고 하는데 앞채의 선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지만 비명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혹시 대사님이 어떻게 되신 것이 아닐까?]
곽정이 묻자 황용이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밥이나 들고 좀 누워 쉬도록 해요.]
곽정이 권했지만 황용은 여전히 머리를 내젓고 있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와요.]
과연 몇 사람이 발소리를 내며 앞마당을 건너오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화가 나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 계집애가 꾀가 많으니 그년부터 해치워야 해요.]
분명 농부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는데 다시 나무꾼의 말소리가 들렸다.
[함부로 거칠게 대들어서는 곤란하니 우선 분명히 물어 봐야 해요.]
[묻기는 뭘 물어요? 두 연놈은 사부님의 원수가 보낸 것이 분명한데, 우리가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남겨 놓을 테니 묻고 싶거든 그 어리숙한 녀석에게나 물어 보시구려]
역시 농부의 말이었다. 어초경독 네 사람은 이렇게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서 문밖까지 와서는 문을 가로막아 버렸다. 자기들 말을 안에서 들어도 무서울 게 없다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곽정은 지체 없이 항룡유회의 재주를 부려 뒷벽을 쳤다. 와르르 소리가 나며 흙벽 반쪽이 무너졌다. 그는 황용을 부축해 등에 업은 뒤 뻥 뚫린 반쪽의 흙벽으로 뛰어올랐다. 그들이 공중에 떠 있는 사이에 농부는 바람처럼 손을 뻗어 그의 왼쪽 다리를 낚아챘다. 황용이 왼손을 가볍게 뿌리며 농부의 등뒤에 있는 양지혈(陽池穴)을 건드렸다. 이는 가전의 난화불혈수로 비록 일등대사의 반수점혈수법에는 미칠 수 없다 하더라도 날렵한 솜씨가 정확하고 재빠른 점이 보통이 아니었다. 황용의 손끝이 번개처럼 이르는 것을 본 농부는 깜짝 놀라 급히 손을 거두며 막았다. 혈도를 쩔리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주춤하는 사이에 곽정은 벌써 황용을 업고 뒷담을 넘어섰다. 그러나 그는 몇 발짝 달려나가다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원래 선원 뒤에는 사람 키가 넘는 가시덤불이 빽빽이 들어차 발 디딜 곳이 없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리니 어초경독 네 사람이 한 줄로 서서 가로막고 있었다.
[일등대사께서 우리에게 하산하라고 하신 말씀을 다 같이 들었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명을 어기면서까지 막는 것입니까?]
곽정이 낭랑한 소리로 묻자 어부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자비심을 가지고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구해 주셨는데 너희들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구해 주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곽정과 황용이 어이없어하며 따지듯 말했다. 그러나 어부와 농부는 동시에 코방귀를 뀌고 서생은 냉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아가씨 부상을 우리 사부님께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구해 주셨는데 정말 모른단 말이오?]
[정말 모르니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서생은 그들 두 사람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 나무꾼을 향해 눈짓을 하자 나무꾼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몸에 지독한 내상을 입었는데 치료를 하자면 반드시 일양지(一陽指)의 재주로 기경팔맥(奇經八脈)에 있는 각개 혈도를 뚫어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진교 교주인 왕중양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로는 오직 우리 사부님께서만 이 일양지를 쓰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무공으로 다른 사람의 부상을 치료하면 본인이 원기를 잃게 되어 오 년 안에 무공은 전부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황용은 이 말을 듣고 너무나 죄스런 마음에 아 하고 신음 소리만 낼 뿐이었다. 서생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여 2년 동안 매일 낮밤을 부지런히 고된 수련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무공을 회복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가벼우면 병신이요, 중하면 목숨까지 잃게 됩니다. 우리 사부님께서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치료해 주셨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말이나 됩니까?]
황용은 땅에 엎드려 일등대사가 거처하는 선방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흐느꼈다.
[사백님께서 저의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가 그토록 깊고 높은 줄 몰랐습니다.]
어초경독은 그녀가 땅에 꿇어 엎드려 흐느껴 우는 것을 보자 한결 표정이 누그러졌다. 먼저 어부가 물었다.
[아가씨 아버지께서 우리 사부님을 해치라고 보낸 걸 아가씨도 몰랐단 말인가?]
[우리 아버지께서 무엇 때문에 사백님을 해치라고 나를 보내요?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데 그런 비열한 수법을 쓰겠습니까!]
그러자 어부가 읍을 하고 나섰다.
[만약 아가씨가 부친의 명을 받고 온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거친 말을 용서해 주기 바라오.]
[홍, 이 말을 우리 아버지께서 들으셨다면 일등대사님의 제자라 하더라도 용서치 않으실걸요.]
이 말에 어부가 발끈하여 비웃음을 띠고 쏘아붙였다.
[아가씨 아버지 별명이 동사 아니오? 우리는 서독이 할 수 있는 일은 동사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믿소.]
[아니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서독과 비교해요? 구양봉 그 늙은 도둑이 무슨 일을 저질렀다구요?]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서생이 나섰다.
[자, 우리 방으로 들어가 자세히 얘기해 봅시다.]
여섯 사람은 선방으로 돌아와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초경독 네 사람은 문 앞과 통로를 막고 앉았다. 황용은 자기가 달아날까 봐 방비를 하는 것임을 알고는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서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구음진경에 관한 일을 알고 계시지요?]
[그야 물론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일등대사님과 그 진경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화산에 모여 논검을 한 것은 진경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는데 전진교주가 무공이 천하 제일이라 진경이 그의 수중에 들어간 것은 모두들 기쁘게 승복한 일이라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지요. 그때 화산 논검에서 각자 자기 재주를 십분 발휘했는데 중양진인께서 우리 사부님의 선천공(先天功)에 지극히 감탄을 했습니다. 이듬해 그분이 그의 사제와 함께 대리국(大理國)으로 우리 사부님을 찾아와 서로 무공을 가지고 절차탁마한 일이 있습니다.]
[그분의 사제라니? 노완동 주백통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가씨는 나이 어린데도 아는 게 많군요.]
[칭찬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주사숙이라는 위인이 워낙 재치 있고 재미있는 분이기는 하지만 그분을 노완동이라고 부르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때는 제가 아직 출가하기 전이었으니까요.]
[아 그럼, 그때 일등대사께서는 황제로 계실 때였군요.]
[그렇습니다. 두 분이 황궁에서 십여 일을 묵으셨는데 우리 네 사람이 옆에서 모시고 지냈지요. 우리 사부님께서는 선천공의 요지와 비결을 중양진인에게 모두 가르쳐 드렸습니다. 중양진인께서는 너무나 기뻐하시며 일양지 무공을 우리 사부님께 전수해 주셨습니다. 그분들께서 말씀을 주고받으실 때 우리도 옆에서 모시고 있었지만 워낙 식견이 부족해서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지요.]
[그럼 노완동은요? 그분의 무공도 낮지 않은데요.....]
[주사숙께서는 움직이기를 좋아하셨지 가만히 앉아 계시는 것은 질색이셨습니다. 온종일 대리국 황궁 안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노시기만 하셨지요. 마침내는 황후와 궁녀들의 침궁까지 거침없이 드나드셨으니까요. 태감이나 궁인들도 그분이 황제의 귀빈임을 아는지라 막을 수가 없었답니다.]
황용과 곽정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노완동답다니까.)
서생이 계속 말을 이었다.
[중양진인께서 떠나실 즈음 우리 사부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최근에 제 고질이 재발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일양지는 이미 다른 분께 전수하여 세상에 그를 제어할 수 있는 분이 계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가 천하를 종횡하며 물의를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우리들은 모든 일의 전모를 깨닫게 되었지요. 중양진인께서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대리국까지 오신 이유는 바로 일양지를 우리 사부님께 전수해 주심으로써 세상을 떠난 후라도 서독 구양봉을 제압할 수 있는 인물을 남겨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 다섯 사람의 명성이 엇비슷한데 만약 무공을 전수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한다면 우리 사부님께 혹시 결례가 되지 않을까 해서 먼저 우리 사부님이 그에게 선천공을 전수하게 한 뒤에 다시 일양지의 재주와 맞바꾼 것처럼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그분의 이런 뜻을 아신 후 그분을 더욱 존경하면서 부지런히 수련을 쌓으셨지요. 그 뒤에 대리국에서 불행한 일이 한 가지 발생하자 사부님께서는 세정을 간파하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신 것입니다.]
황용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황야께서 황제도 마다하고 중이 되셨다면 틀림없이 굉장한 일이었을 텐데 말을 하지 않으니 묻기도 거북하구나.)
슬쩍 옆눈으로 살펴보니 곽정이 물어 보려고 막 입을 벌리려고 해 눈짓으로 만류했다. 서생은 말을 멈추더니 표정이 어느덧 어두워졌다. 아마도 지난 일을 회상하는 듯싶었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 사부님께서 일양지를 익히셨다는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제 이사형께서.....]
그는 농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사부의 분부를 받고 약을 캐러 나갔다가 운남서강(雲甫西疆) 대설산(大雪山)에서 합마공에 맞아 부상을 입었습니다.]
[노독물이었겠군요.]
황용이 묻는 말에 농부가 벌컥 역정을 냈다.
[그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오? 처음엔 한 소년 공자가 까닭없이 귀찮게 굴면서 이 대설산이 자기 집 소유라나요.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약초를 캘 수 없다는 거예요. 나는 사부님 당부도 있고 해서 계속 참고 있었는데 그 소년은 자기에게 절을 삼백 번 해야만 나를 놓아주겠다고 버티는 거예요. 더 참을 수 없어 마침내 싸움이 벌어졌지요. 그런데 소년의 무공이 어찌나 대단한지 둘이 반나절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더군요. 그런데 노독물이 갑자기 산허리를 돌아 나오며 한마디 말도 없이 일 장을 날려 나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 소년은 사람을 시켜 나를 업어다가 사부님이 계신 용천사(龍天寺) 밖까지 데려다 주라고 하더군요.]
[누군가가 벌써 대신 원수를 갚았답니다. 구양공자는 벌써 살해되었어요.]
황용이 알려 주었다.
[아니 벌써 죽었다니, 누가 그를 죽였단 말입니까?]
농부는 여전히 볼멘소리로 물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 자기의 원수를 죽였다는데도 오히려 화를 내시네요.]
[대 원수는 내가 직접 갚아야 하니까요.]
[아깝게도 직접 갚을 수 없게 되었답니다.]
[그래 도대체 누가 그를 죽였단 말이오?]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은 아닌데요. 무공도 구양공자에게 뒤지는 사람이 어쩌다 죽이게 되었답니다.]
[정말 잘 죽였군요. 아가씨, 그런데 구양봉이 내 사형에게 부상을 입힌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서생이 묻는 말이었다.
[그야 어려울 것 없지요. 서독의 무공으로 보아 두 번만 손써도 사형을 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냥 중상만 입혀 놓고 사부님이 계신 곳까지 보내 주었다면 그야 물븐 대사님이 제자를 치료하느라 진력(眞力)을 소모하기를 바라고 그런 것이겠지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라면 오 년이 흘러야 겨우 원상 회복을 할 수 있을 테니, 그렇다면 다음 번 화산논검이 있을 때는 대사님께서 그를 이길 수 없을 것 아니겠어요?]
서생이 감탄과 한숨을 동시에 토해 냈다.
[아가씨, 정말 총명하십니다만 반밖에 맞히지 못하셨습니다. 구양봉의 흉계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우리 사부님께서 사형을 치료한 후 현공(玄功)이 미처 회복되기 전 슬그머니 습격해 살해하겠다는 의도였지요.]
곽정이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일등대사님께서 그토록 자비로우신데 어째서 구양봉 같은 사람과 원한을 맺게 되었습니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그것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첫째 자비로운 호인과 악랄한 악인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요, 둘째 구양봉은 사람을 해칠 때 원한이 있고 없고를 가릴 위인이 아닙니다. 다만 일양지가 그의 합마공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재주이기 때문에 천방백계를 써서라도 사부님을 살해하려 든 거지요.]
곽정은 연방 고개를 끄덕거리다 다시 물었다.
[그래 대사님께서 해를 입으셨나요?]
[사부님께서는 사형의 부상을 보시자 즉시 구양봉의 흉계를 간파하시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처소를 옮기는 바람에 서독으로서는 우리를 찾을 수 없었지요. 우리는 그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보고야 말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사방을 헤매다가 마침내 이 은밀한 장소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부님의 무공이 회복된 후 우리 사형제는 백타산으로 가서 서독과 사생결단을 내자고 주장했지만 사부님께서는 양보가 미덕이라며 우리가 싸우러 나가지 못하게 끝까지 만류하셨답니다. 그렇게 해서 십여 년 동안 안정을 찾았는데 또 두 분께서 찾아오실 줄 누가 알기나 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구지신개의 제자인 줄만 알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막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네 사람이 생명을 걸고라도 사문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호랑이를 해칠 의사가 없어도 호랑이는 사람을 해친다더니, 우리 사부님은 마침내 두 분의 독수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서생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칼날 같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서서히 일어서다가 쉭 소리와 함께 허리에 찬 장검을 빼들었다. 한 줄기 차디찬 한광이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어부, 나무꾼, 농부 세 사람도 함께 일어서며 각기 병기를 꺼내 들고 네 모퉁이로 나누어 포진을 쳤다.
[제가 대사님을 찾아내고 치료를 부탁할 땐 이 일거수의 노고가 오년의 공력을 소모해야 하는 것인 줄 정말 몰랐어요. 또 그 환약에 독약이 들어 있었던 것도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구요. 대사님께서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어찌 배은망덕할 수 있겠어요.]
황용이 당황하여 이렇게 해명했지만 어부가 벌컥 화를 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 사부님의 공력이 손상되었을 때 극약으로 중독되게 했으며 또 원수를 산으로 끌어들였는가?]
두 사람은 더욱 놀라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런 일은 없어요.]
[뭐 그런 일이 없다구? 우리 사부님이 중독되자마자 산 아래에서 상대의 옥환(王環)을 받게 되었는데 미리 악속을 한 게 아니라면 천하에 이토록 공교로운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무슨 옥환이 어떻게 되었다는 거예요?]
[아니 그래도 뻔뻔스럽게 모르는 체한단 말이오?]
어부는 격분하여 양손에 쇠로 만든 노를 들어 하나는 옆으로 휘둘러 치고 다른 하나는 정면으로 휘둘러 곽정과 황용을 노렸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부들풀 방석 위에 앉아 있다가 쌍장이 날아오자 곽정이 먼저 오른손을 구부려 옆으로 날아오는 노를 비스듬히 물리치고 왼손을 뻗어 노 끝을 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곽정의 손에는 무지막지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부는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잡고 있던 노를 놓치고 말았다. 곽정은 노를 빼앗아 들고 쩔그렁거리며 농부의 괭이를 막았다. 쇠와 쇠가 부딪치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겼다. 곽정은 다시 노를 어부에게 되돌려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어부는 얼떨결에 받아 쥐고는 오른쪽 어깨에 힘을 주고 도끼를 든 나무꾼과 함께 다시 한 번 공격했다. 이번에는 곽정이 쌍장을 앞뒤로 뻗자 한 줄기 강한 바람이 두 사람의 앞가슴을 엄습했다.
서생은 항룡십팔장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그들 두 사람에게 빨리 피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부와 나무꾼은 이름난 사부의 수제자들이니 당연히 무예도 보통 수준은 아니었지만 서생의 말을 듣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원래 수중에 가지고 있던 병기가 곽정의 장력에 눌려 오히려 역습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만 자기 생명이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곽정은 쇠로 만든 노와 도끼를 가볍게 집어 던졌다.
[자, 가지고들 가시오.]
이렇게 되자 서생이 찬사를 보냈다.
[훌륭한 솜씨요.]
이번에는 서생이 장검을 번쩍 들어 곽정의 오른쪽 어깨를 노리고 비스듬히 찔렀다. 곽정은 그의 칼 솜씨를 보고 적이 놀랐다. 일등의 네 제자 가운데 이 서생이 가장 풍치 있고 우아할 뿐만 아니라 무공 또한 출중했다. 결코 가벼이 상대할 인물이 아니었다. 곽정은 즉시 전진 칠자가 쓰던 천강북두의 진법을 펴고 쌍장을 춤추듯 놀리며 황용과 자기를 장력으로 에워쌌다. 이러한 진세는 완전무결한 것으로 일말의 허점도 없있다. 쌍장의 기세는 마치 무지개 같았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반경이 점점 넓어져 어초경독은 점점 벽 쪽으로 몰렸다. 어초경독은 공격은 고사하고 방어하기에도 급급했다. 곽정의 장력이 반경을 벗어나기만 하면 네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부상을 입는 것이다.
곽정은 이렇게 계속 버티면서도 장력에 더 큰 힘을 주지 않았다. 상대가 맹격을 하면 맹격으로 맞서고 약하게 나오면 약하게 받을 뿐 시종일관 어느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게 형세를 유지해 나갔다.
이때 서생의 검법이 갑자기 바뀌어 장검을 떨치자 칼이 윙윙 오랫동안 울며 위로 6번, 아래로 6번, 오느안로, 뒤로, 좌로, 우로 육육은 삼십육, 36번이나 찔렀다. 이는 운남 애뢰산(哀牢山)의 애뢰삼십육검으로 천하 검법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검법이었다. 그러나 곽정은 왼손으로는 어초경 세 사람의 병기를 막고 오른손으로는 상하, 좌우, 앞뒤로 춤을 추면서 서생의 장검 끝을 계속 쫓아다녀 검법이 제아무리 변화무쌍하다 하더라도 그의 털끝 하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서생이 마지막 삼십육검을 찌를 때 곽정은 오른손 중지를 구부려 엄지손가락 위에 올려 놓고 칼끝을 응시하고 있다가 검을 향해 맹렬하게 튀겼다. 이러한 탄지(彈指)의 신통한 무공은 황약사의 독보적인 재주로 세상에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예전에 그가 주백통과 공기 놀이를 할 때와 귀운장에서 매초풍에게 돌을 튀겨 길을 인도할 때 이 재주를 썼던 것이다. 곽정은 임안 우가촌에서 그와 전진 칠자가 일전을 겨룰 때 그 요체를 터득했다. 이렇게 튀기는 수법이 비록 황약사의 오묘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힘만은 무시무시했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칼날이 흔들렸다. 서생은 손등이 뻣뻣해지면서 하마터면 칼을 놓칠 뻔했다. 그는 간담이 서늘해져 뒤로 물러가 피하며 소리를 질렀다.
[손을 멈추시오.]
어초경 세 사람은 일제히 뒤로 피했디. 그러나 그들은 원래부터 벽가까이 밀려 더 달아날 곳이 없었다. 어부는 문틈을 비집고 뛰어나갔고, 농부는 반 이상 무너져 나간 흙벽 위로 뛰어올랐다. 나무꾼만이 도끼를 허리에 꽂으며 웃었다.
[내 벌써부터 이 두 분이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믿지 않더니.]
서생도 칼을 칼집에 꽂으며 곽정을 향해 웁을 했다.
[사정을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곽정도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답례를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런 의심을 하고 있었다.
(내 원래 악의가 없었는데 어째서 네 사람이 처음에는 믿지 않고 있다가 한바탕 싸움을 하고 나서야 믿게 되었단 말인가?)
황용은 그의 표정을 보고 벌써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듯 곽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만약 오빠가 악의가 있었다면 벌써 저 네 사람을 해치웠을 게 아니에요? 이젠 일등대사도 오빠의 적수가 아닌데요.]
곽정은 황용의 말이 그럴듯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농부와 어부가 다시 곽정에게 절을 하고 방으로 들어서자 황용이 물었다.
[그런데 대사님의 적수가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군요? 또 옥환이 어쨌다고들 하셨는데 그건 무슨 물건인가요?]
[사실 말씀을 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사정을 잘 모릅니다. 다만 사부님의 출가와 이 사람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지요.]
서생이 하는 말을 듣고 황용이 다시 물으려고 하는데 농부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소리를 질렀다.
[어이쿠 큰일날 뻔했구나!]
[무슨 일인데 그래요?]
어부가 묻자 농부는 서생을 가리켰다.
[우리 사부님께서 부상을 치료하느라 공력이 손실된 것까지 모두 숨김없이 말해 버렸으니 말예요. 만약 이 두 분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우리 네 사람이 막지도 못했을 텐데 그래 우리 사부님께서 살아 남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나무꾼이 껄껄 웃었다.
[아니 장원공께서는 지략이 대단하신데 그만한 것도 생각지 못하셨을라구요. 그래 가지고야 어디 대리국 재상 노릇을 하셨겠습니까? 그분은 벌써 두 분이 적이 아닌 친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방금 싸운 것도 실은 두 분 무공을 한번 시험해 보시려는 의도와, 또 당신들도 승복하라는 뜻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지요.]
서생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고 농부와 어부는 탄복과 원망이 섞인 눈으로 흘겨보았다. 바로 이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나며 어린 사미가 들어와 합장을 하고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 네 분 사형께 손님을 배웅해 드리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이 말을 듣자 그들은 즉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사님의 적수가 나타났는데 저희가 어찌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소제 농력은 없사오나 네 분 사형과 함께 그 적수를 물리칠까 합니다.]
곽정이 이렇게 말하자 어초경독 네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얼굴 가득 기쁜 빛을 띠었다.
[제가 사부님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서생은 이렇게 말하며 나머지 세 사람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되돌아왔다.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 일등대사가 허락을 내리지 아니한 모양이었다.
[사부님께서 두 분께 대단히 고맙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각자의 인과가 다르니 다른 사람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다.]
서생의 정중한 말에 이번에는 황용이 나섰다.
[곽정 오빠, 우리가 직접 대사님께 말씀드려요.]
이래서 둘은 일등대사의 선방 문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무 문은 꽉 잠겨 열리지 않았다. 곽정이 아무리 두드려 보아도 기척이 없었다. 나무 문이라 조금만 힘을 주면 열리겠지만 그렇다고 거칠게 밀 수는 없었다. 어부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두 분을 접견하실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산고수장(山高水長)하니 우리 후일을 기약합시다.]
이때 곽정이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용아, 대사님께서 허락을 하시든 말든 우리가 하산을 하다가 산 아래에서 소란을 부리는 자가 있거든 우선 요절을 내고 보자구.]
곽정의 제안에 황용도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만약 대사님의 적수가 대단한 인물이라 우리가 그의 손에 죽는다면 그것도 대사님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 되겠지요.]
곽정의 말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소리요, 황용은 일부러 목소리를 가다듬어 일등대사가 들으라는 듯 말을 했다. 그들이 막 몸을 돌려 세우고 몇 발짝 걸어 나가자 과연 나무 문이 삐거덕 열리며 한 노승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사님께서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곽정은 놀랍고도 기뻤다. 황용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일등대사는 천축 스님과 함께 여전히 부들풀 방석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둘이 엎드려 절을 하고 고개를 드니 일등대사의 안색이 파리한 것이 처음 대할 때의 원기왕성한 모습과는 완연히 달랐다. 둘은 감격하기도 했지만 괴롭기도 하여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일등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문밖에 있는 네 제자를 불렀다.
[다 같이 들어오너라. 내 할말이 있구나.]
어초경독이 선방으로 들어와 사부와 사숙꼐 인사를 드렸다. 그 천축국 스님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한 후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무얼 생각하는지 다시는 거들떠볼 생각도 안 했다. 일등대사는 가늘게 피어 오르는 파란 향불을 넋을 잃은 듯 바라보며 양지백옥(羊脂白玉)으로 만들어진 팔찌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황용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건 분명 여자가 끼는 옥팔찌인데 대사의 적수가 무슨 의도로 저걸 보냈을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일등대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두 사람의 호의는 고맙게 받겠네. 그런데 지금까지 있었던 인과에 대해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이후에 각자의 친구나 제자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복수를 하느라 끝없는 풍파를 일으킬 것이니 이 또한 본의가 아니야. 두 사람은 내가 원래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아는가?]
[사백께서는 원래 운남 대리국 황제시고 그 명성을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요?]
황용이 이렇게 대답하자 일등대사가 빙그레 웃었다.
[황제도 가짜요, 이 노승도 가짜요, 바로 이 귀여운 소저까지도 가짜라네.]
황용은 그의 선답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예쁜 큰 눈만 말똥거리며 바라볼 뿐이었다. 일등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 대리국이 신성문무제(神聖文武帝) 태조(太祖)께서 개국하신 그해가 정유년(丁酉年)인데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 조황야(趙皇爺)가 병변을 일으킨 것보다 23년이나 빨랐지. 우리 신성문무제로부터 일곱번째로 병의제(秉義帝)께서 황위를 계승했는데 그분은 4년 동안 제위에 계시다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시면서 황위를 조카인 성덕제(聖德帝)에게 양위해 주셨거든. 뒤에 성덕제는 흥종 효덕제(興宗 孝德帝)로, 보정제(保定帝)로, 헌종 선인제(憲宗 宣仁帝)로 계승되다가 내 아버님인 경종 정강제(景宗 正康帝)까지 이르렀는데 모두들 황위를 마다하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니 태조로부터 내게 이르기까지 십팔대 황제 가운데 일곱 분이 출가를 한 셈이지.]
어초경독 네 사람은 모두 대리국 사람들이라 자연 선대의 사적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곽정과 황용은 들으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등대사님이 황제를 마다하고 스님이 된 일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래 그 위로 선조들까지 그랬다니 중이 황제보다 좋단 말인가.)
일등대사는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 단씨는 조상이 쌓아 온 덕으로 남방의 소국에서나마 황위를 차지하고 지내기는 했지만 시종일관 전전긍긍하며 지냈다네. 황제가 되면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먹고, 길쌈도 하지 않으면서 입고, 외출할 때는 거마요, 들어와서는 궁실인데 이 모두가 백성들의 피땀이 아니던가? 그래 매번 만년에 이르러 마음속으로 참회를 하면서 자신의 치적을 되돌아보곤 했지. 아무래도 백성을 위하여 조복(造福)을 한 일은 적고 나쁜 짓은 많이 했다고 생각되어 종종 황위를 사양하고 중이 되었던 것이지.]
여기까지 말을 하고는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았다. 입가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어쩐지 서글픈 느낌이 감돌았다. 여섯 사람은 곁에서 조용히 듣기만 할 뿐 아무도 말참견을 하고 나서지 않았다. 일등대사는 옥환을 손가락에 낀 채 몇 바퀴 돌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만은 그래서 출가한 것은 아니야. 이 말을 꺼내려면 아무래도 다섯 사람이 화산에 모여 진경을 차지하려고 논검을 벌였던 일을 말해야지. 그해 전진교 중양 왕진인이 진경을 차지하고 다음해에 대리국으로 나를 찾아와 일양지 무공을 전수해 주었지. 그분께서는 우리 궁에 보름 동안이나 머무르면서 무공에 대해 토론을 했는데 우린 그때 의기투합하게 됐어. 그런데 그분의 사제인 주백통은 그 십여 일동안 답답했던지 궁중을 동분서주하고 다니다가 그만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네.]
(그놈의 영감이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지.)
황용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등대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진정한 화근은 오히려 내게 있었단 말일세. 우리 대리국은 소국이니 어찌 대화(大華)의 천자처럼 후궁이 삼천 명이 될 수 있을까마는 그러나 후비나 궁녀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네. 바로 이게 화근이요, 죄의 씨앗이었단 말일세. 그런데 나는 무예만 좋아해서 여자들 옆에는 잘 가지도 않았거든. 황후까지도 며칠씩 만나지 못했으니 그 밖의 후궁이나 궁녀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일등은 여기까지 말하고 새삼스럽게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이 일의 내면은 자네들도 소상히 알지 못했을 거야. 오늘 자세히 들려주지. 그 많은 후궁이나 궁녀들은 내가 매일 무예를 익히고 연공하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에 구경을 하다가는 배우겠다고 떼를 쓰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는 그저 내키는 대로 한두 가지 가르쳐 주었지. 건강을 위해서. 그런데 그 가운데 유(劉)가 성을 가진 귀비(貴妃)가 있었는데 워낙 총명해서 한 번만 가르쳐 주면 금방 배우곤 했네. 그녀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부지런히 수련을 해서 무공이 크게 진보했지. 그런데 일이 그렇게 되려고 했던지 그날 그녀가 뜰에서 연무를 하고 있다가 공교롭게도 주백통과 만나게 되었다네. 주사형은 워낙 무예를 좋아하는데다가 성격도 아주 천진난만해서 남녀유별이니 뭐니 하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거든. 그분은 유귀비가 혼자 열심히 연공을 하는 것을 보자 그냥 뛰어들어 그녀와 맞서게 되었다네.]
[어이쿠, 그 노완동이 손을 썼다면 앞뒤 모르고 덤벼들었을 텐데 틀림없이 부상을 입었겠군요.]
황용이 가볍게 놀라며 하는 말했다.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지. 그저 점혈법을 써서 꼼짝못하게 해놓고는 승복하겠느냐고 물었던 게야. 유귀비로서야 탄복하며 승복했지. 주사형은 혈도를 풀어 주고 득의양양해서 점혈 무공에 대한 오묘한 비법을 큰소리로 떠들어대지 않았겠나. 유귀비는 벌써부터 내게 점혈 무공을 전수해 달라고 떼를 써왔지만 어디 생각들 해보게. 그렇게 높고 심원한 무공을 어찌 후궁과 궁녀들에게 함부로 전수해 줄 수 있었겠나? 그녀는 주사형의 말을 듣자 감히 청하지는 못했던 일이지만 내심 바라던 일이라 자세히 가르침을 부탁했던 것이지.]
[정말 그 노완동이 우쭐했을 거예요.]
또 황용이 말참견을 했다.
[아니, 주사형을 아시나?]
일등이 묻자 황용이 웃으며 말했다.
[우린 친구 사이인걸요. 노완동이 도화도에 있으면서 십여 년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았거든요.]
[아니 그렇게 움직이기 좋아하는 사람이 답답해서 어떻게 그토록 오래 있었지?]
[우리 아버지께서 가두어 놓으셨다가 근래에 풀어 주었어요.]
일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 그래 주사형은 건강하신가?]
[건강은 해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말이 아니에요.]
일등이 가볍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러한 점혈 무공은 부자나 모자, 부부 사이를 제외하고는 남자 스승이 여제자에게나, 여자 스승이 남제자에게는 전수해 주지 않는 법이거든.]
[그건 왜요?]
[남녀끼리는 곤란하단 말이야. 생각해 보라구. 전신의 혈도를 누르고 주무르게 되는데 그래 전수할 수 있겠는가?]
[아니, 제 전신의 혈도도 만져 주셨잖아요?]
어부와 농부는 황용이 주책없이 별로 요긴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말참견을 하고 나서자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황용도 지지 않고 그들에게 눈을 흘겼다.
[아니 내가 잘못 여쭈었나요?]
이 말에 일등이 빙그레 웃었다.
[아냐 아냐, 잘 물었어. 아가씨야 어리니까 우선 생명을 구하는 일이 급했던 것이지. 그런 걸 따질 수 있는 처지였나?]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 그 뒤 어떻게 됐어요?]
[그래서 하나는 가르치고 하나는 배우게 되었지. 주사형은 혈기왕성한 사람이요, 유귀비도 꽃다운 나이라 서로 살갗을 맞대다 그만 정이 통해 마침내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져 들었다네.]
황용이 그게 무슨 일인데 그러냐고 물으려다가 꿀꺽 삼켰다.
[누군가가 이 일을 내게 알렸는데 속으로는 화가 났지만 왕진인의 체면도 있고 해서 모르는 체해 버렸는데 결국 왕진인까지 알고 말았다네.]
황용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데 수습하기도 어려웠다고 하시는 거예요?]
일등도 갑자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렸다.
[그들이 부부가 아닌데 부부 사이의 일이 일어났단 말이지.]
[아, 이제 알겠어요. 유귀비가 노완동의 아기를 낳았단 말이군요.]
[아니, 그건 아냐. 그들이 서로 안 지 십여 일인데 어떻게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 왕진인께서는 아시자마자 주사형을 묶어 내게 데려다 놓고는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하셨지. 그러나 무예를 배우는 사람은 의리를 중히 여기고 여색은 경시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한 여자 때문에 친구와의 우정에 금이 가게 하겠나 말일세. 나는 그를 묶은 끈을 풀어 주고 유귀비를 불러다가 부부가 되라고 했지. 그런데 주사형은 본래 이런 일이 나쁜 짓인지 몰랐다고 펄펄 뛰는 게야. 만약 이 일이 나쁘다면 목을 쳐도 좋지만 유귀비를 아내로 맞을 수는 없다고 고집을 부렸지. 그러니 왕진인도 한숨만 내쉬고 말았지. 그렇게 사리분별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면 일찌감치 한칼에 없애 버릴 것을 그랬다는 게야.]
황용이 이 말에 혀를 내둘렀다.
[노완동,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요.]
[그래, 나도 정말 화가 났지.<주사형, 내 호의로 유귀비를 주사형께 보내려고 하는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소. 자고로 형제는 수족과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고 했는데 그래 여자 하나를 가지고 무슨 큰일이라고 야단이오!> 했지.]
[아니, 여자를 깔보시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돼요.]
황용이 다급하게 따지고 들자 농부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참견 좀 그만 집어치울 수 없겠소!]
[틀린 말이면 반박할 수도 있는 것 아뎨요?]
황용도 지지 않고 말대꾸했다. 어초경독 네 사람에게 일등대사는 하늘같은 주군이요, 스승이라 그가 하는 말에 반박은커녕 무슨 말이든 신성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황용이 워낙 방자하게 나오는 바람에 그만 자기들도 모르게 화가 난 것이다.
第 五 卷. 第 七 章.(通卷 章). 첫사랑
일등대사는 황용과 농부의 말다툼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주사형은 이 말을 듣고 고개만 살래살래 흔들더군. 그래 나는 더욱 화가 났지. <당신이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무엇 때문에 고집을 부린단 말이오? 그리고 또 만약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소? 우리 대리국이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이토록 농락을 당하고도 참을 수 있단 말이오?> 주사형은 한참 동안이나 잠자코 있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리다가 이렇게 말하는 게야. <단황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떠나겠습니다.> 나는 그가 그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지. 하여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데 그가 품속에서 비단으로 만든 손수건을 꺼내 <되돌려드리는 것이오> 하며 유귀비에게 건네 주더군. 유귀비는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던지 쓸쓸하게 웃기만 할 뿐 받지 않았어. 주사형은 아무 말도 없이 흘연히 떠나 버렸지. 10년 전 일일세. 그후 나는 그의 소식을 다시 듣지 못했었네. 왕진인께서는 내게 재삼 사과를 하고 주사형의 뒤를 따라 떠났는데 그해 가을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문을 들었네. 왕진인은 보기 드문 영웅이요, 호걸이셨는데.....]
[왕진인의 무공이 어쩌면 사백님보다 훌륭했는지 몰라도 인품이나 덕망이야 어찌 사백님을 능가할 수 있겠어요. 그래 그 비단 손수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역시 황용이 끼여들며 재촉했다. 네 명의 제자들은 속으로 여자라 손수건이나 옷 따위에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부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유귀비가 넋을 잃고 멍해 있는 것을 보자 더욱 화가 치밀었지. 그래 내 발 밑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워 들고 보니 원앙새가 물놀이를 즐기는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네, 물론 유귀비가 주사형에게 정표로 준 물건이었지. 나는 쓴웃음을 머금고 손수건을 뒤집어 보니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네.]
[사장기(四張機) 원앙직취욕쌍비(貧鴦織就欲雙飛)란 말이 있는 거예요?]
황용은 짚이는 바 있어서 이렇게 물었다.
[아니, 우리도 모르는데 뭘 안다고 또 쓸데없이 나서는 거요?]
농부가 못마땅하여 날카롭게 힐난하는데 일등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시야. 아가씨도 알고 있었나?]
이 말이 나오자마자 네 제자는 서로 바라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곽정도 무언가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는지 벌떡 일어섰다.
[저도 생각이 나는군요. 그날 도화도주께서 깊은 밤 퉁소를 부시자 주대형은 마음이 산란하여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바로 이 시를 읊으시던데, 뭐 머리만 먼저 세었느니 어쩌니 하는 뒷구절이 있었는데 영 생각이 나지를 않는군요. 용아, 그 시의 뒷구절은 뭐지?]
황용이 웃으며 그 뒷구절을 들려주자 곽정이 오른손으로 허벅지를 탁 치며 말했다.
[틀림없어. 그때 나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거든. 주대형의 무공이 나보다 윌등한데 나는 황도주의 퉁소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주형은 정신이 어지러워 쩔쩔매더니, 그 일 때문이었군. 어쩐지 늘 여자 욕만 하더니.... 용아, 주형은 내게도 용아하고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게야.]
[피이, 노완동을 만나기만 하면 내 그놈의 영감 귀를 꼬집어 비틀어야겠네.]
이렇게 말하며 황용은 픽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날 임안부에서 내가 농담으로 아무 여자도 시집오지 않을 거라고 했을 때 노완동이 반나절이나 심술을 부리더니 원래 그런 사연이 있어서 그랬군요.]
[영고가 이 시를 읊을 때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영 생각이 떠올라야지. 참 그런데 용아, 영고는 이 시를 어떻게 알았지?]
[아이고 오빠두, 영고가 바로 그 유귀비란 말예요.]
네 제자 가운데 오직 서생만이 어느 정도 짐작을 했을 뿐 나머지 사람은 너무나 놀라 일제히 사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정말 총명해. 약형의 따님으로서 부족함이 없군그래. 그 유귀비의 어렸을 때 이름이 영(瑛)인지는 그때 나조차도 몰랐으니까 그날 비단 손수건을 그녀에게 던져 준 뒤 나는 그녀를 다시 불러 본 일도 없고 국사도 돌보지 않고 온종일 연공으로 소일했다네.]
[사백님께서 마음속으로 그녀를 몹시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셨나요? 만약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그토록 괴로워하시지도 않았을 텐데요.]
네 제자는 황용의 말참견이 너무나 무엄하다고 여겨 동시에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왜요? 제 말이 틀렸나요? 사백님께서도 제가 실언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한 반년 동안 비록 유귀비를 직접 불러 보지는 않았지만 꿈속에서는 가끔 그녀와 만났었지. 하루 저녁은 꿈을 꾸다가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직접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네. 나는 궁녀나 태감들 몰래 슬그머니 침궁으로 가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어. 막 그녀의 침궁 지붕에 올라섰는데 안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 오지 않겠나. 그날 지붕에는 서리가 내려 몹시 추웠거든.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온밤을 서성거리다 새벽녘에야 내려왔는데 나는 그날부터 한바탕 큰 병을 앓았다네.]
황용은 황제의 지엄한 신분으로 야밤에 궁내에서 벽을 타고 지붕에 올라가 자기 후궁을 보려고 했다는 말이 아주 이상하게 들렸다. 네 제자들은 당시 사부의 병세가 너무나 위중했을 뿐 아니라 또 오롓동안 앓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분의 무공으로 보아 제아무리 대단한 풍한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것이 마음의 고통 때문에 자포자기하여 내공으로 병마와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황용은 또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졌다.
[유귀비가 아이를 낳았으니 그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사백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달갑지 않게 여기셨어요?]
[아니, 이 답답한 아가씨야. 그 아이는 주사형의 자식이었단 말이지.]
[주사형은 벌써 떠나 버렸는데도요. 그 사이 또 슬그머니 돌아와 유귀비와 만났던가요?]
[그게 아니지. 아이가 태어나려면 열 달 동안 배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도 들어 보지 못했단 말인가?]
황용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제 알겠군요. 그 아이는 틀림없이 노완동을 닮아 두 귀가 크고, 코가 오뚝했겠군요. 그걸 보고 사백님 아기가 아니라는 걸 아셨겠군요.]
[그야 왜 꼭 봐야만 알 수 있는 일이겠나. 내가 유귀비를 가까이하지 않은 지가 일년이 넘었으니 물론 내 아기가 아님은 확실하지 않겠는가?]
황용은 알 듯 모를 듯했다. 그러나 또 묻는 것이 왠지 쑥스러워 더 추궁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데 일등대사의 다음 말이 들렸다.
[내 한 반년이나 죽게 앓다가 회복된 뒤 다시는 이 일을 생각지 않기로 했다네. 그후 이 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밤 침실에 홀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유귀비가 뛰어들어왔다네. 문밖에 있던 태감과 시위들이 급히 막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수장에 얻어맞고 물러났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녀는 품에 아기를 안은 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더군. 그녀는 곧 꿇어앉아 방성대곡하며 이마만 조아리는 게야. <황야께서는 은혜를 내리사 이 아이를 살려 주소서.> 이렇게 애걸하더군. 내가 다가가 아이를 살펴보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가쁜 숨만 내쉬더란 말야. 다시 아이를 안아다 자세히 보니 등뒤 늑골이 다섯 개나 부러져 있지 않겠나. <황야, 제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하오나 이 어린아이의 목숨만은 살려 주소서.> 그녀의 애걸복걸하는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해서 물었지.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그녀는 그냥 머리만 조아리며 흐느끼는 게야. <누가 이 아이를 때렸는가?> 하고 물어도 대답은 하지 않고 울면서 <황야, 은혜를 내려 아이를 용서해 주소서> 하는 게야. 나는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몰라 궁금하기만 했지. <황야께서 제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만 이 아이만은 이 아이만은.....> 이런단 말야. <도대체 누가 네게 죽음을 내린단 말이냐? 이 아이를 누가 때려 이 모양으로 만들었지?> 하니 그때야 유귀비가 고개를 번쩍 들고 떨리는 소리로 이런 말을 하더군. <황야께서 시위를 파견하여 이 아이를 때리신 것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나는 곡절이 있으려니 싶어 다급히 물었지. <시위가 때려 이렇게 만든 것이라구? 그래 어느 놈이 이토록 대담하고 무엄하단 말이냐?> <아, 황야의 성지가 아니라면 그럼 이 아이는 구할 수 있겠군요!> 유귀비는 이 말을 마치고 그만 기절해 버렸다네. 그 모양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녀를 부축해 침상에 뉘었더니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내 손을 붙잡고 다시 하소연을 하더란 말일세. 그녀가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복면을 한 어전 시위가 창문으로 뛰어들어와 아이를 뺏고는 등에 주먹질을 했다는 게야. 유귀비가 급히 달려들어 말리려 하는데 그 시위가 그녀를 물리치고 또 한 번 아이를 때리고 나서야 하하 웃고는 창을 뛰어넘어 달아났다는 게야. 첫째는 그 시위의 무공이 대단한데다 또 내가 사람을 시켜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한 줄 알았기 때문에 바로 뒤따라가지 않고 이렇게 내 침궁으로 달려왔다고 그러더군. 나는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네. 아이의 상처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대체 무슨 무공으로 해쳤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다만 아이의 대맥(帶脈)이 부러진 것으로 보아 자객의 솜씨가 보통이 아닌 줄은 알겠더군. 나는 곧장 유귀비의 침실로 달려가 살펴보았지. 기왓장과 문설주에 희미한 족적이 보였어. 그래 유귀비에게 이렇게 말했지. <자객의 재주가 보통이 아닌데다가 경공이 아주 비범하군. 대리국에서는 나말고 이러한 공력을 지닌 사람은 없을텐데.> 이 말을 들은 유귀비가 소스라치게 놀라더군. <혹시 그분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식을 살해하려고 했을까요?> 이 말을 하면서 유귀비의 표정이 파랗게 질리더군.]
황용도 놀라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노완동이 그렇게 인정없는 사람은 아닐 텐데요.]
다시 일등대사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때는 나도 주사형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했었지. 그 밖에는 이만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 없었단 말일세. 또 제딴에는 불륜의 씨앗을 제거함으로써 무림의 수치를 씻겠다고 한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 유귀비 자기도 말을 해놓고도 놀랍고 수치스러웠던 모양이야.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이런 말을 하더군. <아냐, 결코 그는 아냐! 웃음 소리가 확실히 그는 아니었어요.> <경황중에 어찌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겠나?> 하고 물었더니 <그 웃음 소리를 저는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제가 죽어 귀신이 된다 해도 잊을 수가 없어요. 아녜요, 결코 그분은 아니었어요.> 하더군.]
뭇사람들은 여기까지 말을 듣고 모두 등골이 오싹해졌다. 곽정과 황용은 영고의 용모와 말씨가 떠올라 당시 그녀가 그런 말을 할 때 얼마나 험악한 인상을 지었을까 그려 보다 그만 자기들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일등대사는 주변 사람의 반웅에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당시 나는 그녀의 단정적인 말을 듣고 그냥 믿고 말았지만 도대체 자객이 누군지 짐작이라도 할 수가 있어야지. 그런 무공을 가지고 어떻게 무고한 어린 생명에게 살수를 쓸 수 있었을까? 나중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네. 혹시 왕진인의 제자인 마옥, 구처기, 왕처일 등의 소행은 아닐까 하는 추측이었지. 전진교의 명예를 보전하기 위해 천릿길을 멀다 않고 찾아와 화근을 제거함으로써 입을 봉해 버리려는.....]
곽정이 입을 움직이면서 말을 꺼내려고 하는 것을 일등대사가 보았다.
[할말이 있거든 해보게.]
[마도장이나 구도장 등은 모두 협의 영웅이신데 설마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왕처일만은 내가 화산에서 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호한이더군.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모르지. 그러나 만약 그들이었다면 가벼운 일 장으로도 이 아이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반만 죽이다 말았는지 그게 답답하단 말일세.]
그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십여 년 전의 이 의문은 여태껏 풀리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선원에는 한 순간 정적만 흐를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일등대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내 얘기를 계속하지.....]
그런데 이때 황용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의심할 것도 없이 구앙봉의 소행이 분명해요.]
[뒤에 나도 그자가 아닐까 생각했지. 그러나 구양봉은 서역 사람이요, 키도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단 말야. 그런데 유귀비 말에 따르면 자객의 키는 보통 사람보다 작더라는 게야.]
[그렇다면 이상한데요.]
[나도 당시에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네. 유귀비는 아이를 안고 흐느끼고 있었는데, 아이의 상처가 이번에 다친 황소저처럼 중상은 아니었지만 워낙 어려 견디기가 어려웠던 모양일세. 만약 치료를 한다면 내 원기가 적잖이 소모될 것도 걱정스럽고 하여 오랫동안 주저하고 있었는데 유귀비가 우는 것이 너무나 불쌍해 몇 번이나 치료를 해주겠노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러나 만약 손을 쓰게 된다면 앞으로 화산에서 있을 제 2차 논검에서 군웅을 제어할 수도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수도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네. 왕진인께서는 이 진경이 무림의 일대 화근이라 인명을 다치고 인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태가 그 지경이라 나로서도 수수방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네. 나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마침내 치료해 주기로 결정을 내렸지. 고민을 하는 동안 나는 정말 짐승만도 못한 비열한 소인이었다네.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내가 손을 써서 치료해 주기로 결정한 것도 자비로운 마음에서가 아니라 단지 유귀비의 간곡한 호소를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
[사백님, 제가 사백님께서 마음속으로 그녀를 깊이 사랑한 게 아니냐고 말씀드렸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군요.]
그러나 일등대사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유귀비는 내가 치료해 주겠다고 하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 나는 우선 그녀를 돌보아 정신이 들게 해준 뒤 아이를 싼 포대기부터 풀었지. 그래야만 선천공(先天功)으로 치료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어. 그런데 아이의 배를 덮은 수건을 뒤집다 그만 깜짝 놀랐다네. 그 수건에는 원앙새 한 쌍이 수놓아져 있었고 옆에는 그 사장기라는 시가 씌어 있었던 게야. 그 수건은 예전에 주사형이 그녀에게 되돌려주었던 바로 그 비단 수건이었단 말일세. 유귀비는 내 표정을 보자 일이 묘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얼굴이 사색이 되어 이를 꽉 문 채 비수 한 자루를 꺼내 들어 자기 가슴에 대고 이렇게 말하더군. <황야, 저는 이 세상에 다시 살 면목이 없는 계집입니다. 대은대덕을 베푸시어 제 목숨으로 아이의 생명을 대신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죽어 내세에 태어날 때는 개가 되고 말이 되어 황야의 은혜에 보답하겠나이다.> 그러면서 자기 가슴을 비수로 푹 찌르는 게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유귀비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알면서도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일등대사는 여전히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급히 금나법(擒拿法)으로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았네. 손을 빨리 쓰기는 했지만 벌써 그녀의 앞가슴엔 선혈이 낭자했지. 나는 그녀가 또 죽으려고 할까 봐 수족에 있는 혈도를 눌러 꼼짝못하게 만들어 놓고 상처를 싸매 주고는 의자에 앉아 쉬도록 했네.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눈에는 애원하는 표정이 역력하더군. 우리 둘은 서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고 방안에는 할딱거리는 아이의 거친 숨소리만 났지. 나는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지나간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지. 그녀가 처음 어떻게 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나는 또 어떻게 그녀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으며,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가? 그녀는 줄곧 나를 존중하고 무서워하면서도 부드럽게 수발을 들어 주고 내 뜻을 어긴 일이 없었다네. 그러나 나를 사랑한 적도 없었어.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날 주사형을 보는 그녀의 눈을 보고야 알게 되었지. 한 여자가 진정으로 한 남자를 사랑할 때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로구나 했었지. 그녀는 그저 주사형이 그 비단 수건을 바닥에 던지는 것을 넋을 놓고 물끄러미 지켜보았고 그가 몸을 돌려 궁을 나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렇게 지켜 보고 있었네. 그날 그녀의 그 눈길은 나로 하여금 잠을 자도 편안히 자지 못하게 만들었고 밥을 먹어도 맛있는 줄 모르게 했는데 그때 다시 또 그러한 눈길을 보게 되었던 것일세. 그러나 이번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들을 위한 것이었네.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이런 모욕을 받으며 일국의 임금 노릇을 하고 있다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발을 들어 앞에 있는 상아 의자를 부쉬 버리고 나서 고개를 들다가또 한 번 깜짝 놀랐네. <아니, 머리가 왜 그렇게 되었지?>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냥 아기만 바라보고 있더군. 나는 전에는 정말 몰랐었네. 한 사람의 눈 속에 그토록 깊고 진한 사랑을 담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거든. 그녀는 그때 벌써 내가 그 아이를 구해 주지 않을 것을 알았던 거야. 단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아이를 일각이라도 더 지켜 보겠다는 마음뿐이었던 게지. 나는 거울을 가져다 그녀의 얼굴에 대고 물었지.<그 머리칼 좀 보구려.> 그 짧은 몇 시간이 그녀에게는 수십 년만큼이나 길게 흘렀던 거야.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십팔구 세였는데도 그 몇 시간 동안의 놀람과 두려움, 우수, 회한, 실망, 상심 등이 그녀의 머리를 순식간에 백발로 만들어 버렸다네.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변했는지에는 관심도 없었고 다만 거울이 자신의 시선을 가리고 있는 것만 안타깝다는 듯 말했어.<거울을 치워 주세요.> 그 말이 어찌나 매섭고 단호한지 내가 황제요, 주인이라는 신분조차 잊은 것 같았지. 나는 너무나 이상해서 이렇게까지 생각했다네. 그렇게 자신의 용모를 가꾸고 사랑하던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번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일세. 그래 나는 거울을 치우고 말았지만 그녀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아이만 바라보더군. 만약 그녀에게 천 개의 영혼과 천 개의 생명이 있다 해도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그걸 다 주었을 거야. 그녀는 자기의 생명을 아이의 몸 속에 배어 들어가게 하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거였네.]
곽정과 황용은 동시에 서로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했다.
(내가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을 가망이 없을 때 너도 그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겠지.)
둘은 서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뻗어 상대방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푸근해 왔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상심이 되어 기절할 지경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잠시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자기 옆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상처도 완치됐으니 죽을 염려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코 다시 죽지 않는다. 이 두 젊은이의 마음속에서 상대방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다.
일등대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나는 차마 더 바라볼 수가 없어 몇 번이나 손을 써 아이를 구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아이의 가슴을 덮고 있는 그 비단 수건이 번번이 내 손을 가로막았던 것이야. 비단 수건에 수놓인 원앙새 한 쌍은 서로 다정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머리가 흰 놈들이었지. 백년해로 하라는 뜻이 담긴 것이었지. 그런데 왜 <가련하게도 늙기 전에 머리부터 센다>고 했는가? 나는 그녀의 하얗게 센 귀밑머리를 보는 순간 갑자기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더군. 나는 또다시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렇게 말했네. <너희 두 사람이 백년해로 하면서 나만 혼자 이 황궁에 남아 황제 노릇이나 하란 말이렷다. 이 아이는 너희 두 사람이 낳은 아이인데 뭣 때문에 진력(眞力)을 소모하면서까지 치료해 준단 말인가?>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원망에 찬 독기가 가득 담겨 있었지. 그후 그녀는 영원히 나를 다시 바라보지 않았지만 그 눈초리만은 내 죽기 전에 잊을 수가 없다네. <저를 놓아주세요. 아이를 안아야겠어요.> 그녀의 이 말이 어찌나 차디찬지 마치 성지(聖旨)와 같아 거역하기 어렵더군. 그래 내가 눌린 혈도를 풀어 주자 그녀는 아이를 끌어 안았어. 아이는 몹시 아팠을 테지만 울지도 못하고 퉁퉁 부어 오른 얼굴로 제 엄마 얼굴을 바라보더군. 그러나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있던 터라 그때는 동정심조차 일어나지 않더군. 그저 그 여자의 까만 머리카락이 회색으로 변했다, 다시 그 회색이 하얗게 변하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네. 나는 그것이 환상이었는지 아니면 사실인지도 분간이 안되었네. 그런데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더군. <아가야, 엄마는너를 구할 재주가 없단다. 그러니 네 고통이나 덜어 주마. 편안히 잠들거라. 편안히.... 착한 아기야, 영원히 깨어나지 말아 다오!> 나는 그녀가 아기를 토닥거리며 하는 말을 노래처럼 듣고 있었네.]
일등대사는 이기까지 말하고 넋을 잃은 듯 침묵에 잠겼다.
[사부님, 말씀을 너무 많이 하셔서 지치셨나 봅니다. 이제 그만 쉬도록 하세요.]
서생이 하는 말을 듣고 일등대사는 제정신을 차렸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이의 얼굴에 잠깐 미소가 스치는 듯하더니 다시 통종이 오는지 온몸을 비틀더군.<착하고 귀여운 아가야, 잠이 들면 아프지 않단다. 조금도 아프지 않단다.> 그녀의 이런 말을 듣고 있는데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벌써 비수는 아기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 있었네.]
황용은 비명을 지르며 곽정의 팔을 꼭 부여잡았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핏기를 잃었다. 그러나 일등대사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나도 깜짝 놀라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네. 그런데 그녀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이런 말을 하더군. <언젠가는 이 비수로 당신의 가슴을 이렇게 찌르고 말겠어요.> 그러면서 자기 팔목에 낀 옥팔찌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네. <이것은 내가 궁으로 들어오던 날 당신이 준 옥환인데, 자, 보세요. 이 옥환을 당신에게 돌려주는 그날 이 비수도 함께 올 거예요. 잊지 마세요!> 하더군.]
일등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 옥환을 한바퀴 빙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 옥환이 언제 오나 십여 년을 기다렸는데 마침내 이제야 되돌아 온걸세.]
[사백님, 그 여자가 제 손으로 아기를 죽여 놓고 그게 사백님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지요? 게다가 그녀가 독약으로 사백님을 해쳤으니 원한을 갚은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요? 제가 산 아래로 내려가 다시는 소란을 부리지 못하게 해야겠군요.]
황용이 막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어린 사미가 방으로 총총 들어왔다.
[사부님, 산 아래서 또 이런 물건을 보내 왔습니다.]
사미는 두 손으로 조그만 보따리를 하나 받쳐들고 일등 앞에 내밀었다. 일등이 받아 펴보는 순간 모두들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바로 아이의 가슴을 덮었던 그 비단 수건이었다. 비단 수건 위에는 원앙새 한 쌍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비록 비단은 누렇게 바랬지만 수놓인 원앙새는 아직도 새것처럼 또렷했다. 두 마리 원앙새 사이에는 구멍이 뚫렸고 구멍 주위는 검게 변한 핏자국이 있었다.
일등은 비단 수건을 바닥에 펼쳐 놓고 처연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이의 시체를 안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창을 뛰어 넘어 지붕으로 올라서더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네.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 낮 사흘 밤을 고민하다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황위를 장남에게 물려주고는 출가하여 중이 되었네. 여기 있는 네 명의 제자는 오랫동안 나를 수행하며 떠나지 않았지. 처음에는 나와 함께 전서(塡西)의 용천사(龍天寺)에 가 살았지. 그후 삼 년 동안은 네 사람이 번갈아 가며 조정에 들어가 내 아들이 정사에 익숙해질 때까지 보좌했다네. 그러다 제자 하나가 대설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구양봉에게 맞아 부상을 입은 일이 있은 후 모두들 이곳으로 옮겨 온 뒤로는 대리국에 가보지 못했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 아이를 구해 주지 않았지만 그후로도 나는 줄곧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네.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베풂으로써 이 큰 죄를 속죄받으려고 했지. 그런데 저들은 내 고충은 아랑곳없이 나를 말리기만 한걸세. 내 비록 천 명, 만 명을 구해 준다 하더라도 그 아이는 죽었으니 내 생명을 바치기 전에야 속죄될 리 있겠나? 그래 나는 날마다 영고의 소식을 기다렸네. 그녀가 비수를 가지고 찾아와 내 가슴을 찔러 죽이지도 않고 그냥 천수를 다 누리게 한다면 이 업보를 누가 받는단 말인가? 그래도 뒤늦게나마 이렇게 찾아오니 다행한 일이지. 그런데 그녀가 무엇 때문에 구화옥로환 속에 독약을 섞었는지 몰라. 내 만약 그녀가 독약으로 중독시키고 바로 뒤따라올 줄 알았더라면 그냥 버티고 있을 걸 그랬어. 그랬더라면 사제가 해독을 시키려고 애쓰지 않아도 됐을 것을.]
황용은 화가 나서 씨근덕거렸다.
[그 여자 정말 지독한 사람이군요. 그녀는 벌써부터 사백님 사는 곳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기회만 노리고 있었으니 말이에요. 자기 실력이 부족하니까 기다리고 있다가 제가 구철장에 맞아 부상을 입은 걸 이용해 저를 치료하게 하여 사백님의 진력이 소모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악랄한데 게다가 독약까지 섞어 만전을 기했으니 정말 대단하군요. 어쩌다 우리가 그런 독수의 이용물이 되었는지 정말 창피하군요. 그러나저러나 사백님, 구양봉의 그림이 어떻게 그 여자의 수중에 들어갔을까요? 그리고 이 사건과 그 그림은 무슨 관계가 있어요?]
일등대사는 탁자 위에 있는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을 집어 한 곳을 펼쳐 놓고 말을 꺼냈다.
[그림의 얘기는 천축의 각성(天竺角城)에서 일어났는데 옛날 한 임금이 있었는데 이름은 시비(尸毗)라 했고 고행에 정진하면서 정등정각지법(正等正覺之法)을 구하고 있었다네. 하루는 큰 매 한 마리가 비둘기 한 마리를 쫓고 있었는데 그 비둘기가 하필이면 시비왕의 겨드랑이 밑으로 날아 들어와 벌벌 떨고 있었단 말야. 매는 왕을 보고 비둘기를 되돌려주어야만 굶어 죽지 않는다고 말했거든. 왕은 한쪽을 구해주면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니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게야. 그래 날카로운 칼로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주었단 말일세. 그러나 매의 요구는 베어 낸 살이 비둘기 무게와 같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일세. 시비왕은 저울을 가져 오라고 해서 비둘기와 넓적다리 살을 달아 보았는데 아무래도 부족했거든. 그래 계속해서 넓적다리 살을 베어 놓았는데도 비둘기가 무겁더라네. 그래 왕은 가슴, 등, 팔, 겨드랑이 살까지 모두 베어 놓았지만 여전히 비둘기의 무게에 미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기 몸을 올려 놓아 달았네. 그 순간 천지가 진동하면서 하늘에서 주악이 울리고 선녀들이 춤을 추고 향기가 온 천지에 가득 찼다네. 하늘에 있는 천룡야차(天龍夜叉)들이 훌륭하다고 감탄하면서 이런 용기는 미증유의 것이라고들 했다네.]
이 얘기는 비록 전해 내려오는 신화에 불과했지만 워낙 일등대사가 진지하고 엄숙하게 말하는 바람에 모두들 감동을 했다.
[사백님, 그렇다면 그녀는 사백님께서 저의 치료를 거부하실까 염려하여 이 그림으로 자극을 주려는 의도였군요.]
황용이 제대로 꼬집어 내자 일등은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때문이야. 당시 그녀가 대리국을 떠날 때 원한을 품고 갔으니 당연히 강호를 떠돌며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 구양봉과도 알게 되었겠지. 구양봉이 그녀의 속을 알아차리고 계략을 꾸미고 이 그림을 그려 주었을 거야. 이 얘기는 워낙 서역에는 널리 퍼져 있는데다가 구양봉도 서역 사람이니 잘 알고 있지 않겠나?]
[노독물은 영고를 이용하고 영고는 또 저를 이용하려고 했으니 이건 차도살인(惜刀殺人)의 연환독계(連環毒計)가 분명해요.]
황용이 분해서 하는 말에 일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는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만약 아가씨가 우연히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부상을 입혀 대신 이용했을 데니까 말야. 다만 무공이 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산을 오르기가 그만큼 어려웠겠지. 구양봉이 이 그림을 그려 흉계를 꾸며 놓은 지가 적어도 십 년은 넘었을 텐데, 그래 그 안에 기연이 없으란 법이 있겠나?]
[사백님, 그녀는 제가 알기로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사백님를 해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에요.]
[그래 그건 무슨 일인가?]
[노완동을 우리 아버지가 도화도에 감금했었는데 그를 구해 내려고 했던 거예요.]
황용은 영고가 그 일 때문에 흑소의 초가집에서 기문술수를 배우느라 고생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결국 자기가 백년을 배워도 아버지를 뒤따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구요. 또 때마침 제가 부상을 입고 찾아갔기 때문에, 그래서.....]
일등은 잔잔하게 웃으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됐어 됐어. 모든 일이 공교롭게 되었군 그래. 오늘에야 소원을 모두 풀게 되었으니 말야.]
그는 다시 엄숙한 표정으로 네 명의 제자틀 바라보았다.
[자네들은 나가서 유귀비, 아냐 아니지. 영고를 모시고 올라오도록 하게. 한마디라도 불경한 언사는 쓰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들 하게.]
제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땅에 엎드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사부님!]
[나를 그토록 여러 해나 따라다녔으면서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른단 말이냐?]
일등은 제자들을 달래고 나서 고개를 돌려 곽정과 황용을 바라보았다.
[두 분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
[말씀만 하신다면 어김없이 받들겠습니다.]
곽정과 황용이 함께 말했다.
[이제 두 분은 하산할 준비들이나 하게. 영고는 내가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니 앞으로 그녀가 무슨 위험한 처지에 놓이거든 두 분께서 내 체면을 보아 도와주기 바라네. 두 분이 만약 그녀와 주사형의 해후를 마련해 줄 수만 있다면 나로서는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겠네.]
곽정과 황용은 너무 어이가 없어 서로 바라볼 뿐 감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영고가 이번에 찾아오는 것은 일등대사를 해치우기 위한 것인데 그의 말은 확실히 덕으로 원수를 갚는 말이었다. 일등은 두 사람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다시 한 번 물었다.
[내 간청을 들어주는 데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있는가?]
황용이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사백님, 말씀이 그러하시니 그냥 좇겠습니다.]
그러고는 곽정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함께 하직 인사를 했다.
[두 분은 영고와 만날 필요조차 없으니 뒷산으로 내려가도록 하게.]
황용이 또 대답을 하고 곽정과 문을 나섰다. 네 제자는 황용의 표정에 섭섭해하는 기색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몰인정하다고 욕을 하고 있었다. 자기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가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곽정은 황용이 결코 그렇게까지 몰인정한 사람이 아니요, 다른 계략이 있어서 그러는 줄 짐작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문밖으로 나왔다. 문 어귀로 나오자마자 황용이 그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곽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서서히 되돌아왔다.
[마음이 중후하니 장래 크게 대성할 것으로 믿소. 영고의 일 다시 한 번 당부하네 ]
일등의 부탁에 곽정은 그러마고 대답하면서 갑자기 손을 뒤집어 일등대사 옆에 있는 천축 스님의 팔뚝을 잡아채면서 왼쪽으로 그의 화개(華蓋), 천주(天柱) 두 대혈을 찔러 버렸다. 이 두 혈은 하나는 손에, 다른 하나는 발에 있기 때문에 찔러만 놓으면 사지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워낙 뜻밖의 일이라 일등과 네 제자는 모두 대경실색하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곽정은 대답도 없이 왼손으로 다시 일등의 어깨를 낚아채는 것이었다.
일등대사는 곽정이 낚아채려고 하자 오른손을 전광석화처럼 놀려 그의 왼팔을 움켜잡으려고 달려들었다. 곽정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등대사의 전신이 원래 자기의 장력에 눌려 있었는데 이처럼 반격을 해올 뿐만 아니라 일격에 급소를 노리는데 이와 같은 무공은 평생 보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다만 일등의 수장과 자기의 손이 닿으려는 순간 그의 진력이 허약해 별로 맥이 없는 것을 알았다. 곽정은 즉시 역습 태세를 취하면서 오른손으로 신룡파미의 묘기를 발휘해 어부와 나무꾼이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물리치고 손가락을 뻗어 일등대사로부터 배운 점혈수법을 이용해 그의 겨드랑이 밑에 있는 봉미(鳳尾), 정착(精捉) 두 혈을 눌러 비렸다.
이때 황용은 벌써 타구봉법을 쓰면서 농부를 선방 문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서생은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까닭을 몰라 소리만 질렀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냥 말로 할 것이지 왜들 이러시오. 자, 손을 거두시오.]
농부는 사부가 다른 사람에게 공격당하자 눈이 획 뒤집혀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선방으로 뛰어들려 했지만 워낙 오묘한 타구봉법의 위세 때문에 세 차례나 실패를 거듭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곽정의 쌍장에서는 원을 그리듯 무서운 바람이 일며 어부와 나무꾼, 서생 세 사람을 선방에서 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들 셋은 장세에 눌려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 이때 황용이 타구봉을 들어 농부의 미간을 찔렀다. 농부는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몇 자나 뒤로 밀렸다.
[자 됐어요!]
황용은 이렇게 말하며 손을 뒤로 돌려 방문을 닫아걸고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이제 손을 멈추세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꾼과 어부는 곽정의 일 장에 얻어맞아 팔이 시큰시큰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도 또 곽정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둘이 함께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곽정은 황용이 말하는 순간 일 장을 뻗다가 도로 거두어 들이면서 두 손을 공손히 마주 잡았다.
[어이구,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어초경독 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어리벙벙해 서로 바라보았다.
[제가 존사의 하해 같은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방금 무례한 행동은 사실 존사님을 구하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황용의 정중한 말에 서생이 앞으로 나서며 읍을 했다.
[사부님의 상대는 우리 네 사람의 주모(主母)십니다. 신분이 유별한데 그분이 찾아오시면 우린 손을 쓸 수 없습니다. 하물며 사부님께서 는 어린아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십여 년 동안 마음이 편치 못하셨습니다. 이번에 공력의 손실이 없고 몸이 중독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귀비께서 찾아오셨다면 아마 그냥 그 칼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부님의 명을 어길 수도 없는 처지라 마음만 조급할 뿐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가씨는 절세의 재주와 아름다움을 지닌 분이니 만약 저희를 밝은 길로 인도해 주실 수만 있다면 분골쇄신하여 대은대덕에 보답할까 합니다.]
황용은 그의 간절한 말을 듣고 계속 농담만 할 수는 없었다.
[저는 본래 천축국 스님이 여러분의 사숙이라는 말을 듣고 무공이 정통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의탁해 존사를 구할까 생각했었습니다만 그분은 전연 무공을 모르시는 분이군요.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대단히 위험해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성공만 한다면 한때 고생으로 오랫동안 안락하게 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위험합니다. 영고가 똑똑하고 교활한데다 무공 또한 높아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나 확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재주가 워낙 용렬해서 더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어초경독이 이구동성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황용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소곤거렸다. 네 사람은 서로 바라볼 뿐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잊었다.
유(酉)시가 되자 태양이 서서히 서산으로 기울었다.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와 선원 앞에 늘어선 종려나무 가지들을 흔들고 연못의 시든 연잎을 떨구어 냈다. 석양 노을이 산봉우리 뒤로 기울어 봉우리 그림자가 땅바닥에 괴물처럼 누워 있었다. 어초경독 네 사람은 돌기둥 다리 한쪽 끝에 앉아 다른 쪽 끝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츨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기다리는 사이에 날은 계속 어두워지고 까마귀 몇 마리가 깍깍거리며 산골짝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돌기둥 다리 저쪽 모퉁이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부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유귀비께서 심경의 번화를 일으켜 이 일이 사부를 원망할 일이 아님을 깨달아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꾼의 생각은 달랐다.
(유귀비가 교활하여 남을 잘 속이니 틀림없이 무슨 간사한 꾀를 쓰겠지.)
가장 초조한 것은 농부였다.
(올 테면 빨리 오지 않고 뭘 이러나?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것이 복이 되든 화가 되든 빨리 결말이 나야지, 이거 원 답답해 견딜 수가 있나.)
서생은 또 서생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늦으면 늦을수록 사태는 수습하기 어렵게 되겠지.)
그는 원래 지략이 풍부한 사람으로 대리국에서 십여 년 이상 재상으로 있으면서 큰일, 큰 전쟁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더 마음이 답답하고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은 이제 어둠침침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먼 곳에서 올빼미 우는 소리가 회미하게 들려 왔다. 갑자기 어렸을 때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올빼미가 어둔 곳에 숨어 몰래 사람 눈썹을 세는데 누구의 눈썹이든 다 세기만 하면 그 사람은 날이 밝기 전에 죽는다.>
이는 물론 어린아이들을 놀리기 위한 거짓말이 틀림없으련만 지금 듣는 올빼미 소리는 왠지 모골이 송연해졌다.
(정말 사부님이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 여자의 손에 돌아가시는 것은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바로 이때 나무꾼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쉿,온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돌다리 위로 나는 듯 달려와 돌이 빠져 나간 위험한 곳을 힘도 안 들이고 사뿐히 뛰어넘었다. 네 사람은 더욱 이상해서 놀랐다.
(그녀가 사부님에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할 때 우리는 벌써 진전(眞傳)을 배운 뒤였는데 어째서 그녀의 무공이 갑자기 우리를 능가할 수 있었을까? 이 십여 년 동안 그녀는 어디서 이런 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검은 그림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네 사람은 서서히 일어나 양쪽으로 갈라섰다. 검은 그림자가 돌기둥을 건너 서자 그녀가 입은 검은 옷이 보이고 희미하게나마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역시 단황야의 총애를 받던 유귀비였다. 네 사람은 즉시 땅에 꿇어 엎드려 절을 했다.
[소인들 마마께 인사드리나이다.]
영고는 코방귀를 뀌면서 네 사람을 훑어보았다.
[마마는 무슨 놈의 마마란 말인가? 유귀비는 죽은 지 오래 되었고 나는 영고란 사람이다. 대승상, 대장군, 수군도독, 어림군 총관이 모두 여기들 있었군. 나는 황야가 참으로 세정을 간파하고 삭발한 뒤 중이 되었나 했더니 이 깊은 산중에 숨어 아직도 태평안락(大平安樂)하게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군그래.]
그녀의 말투에는 원한이 가득 차 있어 네 사람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서생이 먼저 말을 꺼냈다.
[황야는 이제 옛날의 그분이 아니십니다. 마마께서도 보시면 그분을 잘 알아보시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영고는 냉소를 머금었다.
[자꾸만 나보고 마마라 하는데 그래 나를 놀리는 겐가? 뻣뻣하게 여기 엎드려 절만 하면 단가!]
어초경독 네 사람은 서로 바라보다가 주춤주춤 일어섰다.
[소인들 문안드리나이다.]
[황야가 나를 막으라고 했을 텐데 여기서 쓸데없는 인사말이나 나눌 필요는 없지 않나? 싸움을 하겠으면 빨리 공격이나 해. 임금은 임금대로 신하는 신하대로 많은 백성을 괴롭혔는데 나 같은 여자에게 공손한 체할 필요가 뭐가 있나?]
[우리 임금께서는 백성을 친자식처럼 사랑했고 관대하고 후덕하여 무고한 백성을 괴롭힌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중죄를 범해도 늘 법으로 다스림이 없이 은혜를 베푸신 것을 마마께서는 모르신단 말입니까?]
서생의 말에 영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니 감히 내게 대들 생각인가?]
[소신이 어느 안전이라고 그리 하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군. 나는 단지흥(段智興)을 만나러 왔을 뿐이야. 길을 비킬 것인가 막을 것인가?]
단지흥은 바로 일등대사의 원래 이름이다. 어초경독 네 사람도 알고는 있었지만 감히 황제의 본명을 입에 올리지는 못했다. 영고가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자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농부는 조정에 있을 때 일등대사의 어림군 총관이었다.
[하루를 임금으로 모셔도 평생 지존이신데 감히 그렇게 부를 수가 있습니까?]
농부의 항의를 듣고 영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그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네 사람은 두 팔을 뻗어 막았다.
(영고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우리 네 사람이 합세하면 막을 수 있겠지. 오늘 사부님의 분부를 어기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영고는 손을 뻗어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요, 주먹을 휘둘러 때리지도 않으면서 경공으로 그냥 밀고 나가려고 했다. 나무꾼은 그녀가 그냥 밀고 나오자 감히 몸으로 막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살짝 옆으로 비켜서면서 손을 뻗어 어깨를 잡으려고 했다. 손도 빨랐거니와 힘도 강했지만 그의 장심이 막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마치 미끈미끈한 물건을 잡을 때처럼 그냥 놓치고 말았다. 바로 이때 농부와 어부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영고는 머리를 살짝 숙이고 물뱀처럼 벌써 어부의 겨드랑이 밑을 빠져 나갔다. 순간 어부는 난초 향기 같기도 하고 사향 냄새 같기도 한 냄새를 맡으면서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손을 안으로 뻗어 그녀를 잡으려고 했는데도 오히려 밖으로 밀려나오고 말았다. 농부는 화가 나 왜 그러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열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려 영고의 허리춤에 꽂았다.
[무례하게 굴지 마오.]
나무꾼이 다급히 외쳤지만 그는 미처 듣지 못했다. 눈 깜짝할 순간에 열 손가락 끝이 벌써 영고의 허리에 가 닿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손가락 끝이 미끈하고 미끄러졌다.
영고는 흑소에서 터득한 미꾸리의 재주로 세 사람을 물리친 셈이었다. 이제 이들 네 사람 재주로는 자기를 막지 못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 자신을 가지고 손을 뒤로 돌려 농부를 한 번 때렸다. 서생은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팔뚝에 있는 혈도를 노렸다. 그런데 이 순간 영고도 돌연 손가락을 뻗자 건광석화처럼 손가락 끝과 끝이 공증에서 마주쳤다. 이때 서생은 정신을 모두 오른손 식지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가락 끝이 뻣뻣하게 굳어져 와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뒤로 벌렁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나무꾼과 어부는 쓰러진 서생을 급히 부축해 일으키고 농부는 주먹을 길게 뻗어 영고의 얼굴을 향해 쇠망치질을 했다.
이 주먹에는 세찬 바람과 함께 무시무시한 힘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영고는 자신이 흑소에서 터득한 무공을 시험해 보고도 싶었고 또 함정을 파 상대방을 해치우려고도 했다. 그래서 권풍이 얼굴을 향해 날아와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놀란 쪽은 오히려 농부였다. 그는 영고가 이 주먹에 맞기만 하면 그만 으스러질 것 같아 급히 손을 거두려고 했지만 주먹은 벌써 영고의 코끝에 가 있었다. 그러나 영고가 살짝 머리를 옆으로 돌리는 바람에 주먹은 코끝을 비켜 얼굴을 스치고지나갔다. 농부가 깜짝 놀라는 순간 팔이 벌써 상대방에게 잡혔다. 급히 뽑으려고 했지만 우두둑 소리가 들렸다. 아픔도 느낄 사이 없이 영고의 주먹에 맞아 팔꿈치 관절이 부러진 것이다.
그러나 농부는 왼팔이 부러졌든 말든 이를 악물고 오른손 식지로 영고의 겨드랑이를 찔렀다. 어초경독 네 사람의 점혈 무공은 모두 일등대사에게 직접 배운 것이다. 비록 사부의 일양지에 미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무림에서는 소문난 실력이었지만 영고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녀는 노심초사 아들의 복수만을 생각하며 수련했지만 일등대사의 점혈 무공이 두려웠다. 점혈 수단을 깰 재주가 없다면 복수는 단념해야 한다. 결국 자수 솜씨가 빼어났던 그녀는 수놓는 재주에서 한 가지 묘법을 터득했다. 왼손과 오른손 식지 끝에 극약을 묻힌 세 푼 길이의 금바늘을 꽂은 골무 같은 금가락지를 만들어 끼었다. 그녀는 자수에 능했기 때문에 눈도 밝았고 손재주 또한 비범했다. 몇 년 동안 수련을 거듭한 결과 공중에 날아다니는 모기나 파리도 한 번 찌르기만 하면 금침이 그놈들의 몸을 뚫고 나갈 정도가 되었다. 서생의 점혈 무공도 이 금가락지의 독침으로 깬 것이었다. 영고는 농부의 손끝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냉소만 머금고 있다가 붓끝 같은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다. 손가락 끝이 또 한 번 마주치는 찰나 농부의 식지 끝도 찔리고 말았다.
십지연심(十指連心)이란 말이 있다. 그 식지 끝은 바로 폐지(肺支)와 대장(大腸) 양맥이 교차하는 곳이다. 금침에 찔리면 그 여파는 상양혈(商陽穴)에까지 미친다. 농부는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이 일지에 전력을 모으고 있었다. 영고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적당한 시간, 적당한 곳에 금침을 놓아 둠으로 해서 그의 손끝이 스스로 금침을 찌르게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금침에 찔리자 농부도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벌렁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훌륭한 대총관이로군.]
영고는 이렇게 비웃고는 선원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마, 걸음을 멈추십시오.]
어부가 소리를 지르자 영고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왜 그러오?]
이때 그녀는 벌써 연못 앞에 이르렀다. 연못과 선원 사이는 작은 돌다리 하나만 넘으면 되는 거리였다. 영고는 다리 한쪽 끝에 선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라지만 희미하게나마 얼굴은 식별할 수 있었다. 어부와 영고의 눈이 마주쳤다. 영고의 눈에서 차디찬 안광이 뿜어 나왔다. 어부는 등골이 오싹해서 감히 대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대승상과 대총관 두 사람이 칠절침(七絶針)에 찔렸는데 천하를 다 뒤져도 치료할 사람이 없을 거요.]
영고는 이렇게 말한 후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서서히 앞을 향해 걸었다. 뒤에서 역습을 하는 것쯤 문제가 아니라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돌다리의 길이는 겨우 20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끝에 다다르자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두 손을 마주잡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선배님, 안녕 하십니까?]
영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도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났을까? 그가 슬그머니 독수를 썼다면 지금쯤 나는 죽었거나 부상을 입었겠구나.)
자세히 살펴보니 큰 키에 넓은 어깨, 짙은 눈썹에 큰 눈, 바로 자기가 길을 알려 주어 산에 오르게 했던 곽정 그 사람이었다.
[아가씨 상처는 다 나았나요?]
[선배님 소개로 와서 일등대사님의 치료를 받고 이젠 완쾌됐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곽정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왜 직접 와서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지요?]
영고는 코방귀를 뀌듯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앞으로 가려 했다.
곽정은 다리 끝에 서 있다가 그녀가 마구 돌진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선배님, 그냥 되돌아가세요.]
곽정이 다급하게 말해 보았지만 영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을 살짝 비켜서며 예의 미꾸라지 재주를 부리면서 그의 왼쪽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곽정은 비록 흑소의 초가집에서 그녀와 대결한 경험이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워낙 미끄러웠다. 급한 나머지 팔을 뒤로 돌려 흔들며 털었다. 이는 주백통에게 배운 공명권(空明拳) 묘기였다.
영고는 빌써 곽정의 옆을 미끄러져 빠져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가운데 강한 힘을 가진 권풍이 얼굴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도무지 피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영고는 지극히 음험(陰險)한 위인이었다. 이번 행보는 전진이 있을 뿐 후퇴를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곽정의 권세가 맹렬하든 말든 아랑곳없이 여전히 앞을 향해 돌진했다.
[조심하세요.]
곽정이 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부드러운 여자의 몸이 벌써 자기 팔 안에 들어와 있었다. 서로가 깜짝 놀라는 순간 영고가 재빨리 발을 걸어 두 사람은 연못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물 속으로 빠지기 전 허공에 떠 있을 때 영고는 왼손을 곽정의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내밀며 등뒤로 돌려 왼쪽 어깨를 틀어잡고 중지(中指)를 굽혀 곽정의 인후를 눌렀다.
이는 금나수 가운데 전봉후폐기(前封後閉氣)법이다. 이렇게 눌리기만 하면 상대방은 숨통이 막혀 호흡이 끊어지는 지극히 위험한 술수였다. 곽정은 몸이 비스듬히 넘어질 때, 그리고 어깨를 잡혔을 때 일이 잘못된 것을 느꼈다. 그래 즉시 오른팔을 구부려 영고의 목을 껴안았다. 이것도 금나법 가운데 폐기법으로서 후협경폐기(後挾頸閉氣)라고 하는 것이었다.
돌다리로부터 연못에 빠지기까지는 눈 깜짝할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 다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이 찰나의 순간에 각자 상대방을 향해 세 차례나 손을 쓴 것이다. 공력으로 따지자면 영고가 우위에 있다고 하겠지만 곽정은 우선 힘이 센 장사요, 권법이 오묘했다. 세 차례나 서로 손을 쓰고서도 상대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물 속으로 빠져들어간 것이었다.
연못의 진흙은 두 자쯤 깊었고 물은 가슴까지 찼다. 영고는 왼손으로 바닥에 깔린 진흙을 한 주먹 퍼서 곽정의 입에 쑤셔 박았다. 곽정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피했다. 영고는 진흙 속에서 십여 년을 살며 미꾸라지가 진흙을 뚫고 미끄러져 다니는 것을 보고 미꾸라지 재주를 창안해 냈다. 땅에서도 그 재주로 적을 상대하면 미끄러워 상대가 꼼짝을 못하는데 이제 진흙 속에 빠졌으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셈이었다. 곽정의 무공이 자기보다 월등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연못에 빠뜨리기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난관을 돌파하기 어려울 것도 잘 알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찌르고 주먹으로 치면서 땅 위에서보다 더 종횡무진 공격했다. 가끔 진흙 한 주먹을 뭉쳐 곽정의 얼굴 여기저기에 마구 문질렀다. 곽정은 두 발이 수렁에 빠진데다 혹시 그녀가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맹격을 가할 수 없었다. 바람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거뭇거뭇한 진흙 덩이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얼굴로 날아왔다. 고개를 돌려 눈앞으로 오는 것은 피했지만 또 하나가 정통으로 얼굴을 맞혀 눈이며 입이며 할 것 없이 막아 버렸다.
곽정은 강남 육괴에게 무예를 배울 때 몸에 암기를 맞아도 황급히 암기를 빼려고 당황해하거나 상처를 살필 생각은 하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상대는 그 틈을 노려 살수를 쓴다는 것이다. 곽정은 호흡도 곤란하고 눈도 뜨기 어렵게 되자 휙획휙 삼 장을 앞으로 날렸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이 자기를 향해 다섯 자 이내로 접근할 수 없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얼굴의 진흙을 닦아 내고 고개를 돌리니 영고는 벌써 돌다리를 넘어 선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영고는 곽정이 만든 난관을 뚫고 나가며 이런 생각을 했다.
(창피하구나. 만약 이곳에 연못이 없었더라면 저 젊은것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하늘이 오늘은 복수를 하라고 도와주시는 모양이로구나.)
발걸음을 재촉하여 사문(寺門)에 이르러 문을 밀어 보니 잠기지 않았는지 쉽게 열렸다.
그러자 영고는 잠시 주춤했다. 혹시 문 뒤에 누가 매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밖에서 머뭇거렸지만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제야 안으로 들어서니 대전 불상 앞에 등잔불이 켜 있고 불상의 장엄한 얼굴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고는 순간 움찔하여 부들풀 방석 위에 꿇어 엎드려 뭐라고 기도를 드렸다. 이때 등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즉시 왼손을 등뒤로 돌리면서 원을 그려 방어 자세를 취하며 동시에 부들풀 방석을 살짝 눌러 그 힘을 이용해 뛰어올라 허공에서 가볍고 매끄럽게 몸을 돌려 세우고 사뿐히 바닥에 내려섰다.
[정말 훌륭한 묘기로군요.]
탄사를 발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청의홍대(靑衣紅帶)에 머리에 금환 장식이 번쩍거리고 손에는 녹죽장을 든 황용이 예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第 五 卷. 第 八 章.(通卷 章). 낯익은 눈빛
[영고, 우선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해요.]
황용의 인사말에 영고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내가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던 것은 다른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이지 당신을 구해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니 고맙다는 인사는 할 필요 없어요.]
[세상의 은혜와 원수란 종이 한 장 차이로군요. 우리 아버지가 도화도에 노완동 주백통을 십오 년이나 감금했지만 끝끝내 우리 어머니의 생명은 구할 수 없었답니다.]
황용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영고는 주백통이란 이름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가씨 엄마와 주백통이 무슨 관계가 있지?]
영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물었다. 황용은 워낙 총명한 사람이라 그녀의 말투를 듣고도 벌써 주백통과 자기 어머니 사이에 무슨 치정이라도 얽혀 자기 아버지가 도화도에 감금한 것이라 의심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영고는 아직도 주백통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쓸데없이 의심하고 질투할 이유가 없었다. 황용은 즉시 고개를 떨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노완동에게 시달려 세상을 떠나셨어요.]
영고는 부쩍 의심이 생겼다. 등불 아래 황용의 희디흰 살결과 그림같은 눈썹이 보였다. 자기가 가장 아름다웠던 때도 지금의 황용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용이 자기 어머니를 닮았다면 주백통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리 없었을 것이다.
[공연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우리 어머니는 천사 같은 분이시고 주백통은 거친 황소 같은 사람인데 눈이 삐었으면 모를까 거들떠보기나 했겠어요?]
영고는 그녀가 면전에서 은근히 자기를 욕해도 그저 의심이 풀린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돼지처럼 미련한 곽정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소처렴 거친 사람을 좋아하지 말란 법이 있을라구? 그런데 어째서 노완동이 아가씨 어머니를 괴롭혀 죽게 했다고 그러지?]
[아니, 우리 사형을 욕하는 사람하고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황용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토라진 체하며 뒤로 돌아섰다.
[그래요? 그럼 내 다음부터 그런 말 꺼내지 않을게.]
황용은 그제야 다시 영고 쪽으로 돌아섰다.
[노완동이 우리 어머니를 해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나 우리 어머니가 불행히 세상을 떠나신 것도 알고 보면 노완동 때문이지요. 우리 아버지는 화가 나서 그를 도화도에 가뒀지만 점점 세월이 흐르자 후회하셨답니다. 어차피 세상만사가 다 인과응보라는데 누가 누구를 살해했다 해서 그를 찾아다니며 남에게 화풀이를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영고는 이 몇 마디에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어리벙벙해 아무 말도 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벌써 노완동을 풀어 주었대요.]
이 말에 영고는 깜짝 놀랐다.
[그럼 내가 그를 구하러 갈 필요도 없겠군?]
영고는 그해 대리국을 떠난 후 줄곧 주백통의 종적을 찾아 나섰다. 처음 몇 년은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 비로소 흑풍쌍쇄에게서 황약사가 그를 도화도에 감금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날 주백통이 대리국에서 자기를 전연 거들떠보지 않고 떠난 것은 확실히 단호한 결별을 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떤 중대한 변고가 없이는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주백통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희일비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재난을 당해서 슬픈 것보다 오히려 이것이 기연이 되어 만약 자기가 그를 구해 낸다면 혹시 고마워하며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화도 안의 길이 그토록 복잡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자신도 사흘 동안 혜매다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가까스로 몸을 뺀 후 흑소에 은거하면서 술수(術數)의 학문을 연마하며 다시 한 번 도화도에 갈 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 주백통이 풀려 났다는 말을 듣자 망연자실하여 허탈감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노완동은 내 말을 제일 잘 들어요. 무슨 말을 하든지 거절해 본 일이 없어요. 만약 만나고 싶으시거든 나와 함께 하산해요. 내가 나서서 인연을 맺게 해준다면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보답하는 결과가 아니겠어요?]
황용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영고는 두 볼이 달아오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황용은 그런 모습을 보며 어쩌면 피비린내가 날지도 모르는 일을 경사스런 일로 바꾸게 되겠구나 싶어 회색이 만면했다. 그런데 영고가 갑자기 쌍장을 등뒤로 돌려 황용을 치면서 서릿발 같은 차가운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아니, 아직 어리디어린 계집의 말을 듣도록 만들었다니? 그가 무엇 때문에 어린 계집의 말을 들어? 미모 때문인가? 난 은혜를 베푼 바 없으니 보답이니 뭐니 하는 말 집어치우라구. 빨리 길이나 비켜. 공연히 우물쭈물하다가 인정이 있느니 없느니 하지 말구.]
[어이구, 그래 나를 죽이실 참이에요?]
황용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죽인다면 어쩔 테야? 다른 사람은 황노사라면 무서워 벌벌 떨지만 나는 하늘도 땅도 무섭지 않은 사람이야.]
영고는 두 눈썹을 치켜 올리고 차디차게 내뱉었다.
[나 죽는 거야 상관없지만 그럼 누가 그 세 가지 산수를 풀어 줄까요?]
그날 황용이 흑소의 초가집 모래 바닥 위에 세 가지 산수 문제를 써주었는데 영고는 밤을 홀딱 새워 가며 풀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당초 술수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원래 주백통을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점점 학문 그 자체에 빠져 들게 되어 제아무리 복잡하고 오묘한 문제에 부딪혀도 밤을 새우고 침식을 잊으면서까지 풀어내야만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그 문제를 이 자리에서 풀 수 있다 하더라도 황약사의 학문과는 어차피 천양지차가 있음을 자신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주백통이 풀려 난 마당에 아무 소용도 없었지만 호기심 때문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렇게 영고가 망설이기 시작한 것을 눈치챈 황용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나를 죽이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가르쳐 드릴게요.]
그녀는 재빨리 불상 앞에 있는 등잔을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금침을 꺼내 바닥의 벽돌 위에 맨 처음 문제인 <칠요구집천축필산(七曜九執天竺筆算)>을 풀었다. 영고는 정신없이 바라다보다가 혀를 내둘렀다. 황용은 이어서 두 번째 문제인 <입방초병지은급미제(立方招兵支銀給米題)>를 풀었다. 이 문제는 먼저 것보다 더욱 심오했다. 영고는 황용이 마지막 답을 써놓자 자기도 모르게 탄사를 발했다.
[과연 놀라운 재주로군.]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세 번째 문제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아주 어렵기 짝이 없는 것인데, 지금 답은 있는데 숫자는 모르거든요. 삼삼으로 따지면 둘이 남고, 오오로 따지면 넷이 남고, 칠칠로 따지면 둘이 남는 건데 이것이 이십삼인 줄만 알았지 다른 숫자가 통용될 수 있는 공식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군요.]
이 말을 듣고 황용이 빙그레 웃었다.
[아주 쉬운 거예요. 삼삼으로 따져 남은 수를 곱하면 이십일, 칠칠로 따져 남은 수를 곱하면 십오예요. 셋을 합해도 일백오를 넘지 않으면 그게 답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일백오를 빼거나 또는 그 배수를 하면 돼요.]
영고가 속으로 셈을 해보니 과연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낮은 소리로 그 공식을 중얼거리며 외우려고 했다.
[삼삼으로 따져 남는 수를 곱해 칠십이요, 오오로 따져....]
[그렇게 억지로 외울 필요도 없어요. 시 한 수를 읽어 드릴 테니 그걸 외우세요. 그럼 아주 쉽답니다. 삼인동행칠십희(三人同行七十稀), 오수매화이십일지 (五樹梅花二十一枝), 칠자단원정반월(七子團圓正半月), 여백령오변득지(餘百零五便得知)예요.]
영고는 삼인동행이란 말과 단원반월이란 말을 듣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니 이 계집애가 이미 내 비밀을 알고 있었나? 삼인동행이란 한 여자로서 두 남자를 섬겼다고 찌르는 말이요, 단원반월이란 내가 그와 겨우 십여 일을 함께 보냈다는 것을 놀리는 말이 아닌가?)
영고는 워낙 마음에 찔리는 게 많아 사사건건 의심이 일었다.
[좋아요, 가르쳐 주어서 고맙군. 공자께서도 아침에 도를 깨달아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으니 할 수 없지. 그러나 다시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아침에 도를 깨달아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말은 도를 깨달은 사람의 경우지 도를 전하는 사람을 죽인다는 뜻은 아닐 텐데요?]
황용이 웃으며 말을 걸어도 영고는 선원의 사정을 살피기에 바빠 그녀는 안중에도 없었다.
영고는 일등대사가 뒤채에 살고 있겠다고 짐작했다. 한편으로는 황용이 자기와 같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귀찮게 덤비지 않는 걸 보면 다른 속임수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꾀가 많은 점에서는 결코 자기 아버지에게 빠지지 않았다. 30이 넘은 나이에 이 어린것에게 골탕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공연히 어물어물하다가 군량을 실은 배를 진흙 속에 빠뜨리듯 기회를 놓칠 것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그래 더 말대꾸할 것도 없이 안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불전 모퉁이를 돌아서니 등불 하나 없이 캄캄했다. 혼자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 목청을 가다듬고 큰소리를 질렀다.
[단지홍, 도대체 나를 만날 거요, 피할 거요? 이 캄캄한 곳에 숨어 나오지도 못하면서 사내대장부라고 큰소리칠 셈이오?]
황용은 그녀를 뒤따라오면서 계속 웃기만 했다.
[영고, 여기 등불이 없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대사님께서는 등이 너무 많아 그걸 다 켜놓으면 당신이 놀랄까 봐 일부러 끄라고 하신 거랍니다.]
[흥, 나야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팔자인데 도산(刀山)이고 기름솥이고 무서워할 줄 알고? 어림없는 수작이지.]
[그거 아주 잘됐군요. 그렇지 않아도 도산 놀이나 할까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황용은 품속에서 부싯돌을 찾아 불을 켜고 몸을 숙여 땅바닥에 불을 붙였다. 영고는 너무나 뜻밖의 일에 당황했다. 원래 영고가 밟고 있는 땅 위에 기름 등잔이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건 기름 등잔이 아니라 찻잔에 기름을 부어 솜을 담은 것이었다. 찻잔 옆에는 끝이 뾰족한 대나무 송곳이 꽂혀 있는데 길이는 한 자 정도로 위로 솟은 끝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황용은 쉬지 않고 불을 붙여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의 별이 모두 땅으로 내려온 듯 등불과 대나무 송곳이 가득했다. 찻잔 옆에는 꼭 대나무 송곳이 하나씩 있었다. 황용이 불을 다 붙였을 때 영고도 그 숫자를 헤아려 알고 있었다.
모두 찻잔 113개에 대나무 송곳이 l13개였다. 영고는 부쩍 의심이 들었다.
(만약 이것이 무공 매화창(梅花椿)이라면 72개가 아니라 108개라야 하는데 113개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배열해 놓은 것도 띄엄띄엄 구궁팔괘(九宮八卦)도 아니요, 또 매화오출(梅花五出)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대나무 송곳이 저토록 날카로우니 사람이 서 있을 수나 있겠나? 옳지! 저 계집애는 틀림없이 바닥에 쇠를 댄 신발을 신고 있을거야.)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했다.
(저 계집애가 미리 방비를 하고 만들어 놓았으니 그 위에서 싸운다면 내가 당할 수가 없겠지. 모르는 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상책이겠다.)
영고는 재빨리 걸음을 크게 떼어 걸어 나갔다. 대나무 송곳이 너무 빽빽히 꽂혀 있어 지나가기가 어려웠지만 발에 걸리는 걸 그냥 차버리자 금방 대여섯 개가 쓰러졌다.
[이게 무슨 장난이람? 난 이런 장난이나 하며 놀 여유가 없는데.]
[아이코 그럼 안 돼요, 안 돼.]
황용이 다급해 소리를 질렀지만 영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나무 송곳을 차며 계속 걸어 나갔다.
[그럼 좋아요. 그렇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불을 꺼버려야겠어요. 빨리 한 번 훑어보고 대나무 송곳 위치나 기억해 두세요.]
영고는 크게 당황했다.
(저들은 벌써 위치를 기억해 두었는데 만약 몇 사람이 어울려 나를 공격한다면 이 어둠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그냥 대나무 송곳에 찔려 죽는 것이 아닌가? 빨리 이 위험한 곳을 벗어나야겠구나.)
영고는 힘을 모아 재빨리 발길을 옮기며 닥치는 대로 대나무 송곳을 차버렸다.
[창피한 것도 모르고 왜 그래요?]
황용은 이렇게 외치며 죽장을 번쩍 들어 영고 앞을 가로막았다. 등불에 비친 푸르스름한 죽장 그림자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영고가 어린 처녀 하나쯤 안중에 둘 리 없었다. 왼손으로 허공을 가르며 일 장에 그 죽장을 분질러 버리려고 덤볐다. 그러나 황용의 이 봉법은 타구봉법 가운데 봉(封)자 비결이었다. 봉법은 전부 옆으로만 쓰는 것이기 때문에 적의 몸에 있는 급소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녹죽장으로 파란 울타리를 만들어 적의 면문(面門)만 막는 것이다. 적이 만약 일보도 전진하지 않고 그냥 서 있으면 무방하지만 공격을 하다가는 오히려 얻어맞게 되어 있었다. 결국 영고가 일 장을 들어 가르는 바람에 퍽 하고 손등을 얻어맞았다. 급히 손을 움츠리기는 했지만 혈도나 급소를 정통으로 맞은 것도 아닌데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영고는 본래 황용의 무공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다 이렇게 얻어맞았으니 화가 났지만 오히려 숨을 가다듬고 우선 면문을 방어하면서 황용의 봉법이 어떻게 변하나 관망해 보기로 했다.
(당년 내가 흑풍쌍쇄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들의 무공은 과연 훌륭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3,40세의 중년이었지. 그런데 어찌해서 이 어린것이 이처럼 조예가 대단할까? 필시 황약사가 평생의 절기를 이 무남독녀 외딸에게 전수해 준 까닭이겠지.)
영고가 어찌 타구봉법이 개방 방주의 호신술 묘법임을 알 수 있겠는가? 설사 황약사로부터 직접 배운 것이라 하더라도 한눈에 그 술수를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방어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 틈을 이용해 황용의 죽봉은 계속해서 봉자 비결만 써 영고의 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황용은 발 아래 방위는 옮기지 않았지만 대나무 송곳 사이를 나비처럼 누비고 다니며 순식간에 113개 등불을 차례차례 모두 꺼버렸다. 더욱 묘한 것은 이렇게 발로 차 불을 끄면서도 등잔으로 삼은 찻잔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거니와 기름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발을 쓰는 것은 도화도의 소엽퇴법(掃葉腿法)이라는 재주였다. 발 동작이 민첩할 뿐만 아니라 정확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영고는 벌써 그녀의 무공이 상승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음을 간파했다. 죽봉을 쓸 때의 예측 불허의 변화와는 거리가 먼 솜씨에다 부상은 치료되었지만 아직 원기가 회복되지는 않았다.
이럴 때 하체를 공격한다면 10여 초 내에 이길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이런 계산을 하고 있을 때 등불은 겨우 7,8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등불도 모두 동북쪽에만 남아 밤바람에 춤을 추고 있을 뿐 나머지 세 모통이는 캄캄한 칠흑이었다. 갑자기 황용이 죽봉을 들어 두 번 공격하는 바람에 영고는 깜짝 놀라 침침한 등불에 의지하여 대나무 송곳 사이로 뛰어 뒤로 한걸음 피했다. 황용은 죽봉을 던져 버리고 몸을 옆으로 꼿꼿하게 세워 날아오르며 긴 소매를 휘둘러 남은 등불 7,8개도 마저 꺼버렸다.
영고는 속으로 어이쿠 소리를 질렀다.
(내 비록 승산은 있다지만 이 대나무 송곳 속에서 자칫 잘못 발길을 옮겼다가는 그냥 찔리고 말 텐데 어떻게 대결을 한담?)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황용의 말소리가 들렸다.
[대나무 송곳의 위치를 이제 다 확인했지요? 우리 여기서 삼십 초를 대결하여 나에게 부상을 입히면 그때 안으로 들어가 일등대사를 만나도록 해드리죠. 어때요?]
[대나무 송곳을 자기 혼자 배치해 놓고 며칠을 여기서 연습했는지 모를 뿐 아니라 나는 그저 잠깐 보았을 뿐인데 어떻게 이 많은 등잔불의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영고의 대답에 황용은 나이가 어려 지기 싫어하는데다가 자신의 영리함을 믿고 있는 터라 이렇게 대꾸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우선 불을 밝히고 대나무 송곳을 뽑아 다시 당신 마음대로 꽂은 후에 불을 끄고 대결하면 어떨까요?]
(아니 이건 무공을 가지고 겨루자는 것이 아니라 기억력을 따져 보자는 것인데, 공연히 저 꾀 많은 것에 걸려 원수 갚으러 왔다가 되레 내가 당하는 것이 아닐까.)
영고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한 가지 꾀가 생각났다.
[좋아요, 그럼 이 늙은이가 어디 같이 한번 놀아 줄까.]
영고는 부싯돌을 찾아 등불을 밝혔다. 그러자 황용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무슨 늙은이라고 그래요?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이십대의 아리따운 아가씨 같은데요. 그러니 단황야께서 반하셨겠지요.]
영고는 막 대나무 송곳 하나를 뽑아 다른 장소에 옮겨 꽂다가 이 말을 듣고 냉소를 머금었다.
[그가 내게 반했다구? 내가 궁에 들어간 지 삼 년이 넘도록 언제 한번 거들떠보기나 했는지 알아?]
[아니 그분께서 무공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나요?]
[무공을 가르쳤다고 해서 나를 좋아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아, 이제 알겠군요. 단황야께서 선천공과 일양지를 익히시느라 자주 사랑해 주실 기회가 없었던가 보지요.]
영고는 코방귀를 뀌었다.
[뭘 안다고 야단이야? 그럼 어떻게 그가 황태자를 낳았나?]
황용이 고개를 돌리고 잠시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황태자는 그전에 낳았어요. 그땐 그분이 아직 선천공이나 일양지를 익히지 않았을 때니까요.]
영고는 또 한 번 홍 소리를 내고 묵묵히 대나무 송곳을 뽑아 자리를 옮겨 꽂았다. 황용은 그녀가 하나하나 옮겨 꽂을 때마다 정확히 그 위치를 기억해 두었다. 만약 추호라도 착오가 있으면 대결할 때 발을 찔려 다치게 되는 것이다. 잠시 후 황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황야께서 당신의 아이를 구해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사실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영고의 말투에는 원한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분은 노완동을 질투하고 있었거든요. 만약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질투를 했겠어요?]
영고는 여태까지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그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내가 보기에는 조용히 그냥 되돌아가는 것이 좋겠어요.]
[재주 있거든 어디 한번 막아 보지그래.]
영고는 차디차게 내뱉었다.
[그래요. 나도 내 생각대로 하겠어요. 그래도 뚫고 들어간다면 다시는 막지 않겠어요. 그러나 만약 뚫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내 다시는 이 산에 찾아오지 않을게. 다만 나와 함께 일년 동안 있기로 한 약속은 지켜 쥐야 해.]
[그것 좋군요. 흑소의 진흙 속에서 일년 동안 산다면 너무너무 지겨울 거예요.]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영고는 벌써 대나무 송곳 5,60개를 옮겨 꽂고 불을 꺼버렸다.
[나머지는 옮길 필요도 없겠군.]
영고는 어둠 속에서 다섯 손가락을 갈퀴처럼 오므리고 황용을 찔렀다. 황용은 위치를 확인하고 비스듬히 빠져 나가며 왼발을 구부리지도 않고 대나무 송곳 사이로 사뿐히 내려앉으며 죽장을 흔들어 그녀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그러나 영고는 반격할 생각도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뚝뚝뚝, 대나무 송곳 십여 개를 밟히는 대로 부러뜨리면서 후원으로 그냥 들어가는 것이었다.
황용은 어리둥절했지만 금방 그 까닭을 알아차렸다.
(아이코, 내가 속았구나. 그녀가 대나무 송곳을 옮겨 꽂을 때 하나 하나 분질러 놓은 것을 몰랐다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영고는 후원으로 뚫고 들어가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선방 한 부들풀 방석 위에 한 노승이 앉아 있는데 은빛 백발이 가슴까지 덮여 있었다. 그는 두꺼운 가사로 볼까지 싸맨 채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어초경독 네 제자와 노승 몇 명, 그리고 어린 사미가 양쪽에서 모시고 있었다. 서생은 그녀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노승 앞으로 나서며 합장을 했다.
[사부님, 유마마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노승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선방에는 희미한 등잔불 하나만 켜져 있어 각자의 얼굴이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영고는 오래 전부터 단황야가 출가하여 중이 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위풍당당하고 늠름하던 황제가 10여 년 못 본 동안 이처럼 늙고 맥없는 노승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황용의 말이 은근히 귓가에 울려 칼자루를 잡고 있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풀렸다. 바닥에는 비단으로 만든 어린아이 덮개가 단황야가 앉은 부들풀 방석 앞에 놓여 있었고 그 덮개 위에 옥환이 보였다. 이것은 그해 단황야가 자기에게 하사한 물건이었다.
이를 본 영고는 불현듯 옛일이 떠올라 고개를 떨구었다. 입궁하게 된 경위며, 무예를 배우던 광경, 주백통과의 만남과 이별하던 모습, 아들을 낳던 일, 그리고 또 부상을 당했을 때 고통을 참지 못해 괴로워하며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의 얼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영고는 다시 마음을 독하게 먹고 비수를 들어 단황야의 가슴을 노리고 푹 찔렀다. 그녀는 단황야의 무공이 비범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 번 찔러서는 그를 죽일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비수 끝이 그의 몸에 닿을 때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어 비수를 뽑아 다시 한 번 찌르려 했다. 그런데 비수가 늑골 사이에 박혀 빠지지 않았다. 이때 네 제자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영고는 십여 년 동안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동작을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을 연습했었다. 그녀는 단황야의 호위가 철통 같음을 알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왼손은 벌써 춤추듯 혼들어 좌우와 등뒤를 방어하고 있었다. 비수가 뽑히지 않자 그녀는 사태가 위급하다고 판단하고 두 발로 땅을 찍어 문밖으로 빠져 나가며 고개를 돌려 단황야를 바라보았다.
단황야는 왼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지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제 원수는 갚았다. 그러나 단황야가 자기에게 그토록 무정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 한숨을 지으며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고개를 들다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빳빳하게 섰다. 한 노승이 합장을 한 채 문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등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자 우뚝한 콧마루, 둥근 입, 자애로운 눈매가 드러났다. 비록 스님의 장삼을 걸치고는 있지만 당년 남조에 군림하던 단황야가 틀림없었다. 영고는 귀신에 홀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을 잘못 죽였구나.)
영고는 당황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방금 자기 비수에 찔렸던 노승이 서서히 일어나 장삼을 벗으며 왼손으로 볼을 만지니 하얀 수염이 다 떨어져 내렸다. 영고는 또 한 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 노승은 바로 곽정이었다.
이것은 모두 황용이 꾸민 일이었다. 곽정은 일등대사의 혈도를 눌러 놓고 자신이 대신 그 칼을 받을 생각을 했었다. 혹시 천축 스님이 무공이 대단해 계획에 차질이 오지 않을까 염려되어 먼저 그를 공략했던 것인데 그는 전연 무예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황용이 마당에서 등불과 대나무 송곳으로 영고를 지체시키는 동안 네 제자는 재빠른 솜씨로 곽정의 몸에 묻은 진흙을 닦고 머리를 깎아 주었다. 그의 턱에 붙였던 흰 수염도 일등의 수염을 깎아 붙인 것이었다.
네 제자는 이 일이 사부님을 회롱하는 짓이요, 몹시 불경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또 곽정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섰기 때문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사부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네 제자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사부로 가장했다면 그들의 무공이 영고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찔려 죽을 위험이 있었다. 영고가 비수로 찌를 때 곽정은 재빨리 장삼 속에서 두 손가락을 뻗어 비수를 틀어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고가 워낙 있는 힘을 다해 찔렀기 때문에 칼끝이 반 푼쯤 살을 파고 들어가고 말았다. 다헹히 늑골은 다치지 않아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그가 만약 황용의 연위갑을 빌려 입었더라면 이 비수를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워낙 눈치 빠른 영고라 발각될지도 모른다 싶었다. 만약 이번에 깨끗이 청산해 버리지 않는다면 화근이 남아 그녀가 이후에 복수를 하러 다시 찾아올 가능성도 있었다.
이 <금선탈각지계(金蟬脫慤之計)>가 이제 막 성공을 거두려는 찰나 뜻밖에 일등대사가 나타난 것이다. 영고만 놀란 것이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도 당황했다. 원래 일등은 원기가 크게 상하기는 했지만 무공은 아직 잃지 않고 있었다. 곽정 또한 그가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해 별로 대수롭지 않은 혈도를 눌러 옆방에 모셔 놓았는데 그 자신이 내공으로 눌린 혈도를 풀고 선방 문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영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포위되었으니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아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등대사가 곽정을 향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수를 되돌려주오.]
곽정은 일등대사의 위엄에 눌려 비수를 영고에게 되돌려주었다. 영고는 그저 무심코 주는 대로 비수를 받아 들고 일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방법으로 자기를 괴롭힐까 두렵고 궁금했다. 그런데 그가 천천히 장삼을 벗어 버리고 다시 속옷까지 들쳐 살갗을 드러내 보이면서 말을 꺼냈다.
[모두들 이분을 괴롭히지 마오. 무사히 하산하실 수 있도록 모셔야 하오. 자, 그럼 이제 날 찌르시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오]
일등대사의 그지없이 부드러운 말도 영고에게는 우레 소리 같았다. 그녀는 멍하니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그만 뗑그렁 비수를 놓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밖으로 달려나갔다. 발소리는 서서히 멀어지다가 이젠 들리지도 않았다.
모두들 서로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을 잊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어부와 농부 두 사람이 벌렁 나가넘어졌다. 원래 두 사람은 손가락이 중독되어 아픔을 억지로 참고 있다가 사부가 무사한 것을 보고 긴장이 풀려 더 이상 아픔을 참지 못해 그냥 쓰러진 것이다.
[빨리 사숙님을 모셔 오시오.]
서생이 급히 외쳤다.
그런데 미처 서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용이 천축 스님을 모시고 들어섰다. 그는 요독(療毒)의 성수(聖手)다. 약을 꺼내 두 사람에게 먹이고 손가락을 잘라 까만 피가 흘러 나오게 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리(阿馬里), 합실토(哈失吐), 사골아(斯骨兒), 기낙단기(其諾丹其).]
일등이 다른 사람에게 뜻을 풀어 주었다. 두 사람은 무사하지만 워낙 중독이 심해 두어 달 치료해야 완전히 치유된다는 뜻이었다. 이때 곽정은 장삼을 벗어 놓고 가슴의 상처를 싸맨 뒤 일등에게 사죄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일등이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목숨을 버리려고까지 하면서 나를 구해 주었으니 참으로 내 죄가 크네.]
그는 고개를 사제에게로 돌리고 천축 말로 곽정의 행동을 설명해 주었다.
[사리성 (斯里星), 앙의납득(昻依納得).]
천축 스님이 하는 말이었다. 곽정은 깜짝 놀랐다. 그 두 마디는 자기도 외울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즉시 그 다음을 외워 보였다.
[사열확아(斯熱確兒), 합호문영(哈虎文英 )....]
주백통이 그에게 《구음진경》을 외우라고 할 때 마지막에 있는 일편은 모두 이런 괴상한 말들이었다. 곽정은 그 뜻은 몰라도 줄줄 외울 수는 있었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 보았던 것이다.
일등과 천축 스님은 그가 천축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게다가 그가 하는 말이 모두 상승의 내공을 익히는 비결임을 알자 더욱 의아하게 여겼다. 일등이 그 까닭을 묻자 곽정은 사실대로 알려 주었다. 일등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달마 조사가 원래는 천축 사람이셨네. 그분께서 이 구음진경을 한어(漢語)로 쓰시기는 했지만 경문의 요지나 정수는 오히려 천축 말로 쓰셨지. 이 경문이 만약 불법과 관계 있는 사람의 수중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배우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이 주술(呪術) 같은 말들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일등은 즉시 제자들과 다른 승려들을 선방에서 나가게 하고는 곽정이 외우는 천축 말을 한어로 번역해 곽정과 황용 두 사람에게 전해 주었다.
일등대사의 내공은 원래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가 반복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는 동안 황용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알게 되었으며 곽정도 l0에 6,7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나머지는 시간만 지나면 완전히 터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손상된 현공은 원래 오랫동안 수련을 해야만 원상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제 이 달마대사의 진경에 기록된 대로 연습을 하면 한 석 달이면 될 것 같군.]
일등의 말에 곽정과 황용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은 산에서 7일이나 내리 묵었다. 첫째는 일등대사로부터 일양지, 선천공 무공과 달마 유편의 요지를 배우기 위해서요, 둘째는 혹시 영고가 다시 찾아올지 몰라 방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8일째 되던 날 두 사람이 때마침 선원 밖에서 연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수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흰 수리 한 쌍이 동쪽 먼 곳에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금와와가 왔다!]
황용이 반기며 손뼉을 치는데 수리 두 마리 모두 깃털이 빠져 나간게 꼴이 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암컷의 왼쪽 가슴 위에는 짧은 화살이 꽂혀 있고 수컷의 다리 위에는 파란 천 조각이 보일 뿐 금와와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황용은 이 파란 천 조각이 아버지의 옷에서 뜯어낸 것임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수리는 분명히 도화도에 갔었던 것이다. 혹시 도화도에 강적이라도 들어 황약사가 적을 맞아 싸우는 바람에 딸의 부탁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두 사람은 황약사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일등대사에게 즉시 하직을 고했다. 어부와 농부는 침상에서 일어나기가 어려워 서생과 나무꾼만이 산 아래까지 따라 나왔다. 황용과 곽정이 홍마를 찾고 나서야 서로 손을 마주잡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돌아가는 길은 오던 때보다 수월했고 경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심경만은 입산할 때와 크게 달랐다. 황용은 부친이 걱정스럽기 는 했지만 그의 지모나 무공이 당세에 걸출하여 일생 동안 천하를 종횡하면서도 실수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별일 없으리라고 믿었다. 설사 강적을 만나 이기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자기 보호만은 문제가 없으리라, 그러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둘은 다정하게 홍마에 올라탄 채 마냥 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웃을 수 있었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 후 위험한 고비를 수없이 겪었지만 그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었어요. 이번만 하더라도 구천인 그 늙은이에게 얻어맞은 덕택에 일양지와 구음진경을 얻지 않았어요?]
황용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차라리 무공은 배우지 못하더라도 용아만 편안하면 좋겠어.]
황용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아이고, 다른 사람 비위 맞출 줄도 아네? 거짓말 그만둬요. 만약 오빠가 무공을 몰랐다면 벌써 맞아 죽었을 거예요. 구양봉이나 사통천은 그만두고라도 철장방의 이름없는 사람 칼에 벌써 찔렸을 거예요.]
[어쨌든 다시는 용아가 부상당하지 않게 보살피겠어. 지난번 임안부에서 내가 부상당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용아가 부상을 당하니 정말 괴로워 견딜 수가 없더군.]
[오빠는 정말 미워요!]
[아니, 무슨 소리야?]
[그럼 오빠가 부상을 당하면 나만 괴로우라구요?]
곽정은 할말이 없어 그냥 웃음을 터뜨리며 발끝으로 홍마의 옆구리를 찼다. 홍마는 네 발을 모으고 나는 듯 앞을 향해 달렸다.
점심때쯤 그들은 도원현(桃源縣)에 당도했다. 황용의 원기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 반나절이나 말을 탄 것이 피곤했던지 두 볼이 상기되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도원성 안에는 피진주루(避秦酒樓)라는 집이 쓸 만했다. 원래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따온 전고(典故)다. 둘은 안으로 들어가 술과 안주를 시켜 놓고, 곽정이 하인을 불렀다.
[여보, 우리 한구(漢口)로 가야겠는데 귀찮지만 나루터에 나가 배 한 척 부르고 사공에게 이리 오라고 해주시오.]
[도련님, 다른 사람과 같이 타시면 뱃삯이 절약될 텐데요. 두 분이 한 척을 빌리면 돈이 많이 듭니다.]
황용이 그를 흘겨보다가 다섯 냥짜리 은전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어요?]
[아, 충분하고 말고요.]
주점 하인이 미안하다는 듯 굽실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곽정은 황용의 건강을 염려해서 술은 마시지 못하게 하고 밥과 안주만 먹게 했다. 그들이 반 그릇쯤 먹었을 무렵 하인이 사공을 데리고 들어왔다. 사공이 한구까지 모두 네 냥의 뱃삯을 불렀지만 황용은 깎을 생각도 않고 다섯 냥을 주었다. 사공은 돈을 받고 연신 고맙다고 허리를 숙이며 자기 입을 가리키며 아 소리만 냈다. 그는 벙어리였던 것이다. 그가 손발을 움직이며 한바탕 수선을 떨자 황용도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말했다. 사공이 입을 혜벌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무슨 얘기를 나눈 거지?]
곽정이 묻자 황용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식사가 끝나는 대로 곧 출발하겠대요. 내가 닭 몇 마리와 고기 몇 근을 사다 주면 돈을 더 주겠다고 했어요.]
[저 벙어리 사공을 나 혼자 만났더라면 큰일날 뻔했군.]
이 주점의 일미라는 생선은 특별히 신선하고 감칠맛이 있었다. 곽정은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니 홍칠공 생각이 났다.
[은사님은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 상처는 어떤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구나.]
황용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계단이 울리며 비구니 두 명이 올라섰다. 그들은 회색빛 장삼을 입고 얼굴과 코를 가린 채 눈만 내놓고 있었다. 비구니들은 한쪽 모퉁이에 있는 식탁에 앉았다. 하인이 다가가서 인사를 하자 그중 한 명이 낮은 소리로 음식을 시키는데 두 사람분의 소면뿐이었다. 황용은 이들 두 사람의 몸매가 어딘지 낯익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곽정은 황용이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자기도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중 한 비구니도 이쪽으로 시선을 돌려 자기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곽정 오빠, 저 비구니가 오빠에게 반했나 봐요.]
[쓸데없는 소리 ! 출가한 사람을 그렇게 놀릴 수 있나?]
[믿기지 않으면 그만두세요.]
곽정과 황용은 식사를 마치자 계단 쪽으로 내려오려고 했다. 황용은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다시 한 번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 비구니가 얼굴을 가렸던 수건을 벗었다. 그 순간 황용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비구니는 다시 수건을 쓴 뒤에 고개를 숙이고 소면을 먹는데 어찌나 동작이 빨랐던지 곽정은 미처 보지도 못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밥값을 치르니 벙어리 사공이 벌써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황용이 가서 그에게 물건을 사오라고 손짓을 했다. 사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강에 떠 있는 배 한 척을 손으로 가리켰다. 황용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지만 사공이 그냥 그 자리에 서자 곽정과 함께 동쪽으로 걸어 나가다가 모통이를 돌아서며 벽에 몸을 숨기고 주점 문을 주시했다.
잠시 후에 비구니들이 문밖으로 나와 홍마와 수리를 보고는 곽정과 황용의 종적을 찾는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사람이 보이지 않자 서쪽으로 걸어 나갔다.
[옳지,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황용이 낮은 소리로 말하며 곽정의 옷깃을 잡아 끌고 동쪽으로 달렸다. 곽정은 영문도 모르면서 황용을 따라 달렸다. 도원성은 별로 크지 않은 고을이다. 금방 동문을 벗어나 남쪽으로 접어들고 남문을 지나자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니, 그 비구니들을 쫓아가는 거야? 그들을 놀리면 못써.]
[놀리다니요? 저렇게 천사같이 예쁜 비구니를 쫓아가지 않으면 오빠가 후회할 텐데요.]
곽정은 어이가 없어 발길을 멈줬다.
[용아, 그런 말 한 번만 더 하면 화낼 테야.]
[겁날 것 없어요. 어디 한번 화를 내보시지 그래요. 구경이나 해보게.]
곽정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끄는 대로 다시 걸었다. 5리쯤 갔을까, 두 비구니가 길가 나무 밑에 앉아 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곽정과 황용이 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일어나 지름길로 돌아 산언덕으로 올라섰다. 황용도 곽정의 손을 잡고 지름길로 들어섰다.
[용아, 자꾸만 이렇게 나대면 내가 안고 되돌아갈 거야.]
[정말 좀 걸었더니 피곤하군요. 혼자 쫓아가 보세요.]
곽정은 걱정이 되어 몸을 숙였다.
[자 업혀. 내 업고 되돌아가지.]
[아녜요, 내가 가서 저들의 수건을 벗길 테니 어디 한번 보세요.]
황용이 낄낄거리머 발길을 재촉하는데 그들 두 사람은 어느덧 멈추어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용은 비교적 키가 큰 비구니의 수건을 벗겼다. 곽정은 뒤따라오다가 그 비구니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저 입만 딱 벌린 채 할말을 잊고 서 있었다. 비구니는 얼굴을 숙인 채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바로 양강을 따라 서쪽으로 떠났던 목염자였다.
황용이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언니,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양강 그놈이 또 언니를 속였군요.]
목염자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곽정이 다가가서 인사를 하자 목염자도 목례를 했다. 황용은 목염자의 손을 잡아 끌고 개울가 버드나무 아래에 가서 앉았다.
[언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우리도 그를 찾아 화를 풀어야겠어요. 저와 곽정 오빠도 그자의 독수에 걸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목염자는 황용의 말에 대답할 생각은 않고 저쪽에 혼자 있는 비구니를 불렀다.
[이리 와요.]
황용과 곽정은 목염자에게 신경을 쓰느라고 그쪽은 잊고 있다가 그때서야 시선을 돌리니 그 비구니도 곽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자 비구니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벗고 곽정을 향해 날아갈 듯 절을 했다. 곽정을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원래 이 비구니는 혈조를 잡을 때 만났던 진남금이었다. 곽정이 급히 답례를 하면서 보니 그녀는 옆머리에 하얀 꽃을 꽂았고 또 옷깃에는 베로 가장자리를 꿰맨 소복을 입고 있었다.
[할아버지는요? 안녕하신가?]
남금은 대답도 잊은 채 주르륵 눈물만 흘렸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벌써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목염자가 일어나 남금의 손을 잡아 끌어 세 처녀가 나란히 앉았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맑은 시냇물에 비치고 그 위에 낙화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곽정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돌위에 걸터앉았다. 어떻게 그들이 함께 있게 되었는지 마냥 궁금하기만 했다. 그들은 왜 비구니 복장을 하고 있을까? 왜 주점에서는 아는 체도 안 했을까? 진노인은 어떻게 해서 세상을 떠나셨나?
황용은 그들의 상심한 표정을 보고 더 묻기가 거북해 그저 손만 부여잡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목염자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용아와 곽정 오빠 두 분이 빌린 배는 철장방의 것이에요. 그들은 함정을 파 두 분을 살해하려고 하고 있어요.]
곽정과 황용은 깜짝 놀랐다.
[그 벙어리 사공의 배가 말입니까?]
[그래요. 그 사공은 벙어리가 아녜요. 그는 철장방의 고수인데 말소리가 너무 울려 발각될까 봐 벙어리 행세를 한 거예요.]
[언니가 말씀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했군요.]
곽정은 몸을 솟구쳐 버드나무 위로 뛰어올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 두어 사람만 보일 뿐이었다.
(용아가 한바퀴 돌지 않았더라면 철장방 사람이 미행을 했겠구나.)
목염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저와 양강의 그전 일에 대해서는 두 분도 잘 알고 계시지요. 뒤에 제가 의부와 의모의 영구를 모시고 남으로 갔다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임안 우가촌에서 또 그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 일도 우리는 다 알고 있어요. 그가 구양공자를 죽이는 현장도 직접 보았는걸요.]
황용의 말에 목염자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황용은 그와 곽정이 밀실에 숨어 부상을 치료했던 일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또 양강이 어떻게 개방 방주로 행세를 했고 어떻게 위험한 고비를 빠져 나왔는지 나머지 일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동안의 우여곡절을 구구이 말하자면 너무나 길었지만 황용은 빨리 목염자의 행적이 듣고 싶어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그 사람 보통 나쁜 사람이 아녜요. 내 눈이 멀었지, 어쩌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지 팔자가 원망스럽군요.]
황용이 손수건을 꺼내 목염자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목염자는 지나간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나 괴롭고 또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第 五 卷. 第 九 章.(通卷 章). 아픈 회상
목염자는 오른손이 황용에게 잡혀 있었기 때문에 왼손으로 가볍게 황용의 팔등을 어루만지며 유유히 떠내려가는 낙화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그가 구양공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고 이제 개과천선하는 줄 알았어요. 또 개방 고수 두 명이 공손하게 모시고 서쪽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하도 반가워 함께 동행을 했지요. 악주에 도착하자 개방 대회가 군산에서 열리는데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홍은사께서 나에게 개방 방주를 이어받도록 하라는 유명이 있었소라고요.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더군요. 그러나 개방의 연배 높으신 장로들까지 그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정중하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요. 제가 개방 사람이 아니라서 대회에 참가할 수 없는 입장이기에 악주성에서 그를 기다리며 이런 생각을 했어요. 개방 군웅의 방주가 되었으니 나라와 백성을 위해 혁혁한 공로를 세우면 의부와 의모의 원수를 갚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요. 그날 밤 저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그가 창문을 뛰어넘어 들어왔어요. 저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그가 혹시 또 못된 짓을 저지르지 않았나 염려되어 물어 보려고 하는데 이런 말을 하더군요. <누이, 큰일났소. 우리 빨리 떠납시다. 개방에 내란이 일어났소. 오의파가 홍방주의 유명을 듣지 않는군요. 정의파와 오의파가 새 방주를 옹립하는 일로 싸움을 벌였는데 벌써 여러 사람이 맞아 죽었다오.> 저는 깜짝 놀라 어찌 된 일인지 물었더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더군요. <나는 다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차라리 물러설망정 방주가 되지 않기로 했소.> 듣고 보니 저도 사정이 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어요. <정의파의 장로들이 나를 가지 못하게 막는데 다행히 철장방 구방주가 도와주어서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소. 사정이 이러니 잠시 철장산에 숨어 있으면서 다시 상의합시다.> 사실 저는 철장방이 좋은 무리인지 나쁜 무리인지도 모르고 할 수 없이 따라 나섰답니다. 철장산에 도착해서 그들의 행태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좋지 않은 무리라는 걸 알았지요.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방주 자리를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냥 말 수는 없는 일 아녜요? 그러니 우선 사존이신 장춘자 구도장을 찾아가 상의를 하고 강호 호한들의 협조를 얻어 개방 방중 가운데 덕망이 높은 사람을 방주로 뽑아 서로 싸우지 않도록 해야만 홍방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걸 거예요.> 그러나 그는 우물쭈물하며 그 얘기는 넘기고 혼인이나 서둘러 하자고 치근거리더군요. 하여 제가 싫은 소리를 했더니 버럭 화를 내더라구요. 그래 한바탕 말다툼을 했어요. 하루가 지나자 전 점점 내가 잘못했다고 후회하기 시작했어요. 그가 비록 경솔해서 잘못은 했지만 어쨌든 제게는 잘해 주었는데 너무 가혹하게 굴었으니 화낼 만 하다는 생각이 든 거지요. 그날 밤 저는 생각할수록 불안해 등불을 켜놓고 사과 편지를 썼어요. 그 편지를 가지고 나가 슬그머니 그의 방 문틈으로 집어 넣으려고 하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저는 다른 사람의 말을 엿듣고 싶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 가면 편지나 집어 넣으면 되겠거니 했는데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찌나 크게 울리던지 자기 딴에는 낮은 소리로 한다고 하는 것이 밖에까지 똑똑히 들리더군요. <소왕야님, 여자들의 마음이란 변덕이 심해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 목가 성을 가진 아가씨가 잠깐 말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구방주께서 혹시 왕야님이 괴로워하시는게 아니냐고 걱정하시면서 소인에게 예물을 드려 답답한 심사나 푸시도록 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구방주가 어떤 물건을 보냈는지 구경이나 해보자는 생각에 계속 서 있었지요.]
여기까지만 듣고도 황용은 호기심이 동해 다음 얘기를 얼른 듣고 싶었다.
(무슨 재미있는 물건이었을까? 우리가 철장방에 있었을 때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로구나. 좋은 물건이면 빼앗아 올 걸 그랬지.)
목염자가 계속 다음 말을 이었다.
[<구방주님의 호의는 대단히 고맙습니다만 괴로운 일은 없으니 예물은 그만두시라 하세요.> 그이가 이렇게 말하자 철장방의 그 사람은 껄껄 웃더군요. <우선 구경이나 하신 뒤에 말씀하세요. 틀림없이 만족하실 겁니다.> 그리고 가볍게 손뼉을 두 번 치자 발소리가 나며 두 사람이 아주 무거운 물건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어요. 저도 모르게 궁금증이 일어 방안을 들여다보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커다란 대바구니를 들고 들어와 내려놓으니까 먼저 말하던 그 사람이 바구니 뚜껑을 열더군요.]
[아, 그 안에 독사 아니면 두꺼비가 있었지요. 저도 본 일이 있어요.]
황용이 아는 체하자 남금은 옆에서 잠자코 있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염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틀리셨어요. 대바구니 속에서 사람이 하나 걸어 나왔는데 바로 이 남금 아가씨였어요.]
곽정과 황용이 동시에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남금이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면서 말을 꺼냈다. 말씨가 어찌나 조용한지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은인과 황소저가 떠나신 후 저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계속 뱀을 잡아 살림을 꾸려 나갔어요. 할아버지는 늘 은인 말씀을 하셨지요. 은인께서는 저희 집에 이틀밖에 묵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와 저의 얘기는 끝이 없었답니다. 어느 날 제가 숲 속에 들어가 있는데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세 사람이 나타나 저를 보고 웃는 거예요. 저는 큰일났다 싶어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들이 제 뒤를 계속 쫓더군요. 결국 집에 채 이르기도 전에 잡히고 말았답니다. 제가 놀라 소리를 지르자 할아버지께서 달려 나오셨지만 그놈들이 단칼에 할아버지를 죽이고 말았답니다.]
곽정은 들을수록 화가 치밀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난번 은인께서 저를 구해 주셨지만 이번에야 어떻게 또 구해 줄 수 있으랴 생각했지요. 저는 할 수 없이 그놈들에게 끌려 철장산으로 갔지요. 거기 도착해서야 그들이 뱀 잡는 일을 시키려고 나 외에도 수십 명을 잡아다 놓은 것을 알았어요. 원래 구방주라는 사람이 독사를 많이 구해다 놓고 무슨 무공인가를 익힌다고 하더군요.]
황용이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래요.]
남금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철장방에서는 나를 보고 뱀만 잡으라고 했지 다른 일로 괴롭히지는 않았어요. 구방주는 또 우리에게 뱀을 몰고 가 두꺼비와 싸움을 붙이라는 등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게 하라는 둥 괴상한 짓을 시켰어요. 이렇게 며칠을 지내는 동안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죠. 구방주는 그것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 보며 팔다리 놀림이나 몸 동작을 독사나 청사가 하는 대로 따라 하더군요.....]
황용이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곽정 오빠, 원래 그랬군요. 그 구천인도 구음진경을 탐내고 있었던 거예요.]
곽정은 영문을 몰라 멍청히 물었다.
[어째서?]
[그는 서독의 합마공을 깨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야 화산의 이차 논검에서 천하 제일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니까요.]
곽정은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아, 그래서 그가 그렇게 많은 뱀을 잡아다 두꺼비와 싸움을 붙였군.]
[그 두 몹쓸 작자를 서로 죽자 하고 싸우게 해야만 재미있겠군요. 곽정 오빠, 그래 오빠는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센 것 같아요?]
곽정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두 사람 다 장단점이 있으니 나로서는 말하기 어렵군.]
[까짓것,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지요.]
황용은 이렇게 말하고 다시 남금에게 고개를 돌렸다.
[언니, 그래 언니는 어떻게 해서 그 대바구니 속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저야 그들의 종이 되었으니 대바구니 속은 차치하고라도 칼산에 오르라면 오르고, 기름 가마에라도 들어가라면 들어가야지 별수 있나요?]
남금은 마치 남의 얘기라도 하듯 말했다. 황용은 그녀의 말이 귀에 거슬려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불행에 생각이 미치자 꿀꺽 참고 목염자의 얘기를 들었다.
[저는 소저가 바구니 속에서 얼굴을 내밀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어요. 그 사람도 깜짝 놀라는 것 같더군요. 철장방 사람이 웃으며 이런 말을 했어요. <소왕야 어때요? 근사하지요?> 그러자 그가 손을 살래살래 내저었어요.<아니오, 빨리 데리고 나가도록 하시오. 만약 목소저가 이를 보게 되면 큰일나오, 큰일나.> 저는 그의 말을 듣고 그래도 내게만은 진실로 대해 주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목소저가 어떻게 압니까? 며칠 후 소왕야께서 하산하실 때 좋다고 하시면 저희가 슬그머니 왕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만약 싫으시다면 그냥 여기 놔두지요. 정말 귀신도 모르는 일입니다.> 철장방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진소저를 바구니 속에서 움켜잡아 끌어내더군요. <소왕야를 잘 모시도록 해. 너를 특별히 골라 모시도록 했으니 얼마나 좋으냐?> 단단히 엄포를 놓은 뒤 철장방 사람은 수하 사람을 시켜 대바구니를 들고 나가게 한 뒤 편안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하고 물러나와 밖에서 문을 닫아 버렸답니다. 잠시 후 그가 가위를 들어 초 심지를 잘라 내자 방안이 환해지며 진소저의 예쁜 얼굴이 드러났지요. 그제야 그는 웃으며 달려들어 그녀의 손을 잡고 말을 걸더군요. <이름이 뭔가? 나이는 얼마나 됐구?> 진소저가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갖다대며 이렇게 지껄여대더군요. <어, 향기롭구나!> 나는 기가 막혀 눈앞이 캄캄해지며 별이 오락가락해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그러다 한참 만에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진소저가 단도를 가슴에 대고 낮은 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하더군요. <나는 이미 목숨을 버린지 오래예요, 만약 한 번만 더 건드리면 당장 여기서 죽고 말겠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진소저의 단호한 태도에 찬사를 보내며 그만 그가 놀라 물러서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에서 금단추 두 개를 뜯어내 손톱으로 통겨 하나로는 진소저 손에 쥔 칼을 떨어뜨리고, 다른 하나로는 그녀의 아혈(啞穴)을 때렸어요. 저는 더 참을 수가 없어 방문을 부수고 방안으로 뛰어들어갔지요. 그는 멍하니 있다가 한참 만에 웃는 거예요. <누이 정말 잘 왔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의 웃는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화가 스르르 가라앉는 거예요. 그의 달콤한 얘기에 다시 한 번 속아넘어간 거지요. 바로 그때에 황소저가 창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나도 그땐 정말 언니가 철장방에 계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황용의 말에 목염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뒤에 황소저가 밖에서 구방주와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뛰쳐나가 도우려고 했는데 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나는 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슬그머니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지요. 아니나다를까, 캄캄한 방안에서 글쎄 그자가 진소저를 껴안으려 하는 거예요. 나는 갑자기 목구멍이 뜨끈해지며 뭔가 울컥 솟기에 뱉어 보니 피가 나오더군요. <우린 이제 완전히 헤어지는 거예요.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그 즉시 나는 그자에게 이렇게 한마디 쏘아 주고는 산을 내려오고 말았어요. 그때 철장방은 발칵 뒤집혀 모두들 횃불을 밝히고 중지봉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때라 나 혼자 내려오는데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내쳐 걸었는데 어둠 속에서 집이 하나 보였어요. 무작정 안으로 뛰어들어갔더니 바로 그곳이 도를 닦는 도장이더군요. 서쪽 벽에 한 도사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어요. 손에 장검을 들고 풍채가 늠름한 데 그 옆에 활사인(活死人)이란 글자가 씌어 있더군요. 그 뜻은 잘 몰랐지만 별 생각이 다 들었지요. 만약 내가 지금 죽으면 의부와 의모의 원수를 어떻게 갚나? 그래서 그 도장 사람에게 제자로 거두어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온몸에 열이 올라 정신을 잃었어요. 며칠을 앓았는지 모르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진소저가 제 침상 곁에서 간호를 해주고 있었어요. 비구니 차림을 한 채 말예요.]
황용은 남금을 향해 어떻게 해서 철장방을 벗어나게 되었느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어 비렸다. 남금은 곽정을 한 번 쳐다본 뒤에 입을 열었다.
[그 양가가 목언니에게 따귀를 맞고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 잠시 후에 산 위에서 함성이 점점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자는 주머니 속에서 단검을 한 자루 꺼내 허리춤에 꽂고는 불을 끈 뒤 크게 웃고는 창을 넘어 밖으로 나가 버렸어요. 한 시간쫌 지났을까, 함성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모두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았어요. 그때 도망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양가라는 놈이 제 몸을 어떻게 해놨는지 꼼짝할 수가 없어 그냥 침대 옆에 있었어요. 귀를 기울이니 철장방의 함성이 점점 멀어져 가다가 마침내 들리지 않더군요. 사방이 쥐죽은듯 조용한데 그 양가가 다시 창을 뛰어넘어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탁자 앞으로 가 한 손으로 턱을 고인 채 멍하니 앉아 있더라구요. 이렇게 한참이나 앉아 있다가 혼자 중얼거리더군요. <그 곽가가 감히 이 산 위에 올라왔다면 그 뒤에는 틀림없이 고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무엇 때문에 여기서 시간을 지체한담.>]
[겁쟁이 같으니라고.]
황용은 여기까지 듣다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그자는 탁자를 탁 치더군요. <흥, 제까짓 게 날 영원히 만나지 않겠다 해서 겁날 게 있나? 대사만 성공하면 부귀영화에 후궁이 삼천일 텐데 설마 그 정도 미인이야 없을라구?>]
[저런 나쁜 놈이 있나?]
곽정은 화가 치밀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을 해댔다. 남금은 양강이 하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 말에 나라를 팔아 영화를 구하려는 음모가 숨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곽정이 격분을 하자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계속 말씀하세요.]
곽정이 진정하고 부드럽게 말을 하자 남금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꼭 말을 해야 하나요?]
[피곤하면 쉬었다 하셔도 좋습니다.]
남금은 곽정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이상했지만 말만은 조용했다.
[피곤하지는 않아요. 다만 너무 엄청난 불행이라 부끄러워 말을 하기가 거북하군요.]
[그럼 그만두십시오. 우리 앞으로의 일이나 서로 상의합시다.]
[아녜요. 제가 사실 그대로 말씀드려야 해요.]
[그럼 저는 저쪽에 가 있을 테니 목소저와 황소저에게만 말씀하시지요.]
곽정은 이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양강이 틀림없이 무례한 행동을 했을 텐데 만약 그녀가 그 얘기를 꺼낸다면 쌍방이 다 거북할 것 같았다.
[만약 자리를 뜨신다면 저는 죽어도 말하지 않겠어요. 목언니는 친언니나 다름없지만 이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의외로 남금이 단호하게 말하자 곽정은 황용의 눈치를 살피다 황용이 앉으라는 눈짓을 보내자 마지못해 어물어물 제자리에 앉았다.
남금이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신세를 한탄해서 그런지, 아니면 울적한 심사가 쌓여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그자는 이미 결정을 내렸는지 촛불을 밝히고 짐을 챙기다가 침상 옆에 있는 저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더군요. 제가 벌써 도망간 줄 알았던 모양이에요. 그는 촛대를 들어 내 얼굴을 비쳐 보고는 웃더군요. <헤헤, 너 때문에 목염자를 잃었다. 나를 따라가겠다면 데리고 하산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대로 누워 있다가 철장방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거다. 한번 잘 생각해 보아라.> 저로서는 결단을 내리기가 어려웠어요. 산속에 남아도 좋을 일이 없을 것은 뻔했지만 그를 따라 하산하는 것도 불길하게 생각되었지요. 그는 제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자 갑자기 짐승처럼 달려들어 욕을 보였어요.]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목염자는 가슴 한켠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구쳐 눈물을 떨어뜨렸다. 양강의 배신에 괴로운 날을 보내면서도 이토록 비열한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양강에 대한 목염자의 사랑은 너무나 지극해 그의 잘못을 불 때마다 번번이 눈감아 주었지만 마지막에 와서 이런 악몽으로 끝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의외로 남금의 표정은 몹시 담담해 마치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다른 사람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 이미 그에게 욕을 당한 몸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산을 내려오게 되었어요. 기회를 보아 원수를 갚고 나도 자결하면 그만이겠지 하는 마음을 먹었지요. 철장봉이 꽤나 험난한데다 그가 나를 부축하고 내려오느라 새벽이 되었는데도 겨우 산허리까지밖에 내려오질 못했어요. 그는 혹시라도 철장방 사람들과 만나게 되면 거북할까 봐 일부러 산 뒤 길 없는 곳으로 내려왔으니 하산이 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길은 내려올수록 험해지고 아래는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로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쩌다 내려다보면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였지요. 겨우 좀 우뚝한 절벽에 당도했을 때 저는 무서워 손발을 벌벌 떨고 있었어요. 그 모양을 지켜 보던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 업고 내려가지. 움직이면 안돼. 움직이기만 하면 우리 둘 다 죽는단 말야.> 그는 선뜻 허리를 숙이더군요. 저는 정말 하늘이 내려 주신 좋은 기회라 여기고 함께 떨어져 죽어 버릴 결심을 했어요. 그가 허리를 굽히자 저는 그의 목을 꽉 붙들어 잡았지요. 그가 허리를 펴 일어나려고 버둥거릴 때 저는 오른발로 버티며 힘을 썼어요. 곧 우리는 그의 비명 소리와 함께 절벽 밑으로 떨어졌어요.]
여기까지 듣다가 목염자는 자기도 모르게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자기가 아직도 양강에 대한 정을 잊지 못해 그런가 싶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금은 말을 계속했다.
[저는 천길 만길 떨어져 내려가면서도 마음만은 기뻤어요. 내 뼈가 가루가 되겠지만 그놈도 묵사발이 되겠거니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한순간 몸이 휘청하더니 눈앞이 아찔하며 별이 오락가락하더군요. 이제는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그자가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어요. 정신을 차려 눈을 뜨니 그가 오른손으로 절벽 틈새로 삐죽이 자라 있는 소나무 가지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몸이 그네를 타듯 흔들렸어요. 소나무가 그자의 목숨을 구해 준 셈이지요. 그는 제가 자기를 밀어 그렇게 된 것은 까맣게 모르고 오히려 무서워 떨다가 그렇게 됐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다고 독의양양해서 껄껄거리더군요. <만약 이 소왕야의 무공이 아니있더라면 네까짓 게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느냐?> 소나무와 골짜기 밑의 거리래야 겨우 칠팔 장 정도인데 하필이면 거기 소나무가 자랄 게 뭐예요. 그자의 목숨이 꽤나 질긴 모양이구나 싶더군요. 그는 나를 업은 채로 소나무 밑으로 내려왔어요.<우선 골짜기로 내려가 길을 찾도록 합시다.> 그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 골짜기는 나뭇잎과 썩은 풀뿌리뿐인데 도처에 뼈가 보였어요. 아마 산에 오르던 짐승들이 떨어져 죽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백골로 변했나 봐요. 그는 짐승의 대퇴골 하나를 주워 가지고 풀을 헤쳐 나가면서도 연방 제게 농을 걸더군요. 저는 혹시라도 의심을 받으면 다음에 손을 쓰기 어렵게 될까 봐 우물쭈물 대답을 했지요. 한참 동안 걷다가 그는 괴상한 물건을 밟았는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더군요. 그러다 좀 진정이 됐는지 긴 뼈 하나를 주워 들고 풀을 혜쳐 보더군요.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시체 한 구가 있지 않겠어요? 그 시체는 갈포 적삼을 걸쳤는데 머리가 부서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어요. 다만 가슴까지 내려오는 횐 수염에 피가 얼룩져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그 구천리 영감이 깊은 골짜기에 떨어져 죽었는데도 결국 사람 눈에 띄었군요.]
황용이 웃고 말참견을 했지만 남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는 시체를 뒤져 이것저것 자기 주머니에 집어 넣었어요. 반지며, 부러진 칼, 벽돌, 괴상한 물건들이 많더군요. <이놈의 영감이 여기서 죽었군.>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시체의 가슴에서 책 한 권을 찾아냈어요.]
[그 책 속에는 아마 그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속이던 그런 법문(法門)이 가득 씌어 있을 거예요.]
황용이 웃으며 끼여들었지만 남금은 여전히 못 들었는지 자기 말만 계속했다.
[그 양가 녀석은 책을 보면서 꽤 재미가 있었던지 싱글벙글 웃더군요. 한참 동안이나 보다가 품속에 챙겨 넣고 다시 길을 찾기 시작했어요. 어두컴컴한 골짜기를 하루 종일 헤매다가 저녁나절에야 겨우 빠져나와 어떤 농가에서 자게 되었죠. 그런데 그는 나를 보고 자기 아내 행세를 해 신분을 숨기라는 거예요. 저녁 식사를 물린 후 그는 등불을 밝혀 놓고 그 책을 보면서 손짓 발짓을 해가며 책 속에 씌어 있는 무슨 무공을 익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침대에 등을 대고 있었는데 심란하기도 했지만 어찌나 피곤한지 꼼짝할 수도 없었어요. 그때 창 밖에서 꽥꽥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는 숲 속에 살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뱀을 잡으며 살았기 때문에 독사가 청개구리롤 물었을 때 나는 소리라는 걸 알았지요. 저는 악한의 손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지금쯤 저 세상에 계신 제 아버지, 어머니, 삼촌 들과 만나셨을 텐데 나 혼자만 외롭게 남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잠겨 눈물짓다가 문득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어요. 하여 그를 향해 공손히 청을 했지요. <소왕야, 잠깐만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좋아. 그러나 달아날 생각은 말라구. 눈 깜짝할 사이에 쫓아가 잡을 테니까.> <제가 달아난다구요? 어디로 달아나요?> <그래, 달아나지 않아야 착한 아가씨지.> 저는 그 방을 나와 살금살금 집 뒤로 돌아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어요. 때마침 뱀이 개구리를 삼키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래 슬그머니 다가가서 뱀의 꼬리를 틀어 잡아 올려 돌돌 말아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어요. 그는 제가 빨리 돌아오자 웃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가 다시 책을 보더군요. <먼저 자구려, 나는 책 좀 보다가 잘 테니.> 저는 속으로 욕을 했어요. <나쁜 놈같으니라고, 하늘이 내게 오늘 원수를 갚으라고 이런 선물을 주셨다.>]
여기까지 듣자 황용은 벌써 그녀가 어떻게 원수를 갚으려고 했는지 그 방법을 알아차렸다. 목염자도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손에 땀을 쥐었다. 다만 곽정만이 멍청하게 그냥 앉아 있었다.
남금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모기장을 내려놓고 부채로 모기를 쫓은 뒤에 슬그머니 보자기를 풀어 뱀을 꺼냈어요. 그리고 부채로 뱀을 덮은 뒤 움직이지 못하게 오른손으로 꼭 누르고 숨을 죽이며 그가 침상에 오르기를 기다렸지요. 그는 책에 정신이 팔려 저를 잊은 것 같았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숨을 죽이고 기다리자니 가슴이 두근거려 금방이라도 발각될 것 같더군요. 반시간쯤 지나니까 등잔의 기름이 없어지는지 불이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꺼져 버렸지요. <하하, 이 정신 좀 봐라. 책을 본다고 임이 계신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군. 귀여운 아가씨, 너무 나를 원망하지 말아요.> 저는 자는 체 가볍게 코까지 골았지만 귀만은 그의 동정을 살피기에 바빴어요. 그가 책을 엎어 보따리 속에 챙기는 소리, 옷을 벗는 소리, 침상에 올라 신을 벗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지요. 그는 모기장을 들치고 들어와 누우면서 저를 껴안으려고 했어요. 저는 가볍게 코를 골면서 천천히 부채를 치운 후 뱀의 머리를 그의 가슴을 향하게 하고 손톱으로 뱀을 찔렀어요. 뱀은 깜짝 놀라 그의 앞가슴을 꽉 물었죠. 그는 <뭐야? 이게 뭐야?> 소리를 지르며 벌떡 뛰어내리더군요. 그때야 비로소 뱀에 물린 줄 알고 힘껏 잡아당기니 뱀의 이가 모두 빠지면서 그의 살 속에 박혀 버렸지요.]
목염자는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남금을 쳐다보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악과 감탄과 원망이 뒤섞인 묘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을 삽시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남금은 그런 목염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긴박한 순간을 차분하게 이야기해 나갔다.
[<뱀, 뱀이야!> 그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더군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그가 고생하며 죽어 가는 꼴을 끝까지 지켜 보다가 저 세상으로 가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 뵙고 싶었지요. 그래서 저도 깜짝 놀라는 체하고 일어났지요. <뭐예요? 뱀이라니요? 어디, 어디 있어요?> <나를 물었소!> <빨리 불을 켜세요. 불을요.> 그가 부싯돌을 켜 불을 밝히는 순간 저는 그의 가슴에서 조그맣고 검은 구멍 네 개를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어요. <누운 채 꼼짝하지 마세요. 제가 나가 약초를 구해 오겠어요.> 이땐 벌써 농가 사람들까지 깨어났지요.<여긴 원래 독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놈이 침상에까지 기어올랐을까?> 농가 사람들은 안됐다는 듯 입을 모아 위로의 말을 했어요. 저는 초롱불을 들고 약초를 찾으러 나갔지요. 하나 제가 찾는 약초는 뱀 물린 데 치료하는 약초가 아니라 독사의 독을 더 빠르게 퍼지게 하는 독초.....]
목염자는 여기까지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어 남금의 따귀를 철썩 때렸다. 남금의 볼은 금세 빨갛게 부어 올랐다.
[언니, 그 녀석의 죄가 이만한 처벌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황용이 목염자의 팔목을 붙들며 쏘아붙이자 그녀는 넋이 나간 듯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남금은 따귀를 맞고도 그냥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독초가 얼른 눈에 띄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필요도 없었구 요. 독사에게 물리면 여섯 시간을 버티기 어렵거든요. 저는 손에 잡히는 대로 풀을 뜯어 입에 넣어 씹은 뒤에 그걸 가져다 상처에 발라 주었어요. 그의 가슴이 부어 올랐는데 거무스레하면서도 자줏빛이 비치더군요. 그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는데 저는 그 옆에 앉아서 우는체했어요. 처음에는 거짓으로 울었지만 그렇게 울다 보니 제 신세가 불쌍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흐르더군요. 그가 정신을 차리고 저를 바라보는데 그 눈이 무서웠어요. 제가 뱀을 잡아다 자기를 해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그러나 워낙 슬피 울고 있으니까 딱했던가 봐요. <그래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 주는구나.>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그는 세 번이나 까무러치며 차디차게 식어 가는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어요. 자신도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내 아가씨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일만 잘되면 큰 상을 받을 것이오.> <큰 상은 필요 없으니 분부나 하세요.> 그는 나를 보고 저녁에 보던 책을 보따리 속에서 꺼내 놓으라고 하더군요. <내가 죽은 뒤에 내 몸에 있는 단검과 이 책을 가지고 대금국 변량 조왕부로 가서 조왕야께 직접 바치고 무목유서의 소식이 이 책 속에 있다고 말씀드려 주시오.>]
곽정과 황용이 동시에 마주 바라보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구천리가 가진 책과 무목유서가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는 힘없이 또 이런 말을 했어요. <조왕야께 내가 직접 아가씨를 비(妃)로 삼겠다고 했다고 그러시오. 그러면 일생의 부귀영화가 끝이 없을 줄 아오.> 저는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왜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하오?> 그래도 저는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그의 몸에 독이 더 퍼지기만을 기다렸죠. 그가 수족을 못쓰면 그의 면전에서 그 책을 한장 한장 찢어 버릴 결심을 하고 있었거든요. 육체적인 고통도 받아야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아니, 어째서 그토록 악독하오? 그가 아무리 잘못했다 해도 그건 너무 지나쳐요.]
목염자가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아이고 아깝게 됐구나.]
황용의 낮은 말소리였다.
[아깝다니요? 그 악한 자가 죽는데 뭐가 아깝다고 그러세요?]
남금이 차디차게 쏘아붙였다.
[저는 사람이 아깝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아깝다고 한 거예요.]
황용이 해명을 하자 남금은 다시 말을 이었다.
[밤새도록 고통을 겪고 새벽이 되자 그는 물을 찾는 거예요. 저는 물 한 사발을 따라 침상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 놓았지요. <여기 물이 있어요> 하고 말하니 그가 손을 뻗어 물그릇을 잡으려 하더군요. 저는 탁자를 좀 멀리 밀어 놓았어요. 그는 몸부림치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더군요. <물, 물, 물 한 모금만 주오.> <가져다 자시구려.> 그는 온몸의 힘을 다 모아 물사발을 쥐기는 했지만 팔이 뻣뻣하게 굳어 구부러지지 않았어요. 물사발이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죠. 저는 그가 맥이 풀린 걸 알았지요. 곧 책을 들고 그의 면전으로 다가갔어요. <뭐, 이걸 조왕부로 보내 달라구요? 그래요, 자세히 구경이나 하세요.> 저는 책을 한 장씩 뜯어내 조각조각 찢기 시작했어요. <네.... 네가.> 그는 무척이나 놀라더군요. 저는 계속 한장 한장 찢어 나가다 그가 정신을 잃으면 멈추고 그가 다시 눈을 뜨면 또 찢었지요. 이렇게 십여 장을 찢었습니다. 그는 비록 눈을 감고 있어 보지는 않았지만 책 찢는 소리는 듣고 있는 게 틀림없었어요. 그래 저는 한장 또 한장 찢었지요.]
그녀 혼자 말을 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었다. 세 사람의 표정이 모두 야릇했다. 양강이 거의 죽어 가며 침상 위에 누워 있고 남금이 그 앞에서 책을 찢는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했다.
[이때 갑자기 그는 뭔가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어요. 먼 곳의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요. 저도 찢던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보니 먼데서 사람의 말소리와 발소리가 들려 왔어요. 그자는 죽어 가는 마당에도 어찌나 교활한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흉물을 떨더군요. <물, 물, 물 좀 주오.> 사람들 말소리가 가까이 들리더니 마침내 농가앞에서 들려 오더군요. <빌어먹을, 그 연놈이 틀림없이 신산자의 집에 숨어 있을 거야.> <내 말대로 그냥 그녀의 집에 불을 지르자니까 왜 말들을 안 들어.> <그건 그럴 수 없지. 만약 불을 질렀는데 그 신산자가 타 죽지 않고 살아 남는다면 우리 철장방의 크나큰 화근이야.> 이건 그들이 밖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들이었어요. 저는 철장방의 인마임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만약 그들이 들어와 이 악한을 구해 주면 어쩌나 했지요. 철장방에서는 많은 독충을 기르고 있으니까 뱀의 독을 제거하는 방법도 알고 있지 않겠어요? 저는 방바닥에서 깨진 물그릇 조각을 재빨리 주워 들었어요. 만약 방중 사람들이 집 안으로 몰려 들어오면 우선 이자를 처치해 놓고 자결할 결심을 했지요. 저는 혹시 그가 소리를 지르지나 않을까 해서 그의 옷으로 입을 틀어막고 깨진 그릇 조각을 그의 목에 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자가 재수가 좋았던지 철장방 인마는 그냥 그 농가를 지나가 버리더군요. 잠시 후 저는 그의 입을 틀어막았던 옷을 빼주고 다시 책을 찢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농가 대문을 밀고 들어오더군요. 그 집 부부는 벌써 밭으로 일을 나간 뒤라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살짝 문틈으로 내다보니 일고여덟 명의 남자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있는 것 하며 앞에 선 사람 하나가 장대로 땅바닥을 톡톡 쳐보는 품이 모두들 장님이더군요. 옷이 더럽기 짝이 없는데 그래도 그들이 흰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알겠더군요.]
[노독물의 사노들이에요.]
황용이 말참견을 해도 남금은 곽정만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날 은인과 제가 숲 속에서 혈조를 잡고 있을 때 혈조에 눈을 쪼여 장님이 되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어요. 저는 급히 그의 입을 또 틀어막았어요. 사노 가운데 우두머리 격인 사람이 나서서 <남은 밥이나 찬이 있거든 이 불쌍한 소경에게 주십시오> 하더군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는 인기척이 없자 일행들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여긴 사람이 없지 않은가? 우리끼리 찾아 먹도록 하세.> 저는 그들이 집 안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 좋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침을 하며 방문을 열었지요.<누구세요?> 사노들도 깜짝 놀라더군요. <밥과 찬 좀 얻어먹으려고 들어왔습니다.> 그중 한 명이 품속에서 은전을 꺼내 놓더군요. <저희가 돈이 있으니 파셔도 좋습니다.> <다들 앉으세요. 제가 식사를 대접하겠어요.> 저는 그들을 한시라도 빨리 보내고 싶어 부엌으로 들어가 밥 한솥을 지어 그들에게 먹였어요. 그들이 막 식사를 끝내고 가려고 하는데 옆방의 그자가 큰소리를 질렀어요. 제가 급히 방으로 들어가 보니 그는 몸을 침상에 기대고 앉아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온몸을 부르르 떠는데 몹시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요. <구양공자, 구양공자가!> 그는 벌벌 떨며 외마디소리를 질러댔어요. 저도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구양공자가 누군지 알기나 했나요. 혹시 사노들이 들으면 무슨 변고나 생기지 않을까 해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의 머리에 뒤집어씌웠지요. 그런데 그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저를 밀어 바닥에 쓰러뜨리고 계속 소리만 지르는 거예요. <구양공자,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머지 세 사람은 양강이 철창 끝으로 구양공자를 찔러 죽이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남금의 이 말을 듣자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황용은 본래 두 여자 사이에 끼여 앉아 있다가 구양공자의 혼백이 양강을 죽이려고 나타난 것 같은 환각에 섬뜩해져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곽정 옆에 기대어 앉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으랴만 당시 양강은 독사에 물려 정신이 혼미해진 터라 구양공자를 살해하던 광경이 떠올라 그가 자기 앞에 나타나 목을 누르려고 손을 뻗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을 법도 했다.
남금은 황용과 곽정이 이토록 친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그가 큰소리로 구양공자를 부르자 옆방에 있던 사노들이 듣고 분연히 일어나 너나없이 중얼거리더군요.<공자님, 공자님, 어디 계십니까?> 저는 일이 탄로나는 줄 알았어요. 사노들의 표정을 보니 그 구양공자인가 하는 사람을 찾는 것 같더군요. 저는 일이 묘하게 벌어진다고 느끼고 방안이 어수선한 틈을 타 슬그머니 빠져 나왔어요. 어찌 된 일인지 죽고 싶다는 생각도 잊어버리고 그들에게 잡히면 큰일날 것 같아 죽자 하고 앞을 향해 뛰기만 했지요. 그런데 그게 신의 뜻이었는지 마침내 목언니가 계신 그 절까지 가게 되었답니다. 저는 목언니가 열이 나서 심하게 앓는 것을 보고 그냥 거기 남아 보살펴 드리게 되었어요. 그날 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 묘책이 없을 것 같아 저도 목언니가 한 대로 그곳의 제자로 받아 달라고 간청하여 비구니가 되었지요. 이틀이 지나 목언니는 열이 내리고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어요.]
[그래 그 뒤에 어떻게 되었어요?]
목염자가 느닷없이 끼여들며 초조하게 물었다.
[어떻게 되다니요? 물론 죽었겠지요.]
[내...., 내가 가서 봐야지.]
목염자는 벌떡 일어나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앞을 향해 내달렸다.
[언니, 언니!]
황용이 소리쳐 불렀지만 목염자는 듣지 못했는지 그냥 달리기만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양강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변치 않았음을 보고 모두 한숨을 쉬었다. 남금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인, 지나간 일들은 모두 말씀드렸어요. 하늘이 그래도 저를 불쌍히 여겨 은인을 다시 한 번 뵙도록 해주셨군요.]
그녀는 품속에서 그날 찢다 남긴 책을 꺼내 곽정에게 넘겨주었다.
[이 책은 제가 십여 장을 찢어 버렸습니다. 저는 안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도 몰라요. 그 양가 녀석이 보배처럼 다룬 것을 보면 혹시 은인께 소용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드릴 테니 알아서 처리하세요.]
곽정은 받아 들자마자 펴보지도 않고 그냥 품속에 챙겨 넣었다.
[그래 장차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이미 은인을 만나 뵈었으니 어디로 가나 마찬가지지요. 철장방에서 은인과 황소저에게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세요.]
남금은 하릴없이 먼 산만 바라보며 쓸쓸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 벙어리 사공이 철장방 사람이란 걸 아셨어요?]
황용이 대뜸 물었다.
[저를 대바구니에 넣어 양강에게 보낸 사람이 바로 그자예요.]
황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공을 처리할 방법을 강구했다.
[목언니의 열이 내린 후 우리 둘은 동쪽으로 가보자고 상의를 했어요. 그런데 피진주루에서 뜻밖에도 두 분과 그 벙어리 사공을 만나게 되었군요. 어쩌면 하늘이 악한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이런 인연을 만들어 주셨는지도 몰라요.]
남금은 말을 마치자 황용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이어 곽정에게도 사뿐히 절을 했다.
[소녀는 이제 그만 하직하겠습니다. 은인께서는 백세토록 무병 장수하시고 만사 여의(如意)하시길 빌겠습니다.]
곽정은 급히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기만 했다.
[남금 언니, 언니도 집이 없으신데 차라리 우리와 함께 강남으로 가요.]
황용이 권했지만 남금은 살래살래 머리를 저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사시던 숲 속으로 가겠어요.]
[무슨 재미가 있다고 혼자 거기를 가시려고 해요?]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혼자 살라는 팔자인가 봐요.]
황용은 곽정을 한 번 바라보고 입을 다물었다. 남금도 곽정을 한 번 건너다보고 서서히 몸을 돌려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곽정은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서 있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가씨, 잠깐만!]
남금은 그의 말을 듣고 멈추기는 했지만 여전히 등을 돌린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만일 또 못된 사람이 해치려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남금은 고개를 떨구고 조그맣게 말했다.
[난세의 약한 여자이니 모든 걸 팔자 소관으로 돌릴 수밖에 없겠지요.]
[제가 간단한 무공을 하나 전수해 드릴게요. 부지런히 익혀 잊지만 않으면 남자 서너 명은 쉽게 당해 낼 수 있을 겁니다.]
남금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하지요. 은인의 분부시니 배우겠습니다.]
곽정은 뜻밖에도 그녀가 반가워하는 내색을 않자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몽고의 사막에서 단양자 마옥한테 배웠던 내공심법을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워낙 총명한 남금이라 금방 배워 익히게 되었다.
[이 무공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 그 위력을 알게 됩니다. 아가씨가 무예는 모르시지만 계속 연습하면 앞으로 주먹이나 발을 아무렇게나 써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남금은 묵묵부답, 다시 절을 하고는 그냥 떠나갔다.
황용은 멀리 사라져 가는 그녀를 보며 곽정을 향해 웃었다.
[훌륭한 제자를 두시게 되었으니 축하해요.]
[무슨 소리...., 난 그냥 그녀가 다시는 나쁜 사람의 수모를 받지 말라는 뜻으로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
[그건 그래요. 그 정도 배웠으면 또다시 욕을 보지는 않을 거예요.]
[정말 난세야 난세. 사람이 개만도 못한 세상이니 한심스럽군.]
곽정이 세상을 한탄하며 혀를 찼다.
[우리 그 벙어리 개나 잡으러 가요.]
황용이 느닷없이 서두르자 곽정은 어리벙벙했다.
[벙어리 개라니?]
황용은 벙어리 시늉을 하며 한바탕 손짓 발짓을 해 보였다.
[아니, 그 벙어리 사공의 배를 타잔 말인가?]
[물론이죠. 구천인 영감이 나를 어찌나 호되게 때렸는지 분풀이를 해야겠어요. 그 영감을 이길 재간이 없으니 수하의 악당이라도 몇 놈 죽여야 속이 풀릴 것 같아요.]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주점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벙어리 사공이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다가 두 사람이 돌아오자 회색이 만면해서 다가왔다.
곽정과 황용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그의 뒤를 따라 나루터로 나가 배에 올랐다. 원강(沅江)에 흔히 떠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배였다. 상당히 많은 양의 쌀이 실린 그 배 안에는 젊은 사공 두 명이 윗옷을 벗어부친 채 갑판을 닦고 있었다. 곽정과 황용이 배에 오르자 사공은 닻을 올리고 배를 강심으로 몰고 들어가 돛을 올렸다. 때마침 남풍이 적당히 불어 배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부드럽게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곽정은 양강이 비명에 죽어 간 일과 목염자와 남금의 처량한 신세를 생각하면서 뱃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한숨을 쉬었다.
[곽정 오빠, 진소저가 오빠에게 드린 책 좀 보여 주세요. 어째서 그 책이 무목의 유서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용아가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잊을 뻔했군.]
곽정이 품속에서 책을 꺼내 건네 주었다. 황용은 한장 한장 들쳐 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 그랬구나. 오빠, 이리 와 이것 좀 보세요.]
곽정은 몸을 움직여 그녀 옆으로 가서 책을 들여다보았다. 마침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아 빠알간 노을이 수면을 비추고 물결은 다시 그 노을을 황용의 얼굴과 옷, 책에 반사하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둘 다 워낙 대담한 사람들이라 적선(敵船)에 타고 있으면서도 태연자약하게 열심히 책장만 넘겼다.
이 책은 원래 철장방 제 22대 방주인 상관검남(上官劍南)이 쓴 것으로 철장방 역대의 대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상관검남은 원래 한세충 휘하의 장령이었다. 진회(奏檜)가 대권을 잡은 후 악비는 살해되었고 한세충은 병권을 박탈당해 항주의 서호 부근에 은거해 살고 있었다. 그의 부하였던 관병들도 대다수 갑옷을 뺏기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상관검남은 간신들이 정권을 잡은 데 분노하여 한떼의 무리를 이끌고 형양(荊襄)으로 가 도둑이 되었다가 후에 칠장방에 들어갔다. 철장방은 본래 평범한 무리에 불과했으나 그가 워낙 정성을 기울이는 바람에 영웅 호한과 충의 지사가 풍문을 듣고 몰려들었다. 그리고 몇 년이 못 가 강호에서 북방의 개방과 비슷한 규모로 성장했다.
상관검남은 충의로운 인물이라 비록 몸은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나라를 구하고 국토를 회복할 생각에 골몰하여 항상 수하 사람들을 임안으로 파견하여 시기를 염탐했다. 뒤에 송나라 고종이 효종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기는 태상황이 되었다. 효종은 악비가 진충보국하다가 억울하게 살해되었음을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다가 그의 유해를 중안교(衆安橋)에서 서호로 옮겨 융숭하게 안장하고 거기에 사당을 지었다. 악비의 의관과 유물은 모두 궁중으로 옮겨졌다. 이장을 하던 날 악비의 옛 부하와 충성스런 호한들이 밤을 이용해 분묘에 와 제사를 지냈다. 이들 중에 철장방에서 임안에 파견한 방중이 악비의 유물 가운데 병서가 한 권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 소식을 즉시 철장방에 전달했다. 상관검남은 방중의 고수를 불러모아 밤중에 궁중으로 숨어 들어가 그 무목의 유서를 훔쳐낸 즉시 옛 주인이었던 한세충에게 보였다.
이때 한세충은 이미 늙어 부인인 양홍옥(梁紅玉)과 더불어 서호가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상관검남이 보내 온 이 무목의 유서를 보다가 억울하게 죽어 간 영웅을 생각하고 칼을 들어 책상 모서리를 쳐부수며 장탄식을 했다. 그는 엣 친구를 기념하기 위해 악비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시며 서찰, 상소문 등을 묶어 책을 한 권 펴냈다. 그리고 그 책을 상관검남에게 주면서 악무목의 유지를 받들어 중원의 호걸을 모아 이민족을 내쫓고 금수강산을 되찾으라고 당부했다. 악비의 병서는 구구절절이 충의보국을 강조하려는 뜻으로 쓴 것이지 그냥 묘지에 가지고 들어가기 위해서 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진회가 워낙 철저하게 방비를 하는 바람에 밖으로 유출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악무목의 용병이 신출귀몰하니 틀림없이 어떤 국토 회복의 대책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세충은 정작 악무목이 전달하고 싶었던 사람은 띠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소식을 늦게 듣고 다시 궁중으로 가지러 온다면 공연히 헛수고만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철장산의 도형을 그려 이중으로 된 상자 속에 종이 한 장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그 종이에는 <무목유서(武穆遺書) 재철장산(在鐵掌山) 중지봉상(中指峯上) 제이지절(弟二指節)>이란 16자를 남겼다. 한세충은 혹시 뒷사람이 알지 못할까 염려해 다시 그림 위에 악비의 옛 시를 적어 놓았다. 이 병서를 입수하는 사람은 무목의 자제 아니면 그의 옛 부하일 테니 자연 이 시를 알아보고 이 그림에 대해 상세히 연구를 할 것이다.
상관검남은 철장산에 들어오자 군웅 대회를 열고 북벌을 획책했다. 그러나 조정은 금나라가 무서워 협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사를 파견해 철장방 토벌을 감행했다. 철장방에 영웅이 많다고는 하지만 역시 중과부적이요, 설상가상으로 금나라도 지원병을 파견해 측면 공격을 하는 바람에 산채는 대파되었다. 상관검남은 중상을 입고 철장봉 위에서 죽었다.
이 책의 뒷부분 몇 장은 꼬불꼬불한 글씨로 씌어 있었다. 아마도 상관검남이 부상을 입은 뒤에 쓴 것 같았다. 나머지 마지막 몇 장은 남금이 찢는 바람에 없어져 버렸다. 곽정은 끝까지 다 보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철장방에도 이처럼 충의롭고 애국하는 호한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걸. 죽을 때까지도 이 유서를 꼭 잡고 있었다니 말이야. 나는 그냥 구씨 형제와 같은 사람으로서 금나라와 야합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영화나 구하는 그런 위인으로 알고 무시했지. 진작 알았더라면 유골에 대고 절이라도 하는 건데 아무래도 잘못했는걸.]
이렇게 말을 하는 사이에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사공이 배를 농가가 있는 마을에 댄 뒤 닭을 잡고 밥을 지었지만 황용은 혹시 독약이라도 넣지 않았을까 싶어 깨끗하지 못하다는 핑계를 대고 닭과 채소롤 들고 부근 농가로 들어가 따로 밥을 지어 먹었다. 사공은 눈을 부릅뜨고 부르르 화를 냈지만 벙어리 행세를 하는 바람에 말로 분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둘은 농가 앞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아 바람을 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곽정 오빠, 진씨 언니가 찢어 버린 뒷장에는 무슨 말이 씌어 있었을까? 구천리와 양강 두 사람만 그걸 보았는데 둘 다 떠나 버렸으니 알 수가 없겠지요?]
[구천리가 이 책을 보고도 무목유서를 가지지 않았으니 무슨 까닭일까?]
[아마 우리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에 다른 한 권을 가질 시간이 없었을 거예요. 어쩌면 십여 장 가운데 중요한 것이 있어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는지도 모르구요.]
곽정이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런데 상관 방주가 철장봉으로 달아났는데 왜 관병이 쫓아가 잡지 못했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요. 찢어 없어진 십여 장을 보아야만 의문이 풀릴 것 같아요.]
이렇게 말을 하다가 황용이 갑자기 낄낄거렸다.
[진씨 언니가 책을 찢어 버리지 않고 양강의 말대로 그냥 완안열에게 전해 주었어야 일이 재미있게 되는데 그랬어요.]
그녀는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옳지 ! ]
[왜 그래?]
[우리가 이 책을 완안열에게 보내요. 그럼 그는 틀림없이 사람들을 데리고 철장산으로 무목유서를 가지러 갈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되면 중지봉은 철장방 성지이니까 구천인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흐호, 서로 치고 받고 한다면 그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곽정도 역시 박장대소하며 좋다고 했다.
[곡령풍 곡사형께서 부지불식간에 큰 공을 세웠군요.]
곽정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이 무목유서가 본래는 대내의 취한당 옆에 있는 폭포 속의 석굴에 간직되어 있었는데 상관검남이 책을 훔쳐냈으니 물론 그 그림도 책을 숨겨 두었던 곳에 놔두지 않았겠어요? 그렇지요?]
[그건 옳아.]
[우리 곡사형은 도화도에서 쫓겨난 뒤에도 여전히 사문에 미련을 두고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림과 글씨와 골동품을 좋아하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구요. 그런데 천하의 보물이란 보물은 거의 황궁 안에 있잖아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궁에 들어가 적지 않은 명화와 서화를 훔쳐낸 거지요.]
[그래, 곡사형은 이 그림을 다른 그림과 함께 훔쳐다가 우가촌의 밀실에 숨겨 놓았다 용아 아버지께 보내 드리려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궁중 시위에게 살해된 것이 분명해. 그러니 완안열이 황궁에 갔을 때 무목유서만 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이 그림조차 없었던 거야. 진작 그런 줄 알았더라면 우리가 폭포 안에 있는 석굴 속에서 그렇게까지 결사적으로 막을 필요도 없었을 게고, 또 내가 노독물에게 맞아 중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용아도 칠일 낮 칠일 밤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건 그렇지 않아요. 만약 오빠가 우가촌 밀실에서 치료를 받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또 어떻게.....]
황용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우가촌에서 화쟁 공주와 만났던 일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속에 그늘이 지며 서글퍼졌다. 황용은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얼었다.
[아버지께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군요.]
황용은 고개를 들어 초생달을 바라보며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팔월 추석이 머지않았군요. 가홍 연우루에서 대결이 끝나면 오빠는 곧 몽고의 사막으로 돌아가시나요?]
[아니, 우선 완안열을 죽여 아버지와 양숙부님의 원수부터 갚아야지]
[그를 죽인 뒤에는요?]
[그래도 할 일이 많아. 사부님도 치료해 드려야 하고 또 주사형이 흑소로 영고를 찾아가시도록 해야지.]
[그 일이 끝나면 아무래도 오빠는 몽고로 돌아가시겠지요?]
곽정은 말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어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기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황용이 갑자기 웃었다.
[난 정말 바보야. 지금 이런 걸 생각해 뭘 하려고 그러지? 오빠와 함께 있을 때 일각이라도 더 즐기면 그뿐인걸. 이렇게 좋은 날들이 자꾸만 하루하루 적어져 가는군요. 우리 배로 돌아가요. 그 벙어리 사공이나 골탕을 먹여 심심풀이나 해야겠어요.]
두 사람이 배로 돌아오니 사공과 두 젊은이는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곽정이 황용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먼저 자도록 해. 내 지키고 있을테니까.]
황용은 부상을 치료한 뒤라 미처 원기가 회복되지 않아 확실히 피곤했다. 곽정의 다리를 베고 눕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 곽정은 단정히 앉아 연공을 하고 싶었으나 사공에게 의심을 살까 봐 비스듬히 기댄 채 일등대사가 《구음진경》 가운데 천축 말(梵文)로 된 내공을 번역해 준 것을 하나하나 마음속으로 연습했다. 한 시간쯤 이렇게 연습을 했을까, 피곤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원기왕성해지며 사지에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때 황용이 꿈을 꾸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곽정 오빠! 그 몽고 공주를 아내로 맞지 마세요. 제가 오빠에게 시집가겠어요.]
곽정은 어리둥절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맸다.
[아냐 아냐,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전 아무것도 오빠에게 바라지 않을래요. 오빠가 마음속으로 저를 좋아하고 계신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전 얼마든지 행복해요.]
[용아 용아!]
곽정이 그녀의 귀에 대고 다정하게 불러 보았지만 황용은 가볍게 코틀 골 뿐 아무 대꾸도 없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잠꼬대를 한 것이다.
第 五 卷. 第 十 章.(通卷 章). 영고의 원한
곽정은 황용이 사랑스럽고도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은은한 달빛이 황용의 얼굴을 비추었다. 중상을 치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혈색이 말이 아니었다. 곽정은 오랫동안 황용의 얼굴을 지켜 보았다. 미간을 살짝 찡그린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꿈속에서까지 우리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구나. 종일 근심 걱정 없이 꽃처럼 웃고 지내면서도 마음속으론 고민을 하고 있었군. 당시 장자구에서 서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민은 없었을 텐데.)
한 사람은 꿈속에서 고민을 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수심에 잠겨 있었다. 이때 갑자기 요란한 물 소리가 들려 눈길을 돌리니 배 한 척이 상류에서부터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 강은 물살이 세고 돌이 많아 위험한데 도대체 무슨 배길래 대담하게 밤에 다닐까?)
곽정이 이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는데 자기가 탄 배의 고물에서 누군가가 세 번 손뼉을 치는 소리가 둘렸다. 손뼉 소리가 나직하기는 했지만 조용한 밤이라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이어서 돛과 노를 거두는 소리가 들리며 강심에서 내려가던 배가 오른쪽 언덕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가 싶더니 잠시 후에는 벌써 곽정이 탄 배와 나란한 위치에 있었다.
곽정은 잠든 황용을 가볍게 혼들어 깨우고는 배가 살짝 흔들리자 배에 늘어뜨린 거적을 들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이쪽 배에서 저쪽 배로 뛰어넘어갔다. 몸놀림이 빙어리 행세를 하던 사공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일단 건너가 보고 올 테니 여기 있어.]
곽정이 낮게 소곤거리자 황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곽정은 몸을 숙이고 뱃머리를 향해 기어가 저쪽 배가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가볍게 몸을 솟구쳐 돛대를 가로지른 도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곳은 배의 한가운데라 좌우로 흔들림이 없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선창에 철장방 옷차림인 검은 옷을 입은 사람 셋이 서 있었다. 그 가운데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한 사람이 바로 전에 황용에게 참패를 당했던 패장 현배망 교태였다. 곽정의 몸놀림이 워낙 빨라 벙어리 사공이 그보다 먼저 이쪽 배로 뛰어올랐지만 이제야 겨우 선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연놈들이 그냥 있느냐?]
[네!]
교태의 질문에 벙어리 사공이 대답했다.
[무슨 눈치라도 챈 듯싶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연놈들이 배 위에서는 음식을 들지 않으려 하는 바람에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흥, 그래? 여하튼 연놈들이 청룡탄(靑龍灘)에서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모레 정오 너희 배가 청룡탄을 지나 일 리쯤 떨어진 청룡집(靑龍集)에 이르거든 고물의 키를 부숴 버리고 기다리거라. 그러면 우리가 즉시 접응하겠다.]
벙어리 사공이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 연놈들의 무공이 대단하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일이 성공하면 방주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이다. 되돌아가 그들이 눈치채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라!]
[교채주님, 다른 분부는 없으십니까?]
교태가 없다고 손을 흔들자 벙어리 사공은 다시 한 번 절을 한 뒤 뱃전으로 내려서서 살그머니 헤엄쳐 돌아갔다.
곽정은 돛대에 두 발을 버티고 몸을 솟구쳐 타고 있던 배로 돌아와 방금 들은 얘기를 황용에게 들려주었다. 황용은 냉소를 머금었다.
[일등대사가 계신 곳의 그 급류도 올라갔던 우린데 청룡탄이고 백호탄이고 무서울 게 뭐 있어요? 우리 잠이나 자요.]
적의 음모를 알고 있기에 둘의 마음은 오히려 태평해졌다. 이틀째 되던 날 아침 사공이 닻을 올리고 배를 막 출범시키려고 하는데 황용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 우선 말을 언덕으로 끌어올려요. 자칫 잘못해 청룡탄에서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공연히 말만 잃게 되거든요.]
벙어리 사공은 모르는 체했지만 마음은 뜨끔했다. 황용도 사공은 더 거들떠보지 않고 곽정과 함께 말을 언덕으로 끌어올렸다.
[용아, 공연히 그들을 데리고 장난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배에서 내려 말이나 타고 그냥 가도록 하자.]
[그건 왜요?]
[철장방 소인배들과 뭘 겨룰 게 있겠니? 우리 둘이 함께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텐데.....]
[그래 정말 우리가 한평생 함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곽정은 할말이 없었다. 황용이 홍마의 고삐를 풀어 주고 북으로 뚫린 길을 가리켰다. 홍마는 몇 차례나 주인과 떨어져 보았지만 워낙 영특해서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 또 주인과 잠시 헤어져야 하는 걸 알고는 내처 북쪽을 향해 달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 배로 돌아가요.]
황용이 손을 털며 말을 꺼내자 곽정이 머뭇거렸다.
[용아, 몸도 채 회복되지 않았는데 뭣 때문에 또 위험한 일을 벌이려고 그래?]
[오고 싶지 않거든 그만두세요.]
황용은 한마디 툭 내뱉고는 비스듬한 언덕을 내려가 혼자 배 위에 올랐다. 곽정은 어쩔 수 없이 그녀 뒤를 따랐다.
[오빤 바보예요. 우리 둘이 있을 때 기괴한 일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겪으면 혜어진 후에도 추억이 많을 테니 좋지 않겠어요?]
그 배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흘러갔다. 청룡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원강 양쪽에 있는 산들이 갈수록 험준해 보였다.
두 사람은 뱃머리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상행하는 배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이 닻졸을 잡아 끌어올리고 있었다. 큰 배를 끄는 사람은 수십 명이요, 작은 배도 여덟 명 남짓 되었다. 닻줄을 끄는 인부들은 이마가 거의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인 채 한발 한발 움직였다. 급류에 휩쓸려 배들은 거의 못이라도 박아 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인부들은 모두 흰 천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상체는 벗은 채라 구릿빛 피부가 햇빛에 반짝였다. 입으로는 기운을 돋우느라 <이영차 이영차> 소리를 질렀다. 이쪽에서 <이영차> 하면 저쪽에서도 <이영차> 하며 맞받아 그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하행하는 배들은 순류(順流)를 따라 질주하는 바람에 보이는가 하면 어느덧 사라져 없어졌다.
곽정은 이와 같은 상황을 보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용아, 나는 원강의 물살이 거세다고는 해도 별걱정을 안 했는데 사정을 보니 보통 일이 아니로구나. 만약 배가 뒤집힌다면 어떻게 하지? 무슨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겠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그 벙어리 사공을 죽이고 배를 언덕에 대자.]
[그럼 재미가 없어요.]
황용이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자 곽정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아니 그럼 이 마당에 장난이나 하고 놀자는 거냐?]
[저는 언제나 장난꾸러기가 아니던가요?]
황용이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이며 웃었다. 곽정은 혼탁한 강물이 양쪽 산에 걸려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강물이 산모퉁이를 굽이쳐 돌자 멀찍이 강가에 있는 인가 십여 호가 보였다. 높고 낮은 집들이 산을 의지하고 앉아 있었다. 곽정과 황용이 탄 배는 급류를 타고 순식간에 인가 있는 곳에 당도했다. 언덕 위에는 장한들 수십 명이 강줄기를 따라 지키고 서 있다가 벙어리 사공이 닻줄을 던지자 장한들이 받아 얼레에 걸고 십여 명은 얼레를 감아 배를 언덕으로 끌었다.
이때 하류에서 또 배 한 척이 올라왔다. 아까 닻줄을 끌던 인부들이 이곳에 이르러 쉬는 것이다. 곽정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물 아래 물살은 아무래도 여기보다 더 세게 생겼는걸.)
이윽고 배가 언덕에 닿아 주변을 살펴보니 산의 낭떠러지 아래에도 이십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어젯밤 교룡이 나타나 산사태가 일어나고 물살이 세어졌으니 하행하는 선박은 모두 여기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언덕에 올라가 쉬도록 하시오!]
누군가가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황용이 옆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청룡집이란 곳입니다.]
황용이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며 벙어리 사공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언덕에 있는 험상궂은 장한 두 명에게 몇 번 손짓을 하더니 갑자기 도끼를 꺼내 닻줄을 끊고 다른 손으로 쇠로 만든 닻을 번쩍 치켜 올렸다. 닻을 올린 배는 갑자기 비스듬히 방향을 바꾸면서 급류에 휘말려 나는 듯 아래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언덕에 서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청룡집을 지나자 강바닥이 갑자기 아래로 기울어져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급류를 이루며 흘렀다. 벙어리 사공은 두 손으로 키를 움켜쥔 채 뚫어지도록 강심을 바라보았고 두 젊은 사공은 각기 긴 삿대를 잡고 있었다. 마치 급류의 예기치 않은 변화에 대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또 곽정과 황용의 습격으로부터 벙어리 사공을 호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곽정은 물살이 점점 급해지는 것을 보자 배가 금방이라도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위험을 느꼈다.
[용아, 키를 뺏아!]
곽정이 소리를 지르며 고물로 달려가자 젊은 두 사공이 삿대를 번쩍 치켜 들고 좌우 양쪽의 뱃전을 지켜 섰다. 원래 강철만을 두드려 만든 것이라 삿대 끝이 햇빛에 반사되자 눈이 부셔 제대로 뜨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곽정의 안중에 그들이 들어올 리 만무였다. 슬쩍 몸을 낮추며 오른편 뱃전으로 달려들었다.
[잠깐만요!]
황용이 외치는 소리에 곽정이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왜?]
[오빠는 수리를 잊으셨나요? 배가 부딪혀 부서져도 우리야 수리를 타고 날아가 버리면 될 텐데 제까짓 것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황용이 나직한 소리로 일러주자 곽정은 너무나 기뼜다.
(용아가 급류 가운데서도 태연자약하더니 그런 생각이 있어서 그랬군.)
곽정은 손을 흔들어 수리 두 마리를 자기 옆으로 불러들였다. 벙어리 사공은 곽정이 막 달려들려다 그만두자 그들이 다른 방도가 있어 그러는 줄은 모르고 다만 급류에 배가 흔들려 꼼짝할 수 없기 때문에 단념한 줄로 판단하고 은근히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귀가 멍멍하도록 요란한 물 소리에 섞여 먼 곳에서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순식간에 배 한 척이 물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돛대 위의 검은 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벙어리 사공은 이 배를 보자 날카로운 도끼를 번쩍 들어 키의 자루를 찍어 부러뜨리고는 왼쪽 뱃전에 서서 검은 기를 꽂은 배가 옆을 스칠 때 펄쩍 뛰어오를 태세를 취했다. 곽정은 그가 키를 부러뜨리자 수컷 수리의 등을 어루만졌다.
[자, 가자꾸나!]
[서두를 것 없어요.]
황용이 이렇게 만류했다.
[곽정 오빠, 쇠로 만든 닻을 던져 저 배를 부쉬 버려요.]
곽정은 황용이 시키는 대로 닻을 집어 들었다. 이때 곽정이 타고 있는 배는 키를 잃어 제멋대로 물결에 따라 흔들리며 검은 기를 꽂은 배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두 배 사이의 거리가 열 자 정도에 이르자 검은 기를 꽂은 배에서 키를 움직여 방향을 바꾸려고 했다. 배 위에 서 있던 사공과 닻졸을 감던 인부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순간 곽정은 있는 힘을 다하여 쇠로 만든 닻을 던졌다. 닻이 날아가 검은 기를 꽂은 배로 떨어지며 그 배의 닻을 매어 다는 나무에 맞았다. 그 나무는 배를 끄는 동아즐에 꽁꽁 묶여 활처럼 휘어져 있던 차라 쇠닻에 맞자 우지끈 소리를 내며 두 토막으로 분질러졌다. 닻줄 감는 수십 명의 인부들이 때마침 있는 힘을 다해 배를 끌고 있다가 나무가 부러지는 바람에 모두들 코방아를 찧으며 앞으로 넘어졌다. 배는 줄 끊어진 연이 되어 빙그르르 맴을 돌며 아래로 떠내려갔다. 뭇사람들이 놀라 외치는 소리가 물 소리에 섞여 산골짝을 울렸다.
벙어리 사공은 뜻밖의 사태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보세요,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벙어리 사공이 이렇게 외치자 황용이 그를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벙어리가 말을 하다니 천하의 기문이로군.]
곽정이 내던진 닻말고도 또 하나가 근처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저쪽 배가 점점 뱃머리를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보였다. 이런 세찬 물살속에서도 키를 움직여 방향을 돌릴 수 있다니 키를 잡은 사람의 솜씨가 보통이 아닌 둣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시며 두 손으로 닻을 들어 몇 번 훠두르다가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저쪽 배의 키를 향해 또 한 번 집어 던졌다. 이제 키 자루가 맞아 부러지면 양쪽 배가 모두 끝장이 날 판이었다. 이때 갑자기 저쪽 배 선창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오며 긴 삿대를 번쩍 들어 획 하고 내던지자 삿대가 마치 구멍에서 나온 뱀처럼 쇠닻에 찰싹 붙었다. 저쪽의 삿대가 구부러지다가 중간이 부러져 나갔다. 그러나 쇠닻도 삿대에 걸려 비스듬히 기울다 반 토막 남은 삿대와 함께 물방울을 튀기며 물 속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삿대를 쥐고 흔든 사람은 황갈색 옷을 걸치고 흰 수염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몹시 흔들리는 뱃머리에 서서도 기우뚱거리는 법 없이 위풍당당한 것이 바로 철장방 방주인 구천인이었다.
곽정과 황용은 그가 갑자기 나타나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와드득 소리와 함께 뱃머리가 바위에 부딪혔다. 어찌나 진동이 컸던지 두 사람의 몸이 날아가 뒤에 있는 선창 문에 맞고 떨어졌다. 곧바로 강물이 종아리까지 차왔다. 이제는 수리를 타고 날아오르기에도 이미 늦었다. 워낙 다급한 순간이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곽정은 허공을 향해 몸을 날리며 황용에게 말했다.
[나를 따르거라.]
곽정은 비룡재천의 솜씨를 발휘해 구천인을 혼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추호의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적선의 다른 곳에 떨어진다면 구천인은 그가 미처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대들어 역습을 감행할 것이 뻔했고 일단 그의 공력에 걸려들기만 하면 곽정으로서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머리로 그를 받아 기선을 잡는다면 그 사이 방어하는 틈을 이용해 적선에 안전하게 내려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천인도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삿대를 흔들어 공중에서 곽정을 향해 몇 번이나 찔렀다. 삿대가 어디서부터 찔러 오는지 모르게 상대를 교란시키는 장팔사모(丈八蛇矛)의 묘기였다.
(야단났구나!)
곽정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팔을 뻗어 삿대 끝을 막고 계속 적선에 내려서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팔을 들어 막는 바람에 비룡재천의 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구천인은 삿대를 버리고 쌍장을 모아 곽정의 가슴을 쳤다. 그런데 삿대가 미처 뱃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공중에서 갑자기 죽장이 날아와 삿대를 막으며 순식간에 구천인을 향해 세 번이나 살수를 썼다. 구천인은 하마터면 왼쪽 눈을 죽장에 찔릴 뻔 했다. 황용이 공중에서 구천인을 공격한 것이다. 이 틈에 곽정이 벌써 고물에 내려서서는 협공을 했다. 구천인은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옆으로 돌려 죽장을 피하며 다리를 들어 곽정을 밀어 차고는 휙휙 쌍장을 날렸다. 이 철장방의 장법은 보통이 아니다. 철장방이 방을 세운 후 수백 년 동안 중원에 위명을 날리게 된 것도 모두 이 장법 덕택이었다. 상관검남과 구천인에 이르러 더욱 오묘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그 위력이 비록 항룡십팔장에 미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장법의 오묘함만은 항룡십팔장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두 사람은 내심 상대를 두려워하면서도 눈 깜짝할 사이에 7,8초의 대결을 했다. 요란한 물소리가 울려 퍼지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기합 소리를 삼키지는 못했다.
이때 철장방 사람 중 한 사람이 키를 꽉 잡고 있었다. 벙어리 사공이 타고 있던 배는 두 토막으로 부러져 선반이며 돛이 이리 부러지고 저리 찢겨 말이 아니었다. 벙어리와 두 젊은 사공은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휩쓸려 빙글빙글 맴돌며 한사코 헤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물살에 밀려 깊은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그러나 검은 깃발을 단 그 배는 여전히 물결을 따라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황용은 고물에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무섭게 휘도는 소용돌이를 바라보았다. 수리 두 마리와 혈조가 공중을 맴돌며 울부짖었다. 황용은 죽장을 번쩍 들어 배 위에 있는 방중 몇 명을 고물 쪽으로 쫓아 버리고 몸을 돌려 곽정을 도와 구천인과 대결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선실에서 칼을 들어 뭔가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황용은 그가 뭘 내려치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왼손을 번쩍 들어 금침을 날렸다. 금침은 정확히 그자의 팔에 가 꽂혔다. 이렇게 되자 그자는 아픔을 못 견뎌 스르르 칼을 놓치고 말았다. 한데 그 칼이 그의 오른쪽 다리에 찍혀 그자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황용은 그 틈을 타 번개처럼 몸을 날려 선실로 들어가며 그자를 걷어 찼다. 놀랍게도 선실 바닥에는 누군가가 손발을 묶인 채 옴짝달싹하지못하고 누워 있었다.
눈을 반짝거리며 황용을 쳐다보는 사람은 바로 신산자 영고였다. 황용은 이곳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영고의 목숨을 구해 주게 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황용은 선실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그녀를 묶은 오랏줄을 풀어 주었다. 영고는 손이 풀리자마자 금나수로 황용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순식간에 칼날을 번쩍이며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검은 옷의 장한을 죽여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허리를 숙여 발을 묶은 끈을 풀었다. 황용이 죽어 넘어진 자를 살펴보니 다름 아닌 현배망 교태였다.
(네놈이 워낙 나쁜 짓만 하더니 잘 죽었구나.)
[비록 내 생명을 구해 주기는 했지만 보답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영고가 냉랭하게 쏘아붙였지만 황용은 상관없다는 듯 웃었다.
[누가 보답을 하라고 합디까? 나를 한 번 구해 주었으니 오늘 나도 한 번 구해 준 것뿐이에요. 피차 셈을 끝냈으니 피장파장이로군요.]
황용은 이렇게 말하며 선실을 나와 고물로 달려가 곽정을 도왔다.
구천인은 앞뒤로 적을 맞아 수장에 힘을 주며 용케 버텨 나가고 있었다. 배 위에서는 어이쿠 하는 비명과 물에 빠지는 풍덩풍덩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영고가 칼을 가지고 배 위에 있는 방중을 닥치는 대로 하나하나 처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아무리 헤엄을 잘 친다 하더라도이 급류 속에서 빠져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구천인을 모두 <철장수상표>라 부르기는 하지만 이 수상표(水上飄)라는 세 글자는 다만 그의 경공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표현일 뿐 이 격류 속에서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구천인은 곽정만을 대장(對掌)할 때는 상풍의 위치에 있었는데 황용이 타구봉법으로 가세하고 나오자 이 대 일이라 십여 초를 겨루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수세에 몰렸다. 그는 강을 등지고 서서 황용이 뒤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배수진을 쳤다. 곽정이 계속해서 맹공격을 퍼부었지만 구천인은 두 발에 못이라도 박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황용은 그가 이렇게 정신없이 싸우면서도 연방 두 눈을 굴리며 강 위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다른 배가 와서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자의 무공이 높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삼 대 일인데 만약 그를 당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
황용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영고는 이미 배 위에 있던 방중을 남김없이 물 속에 빠뜨려 버리고 키를 잡고 있는 한 사람만 남겨 둔 상태였다. 그녀는 곽정과 황용이 함께 달려들어서도 구천인 하나를 해치우지 못하고 있는 꼴을 보고 냉소를 머금었다.
[아가씨는 비켜나지, 내가 해치울 테니까.]
황용은 비웃음을 당하자 슬그머니 화가 나 죽장을 뻗어 다시 한 번 구천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구천인도 그녀의 의도를 알기는 했지만 곽정의 장력에 눌려 반격할 처지가 못 되자 몸만 움직여 살짝 피해 냈다. 황용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곽정의 옷깃을 잡아 끌었다.
[어디 한번 영고가 대결하도록 해봐요.]
곽정은 그녀의 말대로 그 즉시 수장을 거두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구방주, 당신은 그래도 강호에서 당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처지인데 내가 객점에서 잠이 든 틈을 이용해 마취약을 써서 나를 잡아오다니 그런 비열한 술수가 어디 있소!]
영고가 눈을 부라리며 힐난을 해댔다.
[아니, 내 수하의 부하에게 잡혀 온 주제에 무슨 말이 그리 많소. 내가 직접 나섰더라면 신산자가 열 명이라도 모조리 잡았을 것이오.]
[내 언제 철장방에게 잘못을 했다고 그러는 거요?]
[이 두 어린것들이 우리 철장방 성지에 무엄하게 뛰어들었는데 왜 흑소에 숨겨 주었소? 좋은 말로 내놓으라고 할 때도 거짓말만 하더니 그래 이 구천인을 그렇게까지 얕잡아 보고도 무사할 줄 알았던가?]
[아, 이 젊은것들 때문에 그랬구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잡아가 보구려. 나는 관여하지 않을 데니까.]
영고는 이렇게 말하고 뒤로 물러나 뱃전에 걸터앉았다. 곽정과 황용 두 사람과 구천인의 대결을 그저 바라보겠다는 태도였다. 그녀의 이 같은 행동은 구천인이나 곽정, 황용 모두에게 너무나 의외였다.
원래 영고는 당시 일등대사를 찔렀지만 그건 일등대사가 아니라 일등대사로 변장했던 곽정이었다. 어쨌든 일등대사가 가슴에 칼을 맞아 아픔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녀는 일말의 양심 때문에 또다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산을 내려오기는 했지만 불쌍하게 죽어 간 사랑하는 아이의 모습은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 속에 맴돌았다. 그녀는 객점에 혼자 머무르며 마음이 심란하여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바람에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다가 그만 철장방 마약에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만약 마약이 아니었다면 하잘것없는 아랫것들에게 잡힐 그녀가 아니었다. 그러다 이 배에서 곽정과 황용을 만나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화풀이할 곳이 없어 답답하던 마음이 그들에게로 쏠려 그들 세 사람이 싸우다 몽땅 이 급류에 빠져 죽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황용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구천인과 상대를 하고 나서 본때를 보여 줘야지.)
그래 곽정에게 눈짓을 해 보이고 나서 죽장과 쌍장을 번갈아 쓰면서 구천인을 공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사람은 한덩어리로 어우러져 싸웠다. 영고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구천인의 장력이 무섭기는 했지만 여전히 두 사람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시간을 오래 끌다가는 죽거나 부상을 당할 것 같아 보이는데도 그는 위치를 바꾸지 않고 그냥 버티는 것이 마치 무슨 술수를 써서라도 이길 승산이 있다는 태도였다. 곽정은 황용이 원기를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혹시라도 기진맥진하여 쓰러지지 않을까 조바심이 일었다.
[용아, 잠시 쉬었다가 다시 도와주도록 해.]
[그렇게 하지요.]
황용이 웃으며 죽장을 거두고 물러났다.
영고는 그들 둘이 너무나 다정해 보이는데다 곽정이 세심하게 황용을 배려해 주는 모양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일생에 언제 그 누가 나를 저렇게 대해 주었던가?)
부럽다 못해 질투하는 마음이 샘솟듯 일어나며 그 마음은 다시 증오로까지 번졌다.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이 대 일로 싸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자 덤벼라. 모두 넷이니 이 대 이로 대결을 하여 승부를 가리자.]
그러더니 어느새 품속에서 대나무로 만든 살(籌) 두 개를 꺼내 황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아니 미쳤나, 왜 이 야단일까? 노완동이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황용이 욕설을 퍼부으며 더욱 맹렬하게 대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나서는 바람에 배 위의 상황은 금방 달라졌다. 황용의 타구봉법이 오묘하다고는 하지만 공력이 영고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다만 현란한 변화를 이용해 억지로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영고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자기의 특기를 미꾸라지처럼 유연하게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이쪽의 곽정과 구천인의 대결도 단번에 승부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구천인은 영고가 적의 입장에서 수수방관하는 입장으로 바꿨다가 갑자기 자기편이 되어 도우려 나서자 어리둥절하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정신을 가다듬고 장력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때 곽정이 견룡재전의 솜씨를 발휘해 맹격을 가하자 몸을 한쪽으로 기울여 정면의 예봉을 피한 뒤에 오른손을 높이 들고 왼손을 낮춰 반격을 했다. 곽정은 두 손을 안으로 거두며 교차시켜 뻗었다.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헉 하는 소리를 지르며 각기 뒤로 세 걸음씩 물러섰다. 구천인은 뱃머리로 물러서며 자세를 바로잡았으나 곽정은 왼쪽 발이 배 위에 있는 줄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러나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빙그르르 재주를 한바퀴 돌면서 철통같이 방어를 했다.
구천인은 그가 재주를 넘는 것을 쓰러지는 것으로 착각하여 승산이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자기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고는 때마침 황용을 공격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가 갑자기 터진 웃음 소리에 놀라 도깨비라도 만난 듯 얼굴이 파랗게 질려 그만 대나무 살을 거두는 것조차 잊었다. 황용은 이 틈을 노려 죽장을 맹렬하게 휘둘러 신장혈(腎臟穴)을 찌르려고 했다. 그 순간 영고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신들린 사람처럼 큰소리를 질렀다.
[원래 네놈이었구나!]
영고는 느닷없이 미친 호랑이가 되어 갑자기 구천인을 향해 달려들며 물어뜯으려고 했다. 자기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구천인은 그녀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횐 이를 드러낸 채 자기를 물어뜯을 듯 대들자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록 무예가 높다고는 하지만 영고가 워낙 결사적으로 대드는 바람에 섬뜩해져 옆으로 피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요?]
영고는 대답할 생각도 않고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덮쳐 들었다. 구천인은 좌장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내려치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가 손을 뻗어 막을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그런데 영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그의 머리를 물려고 결사적으로 달려들기만 했다. 구천인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이 미친 여자를 꽉 붙들어 잡는 도리밖에는 없었지만 일단 그렇게 했다가 곽정이 일 장을 뻗는다면 자기는 죽는 것이다. 이제는 대결이고 뭐고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우선 달아나 목숨을 건지는 것이 상책이라 싶어 허둥지둥 몸을 숙이고 옆으로 빠져 나갔다.
황용은 곽정의 손을 꼭 붙잡고 한쪽에 물러서 있었다. 영고가 갑자기 미쳐 날뛰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영고의 모습은 그야말로 펄쩍펄쩍 뛰면서 죽자 하고 대들어 구천인을 잡아 물어뜯고야 말겠다는 태도였다.
구천인은 영고가 죽자 하고 대드는 바람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요리조리 피하다가 걸국 몇 차례나 할퀴어 피를 흘리면서 내심 몸서리를 쳤다.
(응보로구나, 응보야. 오늘 정말 이 미친 여자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닐까?)
영고가 몇 번 더 덮치는 바람에 구천인은 키 있는 쪽으로 몰렸다. 영고는 눈에서 피라도 뿜어낼 듯 쏘아보며 또 한 번 덤벼들었지만 역시 허공을 잡고 말았다. 그러자 상대의 무공이 워낙 높아 붙들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던지 느닷없이 손을 들어 키를 잡고 있던 장한을 물 속에 빠뜨리고 키 자루를 발로 차서 분질러 버렸다.
키를 잃은 배가 급류 가운데서 방향을 잃고 빙글빙글 돌아갔다. 황용은 당황해 큰소리로 외쳤다.
[이 여자가 하필이면 이 순간에 미쳐 버렸나? 우리 네 사람이 모두 여기서 죽고 말겠군.]
황용은 급하게 휘파람을 불어 수리를 찾았다. 바로 이때 배가 비스듬히 기울면서 강가 바위를 받아 뱃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구천인은 영고가 키 자루를 부러뜨리는 것을 보고 그녀가 여기서 함께 죽기로 결심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럴 때는 죽든 살든 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긴 그는 언덕을 향해 펄쩍 뛰어 내리며 그 여세로 배를 밀찌감치 밀어 버렸다. 이 바람에 배가 다시 급류에 말려들었고 그도 전력을 다해 뛰어오르기는 했지만 언덕에 내려서지 못하고 풍덩 물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몸이 물 속에 가라앉자 위로 솟아올라 봐야 급류에 휘말려 손발을 더 쓸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바닥에 있는 돌을 꽉 붙잡고 손발을 움직여 언덕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무공이 탁월한데다 물살이 강심보다는 약했다.
구천인은 몇 번이나 물을 켜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언덕에 닿을 수 있었다. 그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후줄근한 몸을 끌고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가라앉혔다. 배가 벌써 아득히 멀어져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영고가 이를 갈며 대들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영고는 구천인이 배를 벗어나 달아나는 것을 보자 큰소리를 질렀다.
[나쁜 놈같으니라고, 어디로 달아나느냐?]
영고는 뱃전으로 달려가 그 뒤를 따라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배는 벌써 강심에 나와 있었다. 용솟음치는 물결 속에 뛰어들었다간 목숨을 건지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곽정은 차마 그냥 볼 수가 없어 달려가서 그녀의 등을 잡았다. 영고는 버럭 화를 내며 손을 들어 곽정의 따귀를 보기 좋게 후려쳤다. 그때 수리 두 마리가 선창에 내려와 앉았다.
[곽정 오빠, 그런 미친 여자 거들떠볼 것도 없어요. 우리나 빨리 가도록 해요.]
황용이 성을 내듯 곽정을 잡아당겼으나 곽정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강물은 계속 용솟음쳐 물이 어느새 발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곽정이 고개를 돌리니 영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아가야, 아가야!]
황용이 계속 재촉했지만 곽정은 영고를 잘 보살펴 달라던 일등대사의 당부가 생각났다.
[용아, 먼저 수리를 타고 언덕으로 간 뒤에 다시 보내 주면 영고와 함께 타고 나갈게.]
[그럴 여유가 없어요.]
[빨리 먼저 타고 가라니까. 일등대사의 분부를 거역할 수는 없다.]
황용도 일등대사가 자기 생명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하며 망설이고 있는데 꽝 소리와 함께 배가 강심에 있는 암초에 부딪혔다. 물이 배안으로 스며들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빨리 암초로 뛰어내려요.]
황용이 외치는 소리에 곽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가 영고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때 영고는 취한 듯 멀거니 강심만 바라볼 뿐 곽정이 옆구리에 손을 넣었는데도 아무 반항도 하지 않았다.
[자 뜁시다!]
세 사람이 동시에 암초 위로 뛰어내렸다. 암초는 반 자 정도 물에 잠겨 있었다. 강물이 세 사람 주위를 맴돌며 흘러가는 바람에 물이 튀어 옷이 흠뻑 젖었다. 그 사이 배는 서서히 암초 옆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황용은 어려서부터 파도를 벗삼아 자라기는 했지만 빙글빙글 스치며 지나는 물은 차마 어지러워 볼 수가 없었던지 시선을 하늘로 향한 채 감히 수면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곽정이 훠파람을 불어 수리를 불렀지만 수리도 물이 무서워 공중만 맴돌 뿐 물 위에 솟은 암초 위에는 감히 내려서려고 하지 않았다. 황용이 사방을 휘둘러보니 암초로부터 십여 장쯤 떨어진 왼쪽 언덕 위에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곽정 오빠, 제 손을 꼭 붙들어 주세요.]
곽정이 황용의 왼손을 잡아 주자 황용이 풍덩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곽정은 깜짝 놀라 그녀 쪽을 향해 몸을 숙이고 두 발로 암초 위의 울통불퉁한 곳을 찾아 위치를 안정시키고 오른손에 힘을 주어 황용의 팔을 꼭 잡았다. 만의 하나라도 손을 놓치면 황용이 영원히 올라오지 못할까 겁이 난 것이다. 황용은 가라앉은 배의 돛대 위에서 천천히 돛폭을 매단 끈을 찾아 쥐고 다시 암초 위로 올라선 뒤에 두 손을 놀려 배 위의 끈을 가어 올렸다. 한 이십여 자 정도가 올라오자 그녀는 칼로 끈을 잘라 버린 후에 수리에게 손짓을 해 자기 어깨 위로 내려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수리는 자랄 대로 자라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다. 곽정은 그녀가 혼자 감당하지 못할까 봐 팔을 뻗어 거들어 주었다. 황용은 끈의 한쪽 끝을 수리 발에 묶고는 버드나무를 향해 날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수리가 끈을 매단 채 버드나무 위로 날아가 몇 바퀴 맴돌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니, 나무를 한 번 돌려 감고 오라는데.....]
황용이 안타까워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 말을 알아들을 수리는 아니었다. 예닐곱 차례나 이렇게 하고 나서야 겨우 버드나무를 한바퀴 돌아 암초로 돌아왔다. 곽정과 황용은 너무나 기뻤다. 끈 양쪽을 힘껏 잡아당겨 비죽 솟은 암초 부분에 얽어맸다.
[용아, 먼저 올라가라.]
[아녜요, 전 오빠와 함께 갈 테니 먼저 영고를 보내도록 하세요.]
영고는 두 사람을 한 번 흘겨본 뒤에 아무 말 없이 두 손을 번갈아 놀리며 언덕으로 올라갔다.
[제가 재주를 부릴 테니 오빠는 구경이나 하세요.]
황용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줄 위에 올라가 경신의 무공을 이용해 줄타기를 했다. 마치 곡예를 하는 아가씨가 공중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과 똑같았다.
곽정은 이런 훈련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실족이라도 하면 큰일나겠기에 영고가 했던 것처럼 두 손으로 줄을 잡은 채 공중에 매달려 건너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언덕에 이르자면 수장이 남았는데 황용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딜 가려고 그래요?]
곽정은 혹시 영고가 엉뚱한 수작을 부리지나 않을까 덜컥 걱정이 되어 두 손을 재빨리 놀려 미처 버드나무에 이르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렸다. 황용이 남쪽을 가리키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저걸 보세요, 영고가 아무 말 없이 혼자 가버리는군요.]
곽정이 바라보니 영고는 돌이 어지럽게 깔린 울통불통한 길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쫓아가 봐야 어차피 잡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제정신이 아닐 텐데 혼자 가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 쫓아가보자.]
[그래요.]
곽정의 말에 황용은 몇 발짝 뛰다가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곽정은 그녀가 부상을 치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이 빠져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앉아 쉬고 있어. 내 금방 돌아올게.]
곽정은 황용을 남겨 두고 영고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내처 달렸다. 산모퉁이를 돌자 길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그런데 영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거친 돌길에 급류, 게다가 풀은 우거져 가슴께에 닿을락말락했다. 사방을 휘둘러보아야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지려고 했다. 곽정은 한참을 헤매다 이러다 황용까지 잃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어 발길을 되돌렸다.
두 사람은 밤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다음날 새벽 강을 따라 소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홍마와 혈조를 찾은 후에 큰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반나절이나 걸어 겨우 작은 주막 하나를 찾아 닭 세 마리를 사서 한 마리는 둘이 먹고 두 마리는 수리에게 먹였다. 수리들이 높은 나무 위에 앉아 닭을 뜯어먹는 바람에 닭털이 바람을 타고 나부끼며 떨어져 내려왔다.
그러다 갑자기 암컷이 먹다 남은 반 마리 닭을 놓치고 북쪽을 향해 날며 울부짖자 수컷도 높이 날아올라 함께 울부짖으며 암컷 뒤를 따랐다.
[수리의 울부짖는 소리가 급박한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생겼나 본데.]
[오빠, 우리 쫓아가 봐요.]
곽정과 황용은 이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은전을 식탁 위에 올려 놓고 큰길로 나섰다. 수리 두 마리가 먼 상공에서 한바퀴 맴을 돈 뒤에 쏜살같이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수리들은 이렇게 내려갔다가는 다시 상공으로 올라와 몇 바퀴 돌다가 다시 쏜살같이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적을 만났나 봐.]
발길을 재촉해 이삼 리 정도 나아가자 가옥이 즐비한 고을이 나왔다. 수리 두 마리가 공중을 오락가락하는 품이 적의 종적을 놓친 모양이었다.
곽정이 고을로 달려가 수리에게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지만 수리는 사방을 맴돌기만 할 뿐 좀처럼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다.
[누군데 이토록 수리의 미움을 탔을까?]
곽정이 혼자말을 했다. 한참 뒤에야 수리가 돌아왔다. 그런데 수컷의 발에 피가 낭자하게 맺혀 있었다. 깊숙한 칼자국으로 보아 근골이 단단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부러졌을 것만 같았다. 둘은 이를 보자 놀랍기도 하거니와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암컷을 살펴보니 오른발에 거무스름한 뭔가를 꽉 움켜잡고 있었다. 빼앗아 살펴보니 머리카락이 잔뜩 붙어 있는 사람의 머리 가죽이었다. 머리를 할퀴어 잡아당기는 바람에 뜯긴 모양인데 그 가죽 한쪽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第 五 卷. 第 十一 章.(通卷 章). 그들의 해후
곽정은 머리카락이 달린 머리 가죽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이 수리 한 쌍은 어려서부터 매우 양순해 여태까지 사람을 해친 일이 없는데 어째서 갑자기 사람에게 덤비게 되었을까?]
[분명히 까닭이 있을 거예요. 머리 가죽이 벗겨진 사람을 찾으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두 사람은 고을의 객점에 묵으면서 각자 갈라져 그 머리 가죽 주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고을이 넓은 만큼 사람도 많아 날이 저물 때까지 혜매 다녔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수리가 날아가 홍마를 데리고 돌아왔지만 혈조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워낙 그 새를 좋아하는 황용은 다시 돌아가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곽정은 무엇보다도 홍칠공의 일이 궁금한데다 중추절이 머지않아 연우루의 약속을 그르칠 것 같아 동쪽으로 떠나자고 재촉했다. 황용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일어서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못내 아쉬웠다.
둘은 홍마에 올라 동쪽을 향해 질풍처럼 달렸다. 홍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었고 수리도 뒤지지 않고 따라왔다. 황용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곽정은 그녀가 피곤해 보여 일찍 자라고 권했지만 황용은 밤이 깊어도 자리에 들 생각은 않고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옛얘기까지 들추어내며 열을 올렸다.
이날은 강서(江西)에서 출발하여 양절(兩浙)의 남로(南路) 경내에 당도했다. 홍마가 하루를 달려 동해(柬海) 가까이에 온 것이다. 둘은 객점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황용은 객점에서 장바구니를 빌려 찬거리를 사다가 밥을 짓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온종일 피곤할 텐데 그냥 이 집 음식을 먹고 말지.]
곽정은 황용의 건강이 염려되어 부드럽게 말렸다.
[난 오빠에게 대접하기 위해서 그러는 건데 그럼 제가 만든 음식이 싫단 말인가요?]
[그건 아냐, 용아가 만든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는데 ! 다만 용아가 많이 쉬었으면 하는 뜻이지. 용아가 완전히 원기를 회복한 뒤에 천천히 만들어 주어도 늦지 않아]
[원기를 회복한 뒤에 천천히 만들어도.....]
황용은 이렇게 곽정이 한 말을 되씹어 보다가 팔에 장바구니를 낀 채 한 발을 문지방 밖에 내놓고는 하염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곽정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고 가볍게 그녀의 팔에 걸린 바구니를 벗겼다.
[우리, 사부님을 찾은 후에 용아의 맛있는 요리를 함께 먹도록 하지.]
황용은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방으로 들어와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객점에서 식사를 내오자 곽정은 그녀를 깨웠다. 황용이 벌떡 일어나며 뭔가 재미있는 일을 생각해 낸 듯 빙그레 웃었다.
[오빠, 우리 이것 먹지 말아요. 그냥 저를 따라 나오세요.]
곽정이 그녀의 말대로 뒤따라 나서니 황용은 흰 벽에 검은 칠을 한 대문이 있는 부잣집 하나를 골라 담 뒤로 돌아가 뒷마당으로 뛰어들어갔다. 곽정은 까닭도 모르고 그냥 따라 들어갔다. 황용이 앞마당을 향해 달려나갔다. 때마침 주인이 대청에 등촉을 휘황찬란하게 밝히고 손님을 청해다 대접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용이 씩씩거리며 앞으로 걸어나가 큰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썩 물러가거라!]
대청에는 잔칫상 세 개가 차려져 있었는데 음식을 먹던 손님들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미모의 아가씨임을 알고는 어안이벙벙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황용은 손에 잡히는 대로 뚱뚱한 손님 하나를 틀어 잡고 다리를 걸어 내동댕이쳤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느냐?]
이 광경을 본 손님들이 서로 먼저 일어나려고 다투는 통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어서들 오너라.]
주인이 큰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교두 두 명이 머슴 십여 명과 함께 각기 몽둥이와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황용이 씨근거리며 뛰어나가 교두들을 한 손에 때려눕히고 그들이 가진 병기를 빼앗아 머슴들을 향해 휘둘렀다. 머슴들은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나가 뒹굴다 간신히 기어 일어나 달아났다.
주인은 사태가 험악해지자 슬그머니 달아나려고 했다. 황용이 그 낌새를 눈치채고 쫓아가 그의 수염을 휘어잡더니 금방이라도 칼로 내리칠 것 같은 시늉을 했다. 주인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두 무릎을 꿇었다.
[여.... 여왕님, 아니 아가씨...., 돈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누가 돈을 달라더냐? 빨리 일어나 술 대접이나 하란 말이다.]
황용은 왼손을 뻗어 그의 수염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주인은 아파서 견딜 수 없었지만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했다.
황용은 곽정의 손을 잡고 제일 상석을 찾아 앉았다.
[다들 앉아요, 왜 앉지 않고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지요?]
황용은 이렇게 말하며 손을 번쩍 들어 번쩍번쩍 빛나는 칼을 식탁에 꽂았다. 손님들은 벌벌 떨면서 양쪽에 있는 술상으로 몰려가 앉을 뿐 감히 상석에 앉을 생각은 못했다.
[아니, 여러분은 나와 함께 앉기가 싫은 모양이로군요. 그럼 오지않는 사람부터 죽일 수밖에 없군요.]
황용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님들이 한꺼번에 상석으로 달려오느라 서로 부딪치고 의자가 넘어지는 등 북새통이었다.
[아니, 이렇게 다 큰 어른들이 얌전하게 앉을 줄도 모르나?]
손님들은 밀고 밀리다 한참 만에야 겨우 좌정을 했다. 황용이 술 한잔을 혼자 따라 마시고 주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손님을 청했소? 집안에 죽은 사람이라도 있단 말이오?]
[제가 만년에 아이 하나를 얻었습니다. 마침 오늘이 돌이라 이웃 사람들을 청해 온 것입니다.]
주인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 참 잘됐군, 그럼 애기 좀 보게 데리고 나오시오.]
황용의 말을 들은 주인의 얼굴은 흙빛이 됐다. 황용이 아이를 해치지나 않을까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술상에 꽂힌 칼을 보니 감히 거역할 수도 없어 유모를 시켜 아이를 안고 나오게 했다. 황용은 아이를 받아 불빛에 자세히 살펴본 뒤에 다시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혀 닮은 데가 없는 걸 보니 당신 아이가 아닌 모양이로군.]
얼굴이 거북하게 일그러진 주인이 두 손만 달달 떨었다. 손님들은 그 주인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웃을 수는 없었다. 황용은 품속에서 다섯 냥짜리 금전을 꺼내 유모에게 아이와 함께 돌려 주었다.
[몇 푼 되지는 않지만 외할미가 주는 돈이다.]
손님들은 그녀가 어린 나이에 외할머니니 뭐니 떠들어대며 큰돈을 내놓는 것을 보고 어안이벙벙했고 주인도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자, 술 한잔 드시오.]
황용이 큰 사발에 술을 철철 넘치게 부어 주인의 면전에 디밀었다.
[제 주량이 약해서 그러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용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주인의 수염을 다시 움켜잡았다.
[마실 거요, 안 마실 거요?]
주인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얌전하게 술잔을 받아 꿀떡꿀떡 잔을 비웠다.
[암, 그래야만 통쾌하지. 자 그럼 우리 다 같이 주령(酒令)을 합시다.]
황용이 주령을 하자면 주령이요, 죽으라면 죽는 것이지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돈 많은 장사치나 유지가 아니면 글줄이나 한다는 선비 나부랭이지 정말 학식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각자 전전긍긍하다가 내놓는 답이 모두 허무맹랑했다. 황용은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모두 옆으로 비켜나요.]
손님들은 크게 안도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섰다. 이때 와당탕 하며 주인이 앉았던 의자와 함께 벌렁 뒤로 넘어졌다. 주기가 올라와 더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황용은 깔깔 웃으며 곽정과 함께 입에 맞는 안주만 골라 먹으며 연방 마셔댔다. 참으로 방약무인하기 짝이 없었다. 황용과 곽정은 질탕 먹고 나서 초경이 지나서야 객점으로 돌아왔다.
[곽정 오빠, 오늘 재미있었지요?]
[무고한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놀려 주다니 그게 무슨 짓이야?]
[나만 즐겁고 편안하면 됐지 다른 사람 죽고 사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에요.]
곽정은 그녀가 어쩐지 여느 때와 달라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밖에 나가고 싶은데 오빠는 어떻게 하겠어요?]
[어딜 또 나가려고 그래?]
[방금 본 아기가 아주 귀엽게 생겼던데 데려다가 며칠 놀다가 되돌려주려고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단 말야?]
곽정은 어이가 없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용은 그저 빙그레 웃고는 방문을 벗어나 담을 뛰어넘어 나갔다. 곽정이 달려나가 그녀의 팔을 잡고 말렸다.
[용아, 그렇게 놀려 주고도 아직 부족하단 말이냐?]
[물론이죠.]
황용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가 따라 나와야만 재미가 있어요. 며칠 지나면 오빠는 떠날 사람인데. 그 화쟁 공주인가 하는 여자와 함께 있게 되면 그 여자가 날 만나라고 보내기나 하겠어요. 오빠와 함께 있는 날도 이렇게 하루가 지나면 그만큼 하루가 적어지는 거예요. 하루를 이틀이나 사흘, 나흘로 생각하고 지내야겠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시간이 아까워 견딜 수가 없어요. 곽정 오빠, 밤에 제가 잘 생각도 안 하고 수다만 떤 까닭을 이젠 알겠지요? 아무리 그러셔도 저를 말릴 수는 없어요.]
곽정은 측은하고도 귀여운 생각이 들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용아,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둔한 사람이라 여태까지 용아의 속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지냈어. 내...., 내가.....]
겨우 여기까지만 말하고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황용이 빙그레 웃으며 오히려 곽정을 위로했다.
[전에 아버지께서 사(詞)를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 모두가 무슨 수심이니 한(恨)이니 해서 그냥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그러나 했어요. 그런데 오늘에야 비로소 세상의 즐거움이란 찰나의 것이요, 수심과 번뇌만이 일평생을 같이한다는 것을 알 것 같아요.]
버드나무 가지 위의 달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시원한 밤바람이 옷깃을 어루만져 주었다. 곽정은 원래가 감정이 무딘 사람이다. 황용이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토록 깊은 줄은 몰랐다. 그 동안 그녀와 함께 보낸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정말 바보다. 이제 용아와 헤어진다 하더라도 가끔 그리워는 하겠지만 그런대로 견뎌 나가기는 할 거야. 그러나 용아는 어떨까? 혼자 도화도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게 되겠지. 얼마나 외로울까?)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용아의 아버지는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시게 될 거야. 그땐 벙어리 하인들 몇만이 그녀 곁에 있게 되겠지. 날마다 나만을 그리워하면서 한숨만 쉰다면 이거야 정말 산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일 아닌가?)
곽정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무심결에 두 손으로 황용의 손을 잡은 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용아,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나는 평생 용아하고만 살겠어!]
황용이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내 다시는 칭기즈 칸이니 화쟁 공주니 하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일평생 용아 곁에만 있겠단 말야.]
황용이 곽정의 품속에 뛰어들어 안겼다. 곽정은 부드럽게 그녀를 어루만져 주었다. 늘 그 일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 더할 수 없이 후련했다. 둘은 서로 껴안은 채 잠시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었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황용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빠의 어머님은요?]
[내가 가서 도화도로 모셔 와야지.]
[오빠의 사부인 제베(철별)나 의형인 툴루이(타뢰), 그분들이 무섭지 않아요?]
[그들과 정이 두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을 둘로 가를 수는 없지 않아?]
[그럼 강남의 여섯 사부님들은요? 그리고 또 마도장이나 구도장 그 분들은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
곽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들이야 화를 내시겠지. 그러나 천천히 양해를 구하면 될 거야. 용아는 절대로 내 곁을 떠날 수 없어. 나도 용아 곁을 절대로 안 떠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우리 둘이 도화도에 숨어 한평생 밖에 나오지 않으면 그만이에요. 아버지께서 만드신 도화도 길은 너무나 현묘해서 어느 누가 섬으로 찾아온다 해도 소용이 없어요.]
곽정은 아무래도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른 묘책을 강구해 보자고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10여 장 밖에서 사람 발소리가 들렸다. 밤길을 가는 두 사람이 경신의 무공으로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노완동이 팽형에게 걸렸으니 무서울 게 없다구. 우리 빨리 가기나 합시다.]
그들이 떠드는 말이 희미하게 곽정의 귀에 들렸다. 이때 곽정과 황용은 마냥 즐거워 다시는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노완동>이란 말을 듣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사람들은 길만 재촉하느라 미처 눈치를 채지 못했다. 고을을 벗어나 5리쯤 뒤쫓자 그들은 산모통이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사람들을 부르고 욕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곽정과 황용은 그들 뒤를 바짝 쫓아 산모퉁이로 접어들다가 깜짝 놀랐다. 그곳에 노완동 주백통이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주백통의 맞은편에도 한 사람이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몸에 빨간 가사를 걸친 것이 장승(藏僧)인 영지상인이었다. 그런데 그도 역시 옴짝달싹하지 않고 있었다. 주백통 옆에 조그만 굴이 하나 보였다. 밤이라지만 그런대로 굴의 입구가 사람 하나가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까말까 할 정도로 대단히 협소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굴 밖에서는 5,6명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부으면서도 감히 굴 근처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굴속에 뭔가가 있는데 나올까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곽정은 방금 들었던 <노완동이 팽형에게 걸렸다>는 말이 생각났다. 또 주백통이 시체처럼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벌써 재난을 당한 것 같기도 했다. 재빨리 뛰어들 태세를 취하는데 황용이 그를 잡았다.
[우선 적들이 누군가 확인해 봐요.]
두 사람이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굴 밖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모두 낯익은 얼굴이었다, 삼선노괴 양자옹, 귀문용왕 사통천, 천수인도 팽련호, 삼두교 후통해 등이었다. 그 밖에 방금 그들이 뒤쫓아온 두 명은 목소리가 생소한 것으로 보아 전에 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황용은 이들 몇 사람이 곽정이나 자기의 상대가 못 된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방금 밤길을 달려온 두 사람의 경신 무공도 평범하기 짝이 없어 별로 걱정할 상대는 아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아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노완동의 실력으로도 이 몇 사람은 문제가 없을 텐데, 이상하군요. 혹시 서독인 구양봉이 근처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황용이 낮게 속삭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때 팽련호의 신경질적인 말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놈, 그레도 나오지 않으면 굴에다 불을 놓겠다.]
[재주 있거든 마음대로 하려무나.]
굴속에서 누군가가 무거운 어조로 내뱉었다. 곽정은 이것이 자기의 대사부인 비천편복 가진악의 목소리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구양봉이 옆에 있고 없음을 개의할 곽정이 아니었다.
[사부님, 제자 곽정이 여기 왔습니다!]
곽정은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손을 번쩍 들어 후통해를 낚아채 멀리 집어 던졌다. 이렇게 되자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당황하여 사통천과 팽련호가 나란히 정면에서 곽정을 공격할 태세를 취했고 양자옹은 뒤로 돌아가 기습을 하려고 했다.
가진악은 굴속에서 곽정이 외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리고 쉭 하고 독릉(毒菱) 하나를 양자옹의 등을 향해 날렸다. 양자옹이 급히 머리를 숙였지만 독릉이 그의 머리 끝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에 상투 끝이 잘려 나가 산발이 되었다. 양자옹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팽련호가 그의 독롱에 맞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생각하면 가진악의 암기에 독약이 묻어 있을 것은 틀림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옆으로 비켜서서 머리를 어루만져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피부는 다치지 않았다.
품속에서 투골정(透骨釘) 하나를 찾아 들고 굴의 왼쪽을 슬그머니 살피며 어떻게 해서든지 굴속으로 날려보내 보복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손을 막 쳐들려고 하는데 팔이 뜨끔하며 쩔그렁 하고 투골정을 놓치고 말았다. 뭔가에 얻어맞은 것이다.
[빨리 무릎을 꿇어요. 그렇지 않으면 몽둥이찜질을 할 테니까.]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양자옹이 소리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황용이 손에 죽장을 잡은 채 웃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놀랍고도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홍칠공의 죽장이 원래 거기 있었군그래.]
양자옹은 왼손을 번쩍 들어 그녀의 어깨를 내리치며 오른손으로 죽장을 빼앗으려 했다. 황용은 몸을 살짝 비켜 우선 그의 왼손을 피하고 나서 죽장을 움직이지 않고 그가 그냥 한쪽을 잡도록 내버려두었다.
양자옹은 기쁜 마음에 손에 잡히는 대로 죽장을 낚아챘다. 황용이 놓지 않고 그냥 버틴다면 그녀의 몸까지 번쩍 들려 따라올 줄로 알았다. 그런데 죽장을 빼앗기는커녕 아주 미끄럽게 자기 손을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때 죽장 끝은 벌써 자기 방위 범위 내에 들어와 있었다. 그의 두 손이 벌써 죽장 끝머리 밖에 내밀려 있어 급히 손을 거두며 빼앗으려고 덤볐으나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파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사정없이 여기저기를 찌르는 것이 아닌가? 그의 무공이 독특한 경지에 도달해 있어 위급한 상황에 봉착하면 데굴데굴 피하는 재주 또한 묘했다. 그는 땅바닥을 굴러 멀찌감치 피해 다시 일어나 어이없는 표정으로 황용을 바라보았다.
[이 봉법의 이름이 뭔지 아시겠지? 한번 맞으면 어떤 꼴이 되는지도 아직 기억하고 있을 텐데요.]
황용이 이렇게 빈정거리며 놀려댔다. 양자옹은 언젠가 이 <타구봉법>의 맛을 톡톡히 본 일이 있었다. 벌써 몇 해 전의 일이었지만 홍칠공에게 걸려 호되게 골탕을 먹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렸다. 사통천이나 팽련호도 저쪽에서 쩔쩔매고 있는 꼴을 보자 더 머물러 있어야 별 볼일 없을 것 같아 줄행랑을 놓았다.
그러나 곽정이 틈을 주지 않고 도망가는 사통천의 왼쪽 팔꿈치를 한 번 치자 사통천은 비실비실 뒤로 밀렸다. 팽련호는 장풍이 무서워 감히 반격할 생각도 못하고 급히 달아나려고 했지만 벌써 곽정에게 팔목을 잡혀 버렸다. 가뜩이나 작은 팽련호의 몸집은 곽정이 팔을 잡아 치켜 들자 두 다리가 허공에 들려 버둥거렸다. 곽정의 오른손이 주먹이 되어 그의 가슴을 망치 두드리듯 하려고 했다. 팽련호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이렇게 말을 걸었다.
[오늘이 팔월 며칠이오?]
곽정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신의를 지킬 생각이 없단 말이오? 사내대장부가 약속을 어길 수 있소?]
[뭐라고 하는 게요?]
곽정은 오른손으로 여전히 그를 틀어 올린 채 반문했다.
[우리가 팔월 보름날 가흥 연우루에서 대결을 해 승부를 겨루기로 악속하지 않았소? 여기는 가흥도 아니거니와 또 팔월 보름도 아닌데 어째서 내 목숨을 다치게 하려 하오?]
곽정도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막 놓아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일었다.
[당신들이 우리 주백통 주대형을 어떻게 했기에 저 모양이오?]
[그분이 영지상인과 내기를 했는데 누구든지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지기로 한 모양인데 내가 알 게 뭐요?]
곽정은 땅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원래 그랬었구나.)
[대사부님, 그 동안 무고히 지내셨습니까?]
곽정이 우선 굴속에 있는 가진악을 향해 인사를 하자 그는 기침 소리로 대답을 했다. 곽정은 손을 그대로 놓으면 혹시 팽련호가 내려서면서 발길로 차지 않을까 염려해 멀리 집어 던졌다.
[자, 물러 가구려.]
팽련호는 그 기세를 타고 가볍게 땅바닥에 내려섰다. 그는 사통천과 양자옹이 벌써 멀찌감치 달아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의리 없는 놈들이라고 마음속으로 욕을 하면서 곽정을 바라보았다.
[칠일 후 연우루에서 다시 만나 승부를 겨룹시다.]
팽련호는 몸을 돌려 세운 뒤 경공의 재주로 질풍처럼 달아났다.
황용은 주백통과 영지상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각자 두 눈을 부릅뜬 채 서로 응시할 뿐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있었다. 황용은 이런 그들의 모습과 아까 길에서 들은 말을 생각해 보고 벌써 이것이 팽련호의 속임수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들은 노완동의 무공을 대단히 무섭게 생각했다. 그래서 노완동이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용해 누구든지 먼저 일어나 움직이는 사람이 지는 것이란 내기를 영지상인과 하게 한 것이다. 영지상인의 무공은 본래부터 노완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이러한 방법을 쓴다면 노완동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가진악 하나만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완동은 우선 누군가가 자기와 놀아 주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또 아무 잔꾀도 없었으니 당연히 그들의 술수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짐작했던 대로 제아무리 옆에서 큰 싸움이 벌어져도 그는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고 태산처럼 앉아 영지상인만 이길 심산이었던것이다.
[노완동, 제가 왔어요.]
주백통은 황용이 큰소리로 부르는 게 똑똑히 들렸지만 혹시 질까 봐 대답도 하지 못했다.
[두 분이 이렇게 앉아 몇 시간을 더 버틴다 해도 승부는 나지 않을거예요. 차라리 내가 증인이 되어 동시에 두 분 소요혈(소요穴)을 똑같은 힘으로 건드릴 테니 먼저 웃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하지요.]
주백통은 앉아 있는 것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던 참에 황용의 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찬성하고 나설 입장은 아니었다. 황용은 그들의 대답도 기다릴 것 없이 그냥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어 팔을 뻗어 동시에 두사람의 소요혈을 건드렸다. 주백통의 내공이 영지상인보다 상수임을 알기 때문에 거짓 없이 똑같은 힘을 썼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백통도 아무 반응이 없었거니와 영지상인도 전혀 아무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중의 폐혈공(閉穴功)이 대단하구나.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웃음을 터뜨렸을 텐데.)
황용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두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주백통은 내력을 써서 황용의 지력(指力)에 맞섰다. 그러나 소요혈의 위치가 늑골 아래에 있는데다가 근육이 부드러워 힘을 쓰기가 어려웠다. 만약 허리를 펴 반격을 한다면 차력에 힘이 빠져 몸을 움직이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지는 것이다. 그런데 황용의 지력이 점점 강해졌다. 주백통은 결사적으로 버티다가 끝내 더 이상 더 버티지 못하고 근육을 움직여 황용의 손끝을 피하다 못해 빌떡 일어서며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큰뚱보 스님, 내가 지고 말았소이다.]
황용은 주백통이 패배를 인정하고 나서자 후회막급해졌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 뚱뚱보 중에게 좀더 힘을 쓸 걸 그랬지.)
황용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영지상인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당신이 이겼으니 목숨까지는 빼앗지 않겠소. 빨리 여기서 없어지시오.]
그런데도 영지상인은 꼼짝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황용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의 어깨를 밀어 보았다.
[누가 보기 싫은 그 낯짝을 더 보겠대요? 공연히 죽은 척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황용이 가볍게 밀자 영지상인의 뚱뚱한 체구가 벌렁 뒤로 나가동그라졌다. 여전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그대로 나가떨어진 모양이다. 진흙으로 빚어 만들어 놓은 불상(佛像)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세 사람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힘을 주다가 폐혈이 되어 그냥 숨이 막혀 죽어 버린 것이 아닐까.)
황용은 이런 추측을 하면서 그의 코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숨은 쉬고 있었다. 우습기도 하거니와 기가 막혔다.
[노완동,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걸리고도 몰랐으니 정말 어리석군요.]
황용이 놀리자, 주백통은 두 눈을 부릅뜨고 씨근거렸다.
[뭐라고?]
[우선 그의 혈도나 풀어 주고 나서 말을 해요.]
주백통은 아직도 영문을 모른 채 몸을 숙이고 영지상인의 몸을 이곳저곳 어루만지고 두들겨 보았다. 그제야 전신에 있는 여덟 군데 혈도를 누군가가 눌러 놓은 것을 발견했다.
[이건 내기가 아니잖아.]
[뭘, 내기가 아니라고 그러세요?]
[한패거리들이 그가 앉은 다음에 혈도를 나 모르게 눌러 놓았으니 이건 사흘 낮 사흘 밤을 앉아 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소용없단 말이지.]
주백통은 고개를 돌리고 땅바닥에 새우처럼 누워 있는 영지상인을 불렀다.
[이봐요, 뚱뚱보 스님. 우리 다시 내기를 합시다.]
곽정은 주백통이 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쉰 뒤 대사부가 걱정이 되어 굴속으로 가진악을 살펴보러 들어갔다. 주백통은 허리를 숙이고 영지상인의 혈도를 풀어 주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자! 우리 다시 내기를 합시다. 내기를.....]
[우리 사부님은요? 그 노인을 어디에 버려 두었어요?]
황용이 갑자기 홍칠공을 생각해 내곤 주백통에게 힐난하듯 물었다.
[어이쿠!]
주백통은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굴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어찌나 급히 뛰어들었던지 하마터면 거기서 나오던 곽정과 머리를 부딪힐 뻔했다. 곽정은 가진악을 굴속에서 부축해 모시고 나오며 그가 건을 쓰고 상복을 입은 것을 발견했다.
[사부님, 댁에 초상이라도 났나요? 이사부님이랑 다른 사부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가진악은 고개를 들어 하늘만 올려다볼 뿐 대답이 없었다. 어느새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곽정은 너무나 의외라 입을 떡 벌린 채 감히 다시 물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때 주백통이 굴속에서 또 한 사람을 부축해 나오고 있었다. 왼손에 표주박을, 오른손에 먹다 남은 반 마리 닭고기를 쥔 구지신개 홍칠공이었다. 곽정과 황용은 너무나 반가워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부님!]
순간 가진악의 얼굴에 살기가 어리더니 느닷없이 쇠지팡이를 들어 황용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이 전광석화 같은 솜씨는 복마장법(伏魔杖法) 중의 가장 악랄한 일 초였다. 바로 가진악이 몽고의 사막에서 수련했던 재주로, 눈먼 매초풍과 대결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 끝에 창안해 낸 것이었다. 상대가 일 장을 날리는 바람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나는 것인지 모르게 되어 있었다.
황용은 홍칠공을 보고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이제 황용의 머리가 박살이 나는 찰나였다. 당황한 곽정이 왼손을 들어 쇠지팡이를 한쪽으로 물리치고 오른손을 번개처럼 놀려 지팡이 한쪽을 틀어 잡았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곽정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힘을 지나치게 쓴데다가 자기 공력이 크게 진보했다는 사실도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왼손을 쓸 때의 재주는 항룡십팔장으로, 이는 가진악이 당해 낼 수 없는 묘기였다. 그는 무지무지하게 강한 힘이 자기를 엄습해 옴을 느끼면서 더 견디지 못하고 쇠지팡이를 놓친 채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곽정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여 가진악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사부님!]
이미 가진악의 코는 통통 부어 올랐고 앞니 두 개가 부러져 버렸다. 가진악은 부러진 이와 피를 퉤 하고 손바닥에 뱉어 곽정 앞에 내밀었다.
[네가 가져 가거라!]
곽정은 놀라 두 무릎을 땅바닥에 꿇었다.
[제자 죽어 마땅하옵니다, 때려 주소서.]
그러나 가진악은 내민 손을 거두려고 하지 않았다.
[자, 가져 가라니까.]
[사부님....]
곽정은 흐느껴 울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사부가 제자를 때리는 것만 보아 왔는데, 오늘 제자가 사부를 때리는 것을 보니 근사하구나!]
주책없이 지껄이는 주백통의 말이 가진악의 화를 더욱 돋웠다.
[그럼 할 수 없다. 자고로 맞아 부러진 이는 피와 함께 삼켜야 한다던데 네놈에게 주어 뭣에 쓰겠느냐.]
가진악은 손바닥에 뱉었던 부러진 이와 피를 입에 털어 넣고는 꿀꺽 삼켰다. 주백통은 좋다고 손뻑을 치며 야단이었다. 황용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지만 가진악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무섭고 궁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황용은 슬금슬금 홍칠공 옆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곽정은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제자, 만번 죽는다 해도 어찌 감히 이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제자가 일시 실수를 한 것이오니 사부님 때려 죽여 주시옵소서.]
[사부니 뭐니 시끄럽다. 도대체 누가 네 사부란 말이냐? 네가 도화도주를 장인으로 모시고 있는 터에 사부는 찾아 무엇 하려고 하느냐? 강남 칠괴의 변변치 못한 재주를 가지고 어찌 감히 곽 나으리의 사부 자격이 있다고 나서겠느냐?]
곽정은 죽을 수만 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저 머리만 조아리는 수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홍칠공이 옆에서 한마디 참견을 했다.
[가영웅님, 사제간에 대결을 하다가 제자가 실수를 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 않겠습니까. 방금 곽정이 쓴 재주는 이 늙은 거지가 가르친 것이니 제 과실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과를 드리지요.]
이렇게 말하며 꾸벅 절까지 했다. 주백통은 홍칠공이 하는 말을 듣고 자기도 한마디 거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가영웅님, 사제간에 대결을 하다가 제자가 실수를 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 않겠습니까. 방금 정이가 쇠지팡이를 잡은 재주는 제가 가르친 것이니 제 과실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과를 드리지요.]
자기도 홍칠공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꾸벅 절을 했다.
가진악은 화가 날 대로 나 있는 때라 주백통의 말을 그냥 들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꼭 조롱하는 것만 같아 홍칠공의 호의적인 말까지도 악의로 들렸다.
[당신들 동사 서독, 남제 북개는 당세에 무예로 명성을 떨치며 종횡 천하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로는 의롭지 못한 일을 많이 하고 있으니 그 결과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소]
[아니, 남제가 언제 당신에게 잘못이라도 했단 말이오? 그 사람까지 함께 묶어 욕을 하다니 참 이상한 일이오.]
황용은 옆에서 가진악과 주백통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말을 하면 할수록 사태가 더 악화된다고 판단했다. 노완동이 여기서 주책없이 떠들면 떠들수록 성난 가진악의 마음은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노완동, 영고가 찾아왔는데 만나지 않겠어요?]
주백통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영고가 당신을 만나러 왔단 말이에요.]
주백통은 눈을 더욱 동그갛게 떴다.
[어디? 어디?]
황용은 손가락으로 남쪽을 가리켰다.
[바로 저쪽이에요, 빨리 가서 찾아나 봐요.]
[난 영원히 그녀를 만나지 않겠어, 착한 아가씨! 아가씨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할 테니 제발 내가 여기 있단 말은 하지 말아 줘요.]
그리고는 북쪽을 향해 달아나려고 했다.
[지금 한 말 후회하면 안 돼요.]
황용은 밀리 달아나는 주백통의 등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이 노완동 한번 말하면 그뿐,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오]
이 말을 남긴 주백통은 그림자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황용의 속셈은 잠시 그를 속여 이 자리를 떠나게 하려는 것뿐이었는데 그가 영고를 만나는 것을 이토록 질색할 줄은 몰랐다. 어쨌거나 이 마당에 주백통을 잠시 떠나 보내는 데는 성공을 한 셈이다.
이때까지도 곽정은 여전히 가진악의 면전에 끓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벌을 내려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일곱 분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까? 제자 분골쇄신한다 하더라도 사부님들 은혜에 보답하기 어려운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손이 사부님께 득죄를 했으니 차라리 잘라 버리겠습니다.]
허리춤에서 시퍼런 단검을 뽑아 들고 획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팔을 자르려고 했다. 순간 가진악이 쇠지팡이를 들어 옆으로 치며 단검을 밀어붙였다. 단검은 가볍고 쇠지팡이는 무거웠지만 두 개의 병기가 부딪치는 순간 불꽃이 사방으로 퉈었다. 가진악은 입 언저리가 뻣뻣하게 아파 왔다. 곽정이 온 힘을 다 기울인 것을 알자 이것이 진심에서 나온 행동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좋다, 사실이 이와 같다면 꼭 한 가지 내 말만은 들어주어야 한다.]
곽정은 뛸 듯이 기뻤다.
[사부님께서 분부만 내리신다면 제자 어찌 감히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네 만약 어긴다면 앞으로 날 만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우리 사제지간의 정리도 일도양단으로 끝내는 게야, 알겠느냐?]
[제자, 목숨을 내놓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진악은 쇠지팡이로 땅바닥을 무겁게 내리쳤다.
[가서 황노사와 그 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와 만나자.]
곽정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 사...., 사부님.]
[왜 그러느냐?]
[황도주가 사부님께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진악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 그래도 하늘에 배은망덕한 짐승만도 못한 네놈의 얼굴을 한번 보게 해달라고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가진악은 쇠지팡이를 들어 곽정의 골통을 부서져라 내리쳤다.
황용은 가진악이 곽정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고 했을 때 마음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을 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쇠지팡이를 들어 내리치는데도 곽정이 피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여하튼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죽장을 들어 악구난로(惡狗欄路)의 재주를 부려 쇠지팡이와 곽정의 머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쇠지팡이가 죽장에 와 맞는 순간 죽장을 비틀어 옆으로 밀어붙였다. 황용은 힘이 약했지만 오묘하기 짝이 없는 타구봉법으로 쇠지팡이가 내려오는 힘을 역이용해 가진악의 쇠지팡이를 옆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가진악은 비틀비틀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힘없이 손을 거두어 한탄하듯 자기 앞가슴을 두어 번 친 뒤에 북쪽을 향해 내달렸다. 곽정이 그 뒤를 쫓으며 애타게 사부를 불렀다.
[사부님, 잠깐만요.]
[곽 나으리, 이 늙은 목숨을 내놓으라는 거요?]
가진악이 비웃듯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렇게 되자 곽정도 더 만류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군 채 멀어져 가는 쇠지팡이의 땅 찍는 소리만 듣고 있다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사부님 은혜를 생각하며 통곡하는 것이었다.
홍칠공이 황용의 손을 잡고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가영웅이나 황노사가 모두 괴팍한 성격들이라 한번 오해가 생기면 쉽게 풀어지지 않을 게야. 다음에 이 늙은 거지가 나서서 천천히 해결해 주마.]
곽정은 눈물을 거두며 일어섰다.
[사부님, 무슨 까닭인지 아시나요?]
홍칠공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노완동이 속아 다른 사람과 내기를 하면서 꼼짝하지 않는 틈을 이용해 그들이 나를 해치려고 하는데 자네 대사부께서 총총히 달려와 나를 보호해 이 굴속으로 들어왔다네. 그의 독릉 암기가 워낙 무서워 대들지 못하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게야. 자네 사부는 대단히 의리있는 사람이야. 나를 굴 안에 놔두고 적과 싸울 때는 정말 자기 목숨은 안중에도 없었지.]
여기까지 말하고 술 두 모금을 마신 뒤에 닭다리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는 두서너 번 씹다가 그만 꿀끽 삼켰다. 그리고 나서 옷소매로 입언저리 기름기를 닦고 다시 말을 이었다.
[방금 험악한 싸움이 벌어진데다가 나는 또 무공까지 잃어 도울 수도 없었지. 자네 대사부를 만나고도 말을 나눌 겨를이나 있었나. 아까 화내는 것을 보니 결코 너의 실수로 넘어졌기 때문이 아닌 것 같아. 그토록 의로운 영웅의 도량이 그렇게까지 좁을 리야 있겠느냐? 다행히도 팔월 보름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연우루의 무예 겨루기가 끝나면 내가 말을 잘 해주마.]
곽정이 이마를 조아리며 고맙다고 하자 홍칠공이 빙그레 웃었다.
[너희 둘의 무공이 크게 진보한 모양이구나. 가영웅도 무림에서는 꽤 명성이 있으신 분인데 너희들의 솜씨에 그렇게까지 참패를 당했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곽정은 너무나 부끄러워 할말이 없었다. 그러자 황용이 황궁에서 헤어진 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홍칠공은 양강이 구양공자를 살해했다는 말을 들을 때는 아주 잘했다고 좋아했고 개방 장로들이 양강의 속임수에 말려들었다는 얘기를 할 때는 <잡것들>이라 욕도 했다. 일등대사가 황용의 부상을 치료해 주고 영고가 밤에 윈수를 갚으러 왔었다는 말을 할 때는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마지막에 영고가 청룡탄에서 갑자기 미쳤다는 말을 듣고는 표정이 변했다.
[사부님, 사부님도 영고를 아시나요?]
[별로 안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 단황야가 삭발하고 출가할 때 나도 그 옆에 있었으니까. 그때 내게 편지를 보내 남쪽으로 오라고 하기에 그가 일도 없이 나를 부를 리는 없으리란 생각을 했지. 게다가 나는 또 운남의 미각을 맛보고 싶어 즉시 출발했지. 만나서야 그가 무척 수척해져서 화산에서 논검할 때의 생룡활호(生龍活虎)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 이상하게 생각했지. 내가 도착한 다음날 그는 무공을 절차탁마하자는 핑계로 내게 선천공과 일양지를 가르쳐 주려고 했네. 당시 그의 선천공과 내 항룡십팔장, 노독물의 합마공과, 황노사의 벽공장은 서로 막상막하였어. 이미 왕중양에게 일양지 무공을 배웠으니 이차 화산논검에서 무공 천하 제일의 영광은 그가 차지할 텐데 무엇 때문에 아무 까닭도 없이 내게 전수해 주려고 할까? 게다가 말로는 무공의 절차탁마라고 하면서 내 항룡십팔장은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여기에는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고 또 그의 네 제자와 상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까닭을 알았지. 원래 그는 이 두 가지 무공을 내게 전수하곤 자결할 결심이었던 거지.]
[사부님, 단황야는 자기가 죽은 후에 일양지를 아는 사람이 없으면 구양봉의 합마공을 깰 사람이 없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지요?]
황용의 말에 홍칠공은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그렇지. 나는 까닭을 안 뒤에는 그가 뭐라고 하든 말든 배우려고 하지 않았네. 그는 마침내 진실을 토로하더군. 자기의 네 제자가 충성스럽고 성실하기는 하지만 장시간에 걸쳐 국사와 정무에 열중하느라 무공에 전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대를 걸 수 없다는 게야. 선천공이야 내 배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만이지만 일양지를 잃는다면 왕중양을 지하에서 만날 면목이 없다고 하더군. 그러나 그가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일이긴 해도 나는 한사코 배우지 않으려고 했지. 그래야만 그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말일세.]
[무공을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배우지 않겠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네요.]
황용이 말참견을 하며 끼여들어도 홍칠공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단황야도 내가 배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별도리가 없었지. 그래 할 수 없이 삭발을 하고 중이 되었는데 바로 그때에 나도 옆에 있었단 말일세. 이것도 따지고 보면 십여 년 전의 일인데 그냥 이렇게 끝나고 말았군그래.]
[사부님, 그 동안의 우리 일은 다 말씀드렸으니 이제 사부님 말씀을 들어야지요.]
[내 일 말인가? 그때 대내의 어주에서 네 차례나 원앙오진회를 먹었으니 꽤 흐뭇했지. 그 밖에 또 여지백요자(菩枝白腰子)며 양설첨(羊舌簽) 등..··...]
그는 계속해서 어주에 있는 유명한 요리 이름을 주워대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이 꽤나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째서 노완동이 사부님을 찾지 못했었나요?]
홍칠공은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어주에 있는 요리사들은 정성 들여 만들어 놓은 음식이 계속해서 없어지자 귀신이 들어왔다면서 항불을 살라 내게 고사까지 지내던걸. 뒤에 이 일이 궁중 시위의 우두머리에게까지 알려진 모양이야. 그래 그들은 시위들을 어주로 파견해 귀신을 잡으려고 하더군. 나도 일이 묘하게 돌아간다고 느꼈지만 노완동을 볼 수 있어야지. 할 수 없이 은밀한 장소에 몸을 숨겼다네. 그곳은 뭐 악록화당( 綠華堂)이라고 하던가. 매화나무만 가득 심어져 있는 꼴이 아무래도 황제인가 뭔가가 겨울에 매화꽃을 감상하는 장소였나 봐. 여름날이라 새벽에 늙은 태감들이 나타나 청소나 했지 귀신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니 이 늙은 거지 혼자 유유자적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네. 황궁 안에야 도처에 먹을 것 투성이니까 나 같은 늙은 거지 백 명이 있다 해도 충분히 먹을 수가 있었지. 조용히 부상이나 치료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어. 십여 일 이렇게 지내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노완동이 귀신과 고양이 가면을 번갈아 쓰고 다니며 궁중을 발칵 뒤집어 놓더군. 그런데 또 몇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고 다니지 않겠나. 홍칠공, 홍영감님, 홍칠공, 홍영감님하며 찾기에 슬쩍 살펴보니 팽련호, 사통천, 양자옹 등 한패거리더란 말일세.]
[아니 그들이 어째서 사부님을 찾았을까요?]
[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들을 보자 몸을 숨졌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노완동이 나를 보았단 말일세. 반기며 달려들어 나를 껴안더군.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이 노완동이 결국 홍칠공을 찾고야 말았구나!> 그는 양자옹 등에게 뒤에 가 있으라고 명령했는데.....]
[양자옹 등이 어째서 노완동의 지시에 따르게 되었지요?]
[당시에는 나도 뭐가 뭔지 잘 몰랐어. 어쨌든 그들은 노완동에게 쩔쩔매더군. 노완동이 뭐라고 하든 거역을 못하더란 말야. 그는 양자옹 등에게 다른 곳에 잠시 가 있으라고 명령한 뒤에 나를 업고 우가촌으로 돌아가 너희 둘을 찾아야겠다는 게야. 원래 그는 너희들과 헤어지고 또 이리저리 헤매도 나를 찾을 수가 없어 조급해하던 차에 양자옹 그들과 만나게 되었다는 게야. 급한 김에 그들을 잡아 한바탕 두들겨 패고는 매일 나를 찾으라고 시켰다는 게지. 그들은 황궁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워낙 장소가 넓은데다가 또 내가 은밀히 숨어 있어서 시종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어.]
[노완동에게 그런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들 마귀 같은 악당들을 굴복시켰다고 하지만 어째서 그들은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노완동은 노완동대로 어리숙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게야. 노완동의 말에 따르며 자기 몸에 있는 때를 문질러 십여 개의 환약을 만들어 억지로 그들에게 세 개씩 먹게 했다는 게야. 그런 다음에 그 약이 사십구 일 후에 발작하는 무서운 극약인데 자기말고는 천하에 치료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나. 만약 홍칠공을 찾기만 하면 즉시 치료해 주겠다고 했다니 그들로서도 반신반의했겠지만 그렇다고 생사가 달린 문젠데 소홀히 할 수 있었겠나? 마침내 그래도 그냥 믿는 것이 후환이 없겠다고 생각해서 노완동이 시키는 대로 따라다니게 되었다는 게야.]
곽정은 본래 마음이 괴로워 침울해 있었지만 홍칠공의 이런 말을 듣고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가촌에 이르러 너희들을 찾았지만 보여야 말이지. 노완동은 또 그들에게 찾아내라고 야단을 치더군. 어제 저녁에도 풀이 다 죽어 돌아와서는 또 한바탕 그들을 향해 욕을 퍼붓다가 갑자기 이런 말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나 봐. <만약 내일도 그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오줌을 싸 환악을 만들어 네놈들에게 먹이고 말겠다.> 그러나 이 말이 그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네. 그들도 이젠 속은 줄을 알았지. 자기들이 먹은 약이 독약이 아니란 사실을 말일세. 나는 일이 위험하게 된 것을 깨닫고 노완동에게 그들을 다 처치해야만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했어. 그런데 팽련호도 사정이 묘하다는 것을 알았던지 독계를 써서 그 서장의 화상과 앉아 있는 내기를 걸게 만들었던 게야. 나도 말릴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우가촌에서 도망 나왔는데 마을 밖에서 가진악을 만나게 된 것일세. 그는 나를 보호하고 여기까지 왔다가 다시 가서 노완동에게 알렸지.]
[노완동이 어리숙하지만 그래도 나를 떠나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여기까지 쫓아온 게야. 하지만 그들도 그 뒤를 따라와 계속 노완동에게 약을 올렸으니 결국 참지 못하고 그 화상과 내기를 하게 된 것일세.]
황용은 여기까지 듣자 우습기도 하고 기가 막혔다.
[공교롭게 만나지 못했더라면 사부님의 생명이 노완동 손에서 끝날 뻔했군요.]
[내 목숨이야 원래 주워 온 것이니 누구 손에서 끝나든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황용은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사부님, 우리가 그날 명하도에서 돌아올 때.....]
[명하도가 아니라 압귀도다.]
[그래요, 압귀도라고 해두지요. 그 구양공자는 이젠 정말 귀신이 되었으니 상관할 것 없구요. 그날 우리가 뗏목 위에서 구양봉 숙질을 구했을 때 말이에요. 노독물이 천하에 오직 한 사람만 사부님의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데 무공이 뛰어나 억지로는 안 될 것이란 말을 했었지요. 그때 사부님께서는 나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시다며 그 사람의 이름을 대지도 않으셨는데 이제 저와 곽정 오빠가 갔다 왔으니 그분이 바로 예전의 단황야요, 오늘의 일등대사임을 자연 알게 되었지요.]
第 五 卷. 第 十二 章.(通卷 章). 신비의 섬이 쑥밭으로
[그가 만약 일양지의 재주로 내 기경팔맥을 뚫어만 준다면 상처야 거뜬히 치료할 수 있겠지. 그러나 이렇게 한번 손을 쓰면 원기가 크게 손상되어 길면 칠 년이요, 짧아도 오 년은 걸려야 겨우 회복될 텐데, 그가 비록 세정을 간파하고 이차 화산논검쯤은 안중에 없다 하더라도 이미 육칠십이 넘은 나이로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겠어?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 어찌 내가 염치없이 치료를 부탁하겠나?]
홍칠공의 말을 들은 곽정이 벌떡 일어났다.
[사부님, 일양지 무공을 저도 배웠으니. 제가 여기서 사부님의 기경팔맥을 뚫어 드릴게요.]
그러나 홍칠공은 머리를 살래살래 가로 저었다.
[일등대사가 네게 일양지를 전수해 준 의도를 모르겠느냐?]
곽정은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홍칠공의 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어이쿠, 그렇다면 제가 그분을 해친 결과가 되었군요!]
[그분이 용아를 치료할 때 만약 네가 옆에서 지법(指法)을 배우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뒤에 영고가 원수를 갚겠다고 산으로 찾아왔을 때 무엇 때문에 가슴을 내밀며 찌르라고 했겠느냐? 네가 내 부상을 치료해 준다는 것도 별로 요긴할 게 없느니라. 이 오륙 년 사이에 노독물이 가해를 하러 찾아온다면 어떻게 대처하겠느냐? 일등대사의 어려운 결단을 가볍게 생각하고 어길 수도 없지 않겠느냐?]
[사부님께서 치료를 하신 뒤에 노독물을 상대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홍칠공은 여전히 머리를 혼들었다.
[내 일시에 공력을 회복하기도 어려우려니와 연우루의 약속이 코앞에 닥쳤으니 그 일이나 끝나거든 다시 상의하도록 하자.]
[두 분이 입씨름하실 것도 없어요. 기경팔맥은 스스로도 뚫을 수 있으니까요.]
황용이 웃으며 끼여들었다.
[뭐라고?]
홍칠공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곽정 오빠가 마음속으로 외고 있던 그 괴상한 말들을 일등대사가 한어(漢語)로 번역해 준 게 있지 않아요? 요 며칠 생각해 보았는데 이 무공으로 혼자서도 기경팔맥을 통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묘하구나 묘해! 듣자 하니 될 것 같기는 한데, 적어도 일년 반은 걸려야 효과를 보겠구나.]
[사부님, 연우루의 대결에서 상대방은 틀림없이 구양봉을 청해 오지 않겠어요? 노완동의 실력이 그와 비교해 손색은 없겠지만 워낙 이상한 사람이라 믿을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도화도에 가서 아버님을 모셔 와야만 승산이 있을 것 같아요]
[옳은 말이야. 내 먼저 가흥으로 갈 테니 너희 둘은 도화도로 가도록 해라.]
곽정은 걱정이 되어 홍칠공을 가흥까지 모시겠다고 고집했다.
[그럼 네 홍마를 내가 타고 가자꾸나. 노상에서 위험을 만나도 그냥 말을 몰아 달린다면 아무도 쫓아오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말 위에 올라타 꿀꺽꿀끽 또 술 한 사발을 마시고 출발하려고 했다. 홍마는 곽정과 황용에게 하직을 고하듯 투레질을 한 뒤에 북쏙을 향해 달렸다.
곽정은 홍칠공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 가진악의 일을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다 보니 황용을 위로해 줄 생각도 않고 배 한척을 빌려 도화도를 향해 돛을 올렸다. 이윽고 배가 도화도에 이르자 황용은 사공을 되돌려보내고 말을 꺼냈다.
[곽정 오빠, 제가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우선 얘기를 해봐. 내가 할 수 없은 일이면 소용이 없잖아.]
[제가 뭐 여섯 분 사부의 목을 잘라 오라고 할까 봐 그러세요?]
[용아 왜 그런 얘기를 지금 꺼내지?]
[꺼내면 뭐 안 되나요? 그 일을 오빠는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제가 오빠를 좋아하기는 해도 그렇다고 절 죽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요.]
곽정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한탄했다.
[대사부께서 왜 그토록 화를 내셨는지 정말 모르겠어. 물론 내가 용아하고 친한 줄은 알고 계시지만..... 내 천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용아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는 없지.]
황용은 그 말이 진정에서 우러나온 말임을 알고 기분이 좋아져 그의 손을 잡고 물가에 줄지어 선 버드나무를 가리켰다.
[오빠, 오빠는 이 도화도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세요?]
[응, 정말 신선이나 살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야.]
[전 정말 여기서만 살고 싶어요. 오빠 손에 죽고 싶지는 않아요]
곽정은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야. 내 어째서 용아를 죽인단 말야?]
[만약에 말이에요. 오빠의 여섯 분 사부님과 어머니, 그리고 또 친한 친구들이 나를 죽여야 한다고 고집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만천하 사람들이 모두 용아를 괴롭히려 한대도 나만은 용아를 감싸 줄 거야.]
[저를 위해서 모든 걸 버릴 수 있겠어요?]
곽정은 이 말에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황용은 고개를 들어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면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용아, 내 이미 도화도에서 용아와 함께 살겠다고 말하지 않았어? 이 말을 할 때는 벌써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야.]
[그럼 좋아요. 오늘부터 절대로 이 도화도를 떠나면 안 돼요.]
[아니, 오늘부터라니?]
[네, 오늘부터예요. 제가 아버지께 연우루에 가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부탁할 거예요. 아버지와 함께 완안열을 죽여 오빠의 원수를 갚겠어요. 그리고 다시 몽고로 가 오빠 어머님을 모셔 오구요. 또...., 그래요. 아버지에게 오빠의 여섯 분 사부님께 사과드리라고 하겠어요. 오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근심을 제가 나서서 해결해 드리겠어요.]
곽정은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용아, 내가 용아한테 한 말은 다 생각한 바가 있어서 한 것이니 안심해도 돼.]
[천하의 일이란 말하기 어려운 거예요. 당초 그 몽고 공주와 혼인을 하겠다고 대답해 놓고는 왜 뒤에 와서 후회를 하지요? 옛날 전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어요. 한데 이제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오빠도 잘 생각해 보세요. 하늘은 늘 오빠를 따라다니며 심술을 부린다구요.]
여기까지 말한 황용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곽정은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물결처럼 출렁대며 밀려들었다. 황용의 애정이 이토록 깊고 무거울 줄이야.....
그녀와 함께 이 섬에서 평생을 보내고도 싶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을 다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꼭 그렇게 해야만 옳은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느 점이 타당하지 못한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황용이 또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오빠를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아녜요. 그리고 또 억지로 오빠를 여기 계시라고 하는 것도 아녜요. 다만...., 다만 굉장히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군요.]
황용은 여기까지 말하다 갑자기 곽정의 어깨에 기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곽정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어안이벙벙했다.
[용아, 도대체 무엇이 무섭다고 이러는 거야?]
황용은 대답도 없이 흐느껴 울기만 했다.
곽정은 황용과 함께 적지 않은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녀가 늘 희희낙락하는 모습만 보았지 걱정이나 두려움에 싸여 있는 것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이제 자기의 옛집으로 돌아와 곧 아버지를 만나게 될 텐데 어째서 이렇게 무섭다고 울기만 하는가!
[아버지께서 야단이라도 치실까 봐 그러는 게야?]
황용은 머리만 살래살래 가로 저었다.
[그럼 내가 이 섬을 떠난 뒤에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까 봐 그래?]
황용은 계속해서 고개만 흔들며 곽정이 물어 보는 말에도 대답을 안 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황용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곽정 오빠, 도대체 무엇이 무서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오빠의 대사부께서 나를 죽이려고 대들던 표정이 떠올라 무서워 몸서리가 쳐져요. 언젠가는 오빠가 그분의 말을 듣고 저를 죽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가 오빠에게 여기를 떠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니 대답해 주세요.]
[난 또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러나 했더니 바로 그 일 때문이었군. 그날 북경에서 여섯 사부님께서 용아에게 요녀니 뭐니 욕을 한 일도 있었지만 뒤에 내가 용아를 따라 나온 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잖아? 여섯 사부님들은 겉으로는 무서워 보이지만 마음씨는 착하기 이를 데 없으니 아무 염려 마. 다음에 용아를 만나 자세히 아시게 되면 그분들도 좋아하게 될 텐데 뭘 그래? 이사부님의 소매치기 솜씨는 묘하기 그지없으니 다음에 꼭 배워 두라구. 칠사부는 더욱 부드럽고 자상하시지,]
곽정이 대수롭지 않다고 말을 하는데 황용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오빤 여길 떠나시겠다는 말씀이로군요?]
[그럼 우리가 함께 떠나면 될 것 아니겠어. 함께 몽고로 가서 어머님도 모셔 오고, 또 함께 완안열을 죽이고 돌아오면 더욱 좋겠군 그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린 영원히 함께 돌아올 수도 없거니와 한평생 같이 지낼 수도 없을 거예요.]
[그건 무슨 말이지?]
황용은 살래살래 머리를 혼들었다.
[모르겠어요? 그러나 저는 오빠의 대사부를 보고 난 후 그분이 저를 골수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곽정은 그녀의 말을 듣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황용은 아직도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지만 미간을 찌푸린 채 예측할 수 없는 장래의 어떤 불운을 직접 내다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태까지 겪었던 모든 일은 황용이 예측한 대로 들어맞았다. 이번에 만약 그녀의 말을 묵살했다가 장래 정말 무슨 일이 닥친다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다른 것은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좋아, 그럼 내가 이 섬을 떠나지 않으면 되지?]
황용은 이 말을 듣고 곽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줄기 눈물이 그녀의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용아, 또 무엇을 대답해 주면 되지?]
곽정이 조용히 소곤거렸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황용은 찌푸렸던 이마를 펴며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제가 더 욕심을 부린다면 그땐 하늘도 들어주시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긴 소매를 살포시 들어올리며 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머리를 돌리면 금환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팔을 들면 흰옷이 바람에 나부꼈다. 몸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가끔 손을 들어 꽃나무를 혼들면 붉은 꽃, 흰 꽃, 노란 꽃 둘이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주위를 맴돌며 떨어져 내려왔다. 한참 동안 이렇게 춤을 추다가 황용은 갑자기 나무 위로 뛰어올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자리를 옮겨 춤을 추면서 연쌍비(燕雙飛)와 낙영장(落英掌)의 재주를 부렸다. 더할나위 없이 즐거웠던 것이다.
(어머니가 옛날얘기를 해주실 때 동해 어딘가에 선산(仙山)이 있고, 산 위에는 선녀가 많이 산다고 하시더니 정말 그 선산이 이 도화도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며, 또 선녀라 해도 이 용아보다 예쁠 수있을까?)
곽정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황용이 갑자기 깜짝 놀라며 나무에서 뛰어 내려와 곽정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뒤 숲 속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곽정은 혹시 지난번처럼 길을 잃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그녀 뒤를 바짝 밟았다. 황용은 이리 꼬불 저리 꼬불 한참동안 달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앞에 보이는 이상한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게 뭐지요?]
곽정이 앞으로 달려가 허리를 숙이고 살펴보니 노란 말 한 필이 땅위에 누워 있는데 바로 삼사부 한보구가 늘 타고 다니던 말이었다. 손을 뻗어 말의 배를 만져 보니 차디찬 것이 죽은 지 이미 오래 된 듯했다. 이 말은 당년 한보구를 따라 몽고의 사막에도 온 일이 있었다. 곽정은 어려서부터 몹시 친하게 지내 온 말이 여기 이렇게 죽어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은 나이는 많지만 튼튼한데다가 워낙 잘 달려 남부 어느 곳이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늙은 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죽어 있을까? 삼사부께서는 틀림없이 크게 상심이 되셨겠구나.)
다시 살펴보니 말은 비스듬히 누워 죽은 것이 아니라 네 다리를 구부린 채 죽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었다. 곽정은 오싹 소름이 끼치며 예전에 황약사가 화쟁 공주가 타고 다니던 말을 일 장으로 죽였을 때가 이와 똑같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급히 왼팔을 들어 말목을 위로 치켜 올리고 오른팔로 앞다리를 더듬어 보니 생각했던 그대로 뼈가 부러져 있었다. 다시 말등을 만져 보니 등뼈도 마찬가지였다. 곽정은 놀라움에 부들부들 떨며 손을 들다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에 온통 피가 묻어 났기 때문이었다. 피는 벌써 까맣게 변했지만 아직도 비린내를 풍기는 것으로 보아 죽은 지 삼사 일은 된 것 같았다. 곽정은 급히 말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살펴보았지만 상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삼사부께서 흘린 피란 말인가? 그럼 그분은 어디에 계시단 말이냐?)
황용은 잠자코 곽정이 말을 살피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서둘 것 없어요. 자세히 살펴보면 알 것 아니겠어요?]
황용은 꽃나무를 이리저리 제치며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곽정이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보니 땅 위에도 핏자국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그걸 따라가다 보면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곽정은 황용을 앞세우고 핏자국을 따라 앞으로 달렸다. 핏자국이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는 통에 몇 차례나 길을 잃을 뻔했지만 그때마다 세심한 황용이 풀더미 속이나 바위 옆에서 흔적을 찾아내곤 했다. 핏자국이 보이지 않을 땐 황용이 엎드려 발자국이나 말털을 용케도 찾아냈다. 이렇게 몇 리를 쫓아가다 앞쪽을 살펴보니 나지막한 꽃밭이 나타나고 그 꽃밭 속에 묘지가 보였다. 황용은 급히 달려들어 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곽정은 맨 처음 도화도에 왔을 때 이 묘지를 본 일이 있었다. 황용의 어머니가 잠들어 계신 곳이다. 즉시 바닥에 버려진 묘비를 일으켜세웠다. 과연 <도화도여주 풍씨매향지총(桃花島女主馮氏埋香之塚)>이란 글씨가 보였다. 이 11자의 글씨는 황약사가 직접 쓰고 새긴 것이다.
황용은 묘문이 열린 것을 보고 섬에 크나큰 변고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워낙 세심한 성격이라 직접 묘지 안으로 뛰어들어가지 않고 우선 주위부터 살폈다. 묘지 왼쪽 잔디가 엉망으로 짓밟혔고 묘문 입구 여기저기에 병기를 휘두르며 싸운 흔적이 보였다. 그녀는 묘문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묘지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허리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곽정은 혹시라도 황용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바짝 뒤따라갔다.
묘지 안의 길을 보고 둘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벽의 돌들이 부서져 떨어진 것으로 보아 한바탕 악전고투가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석실로 들어서며 황용이 몸을 숙이고 뭔가를 주워 들었다. 어두컴컴하기는 했지만 곽정은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육사부 전금발이 쓰다 부러진 저울대 반 토막이었다. 이 저울대는 강철을 두드려 만든 것으로 굵기가 사람 팔뚝만한데 누군가에 의해서 두 토막으로 부러진 것이다. 황용과 곽정은 서로 바라보면서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둘 다 맨손으로 이 쇠저울대를 부러뜨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화도에서 벌어진 일이니 황약사말고는 이런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일이었다.
곽정은 황용의 손에서 부러진 저울대를 받아 들고 허리를 숙여 남은 반 토막을 다시 찾았다. 가슴에 열댓 개의 두레박을 달아맨 듯 칠상팔락(七上八落) 두근거렸다. 그는 육사부를 찾아내고도 싶었고 또 찾을 수 없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했다. 다시 몇 발짝 걸어 들어가니 더 침침하고 어두워졌다. 곽정은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다 갑자기 둥글둥글하고 딱딱한 물건을 찾아냈다. 이것은 저울에 매달렸던 추로 전금발이 적을 만나면 이것을 날려 상대를 치는 데 쓰던 것이었다. 곽정은 그것을 품속에 챙겨 넣고 계속 더듬어 나갔다. 손에 갑자기 차디찬 물건이 와 닿는 것이 아무래도 사람의 얼굴 같았다. 흠칫하며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다가 꽝 하고 돌로 된 천장을 들이받았다. 그런데도 곽정은 전연 아픈 줄도 모르고 급히 부싯돌을 켜 불을 밝혀보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부싯돌의 불이 여전히 그의 손에서 비스듬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황용이 불빛 아래서 살펴보니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전금발이 거기에 누워 있었다. 나머지 부러진 반 토막 저울대가 그의 가슴 깊이 꽂혀 있었다.
일이 이쯤 되었다면 그 진상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황용은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 곽정의 손에서 불을 빼앗아 그의 코에 대고 연기를 씌게 했다. 곽정이 두어 번 재채기를 한 뒤에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멀거니 황용을 쳐다보며 일어섰다. 묘실에 들어서니 그곳은 더 엉망진창이었다. 상석이 부러지고 쇠로 만든 남희인의 멜대가 비스듬히 바닥에 꽂혀 있었다. 묘실의 왼쪽 모퉁이에도 누군가가 누워 있는데 뒷모습을 보니 해진 망건에 신발이 벗겨진 것이 묘수서생 주총이 아닌가!
곽정이 묵묵히 다가가 주총의 몸을 뒤척이니 입 언저리에 미소를 머금은 채 몸은 벌써 차디차게 굳어 있었다. 이런 죽음의 묘실에서 미소라니 이상야릇하기 그지없었다.
[이사부님, 제자 곽정이 왔습니다.]
곽정이 가볍게 그의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는데 짤랑짤랑 소리가 나 그의 품속에서 무수한 주옥과 진귀한 보물이 바닥에 떨어져 흩어졌다. 황용이 바닥에 흩어진 주옥을 주워 살펴보다가 다시 집어 던졌다.
[이건 우리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바친 보물들이에요.]
곽정은 눈알을 부라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불이라도 뿜어낼 것 같은 험악한 눈초리였다.
[그럼 내 이사부께서 여기에 보물을 훔치러 들어왔단 말인가?]
곽정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고도 황용은 물러서지 않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마주 쏘아보는 눈빛에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내 이사부님은 정정당당한 대장분데 네 아버지의 보물을 훔칠 리 있겠느냐? 더욱이 네 어머님의 묘지에까지 그걸 훔치러 들어오실 리가 있겠느냐구?]
그러나 황용의 귀엔 그의 말투가 점점 분노에서 비탄으로 바뀌어가는 것처럼 들렸다. 눈앞의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여기 흩어진 보물은 확실히 주총의 품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이사부의 별명을 묘수서생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 주머니 속의 어떤 물건이라도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는 묘기를 지닌 사람 아닌가! 그렇다면 그분이 정말 이 묘지에 보물을 훔치러 들어오셨단 말인가? 아니다. 결코 그럴 리는 없다. 이사부님은 정당하고도 결백한 위인으로 결코 이렇게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는 분이다. 여기엔 분명 다른 곡절이 숨어 있을 것이다.
곽정은 슬프기도 하고 화도 치밀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환했다 오락가락하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두 손을 어찌나 꽉 쥐었던지 손가락 마디에서 우두둑 우두둑 소리가 났다.
[그날 오빠 대사부님의 표정을 보고 벌써 오빠와 나 사이에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을 알았어요. 저를 죽이고 싶거든 지금 죽여 주세요. 어머니가 여기 계시니 저도 어머니 옆에 잠들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저를 묻어 주신 다음 이 섬을 재빨리 벗어나도록 하세요. 부디 우리 아버지에게 들키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세요.]
곽정은 큰 걸음으로 왔다갔다하며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황용은 벽에 걸린 어머니의 화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상의 얼굴에 무언가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암기 두 개가 꽂혀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그 암기를 뽑아 곽정의 손에 넘겨주었다. 바로 가진악이 늘 쓰던 독릉이었다. 황용이 상석 뒤에 있는 휘장을 열자 어머니의 옥관(王棺)이 드러났다. 그녀는 관 옆으로 다가서다가 자기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한보구와 한소영 남매가 나란히 옥관 뒤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한소영은 스스로 자결을 한 듯 손에 아직도 칼자루를 쥔 채였고, 한보구는 상반신을 관 위에 걸친 채 뇌문(腦門)에 손가락 구멍 다섯 개가 뚫린 혼적이 역력했다. 곽정은 한보구의 시신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혼자 중얼거렸다.
[내 이 두 눈으로 매초풍이 죽은 것을 직접 보았는데 천하에 이 구음백골조를 쓸 줄 아는 사람이 황약사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곽정은 몸을 숙여 한소영의 손에 쥐여 있는 장검을 빼들고 밖으로 나갔다. 황용의 곁을 지나면서도 눈초리가 망연한 것이 그녀를 보지 못한 것 같기만 했다. 황용은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서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들고 있던 불이 타다 꺼진 것이었다. 그녀는 늘 다니던 묘실이지만 다른 시체들과 함께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무서워져 벌벌 떨면서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뭔가 미끄러운 물체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황용은 정신없이 내달려 묘문 밖에 나와서야 비로소 방금 걸렸던 것이 전금발의 시체였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묘비가 비스듬히 쓰러진 것을 바로 세우며 묘문을 닫으려고 했다.
(아버지께서 사괴(四怪)를 살해하고도 어째 문을 잠그지 않았을까? 워낙 어머니에 대한 정이 두터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묘문을 열어 놓는 일이 없었는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부쩍 의심이 생겼다.
(아버지가 어째서 시체 네 구를 그냥 어머니 옆에 방치했을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아버지도 무슨 일을 당하신 것은 아닐까?)
황용은 서둘러 묘비를 왼쪽으로 세 번 오른쪽으로 세 번 밀어 묘문을 잠가 놓고 집을 향해 달렸다. 곽정은 그녀보다 먼저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몇 십 보 걷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그러다 황용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그녀 뒤를 바짝 쫓았다. 두 사람은 묵묵히 대나무숲을 지나고 연못을 건너 황약사가 평소 거처하던 정사(精含) 앞에 이르렀다. 정사 역시 이리 무너지고 저리 허물어져 온통 부러진 기둥과 대들보로 엉망진창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황용이 아버지를 부르며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지만 넘어지고 쓰러진 탁자며 의자, 책이며 벼루 등이 여기저기 널려 있을 뿐 황약사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용은 평소 꾀가 많고 일을 당해도 당황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이러한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태연자약할 수는 없었다. 두 손으로 엎어진 책상 다리에 몸을 기대고 비틀거리는 품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황용은 이렇게 한참 동안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급히 벙어리 하인들이 거처하는 숙소로 달려가 보았지만 역시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부엌의 아궁이도 썰렁한 것이 불을 땐 지 오래 된 것 같았다. 모두들 죽지 않았다면 섬을 떠난지 오래 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도화도에는 그녀와 곽정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황용이 천천히 서재로 되돌아와 보니 곽정이 아직도 넋을 잃고 바위처럼 우두커니 방안에 서 있었다.
[곽정 오빠, 울기나 하세요. 우선 울고 나서 말을 해요.]
황용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곽정과 이 여섯 사부의 정이 친부모 자식 간보다 더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공이 상승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마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풀지 않으면 중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곽정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지 황용을 뚫어지게 쏘아보기만 했다. 황용은 다시 한 번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너무 맥이 빠져 그만두고 말았다. 다만 오빠 하고 한 번 불러 보았을 뿐 목이 메어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넋을 잃은 채 하염없이 침묵을 지켰다.
[내 용아를 죽일 수는 없어, 용아를 죽일 수는 없어.]
곽정이 혼자 중얼거리듯 하는 말이었다.
[사부님들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한바탕 울기나 하세요.]
황용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않을 거야. 울 수가 없어.]
이 두 마디 말이 오고 간 후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멀리 파도 소리만 은은히 들려 왔다. 황용의 뇌리에는 삽시간에 백 가지 천 가지 상념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려서부터 16살 나이에 이르기까지 이 섬에서 일어났던 허다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난 먼저 사부님들을 안장해야 해.]
곽정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황용의 의식을 되찾아 주었다.
[그래요. 먼저 사부님들을 안장하도록 해요.]
황용이 먼저 앞장을 서고 곽정이 그 뒤를 따라 다시 묘지 앞에 이르렀다. 황용이 묘비를 혼들어 막 묘문을 열려고 하는데 곽정이 달려들며 발을 번쩍 들어 묘비의 허리를 찼다. 그 묘비는 대단히 견고한 화강암으로 만든 것이라 있는 힘을 다해 찼는데도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었을 뿐 부서지지 않고 곽정의 오른발에 피만 낭자하게 흘렀다. 곽정은 그런데도 전연 통종을 느끼지 못하는지 한소영의 장검을 들어 닥치는 대로 여기저기 치는 것이었다. 칼이 돌에 맞을 때마다 사방으로 불꽃이 튀면서 돌가루가 홑어지더니 이윽고 뚝 소리와 함께 장검이 부러졌다. 곽정이 장풍을 날리자 묘비가 결국 두 토막으로 부러지면서 그 안에 있던 쇠기둥이 나타났다. 곽정이 그 쇠기둥을 잡고 흔들자 미처 구부러지기도 전에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묘문이 활짝 열렸다.
[아니, 황약사 외에는 이런 장치가 있는 줄 알지 못할 텐데 누가 우리 은사님들을 유인해 들어오시게 했단 말인가?]
곽정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부러진 장검을 내동댕이치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부러진 묘비는 칼자국투성이요, 여기저기 선혈이 어지럽게 튀었다. 황용은 그가 자기 어머니 묘지에 분풀이를 하는 것을 보고 이런 결심을 했다.
(만약 어머님의 옥관을 부수려고 한다면 내 먼저 관에 머리를 받고 죽어야지.)
황용이 막 묘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곽정이 벌써 전금발의 시체를 안고 나왔다. 그는 시체를 내려놓고 다시 들어가 주총과 한보구, 한소영의 시체를 정중히 차례로 안아 모셔 내왔다. 곽정의 표정은 경건하고 엄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부님에 대한 사랑이 내게 대한 애정보다 깊구나. 나도 아버지를 찾아야 해.)
곽정은 시체 네 구를 안아다 숲 속에 뉘었다. 황용 어머니의 묘지에서 수백 보 떨어진 거리였다. 그는 그제야 엎드려 땅을 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부러진 반 토막 장검으로 파들어 갔다. 그러나 손놀림이 점점 빨라지자 칼자루까지 부러지고 말았다. 곽정은 갑자기 가슴속의 열기가 올라오는지 울컥 피를 토했다. 그런데도 계속 엎드려 두 손으로 흙을 파 밖으로 집어 던졌다. 꼭 미친 사람 같았다. 황용은 꽃을 가꾸던 벙어리 하인의 숙소로 가서 삽 두 자루를 가지고 나와 한 자루는 곽정에게 넘겨주고 남은 한 자루를 가지고 자기도 도우려고 나섰다. 곽정은 아무 말 없이 황용이 건네 준 삽을 받아 꺾어 버리고는 그냥 손으로 팠다.
일이 이 지경이 되니 황용 역시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아 곽정이 하는 양을 하릴없이 지켜 보기만 했다. 곽정은 여전히 있는 힘을 다해 파내려 갔다.
밥 한끼 먹을 정도 시간이 지나자 크고 작은 구덩이 두 개가 만들어졌다. 그는 우선 한소영의 시신을 작은 구덩이에 눠어 놓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몇 번 이마를 조아린 뒤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윽고 흙을 덮기 시작했다. 그런 뒤에 주총의 시체를 옮겨 왔다. 그는 주총의 시신을 큰 구덩이에 뉘려다 이런 생각을 했다.
(더러운 황약사의 보물을 어떻게 이사부님과 함께 땅속에 묻는담?)
그래서 주총의 품속에 손을 넣고 하나하나 보물들을 꺼내 놓는데 마지막에 흰 종이 한 장이 나와 재빨리 펼쳐 보았다.
도화도주 선배님 전 상서.
근자에 소식을 듣고 전진 칠자가 자기들의 역량도 모르고 도화도를 찾아 나섰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후배 등은 여기에 오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솔한 말 때문에 양가에 원한이 생긴다면 여간 유감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선배님은 당세의 고인으로서 왕중양 왕진인과 승부를 겨룰 수는 있을지 몰라도 어찌 존귀함을 급히고 이 같은 후배들과 하루의 길고 짧음을 겨루실 수 있겠습니까? 옛 조(趙)나라의 인상여(藺相如)가 염파(廉頗)에게 길을 양보한 것은 천고의 미담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무릇 호걸 지사의 흉금은 바다와 같아 닭이 벌레를 쪼아 먹기 위해 다투는 것과 같은 사소한 시비는 가릴 바가 없습니다. 잠시 피해 양보해 주시고 다른 전진파 제자들이 사시나무 회초리를 짊어지고 도주의 문전에 이르러 사과를 하게 된다면 천하 영웅은 선배님의 높은 뜻을 우러러 받들게 될 것이니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내용의 편지 밑에 여섯 사부가 친필로 쓴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곽정은 그 편지를 들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전진 칠자와 황약사가 우가촌에서 싸울 때 구양봉이 독계를 쓰는 바람에 장진자 담처단이 맞아 죽었지. 그때 구양봉이 한마디 말로 이 화를 황약사에게 뒤집어씌웠고 또 황약사는 번명조차 한마디 없었으니 전진교는 그를 골수에 사무치게 미워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래서 내 여섯 사부님들은 전진교 사람들이 대거 도화도로 원수를 갚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양쪽에 모두 손해가 있을까 걱정을 해 이 편지를 써서 황약사에게 잠시 피하라고 권유했던 모양이다. 내 사부님들께서는 호의로 그랬는데 황약사 이 도적은 어찌하여 내 사부님들을 모두 이 모양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사부님께서 이렇게 편지를 써놓고도 왜 황약사에게 전해 주지 않고 주머니 속에 그냥 보관하고 계셨을까? 옳지, 전진 칠자가 먼저 도착해서 일이 너무나 긴박하게 되는 바람에 미처 편지를 전할 여유도 없어서 여섯 사부님께서 총총 쫓아오셨겠지. 쌍방의 싸움을 제지하려고 나섰는데 황노사는 전진교를 도와주려고 온 것으로 잘못 판단하여 흑백을 가릴 것도 없이 독수를 쓰고 말았나 보구나.)
곽정은 편지를 들고 한참 동안이나 망연해 있다가 그것을 접어 품속에 챙겨 넣으려고 하다가 뒤에도 글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즉시 뒤집어 보니 꼬불꼬불 이렇게 씌어 있었다.
앞일을 예측할 수 없으니 모두들 방비를.....
마지막 한 자는 오직 세 획만이 씌어 있어 글자가 완전치 않았다. 재난이 너무 급작하게 일어나 다 쓰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건 분명 동녘동(東)을 쓰다 만 것이다. 이사부께서는 동사(東邪)를 조심하라고 하신 것인데 미처 시간이 없었구나.]
그는 편지를 움켜쥐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사부님, 이사부님의 호의를 황노사는 악의로 받아들였군요.]
곽정이 맥이 빠져 스르르 손을 놓자 구겨진 편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주총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황용은 그가 편지를 읽을 때의 험악했던 표정을 보고 그 속에 중요한 내용이 씌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구겨진 편지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서서히 다가가 편지를 주워 앞뒤를 다 읽어 보았다.
(오빠의 여섯 사부가 도화도에 온 것은 호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구나.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묘수서생의 덕이 부족해 평생 도둑질만 해오더니 우리 어머니의 이 많은 보물을 보고 도심이 발동해 마침내 아버지의 금기를 건드리고야 말았군.....)
황용이 마음속으로 원망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곽정이 다시 주총의 시신을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곽정은 꽉 움켜쥔 주총의 왼손 주먹에서 무슨 물건 하나를 빼 살펴보고 있었다. 황용이 보니 비취빛 보옥을 쪼아 만든 여자의 신발이었다. 길이는 일 촌 정도였는데 반짝반짝 짙은 녹색빛을 발하고 있었다. 장난감이라고는 하지만 어찌나 정교하게 생겼는지 실물이나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영롱한 것이 과연 진품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묘실에서는 여태까지 본 일이 없는 물건이고 보면 주총이 다른 곳에서 입수한 듯싶었다.
곽정은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지만 신발 바닥에 초(招)자가 보이고 안 바닥에 비(比)자가 보일 뿐 다른 것은 찾아볼 수가 없자 발끈 성을 내며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런데 이 신발은 어찌나 단단한지 돌에 부딪혔는데도 깨지지 않았다.
곽정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서서히 주총과 한보구, 전금발, 세 사람의 시신을 구덩이에 뉘고 흙을 덮으려고 하다가 사부들의 얼굴을 비통에 잠긴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차마 흙을 덮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다시 구덩이 옆의 보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그것들을 보면 볼수록 화가 치미는지 두 손으로 보물들을 움켜쥐고 황용 어머니의 묘 앞으로 달려갔다.
황용은 그가 혹시라도 어머니의 옥관을 다치게 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앞질러 달려가 묘 앞을 막아 서며 두 팔을 벌렸다.
[왜 이러는 거예요?]
곽정은 대답도 하지 않고 왼쪽 어깨로 황용을 가볍게 밀친 다음 두손을 안을 향해 힘껏 뿌렸다. 쨍그랑 옥과 옥이 부딪치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황용은 비취빛 보옥을 쪼아 만든 신발이 자기 발 앞에 떨어진 것을 보고는 즉시 주워 들었다.
[이건 우리 어머니 물건이 아녜요.]
황용이 벌컥 화를 내며 그것을 도로 집어 던졌다. 곽정은 황용을 한 번 흘끔 살펴보더니 바닥에 떨어진 그 물건을 집어 들어 그대로 품속에 챙겨 넣은 뒤에 돌아와 세 사람의 시신을 흙으로 덮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참 일을 하는 동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황용은 그가 여전히 울지 않자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혼자 있게 내버려둔다면 혹시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돌아와 절인 생선과 구워 말린 고기를 찾아 되는 대로 밥과 찬을 만들어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돌아왔다. 곽정이 여전히 사부의 분묘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밥을 짓느라 반시간 이상 걸린 셈이었지만 곽정은 서 있는 장소를 옮긴 것 같지도 않거니와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이 석상처럼 어둠 속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황용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곽정 오빠, 왜 그러고 계셔요?]
그러나 곽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식사를 하세요. 하루 종일 굶었으니 시장하실 거예요.]
[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도화도의 음식은 들지 않겠어.]
황용은 곽정이 워낙 고집이 센데다 비통에 잠겨 있어 더 이상 권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하는 수 없이 바구니를 내려놓고 자기도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렇게 하나는 서고 하나는 앉은 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반달이 바다 위에서 솟아나와 이제 그들 머리 위에 와 있었다. 바구니 속의 밥과 반찬이 썰렁하게 식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들 두 사람의 마음도 차디차게 식어 있었다.
쓸쓸한 바람, 차디찬 달, 파도 소리만 은은히 들려 오는 가운데 갑자기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어찌나 처절한지 이리나 호랑이의 울부짖음 같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사람의 신음 소리 같기도 했다. 한데 바람에 실려 온 소리라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면 그 소리도 사라졌다. 황용은 귀를 기울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음 소리 같기는 한데 사람의 소리인지 짐승의 소리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황용은 즉시 방향을 살펴 확인한 뒤에 그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곽정을 불러 함께 가고 싶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은 아닐 거야. 그가 본다면 아무래도 번뇌만 더해 주는 것이겠지.)
황용은 이 캄캄한 밤에 혼자 간다는 것이 솔직히 무섭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도화도에 있는 나무며 풀, 어느 것 하나 낯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지만 애써 용기를 북돋우며 앞을 향해 달렸다. 10여 보를 달리는데 곽정이 바람을 일으키며 벌써 자기를 제치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길을 몰라 금방 방향을 잃고는 닥치는 대로 앞에 보이는 나무를 휘갈기는 것이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황용이 이렇게 말하며 곽정을 이끌었다.
[넷째 사부님, 넷째 사부님!]
원래 곽정은 그 소리가 사사부인 남산초자 남희인이 내는 소리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황용의 마음은 또 한 번 싸늘하게 식었다.
(사사부가 나를 보고도 죽이려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지.)
그러나 지금 와서 이것저것 가릴 입장이 아니었다. 재난을 목전에 두고도 피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곽정을 데리고 동쪽 숲 속으로 달려갔다. 한 복숭아 나무 밑에 사람이 새우처럼 몸을 꼬고 이리저리 뒹굴고있었다. 곽정이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그롤 부축했다. 남희인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고통이 심한지 계속 신음 소리를 냈다. 곽정은 놀랍고도 반가운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사부님! 사사부님!]
흐느껴 울면서 이렇게 넷째 사부를 부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희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곽정의 따귀를 후려쳤다. 곽정은 아무 방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여 피했다. 남희인은 헛손질을 하게 되자 이번에는 왼손 주먹을 들어 후려쳤다. 곽정은 사부가 자기를 책망해서 그러는 줄 알고 기쁜 나머지 그냥 꼿꼿하게 맞기로 했다. 그런데 남희인의 주먹이 어찌나 셌던지 펑 하고 때리는 순간 그만 벌렁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곽정은 어려서부터 사사부인 남희인과 더불어 수백 번 수천 번 대련을 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주먹이며 장력이며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주먹의 공력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하며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남희인은 다시 큰 돌 하나를 주워 들고 곽정의 머리룰 내리쳤다.
곽정은 미처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을 때라 맞기만 하면 머리가 부서질 찰나였다. 황용은 옆에서 이 험악한 광경을 지켜 보고 있다가 급히 일어서면서 왼손으로 남희인의 어깨를 밀었다. 남희인은 돌을 안은 채 벌렁 나자빠져 신음 소리를 내면서 쉬이 일어나지를 못했다.
황용이 이렇게 민 것은 어디까지나 곽정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를 해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남희인이 넘어져 옴짝달싹 못하고 있자 황용은 급히 대들어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남희인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 미소는 억지로 만들어 낸 것처럼 이상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황용은 너무나 무서워 외마디 비명을 지를 뿐 감히 그의 몸에 손을 대지 못했다. 순간 남희인이 주먹으로 황용의 어깨를 후려쳤다. 이 바람에 때린 쪽이나 맞은 쪽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황용은 연위갑을 입고는 있었지만 너무나 아팠다. 그래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바라보니 남희인의 주먹은 연위갑의 가시에 찔려 선혈이 낭자했다.
남희인과 황용의 비명 소리와 곽정이 사사부를 찾는 애절한 목소리가 뒤범벅이 되었다. 남희인은 곽정에게 시선을 옮기다가 그제야 그가 누군지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을 하려는지 입을 씰룩거리는데도 힘이 들어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지만 눈초리에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사사부님, 좀 쉬세요. 말씀은 다음에 하셔도 되지 않겠어요?]
곽정이 이렇게 권했지만 남희인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고 계속 입을 씰룩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잠시 이렇게 버티던 남희인의 목이 뒤로 축 처졌다. 곽정은 그를 부둥켜안고 계속해서 <사사부님!> 하고 불렀다.
황용은 옆에서 지켜 보고 있다가 남희인이 이상한 몸짓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사사부님께서 뭔가 글씨를 쓰세요.]
곽정이 보니 남희인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땅 위에 글씨를 쓰려 하고 있었다. 달빛 아래 한 글자 한 글자를 힘겹게 쓰고 있었다.
[나를.... 죽인.... 자.... 는 바로.....]
황용은 옴직거리는 남희인의 손가락을 초조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도화도에 와 있으니 제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 아버지가 죽였다는 사실을 알 것 아닌가? 이제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도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를 죽인 사람의 이롬을 밝히려고 한다면 혹시 다른 사람이 아닐까?)
황용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그의 손가락을 주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맥이 풀리는지 점점 무력해지는 그의 손가락이 안타깝기만 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빨리 그의 이름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런데 그는 이미 써놓은 글자의 왼쪽 위에 짧게 열십(十) 자를 그려 놓고 바들바들 떨 뿐 더 쓰지를 못했다. 손가락이 굳어 더 쓸 기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곽정은 그의 몸이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며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숨을 거둔 것이다. 곽정은 그가 마지막으로 써놓은 열십 자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사사부님, 사부님께서 누를황(黃) 자를 쓰시려고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정말 누를황 자를 쓰시려고 그랬지요?]
그는 남희인의 몸에 엎어져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방성대곡했다. 온종일 참고 참았던 슬픔이 봇물처럼 터진 것이다. 그렇게 울부짖다가 마침내는 남희인의 시체 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홀렀을까. 곽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날이 활짝 밝아 있었다. 그는 비틀비틀 일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황용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남희인의 시체는 아직도 눈을 멀거니 뜬 채였다.
곽정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나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손을 뻗어 가만히 남희인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그 순간 그가 임종할 때의 광경이 생각났다. 도대체 어떤 치명상을 입었는지 궁금해져 그의 옷을 벗기고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이상스럽게도 어제 저녁 황용을 때리다 입은 상처밖에는 다른 이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공을 다친 흔적도 어떤 독에 중독된 흔적도 없었다.
곽정은 그의 시체를 부축해 안고 주총 곁에 함께 묻어 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숲 속 길이 워낙 이상하게 생겨 수십 보를 걷다가 또다시 길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큰 복숭아 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안장했다.
곽정은 하루를 꼬박 굶어 허기가 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길을 찾아 바닷가로 나가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질어질해서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아무데나 앉아 쉬다가 정신이 들면 다시 걸었다. 앞에 길이 나오거나 말거나 그냥 해를 보며 동쪽으로 가기로 했다. 이렇게 한참 동안 걷다 보니 앞에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밀림이 나타났다. 나무마다 가시덤불이 얽히고설켜 있어 발 디딜 장소조차 없었다.
(전진이 있을 뿐 후퇴는 없다.)
이렇게 결심한 곽정은 나무 위로 펄떡 뛰어올랐다. 겨우 한 발짝 옮겼는데 북 하며 바지가 가시에 걸려 찢어지고 살에 빨간 핏자국이 길게 금을 그었다. 다시 몇 발짝 옮기는데 가시덤불이 이번에는 왼쪽 다리를 걸고 잡아당겼다. 비수를 들어 잘라 버리고 앞을 보니 아득한 것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다리의 살이 다 벗겨지는 한이 있어도 이 도깨비 소굴 같은 섬을 벗어나야 한다.)
굳은 결심으로 몸을 솟구쳐 뛰어넘으려고 하는데 아래서 황용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오세요. 제가 길을 안내하겠어요.]
흰옷을 입은 황용이 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곽정은 대꾸도 하지 않고 뛰어 내려왔다. 황용은 안색이 창백한 것이 핏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막상 얼굴을 대하자 가련한 생각이 들어 먼저 다친 데가 아프냐고 물으려다가 꿀꺽 삼켰다. 황용은 그가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실룩거리다가 그만두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그래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 가요.]
황용은 한숨을 섞어 맥없이 말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이리 꼬불 저리 꼬불 길을 찾아 걷기만 했다. 황용의 몸은 아직도 건강하지 못했다. 게다가 갑자기 이런 큰 변고를 당했으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곽정을 원망할 수도, 아버지를 원망할 수도 없거니와, 강남 육괴는 더욱 원망할 처지가 아니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벌을 받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진정 하늘은 사람의 행복을 시기하는 것인가? 황용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으나 입 밖에 내지 않고 묵묵히 곽정을 인도하며 바닷가를 향해 걸었다. 이번에 곽정이 간다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지. 다시는 만날 수 없겠구나. 한걸음 한걸음 떼어 놓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 왔다. 가시덤불의 밀림을 벗어나자 저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황용은 맥이 빠져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몸이 비틀거리며 말을 듣지 않았다. 급히 죽장을 땅에 대고 버텨 보려고 했지만 손에 험이 없어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곽정은 급히 손을 뻗어 황용을 부축하려다 사부의 철천지원수란 생각에 왼손을 전광석화처럼 놀려 자기 오른팔을 때렸다. 이는 주백통에게 전수받은 쌍수좌우호박(雙手左右互搏) 기술이었다. 오른손이 얻어 맞자 손바닥으로 반격을 하면서 뒤로 펄쩍 뛰어 피했다. 황용은 벌써 넘어진 지 오래였다.
순간 곽정의 마음속에는 회한과 비분, 애련 등의 여러 가지 격정이 일시에 솟구쳐 올라왔다. 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었다 해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황용을 끌어안아 부드러운 풀이 있는 장소를 찾아 누이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동북방 바위 가운데 파란 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황용도 눈을 뜨고 본 모양이었다.
황용이 <아버지!> 하고 외치며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그쪽으로 달렸다. 청포 두루마기가 바위에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사람 가죽으로 만든 가면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는 황약사가 가끔 사용하던 도구였다. 황용은 정신없이 그것들을 주워 들었다. 청포 두루마기 자락에 피 묻은 손바닥 자국이 역력했다.
(이는 황약사가 구음백골조로 내 삼사부를 죽인 후에 닦은 것이 틀림없다.)
곽정은 이런 생각과 함께 잡고 있던 황용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뜨거운 피가 터질 듯 솟구쳐 올라와 자기도 모르게 황용이 잡은 청포 두루마기 자락을 낚아채 북 찢었다. 한쪽이 떨어져 없어진 것은 바로 수리의 다리에 묶어 매기 위해 찢은 흔적 같았다.
그 청포 두루마기 자락에는 피 묻은 손바닥 자국이 너무나 분명해 지문까지도 똑똑히 새겨져 있었다. 곽정은 그 손바닥 자국이 햇빛을 받아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사람의 얼굴을 덮칠 것만 같아 몸서리를 쳤다. 그는 손바닥 자국이 묻은 반쪽을 둘둘 말아 품속에 쑤셔 넣고는 범선이 있는 바닷가를 향해 걸었다.
배 위에서 일하고 있던 벙어리 사공들은 어디로 뿔뿔이 헤어졌는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끝내 황용을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며 비수를 뽑아 배를 묶어 맨 밧줄을 끊고 쇠닻을 들어올리고 돛을 높이 올렸다.
황용은 배가 순풍을 받아 서쪽으로 달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마음을 고쳐 먹고 돌아와 동행하자고 하지나 않을까 기대도 해보았다. 그러나 배가 점점 더 멀어져 가자 마음도 함께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녀는 넋을 잃고 망망한 바다만 쳐다보았다. 가물가물하던 배가 이제는 영 보이지 않자 갑자기 자기 혼자 외롭게 이 섬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곽정 오빠는 이제 볼 수 없게 되었고 아버지도 언제 돌아오실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 나간단 말인가. 평생 이렇게 바닷가에 서 있으란 말인가. 용아야, 제발 죽을 생각만은 말아 다오.
곽정은 혼자 배를 타고 도화도를 뒤로 한 채 서쪽을 향해 떠났다. 수십 리를 갔을까. 흘연히 공중에서 수리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에는 도리 위에 사뿐히 내려와 앉았다.
(수리도 나를 쫓아왔으니 용아 혼자만이 섬에 외롭게 남아 있겠구나.)
곽정은 가련한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삼 일 후에 배는 육지에 닿았다. 곽정은 도화도의 모든 것이 미웠다. 쇠닻을 들어 뱃바닥에 큰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리고 언덕으로 뛰어올라 배가 서서히 물 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밥 한끼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배는 완전히 가라앉아 혼적도 없었다. 곽정은 무잇을 잃은 듯 막막하고 가슴이 허전하기만 했다. 서쪽으로 가다가 농가가 보이자 쌀을 사서 밥을 지어 먹고는 길을 물어 가흥을 향해 출발했다.
이날 밤 그는 전당(錢塘) 강변에서 묵기로 했다. 둥근 달이 강물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혹시 연우루의 악속을 어긴 것이나 아닐까?)
퍼뚝 이런 생각이 들어 시골 사람에게 물어 보니 팔월 열나흘이라고 했다. 황급히 밤을 도와 강을 건넌 후 튼튼한 나귀를 빌려 타고 가흥성으로 달려 오후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제 5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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