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소오강호 3-1 김용
소오강호 제 3 권
영호충은 사부 악불군을 속일 수 없음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사부님, 전백광의 행실이 단정치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오나 그는 이미 저에게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 바 있으며 다시는 그와 같은 못된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읍니다. 또한 그는 수차례에 걸쳐 저를 죽이지 않았읍니다. 그는 언제나 의리를 지키면서 저를 친구처럼 대해 왔읍니다.]
악불군은 싸늘히 웃었다.
[흥! 그런 이리(狼)의 심장과 개의 허파를 가진 교활하고 추악한 녀석과 의리를 논하겠다고? 그와 도의를 따지다가는 평생 골치를 썩어야 할게다.]
악불군은 영호충을 극진히 아끼고 있었다. 그가 중상을 입고도 다시 살아나자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거짓으로 넘어지고 자기 자신을 상해할 때는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호충이 사부를 속이려고 한다는 생각에괘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금 전 영호충이 불계화상(不戒和尙)에게 따지던 일을 생각할 때는 마음이 흐뭇하기도 했다.
악불군은 여전히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책은 어디 있느냐?]
영호충은 사부와 사모가 되돌아 오자마자 책에 관해 묻자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알아채고 말했다.
[육후아 사제에게 있읍니다. 소사매는 제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책을 훔쳐 온 것이지 결코 나쁜 생각을 품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부님께서는 너그러이 그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사부님의 분부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하공(紫霞功)을 익히지 않았읍니다. 저는 자하비급을 만져 보지도 않았으며 거기에 적혀 있는 신공(神功)의 요결을 단 한 글자도 읽어보지 않았읍니다.]
악불군은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랬었군! 나는 언젠가 너에게 자하신공을 전수해 줄 생각이었다. 다만 문파의 변고가 생겨 차근차근 가르칠 여가가 없었을 뿐이다. 사실 나의 지도를 받지 않고 혼자서 그 비급을 보고 자하신공을 익히려고 하다가는 약간만 잘못 해석해도 큰화를 초래하게 되느니라 적게는 중상을 입고 무공을 상실하게 되고 크게는 생명을 잃게 될 우려가 있다. 나는 그걸 염려했던 것이다.]
악불군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 불계화상은 미친 사람과 같았는데 내공은 퍽이나 놀랍더구나. 그가 네 몸 속에 있는 여섯 줄기의 사기(邪氣)를 풀어 주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좀 어떠냐?]
영호충은 말했다.
[제자는 몸에 있던 사악한 기운은 모조리 없어졌읍니다. 그렇게 심하던 고통 역시 사라졌읍니다. 하지만 몸의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말았읍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중상에서 치유될 동안 기운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힘이 생길 터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어쨌든 불계화상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영호충은 공손히 대답했다.
[예.]
악불군은 화산으로 돌아오는 동안 도곡육선을 만날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랐다. 지금 그들의 종적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약간 놓였지만 화산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육후아를 데리고 빨리 숭산(嵩山)으로 가자. 충아, 그런 몸으로 먼 길을 갈 수 있겠느냐?]
사실 악불군이 급히 화산으로 되돌아 온 것은 자하비급 때문이었다. 자하비급을 잃어버린다면 문파의 선조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고, 영호충이 자하비급에 수록된 무공을 익히다가 행여 더 큰 화를 입을까봐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호충은 악불군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갈 수 있고 말고요! 물론 갈 수 있읍니다. 그건 조금도 염려 하실 필요가 없읍니다.]
악불군과 영호충, 그리고 악영산 세 사람은 정기당 옆의 작은 집에 도착했다.
악영산은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 나아가더니 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돌연 '악!' 하는 뾰족한 그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에는 놀람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악불군과 영호충은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들이 안에 들어가 보니 육후아가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땅에 벌렁 드러누워 있지 않은가?
영호충은 웃으면서 말했다.
[사매는 놀라지 마! 내가 이렇게 만든거야!]
악영산은 말했다.
[깜짝 놀랐지 뭐예요! 어째서 육후아 사형의 혈도를 찍었죠.]
영호충은 말했다.
[좋은 뜻으로 그런거야. 내가 자하비급을 보려고 하지 않으니까 육 사제가 비급을 읽어 주지 않겠어? 그래서 하는 수 없어서 혈도를 찍었지. 혈도가 찍기가 무섭게 육 사제는 벌렁 자빠지더구만!]
갑자기 악불군이 '어'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고개를 숙여 육후아의 코밑 숨결을 살펴보고 이어 맥을 짚어 보았다.
그는 놀라 부르짖었다.
[죽, 죽었다!]
악영산과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악불군은 다급히 물었다.
[충...... 충아, 너는 그의 무슨 혈도를 찍었느냐?]
영호충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힘이 빠져 몸을 휘청거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저는...... 저는......]
그는 손을 내밀어 육후아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육후아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미 죽은 지 오래 된 듯했다. 영호충은 참을 수 없어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육...... 육 사제, ...... 정말...... 정말...... 죽었느냐?]
악불군이 말했다.
[비급은...... 자하비급은 어디 있지?]
영호충은 눈물을 글썽이며 살펴보았으나 자하비급은 어디에서도찾을 수 없었다.
그는 망연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책......, 책이 어리로 갔을까?]
그는 황망히 육후아의 품 속에 손을 넣어 더듬어 보았으나 자하비급은 잡히지 않았다.
[제가 그의 혈도를 찍었을 때 비급은 펼쳐진 모습으로 책상위에 떨어지고 말았읍니다. 어째서...... 어째서 보이지 않을까요?]
악영산은 방바닥, 책상 옆, 문, 의자 밑 등 곳곳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자하비급의 행방은 묘연할 뿐이었다. 자하비급 이야말로 화산파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악불군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악불군은 한참이 지난 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육후아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몸의 어느 한 구석에서도 상처를 발견할 수 없었고 집안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았어도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라곤 없었다.
악불군은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왔다간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도곡육선이나 불계화상의 짓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악불군은 엄숙한 음성으로 물었다.
[충아, 너는 도대체 그의 어느 혈도를 짚었느냐?]
영호충은 악불군의 앞에 무릎을 끓으며 말했다.
[제자는 중상을 입은 상태라서 손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읍니다. 저는 그의 전중혈(?中穴)을 가볍게 찔렀을 뿐인데...... 육사제가 죽을 줄은...... 저는 정말 꿈에도 몰랐읍니다.]
그는 갑자기 육후아의 허리에 매달린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냅다 스스로의 목을 향해 찔렀다. 악불군이 번개처럼 한 손가락을 퉁겼다. '쨍' 하는 음향과 함께 그 검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악불군은 호통을 내질렀다.
[자하비급을 찾기 전에 죽어선 안 된다! 너는 그것을 어디에 숨겼느냐?]
영호충은 온몸을 움찔하며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자하비급을 숨긴 줄 알고 있구나?)
그는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 그 비급은 도둑맞은 게 분명합니다. 저는 그 책을 찾아오겠읍니다. 한 장도 빠집없이 사부님께 다시 갖다 바치겠읍니다.]
악불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누군가 그 책을 가져다가 머리속에 암기하고 있다면, 또는 다른 종이에 베껴 놓았다면 설사 도로 찾았다고 해도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자하공은 화산파의 독특한 무공이 아니게 된다.]
악불군은 잠시 쉬었다가 타이르듯 말했다.
[충아, 네가 가져갔다면 내놓도록 해라. 이 사부는 너의 과실을 용서해 주마.]
영호충은 육후아의 시체를 망연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격양된 음성으로 말했다.
[사부님, 저는 맹세하겠읍니다! 자하비급을 훔친 자를 찾아내게 된다면...... 열 명이 훔쳤으면 열 명을 죽일 것이고 백 명이 훔쳤다면 백 명을 모조리 죽여버리겠읍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의심하실 바에는 차라리 일장(一掌)을 후려쳐 저를 죽이십시오!]
악불군은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다.
[일어나라, 네가 아니라면 아니겠지. 너와 육후아는 무척 친했으니 네가 그를 고의로 죽일 이유는 없을게다. 그렇다면 그 비급은 누가 훔쳐갔단 말인가?]
그는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악영산은 눈물을 떨구며 목 멘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지, 모두 저의 잘못에예요. 제가 비급을 후쳐서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대사형께서 보시지 않으려고 하는 걸 억지로 가져와 오히려 육 사형을 죽이고 말았어요. 제가...... 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비급을 찾아오고야 말겠읍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우리 한번 더 찾아보자꾸나.]
세 사람은 다시 한참을 찾았으나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악불군은 악영산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외부에 누설하면 안 된다. 네 엄마에게는 내가 설명을 하마. 그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우선 육후아를 매장한 다음 우리는 산에서 내려가자.]
영호충은 육후아의 죽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여러 사제들 가운데 육후아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우리의 정(情)은 친형제보다도 깊었다. 아...... 내가 한번의 실수로 그를 죽이다니!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혹시...... 혹시 내 몸 안에 있던 도곡육선의 사악한 기운이 손가락을 통해 방출되어 육 사제를 해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자하비급은 어디로 갔을까? 스스로 날아서 사라졌단 말인가? 어째서 보잊 않을까? 이 기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단 말인가. 사부님은 나를 의심하고 계시니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이일을 분명히 밝히지 않는 한 나는...... 나는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살인자의 누명을 쓰는 것이 아닌가?)
그는 옷소매를 눈물로 닦고 괭이를 가지고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육후아의 사체를 묻어 주었다. 그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무섭게 손이 떨려왔지만 악영산이 옆에서 도와주어 간신히 육후아를 매장할 수가 있었다.
세 사람은 백마묘(白馬廟)에 도착했다.
악 부인은 영호충이 무사한 걸 보고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악불군은 육후아의 죽음과 자하비급의 행방에 대해 악 부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악 부인은 처연한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악불군이 이미 자하신공을 완전히 익혔기 때문에 자하비급을 잃은 데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육후아는 오래 전에 화산파에 입문하였고 사람됨이 충실하고 정이 많았다. 악 부인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는 영호충과 육후아 두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으므로 육후아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그토록 마음 아플 수가 없었다.
많은 제자들은 악 부인이 어찌해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덩달아 침울해졌다.
악불군은 노덕약에게 명하여 커다란 수레 두 대를 빌리게 했다.
한 대에는 악 부인과 악영산이 타고 다른 한 대의 수레에는 영호충을 눕힌 다음 악불군은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숭산을 향해 떠나는 것이었다.
위림진(韋林鎭)이라는 고을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위림진에는 여관이 하나뿐이어서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적지 않은 손님들이 투숙하고 있었다.
화산파의 제자들 가운데는 아녀자들도 끼어 있었기 때문에 숙소를 빌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악불군은 말했다.
[조금만 더 가자. 다음의 마을에서 묵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약 오리(五里)정도 갔을까?
악 부인이 타고 있던 수레의 바퀴가 갑자기 빠져 버렸으므로 악부인과 악영산은 하는 수 없이 수레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시대자(施戴子)가 동북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부님, 저 숲 속에 절이 한 채 있는데 거기서 유숙하는 게 어떻겠읍니까?]
악 부인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여자들을 받아줄까?]
악불군이 말했다.
[시대자, 네가 가서 물어보려므나. 만약 절의 중들이 좋아하지 않는 눈치가 보이거든 그냥 돌아오도록 하고 억지로 강요하지 말아라.]
시대자는 대답과 함께 나는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멀리서 뛰어오며 소리쳤다.
[사부님, 낡은 폐찰입니다! 아무도 없어요!]
모두들 크게 기뻐했다.
도균(陶鈞), 영백나(英白羅), 서기(舒奇) 등 나이 어린 제자들은 다투어 달려갔다.
이때 동쪽 하늘이 검은 구름에 의해 가려지더니 사방이 금새 어두컴컴하게 되고 말았다.
악 부인이 말했다.
[이곳에 낡은 절이 있어서 천만다행이네요. 그렇지 안았다면 도중에서 큰 비를 맞아야 했을 거예요.]
법당에 들어서서 사방을 살펴보니 하나의 청면신상(靑面神像)이 한쪽에 서 있었다. 신상의 몸은 나뭇잎으로 덮여 있었으며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져 있었다. 백 가지의 약초를 주관하는 약왕보살(藥王菩薩)의 모습이었다.
악불군은 여러 제자들과 함께 약왕보살상에게 배례를 올렸다.
번갯불이 사위를 몇번 밝히고 사라지더니 요란한 천둥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렸다. 곧이어 장대 같은 빗줄기가 대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낡은 절은 여기저기에서 물이 샜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은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피해 앉았다.
고근명(高根明), 양발(梁發)과 세 명의 여제자(女弟子)들이 밥을 지었다. 악 부인이 말했다.
[올해는 봄비가 일찍 내리는군요.]
영호충은 법당 구석진 자리에 있는 종틀 밑에 앉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육 사제가 이곳에 있었다면 모든 사람에게 우스갯소리를 하여 모두들 재미있게 웃고 떠들텐데......)
그는 악영산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다.
(소사매가 사부님께 혼이 날 각오를 하고 자하비급을 훔쳐 와 나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깊은 정을 느껴서였을까? 그녀의 행복을 나는 바라고 있다. 나는 자하비급을 찾은 이후에는 즉시 자결을 하여 육 사제에게 속죄하겠다.
악영산과 임평지는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단지 그녀가 나는 깨끗이 잊어주고 내가 죽었다고 해도 그녀가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그와 같은 생각을 했건만 그녀와 임평지가 오는 도중에 옆에 붙어 서서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회상했을 때 마음은 여전히 쓰라렸다.
이때 밖에는 퍼붓듯이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악영산은 법당 안을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며 밥을 짓고 물을 긷는 일을 도와 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과 임평지의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두 사람은 친밀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사정을 눈치챈 사람은 영호충을 제외하곤 없었다. 그 두 사람이 마주보고 웃을 때마다 영호충의 마음은 산산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고개를 돌리고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그녀에게로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녁밥을 먹고 난 후 모든 사람들은 각각 떨어져 잠을 잤다. 비는 계속하여 내릴 뿐 그칠 줄을 몰랐다.
영호충은 번뇌에 잠겨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가 단조롭게 들려왔다.
이때 갑자기 동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게 아닌가? 적어도 십여 필은 되는 것 같았다.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캄캄한 밤에 비를 맞으며 말을 달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한 일이구나? 설마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악불군이 나직이 말했다.
[모두들 소리내지 말고 있어라.]
잠시 후 십여 필의 말은 약왕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때 화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나 각자 손에 무기를 움켜쥐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말굽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안심한 듯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 누웠다. 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절 밖에서 일제히 멈추었다.
한 사람의 높은 음성이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화산파의 악(岳) 선생님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우리가 물어 볼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소!]
영호충은 화산파의 수제자였으며 평소 손님을 책임지고 접대하곤 했다. 그는 급히 문 옆으로 다가가 빗장을 뽑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말했다.
[한밤중에 방문하신 분들은 누구십니까?]
문 밖에는 열다섯 필의 말이 일자(一字)로 서 있었고 그들 가운데 예닐곱 사람은 손에 공명등(孔明燈)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등을 내밀어 영호충의 얼굴 앞에 들이댔다.
영호충은 눈이 부셔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들의 행동은 지극히 무례했다. 영호충은 그들이 좋은 의도로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찾아온 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검은 두건을 쓰고 한 쌍의 눈만 빠끔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영호충은 흠칫 놀라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들의 얼굴을 알아볼까봐 두건을 했을 것이다.)
가장 왼쪽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악불군 선생을 만나고 싶소. 청컨대 안내해 주시오.]
영호충은 말했다.
[귀하는 누구시오? 존함을 알려 주시오. 사부님께 우선 말씀을 드려야 되겠소이다.]
그 사람은 말했다.
[그대는 우리가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말게. 그대는 다만 사부에게 가서 나오라고 하기만 하면 돼네. 소문을 들으니 화산파는 복위표국(福威??)의 벽사검보(?邪劍譜)를 손에 넣었다고 하더군! 우리는 그것을 잠시 빌려서 구경을 하려고 한다네.]
영호충은 화가 치밀었다.
[화산파에는 화산파 고유의 무공이 있는데 벽사검보를 가져서 무엇에 쓰겠소? 우리는 그것을 억지도 못했지만 설령 얻었다고 한다손치더라도 귀하가 이토록 무례하게 나올 수 있단 말이오? 정말이지 당신들은 화가파를 너무나 업수이 여기고 있구료!]
그 사람은 돌연 껄껄 웃었다. 그러자 나머지 열네 사람 역시 커다랗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웃는 소리는 멀리멀리 울려퍼져 나갔다. 웃음소리가 매우 우렁찬 것으로 보아 이들의 내공(內功)이 무척 심후한 것 같았다.
영호충은 놀라 생각했다.
(오늘 밤 무서운 적을 만난 것 같구나. 이 열다섯 사람은 무두 무예가 뛰어난 고수들임에 틀림없다. 도대체 이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갑자기 한 사람이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하하! 복위표국의 꼬마 녀석이 화산파에 투신했다며? 소문을 들으니 군자검(君子劍) 악불군은 검술은 신(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군! 그는 무림에서 독보적인 검술의 대가(大家)라고 불리워지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가 그까짓 벽사검보를 가지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강호의 무명소졸에 불과하니만치 하잘 것 없는 벽사검보라도 익혀 보고 싶어하지!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악 선생에게 비릴고저 하는 것이야!]
영호충은 말했다.
[귀하는 도대체 누구요?]
하지만 열네 사람의 커다랗게 웃는 웃음소리에 묻혀 영호충의 음성은 말한 그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내가 십여 년이나 공들여 쌓아 올린 내공(內功)이 조금도 담아 있지 않다니! 아...... 정말 큰일 났구나!)
그는 화산에서 내려온 이후 몇번에 걸쳐 화산파의 내공심법(內功心法)을 운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몸 속의 혼잡한 기운이 마구 난동을 부리며 끓어 올라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만약 운기행공을 중단하지 않았다면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몇번이고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의 사부에게 그런 현상이 생긴 까닭을 물었으나 악불군은 단지 냉랭히 코웃음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자하비급을 숨겨두고 혼자서 그 비급에 적힌 자하신공을 수련하느라고 이런 현상이 생긴 줄로 오해하고 게시는구나! 나는 애써 변명을 하려고 하지 말자. 어차피 나는 오래 살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이제부터 내공을 연마하지 말자. 무공을 배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이후 그는 다시는 내공을 연마하지 않았다.
방금 전 그는 내공을 운기하여 말했다고 했지만 평범한 사람의 음성 정도로밖에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악불군의 맑고 낭랑한 음성이 들려 나왔다.
[여러분은 무림에서 이름께나 있는 인물들 같은데 어찌 스스로를 낮추어 무명소졸이라고 하시오? 이 늙은이는 한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거짓말을 해본 역사가 없소. 임가의 그 벽사검보는 나에게 있지 않소이다!]
그는 말을 할 때 음성 속에 자하신공의 기운을 섞어 보냈었다.
그러자악불군의 음성은 절 밖의 웃음소리를 누르고 또렷하게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한 명의 흑두건이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소?]
악불군은 말했다.
[당신이 누구이기에 그와 같은 터무니 없는 소리를 감히 지껄이는 거요.]
그 사람은 말했다.
[천하의 큰일은 천하인 모두가 관계해야 하는 법이오.]
악불군은 냉소를 날린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큰 소리로 말했다.
[악씨 양반, 도대체 내놓을 거요? 아니면 내놓지 않을거요? 말로 할 때 순순히 듣는 게 좋을 것이오. 우리는 들어가 수색을 할 수도 있소.]
악 부인은 날카롭게 말했다.
[여자들은 한쪽에 물러서고 남자들은 모두 검을 뽑아라!]
'치치칫!' 하는 음향과 함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장검을 뽑아들었다.
영호충은 문 가에 서 있었는데 손으로 검자루를 잡고 아직 뽑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두 사람이 잽싸게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영호충을 향해 덮쳐 왔다.
영호충이 몸을 비끼며 검을 뽑으려고 할 때 한 사람이 크게 외쳤다.
[꺼져!]
공중으로 날며 다리를 들어 영호충을 걷어찼다. 영호충은 멀리 나동그라져 수풀 속에 넘어졌다. 그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이렇게 생각했다.
(저 발짓은 그리 매섭지도 않은데 나는 왜 아랫도리가 이렇게 흐느적흐느적 힘이 없으까?)
허우적거리며 똑바로 앉으려고 했다. 갑자기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일곱 여덟 줄기의 진기가 왔다갔다 하며 몸 안에서 서로 부딛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영호충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영호충은 깜작 놀라 입을 벌려 크게 외치려고 했으나 한 마디의 목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마치 악몽을 꾸었을 때 손발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상태와 같았다. 귀에는 병기가 서로 주딛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사부와 사모님 둘째 사제 증은 절 밖으로 뛰어나와 일곱 여덟 명의 복면인들과 싸우고 있었고, 다른 몇명의 복면인들은 이미 절 안으로 들어가 크게 싸우는 듯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절 안에서는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이때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몇 개의 공명등이 땅바닥에 쓰러져 노란 빛을 발산하고 그 불빛 아래 검광과 사람의 그림자가 너울너울 춤췄다.
잠시 후 절 안에서 여자의 비병소리가 들려왔다. 영호충은 더욱 초조해졌다. 적들은 모두 남자이고 이 여자의 비명소리는 틀림없이 사매 중의 한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눈 앞에는 사부님이 장검을 휘두르며 혼자서 네 사람을 대적하고 있었고 사모님은 두 명의 적들과 서로 엉켜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사모님의 검술이 교묘하여 비록 혼자서 여럿과 싸우고는 있으나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째 사제 노덕약은 큰 소리를 외치고 있었는데 역시 혼자서 둘을 대적하고 있었다. 그 두 명은 모두 단도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니 그들의 힘이 막강한 것 같았다. 시간이 길어지면 노덕약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눈 앞에는 세 사람이 여덟 명의 적을 맞아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그 형세는 무척이나 험악했다. 절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안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제와 사매들은 숫자는 많으나 고수는 한 명도 없었다. 귀에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은 이미 몇명이 그들 손에 당하고 있음이다. 그는 마음이 급할수록 힘을 낼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빌었다.
(하나님, 굽어 살피소서! 나에게 반시간만이라도 힘을 회복하게 해주십시오. 이 영호충이 저 안에 들어가 혼자의 힘으로 소 사매를 지킬 수만 있다면 나는 적에게 천갈래 만갈래가 되고 이몸은 형용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한다 해도 기꺼이 달게 받겠읍니다.)
그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내공을 운행해 보았다. 갑자기 여섯줄기의 진기가 일제히 가슴에서 솟아올라 왔다. 뒤따라 또 두 줄기의 진기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이 두 줄기의 진기는 여섯 줄기의 진기를 내리눌렀다. 그때 온몸이 텅 빈 듯하고 오장육부도 텅텅 비고 살과 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속이 냉정해져 암암리에 부르짖었다.
[그렇군, 그래! 그것이 이렇게 되었군!]
그는 이때 비로소 분명히 알았다. 도곡육선이 진기를 가지고 자기의 상처를 치료할 때 여섯 줄기의 진기는 각각 다른 경맥에 주입되었고 내상을 치료할 수가 없었을 뿐더러 이 여섯 줄기의 진기는 체내에 머물러 쌓여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내공이 강하고 성질이 급한 불계화상이 두 줄기의 진기를 가지고 강제로 도곡육선의 진기를 제압시키니 금방 내상은 나은 듯 싶었으나 실제로는 그의 몸에는 두 줄기의 진기가 증가되어 서로 균형적으로 견제를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가 옛날에 단련하여 얻은 내공의 힘은 조금도 남지 않고 결국은 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가슴이 답답해지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뜻하지 않은 사태를 만나 내 무공은 쓸모가 없어지고 오늘날 사문이 어려움을 만났으나 나는 결국 조그만 힘도 되지 못하고 말았구나! 이 영호충의 몸은 이미 화산파의 수제자로서 눈이나 뜨고 땅바닥에 드러누워 사부님과 사모님이 살아남기만을 바라보고 사제와 사매들이 흑두건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정말로 허수아비구나! 좋다! 내가 죽더라도 소사매와 함께 죽겠다!)
그는 조금이라도 기를 운용하면 몸 안에 있는 여덟 줄기의 진기가 연결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를 단저에 모으기만할 뿐 기를 돌리지는 않았다. 과연 그렇게 하니 사지를 움직일 수 있는지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장검을 뽑고 한 걸음씩 발을 절 안을 향하여 옮겨 놓았다.
절에 들어서니 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단상에 놓여 있는 두 개의 공명등의 불빛에 양발, 시대자, 고근명 같은 사제들이 적들과 피범벅이 된 채싸움을 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고 몇명의 사제와 사매들은 땅바닥에 쓰러져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모를 지경이었다.
악영산과 임평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복면괴인과 싸우고 있었다. 악영산의 긴 머리카락은 흩어지고 임평지의 왼족 손에 검이 쥐어져 있는데 오른손은 이미 적에게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복면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단창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의 창법은 힘이 강하고 날카로웠다.
임평지는 연속적으로 창송영객초식을 삼초씩 써서야 비로소 그의 공세를 막을 수 있었다. 갑자기 적의 단창이 휘둘러지자 당창에 붙었던 붉은 술이 갈라지면서 눈이 부실 듯한 빛을 발하는 가운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임평지의 어깨가 창에 맞았다.
악영산은 급히 두번 칼을 찌르니 적은 그 기세에 한발짝 물러섰다.
[빨리 가서 상처를 싸매요!]
임평지는 말했다.
[괜찮습니다.]
검을 내미는 동작은 이미 힘이 없었다. 그 복면괴인은 길게 웃으며 창자루로 악영산의 허리를 찔렀다. 악영산은 오른소에 쥐어져 있던 장검은 떨어지고 고통에 찬 신음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즉시 검을 잡고 앞으로 나갔다. 검을 앞으로 뻗었을 때 진기가 다시 끓어올라 오른쪽 팔목에서 힘이 쑥 빠져 손은 다시 밑으로 축 처졌고 그 복면괴인은 칼이 오는 것을 보자 원래는 몸을 피하고 난 다음 반격을 할 생각이었으나 그가 한검을 앞으로 뻗기도 전에 손이 땅으로 처지는 거서을 보자 그 복면괴인은 내심 이상했으나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왼쪽 다리로 영호충을 걷어차 절 안에서 절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콰당하는 소리와 함께 영호충은 절 밖 물구덩이에 떨어졌다.
비는 더욱 억수같이 쏟아져그의 입과 눈, 코, 귀 속에는 흙탕물이 가득 찼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노덕약은 이미 적에게 허리를 찍혀 넘어졌고 애당초 그와 접전을 하던 복념인은 두 패로 나뉘어 악불군 부부를 에워싸고 있었다. 얼마 후 절 안에서 두 명의 적이 나와 악불군 혼자 일곱 명을 상대로 싸우는 상황이 되고 악부인은 여전히 세 명의 적과 싸웠다. 악 부인과 한 명의 복면인의 비명소리가 똑같이 들려왔다. 두 사람의 다리는 동시에 서로의 칼에 맞았던 것이다. 그 적은 급히 물러났다. 악 부인의 앞에 있던 사람 숫자는 하나 적어졌지만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몇초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적에 의해 칼에 어깨를 맞았다. 칼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지자 두 명의 복면인이 껄껄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에 있는 혈도를 몇군데 짚었다.
이때 절 안에 있던 사제들은 계속 상처를 받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제압당했다. 공격해 온 적들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화산파의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혈도를 찍으면서도 절대로 치명상을 입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다섯 명은 둥그렇게 악불군을 에워쌌다. 여덟 명의 고수들은팔방을 에워싸고 악불군과 접전을 하고 나머지 일곱 사람의 손에는 각기 공명등이 들려져 있었다. 그들은 등불을 악불군을 향해 비췄다. 화산파의 장문인이 비록 내공이 깊고 검술에 정통하다고는 하나 이 여덟 명의 고수들이 대전을 하고 일곱 개의 등불이 똑바로 비추어보니 그는 정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화산파는 쓰러지고 이대로 가다가는 절에 있는 전부가 전멸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칼을 휘두르며 문을 지키고 있었다.
등불이 일제히 비춰오자 그는 눈을 감고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가 맹렬하여 여덟 명의 적은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복면을 한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악불군, 빨리 투항하시오!]
악불군은 냉랭하게 말했다.
[악모는 차라리 죽을망정 치욕을 받지는 않겠다. 죽이려면 빨리 죽여라!]
그 사람이 말했다.
[당신이 투항하지 않는다면 나는 먼저 단신 부인의 오른팔을 자르겠소.]
그러면서 한 자루의 날이 얇은 귀두도(鬼頭刀)를 집어들었다.
칼은 공명등의 불빛을 받아 파랗고 스산한 빛을 발했다. 칼끝이 악 부인의 어깨에 닿자 악불군은 잠시동안 주저했다.
(팔을 자르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그는 생각을 계속했다.
(만약 검을 버리고 투항한다 해도 똑같이 그들에게 치욕을 당할 것이다. 화산파의 백년이 넘게 내려오는 명성을 어찌 내 손에서 더럽힌단 말이냐?)
순식간에 숨을 길게 들이마시니 얼굴에 비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검을 휘둘러 왼쪽에 있는 사내를 내리찍었다. 그 사내는 칼을 들어 막았으나 악불군의 일검에 자하신공이 가미되었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힘이 너무 강해 그의 칼은 악불군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일도일검이 동시에 그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찍었다. 칼을 맞은 그의 어깨에서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신음을 하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접전하는 자는 두 명이 적어졌지만 여전히 악불군은 위험 속에 있었다. 갑자기 퍽 하며 악불군의 등허리에 연자추(?子錘)가 와서 꽂혔다. 그는 연속 삼 검을 휘둘러 적을 물리치고 나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으로 붉은 피를 게워내고 말았다. 모든 적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이 노인네가 상처를 입었으니 지쳐서라도 죽을 것이다!]
그와 접전을 하던 여섯 명은 승산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알고 비로소 포위망을 풀었다. 그들이 이렇게 나오니 악불군은 더 이상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복면을 한 사람은 모두 열 다섯 명인데 그 중 세명은 악불군 부부에게 상처를 받아 하나는 손이 짤려나가 상처가 심하고 나머지 둘은 다리에 상처를 좀 받았지만은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 둘은 곤륜봉을 들고 쉬지 않고 악불군을 향해 욕을 해댔다. 악불군이 그들의 말하는 말투를 들어보니 남쪽음과 북쪽음이 뒤섞여 있고 무공 또한 잡다하여 하나의 문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들어오고 물러나가는 서로간의 묵계가 잘 되었으므로 임시로 모인 패거리도 아니었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실로 추측할 수가 없었다.
제일 이상한 것은 이 열다섯 사람들이 다 고수이며 약자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기는 강호의 견문이 넓기 때문에 이 여러 명의 고수들이 하나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으나 실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 사람들과는 예전에 전혀 싸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원한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벽사검보를 위해서 이렇게 몰려와 우리 화산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그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자하신공을 펼쳐지니 검 끝은 은은한 빛을 발산했다. 십여 초 후에 또 한 명의 적이 어깨에 칼을 낮고 손에 들고 있던 강철 채찍을 땅에 떨어뜨렸다. 싸움권 밖에 있던 또 한 명이 뛰어들었다. 이 사람의 손에는 거치도(鋸齒刀)가 들려져 있었는데 칼날은 무겁고 칼끝에는 갈퀴가 하나 달려 있어 계속적으로 악불군의 손에 들려져 있는 장검을 낚으려 했다. 악불군은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정신은 싸울수록 더욱 맑아졌다. 갑자기 좌측 손의 장력을 이용해서 한 명의 가슴을 밀치니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 사람의 두 손에 들려져 있던 빈철회장(?鐵懷杖)이 땅에 떨어져 데구르 굴러갔다.
뜻밖에 이 사람은 그 누구보다 용감하여 갈비뼈가 부러져 고통이 온몸을 엄습하는데도 오히려 사기 충천하여 땅바닥에 구르면서 손을 벌려 악불군의 오니쪽 다리를 거머쥐었다. 악불군은 깜짝 놀라 검을 휘둘러 그의 등을 내리쳤다.이때 양쪽에 있던 두 자루의 단검이 동시에 쭉 뻗어나와 그를 막았다. 악불군은 장검을 내리치지 못하자 오른발로 그의 머리를 걷어찼다. 그 사람의 동작은 빨라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발조차 꽉 잡고 함께 땅바닥에 굴렀다.
악불군의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이런 손놀림에 더 이상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어 함께 땅으로 구르고 말았다. 순간 단도, 단창, 연자추, 장검 등의 병기들이 동시에 그의 얼굴, 머리, 목, 가슴, 중요한 급소를 내리 눌렀다.
악불군은 길게 탄식하고 손을 풀어 검을 놓고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의 허리, 겨드랑, 목 등의 혈도를 찍은 다음 여섯 복면인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나이를 먹은 듯한 사람이 말했다.
[군자검 악 선생의 무공은 탁월하오. 과연 이름이 헛되지 않소.
우리 열다섯 명이 모두 당신 하나를 상대했는데 그래도 너댓 명이 쓰러지고서야 당신을 잡았소. 하하하! 탄복하오! 탄복합니다! 이 몸이 당신과 단독으로 싸웠다면 당신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우리는 열다섯 사람이고 당신들은 스무 명이나 되오. 비교를 한다면 당신네 화산파 사람들이 많소이다.오늘 저녁 우리는 적은 인원으로 많은 숫자를 상대해 당신네 화산파를 물리쳤소. 이 싸움은 결코 쉽지는 않았소. 그렇지 않소이까?]
그 나이 많은 복면인이 말했다.
[녜, 맞습니다. 참으로 힘겹게 이긴 싸움이었읍니다.]
그 늙은 사람이 말했다.
[악 선생, 우리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이 없소. 오늘 저녁 실례를 무릅쓴 것도 단지 그 벽사검보를 빌려 보려고 했을 뿐이라오.
이 검보는 애당초 당신네 화산파의 것이 아니잖소? 당신이 모든 계략을 동원해 복위표국에 있던 임가 소년을 문하로 끌어들여 그 검보를 취했단 말이외다. 그런 일은 너무 공명정대하지 못하오.
무림의 동료들이 들었다면 모두들 대노했을 것이오. 이 늙은 몸이 좋은 말로 권하니 그 검보를 이리 내놓으시오.]
악불군은 대노했다.
[악모는 너희들 손에 있으니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악불군이라는 사람이 어떠한가는 강호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나를 죽이기는 쉬우나 내 명예를 더럽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 복면인이 껄껄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쉬운 일이오. 당신 부인과 딸, 그리고 여제자들이 얼굴이 반반하군요. 우리 모두가 하나식 나누어 첩으로 삼는다면 하하! 그것이야말로 당신 악 선생 이름이 이 무림에 크게 빛나는 방법이 아니겠소?]
그러나 나머지 복면인들이 일제히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에는 음탕한 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악불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몇명의 복면인들이 절 안으로 들어가 남녀 제자들을 끌고 나왔다. 모든 제자들은 중상을 입고 있어서,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어떤 자는 바깥에 끌려 나오자 픽 쓰러지기도 했다.
그 복면의 늙은이가 말했다.
[악 선생, 우리 정체를 당신이 어느 정도 알아 맞추었는지 모르겠소. 우리는 결코 무림에서 정도를 걷는 영웅호걸들이 아니오.
그래서 못 하는 일이 없지요. 우리 현제들은 색을 좋아하오. 만약 당신 부인과 당신 딸에게 실례를 범한다면 당신 체면이 크게 손상되지 않겠소?]
악불군은 외쳤다.
[그만두시오! 그만들 두시오! 당신들이 우리를 못 믿겠다면 우리 몸을 수색해 보시오! 무슨 검보가 나오는지 찾아 보시오!]
한 복면인이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스스로 내놓으시오. 하나하나씩 수색한다면 당신 마누라와 딸의 몸을 더듬게 된단 말이외다. 그렇게 되어 무슨 결과가 있겠소?]
임평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화근은 다 이몸 때문에 일어난 일이오! 내가 당신들께 말하건대 내 몸 어디에도 벽사검보가 없소. 믿고 안 믿고는 당신들 소관에 달렸소.]
그는 말하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빈찰장을 집어 있는 히을 다해 자기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나 그의 두 팔은 혈도가 찍혀 있었기 때문에 손에는 힘이 없었다. 비록 빈철장은 머리를 찍었으나 단지 살갗만 약간 벗겨졌을 뿐이고 아무런 피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용기를 본 사람들은 그가 자기 생명을 희생하여 검보가 화산파의 수중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 함을 알았다.
그 복면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임 공자, 너는 퍽 의를 지키는 사람인 것 같군! 우리는 너의 죽은 아버지와 아는 사이다. 악불군은 자네 아버지를 죽이고 당신집에 전해 내려오는 벽사검보를 손에 넣었지. 우리는 오늘 그것을 바로잡고자 여기 온 것이다. 네 사부가 군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나 군자다운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지. 그럴바에야 너는 우리 문하에 들어오거라. 틀림없이 이 강호를 주름잡는 좋은 무예를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임평지는 외쳤다.
[애 어머니와 아버지는 청성파 여창해와 목고봉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나의 사부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정정당당한 화산파의 제자이다. 어찌 위험이 있다고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양발이 외쳤다.
[너 말 잘 했다! 우리 화산파......]
한 복면인이 대갈했다.
[네 놈의 화산파가 어쨌단 말이냐?]
칼을 휘둘러 양발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머리통이 두쪽으로 쪼개져 나가며 양발은 죽어 넘어졌다. 화산파의 제자들 중 여덟 아홉 명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악불군의 머리속에는 여러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져갔다. 그러나 결국 이 사람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저 늙은이의 말을 들어보면 어쩌면 흑도(黑道)의 인물 같기도 하고, 또 무슨 나븐 짓을 하는 방회(幇會)의 두목들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진진천예(秦晉川豫) 일대의 백도흑도(白道黑道)의 이름난 인물들은 설사 내가 알지 못한다 해도 소문이 쫙 퍼졌는데 그러한 문파나 산채에 이렇게 많은 고수들을 지니고 있는 곳은 없다. 또한 이 사람이 단칼에 양발의 머리통을 쪼개놓는 그 악랄함이란 실로 보기 힘든 일이다. 이 강토에서 무기를 쓰고 싸움을 하여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다반사이나 사람을 잡아놓고 단칼에 목을 베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 사람은 단칼에 양발을 죽인 다음에 미친 듯이 웃어대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칼은 붉은 피로 물들어져 있었고, 그 칼로 허공을 몇번 휘두르자 악 부인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다. 악영산은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죽이지...... 내 어머니를 죽이지 말아라!]
그리고 혼절했다. 악 부인은 여중호걸이라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자가 자기를 죽인다면 더 이상 능욕을 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잘 되었다 싶어 고개를 쳐들고 욕을 했다.
[이 도둑놈의 새끼, 씨가 있는 놈이라면 나를 죽여봐라!]
바로 이때 동북쪽에서 수십기의 말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복면을 한 노인이 말했다.
[누구냐? 빨리 가서 살펴봐라!]
두 명의 복면인이 대답을 했다.
[녜.]
말을 올라타 말굽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말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곧이어 쨍그랑! 쨍그랑! 하고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아이고!]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달려오는 사람이 두 명의 복면인과 서로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악불군 부부와 화산파 제자들은 구원해 주러 오는 사람이 있는 줄 알고 크게 기뻐했다. 희미한 등불 아래 삼사십 명이 말을 타고 큰 길을 따라 흙탕물을 튀기며 급히 달려왔다. 순간 절 밖에 말이 멈추었고 그들은 삥 둘러 섰다.
말에 탄 한 사람이 외쳤다.
[음. 화산파의 친구들이군. 아니! 이건 악형이 아니십니까?]
악불군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참으로 난처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수일 전에 오악령기(五嶽令旗)를 가지고 화산에 찾아온 숭산파의 세째 고수인 선학수 육백(仙鶴手陸柏)이었다. 그 사람의 우측에 있는 한 사람은 덩치가 컸다. 그 사람은 바로 숭산파 둘째 고수인 탁탑수(託塔手) 정면(丁勉)이었고, 좌측에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화산파 검종(劍宗)의 봉불평(封不平)이었다. 그날 화산에 왔던 태산파(泰山派)와 형산파(衡山派)의 고수들도 그 안에 있었다. 단지 그때보다는 사람이 더욱 증가된 것뿐이었다. 공명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그림자가 너울너울 거려 금방 그 많은 사람들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육백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악형, 당신은 그날 좌맹주의 영기를 받지 않으셨소. 좌맹주께서는 심히 불쾌하셔서 특별히 정 사령과 탁 사령에게 명령을 하여 영기를 받고 다시 화산을 방문하라고 하셨소이다. 뜻밖에 이 밤중에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정말 공교롭운 일이라고 하겠읍니다.]
악불군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복면을 한 노인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알고보니 숭산파의 정 이협, 육 삼협, 양 칠협, 세 분이셨군요. 정말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육백이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각하께선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어찌 우리 앞에서 진면목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복면의 노인이 말했다.
[우리 형제들은 흑도의 이름없는 소인배들이올시다. 우리들의 이 지저분한 이름을 들으시면 무림에서 존경받는 여러분들의 귀를 더럽힐까 두렵습니다. 여러분들 앞이니 우리는 악 부인과 딸에게 무례한 짓은 범하지 않겠소. 단지 한 가지 일은 여러분들이 이 무림에 의리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육백은 말했다.
[무슨 일이오? 한번 들어나 봅시다.]
그 노인은 말했다.
[이 악불군 선생의 호가 군자검이라고 하는데 듣건데 평상시에는 말끝마다 인(仁)과 덕(德)을 따지고 무림의 규칙을 잘 따진다고 들었소. 그러나 지금은 잘못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복주 복위표국은 남에게 멸망당했읍니다. 총표두인 임진남 부부는 누구에게 살해를 당했소. 아마 여러분들도 이제 들어서 알 것이오.]
육백은 말했다.
[그렇소. 듣건대 그것은 사천의 청성파가 저지른 소행이라고 하더군요.]
그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강호에선 그렇게들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속 한번 터놓고 애기해 봅시다. 사람들이 알다시피 복위표국 임가에는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벽사검보가 있소. 그 속에는 오묘하고 정묘한 검법이 적혀 있는데 그 검법을 익히면 가히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 들었소이다. 임진남 부부가 살해된 원인은 많은 사람들이 벽사검보를 탐하고 있기 때문이오.]
육백은 말했다.
[그게 또 어쨌다는 거요?]
그 노인은 말했다.
[임진남 부부가 결국 누구에게 살해되었는가는 바깥 사람들은 모릅니다. 우리가 듣건대 이 군자검께서 간계를 꾸며 임진남의 아들을 속여서 자기의 화산파 문하로 끌어들였으며 그 검보는 자연히 화산파 문중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모두들 추리해 보니 악불군은 계략에 능통해 강제로 탈취하지 못하자 이러한 간계를 쓴 것이오. 생각해 보시오. 저 임가가 나이가 얼마이며 또 무엇을 알겠읍니까? 화산파 문중에 들어선 다음 저 늙은 여우 손바닥에 그 벽사검보를 갖다 바쳤을 것이오.]
육백은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화산파의 검법은 정묘하여 악 선생의 자하신공은 이 무림에서 독보적인 무예입니다. 그것은 제일 신비로운 내공이오. 어찌 그것을 놔두고 다른 파의 검버을 탐하겠소?]
그 노인은 하늘을 향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육노 영웅께선 군자의 마음으로 소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구료! 악불군이 무슨 정묘한 검법을 가지고 있겠소? 그의 화산파는 기검(氣劍) 두 종파로 나누어져 기종(氣宗)은 화산을 점거하고 기의 연마만을 따지는데 검법은 평범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소. 이 강호에서 떠들썩한 '화산파' 하는 세 글자의 이름을 그들이 들을 만큼 정묘한 재주가 있단 말이오? 사실은...... 허허허! 허허......]
그는 코웃음을 몇번 치고 계속 말했다.
[이치를 따진다면 화산파의 장문인의 검술은 자연히 최고의 수준이어야 할 것이나 여러분들도 지금 보고 있지 않습니까? 눈앞에 보이듯 그들은 우리 몇명의 소인배들에게 잡혔소. 우리들은 첫째로 독약을 사용하지 않았고, 둘째로는 암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더러, 세째로는 적은 수로 저 많은 숫자를 이겼소. 그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재주와 묘기로 쳐부순 것이오. 그래서 저 화산파의 스승과 졸개들을 처치해 버렸소. 화산파의 기종의 무예가 어떠한가는 생각해 보시면 알 것이오. 악불군도 물론 자기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급히 벽사검보를 얻은 다음에 검법을 연마하여 그 빈껍데기를 채우려 했으나 지금 이런 추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오.]
육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말 또한 일리가 있는 말이오.]
그 노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몇명의 무명소졸들은 여러분들의 눈에는 하잘 것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벽사검보를 감히 꿈꾸지 못할 존재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몇십년 동안 우리는 복위표국의 임 총표두에게 은덕을 받았읍니다. 그는 해마다 우리에게 많은 예물을 보내주었고 그의 표차(?車)가 우리 산 밑을 지날 때면 우리 형제들은 그의 체면을 보아 그 물건에 절대 손대지 않았소. 이번에 임 총표두께서는 이 검보 때문에 집안이 망하고 돌아가셨소. 우리 모두는 이에 울분을 느껴 이렇게 악불군에게 빛을 청산하려는 것이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타고온 사람들을 한번 휘둘러 본 후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모두가 무림에서 이름이 쟁쟁한 영웅호걸들이오. 더우기 화산에서 결맹한 오악검파 고수들께서도 여기 계시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여러분들의 분부에 따르겠고 이의를 달지 않겠소.]
육백은 말했다.
[이분이 우리를 친구로 대하니 그걸 받아 줍시다. 정 사형, 이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소?]
정면은 말했다.
[화산파의 장문인 자리는 좌맹주의 말씀에 따르면 응당히여기 봉 선생이 맡아야 한다고 했고 악불군은 오늘날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으니, 응당 봉 선생께서 집안을 깨끗이 다스리게 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말을 탄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말했다.
[정 이협의 영단이 옳으신 것 같습니다. 화산파느이 일은 응당히 화산파의 장문인이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강호의 사람들이 우리보고 쓸데없이 일에 간섭을 많이 한다는 말들을 안할 것이오.]
봉불평은 말에서 뛰어내려 여러 사람 앞에서 읍을 했다.
[여러분께서 이 몸의 체면을 살려주시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저 아불군이 장문의 자리를 차지한 후 하늘은 노하고, 사람들은 원망을 품었으며 강호에 그 악명이 자자합니다. 오늘날 사람을 죽이고 검법을 강탈하고 강제로 제자를 거두니 이 같은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른 그를 어찌 장문인 자리에 놔둘 수 있겠읍니까? 이 몸은 비록 덕이 없고 무능하여 본래는 이 화산파의 장문자리에 어울리지 않으나 단지 선조들이 어렵게 보호해 오신 화산파를 지키고 이 화산일파가 저 악불군과 못된 제자들 손에 망하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읍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도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손을 모아 사방을 향해 읍을 했다.
이때 말 위의 몇명은 솜자루에 불을 당겼다. 비는 아직 그치지는 않았지만 가랑비로 변해 있었다. 횃불의 불빛이 봉불평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의 표정은 득의양양해 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악불군의 죄는 너무 크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응당 문규에 의해 죽어야 한다. 총 사제 자네는 이 화산파를 위해서 집안을 정리해라. 저 반역자 악불군 부부를 죽여버려라.]
오십 세가 약간 안 되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녜.]
장검을 뽑아들고 악불군 앞으로 나가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악가놈아, 네 놈이 본 파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오늘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악불군은 탄식하며 말했다.
[좋다. 그래 네놈들의 검종이 장문인의 지위를 강탈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계략을 꾸몄구나. 총불기(叢不棄) 네놈이 오늘 나를 죽인다면 앞으로 저 지하에 가서 어떻게 화산파의 선조들을 바라 볼 생각이란 말이냐?]
총불기는 껄껄 웃었다.
[옳지 못한 행동을 했으면 마땅히 목숨을 끊어야 하는 법, 네 스스로 이런 죄행자르 저질러 놓았으니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네놈은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면 더욱 꼴이 안 좋을 걸?]
봉불평은 일갈했다.
[총 사제, 더 말을 해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 형을 집행해라!]
총불기는 말했다.
[녜.]
그리고 장검을 들어 손을 뻗으니 횃불의 빨간빛이 얼굴을 새빨갛게 비추었다.
악 부인이 외쳤다.
[잠깐! 그 벽사검보는 도대체 어느 곳에 있느냐? 도둑놈을 잡고 물건을 찾는다면서 이렇게사람에게 누명을 씌운다면 그가 마음속으로 거기에 수긍하겠는가?]
총불기는 말했다.
[도둑을 잡고 물건을 찾는다고? 좋아.]
악 부인을 향해 두 걸음 다가가서 웃으며 말했다.
[그 벽사검보는 당신 몸 안에 숨겨져 있는 것 같군! 내가 찾아봐야겠소. 그래야만 당신이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말을 안 할 것이오.]
그는 말을 하면서 왼손을 내밀어 악 부인의 허벅지를 더듬으려고 했다. 악 부인의 다리는 상처를 입고 두 곳에 혈도를 찍혀으니 눈 앞에 총불기의 더러운 손이 자기 몸을 더듬어 왔건만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숭산파 정 사형!]
정면은 그녀가 그를 부를 줄은 생각지 못했다.
[왜 그러시오?]
악 부인은 말했다.
[당신 사형인 좌맹주께선 오악검파의 맹주이시고 이 무림의 황제입니다. 우리 화산파 또한 좌맹주 휘하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데 당신은 어째서 이 무례한 소인배에게 나를 맡기려 하시오? 그것은 어떤 규칙에 있는 일입니까?]
정면은 말했다.
[그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악 부인은 또 말했다.
[저 악당들의 말은 다 거짓이오. 저 두 명의 화산파 역적들이 만약 혼자서 내 남편과 싸울 수 있다면 우리는 장문의 자리를 두손으로 바칠 것이며 죽어도 원망을 않겠소. 그렇지 않으면 이 무림에 있는 천하영웅들의 수많은 입을 다 막지 못할 것이오.]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튀 하고 침을 총불기의 얼굴에 뱉었다.
총불기는 그녀와 거리가 가까워서 이런 행동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지라 피하지 못하고 침을 얼굴 가운데 맞았다. 그는 큰 소리로 욕을 했따.
[제기랄! 개 같은 년!]
악 부인은 노해 말했다.
[이 검종파의 악당아! 네놈의 무공이 졸려하여 내 남편은 고사하고 나 같은 아녀자도 혈도를 집히지 않았다면 네놈 하나 죽이기는 누워서 떡먹기다.]
정면은 말했다.
[좋다.]
그리고 두 다리를 벌려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앞으로 나갔다.
악 부인의 몸을 돌아 뒤로 가서 말채찍을 거꾸로 잡고 악 부인의 등에 있는 세 곳의 혈도를 찍었다.
그녀는 온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두 곳의 혈도가 풀리며 사지가 자유롭게 되었다.
정면이 그녀를 풀어준 것은 총불기와 겨루라는 뜻이었다. 눈앞의 이 일전은 화산파 인물들의 생명과 관계되고 화산파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는 것이다. 자기가 만약 총불기를 이길 수 있다면 비록 위험에서 구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위기를 타개할 실마리를 잡게 될 것이다. 만약 자기가 패한다면 더 이상 말할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즉시 따에서 장검을 집어들고 검을 가로로 눕혀 가슴을 막으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바로 이때 왼쪽다리에서 힘이 빠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녀의 다리는 상처가 깊었다. 약간의 힘을 써도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총불기는 껄껄 웃었다.
[쳇! 여자임을 강조하고 또 다리가 아픈 체 가장하니 무슨 시합을 하겠소? 내가 이긴다 해도 갈채를 받지도 못할 것이 아니오?]
악 부인은 그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검을 받아라!]
싹싹싹 삼 검이 날카롭게 뻗어나갔다. 검에는 내력이 충만되어 있어 휙휙휙 소리가 났다. 이 삼 검은 모두 상대방의 급소를 향했다. 총불기는 두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좋다!]
악 부인은 선기를 잡고 앞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꼼짝 않고 서 있자 총불기가 검을 들고 달려왔다. 쨍그랑쨍그랑 소리와 함께 맹렬한 공격이 펼쳐졌다. 악 부인은 막고 피한 다음 수비를 공격으로 바꾸고 날카롭게 적의 아랫배를 찔러갔다. 악불군은 한쪽에 서서 자기의 처가 다리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해 간적을 물리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총불기의 검초는 정묘하고 변화가 무쌍했다. 자기의 처보다 한수 위였다.
십여 초 접전하다가 악 부인은 아랫배가 무거움을 느꼈다. 화산기종은 본래 내력에 의지해 적을 굴복시키는데 그녀의 상처가 깊어 기가 고르지 못해 검은 점점 총불기에게 제압을 받았다.
악불군은 내심 걱정되었다. 자기의 처의 겁법이 빠르면 빠를수록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검종의 장점은 검법에 있다. 검법으로 그와 부딪치니 자기의 단점을 가지고 적의 장점을 대하는 격이라서 틀림없이 질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악 부인이 어찌 모르겠는가? 단지 다리의 상처가 가볍지 않았고 칼을 맞은 다음 혈도를 찍혔으며 더 나아가 그 상처를 싸매지도 못하여 지금은 피가 계속 흘러 어떻게 지혈시킬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여 지탱하고 있어검초는 비록 흩어지지 않았으나 경력은 급속하게 약해졌다. 십여 초가 지나자 총불기는 상대방의 약점을 알았다. 내심 기뻐하며 공격보다는 은밀하게 방어에만 신경을 썼다.
영호충은 눈을 부릅뜨고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총불기의 검법은 종횡무진하며 사용하는 초식은 힘을 쓰지 않는 검법이었다. 사부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생각했다.
(과연 본문의 기종과 검종 두 파로 갈라진 후 두 파가 사용하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구나!)
그는 천천히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손을 내밀어 한 자루의 장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오늘 우리 파가 무참히 쓰러지고 사모님과 사매의 순결을 간사한 무리에게 더럽히도록 두고 볼 수는 없다. 사모님께서 이 사람의 상대가 못될 성싶으면 내가 먼저 사모님과 사매를 죽이고 목숨을 끊어 화산파의 명예를 지키리라.)
악 부인의 검법이 점점 흩어졌다. 그런데 순식간에 장거미 기세를 올려 '얍' 소리와 함께 날카롭게 뻗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무상무대 영씨일검의 초식이었다. 이 일검의 기세는 무서워 비록 그녀가 상처를 입고는 있었지만 공격하는 기세는 정말 위력이 있었다. 총불기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악 부인의 다리가 온전하고 이 기세를 따라 계속해 공격했다면 적은 틀림없이 패배하고 피를 흘렸을 것이다.
이때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힘없이 검을 땅에 짚고 숨을 계속 헐떡이며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불기는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시오? 악 부인, 힘이 다 빠졌소? 그러면 내가 당신의 몸을 좀 주물러 주겠소.]
그는 말하면서 왼쪽 손을 앞으로 쭉 뻗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악 부인은 검을 들어 지르려고 했으나 오른쪽 팔에 힘이 없어 아무리 해도 검을 들 수가 없었다.
영호충이 외쳤다.
[잠깐!]
그는 악 부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외쳤다.
[사모님.]
그는 검을 뽑아 그녀를 찔러 그녀의 명예를 지키려고 했다. 악 부인의 눈빛에는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생각했다.]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 그녀는 흙구덩이에 주저앉고 말았다.
총불기는 외쳤다.
[꺼져라!]
그는 검을 쭉 뻗어 영호충의 목을 겨누고 찔러왔다.
영호충은 검이 눈 앞에 다가오자 자기에게 약간의 힘조차 없으니 만약 검을 뽑아 막으려 해보았자 그의 검에 찔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똑같이 검을 들어 그의 목을 향해 찔렀다.
그것은 상대방과 같이 죽는 검법이었다. 이 일검은 비록 민첩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절묘했다. 이것이 바로 독고구검 가운데 파검식(破劍式)이었다.
총불기는 깜짝 놀랐다. 진흙투성이의 소년이 이런 일초를 쓸 줄은 생각지도 못한처라 급한 나머지 땅으로 몇바퀴를 굴러서야 비로소 그것을 피했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의 꼴이 말이 아니고 몸을 일으켜 세우자 머리, 얼굴, 손, 그리고 온몸이 진흙투성이로 변하자 어떤 사람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들도 이러한 구르는 방법 외에는 이 초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잇었다. 총불기는 웃음소리를 듣자 창피하고 화가 났다. 다시 검을 들어 영호충을 향해 달려나갔다.
영호충은 이에 생각을 굳혔다.
[나는 절대로 내공의 기를 쓸 수 없다. 단지 대사숙께서 전수해주신 검법으로 그와 맞서보자.]
그는 독고구검을 숙달하게 익히지 못해서 원래는 감히 이것으로 적과 싸울 수 없었으나 지금은 생사가 이 순간에 걸렸기 때문에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가 갑자기 맑아졌다. 파검식의 여러가지 복잡하고 신기한 검법이 삽시간에 뚜렷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눈앞에 총불기의 검이 질풍처럼 앞으로 찔러오고 있었다. 영호충은 벌써 그의 초식에 있는 빈틈을 찾아내고 칼끝을 비스듬히 뉘여 그의 아랫배를 향했다.
총불기는 이렇게 달려들어갈 때 상대방이 피하거나 칼을 들어 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의 아랫배가 무방비 상태였으나 거기를 막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호충은 피하지 않았고 단지 검끝을 비스듬히 세워 자기의 아랫배가 검에 닿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불기는 몸을 날려 두 다리가 땅에 닿기 전에 이미 자기가 위험에 처했음을 알았다. 급히 검을 휘둘러 영호충의 장검을 내리쳤다.
영호충은 벌써 이것을 예상하고 있다는 듯 오른쪽 팔을 가볍게 들어 장검을 앞으로 두 자 정도 뻗었다. 칼끝을 들어올리니 칼끝이 총불기의 머리에 닿았다. 총불기는 일검을 내리치며 영호충의 장검이 자기의 칼을 막을 때 그 빈틈을 타서 피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뜻밖에 상대방은 이 중요한 때에 검을 살짝 돌렸으니 그는 허공을 쳤을 뿐이었다. 몸을 허공에서 돌릴 수 없어 '으' 하는 비명을 지를 때 영호충의 칼끝을 향해 그의 몸이 떨어졌다.
봉불평은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어 총불기의 등을 잡았으나 결국 한발짝 늦어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칼끝이 총불기의 어깨를 꿰뚫었다. 봉불평은 순간 검을 뽑아 영호충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쳤다. 검법의 이치에 따르면 영호충은 반드시 뒤로 급히 물러나 다시 기회를 잡아 공격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몸 속의 내공은 매우 혼란했다. 조금도 힘을 쓸 수 없었다. 절대로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서 총불기에 찍혀 있던 검을 뽑아 다시 독고구검의 초식을 펼쳤다. 반격하여 찌르니 검끝은 봉불평의 배꼽을 향했다.
이 일초는 실로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검법이었다. 그러나 그의 반격 자세는 특이했다. 이 검이 먼저 적의 배꼽을 찌른 다음 적의 병기가 비로소 그의 몸을 찌를 수 있어 서로의 거리는 간발이 차이이고 먼저 당하는가 나중 당하는가 차이뿐이었다.
봉불평은 자기의 일검을 적이 막지 못함을 알았다. 그런데 영호충의 장검이 자기의 아랫배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자 위험 천만이었다. 바로 뒤로 물러나 호흡을 길게 내쉬고 연속 칠검(七劍)을 휘둘렀다. 그 검법은 벼락을 동반한 폭풍우처럼 무섭게 밀어닥쳤다.
영호충은 이미 삶과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풍청양이 가르쳐준 수많은 검법뿐이었다. 어떤 때는 뇌리 속에 뒷동굴에 있던 석벽상의 검초가 떠올랐다. 그 검법을 사용하여 봉불평과 순식간에 칠십여 초를 대결했다. 두 사람의 장검은 서로 부딪치지 않았다. 공격과 수비는 모두 정묘하고 오묘하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눈이 부셨다. 그 누구도 갈채를 보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든 사람은 영호충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힘이 지탱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검의 신묘한 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무쌍하여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봉불평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만 장검을 허공에 대고 찌를 뿐이었다. 상대방이 자기와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검만 서로 부딪치니 쉽게 제압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보는 사람 눈에는 봉불평의 검법이 무미건조할 뿐이어서 어떤 자들은 마음에 불만을 품었다.
태산파의 한 도사가 말했다.
[기종의 제자는 검법이 절묘한데 검종의 사숙은 내공이 강하구나! 이 어찌된 영문인가? 화산파의 기종 검종은 서로 뒤바뀌었단 말인가?]
봉불평의 얼굴이 빨개졌다. 한 자루의 장검을 더욱 질풍처럼 휘둘렀다. 그는 오늘날 화산파 검종의 제일고수이고 검술은 대단했다.
영호충은 발을 옮겨 디딜 힘조차 없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는 터였고 그래서 좋은 기회를 많이 놓쳤다. 처음 사용한 독고구검은 초식이어서 큰 적을 만나자,(오타 아님) 두 사람은 한참을 사웠으나 금방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다시 삼십여 초식을 싸웠다. 영호충은 발견했다. 자기가 초식의 검법이 아닌 마구잡이 검법을 썼을 때 상대방은 때때로 막지 못하고 손과 발의 움직임이 산만해지는 것을...... 그러나 만약 검초 중에 본문의 검법이나 또 석벽에 조각되어 있는 숭산, 형산, 태산 등의 검법을 사용할 때면 봉불평은 선기를 잡아 반격하여 자기의 검초를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한번은 봉불평이 장검으로 연속 세 개의 호형(弧形)을 그렸는데 자기의 칼이 떨어져 나갈 뻔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풍청양의 한 마디가 또렷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초식이 없는 검법을 쓴다면 적은 그것을 뚫지 못할 것이다. 초식의 없음이 초식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검법의 극치이다.)
그때 그는 봉불평과 이미 이백여 초를 싸웠다. 독고구검 중에 절묘한 초식을 갈수록 많이 깨달았다. 봉불평이 어떤 무서운 검법으로 공격해 와도 그는 결국 한눈에 그의 빈틈을 알아내고 검을 휘둘러 그로 하여금 검을 거두어 자기를 방어하도록 했다. 싸울수록 자신이 생겼다. 갑자기 풍청양의 말이 생각났다.
(무초로 유초를 파괴하는 비결을 알려 주마. 가볍게 기를 길게 내쉬고 검을 펼쳐라. 이 일검은 어떤 초식에도 속하지 않으며 심지어 독고구검 중의 파검식의 검법에도 속하지 않는다. 검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고 검끝은 삐뚤어져 자기도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생각하지 마라!)
봉불평은 영호충의 검법이 변화하자 멈칫거리며 생각했다.
(이것은 또 무슨 초식인가?)
금방 어떻게 해소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춤을 추듯 검을 휘둘러 자기의 상반신을 방어했다. 영호충의 검은 일정한 초식이 없었다. 상대방이 자기 몸의 상단을 방어하자 검끝은 가볍게 떨며 그의 허리를 향했다. 봉불평은 그의 초식의 변화가 이렇게 기묘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깜짝 놀라 뒤로 세 발짝 물러섰다. 영호충은 그를 다라갈 힘이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결투하느라고 비록 내공을 쓰지는 않았지만 검을 들어 찍고 내리치는 바람에 자기의 힘을 다 소모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오니손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급한 숨을 계속 내쉬었다.
봉불평은 그가 쫓아오지 않음을 보고 기회는 이때다고 생각하며 바로 앞으로 나와 싹싹싹 사검(四劍)으로 영호충의 가슴과 배, 허리, 어개, 네 곳을 연달아 질렀다.
영호충은 팔뚝을 틀어 검의 방향을 바꾸고 그의 왼쪽 눈을 향해 찔러갔다. 봉불평은 신음소리를 내며 뒤로 세 발자국을 물러 났다.
태산파의 그 노인이 말했다.
[이상하다. 이상해! 이 사람의 검법은정말 탄복할 만하구나.]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모두 동감이었다. 모두들 탄복하는 '이 사람의 검법' 은 자연히 봉불평의 검법이 아니라 영호충의 검법이라는 것을 봉불평은 눈치채고 있었다. 봉불평은 내심 생각했다.
(나는 검종의 최고 고수로서 화산파를 장악할 의도였는데 만약 내가 검법으로 이 기종의 꼬마에게 진다면 화산파의 장문이 되는 계획은 물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또 산에 드렁가 은거해야 하고 다시는 강호에 나올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암암리에 부르짖었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또 무엇을 숨기겠는가?)
고개를 들고 있는 힘을 다해 맑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장검을 비스듬히 찔러갔다. 그 민첩함이란 형용할 수 없었다. 오육 초가 되기도 전에 검세는 이미 윙윙거리며 바람소리를 냈다. 그의 검은 갈수록 빨랐다. 바람소리도 점점 커졌다. 이 광풍쾌검(狂風快劍)은 봉불평이 중조산(中條山)에서 은거하면서 15년이란 세월이 걸려서 창출해낸 뽐낼 만한 검법이었다. 검초는 휘두를수록 더욱 빨랐고 불러 일으키는 바람소리도 갈수록 빨라졌다. 그가 품고 있던 뜻은 아주 컸다.
화산파를 장악하고 또 화산파의 장문인이 된 다음 더 나아가 오악검파의 맹주가 되려 하는 것이었다. 오직 의지하는 것은 이 백팔식(百八式)의 광풍쾌검뿐이었다. 그는 이 재주를 가급적 노출하지 않으려 했다. 일단 노출되면 실제가 다 노출되어 다시는 일류 고수들과 대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은 이미 그 초식을 알아 방비책을 세우기 때문에 그 효과를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기세가 호랑이등에 올라탄 격이니 영호충을 패퇴 시키지 못한다면 그는 얼굴을 들 수 없고 강호에 돌아다닐 염치가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그는 어쩔 수가 없어서 그 초식을 펼쳤다.
이 광풍쾌검은 위력이 엄청나 검에서 솟아오르는 한 줄기의 경기(勁氣)는 점점 확산되어 옆에서 보는 사람에게 한기가 몰려갔고 얼굴이나 손에 검풍(劍風)이 불어와 은은하게 아파오기까지 했다.
모두들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을 에워쌓던 원은 점점 넓혀져 이미 사오 장의 둥근 원으로 펼쳐졌다.
이때 숭산, 태산, 형산파의 고수들과 악불군 부부는 봉불평을 경멸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모두들 그의 검법의 초수가 정기하고 검의 기세가 대단하여 결코 요행히 승리를 얻고자 함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이 사람은 강호에서 별로 이름이 나 있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검법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말 위의 여러 사람이 비추고 있던 횃불의 불빛이 이 검세의 빛에 융합되어 너울너울 춤췄다. 검에서 발산하는 바람소리는 점점 커지고 세력이 강화되었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영호충은 바로 만 장의 파도에 묻혀 있는 일엽편주 같았고 광풍노도가 하늘을 덮을 듯한 하얀 풍랑이 작은 배에 부딪치고 작은 배는 파도를 다라 넘실넘실 금방이라도 파도 속에 휘감길 것 같았다.
봉불평의 공격이 빠를수록 영호충은 더욱 풍청양이 가르쳐 주던 검법의 뛰어남을 확신하게 되었다. 매초식마다 그는 더욱 많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검법의 여러 초식을 철저하게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감이 점점 우러났다. 그는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단지 정신을 집중하여 상대방 검초에 있는 여러 변화를 살폈다.
광풍쾌검은 정말 빠르고 강했다. 백팔 개 초식은 순식간에 끝났다. 봉불평은 상대방을 제압하지 못하자 마음이 더욱 초조해져 계속 소리를 질러대며 장검을 비스듬히 하고 앞으로 똑바로 후려쳐 왔다. 맹렬하기 이를데 없어 영호충은 검을 들어 막지 않을 수 없었다. 영호충은 그의 형세가 목숨을 걸고 들어오는 것 같아 마음이 두려웠다. 계속 싸움을 할 수 없어 장검을 살짝 흔들어 싹싹싹 네 차례의 가벼운 소리와 함께 오른손과 오른발, 왼손과 왼발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봉불평은 손목을 채여 장검을 떨구고 말았다.
봉불평은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만됐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정면, 육백, 탕영악, 세 사람을 향해 읍을 하며 말했다.
[숭산파의 세 분의 사형께서 좌맹주에게 전하시오. 이 몸은 그 어르신의 성의에 감격하고 있다고...... 그러나 기량이 부족하여 그분께...... 면목이...... 면목이......]
그리고 또 한번 읍을 한 다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십여보를 도망친 다음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너의 검법은 대단하다. 이 몸은 굴복한다. 네가 쓰는 검법은 아마 악불군도 지니고 있지 못할 것이다. 너의 이름과 그 검법을 가르쳐 준 분의 이름은 무엇인가? 가르쳐 주게.]
영호충은 말했다.
[저는 영호충이올시다. 은사이신 악 선생 밑에 있는 수제자입니다. 선배님께서 양보해 주셔서 다행히 일초반식의 승리를 얻었을 뿐입니다. 어찌 입에 올리 수가 있겠읍니까?]
봉불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속에는 처량하고 낙담한 의미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떠나갔다.
정면, 육백과 탕영악 세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검법으로 말한다면 우리들은 이미 봉불평의 적수가 못 되고 물론 저 영호충의 적수가 더욱 못 된다. 만약 우리가 일제히 달려들어 난도질을 한다면 그를 죽일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각파의 고수들이 함께 있는데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세 사람의 마음이 서로 통했다. 모두 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이 낭랑히 외쳤다.
[영호 현질, 너의 검법은 고명하군! 정말 눈을 뜨게 해 주었어.
나중에 보기로 하세.]
탕영악은 말했다.
[모두들 갑시다!]
그리고 왼손을 흔들어 말머리를 돌려 양쪽 발을 차니 말은 앞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러자 나머지 사라들도 그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그 무리는 컴컴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약왕묘에는 화산파 사람들과 그 복면의 괴한들만 남아 있었다.
그 복면 노인이 마른 웃음을 두번 웃고 말했다.
[영호 소협, 당신의 검술은 고명하여 모두들 감복하는 바이오.
악불군의 공부는 당신에 비해 아직 멀었소. 이치대로 라면 당신은 벌써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어야 옳았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계속하여 말했다.
[오늘저녁 각하의 정묘한 검법을 보았으니 응당 우리가 물러가야 옳으나 우리는 이미 당신들과 원한을 맺었소. 앞으로의 화근이 무궁할 것이오. 오늘 반드시 그 뿌리를 뽑아 그 근원을 없애야 하겠소. 비록 당신은 상처를 입었지만 사정을 봐줄 수 없구료.]
말을 하면서 한번 소리를 지르자 나머지 복면인들이 둥그렇게 에워쌌다.
정면 일행이 떠나갈 때 횃불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아 깜박깜박 사람들의 하반신을 비추고 있었다. 허리 위에는 불빛이 비추지 않아 알아 볼 수 없었다. 열다섯 명의 복면인들의 병기에 불빛이 반사되었다.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영호충을 향해 다가왔다.
영호충은 봉불평과 싸움을 할 때 비록 내력을 소모하지는 않았으나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가 화산파 검종의 고수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독고구검을 배웠기 때문이고 초식에 있어 선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열다섯 명의 복면인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병기와 그들이 사용하는 초식이 동시에 공격해 온다면 어찌 하나하나 헤쳐나간단 말인가? 그는 내공이 조금도 없었다.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딜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 어찌 열다섯 명이나 되는 고수들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겠는가?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애틋한 눈빛으로 악영산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눈빛이었다. 그는 악영산의 얼굴에서 조그만 위안이라도 찾고 싶었다. 과연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빛에는 초조함과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영호충은 내심 기뻤다. 그러마 희미한 불빛 속에 그녀의 섬섬옥수는 한 남자의 손을 꽉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는 임평지였다. 영호충은마음속이 시큰해졌으며 더욱 싸울 의욕을 상실하고 말았다. 즉시 검을 던지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 열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그가 조금 전 봉불평과 악투하던 위세에 질려서 누구도 감히 먼저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반 걸음 반 걸음씩 천천히 다가왔다.
영호충이 천천히 몸을 돌려보니 열다섯 명의 삼십개 눈동자에서 형형한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마치 한 쌍의 맹수눈과 같이 흉악하고 잔인한 빛이었다.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전광석화 같은 생각이 스쳤다.
(독고구검의 제칠검 파전식(破箭式)은 전문적으로 암기만을 파괴하는 것이다. 적의 수천 수만의 화살이 날아오거나 또 수십 명이 각종 암기를 동시에 쓸 때 이 일초를 사용하면 수백가지의 암기를 동시에 격퇴할 수 있다.)
그 복면노인이 말했다.
[일제히 공격하라! 저 놈을 난도질해 버려라!]
영호충은 더 이상 생각할 영유가 없었다. 장검을 뽑아들고 독고구검의 파전식을 펼쳤다. 검끝이 부르르 떨더니 열다섯 사람의 눈을 찍었다.
아! 아이구! 아이고!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비명소리와 함께 쨍그랑! 챙강! 하는 소리가 들리며 병기가 일제히 땅에 뚝뚝 떨어졌다. 열다섯 명의 복면인의 삼십 개 눈은 일순간에 영호충의 신속한 수법에 의해 칼에 베어진 것이었다.
독고구검의 파전식은 일초는 먼저 수백 개의 암기를 받아낸 다음에 수백 개의 급소를 찍는 것이 순서였으나 검이 너무 빨라 마치 한 번의 칼질로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검법은 단숨에 적중해야 했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게 된다면 적들의 암기는 자기를 찌를 것이다. 영호충은 이 검술을 숙달되게 익히지 못했다. 그러나 천천히 다가오는 눈동자를 보자 멀리서 날아오는 암기를 쳐내는 것처럼 대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느 삼십 검을 뻗어 내어 삼십 개의 눈동자를 적중시킨 것이었다.
그는 찌른 다음 곧바로 사람이 둘러쌓인 곳을 피해 나갔다. 왼손으로 문설주를 부여잡고 있는 그의 안색은 창백하였으며 온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영호충의 손에 들려 있던 장검이 땅에 떨어졌다.
그 열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두 손으로 눈을 싸잡고 비명을 질러댔는데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줄줄 흘러나왔다. 어떤 자는 땅바닥에 꿇어 앉고 어떤 자는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어떤 자들은 흙탕물 속에서 뒹굴었다.
열다섯 명의 복면인은 눈 앞이 갑자기 어두워오고 몹시 아파 참을 수가 없어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외쳤다. 만약에 이 사람들이 약간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몰려들어 공격했다면 영호충은 이 열다섯 사람에게 살해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한들 순간에 두 눈이 찔려 눈이 안 보이는데 어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계속하여 공격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이 열다섯 사람은 마치 머리를 잘린 파리처럼 부딛치고 딩굴며 허우적거렸다.
영호충은 위험 천만할 대 자기의 검법이 성공을 거두자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열다섯 사람의 꼴을 보자 무서움과 또 측은하고 가련한 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악불군은 놀람과 기쁨이 교차되어 큰 소리로 외쳤다.
[충아, 그들의 다리를 잘라라! 그리고 천천히 물어보자!]
영호충은 말했다.
[녜...... 녜.]
고개를 숙여 장검을 주웠다. 그러나 조금 전 그 초식을 쓰면서 내공을 움지였기 때문에 전신은 부들부들 떨려 왔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장검을 쥘 수가 없고 두 다리가 흐물거려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 복면 노인이 외쳤다.
[모두들 병기를 들고 왼손으로 동료들의 허리를 잡고 나를 따라가자!]
열네 명의 복면객은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그 노인의 외침을 듣자 일제히 허리를 굽혀 땅바닥을 더듬었다. 어떤 병기를 만지든지 그 병기를 주웠고 어떤 자는 두 개를 잡았으나 어떤 자는 한개도 잡을 수 없었다. 각자 오니손으로 동료들의 허리를 잡고 한줄을 이루어 그 노인을 따라 비를 맞으며 질퍽거리는 흙탕물을 밟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화산파의 많은 사람들은 악 부인과 영호충 외에는 모두들 혈도가 찍혔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악 부인은 두 다리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영호충은 전신의 힘이 빠져 일어설 수 없어 눈을 뜨고 열다섯 명의 복면객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조용한 가운데 남녀제자들이 내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악불군은 갑자기 냉랭히 말했다.
[영호충, 영호 대협, 내 혈도를 풀어주지 않을 작정인가? 정말 모두가 너에게 애걸을 해야 풀어줄 생각이냐?]
영호충은 깜짝 놀라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저와 농담을 하시는군요. 제가...... 제가 바로 사부님의 혈도를 풀어 드리겠읍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기어 일어났다. 뒤뚱뒤뚱 악불군의 몸 앞까지 걸어갔다.
[사...... 사부님, 어떤 혈도를 풀까요?]
악불군은 화가 치밀었다. 지난번에 영호충이 화산에서 거짓으로 자기 몸을 찔러 아무리 말을 해도 전백광을 죽이지 않았는데 오늘도 옛날과 똑같이 거짓 연기를 하여 열다섯 명의 복면객을 풀어주고 또 고의로 시간을 끌어 자기의 혈도를 풀어주지 않는 것은 자기가 쫓아가 복면인들을 죽일까봐 그러는 줄 알고 악불군은 몹시 화가 났다.
[넌...... 넌...... 신경쓸 필요 없다!]
그리고 계속해서 속으로 자하신공을 운행하여 여러 혈도를 풀려고 했다. 그는 적에게 혈도가 찍힌 다음 계속 강력한 내공을 써서 충격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혈도는 너무 강한 충격을 받았고, 또 찍힌 곳은 옥침(玉枕), 전중, 거추, 견정, 지당(志堂) 등의 중요한 대혈이었기 때문에 경맥의 운행은 이 몇군데 혈도에서 막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하신공의 위력이 많이 경감되어 금방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영호충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사부님의 혈도를 풀려고 했다.
그러나 티끌만큼의 힘도 낼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들려고 했으나 눈 앞에는 불똥이 튀고 귓속은 윙윙 소리가 나 기절할 것 같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악불군의 몸 옆에 쓰러져 스스로 악불군이 혈도를 풀 때를 기다렸다.
악 부인은 땅에 엎드려 있었다. 조금 전 힘을 쓰면서 진기를 흐트려 놓았기 때문에 온몸은 힘이 빠지고 손조차 들 수 없었고 상처를 누를 수도없었다.
날이 점점 밝아오고 비도 점차 그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은 점점 몽롱한 상태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악불군의 머리끝에는 하얀 안개가 떠올랐고, 얼굴에는 자색의 기운이 자욱하게 번졌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악불군은 전신의 혈도를 풀 수가 있었다. 그는 몸을 날려 일어나 두 손으로 치거나 때리며 째거나 문지르면서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혈도를 풀었다. 그리고 내력을 악 부인의 체내에 집어넣어 그녀의 기가 돌도록 했다.
악영산은 급히 어머니의 상처를 싸맸다. 여러 제자들은 어제 저녁 죽음에서 소생한 상황을 생각하니 정말로 악몽을 꾼 것 같았다.
고근명, 시대자 등은 양발의 머리와 몸이 따로 떨어져 있는 참상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몇 명의 여제자들은 더욱 슬피울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다행히 대사형께서 이 악당들을 격퇴시켰어.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생각만 해도 끈찍하게 당하고 말았을 거야.]
고근명은 영호충이 혼자 흙탕물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가서 그를 일으켰다.
악불군은 담담하게 말했다.
[충아, 그 열다섯 명의 복면객의 정체는 무엇이냐?]
영호충은 말했다.
[제자...... 제자는 모르는 일입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너는 그들을 알지 않느냐? 그들과 교분은 어떠하냐?]
영호충은 깜짝 놀라 말했다.
[제자는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 사람 중에 어떤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읍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그들을 잡아 그들의 정체를 밝히라고 명령했는데 너는 어째서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처리하지도 않았지?]
영호충은 말했다.
[제자...... 제자...... 제자는 정말 힘이 없었읍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읍니다. 그땐...... 그땐......]
말을 하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혼자 서 있기가 상당히 어려웠던 것이다. 악불군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연기를 멋지게 하는군!]
영호충은 머리에 땀방울이 맺혀 흘렀다. 두 무릎을 꿇어 땅바닥에 엎드렸다.
[이 제자는 어려서부터 고아가 되어 사부님의 은덕을 받아 사부님이 키우셨읍니다. 사부님께서는 이 제자를 친아들처럼 여기셨읍니다. 이 제자가 비록 불충하다고는 하나 어찌 사부님의 뜻을 배반하여 고의로 사부님과 사모님을 속이겠읍니까?]
악불군은 말했다.
[나와 사모님에게 거짓말을 감히 못 한다고? 그럼 너의 검법은 허허...... 어디서 배웠느냐? 그렇다면 꿈 속의 도사에게 전수받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이냐?]
영호충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부님, 용서해 주십시오. 검법을 전수해 준 사람은 이 제자에게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에게도 검법의 내력을 밝히지 말라고 하셨읍니다. 설령 사부님이나 사모님일지라도 말씀드릴 수 없읍니다.]
악불군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그렇겠지. 너의 무공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사부나 사모님이 네 눈에 차겠느냐? 우리 화산파의 이 조그만 공력(功力)이 어찌 너의 신검(神劍)의 일격을 막을 수 있겠느냐? 아까 그 복면인들도 말하지 않았느냐? 화산파의 장문 자리는 벌써 네가 맡았어야 옳다고.]
영호충은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만 조아렸다. 마음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만약 풍 사숙조에게 검법을 전수받은 경과를 토로하지 않으면 사부님은 결국 용서해 주지 않으실거다. 그러나 남아대장부는 한번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 전백광 같은 계집질만 일삼는 사람도 도곡육선에게 큰 고통을 당하면서도 절대로 풍 사숙조의 행적을 누설치 아니하였다. 영호충은 큰 은덕을 받았다. 절대로 그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내가 사부님과 사모님을 대하는 마음은 하늘과 땅이 안다. 잠시 억울함을 받았다손쳐도 그게 뭐가 대수인가?)
생각을 마친 영호충은 말했다.
[사부님, 사모님, 이 제자가 감히 사부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대항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말할 수 없는 고충이 있읍니다. 앞으로 제자가 그 선배님에게 요청해서 이 제자가 사부님과 사모님께 알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겠읍니다. 그때는 자연히 속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좋다. 일어나거라.]
영호충은 머리를 두번 조아리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두 무릎에 힘이 없어 다시 무릎을 끓었다. 임평지는 그의 옆에 있었기 때문에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악불군은 냉소했다.
[너의 검법도 고명했지만 연극은 그보다도 훨씬 고명하더구나!]
영호충은 감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부님의 은혜는 산과 같은데 오늘은 나를 책망했지만 앞으로는 결국 밝혀질 것이다. 이 일은 사실 너무 이상하다. 의심을 품는 것도 무리가아니다.)
그는 비록 억울한 오해를 받았지만 추호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악 부인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저녁에 충아의 신묘한 검법이 아니었다면 화산파의 인물은 전멸되고 말았을 것이고, 우리 여자들은 말도 못하는 능욕을 당했을 것이다. 충아에게 검법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이든간에 우리는 큰 은혜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열다섯 명의 악당들의 정체는 앞으로 자연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우리 충아가 그들과 교분이 있겠는가? 그들은 정말로 충아를 죽이려고 했고 충아는 그들의 눈을 찍지 않았는가?]
악불군은 고개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악 부인의 이런 말투는 조금도 귀에 들어오는 것 같지 않았다. 여러 제자들은 불을 피우고 밥을 지었다. 어떤 이들은 구덩이를 파고 양발을 묻었다. 아침 식사 후에 각자 행랑에서 마른 옷을 갈아 입고 젖은 옷을 벗었다. 모두들 악불군을 주시하며 지시를 기다렸다. 모두들 생각했다.
(또 숭산에 가서 좌맹주하고 따질 것인가? 봉불평은 이미 대사형의 검에 패했기 때문에 다시는 화산파의 장문자리를 탐하지 않을 것이다.)
악불군은 악 부인에게 말했다.
[사매, 어디로 가야될지 말 좀 해보시오?]
악 부인은 말했다.
[숭산에는 갈 필요가 없지요. 기왕 나온 이상 화산에 급히 돌아갈 필요가 있겠읍니까?]
그녀는 도곡육선이 무서웠다. 그래서 다시 산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악불군은 말했다.
[아무일도 없으니 천하를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겠지. 제자들의 견문이나 경험을 넓혀 두는 것도 좋을거야.]
악영산은 크게 기뻐 손뼉을 치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버님......]
그러나 양발 사형의죽음이 생각났다. 금방 이렇게 기뻐한다는 것은 실로 걸맞지 않는 것 같아 몇번 손뼉을 치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논다는 소리를 들으니 네가 제일 기쁜 모양이구나. 너의 말대로 우리 산천구경이나 다니자.]
말을 하면서 임평지를 쳐다보았다.
악영산은 말했다.
[아버지, 논다는 말씀이 나왔으니 한번 통쾌하게 놀아봐요. 멀리 갈수록 좋구요. 몇백 리 가시다가 다시 집으로 가신다는 말씀은 마세요. 우리 임 사형의 집에 놀러가요. 나와 둘째 사형이 복주에 갔을 때 추한 계집종으로 변장을 했기 때문에 밖에 나가 거닐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복건(福建)의 용안(龍眼)은 크고 또 달아요. 또 귤나무와 수선화......]
악 부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여기서 복건까지는 수만 리 길인데 우리는 그만한 여비가 없단다. 화산파가 거지패거리로 변해서 걸식을 하면서 가야 되겠니?]
임평지는 말했다.
[사부님, 사모님, 며칠만 가면 바로 하남성 변경에 도착합니다.
제자의 외갓집니 낙양에 있읍니다.]
악 부인은 말했다.
[맞다. 너의 외조부이신 금도무적 왕원패(金刀無敵 王元覇)는 낙양 사람이지.]
임평지는 말했다.
[제자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읍니다. 정말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만나뵙고 싶고 자세한 내막을 말씀드리고 싶읍니다.
사부님, 사모님, 그리고 여러 사형 사저들께서 기꺼이 가신다면 제자의 외갓집에 가셔서 며칠 묵도록 하시지요. 저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틀림없이 영광으로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산구경 물구경을 하면서 복건에 있는 집에 가시지요. 장사분국(長沙分局)에는 청성파수중에서 제자가 빼앗은 적지 않은 보물이 있읍니다. 여비의 일체는......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읍니다.]
악 부인은 도실선(挑實仙)에게 일검을 찌른 후에, 날마다 도곡사선에게 사지가 잡혀 전신이 네 조각이 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더우기 성불우(成不憂)가 네 조각으로 찢어진 후에 오장육부가 널려진 참상을 생각하니 더욱 걱정이 되고 가슴이 크게 두근거려 거의 매일밤마다 사지가 찢겨지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번에 하산해 숭산에 가서 따진다는 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명목이고 사실 속셈은 도곡육선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그녀는 생각하기를, 피할 바에는 멀리 피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자기와 남편은 평생 남쪽 지방에 가본 적이 없으니 복건 일대를 유람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악불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형, 임평지가 먹을 것과 잠잘 장소를 마련한다고 했으니 우리 한번 가서 공짜 밥이나 먹어 봅시다.]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평지의 외할아버지 금도무적(金刀無敵)의 위엄은 이 중웡에 떨쳐 울리고 있다. 나는 옛날부터 만나뵙고 싶었으나 아직 인연이 없었다. 복건 보전(?田)이라는 지방은 남소림(南少林)의 소재지이다. 옛날부터 무림의 고수들을 많이 배출했지. 우리는 낙양 복권 일대를 구경하자. 만약 몇명의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여러 제자들은 사부가 복건에 가기로 결정했음을 보고 기뻐했다. 임평지와 악영산은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이 가운데 영호충만이 남몰래 괴로워했다. 그는 생각했다.
(사부님과 사모님이 다른 데를 안 가시고 하필이면 낙양에 가서 임 사제의 외조부님을 만나보고 다시 수만리 떨어진 복건에 가는 이유는 말을 안 해도 자명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소사매를 임평지에게 시집보내려고 그러는 것이다. 낙양에 가서 두 사람의 혼사를 결정하고 복건에 가서 아마 임가와 결혼을 시키겠지? 나는 아버지, 어머니도 없고 친척도 없는 천애고아다. 어찌 분국(分局)이 온 천하에 뻗쳐 있는 복위표국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임 사제가 낙양에 가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만나는데 내가 따라간다면 내꼴이 무엇이 되겠는가?)
눈 앞의 여러 사제와 사매들은 활짝 얼굴을 펴고 웃고 있었다.
양발이 처참하게 죽은 일은 모두 까마득히 잊은 듯해서 더욱 불쾌했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오늘 저녁 묵은 다음에 밤중에 혼자 사라지자. 내가 임 사제의 밥을 먹고 그의 돈을 써야 되는가? 그리고 다시 억지 웃음을 웃고 그와 소사매가 백년해로 하는 꼴을 축하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모두가 길을 떠난 후 영호충도 뒤를 따랐다. 심기가 불편하고 힘이 바져 걸음걸이가 느렸다. 여러 사람들과 거리가 갈수록 멀어졌다. 점심때까지 걸었을 무렵, 그는 길 옆의 도로에 걸터앉아 숨을 헐떡였다. 노덕약이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대사형, 몸이 어떠십니까? 피곤하시죠? 내가 같이 있지요.]
영호충은 말했다.
[좋다. 미안하구나.]
노덕약은 말했다.
[사모님께선 이미 앞마을에서 한 대의 수레를 빌리셨읍니다. 금방 마중하러 오실 것입니다.]
영호충은 내심 따뜻한 정을 느꼈다.
(사부님은 여전히 나를 의심하시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나에게 잘 대해 주시는구나!)
얼마 있지 않아 한 대의 수레가 나귀에게 끌려 왔다. 영호충은 수레에 오르고 노덕약은 옆에서 걸었다.
그날 저녁은 여관에서 묵었다. 노덕약은 그와 같은 방을 썼다.
이렇게 이틀 동안 노덕약은 그와 촌보도 떨어지지 않았다. 영호충은 그가 동문의 의리를 생각해 자기의 병든 몸을 보살펴보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덕약 사제는 강호에서 떠돌다가 늙어서야 사부님의 밑에 들어왔기 때문에 나의 사제이긴 하나 나이는 나보다 많다. 그래서 평소 나와 말을 거의 주고받지 않았는데 뜻밖에 내가 이런 경우를 당하자 그는 이렇게도 진심으로 나를 대해 주니, 길이 멀어야 말의 진가를 알고 세월이 지나야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는 말이 맞구나! 다른 사제들은 사부님이 나에게 좋지 않게 대하자 나하고 말을 하려들지 않았는데.]
'千里眼---名作評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협소설 소호강호 3-3 김용 (0) | 2023.08.10 |
---|---|
무협소설 소오강호 3-2 김용 (0) | 2023.08.09 |
무협소설 소오강호 2-5 김용 (0) | 2023.08.07 |
홍루몽 제 24회 가부 식구들이 귀비 원춘을 문병하러 궁중에 가다 (0) | 2023.08.07 |
무협소설 소오강호 2-4 김용 (0) | 2023.08.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