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화산논검 풍류여마 매초풍 4 김용
제13장 동굴 속에 갇힌 소궁주
두 사람은 다시 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들은 길에서 아무런 강호객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낮에는 농담을 해 가면서 길
을 걸었고 밤에는 함께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매초풍은 무시로 변홍의한테 소녀공을 써 쾌락을 한껏 맛보는 한편 진양을 빨아들여 정력이
왕성해졌다. 변홍의는 자신한테서 진기가 하체를 통하여 빠져 나가면서 이루 말 못할 쾌감
을 느꼈는데 그는 원래 남녀가 살을 섞으면 그런 건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매번 정사를 끝내고는 변홍의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런 뒤이면 매초풍은 가만히 몸
을 일으켜 객점에서 빠져 나왔다. 그녀는 외딴집에 뛰어들어 점혈법으로 집 주인들을 제압
한 후 하나 하나 황야로 끌고 나가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을 닦곤 하였다. 그러고 나서 조용
히 객방에 돌아와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변홍의는 지난 밤에 있은 그녀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변홍의는 매초풍과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어 잔꾀를 부렸다. 그는 일부러 먼 길로 돌아 기일
을 연장해 가면서 남녀지간의 낙을 한껏 누리려 했다.
이렇게 한 달 남짓 길을 걷다 보니 매초풍의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의 공력은 대단히 많이 늘
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우람한 사나이의 머리라도 갈고리 손으로 대번에 끌어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최심장을 쓰기만 하면 오장이 휘딱 뒤집힐 정도가 되었다. 다만 살가죽에 거무스레
한 손바닥 자리가 약간 날 따름이었다.
어느 날 그들은 높은 산 밑에 이르게 되었다. 산세가 대단히 가파르고 구름이 산허리에 걸
려 산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산기슭에는 망망하게 수림이 펼쳐져 있었고, 푸른 숲
이 들어선 산기슭 위로 암홍색 나는 산허리의 일각이 약간 드러나 보였다.
변홍의가 한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곳이 오혈궁으로 드나드는 통로인데 본 궁의 제자들은 오혈문이라고 부른답니다."
산기슭에 몇 채의 농호들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그곳에서 묵기로 하였다.
한 농호에 들어서니 농부가 다가와서 변홍의와 문안 인사를 나누었다. 그 농부가 아낙에게
더운물을 떠오게 하였다.
매초풍과 변홍의는 세수를 하고 나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안주 네 접시와 데운 술 한 주전
자가 들어왔다. 매초풍이 주인집 아낙을 바라보니 살결이 말쑥하고 두 손이 가느다란 것이
아무리 보아도 농부의 아낙 같지가 않았다.
변홍의가 매초풍을 끌어다가 자리에 앉힌 뒤 술 한 잔을 따르면서 입을 열었다.
"아씬, 사내도 아니면서 남의 아낙네는 왜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지요?"
매초풍은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웃으면서 안주만 집어먹었다. 변홍의가 다시 입을 열었
다.
"아씬 소문난 철시이시라 벌써 이상한 점을 발견했나 보군요. 이 몇 집의 농호에는 모두 오
혈궁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모두 산밑을 지키면서 이목(耳目) 노릇을 하고 있답니다."
매초풍이 눈치 빠르게 설명해 주는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식사를 하고 나서 두 사람은 한바탕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매초풍은 이날 밤에만은 마공을
연마하러 나가지 않고 그대로 잠을 청했다. 그것은 오혈궁 문하의 사람들을 해치게 되면 시
끄러운 일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행장을 꾸려 가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길을 걸으면서 살펴보니 사방에서 꽃향기가 풍겨 오고 들토끼며 여우들이며 여러 가지 동물
들이 수시로 나타나곤 하였다. 어딜 가나 그 풍경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삼림 속의
공기가 아주 맑고 햇빛이 잘 스며들어 썰렁한 감이 조금도 없었다.
매초풍은 속으로 아주 감탄하면서 이런 곳에서 며칠 묵으며 노니는 것도 인간 선경(仙境)
같은 일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정오쯤 되었을 때 그들 두 사람은 다리쉼을 하면서 요기를 하였다. 매초풍이 입을 열었다.
"오혈궁이 이처럼 은밀한 곳에 있으니까 숱한 사람들이 다 찾아내지 못하는 게로군요."
"찾아가려고 해도 산속에서 길을 잃기가 십상이죠. 내가 길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이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맬 겁니다."
"그렇겠어요. 산에 나무가 서 있는데도 진법(陣法)이라는 게 있지요. 유감스럽게도 난 도화
도에 있을 때 기문술(奇門術)을 열심히 배워 두지 않았지요.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별로 어
려울 것도 없었을 텐데."
매초풍이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만일 사부님께서 이곳에 있다면 아무리 복잡하고 괴상한 진법이라도 다 알아낼 거예요."
변홍의가 깜짝 놀라면서 속궁리를 하였다.
'오혈궁 주위는 몇백 년을 경과해서야 농군 산에 이런 대진(大陣)이 이루어졌는데 그 아무
리 총명한 황약사일지언정 어찌 그 진법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서야 변홍의가 말하던 '오혈문'에
당도하였다. 그것은 한 절간이었다. 녹색 기와 밑에 붉은 서까래를 대었고 붉은 문에 회색
담장을 한 아주 웅위로운 건물이었다.
변홍의와 매초풍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뜨락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 있었다. 인적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아 여러 해 동안 승려들이 거주하지 않은 빈 절 같았다. 변홍의가 절 옆에
있는 방문을 가리켰다.
"이리로 해서 들어갑시다."
그 방에 들어서자 변홍의는 왼쪽에 서 있는 신상(神象)이 틀어 쥔 패검을 절반쯤 잡아 뽑았
다. 그러자 우릉우릉 하는 소리와 함께 방바닥의 석판이 내려앉으면서 시꺼먼 동굴이 나타
났다.
변홍의가 먼저 뛰어들어가서 매초풍을 끌어들였다. 그러자 다시 석판이 제자리에 올라가 붙
는 것이었다. 변홍의가 어디에서 구했는지 횃불 한 자루를 켜들었다. 그제야 모든 것이 똑똑
히 보였는데 동굴 양쪽에는 괴석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처에 또 다른 동굴들이 있었다.
변홍의가 앞에 서서 그중의 한 동굴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몇 굽이를 돌았는데 매번 길이
교차될 때마다 변홍의는 잠깐씩 어떻게 갈 것인가 하고 궁리를 하곤 하였다.
매초풍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오혈궁은 과연 신비한 곳이로구나. 길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마 한평생 헤매어도 찾아가
지 못할 것이다.'
약 밥 한끼 먹을 시간이 지나서야 앞에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조금 더 가니 동굴 안이 넓
어져 마치 대청마루에 선 것 같았다.
드디어 출구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앞에 운무(雲霧)가 가득 차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
다.
변홍의가 걸음을 멈추더니 매초풍에게 말하였다.
"아씬 이곳에서 하룻밤 기다리십시오. 제가 내일 사형 여혈의를 데리고 오지요."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 앞이 오혈궁인가요?"
"그렇죠. 이곳으로는 본 문의 제자들이 자주 드나드니 절대 굴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는 안
돼요. 이곳에는 크고 작은 동굴이 백 개는 될 테니까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괜찮지만 길을
잃지는 마십시오."
변홍의는 재삼 당부하고 나서 동굴 밖으로 나가더니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매초풍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괴석들만 서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양측에
있는 동굴에는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거미줄만 가득 있었다. 아무래도 여러 해 동안 사람
이 다니지 않은 것 같았다.
오로지 출구 양옆의 암벽에만 수많은 횃불들이 걸려 있었는데 오혈궁의 제자들이 이 동굴로
드나들 때 조명용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 오고 굴 밖의 운무는 더욱 짙어졌
다.
굴 안은 이제 손을 펴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매초풍은 횃불 한 자루를 켜들고
천천히 굴 안을 거닐었다. 굴 안은 그녀의 가벼운 발자국 소리만 가득 울려 퍼졌다.
시간이 길어지자 매초풍은 다소 초조해졌다. 어느 한곳을 찾아 조용히 무공을 닦을 생각도
해보았지만 오혈궁의 제자들이 갑자기 들이닥칠까 봐 걱정되어 한곳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할일이 없어 갑갑해진 그녀는 횃불을 들고 가까운 옆 동굴 어귀로 다가갔다. 그녀는
심심함을 달래려고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곧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그녀는 좀더 큰 다른 동굴을 찾아 들어갔다. 횃불의 화염에 거미줄이 타자 크고 작
은 거미들이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고 굼뜬 놈들은 타죽었다.
이 동굴에는 양벽에 곁가지를 친 다른 동굴들이 아주 많았는데 모두 거미줄로 덮여 있었다.
'표기를 해놓을 필요도 없겠구나. 돌아올 때 거미줄이 없는 곳을 따라가기만 하면 길을 잃
지는 않겠어.'
매초풍은 담이 커져서 사방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괴석과 거미말고 그녀가 발견한 것은 아
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들다가 동굴 천장에 불룩 튀어나온 암석에 하마터면 머리를 부딪칠 뻔하였
다. 불빛에 비쳐 천장을 살펴보니 그 암석에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오혈궁의 중요한 곳, 들어가는 자는 죽는다.(吳血官重地, 入者死)>
그 다음에는 오른쪽을 향하여 화살표가 나 있었다. 매초풍은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따
라 오른쪽으로 가 보았으나 오로지 암벽이 보일 따름이었다.
매초풍이 횃불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암벽에는 푸른 이끼들이 한 벌 덮여 있었다. 이처럼
건조한 곳에 이끼가 자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매초풍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손을 들어 그 이끼를 만져 보았다. 과연 위장물로 만들어 놓은 가짜 이끼였다. 그녀는 그것
을 들춰보았다. 그러자 네모난 석문이 보였고 그 위에 주홍빛 글자로 '오혈궁 중지, 입자사
(吳血官重地, 入者死)'라고 씌어 있었다.
매초풍이 비웃는 투로 중얼거렸다.
"오혈궁의 중요한 장소라니……? 어떤 보물들이 있나 한번 들어가 보자."
매초풍이 석문을 힘껏 떠밀자 문이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갑자기 안으로부터 독한 공기가 훅 몰려와 매초풍은 하마터면 구토를 할 뻔하였다. 그녀는
급히 횃불을 휘저어 독한 공기를 몰아 버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안은 평편하게 길
이 나 있었다. 그곳은 자연 동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파고 깎아 낸 흔적이 역력했다.
삼사 장쯤 들어가니 양측에 석감(石龕)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열일
곱째 석감 속에서 매초풍은 앵두만큼 큰 진주 한 개를 주웠다. 그것은 매끌매끌하고 질이
아주 좋은 진주였다.
'이 석감은 아마도 오혈궁에서 보물을 감취 두는 곳일 텐데 보물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 모
양이군. 이 진주는 보물을 옮겨 갈 때 떨구고 간 것이 분명해.'
매초풍은 계속 안으로 들어가다가 양옆에 놓인 석실 두 개와 돌탁자 그리고 돌걸상을 발견
하였다. 그녀는 또 쇠난간이 가로막힌 한 동굴 입구를 발견하였다.
쇠난간은 그리 단단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쇠난간을 구부리고 그 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물건이 그녀의 발 밑으로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길이가 한 자도 넘는 큰 쥐였다. 그 놈은 한동안 달아나더니 돌아서서 흉한 눈길로 매초풍
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매초풍은 화가 나서 방금 주워 들었던 진주를 그 놈에게 던졌다. 그러자 그 쥐는 돌아서서
잽싸게 안으로 도망갔다. 매초풍은 진주를 다시 주워 들고는 그 놈을 바싹 뒤쫓았다. 그 늙
은 쥐는 바삐 도망가다가 제 굴을 찾자 쏙 기어 들어가고 말았다.
매초풍은 화가 나서 쥐 굴속에 진주를 던져 넣으며 소리쳤다.
"네 놈이 어디 다시 나오는가 보자!"
갑자기 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얏?"
매초풍은 깜짝 놀라 등줄기에 식은땀을 쭉 흘렸다. 그녀는 급히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면
서 미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몸을 홱 돌렸다. 그녀는 왼손에 횃불을 쥔 채 오른쪽 장으
로 한 방 먹였다. 먼저 한 방 먹인 다음에 사람인지 귀신인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매초풍의 눈앞에는 사람은 고사하고 귀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찾고 있는데 앞에서 또 그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말해. 넌 누구냐?"
매초풍이 얼른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한 장 남짓한 거리에 있는 맞은편 석벽 아래
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봉두난발이었고 온 얼굴에 땟자국이 가득하였으며 죽
은 사람처럼 낯색이 창백하였다. 두 눈은 아주 크기는 하였지만 정기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불빛에 눈이 부신지 눈을 가늘게 뜨고 쉰 듯한 목소리로 다그쳐 물었다.
"넌 누구냐? 대답하지 않다가는 용서 없을 줄 알아라!"
그 사람이 손에 무슨 암기를 들고 뿌리려 들었다.
매초풍은 경계 태세를 갖춘 뒤 대답했다.
"난 매초풍이라 부르고 강호에서는 날 철시라고 부른다."
"철시?"
그 사람은 한 번 되뇌이더니 머리를 가로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강호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걸. 휴, 여러 해가 지났으니 그럴 법도 한 일이
지. 철시, 임잔 그래 오혈궁 궁주 묘상을 만나 본 적 있나?"
"본 적 있지요."
"그의 나이가 얼마라던가?"
"아마 쉰 살쯤 되었겠죠."
매초풍은 변홍의한테서 묘상의 나이를 알았던 것이다. 그 말을 듣더니 그 사람은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놈이 날 이곳에 십팔 년이나 가두었구나. 오 그렇지, 그 놈이 날 아홉 번 보러 왔
었지."
매초풍이 매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왜 당신을 가두었나요? 바깥 문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도망가지 못하는 거지
요?"
그 사람이 코방귀를 뀌더니 천천히 일어나는데 떨렁떨렁하는 쇳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
사람의 허리에는 세 치 두께는 됨직한 쇠고리가 채워져 있었고 그 쇠고리에는 다섯 개의 굵
다란 쇠사슬이 달려 있었다. 쇠사슬의 한쪽은 석벽에 있는 다섯 개의 동굴에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그 사람은 매초풍을 향하여 몇 발자국 걸어오다가 쇠사슬 때문에 더 오지 못하고
멈추었다.
"묘상이란 놈은 심보가 독사보다도 더 지독한 놈이어서 한 사람을 가두어 놓으면 날개가 돋
쳤다고 해도 도망가지 못해."
매초풍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십팔 년이나 갇혀 있었다는데 그동안에 쇠사슬을 땅바닥에 문질렀다면 벌써 끊어져
버렸을 것이고 이런 고생도 안 했을 게 아닌가요?"
그 사람이 괴상한 소리로 웃어대더니 허리를 굽혀 끊어진 쇠사슬 서너 오리를 집어들어 보
여주었다.
"아가씨, 임잔 날 바보로 아나? 난 이곳에 갇힌 날부터 잠자는 시간을 내놓고는 하루도 멈
추지 않고 이 쇠사슬을 갈았었네. 하지만 그 묘상이란 놈은 시간가지 미리 계산해 두었던지
내가 마지막 쇠사슬을 끊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날 보러 와서 다시 새 쇠사슬로 갈아채우곤
했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쇠사슬을 갈아 끊어 버렸는지 잘 모를 거네."
그 사람은 손에 들고 있던 쇠사슬 토막을 획 던져 버렸다.
"십팔 년 동안에 그 놈이 당신을 아홉 번 찾아왔다니까 이 년마다 한 번씩 왔겠군요. 그 이
년 동안에……."
"묘상이란 놈이 아주 계산을 정확하게 하더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 쇠사슬은 원래 병
장기를 만들 쇠붙이라 아주 굳은 물건이라네. 이런 물건으로 날 대처한 것은 그 놈이 나의
공력으로는 이태 사이에 이 다섯 줄의 쇠사슬을 다 끊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그자는 정말 지독한 놈이군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놈이지. 날 잡았으면 아예 시원히 죽여 버릴 일이지 빛도 들지 않는
동굴 속에 가두고 이처럼 고독에 시달리게 한단 말이야. 이 십팔 년 동안에 그 놈은 아홉
번밖에 오지 않았지만 나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네. 그래 나는 암벽에 대고 매일 혼잣말
로 중얼거리거나 미친 듯이 웃곤 하였네. 아가씨는 십팔 년 동안에 내게 말을 건 첫번째 사
람일세. 고맙네!"
그 사람이 손을 잡으려고 두 손을 내밀었다. 그 사람의 두 손은 닭의 발처럼 어지러웠고 손
톱이 반 자나 되게 자라 있었다.
매초풍은 진저리를 치며 뒷걸음질하여 암벽에 등을 기댔다.
그 사람은 두 눈을 감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아가씨, 내가 임자를 만지게 해주게나."
매초풍이 깜짝 놀라 횃불을 내밀며 소리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그러잖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그 사람이 흠칫 물러서며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뜨거운가? 불이지? 어서…… 어서 치우게. 견디지 못하겠네."
매초풍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불꽃이 살에 닿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두려워하는
걸 보면 그가 십팔 년 동안이나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있다 보니 광선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해진 것이라 여겨졌다. 그 사람이 낯을 돌리며 두 눈까지 꽉 감는 것을 보면 불빛을 눈
으로 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게 틀림없었다.
매초풍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긴장이 약간 풀리면서 그녀는 그 사람이 쇠사슬에 매여 있어
처음부터 자기를 붙잡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자 은근히 부끄러웠다.
"아가씨, 죽지 않으려거든 어서 고분고분 그 횃불을 던져 버려!"
그렇게 소리치며 그 사람은 돌 두 개를 집어 던졌다. 그것은 매초풍의 양쪽 암벽에 깊숙이
날아와 박혔다. 매초풍은 깜짝 놀라 진기를 운행시키면서 뜻밖의 상황에 대처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돌멩이를 더는 던지지 않았다.
"아가씨, 난 임자를 볼 수는 없지만 능히 사경에 몰아넣을 수 있네. 그러니 내 말을 들어야
해."
매초풍은 눈알을 크게 굴리며 두려워하는 척 꾸며대었다.
"여보세요. 호한 나으리, 날…… 해치지 말아요!"
"호한이라구? 그래 내가 사내인가 여인인가 똑똑히 보라구."
"당신…… 당신은 사내가 아닌가요?"
"나도 임자와 마찬가지로 여자야. 나도 젊었을 땐 이 오혈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어.
그땐 묘상이란 미친 놈이 개처럼 종일토록 나를 감싸고 돌았었지. 하지만 그 놈은 일단 자
기 손 안에 날 넣게 되자……."
그 사람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원래 당신은 묘상의 부인이었군요. 그런데 그 놈이 왜 이리도 당신한테 무정한가요?"
"그때 묘상은 아직 궁주가 아니었고 무예도 나보다 못했었네. 그래서 그 놈이 날 무척 좋아
하였다네. 난 그자의 성화에 못 이겨 그 놈한테 하가(下嫁) 하고 말았지."
매초풍이 속으로 비웃었다.
'하가라니? 공주도 아닌 주제에 하가가 뭐야?'
그 사람은 마치 매초풍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이 말을 이었다.
"나는 전임 오혈궁 궁주 도천룡(屠天龍)의 외동딸 도소정(屠素貞)이고, 묘상은 오혈궁의 사
형이었을 따름이야."
도소정은 마치 오랜 원한을 털어놓듯 그녀가 갇히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오혈궁 궁주의 외동딸 도소정이 묘상에게 시집간 지 석 달이 채 못 되어 궁주인 도천룡은
병환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궁주는 그 지위를 절대 남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오
혈궁의 규칙에 따르면 무공이 가장 높은 제자가 궁주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그
당시 도소정은 무공을 놓고 말해도 궁에서 첫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궁주는 마땅
히 그녀의 차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묘상은 자기가 궁주 노릇을 하고 싶어 그녀더러 도와달
라고 사정을 했고 그녀는 물론 그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도소정이 궁주로 취임하기 전날 뜻밖의 일이 생겼다.
아침에 도소정은 대전(大典)에 쓸 물품들을 준비하라고 분부하고 있는데 한 제자가 와서 어
떤 여인이 뛰어들어 왔다고 보고를 올렸다. 오혈궁은 아주 신비한 곳이어서 오혈궁의 제자
를 내놓고는 감히 찾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이상하다고 여긴 도소정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 보니 스무 살도 안 된 노랑머리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눈이 서글서글하고 눈썹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살결이 백옥 같은 절
제 미인이었다. 도소정도 오혈궁의 여자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그 여자애
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주빛 나는 옷을 입고 있는 그 여자애는 수심이 비낀 얼굴
이 아니었으면 하늘의 선녀가 내려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여자는 적수공권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오혈궁의 제자를 여섯이나 때려눕혔다. 여자
애는 힘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혈궁의 한 제자가 그 여자애에게 한 장을 얻어맞고 두
장도 넘는 곳으로 날아갈 정도였다. 그 여자의 힘에 내심 놀란 도소정은 세 사형 가운데서
가장 나이 어린 노로의에게 맞서 싸우라고 시켰다.
노로의는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오혈궁의 제자들 가운데서 무예가 열 번째 안에 들었다. 그
래서 노로의가 나이가 어린 그 여자애 정도는 거뜬히 막아내리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생
각 외로 노로의는 그 여자애와 거푸 열 합도 채 싸우지 못했는데 벌써 맥을 못 추었고 열
합쯤 더 지나자 여자애의 '군리퇴(裙里腿)'라는 초수에 걸려 나뒹굴고 말았다. 그제야 도소
정과 오혈궁의 제자들은 대단한 적수가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도소정이 그 여자애와 맞붙었다. 여자애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았고 오혈장과 오
혈도의 무공도 괜찮았던 도소정은 그 어떤 일류가는 고수들 못지않다고 스스로 자신하고 있
었다.
여자애는 도소정의 무공이 고강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병장기를 번쩍거리면서 달려들었다.
그 여자애의 병장기는 두 자 남짓한 길이를 가진 자줏빛의 반투명한 몽둥이로 금강석처럼
굳은 자정신침(紫晶神針)이라는 병장기였다. 여자애는 그 자정신침을 마구 휘둘렀는데 얼핏
보면 무질서하게 휘두르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검술이나 도술처럼 초수가 있었고 무시로 상
대의 혈도를 찔러댔다. 오혈궁의 무공도 아주 괴이한 편인데 그 여자애의 무공은 괴이하면
서도 아주 복잡했다. 그 여자애가 쓰는 초수는 갈수록 괴이했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겸한 공
격의 기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소정은 오혈궁의 궁주가 전문으로 쓰는 오혈도를 빼들고 온갖 초수와 절기를 다 써 가지
고서야 겨우 그 여자애와 비길 수 있었다.
여자애는 오랫동안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자 도소정에게 소리쳐 물었다.
"당신은 누구길래 함부로 날 막는 거요?"
도소정 역시 화가 치밀었지만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봐, 임잔 원래 벙어리가 아니었구만. 나는 임자가 벙어리인줄 알고 잡아다가 기생집에 팔
아넘기려 했네."
그 여자애는 도소정의 말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좋아, 내가 먼저 네 년을 죽인 다음 묘상까지 죽여 버릴테다!"
도소정은 그 여자애의 입에서 묘상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랐다.
"넌 왜 그 사람을 죽이려고 그러느냐?"
그러자 여자애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하였다.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난 그 박정한 인간을 죽여 버릴테에요!"
도소정은 그 여자애의 말속에 무슨 까닭 모를 사연이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는 손을 멈추었
다.
"묘상은 내 남편이야. 할말이 있으면 툭 털어넣고 시원히 얘기해 봐."
그러자 여자애의 낯빛이 확 달라지며 이를 악무는 것이었다.
"하긴 잘하는구나. 묘상 그 놈이 감히 장가를 들다니? 내 그놈을 육장을 만들어 버릴테다!"
"여봐, 아가씨, 왜 그 사람을 그렇게 미워하나? 그가 장가를 가든말든 임자가 무슨 상관이
지?"
그러자 여자애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자는 나한테 청혼하면서 감언이설을 다 늘어놓고 또 우리 가문의 무공까지 배웠는데 무
엇 때문에 당신한테 장가든단 말이오? 그 놈은 날 속였어요!"
순간 도소정은 벼락을 맞은 듯이 정신이 아찔했고 뒤미처 화가 버럭 치밀어 올랐다.
"아씨, 그렇다면 임자가 손쓸 것도 없이 내가 죽여 버리겠네."
그때 묘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묘상은 그 여자애를 보더니 낯색이 새파래져 가지고 안절부
절못했다.
"첩비, 당신이구만……. 어떻게 여길 다 찾아왔소?"
여자애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무조건 자정신침으로 묘상을 들이찔렀다. 급한 김에 도소정이
오혈도로 그걸 막으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난 오혈궁 궁주 도소정이다. 오혈궁은 무림의 금지 구역으로서 외인이 이곳에서 방종하게
구는 걸 허락지 않는다!"
여자애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묘상이 앞질러 도소정에게 말하였다.
"부인, 저 사람은 엽첩비(葉牒飛)라고 부르는데 노마(老魔) 엽삼살(葉三殺)의 딸로서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노마 엽삼살은 전문적인 사공(邪功)을 닦는 흑도의 인물로서 오 년 전에 이미 무림의 군웅
들에 의해 중원에서 쫓겨난 자였다. 그런데 그 사람의 딸이 그곳에 다시 나타났으니 모두들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도소정은 남편이 그녀가 사연도 말하기 전에 엽첩비와 아무런 관계가 없노라고 딱 잡아떼는
건 뒤가 켕겨서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도리에 어긋나는 건 도저히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
미를 가진 도소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묘상, 난 당신이 저 여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왜 하필 그 말부터 하는
거예요?"
그러자 묘상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엽첩비는 얼굴이 온통 눈물 범벅이 된 채 울부짖었다.
"묘상아, 네 놈은 지독하구나. 난 뱃속에 너의 어린애까지 임신한 터인데 네가…… 감히 날
배반한단 말이냐!"
그 여자애는 몸을 훌쩍 날려 도소정의 머리 위를 넘어서며 자정신침으로 묘상의 정수리를
갈겼다. 묘상이 황급히 도소정의 뒤로 몸을 숨기며 애걸했다.
"부인, 저 년이 미쳤군요. 어서 쫓아버리시오!"
웬일인지 도소정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져 그 여자가 임신까지 했다는 말을 들었
는데도 분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서 도소정은 말없이 제자들과 함께 엽
첩비를 오혈궁에서 몰아냈다. 처음에는 엽첩비가 애를 낳지 못하도록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
데 그녀의 무공이 실로 괴상하고 초수가 많아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오혈궁의
제자가 둘이나 엽첩비에게 맞아죽었다. 그들은 겨우 그녀를 산에서 쫓아냈다.
엽첩비를 물리친 도소정은 묘상에 대한 심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다. 그녀는 묘상을 일단
가두어 놓고 곰곰이 궁리를 했다.
하지만 묘상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난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내
색을 하지 않고 도소정을 안심시킨 다음 틈을 보아 없애버리기로 작정했다.
묘상은 자기가 미안한 일을 하였다면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차갑게 굳어 버린 도소정의 마음을 다시 돌려 세울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 묘상을 살려 두
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묘상은 다음날이 그녀가 궁주 자리를 물려받는 기쁜 날이니 자
기는 그녀가 궁주가 된 다음에 죽을 생각이며 더욱이 그 스스로 목숨을 끊겠노라고 말하였
다.
그러자 노로의 등 오혈궁의 제자들도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권고하였다. 도
소정 역시 기쁜 날에 피를 보기가 싫어서 잠시 그를 살려 두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묘상이 갑자기 도소정의 침실로 뛰어들었다.
"널 이미 가두었는데 누가 널 내놓았느냐?"
도소정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러자 묘상은 음흉한 웃음을 띄우면서 대답하였다.
"임잔 알 필요가 없어."
도소정은 대로하여 일어나 그를 제압하려 했지만 웬일인지 조금도 맥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녀에게로 다가온 묘상은 음탕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오늘 저녁 임자가 마신 술에 마약을 넣었으니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도소정은 아무리 몸부림을 치며 반항하려 했으나 그건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묘상
에게 속수무책으로 한바탕 짓밟히고 말았다. 그녀는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기도 하고 화
가 나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묘상, 이 놈아. 네 놈이 감히 나의 제자들과 짜고 나를 해치다니……. 넌 기필코 제 명에
죽지 못하게 될 거다!"
묘상은 그녀의 욕설에 냉소하더니 일어나서 그녀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
혈을 찔러 놓았다. 그런 다음 도소정을 이곳에 업어다 놓았던 것이다. 도소정은 그곳에 감추
어 두었던 오혈궁의 보물들이 이미 그림자도 없이 몽땅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믿었
던 노로의가 그와 한패가 되어 쇠사슬과 쇠고리를 준비한 것도 알게 되었다. 묘상의 무리들
이 그녀를 쇠사슬에 얽매어 놓자 도소정은 그만 너무 화가 나서 까무라치고 말았다.
도소정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동굴 안에서는 횃불이 타는 소리만 들
릴 뿐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도소정이 갑자기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면서 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렸다.
졸졸졸―.
미약한 물소리가 들려 왔다. 실날 같은 물줄기가 천장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입
을 벌리고 그 물을 받아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줄기는 이내 그치고 말았다.
매초풍은 이 늙은 여인의 귀가 그처럼 밝은 데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소정은 감
칠 맛 나게 목을 축이고 나서 흐뭇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거 물맛 참 좋구나!"
"도 궁주, 당신은 매일 이렇게 물을 먹나요?"
"낮인지 밤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정한 시간이 되면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러면
얼른 물을 마셔야 하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 십팔 년 사이에 아마 목이 말라 죽었을 거
네."
그때 갑자기 살찐 쥐 한 마리가 도소정의 발 밑으로 기어왔다. 매초풍은 그녀의 발 밑에 피
묻은 자그마한 고깃덩이 한 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쥐가 고깃덩어리를 덥석 물었
다.
도소정이 재빠르게 손으로 그 쥐를 붙잡자 늙은 쥐는 찍찍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냉소를 머
금은 도소정이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을 벌리고 늙은 쥐의 대가리를 물어 끊어서는 아
작아작 씹어 삼키는 것이었다.
순간 매초풍은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구토를 하고 말았다. 매초풍이 토하자 그 냄새를 맡고
십여 마리의 쥐가 모여들었다. 그녀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독룡은편을 꺼내 그 쥐들을 단박
에 때려잡았다.
도소정은 늙은 쥐 한 마리를 먹고 나서 또 매초풍이 때려잡은 쥐들을 한데 모아 놓고는 히
히거리고 웃었다.
"거 참 묘한 방법인걸. 난 그같은 방법은 생각도 못했었네. 이젠 오랫동안 굶지 않게 됐군."
도소정은 이렇게 말하더니 연거푸 쥐를 두 마리나 삼켜 버렸다.
매초풍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긴 하였으나 쥐를 뜯어먹는 도소정을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
어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당……당신은 그래 쥐…… 쥐를 잡아먹는단 말이에요?"
"묘상은 날 기갈에 시달려 죽게 하려 하지만 난 죽지 않았네. 그 놈이 먹을 걸 보내 주지
않으니 난 쥐를 잡아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네. 그 놈이 매번 쇠사슬을 바꾸러 올 때마다 내
가 살아있는 걸 발견하고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란 기색을 지어 나로 하여금 너털웃음
을 웃게 하곤 했지. 지금까지도 그 놈은 내가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를 모르고 있네. 흥, 내
가 살아 있는 한 그 놈의 궁주 자리는 안전하지가 못하지!"
"유감스럽게도 그 놈이 이젠 오혈궁의 궁주가 되었고 당신은 이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군요.
당신이 그 놈을 죽이겠다고 하지만 결국 죽게 될 사람은 당신인걸요."
도소정은 매초풍의 말이 귀에 거슬리는지 음침한 낯빛으로 야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매초풍
이 조금 미안한 감을 느끼며 말문을 돌렸다.
"그 뒤는 어떻게 됐나요?"
"그 뒤로 그자가 나를 아홉 번 찾아왔고 지금 이렇게 임자를 만났을 따름이야. 이게 나의
지난날의 일이야."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매초풍은 횃불의 기름이 거의 다 되어가는
것을 보자 급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불이 꺼지기만 하면 이 동굴 속에 갇혀 버리기 십상이
기 때문이었다.
"여봐, 아가씨, 어딜 가는 거야? 이리로 돌아와!"
도소정은 큰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매초풍은 이미 두 장 남짓
도망하였고 민첩하게 몸을 피해 가며 쇠난간을 빠져 나왔다. 돌 몇 개가 쇠난간에 부딪쳐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매초풍은 도소정이 미친 듯이 부르짖든 말든 오던 길을 따라 제자리를 향해 갔다. 몇 개의
동굴을 지났지만 도소정의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 왔다. 그것을 통하여 매초풍은 도소정의
내공이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매초풍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 섰다. 도소정의 목소리가 아주 가느다랗게 들려 왔다.
"아가씨……, 임자가…… 만일 날…… 구해 준다면 좋은 점이 아주 많아……."
매초풍은 그 말에 마음이 동하였다.
그녀는 동굴 어귀에 와서 새 횃불 한 자루를 켜들고 또 몇 자루를 예비로 가지고 오혈궁의
금지 구역으로 다시 도소정을 찾아갔다.
다시 돌아온 매초풍을 보자 도소정은 생기를 띤 얼굴로 반겨주었다. 그녀는 이미 입술이 새
빨갛지 못하고 이빨도 희지 못했으며, 두 눈에 정기도 없었지만 젊었을 땐 확실히 미인이었
으리라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가씨, 임잔 이 고독한 여인을 버리지 않았어. 임잔 정말 맘씨가 좋아. 임……임자 이름이
뭐지? ……오, 임자가 이미 말했었지, 철시 매초풍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 악독한 별호가
임자한테 어울리지 않아."
"도소정, 당신은 나가서 오혈궁 궁주의 보좌를 되찾으려는 거지요?"
"그래 맞았어. 오혈궁의 궁주는 원래 나야. 매초풍, 임자가 날 풀어 주고 내가 다시 궁주가
되는 걸 도와만 준다면 난 임자의 그 어떤 요구라도 들어줄테야."
"오혈장과 오혈도의 초수가 아주 무시무시하던데 난 그걸 이기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도소정의 낯빛이 확 달라졌다.
"난 오혈장과 오혈도법을 전수해 줄 수는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걸 이기는 방법은 없네."
그러자 매초풍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듣자니 초혈궁 무공을 이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지만 대대로 그것은 궁주만이 알고 있다
고 하더군요. 묘상은 권력을 찬탈한 궁주이기 때문에 그 방법을 모르고 있는 거지요. 하지만
당신은 전임 궁주의 딸이기 때문에 분명 당신은 그 방법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게 날 풀어 주는 조건인가? 나의 아버지는 확실히 오혈궁 무공을 이기는 방법을 나한테
전수해 주었었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내가 궁주가 되기를 희망하였던 까닭이네. 좋아, 내가
임자의 요구대로 하지. 그런데 먼저 날 풀어 주어야겠네."
"당신은 심장이 돌보다도 더 굳은 여자예요. 만일 내가 당신을 풀어 놓으면 당신은 날 먼저
죽여 버릴텐데 그렇게 되면 내 발등을 찍는 격 아니겠어요?"
"하지만 나도 임잘 믿을 수 없네. 만일 내가 본 문의 무공을 이기는 방법을 전수해 준 다음
자네가 그대로 가 버리면 나도 공연한 헛수고가 아닌가!"
"도소정, 당신은 좀 똑똑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 당신이 나한테 청을 드는 건가요, 아니면
내가 당신한테 청을 드는 건가요?"
매초풍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되돌아 나오려 했다.
"잠깐만!"
도소정이 급하게 부르자 매초풍은 멈추어 선 채 돌아보지는 않았다.
"임자가 그렇게 맵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네. 내가 임자의 요구대로 대답해 주겠네."
그 말을 들은 매초풍은 속으로는 매우 기뻤으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려 세
웠다.
"어서 말씀하세요."
"하지만 나도 타산이 있네. 내가 먼저 자네한테 오혈궁 장법을 이기는 법을 전수하면 자네
가 날 풀어 주어야 하네. 그러고 나서 다시 오혈궁 도법을 이기는 법을 전수해 주도록 하
지."
매초풍이 속궁리를 해보고 나서 대답했다.
"공평하고 합리적인 생각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다른 수작을 부려서는 안 돼요."
도소정은 하는 수 없이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를 하나하나 자세히 전수하여 주었다. 매초
풍은 원래 총명한 여인이어서 두어 번 되풀이해 주자 그것을 완전히 기억하였다.
"매초풍, 이젠 자네의 낙언을 실천해야지."
"그런데 당신을 어떻게 풀어 주지요?"
"임자가 갖고 있는 단도나 단검을 나한테 주게. 그러면 나의 공력으로 얼마든지 이 다섯 개
의 쇠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네."
매초풍은 머리를 끄덕이며 허리춤을 만지는 척하다가 당황해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어떡하나? 내 단도가 없어졌네."
그러다가 도소정을 보며 말했다.
"이러면 어때요? 당신이 나한테 오혈도법을 이기는 초수를 마저 전수해 주세요. 그러면 내
가 단도를 찾아와서 당신을 구해 드리겠어요."
도소정은 매초풍의 잔꾀를 눈치채고 노발대발하였다.
"매초풍, 그래 나를 놀릴 셈이냐? 흥, 날 풀어 주지 않고서는 오혈도를 이기는 초수를 배울
생각을 마라!"
매초풍은 자기의 잔꾀가 드러난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도소정과 함께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
단했다. 그리하여 도소정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후닥닥 도망치면서 그녀를 비웃었다.
"도 궁주, 내가 단도를 찾아 가지고 당신을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도소정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으며 연거푸 돌을 집어 던졌으나 매초풍은 벌써 옆에 난 동
굴 속으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매초풍이 동굴 어귀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도소정한테서 오혈
장을 이기는 초수를 배운 것이 매우 기뻤다. 그녀는 몇 번이고 거듭 연습해 보면서 잘 기억
해 둔 뒤 암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새벽 안개가 동굴 속으로 스며들 때 매초풍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동굴 어귀 밖으로부
터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듣고 급히 암석 뒤에 숨었다.
두 사람이 굴속으로 들어왔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들뜬 목소리로 불렀다.
"아씨, 아씨! 어서 나오세요."
변홍의의 목소리였다. 매초풍이 암석 뒤에서 나가 보니 변홍의와 여혈의가 서 있었다.
"여 공자, 과연 당신이 오셨군요. 전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여혈의는 붉은 비단으로 지은 새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차가운 눈길로 매초풍을 쏘아보며
물었다.
"철시, 이 여 모를 찾아와 뭘 하려우?"
"왜요, 일없이 찾아와선 안 되나요? 만일 제가 당신을 그리고 있었다면 안 기쁘신가요?"
"철시, 임잔 똑똑히 알아두어야 해. 본 궁의 제자가 아니고서는 제멋대로 오혈궁에 들어오면
죽어야 하는 거야! 흥, 임잔 이제 살아서 돌아갈 희망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변홍의가 매초풍의 곁에 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씨, 절대 이 여 사형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분은 말하면 말한 대로 하는 성미랍
니다."
매초풍이 깔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알고 있어요. 여혈의, 당신은 말하면 말한 대로 하는 사나이인데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낙
언한 일이 있지 않아요. 당신이 날 어떻게 하는가 두고 보겠어요."
변홍의가 급히 여혈의의 곁으로 가 변명을 하였다.
"사형, 저 아씨는 농담을 좋아하니까 달리 생각지 마시우."
그리곤 변홍의는 여혈의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여혈의가 매초풍은 노려보더니 갑자기 칼을 뽑아 들고 매초풍의 가슴을 겨누면서 소리 질렀
다.
"매초풍, 내가 낙언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로 핍박할 셈이냐!"
매초풍은 태연자약한 자태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희고 긴 중지로 칼끝을 가
볍게 밀어내고는 변홍의한테 말했다.
"변 공자, 밖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세요."
변흥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굴 밖으로 나갔다.
"여혈의, 난 당신한테 한 가지 일을 알려 드리려 해요. 해검계의 무예시합 때 당신들의 묘
궁주는 안전하게 도망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뜻밖의 일이 생겼던 거예요. 눈에 보이는 창은
쉽게 피할 수 있지만 암전은 막아내기 힘들거든요. 가장 긴요한 대목에 유엽표창 한 대가
날아와 하마터면 묘 궁주의 생명이 위험할 뻔했어요."
"그 당시 나는 그 장소에 없었소. 그 뒤 사제들이 그 일을 얘기하더군. 그래서 지금까지 속
으로 잔뜩 벼르고 있는 판이오. 만일 내가 그 장소에 있었더라면 궁주께서는 절대 독약을
바른 표창에 맞지 않았을 거요. 그런데 임잔 이 일을 왜 끄집어내는 거지?"
매초풍이 품속에서 무슨 물건을 꺼내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었다.
"여 공자,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알 만한가요?"
그것을 본 여혈의는 금세 낯색이 변하였다.
"이 유엽표창은 궁주님을 맞힌 것과 꼭 같은 것이로구만. 그래 암전을 쏜 자가 임자란 말인
가?"
여혈의가 그 표창을 빼앗으려 하자 매초풍이 냉큼 물러나면서 말하였다.
"여 공자, 급하게 서두를 것 뭐 있어요? 그 표창은 해검계의 맞은편 기슭의 난석 속에서 날
아왔고 그때 사람들은 격전을 치르느라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지요. 오혈궁의 제자들은 전진
파들이거나 개방 사람들이 매목한 줄로 알고 있지만 전진파와 개방 사람들은 전혀 내막을
모른단 말이에요. 여 공자, 이 유엽표창의 임자가 누군지 알고 있나요?"
여혈의가 눈을 희번득거리면서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 그걸 알겠나?"
"남이 모르는 줄 알고 수염을 쓰다듬을 작정이군요. 표창을 던진 자는 귀신도 모르는 줄 알
고 있을 테지만 그때 또 한 사람이 난석 속에 숨어서 그것을 똑똑히 보았단 말이에요."
여혈의가 칼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도대체…… 그가 누구요? 표창을 던지는 걸 본 사람이 누군가 말이야?"
"여 공자, 긴장할 게 뭐 있어요? 묘상을 해친 사람이 당신은 아닐 텐데요."
여혈의가 슬그머니 이마의 땀을 훔쳤다. 매초풍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오므리고 웃었
다. 그녀는 웃음 끝에 말을 이었다.
"표창을 던진 사람도 너무 긴장했던 탓으로 자기 왼쪽 켠에 있는 괴석 뒤에 한 여인이 엎드
려 있는 것을 보지 못했지요."
"그것도 여자란 말인가?"
매초풍이 웃는 얼굴로 자기 가슴을 쳐보이며 말하였다.
"그 여인이 바로 이 매초풍이에요."
여혈의는 하마터면 놀라서 훌쩍 뛸 뻔하였다. 그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심하게 도리질을 해
댔다.
"난 믿어지지 않아! 그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임잔 나를 속이고 있어!"
"당신은 원래 표창 두 개를 던지려 했어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두 번째 표창을 던지려 했
을 때는 손이 너무 떨려서 그만 난석 사이에 떨어뜨리고 말았지요. 그러고서는 자신이 들키
지 않은 줄 알고 급급히 도망쳤어요. 그러기에 내가 이 유엽표창을 주울 수 있었던 거예요."
여혈의는 놀란 눈길로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점점 커지는 여혈의는 마치 낮도깨비
같았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생각에도 확실히 표창 두 대를 던지려 했던 것 같소. 그런데 내가 너무도 긴장했던 탓
에 두 번째 표창을 던지지 못했던 거요."
"묘상은 내상을 입은데다가 당신의 독이 발린 표창까지 맞았으니 활사인(活死人)과 마찬가
지의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목적을 달성한 셈이지요."
"하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았고 게다가 능히 호통을 칠 수 있소. 난 아직도 그 사람 앞에서
개처럼 비굴하게 굴종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오. 더군다나 화가 나는 일은 노로의나 초천
의마저 나한테 선배로 자처하는 것이오!"
"만일 내가 추측하는 게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당신은 묘상을 암살하고 스스로 궁주 노릇
을 하려 한 것일테죠."
여혈의가 얼떠름한 기색으로 서 있더니 갑자기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막 마치 꿈속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냉혹한 낯빛이 되어 매초풍을 쏘아보더니 불쑥 칼을 들
고 달려들었다.
"네 년이 모든 걸 알고 있으니 내 어찌 네 년을 살려 둘쏘냐?"
개가 급하면 담장을 뛰어넘는다고 여혈의의 이런 꼴을 미리 짐작했던 매초풍은 독룡은편을
뽑아 들고 칼을 막았다. 채찍 끝이 여질의의 오른쪽 눈으로 날아들자 여혈의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매초풍도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매초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혈의, 내가 당신을 이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당신도 오십 합 안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
할 거예요. 내가 소리를 치기만 하면 변흥의가 노로의와 초천의를 데리고 올 거예요!"
"그럼 내가 먼저 변홍의를 죽여 버리고 나서 네 년을 대처할 테다!"
그러나 매초풍이 여혈의보다 앞질러 동굴 어귀로 달려가 그를 가로막았다.
"운명이 점지하는 대로 따르란 말이에요. 여혈의, 소요관에서 당신이 내가 조종하는 대로 말
을 들었다면 이 오혈궁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를 이겨낼 수는 없을 거예요."
여혈의가 두 눈을 부릅떴으나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임자가 변홍의더러 이 여 모를 데려오게 한 건 꼭 나의 내막만을 파헤치기 위한 건 아닐
거야. 무슨 요구 조건인지 어디 말해 봐."
"조건은 단 한 가지에요. 무슨 수를 써서든지 날 오혈궁의 제자로 받아 주세요."
순간 여혈의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다시 한 번 말해 봐!"
매초풍이 방금 한 말을 되풀이하였다.
"매초풍, 임잔 그처럼 큰 명성을 갖고 있는데 비굴하게 오혈궁의 제자가 되련다구? 임
잔……."
"난 동시와 싸우고 나서 헤어졌어요. 이젠 강호에 더는 흑풍쌍살이 없게 되었어요. 이 일은
즉시 온 강호에 널리 퍼질 거예요. 당신 말씀이 맞아요. 이 철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
을 거예요. 하지만 난 신공을 닦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어요. 이제 난 고독한
몸이 되었으니 온 세상을 돌아다닐 때 오혈궁의 보호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여혈의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이기는 하였으나 반신반의 하였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 철시라는 년은 궤계가 많은 여인이라 오혈궁에 받아들이면 뒤에 무
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그럭저럭 놔두고 일후 기회를 보아 죽여 버려 후
환을 없애도록 해야지.'
"좋아, 이 여 모가 최선을 다해 보지."
"최선을 다하는 문제가 아니라 꼭 되게 해야 해요. 내가 오혈궁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면 당
신도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게 될 거에요."
'이 년은 참 지독한 여인이로구나!'
여혈의는 다시금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매초풍이 변홍의를 불러들인 다음 여혈의에게 말하였다.
"여 공자, 우린 이곳에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어요. 조금이라도 허튼 동정이 있으면 내가
더욱 무서운 수단으로 당신을 대처할 거예요. 당신이 담력이 있다면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요."
여혈의가 약속대로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굴을 빠져 나갔다. 평소에 오만하기로 소문난 사형
여혈의가 매초풍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을 보고 변흥의는 속으로 참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혈의가 동굴 밖의 운무 속으로 사라지자 변홍의는 매초풍의 곁에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고
재미를 보려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매몰차게 변홍의를
와락 떼밀었다. 변홍의는 그녀를 몹시 사랑하고 있지만 한편 두려운 마음도 있어 더 이상
어쩌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동굴 속에서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럭저럭 점심때가 되어 두 사람은 몹시
배가 고팠다. 매초풍은 아침식사도 못한데다가 어젯밤에 한바탕 토하기까지 했던지라 더더
욱 속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변홍의한테 요기할 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짜증을
부렸다.
변홍의는 여러모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혈궁의 제자들은 바깥 세상에 나가서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마음대로 먹고 마시지만 궁내에서는 규율이 엄격해서 식사시간이 되기 전에는 누
구도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궁주님이나 세 사형의 허락없이는 아예
주방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오후쯤 되었을 때야 여혈의가 돌아왔다.
"매초풍, 날 따라와!"
매초풍은 매우 기뻐하며 변홍의와 함께 동굴에서 나왔다.
밖은 안개가 자욱하여 서너 발자국 밖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혈의가 앞에서 길
을 안내하였다. 변흥의는 매초풍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이리저리 돌고 걷다가는 멈추어 서
기를 몇 번 하다가 갑자기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층계는 때로는 비탈을 지나고 때로는
수림을 뚫기도 하고 때로는 시내를 지나기도 했다.
드디어 큰 돌을 쌓아 만든 방대(方坮) 앞에 이르렀다. 매초풍이 계속 앞으로 걸어가려 하자
변홍의가 얼른 붙잡았다.
"조심해요. 그 아랜 십칠팔 장도 넘는 벼랑입니다!"
매초풍은 그제야 이 방대 밖은 운무가 피어 오르고 있을 따름이지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
다. 그녀는 큰일날 뻔했다고 생각하며 변홍의에게 교태 어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변홍의가
황홀하여 가만히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여혈의가 한옆에 다섯 사람이 둘러서야 안을 수 있을 만큼 큰 측백나무 위에 매어 있는 밧
줄을 풀었다. 살펴보니 길이와 너비가 일곱 자나 됨 직한 큰 나무상자가 아래위로 오르내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상자는 방대의 변두리에 매달려 있었다. 여혈의가 그 상자에 올라
타자 변홍의도 매초풍을 부축하여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손목만큼 굵은 또 하나의 밧줄을 풀자 큰 상자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주위는 온통 운
무로 꽉 차 있어서 구름을 타고 날아 내리는 것만 같았다.
매초풍이 흥이 나서 말하였다.
"오혈궁에는 참 재미있는 물건이 많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와서 제자가 될 걸 그랬어
요."
"매초풍, 묘 궁주를 만나거든 임잔 묘 궁주를 가만히 기습한 자가 운남 대리국 사람의 옷차
림새를 한 걸 보았다고 말하게. 그리고 더 알아보았더니 그자가 개방에서 청해온 대리국의
고수라고 말하게."
"왜 꼭 대리국의 고수라고 말해야 하나요? 개방 사람이더라고 하면 안 되나요?"
"본 궁에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개방의 고수들에 대해서는 다 익숙히 알고 있지. 만일 남제
단황 나으리 수하의 사람이라고 하면 내막을 잘 모를 수 있거든."
진상을 전혀 모르는 변흥의가 물었다.
"아씨, 참말로 대리국의 고수가 묘 궁주를 암해하려 했나요?"
매초풍이 여혈의한테 힐끔 눈짓을 하였다.
"그런 것 같아요."
변홍의가 눈알을 굴리더니 웃었다.
"알 만해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본 궁의 제자가 되지 못할까 봐 그러는군요. 하지만 묘
궁주가 진상을 알게 되면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변흥의가 매초풍의 안위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자 여혈의가 말을 받았다.
"자네가 말하지 않으면 아씬 아주 안전할 거야."
"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겠소."
이렇게 대답하는 변홍의의 어조는 아주 견결해 보였다. 매초풍도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난 변 공자를 믿어요."
큰 나무상자가 계속 하강하자 운무가 점점 옅어져 울창한 수풀 속에 수많은 집들이 들어선
것이 보였다. 상자가 풀밭에 내려져 위를 쳐다보니 짙은 운무가 꽉 덮여 있었다. 주위를 살
펴보니 높은 산이 둘러섰고 그 위에 운무가 자욱이 서려 있어 해를 볼 수가 없었다. 산꼭대
기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는 운무 아래에 이처럼 신비한 오혈궁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 사람이 나무상자에서 나오자 여혈의는 또다시 한 가닥의 밧줄을 풀고 또 상자 양쪽으로
밧줄을 맸다. 그러자 큰 나무상자는 다시 천천히 올라가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매초풍은 옆에 똑같이 생긴 큰 나무상자들이 세 개나 있고 십여 가닥의 밧줄이 연결되어 있
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이 나무상자들도 아마 오혈궁으로 드나드는 공구일 거다.'
나무 뒤에서 오혈궁 제자 네 사람이 나와 여혈의에게 인사를 올렸다. 여혈의가 손을 저어
그들더러 흩어져 가라고 명했다.
길에는 옻칠을 한 주홍색의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모두 시체를 넣는 관(棺) 같아 보였다.
'정말 오혈궁이란 이름과 꼭 같구나. 집마저 피처럼 새빨간 색깔이라니……!'
그들은 왼쪽에 있는 암벽 앞에 와 멈추었다.
여혈의가 한번 매초풍을 흘겨보고 나서 암벽을 향해 소리쳤다.
"여혈의가 궁주님을 알현하렵니다!"
그러자 밋밋한 암벽이 갑자기 우릉우릉 소리를 내면서 안쪽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이었다.
원래 그것은 석문이었는데 문이 닫힐 때는 틈이 조금도 없이 꼭 맞물렸다. 그것은 너무도
정교하게 제작된 것이어서 매초풍은 속으로 탄복을 하였다.
석문 안에서 붉은 옷을 입은 오혈궁 제자 네 사람이 나와 인사를 하였다.
"사형님께 아룁니다. 궁주님께서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자, 들어 가시지요."
여혈의, 매초풍과 변홍의가 석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들은 변홍의는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 변홍의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당부를 했다.
"아씨, 조심하십시오!"
여혈의가 비꼬는 투로 말하였다.
"매초풍, 나의 변 사제가 임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네 그려. 허 참, 동시가 곁에 있지
않으니 독수공방을 하게 되었겠군. 그러니 바싹 끌어당기라구."
매초풍은 양옆에 귀신불 같은 홍사 등롱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침상 위에서 보는 재미는 이미 한껏 누려 보았지요. 당신은 이런 일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 일 텐데 날 가르치기에는 일러요."
"이 여 모는 풍채가 늠름한데다가 재간도 대단하여 입만 열면 숱한 계집애들이 시집오겠다
고 달려들걸! 하지만 이 여 모는 눈이 높아 웬간한 계집애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내가 알기에는 엽청청만 하더라도 당신의 얼을 빼는 데는 충분할 듯싶은데요. 하지만 엽청
청은 소요공자 악처후를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악처후란 놈은 건달기가 심한 자여서 엽청청은 벌써 그자를 싫어하고 있어. 그녀가 그 놈
을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는 걸 내가 직접 봤다니까!"
"문제는 엽청청이 철산서생 하종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 말씀이에요. 하종이 협의를 행하
고 금나라에 항격하는데다가 그 애를 위험에서 구해 주기까지 했거든요. 청청은 그런 사내
를 좋아해요."
매초풍은 이렇게 말하면서 재미있는지 깔깔거렸다. 여혈의는 평소에 아주 참을성이 있었으
나 웬일인지 엽청청의 이야기를 꺼내자 무척 격분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매초풍의 신랄한
비아냥거림에 화가 나서 당장 칼로 찍어 죽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했다.
매초풍이 옆으로 몇 발자국 물러나면서 또 비아냥거렸다.
"여 공자께서는 대장부인데 한낱 소견머리 없는 여인이 한 말에 이처럼 화를 내시다니오?
이곳은 묘 궁주의 거처이므로 난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요."
석문에서부터 동굴을 통해 이십여 장쯤 걸어오니 앞에 좌중우 세 곳으로 세 동굴이 나타났
다. 각 동굴 어귀에는 각각 파수꾼이 네 사람씩 서 있었다. 여혈의가 매초풍을 데리고 좌측
에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양쪽 벽에는 사등(紗燈)들이 켜져 있어 안온한 느낌을 주었다. 앞에서 물 흐르는 소리
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돌다리에 들어섰는데 다리 아래로도 물이 흐르고 있어 아주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앞으로 몇 장쯤 걸어가니 눈앞에 공문(拱門)이 나타났고 그 위에 금빛 나는 '오혈궁주(烏血
宮主)'라는 네 글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문 앞에는 두 여제자가 지키고 서 있었다.
'이 오혈궁 궁주는 거세를 한 폐인이라고들 하던데……? 여인을 가까이 할 필요도 없는 주
제에 자신의 양기를 시위하려 들다니 우스운 일이구나.'
매초풍은 속으로 묘 궁주를 비웃었다.
동굴 안은 왕후들의 집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 아주 화려하고도 으
리으리한 문 안에도 네 여제자가 양쪽에 둘씩 갈라 서 있었다.
여혈의와 매초풍은 내실로 들어갔다. 맞은켠에 있는 화려한 큰 침대에 병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오혈궁 궁주 묘상이었다. 안색이 누렇게 뜬 그는 비단 이불을 덮고 있
었고 딸 엽청청이 곁에서 국을 떠먹이고 있었다.
그 앞에는 또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노로의와 초천의였다. 침대 양옆에는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들은 묘상의 셋째 부인과 다섯째 부인이었다. 그 두 여인들은 머리
를 숙이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엽청청이 매초풍을 바라보더니 아주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언니, 진짜로 언니였군요!"
엽청청은 국그릇을 내려놓더니 매초풍에게로 달려와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여전히 매
초풍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엽청청이 너무나 천진하고 조금도 사악함이 없어 매초풍은 자기가 그녀에게 행한 소행들을
돌이켜보면서 부끄러워했다.
"귀여운 동생, 그래, 바로 나야."
매초풍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데 여혈의는 그녀가 엽청청을 해칠까 봐 두려워 급히 두
사람 사이에 들어서며 말했다
"엽 사매…… 아니 소궁주님, 어서 물러 가십시오."
엽청청은 원래 사형 여혈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자기가 귀한 소궁주 대접을
받는 처지이지만 그 두려운 마음이 없어지지 않은 탓에 침대 곁으로 물러가면서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저 언니를 적으로 치부하지만 언닌 저에게 아주 잘 대해 주었어요."
궁주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 말했다.
"청청아, 사형의 말을 듣거라."
엽청청은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엽청청이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엽청청의 어머니인 엽첩비가 어린애를 묘상에게
보내 왔던 것이다. 그때는 묘상이 도소정을 가두어 놓은 지 일년도 안 되는 때였다. 신임 궁
주인 그는 제자들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하여 고아를 데려다 기르는 것처럼 꾸며댔다. 묘상
이 백방으로 사랑하고 아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엽청청은 자기가 보통 여제자인 줄로만 알
았다. 묘상은 엽청청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면서도 엽청청이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일
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였고 자기 딸이 장차 훌륭한 가문에 시집가서 강호를 떠나 안온하게
한평생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엽청청이 어른이 되자 묘상은 일부러 딸을 바깥 세상에 내보내어 마음에 드는 낭군을 찾도
록 하였으나 소요공자에게 걸려들 줄 어찌 알았으랴. 소요공자 악처후는 감언이설로 순진한
엽청청을 속였던 것이다. 대로한 묘상은 엽청청을 잡아들인 뒤 오혈궁 밖을 아예 나가지도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엽청청은 첫사랑에 빠져 온종일 악처후 생각만 하였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가
만히 오혈궁을 빠져 나갔다. 그래서 여혈의가 엽청청의 종적을 찾아 태호를 가게 되었던 것
이다.
소요관에서의 변고를 겪고 나서 엽청청은 악처후를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천하의 사내들이란 모두 믿을 수 없는 놈들이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이젠 묘상
이 다시 그녀더러 바깥 세상에 나가 신랑감을 찾으라고 해도 그녀는 절대 불응할 것이었다.
여혈의가 그 틈을 타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그녀는 근본적으로 여혈의를 좋아하
지 않았다. 하지만 엽청청은 여혈의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동의하지도, 그렇다고 감히 거절하
지도 못하였다.
엽청청은 여혈의의 눈길이 온통 자기한테만 쏠리고 있는 것을 느끼자 급히 머리를 숙이고
묘상에게로 몸을 돌렸다.
여혈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나서 묘상한테 절을 올렸다.
"궁주님께 보고를 올립니다. 철시 매초풍을 데려왔나이다……."
매초풍이 읍을 하였다.
"소녀 매초풍이 묘 궁주를 알현하나이다."
매초풍은 묘상의 목에 백포가 여러 벌 감겨져 있고 백포에 거무스레한 피가 배어 나온 것을
보고는 유엽표창의 독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매초풍은 여혈의를 흘끔 바라보고 나서 속으로 궁리를 했다.
'표창에 어떤 독약을 발랐기에 오혈궁 궁주마저 방법이 없는 것일까? 음, 십중팔구 그 천산
의 마귀할멈한테서 얻은 독약일 게야.'
묘상이 매초풍을 내려보면서 힘겹게 말했다.
"여혈의의 말에 의하면 임자는 본 궁의 제자로 들어올 생각이 있다면서? 그리고 인사 예물
도 갖고 왔다고 하던데 그게 뭔가?"
매초풍이 유엽표창을 꺼내 들고 여혈의가 당부한 대로 말하고 나서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단황은 남제라고도 하는데 당세의 으뜸가는 사대 고수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개방의
방주 홍칠공과 나란히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서로 존경하고 추어주는 사이입니다. 그들의
제자들이 합심하여 오혈궁을 대적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묘상이 눈을 감은 채로 탄식하였다.
"남제의 일양지신공(一陽指神功)은 세상에 으뜸가는 것인데 나도 겪은 적이 있네. 휴, 만일
그가 오혈궁 사람들한테 애를 먹이려 든다면 그건 참 야단인 거야."
노로의가 입을 열었다.
"궁주님께서는 남의 위풍을 지나치게 높여 우리 자신의 예기를 꺾고 계십니다. 우리 오혈궁
사람들이 언제 누구를 두려워한 적이 있습니까? 궁주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삼백 명 제자
들이 대리국을 짓부숴 놓겠습니다."
묘상이 도리질을 하였다.
"남제는 일국의 군주인지라 그 어떤 강호의 문파들도 감히 황실과는 맞서지 못해. 세력간의
차이가 현저해 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는 꼴이야. 그러니 그런 말은 다시 꺼내지도 마라."
노로의와 초천의는 서로 마주 쳐다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예전 같으면 묘 궁주가 이런 약
한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으며 이런 말을 들으면 대번에 책상을 탕 내리치면서 큰소리를
질렀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묘상을 바라보았다.
묘상이 그들의 심사를 짐작한 듯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임자들한테 말해 두거니와 지금 우리 오혈궁의 대적은 남제가 아니고 개방과 전진교도 아
닌 거야."
노로의와 초천의는 더더욱 그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개방은 여전히 천하에서 가장 큰
무리이고 전진교는 강호에서 무서운 풍파를 일으키고 있으며 남제는 더군다나 세력이 큰 놈
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내놓고도 더 무서운 적들이 있단 말인가?
묘상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사흘 전에 본 궁주는 편지 한 통을 받았네."
초천의가 생각을 더듬다가 내뱉었다.
"궁주님한테 오가는 편지들은 모두 저의 손을 거치는데 저는 사흘 전에 밖에서 제자가 보내
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없고 궁주님께 편지를 올려 보낸 일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 편지가 본 궁주의 서재에 있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는 말이네."
그러자 노로의가 놀란 어조로 끼여들었다.
"본 궁의 방무(防務)는 제가 관할합니다. 본 궁은 철벽 같아 사처에 보초를 세웠고, 더욱이
궁주님의 의사(議事堂), 용선방(用膳房), 서재, 침실 등 중요한 곳에는 심복들이 불철주야로
파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궁주님의 서재에 누가 편지를 갖다 놓았다니 그게 무슨 말씀
이십니까?"
"그래 내가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아니옵니다. 만일 참말로 그런 일이 생겼다면 진정 본 궁 제자들이 계율을 범한 행위이니
소인이 꼭 조사하겠소이다."
묘상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노의, 본 궁주는 임자를 나무라는 말이 아닐세. 이 편지는 어느 고인이 남겨두고 간 것일
세. 이 고인이 본 궁 내부를 제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으니 그 무공이 실로 가늠키 어려울
정도란 말일세!"
묘상의 눈에 공포에 질린 빛이 떠돌았다.
노로의, 초천의, 여혈의, 매초풍 그리고 엽청청, 셋째 부인, 다섯째 부인 모두 겁을 먹었다.
이곳에 편지를 갖다 놓았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매초풍이 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만일 사부님 황약사가 들키지 않고도 이곳에 편지를 갖다 놓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을 수
있는 일이다. 그분이라면 이런 일쯤은 식은죽 먹기로 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분 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서독, 남제 그리고 북개다. 하지만 이 네 분의 고수는 절대로
이따위 시시한 일을 할 위인들은 아니야.'
묘상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오혈궁에 대하여 아주 익숙하게 알고 있고, 그러려면 기필코 본 궁의
어느 제자와 연줄을 달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본적으로 본 궁의 출입구조차 찾아
내지 못할 거다. 매초풍, 임자 생각엔 그렇지 않은가?"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하였다.
'여 공자께서 길안내를 서지 않았던들 소녀는 한평생 공력을 들였어도 오혈궁이 이곳에 있
다는 걸 상상조차 못했을 겁니다. 설사 오혈궁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안다고 하더라도 그 복
잡한 길을 제대로 찾아서 오지 못했을 겁니다."
노로의는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던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즉시 조사하여 보렵니다."
노로의가 이렇게 말하고 나가려는데 여혈의가 한마디했다.
"큰사형님, 이 일은 이 여 모에게 맡기십시오. 제가 가서 조사하겠습니다."
"사태가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조사할 필요도 없네. 어쨌든 그 고인은 편지에서 본 궁주를
위협하고 욕설도 퍼부으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하였네. 하지만 그 고인은 편지만 남겨 놓고
나를 시끄럽게 굴지도 않은 채 그냥 갔단 말이네."
여혈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편지를 남긴 자가 궁주님이 상
한 줄을 모르는 자로 처음부터 궁주님의 적수가 못 되는 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히 얼굴도 드러내지 못한 것이지요. 둘째는 이른바 고인이라는 자의 소행이란 건 처음부
터 없었고 단지 본 궁의 어느 제자가 남겨두고 갔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묘상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하였다.
"그 고인은 편지에서 자기는 내가 중상을 입은 기회를 이용하여 죽이고 싶지는 않노라고 똑
똑히 밝혔단 말일세. 자네는 본 궁제자들의 소행이라고 의심하고 있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야. 청청이가 서재에서 그 편지를 발견했을 때 필적의 먹물조차 마르지 않았네. 그러니
그 고인이 서재에 잠입해 들어와서 써놓은 게 분명하네. 필체를 보아도 본 궁 제자의 것이
아니란 말일세."
모두들 그 말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고인의 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했기
때문이었다.
여혈의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 사람이 이름은 써놓지 않았습니까?"
"편지에다 '천산마모(天山魔母)'라고 써놓았네."
묘상은 세 제자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임자들은 강호에서 천산의 마귀할멈이란 인물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나?"
모두들 서로 얼굴을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매초풍이 슬그머니 여혈의를 쳐다보았더니 여
혈의는 망연한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 흔들고 있었다. 매초풍은 속으로 이 사나이가 아주 태
연하고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엽청청이 귓속말을 했다.
"아버님, 그건 가짜 이름인지도 모르지요. 우릴 놀리느라고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어요."
묘상이 엽청청의 말을 일축하였다.
"너희 세 사형의 말을 들어 보자꾸나."
갑자기 노로의가 넓적다리를 철썩 쳤다.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요. 이태 전에 천산 기슭에서 강남으로 장사꾼 행렬이 왔었는데 그들
한테서 천산 부근에 마귀할멈이라고 부르는 여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여
인은 젊고 건장한 사나이들을 붙잡아서 농탕치고 나서는 그 사나이의 뇌수를 빨아먹는다고
합니다."
여혈의가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그래 그 년이 정말로 사람의 뇌수를 빨아먹는답니까?"
"그렇다네. 천산의 마귀할멈이란 참말 그 별호와 마찬가지로 에누리 없는 여마귀란 말일세.
만일 정말로 그 여인이 우리와 맞선다면 아주 시끄러운 일이네."
하지만 노로의는 곧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여혈의를 안심시켰다.
"여 사제, 하지만 근심할 필요는 없네. 오혈궁에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으니까 우리 제자들
이 한마음으로 뭉친다면 그까짓 천산의 마귀할멈쯤이야 두렵겠나?"
묘상이 노로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노로의의 말이 사리에 맞네. 본 궁은 수백 년이나 되는 근기(根基)를 갖고 있거늘 천산의
마귀할멈이 어찌 혼자 힘으로 대처할 수 있겠는가? 우린 이후부터 더욱 경계를 강화하여 그
년한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네. 그러면 그 년이 어려움을 느끼고 스스로 물러갈 걸세."
간사하고 꾀가 많은 초천의가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제가 보건대 이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천산의 마귀할멈이 무공이 아무
리 대단하기로서니 길안내를 서는 사람도 없이 곧바로 오혈궁까지, 그것도 서재까지 들어올
수 있을까요?"
묘상이 무엇인가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는 말일세. 그렇다면 오혈궁 안에 과연 천산 마귀할멈의 밀정이 있단 말인가?
여혈의, 임자가 본 궁에 박아넣은 밀정들을 잡아들이게. 의심스러운 제자이기만 하면 즉시
나한테로 끌고 오도록 하게."
"예, 제자가 즉시 알아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매초풍을 한번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궁주님, 이 매초풍은……."
초천의가 말을 가로챘다.
"궁주님, 철시는 본 궁의 대적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당장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여혈의가 큰소리로 반박했다.
"궁주님께서 중상을 입으시어 지금은 믿음직한 조수들이 필요할 때입니다. 마침 아씨가 우
리한테 몸을 의탁하러 찾아왔는데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성세가 커질 게 아닙니까? 궁주님께
서도 현능한 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름이 높지 않습니까?"
초천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 사제, 철시는 심보가 지독하여 육친도 알아보지 않는 년이다. 저 년이 도화도 도주 황약
사도 배반한 터인데 어찌 궁주님께 충성할 수 있겠나?"
여혈의가 이에 맞서 냉소하였다.
"형님은 매초풍이 무공이 고명하니까 질투를 하는군요!"
"버릇없이 굴지 마라. 궁주님께서 성을 내시기 전에 싸움을 그치지 못할까!"
노로의가 준엄하게 꾸짖자 여혈의와 초천의는 서로 쏘아보기만 할 뿐 더 말을 하지 못하였
다.
"천의와 혈의, 두 사람 모두 나를 위하는 그 충성스런 마음은 치하할 만하네."
두 제자에게 느릿느릿한 어조로 힘겹게 한마디한 묘상은 이번엔 매초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철시, 임자는 굴욕을 참아 가면서 본 궁의 제자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매초풍이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였다.
"소녀는 원수들의 추격을 받아 살길이 없어 이곳 오혈궁으로 도망해 왔으니 궁주님께서 보
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소녀가 이 오혈궁의 제자 노릇을 하는 데는 하나의 작은 소
청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어디 한번 얘기해 보게."
"소녀는 태호오교들과 척을 지었다가 하마터면 그 놈들의 손에 목숨을 끊을 뻔하였습니다.
때문에 묘 궁주께서 이 원수를 갚아 주시면 소녀는 결사적으로 묘 궁주님을 따르겠나이다."
그러자 초천의가 대뜸 면박을 주었다.
"매초풍, 네 년이 감히 궁주님한테 조건을 들이대다니 죽고 싶어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오혈
궁은 종래로 외인들과 어떤 흥정도 하지 않는단 말이다!"
매초풍은 입귀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일 뿐 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묘상만 올려
다보았다. 그녀는 일부러 이렇게 꾸며대고 있는 것이었다. 묘상과 무슨 흥정이라도 하는 척
해야만 자신이 오혈궁에 들어오려고 하는 목적에 대하여 오혈궁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 거
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묘상 역시 매초풍이 무조건 굴종하려 했다면 기필코 딴 음모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즉시 끌어내다가 목을 자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매초풍이 이처럼 흥정을 하는 바람에 묘상
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매초풍, 임자가 본 궁주한테 의탁하려 하니 이건 오혈궁으로서는 길한 일이로다. 본 궁주가
담보한건대 조만간에 태호오교를 없애 그대의 원수를 갚아 주겠노라!"
매초풍은 아주 기쁜 척하면서 연거푸 절을 올렸다.
"묘 궁주님, 감사합니다. 이 소녀는 궁주님에 효성을 다하며 간뇌도지(肝腦塗地)하는 것도
마다않겠사옵니다."
아주 흐뭇한 듯 묘상의 얼굴에 불그레한 기운이 감돌았다.
"청청아, 어서 저 아씨를 부축하여 일으켜 드려라."
엽청청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매초풍을 부축하였다.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묘상
은 딸이 매초풍을 좋아하는 것을 보자 더욱 믿게 되었다.
"아가씨가 강호를 질타하며 다닌다는 이야기를 본 궁주는 벌써부터 듣고 있었네. 오늘 이렇
게 본 궁주에게 의탁하러 왔으니 절대 소홀히 대하지 않겠네. 임자는 오늘부터 오혈궁의 사
제가 되어 이십 명의 여 제자들을 통솔하도록 하게."
매초풍은 또 절을 하면서 감사를 드렸다. 초천의가 옆에서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한편 여혈의는 매초풍이 자기한테 당부하던 일이 성사된지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매초풍이 오혈궁에 있는 건 그로서는 큰 우환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제14장 오혈궁 제자가 된 매초풍
매초풍은 오혈궁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녀는 사저로 명명받아 이십 명의 여제자들을 관할하였다. 이런 여 제자들은 반채의 같은
여인들이 아니라 관심부름 따위를 하는 시녀들이었다.
매초풍은 무공이 아주 높은데다가 도중에 오혈궁으로 들어온 사람이었으므로 묘상은 그녀를
받아들이긴 하였지만 다소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매초풍도 묘상의 이런 심사를 알고 있
었기 때문에 눈에 띄는 행동은 가급적 피했다. 더구나 그녀는 권리를 다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하찮은 관리자인 자신의 입장을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다.
엽청청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매초풍에게 달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매초풍의 무공
과 강호를 돌아다니며 겪은 담력과 견식을 무척 부러워하였다. 매초풍도 엽청청을 친동생처
럼 여기면서 늘 무예를 가르쳐 주었고 강호를 떠돌아다닐 때 주의하여야 할 일을 일일이 알
려 주었다.
오혈궁으로 오는 길에 매초풍은 변홍의에게 천산의 마귀할멈과 관련된 일들을 거듭 물었었
다. 유감스럽게도 변홍의는 마귀할멈에 대해서 그다지 많이 알고 있지 못하였다. 다만 그녀
가 무공이 대단하고 자기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조한 일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때문에 천산의 마귀할멈이 사실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똑똑히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천산의 마귀할멈을 찾는 유일한 길은 여혈의를 통하는 길밖에 없었다. 여혈의는
천산의 마귀할멈의 제자이므로 분명 사부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여혈의는
사형으로 뜨락 어느 깊은 곳에 거처하고 있어서 매초풍은 오혈궁에 들어온 이래로 그의 그
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를 아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변흥의는 더욱 안타까워했다. 매초풍의 미모에 반한 변홍의는 그녀가 보고 싶어 미
칠 것만 같았다. 매초풍의 지금 신분이 사저로 되어 있는데다가 방금 오혈궁으로 들어온 터
라 변홍의는 수시로 그녀를 찾아갈 수가 없었다. 동문 사람들에게 괜히 의심을 살까 봐 두
려웠던 것이다.
그럭저럭 두 달이 지나가서야 매초풍은 오혈궁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오혈궁에는 수많은 여제자들이 있었으나 자색이 아주 뛰어난 여인은 극히 적었다. 엽청청과
반채의는 그녀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그런데 엽청청은 너무나도 얌전하
여 누구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였고 반채의는 성미가 활달하여 묘상의 총애를 받고 있
기는 하지만 오만하고 도도하여 강금의를 제외한 사내들은 감히 아는 척도 하지 못하고 있
었다. 대다수 남제자들은 아예 그 두 여인을 멀찌감치 피해 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매초풍이란 매력 있는 아가씨가 오혈궁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진현풍과
변홍의의 진기를 흡취한 까닭에 몸매가 더욱 풍만해지고 살결이 아주 매끄러워져 한층 더
성숙한 여인의 아름다운 맛을 풍겼다.
남제자들 가운데서 이전에 매초풍의 솜씨를 경험한 적이 있는 사내들은 모두 그녀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사내들은 그녀를 처음 보는지라 아름다운 자색에 끌
려 저마다 한번쯤 끌어안고 농탕치고 싶어하였다.
매초풍은 남제자들의 주린 듯한 눈길을 눈치채고 일부러 더 애교를 부리고 아양을 떨어 사
나이들로 하여금 넋이 나갈 지경으로 만들었다.
"아씨, 몇몇 녀석들은 본 궁에서 이름난 호색한들이니 조심하시오."
어느 날 변홍의가 매초풍이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얘기꽃을 피우고 있자 얼른 달려와 사내들
을 호통쳐 쫓아버렸다. 그리고 그는 매초풍을 나무 뒤로 끌고 갔다.
"아씨가 그 놈들과 히히덕거리는 게 아주 꼴사납단 말입니다. 당신이 그러는 걸 난 용서치
않겠어요."
"변홍의, 당신이 뭔데 감히 내 일에 관계한단 말이에요?"
매초풍이 아주 쌀쌀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변홍의는 잠시 얼떠름해 있다가 그녀를 흘겨보며
말하였다.
"아씨, 난 당신한테 장가들렵니다. 천하의 사내들치고 자기 처가 남의 사내와 히히덕거리는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흥, 내가 언제 당신한테 시집가겠다고 대답한 적 있나요! 남의 일에 작작 간섭하세요."
변홍의는 한동안 멍청하니 서 있었다. 그는 속에서 부아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녀를 제압
할 수가 없는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매초풍의 어여쁜 모습을 보며 긴 한숨을
토했다.
"매초풍, 요 며칠 사이에 난 줄곧 당신을 생각하느라 밤잠도 이루지 못했어요. 성만 내지 말
고 예전처럼 날 대해 주시오."
매초풍은 그의 영준하게 생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다소 마음이 누그러졌다. 근래에
사내맛을 보지 못한 그녀는 춘심이 발동하여 눈웃음을 치며 그에게 한 발 다가섰다.
"당신은 질투를 하고 있군요."
변홍의가 가볍게 그녀를 끌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을 맞추겠어요. 난 당신 생각에 죽을 지경이요."
변홍의가 매초풍의 입에 자신의 것을 포개었다. 변홍의는 마치 펌프처럼 매초풍의 입을 빨
아대었다. 매초풍이 가는 신음을 토하며 몸을 비꼬았다. 그는 매초풍의 허리를 억세게 끌어
안더니 번쩍 안아 들고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풀밭에 그녀를 내려놓고 황급히 그녀를
덮쳤다. 두 사람은 마음껏 뒹굴었다.
오혈궁 안에서 소녀공을 닦기로 작심한 매초풍은 변홍의와 운우지정을 나누면서 이제부터는
그한테도 사정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가만히 진기를 운행시켜 그의 체내에 몇
년 동안이나 쌓였을 진기를 태반이나 빨아들였다.
변홍의는 기가 막힐 듯한 쾌감에 몇 번 소리를 지르더니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매초
풍은 그를 떠밀어 버리고 옷을 입은 다음 변홍의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반시진이 지나서야 변홍의는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는 사맥이 나른하여 몸을 일
으키기도 매우 힘이 들었다. 겨우 일어난 그는 체내에 기를 운행시켜 보았다. 체내에서 움직
이는 진기가 실오리만큼밖에 안 되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영문이지?"
한껏 빨아들인 진기를 단전으로 몰아넣고 난 매초풍이 입을 오므리면서 웃었다.
"변 공자,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하세요?"
변홍의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대답하였다.
"아까 기분은 대단히 좋았는데 문제는 나의 몸에 있던 진기가 갑자기 많이 줄어들었군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매초풍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하였다.
"아마도 너무 피로했던 모양이군요."
매초풍이 다가와서 변홍의를 부축하여 주었다. 변흥의는 일어났으나 두 다리가 후들거려 하
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안 되겠는데요. 오 년 동안 닦은 공력을 손실 본 것 같아요! 아까 진기가 하체로부터 흘러
나가는 것 같던데, 혹시 당신이……?"
변홍의가 매초풍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말을 맺지 못하였다. 매초풍은 뜨끔하여 얼른 속으
로 잔머리를 굴렸다.
"맞았어요. 내가 당신 체내의 진기를 빨아 갔어요."
변홍의는 총명한 사람이라 매초풍과 관계를 가진 이후의 나날을 회상해 보았다. 한참 후 그
가 화를 버럭 냈다.
"과연 당신이…… 당신이 마공으로 나의 진기를 빨아 갔군요……. 당신은 참 지독한…… 사
람이군요!"
변홍의가 장을 휘둘러 그녀를 치려고 했으나 맥이 하나도 없었다. 매초풍이 젖가슴을 들이
대며 애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정한 낭군! 어서 날 때려죽이세요!"
매초붕은 두 눈을 감더니 내공으로 두 줄기의 눈물을 짜냈다. 그 눈물에 변홍의의 마음이
금세 누그러졌다. 그는 살포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가씨, 당신을 위해 죽는데도 달갑겠는데 그까짓 오 년 쌓은 공력을 잃어버리는 것쯤이야.
하지만 당신이 날 속이지는 말아야 할 걸 그랬소."
"당신이 정말로 날 좋아한다면 내가 소녀공을 닦는 걸 도와줘야 해요."
"당신은 또 나의 진기를 빨아들일 작정이오?"
"아뇨, 만일 내가 또 당신의 진기를 빨아들인다면 당신은 정기가 고갈되어 죽고 말 거예요.
내 뜻은 당신이 나한테 내공이 훌륭한 오혈궁의 제자들을 물색하여 달라는 말이에오. 그들
의 진기를 빨아들여야겠어요."
그녀의 말에 변홍의는 펄쩍 뛰었다.
"당신은…… 딴 사내와…….한 침대에 오를 생각이로군?"
"꽤도 급하시네요. 난 당신 말고는 딴 사내를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소녀공을 닦기 위해
서는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난 진양을 얻어 무공을 닦으려고 그러는 거지 낙을 누리
려고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안 돼, 절대 안 돼요! 아씨, 당신이 날 좋아하는 이상 방탕하게 굴지 말아요. 날 오쟁이를
진 놈으로 만들어선 안 돼요!"
"당신은 절 위해 무슨 일이나 다 하겠다고 그러지 않았나요? 그런데 요까짓 일쯤도 희생하
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이건 좀 다른 일이오."
"뭐가 다르단 말인가요? 이렇게 해주지 않는다면 난 당신한테 시집가지 않을 거예요."
변흥의는 화가 나서 매초풍을 확 밀쳤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는군! 흥, 내가 당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의도를 누설하기만 하면 궁주
님은 당신을 죽여 버릴 거야!"
처음으로 그가 성을 내자 매초풍은 잠시 얼떠름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만일 내가 당신이 날 끌어들였다고 말하면 궁주는 당신까지 잡아죽일 거예요. 만일 내가
당신이 나한테 말한 일, 즉 여혈의와 천산의 마귀할멈에 관계되는 일을 여혈의한테 말해 버
린다면 그 역시 당신을 가만두지는 않을 거예요."
변홍의는 한동안 침통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머리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아가씨,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굴든지 상관없어요. 방금 한 말은 기분이 상한 김에 한 말이
에요."
그는 갑자기 머리를 쳐들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은 천산의 마귀할멈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예를 배우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므로 당
신은 소녀공을 닦을 필요도 없고 사내들의 능욕을 당할 필요도 없어요."
'말은 그렇지만 소녀공을 닦으면 공력이 커지는 건 사실이지. 게다가 남녀간의 낙을 한껏
맛볼 수도 있지. 일거양득인 것을 내가 왜 포기해야 하지?'
매초풍은 오혈궁 안에서 아직은 그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말로 그의 마음을 돌려 세우려
했다.
"휴, 나라고 왜 당신과 함에 거처하며 낙을 누리고 싶지 않겠어요. 당신은 내 맘속의 고충을
알기나 하나요?"
"당신에게 무슨 고충이 있으면 나한테 다 이야기해요."
매초풍은 그가 꼬드김에 빠진 것을 보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날 시가지 밖에서 우리 두 사람이 태호오교와 금도 임청 그리고 육승풍, 막여인과 죽기
살기로 싸우던 때 말이에요. 비록 우리가 포위를 뚫고 도망하여 나오기는 하였지만 난 육승
풍의, 그 도화도의 괴이한 내공에 의해 진상을 입었단 말이에요."
변홍의는 그 말을 곧이듣고 걱정스런 얼굴을 하였다.
"당신이 때로 근심에 잠겨 있는 게 다 내상을 입은 까닭이었구료."
"내가 때때로 당신한테 냉담하게 대하고 화를 내기도 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에요. 휴, 나도
이 상처의 치료에 대한 문제를 두고 줄곧 망설여 왔어요."
매초풍은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이 말을 이었다.
"좋아요, 당신이 진짜로 날 사랑한다면 몽땅 얘기해 드리지요. 육승풍이 쓰는 도화도의 이
기이한 내공은 정말 까다로운 것이어서 내가 입은 진상은 반드시 원양진기(元陽眞氣)로써
끊임없이 씻어내어야만 점점 아물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참말입니까?"
매초풍의 큰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당신은 날 믿지 않는군요. 좋아요. 그럼 난 다신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고 그대로 죽어 버
리겠어요."
그리곤 매초풍은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변홍의가 당황하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가씨, 난 당신을 믿어요!"
"날 죽게 내버려둬요. 남한테 시름을 끼칠 필요가 뭐 있어요?"
"울지 말아요. 미안해요. 에잇 참, 난 왜 이리 둔할까? 당신의 진심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
데……."
매초풍이 눈물을 닦으면서 말하였다.
"당신이 똑똑히 아셨다면 좋은 일이에요. 난 처음엔 당신의 진양으로 상처를 치료히려고 했
는데 차마 당신을 해칠 수 없더군요. 오늘에야 나는 결심을 하고 당신의 진기를 빨아들였지
요. 하지만 당신은 내공이 약해서 근본적으로 나의 상처를 치료해 낼 수 없고 오히려 당신
만 위험을 당했군요."
그러자 변홍의가 손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한탄하였다.
"난 참 쓸모 없는 놈이야. 자기의 여자 하나도 지켜 주지 못하고 있으니……."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어떻게 당신을 탓할 수 있겠어요? 오로지 육승풍을 탓할 뿐이에
요. 그자가 나더러 사내들의 유린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 게 원통하군요."
"아가씨, 이 방법말고 당신의 내상을 치료할 딴 방법은 없나요?"
"당신은 정말 바보로군요. 나한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 육승풍이 어찌 목숨을 내걸고
나를 상하게 했겠어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된 변흥의가 다시 물었다.
"아가씨, 당신의 내상은 대단히 중한가요?"
"도화도 도주는 당세에 으뜸가는 사대 고수들 중의 한 사람이에요. 그가 전수하는 내공은
백발백중으로 적수에게 내상을 입히지요. 나의 내상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한 해 후면 온
몸이 썩기 시작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일어나는데 백 날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고 나서야
죽게 되지요."
그 말을 들은 변홍의는 놀라서 중얼거렸다.
"너무나도 지독하군요! 당신의 사부님은 왜 이따위 지독한 내공을 전수하는 거죠?"
"그러기에 그분의 별호가 동사 아닌가요. 사람들은 그분을 황노사(黃老邪)라고들 부르지요.
성미나 무공으로 말하면 천하에 이분보다 더 사악하고 기괴한 사람은 없지요."
변홍의는 매초풍의 손을 잡고 고통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좋아요. 당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내가 내공이 훌륭한 호수들을 물색해 드리지요."
매초풍은 변홍의의 품속에 머리를 묻고 가만히 웃었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난 내상이 완치되면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그 말에 변홍의는 당장 결혼이라도 한 듯 아주 기뻐했다.
이로부터 변홍의는 오혈궁에서 내공이 좀 훌륭하다는 제자들을 소개해 주고 매초풍이 그들
과 접촉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매초풍은 빼어난 미모와 요사스런 교태로 사내들을 끌어
당겼다.
한 달도 못 되어 매초풍의 내공은 오혈궁에 갓 들어올 때보다 크게 늘어났다. 반면에 매초
풍의 소녀공에 진기를 빼앗긴 오혈궁의 제자들은 누구나 얼굴에 황달이 들고 병색이 완연한
몰골을 하였다.
제자들의 무공을 닦는 일을 주관하는 노로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그런 제자들
을 불러다 물었으나 그들은 모두 우물거리기만 할 뿐 진상을 말하지 못하였다.
매초풍은 단맛을 느끼자 한번 시작한 그 짓을 그만두지 못하고 마침내는 세 사형들에게 눈
독을 들였다. 그중에서 초천의는 너무나도 교활하고 줄곧 자기와 척을 짓고 있는 터라 제외
시켰다. 여혈의는 무공이 너무나도 고장하므로 손 안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여혈의는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이므로 잘은 모르지만 대개 사로(邪路)의 마공을
닦았을 것이기에 진기도 깨끗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매초풍은 노로의를 가장 합당한
목표로 삼았다.
공교롭게도 이날 노로의가 매초풍을 찾아와서 자기와 함께 오혈궁을 나가 산밑으로 내려갈
일이 있다고 말했다. 매초풍은 이젠 오혈궁의 규칙에 습관되었으므로 두말없이 그를 따라갔
다.
벼랑 옆에는 이미 여덟 명의 제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노로의가 손짓을 하자 그들 일행은
나무상자를 타고 천천히 공중으로 올랐다.
수행하는 여덟 제자들은 모두 쾌도(快刀)를 쓰는 호수들로 그 가운데는 매초풍과 겨루어 본
적이 있는 이자의란 자도 섞여 있었다. 매초풍은 이자의의 내공이 괜찮은 것을 알고 있는지
라 만일 그가 지금까지 자기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있지 않았다면 저 사람한테도 소녀공을
시험하여 보았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큰 나무상자는 운무 속을 헤치고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산꼭대기에 당도하였다. 모두들 나
무상자에서 내려 운무 속을 헤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각기 횃불 한 자루씩 들고 나왔다.
산에서 내려갈 때 모두 경공을 썼는데 원래 노로의와 어슷비슷하던 매초풍의 공력은 약 한
달간 소녀공을 닦는 바람에 내공이 노로의 보다 월등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노로의의 의심
을 자아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어 그와 비슷한 속도로 내려갔다.
얼마 안 걸려 그들은 산기슭에 당도하여 밀정의 집에서 밥을 먹었다. 노로의는 그곳에서 하
룻밤 묵자고 명령을 내렸다.
이튿날 길을 떠나 연거푸 닷새나 걸어서야 남북으로 통하는 관도(官道)가 보였다. 노로의가
멈춰 서라고 명을 내려 수림 속에서 휴식을 취하게 했다. 노로의가 이자의를 파견하여 어딘
가로 보냈는데 무엇하러 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되어 이자의가 돌아와서 보고를 올렸다.
"큰 사형님, 이제 반시진만 지나면 당도할 겁니다."
그러자 노로의가 자리에서 일어나 명령을 내렸다.
"병장기를 준비하라!"
이자의 등 여덟 제자들이 자루를 끌러 그 안에서 궁노를 꺼냈다. 이 궁노는 살을 연속적으
로 열 살 쏠 수 있는 것으로써 살촉에는 단정학(丹頂鶴)의 대가리에서 뽑아낸 붉은 극독약
이 발라져 있어 그 살촉에 맞기만 하면 목구멍이 졸아붙게 되는 무서운 무기였다.
노로의는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이 일의 목적을 설명해 주었다.
"한 시진쯤 더 지나면 개방의 제자 이십 명이 남쪽으로부터 올라올 것이네. 그중 네 사람이
길을 탐지하려고 먼저 나타날 텐데 그 놈들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게. 그런 후에 좀 뒤떨어
져 앞머리에 넷, 중간에 여덟, 뒤에 넷의 십육 명 기마가 올 것인데, 중간의 여덟 기마에는
각기 나무상자 두개씩 싣고 있네."
노로의가 매초풍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매 사매, 임잔 중간에 선 팔기(八騎) 가운데서 두 번째 놈을 치게. 그 놈은 뚱뚱한 행각승
이네. 그런데 그 놈은 부상만 입혀야지 절대 죽여서는 안 되네."
"큰사형, 그 행각승의 무공은 어떠한가요?"
"내가 그 놈과 겨루어 본 적이 있는데 삼십여 합이나 싸웠어도 승부를 가르지 못했네. 하지
만 그건 칠 년 전의 일이야."
매초풍이 속으로 궁리를 했다.
'칠 년 전에 당신이 그 행각승과 비긴 정도라면 그 놈이 칠 년 동안에 무공이 더 늘었겠으
니 내가 꼭 이길 수 있다는 자신도 없는 거다. 보아하니 다루기 힘든 적수를 나한테 떠맡기
는 것 같은데 이거야말로 나를 골탕먹이려는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매초풍이 불쾌한 표정을 짓자 노로의가 덧붙였다.
"초 사제가 임잘 추천하더군. 임자의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이 절기에 속한다면서 불의의 기
습을 들이대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매초풍은 그제야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으며 동문인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천의는 매초풍이 처음부터 그 행각승을 이길 수 없다고 믿었던 것
이 분명했다.
"큰사형, 그 뚱뚱한 행각승은 도대체 어떤 자예요?"
노로의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자는 본래 소림사(少林寺)의 나한당(羅漢堂) 십팔나한 중의 한 사람일세. 삼 년 전에 개
방에 가입하였는데 개방에서 일류가는 고수네. 하지만 임잔 시름을 놓게. 그자는 십팔나한
가운데서 무공이 가장 약한 자일세."
소림사는 무림의 으뜸에 속하고 나한당의 십팔나한은 소림사의 제자들 가운데 고수 중의 고
수이다. 그렇다면 십팔나한 가운데서 꼴찌라고 하더라도 그의 무공은 절대 얕잡아볼 수 없
는 것이었다.
노로의가 심각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 행각승의 법호(法呼)는 아수라(阿修羅)이고 사람들은 철금강(鐵金鋼)이라고 부르네."
"철금강이라구요!"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그녀가 도화도에서 도망할 때 처음으로 들은 강호의 호한 이름이 바
로 철금강 아수라였던 것이다. 아수라는 여덟 살에 소림사에 들어가 중이 되어 천하에 이름
난 소림칠십이절기(少林七十二絶氣)를 배우기 시작한, 소림의 불사신술의 소유자였다. 열여
덟 살에 동문인과 무예를 겨루었는데 세 사형이 소림권(少林拳)으로 스물일곱 번이나 때렸
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고 낯색조차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십팔 세 때에는 동경(東京) 변
량(卞梁)에서 황궁의 사품시위(四品侍宜) 일곱 사람이 무리하게 무예를 겨루자고 강요하여
싸우게 되었다. 철금강 아수라는 얻어맞고서도 반격을 하지 않았고 욕을 먹고서도 입을 다
물고 있었는데 연거푸 장을 서른여섯 번, 주먹을 마흔여덟 번이나 맞았으나 여전히 아무렇
지도 않았다고 한다. 일곱 시위들은 이에 불복하여 각기 요도(腰刀)를 꺼내 열아홉 번이나
찍었는데 이로 인해 아수라에게 열아홉 곳의 상처 자국이 더 생기게 되었다. 한편 살가죽에
생긴 열아홉 곳의 상처 자국은 반나절쯤 지나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
철금강'이란
이름이 무림에 널리 전해진 사람이었다.
매초풍은 오늘 자기가 대적해야 할 사람이 철금강 아수라라는 말을 듣고 머리칼이 곤두서고
낯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노로의가 그녀의 표정을 읽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매 사매, 오늘 임자는 처음 오혈궁을 위해 일하는데 임자더러 철금강 아수라를 대적하게
하는 건 궁주님이 임자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네. 일이 아주 중요하니 반드시 이겨야지 져서
는 안 되네."
매초풍은 속으로 생각을 추스려 보았다.
'참말로 내가 그 철금강 아수라를 이긴다면 강호에서 크게 명성을 날릴 수 있을 거다. 그리
고 개방과 전진교에서 이 매초풍을 다시는 얕보지 못할 거고 오혈궁에서도 상하가 모두 나
를 신임하고 중하게 여길 거다. 그러면 더 나아가서 여혈의와도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거고 되도록 빨리 천산의 마귀할멈을 만날 수 있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난 매초풍은 활달하게 말하였다.
"큰사형, 시름을 놓으십시오. 이 매초풍이 전력을 다해 철금강을 꺼꾸러뜨리겠어요."
노로의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는 또 여덟 사제한테 당부하였다.
"임자들 여덟 사람은 두 패로 나뉘어 각기 궁노로서 앞뒤에 선 여덟 개방 제자들을 죽여 버
리고 말도 쏘아 눕히게. 하지만 중간에 있는 팔기만은 결코 상하게 해서는 안 되네."
이자의가 분부대로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나서 물었다.
"큰사형님, 그다음엔 뭘 하랍니까?"
"만일 궁노를 쓸 수 없게 되면 달려나가서 쾌도로 전후에 있는 여덟 제자를 죽여 버리도록
하게. 그 다음 허장성세하면서 중간에 있는 팔기를 산길로 끌어들이도록 하게."
그는 백 보 안팎에 있는 좁은 산길을 가리키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들을 한데 몰아가야지 절대 흩어지게 해서는 안 되네."
이자의는 명령을 받자 곧 자리를 떴다.
매초풍이 노로의 곁으로 다가가 살짝 팔을 잡으며 물었다.
"큰사형,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지요?"
노로의가 팔소매를 홱 뿌리치며 소리 질렀다.
"매 사매, 임자가 오혈궁에 들어온 지도 이제 꽤 됐는데 여태 어떤 걸 묻고 어떤 걸 묻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는가?"
매초풍이 눈웃음을 치면서 아첨을 했다.
"큰사형께서는 정말 대장의 풍모가 있으시군요. 저는 오늘 아주 탄복했어요."
매초풍은 말끝에 노로의를 힐끗 쳐다보았다. 노로의의 입귀에 살짝 웃음이 어렸다. 그는 대
답은 하지 않고 머리만 약간 끄덕이며 수림 밖의 관도를 주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 탄 사람 넷이 남쪽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온 다음 살펴보
니 그들 네 사람은 모두 남루한 옷을 입은 개방의 제자들이었는데 각기 칼 한 자루씩을 등
에 메고 말등에는 보따리를 하나씩 싣고 있었다. 그들의 기색을 보니 귀중한 물건을 싣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혈궁 사람들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했다. 네 개방 제
자들은 천천히 그들을 지나 멀리 사라졌다.
밥 한끼 먹을 시간도 못 되어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열여섯 기마 대열이 달려왔
다.
이윽고 노로의가 입을 열었다.
"궁노를 쏨과 동시에 매 사매가 돌격해 나가도록 하게."
앞줄에 선 네 필의 말 위에는 네 명의 개방 제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체구가 우람했다.
그들이 가진 병장기는 각기 다른 것이었으나 무공이 모두 괜찮아 보였다.
중간에 선 여덟 필의 말에는 과연 한 필마다 나무상자 두 개씩이 실려 있었는데 상자의 옻
칠이 벗겨져 있어서 그 속의 내용물이 그다지 귀중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매초풍은 낡은 상자일수록 그 속에 보물이 들어 있기가 일쑤며 낡은 상자를 사용하는 것은
단지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앞선 말 위에는 노로의와 매초풍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가 바로 개방의 칠대
제자 한대웅이었다.
두 번째 말 위에 바로 그 뚱뚱한 행각승 철금강 아수라가 앉아 있었다. 그는 키가 여덟 자
도 넘었고 허리통이 한아름이나 되었으며 반들반들한 까까머리는 돼지 머리만큼 커 보였다.
거무튀튀한 살갗에 마치 천신(天神) 같아 보이는 그는 잔등에 일곱 개의 낡은 자루를 메고
있었는데 한대웅과 마찬가지로 칠대 제자였다.
그 뒷사람을 바라본 매초풍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심란했다. 중간에 선 팔기에서 마지막
말 한 필에는 철선서생 하종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늘 하종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
던 철권패왕 노위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는데 유독 하종만은 손에 철선을 들고 관건(館
巾)을 친 푸른 두루마기에 허리에는 미옥(美玉)을 달고 있어 꼭 닭 무리 속에 섞인 학처럼
단번에 눈길을 끌었다.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를 세가의 한 공자 나부랭이
쯤으로 알 터였다.
노로의도 철선서생 하종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본 궁의 밀정들은 하종이 따라온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 밀정들이 하종
을 몰랐던 모양이로구나. 이거 아무래도 일이 시끄럽게 생겼군.'
그들은 아주 빨리 접근하여 왔다. 노로의가 명령을 내리자 여덟 명의 오혈궁 제자들이 궁노
를 쐈다. 팔십 대의 살이 누리떼처럼 날아가자 전후 팔기의 개방 제자들은 미처 방비할 새
도 없이 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들은 줄곧 경계심을 풀지 않고는 있었으나 날강도들이 기습
적으로 궁노를 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궁노의 살이 날아가는 속도와 힘은 흔히 무림의 호한들이 던지는 암기보다 더 빠르고 강했
다. 만일 방패를 들지 않는다면 일류가는 고수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었
다.
여덟 명의 개방 제자가 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면서 말과 함께 길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동
시에 매초풍이 살같이 달려나가 철금강 아수라한테 접근하더니 몸을 훌쩍 날렸다. 그녀는
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아수라의 까까중 머리를 할퀴려 들었다.
아수라는 숲 속에서 궁노가 날아오는 것을 보자 금세 물건을 탈취하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그는 또 미모의 여인이 나는 듯이 달려와 섬섬옥수의 열 손가락을 휙휙 휘
두르는 것을 보았으나 그것이 대체 무슨 무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소림 불사
신술의 절기를 갖고 있는지라 머리를 아래로 움츠리면서 주먹으로 상대방의 동가슴을 내질
렀다.
매초풍이 공중에서 한바퀴 돌아 땅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려오면서 아수라의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두 손으로 그의 정수리를 끌어잡았다.
아수라는 금종조(金鍾 ), 즉 불사신술로 몸체를 보호할 수는 있었으나 매초풍의 구음백골조
는 <구음진경> 가운데서 가장 강하고 무서운 외문 경공이었던 까닭에 그의 머리와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즉, 매초풍의 열 손가락은 비록 아수라의 두개골까지는 꿰뚫지 못했
지만 뼈가 다 들여다보일 정도의 열 가닥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매초풍은 첫공격이 성공하자 사기가 부쩍 올라 말잔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자기의 구음
백골조가 아수라의 소림 불사신술을 완전히 격파하지 못한 것을 알자 최심장을 썼다.
철금강 아수라는 매초풍한테 정수리를 할퀴우자 몹시 아프고 눈에서 별똥이 튀는 듯하였다.
그제야 그는 무서운 적수를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급히 안장에서 훌쩍 솟아오
르면서 왼쪽 장을 뒤로 보내 날아오는 매초풍의 장을 막았다.
빵―!
매초풍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수라도 급급히 뒤로 장을 보내다 보니 힘을 절반쯤밖에
쓰지 못해 전력을 다해 내치는 매초풍의 최심장을 당할 수가 없어 왼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기습에 성공한 매초풍은 아수라가 이미 상한 것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대면서 그 자리를 떠
나려 하였다. 그때 갑자기 그녀는 센 바람결이 자기한테로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매초풍이
머리를 돌리니 아수라의 뒤에 있던 개방의 육대 제자가 주먹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매초풍
은 반 발자국을 옆으로 물러서면서 오른쪽 팔꿈치로 육대 제자의 오른쪽 주먹을 세차게 들
이쳤다.
육대 제자가 매초풍의 팔꿈치를 피하며 주먹을 뒤로 빼자 매초풍은 즉시 맞받아 한 발자국
나서면서 왼쪽 장으로 그의 겨드랑이를 힘껏 떠밀었다. 그러자 육대 제자는 마치 내던져진
자루처럼 도로 말잔등 위에 철썩 떨어졌다.
매초풍이 미친 듯이 웃으면서 소리 질렀다.
"철금강, 내가 바로 철시 매초풍이다!"
그녀는 자기가 두 합 만에 철금강 아수라를 부상입힌 사실을 개방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했
다.
철선서생은 매초풍을 발견하자 상서롭지 못함을 깨닫고 말잔등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수
림 속에서 화살이 마구 날아오는 바람에 그는 눈을 번연히 뜬 채 매초풍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매초풍이 수림 속으로 들어가니 노로의가 손에 궁노를 든 채 그녀에게 웃음을 띄우며 치하
하였다.
"매 사매는 솜씨가 대단해. 철금강을 부상당하게 했으리 이 일은 절반쯤 성공한 셈이야. 내
가 돌아가서 궁주님에 임자의 공로에 대해 보고를 올리겠어."
노로의의 칭찬에 매초풍이 흥분되어 읍을 하였다.
"큰사형, 감사해요. 제가 이런 성과를 거둔 건 전적으로 큰사형께서 관심을 써주셨기 때문이
에요."
매초풍이 천진스런 미소를 짓자 노로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서 호감을 가지기 시
작하였다.
'철시는 필경 어린 여자야. 공로를 세웠다고 오만하게 굴지도 않고 늙은이를 존경할 줄도
알지 않는가. 앞으로는 홀대하지 말아야겠어.'
한편 수림 밖에서는 이자의 등 여덟 명의 오혈궁 제자들이 허장성세하면서 말잔등에 실린
나무상자들을 빼앗을 듯한 기세를 보였다.
인솔자인 칠대 제자 한대웅은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는데다가 가장 믿음직한 조수인 철금강
아수라까지 부상을 당하자 열여섯 개 나무상자의 안전을 위해 부하들을 거느리고 좁은 산길
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자의 등은 뒤에서 추격하지는 않은 채 고함만을 질러대다가 수림 속으로 들어왔다. 노로
의는 크게 칭찬하면서 몇 사람들에게 당장 상으로 황금 열 냥씩을 주었다.
이자의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제자들이 매초풍을 둘러싸고 그녀가 아수라를 부상입힌 일에
대하여 탄복해 마지않았다. 매초풍이 깔깔 웃어대면서 자기가 어떻게 초수를 썼고 또 어떻
게 아수라의 팔을 부러뜨렸는가를 이야기했고, 또 노로의가 용병에 귀신같다고 칭찬을 하였
다. 그 말을 들은 노로의는 속으로 아주 흡족해 하였다.
매초풍이 노로의의 앞에 와 웃으면서 물었다.
"큰사형, 이젠 뭘 할까요?"
노로의가 수림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놈들을 마저 수습해 버려야지."
뭇사람들이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아까 길을 찾아 옆으로 지나갔던 개방 제자
네 사람이 말을 탄 채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궁노 살에 맞아 죽은 동료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매초풍이 입을 열었다.
"큰사형, 저 나한테 맡겨 두세요."
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수림 밖으로 뛰쳐나갔다.
개방 제자들은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자 의아해 하며 물었다.
"여봐, 여덟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 걸 보았나?"
매초풍이 그들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들 중에 뚱뚱한 중도 있고 공자 한 분도 있지 않던가요?"
"그들이 어디 있던가?"
"난 보지 못했어요."
"임자가 금방 보았다고 하지 않았나?"
"글쎄요, 이제 곧 죽은 말 네 필과 죽은 사람 넷을 또 보게 될 것 같아요."
매초풍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그래 우릴 가리켜 하는 말이냐?"
"당신 말이 맞아요!"
그 말과 동시에 매초풍은 갈고리 손으로 말대가리를 찍어 잡았다. 그녀는 발걸음을 날쌔게
옮겨 놓으면서 나머지 세 필의 말도 모두 대가리를 찍어 몽땅 죽여 버렸다.
네 개방 제자들은 말이 쓰러지게 되자 황급히 말잔등에서 뛰어내렸다.
"네 년이……?"
그들이 미처 어쩔 사이도 없이 매초풍은 네 개방 제자들을 한 장에 하나씩 죽여 버렸다.
"죽은 말 네 필과 죽은 사람 넷을 유감스럽게도 너희들은 보지 못하게 되었구나."
노로의가 뭇사람들을 데리고 수림 속에서 나오며 말했다.
"솜씨가 대단한데. 먼저 말을 죽이니 그 놈들이 한 놈도 도망가지 못하고 결국 몽땅 죽어
버렸군."
이자의가 말대가리에 난 다섯 개의 손가락 구멍에서 뇌수가 흘러 나오는 것을 보고 생각했
다.
'말대가리까지 구멍을 뚫는 판이니 그 무공이 실로 놀랍구나. 휴, 철금강 아수라를 내놓고는
천하에 더는 매초풍의 구음백골조와 감히 맞서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각별히 조심하고
절대 저 년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말아야겠다.'
한대웅네들은 꾸불꾸불한 산길을 돌아 산허리까지 왔다. 그들은 더 이상 뒤에서 추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멈춰 서서 숨을 돌렸다.
철금강 아수라가 부러진 팔을 어루만지면서 악에 받쳐 소리쳤다.
"매초풍, 조만간에 네 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테다!"
한대웅이 그를 나무랐다.
"철시 그 년이 실로 지독하기도 하구먼. 휴, 다 당신이 적을 업신여겼기 때문이오."
"내가 그 년이 철시인 줄을 어찌 알았겠소. 또 그 년의 구음백골조가 소림의 불사신술로도
당해내지 못할 것인 줄 어찌 알았겠소."
한 개방의 육대 제자가 끼여들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중임을 맡지 않았던들 오늘 그 놈들과 결사적으로 싸웠을텐데. 흥, 철시
를 내놓고 그 나머지 오혈궁 문하 제자들은 무공이 그다지 고명하지 못하지요."
철선서생 하종이 말하였다.
"절대 그자들을 소홀히 볼 게 아니오. 난 숲 속에 매복해 있는 고수들을 발견했었소. 우리가
빨리 도망하지 않았더라면 이 물건들을 지켜낼 수 없었을 거요."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오. 그자들이 앞뒤에 선 여덟 형제만 죽이고 우리와는 결사적으로 싸
우지도 않고 추격도 안하니 말이오."
아수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매초풍이 나한테 부상을 입혔으니 그 기세로 공격을 계속하였으면 날 죽일 수도 있었을 거
요. 그런데 그 년이 왜 물러갔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한 육대 제자가 참견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들이 손을 쓸까 봐 두려웠을 겁니다. 아수라께서 상하기는 하였지만 아
직도 한 칠대님과 하 공자께서 계시고 그 나머지 우리 다섯 사람의 무공도 괜찮으니까 말입
니다."
하지만 하종이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그렇게 간단히 볼 일이 아닐세. 오혈궁 놈들은 일처리에서 옛날부터 아주 주도면밀하게 타
산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않고는 결코 그만두지 않는단 말이네. 내 보기엔 그 놈들이 딴 꿍
꿍이가 있는 것 같네."
철금강 아수라가 자기 배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 놈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건 말건 우린 요기나 좀 해야겠소. 그래야 힘이 나서 싸울 수
있지 않겠소?"
벌써 저녁 무렵이 지나 있었다. 개방 사람들은 다시 말잔등에 올라 밤을 지낼 곳을 찾기 시
작하였다. 오 리도 채 못 가서 허름한 집 하나를 발견했는데 담장은 태반이나 무너졌지만
다행히 열여덟 간이나 되는 방들은 그런대로 지낼 만했다.
뜨락에 들어서니 잡초가 허리까지 자라 있었고 바람벽도 낡고 바랜 것이 벌써 여러 해나 사
람이 살고 있지 않는 듯싶었다.
아수라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였다.
"하늘의 보살핌으로 우린 오늘 밤 노숙은 면하게 됐소. 그런데 맞아 줄 주인이 없는 게 섭
섭하군."
방들을 살펴보니 세 칸이 천장에 비가 새지 않을 것 같았다.
한대웅은 제자들더러 여덟 필의 말을 한 방에다 끌어다 매어 놓게 하고 열여섯 개의 나무상
자를 또 다른 한 방에다 부려 놓게 한 다음 나머지 한 방에 사람들이 모여 쉬기도 하고 요
기도 하게 하였다. 한대웅은 두 사람의 육대 제자더러 나무상자를 지키게 하고는 두 시진마
다 교대하게 하였다.
집 안 복판에는 두 자 높이의 불상이 놓여져 있었다. 아마도 이 집 원주인이 불교를 믿었던
모양이었다. 불상은 낡았지만 그래도 여래불의 면목만은 알아볼 수가 있었다.
아수라는 불교를 믿는 중인지라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였다.
사람들은 체구가 우람한 사나이가 자그마한 불상 앞에서 염불을 외우는 장면이 아주 우스워
보였지만 감히 웃을 수는 없었다.
아수라는 불상 앞에서 염불을 다 외우고 나서 그 불상을 공경스럽게 한쪽으로 옮겨 놓았다.
"불조(佛祖)님, 억울한 대로 잠시 참아야겠소이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밥 먹을 곳도 없게
되나이다."
그러자 모두들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수라가 다짜고짜 닭의 다리 한 개를 집어들고 서너 입에 다 뜯어먹어 버렸다.
철선서생 하종이 웃으면서 물었다.
"불조님 앞에서 고기를 먹다니. 불조님의 벌을 받는 게 두렵지 않소?"
아수라가 손으로 쇠고기 한 점을 집어 입 안에 밀어넣으며 웅얼거렸다.
"술과 고기는 창자 속을 지나가 버리지만 불조님은 맘속에 남아 있으면 되는 거요. 내가 고
기를 먹는 건 요마(妖魔)를 잡을 힘을 기르기 위해서인 거요. 불조님께서는 이 일을 아셔도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의 직위를 높여 주고 나더러 진짜 금강이 되라고 하실 거
요."
그 말에 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모두들 옷을 입은 채로 드러누웠다. 사방은 고요하여 수림이
서걱이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따름이었다. 모두들 온종일 피로하게 보냈던
지라 이내 꿈나라로 빠져 들어갔다.
나무상자를 지키는 두 육대 제자들만은 두 눈을 부릅뜬 채 한 사람은 창가에서, 또 한 사람
은 방구석에서 칼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 올 무렵, 수림 부근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거리더니 어떤 사람이 집 쪽으
로 다가왔다. 그 사람은 동작이 민첩하고 발자국 소리도 전혀 없어 그의 경공을 짐작케 했
다.
그 사람은 담장을 넘어 들어온 뒤 사방의 동정을 살피더니 이내 방문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
갔다. 그 방은 바로 나무상자를 쌓아 둔 방이었다.
창문을 지켜 섰던 육대 제자가 밖에 온 사람을 주시하다가 그자가 문 쪽으로 다가오자 갑자
기 창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칼로 그자를 내리찍었다. 방안에 있던 제자가 큰소리를 질렀다.
"도적이야!"
육대 제자가 칼로 내리찍었으나 그 도적은 너무도 민첩하게 몸을 비키면서 오른손으로 육대
제자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그자는 또 왼손으로 칼등을 잡은 채 왼쪽 무릎으로 육대 제자의
오른쪽 팔꿈치를 올려 받치면서 칼을 잡아당겼다. 육대 제자는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칼을
빼앗겼다. 칼을 빼앗긴 육대 제자는 급한 김에 땅바닥을 뒹굴면서 발길질을 하였다. 그자는
손으로 육대 제자의 겨드랑이를 잡아 넘어뜨려 놓고는 발로 가슴을 밟고 서서 칼로 내리찍
으려 하였다.
이때 한대웅네들이 고함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그들이 황급히 뛰어나와 보니 어떤 자가
육대 제자를 발로 짓밟고서 칼로 내리찍으려 하고 있었다.
한대웅은 급히 발길을 날려 그자의 명문혈을 걷어찼다. 그자는 할 수 없이 칼로 내리찍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한대웅이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냐?"
철금강 아수라가 두말없이 달려들어 주먹으로 그자의 왼쪽 옆구리를 내질렀다. 아수라는 소
림사의 불사신술을 배웠는데 그것은 매를 맞았을 때 견디는 무공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가 배운 소림 나한권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 이젠 그가 주먹을 휘두르면 바람 소리까지 휙
휙 들렸다.
그 사람은 코방귀를 뀌더니 약간 왼쪽으로 몸을 돌려 왼발을 뒤로 가져가면서 수비 자세를
취했다. 그는 오른쪽 장으로 방어하다가 반격을 가하더니 아수라의 팔목을 틀어쥐었다. 아수
라는 공격에서 실패하고 상대방한테 팔목을 잡히자 소림의 '금나소전완식(擒拿小纏腕式)'
초수로 그 사람의 오른쪽 손등을 잡으며 오른쪽 주먹을 장으로 변화시켜 오히려 상대방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그와 동시에 아수라는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그 사람의 오른쪽 손
목을 비틀어 꺾으려 했다. 그 사람은 도리어 아수라한테 팔을 잡히자 오른쪽 발로 연거푸
일곱 번이나 걷어차서 아수라는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하종이 아수라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면서 달빛을 빌려 상대를 살펴보았으나 똑똑히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귀하께서 전진파 무공 중의 절기인 '반퇴칠성(半腿七星)'을 쓰는 걸 보아 전진교 문하의 사
람이겠군요?"
그 사람은 아무 대답도 없이 갑자기 하종에게 달려들었다. 하종은 이미 대기하고 있던 차라
몸을 훌쩍 날리며 철선으로 그 사람의 왼쪽 가슴에 있는 운문혈(雲門穴)을 찔렀다. 그 사람
은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종은 또다시 철선으로 사람의 오른쪽 가슴에 있는 영허혈(靈墟
穴)을 찔렀다. 그 사람은 '금강철판교(金剛鐵板橋)'의 초수를 쓰면서 몸을 뒤쳐 누우며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었다.
하종은 두 번이나 실수하자 팔꿈치를 아래로 내리면서 그 사람의 복부에 있는 음교혈(陰交
穴), 관원혈(關元穴), 귀래혈, 대횡혈(大橫穴)을 찔렀다. 그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몸체를 낮추
면서 두 발로 하종의 두 무릎을 걷어찼다. 하종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 사람도 또 훌쩍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때 아수라가 달려와 오른쪽 주먹을 내질렀다. 한 팔이 상한 그는 한 손으로 적을 맞아 싸
웠으나 싸울수록 용맹하였다. 그 사람은 전진교의 장법으로 싸우면서 조금도 만만하게 굴지
않았다. 하종이 보기에는 이 사람이 비록 전진파의 무공을 쓰기는 하였으나 행적이 의심스
러워 보였고 십중팔구는 전진교를 찾아가서 가만히 무예를 훔쳐 배운 강호의 무뢰한일 것
같았다. 그는 더 고려할 새 없이 아수라와 함께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은 아수라와 십여 합 싸워 힘에 부친데다가 하종까지 철선으로 점혈 공격을 가해 오
자 견뎌 내기 힘들어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다.
갑자기 뜨락 안의 수림 속에서 맑은 외침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만 들어도 내공이 대단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뜨락으로 뛰어들어 검을 빼
들고 하종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동작은 그다지 날렵하지 않았으나 그 힘이 대단해 공력의
깊이를 알게 했다.
하종이 철선을 휘둘렀다. 그 사람은 칠타검화(七朶劍花)의 초수를 쓰면서 하종의 몸을 연속
찔러댔다.
하종이 맞받아 싸우지 않고 훌쩍 물러서며 물었다.
"전진파 검법 중의 '칠성비화부태허(七星飛花赴太虛)'란 초수로군요! 귀하는 전진파의 누구
신가요?"
그 사람은 어리벙벙해진 기색으로 되물었다.
"당신은 철선서생 하 공자가 아니시오?"
하종이 그의 목소리를 듣자 기쁜 기색을 지었다.
"장춘자 구 도장 아니시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정말로 구처기였다. 구처기가 하하 웃으면서 말하였다.
"빈도가 시력이 나쁘다 보니 옛 친구도 알아보지 못했군요!"
구처기는 하종에게 읍을 하고 나서 철금강 아수라에게 몰리고 있는 그 사람도 갈라놓았다.
아수라는 구처기와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고 함께 손을 잡고 금나라에 투항한 송나라 장관
을 죽여 버린 적도 있었다. 아수라는 너무 기뻐 합장하며 말하였다.
"구 도장께서 안녕하십니까? 이 사람이 귀파의 무공을 쓰므로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는군
요. 이 사람이 전진파의 제자입니까?"
"아니……, 이 사람…… 이 사람은……."
구처기가 꺽꺽거리자 아수라는 불쾌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구 도장께서는 원래 시원시원한 사람이신데 오늘은 왜 이처럼 우물쭈물하십니까?"
분위기가 다소 불편해지자 한대웅이 구처기한테 다가가서 말했다.
"이 사람이 깊은 밤에 우리 뒤를 밟는 게 아주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싸움이 붙은 겁니
다. 이 사람이 전진교의 제자라면 참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구처기가 비로소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하였다.
"빈도는 실로 미안합니다. 한 칠대님께선 너무 겸손하게 그러지 마십시오. 모두 한집안 사람
이니까요."
아수라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쏘았다.
"한집안 사람이라 해도 이름이야 서로 알려야 할 게 아닙니까? 그냥 여보시오, 하고 부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마침내 그 사람이 쌀쌀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난 소요공자 악처후입니다. 여러분과도 상면한 일이 있는데 모두들 건망증이 이리도 심하
단 말입니까?"
그제야 사람들은 한 인물을 떠올리고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구처기가 와서 구원해 주려고
하였던 인물이 호색한으로 이름난 소요공자 악처후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
다.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은 철금강 아수라였다.
"구 도장님, 당신이 살인을 하든 불을 지르든 계율을 어기든 상관없이 우린 마찬가지로 출
가한 사람들입니다. 강호의 사람들은 우리들이 협의를 이행한다고 칭찬하고 있지요. 그런데
당신은 어찌하여 이런 더러운 난봉꾼과 함께 밀려다닌단 말씀입니까?"
철선서생 하종도 참견하였다.
"이 악가란 자는 숱한 양갓집 딸들을 유린한 놈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런 자를 죽여 버리
기는커녕 구원하는군요. 이러다가 장춘자란 이름이 더러워지면 어떡하겠습니까?"
나무람을 들은 구처기는 얼굴이 화끈거려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요공자 악처후가 소리 질렀다.
"아수라, 사람들은 중들을 호색한 중에서도 악귀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이 악 모는 네 놈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걸 믿지 않는다."
그는 또 하종을 가리키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네 놈이 오혈궁의 엽청청에게 엉큼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날 이 악처
후가 막지 않았던들 엽청청은 엄청 모욕을 당했을 거다."
"이 놈아, 사람을 함부로 물고 드는구나! 흥, 오늘 밤 이 하 모는 강호를 대신하여 너 같은
음적을 없애 버리겠다!"
하종이 달려나가며 철선으로 악처후의 인후에 있는 천공혈(天空穴)을 찔렀다. 구처기가 얼른
검으로 철선을 막았다.
"구 도장, 당신은 이 음적을 도와줄 셈이오?"
구처기가 읍을 하면서 말하였다.
"하 공자님, 이 빈도의 체면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빈도는 실로 말 못할 고충이 있소이다."
소요공자 악처후가 뒷짐을 진 채 말하였다.
"구처기, 나는 한 번도 당신더러 도와달라고 말한 적 없소."
"그래 맞아. 빈도가 당신을 도운 건 빈도 스스로 한 일이오."
하종, 아수라, 한대웅 등은 모두 깜짝 놀랐다. 장춘자 구처기는 호협하고 충성스러우며 의를
존중하기로 이름이 높을 뿐만 아니라 성미가 불 같은 사람인데 소요공자 앞에서 이처럼 굽
실거리니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대웅은 구처기에게 어떤 곡절이 분명 있으리라 여기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하다면 화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악 공자, 이젠 돌아가십시오."
악처후가 오만한 기색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한 칠대께서 축객령을 내렸군요. 보아하니 이 악 모는 오늘 밤 산속에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군요. 좋소. 난 당신들과 집을 쟁탈하려 하지 않겠소. 하지만 장춘자 이 귀객만은 이곳
에서 묵게 하란 말이오!"
그리곤 그는 뜨락을 나섰다. 그러자 구처기도 서둘러 읍을 하고는 뒤따라 갔다. 먼 곳에서
악처후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구처기, 당신은 뭐 이 악 모의 꼬랑지란 말이오? 벌써 내 뒤를 두 달이나 따라다녔단 말이
요. 원 참, 이런 답답한 친구가 있나?"
하지만 구처기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모두들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한대웅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 나무상자를 보려고 육대 제자들이 지키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
다. 횃불을 밝혀 든 한대웅은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뭇사
람들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안은 텅텅 비어 있었고 열여섯 개의 나무상자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방구석에 있던 육대
제자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머리를 숙이고 쿨쿨 자고 있지 않은가?
한대웅이 대로하여 그 제자를 잡아 일으키려 하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그 육대 제자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고 온 얼굴이 피투성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제자의 두개골에는 손
가락 굵기만큼한 다섯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매초풍이 한 짓이로구나!"
하종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매초풍이 아니고서 누가 이처럼 손가락으로 사람의 두개골을
뚫을 수 있단 말인가?
"매초풍이 어떻게 들어왔을까? 우린 줄곧 뜨락을 지키고 있지 않았는가. 그래 나무상자 열
여섯 개는 어디로 어떻게 옮겨 갔단 말인가?"
한대웅이 어이없어 하자 하종이 말했다.
"이곳에 꼭 암도(暗道)가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 집 안을 샅샅이 뒤졌다. 과연 낡은 탁자 밑에서 몇 개의 석판이 발견되었다. 그
것을 치웠더니 동굴이 드러났다.
한대웅이 횃불을 들고 다짜고짜로 그 동굴로 뛰어들었다. 아수라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은 되돌아 나왔다.
"삼 장도 채 못 가서 앞이 막혀 더 나갈 수가 없더군."
아수라가 주먹으로 탁자를 꽝 내리치며 말했다. 탁자는 즉시 산산조각이 났다.
"매초풍, 오혈궁, 너의 너희 놈들은 왜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지 않는단 말이냐?"
육대 제자가 갑자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오혈궁 놈들은 나무상자를 훔쳐가고 악처후와 구도장은 때마침 뜨락에 나타났거
든……?"
한대웅이 두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일이 이처럼 공교로울 수 있습니까? 악처후와 구 도장이 왜
하필 이런 때에 나타났을까요?"
"허튼소리를 하지 말어! 구 도장은 천하에 이름난 협객이시다. 그분은 근본상 오혈궁이나 철
시 같은 따위와 결탁할 사람이 아니야!"
"사람은 재물 때문에 망하고 새는 모이 때문에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 칠대님, 오십만
냥이나 되는 백은과 열여덟 상자나 되는 주보가 어디 값이 적습니까?"
그 말에 한대웅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아수라가 그 말뜻을 알아듣자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믿기지 않는 자는 바로 그 구 도장이란 자야. 그자가 그처럼 재물에 눈이 어두
워 의리를 저버릴 줄이야."
그러자 하종이 말을 받았다.
"그래, 구 도장이 악처후와 함께 있던 일을 잊지 말아야지. 악처후는 궤계가 많아 무슨 짓이
든지 다 하는 자거든."
한대웅이 눈썹을 치뜨고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하 공자, 당신의 뜻은……?"
하종이 눈빛을 반짝이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쫓아가야지요. 반드시 똑똑히 캐물어야 합니다."
"이 보물들은 우리가 갖은 고생 다해 가며 모아들인 것이오. 노 장로에서 우리들을 각별히
신임하시어 금나라에 항격하는 송나라 군대의 자금으로 이걸 호송하게 하였으니 우린 절대
노 장로를 실망시켜서는 안되오."
아수라는 한 번 코방귀를 뀌고 나서 말을 이었다.
"구 도장은 의로운 사람이고 성미가 좀 급하기는 하지만 지혜가 있는 사람이지요. 소요공자
가 아무리 궤계가 많은 자라 하더라도 구 도장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한대웅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 역시 구처기를
믿는 마음은 있었지만 악처후란 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한창 언쟁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잠을 자던 방안에서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한대웅이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네 년이로구나!"
철시 매초풍이 깔깔 웃으면서 문어귀에 나타났다.
"깊은 밤중에 왜 여러분은 잠도 자지 않은 거예요?"
철금강 아수라는 그녀를 보자 상한 팔을 어루만지면서 분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질렀다.
"철시, 난 너를 용서하지 않을테다!"
아수라는 앞으로 달려가면서 주먹으로 매초풍의 가슴을 힘껏 들이쳤다.
매초풍은 낮에 그와 두어 합 겨루어 보았던지라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내력도 아수라와 엇
비슷하였으므로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오른쪽 장으로 최심장의 가장 위력 있는 일장열석
(一掌裂石) 초수를 썼다.
빵―!
두 손이 맞부딪치자 두 사람은 모두 큰 진동을 받았다. 매초풍은 두 다리를 움직이지 않은
채 반자나 되게 뒤로 밀려갔다.
철금강은 고집스러운 성미라 그대로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당신은 부상을 입은 몸이야. 하 모가 임잘 대신하여 복수하라고 하게!"
한대웅이 얼른 아수라를 막으며 매초풍을 쏘아보았다.
"철시, 임잔 그래 오혈궁과 손을 잡았나?"
매초풍이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손을 잡은 게 아니라…… 난 이미 오혈궁의 제자고 본 궁의 사저야."
그 말을 들은 한대웅은 깜짝 놀랐다.
"우리가 갖고 온 열여섯 개의 나무상자를 너희들이 훔쳐갔지?"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이며 깔깔 웃어대었다.
"새는 모이를 위해 죽고 사람은 재물 때문에 망한다지 않은가. 가치가 오십만 냥이나 되는
백은과 열여섯 상자의 주보가 결코 적은 물건은 아니지."
매초풍이 그 육대 제자가 한 말을 되뇌었다. 한대웅이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 질렀다.
"너희들은 벌써부터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구나."
"맞았어. 허지만 본 궁에서는 열두 상자의 주보밖에 가질 수 없어."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나머지 네 상자는 어찌 되었나?"
"나머지 네 상자야 전진교 거짓말쟁이 도사가 가져다 자기네 종남산(終南山)의 도관(道觀)을
수선하는 데 써야 하지."
철선공자가 한걸음 나서면서 물었다.
"매초풍, 이 일이 전진교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전진교도 강성한 시기가 있었지만 왕중양이 사망한 후로는 점점 몰락하고 있는 형편이지.
전진칠자들은 인심을 끌기 위해선 수치를 무릅쓰고서라도 본 궁과 암암리에 손을 잡는 수밖
에 없었지. 그래서……."
하종이 한대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구처기가 한 짓이로군!"
화가 난 아수라가 매초풍에게 달려들어 연거푸 세 번이나 차면서 말했다.
"이 년이 별 해괴한 소리를 다 지껄이는구나. 네 같은 년은 죽어야 마땅하다!"
매초풍이 집 안으로 피해 들어가며 악을 쓰듯 말했다.
"구처기와 악처후가 우릴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주보를 훔치러 왔더라도 어찌 손쉽게
해낼 수 있단 말이냐. 이래도 내 말이 해괴한 소리란 말이냐?"
한대웅은 매초풍의 말을 믿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먼저 철시를 붙잡은 다음 구처기와 악처후를 잡아야 하오!"
이러면서 한대웅은 먼저 집 안으로 쫓아 들어갔다. 매초풍의 그림자가 언뜻하더니 집 구석
에 있는 굴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한대웅 패들도 서둘러 굴속에 들어갔다.
굴속은 온통 까막나라였다. 그들은 손으로 더듬어 가며 천천히 전진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소리가 나며 숱한 흙들이 쏟아져 내렸다.
"뒤로 물러서라!"
한대웅이 큰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몇 발자국 물러섰다.
쿵―!
깔깔거리는 매초풍의 웃음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흙이 무너져 내려 굴이 막힌 것이
분명했다.
모두들 굴 밖으로 나와 다시 의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한대웅, 하종과 한 육대 제
자가 구처기와 악처후를 추격하고 아수라가 다른 세 육대 제자를 데리고 사처에서 오혈궁
제자들의 행방을 찾기로 하였다.
한대웅, 하종과 육대 제자가 경공으로 급히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산길에서 앞뒤에 서서
걷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하종이 큰소리를 질렀다.
"서랏!"
세 사람은 나는 듯이 달려갔다. 그 두 사람은 과연 구처기와 악처후였다. 하종, 한대웅, 육대
제자 세 사람이 그들을 둘러싸고 노려보았다.
소요공자 악처후가 쌀쌀하게 쏘아붙였다.
"그래 어쩔 셈이냐? 손을 쓰려느냐? 장춘자까지 날 도우면 너희들은 적수가 못 돼!"
구처기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하종, 한대웅 등에게 두 손을 마주잡고 물었다.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그는 되도록 기분을 억누르면서 이 사람들이 소요공자의 말에 자극받지 말기를 바랐다. 하
지만 한대웅은 구처기가 제 발이 저리니까 공손하게 구는 거라고 오해하였다.
"구 도장, 난 당신을 호한으로 존경해 왔소. 그런데 당신이 소요공자와 단짝이 되어 이런 나
쁜 짓을 할 줄은 정말 몰랐소!"
구처기는 한대웅이 평소에 아주 신중한 사람임을 아는지라 급히 물었다.
"한 칠대님, 빈도가 무슨 일로 당신을 노엽혔는지 알고 싶소."
"구처기, 당신이 날 노엽히는 것쯤은 대단한 일이 아니오. 하지만 당신은 절대 대송국의 백
성들한테 죄를 짓지 말아야 하오."
도무지 영문을 알 길 없는 구처기가 다시 물었다.
"하 공자,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러자 하종이 입을 열었다.
"호한이면 호한다운 노릇을 해야지. 구처기, 당신이 그래 자신이 한 짓을 솔직히 말할 용기
도 없고서야 어찌 무림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소!"
육대 제자가 큰소리로 말하였다.
"구처기, 은자가 없으면 말이나 한마디하면 되는 거 아니냐. 우리 개방 제자들이 비록 빌어
먹고 사는 신세이긴 하지만 능히 널 도와줄 수는 있다. 하필 금나라에 항격하는 용사들에게
증송할 주보를 훔칠 필요가 어디 있느냐? 너희들의 전진파도 협의를 부르짖는 처지가 아니
더냐?"
구처기는 본디 성미가 될 같은 사람이라 이런 모욕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구 모는 광명정대한 사람이오. 난 그 무슨 주보니 뭐니 하는 걸 알지도 못하오. 남이 이
구처기를 모욕하면 구 모는 용서할지 모르나 구 모 손에 있는 검이 용서하지 않을 거요."
그는 검을 뽑아 들었다. 한대웅, 하종과 육대 제자들도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면서 각기 병
장기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구처기가 자기들을 죽여 증거를 없애려 한다고 여겼다.
한대웅이 손에 타구봉을 들고 소리 질렀다.
"구처기, 네 놈이 주보를 내놓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
"생사람 잡지 마라! 구 모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엇이 주보인지 아예 모른다."
소요공자가 옆에서 그 말을 듣고 비아냥거렸다.
"구처기, 당신이 남의 주보를 홈쳐갔다면 남이 되돌려 달라고 할 때 돌려주면 그만이지 생
떼질은 왜 하오?"
구처기가 부릅뜬 눈으로 악처후를 쏘아보더니 검 끝으로 악처후의 목을 들이찌르면서 소리
질렀다.
"허…… 허튼소리 말어!"
악처후도 두 눈을 부릅뜨며 큰소리로 빈정거렸다.
"좋아, 네 놈이 날 죽이면 날 따라다니는 떠돌이 신세를 면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전진교
놈들이 나 때문에 겁나는 일이 없겠으니 좋겠구나."
구처기가 급히 악처후의 검을 피하면서 곤혹스러워했다.
"네 놈이 사람을 너무도 못살게 구는구나!"
악처후가 큰소리로 웃어댔다.
"전진파의 검에 찔려 죽는 게 악 모는 소원인걸. 하지만 네 놈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느
냐, 하하하!"
하종이 철선으로 구처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우리가 손쓸 때까지 주보를 바치지 않을테냐?"
구처기가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개소리 작작하고 어서 덤벼들기나 해라. 이 구 모가 철선서생의 삼십육로철선점혈법의 무
공이 어떤 건지 보고 싶다!"
"자 한 수 받아라!"
하종이 소리치더니 철선을 휘둘렀다. 구처기가 검으로 그것을 막으려 하자 하종의 철선은 '
광풍취엽(狂風吹葉)'로부터 '야차탐해(夜叉探海)'로 그 초수가 바뀌어 구처기의 복부에 있는
관원혈을 겨냥하였다.
구처기가 미처 어쩔 사이가 없어 급히 왼쪽 무릎을 굽히면서 몸을 뒤로 비키자 철선이 빗나
가고 말았다. 하종이 다섯 손가락을 움직여 철선을 확 펼쳐 들고 구처기의 목을 베려 하였
는데 그것은 '지리투조(枝里偸桃)'라는 초수였다. 구처기는 두 발로 땅을 박차면서 뒤로 돌
아가 어느새 오른손에 든 검으로 하종의 허리를 찔렀다. 하종이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철선으로 검을 막았다.
땅―.
검과 철선이 부딪쳤다가 튕겨났다. 두 사람은 서로 어슷비슷한 적수라 승부를 가리기가 어
려웠다.
소요공자 악처후가 싸움을 구경하면서 냉소를 퍼붓는데 육대 제자가 뒤에서 갑자기 그를 공
격해 들어왔다. 악처후가 약간 몸을 비틀어 상대방의 칼날이 빗나가게 한 뒤 장으로 칼등을
내리쳤다.
"왜, 이 악 모도 죽여 보려구?"
육대 제자는 손아귀가 쩡 저려나 하마터면 칼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그는 급급히 땅바닥을
뒹굴어 대여섯 발자국 되는 곳에 가서 후닥닥 일어났다.
"악처후, 주보의 행방만 말하면 죽이지 않을테다!"
악처후가 보검을 빼들고 아랫도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타구봉을 막으면서 말했다.
"주보 말인가……? 그거야 구처기가 그 행방을 알고 있을 뿐이지."
악처후가 이렇게 허튼소리를 하자 한대웅은 정말로 구처기가 주보를 훔쳐간 줄 알았다.
다섯 사람이 한창 악전고투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씽―' 하고 서쪽 산마루에서 붉은 염탄
(焰彈) 한 발이 솟아올랐는데 달빛 아래 아주 선명하였다.
구처기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검으로 하종을 맹렬히 핍박하여 물러서게 한 뒤 이상한 소리
를 내질렀다. 얼마 안 되어 서쪽에서도 고함소리가 들렸고 뒤미처 남쪽, 북쪽, 동쪽에서도
모두 고함소리가 들렸다.
한대웅이 깜짝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구처기가 자기 패들을 불러들이니 어서 손을 써서 잡아야 해!"
한대웅과 육대 제자가 힘을 합쳐 악처후를 공격하였지만 승부를 가를 수가 없었고, 하종과
구처기도 서로가 조금도 우세를 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조금 후 서쪽에서 한 사람이 달려왔는데 전진교의 장문인인 단양자 마옥이었다. 그는 사제
가 철선서생 하종과 싸우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 질렀다.
"구 사제, 하 공자, 어서 싸움을 멈추게!"
하지만 구처기, 하종 두 사람은 싸움에 열을 올리느라고 그 말을 들을 계제가 못 되었다. 마
옥은 하는 수 없이 장검으로 두 사람의 병장기를 갈라놓는 수밖에 없었다.
하종이 철선을 든 채 한 발 물러나서 말했다.
"좋아, 그까짓 네 상자의 주보가 욕심나서 전진교의 장문인마저 얼굴을 드러내 놓았구나.
자, 덤벼라! 너희들 모두가 함께 덤벼도 이 하 모가 눈 한 번 까딱할 줄 아느냐?"
마옥은 그 말에 마구 달려들려는 구처기를 가로막고 하종에게 읍하며 말했다.
"하 공자, 말로 해야지요. 우린 종래부터 친구로 지내 온 사인데 병장기로 싸워서야 되겠
소?"
"이 하 모는 오늘에야 거짓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소!"
남쪽에서 두 사람이 달려왔는데 철각선이라 불리는 옥양자 왕처일과 장진자 담처단이었다.
북쪽에서 달려온 왜소한 말라깽이는 꼭 원숭이 상이었는데 장생자 유처현이었다. 동쪽에서
달려온 사람은 청정산인 손불이와 광녕자 학대통이었다.
구처기를 제외한 전진교 제자들은 모두 의혹에 찬 기색이었다. 마옥이 이번엔 구처기를 돌
아보며 물었다.
"구 사제,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 공자와 한 칠대의 노염을 사게 되었나?"
"저 놈들이 나와 악 공자를 둘러싸고 우리들이 그 무슨 주보를 훔쳤다고 하면서 우리더러
그것을 내놓으라고 생트집을 거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놈들은 근본적으로 우리 전진교를
안중에 넣지도 않는다니까요!"
한대웅과 육대 제자도 악처후와의 싸움을 그만두었다. 한대웅이 전진철자들을 보고 말하였
다.
"너희들이 함께 달려들어도 두렵지 않다!"
때마침 수림 속에서 누구인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 개방 제자들은 종래로 '두렵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있다!"
철금강 아수라와 세 육대 제자가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왔던 것이다.
한대웅이 기쁜 기색을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
"아수라, 전진칠자들이 사람을 죽여 증거를 없애려고 모여 왔소. 마침 잘 왔으니 우리 함께
저 놈들을 족치잔 말이오."
하종이 불만스럽게 말하였다.
"아수라, 임잔 아직도 전진교 놈들이 우리의 주보를 훔친 걸 믿지 않나? 방금 난 구처기와
삼십여 합이나 싸웠네."
아수라가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를 질렀다.
"워낙 이런 판이었군. 그림 어서 싸워야지."
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마옥한테 달려들었다.
아수라가 어찌나 사납게 달려드는지 마옥은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는 마옥이 겁
이 나서 도망가는 줄 알고 뒤따라가 왼팔을 휘두르려 하다가 갑자기 왼팔 뼈가 부러진 게
생각나서 다시 오른쪽 주먹을 휘둘렀다.
마옥은 여전히 피하기만 하다가 아수라가 계속 쫓아오니 오른손에 든 먼지떨이로 자기 몸
뒤를 휩쓸었다. 먼지떨이에 아수라의 오른손이 감기자 마옥은 힘껏 낚아챘는데 아수라는 당
해내지 못하고 허공에 붕 떴다가는 손불이 쪽으로 날아갔다.
손불이는 마옥이 아수라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출가하기 전
에는 마옥과 부부간이었고 어려서부터 함께 무예를 배웠는지라 마옥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
었다.
그런데 아수라가 불사신공을 써가지고 머리를 손불이의 얼굴 쪽으로 향하고 날아올 줄 어찌
알았으랴. 그의 머리는 매초풍의 구음백골조 초수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머리여서 거기
에 얼굴이 맞부딪친다면 큰일날 판이었다.
깜짝 놀란 손불이가 먼지떨이를 휘두르며 옆으로 피했다. 아수라가 힘껏 오른팔을 잡아당기
자 먼지떨이가 끊어졌다.
"대단한 공력이군!"
마옥이 이렇게 칭찬하자 아수라는 마옥과 손불이가 자기를 해치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 도장, 그래 당신들이 오혈궁 도적들과 작당을 해서 주보를 훔치지 않았단 말이오?"
그 말에 마옥이 아연실색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빈도는 귀 방에서 주보를 도적 맞았다는 말을 처음 듣습니다. 이 거친 산에다 귀 방에서
주보를 묻었단 말이오?"
그 말을 들은 아수라가 한대웅 가까이 다가가서 속삭였다.
"내 보기엔 마 도장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소. 이 일엔 무슨 다른 곡절이 있는 것 같
아."
마옥이 한대웅한테 읍을 하였다.
"한 칠대님, 무슨 일이 생겼든 먼저 말씀을 똑똑히 해야지요."
한대웅이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열여섯 상자의 주보를 잃어버리게 된 전후 사연을 이야기했
다. 그러고 나서 의문에 찬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주보를 도적맞을 그 시각에 공교롭게도 악 공자와 구 도장이 나타나 우리들을 뜨락으로 끌
어내게 되었던 겁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오혈궁 놈들은 쉽사리 손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그
러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구처기가 화가 나서 말하였다.
"죄를 씌우려고 들면 구실을 만들지 못하겠소? 이 구 모는 악 공자를 찾아 헤매다 보니 언
제 그런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소. 믿어지지 않으면 악 공자에게 물어 보구려!"
구처기가 악처후를 가리켰다. 그러자 악처후가 쌀쌀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구처기, 당신은 잘못했다고 말하란 말이오. 당신이 그 탐욕때문에 오혈궁 놈들과 결탁한 줄
은 남은 몰라도 이 악 모는 똑똑히 알고 있단 말이오."
구처기가 그 말을 듣자 대로하였다.
"악처후, 네 놈이 감히 허튼소리를 하다니……!"
구처기가 장검을 뽑아 드니 악처후가 빈정거렸다.
"네 놈이 사람을 죽여 증거를 없애려구? 좋아, 이 악 모가 반격하지 않을테다."
마옥이 다가가서 악처후를 흘겨보았다.
"악 공자, 그 주보는 개방의 호한들이 의연금을 모집해 가지고 금나라를 항격하는 송나라
군대에 자금으로 제공하려는 보물들이오. 이것은 국가적으로도 중대한 일일 뿐 아니라 전진
교의 명성에도 관계되는 일인데 당신이 함부로 허튼소리를 해서야 되겠소? 나는 전사님 유
언에 비추어 당신을 죽여 버려야겠소."
마옥의 말은 길지 않았고 언성 또한 높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은 악처후는 머리에 벼락이나
맞은 듯이 멍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철선서생 하종이 끼여돈었다.
"마 도장, 당신이 악처후를 말도 못하게 하면 우리가 어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소.?"
마옥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였다.
"여러분들이 여전히 의심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 전진교에서 여지껏 비밀로 붙여 오던 일을
이야기하여야겠소."
한대웅이 그 말에 대답하였다.
"우리는 전진교의 비밀까지 알 생각은 없소. 그저 마 도장께서 우리가 묵어 있는 집 뜨락에
뛰어든 연유만 얘기해 주면 되오."
마옥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한 칠대님께 감사하게 생각하오. 이 소요공자는 우리 전진교와는 깊은 관계를 가
진 사람인데 그 이야기는 상세히 하지 않겠으니 양해를 바라오. 전진칠자는 선사님의 명을
받고 되도록 악처후의 목숨을 지켜 주기로 되어 있소. 오혈궁 제자들이 악 공자를 잡아죽이
려 하자 이 사람이 예까지 도망해 오게 된 거요. 우리 일곱 사람은 그 소식을 듣고 몇몇 젊
은이들더러 도관을 지키게 한 뒤 지금까지 악 공자의 행방을 찾고 있던 중이오."
구처기가 한마디 덧붙였다.
"빈도가 다행히 악 공자를 따라잡았을 때 우연히 여러분과 만나게 되었는데 여러분이 열여
섯 상자의 주보를 북쪽으로 호송해 가는 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하종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매초풍이 일부러 이간을 붙인 거로구만……. 괘씸한 년 같으니!"
제15장 끝없는 내란과 음모
가장 득의양양해 한 사람은 철시 매초풍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마차 안에서 노로의 곁에 앉아 잠을 자는 척하였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보드라운 몸은 자연스레 노로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때로는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칼이 노로의의 얼굴을 간지럽혔고 그때마다 여인의 향긋한 체취를 풍기곤 하였다.
그 황폐한 집은 그럭저럭 쓸 만한 집이었는데 초천의가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세 칸만 비가
새지 않도록 남겨두고 일부러 못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 집 안의 방마다 땅굴을 만들어
주보가 담긴 상자가 어느 방에 있든지 손쉽게 손쓸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땅굴에서 나와 한대웅 패들을 견제한 다음 그 틈을 타서 나무상자를 훔쳐가려 하였
다. 그런데 마침 악처후와 구처기가 뛰어들어 한대웅 등을 뜨락으로 끌어내었던 것이다. 그
리하여 매초풍은 나무상자를 지키던 육대 제자를 죽이고 쉽사리 나무상자들을 훔쳐갈 수 있
었으며, 또 이것을 이용해 개방과 전진교 사이에 이간을 시켜 싸움을 하게 만들었다.
개방과 전진교 사람들이 옥신각신 싸우고 있을 때 오혈궁 사람들은 벌써 사십여 리 밖으로
도망하였다.
휘뿜하니 새벽빛이 마차 안으로 스며들자 매초풍의 얼굴에는 발그레한 노을빛이 비쳐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매초풍은 태호에서 있은 일을 회상하였다. 그때 여소교가 선창에서 진현풍을 유혹하던 정경
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생각을 더듬으면서 천천히 옷깃을 젖히고 가슴을 풀어헤쳤다.
여인의 앞가슴이 노로의의 눈앞에 나타나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매초풍을 보지 않
으려고 하였으나 두 눈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마찬가지의 부드럽고 횐 살결이라고 하여
도 못생긴 여인과 미녀의 경우는 아주 다른 것이다. 미녀의 젖가슴은 각별히 사람들을 자극
하는 법이다. 노로의가 이를 악물고 속생각을 하였다.
'제기랄, 매초풍은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워. 내가 스무 살만 젊었어도. 아니 열 살만 젊었어
도 한번 덤벼들어 보겠는걸. 하지만 이젠 오혈궁의 못난 계집애들마저 날 본 척 만 척하지.'
그는 워낙 자기의 체신을 생각하여 스스로 여인을 탐하지 않고 여인이 자기를 따르게 되기
를 기다리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너무나 늙었고 온 얼굴에 주름살투
성이여서 만일 자기를 따르는 여인이 있다손 치더라도 아주 큰 결심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
었다.
그런데 지금 곁에 너무도 아름다운 미인이 있고 풍만한 젖가슴까지 자기한테 헤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큰 한숨을 내쉬면서 더 생각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매초풍한테
자기가 그녀를 가만히 훔쳐본 것이 들켰을 수도 있겠다 싶어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날이 환히 밝자 다섯 대의 마차가 관목 숲 속에 들어와 멈추었다. 노로의는 낮엔 쉬고 밤에
길을 가는 것으로 개방 제자들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노로의는 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송림 속에 들어와 청신한 공기를 마시자 각별히 몸에 생
기가 돌고 상쾌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니 마차와 아주 멀어졌
다. 노로의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문득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물 속에는
한 늙은이의 볼품없는 얼굴이 내비쳤다. 그는 몹시 기분이 언짢고 서글퍼졌다.
그때 갑자기 등뒤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났다. 몸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잔뜩 긴장한 노
로의는 잠시 후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그는 마차 안에서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던 바로 그
향기라는 걸 알았다. 그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발자국 소리가 멎으면서 노로의는 물에 비친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런 미소까지 담고 있었다.
매초풍이 노로의 가까이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큰사형, 뭘 그리 생각하고 계셔요?"
노로의는 사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의 가슴은 젊은이
들처럼 세차게 뛰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그는 속으로 자기는 이젠 쓸모 없는 놈이라고 한탄하면서 말을 이었다.
"하룻밤새 길을 다그치느라 피로했겠는데 왜 가서 쉬질 않나?"
"난 지금 생각이 많아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큰사형님이 이런 연세에도 가족이 없는 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 같은 사내한테 어느 여인이 시집오려 하겠나?"
"큰사형님은 세상에 소문난 영웅 호한인데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시집오려 할까요?"
매초풍이 눈웃음을 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끼며 앉았다. 노로의가 흐뭇해 하며 대
꾸했다.
"나도 젊었을 때야 오혈궁의 처녀들이 모두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야단이었지. 허 참, 그땐
참 살맛 났었는데……."
"휴, 그때 제가 오혈궁에 있지 않았으니 그렇지 오혈궁에 있었더라면……."
매초풍이 노로의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난 영웅 호한을 제일 좋아해요."
노로의의 팔꿈치가 저도 모르게 매초풍의 젖무덤에 닿자 그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
는 용기를 내어 얼굴을 그녀한테로 돌리면서 물었다.
"임잔 날 영웅 호한으로 생각하나?"
매초풍은 그가 낚시에 걸려들자 노로의의 품에 살며시 안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큰사형, 난…… 난 정말 당신을 좋아해요. 헌데 당신은 날 좋아하지 않는군요."
노로의는 미인이 자기 품에 뛰어들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매초풍의 입술과 볼에
마구 입을 맞춰 대면서 아주 자연스레 손으로 여자의 허리띠를 아주 익숙한 솜씨로 풀어헤
쳤다.
두 사람은 송림 속에서 한차례 격렬하게 정사를 치렀다. 매초풍은 노로의가 약간 경계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소녀공을 쓰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신중하지 못해 여지껏 애
써 온 보람을 일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노로의는 만족감을 느끼며 풀밭에 드러누운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매초풍은 옷으로 아름
다운 몸매를 살짝 가린 채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노로의가 눈을 떴다. 그는 매초풍이 아직 옷도 입지 않은 것을 보자 탐욕스런 눈을
이글거리며 또다시 달려들었다. 노로의는 이번엔 모든 경계심을 깡그리 털어 버리고 아주
방종하게 나왔다. 그의 변화를 읽은 매초풍은 소녀공을 썼다.
노로의는 즉시 진기가 치솟는 노도처럼 자기의 하체에서 콸콸 흘러 나가는 것을 느끼고 그
것을 제지하려고 애썼으나 그에 못지않은 힘으로 온몸을 휘감는 쾌락에 어찌하는 수가 없었
다. 매초풍은 아무런 연민과 동정심도 없이 소녀공을 힘껏 써서 반시진도 안 되는 사이에
노로의가 반생 동안 쌓아 올린 원양진기를 칠팔 할이나 빨아들였다.
매초풍은 일이 끝나자 훌쩍 일어나 알몸으로 시냇물에 들어섰다. 그녀는 손으로 물결을 갈
겼다. 그러자 즉시 그 힘에 놀라 죽은 고기 세 마리가 물 위로 떠올랐다.
매초풍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이처럼 계속 나아간다면 이 년도 못 되어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이 으뜸가는 네 사람의
고수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을 거다.'
기진맥진해 축 늘어져 있던 노로의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더니 일어나 앉았다. 그는 자기가
알몸인 것을 발견하고는 얼른 옷을 입었다. 그는 훌쩍 일어나려 했으나 다시 넘어지고 말았
다.
매초풍이 다가와서 부축하며 말하였다.
"큰사형, 조심하세요. 그러다가 상하시겠네요."
노로의가 속으로 생각을 추스렸다.
'이상한 일이군. 내 몸동작이 왜 이처럼 둔해졌지?'
그는 방금 매초풍과 운우지정을 나누면서 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가던 것이 생각
났다. 그러자 그는 매초풍을 힘껏 떠밀면서 물었다.
"매 사매, 임자가 내게 무슨 사공(邪功)을 사용한 게 아니냐?"
매초풍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큰사형님,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계시네요. 제가 무슨 사공을 알고 있겠어요. 아마 착각이
드신 게로군요."
강호에서 반생을 보내면서 산전수전 다 겪는 노로의인지라 감언이설에 쉽사리 속아넘어갈
리가 없었다.
"못된 년 같으니. 네 년이 감히 사공으로 이 늙은 것의 진기를 빨아들이다니. 죽고 싶어 환
장을 했구나!"
노로의는 대로하여 곧바로 오혈장법의 '개산파석(開山破石)' 초수를 쓰며 장을 날리기 시작
했다.
매초풍은 그가 공력의 삼 할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지라 내력을 쓰지 않
고 암굴 속에서 도소정한테서 배운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로 맞섰다. 그녀는 몸을 뒤로 젖
히고 왼손을 내밀어 그의 장을 막으면서 오른팔로 그의 팔꿈치를 올려쳤다.
노로의는 팔꿈치가 부러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매초풍이 살짝 떼어
밀었는데도 그는 일여덟 발자국이나 밀려갔다. 그는 자기의 내공이 태반이나 줄어든 것을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노로의는 실패를 무릅쓰고 또다시 달려들면서 장으로 매초풍의 왼쪽 태양혈을 후려
갈겼다. 매초풍이 뒤로 몸을 비키면서 방장으로 그의 오른팔을 막았다. 노로의는 매초풍이
그의 팔을 잡고 내리누르는 바람에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매초풍이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혈장법이 이처럼 쓸모 없게 되었으니 오혈궁 놈들은 강호에서 점차 견디기 어려울 거
야."
노로의가 일어나 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임잔…… 임잔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
"오혈궁에는 궁주만이 이 초수를 알게 한다는 규칙이 있다고 하던데 그렇지요? 큰사형, 제
말이 옳은가요?"
노로의가 놀란 마음으로 생각했다.
'도 궁주가 당년에 궁주 자리를 아무한테도 물려주지 않았으므로 묘상이 틈을 보아 도소정
을 감금하고 궁주가 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저 년이 암암리에 도 궁주가 세워 놓은 궁주
란 말인가?'
매초풍은 그가 의심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입을 열었다.
"비록 나는 오혈궁에 있지는 않았지만 오혈궁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어요. 노로
의, 당신은 오혈궁에 대하여 네 가지 죄를 지었단 말이에요."
노로의가 정신을 가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못된 년 같으니. 내가 돈을 테니 어서 말해 보아라!"
"도 궁주가 갑자기 사망하자 묘상은 궁주의 보좌를 차지할 생각이 났지요. 당신은 이 일을
다 알면서도 제지하지 않았으니 이게 첫번째 죄이지요. 당신은 묘상이 궁주의 자리를 찬탈
하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이게 두 번째 죄란 말입니다. 당신은 또 묘상과 함께 궁주의 딸 도
소정을 해쳤는데 이게 세 번째 죄예요. 노로의, 그래 죄를 시인하나요?"
"임……임잔 어떻게…… 이 일을 알고 있나?"
노로의는 벌벌 떨면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훔칠 생각도 못했다.
매초풍이 코방귀를 한번 뀌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네 번째 죄상은 당신이 본 궁주한테 폭행을 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
으로써 증거를 없애 버리려 한 것이지요."
노로의가 깜짝 놀라서 더듬거리며 물었다.
"당……당신이 과연 궁……궁주십니까?"
"난 궁주가 아니에요. 그래 또 누가 감히 궁주로 자처할 수 있단 말이에요?"
매초풍은 노로의를 쏘아보고 나서 준엄하게 말했다.
"노로의, 네 놈이 네 가지 죄를 지었으니 용서받을 수 없으며 죽어야 마땅하다!"
노로의는 묘상과 짜고들어 오혈궁 궁주의 자리를 찬탈한 일을 아무도 모르는 줄 알고 있었
다. 오늘 매초풍이 그 내막을 손금처럼 환히 알고 있자 그는 겁이 나서 혼백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노로의는 땅에 풀썩 무릎을 꺾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지은 죄는 죽어 마땅하오니……, 궁……궁주님께서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매초풍은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지만 정색을 하고 말했다.
"본 궁주가 네 놈의 진기를 좀 빌려 쓰면 안 된단 말이냐?"
"저의 온몸은 궁주의 것입니다. 저는 궁주를 위해서라면 칼산에도 오르고 불바다에도 뛰어
들겠습니다."
"본시 내가 나의 공력으로 널 죽이는 것쯤은 여반장이라는 걸 알아야 해, 안 그래?"
"그렇지요.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네가 도 궁주를 따라 여러 해 일을 했고 또 나이가 많은 걸 감안하여 본 궁주
는…… 에, 차마 널 죽일 수 없는 거야."
노로의는 살아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감격하여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매 궁주께서는 절 다시 살아나게 한 부모님이십니다. 저는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네가 감격을 금할 수 없다고 하면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아느냐. 죽지 않으려고 그따위 말
을 하는 거지. 어서 눈물을 닦으란 말이다."
매초풍은 그의 아첨하는 말을 듣자 비록 내심의 말은 아닐지라도 기분은 좋았다.
"당신이 나한테 아직 쓸모가 있으므로 죽이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이 일을 조금이라
도 누설한다면……."
매초풍은 장으로 시냇물을 내리쳤다. 그러자 굉장한 소리를 내며 물이 사처로 날리면서 죽
은 물고기 몇 마리가 떠올랐다.
"본 궁주가 이미 격산타우(隔山打牛) 초수와 벽공장(壁空掌)을 익혔으므로 나의 최심장은 이
전보다 더욱 무서운 거예요. 나의 뜻을 알 만하겠지요?"
"알 만합니다. 제가 만일 비밀을 조금이라도 누설한다면 벼락을 맞아 죽겠습니다."
"그 대답에 난 만족해요. 허 참, 묘상이 뭐가 좋아 당신은 그런 놈을 따른단 말이에요?"
매초풍은 말문을 딴 데로 돌려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전 그 놈이 심지가 바르지 못하다는 걸 벌써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칼자루를 잡고 있는
놈한테 제가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음, 그런 일이 있었나요? 어서 말해 봐요."
노로의가 잠시 망설이자 매초풍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는 그녀의 심상치 않은
눈초리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당년에 소궁주 도소정도 미인이었지만 소궁주의 시중을 드는 하녀
무청의(武靑衣)도 그녀에 비하여 짝지지 않는 미인이었답니다. 저도 그때는 혈기가 방장한
장년이었던지라 도소정은 비록 선녀처럼 아름다웠으나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무청의를 바싹
따랐지요."
"당신도 그처럼 풍류를 좋아하는 사내였군요."
노로의가 약간 얼굴을 붉혔다.
"무청의도 절 맘에 들어하여 우린 은밀히 사랑을 속삭였지요. 그런데 뜻밖에 이 일이 묘 궁
주…… 아니 묘상한테 들킬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자가 절 위협하면서 자기 말을 고분고
분 듣지 않으면 도소정한테 일러 바치겠노라고 을러대더군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오혈궁에서도 남녀 제자간의 거래를 금지하
는 것도 아닌데 두려워할 게 뭔가요?"
"도소정은 무청의를 따르는 사내를 친히 죽인 일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 뒤로 자기의 남제
자들이 무청의와 절대 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하였지요. 그 당시 전 영문을 몰랐는데 그 뒤
도소정이 묘상한테 감금당한 뒤에야 그녀가 사내를 좋아하지 않고 같은 여색을 각별히 좋아
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매초풍이 얼떠름해진 기색을 지었다.
'도소정이 음양이 전도된 여인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
노로의가 말을 이었다.
"제가 묘상의 비밀을 알게 되지 못했던들 도소정이라는 이 선녀 같은 여자가 기실은 괴물이
었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엉? 묘상한테 또 무슨 비밀이 있나요?"
"매 궁주님께서는 묘상이 거세한 사람인 줄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그 말에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였다.
"묘상의 난봉기는 아마 소요공자보다도 더 했을 겁니다."
"그래서 엽첩비란 여인이 자정신침을 들고 오혈궁에 찾아가 묘상과 결판을 내려고 드는 바
람에 도소정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 여인을 쫓아내는 일까지 생겼다지요."
"매 궁주께서는 그 일까지도 아시는군요."
"그래요. 아마 당신은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야만 할 거예요."
내심 화들짝 놀란 노로의는 속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다.
"묘상은 도소정과 결혼하게 되면 아주 행복하게 될 줄로만 알았던 겁니다. 하지만 유감스럽
게도 그는 도소정이 여색만 좋아하는 괴물일 줄은 몰랐지요. 결혼한 그날 밤에 묘상은 도소
정한테 칼로 거세를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보름 동안이나 묘상은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
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그가 도소정의 미모에 반해서 밤낮 그 짓을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더
랬지요. 참,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매초풍이 도소정의 행위를 괴이쩍게 생각하며 물었다.
"사내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묘상한테 시집갈 건 뭔가요?"
"묘상이 거세당한 처지이면서도 왜 절정공자의 미혼처인 유정아를 빼앗아다가 일곱째 부인
으로 맞아들였을까요? 그걸 생각하면 도소정의 심사를 알 수 있지요."
"그렇지, 묘상이 명성이 자자한 탁운백의 미혼처를 빼앗아 간 건 자기가 결코 병신이 아니
라 정력이 왕성한 사내라는 걸 온 세상에 알리자는 거겠지요. 마찬가지로 도소정이 묘상한
테 시집간 건 사람들의 이목을 가려 자기의 추악한 일이 남한테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
지요."
"매 궁주께선 이제 묘상이 무엇 때문에 자기의 처를 그처럼 가혹하게 대처하게 되었는지를
아시겠지요. 휴, 천하의 일이란 다 인과관계가 있는 거지요."
얘기를 다 듣고 난 매초풍은 참지 못하고 키드득 웃고 말았다.
"당신은 마치 큰 섭리나 알고 있는 스님처럼 꾸며대는군요. 어서 가 보세요. 이젠 시간도 제
법 지났으니 이자의네들이 의심을 할지 모르겠어요."
노로의는 매초풍이 비웃자 내심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
'일이란 이렇게 손쉽게 뒤집히는 것인가? 이젠 매초풍이 나와 마음껏 풍류를 즐길 수 있는
매 사매가 아니로구나.'
두 사람은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매초풍이 입을 열었다.
"마차에 돌아간 다음부터는 여전히 큰사형 행세를 하세요. 당신은 내 앞에서 절대로 굽실거
려서는 안 돼요."
"명심하겠습니다!"
"오혈궁에 돌아간 뒤 당신은 수시로 나의 명령대로 해야 하며 내가 다시 궁주의 자리를 빼
앗는 걸 도와야 해요."
"묘상이 중상을 입었으므로 그자를 죽이는 것쯤이야 여반이지요. 매 궁주님에선 시름을 놓
으십시오."
"내가 근심하는 건 묘상이 아니라 초천의와 여혈의 두 사형이에요."
"초천의는 비록 음험한 자이기는 하지만 오혈궁에 대해서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지요. 만일
매 궁주께서 진정한 궁주인 것을 알게 된다면 절대 간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시끄러운
자는 여혈의인데 그자는 묘상이 친히 발굴시킨 자이고 무공도 대단하니 방법을 잘 강구하여
대적해야 할 겁니다."
"노로의, 오혈궁에서는 여혈의한테 다른 무공을 가르쳐 준 신비한 사부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나요?"
"아직 모르고 있지요. 하지만 그자의 사부님은 꼭 고수일 겁니다. 그자가 일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무공이 대단히 늘어 묘상과 어슷비슷한 수준에 이른 것만을 보아도 똑똑히 알 수 있
지요."
노로의는 약간 생각을 더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매 궁주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혈의가 보름 전에 오혈궁을 떠나 고향
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틈을 타서 묘상을 죽여 버리고 아씨께서 궁주의 지위를
이어받은 뒤이면 여혈의가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대세가 이미 결정되어 그로서도 어찌는 수
가 없을 겁니다."
이윽고 그들은 마차로 돌아왔다. 매초풍은 여전히 노로의를 큰사형으로 대접하였고 노로의
도 제법 큰사형의 노릇을 틀지게 해 초천의, 이자의 등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였다.
저녁 무렵 오혈궁 사람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날로 그들은 오혈궁의 높은 산밑에 당도하였다. 노로의가 제자들을 독촉하여 열여섯 상자
의 주보들을 무사하게 오혈궁까지 날라갔다.
오혈궁 궁주 묘상은 병상에 누운 채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고 공을 세운 사람들마다 상을 내
리고 매초풍에 대해서는 각별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매초풍은 뭇사람들과 작별한 뒤 자기의 숙소로 돌아왔다. 갑자기 누구인가가 뒤에서 불렀다.
"언니!"
머리를 돌려 보니 소궁주 엽청청인지라 매초풍이 웃는 얼굴로 말하였다.
"동생, 무슨 일이 있나?"
엽청청이 곁에 다가와 망설이는 투로 말하였다.
"언니, 난…… 한사람에 대하여 알아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 누구를 알아보려나?"
엽청청이 머리를 수그린 채 앵두 같은 입술을 슬며시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하…… 하 공자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그래요."
"하 공자라니 어느 하 공자 말이야?"
"철선서생 말이에요."
"철선서생 하종 말이야? 동생이 그 사람을 알아서는 뭘 하려구? 아, 알 만해. 동생이 그 사
람한테 반한 모양이군."
엽청청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언니 함부로 말씀하지 말아요. 난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매초풍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대었다.
"이런 급해 하는 꼴 좀 봐. 언닌 동생과 농담한 것뿐인데. 그래 그 사람의 무얼 알고 싶어서
그래?"
"주보를 호송하여 오는 사람들 가운데 하 공자가 있었다고 그러더군요. 언니네들은 무서운
싸움을 치렀는데 혹여 그분이 상하지는 않았나요?"
매초풍이 눈알을 굴리더니 한탄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였다.
"웬일인지 그 철선서생이 개방 사람들 편에 서 있더군. 그때 궁노를 마구 쏘아댔는데, 휴,
그 사람은 살을 세 대나 맞았어. 그런데 그 살촉에는 극독을 발라 뒀기 때문에 아마 벌써
죽었을 거야……."
엽청청은 그 말에 대경실색하며 낯빛을 흐리더니 떨리는 소리로 말하였다.
"그 사람…… 그 사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하종은 우리 오혈궁과는 철천지 원수여서 죽어 마땅한데 동생은 왜 그런 사람 때문에
우나?"
"하 공자, 난…… 당신한테 미안해요."
엽청청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을 하였다.
매초풍은 엽청청이 이처럼 슬퍼할 줄은 몰랐던지라 농담이 지나쳤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엽청청을 끌어안으며 말하였다.
"됐어, 울지 말어. 하종은 안 죽어."
"독전(毒箭)에 피가 묻기만 하면 목구멍이 졸아붙는데요. 그분은…… 분명 죽었을 거예요."
"그 사람은 안 죽어."
매초풍이 웃으며 말하자 엽청청은 눈물 어린 얼굴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 사람이 살을 맞고도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니까 우린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었지. 후에
알아보니까 철선서생은 장삼 속에 호신연갑(護身軟甲)을 입어 칼과 창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자 엽청청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런 걸 제가 왜 몰랐을까요?"
"이런 멍청이 같으니. 네가 그와 몇 번이나 만났다고 그러니. 그 사람이 너한테 털어놓지 않
고 네가 그 사람 의복을 벗겨 보지 않은 다음에야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냐?"
엽청청은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움에 눈물이 가득 묻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언닌 또 허튼소릴 하시네요."
매초풍이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부추겼다.
"내가 만일 그 사내를 좋아한다면 난 직접 찾아가서 속마음을 털어놓겠어. 그런데 계집애들
이란 자기가 사내를 좋아하면서도 그걸 남이 알까 봐 두려워 그저 맘속으로 애만 태우거
든."
"언니, 언니가 말씀하시는 계집애들이란 나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테죠?"
매초풍이 깔깔 소리내어 웃었다.
"이곳에 우리 자매 두 사람밖에 없는데 내가 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면 누굴 두고 하는
말이겠니?"
엽청청이 눈을 깜빡거리더니 정색을 하였다.
"언닌 오해하고 계셔요. 하 공자는 의로운 사람이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절 구해 주었고, 또
저 때문에 우리 아버지 목숨까지 해치지 않고 살려 주었거든요. 저는 그분한테 감격해서 그
럴 뿐 다른 뜻은 없어요."
"다른 뜻이 없다면 얼굴은 왜 빨개지는 거야?"
엽청청은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면서 종알거렸다.
"그런 일이 아니란데두요. 언니, 날 놀리지 마세요!"
"좋아, 내 놀리지 않으마. 하지만 이 언니한테 똑똑히 말해 줘야 해. 동생이 철선 공자한테
반한 게 아니라면 사형 여혈의한테는 반했겠지?"
엽청청은 얼굴이 새하얗게 되더니 세차게 도리질했다.
"아니, 아니에요. 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여 사형은 풍채가 늠름한데다가 무공도 대단한데 동생은 왜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
엽청청은 머리를 숙인 채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전…… 전 그가 두려워요. 어쩐지 그 사람은 좋은 사람 같지 않아요. ……언니, 여 사형이
고향에 돌아가기 전에 아버지한테 혼사 문제를 꺼낸 사실을 아시나요?"
"그래 궁주님께선 대답하셨어?"
엽청청은 눈물을 머금고 머리를 끄덕였다.
"여 사형이 돌아오면 결혼시켜 주겠다고 아버님께서 대답하셨어요."
"그럼 왜 궁주님께 싫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니?"
엽청청이 머리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중상을 입으셨는데 전 근심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또 여 사형은 절 구해
준 일도 있으니까요……."
매초풍은 비록 차갑고 잔인한 여자이긴 하였지만 엽청청에 대해서는 친자매간의 감정을 갖
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불평을 토로하였다.
"동생, 그렇게 억울한 노릇을 할 게 뭔가? 싫은 사내한테는 시집가지 말아야지."
엽청청이 눈길을 내리깔며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천하의 여인들이란 모두 부모의 명을 따르기 마련인걸요. 자기가 좋아하건 안하건 상관없
이 말이에요."
"여인도 사람이야. 결코 사내의 노리개가 아니란 말이야. 넌 마땅히 이 언니처럼 처신해야
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사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매초풍은 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엽청청을 오혈궁에 놔두면 내가 묘상을 죽이게 될 때 우리 사이에 감정이 상하게 될 거다.
여혈의가 돌아오면 내가 청청의 일을 가지고 그자를 위협하기 유리하게끔 만드는 게 필요
해. 그럼 그자가 부득불 천산의 마귀할멈을 나한테 찾아주게 될 거다.'
매초풍은 갑자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동생, 나한테 방법이 하나 있는데 동생 마음에 들지 안 들지 모르겠군."
"어서 말씀하세요. 무슨 좋은 방법이 있나요?"
"산에서 내려가 이십 리쯤 되는 곳에 작은 시가지 하나가 있는데 정안성(定安城)이라고 불
러. 그곳에 '취붕객점(聚朋客店)'이란 곳이 있지. 만일 동생한테 담력이 있다면 도망해 가서
그곳에 있는 게 어때?"
"제가 도망치면 아버지에서 근심하실 텐데요. 전 아버님의 몸이……."
"일없어. 우리가 지금 주보들을 훔쳐 왔기에 궁주님께서 아주 기뻐하고 계셔. 그 일에 대해
선 이 언니는 다 방법을 댈 수 있어."
"일시 숨어 있을 수는 있지만 한평생 숨어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제가 숨어 있는다고 해서
아버님께서 생각을 고칠 리 만무해요. 아버님은 여 사형을 몹시 아끼고 여 사형도 저를 놓
치려 하지 않을 거예요."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니? 동생은 정안성의 취붕객점에 가서 조용히 숨어 있기만 하면 돼.
길면 반년이고 짧으면 한 달 동안이면 충분해. 이 언니가 동생을 데리러 갈 때면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처리돼 있을 거야."
"언니는 정말 그렇게 자신이 있나요?"
"이 언니가 언제 동생을 속인 적 있었나? 됐어. 어서 물건들을 챙기러 돌아가라구. 은냥과
값진 주보들을 되도록 많이 갖고 가는 게 좋아."
"언니 말씀을 명심하겠어요. 언니께서 꼭 책임져 주셔야 해요."
"시름을 놓으라니까. 취붕객점에 가면 네 이름을 이청청(李靑靑)으로 바꾸도록 하고 이 언니
가 찾으러 가기 전엔 그 누구도 만나지 말구."
"알겠어요."
엽청청은 될 듯이 기뻐하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매초풍은 오혈궁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 엽청청을 산 아래로 내려보냈다. 매초풍은
엽청청이 사라지자 다시 나무상자에 올라 오혈궁에 내렸다.
"어서들 나오너라!"
매초풍이 명령하자 나무 뒤에서 네 제자가 나와 인사를 하였다.
"똑똑히 기억해 둬. 누가 만일 묻거든 소궁주 혼자서 갔다고 말해야지 날 끄집어 넣어서는
재미없을 줄 알란 말이다!"
네 제자는 매초풍이 오혈궁을 위해 큰 공을 세우고 신분도 지난날과는 다른데다가 손가락으
로 대번에 나무에 다섯 개의 구멍을 뚫던 일을 생각하고는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매초풍은 네 사람에게 은자 열 냥씩을 찔러 준 뒤 오솔길로 해서 자기의 숙소로 돌아갔다.
매초풍의 앞에 갑자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언뜻거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변홍의였다. 몽롱한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 하여 보였으며 눈에 정기라고는 없고 머리카락은 마구 흐
트러져 실혼낙담(失魂落膽)한 몰골이었다.
매초풍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건가요?"
그녀에게로 다가온 변홍의는 그녀의 양어깨를 와락 잡았다.
"아씨, 난 당신을 생각하느라 혼났어요."
변홍의의 얼굴을 가까이 대하자 매초풍은 역겨운 생각이 들어 그의 두 손을 홱 밀쳤다.
"난 몹시 지쳤으니 귀찮게 굴지 말아요."
그녀가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고 하자 변홍의가 다시 막아섰다.
"아씨, 당신은 이젠 날 좋아하지 않는 거죠?"
"비키라니까요! 이젠 내가 본 궁의 사저임을 잊지 말아요. 당신은 날 좀 존중하란 말이에
요!"
변홍의가 이를 악물더니 코방귀를 뀌었다.
"이제 보니 아씨는 날 놀린 셈이었구료. 나의 진기를 다 빨아 들이고 나서는 헌신짝처럼 차
버린다는 말이지? 흥, 그렇게 쉽게는 안 될걸!"
"변홍의, 방자하게 굴지 말아요!"
변홍의는 그 말을 들은 척만 척하고 매초풍을 껴안더니 얼굴에 마구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화가 나서 그를 와락 떠밀면서 소리 질렀다.
"변홍의, 당신이 감히 이런다면 내가 지난날 정분을 다 팽개쳐도 나무라지 말아요!"
변홍의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성난 어조로 소리쳤다.
"좋아요. 당신은 참 사나운 여자예요! 난…… 난 궁주님한테 가서 고발하고 말해야!"
변홍의가 뒤돌아서자 매초풍이 몸을 훌쩍 날려 변홍의 앞에 와 서면서 물었다.
"변흥의, 당신은 뭘 고발하겠다는 거예요?"
"난 당신이 소궁주를 꾀어 내어 보내고 본 궁의 제자들한테 뇌물을 준 걸 일러바치겠소!"
대경실색한 매초풍이 속궁리를 하였다.
'이 변홍의가 나한테는 큰 우환거리야. 가만히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매초풍은 갑자기 얼굴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로 한발 다가섰다. 그러더니 그녀는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가지고 변홍의의 정수리를 끌어 잡으려 하였다. 변홍의가 급히
두 손으로 막으려 하였으나 이제는 무공이 퍽 약해져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섯 손가락이
두개골을 뚫고 뇌장 깊숙이 박혔다. 그는 비명 한마디 내지르지 못했다.
매초풍이 손가락에 묻은 피를 닦고 나서 변홍의의 시체를 풀 숲에 감추어 놓았다. 오혈궁에
서는 매일 아침마다 조련을 하면서 사람 수를 점검하게 되는데, 만일 변홍의가 실종된 것이
발견되기만
하면 사처로 수색할 것이 뻔하였다.
매초풍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노로의의 사가부(邪哥俯)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이튿날 오경(五更)이 되자 산마루 위에는 벌써 아침 햇살이 비끼었으나 오혈궁은 여전히 자
욱하니 운무로 덮여 있었다.
묘상은 예전 같으면 그전에 침상에서 일어나 본궁 제자들의 아침 훈련을 순시할 것이겠지만
지금은 중상을 입은 몸이라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때 시중을 드는 여제자가 문밖에서 알렸다.
"궁주님, 큰사형님과 사저님께서 만나 뵈려 하옵니다."
침대 곁을 지켜 섰던 다섯째 부인이 급히 문 옆으로 와서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궁주님께선 아직도 주무시고 계신다. 좀 후에 오도록 해라."
"급한 일이 있어 궁주님께 꼭 알려야 한답니다."
다섯째 부인이 살며시 묘상을 깨웠다.
"큰사형과 매 사제가 급한 일로 만나겠답니다."
묘상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지라 웃는 얼굴로 말하였다.
"들어오게 하오."
이윽고 노로의와 매초풍 두 사람이 들어오자 묘상이 물었다.
"두 분에서는 무슨 급한 일이 있나?"
매초풍이 침대 곁으로 다가들며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궁주님, 당신은 이제 제자들을 거느리고 강호를 넘나들 수 없게 되었으므로 우리 둘은 지
금 누가 그 자리를 물려받으면 좋겠는가를 상론하는 중이에요."
묘상이 어리벙벙한 기색으로 물었다.
"매초풍, 임잔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건가?"
매초풍이 방종하게도 묘상의 얼굴을 툭툭 치며 말했다.
"묘상, 그래 내가 농담하고 있는 것 같나요?"
묘상이 깜짝 놀라 노로의를 건너다보면서 소리쳤다.
"로의! 어서 저 년을 붙잡게! 저 년이…… 무례하기 그지없구나!"
그러나 노로의는 자기에 대한 묘상의 커다란 은총을 생각하여 고개를 푹 숙이곤 있었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그래 반란을 일으킬 작정이냐?"
다섯째 부인이 달려와 묘상의 앞을 막아서며 매서운 눈길로 매초풍을 쏘아보았다.
"못된 년 같으니! 네 년이 감히 궁주님께 이토록 무례하게 굴수 있단 말이냐? 어서 썩 나가
지 못할까!"
매초풍은 표정이 험악해지더니 갈고리 손으로 다섯째 부인의 정수리를 끌어잡아 방 한 귀퉁
이에 내동댕이쳤다. 매초풍이 손가락에 묻은 피를 이불에 닦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묘상, 죽고 싶지 않거든 어서 궁주의 신물인 오혈도를 내놓아라!"
묘상이 노로의를 흘겨보며 소리 질렀다.
"임……임잔 그래 저 년이 허튼 짓을 하도록 내버려둘 셈인가?"
노로의가 머리를 숙인 채 대답하였다.
"당신은 아직 모르시는군요. 철시는 이미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고 있소이다. 그
러니 저분이야말로 오혈궁의 궁주입니다."
그 말에 묘상은 아연실색하였다. 매초풍이 다섯 손가락을 묘상의 정수리에 갖다 대고 을러
댔다.
"그래 오혈도를 안 바칠 셈이냐?"
다섯째 부인이 죽은 비참한 꼴을 본 묘상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밀실에서 오혈
도를 꺼내 오게 했다.
또한 묘상은 매초풍의 협박에 못 이겨 통고문(通告文)을 써서 매초풍이 진정한 궁주라는 것
을 승인하고 자기가 음모를 꾸며 궁주 자리를 빼앗은 변절자라는 것을 오혈궁 문하의 사람
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매초풍과 노로의는 묘상을 들것에 담아 가지고 암동(岩洞) 밖으로 나왔다. 영문을 통 모르는
뭇제자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매초풍의 허리에 오혈도가 있고 매초풍이 묘상에게 통고문을
넘겨 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묘상은 제자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고 나서 친히 통고문을 읽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도 궁주님의 은총을 입어 오혈무공을 배웠고 소궁주 도소정에게 장가를 들
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도소정을 해치고 궁주의 자리를 찬탈하였
으니 그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소이다. 오늘 도 궁주님의 유언으로 매초풍이 오혈궁의 궁주
자리를 물려받게 됨을 알립니다. 부끄러운대로 이 묘상은 궁주의 자리를 매초풍한테 넘겨주
어 본 궁의 대업을 이어 나가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통고문을 읽고 난 묘상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초천의가 달려와 땅바닥에 엎드리며 큰소리로 물었다.
"묘 궁주, 이게 웬일이오니까? 매초풍이 당신을 협박한 것이 아니옵니까?"
그는 매초풍을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묘상이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눈을 감은 채 탄
식하였다.
"천의, 본 궁주는……."
매초풍이 손가락을 묘상의 정수리에 얹자 묘상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매초풍이 입을 열었
다.
"초천의, 나야말로 진짜 궁주이니라. 임자는 나에게 절을 올리도록 하라!"
초천의가 코방귀를 뀌며 일어서더니 노로의를 향해 말하였다.
"큰사형, 이게 대체 웬일입니까? 왜 하룻밤 사이에 철시가 진정한 궁주라고 하는 겁니까?"
"오로지 궁주만이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게 한다는 본 궁의 규칙이 있네. 사제도
그걸 알고 있겠지?"
초천의가 머리를 끄덕 이면서 대답했다.
"그 규칙이야 본 궁의 상하가 다 똑똑히 알고 있지요."
"문제는 묘상이…… 묘상이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모르고 있다는 걸세."
그 말을 들은 뭇제자들이 깜짝 놀라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초천의가 다시 물었다.
"묘 궁주, 그게 …… 참말입니까?"
묘 궁주는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십여
년 동안이나 묘상이 이런 사실을 속이고 있을 줄 몰랐던 그들은 배신감에 마구 욕설을 퍼부
었다.
초천의가 놀란 기색으로 매초풍한테 물었다.
"철시, 그럼 당신은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배웠단 말이오?"
"그래, 그 초수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도 궁주님께서 나한테 친히 전수해 주었지."
초천의가 공지로 달려나와 칼을 뽑아 들더니 소리를 질렀다.
"좋다! 철시, 임자가 오혈도법을 이길 수만 있다면 이 초 모가 복종하고 임잘 궁주로서 존중
하겠다!"
뭇제자들도 소리 질렀다.
"옳습니다. 말로만 들어서는 믿을 수 없으니 눈으로 보아야겠습니다!"
뭇제자들의 시선이 매초풍의 몸에 집중되었다. 매초풍이 오혈도를 절반쯤 뽑다가 칼집에 도
로 꽂아 넣더니 입을 열었다.
"병장기란 사정이 없는 거야. 본 궁주는 초천의를 해칠 생각이 없어. 이렇게 하지. 초 사형
은 오혈장법을 쓰고 본 궁주가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를 쓰기로 하지!"
뭇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부하를 아끼는 매초풍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초천의는 칼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매초풍이 다가오자 초천의는 그녀가 멈춰 서기를 기다
리지 않고 대번에 오혈장법 중의 '발운견일(拔雲見日)'이란 초수를 쓰면서 매초풍의 왼쪽
태양혈을 장으로 후려갈겼다.
매초풍은 초천의의 장이 세 치도 못 되게 가까워지자 갑자기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오
른손을 뻗쳐 상대방의 팔을 잡음과 동시에 왼손으로 초천의의 팔꿈치를 드세게 올려 밀었
다.
연관된 동작이 마치 번개처럼 신속하여 단 한 합에 초천의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매초풍이 손을 놓고 두 걸음 물러섰다.
"초 사형, 상하지 않았나?"
초천의가 일어나서 오른팔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매초풍이 사정을 봐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난 필시 오른팔이 부러지고 말았
을 거다.'
그러나 초천의는 승복할 수 없었는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오혈장법 가운데서 가장 위력이
있는 '질풍팔타' 초수로 쌍장을 흔들었다. 그것은 곧 팔장(八掌)으로 변하고 그 팔장은 또
육십사 방향으로 장을 내뻗었다.
하지만 매초풍은 조금도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도소정이 그녀한테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
를 배워 줄 때 '질풍팔타'에 대하여 각별히 지적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매초풍은 그대로 훌
쩍 뛰어 오르더니 손은 앞으로 향하고 발은 뒤로 향하고는 화살처럼 장의 그림자의 중심으
로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육십사 장은 그녀의 몸 밖에서 움직여 그녀의 몸을 조금도 다칠
수 없게 되었다.
초천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종래로 질풍팔타 초수에 이처럼 큰 구멍이 나 있으리라고는 생
각지 못하였다. 만일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매초풍의 쌍장에 얻어맞기 십상이었다. 그는
급히 쌍장을 철회하면서 뒤로 훌쩍 물러나려 하였다.
하지만 매초풍의 동작은 아주 빨라 벌써 초천의의 앞으로 다가와 쌍장으로 가볍게 초천의의
가슴을 떠밀었다. 초천의는 한 장이나 넘게 밀려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두 제자가 달려와 초천의를 부축하였으나 그는 벌써 숨이 막혀 있었다. 두 제자가 한참 안
마를 해주어서야 비로소 점차 정신을 차렸다.
초천의가 두 제자를 밀어젖히고 매초풍에게 넙죽 절을 하였다.
"부하 초천의가 매 궁주님께 배알합니다!"
매초풍이 오혈장법을 쉽사리 이기는 것을 본 뭇제자들은 더 의논할 여지도 없이 분분히 땅
바닥에 엎드려 소리 높이 외쳤다.
"매 궁주님!"
매초풍은 득의 양양한 기색으로 제자들더러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분부한 다음 묘상을 동굴
안에 연금하게 하였다.
뭇제자들 가운데는 완고한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매초풍이 진짜 궁주라는 것을 인
정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여전히 묘상이 궁주로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묘상이 중상을
입은데다가 오혈도가 매초풍의 수중에 있는지라 잠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뭇제자들은 흩어져 매초풍이 궁주로 취임하는 대전(大典)을 준비하려 하였다.
"여러분, 잠깐 기다리시오!"
이때 누구인가의 목소리가 높지는 않았으나 매우 똑똑히 들려 왔다.
뒤를 돌아다본 매초풍은 가슴이 철렁했다.
'여혈의, 네 놈이 아닌 때에 너무 빠르게 돌아왔구나!'
여혈의가 사람들을 헤치고 매초풍 앞에 서더니 쌀쌀한 기색으로 노려보았다.
"매초풍, 넌 담도 크구나. 감히 묘 궁주를 가두다니!"
초천의는 평소에 여혈의와 사이가 나빴던지라 오히려 여혈의를 꾸짖었다.
"여혈의, 너야말로 하늘이 높은지 땅이 높은지도 모르는 자이다. 어서 매 궁주 앞에 머리를
조아려 빌어라. 그럼 널 죽이지는 않을 거다!"
여혈의가 코방귀를 뀌면서 말하였다.
"누구든지 이 여 모를 때려눕혀야 말이지. 그러지 못한다면 매초풍이 나한테 빌어야 할걸!"
매초풍이 약이 올라 부르짖었다.
"여혈의, 날 핍박하지 마라! 그러잖으면 내가 명을 내려 네 놈을 잡아들이게 할테다!"
여혈의가 쓴웃음을 짓더니 제자들에게 큰소리로 말하였다.
"매초풍이 음모를 꾸며 궁주의 자리를 찬탈하려 하오. 그러니 여러분은 이 여 모와 함께 저
마귀년을 없애 버려야 하오!"
그러자 몇십 명의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호응해 나섰고 뒤이어 여혈의를 믿는 젊은 제자들
도 그 편에 섰다.
노로의가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들인가? 그래 반란을 일으켜 매 궁주를 해칠 작정들인가? 어서 돌아서라!"
강금의와 반채의가 여혈의의 뒤에 서 있었다. 반채의는 평소에 묘 궁주의 총애를 몹시 받던
터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노한 기색으로 질책하였다.
"노로의, 묘 궁주께선 당신을 가장 신임했었는데 당신이 먼저 나서서 배반할 줄은 정말 생
각지 못했어요!"
강금의와 여혈의는 사실 그리 교분이 깊지 않았으나 반채의때문에 강금의는 매초풍을 반대
하게 되었다.
"여 사형, 영만 내리시우. 그러면 우린 쳐나가서 저 역적들을 죽이고 묘 궁주를 구해 내겠
소."
몇몇 제자들도 호응하여 막 달려들 태세를 취하였다.
다른 한쪽에서는 매초풍이 다른 한패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호시탐탐 노려보면서 수시로 달
려들 준비를 하였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 사위는 쥐죽은듯한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여혈의가 양쪽을 살펴보면서 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나를 지지하는 제자들이 저쪽의 절반도 안 되는데다가 대부분 젊은 제자들이다. 혼전을 하
게 되면 아마 당해내지 못할 게다. 적을 이기자면 우두머리부터 사로잡아야 하는 법. 철시를
먼저 죽이는 것이 나을 거다.'
강금의가 뒤에서 여혈의한테 속삭였다.
"여 사형, 매초풍이 이미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고 있답니다."
조금 전 여혈의는 제자들이 모여 서 있는 뒤에 서서 매초풍이 질풍팔타 초수를 물리치는 것
을 보았었는데 강금의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원인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
쨌든 매초풍이 노궁주 도천룡의 적계(嫡系) 제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매초풍
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딴마음을 품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혈의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제안을 했다.
"방금 임잔 오혈장법을 이겼는데 지금 여 모가 오혈도법을 쓰겠으니 어디 이겨 보시오!"
여혈의가 칼을 빼들자 초천의가 코방귀를 뀌었다.
"임자가 비록 본 궁의 무공을 쓴다고는 하지만 내공은 어떤 놈한테서 배웠는지 모르지. 매
궁주는 임자와 싸울 필요가 없어!"
그 말을 들은 매초풍은 약간 시름이 놓였다. 그녀는 비록 내공이 많이 늘어나기는 하였지만
여혈의를 꼭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없었다. 만일 제자들 앞에서 지게 되면 지금까지 쌓
은 노력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매초풍은 여혈의를 쏘아보면 서 입을 열었다.
"그래, 본 궁주는 임자처럼 무공의 내력이 불투명한 놈과 싸울 필요가 없어."
여혈의가 칼로 매초풍을 가리키며 무서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매초풍, 설사 임자가 정말 도 궁주한테서 신공을 전수받았다고 하더라도 궁주의 풍도(風度)
는 있어야 하는 거다. 본 궁의 일은 제쳐놓더라도 이 여 모와 임자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
그래도 감히 응전하지 못하겠단 말인가?"
"이 여가야! 내가 네 놈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면 자연히 제자들의 힘에 의거하여 널 눌러
이겨서는 안 되겠지. 호한은 호한답게 처신해야지. 본 궁주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
니다!"
매초풍은 쓴웃음을 짓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주 유감스럽게도 본 궁주는 임자와 아무런 개인적 원한이 없다."
"매초풍, 만일 임자가 이백 리 밖에 있는 여가집에서 임자와 동시 진현풍이 살해한 사람들
을 생각해 본다면, 이 여 모가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는 걸 알게 될 거다."
이렇게 말하는 여혈의의 눈길은 칼끝처럼 날카로웠고 그 날카로움은 벌써 매초풍을 수백 토
막 내고 있었다.
매초풍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여가집을 떠올렸다. 여가집에는 여가부가 있었는데 그 여가부
의 주인 여원외는 그녀의 원수였다. 매초풍은 여부 휘하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의 딸
여소교를 처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 집 가족들은 모두 죽었고 단 하나 밖에 나
가 학문을 닦는 아들이 남아 있었다. 그 아들은 여강이라고 불렀으며 둘째 부인의 소생이었
다. 매초풍이 의심어린 눈길로 여혈의를 바라보면서 떠듬거렸다.
"임자…… 임자가……?"
여혈의가 냉랭한 어조로 내뱉었다.
"여원외는 나의 아버지이고 둘째 부인은 나의 어머니시다. 여승, 여통은 나의 이복 형님들이
고 여소교는 나의 이복 여동생이다. 그리고 난 여가네 셋째 아들 여강이다."
"임……임자가 여……여강이었구만!"
여혈의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노로의가 여부로 갈 땐 내가 허락한 오만 냥 은자와 삼천 냥 황금을 받으려고 갔던 거다.
하지만 그들이 여가집에 이르렀을 땐 여부는 이미 잿더미가 된 상태였지. 그런데 노로의 무
리는 원래 나와 사이가 버성겼던 탓으로 돌아와서 여부가 잿더미가 되었다는 것만 전해 주
었지. 우리 가족들의 행방에 대해선 알아보지 않았단 말야. 당시 오혈궁의 사무가 번망했던
까닭에 이 여 모는 고향에 가서 상세한 형편을 알아볼 짬도 없었지."
이때 강금의가 둘 사이에 끼여들었다.
"원래 이러한 판이었구려. 그때 나와 반 사매가 여가집 밖에서 흑풍쌍살을 만났던 게 이상
한 일이 아니었구만. 연놈들이 여부에 가서 이미 살인을 했던 거군 그래?"
여혈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해검계 시냇가에서 막가권 장문인 막여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여 모는 영원히 집
식구들의 행방을 모른 뻔했지."
매초풍이 한스러운 듯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내가 뿌리를 채 뽑아 버리지 못한 탓이다! 막여인, 이…… 이 놈을 죽여 버렸어야 했
는데……!"
여혈의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빛내며 말을 씹어 뱉었다.
"이 여 모는 어려서 집을 떠났지만 다행히도 막여인과 이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거든.
막여인은 날 알아보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난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지. 철시,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게 된 거야!"
매초풍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꾸하였다.
"듣자니까 여원외는 임잘 좋아하지 않았고 여승과 여통은 이미 임잘 대적할 준비를 하였다
더군. 본 궁주가 임자의 눈에 든 가시를 빼 주었으니 오히려 임잔 나한테 감사를 해야 할
게 아닌가?"
여혈의가 침을 뱉으면서 말하였다.
"그래도 그분들은 분명 이 여 모의 부형(父兄)들이야. 그들이 이 여 모를 아무리 미워했다고
하더라도 너 따위 여마귀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자, 매초풍. 어서 나와 판가름을 해보자!"
여혈의는 말을 끝내고는 곧바로 나는 듯이 달려들었다. 매초풍도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독
룡은편을 뽑아 들었다. 독룡은편은 길이가 사 장이나 되는데다가 매초풍의 내공은 이젠 그
전과 비길 바가 아니었는지라 채찍이 울리기 시작하자 여혈의는 뒤로 몇 발짝 물러서지 않
을 수 없었다.
매초풍은 분주하게 속궁리를 하였다.
'내 쪽이 숫자가 많을 때 이 점을 이용해서 이겨야지. 그러지 않다가는 일이 재수없이 뒤틀
릴 수도 있겠어.'
그러자 그녀는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초천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이 못된 역도들을 죽여 버려라!"
초천의는 매초풍과 마찬가지로 여혈의를 미워하였던지라 제자들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면
서 지쳐 나갔다. 여혈의는 비록 뛰어난 용맹을 가진 사람이기는 하였지만 몇백 명의 포위
속에 들었는지라 쉽게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매초풍은 쌍방이 혼전을 일으키자 사람들이 주의를 돌리지 않는 틈을 타 가만히 빠져 나와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재빨리 벼랑 옆에 와서 나무상자에 앉아 산마루 쪽으로 올라
갔다.
그녀는 서둘러 암동에 들어가 횃불 한 자루를 들고 또 예비로 세 자루를 가진 다음 오혈궁
의 금지 구역으로 들어가 도소정을 찾았다.
도소정이 불빛에 눈이 부신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물었다.
"누구냐? 개 놈의 자식 묘상이냐?"
"도 궁주, 난 매초풍이에요. 내가 오늘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조금 지나자 도소정은 빛에 적응되는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했다.
"철시, 오혈도법을 이기는 초수를 배워 내려고 왔겠지? 흥, 이번에는 절대 너의 속임수에 들
지 않을 거다!"
매초풍이 눈알을 굴리더니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도 궁주, 그런 억울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난 당신을 속인 게 아니에요. 전번에는……."
도소정이 말끝을 가로챘다.
"전번에 그래 네 년이 오혈장법을 이기는 초수를 알아내고는 도망가지 않았더냐? 그 무슨
단도를 가지러 간다면서 말이야!"
매초풍은 여전히 명랑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단도는 찾지 못했지만 긴 칼을 찾았어요."
매초풍이 오혈도를 뽑아 들자 사방에 붉은 빛이 퍼졌다.
"도 궁주, 이 칼을 알아보겠지요?"
도소정이 눈을 좀더 크게 뜨다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건…… 본 궁의 오혈도가 아닌가?"
매초풍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요."
도소정이 큰소리로 말했다.
"철시, 오혈도는 본 궁 궁주의 신물이야. 절대 바깥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거
야. 임……임잔 그걸 나한테 주어야 해!"
도소정이 다급한 심정에 앞으로 달려 나오는데 몸에 매어 있는 쇠사슬이 절그럭거렸다. 매
초풍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도소정은 더는 가까이 다가올 수가 없었다.
"도 궁주, 너무 급해 말아요. 난 정말로 구해 주러 왔어요."
"구해 주러 왔다면 어서 오혈도로 쇠사슬을 끊어 줘야지."
매초풍이 다가가서 칼을 휘둘러 쇠사슬 한 개를 내리쳤더니 대번에 끊어져 나갔다.
"과연 예리한 무기로군요."
"본 궁주의 신물이 어찌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겠느냐? 어서 나머지 네 개의 사슬도 끊어
버리라구!"
매초풍이 다시 뒤로 물러선 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할말이 있어요."
"어서 말해, 어서 말하라니까!"
"도 궁주, 난 당신을 위해 오혈도를 가져왔고 당신을 대신하여 그 묘상이란 자를 연금까지
하여 놓았는데 당신은 나한테 어떻게 감사를 하겠어요?"
도소정은 그 말에 놀라움과 기쁨으로 표정이 아주 환하게 밝아졌다.
"본 궁주는 낙언을 실천하여 오혈도법을 이기는 초수를 임자한테 가르쳐 주지."
매초풍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하였다.
"난 당신을 믿어요. 그런데 당신이 다시 궁주의 보좌에 오르자면 한 가지의 큰 시끄러움이
있을 거에요."
"말해 보게. 무슨 시끄러움인가?"
"지금 오혈궁에는 여혈의라 부르는 사형 한 사람이 있지요. 내가 애를 써서 묘상을 연금해
놓았더니 여혈의가 나쁜 심보를 품고 몇십 명 제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 놈
이 지금 오혈궁의 궁주가 되려고 해요."
"이런,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묘상이란 역적 놈이 생겼
으니 본 궁의 제자들이 그 본을 따서 나쁘게 되었단 말야. 그 여혈의란 놈은 어떤 자인가?"
"스물두세 살 먹은 놈인데 아주 영준하게 생긴 놈이지요. 몸에 핏빛이 도는 붉은 비단 두루
마기를 입고 허리에 쾌도를 찼는데 무공이 출중하여 묘상에 못지않지요."
"그 놈이 그 젊은 나이에 어찌 이렇듯 고명한 무공을 가질 수 있단 말이냐? 아마도 따로 스
승을 가졌던 게지?"
"도 궁주께선 과연 영명하시군요. 여혈의는 내공을 어느 마귀한테서 얻었는데 그 마귀의 별
호는 천산 마귀할멈이라고 한답니다. 내가 제자들을 타일러 잘 다스려 놓은 뒤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면서 도 궁주를 영접하려 했었는데 여혈의란 놈이 이런 야심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군요. 이 시각에 그 놈은 지금 본 궁의 제자들과 혼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놈이
자기의 야심을 성사하게 될까 봐 근심되는군요."
도소정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어서 날 풀어 놓아라. 내가 가서 그 여혈의인지 뭔지 하는 놈을 죽여 버려야겠다!"
매초풍이 맘속으로 아주 기뻐하면서 속궁리를 더듬었다.
'도소정과 여혈의를 붙여 놓으면 난 어부지리를 얻게 되는 거다.'
매초풍은 두말없이 오혈도를 도소정에게 넘겨주었다. 도소정이 칼을 네 번 휘두르자 네 개
의 쇠사슬이 끊어져 나갔다. 도소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철시, 앞에서 길을 안내해라!"
매초풍이 기뻐하며 앞장서 달려나갔다. 그녀가 경공으로 동굴 어귀까지 와서 머리를 돌려
보니 도소정은 뒤에 겨우 두세 걸음 밖에 떨어지지 않고 바싹 따라오고 있었다. 매초풍은
혀를 차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십팔 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던 여인의 경공이 이러하니 실로 기녀자(奇女子)가 아닐 수 없
다.'
도소정이 동굴 밖의 밝은 빛에 적응되지 못하여 또다시 눈을 감고 탄식하였다.
"모두 묘상이란 놈 때문이야. 내가 돌아가면 그 놈을 여러 토막을 내어 승냥이 밥으로 던져
줄테다!"
도소정이 능히 눈을 뜰 수 있게 된 다음 그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나
무상자를 타고 오혈궁에 당도하여 함성 소리가 요란한 곳으로 달려갔다.
이때 오혈궁 제자들은 이미 삼십여 명이나 죽었고 그 나머지는 아직도 악전고투하고 있었
다. 여혈의네 패들은 워낙 소수인지라 노로의, 초천의가 거느린 제자들한테 물샐 틈 없이 포
위당해 있었다. 하지만 여혈의네 악당들은 오혈궁에서 무공이 훌륭한 호수들이라 아직도 버
텨내고 있었다.
여혈의는 혈안이 되어 사정없이 칼을 휘둘렀는데 그때마다 오혈궁 제자들이 어김없이 부상
을 당하곤 했다. 초천의가 여혈의를 대적하고 있었는데 매번 여혈의가 휘두르는 칼에 쩔쩔
매며 수세에 몰렸다.
매초풍이 손으로 여혈의를 가리켰다.
"도 궁주, 쾌도를 휘두르는 저 놈이 여혈의예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소정이 나는 듯이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혈궁 제자들은 봉
두난발이 되어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야인(野人)이 갑자기 하늘에서 강림하듯 내려오자
강적이 죽이러 오는 줄 알고 각기 병장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도소정은 오혈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고 있는데다가 평소에 묘상한테 복수를 하려고
별러 오던 터였기에 오혈궁 제자들의 병장기들을 대수롭지 않게 헤치고 들어와 여혈의 앞에
섰다.
"역적 놈아, 내 칼을 받아라!"
그녀는 대뜸 이렇게 소리치면서 오혈도로 여혈의를 내리찍으려 하였다. 초천의 등은 그 여
인이 여혈의를 죽이려 하고 또 오혈도를 사용하는 것을 보자 매초풍이 청해온 고수가 싸움
을 도우러 온 줄 알고 분분히 그 여인과 함께 여혈의를 공격하였다.
겨우 오혈도의 공격을 피한 여혈의는 생각했다.
'오혈도는 본디 매초풍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어찌하여 다시 이 야인 같은 여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을까? 철시한테 이런 벗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이 야인의 도법이 귀
신 같고 공력이 대단한 걸 보면 십중팔구 매초풍이 사전에 이 오혈궁에 잠복시켰다가 날 대
적하게 한 고인이 분명하구나!'
노로의도 뒤에서 이 야인의 매서운 도법을 보고 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사람의 무공이 너무나도 익숙하구나. 누구일까?'
노로의는 도소정까지는 생각지 못했던지라 이 야인의 초수가 순수한 오혈궁의 도법인 것을
알아보고는 대경실색하였다.
노로의가 매초풍에게 안절부절못하면서 물었다.
"매 궁주, 저 사람……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노로의, 저 사람은 당신과는 구면일 텐데 왜 알아보지 못하나?"
노로의가 그제야 놀라 더듬거렸다.
"저 여자가? 그래, 도……도소정, 소궁주란 말이오?"
노로의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매초풍이 노로의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비웃는 투로 물었다.
"그래 내가 여혈의를 대적하도록 청해온 방조꾼이 어떤가?"
노로의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애원하였다.
"매 궁주님, 저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매초풍은 노로의가 절을 하면서 애걸하자 처음에는 얼떠름해 졌다가 금세 그 영문을 알아차
렸다. 노로의는 일찍 묘상과 단짝이 되어 도소정을 감금하였기에 도소정이 자기한테 보복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생각해 보란 말야, 저 도소정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나? 내가 여혈의를 죽이라고 하
면 죽인단 말야. 그러니 본 궁주가 임잘 죽이라고 하면……."
노로의가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매초풍이 깔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임잔 본 궁주의 공신인데 내가 어찌 임잘 죽이게 하겠나?"
그 말에 노로의는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매 궁주님, 가, 감사합니다."
이때 여혈의네 패들은 죽을 놈은 죽고 상할 놈은 상하고 강금의, 반채의 등 칠팔 명은 사로
잡혔다. 뭇제자들은 도소정과 여혈의의 주위를 둘러싸고 긴장한 상태에서 둘을 주시했다.
도소정은 칼로 여혈의의 오른쪽 어깨를 엇비스듬히 내리쳤다. 칼날이 미처 닿기도 전에 칼
바람에 여혈의의 목이 따끔거렸다. 여혈의는 뒤로 물러서면서 칼로 오혈도를 물리치고는 재
빨리 오혈도법 중의 정화라고 일컫는 '요운자일(燎雲刺日)'이란 초수로 도소정의 가슴을 들
이찔렀다.
도소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비스듬히 누이면서 칼을 피하는 동시에 오혈도로 여혈의의
허리를 내리쳤다.
여혈의는 미처 칼을 건사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도소정이 뒤이어 칼끝으로 그
의 쇄골(鎖骨)을 들이찌르다가 그 칼을 피하는 여혈의의 아랫도리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자
재빨리 발로 그의 왼쪽 다리를 걷어찼다. 여혈의는 왼쪽 다리가 끊어지는 듯이 아팠다.
도소정은 또 발길을 날려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걷어찼다. 여혈의는 더 서 있을 수가 없어
땅바닥에 나가자빠졌다. 도소정은 오른쪽 다리로 여혈의의 복부를 짓밟고 나서 오른손에 든
오혈도로 그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자 뭇제자들이 큰소리를 질렀다.
"그 놈을 죽여 버리시오. 반역자를 어서 죽이시오!"
여혈의는 칼끝이 목에 닿을 무렵 갑자기 무서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면서 몸을 비틀며 뒹
굴어 도소정의 칼을 피하였다.
도소정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괴이한 몸놀림은 오혈궁의 무공이 아니고 분명 천산의 마
귀할멈인가 하는 이한테서 배워온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도소정은 검
법을 쓰듯이 칼로 여혈의의 요해처를 겨누고 마치 하늘의 유성처럼 연거푸 열일곱 번이나
내리찔렀다.
여혈의는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땅에서 한 장 남짓이나 먼 곳까지 굴러갔다. 가까이에 있
는 한 제자가 굴러오는 그를 발로 걷어차다가 여혈의한테 발목을 비틀리어 탈골이 되는 바
람에 제자는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여혈의가 벌떡 일어나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어떻게 해서 오혈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고 있는 거요? 그렇지 않았
던들 이 여 모는 절대로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도소정이 앙천대소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전임 궁주 도천룡의 딸 도소정이고 현임 궁주이다. 여혈의, 어서 무릎을 꿇고 용
서를 빌어라. 그렇지 않았다가는 죽는 길밖에 없느니라!"
여혈의는 그 말을 듣고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을 굴렸다. 그도 동문 사람들한테서
전임 궁주한테 도소정이란 딸이 있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녀가 실종된 지 이미 십팔
년이나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야인이 바로 도소정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여
혈의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어찌 노 궁주의 딸일 수 있겠소? 당신은 철시가 청해 온 도움꾼일 따름이오. 철시
가 당신한테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가르쳐 주었지요?"
"난 진짜 도소정이야. 묘상이란 놈에 의해 동굴 속에 십팔 년이나 갇혀 있었는데 철시가 본
궁의 무공을 이기는 초수를 알게된 건 내가 친히 가르쳐 준 것이니라. 여혈의, 어서 본 궁주
앞에 절을 하지 못할까?"
도소정이 한걸음 나서자 여혈의가 냉소를 퍼부었다.
"좋아, 아주 좋아. 네 년이 도소정이라니 마침 잘됐어!"
뭇제자들은 이 야인이 도천룡의 딸 도소정이라는 데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며 또 여혈
의가 이젠 겁이 나서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혈의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승냥이의 울음 소리 같은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 것
이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는지 몰라 모두들 겁이 났다.
이윽고 먼 산에서 마치 여인의 목소리 같은 소리가 메아리쳐 왔다. 그 목소리의 메아리가
사라지자 이윽고 운무 속을 헤치고 한 사람이 내려왔다. 그 사람은 검은 옷을 입었는데 극
히 빠른 동작으로 산세를 타고 벼랑에서 마치 평지 걷듯이 날아내리는 것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들은 종래로 이곳의 산벼랑을 제 마음대로 오르내리는 사람을 본 일
이 없었으며 이런 벼랑을 날아내린다는 것은 당년의 노궁주인 도천룡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었다.
사람들은 놀라움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어디 사람인가? 기필코 마귀일 거야."
"귀신일지라도 실수하여 넘어질 수 있는 거야. 내 보기엔 신선같아. 신선만이 하늘을 날 수
있거든."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벼랑에서 내린 뒤 일단 나무 숲 속으로 사라지더니 다시 고함소
리가 들리면서 나는 듯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서는 여혈의 앞에 와 섰다.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여인이었다. 몸집은 왜소하고 여위었으며 머리에 검은 수건을 두
르고 얼굴은 검은 면사포로 가렸으며 검은 비단으로 지은 긴 치마를 입었는데 그 치맛자락
이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그 여인의 두 눈은 아주 컸으나 눈길은 북극의 얼음처럼 싸늘하였고 눈썹이 아주 가늘었다.
그녀가 여혈의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혈의, 무슨 일 때문에 내가 친히 나서야 하는 거냐?"
여혈의가 절을 여러 번 하고 나서 대답하였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가부를 결정해 주어야 할 일이 있나이다."
"그런가? 어서 말해 보아라."
여혈의가 손으로 도소정을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부님, 저 사람이 바로 도소정인데 묘상에 의해 동굴 속에서 십팔 년 동안이나 감금당하
였다고 합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도소정을 쏘아보며 물었다.
"당신이 정말로 도소정이오?"
도소정이 오혈도를 비껴든 채 대적이 앞에 왔다는 것을 알아 차렸는지라 경계하며 대답했
다.
"그렇소. 내가 바로 본 궁주요. 당신은 누구시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여혈의한테로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묘상이란 놈은 어디 있느냐?"
"묘상은 철시 매초풍이 이미 동굴 속에 연금했습니다. 좀 있다가 이 제자가 친히 죽여 버리
겠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철시가 저도 모르게 날 위해 좋은 일 한 가지를 하였군."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도소정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바로 천산의 마귀할멈일세."
도소정은 머리를 끄덕 이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이 천산의 마귀할멈 때문에 묘
상이 항상 불안에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초풍은 속으로 경탄해 마지않았다. 이 천산의 마귀할멈이 비록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을 보니 눈귀에 아무런 주름살도 없었다. 그러니 서른 살도 안 되었을 이
여인이 이런 절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실로 탄복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매초풍은 당장 달려나가 천산의 마귀할멈한테 절을 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지만 아직 때
가 이르다고 생각하였다.
'여혈의가 바로 여강이라니 저 놈은 분명 나를 가만두려 하지 않을 거고 천산의 마귀할멈더
러 날 죽이라고 부탁할 거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매초풍이 한창 그 방도를 궁리하고 있는 판에 천산의 마귀할멈이 도소정을 사납게 쏘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도소정, 만일 당신이 날 알아보지 못한다면 내가 알려 주지. 십팔 년 전에 한 처녀가 당신
한테 사내를 빼앗기고 또 오혈궁에서 쫓겨난 일을 기억하겠지."
도소정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당……당신이…… 엽……."
천산의 마귀할멈이 마술을 부리는 듯하더니 그녀의 손에 갑자기 길이가 두 자 남짓한 자주
빛 물건이 나타났다.
"이것이 기억나겠지!"
도소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정신침이구만. 그럼, 다, 당신이…… 엽첩비?"
천산의 마귀할멈이 머리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맞았어. 내가 바로 엽첩비야.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넌 날 오혈궁에서 쫓아낼 능력이
없어. 하하하!"
천산의 마귀할멈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노로의가 매초풍의 곁에서 중얼거렸다.
"바로 엽 아씨가 틀림없어. 눈매를 보니 십팔 년 전과 꼭 같이 아름답군……!"
매초풍이 비웃었다.
"당신은 줄곧 저 여자를 짝사랑해 왔나 보군요."
"저 같은 거야 짝이나 되겠습니까? 엽첩비는 성미가 변화 무쌍하고 제멋대로 하기 때문에
묘상조차 감히 겨루려 하지 못했지요. 만일 저 여자가 성미가 저렇지만 않았더라면 묘상이
싫다고 할 리도 없고 이런 복잡한 일들이 생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휴―!"
매초풍이 그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하였다.
'만일 엽첩비가 성미가 유순한 여인이었더라면 묘상은 도소정한테 장가들지 않고 그녀를 아
내로 맞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면 도소정은 편안하게 궁주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십팔
년의 감금 생활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여혈의 또한 아무리 큰 야심을 갖고 있더라도 하는
수 없이 이곳에서 무예를 닦는 일에 열성을 다했을 것이다.'
갑자기 노한 외침 소리가 들리더니 도소정이 오혈도를 휘둘러 천산의 마귀할멈을 내리찍었
다. 도소정은 자기의 공력이 천산의 마귀할멈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선수를 써서
기습하여 한번에 죽여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땅―!
천산 마귀할멈의 무공은 완미한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도소정에 비길 바가 못 되었다. 자정
신침이 오혈도의 칼끝을 막자 한 갈래의 대력이 오혈도를 통하여 도소정의 오른쪽 어깨로
전해졌다. 도소정은 팔이 마비되면서 하마터면 칼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천산의 마귀할멈이 냉소를 퍼부었다.
"도소정, 네가 감히 나의 사내를 빼앗았으니 분명히 죽는 길밖에 없다!"
천산의 마귀할멈이 자정신침으로 검술의 초수를 쓰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검기(劍氣)
가 나갔다. 도소정이 칼로 그것을 막으면서 반격하려 하였으나 자정신침이 또다시 도술(刀
術)의 초식으로 엇비스듬히 날아왔다. 도소정이 머리를 숙여 그것을 피한 다음 머리를 다시
쳐들면서 오혈도로 상대방을 들이찔렀다. 자정신침은 마치 몽둥이가 되어 오혈도를 비껴 물
리쳤다. 그리곤 판관의 붓 끝이라도 된 듯이 도소정의 가슴에 있는 화개혈을 향했다.
천산 마귀할멈은 바로 이 순간에 자정신침을 검, 칼, 곤봉, 그리고 판관의 붓으로 네 수를
연거푸 썼다. 이 네 수는 서로 뗄 수 없는 병장기였다. 하지만 천산 마귀할멈은 한곳이라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취한 듯이 바라보면서 혀를 찼다.
매초풍도 속으로 저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저러한 무공은 아마 세상에서 둘도 없이 총명하다는 황 사부님도 만들어 내지 못할 거다.
저 할멈을 스승으로 모신다면 내게는 끝도 없을 이익이 돌아올 것이다. 무림에서 마음껏 활
개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천산 마귀할멈은 이미 십여 수나 썼다. 그 자정신침을 매우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도소정은 오혈도를 휘두르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막아냈다. 그러나 차츰 힘이 빠져 밀리
기 시작했다. 이쪽을 겨우 막으면 반대로 다른 쪽이 허점으로 드러나곤 했다.
천산 마귀할멈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마치 고양이가 쥐 한 마리를 가지고 놀듯이 도소정을
괴롭혔다.
"소궁주님, 왜 이 모양이오? 오늘따라 왜 이처럼 나약한가? 어디 한 군데 상처를 내주고 싶
어도 불쌍해서……."
그 말에 도소정은 화가 나서 두 눈을 크게 뜨며 씩씩거렸다. 그녀가 갑자기 오혈도를 바람
개비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붉은 섬광이 번뜩였다.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는 몸뚱이와 함께
봉두난발을 한 머리카락들이 어지럽게 흩날려 마치 요귀 같았다.
천산 마귀할멈은 이윽고 냉랭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터졌다.
"그따위 구역질 나는 모양을 한다고 내가 겁을 낼 줄 아느냐?"
그녀가 갑자기 오른손을 부르르 떨어댔다. 자정신침이 순간 천만 갈래로 변하며 자줏빛 섬
광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그 빛은 오혈도에서 나오던 붉은 섬광을 커다란 천으로 감싸듯 덮
어 버렸다.
두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싸우는 동작은 갈수록 더 빨라졌다. 여혈의와 매초풍 외 몇몇 고
수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제자들은 누구도 이들의 무공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저 붉은
빛과 자줏빛이 합쳐졌다가 분리되는 것만을 볼 뿐이었다.
붉은 빛은 점점 사그라들고 자줏빛은 강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붉은 빛은 가물거리다
가 자줏빛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째앵―.
요란한 금속성이 들리면서 오혈도는 자줏빛으로부터 튕겨져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오혈도는 수림 속으로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뒤이어 나뭇가지들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
려 왔다.
자줏빛은 갑자기 빛들을 한가운데로 모으더니 우왕좌왕하는 도소정을 빈틈없이 에워쌌다.
곧 단발마적인 비명 소리가 처참하게 들렸다. 핏물과 살점들이 마구 튀며 옷마저 갈기갈기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줏빛이 갑자기 사라지자 천산 마귀할멈이 뒷짐을 진 채 태연히 머리를 쳐들고 있는 모습
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자정신침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발 밑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한 무더기의 살점 더미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가 천천히 땅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도소정은 이미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녀는 원래 자신이 오혈궁 궁주의 보좌에 다시 오
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원혼이 되어 저승으로 가버린 것이다.
매초풍마저도 도소정의 처참한 최후를 보고 탄식하고 말았다. 그녀는 동굴 속에서 십팔 년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방금 전 겨우 햇빛을 보았던 것이다.
오혈궁의 제자들은 오래도록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모두들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초천의가 칼을 높이 쳐들었다.
"여러 형제들, 천산 마귀할멈이 백주에 본 궁에서 소궁주님을 살해했소. 우린 소궁주님을 위
해 복수를 해야 할 것이오!"
이자의도 격분을 참지 못하고는 맞장구를 쳤다.
"맞소. 오혈궁의 제자인 이상 천산 마귀할멈이 본 궁에서 행패를 부리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소. 양심이 있는 제자들은 날 따라 저 요귀를 죽입시다!"
이자의가 먼저 달려가 천산 마귀할멈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뒤를 이어 초천의가 나섰다. 이
자의와 힘을 합친 그가 천산 마귀할멈의 가슴팍을 겨눈 채 칼을 뻗었다.
"야앗!"
천산 마귀할멈은 몸을 슬쩍 피하며 순식간에 두 사람의 등뒤로 돌아갔다. 그녀가 검은 소맷
자락을 휘젓자 펑펑 하는 굉음이 일었다. 그녀가 이자의와 초천의 등을 강하게 쳤다. 이자의
와 초천의는 졸지에 그 거대한 힘에 떠밀려 앞으로 고꾸라질 듯했다.
바로 이 순간 여혈의가 냉소를 홀리며 칼을 내리쳤다. 칼날은 곧바로 이자의와 초천의의 숨
통을 끊어 버렸다. 삽시간에 잘려 나간 목에서는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두 사람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여혈의는 한칼에 두 사람을 요절내고는 주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직도 덤빌 자가 있느냐?"
모두들 겁에 질려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한 제자가 사람들을 헤치면서 달려나왔
다. 칼을 들고 여혈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너 같은 반역자는 이 칼에 죽어야 한다!"
이때 다른 제자 넷이 사람들 속에서 뛰어나와 역시 칼을 휘둘렀다. 여혈의가 냉소를 씹어댔
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들이 또 있군!"
여혈의는 맞받아치며 달려드는 그들의 가슴을 공격했다. 제자 두 사람이 양쪽에서 공격해
왔다.
여혈의는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으며 몸을 낮추었다. 두 발로 번개같이 달려드는 제자의 아
랫배를 걷어찼다.
"헉!"
두 사람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뒤를 따르던 두 제자가 몸을 솟구치며 쌍칼로 여혈의의 목과 등을 내리찍었다. 여혈의는 이
미 칼을 시체에서 뽑아낸 뒤라 얼른 한 제자의 왼쪽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
이어서 왼쪽 손바닥으로 다른 한 제자의 칼등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 제자의 칼이 떨어졌다.
여혈의가 기다리지 않고 단칼에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연거푸 제자들이 죽자 모두들 더욱 겁에 질렸다.
"아직도 나설 자가 있느냐?"
바들바들 몸을 떠는 사람들뿐이었다.
여혈의의 시선이 노로의의 얼굴에 가 멎었다.
"큰사형, 도소정을 위해 복수할 생각이 없소?"
노로의는 한참 동안 고심을 하더니 대답했다.
"여혈의, 네 놈이 천산 마귀할멈에게 빌붙어 본 궁의 제자들을 무참하게 살육한 죄는 용서
할 수 없다. 네 놈이야말로 악마다. 하지만 내 늙은 몸에는 네 놈을 죽일 힘이 남아 있지를
않구나!"
그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제 가슴만 쥐어뜯었다.
여혈의가 다가서며 비웃었다.
"큰사형, 무섭다면 무섭다고 솔직히 말하시오. 무슨 핑계가 그리도 많소? 그런다고 네 놈을
살려 둘 줄 알았느냐?"
여혈의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서 칼을 들었다.
"아니!"
노로의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노로의는 매초풍에 의해 진기의 대부분을 빼앗겼기에 공력이 얼마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
래서 그는 여혈의의 칼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악!"
결국 그는 여혈의의 칼에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노로의는 가슴이
터지는 아픔을 참아 가며 피 묻은 칼이 자기 몸에서 다시 뽑히는 것을 보았다. 칼이 뽑아지
자 더욱 힘찬 피가 솟구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탄식했다.
"이 칼 끝에도 숱한 적수들의 피를 묻히면서 반평생 강호에서 지내왔는데, 오늘은 이 사악
한 놈의 손에 목숨을 잃는구나……!"
그는 더 이상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오혈궁 안에 있는 모든 적수들이 죽어 나가자 여혈의는 자기와는 원수지간인 매초풍을 찾느
라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제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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