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화산논검 풍류여마 매초풍 5 김용
화산논검(華山論劍) 제18권 6부 풍류여마 매초풍 III
제목: 화산논검 제18권 (전22권)
지은이:
옮긴이: 박영창
- 차례 -
제16장 묘상의 최후
제17장 개방과 손잡은 매초풍
제18장 엽청청의 행방
제19장 기구한 모녀의 상봉
제20장 전진교와 소요공자의 관계
제21장 여소교와 천산 마귀할멈의 죽음
제22장 전진철자와의 싸움
제23장 구원의 손길
제24장 오혈궁과 천산 마궁
제25장 사라진 흑풍쌍살
제16장 묘상의 최후
매초풍은 이미 바람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여혈의는 미친 듯이 날뛰며 그녀를 찾아 헤맸다.
"매초풍, 냉큼 나오지 못하겠느냐? 이 화냥년을 내 요절내고 말 것이다!"
모두들 여혈의가 매초풍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설치는 것을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저마다 저 살기 어린 불똥이 재수없이 자신에게 튀지나 않을까 잔뜩 겁먹은 표정들이었다.
여혈의는 광기를 부리면서 사방을 정신없이 뒤지다가 불현듯 누군가 자기 뒤에서 허리띠를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여혈의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사부인 천산 마귀할멈이었다.
여혈의는 그녀를 몹시 무서워하는 편이라 얼른 얼굴빛을 바꾸면서 굽신거렸다.
"사부님께서 제게 무슨 분부라도 계시는지요?"
천산 마귀할멈이 손을 풀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요구한 것을 자네는 아직 끝내지 못했네."
"무슨 일인지요?"
"내가 자네에게 무공을 전수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겠나? 그래, 자넨 그걸 벌써 잊었단 말
인가?"
등골이 오싹해진 여혈의가 더욱 마리를 조아렸다.
"제가 어찌 그것을 잊는단 말입니까? 묘상 그 놈으로 말하자면 독 안에 든 쥐이지요. 지금
가장 위험한 적수는 매초풍입니다. 서둘러서 그 년을 잡아죽이지 않는다면 후일에 우리에게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 줄 것입니다."
"흥, 당당한 사내 대장부가 자기 원수를 갚는 일에 떳떳해야 할 게 아닌가? 그렇게 빙빙 돌
릴 게 뭐가 있느냐?"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모습을 곁눈질해 보면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생각하는 바가 많았다. 여혈의는 천산 마귀
할멈의 제자인데도 오금조차 펴지 못하고 있으니 천산 마귀할멈의 수단이 얼마나 악독한지
를 충분히 짐작하고 남았다. 사람들은 더욱 자신들에게 그 화가 미칠까 봐 몸을 사렸다.
천산 마귀할멈이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혈의를 쏘아보며 물었다.
"잘못을 안 이상 더 추궁하지는 않겠다. 그렇다면 자넨 지금 무엇을 할 작정인가?"
여혈의는 그녀의 표독스런 눈길을 피하며 대꾸했다.
"지금 곧 묘상을 죽이러 떠나겠습니다."
여혈의는 묘상이 거처하고 있는 동굴 쪽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갔다. 불현 걸음을 멈춘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사부님, 묘상은 독 안에 든 쥐가 분명합니다. 사부님께서 그토록 증오하시는데 왜 직접 죽
이시지 않는 겁니까?"
천산 마귀할멈이 두 눈을 부릅뜨면서 꾸짖었다.
"가라면 가는 거지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여혈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도 천산 마귀할멈이 소리를 지르자 간담이 서늘해져 뒷걸음질을 쳤
다.
천산 마귀할멈은 스스로도 자신의 태도가 너무 표독스러웠다고 여겨졌는지 여혈의에게 한
발 다가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만일 내가 내 손으로 잡아죽이려 했다면 왜 자네에게 무공을 전수했겠는가?"
"저 역시 그런 사부님의 고충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지금까지 그 원인을 몰라 궁
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산 마귀할멈이 말을 할 듯하다가 머뭇거렸다. 그녀의 눈길에서 여혈의는 복잡한 심경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탄식했다.
"어서 가보게. 잔말 말고 단칼에 죽이도록 하게. 시체는 동굴속에 처넣고……."
여혈의는 더는 물어 보지 못하고 동굴 쪽을 향해 발을 옮겼다.
오혈궁 제자들은 감히 그를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길을 내주었다.
여혈의는 위풍당당하던 오혈궁 궁주가 자신의 칼에 원귀가 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저절로
뛰었다. 그는 두 눈을 무섭게 뜨고는 차거운 쇳소리를 내며 칼을 뽑았다. 그리곤 동굴 안으
로 성큼 들어섰다.
이때 홀연히 바람에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혈의 앞에 한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다름아닌 천산 마귀할멈이었다.
"사부님께서…… 그럼 생각을 바꾸셨는지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묘상은 벌써 죽었어야 할 놈이야. 내가 생각을 바꾸다니?"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다시 입을 떼었다.
"난 마지막으로 묘상을 만나야겠다. 앞에서 길을 안내하게나."
여혈의가 앞장을 서서 걷기 시작했다.
동굴 속에 있던 사내와 계집들은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여혈의가 얼굴을
가린 여인을 데리고 들어오자 모두들 허겁지겁 몸을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혈의가 그중 한 여제자의 멱살을 움켜잡고 물었다.
"묘상은 어디에 가둬 두었느냐?"
열 대여섯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여제자는 겁에 질려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백지장처럼 하
얗게 질려 있는 그녀는 입술이 심하게 요동을 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여
혈의는 화가 치밀어 더욱 눈을 부라리며 다그쳤다.
"어서 말하지 못해!"
여제자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여혈의가 그녀를 번쩍 들어 암벽 아래로 던져 버렸다.
"아악!"
그녀는 머리가 부서져 죽고 말았다.
이번에는 나이가 좀 든 여제자를 잡아 칼로 위협했다. 여제자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궁
주의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 문밖에서 파수를 보고 있던 제자들이 놀라 달아났다.
여혈의와 천산 마귀할멈이 안으로 들어갔다. 묘상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데 팔다리가 꽁꽁
묶인 채였다.
묘상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린 뒤였다. 그러나 가장 믿던 제자 여혈의가 들어오자 그
는 놀라움과 기쁨을 이길 수 없어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
으며 더듬거렸다.
"혈의구나. 그래…… 정, 정말 자네란 말인가? 반갑네. 날 구하러 왔구나. 어서 이 포박을 풀
어주게나. 오늘부터 자네는 오혈궁의 수제자야."
칼자루를 거머쥔 여혈의가 침대로 다가가 줄을 풀어 주는 대신 냉랭한 눈길을 던졌다. 그의
입가에는 조소가 어려있었다. 하지만 묘상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웃으면서 말을 이
었다.
"혈의, 자네가 있으니 난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 자네는 나를 위해 노로의와 매초풍 두 역
적을 처단해야 하네. 배은망덕한 놈들이야!"
여혈의가 조소 어린 입을 열어 한마디 내뱉었다.
"만약 내가 궁주님을 배반했다면 역시 이처럼 나를 욕했을 테죠?"
묘상은 그의 반응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곧 너스레를 떨듯 말했다.
"내가 자네를 그토록 믿어 주고 중용했었는데 자네가 나를 배신할 이유가 있겠나? 그런데
왜 이 줄을 풀어 주지 않는 건가?"
여혈의를 바라보는 묘상의 마음속에서는 차츰 희망의 불씨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여혈의는 섬뜩한 칼날을 묘상의 목에 갖다 댔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부터 오혈궁의 제자가 아니올시다. 뿐만 아니라 나는 궁주님을 죽여
야겠소."
묘상은 이미 그가 자기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그만 낯색이 흙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네 놈이 정녕 나를 배신했단 말이냐? 배은망덕한 놈!"
여혈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하하하, 내가 네 놈을 죽이지 않더라도 넌 더 이상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결코 배은망
덕한 사람이 아니다. 난 오직 사부님께만 충성을 다할 뿐이야!"
여혈의는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 넣었다. 그리곤 천산 마귀할멈을 향해 공손히 읍을 했다.
그제야 묘상은 여혈의 뒤에 검은 천으로 복면을 하고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저건 또 누구냐!"
"이분이 바로 내 사부님이시다!"
묘상의 눈빛은 더욱 침통하게 변해 갔다.
"네 놈의 사부라고? 그럼 네 놈에게 다른 사부가 정말 있었단 말이냐?"
"나의 사부님의 존호는 천산마로라고 한다!"
그 말에 묘상은 정신을 잃을 뻔했다. 오혈궁을 무인지경으로 드나들 듯했고 쪽지를 남겨 자
신을 놀라게 했던 천산 마귀할멈이 아니던가. 그녀가 여혈의의 사부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대가 정말로 천산마로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묘상이 물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여혈의를 물러가게 하고는 문을 닫았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묘상
을 보며 예전에 정을 나누던 일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뒤이어 묘상이 도소정 앞에서 큰소리
로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것처럼 굴던 일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차가운 시선으로 묘상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나를 못 알아보나요?"
그 말에 묘상은 고개를 흔들었다.
"난 전혀 그대를 만난 본 기억이 없소. 그런데 왜 나를 해치려 하는 게요? 어떤 원한이 있
길래……?"
"흥, 그렇다면 내가 이야기를 해주지요. 궁주님께서는 듣고 싶으신지요?"
"내 목숨이 그대 손에 달려 있는데, 내겐 선택할 수 있는 권한조차……."
묘상이 말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아주 비참하답니다. 하지만 궁주님께선 좋아하실 겁니다. 십팔 년 전 심산 속에
한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부부간에는 아주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답니다. 집안은 행복하
고 아주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죠. 세월이 흘러 그 계집애는 꽃다운 나이로 성장했지
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내가 그 계집과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때 사내는 강한 적수와 싸우
다가 심한 상처를 입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이었습니다. 계집은 산속을 뒤져 온갖 약초
를 캐다가 사내를 구하려고 했지요. 사내를 죽이려고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사내는 지탱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계집애는 그를 동굴 속에 감추었습니다. 캐온 약초로 정성껏 사
내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집애의 집안은 엄격하여 사내를 집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매일 몰래 동굴 속으로 밥을 나르고 상처를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계집의 정성으로 사내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사내는 상처가 낫지 않은 것
처럼 가장을 하였습니다. 계집의 용모에 반한 탓이었죠. 순진한 계집은 자비로운 마음을 지
녔기에 사내
의 욕심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구변이 뛰어난 사내는 강호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들을 장황
하게 늘어놓으며 계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했죠. 산속에서 나서 자란 계집은 사내를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내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긴 숨을 부려 놓더니 말을 이었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뀌자 계집은 사내의 달콤한 말에 결국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내는 어
느 날 계집에게 어떤 여인도 사랑해 본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청혼을 했습니다. 허락해 주
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천산 마귀할멈이 힐끗 묘상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면서 또 한번 한숨을 토했다. 그녀의 얘기
는 계속 이어졌다.
계집은 사내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저도 모르게 허락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사내는 그것으
로 만족하지 않고 계집을 안았다. 계집은 몸부림을 쳤지만 사내는 억센 팔로 그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이미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계집은 그만 몸까지 주고 말았다.
그 후 사내는 계집에게 끝없는 맹세를 했다. 그리고 보름 동안 밤마다 계집은 집에서 빠져
나와 사내와 밀회를 즐겼다. 계집은 사내의 말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내
는 작별을 고했다. 사내는 그러면서 또 맹세를 했다. 석 달 안으로 아니 늦어도 반년 안으로
꽃가마로 계집을 데려 가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다. 사내가 떠난 후 계집은 매일 산에 올라
사내를 기다렸다.
어느덧 석 달이 지났지만 꽃가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무렵 계집의 몸에서는 이상한 조짐
이 보이기 시작했다. 입덧을 하기 시작했고 새 생명이 자기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다시 석 달이 지났지만 사내에게선 역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배는 자꾸만 불러오고 계집
은 천으로 배를 감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계집의 부모는
어느 사내와 배가 맞았냐고 윽박질렀지만 계집은 무서움과 부끄러움보다 사내가 행여 부모
에게 잡혀 죽을까 봐 입을 열지 않았다. 부모는 계집을 광 속에 가두었다. 그래서 계집은 사
내와 멀리 도망쳐 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틈타 계집은 광에서 몰래 빠져 나왔다.
계집과 사랑에 빠졌을 때 사내는 자신의 거처를 알려 준 적이 있었다. 계집은 쉽게 사내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내는 계집을 보자마자 산속에 사는 마귀의 딸이라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외면을 했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이미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한 뒤였다.
"그때 계집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맛보았지요."
천산 마귀할멈이 갑자기 침대 모서리를 향해 장을 날렸다. 모서리가 박살이 났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묘상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그……그대는 대관절 누구요? 누군데 그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말이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묘상, 정녕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어요?"
묘상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아리송한 눈빛을 지었다. 그녀는 무거운 한숨을 내
쉬었다.
"보름 동안이나 데리고 놀던 기억이 전혀 없나요? 물론 여인들을 한낱 노리갯감으로 밖에는
여기지 않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색 비단천을 천천히 벗겨 내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차츰
위로 치켜올라가더니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이래도 모르겠어요?"
묘상의 두 눈이 갑자기 커지면서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그대가 바로 그 계집……!"
그녀가 차갑게 웃으면서 반문했다.
"나를 첩아라고 부르던 기억도 나겠지요?"
"그, 그랬지. 첩아라고……."
묘상이 더듬거리자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때 묘상은 신혼 때라 도소정이라는 년이 나를 개처럼 오혈궁에서 몰아내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했지요. 그때 난 임신 육개월이었어요. 그러나 매정하게 나를……
"첩아……!"
울상이 된 묘상이 천산 마귀할멈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쌓였던 울분이 치솟아 계속 언성
을 높였다.
"닥쳐! 첩아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묘상은 주눅이 들긴 했지만 여전히 입으로는 변명을 토했다.
"그럼 좋소. 그때 난 정말 그대가 임신중인 걸 몰랐소. 알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와
함께 멀리 도망치려고 했을 거요."
그녀가 코방귀를 뀌었다.
"흥, 내가 아직도 그때의 철부지 계집인 줄 아는가? 아직도 네 놈의 말에 넘어갈 그런 계집
으로 보이냔 말이다. 난 알고 있다. 네 놈이 그때 도소정에게 장가를 든 건 오혈궁 궁주 자
리가 탐나서였다는 것을. 네 놈의 목적이 궁주인데 어찌 나와 도망을 칠 생각을 하겠냔 말
이다!"
"그건 틀린 말이오 나는 오혈궁 궁주가 되기 위해 도소정에게 장가를 들었소. 하지만 그녀
가 여색을 좋아하는 해괴한 괴물인 줄은 정말 몰랐소. 첫날밤 신방에 들었는데 그녀가 내
남근을 칼로 잘라 버려……."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천산 마귀할멈은 그 말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통쾌한 듯 한바탕 웃어젖혔다.
"오호호. 죄는 지은 대로 가고 공은 닦은 대로 간다더니, 네 놈 같은 바람둥이에겐 딱 알맞
는 일이었군!"
"그대가 오혈궁으로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이미 사내 구실을 못하는 허수아비였소. 그래서
그대와 함께 달아날 용단을 내리지 못한 거요. 솔직히 말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
께 살면서 평생 생과부 노릇을 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소."
"네 놈은 지금도 나를 구슬려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흥, 하지만 어림도 없다!"
"허나 우리 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방으로 당신을 찾아다닌 것만은
사실이오."
"그것은 내가 몸을 푸느라 공력이 크게 소비된 틈을 타서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거였지. 영원
히 입을 봉해 버리고자 말이다!"
"아니오. 난 진심으로 그대와 딸을 찾아서 조용한 곳에 가 살게 하려고 했던 거요."
"흥,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구나. 그때 난 비록 내공을 허비한 상태였지만 한 놈쯤은
생포할 여력은 있었다. 그 놈은 목숨이 아까워 네 놈이 시킨 것을 모두 불었다."
묘상은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 놈이 누군데……?"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부터 내가 네 놈의 속셈을 완전히 알게 되었
다는 거다. 그래서 난 마음을 독하게 먹고 딸을 네 놈에게 주었다. 딸애를 보면 자연히 나를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동안 나는 천산에 가서 신공을 연마했다. 신공을 몸에 익히는 그
날 돌아가 복수를 하리라 결심을 했었다."
갑자기 그녀가 앙천대소를 했다.
"오호호호……, 바로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묘상은 크게 절망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그대는 내가 우리 청아를 키운 공로를 인정해야 하오. 청아와 나 사이의 정은 매우 깊소.
그대가 만일 나를 죽인다면 청아는 그대를 어미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아무리 떠들어도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아!"
그녀가 이윽고 여혈의를 불렀다. 여혈의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부님, 분부만 내리십시오!"
그녀가 묘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혈의야, 이제는 네 손을 빌릴 때가 된 것 같다."
여혈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칼을 뽑아 들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검은 비단으로 얼굴을 다
시 가리며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왜 네 손으로 직접 죽이지 않느냐? 결국 넌 내게 아직 미련을 두고 있다는 증거다."
묘상의 말에 그녀가 이를 사려물었다.
"어서 손을 써라!"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여혈의의 칼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어헉!"
묘상의 몸은 순식간에 난도질당했다. 여혈의는 이불로 묘상의 시체를 싸서 동굴 속에 흐르
는 암류 속에 던져 넣었다. 시체를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혈의가 동굴 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제자들은 그때까지 공지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여혈의
는 제자들 앞을 걸어 지나갔다.
이때 천산 마귀할멈이 여혈의 앞에 나타났다.
"네가 나를 도와 묘상을 처단했으니 그 공으로 너를 새 궁주로 발탁한다. 지금부터 오혈궁
은 너의 휘하에 움직이게 되었다!"
여혈의가 무릎을 꿇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차갑게 표정을 바꾼 그녀가 말했다.
"너와 나 사이에 있은 일은 일종의 거래였다. 그것이 끝났으니 사제간의 연분도 끝난 셈이
다."
그리고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혈의가 그녀의 모습을 찾는 척하며 속으로 뇌까렸다.
'네 년이 가버리면 더 좋지. 매일마다 네 년에게 굽신거릴 일을 걱정했었는데…….'
여혈의가 대뜸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부터 내가 오혈궁의 궁주다. 너희들 중에서 누구든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나와라!"
이때 강금의, 반채의 등 여러 제자들의 몸에 감겨 있던 오랏줄은 풀려져 있었다. 이들은 평
소 묘상의 신임을 받던 제자들이었지만 이미 득세한 여혈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금의가 나서면서 대답했다.
"우리는 새로운 궁주를 환영합니다!"
반채의도 맞장구를 쳤다.
"만일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우리가 나서서 처단하겠습니다!"
이때 천산 마귀할멈이 다시 허공을 날아왔다. 몸 뒤에는 한 줄기의 검은 연기가 길게 달려
있었다. 여혈의 앞에 내린 그녀가 물었다.
"청아가 어디 있지. 빨리 그 애를 찾아와라!"
여혈의는 이때서야 엽청청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음을 상기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그녀의 근
황을 물었다. 매초풍이 엽청청을 떠나 보낼 때 있었던 제자들이 그 사실을 고했다.
천산 마귀할멈은 매초풍이 자기 딸을 잡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고함을 쳤다.
"매초풍, 이 년을 꼭 내 손으로 잡아 요절을 낼 것이다!"
그녀는 다시 바람처럼 날아갔다.
여혈의는 그녀가 사라지자 눈알을 무섭게 굴리며 명령을 내렸다.
"강금의하고 반채의는 잘 듣거라. 내일 너희 두 사람은 경공에 능한 자 몇을 데리고 오혈궁
에서 나가 엽청청을 찾도록 해라. 그 애를 발견하거든 즉시 알려라."
제17장 개방과 손잡은 매초풍
오혈궁에서 빠져 나온 매초풍은 즉시 엽청청을 찾지 않았다.
그녀는 여혈의와 천산 마귀할멈이 뒤쫓아 오리라 짐작하고는 가능한 한 그곳으로부터 멀리
도망쳤던 것이다.
오십여 리 길을 단숨에 달아난 매초풍은 차츰 걸음을 늦추고는 속으로 궁리했다.
'여혈의란 놈이 옆에서 고자질을 할 게 뻔한데, 그럼 마귀할멈은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만나기만 하면 죽이려고 대들 게 분명하다.'
그녀는 여혈의가 더욱 미워졌다. 죽여 버리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여혈의로 말하자면
무공이 강해 설사 천산 마귀할멈이 편을 들어주지 않더라도 매초풍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무공과 용력으로 이기지 못하면 지혜로 맞서야 했다. 매초풍은 좋은 수를 생각해 내고는 남
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해도 개방의 세력권보다는 넓지 못하다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었다. 인
간이 사는 곳에는 거렁뱅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거의가 개방의 제자들이었다.
개방의 제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개방 산하에는 또 분타들이 난립되어 있
는데 개방의 방주인 홍칠공과 사대 장로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수를 파악하고 있지 못하
는 실정이었다.
오대 제자 손립이 지도하는 분타가 오혈궁에서 가장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나 손립은 오혈
궁이 대관절 어느 곳에 있는지 잘 몰랐다. 이 고장에는 늘 오혈궁의 제자들이 출몰하는 것
으로 미루어 부근에 있을 거란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개방의 총타는 이 소식을 듣고 무공이 출중한 수십 명의 제자들을 파견했다. 손립은 이들
중에서 무공이 가장 뛰어난 제자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에게 분타의 주인 노릇을 하도록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손립이 불안한 마음으로 서성거리고 있는데 한 제자가 달려왔다. 제자가 말하기를
웬 자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거였다.
그는 매초풍이었다. 손립은 두 손을 들어 맞잡고 흔들면서 물었다.
"그대가 철시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소?"
그러자 매초풍이 독룡은편을 꺼냈다. 손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룡은편은 분명 철시에게만 있는 것이지."
손립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소저는 무슨 일로 예까지 왔소?"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인데 자리도 권하지 않으니 섭섭합니다. 그리고 손님을 맞기 위해서
는 향기로운 차라도 권해야 할 게 아닙니까?"
손립이 다시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이제는 소저가 찾아온 이유를 말해 주시오."
"저는 이곳의 타주님을 뵈러 왔어요."
"내가 바로 손립이오. 이곳의 주인이지요."
"하찮은 오대 제자가 분타의 주인 노릇을 하다니요? 개방에는 인재가 없는 모양이지요. 오
호호……!"
매초풍이 한껏 비웃었다.
"사정을 모르시고 하는 말씀이오. 무릇 개방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일
반적으로 분타의 주인은 사대 제자들이오."
"좋아요 아무튼 난 당신네 개방의 칠대나 팔대 제자들을 만나고 싶어요. 아주 중요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지요."
"무슨 일인지 내게는 말할 수 없소?"
"당신은 자격이 없어요."
"말이면 다하는 줄 아시오? 매 소저가 오혈궁 무리에 가담한 그 자체는 벌써 우리 개방의
적임을 말해 주는 일이야. 그리고 기억하라구. 바로 매 소저가 금나라 놈들과 싸우러 나간
우리 개방 의사들의 금은 보화를 강탈해 갔다는 것 말이오!"
손립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매초풍이 훌쩍 몸을 날리더니 구음백골조로 참나무 탁자
를 가볍게 할퀴었다. 나무조각이 삽시간에 톱밥처럼 흩어졌다.
손립이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수작을 부리느냐?"
"흥, 너 따위에게 질 내가 아니다. 어서 그들을 불러 주시오. 성사만 되면 네게도 후한 상을
줄테니."
이때 문밖으로부터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매초풍, 담도 크구나.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이 늙은이가 너를 용서해 주리라고는 꿈도 꾸지
마라!"
횐 수염을 휘날리며 들어선 자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내였다. 그가 바로 칠대 제자 한대
웅이었다. 그는 손에 든 타구봉으로 매초풍을 향해 연신 삿대질을 해댔다.
"이 년,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그러나 매초풍은 그를 보고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죽 웃으며 받아쳤다.
"기다리고 있던 참인데 잘되었군요. 내가 왜 도망을 치겠어요."
한대웅 뒤로 다시 뚱뚱하고 몸집이 거대한 중이 뛰어들어왔다.
"매초풍, 벼르고 있던 참인데 잘 만났다!"
그는 다짜고짜 소림신권인 '역당산문(力撞山門)'이라는 초수를 쓰면서 덮쳐들었다.
매초풍은 갑자기 강한 돌풍이 얼굴을 때리는 것 같아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최심
장으로 응전을 했다.
두 사람이 공중으로 솟구치며 장을 날렸다. 매초풍이 싸우면서도 여유 있게 말했다.
"아수라, 그대의 상처는 다 나은 모양이군요. 나도 기뻐요. 실로 소림사의 의술은 대단해!"
철금강 아수라는 소림사의 상과단약(傷科丹藥) 덕분에 내상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었다. 또
한 부러졌던 왼팔도 회복을 한 상태였다.
그는 매초풍과 주먹으로 견주어 보았다. 예전보다 그녀의 내력이 더 강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매초풍이 강해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매초풍이 오혈궁의 큰 사형인 노
로의의 진기를 거의 빨아들였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수라는 그러나 계속 매초풍에게 달려들었다. 매초풍은 그의 내력이 자신보다 약한 것을
알고는 진기를 슬쩍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양기를 단전으로 밀어 응축시켰다. 그
리고 다시 단전으로 올려 오른쪽 주먹으로 집중시켰다.
그녀의 주먹이 곧장 날아왔다. 아수라의 주먹도 바로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주먹끼리 맞부딪
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초풍의 주먹이 그의 주먹을 순간 감싸 쥐었다. 매초풍의 진기가 들
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아수라는 내공을 써서 막았다.
점점 아수라가 밀리기 시작했다.
아수라는 마치 매초풍에게 끌리듯 꼼짝을 못하고 굳어졌다. 그녀의 내력에 전신을 빼앗기고
만 것이었다.
한대웅은 아수라가 매초풍에게 패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
는 잠시도 주저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아수라를 구해야 했다. 그는 타구봉으로 매초풍의 등
을 향해 갈겼다.
그것을 알아차린 매초풍이 얼른 몸을 피하며 냉소를 뿌렸다.
"호호호, 개방의 칠대 제자가 그런 비겁한 수단을 쓰다니…… 수치스럽군요!"
한대웅이 흠칫 놀랐다. 그는 매초풍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아수라를 구
하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네 년 같은 마귀와 겨루는 데는 강호의 도리를 따질 필요가 없다!"
한대웅이 타구봉으로 다시 매초풍의 등을 후려쳤다.
매초풍이 얼른 왼손을 뒤로 돌리며 도화도 무공인 낙영신검장 중 해풍소락화(海風掃落花)의
초수를 썼다. 한대웅의 손에 잡힌 타구봉은 매초풍의 주먹에 맞아 옆으로 튕겨 나갔다. 순식
간에 매초풍의 왼쪽 주먹이 여러 개의 주먹으로 변하더니 한대웅의 면상으로 쏟아졌다.
"이크!"
한대웅이 식은땀을 흘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며칠 보지 않은 사이에 무공이 이렇게 늘다니……! 그러니까 아수라와 내력을 겨루면서도
입을 벌려 할말을 다하고 다른 한 손으론 공격까지 할 수 있었던 거로구나.'
그는 점점 위기감을 느꼈다. 급박하게 된 한대웅이 다시 타구봉을 휘두르며 공격을 가했다.
매초풍이 타구봉을 탁 하고 가볍게 치자 그는 멀리 날아갔다.
쿵 하는 소리를 내며 한대웅이 땅에 떨어졌다. 매초풍이 조금만 더 내력을 가했어도 그는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부끄럽지도 않아요?"
매초풍이 한대웅을 향해 소리쳤다. 한대웅이 벌떡 일어서며 다시 매초풍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때 손립이 나섰다.
"한 형, 우리 둘이 힘을 합쳐 저 년을 끝장내 줍시다!"
한대웅이 괴성을 질렀다.
"잔말이 왜 그리 많은가? 할려면 어서 손을 써!"
그러면서 그는 수치감을 느꼈다.
'우리 개방의 위신이 저 년의 손에 더럽혀지는구나. 한다하는 사내가 계집년 하나 당해내지
못하고 있다니……. 무림이 이런 사실을 알면 얼마나 비웃겠는가!'
손립의 무공은 비록 한대웅보다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힘을 합치면 그 위력은 실로 가공할
만한 것이 되었다. 매초풍은 아까보다 신중하게 내력을 끌어 모았다. 그녀가 다시 도화신검
장으로 응전했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손바닥이 등뒤로 감춰질 때면 어떤 장이 퍼부어질지
알 수 없어 모두들 전전긍긍했다.
펑펑펑……!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빠른지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차례의 장을 피하고
나면 연달아 질풍 같은 장이 몰아쳤다.
매초풍은 뛰어난 무공으로 순식간에 두 사람을 압도했다. 하지만 이 틈을 이용해 숨을 돌린
아수라가 다시 내력을 모아 버텼다. 만일 한대웅과 손립이 공격을 가하여 매초풍의 내력을
뺏지 않았다면 아수라는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다.
두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앞장선 사내는 거렁뱅이 차림이었고 등에는 자그마한 자루를 아흡 개나 짊어지고 있었다.
개방의 장로 노유각이었다. 또 한 사내는 남색 저고리에 접은 부채를 손에 들고 있는 철선
서생 하종이었다.
두 사내를 보자 한대웅이 반색하며 구원을 청했다.
"노 장로님, 어서 저 아수라를 구해 주세요!"
노유각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매초풍 배후에 가서 기를 내보낼 자세를 취했다.
"매초풍, 어서 손을 떼라!"
그녀는 손을 떼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겨우 지탱하고 있던 아수라는 매초풍이 손을 떼
자 그대로 앞으로 달려갔다. 매초풍이 내력을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맞은편에는 바위가 있었다. 아수라의 몸이 바위에 닿는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바위가
산산조각이 났다.
"으으……."
아수라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여 죽은 듯이 쓰러졌다. 한대웅과 손립이 얼른 달려가 그를 부
축했다.
이때 노유각이 매초풍을 쏘아보았다.
"철시, 넌 왜 이곳에 왔느냐? 우리 개방의 열여섯 상자나 되는 보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
지?"
매초풍이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당신들이 모두 여기에 계시니 참 잘 되었네요. 찾아다니느라 힘을 들일 필요가 없으니까
요."
개방에서는 열여섯 상자나 되는 보물을 잃은 후에 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노유각에게 곧
바로 그 사실이 알려졌다. 노유각은 소식을 접하고는 사건 현장에 달려갔다. 그 후로 개방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염탐을 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하종도 위협조로 다그쳤다.
"어서 실토해라. 상자들을 어디에 감췄냔 말이다. 실토하기 전에는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문밖에서 또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뒤이어 우렁찬 음성이 들렸다.
"철시란 마귀 계집이 찾아와서 소란을 피운다던데 잡았나?"
철권패왕 노위였다. 노위도 매초풍과 눈길을 마주치자 내심 놀라워했다.
"정말 마귀년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군. 어서 저 년을 잡지 않고 왜 그러고 계십니까?"
노위가 노유각과 하종에게 물었다.
노위가 우쭐거리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려 하자 하종이 그를 막아섰다.
"무턱대고 덤벼서는 안 되네. 보라구, 저 철금강 아수라도 저 년을 당해내지 못하고 저렇게
되었네."
하종이 타이르자 노위가 버럭 화를 냈다.
"저것이 무공이 한 수 늘었다 해도 우리가 힘을 합치면 문제 없소!"
매초풍이 손을 내저으며 히죽 웃었다.
"내가 싸우러 온 줄 아시나요?"
"그럼 뭣하러 왔느냐?"
노유각이 따져 묻자 매초풍이 다시 웃음을 띄웠다.
"듣자하니 그 상자의 보물은 금나라 놈들과 싸우는 송나라 군에 보내는 것이라면서요?"
"그렇다. 금나라 놈들을 몰아내는 항금 대업에 관계되는 보물이니 너는 신중해야 할 것이
다!"
"그런 줄 알았더라면 손을 대지 않았을 거에요."
"너 같은 주제에 그 일이 어떤 일인지나 알고 있느냐? 허튼 수작 집어치우고 뭣하러 왔는지
만 말해라!"
"노 장로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제 사부님이신 황약사와 흥 방주님은 벗 사이가 아닙니까?
이런 정분을 보더라도 저는 그 보물 상자를 탐내서는 안 되지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하종이 쏘아댔다.
"탐내기만 했더냐? 빼앗아 놓고는 무슨 오리발을 내미는 수작이냐!"
가볍게 탄식을 한 매초풍이 대답했다.
"오혈궁 무리들과 함께 보물을 강탈했어요. 하지만 그것이 항금 대업에 관계된다는 것을 안
뒤로는 후회를 했답니다. 저도 송나라 백성이에요. 저 역시 애국심은 있다구요!"
"그렇다면 매 소저는 어쩔 셈이오?"
노유각이 미덥지 않다는 투로 물었다.
"전 당신들을 도와서 그 보물들을 다시 찾겠어요."
"그게 정말이오?"
노유각이 표정을 활짝 피며 물었다.
"제가 흘몸으로 여기까지 찾아와서 목숨을 걸고 장난을 하겠어요?"
노유각은 하종과 그 밖의 사내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눈짓으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매 소저는 우리를 어떻게 돕겠다는 게요?"
노유각이 재차 묻자 매초풍이 대답했다.
"그 보물상자는 이미 오혈궁으로 옮겨졌어요. 제가 길을 안내하겠으니 함께 협력하여 그곳
으로 쳐들어가 다시 빼앗아 오는 겁니다."
"매 소저는 오혈궁의 제자가 아니오.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한단 말이오?"
"첫째는 항금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고 둘째로는 한 사람을 없애 버리기 위해서지요."
그녀의 말에 겉으로는 수긍의 기색을 보이던 노유각은 속으로 달리 생각했다.
'항금 대업을 운운하는 것은 필시 거짓이고 우리들의 손을 빌려 사람잡이를 하려는 게 분명
해!'
노유각은 짐짓 동조하는 것처럼 하면서 넌지시 물었다.
"매 소저가 우리에게 죽이라고 하는 자는 대관절 누구요?"
"여혈의!"
그러자 하종이 냉소를 던졌다.
"허허허, 매 소저의 말이 진심이라 해도 오혈궁의 실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요. 섣불리 쳐들
어갔다가는 애매한 목숨만 잃게 될텐데."
"당신들이 저를 믿어만 주신다면 오혈궁을 모조리 소탕할 수가 있어요. 당신들은 말끝마다
의협심과 정의감을 떠벌리더니 정작 일을 하자니까 왜 이 모양이죠? 당신들은 줄곧 오혈궁
을 섬멸시키려고 궁리해 오지 않았던가요?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
요?"
매초풍은 최근 오혈궁에서 일어난 변고를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난 노
유각이 궁리를 했다.
'과연 절호의 기회다. 허나 오혈궁에 그런 변고가 생겼다고는 해도 실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일망타진을 하려면 개방의 제자들을 더 많이 동원해야 할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고심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이 하도 중대하다 보니 홍 방주님께 보고를 올려야겠네."
매초풍이 노유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전 당신이 어떻게 계획을 짜던 상관하지 않겠어요. 다만 제 요구만은 꼭 들어줘야 해요. 여
혈의란 놈을 반드시 요절내야 한다구요."
그녀의 두 눈에서 매서운 살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변고가 있은 다음 오혈궁은 원기를 크게 잃어 버렸다.
하지만 여혈의는 득의양양하여 자신의 웅대한 목표를 실현하여 강호에서 으뜸가는 풍운아가
되려고 노력했다.
며칠 동안 그는 제자들을 사방으로 보내 매초풍과 엽청청을 찾도록 분부했다. 그러나 두 여
인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두 여인 중 하나는 그의 원수였고. 다른 하나는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인이었다. 두 여
인을 그는 어느 하나라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엽청청은 오매불망 잊지 못해 매일
되뇌이는 쪽이었다.
여혈의는 자신의 무공으로는 아직은 강호의 이름있는 파벌들과 힘을 겨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천산 마귀할멈이 전수해 준 무공을 익히느라 심혈을 기
울였다.
수림 속에서 무공을 연마하고 있던 여혈의는 가볍게 들려 오는 발짝 소리에 몸을 급히 날렸
다. 그는 어느새 나뭇가지가 무성한 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한 처녀가 걸어왔다. 몸을 숨긴 채 내려다보니 그녀는 동문의 여제자 반채의였다. 그
녀가 사방을 기웃거리는 모양을 봐서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녀는 한동안 사
방을 두리번거리더니 한숨을 지었다. 그녀는 나무에 기대어 멍하니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여기까지 와서 무엇을 찾지?"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반채의가 고개를 돌렸다. 여혈의가 자신이
기대고 있는 나무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궁주님이셨군요.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넌 이곳이 본 궁주가 무공을 연마하는 곳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나?"
여혈의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알고 있어요. 전…… 궁주님께서 무공을 닦는데 시중이나 들어드릴까 해서……."
그녀는 짐짓 두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여혈의에게 아양을 떠는 중이었다. 여혈의는 그녀
가 찾아온 의도를 간파했다.
'앙증맞은 계집, 묘상이 궁주 노릇을 할 때에는 그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애교를 부리더
니 이젠 내게까지……. 강금의란 녀석이 어떻게 이런 년을 참아냈을까? 묘상이란 놈이 병신
이었으니 망정이지 성한 놈이었다면 가관이었을텐데.'
반채의는 여혈의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더욱 애교를 부렸다.
"궁주님께서 이 제자를 사저로 삼으셨는데 그 은혜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궁
주님의 마음도 잘 모르고 하니까 더욱……."
여혈의가 그녀의 몸에 눈길을 주었다. 탄력 있는 몸매는 충분히 사내를 유혹할 만한 매력이
있었다. 얼굴빛이 좀 검은 것이 흠이지만 호수같이 맑은 눈동자와 탐스러운 입술이 그 흠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여혈의가 다가가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내 말만 잘 듣고 다른 생각을 품지 않으면 널 아껴 주겠다."
"궁주님께 향한 제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궁주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이 제자는 목
숨을 바쳐 성심 성의껏 거행하겠습니다."
여혈의는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더욱 가까이 그녀에게로 몸을 밀착시켰다.
"넌 정말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훌륭한 제자야."
여혈의는 슬쩍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반채의가 전신을 가볍게 떨며 여혈의의 가슴에 얼굴
을 묻었다.
"전 궁주님의 영원한 노예랍니다."
여혈의는 그녀의 머리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에 갑자기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를
더욱 세차게 안았다. 그리곤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찾아 얼굴을 들이밀었다. 혀로 그녀의
두 볼과 입술을 핥았다.
그런데 잠시 후 여혈의가 갑자기 그녀를 밀쳐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냉큼 물러가지 못할까! 네 년은 그 애가 아니야!"
그는 불현듯 엽청청을 떠올렸던 것이다.
'엽청청,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나? 난 오직 그대만을 사랑한다구. 다른 계집들은 절대 사랑
하지 않을 거야!'
반채의는 그가 지금 엽청청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고는 질투를 느꼈다. 그녀는 여혈의가
강금의처럼 자신의 잔재주에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지만 계속 아양을 떨었다.
그녀는 속으로 탄식하면서도 여혈의의 가슴에 얼굴을 다시 살며시 묻었다.
"궁주님께서는 저를 그 아이로 생각하세요. 그래도 저는 조금도 서운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
까요."
여혈의가 두 손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앞가슴으로 옮아 간 그의 손길은
뜨거웠다.
반채의는 그의 손을 자신의 옷 안으로 이끌었다. 여혈의의 손아귀가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
쥐었다.
"아…… 제가 바로 엽청청이랍니다."
여혈의는 이미 두 눈을 감은 채 황홀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청청, 난 그대만을 사랑해. 그대만을……!"
여혈의가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여인의 살내음이 여혈의의 가
슴을 자극했다. 그는 더는 억제할 힘을 잃고 그녀의 옷을 마구 벗기기 시작했다.
"그대는 정녕 엽청청이지?"
여혈의가 울부짖으며 반채의의 몸을 탐닉해 갔다.
"예, 전…… 아……, 제가 엽청청이에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여혈의가 뒤로 누우며 양팔과 다리를 뻗고는 눈을 감았다. 반채의는 알몸을 여혈의의 가슴
팍에 갖다 대며 교태스런 웃음을 뿌렸다.
"호호호, 궁주님께서는 정력이 대단하세요. 전 궁주님께 홀딱 반했답니다."
여혈의는 그녀가 제 마음껏 그의 몸을 주무르고 만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점점 그 정
도가 지나쳐 여혈의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며 반
채의 역시 옷을 챙겨 입었다.
"궁주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여혈의가 차갑게 내뱉었다.
"냉큼 사라져라. 앞으로 이 일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반채의가 다시 여혈의의 팔을 잡으며 눈웃음을 쳤다.
"궁주님께서는 벌써 제가 싫어졌나요?"
"더러운 년, 어서 물러가지 못할까!"
여혈의가 버럭 화를 냈다.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어요? 말이나 속시원히 해주세요."
"넌 엽청청이 될 수 없어. 어떤 여인도 그녀를 대신할 수는 없어!"
그때 갑자기 오혈궁 쪽에서 경적 소리가 크게 세 번 울려 퍼졌다. 이윽고 폭죽을 단 화살
세 개가 하늘로 솟구쳤다.
펑펑펑!
굉음이 울리며 폭죽이 터졌다. 여혈의가 몹시 당황한 얼굴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폭죽이 터
진 것은 적이 쳐들어왔다는 신호였다. 그가 수림을 헤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동굴 앞에 이르자 몇몇 제자들이 멀리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강금의 무리들이었다. 강금의
의 옷자락에는 핏물이 뻘겋게 배어있었다.
"궁주님, 큰일났습니다!"
강금의가 소리쳤다.
"무엇이!"
"매초풍이 개방의 무리들을 데리고 침입했습니다!"
"매초풍은 원래 개방하고는 앙숙이 아니던가? 그런데……."
여혈의는 의구심이 일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매초풍이 노유각 패거리들을 이끌고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우리 제자
들을 살육하고 있습니다."
여혈의는 더럭 겁이 났다.
'매초풍, 정말 지독한 년이로구나!'
여혈의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 수가 얼마나 되더냐?"
"아마 칠팔십 명은 됩니다. 그러나 지금쯤은 천 명 가까이 될지도 모릅니다. 계속 밀려들어
오고 있으니까요."
여혈의는 개방의 무리들을 끌고 온 것으로 보아 오혈궁을 쑥대밭으로 만들 계산이라는 걸
짐작했다.
"모든 제자들을 소집하라. 싸움에서 비겁하게 물러서는 자는 가차없이 죽일 것이다!"
여혈의가 각오를 다졌다.
이때 제자들이 쫓겨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이백여 명의 개방 제자들이 추격해 왔다.
여혈의가 몇몇 무공이 뛰어난 제자들을 끌고 나가 연거푸 십여 명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개
방의 무리들이 주춤했다.
노유각도 달려왔다. 그는 오혈궁의 제자들이 여혈의의 지휘 아
래 진을 형성하고 있는지라 얼른 공격을 중지시켰다.
노유각이 명령을 내렸다.
"한 칠대와 손 오대 자네 두 사람은 각각 이십 명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오혈궁의 잔당을 소
탕하게나. 나머지 제자들은 저 놈들을 포위하라!"
한대웅과 손립이 제자들을 데리고는 양쪽으로 갈라졌다. 나머지 백여 명은 오혈궁 무리들을
에워쌌다. 오혈궁 쪽에는 이제 팔십여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여혈의는 매초풍을 발견하고는 언성을 높였다.
"철시, 복수를 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해라. 왜 하필이면 거렁뱅이들을 끌고 와 어지럽히느
냐? 본 궁주의 위력에 겁을 먹은 게 틀림없구나!"
매초풍이 뒤질세라 맞받아쳤다.
"나는 복수하러 온 게 아니다. 이 철시 역시 애국자다. 개방의 영웅들을 도와 그 보물을 찾
고자 왔다!"
"용기가 있으면 나와서 승부를 가려 보자!"
노유각이 매초풍에게로 달려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도둑 무리를 소탕하려면 그 두목부터 잡아야 하네. 그대가 여혈의만 제압하면 나머지는 식
은죽 먹기야. 모두 투항할 게 뻔하다구."
매초풍이 눈을 흘겼다.
"흥, 벌써 네가 내놓은 조건을 잊었나요. 여혈의를 어떻게 하든 그건 당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이때 여혈의가 고함을 쳤다.
"철시야, 네 년은 강호에서 천방지축 돌아다니면서 호걸들로부터 철시라는 말을 들어오지
않았느냐. 그러한 철시가 정말로 나를 두려워한단 말이냐?"
자존심이 상한 매초풍이 대꾸했다.
"이 놈, 철시가 너 같은 놈을 무서워할 줄 아느냐!"
노유각이 이 틈을 이용해 또 한마디 던졌다.
"저걸 보라구. 여혈의는 오직 그대에게만 도전을 하잖아. 아마도 그대도 응전을 해야 할 것
같아."
매초풍이 그의 말에 넘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먼저 싸울 테니, 제가 당하게 되면 구해 줘야 합니다."
"그거야 두말 하면 잔소리지."
두 사람이 서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매초풍이 걸을 때마다 깊이 발자국이 새겨졌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긴장을 했다. 매초
풍이 정신을 차리고 숨을 모아 조용히 내력을 집중시켰다. 진기가 발동하자 저고리와 치마
가 마치 광풍을 만난 듯이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여혈의의 도법은 빨랐지만 그가 처음으로 후려치는 칼은 반대로 느렸다.
누구라도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매초풍처럼 날쌘 고수들은 눈을 감고서도 연거퍼 세 번이
라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초풍은 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혈의의 그 다음 초수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몸을 빨리 피할수록 여혈의의 다음 번 칼날은 더 빨라졌다. 그야말로 숨을 돌릴 틈
을 주지 않았다.
다시 여혈의의 칼이 매초풍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그의 칼은 마
치 우박처럼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매초풍이 칼날을 묘하게 피하면서 기회를 엿봐 칼등을 손으로 잡으려 했다. 그런데 그만 헛
잡는 바람에 여혈의의 칼은 다시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곧추 내리꽂혔다.
"얏!"
매초풍이 번개 같은 동작으로 얼른 그의 등뒤로 옮겨 갔다. 그리곤 최심장을 내질러 그의
등을 박살내려고 했다. 여혈의가 머리를 돌리지도 않은 채 뒤를 공격했다. 매초풍도 황급히
칼을 피하면서 그의 뒷머리를 할퀴려고 손가락을 뻗었다.
"간다!"
여혈의가 무릎을 꿇으면서 그녀의 갈고리 손을 피했다. 동시에 양손으로 칼을 잡고는 머리
를 비스듬히 젖히면서 위를 향해 찔렀다. 오혈도법 중의 절묘한 초수인 거두망월(擧頭望月)
이었다.
매초풍은 미처 이 초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용케 몸을 피한 그녀는 독룡은편을 뽑아
들었다.
휘리릭―.
그녀의 채찍이 한차례 바람을 갈랐다. 여혈의가 소리를 지르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손목을 재빨리 놀려 칼을 바람개비처럼 돌리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칼날들이 돌아가는 것
처럼 보였다. 매초풍은 그러나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호호호, 광대처럼 재주 한번 그럴듯하게 부리는군!"
매초풍이 야유를 보냈다. 그러면서 독룡은편을 연신 휘둘러댔다. 그녀의 독룡은편은 세차게
넘실대는 물줄기를 연상하게 했다. 여혈의의 칼이 기승을 부릴수록 그녀의 독룡은편 역시
집요하게 허공을 그어댔다.
여혈의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칼끝을 땅에 박고는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매초풍도 양손
으로 독룡은편을 여유 있게 잡고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벌써 지쳤느냐?"
매초풍이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여혈의가 다시 칼을 곧장 뻗으며 달려들었다. 매초풍이 독룡
은편을 크게 후려치면서 왼손으로는 구음백골조를 써서 여혈의의 오른쪽 어깨를 할퀴려고
했다.
여혈의가 오른쪽 어깨를 움츠리는 바람에 칼의 속도가 느려졌다.
순간 매초풍의 온몸의 뼈마디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삽시간에 왼손이 믿어지지
않게 길어지면서 여혈의의 오른쪽 어깨를 움켜잡는 것이었다.
여혈의가 깜짝 놀라 얼른 뒤로 물러섰다. 매초풍은 그의 옷자락만 한 움큼 뜯어냈을 뿐이었
다. 여혈의는 내심 매우 당황했다.
매초풍이 이를 악물고는 왼손으로 장을 날렸다. 내력이 담긴 장이라 위력이 대단했다. 천지
를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돌풍이 여혈의에게로 쏟아졌다.
여혈의가 슬쩍 피하면서 달려왔다. 그리곤 양손을 내밀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매초풍도 양
손을 뻗어 그와 내력을 겨루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양손에
힘을 주며 내력 싸움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머리에서는 희디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그리고 발도 점점 땅속으로 한
자 깊이까지 빠져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손바닥은 갑자기 떨어졌다가 다시 맞붙으며 끈질기게 서로의 내력을 겨루었다.
이때 여혈의가 오른손에 힘을 약간 늦추었다. 칼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매초풍도 독룡은편
을 던져 버렸다. 이제 두 사람은 오로지 내력에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삼척동자라도 두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었다.
철권패왕 노위가 하종을 돌아보며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저 두 악인을 한꺼번에 없애 버리는 게 어떤가?"
하종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노 장로가 이미 매초풍에게 약속을 했네. 절대 매초풍을 해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녀
를 도와 저 여혈의를 죽이겠다고 말일세. 사내 대장부들의 신의를 저버려서야 되겠나?"
노위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리는 그렇지만 여혈의를 이 틈에 죽여도 되지 않겠는가?"
노유각이 옆에서 그 말을 엿듣다가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바로 이때네. 노 형, 그 무쇠 같은 주먹으로 여혈의를 한 번 치면 되겠어!"
노위가 잠시 궁리하다가 대꾸했다.
"나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위험에 빠졌을 때 공격해 본 적이 없소. 하지만 여혈의 같은
악인을 처단하는 일에는 예외일 수도 있겠지."
이때 철금강 아수라가 노위를 잡아당기며 뇌까렸다.
"내가 저 악마를 지옥불에 처넣고 오겠네!"
아수라는 말을 하자마자 달려가 여혈의를 정수리를 겨냥해 주먹을 쳐들었다.
여혈의는 눈치로 이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아차렸
다. 예상대로 아수라가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그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가 순간 그 힘을 이용하여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매초풍은 거대한 내력이 자신에게로 밀
려오자 전력을 다해 반격했다. 그녀의 내력 덕분에 여혈의는 석 장 이상 날아가 오혈궁 제
자들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틈을 이용해 노유각이 소리쳤다.
"타구진을 쳐라!"
거렁뱅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한 면에 두 줄로 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
간에 오혈궁 무리들을 에워쌌다.
거렁뱅이들은 <연화락(蓮花落)>이라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면서 타구봉으로 땅바닥을 절도
있게 쳤다.
타구진이 펼쳐지자 노유각이 타구봉을 휘두르며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백여 개의 타구봉이
일제히 윙윙 우는 소리를 내며 몰아쳤다. 오혈궁 무리들은 겁에 질려 점점 한곳으로 뭉치듯
몰려 들었다.
무리들 속에 떨어진 여혈의는 내상을 입고는 두 번이나 검은 피를 토했다. 그러나 내상을
치료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간신히 버티고 일어서 소리쳤다.
"당황하지 마라!"
궁주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본 오혈궁 제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에 힘을 입은 여혈의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병장기를 손에 잡아라. 저따위 오합지졸들은 우리 오혈궁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궁주의 말에 제자들은 더욱 사기가 충천했다. 모두들 칼을 빼들고는 거렁뱅이와 혈전을 벌
이기 위해 각오를 다졌다. 거렁뱅이들은 타구봉을 연신 돌려대며 차츰 거리를 좁혀 왔다. 오
혈궁 제자들이 칼로 맞섰으나 백여 개의 타구봉이 내뿜는 힘은 가공할 만했다. 그들은 속속
타구봉에 정수리를 얻어맞고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어헉!"
한차례 거렁뱅이들이 공격을 퍼붓자 오혈궁 제자 이십여 명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여혈의가 다급하게 외쳤다.
"본 궁의 도법을 써라. 어서 한가운데를 공략하라!"
오혈궁 제자들이 칼을 맹렬히 휘두르며 탈출구를 뚫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또 십
여 명이 당했다.
노유각이 타구봉을 쥐고 서서 대응했다.
"아랫도리를 갈겨라!"
그러자 타구봉이 이번에는 오혈궁 제자들의 정강이를 향해 떨어졌다. 오혈궁 제자들이 공중
으로 솟구쳤으나 다시 내려오는 과정에서 정강이를 심하게 얻어맞고 말았다. 타구봉에 맞은
제자들이 또 맥없이 쓰러졌다. 거렁뱅이들은 타구봉을 휘어치고 내리치면서 오혈궁 제자들
을 마음놓고 주물러댔다.
여혈의는 대세가 이미 기울어 졌음을 알고는 도망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서쪽을 뚫어라!"
여혈의가 새로운 명령을 내리자 제자들이 일제히 서쪽을 향해 돌진했다. 거렁뱅이들도 서쪽
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모두 서쪽으로 몰려가자 오히려 빈틈이 생긴 것은 동쪽이었다. 여혈
의는 자신의 계산대로 되자 얼른 그곳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그는 아직 동쪽에 남아 있는
거렁뱅이들이 타구봉을 후려치는 것을 무릅쓰고 달려나갔다.
여혈의는 자신의 꾀로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노유각과 거렁뱅이들은 서쪽으로 몰려가 싸움
을 하는 바람에 여혈의가 달아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여혈의의
도주를 목격하고는 소리쳤다.
"여혈의가 동쪽으로 달아난다. 어서 추격하라!"
그것은 매초풍이었다. 그녀가 소리치며 앞장서 그를 쫓았다.
하종과 노위는 개방 사람이 아니었기에 매초풍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혈의는 내상은 입
었지만 경공만은 여전했다. 그는 벼랑 밑으로 달려가 큰 나무상자에 뛰어들면서 곧 공중으
로 오르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자신의 경공으로는 그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독룡은
편을 꺼냈다. 그것을 공중을 향해 휘어쳤다. 독룡은편이 여혈의의 두 눈을 명중시킬 뻔했다.
여혈의가 얼른 뒤로 몸을 숨기면서 칼로 채찍을 막았다. 매초풍이 다시 독룡은편을 휘어치
려고 했지만 나무상자는 이미 다섯 장 높이나 오른 뒤였다.
"네 놈이 도망치면 어디로 가겠느냐?"
매초풍이 다른 나무상자 위로 뛰어올랐다. 하종과 노위도 달려와 나무상자에 몸을 실은 채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무상자는 점차 구름과 안개 속으로 들어가 사방은 아무것도 보
이지가 않았다.
잠시 후 갑자기 머리 위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서 나무 상자가 기우뚱거렸다.
순간 머리 위에서 줄 하나가 내려왔다. 그리고 곧 또 하나의 줄이 힘없이 떨어졌다.
매초풍이 외쳤다.
"여혈의가 나무상자를 달고 있던 줄을 모두 베어 버렸어요!"
이때 여혈의의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들려 왔다.
"네 년은 이제 꼼짝 못하고 떨어져 콩가루가 될 것이다."
말을 마친 여혈의가 다시 줄 세 개를 잘라 버렸다 나무상자는 이미 한쪽이 아래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매초풍과 나머지 두 사람은 난간을 잡고는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비겁한 방법을 쓰는 네 놈은 정녕 사악한 놈이다!"
노위가 위를 향해 욕설을 퍼붓자 여혈의의 냉소가 떨어졌다.
"하하하, 난 원래 그런 놈이다. 하지만 나를 비겁한 놈이라고 욕하는 네 놈보다는 목숨만큼
은 더 질기다!"
나무상자를 지탱하고 있는 줄은 이제 세 가닥밖에는 남지 않았다. 하종도 조급해져 매초풍
에게 재촉했다.
"매 소저, 어서 살 수 있는 방법을 말하게나. 이곳의 사정이야 그대가 잘 알고 있지 않은
가?"
"흥, 나라고 뭐 용 빼는 재주가 있나요. 이번에는 꼼짝없이 죽는 수밖에……."
이제 죽었구나 하고 하종과 노위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에요. 저 암벽에 붙어서 기어오르는 수밖엔 없어요."
매초풍이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드러난 암벽을 가리켰다. 상자에서 다섯 자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암벽을 쳐다보던 하종은 머리칼이 쭈빗 서는 듯했다.
'만일 암벽이 매끄러워서 전혀 손에 잡히는 게 없다면 영락없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세 사람은 잠시 망설였다. 방법은 알아냈지만 경공을 써서 그 곳까지 날아갈 자신이 없었다.
다시 줄 하나가 끊어졌다. 상자는 두 가닥의 줄에 의지한 채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세 사람
의 몸은 더욱 기울어졌다.
매초풍이 두 사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 이 상자는 그네를 타고 있어요. 우리가 힘을 합쳐 몸을 굴리면 암벽까지 닿을 수 있
을 거예요. 가까이 갔을 때 잡을 만한 곳을 찾아 암벽에 붙으면 되잖아요."
세 사람은 천천히 몸을 이동시키며 상자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에 있던 여혈의 역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네 놈들이 상자를 움직이고 있구나. 그러면 죽음만 재촉하게 되지."
그는 이렇게 지껄이면서 다시 줄 하나를 끊었다.
"아악!"
상자가 완전히 뒤집혀졌다. 세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마지막으로 남은 줄에 세 사람이 매달
렸다. 그리곤 힘껏 몸을 움직여 암벽 쪽으로 가려고 했다.
여혈의가 마지막 줄을 칼로 천천히 자르면서 냉소를 보냈다.
"매초풍, 네 년은 원래부터 사내를 잡아먹는 마귀년이 아니었냐? 죽는 마당에도 결국에는
사내들을 물고늘어지는구나! 내가 만약 자네들이라면 그 철시년을 목 졸라 죽이고 말겠다!"
순간 매초풍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들은 저 놈의 말을 들어선 안 돼요. 절대!"
노위의 욕설이 뒤를 이었다.
"이 마귀년아, 네 년 때문에 우리까지 죽게 되었다. 그러니 네 년부터 먼저 죽어야 해!"
하종도 한마디했다.
"이 년, 지금 우리는 무림을 위해 골칫덩어리를 없애 버릴 것이다. 그러면 죽어서도 승천할
수 있을 것이다!"
줄이 심하게 흔들리면서 뒤를 이어 매초풍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내 혈도를 건드리지 말아요. 난 손에 이미 힘이 빠졌어요. 떨어져요. 제발……."
여혈의가 칼을 거두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매초풍, 원귀가 되더라도 나를 탓하진 말아라. 내가 널 죽인 것은 아니니까."
"여혈의, 제발 나를 구해 줘요. 그러면 엽청청의 행방을 알려주겠어요."
그 말에 여혈의는 정신이 퍼뜩 들어 물었다.
"어서 말해라!"
"엽청청의 행방을 알고 싶다면 우리를 끌어올려 줘요!"
잠시 생각하던 여혈의가 코웃음을 쳤다.
"흥, 네 년이 알려 주지 않아도 내가 찾을 수 있다. 그따위 미끼로 나를 속이려 들다니 어림
도 없다!"
"그렇지만 난 말해 주겠다!"
그런데 매초풍의 목소리는 여기서 싹뚝 끊어졌다. 더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안달이 난 쪽은 여혈의였다. 그가 다급하게 소리쳐 물었다.
"매초풍, 어서 말을 해라! 하종, 노위! 혹시 네 놈들이 벌써 그년을 죽인 것은 아니냐?"
한참 후에야 노위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우리는 철시의 혈도를 눌러 놓았다. 죽일 때 귀찮게 비명을 지를까 봐 그랬다."
여혈의가 협박을 했다.
"어서 혈도를 풀어 놓아라. 내 말을 거역하면 당장 줄을 끊어 버릴테다!"
줄이 다시 세차게 흔들렸다.
"내 말이 들리느냐?"
여혈의가 다시 아래에 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래로 떨어졌다면 비
명 소리라도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걸 보니 달아난 게 분명하
다고 그는 생각했다. 화가 치민 그가 줄을 마저 끊어 버렸다.
여혈의가 분풀이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벼랑가에서 은방울 굴리는 듯한 여인의 음성이 들
려 왔다. 곧 안개 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로 매초풍이었다.
"호호호. 내 꾀에 속은 맛이 어떠냐?"
매초풍이 깔깔거리며 조롱을 했다. 여혈의는 그만 사색이 되어 입을 크게 벌렸다.
"어떻게…… 어떻게 기어올라왔지?"
여혈의가 주춤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노위가 이죽거렸다.
"하하하, 넌 우리들이 서로 짜고 연극을 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을 것이다!"
노위가 말을 마치자마자 여혈의에게 달려들면서 주먹을 뻗었다. 평소 같았으면 노위쯤은 대
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내상을 입었고 또 귀신에 홀린 듯이 정신이 나간 상태
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다급한 나머지 안개 속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
"도망을 쳐?"
매초풍이 하종과 노위를 이끌고는 그를 뒤쫓았다.
산꼭대기에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이끌고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 여혈의가 보였다. 그는 막 옆으
로 뻗은 작은 굴로 달아나고 있었다.
매초풍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발만 동동 굴렸다.
"왜 쫓지 않는가?"
노위가 물었다. 매초풍이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이곳엔 암굴이 너무 많아 자칫하다가는 미로에 빠질 위험이 있어요."
"그럼 여혈의란 놈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소리냐?"
하종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묘상조차 감히 들어가지 못했는데 어디 두고 보자. 이곳에서 살아 나올 수 없을 게다!"
하종이 잠시 침묵을 하고 있더니 웃으면서 입을 떼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우린 그만 헤어져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내가 알고 싶은 게 있네. 엽
청청이라는 소저는 대관절 어디에 있지?"
매초풍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여혈의가 이미 여기에 갇힌 이상 엽청청을 미끼로 위협할 필요가 없어졌다. 엽청청과 난
자매지간처럼 다정한 사이인데 하종과 좋은 인연을 맺어 줄까……? 아니다, 만일 여혈의가
죽지 않는다면 난 엽청청을 잃게 될 것이고 또 그만큼 승산도 줄어들겠지…….'
속으로 혼자 머리를 굴리던 매초풍이 웃으며 말했다.
"저 놈의 허튼소리를 귀담아듣지 마세요. 제가 어찌 엽청청의 행방을 안단 말이에요?"
하종이 말을 받았다.
"매 소저, 그녀는 비록 묘상의 딸이긴 하지만 마음씨가 착하고 순결한 처녀라오. 매 소저는
그런 깨끗한 처녀에게 못된 버릇을 가르쳐 줘서는 안 돼!"
노위가 주먹을 휘두르며 떠들어댔다.
"철시, 우리를 건드려서는 안 돼. 철시가 무공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적수는 되지
못할 테니까."
매초풍이 소리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애석하게도 내게는 당신들과 겨룰 만한 여유가 없군요."
그러더니 그녀 역시 몸을 날려 동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종과 노위가 그녀의 뒤를 쫓았지만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매초풍의 경공을 따라잡지 못한 그들은 투덜거리며 굴 밖으로 나왔다.
제18장 엽청청의 행방
정안성(定安城)은 원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시골 벽촌으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고장이었다. 그런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팔십 년 전 이
고장에는 화적 떼들이 자주 출몰했고 저마다 수림 속에 영채를 세워 놓고 왕을 자칭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한 장군을 파견하여 반란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조정에서는 공로에 따라 포상을 내렸다. 황제는 이 평정에 대공을 세운 장군을 정안
장군에 봉했다. 그때부터 이 작은 읍은 장군의 봉호(封號)를 따라 정안성이 되었다.
정안성 안에는 취붕이라는 이름이 붙은 객줏집이 하나 있었다. 객줏집 가운데 가장 작고 허
술한 곳이었다. 하지만 방만은 깔끔하고 음식맛도 가장 으뜸이었다.
매초풍은 엽청청을 이 취붕객점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초풍은 그것도 마음이 놓
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엽청청을 산 밖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녀가 객줏집에 들어서자 심부름꾼이 손을 들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 젊은이는 매초
풍을 벽 쪽에 놓인 탁자로 안내하며 공손하게 물었다.
"소저께서는 요기를 하실 거요, 아니면 하룻밤 묵을 건가요?"
"우선 먹을 만한 안주 몇 접시와 소흥 여아홍(女兒紅) 한 주전자를 주시오."
심부름꾼이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이거 죄송해서……. 워낙 보잘것없는 주막이라 그 술을 미처 준비해 놓지 못했습니다요. 하
지만 이 고장 토종술인 미주(米酒)가 있는데 어떠세요? 한번 마시면 입 안에 향기가 가득한
게 아주 좋은 술입니다요."
매초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부름꾼이 주방으로 가더니 곧 주문한 것들을 날라 왔다.
매초풍은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며 안에 있는 길손들을 유심히 살폈다. 매초풍은 매사 조심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혈의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 부근에 나타난 일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끈질긴 하종이 줄곧 엽청청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사실도 그
녀는 알고 있었다.
의심이 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심부름꾼을 다시 불렀다.
"이곳에 한 처녀가 투숙을 했었지요. 이청청이라는 처녀 말이에요."
그녀는 일전에 엽청청에게 이청청으로 성을 바꾸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심부름꾼이 오히
려 반문을 했다.
"그 처녀가 어떤 처녀지요?"
매초풍이 입을 열려는 찰나 갑자기 객줏집 안으로 사내 여섯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그녀
는 여섯 중에서 네 사람과 안면이 있었다. 바로 소요관의 팔대 금강 중에서 살아 남은 네
명의 금강인 탈백도 정원, 타장편 정건, 쌍창 정비용, 개산부 정비호였다.
이밖의 두 사람 중 하나는 거무튀튀한 얼굴빛에 매부리코를 가진 아주 사납게 생긴 사내였
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은 말라 비틀어진 칡넝쿨 같았다. 하지만 손톱들만은 닭발처럼 뾰족
했다. 다른 한 사내는 얼굴이 관옥같이 희었는데 흰 도포까지 입고 있어 첫인상에도 매우
깔끔하고 조금은 연약하게도 보였다. 그런데 그는 애꾸였다.
매초풍이 급히 얼굴을 돌려 사내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넓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구면인 사대 금강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그녀는 얼굴을 숨긴 채 곁눈질로 이들의 거동을 살
폈다.
사내 여섯은 그녀가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오면서 오만스럽게 떠들었다.
"흥, 자꾸만 어디로 몸을 피하는 게야. 우리들이 흥을 깨기 전에 냉큼 물러가지 못할까!"
매초풍은 속으로 뜨끔했다.
'저들이 나를 알아본 게 아닐까? 저 놈들이 행패를 부리는 날엔 큰일인데…….'
매초풍은 마음을 졸이며 계속 눈치를 살폈다.
흰 도포를 걸친 사내가 냉소를 퍼부었다.
"허허허, 초하룻날은 피할 수 있다 해도 보름날까지는 그럴 수 없지. 이 나리님이 손을 써야
만 할 것 같네."
매초풍은 사내들과 한차례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단단히 준비를 했다. 그런
데 유심히 살펴보니 사내들의 시선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쏠려 있는 게 아닌가. 바로 옆
에 있는 탁자에 앉은 중년의 나그네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그 나그네를
힐끔 훔쳐보았다.
중년의 나그네는 좀 비대한 몸집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칠 정도로 미련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비범한 데라고는 없고 동작도 굼뜨고 눈빛도 광채를 띠고 있지를 못했다. 매
초풍은 무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짐작했다.
'탁자 위에 올려 놓은 돈주머니를 보니 제법 불룩하구나. 저 놈들이 저 돈주머니를 보고 시
비를 거는 게 아닐까?'
중년의 나그네가 술잔을 내려놓더니 히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보게 영산흑응(嶸出黑鷹), 자네는 비록 날개는 없어도 내 뒤를 밟아 오백여 리나 달려왔
으니 그 뜻이 가상하네."
나그네는 한 사내를 가리키며 농지거리 비슷한 말을 던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흰 도포의 사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옥면낭군(玉面郎君)께서는 본래 애꾸눈이어서 혼자 다니기를 좋아하더니만 오늘은 웬일로
다섯이나 거느리고 왔소? 아무튼 반갑네."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뜻밖에도 두 사내는 화적 무리 중에서도 악명이 높기로 유명한 영산
흑응 모삼과 옥면낭군 심모홍이었던 것이다. 특히 모삼의 응조공(鷹爪功)과 심모홍의 음양장
(陰陽掌)은 강호에서는 천하 무공이라고 일컬어졌다. 비로소 나머지 두 사내에 대한 정체가
밝혀진 셈이었다.
심모홍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오랜 만이군. 변씨, 자네가 내 눈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지도 어언 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네. 나의 벗들은 자네가 너무나 의리가 없다고들 하네. 그들은 날 찾아와서 자네의 '탈
명한추'라는 초수를 구경시켜 달라고 청하기도 했네."
매초풍은 더욱 경악을 했다. 그렇다면 나그네가 바로 탈명한추 변청교라는 말이지 않은가?
그녀의 가슴은 송곳 방석 위에 앉은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매초풍은 변홍의를 죽인 후부터
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해야 할 사람이 바로 그의 형인 탈명한추 변청교로 여겼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 객줏집에서 맞부딪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때 매초풍은 변홍의의 시체를 오혈궁의 풀밭 속에 내던졌었다. 개방의 무리들이 오혈궁의
제자들을 도륙했으니 변청교는 그 원한을 개방의 무리들에게 풀 것이 분명했다.
탈명한추 변청교는 빙그레 웃으며 애꾸눈을 응시했다.
"오 년 전 자네는 공동파의 몇몇 놈들과 짜고서 양무표국 진표사가 압송하는 십만 냥의 은
표를 강탈하고 진표사마저 죽였지. 또한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네는 진표사의 아내마저
겁탈하려고 미친 듯이 날뛰었지. 다행히도 내가 나타나서 자네는 욕심을 채우지는 못했어.
허허, 바로 그때 내가 자네의 눈알을 하나 빼버렸지. 물론 두 눈을 모두 뽑아 버릴 수도 있
었지만 하도 불쌍하여 하나만 뽑은 거라네. 그 뜻은 다른 게 아니라 자네가 악한 마음을 고
쳐 먹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라는 거였어. 허나 개는 똥을 먹는 버릇을 남에게 주지 못한다
고 했던가? 자넨 요사이 송나라와 금나라 양국간에 싸움이 벌어진 틈을 타서 살인을 일삼고
양쪽을 오가면서 물건을 되넘겨 팔아서 횡재를 했다면서?"
이때 모삼이 심모홍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여보게 아우, 우리가 무엇을 하러 왔나? 저 놈의 훈계 따위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잖은
가?"
심모홍은 애꾸눈을 부릅뜨면서 말을 받았다.
"암, 우리가 저 놈의 훈계를 들으러 왔다니요. 모 형, 그리고 네 분의 정 형, 병장기를 어서
꺼내시우."
심모홍은 말을 마치면서 제일 먼저 '음양쌍환'이라는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음환은 검고 양
환은 붉은 색이었는데, 음환은 다섯 근 일곱 냥이나 나갔고 양환은 여섯 근 넉 냥의 무게를
지녔다.
이 병장기는 위력이 아주 강한 것으로 강호에 소문이 파다했다.
탈백도 정원도 큰소리를 지르며 탈백도를 꺼내 들었다.
"변청교, 오늘은 네 놈이 황천으로 가는 날이다!"
정원이 앞장을 서자 정씨네 사 형제가 일제히 그를 에워쌌다.
정건의 타장편이 왼쪽으로부터 변청교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정비용의 쌍창은 변청교 뒤를
공격해 왔다. 한편 정비호의 개산부는 오른쪽에서 날아와 변청교의 목을 치려고 했다.
심모홍과 모삼이 연신 사대 금강을 부추겼다.
이때 매초풍은 그들의 초수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자들은 겉으로는 흉악하게 보이지만 무공은 별로구나. 네 가지 병장기들은 서로 장단점
을 보완하면서 어지간히 조화를 이루고 있으나 아직 미숙하고 허점이 많다. 만약 변청교가
소문에 들은 것처럼 용맹하고 재주가 있다면 사대 금강은 결코 그의 적수가 못 될 것이다.'
과연 매초풍의 짐작이 들어맞았다. 사대 금강이 마구 덤벼들자 변청교는 갑자기 몸을 흔들
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원의 탈백도가 탁자를 절반으로 쪼개 버렸다. 정건의 타장편이 변청교가 앉았던 나무 의
자를 박살냈을 뿐 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정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 놈, 어디로 도망쳤느냐!"
모삼과 심모홍은 멀찍이서 구경을 하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변청교는
탁자 밑에 몸을 숨겼다가 정원과 정건 사이로 슬쩍 빠져 순식간에 객줏집 뒤뜰로 나갔던 것
이다.
모삼과 심모홍이 고함을 지르며 쫓아갔다.
그런데 변청교는 도망칠 궁리를 하지 않고 뜨락 복판에 서서 히죽 웃고 있었다. 그는 두 사
람을 빤히 쳐다보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 히죽거렸다.
심모홍이 오른손에 양환을 들고는 변청교를 향해 약을 올렸다.
"사내답게 우리와 겨루자!"
변청교는 능글거리는 웃음을 던지며 콧수염을 한번 쓰다듬었다.
"이 돈주머니 안에는 황금 이천 냥이 있다. 내가 도망치면 너희들만 좋게 되는 게 아니냐?"
이때 사대 금강이 달려와 합세를 했다. 정원은 칼을 휘두르며 공중회전을 하더니 외쳤다.
"어서 쳐라!"
정원이 쏜살같이 달려들면서 칼로 찍었다.
변청교는 여전히 히죽 웃으며 탈백도가 자기 몸에 이르자 갑자기 몸을 틀면서 오른손으로
칼등을 잡았다. 정원은 순간 칼을 잡은 손이 저려 칼을 놓치고 말았다. 탈백도는 자연스럽게
변청교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정원이 놀라 고함을 질렀다.
"내 탈백도를 내놓아라!"
그가 아우성을 치며 오른손으로 칼을 빼앗으려 했다. 그런데 주먹이 변청교의 가슴팍에 닿
으려는 순간 갑자기 옆으로 미끄러져 버렸다. 거대한 힘이 왼쪽 주먹으로 전달되어 그는 그
만 고꾸라졌다.
이때 심모홍이 급히 달려가 겨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변가 놈의 무공은 괴이하다. 절대 주먹질과 발길질로는 당할 수가 없겠어!"
심모홍이 정원에게 귀띔을 하고 있는데 정비호가 만용을 부렸다. 그가 개산부를 마구 휘둘
러댔다. 변청교가 몸을 슬쩍 돌리는 바람에 도끼질이 빗나갔다. 다시 정비호가 발길을 날렸
지만 정원과 마찬가지로 코방아만 찧고는 널브러졌다.
정비호는 겨우 일어서더니 개산부를 집어 들었다.
"괴상해. 혹시 저 놈 몸에 기름이라도 발라 둔 게 아냐?"
정비호가 고개를 흔들자 변청교가 탈백도를 정원에게 돌려주었다.
"이 놈아, 칼을 이제부터는 단단히 잡고 덤벼라!"
변청교의 무공은 이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었
다. 특히 그는 내공이 뛰어났다. 또한 장기간의 수련을 거쳐 온몸의 근육들이 극히 발달되어
힘을 받으면 더욱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했다. 그의 특이한 재주는 후에 청나라 시대까지
전해졌다. 청나라의 유명한 대협객 감봉지(甘鳳池)는 이를 더욱 완성하여 '점의십팔질(沾衣
十八跌)'이라는 절기를 창조해 냈던 것이다.
변청교가 조롱을 하자 모삼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도전을 하고 나섰다.
"남들은 무서워할지 몰라도 이 어르신네는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모삼은 몸을 날리며 허공으로 높이 솟구쳤다. 마치 독수리처럼 두 팔을 넓게 벌리고는 날카
로운 손톱을 세운 채 덮쳐들었다. 그의 손톱은 칼날과도 같았다. 변청교가 양미간을 잔뜩 오
므리더니 불평을 터뜨렸다.
"난 독약을 쓰는 자들이 가장 밉지!"
변청교가 갑자기 몸을 팽이처럼 빙그르르 돌리더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공중에서 막
내려오던 모삼과 만났다. 모삼과 변청교가 공중에서 한차례 공격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변청
교는 더는 공격을 하지 않고 먼저 내려왔다.
모삼은 변청교가 싸움을 피하자 득의앙양했다. 바닥으로 내려선 모삼이 웃었다.
"하하하, 감히 나와 맞설 자는 없을 것이다. 이 손톱이 무서워 피하느냐?"
모삼이 다시 양손을 벌리더니 덤비려고 했다. 심모홍이 모삼을 급히 불렀다.
"모 형, 손톱이……!"
순간 자신의 손톱을 확인한 모삼의 얼굴빛이 돌변했다. 길다랗던 손톱들이 가위질이라도 당
한 듯이 일률적으로 잘려져 있는게 아닌가. 손톱이 병장기인 그로서는 아찔한 일이었다.
변청교를 노려보며 모삼이 핏대를 올렸다.
"감히 이 어르신네의 병장기를 망가뜨리다니!"
변청교는 공중에서 단 한차례의 공격으로 그의 손톱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모삼은 속으로 매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어떤 병장기를
사용했기에 순식간에 손톱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
다.
"함께 저 놈을 치자!"
심모홍이 소리치자 모삼과 사대 금강이 변청교를 한가운데 넣고 포위했다.
음양쌍환이 아래위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요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변청교는 왼
손에 무슨 병장기를 들었는지 역시 아래위로 따라 움직이며 쉽게 음양쌍환을 물리쳤다.
모삼은 여전히 대력응조공으로 그를 할퀴려고 했다. 하지만 손톱이 망가진 상태라 손가락이
변청교의 옷에 닿기만 하면 저절로 미끄러졌다. 그러던 중 모삼의 손이 하마터면 심모홍의
양환에 맞아서 부서질 뻔했다.
변청교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어려움 없이 물리쳤다.
모두들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싸웠지만 변청교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어찌나 빠른지 동작
의 선을 눈으로 볼 수조차 없었다.
오십여 합을 싸우자 심모홍과 나머지 사람들은 기진맥진하여 헐떡거렸다. 그들은 변청교의
머리카락 하나 자르지 못한 처지였다.
정건이 타장편을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변가 놈의 손은 무쇠로 만들었단 말인가. 왜 아무리 때려도 소용없
고 쇳소리만 나는 걸까?"
매초풍은 문 뒤에서 이들의 싸움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변청교의 손에 은빛이 나는 무언가가 있기는 했지만 너무 작고 멀어서 확실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매초풍은 속으로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음양쌍환도 타장편도 그리고 개산부까지 모두 뛰어난 병장기다. 이 셋이 모이면 천하를 얻
을 수도 있을 텐데 변청교 앞에서는 허수아비에 불과하구나. 변청교의 병장기는 작지만 엄
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아마 황약사나 구양봉 그리고 단지흥 등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실력이다!'
다시 변청교가 싸우는 모습을 보던 매초풍은 웬지 그녀의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을 받았
다. 싸우면 싸울수록 대범하고 호걸다운 그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히 여섯 사내들을 적수로 여기고 있지 않은 듯싶었다. 그저 재미로 아이들을 데리
고 노는 것만 같았다.
심모홍은 싸움이 계속될수록 겁이 났다.
'이 놈이 그동안 무공이 놀랍게 늘었구나. 초수들도 절묘하기 짝이 없어. 우리들이 계속 싸
우다가는 크게 당하겠는걸!'
그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는 틈을 엿봐 도망칠 궁리를 했다. 변청교가 싸움을 끝내려는
지 두 손에 힘을 더 주면서 눈을 부라렸다.
"탈백도를 던져라!"
그가 한 손을 뻗어 탈백도를 세게 치자 탈백도는 화살처럼 날아가 뜨락에 있는 거목에 거의
한 자 깊이로 박혔다.
변청교가 다시 가슴을 부풀렸다. 부풀렸던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그가 또 소리쳤다.
"개산부를 던져라!"
순간 정비호는 갑자기 강렬한 진동이 두 팔에서 시작되는 것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개산
부를 힘껏 던졌다.
이번에는 정비용의 쌍창이었다.
"창을 놓아라!"
정비용의 쌍창 역시 허공에서 마구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대추나무로 만든 창대가
부러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타장편을 놓아라!"
그러자 정건이 두 손으로 타장편을 움켜쥐고는 버럭 소리쳤다.
"이건 어림도 없다!"
그러나 변청교의 내력에 의해 진동을 받은 타장편은 형편없이 뒤틀렸다. 청동으로 만든 타
장편도 소용이 없었다. 정건은 너무 세게 그것을 잡고 있어서 그 진동으로 인해 그만 내상
을 입고 말았다.
"으윽……."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렀다. 타장편을 떨어뜨리며 정건이 그 위로 쓰러졌다. 정건의 두
손을 살펴보니 손아귀에는 한치 깊이의 상처가 길게 나 있었다. 그곳에서도 피가 쉬지 않고
쏟아졌다.
변청교가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과연 강한 사내로군!"
변청교는 두 팔을 휘두르며 음양쌍환을 잡은 심모홍에게 접근해 갔다. 그가 두 눈을 매섭게
뜨며 겁을 주었다.
"이 도적놈아, 이번엔 네 차례다!"
심모홍은 원래 교활한 자라 슬슬 뒷걸음질을 치면서 응수했다.
"오 년 후에 다시 네 놈을 찾아 복수할 것이다!"
심모홍이 말을 마치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변청교가 코웃음을 날렸다.
"흥, 다른 놈은 용서해도 네 놈만은 절대 그럴 수 없다!"
그가 한 손을 뿌리치듯 털면서 휘릭 하고 공중으로 무언가를 뿌렸다. 은빛이 나는 물건이
암기처럼 날아가 막 날아오르던 심모홍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억!"
심모홍은 정확히 옥침혈을 맞아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해버렸다.
이때 모삼이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주춤 물러섰다.
"탈명한추다!"
변청교가 빙그레 웃었다.
"네 놈이 탈명한추를 본 적이 있느냐?"
모삼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면서 더듬거렸다.
"탈명한추를 제외하고 어떤…… 병장기가 이처럼 두렵겠나?"
그는 계속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나머지 형제들이 부상당한 정건을 부축하고는 변청교에게
욕설을 던졌다.
"네 이 놈, 정말 지독한 놈이구나!"
정비호가 이렇게 내뱉자 변청교는 너털웃음을 보였다.
"우화하하……! 내가 지독한 인물인 줄 이제야 알았느냐?"
변청교의 얼굴이 갑자기 험상궂게 변했다. 무섭게 치뜬 그의 눈에서는 살기가 가득 넘쳐흘
렀다.
정씨 사형제는 비칠비칠 뒷걸음질을 치며 그래도 입으로는 맞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도 있는 법이다. 어디 두고 보자!"
정원이 큰소리로 변청교를 향해 다짐을 하고는 눈짓을 형제들에게 보냈다. 그들이 곧 몸을
돌려 사라지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의 실력으로 변청교를 이길 수 없었기에 더 이상 창피를
당하기 전에 물러서는 것이었다.
모삼은 방금 전 심모홍이 죽는 것을 보고는 변청교의 노여움을 더는 사려고 하지 않았다.
"여보게, 오늘은 이만하게나. 훗날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모삼이 이렇게 눙치듯 말하고는 정씨 형제들을 따라 자리를 떴다.
"도망치면 다냐!"
변청교가 고함을 쳤다. 정씨 형제들과 모삼이 가던 길을 멈추고는 우뚝 서 버렸다. 그중 정
비호가 고개를 돌리며 변청교를 노려보았다.
"그러면 또 어쩌겠다는 게냐?"
모삼은 간이 콩알만해져 돌아보지도 못한 채 너스레를 떨어댔다.
"헤헤헤, 또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요?"
변청교가 독기 어린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고, 또 건드리고 싶으면 건드리다니……. 네 놈들이 나를
뭘로 아는 게냐?"
정원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그의 말을 받았다.
"너무 유난을 떨지 마라!"
무서운 시선을 정원에게로 돌린 변청교가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난 오늘 좀 유별나게 굴어야겠다. 그래, 내가 네 놈을 죽일 것 같으냐?"
모삼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끼여들었다.
"이 일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네. 헤헤, 그럼 나는 이만!"
그가 혼자서 떠나려고 했다.
"네 이 놈, 한 발짝이라도 움직여 봐라. 요절을 내고 말테다!"
변청교가 겁을 주자 모삼이 다시 걸음을 세우고는 비굴한 웃음을 만들었다.
"헤헤헤, 우리 사이엔 예전이나 지금이나 원한이 없지 않소. 오늘 일어난 일은 모두 옥면낭
군이 꼬드긴 일이지 소인과는 무관합니다요."
정비호가 크게 화를 냈다.
"모삼아, 그래 네가 심모홍이 준 황금 백 냥을 받은 일이 없다는 게냐? 재물과 돈을 받고는
남의 재난을 없애 주겠다고 나선게 누구였느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봐라. 옥면낭군
에게 미안하지 않는가 말이다!"
"옥면낭군은 이 모삼의 벗이다. 내가 벗의 황금을 받은 게 너하고 무슨 연관이라도 있느냐?
너희들도 각자 황금 백 냥씩을 얻어 가지고 역시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느냐?"
두 눈을 부릅뜬 모삼이 뒤질세라 큰소리를 쳤다. 정비호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얼굴을
붉히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변청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모두 나쁜 놈이다!"
그 말에 발끈한 정원이 변청교에게 따졌다.
"선비를 죽일 수는 있지만 모욕할 수는 없다고 했다. 사람을 마음대로 모욕해서는 안 될 것
이다!"
"하하하, 네 놈이 나를 웃기는구나. 도적놈도 선비냐? 난 오늘 네 놈을 끝장내 주겠다!"
변청교의 눈에서는 살기의 불꽃이 타올랐다. 속으로는 겁이 났지만 정원은 그러나 겉으로는
용감한 척했다.
"우리가 정말로 네 놈을 두려워하는 줄 아느냐. 우린 여럿이 네 놈 하나를 이기고자 하지
않을 뿐이다. 어서 가자!"
그가 형제들과 가려고 했다. 변청교의 성난 목소리가 그들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서지 못할까! 너희들 역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흥!"
순간 그들은 거짓말처럼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변청교의 내력이 그들의 걸음을
막아서고 있는 중이었다. 부축을 받고 있는 정건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그러했다. 그들은
마치 땅속으로 다리가 빠져 버린 듯한 기분에 당황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모삼이 정원에게 부추겼다.
"정원이야말로 영웅이고 호걸이다. 저 놈의 탈명한추도 다 소용없어!"
모삼의 칭찬에 넘어간 정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이 어르신께서 네 놈과 담판을 짓겠다!"
정원이 몸을 훌쩍 날려 뜨락 문밖으로 향했다. 뒤를 이어 바람을 가르는 요상한 소리가 들
렸다. 살펴보니 탈명한추가 유성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던진 변청교는 뒷짐을 진 채
로 태연하게 서 있었다.
"아악!"
이때 먼 곳에서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 피투성이를 한 정원의 모습이 보였
다. 그가 서서히 쓰러졌다.
"형님!"
나머지 형제들이 소리치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목숨이 아깝거든 꼼짝 마라!"
다시 변청교가 으름장을 놓았다.
형제들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는 그 자리에 붙박혀 버렸다.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만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모삼은 변청교를 향해 계속 아첨을 늘어놓았다. 그런 모삼의 입을 변청교가 막았다.
"네 놈이 얼마나 악한 짓을 많이 했는지는 천하가 다 안다. 난 네 놈 역시 용서할 수 없다!"
일순 변청교가 모삼의 등뒤로 자리를 옮기더니 양손을 들어 한차례 그의 등을 휩쓸었다. 순
식간에 모삼의 옷이 뜯겨져 나갔다. 변청교의 손가락 끝이 그의 살점들을 할퀴고 지나갔다.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모삼이 이를 갈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자신도 맞받아 응수했다. 여러 합이 계속되자
모삼은 차츰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위기를 느낀 모삼이 애원을 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오. 소인에게는 노모가 계시고 처와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변청교가 입꼬리를 옆으로 길게 찢으며 물었다.
"정녕 네 놈이 불쌍한 놈이냐?"
"소인은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는 놈입니다. 천하에서 가장 가엾은 놈이지요."
변청교가 쓴웃음을 그의 얼굴 위로 뿌렸다.
"그럼 묻겠다. 늙은 어미를 모시고 있다는 네 놈이 어째서 하룻밤 사이에 창주의 권사(拳師)
유대동(劉大同)의 부모와 장인 그리고 장모를 한꺼번에 참살했느냐? 그리고 처자식이 있다
는 네 놈이 어떻게 서호 기슭에서 남의 처자식을 겁탈했더냐? 어디 그뿐이더냐. 금나라 군
의 노략질을 피해 강을 건너온 강북 난민들의 재물을 강탈하고 진남의 화적들과 짜고 이재
민들을 구원하려는 물자를 빼앗은 것은 네 놈이 아니고 또 누구더냐?"
모삼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바들바들 떨면서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못했다.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던 모삼의 눈빛이 순간 야릇하게 빛났다. 그는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들더니
변청교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당할 변청교가 아니었다. 그는 벌써 눈치를 채고는 옆으
로 슬쩍 몸을 피한 다음 모삼을 향해 장을 날렸다.
"헉!"
모삼은 장에 손목을 얻어맞고는 비수를 떨어뜨렸다.
모두들 이 사실에 경악했다. 모삼의 손아귀 힘은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데 변청교가 그의 손에 있던 비수를 가볍게 떨어뜨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삼의 손목뼈
는 이미 박살이 나 간들거리는 처지였다.
차가운 눈초리로 모삼을 쏘아보던 변청교가 한마디 내뱉었다.
"오늘이 바로 네 놈의 제삿날이다!"
말을 마친 변청교가 주먹을 들어올렸다. 모삼은 죽을 바에는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결심
하고는 변청교를 향해 돌진해 갔다.
모삼이 가까이 다가오자 변청교가 손바닥으로 그의 정수를 내리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모삼의 몸은 수십 보 뒤로 나동그라졌다.
모삼은 단 일격에 어이없게 무너져 버렸다. 모삼은 머리가 터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머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목격하고는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려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좋다, 너희 놈들은 나쁜 짓을 덜했으니 이번만은 용서하겠다!"
그러자 살아 남은 정씨네 삼형제가 문밖으로 허겁지겁 도망치려 했다.
"잠깐만!"
그런데 변청교가 다시 이들을 불렀다. 삼형제는 걸음을 멈추고 오들오들 떨어댔다.
"허허허, 담도 어지간히 없는 놈들이구나. 이번만은 용서해 준다만 다음 번에 또 나쁜 짓거
리를 했다가는 소리 소문도 없이 죽을 줄 알아라!"
변청교가 재차 다짐을 했다. 정비용이 이빨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짓을……."
삼형제는 그제야 걸음이 보이지 않을 듯이 재빨리 달아났다.
주막에 들어선 변청교는 다시 좀 전의 탁자에 가 앉았다.
"주인장, 왜 술과 안주를 가져오지 않소?"
그가 소리를 꽥 질렀다. 심부름꾼이 그 고함에 몸을 사리며 주방 쪽으로 갔다. 그러나 주방
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변청교가 다시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외쳤다.
"내가 술값을 떼어먹을까 봐 그러느냐?"
그는 즉시 닷 냥짜리 은전을 뿌렸다. 그러면서 망가진 탁자와 의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집기들 값이고 술값은 따로 내겠다!"
그러자 비로소 고개를 내민 주인이 더듬거렸다.
"나……나리님 은냥을 어찌 제가 받겠습니까요?"
주인이 심부름꾼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어서 떨어진 은전을 주워 나리님에 드려라."
심부름꾼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은전을 주웠다.
"흥, 타관 사람이라고 업신여기는 게냐!"
변청교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이때 구석에 앉아 있던 매초풍이 천천히 일어나며 그를 향해 읍을 했다.
"변 나리께서 오해를 하셨소이다. 저 사람들은 방금 나리께서 살인을 하는 걸 보고는 두려
워서 저릴 겁니다."
그러자 변청교가 이해한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우화하하하, 나는 평생 악인들만 골라서 죽여 왔네.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나."
고개를 돌리며 변청교가 매초풍에게 미소를 던졌다.
"고맙소 소저, 나를 일깨워 줘서 정말 고맙소이다."
매초풍도 웃음을 머금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심부름꾼은 변청교의 태도가 부드러워지자 용기를 내어 술과 안주를 날라 왔다. 하지만 아
직 경계를 늦추지 않아서인지 이내 멀리 물러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나리에서는 원래 협객이셨군요?"
"허허허, 난 협객이 아니라네."
"나리께서는 혼자 여섯과 싸워 이기셨으니 협객이 분명합니다요."
술을 조금 마시며 변청교가 말했다.
"부끄럽네. 난 하늘에서 떠도는 구름이나 수림 속에서 한가롭게 노는 학처럼 정처없이 흘러
가는 사람이라네. 그러다가 억울한 일들을 보면 나서 대신 싸워 주기도 했지. 하지만…… 최
근 반년 동안은 그저 산천을 구경하며 유랑했을 뿐이야."
그가 서글프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협(俠) 자를 풀이하자면 무공이 높고 낮음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지. 그것은 정녕 의협심을
갖고 정의를 위해 칼을 뺄 수 있는 거라 생각하네. 한평생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
악한 무리들을 제거하지만 어떠한 보답도 바라지 않는 거지. 그런 사람만이 진정한 협객이
라 불릴 수 있을 거야."
심부름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알겠습니다. 무공이 없더라도 모든 행실이 나라와 백성들에게 유익하다면 역시 협객이
라 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
그러자 주인이 그의 뺨을 한차례 갈겼다.
"나리께서 말씀하시는데 왜 건방지게 나서!"
"그럼 내 말이 틀렸나요?"
심부름꾼이 억울하다는 듯이 따지고 들었다. 변청교가 웃으며 중간에 끼여들었다.
"자네 말이 틀리기는커녕 도리에 맞다네."
변청교는 술 한 모금을 마시고는 개탄했다.
"이 세상이 크고 넓다지만 내가 진심으로 탄복하는 이들은 오직 세 분뿐이네. 이분들이야말
로 협객이라는 이름이 부족할 정도지."
"그분들이 누구십니까요?"
심부름꾼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먼저 개방의 방주인 홍칠공을 들 수가 있지. 두 번째는 전진파의 왕중양이네. 그리고 마지
막으로는 역시 전진파의 제자인데 왕중양만큼이나 훌륭한 분이지."
한쪽 구석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매초풍도 궁금증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분이 대체 누구요?"
"바로 구처기를 두고 하는 말이네."
매초풍은 구처기란 말에 얼른 수긍이 가지 않았다.
'구처기로 말하면 무공도 별로 뛰어나지 않고 성미 또한 포악한데 무슨 협객……?'
무공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평범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협객
이라 그녀는 여겨 왔다.
이때 한 처녀가 뒷문으로 살금살금 걸어왔다. 얼굴은 면사포로 가려져 있었다. 처녀가 주인
이 서 있는 앞으로 다가서더니 그와 뭐라고 귓속말을 나누었다.
매초풍은 그 처녀의 걸음걸이를 보고는 눈에 몹시 익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바로 엽청청임
을 금세 알아차린 매초풍은 속으로 뇌까렸다.
'얼굴을 가렸으니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겠구나!'
심부름꾼이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뭐라고 하면서 매초풍 있는 쪽을 향해 눈짓을 했다. 처녀
가 몇 번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처녀는 희색이 가득하여 빠른 걸음으로 매초풍에게로
달려왔다.
"언니, 내가 얼마나 언니를 기다렸는 줄 아세요?"
목소리를 들으니 과연 엽청청이었다. 매초풍이 엽청청을 앉히고는 나지막하게 타일렀다.
"청청아, 목소리를 낮춰!"
엽청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무사한가요? 내가 떠난 뒤로 속을 몹시 태우셨을텐데……."
매초풍이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묘상이 벌써 귀신이 되었는데도……. 하지만 사실을 알려 줄 수는
없어. 알려 줬다가는 대성통곡을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의심만 살 게 아닌가. 만일 옆에
있는 변청교가 들으면 간섭을 할 게 뻔하다.'
매초풍은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기기를 원했다.
"아버진 무사해. 그런데 여혈의가 사람들을 풀어 사방으로 널 찾고 있다. 널 자기 아내로 삼
으려고 말이다. 그리고 천산 마귀할멈도 너를 붙잡아 인질로 삼고 네 아버질 위협하려고 한
단 말이다."
엽청청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그럼 난 어떡해요?"
그런 엽청청이 한없이 가엾고 사랑스러웠다.
"침착해라. 이 언니와 멀리 도망을 쳐서 몸을 숨기는 수밖에는 없다."
매초풍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엽청청이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궁리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그녀의 눈시울은 붉게 변해 있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 여혈의나 천산 마귀할멈에게 잡히는 날엔……."
매초풍이 그녀를 위로했다.
제19장 기구한 모녀의 상봉
이때였다. 등뒤로부터 돌연 변청교의 벽력같은 음성이 달려왔다.
"너희들 지금 천산 마귀할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냐!"
내공이 강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귀가 몇 배는 밝았다. 두 여인이 소곤거리는 말까지 그
는 듣고 있었던 것이다.
"뉘신데……?"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며 엽청청이 물었다. 얼른 매초풍이 대꾸했다.
"저분은 천하에 이름이 높은 탈명한추 변청교 나리시란다."
엽청청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변홍의의 형님이 되시는……."
순간 매초풍도 크게 놀랐다. 그녀는 탁자 밑으로 엽청청의 손등을 꼬집었다. 엽청청은 변홍
의가 매초풍의 구음백골조에 목숨을 잃은 사연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야, 왜 꼬집어요?"
엽청청이 인상을 쓰며 매초풍을 쏘아보았다.
변청교는 두 여인이 자신이 변홍의의 형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 이상하게 여겼다.
"어떻게 내 동생을 알지?"
엽청청은 그가 변홍의와 한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왜 모르겠어요. 우린……."
순간 매초풍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벗이었죠. 아주 가까운 벗!"
엽청청이 한 동문의 제자간이라고 말할 것 같아 매초풍이 얼른 말을 바꾸었다. 엽청청은 그
런 매초풍의 반응에 눈치를 조금 차렸다. 그래서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무엇 때문에 매초풍
이 변홍의와 동문임을 숨기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변청교가 이때서야 매초풍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과히 경국지색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
름다웠지만 눈매에는 어딘가 모르게 여인으로서는 강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음, 동생이 이러한 여인들과 벗으로 지내다니……. 혹 나쁜 물이라도 든 것은 아닐까?'
변청교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홍의는 오혈궁 제자이니 그럼 너희들은……?"
매초풍이 대답했다.
"우린 변홍의와는 가까운 벗이랍니다. 홍의는 영준하고 무공도 뛰어나고 그래서 우린 홍의
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지요."
매초풍이 다시 탁자 밑으로 엽청청의 손을 꼬집었다. 엽청청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였다.
변청교는 매초풍과 엽청청이 모두 자기 동생의 정부인 줄로 오해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홍의가 이렇게 타락을 하다니……."
변청교가 머리를 저었다.
엽청청은 변청교의 언동을 보면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변홍의의 형은 정말 이상하군. 제 동생을 왜 타락했다고 말할까? 나와 언니가 홍의와 벗으
로 지냈기에 타락했다는 것일까?'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매초풍은 변청교의 말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두 볼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변홍의와 함께 지
내던 나날들을 돌이켜보았다. 그러자 변홍의에게 약간 미안한 감이 들었다.
이때 변청교가 또 물었다.
"아까 너희들이 천산 마귀할멈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는데 그 계집이 지금 어디에 출몰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엽청청이 머리를 흔들었다.
"몰라요. 천산 마귀할멈이 한 번은 오혈궁에 쳐들어왔었어요. 하지만 그 후로는 누구도 본
적이 없어요."
"오혈궁의 일마저 알고 있구나."
"물론이지요.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요?"
"그게 무슨 말이더냐?"
매초풍이 다시 엽청청의 손등을 꼬집었다. 그리곤 대신 대꾸했다.
"변홍의가 우리의 벗인데 우리에게 그만한 일쯤이야 알려 줄수도 있잖아요."
변청교가 냉소를 터뜨렸다.
"그 놈 자식이 점점 나쁜 버릇만 키워 가는구나. 계집만 밝히면서 돌아다니더니……."
엽청청은 비로소 변청교가 자기를 천한 여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엽청청은 눈물까지 보일 정도로 격해 있었다. 매초풍이 그녀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엽청청은 계속 흐느꼈다. 매초풍이 대신 변청교에게 말했다.
"달리 생각하지 마세요. 이 앤 수줍음을 잘 타서 그런답니다."
변청교는 곱지 않은 눈으로 두 여인을 응시했다.
'그 따위 너절한 짓거리를 하고서도……. 이런 더러운 계집들과 마주해서 무슨 소득이 있단
말인가!'
변청교가 입을 열었다.
"난 너희들에게 천산 마귀할멈의 행방을 물었을 뿐이다. 다른 건 결코 알고 싶지도 않아!"
매초풍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천산 마귀할멈의 행방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는데 그분과는 가까운 사이인가요?"
그 말에 엽청청이 화풀이처럼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보기에도 나리께서는 천산 마귀할멈과 가깝게 지낼 게 뻔해!"
변청교가 담담하게 웃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천산 기슭에서 나쁜 짓들을 많이 했지. 이 몇 년 동안에는 심지어 중원에
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지. 난 그 년을 찾아다닌 지 석 달째가 되었어. 중원의 무림을
위해 그 요물을 없애지 않으면 안 돼. 그런데 어찌나 교활한지 두 번이나 마주쳤지만 번번
이 놓치고 말았지."
엽청청이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원래 천산 마귀할멈을 죽이려고 했었군요. 그러면 우리 아버님께서 이제 근심하지 않게 되
겠네요."
"천산 마귀할멈이 네 아버지도 괴롭혔다구?"
"그래요 그때……."
이번에도 매초풍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때 우린 산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날 천산 마귀할멈이 대로하여 우리를 몽땅 잡아죽이려
고 달려들었어요. 다행히 우리는 그 전에 화적떼의 습격을 피할 수 있도록 땅굴을 파놓았었
지요. 그 굴에 숨지 않았더라면 모두 떼죽음을 당했을 거예요."
변청교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 년이 나타나기만 하면 내가 기필코 죽여 버릴 것이다!"
이때 문밖에서 누군가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떤 영웅 호걸이길래 그런 헛소리를 치는 거야!"
여인의 목소리였는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살기가 어려있었다. 변청교가 탁자를 치면서 받아
쳤다.
"누구나! 냉큼 모습을 보여라!"
문소리가 나더니 중년의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가 변청교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대가 방금 전 천산 마귀할멈의 험담을 늘어놓은 자로군!"
"그렇다!"
중년의 여인이 손가락 끝으로 변청교를 가리켰다.
"원래 네 놈의 혓바닥만 잘라 버리려고 했지만 이젠 사정을 봐줄 수가 없다!"
그러더니 여인은 갑자기 변청교에게로 달려들었다. 주먹을 곧추 뻗더니 두 손가락을 칼처럼
세우고 변청교의 두 다리를 찌르려고 했다.
"지독한 년!"
변청교가 탁자를 밀었다. 탁자가 그녀의 손을 막아냈다. 여인이 공중으로 튀어오르며 탁자를
발로 쳐 박살을 냈다. 그녀가 다시 달려들며 변청교를 향해 주먹을 연달아 퍼부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두 자 남짓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보기 드문 보검이었다. 그 단검을 제대
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동작으로 그어대며 변청교를 공격했다. 그러자 탁자와 의자들이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주인이 옆에서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그는 싸움이 길어지기만을 비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
번에도 변청교가 파괴된 것들에 대해 배상을 해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인의 안색이 차츰 바뀌었다. 탁자와 의자들이 변청교의 무기로 변해 가고 있었다.
검이 번뜩일 때마다 탁자와 의자를 들어 변청교가 무기처럼 사용했다.
여인은 계속 공격을 퍼부었지만 민첩한 변청교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오른손으로 장
을 날렸다. 그러자 폭풍이 몰아치 듯 괴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 안에 집기들을 부스러
뜨렸다.
변청교는 여전히 사뿐히 몸을 날려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면서 역으로 장을 퍼부어 그
녀의 기세를 꺾었다.
변청교에게서 조금의 허점을 찾을 길 없는 여인은 당황했다.
그러나 변청교 입장에서도 그녀의 검술에 놀라고 있었다. 장을 날리면서도 여전히 검을 앞
으로 내민 채 상대를 경계하고 있는 그녀의 빈틈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훌륭한 검술이로군!"
변청교가 웃으며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그대는 이런 검술을 본 적이 있나요?"
여인이 묻자 변청교가 솔직히 대답했다.
"처음이오."
변청교는 원래 정직한 사람이라 무공에 관해서는 절대 허튼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그대가 천산 마검(魔劍)을 알 리가 없지."
그녀가 다시 검을 내밀며 달려들었다. 변청교가 슬쩍 몸을 틀면서 말했다.
"그럼 천산 마귀할멈의 천산 마검이란 말이오?"
"귀 한번 밝군!"
여인이 뇌까리자 변청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이 여인은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란 말인가?'
변청교가 다시 물었다.
"그대는 천산 마귀할멈의 수하요?"
"내가 천산 마귀할멈은 아닌 것 같소?"
"하하하, 그대가 그 꼴로 천산 마귀할멈이라면 내가 뭣하러 찾아 다니겠소?"
말의 뜻은 여인의 무공이 아직은 미숙하여 자신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이었다. 약이 바싹 오
른 여인은 검을 마구 휘둘러댔다. 그러나 단검 하나로는 변청교를 넘어뜨릴 수 없다고 판단
한 그녀는 애가 타기만 했다.
변청교가 내력을 모으더니 손바닥으로 그녀의 가슴을 쳤다. 그녀가 뒤로 미끄러졌다.
"대단하군!"
그녀가 몸을 추스리며 지껄였다. 변청교는 승기를 잡았다고 여겼는지 곧장 달려갔다. 여인이
뜨락으로 내려섰다. 변청교가 막 뜨락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
다.
검은 저고리에 검은 치마 차림의 여인이었다. 얼굴을 검은 면사포로 가린 그녀가 소리쳤다.
"쫓지 마세요. 내가 바로 여기 있으니까!"
뒤로 몇 걸음 물러선 변청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드디어 나타나셨군!"
그녀가 바로 천산 마귀할멈이었다. 그녀가 냉소를 했다.
"네 놈을 며칠 더 살게 놔두었을 뿐이다. 요즘 더 중요한 복수가 생겨서 네 놈과 맞서지 않
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림도 없다! 지금까지 난 네 놈의 내력을 잠시 시험해 보았던
것이다."
"그 따위 방법으로 나의 절기를 엿보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난 네 놈의 탈명한추와 내공을 알아냈다. 승리의 절반은 이미 차지한 거나 마찬가
지지. 네가 심모홍을 죽일 때 뿌린 탈명한추는 참으로 멋있었다!"
"그렇다면 줄곧 나를 지켜보고 있었구나!"
천산 마귀할멈이 뒷짐을 진 채 득의양양해서 털어놓았다.
"어디 그뿐인 줄 아느냐? 심모홍과 모삼 그리고 정씨네 사형제는 모두 내가 보내 네 놈과
시비를 걸게 했던 것이다."
변청교의 눈동자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내 말 한마디면 죽는 한이 있어도 거역하지 못하지! 그들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
외에는 생각할 수도 없으니까……."
천산 마귀할멈이 차갑게 웃었다.
"정말 지독한 년이구나. 남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탈명한추 쓰는 것을 알아냈으니……."
천산 마귀할멈이 여전히 싸늘한 웃음을 던졌다.
"쓸데없는 입방아는 그만 찧고 어서 덤벼라!"
두 사람이 양손을 높이 쳐들었다. 마치 검이라도 되는 듯이 두 사람은 손을 휘어치며 연신
장을 퍼부었다. 땅 위로 흙먼지와 함께 돌들이 튀어올랐다.
천산 마귀할멈은 흙먼지 속으로 종횡무진 자리를 옮기며 변청교를 치려고 했다. 그녀는 변
청교의 허점을 찾기 위해 날카로운 눈빛을 부라렸다. 변청교의 장법의 묘미와 비결은 동작
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의 내력이 비밀이었다. 그 때문에 변청교의 장법에는 허점들
투성이인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허점들을 이용하여 공격한다면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
가 있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변청교의 장법에서 허점들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의 내력을 생각해 섣불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매초풍과 엽청청은 창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싸움을 지켜보았다. 매초풍은 두 사람의 무공에
놀라움을 금하질 못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기회를 잡지 못하자 자정신침을 꺼내 변청교의 가슴을 겨누었다. 천산 마
귀할멈이 죽기 살기로 덤비는 것을 보고는 변청교는 정신을 더욱 바싹 차렸다. 변청교가 내
력을 이용해 그녀의 공격을 물리쳤다. 자정신침은 거대한 힘에 의해 방향이 뒤틀리곤 했다.
그녀는 변청교와 정면 충돌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가볍고도 민첩
한 동작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마치 한 마리의 독사처럼 자정신침이 꿈틀거
렸다.
그러면서 변청교의 허점을 찾아 공략할 태세를 취했다.
변청교도 자세를 바꾸었다. 자신의 장력으로 쉽게 자정신침을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빠른 동작을 취하며 천산 마귀할멈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가 자정신침을 길게 뽑더니 칼처럼 휘둘러댔다. 사방에서 정신없이 휘어치는 자정신침
을 막으며 변청교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정신침은 칼보다 더 날카롭게 허공을 그어댔다.
변청교가 주먹과 손바닥 등을 이용하여 자정신침의 공격을 막아냈다. 동시에 장을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날렸다. 천산 마귀할멈이 급히 몸을 돌리며 장을 피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변청
교의 혈도를 찌르려고 집요하게 공격해 왔다.
소리를 지르며 허공으로 떠오른 그녀가 변청교의 숨통을 겨눈 채 내리꽂혔다. 변청교가 보
법을 달리 하며 얼른 옆으로 물러섰다. 천산 마귀할멈이 다시 내려왔다.
차츰 천산 마귀할멈이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처음에는 그녀가 밀리는 듯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변청교는 하는 수 없이 후퇴할 생각을 했다.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내려온 천산 마귀할멈이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서 그토록 소문이 난 탈명한추도 별볼일 없군. 이제부터는 내가 신공으로 너를 묶어
두겠다!"
그녀가 다시 몸을 새처럼 띄우며 날아들었다. 허공으로 높이 오른 그녀가 자정신침을 앞세
우며 들이닥쳤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날아드는 것만 같았다.
변청교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곧 그녀가 마공을 부리고 있음을 알
아차렸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양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돌연 강한 빛을 발하
는 서른 여섯 개의 별빛이 쏟아졌다. 그 빛은 일제히 천산 마귀할멈의 몸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천산 마귀할멈도 마공을 부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별빛들을 떨쳤다. 그중 여섯 줄기의 빛
이 흩어졌다. 그러나 나머지 빛들이 다섯 개의 방위로 돌면서 여전히 그녀를 감쌌다.
변청교가 비로소 탈명한추를 사용한 것이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당황
하고 있었다. 서른 개의 탈명한추가 각 방향에서 달려드니 그녀는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조심해요!"
이때 아까 그 중년의 여인이 천산 마귀할멈을 향해 소리쳤다.
창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매초풍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천산 마귀할멈이 탈명한추에 당한다면 여혈의의 복수도 할 수 없게 되어 좋겠군. 비록 천
산 마귀할멈의 마공은 배울 수 없게 되어도 대신 변청교를 구슬려 그 탈명한추의 절기를 배
울 수 있지 않을까?'
매초풍은 어여쁜 여인을 싫어하는 사내는 없을 거라 여겼다. 그를 여색으로 홀린다면 문제
없이 자기 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허공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바로 그 찰나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입으로
자줏빛 혈전(血箭)을 무수히 뿜어냈다. 그러면서 몸을 팽이처럼 돌리기 시작했다.
탈명한추가 그녀의 몸에서 튕겨져 나왔다. 이윽고 천산 마귀할멈은 흙과 먼지가 가득한 땅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중년의 여인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천산 마귀할멈이 몸을 가볍게 떨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변청교, 또 다른 수가 있더냐? 어디 한번 부려 봐라!"
그녀가 여전히 눈을 부라리며 변청교를 윽박질렀다. 이때 그녀는 힘이 거의 빠져 몹시 무기
력했지만 큰소리만은 잊지 않았다.
변청교는 함부로 다가서지 못했다. 그는 놀라운 눈길로 천산 마귀할멈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저었다.
"탈명한추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대에게 큰 실수를 했어. 그대의 무
공이 나보다 높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싸움을 그만두기로 하지."
천산 마귀할멈은 공력을 차츰 회복해 갔다. 일어나 다시 변청교와 싸운다면 이길 수는 없겠
지만 자신을 방어할 수는 있었다.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나를 찾아 다닌다면 각오해라!"
"패한 장수가 어찌 용맹에 대해 떠벌릴 수 있겠소. 난 오늘부터 절대로 그대에게 도전하지
않겠소."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는 마음 한구석에 체증처럼 걸리는 게 있어 물었다.
"그런데 한 가지 모를 일이 있소. 마귀할멈이 가르쳐 주기 바라오."
"말을 해보시오."
"내 탈명한추는 누구도 당해낸 사람이 없었소. 그런데 그대는 탈명한추를 물리쳤는데 대관
절 어떤 방법을 썼소?"
"방금 내가 쓴 것은 천마해체대법(天魔解體大法)이라고 하오."
그것은 천산 마귀할멈 엽첩비의 가전마공(家傳魔功)으로 평소에는 웬만해서 쓰지 않는 거였
다. 강한 적수와 대결할 때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만 사용해 왔었다.
천마해체대법을 쓸 때에는 반드시 자기 몸의 피를 뿜어냄으로써 온몸의 진기를 방사해야 했
다. 뿜어낸 피가 많을수록 내력이 더 강해지는데 이는 몸의 원기를 크게 상하게 하고 쉽게
회복도 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극에 이르면 온몸의 피가 모두 뿜어져 나오는데 이때 방
사된 내력으로는 무쇠나 바위도 가루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피가 마르고 나면 이것을
사용한 사람마저도 얼마 못 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천산 마귀할멈의 지금 공력은 대부분 소모되었던 것이다. 만일 변청교가
이런 사실을 알고 손을 쓴다면 천산 마귀할멈을 죽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탈명한추가 천산 마귀할멈에게 패하자 오히려 충격을 받고는 전의를 상실해 버린 것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 변청교가 중얼거렸다.
"천마해체대법……? 참으로 어마어마한 초수로군!"
그는 탄식을 하며 뜨락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다.
천산 마귀할멈은 감히 그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중년의 여인과 함께 길을 내주며 그가 나
가도록 옆으로 물러섰다.
"변청교, 그대의 탈명한추가 누구도 당해내지 못한다고 했는데 무슨 낯으로 강호에서 영웅
호걸들을 대하겠나?"
변청교가 걸음을 멈춰 섰다.
"그 말이 옳소. 내 탈명한추는 대단한 게 아니오. 내가 무슨 면목으로 나돌아 다니겠소. 심
산의 사찰이나 찾아가 삭발하고 중이 될까 하오."
그리곤 멀리 사라졌다.
매초풍은 곰곰이 머리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그녀는 천산 마귀할멈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공을 배우기로 최종 결심을 했다. 그녀는 엽청
청에게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는 천산 마귀할멈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그녀를 알아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매초풍 아닌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지?"
계속 두 번 머리를 조아린 매초풍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소녀는 오래 전부터 세상에 비길 자가 없는 신공을 우러러 봐 왔습니다. 이 소녀를 제자로
받아주신다면 더없는 행복으로 알겠습니다."
"그 따위 소리는 나중에 하고 내 딸을 어디에 두었느냐? 어서 내 딸을 데려오너라!"
천산 마귀할멈은 아직 기력을 다 회복하지 못해 비틀거렸다.
그녀는 매초풍을 보자 딸 엽청청이 생각나 혼란스러워졌다. 중년의 여인이 급히 천산 마귀
할멈의 맥을 짚어 보더니 당황했다.
"어서 숨을 조절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초풍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내 딸을 내놓아라!"
매초풍은 그녀가 지금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했다.
'자기 딸을 내놓으라고 하지만 내가 어찌 알 수 있겠어?'
천산 마귀할멈이 매초풍에게 부릅뜬 눈빛을 쏘아대며 외쳤다.
"어서!"
그녀가 매초풍의 목덜미를 거머쥐었다. 겁에 질린 매초풍이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다. 중년의
여인이 달려와 천산 마귀할멈을 말렸다.
"전 정말로 노마님의 딸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협박을 해도 소용없어요!"
천산 마귀할멈이 계속 다그쳤다.
"네 년이 모른다고? 여혈의가 내게 알려 줬다. 철시 매초풍이 내 딸을 오혈궁에서 데리고
도망쳤다고 말이야!"
매초풍은 눈을 꿈벅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혈궁에서 도망을 치기 전에 엽청청을 빼돌리긴 했지만 마귀할멈의 딸은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딸을 찾아내라니……?'
순간 매초풍의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그렇다면 엽청청이 묘상과 천산 마귀할멈 사이에서 태어난 그……! 천산 마귀할멈의 이름
이 엽첩비인 걸 보면 제 어미의 성을 따라……?'
갑자기 매초풍이 안색이 밝아졌다.
"따님의 성이 엽씨입니까?"
"그렇다. 성은 엽씨이고 이름은 청청이다."
매초풍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알겠어요. 그럼 제가 엽청청을 데리고 오면 저를 제자로 받아주시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매초풍이 얼른 엽청청을 끌고 왔다.
"바로 이 처녀가 스승님의 따님이 아닙니까?"
매초풍의 말에 천산 마귀할멈이 화들짝 놀라며 엽청청의 팔을 잡았다. 그런데 엽청청이 있
는 힘을 다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이 마귀년아, 네 년은 우리 아버지를 죽이고도 어머니로 가장해 나까지 희롱하려 드는구
나!"
엽청청의 입에서 다짜고짜 욕설이 터졌다. 천산 마귀할멈은 크게 놀랐다.
"아니다. 내가 너의 어머니다!"
매초풍이 보다못해 나섰다.
"청청아, 이분이 바로 네 어머니란다."
"언니도 한패로군요!"
엽청청은 끝까지 외면하였다. 매초풍이 그동안 있었던 묘상과의 곡절을 들려주었다.
"그러니 어서 어머니라고 불러!"
천산 마귀할멈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엽청청이 달려와 자신의 품에 안기기를 원했
다. 엽청청은 그 자리에 붙박힌 듯이 서서 눈물을 흘렸다.
"아니야, 모두들 날 속이고 있어!"
천산 마귀할멈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정말 내가 네 어머니란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널 찾았는지 아느냐?"
"그렇다면 그땐 왜 나를 버렸어요. 난 오혈궁에서 외톨이로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어
요. 아버지마저 날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라고
생각하며 이제껏 자라왔어요."
"청청아, 이 어미가 죄를 지었구나. 나를 용서해 주렴."
"해검계 옆에서 아버지가 절정공자와 싸움을 벌일 때 아버지가 제게 말씀해 주셨어요. 나는
비로소 궁주인 아버지가 왜 줄곧 나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해 주셨는지 알게 되었어요.
원래 나는 아버지의 딸이었으니까……. 아버지에게도 고충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아버진 나
를 키워 주셨어요. 그래서 난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거예요."
그녀는 천산 마귀할멈을 외면한 채 눈물을 닦으며 말을 계속 했다.
"어머니라고 하지만 그동안 나를 찾아온 적이 있나요? 아버지를 죽이지 못해 날뛴 게 어머
니라면 난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내 잘못이다. 나를 용서해 다오. 지난 십여 년 동안 난 밤마다 네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을 보상할 테니 어서 내 품에 안겨 다오."
"나에겐 어머니가 없어요!"
엽청청이 몸을 돌려 뜨락문 쪽으로 달려갔다.
"청청아, 나를 두고 어딜 가니?"
천산 마귀할멈은 그녀를 애절하게 부르다가 그만 혼절을 하고 말았다. 매초풍과 중년 여인
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정신을 겨우 차린 천산 마귀할멈은 딸을 소리쳐 불렀다.
"청청아!"
"그 앤 갔어요."
매초풍이 대신 대꾸하자 천산 마귀할멈이 일어서며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그 앤 내 딸이다. 그 애를 꼭 찾아오너라. 그렇지 못하면 너도 죽을 것이다!"
매초풍은 살기 어린 그녀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매초풍은 길을 떠났다. 그녀는 어떻게 엽청청을 찾을 수 있을까 고심을 했다. 그리고 무사히
그녀를 찾게 되기를, 그래서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가 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칠팔십 리를 뒤쫓아간 매초풍은 생각보다 쉽게 엽청청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엽청
청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쥐고는 간절하게 말했다.
"청청아, 이제 그만 고집을 부리고 나를 따라 어머니에게로 가자."
그러나 엽청청은 발을 구르며 고집을 부렸다.
"그 사람은 나쁜 짓들만 골라 해왔어요. 난 절대 그런 마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사람 냄새도 나지 않는 그 마귀를 어떻게 어머니라고 불러요."
"그럼 넌 네 아버지가 완벽했다고 생각하니?"
"하지만 아버지는……."
악명이 높은 것으로 치면 아버지 역시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엽청청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묘상의 보호를 받아 왔기에 그녀는 아버지를 좋게만 여겨 왔었다. 아버
지가 악행을 저질러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매초풍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실 두 사람은 피차 일반이야. 강호의 협객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악인으로 보인단 말이
지."
"아무튼 난 그 마귀에게 어머니란 소리를 할 수 없어요. 오혈궁으로 돌아가 어버지의 뜻을
따르겠어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천산 마귀할멈을 막아야 한다고 알려야겠어요."
엽청청은 막무가내로 떠나려 했다. 그러자 매초풍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제지했다.
"청청아, 궁주님께서 널 여혈의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는 게 두렵지 않느냐?"
"더 이상 절 막지 말아요. 난 이미 결심했어요. 어떤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먼저 아버지를 보
호해야겠어요. 내가 싫다고 잘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여혈의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내시지는
않을 거에요."
매초풍이 코웃음을 날렸다.
"흥, 왜 네 생각만 하지? 궁주님은 지금 심한 내상을 입어 병상에 누워 계시지 않느냐. 또
현재 여혈의가 오혈궁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있어. 궁주님은 오혈궁의 기틀이 흔들리지 않
게 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네 말을 듣지 않을 게다. 꼭 여혈의에게 시집을 가라고 할걸."
엽청청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내가 마땅히 희생을 해야지요."
고개를 푹 숙이며 엽청청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매초풍은 엽청청이 이토록 고집을 부리자 난처해졌다. 강제로 손을 써서 엽청청을 제어하지
않으면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매초풍은 갑자기 손을 써서 엽청청의 혈도를 눌렀다. 움직일 수 없게
된 엽청청을 자기 옆구리에 낀 매초풍이 부드럽게 말했다.
"청청아, 난 너희들 모녀간이 생이별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이 언니를 원망하지는 말아
라."
매초풍은 엽창청을 끼고 정안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엽청청은 자기의 손과 발이 차츰 마비되는 것을 느끼고 매초풍을 졸랐다.
"언니, 날 빨리 놓아주세요. 난 그 마귀를 결코 어머니라 부를 수 없어요!"
매초풍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타일렀다.
"천산 마귀할멈은 무공이 천하에서 으뜸이지. 네가 그분을 따르면 네게도 좋은 일이 많을
것이다. 너를 협박하여 시집을 보내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생각을 좀 해보렴. 여혈의
같은 놈팽이에게 시집가기만 하면 넌 평생 마음 고생을 하며 살게 될거야."
엽청청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언니는 왜 내가 싫어하는 노릇을 억지로 시키려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돼요. 날 놓아주세
요. 그렇지 않으면 소리치겠어요."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가 되라는 일념밖에 없는 매초풍에게는 엽청청의 성난 음성도, 또 간
절한 애원의 말도 아예 들리지가 않았다. 그녀는 숫제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달리기만 했다.
"사람 살려요!"
엽청청이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협객이라도 만나
면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인 상황이었다. 매초풍은 얼른 그녀의 아혈을 눌렀다.
엽청청이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되자 매초풍이 여유를 찾으며 말했다.
"언니가 너를 해치자고 이러는 게 아니다. 너희 모녀를 상봉시켜 주자고 하는 짓이지. 오혈
궁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단다."
매초풍은 엽청청의 속마음을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자기 어머니라는 것
을 알았고, 게다가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란 것도 확인했는데 오히려 외면하려고만 드니 매
초풍으로서는 의아스럽기만 했다.
매초풍은 뒤를 이어 자신의 신세를 되짚어 보았다.
'만약 내게 천산 마귀할멈과 같은 어머니만 있었더라면 여원외에게 겁탈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집 역시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 지금 우리 매씨 가문에는 나 혼자 외롭
게 남아서 강호를 헤매고 있다.'
매초풍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그들은 정안성에 이르렀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매초풍의 모습을 보고는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워낙 외진 산속에
사는 사람들이라 한 여인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는 매초풍의 모습에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취붕객점 뜨락에는 천산 마귀할멈과 중년 여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인과 심
부름꾼이 두 구의 시체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관청에서 나온 사람인 듯한 두
사내가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매초풍은 심부름꾼을 불러 물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어디에 있지?"
엽청청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것을 발견한 심부름꾼이 눈을 왕방울만하게 떴다.
"난 몰라요!"
매초풍이 그의 뺨을 한차례 갈기려고 했으나 꾹 참으며 다시 물었다.
"방금 전 얼굴을 면사포로 가렸던 여인 말이야!"
심부름꾼이 바들바들 손을 떨면서 대답했다.
"그 여인은 이미 옆에 있던 중년 부인이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는……."
이때 주인이 걸어오면서 물었다.
"소저는 그 얼굴을 가린 여인과 한패시오?"
매초풍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분은 바로 제 사부님이시죠."
근심에 싸여 있던 주인이 그 말에 매우 기뻐했다. 그는 서둘러 관청에서 나온 사내들을 불
러왔다.
"이 소저가 방금 싸움판을 벌였던 여인의 제자라고 합니다. 하하하, 이제야 내가 혐의를 벗
었군!"
관청의 사내가 매초풍을 노려보며 호령했다.
"넌 이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 우리를 따라 관청으로 가야겠다!"
그들이 쇠고랑을 꺼내 들고 매초풍의 손에 채우려 했다. 매초풍이 쇠고랑을 빼앗아 대문 밖
으로 멀리 내던졌다. 사내들이 눈을 부라렸다.
"이 년이 거역하려고 하다니……! 그야말로 큰 사건이 되겠는걸. 우리 정안성에서는 지금껏
죄를 지은 자가 그 벌을 피한 적이 없다!"
"얼굴이 반반하니 잡아가면 나리께서 입을 다물지 못하겠는걸."
두 사내가 히히덕거리더니 매초풍에게로 덮쳐들었다. 매초풍이 두 사내를 향해 구음백골조
를 썼다. 사내들은 가슴에 일격을 맞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늘어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주인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다리가 떨려서 옴쭉달싹을 하지 못했다.
"관청의 아전들이 죽었다!"
주인이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난 매초풍이 발로 주인을 차버렸다. 주인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는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매초풍은 그 자리에 좀더 있다가는 시끄러워질 것만 같아 다시 엽청청을 단단히 추스리고는
정안성 밖으로 달렸다.
수림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엽청청을 내려놓고 혈도를 풀어 주었다. 엽청청이 날뛰면서 욕
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왜 아까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어요?"
"다 죽일 놈들이야!"
매초풍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었다.
"매초풍, 난 지금부터 너를 벗으로, 그리고 언니로도 생각하지 않겠어!"
엽청청은 단호하게 한마디 던지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 매초풍이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붙잡자 엽청청이 소리쳤다.
"간섭하지 마. 내가 어딜 가든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난 천산 따귀할멈에게 약속을 했다. 너를 그분에게로 꼭 데려 가겠다고 말이야."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라는 사실은 말할 수가 없었다. 엽청청이 힘껏
매초풍의 손을 뿌리쳤다.
"다시 한 번 말하겠어. 이제부터 넌 나를 간섭하지 마. 자꾸만 귀찮게 굴면 아버지께 일러바
칠테다!"
묘상은 이미 황천객이 된 지 오랜데 엽청청이 그런 말을 하자 매초풍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
다. 하지만 그녀는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엽청청을 달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이미 네 어머니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는 데 있어. 장차 두 사람이 상봉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니? 청청아, 넌 이 언니가 난처해지는 걸 원하지는 않겠지?"
엽청청이 조금 수그러졌다.
"언니의 호의는 이해해요. 하지만 난 가야만 해요. 아버지 곁으로 가야겠어요. 가서 아버지
의 착한 딸이 되겠어요."
하는 수 없이 매초풍은 다시 그녀의 혈도를 건드렸다. 그리곤 아까처럼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
"네 어머니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이제 네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야!"
엽청청은 화가 났다.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매초풍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
다.
엽청청은 결국 매초풍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엽청청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림을 벗어나자 엽청청이 입을 열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이미 떠나 버린 것을 봐서는 날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아요. 우
리 함께 오혈궁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호호호, 보통이 아닌걸. 이 언니를 꼬드길려고?"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매초풍 역시 속으로는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어디로 가서 천산
마귀할멈을 찾는단 말인가. 그녀는 천산 마귀할멈이 변청교와 싸우다가 내상을 입었고, 그래
서 어디론가 치료를 받기 위해 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는 알 길이 없었다.
매초풍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엽청청을 데리고 도처를 돌아다니면 자연히 자신들의
소문이 날 것이다. 그 소문은 분명 천산 마귀할멈에게도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쉽게
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추측이었다.
매초풍은 엽청청을 데리고 가급적 사람들이 많은 곳을 골라 다녔다. 그리고 자신들이 매초
풍과 엽청청이라는 말을 흘렸다.
제20장 전진교와 소요공자의 관계
양자강을 따라 떠돌던 두 여인은 건강성에 이르렀다.
매초풍과 엽청청은 먼저 객줏집에 들어가 잠자리를 정했다. 그리곤 다시 거리로 나왔다.
두 여인 모두 워낙 빼어난 미모인지라 사내들이 몰려들었다. 사내들이 겹겹이 두 여인을 둘
러싼 채 희롱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초풍이 바라던 상황이었다. 사내들이 많이 모일수록
소문은 빨리 퍼지기 때문이었다.
매초풍이 한참 사내들과 농을 주고받고 있는데 웬 사내 둘이 앞으로 나왔다. 몸집이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한 사내는 봉두난발에 검정색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었다. 다른
사내는 검은 색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맨발 차림이었다.
"철시, 오늘 네 년을 요절내고 말겠다!"
칼을 찬 사내가 대뜸 매초풍에게 욕을 해댔다. 매초풍은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내
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매초풍이 의아한 눈으로 서 있자 맨발의 사내가 입을 놀렸다.
"우린 금도채의 호걸들이다. 난 두아맹(杜阿猛)이고 이 친구는 엄기(嚴奇)라고 한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금도채 화적들이 건강성까지 나타났으니 야단났다
는 표정들이었다. 구경하던 사내들이 모두 도망치고 몇몇만 남아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매초풍은 두아명과 엄기에 대한 소문을 약간 들어 알고 있었다. 두아명의 별호는 '각답삼산
무적수(脚踏三山無敵手)'라고 하는데, 한 쌍의 큰 발은 무쇠보다 더 강하며 칼과 창도 두려
워하지 않는 자였다. 엄기는 금도채의 두목인 금도 임청의 제자로 별호는 소금도(小金刀)였
다. 그는 '금도일백영팔식'의 진수를 잘 알고있는 임청의 수제자였다.
"언니, 이 사람들이 언니의 원수들인가요?"
엽청청의 물음에 매초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두아명이란 놈은 개똥을 밟아도 냄새를 모르는 놈이라고 통하지. 또 엄기는 임청의 일등
제자지. 강호에서는 발톱 깎는 칼이라고 알려져 있어. 청청아, 저 두아명이란 놈의 발을 봐
라. 바로 엄기란 놈이 그 발톱 깎는 칼로 다듬어 놓기는 했지만 그럴수록 흉칙스럽고 도적
의 발처럼 커진단 말이다."
구경하던 사내들은 비록 내막은 잘 몰랐지만 매초풍의 말에 흥미를 느끼는 기색들이었다.
두 사내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두아명이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매초풍, 관청에 붙잡혀 갈지언정 네 년 같은 잡년은 죽여야겠다. 이 발로 개똥인 네 년을
밟아 주겠다!"
두아명은 오른발을 들어 매초풍을 밟으려고 했다. 매초풍이 몸을 슬쩍 피하며 소맷자락으로
코를 막았다.
"정말로 냄새가 심하네!"
엄기가 후배관도(厚背寬刀)라는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그는 매초풍의 정수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매초풍이 또 날쌔게 몸을 피하며 깔깔 웃어댔다.
"오호호호, 성질이 급하시군!"
엄기가 금도일백영팔식의 초수를 쓰면서 칼을 돌리기 시작했다. 매초풍을 향해 서서히 접근
해 오는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구경하던 사내들이 아우성을 치며 좋아했다.
엽청청은 싸움이 벌어졌는데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무공은 대단하지 못했지만 구경
꾼들이나 화적 떼들보다는 나았다. 그래서 두아명의 발 힘은 대단하지만 민첩하지 못하며
단조롭다는 것을 읽어냈다. 그리고 엄기가 비록 칼을 멋지게 쓰는 것 같아도 겉치레가 요란
하고 아직 깊이가 없다는 것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매초풍은 반격하지 않고 두 사내의 공격을 막기만 했다. 사실은 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
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온 성안의 사람들이 다 와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자신
들의 소문이 어서 넓게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백여 합을 겨루고 나니 두아명과 엄기는 맥이 빠졌다. 두아명과 엄기가 뒤로 물러서며 지껄
였다.
"철시, 오늘은 네 년을 살려 주겠다. 하지만 다음엔 어림도 없을 줄 알아라!"
그러나 오히려 살려 준 것은 매초풍 쪽이었다.
"두목인 임청을 오라고 해라!"
매초풍은 두 사내가 사라져 가는 쪽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매초풍이 엽청청에게로 다가
왔다.
"청청아, 넌 언니에게 경공을 배울 생각이 없니?"
"배우고 싶어요."
엽청청이 슬쩍 능청을 떨었다.
"하지만 언니가 과연 내게 가르쳐 줄 수 있을지……."
매초풍도 은근히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경공은 내공을 바탕으로 하는 건데 내공에도 조예가 깊어야 한다. 깊은 내공을 지니려면
천산 마귀할멈을 꼭 찾아야 해. 그 분은 반드시 너에게 경공을 가르쳐 줄 거다."
매초풍이 다시 천산 마귀할멈을 들먹이자 엽청청은 또다시 표정이 굳어지며 앙칼지게 쏘아
붙였다.
"만나도 난 어머니란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 내 다신 그 이야긴 꺼내지 않을게."
매초풍은 엽청청을 데리고 객줏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구경하던 사내들은 매초풍의 무공
을 알고는 더는 접근하지 않았다.
두 여인이 한 객점 앞을 지나는데 이층에서 갑자기 누군가 뛰어내려 가로막았다. 엽청청이
살펴보다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층에서 뛰어내린 자는 두 명이었는데 하종과 노위였다. 하종이 무쇠부채를 활짝 펼치더니
슬슬 부치면서 물었다.
"엽 소저는 그동안 무사하였는가?"
엽청청은 이들을 대하자 어쩐지 어색해 다소곳이 머리를 숙였다.
"전 무사해요. 하 공자님도 무사하셨어요?"
원래 시원시원한 성미를 지닌 노위가 불쑥 끼여들었다.
"이 사람들 초면도 아닌데 무슨 인사야?"
노위가 하종의 어깨를 탁 치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오매불망 그리던 엽 소저가 눈앞에 있는데, 왜 이렇게 멋대가리가 없어?"
하종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노위가 껄껄 웃으면서 엽청청에게 시선을 주었다.
"소저는 잘 모를 거요. 소저가 철시에게 붙잡혀서 강호를 떠돈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가 얼
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말이오. 그래서 단숨에 삼백 리나 달려온 길이라오. 바로 이 친구가
나를 데리고 이곳까지 온 셈이지."
그리고 나서 노위는 연신 싱글거리며 엽청청의 반응을 살폈다. 하종은 비록 강호의 협객이
긴 하지만 선비 가문에서 태어난 서생이라 노위의 노골적인 표현을 듣고는 어쩔 줄 몰라 했
다. 하지만 노위가 한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다. 한편 자신의 마음을 엽청청에게 보인 것 같
아 시원하기도 했다.
엽청청도 이곳으로 오는 길에 매초풍으로부터 하종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방금 노위의 솔직한 말도 들었고 또 그 말에 얼굴을 붉히는 하종을 보면서 엽청청은 마음속
으로 명확한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하종을 영웅호걸로 협객으로 존경해 왔
고 호감 또한 갖고 있었다. 그를 사모하는 마음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하
종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많은 부분
을 모르고 있다는 것도 떠올렸다. 하지만 사랑이란 미지수인 상태에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매초풍은 하종과 엽청청이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
다. 그러나 매초풍은 즐겁지가 않았다. 그녀는 하종이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엽청청을 자기 뒤로 세우고는 쌀쌀맞게 말했다.
"청청에게 눈독을 들인 자가 있다 해도 우선 내게 물어 봐야 할 거예요."
노위가 눈을 치뜨면서 대들었다.
"그러면 내가 물어 보겠네. 그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는 걸 찬성하는가?"
"난 허락할 수 없어!"
매초풍은 찬바람이 일 정도로 매몰차게 대꾸했다. 그녀의 딱 부러진 거절에 화가 난 노위가
두 눈을 부릅뜨자 하종이 말렸다.
"오혈궁을 소탕하는 일에 철시의 공이 제일 컸네. 그때 우린 매초풍에게 시끄러운 일을 만
들지 않겠다고 대답한 적이 있지 않나. 그러니 우린 신의를 지켜야 하네."
노위가 큰소리로 말했다.
"엽 소저가 이런 못된 여인과 강호를 떠도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네. 소저의 장래에 불리
하지. 원래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도 철시와 함께 있으면 악인이 되거든."
엽청청이 얼굴을 쳐들며 하종에게 물었다.
"하 공자님, 오혈궁을 소탕했다는 건 무슨 뜻이죠? 또 언니의 공이 크다는 건 무슨 소리에
요?"
매초풍이 급히 하종을 바라보면서 한쪽 눈을 꿈벅였다. 그리곤 대신 말을 가로챘다.
"아무 일도 아니야. 하 공자님이 그저 허튼소리를……."
매초풍은 잔뜩 긴장해 가지고 엽청청의 손을 잡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자 엽
청청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계속 따지고 들었다.
"하 공자님, 대관절 오혈궁에 무슨 일이 생겼죠?"
하종은 오혈궁이 개방에 의해 소탕된 일은 이미 강호에 소문이 자자하므로 그녀가 알고 있
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엽청청은 아직 모르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는 무슨 특별한 사
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하종이 엽청청에게로 다가서며 오히려 반문했다.
"엽 소저, 오혈궁은 이미 두 달 전에 개방의 무리들이 쳐들어 가 전멸당했어요. 엽 소저는
정녕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엽청청이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오혈궁은 심산 속에 있고 길목마다 숱한 장애물과 올가미들이 있어
요. 개방의 무리들이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단 말이죠?"
"그건 이 매 소저가 개방을 위해 길을 안내해 준 덕분이죠."
하종이 매초풍을 향해 읍을 하며 말을 이었다.
"매 소저는 무림을 위해 큰 공을 세웠지요. 그때부터 중원 무림에서는 매 소저를 다른 눈으
로 보게 되었답니다."
엽청청이 매초풍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 하 공자님이 방금 하신 말씀들이 모두 사실인가요?"
매초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엽청청의 얼굴색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잠시 말문을 잃고 머뭇거리던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잘됐어요. 오혈궁 문하의 사람들이 의롭지 못한 일들을 수없이 저질렀으니 벌을 받아 마땅
해요."
엽청청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몸을 흠칫 떨더니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죠?"
하종이 대답했다.
"붙잡힌 오혈궁 제자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개방이 오혈궁을 소탕하기 전에 묘 궁주는 이미
살해되었다고 하오."
"살해? 누가……?"
"천산 마귀할멈에게 죽었는데 여혈의가 묘 궁주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했소."
엽청청은 입을 반쯤 벌리더니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곤 뒤로 넘어졌다. 정신을 잃은 모양이
었다.
하종이 얼른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엽 소저!"
"기절한 것뿐이에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매초풍은 자신에게 엽청청을 넘겨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하종은 엽청청을 안은 채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매 소저는 엽 소저를 데리고 갈 수 없소!"
노위가 주먹을 앞세우며 달려들었다.
"이 몹쓸 년, 더는 엽 소저를 해칠 생각을 말아라!"
매초풍이 순간 노위의 주먹을 향해 장을 날렸다. 펑 하는 굉음이 울리며 노위가 대여섯 걸
음 뒤로 밀려갔다.
'그, 사이 공력이 크게 늘었구나. 몇 달 전만 해도 철금강 아수라보다 조금 강했을 뿐인데
지금은 여혈의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정도야!'
노위가 속으로 감탄을 했다. 그는 다시 주먹을 단단히 틀어쥐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구경하
던 사람들은 그 주먹에 한 대 맞으면 뼈도 못 추릴 거라고 수군거렸다. 노위의 주먹이 매초
풍을 향해 떨어졌다. 매초풍이 슬쩍 몸을 날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주먹은 빗나가 땅바닥에
내리꽂혔는데 한 뼘 정도나 깊이 파여 자국을 남겼다.
"간다!"
노위가 눈에 불을 켜며 다시 질주해 왔다. 순간 매초풍이 손을 들어 날카로운 손톱을 앞으
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의 손톱들에서 나는 괴상한 소리에 놀란 노위가 몸을 뒤로
빼면서 물러났다.
매초풍이 웃어대자 그녀의 팔이 갑자기 길어졌다. 노위가 미리 알고 피했으니 다행이지 잘
못했다가는 그 손에 잡혀 숨통이 막혔을 것이다.
하종은 한 손으로 엽청청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쇠부채로 매초풍의 혈도를 겨누었다.
하종이 드디어 부채 끝으로 그녀의 혈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매초풍의 시선이 하종에게로
돌아가자 비로소 노위가 위기에서 풀려났다.
"먼저 엽 소저를 빼돌리세!"
하종이 노위에게 귀띔하자 두 사람은 거리의 사람들을 헤집고 나갔다. 갑자기 그들의 머리
위에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을 올려다보니 매초풍이 어느새 행인들 머리
위를 날아왔다. 그녀가 하종과 노위 앞으로 뛰어내리며 협박했다.
"목숨을 건지고 싶거든 엽청청을 내려놓아라!"
매초풍이 손을 뻗어 엽청청을 거머쥐려고 했다. 하종은 매초풍이 혼수상태에 처한 엽청청을
다치게 할까 봐 몸을 슬쩍 돌렸다. 그리곤 엽청청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철선을 쭉 펴서 매
초풍의 손목을 후려쳤다. 그 무쇠로 만든 부채의 겉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는데 하종의 팔힘
이 가해지면 어떠한 병장기보다 위력적이었다.
구음백골조를 이미 몸에 익힌 매초풍의 두 손 역시 칼과 창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번개같이 손목을 뒤집으면서 다섯 손가락으로 철선을 잡더니 왼손으로 하종의 가슴팍을 내
질렀다.
이때 노위가 달려들어 주먹으로 매초풍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매초풍은 그의 주먹이 강한
줄 알고 있기에 급히 손을 되돌려 노위의 손목을 할퀴려고 했다. 노위도 곧장 오른쪽 주먹
을 뒤로 끌어오고 왼쪽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하종은 철선으로 그녀의 숨통을 노
렸다.
매초풍이 서서히 마공을 쓰기 시작했다. 진기를 양팔에 가득 모았다. 긴 머리카락들은 순간
뒤로 흩어져 괴상한 형태를 이루었다. 이윽고 그녀는 두 손을 펴 매발톱처럼 만들고는 하종
과 노위를 공격했다.
그러자 하종과 노위의 주먹은 매초풍에게 미치지 못했다. 또한 매초풍의 손톱 역시 두 사람
의 몸 어디에도 닿지를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무공에 대해 너무도 잘 알
고 있었다. 각자의 무공이 절대의 경지에 가까웠으므로 한 번 충격을 받으면 끝장이었다. 그
래서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중에서 그나마 불리한 사람은 하종이었다. 그는 엽청청을 끼고 있었기에 충분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하종은 점점 힘이 빠졌다. 웬일인지 노위 역시 차츰 공격 빈
도가 약해졌다.
반면에 매초풍은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을 번갈아 쓰며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진기가 넘쳐흘러 마치 맹수와도 같은 표독스런 동작을 만들어 냈다.
매초풍은 엽청청 때문에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하종을 집중 공략했다. 과연 하종
은 매초풍의 손톱과 장을 막느라 이렇다 할 공격을 하지 못했다.
매초풍의 눈빛이 순간 반짝하였다.
"받아랏!"
최심장이 하종을 향해 날아갔다. 사실 그녀는 엽청청을 노리고 뿌린 것이었다. 그녀의 예상
대로 하종이 엽청청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이때 매초풍이 계산해 두었던 다
음 동작을 취했다. 그녀가 다시 최심장을 날렸다. 엽청청을 안고 있던 하종의 가슴으로 두
번째 최심장이 스쳤다.
"으윽……."
하종은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혈도가 끊어져 입으로 검은 피를 토했다.
노위가 달려들었다. 매초풍이 이번엔 노위를 향해 장을 날렸다. 순간 그녀가 노위의 옆구리
를 타고 등뒤로 자리를 바꾸었다.
노위의 왼쪽 팔에 이미 매초풍의 손톱 자국이 다섯 개나 나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
다.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런……."
노위는 얼른 스스로 별도를 눌러 지혈을 시켰다.
매초풍이 웃음을 터뜨리며 엽청청 쪽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비웃듯이 말했다.
"하 공자님, 엽청청은 바로 천산 마귀할멈의 딸이랍니다. 청청이를 아내로 맞아들이려면 먼
저 그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거예요."
하종은 매초풍이 엽청청을 가로채려고 하자 화가 났다. 하지만 그는 소리조차 지를 수 없는
상태였다. 그의 입에서는 연신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그의 안색이 차츰 노랗게 변해 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매초풍이 막 손을 내밀어 엽청청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이 때 갑자기 누군가 고함을 지
르며 동시에 병장기가 허공을 가르면서 날아왔다. 매초풍이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두 손
바닥으로 앞가슴을 막았다.
날아든 병장기는 녹이 슨 검이었다. 하지만 날만은 잘 갈아져 있어 서릿발처럼 번뜩였다.
검잡이는 흰 옷차림으로 깨끗해 보이는 사내였다. 얼굴빛은 창백하다 못해 얼음장 같았다.
나막신을 신고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딸깍딸깍 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절정공자로군!"
매초풍이 저도 모르게 이런 소리를 냈지만 절정공자 탁운백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하종을 일으켜 세우며 입을 떼었다.
"하 공자, 많이 다쳤는가?"
노위가 달려와 역시 하종을 부축하며 대답했다.
"탁 공자님, 한걸음만 늦었더라도 우리 두 사람은 저 철시 년에게 당했을 겁니다."
하종도 정신을 차리면서 탁운백에게 말을 건넸다.
"탁 형, 저 철시라는 못된 년이 엽 소저를 빼앗으려고 하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돼
……."
말을 하면서도 하종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먼 곳으로부터 한 여인이 달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역시 흰 저고리에 흰 치마를 입은 여인이었는데 꽤나 미인이었다. 여인은 다름아닌 탁운백
의 아내인 유정아였다. 유정아는 하종과 노위가 부상을 입은 것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곁에 있던 매초풍을 보고는 사태를 얼른 짐작했다.
유정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엽 소저는 어떤가요?"
그녀가 급히 엽청청을 안았다.
유정아가 오혈궁에 들어가서 묘상의 일곱 번째 첩 노릇을 할 때 묘상은 엽청청을 양육하는
소임을 그녀에게 맡겼었다. 그런 까닭에 그녀와 엽청청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탁운백은 녹이 슨 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는 칼날 같은 눈길로 매초풍을 쏘아보았다.
"매초풍, 우린 네가 개방을 도와서 오혈궁을 소탕했기에 그대가 뉘우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역시 개꼬리는 몇백 년을 묵어도 황모가 되지 못하는구나!"
탁운백이 꾸짖으며 검을 앞으로 힘껏 내리찔렀다. 매초풍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줄곧 절정공자 탁운백의 절정검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금은 비록 탁운백과 겨룰
만한 공력을 몸에 지니고는 있지만 그의 위엄 앞에서는 여전히 가슴이 떨렸다. 특히 탁운백
의 얼굴에 서린 정의의 기운이 매초풍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매초풍은 눈치를 살피더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탁운백은 하종과 노위의 상처가 걱정스
러워 그녀를 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검을 거두고는 유정아와 함께 하종과 노
위 그리고 엽청청을 부축하여 개방의 분타를 향해 걸어갔다.
매초풍은 여러 거리와 길목을 따라 도망을 쳤다.
그녀는 탁운백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앞에서 거렁뱅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앞장을 선 자는 개방의 육대 제자 상승이었
다. 매초풍은 화살에 놀란 매처럼 잔뜩 긴장을 했다. 개방이 자신을 잡으러 온 것으로 여기
고는 황망히 작은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개방의 무리들이 지나간 뒤에야 그녀는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눈에는 또 낯설지 않은 사람이 들어왔다. 소요공자 악처후였다. 그녀는 또 급히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꽃무늬가 있는 주홍빛 두루마기를 입고 등에는 보검을 메고 있었다. 필시 무슨 좋은
일이 생긴 듯한 표정이었다.
개방에 의해 오혈궁이 소탕된 후부터 악처후는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놈들이 없어졌
다고 믿었다. 태호 기슭에 있는 소요관은 비록 사라졌지만 그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는
계속 강호를 떠돌면서 계집질에 열중했다. 전진교의 일곱 영웅들은 악처후에게 다른 위험이
없게 되자 모두 종남산으로 돌아간 후였다.
악처후는 득의 양양한 기색으로 '강순주루(康順酒樓)'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이층으로 올라
간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창문이 있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그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곳에는 한 어여쁜 여인이 그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악처후는 옷자락을
여민 다음 그곳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여 소저, 안녕하셨소이까?"
자리에 앉아 악처후에게 손짓을 한 미모의 여인은 바로 여소교였다. 그녀가 몸을 세우더니
답례를 했다.
"악 공자께서 약속을 어기지 않고 찾아와 주시니 소녀는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내가 여 소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악처후가 아주 반가운 얼굴로 그녀 앞자리에 앉았다. 반년 전쯤부터 여소교는 갑자기 실종
된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도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동시 진현풍
과 싸움을 하던 중 그에게 맞아 죽었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절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
다는 말도 했다. 또한 부잣집의 첩으로 들어앉았을 거란 추측도 나돌았다.
악처후는 소요관이 풍지박산이 난 뒤 줄곧 여소교를 찾아 다시 정을 나누려고 했었다. 그는
숱한 여인들의 살을 탐미해 보았지만 여소교만은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검계에서 오
혈궁 궁주 묘상과 절정공자 탁운백이 무공을 겨룰 때 여소교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악
처후는 그 길로 달려갔었다. 하지만 그는 뭇영웅들과 오혈궁 무리들의 혈전을 보았을 뿐 여
소교를 만나지는 못했다.
며칠 전 악처후는 뜻밖에 여소교의 서찰을 받았다. 거기에는 그녀가 건강성에서 만나자고
밝히고 있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한걸음에 달려온 길이었다.
어젯밤 건강성에 도착하였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한 객줏집에 잠자리를 정하였다. 그런데
여소교로부터 또 하나의 서찰이 날아왔다. 바로 다음날 이곳 주루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악처후는 슬며시 여소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름다움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악처후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여소교가 애교를 부렸다.
"호호호, 그렇게 사람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시면 배가 저절로 불러지나요."
"그래, 어서 술과 안주를 청해야지."
"호호호, 머리가 영 돌지 않으시는군."
탁자 위에는 이미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악처후가 뒤늦게 그런 사실을 알고는 머리를 긁적
였다. 그가 여소교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여 소저, 우리의 상봉을 위해 듭시다!"
악처후가 먼저 술잔을 들어 마셨다. 그런데 여소교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
쉬었다.
"여 소저, 무슨 일이오?"
악처후가 짐짓 걱정된다는 투로 물었다. 이윽고 여소교가 술잔을 비우고는 입을 열었다.
"절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겠죠?"
"물론이지.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여 소저를 잊은 적이 없다오."
그러면서 악처후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굴렸다.
'네 년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을까? 그리고 오늘 날
불러서 뭘 어쩌자는 게지. 조심을 해야겠는걸!'
여소교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 당신이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았어요."
악처후가 술을 다시 따랐다.
"여 소저는 대갓집의 규수인데 강호를 헤매면서 지난 세월 동안 어떻게 지냈소?"
여소교가 장탄식을 탁자 위로 쏟아놓았다.
"거렁뱅이가 될 뻔했어요. 다행히도 한 협객이 구해 줘서 그 집에 머물 수가 있었지요."
"누구였소?"
악처후는 약간의 질투를 느끼며 물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절 구해 준 협객은 여인이었으니까요. 흥,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전 당신
을 위해 제 몸을 지켜 왔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난 여 소저를 믿고 있다오. 설사 소저가 다른 사내를 따랐
다고 해도 난 상관하지 않겠소. 여전히 소저를 내 아내처럼 여기겠소."
"누가 당신의 아내라는 거죠?"
여소교가 쌀쌀맞게 눈을 치뜨며 쏘아붙였다.
"그럼 당신이 다른 여인들과 놀아난 일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여 소저의 처분만을 기다릴 뿐이오."
"당신은 그럼 어떤 벌을 받고 싶으세요? 절 구해 준 그 여협객에게 대단히 무서운 주먹질을
배웠거든요. 잘못을 빌지 않아도 저에게 그 버릇을 고쳐 놓을 힘이 있다구요."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소. 하지만 절대 내 곁을 떠나지만 말아 주오."
두 사람은 티격태격 싸우다가는 정겨운 웃음을 나누곤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신없이
술잔을 주고받았다. 악처후와 여소교는 잔뜩 취해 가지고 주루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줄곧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매초풍이었다. 그녀는 소요공자
악처후를 발견하고는 그의 뒤를 계속 따라왔던 것이다. 매초풍은 그들의 뒤를 계속 미행하
기로 마음먹었다.
'여소교가 그동안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났지만 옷차림이 화려하고 얼굴로 몰라볼 정도로
고와졌구나. 그동안 어디서 잘 먹고 잘 지낸 게 틀림없다. 더러운 년, 가는 곳마다 꼬리를
쳐서 사내들을 꼬드기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여우야!'
소녀공을 몸에 익히기 위해 매초풍 자신은 또 얼마나 많은 사내들과 뒹굴었는가. 그녀는 자
신의 과거는 까마득히 잊고 여소교를 경멸했다.
악처후와 여소교는 어느 아담한 객줏집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여소교가 미리 잡아 놓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빗장을 걸어 잠갔다. 매초풍은 창문 아
래로 다가가서 숨을 죽이고 방안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여소교는 한때 악처후를 죽도록 미워한 적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왜 저 놈에게 붙어서
화해를 했을까?'
매초풍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방안으로부터 악처후가 일부러 취한 척하며 여소교를 끌어안고 수작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 소저, 오랜만에 만나니 첫날밤보다 더 좋은데. 허허허……!"
여소교가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제가 아무리 당신을 바람둥이라고 욕을 해도 첫날밤만 생각하면 언제나 당신이 떠
올라요."
"난 다른 여인들에게는 마음이 동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그대만 보면 걷잡을 수가 없어진
다구."
"그래요, 호호호……!"
여소교는 두 눈을 살며시 감고 마치 악처후가 어서 옷을 벗겨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에
게 찰싹 달라붙었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기기묘묘하단 말씀이야. 내가 천하의 영웅인데 그대의 치마 아래서는
벌벌 기는 무골충이 돼버리니 말이오. 영웅 호색이란 말이 맞긴 맞는가 보오."
악처후는 여소교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을 계속했다.
"요 귀여운 것. 그 소녀공에 대해서 좀 말해 보렴. 내가 그 속에 담긴 묘한 맛을 알려 줄테
니."
"오호호, 저를 구해 준 그 여협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소녀공은 여인들이 양기를 취하여 음
기를 보충하는 사공(邪功)이라고요. 당신 같은 사내들이 그걸 배워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요?"
"그저 호기심 때문이지 뭐."
"그 때문일까요? 솔직히 말하지 않으려면 당장 여기서 나가세요!"
"음, 그럼 내 말하리다. 소녀공은 확실히 여인들이 양기를 취하여 음기를 돕는 길잡이야. 하
지만 한 고명한 분이 일찍이 나에게 귀띔을 해준 적이 있소. 소녀공을 거꾸로 연마하기만
하면 사내들이 음기를 취하여 양기를 보충하는 방법으로 쓸 수도 있다구 말이오."
"그래요? 그분이 누구죠?"
"알려 줘도 상관은 없지. 그분은 바로 화산 무예시합에서 동사 그리고 남제와 북개 등을 이
긴 왕중양이지."
"바로 전진교 교주인 왕 진인이란 말씀이에요?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그분은 매우 강직하고
공명정대하신 분이라고 하던데 어째서 그런 사공을 알고 있을까요?"
"왕중양이 무림에서 으뜸가는 고수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지만 사실은 그도
양심 없는 일들을 많이 벌였지."
"어떤 짓들을 했는데요?"
"하지만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돼. 내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대에겐 말해 주
겠소. 왕중양이 화산 무예시합에 참가하기 전의 일이지. 그때만 해도 손불이는 전진교에 갓
들어 온 인물이었고 구처기 역시 소년이었던 시절이었소. 왕중양은 비록 집을 떠나 도사가
되었지만 속세와의 인연이 끊나지 않아 젊은 시절 연인이었던 임조영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었지. 왕중양의 무공이 천하에서 으뜸이었지만 임조영의 무공도 그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
소.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나았지. 속담에 같은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 없다고 하
듯, 왕중양과 임조영도 한곳에 사는 호랑이처럼 사이가 점점 나빠졌소. 원래는 서로 사모하
던 사이였지만 무공에서 서로 높고 낮음을 겨루다 보니 틈이 벌어진 거지.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은 원수처럼 등을 돌린 채 암투만을 벌이곤 했지."
"난 왕중양이란 분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알고 싶어요. 상관없는 임조영은 왜 들먹이죠?"
"세상일에는 모두 원인이 있는 법. 이 일은 바로 왕중양과 임조영 사이에서 생겨난 거야. 임
조영 친청집에는 외사촌 동생 이씨가 있었는데 그녀처럼 무공에 열중했었지. 이씨는 왕중양
과 임조영이 무공을 겨룬다는 소식을 듣고는 구경하겠다고 졸라댔소. 원래 왕중양과 임조영
의 겨룸은 언제나 비밀리에 벌어지곤 했었거든. 무림에 소문이 나면 시비가 일어날까 봐서
였지. 그래서 임조영이 거절했더니 이씨는 그날 그녀를 미행하여 종남산에 이르렀던 거요
임조영은 내공에 조예가 깊었기에 귀도 상당히 밝았소. 그러나 길을 가면서 어떻게 하면 이
길 것인가만을 골똘히 생각하느냐고 이씨가 뒤를 밟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소.
왕중양은 먼저 나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소.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인삿말도 건네지 않
고 싸우기 시작했지. 맨손으로 싸우다가 두 사람은 검술로 승부를 내기로 했었소. 그때 왕중
양의 검술은 아직 절정에 오르지 못한 상태였소. 그래서 임조영의 검끝에 왕중양의 옷이 찢
어지면서 구멍이 뚫리게 되었지."
"어머, 왕중양이 임조영의 상대가 못 된다는 말인가요?"
"그렇구말구. 옷을 그 정도로 뚫었다는 것은 마음만 먹었다면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뜻
이 되지. 그러나 임조영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죽일 수 없었던 거요. 상황이 그렇게 되면
왕중양 입장에서는 패배를 시인해야 마땅했을 거요. 그 당시 왕중양은 무위지경에까지 이르
지는 못했었지. 그 경지에 도달했다면 처음부터 임조영과 무공을 겨루지도 않았을 테니까.
왕중양은 한 번 지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소. 이때부터 두
사람의 무공시합은 생사를 놓고 하는 싸움으로 변하기 시작했지."
"흥, 왕중양의 명성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알고 보니 아주 무지한 사내로군!"
여소교가 빈정거렸다.
"그 말이 맞소. 몸을 숨기고 구경을 하던 이씨는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자 그만 뛰어
나가 싸움을 말렸소.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살기로 충만해 있던 터라 이씨의 말을 들으려
고 하지 않았소."
잠시 숨을 가다듬은 악처후가 말을 계속했다.
차츰 위기에 빠져들던 왕중양은 체면을 세우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그는 내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임조영은 그의 검 끝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는 역시 내력을 써 막았다. 무림의 고
수들은 무공을 겨를 때 원수간이 아니면 내력을 쓰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왜냐하면 일단
내력을 쓰게 되면 반드시 크게 상하거나 죽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치명상
을 입을 수도 있었다.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이씨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댄 것도 그런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
소리에 전진교의 일곱 제자들이 달려왔다. 자신들의 사부와 임조영이 내력을 겨루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경악했다.
그러나 평소 왕중양은 일곱 제자들을 엄히 다스렸기에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를 못했다. 보
다못한 이씨가 검을 뽑아 들고는 달려나갔다. 왕중양과 임조영의 맞붙은 검을 떼어놓으려고
힘껏 검으로 쳤다. 두 검날이 두 동강 났지만 이씨는 그 진동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내상
을 입은 채 쓰러지고 말았다.
"이씨가 과연 여걸이네요!"
여소교가 이씨를 칭찬하자 악처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는 의롭게 왕중양과 임조영을 구했지. 임조영은 급히 이씨를 부축했소. 이씨의 호의를
아는지라 미행한 걸 꾸짖지도 않았지. 그런데 왕중양은……."
"왕중양은 이씨 덕분에 살았고 게다가 일곱 제자들도 그 장면을 봤으니 그도 이씨의 은혜에
고개를 숙였겠네요?"
"흥, 왕중양이 그런 마음씨를 가진 인간인 줄 알아? 그는 오히려 이씨가 말린 것을 탓했지.
그는 반시간만 더 지나면 임조영이 지탱하지 못하고 자기 내력에 당할 것이라고 주장했소.
그리고 이씨가 달려들어 뜯어말린 것은 임조영을 편든 것이라고 억지를 부렸지."
"당당한 사내 대장부가 정말 째째하군요."
여소교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악처후가 입꼬리를 찢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시오? 왕중양은 대로하여 검으로 이씨를 찔렀소. 이씨는 이미 내상을 입
은 상태라 막아낼 힘이 없었소. 임조영이 급히 검으로 막았지만 마음을 먹고 찌른 왕중양의
검을 어찌 막을 수 있었겠소. 결국 임조영의 검은 왕중양의 검을 막아내지 못했소."
"그럼 이씨가 그 검에 찔렸나요?"
"임조영조차 막아내지 못했는데 이씨가 무사할 수 있었을 것 같소? 이씨는 끝내 왕중양의
검에 찔려 죽고 말았지."
그는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왕중양이 그다지도 무지하다니……!"
여소교는 악처후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울지요? 그 이씨와 친척이라도 되나요?"
"그분이 바로 나를 낳아 준 어머니요."
여소교가 크게 놀라며 중얼거렸다.
"공자님의 신세도 비참하군요. 소문에 의하면 공자성과 전진교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던데 바로 그거였군요."
"임조영은 왕중양을 배은망덕한 소인배라 욕하면서 그 후로는 다신 그와 만나지 않았소. 그
때서야 왕중양은 자기가 잘못했음을 깨달았지. 그래서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전진파의 무공
을 모두 내게 전수해 주었던 거요."
"알고 보니 당신의 무공은 왕중양에게서 직접 전수받았던 거로군요."
"하지만 난 그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목숨이 귀중해. 어머니의 목숨만 살릴 수 있다면 전진
파의 무공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리겠소."
악처후가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소교가 그의 얼굴색을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자님은 전진파의 무공 때문에 무림에 발을 붙일 수 있잖아요?"
"처음 어머니가 왕중양의 검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그를 한칼에 죽이지 못하는 나 자신
을 원망했지. 하지만 아직 어리고 무공도 없으니 원한을 속으로만 품을 수밖에 없었소. 어느
날 왕중양이 날 찾아왔소. 자기가 한평생 동안 익힌 무공을 모두 내게 가르쳐 주겠다는 거
였소. 내가 무공을 익힐 수 있는 특별한 재목이라서가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그로
써 보상하려는 것이었지."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사나요? 왕중양이 제 마음 편하고자 하는 수작이지요."
"그 말이 옳소. 그래서 난 단호하게 거절했었소. 하지만 왕중양은 끈질기게 달라붙었소. 며
칠 건너 한 번씩 찾아와 나를 설복하려 했소. 그러던 중 난 고심을 했지. 왕중양의 무공을
모두 배워 놈보다 강해졌을 때 어머니의 복수를 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말이오. 그래서 승
낙을 했던 거요."
"호호호, 어린 나이에 그만한 심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대단한데요?"
"놀리지 마오. 나도 어쩔 수 없어 생각해 낸 거니까. 그때 난 왕중양에게 두 가지 조건을 제
시했소. 첫째는 사부로 모시지는 않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
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소."
"그가 그 조건을 들어주던가요?"
"우리 어머니를 죽이고 자책감에 빠져 있던 터라 쾌히 받아들이더군. 난 왕중양에게 열심히
무공을 배워 익혔소. 오 년 남짓 되자 나는 전진파 장법과 검술을 배울 수 있었고 도가의
내공도 기초를 단단히 다질 수가 있게 되었지. 하지만 아무리 악을 쓰고 배워도 왕중양을
능가할 수는 없었지. 왕중양은 확실히 천성적으로 무공을 익히는 소질을 타고 태어난 사람
같았소."
악처후가 잠시 회상을 하는 듯하더니 다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몇 년 후 화산에서 있은 무예시합에서 왕중양은 모든 고수들을 누르고 <구음진경>을 손에
넣었다. 매번 악처후는 손을 써 왕중양을 없애려고 궁리했지만 그의 신공이 두려워 감히 실
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생각하던 끝에 왕중양을 죽이지 못할 바엔 전진교의 명성이
라도 더럽혀 놓으려는 생각으로 종남산을 내려왔다.
그 후 왕중양은 악처후가 강호에서 허튼 짓거리만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를 찾
아왔다. 왕중양은 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악처후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만일 그가 왕중양의
제자라고 떠들기만 하면 종남산에 잡아 가두겠다는 협박이었다.
악처후의 말을 듣고 있던 여소교가 깔깔 웃어댔다.
"그게 무서워서 자기의 무공이 누구에게 전수받은 것인지도 밝히질 못했었군요."
그러나 악처후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대장부는 허리를 굽힐 줄도 알고 곧게 펼 줄도 알아야 하오. 자그마한 일로 목숨을 잃는
일을 자초해서야 되겠는가. 강호에는 꽃 같은 계집들이 구름처럼 많은데 난 아직도 그녀들
을 다 만나 보지 못했단 말씀이야."
"당신은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벌써 잊었나요?"
"하늘은 자고로 공정하다오. 왕중양은 <구음진경>을 손을 넣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죽어
버렸지. 내가 손을 댈 필요도 없이 저절로 죽은 거요. 가소로운 것은 왕중양이 임종시 일곱
제자들에게 내가 한평생 안전하게 지내도록 보호해 주라는 유언까지 했다는 거지."
그 말에 여소교는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듣자하니 오혈궁의 제자들이 악처후를 잡아죽
이려고 뒤쫓아오자 전진교의 일곱 제자들이 모두 출동하여 악처후를 보호했다는데 바로 그
때문인게 아닌가 싶었다.
"정말 당신은 복이 많군요. 전진교 일곱 제자들이 보호를 해주니 천하에 두려울 게 없겠는
걸요."
악처후가 다시 달려들어 그녀의 옷을 벗기면서 능글맞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마음놓고 그대와 사랑을 나눌 수도 있는 게 아니오?"
악처후의 손에 의해 여소교의 옷은 하나씩 벗겨져 나갔다.
여소교는 몸을 맡기고는 있었지만 뿌리치는 시늉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악처후는 욕정을
더는 참을 수가 없는지 그녀를 자리에 눕혔다.
창 밖에서 음탕스레 들려 오는 남녀의 말소리를 엿듣고 있던 매초풍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내가 저 년에게 소녀공을 가르쳐 줄 때는 사내들과 잠자리를 같이할 때 모진 고통을 겪으
라고 한 건데……, 오히려 저 년은 소녀공 덕분으로 더없는 재미를 보고 있으니 정말 분통
이 터지는구나!'
매초풍은 당장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그들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이때 방안에서 악처후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악! 아이고, 내 진기가……!"
이어서 여소교의 달래는 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걱정 마세요. 당신의 기분을 더 좋게 하려고 그러는 거니까요."
여소교는 소녀공을 써서 악처후의 원양지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매초풍이 속으
로 쾌재를 불렀다.
'호호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되겠군!'
얼마 지나지 않아 악처후가 큰 비명 소리를 한 번 내질렀다. 그리곤 까무러쳤는지 조용해졌
다. 곧 여소교가 혼자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람둥이 같은 녀석, 달콤한 말로 나를 구슬려서 내 몸을 망쳐 놓았지. 넌 나를 노리갯감으
로만 여겼었지. 흥, 오늘 나도 네 놈을 노리갯감으로 다루겠다. 네 놈의 진기를 모두 빨아내
겠어."
매초풍은 창문 틈 사이로 방안을 엿보았다.
이미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여소교는 알몸인 악처후의 두 팔을 등뒤로 비틀어서 꽁꽁 묶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발목마저 움직일 수 없도록 묶어 두었다.
여소교는 악처후를 꼬집어 깨우더니 조소를 던졌다.
"기분이 어떤가요? 호호호……!"
"이 화냥년!"
악처후가 소리를 지르면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곧 중심을 잃고는 쓰러졌다.
"어서 이 포박을 풀지 못해! 말을 안 들으면 죽여 버릴테다!"
그러자 여소교는 언제 감춰 두었던 칼인지 꺼내 들고는 악처후 숨통에 갖다 대고 코웃음을
쳤다.
"누가 먼저 죽을 건지 내기할까요?"
악처후는 칼끝이 숨통에 차갑게 닿자 기겁하여 애걸을 했다.
"소저, 농담을 해도 분수가 있지. 칼은 아주 위험한 거라오."
여소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면 다행이야. 내가 물을 테니 그럼 대답을 해봐요. 그때 날 달콤한 말로 속여서 몸을
망쳐 놓고 무슨 생각을 했죠?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헌신짝처럼 차버리려고 했
었죠?"
"아니오. 난 그대를 줄곧 아내로 맞아들일 생각만 했소. 어서 이 줄을 풀어 주오. 그럼 내가
천천히 말해 줄테니……."
"좋아요. 풀어 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오늘도 날 속이고 있어요. 원래 난 오늘 당신
의 진심을 들어보려고 했어요. 당신이 진정 사내답고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가만히 있었
을 수도 있었어요."
여소교가 단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날 원망하지 말아요. 누가 그처럼 너저분하게 놀라고 하던가요?"
말을 마친 그녀는 단검을 내리찍었다.
"아악!"
순간 악처후의 입에서 괴성에 가까운 비명이 터졌다. 그녀가 순식간에 그의 남근을 도려 냈
던 것이다.
"으으……."
그녀는 아픔을 참지 못해 악을 쓰는 악처후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진기를 모두 빨아냈으니 그 물건은 이제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잘라냈으니 너무 억울해
하지 마세요. 그냥 달아 두면 또 무고한 여인들을 해칠 테니까……."
악처후가 인상을 쓰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지독한 년!"
"내가 지독한 게 아니라 네 놈이 독하다. 나보다 몇 배 더 지독해. 네 놈은 내 일생을 망쳐
놓았지 않느냐?"
악에 받친 여소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여소교의 절규에 몸서리를 쳤다. 그녀는 여소교가 악처후에게 온갖 애교를 마다하
지 않은 것은 진기를 빼앗은 후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았다.
'보아하니 저 년의 마음은 심한 번뇌에 시달리고 있구나. 흥, 난 그럴수록 행복하단 말이야.'
매초풍은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이때 갑자기 공중에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한 중년의 도
사가 뜨락으로 이미 내려서고 있었다. 흠칫 놀란 매초풍이 물었다.
"아니 구처기, 당신이 어떻게?"
구처기 역시 매초풍을 보고는 놀라는 기색이었다.
"매초풍이로군!"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전진교의 장법 가운데 노우말두(老牛沫頭)라는 초수를 쓰기 시작했다.
두 손바닥으로 동그랗게 원을 긋더니 한 갈래의 거대한 기류를 뿜어냈다. 기류는 곧장 매초
풍에게로 엄습해 왔다.
매초풍이 슬쩍 옆으로 몸을 날리며 비꼬았다.
"무공이 그새 늘었군!"
"철시, 악 공자님은 어찌했느냐?"
구처기는 악처후의 안부만을 물었다. 매초풍은 악처후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전진교 제자들
이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전진교 제자들은 모두 종 남산으로 돌아갔다 며칠 전 제자들이 악처후가 건강성으로 갔다는
제보를 해와 마옥은 구처기를 보내 소요공자 악처후를 보살피라고 당부했다.
건강성에 도착한 구처기는 악처후가 한 요염한 여인과 주루에서 술을 마신 뒤 함께 객줏집
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계집질을 하는구나, 하고 여기고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방금 전 악처후가 내지른 비명 소리를 듣고 황급히 달려
온 것이었다.
그런데 방문 앞에서 매초풍과 맞닥뜨리자 그녀가 악처후를 어쨌는가 싶어 다짜고짜 달려들
었던 것이다.
"궁금하면 알려 주지."
악처후를 아직 보지 못한 구처기는 매초풍이 가리키는 대로 창문을 박차고 방안으로 뛰어들
어갔다. 순간 그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방에는 바로 주루에서 보았던 그 요염한 여인이 서
있고 악처후는 알몸인 채 묶여 있었다. 더욱 기가 찬 것은 악처후가 피칠갑을 한 채 기절해
있는 것이었다.
매초풍이 밖에서 깔깔 웃어대며 빈정거렸다.
"너희 전진교에서 애지중지하는 놈의 꼴을 보거라. 왕중양의 얼굴에 똥칠을 해주었어!"
구처기가 매초풍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이 못된 년, 닥치지 못하겠느냐!"
구처기는 얼른 악처후의 혈도들을 정신없이 누르며 지혈시키고자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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