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 화산논검 풍류여마 매초풍 6 김용
제21장 여소교와 천산 마귀할멈의 죽음
매초풍이 방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여씨 문중의 천금 같은 따님께선 그간 안녕하셨겠지?"
매초풍은 여소교를 향해 가시가 박힌 말을 던졌다. 여소교도 뒤질세라 입꼬리를 묘하게 뒤
틀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하루 세 끼 산해진미에 멋진 사내들만 끼고 놀았으니 언니께 감사를 드려야겠어
요."
"내게 고마워할 게 뭐 있어. 난 그저 악처후가 흉물스러운 사내인 줄 알면서도 너를 그 놈
의 소요관에 맡긴 죄밖에는 없지. 아마 악처후란 놈은 너의 살맛을 실컷 보았을 거야. 사실
소녀공을 익히자면 더럽고 흉측한 사내들에게 욕을 보게 마련인데, 네게 사내들의 양기를
받아들이는 요령을 거꾸로 알려 주었거든. 그러니 너는 못난 사내 놈들의 노리갯감이 되었
을 뿐이지, 그 사내 놈들의 양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 거야."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며 여소교가 매초풍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네 년의 악독한 심보를 난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더니 매초풍에게 한 장을 날렸다. 휙 하고 돌풍이 한차례 일었다. 매초풍
은 뜻밖이라 황급히 손바닥을 펴 여소교의 장을 막았다. 여소교의 장으로부터 음유지력(陰
柔之力)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매초풍도 급히 기를 운행시켜 여소교와 맞섰다.
여소교는 입가에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점점 힘을 가했다. 매초풍의 전신으로 그녀의 음유
지력이 파고들었다.
'이 년이 이토록 무섭게 음유지력을 운행시키는 것을 보니 아마 그동안 대단한 스승을 모셨
던 모양이군. 괜히 건드렸다가 애를 먹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매초풍도 전력을 다해 기를 내보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장력을 시험하듯 오랫동안 맞섰다. 매초풍의 귀밑머리가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마에는 뜨거운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여소교는 매초풍의 변화에 신이 나서 음유지력을 계속 운행시켰다. 그녀는 찬 기운이 매초
풍의 뼛속까지 파고들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가 있었다.
여소교가 야멸스런 웃음을 날렸다.
"호호호, 매초풍. 네 년이 우리 집안을 망쳤으니 오늘 내가 너를 요절내 주마!"
예전의 여소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매초풍은 이만 빠드득 갈아댈 뿐 아무 소리도 하
지 못했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쓰며 독살스런 눈초리로 여소교를 노려보았다.
여소교가 다시 입꼬리를 옆으로 찢으며 말했다.
"나를 죽이고 싶겠지. 하지만 너도 알아야 해. 오늘의 여소교는 닭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하
던 그 여소교가 아니란 말씀이야!"
여소교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지. 천하에 이름난 여걸 철시가 이처럼 내 손에 잡혀 옴쭉달싹을
못하게 될 줄이야. 내가 괜히 신경을 썼었어. 철시 매초풍이라……, 이젠 허울좋은 이름뿐이
라구!"
어느덧 매초풍의 눈썹에도 새하얗게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백발로 변한 그녀의
두 눈에는 애처로운 빛까지 어렸다.
여소교가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고 웃었다.
"이젠 용서를 해달라는 건가? 아쉽군 그래. 여소교는 불쌍한 사람을 동정할 줄 모르기 때문
이지. 남이 불구덩이에 빠지든 늑대에게 물려가든 내겐 상관이 없어. 하지만 함께 지냈던 일
들을 생각해서 단번에 죽이지 않고 더 추운 맛을 보여주겠어!"
여소교는 매초풍의 얼굴을 음미하듯 찬찬히 뜯어보며 말을 이었다.
"진현풍도 알아보지 못할걸. 얼어죽은 늙은 귀신라고 외면하며 지나쳐 버릴 테니까."
여소교가 진현풍까지 들먹이며 비꼬자 매초풍의 가슴은 칼로 도려 내는 것만 같았다. 사실
매초풍은 진현풍 때문에 함께 도화도에서 도망쳐 나왔고,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살자고 다
짐했던 터였다. 사실 매초풍의 가슴에는 진현풍밖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진현풍은 여소교를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매초풍이 살기 어린 눈으로 여소교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당장 여소교를 죽여 버리지 못하
는 것이 한스러웠다.
여소교는 득의 양양한 기색으로 웃어대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진현풍이 나를 좋아해도 난 그를 좋아하지 않아. 난 네 년에게 복수하기 위해 진현풍을 유
혹했을 뿐인데 네 년은 그 술수에 걸려 들었지. 네 년이 진현풍을 떠나자 즉시 나도 그를
따돌려 버렸지. 솔직히 말해 난 진현풍이란 자의 내공이 필요했을 뿐이야. 그 외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사내라구. 난 그 화상을 보기만 하면 구역질이 나거든. 매초풍, 너의 사제 육승
풍이란 사람은 얼마나 영준하고 사내답게 생겼어. 넌 왜 그를 좋아하지 않고 하필이면 진현
풍 같은 못난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냔 말이야. 내가 도리어 수치스럽게 여겨진다구."
매초풍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던 땀방울도 어느덧 하얗게 얼어붙었다. 매초풍은 천 길이
되는 빙하 계곡으로 떨어진 사람처럼 온몸이 얼어붙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는 허
연 김이 피어 올랐다. 그녀는 졸음이 몰려와 도무지 두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졸음을 짜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가다듬으려니 온몸을 천만 개의 바늘이 마구 찔러대는
듯한 아픔이 전해졌다. 매초풍은 더는 지탱할 수 없어 스스로 눈을 감고 말았다.
여소교가 속삭이듯 말했다.
"매초풍, 잘 자거라. 깊은 잠에 들어야 아픔을 잊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매초풍은 천 근이나 되는 눈을 주체하려고 몸부림을 쳤다.
'눈을 감으면 안 된다. 난 여소교보다 훨씬 무공이 뛰어난 여인이 아니던가. 나는 기어이 여
소교를 눌러 놓고 더 무서운 고통을 안겨 줘야 한다.'
그녀는 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의식은 희미해져 갔다. 몸은 구름
위에 떠있는 것만 같았다.
여소교는 더욱 집요하게 음유지력을 가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불현듯 창 밖으로부터 웬 검은 물체가 빠르게 날아 들었다. 여소교가 놀라 허리를
재빨리 숙였다. 돌아보니 봉당에 떨어진 물체는 헌 신발이었다. 헌 신발이 여소교를 향해 느
닷없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여소교가 기의 진행을 다소 늦추었다.
그 순간 여소교에게 눌리고 있던 매초풍의 진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여소교는 매초풍의
손바닥으로부터 밀려오는 드센 열기를 느끼고는 황급히 다시 기를 운행시켰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매초풍은 양기를 체내에 많이 비축하고 있었기에 원래 여소교보다 내력이 강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매초풍의 진기가 무섭게 여소교의 체내로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여소교의 손바닥은 불덩어리로 달구어지는 것 같았다. 오장육부가 뒤집어지고 온
몸에 경련이 일었다. 여소교는 급히 손바닥을 떼려고 했으나 음과 양이 대립된 상태라 그럴
수가 없었다. 매초풍의 짓눌렸던 진기는 마치 터진 봇물처럼 밀려나와 여소교의 음유지력을
밀어냈다.
여소교의 전신은 불덩어리가 되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옷깃을 잡아뜯었다. 온몸은 벌써 불
에 달궈진 쇠처럼 벌갰다. 그녀의 두 눈이 팽창되더니 곧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매초풍이 정신을 수습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누가 자신을 구해 주었는지 매우
궁금했다. 매초풍의 시야로 웬 물체가 들어왔다. 유심히 살펴보니 웬 여인이 거의 알몸인 상
태로 가로로 누워 있는 것이었다. 바로 여소교였다. 매초풍이 거의 인사불성 상태에서 벌어
졌던 일이라 그녀는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매초풍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도대체 누가 나를 구해 주었을까……? 그리고 이 년은 왜 여기에 자빠져 있는 거지?'
매초풍은 여소교의 손목을 잡고 맥을 살폈다. 맥이 몹시 어지럽게 뛰고 있는 것을 보아 내
상을 심하게 입은 게 분명했다. 매초풍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신차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한참 후 겨우 눈을 뜬 여소교가 매초풍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온
몸으로 엄습하는 통증 때문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매초풍, 오늘 네 년은 운이 좋았어."
여소교가 이를 갈며 흘겨보았다. 매초풍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난 언제나 운이 좋은 편이야. 하지만 이번엔 어떤 연유로 살아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대
관절 누가 날 구해 주었는지 넌 알고 있느냐?"
그러자 여소교가 구석에 처박혀 있는 헌 신발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저 빌어먹을 신짝이 난데없이 날아오는 통에 놀라 정신을 팔지 않았던들 이 지경까지 되지
는 않았을 거야. 놀라 손을 늦추는 바람에 내가 도리어 내상을 입고 말았단 말이야!"
"호호호, 그거 정말 다행이었군. 신발이 날아온 덕분에 내 목숨이 살아났다니……. 헌 신짝
도 때에 따라서는 대감의 감투보다 더 소중하군!"
매초풍이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돌연 번개같이 장을 날려 여소교의 손에 있는
태음경맥을 끊어 놓았다. 다시 한 장을 더 내리쳐 그녀의 발에 있는 소음경맥마저 끊어 버
렸다.
매초풍이 냉랭한 눈길로 여소교를 쏘아보았다.
"반년 사이에 이처럼 사악한 무공을 익힌 것을 보면 언젠가 또 나를 해칠지도 모르지. 앞으
로 네 년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일찌감치 병신을 만들어 줘야겠다!"
매초풍이 구음백골조를 사용해 여소교의 한쪽 어깨뼈를 뜯어냈다.
"아악!"
여소교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곧추세웠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에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
왔다.
"매초풍 이 년, 이 마귀 같은 년아 어서 날 죽여 다오!"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지르는 여소교를 매초풍은 태연하게 바라 보았다. 매초풍이 고개를 내
저었다.
"너를 죽이진 않겠어. 너를 병신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기생집에 팔아 영영 강호에는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여소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매초풍, 천하에 너보다 더 악독한 년이 또 어디 있겠느냐?"
여소교의 눈빛이 강하게 흔들렸다. 순간 그녀는 벽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여소교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꾸역꾸역 뿜어졌다. 그녀의 몸 위로 피가 얼룩졌다.
"으음……."
그녀는 곧 절명하고 말았다.
매초풍은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여소교의 몸을 힘껏 찼다. 그것도
모자라 배 위로 올라가 마구 짓밟았다.
"안 돼. 너무 쉽게 죽어서는 안 돼!"
객줏집을 나온 매초풍은 거리로 나섰다.
벌써 자정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목탁 소리만이 외롭게 들려올 뿐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때 정면에서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말도 검고 마차를 모는 사내의 옷 역시 검은 색이었
다. 또한 마차의 지붕마저도 검은 색 일색이었다. 어둠 속에서 보니 마치 지옥에서나 나다닐
법한 마차 같았다. 그리고 마차를 모는 사내 역시 지옥의 사자를 떠올리게 했다.
매초풍은 귀신도 무서워하지 않는 대담한 여인이었지만 괴상한 마차 앞에서는 긴장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길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마차를 모는 사
람은 사내가 아니었다. 처음엔 어두워서 분간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 살
정도 먹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바른 자세로 채찍을 휘두르는 힘이 남다른 것으로 보아
무공을 익힌 여인 같았다.
"그대가 매초풍?"
마차를 몰던 여인이 불쑥 매초풍을 향해 소리쳤다. 마치 죽은 사람이 내는 목소리처럼 음산
하고 쓸쓸했다.
"그런데요……?"
매초풍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서 올라타라!"
마차가 매초풍 앞에 섰다. 정신을 차린 매초풍이 급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왜 당신의 마차에 타야 한다는 게요?"
"그건 그대가 바로 매초풍이기 때문이지."
불현 마차 위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손은 두 자 정도 되는 자색의 막대기로 변했다. 그
것은 별빛을 받아 차디찬 빛을 반사했다.
막대기를 본 매초풍은 흠칫했다.
"자정신침!"
매초풍이 다음 순간 설핏 미소를 보이며 얼른 마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휘장이 둘러 쳐
진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매우 어두웠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은 쏜살같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혹 천산 마귀할멈이란 분이 아니신가요?"
매초풍이 물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냉소 어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천산의 마귀할멈을 빼놓고 또 누가 자정신침을 쓰겠나? 매초풍, 그댄 과연 총명해. 엽청청
을 데리고 다녀 끝내는 나를 움직이게 했으니 말이야."
"이 제자가 그날 엽 소저는 찾았지만 사부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계책을 부렸던 겁니
다."
"청청은 지금 어디에 있나? 어서 내게로 데려와라."
"청청이는…… 철선선생 하종이란 자에게 잡혀갔습니다."
그녀는 그 일을 천산 마귀할멈에게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한참 후에 천산 마귀할멈이 무겁
게 입을 열었다.
"여혈의의 말을 들어 보면 그 하종이란 자는 청청이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모양이야. 청청
이가 하종의 손에 있다니 일단 마음은 놓이는군. 허나 자네를 제자로 받는 조건이 청청이를
데려오는 것이기에 자넨 아직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처지야. 그러니 어서 마차에서 내리게."
"이 제자는 진심으로 천산 마귀할멈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좋아요, 당장 엽 소저를
찾아 데려오겠습니다."
"청청이는 거렁뱅이 무리 속에 있고 게다가 탁운백 같은 고수들이 좌우에서 지키고 있어.
너의 무공으로 청청을 데려오다니 지나가던 소가 다 웃겠다."
매초풍은 두 눈을 꿈벅이더니 입을 열었다.
"전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엽 소저를 구해 오고야 말 겁니다."
매초풍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천산 마귀할멈이 괴상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
다.
"흐흐, 앙큼한 계집이로군. 아무튼 네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듣기 좋으니 괜찮다. 청청이를
데려오기 전에는 절대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으니 알아서 해라."
"아닙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시겠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마차에서 내리지 않을 겁니다."
"흥,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이군. 내가 그렇게 못하겠다는데 웬 고집이냐?"
천산 마귀할멈이 매초풍을 떠밀었다. 매초풍이 마차에서 떨어졌다. 마차는 그대로 앞으로 달
려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매초풍이 경공을 써 마차를 따라잡으려고 했다.
"제발 제자로 받아주세요!"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은 묵묵부답이었다.
매초풍이 훌쩍 몸을 날려 마차 위로 다시 올랐다. 하지만 거센 힘에 밀려 그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몇 번이고 다시 시도를 했지만 그럴 때마다 천산 마귀할멈이 장을 날
려 그녀를 마차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마차는 쏜살같이 달리기만 했다.
"매초풍, 네가 끝까지 쫓아와도 소용없다!"
매초풍은 포기하지 않고 마차를 쫓았다. 마차는 어느새 건강성을 두어 바퀴째 돌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성문이 열리자 검은 색의 마차는 성안으로 들어갔다. 매초풍은 마차를 놓칠까 봐 열
심히 뒤쫓았다. 매초풍은 몹시 지쳐 있었다. 마차를 끄는 말 역시 지쳤는지 더운 김을 뿜어
내고 있었다. 말의 온몸이 땀에 젖어 털에서 윤기가 흐르는 듯했다.
말을 몰던 여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러다간 우리 오룡말도 탈이 나겠네."
그 말을 천산 마귀할멈이 들은 모양이었다.
"알았다."
천산 마귀할멈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매초풍 앞에 섰다.
"철시야, 네가 나를 잡으면 제자로 받아주겠다."
앞을 향해 손을 내젓던 천산 마귀할멈은 마치 연기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자신
의 경공이 천산 마귀할멈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그녀를 쫓았다.
겨우 매초풍이 따라가면 천산 마귀할멈은 다시 기기묘묘한 경공을 써 멀리 달아났다.
두 사람은 산을 넘으며 꽤 먼 곳까지 날아왔다. 매초붕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나도 이젠 지쳤어.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나를 잡을 수 있을거야."
약이 바싹 오른 매초풍이 몸을 날렸다. 천산 마귀할멈은 산길을 지나 큰길이 보이는 곳까지
날아갔다. 그녀는 매초풍을 한번 돌아보고는 그 검은 색 마차 위에 올라타더니 달아났다.
천둥이 울고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매초풍은 더 이상 그녀를 쫓을 수가 없었다. 마차는 아까보다 천천히 달리고 있었지만 도무
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비까지 내리는 탓에 매초풍은 온몸이 무거웠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천산 마귀할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쳤으면 이젠 쫓아올 생각을 말라구!"
매초풍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손으로 훔치며 소리쳤다.
"끝까지 쫓아갈 거예요!"
악에 받쳐 소리는 질렀으나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또한 빗소리에 묻혀 그녀의 목소리
는 천산 마귀할멈에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입을 앙다문 매초풍은 힘겹게 걸어갔다. 한걸음 뗄 때마다 온 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검은 색 마차는 다시 건강성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작은 누각 앞에 멈춰 섰다.
강남에 내리는 비는 변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느새 비가 멎었고 구름이 흩어지면서 하늘
이 호수처럼 맑게 개었다.
잠시 후 뒤쫓아온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이 마차에서 내려 누각 안으로 들어가고 마차는
누각 뒤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매초풍은 얼른 누각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혀 버렸다.
매초풍은 화가 나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질렀다.
"어서 문을 열어요. 난 포기하지 않고 쫓아왔어요!"
이층 창문이 열리더니 천산 마귀할멈이 고개를 내밀었다.
"난 여기 있다. 네가 여기까지 뛰어오른다면 날 잡은 셈 치겠다!"
매초풍은 그만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몇 번이고 경공을 부려 뛰어오
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매초풍, 너의 경공이 그 정도였느냐?"
천산 마귀할멈이 놀려댔다. 천산 마귀할멈이 보란듯이 이층에서 몸을 날려 사뿐히 매초풍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가 그녀의 정수리를 발끝으로 가볍게 차고는 다시 이층으로 올라갔
다. 놀라운 경공이었다.
"난 언제까지나 사부님을 기다릴 겁니다!"
매초풍이 이젠 인내력으로 승부를 걸려고 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피곤하다며 하품을 해대고
는 사라졌다. 매초풍 역시 피곤하여 벽에 기댄 채 졸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물벼락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매초풍이 이층을 올려다보았다. 웬 사내 차림을 한 계집애가
깔깔 웃으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쩌나. 아래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요."
매초풍이 눈을 흘기며 막 시선을 돌리려는데 다시 물벼락이 쏟아졌다. 매초풍은 겨우 말라
가던 옷과 몸을 또 적시게 되자 화가 났다.
이때 이층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아래에 손님이 있는데 왜 자꾸 실수를 하는 거야?"
다른 계집애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물을 뿌린 계집애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귀할멈이 급히 목욕물을 바꾸라고 해서 서두르는 바람에 그만……."
그 계집애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매초풍에게 한껏 능청을 떨어댔다.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마귀할멈의 목욕물엔 꽃가루를 넣었기에 향기로울 거예요."
두 계집애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매초풍은 그때서야 자기 몸에서 향긋한 꽃냄새가 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럴수록 부아가 더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참을성을 발휘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자신을 떠보려는 것이라 믿고는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정말 향기롭고 시원한 물이구나. 있으면 좀더 뿌려 다오!"
그러자 두 계집애들은 당황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없어요. 내일 다시 온다면 그때 뿌려 줄게요."
그들이 사라지자 천산 마귀할멈이 창가로 나타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목욕을 했더니 피로가 확 풀리는군. 아, 좋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셔야 해요. 저는 죽어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작정이니까요."
매초풍이 소리치자 천산 마귀할멈이 웃었다.
"그래? 넌 그런데 지치지도 않느냐? 하기야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난 진수성찬을 받고
목욕까지 했으니 이제 한숨 자야겠다."
그 말에 매초풍은 몹시 시장기를 느꼈다. 그러나 시치미를 떼고는 말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어서 쉬세요."
"정말 마음씨 하나는 곱구나. 허나 참 안됐다. 난 푹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는데 넌 선잠을
자야 하다니 참……."
천산 마귀할멈은 혀를 차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매초풍은 이제 창문가로 얼씬거리는 사람이 없자 마음놓고 잠을 청했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고 땅거미가 기어들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긴장이 풀려 달
게 잠을 자고 있었다 이때 이층 창문이 살짝 열리더니 시녀가 매초풍을 향해 다시 물을 끼
얹었다.
"이게 뭐야!"
이번에는 지린내가 물씬 풍겨 매초풍은 죽을 맛이었다.
"어머, 미안해요. 언니들이 미운 강아지가 마당에서 어슬렁거린다고 오줌을 모아 두었다가
끼얹으라고 해서 그만……."
한 시녀가 변명을 했다. 오줌 벼락을 맞은 매초풍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모
습을 내려다보던 시녀가 이기죽거렸다.
"오해하지 마시고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매초풍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번죽 좋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정말 마음씨가 곱군요. 우리가 잘못했어요. 제가 혼이 나더라도 내려가 문을 열게
할 테니 올라와 목욕도 좀 하시고 쉬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두 시녀가 모습을 보였다. 매초풍에게 두 시녀가 예를 갖추었다.
"아가씨, 어서 드시지요."
매초풍은 매우 기뻤다. 천산 마귀할멈이 자기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믿은 그녀는 날아갈 듯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거문고와 바둑판 그리고 고서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져 있어 명문 대가의
서재를 연상하게 했다. '설매'라고 부르는 시녀가 매초풍을 한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
에는 목욕물을 받아 놓은 통이 세 개가 있었다. 두 개에는 찬물과 더운물이 담겨져 있었고
한 커다란 통에는 적당하게 데워진 물이 반쯤 차 있었다.
"아가씨, 어서 목욕을 하시지요."
설매가 권하자 매초풍이 새삼 낮을 붉혔다. 자신의 옷이 너무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얼른 더러운 옷을 벗고는 통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설매가 매초풍이 벗어 놓은 옷을
들고 나갔다.
매초풍은 기분좋게 목욕을 즐겼다. 그런데 갑자기 등쪽에 있던 벽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목욕통이 밖으로 끌려 나갔다. 깜짝 놀란 매초풍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욕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저잣거리로 나와 있었다.
알몸을 감추려고 애를 쓰는 매초풍을 사람들이 구경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
작했다. 매초풍은 어쩔 줄을 몰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더욱 낭패스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목욕통에 구멍이 나서 그곳으로 점점 물이 빠
지고 있었다. 곧 알몸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이때 목욕통이 와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
각이 나버렸다. 졸지에 매초풍은 알몸으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되었다.
"미인인걸!"
"조심하라구. 어쩌면 미친 계집인지도 모르니까."
"그렇겠지. 그러니 알몸으로 거리 한복판에서 목욕을 하지."
눈치를 보던 매초풍이 알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뒤쫓
았다. 매초풍은 허둥지둥 누각 앞까지 와 이층 창문으로 뛰어올랐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사
색이 되어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 입니까요? 설해와 설죽이 아가씨를 욕실로 안내하지 않았던가요?"
오줌 벼락을 뿌렸던 시녀가 짐짓 놀라며 말했다.
"바로 그 계집년들이 꾸민 수작이야. 이런 망신을 당했으니 내 그 년들을 찢어 죽이겠어!"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지만 노여움을 푸세요. 그 애들이 언니처럼 믿고 장난을 했겠지요.
여기도 목욕통이 있으니 마음놓고 목욕을 마저 하세요. 그 애들이 더는 장난을 치지 못하도
록 제가 단속을 할 테니 걱정 마시고요."
매초풍은 다시 그녀를 따라 이층에 있는 욕실로 갔다.
"네 이름은 뭐냐?"
매초풍이 물었다.
"저는 설란이라고 해요. 마귀할멈은 원래 몸종을 넷을 두었는데 설매, 설죽, 설란, 설국이라
고 하죠. 그중에서 설국이 가장 총애를 받고 있는데 지금은 마귀할멈의 머리를 벗어 드리고
있어요."
설란이 물에 새하얀 가루를 풀었다.
"이건 화정(花精)이랍니다. 백 가지 꽃에서 수집한 화분으로 정성들여 만든 것인데 목욕을
하면 기분도 좋고 살결도 고와진대요. 어서 통 안으로 드시지요."
과연 향긋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매초풍은 물 속에 잠겨 기분을 풀었다. 매초풍아 목
욕을 하고 나자 비로소 입을 옷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러워진 옷들을 설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설란아!"
매초풍이 소리쳤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또
천산 마귀할멈의 속임수에 걸려든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이때 누군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설란, 미안하지만 입을 만한 옷 좀 갖다 줘요."
매초풍은 설란인 줄 알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면서 들어선 것은 표범같이 우락부
락한 사내였다. 그 뒤로 흉칙하게 생긴 사내들이 더 들어왔다. 매초풍이 앞가슴을 가린 채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누구세요!"
사내들은 징그럽게 웃으며 매초풍의 알몸을 감상했다.
"우리와 함께 재미를 보는 게 어때?"
사내가 수작을 걸어 왔다.
"닥쳐라!"
매초풍이 눈초리를 사납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히죽 웃으며 매초풍의 얼굴을 만지려고
손을 뻗었다.
"무례한 놈!"
매초풍이 사내의 손을 내리쳤다. 그러자 다른 사내가 불쑥 매초풍의 손을 잡으며 낄낄 웃었
다.
"부드럽구나. 어디 젖통도 좀 만져 보자."
사내가 덥석 매초풍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매초풍은 분하고 억울해서 고함을 질렀다.
"설란, 네 년이 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장난을 치느냐?"
그러자 앞장을 서서 들어왔던 사내가 말을 받았다.
"설란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괴짜지. 아까 물에 화정을 넣은 게 아니라 간지러움을 타는
약을 넣었거든……."
매초풍은 문득 온몸이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것을 의식하자 점점 더 간지럽기 시작했다. 매
초풍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온몸으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착각에 시달렸다. 내력을 부릴
만한 경황이 없었다.
이때를 이용해 사내들이 달려들어 매초풍을 마음껏 희롱했다. 사내들은 매초풍의 전신을 입
으로 빨아대고 손으로 주물러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초풍은 눈을 꼭 감고 눈물을 참았다. 사내들은 급기야 발정난 수캐처럼 씩씩거리며 욕정
을 발산하려고 했다. 매초풍은 포기한 채 사내들에게 몸을 내맡겼다. 한 사내가 막 매초풍의
다리를 벌리려고 할 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설란이 들어왔다.
"어서 물러나지 못할까!"
설란이 크게 꾸짖자 사내들이 쩔쩔매며 물러갔다. 설란이 매초풍을 토닥여 주었다.
"됐으니 그만 울어요. 여인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씩 겪는 일이 아니겠어요!"
설란이 얼른 완두 알만한 빨간색의 환약을 매초풍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매초풍은 간
지러움을 씻은 듯이 벗어 던지고 예전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매초풍이 기다렸다는 듯이 설란의 뒷덜미에 있는 대추혈을 잡아 쥐었다. 그리고 무섭게 그
녀를 노려보았다.
"죽일 년, 네 년마저 나를 희롱할 셈이더냐?"
그러나 설란은 태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종알거렸다.
"놓지 못해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래요?"
순간 천산 마귀할멈이 떠올랐다. 매초풍은 할 수 없이 설란을 풀어 주었다.
설란은 매초풍을 데리고 외진 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여인들의 옷가지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매초풍은 자색 저고리와 붉은
색 치마를 골라 입고 설란의 뒤를 따라 넓은 내실로 갔다.
천산 마귀할멈은 검은 색 옷을 걸치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얼굴은 여전히 검은 천으로 가
려진 상태였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잠들어 있었다.
매초풍이 절을 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잠든 고양이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매초풍, 내가 왜 자네를 희롱했는지 알겠는가?"
"가르쳐 주십시오."
"중원 땅에 돌아온 후부터 내 무공을 모두 전수받을 만한 제자를 물색해 왔었네. 허나 아직
내 마음에 드는 자를 만나지 못했지."
"여혈의가 스승님의 제자가 아닌가요? 그리고 또 탈명한추 변청교의 친동생인 변홍의 역시
스승님의 제자가 되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 여혈의란 놈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목적은 여혈의를 이용
해 묘상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거든. 이미 여혈의는 쫓겨났어.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혈의를
도와 자네를 죽여 버렸을지도 모르지."
매초풍은 소름이 돋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천산 마귀할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변흥의란 놈을 놓고 말하자면 그 놈이 나와 여혈의가 가깝게 지내는 것을 보았으니
으레 죽여 입을 막아야겠지만 탈명한추 변청교의 친동생이라고 하기에 생각을 달리했지. 앞
으로 그 놈을 인질로 삼아 변청교를 다스릴 생각이야."
그녀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볼멘소리를 냈다.
"헌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글쎄 변홍의란 놈이 사라졌단 말이야. 사람을 시켜 수소문해
보았지만 전혀 행방을 알아낼 수가 없어."
매초풍은 변홍의가 무엇 때문에 천산 마귀할멈에게 소용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녀가 이미 그를 죽였으니 어쨌든 낭패였다. 매초풍은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계속 고시랑거렸다.
"매초풍, 넌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천하의 사내란 다 믿을 게 못 된다구. 결국엔 후회를 하
게 되는 게 사내들과의 인연이지."
"전 일찍부터 천하의 사내들을 짐승으로 보아 왔으며 원수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이 묘상이란 사내의 배신 때문에 천하의 모든 사내들을 미워하고 있
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내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또 입을
열었다.
"내 슬하에 있는 계집들 모두가 사내들에게 피해를 보았지. 하지만 내 밑으로 온 후로는 자
기 손으로 그 사내들을 잡아죽일 수가 있게 되었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모두가 약골이라
큰 그릇이 될 수 없다는 거지. 말하자면 내 제자가 될 만한 계집이 없다는 거야."
그 말에 매초풍이 다시 절을 올렸다.
"제자가 사부님의 믿음을 받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행운이 아닌가 하옵니다."
"아니다. 행운이 아니라 자네의 뛰어난 체력과 총명한 머리 때문이지. 솔직히 말해 사실 난
자네를 제자로 맞이하려고 했으면서도 다른 한 계집을 마음속에 넣어 두고 있었지. 나중에
자네를 선택하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 계집이 누구이온지요?"
"바로 여소교지."
매초풍은 매우 놀랐다. 여소교가 그동안 어디서 그 엄청난 무공을 익혔는가 의문이었는데
이제 그 실마리가 풀리는 듯싶었다.
"허나 제가 벌써 여소교를……."
매초풍은 자기도 모르게 실토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천산 마귀할멈이 정색하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지난 밤에 자네가 그 애를 죽였지. 사실 두 사람은 성품도 비슷하고 무공
도 막상 막하지. 그래서 난 누구를 제자로 받아들여야 할지 마음속으로 고심을 많이 했어.
그런데 자네들은 또 서로가 앙숙이라 결국 이기는 쪽을 선택하기로 결정을 했었다네."
매초풍은 지난 밤의 일을 문득 돌이켜 보며 수치감에 시달렸다. 헌 신발만 아니었다면 자신
은 분명 얼어죽고 말았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말했다.
"죽기 살기로 나를 쫓게 했던 것은 너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늘 여
러 번 너를 희롱한 것은 사내들에 대한 증오심을 강하게 심어 주기 위함이었어."
"사부님의 뜻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좋다, 그럼 이제 일어서라. 하루빨리 자네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고 싶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건강성엔 무공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과 괜히 마찰을 일으키지 말고 호젓한
곳으로 가 무공을 닦자."
"헌데 엽 소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은 하종과 함께 있다니 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그러나 청청이는 고생을 좀 해야 돼.
그래야 내 진심을 알게 될걸세. 사내 놈들의 허위와 악랄함을 깨달은 다음에 데리고 올 생
각이야."
천산 마귀할멈의 일행은 마차 네 대에 나눠 타고 길을 떠났다. 천산 마귀할멈은 천산 마궁
으로 돌아가 수련을 하려고 했으나 여인들의 마음이란 죽 끓듯 해서 남행하기로 결정했다.
매초풍은 신이 났다. 그녀는 충심으로 천산 마귀할멈을 따랐다. 천산 마귀할멈 역시 내심 흡
족하여 미소를 연발했다. 천산 마귀할멈은 마차 안에서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무학의 요
결심법(要訣心法)을 구술로 전수하고 매초풍에게 암송하도록 했다.
매초풍은 요결심법을 음미했다. 강호의 무공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유독 기를 운행시키
는 법문만은 소녀공과 흡사했다. 단지 천산 마귀할멈의 심법에서는 건장한 사내들을 빌려
무공을 수련한다고 떠드는 대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매초풍은 어느 정도 무공으로 단련된 몸이어서 천산 마귀할멈의 무공을 며칠 사이에 대략
전수받을 수가 있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그런 매초풍을 보고 다시 한 번 만족해 했다.
매초풍이 물었다.
"한 가지 터득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가르쳐 주십시오. 심법에서는 건장한 사내의 양기로
공력을 돕는다고 했는데 대관절 어떻게 해야 사내들의 양기를 얻을 수 있죠?"
"자네와 여소교가 짧은 기간 동안 소녀공을 익힌 것은 대단한 일이야. 허나 더럽고 추잡한
사내들에게 한껏 조롱을 당하고 자기 몸을 더럽히면서 익혔으니 애석하지. 자넨 진현풍에게
버림을 받고 사내들을 저주해 온 여인이 아닌가? 헌데 왜 그 따위 너절한 방법으로 무공을
익으려 드느냔 말이다. 정말 수치야!"
"죄송합니다. 어서 고명한 무공을 몸에 익힐 생각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만약
일찍 사부님을 만났더라면 그런 수치는 당하지 않았을텐데……."
그러면서 매초풍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마귀할멈이 묘상이란 사내와 한동안 함께 살았다고 하지만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남녀간의
달콤한 맛을 진정으로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젊고 영준한 사내들만 골라서 동
침을 했거든. 내 음기도 보하고 사내의 맛도 보았으니 그 짜릿한 쾌감을 어찌 할멈이 알 수
있으랴?'
천산 마귀할멈이 제 흥에 겨워 중얼거렸다.
"진작 자네와 같은 제자를 만났더라면 얼빠진 사내들을 더 많이 혼내 줄 수 있었을 텐데 정
말 아쉬워. 아무튼 사내가 눈에 띄면 가차없이 죽여 버릴 것이다!"
그 말에 매초풍은 울상이 되었다. 이러다가 사내 맛을 더는 볼 수 없게 되는 게 아닌가 하
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산 마귀할멈의 뜻을 거역할 수 없기에 그녀는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지요. 앞으로 사내들이 저를 건드리면 아니 쳐다보기만 해도 당장 요절을 내놓고 말
것입니다."
"장하다. 그래야지!"
천산 마귀할멈이 좋아서 낄낄 웃자 매초풍이 눈치를 살피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직도 알려 주시지 않으셨어요. 대관절 사내들을 빌려 어떻게 무공을 닦는다는 말
씀입니까?"
마차는 밀보리밭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문발을 헤치고 밖을 내다보았
다. 농부들이 밀보리밭에서 부지런히 김을 매고 있었다.
"설란!"
그러자 설란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마차에서 훌쩍 몸을 날리더니 이쪽으로 날아왔다.
"무슨 분부가 있으신지요?"
"쓸 만한 놈으로 하나 잡아오도록 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설란이 묘하게 웃었다.
"어디 한두 번 해온 일입니까요."
"내가 너무 설란을 얕잡아 보았군. 정말 부러운 경공술을 갖고 있군요."
매초풍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러자 천산 마귀할멈이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내 수하에는 무능한 자란 없어.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는 일도 별로 없지. 몇 년 전 천산
기슭에서 무림의 고수들이 한패가 되어 나를 공격했던 일이 있었지. 그때도 설란과 설매 그
리고 설죽, 설국이 나섰지. 또한 아련이란 아이가 크게 활약을 해 쉽게 물리친 일이 있었
어."
아련이란 여인은 바로 취붕객점에서 탈명한추 변청교와 싸웠던 여인이라는 것을 매초풍은
알고 있었다.
"설란의 말을 들으니 사부님은 설국을 가장 총애한다고 하던데 그녀가 말하는 걸 보지를 못
했어요. 꽤나 과묵한 여인인가 보죠?"
"그 앤 벙어리야."
뜻밖의 사실이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말을 계속했다.
"그 앤 날 때부터 그런 게 아니라 도중에 일을 당했지. 원래 그 앤 천산 기슭에 있는 왕부
에 시녀로 있었는데 어느 날 손님에게 차를 따르다가 손님의 옷을 더럽혔어. 그 벌로 왕예
나으리가 시뻘겋게 달군 인두를 그 아이 목에 넣고……."
"지독하군……."
소름이 확 돋았다.
"설국은 왕부에서 쫓겨났다가 마침 내 눈에 띄었지. 그 애가 겪은 고초를 이웃들에게 들은
난 이가 갈리더군. 난 그 애를 데리고 왕부로 쳐들어가 열여섯 명의 시종들을 모두 죽여 버
리고 그 놈을 잡아 설국에게 똑같이 하라고 시켰지."
천산 마귀할멈의 입가에는 설핏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오히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즐거
워하는 것 같았다.
이때 밀보리밭이 있는 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났다. 설란이 농부 하나를 옆구리에 차고
경공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몇몇 농부들이 호미를 치켜들고 쫓아왔다. 그러나 농부
들은 점점 뒤처졌다.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설란은 자기보다 덩치가 큰 농부를 옆구리에 끼고는 달려와
마차에 뛰어올랐다. 농부를 내려놓으며 설란이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대단한 장사였어요. 혈도를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어요."
농부는 두 눈만 멀뚱히 뜬 채 누워 있었는데 손과 발이 투박한 것이 힘깨나 쓸 것 같았다.
"좋아, 젊고 소처럼 튼튼한 놈이로군. 아무튼 설란인 사람을 볼 줄 알거든."
천산 마귀할멈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설란이 우쭐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농부를 잡
아 일으켜 가부좌를 틀고 앉게 했다. 농부는 눈이 퉁방울만해져 세 여인을 번길아 보며 와
들와들 떨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괴춤에서 대나무로 만든 대롱을 꺼내며 매초풍을 의미심장
한 눈빛으로 건너다보았다.
"그럼 우리 가문의 심법을 보여주지. 진기가 독맥(督脈)에 모여지기를 기다려 그걸 왼팔에
운행시키면서 손바닥에 있는 노궁혈을 통해서 사내의 독맥 명문혈에 불어넣어야 하네."
천산 마귀할멈은 자세히 설명을 하면서 왼쪽 손바닥을 농부의 뒤허리에 있는 명문혈에 갖다
댔다. 순간 농부의 두 눈이 토끼눈처럼 새빨갛게 충혈되고 얼굴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천산
마귀할멈의 진기가 사내의 체내에 깊이 들어간 것이었다.
"이젠 대롱을 놈의 머리에 있는 백회혈에 꽂아야 해."
천산 마귀할멈이 대롱을 번쩍 들더니 농부의 정수리에 쿡 박아 넣었다. 대롱을 통해 시뻘건
뇌수가 솟구쳤다.
매초풍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귀할멈의 심법이란 게 내 구음백골조와 별반 차이가 없구나. 손가락만 살짝 튕겨도 될
걸 가지고 대나무 대롱으로 힘을 들일 건 뭐람!'
천산 마귀할멈의 얼굴을 가렸던 복면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그녀는 복면을 조
금 들고 빨대를 입에 물고는 힘껏 빨기 시작했다. 순간 농부가 전신을 마구 떨며 사지를 버
둥거렸다. 매초풍은 그 광경이 놀랍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토할 것만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천산 마귀할멈은 농부의 뇌수를 마음껏 빨아먹고 나서 복면을 다시 내리고는 앉은 자세로
두 눈을 감고 수양을 하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이 농부의 뇌수를 빨아먹던 모습을 생각하며 새삼 구역감에 시달렸
다. 그녀는 사람의 뇌수를 먹는 사람을 사부로 모셨으니 자신도 그렇게 해야만 될 것 같아
진저리를 쳤다.
잠시 후 천산 마귀할멈이 조용히 눈을 떴다. 힘이 새롭게 되살아난 듯했다.
"뇌수를 먹은 뒤엔 즉시 손을 써서 사내의 성기까지 복용해야 진정으로 보신이 되는 거다!"
천산 따귀할멈이 설란을 불렀다.
"어서!"
그러자 설란이 농부를 눕히더니 바지를 벗겼다. 사내의 성기가 드러났다. 설란이 단검으로
사내의 성기를 도려 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것을 받아쥔 천산 마귀할멈이 말했다.
"양기를 돕는 데는 천하 최고지!"
천산 마귀할멈이 사내의 성기를 어적어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
로 치를 떨었다.
'이건 생사람을 잡아먹는 꼴이 아닌가. 그래서 강호에서 이 여인을 마귀할멈이라 부르는 모
양이군. 실로 나보단 훨씬 지독한 여인이야!'
입 주변을 훔치며 천산 마귀할멈이 매초풍에게 말했다.
"왜 낯색이 그 모양이지? 나 역시 어머니가 이 무공을 닦는 걸 처음 보았을 땐 혼비백산하
여 도망을 쳤었지……."
설란이 한마디 거들었다.
"설국인 혼절까지 했었죠. 그 앤 사람을 죽이면 죽였지, 차마 그런 장면은 볼 수 없다며 발
버둥을 쳤었어요. 하지만 매 소저는 약간 얼굴만 찌푸렸을 뿐이니 정말 담이 큰 여인이에
요."
매초풍이 어색하게 웃었다.
"뭘요……?"
순간 매초풍은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울컥 토하고 말았다. 천산 마귀할멈이 배꼽을 싸쥐고
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매초풍은 담은 크지만 속은 좋지 않은가 보지?"
매초풍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사람의 뇌수를 빨아마시고 성기까지 먹어야 하는 무공이라면
당장 집어치우고 싶었다.
네 대의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산속에 위치한 절 하나가 보였다. 일행은 그 절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이들을 지켜보던 비
구니 하나가 빠꼼히 내다보더니 절 안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조금 후 세 명의 중이 나왔다.
이번엔 사내 중들이었다. 그들은 아리따운 여인들이 온 것을 보고는 실눈을 만들었다.
눈웃음을 치는 중들을 보자 천산 마귀할멈은 심히 불쾌했다. 그녀는 모든 중들을 잡아 묶으
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십여 명의 시녀와 여종들이 절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절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돼버렸다.
스물여섯 명이나 되는 중들이 결박을 당한 채 모두 뜨락에 모였다. 네 명의 늙은 중을 제외
하고는 한결같이 피둥피둥 살이 찐 놈들이라 이상하게 여겨졌다. 신문을 해보니 늙은 중들
을 제외하고는 모두 밥이나 얻어먹고 계집질이나 일삼는 자들이었다.
"명색이 부처님을 모시는 중이란 놈들이 계집질이나 하고 중생들의 등이나 처먹어. 내 오늘
너희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다!"
그러자 목숨만 살려 달라고 모두 빌기 시작했다. 설매가 다가와 천산 마귀할멈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천산 마귀할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늙은 중 넷을 시켜 밥을 짓게 하고 나머
지는 모두 한곳에 가두어 버렸다.
천산 마귀할멈은 절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절에는 재물과 양초 그리고 양식이 풍부했
다. 일행이 반년을 먹고도 남을 만한 양이었다.
선방에 들어가 좌정하자 매초풍이 말했다.
"사부님, 저 구린내 나는 중놈들을 어서 죽여 버립시다."
천산 마귀할멈은 그저 웃기만 했다.
저녁을 먹은 후 천산 마귀할멈이 매초풍을 데리고 뜨락으로 나갔다.
"지금부터 자네에게 우리 가문의 무공을 가르쳐 주지. 우리 가문의 무공을 익히자면 우선
내공부터 닦아야 해, 자넨 내공을 어느 정도 익혔으니 조금만 더 공력을 들이면 열흘 안에
우리 가문의 내공법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을 걸세."
매초풍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친자식처럼 대해 주시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우리 가문의 내공을 익히는 데 중요한 것은 역시 사내들의 힘을 빌려 오는 거지."
천산 마귀할멈이 손뼉을 치자 설죽이 뚱뚱한 중 하나를 끌고 왔다. 매초풍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저더러 저 놈의 뇌수를 마시고 성기까지……."
매초풍이 더듬거리자 천산 마귀할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게는 저 놈이 한 마리의 돼지로 보이고 있다. 그러니 너도 맛있게 저 놈을 먹
어야 해!"
중이 발악을 해댔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년들아! 이 어르신을 건드리기만 해봐라!"
설죽의 손이 원을 그렸다. 순간 중은 혈도를 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사
나운 눈길로 매초풍을 쏘아보았다.
"똑똑히 봤지. 내게 감히 대드는 놈을 어디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느냐?"
"알겠어요. 이 중놈은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의 돼지예요. 당장 이 놈을 잡아먹겠어요."
큰소리를 친 매초풍이 중 앞으로 다가갔다.
'이왕 마귀할멈의 제자로 들어온 이상 사람의 고기를 먹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를 가만두
지 않을 게 분명하다. 내키지는 않지만 무공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매초풍이 정신을 가다듬고는 진기를 중의 독맥에 불어넣고는 대나무 대롱을 중의 정수리에
꽂았다. 그리고 뇌수를 빨아마셨다. 당장 토할 것 같은 역겨운 냄새와 맛이 그녀를 괴롭혔
다.
설죽이 어느새 중의 성기를 잘라 매초풍에게 건네주었다. 매초풍은 심호흡을 하고 나서 두
눈을 딱 감고 그것을 씹어 삼켰다. 그 다음 천산 마귀할멈이 가르쳐 준 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식경이 지나 두 눈을 떠보니 과연 전신에 진기가 뻗치고 정신이 명징해졌다. 매초풍은 스
스로 대견스러운 생각이 들어 천산 마귀할멈에게 절을 했다.
"참으로 신비스런 수련이었습니다. 앞으로 사부님의 가르침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따르겠습
니다."
천산 마귀할멈은 아주 흐뭇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 고기맛을 보면 절에 빈대가 남지 않는다고 이 년이 사람 고기 맛을 보았으니 앞으로
기를 쓰고 찾을 것이다!'
그 후 열흘 동안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의 가르침을 받으며 부지런히 마공을 연마했다. 밥
을 짓는 늙은 중 넷을 제외한 나머지 중들은 모두 매초풍에게 뇌수와 성기를 빼앗겨야 했
다.
열흘 사이에 매초풍의 무공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젠 천산 마귀할멈과도 겨룰 만한
실력이 되었던 것이다. 열흘 후 천산 마귀할멈은 매초풍에게 몇 가지 특이한 초수를 전수해
주었다.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매초풍은 감히 사내들과 재미를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마공을 어지간히 익히고 보니 자연 음탕한 생각이 몸 안에서 꿈틀거렸다. 원래 그녀는 소녀
공을 익힌 몸이라 보통의 여인들보다 음욕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초풍은 끝내 음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슬그머니 절을 벗어났다.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한 촌락이 있었다.
매초풍은 아낙으로 가장한 채 그곳으로 들어가 세 명의 시골 사내들과 한껏 정을 통했다.
그녀는 온종일 세 사내와 번갈아 살을 섞으며 욕정을 불태웠다. 그런 다음 그들을 모두 죽
여 버렸다.
매초풍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절로 돌아왔다.
천산 마귀할멈이 쌀쌀한 눈길로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설매, 설란, 설죽, 설국도 뒤에 서서
매초풍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주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매초풍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이윽고 천산 마귀할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년, 어찌하여 사내들과 살을 섞었느냐?"
순간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제가 어찌……."
"뭣이,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천산 마귀할멈이 고함을 치자 아련이 걸어 나왔다. 허리에는 검은 색 넓은 띠를 두르고 있
었다. 그 띠는 천산 마귀할멈의 수하를 뜻하는 집법사자의 표시였다. 매초풍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왜냐하면 아련이 끌고 나오는 시체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맞아죽은 바로 그 사내들이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물었다.
"너의 최심장에 죽었는지 확인하려면 놈들의 뱃가죽을 살펴봐야 하겠지?"
매초풍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그만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최심장을 사용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자 천산 마귀할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련아, 우리 가문의 가법에 따르면 어찌해야 하느냐?"
아련이 또렷한 어조로 대답했다.
"가법 제삼조에 의하면, 사사로이 외간 사내와 간통한 여인은 가차없이 죽여야 합니다."
매초풍은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사부님, 저는 사부님의 뒤를 이를 제자가 아니옵니까? 이 제자가 멋모르고 죄를 범한 것이
니 부디 이 한 번만……."
매초풍이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을 했다.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이 코방귀를 날렸다.
"닥쳐라. 난 사내들과 어울리는 계집이 가장 밉다. 아련아, 어서 가법대로 저 년을 처단해
라!"
아련이 잠시 망설이는 기색으로 주춤거리더니 천산 마귀할멈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매초풍은 수제자입니다. 만약 저 년을 죽여 버린다면 사부님의 신묘한 무공을 이를 사람이
없어집니다."
설란도 한마디했다.
"처음으로 저지른 죄이니……."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은 완고했다.
"무슨 소리! 저 년과 여소교는 소녀공을 배웠기 때문에 이미 악마의 길에 들어섰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붙는 음욕을 누를 길이 없는 년들이야. 그러니 가차없이 벌을 내려 그 음욕
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
매초풍은 용기를 내어 다시 빌었다.
"사부님, 앞으론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허, 나를 우습게 아는구나. 네 년의 맹세는 믿을 게 못 된다. 네 년은 일찍이 동사 황약
사를 배반하고 묘상 앞에서도 충성을 다졌던 년이 아니더냐!"
천산 마귀할멈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녀가 손을 휙 내저었다. 아련이 얼른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는 두 자 남짓한 시퍼런 단검을 들고는 매초풍 앞으로 나왔다.
매초풍은 이제 틀렸구나 싶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척했다. 그리곤 두 팔에 한껏 내력을 운
행시켰다. 매초풍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자신은 무림의 고수가 되고자 굽신거렸을 뿐이라며
이렇게 된 이상 가만있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산 마귀할멈이 강적이라
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음백골조와 최심장 역시 무적이라고 믿었다.
아련이 조금씩 다가왔다. 매초풍은 아련이 단검을 쳐들기만 하면 번개같이 일어나 최심장으
로 그녀를 죽일 생각이었다. 뒤를 이어 구음백골조로 설매와 설죽 그리고 설란과 설국을 차
례대로 뜯어놓을 계산을 했다. 그러면 걸림돌 없이 천산 마귀할멈과 맞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매초풍의 이런 계략을 천산 마귀할멈은 벌써 눈치채고 있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시
녀들에게 분부했다.
"저 년이 달아나지 못하게 에워싸라!"
네 명의 시녀와 아련이 매초풍을 둘러쌌다. 매초풍은 날개가 있어도 이젠 달아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때 시녀 하나가 소리쳤다.
"저기 변청교가 옵니다!"
매초풍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변청교를 만나면 입이라도 맞추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천산
마귀할멈이 놀라 한쪽으로 정신을 파는 사이 매초풍이 경공을 쓰며 달아났다.
아련이 쫓아가려고 했지만 천산 마귀할멈이 제지했다.
"변청교부터 물리친 다음에 그 년을 잡아 처단하기로 하자!"
곧 변청교가 나타났다. 변청교가 천산 마귀할멈을 보고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이게 뉘시오?"
변청교는 이 근처를 지나다가 절의 중들이 못된 짓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응징을 하러 들렸
던 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산 마귀할멈과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천산 마귀할맘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오늘도 귀찮게 굴 셈이더냐?"
변청교는 시녀들은 물론 천산 마귀할멈 역시 못된 중놈들과 한통속으로 속단했다.
"그 수하의 못된 중놈들만 내놓으면 순순히 말씀을 따르겠소!"
그러자 아련이 나섰다.
"여기 있던 중들은 우리가 모두 죽여 버렸어요. 그들과 벗이라도 되나요?"
비로소 오해가 풀린 변청교가 크게 웃었다.
"음……, 하하하……! 그랬으면 다행이오. 어쨌든 이렇게 만났으니 마귀할멈과 한판 겨루어
보고 싶소!"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헌데 난 그대의 아우 변홍의를 죽인 일이 없다!"
"흥, 그럼 철시가 당신의 제자가 아니란 말씀이오?"
"어제까지는 제자였지만 오늘부터 아니다."
"아무튼 제자였다는 걸 부인하지 못하는 게 아니오. 철시가 내 아우를 죽였고 당신은 그녀
의 사부라는 건 엄연한 사실이오. 그러니 당신을 죽인다면 원수의 절반은 갚은 셈이 아니겠
소?"
"매초풍이 변홍의를 죽였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오혈궁 무리들이 거렁뱅이 패와 무림의 협객들의 손에 절단이 난 일을 알고 있소? 사후에
난 아우의 시체를 찾으러 갔었소. 내 아우가 그들의 손에 죽었다면 할말이 없겠지요. 하지만
오혈궁에 가서 겨우 잡초 속에 처박힌 아우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정수리에 구멍이 다섯 개
가 나 있었소."
"그렇다면 구음백골조가 남긴 흔적이란 말인가?"
"물론이오.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구음백골조를 쓰는 자는 철시와 동시 뿐이오. 그러나 동
시는 벌써 <구음진경>을 갖고 산속에 숨어 수련하고 있으니 철시의 소행이라는 건 명백하
오이다."
천산 마귀할멈이 이를 갈아댔다.
"매초풍, 그 년이 말썽이군!"
원래 천산 마귀할멈은 변홍의를 잡아 인질로 삼고는 변청교를 칠 계산이었다. 그런데 매초
풍이 중간에 변홍의를 죽였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변청교가 한걸음 나서며 으름장을 놓았다.
"마귀할멈, 내가 있는 이상 당신은 더는 무고한 백성들을 해칠 수가 없소!"
아련은 천산 마귀할멈이 천마해체대법을 쓴 뒤로 제대로 공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았다. 오늘만은 변청교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슬그
머니 잔꾀를 부려 호통을 쳤다.
"사부님, 저 놈이 무례하게 구는군요.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저 무례한 놈의 버릇을 고쳐 줍
시다."
그러자 나머지 시녀들도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저 놈의 버릇을 잡아 줍시다!"
변청교는 천산 마귀할멈의 기를 꺾을 생각이었다.
"네 년들이 한꺼번에 덤벼도 두렵지 않다!"
변청교는 천산 마귀할멈이 자신의 몸에 해를 주면서까지 더는 천마해체대법을 쓰리라 생각
하지 않았다. 천산 마귀할멈이 시녀들을 물리치고는 앞으로 나섰다.
"변청교, 그대가 제 발로 찾아와 도전을 한 이상 나를 무정하다고 생각지 말게."
아련이 소리쳤다.
"설매, 설죽, 설란, 설국! 우리가 먼저 저자와 맞서 보자구."
아련이 검을 뽑아 들고 나서자 네 시녀들도 합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산 마귀할멈은
속으로 흐뭇했다. 변청교가 내력을 소모한 다음 공격한다면 쉽게 그를 칠 수 있을 거란 생
각 때문이었다.
변청교도 자신이 시녀들과 싸우면 힘이 빠질 거란 계산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입장
이었다. 변청교는 달려드는 다섯 명의 여인들에게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댔다. 그리곤 오른
손을 들었다. 달려들던 여인들이 주춤 멈추는 순간 변청교는 등뒤에 숨겨 두었던 왼손을 앞
으로 뻗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다섯 개의 차가운 빛이 날아갔다.
"위험해!"
천산 마귀할멈이 소리쳤으나 벌써 늦은 후였다. 다섯 개의 탈명한추가 여인들을 각각 명중
시켰다.
"아악!"
여인들은 순식간에 모두 쓰러졌다. 모두들 이마에 있는 인당혈에 탈명한추를 맞고 죽고 말
았다.
기가 막힌 천산 마귀할멈이 목청을 높였다.
"오늘은 꼭 네 놈을 죽이고 말테다!"
천산 마귀할멈이 몸을 날리며 변청교에게로 날아갔다. 자정신침이 춤을 추듯 자색의 빛이
변청교를 향해 쏟아졌다. 변청교는 그녀의 비범한 내력과 변화무쌍한 무공을 맛본 적이 있
기에 그녀를 향해 수십 개나 되는 탈명한추를 뿌렸다. 삽시에 뜨락에는 자색의 연기가 자욱
했다. 수십 개의 차가운 탈명한추가 날아가다 천산 마귀할멈의 자색 섬광에 부딪쳐 사방으
로 흩어지곤 했다.
다시 일곱 개의 탈명한추가 꼬리를 물고 자정신침으로 이루어진 장막을 뚫고 곧바로 천산
마귀할멈에게로 날아갔다. 한 개만 맞아도 불구가 될 수 있는 것이라 천산 마귀할멈은 다시
천마해체대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천산 마귀할멈이 갑자기 피를 뿜으며 몸을 팽이처럼 돌
렸다. 탈명한추가 가까이 날아왔다가 빙빙 돌아가는 거센 기류에 밀려 빗나갔다.
변청교는 연해 연방 탈명한추를 날려보내고 천산 마귀할멈은 천마해체대법으로 매번 그것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천산 마귀할멈의 피가 다 마르면 분명 변청교의 탈명한추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천산 마귀할멈은 위기를 느끼고는 연신 피를 뿌리며 달려들었다. 가깝게 접근한
그녀에게 탈명한추를 뿌릴 수 없는 변청교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순간 천산 마귀할멈이 장
을 내밀었다. 변청교가 급히 선공을 운행시켜 쌍장으로 맞받아쳤다.
펑!
두 사람은 동시에 한 장 남짓 뒤로 밀려났다. 시녀들이 달려와 비틀거리는 천산 마귀할멈을
부축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싸울 태세를 취했다. 눈에는 살기가 가득
했다. 변청교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천산 마귀할멈이 독기 어린 눈으로 변청
교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승리감이 어려 있었다.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변청교의 입과 귀로 검붉은 피가 흘렀다. 변청교가 힘없는 소리로 말
했다.
"마귀할멈, 당신은 내 탈명한추가 결코 천하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증명하였소. 당
신은 나보다 세군. 내가 졌소."
천산 마귀할멈이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변청교가 더욱 침통한 목소리를
던졌다.
"이젠 날 죽여 주시오. 당신은 얼마든지 날 죽일 수가 있지 않소."
그러나 천산 마귀할멈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코웃음을 날렸다. 그것은 더욱 큰 수치였다.
변청교는 수치감에 시달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날 죽이는 일조차 시시하단 말이오?"
변청교가 가까이 다가와 읍을 했다.
"그럼 나를 살려 준 은공에 감사를 하겠소. 이제부턴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참견하지 않을
것이오."
변청교가 괴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찢어 버렸다. 순간 차디찬 빛이 허공
으로 가득 흩어졌다. 변청교가 그 아래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곧 공중으로 흩어졌던 탈명한
추들이 뜨락으로 어지럽게 떨어졌다.
천산 마귀할멈은 변청교가 멀리 사라진 뒤에야 한숨을 돌렸다. 그녀는 참았던 피를 왈칵 쏟
았다. 그리곤 힘없이 주저앉았다.
여러 시녀들이 달려와 그녀를 안았다.
"정신을 차리세요."
이때 요사스런 웃음 소리가 느닷없이 터졌다. 이윽고 매초풍이 한들거리는 걸음으로 천산
마귀할멈 앞으로 걸어왔다.
"축하해요. 결국엔 변청교를 물리쳤군요."
매초풍이 탈명한추를 하나 주워 들며 말을 이었다.
"변천교가 다시는 탈명한추를 들고 우쭐대지 못할 거예요."
천산 마귀할멈이 겨우 일어나 의자에 몸을 어렵게 의지했다.
"철시, 네 년은 우리 가문에서 쫓겨난 여인이니 당장 사라져라!"
그러자 계집종 하나가 매초풍을 밀쳤다.
"어서 꺼지란 말이야!"
매초풍이 다짜고짜 그녀를 향해 장을 날렸다. 계집종이 비명을 내지르며 피를 토한 채 죽었
다. 나머지 계집종들이 단검을 뽑아 들고는 매초풍에게로 달려들었다. 매초풍은 자신이 익힌
무공을 시험이라도 해보듯 종횡무진 몸을 날리며 계집종들과 맞섰다. 순식간에 사방에는 시
체들이 쌓였다.
천산 마귀할멈이 다시 피를 토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매초풍, 넌 정녕 천하에서 가장 사악한 년이로구나?"
매초풍이 방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 그렇지 않다면 어찌 철시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겠어요?"
매초풍이 당당히 천산 마귀할멈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이 음탕한 나를 죽이고 싶나요?"
천산 마귀할멈에게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애석하게도 변청교는 물리쳤지만 자신의 원기를 크게 상실해 버렸단 말이지요. 그것을 모
르고 자신이 패한 줄 알고 탈명한추를 팽개치고 간 변청교. 호호호, 하지만 이 매초풍의 눈
은 속일 수가 없어요. 지금 당신은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어요!"
"나를 잘 알고 있으니 그런 것쯤이야……."
천산 마귀할멈이 쓸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얼굴을 보인 적이 없어요. 이 제자는 그 점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에요. 미인인지 아니면 추녀인지……."
매초풍이 손을 뻗어 복면을 벗기려고 했다.
"감히!"
천산 마귀할멈이 꾸짖자 매초풍이 다시 웃었다.
"호호호 싫은가요? 당신이 좋아했던 묘상이 늙은 고양이상을 했으니 당신 역시 비슷하겠지
요."
순간 매초풍이 재빨리 복면을 벗겼다. 매초풍의 표정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돌변
했다. 눈앞에 드러난 천산 마귀할멈의 얼굴은 천하 제일의 아름다움이었다. 수정처럼 맑고
그윽한 눈동자와 넓은 이마, 그리고 앵두같이 붉은 입술……. 살결 또한 고왔다. 강남의 이
팔청춘 미인을 연상하게 했다.
"이 여인이 정말로 천하가 벌벌 떠는 천산의 마귀할멈이란 말인가? 내가 보기엔 꽃띠 처녀
같은데……."
"매초풍, 어쨌든 자네는 소원을 풀었다."
"만약에 내가 사내였다 해도 당신에게 반했을 겁니다. 이제야 묘상이 미친 듯이 당신을 쫓
아다닌 이유를 알겠어요."
"그 사람은 내 미색보다는 오혈궁 궁주의 자리를 더 소중히 여겼던 인간이었어."
묘상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천산 마귀할멈이 불같이 화를 냈다.
매초풍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다시 한 번 자기 눈을 의심했다. 너무나 젊고 아름
다웠다. 그러나 천산 마취할멈의 눈가에는 알 수 없는 애수가 엿보였다.
천산 마귀할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른이 넘었지만 남들의 눈에는 이팔청춘으로 보이지. 그래서 무공은 뛰어났지만 뭇호걸들
에게 애숭이로 보일까 봐 복면을 하고 다녔던 게지."
매초풍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소녀로 보자 복면을 하고는 신비스럽게 나타났었던 거군요."
이때부터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을 본받아 머리를 길게 뒤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손톱을
길게 길렀다. 그녀는 싸움에 나설 때마다 매의 발톱 같은 두 손을 쳐들고 긴머리를 휘날렸
다. 그것은 상대에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의 정수리를 겨누고 손을 높이 들었다.
"아름다운 사람……! 하지만 당신을 이 세상에 남겨 둘 수는 없어요!"
"잠깐, 더 할말이 있네."
"죽을 마당에 무슨 말? 허나 내게 이로운 거라면 들어주지요."
"너에게 이로운 것이다."
잠시 숨을 돌린 천산 마귀할멈이 말을 이었다.
"내 무공의 진수를 배우고 싶지 않나?"
"물론이죠."
"그럼 가르쳐 주지. 내 목숨을 살리는 일인데 마다할 수 없지."
"오호호호, 과연 총명한 여인이로군요. 하지만 당신의 꾀에는 넘어가지 않아요. 무공을 가르
쳐 주는 동안 내력을 회복해 나를 치려는 속셈이지. 여우 같은 계집!"
매초풍이 송곳 같은 손가락을 천산 마귀할멈의 정수리에 사정없이 박았다.
천산 마귀할멈이 아픔을 참으며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이것이 스승을 죽이는구나……!"
"입으로만 사부라 불렸지 마음속으론 한 번도 그렇게 여긴 적이 없다. 내 사부는 오직 한
분 황약사뿐이다. 그분은 네 년보다 더 명성이 높은 영웅이야!"
매초풍이 그녀의 두개골 속으로 더 깊이 손가락을 박았다.
천하를 뒤흔들던 여걸 천산 마귀할멈은 이렇게 매초풍의 구음백골조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제22장 전진철자와의 싸움
어둠이 서쪽 하늘로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은 별 한 점 없이 검푸르게 펼쳐져 있었
다. 불현듯 서북풍이 불어닥칠 때마다 하늘에 걸린 달무리가 뿌옇게 몸을 떨고 있는 듯했다.
멀리서 일곱 개의 시커먼 그림자가 언뜻 비치더니 산등성이를 타고 어슬렁 걸어오고 있었
다. 맨 앞에 선 자는 두 눈이 퉁방울같고 아래턱에는 수염이 더부룩했다. 손에는 서슬이 시
퍼런 장검을 쥐고 있었다.
두 번째로 따르는 자는 도관(道冠)에 청포를 입고 인자한 얼굴을 가졌다. 그러나 두 눈에서
는 살기가 충만했다. 그 뒤로 네 명의 도사와 비구니 차림의 여인 하나가 걸어왔다. 저마다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전진교의 전진칠자였다. 맨 앞에 선 자가 장춘자 구처기이고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자는 단양자 마옥, 그리고 차례대로 장진자 담처단, 장생자 유처현, 옥양자 왕치일 그
리고 광녕자 학대통과 청정산인 손불이였다.
손불이가 서쪽의 어두운 밤하늘을 걱정 어린 낯빛으로 올려다 보았다.
"오늘 밤에 큰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그래서 그 년이 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오늘 밤 허탕
을 치게 될까 봐 걱정이 돼요."
왕처일이 퉁명스럽게 말을 받아쳤다.
"자시면 꼭 나와서 무공을 닦는다고 했어. 이건 거렁뱅이들이 목숨을 걸고 알아낸 정보니까
틀림없을 거야."
산등성이에 이르자 일행은 사방을 유심히 살폈다. 주위는 쥐죽은듯 고요하기만 할 뿐 별다
른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유처현이 별안간 풀숲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니 저게 뭐지?"
달빛 아래로 어떤 물체가 세 무더기 정도 쌓여져 있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괴이하게 생각
한 전진철자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 물체는 세 무더기의 해골들이었다.
학대통이 죽은 사람의 해골 하나를 쥐고는 좀더 자세히 뜯어 보았다.
"큰형님, 이걸 좀 보시오."
갑자기 그가 놀란 목소리로 마옥에게 해골을 넘겨주었다. 해골의 정수리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다섯 개가 뚫려 있었다. 마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른 해골 역시 마찬가지였다.
"틀림없이 그 년의 소행이다!"
마옥이 침울한 기색으로 서 있는데 구처기가 학대통을 보고 물었다.
"해골들의 위치는?"
"모두 세 무더기인데, 품(品) 자 형으로 놓여 있으며 각 무더기에 해골 아홉 개씩입니다."
"무더기마다 세 층으로 쌓지 않았는가? 가장 아래에 다섯 개 그리고 복판에는 세 개 나중에
한 개씩 말이야."
학대통이 해골 한 무더기를 살펴보더니 혀를 찼다.
"네째 형님은 그걸 어떻게 알았소?"
"한대웅이 알려 준 거지. 자, 이렇게 하세. 처일 아우는 동북쪽 방향으로 대통 아우는 서북
쪽 방향으로 각각 백 보씩 걸어가서 거기에 무엇이 있나를 보고 오게."
왕처일과 학대통이 그 방향으로 걸음을 세면서 갔다. 잠시 후 동시에 두 사람이 소리쳤다.
"여기도 똑같은 해골 무더기가 있다!"
마옥이 얼른 떠들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다시 일행은 한곳에 모였다.
"한 칠대가 전해 준 정보가 틀림없군!"
마옥이 해골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걸 보게나. 다섯 손가락에 뚫린 구멍이 금 하나 없이 깨끗해. 그건 그 년의 무공이 경지
에 들어섰다는 증거야."
"이렇게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으니 귀신도 보통 귀신이 아닙니다."
구처기가 이를 갈자 왕처일이 한마디 거들었다.
"내가 가본 쪽의 한 무더기엔 해골이 여덟 개밖에는 없었어요. 그런데 위에 놓인 몇 개의
해골은 채 썩지도 않아 고약한 냄새가 났었습니다."
그 말에 마옥이 중얼거렸다.
"하나가 모자라는 아흔아홉 개라……. 우리가 때를 잘 맞춰 온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왕처일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 마옥이 차분한 목소리로 조용히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오늘 밤 그 년은 또 한 사람을 죽여 무더기를 마무리 지을 걸세. 해골 무더기를 세울 때마
다 그 년의 무공은 강해지는 모양이야. 듣자하니 매초풍이란 년은 천산의 마귀할멈 밑에서
마공을 익힌 다음 스승마저 죽여 버렸다네. 매초풍이 사악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천산
마귀할멈까지 죽인 걸 보면 무공이 대단할 거야. 일 대 일로 맞붙는다면 우리들 중 누구도
그 년을 당해낼 수가 없어!"
"아무렴요, 매초풍이 나타나면 강호의 법이고 체면이고 가릴 것 없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난
도질을 해버립시다."
구처기가 마옥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데 유처현과 담처단도 동조했다. 여럿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자 마옥이 손을 내저어 그들의 말을 중단시켰다.
"조용히들 해. 자시가 가까워 오니까 이제 곧 매초풍이 나타날거야. 내공이 귀신 같아서 바
늘 떨어지는 소리도 듣는다구."
이윽고 마옥이 모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마옥과 손불이는 관목 숲으로 들
어갔다. 담처단과 유처현, 학대통은 풀숲에 엎드렸고, 구처기와 왕처일은 큰 나무 위로 올라
가 나뭇가지로 위장했다.
마옥은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아무도 먼저 공격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구처기는 성미가 급하
니 단단히 명심해라."
구처기가 나무 위에서 이기죽거렸다.
"내가 아무리 성미가 급해도 지금까지 대사를 그릇친 적이 있었소? 철시라는 여마귀를 잡는
일인데 낸들 왜 정신을 차리지 않겠소?"
"쉿!"
왕처일이 주의를 주었다. 일제히 산기슭 쪽으로 시선을 박았다. 산기슭으로 웬 검은 그림자
하나가 달빛을 밟으며 오르고 있었다. 분명 사람이었다. 잠시 후 달빛에 그 정체가 드러났
다. 웬 사람 하나를 둘러멘 매초풍이었다. 그녀가 매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매초풍의 가까운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올수록 전진칠자의 가슴은 무섭까 뛰었다.
이때 서북풍이 한결 세차게 불어왔다. 먹장구름도 빠른 속도로 몰려오고 있었다. 주위는 점
점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두워져만 갔다.
순간 발소리가 우뚝 멈추더니 산 언덕의 드넓은 공지에 매초풍의 날렵한 몸이 나타났다. 그
녀는 어깨에 둘러멨던 사람을 내려놓고 그 옆에서 한숨을 돌렸다.
바닥에 눕혀진 사람은 시체가 아니었다. 그는 어렵게 몸을 일으키더니 혼잣말처럼 나불거렸
다.
"이런 산속에 나를 데려와 어쩔 셈인가?"
매초풍이 매서운 눈길로 사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안심한 듯 음탕한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여기가 얼마나 호젓하고 좋아요. 마음대로 나를 가지고 놀아도 방해할 사람이 없잖
아요."
사내가 매초풍을 얼싸안고는 입을 맞추었다.
"흐흐, 그대는 정말 요귀 같은 미인이야. 사내들의 가슴을 완전히 녹여 버리거든. 그런데 내
몸이 왜 이러지. 마치 큰 병이라도 앓고 난 사람처럼 전신에 맥이 풀리고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군 그래. 이거 어디 힘이 없어 그 짓을 하겠냔 말이야."
자세히 보니 사내는 형산파(衡山派)의 제자인 진달(津達)이었다. 진달은 형 산파에서 으뜸가
는 고수인데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그 역시 매초풍의 술수에 걸려든 모양이었다. 매초풍
이 소녀공을 닦는 데 이용된 것 같았다.
구처기가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무림의 호걸로 강직하다고 소문난 진달이 어찌하여 매초풍의 꾀에 넘어갔을까? 그렇다면
진달 역시 위선자에 가까운 자란 말인가……?'
매초풍이 애교를 부리며 까르르 웃더니 슬쩍 진달을 잡아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가
부좌를 틀고 앉은 진달 뒤로 가 앉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해요."
어린아이 어르듯 하면서 왼쪽 손바닥을 진달의 허리에 있는 명문혈에 갖다 댔다.
진달이 얼굴 가득 웃음을 처바르며 중얼거렸다.
"또 무슨 장난질이이?"
"몸이 약해서 어디 쓰겠어요. 양기를 불어넣어야겠어요."
매초풍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진기를 모아 진달의 명문혈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진달은
등줄기에 있는 독백혈로 한 가닥 열기가 흐르면서 일시에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허, 시원하다!"
진달이 좋아하는 소리를 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정수리 부근에 한 가닥의 열이 치밀어 오르
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야? 생사람 죽이는 거 아냐. 어서 그만둬!"
진달이 아우성을 쳤지만 매초풍은 오히려 키들키들 웃을 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안 돼요!"
매초풍이 진기를 계속 불어넣자 진달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매초
풍의 진기는 그를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또한 매초풍은 그가 발악을 할까 봐 어느
새 아혈을 눌러 놓았기 때문에 더더욱 진달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불기둥같은 뜨거운 열기
가 정수리까지 뻗어 오르자 진달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었고 툭 불거져 나왔다.
전진칠자는 약간 떨어진 그 자리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이라 전진칠자는 매
초풍과 진달이 정을 나누고 있는 줄로만 알고 애써 외면을 하며 이따금씩 동정을 살피고 있
는 중이었다.
매초풍이 일어나 진달의 정수리에 대나무 대롱을 박았다. 그리곤 뇌수를 빨아마셨다. 천산
마귀할멈에게서 배운 그대로였다. 진달이 차츰 늘어지기 시작했다.
전진철자는 이때서야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매초풍은 일을 끝내
자 진달의 시체를 다시 둘러했다. 전신에 힘이 뻗치는지 그녀는 진달을 메고는 날아가듯 뛰
어갔다.
매초풍이 발을 옮길 때마다 뼈마디에서 북소리 같은 힘찬 소리가 울려 나는 듯했다.
전진칠자는 그녀의 무공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정녕 경지에 이르렀음을 그들은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한참을 뛰어가던 매초풍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매초풍이 시체를 장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장을 날려
시체를 파괴했다. 하지만 허공에 그녀가 뿌리는 쌍장이 빗발치건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
았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매초풍은 껑충 치솟아 올랐다 거꾸로 내리박히며 갈고리 손으로 시신
의 두개골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기괴한 웃음 소리를 흘리며 시체의 몸을 파헤치더니 내장
을 끄집어내 어둠 속에 흩뿌렸다.
어둠 속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전진칠자는 경악을 금하질 못했다. 매초풍의 최심장은 실
로 무서운 것이었다.
매초풍은 비수로 시체의 머리를 잘라내어 동북쪽에 있는 해골 무더기 위에 얹어 놓았다.
다시 공지로 돌아온 그녀는 감격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밤 난 드디어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을 완벽하게 익히게 되었다. 이제부터 매초풍은 강
호 무림에서 사대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매초풍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마공을 닦기 시작했다. 이때는 모든 정신을 한곳으
로 모으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외부에서 움직이는 일에는 약간 둔해지기 마련이었다.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마옥이 후닥닥 관목 숲에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저 년을 죽여라!"
그러자 사방에서 전진칠자들이 튀어나왔다. 일곱 자루의 검이 매초풍을 향해 동시에 그어졌
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매초풍은 그만 진기가 흩어져 허둥댔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공중제비를 뿌렸다. 그리곤 서너 장 떨어진 곳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전진칠자가 매초풍을 한가운데 두고 포위했다. 구처기가 도끼 눈을 하고는 꾸짖었다.
"매초풍, 무림의 독버섯 같은 년아. 오늘은 네 년의 제삿날이다!"
매초풍은 한껏 모았던 진기를 얼른 수습할 수가 없었다. 그것에 몹시 화가 난 그녀는 길길
이 뛰었다.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 지랄들이냐? 네 놈들이 설치는 바람에 내 신공이 깨어질 뻔
했다. 나 역시 너희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매초풍이 장을 담처단의 가슴을 향해 날렸다. 동시에 왼손으로는 검을 잡은 손불이의 손목
을 틀어쥐었다. 또한 두 발로는 구처기와 마옥을 걷어찼다. 일순 몸을 날린 매초풍이 한꺼번
에 네 명을 공격한 것이었다.
담처단은 매초풍의 장이 하도 강해 뒤로 슬쩍 물러섰다. 요즘 담처단은 새롭게 지필공(指書
功)이란 무공을 익혔는데 이것은 상대의 치명적인 혈도만을 공략하는 것으로 남제의 일양지
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역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담처단은 검으로 몸을 방어하면서 왼손
의 식지와 중지를 튕겨 매초풍의 오른쪽 어깨에 있는 견정혈(肩井穴)을 치려고 했다.
그러자 매초풍이 한걸음 물러서며 오른쪽 어깨를 내밀었다. 담처단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매초풍의 왼쪽 어깨가 살짝 뒤틀리면서 그녀의 왼손이 담처단의 팔목을 잡았다. 순간 담처
단의 얼굴이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으로 찌그러졌다.
이 모습을 본 마옥과 왕처일이 눈을 흡뜨며 긴장했다. 매초풍의 구음백골조에 걸리기만 하
면 끝장이었다. 마옥과 왕처일이 매초풍을 향해 검으로 내리쳤다.
"앗!"
매초풍은 별수없이 담처단의 팔을 놓고 말았다. 마옥과 왕처일의 협공이 없었다면 담처단의
팔은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담처단은 다행히 팔소매가 뜯기며 긁힌 곳에서 피만 흐
를 뿐 팔은 잃지 않았다.
구처기가 옆에서 '창송영객(蒼松迎客)의 검술을 부렸다. 그는 검 끝으로 매초풍의 손목을 노
렸다. 그런데 매초풍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슬쩍 검을 받아 쥐었다. 구처기는 매초풍이
손으로 날카롭고 예리한 검을 쥐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검자루를 힘껏 잡아당겼다.
매초풍이 검을 쥐고 끌려가는 듯하더니 왼쪽 장으로 번개같이 구처기의 가슴을 쳤다.
놀란 구처기가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공중제비를 부리며 싸움판에서 약간 벗어났다.
매초풍은 구처기를 가장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쫓아가 공격했다.
이때 손불이와 왕처일이 매초풍의 뒤에서 검을 찔렀다. 매초풍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가
락으로 가볍게 검을 튕겨 위기를 모면했다. 황약사의 탄지신공을 모방한 것인데 그런대로
위력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도 자신의 무공에 탄복했다.
다시 구처기가 공격해 왔다. 매초풍이 다섯 손가락을 곧추 펴고 그를 집중 공략했다. 막 구
처기의 정수리를 향해 손가락을 박을 찰나였다. 시퍼런 장검이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급히 몸을 돌린 매초풍의 시선으로 철각선 왕처일이 보였다. 사방에서 전진칠자들이 한꺼번
에 공격해 올 기미를 보였다.
매초풍은 슬쩍 몸을 날려 일단 그 위기를 피했다.
'전진칠자가 북두칠성 진을 치는 날엔 어렵게 된다!'
매초풍은 동서남북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온갖 초수를 다 부리며 전진철자를 흩어놓았다. 북
두칠성 진을 펼치지 못하게 할 속셈이었다.
"간다!"
매초풍은 전진칠자 중에서 가장 약하다고 판단한 손볼이에게 달려들었다. 손불이는 검을 단
단히 쥐면서 단봉점두(丹鳳點頭)의 초수로 매초풍의 겨드랑이를 찌르는 척하다가 그녀의 눈
을 노렸다. 그러나 손불이의 속임수에 넘어갈 매초풍이 아니었다. 매초풍이 '순수추주(順氷
推舟)' 초수로 검등을 슬쩍 내치면서 한 장을 뿌렸다.
"악!"
한쪽 어깨를 맞은 손불이가 검을 잡은 채 빙그르르 돌면서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
었다. 매초풍은 날쌔게 뛰어가 손불이의 정수리를 향해 장을 내리치려고 했다.
"얏!"
순간 마옥이 바람처럼 달려와 매초풍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매초풍이 왼손으로 검을
원기며 오른손으로 손불이를 끝장내려고 했다. 그때 다시 등뒤에서 검날이 크게 울었다. 매
초풍이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녀가 공중에서 위치를 바꾸며 얼른 장을 날렸
다. 학대통과 유처현이 장검을 떨어뜨리며 얼른 뒤로 물러섰다.
마옥이 손불이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북두칠성 진을 쳐라!"
전진철자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옥이 천추(天樞) 자리에, 담처단은 천선(天璿),
유처현은 천기(天璣), 구처기는 천권(天權) 자리에 섰다. 이들 넷이 두괴(斗魁)를 이루었고,
왕처일이 옥형(玉衡), 학대통이 개양(開陽), 손불이가 요광(搖光) 자리를 차지해 두병(斗柄)
을 이루었다. 북두칠성 가운데 천권이 가장 어두운 별이면서 두괴와 두병을 이어 주는 중요
한 자리이므로 전진칠자 중에 무공이 뛰어난 구처기가 자리했다.
진이 형성되자 매초풍은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매초풍은 다
짜고짜 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먼저 유처현에게 장을 날렸다. 유처현이 겁을 먹고 물
러서면 자연히 진이 허물어지리라 계산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처현은 검을 비껴든 채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담처단과 구처기를
향해 양쪽 손으로 각각 장을 날렸다. 마찬가지였다. 두 사내의 몸에서 오히려 엄청난 힘의
장이 뿜어졌다. 두 사내의 장력은 일음일양(一陰一陽)으로 서로 보완하면서 가공할 만한 위
력을 발휘했다.
매초풍은 두 사내의 장력에 밀리자 황급히 왼쪽 장으로 자기 등뒤의 허공을 들이쳐 겨우 몸
을 지탱했다. 그녀는 내심 크게 놀랐다.
몹시 당황한 매초풍은 이번엔 학대통을 향해 장을 뿌렸다. 그런데 왕처일과 손불이가 일음
일양 두 장력을 합쳐 매초풍에게 뿌리는 거였다.
매번 그녀의 공격이 실패하게 되자 매초풍은 자신이 큰 위기에 빠졌음을 절감했다.
'과연 북두칠성 진은 대단하구나. 이 놈들과 싸우다가 타격이라도 입게 되면 큰 망신이다.
정신을 좀더 차려야겠다!'
원래 이 북두칠성 진은 전진교의 진법 가운데 가장 이름난 것으로 크고 작은 싸움을 가리지
않고 두루 사용되었다. 특이한 점은 적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정면에 있는 자는 그대로 있
고 양 옆에서 협공하여 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이다.
이번엔 북두칠성 진이 서서히 움직이며 매초풍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사면에서 좁
혀 오는 공격을 막아내고는 있었으나 차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연신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초조한 기색이 완연했다.
구처기가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힘을 합쳐 저 년을 요절내자!"
구처기가 장을 날리자 유처현과 왕처일도 합세했다. 세 사내의 장이 뻗쳐 오자 매초풍이 뒤
로 황급히 물러서며 막았다. 이때 등 뒤에 있던 손불이와 학대통 역시 장을 뿌렸다. 매초풍
이 공중으로 얼른 뛰어올랐다. 그러면서 독룡은편을 뽑아 들었다.
매초풍이 독룡은편을 한차례 후려치자 전진칠자들이 한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바닥
에 사뿐히 내려서며 돌연 마옥에게 채찍을 날렸다. 매초풍은 정말 우연히 마옥을 공격했던
것이다. 진의 고리를 담당하고 있는 게 마옥이란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다만 그들의 우두머
리 격인 그를 먼저 꺾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채찍이 마옥의 몸 근처에 닿기도 전에 오히려 매초풍에게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채찍이 허리 잘린 뱀처럼 맥없이 흔들거리자 매초풍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매초풍은 잠시 영문을 몰라 하며 주춤거렸다. 그 사이에 채찍을 잡은 그녀의 손이 후들후들
떨리고 눈앞에 횐 빛이 번뜩이더니 거센 바람이 그녀에게로 몰려왔다. 그녀는 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채찍이 머리 위를 무서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녀의 입가에서 안도의 숨
과 함께 탄성이 흘러 나왔다.
"휴, 정말 대단하군 그래!"
매초풍은 좀더 공격에 신중을 기하였다. 그녀는 담처단과 유처현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이 두 사람에게로 닿으려는 순간 옆에 있던 구처기와 마옥이 동시에 장을 뿌려 이번에
도 간단하게 채찍을 막아냈다.
매초풍은 여러 합이 진행되자 진의 비밀을 차츰 알 수 있었다. 전진칠자들이 장을 날릴 때
보면 한 손은 옆 사람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한쪽 손을 옆 사람의 어깨에 있는 노궁혈에
얹고 서로 내력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에 위력적인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매초풍이 있는 힘을 다해 채찍을 후려쳤다.
"아니!"
갑자기 채찍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되돌아오지 않았다. 채찍은 전진철자의 진에 걸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채찍을 버린다면 매초풍은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몸에 지녔던 채찍을 버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로서는 자신을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
준 채찍이라 애착이 더했다.
매초풍이 주춤하자 북두칠성 진은 더욱 밀물처럼 밀려왔다. 이젠 채찍을 버린다 해도 늦은
후였다. 구처기가 와락 장력으로 채찍을 낚아챘다. 매초풍은 채찍을 틀어쥐고 있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 한걸음 앞으로 끌려갔다.
두 자밖에 안 되는 한걸음이 승패를 결정할 수도 있었다. 순간 불안한 예감이 든 매초풍은
재빨리 왼쪽 장을 내질렀다. 그러자 마옥과 학대통의 장이 담벽처럼 그 앞을 가로막았다. 매
초풍이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데 등뒤로 구처기와 왕처일의 장이 사정없이 날아왔다.
"아……!"
매초풍은 앞을 뚫고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오른발을 조금 내밀면서 왼
발로 구처기와 왕처일의 손목을 걷어찼다.
"멋진 퇴법이군!"
두 사내가 살짝 옆으로 비껴서며 탄성을 질렀다.
매초풍이 번개같이 발을 날려 구처기와 왕처일을 물리쳤지만 자신은 더욱 깊이 진 안으로
들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매초풍은 이제 한 사람이라도 쓰러뜨리지 않으면 포위망을 뚫을
수가 없게 되었다.
전진칠자가 물샐 틈 없이 둘러싸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순간 매초풍을 포함하여 여덟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원을 그렸다. 달이 언듯언듯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빛을 조금 뿌릴 뿐 칠흑의 어둠 속에서 매초풍은 긴 머리칼을 휘날리
며 진을 파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얼마 후 전진칠자는 참전하는 중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진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진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움직이고 있었다. 한 마리의 뱀처럼 매초풍을 감은 채 단
단한 막을 형성하고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매초풍은 온갖 초수를 다 부리며 장벽을 허물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매번 진에 막히고
말았다. 속수무책이었다.
"아악!"
매초풍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질렀다.
구처기가 마옥을 바라보며 성급하게 외쳤다.
"저 년이 이제 지쳤으니 당장 죽여 버립시다."
마옥은 그러나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매초풍이 황약사의 제자라는 점을
그는 상기했다. 그는 차마 매초풍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는 난색을 띠며 잠시 고심하더니
한마디 하였다.
"우리 사부님인 왕중양과 황약사는 서로 아끼고 존경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매초풍을 죽인
다면 훗날 무슨 낯으로 황 도주님을 뵙겠는가?"
그러자 옆에 있던 왕처일이 끼여들었다.
"매초풍은 배은망덕하게도 황 도주님을 배반한 제자입니다. 설사 황 도주님의 제자라 하더
라도 저 년이 범한 수많은 악행을 아신다면 그분도 기가 막힐 겁니다."
구처기도 한마디 거들었다.
"황 도주께서 매초풍의 편을 들면 그분마저 화를 당할 것이오!"
투덜거리던 구처기가 대뜸 장을 날렸다. 그는 북두칠성진의 긴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가
움직이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이동을 했다. 구처기 옆에 있던 유처현과 왕처일도 장을 날렸
다. 진이 수비에서 공격의 형태로 바뀌자 매초풍은 돌풍을 안은 것처럼 지탱하기가 힘들어
졌다.
이제 마옥도 마음을 결정했다. 매초풍은 이미 악인의 경지에 이른 여인이기에 도의로는 설
득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훗날 황약사가 꾸짖는다 해도 매초풍의 죄상을 고한다면 이해
할 것이라 믿었다.
전진칠자가 한꺼번에 매초풍을 치려고 할 때였다. 돌연 밤하늘을 가르는 암기들이 쏟아졌다.
뒤를 이어 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세 자루의 비수가 구처기의 등뒤를 향해 날아왔다. 구처
기는 낭패에 빠지고 말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진이 흔들릴 판이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비수를 맞을 수는 없었다.
"안 되겠다!"
구처기가 얼른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진이 흩어졌다. 구처기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을
때는 매초풍은 이미 번개같이 진을 뚫고 달아난 뒤였다.
전진칠자가 뒤쫓자 매초풍은 오른손으로는 채찍을 휘두르고 왼손으로는 구음백골조와 최심
장을 펼쳤다. 전진철자들이 다시 진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매초풍은 내력을 적지 않게 소모한 뒤였다. 전진칠자가 진을 형성하지 못하게 할 수
는 있어도 우세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반대로 전진칠자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럴수록 어디선가 비수가 계속 날아들었다. 그 바람에 매초풍이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이때였다. 광풍이 사납게 불더니 검은 구름이 달을 가리며 하늘마저 가렸다. 산등성이는 먹
물을 쏟아부은 듯이 캄캄해서 지척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모래와 자갈들이 어지럽게 날리
고 바람소리마저 요란했다.
전진칠자는 괜히 자기 편끼리 싸우게 될까 봐 사방으로 흩어지기로 했다. 그들은 흩어지는
즉시 바닥에 엎드렸다. 매초풍은 그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틈을
타 그녀는 서둘러 달아나기 시작했다.
꽤 멀리 벗어난 그녀는 비로소 해묵은 노송 아래 주저앉았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주위는 더욱 어둡기만 했다.
제23장 구원의 손길
소나기는 날이 샐 때까지 계속 퍼붓다가 차츰 잦아들었다.
먹장구름이 밀려가면서 동녘 하늘이 고깃비늘처럼 희붐하게 밝아 왔다. 매초풍은 정신을 차
리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곳은 성밖이었다. 그녀의 온몸은 비와 땀에 온통 젖었고 그녀는
몹시 지쳐 있었다.
매초풍은 비칠대는 걸음으로 성문 안 허술한 객줏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주
인을 불렀다. 그녀는 열 냥짜리 은 덩어리 하나를 꺼내 놓으며 재촉했다.
"어서 방 한 칸 주시오."
주인이 보니 미모의 여인인데다가 온몸이 젖었고 몹시 지친 듯했다. 하지만 은 열 냥이나
내놓는 것을 보아 대단한 손님이라 판단하여 하인에게 정중히 모시라고 당부했다.
매초풍은 심부름꾼의 안내로 이층 방으로 들어갔다. 심부름꾼에게 그녀는 은냥을 내주며 입
을 만한 옷 두 벌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젖은 옷을 벗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기를 운행시켰다. 조금 있으니 속옷이 마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심부름꾼이 들어와 옷을 두고 나갔다. 매초풍은 새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하여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한잠 자고 깨어났을 땐 황혼 무렵이었다. 그녀는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온
몸이 쑤셔 다시 눕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녀의 온몸은 불덩
어리였다. 적이 놀란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력을 많이 소모한데다가 소나기까지 맞아 몸살이 난 모양이군."
매초풍은 의원을 찾아갈 요량으로 다시 일어섰으나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방
문을 채 나서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
비몽사몽간에 문밖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나는 객줏집 주인 같았고 다른 하나
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귀에 익었다.
이윽고 조용히 문을 열렸다. 매초풍은 누운 채로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녀는 눈꺼풀이 천 근이나 되는 것 같아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입으로 차가운 것이 흘러들었다. 쓴맛
이 나는 것을 보아 약인 듯싶었다. 매초풍은 그 약물을 몇 모금 삼키고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왔다. 누군가 죽을 먹여 주고 있었는데 자신의 이마 위에는 차가
운 물수건이 얹어져 있었다. 매초풍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읊조렸다.
"뉘신지 고맙……습니다."
상대는 그녀의 말을 못 들었는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때 불현 누군가의 손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더니 매초풍의 속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
가 소리치며 반항하려고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몸
부림을 치다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녀가 눈을 살며시 떴다. 방안은 텅 빈 상태였다. 탁자 위에는 약을 달였
던 약탕관만이 덩그마니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아까 있었던 일을 더듬어 보았다. 그 기억 끝에 그녀는 얼른 이불을 들추고 살폈다.
속옷을 만져 보니 물기 하나 없이 정갈했다.
"나를 구해 주었으니 은인이겠지만 색을 좋아하는 놈 같군……. 그렇다면 용서할 수가 없
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는 밖으로 나가 주인장을 찾았다.
"주인장!"
그러자 심부름꾼이 달려왔다.
"아씨, 결국 일어나셨군요?"
"누굴 보고 아씨라는 거요?"
"아씨의 주인 어른께서 그렇게 부르라고 하시던데요."
"허튼소리! 다시 그 따위 소리를 지껄였다가는 죽여 버릴 것이다!"
매초풍이 심부름꾼의 뺨을 후려쳤다. 심부름꾼은 얻어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분이 분명 그렇게 부르라고……."
매초풍은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자신의 옷을 벗기던 사내일거라고 짐작했다.
"그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벌써 떠났습니다요. 아씨, 아니 소저의 병도 겨의 나았고 또 급한 볼일이 있다면서…… 소
저에게 은 한 보따리를 두고 갔습니다요."
그는 얼른 뛰어가 보따리를 가져왔다. 그속에는 은 덩어리가 가득했다. 백 냥은 족히 넘을
듯싶었다.
"헌데 그 사내의 이름은 알고 있느냐?"
"저희 주인에게도 꽤 많은 은을 주셨습니다. 주인께서는 잔소리 말고 그분의 심부름만 하라
고 말씀하셨죠. 그러니 제가 어디 주제넘게 이름을 물어 볼 수 있었겠어요. 아무튼 그분은
며칠 동안 약을 달이고 손수 간호하며 소저를 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셨답니다."
"그리고 또 그자가 내게 어떤 짓을 했지?"
심부름꾼은 잠시 그 물음에 주춤하더니 대답했다.
"소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자 그분이 속옷을 계속 갈아입히면서
깨끗하게 치우셨어요.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간호를 하시는지 제가 감탄을 했답니다."
"그리고 또 무슨 짓을 했느냐니까?"
매초풍이 갑자기 손가락을 날카롭게 세우며 다그쳤다. 심부름꾼은 매초풍이 사내들보다 무
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전신을 떨었다.
"다……다른 일은 없……었는데요."
"그럼 그자가 밤에는 어디서 잤느냐?"
"바로 옆방에서 주무셨어요. 저…… 저도 그분이 소저의 남편이라고 하시면서 왜 한 방에
자지 않는지 그 점이 좀 요상했습니다요."
그리고는 심부름꾼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더 이상 말이 없자 그는 슬금슬금 사라
져 버렸다.
'세상에 벗은 계집을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사내가 있을까? 그런 사내를 정녕 남편으
로 섬길 수만 있다면…….'
그러나 미지의 사내는 벌써 사라지고 없는 후였다. 매초풍은 아래로 내려가 주인에게 그 사
내의 생김새에 대해 물었다. 복면을 하고 있었기에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훤칠하고 과묵한
사내라는 대답뿐이었다.
'이름을 남기기 싫어하는 사내로군!'
매초풍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이곳에서 며칠 더 묵기로 했다.
하는 일 없이 닷새가 지나갔다.
매초풍은 전진철자와의 싸움에서 혼줄이 난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일은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구해 준 사내에 대한 일은 서서히 잊어 가고 있
는 중이었다.
아무튼 지금의 무공과 공력으로는 전진칠자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녀는 한 단
계 더 높은 마공을 익힌 다음 그들을 반드시 찾아가 복수하리라 결심했다.
마침내 그녀는 길을 떠났다. 사방을 돌아다니며 무공을 연마할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어느새 겨울이 찾아들었다. 강남 땅에 새하얗게 눈이 내리고 날씨마저 혹독해졌다. 매초풍은
하는 수 없이 외딴 마을로 들어가 겨울을 보내야 했다.
또다시 몇 달이 흘러갔다. 아지랑이가 가물거리고 복숭아꽃이 만발하는 봄이 찾아왔다. 화창
한 봄기운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모든 근심을 잠시나마 벗어 던지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들판으로 또는 볕 좋은 강가로 나갔다. 매초풍도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만은 없어 들판으로 모여드는 마을 사람들 속에 끼였다.
봄날의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그 하늘 여기저기에 아름다운 연이 꼬리를 물고 날고
있었다. 그 앞에는 복숭아꽃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다.
매초풍의 가슴은 활짝 트이는 것만 같았다.
매초풍은 무심히 그 만발한 복숭아꽃 사이를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면서 도화도에서 지냈던
일들을 추억했다. 도화도의 복숭아꽃은 이곳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또 그때 함께 지냈던
사람들과 일들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또렷이 떠올라 그녀의 머리 속을 흔들어 놓았다.
그 무엇보다도 그리운 얼굴들이 있었다. 그것은 진현풍과 사부인 황약사였다. 두 사람과 얽
힌 사연들을 추억하던 매초풍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자신이 그들로부터 너무 멀
리 떨어져 나와 있다는 생각에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과 다시 만날 수
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매초풍은 그 기분에서 벗어나려는 듯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때 마침 눈앞으로 낯익은 얼굴 둘이 천천히 지나갔다. 매초풍은 재빨리 복숭아 나무 뒤로
숨으며 가지 사이로 그들을 훔쳐보았다.
철선서생 하종과 엽청청이었다. 하종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고 수척해 보였다. 매초풍의 드
센 장에 맞은 후 여라 달 고생을 한 끝에 겨우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는 지금 무엇이 좋은
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엽청청도 하종의 팔을 잡고 걸으며 정겨운 눈으로 연신 웃곤 했다. 두 남녀는 뜨거운 사랑
에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매초풍은 그들의 뒤를 밟으며 심한 질투심을 느꼈다. 자신과 진현풍이 사랑을 나눌 때 얼마
나 황홀했었던가를 떠올리며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가 여소교를 사랑하는
바람에 끝장이 나질 않았던가. 매초풍은 갑자기 여소교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손에 잡히는
꽃가지를 꺾어 버렸다.
엽청청이 하종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글쎄, 꽃가지를 꺾는 소리 같았는데……."
"이처럼 아름다운 꽃가지를 꺾다니 정말 때려 주고 싶어요."
엽청청이 약간 성이 난 목소리로 말하자 하종이 손을 저었다.
"별소릴 다하는군. 꽃가지 한두 개쯤 꺾는다고 복숭아밭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요……."
"아니 당신마저 그런 소릴 해요. 꽃을 사랑할 줄 알아야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매초풍이 속으로 웃었다.
'저 하종이란 놈은 무공은 뛰어나지만 여인들의 환심을 얻는 일엔 통 재간이 없군.'
하종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안해. 하지만 꽃가지 몇 개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낼 필요는 없잖아?"
"흥, 꽃을 가엾게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 수가 있겠어요. 꽃
에도 생명이 있고 꽃도 아픔을 아는거라구요."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줘. 나도 글공부는 조금 한 사람이야. 꽃이 아름다운 미인이니 꽃
을 가엾게 생각할 줄 알아야 미인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법이지."
"오라버니는 항상 말뿐이죠. 그래 정녕 꽃을 가엾게 생각하고 있나요?"
"하지만 내가 크게 잘못한 건 없잖아?"
엽청청은 눈물이 글썽해서 울먹였다.
"물론 당신이 잘못한 건 없어요. 그저 내 팔자가 사나울 뿐이지요. 저는 의지할 데라고는 없
는 고아라 이 복숭아꽃처럼 가엾게 생각하는 사람도 보살펴 주는 사람도 없어요. 누구든지
꺾을 수 있고 짓밟을 수 있겠지요."
엽청청은 제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울기 시작했다. 하종은 애가 타서 엽청
청의 손을 잡아 주었다.
무림의 하종이 이렇듯 여인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는 게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매초풍은 한
심하다는 듯이 하종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엽청청이 부럽기도 했다.
잠시 매초풍이 시름에 잠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엽청청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매초풍은 깜짝 놀라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종이 복면을 한 두 명의 사내와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엽청청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복면의 사내는 시퍼런 칼을 지니고 있었는데 솜씨가 날렵하고 사나웠다. 하종은 이제 겨우
내상을 회복한 뒤여서 완벽하게 몸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는 쇠부채를 들고 사내들이
내리치는 공격을 막으며 자꾸 뒤로 밀리기만 했다. 복면의 사내는 하종의 내력이 시원치 않
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연신 묵직한 칼을 맘껏 휘둘렀다.
두 사내가 칼을 부리는 것을 지켜보던 매초풍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오혈궁의
오혈도법을 쓰고 있었는데 도대체 누구인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하종이 크게 꾸짖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엽 소저는 너희들의 궁주나 다름없거늘 이토록 무례하게 굴 수가
있느냐?"
하종도 그들의 정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우리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는 법. 우리의 궁주님이 엽청청을 좋아해서 잡아오라고 명령하
셨다!"
복면한 사내 중 하나가 낄낄거리며 지껄였다. 그러자 다른 사내가 덧붙였다.
"엽청청은 오혈궁 제자인데 배반을 했었다. 그래서 우리가 잡아가려고 하는데 네 놈이 무슨
상관이냐?"
그들이 하는 말에 화가 난 하종은 몸을 휙 날렸다. 두 사내가 칼을 치켜들며 하종을 찔렀다.
하종이 쇠부채로 간단히 막으며 반대쪽으로 내려섰다. 다시 사내들이 공격해 왔다. 하종이
옆으로 피하며 쇠부채를 들어 한 사내의 혈도 여덟 개를 한꺼번에 때렸다. 사내는 당황하여
황급히 칼로 부채를 막았다.
이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매초풍이 나섰다.
"하 공자님, 그간 별고 없으셨나요?"
하종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니 넌……?"
하종은 복면을 한 사내들이 매초풍의 졸개였다고 판단하고는 화를 버럭 냈다.
"철시, 그대가 오혈궁 궁주가 되었을 줄은 정말 몰랐는데?"
"오호호, 웃기지도 않는 말이군요. 내가 어떻게 오혈궁 궁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어요. 아
마도 내가 사방에 널려 있는 오혈궁 파의 졸개들을 끌어모아 다니는 줄 아나 본데 천만의
말씀이랍니다. 황제 노릇을 하면 했지 그런 너절한 일을 하고 다닐 내가 아니거든요."
하종은 매초풍에게 정신을 팔다가 그만 사내들의 칼에 당할 뻔했다. 하종이 몸을 급히 돌리
며 부채를 활짝 폈다. 하종은 다시 사내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매초풍이 한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하 공자, 이렇게 계속 싸운다면 도리어 하 공자 쪽에서 낭패를 보기 쉬워요. 만일 문제라도
생기면 엽청청은 어떻게 하겠어요. 하 공자는 이제 지친 것 같으니 물러서요. 청청이와의 교
분을 생각해서 내가 대신 나설 테니까."
그 말을 들은 복면의 사내가 매초풍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건방진 계집, 오혈궁 사람들을 얕잡아 보다니!"
"흥, 내가 누군 줄 알고 혓바닥을 놀리느냐? 내 이름을 들으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칠 녀석
들이!"
사내가 성큼 다가와 매초풍의 가슴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매초풍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날렵
하게 발을 올렸다.
"헉!"
사내가 공중으로 치솟더니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곤 일어서지 못했다. 다른 사내
는 기가 질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디를 맞았길래 늘어졌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때 하종이 사내의 옆구리에 있는 기문혈을 향해 부채를 뻗었다. 그 사내 역시 맥없이 쓰
러졌다.
처음 쓰러졌던 사내가 사타구니를 움켜쥐고는 벌벌 기었다.
매초풍이 웃음을 한바탕 터뜨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맛이 어떠냐?"
"그댄 누구요?"
사내가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사실 우리는 한집안이나 마찬가지지. 난 오혈궁에서 사저로 있었던 몸으로 강호에선 나를
철시라고들 부르지."
사내가 갑자기 전신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철시……!"
"이제 나를 알았으니 죽어도 원이 없겠지?"
매초풍이 사내의 가슴을 걷어찼다. 사내는 멀리 날아가 복숭아 나무에 부딪쳤다. 매초풍이
다른 사내에게로 눈길을 돌리자 하종이 막아섰다. 매초풍이 미소를 던지며 비아냥거렸다.
"하종, 오늘도 또 한 장 맞고 싶은가?"
"난 죽어도 좋다. 하지만 이 사내마저 죽인다면 사라진 엽 소저를 찾을 길이 없지 않소."
"그럼 엽 소저를 데려간 놈들이 따로 있다는 건가?"
매초풍이 깜짝 놀라 묻자 하종이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모두 네 놈이었는데 그중 두 놈이 엽 소저를 둘러메고 달아났소. 그러니 이 놈을 달래야
엽 소저의 행방을 알 수 있지 않겠소?"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이젠 늦었지 않아요."
"매초풍, 그대가 왜 엽 소저를 그토록 찾는지 모르겠군."
"난 지금까지 청청이를 친동생처럼 여겨 왔어요."
"말은 그럴듯하군. 그렇다면 왜 그녀를 미끼로 삼아 마귀할멈의 호감을 사려고 했었지?"
"닥쳐요. 허튼소리는 그만하구 어서 놈을 다그쳐 봐요!"
매초풍은 내심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엽청청과 자신이 친자매처럼 지낸
다고 말해 왔었다. 그런데 엽청청을 납치해 가다니 이건 자신을 업신여기는 일밖에 되지 않
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종이 사내를 일으켜 세우더니 복면을 벗겨 버렸다.
"어서 말해라. 놈들이 엽 소저를 어디로 끌고 갔지?"
사내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아주 뻣뺏한 태도로 나왔다.
"점잖게 이 어른을 놓아주지 못하겠느냐? 우리 궁주님이 찾아와 화를 내기 전에 어서 나를
놓아주어라!"
"너희들의 궁주? 그게 누구냐?"
"흥, 알려 줄 수 없다!"
하종은 당장 사내를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엽청청의 행방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종이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있는데 매초풍이 미소를 지으며 사내에게로 다가섰다.
"이런 놈들은 버르장머리부터 가르쳐 줘야 해요."
그녀가 사내의 오른팔을 비틀어 뒤로 들리며 윽박질렀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사내의 얼굴은 금방 사색이 되었다.
"우린 한집안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왜 나를……?"
"닥쳐라! 지금 누가 궁주 노릇을 하고 있으며 엽 소저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만 알려 준다면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
"그건 비밀이라 말해 줄 수가 없어요. 제발 나를……."
매초풍이 사내의 팔을 비틀었다.
"아악!"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사내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매초풍이 때를 놓치지 않고
으름장을 놓았다.
"성한 팔마저 부러뜨려 줄까?"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엽 소저의 행방을 알려 준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매초풍이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네 놈도 구음백골조라는 말은 들어 봤겠지?"
사내가 더욱 몸을 움츠리며 벌벌 떨었다.
"어디로 끌고 갔느냐?"
사내가 매초풍의 손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손에 맞으면 나는 죽겠지만 우리 오혈궁의 비밀을 누설하면 죽음보다 더 큰 처벌을 받
게 됩니다."
순간 매초풍의 장이 사내의 가슴에 무섭게 떨어졌다. 사내는 왈칵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매
초풍이 사내의 시체를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망할 놈의 자식!"
하종은 안타까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젠 엽청청의 행방을 알아낼 길이 없어졌기 때
문이었다. 설사 엽청청의 행방을 알고 쫓아간다 해도 공력이 회복되지 않은 이상 두 사내를
당해내기에 역부족일 것 같았다.
"철시, 만약 엽 소저를 정말 친동생처럼 여긴다면 그녀가 욕을 보기 전에 급히 뒤쫓아 구해
야 되지 않겠소?"
하종의 말에 매초풍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내가 쫓아가면 하 공자는 무엇을 하겠소?"
"난 돌아가 사람들을 모아야겠소. 개방의 제자들이 천하에 깔려 있으니 조만간 엽 소저를
찾을 수 있겠지요."
"좋아요. 그 따위 거렁뱅이들을 믿든지 말든지 난 상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누가 먼저 청
청이를 찾게 되나 봅시다!"
매초풍이 쌀쌀맞게 찬바람을 남기며 돌아서 걸어갔다.
하종은 빙그레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철시는 악독한 여인이긴 하지만 엽 소저를 찾아오고 보호하는 데는 제격이야!"
매초풍이 복숭아 숲을 빠져 나와 멀리 바라보니 맞은편 산기슭에 세 개의 그림자가 언뜻 보
이더니 사라졌다.
노란색 저고리에 분홍색 치마를 입은 것이 엽청청 같았다. 매초풍은 미끄러지듯 산을 내려
와 맞은편 기슭으로 달려갔다. 그 산등성은 보기와는 달리 가파롭고 덤불이 잔뜩 우거져 있
었다.
매초풍은 뛰어난 경공으로 아주 쉽게 그것들을 뛰어올랐다.
그녀는 곧 풀숲에 꽃신이 한 짝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엽청청의 꽃신임을 확신한 매
초풍은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짐작했다. 조금 더 걸어가자 꽃신 한 짝이 더 있었다.
매초풍은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그녀의 저고리와 치마가 찢어진 채 널려져
있는 게 보였다.
'이상하군. 저것들을 봐서는 엽청청이 혈도를 눌린 게 아냐. 왜 오혈궁 놈들이 그녀가 발버
둥을 치게 놔두었을까!'
곧 풀숲이 어지럽게 짓뭉개진 자리를 발견했다. 순간 매초풍은 엽청청이 사내들에게 욕을
보았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에게 욕보인 것처럼 수치심과 복수
심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매초풍은 주먹을 단단히 틀어쥐고 서둘러 산을 올랐다.
울창한 수림이 끝나고 헐벗은 바위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산마루가 나타났다. 매초풍은 집
채만한 바위 위에 뛰어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
다.
이때 바위 아래서 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댄 누군데 남의 뒤를 밟는 거지?"
그러나 그가 엽청청을 납치해 간 오혈궁 패거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매초풍은 경계를 하
며 은근히 딴청을 부렸다.
"여긴 경치가 참 좋군요. 저는 산구경을 하러 온 사람인데 거기는 이곳에서 뭘 하죠?"
매초풍이 바위에서 내려서자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까이 오지마. 여긴 어르신네 땅이니 함부로 넘보지 않는게 좋을 거야!"
매초풍은 더욱 의심이 들렸다.
"제가 말벗이라도 해주면 좋지 않아요?"
매초풍이 사내에게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사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가까이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사내가 칼을 뽑아 들며 눈을 한껏 부라렸다. 매초풍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주춤 물러섰다.
그리곤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게 진짜 칼인가요? 정말 소름이 끼치네요."
"이 칼은 매우 날카롭지. 한번에 목이 날아간다구.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이 칼이 용
서하지 않을 거야."
이때였다. 바위 뒤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터졌다.
"사람 살려요!"
그러자 사내가 당황하며 그쪽에 대고 소리쳤다.
"아우, 무슨 일이야? 어서 그 년의 입을 틀어막아!"
매초풍은 순간 엽청청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렸다. 매초풍이 공격할 태세를 취하자 사내가 달
아나며 소리 질렀다.
"큰일났다. 그 년을 구하러 사람이 왔어!"
그와 때를 같이하여 매초풍의 머리 위로 바위가 부서져 내렸다. 매초풍이 장을 날려 우박처
럼 쏟아지는 바위들을 쳐냈다.
이 틈을 이용해 사내들은 엽청청을 데리고 어디론가 또 달아나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분노
로 이를 악물고는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게 섰거라!"
사내와 매초풍 사이는 열 장 장도 차이가 났다. 사내들은 오솔길을 따라 울창한 수림 속으
로 들어갔다.
"서지 못할까. 내 용서하지 않겠다!"
매초풍이 막 경공을 써 쫓아가려고 할 때였다.
사내들이 수림 속에 있는 절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매초풍은 달리는
동작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장을 날렸다. 문이 산산조각 났다.
매초풍이 안으로 들어섰다. 거미줄투성이인 걸 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 절이 분명했다. 매초
풍은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조심 안으로 발을 옮겼다. 대청 안은 굴속같이 매우 어둡고 음산
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갑자기 제물상 위에 세워진 촛대에 불이 켜졌다. 양쪽으로 늘어선 나한들이 불빛을 받아 온
갖 얼굴을 드러냈다.
"누구 없느냐?"
매초풍이 호통을 쳤다. 순간 촛불이 꺼져 버렸다. 뒤를 이어 대청 문이 밖에서 잠기는 소리
가 들렸다.
매초풍은 화들짝 놀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나!"
대청 안은 쥐 죽은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실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하
여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매초풍은 다시 목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
"누가 감히 철시를 희롱하려 드는 게냐?"
그녀가 장을 날려 제물상을 두 동강 냈다.
이때 누군가 천장 위에서 코웃음을 날리는 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위를 올려다보던
매초풍은 깜짝 놀라 기절할 뻔하였다.
"앗!"
어두컴컴하고 우중충한 천장에는 새하얀 그림자가 박쥐처럼 너울너울 떠돌고 있었다. 그 그
림자는 삼단같이 산발을 한 채 얼굴은 해골을 닮아 창백했다. 정수리에서 흐르고 있는 피가
이마에 맺혔다가 매초풍의 발등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니, 넌 사람이냐 귀신이냐!"
매초풍이 잔뜩 겁을 먹고는 외쳐 댔다.
"크흐흐……."
그림자가 괴이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럴 때마다 핏방울이 연신 매초풍에게로 떨어졌다.
그 웃음 소리로 보아 여인이 틀림없었다.
매초풍은 오싹 소름이 끼쳐 뒤로 계속 물러섰다.
"매초풍, 그래 정말 나를 모르겠느냐?"
여인이 느닷없이 음산한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매초풍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요? 난 모르겠소."
"흥, 내가 네 년에게 나의 신공을 가르쳐 주었건만 넌 나를 배반했다. 그리고 나의 내력이
쇠잔한 틈을 이용해 구음백골조로 나를 죽였지."
그 여인은 매우 노한 기색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와 입에서 피가 떨
어져 내렸다.
순간 매초풍은 가슴이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당신은…… 마, 마귀할멈이란 말이오?"
매초풍이 더듬거리며 묻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마귀할멈의 혼이 붙은 귀신이다!"
매초풍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사부님, 제가 뭐라 죄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매초풍, 난 자네가 날 죽인 걸 탓하진 않는다. 난 좋은 시절을 이미 보낸 사람이니까. 허나
자넨 내 시신을 야산에 던져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게 했다. 그것이 한이 된다."
여인은 매우 춥다는 듯이 몸을 떨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춥다. 더 이상 내 혼백이 떠돌아다니게 하지 말고 어서 날 고이 묻어 다오."
매초풍은 봉당에 꿇어앉으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어댔다.
"제발 화를 내지 마세요. 이 제자가 반드시 사부님의 시신을 찾아내어 풍수가 좋은 명소에
모셔 드리겠습니다."
"좋다. 그래도 사부의 은공을 아는 계집이로구나. 날 죽인 것을 원망하지 않겠다. 자네가 날
죽이지 않았어도 난 올해를 넘길 수가 없는 몸이었거든."
여인은 박쥐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기를 멈추며 끼륵끼륵 한바탕 요란하게 웃어댔다.
"아니 무엇 때문에……?"
"우리 가문의 무공을 몸에 익히기만 하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게 되지. 하지만 정도(正道)가
아닌지라 공력을 깊이 익힐수록 사내들의 진기가 많아져 나중에는 자기 몸에 있는 선천적인
진기를 죽이게 된다네. 그때가 되면 스스로 팔맥(八脈)이 끊어져 죽게 된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우리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 때문에 죽었지. 그러나 공력을 깊이 들이지 못했기에 오십 세
까지는 살았다네. 그렇지만 난 날마다 열심히 공력을 쌓은 탓에 우리 가문 무공의 극에 이
르렀지. 결국 한창 좋은 나이에 죽게 될 수밖에 없었지."
그 말에 매초풍은 가슴이 섬뜩했다. 분명 자신도 천산 마귀할멈의 무공을 배웠다는 생각 때
문이었다.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요?"
매초풍이 조심스럽게 묻자 여인이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없다. 없구말구!"
여인은 놀라 커져 가는 매초풍의 눈을 뚫어지게 쏘아보더니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 역시 죽을 때가 멀지 않았다!"
"정……정말인가요?"
"자넨 젊은 나이에 사내들의 뇌수를 마시고 성기를 먹었을 뿐만 아니라 내공이 뛰어난 사내
들과 살을 섞기도 했지. 자네는 그네들의 양기를 한껏 빨아먹었겠지. 결국엔 밖으로부터 들
어온 진기가 자네의 진원을 능가하게 되고 자네는 진기를 잃고 말겠지. 젊은 나이에 죽는다
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자넨 그만큼 성공을 보지 않았는가?"
"제발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당신은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매초풍이 애가 달아 간청을 했다.
여인은 그런 그녀를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되물었다.
"매초풍, 내가 왜 자네에게 서둘러 무공을 전수했는지 알겠는가?"
"모……모릅니다."
"그건 내가 죽을 때가 임박했기 때문이었어. 내가 천산에서 중원 땅에 내려온 목적은 두 가
지였지. 하나는 원수를 갚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가문의 무공을 전수하는 거였어."
"알겠어요. 사부님은 가문의 무공이 사라지는 걸 무엇보다 가슴 아파하시는군요."
매초풍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궁리를 하였다. 잠시 후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사부님께서 저를 살리는 방법만 알려 주신다면 전 죽는 한이 있어도 사부님의 무공을
세상에 전하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러자 그 여인은 그녀의 의도대로 발끈하여 말을 가로챘다.
"그렇지 않으면 무공을 전수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사부님, 용서해 주세요. 이 제자는 좀더 살고 싶습니다."
"흥, 고약한 년 같으니라구. 만약 자네가 우리 가문의 무공을 마땅한 제자를 골라 전수하지
않는다면 당장 목을 비틀어 놓겠다!"
여인은 날카로운 손가락들을 활짝 펴 보이며 피투성이가 된 입을 놀렸다. 그 여인은 매초풍
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매초풍은 그 서슬에 간담이 써늘했으나 짐짓 큰소리를 치며 배짱을
부렸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저를 죽인다면 사부님의 무공은 여기서 끊어지고 마는 겁니다."
여인이 흠칫 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당초 내가 자네를 제자로 받은 게 잘못이었어."
"이 제자는 사부님의 명성을 욕되게 한 일이 없어요. 지금 강호에서는 매초풍이란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산천초목이 벌벌 떤답니다. 지금 이 매초풍을 깔볼 만한 사람은 별로 없어요."
매초풍이 실실 웃으며 건방지게 대꾸했다. 사실 그녀의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중원 땅
에서 이름난 적잖은 무림의 영웅들이 그녀의 무공 제물이 되었고, 그로 인해 이젠 '철시'란
이름만 들어도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칠 정도였다.
"내가 귀신이 되어서까지 너의 협박을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구나."
여인이 힘없이 중얼대자 매초풍이 더욱 우쭐해서 지껄였다.
"사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덕분이지요."
여인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가문의 무공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참는 도리밖
에는 없었다. 그 여인은 화를 삭이느라 한참 동안 매초풍을 노려보았다.
"알았으니 그만 지껄여라. 내 자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부님."
매초풍은 내심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여인을 향해 읍을 하였다. 여인은 한번 고개를 끄
덕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제는 자네가 내가 가르쳐 준 방법대로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런 방법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여인은 그녀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살짝 띠었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진기를 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지체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내공을 즉시 버려야 한다."
매초풍이 놀라 물었다.
"그건 스스로 자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군요. 무공을 버리게 되는 날엔 전 당장 죽게 됩니
다. 무공이 없어진 걸 알면 무림의 호걸들이 절 가만 놔두겠습니까?"
매초풍은 자신에게 원한을 두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
는 여인의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생각할수록 점점 더 의심이 들었다.
매초풍이 쌀쌀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저를 살리자는 게 아니라 죽게 만들려는 속셈이군요?"
"자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네."
여인이 낄낄거리며 웃어대자 매초풍이 못 참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뱉었다.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당신은 왜 써보지 않았죠?"
그러자 여인은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자네를 제자로 삼은 것을 후회하지 않아. 자네는 어쩌면 내 젊었을 때와 그렇게 닮았는
가? 그때 나도 무공을 익힌다면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 하지
만 무공에 도취되어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가 없었네. 이미 늦었다고 판단하고는 자네
에게 무공을 서둘러 전수한 거라네. 그런데 뜻밖에 난 자네의 손에 의해……."
"그게 정말인가요?"
"오호호호, 내가 왜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겠나? 아무튼 살고 싶다면 내공을 버리게나. 무공
을 단념하지 못한다면 삼 개월 안에 남의 진기가 범람해서 경맥이 하나씩 끊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죽게 될걸세."
매초풍이 놀라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인가요?"
"선배들의 말을 들으니 경맥이 끊어질 때는 천만 개의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고 또 스
스로 진기를 누를 수가 없어 쉽게 죽지도 못한다고 하더군. 무서운 시달림을 받아야 하는
거지."
그 말을 들으니 매초풍은 벌써 수많은 바늘이 가슴을 찔러대는 듯이 아프고 떨렸다. 겁에
질린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내공을 버리는 길밖에 없겠군요……."
"시달림을 받는 것보다 내공을 버리고 깊은 심산 속에 들어가 조용히 사는 것도 일종의 행
복이 아니겠는가?"
"지당한 말씀이에요.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 늘 위험하지만 평범한 자가 되면 사람들의 미움
도 덜 받게 되고……."
"결단을 내렸으면 실행에 옮겨야지."
매초풍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갈래의 진기를 동시에 운행시키기 시작했다. 한 갈래는 독
맥으로 다른 한 갈래는 임맥(任脈)으로 흘러 나와 서로 무섭게 교차했다. 서로 맞부딪치는
힘이 경맥으로 흩어져 나가면 내공을 모두 버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일단 진기를 두 갈래
로 나누어 교차시키는 것이 쉽지마는 않은 일이었다.
두 갈래의 진기가 체내에서 밀고 당기고 할 때 매초풍의 머리속에 또 한 생각이 고개를 쳐
들었다.
'오랜 숙원이던 천하 제일의 무공을 이제야 이루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왜 스스로 버리려
하는가? 인명은 재천이니, 차라리 사는 동안 천하 제일로 살아가리라.'
매초풍은 무림의 여왕으로 군림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어 흩어진 진기를 다시 단전에 끌어 모았다. 그리고는 후닥닥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며 소리쳤다.
"살고 죽는 일은 작은 일. 그러나 명성이 깨지는 것은 큰일이다! 여기서 한걸음만 더 가면
천하 제일로 군림할 수 있거늘 내 어찌 죽음이 두려워 뒷걸음질을 칠 수 있겠는가!"
"매초풍, 다시 생각해 보거라!"
여인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나 매초풍은 눈을 부릅뜨며 오히려 호통을 쳤다.
"마귀할멈, 난 이제 당신의 꼭두각시가 아니니 썩 사라지시오!"
"내 충고를 듣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아니 내가 반드시 데리고 갈테다!"
매초풍이 막 자리를 뜨려고 했다. 순간 매초풍의 시선으로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공중에 매
달려 있는 여인의 등뒤로 보일락말락한 두 갈래의 실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제야 매초풍
은 여인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매초풍은 부아가 치밀었으나 일단 계속 속고 있는 자세를 취했다.
"마귀할멈, 당신 가문의 무공이 끊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그렇게 해봐요!"
"좋다, 그럼 나를 원망하지 마라!"
여인이 손을 등뒤로 가져가더니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실을 풀었다. 그리곤 곧장 매초풍에
게로 덮쳐들었다. 매초풍은 짐짓 떨면서 외쳤다.
"제자에게 정말로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거예요?"
여인은 봉당에 내려서며 사납게 쌍장을 퍼부었다. 돌풍이 일며 봉당 안은 먼지로 자욱하게
뒤덮였다. 매초풍은 그러나 내심 한 가지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그 여인이 부리는
장법이 천산 마귀할멈의 것과 너무 닮아 있었던 것이다.
매초풍은 한껏 진기를 모아 최심장으로 공격을 막았다. 돌풍이 사방으로 홑어졌다. 두 장이
맞부딪치는 바람에 여인은 넉 장 정도 멀리 날아가 나한의 머리를 부수며 나동그라졌고, 매
초풍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매초풍이 겁에 질려 움츠려 든다고 판단한 여인은 몸을 일
으킴과 동시에 다시 장을 내밀었다.
매초풍은 재빨리 여인의 장을 피하며 여인을 꾸짖기 시작했다.
"대관절 누구길래 귀신으로 가장하여 사람을 놀리느냐?"
제24장 오혈궁과 천산 마궁
이때였다.
여인의 몸에 부딪쳐 머리가 날아갔던 나한의 뒤에서 웬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내와 여인이
섞여 있는 무리였는데 검과 칼로 무장을 한 상태였다. 그들이 매초풍을 둘러쌌다.
검은 색 긴 도포를 입은 네 명의 여인이 귀신을 행세했던 여인을 부축해 앉혔다. 그녀는 아
까 매초풍과 장을 주고받다가 충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매초풍에게는 그 점을 노출
시키지 않았다. 여인들이 그녀의 팔과 다리를 연신 주물렀다.
매초풍은 사내들 틈에서 엽청청을 납치해 간 사내들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네 놈들은 오혈궁 제자들이냐? 그런데 어찌하여 마귀할멈의 무공을 흉내내고 있느냐?"
매초풍이 묻자 검은 옷의 여인들의 도움으로 기력을 회복한 여인이 말했다.
"셋째, 이 가죽을 벗겨 주게나."
그러자 여인 하나가 그녀가 입은 횐 치마저고리를 벗겼다. 그 여인 역시 안에는 검은 색 치
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얼굴에 쓰고 있던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탈을 벗었다.
그러자 창백하고도 부드러운 선을 가진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넌 누구냐?"
매초풍이 윽박질렀다. 그러자 여인이 코방귀를 뀌며 욕설을 퍼부었다.
"스승을 죽인 계집이 뭐가 잘났다고 큰소리냐! 네 년은 마귀할멈 수하에 흥, 하 두 장군과
사대 사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겠지?"
순간 매초풍의 안색이 돌변했다. 천산 마귀할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자기 수하들 중에서
가장 믿음직하고 무공이 뛰어난 자는 흥, 하 두 장군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구혼사자, 집법
사자, 호기사자, 전신사자가 있는데 흥, 하 장군에 비하면 좀 약하지만 그래도 무서운 계집
들이라고 했었다.
매초풍이 넌지시 물었다.
"그대는 흥, 하 두 장군에 속하는가, 아니면 사대 사자의 한 사람인가?"
그러자 여인이 오만하게 대꾸했다.
"내가 바로 흥 장군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네 명의 자매가 사대 사자다. 매초풍, 오늘은 순
순히 무릎을 꿇고 죄를 비는 게 좋을 것이다. 이제 하 장군마저 도착하면 넌 큰 곤욕을 치
르게 될 것이다."
"흥 장군……, 오호호! 그토록 나를 신경 써주니 고맙군. 하지만 매초풍은 그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숙여 본 적이 없다."
그러자 흥 장군이 손을 흔들었다.
"오혈궁 형제들이여, 저 년을 잡아라!"
순간 칼을 쥔 사내들이 나타나 매초풍을 공격했다. 매초풍은 어째서 오혈궁과 천산 마궁이
한통속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내들은 모두 오혈도법을 쓰고 있었다. 매초풍은 그들이
쓰는 무공을 이미 도소정을 통해 익힌 터이고 후에 혼자 훈련을 쌓아 거의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매초풍은 그들의 칼이 정수리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쩍 피하면서 한 사내의 어깨를
부러뜨렸다.
"악!"
그 사내가 뒤로 고꾸라지자 다른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매초풍은 날쌘 동작으로 다시 공격
해 오는 사내의 뒤로 자리를 옮겨가 또 다른 사내의 검을 발로 걷어찼다.
"헉!"
그 검은 매초풍 앞에 서 있던 사내의 가슴에 정확히 꽂혔다.
매초풍은 검에 찔려 죽은 사내의 시체를 들고 방패로 삼았다. 사내들의 공격은 매번 시체에
막혀 버렸다. 그녀는 시체를 풍차처럼 돌리며 앞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오혈궁 제자들
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사내들이 흩어지자 매초풍은 시체를 던지며 몸을 날려 갈고리 손으로 한 사내의 머리를 움
켜잡으려고 했다. 구음백골조를 쓰려는 것이었다.
"아악!"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이 사내의 정수리에 박혔다. 매초풍은 사내가 넘어지기 전에 얼른 손
가락을 빼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매초풍은 네 명의 사내를 죽이고 한 사내에게는 중상을 입혔다. 나머지
아홉 명의 오혈궁 제자들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매초풍이 기고만장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 네 놈들 궁주에게 반드시 전해라. 엽청청을 내놓지 않으면 껍질을 벗겨 말려 죽
이겠다고!"
사내들은 문을 박차고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사내들이 힘을 합쳐 문
을 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들이 문틈으로 살펴보니, 몸집이 절구통처럼 커다란 여인이
양손으로 대문을 떠억 막고 서 있었다. 그녀는 다름아닌 호기사자였다.
"아홉 명의 사내를 당해내는 무서운 계집이로구나……."
한 사내가 중얼거리더니 외쳤다.
"어서 문을 여시오!"
호기사자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검은 색 삼각기를 꺼내 들었다. 삼각기에는 '영(令)'이라는
뻘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호기사자가 큰소리로 말했다.
"흥 장군의 명령이다. 그 누구라도 싸움터에서 도망친다면……."
그녀가 협박을 해대자 몇몇 오혈궁 제자들이 화를 냈다.
"도망을 치면 어쩌겠다는 게요?"
호기사자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내가 이 기를 이어받은 지도 사 년. 그동안 벌써 백삼십팔 명이 영을 어겼다가 징벌을 받
았지."
"대관절 무슨 징벌을 받는다는 게요?"
"그중 다섯은 우리 가문의 자매들인데 왼손을 잘렸지. 나머지 백삼십삼 명은 우리 가문 사
람은 아니었어. 가문 밖의 사람일 경우 죽여 버리지. 하지만 죽이는 방법에 있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어."
"목을 자르고 염통을 빼내고 목을 달아매고 생매장하고 기름 솥에 처박고……. 또 뭐가 있
겠소?"
"하지만 그뿐이 아니지.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는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쉰두 가지가 있지."
오혈궁 제자들은 바짝 긴장을 했다.
호기사자가 다시 협박 투로 말했다.
"그래서 명령을 어기지 말라고 충고를 하는 거라네. 그대들이 한사코 어긴다면……."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소?"
"과연 총명하군. 여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아쉽군."
"흥, 난 당당한 사내요."
"곰처럼 우둔한 사내지. 우리같이 총명하고 영리한 여인들은 무서운 징벌을 각오하고 도망
치는 일은 하지 않거든."
"잔말 말고 물러서시오. 우린 나가야겠소!"
한 사내가 문틈으로 칼을 휘저었다. 호기사자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날카로운 비수로 된
깃발의 끝을 그 사내의 목에 박았다. 사내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이 광경을 본 매초풍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깃발은 천산 마귀할멈의 자정신침처럼
순식간에 신비한 병장기로 둔갑했던 것이다.
가장 무공이 뛰어난 사내가 죽자 나머지 사내들은 모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우린 절대로 도망치지 않겠소!"
사내들이 변명을 하는데 그중 한 사내가 좌우를 둘러보더니 불만을 털어놓았다.
"젠장, 우리가 저 계집들의 종 같군. 우리 오혈궁과 천산 마궁은 평등하게 손을 잡고 철시
년을 죽이려고 했는데 우리를 이렇게 다그치니……. 젠장, 우리 궁주님의 체면을 봐서라도
우릴 이렇게 대접하진 못할 것이오!"
그러나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법사자가 날아와 단칼에 그의 가슴을 난도질해 버렸
다.
"감히 우리들을 깔보다니!"
사태가 이렇게 되자 더 이상 군말을 늘어놓는 사내가 없었다.
흥 장군이 사내들을 응시하며 호통을 쳤다.
"어리석은 사내 놈들 같으니. 어서 철시를 잡아죽이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우린 철시의 적수가 되지 못해서……."
한 사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리자 흥 장군이 눈을 부라렸다.
"만약 철시를 죽이지 못하겠다면 너희 놈들부터 저승길로 가게 될 것이다!"
호기사자가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전신사자가 명령을 대신 하달했다.
"흥 장군님의 명령이다. 오혈궁 형제들은 철시를 죽여라!"
집법사자가 번뜩이는 장검을 휘두르는데 구혼사자만이 묵묵히 서 있었다.
일곱 명의 오혈궁 제자들은 어차피 죽게 된 목숨이라 여기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들이
다시 매초풍을 에워쌌다.
흥 장군이 흐뭇해서 혼잣말을 흘렸다.
"저 일곱 명의 사내들이 배수진을 치고 달려들면 매초풍을 지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저
년이 지친 다음 우리 사대 사자가 동시에 덮쳐들면 아무리 나는 재간이 있어도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매초풍은 그런 흥 장군의 심중을 꿰뚫고 있었다. 매초풍이 보란듯이 사내들을 향해 장을 날
렸다. 사내 하나가 가슴에 장을 맞고는 크게 나동그라졌다. 여섯으로 줄어든 사내들이 동시
에 달려들었다. 매초풍은 다시 몸을 날리며 종횡무진 사내들의 머리 위에서 무공을 펼쳤다.
"간다!"
매초풍의 몸에서는 최심장과 구음백골조가 자유자재로 솟구쳤다. 그럴 때마다 사내들은 피
를 뿜으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사내들이 모두 쓰러졌다. 겨우 살아 남은 한 사내는 이미 폐
인이 되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흥 장군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사대 사자를 향해 말했다.
"모두들 저 년의 무공을 지켜보았겠지?"
사대 사자 중에서 오로지 구혼사자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장군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
다.
"구혼사자, 넌 얼마나 파악했는가?"
"열 개라면 네 개쯤 파악했소이다."
흥 장군이 난색을 지었다.
"어서 철시 년을 죽여라. 필요하다면 나도 우리 가문의 퇴공으로 도울 것이다!"
사대 사자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매초풍에게로 달려들었다. 집법사자는 검을 들고 호기사
자는 삼각기를 들었다. 전신사자는 이름모를 암기를 들고 나섰는데 구혼사자가 나중에 꺼내
든 것은 오나라의 갈고리였다. 그것은 구혼사자의 얼굴처럼 푸른 빛을 띠고 있었는데 소름
이 돋았다.
갈고리를 쥔 구혼사자를 노려보는 매초풍의 눈이 예리한 빛을 발했다. 매초풍은 그녀가 사
대 사자 중 무공이 가장 뛰어날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사대 사자의 우두머리는 호기사자
였다. 호기사자가 삼각기를 흔들며 지휘를 했다.
"자, 저 년을 슬슬 죽여 주자!"
사대 사자들이 공격해 왔다. 천산 마귀할멈의 수하에서 익힌 무공들이라 만만하지가 않았다.
매초풍은 병 장기들을 날렵하게 피하며 그들의 무공을 면밀하게 살폈다. 허점을 노려 한 사
람씩 쓰러뜨릴 계산이었다.
이때 전신사자가 두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새까만 철주를 날렸다. 그 때문에 매초풍은 숨을
돌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철주는 매초풍의 몸으로 끊임없이 날아들어 마치 수백 명이 한
꺼번에 공격해 오는 듯했다. 매초풍이 몸을 돌리며 철주를 피했다. 철주에 맞으면 그대로 절
명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매초풍은 최심장을 가까이 있던 호기사자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순간 집법사자의 장검이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검을 밀며 오른손으로 장을 날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혼사자의 갈고리가 매초풍의 종아리를 걸려고 했다.
전신사자가 매초풍의 두 눈과 가슴팍에 있는 전중혈을 겨누고 철주 세 발을 쏘아댔다. 매초
풍은 살짝 다리를 들어 갈고리를 피하고 그 반동으로 그대로 왼쪽으로 몸을 날려 철주마저
피했다.
사대 사자의 포위망을 뚫고 나온 매초풍이 깔깔 웃어댔다.
"오호호호, 사대 사자도 이름뿐이군!"
철주가 다시 바람을 가르며 매초풍에게로 쏟아졌다. 독이 묻어있는 철주라 손으로 막을 수
는 없었다. 매초풍은 사방으로 몸을 날리며 피할 수밖에 없었다.
구혼사자가 앞장서 쫓아왔다. 번뜩이는 갈고리가 가슴을 향해 뻗어오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
어깨를 잡으려 했다. 매초풍은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뒤에는 호기사자가 삼각기를 틀어쥔
채 그녀를 노리고 있는 판국이었다. 매초풍이 갈팡질팡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전신사
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철주 다섯 개를 날렸다. 매초풍의 머리와 어깨 그리고 앞가슴과
두 다리를 겨냥
한 것이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매초풍은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
'이젠 끝장이구나!'
그런데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매초풍에게로 발사된 철주가 갑자기 방향을 틀면서
나한들의 얼굴을 때려부셨다. 뿐만 아니라 갈고리와 삼각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이 불어온 듯싶었다.
흥 장군과 사대 사자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죽을 고비를 넘긴 매초풍
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벌어진 일은 바로 매초풍의 뛰어난
무공을 실은 독룡은편이 바람을 갈랐던 것이다.
그녀는 사실 자신이 없었다. 독룡은편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은 당할 것이라 여겼었다. 그런
데 위험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
해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구혼사자의 갈고리였다. 구혼사자는 갈고리를 중간에 멈추었던 것
이다. 그러나 구혼사자가 일부러 갈고리를 멈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의 무공이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매초풍은 위기에서 벗어난 것만은 사실이었다. 사대 사자가 얼빠진 사람들처럼 서
있는데 매초풍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룡은편을 휘둘러 그들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전
신사자가 황망히 피하는데 채찍이 바람을 일으키며 철주를 넣은 주머니를 채갔다. 철주 주
머니는 대청 정면에 서 있는 여래불상 쪽으로 날아가 불상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정신을 차린 구혼사자와 호기사자 그리고 집법사자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철주 주머
니를 빼앗긴 전신사자는 잔뜩 약이 올라 먼저 매초풍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얏!"
매초풍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독룡은편을 휘둘렀다. 동시에 전신사자를 향해 구음백골조를
뻗었다. 전신사자는 점을 집어먹고는 옆으로 몸을 굴렸다. 하지만 매초풍의 팔은 더욱 늘어
나 그의 오른쪽 어깨를 움켜잡았다. 순간 전신사자의 오른쪽 어깨는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
처럼 다섯 군데나 살점이 뜯어지고 피가 뚝뚝 흘렀다.
그래도 전신사자는 날렵한 동작으로 얼른 몸을 돌려 다행히 어깨를 잃어버리는 일은 모면했
다. 전신사자가 신음을 삼키며 얼른 혈도를 눌러 지혈을 했다.
전신사자가 주춤하자 흥 장군이 발을 세게 구르며 꾸짖었다.
"정신을 차려라! 철주까지 빼앗겼으니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
흥 장군의 말대로 철주 주머니를 빼앗은 매초풍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구혼사자가 전신
사자 대신 나서며 매초풍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구혼사자는 화살처럼 몸을 곧게 펴고 갈고
리를 뻗으며 매초풍의 허점을 노렸다. 매초풍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룡은편으로 맞섰
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집법사자의 검을 막았다. 하지만 구혼사자가 너무도 사납게 덮쳐
들어 그들을 공격할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뒤이어 사방에서 사대 사자가 한꺼번에 공격을 했다. 매초풍은 다시 뒤로 조금 물러서며 기
회를 엿보기로 했다.
"철시 이 년,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구혼사자의 말소리 뒤로 번뜩이는 갈고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순간 매초풍이 얼른 몸을 낮추며 그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어헉!"
구혼사자의 팔목이 부서졌다. 동시에 매초풍이 채찍을 휘둘렀다. 집법사자와 호기사자가 물
러서자 그녀는 아직 잡고 있던 구혼사자의 가슴을 발로 차버렸다.
구혼사자가 바닥으로 굴렀다. 매초풍은 채찍으로 집법사자와 호기사자가 다가서지 못하게
하면서 구혼사자의 가슴과 등을 계속 짓밟았다. 구혼사자는 안간힘을 다하여 이리저리 몸을
굴려 매초풍의 공격을 피했다.
"지독한 년!"
매초풍의 입에서 욕설이 터졌다. 그녀가 다시 구혼사자를 걷어차려고 했다. 순간 번개같이
날아든 다리 하나가 그녀의 정강이를 세게 찼다. 매초풍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흥 장군이었
다. 이 틈을 이용해 구혼사자가 벌떡 일어섰다.
"흥 장군께서 구해 주신 은공에 감사드립니다!"
구혼사자가 읍을 하며 떨어진 갈고리를 다시 주워 들었다.
흥 장군은 지금 다리의 통증 때문에 오금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매초풍과 서
로 다리를 부딪쳤을 때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매초풍은 <구음진경>에 있는 외문공을 익혔
기에 아픔을 몰랐다. 그저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채인 느낌 정도였다. 하지만 흥 장군은 뼛
속까지 파고드는 통증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흥 장군은 한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만약 지금 매초풍
이 달려든다면 꼼짝없이 당할 위기였다. 하지만 매초풍은 공격하지 않고 흥 장군을 노려보
기만 했다. 매초풍은 흥 장군의 무공을 은근히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대 사자는 흥 장군 옆에 서서 악의에 찬 눈길로 매초풍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매초풍은 속으로 생각했다.
'세 놈이 부상을 입었지만 그래도 항복을 받아내려면 더 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혹시 더
무서운 놈들이 달려들지도 모르니 어서 방어책을 마련해야겠군!'
한편 흥 장군은 겨우 통증이 잦아들자 슬그머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안심을 한 흥 장군
이 비로소 매초풍에게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철시, 오늘은 승부가 나지 않는데 훗날 다시 겨루어 보는 게 어떻겠소?"
매초풍은 놀라지 않을 슬 없었다. 왜 갑자기 흥 장군이 저자세로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흥 장군의 속셈이 있는 것 같아 매초풍이 냉소를 던졌다.
"흥 장군은 참으로 총명한 분이시구려. 싸움에 지게 되니까 슬슬 꼬리를 뺄 꾀를 부리고 있
군요. 세상에 어디 그처럼 쉬운 일이 있겠소?"
구혼사자는 과묵한 성미지만 무공은 가장 뛰어났다. 매초풍이 빈정거리자 구혼사자가 목소
리를 높였다.
"매초풍, 우리가 부상을 입었다고 너를 두려워하고 있는 줄 아느냐? 나는 왼손으로도 얼마
든지 갈고리를 다를 수 있고 너를 간단히 죽일 수도 있다."
"그럼 그 왼손으로 사람의 혼백을 낚아채는 재간을 한번 보여줄 수 있어요?"
매초풍이 빈정거렸다. 홍 장군이 대신 나섰다.
"철시, 네가 천산의 마귀할멈을 살해한 이상 그 원수는 꼭 갚고야 말겠다. 하지만 오늘만은
다른 급한 일이 있어 너와 다투고 싶지가 않다. 자, 가자!"
흥 장군이 사자들을 데리고 대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러니 매초풍이 그들을 보낼 리 만무였다. 그녀는 훌쩍 몸을 날려 문 쪽을 막아섰다.
"오혈궁 제자들을 막은 이상 너희들 역시 나갈 생각을 말아라! 만약……."
"만약 어쩌겠단 말이냐?"
호기사자가 참지 못하고 다그쳤다. 매초풍이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너희들이 꿇어앉아 무릎으로 기어 나간다면 몰라도!"
"뭣이, 네 년은 정말 안하무인이로구나!"
호기사자가 버럭 화를 내자 매초풍이 깔깔 웃어댔다.
"오호호호, 그럼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들어 보겠어요?"
"어서 말해 봐라."
"무릎걸음으로 나가는 것이 싫다면 너희들을 하나씩 때려죽인 다음 짐꾼들을 시켜 메고 나
가는 방법이다. 어서 선택하라!"
흥 장군은 크게 노했다. 흥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자들이 매초풍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매초풍이 여유롭게 웃었다.
"이 년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독룡은편을 뽑아 들고 휘어쳤다. 채찍은 구혼사자와 호기사자 그리고 집법사자의 종아리를
쳤다. 다시 회오리를 일으키며 흥 장군과 전신사자의 상체를 공격했다.
흥 장군은 처음 매초풍과 싸울 때 팔목을 다쳤고 전신사자는 한쪽 어깨가 상했기에 채찍을
막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구혼사자와 호기사자 그리고 집법사자가 여전히 공중을 날아다
니며 매초풍을 공격했다.
매초풍의 채찍은 쉬지 않고 그들을 향해 원을 그리고 또 일직선이 되어 창처럼 뻗어 갔다.
그럴 때마다 사자들은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움직였다. 그런데 매초풍의 채찍에 구혼사자의
갈고리가 걸리고 말았다. 구혼사자는 갈고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매초풍이
채찍을 힘껏 잡아당겨 구혼사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아악!"
순간 매초풍이 구혼사자의 목을 뜯어냈다. 구혼사자가 맥없이 쓰러졌다.
매초풍이 구혼사자의 멱살을 잡는 틈을 이용해 흥 장군과 전신사자는 허둥지둥 대문으로 뛰
어갔다. 매초풍이 축 늘어진 구혼사자를 팽개치며 뒤쫓았다.
"어딜 도망치느냐?"
그러자 집법사자와 호기사자가 매초풍의 앞을 막았다.
"흥 장군님, 우리를 위해 복수를 해주세요!"
그녀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그 말을 들은 매초풍이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더러운 년들, 제법 의협심 있는 척하고 있군!"
다시 채찍이 돌개바람을 일으켰다. 채찍 바람에 장검과 삼각기가 휘감겨 멀리 날아갔다. 두
사자는 병장기를 잃어버린 채 맨손으로 덮쳐들었다. 매초풍이 오만하게 서 있다가 두 사자
의 가슴을 향해 장을 안겼다. 최심장이었다. 최심장을 얻어맞은 두 사자는 뒤로 넘어지지 않
으려고 버둥거리다가 도리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면서 매초풍의 두 다리를 끌어안았다.
"이런!"
매초풍이 두 사자를 떨치려고 했으나 그녀들은 죽을 힘을 다해 물고늘어졌다. 매초풍이 회
심의 미소를 짓더니 구음백골조를 두 사자의 정수리에 박았다. 비로소 두 사자가 널브러졌
다.
두 사자와 싸우는 사이 흥 장군과 전신사자는 멀리 달아났다.
매초풍이 채찍을 거두고는 뜨락을 서성거렸다. 주변의 경치는 그런대로 좋았지만 신전과 선
방은 꽤나 초라해 보였다.
매초풍은 천산 마귀할멈이 무공을 전수해 주던 모습을 그려 보며 천천히 뒷뜨락에 이르렀
다.
그때 바로 이곳에서 천산 마귀할멈은 변청교와 혈투를 벌이지 않았던가. 천산 마귀할멈은
천마해체대법으로 변청교를 물리쳤지만 스스로 자기 몸을 훼손시켰고 변청교는 탈명한추를
영영 잃고 말았다.
그런 천산 마귀할멈을 매초풍은 구음백골조로 죽였던 것이다. 매초풍은 지금 후회하고 있었
다. 구음백골조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회의가 가득 몰려왔다. 구음백골조만 펼치지 않았다
면 흥 장군은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천산 마귀할멈을 죽였다는 사실조차도 말이
다. 그랬더라면 흥 장군은 천산 마귀할멈이 변청교에게 당한 거라고 판단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구음백골조만 쓰지 않았다면 변청교 역시 변홍의가 그녀의 손에 죽었다는 사
실을 영영 알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매초풍은 한숨을 내쉬었다.
"흐흐흐……."
이때 스산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매초풍이 고개를 돌려 보니 괴상하게 생겨먹은 물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눈썹도 없고 코도
없는데 눈은 애꾸였다. 또 다른 한 눈은 눈꼬리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이마에서 입까지 세
갈래의 깊은 상처가 비스듬히 지나고 있었는데 마치 얼굴에 세 마리의 독사를 달고 다니는
듯했다.
그러나 옷차림만은 아주 화려했다. 부드러운 녹색 비단 장옷에 허리에는 옥대를 두르고 있
었다. 칼자루에 번쩍이는 금은 보석으로 수놓은 장검이 돋보였다.
"그대는 누군가?"
매초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매는 나를 몰라본다는 건가?"
매초풍은 난감하기만 했다. 목소리는 귀에 익었지만 이런 추물을 어디서 보았는지 전혀 기
억나지 알았다.
"내 꼴이 이 모양이니 어찌 알아볼 수 있겠나? 하지만 난 그대와 철천지 원수를 맺은 사람
이지. 바로 여혈의다!"
매초풍이 깜짝 놀라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여혈의라구!"
여혈의는 동굴에 떨어져 죽지 않았던가. 매초풍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휘둥그래진 그
녀의 눈을 쏘아보던 여혈의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여혈의의 얼굴은 원래 이렇지가 않았지. 하지만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 기억해야
해! 난 그때 죽지 않고 이런 상처만을 입고 살아났다."
"그 지옥과도 같은 동굴에서 어떻게 살아날 수가 있었던 말인가?"
"지금까지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헌데 요즘 난 처음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어렵
겠지만 사매의 도움을 얻었으면 하네."
"사형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야겠지요."
"내게는 원수가 하나 있지. 세상 사람들은 그를 철시라고 부른다네. 난 철시라는 년을 죽여
야 하네. 그런데 그 방법을 모르겠어. 그러니 사매가 좀 가르쳐 주게나."
매초풍은 차가운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그의 태도에, 더군다나 자기를 잡아죽이려 이제
껏 별러 온 사람이라 느끼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하지만 그녀는 입가에 냉소
를 띠며 비아냥거렸다.
"미안해서 어쩌죠. 세상에서 철시를 죽이는 방법은 전혀 없답니다."
"하하하, 과연 철시는 철시로구나!"
여혈의가 웃음을 터뜨리며 매초풍을 향해 장을 날렸다. 동시에 사방에서 화려한 복장을 한
사내들이 칼을 쳐들고는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오혈궁 제자들이 분명했다. 잿더미가 되었던
오혈궁이 다시 강호에 나타난 것이었다.
여혈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도 복수를 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좀 거친 방법이긴 하지만 효과는 있거든."
순간 그가 손을 저었다. 그러자 삼십여 명의 제자들이 가슴 앞으로 칼을 세우더니 한걸음씩
다가들었다.
여혈의가 으름장을 놓았다.
"매초풍, 너의 무공이 황약사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서른여섯 명의 고수가 한꺼번에
부리는 난도질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매초풍도 냉소로 받아쳤다.
"흥, 천산 마귀할멈도 나를 죽이지 못했다. 전진칠자도 또한 너의 누이인 여소교 역시 나를
죽이지는 못했어. 여혈의, 너는 오혈궁에서도 나를 이기지 못했고 오늘 또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때였다. 매초풍을 향해 낯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철시, 네 년도 죽을 때가 되었다!"
흥 장군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데 뒤에 전신사자가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
를 또 몸집이 우람한 여인 하나가 걸어 나왔다. 절구통처럼 아주 뚱뚱한 여인이 매초풍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흥 장군, 바로 저 년이오?"
"그렇소 하 장군. 저 년이 구혼사자, 집법사자 그리고 호기사자를 죽였으니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매초풍이 그들의 말사이로 끼여들었다.
"그대가 바로 하 장군이오? 반갑소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통돼지처럼 생겼나요?"
평소 뚱뚱하다는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하던 하 장군은 부아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
"매초풍, 네 년을 당장 조각내 죽여 주겠다!"
여혈의가 슬쩍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하 장군, 고정하십시오. 저게 바로 철시의 격장법이라는 겁니다. 저 년의 약은 꾀에 속아
우리의 계획을 망치기 쉬우니 주의해야 합니다."
하 장군이 큰소리를 쳤다.
"걱정 마시오. 난 절대로 저 년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소!"
매초풍은 어떻게 해서 여혈의가 천산 마궁의 여인들과 손을 잡았는지 궁금했다.
"그대는 천산 마궁과 손을 잡고 날 죽일 생각인가?"
여혈의가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난 네 년이 얼마나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 그래서 이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생각으로
다섯 개의 구멍이 뚫린 마귀할멈의 해골을 보여주었던 거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날 잡기 위해서 수작을 부렸던 게로구나!"
"그렇다. 우린 네 뒤를 밟았고 네가 엽청청을 구하러 올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엽 소
저를 납치해 온 것은 또 다른 까닭이 있지."
"기껏해야 사내 욕심을 채우려는 수작이었겠지."
"사실 난 엽 소저를 좋아했다. 네 년이 남의 일에 방해만 놓지 않았다면 엽 소저는 벌써 내
게로 시집을 왔을 것이다!"
"네 몰골을 보면 당장 도망을 칠 텐데 무슨 소리냐?"
"그건 엽 소저가 결정할 문제다. 난 오혈궁 궁주로 추대되었고 머지않아 강남 땅에 명성을
떨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엽 소저에게는 오히려 영광이 아니겠는가?"
여혈의가 애꾸눈을 실룩거리더니 손을 높이 쳐들었다.
"형제들이여, 저 년을 죽여라!"
그러자 사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매초풍도 장을 날리며 사내들과 맞섰다. 공중으로 피
분수가 터지면서 몇몇 사내들이 나동그라졌다. 동시에 매초풍의 독룡은편이 바람을 갈랐다.
순식간에 일곱이 죽고 네 명의 사내가 부상을 당했다.
매초풍은 내력을 운행시키며 독룡은편을 연신 후려쳤다.
"아악!"
"으헉……."
오혈궁 제자들이 차례대로 쓰러져 갔다. 다시 매초풍의 발 아래로 스무 명이 넘는 시체가
쌓였다. 다른 제자들은 그만 겁을 집어먹고는 벌벌 떨기만 했다.
여혈의가 무섭게 호통을 쳤다.
"도망치는 자는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자 제자들은 다시 매초풍을 향해 죽기 살기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비명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혈궁 제자
들의 수는 더욱 줄어만 갔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하 장군이 실눈을 만들며 외쳤다.
"여 궁주, 정말 실망이오. 철시를 죽이기 위해 그대와 또 더러운 사내들과 잠시 손을 잡았는
데 결과가 이게 뭐요?"
하 장군이 여혈의를 크게 꾸짖었다. 그러자 흥 장군이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집안끼리 싸우면 어쩌겠다는 게요?"
여혈의와 하 장군은 이 말에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는 매초풍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매초풍
은 지금 내력을 꽤 소모한 상태였다. 그 낌새를 눈치챈 여혈의가 하 장군을 급히 돌아보았
다.
"하 장군, 저 년이 숨을 돌리기 전에 합세하여 쓰러뜨려야겠소!"
"흥, 여 궁주는 참견 마시오. 내가 한번 겨루어 보리다. 저 년이 무슨 재간으로 마귀할멈을
죽였는지 내 직접 알아보고 싶소!"
하 장군이 훌쩍 몸을 날리더니 장을 날렸다. 그 장을 보고 있던 매초풍은 속으로 감탄을 했
다. 매초풍도 도화도 무공의 하나인 낙영신검장을 쓰기로 작정했다.
두 사람이 공중에서 거리를 둔 채 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회오리바람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흙먼지를 날렸다. 점점 장력이 가해지면서 바위가 부서지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갔다.
하 장군은 육중한 몸에 비해 경공이 뛰어났다. 그녀가 다시 매초풍을 항해 날아들었다. 매초
풍은 무공으로는 상대를 누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슬쩍 진기를 운행시켜 두 장에
모았다. 그리곤 하 장군이 가까이 왔을 때 최심장을 날렸다.
전혀 예상을 못했던 하 장군은 반사적으로 장을 날렸다. 두 장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순간
하 장군은 장에 밀려 오른팔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때 매초풍이 두 번째 장을 날렸다. 하
장군이 다시 왼팔로 막았지만 굉음과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힘이 대단하군!"
하 장군은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기를 운행시켜 아픔을 잠재웠다.
이때 매초풍의 세 번째 장이 날아들었다. 하 장군은 이번에는 슬쩍 몸을 날려 피했다. 매초
풍이 달려들며 다시 장을 날렸다. 하 장군은 이번에도 몸을 굴려 매초풍의 돌풍을 피했다.
"어림도 없다!"
매초풍이 악을 쓰며 쌍장을 날렸다. 하 장군이 도망칠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통돼지 같은 년아, 이젠 각오해라!"
매초풍이 독살스럽게 웃으며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제25장 사라진 흑풍쌍살
하 장군은 이제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내력을 운행시켜 역시 쌍장으로 응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력으로라면 하 장군은
매초풍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흥 장군과 천산 마궁의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서 쭉 지켜보던 여혈의가 순간 날아오르며 매초풍 뒤통수에 있는 옥침혈을 향해 칼을
뻗었다. 그 역시 내력 싸움에서 하 장군이 밀린다는 것을 알고는 뛰어든 것이었다.
매초풍은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에 재빨리 몸을 옆으로 틀었다.
"여혈의, 너도 죽고 싶으냐?"
매초풍이 윽박지르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여혈의가 하 장군을 돌아보며 외쳤다.
"괜찮소?"
"여혈의 당신이 나를 구해 주었군요. 고맙소이다."
하 장군은 숨을 헐떡이며 인사를 하고는 얼른 몸을 추스렸다.
그러자 여혈의가 매몰차게 면박을 주었다.
"흥 장군을 구한 게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그 말에 하 장군은 무안해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녀는 곧 여혈의의 의도를 깨달았는지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매초풍과 열 합 이상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하 장군과 여혈의밖에는 없었다. 그러
므로 둘 중 하나라도 부상을 입거나 죽는다면 모두 죽음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홍 장군이 나서 둘의 입장을 일깨워 주었다.
"하 장군과 여혈의, 당신들이 손을 잡고 대처하지 않으면 매초풍에게 당할 것이오!"
하 장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혈의를 건너다보았다.
"우리 함께 저 철시 년을 칩시다!"
여혈의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하 장군, 매초풍의 가장 무서운 재간이 무엇인지 아시오?"
"물론이지. 저 년의 장기인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은 무림의 으뜸가는 무공이지."
"그렇다면 구음백골조와 쬐심장을 누르는 방법을 알고 있소?"
하 장군은 한참 두 눈을 슴벅거리며 궁리를 하더니 머리를 가로 저었다.
"하도 사악한 무공이라 꺾을 만한 방법이……."
이때 그들의 말을 들은 매초풍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끼여들었다.
"여혈의, 내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을 꺾을 생각을 하다니, 어디 한번 그 솜씨를 보여주시오!"
여혈의가 쌀쌀하게 웃었다.
"두 무공을 꺾는 방법은 모르지만 아무튼 나의 칼은 네 년의 무공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
다!"
여혈의가 재빨리 하 장군을 돌아보며 외쳤다.
"내 말뜻을 알겠소?"
하 장군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명령했다.
"내 병장기를 가져와라!"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네모 반듯한 검은 색 비단함을 두 손에 받쳐들고 나왔
다. 하 장군이 함을 열고 그 안에서 동그랗고 바깥 쪽에 날이 서 있는 병장기를 꺼냈다. 빛
이 찬란하고 꽤나 묵직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건 무슨 병장기요?"
여혈의가 의아해 하며 묻자 하 장군이 왼손을 쳐들었다.
"이건 월환(月環)인데 예리하고 날카로워서 창칼 대신으로 쓰이는 거지."
그리고 또 오른손을 들면서 굴을 이었다.
"또 이것은 일환(日環)인데 무게가 열네 근 일곱 냥이라 일단 휘두르면 큰 바위도 박살을
낼 수가 있소!"
여혈의가 반색을 했다.
"그럼 일환으로는 최심장을 치고 월환으로는 구음백골조를 칠 수 있겠군요. 게다가 나의 칼
까지 있으니 저 철시란 년은 이제 지옥으로 가는 일만 남았군요."
여혈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 장군이 일환으로 매초풍의 얼굴을 치면서 월환으로는
명치를 겨냥했다. 여혈의도 함께 공격해 왔다.
매초풍이 뒤로 물러서며 장을 날렸다. 세 사람은 한데 어울려 다시 돌풍을 일으켰다.
십여 합을 싸우고 나자 성미가 급한 하 장군이 씩씩거렸다.
하 장군은 일환과 월환을 번갈아 앞으로 내밀며 매초풍을 치려고 했다. 그때마다 매초풍은
몸을 날렵하게 피하며 장을 날렸다. 그러나 하 장군의 일월쌍환이 예리한 병장기라 손으로
잡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번엔 용서없다!"
하 장군이 눈에 불을 켜며 달려들었다. 매초풍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 장군이
막 일환을 뻗으려고 할 때였다. 매초풍이 옆으로 슬쩍 몸을 돌리더니 손을 길게 뻗어 하 장
군의 손목을 잡았다.
여혈의가 칼을 휘둘러 하 장군을 구하려고 했다. 매초풍은 발로 여혈의의 공격을 막는 동시
에 하 장군의 가슴을 움켜쥐려고 했다. 매초풍의 왼손은 어느새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었
다. 하 장군이 질겁을 하며 일환을 던져 버리고 몸을 날려 피했다. 구음백골조에 겁을 먹었
던 것이다.
매초풍이 떨어진 하 장군의 일환을 집었다. 순간 여혈의가 달려들었다. 매초풍은 일환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여혈의는 자신의 실력만큼 칼을 쓰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매초풍은 무작정 날뛰는 여혈의에게서 슬쩍 물러서며 일환으로 재간을 한차례
부렸다. 그것을 본 여혈의는 속으로 적이 놀랐다.
하 장군이 우람한 몸을 뒤뚱거리며 다시 달려들었다. 월환으로 매초풍의 얼굴을 가격하면서
오른손으로 그녀의 단전을 찔렀다. 매초풍은 미처 하 장군의 오른손을 의식하지 못했다.
"헉!"
매초풍이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돌렸다. 순간 월환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렇다
고 당하기만 할 매초풍이 아니었다. 그녀는 일환으로 하 장군의 월환을 막으며 오른발로 하
장군의 오른쪽 팔을 걷어찼다. 하 장군도 뒤질세라 맞서자 매초풍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연
달아 양발로 공격했다.
'음…….'
싸움을 지켜보던 흥 장군은 여혈의와 하 장군의 힘으로는 매초풍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
닫기 시작했다. 흥 장군이 명령을 내렸다.
"자매들이여, 어서 나가 저 년을 잡아라!"
검은 옷을 입은 여덟 명의 여인들이 번뜩이는 비수를 들고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녀들은
매초풍을 에워싼 채 공격 자세를 취했다. 매초풍은 약간 위기를 느꼈다. 천산 마귀할멈의 수
하에서 무공을 익힌 여인들이라 그 실력을 얕잡아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여덟 여인의 검술은 마치 천산 마귀할멈의 자정신침처럼 변
화무쌍했으며 더군다나 여혈의와 하 장군이 합세하는 바람에 매초풍은 더욱 위기에 빠졌다.
다급해진 매초풍은 경공을 쓰며 공중을 날기 시작했다. 일단 공격을 피할 생각이었다. 그러
나 여인들의 경공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여인들도 하나 둘씩 뛰어오르며 매초풍을 공격했
다.
매초풍이 독룡은편을 다시 뽑아 들었다. 독룡은편을 힘껏 휘두르던 그녀는 차츰 힘이 빠지
기 시작했다. 독룡은편은 무게와 길이가 엄청났기에 그만큼 힘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독룡은편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아까보다 지쳐 있는 매초풍을 발견한 흥 장군이 고함을 쳤다.
"저 년은 이제 지쳤으니 더욱 매몰차게 쳐라!"
여인들이 다시 매초풍을 향해 달려들 때였다.
웬 사내가 훌쩍 담장을 넘어 날아들더니 번갈아 장을 날렸다. 두 여인이 동시에 쓰러졌다.
놀라운 무공이었다. 두 여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나머지 여인들이 급히 물러섰다. 매초
풍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구음백골조로 한 여인의 등을 후려쳐 멀리 던져 버렸다. 그 여인
도 담장에 머리를 박고는 절명했다.
흥 장군은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그대는 누구길래 우리 천산 마궁을 건드리는가?"
여혈의가 그 사내를 유심히 뜯어보다가 외쳤다.
"아니? 동시 진현풍이다!"
모든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한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진현풍의 출현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동시와 철시는 서로 원수처럼 지낸다고 하던데 무엇 때문에 그가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진현풍의 몰골은 매우 초췌해 보였다. 믿어지지 않기는 매초풍도 마찬가지였다. <구음진경>
을 모두 연마해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만을 할 뿐이었다. 어쩐지
그가 사용하는 장이 예전보다 더욱 세련된 것 같았다.
매초풍은 지난날 그와 강호를 떠돌아다니던 일들을 떠올렸다.
"무슨 일로 오셨죠?"
매초풍이 쌀쌀한 어조로 물었다. 진현풍이 약간 미소를 지으려다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대가 당하고 있는데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나서 당신을 돕겠소?"
"나를 돕겠다구요? 흥, 그런 소리 집어치워요. 당장 가서 그 계집이나 돌봐주라구요!"
매초풍이 말한 계집이란 물론 여소교였다. 진현풍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매, 난 한때 그녀의 간계에 빠졌을 뿐이야. 이제 그녀도 죽었으니 그만하라구!"
"만약에 죽지 않았다면 그 계집을 도와 나를 잡아먹을 궁리를 했겠지요?"
"무슨 소리? 난 그녀를 죽이려고 일찍부터 생각했었지만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통에 그럴
수가 없었단 말이오!"
"날 속일 순 없어요. 당신은 그 계집의 치맛자락에 파묻혀 노는 사내인데 어찌 그 계집을
죽일 수가 있단 말이에요?"
"비록 내 손으로 그녀를 죽이진 못했지만 그대를 도와주지 않았소? 기억하겠지. 건강성에
있는 어느 객줏집에서 그녀와 내공을 겨룰 때 느닷없이 밖에서 헌 신발이 날아든 일을 말이
야."
매초풍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당신이 그 일을 어떻게……?"
"내가 바로 그 신을 던진 사람이오."
"그럼 당신이 나를 구했단 말인가요?"
"아니오. 그대는 그녀보다 무공이 강한데 어째서 내가 도와주겠소. 난 그녀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팔게 하기 위해 한 일일 뿐이오. 사매, 내가 왜 그대를 속이겠나?"
매초풍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왜 그런 짓을 했죠? 나와 당신은 이미 끝난 사이인데 왜?"
진현풍이 다가서며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사매, 난 정말……."
진현풍이 예전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자 매초풍이 눈을 부릅뜨며 외면했다.
"닥쳐요. 난 당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어서 사라져요!"
"사매,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숱한 사내들과……. 하지만 난 이해할 수 있어. 우리 다시 시
작하자구."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저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지?"
매초풍은 객줏집에 누워 있을 때 자신을 간호했던 사내를 떠올렸다.
매초풍의 안색을 살피던 진현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진칠자와 싸우고 나서 그대는 객줏집에 누워 있게 되었지. 그때 한 사내가 그대를 도와
주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지?"
"아니, 당신이 그 일을 어떻게……?"
"그게 바로 나요."
매초풍은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아니에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이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어요!"
그러자 진현풍이 정색을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동안 그대를 잊지 못하고 계속 그대를 수소문하며 강호를 헤매였어. 그래서 겨우 그
대의 행방을 알게 되었소. 그 뒤론 줄곧 뒤를 밟으며 그대를 보호해 왔던 거요. 세상에서 그
대를 사랑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증거지."
매초풍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역시 사형을 미워한 거는 아니었어요."
매초풍이 급기야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진현풍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날 믿어 주오. 이제부턴 절대 다른 여인에게 한눈을 팔지 않을 것이오. 오직 매초풍 그대만
을 사랑하겠소."
"마음은 고맙지만 전 사형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왜지?"
"이젠 이 매초풍도 도화도에 있을 때의 그 순결하고 천진난만한 처녀가 아니랍니다. 전 사
내들의 진기를 전문적으로 빨아먹는 음탕한 계집……."
매초풍은 고개를 떨구고 더욱 슬피 흐느꼈다. 그러자 진현풍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사매, 내 마음속에는 도화도에 있었던 매초풍으로만 남아 있소. 그리고 난 그대가 한 일이
모두 옳다고 보오."
진현풍은 더욱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저를 용서할 수 있나요?"
"난 오히려 그대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난 그동안 당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일부러 못생긴 사내들
과 어울려 다녔어요."
"이젠 우리 두 사람만의 세상이 있을 뿐이야."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기가 막혔다. 싸우다 말고 사랑놀이에 빠져 있는 두 남녀를
향해 흥 장군과 하 장군이 한마디씩 던졌다.
"우리 천산 마궁을 어떻게 보고 그런 수작들이냐? 어서 떨어지지 못할까!"
"매초풍, 네 년이 여인이라면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매초풍이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이 더러운 년들아, 이 매초풍이 멋진 사내와 재회를 하니 배가 아픈 모양이구나. 질투만 하
지 말고 사정을 하면 내가 멋진 사내들을 골라 줄 테니 너무 유난 떨지 마라!"
"닥쳐라!"
흥 장군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다른 여인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다시 아가리를 벌리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자매들, 저 연놈들을 당장 죽여 버리자구!"
매초풍과 진현풍,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진현풍이 합세한 싸움
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여혈의와 하 장군 측은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다시 만난 기쁨에 힘입어 더욱 뛰어난 무공을 발휘했다.
한편 궁지에 몰리게 된 흥 장군과 전신사자들은 애가 탔다.
이때였다. 문밖에서 아우성이 터지더니 수십 명의 인마가 몰려들었다.
"오혈궁을 짓밟고 엽 소저를 구하자!"
그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여혈의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칼을 놓
칠 뻔했다.
"저건 거렁뱅이들!"
흥 장군도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빨리 들이닥칠 줄이야……. 뜻밖이군. 저 놈들은 숫자가 많으니 일단 피하고 봅시
다!"
흥 장군과 그 일행들이 사라지자 진현풍이 매초풍을 향해 말했다.
"괜히 말려들지 말고 우리도 자리를 떠야겠소."
매초풍 역시 거렁뱅이들과는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뒷문 쪽을 향해 급히 돌아
섰다.
그런데 그 순간 뒷문이 활짝 열리면서 이십여 명의 거렁뱅이들이 타구봉을 들고 앞을 막아
섰다.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한 하 장군이 소리쳤다.
"왜 앞길을 막는 거요?"
뒤에서 누군가 구시렁대며 들어서는데 가만히 보니 한대웅과 몇몇 육대 제자들이었다.
한대웅은 그들 앞에 선 여인들의 기기묘묘한 옷차림을 보고는 놀랐다.
"그대들은 어느 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오? 왜 여혈의와 어울려 다니고 있지?"
흥 장군이 거만하게 대답했다.
"우린 마귀할멈의 수하들로 천산 마궁에서 중원 땅으로 와 명성을 날렸소. 대체 우릴 어쩔
셈이오?"
"이제 보니 강호에서 알려진 흥, 하 두 장군이로군!"
"거렁뱅이 놈들도 사람을 볼 줄은 아시는군!"
하 장군이 우쭐대자 한대웅이 육대 제자들을 향해 한쪽 눈을 꿈벅였다.
"개똥도 약으로 쓰려면 없다더니 너희들을 찾느라 얼마나 고생을 한 줄 아느냐? 마귀할멈의
잔당들은 물론 흑풍쌍살도 함께 모여 있었구나. 으하하하……!"
이때 앞문으로 몇몇의 거렁뱅이들과 하종, 노위 그리고 이 지방에서 이름난 호걸들이 뛰어
들어왔다.
하종이 여혈의를 보자마자 날뛰었다.
"이 놈, 엽 소저는 어떻게 했느냐? 당장 내놓지 못하겠어!"
여혈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짐짓 큰소리를 쳤다.
"그래도 나를 알아보시는군!"
거렁뱅이들은 여혈의가 마귀할멈의 잔당들과 결속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들은 여혈의가 엽청청을 잡아갔다는 말을 듣고 혹시 그녀가 잘못될까 봐 부랴부랴 달려왔던
것이었다. 그러니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오혈궁 무리들을 모조리 죽여야 할 형편이었다.
하종이 악을 썼다.
"여혈의, 어서 엽 소저를 내놓거라!"
여혈의는 애꾸눈을 실룩거리며 빈정거렸다.
"하 공자, 엽청청이 어디 자네의 여인인가? 엽청청은 원래부터 내게로 시집을 오게 돼 있었
지. 그녀의 아버지인 묘상 어른이 약속한 일이라네."
기가 막힌 하종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허튼소리! 엽 소저가 네 놈을 좋아할 리가 없다!"
노위가 나섰다.
"엽 소저는 하종을 따르고 있다. 조만간에 두 사람은 화촉을 밝히고 부부가 될 것이다. 그런
데 왜 그댄 남의 일에 끼여들어 방해를 놓는 것인가?"
여혈의가 노위의 말을 일축했다.
"흥, 엽청청은 내 사람이야. 어느 놈이 감히 그녀를 넘보려는 게냐?"
여혈의가 번개처럼 몸을 날리더니 하종에게 칼을 그어댔다. 하종이 쇠부채를 펴더니 급히
칼을 막았다. 하종으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원래 여혈의보다 내력도 부족하고 내상까
지 입은 터라 공격을 막은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노위가 얼른 여혈의를 향해 장을 날렸다. 여혈의가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하종이 매
초풍에게로 돌아서며 따져 물었다.
"철시, 엽 소저를 구할 수 있다더니 어찌 되었소?"
"흥, 내가 왜 엽 소저를 구하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매초풍은 나름대로 고심을 했다.
'거렁뱅이들은 원래 나를 치려고 했었다. 아직도 얼마나 더 몰려들지 모르는 일이다. 거렁뱅
이들이란 본래 우악스럽고 질긴데다가 수효까지 엄청나니 구태여 그들과 맞설 필요는 없
다!'
매초풍은 슬그머니 진현풍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진현풍도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두 사
람은 갑자기 공중으로 치솟더니 거렁뱅이들의 머리를 타넘으며 담장 위로 올라섰다.
매초풍이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며 웃었다.
"하 공자와 한 칠대, 그대들이 있으니 저들쯤이야 문제없이 처치할 수 있겠죠? 훗날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우린 이만 가겠소!"
두 사람이 담장 밖으로 뛰어내렸다.
한대웅은 그들을 쫓지 않고 심드렁하니 서 있다가 불현 거렁뱅이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 사악한 무리들을 더는 도망치지 못하게 해라!"
거렁뱅이들이 고함을 지르며 남은 무리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종과 노위가 앞장을 서서 그들
을 에워쌌다. 여혈의를 생포하여 엽청청의 행방을 알아낼 속셈이었다.
새로운 싸움이 전개되었다.
여혈의는 하종이 마치 자기 아내를 강탈해 간 원수처럼 여기고는 날뛰기 시작했다.
"하종,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아!"
여혈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종과 노위 그리고 여혈의는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우러졌다.
한편 한대웅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나머지 천산 마궁 무리들과 맞붙었다. 그러나 예상해던
것보다는 쉽지가 않았다. 몇 합 지나지 않았는데 한대웅 편에서는 넷이 죽고 일곱이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육대 제자 하나가 한대웅에게 급히 귓속말을 건넸다.
"한 칠대님, 상대방의 무공이 우리 제자들보다 훨씬 월등하고 또 한데 뭉쳐 있으니 승산이
없습니다."
"네 말이 옳다. 저 년들을 갈라놓고 하나씩 쳐야겠구나!"
그는 무공이 뛰어난 육대 제자 셋을 데리고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한대웅이 맨 앞에 서서
타구봉으로 하 장군의 정수리를 세게 내리쳤다. 하 장군이 월환을 번쩍 들어 막았다. 하 장
군은 절구통 같은 몸집으로 훌쩍 뛰어오르며 한대웅의 정수리에 다시 월환을 꽂았다. 한대
웅이 기다렸다는 듯이 타구봉을 틀어쥐고는 그녀의 이마에 있는 인당혈을 쳤다.
다른 쪽에서는 거렁뱅이들이 흥 장군과 여인들을 둘러싸고는 연신 타구봉을 휘저었다.
"저 년의 아랫도리를 집중 공략해라!"
누군가 소리치자 삽시간에 타구봉들이 흥 장군의 하체를 향해 날아들었다. 흥 장군은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피했지만 타구봉은 쉬지 않고 날아들었다.
'낭패로군!'
흥 장군은 차츰 힘이 빠져 경공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다. 이때 타구봉 하나가 재빠르게
왼쪽 무릎에 닿았다. 뼈가 부서졌는지 큰 충격이 흥 장군의 전신으로 뻗쳤다. 그녀는 왼쪽
다리를 꿇으며 앞으로 쓰러지려고 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타구봉이 홍 장군의 몸 위로 마
구 쏟아졌다.
"아악!"
흥 장군은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옆으로 나뒹굴었다. 홍 장군의 비명을 들은 하 장군은
섬찍했다. 하 장군이 번개처럼 달려가 두 거렁뱅이를 쳐 죽였다. 옆에서는 거렁뱅이들이 흥
장군과 함께 있던 두 여인을 타구봉으로 역시 난타를 하고 있었다.
사대 사자와 검은 옷의 여인들이 위기를 느끼고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끝없이 몰려드는 거렁
뱅이들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그럴 기회가 조금도 없었다. 벌써 앞에 섰던 몇몇은 타구봉
에 맞아 고꾸라졌다.
혼자 남은 하 장군은 더욱 발악을 하며 일월쌍환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하 장군이 하도 사
납게 날뛰자 한대웅은 잠시 제자들을 물리치고 무공이 뛰어난 육대 제자 다섯을 데리고 타
구진을 쳤다.
하 장군에게 곧장 빗발치듯 타구봉이 떨어졌다. 하 장군은 지칠 대로 지쳐서 눈앞이 아른거
렸지만 이를 악물고는 타구봉을 막아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기를 써도
쉬지 않고 퍼부어지는 타구봉을 막아낼 도리는 없었다.
그녀의 전신은 벌써 피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마에서도 선혈이 흘렀다. 하 장군이 소리치
며 진을 뚫으려고 했다. 한대웅과 제자들은 일월쌍환에 맞을까 봐 거리를 둔 채 감히 접근
하지 못했다.
한대웅이 얼른 한 가지 꾀를 떠올리며 하 장군을 향해 외쳤다.
"잠깐만!"
하 장군이 그의 부름에 잠시 동작을 멈추고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한대웅의 타구봉이 사정
없이 하 장군의 눈을 쳤다.
"악!"
하 장군이 두 손으로 눈을 감싸 쥐며 허리를 굽혔다. 그 바람에 일월쌍환이 떨어졌다. 그녀
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그러자 다섯 제자들이 일제히 하 장군의 몸에 타구봉을 박았다. 하 장군은 괴상한 소리로
울부짖다가 그만 쓰러져 버렸다.
이렇게 중원 땅에 내려왔던 천산 마궁의 제자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이 천산에 전
해지자 마궁에 남아 있던 이십여 명의 시녀와 여인들은 그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봐 무서워
사방으로 흩어졌다. 때를 같이하여 천산 기슭에 있던 무림의 인물들이 마궁으로 뛰어들어
불을 질렀다. 마침내 마궁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한편 여혈의는 흑풍쌍살과 싸운 탓에 공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상태였다. 하종과 노위 두 사
내와의 싸움은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여혈의는 하종이 엽청청을 납치해 간 일이 가슴에
맺혀 계속 이를 악물고 싸웠다. 하지만 이젠 천산 마궁의 제자들이 모두 쓰러지고 나니 혼
자서 버틸 수가 없었다.
여혈의는 싸움을 중지하고는 얼른 담장 너머로 도망을 쳤다. 하종과 노위가 고함을 지르며
그를 뒤쫓았다.
절 밖으로 나가니 거렁뱅이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데 뒤에서는 하종과 노위가 쫓고 있는 형
편이었다. 여혈의는 궁리하다가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하종과 노위도 끝까지 여혈의를 뒤쫓아왔다.
"게 섰지 못하겠느냐?"
하종이 고함을 질러댔다. 순간 여혈의가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섰다. 하종과 노위는 여혈의가
무슨 꾀를 부리는 게 아닐까 하고는 약간 경계 태세를 취했다.
여혈의가 비웃었다.
"하하하, 금나라와 맞서 당당히 싸우던 협사들께서 그렇게 겁을 먹다니 실망인걸!"
하종이 쇠부채를 펼치며 꾸짖었다.
"네 놈을 두려워할 우리가 아니다. 어서 엽 소저를 내놓거라. 그 길만이 네 놈이 살길이다!"
"정말이냐?"
"하지만 네 놈의 무공은 내가 가져가야겠다. 앞으로 절대 악행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
여혈의가 냉소를 던지더니 허리를 굽혔다. 하종과 노위는 잔뜩 긴장을 했다. 그런데 여혈의
가 풀숲에서 끌어낸 것은 다름아닌 엽청청이었다. 그녀는 혈도를 눌렸는지 멀뚱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종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엽 소저, 그동안 어떻게 지냈소?"
앞으로 막 뛰어나가려는데 노위가 가로막았다.
"성급하게 굴지 마시게나."
하종은 더욱 애가 타서 울부짖었다.
"여혈의, 그녀를 어서 놓아다오. 불쌍한 여인을 인질로 삼다니 그러고도 사내라고 할 수 있
겠는가?"
"난 자네들과 원수를 지고 있는 오혈궁 궁주야. 그러니 이 년을 인질로 삼아 자네들을 좀
골탕먹여야겠어."
노위가 화를 내며 끼여들었다.
"대관절 무슨 꿍꿍이 속이냐?"
"다른 건 없다. 그저 무사히 나를 산 아래로 보내 주면 된다."
"흥, 이 산에는 거렁뱅이들이 깔려 있는데 어디로 도망을 치겠다는 게냐?"
"좋다. 내가 도망을 칠 수가 없다면 엽청청도 살아서 산을 내려갈 수는 없겠지!"
그가 칼을 들어 엽청청의 목에 들이밀었다. 하종이 기겁을 하며 손을 크게 내저었다.
"안 돼!"
그가 서너 걸음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녀를 괴롭히지 마라. 너도 사내라면 우리와 정정당당히 싸우잔 말이다!"
여혈의가 징그럽게 웃었다.
"잔말 말고 이 계집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어서 그 부채를 던져라!"
여혈의가 엽청청의 목을 베는 시늉을 했다. 하종은 하는 수 없이 부채를 땅에 던졌다.
"여혈의, 네 놈은 정녕 악마다!"
그러나 노위는 수긍하지 않았다.
"난 네 놈의 잔꾀에 걸려들지 않겠다. 죽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네 놈을 요절내고 말겠다!"
그가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러자 여혈의는 엽청청을 죽이려고 칼을 다시 쳐들었다.
"잠깐만!"
하종이 소리쳤다.
"난 엽 소저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소 그런데 어찌……."
그가 여혈의를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노위도 더는 나서지를 못했다.
"꿇어앉지 말게나!"
이때 누군가 소리치며 이들 앞으로 날아들었다. 탈명한추 변청교였다.
"하 공자, 저런 놈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수치요."
그러자 하종이 어설픈 웃음을 보였다.
"변 공자군요. 고맙습니다만, 저로서는 엽 소저를 구할 방법이 없소이다. 엽 소저를 구하는
일이라면 이렇게라도 해서……."
여혈의가 웃었다.
"변청교, 하종이 꿇어앉아 빌겠다는데 네 놈이 무슨 상관이냐?"
변청교의 안색이 돌변했다.
"하하하, 그러나 난 끝까지 간섭을 해야겠다!"
변청교의 오른손이 휘릭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순간 무언가가 날아가 여혈의의
이마에 있는 인당혈에 명중되었다.
"헉!"
여혈의가 칼을 놓치며 눈을 부릅뜨고는 변청교를 응시했다.
"네 이 놈……, 탈명한추를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맹세를 해놓고서……."
여혈의가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소용이 없
었다.
"하하하, 그건 탈명한추가 아니라 말라 비틀어진 삭정이였다!"
변청교가 뒷짐을 지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때서야 하종이 달려가 엽 소저를 부축했다. 그가 혈도를 풀어 주었다.
"엽 소저!"
하종이 목놓아 그녀를 불렀다.
"난 정말 무서웠어요……."
엽청청이 아직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엽청청은 하종의 품
에 안겨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서서 웃고 있는 노위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노위가 웃었다.
"하하하, 나는 괘념하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구."
그리곤 노위마저 그 자리를 떠났다.
흑풍쌍살은 절에서 빠져 나와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쌍지팡이를 든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흑풍쌍살과는 앙숙인 태호의
육가장 장주 육승풍이었다.
육승풍 뒤로는 막가권 장문인 막여인과 노영웅 석산공을 비롯한 수십 명의 개방 패거리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매초풍은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왼쪽으로 나는 듯
이 달려오고 있는 절정공자 탁운백만큼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진현풍은 오늘 매초풍과 어렵게 화해를 했기에 하늘이 무너져도 두려울 게 없는 심정이었
다. 진현풍은 마주 오는 사내들을 크게 둘러보며 자신 있게 말을 걸었다.
"하하하, 오래간만이오. 이젠 쌍지팡이가 손에 익어 잘 걷는구만."
가뜩이나 창백한 육승풍의 얼굴이 더욱 시퍼렇게 굳어졌다.
"흑풍쌍살, 너희들이 지은 죄가 하늘에 닿아 있거늘 어서 꿇어앉아 칼을 받지 못하겠느냐?"
육승풍이 다짜고짜 쇠지팡이로 후려쳤다. 진현풍이 슬쩍 피하며 또 한마디 내쏘았다.
"무공이 꽤나 늘었군. 내가 한잔 톡톡히 내야겠어."
육승풍이 왼쪽 지팡이로 허공을 후려치면서 오른쪽 지팡이로 진현풍의 가슴을 내질렀다. 그
렇다고 진현풍이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천 년 묵은 산삼을 먹었고 소녀공을 닦다가
정기를 많이 소모하기는 했어도 지금 남아 있는 정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산에 들어가 부지런히 무공을 닦았기에 육승풍 정도는 식은죽 먹기였다.
육승풍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공격할 때마다 진현풍이 가볍게 피하며 약을 올렸다.
"육 사제, 자네의 재간으로는 한평생 가도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야!"
다시 육승풍의 지팡이가 날아와 막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칼이 먼저 진현풍 눈앞을 스쳤다.
돌아보니 막여인이 귀두도를 틀어쥐고는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막여인이 어깨를 거들먹거
리면서 소리쳤다.
"동시, 그대가 어찌 우리들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자 매초풍이 진현풍의 어깨를 다독였다.
"과연 저 놈의 말이 옳을까요?"
진현풍 역시 매초풍 앞에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대는 구경만 하고 있으라구."
진현풍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왼손으로는 최심장을 육승풍 가슴을 향해 뻗었다. 동시에 오
른손으로는 구음백골조를 펼쳐 막여인의 머리를 움켜잡으려고 했다. 육승풍과 막여인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귀두도와 지팡이로 진현풍을 공격했다.
사실 육승풍과 막여인의 무공으로는 흑풍쌍살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년 동안 지팡
이와 귀두도가 어우러지는 무공을 익혔다. 과연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매초풍이 근심이 되어 진현풍을 불렀다.
"놈들도 보통이 아닌데요!"
진현풍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현풍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육승풍은 두 다리
가 불구이고 막여인은 경공에 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현풍은 경공을 쓰면서 두 사람을 향해 장을 날렸다. 두 사람은 마치 살아 있는 과녁이 되
어 진현풍의 장에 시달려야 했다. 육승풍과 막여인은 진현풍의 장을 피하느라 기진맥진해졌
다. 두 사람은 이정제동(以靜製動) 초수로 서로 등을 맞대고는 지팡이와 칼을 휘둘렀다. 그
러나 두 사람이 등을 서로 맞대니 자연히 지팡이와 칼을 자유롭게 쓸 수가 없었다.
진현풍은 더욱 신이 나서 그들을 향해 장을 자유자재로 날렸다. 이때 두 사람이 열세에 처
한 것을 보고는 노영웅 석산공이 용두지팡이를 쳐들며 나섰다.
그가 진현풍을 향해 막 용두지팡이를 내리칠 때였다. 매초풍이 나서며 지팡이를 막았다.
"영감님은 좀 참으시지요. 둘이서 하나와 싸우는데 영감님까지 나서면 체통이 섭니까요?"
매초풍이 이기죽거렸다.
"흑풍쌍살이 강호의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으니 구태여 강호의 도리를 따질 필요가 없다!"
석산공이 용두지팡이를 잡아채며 다시 높이 쳐들었다. 매초풍이 뒤로 멀리 물러서며 장을
날렸다. 석산공이 지팡이로 장을 막아내며 달려들었다. 매초풍은 다시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서며 한 손으로 슬쩍 지팡이를 치며 다른 손으로 장을 날렸다. 번개같은 장법이었다. 석산
공은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달려들며 석산공을 안고는 옆으로 굴렀다. 바로
탁운백이었다.
"흥, 절정공자, 그대도 나와 싸워 볼 생각인가요?"
매초풍이 흘겨보며 따지자 탁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하니 철시의 무공이 하늘을 찌른다고 하는데 한수 가르쳐 주시지요."
매초풍이 앙천대소를 했다.
"그럼 그대의 소원대로 한 수뿐만 아니라 버르장머리도 가르쳐 주지!"
그녀가 몸을 띄우며 탁운백의 멱살을 틀어쥐려고 했다. 탁운백이 곧장 검을 뻗었다. 매초풍
은 옆으로 슬쩍 몸을 돌리며 왼쪽 장으로 검을 내리쳤다. 동시에 그녀는 높이 솟아오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물론 목표는 탁운백의 정수리였다.
위기를 느낀 탁운백이 얼른 바위 위로 올라섰다. 매초풍이 한 쪽으로 내려서며 깔깔 웃어댔
다. 석산공은 탁운백이 매초풍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슬그머니 뒤로 달려와
용두지팡이를 쳐들었다. 매초풍이 장을 날리려고 하자 석산공이 지팡이를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흥!"
매초풍은 그러나 여유 있게 장으로 날아드는 지팡이를 막았다. 그녀는 자신의 내력이 석산
공보다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과 지팡이가 맞섰다.
"으으……."
석산공은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지팡이를 잡고 있는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
때 탁운백이 검을 놀리며 매초풍을 떨어지게 했다. 그 틈을 이용해 그가 석산공을 부축했다.
"석 선배님, 어떠십니까?"
석산공은 다시 지팡이를 억세게 틀어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아. 자, 우리 함께 저 악마 같은 년을 무찔러 보세!"
허연 수염을 흩날리며 석산공이 일어섰다. 탁운백은 속으로 석산공의 결의에 찬사를 보냈다.
탁운백도 두 주먹을 힘차게 쥐며 결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저 악귀를 꼭 죽여야 합니다!"
매초풍은 석산공이 갑자기 노기를 띤 얼굴로 다가서자 저도 모르게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
다.
'과연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영웅이라 다르군. 나도 저처럼 뭇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저자는 무공이 대단하지가 못한 것이 약점이야. 무공까지
뛰어나다면 정말로 영원히 존경을 받을 수 있을텐데…….'
석산공이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매초풍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자신을 일
깨우며 날쌔게 뛰어올랐다. 순간 매초풍이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구음백골조를 쓸 순간이
었다. 탁운백이 검을 뻗어 또 방해를 했다. 매초풍이 장을 던지며 다른 손으로 얼른 석산공
의 지팡이를 잡은 채 검을 막았다.
어지러운 싸움이 계속되었다. 한편 진현풍은 육승풍과 막여인을 한곳으로 몰아가며 연신 쌍
장을 날리고 있었다. 육승풍과 막여인은 돌풍이 일 때마다 숨을 몰아쉬며 안간힘을 다해 빠
져 나오려고 했다. 막여인이 그만 현기증을 느껴 한쪽으로 쓰러지려고 할 때였다. 진현풍의
손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조심해!"
육승풍이 소리쳤다. 그의 지팡이가 진현풍의 손목을 향해 떨어졌다. 진현풍이 손을 거두며
동시에 육승풍의 가슴으로 오른쪽 장을 내질렀다. 육승풍이 위험을 느끼고 옆으로 몸을 틀
었다. 이때 진현풍의 장은 다시 막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아악!"
진현풍의 최심장에 걸린 막여인은 오장육부가 파열되면서 그 즉시 절명하고 말았다.
"막 장문인!"
육승풍의 울부짖는 소리가 수림 속에 메아리쳤다.
"막 장문인, 그대의 원수를 내가 꼭 갚아 드리겠소이다!"
육승풍이 벌떡 일어서며 진현풍의 머리를 겨눈 채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의 두 눈에는 복수
의 불꽃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진현풍은 코웃음을 날렸다. 육승풍을 얕잡아 보고 있는 그였
다.
육승풍은 진현풍을 때려죽이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더욱 사납게 지팡이 공격을 해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거렁뱅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진현풍을 공격했다. 거렁뱅이들의 타구
봉이 일제히 그를 향해 날아들고 뻗어 왔다. 진현풍의 얼굴이 살기로 번뜩였다. 그는 거렁뱅
이들 사이로 몸을 놀리며 연신 최심장을 사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렁뱅이 넷이 쓰러졌
다. 거렁뱅이들이 일단 뒤로 물러서서 타구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진현풍은 거렁뱅이들과 상대하기 싫어 최심장으로 통로를 만들고는 매초풍에게로 달려갔다.
"사매, 내가 도와주지!"
"어서 이 놈들을 해치웁시다!"
매초풍이 거렁뱅이들이 달려오기 전에 석산공과 탁운백을 치자고 제의했다. 석산공이 외쳤
다.
"저것들이 합세해 우릴 치려는 수작이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네!"
탁운백이 알겠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흑풍쌍살에게 두 사람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십여 합을 싸우고 나자 두 사람은 금세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매
초풍이 석산공의 옷자락을 잡았다. 석산공이 지팡이로 그녀의 손을 내리치며 몸을 피했다.
거렁뱅이들이 몰려온 것은 이때였다. 그들은 흑풍창살을 다시 에워쌌다. 하지만 지휘하는 자
가 없어서인지 그들은 중구난방으로 타구봉만을 휘둘러대는 꼴이었다. 흑풍쌍살은 내공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타구봉이 아무리 그들의 몸 위로 떨어져도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흑풍쌍살은 거렁뱅이들의 타구봉을 맞아 주며 오로지 석산공과 탁운백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더는 싸울 수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진현풍의 최심장이 그들
을 향해 날아갈 순간이었다.
이때 변청교가 나타났다.
그는 훌쩍 한복판으로 날아들면서 막 석산공을 향해 뻗어가던 매초풍의 장을 막았다. 변청
교의 장에 걸려 매초풍의 공격이 무산되었다. 변청교는 매초풍보다 장력이 강한 편이었으나
갑자기 뛰어든 상태라 완벽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석산공을 위기에서 구하는 데는 손색이
없었다.
매초풍이 눈을 흘겼다.
"변청교, 또 훼방을 놓을 셈이더냐?"
"내가 있는 이상 너희 연놈들은 살아서 산을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서 덤벼라. 변홍의의 원수를 갚으러 온 모양인데 나 매초풍은 두렵지 않다!"
"내 아우의 원수도 갚아야 하겠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해친 네 년의 염통 또한 발기발기 찢
어 놓겠다!"
"다시는 탈명한추를 쓰지 않겠다고 한 맹세를 지킬 수 있겠냐?"
변청교가 의미 있는 웃음을 던지며 큰소리를 쳤다.
"대장부의 일언은 중천금이라 하였거늘 내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느냐? 그리고 탈명
한추를 쓰지 못한다고 해서 내 어찌 네 년의 목을 비틀지 못하겠느냐?"
매초풍이 속으로 비웃었다.
'네가 탈명한추만 쓰지 않는다면 보다 손쉽게 죽여 줄 수도 있지!'
매초풍이 먼저 공격을 했다. 기를 모아 힘껏 변청교를 향해 장을 뿌렸다. 변청교 역시 살기
어린 장을 받아쳤다. 두 사람의 몸에서 뻗친 광풍이 맞부딪치며 굉음을 토했다. 옆에서 구경
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귀를 틀어막고 비틀거릴 정도였다.
"간다!"
"각오해라!"
두 사람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다시 장을 각각 날렸다. 또 굉음이 터지며 장과 장이 힘을
겨루었다.
"오……."
순간 변청교가 충격에 뒤로 서너 걸음 밀려 나갔다.
"이런……."
매초풍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신의 진기가 뒤섞이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단전에도 이상이 생
겨 갑자기 사맥이 나른해졌다. 아마도 심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진현풍이 급히 달려왔다.
"괜찮아?"
매초풍이 애써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변청교는 제 적수가 되지 못해요!"
그녀는 자신하며 변청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탈명한추가 없는 네 놈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다. 그대는 천산 마귀할멈도 이기지 못하고
이 매초풍은 더더욱 이길 수가 없다!"
변청교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해 갔다. 그의 다리가 조금씩 아래로 무너지고 있었
다. 변청교는 입꼬리를 실록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변청교가 두 계집에게 당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오호호, 변청교, 그대는 내상을 입었다. 어서 기를 운행시켜 몸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남은
인생 폐인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매초풍도 마찬가지였다.
"매초풍, 그대는 괜찮은가? 역시 독한 년이군!"
변청교는 그녀가 자신보다 장력이 강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매초풍은 더 이상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내상을 입혔다면 필시 변청교가 포기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녀는 진
현풍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린 그만 갑시다!"
거렁뱅이들이 그들을 쫓으려 하자 변청교가 만류했다.
"놔둬라!"
석산공 역시 변청교의 속뜻을 간파했다. 매초풍이 변청교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그리고 노구를 이끌고 매초풍과 맞설 수 없는 몸이라 그 역시 무기력
한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싸움을 더 벌였다가는 애매한 거렁뱅이들만 죽게 될
것이었다. 석산공도 거렁뱅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연놈들을 그냥 내려보내라!"
탁운백이 멀리 사라지는 흑풍쌍살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흑풍쌍살은 강호에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 반드시 죽여야 해!"
그곳을 빠져 나온 흑풍쌍살은 한참을 걸어 어느 작은 수림 속으로 들어섰다. 조금 더 가자
작은 강이 앞을 가로막았다. 강물은 푸르고 맑았다.
진현풍은 강물에 머리를 담그며 땀을 씻었다. 두 사람은 물도 마시고 몸도 씻으며 잠시 휴
식을 취했다.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던 매초풍은 그대로 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진현풍이
급히 다가와 그녀를 안았다.
"사매, 어찌 된 일이오?"
매초풍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사형, 정녕 내가 변청교를 이긴 것으로 믿고 있나요?"
"물론이지. 그대는 이렇게 멀쩡하지만 변청교는 내상을 입었기에……."
"아니에요, 전 어쩌면 오기로 버렸는지도 몰라요. 저의 명성을 높이고 싶어서예요. 변청교를
쓰러뜨렸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말이죠. 앞으로 강호에는 소문이 퍼지겠죠. 매초풍이 변청교
마저 물리쳤다고……."
그 순간 매초풍의 희미한 기억 속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오늘의 자기가
있게 한 사부 황약사의 얼굴이었다.
"사부님……!"
진현풍은 그녀의 입 속에서 불쑥 흘러 나온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도 아련하게 옛 기억들이 피어 올랐다.
"사부님,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언젠가 천하 제일의 무공을 갖게 되면 도화도로
돌아가 용서를 빌고 담담하게 사부님께 죄값을 받으려 했는데……."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매초풍은 갑자기 검은 피를 토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진현풍이 급히
그녀의 허리에 있는 명문혈에 손바닥을 대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잠시 후 매초풍이 다시 의식을 차렸다. 그녀는 주위를 살펴보더니 불현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젠 끝이에요. 내가 그동안 수치를 무릅쓰고 모았던 진기가 모두 흩어졌어요. 이제 어쩌
죠!"
진현풍은 그녀를 어떻게 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사부님, 전 이제 어떻게 해요. 사부님, 흑흑……!"
그녀는 절망적으로 울부짖다가 또 정신을 잃었다.
진현풍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맥을 살폈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는 매초풍을 주물러 주
는가 하면 그녀에게 진기를 불어넣어 주는 등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그는 매초풍을 업고 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차츰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평생
닦은 음공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매초풍은 이제 절망 속에서 살아갈 게 분명했다. 강한 적수
들이 사방에서 출몰하여 그녀를 괴롭힐 텐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진현풍은 걱
정이 되었다. 강호에서 다시는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매초풍을 업은 채 북쪽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두 사람은 며칠 후 막북초원에 이르렀다. 그 후 두 사람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진기를 잃은 매초풍은 진현풍을 따라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을 열심히 연마했다. 두 사람
은 절세의 신공을 익혀 다시 강호로 돌아가 명성을 떨칠 그날만을 염원했다.
그날 이후 강호에서는 흑풍쌍살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강남에서 태어
나 자란 흑풍쌍살이 황막한 사막에 가서 무공을 닦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
었다.
―제7부에 계속―
[출처] 화산논검 - 풍류여마 매초풍 6 - 모이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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